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화 (5/15)

#05

정신없는 하루하루였다. 선아는 사흘 내내 꼼짝없이 침대에만 붙들려 있었다. 한우진은 직접 제 손으로 그녀의 모든 것을 해결해 주었다. 심지어는 화장실에 가려다 중간에 무릎이 풀려 앞으로 넘어질 뻔한 그녀를 안아 들고, 손수 화장실까지 데려다주기까지 했다. 선아가 수치심에 귀까지 벌겋게 달아오르든 말든.

하도 입을 맞춘 탓에 입술이 약간 부어올랐다. 그래서 선아는 제 입술 대신에 제 양 뺨을 제물로 그에게 대 주어야 했다. 희끄무레한 정액을 그녀의 안에 쏟아 냈으면서도 여전히 제 안에 성기를 박아 넣은 한우진의 품에 안긴 채, 선아는 그가 퍼붓는 키스 세례에 떠밀려 허우적대고 있었다.

양 뺨으로는 모자랐는지, 눈꺼풀과 콧등과 이마까지 빼곡히 그는 꾹꾹 제 입술로 눌러 댔다. 받는 선아는 이제는 조금 질릴 정도인데, 하는 그는 전혀 질려 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마치 그녀의 몸에 설탕이라도 발린 것처럼 한우진은 단것에 사족을 못 쓰는 어린애같이 쪽쪽대기 바빴다.

선아의 몸 중에 그의 입술과 혓바닥이 닿지 않았던 곳이 없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선아는 지금 제게 이러고 있는 그가 한없이 낯설었다. 정말로 그 무심하기 그지없었던 제 남편이 맞는지, 선아는 확인하기 위해 종종 그의 얼굴과 몸에 제 손가락을 가져다 대기도 했다.

그럼 확인 사살이라도 하듯 한우진은 선아의 안에 박힌 제 성기를 더욱 깊게 쳐올리거나, 나직한 숨과 함께 그녀의 이름을 부르고는 했다. 그건 선아의 발끝을 간지럽게 했다.

“선아 씨.”

바로 지금처럼. 선아는 충동적으로 제가 먼저 그의 입술을 찾아 제 입술을 부딪쳤다. 부푼 입술이 조금 쓰라렸지만, 다가올 달콤함에 휘감긴 쾌락을 위해 충분히 감수할 만한 것이었다. 선아의 입술을 벌어진 입술이 가볍게 빨아 당긴다.

나란히 누웠던 자세가 순식간에 그가 선아의 몸을 올라타는 자세로 바뀌었다. 박혀 있는 성기가 금세 탄력을 받고서는 선아의 좁은 질 안에서 꿈틀댄다.

“정말 사람을 아주…….”

그의 말은 계속 이어지지 못했다. 선아가 팔을 뻗어 그의 목덜미를 제 품으로 당겼다. 그 가벼운 힘에도 한우진은 속수무책으로 그녀 쪽으로 무너져 내렸다.

그 뒤 선아는 하루 꼬박 동면하는 동물처럼 잠만 잤다. 그 옆에서 한우진이 마치 환자를 병간호하듯 선아를 살뜰히도 챙겼다.

***

선아가 결혼하고 나서, 유일하게 하는 바깥 활동이라고는 일주일에 두 번 유기견과 버려진 고양이를 돌보는 사업을 하는 사립 재단의 봉사 활동이 전부였다. 재단의 이름도 선아의 이름을 따와 지었다.

봉사 활동이라는 것이 생각보다 더 몸을 많이 쓰는 일인 데다가, 간혹 고양이가 할퀴어서 생채기가 나거나 물리는 사고가 발생하는 일 또한 빈번했다. 그래서 우진은 영 마땅치 않게 여겼다.

선아가 주변의 시선을 신경 쓰느라 기사를 대동하지 않고 버스를 타고 그 외진 곳까지 혼자 간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표현에 인색한 그가 대놓고 미간을 찌푸렸다.

“이 집안 식구 중에 누구도 그렇게까지는 하지 않아요. 이제 선아 씨는 한신가의 사람이에요. 그거에 걸맞은 것을 충분히 누릴 자격이 있어요.”

마치 그 말이 자신을 걱정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 꼭 제 아내 역할을 똑바르게 하라는 핀잔 같았다. 그의 눈치를 보느라 횟수를 줄였더니, 이제는 일주일에 한 번 가는 것조차 힘들었다.

그런 차에 보호소 소장에게 연락이 왔다. 일손이 부족하니, 와 줄 수 있겠냐는 정중한 부탁이었다. 보호소 소장은 그녀가 그 재단의 이사장이라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선아는 망설이다가 결국에 집 밖으로 나섰다. 거의 쓸 일이 없는 자신의 신용카드를 만들 때, 교통 카드 기능을 넣기를 잘했다는 생각을 하면서.

경기도 외곽에 있는 보호소는 멀리에서도 컹컹 짖어 대는 소리가 들릴 만큼 시끄러웠다. 선아는 작업복을 입고 삽을 들고 있던 소장을 보며 인사했다.

발밑에 달려드는 작은 강아지들이 득달같이 꼬리를 치면서 선아에게 엉겨 들었다. 선아는 행여 발이라도 밟을까 싶어, 조심히 걸음을 떼었다.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아! 선아 씨. 어서 와. 나야 잘 지냈지. 선아 씨는? 잘 지냈어? 미안해, 이렇게 갑작스럽게 부탁해서.”

선아의 얼굴을 보자마자, 소장은 푸념하듯 그녀에게 하소연했다.

“선아 씨, 나랑 수고 좀 해 줘. 직원 애가 갑자기 오늘부터 안 나오는 바람에…….”

“아니에요. 자주 못 와서 제가 죄송한걸요.”

“선아 씨는 참으로 사람이 착해. 남자들은 뭐 하나 몰라. 우리 선아 씨 같은 사람 놔두고. 내가 오늘 일당은 잘 쳐서 줄게.”

“네. 많이 주세요.”

소장의 인사에 선아는 가벼운 미소를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받은 돈은 도로 보호소의 기금으로 들어갈 것이다. 하지만 선아는 거기에서 더 말을 붙이지 않았다.

분명 말이 길어지면 꼬리가 밟힐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녀가 결혼했다는 사실도 굳이 밝힐 필요가 없는 것 같아서, 소장이 멋대로 상상하게 내버려 두었다. 소장의 성격상 결혼했다는 사실을 알면 꼬치꼬치 물을 것이 뻔했다. 거짓말에는 영 소질 없는 선아였다. 그럼 그녀가 한신가의 며느리라는 사실도 분명 알게 될 터였다.

“선아 씨는 안 늙나 봐. 어쩜 처음 봤을 때랑 똑같지? 아니야. 더 어려지는 것 같아. 어디 가서 고등학생이냐는 소리 안 들어?”

과하게 입에 발린 말에 선아는 살짝 웃고 말았다. 성격이 원체 발랄한 소장의 너스레는 아직도 여전했다. 그녀의 말에는 악의가 전혀 없었다. 조금의 비틀어짐도 없었다. 그래서 선아는 가끔 그녀의 선 넘는 오지랖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그녀의 오지랖은 기본적으로 걱정이라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또한 선아는 그런 것에 한없이 약했다. 작정하고 상대방이 밀어붙이면, 선아가 알아채지 못한 새에 어느샌가 깊숙이 발을 집어넣고 있는…….

“소장님. 저 뭐 하면 될까요?”

“우선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애들 밥부터 주도록 합시다. 그래도 이따가 수의학과 애들이 도와주러 오니까 괜찮을 거야.”

삽으로 막사 안의 분비물을 치우는 야문 소장의 움직임을 흘깃 본 선아는 탈의실로 향했다.

어제 달라붙어 오는 우진을 달래서 안 하기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 아니면 온몸이 쑤셔서 나오지도 못했을 거다.

“선아 씨는 애들 잘 안 만지더라.”

선아는 자신의 뒤편에서 다가와 하는 소장의 말에 굽혔던 허리를 폈다. 캉캉 짖어 대는 개들은 밥그릇에 담긴 사료보다는 발밑에서 꼬리를 흔들며 사람 손길 한번 받겠다고 선아와 소장의 다리에 매달렸다. 원장은 대강 손에 닿는 대로 조막만 한 머리를 쓰다듬었다.

“다 예뻐해 줄 수 없으면, 그냥 다 안 만져 주는 게 공평한 것 같아서요.”

“그런가? 근데 보고 있으면 안 만져 줄 수가 없어. 이렇게 자기 만져 달라고 아우성인데.”

선아는 자신의 손끝을 핥는 느낌에 밑으로 시선을 내렸다. 그녀가 시선을 주자 아예 바닥에 궁둥이를 붙이고 꼬리를 아까보다 더 세차게 흔든다. 동그란 눈에는 기대감이 어려 있었다. 사랑받기를 원하는 막연한 기대감.

상처는 티 나지 않게 밑바닥에 깔아 놓고, 손짓 하나에 모든 것을 바칠 듯한 충직함. 그리고 선아는 이 눈빛이 익숙했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자신은 이렇게 모친을 보았을 테니까. 평생을 이렇게 손길 한 번을 받고 싶어 하는 애절한 눈으로…….

“그렇지? 안 만져 줄 수가 없어.”

선아는 손가락에 감기는 털의 감촉에 옅게 미소를 물었다. 엄마는 그녀의 머리 한번 쓰다듬은 적이 없었다. 그녀는 채선우의 엄마였지, 끝까지 채선아의 엄마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의 유골함도 그토록 원하는 선우의 옆자리로 놓아주었다. 그 뒤로 선아는 그 근처에도 가지 않았다. 사랑하지 않는 자식이 가 봤자, 자신의 엄마는 기뻐하지 않을 것 같았다. 아프기 전처럼 생생한 모습으로 재수 없다면서 그녀에게 윽박이라도 지를 것만 같았다.

이제 선아는 엄마의 망령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평생 자신을 괴롭히던 그림자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소장님!”

상념에 빠진 선아를 일깨운 것은 남자의 목소리였다. 남자애라기에는 뭣하지만 그렇다고 남자라고 칭하기도 모호한 딱 그 나이대 남자애의 목소리.

“선아 씨. 수의학과 애들 왔으니까 우린 숨 좀 돌리자.”

“아……. 네.”

선아는 손을 떼었다. 낯선 자신의 존재가 저들 눈에 거슬렸나. 뭔가 시선이 꽂히는 느낌에 선아는 입을 가리고 있던 마스크를 턱으로 내렸다. 인사를 해야 하는지, 아니면 그냥 모르는 사이처럼 지나치는 것이 서로에게 더 나은지 고민하며 선아는 눈을 깜빡였다.

“선아 씨, 인사해. 이쪽은 우리 민호.”

소장은 저를 부르던 남자애를 간단히 소개했다. 선아는 고개를 살짝 까닥여 인사를 했다. 그녀의 인사에 눈을 껌뻑이던 남자애도 인사를 한다. 선아는 살짝 웃었다.

“여기 입술 옆에 뭐 묻었어요.”

선아는 제 입술 옆을 손가락으로 콕콕 가리켰다. 그러자 그가 얼굴이 벌게져서는 손등으로 제 입술 옆을 마구 문지른다. 창피한지 얼굴과 귀밑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조금 전에 초코우유를 먹어서 묻, 묻었나 봐요.”

이유도 어쩐지 애 같았다. 선하의 나이대에 가까운 남자애를 보자, 기숙학교에 있을 선하가 떠올랐다. 요새 시험이라고 해서 연락이 뜸한 것이 서운했던 차였다.

선하가 입학한 기숙학교는 대학 진학률이 좋은 대신에 그만큼 외부와 격리된 생활을 했다. 선하가 원한 것이고, 그 애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좋은 선택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지만. 그래도 선아는 종종 섭섭할 때가 있었다. 그때의 자신은 모두가 날아가고, 아무도 없는 지붕 위에 홀로 남겨진 새 같았다.

“민호가 몇 살이지?”

“스물다섯이요.”

“군대는 다녀왔고, 민호 부모님도 의사랬지?”

갑자기 왜 그런 것들을 물어보는지. 선아는 불쾌한 기색 없이 고개를 순순히 끄덕이는 남자애가 자꾸 자신을 흘끗흘끗 쳐다보는 것 같아서 눈을 깜빡였다. 남자애는 피부가 깨끗하고 이목구비가 단정해서 제 또래의 여자애들한테 인기가 많을 것 같았다.

“선아 씨, 민호 잘생겼지?”

“네…….”

대답하면서도 선아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잘생겼나? 저 정도면 귀엽다고 하는 편이 더 어울릴 것 같았다. 잘생겼다는 말은 한우진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선이 짙으면서도 그렇다고 너무 부담스럽게 느껴지지도 않고, 또 그게 너무 잘 어울리는 생김새를 가졌다. 한우진은.

이루고 있는 선이 유약하지도 않으면서 아름답다는 말이 잘 어울리는 남자. 선아는 살면서 한우진보다 인물 좋은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그것은 미디어를 통틀어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독보적이었다. 어리석은 짝사랑을 빼고 봐도 그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민호 애인도 없대.”

왜 이런 얘기를 꼭 귓속말로 하는지. 선아는 영문을 몰라 눈을 깜빡였다. 소장이 자신의 옆구리를 손가락으로 콕콕 찌르는 이유도 알 수 없어서 당혹감에 눈만 깜빡거렸다. 제 나이에서 조금만 더하면 띠동갑일 남자애는 발그레 뺨만 붉히고 있었다.

선아는 설마 하는 생각에 고개를 저었다. 소장이 아무리 저를 좋게 본다고 해도, 나이 차이가 많은 자신을 저 어린애한테 가져다 붙일 거라는 생각은 손톱만큼도 하지 않았다.

한창 개들을 돌보고 있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작은 사모님. 전무님, 댁에 벌써 오셨어요.」

집안일을 돌봐 주시는 아주머니가 보낸 핸드폰 메시지에 선아는 눈을 키웠다. 아직 그의 퇴근 시간이 아니었다. 그는 별로 이런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말없이 어딘가로 가는 것. 그도 매일 딱딱하게 보고하고는 했다.

그는 무심한 것과는 별개로 자신을 필요 이상으로 걱정했다. 둘이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그녀가 깜빡하고 휴대전화를 집에 놔두고 외출했을 때.

그는 처음으로 그녀에게 화를 냈다. 크게 소리를 지른 것도 아니고, 볼멘소리를 제게 직접 한 것도 아니지만. 그는 근처 슈퍼 로고가 찍힌, 그녀의 손에 들린 비닐봉지를 보다가 이를 꽉 물고 깊은숨을 내뱉었다. 영문을 모르는 선아를 내버려 두고 방 안에 들어가더니, 망가진 그녀의 핸드폰을 그녀에게 건네며 그는 사과했다.

“핸드폰 망가트려서 미안해요.”

하나도 미안하지 않은 표정으로 그는 평소와 다름없는 높낮이와 목소리로 사과했다. 선아는 그의 커다란 손 위에 놓인, 그의 반듯한 손과는 어울리지 않는 자신의 오래된 핸드폰을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낡은 핸드폰의 액정이 모두 나가 있었다.

그때의 선아는 망가진 제 핸드폰보다는 조금 흐트러진 그의 머리카락에 더욱 오래 시선을 두었다. 항상 포마드로 깔끔하게 넘긴 머리카락이 조금 삐져나와 있었다. 선아는 그 머리카락을 만지고 싶었다. 손끝이 간질거렸다.

제 중증은 그때부터 이미 시작되었다. 어리석은 짝사랑을 자각한 것이 우습게도 그 순간이었다.

그 뒤부터였다. 그가 꼬박꼬박 제 일정을 그녀에게 보고하듯 문자로 보내는 것이. 그에 맞춰 선아도 제 지루한 일상 중의 한 단편을 그에게 꼬박꼬박 보냈다. 삭막한 부부 사이에 조금 살가운 행위라 부를 만했다.

선아는 그에게 보통 때처럼 문자를 보낼까 하다가, 통화 버튼을 눌렀다. 신호음은 길지 않았다. 기다렸다는 듯 바로 그가 전화를 받았다.

[어디예요?]

득달같이 묻는 말에 선아는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뭐라 둘러댈 말을 생각하느라 조금 시간을 끌었다.

“지금 백화점이요. 쇼핑하러 왔어요.”

그는 이상하게 선아가 가는 곳들을 영 마음에 들어 하지 않으면서, 유일하게 백화점은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대놓고 말은 하지 않고, 내색도 잘 안 하지만.

한우진은 선아가 돈을 쓰면 쓸수록 기뻐하는 기색이었다.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미 선아는 그의 돈을 최대로 빌려다 썼다. 그런데도 그는 거기에서 더 선아가 돈을 쓰길 원했다. 마치 자신의 존재 의의를 거기에 둔 사람처럼.

하지만 때마다 시댁에서 보내온 사치품으로 자신의 드레스 룸은 꽉 차 있었다. 이미 제 분수에 맞지 않을 정도로 과분하게 받고 있었다. 그 정도도 자신에게 무거웠으며, 제 처지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한 번도 긁지 않은 그의 카드는 아직도 화장대 서랍의 가장 깊은 곳에 고이 놓여 있었다. 여기서 더 이상의 빚은 만들고 싶지 않았다.

[내가 그쪽으로 갈까요? 짐 무겁지 않아요?]

“기, 기사님 불렀어요. 우진 씨는 걱정할 거 없어요.”

“선아 씨!”

멀리서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선아는 얼른 핸드폰의 밑 부분을 감싸 쥐었다. 그리고 더욱 구석진 곳으로 들어가 조심스럽게 우진을 불렀다. 그가 듣지 못했기를 바랐다.

쓸데없는 거짓말을 한 것이 이제 와 후회가 됐다. 그는 별말을 하지 않을 것이다. 할퀴어져 있는 선아의 손등과 그가 돈을 들여 보낸 관리 숍에서 수십만 원을 주고 관리받은 손톱이 망가진 것을 조금 못마땅하게 보고 넘어갈 터였다.

하지만 이미 되돌릴 수 없는 강물을 건넜다. 이럴 때마다 선아는 불쑥불쑥 나타나는 엄마에 대한 기억에 미간을 찌푸렸다. 남의 비위를 조금이라도 거스를까, 먼저 배를 까뒤집고 비굴하게 구는 구석은 오래전부터 모친에게 학대당하며 학습한 것이었다.

[알았어요.]

우진은 별말이 없었다. 선아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럼 이따가 집에서 봐요.”

선아는 조금 속삭이듯 말했다. 네, 빨리 와요. 어쩐지 어리광 같은 우진의 말에 선아는 조금 소리를 내어 웃었다.

선아는 보호소가 있는 근처 호텔에서 씻고, 서둘러 쇼핑몰에 들렀다. 그에게 한 거짓말도 있으니 빈손으로 덜렁 들어가기가 그랬다. 1층에 늘어선 명품관 매장 중에 로비와 제일 가까운 곳으로 무작정 들어갔다.

그리고 전시된 것 중 제일 무난해 보이는 디자인의 가방을 가리켰다.

“저거 주세요.”

빠른 걸음으로 종종 들어와서 대뜸 물건부터 달라는 요구에 흰 장갑을 끼던 직원은 조금 얼빠진 얼굴로 그런 선아를 보았다. 단숨에 선아의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훑어 내렸다. 고질적인 직업병이었다. 그리고 계산된 아주 친절한 미소를 안면 가득 지었다.

양 귀에 바짝 달린 작은 귀걸이는 분명히 다이아몬드였다. 세심하게 세공한 것인지 조명 아래에서도 은은히 빛을 냈다. 단순한 듯 보이지만, 질감이 뛰어난 옷도 분명히 몸에 감기는 태가 남달랐다.

더군다나 그녀가 지금 뒤지고 있는 핸드백은 국내에 출시도 되지 않은 브랜드의 제품이었다. 남들은 흠집이 날까, 전전긍긍한다는 그 가방을 여자는 아무렇지도 않게 다루고 있었다.

돈을 바르다 못해 아예 때려 부은, 철저히 계산된 단순한 옷차림이었다. 머릿속이 재빠르게 돌아갔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제 앞에 있는 부잣집 딸은(아니면 며느리인지는 모르겠으나) 제 머릿속에 없었다. 그러면 다른 지점을 이용하는 고객일지도 모르겠다고 그녀는 짐작했다.

“혹시 실례지만, 명단에 계신 고객님이신가요?”

“아……. 명단이요?”

난감한 기색이 역력한 표정이었다. 직원은 끼려던 장갑을 벗으며 예의 미소를 띠었다. 차갑고도 아주 친절한 미소였다. 그렇지만 결코 만만하게 보이지는 않는.

“고객님. 정말 죄송한 말씀이지만, 저희 브랜드는 철저히 회원제로 운영을 하므로 회원이 아니신 분들의 방문과 구매를 제한하고 있습니다.”

기계적으로 안내 문구를 읊은 직원은 최대한 에둘러 이 손님을 쫓아내기 위해 운을 뗐다.

타 브랜드와 차별을 둔다는 명목으로 철저히 회원제로만 운영하고 있었다. 물건을 사기 위해 사람들은 기꺼이 자신의 개인 정보를 모두 미주알고주알 회사에 서면으로 제출했다. 이 콧대 높은 브랜드는 돈 있는 사람 중에서도 등급을 매겨서 자신들의 물건을 살 만한 품격을 갖추었는지 저울질했다.

인과관계가 뒤바뀐 것 같지만, 그런데도 사람들은 모두 이곳의 회원이 되기 위해 눈에 불을 켰다. 제 눈앞의 손님이 아무리 가방 열 개 값을 싸 들고 왔어도 명단에 없다면 빈손으로 매장을 나가야 했다. 그녀는 처진 눈꼬리 덕에 한없이 순해 보이는 손님을 향해 축객령을 내리기 위해 계산대를 나와 문고리를 잡으려 했다.

“채선아?”

매장 안에 먼저 들어와 있던 손님이 쓰고 있던 선글라스를 벗으며 그녀의 이름일 법한 소리를 내지만 않았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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