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09 Chapter 2.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더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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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학생들의 인산인해는 정점인 두 시와 네 시 사이를 지나가면서 서서히 줄어들었다. 보통 내가 퇴근하고 종종 들르곤 했던 시간인 다섯 시 반 무렵에 보았던 남자의 주변을 에워싸고 있는 여학생의 수는 그 반의 반절도 안 되는 거였다. 몇 시간이 지났는데도 지치지도 않는 것인지 여전히 웃는 낯으로 여학생들과 깔깔거리며 놀고 있는 남자를 보며, 나는 질린 기색을 했다.
수 시간 동안이나 여학생들이 다닥다닥 달라붙어있는데도 어떻게 저 표정이 유지가 되는 건지, 어떤 면으로는 참 대단한 정신력의 소유자다. 나는 여기 앉아서 가끔 말 몇 마디 하면서 장부 적는 것만 해도 피곤한데 말이지. 나는 찌뿌둥한 몸을 슬쩍 풀며 한층 여유 있게 장부를 쓰며 겸사겸사 짐도 챙겼다. 곧 퇴근할 시간이었다.
시계를 전혀 보지 않는 것 같았던 남자도 퇴근 시간은 어떻게 기가 막히게 알았는지, 어느새 주변에 있던 여자애들을 마구 떠밀고 있었다. 멀리 떨어져 있어서 목소리는 잘 안 들렸지만, 어렴풋이 들리는 소리와 하는 행동으로 추측컨대 아무래도 빨리 나가라고 하는 듯했다.
부모님 말씀도 안 들을 나이대의 애들이 남자의 말은 어쩜 그렇게 잘 듣는지, 적지 않은 숫자의 여학생들이 그의 말 한 마디에 물 흐르듯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인다. 그 모습이 참 이렇게 표현하기 뭐한데, 장관이다. 나는 그 나머지 사람들의 장부를 마저 작성하고, 이제 정말로 퇴근을 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계가 딱 여섯시 정각을 가리키고 있었다.
“퇴근해?”
언제 넘어온 건지, 뒤통수 너머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들린다. 가방을 걸친 채로 고개만 슬쩍 돌려보니, 나에게서 한 걸음 정도 떨어진 곳에서 남자가 데스크를 짚고 선 채로 샐쭉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오늘 하루 종일 질리도록 봤던 미소지만, 이상하게 볼 때마다 새롭게 느껴질 정도로 싱그럽다. 이 정도면 저 얼굴은 죄악이 아닌가 싶다. 의도하건 의도하지 않건 사람을 홀리니까.
정신 줄 잘 잡아, 클레이브. 스스로에게 말하듯 다짐하고 남자의 말에 대꾸했다.
“해야죠. 여섯 시 넘었잖아요.”
“생각보다 안 쉽지?”
그의 이어진 질문에, 나는 넘실거리는 커다란 파도 같았던 인파를 떠올리며 질색했다. 확실히,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어떻게 보면 출판사에서 하던 일보다 더 힘든 것 같기도 하고. 사람이 많아서 일이 많은 것도 그렇지만, 그것보다는 몇 시간 동안 똑같은 질문에 시달린 것에 대한 스트레스가 좀 컸지.
그때를 떠올리자, 여학생들이 그를 ‘라테’라고 부르던 것이 저절로 떠오르며 여태껏 궁금해 하지 않았던―어쩌면 궁금할 필요도 없었던―그의 이름이 문득 궁금해졌다.
“확실히 생각했던 것보다는 힘들긴 했어요. 근데 관장님, 저 궁금한 게 있는데.”
“응? 뭔데?”
궁금한 것이 있다는 내 말에, 갑자기 남자의 눈이 아주 초롱초롱 빛나기 시작한다. 원래는 항상 반만 뜨여 있는 것 같았던 눈이 커지며 선명하게 드러난 보랏빛 눈동자는, 정말 신이 내려주신 축복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아름답고 신비한 빛을 가지고 있었다. 와 진짜 예쁘다…….
아니, 이게 아닌데. 하마터면 또 넋을 놓을 뻔했다. 나는 날아가기 직전이었던 멘탈을 가까스로 붙잡아 붙들어 놓고, 그의 말에 대꾸했다.
“관장님 이름이 라테에요? 커피 종류 중에 하나인 그 라테?”
“오.”
나의 질문에 의미를 알 수 없는 감탄사를 던진 남자가, 갑자기 비뚜름하게 서 있던 자세를 고쳐 똑바로 섰다. 그러더니 어디 감동이라도 받은 사람처럼 환하게, 정말 여태까지 봤던 그 어느 때보다―그래봤자 오래 본 건 아니었지만―환하게 웃는 것이 아닌가?
그 순간은 정말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줄 알았다. 나도 모르게 한 걸음 뒷걸음질 쳤지만, 뭐가 그리도 기쁜지 남자는 그것은 눈치 채지도 못하고 한 톤 올라간 목소리로 외쳤다.
“와! 클레이브, 너 처음으로 나한테 관심 보였어, 알아?”
그리고 그 외침에 나는 또 정신없이 뛰는 심장을 부여잡아야 했다. 아, 그렇게 웃지 좀 말라고.
“네?”
“내 이름 라테 아니야. 그거 애들이 멋대로 줄여서 부르는 거야. 발음이 좀 그렇거든.”
“그, 그럼 관장님 이름은 뭔데요?”
놀라서 막 내뱉다시피 한 내 질문에 대꾸하는 남자의 눈이 완벽한 호선을 그리며 휘어졌다.
“내 이름은 라텐테야. 물어봐줘서 진짜 기쁘다. 더 궁금한 건 없어?”
관심을 가져줘서 기쁘다니, 그런 잘생긴 얼굴에 그런 표정을 지으면서 그런 말은 너무하잖아. 내게 왜 그러는 거야? 외모를 기반으로 호의적인 행동과 말을 더해 사람의 마음을 아무렇지 않게 흔드는 그가 원망스럽다. 아니, 그것보다 그것에 흔들리고 있는 내가 더 싫다. 한 번 당해놓고서는 또, 멍청하게.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설레려 하는 내 모습에 나도 모르게 입술을 짓이겼다.
이런 건 싫어, 불편해. 몸에 가시가 돋친 느낌이 들었다. 이제 고작 하루밖에 지나가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정신력에 한계가 다가왔다. 이대로는 못 견뎌.
그 일이 도대체 언제 일인데, 아직도 이토록 내게 크게 자리하고 있었던가. 나는 사 년이 넘도록 떨쳐내지 못한 악몽 같았던 현실의 잔재에 속으로 자조했다. 그리고 동시에 결정했다.
완전히 자리를 잡을 때까지 모른 척, 아무렇지 않은 척 넘어가려고 했던 것. 그것에 대해 담판을 지어야 했다. 그 끝이 설령 하루만에 다시 실업자가 되는 것이라 해도. 그의 행동에서 털어놓을 수도 없는, 떠올리기 싫은 끔찍한 기억이 자꾸만 떠오르는데 어떻게 버티란 말인가.
입술을 너무 세게 깨문 걸까, 비릿한 피 맛이 느껴진다.
“클레이브, 입술이…….”
큰 상처는 아닐 테지만, 그렇다고 눈에 안 보이는 상처도 아닌 그 상처를 본 남자, 아니, 라텐테의 입가에서 순식간에 미소가 사라졌다. 나는 내 입술 쪽으로 그 조각 같은 손끝을 천천히 가져오는 그의 손목을 잡아 제지하며, 그의 말을 끊었다.
“관장님.”
미간에 손끝 살짝 가져다댔다고 경기를 일으키던 여자가 갑자기 제 손목을 턱 낚아채니 그도 순간 엄청 놀랐나보다. 그는 몸을 움찔 떨며 잠시 굳어 있다가, 한 박자 늦게 내 부름에 답했다.
“……응.”
“관장님 저한테 관심 있어요?”
속으로 미친 듯이 고뇌하고 한 질문인데, 아이러니하게도 목소리는 무섭도록 덤덤하게 흘러나왔다. 그 때문에 나의 심각함이 잘 전달되지 않은 걸까, 대꾸하는 라텐테의 목소리는 상당히 가벼웠다.
“처음에 말했잖아? 마음에 들어서 뽑았다고. 응, 있어. 아주 많이.”
관심 있다고 말하는 남자의 태도가 너무 가볍잖아. 이것마저 그때를 떠올리게 해, 순간 목울대가 크게 울컥거렸다. 나는 막히기 직전에 놓인 목을 억지로 열어 천천히, 힘겹게 한 마디를 내뱉었다.
“……관장님, 전 장난하는 게 아니에요.”
그때 볼에 뭔가 따뜻한 것이 흘러내렸다. 아, 잠깐만. 보지 않아도 뭔지 알 것 같은 그 온기를 지우려 손을 들었는데, 갑자기 뭔가 내 팔을 낚아채 그것을 막았다. 놀라서 눈을 둥그렇게 뜬 채로 얼굴을 슬쩍 돌려 뭔가 보니, 그의 손이 내 손목을 잡고 있었다. 그에 또 놀라 다시 고개를 돌려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니…….
거의 웃는 낯인 그의 얼굴이 차갑게 내려앉아있다. 그 표정이 무서우면서도 황홀할 정도로 아름다워서, 나도 모르게 잠시 넋을 놓고 뚫어져라 쳐다보게 되었다. 내 시선이 시린 빛을 내고 있는 그의 보랏빛 눈동자 속에 담긴 내 모습에 고정되자, 남자가 살짝 입을 뗐다.
“이봐, 클레이브.”
그 목소리는 내가 여태까지 들었던 미성과는 달랐다. 낮고 차갑게 울린다.
“내가 장난하는 것처럼 보여?”
그가 내게 잡혀있던 팔을 풀고 역으로 내 팔을 잡았다. 졸지에 나는 그에게 양팔을 잡혀 움직일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렸다. 눈물은 주룩주룩 흐르는데, 닦을 수가 없다. 하지만 남자는 잡은 내 팔을 놓아주지 않고, 그대로 한 걸음 내게 다가오며 말을 이었다.
“혹시 그렇게 느꼈다면 확실하게 말할게. 절대로 장난 아니야.”
나는 한 발 더 가까워진 그와의 거리를 다시 벌렸다. 내 상태가 그때와 다르다는 것만 빼면, 거의 비슷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그 사실을 인지하니 다시금 몸이 덜덜 떨려온다. 그 다음으로 울먹거리며 하는 질문도, 그때와 비슷했다. 아아, 싫어. 하지만 이 상황에 할 질문도 이것뿐이다. 갈림길은 없어.
“……왜요? 관장님이 저에게 관심 가질만한 이유가 있어요?”
그리고 여자보다 예쁜 그의 입술에서 나온 대답 또한,
“……예전부터 쭉 지켜보고 있었어.”
그때와, 똑같다.
다리에 힘이 빠지려는 것을 간신히 참고 서 있으려니, 몸이 자꾸 기우뚱한다. 라텐테의 팔이 나를 붙잡고 있지 않았더라면 아마 나는 그 자리에 쓰러졌을 것이다. 그 남자도 그랬어, 나한테 그랬다고……내 머릿속은 백지가 되어버렸다.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냥 벗어나고 싶었다. 나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부들부들 떨면서도, 그의 팔을 빼내려고 온힘을 다했다.
“싫어, 싫어요, 놔요, 나 여기 안 나올 거야. 갈래요.”
“어딜 가. 지금 놓으면 쓰러지잖아.”
“그래도 싫어요, 빨리 놔.”
하지만 애초에 여자와 남자가 힘으로 상대가 될 리가 없다. 하물며 지금 나는 서 있을 힘조차 없는 상태인데. 나는 계속해서 발버둥 쳤지만 그는 표정조차도 변하지 않고 내 발작 같은 중얼거림을 끊었다.
“내 말 아직 안 끝났어. 사실 저건 거짓말이야. 어제 면접 보러 온 당신에게 반했어. 그래서 합격 시켰어.”
그의 이어진 말에 내 중얼거림이 순식간에 뚝 끊어졌다. 뭐야, 갑자기 말을 왜 바꾸는 거야? 내가 질문했을 때 너무 당황스러워서 할 말이 없어서 막 대답한 거였어? 그게 아니라면 저 말이 안 먹히니까 다른 말로 날 꾀어내서…….
생각에 독기가 스미니, 표정도 절로 굳어갔다. 그 얼굴에 핀 독기를 읽어낸 라텐테의 미간이 찡그려졌다.
“저 둘 중 뭐가 사실이건 간에, 지금 넌 내가 무슨 말을 해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없는 상태야. 그래서 난 지금 네게 고백하진 않을 거야. 네가 아직 내 마음을 받을 준비가 안 돼 있다는 거, 아니까. 그러니까.”
그는 나를 잡고 있던 손을 놓으며 내 허리를 감싸 나를 부축해, 의자로 데리고 갔다. 그 손길이 의식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힘이 다 빠져버린 몸은 그것에 반응하지 못했다. 나는 그의 인도를 받아 도착한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는 의자에 축 늘어져서 눈물을 펑펑 쏟아내고 있는 내 앞에 쪼그려 앉아 나를 올려다보았다.
“마음 열어줄 때까지 기다릴게. 대신 하나만 생각해줘. 내가 네게 한 행동은 전부 진심이었고, 지금 하는 말도 진심이고, 앞으로도 진심일 거야.”
그가 손을 들어 내 얼굴을 쓸어 눈물을 닦아주었다. 놀랍게도, 처음으로 그의 손길에 전혀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 그것이 신기해서 훌쩍이며 그의 얼굴을 슬쩍 내려다보니, 그의 얼굴에는 어느 샌가 봄날 따사로운 햇빛보다 찬란한 미소가 걸려 있다. 아, 아름답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아직은 모르겠지만, 그는 조금 다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슬쩍 마음 한 구석에 새싹처럼 피어났다.
============================ 작품 후기 ============================
1.
:3...-///- 제가 다 부끄럽군요...
우리 라테군은 잘생기고 엉뚱하면서 박력도 넘치져. 반전매력(?)
자 이제 시작이야 내꿈을(...)
제가 뭘 잘못먹었나요...선작이...음...어제까지만 해도 100몇이었는데...감사합니다...후덜덜하네요...저 혹시 투베라도 갔었나요...왜...아니 투베치곤 적나...음...어...(ㅠㅠ)무튼 감사합니당
2.
엌 독자분들 중에 의외로 그 유명한 소설을 모르시는 분들이 꽤 계시네요 'ㅁ';
판타지 쪽에서 거의 독보적이다 싶을 정도로 유명한 소설이라 다들 아실 줄 알았는뎅
이왕 다들 모르시는 거 제가 적극적으로 추천드립니답
'구경하는 들러리양'이라는 작품이에요! 로판 말고 판타지 쪽에 있어요!
졸잼 꿀잼 핵잼이에요!! 꼭 보세요!!
(언급해도 되나요 'ㅁ'; 실례라면 지우겠습니당 ㅠㅠㅠㅠ)
열심히하겠습니다!! 선추코 감사합니다 ♥ 많이 주세요 ♥
채꼬지님 후원쿠폰 감사드립니당 ♥ >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