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
수많은 임원진을 거쳤지만, 상사로서의 한우진은 까다로운 사람은 아니었다. 일 처리도 군더더기가 없고, 기록적인 매출 실적까지 올린 덕분에, 흔히 입방아에 오르는 젊은 재벌 3세의 무능력에 대한 뒷말들도 사내에서 전혀 없는 편이었다. 제가 뒤치다꺼리할 필요 없이 알아서 다 잘하기 때문에 오히려 일하기에는 편한 상사라고 할 수 있었다.
약간의 결벽증만 아니라면 모든 것이 완벽한 사람이었다. 흐트러지는 것을 용납 못 하는 성격답게 제 물건에 타인의 손길이 미세하게 닿은 흔적만 있어도, 다시 원위치를 시키거나 아니면 아예 미련 없이 버리기까지 하는 성격이었다.
그런 성격 탓인지 칼로 무 자르듯, 일 처리도 지나치게 깔끔하다는 게 흠이라면 흠이었다.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사회생활은 젬병이었을 성격이었다. 아니면 윗선에 진작에 찍혀서 고달픈 회사 생활을 했을 수도 있다.
신이 돕기라도 했는지 탯줄까지 잘 타고난 덕에 그런 사내 정치마저 한우진을 비껴갔다. 그래도 저더러 한우진으로 다시 태어나게 해 준다고 해도, 자신은 글쎄, 그런 피곤한 삶은 한순간도 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낯선 타국에서 시차 적응도 되지 않은 지금. 새벽녘에 불려 나가는 이 순간만큼은 정말 한우진이 좋은 상사인지, 처음으로 자문하고 싶을 정도였다. 일 중독답게 제 몸을 혹사했으면 혹사하지, 절대 제 밑의 직원은 혹사시키지 않는 한우진의 밑에서 일하면서 처음 겪는 새벽 호출이었다.
차라리 그런 성격의 상사라면 대수롭지 않게 여겼을 일이었다. 얼마나 큰일이기에 새벽부터 저를 부르는지. 괜스레 불안감까지 들었다. 절로 걸음이 종종걸음으로 빨라진다…….
한 비서는 호텔방에 있는 집무실 격인 다른 방의 문을 두들겼다. 곧 안쪽에서 들어오라는 허락이 떨어지자, 한 비서는 손잡이의 문을 당겼다.
자신의 상사는 미처 옷을 갈아입지도 못했는지 어제의 슈트 차림 그대로 제게 시선을 주지도 않았다. 계약 서류를 검토하고 있는, 피곤한 기색 없이 반듯한 한우진의 얼굴에 한 비서는 저도 모르게 조금 질린 낯을 했다. 때때로, 아니 자주 저 인간이 정말 사람이 맞을까 싶은 순간이 많았지만, 오늘같이 통렬히 느낀 것은 처음이었다.
하지만 노련한 비서답게 그녀는 얼른 그 표정을 갈무리했다.
“전무님. 부르셨습니까?”
“바이어 미팅 세 시간 뒤로 수정 부탁드립니다.”
“그 건은 오후에 하시기로 한 것으로……. 그보다, 너무 이른 시간이라서 바이어들이 그 시간대에 약속을 잡아 줄지…….”
“한 비서님. 부탁드리겠습니다.”
여전히 서류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말씨만 공손했다 뿐이지 강압적인 명령보다 더 사람이 압박을 받게끔 지시를 내리는 우진을 향해 한 비서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아버지뻘 되는 고문들도 그 앞에서는 왜 꼼짝을 못 하는지 새삼스럽게 다시금 느끼는 중이었다. 제아무리 단정하고 예의 바르게 말을 한다고 해도, 그 말을 가벼이 흘릴 만큼 한우진은 호락호락해 보이지 않았다. 단 한 순간도.
사석에서는 본 적이 없는 탓인지, 도무지 그런 그가 제 아내에게는 어떻게 대할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
꼭 저 무뚝뚝한 말투로 프러포즈했을 것 같은 남자였다, 한우진은. 낭만이라는 단어와 영 동떨어진 남자가 어떻게 전형적인 신데렐라 얘기의 왕자님이 되었는지, 의아스러울 정도였다.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이 계약 서류 이 부분이 저희가 요청한 사항과 착오가 있으니, 법인팀에 연락해서 이 부분 알아봐 주세요.”
벌써 계약 서류를 다 검토했는지, 제 쪽으로 밀어 놓는 서류 뭉치에 한 비서는 질겁한 눈으로 한우진을 바라보았다. 일정이 이틀은 남아 있었다. 이렇게 몰아치듯 해치울 필요는 없었다.
“댁에 혹시 무슨 일 있으신가요?”
그리고 한우진이 이렇게 일정을 무리하게 수정하면서까지 계획 밖의 행동을 하는 이유는 분명했다.
그녀가 무뚝뚝하기 그지없는 제 상사의 결혼식에서 딱 한 번 봤던, 금이야 옥이야 제집에 꼭꼭 숨겨 놓고 아무리 막으려 해도 새어 나오기 마련인 한신가의 다른 식구들과는 달리 매스컴에 타지도 못하게, 수억씩 언론에 헛돈을 쏟아부으며 특별히 관리하는 그와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을 것 같던 한우진의 아내.
톡 건들면 꽃잎이 피어날 몽우리를 한껏 움츠린 작은 들꽃처럼, 제법 웃는 게 예뻤던 그의 수수한 아내. 저 무뚝뚝하고 건조한 사내가 왜 빠졌는지, 조금은 이해가 갈 것 같던.
뭔가 웃는 것보다 우는 게 더 이쁠 것 같은 수수한 미인이던, 그의 아내 말이다.
“있습니다. 저는 오늘 일정 끝내고 저녁에 따로 귀국할 테니 한 비서님은 예정대로 귀국하시면 됩니다.”
예사롭지 않은 일이구나 싶었다.
“그리고 전 도착하면 3일…… 아니 일주일 동안 연차 내겠습니다. 급한 일 아니면 다 취소하시거나 일정 뒤로 미뤄 주세요.”
하지만 한우진이 덧붙이는 말에 한 비서는 의아스러웠다. 불과 몇 달 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던 것 같았는데……. 그와 함께 일하던 몇 년 내내 단 하루도 쓴 적이 없는 휴가를 그가 통보하듯 당일 아침에 처음으로 쓴 게.
“귀국하시면 바로 임원진 회의가 있습니다. 꼭 참석하셔야 하는 회의라서, 그건 곤란할 것 같습니다, 전무님.”
“그럼 바로 귀국 후에 회의 참석할 수 있게 진행해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지시하신 대로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얼마나 큰일이기에 이렇게 빡빡한 일정 가운데에서 더 타이트하게 조여서 일들을 소화한다는 것인지. 한 비서는 날래게 서류 뭉치를 양팔 가득 들어 올렸다.
***
우진은 피곤한 눈가를 문질렀다. 아무리 저라고 해도 너무 일정을 무리하게 소화했다. 안 그래도 빈틈없이 빠듯하게 잡은 일정을 더욱 빡빡하게 조였으니, 무리가 가는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어서 이 피곤한 몸을 선아의 품에 눕히고 싶었다. 그녀의 목덜미에 코를 박으며 잠을 청하고 싶었다. 그리고 잠을 자기 전에 원활한 수면을 위해서 해야만 하는 일도.
아니다. 오히려 그의 숙면을 방해하는 달큼한 유혹이 기다릴지도 모르겠다. 지나치게 말랑거리는 선아의 몸뚱이와, 입술을 대면 그대로 녹아 없어질 것 같은 부드러운 살결과, 선아를 이루고 있는 그 밖의 모든 것들이 우진의 숙면을 방해하는 요소였다.
하지만 홀로 그녀를 상상하느라 풀지 못한 욕구 탓에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는 것보다는 훨씬 나으리라. 차라리 그녀의 몸을 몰랐던 때가 더 낫다고 느낄 정도였다. 그때의 독수공방은 이토록 괴롭지는 않았다. 단단히 중독이라도 된 것 같았다.
갑작스러운 금단증세를 겪는 사람처럼 그는 죽을 것 같았다. 기어이 그는 어제 선아에게 자위까지 시켰다. 그가 듣고 있는 가운데에서.
그리고 한우진은 그런 선아의 신음을 들으며, 제 좆을 스스로 까뒤집듯 미친 듯이 흔들었다. 제 두툼한 귀두를 문지르며, 선아의 질 끝까지 밀어 넣은 채 자궁구를 찌르던 감각을 되새겼다.
요도가 닿는 그 쫀득한 감촉을 제 손가락이 재현할 수 있을 리 없었다. 한참은 부족했다. 제아무리 용을 써도 아무것도 선아의 대체품이 될 수 없었다.
한우진이 제아무리 쥐어짜듯 수음을 해도, 도무지 만족할 수 없었다. 싸지 못해서 응집된 정액들이 고대로 제 몸에 남아 있는 느낌이었다. 억지로 싸지른 묽은 쿠퍼액만이 그의 손에 묻어 나올 뿐. 선아의 구멍에서 질질 새어 나오던, 그 색이 탁할 정도로 농도 짙던 정액은 이제 스스로 나오지도 않았다.
오직 선아만이. 오직 제 아내만이. 오직…….
지끈 아파 오는 머리에 우진은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와인 좀 드릴까요?”
승무원의 목소리에 우진은 달아오른 생각을 끊어 냈다. 꼴사납게 선아 생각을 하느라, 기내에서 홀로 성기를 세울 뻔했다.
“아니요. 차가운 물 한 잔 부탁드립니다.”
냉수라도 들이켜, 욕구불만으로 뜨끈하게 열이 오른 몸이라도 식힐 참이었다.
선아가 보고 싶었다. 미친 듯이.
***
우진의 다른 수행 비서가 공항으로 마중을 나와 있었다. 우진은 자신이 출장 가 있는 동안 있었던 업무적인 일들에 관해 비서에게서 간단히 브리핑을 들으면서 걸음을 옮겨 이미 시동을 걸어 놓은 차에 올라탔다.
그의 옆 좌석에 비서가 뒤따라 탔다. 그가 알아야 할 업무적인 내용은 이미 다 보고를 한 상태였다.
따로 마련된 차에 타야 할 비서가 같이 제 업무용 세단에 타자, 우진은 뷰 미러로 운전기사를 확인했다. 우진의 대외적인 운전기사를 도맡아 할 정도로 입이 무거운 믿을 만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제 비서도 그것을 아는 상태인 것 같았다. 아니면 일부러 그를 배정했든가.
“전무님.”
다시금 자신을 부르는 비서의 말투가 어딘지 조금 초조해 보였다.
“어느 분이 전무님을 뵙자고 합니다.”
“…….”
“개인적인 일입니다.”
“개인적인?”
거슬리는 말을 다시금 되짚자, 조금 사색이 된 비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모님과 관련된 일인 것 같습니다.”
거의 표정이 없는 한우진의 얼굴이 노골적으로 구겨졌다. 우진의 사나운 기색에 비슷한 또래임에도 남자 비서는 저도 모르게 겁을 먹고 꿀꺽 침을 삼켰다.
“그게 뭔 말이야?”
“제가 설명해 드리는 것보다는 직접 가서 들으시는 편이 더 나을 듯합니다.”
급속도록 가라앉은 차 안의 분위기에 한우진은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이를 악문 탓에 단단한 턱선이 더욱 도드라졌다.
***
단정하고 앳된 남자애의 낯선 얼굴이 자신을 반기며 알은척을 한다. 한우진은 그쪽으로 걸어가면서도, 제 기억 속에서 조금이라도 비슷한 인물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맞은편에 앉을 때까지 기억이 나지 않자, 낯을 살짝 굳혔다.
선아의 주변 인물은 이미 그의 머릿속에 다 있는 줄 알았는데……. 제 과신에 우진은 와이셔츠 소매 아래에 드러난 시계의 유리 표면을 살짝 손가락으로 문댔다. 회의까지는 아직 시간이 있으니, 천천히 들어도 될 것 같았다.
“어떻게 내 아내를 알죠?”
선아와 무슨 관계며, 왜 그를 선아의 일로 보자고 했으며, 건방지게 저 입에서 듣지 않는다면 한우진이 후회한다는 말까지 왜 나왔는지. 선아와 관련된 전반적인 모든 것을 듣고자 왔다.
“별말 하지 않을게요. 저 선아 씨랑 잤어요.”
“누구랑?”
“선아 씨와 저, 같이 자는 사이예요.”
웃음기를 지우지 않는 남자를 쳐다보며, 한우진은 예의상 곧게 세우고 있던 몸을 뒤로 젖혀 의자 등받이에 상체를 파묻었다. 한 다리를 외로 꼬며, 한쪽 입꼬리를 노골적으로 비틀어 웃었다.
별 같잖은 게 선아에게 다 붙었다 싶었다.
“말해 봐.”
한우진은 턱을 괴었다. 반듯한 자세보다 이런 자세가 더 우진에게는 편했다. 사회적인 위치로나 개인적으로나. 그리고 저를 둘러싼 사람들이나 상황, 그 밖의 모든 것들이 우진이 이런 자세를 하도록 용인해 주었다.
겉멋이 든 것도 아니고, 건방을 떠는 것처럼 보이지 않고. 상대방을 내리깔아 보는 것이 우진에게는 당연했다.
제 태도에 눈에 띄게 당혹스러워하는 남자를 향해 한우진은 한쪽 눈썹을 까닥이는 것으로 말없이 재촉했다.
“처음에는 실수였는지 몰라요. 하지만…….”
“…….”
눈초리가 내려가 순해 보이는 눈매 때문일까. 불그스름하게 얼굴을 붉힌 게 남자인 제가 봐도 제법 봐 줄 만했다. 저 모습으로 선아를 꾀어냈을까.
“그 뒤로부터는 실수가 아니었어요.”
아니면 자신과 달리 하얀 피부에 선아가 색다름을 느꼈나 싶어, 한우진은 자신의 맞은편에 있는 남자의 이목구비와 눈에 들어오는 모든 것을 자신과 비교해 보았다. 선아와의 구구절절한 사연 따위를 늘어놓는 말은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희미한 힘줄조차 보이지 않는 맞은편 남자의 손등과 푸른 힘줄이 툭툭 튀어나오다 못해 마른 살갗 위로 도드라진 굵은 뼈의 형체까지 희미하게 보이는 투박스러운 자신의 손등을 힐끗 내려다보았다.
평소에는 신경도 쓰지 않던 곳까지 괜히 거슬렸다.
“선아 씨를 사랑해요.”
줄곧 내리깔고 있던 그의 시선이 꽤 신선한 개소리에 드디어 맞은편의 상대에게로 향했다. 자신도 쉽사리 단정하지 못한 감정을 저 새끼는 잘도 입 밖으로 내뱉는다 싶었다.
“그래서?”
“그냥 사실을 알려 드리려는 거예요.”
“무슨 사실?”
“제가 선아 씨를 사랑한다는 사실이요. 그리고 선아 씨도 저를 마찬가지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이요.”
그 말에 우진의 입매는 더욱 비틀어졌다. 꼴 같지도 않은 사랑 타령을 하기에는 나이가 너무 많은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뻔뻔스럽게 유부녀를 꾄 주제에 본남편 앞에서 지나치게 당당했다.
“애정 없는 결혼 생활을 이어 가는 게 굴욕스럽지 않으세요?”
“전혀.”
상대가 자신을 도발하기 위해 던진 말에 한우진은 턱을 괸 상태 그대로 간단히 부정했다. 노골적으로 무시라도 하듯 비죽이며 입매를 비트는 것 말고는 밀랍을 바른 것처럼 표정 변화가 없는 우진을 보며, 그는 오히려 그 순진한 인상을 가득 구겼다.
“이 결혼을 계속 이어 갈 수 있으면 나는 선아 씨 발이라도 핥을 수 있어. 선아 씨가 나를 사랑하지 않아도 괜찮아. 이 결혼 생활에 목숨을 거는 것은 전적으로 나니까.”
“…….”
“잠깐 흔들리는 바람 정도도 이해할 수 있고.”
한우진은 제 뺨을 대고 있던 손가락을 까닥이며, 고저 없는 목소리로 천천히 내뱉었다.
실수 정도는 누구나 한다. 선아도 마찬가지일 수 있었다. 새파랗게 어린 남자 놈이 작정하고 유혹해 댄다면, 목석이 아닌 한, 선아도 함정에 빠지듯 거기에 휘말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거기에 남녀는 불문한다고 생각했다. 정계 재계 가릴 것 없이 매번 들었던 게 낯 뜨거운 스캔들이니, 선아도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네가 아니라도, 다른 새끼들이 몇 번 나를 찾아와도 그 정도는 눈감아 줄 수 있어.”
“…….”
그래. 한우진은 그 정도는 참을 수 있었다. 한순간 지나가는 감정까지 옥죌 생각이 없었다. 선아만 제 곁에 있다면, 제 땅에 뿌리를 박고 있기만 한다면. 지나가는 바람 따위에 꽃잎처럼 흔들린다고 해서 그것마저 우진은 그녀를 책망할 생각은 없었다.
“차라리 돈을 원한다고 말해. 내 아내에게 몸으로 하는 화대 정도는 대 줄 용의가 나는 충분하니까. 그게 뭐 첩 노릇을 하는 사내새끼가 할 말 같고. 그런데…….”
그의 비위를 거스른 것은 선아의 외도 따위가 아니었다.
“그 같잖은 입에서 나와 선아 씨의 결혼 생활을 입에 올리지 마. 그 입으로 건방지게 나와 선아 씨의 이혼 같은 얘기도 꺼내지 말고.”
선아에게 배신을 당했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사랑 없이 결혼한 사이였다. 선아에게 돈을 쥐여 주며 거의 반강제적으로 졸라서 이 결혼을 한 한우진이, 감히 선아에게 사랑까지 원한다면 그건 그가 너무 양심이 없는 짓을 선아에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사랑이니 뭐니, 구역질 나게 감히 내 앞에서 지껄이지도 말고.”
선아가 떠난 것도 아니고, 선아가 제 입으로 직접 그를 떠나겠다고 한 것도 아니었다. 선아가 직접 그에게 저 새끼를 사랑한다고 말한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저 새끼는 제 처지가 뭐라도 되는 양, 그의 앞에서 저토록 당당하게 선아를 사랑한다고 말을 하는 것일까. 그 사실이 고까운 것이었다. 한우진의 고상한 비위에 뒤틀리는 것이었다.
자신은 제대로 인식도 못 하는 감정을 저딴 새끼는 제 입으로 술술 나불댈 정도로 안다는 게.
“불륜 상대면 불륜 상대답게 행동해.”
“당신 아내가 나랑 바람을 피웠어……!”
이혼만은 안 된다. 선아를 붙들 수 있는 구실은 그에게는 그게 유일했다. 선아가 이 일을 덮겠다고 하면 오히려 우진의 처지에서는 다행이었다. 적어도 이 일로 그와 헤어질 생각은 선아에겐 없는 것이니.
“내 아내가 한 번 한 실수에 내가 일일이 반응할 생각도 없고, 하고 싶지도 않아.”
“…….”
“그리고 노파심에 하는 말인데…….”
우진의 불안은 다른 곳에 있었다. 채선아가, 선아가 제 곁을 떠나겠다고 하는 만일의 일이 생길 수도 있다는. 감정적으로 여린 그녀이니, 저 세 치 혀로 속삭이는 유혹에 넘어가 그에게 이혼이라는 말을 꺼낼까. 그게 두려웠다, 한우진은.
“혹시 언론이나 다른 곳에 흘릴 생각 마. 돈은 이쪽에서 거기에서 제시한 것보다 얼마든지 줄 수 있으니까.”
자리에 앉느라 풀어 두었던 재킷의 단추를 일어서며 습관처럼 다시 여며 잠갔다. 말려 올라간 와이셔츠 소매를 잡아 빼는 그의 손길에는 아무런 감정도 없었다.
무표정한 얼굴 그대로 밀랍이 된 듯한 제 표정을, 조금 질린 듯한 낯으로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타인이 자신을 볼 때면 항상 느끼는 그 익숙한 시선에, 우진도 눈을 내리깔고는 비릿하게 그를 쳐다보았다. 무려 선아의 내연남이 된다는.
“얼마나 갈지 모르겠지만, 그동안 최선을 다해 봐.”
“…….”
“선아 씨가 너로 인해서 나와의 결혼 생활에 색다른 재미라도 찾았다면, 나도 반대할 생각은 안 해. 되레 내가 고마워할 일이지.”
“당신…….”
문득 걸음을 옮기려다 잠깐 멈춘 우진은 격앙한 듯 자리에서 일어선 남자를 쳐다보았다.
“당신, 미쳤어?”
“좋을 대로 생각해.”
굳이 정정하지 않았다. 우진이 스스로 생각해도, 제가 미친 것 같았으니까. 하지만 분명한 것은 단 한 가지였다. 채선아만 제 옆에 있으면 된다. 채선아가 제 손에 닿는 곳에만 있기만 한다면, 한우진은 모든 것을 감내할 수 있다.
차갑게 식은 머리로 분명히 그렇게 생각했다.
우진의 손안에서 사진이 구겨졌다. 선아가 꽃다발을 한가득 품에 안은 채로 남자에게 입맞춤을 당하고 있는 사진이었다. 풋풋한 어린 연인 흉내라도 내듯, 그 순간이 그대로 박제되어 있었다.
그 사진뿐만 아니었다. 선아가 웬 허름한 이름뿐인 호텔에 들어선 다음에 남자가 들어가는 모습과, 순번을 바꾸듯 남자보다 더 앞서서 나오거나 아니면 뒤에서 나오는 모습까지. 선아의 팔목을 잡는 사진과 어딘가 친근해 보이는 사진까지.
그의 인내심의 한계를 시험하듯.
상대방을 추궁하고 외도의 증거로 쓰기 충분할 정도로 사진을 보내왔다. 마치 여봐란듯이.
“아는 사람은?”
“저밖에는 모르는 일입니다. 사무실로 우편이 도착해서 저만 알고 있는 사항입니다.”
비서는 한신가의 사적인 일을 관리하다가 우진에게 스카우트되어 회사를 옮긴 이로, 우진의 일도 전적으로 담당했던 이력도 있는 인물이었다. 외부로 유출될 일은 없었다.
“발신인은?”
“없었습니다.”
그만 입을 다문다면 설사 그의 부모라도 이 일을 모를 터였다. 당사자인 선아조차도 알아낼 수 없을 것이다.
“임원 회의는 취소할까요?”
“아니. 그대로 진행해.”
“네.”
“그리고 이 일은 그 누구도 알아선 안 돼.”
“네. 알겠습니다.”
마지막까지 당부를 마친 우진은 자동차 뒷좌석 시트에 깊숙이 몸을 묻었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에 의미 없이 시선을 주었다.
하얀 재스민 꽃다발을 안고서, 낯선 남자에게 입맞춤을 당하던 선아의 모습이 다시금 제 눈앞에 어른거리는 것 같았다. 한우진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그런데도 그 환영이 없어지지 않는다.
***
한우진은 꽤 제정신으로 임원 회의까지 무사히 마쳤다. 오히려 평소에는 그냥 넘어갔을 세세한 관련 사항까지 지적하는 그를 보며, 요새 사람이 조금 말랑말랑해진 것 같았는데, 출장을 다녀오더니 더 독해졌다고 몇몇 임원진들이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오직 그의 비서만이 캐리어도 챙기지 않고 차 밖으로 튕겨 나가듯 자신의 집으로 서둘러 돌아가는, 평소와는 다른 우진의 뒷모습을 보며 착잡함을 느꼈다.
들어선 집 안에는 인기척이 없었다. 오히려 그 탓에 그의 예민한 신경이 더욱 곤두서는 느낌이었다. 한동안 한우진은 현관에 못 박힌 듯 가만히 서 있었다. 방황하는 한우진의 시야에 마땅히 잡혀야 할 사람이 없었다. 한우진은 주먹을 꽉 그러쥐었다.
잠자리에 들기에는 아직은 이른 시간이었다. 어둑하게 잠긴 집 안을 한우진은 의미 없이 둘러봤다. 지끈 머리가 아파진다. 통증과 동시에 관자놀이에 맥박이 뛰는 게 도드라지는 것 같았다. 심장은 이미 터질 듯이 쉼 없이 쿵쿵대며, 우진의 불안감을 더욱 증폭시켰다.
한계까지 차오른 두려움과 불안감이 뒤엉켜 겹겹이 쌓이다가 울컥 모든 것을 쏟아 내고 싶은 마음이 솟아났다. 한우진은 구두를 신은 그대로 벽면을 조심스럽게 짚으며 선아의 침실로 들어섰다. 하도 이를 악문 탓에 턱에 동그란 근육이 단단히 잡혔다.
그리고.
당연하게 비어 있을 줄 알았던 침대 위에 선아가 잠들어 있었다. 둥근 무덤처럼 이불을 덮고 잠든 선아의 모습에, 단단하게 뭉친 모든 것들이 맥이 탁 풀리는 느낌이었다.
미칠 듯한 두려움과 불안감은 가셨다. 남아 있는 것은 머리를 태워 버릴 정도로 바짝 열이 오른 감정뿐이었다. 마구잡이로 쏟아붓고 싶었다.
우진은 거칠게 제 얼굴을 손바닥으로 쓸어내렸다. 냉정함을 되찾기 위해 그는 깊게 숨을 들이켰다가 내뱉었다. 아까 남들에게 보였던 모습은 제 객기였나 싶을 정도로. 한우진은 전혀 제어되지 않는 낯선 제 감정에 혼란을 느꼈다.
일단 선아가 있는 침실에서부터 벗어나자는 생각이 들었다. 한우진은 지금 상태에서 자신이 무슨 짓을 할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이 설익은 감정을 조절하기에는 지금의 한우진은 매우 이성적이지 못했다.
“우진 씨?”
한데 불행히도 선아가 그의 인기척에 깨어났다. 한우진은 한쪽 눈을 비비며 상체를 일으킨 선아를 바라보다가, 성큼 그녀의 침대로 향했다.
선아가 낯선 침입자처럼 구두도 벗지 않고 집 안으로 들어선 그에게 의아함을 느끼기도 전에 그녀의 목덜미가 한우진의 한 손에 꽉 붙들렸다.
“읏.”
불시에 득달같이 달려든 우진의 이에 입술이 부딪힌 것인지 아픔이 느껴져 선아가 고개를 조금 틀려고 했다. 한우진의 다른 손이 그런 선아의 양 뺨을 손가락으로 붙잡았다.
그녀의 양 뺨에 제 손가락이 아프게 파고 들어갈 정도로 단단히 고정했다. 억지로 혀를 밀어 넣어, 그녀가 스스로 입을 열 수밖에 없도록 강제했다.
선아는 몰아붙이는 우진의 힘에 밀려 맥없이 다시금 침대 위로 쓰러졌다. 고개 방향을 틀어 가며 선아의 입 안에 제 혀를 밀어 넣고 선아의 입 안 점막을 다급하게 훑어 대는 우진의 입맞춤이 버거워 선아는 그의 와이셔츠 앞자락을 꽉 부여잡았다. 달라붙어 오는 절박한 몸짓에 선아는 그를 밀어낼 수도 없었다.
영문도 모른 채 마구잡이로 당하는 입맞춤은 일방적인 폭력처럼 얼얼했다. 한우진은 맨정신으로는 선아에게 이런 식으로 군 적이 전혀 없었다. 선아가 우진이 전해 주는 쾌락에 흠뻑 젖어 흥분에 취했을 때에나 우진은 이성이 잠시 잠식당한 사람처럼 정신없이 이런 입맞춤을 했었다.
버겁게 입을 그에게 벌려 주면서도, 선아는 그런 그가 낯설어 저도 모르게 어깨를 옹송그렸다. 그의 손이 자신의 몸을 거칠게 제 손바닥으로 마구잡이로 훑다가, 밑으로 파고드는 손길에 움츠린 어깨가 더욱 좁아졌다.
목덜미로 내려간 입술 덕분에 겨우 막혔던 숨을 얼얼하게 내쉬며, 선아는 그의 어깨를 붙들었다.
“우, 우진 씨.”
그리고 그를 불렀다. 그럴 때면 우진은 항상 시선을 선아에게로 향했다. 정신없이 살갗을 빨다가도, 선아의 몸을 쉴 틈 없이 치받는 순간에서도. 조금 남아 있는 이성을 한껏 그러모은 채로 그녀의 손바닥 안에 제 얼굴을 가져다 대고 항상 선아를 보았다.
그런 다정한 한우진만 아는 선아는 지금 이런 그의 모습이 낯설었다.
그녀의 거듭된 부름에도 불구하고, 듣는 척도 하지 않고, 제 입을 한껏 벌려 선아의 목덜미를 잡아 뜯을 기세로 물고 빨고 있는 남자는 선아가 알던 한우진이 아닌 것 같았다.
“아!”
힘껏 물린 탓에 선아가 새된 비명을 내질러도, 한우진은 멈추지 않았다. 그녀의 반응에 오히려 더 제 턱에 꽉 힘을 주었다. 잇자국이 그대로 남을 것 같았다. 선아는 아픔에 눈물이 맺혔다.
슬립 형태의 선아의 잠옷이 성마른 그의 손길에 못 이겨 벗겨지다 못해 찢어발겨 넝마가 될 것 같았다. 큼직한 선아의 젖가슴을 한쪽만 꺼낸 한우진은 제 입을 한껏 벌린 채로 유륜과 유두를 한꺼번에 물었다.
마치 애무라기보다는 젖을 빨아 먹는 것 같은 원초적인 몸짓이었다. 천천히 선아의 몸을 달구기 위한 목적이 아닌. 그저 제 잇새에 살덩이를 채워 넣고서 우악스럽게 빨아 댔다.
“흑.”
아픔에 선아가 흐느끼듯 울음을 토했다. 그 입 안으로 한우진은 제 두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울음기 가득한 입 안으로 우진의 두꺼운 손가락이 들어섰다. 여전히 그는 쭉쭉 선아의 가슴살을 빨고 있었다. 얼마나 맹렬하게 빨아 대는지, 입 안의 압력에 얼얼하게 유두가 곤두설 정도로 아팠다.
한참 뒤에 젖을 빠는 행위를 멈춘 우진은 선아의 입 안에 처넣은 손가락 개수를 늘렸다. 입을 다물 수 없어 침을 입술 옆으로 질질 흘리는 선아를 한우진은 메마른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선아는 저도 모르게 흠칫 몸을 굳혔다. 어쩐지 우진이 무섭게 느껴졌다. 선아가 한우진에게 한 번도 느껴 본 적이 없는 감정이었다. 그를 잘 알지 못했던 때에도, 선아는 한 번도 그가 무섭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의 그는 무서웠다.
그런 선아를 눈치챈 것인지, 한우진이 입매를 비틀더니 선아의 뺨에 제 입술을 마구잡이로 비벼 댔다. 하아. 깊은숨이 선아의 등줄기를 오싹하게 만든다. 그에게서 이런 느낌은 처음 받는 선아는 그의 어깨를 꽉 붙잡았다.
입 안에서 드디어 그의 손가락이 빠져나갔다. 그녀의 몸에 빈틈없이 제 몸을 붙이던 한우진이 제 하체를 조금 뗀 상태로 바지 버클을 풀었다. 그에게서는 아무런 말도 없었다. 항상 선아의 이름을 다정히 부르던 그의 낮은 음성이 없었다. 그저 한우진은 짐승처럼 거친 숨만 내뱉었다.
허공에 조금 허리를 띄운 채로, 선아의 침이 묻은 제 손가락으로 대충 제 성기를 쓸었다. 그것도 모자란다고 생각했는지, 손바닥 안에 제 침을 내뱉고 성마르게 제 성기에 전체적으로 묻혀 댔다. 선아는 눈물이 맺힌 눈을 깜빡였다.
그는 어쩐지 화가 난 것 같았다.
“아읏!”
무섭도록 무거운 침묵 뒤에 이어진 메마른 삽입에 선아의 눈에 맺힌 눈물이 그대로 관자놀이를 타고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