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국왕의 평범한 날들
하늘섬 포르투가 지상으로 내려온 지 3년.
영원한 어둠의 도시 동력지대를 무너트리고 그 자리에 새로 세운 포르투를 사람들은 테 포르투라고 불렀다. 하늘섬과의 차별화도 필요했지만, 새로운 포르투라는 의미를 담은 것이었다.
자르지스를 구하고 포르투의 국왕이 된 클로디아 테 포르투에 대한 존중의 의미도 담겨 있었다.
동력 지대에 자리 잡은 테 포르투에는 하늘을 찌를듯한 탑이 세워졌으며, 대륙의 그 어느 곳보다 다양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 도시가 됐다. 하늘섬에 임시로 자리 잡았던 자르지스 주민들을 비롯해 마법사들까지 몰려왔기 때문이다.
도시는 그야말로 정신없이 돌아갔다. 모든 것을 무너트리고 새로 건물을 짓는 것은 물론이고, 주민들의 생활기반도 다잡아야 했다.
그래서 모닝문 축제가 열린 것은 테 포르투 왕성이 완공된 지 약 3년이 지났을 때였다. 전 대륙적으로 열리는 축제였으나 테 포르투에서는 그간 축제를 외면해왔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대륙의 모든 왕국의 사신이 줄이어 방문했으며 상인들이 몰려들었다. 새로운 도시를 구경하려는 여행객들이 잇달아 테 포르투로 향했음은 물론이다.
일 년 중 가장 큰 달이 아침까지 뜨는 축제. 모두가 들떠 있었다. 처녀들은 아름다운 옷을 구입했으며 청년들은 청혼 혹은 교제를 신청할 생각에 보석을 샀다. 연인들의 축제이니만큼 낭만이 가득했다.
노바라는 새벽부터 잔뜩 기합이 들어가 있었다.
그녀가 모시는 사람은 다름 아닌 국왕이었다. 클로디아가 모닝문의 축제 연회를 위해 반짝이는 은빛 드레스를 맞춘 것은 한 달 전이었다.
그간 드레스를 맞출 돈이 있으면 그 돈으로 건물이라도 하나 더 지으라던 클로디아였다.
‘그런 폐하가 드레스를 맞추시다니!’
분명했다. 노바라의 예감이 번득였다.
국왕은 오늘 청혼받을 것이다.
누구에게? 수르 알파에게!
5년 전 열아홉 살의 국왕과 함께 100일간의 모험을 떠났다 돌아온 이후로 수르 알파와 국왕의 연애는 왕성에서는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하지만 나이가 차다 못해 과년했음에도 불구하고 클로디아는 결혼의 ㄱ자도 꺼내지 않았다.
노바라로서는 답답할 따름이었다.
‘우리 폐하, 제발 서류랑은 이혼하셨으면….’
그녀가 왜 결혼하지 않는지. 이유야 뻔했다. 포르투를 재정비하느라 너무 바빴기 때문이다. 물론 노바라도 클로디아가 얼마나 중요한 일들을 하고 있는지는 아주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우리 폐하도 개인적인 행복을 좀 누리셔야 되지 않나요?!’
그게 노바라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더욱이 클로디아가 국왕에 즉위하기 전, 그러니까 모험을 다녀오기 전에 어떤 아가씨였는지 알고 있는 입장에서는 더더욱 그랬다.
가여운 폐하.
노바라는 새벽같이 성문으로 들어서며 다짐했다.
수르 알파, 오늘 청혼하지 않으면 내가 그를 쓰러트리고 수르의 자리에 올라서겠어!
물론 농담이다. 그럴 수 있을 리 없다. 말이 그렇다는 거지.
그렇게 생각하며 노바라는 왕성의 정문을 들어섰다. 그리고 수르 알파와 마주쳤다. 그녀가 갑자기 나타난 수르 알파의 얼굴에 기겁했음은 물론이다.
“엄마야!”
“…노바라?”
아직 해가 뜨지도 않은 시각, 수르 알파는 왕성의 정문에서 문을 지키는 기사들과 모여 뭔가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는 갑자기 기겁한 노바라를 보고 눈을 껌벅이고는 이쪽으로 다가와 말을 걸었다.
“아침 일찍 출근하시는군요…. 무슨 일 있습니까?”
“아, 아뇨! 오늘 날이 날이니만큼 좀 일찍… 그보다 수르 알파는 왜…”
노바라는 말을 흐렸으나, 수르 알파는 즉시 그녀의 말뜻을 알아들었다. 수르씩이나 되는 사람이 대체 왜 이 시간에 왕성 정문에 나와 있냐는 뜻이었다. 수르 알파는 무표정하게 답했다.
“오늘이 축제 첫날이니까요.”
“어….”
“예고된 방문자가 워낙 많아 치안 점검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그렇군요….”
“별일 없으시면 물러가겠습니다.”
“그, 그러세요!”
수르 알파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기사들에게로 돌아갔다.
‘이런 날 아침부터 폐하 곁에 계시지 않고 뭐 하는 거람!’
노바라는 괜히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속으로 투덜댔다.
폐하께서는 오늘 아마 새벽부터 단장하실 텐데!
수르 알파는 언제나와 같은 포르투 기사단의 정복을 입고 있었다.
‘설마 저 옷을 입고 청혼할 셈은 아니겠지? 저 꼴로 폐하 앞에 나타나면 아주 흠씬 두들겨줄 테다!’
노바라는 그렇게 생각하며 왕성의 내실로 향했다.
그러나 문을 열고 들어간 노바라는 눈이 동그래졌다. 클로디아의 침실에는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폐하?”
침대도 마찬가지였다. 노바라는 이불이 젖혀진 침대를 손으로 더듬어봤다. 온기는 없었다. 어제저녁에 분명 침소에 드신 걸 확인했는데? 그때 어디선가 바람이 불었다.
‘설마….’
노바라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녀는 쿵쿵쿵, 걸어서 클로디아의 침실 커튼을 확 젖혔다. 촥, 하며 아름다운 전면 유리창으로 햇빛이 들어왔다.
그리고 동시에 노바라는 전면 유리창의 한쪽, 정원으로 통하는 유리문이 열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 노바라는 코를 찡그리고는 유리문으로 나갔다. 얼마 걸어 나가지 않았는데도 노바라는 목표하던 것을 찾을 수 있었다.
“끙,”
그러니까, 정원에서 요상하게 무릎을 굽히고 있는 클로디아 테 포르투 국왕 폐하 말이다.
“폐하!”
“어머나? 노바라?”
클로디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는 상당히 해괴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무거운 나무막대를 등에 가로로 걸친 후 팔을 뻗어 막대 끝을 잡고 있었다. 그대로 몸을 세운 채 무릎을 굽히고 있는 모습은 마치, 노바라가 어릴 적 선생님에게 받던 벌을 연상시켰다.
노바라의 가정교사는 노바라가 엉뚱한 짓을 할 때마다 그녀에게 마치 보이지 않는 의자에 앉은 듯한 자세를 하게 시켰던 것이다.
“이 새벽부터 뭐 하시는 거예요?”
“뭘 하긴. 하던 거 하는 거지.”
클로디아가 그대로 몸을 세워 일어섰다. 노바라는 어휴, 하며 손을 모으고 섰다. 클로디아는 빙긋 웃었다.
“오늘은 눈이 조금 일찍 떠져서.”
클로디아는 100일간의 모험에서 이상한 습관을 들여왔다. 물론 건전하다면 건전한 생활습관이다.
새벽에 일어나 칼을 휘두르는 것이다.
수르 알파가 그녀의 여행길에서 마왕을 무찌르게 하기 위해 시켰다는 훈련은 클로디아의 생활습관이 돼 있었다. 해가 뜰 즈음 일어나 검과 비슷한 무게의 나무막대를 들고 몸을 단련한다. 그다음에는 검을 들고 몇백 번의 베기를 연습한다.
운동이 나쁠 것은 없다. 집권 초기의 클로디아는 그야말로 체력이 바닥나는 일을 여러 번 겪었다. 그때 그녀가 떠올린 것이 아침 훈련이었다.
포르투를 처음 옮기고 자르지스의 일들을 수습할 때는 시간이 없어 하지 못 하던 운동이었다. 그러나 클로디아는 일부러 시간을 내 다시 훈련하기 시작했고, 지금은 제법 체력이 붙은 뒤였다.
하지만….
“오늘은 축제일이라구요….”
노바라는 이런 날까지 훈련을 빼먹지 않는 클로디아가 약간은 원망스러웠다.
우리 폐하, 오늘 엄청 바쁜데!
아침 일찍 클로디아를 깨운 뒤 꽃잎을 띄운 물에 목욕시킨 후 좋은 소금을 문지르고 향유를 바르려던 노바라의 계획이 처음부터 어그러지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클로디아는 그런 노바라의 마음도 모르고 눈을 깜박거렸다.
“그게 왜?”
“연회 준비를 하셔야 하잖아요….”
“무슨 소리야, 노바라.”
클로디아가 정말로 말도 안 된다는 듯 웃었다.
“지금 새벽이야!”
노바라는 배신당한 기분에 휩싸였다.
공주님 옛날엔 안 그랬잖아요, 저도 공주님이 요즘 꾸미는 것보다 훨씬 중요한 일들이 많은 거 알거든요?
하지만 그래도 파티도 거의 안 하던 공주님이 웬일로 연회 드레스를 맞췄는데! 제가 그래서 오늘 얼마나 많이 준비했는데!
공주님 오늘이야말로 청혼받아야 되는데! 그러고 보니까 수르 알파는 이런 중요한 날 새벽부터 치안 점검이나 하고! 얼굴에 뭐라도 바르지 그 꼴로! 공주님도 지금 얼굴 엄청 텄거든요! 손가락 끝에 거스러미는 또 뭐냐구요!
저도 공주님 바쁜 것도 알고 체력 부족한 것도 알고! 공주님이 중요한 사람인 것도 알아요. 하지만! 하지만! 하지만 말이에요!
…그 모든 말이 함축된 한마디를 노바라는 내질렀다.
“공주님 미워욧!”
그리고 뒤돌아 내실로 달려갔다. 클로디아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웃었다. 노바라가 왜 저러는지 모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연회 준비, 미워요! 하는 단어만으로도 클로디아는 노바라의 속마음을 대번에 알아챘다.
하지만 클로디아는 노바라를 즉시 달랠 마음은 없었다. 달래러 들어가면 노바라는 자신에게 원망을 털어놓으면서 제 얼굴을 씻길 것이다.
‘씻고 나면 운동 다시 못해!’
어차피 땀 나면 씻어야 한다. 씻을 거면 훈련 끝나고 하자.
클로디아는 그렇게 생각하며 하던 하체 운동을 마저 했다. 유리 창문 너머로 손수건을 물어뜯으며 자신을 보고 원망스러운 눈을 하고 있는 노바라는 거뜬히 모른 척한 채로. 손에 든 검을 오백 번 휘두르고, 해가 거의 다 뜬 후에야 상쾌하게 땀을 닦으며 들어간 클로디아는 입을 열었다.
“노바라, 근데 나 공주 아닌 지 삼 년 넘었어.”
노바라는 한층 더 클로디아를 미워하게 됐다. 물론 그 미움은 3초 만에 사라졌다. 클로디아에게서 시큰한 땀 냄새가 풍겼기 때문이다.
“아악! 폐하 땀 냄새 나요!”
결과적으로 노바라는 장미꽃잎을 띄운 물에 클로디아를 집어넣는 데 성공하기는 했다.
“정말이지, 폐하 너무하세요. 이런 날은 훈련 좀 빼먹을 수도 있는 거잖아요.”
젖은 머리카락을 빗어 말리며 노바라가 투덜거렸다. 클로디아는 책상에 손을 뻗으며 웃었다.
“그렇게 하루 빼먹으면 내일도 빼먹을걸.”
“폐하가 훈련 좀 며칠 빼먹는다고 흉보는 사람 없어요!”
“흉이 문제가 아냐….”
그렇게 대답하는 클로디아의 신경 줄은 이미 책상에서 집어든 서류로 향해 있었다. 모닝문 축제에서 열리는 연회의 손님 명단이었다.
말하자면 오늘 연회는, 테 포르투의 신장개업 파티 같은 것이다. 새롭게 지어 올린 테 포르투 왕성과 단장한 도시, 그리고 안정적인 치안을 과시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그러다 보니 백 개의 왕국에서 사신들이 모두 방문할 예정이었고, 당연히 명단도 엄청나게 길었다.
“이 사람들하고 다 인사하려면 체력이 관건이라구.”
“그러니 더더욱 오늘은 푹 쉬셨어야죠!”
“노바라를 이길 수가 없어….”
“절 이기려고 훈련하신 거예요?”
노바라가 샐쭉한 말투로 물었다. 클로디아가 생글 웃었다.
“정말이지, 노바라가 자르지스의 마왕이었으면 나는 꼼짝없이 마왕의 포로가 되었을걸!”
“무슨 뜻이에요?”
그렇게 따지면서도 노바라는 한쪽에서 핑거 푸드를 집어 클로디아의 입에 넣어주었다. 클로디아가 우물거리며 명단을 넘겼다. 노바라가 슬쩍 명단을 들여다봤다.
“쥬버린 전하는 안 오신대요?”
“응. 오빠는 바쁘대.”
“정말이지…. 이럴 때 안 오시구.”
“별수 없잖아.”
쥬버린이 지금 어디 있는지도 클로디아는 몰랐다. 다만 이따금 통신 도마뱀으로 근황을 전해오니 그런가 보다 하고 있었다. 사실 쥬버린보다는 그 뒤에서 눈을 반짝이며 인사하는 포폰이 훨씬 반갑다는 것은 클로디아만의 비밀이다.
노바라가 클로디아의 머리를 땋아 올리려 할 때였다. 클로디아가 손을 들어 노바라의 손길을 저지했다.
“아, 노바라. 나 머리는 조금 있다가 할게.”
“예? 지금 아니면 언제….”
“오후쯤 하면 되지 않을까?”
“오후에요!”
노바라가 펄쩍 뛰었다. 클로디아는 어깨를 으쓱했다.
“할 일 엄청 많단 말이야. 오전에도 이거저거 알아봐야 할 게 많다구. 사신들이 괜히 온 게 아냐. 그렇잖아도….”
“아니, 대체 이 포르투에서 폐하만 일한답니까? 하루쯤은 노셔도 되잖아요! 하루 종일 대체 뭘 하시기에!”
결국 참지 못한 노바라가 클로디아의 말을 가로막았다. 클로디아는 씩 웃었다.
“그러게. 궁금해?”
***
노바라는 본래 클로디아의 내실 시중만 든다. 클로디아를 노바라가 하루 종일 따라다니기도 어렵거니와, 노바라는 노바라의 할 일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클로디아가 참석하는 회의 자리에 노바라가 하염없이 서 있기는 어려운 일이기에 클로디아가 그렇게 조치했다.
하지만 클로디아는 오늘 노바라에게 “그럼 내 옆에 있어 줘”라고 말했다. 죽을 맛인 국왕의 하루 일과를 함께 체험해보자 같은, 그녀를 곯리려는 의도는 아니었다.
이유는 한 가지였다.
“노바라. 혹시 나한테 헛소리 한 남자들 기억해?”
“헛소리라면….”
“킴 왕자는 기억나?”
그제야 노바라는 클로디아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챘다. 그러니까 이를테면 오늘의 사신 방문은 복수의 시간이었다. 5년 전 그녀가 100일간의 모험을 떠날 때, 포르투에 등을 돌린 국가들은 숱했으나 그중에서도 유독 모욕적으로 군 남자들이 있었다.
클로디아의 신랑감으로 낙점되다시피 했지만, 마왕의 습격이 있자마자 청혼 같은 건 없었다는 듯이 등 돌린 킴 왕자가 대표적이었다. 그 외에도 킴 왕자와 비슷한 남자들이 몇 있었다. 그 남자들이 속한 국가의 사신들도, 당연히 오늘 테 포르투를 방문한다. 노바라의 눈이 대번에 번득였다.
“제가 뭘 하면 되죠?”
“나 솔직히 말하면 그 남자들이 누구누구였는지 다는 기억 안 나.”
“그러면….”
“옆에서 얘기 좀 해 줘.”
“맡겨주세요. 제발!”
노바라의 말에 클로디아가 싱긋 웃었다.
“부탁해.”
보기에도 푸짐한 상차림이 트롤리 위에 있었다. 채소 샐러드와 고기를 토막 내 구운 것, 소스를 잔뜩 뿌린 해산물 같은 것들이 놓여졌다. 식탁은 아니었다. 노바라는 작은 포크에 올리브유를 뿌린 단새우 카르파쵸를 찍어 손으로 받친 후 클로디아에게 들이밀었다. 클로디아가 입을 벌려 우물거렸다.
“음, 맛있다. 이게 오늘 연회 메뉴야?”
“네.”
“좋네. 새우가 싱싱하다.”
클로디아는 새우를 우물거리며 서류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서류 안에는 자르지스에 세워질 학교의 규모에 대한 보고와, 자르지스까지 자재를 나르는 데 필요한 예산 같은 것들이 쓰여 있었다. 노바라는 한숨을 쉬었다. 자신의 폐하는 그렇게 식사 시간도 참 알뜰하게 쓰고 계셨다. 자신의 아침 식사를 연회 메뉴로 준비하게 시켜 맛을 보면서 동시에 빠르게 자신이 봐야 할 서류를 보면서 손으로 체크해나갔다.
“꼭 이런 날 오전까지 일하셔야 해요?”
“응. 오늘 오는 사신들한테 일거리를 맡겨주고 가야 하니까.”
클로디아는 의욕이 대단했다.
근 5년 만에 백 개의 왕국에서 그녀를 방문하고 충성을 맹세하는 자리였다. 이런 기회를 놓칠 순 없었다.
동부의 광산 지역에 숙련된 일꾼이 없다고 하니 중서부의 왕국에서 일꾼들을 데려다 일하게 할 것이다. 자르지스에 대한 정박세를 면제해주고 예산을 지원해줘서 상인들이 자르지스에 들어가게 할 것이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온갖 일들이 가득했다. 평소에는 서신 몇 통이 몇 달에 걸쳐서 오가거나 통신 도마뱀으로 꽥꽥 소리를 질러가며 해결해야 하는 일을 한 번에 해결할 수 있는 기회인 것이다.
“그때, 공주님이 교황과 만나셨다는 소문을 듣고 말예요. 헤럴드 왕자가 자기 왕국의 연회장에서 얼마나 보란 듯이 떠들었는지 아세요?”
“헤럴드 왕자가?”
“예! 이제 포르투는 교국에까지 손을 내민다면서 공주님의 오만한 콧대가 눌린 꼴이 볼 만하다구….”
“맞는 말 했네.”
클로디아가 심드렁하게 답해서 노바라는 눈물이 솟을 뻔했다.
“맞는 말이라뇨! 어떻게 그런 말씀을 하실 수 있어요! 공주님에 대한 모욕이라고요!”
“처맞는 말.”
“….”
클로디아는 책상 위에 산더미같이 쌓인 서류 중에서 헤럴드 왕자의 나라인 필리아 왕국에 대한 항목을 찾아냈다. 바다를 면하고 있는 필리아 왕국은 최근 소금의 품질 향상을 위해 애쓰고 있었다. 이번 연회 메뉴에 부디 사용해달라며 필리아 왕국은 고급 분홍소금을 보냈다.
“왕성 부엌에서 필리아 왕국의 소금을 다 빼는 거 가능할까?”
“어… 글쎄요. 빨리 요리사들한테 말해야….”
“아니다. 지금 뺄 순 없겠네. 벌써부터 찌고 굽는 요리들이 있을 테니까.”
클로디아는 눈알을 굴리다가 웃었다.
“요리를 소개할 때, 교국에까지 손을 내밀었을 때 콧대가 눌린 내 눈물을 섞었다고 해.”
“…헤럴드 왕자가 왕성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는 건 아닐까요?”
“자기들 왕국 연회에서 그딴 소리를 했으면 나도 우리 왕성 연회에서 그딴 얘기 좀 할 수 있잖아.”
“그딴 소리라뇨, 폐하. 정말! 아까도 그렇고!”
노바라는 사실은 자신이 연회에 별 필요가 없는 게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클로디아는 포르투 기사들, 그리고 자르지스 사람들과 어울리며 부쩍 입이 험해졌는데 요즘 그 끝을 달리고 있었다. 클로디아가 미소 지었다.
“노바라 아까 웃는 거 다 봤어.”
“…웃기긴 했어요. 하지만!”
크흠, 하고 헛기침하며 노바라는 클로디아에게 일렀다.
“연회에선 안 돼요, 아셨죠?”
“으응, 노바라.”
그렇게 말하며 클로디아는 장미 백만 송이가 한꺼번에 핀 듯, 아름답고 화사하게 웃었다. 노바라는 조금 짜증이 났다.
정말이지! 이런 미소는 제가 아니라 수르 알파 앞에서 지으시란 말이에요! 청혼을 받았을 때!
…하지만 그렇게 말하지는 않았다. 대신 노바라는 잘 구워진 채소를 들어 클로디아의 입에 집어넣었다. 클로디아가 우물거리며 계속해서 눈을 서류 위에 두었다.
“아, 허리 아파.”
겨우 서류의 산을 반쯤 해치웠나 싶은 시점 클로디아가 일어났다. 벌써 해는 오후가 다 되어 노랗게 빛나고 있었다. 식사는 이미 다 맛본 후 물렸고, 노바라는 그녀의 점심 간식을 챙기고 있었다. 커다란 초콜릿 덩이가 섞인 스콘을 받아먹으며 클로디아가 이마를 찡그렸다.
“맨날 앉아 있으면서 이런 것만 계속 받아먹으니까 살이 찌지.”
“어디가 찌셨어요?”
“아침마다 훈련하지 않으면 살찔걸….”
그렇게 이야기하며 클로디아는 책상 위에 한쪽 다리를 올려놓고는 허벅지를 늘렸다. 이 공주가 일하다 말고 해괴한 자세를 취하는 것에 노바라는 이미 익숙해져 있었지만, 그래도 이마를 찡그리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다.
“곧 나가셔야 합니다.”
시종이 들어와 클로디아의 일정을 알렸다. 이제는 정말로 그녀가 화장하고 씻고 옷을 갈아입어야 하는 시점이었다. 노바라는 기쁨에 가슴이 뛰었다.
말이야 바른말이지, 그녀가 모시는 폐하께서는 일찍이 그 미모로 온 대륙을 떠들썩하게 만든 사람이었다.
어느 정도냐면, 그녀가 지금처럼 화장기 없이 괴상한 포즈를 취하고 있는 상태여도 그녀를 처음 본 사람들은 넋을 잃을 정도로.
그러니 노바라는 오랜만에 그녀의 장기를 발휘할 때가 됐다는 것 외에도 여러모로 신이 났다.
“이날 이때만을 위해서 관리해왔다구요!”
“노바라가?”
“아뇨! 제가 매일 저녁 주무시기 전 폐하 얼굴에 잔뜩 발라두는 오일이 대체 뭘 위해서라고 생각하셨어요?!”
“그건 그냥 하는 거 아니었어?”
“아니거든요!”
클로디아는 까르륵 웃으며 앞서 걸었다.
조금 추운 듯, 걸친 분홍색 실크 가운을 여미면서 걷는 모습에 지나가던 시종들이 황홀한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는 게 다 보였다. 노바라는 위압적으로 그들에게 눈을 부라렸다.
눈깔아.
시종들이 움찔하며 고개를 돌렸다.
“잠깐만 별궁에 들르자.”
“이 시간에요?”
“응. 여유 없어?”
사실은 별로 없다. 하지만 별궁에 누가 있는지 아는 노바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요.”
“좋아, 잠깐 들를까!”
클로디아는 빠르게 걸었다. 시녀 대여섯 명이 그녀를 따라나섰지만, 노바라는 고개를 저었다.
“너희들은 욕실에 가서 폐하께서 조금 늦는다고 전하렴.”
시녀들이 고개를 숙이고 물러났다. 노바라가 손짓하자 기사 둘이 그녀들에게 따라붙었다.
왕성의 복도를 빠르게 걸어 회랑을 지나고, 정원 사이에 난 오솔길도 지났다. 왕성의 뒤쪽에 있는 작은 별궁은 별궁이라고 하기에는 다소 소박한 규모였다. 별궁 정원의 분수에서 졸졸졸 물이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별궁의 시종들이 놀란 듯 고개를 숙였다. 이런 날 클로디아가 그곳까지 오리라 생각하지 않은 것 같았다.
그녀는 별궁 안으로 들어갔다. 작은 이층집과 같은 별궁 안에서 그녀가 만날 사람은 한 명이었다.
“아바마마.”
클로디아는 그렇게 말하며 햇볕이 따사롭게 쏟아져 내리는 방 안으로 들어갔다. 방 안에는 나이를 먹어 머리가 희끗희끗하게 센 중년의 남자가 앉아 있었다. 노바라는 그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그녀만 들어가도록 놔두었다.
곧 그녀가 남자의 곁으로 다가가는 게 보였다.
“아바마마, 쥬버린 오빠 정말 못됐어요. 클로디아 오늘 진짜 잘해야 되는 거 있는데! 들어볼래요?”
남자가 그녀의 이야기를 알아듣는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클로디아의 표정은 다정했고, 그 이야기를 듣는 남자의 얼굴은 노바라에게 보이지 않았다.
노바라는 문을 잠시 닫았다. 부녀가 어떤 이야기를 하든, 바깥에 들리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클로디아가 별궁을 나올 때까지는 생각보다 긴 시간이 소모되지 않았다. 그녀는 씩씩하게 걸어 정원을 나섰지만, 노바라는 클로디아의 소맷자락이 조금 젖어 있는 것을 알아챘다. 선대 국왕은 아직도 그녀를 알아보지 못한다. 하지만 클로디아가 종종 별궁에서 위안을 얻는 것만은 확실했다.
욕실로 돌아가니 시녀들이 넓은 탕 안에 꽃잎을 가득 띄운 물을 준비하고 있었다. 클로디아는 훌렁훌렁 가운을 벗고 탕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면서도 중얼거렸다.
“대충 씻으면 안 되나…. 오전에도 씻었는데….”
“안 돼요.”
“내가 씻었는지 안 씻었는지 그 사람들이 점검하는 것도 아니잖아.”
“폐하, 제발 창피한 말 좀 하지 마세요….”
클로디아가 입을 비죽였다. 그녀의 몸을 다른 시녀들이 거품을 낸 해면으로 문지르는 동안, 노바라는 클로디아의 얼굴에 차가운 젤리를 붙여주었다. 식물의 이파리를 자른 젤리는 붓기를 가라앉히는 데 효과가 좋았다.
클로디아가 눈을 감으며 “으음…. 노바라 다 들었어, 설마?” 하고 물었다. “뭘요?” 노바라는 모른 척했다.
젤리를 문질문질하면서 뺨을 부드럽게 쓸어주니 한숨이 터져 나왔다.
좋은 냄새가 나는 향유를 다시 바른다. 머리카락은 아침에 잘 빗어 말린 덕에 굳이 다시 감을 필요가 없었다. 틀어 올린 머리에서 수건을 풀고, 가운을 입고 앉은 클로디아의 뺨에 화장수를 올리고 몇 번 두들겼다. 시녀들이 클로디아의 팔다리를 부드럽게 주물렀다. 그리고 곧 비명이 터졌다.
“악!”
“어깨가 엄청 딱딱해요!”
“허리도요!”
“아악, 아파!”
“참으세요!”
보통 미혼 여성의 투왈렛 룸에서 들리리라고 생각하기는 어려운 소리가 연신 들렸다.
우두둑, 우두둑. 아악! 악!
투왈렛 룸을 지키고 선 기사들이 대체 무슨 생각을 할까 생각하며 노바라는 클로디아의 종아리를 힘차게 눌렀다. 잔뜩 뭉쳐 있는 종아리 뒤쪽에 힘이 들어갔다.
“너무 아파!”
클로디아의 눈에 눈물이 글썽글썽했다. “그러니까 자주 좀 오셔서 마사지 좀 받으라고 말씀드렸잖아요! 이렇게 뭉칠 때까지 뭐 하셨어요?” 그녀의 어깨를 누르던 시녀 하나가 구박했다. 클로디아는 저도 모르게 내뱉었다.
“데미안이 요새 바빠서 못 했단 말이야!”
시녀들의 눈이 동그래졌다. 클로디아는 빠르게 입을 닫았다. 시녀들의 눈길이 바쁘게 서로를 오갔다.
누구요?
수르 알파.
뭘 해요?
그 많은 시선들이 노바라를 향했다.
노바라는 클로디아의 눈치를 봤다. 클로디아의 얼굴은 홍당무가 돼 있었다. 노바라는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수르 알파가 훈련하고 잠깐 주물러주시는 거랑 같나요?”
아. 그 얘기였어?
시녀들이 김 샜다는 표정이 됐다. 클로디아가 노바라에게 눈으로 고마움을 표했다. 노바라는 눈으로 말했다.
고마우면 올 때 청혼 반지 받아오세요.
조금 후에 클로디아가 그녀에게 속삭였다.
“노바라, 이따가 내 방에 와. 저번에 예쁘다던 산호 머리핀 줄게.”
제 말 하나도 못 알아들으셨군요.
노바라는 속으로 눈물을 삼켰다.
***
해가 저물 때가 됐다. 동력 지대로 내려온 것을 실감할 때는 많았지만, 뭐니뭐니해도 엄청나게 큰 모닝문을 볼 때가 가장 신기했다. 클로디아는 성의 회랑을 지나다가 멍하니, 뻥 뚫린 천장 위의 모닝문을 바라봤다.
하늘의 대부분을 달이 차지하고 있었다.
“세상에….”
하늘섬에서 달을 볼 때와는 사뭇 달랐다. 하늘섬에는 지평선이 없다. 당연하지만 대륙 위의 허공에 떠 있는 하늘섬에서 모닝문을 바라보면, 항상 동그란 모양이었다. 하지만 지상에서 본 모닝문은 압도적이었다. 클로디아는 모닝문 축제가 왜 대륙 전역에서 그렇게나 크게 벌어지는지 이제야 알 것 같은 기분이었다.
“예뻐….”
하얗게 빛나는 달이 하늘의 반 이상을 차지하며 빛나는 모습은 분명 인상적이었다. 포르투에서 내려다보듯이 볼 때와, 지상에서 달을 올려다보는 기분.
클로디아는 내심 동력 지대로 내려오기를 참 잘했다고 생각했다.
‘동력 지대 사람들은 벽이 무너지기 전까지 저 달을 본 적이 없겠지….’
부드러운 바람이 불었다. 동력지대를 감싼 높은 성벽 때문에 동력지대 안에는 바람도 잘 불지 않았다. 그녀는 그 끝없는 어둠 속에서 헤맸을, 자신이 아는 남자를 생각했다.
기분이 조금 좋아졌다.
“폐하?”
그녀의 걸음을 따라가느라 뒤에 서 있던 노바라가 클로디아를 재촉했다. 클로디아는 화들짝 놀랐다.
“무슨 생각을 하세요?”
“아니야, 그냥….”
클로디아는 옅게 웃으면서도 다시 한번 달을 바라봤다.
“예쁘다고 생각했어.”
그녀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어깨를 따라 달빛이 흘러내렸다. 몸을 잔뜩 감싼 은빛 드레스 위에서 비즈들이 달빛을 반사하며 반짝반짝 빛났다. 정성스럽게 땋아서 틀어올린 머리카락은 이제 제법 많이 길었다. 머리카락 위에 단단히 고정된 은왕관은 그녀를 위해 특별히 가볍게 만들어진 것이다.
그녀의 뒤로 포르투 기사들이 네 명 줄을 이었다. 시녀들도 네 명. 노바라와 클로디아까지 하면 총 열 명이라는 행렬이 연회장을 향해 가고 있었다.
“저어, 폐하.”
“응?”
노바라가 그녀에게 넌지시 말을 건넸다.
“역시 기사 한 명이라도….”
연회장에 들어가야 하는 그녀의 옆에는 아무도 없었다. 노바라의 눈 안에서, 약간의 불안이 엿보였으나 클로디아는 부드럽게 웃어넘겼다.
“괜찮아.”
“하지만 너무 허전해 보여요….”
“내가 5년 전에 여행할 때는,”
“네에, 네에.”
노바라가 한숨을 쉬었다.
“달랑 두 명이 출발했다고 말씀하시려는 거죠? 그 말 몇 번만 들으면 백 번 채울걸요.”
“알았으면 됐어.”
클로디아가 생긋 미소 지었다. 노바라는 조금 울컥했다.
‘수르 알파! 아무리 폐하가 거절해도 이런 날 정도는 폐하 옆을 지키란 말이야!’
그러니까, 국왕의 말이라면 껌벅 죽는 그 수르 알파는 지나치게 고지식해서 문제였다. 클로디아는 테 포르투가 치를 첫 모닝문 축제의 보안이 영 걱정됐다. 그 말을 들은 수르 알파는 그녀의 말대로 자신이 모든 치안을 직접 점검하겠다고 말했다.
클로디아는 웃으며 그에게 모든 걸 맡기겠다고 했으니, 자연스레 수르 알파는 그녀의 옆을 지킬 수 없게 됐다. 아무리 잘난 수르 알파라도 몸이 두 개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높으신 분이 하실 일이 있고 안 하실 일이 있다구요!’
노바라는 속으로 툴툴댔다.
포르투 기사단의 부단장이 그녀의 곁을 지키는 것이 어떻겠나 하는 이야기가 나왔지만, 클로디아는 미소 지으며 그 모든 것을 거절했다.
“괜찮아요. 저 혼자 할게요. 물가에 내놓은 어린애도 아니고.”
여느 때였으면 우리 공주님 다 컸다고 눈물이라도 흘렸을 노바라지만, 오늘은 미련을 버릴 수 없었다.
“바람이 포근하네….”
회랑의 끄트머리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다시 하늘을 바라보는 이 여인은 오늘 해도 해도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예뻤으니까. 시녀들이 혼신의 힘을 다한 화장 때문만은 아니었다. 클로디아의 푸른 눈이 꿈꾸는 듯 달을 다시 한번 향했다.
“잘 지내고 있으려나….”
“예? 수르 알파라면….”
“아, 아냐.”
노바라의 대답에 클로디아가 손을 내저었다. 그녀는 방금 전과는 조금 다른 묘한 미소를 머금고 걸음을 옮겼다.
“딴생각을 너무 많이 했다. 그렇지? 어서 가자.”
“예.”
연회까지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노바라는 황급히 그녀를 따라 걸음을 빨리했다.
그래서 클로디아가, 달을 보며 새빨간 머리카락을 가진 어떤 마법사의 생각을 했다는 것은 아무도 알아채지 못했다.
***
“처음처럼 지금도, 단 한 번도 흐려졌던 적 없는 빛처럼 아름다우십니다.”
와, 대박 뻔뻔해.
노바라는 입을 벌렸다. 클로디아의 눈앞에는 다름 아닌 킴 왕자가 무릎 꿇고 있었다. 백 개의 왕국에서 보낸 사신 명단은, 대부분 예정 명단이다. 당일까지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신들은 대부분 명단과 다르지 않은 구성으로 테 포르투를 방문했다. 눈앞의 킴 왕자만 빼고.
“킴 왕자. 오랜만에 봅니다.”
“저를 기억하시다니 영광입니다.”
킴 왕자는 몸을 과장되게 수그리며 인사했다.
킴 왕자의 이름은 사신 명단에는 없었다. 하지만 그는 사신 명단의 허점을 이용해 지금 이 자리에 서 있었다. 연회장에 모인 수백 명의 사람들 앞인데도 그의 얼굴에는 부끄러움 한 점 없었다. 사람들이 킴 왕자를 알아보고 수군거렸다.
“세상에, 킴 왕자 아녜요?”
“그, 5년 전에 자기는 청혼한 적 없다고 입 싹 닦은….”
“어머나, 뻔뻔해라.”
내 말이!
노바라는 파르르 떨었다.
생각 같아서는 자신이 나서서 왕자의 뺨이라도 후려갈기고 싶었다. 하지만 클로디아가 가만히 있는데 자신이 그럴 수 있을 리 없었다. 물론 클로디아가 무례하게 굴면 자신이 뜯어말리긴 하겠지만….
“참으로 좋은 날입니다! 연인들을 축복하는 모닝문의 달빛 아래에서 한때나마 인연이었던 여인과 재회하다니, 이것도 모닝문이 이어준 인연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가요?”
“모닝문의 마법은 헤어진 연인들도 운명적으로 재회하게 해 준다지요. 지금 제 가슴이 얼마나 두근거리는지 모르실 겁니다.”
아, 죽이고 싶다. 노바라는 손발이 근질거렸다.
클로디아는 말없이 웃고 있었다. 숱한 남자들이 그녀에게 얼마나 무례하게 굴었는지 그녀가 다 기억하지 못한다 해도, 그녀가 킴 왕자를 잊어버렸을 리는 없었다. 그만큼 킴 왕자의 배신은 너무나 대단한 타이밍에 이뤄졌다.
하지만 혹시나 싶은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노바라는 결국 클로디아의 귀에 속삭이고 말았다.
“폐하, 혹시 잊어버리신 건 아니죠?”
클로디아도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노바라에게 속삭였다.
“암만 내가 디자이어한테 속아서 뛰쳐나간 빡대가리라도, 그걸 잊어버릴 정도로 멍청하진 않지.”
노바라는 만족했다.
그녀가 모시는 폐하의 입버릇이 유독 걸어진 것 자체가 빡침의 방증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킴 왕자는 이제 그녀에게 상자 하나를 내밀었다.
“혹시 기억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어머나, 이게 무엇인가요?”
“아아! 오늘따라 부드러운 바람이 다시금 제게 5년 전의 기억을 되새기게 하는군요. 폐하께서는 아름다운 열아홉의 처녀이셨으며 저는 그런 폐하께 고작 양산을 씌워드리는 것이 기쁨인, 순진한 청년이었답니다.”
순진한 청년 다 죽었냐. 노바라가 이를 악물었다. 클로디아가 고개를 살짝 옆으로 기울였다.
“으음, 그랬던가요? 워낙 오래전이라….”
기억 다 나도 안 나니까 엿이나 처먹으라는 말뜻을 알아들을 위인이었다면, 킴 왕자가 지금 그녀의 눈앞에서 이렇게 대단히 부담스럽게 굴진 않을 것이다. 그는 과장된 몸짓으로 말을 이어갔다.
“사소한 추억이라 폐하께서는 잊으셨을지 모르지만, 저에게는 아주 소중한 기억으로 남아있답니다! 호숫가에서 시녀들이 양산을 챙겨오지 않아 제가 직접 양산을 씌워드렸죠!”
“그랬군요.”
“그 후에 제가 폐하께 깊은 뜻을 담아 선물을 준비했지만, 포르투에 닥쳐온 크나큰 재앙 때문에 미처 전해드리지 못했답니다!”
그제야 노바라는 킴 왕자가 주려는 선물이 무엇인지 알아챘다. 자신의 기억이 맞다면 저건….
“바로 이것입니다.”
킴 왕자가 자랑스러운 얼굴로 상자를 열었다. 조그마하고 고급스러운 포장의 상자가 열리자마자 안에서 엄청난 광채가 뿜어져 나왔다. 하늘섬의 폭포 안에서만 난다는 하늘석 반지였다.
바로 5년 전, 그가 클로디아의 열아홉 살 생일에 그녀에게 바치며 청혼하려던 그 반지. 노바라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저 금치산자 같은 놈이! 어쩜 저렇게 뻔뻔할 수가!
그러나 킴 왕자는 노바라의 심정 따위는 알지 못한 채 계속해서 지껄였다.
“아아, 이 아름다운 반지를 5년 만에 드리게 되었군요. 페하께서도 아시겠지만, 이것은 하늘섬에서도 용감한 남자들만이 가질 수 있다는 하늘석입니다. 이제는 포르투에 가기가 요원해져, 더 이상 구하기 어려운 반지이기도 하죠.”
“아하…. 맞아요. 하늘석을 본 지 정말로 오래됐네요.”
클로디아가 흥미로운 표정이 됐다. 킴 왕자는 그녀의 그런 반응에 용기를 얻은 듯, 한 걸음 더 그녀에게 다가가 상자를 들어 올리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
연회장에서 그들을 지켜보던 이들이 한 차례 술렁였다. 누가 봐도 청혼하는 자세였다. 킴 왕자의 잘생긴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공주님, 5년 전의 제 실수를 감히 포장하지 않겠습니다. 저 또한 왕국을 책임지는 자. 그때는 저로서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한 왕국의 지도자로서 제게는 사랑도 중요하지만, 저의 왕국이 더욱 중요했답니다. 목숨을 걸고 대륙을 구해낸 공주님께서도 이해하시겠지요?”
언변 한 번 대단했다. 클로디아의 입술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럼요, 충분히 이해한답니다. 저 또한 포르투의 안위와 제 백성들의 불안감을 해소할 생각뿐이었죠.”
“이해해주신다니 영광입니다!”
킴 왕자가 기쁜 얼굴이 됐다.
“뻔뻔하다고 하실 수도 있겠지만, 클로디아 공주님. 그래서 저는 감히 이 자리에서 청하고자 합니다.”
“으음.”
클로디아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웃었다.
“5년 전 제가 열어보지 못한 상자를 열어주심에 짐작은 하고 있었습니다만….”
“네!”
그녀의 말에 킴 왕자는 정말로 환희에 휩싸인 표정으로 말을 치고 들어왔다.
“공주님, 제가 5년간 간직해온 사랑을 펼쳐내 보일 때라고 생각합니다. 매일 네 개의 대륙, 백 개의 왕국을 돌보시면서도 공주님의 마음을 감싸드릴 수 있는 이는 존재하지 않음이 안타까웠습니다.”
“그러셨군요….”
킴 왕자는 한층 더 가까이 그녀의 눈앞에 하늘석 반지를 들어 올렸다.
흘러가는 구름, 쾌청한 하늘. 하늘섬이 가지고 있던 아름다운 풍경이 그 하늘석 안에 자리하고 있었다.
클로디아는 꿈꾸는 듯이 그 반지를 감상했다.
“정말로 오랜만에 보는 아름다움이에요.”
“하지만 제 앞에 계신 분의 아름다움과는 비할 바 없지요.”
클로디아는 킴 왕자를 응시했다. 킴 왕자가 용기를 얻어 입을 열었다.
“이 좋은 날 청하건대, 공주님. 부디 저와 결혼해주시겠습니까?”
킴 왕자의 목소리는 우렁찼으며, 두 사람을 주목하던 모든 사람들이 숨을 죽였다. 백 개의 왕국에서 온 사신들이 모두 이 장면을 보고 있었다.
노바라는 정말 짜증 난다고 생각했다.
이 왕자는 클로디아가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저를 망신 주지 않을 것이라는 걸 확신한 후에야 청혼했다. 아마 클로디아가 사근사근하게 받아주지 않았다면 반지를 꺼내지도 않았을 것이다. 혹은 청혼을 하지 않을 수도 있었겠지. 그야말로 누울 자리 보고 발 뻗은 것이었다.
하지만 노바라는 믿었다. 누구를? 그녀의 주인을.
클로디아는 빙그레 웃었다.
“싫어요.”
킴 왕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주변은 한층 더 조용해졌다. 킴 왕자의 얼굴은 이제 점점 벌게지고 있었다. 클로디아는 방긋방긋 웃으며 킴 왕자를 내려다보기만 했다. 한참 후, 킴 왕자가 입을 열었다.
“오, 오랜만에 보는 아름다움이라고….”
“오랜만에 보면 다 청혼을 받아줘야 하나요?”
“이해하신다고….”
“그럼요, 이해하죠.”
클로디아가 주변을 둘러봤다. 백 개의 왕국에서 온 사신들이 모두 숨죽여 이쪽을 바라보다가, 그녀와 시선을 맞췄다. 클로디아는 다분히 의식적으로 그 모든 사신들과 눈인사했다. 그녀의 푸른 눈을 마주한 모든 이들이 조금씩 움찔했다.
주변을 모두 둘러본 클로디아는 환하게 웃었다.
“정말이랍니다. 저는 이 자리에 계신 모든 분들을 이해해요. 그때의 포르투는 너무나 연약했고 애처로웠어요. 저 또한 엄청나게 불안했죠. 사흘 밤낮을 눈물로 지새웠답니다.”
“하지만 지금 저를 거절하시는 건, 그때의….”
“무슨 소리세요, 왕자님.”
클로디아는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녀의 푸른 눈이 장난스럽게 빛났다.
“거절을 비난으로 착각하지 마세요.”
“….”
“물론 킴 왕자님께서는 그때 저에게 청혼한 적도 없다며, 저와의 약혼을 무효화하는 확인서까지 받아가셨죠!”
그녀의 목소리는 낭랑했고, 그 내용은 연회장 구석구석에 울려 퍼졌다. 사신들이 이마를 찡그리며 킴 왕자 쪽을 바라봤다. 킴 왕자의 얼굴은 이제 피가 날 정도로 벌게져 있었다.
클로디아는 어깨를 으쓱했다.
“하지만 저는 왕자님을 비난할 생각이 없답니다! 말씀드렸잖아요. 이해한다고.”
“그렇지만…. 방금 공주님께서는 저를 이해하신다고….”
“이해한다고 해서 제가 킴 왕자님의 청혼을 받아드려야 하나요?”
클로디아가 수줍게 미소 지었다.
“그거 아세요? 저는 얼마 전 개를 기르기 시작했답니다. 아주 작고 귀여운 강아지인데, 제 친구를 꼭 닮았죠! 어찌나 영리한지 제가 하는 말을 다 알아듣는답니다. 물론 저도 그 강아지의 말을 알아듣죠. 밥그릇을 긁으면 밥을 달라는 소리고, 왕왕 짖으며 제 옆을 두어 바퀴 돌면 그건 제 정원에서 산책하고 싶다는 이야기랍니다!”
갑자기 웬 강아지 이야기야?
하지만 곧 클로디아의 말이 이어졌다.
“킴 왕자님의 말씀대로라면 전 저의 사랑스러운 강아지 뽀뽀와 먼저 결혼해야 해요!”
익살스러운 말투에 웃음이 쏟아졌다.
와하하하하.
킴 왕자의 얼굴은 이제 시꺼메졌다. 하지만 클로디아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말이에요, 왕자님. 중간부터 틀리신 게 있어요.”
“제가…요?”
킴 왕자는 이제 말을 더듬고 있었다. 클로디아는 자신의 머리 위에 씌워진 은왕관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아까부터 자꾸 공주님이라고 부르고 계시잖아요.”
빙고! 노바라는 주먹을 쥐고 환호하고 싶었다. 자신의 손에 빛나는 봉이라도 있다면 들고 흔들고 싶었다!
아까부터 거슬리던 게 뭔지 클로디아는 정확히 짚어냈다.
“저 공주 아녜요. 국왕이죠.”
클로디아가 한쪽 눈을 찡긋했다. 노바라는 환호하고 싶었다.
정말이지, 자신이 모시는 국왕 폐하야말로 최고의 여인이었다. 십 년 묵은 체증이 다 내려가는 기분이 들었다.
클로디아는 정말 많은 남자들과 춤을 추었다. 포르투의 귀족들, 사신들, 그사이 섞여 있는 왕족들…. 젊은 남자들부터 아직은 어린 소년, 그리고 나이 많은 중년의 남자와 노인까지 그녀에게 춤을 신청하는 이들은 다양했다.
노바라는 정말이지, 클로디아가 훈련한 성과를 오늘 깨달을 줄은 몰랐다. 클로디아는 저녁을 지나 새벽별이 뜰 때까지 그 모든 사람들과 춤을 춰 주었던 것이다!
물론 노바라가 옆에서 귀띔한 남자들은 빼고. 킴 왕자는 당연하게도 오늘 클로디아와 춤을 추지 못했다. 그 밖에도 몇몇 남자들은 클로디아의 근처에도 가지 못했다. 그녀에게 조금이라도 무례하게 대했던 남자들은 노바라의 시선을 벗어나지 못했다. 누군가가 클로디아에게 접근하면, 노바라는 그녀에게 몰래 속삭였다.
“저 남자는 안 돼요, 그때 폐하께 어떻게 굴었냐면….”
“쥬버린 오빠가 미워.”
그녀는 막 폐회 선언을 하고 휴게실에 들어온 참이었다.
그녀가 신고 있던 신발을 벗어내며 투덜댔다. 다른 시녀가 클로디아의 낮은 신발을 받아냈다. 양가죽으로 만든 그 하얀 신발이 아니었다면 오늘의 클로디아는 발목이 부러졌을 것이다. 노바라가 그녀의 퉁퉁 부은 발을 주물렀다.
“쥬버린 전하가 왜요?”
노바라의 물음에 클로디아가 불만 가득한 얼굴로 입술을 쭉 내밀었다.
“오빠가 아바마마 대신 통치할 때, 모닝문 축제의 연회에는 내가 나가서 춤췄잖아! 그럼 내가 통치할 때는 오빠가 나가서 춤춰야 하는 거 아냐? 발 아파 죽겠어!”
“아하하하.”
“생각해 보니까 오빠는 그때 힘든 건 다 나 시켰어!”
물론 쥬버린이 그때 그녀를 연회에 내보낸 것은, 클로디아가 파티를 좋아했기 때문이다. 노바라는 알고 있었으나 굳이 말을 보태지 않았다. 클로디아는 사람을 만나고 까르륵 웃고 춤을 추는 것을 좋아했다. 어여쁘게 꾸미고 자신의 아름다움을 뽐내는 것도 좋아했다.
지금의 클로디아가 그렇지 않으냐 하면, 물론 아니다. 클로디아는 문득 거울을 보고 조금 기분이 좋아졌다. 그 안에는 지치기는 했으나 대륙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나 안 죽었네. 그치?”
“언제 돌아가셨어요, 저 모르는 사이에?”
노바라가 뾰족하게 대꾸했지만 클로디아는 와르륵 웃으며 거울을 봤다.
“나 엄청 예쁘네. 누구 좋으라고.”
“그러게요. 누구 좋으시라고.”
노바라가 투덜댔다. 수르 알파는 결국 끝까지 연회장에 나타나지 않았다. 몇몇 왕족들이 클로디아에게 수르 알파의 행방을 물었고, 클로디아는 미소 지으며 “그는 지금 이 시간에도 포르투의 안녕을 위해 우리 모두를 지키고 있답니다.” 하고 답했다. 그뿐이었다.
결국 연회는 끝이 났고,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 사라졌다. 연인들은 손을 잡고 숲으로, 들로, 혹은 아무도 모르는 회랑으로 나갔다. 오로지 그녀가 모시는 국왕만이 혼자였다.
“수르 알파께서도 너무하세요.”
“으응?”
결국 참지 못하고 노바라는 불만을 털어놓고야 말았다. 푹신한 의자에 늘어져 있던 클로디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노바라는 조금 훌쩍거렸다.
“오늘 폐하가 얼마나 예쁜데, 보러 오지도 않으시고….”
“노바라.”
“킴 왕자 같은 무례한 놈들이 폐하께 엉망진창으로 구시는데, 이렇게 딱!”
“….”
“검이라도 들고 오셔서 킴 왕자 같은 놈들을 혼쭐내주시면 좋잖아요!”
클로디아는 몸을 숙여 노바라를 내려다봤다. 노바라는 불퉁한 얼굴로 주절주절 늘어놨다.
“저는 있잖아요, 오늘에야말로 수르 알파가 사람들 앞에서 청혼하는구나 했다구요, 모닝문의 축제잖아요….”
“이런, 노바라.”
“아시잖아요. 폐하의 첫 모닝문 축제를 수르 알파가 어떻게 망쳐놨는지 저는 안다구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저는 알아요!”
모를 수가 없다. 클로디아는 쓰게 웃었다. 그 오래전의 모닝문 축제의 아침에, 포르투 왕성에서 가장 높은 탑에서 홀로 잠들어 있는 클로디아를 가장 먼저 발견한 것은 노바라였다.
모시는 공주님께서 부디 사랑하는 사람과 낭만적인 밤을 보냈기를 바라며, 얼굴을 붉힌 채 공주를 찾으러 왔었다. 그리고 노바라는 눈이 퉁퉁 부어 기절하듯 잠들어 있는 클로디아를 보고 대경실색했다.
머뭇거리던 클로디아에게 자초지종을 듣고, 며칠 후 클로디아가 파혼하고 나서도 노바라는 얼마나 슬퍼했는지!
“저는 폐하께서 행복하기를 바라요. 저도 어떻게 해야 폐하가 행복해질 수 있는지 아는데, 대체 수르 알파는….”
“그러니?”
“예?”
“내가 행복해지는 길을 노바라 너는 아니?”
클로디아가 빙그레 웃으며 노바라에게 물었다. 노바라는 얼떨떨한 채로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그야,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행복한 인생을….”
“하지만 나는 지금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행복한 인생을 살고 있는걸.”
여인이 눈을 찡긋했다. 노바라는 이마를 찌푸렸다. 아침에 일어나서 땀 범벅이 되어 훈련하다가, 저녁까지 서류에 파묻혀 있는 인생이 말인가? 게다가…. 사랑하는 남자는 연회에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인생이?
하지만 클로디아는 노바라의 이해를 바라지 않았다. 정확히는 필요 없었다. 가장 친한 친구라 할지라도 아마 그녀의 인생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클로디아는 공주였고, 이제는 국왕이었다. 누구도 그녀와 같은 삶을 살고 있지 않다. 물론 이 세상에 남들과 완전히 똑같은 삶을 사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누구의 인생 궤적도 완전히 똑같지는 않다.
데미안 알파가 남들 앞에서 무릎을 꿇으면 참 낭만적이고 멋진 장면으로 오랜 세월 회자될 것이다. 하지만 클로디아의 인생에 그런 남자는 필요 없었다.
그녀의 인생을 책으로 치면, 로맨스는 몇 페이지에 불과하다. 화려할 필요도, 남들에게 보여줄 필요도 없다.
남들 앞에서, 주인공은 그녀 하나여야 했다.
클로디아는 노바라에게 웃어 보였다.
“…그래도요.”
영 시무룩한 노바라가 다시 입술을 쭉 내밀었다.
“수르 알파는 폐하의 연인이잖아요….”
“그건 이 왕성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지 않아?”
“그러니까요!”
노바라가 발끈했다.
“모두들 수르 알파의 입맞춤만 기다리고 있는데!”
“…뭐라고?”
클로디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노바라는 아차 싶었지만, 다시 말을 이었다. 말이 나온 김에 얘기하는 게 나았다.
“모닝문 축제잖아요! 해가 뜨기 전에! 달 밑에서 입을 맞춰야!”
“…영원히 행복해진다는 말 말이지?”
그제야 클로디아가 피식 웃으며 머리를 긁었다. 단단히 고정해놓은 머리카락이 아무래도 갑갑한 듯했다. 노바라는 서둘러 그녀의 머리 위 은왕관부터 빼냈다.
가벼운 은왕관이지만 하루 종일 머리에 얹고 있으면 아무래도 버거운 것은 사실이었다.
“그런 거라면, 노바라. 난 이미 그건 했어.”
“…예?”
“했다고. 수르 알파랑.”
클로디아의 땋아올린 머리카락을 차근차근 풀던 노바라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녀는 꽥 소리를 질렀다.
“언제요?!”
“…그건 비밀…?”
데미안과 파혼하게 된 계기는 그 어린 여름밤이었다. 클로디아는 잠시 회상에 잠겼다. 그날 자신은 울면서 데미안에게 입 맞춰달라고 명령했다. 데미안은 머뭇거리며 자신에게 입 맞췄고… 그것은 분명 해가 뜨기 전의 모닝문 아래였다.
며칠 후 파혼하면서 ‘모닝문 전설 따위는 다 거짓말이야! 미신이야!’라고 생각했지만….
클로디아는 잔잔히 미소 지었다.
어쩌면 그 전설은 사실이 아닐까. 그것도 아주 대단한 효과가 있는.
눈물이 흘러 짠맛이 났던 입맞춤은 이제 생각도 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녀는 이제 행복하다.
클로디아는 맨발로 걸어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낮은 신발도 신기 싫었다. 통통하게 부어서 체온이 높아진 발에, 차가운 대리석으로 된 바닥이 닿는 감촉이 기분 좋았다. 시녀들과 기사들이 황송해하며 그녀의 뒤를 따랐다.
클로디아가 막 회랑으로 들어섰을 때였다. 달빛이 휘황찬란하긴 하지만, 어둠이 가시지 않은 정원에서 서걱서걱 소리를 내며 걸어오는 인영이 있었다.
기사들이 저도 모르게 놀라 경계를 취했지만, 곧 상대의 모습을 보고 예를 취했다.
“…수르 알파.”
“지금 막 포르투 왕성의 마지막 손님이 빠져나간 참입니다. 치안에 문제는… 없었습니다.”
“고생했어요.”
데미안이 고개를 숙이다가, 그녀의 발에 시선이 닿았다.
“왜 맨발로….”
“춤을 너무 많이 춰서 힘들길래. 이리 와요. 같이 가요.”
그러나 데미안은 그녀의 말을 듣지 않았다. 정확히는, 다가오자마자 그녀를 안아 들었다. 길게 늘어진 은빛 드레스 자락이 확, 하고 그 바람에 어둠 속에서 아름답게 펄럭였다.
“꺅! 뭐예요?”
데미안은 무표정히 대답했다.
“혼자 걸으실 수 없을 것 같아서.”
놀라 크게 뜨였던 클로디아의 눈이 가늘게 휘어졌다. 십여 년 전, 그녀가 들었던 말과 완벽히 같았으나 지금 그 말은 전혀 다른 의미를 지녔다.
클로디아는 기쁘게 데미안의 목에 팔을 감았다.
그대로 두 사람은 클로디아의 내실까지 들어갔다. 클로디아는 자신의 은왕관을 노바라에게 건네주었다. 노바라는 왕관을 모셔 들고 문을 닫으려다가, 힐끗 방 안을 들여다봤다. 잘 보이지는 않았으나 클로디아가 웃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노바라는 문을 닫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