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장. 종장 (24/30)

4장. 종장



 

아나니아시빌리의 방은 광활하고 공허했다.

그가 맨 처음 용의 화구 속에 자신의 방을 만들 때는, 그곳에서 백 년이 넘게 살아낼 생각은 분명 없었다. 그곳은 어둡고 더웠기 때문이다.

자르지스의 민둥산 안에는 불을 부르는 검은 물이 있었다. 용들이 그곳에 둥지를 튼 이유 중의 하나일 것이다. 한 번 지른 불이 몇백 년이나 탈 수 있는 곳은 잘 없었기에.

검은 물은 가끔 따닥, 따닥 하는 소리를 냈을 뿐, 대부분은 소리 없이 불을 태웠다. 시빌은 잠을 청할 때마다 들리는 그 소리가 제 귓가에서 사라지기만을 빌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시빌은 자신을 의심하고 있었다. 대륙에서의 기억 때문이다. 그는 대륙에서 떠돌며 매일 밤 쉬이 잠들지 못했다. 그것은 대륙에서 그가 겪은 미움과 증오 때문이라고 생각했으나…. 자르지스로 돌아와 자신의 화구에 눕는 순간. 그는 어쩌면 백 년이 넘게 들은 그 소리가 없어 잠들지 못한 것은 아닌가 싶었다.

시빌은 자신의 머리를 만졌다.

그곳에는 새까만 뿔이 돋아 있었다. 클로디아의 앞에서는 필사적으로 인간과 같은 모습을 유지해왔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도 희한하게 그 감촉이 낯설었다.

시빌은 팔짱을 끼고 어두운 화구의 벽에 기댔다. 언제나와 같이 뜨겁게 달궈져 있는 화구의 중심은, 그 벽도 말할 수 없이 뜨거웠으나 시빌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익숙한 온도였다. 그래서 더 이상했다.

백 년을 넘게 지내온 화구의 온도도 이렇게나 익숙한데, 왜 태어날 때부터 제게 달려 있던 뿔은 낯설게 느껴질까.

이유는 뻔했다. 그 어여쁘고 선한 공주님 때문이다.

어제 오후 클로디아는 훌쩍 자르지스를 나갔다. 날개 달린 말을 타고 화구를 벗어나는 그 모습을 시빌 또한 멀리서 지켜봤다. 그녀가 왜, 어째서 그랬는지는 모른다. 일행들은 일제히 그녀가 떠난 후 흩어졌다.

헬렌, 그 착해빠진 요리사는 자르지스의 소년과 함께 마을로 내려갔다.

데미안은…. 자리를 지키고 있다. 시빌은 내내 자신이 거북하게 느꼈던 포르투의 기사를 생각하고 픽 웃었다. 데미안이 이곳에 남은 이유는 부상 말고도 뻔했다. 시빌은 미소를 머금은 채로 딱, 하고 손가락을 튕겼다. 순식간에 몸이 당겨지는 느낌이 났다.

다음 순간, 시빌은 민둥산의 한 동굴 앞에 서 있었다.

얼핏 보기에는 아무것도 없는 바위더미 같지만, 바위들이 쌓이고 쌓여 간신히 사람 몇 명이 들어갈 만한 공간이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는….

시빌이 익히 아는 기사 하나가 가부좌를 틀고 앉아있었다. 그의 무릎에 놓인 검이 반짝반짝, 빛을 냈다.

[…시빌.]

“안녕, 디자이어. 오랜만은 아니지요?”

[지금 클로디아는 없어. 지금 나를 네가 쥐어봐야 많이 아플 거야.]

시빌은 나 참, 하고 혀를 찼다. 팔짱 낀 자신을 그제야 기사가 올려다보았다. 그의 얼굴은 핏기가 온통 빠져 하얀색이었다. 시빌은 싱긋 웃었다.

“많이 아팠어요? 나 때문에 피를 많이 흘린 것 같네.”

“무슨 일이지.”

“미안하다고는 안 할게요. 어쩔 수 없었으니까.”

데미안은 미동도 하지 않고 그를 바라봤다. 시빌은 양손을 흔들어 보이며 어깨를 으쓱했다.

“아무 짓 안 해요.”

[그, 그걸 어떻게 알아?]

“이런, 디자이어. 날 그렇게 못 믿어요? 서운하다. 명색이 몇 달씩이나 같이 여행한 동료인데.”

[…이런 철면피…!]

그런 소리를 듣는 건 아무렇지 않다. 예상도 했다. 애초에 몇 달씩 여행하기 전부터 정체를 숨긴 건 시빌 쪽이다. 시빌은 피식 웃으며 데미안의 옆을 턱으로 가리켰다.

“나 거기 좀 앉아도 돼요?”

“아직 용건을 말하지 않았는데.”

“해치러 온 건 아녜요. 당신이 남아 있는데, 나라고 뭐 대단히 뭔가를 할 것 같아요?”

데미안의 검푸른 눈이 가늘어졌다.

시빌은 그가 왜 자르지스에, 정확히는 이 민둥산 앞에 남아 있는지 아주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클로디아는 유니콘이 모처럼 데미안을 데려다주겠다고 선심을 썼는데도, 데미안에게 이 화구 앞에 남아달라고 부탁했다. 시빌 때문이다.

헬렌과 포폰이 마을로 내려간 후, 만약 클로디아가 데미안과 함께 유니콘을 타고 포르투로 돌아가 버리면 남겨진 시빌은 어떻게 생각할까?

시빌이 자초지종을 다 알고 있으리라는 보장은 클로디아에게 없었다.

그녀는 시빌이 떠난 제 뒷모습을 보고, 스스로 또다시 자르지스에 버려졌다고 생각할까 봐 두려워했다.

그래서 클로디아는 데미안의 손을 잡고 그가 남아주기를 부탁했다.

‘부탁해요, 수르 알파. 시빌이 외롭지 않게 해 줘요.’

데미안은 자신이 모시며 경애하는 공주님이, 언제나 선하다 못해 순진하다고 생각해왔다. 최근의 여행을 지나오며 그 순진함이 조금은 바랬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아무래도 영 자신의 착각이었던 모양이다.

제 옆에서 천연덕스럽게 엉덩이를 비비고 앉는 이 마법사, 아니 마왕이 외로움을 탈 거라고 생각하다니. 천만의 말씀이었다.

“…앉으라고 하지 않았다.”

“거 참 딱딱하시네. 뭐, 그럼 우리 싸울까요? 제가 다시 일어나서 당신하고 한판 뜰까?”

시빌은 짐짓 장난스럽게 말했다. 데미안은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대꾸하지 않기로 했다.

여기서 더 대꾸하면 시빌은 더 신이 나서 떠들 테니까. 그런 작자였다. 애초에 그가 데미안을 죽일 수 있었지만 살려둔 것도, 클로디아가 정말로 화가 나거나 절망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클로디아는 참 다정해요. 그렇지요?”

“….”

“구태여 당신을 남겨놓지 않아도, 저는 클로디아가 절 버리고 떠날 거라고 생각해 본 적도 없는데 말이야.”

시빌은 픽 웃으며 데미안 옆에 앉아 그가 가부좌를 틀고 바라보던 쪽에 시선을 던졌다. 민둥산의 동쪽은 깎아지른 것처럼 돌들이 가득했는데, 그 지대가 높아 바다 쪽이 꽤 잘 보였다.

빽빽한 정글과 그 앞의 해안선, 그리고 새까만 바다와 수평선이 모호한 밤하늘.

밤하늘 저편은 조금씩 새파랗게 밝아오고 있었는데, 그 끝에서 파도가 간간이 치는 것이 보였다. 아직 어두웠기에 보이는 것은 많지 않았으나, 시빌이 오랫동안 보아 온 풍경이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데미안의 물음이 던져진 것은 한참 후였다.

“거 참. 저는 계속 존댓말 하는 중인데, 제가 마왕이라고 계속 반말하시네.”

시빌이 시답잖은 소리를 하며 데미안의 어깨를 건드리려 했으나, 그 손을 튕겨낸 것은 디자이어였다. 파직, 소리가 났고, 동시에 디자이어는 시빌에게 경고했다.

[시빌. 데미안을 건드리지 마.]

“이런, 섭섭하네요, 디자이어. 우리는 꽤 죽이 잘 맞았다고 생각하는데.”

시빌이 너스레를 떨었지만 디자이어는 답하지 않았다. 그렇지. 모든 관계는 변하는 거지.

시빌은 입맛을 다시며 웃곤 데미안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거 알아요? 클로디아의 첫 입맞춤 상대가 나라는 거요.”

“…그런가.”

“어라. 안 놀라요?”

데미안은 시빌 쪽은 쳐다보지도 않은 채 바다 쪽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시빌은 심술 맞게 웃었다.

“거짓말인 거 알고 있나 보네.”

“….”

“사실은 그럴 뻔했다는 게 맞겠죠. 내가 이마를 가져다 대도 거부하지 않았으니까. 클로디아는 마음 약하고, 눈물이 많은 사람이에요. 애초에 나를 죽일 수 있는 사람이었다면 나에게 그렇게 묻지 않았을 거예요.”

시빌은 클로디아가 제게 조심스럽게 물어왔던 때를 떠올렸다. 검을 들고, 바들바들 떨면서도 그러지 않으려 애쓰며 자신을 쳐다보던 푸른 눈.

“‘당신이 마왕 아니에요?’라니. 세상에. 어느 용사님이 마왕에게 그렇게 묻는단 말이에요?”

정말로 웃기다는 듯 시빌은 배를 잡고 한참이나 웃었다. 얼마나 몸부림치며 웃었는지 바닥을 모두 쓸 정도였다.

그동안 데미안은 미동도 없이 앉아 있었다. 시빌은 흐흐, 흐 하고 웃다가 고개를 바닥에 처박았다. 그의 이마에 돋은 뿔에 모래 먼지가 잔뜩 묻었다.

시빌의 웃음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하늘섬에 있는 커다란 도서관의 이야기를 들은 적 있어요. 대륙에 있는 모든 책이 거기에 있다죠.”

“….”

“클로디아는 다른 방법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나 봐요. 그렇죠? 구태여 당신을 남겨놓고, 하늘섬까지 간 걸 보면 말이에요.”

시빌은 너무 웃어서 눈물까지 나는 듯, 눈가를 비비며 일어나 앉았다. 디자이어가 답답한 듯 뭐라고 말하려다가 이내 다시 잠잠해졌다. 시빌은 흥흥 웃으며 데미안 쪽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또 파직, 소리가 났다. 일부러 건드린 것을 아는지, 데미안이 한숨을 쉬었다.

“디자이어를 도발하지 마라.”

“…방법은 없어요.”

[아냐, 클로디아가 성기사들을 데리고 올 거야,]

결국 참을 수 없었는지 디자이어가 끼어들었다. 그 익숙한 이름에 시빌은 무릎을 모으고 앉아 웃었다.

“성기사? 아하…. 스완 세이비어?”

[….]

“’성스러운 길’이라도 쓰려나 보죠. 그래요. 나도 그 신기한 길을 직접 겪기 전에는 그런 게 있는지도 몰랐죠. 이걸 사용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해보기도 했답니다. 클로디아가 이제야 그 생각을 해냈다는 걸 칭찬해야 할까요?”

시빌은 노골적으로 비아냥대고 있었다. 그 또한 스완 세이비어가 마고뜨를 대하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아트릭스에서 스완은 마고뜨를 향해 검을 빼 들었더랬다.

그 불쌍한 마족 아이를 생각하며 시빌은 얼굴을 감쌌다. 둘만 남았을 때, 용케 자신을 알아본 마고뜨는 시빌에게 제발 자르지스로 돌아가 사람들을 구해달라고 졸랐다.

‘친구가 불에 휩싸였어요. 우리의 왕이시여, 어째서 여기서 떠돌고 계신가요?’

그 물음에 시빌은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증오에 휩싸여 그 섬을 떠났다고, 복수를 하고 싶었다고 그 어린애에게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심지어 그 복수조차 제대로 해내지 못했음에야.

“그 잘난 성기사들이 우리를 대륙에 참 잘도 데려다주겠어요. 그렇죠?”

빈정대는 시빌의 말에 결국 데미안이 그쪽을 바라봤다. 그 고요한 검푸른 눈을 보며 시빌은 어쩐지 시비가 걸고 싶어졌다. 왜일까.

그는 클로디아가 떠난 뒤, 명백히 동요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맙소사. 클로디아가 데미안을 남겨두고 간 것은 정말이지 훌륭한 처사였다. 클로디아가 자신을 버리지 않을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날개 달린 말에 올라 무지개를 밟고 사라지는 모습을 보며 시빌은 지독한 외로움에 휩싸였던 것이다.

굳이 데미안의 옆에 온 것도 그래서였다. 데미안이 여기 있음에, 클로디아가 돌아올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싶어서.

하지만 정작 데미안의 모습을 보자 시빌은 자신이 우스꽝스럽게 느껴졌다. 데미안은 클로디아가 떠나는 것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동요라고는 조금도 없이 이곳에서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저건 클로디아가 반드시 돌아올 거라고 믿는, 아니, 클로디아가 돌아오지 않을 거란 생각 따위는 하지 않는 자의 눈이었다.

시빌의 마음속에서 들불처럼 질투가 솟아올랐다.

“…넌 로드를 모른다.”

그래서 그 말에, 시빌은 기가 막히다는 듯 짜증을 내뱉었다.

“참나. 기껏 할 말이 그 말이에요? 그래요. 당신이 클로디아와 나보다 더 오래 알고 있었겠죠. 하지만 당신이 그녀를 잘 안다면 어디 차였겠어요?”

“로드는 모두를 구할 수 있는 분이시다.”

“어떻게요?”

“어떻게든.”

두 남자는 이제 서로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 모습은 사뭇 대조적이었다. 새카맣고 긴 머리카락을 새벽바람에 나부끼고 있는 기사와, 붉고 거칠게 엉킨 머리카락을 헤집고 있는 검은 피부의 마왕. 시빌은 그와 자신의 시선 사이에 얽힌 복잡한 감정이 모두 흐트러지는 느낌이었다. 기분이 아주 나빴다.

자신은 이렇게 엉망진창인데, 그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그게 마치 클로디아에 대한 마음의 깊이 같아 질투가 났다.

시빌은 그제야 알아차렸다. 자신이 생각보다 클로디아를 더 좋아하고 있었음을. 그리고…. 이 남자 또한, 자신보다 몇 배는 더….

[저것 봐!]

그때였다. 디자이어가 소리 질렀다.

시빌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내려 디자이어를 바라봤다. 그러나 데미안의 시선은 디자이어가 아닌 바다 저편으로 향했다. 디자이어가 반짝반짝 빛을 내며 바다 저편을 비췄다. 그 앞에는 희미하지만 이쪽으로 뻗어오는 일곱 빛깔의 빛무리가 보였다.

시빌은 그게 어떤 것인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유니콘이었다. 그리고 거기에는 아마…. 클로디아가 타고 있을 것이다.

데미안은 시빌을 쳐다보지도 않고 말했다.

“…세계를 구하는 건 바보 아니면 멍청이라는 말을 했죠, 디자이어. 당신이 틀렸습니다.”

[…그래.]

데미안이 희미하게 웃었다. 데미안의 웃음과 함께, 동이 텄다. 무지개가 뻗어오며 새까만 바다도 그 빛으로 물드는 듯 보였다.

아니, 아니었다.

시빌은 눈을 의심했다. 새까맣던 바다는 점점 희고 투명해지고 있었다. 햇빛을 받아서 반사되는 빛이 아니었다. 이건….

시빌은 급히 데미안을 돌아봤다.

어느새 뺨까지 뒤덮고 있던 흉하고 새까만 고름이 조금씩 사라지고 있었다. 데미안의 눈은 평온했다.

저주가 사라지고 있었다.



 

***



 

“정말 이걸로 될까?”

- 상관없어. 던져넣어.

차가운 바람이 쉴 새 없이 불어 클로디아의 뺨을 때렸다. 좋게 말해서 뺨을 때리는 거지, 가시채찍으로 얻어맞는 것 같았다. 자르지스 상공의 거센 바람은, 바람이 세다 정도가 아니었다. 자르지스를 떠날 때도 그랬고 돌아온 지금도 그렇다.

자르지스를 감싼 용의 저주는 상공에서의 침입자도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쉴 새 없이 으르렁거렸다. 검은 바다가 밑에서 철썩거렸다. 새카만 바닷물 사이에 치는 파도 덕분에 점점이 흰 포말이 비산하는 것이 눈에 보였다.

클로디아는 유니콘의 목덜미를 감싸 안고 심호흡한 뒤, 제 손에 있는 것을 떨어트렸다. 조그맣고 새까만 도마뱀의 꼬리.

정말 이런 걸로, 화를 풀까?

꼬리는 그녀의 손에서 까마득한 저 아래로 추락했다. 퐁당, 소리도 나지 않았다. 바람 소리 때문에 클로디아는 기절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아마 노바라가 머리카락을 땋아주지 않았다면 올 때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머리카락에 뺨을 거세게 얻어맞았을 것이다.

역시 스완 경과 같이 오는 게 좋았을까…. 하고 클로디아는 생각했다.

유니콘의 말을 듣자마자 그녀는 급하게 교황을 만나지도 않고 유니콘을 타고 자르지스로 향한 차였다. 아마 켈록스 2세는 자신을 물 먹였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한시가 급했다. 자신을 기다릴 이들이 있었기에.

철썩, 철썩, 쏴아아아….

검푸른 하늘도, 새까만 바다도 한참이나 변화가 없었다. 그녀가 유니콘을 타고 오는 동안 부쩍 밝아진 하늘이 점점 그 빛을 드러낸 정도였다.

“역시 안 되는 거 아냐?”

클로디아가 중얼거릴 때, 유니콘이 푸르릉, 소리를 내며 하늘에서 발을 한 번 굴렀다. 그 바람에 그녀는 유니콘의 등에서 굴러떨어졌다.

“아악!”

클로디아는 기겁하며 비명을 질렀다. 유니콘의 등 바로 아래는 그저 바다뿐이었기 때문이다. 엄청난 추락감이 그녀를 덮쳤다. 바람이 거세게 윙윙, 하고 클로디아의 귓전을 때렸다. 눈앞에는 순식간에 새까만 바다의 표면이 다가왔다. 빠진다, 하고 생각했을 때였다.

둥실, 부드러운 감촉이 그녀를 감쌌다.

동시에 추락감도 그녀를 떠났다. 거센 물벼락도, 충격도, 물속으로 빠지는 느낌도 오지 않았다. 클로디아는 어리둥절해졌다가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그녀는 물 위에 떠 있었다.

정확히는 새카만 바닷물이 그녀의 주변을 보호하듯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어….”

물 위를 걷는다는 신이 이런 느낌이었을까?

클로디아는 어릴 적 읽었던 전설이 담긴 책의 한 구절을 떠올리며 주변을 둘러봤다. 여전히 까만 바닷물이 철썩이고 있었고, 그녀는 바다 위에 서 있었다. 소용돌이치는 바닷물은 마치 촉수처럼 움직였다.

그녀가 손을 뻗자 그 촉수는 마치 의지가 있는 듯 뒤로 물러났다. 그 움직임이 익숙하다고 느끼던 도중, 그녀는 자신이 디자이어의 배에 타고 자르지스로 진입하던 당시를 떠올렸다. 바닷물은 그때도 촉수처럼 움직여 뱃전을 두들겼다. 탕, 탕탕.

하지만 그때와는 노골적으로 다른 움직임이었다. 그때의 바닷물에 적의가 가득했다면, 지금은 그녀를 마치 보호하려는 것처럼 굴었다.

아니, 피하려는 건가?

그녀가 고개를 갸웃했을 때, 유니콘이 천천히 허공에서 내려왔다. 클로디아는 방금 전의 신기한 감정도 잊고 유니콘에게 볼을 부풀리며 화를 냈다.

“너 정말! 나를 떨어트리면 어떻게 하니?”

- 네가 안 빠질 줄 알고 있었어.

“뭐? 무슨 소리야?”

- 저걸 보렴.

유니콘이 콧등으로 그녀의 뺨을 밀었다. 그제야 클로디아는 소용돌이치던 바닷물의 색이 천천히 옅어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해가 뜨면서 허공에 뜬 바닷물은 햇빛을 받아 점점 투명해졌다.

아니….

클로디아는 눈을 찡그렸다. 아니었다. 햇빛에 비쳐서가 아니었다.

새카만 바닷물이, 점점 본래의 색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처음은 느렸으나 변화가 이루어진 다음에는 신속했다. 클로디아는 눈을 부릅뜬 채 그 광경을 봤다. 바닷물은 그녀의 앞에 뻗은 작은 촉수 가닥부터 시작해 점점 새파란 색으로 바뀌고 있었다.

새까만 색에서 군청색으로, 다시 새파란 색에서 옅은 하늘색으로….

아트릭스의 앞바다가 가지고 있는 아름다운 푸른색으로 바뀌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클로디아는 황급히 주변을 둘러봤다. 그녀를 중심으로, 바닷물의 색이 옅어지고 있었다.

해가 뜨기 시작하며 하늘도 새하얗게 밝아오고 있었다. 그 가운데 바다의 색이 차차 바뀌는 광경은 클로디아를 압도했다. 거칠게 불던 뜨거운 바람이 점점 부드러워지고, 그녀의 뺨을 때리던 파도조차도 잠잠해졌다.

누구든 침몰시킬 것처럼 파괴적으로 움직이는 물결은 더 이상 없었다. 그 뒤로 자르지스 섬이 뜨는 햇빛을 받아 푸르게 빛나고 있었다.

장관이었다.

용의 화구 꼭대기에 잔뜩 끼어 있던 먹구름이 물러가고 있었다. 화구에서 흩날리는 재들은 아직도 선명했으나, 그것들이 만들던 회색빛은 점점 옅어지고 있었다.

그녀의 발밑에 자리한 바다는 어느새 투명해져, 그 안에서 움직이는 물고기들이 보일 정도였다. 저주에 물들었던 물고기들이 새카매진 지느러미를 퍼덕이는 것이 다 보였다. 저주에 휩싸여 연약해졌던 것들이 본래의 빛을 찾아가고 있었다. 변화는 점점 더 신속해졌다.

이제 클로디아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의심 따위는 이제 치워버려도 된다.

왜일까.

‘로드께서는 틀림없이,’

이런 순간 생각나는 건 어김없이.

‘모두를 구하실 수 있을 겁니다.’

그 남자의 말이었다.

해가 떴다. 작열하는 태양빛 아래 그 모습을 드러낸 자르지스의 바다는 한없이 푸르렀다. 그녀는 저 검푸른 색과 같은 눈동자를 알고 있었다. 네 개의 대륙을 돌아 자르지스까지 감싸고, 까마득한 암흑으로 떨어지는 바닷물과 같은 눈.

“…돌아가야겠다.”

- 너 안 우니?

옆에 선 유니콘이 입맛을 다셨다. 클로디아는 픽 웃으며 유니콘의 등을 팡팡 두들겼다.

“얘는, 좋은 일인데 왜 우니!”

좋은 날이었다.

울 수는 없었다. 웃는 얼굴로 그를 만날 것이다.



 

***



 

마력의 흐름이 대번에 가벼워졌다. 시빌은 자신의 두 손을 내려다봤다. 자르지스에서는 그가 일찍이 단 한 번도 다뤄본 적 없는 강력한 힘이 제 손에 흐르고 있었다. 이건 자르지스를 나가서, 그가 대륙에서나 느껴봤던 흐름이었다.

그는 고개를 돌려 자신이 발을 담근 바다를 바라봤다. 믿을 수 없는 일이었기에 이미 몇 번이나 바다를 바라보고, 그마저도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어 해변까지 달려 내려온 참이었다. 푹푹 발이 파묻히는 모래 바닥을 걸어, 신발을 벗을 틈도 없이 그대로 물속에 들어갔다.

단 한 번도 자르지스에서 꿈꿔본 적 없는 일이었다. 사람들이 바다 가까이에 가기라도 하면 바다는 언제나 그 날카로운 촉수를 들어 사람들을 독으로 할퀴었기 때문이다.

기가 막혀서 시빌은 발을 들었다. 찰랑거리는 바닷물이 그의 발을 따라 둥그런 궤적으로 흘러내렸다. 쏴아아, 쏴아…. 평화롭게 굽이치는 파도에 배신감마저 느껴질 지경이었다.

그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천천히 바다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무릎이 잠기고, 허벅지가 잠겼다. 허리까지 물 안에 들어가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축축하게 온몸이 젖는 것도 상관없었다.

남자는 바닷물 안에서 제 손을 다시 들여다봤다. 거무스름한 자신의 손이 물 아래서 그대로 들여다보였다. 그는 손을 모아 바닷물을 떴다. 투명한 바닷물이 손 안에서 찰랑거렸다.

시빌은 그 바닷물을 그대로 모아 삼켰다. 입안에 짠물이 가득 찼다. 물이 맑은 지역은 바닷물이 훨씬 더 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자르지스의 바닷물은 숨 막히도록 투명했으며 지독히도 짰다.

시빌은 아하하, 하고 웃었다. 주르륵, 채 삼키지 못한 소금물이 입가를 타고 턱으로 흘러내렸다.

“너무 짜….”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짠맛이 입안에 맴돌았다. 어찌나 짠지 얼굴이 절로 찌푸려지고 눈물마저 나올 만한 맛이었다.

시빌은 그대로 젖은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눈물이 났다. 바닷물이 너무 짜서였다. 짜서 기뻤고, 허탈하고 슬펐다. 공허함과 충만감이 그 순간 시빌의 마음속에 공존했다. 자신은 대체 무엇을 위해 그렇게 파괴적으로 굴었나 싶었고, 동시에 지금이야말로 모두가 기뻐할 거라는 충만감이 가득 차올랐다.

어느덧 가슴까지 찰랑거리는 바닷물이 시빌의 마음을 대변했다.

안타까움, 슬픔, 그리고 허탈함.

경애와 기쁨, 그리고 굴종하고 싶게까지 만드는 미련.

그 모든 마음을 가지고 시빌은 뒤돌아 자르지스의 해변을 바라봤다. 거기에는 그에게 눈물을 흘리게 만든 사람이 서 있었다.

쭉 곧은 자세와 큰 키, 조금 그을린 얼굴과 바닷바람에 나부끼는 짧은 머리카락. 등에 짊어진 검이 반짝반짝 빛났다. 어깨는 다부졌으며 눈동자는 푸른 바다색이었다. 옆에 선 날개 달린 말이 치대는 것을, 슬쩍 옆의 기사에게로 밀어낸 그녀가 자신을 향해 짓는 미소가 눈이 부셔 시빌은 다시 울고 말았다.

클로디아는 조심스럽게 모래를 밟고 해변으로 내려왔다. 오전의 햇살이 그녀의 금발에 반짝반짝 빛나며 부딪쳤다. 시빌이 물에서 나오지 않으면 클로디아는 그대로 물 안으로 들어올 기세였다. 시빌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허겁지겁 물 밖으로 나가려 했다. 차마 그녀가 물 안으로 들어와 젖어버리게 놔둘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느라 힘이 빠진 시빌은 클로디아가 그 발을 물에 적시기 전에 물 밖으로 나가는 데 실패했고, 결국 일그러진 얼굴로 그녀의 부츠가 반쯤 잠겼을 때쯤 그 앞에 무릎 꿇고 말았다.

첨벙, 소리가 크게 났다.

“시빌.”

“…미안해요.”

젖은 얼굴로 시빌은 엉엉 울었다. 기가 막혔다.

마법사라고 내내 잘난 척한 것은 자신인데, 자르지스에 진짜 마법을 가져온 것은 그녀였기 때문이다. 클로디아는 난처한 얼굴로 무릎 꿇은 시빌 앞에 주저앉아 눈을 맞췄다.

다정하고 따뜻한 눈이 그에게로 향했다.

“잘은 모르지만, 아무래도 제가 해낼 수 있을 것 같죠?”

“…무슨 소리예요….”

당신 지금 다 해냈잖아.

시빌은 기가 막혀서 엉망인 얼굴로 그녀를 올려다봤다. 가무잡잡한 뺨에 투명한 눈물이 주룩주룩 흘렀다. 클로디아는 손을 내밀어 엄지손가락으로 그 뺨을 부드럽게 닦아냈다. 바닷물과 섞여 어디서부터 눈물이고 어디서부터 바닷물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상관없었다.

클로디아는 싱긋 웃었다.

“오랜 싸움 끝에 어찌어찌 당신 심장을 찌르고 아무르를 가지고 돌아가 세계를 구한 공주님이 되는 건 해내지 못했지만요.”

“…미안, 미안해요.”

자신이 했던 말을 그대로 읊는 클로디아의 목소리에 시빌은 땅이 꺼져라 서럽게 울며 품을 뒤졌다.

품 안에 귀하게 넣어놓았던 쥬버린의 심장이 있었다. 클로디아는 그 펄떡거리는 심장을 보고 조금 질색했지만, 조심스럽게 그것을 받아들었다. 뒤에 업힌 디자이어가 [쥬버린! 쥬버린!] 하며 정신없이 떠들었다.

클로디아는 어느새 다가온 데미안에게 그 심장을 넘기며 약간 웃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이렇게나 예쁘고 곱게 쥬버린의 심장을 간직하고 있었던 시빌의 마음을 알 것 같아서였다.

“시빌. 나와 함께 포르투로 가요.”

“클로디아.”

“저에게 왕관을 쓰고 행복하게 웃으며 결혼할 수 있겠냐고 물었지요?”

그랬다. 땅요정과 유니콘, 요정과 숲 거인, 그리고 시빌 자신을 잊을 수 있겠냐며 그는 건방지게도 클로디아에게 물었다. 클로디아는 부드럽게 웃으며 시빌에게 속삭였다.

“저는 왕관을 쓸 거예요. 하지만 그건 세계 최고의 신부가 되기 위해서는 아니랍니다.”

“….”

“제가 머리에 관을 쓴다면, 그건 당신을 잊지 않기 위해서가 될 테니까요.”

그녀는 왕이 되기로 했다.

자르지스와 땅요정, 유니콘과 요정, 숲 거인, 그리고 시빌을 잊지 않기 위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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