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화 (14/15)

#14

한우진의 평탄하다 못해 무탈한 결혼생활이 이제 막 2년에 접어들었을 때였다. 선아의 모친이 또 쓰러졌다. 완치판정을 받은 간암이 다시 재발한 것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우진은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 선아가 그것에 마음을 쓸지 모른다는 게 조금 걸렸을 뿐.

정 안 되면 해외에 가서 불법적으로 수술을 받는 것도 그는 꽤 진지하게 고려해 보기까지 했다. 제 장모라는 여자가 태연스럽게 선아에게 장기이식을 권하기 전까지만 해도.

우진은 당장이라도 그 미친 여자의 목을 조르고 싶은 것을 얼마나 참았는지 모른다. 제 장모가 그 말을 꺼내자마자, 정말 그 여자가 제 간이라도 파먹는 괴물이라도 된 듯 두려움에 가득 차 무의식중에 그의 등 뒤에 숨던 선아가 떠오르자, 더 열이 뻗쳤다. 제 분노를 선아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갈무리하기 위해, 그는 안쪽 볼이 찢어질 정도로 으스져라 이를 물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 것이었다. 그가 병원장까지 개입시켜서 결과서를 위조한 것은. 그리고 그를 포함해서 소수만 알아야 할 사실은 왜, 저 남자가 알고 있는 것일까. 우진은 얼굴을 찌푸리지 않기 위해서 손가락으로 눈썹을 가볍게 문질렀다.

“이 사실을 제가 알리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전무님.”

“이름이?”

“김, 김명훈입니다.”

이를 아득아득 가는 모양새로 짓씹듯 제 이름을 내뱉는 남자를 우진을 천천히 뜯어보았다. 한때 의사였던 남자는 소송이 여럿 걸린 탓에 초췌해져 있었다. 그간 저질렀던 자잘한 성추행과 혼인빙자간음까지. 너저분한 소송에 휘말린 남자는 제가 벌어놓은 것은 물론이고, 버는 족족 변호사의 뒷구멍에 대주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리고 변호사들끼리 무슨 얘기가 돌았는지 모르지만, 이제는 제 사건을 맡아 줄 이가 없어 별 거지같지도 않은 것 때문에 아예 구치소에 처박히게 생겼다.

“소송 취하해 주시기 바랍니다.”

“나는 김명훈 씨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모르겠군요.”

모른다고? 아무것도 모르는 척 고상한 척 굴면서, 뒤에서 호박씨를 까듯. 그 년들 다 모아서 단체로 소송 걸게 한 게 네 새끼라는 거 다 알고 있다고, 고래고래 소리라도 치고 싶은 마음이었다. 중견 이상의 병원에도 뭔 입김을 불었는지, 이제 동네병원의 페이 닥터 신세로 근근이 살고 있었다. 줄줄이 걸린 소송 탓에 결근이 잦자, 이제는 이마저도 못 하게 생겼다. 병원을 개업하자니 돈이 터무니없이 부족했다. 대출도 못 받는 신세였다.

현재 김명훈은 이래저래 진퇴양난의 상태였다. 그래도 마지막 이성이 저 표정 변화가 없는 한우진에게 대거리를 하지 못하게 막았다. 더 본질적으로는 한신그룹의 장남이자 후계인, 자신보다 한참은 어린 남자에게 겁을 먹고 찍소리도 못한다는 것이 맞는 말이었지만. 김명훈의 알량한 자존심이 그 생각까지는 못하게 했다.

“분명히. 제더러 조용히 나가면…… 다른 피해가 없다고…….”

“그냥. 생각할수록 열 받아서. 나도 한 입으로 두말하는 성격은 아닌데. 그냥 김명훈 씨가 생각할수록 좆같아서. 그래서 그랬어요.”

제 앞을 기어 다니는 벌레를 죽이듯 별 감흥 없는 목소리로 한우진은 말했다. 김명훈은 저도 모르게 이가 아득아득 갈렸다. 제 이름 석 자도 제대로 모르는 새끼한테 제 인생이 모조리 흔들리는 게 말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제가 의사가 되려고 어떻게 아득바득 공부했는데. 저 어린 새끼가…….

“…….”

“그렇다고 내 앞에서 이 종이 쪼가리 흔들면서, 나도 모자라서 내 아내까지 그 입으로 거들먹거리면. 여기서 더 좆 되고 싶다고 나한테 시위하는 거라고, 내가 생각하지 않겠어요?”

“…….”

“알아보니까, 의료사고도 몇 번 저지른 전적도 있던데. 제아무리 의사들끼리 관계가 끈끈하다고 해도, 신한병원 파트장 맡게 해 준다고 하면 법정에서 줄줄이 말하지 않을까요?”

“한…… 한 번만…… 용서를…….”

손이 떨리다 못해 목소리까지 벌벌 떨렸다. 면허취소까지 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 왔다. 지금 하고 있는 소송비용도 감당하지 못할 정도인데, 의료사고 소송까지 감당할 수는 없었다.

“그러니까, 얌전히 지내세요. 이딴 걸로 사람 협박할 생각 말고.”

김명훈은 어렵게 구해 온 진본이 한우진의 손에 벅벅 찢기는 것을 분해서 발개진 눈으로 바라보았다. 한우진의 왼손의 약지에 껴 있는 유달리 반짝이는 금속의 반지를 핏발이 선 눈으로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한때 매스컴에서 한참을 떠들던 한신가의 신데렐라. 얼마나 꼭꼭 숨겨 대는지, 공식 석상에는 죽어도 대동하지 않는다는 저 씨발 새끼와 같이 붙어먹는 년. 오로지 제 얼굴과 몸으로 남자를 꾀어내서 세상 편하게 사는 골빈 년. 저 개 같은 연놈들. 이 치욕을 꼭 갚아 주리라 다짐했다.

***

짝. 짝. 고개가 돌아갈 정도로 뺨을 후려치는 감각에 김명훈은 가물거리는 눈을 억지로 떴다. 약에 취해 몽롱하게 젖은 눈에 사내는 찬물을 끼얹고, 다짜고짜 다시금 뺨을 몇 대 후려쳤다. 의자에 앉혀진 채 뒤로 팔이 꺾여 두 손이 묶여 있으니, 반항도 하지 못했다. 얼굴에 끼얹어진 물이 아닌 눈물이 절로 줄줄 흘렀다.

“다, 당신 뭐야.”

“혹시 이 사진 알아?”

두 사람이 꽤나 선명히 인화된 사진을 제 눈앞에 들이밀며 하는 말에 김명훈은 본능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남자 쪽은 자신이 고용한 호빠 새끼고, 그 호빠 새끼가 뺨에 입술을 맞추는데도 가만히 있는 계집은 옷이 바뀌어도 천박한 태가 줄줄 흐르는 한우진의 아내였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홀어머니를 모시는 갖은 착한 척을 하고, 뒤로는 죽으라고 저주를 퍼붓던 가증스러운 저 썅년. 그저 남자라면, 그 천박한 가랑이 처 벌리는 창녀보다 못한 년. 그 년만 아니었어도, 그 개 같은 새끼가 엮일 일도, 제 인생이 이렇게 무너질 리도 없었다.

지금쯤이면 그 한우진도 그 년의 민낯을 낱낱이 알아차렸을 터였다. 꼴좋게. 배신감에 치를 떠는 그 새끼를 한번 봤어야했는데.

그 새끼도 정말 미친 새끼다. 적당히 몇 번 데리고 놀 계집년과 결혼까지 하다니. 높은 자리에서 고고히 저를 내려다보듯 있던 고상했던 한우진도 골빈 것은 마찬가지였다. 뭣 하러 제 어미한테 장기 이식할 마음도 없는 년 때문에 수고스럽게 돈을 들여 결과서를 조작까지 하느냐 말이다. 고작 그 년의 이기적인 마음 하나 편하게 해 주겠다고 헛돈을 쓴 거나 다름없었다.

“몰라, 씨발. 당신은 뭔데 나, 나한테 이래.”

“몰라?”

“그래!”

사내의 손에 사진이 무참히 구겨졌다. 그리고 그 손이 그대로 김명훈의 턱을 손으로 들어올리더니 마구잡이 그의 입에 구겨진 사진을 쑤셔 넣는다.

“뱉기만 해 봐. 이 하나씩 나갈 줄 알아.”

그 말이 꼭 공수표는 아니라는 것을 남자의 기세를 보면 알 수 있었다. 더군다나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남자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의 뒤로 늘어선 남자들의 머릿수가 제 눈으로 어림잡아 세어지지 않을 정도로 많았다. 그리고 남자가 쳐다도 보지 않고 손가락만 까딱이는데도, 각이 잡혀서 저들의 가까이로 오는 남자는 한눈에 보아도 뭘 생업으로 하고 사는 이인지 알 것 같았다.

“그럼 이건?”

김명훈은 살고자 하는 열망으로 입 안에 쓰레기를 머금은 채로 고개를 절박하게 흔들었다. 그러자 다시금 꾸역꾸역 제 입 안으로 무참히 구겨진 사진이 들어온다. 공간을 확보하듯 목구멍까지 밀어 넣는 잔혹함에 치가 떨린다. 이제는 그에게 묻지도 않고 기계적으로, 그의 입 안이 날카로운 단면에 찢어져도, 목구멍에 닿아 헛구역질을 해도 아랑곳없이 쑤셔 넣었다.

입 안이 터져라 담고 억지로 쓰레기를 물고 있던 김명훈은 하나가 더 제 입으로 들어오기 전에 다급하게 발을 굴렀다. 온몸이 들썩일 정도로 고개를 저었다. 막힌 입에서는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고, 소음처럼 빈 콘크리트 창고에 울렸다.

“알지?”

남자의 말에 고개를 냉큼 끄덕였다. 그 탓에 입술에 아슬아슬 걸치고 있던 것이 툭 떨어졌다. 그와 동시에 뺨이 돌아갔다.

“잘 물고 있으랬지?”

그리고 고개가 뒤로 넘어갈 정도로 세게 머리끄덩이가 우악스럽게 잡혔다. 두려움으로 오줌이 가랑이 사이로 질질 새어나왔다. 발등까지 축축하게 젖을 정도였다. 그리고 영원히 열릴 것 같지 않던 철제문이 녹이 슬어 끼익대는 소리와 함께 열렸다. 절로 모든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

“이게 뭔 냄새야.”

그리고 이 상황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코를 틀어막으며 들어선 여자의 등장에 김명훈은 얼른 입 안에 있는 쓰레기를 몽땅 내뱉고는 도움을 요청했다.

“경찰에 빨리 신고해! 멍청하니 처 들어오지 말고! 이 멍청한 년아!”

주변의 공기가 순식간에 싸해지는 것도 모른 채로 김명훈은 발을 동동 구르며 제 쪽으로 다가오는 여자에게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미친년아! 죽고 싶어? 이 새끼들 안 보여? 기어들어 와서, 돌림빵이라도 당하기전에 빨리 쳐나가서 경찰 부르라고! 경찰!”

그리고 김명훈이 상황이 이상하다고 감지한 것은, 제 뺨을 후려갈기던 남자가 여자가 제 쪽으로 다가오자 순순히 뒤로 물러서는 모양새를 보고서였다. 아까와는 비교도 되지 않게 분위기가 얼음장같이 쩍쩍 얼어붙었다.

“이 씨발 새끼가 뭐라고 지껄였어?”

“…….”

“순덕아. 뭐라고 지껄이든?”

한데 뭉쳐져 있는 사내새끼들 중 하나에게 묻는 말에 사내새끼는 눈에 띄게 움칠대더니, 반걸음쯤 앞에 나와 허리를 숙여 보였다. 아까 저를 추궁하던 남자에게보다 더 극진한 태도였다.

“개가 짖는 소리밖에 듣지 못했습니다, 사장님.”

“그러니깐 누가 개새끼 잡을 때, 소리 새어나가게 입도 안 막고, 일 이딴 식으로 진행을 하래? 하루 이틀 해?”

“시정하겠습니다.”

남자는 탁자라고 부르기도 뭣한 허름한 걸상 위에 올려진 노끈 뭉치를 손에 들었다. 그리고 비어진 김명훈의 입 안으로 제 재킷 안쪽에 있던 손수건을 목구멍 깊숙이 쑤셔 넣었다. 제아무리 김명훈이 발악을 하듯 몸을 비틀어도 소용이 없었다. 남자는 기계적으로 김명훈의 입에 재갈을 물리듯 입 안에 있는 손수건을 뱉지도 못하게 노끈으로 위아래 입술을 가로질러 뒤로 꽉 묶었다. 어찌나 세게 묶는지 줄 때문에 조여들어 가는 입가가 찢어질 듯 아팠다.

“한우진 전무라고, 그 미친놈이 당신한테 원한이 많아.”

여자는 쯧. 혀를 짧게 찼다.

“재수가 옴 붙은 것도 아니고. 왜, 하고 많은 사람 중에 걔를 건드려서, 이 사달을 만들어.”

두 손을 묶고 있던 케이블 타이가 여자가 내린 손을 풀라는 지시에 간단히 뚝 끊어졌다. 대신에 두 명이 양옆으로 명훈의 팔을 붙들고 있었다.

“손 하나만 잘라내는 거면, 걔치고는 많이 봐준 거야. 한우진이 안 그러더니, 제 와이프 때문에 많이 물렁해졌어. 성환아, 안 그러니?”

김명훈은 여자의 말뜻을 이해도 하기 전에, 그대로 먼지가 뽀얗게 쌓인 걸상 위로 상체가 짓눌렀다. 어깨를 붙들고 있는 놈이 두 놈이었다. 그리고 다른 두 놈이 제쪽으로 다가온다. 고개를 들지도 못하게 아프게 걸상위로 짓누르고 있었다. 다른 팔을 등 뒤로 넘겨져 붙들렸다. 다른 손은 걸상위로 짓누른다. 뭘 할지 예상이 갔다. 아무리 제가 울부짖는 것같이 악악대도, 허공에 치켜든 날이 잘 든 손도끼 같은 것이 도중에 멈출 리가 없었다.

“한우진 아내. 이름이 채선아였던가? 여자인 내가 봐도 눈깔 돌아가게 예쁘게 생기긴 했더라. 정말 난 새끼야. 그렇게 내숭을 떨어서, 결국에는 지 소원대로 결혼까지 하고. 그것도 지랑 안 어울리게 존나게 착하고 예쁜 여자랑. 세상 참 불공평해. 그렇지 않니? 성환아.”

이 난리통에도 그저 배알이 꼬이는지 입맛을 쩝쩝 다시는 지아를 쳐다보며, 성환은 한우진 전무님과 사장님이 별반 다를 것 없다고 덧붙이고 싶은 것을 입을 다무는 것으로 대신했다. 학창시절부터 대학교, 그리고 성인이 되어서도 꽤나 붙어 다니던 두 사람은 서로를 혐오스러워했다. 친구라고 이름 붙일 수 있는 인간관계가 전무한 두 사람에게는 서로가 그나마 ‘친구’라고 따로 부를 수 있는 대상이었다. 만약에 성환의 생각을 입 밖으로 말한다면, 두 사람은 동시에 제 목을 조를 정도로 질색을 할 생각이지만.

대강 서로 이윤에 맞아 어울리기는 했지만, 옆에 보아도 서로를 싫어하는 게 보였다. 성환은 그것이 동족 혐오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남녀 사이에 으레 있을 법한 성적 기운까지, 두 사람에게는 전혀 기미조차 없었다.

한우진이 미쳐 날뛰는 버전이 정지아고, 정지아의 조용히 눈 돌아가는 버전이 한우진이었다. 그리고 제 본모습을 아내에게 들키기 싫어하는 한우진 전무가 당연스럽게 지아를 끊어내는 것이 제 본모습을 철저히 감추기 위함임을 어렴풋이 지아도 눈치채고 있을 것 같았다.

“근데, 참 불쌍해. 선아씨도 어쩌다가 그런 놈 눈에 띄어서는. 내가 남자면, 어떻게 해 보는 건데. 그 새끼 날뛰는 것도 덤으로 보고.”

“…….”

낄낄. 장난처럼 지아가 덧붙인 말에 성환은 순간 뭔가 상상이 가서 등골이 오싹해졌다. 가정도 하고 싶지 않은 일이지만, 만약에 그랬다면 두 고래 싸움에 새우등처럼 제 등이 터져 버리고 말 것이었다.

“저 손은 한우진 선물이니, 포장해서 전무실까지 애 하나 시켜서 잘 배달해 주고.”

“……네.”

“저 새끼는 그냥 묻어.”

보지도 않고 태연하게 지시하는 말에 성환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식으로 처리할까요?”

“그냥. 콘크리트 부어서, 바다에 던져.”

“죽인 다음에 할까요?”

한참을 없어진 손을 보여 시끄럽게 악악대더니, 탈수증상이라도 왔는지 시체처럼 늘어진 김명훈을 보며 지아는 못 볼 꼴을 봤다는 듯 한쪽 눈썹을 살풋 찌푸렸다.

“뭣 하러, 귀찮게. 그냥 산 채로 해.”

“네. 알겠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