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한우진이 채선아를 보았던 시간만큼, 그녀를 지켜보았던 시간도 길었다. 정지아는 그런 그를 보고 스토킹이라 했지만 한우진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제 생업과 모든 것을 포기하고 그녀의 뒤만 졸졸 쫓아다니지도 않았고, 그녀에게 폐가 될 정도로 선아의 사생활을 캐내거나 알아보지도 않았다.
그건 그가 채선우의 옆구리만 무심히 툭 찔러도 그의 입에서 술술 나오는 것이기에 괜히 사람을 붙여 알아낼 필요도 없는 일이었지만.
그는 자신은 스토킹을 하는 놈들과는 결이 다르다고 느꼈다. 그가 고등학교 때, 선아는 스무 살이었던 때에. 그는 선아가 일하는 맞은편에 있는 카페에서 공부했다. 그리고 간혹 시선은 그녀에게 머물렀다. 그때의 선아는 턱까지 오는 짧은 단발머리였다. 움직일 때마다 살랑거리는 머리카락은 그의 마음을 술렁이게 했다. 그는 질척한 호기심과 깊은 감흥이 제 속을 어지럽힌다고 느꼈다.
그가 알고 있는, 보통의 사람들이 말하는 사랑은 이런 것이 아니다. 그는 선아를 보면 구름 위를 둥둥 떠다니는 것이 아니라, 밑바닥이 꺼지는 기분이었다. 그런 기분이었다.
그건 사랑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니 숨겨야 한다. 제 민낯을 알게 되면, 선아는 자신을 견디지 못하고 도망가고 말 것이다. 그런 일은 있어서도 일어나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
***
“우진아.”
우진은 자신을 부르는 모친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그가 선아를 데려오자마자, 눈에 띄게 당혹스러워했다. 그리고 결혼을 하겠다는 자신의 말에 최대한 침착하려 애를 썼다. 기품 서린 미소를 선아에게 유독 많이 보여 주었다. 우진은 그런 모친의 모습이 그녀가 바짝 긴장하고 있다는 반증이라고 느꼈다. 자신의 옆에 앉아 있는 선아보다 더.
그의 모친은 선아가 화장실에 다녀오겠다며 자리를 비우자마자, 그 가면 같은 모습을 벗었다. 그가 표정을 숨기는 데 능숙한 것은 필시 모친을 닮아서일 거다.
호텔의 커피숍에 흐르는 클래식 음악은 그도 알고 있는 것이었다. 드뷔시의 <달빛>. 선아가 알고 있는 유일한 클래식이자, 제일 좋아하는 음악. 그게 그의 긴장감을 누그러트리고 있었다. 여기 있는 제 모친도 선아도 그가 손안에 땀이 밸 정도로 긴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를 것이다. 그들과는 다른 이유로.
“네.”
한우진은 부드럽게 찻잔의 손잡이 부분을 감싸 쥐며 대답했다. 선아가 없으니, 조금 마음이 편했다. 선아는 눈에 띄게 움칠거렸다. 그게 조금 안쓰러우면서도, 제 눈에는 귀여워서 우진은 저도 모르게 손이 뻗어 나갈 뻔한 것을 참느라 곤욕이었다.
그의 긴장감은 그런 이유였다. 저 자신도 모르게 그녀에게 함부로 손을 댈까 봐 조마조마했다.
“너, 그 애를 사랑하니?”
우진은 선아를 생각했다. 사랑이라……. 자신이 하는 게 사랑일까. 한우진은 인간미는 없을지 몰라도 양심적인 사람이었다. 특히 채선아에 관해서는.
“아니요.”
한우진은 입술에 찻잔을 가볍게 대며 말했다. 떫은 홍차의 맛이 그의 입 안에 맴돌았다. 그는 선아의 잔에 각설탕을 몇 개 더 넣었다. 선아가 먹기에는 홍차가 너무 떫을 것 같아서였다.
선아는 우진이 입도 못 댈 단것을 좋아했다. 저번에 그가 선물한 초콜릿을 입 안에서 천천히 혀를 살며시 굴려 가며 녹여 먹는 채선아를 보며 한우진은 그날 처음 견고히 쌓아 올린 제 인내심이 그대로 무너질 수도 있다고 느꼈다.
뜨거운 홍차에 설탕이 녹자, 우진은 티스푼으로 잔 안을 휘저었다. 제 앞에 있는 신 원장의 물음에 답하는 것보다 이게 더 중요한 일로 느껴졌다.
“그럼 왜 결혼하려고 하는 거니?”
“결혼은 사랑 없이도 할 수 있는 거니까요.”
결혼이라는 제도는 아주 훌륭했다. 완벽한 타인인 남녀가 서로의 것임을 정부에서 서류로 증명한다. 도장만 찍어서 제출하면 둘은 서로의 동의 없이는 타인이 될 수 없었다. 영원히 가족으로서 묶이는 것이다. 서로에게 종속되는 것이다. 그런 일은 한우진에게는 더없이 달큼하게 느껴졌다.
“그게 무슨 소리니?”
“제가 필요해서 선아 씨에게 해 달라고 했어요.”
한우진은 그것이 필요했다.
“…….”
“어머니, 허락해 주세요. 저는 선아 씨가 필요해요.”
그것도 아주 간절하게.
“선아 그 애는? 네가 필요하니?”
그는 살짝 눈매를 찌그러트리며 자신의 눈썹을 손가락으로 비볐다. 그리고 두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쓸어내리고는 단호한 얼굴로 제 모친을 바라보았다.
“네. 선아 씨도 제가 필요해요.”
정확한 것은 한우진의 돈이겠지만, 우진은 뒷말을 아꼈다. 뭐가 되었든 자신은 선아에게 필요한 것을 충분히 갖추고 있었고, 그는 풍성하게 그녀에게 베풀 마음이 있었다. 그녀가 그의 밑바닥까지 긁어먹더라도, 그는 상관없었다. 그리고 그녀가 아무리 긁어먹어도 쉽게 바닥날 정도로 제 밑천은 그렇게 얕지 않았다.
“그 애도 네 상황을 아니?”
“…….”
우진은 손깍지를 꼈다가 풀었다.
“아니요. 선아 씨는 몰라요.”
우진은 이 피아노 선율이 끝나기 전에 그녀가 되돌아왔으면 해서, 그녀의 손잡이 부분을 손끝으로 살며시 쓸었다.
“모르게 할 거고. 조심할 거예요.”
“…….”
“아낄 거예요. 내 옆에 두고 그냥 보기만 할 거예요. 망가지지 않게, 앞으로도 내 옆에서 예쁜 그 상태로 있을 수 있게.”
혼잣말에 가까웠다. 자조적인 중얼거림에 가까운 독백이었다. 그답지 않게 조금 연약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한우진은 채선아의 생각만 해도 물렁물렁해진다. 그것을 한우진은 알고, 채선아는 모른다.
그녀는 멋대로 그를 상상하고 있었다. 그는 그것을 내버려 두었다. 그녀는 그의 천성이 다정한 줄 알고 있었다. 그가 베푸는 것조차 그녀를 불쌍히 여겨서인 줄 알고 있었다. 한우진은 그것을 정정하지 않았다. 채선아의 눈에 자신이 그렇게 보인다면 기뻐할 일이다. 미친놈이라고 생각하기보다 바보처럼 착한, 우둔한 이로 보이는 것이 훨씬 나았다.
“어머니, 전 그럴 거예요.”
우진의 시선이 제 모친에게로 똑바르게 향했다. 그의 눈은 단단했다. 모친은 그런 그를 바라만 보았다. 침묵이 둘 사이로 어둡게 가라앉았다. 둘 중 누구도 선뜻 입을 떼지 않았다. 두 모자의 대화는 다행히도 그녀가 오자 자연스럽게 끊겼다.
선아는 제 자리에 앉았다. 한우진의 옆자리.
우진은 손가락으로 한번 쓸었던 손잡이에서 손을 떼었다. 선아는 그를 보며 옅게 웃어 보였다.
“이거. 우리가 좋아하는 곡 맞죠?”
그녀가 좋아하는 곡.
“네. 맞아요.”
우진은 그녀의 손가락을 만지고 싶었다. 한껏 긴장했던 얼굴이 조금 순하게 풀린 그녀의 얼굴을 매만지고 싶었다. 치맛자락이 올라가 둥글게 드러난 무릎을 만지고 싶었다. 내내 그 충동을 억제하느라, 너무 힘이 들었다.
분명 그녀와의 결혼 생활도 이런 충동과 억제의 연속인 나날일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대도 한우진은 이 형벌과 같은 인내를 감수할 것이다.
그녀만 제 옆에 붙들어 둘 수 있다면, 한우진은 모든 것을 할 것이고, 다 할 수 있었다. 제 모든 것을 바칠 수 있었다. 가지고 싶은 것도, 가져야 할 것도 모두 채선아다. 채선아뿐이다.
그 밖의 것들은 다 부수적인 것들이었다. 선아의 옆에 있을 수 있게 갖춰야 할 부차원적인 것들. 돈도, 명예도, 저를 이루고 있는 모든 것들이 채선아의 앞에서는 우진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먹을 만은 해요?”
두 손으로 얌전히 잔을 잡은 선아를 보며, 우진은 물었다. 그녀의 손은 너무 작았다. 만약에 자신의 손을 그녀가 붙든다면, 두 손으로 저렇게 잔을 잡았듯, 두 손을 모아야 겨우 그의 한 손을 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맛있어요.”
순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조금 더 풀린 얼굴로 그를 향해 선아가 웃었다. 우진은 뒷덜미가 살그머니 서는 느낌이었다. 선아가 가볍게 도톰한 아랫입술을 빠는 것을 보며 우진은 겨우 시선을 돌렸다.
“그래, 식 날짜는 정했니?”
어머니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태연히 물었다. 자신의 뻔뻔함은 필시 어머니를 닮은 것이다. 우진은 항상 그렇게 생각했다.
“다음 달로 정했어요.”
“생각보다 빠르구나.”
“선아 씨 어머니께서 위독하셔서요.”
“아……. 사돈어른께서…….”
벌써 호칭이 사돈어른으로 바뀌었다. 우진은 초조한 듯 꼴깍 소리를 내며 홍차를 삼킨 선아를 힐끗 보았다. 곁눈으로 봐도 예쁜 선아의 둥근 어깨를 내려다보며, 그는 그곳에 제 입술이 닿으면 얼마나 좋을지 따위를 생각했다.
“제가, 우진 씨보다 많이, 굉장히 많이 부족해요.”
그녀는 잔을 놓고 초조한 듯 자신의 치마 밑자락을 손가락으로 매만지며 운을 뗐다. 우진의 시선은 그녀의 분주히 움직이는 손가락에 박혔다. 가느다란 저 하얀 손가락으로 야무지게 물건을 나르던 선아를 그는 알고 있었다.
홀로 제 동생들 몰래 울 때, 그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눈물을 훔치던 모습을 우진은 알고 있었다. 길거리를 돌아다니던 고양이를 지나치지 못하고, 점심값을 털어서 통조림 캔을 따던 손가락이었다. 은근히 길을 재촉하며 그녀의 손을 맞잡았을 때, 제 손가락 사이사이에 끼워 잡아 보았던, 선이 가는 손가락을 우진은 오랫동안 보았다.
그 감촉과 그 온기가 얼마나 단지도 우진은 안다.
“그래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 손가락 중 약지에 결혼반지가 끼워질 것이다. 그와의 증표가 그녀의 손가락 하나에 단단히 자리 잡을 것이다. 나중에는 너무 익숙해서 문신처럼 제 몸의 일부분으로 착각할 정도로 그녀의 손에 당당히 자리할 것이다. 우진은 그 결혼반지를 보며 항상 그녀의 옆자리는 자신의 자리임을 확신하고 확인할 것이다.
“선아 씨는 우리 우진이 사랑하나요?”
그녀는 살짝 그를 보았다. 그리고 정면에 있는 어머니를 응시했다. 항상 올곧았다. 항상 그녀의 시선은 발랐다. 아무리 제 환경이 구질구질하더라도 선아는 항상 정면을 똑바로 응시했다. 무너질지언정 구걸하지는 않았다. 한우진은 그것에 본능적으로 끌렸다.
아니다! 한우진은 만약에 채선아가 그렇지 않더라도 그것에도 끌렸을 거다. 어디 나사가 하나 빠진 미친놈처럼.
“……네. 사랑해요.”
뻔히 그녀의 거짓말인 줄 알면서, 이 순간만큼은 진실이라고 생각할 만큼 선아의 목소리는 꽤 단단했다. 우진의 손가락이 홀린 듯 그녀의 손가락 사이로 흘러 들어갔다.
선아는 순간 놀랐지만, 그를 바라보며 유순히 눈을 접어 웃었다. 그녀가 손을 돌려 그의 손을 꽉 맞잡는다. 마치 제가 한 말에 거짓은 한 톨도 없다는 듯. 우진마저도 착각하도록.
“그래. 결혼식은 다음 달에 날 좋은 날 치르도록 해요. 준비는 이쪽에서 다 알아서 할 테니. 우리 선아 씨는 신경 쓸 필요 없어요.”
선아는 긴장감이 다 풀린 듯 조금 숨을 놓으며 입술을 끌어당겨 웃었다. 눈이 곱게 접힌다. 우진은 그녀가 웃을 때 동그랗게 광대뼈가 올라가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때마다 우진은 그녀의 볼에 제 입술을 파묻고 싶었다. 통통하게 솟아오른 볼에 제 잇자국을 꽉 내고 싶었다.
“우진 씨.”
그녀가 자신을 불렀다. 우진은 조금 난감한 기색으로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는 선아의 표정에 정신을 차리고 자신의 어머니를 보았다.
“우진아. 나는 이만 가 보마.”
그녀는 두어 번 했던 말을 반복하며 강조하듯 말했다. 그리고 핸드백을 챙기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우진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선아도 같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허리를 굽혀 배웅했다. 여전히 그의 손을 꼭 붙들고 있었다. 그 모습에 조금 심장이 간질거린다.
“집에서 뵐게요.”
그에게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신 원장은 선아에게 시선을 주었다.
“선아 씨.”
“네.”
“우리 애도 내 입으로 말하기는 그렇지만 흠이 많아요.”
“…….”
“그래도 잘 부탁해요.”
“네. 감사합니다. 원장님.”
“아……. 그래도 다음에 만날 때는 어머니라고 불러 주었으면 좋겠어요.”
선아는 예쁘게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얌전히 네, 어머니, 라고 말했다. 우진은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호텔 로비를 선아와 가로지르며, 우진이 머릿속으로 그녀를 자신의 어깨에 둘러메고 수많은 방 중 하나를 잡아 그녀를 가두고 싶은 충동과 얼마나 치열하게 싸웠는지 선아는 알 수 없었다.
그냥 선아는 평소와 달리 딱딱히 얼굴을 굳힌 그도 자신처럼 긴장했다는 사실에 자신의 손을 꽉 잡은 손등을 살짝 토닥여 주었다.
“의심하는 거 같지 않으셨어요. 잘됐죠?”
“네.”
“이제 우리 손 놔도 될 것 같아요.”
선아는 자신의 손가락에 살며시 힘을 뺀다. 그리고 우진이 그제야 깨달았다는 듯 슬그머니 손의 힘을 풀자, 얼른 자신의 손을 빼냈다. 우진은 새삼스럽게 허전한 자신의 손바닥을 조금 오래 내려다보았다.
손안에 마땅히 있어야 할 것이 갑자기 사라진 기분이었다.
***
결혼을 준비할 무렵 우진은 회사 일로 바빴다. 병원 인수 건과 함께 맞물린 일은 도무지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아서, 그 무렵 우진을 꽤 곤혹스럽게 했다. 선아는 웨딩 플래너와 함께 그 없이 결혼 준비를 했다.
이미 여러 차례 결혼을 반복한 그의 비서는 남자는 입을 다물고 한도가 없는 카드만 준비하면 된다는 지론을 친히 그에게 알려 주었고, 우진은 일리가 있는 그녀의 말에 선아를 도울 만한 사람과 함께 카드를 주었다.
우진은 메시지가 도착한 자신의 핸드폰을 켜 보았다. 어떤 게 더 낫냐고 묻는 메시지에 그는 거기에서 거기인 그릇들을 보며 무심하게 사진을 넘겨 보았다. 그의 시선이 잠깐 사진에 머무를 때는 어쩌다 선아의 손가락이 같이 찍혔을 때뿐이었다.
「아무거나 괜찮아요. 선아 씨가 마음에 드는 것으로 사요.」
우진은 항상 같은 글자를 전송했다. 그게 한우진으로서는 최선이었다. 그깟 가전제품 따위야 그게 그거였고, 그깟 가구 따위 또한 그게 그것이었다. 사소한 것들은 한우진의 눈에는 다 비슷비슷했다. 숟가락 하나하나까지 뭘 골라야 하는지 우진에게 의견을 묻던 선아의 연락은 뜸해졌다.
그가 회의 때문에 수 시간이 지나서야 문자를 확인하는 전적이 늘어 가자, 아예 이제 선아는 그에게 따로 연락도 하지 않았다.
서류를 넘겨 보던 우진의 시선이 내내 조용한 제 개인 핸드폰으로 향했다. 다과를 준비해 온 그의 비서가 문을 두들기고 그의 책상 곁으로 다가왔다. 결혼을 세 번이나 한 그녀는 아주 유능했고, 한우진을 상사로서 깍듯이 모시고 있지만, 다른 비서와 상사처럼 필요 이상으로 서로의 사생활에 끼어들지 않았다. 우진이 그것을 허용할 리도 없지만.
하지만 요새 둘 사이에 공통된 화제가 있었다. 바로 그의 결혼이었다.
“결혼식 준비는 잘되어 가시나요?”
우진의 시선이 한 비서에게 잠깐 향했다가 다시금 제 서류를 의미 없이 훑어보았다. 네. 우진의 짤막한 대답에 한 비서는 특유의 그 미소를 더욱 짙게 지었다.
“이제 신부가 예복 입은 모습도 보시겠네요. 바쁘셔도 그건 꼭 보러 가셔야 해요. 은근히 그게 서운해요.”
“예복이요?”
“예. 웨딩드레스요. 그것 때문에 결혼하는 건데……. 신랑이 먼저 봐야죠. 뭐, 어차피 신부 취향대로 고르기는 하지만, 그래도 옆에서 박수 정도 쳐 주는 관객은 있어야죠.”
서류에 못 박혀 있던 한우진의 시선이 요 며칠 아무런 연락이 없는 핸드폰으로 향했다.
우진은 신호음만 가는 핸드폰을 잡고 있었다. 피곤한 탓인지 머리가 지끈거려 등받이에 고개를 젖힌 채로 눈이 시리도록 하얀 사무실의 천장만 보고 있었다. 신호음이 꽤 길다고 느꼈다. 하지만 그런 기다림마저도 그녀의 목소리를 듣자 금세 아무렇지도 않아졌다.
[여보세요?]
실내인지 목소리가 조금 울린다.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에 우진은 몸이 뻐근하게 저리는 것 같았다. 일에 이리저리 치이고 나면 항상 새벽녘이었다. 얼굴은커녕 통화할 시간도 제대로 나지 않았다. 일단 선아는 먼저 제집에 데려다 놓았는데, 제대로 집에도 들어가지 못하는 형편이었다. 불쑥불쑥 치미는 충동에 차라리 잘됐다 싶다가도 이렇듯 너무나 보고 싶었다. 채선아가.
“어디예요?”
우진은 뻑뻑한 눈을 잠시 감으며 물었다.
[아……. 지금 드레스 고르러 왔어요.]
“무슨 드레스요?”
설마 설마 하면서 묻는 말에 선아는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웨딩드레스요.]
“…….”
눈꺼풀을 느릿하게 들어 올린 우진은 잠깐 침묵을 했다. 둘 사이에 맴도는 묘한 정적을 깬 것은 선아였다.
[요새 더 바쁘신 것 같아서요. 일부러 따로 말하지 않았어요.]
“내 아내 웨딩드레스도 못 봐 줄 정도로 바쁘지는 않아요.”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에 가시가 조금 박혀 있었다. 우진은 도로 눈을 감았다. 지끈거리던 머리가 욱신거린다. 당장이라도 이 사무실 밖으로 나가고 싶었다. 선아의 말간 얼굴을 보면 이런 기분이 조금 가실까.
하지만 그의 머릿속에 떠다니는 것은 선아의 얼굴이 아닌, 곧 만나게 될 이사진들의 늙은 고목처럼 무뚝뚝한 얼굴들이었다. 더불어 이따가 잡힌 중요한 미팅 일정을 다시금 당부하던 한 비서의 높은 목소리가 울리는 것 같았다.
그 사이로 청아한 선아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괜찮아요. 걱정하실 필요 없어요. 남들 보기에 창피하지 않을 만한 것으로 고를게요. 매니저님도 옆에서 많이 조언해 주세요.]
선아의 목소리는 물이 흐르듯 나직하고 조용했다. 맑은 음색 탓에 더 그렇게 들렸다. 그래서 항상 괜찮다는 저 말이 정말 괜찮아서인지, 아니면 습관적으로 하는 말인지 헷갈릴 때가 많았다. 선아는 미동이 없는 잔잔한 물 같았다. 전혀 동요가 없다. 그 탓에 매번 울렁대는 것은 한우진 저뿐이었다.
그는 조금 화가 났다. 그리고 그것을 덮어 버릴 만큼의 섭섭함이 물밀 듯 그의 감정을 요동치게 했다. 우진은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피곤했다. 머리가 아프도록 지끈거렸다. 그리고 유치하게 그녀가 웨딩드레스를 입은 모습을 보지 못했다고 이러한 감정이 드는 스스로가 정말 이해가 가지 않았다. 스스로가 한없이 낯설었다.
선아가 주는 것들은 온통 한우진에게 낯선 것들이었다. 선아는 그에게 자꾸만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이름 붙일 수 있는 감정이든 아니면 이름을 붙일 수도 없는 감정이든, 뭐든 불러일으켰다.
무채색인 한우진의 세계에 유일한 색채인 채선아는 온통 마구잡이로 그의 세계를 제 맘껏 물들이고 있었다. 그래서 한우진은 어지러웠다. 가끔 이렇게.
똑똑. 사무실의 문을 두들기는 소리에 우진은 뒤로 젖혔던 고개를 들어 올렸다.
“나 회의 들어가 봐야 해요. 이따가 연락 다시 할게요.”
[네……. 수고하세요.]
하물며 미련 없이 자신과의 통화를 끊으려는 그녀가 야속하기까지 했다.
“선아 씨.”
[네?]
순간 치솟는 말을 우진은 억지로 꾹 내리눌렀다. 해도 될 말인지 그는 잠시 고민했다.
[우진 씨?]
“아니에요. 이따가 다시 연락할게요.”
그녀의 부름에 결국 한우진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
결혼식은 눈을 깜빡이자 순식간에 끝나 있었다. 우진은 한 비서가 전송해 준 사진을 쳐다보며 실소를 내뱉었다. 선아의 옆에 서 있는 자신이 저토록 얼이 빠진 표정이었나 싶었다. 남들이 보기엔 별 차이가 없겠지만, 자신이 봤을 때는 한없이 얼이 빠진 표정이었다. 저렇게 내내 자신의 시선이 선아에게 박혀 있었나 싶었다.
그의 손가락이 액정을 가득 채운, 눈을 나붓이 내리깔고 주례를 듣고 있는 선아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예쁘다.”
그의 입에서는 감탄사가 신음처럼 흘러나왔다. 하얀 웨딩드레스를 입은 선아는 그의 예상보다 더 예뻤다. 평소와 달리 옅은 화장까지 한 선아의 손을 잡고 식장으로 입장을 할 때부터 한우진은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다.
바보처럼 서로 반지를 교환할 때에도 그답지 않게 그녀의 손가락에 제대로 끼우지 못해서 버벅거렸을 정도였다. 사회를 맡은 제 막냇동생이 그런 그를 보며 마이크에 대고 새신랑이 긴장했다며, 대놓고 놀렸을 정도였다.
화면의 액정이 스스로 꺼질 때까지 쳐다보고 있던 우진은 내던지듯 핸드폰을 소파 위에 놓았다. 그리고 깊숙이 몸을 묻었다. 피곤했다. 결혼식 때문만은 아니었다.
고개를 젖힌 채로 눈을 내리감고 있던 우진은 문이 열리는 소리에 그 상태에서 고개만 살짝 비낀 채로 눈을 천천히 떴다. 슬리퍼를 신지 않은 맨발과 물기에 젖어 있는 발목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순서대로 선물 포장지처럼 캐릭터가 곳곳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잠옷이 눈에 들어왔다. 벙벙한 파자마 속에 숨겨진 여린 몸 선도. 우진은 게걸스럽게 눈으로 선아를 훑어 올렸다. 말간 선아의 얼굴이 드디어 시야에 들어오자, 한우진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피곤할 텐데 먼저 자요.”
딱딱하게 굳은 얼굴만큼 목소리도 덩달아 딱딱하게 나왔다. 한우진은 거실에 선아만 덩그러니 남겨 둔 채로 도망치듯 차 열쇠만 챙겨 들고 걸음을 성큼성큼 옮겼다. 종종걸음으로 현관까지 따라온 선아를 쳐다보지도 않고 짓씹듯 말을 내뱉었다.
“나는 일이 있어서. 마무리하고 올게요.”
“아……. 네.”
구두를 신으면서도 내심 그녀가 붙잡아 주었으면 했다. 그럼 그도 못 이기는 척 그녀의 입술에 제 입술 정도는 부딪쳤을지도 모른다. 아까 식장에서처럼 입술을 비켜 입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서로의 숨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서로의 입술을 맞출 수도 있었다. 정말 못 이겨서 저 포장지 같은 잠옷을 벗기고, 손끝으로 그녀의 부드러운 몸을 이루고 있는 선들을 덧그리듯 하나하나를 매만졌을지도 모른다. 명색이 첫날밤이지 않은가.
채선아가 한우진을 유혹하는 데에는 많은 힘도 필요 없었다. 그냥 제 소매만 두 손가락으로 약하게 붙들었어도, 그는 그녀의 몸 위로 허무하게 스러지고 말 것이었다.
채선아에게 한우진은 그런 존재였다. 그녀가 손끝으로만 까닥이며 불러도, 있지도 않은 꼬리를 정신없이 흔들어 대며 개처럼 혀를 빼물고 선아에게 냉큼 달려들 그런 존재 말이다.
하지만 채선아는 매우 담백한 태도로 그를 배웅했다. 이제 막 씻고 나와서 기분 좋은 냄새를 풍기면서. 한입에 통째로 삼켜져도 상관없을 것 같은 냄새를 풍겨 대면서.
“다녀오세요.”
한순간 쌓아 두었던 긴장감이 단번에 풀린다는 듯 저렇게 무구하게 웃으면서. 우진은 턱을 꽉 악물었다. 그리고 한 손으로 자신의 마른 뺨을 쓸어내렸다.
그날 신혼의 첫날밤부터 보기 좋게 소박은 맞은 것은 한우진이었다, 분명히. 그러면서도 그녀가 건네는 저 간단한 인사말이 그의 심장을 적당히 기분 좋은 박자로 뛰게 했다.
“네. 다녀올게요.”
정말 중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