00015 Chapter 4. 불행에는 항상 전조가 있다더니 =========================================================================
그리고 그 목소리의 주인이 나도, 라텐테도 아닌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은 순간, 반쯤 날아갔던 이성이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와 동시에 나는 나를 안고 있던 라텐테를 뒤로 확 밀어버렸다. 다행히 라텐테도 사람이 보는 앞에서 그런 추태를 보일 생각은 없는 듯 쉽게 밀려났다.
하지만 내가 당황한 채로 허둥지둥 자세를 고치고 있는 것과는 다르게, 라텐테는 그저 기분 나쁘다는 표정을 지은 채로 데스크에서 내려와 손님에게 서늘한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아니, 저놈은 부끄러움도 몰라? 왜 방해받아서 화가 난 사람 마냥 그런 굳은 표정을 하고 있는 건데? 그것도 손님한테!
너무 당당한 그의 태도에, 나는 그가 받아야 할 몫의 부끄러움까지 다 떠안아야 했다. 나는 얼굴이 아주 홧홧하게 달아오르는 것을 실시간으로 느끼며, 차마 손님과 똑바로 눈을 마주하지도 못하고 흘끗흘끗 눈치를 슬슬 살피며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바, 방해는요. 소, 소, 손님. 찾으시는 책이 있나요?”
“방해한 거 맞는데.”
“라테!”
아니, 저 인간이! 표정으로 말하는 것으로 모자라서 결국 저질렀다! 으아, 얼굴이 타들어갈 것 같아, 화산이 폭발한 것 마냥 넘쳐흐르는 부끄러움에 나도 모르게 소리를 빽 지르며 그의 셔츠를 확 잡아당겼다.
하지만 그 말을 들은 손님은 차갑게 픽 웃을 뿐이었다……아니, 잠깐, 뭐라고? 차갑게? 무의식중에 떠올린 그 기괴한 느낌에, 부끄러움이 순식간에 수그러들었다. 그제야 나는 고개를 들어 손님의 얼굴을 똑바로 볼 수 있었다.
나와 라텐테 둘만의 시간을 깨고 데스크 너머에 있는 손님은……조금 특이한 사람이었다.
너무 까매서 푸른 기운이 도는 흑발을, 보통 남자들과는 다르게 길게 길러 질끈 올려 묶었다. 그런데 더한 것은 그 머리 아래에 놓인 얼굴은 여자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유려하고 곱상해서 그 포니테일이 무섭도록 잘 어울린다는 것. 아마 서 있는 라텐테만큼 큰 키와 떡 벌어진 어깨가 아니었다면 정말 여자라고 생각했을지도 몰랐다.
세상에, 이 손님 무진장 예쁘게 잘생겼다. 물론 라텐테가 좀 더 남자답게 잘생기긴 했지만―어디까지나 저 남자와 비교했을 때―, 이 남자도 그 못지않게 여자 여럿 울렸을 것 같다. 음, 어쩌면 남자를 울렸을지도…….
아니, 이게 무슨 해괴망측한 망상이람. 나는 이상한 상상을 휘휘 날려버리려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손님도 그런 나를 보며 마주 웃어주었다. 와, 엄청 예쁜 웃음이다. 정말로 남자를 홀릴 수 있을 지도. 그런데……뭐지, 오한이 드는 이 느낌은? 겉보기엔 그저 예쁘기만 한 저 웃음엔 분명 차가운 칼날이 들어있었다.
뭐지, 나에게 원한이라도 있나? 하지만 난 저 손님을 오늘 처음 보는데……두려움과 함께 느껴지는 불쾌함에 인상을 찌푸리는 그때, 라텐테가 입을 열었다. 누가 들어도 적의가 가득 서린 까칠하고 낮으며, 냉기가 짙은 날카로운 어투. 손님의 적의가 감춰진 칼날이라면, 라텐테가 그에게 내보이는 적의는 대놓고 칼을 꺼내든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서로 다른 방식으로 적의를 표현하는 그들의 대화는 뭔가 이상했다.
“꺼져, 빌릴 책 따위 없는 거 다 아니까.”
“손님을 상대하는 말투치곤 너무 거친데.”
“손님 같은 소리하고 있네.”
다소 거칠지만 자연스럽게 반말을 주고받으며 그들이 하는 대화는 분명 서로를 알고 있을 때에나 할 수 있을 만한 대화였다. 하지만 결코 좋지는 않은 사이……라고 결론을 내리기 무섭게 라텐테가 데스크를 넘어가 손님의 멱살을 잡았다.
갑작스런 상황에 나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매사가 여유롭고 능글맞은 그가 앞뒤 재지도 않고 적의를 표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놀라운데, 멱살까지? 하지만 정작 멱살을 잡힌 당사자는 별로 놀랍지 않다는 듯 여전히 얼굴에서 미소를 지우지 않고 있었다.
“재밌네. 이 경계는 어디서 오는 걸까? 네 힘을 지키려고? 아니면 저 여자를 지키려고?”
끝이 보이지 않는 심연보다도 더 새카만 눈동자가 다시 나에게로 돌아왔다. 그 눈빛에서 나는, 아까는 읽을 수 없었던 감정을 읽어낼 수 있었다. 바로 탐욕과 호기심이었다.
적나라하게 꽂히는 그 감정에 온몸이 감전된 듯 찌릿하는 느낌이 들더니, 그대로 얼어붙었다. 설마, 저 남자가 라텐테가 말했던…….
“그 입 닥쳐, 녹스. 난 네놈처럼 힘에 미친놈이 아냐.”
맞구나, 나는 숨을 들이켰다.
“알아. 네 생각은 약해 빠졌지. 옛날에는 전부 가진 놈의 여유라고 생각했는데……지금 보니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뒷이야기는 나가서 들어주지. 당장 나와.”
서늘하게 식어 내려앉아있던 라텐테의 시선이 흘끗 내게로 향했다.
“잠깐만 나갔다 올게.”
차가운 눈빛과는 달리 상냥한 목소리. 겨우 그 한 마디가 따뜻하다 해서 이 차가워진 분위기가 바뀌지는 않지만……적어도 그 의도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나를 안심시키려는 거다. 나는 뻣뻣하게 굳은 목 근육을 억지로 움직여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리고 그는 내 허락이 떨어지기 무섭게 그의 멱살을 거칠게 잡아끌고 도서관 밖으로 나갔다. 그 거친 모습에서 나는, 아까 라텐테가 했던 소설책 속 한 구절 같았던 그 말들이 그저 지나가는 말이 아닌 내게 닥친 현실이라는 것을 문득 자각했다.
뭐가 뭔지 아직도 제대로 알지는 못하지만, 뭔가 심각한 일에 휘말렸다는 것이 피부로 느껴지며 몸에 힘이 턱 풀렸다. 입에서는 헛숨이 터졌다.
“아…….”
사람의 온기가 사라진 커다란 도서관이 이토록 무섭게 느껴지기는 난생 처음이었다.
**
도서관 밖으로 나가자마자, 라텐테는 있는 힘껏 녹스를 벽으로 밀쳤다. 쾅 하는 무시무시한 소리와 함께 녹스의 여유 넘치던 얼굴이 찌그러지고 그 입에서는 작은 신음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라텐테는 그가 아프건 말건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도서관 안에서보다 더 굳어진 낯을 한 채로 서늘하게 쏘아붙였다.
“아야…….”
“제정신이냐?”
라텐테가 이를 으득 갈며 멱살을 쥔 손에 힘을 잔뜩 주었다. 목이 졸릴 법도 한데, 녹스는 그다지 숨이 막히지는 않는 듯 기침도 하지 않고 그저 벽에 부딪힌 등이 아파 찡그려진 인상을 한 채로 태연하게 대꾸할 뿐이었다.
“제정신이지. 오히려 내가 네게 제정신이냐고 묻고 싶군.”
“건드리면 죽여 버린다고 분명히 말했던 것 같은데.”
“별로 무섭지 않다고 분명히 말했던 것 같은데.”
제 말을 똑같이 따라하는 녹스의 어투에, 라텐테가 어이가 없다는 듯 냉소를 흘렸다. 아주 같잖다는 듯한 비웃음이었다. 뭐지, 저건. 마법도 몇 개 남지 않은 놈이 왜 저런 강자의 여유를 보이는 건지 모르겠군. 허세인가. 갈피를 잡지 못하는 녹스의 얼굴에서 처음으로 여유라는 것이 사라졌다.
“……뭘 믿고 그렇게 웃는지 모르겠군.”
“너야말로 뭘 믿고 그렇게 자신만만한지 모르겠는데.”
라텐테는 그의 멱살을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그리고는 녹스가 기대어 있는 옆자리에 손 낙서하듯 뭔가를 슥슥 그렸다. 그러자 그 벽에서, 난해하게 생긴 마법진이 그려진 상당히 오래된 누리끼리한 종이 한 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그 종이를 구겼고, 구겨진 종이는 그의 손에서 하얀 빛이 되어 사라졌다. 그들의 주변에 퍼지는 빛과 함께, 라텐테의 말이 이어졌다.
“내가 마법을 거의 잃긴 했지만, 너 같은 건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여 버릴 수 있으니까. 좀 조용히 찌그러져 살아.”
분명 마법을 쓴 건데, 무슨 마법인지는 알 수가 없다. 알 수 없다는 것에서 오는 공포감에 녹스가 순간 움찔했지만, 이내 그것이 위해가 되지 않는 마법이라는 것을 깨달은 그의 표정이 다시 펴졌다.
분명 지금의 라텐테의 모습이 위협적이긴 했으나……당장 가해지는 위해가 없으니 그저 보여주기 식 허세로만 느껴진다. 그래, 그때나 지금이나 네놈 따위는. 녹스는 그의 협박에 위축되는 대신 비웃음을 흘리며, 제 옆을 가로막고 있는 라텐테의 팔을 툭 쳐냈다.
“협박을 하려면 좀 먹힐 만한 걸로 하지 그래. 넌 아무도 못 죽여. 옛날에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생각이 나약한 너 같은 놈이 힘을 가지고 있었으니, 다들 승냥이 떼처럼 달려들었겠지. 그때 넌 우습게도 네 목숨을 노리는 것들도 하나 죽이지 못했는데, 이제 와서 그런 협박이 먹힐 것 같나?”
녹스는 그를 등지고 슬슬 발을 옮겼다. 오늘은 아지트를 찾은 걸로 만족한다.
만약 라텐테가 그를 죽일 수 있다면, 지금 자신을 등지고 있을 때 죽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녹스는 전혀 두렵지 않았다. 그는 절대로 저를 죽이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직 완전히 봉인이 풀리지 않아서 그의 힘이 얼마나 남아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의 힘이 얼마나 남아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는 이 세상 전부를 집어삼킬 힘을 가지고 있을 때도 누구도 죽이지 못한 나약한 정신을 가지고 있으니까.
그리고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라텐테는 제게서 등을 돌린 녹스를 그저 지켜보기만 할 뿐이었다. 그럼 그렇지, 녹스는 비웃음을 흘리며 도서관이 있는 서른 번째 골목을 떠났다.
============================ 작품 후기 ============================
1.
:3 녹스의 방해공작은 일부러 벌인 겁니다...★
분위기 파악 못하는 진상손님 ^-^
이 소설은 40편 이내로 완결내려고 생각 중입니다. 길어져도 50편은 절대로 안 넘을 거예요. 별거 없거든요...그러니 다들 가볍게 읽어주시길!!
아참, 녹스가 그 남자라고 추측해주셨던 (코난아닌)유명한 독자님!! 땡!!!
선추코 감사합니다 :3♥ 저야 원체 인기 없는 작가라 선추코 없어도 글을 계속해서 열심히 쓰지만 ㅠ_ㅠ... 그래도 주세요... 흑흑(구걸)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