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성기사의 고뇌 (28/30)

외전. 성기사의 고뇌



 

연두색 배가 바다 저 건너로 멀어졌다. 스완 경은 그 배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었다. 이윽고 수평선 너머로 배가 사라지고, 항구의 소란이 주변을 메웠다. 선원들이 어이차, 하고 밧줄 묶음을 날랐다.

“어이! 경매장이….” “여기 좀 맞들어주게!” “야! 이 자식아! 네가 분명 오늘 납품량이….”

거친 남자들이 소리 질렀다.

“맛 좋은 빵 사세요!” 선원들에게 간단한 식사를 파는 행상인이 사람들 틈을 빠져나가려다가, 스완 경에게 부딪쳤다. 스완 경은 저도 모르게 품에 안은 것을 감쌌다.

“어이쿠, 죄송합니다!”

“괜찮습….”

“키이익!”

그에게 부딪쳤던 행상인이 기겁하며 스완 경의 품을 바라봤다. 두건을 두른 아이, 마고뜨가 상인 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스완 경은 두건을 마저 아이에게 둘렀다. 아이가 끄르륵, 하고 짜증을 냈다. 행상인은 희한한 것을 보는 눈으로 이쪽을 보다가 멀어져갔다.

바쁜 항구에서 쓸데없이 시간을 지체해서 좋을 것이 없었다.

“키익, 킥!”

“가만히 좀 있어라.”

스완 경이 짜증스럽게 아이를 끌어안았다. 클로디아 테 포르투가 그에게 남겨준 번잡스러운 과제, 마고뜨.

이제 정말로 그들은 둘만 남았다. 스완 경은 포르투로 가야 하는 자신의 처지가 아득하게 느껴졌다.

‘아무리 정치적 목적이 있다지만, 마족을 데리고 포르투로 가야 하다니.’

세이비어 가문의 기대주로 자랄 때도, 신의 힘을 발현해 교국의 성기사로 뽑혔을 때도 이런 일을 맡게 되리라고는 생각해본 적 없다.

‘신이 계신다면 지금 하필 내게 왜 이런 임무를 맡기시는 것인가.’

하지만 어쩌겠나.

그는 이미 클로디아 공주의 제의를 수락했고, 아이는 제 품에 있다. 그는 생각 같아서는 신을 찾아 붙들어 왜 제게 이러시나 묻고 싶었으나 신은 이곳에 없다.

스완은 한숨을 쉬었다.

“…출발하자.”

“크르륵!”

아이는 그가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내며 손을 뻗었다. 하지만 스완 경은 아이의 사정을 봐 주지 않고, 길고 큰 망토로 아이를 더 두껍게 둘둘 말았다. 답답한 듯 마고뜨가 키익거렸으나 어쩔 수 없었다.

아이의 뿔이 사람들 눈에 띄는 것보다는, 조금 답답한 게 나았다. 마고뜨는 아마 납득하지 못할 테니 말이다.

스완 경은 항구의 사람들을 헤치고 걸었다. 사람들이 제 갑옷을 힐끔거리는 게 보였다. 교국의 성기사라는 것까지는 알아보는 것 같지 않았으나, 적어도 평범한 사람은 아니라는 것을 눈치챈 듯했다. 일부러 길을 비켜주는 사람도 있었다.

여태까지는 단 한 번도 그런 것을 달가워한 적 없었으나 이번만은 고마웠다. 스완 경은 자신에게 길을 비켜준 처녀에게 목례했다. 이름 모를 처녀가 얼굴을 붉혔다.

‘포르투로 갈 때까지 이대로만 여행할 수 있으면 좋겠군.’

물론 그렇게 수월할 리 없었다.



 

***



 

조그만 계집애를 안고 여관에 묵는 것, 그것도 거대하리만치 덩치가 큰 기사가 단독으로 여자애를 데리고 묵는 것은 굉장히 거북한 시선을 감당해내야 하는 일이었다.

스완 경은 두 군데의 여관에서 의심의 눈초리를 받았다. 소아성애자 아니냐는 눈초리였다.

하지만 그의 갑옷을 보고 함부로 그런 의심을 입 밖에 내는 자들은 없었다.

이게 더 안 좋았다. 여관 주인들은 의심을 입 밖에 내서 모르는 기사님에게 도륙당하는 일을 피할 만큼 요령이 좋았다. 자연스럽게, 그들은 스완 경에게 “방이 없습니다”라고 유연하게 거절을 내밀었다.

스완 경은 난감해졌다. 세 번째 여관 주인은 심지어 스완 경의 갑옷을 알아봤다. 하지만 대륙 전역에서 존경받는 교국의 그 갑옷은, 이같은 상황에서는 역설적으로 작동했다.

“…성기사 아니십니까?”

“맞네.”

“…저는 못 뵌 것으로 하겠습니다. 하지만 저희는 그런 영업은 하지 않아요, 나으리.”

“그런 영업이라니,”

여관 주인은 다 안다는 표정으로 스완 경에게 속삭였다.

“저희 같은 여관에서는 힘드실 겁니다. 저쪽 두 번째 골목으로 가시면 조금 허름하지만 이런 종류의 영업을 하는 곳이 있는데….”

모두가 그를 소아성애자 취급하고 있었다. 스완 경은 머릿속이 아득해졌다. 그런 게 아니라고 해명하고 싶었으나 마고뜨의 뿔을 내보일 수도 없다.

“그게 아니오. 임무 때문이오. 말할 수 없는….”

여관 주인은 영 탐탁잖은 표정이었으나, 스완 경의 말에 겨우 고개를 끄덕이며 열쇠를 내주었다.

“죄송합니다. 성기사님에게 무례한 소리를 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워낙 경악스러운 자들이 멀쩡한 척하면서 많이 오는지라….”

변명 비슷한 것을 주워섬기는 여관 주인의 말을 들으며 스완 경은 한숨을 내쉬었다.

‘신이시여, 거기 계신 것 맞지요? 불경하고 악한 이들에게 천벌을 내리시는 것 맞지요?’

스완 경은 불경한 의심을 품으며 제 품에 안긴 마고뜨를 내려다봤다.

함께 길을 떠난 지 사흘.

둘둘 말다시피 한 망토에 겨우 익숙해진 마고뜨는 조용히 스완에게 안겨 있었다. 두건 속에서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설마 사람들이 하는 말을 다 알아듣는 건 아니겠지? 스완은 제발 마고뜨가 인간들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길 바랐다.

그리고 자신보다 앞서 이 여관에 들렀을, 수많은 ‘독특한 연애자’들을 다 도륙해 죽이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맙소사, 신이시여. 용서하소서. 불측한 생각을 했나이다.”

방을 안내받다 말고 툭 내뱉은 스완 경의 말에, 여관 주인이 한층 더 미묘한 표정을 하게 된 것은 여담이다.



 

***



 

함께 여행한 지 열흘이 다 되어가던 어느 날이었다. 그날까지도 스완 경와 마고뜨의 여행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포르투까지 좀 돌아서 가더라도, 큰 도시들을 경유하는 쪽이 훨씬 수월하다는 걸 알게 됐기 때문이다.

어쨌든 스완 세이비어라는 이름은 제법 유명한 이름이었다. 스완 경은 여전히 성기사 갑옷을 입고 국경을 통과했으며, 어떤 큰 도시에서는 그에게 군마를 빌려주겠다 제의하기도 했다.

그가 안고 있는 작은 여자아이도, 자연스레 교국의 임무이겠거니 생각해주는 이들도 많았다.

하지만 그날은 좀 달랐다. 스완 경은 여관에서 방값을 셈하고 있었다. 통상적으로 여관 1층은 대부분 식당이었는데, 음식을 나르던 여급이 주정뱅이들에게 거칠게 대꾸하다가 그만 스완 경에게 부딪치고 말았다.

운이 나쁘게도 여급이 들고 있던 맥주는 스완 경의 품에 안겨 있던 아이에게 왈칵 쏟아졌다.

“키이익!”

“꺅! 죄송합니다, 죄송합니….”

놀라 황급히 사과하던 여급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차 싶었을 때는 이미 늦었다. 여자아이는 신경질적으로 자신이 두르고 있던 두건을 헤치고 손을 뻗었다. 가장 먼저 튀어나온 건 여자아이의 지푸라기 같은 거친 머리카락과 함께 보이는… 뿔이었다.

“꺅, 저게 뭐야?”

여급의 작은 비명에 모두 이쪽을 바라봤다. 스완 경에게 돈을 받고 있던 여관 주인의 얼굴도 일그러진 것은 물론이었다.

결국 스완 경은 아이를 안은 채 여관을 나왔다. 여관 주인은 스완 경의 이름도 알고 있었고 교국의 성기사들이 가진 성스러운 임무도 알고 있었지만, 마족을 재워주는 것은 거부했다.

게다가 스완 경은 여관을 나와 다른 여관을 찾던 도중, 이상한 무리들과 싸워야 했다. 스완 경의 실력은 그들을 물리치기에 모자람이 없었으나 문제는 그들이 너무 많다는 것이었다. 큰 도시의 부작용은 소문이 빨리 퍼진다는 것이다. 그 도시에서 스완 경이 마족 어린애를 데리고 있다는 소문이 퍼진 모양이었다. 그것도 질이 좋지 않은 부류에게.

“거, 어차피 교국에 들고 가면 죽일 거 아니우? 그럴 바엔 우리한테 넘기는 게 좋지 않을까요, 성기사 나리.”

그딴 말을 하며 스완 경의 가는 길을 습격하는 무리가 끝도 없었다.

“겁대가리가 없구나.”

스완 경은 싸늘한 얼굴로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떼거지로 덤비는 데는 장사 없었다. 마고뜨를 품에서 떼놓을 수도 없었으며 스완 경도 괴물은 아니었다. 체력이 달렸다.

대체 어디서 이렇게들 덤비는가, 여섯 번째인지 일곱 번째인지 모를 강도 무리의 멱살을 잡고 물어보니 도둑 길드에 소문이 퍼졌다 했다.

도둑 길드라는 것이 있다는 소문은 들었으나 스완 경이 직접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애초에 도둑 길드 같은 것에 관심을 둔 적도 없었다. 다만 스완 경은 마족을 팔아치우거나 노예로 쓰는 놈들의 주체가 도둑 길드라는 것은 확실하게 알게 됐다.

결국 스완 경은 다시 여행 방법을 바꾸었다. 그는 갑옷을 벗었다. 성기사 갑옷을 벗을 때는 휴가 때뿐이었던 그가 임무 중에 갑옷을 벗다니. 동료들이 알면 대경실색하며 놀랄 일이었다. 그만큼 스완 경은 엄격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는 상관없었다. 어쨌든 마고뜨는 그의 임무였고, 이 임무가 불쾌하든 거추장스럽든 해내기로 포르투의 공주와 약속했다.

‘하지만 신께서 이렇게 잡스러운 무리들을 붙이실 줄은 몰랐는데.’

그는 다시 최대한 지름길로, 그러니까 작은 도시들을 다시 경유해 가기로 마음먹었다. 시골 마을을 지나던 참이었다. 하필 초저녁부터 비가 왔다. 여관이 있는 도시까지 가고 싶었으나 어둠은 빨리 찾아들었고 비는 억수같이 쏟아졌다. 할 수 없이 스완 경은 근처에 있던 한 농가를 찾아들었다.

“미안하지만 집 안에 들일 수는 없수다.”

늙은 농부는 불안한 얼굴로 스완 경과, 안겨 있는 작은 인영을 번갈아 쳐다봤다. 갑옷을 벗은 스완 경은, 물론 그 호감을 불러일으키는 인상은 같았으나 일반인들이 보기에는 꽤 위협적인 덩치를 가진 남자였다. 잘 다져진 근육은 누가 봐도 무인의 것이었다.

게다가 아이는 망토에 둘둘 말려 있었다. 스완 경은 갑옷을 벗으면서도 체온을 유지해주는 마법이 걸려 있는 망토는 포기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스완 경의 수상함은 배가됐다. 옷은 평범한데 덩치는 무인이고, 망토는 고급품이었다. 게다가 거기 싸인 사람은 얼굴도 보기 어렵다. 농부가 스완 경을 집에 들이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스완 경은 애타게 사정했고, 결국 그는 농부의 헛간에나마 누울 수 있었다. 소들을 위해 잘 말린 지푸라기가 한쪽에 꽤 많이 쌓여 있었다. 스완 경은 헛간 문을 잘 닫은 후 아이의 망토를 풀었다.

“까끄륵….”

아이가 작은 소리를 내며 고개를 흔들었다. 망토 안에서 구겨져 있던 몸을 펴는 듯한 몸짓이었다. 열흘을 넘게 갑갑한 망토를 두른 채 그에게 안겨 이동하고, 밤에만 겨우 몸을 펼 수 있는 아이의 처지가 스완 경은 조금은 안타까웠다.

그래서 스완 경은 농부가 내어 준 감자 다섯 알 중 세 알을 아이에게 내주었다. 그러나 아이는 감자를 힐끗 쳐다보고는 고개를 돌렸다.

“입맛에 맞지 않는 것이냐.”

“키익….”

스완 경은 답답해졌다. 자르지스와 이곳의 마력이 다르니 아이는 인간의 말을 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시빌이라는 마법사가 마법을 걸었을 때는 분명 사람과 다르지 않게 말할 줄 아는 것을 본 후였다.

“분명 지성이 있고 이성도 있는데, 의사소통이 안 된다는 이유만으로 이렇게나 천치처럼 구니….”

그 말에 아이가 눈을 매섭게 떴다. 스완 경은 확신했다.

이 애, 사람의 말을 알아듣기는 했다.

뉘앙스는 다르지만 분명히 알아듣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다시 아이의 입 앞까지 감자를 내밀었다.

“먹을 만은 하다. 맛은 없지만, 배가 고프고 체력도 유지해야 하니….”

“캭!”

그러나 마고뜨는 이를 드러내다가, 스완 경의 손등을 콱 물어버렸다. 예상하지 못한 일이기에 스완 경은 화들짝 놀라 감자를 떨어트렸다. 감자가 흙바닥에 뒹굴었다. 다른 것보다, 그리 형편이 좋아 보이지 않는 농부가 내민 소중한 식사를 버렸다는 데 화가 났다.

“너!”

하지만 마고뜨가 더 빨랐다. 마고뜨는 벌떡 일어나 헛간 문을 벌컥 열곤 뛰쳐나갔다. 스완 경은 당황해 벌떡 일어섰다. 아이는 어둠 속으로 뛰고 있었다. 누런 머리카락이 들판의 어둠 속으로 빠르게 사라졌다.

빌어먹을, 신이시여!

“안 돼!”

스완 경도 황급히 뛰쳐나갔다. 아이를 잃어버릴 수는 없었다.



 

***



 

바깥에는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다. 스완 경은 그 비를 다 맞으며 사방을 뛰어다녔다. 농사를 짓는 작은 마을 사람들은 모두 일찍 잠이 든 터라, 소리를 지르며 아이를 찾을 수도 없었다. 마을을 샅샅이 뒤져도 아이는 나오지 않았다. 그렇다고 마을 사람들의 밭을 헤집을 수도 없었다.

스완 경이 아이를 찾은 것은 한밤중이 다 돼서였다.

비가 그렇게 오니 스완 경의 몸도 점점 식어갔다. 자신보다 더 작은 아이가 걱정되는 건 당연했다. 마을 옆에 자리한 작은 덤불숲을 뒤지던 스완 경은 숲 공터에서 아이를 발견했다.

아이는 야생 개떼와 대치하고 있었다. 개라고는 하지만 대다수의 개들이 아이보다 몇 배는 컸다. 아무래도 버려지거나 떠돌이였던 개들이, 인간이 사는 마을 근처에 먹이를 위해 자리 잡은 것 같았다. 그리고 조그마하고 작은 아이는 만만한 먹잇감으로 느껴졌으리라.

“크르르르….”

개들은 여섯 마리나 됐다. 경은 아이를 살펴봤다. 아이는 어디서 굵은 나뭇가지까지 주워들고 스완 경 쪽을 등지고 있었다.

하지만 아이의 어깨는 떨리고 있었다. 스완 경은 한숨을 쉬었다. 저 조그만 아이가 대체 뭘 한단 말인가. 인간의 아이로 치면 기껏해야 여덟 살이나 아홉 살쯤? 위험한 순간이 오기 전까지 지켜보는 건 스완 경이 용납할 수 없었다.

갑자기 덥석 스완 경만 한 사람이 끼어들면 개들은 도리어 이를 드러내며 더 공격적으로 굴 가능성도 있었다. 스완 경은 천천히, 느리게 모습을 드러냈다.

가급적이면 야생 짐승처럼. 그가 기척을 드러내자 개들이 킁킁 냄새를 맡더니 이쪽을 쳐다봤다.

아이는 움찔했으나 돌아보지는 않았다. 여기서 아이가 눈을 돌리면, 개들은 곧장 아이를 공격할 것이다. 야생 짐승들은 약점이 드러나는 순간을 놓치지 않는다.

스완 경은 눈에 힘을 주고 개들을 노려봤다. 얼마나 대치가 계속됐을까. 개들은 하나둘씩 꼬리를 말았다. 스완 경의 덩치도, 위압도 애초에 개들 따위가 당해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는 천천히 아이의 뒤로 다가가 나직하게 말했다.

“…가자.”

반항할 줄 알았지만 아이는 예상외로 힘없이 스완 경에게 안겼다. 비를 오래 맞은 아이의 몸은 차가웠다. 더욱이 공포에 장시간 떤 흔적이 역력했다.

바들바들 떠는 마고뜨는 풀이 죽어 있었다.

하지만 헛간으로 돌아오자 아이는 굳이 구석으로 몸을 피했다. 스완 경과 붙어 있고 싶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내가 바닥에서 잘 테니, 짚더미 위에서 자라.”

스완 경의 말을 알아들은 것은 분명한데, 아이는 말을 듣지 않고서 결국 구석에서 잠이 들었다. 아마 지쳤기 때문일 것이다. 스완 경은 한숨을 쉬며 망토를 아이에게 덮어주었다. 자고 있어서 그나마 가까이 갈 수 있었다.

몸이 젖은 것은 스완 경도 마찬가지였다. 경은 짚더미 안으로 파고들어 눈을 붙였다. 지푸라기 안에서 짐승 냄새와 마른 풀 냄새, 흙냄새 같은 것이 섞여서 났다. 고약한 냄새였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 정도 추위는 견뎌야지, 하고 생각했지만 쉬이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까무룩 잠이 들었다가 어렴풋이 눈을 뜬 건 아침이었다. 이상하게도 몸이 따스했다. 스완 경은 몸을 뒤척이다가 제 위에 망토가 덮여 있는 것을 알아채고 옆을 돌아봤다.

뿔이 난 마족 아이는 몸을 웅크린 채 스완 경과 등을 맞대고 잠들어 있었다. 망토 끝자락을 덮은 채였다. 잠이 절로 깼으나 스완 경은 몸을 일으키지는 않았다.

마음 한쪽이 이상하게 젖어 들었다.



 

***



 

그렇게 비를 맞았으니 둘 다 멀쩡하지는 않았다. 다시 출발하기 위해 길을 나섰으나 마고뜨의 몸이 뜨거웠다.

‘마족도 아프면 열이 나는 건가….’

스완 경은 길을 재촉했다. 다음 마을에는 한나절을 걸어 도착했다. 의사를 찾아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갈등했으나 답은 없었다. 아이가 아파 목숨을 잃기라도 하면 스완 경의 임무는 실패였다.

그는 생각 끝에 마을의 의사를 찾아가 신분을 밝혔다.

“교국의 스완 세이비어요.”

의사는 뜻밖의 거물이 지나치게 허름한 차림으로 찾아온 것에 크게 당황했다. 그리고 스완 세이비어가 망토를 걷자 나타난 뿔 달린 아이를 보고 두 배는 더 당황했다.

“마족입니까?”

“그렇소. 그리고 이것은 나의 임무이니, 외부에 발설하지는 말아주시오.”

스완 경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의사를 믿진 않았다.

대체적으로 의사라는 직업을 가진 자들은 교국에 호의적이지 않았다. 그들은 사람을 치료한다며 기부금을 받는 신전의 행태에 관해 의구심을 품곤 했기 때문이다.

이 의사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마족 아이에게 대놓고 거부감을 표했다. 하지만 스완은 의사들이 교국보다 더 존중하는 가치를 알고 있었다.

스완은 품에서 금화를 꺼냈다. 의사는 마지못해 아이의 머리를 성의 없이 짚어본 후, 약장에서 푸른 약을 열 알 꺼냈다.

“사람 아이들은 이 약을 한 번에 다섯 알씩 먹습니다. 끼니를 먹인 후 먹이세요.”

“고맙소. 그런데….”

더 안 줘? 스완의 눈초리에 의사는 고개를 저었다.

“마족에게 맞을지도 아닐지도 모르는 약을 마구 내어줄 수 없습니다. 이 마을은 작아요. 약재 상인이 언제 들를지도 모르고, 마을 사람들을 위한 비상약도 남겨 둬야 합니다.”

합리적인 설명이었다. 의사는 양심적이었고, 금화를 거슬러주었다.

스완은 마을의 여관에서 아이에게 약을 먹인 뒤 재웠다. 열은 빠르게 떨어졌으나 여전히 마고뜨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장기간의 여행에 체력이 떨어진 게 분명했다.

결국 스완은 여관에서 통신 도마뱀을 빌렸다. 동료 성기사들에게 ‘성스러운 길’을 열어달라고 하기 위해서였다. 조금이라도 여행 기간을 단축하는 편이 나았다.

하지만 스완의 동료 성기사는 난색을 표했다.

“마족이라고? 스완, 자네 미쳤나?”

“…클로디아 테 포르투의 부탁이야. 상당히 정치적인 임무인 데다가 포르투와의 이해관계도 얽혀있네. 그리고 대륙의 평화를 위한 길이기도 해.”

“교황 성하에게는 허락받았나?”

그 말에 스완은 대답하지 않았다. 동료 성기사는 더 말할 필요도 없다며 통신을 끊었다. 다른 동료도 마찬가지였다.

“당장 그 마족의 새끼를 죽이지 않으면 내가 결투를 신청하겠네!”

흥분해 화를 내는 이도 있었다. 통신을 대여섯 번 시도했으나 모두 거부당했고, 스완 경은 짜증이 났다.

그는 침대에 누워 있는 아이를 등진 채 고뇌했다. 저 작고 거추장스러운 몸뚱이가 조금은 지겨웠다. 자신이 대체 왜 이 짓거리를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클로디아 테 포르투의 거래 제의는 합리적이었으나, 자신은 동료들에게 더없이 비합리적인 자 취급을 받고 있었다.

‘신이여. 저는 평생 당신에게 봉공했습니다. 왜 저는 저 아이 때문에 동료들에게서까지 외면받아야 하는 겁니까? 거기 계신다면 응답해 주십시오.’

“끄륵….”

그때였다. 아이가 희미하게 눈을 뜨고 소리를 냈다. 스완은 놀라 몸을 돌렸다. 아이는 이쪽을 쳐다보며 뭐라 말하고 있었다.

당연하게도 스완 경은 알아들을 수 없었으나, 아이의 감기가 많이 나아졌다는 건 알 수 있었다.

그는 다시 해가 질 때까지 남은 미음을 아이에게 마저 먹이고, 남은 약을 마저 먹였다. 아이는 기력이 없어서인지 한층 순해져 있었다. 자신을 쳐다보면서 물을 받아먹고, 약을 삼키는 마고뜨의 이마에 식은땀이 아직 맺혀 있는 게 눈에 띄었다. 스완 경은 제 소매로 마꼬뜨의 이마를 조심스레 닦았다.

“다 신께서 안배하신 인연이겠거니…. 네가 무슨 죄가 있겠나.”

마고뜨가 물끄러미 그를 올려다보다가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는 그의 품에 파고들었다. 스완 경은 조금 놀랐다. 아이가 처음으로 제게 응석 비슷한 것을 부린 것이다. 그는 마고뜨를 안고 어깨를 토닥였다. 아이는 아주 약간 우는 것 같았으나 고개를 들지 않아 알 수 없었다.

아이가 잠들 때까지, 스완 경은 아이를 계속해서 토닥였다.



 

***



 

다음 날 저녁에도 스완 경은 마을을 출발할 수 없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스완 경이 앓아누운 것이다. 경은 자신이 자리에 드러눕고서야 그것이 감기라는 걸 알아챘다.

“정말 인간인 게 맞군….”

스완 경에게 간호받은 덕분인지 아이는 오히려 기운이 괜찮아졌다. 스완 경은 몸을 비척비척 끌고 내려가 식사를 방으로 가져다 달라고 부탁했다. 똑똑, 하인이 문을 열었을 때 먼저 반응한 것은 마고뜨였다.

스완 경이 일어나려는데, 미리 망토를 두르고 있던 마고뜨는 문을 열고 말없이 하인이 주는 쟁반을 받아들었다. 스완 경은 눈을 크게 뜬 채로 마고뜨를 바라봤다. 마고뜨의 얼굴에는 표정이 없었다.

하지만 마고뜨의 의도는 분명했다. 그를 돕고 있었다! 스완 경은 이를 악물었다.

고마운데, 그러면 안 될 것 같아서였다. 저건 마족이다. 마족인데….

마족이 가져다준 식사는 맛있었다.

스완 경은 식사를 하고, 마고뜨에게 일렀다.

“오늘은 일찍 자자꾸나. 푹 자야 내일 출발할 수 있지….”

도무지 내일 아침에 출발할 수 있을 것 같은 상태는 아니었다. 스완 경은 의사에게 가봐야 하나 생각했지만, 솔직히 말하면 다시 의사의 집까지 갈 수 있을 것 같진 않았다.

게다가 그 의사가 마고뜨를 보고 여관에 마족 아이가 묵고 있다고 소문을 낼지도 몰랐다. 그는 갈등 끝에 기절하듯이 잠들었다.



 

마고뜨는 이불을 목까지 덮어쓰고, 이마에서는 땀을 흘리며 잠들어 있는 남자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자르지스에서는 이런 열병을 앓아본 적 없었다. 비가 와서 몸이 식는 것, 엄청난 추위. 다 마고뜨가 대륙에서 처음 겪은 것들이었다.

마고뜨는 남자가 싫었다. 하지만 그가 자신에게 해준 일들은 마고뜨가 그를 싫어하기에는 너무 많았다. 마고뜨는 인간의 말을 할 수 없으나 대강은 알아들었다. 왕이 마법을 걸어 준 덕이었다. 그녀가 만난 자르지스의 왕은 마고뜨와 헤어지기 전 속삭였다.

‘네 가족과 친구들을 꼭 구해줄게. 그러니 저 남자를 따라가렴. 적어도 너를 해치진 않을 거야.’

마고뜨는 자르지스에 같이 따라가겠다 울부짖었으나 왕은 고개를 저었다. 왕이 설명하는 모든 이유가 납득하기 어려웠으나 마고뜨는 왕을 따랐다. 대륙의 인간 놈들은 믿을 수 없었으나 왕은 믿을 수 있었다.

‘하지만….’

마고뜨는 남자가 줄곧 자신을 안아 들고 걸었던 날들을 생각했다. 그는 단 한 번도 마고뜨가 걷게 하지 않았다. 마고뜨가 위험에 처했을 때 그녀를 구했으며 마고뜨에게 망토를 덮어주었다.

마고뜨는 새벽녘에 남자가 온몸을 옹송그리고 자고 있는 것을 보고, 망토를 함께 덮었다. 그건 순전히 자신이 받은 만큼만 갚아주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남자는 마고뜨에게 더 많이 베풀었다. 물론 그 호의는 순수한 것이 아니었다. 마고뜨는 인간들이 주고받는 대화로 하여금, 그가 어떤 목적을 갖고 자신을 보호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때로 그는 마고뜨를 보며 그녀를 버리고 싶은 충동에 휩싸이는 듯했다. 마고뜨는 그때마다 인간들 속에서 홀로, 자르지스로 돌아가는 험로를 헤쳐나갈 각오를 다졌다.

하지만 그는 마고뜨를 버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를 더 성실히 돌봤다.

마고뜨는 남자가 제게 먹였던 파란 알약을 찾았다. 그게 이 열병의 특효약이라는 것도 그녀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약을 쌌던 종이는 없었다. 약을 다 먹어서였다. 마고뜨의 표정이 애매해졌다.

마고뜨는 그 약을 준 사람의 얼굴을, 그리고 그가 살고 있는 집을 기억하고 있었다. 아픈 와중에도 버려질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필사적으로 남자가 걸어왔던 길을 기억한 덕분이었다.

결심을 행동에 옮기는 것은 빨랐다. 마고뜨는 남자의 망토를 둘둘 둘러 얼굴을 감췄다. 작은 손으로 남자의 품을 뒤져 돈을 찾아냈다. 인간들이 금속의 동그란 물건으로 물물교환을 한다는 것을 마고뜨는 알고 있었다.

마고뜨는 빠르게 여관을 나섰다.



 

***



 

의사는 오밤중에 홀로 찾아온 마족 아이에게 호락호락하게 굴지 않았다. 까끄르륵, 하는 소리를 내며 동전을 내미는, 망토를 두른 조그만 아이를 의사는 대번에 알아보고 주변을 살폈다.

스완 세이비어가 없다는 것을 알고 의사는 놀라 아이에게 발길질했다.

“징그러워! 저리 썩 꺼지지 못해!”

아이는 곧장 나뒹굴었으나 그대로 도망치지 않았다. 마고뜨는 의사의 다리를 표독스럽게 할퀴었고, 의사는 기함을 했다.

“아이고! 이 마귀가!”

마족에게 할퀸 상처에 독이 감염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의사는 패닉에 빠졌다. 마고뜨는 그 틈을 타서 의사의 집으로 들어갔다.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약 찬장을 빠르게 뒤져, 푸른 알약병을 찾았다. 의사가 겁에 질려 뒹구는 동안 마고뜨는 엉망진창인 모습으로 의사의 집을 떠났다.

스완의 열은 더 심해져 있었다. 뜨거운 남자의 몸을 만져보고 마고뜨는 작은 손으로 알약병을 모조리 털었다. 약병 안에는 푸른 알약이 열 개가 조금 넘게 들어 있었다. 스완을 흔들어 목구멍에 알약을 집어넣었다. 쓴맛에 스완이 저도 모르게 눈을 찌푸렸으나 곧 물을 먹이는 마고뜨의 손길에 의식 없이 그대로 받아먹었다.

마고뜨는 그날 스완의 옆에서 잤다. 뜨끈뜨끈한 체온이, 아이러니하게도 고향인 자르지스를 떠오르게 했다. 마고뜨는 그날 자르지스의 꿈을 꿨다. 불타는 화구 때문에 사라진 가족이 꿈에 나와 미소 지었다.



 

***



 

탕탕탕탕! 스완 경은 엄청난 소리에 눈을 떴다. 아까부터 누군가가 방문을 엄청난 기세로 두들기고 있었다. 그는 가까스로 몸을 일으켰다.

“뭐지….”

“이보시오! 스완 세이비어 경! 이보시오!”

귀에 익은 목소리였다. 어디서 들었더라. 까무룩한 정신을 겨우 챙기려 애쓰며 주변을 둘러보던 스완은 흠칫했다. 제 옆에 누런 머리카락이 사정없이 흩어져 있었다.

작은 몸집은 마고뜨가 분명했다.

“…이게….”

무슨 일인지 알 수 없었다. 스완 경은 일단 문밖에서 애타게 자신을 부르는 사람부터 해결하기로 하고 몸을 일으켰다가 눈을 껌벅였다. 이상하게 몸이 가벼웠다.

‘하루 만에 나았나…?’

물론 스완은 그게 착각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문밖의 사람 때문이다.

아침부터 여관에 찾아와 문을 쉴 새 없이 두들기던 사람은 바로 마을의 의사였다. 의사는 화가 잔뜩 난 얼굴로 씩씩거렸으며, 스완은 그의 앞뒤 없는 소리가 무슨 이야기인지 추측하느라 상당한 공을 들여야 했다.

“…니까, 저 망할 괴물이 나를 할퀴고 약을 훔쳐 갔단 말이오!”

가까스로 스완은, 자신이 감기에 걸려 잠든 사이 아이가 의사를 찾아가 그를 할퀴고 약을 가져와 그에게 먹였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니 어렴풋이 어젯밤의 기억이 날 듯 말 듯도 했다.

꿈인 줄 알았는데, 저 조그만 애가 제게 약을 먹인 모양이었다.

스완은 자초지종을 알아채고는 일단 품 안에서 돈을 꺼내려 했다. 하지만 품 안에 돈이 없었다. 그가 당황해 품을 더듬다가 주변을 둘러보는데, 어느새 깬 마고뜨가 이불을 두른 채 눈치를 보다가, 작은 손을 이불 속에서 내밀었다.

그 손에는 스완의 돈주머니가 쥐여 있었다. 스완은 헛웃음을 지었다.

“미안하오. 일단 위로금 조로…. 이 돈을 받으시오.”

스완이 주머니에서 금화를 꺼내 의사에게 쥐여주었으나 의사는 영 못마땅한 듯했다. 이유는 곧 알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붕대 감긴 다리 한쪽을 내보이며 꽥 소리를 질렀던 것이다.

“독이 옮으면 어쩔 거요?! 부정 탔어!”

스완은 이마를 찡그렸다. 의사가 투덜거렸다.

“제기랄, 어디서 더러운 게….”

그가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스완은 의사의 멱살을 쥐고 방 안으로 끌어들였다. “컥….” 하고 의사가 숨을 삼켰다. 스완은 방문을 쾅 닫고 의사에게 으르렁거렸다.

“말조심하시오. 내가 어제 비밀을 지켜달라고 했지?”

“…당신이라면 저 마귀한테 상처를 입고도 비밀 따위를 지킬 생각이 나겠소?!”

그러니까, 정녕 이 남자는 스완 세이비어가 어떤 남자인지 잊어버린 듯했다. 스완 경은 의사의 목덜미를 쥔 채로 벽에 밀어붙였다. 의사가 다시 크헉, 하고 숨 막히는 소리를 냈다.

“저건 마귀 같은 게 아니야. 말조심해.”

“이, 이마에 뿔이 났는….”

스완은 이를 악물었다.

“저 애는 마귀가 아니다. 다시 한번 말하게 하면 가만두지 않겠다. 내가 누구라고 했지?”

남자가 눈을 희번덕거렸다. 스완은 남자의 반대쪽 귀 옆 벽을 주먹으로 쳤다. 뻑, 소리가 나며 벽이 엄청나게 흔들렸다. 남자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나는 스완 세이비어다.”

“그, 압니… 압니다.”

“내가 비록 교국에 봉공하고 있으나 내 가문이 어떤 곳인지는 익히 알고 있으리라 본다.”

“아, 알지요….”

스완 경은 맹세코 자신의 가문 이름으로 누군가를 협박한 적 없었다. 지나치게 세속적인 짓이었으며 저열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지금 그보다 더 좋은 수단을 발견할 수 없었다. 스완은 의사에게 고압적으로 굴었다.

“싸구려 약에 과한 대가를 받았으면 입 닥쳐. 독이 옮을 리도 없지만, 만약 그 다리에 조금의 이상이라도 생긴다면 내 가문에서 보상할 것이다.”

“그….”

“주제넘게 입을 놀린다면 다리가 잘리는 것보다 더한 경험을 하게 해 주겠다.”

의사는 부리나케 도망쳤다.

남자는 문을 닫고 한숨을 토해냈다. 이불 안에서 이리저리 굴러가는 눈이 보였다. 스완은 잠시 침대를 바라보다가, 머리를 감싸 쥐었다. 신의 종이, 마땅히 모셔야 할 그의 백성들을 겁박하다니.

‘맙소사, 신이시여…. 부디 방금 전에는 귀를 막고 계셔 주셨었으면 합니다….’

그러나 그는 자괴감에 빠져 감사의 인사를 잊는 사람은 아니었다.

“…일단은 고맙다. 그리고….”

마고뜨가 눈알을 굴리다가 이불을 걷고 얼굴을 드러냈다. 쓸데없는 짓 하지 말라고 말하려던 스완 경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아이의 얼굴에 새파란 멍과 생채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어디서 생겼는지는 명확했다.

“그 빌어먹을 작자가!”

스완 경은 몸을 확 돌리고 방문 고리를 잡았으나, 아이의 목소리가 그의 뒷덜미를 잡아챘다.

“끼르륵….”

그러니까, 아이를 그렇게 방치한 건 제 책임이었다. 아팠든 아니든. 스완은 결국 힘없이 방문 고리에서 손을 내리고 침대로 다시 돌아갔다. 그리고 무릎을 꿇고 아이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둘의 시선은 한참 동안 맞닿아 있었다. 스완 경은 상당한 시간이 지난 후에야 제 안에 있던 한마디를 겨우겨우 꺼내놓을 수 있었다.

“…미안하다.”

마고뜨가 눈을 깜박였다. 한 번 입 밖으로 내놓으니 다시 말하는 건 쉬웠다.

“미안하다, 미안해. 내가…. 미안하다.”

스완 경의 탄식이 이어졌다. 마고뜨는 그런 스완 경의 머리를 한참 동안이나 내려다보고 있었다.



 

***



 

스완 경은 ‘성스러운 길’을 준비하는 성기사들 사이에 끼어 있었다. 클로디아 공주가 포르투 성의 유리창을 깨면서 유니콘을 타고 귀환한 지 이틀.

켈록스 2세는 성기사들을 불러올렸다. 그들이 해야 할 임무는 자명했다. ‘성스러운 길’로 자르지스의 마족들을 피신시키는 것이었다.

교황의 명령은 교국의 성기사들과 사제들에게 엄청난 항의를 받았다. 하지만 어떤 이유로든 교황의 명령은 절대적이었다. 교국은 작았고, 그들은 자신들이 교황에게 머리를 숙이지 않으면 교국이 어떤 식으로 와해될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거부감은 어쩔 수 없었다. 몇몇 성기사들이 스완 경을 흘끔거렸다. 스완 경이 마고뜨를 데리고 포르투로 올 때, ‘성스러운 길’을 부탁했던 이들이었다.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다는 시선을 보내는 그들은 처음엔 스완 경을 쳐다봤다.

하지만 시선의 끝은 어김없이 스완 경 옆에 딱 붙어있는 마고뜨를 향했다.

“징그러워….”

“저 뿔이야말로 마귀의 증거 아니겠나.”

“예끼, 이 사람아. 자르지스 사람들도 오랜 기간 고통받아서 그런 거라는 이야기를 듣지 않았나.”

“누가 믿어? 클로디아 공주가….”

스완 경은 한숨을 쉬었다.

클로디아 공주는 성기사들에게 ‘성스러운 길’을 부탁하며 자르지스의 상황에 대해 솔직하게 털어놨다. 하지만 성기사들은 반쯤은 납득하지 못한 채였다. 그렇다고 해서 스완이 설명하기도 벅찼다.

스완이 그들에게 마고뜨에 대해 설명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오늘 오전 마고뜨를 안고 나타난 스완은 성기사들에게 과장을 조금 섞어 ‘하마터면 이 꼬맹이가 아니면 죽었을지도 모른다’고 마고뜨를 칭찬했다.

그러나 성기사들은 입을 닫고 그를 백안시했다.

“스완 경.”

그때 누군가가 그에게 다가왔다. 성기사단의 부단장이었다. 말이 부단장이지 그와는 거의 성기사단 내의 라이벌이나 다름없는 사이였다.

스완은 애매하게 웃었다.

“부단장.”

“부탁인데, 그 마족 좀 치워주면 안 되겠나?”

“음?”

부단장은 눈썹을 찌푸리며 스완에게 말했다.

“말이야 바른말이지. 솔직히 교황 성하의 말씀이시니 따르겠지만 아무래도 성기사들 사이에 저런 것을 끼고 오는 자네를 이해하지 못하겠네. 적어도 우리와 함께 있을 때만이라도….”

동료들의 거부감이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스완은 고개를 저었다.

“미안하지만 마고뜨는 내 곁에서 떼놓을 수 없네.”

“안전이 문제라면 포르투 기사단에 부탁해도 되잖나.”

“그게 아냐. 마고뜨가…. 나를 상당히 좋아해서.”

그 미묘한 말투에 부단장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마귀 같은 것….”

“부단장.”

스완이 엄하게 그를 불렀으나 부단장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나는 도무지 자네가 저 징그럽고 사악한 것을 몸에서 떼어놓지 않는다는 것도 이해가 가지 않아! 아무리 지금….”

부단장이 저도 모르게 한발 다가섰을 때였다. 마고뜨가 소리를 질렀다.

“캬악!”

찢어지는 소리에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움찔하며 이쪽을 쳐다봤다. 부단장의 얼굴이 험악해졌다. 마고뜨는 스완의 다리를 붙들고 꽥꽥 소리 질렀다. 대부분의 말뜻은 당연히 알아들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 기괴한 소리들이 더더욱 거부감을 키웠다.

“이 마족의 새끼가 말하는 것 좀 보게나!”

“성하께서도 저것에게 목줄을 채우라 하셨다며! 스완 경!”

“정말이지, 저런 은혜도 모르는 것들을 대륙에 풀어놔야 하다니. 대륙의 위험을 포르투는 더 키우려는 거 아니겠나!”

격분, 질책, 우려와 탄식이 동시에 쏟아졌다. 스완은 그만 아득해졌다.

마고뜨는 사람의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할 뿐이지 다 알아는 들었다. 그는 어쩔 줄 몰라 하다가, 빠르게 마고뜨를 붙들고 귀를 막았다. 발버둥 치는 마고뜨를 붙잡고 스완 경은 부단장을 타박했다.

“그만하게! 다 알아듣네!”

“알아듣는데도 자네에게서 떨어지질 않으니 얼마나 교활한가!”

“이 애는 그저 자네들이 무서울 뿐이야!”

“마치 인간이라는 것처럼 말하는군?”

스완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부단장은 클로디아 공주의 설명을 모두 듣고서도 저런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이다.

“듣지 않았나! 마고뜨는….”

“클로디아 공주의 말대로 저것이 인간이라면, 인간의 말도 해야 인지상정!”

스완은 고함을 지르려 했다.

하지만 마고뜨가 더 빨랐다.

“그러는 네놈들은 지금 하는 말이 신의 뜻이라는 거냐!”

좌중이 조용해졌다. 마고뜨가 다시 소리쳤다.

“천벌을 받을 인간 놈들! …어?”

마고뜨의 눈이 커졌다. 스완 경의 눈은 두 배는 더 커졌다. 스완 경은 마고뜨를 내려다보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마고뜨?”

“…인간?”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침묵이 한참 동안 계속됐다. 스완 경은 도무지 지금 일어난 일이 무엇인지 믿을 수 없었다.

나중에야 알게 됐지만, 그 순간은 하필 공교롭게도 클로디아 테 포르투가 남쪽 바다 저편에서 자르지스의 저주를 풀어낸 때였다. 자르지스의 마법이 풀리며 마력장의 저주도 해소된 것이었다.

“…뭐, 뭐야 지금.”

부단장이 얼떨떨한 목소리로 둘을 번갈아 쳐다봤다. 그러나 스완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는 마고뜨를 붙들고 물었다.

“마고뜨. 내 말 알아듣겠니?”

“…어.”

“말해 봐. 네 이름을. 마고뜨.”

“마고뜨….”

아이가 눈을 깜박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게 뭐야…? 왜 갑자기….”

스완은 더 이상 신의 존재를 의심하지 않았다. 신이 계신다면 이럴 수 없다던 그의 기도를, 신은 가장 적절한 순간에 들어주신 것이었다! 신은 존재했다!

‘세상에, 신이시여. 거기 계시군요!’

스완은 마고뜨에게 환하게 웃어 보이고는 부단장을 올려다봤다.

“이 아이가 인간의 말을 하는군.”

“…그….”

“방금, 자네 입으로 뭐라고 했지?”

어차피 부단장이 그에게 뭐라고 하든 상관없었다. 그의 인정은 처음부터 그다지 필요가 없었다. 부단장이 뭐라 뭐라 말을 이었으나, 스완 경은 그를 외면한 채 마고뜨의 손을 붙들고 미소 지었다.

“괜찮아, 마고뜨. 신경 쓰지 말렴.”

“….”

“신께서는 언제나 너를 아끼신단다.”

마고뜨는 어처구니가 없어졌다. 하지만 스완 경은 그녀의 기분도 모르고 벙긋벙긋 웃으며 마고뜨를 안아 올렸다. 마고뜨는 엉겁결에 그의 팔에 매달렸다. 대번에 시야가 훌쩍 높아졌다.

마고뜨는 어쩐지 이 멍청이가 뭐라든 아무래도 상관없어졌다.

갑자기 기분 좋아하니 됐다.

그 후로도 둘은 아주 오랫동안 함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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