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 공주를 위한 왕관
열아홉의 생일이 되기 전 클로디아는 스스로에게 맹세했었다. 지루하고 재미없는 남자와는 절대로 결혼하지 않겠다고.
스무 살이 되는 해에 결혼하고 싶다는 바람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가 결혼하기 전 받아야 할 프러포즈는 가장 완벽해야 한다고도 생각했다. 아름다운 꽃, 예쁜 드레스, 보석, 신나는 파티, 왕자님 같은 것들은 요소요소 빠짐없이 자리해야 했다.
그날만은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고, 그렇게 바랐다.
하지만 채 스무 살이 되지도 않았는데 이제 클로디아는 그날이 영원히 오지 않아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아름다운 꽃과 예쁜 드레스, 보석과 신나는 파티, 그리고 자신을 데리러 올 왕자님 같은 것은 있으면 좋은 것이지만, 없어도 인생이 그렇게 끔찍해지지는 않는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그런 것들이 사라진 자리에 차곡차곡 채워 넣을 수 있는 다른 것들이 더 많다는 것을 클로디아는 안다.
그리고 이 여행에서 자신이 차곡차곡 채워 넣은 것들을 클로디아는 절대로 잊어버리고 싶지 않았다.
“당장 모든 게 좋아질 거라고 장담할 수는 없어요, 시빌. 당장 바다가 이렇게 되었다고 해도 물고기들은 여전히 까맣더군요.”
“….”
“여전히 당신 말대로 숲 거인들은 숲에 고립되어 있고 유니콘은 멸종 직전이죠. 나쁜 것들을 좋은 것으로 바꿔주는 요정들은 백 년을 갇혀 있고요. 그런 것들을 해결하려면 더 많은 시간이 걸리겠죠.”
[할 수 있어, 클로디아, 너는!]
디자이어가 노래하는 듯한 리듬으로 끼어들었다. 클로디아는 등 뒤에 멘 검을 툭툭 두들기며 웃었다.
“고마워, 디자이어.”
[나야말로!]
시빌은 온몸을 덜덜 떨면서 물 안에 주저앉아 울고 있었다. 클로디아는 작게 한숨을 쉬며 시빌의 이마를 쓰다듬었다. 거기에는 단단하고 새까만 뿔이 나 있었다. 그녀에게 단 한 번도 보여준 적이 없는 시빌의 뿔.
“어떻게, 어떻게 그렇게….”
시빌의 초록색 눈 안에는 수많은 감정이 담겨 있었다.
어떻게 당신은 이 모든 게 그렇게 쉽죠?
내가 백 년을 넘게 고민한 것들이 클로디아에게는 어째서 이렇게나 순식간에 이룰 수 있는 일들이죠? 왜 세상은 불공평한가요?
하지만 그런 수많은 감정들 가운데에서도, 확고한 또 하나가 있었다.
왜 당신은 아직까지도 그렇게 말할 수 있죠? 내가 한 짓을 아는데도 말이에요….
클로디아는 시빌에게 속삭였다.
“당신을 용서하는 건 아니에요, 시빌.”
“….”
“당신은 마법사들을 죽였고, 포르투를 흔들었어요. 오빠는 당신 때문에 가사 상태에 빠져 있죠. 당신은 나쁜 사람이에요. 당신이 미워요.”
죄스럽다는 말로는 다 할 수 없을 것이다. 시빌의 얼굴에 복잡한 감정이 깃들었다. 클로디아의 마음 또한 복잡하기는 매한가지였다. 시빌이 일으킨 수많은 일들을 그저 용서할 수는 없었다. 당장 돌아가 클로디아가 수습해야 하는 일들만 해도 산더미 같았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시빌에게 그 책임을 물을 수는 없었다. 책임을 묻는다 해도 시빌이 해결할 만한 일도 아니었다. 그걸 해결할 수 있는 힘은 클로디아에게 있었다.
그녀는 시빌의 뿔을 어루만졌다.
“하지만, 약속할게요. 다시는…. 울게 하지 않겠다고.”
포르투를 떠나던 첫날 클로디아는 많이도 울었다. 엉엉 울면서 하늘섬을 떠나 동력 지대에 도착하던 첫날을 기억한다. 그때는 자신이 누군가에게, 울게 하지 않겠다고 말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은 조금도 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녀는 이제 시빌에게 약속할 수 있었다. 다시는 누구도 울게 하지 않겠다고.
“나와 함께 가서, 내가 당신과 한 약속을 지키는 걸 봐요.”
“…안 돼요. 그럴 순, 그럴 수는 없어요.”
시빌은 더듬거리며 말했다.
“저는 그럴 자격이 없어요. 저는….”
“…물론 강요할 생각은 없어요.”
찰랑, 하고 투명한 바닷물이 클로디아의 무릎 아래에서 부딪혔다. 그녀는 포르투로 돌아가 왕관을 쓸 것이다. 쥬버린에게 심장을 돌려주고, 아무르로 하늘섬을 다시금 띄울 것이다. 시빌과 한 약속을 지키려면 그럴 수밖에 없었다. 최고의 신부가 되는 건 그다음에.
“화구도, 그… 섬을 떠날 순 없어요.”
시빌이 다시 중얼거렸다. 죽음의 바다에서 저주는 사라졌지만, 아직 첫 번째 용의 화구는 아직 불타고 있었기 때문이다. 세 번째 용이 남긴 거울 공작의 성도 마찬가지였다.
자르지스에는 해결되지 않은 것들이 훨씬 많았다. 시빌은 고개를 저었다.
“아직 자르지스는 뜨거워요. …이제 그걸 해결할 방법을 찾아보려고 해요.”
그런 것까지 클로디아에게 맡길 수는 없다. 그럴 생각도 없었다. 자르지스의 고립이 해결되었지만, 아직 문제는 산재해 있었다. 그러나 클로디아는 고개를 기울이면서 입을 열었다.
“아, 그거 말인데. 저 물어볼 게 있어요.”
“말하세요….”
“혹시 자르지스 사람들, 임시로 이사하는 데 큰 불만은 없겠죠?”
“…뭐라고요?”
“매일매일 재가 날리고 화구 때문에 마을이 폭발하는 상황이니 별문제는 없을 거라고 포폰은 말했지만, 그래도 시빌에게 물어보고 싶어서요.”
“…대체 뭘요?”
시빌이 어안이벙벙한 얼굴로 클로디아를 바라봤다. 클로디아는 어깨를 으쓱했다.
***
헬렌이 내놓은 아이디어는 조금 다른 버전이었다. 성기사들을 데려올 거면 일회용으로 쓰지는 말자는 것이었다. 이왕 공을 치켜세워줄 거면, 알뜰하게 쓸 수 있는 만큼 쓰자는, 그녀다운 생각이었다.
“나는 좀 다른 생각이 있는데.”
클로디아는 헬렌을 바라봤다. 헬렌은 천정을 휘휘 둘러보고 있었다.
“…무슨 생각이요, 헬렌?”
“데미안. 혹시 이걸 무너트릴 수 있어? 아, 물론 지금 말고. 좀 회복하면 말이야.”
그 말에 클로디아가 눈을 깜박이다가, “앗!” 하고 비명처럼 소리 질렀다. 헬렌이 턱을 문지르며 그 비명에 답하듯 말을 이었다.
“이 민둥산 말이야, 밖에서 볼 때부터 거대한 빵 화덕같이 생겼다고 생각했거든. 용들이 살기 위해 안쪽을 비웠다는 것 같은데…. 맞지?”
“예! 그러니까 헬렌의 말은….”
“지열은 어쩔 수 없어. 하지만 여긴 용들이 만든 불이잖아? 그리고 이 구조는…. 안의 열을 몇 배나 더 뜨겁게 만드는 거지.”
헬렌은 바닥에 손가락으로 그림을 그리며 설명했다. 둥글고 넓은 민둥산의 구조는, 계속해서 불에 공기를 공급해 더 뜨겁게 만드는 요리용 화덕과 비슷하게 생겼다.
안쪽에서 이 화구의 일부를 어렴풋이나마 구경하고 나서, 헬렌은 자신의 상상에 확신을 얻었다고 말했다.
“만약에 이 민둥산을 무너뜨리면 공기도 안에서 돌지 않게 될 거야…. 몇 백 년을 불타 온 화구가 꺼지는 거지.”
“하지만 시빌이 그 생각을 못 해서 그런 건 아니었을 거예요. 뭔가 끄지 못하는 이유가….”
클로디아가 심각한 얼굴로 반대 의견을 제시했다. 그러나 헬렌은 손가락을 세워 양쪽으로 흔들었다.
“여긴 좁은 섬이야. 만약 사람들이 있는 채로 산 하나를 무너트리면 아무리 민둥산이라도 피해가 심각할 거야. 그래서 시빌도 여태까지는 그 방법을 시도하지 못했겠지. 하지만….”
“…사람들을 대피시킨 후 시도해본다면 가능하다?”
“심지어….”
헬렌이 팔짱을 끼고 이쪽을 보던 데미안에게 윙크하며 말했다.
“데미안이 만약 하지 못하더라도 시빌이 가능할 수도 있겠지.”
“…그가 거부한다면….”
데미안이 상반신을 일으켰다. 클로디아가 놀라 급히 그를 눕히려 했으나 데미안은 고개를 내저었다.
“그가 거부하더라도…. 제가 하겠습니다. 불가능한 일은 아닙니다.”
“수르 알파.”
“로드.”
무리하지 말라고 말하려던 클로디아를 데미안이 가로막았다. 데미안은 필사적인 시선으로 그녀를 올려다봤다.
“쓸모없는 건 두 번으로 충분합니다.”
두 번? 왜 두 번이지? 하고 생각하던 클로디아는 눈에 힘을 주었다.
시빌과의 전투에서 진 것,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아마 그녀의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이리라.
이 남자는 대체 어디까지 꽉 막혀 있을 셈일까. 그녀는 화가 벌컥 났으나, 환자에게 화를 내면 안 된다는 최소한의 상식이 그녀를 가로막았다. 포폰이 중얼거렸다.
“…화구가 무너진다면, 자르지스도 괜찮아질까?”
“그건 몰라, 포폰.”
헬렌이 다정하게 포폰의 뒷머리를 긁어주었다. 포폰의 귀가 쫑긋 섰다.
“무책임한 말이긴 하지만, 그건 아무도 몰라. 자르지스의 열기가 사라진다면, 아마 가장 먼저 사람들은 살 만해지겠지. 하지만 고립된 곳이니까 식량난은 쉬이 해결되지 않을 거야. 정글은 몇십 년에 걸쳐져서 사라질 거고, 그래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단 낫겠지, 헬렌.”
포폰이 그녀의 말에 맞장구쳤다.
“가장 좋은 건 고립을 해결하는 거지만, 자르지스 사람들도 선택을 할 순 있어야지. 계속 여기에 남는 것을 원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포폰 네 말처럼, 반대로 이곳을 떠나길 원하는 사람들도 있을지 몰라. 대륙에 보내줄 테니, 이곳이 아닌 다른 곳에 살지, 아니면 최소한 용의 화구가 사라진 자르지스로 돌아올지….”
“네 말이 맞아.”
포폰이 코를 훌쩍였다.
“…적어도 나는 너희들을 보고 대륙을 한 번쯤 구경하고 싶어졌거든.”
헬렌이 생긋 웃었다.
“그거 좋은데. 나도 너 같은 조수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거든. 어때, 포폰. 나가서 나와 함께 대륙을 돌아다니면서 장사를 해보는 건?”
“좋아, 좋아!”
풍성한 꼬리가 다시 살랑살랑 힘을 찾아 흔들렸다.
***
클로디아의 말에 시빌은 입을 약간 벌렸다. 그 또한 생각해보지 않은 방법은 아니었다. 오히려 맨 처음 생각했던 방법이었다. 그가 마법으로 용의 화구를 무너트리면 어떨까. 용의 화구에서 불타는 것은 마법적인 이유도 있지만, 가장 큰 원인은 화구 아래의 검은 물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이 화구를 무너트린다면 해결될 것이다.
단순한 생각이었지만 그보다 확실한 것도 없었다. 민둥산을 무너트려 불을 덮어버리는 것.
하지만 시빌이 그 일을 하지 못한 건 두 가지 때문이다. 자르지스에서는 그가 충분히 힘을 발휘할 수 없었으며, 헬렌의 말대로 민둥산을 무작정 무너트리면 아마 자르지스 사람들은 엄청난 피해를 입을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 클로디아는, 사람들을 임시로라도 성기사들을 동원해 대피시키고 민둥산을 무너트리자고 하고 있었다.
“환경은 많이 바뀔 거예요. 하지만 대륙보다 자신이 살아온 자르지스가 좋은 사람들은 충분히 자신이 원하는 곳에서, 이제는 척박하지 않게 살아갈 수 있겠죠.”
“…자르지스 사람들은 그럼….”
“아. 당분간 포르투에서 살게 될 거예요.”
클로디아가 생긋 웃었다.
“포르투에는 지금 빈집이 꽤 많거든요. 당신 덕분에.”
반쯤은 놀리는 말투였다. 시빌이 일으킨 재앙 때문에 대륙으로 피난을 간 사람들의 집이 비었다는 말을 시빌이 못 알아들을 리 없었다. 그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러다 자르지스 사람들이 포르투에서 눌러앉겠다고 하면, 곤란하지 않겠어요?”
“아, 괜찮아요.”
포르투의 공주는 정수리를 몇 번 긁었다. 노바라가 예쁘게 땋아준 머리카락이 흔들흔들 흔들리며 잔머리를 토해냈다. 하지만 사랑스럽다고, 시빌은 생각했다.
“하늘섬 곧 가라앉힐 거예요.”
“…예?”
[뭐라고?!]
반문한 것은 여태까지 뒤에 서 있던 기사와 디자이어였다. 클로디아는 그제야 뒤에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는 듯 데미안 쪽을 쳐다보고는 이를 드러내고 환히 웃었다.
“아, 맞아요. 미리 말하는 걸 깜빡했네요.”
깜박하는 것도 정도가 있다. 데미안의 얼굴이 당혹으로 물들었으나 클로디아는 아랑곳하지 않고 손을 떨어냈다.
“근데, 바닷물 안에서 이야기하는 건 그만두지 않겠어요? 계속 손이 젖고 있어서 아까부터 자꾸 손을 내밀 타이밍을 놓치고 있거든요.”
무슨 소리인지 알 수 없어서 시빌은 멍하니 클로디아를 쳐다봤다. 털어내고 있는 그녀의 손바닥에서 바닷물이 계속 떨어졌다. 클로디아는 손을 자신의 허리춤에 슥슥 닦더니 그 손바닥을 주저앉아 있는 시빌에게 내밀었다.
“일어나요.”
미소가 환했다. 시빌은 도저히 자신이 이 공주님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
자르지스의 주민들이 모두 대피하는 데에는 꼬박 일주일이 걸렸다. 상황을 설명하고, 당혹한 주민들이 짐을 싸길 기다려야 했기 때문이다. 성기사들을 앞세워 직접 자르지스까지 온 켈록스 2세는 씨근대고 있었다.
하지만 자르지스의 열기에 금세 고개를 쏙 집어넣고는 “클로디아 공주가 존경스럽군요”라며 자신만 먼저 아트릭스로 돌아갔다. 정말이지 한결같은 사람이라며 클로디아는 웃었다.
마왕을 토벌하러 간 공주님의 행방을 궁금해하던 백 개의 왕국 사람들에게 공주님은 통신 도마뱀으로 쾌활하게 웃어 보였다.
자초지종을 다 설명하긴 힘들겠지만 당분간 하늘섬에 색다른 친구들이 좀 늘어날 예정이다, 나쁜 마왕은 눈물을 쏙 빼주었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대단히 명랑하지만 반쯤은 공주님의 정신감정 의뢰를 하고 싶게 만드는 말에 사람들은 어안이벙벙해졌다.
무엇보다 가장 충격적인 건 클로디아 공주의 행색이었다. 아름다운 긴 머리카락을 늘어트리고 눈물짓던 공주님은 어디로 가고, 사내애처럼 머리를 잘라놓은 클로디아 공주가 환하게 웃는 모습에 하늘섬 사람들은 ‘공주가 바꿔치기 된 것은 아닐까?’라며 토의했다.
어쨌든 막상 자르지스 사람들이 대피하던 날, 포르투의 주민들은 호기심에 모두 밖으로 나와 ‘성스러운 길’을 건너오는 자르지스 사람들을 구경했다. 반쯤은 혼비백산해 달아났고, 반쯤은 기함했다. 기함한 사람들의 대부분은 마족들이 자신들과 같은 사람이라는 데에 놀란 것이었다.
하지만 성기사들이 버티고 있으니 그들을 함부로 적대시하지는 못했다. 포르투의 개구쟁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성기사들이 진을 치고 있는 구역을 기웃거리곤 했다.
포폰은 가장 마지막까지 자르지스에 남은 자르지스 주민이었다. 성기사들이 만든 길을 몇 번이나 뽀르르 뽀르르 옮겨 다니며 의심스러워하는 주민들을 안심시켰다. 헬렌이 포폰의 머리를 쓰다듬자 씩 웃어 보이는 까만 개를 보고, 성기사들은 마족들에게 날을 세웠던 것도 잊고 집에서 키우던 애완동물을 몰래 그리워했다.
물론 포폰이 알게 되면 기분이 상할지도 모르니까, 어디까지나 몰래.
거대한 민둥산이 무너지는 광경은, 그래서 클로디아와 데미안, 시빌과 디자이어만 볼 수 있었다. 미로에서 나올 수 없는 거울 공작이 포함된 인원이니 다섯으로 치자고 시빌이 웃었다. 심술궂게 입을 비죽일 그녀를 상상하며 클로디아도 옅게 웃었다.
클로디아는 디자이어를 안고 데미안의 뒤에서 그를 지켜봤다. 데미안의 검에 푸른 기운이 맺혔고, 그 기운은 바다까지 갈 정도로 세차게 뻗었다. 검의 궤적이 정확히 다섯 번 흩뿌려졌다. 민둥산의 가운데가 푹 꺼지고, 점점 빠르게 무너졌다. 콰르릉, 소리가 났고 연기가 피어올랐다. 용의 화구는 딱 열흘 동안 재를 흩뿌렸다. 그리고 끝내 불이 꺼졌다.
가장 먼저 바뀐 것은 자르지스의 하늘 색깔이었다. 열기로 달아올라 있던 자르지스의 하늘은 항상 흐리게 흔들리고 있었는데, 열기가 사라지자 하늘은 빠르게 푸른색으로 돌아왔다.
열흘 동안 포르투에서 자르지스 난민들을 돌보느라 쉴 틈이 없던 클로디아의 안색도 푸른색이었지만, 그녀는 자르지스로 다시 향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재도, 연기도 모두 가라앉은 자르지스의 모습은 회색이었다. 산이 무너졌는데 주변의 정글이 멀쩡하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하지만 더 이상 열기는 없었다. 새파란 하늘 아래의 회색 섬을 보던 클로디아는 디자이어를 꼭 끌어안았다.
“디자이어.”
[으응….]
“이게 옳은 일이었을까?”
그녀는 아직도 확신하지 못했다. 믿을 수 없을 만큼의 행운들이 겹치고 겹쳐 여기까지 오는 동안, 클로디아는 단 한 번도 자신이 하는 일이 옳고 확실하다고 생각하지 못했다.
그 방법이 나쁘거나 누군가에게 피해를 끼쳐서가 아니다. 그저 더 나은 방법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 그리고 어쩌면 훨씬 더 최선을 다했다면 더 좋은 결과가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그녀의 뇌리 한쪽에서 계속 요동쳤다.
디자이어는 그녀의 말에 작게 웃었다.
[클로디아.]
“으응.”
[미겔도 그랬어. 언제나 사람들을 도우면서도 그게 가장 좋은 일인지는 확신하지 못했어.]
“그러셨어?”
[응. 누구도 자기가 옳다고 확신하진 못해. 그걸 확신할 수 있다면, 그건 아마….]
“저 같은 결과를 만들게 될 겁니다.”
둘의 대화에 끼어든 건 시빌이었다.
시빌은 이전보다 훨씬 좋아진 안색으로 자르지스를 둘러보고 있었다. 열흘 동안 날린 재 때문에 정글의 식물들은 반쯤 죽었고, 마을들도 폐허가 됐다. 하지만 시빌의 기분은 나쁘지 않아 보였다.
그는 클로디아에게 눈을 찡긋했다.
“저는 하늘섬으로 가 아무르를 훔쳐내는 것이야말로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의심하지 않았죠. 그리고 저는 어떻게 됐을까요?”
“…나쁜 사람이 됐죠.”
클로디아는 애잔한 눈으로 그를 쳐다봤다. 그녀는 아직도 시빌을 용서할 수는 없었다. 그가 죽인 수많은 사람들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왜 그랬는지는 알고 있다. 시빌은 클로디아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그녀에게 머리를 살짝 기댔다.
“스스로에게 확신을 가지는 사람이야말로 가장 위험합니다. 자신이 옳은지 끊임없이 되새김질하고, 남들을 돌아보는 게 가장 중요하다는 걸…. 저는 이제야 조금 알 것 같아요.”
시빌은 자르지스에 남기로 했다. 회색 섬이 된 자르지스에는 많은 도움이 필요했다. 이제 용의 화구와 저주가 사라진 지금, 예전보다 훨씬 더 많은 마법을 쓸 수 있게 된 그는 자르지스를 더 좋은 곳으로 바꾸기 위해 힘을 쓸 것이다.
그때, 장갑을 낀 손이 두 사람의 얼굴 사이 틈으로 파고들어 왔다. 눈을 찌푸린 데미안이었다.
“로드에게서 그 손 떼도록.”
내내 클로디아를 경호하고 있던 남자의 엄격한 말투에 시빌은 으햐, 소리를 내며 클로디아를 더 꽉 끌어안았다. 혀까지 낼름 내밀어가면서.
데미안의 이마가 한층 더 크게 구겨졌다.
“싫은데요! 오늘이 마지막인데!”
“마지막….”
알고는 있었지만 그 말에 새삼스럽게 마음이 아파 클로디아가 시빌을 올려다봤다. 시빌은 그런 그녀를 내려다보더니 싱긋 웃었다.
“클로디아. 확신이 없어도 괜찮을 겁니다.”
“어….”
“손을 잡아줄 사람이 옆에 있으면 말이에요.”
어째서일까.
시빌의 말에 클로디아는 저도 모르게 무심코 옆을 돌아보고 말았다. 이쪽을 보던 검푸른 눈동자가 어째서인지 확 커졌다. 시선이 마주친 순간, 클로디아는 화들짝 놀라 다시 시빌 쪽으로 황급히 얼굴을 돌렸다.
시빌은 노골적으로 불만이 가득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아, 알고는 있지만 정말 짜증나네요.”
“뭐, 뭐가요?”
“저 진짜 진심이었거든요, 클로디아.”
그렇게 말하고 시빌은 손을 뻗어 클로디아의 손을 잡았다. 장갑을 끼지 않은 맨손에는 여행의 흔적 때문인지 군데군데 굳은살이 배어 있었다. 시빌은 그 손을 사랑스럽다는 듯이 들여다본 후, 손등에 입을 맞췄다. 그리고 눈을 들어 클로디아를 쳐다보고 싱글싱글 웃었다.
“정말로 좋아했답니다, 클로디아.”
“어, 그, 시빌….”
시빌은 슬쩍 옆을 바라봤다. 이제는 검을 내리고 이쪽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는 검은 머리카락의 남자를.
아마 자신은 도저히 그를 이기지는 못할 것이다. 그날 새벽의 동이 트는 것을 보며 깨달았다. 그녀를 끝까지 믿은 것은 이 남자 하나뿐이었다. 그녀를 잘 안다고 생각한 자신조차 클로디아가 떠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도.
그녀의 손을 잡아줄 사람은 자신이 아닐 것이다. 시빌은 마지막으로 조금의 심술을 부리기로 했다. 앞으론 부리지도 못할 심술이다. 자르지스에 자신이 얼마나 있을지는 모르지만, 특별한 계기가 없는 한 그는 이곳을 나가지 않을 것이고, 그녀 또한 바빠질 테니까.
그는 빠르게 클로디아를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꺅!” 클로디아가 당황한 틈에 그는 부드럽게 뺨을 부볐다.
“당신과 함께 있으면서 자르지스에 당신 같은 사람이 있었다면 좋았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 말에 굳었던 몸이 품 안에서 부드럽게 풀려 간다. 정말이지 다정한 사람이었다. 시빌은 그녀의 이마에 제 뿔을 갖다 댔다. 이마는 댈 수 없으니, 궁여지책이었다. 클로디아가 빙그레 웃어주었다. 기회를 놓치지 않고 시빌은 코도 부볐다. 그러나.
“거기까지.”
그새 옆에 있던 데미안이 성큼성큼 다가와 시빌의 어깨를 떼 놨다. 한 사람 어깨만 붙들었는데도 두 사람을 다 떼놓을 수 있다는 게 데미안의 신기한 점이었다.
남자는 검푸른 눈동자로 시빌을 똑바로 쏘아보며 말했다.
“로드께 무례하게 굴지 마라.”
“아, 섭섭했어요, 데미안?”
시빌은 쾌활히 웃으며 데미안을 들여다봤다. 그의 이마가 약간 찡그려진 순간, 시빌은 그의 뺨에 입을 맞췄다. 쪽, 소리가 경쾌하게도 났다. 데미안의 눈이 두 배로 커졌다. 클로디아는 어머, 하고 입을 가렸다.
“제가 데미안에게 언젠가 말했잖아요. 제 빚 갚아주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한테 인생 바치려고 했다고.”
“그….”
“저는 데미안도 좋아했거든요. 비록 제가 좀 거칠게 사랑 표현을 하긴 했지만….”
[이게 무슨 갑자기 분위기 이상해지는 소리야. 그만.]
빠직, 하고 클로디아가 안고 있던 디자이어가 빛을 내더니 시빌을 튕겨냈다. “으악.” 하고 시빌이 데미안에게서 손을 뗐다.
디자이어가 불만 가득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시끄럽고 아무르나 내놔.]
“아, 드려야죠.”
킬킬 웃던 시빌이 품에서 아무르를 꺼냈다. 반짝반짝 빛나는 빨간 보석은 클로디아의 주먹만 했다.
클로디아는 아무르를 받아들고 새삼스럽게 그 보석을 내려다봤다. 그녀는 일부러 쥬버린의 심장 이후로 아무르를 돌려받겠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말하지 않아도 그가 알아서 주리라 믿었기 때문이다. 아무르가 반짝반짝 빛을 냈다.
[아무르가 맞군.]
“제가 뭐 이런 걸로 사기 치겠어요?”
[넌 그럴 놈이잖아!]
“우와…. 나 정말 디자이어에겐 그냥 나쁜 놈이 됐나 보네.”
클로디아는 소중하게 아무르를 갈무리했다. 디자이어가 투덜거리다가 문득 생각난 듯 그녀에게 쥬버린의 안부를 물었다.
[쥬버린은?]
“아, 오라버니는…. 아직 회복 중이야. 체온이 돌아오지 않고 있긴 하지만, 그건 차차 시간이 지나면 해결될 거라고 다들 말했어.”
심장을 돌려받은 쥬버린이 눈을 뜬 것은 불과 사흘 전이었다. 그는 의식을 되찾은 뒤에도 여전히 몸이 얼음처럼 차가워 고생 중이었다. 디자이어는 그것이 한 번 심장을 잃어버린 부작용이라고 말했다.
어쩔 수 없었다. 차차 회복을 기다릴 수밖에. 그래도 쥬버린은 잘 웃고 잘 먹었다. 말하는 것이 좀 더디긴 했으나 그것도 혀가 차갑기 때문이었다. 쉬이 움직이지 않는 굳어버린 혀로도 쥬버린은 우아하게 말했다. 다만 말수가 좀 적어졌다. 지금은 클로디아가 자리를 비운 대신, 영광의 홀에 앉아서 포르투를 지휘하고 있었다. 바뀐 상황이나 지금의 하늘섬에 적응하기는 조금 힘든 모양이었지만, 그녀의 자리를 대신 메울 정도는 됐다.
애초에 하늘섬을 비롯한 대륙은 쥬버린이 거의 다스리던 곳이었다. 어려울 리 없었다.
[클로디아.]
“응?”
[있잖아, 나도 자르지스에 남으려고 해.]
“…디자이어, 네가?”
[응.]
시빌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놀란 건 클로디아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품 안의 검을 내려다봤다. 디자이어는 잠시 말을 고르는 듯했다.
[하늘섬에는 이제 내가 필요 없을 것 같아. 아니…. 정확히는, 하늘섬보다는 자르지스에 내가 훨씬 더 많이 필요할 것 같아.]
“…미겔 때문이야?”
[아냐, 클로디아. 이건 그냥…. 내 마음이야.]
디자이어가 우물쭈물하며 말을 이었다.
[하늘섬은 이제 바다로 돌아올 거잖아.]
***
디자이어의 말대로였다.
클로디아가 깨어난 쥬버린을 붙들고 가장 먼저 말한 것도 그것이었다.
“오빠. 나 하늘섬을 바다로 돌려보낼 거야.”
막 깨어나 정신이 없을 법도 했지만, 쥬버린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또한 의식이 없는 동안, 자신을 잠들게 해준 디자이어의 의식을 따라 간헐적으로 클로디아의 여행을 엿봤던 모양이었다.
클로디아는 하늘에 떠 있는 포르투를 자르지스의 옆으로 돌려보낼 셈이었다. 포르투를 대신할 곳은 동력 지대였다. 그녀는 포르투의 그림자에 가려 계속 어둠만이 계속되는 동력 지대를 새로운 하늘섬으로 만들 작정이었다.
네 개의 대륙을 굽어 살피듯 존재하는 하늘섬은 필요 없었다. 미겔은 아무르의 힘은 끌어모으는 것이라고 생각해 네 개의 대륙을 견인하듯 포르투에 아무르를 심었다. 하지만 클로디아는 그저 높은 곳에 존재하기만 해도 상관없다면, 그냥 높은 탑을 만들기로 했다. 아무르를 높이 띄워놓기 위해 영원히 어둠만 계속되는 땅을 놔둘 필요는 전혀 없었다.
하늘섬의 통치력이 약해질지도 모른다, 상징성이 떨어진다고 대신들이 반대했다.
그렇다 해도 클로디아는 상관없었다. 하나의 나라가 백 개의 왕국을 통치하는 세상은 이상했다. 모두의 고통을 한 사람만이 책임지는 것은 더 이상 없어야 한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너무 많은 이들에게 시선을 보내느라고, 정작 발밑에서 고통 받는 사람들을 외면해왔다. 그렇게 생각하며 클로디아는 제 옆에 항상 있는 남자를 생각했다.
그 같은 사람이 또 생기는 건, 싫었다.
세상은 그렇게 조금씩 변해가는 것이다. 이미 생긴 불행을 어떻게 할 순 없지만, 앞으로 일어날 불행을 막으려 애쓰는 것.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세상도 모두 행복한 사람들로 가득 차지 않을까.
그리고 디자이어 또한, 그렇다면 포르투에는 자신이 더 이상 있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세계수를 키우는 건 계속할 거야. 단, 자르지스에서.]
“…저런.”
시빌이 감탄사인지 신음인지 모를 소리를 내뱉었다. 디자이어는 한숨을 쉬듯 말했다.
[정령을 탄생시키는 건 시빌의 말대로 그냥 맨땅에서 할 수도 있긴 하지만, 세계수는 땅을 정화시키는 식물이야. 저주에는 특효지. 투르에서 있던 일 기억해?]
투르에서 세계수를 심었을 때, 세계수는 자라다 말고 갑자기 클로디아 쪽으로 뻗어왔다. 그 이유는 마기를 숨기고 있던 시빌 쪽을 정화하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디자이어는 이곳에 세계수를 심기로 했다. 그리고 그 외에도 다른 이유가 있었다.
[세계수가 자라는 곳에는 숲 거인도 반드시 있지.]
그제야 클로디아도 디자이어가 세계수를 이곳에서 키우겠다고 한 다른 이유를 알아챘다. 자르지스는 지금 황폐해 보이는 회색 섬일 뿐이다. 하지만 황폐한 곳을 정원처럼 꾸미는 것에 즐거움을 느끼는 이들이 있다. 바로 숲 거인이다.
그들에게 자르지스를 내보이며 씨를 뿌리고 가꿔달라고 부탁한다면, 틀림없이 다들 반색하며 짐을 싸 들고 뛰어올 것이다. 시빌도 같은 것을 떠올렸는지 반색했다.
“세상에, 디자이어 당신 천재군요?”
[이제 알았어?]
디자이어가 툴툴댔다. 클로디아는 디자이어에게 무한한 고마움을 느끼면서도 어쩐지 디자이어를 품에서 떨어트려 놓을 수가 없었다. 조금 서운하기도 했고, 마음이 속상하기도 했다. 디자이어의 힘이 자르지스에 필요한 이유는 명확했지만, 그녀에게 디자이어는 좋은 친구였기 때문이다.
“보고 싶을 텐데….”
[나는 정령이니까, 뭐. 지금은 검의 모습이지만.]
디자이어가 잘난 척했다.
[좋은 일이 생긴다면 어쩌다 한 번씩 포르투, 아차. 네가 있는 곳에 한 번쯤은 놀러 갈 수 있지 않겠어?]
“그렇게 생각하니….”
클로디아는 눈물이 조금 글썽이는 것을 느끼고 고개를 두어 번 흔들었다. 디자이어가 잘난 척했다.
[그러니까 넌 돌아가서 매일매일 좋은 일을 만들어야 해! 될 수 있으면 아주 많이!]
“내가 매일 좋은 일이 생기면 너는 매일 놀러 올 거니?”
[당연하지!]
디자이어가 에헴, 하고 잘난 척하다가 앗, 하고 반색했다.
[하지만 헬렌에게도 놀러 갈 거니까 가끔은 못 갈 수도 있어!]
“아하하.”
헬렌은 자르지스에 당분간 포폰과 함께 남겠다고 했다. 하지만 당분간일 뿐이다. 자르지스의 복구를 도운 뒤에는, 포폰과 함께 신나게 대륙을 돌아다니겠다는 원대한 계획을 세웠다. 정령이 자신에게 준 능력도 있으니 좋은 힘이 있으면 많은 사람들에게 베풀어야 한다는 그녀다운 계획을 가진 모양이다.
지금도 클로디아의 품 안에는 헬렌이 바쁜 와중에도 만들어 준, 견과류를 꿀로 굳힌 간식이 들어 있었다. 먹으면 기분이 좋아지는 물건이었다.
[그리고 시빌도 치료해주긴 해야지.]
“우와. 절 치료할 생각이 있긴 했군요?”
시빌이 너스레를 떨었다. 디자이어는 다시 파직, 하고 시빌을 공격했다. 시빌이 “앗 따가워!” 하고 호들갑을 떨었다.
데미안의 상처는 자르지스에서 디자이어가 대부분 치료했다. 용의 저주도 사라졌으니, 이제 데미안의 상처는 시간에 맡기면 된다. 하지만 시빌은 아니었다. 그가 포르투를 습격할 때 입은 상처는 아직도 채 낫지 않은 채였다.
[아무래도 클로디아가 없으니 좀 오래 걸리긴 하겠지만.]
“백 년 넘게 살았다면서요. 치료할 시간도 충분하겠군요.”
데미안이 보기 드물게 끼어들었다. 아무래도 시빌에게 가진 원한이 아직도 사라지지 않은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클로디아는 환하게 웃었다.
“그래, 좋아. 디자이어. 그렇게 해.”
[고마워, 클로디아.]
“…매일매일 좋은 일을 만들 수 있도록 노력할 테니까, 놀러 와야 돼. 알았지?”
[…그래.]
“약속이야.”
[너도 약속이야. 매일매일 행복해야 해.]
클로디아가 콩, 하고 검의 표면을 가볍게 두들겼다. 디자이어는 거기에 답하듯이 아르릉, 하고 검신을 울렸다.
작별이었다.
***
유니콘을 타는 것도 마지막이었다. 자르지스의 바닷가 한쪽에서, 클로디아가 가져온 솜사탕을 뜯어 먹고 있던 유니콘이 두 사람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반색했다.
- 이제 끝이야?
“응, 이번 한 번만 데려다주면 돼.”
성기사들은 화구에서 날리는 재 때문에 모두 자르지스에서 철수한 뒤였다. 하지만 이제 그들은 배를 타고 자르지스로 올 수 있다. 그녀는 유니콘의 갈기를 쓸어주며 “잘 부탁해….” 하고 타일렀다. 유니콘이 흥흥거리며 데미안을 노려봤다.
- 나 남자는 싫은데. 쟤는 걸어오라고 하면 안 돼?
클로디아는 작게 웃으며 유니콘에게 코를 부볐다.
“미안해. 부탁해. 응?”
그러나 둘 사이에 오가는 대화를 알아차렸는지 데미안이 먼저 나섰다.
“저는 괜찮습니다. 로드께서 먼저 가셔도…. 경호 문제도 없고요.”
- 당연하지! 나를 뭘로 보고!
유니콘이 푸르릉거리며 잘난 척했다. 클로디아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유니콘의 목덜미를 살살 어루만지며 속삭였다.
“마지막이잖니, 부탁해. 응?”
- 싫은데….
짐짓 싫은 듯 중얼거리는 날개 달린 말에게, 클로디아는 눈치를 보다가 조심스레 속삭였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야. 안 되겠니?”
그 말이 끝나자마자 유니콘은 흐흥, 하고 코를 벌름거리며 눈을 번쩍 떴다.
- 뭐야, 그런 거야? 진작 말하지!
“…그….”
- 너무한다, 너! 이거 내가 되게 좋아하는 건데! 말을 했어야지! 갑자기 첫사랑 냄새가 나!
킁킁, 유니콘이 번잡스럽게 코를 벌름거리며 냄새를 맡았다.
첫, 첫 뭐라고?
클로디아는 몇 번이며 되묻고 싶었으나 그럴 수 없었다. 옆에서 데미안이 고요하게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그 말을 듣기라도 하는 날에는 정말이지, 창피해서 바다로 떨어져 버릴 것만 같았다.
그래서 클로디아는 귀 끝까지 새빨개진 얼굴이 돼서 간신히 “…이 애가 괜찮대요. 타세요.” 하고 속삭이듯 말했다.
유니콘은 계속해서 킁킁대며 좋아했다. 데미안은 무릎을 꿇고 손을 깍지껴 클로디아가 자신의 손을 밟고 유니콘에 올라탈 수 있도록 했다. 탈 사람이 두 사람인지라 유니콘이 몸을 낮췄다 일어나는 것은 어려웠기 때문이다.
클로디아는 조심스럽게 탄 후에, 몸을 긴장시키고 데미안이 타길 기다렸다. 말 타는 것이 익숙한 남자는 거리낌 없이 그녀가 있는데도 편안하게 말 위에 훌쩍 올라탔다.
- 우와 대박! 냄새 더 진해졌어! 이거 완전 좋아! 나 앞으로도 너네 태우고 다니면 안 되니?
유니콘이 호들갑을 떨었다. 클로디아는 얼굴이 홧홧 불타는 것을 느끼며 갈기를 가볍게 잡아당겼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고 빨리 출발해주지 않을래?”
- 쳇, 알았어. 간다!
몸이 붕 떠올랐다. 안장이 없었기에 그녀는 유니콘의 목덜미를 엉겁결에 끌어안으려고 했으나, 데미안이 빨랐다. 데미안은 그녀의 몸을 가볍게 잡아당겨 제 몸에 밀착시켰다. 스스럼이라고는 없었다. 바람이 불고, 머리카락이 나부꼈다.
클로디아는 어느새 데미안의 몸에 편히 기대어 있었다. 무지개가 발밑에 펼쳐졌고, 회색 섬이 그 아래로 빠르게 멀어졌다. 그녀는 손을 흔들지는 않았다. 여행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행은 아직 제대로 시작하지도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