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수정
#01
그를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그는 우아한 짐승 같았다. 이질적인 그 두 단어만큼 그에게 잘 어울리는 표현은 없을 듯하다. 날것의 본능을 잘 누른 정갈한 귀족적인 느낌이 한우진에게는 있었다. 신분제가 없는 지금 그런 표현을 하는 것 자체가 웃기는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이혼이라는 단어를 꺼낸 순간조차 그는 평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오히려 그녀가 먼저 말하기를 기다리고 있었을까. 겉으로는 무심해도 그런 면에서는 섬세한 사람이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다시 말해 봐요, 선아 씨.”
되묻는 목소리도 평소와 다를 게 없었다. 묘하게 가라앉은 게 평소보다 더욱 차분해 보였다. 괜히 손가락을 꿈지럭대고 있는 자신이 더욱 부산스러워 보일 지경이었다.
예전부터 생각했던 것이지만. 도무지 자신의 맞은편에 앉아 이혼 서류를 내려다보고 있는 저 남자가 자신보다 세 살은 어린 연하라는 것이 현재에도 믿기지 않았다.
“인제 그만해도 돼요. 엄마도 돌아가셨고, 이제 더 이상 우진 씨한테 이렇게 신세를 질 수는 없어요.”
다행이다. 목소리가 떨리지 않았다.
한우진은 어리석은 남자였다. 고작 고등학교 때부터 친했던, 죽은 친구의 누나를 선뜻 책임지겠다고 말할 만큼. 그깟 동정심 때문에 도무지 수지가 맞지 않는 결혼을 겁도 없이 덥석 그녀에게 제안할 만큼.
선아는 준비해 둔 다른 서류를 그에게 내밀었다.
“이거는 우진 씨가 내게 빌려준 돈을 갚겠다는 채무 이행 관련 서류예요. 몇 년이 걸릴지는 모르겠지만, 최선을 다해서 갚을게요.”
한우진의 차분한 시선이 선아가 이혼 서류 옆에 내민 다른 서류로 향한다. 그의 매끈한 검지가 서류에 적힌 금액을 정확히 가리킨다.
“선아 씨가 내게 어떻게 5억을 갚는다는 거죠?”
결혼 전 그가 탕감해 준 사채 3억과 그동안 들어갔던 엄마의 병원비, 동생 선하의 사립 기숙사비까지 계산한 금액이었다. 너무 적게 적었나. 선아는 자신도 모르게 허벅다리에 놓인 손가락을 손톱으로 꾹꾹 누르며 괴롭혔다.
“금액이 너무 적나요? 그러면 우진 씨가 청구금액을 정해 주면…….”
“아니요. 내가 묻는 건 그게 아니에요.”
그답지 않게 자신의 말을 중간에 자른 그의 말투가 조금 신경질적으로 들렸다. 선아는 상황이 상황인 만큼 자신의 착각일 거라 생각했다. 제게만큼은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각박한 그가 그럴 리가 없을 테니까.
“제대로 된 대학 졸업장도 없는 채선아 씨가 내게 어떻게 돈을 갚겠냐고 묻고 있는 거예요. 어디서 돈이 나서, 이 금액을 나에게 갚을 건가 싶어서요.”
그리고 그런 선아의 생각이 착각이라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그의 음성은 평소와 다름없이 고저가 없었다.
“취, 취직하면 조금씩 갚을 수 있을 거예요. 한꺼번에는 갚지 못해도 조금씩 갚을게요. 갚을 수 있어요.”
그녀가 말을 하는 와중에도 그의 검지가 가볍게 서류 위를 두들겼다. 왼손 약지에 끼워진 결혼반지가 그의 두꺼운 손가락 사이에서 유달리 빛을 낸다. 선아는 거기에 고정했던 시선을 억지로 떼어 냈다.
그는 결혼 서약 이후 단 한 번도 그 반지를 뺀 적이 없었다. 그만큼 한우진은 부담스러울 정도로 과하게 착실한 남편이었다. 애정 없는 이 결혼에도 혹시나 그가 진심이 아닐까 하고 선아가 의심할 정도로.
그리고 그 반지의 반짝거림이, 이 순간 선아의 가슴을 짓눌렀다. 선아는 제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매만졌다. 그와 같은 디자인의 반지가 제게는 조금 과하게 느껴졌다. 한우진처럼.
말없이 서류를 내려다보고 있는 우진이 살짝 고개를 기울인다. 도통 그녀의 말을 못 알아듣겠다는 듯.
“한 달에 얼마씩 갚을 수 있는데요? 오백? 아니, 그것보다 선아 씨가 월에 오백이라도 벌 수 있을까요?”
“…….”
“선아 씨의 머리가 그렇게 꽃밭일 줄은 몰랐는데. 벌써 한신가의 며느리가 다 된 거예요?”
그의 검지는 강박적으로 서류 위를 두들겼다. 반복적인 행위에 손톱자국이 종이 위에 선명하게 찍힐 것 같았다. 그리고 선아의 손톱은 이미 제 손등 위를 파고들고 있었다. 우진의 말에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나직하고도 단정한 음성은 자신을 비꼬는 것이 아니라, 사실을 알려 주는 것이라는 듯 감정이 없었다. 선아도 그가 자신을 비웃기 위해 그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제게 그런 감정조차 없는 이였다. 그 말에 상처를 받지는 않았다. 다만…….
“괜히 손등만 괴롭히지 말고 내게 말해 봐요.”
그는 한숨과 함께 조금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시선이 어쩐지 자신의 손등 위로 향하는 것 같아서 선아는 다른 손으로 제 손등을 가렸다. 고치려고 해도 뭔가 불안하거나 초조할 때면 옛날의 버릇이 어김없이 튀어나왔다.
“그럼, 우진 씨는 이 의미 없는 결혼 생활을 계속하고 싶은 건가요?”
“네. 유지하고 싶어요. 이혼이라는 게 겨우 서류에 도장을 찍는다고 다 해결될 문제도 아니고. 특히나 제 부모님 같은 경우는 선아 씨 생각보다 더 이런 거에 보수적인 분들이셔서, 우리 부부가 이혼하겠다고 해도 쉽게 허락해 주실 분들도 아니고요.”
선아는 자신들을 보며 은근히 그녀의 임신을 부추기던 시부모님을 떠올렸다. 한신가의 회장 내외는 재벌 2세들 중 드물게 연애 결혼을 해서 사이가 돈독했다. 슬하에 아들을 다섯이나 둔 그들은 얼른 선아도 임신하기를 바랐다.
결혼한 지 3년이나 지났으면 이제 둘만의 신혼 생활도 즐길 대로 즐긴 것 아니겠냐며 은근히 종용하거나, 그녀에게 이제 막 태어난 그의 조카를 안겨 주고서 예쁘지 않냐고 호들갑을 떨기도 했다. 그런 시어머니의 눈빛에는 손주를 바라는 간절함이 묻어 있었다.
그리고 항상 그런 그녀의 시선에 죄책감을 느꼈던 선아였다. 안 그래도 한우진과 비교하면 많이 부족한 자신을 보고도 선뜻 결혼을 승낙해 준 시부모에게 면목이 없었다.
선아는 한우진과 자신의 아이를 원했다. 그녀에게는 뭔가 증표가 필요했다. 이 결혼에서 자신이 아예 쓸모없는 존재가 아니라는 걸 아이를 통해서라도 증명해 보이고 싶은 것일까.
그런 자신의 마음을 한우진은 어렴풋이 눈치를 채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선아가 제 젖먹이 조카를 안고 있을 때, 미묘한 낯으로 선아를 쳐다보았는지도 모른다. 묘하게 불쾌해 보였던.
그런 그를 두고 자신이 임신이라니. 애초에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와 선아는 표면적으로 한 결혼 생활 내내 실수로라도 단 한 번도 잠자리를 한 적이 없었다.
그는 2층의 침실을 사용했고, 선아는 아래층의 침실을 사용했다. 그는 최대한 선아와 마주치지 않도록 노력했다. 그래서 처음에 선아는 막연히 그에게 여자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드라마에서만 보던, 그의 연인을 위한 방패막이 될 줄 알았다. 차라리 그랬다면 덜 비참했을까. 자신을 피하는 그에게 타당한 이유라도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선아의 예상과는 달리 한우진에게 다른 연인은 없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선아가 봐도 그의 사생활은 이상하리만치 깨끗했다. 그렇다고 선아가 그에게 무슨 의미 있는 사람이라는 건 아니었다.
선아는 그에게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냥 선아는 집 안에 존재하는 가구와 같았다. 뭔가 필요성이 있어서 집에는 들여놓았지만, 그다지 신경은 쓰지 않아도 되는 물건.
선아는 질끈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리고 잠깐 혀를 내밀어 마른 입술을 적셨다. 그때에도 우진의 시선은 선아에게 못 박혀 있었다. 선아는 차마 그의 얼굴을 쳐다보지 못하고 테이블의 둥근 모서리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아이가 가지고 싶어요. 그런데 우리 둘은 결혼 생활 내내 한 번도 잠자리하지 않았어요.”
“…….”
“그것도 명백한 이혼 귀책사유예요.”
“…….”
선아는 그의 유일한 흠집을 들먹였다. 그것 빼고는 그는 남들이 봐도 완벽한 남편이었다. 굳이 책을 잡자면 그것이 유일했다.
그리고 사실 선아는 자신의 아이가 가지고 싶었다. 꼭 우진과의 아이가 아니어도 상관없었다.
그냥 맹목적인 사랑을 주고 싶었다. 그리고 이유가 없는, 조건 없는 사랑을 받고 싶었다. 가족을 이루고 싶었다. 제 생애에는 한 번도 제대로 가진 적 없는 것을 가지고 싶었다.
남들과 똑같은. 정말로 평범하고, 남들이 봐도 특별할 게 없는 아주 보통의 가족. ‘평범한’이라는 단어랑 전혀 어울리지 않는 한우진에게는 못 얻을 아이를.
그는 말이 없었다. 선아는 필시 벌겋게 달아올랐을 자신의 뺨에 차갑게 식은 제 손을 가져다 대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도 우진의 눈에 이상해 보일 것 같아서 하지 않았다. 그저 둘이 앉아 있는 테이블의 둥근 모서리만 쳐다보며 그의 입에서 이혼하자는 말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미안해요.”
그리고 안절부절못하던 선아는 그의 입에서 나온 말에 놀라 숙이고 있던 고개를 퍼뜩 들었다. 한우진은 난감하다는 듯 자신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비비고 있었다. 그리고 긴 숨을 내뱉었다. 한숨과는 달랐다. 마치 참고 참았던 숨을 이제야 내뱉는 느낌이었다.
“나는 선아 씨가 그런 생각을 하는 줄 몰랐어요.”
“…….”
“미안해요. 내가 무관심해서, 선아 씨 마음을 미처 눈치채지 못했어요.”
뭔가 이상했다. 얘기가 이상한 쪽으로 흐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제지할 말이 딱히 떠오르지 않는다.
“우리 노력해 보죠.”
선아는 제 귀가 제대로 뚫린 것은 맞을까 의심했다. 아니면 자신의 머리 한쪽이 잘못되어 그의 말을 곡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는 이혼을 말하는 걸까? 아니면…….
“무엇을요?”
선아는 오히려 멍청히 되물었다. 이마를 문지르던 그는 이제는 입가를 문지른다. 그의 입은 커다란 손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항상 무뚝뚝하던 눈매가 미묘해진 것도 같았다. 선아는 뭔가 위화감을 느끼기도 전에 그가 한 말에 넋을 빼앗겼다.
“우리 아이 말입니다. 가지도록 노력해 봐요.”
“아…….”
선아는 멍청한 감탄사만 내뱉었다. 이상하게 덫에 스스로 걸려든 기분이었다.
***
선아는 잘근잘근 자신의 엄지에 잇자국을 냈다. 방 안쪽의 욕실에서 들리는 물줄기 소리가 유난스레 귓가에 박혀 들었다. 지금 한우진이 자신의 침실에 딸린 욕실에서 씻고 있었다. 3년 동안 한 번도 그는 선아의 침실에 실수로라도 들어온 적이 없었다.
뭐가 어찌 된 건지. 분명 그녀는 한우진이 출근하기 전에 그에게 이혼 서류를 내밀었다. 순순히 받아들일 줄 알았던 그는 미안하다며 노력하자고 했다. 이혼으로 시작한 얘기는 아이를 갖기 위해 노력하자는 말로 끝났다.
우진이 출근한 이후 선아는 멍하니 거실의 소파에 앉아 있었다. 집안일을 도맡아 해 주는 아주머니가 권한 식사도 거부한 채로 핸드폰 시간만 강박적으로 확인했다.
시간이 어떻게 가는 줄도 몰랐다. 그저 선아의 머릿속에는 아침에 우진이 했던 말만 끝없이 되풀이되고 있었다.
정확히 6시 30분쯤에 도착한 그는 자신을 보고 기겁한 듯 놀라 온종일 붙박여 있던 소파에서 벌떡 일어선 선아를 향해 태연히도 말했다.
마치 이 순간만을 기다렸다는 듯. 우진을 보자마자 혼비백산하여 뻣뻣하게 굳은 선아와는 달리 그에게는 일말의 망설임조차 보이지 않았다. 인사말도 생략한 채로 그는 대뜸 선아에게 물었다.
“내가 먼저 씻을까요?”
여상하게 코트를 벗어 소파의 등받이에 걸쳐 놓으며 평소와 다름없는 목소리로.
단정한 한우진은 항상 퇴근 후에는 곧장 2층의 드레스 룸으로 올라가서 일상복으로 갈아입었다. 그러고는 2층에서 모든 것을 해결했다. 식사 시간에만 잠깐 내려올 뿐. 선아가 생활하는 1층에는 발걸음조차 하지 않았다.
한우진의 그 기계 같던 습관이 처음으로 깨졌다.
선아는 소파의 등받이에 걸쳐진 그의 검은 코트와, 언제 벗었는지 그 위에 가지런히 놓인 재킷을 멀거니 내려다보았다. 겨우 이것 가지고 일탈 행위라 칭하기는 이상했지만. 최초의 그의 일탈을 엿본 것 같다.
“선아 씨?”
그가 와이셔츠의 단추를 하나 끄르며 그녀를 불렀다. 선아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는 목까지 채워져 있던 와이셔츠 단추를 두어 개 끄르고, 이제는 소매의 커프스를 풀고 있었다.
항상 스리피스의 맞춤 슈트를 꽉 빈틈없이 갖춰 입던 그가 아니었다. 그의 외출복인 그 무채색의 슈트들은 꼭 수도자들이 입는 수단 같아서, 한우진의 금욕적인 얼굴을 더욱 도드라지게 했다.
잔머리 하나 없이 머리카락을 모두 뒤로 넘긴 깔끔한 포마드도 그의 차가운 인상을 더욱 이지적으로 만들었다. 우진은 무조건 그 박제된 모습을 어느 곳에서건 유지했다. 같은 집에 사는 선아에게조차. 그는 딱 그 모습을 유지했다.
그래서 지금 그의 흐트러진 모습을 처음 본 선아는 순간 당황하고 말았다.
“먼저 씻으세요.”
말도 되지 않는 얘기를 스스로 꺼낼 만큼. 이미 내뱉어 버린 말을 주워 담을 수도 없었다. 그녀의 말에 그는 곧바로 그녀의 침실로 들어가 버렸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선아가 종종거리며 그의 뒤를 따라 들어갔지만, 그는 벌써 선아의 침실에 딸린 욕실로 들어가 버린 후였다. 일 처리가 재빠른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가 이런 순간조차 재빠른 줄은 몰랐던 선아는 굳게 닫힌 욕실 문 앞에서 우물쭈물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그녀가 노크하려 손을 들어 올렸을 땐 이미 물줄기 소리가 그녀의 귓전을 세게 때리고 있었다.
갑자기 뺨이라도 맞은 것처럼 선아는 바짝 굳었다.
이렇게 멀뚱멀뚱하게 서 있을 수는 없는지라 일단 침대의 모서리에 앉았다. 반쯤 정신을 놓은 그녀는 멀거니 창밖을 바라보았다.
요즘 날이 풀린 탓에 저녁 해는 평소보다 길었다. 그리고 저물어 가던 해가 완전히 넘어갔을 때쯤 그의 샤워가 끝났다. 이제는 완벽한 밤이었다. 길다면 매우 길고, 짧다면 한없이 짧은 시간이었다.
굳게 닫혀 있던 욕실 문이 열렸다. 아무런 소리가 나지 않았지만, 선아는 괜히 경첩의 소리가 크게 들리는 것 같았다. 긴장감으로 뻣뻣하게 굳은 몸이 더욱 뻣뻣해졌다.
욕실에서부터 새어 나오는 수증기와 함께 샤워용 수건으로 겨우 아래만 가린 반나체의 그가 나오자, 선아는 자신도 모르게 ‘흡!’ 숨을 급하게 들이켰다. 사레가 들리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우진이 하루도 빼놓지 않고 운동한다는 것은 평소에도 알고 있었다. 그래도 저토록 완벽하게 몸이 좋은지는 몰랐다. 새삼 불공평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셔츠의 가슴 부분이 유독 팽팽해진 이유가 커다란 골격에 붙어 있는 저 가슴 근육 때문이었나 보다.
과하지 않을 정도로 도톰하게 근육이 붙어 잘 짜인 느낌이 드는 복근부터, 눈에 띄게 두드러진 큰 근육과 이어진 세밀한 근육 하나하나까지. 어느 하나 부족한 것 없이 제 위치에서 적당한 볼륨으로 타인의 눈을 과하게 즐겁게 할 만큼 잘 자리 잡고 있었다.
얼굴만큼이나 그의 몸은 완벽했다. 평소 그가 풍기던, 정제된 짐승 같은 느낌은 그의 저 몸 덕분일지도 모른다. 남들보다 두 뼘은 더 큰 키와 타고난 뼈대가 굵고 긴 탓인지 둔하다는 느낌보다는 매끈하다는 느낌만 들었다.
선아는 당황했다. 그가 못해도 실내복은 입고 나올 줄 알았다. 덜렁 아랫도리만 가린 나체가 ─그것도 아주 훌륭한─ 다가오자 선아는 눈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몰랐다. 도망치자니 웃기고, 그렇다고 뻔뻔스럽게 쳐다보자니 그것은 감당 못 할 것 같았다.
마른침을 소리 없이 삼킨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침대에 놓인 자신의 엉덩이 위치를 서서히 옆으로 옮기는 것밖에 없었다.
바짝 긴장한 선아와 달리, 한우진은 매우 태평했다. 물기 젖은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털며. 한 발짝 한 발짝 천천히 선아에게 다가간다. 급할 것이 전혀 없다는 듯. 제 사정거리에 있는 사냥감을 천천히 몰이라도 하듯이.
선아는 제가 꼭 사지로 내몰린 사냥감이 된 것 같았다. 더는 물러날 곳도 없었다.
“선…….”
그가 입술을 떼자, 선아는 기겁하며 먼저 그의 말을 잘랐다.
“내, 내가 말려 줄까요?”
어떻게든 시간을 끌어야 한다는 생각에 되는대로 막 내뱉자마자, 선아는 입술을 깨물며 후회했다. 그런 친근한 행위 따위 그는 원치 않을 것이다. 이러는 것조차 그는 제 의무 때문에 하는 일일 텐데…….
어쨌든 서류상 그녀의 남편은 한우진이고, 한우진은 쓸데없는 책임감이 강한 남자이니. 그녀가 들먹인 남편의 노릇을 억지로 하는 것일지도. 바보같이 선아만 혼자 감정적으로 휘둘리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녀와 조금 떨어진 곳에 우진이 앉는다. 값비싼 매트리스는 그의 무게도 흔들림 없이 충분히 흡수했을 테지만, 선아는 어쩐지 무게중심이 그에게로 쏠리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는 그녀에게 제 손에 들린 수건을 넘겼다. 검은 머리카락에서 뚝뚝 떨어진 물은 그의 몸의 움푹 팬 굴곡을 따라서 주르륵 흘러내렸다.
평소 그의 성격으로 유추해 보면 이렇게 제대로 물기를 털지도 않아서 머리카락에서 뚝뚝 물을 흘리는 것이 아니라 헤어드라이어로 꼼꼼히 말리고 완벽하게 손질까지 할 줄 알았다. 그의 다른 면을 엿본 기분이었다.
그는 지나치게 깔끔했다. 그녀의 앞에서는 더욱 흐트러진 모습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언제나 정제된 모습 그대로였다. 꼭 그가 선아와 자신의 거리를 재는 것 같았다. 겉모습뿐만 아니라 속까지도.
표면상의 부부일지라도 살을 부대끼고 살기에는 뭣하고, 그렇다고 생판 모르는 남처럼 아예 무관심한 것은 아닌. 일정한 선을 그어 놓고 서로의 구역에서는 조금도 벗어나지 않는, 어떨 때는 남보다 더 못한, 그런 어정쩡하고 미온적인 관계.
그리고 그런 그의 모습에 아무리 덤덤히 반응하려 애쓰는 선아라도 완전히 상처를 받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래 줄래요?”
당연히 거절할 줄 알았던 그가 냉큼 고개를 숙여 제 머리를 말려 달라 할 줄은 몰랐던 선아는 그의 까만 뒤통수를 내려다보며 당혹감에 눈을 껌뻑였다.
뭔가 항상 한우진과 자신 사이에 선명히 그어진, 보이지 않는 선을 그가 단숨에 넘어온 기분이었다. 그것도 어찌할 줄 모르는 선아와는 달리, 조금 뻔뻔하다고 생각할 만큼 아무렇지도 않게.
망설이던 선아는 결국 그의 머리 위로 수건을 덮으며 두 손으로 살살 흔들었다. 이런 일은 익숙했다. 그와 결혼하기 전에는 직접 엄마의 병간호를 했고, 그녀보다 한참은 어린 늦둥이 동생을 챙기는 것도 그녀의 몫이었으니. 남의 머리를 말려 주는 것 따위는 하도 해서 아무렇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 남자의 머리카락을 제 손으로 말려 주는 느낌은 이상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실수라도 서로의 손끝을 스쳐 본 적 없는 부부였다. 게다가 불과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이혼을 얘기하던 삭막한 부부 사이였다. 그런데 이렇게 태연히 머리를 말려 주고 있다니. 뭔가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에게서는 항상 풍기던 그의 향수 냄새가 아니라 자신과 같은 샴푸 향이 났다. 평소의 한우진과는 어울리지 않는 과일의 단내가 가득한 향.
그게 조금 이상해 선아는 손가락 끝이 간지러웠다. 그리고 그 간지러움이 뻣뻣한 긴장으로 다시금 바뀌는 데는 몇 분 걸리지 않았다. 그가 그녀의 손목을 잡으며 그녀의 행동을 부드럽게 제지했다.
“선아 씨는 안 씻어요?”
목 안쪽을 묘하게 긁어내리는 가라앉은 목소리가 꼭 선아를 성마르게 재촉하는 것 같았다.
***
선아는 뿌옇게 수증기가 낀 거울을 손바닥으로 닦아 내고는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빤히 보았다. 밋밋한 자신의 얼굴은 별 특징이 없었다. 다행히도 좋은 피부를 타고난 덕에 말갛다는 느낌 말고는 별 장점이랄 것도 없었다.
선이 굵직굵직하고 뚜렷한 이목구비가 특징인 한신가의 사람들과 자신은 별 연관성이 없었다. 그리고 한신가 사람들의 취향은 꼭 저들과 같은 사람인지, 그녀의 동서라는 사람들도 모두 키가 크고 선이 뚜렷한 서구형의 미녀들이었다. 제 형제들의 취향이 그러할진대, 그라고 별다르진 않을 터였다.
키가 작고 오밀조밀한 생김새의 선아는 그곳에서 꿔다 놓은 보릿자루였다. 선아는 괜히 조금 낮은 제 코를 집었다.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면 그다지 콧대가 낮은 건 아닌데…….
통통하게 살이 오른 제 볼 때문에 콧대가 더 낮아 보이나 싶어 선아는 괜히 제 볼을 한번 꼬집어 보았다. 젖살일 줄 알았던 볼살은 한순간도 빠지지 않고, 어쩜 고등학교 때부터 그대로였다.
그리고 선아는 절로 제 몸을 내려다보게 되었다. 이번에는 눈에 거슬리는 제 뱃살을 꾹 잡아 보았다. 누군가는 요즘 사람답지 않게 보기 좋게 살이 통통하게 오른 선아를 보며 복스럽게 생겼다고 했지만, 그건 온전히 저만 한 딸을 가진 중년 나이대 사람들의 입에 발린 소리일 뿐이었다.
“살을 빼야 할까?”
그동안 잊고 있었던 것들이 인제 와서 신경이 쓰였다. 제 몸의 이곳저곳이. 오랫동안 세뇌당하듯 들었던, 악몽 같은 그 높다란 고함 소리가 떠오른다.
돼지의 등급을 매기는 도축사처럼 그녀의 사소한 부위 하나하나를 짚으며, 제아무리 선아가 울어도 그 모욕적인 언사를 참지 않았던 목소리와 함께.
선아는 제 몸 이곳저곳을 거울에 비추어 보았다.
자신은 왜 이렇게 생겼을까. 제 엄마의 악담처럼, 그 누구도 자신의 이딴 몸을 보고 사랑해 줄 리가 없었다. 아무리 우진이라도.
습관적인 자기 학대에 빠진 선아가 한참 동안 굳이 없는 흠집마저 찾아내려 용을 쓰고 있을 때였다.
똑. 똑.
욕실 밖에서 문을 두들기는 노크 소리에 놀란 선아는 제 몸에서 손을 떼어 냈다.
“무슨 일 있어요?”
괜히 어물거리느라 시간을 허비했나 보다. 급히 샤워 가운에 팔을 꿰며 그녀는 대답했다.
“아니에요. 금방 나갈게요.”
***
욕실의 문 앞에 서 있던 한우진은 선아가 나오자마자 낚아채듯 허리를 끌어안고 허리를 굽히며 다짜고짜 제 입술부터 들이밀었다. 선아가 당혹해할 틈도 주지 않았다. 첫 키스는 급작스러웠다. 하지만 말랑말랑 기분 좋을 만큼 부드러웠다. 그리고 뜨거웠다.
“으응…….”
선아는 자신의 비음에 살짝 뒷걸음질을 쳤다. 하지만 선아의 허리가 뒤로 꺾일 정도로 바짝 붙들고 있는 그가 그녀의 허리를 더욱 세게 감아 자신에게로 끌어당겼다. 선아의 걸음은 물러난 만큼 다시금 그에게로 향했다. 오히려 아까보다 더 가까이 그의 몸에 바짝 붙었다.
자신의 입술을 가볍게 핥아 대는 그의 혀가 간지럽다. 선아는 자신도 모르게 살짝 웃었다. 그 틈으로 우진의 혓바닥이 성큼 그녀의 입 속으로 들어섰다. 아까의 촉감을 즐기듯 부드럽게, 그녀의 입술에 제 입술을 가져다 붙여 댄 순간이 있었냐는 듯 꽤 성급하게.
안쪽의 점막을 훑는 두꺼운 혓바닥에 선아는 흠칫 어깨를 좁혔다. 숨을 쉬는 법을 잊어버린 것 같았다. 그러자 그녀의 입술에 혀를 밀어 넣고 휘저어 대던 그가 혀를 빼냈다. 그 순간에도 그의 혓바닥은 그녀의 입천장을 잠시 훑다가 빠져나갔다.
“싫어요?”
선아는 참았던 숨을 몰아쉬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는 다른 손으로 그녀의 턱을 살짝 매만졌다. 한없이 조심스럽다. 꼭 제가 소중히 여겨지는 기분이었다.
아닌 것을 알면서도, 가끔 이런 그의 행동에 선아는 꼭 착각했다. 제 심장 소리가 자신의 귀에도 이리 선명할진대. 저와 몸을 딱 맞붙이고 있는 그가 느끼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그, 그냥 놀라서…….”
“그래요?”
왜 오늘따라 바보 같은 소리만 하는지. 선아는 눈을 질끈 감았다. 턱을 쓰다듬던 손길이 이번에는 뺨을 가볍게 쓸어내린다. 입술 옆을 엄지가 스친다. 그가 입술을 살짝 벌려 그녀의 아랫입술을 가볍게 빨았다 놓아주었다.
선아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외꺼풀인 눈을 가느스름하게 내리뜨고 있는 그를 보노라니 선아는 열이 확 올라왔다. 그는 제 생김새가 이토록 유해한지 알까.
“나는 또 내가 싫은 줄 알고 겁먹었잖아요.”
그의 입술이 그녀의 지척에서 달싹였다. 겁을 먹은 것은 그가 아니라 선아였다. 선아는 다시금 뒷걸음질을 치고 싶었다. 그를 피해 어딘가로 도망을 쳐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단단히 자신의 허리를 감고 있는 그의 팔뚝은 도무지 자신을 놓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가 엄지로 턱을 살짝 눌러 살짝 내린다. 선아는 그의 의도대로 입술을 조금 벌렸다. 지척에 있는 그가 희미하게 웃는 것 같았다.
“빨리 말해요. 하기 싫은 거면…….”
하지만 그는 그녀가 대답할 시간을 주지 않고 자신의 혓바닥부터 그녀의 입 안으로 밀어 넣었다. 선아는 자신이 생각할 틈도 없이 입 속을 마구잡이로 쑤시는 감각에 헐떡이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는 구석구석을 핥았다. 어쩔 줄 모르는 그녀의 혓바닥을 휘감아 제 입 속으로 가져가 가볍게 깨물며 그녀의 타액을 거리낌 없이 자신의 목 너머로 삼켰다.
쭉쭉, 선아의 혓바닥을 게걸스럽게 빨기도 했다.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다시금 하는 입맞춤은 거칠었다. 거친 만큼 질척이는 소리는 그와 어울리지 않았다.
이렇게 고상하지 못한 너저분한 소리는 평소의 한우진과 전혀 달랐다. 마치 성교만을 위한, 잡아먹기 직전의 전초전 같은 입맞춤은 그녀가 매번 보았던 고상한 한우진이 전혀 아닌 것 같았다.
선아는 그의 어깨를 살짝 밀어냈다. 그러자 자신의 입 속을 빈틈없이 파고들던 그가 순순히 물러났다. 대신에 쪽, 하는 마찰음 같은 소리가 떨어지는 사이에도 크게 울렸다. 그리고 조금 전까지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상기시키듯 가늘고 투명한 실선이 둘 사이를 이었다.
기겁한 선아가 닦아 내려는 찰나,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금 그녀의 입술을 가볍게 빨아들여 그 거미줄 같은 것을 끊어 냈다.
“피, 피곤하지 않아요?”
“…….”
선아는 자신도 제 핑계가 이상하고 궁색하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여기서 더 나아간다면 뭔가 단단히 잘못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정신없이 뛰어 대는 심장과 함께 그런 예감이 들었다.
단순히 한우진이라는 남자에 대한 호감을 넘어선, 질척이고 무거운 것으로 변할 것 같다는 그런 예감 말이다. 아까의 입맞춤 같은…….
“우리 다음에…….”
“아……. 선아 씨.”
그는 안쓰러운 탄식을 내뱉었다. 그리고 등을 굽혀 제 고개를 선아의 목덜미에 묻었다. 그 탓에 그의 입술이 그녀의 여린 목덜미에 비벼졌다. 순식간에 그 자리에 홧홧하니 열이 올랐다.
“내가 말했잖아요. 싫은 거면 아까 말했어야 했다고.”
“…….”
“이미 늦었어요.”
피할 새도 없이 목덜미가 꽉 물렸다. 왠지 여기서 잘못 움직이면 그대로 제 목덜미의 살점을 뜯길 것 같았다. 잘 훈련된 개가 일순 자신의 본성을 드러내며 사납게 이를 세운 채로 자신의 목덜미에 이를 박아 넣고 있었다.
포식자에게 물린 피식자처럼 선아는 잠깐뿐이었지만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이내 한우진은 선명히 제 잇자국이 찍힌 그녀의 목덜미를 길게 핥았다. 선아는 혼란스러웠다. 그리고 그런 그녀를 보며 그는 설핏 웃었다. 미묘하게 올라간 입술은 한없이 야릇했다. 평소에 굳게 다물려 있는 입술이 모양이 조금 바뀌었다고 분위기가 이토록 달라지는 것일까.
“후회하지 마요. 모든 것은 선아 씨가 자초한 일이니까.”
다시금 입술이 쪽쪽 빨렸다. 그는 그 상태로 속삭였다. 위협적일 정도로 낮은 목소리는 모순적이게도 듣기 좋았다. 차분히 귀에 감길 정도로. 너무 좋아서 탈이었다.
귓가에 낮게 속삭이는 목소리 탓에 무릎이 풀릴 것 같았다. 선아의 손이 본능적으로 그의 팔뚝을 붙들었다. 한우진은 선아를 붙들고 있는 제 팔로 그런 선아를 추슬러 올렸다.
“우진 씨는 후회 안 해요?”
선아는 어지러운 상태에서 불쑥 물었다. 자신의 조름에 마지못해 이런 짓을 하는 것? 나랑 결혼한 것? 애초에 엮일 일도 없는 자신과 이렇게 엮인 것?
물을 것이 수없이 많으니 아이러니하게도 입 밖으로 선뜻 튀어나오지 않았다. 그의 대답이 두려운 탓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이혼도 자신이 스스로 요구한 것이었다. 지금보다 더 깊게 한우진에게 빠지기 전에 먼저 기어 나올 작정으로.
그녀의 윗입술을 빨아 당기던 그가 살짝 아프게 이를 세워 그녀의 입술을 물었다. 아. 그녀의 입술 사이에서 신음이 터졌다.
“후회 안 해요.”
그의 목소리는 단단했다. 평소와 다름없이. 고상한 한우진답게.
“…….”
“난 당신에 관한 일이라면 후회 안 해. 그게 어떤 것이 되었든.”
입술이 전체적으로 그의 입 속으로 삼켜졌다. 선아는 자신의 몸이 들리는 감각에 절로 그의 목덜미를 두 팔로 감았다. 그는 한없이 가벼운 아이를 안듯 그녀를 들어 올리고는 허공에서 대롱거리는 그녀의 다리를 자신의 허리에 감게 했다. 선아는 두 눈을 내리감으며, 그의 허리에 감긴 자신의 다리에 힘을 꽉 주었다.
온 힘을 다해 그에게 매달렸다. 이제는 그가 후회한다고 해도 소용이 없을 것 같았다. 그도 이미 후회하기에는 늦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