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우진은 자신도 모르게 옆머리를 다듬고 있는 자신의 손에 헛웃음을 내뱉었다. 그런데도 그의 손은 제 코트의 윗부분을 털어 내거나, 깃을 가볍게 잡아당기는 식으로 모양새를 가다듬고 있었다.
띵! 맑은 종소리를 내며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환자복을 입은 사람들이 간혹 지나갔다. 우진은 걸음을 옮겼다. 복도에 울리는 제 구둣발 소리가 이렇게 요란스러웠나 싶었다.
그는 잠시 멈추었다. 초조한 듯 손톱을 물어뜯던 여자는 그를 보자 자리에서 일어섰다. 우진은 제 걸음이 평소 걸음보다 빠르지 않도록 의식하면서 걸어갔다. 그는 제 주먹을 꽉 틀어쥐었다. 제 손이 언제 멋대로 나가, 채선우의 장례식장에서처럼 그녀를 제멋대로 매만질지 몰라서였다. 눈으로만 봐야 한다, 눈으로만. 그는 속으로 수천 번은 외던 그 말을 다시금 곱씹었다.
“죄송해요. 바쁘실 텐데…….”
“아니에요. 어머니는 지금 어떠세요?”
“일단 고비는 넘겼다고 했어요. 수술 중이에요.”
손톱 옆에 붙어 있던 거스러미를 억지로 떼어 냈는지, 벌겋게 속살이 드러난 손가락을 본 우진의 한쪽 눈썹이 못마땅하게 들썩였다. 하지만 찰나의 순간이라, 그 자신도 미처 깨닫지 못했다.
“선아 씨는…….”
우진은 잠깐 제 목소리가 잠긴 것 같다고 느꼈다. 그는 제 목을 가볍게 손바닥으로 쓸어내렸다. 내내 고개를 숙이고 있던 선아가 얼굴을 들어 올리며 그를 바라본다. 우진은 그런 그녀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선아 씨는 괜찮아요?”
“아…….”
선아는 잠시 말을 고르듯 숨을 깊게 들이켰다. 입매를 부드럽게 끌어 올린다.
“저는 괜찮아요.”
우진의 시선이 그녀의 손으로 향했다. 그녀는 손톱으로 제 손등을 꽉 누르고 있었다. 움푹 들어간 것이 우진의 눈에도 보일 정도였다. 필시 벌겋게 손톱자국이 남을 것이었다. 우진의 시선이 다시 올라가, 그녀의 얼굴로 향했다.
“밥은 먹었어요?”
“네?”
우진이 손목을 들어 올렸다. 손가락으로 소매를 들춰 제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자신의 시계 유리판을 톡톡 두들겼다. 의미 없는 손짓이었다.
마침 이른 저녁을 먹기에 딱 좋은 시간이었다. 어느 시간이 지금의 그에게 안 좋을 시간이겠느냐마는. 아무튼 함께 저녁을 먹기에 이상한 시간은 아니었다.
우진의 손이 그녀의 손을 감싸 쥐었다. 하얀 손등 위에 벌겋게 손톱자국이 난 손이 그의 손안에 가볍게 잡혔다. 우진은 한숨이 나오려는 것을 참았다.
순간 그는 숨을 어떻게 쉬어야 하는지 잊었다. 다행히도 숨이 막히기 전에 그의 입에서는 말이 먼저 나왔다.
“가요. 우리 밥 먼저 먹어요.”
우진은 제 손에서 그녀의 손이 빠져나갈까 꼭 쥐었다. 힘껏 쥐지는 않았지만, 그녀가 힘을 써서 손을 놓기에는 모호하게 생각할 정도로. 가벼운 듯하면서도, 절대 놓을 것 같지 않게. 한우진은 채선아의 손을 꼭 맞잡았다. 목에 있는 맥박이 너무 뛰는 듯해서 그는 제 목둘레를 선아의 손을 잡지 않은 다른 손으로 매만졌다.
***
그날부터 우진은 뻔질나게 병원을 들락거렸다. 선아의 모친은 그를 반겼지만, 그의 손에 들려 오는 병문안 선물을 더욱 반겼다. 채선우가 누구를 닮았는지, 안 봐도 뻔했다.
차라리 그녀도 제 집안의 사람들처럼 속물적인 사람이었다면 꾀어내기가 더 쉬웠을까. 우진은 간혹 그런 생각을 했다. 차라리 제 재력에 그녀가 눈이 뒤집혀 달려들었으면 좋겠다고. 그럼 기꺼이 그가 팔 벌리고 기다릴 텐데.
“이제 안 오셔도 돼요.”
선아의 손에 이끌려 병실 밖으로 나간 우진은 그녀가 망설이다가 내뱉은 말에 고개를 기울였다. 우진이 아까 그녀가 먼저 잡고 있던 제 손안의 감촉을 되새기기도 전이었다. 그냥 인사치레로 하는 말이 아니었다. 선아는 맞잡은 손을 한참을 꼬물대더니, 그를 응시했다.
“고맙지만 이제 부담스러워요. 엄마도 안정기에 접어들었고, 이제는 안 오셔도 돼요.”
“…….”
“매일 밥 사 주시는 것도 그렇고……. 버릇되겠어요. 저번에 병원비 결제해 주신 건 제가 꼭 갚을게요. 말일에 아르바이트비를 받거든요. 입금되자마자 송금해 드릴게요.”
선아는 어쩐지 무겁게 가라앉은 분위기를 풀어 보려, 입매를 살짝 올리며 웃었다. 우진은 아직도 굳어 있는 상태였다. 이 완곡한 거부에. 우진은 깊게 숨을 들이켰다가 내뱉었다. 그의 숨소리에 선아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한숨처럼 우진은 말을 끄집어냈다.
“버릇되라고 하는 거 맞아요.”
하얀 눈꺼풀에 달린 속눈썹이 깜빡인다. 우진은 이 순간에 왜 그녀의 속눈썹 따위가 눈에 들어오는지 몰랐다. 우진은 그녀의 무엇인가가 되고 싶었다. 이 순간 그녀의 속눈썹 따위는 아무렇지 않게 만질 수 있는 그런 사이. 그녀도 그런 우진의 손길을 피하지 않고, 얌전히 제 속눈썹을 맡기는 그런 사이가 되고 싶었다.
“겨우 이런 것 해 주는 거에 큰 의미 갖지 않아도 돼요.”
“우진 씨는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나에게는 겨우 그런 일이 아니에요.”
“…….”
선아의 속눈썹이 빠르게 깜빡였다. 우진은 그 속도에 속이 어지러웠다.
“우진 씨가 해 주는 의미 없는 동정심이 나에게는…….”
“…….”
“겨우가 아니에요.”
한 자 한 자 애를 쓰듯 힘을 주어 말한다. 지금의 선아는 톡 건들면 쓰러질 듯 위태로워 보인다. 우진은 손가락 끝으로 자신의 입매를 가볍게 쓸어내렸다. 지금 제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확인을 했다. 혹여나 힘겨워하는 그녀의 앞에서 눈치 없이 제 입매가 미세하게 올라가지는 않았는지.
“그럼 선아 씨가 익숙해지도록 해요. 나에게 받는 것들이 아무렇지 않도록.”
“그게 무슨…….”
“나 배고파요.”
우진의 손이 선아의 소맷부리를 가볍게 잡았다.
“한우진 씨.”
선아는 뿌리치지도 못한 상태로 그의 이름을 제법 낮게 불렀다. 평소와 달리 낮은 목소리가 우진의 다른 감각을 툭 찔렀다. 오늘 밤에는 다른 모습의 선아가 그의 꿈속에 등장할 것 같았다.
“우리 밥 먹으러 가요, 선아 씨.”
“…….”
“정말로 나 배고파요.”
우진은 선아의 어떤 부분이 약한지 잘 알고 있었다. 그 긴 시간을 허투루 허비한 것이 아니었다.
우진이 즐겨 찾는 한정식집이었다. 강이 내려다보이는 고층에 자리한 그곳은 목재로 내부를 마감해 고즈넉한 분위기를 풍겼다. 이런 평가에 박한 우진조차 고개를 끄덕일 만큼 괜찮은 곳이었다. 물론 음식도 제값을 톡톡히 했다.
몇 번이나 왔음에도 선아는 직원의 극진한 안내를 어색해했다. 그러다 둘만 방에 남게 되면,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살짝 굳어 있던 표정을 풀었다. 그 순간이 우진은 좋았다.
좋고 비싼 것을 먹이고 싶은 마음도 크지만, 그런 이유로 일부러 이런 곳만 예약하여 데려온다는 것을 그녀가 알면 저에게 화를 낼까. 선아는 화낼 때도 팔랑거리며 속눈썹을 깜빡일 것 같았다. 그것을 상상하자, 우진의 입매가 미미하게 올라갔다.
전채 요리로 나온 죽을 먹고 나자, 정갈한 한정식이 차려졌다. 선아는 모든 음식을 가리지 않고 잘 먹었다. 괜히 보고 있는 우진이 뿌듯해질 정도로 딱히 못 먹는 음식이 없는 것 같았다.
“선아 씨는 생선은 안 먹어요?”
“아……. 안 먹는 게 버릇이 돼서…….”
안 먹는 게 버릇이 된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우진은 잠시 고민을 했다. 하지만 이미 그의 젓가락은 굴비의 살을 발라 내고 있었다.
“어쨌든 먹을 수는 있다는 말이죠?”
선아가 고개를 주억이는 동시에 그의 젓가락이 선아의 밥그릇 위로 발라 둔 생선 살을 올려 두었다. 그는 그때부터 족족 그녀의 수저 위에 생선 살을 올려다 주었다. 선아는 그때마다 멈칫하다가 이내 숟가락을 제 입에 넣었다. 입을 앙다물고 오물오물 씹는 모양새가 예뻤다.
“우진 씨는 안 먹어요?”
“먹고 있어요. 이거 더 시킬까요?”
선아는 눈을 깜빡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뒤로 항상 선아와 함께 먹는 식탁에서는 굴비가 빠지지 않고 나왔다. 물론 생선 살을 바르는 것은 그의 일이고 말이다.
***
우진은 그날도 퇴근하고, 어김없이 선아 모친의 병실로 향했다. 그녀의 옆에는 그녀의 가슴께 정도 오는 어린애가 있었다. 그건 별 신경 쓸 일이 아니었다. 한 번도 우진이 직접 대면한 적은 없는, 그녀의 나이 차이 크게 나는 남동생일 거다. 문제는 그녀의 앞에 서 있는 남자였다.
하얀 가운을 입은 남자는 선아에게 캔 커피를 내밀었다. 선아가 몇 번 거절하자, 이제는 아예 그녀의 손을 잡아당겨 손에 억지로 쥐여 주었다. 남자의 손에 손목이 함부로 잡힌 선아는 당황스러워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하는 것으로 이 곤란한 상황을 마무리 지으려는 것 같았다.
거기에서 선아의 바람대로 조용히 끝났으면, 한우진의 유치한 질투심 따위는 자극하는 일이 없었을까. 그건 그도 장담을 못 할 일이었다. 선아의 손목이 억지로 붙잡힐 때부터 그의 속은 엉망으로 일그러졌다.
흰 가운을 입고 있는 남의사는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제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우진의 고개가 한쪽으로 비스듬히 기울었다. 저게 지금 뭔 지랄을 하고 있는지, 제대로 제 두 눈으로 확인하듯.
“우진 씨!”
우물쭈물 곤란해하던 선아는 때마침 고개를 틀다가, 그를 발견했다. 우진의 걸음이 그때야 움직였다. 화기로 딱딱하게 굳어 있던 몸이 그녀의 부름을 인식하기도 전에 절로 움직였다. 저녁 시간대의, 병실이 늘어선 병원의 복도는 너무 삭막했다. 그의 구둣발 소리가 천둥소리같이 울릴 정도로.
“선아 씨. 누구예요?”
우진은 목소리가 사납게 나가지 않도록 잔뜩 가다듬고 낮게 물었다. 선아는 그 미묘한 차이를 못 느꼈지만, 동성인 의사는 충분히 느꼈는지 주머니에서 꺼내던 핸드폰을 슬그머니 다시 집어넣었다.
“엄마 담당의 선생님이세요.”
“아…….”
우진은 짤막하게 감탄사를 터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의사라는 제 직업이 자랑스러운 모양인지, 우진의 외적인 모습에 조금 기가 죽은 듯했던 사내의 얼굴이 금세 펴진다. 우진은 그 모습이 같잖았다. 하지만 그의 얼굴은 조금의 움직임 없이 그대로였다.
“잘 부탁드립니다.”
우진은 손을 뻗어 악수를 청했다. 우진의 행동은 지극히 사무적이고, 평소처럼 흠 잡을 데 없이 예의 발랐다. 얼결에 제 손을 그 의사가 맞잡는다. 우진은 골방에 틀어박혀 공부만 했을 게 뻔한 남자치고는 선이 가는 손을 힘주어 잡았다. 의사의 낯빛이 미묘하게 구겨진다. 하지만 꼴에 자존심은 있는지 맞잡은 손에 제 나름대로 힘을 주고 있었다.
우진의 한쪽 입꼬리가 조금 올라갔다. 노골적인 비웃음이었다. 자신의 뒤편에 서 있는 선아는 보지 못했고, 그의 맞은편에 있는 의사의 얼굴은 조금 벌게졌다. 결국에 의사가 먼저 손의 힘을 푸는 것으로 그 미묘한 악수는 끝이 났다. 우진은 헛웃음이 나오려 했다.
이 같잖은 기 싸움의 승리에 잠시 취한 자신의 모습도 꼴사납기는 마찬가지였다.
“보호자이신가요?”
이 물음의 의도도 뻔했다. 선아가 입술을 떼기도 전에 우진이 먼저 대답했다.
“네. 채선아 씨 보호자입니다.”
“…….”
우진은 재킷의 안쪽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어, 자신의 명함을 꺼내어 의사에게 건넸다. 의사는 대수롭지 않게 본 그의 이름에 적힌, 정확히는 그의 이름 앞에 적힌 회사의 명과 직함에 더욱 오래 시선을 두었다. 그리고 그를 한번 힐끗 쳐다보았다. 대놓고 티는 내지 않지만, 그의 얼굴에 떠오르는 것은 당혹감이었다.
“그러니 어머니 병세에 무슨 일이 있을 때는 선아 씨 말고, 저를 통해서 말을 전달하시는 편이 더 나으실 겁니다.”
우진은 여유롭게 입꼬리를 말며 덧붙였다. 한우진이 지금 이 남자에게서 느끼고 있는 것은 명백한 우월감이었다. 그는 여태껏 그런 감각을 느껴 본 적이 없었다. 그는 태어났을 때부터 남들과 달랐다. 한신가의 뒷배는 단단했지만, 그것이 아니더라도 한우진 그 자체로도 충분히 남들의 부러움을 살 만한 요건을 다 갖추었었다.
남들의 부러움에 우월감을 느낀다는 것은 상대를 명백하게 인식한다는 것을 뜻했다. 동물이 사람을 부러워한다고 해서, 사람이 자신을 부러워하는 동물에게 우월감을 느끼지 않듯이.
우진은 남들에게 우월감을 느낄 만큼 상대를 제대로 인식한 적이 없었다. 그런 그가 지금 이 순간에 제 직함과 회사 따위에 우월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여태까지 별 신경을 쓰고 살지 않던 제 외적인 조건에서조차 그는 상대보다 상당히, 꽤, 월등히 뛰어나다는 우월감에 젖어 있었다.
이 우월감은 선아에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그녀가 저를 두고, 이런 초라한 남자를 선택할 리 없다는 근거가 있는 충만한 자만심.
하지만 아무리 선아가 거들떠볼 것 같지 않은 남자라도 그녀의 주변에서 얼쩡거리는 꼴은 정말 치가 떨리게 싫었다.
“아시다시피 병간호가 무척 사람을 지치게 하는 일이니까요. 선아 씨가 다른 일에 신경을 쓸 여유가 없을 겁니다.”
이건 경고였다. 상대방도 충분히 알아먹은 것 같았다. 우진은 어정쩡하게 인사를 하고 가는 의사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선아 쪽으로 몸을 틀었다.
이건 그조차 낯선 경험이었다. 우진은 고개를 살짝 기울여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선아를 바라보았다. 하얀 손에 들린 파란색이 눈에 거슬린다. 우진은 그녀의 손에 들린 커피 캔을 집어, 근처에 있는 쓰레기통으로 밀어 넣었다. 텅─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둔탁했다.
영문을 모르는 단정한 이목구비가 눈에 들어오자, 우진은 살짝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스스로가 어이가 없는 것인지, 아니면 기분이 나쁜 것인지. 그조차 제 기분을 알 수 없었다.
“우진 씨, 식사는 했어요?”
“아니요.”
“그럼…… 우리 밥 먹으러 갈까요?”
선아의 간단한 제안에 우진은 옅게 웃었다. 이건 확실히 기분이 좋은 게 맞았다.
***
한우진은 기본적으로 예의가 있었다. 인간적이라고 할 수는 없어도, 그래도 사람으로서 기본적으로 갖춰야 할 소양거리 정도로 인식하고 무례하지 않게 타인을 대하는 편이었다. 정지아가 제아무리 그더러 성격이 더럽다고 평해도, 그는 그런 정지아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았다.
남들이 그를 어려워하는 것과 성격이 더럽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는 착하지는 못해도 못돼 먹지는 않았다.
“씨발. 내가 얼마나 공들였는데, 그 씨발년이 벌써 다른 새끼한테 다리를 벌리고 있었는 줄 누가 알았겠어. 무슨 전무라는데, 사칭을 했는지 뭘 했는지 내가 알 바야? 얼굴만 반지르르한 새끼가. 그런 대단한 새끼가 지 뭘 보고 꼬시고 있는지도 모르는 그 년도 골이 빈 거지. 제법 반반하게 생기고, 빨통도 존나게 커서 한번 따먹어 볼까 했는데. 죽 쒀서 개 주게 생겼어.”
그는 잠깐 뒷머리를 벽에 가볍게 댔다. 치솟아 오르는 불쾌감을 잠깐 내리눌렀다. 열이 올라 뻐근해진 목덜미를 잠깐 풀어내듯 그의 고개가 왼쪽으로 살짝 비틀어진다.
우진은 서서히 자신의 쪽으로 다가오는 인기척에 뒷머리를 벽에서 떼어 냈다. 그리고 몇 초 뒤 자신에게 다가오는 인기척에 맞춰 몸을 틀었다.
그의 예상대로 서로 부딪쳤다. 미동 없이 태연한 그와는 달리 그의 몸통에 부딪힌 상대방은 이미 몇 발자국 주춤 뒤로 밀려 나갔다.
그 반동에 그의 코트에 설탕이 많이 들어간 자판기 커피가 쏟아진다. 훅 끼치는 단내가 역할 정도였다. 상대방은 손에 들고 있던 커피를 쏟는 바람에 다른 손에 들린 핸드폰을 놓친다.
“어…….”
어벙하게 손에 커피를 쏟은 채로 저를 올려다보는, 가운을 입은 사내를 우진은 내려다보았다. 고압적으로 상대를 짓누르듯 내려다보는 시선에 안 그래도 좁은 어깨가 더욱 좁아진다. 우진의 입매가 살짝 삐뚜름하게 올라갔다. 필요 이상으로 큰 자신의 키가 이럴 때 도움이 될 줄이야.
통화 중이던 핸드폰은 홀로 스피커를 통해 미미한 소음을 만들어 냈다.
“죄송합니다.”
우진은 저에게 어색한 사과를 건넴과 동시에 허리를 굽혀 핸드폰을 주우려고 하는 사내의 손과 핸드폰을 함께 밟았다. 그의 구둣발에 물컹 닿는 살의 느낌이 더러웠다.
“아악!”
터져 나오는 비명 소리에 우진이 남자의 손등 위를 더욱 뭉개 버릴 듯 뒤꿈치로 비볐다. 악악대는 소리가 건물을 가득 울리며 메아리친다. 상체가 허물어지듯 무릎을 꿇은 상태에서 남자가 우진의 다른 다리 쪽의 바짓단을 부여잡는다. 벌레가 살려고 꿈틀대는 것을 보듯 그의 표정은 무감했다.
발악이 거세질수록 그는 무게를 실어 더욱 짓밟았다. 상대방도 그것을 이제야 깨달았는지, 악악대며 소리를 질러 대던 거에서 흐느끼는 것으로 태도를 바꾼다.
“엄살 떨지 마. 누가 보면 내가 뼈라도 부러트린 줄 알겠어.”
그는 차분히 뇌까렸다. 그리고 천천히 무게를 싣고 있던 발을 떼어 냈다. 그러자 재빨리 제 손을 치우는 남자의 행동에 그는 코트에 묻은 커피를 손으로 털어 내며 비웃었다. 멀쩡한 핸드폰 액정을 우진이 다시금 발로 찍어 눌렀다. 유리 액정이 사방으로 갈라진다. 전화는 이미 끊긴 지 오래였다. 우진의 시선이 바닥에서 천천히 기어 올라갔다.
흠칫 놀란 상대방의 가슴팍에 달린 명찰이 눈에 들어와 그는 그것을 자세히 보기 위해 허리를 잠시 굽혔다. 그는 검지 손톱으로 똑, 소리가 나게 플라스틱 명찰을 한번 튕겼다. 달랑대는 이름 석 자가 그의 두 눈에 선명히 들어왔다.
“김명훈?”
남자는 다친 손을 부여잡고 흐느꼈다. 우진은 그 모양새에 한쪽 눈을 찌푸렸다. 제 눈에 담기에 과히 좋은 꼴이 아니었다. 그가 굽혔던 상체를 완전히 일으키자, 남자는 흠칫 놀라 그를 멀거니 올려다보았다. 우진은 구두의 옆면으로 액정이 나간 핸드폰을 툭 가볍게 쳤다. 우진의 작은 행동에도 남자는 과하게 흠칫흠칫 놀랐다.
“근무하시는 병원은 다른 곳으로 알아보셔야겠습니다.”
“그게 무슨…….”
“아. 김명훈 선생님께서는 아직 모르시는 모양이군요. 저희 한신그룹에서 성희병원 인수 단계에 있습니다. 며칠만 있으면, 성희병원이 아니라 한신병원으로 이름을 바꾸겠죠.”
우진은 마저 정리하지 못한 제 옷을 다시금 정돈했다. 아까 남자의 손에 구겨진 제 바짓단이 눈에 들어오자 그는 미미하게 미간을 찌푸렸다. 오늘 입었던 옷은 모두 쓰레기통으로 처박힐 것이다.
“불미스러운 일로 기어 나가시기 전에 먼저 나가라, 제안을 드리고 있는 겁니다.”
“내가, 내가 잘못한 게 없는데! 왜 나갑니까!”
“김명훈 선생님. 아직 상황 파악이 안 되는 모양이신데, 내가 지금 아주 드물게 기분이 더러워요.”
“…….”
“이유야 얼마든지 내가 만들어 줄 수가 있습니다. 나는 가진 게 아주 많고…… 김명훈 선생님께서는 고작 그 의사 면허뿐이신 것 같은데…….”
“…….”
“그 잘난 직업이라도 부지하고 싶으시면 어떻게 해야 할 것 같습니까?”
우진은 입매를 유려하게 올렸다.
“이해가 된 것 같아 다행이군요.”
우진은 흐르는 물에 손을 씻었다. 코트에 스며든 싸구려 커피의 단내가 아직도 가시지 않는 것 같았다. 남자가 통화하던 목소리가 아직도 제 귀에서 재생되는 것 같았다. 우진은 아득 이를 물며, 더욱 강박적으로 손을 씻었다. 더러움이 가시지 않는다.
우진은 고개를 들었다. 화장실 거울 속에 선명히 비치는 제 모습을 뚫어져라 보았다. 정말 자신은 선아를 보면서 그 남자와 같은 생각을 하지 않았는지. 선아의 하얀 뺨. 선아의 입술. 선아의 동그란 얼굴. 힘을 주어 잡지 않으면 제 손에서 스르륵 빠져나갈 정도로 작은 손. 선아의…… 눈에 담고 담아도 부족한 선아의 그런 것들을 보면서 그딴 것과 아예 무관한 생각을 하지 않았는지.
“씨발. 좆같게.”
우진은 서늘히 읊조렸다. 그는 신경질적으로 물을 잠갔다. 얼마나 세게 씻어 댔는지, 그의 손등 위가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는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을 노려보았다. 거울 속의 자신은 그 더러운 새끼와 네가 다를 게 뭐냐며 금세 비아냥댈 것 같았다.
우진은 아직도 역한 커피 향이 올라오는 코트를 벗었다. 그리고 화장실 밖에 있는 쓰레기통에 코트를 버렸다. 그런데도 더러운 기분은 가시지 않았다.
그리고 그 기분과 더불어 한우진 제 눈에 닿지 않을 곳에서 선아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불안한 생각도 더불어 들었다. 연애는 불안정했다. 연인 사이는 조금의 균열만 가도, 헤어지는 것도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되는 것도 아주 손쉬웠다. 그것보다 단단한 것을 우진은 원했다. 합법적이고, 남들이 볼 때 꽤 정상적으로 보이는. 예속하고, 구속하는 것이 정당하게 보이는 관계.
그리고 답을 찾는 것은 아주 간단했다.
“선아 씨. 우리 결혼할래요?”
말은 아주 쉽게 나왔다. 며칠을 고민하고 생각했던 것보다 더 쉽게. 선아가 그에게 조금 희미하게 웃어 주었다는 것에 한우진의 이상한 용기를 북돋운 것일 수도 있었다. 아니면, 오늘따라 유난히 맞은편에 앉아 있는 선아가 예뻐서 그런 것일 수도.
메뉴판을 훑다가 동그래진 눈이 한우진의 시야에 가득 찼다.
“결혼이요?”
예상했던 말이 아닌 듯 선아는 조금 당혹스러워했다. 한우진은 효율성을 생각했다. 어차피 종착지가 결혼이고, 연애가 그 종착지를 가기 위한 여정이라면, 과감히 생략을 해도 좋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내가 선아 씨를 조금 더 도와줄 수 있어요.”
“이미 우진 씨가 많이 도와주고 있잖아요. 괜찮아요. 그리고…….”
생각을 하느라 앙다문 입술을 우진은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녀가 습관처럼 제 손등을 쥐어뜯고 있는 것을 내려다보며, 우진은 제 재킷 안쪽 주머니에서 벨벳 천으로 감싸진 반지케이스를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반지케이스 안에 있는 다이아반지는 선아의 약지에 꼭 맞을 것이었다.
“선우 빚, 어머니, 그리고 선하까지. 선아 씨가 다 감당 못 해요.”
“…….”
“나한테 기대요, 선아 씨.”
선아가 대답이 없자, 우진은 조금 초조해져 자신도 모르게 반지케이스의 표면을 검지로 훑고 있었다.
“그런데 왜 저랑…….”
“선아 씨가 적당해요. 다른 형제들보다 내가 결혼이 늦된 편이에요. 부모님은 결혼을 하라고 성화고. 그렇다고, 저도 아무나하고 결혼할 생각은 없어요.”
“……..”
“선아 씨는 착하니까, 그다지 나에게 별다른 간섭도 하지 않을 거고. 나도 마찬가지로 선아 씨에게 결혼을 빌미로 다른 것을 요구할 생각이 없어요. 난 내 결혼생활이 무난하기를 바라요. 어차피 해야 할 결혼이라면, 선아 씨랑 하고 싶어요. 그리고, 선아 씨도 이 결혼을 통해서 잃을 건 없을 거예요.”
그의 부모는 한우진 앞에서 결혼의 ‘기역’ 자도 꺼내지 않았다. 안 해도 될 거짓말까지 충동적으로 덧붙이 한우진은 제 변명이 구구절절하다고 느껴졌다. 구차하기까지 했다. 자괴감이 밀려왔다. 처음으로 자신이 멍청하게 느껴졌다. 좀 더 그럴듯하게 결혼을 선아에게 제안할 수도 있었다.
“아…… 착하고, 적당해서…….”
그에게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혼자 되뇌는 선아의 말을 그래서 듣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