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침대에서 벗어난 게 얼마 만인지. 선아는 우진의 긴 휴가가 끝나고서야, 겨우 침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 기간 내내 자신의 몸을 기분 좋을 정도의 무게로 누르고 있던 우진의 몸이 없는 게 조금 어색할 지경이었다.
선아는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거실로 나왔다. 늦잠을 잔 덕분에 우진과 선아네 집안일을 전반적으로 도맡아 하고 있는 아주머니는 벌써 퇴근 준비를 하고 있었다.
검은 유니폼 위에 외투를 걸치는 모습에 선아는 사람이 온 줄도 모르고 내내 침대에서 뒹군 자신의 볼을 괜스레 쓸어내렸다. 아직도 잠이 덜 깬 느낌이었다. 어쩐지 더욱 게을러지는 것 같았다.
“저녁은 전무님이 예약해 두셨다고 하셔서, 간단히 드실 거만 준비해 두었어요.”
“감사합니다.”
식사하기에는 모호한 시간이라 생각했는지, 허기를 달랠 정도의 간단한 브런치가 거실의 테이블 위에 차려져 있었다. 혼자 식사를 할 때면 습관처럼 TV를 보면서 먹는 선아를 배려해서였다.
우진과 결혼한 지 며칠 지나지 않아서, 간단히 밥그릇과 반찬 몇 개를 놓고 거실의 소파에 앉아서 식사하던 그녀를 보고 질겁하던 아주머니의 표정이 괜스레 생각이 났다. 그때 그녀는 본가에서 사람을 몇 명 더 불러내서, 아예 대청소까지 시작했었다.
이 집에 들어와서 처음 겪는 그녀의 반응이 선아는 정말 당혹스러워서 우진에게 살며시 그날 저녁에 물었었다. 혹시 소파에서 뭐 먹으면 안 되는 중요한 이유가 있는 건지. 우진은 은근히 긴장한 선아의 맥이 빠질 정도로 선아에게 마음대로 하라 했다. 그리고 우진이 뭐라 말을 했던 건지, 그 뒤로부터 간단한 요깃거리조차 거실의 테이블 위에 차려졌었다.
“그럼 작은 사모님.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네…….”
“아. 그리고 작은 사모님 앞으로 우편이 와 있어서 제가 받아 두었습니다.”
우편? 우진과 결혼 후에 자신의 앞으로 단 한 번도 온 적이 없었던 우편의 존재에 선아는 거실의 테이블 위에 놓인 서류 봉투를 낯선 눈으로 쳐다보았다.
“제가 확인해 볼게요.”
선아의 대답에 그녀는 허리를 반듯이 접어 보인다. 선아는 아무리 받아도 익숙해지지 않는 지나치게 공손한 인사에 같이 고개를 숙였다.
홀로 집에 남겨진 선아는 그릇 옆에 놓인 서류 봉투를 집어 들었다. 묵직한 게 서류가 아닌 뭔가 다른 게 들어 있는 것 같았다. 꼼꼼히도 밀봉된 것을 선아는 조심스럽게 뜯었다. 그 안에 든 것은 핸드폰이었다. 선아는 오래된 기종인 것 같은 핸드폰을 이리저리 살펴보다가, 전원 버튼을 눌렀다.
전원을 켜 놓은 상태였는지 바로 화면이 밝아졌다. 선아는 잠금장치도 따로 설정되어 있지 않은 핸드폰을 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이런 것을 자신에게 보낼 사람이 누가 있나 싶었다.
선아는 아무것도 없는 빈 화면에 덩그러니 나와 있는 아이콘을 눌렀다. 녹음 파일이었다.
잡음이 많이 섞인 소리가 핸드폰에서 스피커를 통해 나왔다. 선아는 멍하니 음향을 표시하는 그래프를 쳐다보았다. 자신의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를 따라서 선들이 마구잡이로 움직였다.
[내가 얼마나 좋았는지 알아? 엄마한테 간이식 하지 못한다는 의사 말 듣자마자, 나 그 자리에서 울 뻔했어. 너무 좋아서. 드디어, 엄마가 나를 놔줄 것 같아서……. 엄마. 그냥. 제발 죽어 줘. 나를 위해서…… 제발…… 나 좀 살려 줘. 나 이제 조금은 행복해지고 싶어.]
울음소리와 섞여든 목소리는 분명히 제 것이었다. 그리고 선아는 그것을 변명할 생각도 없었다. 분명히 자신은 깊게 잠이든 엄마의 병석에서 저 말을 저주처럼 내뱉었다.
선아에게 엄마는 애증의 대상이었다. 그리고 노골적으로 자신을 통하여 우진에게 기생하려고 들 때부터 엄마는 선아에게 단순한 증오의 대상이 되었다.
제 엄마가 적당히 우진에게서 받아 낸 것이었다면, 선아도 그런 생각까지는 들지 않았을 거다. 하지만 단단히 한몫을 잡은 듯, 저 몰래 우진에게 연락하여 끝도 모르고 요구하고 당연스럽게 받았다는 사실을 알자마자 선아는 처음으로 그때 우진과의 결혼을 후회했었다.
그에게 기생하는 것은 자신만 해도 충분했다. 거기에 엄마까지 더할 생각은 없었다. 우진은 저들 모녀에게 충분히 선의를 베풀었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선아에게 선의를 베풀고 있었다. 그는 착하고 다정하니까. 그러니까, 자신을 내쫓지도 못하고 어쩔 수 없이…… 그는 채선아가 불쌍하고, 한없이 착하다고 생각하니까. 그 밑에 깔려 있는 선아의 속마음이 얼마나 추악한지도 모르고. 제가 떼를 쓰듯 조른 말도 넘겨짚지 못하고. 억지로 인형극을 하듯 어울리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 선들의 파동 때문인지. 아니면 정확히 새어 나오는 제 목소리 때문인지. 선아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겨우 그 핸드폰 화면을 껐다. 동시에 제 목소리도 끊겼다. 손의 힘이 빠졌는지, 핸드폰이 선아의 손에서 미끄러져 접시 위로 떨어졌다.
샐러드 접시로 핸드폰이 처박혔다. 선아는 그것을 두려운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차마 두 손을 올려 두 눈을 가릴 수도 없었다. 이제는 온몸이 볼썽사납게 덜덜, 주체할 수 없도록 떨렸다.
명백한 증거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추궁당하는 살인자처럼.
***
한우진은 신호 대기 중인 상태에서 선아에게 전화를 걸었다. 손가락이 가볍게 핸들을 두들겼다. 연결음이 길어지고 있었다. 그래서 한 번 더 통화 버튼을 눌렀다.
그래도 연결이 되지 않는 전화에 우진은 한쪽 눈을 찌푸렸다. 무슨 일이 있나 싶었다. 그리고 뒤따라오는 그 미세한 의심도. 우진은 지체 없이 손을 뻗어 다른 전화번호를 눌렀다.
“여사님. 저 한우진입니다.”
[네, 전무님.]
“혹시 퇴근하시기 전에 선아 씨 봤나요?”
[네. 제가 퇴근하기 전에 뵙고 바로 나왔습니다.]
“외출 준비를 하던가요?”
[아니요. 따로 준비하고 계시지는 않으셨습니다.]
“그럼…….”
[외출은 하지 않을 것 같으셨습니다. 저녁도 제가 전무님과 따로 하실 예정이라고, 말씀도 드렸고요.]
“네. 알겠습니다.”
제 착각인가 보다. 그를 기다리다가 깜빡 잠이 들었을 수도 있다. 선아는 요새 부쩍 잠이 많아졌다.
[그런데…….]
“…….”
[작은 사모님 앞으로 우편이 하나 와 있었습니다.]
“우편이요?”
[네. 개인적인 거라 따로 확인은 하지는 않았는데. 아무래도 이런 적은 처음이라……. 전무님도 알고 계신 게 나을 것 같아서 따로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네. 감사합니다. 이만 전화 끊겠습니다.”
네. 간단한 인사와 함께 통화가 끊긴 핸드폰을 바라보다가, 우진은 바뀐 신호에 핸들을 부드럽게 꺾었다.
우편이라? 무슨 우편? 선아와 관련한 모든 것은 우진과의 결혼 후에는 우진의 앞으로 날아오기 시작했다. 하다못해 선아의 동생과 관련된 학교 공문도 학비를 대고 있는 우진의 이름으로 왔다.
왜, 발신인 없이 자신의 사무실로 배달되었던 그 서류 봉투가 생각이 나는지. 우진은 불안감으로 지그시 제 아랫입술을 물었다.
별일이 아닌 거다. 그냥 선아만, 선아만 제 자리에 있어 주면 뭐든 상관이 없었다.
우진은 아직 불을 켜지 않아 어둑한 집 안에 미간을 살며시 구겼다. 아니다. 저번에도 그랬지만, 선아는 침실에 얌전히 잠이 들어 있을 거다. 속단하기에는 이르다. 이번에도 틀림없이 그러리라. 한우진은 불안감을 억지로 제 이성으로 꾹꾹 짓눌렀다.
“선아 씨?”
우진은 나직이 선아를 불렀다. 공허하게 제 목소리가 메아리치는 집이 이토록 넓었나 싶었다. 먼저 거실의 불을 켜고, 선아의 침실 문부터 열었다. 없었다. 혹시 2층에 있어서 제 목소리를 못 들었나 싶어서 우진은 성큼 층계 위로 올라갔다.
드레스 룸과 서재를 비롯하여 모든 방문을 열어젖혔다. 선아는 그 어느 곳에도 없었다.
우진은 재킷 안쪽에서 핸드폰을 꺼내 선아에게 전화를 걸었다. 의미 없는 연결음만 길게 느껴졌다. 아래층에서 희미하게 새어 나오는 벨 소리에 겨우 버티고 있는 한우진의 얼굴은 완전히 일그러졌다.
미끄러지듯 가파르게 층계를 내려와서 벨 소리가 들려오는 침실로 다시금 들어갔다. 화장대 위에서 홀로 핸드폰이 울리고 있었다. 제 핸드폰을 쥐고 있던 우진의 손아귀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정처 없이 헤매던 눈이 이제는 목적을 가지고 선아의 침실을 뒤지기 시작했다.
우편이 왔다고 했다, 우편이.
침실을 다 뒤집었는데도 나오지 않았다. 한우진은 짓씹듯 욕설을 나직이 뇌까렸다. 그리고 거실로 장소를 옮겼다. 장식장을 열고 아무 데나 손에 닿는 대로 뒤집어엎었다. 가지런히 제자리에 놓였던 물건들이 토악질을 해 놓은 것처럼 두서없이 바닥에 널브러졌다.
한우진은 미친 듯이 이곳저곳을 헤집어 놓았다. 그러다 문득 한우진의 시야에 샐러드 접시 위에 빠진 핸드폰이 들어왔다. 그는 성큼 걸음을 옮겨서, 그 핸드폰을 제 손에 쥐었다. 화면에 띄워져 있는 아이콘을 눌렀다. 중간까지 들었던 모양이었다. 앞부분은 잘린 채로 녹음이 된 음성이 우진에게 들렸다.
한우진은 서재로 향했다. 언젠가 서랍에 넣어 두었던 명함을 꺼내 들었다. 선아의 쇼핑백 속에 들어 있던 낯익은 명함을 발견했을 때, 우진은 이 연락처가 결국 이런 일에 쓰일지는 미처 몰랐었다.
어쩌면 정지아가 선견지명이 있었던 것일지도. 셈에는 지독히도 눈이 밝으니, 마치 이런 일이 있을 줄 알고 일부러 선아에게 접근했을지도 모른다. 자신과의 약속을 어기고 선아에게 접근했다는 불쾌감만 들었던 저번과 달리, 아이러니하게도 지금 이 순간은 한우진이 매달릴 유일한 동아줄이었다.
손에 들린 제 핸드폰으로 번호를 눌렀다. 다시는 들을 리 없다고 생각한 목소리가 기계음처럼 핸드폰에서 흘러나왔다.
[정지아입니다.]
“나야. 한우진.”
우진은 제 손아귀에 있는 명함을 구겼다.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지기 시작했다. 우진은 책상에 겨우 손을 짚었다.
“혹시 선아 씨 갈 만한 데 네가 알아? 채선우에게 들은 거 있을 거 아니야.”
그는 정지아의 대답을 기다리면서, 자신도 모르게 속으로 제발이라고 중얼거렸다. 믿지도 않는 신에게 무릎이라도 꿇고 빌고 싶은 심정이었다.
***
바람이 시원했다. 바닷가에 있으면 바람이 춥다더니. 꼭 그 말이 맞는 건 아닌 것 같았다. 해수면 너머로 노을이 지는 풍경이 참 예쁘다고 선아는 생각했다. 그리고 발가락 사이사이에 닿는 모래 알갱이에 괜스레 제 발가락을 꿈지럭 움직였다.
우진도 들었을까? 일부러 챙기지 않고 도망치듯 집을 나왔으니, 들었을지도 모르겠다. 우진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을 할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선아는 생각을 털어 내듯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일단 도망을 치듯 무작정 나왔는데, 밤이 문제였다. 이 근처의 여관방이라도 얻어야 하나 싶어서, 모래사장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래도 핸드폰은 챙겨서 나오는 건데. 때늦은 후회도 들었다.
뒤로 돌았을 때, 눈에 밟히는 매끈한 차체에 선아는 고개를 기울였다. 인적이 드문 작은 해변에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차였다. 그리고 어디서 많이 본 것 같기도 했다. 흔하지는 않은 차인 거로 알고 있는데.
아! 우진도 같은 기종의 차를 몰고 다녔다. 하지만 우진일 리 없었다.
선아는 헤드라이트가 꺼지고 멈춰 선 차 문을 열고 나오는 사람이 흐릿하게 보여 눈을 가늘게 떴다. 이제 제법 해가 저물어 어둑어둑해져서 누군지 잘 식별이 되지 않았다.
그래도 설마 하는 생각에 멀거니 선아가 바라만 보고 있을 때였다.
“선아 씨!”
선아는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눈을 크게 떴다. 그가 어떻게 여기까지 알고 찾아왔는지 모르겠다. 이미 선아는 한우진이라는 것을 알자마자, 그와는 반대편으로 달음박질치고 있었다. 이런다고 해결이 될 일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일단 우선은……. 우선은……. 생각을 정리한 다음에……. 마음의 준비도 하고, 조금 여유로워질 때. 그때, 그때……. 우진에게 모든 것을 다 말할 작정이었다. 이렇게 닥쳐서가 아니라.
“채선아!”
구두를 신은 한우진이 제 뒤를 쫓아오고 있었다. 선아는 뒤도 쳐다보지 않고 뛰었다. 달리기에는 자신이 없지만, 이 정도의 거리라면 승산이 있었다. 자신을 뒤쫓아 오는 그에게 달아날 수 있을 것 같았다.
일단 이 상황부터 피하고. 우진에게는 따로 전화할 작정이었다. 그리고, 그리고. 우진이 만약에 헤어지자고 말한다면, 그렇게 할 생각이었다. 정말로, 정말로 그럴 작정이었다.
그런데 제 계획이 다 수포로 돌아가기 일보 직전이었다.
허리를 낚아채는 느낌에 선아는 저도 모르게 울음이 터져 나왔다. 자신을 품 안에서 돌려세운 우진이 시근덕대는 숨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선아를 내려다보았다. 선아는 울음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꾹 입술을 물었다.
“지금 울 사람이 누군데. 자기가 도망가 놓고, 왜 울어요?”
울음기가 가득한 선아의 얼굴을 보자, 한우진은 뭐가 되든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단하게 굳어 있던 얼굴이 저도 모르게 유순하게 풀어지는 것을 그도 잘 인식하지 못했다. 울음을 참지 못해서 볼록한 볼을 움찔움찔하는 게 작은 동물 같았다.
그저 선아의 손이 제 와이셔츠의 앞부분을 절대 놓지 않을 것처럼 꽉 움켜쥐고 있는 모습이 그의 불안했던 생각을 차분히 어르고 있었다.
“나…… 나, 우진 씨가 아는 것처럼 차, 착한 사람 아니에요. 엄청 못됐어요.”
선아는 우진의 옷깃을 온 힘을 다해 꾹 쥐었다. 보호자를 잃어버렸다가 되찾은 어린애처럼. 제가 쥐고 있는 것을 빼앗긴다면 더욱 울음을 터트릴 것처럼. 그래서 한우진이 조금 웃을 수밖에 없도록.
“나 만약에 엄마한테 내 간 이식할 수 있다고 해도, 사, 사실은 엄마한테 간이식 해 줄 생각 조, 조금도 없었어요.”
“선아 씨, 숨넘어가요. 천천히, 천천히 말해요.”
조곤조곤 타이르는 말에 선아는 억지로 숨을 고르게 쉬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울음 때문에 딸꾹질하는 것처럼 자꾸만 가슴이 들썩거렸다.
한우진은 선아의 우는 모습이 예쁜 것과 별개로 그게 조금 안쓰러워 그녀의 둥근 어깨를 잡은 손을 부드럽게 굴리듯 매만지며 그녀를 얼렀다.
“엄마가 간암 말기라고 했을 때, 벌받은 거라고 생각했어요. 나한테 못되게 군 거, 그거 벌받은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어요.”
“…….”
“내 간…… 나눠 달라고 하는 것도 너무 뻔뻔하다고 생각했어요. 내 몸인데, 내 건데. 나한테 뭐 하나 주지 않고, 다 뺏어 가 놓고. 채선우랑 둘이 다 뺏어 가 놓고. 내 몸조차 마음대로 자기가 달라고 하는 게……. 너무너무 미웠어요.”
말 사이사이에 서러운 울음소리가 뒤섞였다.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모르겠는지, 횡설수설하듯 장황하게 늘어놓는 얘기도 한우진은 그냥 듣고만 있었다.
“채선우만 자기 자식이라고 했으면서. 엄마는 선우가 살아 있었어도, 선우한테는 달라고 못 했을 거예요. 눈에 넣어도 안 아픈 자식이니까. 차라리 그냥 죽는 게 낫다고, 달라는 말도 못 하고 죽었을 거야.”
선아는 그런 한우진의 차분한 태도에 더욱 서러움이 복받치는 듯, 더욱 아이처럼 엉엉 울어 댔다. 눈물이 너무 나서 시야를 가리자, 손을 들어 올려 눈물을 닦으려는 것을 우진이 부드럽게 제지했다. 이내 그의 큰 두 손이 선아의 얼굴을 감싸 쥐고는 살살 달래듯 손가락으로 눈가에 묻어난 물기를 조심스럽게 닦아 냈다.
“우진 씨가 나 불쌍해서, 그래서…… 그래서 나랑 결혼한 것도 나 알아요.”
“…….”
“우진 씨는 착해서, 그러니까 동정심 때문에……. 근데 나는 못됐어요. 우진 씨가 동정할 정도로 나 착하지 않아요. 난…….”
우진은 다정했다. 한우진은 착했다. 선아가 알고 있는 우진은 그랬다. 그래서 선아는 이렇게 못된 자신이, 우진을 마음대로 좋아하게 된 자신이 너무 미웠다.
어떻게 염치도 없이, 제까짓 것이 뭔데 우진을 좋아한다는 말인가. 천벌을 받아도 변명할 수 없는 잘못이었다. 차마 우진을 똑바로 쳐다볼 용기도 없어서 선아는 고개를 숙여, 애써 저와 눈을 마주치려고 하는 우진의 시선을 피했다.
“선아 씨. 나 봐요. 응?”
우진이 붙들고 있는 손을 떼어 내며, 선아는 숨을 크게 들이켰다. 도중에 잘못 들이켰는지 캑캑대기까지 했다. 우진이 다시금 선아의 얼굴을 감싸고는 자신을 바라보게 했다. 조금 웃음기를 머금고 있는 우진의 얼굴이 물기가 가득 어린 선아의 시야에 제대로 들어올 리 없었다.
“내가 얼마나 못됐는지 우진 씨는 모를 거예요. 엄마랑 나랑 이식할 수 없다는 결과 들었을 때, 나 너무 행복했어요. 너무 기뻐서 몰래 혼자 울 정도였어요. 이제는 나 괴롭힐 사람 없어진다는 생각에 너무 좋았어요.”
모든 것을 토해 내듯 거침없이 쏟아 냈다. 이미 녹음해 놓은 것을 들었으면, 그도 알고 있을 것이었다. 그래도 제 입으로 스스로 말하자니 입 안이 썼다. 그리고 불쑥 그런 원망도 들었다.
“그러게. 내가 이렇게 못된 애인 거 알기 전에. 그 전에 이혼했으면 좋았잖아요.”
“선아 씨.”
“내가, 내가 염치도 없이 우진 씨를 사랑하기 전에, 그 전에 헤어졌으면 됐잖아요.”
“…….”
우진은 잘못 생각한 것이었다. 저번에 제가 이혼을 요구했을 때, 쌍수를 들고 찬성을 해야 했다. 자신이 얼마나 못된 사람인지, 이기적인 사람인지 모른 채로, 선아의 꾸며진 겉모습만 보고 제대로 속은 것이었다. 채선아가 얼마나 못돼 먹었는지 이제 깨달았어도 소용이 없었다.
“흐엉. 우진 씨. 사랑해요.”
이미 못된 채선아가 한우진을 사랑하게 되어 버렸으니까. 다정하고 착한 한우진을 채선아가 염치도 없이 사랑하게 되었으니까.
“나 못돼 먹었어요. 그래도 나 버리면 안 돼요. 우진 씨가 나 주웠으니까. 그러니까 끝까지 책임져야 해요. 우진 씨가 싫다고 해도……. 그래도…… 나 이혼 안 해 줄 거예요.”
“다시, 다시 말해 줄래요?”
“이혼 안 할 거예요. 나 이혼 못 해 줘요.”
채선아는 다시금 강경하게 말했다. 하도 울어서 딸꾹질을 끅끅하고 있는 와중에도, 우진이 제대로 못 알아들을까 싶어서, 일부러 한 자 한 자 정확히 또박또박 발음했다.
그가 아무리 뭐라고 해도, 이혼해 줄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한우진이 멋대로 자신을 데려다가, 제가 원치도 않았는데 제멋대로 다정하게 굴었다.
아무도 신경 써 주지 않고, 아무도 사랑하지 않던 채선아를. 그는 마땅히 그래야 하는 것처럼 다정하게 굴었다. 값싼 동정이라도 괜찮았다. 우진의 다정함에 기대어 구걸하듯 받는 온기라도 선아는 괜찮았다.
그래서, 그래서 선아가 그를 사랑하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한우진도 그에 마땅한 벌을 받아야 했다. 그러니 죽어도 이혼은 해 주지 않을 거다. 왜, 자신을 이런 데까지 찾아와서 이런 이기적인 소리까지 내뱉게 만든 것인지. 문뜩 얼어붙은 듯 표정이 굳은 한우진이 미워지기까지 했다.
“그거 말고.”
그거 말고요. 선아 씨. 나를……. 그러니까 나를……. 선아 씨가…….
우진은 꿈결을 헤매는 사람처럼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선아의 대답을 재촉했다. 선아는 우진의 두 손에 얼굴이 감싸인 채 엉엉 울면서 다시금 고백했다.
“사랑해요.”
이렇게 멋없는 고백도 없을 거다. 두 눈은 퉁퉁 부은 채로, 바닷바람에 머리가 산발인 것도 모자라서 맨발인 채로. 밑도 끝도 없이 잘생긴 남자 앞에서 손을 쓸 수 없이 엉망진창인 모습으로 고백하고 있다는 게.
문뜩 그것도 서러워져 선아는 엉엉 더 소리를 높여 울었다.
“그리고 나한테 묻고 싶은 건 없어요?”
그게 무슨 엉뚱한 소리인가 싶어서, 선아는 울음을 멈추고는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한우진은 엉엉 엉망으로 울고 있는 채선아 앞에서, 노을에 젖은 것처럼 귀밑머리가 붉어진 채로 묻고 있었다.
밑으로 살짝 처진 눈으로 부드럽게 눈가를 접으며 웃고 있는 한우진이 고개를 내려서, 자신의 뺨을 살짝 입술을 대고 있는 순간에. 선아는 결혼 생활 내내 묻고 싶었던, 우진을 알게 된 후 내내 문뜩문뜩 의구심이 들던 물음을 그의 품 안에서 속삭였다.
“우진 씨는 나를, 나를 사랑해요?”
선아는 그의 품에 꽉 안겼다. 우진은 그런 그녀를 제 품 안에 가두듯 끌어안았다. 우진의 단단한 팔이 선아의 허리께를 빈틈없이 둘러쌌다. 그의 힘에 선아의 뒤꿈치가 살짝 들릴 정도였다.
“사랑해요. 선아 씨.”
뜨거운 숨이 선아의 귓가를 간질였다. 선아는 움칠 고개를 더욱 우진의 품 안으로 집어넣었다. 울음은 거짓말처럼 선아의 입 안으로 꿀꺽 사라지고 없었다. 선아는 그저 눈만 끔뻑끔뻑했다. 그의 품 안에서.
“단 한 순간도 선아 씨를 사랑하지 않았던 적이 없어요. 사랑하고 있었어요. 처음 당신을 봤을 때부터. 나는 당신을 사랑하고 있었어요.”
열이 가득 오른 고백에 선아는 발밑이 아득하니 꺼지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 기분을 만끽하듯 선아는 두 눈을 가만히 감았다.
왜, 사람들이 너무 좋으면 죽을 것 같다고 하는지 이해가 가는 순간이었다.
정말 이대로 죽어도 좋을 것 같았다.
***
침대맡에 걸터앉은 우진은 손을 뻗어서, 선아의 얼굴로 흘러 내려온 머리카락을 정리하듯 뒤로 살며시 넘겨 주었다. 바닷가에서 기운을 다 뺏는지. 선아는 이미 집에 도착하기 전부터 잠에 빠져 있었다.
선아를 안아 들고 올 때 들리는 소음과 조금의 반동에 선아가 깰까 봐 염려했던 우진의 걱정이 무색하게, 선아는 지금까지 고른 숨을 내뱉으며 정신없이 잠에 빠져 있었다.
우진이 조심스럽게 입술을 그녀의 뺨에 내려도, 선아는 미동이 없었다.
제 전화벨 소리에도 눈 한번 찌푸리지도 않고. 한우진은 손가락으로 부드럽게 선아의 뺨을 쓸어내리며, 핸드폰을 제 귓가에 가져다 댔다. 선아만 자신의 침실에 남겨 둔 채로, 혼자 있기에는 그 찰나의 시간도 아까웠다.
지금의 단꿈에 달게 빠진 한우진에게는 찰나의 순간순간이 너무 아까웠다. 천천히 녹여서 음미하고 싶었다. 우진은 손가락에 닿는 선아의 머리카락을 가만히 쓸어 대며 그녀의 뺨에 다시금 짧게 입술을 맞췄다.
“말해.”
인사말은 따로 필요하지 않았다. 본론만 원하는 한우진의 성격을 뻔히 알고 있는 상대방은 별말 없이 서류를 팔랑팔랑 넘기는 소리와 함께 우진에게 물었다.
[김명훈이라고 알아?]
“누구?”
[김명훈. 너희 그룹에서 병원 인수하기 전에 근무했던 의사라던데.]
머릿속을 제아무리 뒤져 봐도, 딱히 생각이 나지 않는 인물에 우진의 미간이 살며시 찌푸려졌다. 선아 쪽으로 기울어져 있던 몸을 침대에서 일으켰다.
[채선아 씨 어머니 주치의이기도 했고.]
뒤따르는 설명에 스쳐 지나가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
“그런데?”
우진은 창문의 커튼을 살며시 손으로 밀어젖혔다. 강물에 반사되는 빛이 반짝이는 게 여기서도 보일 정도로 어두웠다. 대로변을 꽉 메우고 있던 차들도 시야에 걸리지 않았다. 그만큼 늦은 시간이었다.
[그 사람 짓이야. 사진 보낸 것도. 그리고 네 집으로 우편 보낸 것도. 너는 의사한테까지 무슨 원망을 그리 사니. 안 그래도 너 죽이겠다고 난리 치는 사람들이 몇인데.]
쯧쯧. 짧게 혀를 차는 소리에도 우진은 밀랍이 된 듯 차갑게 굳은 표정 그대로였다. 창문에 비치는 제 모습을 보며, 우진은 아까 선아의 말이 생각이 나서 한쪽 눈을 찌푸렸다.
세상 사람들 가운데 유일하게 저를 착하다고 하는 것은 선아밖에 없을 것이다. 제 가족들도 빈말이라도 한우진을 보고 착하다느니 다정하다느니 말도 꺼내지 못했다.
엉엉 울면서 그 말을 하는 선아를 보며 웃음을 터트리지 않기 위해 한우진은 얼마나 제 볼을 짓씹었는지 모른다.
“선아 씨한테 접근했던 남자는?”
[아. 김명훈에게 돈 받아서 한 일이라고 술술 불던데.]
“…….”
[어떻게 할까?]
“네가 알아서 처리해. 그리고 이 일은 선아 씨가 절대 모르게 해.”
우진은 문뜩 제 뒤에 놓인 침대에서 잠든 선아를 뒤돌아보았다. 모로 누워서 아이처럼 몸을 웅크리고 잠이 든 선아의 모습에 그의 입매가 유순하게 풀렸다. 이 순간을 위해서라면, 한우진은 모든 것을 할 수 있었다.
[그건 네가 얼마를 지급할 건지에 따라서 다르지.]
그리고 얼마가 들든 상관없었다. 오히려 그건 그에게 손해라고 부를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건 내 비서랑 따로 얘기해. 그리고 다시는 우연이라도 선아 씨에게 접근하지 마.”
이거, 원. 무서워서 살겠어? 자유국가에서.
[그리고 내가 그 새끼한테서 재미있는 얘기를 들었는데 말이야.]
뜸을 들이는 얘기가 무엇인지, 우진은 짐작이 갔다.
[아니, 검사서 서류를 조작하는 거 범죄 아닌가? 남동생에겐 빚쟁이를 소개해 주고, 엄마는 간이식도 못 하게 하고. 선아 씨한테 너무한 거 아니야?]
이거 백마 탄 왕자님이 아니라, 꼭 성안에 공주님 가둬 놓는 악당 같잖아. 한우진아, 이 미친놈아.
지아 특유의 비아냥거림에도 우진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것도 포함해서, 내 비서가 입막음 비용 잘 지불할 거야.”
다만 정지아가 원하는 답변을 별 동요 없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이야, 우리 전무님. 역시 통이 크셔. 내가 그 거지새끼는 알아서 처리할게.]
그냥 선아 덕에 말랑말랑해진 머리로 우진은 어울리지 않는 말을 충동적으로 불쑥 지아에게 건넸다.
“그리고 선아 씨 있는 곳 말해 줘서 고마워. 네 덕분에 찾을 수 있었어.”
가만히 그의 말을 듣고 있던 정지아의 음성이 정말로 진지했다. 그녀는 웃음기 하나 없는 어조로 우진에게 물었다.
[너 진짜로 미쳤어?]
의미 없는 말장난을 할 생각이 없는 우진은 그냥 전화를 끊었다. 더 방해도 받기 싫어서 아예 핸드폰도 꺼 두었다. 한우진은 그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다. 선아의 곁으로. 영원히 자신만 있을 수 있는 곳으로.
사랑하는 자신의 아내 옆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