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왕자님의 첫사랑
도시 하나를 밀어버리고 새로 짓는다는 건 통상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동력 지대의 경우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두 가지다.
첫 번째는 포르투의 동력만을 위해 움직이던 도시였기에, 도시 자체에 별다른 생산시설이 없었다는 점이다. 도시에서 창출되는 이익이 없다 보니 시설은 상대적으로 엄청나게 낡아 있었다. 400여 년 동안 보수 없이 동력 제조가 가능했다는 점이 더 놀라운 일이었다.
두 번째는, 동력 지대에 남고 싶어 하는 이들이 없었다는 것이다. 동력 지대는 원주민이라는 개념이 없었다.
애초에 미겔 포르투는 사람이 없는 곳을 골라 포르투를 그 위에 띄웠다. 동력 지대에서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범죄자였다. 하늘섬이 자르지스의 옆으로 이동한다는 사실을 클로디아가 선포한 날부터 동력 지대의 주민들은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물론 포르투의 기사들이 며칠 전부터 동력 지대의 입구에서 버티고 있었기에, 대륙의 왕국들이 새로운 범죄자들의 출몰에 골머리를 썩이는 일은 없었다.
클로디아는 그들에게 이주 지원비를 지급하고 자르지스로 보냈다.
민둥산이 무너져 재투성이에 먼지투성이인 자르지스의 복구를 위해서였다. 그들이 범죄를 일으킨다손 쳐도, 거기에는 아주 무서운 마법사가 있으니까 괜찮았다.
하지만 동력 지대의 재건축이 수월하다고 해서 모든 것이 편히 돌아가지는 않았다. 그녀는 동력 지대의 재정비가 끝나기 전에는 왕관을 쓰지 않을 셈이었으나, 대신들의 의견이 엄청나게 엇갈렸다.
백 개의 왕국에 포르투의 권력이 공고함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의견과, 빠르게 새로운 도시를 지은 후가 훨씬 낫다는 의견.
클로디아는 모든 이들의 말을 귀담아들었지만, 토론은 며칠을 거듭했다.
클로디아도 인내심이 동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클로디아가 두통에 시달리고 있던 토론 사흘째, 그 의견이 나왔다.
“쥬버린 전하께서 먼저 왕관을 쓰시고, 공주님께서 물려받으시면 어떻습니까? 역시 모양새는 그쪽이 더….”
눈치 없기로 유명한 수조대신이었다.
이제나저제나, 백 개의 왕국에서 세금을 다시 걷을 수 있게 될 날만 기다리는 직급.
외무대신이 눈을 찌푸리며 눈치를 줬다.
“무슨 소립니까? 클로디아 공주님께서 왕좌에 앉으실 거라는 게 이미 공고한 때에 새삼스럽게….”
“아니, 저는 돈을 만지는 사람이니 말입니다. 아무래도 아직도 공주님께서 세계를 구했다는 것이 믿을 수 없는 자들이 많은 모양…. 물론 저는! 공주님께서 하신 일에 아무런 의심이 없지만 말입니다! 돈을 내는 사람 입장에서는 아무래도 과거의 이력을 살펴보기 마련이니….”
수조대신이 말을 늘어놓다가 클로디아 쪽을 바라보고 황급히 말을 고쳤다. 클로디아는 이마를 찡그린 채 그쪽을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클로디아의 눈치를 보면서도 말을 멈추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그간 통치력을 과시하신 쥬버린 왕자님이 왕관을 쓰시면, 그 뭐냐. 공신력! 공신력이 더….”
클로디아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한참 쳐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적어도 지금은 저보다는 오라버니께서 더욱 믿음직하다는 말씀이시지요, 수조대신?”
“아, 예! 그렇습니다! 물론 앞으로 클로디아 공주님께서 잘하실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지만….”
“그렇군요.”
클로디아는 싱긋 웃었다.
“저는 그럼 언제쯤 믿음을 줄 수 있나요?”
“예?”
수조대신이 화들짝 놀라 물었다. 클로디아는 턱을 괴고 수조대신 쪽을 바라봤다.
“오라버니께서 어린 나이에 아바마마를 대신했을 때는 어떤 공신력이 있었나요?”
“…그.”
“물론 국민들에게, 나아가 대륙에 믿음을 주는 것은 왕이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하지만 수조대신.”
클로디아는 심드렁하게 그를 바라봤다. 웃지도, 찡그리지도 않은 채였다.
“수조대신의 말대로라면 저는 대륙을 구해놓고도 믿음을 줄 수 없는 사람인데, 언제쯤 믿음을 줄 수 있죠? 이것보다 얼마나 더 큰 일을 해내야 하나요?”
“저는, 그….”
클로디아는 창문 쪽을 바라봤다.
벌써 점심때였다. 새벽에 일어나자마자 자리에 앉아 머리 아픈 일들과 씨름을 한 차인데, 저런 이야기까지 들으니 힘이 빠지고 배가 고팠다.
클로디아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일단 쉽시다. 저는 밥 먹을 거예요.”
“공주님.”
수조대신이 당황한 듯 그녀를 바라보며 다시 한번 불렀다. 그러나 그녀는 수조대신 쪽은 쳐다도 보지 않고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제가 아는 사람이 그랬어요. 배가 고프면 남한테 상처 준다고. 식사하시고 오세요. 배부른 상태로 다시 이야기합시다.”
잽싸게 노바라가 그녀를 수행했다. 클로디아는 걸어서 홀을 나갔다.
대신들이 술렁이다가 각자의 자리로 흩어졌다.
외무대신이 그녀를 따라오려고 했지만, 클로디아는 “오라버니와 함께 식사할 거예요”라며 대신을 물렸다. 외무대신이 안타까운 듯 그녀를 바라보다가 돌아섰다.
***
쥬버린은 자신의 방에 있었다.
극적으로 마왕에게 심장을 돌려받은 왕자는, 살아 있었으나 부작용에 시달리고 있었다. 몸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던 것이다.
그의 몸을 도는 피는 따뜻해질 줄 몰랐고, 쥬버린은 봄이 지나가고 여름에 가까운 계절이 왔는데도 방 안의 벽난로에서 불을 뺄 수 없었다.
“오빠.”
“클로디아 왔구나.”
두터운 모피를 두르고 책상 앞에 앉아 있던 쥬버린이 환하게 웃으며 그녀를 환영했다. 파리한 입술과 창백한 안색. 원래도 희고 아름다운 왕자였지만 지금은 건들면 부서질 것만 같았다.
클로디아는 그의 책상 한켠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으며 쥬버린의 손을 붙들었다. 여전히 얼음처럼 차가웠다.
“오늘은 어때?”
“똑같아. 그런데 무슨 일이니, 이렇게 일찍?”
“무슨 일이긴. 점심 같이 먹으러 왔지.”
그 말을 뒷받침하듯 곧장 시녀들이 음식을 날라왔다. 차가운 샐러드와 고기를 차갑게 식힌 육편 같은 것들이었다. 쥬버린은 안타깝게 웃었다.
“이런, 나와 점심 먹으면 재미없을 텐데.”
“무슨 소리야. 점심을 재미로 먹나. 음….”
클로디아는 눈알을 굴리다가 쥬버린에게 웃으며 말을 보탰다.
“재미로 먹던 때도 있었던 것 같다.”
온갖 멋을 낸 예쁜 요리를 먹고 싶어 했던 어린 클로디아가, 한때 왕성의 요리사를 지독하게도 괴롭힌 것은 유명했다.
새삼스럽게 그 요리사에게 미안함을 느끼며 클로디아는 시녀들이 날라온 간이 테이블 앞에 앉았다.
클로디아의 앞에는 따뜻한 수프가 놓였지만, 쥬버린의 앞에는 차가운 가스파초가 놓였다. 몸이 차가워진 쥬버린은 뜨거운 음식을 먹으면 입안에 쉽게 화상을 입었다. 안타까운 일이었다. 두 사람은 식사를 하면서 이야기를 나눴다.
가벼운 한담이었다면 좋았겠지만 안타깝게도 두 사람은 지금 밥 먹는 시간도 아까울 정도로 바빴다.
“마법사 길드의 보상은 어떻게 하기로 했어?”
“그거 의외로 간단하게 끝났어. 다들 아무르를 연구하고 싶어하더라구.”
클로디아의 말에 쥬버린이 놀랍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동력 지대의 마법사 길드원들이 마왕에게 몰살당한 사건에 관해, 포르투는 도의적인 보상을 하기로 했다.
사람의 목숨을 돈으로 셈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포르투는 그 가족들에게 커다란 금전적인 보상을 더 해, 마법사 길드들이 오랫동안 궁금해하던 아무르를 연구할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하기로 했다. 단, 대륙이 위험하지 않을 정도로 횟수를 제한해서다.
그 과정에서 클로디아가 마법사 길드를 배려한 스탠스, 그리고 정치적으로 고른 말들을 들은 쥬버린은 정말로 기쁜 표정을 지었다.
“내 동생, 정말로 멋져.”
“누구 동생인데요, 오라버님. 오죽하면 오라버님 덕분에 왕 자리 양보하라는 소리도 들었다니까요.”
그렇게 말하고 클로디아는 정말 재미있다는 듯 까르륵, 웃었다.
하지만 쥬버린의 얼굴은 심각해졌다. 클로디아는 웃음을 멈추고는 쥬버린에게 자신이 들은 이야기들을 설명했다.
이야기가 끝난 후, 쥬버린은 신음하듯 말했다.
“내가 문제로구나.”
“예상하지 못했던 건 아니잖아요, 공신력 있는 오라버니.”
비아냥거리는 말투에 쥬버린이 눈을 찡그리며 웃었다.
“내 동생, 여행하면서 안 좋은 버릇이 들었어.”
“사물을 여러 가지 시각으로 볼 수 있게 됐다고 해줘. 아무튼, 그래서는 아니지만, 오빠.”
클로디아가 스푼을 내려놓았다. 그녀는 아까부터 수프를 먹지도 않은 채 계속 휘젓고 있었다. 쥬버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가 약속을 지킬 때가 됐구나.”
“…오빠를 쫓아내는 건 아니야. 알지?”
“물론, 클로디아. 다정하고 상냥한 나의 동생.”
쥬버린이 부드럽게 웃으며 클로디아의 왼쪽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올려놓았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손 위에 클로디아도 다시 다른 손을 겹쳤다.
“필요한 게 있다면 뭐든지 지원할게.”
“그건 당연한 것이지, 나의 동생. 일단 따뜻한 모피가 시급하겠구나. 이제 자르지스는 더운 곳도 아닐 테니.”
얼음에서 완전히 깨어난 쥬버린에게, 클로디아는 부탁 하나만 들어달라고 청했다. 바로 자르지스의 거울 공작이 묶여 있는 마법을 풀어달라는 것이었다.
클로디아는 자신의 여행을 통해, 몇백여 년 전 미겔이 모험하던 시절의 마법들이 꽤 동화적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예를 들면 그 시절의 마법들은 해석하기에 따라 꽤 여러 가지 의미로 바뀌어 시전됐다. 그녀가 요정들이 준 도마뱀 꼬리로 꼬리를 잃어버린 용의 저주를 푼 것처럼. 그렇게 생각하니 거울 공작이 걸린 저주도 완전히 이해가 됐다. 지하의 미로에 갇힌 공주님은 반드시 ‘왕자님’만이 데리고 나올 수 있었다.
물론 백 개의 왕국, 다른 왕자님들이 가도 상관없을 것이다. 거울 공작에게 걸려 있는 저주는 ‘왕자님’이면 해금이 되는 종류의 것이었으므로.
하지만 거울 공작은 쥬버린이 오기를 원했으며, 클로디아는 쥬버린에게 제대로 부탁하겠다고 그녀에게 약속한 바 있었다.
쥬버린은 클로디아의 부탁을 듣고 곧장 승낙했다.
“물론이지, 나의 동생. 내가 어떻게 네 부탁을 거절할 수 있겠니. 네가 백 개의 산을 넘고 아흔아홉 개의 바다를 건너 달라고 부탁한다 해도 나는 그 부탁을 꼭 들어줄 거란다.”
쥬버린이 그렇게 말했을 때 클로디아는 어이가 없어 웃어버렸다.
자르지스의 저주가 풀리고 클로디아가 귀환한 지 두 달. 슬슬 쥬버린도 자신이 출발해야 한다고 느끼던 차였다.
하지만 이대로 차가운 몸으로 출발하기에는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 그의 체온이 돌아오기를 기다려보자는 의사들의 말 때문에 주저앉아 있었을 뿐이다. 그 와중에 클로디아의 일이 너무 많아 옆에서 겸사겸사 손을 보태왔는데, 그게 수조대신 같은 의견을 불러올 줄은 몰랐다.
아니, 정확히는 알고 있었지만 모른 척했다. 왕자가 있는데 공주에게 왕관을 물려주려고 하는 이들은 없을 테니 말이다. 쥬버린은 그렇게 생각하고는 곧이어 깊은 슬픔을 느꼈다.
연약하고 사랑스러운 줄로만 알았던 클로디아가 사실은 모두를 구할 만큼 강인한 아이였다는 걸 모두가 보았는데도, 사람들은 여전히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본다.
‘…나도 마찬가지인가.’
쥬버린은 손끝을 쥐었다. 자신이야말로 앞장서 한때는 클로디아의 가능성을 제한했지 않은가.
그는 클로디아가 행복하길 바라며 그녀에게 아무것도 시키지 않았으며 심지어 포르투를 포기하기까지 했으나, 클로디아는 그런 쥬버린을 비웃듯이 아무것도 포기하지 않았다.
그 또한 보고 싶은 것만 봐왔던 사람임은 분명했다.
“좋아, 그럼 수르 알파를 함께 보내줘.”
“…어?”
“필요한 게 있다면 뭐든 지원한다며. 거짓말이었어? 나의 동생.”
쥬버린은 입술을 올리며 클로디아를 바라봤다. 자신과 꼭 닮은 새파란 눈이 당황으로 일렁이다가, 곧 쥬버린이 자신을 곯리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꽥 소리를 질렀다.
“아이참, 오빠!!”
쥬버린은 허리를 접으며 웃어버렸다. 클로디아는 얼굴이 새빨개진 채로 테이블을 쿵쿵 두드렸고, 결국 수프를 엎고 말았다.
***
자르지스로 가는 길은 그리 험난하지 않았다. 애초에 쥬버린은 클로디아처럼 고생고생해서 자르지스로 들어갈 이유가 없었다. 자르지스 수복에 동원되는 동력 지대의 주민들이 타는 배가 있었고, 쥬버린은 그 배를 타겠다고 청했다.
하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모두가 극구 말렸다. 동력 지대의 주민들은 대부분 범죄자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가장 강력히 반대한 것은 수르 알파였다.
“그들은 정착 비용을 받고 범죄를 안 저지르기로 맹세했잖아?”라는 쥬버린의 말에 그는 지극히 평온하게 악담을 늘어놨다.
“아주 옛날에, 서쪽 바다에 작은 섬이 있었습니다. 어찌나 척박한지 결국 포르투의 왕이 충성을 맹세 받는 대신 코코넛 나무 열다섯 그루를 지원해주었죠. 그 코코넛 나무에 열리는 코코넛을 먹고 마시고, 남은 껍질로 공예품을 만들 꿈에 섬의 주민들은 기뻐하며 코코넛 나무를 기다렸습니다.”
그 이야기는 쥬버린도 알고 있었다. 모를 수가 없다.
섬의 몇몇 주민들은 코코넛 나무를 운반해 간 아름다운 아리아드네를 보고 그날 밤 아리아드네를 겁간할 계획을 짰다. 마법사 아리아드네는 그 섬사람들을 모두 코코넛 나무에 거꾸로 매달아 놓고 섬을 나왔다.
수르 알파는 무표정하게 말했다.
“왕자님께서는 마법사 아리아드네가 아닙니다.”
“…데미안. 캐릭터가 좀 변한 줄 알았더니 여전히 가차 없는데?”
쥬버린이 하하 웃으며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수르 알파는 그런 쥬버린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말을 이었다.
“어쨌든 안 됩니다.”
“아이참, 데미안은 매번 안 된다고 한다니깐. 저 때도 그러더니.”
쥬버린의 여행 준비 자리에 있는 것은 데미안뿐만은 아니었다.
클로디아가 웃으며 소파에 앉아 즐거운 듯 다리를 흔들었다.
노바라가 “공주님, 경망스러워요!”라며 옆구리를 찔렀으나 그녀는 “간지러워!”라며 깔깔 웃음을 터트리기만 했다.
노바라가 한숨을 쉬었다.
“이럴 때 보면 갈수록 더 철이 없어지시는 것 같다니까요.”
“오빠가 특별취급 받고 싶지 않아 한다는 건 나도 알겠어. 어디까지나 오빠는 그저 해야 할 일을 하러 가는 거니까. 하지만, 알잖아요. 아직도 오빠를 노리는 사람은 많아요.”
“으음.”
클로디아의 말에 쥬버린이 낮게 신음했다. 쥬버린은 언제나 암살 위협에 시달려왔으나 클로디아의 즉위가 선포된 후에는 조금 덜해졌다. 하지만 아예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어쨌든 쥬버린은 포르투의 왕자였으니까. 클로디아가 돌아온 후에도 포르투의 혼란이 없어진 것을 아쉬워하는 이들은 많았다. 쥬버린은 별수 없이 한숨을 쉬었다.
“어쩔 수 없지. 그러면 신세 지도록 할까.”
“그럴까요?”
옆에서 나선 것은 클로디아에게는 익숙한 여인과, 한 마리의 개…가 아니라 사람이었다.
헬렌과 포폰.
헬렌은 제법 길어진 갈색 머리를 하나로 묶은 채였다. 시원시원한 미소는 여전했다. 클로디아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쥬버린에게 헬렌을 소개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자면, 이쪽은 헬렌. 그리고 여기는 포폰이에요.”
검은 개 수인-포폰이 코를 킁킁거리며 꼬리를 흔들었다. 쥬버린은 그쪽을 보고 자기도 모르게 머리를 쓰다듬으려고 손을 내밀었다가 화들짝 놀라 손을 거두었다.
“미, 미안합니다.”
“괜찮아요!”
포폰이 쾌활하게 웃었다.
“저를 보자마자 몽둥이부터 드는 사람들도 많은데 말이죠! 머리를 쓰다듬어 주려 하시다니, 좋은 분이네요, 왕자님은!”
“그렇지, 포폰? 우리 오빠는 착한 사람이라니까?”
클로디아가 웃으며 포폰의 목덜미를 끌어안았다.
“아, 폭신폭신해.”
“좋아?”
“응! 어느 정도냐면…. 너 같은 강아지를 한 마리 기르고 싶을 정도로?”
그 말에 포폰이 진지하게 꼬리를 흔들며 클로디아를 올려다봤다.
“그냥 날 기르는 건 어때?”
“뭐라고?”
웃음이 터졌다. 이유는 의외로 진지했다.
포폰은 반짝이는 눈으로 “있지, 내가 두 달 동안 포르투를 돌아봤는데 다들 날 보고 너무 놀라더라고. 내가 공주님의 애완동물이라는 사실이 퍼지면, 자르지스 사람들이 대륙 사람들에게 좀 친근한 이미지로 박히지 않을까?” 하고 의견을 피력한 것이다.
물론 헬렌에 의해 기각됐다.
“그러다 대륙 사람들에게, ‘자르지스 사람들, 애완동물로 기르기 안성맞춤이네!’라는 인식이나 퍼지면 어쩌려고?”
“아, 그러네….”
붕붕 흔들리던 꼬리가 순식간에 처졌다. 다들 두 배로 웃었다. 쥬버린도 같이 웃다가 헬렌에게 말을 붙였다.
“그, 요리사시라고요.”
“말 편하게 하세요, 전하. 맞습니다. 제가 전하의 식사를 자르지스 왕복 기간 동안 책임질 겁니다. 따뜻한 음식은 잘 드시지 못한다면서요?”
헬렌이 고용된 이유는 쥬버린의 식사 때문이었다. 통상적으로 어딜 가든 음식의 기본은 끓이고 굽고 데치는 것이었다.
하지만 쥬버린은 미지근한 음식조차도 지금 목으로 넘기면 식도에 저온 화상을 입었다. 체온 자체가 엄청나게 낮아진 상태라, 멀쩡한 음식을 좀처럼 먹기 어려운 것이다.
맨 처음 데미안은 쥬버린의 식량으로 말린 육포만을 잔뜩 챙겼으나, 클로디아가 데미안의 등짝을 때린 후 헬렌을 불렀다.
‘헬렌! 돈 필요하죠?’
그 말 한마디에 헬렌은 포르투 왕성까지 단숨에 달려왔다. 물론 조수를 자처하는 포폰도 함께다.
헬렌은 최근 대륙을 횡단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는데, 그러려면 무엇보다 돈이 가장 시급하다고 말한 것을 클로디아가 기억하고 그녀를 부른 것이다.
“고마워요, 헬렌. 번거로울 텐데.”
물론 돈 준다고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클로디아는 미안한 눈으로 헬렌을 바라봤다. 헬렌은 스스로도 돈을 벌며 충분히 대륙을 횡단할 수 있는 실력의 소유자였다.
이번에 그녀가 온 건, 자신의 친구인 클로디아를 위해서다. 헬렌은 다정한 눈으로 클로디아를 내려다보며 미소 지었다.
“번거로울 게 뭐 있어? 너는 날 자르지스에 데려다줬는데.”
그렇게 말하고 헬렌은 클로디아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클로디아가 까르륵 웃으며 헬렌의 허리를 끌어안았고, 그 사이에 엉겁결에 끼어 버린 포폰이 신음했다.
“아무튼, 제가 왕자님의 식사를 책임질 겁니다. 잘 부탁드려요.”
“그거 알아, 오빠? 헬렌의 음식은 정령에게 축복받아서, 먹으면 기분이 좋아져!”
쥬버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포폰이 에헴, 하고 설명했다.
“여기 계신 요리사님으로 말할 것 같으면, 정령의 축복을 받은 요리사로 이 캐러멜 하나만 먹으면 기분이 좋아지고 하늘을 날 것 같은 기분이 되며….”
“…그거 혹시 마약인가?”
쥬버린이 심각한 얼굴로 눈을 찌푸리자 클로디아가 까르륵 웃으며 첨언했다.
“그러게, 설명이 꼭 금지약물 같네! 게다가 그 말투는 뭐야?”
“포폰은 내 조수를 하고 있다구.”
“요리 조수가 아니라 판매 조수예요?”
헬렌이 씩 웃었다.
“요리는 다른 사람이 도와주면 마법적 효과는 없어져. 나 혼자 해야 해. 그러니 포폰은 자연스럽게 판매를 도와주게 됐지.”
“근데 말투는 완전히 약장수인데!”
“클로디아, 네가 몰라서 그러는데, 내가 얼마나 캐러멜을 잘 파는지 알아? 다들 내가 일어나서 설명을 시작하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본다구!”
포폰이 코를 쳐들고 잘난 척을 했다. 그 자리의 모두가 속으로 ‘그야 개가 말하는 걸 보면 다들 신기하기도 하겠지…’라고 생각했지만 입 밖에는 내지 않았다.
***
쥬버린은 클로디아와 같은 길을 걸어가 보기를 원했다.
“사랑스럽지만 용감한 내 동생이 어떤 멋진 모험을 했는지가 궁금한걸!”이라는 이유였다.
클로디아는 말도 안 된다고 웃었으나 쥬버린은 의외로 고집이 셌다.
“하지만 오빠, 그러려면 거인의 숲도 가야 하고, 동력 지대도 가야 하고 말이야. 땅요정의 굴도 들어가야 하는데….”
“요정의 동굴도 들어가야 하고? 물론 그럴 수야 없겠지만, 그저 나는 네가 걸었던 길이 궁금하단다.”
쥬버린이 빙그레 웃었다.
“네가 어떤 길을 걸으며 어떤 생각을 했는지, 어떤 광경을 봤는지가 궁금해.”
“그럼 변장도 하셔야겠는데요.”
끼어든 것은 헬렌이었다.
헬렌은 씩 웃으며 클로디아가 성직자로 변장했다가 교황에게 곤욕을 치른 이야기를 늘어놨다. 교국이 최근 급부상하게 된 계기가, 사실은 클로디아가 국경을 통과하기 위해 한 변장에서 시작됐다는 이야기를 아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쥬버린도 이미 들은 이야기였고 그는 한술 더 떠 “그럼 난 성기사로 변장해야 하나?” 하고 고개를 갸웃했다. 클로디아가 손을 내저었다.
“관둬. 그럼 켈록스 2세가 정말 화낼 거라고.”
“그 조그만 고양이 같은 아가씨 말이지.”
헬렌이 흥흥 웃었다.
헬렌이 켈록스 2세를 다시 보게 된 건 최근이었는데, 아주 잠시 스쳐 지나간 것만으로도 꽤 깊은 인상을 헬렌에게 준 모양이었다.
“이름은 무슨 재채기 같은 이름을 해서는, 화내봐야…. 아니다.”
“음?”
“그 고양이 같은 교황님이 클로디아랑 둘이 붙어 있는 모습은 좀 보고 싶은데. 둘 다 너무 귀여우니까.”
“아이참, 헬렌도!”
클로디아가 웃으며 헬렌의 어깨를 찰싹 때렸다.
“귀엽지만 발톱이 엄청 아프다고요! 저를 얼마나 싫어하는데요, 그녀가!”
“아무튼, 그래서 왕자님의 가는 길 말인데.”
헬렌이 어깨를 으쓱했다.
“사실 저는 장기고용될수록 이득이니까 아무래도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무리수는 있어요. 일단 숲 거인들은 자르지스에 있으니까요. 그리고 땅요정 왕의 땅굴은 찾아간다고 해서 있는 것도 아닐 테고. 저도 애초에 그 길을 모릅니다.”
“헬렌은 투르에서 우리에게 고용됐으니까요.”
클로디아가 말을 보탰다. 그때 데미안이 끼어들었다.
“애초에 쥬버린 전하는 간과하고 계신 게 있습니다. 자르지스에서 기다리는 사람 말입니다.”
“…아.”
그제야 모두가 거울 공작을 떠올렸다. 그렇다. 그녀는 두 달째 쥬버린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데미안은 말을 이었다.
“물론 몇백 년을 기다린 사람입니다만, 어쨌든 구해줄 사람이 온다는 소식을 안다면 하루하루가 굉장히 느리게 가지 않겠습니까?”
“그러네….”
“그러니 제가 제의 드릴 수 있는 건 하나입니다. 최대한 빠르게 남쪽으로 가서 자르지스부터 들어가서 거울 공작과의 약속을 지킨 후, 이곳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 코스를 거쳐서 여행하세요.”
“거꾸로?”
“그렇습니다.”
아트릭스로 말을 타고 간 후, 그곳에서 곧장 배를 타고 자르지스로 향한다. 자르지스에서 용무를 해결한 후 돌아오면서 클로디아가 여행했던 곳을 돌아본다는 계획이었다.
쥬버린이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다가, 문득 포폰을 바라봤다.
“그… 실례되는 질문일지 모르나.”
“예? 뭔진 모르지만 말씀하세요!”
포폰이 꼬리를 흔들었다. 쥬버린은 아주 천천히, 힘겹게 말을 꺼냈다.
“말을 탈 줄… 압니까?”
“아이, 전 또!”
포폰이 활짝 웃으며 앞발… 아니 팔을 쾌활하게 흔들었다.
“저는 뭐든지 잘한다구요! 승마 뭐 까짓거 배우면 되죠!”
푸우우웁. 포폰에게는 매우 안타까운 일이었으나, 그 자리의 모두는 포폰의 호언장담에도 불구하고 어떤 상상도를 떠올리고는 웃고 말았다.
그러니까, 말 안장 위에 두 발로 서서 의기양양하게 말고삐를 잡고 앞으로 전진하는 까만 털의 귀여운 개… 같은 것 말이다.
포폰은 맨 처음 모두가 웃을 때 어안이벙벙해 좌우를 둘러보다가, 곧 그들이 왜 웃는지를 알아차리고 귀를 바짝 세우고 짜증을 냈다.
“너무해! 나 말 잘 탄다고! 자르지스에서는 멧돼지도 잘 탔어!”
그 짜증내는 모습까지도 어떤 품종의 작고 귀여운 강아지를 닮아서 모두 화가 난 포폰을 귀여워하고야 말았다.
그 와중에 클로디아가 진지하게 정말로 왕성에서 애완견이라도 키울까 머릿속으로 조용히 새 애완동물을 그려본 것은 비밀이다.
***
예상했던 대로 쥬버린의 여행길은 전혀 힘들지 않았다. 쥬버린은 가는 길마다 포르투의 왕가 문장을 내밀었고 어떤 위압적인 문지기나 기사들도, 문장을 보는 순간 경례했다.
포폰을 보고 섣불리 경멸의 눈초리를 보내던 한 사람은 징계를 받았다. 그는 영지의 말단 경비대원이었고, 쥬버린이 불쾌감을 표하자 경비대장은 그를 바로 무릎꿇렸다.
결국 포폰이 괜찮다고 손을 내젓고 나서야 그들은 그 곤란한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헬렌이 휘파람을 불며 감탄했다.
“이야. 클로디아 때와는 다르네요.”
“그렇습니까?”
쥬버린이 싱긋 웃었다. 헬렌이 어깨를 으쓱했다.
“클로디아와 다닐 때는 항상 변장을 하고 얼굴을 가려야 했죠. 데미안이 제 남편 행세를 해야 했고, 구구절절이 경비들에게 어떤 사람인지를 언제나 증명해야 했답니다.”
“그랬군요….”
클로디아가 길을 나선 때는 혼란스러웠고, 그녀는 수많은 위험에 휩싸였다. 쥬버린과는 사뭇 환경이 달랐지만 그건 비단 환경 때문만은 아니었다.
클로디아가 공주라는 것이 밝혀진 순간 사람들은 그녀를 납치하려고 들었지만, 쥬버린이 왕자라는 것이 밝혀지자 사람들은 그를 경외의 시선으로 봤다.
“제 동생은 너무 미인이니까요. 사람들은 분수에 넘치는 것을 욕망하기 마련이죠.”
그들이 이날 지나는 영지 안에서는 말을 타고 다닐 수 없었다. 영지는 도시국가에 가까워서 사람들이 밀집된 지역에서 말을 타다가는 누군가 다칠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쥬버린의 도착 소식에 영지 바깥까지 달려 나온 영주는, 쥬버린에게 말에서 안 내려도 된다며 굽신거렸다. 때문에 쥬버린은 말 위에서 고개를 까딱이고 있었다.
옆에서 포폰과 함께 말을 타던 헬렌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쥬버린은 승마는 잘하지 못한다던 헬렌이 아무래도 긴 승마에 지친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오늘은 조금 일찍 쉴까요? 헬렌, 아무래도 좀 피곤한 듯하니….”
“아닙니다. 저는 괜찮아요. 계속 가시죠. 이 마을에서 쉬면 일정이 밀립니다. 내일모레에는 큰 언덕을 넘어야 하는데, 자칫해서 시간이 저녁이 되면 곤란해져요.”
헬렌은 능숙하게 지도를 보며 답했다. 쥬버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아무래도 제 지위 때문에 본의 아니게 주변의 배려를 받는 입장이다 보니 간혹 제가 주변인들의 상태를 잘 모를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는 가감 없이 말씀해 주세요.”
“예, 그러죠 왕자님.”
헬렌의 앞에 타고 있던 포폰이 흥얼거리며 말을 부드럽게 몰았다. 포폰은 시선이 모이는 것을 피하기 위해 망토를 뒤집어쓰고 머리에도 후드를 쓰고 있었는데, 그래도 말을 타고 있다 보니 밑에서 누군가가 포폰의 얼굴을 보게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어린애 하나가 제 부모의 손을 잡고 대로를 걷다가, 후드 밑의 까맣고 촉촉한 코를 보고 눈이 동그래졌다.
포폰은 그쪽을 향해 씩 웃어주었다.
“엄마아!!”
아이가 갑작스레 으앙, 하고 눈물을 터트렸다. 영문도 모르는 부모가 아이를 달래느라 쩔쩔맸고, 세 사람은 빠르게 말을 몰아 그들을 뒤로하고 사라졌다. 포폰이 쩝, 하고 입맛을 다셨다.
“에구. 울릴 생각은 없었는데.”
“어쩔 수 없지. 쟤들 입장에서는 얼마나 신기한 광경이겠어?”
그렇게 말하며 헬렌이 포폰의 머리를 툭툭 두들겼다. 쥬버린이 애매하게 웃었다.
“자르지스에서 온 사람들에 대해 대륙 사람들은 겨우 존재를 알아가고 있는 터라…. 시간이 좀 오래 걸릴 것 같습니다. 미안합니다.”
“어휴, 왕자님이 미안하실 건 아니죠!”
포폰이 손을 내저었다.
“섬을 나올 때부터 이 정도 각오는 하고 있었어요.”
하늘섬의 사람들은 그래도 이제는 공주님이 데려온 그 ‘괴물들’이 사람이라는 걸 겨우 납득해가고 있었지만, 대륙은 달랐다.
사람들의 신기한 눈초리, 나아가 괴물을 보는 듯한 눈빛에 포폰은 이제 막 익숙해져가고 있었다. 물론 그 익숙함이 좋은 방향은 아니었다.
사람들이 자신을 쳐다볼 때마다 이 사람도 나를 꺼려하겠지, 하고 생각하는 종류의 익숙함이다.
그래서 어린아이에겐 일부러 좋은 인상을 주려고 웃었는데….
“내 이빨이 좀 날카로워 보이나?”라고 포폰이 시무룩하게 중얼거렸다. 헬렌이 포폰의 어깨를 가볍게 주무르며 위로했다.
“아마 어릴 적에 강아지한테 물려본 애가 아닐까?”
“나 강아지 아니라니깐….”
“아무튼 말이야. 그래도 거기서 소리 안 지른 게 어디야? 저번에는 보자마자 ‘괴물이다!’라고 소리 지른 어린애들도 있었잖아.”
“하하, 그러게.”
헬렌이 포폰을 위로하는 걸 신기한 듯 보던 쥬버린이 입을 열었다.
“두 사람은 자르지스에서 만났다고 들었는데, 유대감이 꽤 깊어 보이는군요. 신기합니다.”
“그런가요?”
포폰이 기쁜 듯 눈을 반짝였다. 쥬버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헬렌이 포폰보다 나이가 꽤 많아서 그런지…. 누나와 동생 같기도 하고, 포폰의 인상이 앳되어서 엄마 같은 느낌도 드는군요. 아, 물론 헬렌의 기분을 상하게 하려는 건 아닙니다.”
헬렌이 한쪽 눈썹을 웃으며 들어 올렸다.
“뭐, 실제로 조카뻘이긴 하죠. 하지만 꼭 그래서는 아니고요.”
“그러면요?”
“원래 식사란 게 그렇습니다. 같이 밥 먹는 게 친해지는 가장 빠른 지름길이죠.”
세 사람은 다시 영지를 천천히 벗어나 구릉을 지나고 있었다. 그동안 헬렌은 자신이 자르지스 산기슭의 마을에서 변신이 풀린 후 감금됐던 이야기, 그리고 포폰이 단체식을 만드는 데 끙끙거리기에 도와주었던 이야기를 풀어주었다.
이야기를 듣던 포폰이, 그가 줄곧 헬렌 옆에 붙어있는 이유에 관해 ‘사실은 여태까지 먹어본 음식 중에 헬렌의 식사가 가장 맛있다’고 털어놓자 쥬버린은 환하게 웃었다.
“저도 동감합니다. 헬렌의 요리는… 사실 왕성의 요리사보다 훌륭하다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에헤이. 왕자님 칭찬이 너무 과하신데요.”
“사실입니다.”
쥬버린이 어깨를 으쓱했다.
“왕성의 요리들은 대부분 어쩔 수 없이 차가워지거든요. 제게 날라오는 과정에서 많이 식습니다. 물론 지금은 그게 고마운 일입니다만…. 헬렌은 제게 요리를 해줄 때 처음부터 차가운 요리를 만들지요?”
“손이 많이 가는 건 어렵지만 어지간하면 차게 식혀도 맛있는 걸 드리려고 노력하죠. 저는 피고용인이니까.”
“하하. 그게 헬렌이 가진 배려심이기도 하죠. 제가 돈을 드리지 않았어도 헬렌은 그랬을 거예요.”
헬렌이 멋들어지게 말 위에서 인사해 보였다. 포폰이 “옳소~!” 하고 외쳤다.
쥬버린이 덧붙였다.
“헬렌의 요리는 여행길이라는 상황 때문에라도 어쩔 수 없이 소박한 것들만 제가 맛보게 되었지만, 먹을 때마다 감동적입니다. 뭐랄까요… 사람들이 말하는 어머니의 사랑 같은 걸 느낀다고 하면 제가 너무 과한 걸까요.”
헬렌의 웃음이 조금 바뀌었다. 눈을 가늘게 뜨며 쥬버린을 가늠하는 듯한, 그런 눈.
쥬버린은 헬렌의 표정을 보고 잽싸게 말을 더했다.
“물론, 저의 어머니께서는 일찍 돌아가셨기 때문에 저는 그 세간의 모정에 관해 상당히 추상적인 느낌만 가지고 있답니다. 무례로 들렸다면 용서하세요.”
“무례라기보다는….”
그때 말이 푸르릉, 고개를 흔들었다. 퍼뜩 정신을 차린 쥬버린은 길 앞에 나무 하나가 쓰러져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이야기하다 보니 길이 막혀 있다는 것도 잊었던 것이다.
그 둥치가 굵지는 않았으나 가지가 많고 잎이 풍성해 말이 걸어서 넘기는 애매하고, 돌아가기에는 길 전체에 걸쳐 쓰러져 있었다.
헬렌이 혀를 찼다.
“어젯밤에 바람이 세더라니. 치워야겠군요.”
“그럴까요.”
헬렌의 말에 쥬버린이 훌쩍 말에서 뛰어내린 후, 말고삐를 포폰에게 자연스레 쥐어주었다. 말들은 얌전히 자리에 서 있었고, 헬렌도 얼른 말에서 내려 다가갔다. 쥬버린은 나뭇가지 쪽을 가늠하고는 나무를 들려고 애썼다.
“어어, 왕자님. 같이 하시죠.”
“괜찮습니다. 제가 손이 차가울 뿐이지 이런 것도 못 하는 건 아니랍니다.”
쥬버린이 환히 웃으며 나무 위쪽을 붙들고 조심스럽게 들어냈다. 나무가 들썩, 하고 들렸고, 쥬버린은 옆으로 살짝 나무를 옮겼다. 하지만 완전히 치우지는 못했다.
역시 도와야겠다 싶어 헬렌이 그쪽으로 다가가 반대편을 들었다.
“괜찮아요, 헬렌.”
“그냥 같이 빨리하세요, 왕자님.”
“음, 여자분께 매너가 아닌데….”
이번에야말로 헬렌의 이마가 약간 찌푸려졌다. 그녀가 입을 열었지만, 쥬버린이 더 빨랐다.
“그러면 얼른 해치울까요. 하나, 둘, 셋.”
헬렌은 입을 닫고 힘을 주었다. 나무는 번쩍 들렸고, 두 사람은 조심스럽게 나무를 길 가장자리로 치웠다. 쿵, 하고 나무를 내려놓자마자 쥬버린이 손을 털고 미소 지어 보였다.
“두 사람이 하니까 빠르긴 하군요! 고맙습니다, 헬렌.”
“아, 예.”
쥬버린이 먼저 앞장섰고, 헬렌이 뒤를 따랐다. 쥬버린은 발 받침 하나 없이 훌쩍 말에 올랐다. 완벽한 탑승에 포폰이 오오, 하고 박수를 짝짝 쳤다.
헬렌은 잠시 망설이다가, 포폰에게 동의를 구하고 포폰의 손을 잡고 말에 오르려 했다. 하지만 아무래도 다른 사람이 말에 타고 있는 상태에서 쥬버린처럼 무릎을 휘두르며 말에 올라타기는 어려웠기에 헬렌은 조금 헤맸다.
그 광경을 말없이 지켜보던 쥬버린이 말에서 휙 뛰어내린 후 헬렌의 옆에 무릎을 꿇고 손을 받쳤다. 헬렌은 움찔했다. 쥬버린이 미소 지었다.
“제 손을 밟고 올라가세요.”
“…어….”
“괜찮습니다. 헬렌은 승마에 익숙하지 않으셔서 그럴 겁니다. 2인용 안장에 올라가는 건 누구나 어려워하죠.”
“헬렌, 내가 좀 앞으로 몸을 당길까?”
헬렌이 뭐라고 답하려는 때, 포폰이 끼어들었다. 헬렌은 포폰에게 웃어 보이며 손을 내저었다.
“아냐, 괜찮아.”
그리고는 조금 망설이다가, 그녀는 쥬버린에게 입을 열었다.
“왕자님. 제가 아까부터 좀 마음에 걸리는 게 있습니다.”
“예? 말씀하십시오.”
“왕자님께서 제게 이러시는 건, 음….”
그녀는 한참 말을 골랐다. 그녀가 마음에 걸려 하는 부분은 분명했으나, 그것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잘 몰랐기 때문이다.
게다가 헬렌은 클로디아와 달리 이 왕자님이 아무래도 좀 어려웠다. 클로디아와 놀랍도록 닮은 예쁜 얼굴이었지만, 그 얼굴이 갖고 있는 뉘앙스가 엄청나게 달랐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하지만 쥬버린이 먼저였다. 쥬버린은 아, 하고 난처한 표정이 되어 무릎을 꿇은 채 그녀를 올려다보고 말했다.
“죄송합니다. 혹시 제가 헬렌을 무시하는 것처럼 보였나요?”
“…그건 아닙니다.”
“하지만… 지금 제가 하는 행동이 불편하신가요?”
헬렌은 생각을 미처 정리하지 못한 채였으나, 그가 하는 말은 그녀가 느끼는 감정과 같았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쥬버린이 미안한 얼굴이 되어 바로 일어서 그녀에게 사죄했다.
“미안합니다. 저는, 음… 그러니까.”
“아뇨, 왕자님께서 사죄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뭐랄까….”
헬렌이 잠시 입을 닫았다.
그녀는 아직도 자신이 왜 불편한지 정확하게 감정을 집어내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높으신 분이 제게 이렇듯 예의 바르게 구는 것을 넘어, 존중하는 것처럼 구는데도 그랬다.
그야 그녀는 원래 높으신 분들을 어려워하긴 했지만…. 자신은 혹시 왕자님씩이나 되는 사람이 제게 너무 정중하게 구는 게 민망해서 이러는 걸까.
갈피를 잡을 수 없었고, 헬렌의 침묵이 길어졌다. 결국 헬렌의 말을 기다리던 쥬버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죄송합니다. 저는 헬렌이 포폰과 친밀하게 몸을 붙이고 승마하기에, 저도 괜찮을 줄 알았습니다.”
“…어, 예?”
“헬렌은 남부 출신이시지요?”
“…예.”
“남부 출신의 여성분들은 남자들과도 크게 거리낌 없이 어울리신다는 이야기도 들은 바 있어, 감히 제 동생을 대하듯 대했답니다. 용서하세요. 저는 가끔 클로디아가 어릴 적 말을 타기 어려워하면 손을 받쳐주곤 했답니다.”
“아, 예….”
그런가? 헬렌이 눈을 껌벅였다. 쥬버린은 미소 지으며 뒤로 물러난 후, 근처에서 돌 하나를 가져다 말 옆에 놓았다.
“쓰시지요.”
결국 헬렌은 그 돌을 밟고 말에 올랐다. 쥬버린이 다시 말에 올라탔다. 때마침 구릉의 내리막길이었다.
“야호!”
포폰이 즐겁게 소리 질렀다. 그 바람에, 헬렌은 생각의 갈피 끝을 놓쳐버렸다.
***
“그러고 보면 쥬버린은 정말로 용서하세요, 죄송합니다를 잘하네.”
불쑥 포폰이 말했다. 본격적으로 남부 지역에 들어선 참이었다. 그들이 함께 여행한 지도 벌써 보름이 흘렀다. 포폰은 줄곧 쥬버린과 한 방을 썼는데, 그사이 말을 편하게 놨다.
그러더니 쥬버린의 말버릇에도 주목하게 된 모양이었다. 쥬버린은 하하, 웃었다.
“그렇게 보이나요?”
“응. 자르지스 사람들은 그 말을 절대로 안 하거든. 왜냐하면 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야!”
포폰은 고삐를 쥐고 불끈 외쳤다. 까만 털이 푸르륵 휘날려서 헬렌은 코앞을 휘휘 저었다. 털 뭉치인 포폰과 보름 넘게 말 위에서 꼭 붙어 다니니 없는 콧물이 나려는 기분이었다.
지금도 에취, 하고 작은 재채기가 났다. 코가 간지러워서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포폰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자르지스 사람들은 용감한 걸 최고의 덕목으로 쳐. 말버릇도 험하고 말이야.”
“그렇군요. 예를 들면요?”
“음, 일단 쥬버린처럼 말하는 건 인간처럼 말한다고들 했었지.”
“인간처럼….”
포폰은 으스대듯 코를 치켜들었다.
“나를 깎아내리는 말은 절대로 하지 않아. 예를 들면 남이 뭔가를 칭찬해줄 때 사양하거나 하지 않지. 대륙 사람들은 뭔가 칭찬하면 ‘그렇지 않다’고 말하거나 ‘아니다’라고 부정하잖아? 그럼 칭찬한 사람 쪽에게 무례를 범하는 거야.”
자르지스 사람들은 험난한 환경에서 몇백 년간 살아왔다. 식량이 귀하니 뭔가를 사양하는 문화는 없었다. 지금 받아두지 않으면 앞으로도 없을 것이라는 의식이 팽배했다.
강한 것을 자랑하는 게 자르지스 사람들의 풍조였고, 자연스레 겸손을 떠는 것은 대륙의 인간들이나 하는 거란 인식이 생겼다.
쥬버린은 신기해하며 포폰의 말을 경청했다.
“대륙 사람들이 겸손하다는 건 용케들 알고 계시군요….”
“가끔 들어오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그, 타스테? 그 사람처럼.”
“타스테요?”
“응. 그…. 시빌이 말했던 사람인데.”
포폰은 시빌이 만났다던 노인에 대해 떠벌렸다. 시빌로 하여금 인간에게 기대를 걸게 했던 노인.
쥬버린은 턱을 어루만지며 흐음, 하고 흥미로워했다.
“왜? 아는 사람이야?”
“…예. 아마도? 정확히는…. 제가 아는 사람과 이름이 같습니다. 음, 정황상 그 사람일 가능성이 좀 높군요.”
포폰의 눈이 반짝반짝해졌다.
“정말?! 누군데?”
“수르 미다프입니다.”
예상외의 이름에 헬렌의 눈도 커졌다.
“수르 미다프? 데미안의 양아버지라는 그….”
“맞습니다.”
쥬버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수르 미다프의 이름은 타스테 미다프.
그 꼬장꼬장한 듯 거친 노인의 이름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발랄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다.
실제로 수르 미다프는 젊은 시절까지는 자신의 이름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고 했다. 물론 포르투 국왕이 그의 이름을 지겨울 정도로 불러댄 뒤에는 그냥 순응했다던가.
국왕이 사석에서 수르 미다프에게 가끔 타스테, 이봐. 자네- 같은 소리로 그를 부르지 않았다면 아마 쥬버린도 까먹었을 것이다.
“수르 미다프는 수르 자리를 데미안에게 넘겨주고 나서 여행을 떠났습니다. 포르투 기사단으로서 원정을 다니며 봐온 세상들이 너무 징글징글해서, 좋은 곳을 보고 싶다고 떠났죠. 그리고 몇 년째 연락이 두절됐습니다. 하지만 포폰의 이야기를 들으니…. 그가 맞는 것 같군요.”
“오, 신기하다. 이런 인연도 있구나….”
포폰이 감탄했다. 쥬버린은 싱긋 웃었다.
“자르지스까지는 험한 길이니 보통 사람은 엄두를 못 내겠지만, 수르 미다프라면 가능하겠죠. 그 또한 검기 사용자니까요.”
“이야기를 들으니 꽤 명랑한 노인 같던데.”
“예. 수르 미다프는 호탕한 성격입니다. 하지만 재미있군요. 정작 수르 미다프는 그리 겸손한 성격이 아닌데….”
그런 그도 자르지스에 가면 겸손한 사람의 종류에 속하는 걸까요, 하고 쥬버린이 고개를 갸웃했다.
포폰은 손을 내저었다.
“아아니, 그 노인은 겸손한 사람의 예는 아니고, 그 사람처럼 가끔 자르지스로 들어온 대륙 사람들이 있었다는 거야.”
“아아, 그렇군요.”
잠시 수르 미다프로 돌아갔던 이야기는 곧 다시 자르지스 사람들의 성격으로 바뀌었다. 포폰은 헬렌을 클로디아로 착각했던 이야기를 하며 쥬버린을 웃기는 데 성공했다.
“자르지스 기준에선 누가 봐도 헬렌 쪽이 공주라구.”
“그렇습니까?”
“일단 영양 상태가 좋잖아!”
호오. 쥬버린이 감탄했다.
“그건 또 새로운 관점이군요.”
“귀한 공주라면 당연히 잘 먹고 몸도 튼튼할 거라고 생각했다고. 그렇게 피죽도 못 먹은 것 같은…. 이 이야기는 클로디아에게 비밀이야.”
“아하하. 포폰 네 이놈. 내가 클로디아를 얼마나 두 달 동안 잘 먹였는데 섭섭하게~!”
헬렌이 뒤에서 포폰을 간지럽혔다.
“으아! 나 고삐 쥐고 있다고! 위험하잖아! 으악!”
포폰이 간지럼을 타며 웃었다.
그야 적당히 잘 먹고 운동도 하고 쉴 새 없이 여행하던 헬렌과, 다이어트한답시고 하루 종일 굶거나 운동이라고는 댄스 정도만 하던 클로디아가 비교되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렇군요, 자르지스는 아무래도 환경이 험하다 보니 튼튼한 쪽이 매력으로 작용하는 거군요.”
“그렇지.”
포폰이 고개를 끄덕이며 헬렌을 올려다보고 씩 웃었다. 헬렌이 느물느물 웃었다.
“임마. 난 어린애랑은 안 만나.”
“뭐라는 거야! 말하자면 그런 거라고! 난 눈부시게 새하얀 털을 가진 예쁜 그녀가 있다고.”
“…그랬어?”
헬렌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포폰이 머뭇거렸다. 짧은 추궁 끝에 모두가 포폰의 그녀는 환상 속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포폰의 미래의 사랑을 응원했다.
응원받았지만 어쩐지 놀림받는 기분이 된 포폰이 계속 고개를 갸웃했지만 두 사람 모두 모른 척했다.
“그러면 자르지스의 남자들은 어떤가요? 역시 튼튼하고 멋진, 여자를 지켜줄 수 있는 남자가 가장 매력적인가요?”
“음, 아무래도 그렇지? 자르지스는 모두들 가정을 만들기도 어렵지만, 일단 아이를 낳고 기르는 데 전력을 다해. 그런 면에서는 대륙 사람들하고 비슷한가….”
“대륙에서도 남자들의 가장 큰 미덕은 여성을 존중하는 것이니까요. 약자를 보호하고 존중하며 동등하게 대하는 것이야말로 모두가 가장 어릴 때부터 배우는 일입니다.”
그때였다. 헬렌이 “아.” 하고 박 터지는 소리를 냈다.
쥬버린과 포폰이 그 소리에 헬렌 쪽을 바라봤다.
“왜 그래?”
“아니, 계속 뭔가 알 듯 말듯 생각 안 나던 게 나서.”
“뭔데?”
포폰의 말에 헬렌이 대답하려는 때였다.
슈르륵, 하는 소리가 들렸다. 쥬버린은 저도 모르게 무서운 반응속도로 고개를 휙 꺾었다.
팍! 하는 소리가 나며 뒤쪽의 나무에 화살이 꽂혔다.
헬렌의 눈이 커졌다. 깃이 짧고 그 대의 길이도 보통 길이의 반밖에 되지 않는 화살이었다. 쥬버린은 이미 화살이 날아온 쪽을 노려보며 칼을 빼 들고 있었다.
“이건….”
“습격입니다.”
두 사람에게 대답이라도 하듯, 풀숲 저편에서 키이이, 키익! 하는 소리가 들리며 화살 몇 개가 더 날아왔다. 쥬버린은 빠르게 검으로 그 화살들을 쳐냈다.
키익! 화난 듯한 소리를 내며 나타난 것은 다섯 마리 정도의 숲 고블린이었다.
“맙소사.”
헬렌이 당황하며 말에서 내리려는데, 쥬버린은 훨씬 빠르게 말에서 뛰어내렸다. 헬렌은 저도 모르게 “위험….” 하고 말했지만 쥬버린의 검이 먼저 고블린을 향했다.
“위험해요, 왕자님!”
“괜찮습니다!”
쥬버린은 빠르고 힘있게 검을 휘둘렀다. 첫 검격에 고블린 한 마리의 목이 뼈까지 베였다. 그 고블린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죽었다.
그제야 헬렌은 그 왕자가, 수르 알파의 소꿉친구라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보통 왕족들은 교양으로 검술을 배우지만, 이 왕자의 경우에는 그 검술 상대가 데미안 알파였던 것이다.
‘얼음으로 된 왕자라 부서질 것 같더니….’
그저 체온이 좀 낮을 뿐, 그는 훌륭한 한 명의 기사 몫을 해내고 있었다. 지금 빠르게 휘둘러지는 검의 간격만 봐도 그랬다. 헬렌은 넋을 잃을 뻔했다가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저도 도울게요!”
“위험합니다, 피해 계세요!”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쥬버린이 두 마리의 고블린을 상대하는 틈에 한 마리 고블린이 이쪽으로 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머지 한 마리는 조악한 활과 화살을 들고 저편에서 한참 이쪽을 겨냥하고 있었다.
헬렌은 즉각 품에서 단검 하나를 꺼내 궁수 고블린의 목을 겨누고 던졌다.
깩! 목에 단검을 맞은 고블린이 비명을 지르며 뒤로 넘어갔다. 그 틈에 다른 고블린이 이쪽으로 달려들었다.
“포폰! 말을!”
“으응!”
포폰이 빠르게 놀란 말들의 고삐를 당겨 물러섰다. 헬렌은 품에서 중검을 뽑으며 빠르게 한쪽 다리를 들어 고블린의 옆구리를 걷어찼다.
“끄엑!”
고블린이 괴이한 소리를 내며 비틀거렸다. 하도 급하게 찼더니 다리에 무게가 실려서, 헬렌은 한 바퀴 돌아 다시 그쪽을 향했다. 그리고 그녀가 다시 중심을 잡았을 때는.
“께륵….”
그사이 두 마리의 고블린을 모두 처치한 쥬버린이 마지막으로 헬렌 앞의 고블린을 꿰뚫고 있었다. 등에서 가슴으로 통과한 쥬버린의 검날 끝에서 초록색 피가 뚝뚝 떨어졌다.
쥬버린이 한숨 겨우 놓은 표정으로 헬렌을 바라봤다.
“괜찮으십니까?”
“어, 예….”
“다친 곳은?”
“나는 없어!”
포폰이 기세 좋게 소리쳤다. 헬렌도 고개를 끄덕였고, 쥬버린은 빠르게 고블린의 가슴에서 검을 뺐다. 그제야 고블린이 앞으로 쓰러졌다.
쥬버린은 궁수 고블린이 완전히 죽었는지까지 확인한 후에야 검을 검집에 집어넣고 돌아왔다.
“아무래도 식량을 약탈하려던 놈들 같군요.”
“숲 고블린은 오랜만에 보는데…. 이런 곳까지 내려오다니.”
헬렌이 중얼거렸다.
숲 고블린들은 보통 중부의 숲 깊숙한 곳에서나 출몰한다. 그러나 세 사람이 가던 곳은 남부의 숲길. 숲 안에 나 있는 길이라고 해도 여행자들이 꽤 자주 다니는 곳이다.
“고블린들이 여기까지 나오다니, 아무래도 네 개의 대륙이 안정되려면 아직 멀은 모양입니다.”
“아무래도 치안 문제가 맞겠죠.”
“예.”
쥬버린이 궁수 고블린의 목에서 뽑아낸 단검을 건네며 답했다. 헬렌은 한숨을 쉬며 그 단검을 받아들자, 쥬버린이 손수건을 건넸다. 검에 묻은 피를 닦으라는 뜻이었으나, 헬렌은 손을 내저었다.
“이런 건 물에 흘려낸 후에 기름 먹인 천으로 닦으면 그만입니다. 그 손수건은 너무 비싸고 부드럽잖아요.”
“괜찮습니다. 저야말로…. 피해 계셨어도 되는데 폐를 끼친 기분입니다.”
헬렌은 멈칫했다.
숲 고블린의 습격 직전, 그녀가 느꼈던 기시감이 또다시 재생돼서다. 헬렌은 눈을 가늘게 뜨며 쥬버린을 바라봤다.
쥬버린은 머쓱한 듯 손수건을 그녀에게 쥐어주려고 애쓰고 있었지만, 헬렌은 무응답으로 거절을 표했다. 결국 쥬버린은 손수건을 다시 품에 갈무리하며 단정하게 말했다.
“헬렌의 일은 제 식사를 책임지는 것이지, 제 경호가 아닙니다. 굳이 힘들여 위험한 상황에 처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아니, 그러면 그 상황에….”
포폰이 멀뚱멀뚱 눈을 뜨고 있다가 반박하려고 했다. 쥬버린은 고개를 저었다.
“제가 죽는다 해도 포르투에서는 두 분께 책임을 묻지 않을 겁니다. 그러기로 되어 있으니까요. 그러니 앞으로도 이런 일이 있으면 두 분은 자신의 안전부터 챙기세요.”
“….”
“물론 저는 두 분께서 자신의 몸 하나 정도는 책임질 실력이시라는 것도 압니다. 하지만 제가….”
그때 쥬버린의 눈이 헬렌과 마주쳤다. 쥬버린은 위화감을 느꼈다. 헬렌의 눈이 웃고 있어서였다. 웃을 상황이 아닌데, 희한하게도 즐거워 보였다.
뭐지? 그는 조심스럽게 헬렌을 불렀다.
“…헬렌? 뭔가 문제 있습니까…?”
“음, 아뇨.”
“그러면….”
내가 뭔가 오해했나. 쥬버린은 마주 웃어 보이기로 했다. 자신이 고블린을 죽인 것이 고마워서, 혹은 제 말이 민망해서 그러는 걸까?
하지만 쥬버린의 귀를 때린 건 전혀 다른 말이었다.
“왕자님은 정말 왕자님 같은 이야기를 하시는군요.”
쥬버린은 고개를 갸웃했다. 눈앞의 여인은 분명 웃고 있었고, 말투도 온화했다. 하지만 쥬버린은 오랫동안 대신들 사이에서 정치를 해온 사람이었고, 그 말 안에 가시가 있다는 것을 지나치지 않았다.
“좋은 뜻은 아닌 것 같습니다.”
“네. 좋은 뜻 아닙니다.”
헬렌은 미소 지으며 보란 듯이 자신의 단검을 탈탈 털었다. 검에 묻은 핏방울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쥬버린은 가만히 그녀의 말을 기다렸으나, 헬렌은 고개를 저었다.
“고블린 시체 때문에 산짐승들이 몰려올 겁니다. 일단 여기를 벗어나지요.”
“…예.”
포폰이 힐끗 눈치를 보다가 말 두 마리를 끌고 다가왔다. 헬렌은 쥬버린을 쳐다보지도 않고 말에 먼저 뛰어올랐다.
이번에는 포폰이 없었기에 조금 수월하게 말에 탈 수 있었다. 발 받침 없이도.
쥬버린은 단정한 얼굴로 자신의 말에 올라탔다. 포폰은 어색한 분위기를 쇄신하고자 몇 번이나 두 사람에게 말을 걸었으나, 이내 포기했다.
세 사람은 말을 달려 평야로 접어들었다. 사방이 훤히 트여 있었고, 눈부신 초록색 밀밭이 펼쳐졌다. 쥬버린은 겨우 마음이 트이는 것을 느꼈다. 말들도 속도를 늦췄다.
그때 헬렌이 입을 열었다.
“왕자님. 저는 사실 이런 이야기를 고용주에게 하는 타입은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헬렌, 그러니까….”
“예. 얼마 전에 가감 없이 이야기해달라고 하셨죠.”
헬렌이 싱긋 웃었다. 쥬버린은 약간 무서워졌다.
그는 주변인들에게 그런 이야기를 항상 해왔다. 하지만 정말로 그에게 가감 없이 이야기한 사람은 별로 없었다.
…그러나, 눈앞의 여인에게 ‘가감’은 정말로 없을 것 같았다. 단순히 예감일 뿐이지만.
“왕자님께서는 얼마 전에, 주변인들이 왕자님을 너무 배려해서 오히려 신경이 쓰인다고 하셨지요?”
며칠 전 그가 헬렌에게 했던 말이었고, 쥬버린은 당연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왕자님께서는 평생 왕자로 살아오셨지요?”
“예.”
“재미있게도 저는 왕자님의 기분을 조금은 알고 있습니다.”
쥬버린은 헬렌에게로 시선을 향했다. 포폰이 헬렌과 쥬버린의 눈치를 보며 말을 몰아 쥬버린의 옆으로 붙이고 있었고, 이제 말 두 마리는 나란히 걷고 있었다.
헬렌은 미소 지었다.
“물론 제가 공주라서 그런 건 아니죠.”
“헬렌은 공주 같은데!”
“아하하. 자르지스 기준이지, 요놈.”
헬렌이 포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포폰이 기분 좋은 듯 헬렌의 손에 머리를 부볐다. 그 덕에 분위기가 조금은 괜찮아졌다.
“남부 여자들이 남자들과 잘 어울린다고 말씀하셨죠? 맞습니다만, 그건 남자들과 친밀해서, 거리감이 적어서가 아니랍니다, 전하.”
“….”
“남부 여자들은 바다를 앞에 두고, 남자들에 뒤지지 않기 위해 기를 쓰거든요.”
쥬버린은 헬렌이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알 것 같았다.
“혹시 제가 오늘 피해 있으라고 말씀드린 것이, 헬렌을 약하게 생각한 것 같아 기분이 나쁘십니까? 제 불찰입니다. 저는 다만….”
“전하.”
헬렌이 씩 웃었다. 짧은 머리카락이 평야의 부드러운 바람에 나부꼈다.
“그깟 걸로 기분이 나빠진다면 저는 평생 한순간도 기분이 좋을 수 없었을 겁니다.”
한참 동안 침묵이 돌았다. 헬렌은 천천히 말했다.
“저는 남자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포폰이 놀란 듯 헬렌 쪽을 쳐다보며 귀를 쫑긋거렸다. 헬렌은 작게 웃음을 터트리며 포폰의 귀를 만지작거렸다. 쫑긋거리는 귀가 헬렌의 손가락을 따라 움직였다.
“물론 포폰 너는 좀 좋아해. 아무튼, 전하. 여자를 대놓고 무시하는 남자들만이 여자들의 미움을 받을 것 같습니까?”
“….”
“잠깐 전하의 이야기를 들어보지요. 출발 전, 전하께서는 클로디아를 사랑스럽지만 용감하다고 말씀하셨어요. 그리고 클로디아를 보고, 본인이 무지했다고 반성하셨죠.”
헬렌의 곧은 어깨는 빳빳해 보였다. 그녀는 쥬버린을 보며 입가에 옅게 미소 짓고 있었다. 쥬버린은 그 온화한 웃음을 보고 벼락처럼 멈춰 섰다.
그건 비웃음이었다.
“남자들이 종종 여자들에게 취하는 순진한 태도를 아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남자들은 여자들에게 ‘네가 그렇게 대단한 줄 몰랐다’ ‘용감하다’고 칭찬하죠. 근데, 그 칭찬은 가끔 사람을 화나게 합니다. 악의 없이 정말로 하는 칭찬이라는 걸 아니까 더 화가 나요.”
“헬렌.”
헬렌의 눈은 엄격한 빛을 띠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눈앞에 있는 이 아름다운 왕자를 보며, 클로디아가 맨 처음 디자이어의 꼬임에 빠져 포르투 왕성을 뛰쳐나왔다는 이유를 완벽히 이해하게 됐다.
쥬버린은 정말로 완벽한 왕자님이었다. 그림으로 그려낸 듯한 멋진 왕자님. 아름다운 금발과 푸른 눈 같은 외형을 제외하고라도. 부드러운 태도와 말씨, 약자를 존중하는 따뜻함과 모든 이들에게 상냥하게 대하려는 자세, 자신이 잘못한 사실을 깨달으면 금세 반성하고 뉘우치는 태도까지.
하지만 그 왕자님이 이딴 식으로 굴면, 역시 화가 나게 된다.
클로디아는 아마 이 왕자의 이런 면 때문에 그에게 반항하고 데미안과 함께 떠났으리라고 헬렌은 확신했다.
쥬버린은 왕자였다. 그는 자신이 모든 이들의 머리 위에 있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었다.
물론 주변인들도 쥬버린이 자신의 위에 있는 것이 당연했기에 위화감 따위는 느끼지 않았으리라.
하지만 헬렌은 조금 달랐다. 그녀는 쥬버린이 아주 당연하게, 스스로를 헬렌의 위에 놓고 있는 듯한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처음에는 그가 나를 고용했기에 당연하다고 생각했지만.’
쥬버린은 헬렌이 자신의 고용인이기 때문이 아니라, 원래 자신보다 아래라고 물 흐르듯 생각하고 있었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에서 기인한다. 헬렌이 고용인이라서, 평민이라서, 남부 출신이라서. 요리사라서. 여자라서.
“저는 어머니가 될 사람이라서 요리를 잘하는 건 아닙니다. 저는 요리사라서 요리를 잘합니다. 왕자님께서는 제게 피해 있으라고 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저는 왕자님께서 보호해야 할 사람이 아니라, 왕자님께 고용된 사람입니다.”
“….”
“감히 제가 왕자님의 동료가 될 순 없겠지만, 방해가 될 필요도 없죠.”
“방해라고 생각한 적 없습니다.”
포폰이 두 사람의 눈치를 봤다. 헬렌은 포폰의 어깨를 툭툭 두들기며 무서워하거나 눈치 보지 말라고 몸으로 말했다. 그리고는 왕자에게 말했다.
“왕자님. 제가 말을 탈 때 배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클로디아가 데미안에게 그런 배려를 받는 것을 익히 알고 있죠. 그건 동료로서 저를 배려해주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의도는 없으셨겠죠.”
알고 있다. 그저 그건 그의 호의일 뿐이라는 것. 하지만 악의가 없다는 점이 나쁘다.
헬렌은 이 왕자가 왕자라서 베풀 수 있는 호의, 그리고 그 호의에 대해 아무 생각이 없는 순진함이 가장 나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동안은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주제넘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단순히 클로디아의 친구여서 이 의뢰에 응했을 뿐, 이 이후로 쥬버린과 얼굴을 부딪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녀가 돈을 받은 의뢰에 한해서도 이 왕자가 호의를 베푼다면 그건 문제가 달랐다.
“…다른 의도가 없다 하더라도 헬렌이 기분이 나빴다면….”
“사과하실 필요 없습니다, 왕자님.”
헬렌은 경쾌하게 말했다.
“저는 전하와 클로디아의 관계에 대해서 감히 말을 얹을 생각은 없습니다. 하지만 전하, 저는 지금 당신이 습격당해 잠들었을 때의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는 없군요,”
“….”
“클로디아는 왜 자르지스로 갔을까요, 왕자님?”
쥬버린은 입을 닫은 채 헬렌을 바라봤다. 헬렌은 눈을 가늘게 뜨고 웃었다.
“제가 데미안이었더라도 당신이 무릎을 꿇고 발을 받쳐 주셨을지 생각해보세요. 그리고 다음부터는 그러지 않으시면 됩니다.”
쥬버린은 대번에 말이 없어졌다. 그리고 그날 저녁, 다음 왕국에 도착해 환대를 받을 때까지도 쥬버린은 두 사람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
포르투의 왕자가 도착했다는 소식에 왕국의 왕은 파티를 열고 싶어 했으나 쥬버린은 그를 모두 거절했다.
“저는 자르지스로 가는 길이며, 일을 벌릴 생각이 없습니다.”
쥬버린의 말에 왕은 아쉬워했으나 그를 존중했다. 쥬버린은 성에서 가장 좋은 방을 받았다. 헬렌과 포폰 또한 환대받았다. 포폰의 기이한 얼굴은 여전히 모두에게 묘한 시선을 받았다. 그러나 쥬버린과 함께여서일까. 큰일은 없었다.
쥬버린은 방에 누워 클로디아를 생각했다.
자신의 동생이 데미안과 사뭇 다른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는 것은 그도 알고 있었다. 100여 일간의 모험 동안, 그녀가 데미안과 좋은 관계가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 다 모두 밖에 티를 내지 않았다.
쥬버린은 그것이 그저 막 연인이 된 두 사람의 쑥스러움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아니면, 포르투의 상황이 워낙 바빠서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헬렌의 말이 그를 흔들었다.
“사랑스럽지만 용감한 나의 동생 클로디아….”
쥬버린은 그렇게 읊조린 직후,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깨달았다.
그는 클로디아가 아무것도 포기하지 않기를 바랐기에, 그녀에게 포르투를 포기하고 결혼하라고 했다. 클로디아가 가질 수 있는 행복은 모두 주고 싶었다.
하지만 정말로 그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는 클로디아를 부를 때 ‘사랑스럽지만 용감하다’고 말하면 안 됐다.
사랑스러운 사람은 용감할 수 없는가?
그의 동생 클로디아는 아무것도 포기하지 않았다. 정말로.
사랑스럽고, 용감한 그녀를 생각하며 쥬버린은 쥐구멍이라도 있다면 그저 도망치고 싶었다.
자신은 아직도 아무것도 배운 것이 없었던 것이다.
‘왕자님은 정말 왕자님 같은 이야기를 하시는군요.’
모두가 그를 동화 속에서 나온 왕자님이라고 칭송했다. 만약 쥬버린이 100일간의 모험을 끝마치고 자신을 수행한 여인과 연인이 되었다면, 그는 아무것도 숨길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포르투가 바쁘더라도 그는 자신의 연인과 입 맞추기를 주저하지 않았을 것이며, 쑥스럽더라도 그녀를 내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클로디아는 적어도 당분간은 그럴 수 없다. 왜일까.
동화 속에서 나온 왕자님은, 딱 동화만큼 순진했다. 그런 종류의 순진함이 남으로 하여금 얼마나 화가 날 수 있게 하는 것인지 쥬버린은 모르지 않았다.
도망치고 싶다.
생각 같아서는 헬렌과 포폰에게 남은 비용을 지급하고, 쥬버린은 도망치고 싶었다. 그 정도로 그는 지금 창피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럴 순 없어.’
그러면 자신은 정말로 비겁한 사람이 될 테니까.
결정적인 순간에 도망쳐버린 수많은 왕들의 이야기를 쥬버린은 알고 있었다. 여태까지 한 번도 누군가에게 지적받아본 적 없는 완벽한 왕자님은, 도망치는 순간 비겁한 도망자가 될 것이다.
그는 차가운 손끝으로 자신이 덮은 담요를 쥐었다. 담요는 푹신한 데다가 화려하고 보드라웠다. 그게 꼭 자신이 앞으로도 살아갈 세상 같아서 쥬버린은 물끄러미 담요를 내려다봤다.
‘그렇구나….’
쥬버린은 그대로 누웠다. 푹 자기 위해서였다. 이런 날, 생각이 아무리 많다고 해도 잠을 설치는 것보다는 그게 나았다. 그는 눈을 감았다.
그날 밤 그는 자르지스의 꿈을 꿨다. 그는 꿈속에서 둥실둥실 커다란 배에 타고, 그의 동생이 저주를 푼 바다를 건너갔다. 바다는 아주 새파랗고 아름다웠는데, 그 안에서 꼬리가 잘린 용이 튀어나왔다.
쥬버린은 용에게 맞서 아주 용감히 싸웠으나 역부족이었다. 배가 부서졌고 선원들이 바다로 떨어졌다.
결국 그가 용의 입안에 삼켜지려는 순간, 누군가 나타나 그를 구해주었다. 쥬버린은 용의 입에서 빠져나와 상대에게 감사 인사를 했다.
갈색 머리카락을 짧게 자른 여인, 헬렌이 웃으며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구하러 왔어요, 왕자님.’
쥬버린은 벌떡 일어났다. 아침이었다.
귀한 손님을 위해 왕성에서 일부러 모아다 정원에 풀어놓은 카나리아들이 고운 소리를 냈다.
쥬버린은 그대로 한참이나 굳어 있었다.
***
쥬버린은 흐린 눈으로 모피를 여몄다.
자르지스의 날은 맑았으며 해변은 아름다웠다. 날씨는 춥지도 덥지도 않았다. 거울 공작의 성까지 가는 것이 전혀 어렵지 않았다. 세 사람은 천천히 걸어 하얗고 둥근 모양의 성 앞에 도착했다.
성은 거대한 하나의 바위 같았고, 쥬버린은 저도 모르게 거기 감탄하고 말았다.
이런 건물은 본 적이 없어서였다.
그 성 앞에 한 여인이 서 있었다. 새카만 머리카락을 엄청나게 길게 기른 여인의 입술은 피처럼 붉었으며 엄청나게 아름다웠다.
포폰은 그 얼굴을 보자마자 귀를 바짝 낮췄다.
“말로만 듣던 거울 공작이 저 사람이야?”
“아마 그렇지 않을까?”
헬렌이 대답하며 포폰의 어깨를 툭툭 두들겼다.
“너무 겁먹지 마.”
“누가 겁먹었다고 그래!”
투닥거리는 둘의 말을 뒤로하고, 쥬버린은 미소 지으며 그녀의 앞으로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저게 뭐야….”
공주님을 구하러 온 왕자님의 대사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여상한 말투에 포폰이 뒤에서 자그마하게 중얼거렸다. 여인-거울 공작은 싸늘하게 미소 지었다.
“거울 안에서만 봤을 때랑 좀 다른데.”
“그러신가요? 실망시켜드려서 죄송합니다.”
“아니.”
여인이 팔짱을 끼고 웃었다.
“실물이 훨씬 나아. 마음에 들어.”
“다행이에요.”
“다행이라고?”
쥬버린의 답이 재미있다는 듯 여인이 되물었다. 쥬버린은 미소 지은 채 대꾸했다.
“저를 남편으로 맞이하고 싶다고 하셨다면서요. 하지만 실제로 만나보니 별로라는 말보다는, 그쪽이 훨씬 다행이지요.”
왕자의 말에 거울 공작은 잠시 멈칫했다가 정말로 웃긴 말을 들었다는 듯 크게 웃었다.
쥬버린은 그녀가 다 웃기를 기다린 다음, 미소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너무 늦게 왔지요. 미안합니다.”
“천만에.”
공작은 고개를 빳빳이 들고 쥬버린의 손에 자신의 손을 얹었다. 차가운 손의 온도에 그녀는 눈썹을 들어 올렸으나, 이내 웃었다.
“나도 지하에만 있어 항상 손이 곱아 있지.”
의외의 동지의식이었다. 그녀는 그렇게 말한 후, 천천히 걸어 나왔다. 하나, 둘, 셋…. 두 사람은 자르지스의 해안선이 연회장이라도 되는 듯, 우아하고 엄숙하게 걸어 나갔다.
그동안 쥬버린은 부드럽게 웃으며 그녀에게 이름을 물었고,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잊어버렸어.”
“그렇군요.”
클로디아에게는 기억할 필요 없다 말했으나 실은 그녀야말로 자신의 이름을 잊어버린 지 오래였다.
“거울로 남의 삶을 들여다볼 뿐, 남에게 나를 소개할 일이 없었으니까.”
짧은 설명에 쥬버린은 납득했다. 그리고 해안선의 숲을 앞에 두었을 때, 거울 공작은 잠시 멈췄다. 그 해안 숲이야말로 그녀가 수백 년 동안 넘지 못한 한계선이었기 때문이다.
쥬버린은 자신이 붙든 그녀의 어깨를 살짝 쥐었다 놓았다. 거울 공작이 그를 짧은 순간 올려다봤다가 피식 웃었다.
그리고 발을 내디뎠다.
공작이 신은 보석 달린 비단신 끝이 해안숲의 모래 위에 쌓인 침엽들 사이로 들어섰다. 공작이 숨을 탁 내뱉었다.
“…저주가 풀리는 것이 그렇게 드라마틱할 거라고 생각해본 적 없지만.”
“선을 넘는 것은 항상 넘기 전에는 두렵고 무서운 일이지만, 막상 넘으면 별것 아니기 마련이니까요.”
“…선을 넘어본 적은 있고?”
공작이 쥬버린의 말에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쥬버린은 씁쓸하게 웃었다.
“그렇군요. 당신의 말이 옳습니다.”
선을 넘어볼 필요가 없었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쥬버린은 자신이 그녀에게 더 말을 보태는 것이 무례가 됨을 알고 입을 닫았다.
공작이 다시 쥬버린을 올려다본 후, 그의 손을 놨다. 그리고는 한 발짝, 다시 앞으로 나갔다. 한 발, 두 발. 공작의 걸음이 빨라졌다.
쥬버린은 공작이 놔버린 손을 갈무리했다. 발아래까지 기른 그녀의 윤기 넘치는 머리카락이 숲 사이로 나부꼈다.
그녀는 바다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
공작이 쥬버린에게로 돌아온 것은 한참이 지나서였다. 해안선을 맨발로 거닐다 온 그녀의 뺨은 발갛게 물들어 있었다. 그사이 헬렌의 식사 준비를 돕던 쥬버린과 포폰이 미소 지으며 그녀를 맞았다. 공작은 따뜻해진 뺨을 자신의 손으로 식히다가, 그것도 모자랐는지 쥬버린의 손을 끌어당겼다.
쥬버린은 제 손을 얼음주머니 대용으로 쓰는 공작을 보며 물었다.
“이제 어떻게 할까요?”
“어떻게 하냐니….”
“수백 년 동안 그 안에서, 하고 싶은 것들이 없었나요? 이제 저주도 풀렸으니 하고 싶은 걸 마음껏 할 수 있는걸요?”
“…너를 남편으로 맞는 것?”
쥬버린이 눈을 찡그리며 웃었다.
“문제가 좀 있군요.”
“무슨 문제?”
“우린 서로를 모르잖아요. 클로디아는 당신의 말을 절대로 승낙하지 않았다고 제게 이미 말했으니, 강제성도 없어요. 그러니 저를 남편으로 맞고 싶다면 우리에게는 시간 외에도 여러 가지가 필요하지 않을까요?”
거울 공작은 그 말이 마음에는 들지 않았으나 이치에는 맞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어쨌든 매일 바라보기만 하던 바다에 발을 담그고 온 차라 기분이 좋았다.
그래서 공작은 헬렌이 권하던 옥수수 수프를 먹어보기로 했다. 몇백 년 만에 먹어보는 음식은, 놀랍게도 그 소박한 메뉴에 비해 맛이 엄청나게 좋았다!
공작은 수프 그릇을 싹 비우고는 헬렌에게 말했다.
“…너를 고용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헬렌은 사람 좋게 웃으며 답했다.
“난 초면에 반말하는 사람은 고용주로 안 모셔.”
그 말에 공작은 약간 발끈했다.
“나는 너보다 나이가 몇백 살은 많아!”
“그리고 내가 만든 수프를 공짜로 먹었지.”
나이가 아무리 많든 적든 은인에게 반말을 하는 사람이 됐다. 할 말이 없었다. 공작은 입을 다물었다.
그러다 옆에 앉아 있던 쥬버린을 바라봤다. 쥬버린은 수프가 식기를 기다리면서 포폰의 제멋대로 자란 꼬리털을 귀엽게 땋고 있었다.
그녀의 시선을 알아차린 쥬버린이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곤 웃었다.
“헬렌은 제 고용인이라 아마 고용하시기가 힘들 겁니다. 그보다는 뭘 하실지 고민하는 게 어떨까요?”
“…뭘 할지?”
“예. 저 성에서 나오지 못하는 몇 년 동안, 하고 싶은 게 있지 않으셨나요?”
공작은 눈을 깜박였다.
하고 싶은 것.
그 깜깜한 지하의 미로에서 그녀는 가끔 길잃은 자르지스 사람들을 놀리는 것을 빼면 크게 하고 싶은 것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하고 싶은 것, 가고 싶은 곳, 드시고 싶은 것…. 뭐든 간에요.”
“그렇군.”
거울 공작은 팔짱을 끼고 잠시 생각했다
“날 데려가 줘.”
“…음.”
뜻밖의 말은 아니었다. 쥬버린은 자르지스를 도로 나갈 때, 공작이 제게 동행을 제의할 것을 충분히 예상한 바였다. 공작이 빠르게 손가락을 딱 튕겼다.
순식간에 허공에서 금화가 좌르르 쏟아졌다.
“헐.”
포폰의 눈이 두 배로 커졌다.
“나 부자야.”
“…마법사이기도 하고요?”
“그럼.”
공작이 어깨를 으쓱으쓱하며 잘난 척했다. 쥬버린은 그러나 난처하게 웃었다.
“제가 어디로 갈 줄 아시고 그러세요?”
“글쎄, 그 공주가 있는 곳은 아니잖아, 적어도.”
“그건 그렇지만….”
“저도 그건 좀 궁금하던데요, 왕자님.”
헬렌이 그때 끼어들었다. 쥬버린은 헬렌에게 자르지스를 나간 뒤 추가 고용을 제안하면서도 그녀에게 딱히 목표지는 말하지 않은 채였다.
“저와 포폰은 신대륙 탐험을 위해 돈을 모으고 있다 보니까 아무래도 너무 장기고용은 힘들거든요. 행선지를 슬슬 말씀해주셔야 저도 계획을 좀 맞춰보지요.”
“음, 그렇군요.”
쥬버린이 턱을 쓰다듬으며 약간 고민하다가 이내 웃어 보였다.
“그럼 저도 대륙 탐험으로 할까요.”
“…예?”
클로디아가 쥬버린에게 단단히 이른 바가 있었다.
‘공작이 오빠를 남편으로 맞이하고 싶다고 했지만, 내가 완강히 거절했어. 오빠는 그녀를 구해주기만 해도 돼. 알겠어? 그러니 부담 갖지 말고 다녀와. 내 곁에 돌아오는 걸 부담스럽게 생각하지 않아도 좋아.’
하지만 쥬버린은 아무래도 역시 당장은 클로디아의 곁에 돌아갈 생각이 없었다. 그녀의 대관식에는 참석해야겠지만, 대관식 전에 자신이 포르투에 있어봤자 방해만 될 뿐이었다.
그래서 쥬버린은, 당분간은 바깥을 떠돌 생각이었다. 장기계약일수록 좋다는 헬렌과도 이에 관해 미리 말을 나눈 차였다.
거울 공작의 일이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으나, 자신과 함께해주면 좋겠다고.
헬렌의 승낙도 이미 받아 놓은 상태였다. 어디를 어떻게 갈지는 말하지 않았다. 거울 공작을 구하고 나서 생각해보자고 결론 내려놓은 상태였다. 그래서 그는 거울 공작에게 어떻게 할 거냐고 물은 것이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 결심이 섰다. 쥬버린은 거울 공작을 돌아봤다.
“제게 선을 넘어본 적이 있냐고 하셨죠?”
“그랬지.”
“저는 선을 넘을 필요가 없었던 사람입니다. 애초에 제겐 남들이 그어놓은 선이 없었으니까요.”
그는 대륙을 호령하는 포르투의 왕자로 살았다. 아무것도 넘을 필요가 없었다. 그에게 정해진 한계는 없었으므로.
헬렌처럼 비유하자면, 그는 언제나 모든 것의 주인이었으며 왕자였고, 세계의 중심에 살았고 지배자였으며 남자였다. 하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쥬버린에게는 넘어야 할 공고한 한계가 생겼다.
그리고 그건 저 사람이 가르쳐준 것이다. 쥬버린은 헬렌 쪽을 바라보며 웃었다.
“저는 넘어보고 싶은 선이 생겼습니다.”
공작이 이마를 찌푸렸다. 헬렌은 고개를 갸웃하는데, 포폰이 반색했다.
“앗! 그러면 쥬버린도 혹시 우리의 신대륙 탐험에 끼고 싶은 거야?!”
“…아마도요?”
아름다운 왕자가 싱긋 웃었다. 포폰이 흥분해 발을 동동 굴렀다.
“내가 이럴 줄 알았어! 그러게 내가 말해보쟀잖아, 헬렌! 클로디아에게 부탁하면 스폰서를 해줄지도 모른다고!”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까?”
했다.
헬렌과 포폰은 맨 처음 자르지스 너머에도 또 다른 대륙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아이디어에 착안했고, 둘이 신나게 모험의 비용을 모으자고 의기투합했다.
그러나 비용을 구할 길이 요원해 포폰의 본격 네 개의 대륙 탐험부터 나선 것이다.
하지만 포폰은 그전에, 클로디아에게 돈을 빌려 신대륙 탐험을 해보는 건 어떻겠냐고 헬렌에게 제안했었다.
“신대륙에서 발견한 것들을 먼저 클로디아에게 넘긴다고 하면 되잖아!”
“하지만 클로디아는 바쁘니까, 폐를 끼칠 수 없어.”
그때는 그랬지만, 이렇게 왕자님이 흥미를 느낄 줄 알았다면 제안을 역시 해볼걸!
포폰이 꼬리를 흔들며 떼굴떼굴 구르자 쥬버린이 웃었다.
“저는 사유재산이 꽤 있습니다. 포르투의 왕가 재산과는 다른 재산이죠. 그 돈으로 당신들을 고용하면 될까요.”
“이런, 왕자 전하.”
헬렌이 눈썹을 들어 올렸으나 쥬버린이 빨랐다.
“말했잖습니까. 헬렌. 넘어보고 싶은 선이 생겼다고. 당신에게도 그런 선이 있기에 신대륙 탐험을 하려는 것이지요? 그게 저도 함께가 아닐 이유는 없지 않나요?”
“끙….”
어차피 답은 정해져 있었다.
끙끙거리는 헬렌과, 싱긋 웃는 쥬버린을 멍청히 쳐다보던 공작은 쥬버린 쪽을 올려다보고 입을 열었다.
“성에서 나오기도 전에 내 사랑의 라이벌이 생겨 있을 줄은 몰랐는데.”
“그렇습니까? 안타깝군요.”
와, 진짜 얘 예쁘게 생겨서 안 만만하네. 뻔뻔하게 대꾸하는 것 좀 봐.
그렇게 생각하며 공작은 웃었다.
“게다가 내 사랑이 얻어맞는 걸 좋아할 줄은 몰랐어.”
“그렇게 보였습니까….”
성 안에서 거울 공작은 쥬버린이 이곳으로 오는 광경을 다 봤을 것이다. 그렇기에 쥬버린은 놀라지 않았다. 다만 서둘러 예산을 다시 짜 보려는 헬렌 쪽을 보며 싱긋 웃었다.
“뭐, 그것도 선을 넘는다면 선을 넘는 것 아니겠습니까. 전 아무래도 좋습니다.”
온몸이 차가운 왕자가 신대륙으로 가는 길을 막고 있던 빙벽을 통과해낸 것은, 이보다는 한참 후의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