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마지막의 마지막에는
휴양지로 유명한 그 섬에는 아침부터 드나드는 사람이 많았다. 배로는 한나절이 꼬박 걸렸지만, 돈깨나 번다는 사람은 꼭 그 섬에 가보고 싶어 했다. 몇 십 년 전 용사가 마왕을 무찌르고, 대륙에 태평성대를 가져왔다는 비하인드 스토리 때문이다.
빙벽이 깨지고 교류가 시작된 북극점의 얼음대륙, 그리고 바다 건너편에서 발견된 신대륙에서도 그 섬을 동경했다.
특히 신대륙과 네 개의 대륙의 교류점이 됐다. 섬이 번창한 건 당연했다. 항구가 열 개나 생기고 도시들이 번창했다. 섬의 남쪽과 북쪽에 거점 도시가 생긴 지는 오래였다. 본래 엄청나게 뜨거운 온도 때문에 사람이 살기 힘들었다는 섬은, 지금은 아주 따뜻하고 기분 좋은 기후로 이름 높았다.
“와아!”
고불고불한 갈색 머리카락을 나부끼는 여자가 배에서 내리자마자 탄성을 질렀다. 그녀는 목가적인 밀짚모자를 눌러쓰고 있었는데, 그 모자를 날리려는 듯 바닷바람이 정신없이 불었다. 그녀는 모자를 누르고 있는 손에 힘을 주면서도 사방을 보느라 여념 없었다.
여자는 달음질쳐 부두의 끝까지 갔다. 그녀의 시선 끝에 아름다운 항구도시가 펼쳐져 있었다. 해변을 따라서 지어진 아름다운 집들, 거리들, 사람들. 어릴 적부터 지금까지 계속, 따뜻한 섬나라에서 느긋하게 망중한을 즐기고 싶어 하던 여자는 귀한 휴가를 이곳에서 보낼 기쁨에 젖어 있었다.
“이런, 먼저 가깁니까?”
그때였다. 그녀의 연인이 뒤에서 웃으며 그녀를 따라왔다. 연인의 손에는 짐이 잔뜩 들려 있었고, 여자는 뒤로 돌며 웃었다. 정말 아름다운 곳이라고, 같이 와 주어서 고맙다고 말하려는 찰나였다. 휙, 하고 그녀가 썼던 모자가 바람에 날렸다.
“꺅!”
저도 모르게 모자를 잡으려던 여자가 휘청했다. 남자는 놀라 짐을 바닥에 버리고 제 연인을 붙잡았다. 그 바람에 모자는 영영 바다로 빠져버릴 뻔했으나, 그 모자를 붙든 사람이 있었다.
“어잇차.”
빨간 머리와 가무잡잡한 피부를 지닌, 준수한 청년이었다. 그는 모자를 잡은 채 웃으며 두 연인에게 내밀었다.
“여깄습니다.”
“어머나! 감사합니다!”
여자가 모자를 받아들고 감사의 인사를 했다.
“조심하세요. 자르지스의 바닷바람은 거칠답니다. 아가씨들의 모자를 사정없이 날려버리고 말지요. 제가 아는 여인도 바람에 날린 모자를 주우려다가 하마터면 바다에 빠져 큰일이 날 뻔했죠.”
“명심할게요.”
그리고 청년은 두 사람의 짐을 주워주었다. 연인 중 남자 쪽도 감사를 표했다.
“이거 감사합니다.”
“무슨 말씀을요. 빨간 머리끼리 돕고 살아야죠.”
청년이 눈을 찡긋했다. 남자가 쓴웃음을 지었다. 이쪽 대륙에는 빨간 머리가 그리 흔하지 않은 듯싶었다. 남자는 짐을 다 받은 후에 다시 한번 허리를 숙여 감사 인사를 했다.
이쪽에서는 보지 못한 인사법에 청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신대륙 분들이시군요.”
“저희 입장에서는 이쪽이 신대륙이지만요.”
남자가 쓴웃음을 지었다. 청년은 반가움을 표하며 남자의 손을 잡고 붕붕 악수했다.
여기는 놀러 왔냐, 나는 이곳 토박이인데 이렇게 놀러와 주는 손님들이 정말 고맙다, 만약 배가 고프다면 항구에서 제일가는 식당으로 가라…. 같은 이야기를 줄줄 늘어놓는 청년은 참 발랄했다. 남자는 미소 지으며 물었다.
“항구에서 일하는 분입니까?”
“아니오, 저는 친구를 마중하러 왔습니다.”
“마중이라면….”
“당신들이 내린 배 다음에 정박한 저 배에서 제 친구가 내릴 예정이죠. 아! 마침 배에서 사람들이 내리는군요!”
청년은 방금 전까지 연인들과 떠든 것은 거짓말같이 둘에게 안녕을 고했다. 순식간에 사라지는 그를 보며 연인은 좀 얼떨떨해했다.
“자르지스 사람들은 다 저렇게 발랄한가…?”
“으음, 당신 부관 생각이 나네요. 어머.”
여자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인파 사이에서 자신의 친구를 맞이한 청년이 보였는데, 그 친구가 상당히 독특했다. 머리가 하얗게 센 할머니였다. 남자가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친구…?”
“뭐, 저렇게 발랄한 사람은 호호 할머니와도 친구 할 수 있겠죠?”
여자는 제 연인의 팔을 붙들었다. 오늘 처음 본 사람의 친구 관계에 신경 쓰기엔 할 일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우리 저 사람이 알려준 식당에 가볼래요? 저 그렇잖아도 배고팠어요!”
“그럴까요.”
두 사람도 곧 바쁘게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그래서 청년이 할머니를 번쩍 안아 든 것은, 두 사람 다 보지 못했다.
***
“세상에, 정말 예쁘군요.”
은발의 여인이 감탄했다. 그녀는 새하얀 모래사장 앞에 도달해 있었다. 붉은 머리의 청년 - 시빌은 그녀를 거뜬히 안아 든 채였다.
자르지스의 해변은 대부분 북적거렸으나 지금 여인과 청년이 있는 곳은 인적이 드물었다. 사유지이기 때문이다. 아주 오래전부터 신원 미상의 왕족이 사들였다는 그 사유지는, 자르지스에서 가장 아름다운 해변은 아니었지만 고즈넉하고 포근했다.
청년은 늙은 여인을 안아 들고 이 해변까지 온 후, 그녀를 조심스럽게 모래사장 위에 앉혔다. 부드러운 카펫 위에 온갖 먹을거리와 술까지 차려져 있었다.
하지만 여인은 얌전히 카펫 위에 앉기는커녕 바다에 발을 담가 보고 싶다고 떼를 썼다. 그런 사람인 줄은 이미 익히 알고 있었기에 시빌은 부드럽게 그녀를 안아 올렸다.
“자르지스의 이 해변을 다시 한번, 맨발로 밟아보고 싶었지요. 가끔은 꿈까지 꿨답니다. 당신이 여기에 무릎까지 담그고 망연자실하게 앉아 있는 모습이 어찌나 바보 같아 보였는지 요즘까지도 종종 생각나곤 했다니까요.”
시빌은 제 품에 안긴 그녀의 말에 웃음을 터트렸다. 바보 같다고는 했지만, 그녀의 말에 애정이 듬뿍 담겨 있다는 것을 그 또한 알고 있었다.
“오고 싶으면 그냥 오지 그랬어요.”
“다들 그렇게 생각하더라고요. 세상에. 내가 얼마나 바쁜지 알아요? 다들 늙은 나를 혹독하게도 부려먹는다니깐.”
여인이 시빌을 흘겨보며 투덜거렸다. 시빌은 그녀의 이마에 가볍게 입 맞춘 후 해변에 천천히 그녀를 내려놨다. 여인은 신중히, 그러나 즐겁게 모래사장에 발을 딛고 섰다. 그리고 신고 온 부츠를 벗었다.
부드러운 가죽으로 된 신발은 그녀의 발에 꼭 맞는 물건이었다. 그 물건이 까마득하게 오래된 것임을 시빌은 알아보았다.
부츠 안에서 맨발이 드러났다. 발은 주름져 있었으나 희고 깨끗했다. 그녀는 맨발로 모래를 밟은 다음 조그맣게 감탄했다.
“부드러워….”
“그래도 조심하세요. 간혹 깨진 조개 같은 것들이 있답니다.”
시빌은 여인을 부축해 파도 안으로 그녀가 들어갈 수 있게 도왔다. 찰랑찰랑, 그녀의 발목까지 바닷물이 차올랐다. 그녀는 시빌에게 기댄 채 주변을 둘러보고 감탄했다.
“정말 예뻐요. 날씨도 따뜻해….”
“당신이 온다고 해서 디자이어가 날씨에 신경을 많이 썼답니다.”
시빌이 미소 지었다. 여인은 그리운 이름에 아, 하고 반가움을 표했다.
“그 애도 왔나요?
“아뇨, 그는 움직일 수 없답니다. 조금 있다 만나게 해 드릴게요.”
자르지스의 흙에 뿌리를 박고 거대한 나무가 된 정령을 떠올리며 시빌은 함박웃음을 지었다. 그 정령은 자유자재로 모습을 바꿀 수 있었지만 지금의 모습에 꽤 만족하고 있었고, 그래서 그녀에게 ‘보고 싶은 사람이 이쪽으로 오라구!’라는 전언을 남겼다. 여인이 그 전언을 전해 듣고는 투덜댔다.
“그 애는 정말! 항상 자기만 알아!”
“그가 제멋대로 굴지 않는 날이 온다면 그날은 세상이 멸망하는 날일 겁니다.”
“그렇기야 하죠. 후후….”
여인은 짧은 머리카락을 뒤로 넘겼다. 항구보다는 바닷바람이 약했으나, 해변의 바람은 그녀의 희게 센 머리카락을 춤추게 하기엔 충분했다.
나부끼는 그녀의 은발을 보며 시빌은 그 머리카락이 한때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긴 금발이었던 때를 회상했다. 시간은 화살같이 지나갔으나 시빌에게는 대륙에서 제일가는 미인이었던 그녀의 모습이 여전히 선명했다.
“여기까지는 어떻게 왔어요?”
“음, 아트릭스까지는 일행이 있었어요. 알겠지만 이제는 혼자 움직이기가 좀 어려워서. 하지만 아트릭스에서 여기까지는 꼭 혼자 가겠다고 고집을 피웠더니 보내주더군요. 나도 이제 어른인데 말이에요.”
그녀는 샐쭉하게 입술을 내밀었다. 그 모습이 마치 어린 소녀 같아서 시빌은 마구 웃어버렸다.
“아하하하….”
퍼지는 웃음소리에 그녀도 이내 웃어버렸다. 바람에 두 사람의 웃음소리가 흩어졌다. 여인은 한참 동안이나 바닷물로 장난을 쳤다. 발을 담그고 물을 튕겨보기도 하고, 아름다운 하늘석 반지를 끼운 손을 바닷물 안에 넣은 채 관찰했다.
시빌은 그 반지가 한 쌍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자르지스의 옆에 있었으나 대륙령으로 막아놓아 사람들이 출입할 수 없는 섬, 포르투의 폭포에서만 나는 돌. 그 하늘석을 캐다 그녀에게 결혼 선물로 보낸 것이 자신이기 때문이다.
그는 문득 생각난 것처럼, 장난스럽게 물었다.
“혼자 온다니까 화 안 냈어요?”
“누가요?”
여인은 한때는 새파랬지만, 이제는 비둘기색으로 약간 흐려진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다가 이내 시빌이 말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채고는 환하게 웃었다.
“그 사람이요?”
“당신이 혼자 온다고 편지를 보냈지만, 저는 안 믿었단 말이에요.”
그녀의 남편은, 전해진 소문에 의하면 절대로 그녀를 혼자 두지 않겠다고 결혼식에서 맹세했다고 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수줍게 웃으며 입을 손으로 가렸다.
“그 사람은 평생 나한테 화낸 적 없어요. 화내는 방법도 모를걸요.”
“그건 당신의 착각이라고 제가 단언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시빌은 보기 드물게 단호하게 그녀에게 말했다. 그 남자가 정말로 화를 내면, 자르지스 따위는 그냥 지도에서 사라질걸! 그의 말에 여인은 흐물흐물 웃기만 했다.
바람이 하도 불어서 시빌은 품속에서 작은 머리핀을 꺼내 그녀의 머리카락을 고정시켜주었다. 여자 머리핀이 대체 어디서 났냐, 누구 거냐 여인이 집요하게 물었으나 시빌은 어깨를 으쓱하며 천연덕스럽게 웃었다.
“당신을 위해 마련한 거예요. 자르지스에서 가장 큰 상점에서, 한참이나 처녀들 시선을 견뎌내 가면서 골랐다고요. 순전히 당신 생각만 하면서요.”
“에구머니나! 거짓말도 잘하지! 변한 게 없군요?”
여인이 쾌활하게 웃었다. 시빌은 부루퉁한 얼굴로 투덜댔다.
“진짜라구요. 당신이 혼자 온 걸 보고 약간 기대했는데.”
“뭘 말이에요?”
여인이 궁금한 듯 물었다. 시빌은 그녀에게 대답하기에 앞서, 슬슬 차가워질 그녀의 몸을 염려해 번쩍 그녀를 들어 올렸다. 여인은 화들짝 놀랐으나 이내 웃으며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여인을 카펫 위에 도로 앉힌 후, 시빌은 그녀의 발을 꼼꼼하게 닦아주고 부츠를 집어다 다시 신겨주었다.
그리고는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상자를 꺼냈다. 상자는 아주 조그마했다. 손바닥 위에 덩그러니 올라앉을 정도로.
“그 남자가 당신에게 화냈다고 하면 이걸 주려고 했죠.”
“뭔데요?”
시빌은 씩 웃었다.
“안 가르쳐 줘요.”
“뭐야! 보여 줘요!”
하지만 시빌은 혀를 내밀고는 상자를 먼바다로 던져버렸다. 여인의 눈이 한층 더 커졌으나, 시빌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 사람이 당신 조금이라도 울리면 그걸 기회로 삼아서, 이번에는 공주를 납치한 마왕이 돼 보려고 했거든요.”
여인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시빌은 너스레를 떨었다.
“아마 평생 제게는 기회 안 올 것 같네요.”
“아직도 미련 못 버렸어요? 세상에, 나 너무 매력적이다!”
여인이 웃음을 터트렸다. 어느새 옆에는 따뜻한 차가 준비돼 있었다. 여인의 취향대로 술을 조금 차에 덜어 넣으며 시빌은 물었다.
“요즘 어때요?”
근황을 묻는 질문이었다. 여인은 눈을 깜박이다가 손가락을 꼽기 시작했다.
“밥 잘 먹고, 다들 말 잘 듣고, 일 잘돼요.”
“당신은요?”
“저요? 음….”
여인은 손가락을 꼽다 말고 잠시 고민하다가 웃었다.
“좋아요.”
“….”
“당신도 행복해야 해요.”
시빌은 여인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미소 지었다.
“그럴게요.”
그는 하얗게 센 은발 위에 깊게 입 맞췄다. 그리고 그녀와 아주 오랫동안 차를 마시며 해변에서 이야기를 나눴다. 두 사람 사이에는 묵은 이야기들이 많았고, 해가 지고 어둠이 내려앉을 때까지 그 이야기는 끊임없이 이어졌다.
머리가 하얗게 센 그녀가 어둠 속에서 반짝반짝 빛을 내는 아름드리나무를 끌어안고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시빌은 한참 동안 지켜봤다.
그리고 나서, 그녀의 돌아가는 길을 배웅했다.
배웅이 끝난 후 그는 돌아와 깊은 잠에 들었다.
세상이 끝날 때까지, 아주 깊은 잠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