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장. 공주의 귀환 (23/30)

3장. 공주의 귀환



 

켈록스 2세는 의심이 많은 사람이다. 젊은 여인이 교황의 자리에 앉아 홀로 교국을 다스리려면 몸이 몇 개라도 모자라며 머리는 남들의 몇 배로 좋아야 한다. 켈록스 2세는 머리에 한해서는 필요조건을 모두 갖추었으나, 몸은 그럴 수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대부분의 사람들과 같은 방식으로 모자란 몸을 충당했다. 신뢰할 만한 인간들로 주변을 채우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켈록스 2세가 가장 신뢰하는 사람은 성기사단장이었다. 스완 세이비어. 켈록스 2세는 그를 성기사단장으로 뽑은 것에 관해 추호의 의심도 한 적 없었다. 그는 신실했으며 교황을 거스르지 않았다. 단 한 번도.

스완 세이비어에 관해 교황의 평가가 높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최근의 켈록스 2세는 스완 세이비어에 관해 자신이 가졌던 생각들이 좀 잘못된 것은 아닌가, 혹은 너무 섣부른 판단을 내렷던 것은 아닌가 의심하고 있었다. 무려 10여 년을 봐왔던 인물인데도. 최근 스완 세이비어의 행동은 그녀가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방향으로 엇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예를 들면, 교국 복귀 명령을 거역하는 것이 그렇다.

성기사들은 대륙의 전역에서 신민들을 위해 봉사한다. 하지만 그 어떤 일이 있을지라도 교황의 호출에는 즉각 응답해야 했다. 사람의 생사가 걸려 있지 않은 한, 성기사들은 임무 중이라 할지라도 교국의 부름에는 바로 돌아와야 했다. 그러나 스완 세이비어는 최근 켈록스 2세의 호출을 세 번이나 거역했다.

세 번이나.

‘빌어먹을. 가뜩이나 머리가 복잡해 죽겠는데 그 자식은 왜 그러는 거야?’

열 살 이후로 남에게는 절대로 해 본 적 없는 언사였지만, 켈록스 2세의 머릿속은 대체로 ‘그 새끼’ ‘그 자식’ ‘멍청한 놈들’ 같은 수식어 위주로 돌아간다.

그녀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커다란 유리창 너머로 햇빛이 쨍하게도 비쳤다. 동시에 술 냄새가 진하게 풍겼다. 다름 아닌 자신의 머리카락에서 나는 냄새였다. 켈록스 2세는 지난 밤 자신이 다 마신 술잔을 스스로 머리카락 위에 들이부으며 잔을 비운 것을 증명했던 사실을 기억해내고 신음했다.

‘노친네들이란, 기어코 젊은 것들에게 술을 먹이고 나서야 만족하지.’

어젯밤 켈록스 2세가 참석한 자리는, 대륙의 평화를 위해 각 왕국의 수장들이 모여 앞으로의 대책을 도모하는 자리였다. 하늘섬은 석 달 전 아무르를 마왕에게 빼앗겼다. 하늘섬의 왕자는 심장을 잃고 가사 상태에 빠졌고, 공주가 마왕 토벌을 위해 떠났다. 하지만 그 공주의 토벌은 기약이 없었다. 수르와 단둘이 떠난 클로디아 공주에 관해 자르지스 진입은커녕 수르와 도망치지나 않으면 다행이라는 소문이 떠돌았다. 그 수르가 과거 클로디아 테 포르투와 약혼했던 데미안 알파이기 때문에 더욱 더 포르투의 폐망은 확실시됐다.

가사 상태에 빠지기 직전 쥬버린 왕자가 클로디아 공주에게 포르투를 정리하고 결혼하라고 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더욱 더.

추후 포르투가 부재할 것이 확실해진 상황에서 4개의 대륙 위에 세워진 백 개의 왕국은 눈치 게임에 들어갔다. 누가 대륙의 패자가 될 것인가. 그러나 그 타이밍에 정리를 위해 나선 것이 교국이었다. 당시 멜라토르에 머물고 있던 켈록스 2세는 클로디아 테 포르투를 자신이 만났다고 증언하며 대륙의 안정을 꾀했다.

교황이 가장 신뢰하는 성기사 스완 세이비어가 클로디아 공주와 동행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며 교국은 급물살을 탔다. 사라질지도 모르는 포르투 대신 교국을 안전장치로 이용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말이 좋아 안전장치고 대륙의 평화다.

‘평화는 개뿔. 돈 달라고 재롱잔치 하는 자리지.’

어제 모인 자리도 그랬다. 네 개의 대륙에 백 개의 왕국이 있다는 말인즉슨, 특별히 강대한 나라가 많지 않다는 뜻도 됐다. 몇몇 나라를 제외하고는 그 왕국들의 규모가 고만고만했다. 크다고 일컬어지는 왕국들도 자신들이 온전히 대륙을 지배할 수 없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교국을 이용하기로 했다. 포르투가 사라진 자리에 교국을 집어넣고, 자신들 좋을 대로 이용해먹겠다는 것이다.

어찌 보면 교국이 그들에게는 포르투보다 더 좋았다. 포르투는 왕국들이 세금을 내고 섬겨야 하는 지배자였지만 교국은 그저 종교를 매개로 모인 작은 왕국일 뿐이다. 그런 이들을 교섭자로 내세운 다음 자신들은 하던 자리에서 잘 해먹겠다는 게 강대국들의 심산이었다. 포르투 기사단의 역할은 성기사들에게 맡기고, 교황은 왕국들 사이의 다툼을 진정시키면 된다는 게 어제 모임의 주제였다.

한마디로, 중립을 표방하면서 왕국들 사이에서 기득권이나 지켜주고 헌금이나 받아먹으라는 것이다. 켈록스 2세 또한 바라마지 않던 것이었다.

그러나….

‘이딴 재롱잔치를 평생 해야 되다니.’

도저히 못해먹겠다는 게 켈록스 2세의 최근 감상이었다. 힘없는 교국이 포르투 대신 왕국들을 콘트롤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왕국들이 포르투의 지배자에게 하는 것처럼 교국에게도 공손하리라고는 바라지도 않았다. 하지만 왕국의 대표자라는 외교관들이, 혹은 왕자와 왕들이 젊은 여인인 교황을 앉혀 놓고 밤새도록 술이나 먹이면서 같잖은 농담 따먹기나 할 줄은 몰랐다. 켈록스 2세는 어제 새벽까지 속으로 중얼거렸던 욕이 얼마나 되나 손가락으로 세 보고는 현기증을 느꼈다. 숙취일지도 모르지만 그건 지금 켈록스 2세에게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다.

그녀는 침대에 누워 스완 세이비어를 생각했다. 어젯밤 들려온 농담 중에는 스완 세이비어에 관한 농담도 있었다. 대부분은 ‘그 완고한 스완 세이비어 경에게 드디어 사춘기가 온 것인가’ 같은 종류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간 스완 세이비어는 교국에 절대 충성하는 자로 유명했다. 하지만 최근의 그는 교황으로서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행동뿐이었다.

처음 시작은 그가 클로디아 테 포르투의 일행에서 약 일주일도 안 되어 벗어난 것이었다. 클로디아 공주는 아트릭스라는 항구에서 마고뜨라는 마족 어린애를 구출했다. 구출이라는 데도 어폐가 있지만, 일단은 그렇다고 하니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클로디아 공주가 그다음 취한 행동은, 그 어린애를 스완 세이비어에게 맡겨 포르투로 보낸 것이었다.

스완 세이비어는 맨 처음 그 결정에 납득하지 못했으나, 클로디아 공주의 지시가 함의한 정치적 이해관계에는 납득했다. 교황 또한 이 행동에는 환호했다. 클로디아 공주는 스완 세이비어에게 포르투의 안정을 위해 마고뜨를 데리고 하늘섬에 올라가 달라고 부탁했다. 교황을 포함해 교국의 인원들은 단 한 번도 하늘섬에 올라간 적이 없었다. 그러니 클로디아 공주의 부탁은 즉, 그 콧대 높은 하늘섬에서 드디어 교국을 정치적 국가로 인정하겠다는 뜻이었다.

다만 스완 세이비어가 포르투로 올라가는 일에서 교국은 여러 가지 난항을 겪었는데, 첫 번째로 물리적인 문제였다. 포르투에는 성기사가 없었기에 ‘성스러운 길’의 사용이 불가능했다. 그렇기에 스완 세이비어는 육로로 하늘섬으로 향했다. 중간중간 ‘성스러운 길’을 사용할 수도 있었으나, 대부분의 성기사가 스완 경과 함께 있는 마족의 아이가 ‘성스러운 길’을 사용한다는 데에 심리적 저항을 느꼈다.

두 번째. 첫 번째 문제에서 말한 이유로 교국에서는 마고뜨라는 그 어린애를 스완 세이비어가 다른 이에게 맡기고 포르투로 먼저 올라가기 바랐다. 하지만 스완 세이비어는 그것을 거부했다. 그가 교황의 명령을 거부한 것은 그것이 처음이었는데, 고작 ‘마고뜨가 다칠 수 있다’는 이유였다. 교국에서 막대한 재정과 인력을 사용하겠다는데도 스완 세이비어는 고집을 부렸다.

성기사들조차 ‘성스러운 길’을 마고뜨에게 내어주지 않는 판국에, 대체 누굴 믿겠냐는 것이었다.

세 번째. 그는 며칠 전 포르투에 도착했다. 포르투에서는 당장 스완 세이비어를 이용해 클로디아 공주에 관한 정치적 선전을 대대적으로 치렀다. ‘성기사와 마족마저 감화시킬 만한 행보’라나.

교국으로서는 물 먹은 셈이었다. 켈록스 2세는 노발대발해 스완 세이비어에게 성명문을 발표할 것을 요구했다. 교국은 클로디아 공주를 선의로 도왔을 뿐이며 감화된 것이 아니라 대륙의 평화를 위해 행동한 것이라고.

그러나 스완 세이비어는 교황의 요구를 거부했다. 당분간 일의 추이를 지켜보겠다는 것이다. 켈록스 2세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경은 포르투 기사단인가? 아니면 성기사단인가?”라고 통신 도마뱀을 통해 물으니 무표정하게 “저는 언제나 신의 가장 신실한 도구입니다”라고 답하는 스완 세이비어를 보니 기가 막혔다.

스완 세이비어는 그렇게 며칠째 마족 어린애를 데리고 포르투에 머무르고 있었다. 들어보니 포르투 황성에서 클로디아 테 포르투가 어릴 적 쓰던 방을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그 이유가 기가 막혔다. “어린 여자애의 키 높이에 모든 가구가 맞춰져 있어, 마고뜨가 생활하기에 불편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다른 정치적 의도는 없습니다”란다. 그 얘기를 들은 켈록스 2세는 마치 식사를 하다 목이 막힌 것 같은 답답함을 느꼈다. 신의 가장 신실한 도구라더니 마족 어린애 나부랭이의 신실한 종이 되어 있는 꼴이었다.

하다못해 그 어린애를 끌고 어제의 모임에라도 얼굴을 비추라고 요구했다. 그 정도는 할 수 있을 줄 알았다. 대륙의 평화가 어쩌고 하는 모임은, 다름 아닌 포르투 바로 근처에서 이뤄졌다. 반쯤은 포르투를 놀리려는 목적으로, 그리고 나머지 반은 스완 세이비어를 불러오기 위해서였다.

스완 세이비어는 그 어린애를 끼고돌기는 했지만, 클로디아의 자르지스 행에 관해서는 여전히 ‘큰 가능성이 없다’고 말했다. 클로디아 테 포르투는 지나치게 인정이 많았으며, 스완 세이비어가 추측한 바로는 자르지스의 상황은 대륙 사람들이 생각한 것과 다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그런 이야기를 대륙의 왕국들 앞에서 조금만 언급해줘도 왕국들은 크게 만족하며 교국에 헌금할 것이었다. 마족 어린애를 보여주면 자르지스의 상황에 관한 증명도 될 것이었다. 하지만 스완 세이비어는 나타나지 않았다. 켈록스 2세는 슬슬 스완 세이비어가 제게 반항하는 것인지, 아니면 성기사를 그만두고 싶은 것인지 고민해보기로 했다. 진지하게.

상황은 그리 단순하지 않았다. 교황은 그가 어깨에 앉히고 온 마족 어린애 때문에 벌어진 수많은 상황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교국만 해도 마족 어린애를 싸고도는 그를 경질해야 한다는 강경파, 마족마저 감화시킨 교국의 교리부터 선전해야 한다는 기회주의자파로 나뉘어 싸우고 있었다.

그마저도 교황이 어제의 모임부터 진행하고 이야기하자며 억눌러놨지만, 막상 대륙의 지도자들 모임이 그 정도로 저열하다는 것을 막 절감한 터다. 도무지 되는 일이 없는 기분이었다.

교황은 그 모든 걸 다 내팽개치고 싶었다. 하지만 내팽개치려면 일단 기력이 있어야 한다. 그녀의 목구멍에서는 술 냄새가 계속해서 올라왔고, 기운은 한 줌도 없었다.

‘일단…. 한숨 더 자자.’

자고 일어나서 어제 안 온 스완 경을 드잡이질하든, 아니면 헌금이나 더 달라고 제게 술 먹인 자들을 만나 읍소하든 하기로 했다. 교황은 얼굴을 간지럽히던 머리카락을 모아 베개 위로 올렸다. 숙취 때문에 일어나기가 무지하게 힘들었지만 꾸역꾸역 일어나 커튼도 쳤다. 술김에 그냥 입고 잤던 성복도 벗어던졌다. 조금이라도 더 편하게 자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녀의 바람은 이뤄지지 않았다.

“성하. 하늘섬에서 급한 전갈이 왔습니다. 스완 세이비어 경입니다.”

되는 일이 없는 기분이 아니라, 그냥 되는 일이 없었다.



 

***



 

그보다 조금 이른 시각, 스완 세이비어는 포르투 왕성의 한 방에 앉아 있었다. 어지간한 사람들보다 머리 하나 정도는 더 큰 스완 경이 앉아 있는 방의 가구들은 하필이면 작은 여자애에게 맞춘 것이라 그 모양새가 유난히 우스웠다.

예를 들면, 스완 경은 지금 그의 손바닥 두 개면 족히 다 가릴 만한 의자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아 있었는데 - 어린애를 위해 만든 의자라 그 다리도 당연히 짧았고 - 스완 경은 거의 웅크린 것 같은 모습이었다. 장대한 기골을 가진 기사가 그런 의자 위에 가만히 쪼그려 앉아 있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까르륵.”

그의 앞에서 작은 그릇을 늘어놓고 있는 여자아이 때문이었다. 마고뜨. 스완 경과 함께 포르투에 입성한 마족 여자아이였다. 머리에 달린 뿔을 남들의 눈에 띄지 않게 하기 위해 모자를 눌러 쓰긴 했지만, 그녀가 마족이라는 것을 포르투에서 모르는 이가 없었다. 이유야 뻔했다. 클로디아 테 포르투의 이름을 대고 하늘섬에 도착한 성기사와 마족 여자아이는 순식간에 대륙 전역에 유명해졌다.

“마고뜨.”

“갸륵?”

스완 세이비어는 여자아이의 이름을 불렀다. 여자애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답했다. 비록 자르지스와 이곳의 마력장이 달라 제대로 말을 할 순 없었으나, 그녀가 스완 경의 말을 못 알아듣고 있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스완 경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스완 경은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한숨을 쉬었다.

널 어떻게 해야 할까, 하는 말을.

여자아이는 성의 시녀들이 소꿉놀이를 하라고 가져다준 그릇을 가지고 이리저리 늘어놓는 데 열중하고 있었다. 본래는 클로디아 공주의 장난감이었다던가. 하늘섬의 여자애들이라면 저 그릇에 음식을 담거나 요리를 하는 흉내를 내며 놀 테지만, 마고뜨는 그 그릇을 색깔과 크기별로 늘어놓는 것을 좋아했다.

‘아마 소꿉놀이라는 것 자체를 모르니 그럴 테지.’

그뿐만 아니었다. 가끔은 그릇들을 집어 던져 깼다. 깨고 난 다음 그 조각을 도로 맞추는 것이다. 위험해서 스완 경이 몇 번이나 그만두게 하자, 그다음에는 흥미를 잃었는지 방 안을 엉망으로 만들었다. 공주의 방이라는 것을 증명하듯 방은 아주 크고 여러 곳으로 이어져 있었는데, 클로디아 공주가 예전에 입던 옷들이 있는 옷방을 엉망으로 만든 꼴을 보고 노바라라는 시녀는 기절을 할 뻔했다.

그래서 스완 경은 매번 마고뜨의 옆에 붙어 있었다. 마고뜨는 다른 이들의 말을 잘 듣지 않았으나, 스완 경의 말만은 몇 번 눈을 치켜떠 화를 내면서도 결국 듣곤 했다. 남들은 그것을 보고 마족도 감화시킨 스완 세이비어라며 감탄했지만, 사실은 약 한 달이 되지 않는 기간 동안 동행하면서 그나마 얻은 수확에 불과했다.

하지만 교황조차 자신을 그렇게 이용하려고 할 줄은 몰랐다. 스완 세이비어는 어제 있었던 켈록스 2세의 호출을 몇 번이나 무시했다. 순전히 마고뜨 때문이었다.

최근 교황이 자신에게 흰눈을 뜨고 있다는 것은 스완도 알고 있었다. 다 자신의 불복종 때문이다. 교황은 자신 때문에 교국에서 난처한 상황에 처해 있었으나 그는 알면서도 교황을 무시했다. ‘구원자’ 의 호칭을 가진 기사는 언제나 교황에게 복종해왔기에 이는 엄청난 변화이자 교황에게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그래서 이번만은 교황의 호출에 응하려고 했다.

하늘섬의 추락이 명약관화한 상황이다. 교국의 성기사로서 대륙의 평화를 유지하려는 교황의 움직임에 응하지 않는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다.

하지만 교황은 마고뜨에게 목줄을 채워 오라고 명령했다. 스완 세이비어는 그 명령을 받고서 이틀 내내 갈등했고, 결국 불복종했다.

기가 막힌 일이다.

‘이깟 마족 어린애가 뭐라고.’

스완 경은 그렇게 생각하며 그릇이 나란히 늘어서 있는 책상을 바라봤다. 누런 머리카락이 정신없이 헝클어져 있는 가운데, 뾰족하게 돋은 뿔과 귀 뒤의 누런 털이 함께 내려다보였다. 그 귀의 털만은, 짐승과 닮았다. 맨 처음 스완은 그 모습을 봤을 때 칼을 빼어들었다. 당장 저 흉한 것을 죽여 지상에서 사라지게 만들고 싶었으니까. 자신도 그랬을진대, 저 목에 목줄을 채워 오라는 교황의 명령도 이상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르륵.”

마고뜨가 작은 소리를 내며 유심히 그릇을 바라봤다. 아마 작은 그릇과 큰 그릇 사이의 간격이 불규칙한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가만히 그릇들을 바라보다가 손가락을 움직여 같은 간격이 되도록 세밀하게 그릇의 배치를 바꿨다. 그러더니 그릇들을 규칙적으로 배열한 후에, 이쪽을 보며 씩 웃었다.

“갸륵?”

마치 잘했지? 라고 묻는 듯했다. 아니, 아마 맞을 것이다.

스완은 얼굴을 감싸 쥐고 마른세수를 했다. 마고뜨가 만약 정말로 짐승이라면 이런 식으로 행동하지는 않는다. 교황이 무슨 생각으로 마고뜨를 그렇게 데려오라고 했는지 스완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마고뜨의 목에 목줄을 채울 수 없었다. 자신은 마고뜨를 감화시킨 적이 없기 때문이다.

고작 한 달도 되지 않는 시간 동안 스완 세이비어는 마고뜨와 함께했다. 맨 처음 아트릭스에서 마고뜨와 남겨진 후 포르투로 출발했을 때, 자신이 그 후에 겪을 일을 알았더라면 스완 경은 아마 마고뜨를 맡지 않았을 것이다. 성기사의 갑옷을 입지 않은 채 머리에 뿔이 돋은 아이를 안고 하는 여행은 결코 녹록지 않았다. ‘그게 무슨 이상한 분장이냐’며 호기심을 보내는 축은 차라리 나았다. 돌을 던지거나 기겁하는 몸짓, 가끔은 기예단이라도 보는 듯한 눈초리. 스완 세이비어가 겪어본 적 없는 홀대였다.

같은 성기사 동료들조차 그에게 ‘성스러운 길’을 내어주지 않았다. ‘당장 그 품에 안은 마족 아이를 내팽개치지 않으면 마왕에게 홀린 것으로 생각하고 결투를 신청하겠다’는 성기사들도 부지기수였다. 그 지난한 여행 기간 동안, 스완 경은 처음에는 이 모든 게 신이 주신 시련이겠거니 생각했다. 조금 후에는 제 품에 안긴 작은 몸뚱이가 지겨워지기 시작했고, 가끔은 짜증스럽게까지 느껴졌다. 스완 세이비어의 성정을 아는 이들이라면 놀랄 만한 변화였다.

하지만 그 여행이 끝날 무렵에 스완 세이비어에게 찾아든 것은 평정심이었다. 그는 교황 앞에서든, 아니면 하늘섬 사람들 앞에서든 보란 듯 마고뜨를 싸고돌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아이를 내어주지 않을 것임을 보여주려는 것이었다.

스완 경 정도 되는 이가 아이를 싸고도니 함부로 나서는 이들도 없었다. 하지만 클로디아 테 포르투의 이름을 댔는데도 이쪽을 흰눈으로 보는 사람들은 여전히 있었다. 그가 없는 곳에서, 마고뜨의 뿔을 비틀어 보다가 아이의 손톱에 할퀴는 사람이 주기적으로 나왔다. 여기는 포르투 왕성인데도 말이다. 교황 또한 그의 의지를 알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아이에게 목줄을 채워 오라는 소리를 한다.

그렇기에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마고뜨의 눈앞에서 작은 의자에 몸을 구겨 넣은 후 지켜봐 주는 것뿐이었다.

‘그렇지만….’

스완은 한숨을 쉬었다. 앞날이 명확하지 않아서였다.

맨 처음 그와 마고뜨를 환영해주었던 하늘섬의 대신들은 그 환영이 거짓말인 것처럼 사라져서 보이지도 않았다. 매일매일이 눈코 뜰 새 없이 바빴기 때문이다. 하늘섬의 지배력이 약해져서다. 클로디아 테 포르투가 아무리 마왕 토벌을 선언했다고는 하나, 쥬버린 테 포르투가 가사 상태인 것은 여전했다. 마왕에게 습격당했던 피해는 잘 복구되지 않았다. 포르투의 주민들은 하나둘씩 하늘섬을 떠나고 있었다. 하늘섬이 곧 추락한다는 소문이 곳곳에 퍼져 있었고, 클로디아 공주의 마왕 토벌에 고무되어 있던 분위기는 점점 식어갔다. 당장 공주가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데 섬의 주민들이 그녀에게만 희망을 걸고 일상생활을 영위하라는 것은 무리였다.

스완 세이비어가 왔음에도 마찬가지였다. 마왕 토벌은커녕 마족 아이를 데리고 돌아온 스완 세이비어를 보고 몇몇은 비아냥댔다. 클로디아 공주가 마왕을 무찌르러 간 게 아니라, 마왕에게 시집가는 게 아니냐는 이야기였다. 그렇지 않고서야 포르투를 이렇게 파괴한 마왕의 일족을 성기사로 하여금 보호케 한다는 것이 가당키나 한가.

“마고뜨.”

“아르륵.”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마고뜨가 고개를 들었다. 선명한 보라색 눈동자가 자신을 향해 의문을 표시한다. 처음에는 이 눈동자가 징그럽게만 느껴졌지만 지금은 이 눈을 보는 것만으로 작은 아이가 화가 났는지, 아니면 슬픈지, 혹은 궁금한지 구별할 수 있게 됐다. 스완 세이비어는 무표정하게 마고뜨를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잘 알아듣지 못해도 일단 들어두거라.”

아마 오늘쯤 노한 교황이 다시 그를 부를 것이며, 이번에야말로 스완은 그 호출에 응해야 할 것이다. 교황의 말에 불복종하는 성기사는, 그 사유가 사람의 목숨이 걸려 있는 정도의 중대함이 아니라면 제명 처분을 받거나 혹은 그에 준하는 징벌을 받았다. 여태까지 교황은 스완 경이 그간 교국에 세운 공을 봐서 봐준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이번에 자신을 부른 교황이 또다시 마고뜨에 관해 불합리한 명령을 내린다면 어떨까? 교황은 대부분 교국을 위해 행동했고, 스완도 지금까지는 그런 교황의 행동에 아무 의문을 갖지 않았다. 그러나 만약 그녀가 그리한다면…. 스완은 도무지 명령을 들을 자신이 없었다.

게다가 그렇게 자신이 버텨서 좋은 결과가 나온다면 상관없다. 클로디아 테 포르투가 마왕을 토벌하고 돌아와 스완 경의 행동을 칭찬하고, 교국의 명예를 세워준다면 스완 세이비어의 고집도 신의 이름 하에 신념을 지킨 것으로 칭송받을 것이다.

다만 클로디아 공주가 실패한다면, 스완 세이비어의 신념은 그저 마족에게 홀린 자의 반발이 될 것이다. 징벌은 물론이고 교단 제명도 각오해야 한다. 가문의 이름을 더럽히는 건 물론이다. 구원자라는 칭호는 남의 이름이 될 것이다.

“오늘부터 클로디아 공주가 부디 마왕 토벌에 성공하기를, 신에게 기도해주지 않겠니?”

“…아륵?”

“사람의 일이라는 게 말이다, 생각보다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구나.”

마고뜨는 분홍색 그릇 하나를 양손에 쥐고 고개를 갸웃했다. 스완의 말을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어서일 것이다. 하지만 스완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너는 마왕을 찾으러 그 섬을 나왔고, 그의 무사 건강을 빌고 있을지도 모르겠다만…. 만약 그렇게 된다면 너도 나도 살아남기가 힘들 것이다.”

마고뜨가 인간의 말을 제대로 할 수 없어 다행이었다. 이 작은 아이가 아트릭스에서 했던 말들을 스완은 이미 들은 바였다.

천벌을 받을 인간 놈들, 우리의 왕을 찾으러 왔다, 같은 것들.

하지만 마고뜨는 지금 포르투에 있다. 만약 클로디아 공주가 마왕 토벌에 실패하고 마왕만이 살아남는다면 교국은 성공적으로 포르투의 역할을 계승하게 될 것이며 자신은 그사이에 교단에서 제명당하고 이 작은 아이를 빼앗길 것이다.

가슴이 답답해져왔다. 스완 세이비어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마고뜨의 뺨을 건드렸다. 자신을 경계하던 아이가 뺨 끝에 붙은 먼지를 떼어낸 굵은 손가락을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손가락 끝으로 옮겨간 먼지가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살에 반짝반짝 빛나는 광경은 묘하게 평화로웠다.

“…신이 계신다면 부디 내 바람을 들어주시면 좋으련만.”

마고뜨가 눈을 깜박이며 이쪽을 바라봤다. 기사는 한숨을 토하듯 웃었다. 당장 답이 나오길 바라지는 않는다. 다만 아트릭스에서 헤어졌던 클로디아 공주가 명확한 답을 가져오기를 바랐다.

클로디아를 스완 경이 만난 것은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녀는 되도록이면 모두가 원하는 답을 얻길 바라는 사람이었다. 실제로도 그렇게 만들었다. 스완 세이비어는 그녀가 아트릭스에서 자신을 부드럽게 쫓아내면서도 자신을 정치적 선전 도구로 쓰고, 데미안 알파를 진정시켰으며 나아가 포르투에 소식을 보냈고 교국마저 입을 다물게 했듯이 마왕 토벌에서도 그럴 수 있길 바랐다.

어떤 희생도 치르지 않고, 모든 대륙의 사람들이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을 수 있기를.

“…어렵겠지만.”

막 스완 세이비어가 입을 닫았을 때였다. 어디선가 휭, 하고 큰 바람이 불었다. 창문은 분명 닫혀 있을 텐데? 스완 경이 눈을 찌푸리며 햇볕이 들어오는 창 쪽으로 눈을 돌렸을 때였다.

와장창, 하고 창문이 깨지는 소리가 났다.

그 뒤에 일어난 일들은 한마디로 표현할 수 없었지만, 정리하자면 대략 짧게는 요약할 수 있었다.

신은 스완 세이비어의 바람을 들어주었다. 그것도 아주 즉각적이고 화끈한 방식으로.



 

***



 

하늘섬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은 사방 어디를 둘러봐도 푸른 하늘과 구름들을 볼 수 있었고, 그래서 애초에 하늘 위를 잘 쳐다보지 않았다. 하늘섬이 추락할 거라는 공공연한 이야기들 때문에 모두들 우울하게 땅만 쳐다보고 다니는 요즘에는 더 그랬다.

그래서 하늘을 달리는 말이 발견된 것은 그 말이 포르투 왕성의 코앞까지 근접한 다음이었다.

가장 먼저 그 말을 발견한 것은 포르투 왕성의 정원사였다.

마왕의 습격으로 엉망이 된 정원은 최근 거의 복구를 마쳐가고 있었고, 그는 커다란 정원석 배치를 막 마친 참이었다. 무거운 돌을 내려놓고 “휴!” 하고 땀을 닦으며 무심코 하늘을 바라보던 정원사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늘에 무지개가 떠 있었기 때문이다.

“세상에, 무지개네….”

무지개는 무엇을 막론하고 좋은 징조다. 좋은 일이 있으려나, 하고 웃으려던 정원사는 그다음 순간 무지개 끝이 이상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러니까, 무지개가 점점 자라고 있었다. 그것도 포르투 왕성 쪽을 향해.

“…저게 뭐야?”

그리고 곧 정원사는 그 무지개가 자라는 지점에 뭔가가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무지개는 무시무시한 속도로 이쪽을 향해 오고 있었고… 그 끝에 있는 물건은 정원사가 그걸 알아보려 노력하지 않아도 되도록 알아서 커지고 있었다.

저거, 저대로라면 여기에 추락할 텐데…?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정원사는 비명을 질렀다.

“으악! 말이다! 도망쳐!”

“…유니콘이에요!!”

맹세코 정원사는 그렇게 비명 지르는 순간, 제게 친절한 대꾸가 돌아올 거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말 위의 기수는 다급하고도 우아하게 그의 말을 정정해주었다. 그리고 하늘을 달리고 있던 날개 달린 말 – 유니콘 - 은 정원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의 머리 위를 지나쳐갔다. 그만큼 엄청난 속도로 달리고 있었다.

정원사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재빨리 뒤를 돌아봤다.

“…공주님?”

와장창!!

정원사의 말에 대답이라도 하듯, 유니콘은 포르투 내성의 유리창을 깨고 처박히듯이 추락했다. 정원사는 아득한 기분이 됐다. 제가 본 날개 달린 말 때문도, 포르투 내성에 닿은 무지개 때문도 아니었다. 유니콘이 내려앉으며 안긴 충격 때문에, 포르투 내성에 간신히 매달려 있던 용사왕 미겔의 돌조각이 끼익, 하며 기울어졌기 때문이다.

“아, 안….”

우드득, 쿵.

정원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거대한 돌조각이 정원으로 추락했다. 그 아래에는 정원사가 심혈을 기울여 꾸며놓은 장미 울타리가 있었다. 그는 울고 싶은 기분이 됐다.



 

***



 

아무르와 디자이어에게 보호받던 때와 지금의 포르투는 아주 많이 달랐다. 포르투 내성을 누군가가 다시 습격한다면 이번에는 막을 사람이 없었고, 그래서 포르투 내성에는 꽤 많은 순찰 인원이 배정돼 있었다.

내성의 유리창과 가구, 성벽까지 부서지는 그 엄청난 소리에 가장 먼저 달려온 것도 포르투 기사단이었다. 하필 소리가 난 곳은 성기사 스완 세이비어가 마족의 어린애와 묵고 있는, 클로디아 공주의 방이었고 그들은 필사적으로 검을 빼 들고 뛰었다.

그리고 막 현장에 도착한 그들이 본 것은, 부서진 유리창 조각들을 밟고 선 날개 달린 말과 꾀죄죄하고 수상한 어떤 여자였다. 그리고 그 앞에 마족 아이를 끌어안고 황망하게 선 스완 세이비어의 모습도 있었다.

‘아무리 아이를 데리고 있다지만, 침입자 앞에서 저렇게 무방비하다니!’

내심 성기사의 존재에 못마땅해하던 포르투 기사단의 십인장, 호건 경은 그 모습을 보고 기가 막히면서도 어떤 우월감에 휩싸였다. 데미안 알파가 없어 포르투 기사단도 그에게는 한 수 접어주고 있었지만, 이럴 때일수록 빈틈없이 구는 모습을 보여줘야 했다.

호건 경은 검을 빼 들고 호기롭게 외쳤다.

“감히 하늘섬의 가장 영광된 곳에 침입한 자 누구냐! 정체를 밝혀라!”

“어머나. 호건 경. 오랜만이에요.”

호건 경은 혼란에 휩싸였다. 봉두난발을 한데다가 팔다리를 품위 없이 드러낸 거지꼴의 여자가 제 이름을 친한 척 부르고 있었다. 호건 경은 눈을 부릅떴다.

뒤쪽에 선 포르투 기사들 두어 명은 반대로 이마를 찡그리며 눈에 힘을 주었다.

‘어디서…. 많이 본….’

키가 크고 쭉 곧은 팔다리. 저 체형은 확실히 익숙하기는 했지만, 호건 경은 저런 사람이 기억에 없었다. 혹시 예전에 헤어진 여자라도 되나? 호건 경의 얼굴을 본 여자가 아이고, 하더니 머리를 거칠게 헤집었다. 옆에 선 말이 푸르릉, 콧김을 내뿜더니 여자의 얼굴을 부드럽게 핥아주었다.

“미안해요, 내가 하늘을 날아오느라 얼굴이 좀 지저분한 데다가 뺨이 얼어서….”

그녀의 목소리도 익숙했다.

얼마나 익숙하냐면, 호건 경이 근 십 년은 들어왔던 인물의 목소리인데…. 호건 경이 동공에 지진을 일으키는 동안, 옆에 선 스완 세이비어가 한숨을 쉬며 부연했다.

“클로디아 공주님이십니다.”

와장창! 그 소리를 듣자마자 호건 경과 포르투 기사들은 갑옷이 부서져라 무릎을 꿇었다.

“공주 전하를 뵙습니다!”

클로디아가 아하하, 웃었다.

“아휴, 제 꼴이 좀 못 볼꼴이긴 하죠. 뭐라구? 얘! 내가 이래봬도 대륙에서 제일 예쁘다는 소리를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내내 들어온 사람이거든!?”

앞의 말은 호건 경에게, 뒤의 말은 날개 달린 말에게 하는 말이었다. 말은 다시 흥흥 비웃는 소리를 냈다. 클로디아는 미소 지으며 말의 목덜미를 툭툭 두들겼다.

“고마워. 너 좋아하는 걸 말해주면 성의 마구간지기에게 부탁할게. 뭐라구? 내 옆에 있겠다구?”

“…공주님.”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알 수 없어서 무릎을 꿇고도 눈을 희번덕거리는 호건 경 대신, 스완 세이비어가 한숨 쉬듯 그녀를 불렀다. 클로디아는 그제야 아, 하고 빙그레 웃어 보였다.

“미안해요. 호건 경. 나 잠깐 돌아왔어요.”

그때, 뒤늦게 뛰어온 이들이 문 앞에 도달했다. 모두들 내성이 부서지는 소리를 듣고 온 자들이었다. 그중에는 공주의 방이 부서진 것을 알고 기함해 뛰어온 시녀 노바라도 있었다. 과연 클로디아를 어릴 때부터 모신 짬밥이 남다르긴 한지, 그녀는 클로디아를 보자마자 비명처럼 소리 질렀다.

“공주니임!!”

“어머나, 노바라!”

클로디아의 얼굴이 환해졌다. 공주는 긴 팔을 벌려 노바라를 끌어안았다. 노바라가 다시 새된 비명을 질렀다.

“냄새!!”



 

***



 

약 3개월 만에 공주가 홀로 돌아왔다는 소식에 온 포르투의 중요 인물들이 다 뛰쳐나왔다. 클로디아는 자신이 어릴 적 쓰던 조그만 방에 사람들이 가득 찬 것을 둘러보며 어색한 기분이 됐다.

“그 영광된 걸음 앞에 용사왕의 축복 있을지니. 공주님, 즉시 포르투 전체에 공주님의 귀환을 알리고….”

“아냐. 그러지 말아요. 지금 제 용무는 따로 있으니까요. 아직 귀환한 것도 아니고.”

“…예?”

그녀의 앞에 무릎 꿇은 내무대신이 말을 잘리고 당황했다. 클로디아는 손을 내저은 다음 외무대신 쪽을 바라봤다. 고작 석 달 동안 자리를 비웠을 뿐인데 폭삭 늙어 보이는 그녀를 보고 클로디아는 미안한 마음이 됐다. 그동안 소식이라고는 스완 세이비어 하나만 달랑 보내놓고 제대로 연통 한 번 안 했으니 외무대신이 힘들었을 법도 했다.

하지만 그녀의 고생은 끝나지 않았다.

정확히는 지금부터 시작이었다. 클로디아는 그 방에서 대신 몇 명과 스완 세이비어, 호건 경을 제외하고는 나머지를 다 내보내 달라고 말했다. 다만 노바라가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으로 그녀의 팔을 붙드는 게 문제였다.

클로디아는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노바라. 몸은 나중에 씻어도 돼.”

“공주님, 제가 옆에서 수건으로 닦게라도 해 주세요.”

“노바라.”

세 번째로 수건을 빨아온 시녀의 표정은 우중충했다. 노바라의 눈길이 클로디아의 머리카락부터 거친 뺨, 긁힌 상처가 울긋불긋 드러난 팔다리와 손끝을 향했다. 결국 노바라는 가운 한 장을 가져와 그녀의 몸을 감싸는 것으로 합의를 봤다. 그렇잖아도 맨살을 드러낸 적 없던 공주가 팔다리가 다 드러난 옷을 입고 침대에 앉아 있는 것에 모두가 민망해하던 참이었다.

클로디아는 분홍색 비단 가운을 대강 둘둘 감아 걸쳐 입고 자리에 앉았다.

“제가 돌아온 건 실패해서는 아니에요. 지금 모든 걸 설명하기에는 시간이 없고, 저는 도움을 요청하러 왔어요.”

“무슨 도움입니까! 이 포르투 기사단….”

“호건 경. 제 말 끝까지 들어요.”

시간이 없다고 말했는데, 그녀의 말을 잘라먹고 들어오는 포르투 기사단의 십인장에게 클로디아는 눈총을 보냈다. 호건 경은 움찔하며 입을 닫았다. 그러나 그녀의 말을 잘라먹는 것은 눈치 없는 호건 경만은 아니었다.

“수르 알파는….”

“그것도 설명할 테니 제 말부터 들으세요, 내무대신.”

“…예.”

클로디아는 두 남자를 바라보며 이마를 문질렀다. 다들 궁금한 게 많긴 할 것이다. 갑작스럽게 공주가 유니콘을 타고 온 것도 황당한데, 정문도 아닌 유리창을 깨고 들어온 데다가 수르 알파는 온데간데없다.

게다가 자르지스에서 바로 출발해 그녀의 옷은 여전히 반팔에 반바지였다. 부츠를 신고 있다고는 해도 모두들 그녀를 민망해 쳐다보지도 못하는 광경을 보고 클로디아는 자신이 너무 많은 걸 무시하고 온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시간이 없다. 그녀는 입을 열었다.

“수르 알파는 지금 부상을 입었습니다.”

“!!”

“하지만 디자이어가 그 옆을 지키고 있어요. 위독하진 않습니다. 다만 저와 함께 귀환할 사정도 되지 않아 제가 홀로 왔을 뿐이에요.”

“그렇지만 호위는….”

“호건 경. 나가요.”

자신의 말에 끼어들지 말라고 분명 경고했는데, 두 번이나 듣지 않는 사람은 이 자리에 필요 없었다. 클로디아는 엄격하게 호건 경을 노려봤다.

호건 경은 당황하다가, 곧 자신이 무슨 무례를 저질렀는지 납득하고 어깨를 늘어트렸다. 그리고는 곧장 방문 밖으로 나갔다. 그사이 대신들은 입을 벌리고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클로디아는 곧장 스완 세이비어에게로 고개를 돌리고 손을 내밀었다. 스완 경이 금세 그녀의 뜻을 알아차리고 마고뜨의 등을 두들겼다. 그러나 마고뜨는 클로디아에게 안기기는커녕, 그녀를 경계하며 스완의 목을 끌어안았다. 스완이 난처한 기색을 띠었으나 클로디아는 빙그레 웃었다.

“제 말을 들어주시느라 고생이 많으셨어요, 스완 경.”

“약속을 지켜야 했으니까요.”

“포르투는 스완 경이 지킨 신의에 관해 우정을 약속할 겁니다. 고마워요. 마고뜨를 보니 당신이 약속 이상으로 잘 해주었다는 것을 알겠어요.”

“천만에요. 모두 공주님의 지혜 덕입니다.”

“덕담은 그만하도록 하고, 본론을 말씀드릴게요.”

클로디아는 여전히 스완 경의 목에 매달려 있는 마고뜨 쪽을 보고 미소 지은 후 말을 이었다.

“교국의 성기사들이 성스러운 길로 사람들을 피난시킨 사례가 있나요?”

“갑자기…. 애초에 ‘성스러운 길’은 신께서 불행한 사람들을 구제하기 위해 성기사들에게 주신 힘입니다. 그 덕에 교국이 만들어질 수 있었지요.”

스완 세이비어는 갑작스러운 물음에도 차분히 답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흠칫했다.

“설마.”

“음…. 제가 말하려는 것과 스완 경의 ‘설마’가 같은지는 모르지만, 아마 비슷하긴 할 거예요.”

클로디아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옅게 웃었다.

“스완 경. 저와 함께 자르지스로 가 주시겠어요? 그리고 ‘성스러운 길’을 자르지스 사람들을 위해 사용해주실 수 있을지 묻겠습니다.”

대신들의 눈이 커졌다.

“공주님!”

외무대신이 다급하게 외쳤다. 클로디아는 그쪽을 바라보고 어깨를 으쓱했다.

“미안해요, 외무대신. 좀 고생해주어야 할 것 같아요.”



 

***



 

스완 경이 포르투에 있으니, 교황이 ‘성스러운 길’을 통해 포르투에 오는 것은 쉬웠다. 교국의 교황들이 대대로 염원해왔던 포르투 입성을, 켈록스 2세는 채 즐기지 못했다. 그럴 여유도 없었으며 그럴 만한 환경도 아니었다.

첫째, 그녀는 아직도 숙취에 시달리고 있었으며 둘째, 교황의 포르투 입성은 깨진 유리창을 통해서였다. 스완 경이 연 ‘성스러운 길’이 유리창을 통해 나 있으니 당연했다. 셋째, 스완 경에게 자초지종을 들은 켈록스 2세는 몸가짐을 바로 할 새도 없이 대충 성의를 꿰입었다. 머리를 감기는커녕 씻지도 못했다는 소리다.

그래서 켈록스 2세는 상당히 심기 불편한 상태로 포르투에 입성했으나, 클로디아 테 포르투의 꼴을 보고는 조금 마음이 바뀌었다. 한 달여 전만 해도 제 앞에서 도도하게 고개를 치켜들던 클로디아 테 포르투의 거지꼴에 비하면 자신은 공주라고 불러도 될 법했다.

“…그래서, 정리하자면.”

“교국의 성기사들로 하여금 저와 함께 자르지스로 가서 ‘성스러운 길’을 열고, 자르지스의 사람들을 구원해주십사 하는 겁니다.”

클로디아가 진지하게 대리석 테이블을 짚고 교황에게 요청했다. 시녀가 얼굴과 몸을 닦아주었다고는 하나 그녀에게서는 퀴퀴한 냄새가 여전히 풍겼다. 자르지스가 그렇게 덥다 하더니 한 달 내내 제대로 씻기도 힘들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면전에서 타박하기도 어려운 노릇이다. 켈록스 2세는 코를 싸쥐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참으며 입을 열었다.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알고는 계십니까? 자르지스의 마족들을….”

“어머, 술 냄새.”

클로디아가 코를 싸쥐었다.

‘근데 이 계집애가!’

켈록스 2세는 이마에 돋는 힘줄을 누르며 말을 이었다.

“성기사들에게 마족의 이동 수단이 되라는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예.”

“어떻게!”

탕, 하고 켈록스 2세가 일어서 테이블을 내려쳤으나 곧 그녀는 당황했다. 그녀가 두들긴 테이블은 대리석이었고, 손바닥은 곧 통증으로 뜨겁게 달아올랐다.

“어머, 아프시겠다….”

클로디아가 중얼거렸다. 정말이지 얄밉고 싫은 계집애였다. 켈록스 2세는 간신히 입을 열었다.

“신의 뜻을 받드는 기사들에게 어찌 그 더럽고 저열한 마족들을!”

“성하.”

보다 못한 스완 세이비어가 끼어들었으나 교황은 더 격렬하게 소리쳤다.

“교국이 하늘섬에 대한 경애의 뜻으로 전적인 협조를 약속했으나 그것은 오로지 대륙의 신민들을 위해서입니다! 교국을 무시해도 유분수가 있습니다! 스완 경에게 마족의 새끼를 보호하게 한 것도 이미 충분히 치욕스러운 일일진대, 어째서 클로디아 공주는 교국의 성기사들을 한낱 교통수단으로 쓰려는 것입니까? 포르투가 교국에 보내겠다는 우정은 기껏해야 이런 것입니까? 거기에 더해, 제가 만약 그리하라 명령했다 한들 성기사들이 들을 것 같으십니까? 교국은 포르투와 수많은 왕국들이 그렇듯, 왕과 신하로 이루어진 나라가 아닙니다. 믿음과 신뢰로 이루어진 신의의 나라란 말입니다.”

“으음, 음.”

“공주!”

“아, 화 다 내셨어요?”

켈록스 2세는 정말 짜증이 났다. 눈앞의 공주가 제 뜻을 모르지 않는다는 걸 지금의 태도로 아주 잘 알게 됐기 때문이다. 클로디아 공주는 애초부터 켈록스 2세가 자신의 제안을 거절할 리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니 이런 식으로, ‘응 너 할 말 일단 다 해, 그래야 나중에 가서 노인네들한테 너는 화냈다고 체면 세우지!’ 같은 태도를 취할 수 있는 것이리라.

클로디아 공주는 집어먹던 쿠키를 내려놓고 입가의 부스러기를 닦았다.

“죄송해요, 너무 오랜만에 먹는 쿠키다 보니 눈이 좀 돌아가서.”

교양 없는 행동에도 기가 막혔지만, 그게 중요한 건 아니었다. 켈록스 2세는 팔짱을 끼고 도로 제자리에 털썩 앉았다. 난 할 말 다 했으니 이제 네 할 말 해보라는 태도였고, 클로디아 공주도 그 뜻을 알아차린 듯 옅게 웃었다.

“제가 성하를 만났을 때 했던 말은 기억하시지요?”

“저는 기억력이 그리 좋지 않습니다.”

삐딱한 켈록스 2세의 말투에 클로디아는 환하게 웃었다.

“성하의 성의 표시는 받아들일 마음이 없으나, 가장 충직한 친구이자 제후국의 충성이라면 받아들일 용의가 있다고 말했답니다.”

“지금 성기사들을 종처럼 부리시겠다는 겁니까?”

“천만에요.”

클로디아는 어깨를 으쓱하곤 말을 이었다.

“종이 아니라 주인공으로 만들어 드릴게요.”

“….”

켈록스 2세는 눈썹을 꿈틀했다. 그녀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파격적인 제안이었기 때문이다. 클로디아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미겔 포르투가 채 구해내지 못했던 신의 아이들을, 교국의 성기사들이 구해냈다는 것으로 하죠.”

“공주님!”

옆에서 안절부절못하며 가만히 듣고 있던 외무대신이 끼어들었다. 클로디아는 손을 두어 번 내저어 외무대신의 입을 막았다.

“성기사들을 설득하는 것도 어렵지 않으실 거예요. 상황은 간결해요. 자르지스 섬에서 사람들이 나갈 방법은 오직 그것뿐이고, 신은 성기사들에게 허공을 걸을 수 있는 길을 주셨죠. 성하. 저는 이게 우연의 일치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마치 짜여진 각본 같지 않나요? 그리고….”

클로디아는 손을 뻗어 창문 밖을 가리켰다. 거기에는 반쯤 옅어진 무지개가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유니콘이 하늘을 디딜 때 생기는 무지개였다.

“저는 유니콘을 타고 왔습니다. 유니콘은 신성생물이죠.”

공주는 자르지스로 유니콘을 처음 불러서 타고 올 때를 회상했다. 유니콘은 의기양양하게 예쁜 것을 보여주겠다며 무지개를 펼쳤다. 유니콘의 발이 닿는 곳마다 무지개가 널찍하게 펼쳐졌다.

푸른 하늘 위를 반짝반짝하게 수놓는 무지개.

그 아름다운 일곱 개의 빛무리가 포르투로 뻗은 광경을 본 사람은 대륙 전역에 수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교황 또한 클로디아의 말이 갖는 의미를 깨달았다. 대륙의 왕 몇 명만 불러다 놓고 헌금을 종용하는 것보다 몇 천 배는 큰 스케일로, 교국은 전 대륙에 무지개를 타고 온 신의 교리를 전파하고 헌금을 쏠쏠히 모을 수 있을 것이다.

이걸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세상 제일가는 멍청이였다.

교황은 ‘정말 네가 싫다’라는 눈빛을 쏘아 보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클로디아는 그 눈빛을 보지 못한 것처럼 “아, 정말로 다행이에요. 신의 축복이 있기를!”이라고 말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때 황망하게 듣고 있던 내무대신이 재빨리 끼어들었다.

“공주님, 하나 여쭤 봐도 됩니까?”

“말씀하세요.”

“말씀을 들어보니 이주한 자르지스 주민들은 어디로 대피시키실 것인지 분명해 보이는데….”

“아, 하늘섬에 빈집 많이 생겼다고 아까 노바라에게 들었어요. 전통적으로 포르투의 거주지는 그 거주민이 자진해서 포르투에서 철수하면 그 부동산에 대한 권리가 왕족에게 귀속되잖아요?”

환하게 웃는 공주의 얼굴을 보며 내무대신은 이마를 감싸 쥐었다.

“하지만 자르지스 사람들이 이주를 원하지 않을 수도 있잖습니까?”

“아, 그것도 고려했답니다.”

클로디아는 뭉친 어깨를 주무르며 여상하게 답했다. 내무대신과 외무대신이 시선을 주고받았다. 외무대신은 이제부터 아마 국가로 공식 인정될 교국의 권한을 어디까지 인정해야 하는지 골머리를 싸매야 할 것이었고, 내무대신은 자르지스의 인구가 얼마나 되는지부터 물은 후 포르투 왕족에게 귀속된 부동산 권리를 따져보기 시작해야 했다.

한마디로 일거리가 쌓여 있었다.

하지만 두 사람 다 차마 입을 뗄 수 없었다. 교황은 성기사들을 설득할 생각에 골똘히 머리를 굴리고 있었고, 클로디아 또한 생각에 잠겨 있었기 때문이다.



 

***



 

클로디아는 헬렌과 포폰까지 모아놓고 자신이 세운 가설을 설명했다.

“우리가 걸어온 성스러운 길 말예요. 그걸 자르지스에서 아트릭스까지 연결할 수 있을까요?”

그녀의 물음에 헬렌은 그들이 투르 근방에서 멜라토르까지 ‘성스러운 길’을 이용했던 거리를 계산해보고 즉답했다.

“가능은 할 것 같은데, 성기사를 여기에 어떻게 데려오려고?”

답은 간단했다.

“유니콘 말이에요. 그 애의 도움을 빌려보죠.”

“하지만 시빌이….”

시빌이 말렸잖아, 라고 말하려던 헬렌이 입을 닫았다. 클로디아는 쓰게 웃었다.

“예. 시빌은 말렸죠. 하지만 그게 유니콘이 우릴 도와줄 수 없어서는 아닐 거예요.”

“…마왕은 포르투에 유니콘을 이용해 진입했지.”

“네. 신성생물이니까, 디자이어나 아무르의 방해도 받지 않았겠죠.”

[…미안.]

디자이어가 뒤늦게 사과의 말을 보탰다. 클로디아는 고개를 내저었다.

“지금 와서 사과해봤자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아, 디자이어. 네 사과가 받고 싶어서 그런 말을 하는 것도 아냐.”

[그래도….]

디자이어는 줄곧 풀이 죽어 있었다. 클로디아는 부드럽게 달래듯 검신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아마 시빌은 유니콘이 자신을 알아볼까 봐 걱정했겠지. 물론 잠깐의 유예에 불과했지만…. 아무튼 본의 아니게 유니콘이 자르지스에 들어올 수 있다는 건 알게 된 셈이야.”

클로디아는 어느새 시빌의 화법을 대강은 꿸 수 있게 됐다. 시빌은 언제나 불가능한 것에 대해서만 말했다. 가능성이 있는 것에 대해서 언급할 때는, 그 후의 불가능을 언급했다.

‘그 유니콘이 우리를 한꺼번에 다 태울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고작 한두 명일 텐데, 유니콘이 우리를 태우느라 들락날락하는 동안 화구 안에 남겨진 사람은 타죽으면 됩니까?’

그 말인즉슨, 유니콘은 자르지스에 들어올 수는 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디자이어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렇지만…. 그 교황이라는 사람이 호락호락하게 네 말을 들어줄까? 클로디아. 스완에게 네가 마고뜨를 맡겼을 때, 그가 반발하는 걸 봤잖아.]

스완 경은 마고뜨가 마족이라는 것을 알고 처음에는 숨을 끊으려 했다. 그들을 설득하는 것이 쉽지는 않을 것이다. 클로디아 또한 입술을 깨물었다. 세상일이 모두 마음대로 되지는 않을 것이다. 스완 경의 반발심을 볼 때, 교국 전체가 자르지스에 갖고 있는 적개심 또한 만연할 것이라 예상하는 게 어렵지 않았다.

그때였다. 데미안이 입을 열었다.

“교황을 부추기십시오.”

“…무슨 뜻이죠?”

“교국은 포르투에 의해 정식으로 인정받고 싶어 합니다. 물론 그것만으로 그들이 돌아서지는 않을 겁니다. 포르투를 낮추고, 교국을 구원자로 만드십시오.”

“…데미안.”

“필요하다면 저를 빈사 상태에 처했다 말씀하십시오. 수르조차 이겨내지 못한 마왕을 토벌하고, 착취당하던 자르지스의 주민들을 구원한 이들로 만들어주어도 좋….”

“우리 착취 안 당하는데….”

조심스럽게 포폰이 끼어들었다. 클로디아가 애매하게 웃으며 답했다.

“말이 그렇다는 거야. 포폰, 중요한 건….”

“저기, 클로디아. 나 할 말이 있는데.”

“응, 말해. 포폰.”

“잘은 모르겠지만, 너는 지금 우리를 대륙으로 보내려는 거야?”

포폰의 까만 눈동자가 클로디아를 향했다.

흰자가 거의 없어 동그랗고 순수해 보이는 눈. 그 눈동자를 본 순간 클로디아는 불현듯 깨달았다.

아, 맞다….

포폰은 어색한 듯 어깨를 움츠렸다.

“네 뜻은 이해해. 하지만 만약 자르지스를 떠나고 싶지 않다면 어떻게 해?”

“…포폰.”

자르지스는 분명 사람들이 살기 힘든 곳이다. 덥고, 수풀이 우거진 데다가 바다의 독기 때문에 식량도 부족하다. 하지만 그런 곳이라고 할지라도 누군가에게는 고향이다. 새로운 곳으로의 이주를 반기기는커녕, 자신이 원하는 곳에서 살고 죽겠다 말하는 이들이 있을지 모른다.

포폰은 그런 사람들은 어떻게 할 거냐고 묻고 있었다.

“있지, 클로디아. 네게는 왕이 나쁜 사람일 거야. 하지만…. 나한테는 도무지 그가 나쁘게 느껴지지 않아.”

“포폰….”

“뭣보다…. 그렇게 옮겨가면 우리들은 대륙에서 잘 살아갈 수 있을까?”

생각도 못 한 맹점이었다. 클로디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왕이 왜 상처를 받았는지 기억해봐, 클로디아.”

소년은 처음부터 클로디아를 싫어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이 일행이 자르지스에서 뭘 하고 있는지 궁금했고, 너무 선하고 멍청한 이들만 보내기에는 안심되지 않아 따라온 것이었다. 그래서 이들의 일행이라며 민둥산 앞에서 합류한 시빌이, 사실은 자신들의 왕이었다는 것을 알게 됐을 때도 그다지 놀라지는 않았다. 그가 어떤 이유로 이 공주의 동료로 함께했든 일견 납득가는 면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빌이 클로디아에게 자신이 당했던 일들을 이야기할 때, 포폰은 헬렌 뒤에서 몰래 코를 훔쳤다. 눈물이 자꾸 나려고 해서다. 클로디아의 목적, 그리고 시빌의 목적 모두가 이해 가서 자신이 다 난감해질 지경이었다. 자신과는 어떻게 보면 상관없는, 나아가 시빌의 편을 들어야 할 텐데도 도무지 한쪽의 편을 들 수가 없었다. 그만큼 양쪽 다 절절했다.

그래서 클로디아가 양쪽을 다 해결해보겠다고 할 때도 거부감이 들진 않았다. 고맙기도 했다.

하지만…. 포폰은 시빌의 말이 자꾸 마음에 걸렸다. 그가 만난 사람들 중에 좋은 사람은 딱 세 명, 그리고 모르는 노인 한 명뿐이었다는 왕의 이야기.

자르지스는 분명 살기 힘겨운 환경을 가진 곳이다. 그건 이곳에서 열일곱 해를 살아온 포폰이 더 잘 알았다. 포폰과 같은, 털이 많은 수인들에게는 남들보다 몇 배로 더 힘든 곳.

하지만 대륙이라고 남달리 편할까? 포폰은 그렇게 생각할 수 없었다. 그들의 왕, 아나니아시빌리는 얼핏 보기에는 피부색만 다를 뿐, 클로디아나 데미안, 헬렌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그런 왕도 대륙에서 천대받았다고 한다.

그럼 나는 어떻게 될까, 하고 생각하는 게 섣부른 일은 아니었다.

포폰은 촉촉하게 젖은 코를 벌름거리며 말했다.

“그렇게 옮겨간 대륙이 사실은 자르지스보다 더 힘들지도 몰라. 자르지스는…. 힘든 곳이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이 모두 힘을 합쳐 뭔가를 하는 것이 익숙해. 하지만 대륙은 아닐 거 아냐?”

“….”

“클로디아, 너는 상냥하고 착해. 네가 우리를 대륙으로 데리고 가겠다는 마음에는 악의라고는 조금도 없다는 걸 잘 알아. 하지만 우리가 다시 자르지스로 돌아오고 싶으면 어쩌지?”

당혹으로 물들었던 클로디아의 얼굴은 이제 새카맣게 변해 있었다. 대륙에서 살아왔고, 그곳으로 돌아갈 그녀에게는 그게 가장 좋은 해결책이라고 생각됐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게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그녀는 알아야 했다. 포폰은 미안한 마음으로 말을 이었다.

“그때도 성기사님들이 우리를 데려다줄 수 있어? 그건 아닐 거 아냐….”

클로디아는 침묵했다. 그녀는 그제야 미겔을 비난하던 시빌의 마음을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 또한 미겔과 비슷한 오류를 저지를 뻔했던 것이다.

그저 좋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베푼 선의가 어떤 결과가 될지 예측하지 못하는 것.

미겔은 자르지스의 부탁을 듣고 용의 화구로 들어갔다. 그리고 도리어 자르지스를 고립시켰다. 클로디아는 자신의 입장에서만 자르지스 사람들을 생각했다. 그들을 자르지스에서 벗어나게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시빌이 대륙에서 겪은 것은 환경이 아니라 정서였다.

그런 것은 어떤 왕의 명령으로도 바뀔 수 없다. 우울해진 클로디아를 보고 포폰은 머뭇거리다가 그녀의 손목에 코를 부비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무, 물론 네 제안이 못마땅한 건 아냐. 나는 대륙에도 가보고 싶고, 자르지스에서 벗어났으면 좋겠어. 이곳은 너무 힘든 곳이니까…. 하지만 내 생각과 다른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는 걸 얘기해주고 싶었어.”

“그렇구나, 포폰. 고마워.”

부드러운 감촉에 클로디아는 그제야 작게 웃으며 포폰의 콧등을 손가락을 문질렀다. 포폰이 눈을 꼭 감으며 응석 부리듯 클로디아에게 머리를 부볐다.

그때 헬렌이 위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나는 좀 다른 생각이 있는데.”



 

***



 

클로디아는 포르투의 침대에 누워 있었다. 밤이 깊어가고 있었으나 잠은 오지 않았다. 그녀가 석 달간 누운 모든 잠자리보다 포르투의 침대가 몇 배는 푹신했지만, 이상하게도 자꾸 몸을 뒤척이게 됐다. 클로디아는 한숨을 쉬었다.

교황은 클로디아의 제안을 결국 받아들였고, 성기사들을 긴급 소집했다. 교황은 그녀에게 시간을 달라고 했다. 딱 여섯 시간. 밤이 다 끝나기 전까지 그녀는 성기사들을 설득하겠다고 말하며 스완 세이비어까지 데려갔다.

내무대신은 영 탐탁찮은 얼굴로 “스완 경은 계셔주셨으면 좋겠습니다만….” 하고 말했으나, 클로디아는 고개를 저었다. 내무대신의 말뜻이야 뻔했다. 이대로 교황이 상황을 파악한 후, 성기사들을 데리고 자르지스에 가 그곳을 그저 토벌해버릴 수도 있었다.

클로디아는 정말로 교황에게 거의 모든 상황을 공유했으니까.

하지만 그녀는 동시에 교황을 믿었다. 정확히는 교국의 재정 상황을 믿었다. 교황이 사라진 자리에서 클로디아는 팔짱을 끼고 내무대신에게 말했다.

“어차피 성기사들은 지금 당장 자르지스로 갈 수도 없거니와, 간다 해도 돌아와서 대륙의 지배권을 잡을 재정 상황이 되지 않아요.”

포르투 대신 지배권을 잡으려 시도할 수는 있겠지만 그들은 명분만 있을 뿐, 힘이 없다. 차라리 클로디아가 내민 손을 잡는 것이 백 배는 나았다. 명예와 지원을 챙길 뿐 어떤 힘도 쓰지 않는 것. 대륙 평화의 수복은 포르투의 몫이 될 것이다.

유리창이 깨진 방에 마고뜨를 둘 수 없다며 스완 세이비어는 결국 마고뜨를 데리고 갔다. 클로디아는 그러라고 선선히 허락했다. 허락하지 않는다 해도, 마고뜨가 스완에게서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언제 저렇게 친해졌는지 알 수 없었다. 뭐, 그 이야기는 나중에라도 찬찬히 들을 기회가 있을 것이다.

클로디아는 시선을 돌려 밤하늘을 바라봤다. 자르지스에서 밤하늘을 바라볼 때는 우거진 나무들 틈새로 겨우 별이 뜬 하늘을 바라보는 게 다였는데, 하늘섬에 있는 그녀의 방에서는 그 어떤 시야 방해도 없었다.

밤하늘에는 수백 개의 별이 반짝거리며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불현듯 외로워졌다.

정말로 그 일행과 떨어지는 건 처음이었다. 내내 일행들과 함께 움직였다. 요정의 동굴에서는 혼자라고는 하지만 디자이어와 함께였으며, 자르지스에서도 내내 데미안과 함께였다.

그러나 다시 돌아온 포르투에서, 클로디아는 그들 없이 혼자 그 모든 것을 해내야 했다. 교황을 설득하고, 성기사들을 끌어와야 한다. 그 모든 것은 평화를 전제로.

클로디아는 지금의 상황 자체는 전혀 부담스럽지 않았다. 요정의 동굴을 헤맬 때는 울고 싶었으며 자르지스에서는 더위와 걱정 때문에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던 것에 비하면 계속 떠들고 교섭만 하면 되는 이쪽이 차라리 낫다고 생각될 정도였다.

차라리.

‘…시빌의 가슴에 디자이어를 꽂아 넣는 것보다는, 백만 배는 쉬워.’

누구에게라도 이 이야기를 털어놓고 싶었다. 사무치게 외로웠다. 클로디아는 터져 나오는 한숨을 어찌하지 못하고 얼굴을 감싸 쥐었다. 성기사들을 자르지스로 데려가 사람들을 대피시키기 전에 반드시 시빌이 나타날 것이다. 그녀가 그를 찾아가기 전에는 나타나지 않을 것처럼 그는 말했으나, 클로디아가 성기사들을 데리고 오는 것을 그가 좌시하지만은 않을 것이므로.

‘이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있으면 좋을 텐데.’

클로디아는 베개를 끌어안았다.

노바라가 깨끗이 씻겨주고 잘 말려준 머리카락에서는 좋은 냄새가 났다. 예전이라면 웃으며 행복하게 잠들었겠지만, 지금은 그저 걱정만 가득했다.

‘시빌이 너무 화내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마 그는 자신에게 크게 화내지는 않을 거라고, 클로디아는 생각했다. 그는 그 공동에서까지 자신에게 화내지 않고 다만 애원했으므로. 가슴 한쪽이 조금 욱신거렸다. 시빌은 지금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의 머릿속에 무슨 생각이 들어찼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하나 확실한 건, 그는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녀는 자신에게 좋아한다고 고백하던 다정한 초록색 눈동자를 떠올리고 얼굴을 베개에 묻었다.

그렇게나 다정한 눈을 한 사람이, 포르투를 부수고 쥬버린의 심장을 꺼냈다. 그렇게 될 때까지 그가 겪었던 아픔들을 상상해 보려다가 클로디아는 그만두었다.

자신은 아마 알 수도 없을 크기의 슬픔일 것이므로.

포폰은 클로디아가 돌아올 때까지, 마을 사람들을 설득해보러 내려가겠다고 말했다. 헬렌 또한 포폰과 함께 가기로 했다. 데미안은 운신을 할 정도는 되었기에, 그 화구를 나와 은신처에 몸을 숨겼다. 디자이어가 함께하고 있을 것이다. 사실 유니콘은 데미안까지는 상관없이 태워줄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그가 자르지스에 남은 이유는 따로 있었다.

‘데미안은 괜찮을까?’

그렇게 생각한 순간, 다시 한 번 명치 아래쪽이 욱신하고 아파왔다. 클로디아는 베개를 꾹 쥐었다. 자신이 포르투의 편안한 침대에 누워서 쉬고 있을 동안, 다치고 저주받은 남자가 자르지스의 맨땅 어딘가에 몸을 기대고 있을 생각을 하니 미안하고 죄스러웠다. 디자이어가 옆에 있겠지만….

요즘 부쩍 말수가 줄어든 디자이어, 그리고 그 옆에서 말없이 쉬고 있을 데미안을 생각하고 클로디아는 속상해졌다.

모든 것이 상처투성이였다.

그가 자신에게 그렇게 죄스럽게 굴었던 이유를 알고 나니 가슴 속 어딘가에서 한없이 뜨거운 게 치밀어오르는 느낌이었다. 간신히 그의 앞에서 평온한 척, 혹은 위엄 있는 척 굴었으나 혼자 남으니 이 모양이다.

그녀는 베개를 내려놓고 슬며시 일어났다.

‘아바마마를 만나고 싶어. 안 되면 오라버니라도.’

하지만 포르투 국왕은 그 병증 때문에 밤에는 깊게 잤다. 포르투 왕성이 부서진 후에도 국왕의 병은 여전해, 좀 더 안전한 곳으로 옮긴 것 외에는 변화가 없었다. 게다가 지금 그녀가 움직이면 멀리 떨어진 왕의 방까지 수많은 경호 인력이 따라붙어야 한다.

클로디아는 이 밤에 그런 민폐를 끼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리고 그것 외에도, 그녀는 자르지스에서 스스로에게 한 맹세를 어기고 싶지 않았다. 지금 부왕을 만나면 그녀는 아마 울며 부왕에게 안겨버릴 것이다. 다시는 나가고 싶지 않다고 눈물 흘리며 포르투의 가장 깊숙한 곳으로 숨어버릴지도 몰랐다.

‘안 돼.’

그녀가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되새긴 때였다.

푸르릉.

“엄마야!”

클로디아는 작은 소리에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봤다. 그녀의 침대 옆에는 어느새 어떻게 들어왔는지 하얀 유니콘이 코를 벌름대고 있었다.

클로디아의 푸른 눈이 커졌다.

“깜짝이야. 너 여기엔 어떻게 들어왔니?”

유니콘은 그녀의 말에는 답하지 않고, 대뜸 혀를 내밀어 그녀의 뺨을 핥았다. 그제야 클로디아는 자신이 울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무래도, 포르투의 마구간에서 편안하게 자고 있던 이 신성생물은 그녀가 울고 있는 것을 알고 달려와 준 모양이었다. 이미 자르지스에서 출발할 때, 그 커다란 화구의 천장을 가볍게 통과해버리는 신성생물의 위력을 체험한 터였기에 크게 놀랍지는 않았다.

다만 그녀는 새삼스럽게 고마운 마음이 들어 유니콘의 콧등을 쓰다듬었다. 그리고 코를 찡그렸다. 손을 통해 유니콘의 생각이 전달됐기 때문이다. 익숙한 감각이었지만….

“…그냥 눈물이 맛있어서 온 거였니….”

- 좀처럼 맛볼 수 없는 진미인걸, 놓칠 순 없지!

유니콘이 흥흥 콧김을 내뿜었다. 클로디아는 이 제멋대로인 신성생물이 조금 괘씸했지만, 덕분에 우울한 기분은 가셨다. 디자이어도 그렇고, 인간이 아닌 애들은 원래 이렇게 태생적으로 명랑한 걸까?

클로디아는 픽 웃었다.

“있잖아, 얘. 내가 저번에 너한테 복수해주겠다고 했잖니?”

- 그랬지. 그 까만 괴물이….

“…내가 그 복수를 혹시 하지 못한다고 하면 너는 어떻게 할 거야?”

- 뭐야. 밑장빼기야?

얘는 근데 유니콘이, 그런 말은 어디서 배운 거야.

클로디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자 유니콘은 가볍게 그녀의 팔을 밀었다.

- 바보야. 괜찮아. 네가 그때 날 고쳐준 걸로 충분해.

“이런…. 너도 착한 애로구나.”

- 명색이 신성생물인데 말야. 그깟 복수 안 해준다고 원한 가지면 쓰겠어?

클로디아가 웃으며 유니콘의 이마에 제 이마를 비볐다. 다정한 몸짓에 유니콘도 푸르릉, 하고 그녀에게 응했다.

클로디아는 잠시 망설이다가 영광의 홀까지 유니콘에게 경호를 부탁했다. 유니콘은 기꺼이 수락했다. 영광의 홀은 정말로 그녀가 머무는 방의 바로 근처였고, 마구간보다는 유니콘도 깨끗한 성 안이 좋았다.

유니콘과 함께 복도를 걷는 동안 그녀는 나직하게 자신의 오빠에 대해 설명했다. 복도를 걷는 동안 순찰하던 기사들을 두어 번 마주쳤고, 그들은 잠옷 차림의 공주에게 당황한 후 경호를 하겠다고 붙었으나 그녀는 유니콘을 가리키며 손을 내저었다.

“얘는 남자 싫어해요.”

유니콘의 커다란 날개와 뿔을 본 기사들이 즉각 납득하고 물러났다. 어쨌든 유니콘은 남자들에게는 지상 최강의 생물이므로 그녀를 걱정할 필요도 없다고 다들 생각했기 때문이다.

“여자가 날 죽이면 어쩌려고들 저럴까. 그치?”

- 내가 그래서 남자들을 싫어하는 거야. 지저분하고 멍청한 것들.

유니콘이 그녀에게 응대했고, 클로디아는 까르륵 웃었다. 정말이지 유쾌한 친구였다.

영광의 홀은 엄중한 경호로 보호받고 있었다. 채 모두 보수하지 못해 구멍이 난 벽은 여전했지만. 영광의 홀 중앙을 지키고 선 기사들도 유니콘과 함께 들어선 공주를 보고 당황했다. 그녀는 기사들에게 요청했다.

“오라버니와 둘이 있고 싶어요. 잠시만 자리를 비워줄래요?”

기사들은 오랜만의 여행에서 잠시 돌아온 공주가 쥬버린과 함께 있고 싶은 마음을 짐작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오래는 어렵습니다.”

그들의 수르는 원리원칙주의자였으니 기사들도 그럴 것이다. 클로디아는 미소로 답한 후 쥬버린이 누운 관으로 다가갔다. 곧 기사들이 문을 닫았다. 이제 홀에는 그녀와 유니콘, 그리고 쥬버린의 관만이 남았다.

클로디아는 천천히 걸어 쥬버린의 관 앞으로 다가갔다. 관 안에는 여전히, 석 달 전과 같이 누워 있는 쥬버린이 보였다. 하얀 뺨과 창백한 입술. 그야말로 잠자는 왕자였다. 동화 속에 나오면 어울릴 듯한 아름다운 얼굴을 보며 클로디아는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오빠.”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디자이어도 없으니 당연했다. 디자이어의 힘으로 보호받고 있기는 했지만, 본체가 이곳에 없으니 의식조차 불러올 수 없을 것이다.

‘아마 내가 하는 말도 들리지 않겠지.’

하지만 상관없었다. 그녀는 입을 열었다.

“다 알고 있었어?”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클로디아는 아마 쥬버린이 이 모든 것을 몰랐으리라 확신했다. 그래도 물어보고 싶었다. 혹시 오빠는 자르지스에 대해 알고 있었느냐고.

자르지스, 포르투, 미겔과 디자이어, 그리고 부왕과… 데미안.

“오빠가 미워. 아마 적어도 하나는 알고 있었을 테니까.”

클로디아는 몰랐지만 쥬버린은 아마 알았을 것이다. 부왕이 데미안이 일으킨 사고로 인해 병에 걸렸다는 것을.

그녀는 한숨을 쉬며 유리관을 문질렀다.

“데미안의 일을 내게 알려주지 않아서 미운 게 아냐…. 데미안에게 왜 그랬어?”

이상했다. 자신이 그 사실을 몰랐던 것에는 분노가 일지 않았다. 다만 그를 제 옆에 두려고 한 쥬버린에게 화가 났다. 데미안이 자신을 사랑하는 것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책감 때문에 몸부림치는 것 또한 쥬버린은 알고 있었을 것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자신은 온실 안에 놔두고, 그 온실의 문지기로 데미안을 임명한 것은 왜일까?

가사 상태인 쥬버린에게 말해봐야 소용없다. 클로디아는 반드시 포르투를 구해내고, 쥬버린의 심장을 되찾아야겠다고 결심했다.

“오빠. 나는 오빠를 꼭 되살릴 거야. 그래야 오빠에게 화를 낼 수 있을 테니까.”

그녀의 눈이 축축해졌다. 뒤에서 잠자코 보고 있던 유니콘이 날개를 크게 펼쳐 그녀의 어깨를 감쌌다. 따뜻한 깃털이 닿는 감촉은 부드러웠다. 눈물 나도록.

…거기까지 생각하고 클로디아는 피식 웃으며 유니콘을 바라봤다.

“너 혹시 또 내 눈물 때문에 이러니?”

- 나를 뭘로 보고! …틀린 말은 아니지만.

“바보야. 난 이제 안 울 거야.”

- 뭐? 안 되는데.

클로디아는 날개를 장난스럽게 잡아당기며 뺨에 깃털을 부볐다.

“우는 건 나중에 할 거야. 다 끝나면…. 그때 울 거야.”

- 뭔진 모르지만 끝날 때까지 내가 네 옆에 있어야겠군?

“아하하, 그래. 그래 주면 고맙겠네.”

그렇게 말했을 때, 기사들이 기웃거렸다.

“저어, 공주님. 슬슬 자리를 비켜 주셔야….”

그 누구도 아닌 쥬버린의 관이다. 아무래도 자리를 비우는 것이 켕키긴 하겠지. 클로디아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쥬버린의 유리관 뚜껑을 가볍게 두들겼다. 통통 소리가 났다.

“…오빠가 해 줄 일도 있어.”

클로디아는 잊어버리지 않았다. 자신이 하늘섬을 구하고 나면 깨어날 왕자님에게는 또 다른 할 일이 있다.

죽음의 바다를 건너, 오랫동안 미로에 갇힌 공주님을 구하는 것. 삼단같이 새카만 머리카락을 가지고 심술궂게 말하던 거울 공작을 생각하며 클로디아는 픽 웃었다.

“어디 한 번, 그 저주의 바다를 건너봐. 나는 엄청나게 고생했거든. 꼬리를 잃어버린 용의 저주가 어떤지…. 꼭 겪어봐야 해.”

기사들이 어색하게 관 근처로 와 딱딱한 자세로 경호에 복귀했다.

더 이상 저들을 방해하면 안 되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클로디아는 유니콘의 등을 가볍게 두들겼다. 유니콘은 푸르릉 소리를 내며 돌아섰다. 그렇게 영광의 홀을 나오며 문득 바깥을 보는데, 하늘 저편이 새파랗게 밝아오고 있었다.

곧 교황이 올 것이다. 눈 한 번 붙일 틈도 없이 바빠지겠네…. 하고 생각할 때였다.

- 있잖아. 뭐 하나 물어봐도 돼?

“응? 말해.”

- 그, 혹시 그러면 그 섬에 내가 그 성기사들을 태우고 가야 하는 거야?

유니콘이 짐짓 싫은 듯 푸르릉거리며 물었다. 클로디아는 안타깝게 웃었다.

“미안. 처음 한 사람만 태우고 가면 돼. 그 스완 경이라는 사람 봤지? 그 사람 혼자면 되는데….”

아무리 유니콘이 남자를 싫어한다 해도, 어쩔 수 없었다. 성기사들이 ‘성스러운 길’을 열기 위해서는 반대편 목적지에도 성기사가 한 명은 있어야 했으므로.

스완 경이 도착한 다음에는, ‘성스러운 길’을 열어 다른 성기사들이 자르지스에 진입하면 된다고 클로디아는 생각했다. 오는 길에도 유니콘에게 조심스럽게 부탁한 차였다.

‘하지만 새삼스럽게, 이제 와서 싫은 티를 낼 줄은 몰랐는데.’

지금 유니콘이 제 부탁을 거부하면 모든 게 번거로워진다.

클로디아는 미안한 듯 물었다.

“그래도 스완 경은 성기사고, 신의 힘을 쓰시니까 신성생물인 너한테도 그렇게 싫은 일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는데…. 혹시 엄청나게 싫은 일이니?”

- 뭐, 그렇다기보다는…. 싫긴 싫은데, 너 다른 방법이 있는데 모르는 것 같아서.

“…다른 방법?”

다른 방법이 있긴 있다. 힘들어서 그렇지. 디자이어가 다시 배를 만들고 성기사들을 태워 가는 일이다. 하지만 디자이어도 자르지스에 있으니, 자신이 다시 자르지스로 갔다가 디자이어를 데려와야 하는데….

그동안 시빌이 가만히 있을 리도 없거니와, 데미안의 거취도 문제다. 혹시 그 방법을 얘기하는 거라면, 유니콘에게 내가 많이많이 울어줄 테니까, 조금만 참아달라고 하면 통할까?

…하는 어처구니없는 생각을 하는 동안 유니콘이 말을 이었다.

- 너, 누군가가 잃어버린 꼬리를 갖고 있잖아.

“…무슨 소리야?”

잃어버린 꼬리?

무슨 소리를 하는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클로디아가 눈을 찌푸리자 유니콘이 고개를 갸웃하다가 코로 클로디아의 엉덩이 쪽 치마를 물더니 그녀를 끌어당겼다. 유니콘에게 끌려온 곳은 자신의 방, 그녀가 입고 온 옷가지들이 잘 개켜져 있는 옷장 앞이었다.

유니콘은 그녀의 바지를 물고 푸르륵 흔들었다. 그 바람에 바지에 대충 쑤셔 넣어져 있던 것들이 마구 떨어졌다. 먹다 만 육포, 대충 쑤셔 넣은 손수건과 장갑 같은 것들.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것들….

클로디아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이, 이건…. 내가 그렇게 더러운 사람은 아니거든?!”

하지만 유니콘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중 새카맣고 쪼글쪼글한 뭔가를 코로 밀어 그녀에게 주었다. 클로디아는 이마를 찡그리며 그것을 집어 들었다. 아주 징그러운 것을 집어 드는 손짓으로.

“이건….”

요정들이 동굴에서 준 것들 중 하나였다. 요정들의 동굴에서 빠져나온 그녀에게 쥐어진 지저분한 것들. 그리고 그 사이에 있던.

‘도마뱀 꼬리도 드릴게요!’

그녀가 잘라낸 바실리스크의 꼬리였다. 필요 없다고 했는데 제 짐에 구태여 넣어놓은 것을 보고, 클로디아는 진저리를 치며 대강 아무 데나 쑤셔 넣었던 기억이 있었다.

“이게 왜….”

클로디아가 설마, 하는 표정으로 유니콘을 바라봤다. 유니콘은 코를 흥흥거리며 말했다.

- 그거랑 비슷한 걸 잃어버린 애가 있지 않아?

클로디아의 눈이 커졌다. 확실히, 꼬리에 불이 붙은 채 바다로 뛰어든 용이 있었다. 죽음의 바다는 그 용의 저주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걸로, 죽음의 바다가 괜찮아진다고?”

- 그거야 나도 모르지. 하지만 그건 요정 냄새가 나는데. 그 물건, 요정에게서 받은 거 아냐?

“어…. 맞아.”

유니콘이 킁킁 냄새를 맡았다.

- 네가 불러서 그 바다를 건널 때, 나도 그 바다를 봤어. 아마 인간들은 제대로 보고 들을 수 없겠지만, 나는 그런 것들에 대해 아주 잘 알아. 뭔가를 잃어버린 애들은 그것과 같거나 더 좋은 물건이 아니면 화가 풀리지 않아. 확실히 그 꼬리는 그 바다에서 화를 내고 있는 애의 것은 아니지만…. 요정들은 나쁜 물건을 좋은 걸로 바꿔주거든.

“…요정들이 그런다고?”

- 잘 생각해봐. 너 요정들하고 만났을 때, 걔들이 나쁜 걸 좋은 걸로 바꿔주지 않았어?”

그랬던 것 같기도 했다. 클로디아는 이마를 찡그리며 요정들이 했던 말을 떠올리려 애써봤다.

그녀의 반짝이는 금발 머리를 잘라가며 요정들은 예쁜 것, 좋은 것, 아름다운 것과 함께 슬픔과 거짓말을 가져가겠다고 노래했다. 대신 그녀가 받은 것은….

슬픈 일은 없도록,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도록, 가장 필요한 때를 위해 작은 용기를 낼 수 있도록. 행운과 눈물은 함께.

클로디아는 입을 막았다. 그 조그만 요정들은 그러니까, 짓궂긴 했지만…. 그녀에게 가장 필요한 것들을 주었던 모양이다. 유니콘이 다시 콧소리를 내며 웃었다.

- 꼬리를 잃어버린 도마뱀에게는 꼬리를 돌려줘 봐.

“…이걸로 괜찮을까….”

- 어쩌겠어? 아마 막 잃어버렸을 때라면 화가 나서 어쩔 줄 모르며 집어던졌을지도 모르겠지만, 아마 지금은 그 애도 화가 좀 풀리지 않았을까?

클로디아는 얼핏 들었던 말을 기억해냈다. 물살과 세월에 조금씩 옅어진 용의 저주.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약해졌다는 저주는 사실 용의 화가 풀렸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유니콘의 말이 사실이라면….

- 와.

유니콘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좋아했다. 생각의 끝에 다다른 클로디아의 눈에서 왈칵 눈물이 쏟아졌기 때문이다. 펑펑, 눈물방울이 쉴 새 없이 쏟아졌다.

하지만 슬퍼서 흘리는 눈물은 아니었다.

- 다 끝나면 운다더니, 뭐야. 너 분수야? 아니면 댐이야? 막 터진다. 우와.

“저리 가, 약 올리지 마….”

신난 듯 머리를 제게 부비는 유니콘을 보면서, 클로디아는 마구 울면서 웃었다. 유니콘의 말이 정말이라면 그녀는 긴 머리채와 바꿨다고 하기에는 너무 과분한 선물을 받은 것이었다.

죽음의 바다가 가지고 있는 저주를 풀 수만 있다면, 시빌은 더이상 괴로워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마치 잔뜩 꼬여 손댈 수도 없던 마지막 실타래가 풀린 기분이었다. 아무르는 포르투에게로, 자르지스의 저주는 원래대로. 행운을 주겠다던 요정들의 말대로, 그녀는 운이 좋았다.

그녀는 새까맣고 지저분한 꼬리를 쥐고 복도에서 훌쩍였다. 요정들이 제게 해줬던 말이 계속해서 맴돌았기 때문이다.

슬픈 일은 없도록,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도록, 가장 필요한 때를 위해 작은 용기를 낼 수 있도록. 행운과 눈물은 함께.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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