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화 (11/15)

#11

한우진의 가정은 화목했다. 우진의 부친은 제 또래의 사내들이 할 법한 외도를 한 적도 없었고, 오히려 그 시대의 사내들에게 드문 다정한 성격 탓에 가정적인 남편, 존경할 만한 아버지였다.

그리고 우진의 모친은 교육을 잘 받은 지식인 특유의 다듬어진 현명함을 겸비한 여성이었다. 다감한 성격에 봉사 활동도 열심히 할 정도로 사회 공헌에도 관심이 많았다. 그렇다고 제 가정을 소홀히 하지 않는 인자한 어머니였다.

틀에 꽉 맞추어진 이상적인 가족 형태였다.

제 동생들도 그 핏줄을 고대로 물려받았는지, 크게 속 썩이는 일 없이 바르게 자라 주었다.

어느 한구석 비틀림 없이 햇볕을 잘 받아 큰 나무처럼 곧게 하늘 위로 뻗은 한신가의 사람 중에서 유일하게 한우진만 옆으로 몸통을 꼬아 자란 비틀어진 나무였다. 겉면으로 보이는 풍성한 나뭇잎과 겉까지로 제 비틀린 부분을 교묘히 가린 그런 나무.

우진이 어렸을 때였다. 우진은 자신이 그때 몇 살인지도 기억이 나지 않을 만큼 까마득하게 오래전 일이었다. 그런데도 그때 우진에겐 화병에 꽂혀 있는 꽃이 무엇이었는지, 당시 서재의 냄새까지 기억할 정도로 생생했다.

아버지의 서재는 언제나 열려 있었다. 어린 우진의 팔뚝만큼 두꺼운 책들이 꽂힌 책장이 놓인 다소 삭막한 그 공간에는 바라만 봐도 눈이 시릴 정도로 샛노란 작은 카나리아가 있었다.

아버지가 성심을 다해 키우는 그 노랗고 작은 새는 언제나 아버지를 보면 작은 울음소리를 내어 울었다. 맑은 울음소리가 예쁜 그 새는 아버지가 새장 문을 열면 아버지의 손가락 위를 타고 나와 더욱 소리를 높여 울었다. 턱을 간질이는 손길이 좋을 때는 작은 날개를 퍼덕거리기도 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이 만질라치면 부리로 쪼아 대거나, 아니면 아예 제 새장으로 도로 날아가 버렸다. 그래서 아버지는 그 새를 더욱 아꼈다. 재스민. 아버지는 어머니가 제일 좋아하는 꽃 이름을 그 새에게 붙여 주었다.

우진의 어린 마음에도 그 새는 너무 예뻤다. 그래서 그날도 새장에 매달려 그 새를 보고 있었던 때였다. 새는 고개를 갸웃 기울여 그를 보았다. 우진은 충동적으로 새장의 문을 열고 새를 꺼냈다. 몸통이 잡힌 새는 놀랐는지 짧게 울었다.

우진은 제 아버지가 했던 것처럼 새의 부리 밑 부분을 손끝으로 조심히 쓸었다. 몸통이 꽉 잡힌 새는 그런데도 울지 않았다. 새는 되레 우진의 손가락을 쪼았다. 우진은 그래도 턱 밑 부분을 쓸었다. 그런데도 새는 울지 않았다. 점점 우진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새는 더 울지 않았다. 울 수 없었다. 흥미가 떨어진 우진은 죽은 새를 손아귀에서 툭 놓았다. 그의 손바닥보다 더 작은 새는 떨어지는 소리조차 약했다. 그리고 그 광경을 고스란히 그의 어머니가 보았다.

신 원장은 애써 소리를 내지르지 않고, 나름 침착한 모습으로 우진에게 물었다.

“왜 그랬니?”

“예뻐서요.”

우진은 아직도 만졌을 때 보들보들하던 깃털의 촉감을 되살리게 하는 새를 내려다보다 시선을 올렸다. 우진은 그때 제 어머니가 살짝 걸음을 물리려 하던 것을 보았다. 신 원장은 그런 자신의 행동을 자각했는지 아랫입술을 꾹 물었다.

“우진아.”

“네, 어머니.”

“예쁠수록 아껴야 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예쁘면 만지고, 손안에 쥐고 싶은 것이 본능이었다. 적어도 우진은 그랬다. 가지고 싶으면 가지고, 싫증이 나면 버린다. 어린 우진에게 아낀다는 것은 어려운 말이었다.

“아껴요?”

“그래. 눈으로만 봐야 할 것들이 있어.”

“…….”

신 원장은 걸음을 옮겨, 새의 사체가 있는 바닥으로 무릎을 굽혔다. 우진은 어머니의 하얀 손위로 옮겨지는 새를 바라보았다. 힘없이 축 늘어진 사체는 흡사 잠이라도 든 것처럼 보였다. 어머니의 다른 손이 그 위를 살며시 덮었다.

“눈으로만 봐야지, 망가지지 않고 예쁜 그대로 있을 수 있는 것들이 있어.”

“만지고 싶어지면요?”

“그래도 네가 참아야 해.”

신 원장은 고개를 들어 무릎을 굽힌 상태에서 우진을 바로 보았다. 우진은 자신의 바로 지척에서 자신을 곧게 응시하는 어머니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조금도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어린애 특유의 치기가 아니었다. 그는 그렇게 태어났다. 며칠에 한 번꼴로 만나는 의사도 그랬다. 그는 그냥 이렇게 태어났을 뿐이라고. 우진의 탓은 아니라고.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이해를 못 할 것이니, 잘 관리해야 한다고.

“참아야 해, 우진아.”

“…….”

“아니면 재스민처럼 죽을 거야. 알았니?”

“…….”

“소중하면 소중할수록. 예쁘면 예쁠수록. 망가지지 않게 눈으로 보기만 해야 해.”

우진의 시선이 신 원장의 손에 들린 노란 카나리아로 향했다. 움직이지 않고, 노래를 부르지 않는 새는 더는 우진의 흥미를 끌지 못했다. 더 이상 예쁘게 보이지도 않았다.

“그럼 내 것이 되나요?”

“……그래. 네가 인내하고 참을수록. 언젠간 네 것이 될 거야.”

그 뒤로 한우진의 마음에 드는 것은 없었다. 모든 것에 무감했다. 좋다고 이름을 붙일 만한 것은 그의 인생에 없었다. 하다못해 그는 좋아하는 음식도 없었다. 거세당한 것처럼 기호라든가, 취향이라는 것이 전혀 없었다.

그것을 그의 부모는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불행이라고 해야 할지 모를 기분을 느꼈다. 우진은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자신이 이렇게 태어난 것은 그들의 잘못이 아니었다.

가끔 어머니는 기분이 울적해지면 그의 방에 들어와 그의 손을 잡고 훌쩍이며 울기는 했지만, 우진은 신경 쓰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신경을 쓸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한우진은 그들의 걱정과는 달리, 아주 심심하도록 무탈하게 크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를 만났다. 한우진의 인생에서 유일무이하게 특별히 그의 무엇이라 이름을 붙일 만한 존재를.

***

눈이 펑펑 내리던 날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우진의 중학교 졸업식이었던 날이었다. 우진은 자신 말고도 네 명의 형제가 더 있었다. 세 살 터울의 두 동생은 심지어 쌍둥이였다. 형제가 많은 집안이 그렇듯, 우진과 쌍둥이 형제의 졸업식이 겹쳤다.

그때 아버지는 하필 해외 출장 중이었고, 어쩔 줄 몰라 하는 어머니에게 우진은 당연하다는 듯 쌍둥이 졸업식에 가라고 말했다.

숫자로 비교해도 그쪽이 더 적합했고, 처음 졸업식을 맞이하는 어린 동생들의 추억을 뺏을 만큼 그는 못돼 먹지 않았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는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어머니가 제 졸업식에 오든 오지 않든. 어머니뿐 아니라 그 누군가가 오건 말건.

그날도 그의 수많은 똑같은 날 중의 하나일 뿐이었다.

그래도 어머니는 그런 그를 걱정했는지, 졸업식이 끝나기 전에 비서를 보내 꽃다발을 그의 품에 안겨 주었다. 하얀 재스민 꽃다발이 그의 품에 안겨졌다. 우진은 자신을 집까지 데려다준다는 비서를 되돌려 보냈다. 오늘 결석한,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같은 반인 애한테 졸업장과 졸업 앨범을 가져다주라고 그의 담임이 특별히 부탁했기 때문이었다.

평소의 한우진이라면 마땅히 거절할 일이었다. 아니면 앞에선 알겠다고 대답을 하고 그냥 쓰레기통에 그것을 처박을 성격이었다, 한우진은.

하지만 그날은 뭔가에 홀린 것일지도 몰랐다. 품에 안겨져 있는 재스민꽃의 향취에. 아니면 굵게 내리는, 눈이 시리도록 아름다운 함박눈의 풍경에.

온갖 아름다운 것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그가 뭔가 변화를 일으킨 것일지도 모른다.

자각하기도 전에 그는 마치 뭔가에 홀린 듯, 담임이 준 연락처와 집 주소를 들고 낯선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한쪽 팔에는 낯선 이름의 인물의 몫일 물건과, 다른 한쪽 손에는 한 손으로 들기에는 조금 버거운 무게의 커다란 꽃다발을 들고서.

그날 한우진은 허름한 공영 아파트의 놀이터에서 그녀를 처음 보았다. 운명이라는 것이 그런 것일까. 운명론자도 아니고, 그런 우연 따위는 절대 믿지 않는 우진이 생각해도 그건 운명일 수밖에 없었다. 운명이라는 단어가 아니라면 뭐라 칭해야 하는지 그는 알 수 없었다.

평소의 우진이라면, 들어오지도 들어올 리도 없는 놀이터에서 그녀가 울고 있었다. 근처의 고등학교 교복을 입은 그녀는 쇠가 녹슨 늙은 그네에 앉아 훌쩍이고 있었다.

평소의 우진이라면 지나쳐 갔을 것이다. 평소의 한우진이라면 필시 그리했을 것이다. 하지만 우진은 못이 박힌 듯 그 자리에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간사한 운명이란 것이 그에게 장난질을 걸고 있었다.

새하얀 풍경 속에서 유일하게 새빨간 코트를 입은 여자애가 엉엉 울고 있는 것에서 운명을 찾지 않는다면 그건 바보일 것이다.

“뭐 해?”

충동적이었다. 그의 충동은 철저히 이성 아래에서 절제되고 제어되는 존재였다. 절대 함부로 꺼내서는 안 될 감정이었다. 하지만 불쑥 나간 말을 다시 주워 담을 수 없었다. 외투도 제대로 입지 않은 탓에 벌겋게 언 손으로 제 두 눈덩이를 비비고 있던 그녀는 퉁퉁 부은 눈으로 자신을 올려다보았다.

우진의 걸음이 그녀에게 향했다. 이번에는 본능적이었다. 다가가야만 할 것 같았다. 그의 걸음은 그녀에 지척에서 간신히 멈추었다.

“왜 여기서 울고 있어?”

그는 물었다. 영문도 모른 채로 눈을 깜빡이던 그녀는 그의 품에 있는 졸업장과 그의 교복을 번갈아 보더니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우진은 저도 모르게 살짝 눈을 찌푸렸다.

“너, 선우 친구구나?”

“아…….”

우진은 언뜻 들었던 것도 같은 이름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내가 전달해 줄게. 졸업장이랑 앨범 가져다주러 온 거지?”

“그런데 왜 운 거야?”

우진은 그녀에게 선뜻 제 손에 들린 것을 주기 전에 물었다. 그녀는 영문도 모른 채로 눈만 둥글게 떴다. 퉁퉁 부은 눈꺼풀에도 그녀의 눈은 유달리 둥글었다. 한쪽 뺨이 벌겋게 부푼 게 보이지 않을 만큼.

“사실은…… 꽃을 못 받아서 그래. 나도 오늘 졸업식 했거든.”

핑계 댈 것을 찾다가 그의 다른 손에 들린 꽃다발을 보고 한 거짓말임을, 그는 시간이 지나고 뒤늦게 알게 되었다. 그때의 순진했던 저는 그녀의 말을 철석같이 믿고, 그녀의 손에 채선우의 졸업 앨범과 졸업장 말고 재스민 꽃다발을 안겼다.

“그럼 이거 줄게.”

얼결에 꽃다발을 안은 그녀는 눈을 이리저리 굴리다가, 이내 웃으면서 그 꽃다발 속으로 제 코를 대고 얕게 숨을 들이켰다. 우진은 어쩐지 그 모습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고마워. 나 꽃다발 처음 받아 본 거야.”

처음이라는 단어에 우진은 어쩐지 손끝이 간지러웠다.

“이 꽃 이름이 뭐야?”

“재스민.”

“예쁘다…….”

잠깐 우진을 보기 위해 들렸던 고개가 다시금 꽃으로 숙어진다. 코를 가까이 댄다. 이번에는 숨을 깊게 들이켠다. 그리고 천천히 내뱉는다. 손끝으로 꽃잎을 살살 건든다. 다치기라도 할까 손짓이 한껏 조심스럽다. 아무것도 아닌 행동이 왜 이렇게 제 눈에는 느린 것인지, 우진은 빈손을 괜스레 꽉 쥐었다.

“혹시 이거 꽃말 알아?”

“…….”

우진은 마른침을 삼켰다.

“응?”

“당신은 나의 것.”

생전 처음으로 허기가 졌다.

우진은 그날 처음으로 몽정을 했다. 꿈속에 나온 그의 첫 몽정 상대는 하얀 재스민 꽃다발을 들고 있던 그녀였다. 채선아. 이름도 꼭 저 같은 것을 가진 그녀.

***

선아의 남동생인 채선우와 친해지는 것은 별로 어렵지도 않았다. 채선우는 허영과 욕망으로 가득 찬 인간이었다. 우진은 채선우가 동경과 그것을 덮을 만큼의 질투심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것을 알고 있었다.

우진의 존재는 그런 채선우의 허영을 채워 줄 만큼 충분한 요건을 가지고 있었고, 헛된 욕망에 나름 졸졸 마른 땅을 제법 젖혀 줄 만큼의 인정도 있었다. 채선우는 자신에게 다가온 우진을 거부하지 못했다. 뒷배는 물론이거니와 외양적으로도 우월하게 뛰어난 동급생을 꺼린다는 느낌으로 거부할 만큼 그는 그렇게 순진하지 않았다.

그는 속물적인 인간이었다, 뼛속까지. 제 누나의 헌신을 아무런 죄책감 없이 받는 것으로 모자라, 더 달라 입을 쩍쩍 벌리는 뻐꾸기 새끼처럼.

그날, 우진이 선아를 처음 만났던 날. 선아가 대학교에 가고 싶다고 했고, 선아의 모친은 그런 그녀의 뺨을 때렸던 날. 선우는 제 방에 틀어박혀 게임을 하고 있었다. 그의 모친의 몇 달 치 월급을 쏟아부었을 것 같은 컴퓨터로. 허름한 방 한편에 어울리지 않게 놓인 그 물건의 가격은 선아의 대학교의 입학금을 내도 남을 정도의 액수였다.

우진이 애쓰지 않아도 되었다. 이미 선아의 인생은 그가 따로 손을 댈 필요도 없이 엉망이었다. 그들은 이미 선아의 인생에서 재앙 덩어리였다. 재앙 덩어리는 하나가 아니고, 무려 세 개나 되었다.

선아는 도무지 제 손으로 떼어 낼 수 없는 굴레에 갇혀 서서히 죽어 가고 있었다. 제 환경에 그녀는 서서히 익사해 가고 있었다.

저를 이곳에서 꺼내 줄 것이라면 지푸라기라도 잡을 수 있을 만큼 그녀가 처한 환경은 우진이 생각한 것보다 더 진탕이었다.

그건 한우진에게는 축복이었다.

정말 신이 준 커다란 축복.

***

채선우는 한우진이 가진 모든 것을 다 탐냈다. 제 키를 훨씬 웃도는 그의 키. 그의 외모. 그리고 가장 가지고 싶어 하는 그의 부모의 재력까지. 그래서 한우진은 그에게 선심을 쓰듯 채선우에게 간혹 제 물건과 같은 것을 선물하고는 했다.

고등학교 때는 만년필이나 기껏해야 브랜드 운동화 정도를 선물했다. 하지만 커 갈수록 그의 씀씀이가 커지듯 채선우의 욕심도 커졌다.

둘이 대학생이 되었을 때, 한우진은 그에게 종종 명품을 안겨 주었다. 그와 동반 입대를 했을 때는 몇천만 원을 호가한다는 명품 시계도 선물했었다. 미끼는 언제나 선물이라는 그럴싸한 포장으로 그의 앞에 던져 놓았고, 채선우는 한 치의 의심도 없이 한우진의 미끼를 족족 입 안에 물었다.

한우진의 물건을 같이 공유한다는 생각이 채선우의 허영을 더욱 부추겼다. 한우진이 선물하는 것만으로는 채선우의 욕심을 채우기에는 터무니없이 부족했다.

그래서 우진은 그에게 정지아를 소개해 주었다. 정지아는 고등학교 때 유명했다. 외모로도 유명세를 톡톡히 치렀지만, 우진의 여자친구라는 타이틀도 그녀를 빛내기에는 충분했다.

사귀지는 않는 사이였다. 집안끼리 서로 아는 사이라서, 다른 사람들보다 자주 어울리는 것이 남들 눈에 그렇게 보인 것뿐이었다. 정지아는 그걸 이용했고, 한우진은 그걸 굳이 정정할 만큼 남들이 자신에 대해 말을 하는 것을 그리 신경 쓰는 타입은 아니었다.

그래서 둘을 아는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정지아와 한우진이 고등학교 때 잠시 사귀었던 것으로 둘을 엮었다.

“난 가난한 애는 안 만나.”

“……너 잘하는 거 있잖아.”

“네 친구 아주 빈털터리로 만들고 싶어?”

“아니. 아예 구제조차 못 하게 만들어 놔. 너 그런 거 잘하잖아.”

이제 정지아는 다른 의미로 유명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사채업을 크게 하고 있었고, 정지아는 그런 아버지의 피를 고스란히 물려받아 그런 방면에 꽤 재능이 있었다. 이름 꽤 있다는 자제들의 허리에 빨대를 꽂고 쪽쪽 빨아먹는 것을 즐기는 부류로.

그녀는 돈을 쓸 수밖에 없는 환경을 잘 조성했고, 그것에 자제력을 잃고 펑펑 돈을 빌려 쓰는 것은 온전히 그들의 선택이었다. 정지아는 그걸 사업이라고 했고, 우진도 그것이 영 틀린 말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네 친구 빚쟁이로 만들자고? 갚지도 못할 돈을 내가 왜 빌려줘야 해?”

“내가 갚을 거야. 넌 걔가 원하는 금액만큼 빌려주면 돼.”

“네가 왜? 천하의 한우진이 손해 볼 짓을 할 것 같지는 않고…….”

“…….”

조용한 재즈 음악이 흐르는 라운지 바 안이었다. 우진은 지아의 손안에서 의미 없이 굴려지는 와인 잔 안에서 찰랑이는 붉은 와인을 의미 없이 바라보았다.

“왜? 그…….”

“입조심해.”

“어련하겠어. 표정 풀어. 이거, 무서워서 살겠어?”

정지아는 그를 무서워하지 않는 드문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제 목숨 줄을 걸고 적정선을 넘을 정도로 멍청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두 사람은 이렇게 서로 주고받을 것이 있을 때, 만나는 사이가 되었다. 지아는 입 안으로 꼴깍 와인을 넘겼다. 돈을 꽤 썼는지, 목 넘김이 깔끔한 와인이 마음에 들었다.

“괜한 말 하지 마.”

그의 마지막 경고에 지아는 고개를 건성으로 끄덕였다. 그리고 자신의 쪽으로 다가오는 인기척에 습관처럼 그린 듯한 미소를 띠었다. 자리에서 매끄럽게 일어서며 가볍게 손을 내밀었다. 어정쩡하게 제 손을 잡는 남자를 지아는 속으로 비웃었다.

“정지아…….”

“아……. 설마 했는데. 나 너 알아. 너 고등학교 때 정말 유명했잖아.”

“…….”

“내가 천하의 정지아의 손을 잡아 보다니. 이거 오래 살고 볼 일이다.”

과도하게 반응을 보이는 남자의 행동에 지아는 한쪽 눈썹을 들썩이며, 자신들 사이에서 한 발짝 물러서 있는 것 같은 우진을 바라보았다. 우진은 아무렇지 않게 지아에게 자신의 친구를 소개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친구인 척하는.

“너도 알 거야. 같은 고등학교 다녔어. 채선우.”

“채, 선우?”

끝자리만 미묘하게 다른 이름이 순간적으로 지아의 머리에 스쳐 지나갔다. 지아는 크게 웃음이 터질 뻔한 것을 다른 손으로 제 입술을 꾹 막는 것으로 간신히 막았다. 한우진의 한쪽 눈썹이 미묘하게 찌푸려진 것이 눈에 보였다. 지아는 얼른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나도 우진이한테 네 얘기는 자주 들었어.”

정확히는 네 누나지만. 지아는 뒷말을 웃음과 함께 삼켰다.

***

지아는 손목을 돌리며 코끝으로 자신의 와인 잔에 담긴 와인 향을 맡았다. 최고급이었다. 자신의 옆에 앉아 있는, 무뚝뚝할 정도로 표정이 없는 한우진의 기분이 좋다는 뜻이었다. 그것도 이 와인의 급에 맞춰서 최상으로.

바텐더가 우진의 잔에도 술을 따르려 했다. 우진은 그것을 제지했다.

정지아가 알고 있는 한우진은 단 한 방울도 술에 입을 대지 않았다. 음주도 흡연도 그렇다고 여자를 만나는 것도 아닌, 그 무엇도 가볍게도 즐기지 않는 금욕적인 생활을 그는 고수하고 있었다.

“정말 정나미 없어.”

자주 만나지는 않았지만, 꽤 긴 시간 동안 그와 알고 지냈던 지아는 그런 그를 향해 중얼댔다. 우진은 그런 지아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매끈하게 검은 상복을 입은 남자는 껍데기만큼은 제가 봐도 나무랄 데 없이 아주 훌륭했다. 그 속에 무엇을 감추고 있는지 보이지 않을 만큼 아주 훌륭한 껍질을 가졌다, 한우진은.

하지만 겉모습에 혹할 만큼 지아는 멍청하지 않았다. 그리고 제가 혹한다고 저 한우진이 받아 줄 리 만무했다.

“나 모레면 뉴욕 가. 돈은?”

“내일. 내 비서가 갈 거야.”

“그 여자도 알아?”

“…….”

“그 천하의 한우진이 첫사랑에 목매느라 이 같잖은 삼류 드라마 찍고 있는 거?”

지아는 무감한 얼굴로 정면만을 응시하고 있는 한우진의 잘난 옆얼굴을 보며,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지아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대체 뭐가 좋아서 이 난리인지.

“쓸데없는 것은 알 필요 없지.”

“네가 자기 남동생을 죽였다는 것도 쓸데없는 일인가…….”

지아는 와인을 목 너머로 꿀꺽 넘기면서 떠보듯 물었다. 살짝 눈썹을 찌푸린 한우진은 눈 깜짝할 새에 표정을 갈무리했다. 정말 인간적인 면모라고는 요만큼도 없었다. 그나마 남아 있던 정나미까지 떨어지려고 했다.

“……채선우는 내가 죽인 게 아니야. 내가 등 떠밀어서 음주 운전을 한 것도 아니고.”

“하지만 네가 걔 발밑에 지뢰를 설치한 것은 맞잖아? 그 사고 난 오토바이도 네가 사 준 거로 아는데? 그 개망나니한테 그걸 사 주었으니. 사고가 나도 골백번은 났을 거다.”

“그저 걔는 운이 나빴어.”

“너에게는 행운이고?”

한우진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지아의 고개가 절로 올라갔다. 우진은 앉기 위해 풀어 둔 재킷의 단추를 잠갔다. 습관처럼 나오는, 흐트러진 제 옷을 금세 다듬는 일련의 행동에 흔들림이 없었다. 지아는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올 것 같지 않은 한우진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몸 조심히 가. 그리고 이제 안 봤으면 좋겠다.”

유일하게 한우진과 의견이 일치한 순간이었다. 지아는 허공에 잠시 잔을 들어 보이고는 한 번도 뒤돌아보지도 않고 떠나는 우진의 뒷모습을 보며 다시 입에 와인을 머금었다. 그리고 내려놓은 자신의 빈 잔에 와인을 다시금 채우는 바텐더를 보며 싱긋 웃었다.

“아까 그 남자, 어때 보여요?”

처음 입구에서 들어올 때부터 모든 여자의 시선은 한우진에게로 은근히 쏠려 있었다. 바텐더도 예외는 아니었다. 가끔 남자들도 넋 잃고 볼 때가 있는데, 여자들이야 넋 빠져라 보는 게 당연했다.

“네? 아……. 저는 사실 모델이신 줄 알았어요. 키도 크고 잘생기셔서…….”

그것뿐인가. 한우진의 외모는 잘생겼다는 것을 뛰어넘는 무엇인가 있었다. 모든 것을 차치하고, 외모적으로만 봐도 그의 앞에서는 누구도 한 수 접고 들어갈 것 같았다.

굵직한 생김새와 한눈에 봐도 흉곽이 크고 옆으로도 두꺼운 몸은 테스토스테론을 풀풀 풍기면서, 눈에 살짝 물기가 어린 것이 또 무엇인가를 자극하는 게 있었다. 그는 전혀 의도한 게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그 매력은 점점 나이를 먹을수록 농익게 발화했다.

한우진은 딱 알파메일의 표본이자 정석이었다. 그 한 단어가 한우진의 모든 것을 설명했다.

“저런 남자가 10년 넘게 짝사랑한다는 게 믿겨요? 그것도 음침하게 뒤로 숨어서.”

“네?”

“나는 아직도 안 믿겨요. 차라리 저 외모로 무릎 꿇고 사랑해 달라 비는 게 더 가능성 클 텐데.”

돈도 썩어 빠지게 많고, 거기에 머리까지 좋았다. 후계 싸움도 없이 한신그룹도 무사히 그가 받을 터였다. 싸움이라는 게 고만고만해야 겨루는 것이지, 한우진처럼 월등하게 뛰어난 놈에게는 제 형제들도 쉽사리 달려들지 못했다. 치기 어렸던 어렸을 때도 그랬는데, 지금이라고 다를 리가.

그는 한신가에서 배출해 낸 뛰어난 걸작이었다. 정상인 척하는 미친놈일지라도 걸작은 걸작이었다.

사생활도 백지장처럼 깔끔하다. 그리고 저 외모. 저 우월하도록 뛰어난 외모. 그를 싫다고 하는 여자가 이상한 취급을 받을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아요?”

지아는 다시금 둥글게 와인 잔을 굴려 향을 맡았다. 감기는 향은 평소에 먹던 것과 차원이 다르다. 역시, 돈이 좋다.

“뭐, 여자를 만나 봤어야 알지. 쟤는 저딴 얼굴 가지고 있으면서도 섹스 한번 해 본 적 없을걸요. 딱 봐도 각이 나오잖아.”

지아는 홀짝 와인을 마셨다. 자신이라면 껌뻑 죽는 아버지조차 그런 한우진을 사윗감으로 입맛을 다셨을 정도였다. 지아는 그런 제 아빠의 말에 몸서리를 쳤지만 말이다. 말도 되지 않았다. 저 한우진이 데릴사위로 들어오는 것도 말이 되지 않을뿐더러, 여자로서도 인간적으로서도 싫었다.

차라리 평생 목석을 끌어안고 사는 편이 더 나았다. 도통 저 한우진에게는 미운 정조차도 가지 않았다. 이제껏 저 잘난 얼굴을 구겨 본 적이 있을까 싶었다.

저 정떨어지는 인간은 어렸을 때조차 울어 본 적 없이 저 딱딱한 얼굴 그대로일 것 같았다. 하물며 여자와 함께인 침대에서조차 저 딱딱한 표정 그대로일 것 같았다. 그건 딱 질색이었다.

“쯧. 그 여자도 참 안됐어.”

지아는 짧게 혀를 찼다.

***

그의 행운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우진은 저장이 되어 있지 않은 번호에 깊게 숨을 들이켰다. 그답지 않게 긴장을 한 탓이었다. 업무와 관련된 대외적인 전화는 모두 그의 비서가 받는다. 사적으로 걸려 올 전화는 그의 가족들과 그리고…….

“네. 한우진입니다.”

[…….]

답이 없는 상대방 때문에 우진은 자신이 너무 사무적으로 딱딱하게 전화를 받았나 싶었다. 우진이 초조함에 사무실의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뭐라 덧붙이기 전에 작은 소리가 희미하게 새어 나오자, 그는 제 핸드폰을 더욱 바짝 귓가에 가까이 댔다.

[저…….]

“네. 말씀하세요.”

우진은 마른침을 소리 없이 삼켰다. 긴장감으로 목덜미가 뻣뻣해지는 것 같았다.

[기억하실지 모르지만. 서, 선우 누나예요. 장례식 때 봤던…….]

“네…….”

[혹시 통화 괜찮으실까요?]

조심스럽게 묻는 유약한 목소리에 우진은 뻣뻣해진 목덜미를 손으로 주물렀다. 사무실의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 그의 시선이 어느 한 곳을 응시하지만. 딱히 그곳을 응시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괜찮습니다. 말씀하세요.”

[사실은…….]

“…….”

[사실은…….]

미약하게 떨리는 목소리에 우진은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그녀는 알까. 지금 그의 심장이 박동 소리를 내면서 빠르게 뛰고 있다는 것을. 고작 목소리 때문에. 고작 제게 먼저 걸려 온 전화 덕분에. 우진은 쿵쿵, 낮게 뛰고 있는 제 가슴팍에 손을 가져다 대고 힘 있게 꾹 눌렀다. 제가 느끼기에 박동 소리가 너무 요란했다.

[저, 죄송해요. 아무 일도 아니에요. 공연히 제가 전화를 건 것 같아요. 바쁘실 텐데…… 이만 끊을…….]

“아니요. 지금 어디예요?”

[네?]

“어디에 있어요? 내가 그쪽으로 갈게요.”

[아, 아니요. 괜찮아요. 제가 괜히 신경 쓰이게 전화를 한 것 같아요. 신경 쓰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채선아 씨.”

[…….]

“무슨 일이 있는 거잖아요. 있으니까 처음 본 저한테까지 전화한 거 아닌가요?”

[…….]

“선아 씨. 내가 그쪽으로 갈게요. 말해 줘요.”

그는 마치 애걸하는 듯한 태도로 그녀에게 유약하게 말했다. 그를 아는 정지아가 들었다면 귀를 골백번은 씻었을 것 같은 목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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