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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선(善) (22/30)

2장. 선(善)



 

시빌과 만난 건 불과 두어 달이다. 그전에는 그를 알지도 못했으나, 클로디아는 지금의 시빌이 자신을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다는 것을 절감했다.

클로디아는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포르투에 가려진 자르지스를. 몸이 변형된 사람들과 화구의 열기, 무거운 공기. 잘 씻지 못하던 더러운 삶과 지긋지긋한 정글의 진흙 바닥. 몸이 불편해 만드라고라조차 잘 캐지 못한 나머지 남에게 부탁하던 사람들과 그녀에게 부족한 식량을 나눠주던 사람들.

그녀의 옆에서 펄쩍펄쩍 뛰던 마법사. 웃으면서 그녀를 안아주던 남자의 다정함과, 그녀를 토닥이던 목소리를 클로디아는 결코 잊어버릴 수 없을 것이다. 그녀를 바라보던 따뜻한 눈동자에 감도는 여름의 녹음, 그리고 석양 가운데서 속삭이던 숨결까지.

눈물 한 방울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디자이어를 끌어안은 채라 차마 눈물을 닦을 수도 없었다. 그런 그녀를 보고 시빌은 한숨 쉬듯 웃었다.

“그래요. 당신은 그럴 수 없겠죠. 그래서 나는 미겔이 더 미워요.”

“….”

“미겔이 자르지스를 버리고 살려낸 사람들은 어린아이를 팔아치우고, 범죄를 저질러요. 미겔이 아니었더라면 암흑의 바다에 잠겨 삶이라는 것을 살아볼 수도 없었을 자들은, 자신의 삶이 선물 받았다는 것을 몰라요. 귀중한 인생을 훌륭하게 살기는커녕, 선의를 악의로 받아치고, 사람을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공격하더군요.”

“그런….”

“클로디아. 부정하지 말아요. 당신 또한 당신 자신이라는 이유만으로 이유 없는 적의에 노출된 적 없었나요?”

시빌의 말은 그녀의 아픈 부분을 찔러댔다. 시빌이 당한 일을 그저 운이 나빴을 뿐이라고만 위로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건 시빌의 말처럼 기만이었다.

클로디아 또한 그녀 자신이 공주라는 이유로, 혹은 미녀라는 이유로, 아니면 그저 혼자 있는 여자애라는 이유만으로 두어 달 동안 숱한 일을 겪었다. 클로디아는 그래서 답하지 못하고 눈물만 뚝뚝 떨어트렸다.

그녀의 옆에 서 있던 데미안이 그녀를 흘끗 바라보고는 한숨을 쉬고는 검을 고쳐 쥐었다.

“로드. 그만하시지요.”

“수르 알파. 하지만….”

“결국은 싸워야 할 상대일 뿐입니다. 로드의 심기를 어지럽히려 말장난을 하는 것뿐입니다.”

데미안의 말에 대답한 것은 시빌이었다.

“흠. 데미안. 아니, 수르 알파. 그래요. 당신 이야기를 해 볼까요.”

시빌은 이제 허공에 뜬 채 다리를 꼬고 앉아 턱을 괴었다. 본격적으로 이야기라도 더 나눠보자는 그 자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데미안은 검을 겨눴다.

“현혹되지 않겠다.”

“와하! 이제는 반말입니까? 그래요. 적이니까 그렇게 태도를 바꾸는 것도 당신답군요.”

시빌은 손뼉을 짝짝 치며 좋아했다.

“하지만, 수르 알파. 당신도 알죠? 포르투 기사단이 왜 원정을 다니는지.”

“…대륙의 평화를 위해서다.”

“…라고들 말하죠!”

시빌은 과장된 모습으로 팔을 벌렸다.

“아니라는 걸 모르지 않으면서 왜 그렇게 말하죠? 당신은 일개 기사도 아니고 수르잖아요?”

“수르 알파. 이게 무슨 말이에요?”

클로디아가 데미안을 쳐다봤다. 데미안은 눈에 띄게 불안한 모습이었다. 그는 시빌의 말을 받아치려는 듯 몇 번 입술을 달싹였으나, 이내 고개를 저었다.

“로드. 허락해 주십시오. 당장 저자를 베도록.”

그러나 시빌은 클로디아의 말을 기다리지 않았다.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비아냥거렸다.

“…땅요정들을 기억하죠, 클로디아? 그 저주받은 불쌍한 이종족들 말이에요.”

“….”

“그 땅요정들도 원래는 땅 위에서 살았답니다. 하늘섬을 만든 인간들은 땅 위에서 요정들을 지하로 내몰았어요.”

데미안이 버럭 소리 질렀다.

“헬렌! 로드를 부탁합니다!”

“뭐? 데미안,”

갑자기 이름을 불린 헬렌이 놀라 눈을 둥그렇게 떴다. 그러나, 데미안은 헬렌이 넋 놓고 있도록 기다리지 않았다.

붕, 소리가 나며 수르의 검에서 푸른 검기가 뻗어 나갔다.

데미안은 칼을 허공의 시빌에게로 뻗는 동시에 클로디아를 뒤로 밀었다. 힘없이 서 있던 클로디아는 속절없이 뒤로 떠밀렸고, 앗차 하고 넘어지려는 사이 뒤에 있던 포폰이 그녀를 떠받쳤다. 와장창, 소리가 나며 둘 다 뒤로 나동그라졌다.

“허억….”

“꺅….”

포폰은 숨 막히는 소리를, 클로디아는 작은 비명을 질렀다. 그 와중에도 시빌에게 빼앗기면 안 된다는 생각에 디자이어를 끌어안은 채 쓰러진 클로디의 몸 여기저기에 생채기가 났다. 그러나 몸의 아픔 따위는 신경 쓰이지도 않았다. 클로디아는 곧장 몸을 돌려 위를 쳐다봤다. 데미안이 검을 휘두르며 시빌에게로 쇄도하고 있었다.

펑.

자르지스의 공기가 무겁다더니 시빌 또한 먼 허공까지는 날 수 없는 듯, 이리저리 데미안을 피하다가 끝내는 여력이 없는 듯 “흐아아!” 하고 소리를 질렀다. 클로디아의 눈이 커졌다. 시빌의 한쪽 팔이 더욱 새까맣게 변하면서, 점점 덩치를 불렸기 때문이다. 팔은 비정상적으로 길어지고 커졌으며, 그 끝은 마치 날카롭고 검은 금속처럼 변했다.

챙!

자신의 덩치만큼 커진 팔로 데미안의 칼을 받아낸 시빌이 신음했다.

“우와, 당신, 정말 쎄….”

데미안은 대답하지 않고 다시 검을 휘둘렀다. 시빌도 팔을 맞부딪혔다.

쩡, 쩡, 쩡!

세 번의 엄청난 소리가 들린 뒤 시빌의 팔이 그대로 부서져 나갔다. “아악!”

클로디아가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으나 시빌은 씩 웃은 다음 다른 쪽 팔을 다시 불렸다. 멀쩡하던 다른 쪽 팔 또한 새카맣고 커다란 갈퀴처럼 변해 데미안의 검을 막아냈다.

쩡!

데미안은 이번에는 한 번의 일격만으로 시빌의 팔을 잘랐다.

“미친!”

시빌이 숨 막히는 소리를 내며 뒤로 휙 뛰어올랐다.

하지만 데미안은 시빌에게 틈을 주지 않았다. 그가 오른발을 내디디며 공중으로 달려들자, 시빌은 황급히 몸을 피했다. 언뜻 양쪽 팔이 없는 것처럼 보였으나, 클로디아는 그 순간 그의 양쪽 팔이 다시 자라나는 것을 알아챘다. 그는 밑으로 뛰어내린 후 아래에서 데미안을 다시 할퀴려 몸을 돌렸다.

하지만 데미안도 만만치 않았다. 수르의 명성은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데미안은 공중에서 검기를 길게 뻗어낸 후 그대로 시빌 쪽의 공간을 갈랐다.

부웅, 하고 공기가 갈라지는 소리가 났다.

“사람이야…?”

클로디아의 밑에 깔려 있던 포폰이 숨 막히는 소리로 감탄했다. 그제야 클로디아는 “어, 어머 미안해 포폰!” 하며 몸을 비켰다. 그러나 포폰은 클로디아에게 깔려 있던 것도 잊은 듯, 두 사람의 대결을 바라보느라 여념이 없었다. 헬렌이 겨우 두 사람의 뒷덜미를 끌고 뒤로 물러섰다.

“클로디아! 내 말 들어요!”

“닥쳐! 네가 로드를 현혹하게 두지 않겠다!”

쩡! 쩡!

동공이 온통 흔들리는 소리가 났다. 클로디아는 헬렌에게 끌려 나온 이후에야 데미안이 자신 때문에 검격을 좁히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범위 안에 클로디아가 없는 것을 알아챈 데미안은 더욱 빠르고 세밀하게 시빌을 밀어붙이고 있었다. 중간중간 시빌이 마법으로 잔재주를 부리지 않았다면, 데미안은 틀림없이 클로디아가 몇 번 날숨을 내쉬기도 전에 시빌의 목을 베었을 것이다.

“미겔이 만들어 준 평화로운 대륙에서 인간들이 제일 먼저 뭘 했는지 아십, 니까?”

펑! 하는 소리가 났다. 데미안의 검에 바위가 박살 난 것이었다. 모래가 흩날렸고, 그 사이로 시빌이 몸을 감췄다. 하지만 시빌은 여전히 소리를 지르고 있었고, 데미안은 그쪽을 향해 몸을 던졌다.

“왕국을 만들었어요! 백 개나 되는 왕국을요! 그 많은 왕국이 세워지기 위해 땅요정들은 자신들의 땅을 빼앗기고 지하로 내몰렸죠! 덕분에 지하에서 살던 용의 저주를 받았고요!”

쩍, 동공의 벽 한쪽이 갈라지자, 쾅, 와르르 하고 돌이 우수수 떨어졌다.

시빌이 얼핏 팔을 다시 휘두르는 게 보였고, 펑! 하는 소리와 함께 불꽃이 튀었다. 헬렌이 침착하게 냄비를 들어 포폰의 머리 위에 씌워 주었다. 디자이어가 방어막을 만들어 세 사람을 감쌌다.

“숲 거인들은 또 어떻고요? 데미안, 당신도 알죠? 수르가 몇 년에 한 번씩 세계수 씨앗을 가지러 가는 게 목적이겠어요?”

“입, 다물어! 사정 모르는 자르지스 인이 함부로 논할 수 있는 게….”

화르륵, 커다란 불이 일어났다. 데미안은 고개를 돌리며 뒤로 물러났다. 시빌이 지른 불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서였다. 시빌은 쿨럭, 기침을 하면서도 데미안과 자신 사이에 커다란 불의 벽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벽 뒤에서 숨을 고르던 시빌이 고함을 질렀다.

“아무르가 포르투를 띄우고 있는데 세계수 따위가 왜 하늘섬을 받치고 있느냔 말이야?!”

…생각해본 적 없었다. 그저 안전장치일 뿐이라고 생각했는데. 설마 그것마저 자신이 모르는 이야기가 있는 걸까. 클로디아는 디자이어를 내려다봤다.

[…아냐. 아냐.]

“세계수는 수단일 뿐이에요! 숲 거인들을 숲 안에 외딴 섬처럼 고립시키고 세계수에만 매달리게 하는 금치산자로 만들었죠!”

[아냐! 세계수는 정령들을 만들고 땅을 정화시킨다구!]

디자이어가 마주 소리 질렀으나 시빌은 이번에는 확연한 분노를 표출했다.

“웃기지 마! 디자이어, 세계수가 아니라도 넌 정령들을 잉태시킬 수 있잖아!”

가장 오래된 정령. 하늘섬을 수호하는 디자이어.

세계수에 정령들을 잉태시킨다는 것은 그저 핑계일 뿐이다. 숲 거인들에게 세계수를 가꾸고 정원을 만드는 것이, 그들의 숙명이자 가장 즐거운 일인 것처럼 오랜 기간 속삭여 온 것은 바로 그들이 인간들의 영역을 침범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라고 시빌은 말하고 있었다.

“마을을 봐! 백 개의 왕국에 온통 인간들뿐이라고! 요정? 잊혀지다 못해 오래된 곳에서 숨어 살지. 유니콘? 더러운 인간들을 피해 숲으로 도망치다 고립된 나머지 나 같은 것에 이용당하는 머저리들이 됐어! 그따위 게 어떻게 신성생물이야?”

[그만….]

“자르지스만 괴로운 줄 알아? 미겔은 제게 부탁한 인간들만 생각하느라 나머지들을 모두 희생했다고! 그런 주제에 포르투를 부수었다고 나를 죽이러 왔잖아! 클로디아, 응?”

클로디아의 이가 딱딱 부딪히기 시작했다. 그가 가진 화의 양이 어마어마해서였다. 시빌은 불의 벽 뒤에서 분노가 일렁이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렇게 큰 분노를 그녀는 대해 본 적이 없어 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게 됐다.

“당신 아버지가 왜 그렇게 됐는지는 알아요?”

“…뭐라고요?”

클로디아의 눈이 부릅떠졌다. 치매에 걸린 포르투의 왕, 그녀의 아버지. 클로디아를 응시하던 시빌은 차게 웃었다.

“정말 당신, 아는 게 없구나.”

“거기까지다.”

그 순간이었다. 데미안이 불의 벽으로 뛰어들었다. 클로디아는 찢어지는 비명을 질렀다.

“수르 알파!!”

데미안은 이를 악물고 제 몸을 태우려 드는 불을 갈랐다. 그리곤 곧장 그 뒤에 서 있던 시빌을 향해 검을 찔러넣었다. 하지만 시빌이 더 빨랐다. 시빌은 이미 데미안이 습격할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어째서인지 데미안은 아까보다 부쩍 더 흔들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이유를 클로디아는 몰랐으나, 시빌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시빌이 이를 드러냈다.

“미안하지만, 데미안.”

시빌의 팔이 다시 우드득거리며 자라났다. 찰나의 순간이었으나 어째서인지 클로디아에게는 아주 느린 속도로 보였다. 마치 세계수처럼 순식간에 커진 손아귀가 데미안을 찢어발겼다.

아드득, 소리가 났다. 사람이 부서지면 그런 소리가 나는 것을 클로디아는 처음 알았다.

“데미안!!”

“당신은 내게 너무 방해가 돼.”

시빌의 거대한 손이 데미안을 구겨 쥐었다. 불의 벽은 어느새 사라진 채였다. 시빌은 손을 힘껏 쥐었으나, 이내 풀었다. 정확히는 풀 수밖에 없었다.

“쳇.” 시빌이 혀를 찼다.

그 안에서도 포르투의 기사는 마지막 힘을 짜내서 검기로 팔을 부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공격은 정통으로 먹혀, 시빌의 팔이 와스스 부서졌다. 조금 전 팔꿈치까지 잘렸던 것과는 확연히 달랐다. 시빌은 어깨 바로 아래까지 잘려, 파스스 모래처럼 흩어지는 팔을 내려다봤다. 오른팔 하나는 확실하게 해먹은 셈이었다.

그리고 그 모래 안에서 잔뜩 부서지고 구겨진 새빨간 것이 떨어졌다. 데미안이었다.

“데미안!”

클로디아가 다시 한번 비명을 올렸다. 데미안의 처참한 모습에 그녀는 꼭 끌어안고 있던 디자이어도 팽개치고 일어났다. 하지만 뭔가가 그녀를 가로막았다. 디자이어였다.

[안 돼, 클로디아!]

“비켜, 디자이어! 이거 치워! 뭐야!”

클로디아는 눈물범벅이 되어 울며 디자이어가 만든 방어막을 두들겼다. 희게 빛나는 빛의 막이 그녀가 두드릴 때마다 텅, 텅, 소리를 냈다. 그 모습을 본 시빌이 빙그레 웃었다. 그는 어깨 아래부터 잘린 부분에서 피를 철철 흘리고 있었으나 표정만은 평온했다.

그리고 시빌의 발밑에는, 엉망진창이 된 데미안이 있었다. 숨도 쉬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클로디아는 미친 사람처럼 벽을 때렸다.

“데미안! 일어나요! 제발, 디자이어!”

“클로디아, 제발! 이성을 찾아!”

헬렌이 그녀의 어깨를 끌어안고 말렸다. 그러나 어디서 그런 힘이 났는지, 클로디아는 헬렌을 뿌리쳤다. 포폰까지 엉겁결에 클로디아의 허리를 감고 말렸으나 도무지 역부족이었다. 자그마하고 동그란 막 안에서 울면서 이쪽으로 오려 발버둥 치는 그녀를 보고, 피투성이가 된 시빌은 여상하게 물었다.

“클로디아. 혹시 데미안이 아니었다면 당신은 나를 좋아했을까요?”

석양이 비추는 항구에서 비슷한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눈앞에 선 청년의 말투는 그때와 다르지 않았다. 평온했으며 다정하고 온기를 담고 있었다.

하지만 클로디아는 도무지 그때처럼 답할 수는 없었다. 그녀는 울부짖으며 마주 소리 질렀다.

“무슨 미친 소리예요, 그게!”

“좋아해요, 클로디아.”

그쯤 해서 클로디아는 자신이 냉정을 되찾아야 할 때라는 것을 직감했다. 안 그러면 저 미친 자에게 더 휘말릴지도 모른다. 데미안의 경고가 뒤늦게 그녀를 관통했다. 말려들지 말라고.

“놔.”

제 어깨를 붙잡은 헬렌을 밀어내고 그녀는 앞을 똑바로 노려봤다. 눈물을 철철 흘리면서도 자신을 쳐다보는 클로디아를 향해 시빌은 수줍은 듯 어깨를 한번 느리게 으쓱했다.

“당신의 선함, 아름다움, 순진함을 좋아해요.”

그녀는 이런 상황에도 익숙했다. 비상상황에 인질을 교환하려 드는 적에게 대처하는 방법은 그녀가 언제나 배워온 것이었다. 자신을 요구할 경우에 대해서도.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사랑의 고백 비슷한 소리를 하는 ‘마왕’이 대체 어떤 심산으로 저러고 있는지 클로디아는 도저히 알 수 없었다. 데미안을 반쯤 죽여놓고 지금 무슨 소리를 하려는 거야? 그녀는 손등으로 눈물을 닦아내며 위협하듯 읊조렸다.

“개수작하지 말아요. 어차피 나를 원하는 게 아니라, 디자이어를 원하는 거잖아요?”

“이런. 그래서 당신을 좋아하기도 하지만 말이에요, 클로디아. 역시 아니꼽긴 하군요.”

시빌이 낮게 웃으며 발로 데미안을 걷어찼다. 온통 피범벅이 된 데미안은 신음도 없이 그대로 옆으로 넘어갔다. 불에 탄 옷조각이 떨어지며 데미안의 목덜미와 어깨쯤이 드러났다. 핏자국 사이에도 새까맣게 물든 몸이 적나라하게 보였다.

“이렇게 보니 데미안, 당신 모습도 나의 친구들과 별로 다를 바가 없네요.”

뚝뚝 떨어지는 핏방울을 수습할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시빌이 중얼거렸다.

“처음에 동력 지대를 당신들과 함께 벗어났을 때, 그런 어둠에서 벗어났다고 엉엉 우는 당신을 보고 저는 참 아니꼬웠답니다, 클로디아.”

“….”

끝없는 어둠 속에서 벗어나 빛을 보고 울었던 자신의 모습이 클로디아 역시 기억났다. 하지만 그가 도무지 무슨 말을 하려는지 감 잡기 어려웠기에 클로디아는 날 선 말투로 대꾸했다.

“그게 지금이랑 무슨 상관이야?”

시빌은 발끝으로 데미안을 몇 번 툭툭 찼다. 데미안은 여전히 미동도 없었고, 시빌은 희미하게 웃으며 덧붙였다.

“글쎄요, 저도 모르겠네요.”

“…당신이 정말로 나를 좋아하긴 했어요?”

“이런, 클로디아. 저는 정말로 끈질기게 당신에게 구애했던 걸로 아는데요.”

[클로디아, 말려들지 마.]

디자이어가 경고했다. 잠시 후 클로디아는 다시 입을 열었다.

“믿지는 않지만, 시빌. 당신 말마따나 나를 정말로 좋아한다면 오빠의 심장을 돌려줘요.”

“아, 그 시도 좋았어요.”

시빌이 손끝에서 희미하게 빛을 내며 자신의 다친 팔을 감싸 쥐었다. 하지만 피는 쉬이 멈추지 않았다. 그가 혀를 찼다.

“젠장, 디자이어 당신이 입힌 상처 때문에 몸도 잘 낫지 않는군요.”

[…그때의 내가 얼마나 잘했는지 칭찬해주고 싶을 정돈데.]

“어쨌든, 클로디아. 당신은 나를 찼잖아요. 그래놓고 내가 당신을 좋아한다는 이유로 제가 가진 유일한 협상 수단을 요구하다니. 너무해요.”

한쪽 눈을 찡긋하는 그의 표정에 이르러선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시빌은 다시 쥬버린의 심장을 손 위에 불러올렸다. 두근두근 뛰는 붉은 심장을 보며 클로디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클로디아. 쥬버린을 살려줄게요. 그러니 이 심장을 받고 나를 택해요. 둘 다는 안 돼요. 쥬버린을 살리고, 포르투는 버려요. 대신 자르지스 사람들을 구해줘요. 포르투에는 아직 시간이 있잖아요. 2년 정도는 기다릴게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고 이미 경고했어요.”

“아니면 저를 죽이고 쥬버린과 포르투, 그리고 이 남자를 택할 수도 있겠죠. 오랜 싸움 끝에 어찌어찌 내 심장을 찌르고 아무르를 가지고 돌아가 세계를 구한 공주님이 되는 거예요.”

시빌이 한 발짝 물러섰다. 이제 그의 팔에서 떨어지는 피는 검은색에 가까워져 있었다. 그는 평이한 어조로 되물었다.

“하지만 당신이 정말로 그럴 수 있을까요? 땅요정과 유니콘, 요정과 숲 거인, 그리고 나를 잊을 수 있겠어요? 당신은 과연 티아라를 쓰고 행복하게 웃으며 결혼할 수 있을까요?”

아까와 같은 물음이었다. 포르투에 평화를 가지고 오는 대신, 여전히 고통스러운 자르지스를 잊을 수 있겠느냐는 물음.

클로디아는 눈물을 억지로 닦고는 거칠게 내뱉었다.

“사람 우습게 봐도 유분수지….”

하지만 확답은 아니었다. 클로디아는 혼란스러웠고, 도저히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랐다.

시빌은 그녀의 말에 킥킥 웃다가 “아야….” 하고 중얼거렸다. 팔에서 검은 피가 덩어리져 떨어지는 것이 아무래도 그쪽 또한 큰 부상을 입은 것 같았다. 시빌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다가 입을 열었다.

“당신, 내 흔적을 가지고 있죠?”

시빌이 손가락으로 그녀를 가리켰다. 클로디아는 말하지 않아도 그것이 데포포에게 받았던 마왕의 돌을 가리킨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시빌이 눈을 가늘게 뜨며 미소 지었다.

“마음이 정해지면 내게로 와요. 그것이 당신을 내게로 인도할 테니까.”

그리고 시빌은 성큼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훅, 하는 사이 사라졌다. 정말로 눈 깜짝할 사이였고, 클로디아는 어안이벙벙해졌다.

시빌이 도망쳤다는 것을 클로디아는 잠시 후에야 알아챘다. 그녀는 그 직후 데미안에게로 뛰어갔고, 그의 목숨이 무사한 것을 확인한 뒤에서야 뒤늦게 찾아온 끝 간 데 없는 분노를 다스리느라 한참을 고생해야 했다.



 

***



 

데미안이 시빌의 팔을 잘라버리는 것이 조금만 늦었어도 아마 그는 그대로 시빌의 거대한 팔 안에서 구겨졌을 것이다. 데미안의 상태는 형편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목숨만은 무사했다.

세 사람은 여전히 그 공동에 있었다. 클로디아는 당장이라도 밖으로 나가고 싶었지만, 심하게 다친 데미안을 데리고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갈 순 없었다. 데미안은 의식을 찾지 못하고 있었고, 결국 헬렌은 이 자리에서 머무르기를 결정했다.

“여기서 쉬자. 아까 시빌이 우리를 죽이려고 했다면 충분히 그럴 수 있었어. 나간다고 해도 별로 다른 상황은 아닐 거야.”

헬렌의 말이 맞았다. 시빌은 디자이어의 도움을 필요로 했고, 그러기 위해 클로디아를 내버려 뒀다. 클로디아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도 헬렌이 있어 다행이라고 느꼈다. 그녀는 클로디아가 감정적으로 동요하고 있을 때, 옆에서 모든 걸 지켜보면서도 오히려 반대로 가장 상황에 알맞은 일이 뭔지 빠르게 판단하고 있었다.

지금도 헬렌은 가장 먼저 포폰의 머리에 뒤집어씌웠던 냄비에 물을 끓여 데미안의 몸을 닦아냈다. 데미안의 부상은 극도로 심했고, 디자이어는 데미안의 옆에서 회복을 도왔다. 하지만 저주 때문에 회복이 더뎠다.

포폰은 시무룩하게 저편에 앉아서 이쪽에 손을 보태지도 못하고 있었다. 시빌과 일행이 주고받았던 내용들이 충격으로 다가온 나머지, 클로디아를 적으로 생각해야 하는지 친구로 대해야 하는지 헛갈리는 모양이었다.

클로디아는 포폰에게 몇 번 말을 걸려다가 포기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도무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헬렌은 그 두 사람을 얌전히 내버려 두지 않았다. 더운물에 깨끗하게 헹군 천을 짠 헬렌은 클로디아에게 그 천을 쥐여 주었다.

“클로디아, 너는 이걸로 데미안 상처를 마저 닦아줘. 그리고 포폰!”

“어… 어?”

“너는 이리 와. 지금 바빠. 식재료를 좀 다듬어 줘.”

포폰이 그제야 눈치를 보면서 쭈뼛쭈뼛 다가왔다. 헬렌은 가방에서 언제 챙겨뒀는지 모를 마른 육포들을 꺼냈다.

“쭉쭉 찢어서 물에 불려야 해. 최대한 잘게 찢어. 알았지?”

“으응….”

포폰이 흘깃 클로디아 쪽을 바라봤다. 클로디아는 애매한 표정으로 웃어 보였다. 포폰은 그 미소에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언제나 살랑살랑 흔들리던 꼬리도 축 처져서 엉덩이 사이에 형편없이 깔려 있었다.

클로디아는 나직하게 한숨을 쉬고 데미안의 팔을 닦으려고 나섰다.

그래도 제법 수습된 모습이었다. 처음에는 팔의 뼈가 다 튀어나올 정도로 처참했던 상처는, 디자이어가 데미안의 옆에 붙어 애를 쓰면서 그나마 좀 나아진 모양이었다.

하지만 말이 나아졌지, 그래도 큰 상처를 입었다는 것은 변하지 않은 채다. 클로디아는 데미안의 오른팔을 내려다보고 또다시 눈물이 나려는 것을 애써 눌렀다. 헬렌과 함께 그의 갑옷을 벗겼을 때 봤던 처참한 광경이 다시 생각나서다.

데미안은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상처를 입은 곳이 입지 않은 곳보다 많았다.

“디자이어. 좀 괜찮니?”

[나는 괜찮아. 그런데 데미안이…. 쉽게 낫질 않네.]

기가 죽은 디자이어의 말이 뒤를 이었다. 그녀는 괜찮다는 뜻을 담아 손가락 끝으로 디자이어를 가볍게 콩콩 두들겼다. 다독이는 듯한 몸짓이었다. 웅웅, 디자이어에서 나는 파란 빛이 일렁이며 클로디아에게 답했다.

[…미안해, 클로디아.]

“뭐가?”

[내가 널…. 이런 곳에 데려와서.]

“무슨 말이야.”

클로디아는 디자이어의 말에 작게 웃으려고 했지만, 도저히 웃음은 나오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눈을 내리깔고 디자이어를 내려다봤다. 디자이어는 축 처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나는…. 그때 시빌을 언뜻 보고 네가 아니면 마왕을 죽이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어.]

“아, 그 얘기였구나.”

시빌은 클로디아와 디자이어가 아니어도, 자르지스에서라면 자신을 누구든 죽일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니까, 마왕 토벌은 클로디아가 아닌 다른 사람이 왔어도 됐단 이야기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아마 예전의 클로디아였다면 그 이야기를 들은 순간 당장 그 자리에서 방방 뛰면서 억울하고 분하고 괜한 고생을 했다고 속상해할 만한 이야기였지만…. 클로디아는 도무지 자신이 지금 이곳에 있는 것이 부조리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자신이 아니라 데미안 혼자서 여기에 왔다면 어땠을까. 그라면 속전속결로 시빌을 처치했겠지. 아니, 속전속결이 아니었다 해도…. 아마 이런 이야기들은 영원히 클로디아의 귀에 들어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자신이 자르지스로 온 것이야말로 필요한 일이 아니었을까.

“아냐, 디자이어. 괜찮아. 너도 그때는 몰랐잖아.”

[….]

“그리고….”

내가 여기에 와서 다행이야.

그런 말은 죽어도 입에서 나오지 않았다. 데미안의 팔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클로디아는 물끄러미 그를 내려다봤다. 그전까지는 시빌을 압박하고 몰아붙이며 공세를 더하고 있던 데미안은 명백히 어느 순간 흔들렸다. 그리고 클로디아는 그 원인이 자신이 아니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다.

그때, 데미안이 가늘게 눈을 떴다.

클로디아는 놀라 데미안을 내려다봤다. 데미안은 흐린 눈으로 주변을 보고는 클로디아에게로 시선을 향했다. 검푸른 눈동자가 두어 번 떨리는 것을 보고서야 클로디아는 데미안이 정말로 정신을 차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데미안!”

[뭐야. 데미안 깼어?!]

“깼다고?!”

클로디아는 비명을 지르듯 데미안의 이름을 불렀고, 디자이어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 말을 들은 헬렌과 포폰도 놀라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데미안은 이마를 찌푸리고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녀를 바라봤다. 그의 눈동자는 놀란 듯 커져 있었고, 클로디아는 갑자기 불안해졌다.

‘왜 그런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지?’

그래서 그녀는 발작적으로 데미안의 가슴을 붙들고 캐물었다. 힘겹게 눈을 뜬 데미안이 고통스럽지 않도록, 하지만 그가 도로 정신을 잃지는 않기를 바라며.

“데미안, 괜찮아요? 정신 차릴 수 있겠어요?”

“…누구….”

“누구냐니.”

클로디아는 순간 식겁해 저도 모르게 헬렌 쪽을 바라봤다. 헬렌도 당황한 듯, 소금을 꺼내던 손을 멈추고 중얼거렸다.

“설마….”

크게 다친 사람이 기억을 잃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 있었다. 설마, 이런 순간에 데미안이? 시빌에게 다친 것, 그리고 그가 흘린 피의 양을 생각하면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하필이면 이럴 때…!

클로디아는 정말 울 것 같은 기분이 돼서 데미안에게 매달렸다.

“데미안, 날 못 알아보겠어요? 나예요!”

데미안이 이마를 찡그리며 그녀를 뿌리치려는 듯한 몸짓을 했다. 클로디아의 눈가가 새빨개졌을 때, 데미안이 힘겹게 말을 이었다.

“…로드는 나를 그렇게 부르지 않….”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클로디아는 자신이 그를 뭐라고 불렀는지 잠시 돌이켜보고, 곧 그가 왜 그런 소리를 하는지 알아차렸다. 항상 그를 수르 알파라고 부르던 클로디아는 저도 모르게 그의 이름을 부르짖고 있었던 것이다.

이쪽을 난감하게 쳐다보고 있던 헬렌이 얼굴을 잔뜩 부풀렸다. 틀림없이 웃음을 참는 것이리라. 포폰은 아예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 웃는 것은 적절하지 않긴 했다. 그렇긴 한데….

큼. 큼. 순식간에 목부터 머리끝까지 새빨개진 얼굴로 헛기침한 클로디아는 어색하게 입을 열었다.

“…수르 알파. 저 맞아요. 미안해요. 나도 모르게 실수했어요. 너무 놀라서….”

잠시 가늘어졌던 눈은 이쪽을 한참이나 훑어본 후에야 안심하듯이 가라앉았다. 그동안 클로디아는 어쩐지 안절부절못하며 눈알을 굴려야 했다.

이내 데미안이 길게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로드.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아니에요. 몸은 괜찮아요? 다친 곳은….”

“저는 괜찮습니다. 그저 순간 방심해…. 그자를 놓쳤습니다.”

[일어나지 마, 데미안. 너 상태 심각해.]

막 일어나려던 그를 제지한 건 디자이어였다. 디자이어는 보기 드물게 강력한 목소리로 말했으나 데미안은 아랑곳하지 않고 일어나려 했고, 클로디아는 엄격한 표정을 지으며 데미안의 이마를 눌러야 했다. 몇 번 용을 쓰던 데미안은 결국 포기하고 다시 누웠다.

[지금 눈을 뜬 것도 기적이야. 누워. 나 지금 다른 데 용 쓸 여력 없어. 널 치료하는 데만도 벅차다고.]

“디자이어…. 저는 괜찮습니다.”

[뭐가 괜찮아? 지금 네게 난 상처나 살펴보고 그런 말 할래? 아니, 일어나지 말라고! 안 살펴봐도 돼!]

한동안 소요가 일어난 뒤에야 데미안은 간신히 도로 누웠다. 그동안 눈치를 보던 포폰이 헬렌에게 다 찢은 육포 조각들을 모아 내밀었고, 헬렌은 한숨을 쉬며 육포 조각들을 기름에 살짝 볶기 시작했다.

“환자가 식사나 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

헬렌이 작게 중얼거렸다. 그러나 그 말의 내용과는 달리, 희한하게도 클로디아는 겨우 그제야 안심이 되기 시작했다. 데미안이 깨고, 시덥잖은 소리에 다들 웃음을 참는다. 그리고 음식을 하는 냄새까지 풍기기 시작하니 여태까지 잔뜩 긴장해 있던 어깨가 풀린 것이다.

“하아….”

“로드는 다치신 곳이….”

그녀가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자마자 데미안이 다시 물어왔다. 클로디아는 어이가 없어서 뾰족하게 대꾸했다.

“저는 아주 멀쩡해요. 걱정하지 말아요. 당신이나 챙겨요.”

“…죄송합니다.”

데미안이 풀 죽은 목소리로 답했다. 클로디아는 대답 대신 손에 쥔 수건으로 괜히 데미안의 팔을 북북 문질렀다. 데미안은 이마를 조금 찡그릴 뿐, 움직이지 않으려 애쓰는 것이 눈에 보여 클로디아는 어쩐지 속이 더 상했다.

간단한 식사를 마치자 몸에 겨우 기운이 났다. 헬렌 덕분일 것이다. 그녀는 가볍게 그릇을 챙겨 포폰의 어깨를 문지르며 “같이 그릇이나 씻으러 갈까?”라며 자리를 떴다. 클로디아와 데미안에게 대화를 할 시간을 주려는 것일 테다. 어른의 배려라는 건 헬렌 같은 사람에게 쓸 수 있는 말일 거라고 클로디아는 생각했다.

[시빌은 물러갔어.]

“그냥 물러가진 않았겠지요.”

[…쥬버린의 심장을 돌려줄 테니 포르투를 포기하라고 했어. 그리고 나로 하여금 자르지스를 하늘에 띄우게 해 달라고….]

디자이어가 말끝을 흐렸다. 데미안은 더이상 묻지 않았다. 그도 아마 시빌이 왜 물러갔는지 충분히 짐작하고 있을 것이다. 시빌은 데미안을 일부러라도 더 손대지 않고 놔뒀다. 클로디아가 어떤 사람인지 아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데미안이 정말로 죽는다면, 클로디아는 시빌과 조금의 타협도 하지 않았을 테니까….]

클로디아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디자이어가 중얼거렸다. 클로디아는 입을 다물었다.

그녀가 보는 앞에서 시빌이 만약 정말로 데미안을 죽였다면, 그녀는 울면서 시빌에게 굴복했을까? 디자이어의 말대로였다. 거기까지 시빌이 계산했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클로디아의 머리가 또다시 복잡해졌다.

“타협하지 마십시오.”

“…데미안.”

데미안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올려다봤다. 그가 그녀를 올려보는 것은 워낙 흔한 일이었지만, 이렇듯 그가 약해져 있는 모습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기에 클로디아는 심란한 속을 어찌하지 못했다. 데미안은 그녀의 마음을 다 안다는 듯, 착잡한 표정이었다.

“시빌은 말장난을 치고 있습니다. 애초부터 로드께서는 포르투와 자르지스 중 하나를 택할 이유가 없습니다.”

“….”

“그가 자르지스를 대변하듯 로드께서는 포르투의 대변자이자 보호자입니다. 포르투 사람들이 그에게 당한 고통 역시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데미안이 말할 때마다 디자이어가 세게 반짝거렸다. 아마 무리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클로디아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데미안의 말이 틀린 것 하나 없었으나, 그녀에게는 고통스러운 말임은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데미안 또한 어쩐지 자신의 말을 의심하는 듯한 어조였다. 클로디아는 말없이 데미안을 내려다보다가, 그의 손을 잡았다. 단단하고 거친 손가락 사이로 자신의 손가락을 끼워 넣어 잡자, 데미안이 움찔했다.

그녀는 낮은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그전에,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요.”

“말씀하십시오.”

“시빌이 말한 것들은 너무 많아서 다 기억하기조차 어려워요. 하지만 한 가지, 알 수 없는 게 있어요. 그가 왜 내 아버지의 일에 대해 그렇게 말하죠?”

데미안이 움찔했다. 클로디아는 어째서 그의 공세가 무너졌는지 알 것 같았다. 뭔가 연관이 있다. 시빌이 선대 포르투 왕에 대해 말한 순간, 데미안은 보기 드물게 동요했으며 끝내 시빌에게 무너졌다.

‘당신 아버지가 왜 그렇게 됐는지는 알아요?’

‘정말 당신, 아는 게 없구나.’

클로디아는 이 여행을 시작한 이후 줄곧 남들에게 바보 취급받아왔다. 이제는 익숙하다고도 할 수 있을 정도로 잦았지만, 괜찮았다. 자신이 포르투에서 아무것도 모르고 살았던 세월은 분명히 존재했고, 그녀는 남들의 바보 취급에 분개하지 않았다. 그저 다음에는 그러지 않으면 된다고, 웃고 털어버리려 애써왔다.

자르지스의 일? 모를 수 있었다. 오히려 아는 사람이 더 희귀할 정도로 고립돼온 섬이었으니까. 그래서 그녀는 자신이 모르는 것이 있어도 놀라지 않으려 애썼고, 다만 안타까워했다.

하지만 이건 달랐다. 제 가족의 일이었다. 이 먼 자르지스의 시빌조차 아는, 어떤 일. 하지만 자신은 모르는 일.

클로디아는 데미안의 동요를 그냥 보아 넘기지 않았다. 자신만 모르는 뭔가가 있었다.

“내가 모르는 게 더 남아 있나요? 데미안.”

“…로드. 나중에….”

“지금 말해요. 내 아버지는 자르지스와 대체 무슨 연관이 있기에 시빌이 저런 소리를 하는 거죠?”

클로디아는 잠시 침묵했다 덧붙였다.

“내가 포르투의 유일한 왕위 계승권자로서 수르 알파를 부르기 전에 답해줘요. 내 친구로서.”

더이상 자신에게서 멀어지지 말라는 일종의 경고였다. 지금 데미안이 대답을 회피하려 한다면 클로디아는 포르투의 왕족으로서 기사에게 요구할 수 있는 충성을 요구할 것이다. 거기에는 진실에 대해 감추지 않는다는 서약도 포함돼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았다. 기사이기 전에 친구로서 제발 입을 열어달라는 클로디아의 간청에 데미안은 한참 동안 입을 닫고 있다가, 결국 말문을 열었다.

“…사고였습니다.”

“무엇이요?”

“선왕 폐하께서는 사고를 당해 병을 얻으셨습니다.”

“….”

어릴 때라 잘 기억은 나지 않는다. 쥬버린은 어느 날 아바마마가 아프다는 이야기를 하며 클로디아에게 말 잘 듣고 공부 열심히 하라고 부탁했다. 아바마마는 잠깐 감기에 걸리셨어. 하지만 클로디아가 열심히 공부하면 아바마마도 곧 쾌유하실 거야, 라는 말에 클로디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본성에는 접근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린애의 인내심에도 한계가 있었다. 클로디아는 호탕하게 웃으며 자신을 번쩍번쩍 들어 올리는 아바마마가 보고 싶었고, 울며 떼를 쓰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자고 일어나니 쥬버린이 아바마마를 대신해 일한다는 이야기를 노바라가 해 주었다.

아바마마께서는 어린아이가 되셨어요. 너무 놀라시면 안 돼요.

자초지종이나 그때의 상황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노바라의 손에 이끌려 자신의 아버지를 보러 갔고, 언제나 웃으며 자신을 안아오던 커다란 아버지는 더이상 거기 없었던 것. 그게 너무 이상해서 울음을 터트렸던 것. 그 뒤로도 종종 찾아갔지만, 자신을 알아보기는커녕 따뜻한 햇볕 아래에서 꾸벅꾸벅 졸고만 있는 모습을 보다 결국은 말 한마디 걸지 못하고 돌아왔던 기억들만 있다.

괜찮아. 이제 와서 그게 사고였다고 해도 놀라지 않을 수 있어. 괜찮아. 지금 봐. 별로 안 놀랐잖아?

클로디아는 그렇게 생각하며 낮게 물었다.

“어떤 사고였는데요?”

“…동력 지대에서, 사고를….”

“어떤 사고였냐고 묻고 있어요, 데미안. 어디서 사고를 당했는지 묻는 게 아녜요.”

[클로디아. 재촉하지 마. 응? 데미안도 지금 아프니까….]

그러나 어느새 클로디아의 말투에는 날이 서 있었다. 디자이어가 불안한 듯 그녀를 달랬다. 데미안은 눈을 꽉 감은 채로 입을 열었다.

“…포르투 기사단은 대륙에서 일어나는 각종 사고와 재해를 막기 위해 원정을 다닙니다. 동력 지대도 예외는 아닙니다. 저는 갓 기사가 되었다는 이유로 가장 가까운 동력 지대 원정을 배정받았습니다. 제 첫 임무였고, 미다프 경과 단둘일 예정이었습니다.”

“….”

“폐하께서 합류하시기 전까지는요.”

포르투의 왕은 변덕스러운 사람이었다. 정무를 보다가도 갑작스레 마음이 변해 공부하는 아들딸을 보러 오기 일쑤였다. 클로디아는 언제나 까르륵 웃으며 그를 환영했기에 제 아버지의 성향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그가 갑작스레 동력 지대에 수르 미다프와 그 양자를 따라나섰더라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폐하께서는, 동력 지대에서 머리를 다치셨습니다.”

“…습격이었나요?”

수르 미다프가 동행한 차다. 어떤 무도한 자였는지는 몰라도 꽤 대단한 습격이었음이 틀림없다고 클로디아는 생각했다. 그러나 뒤이은 데미안의 대답이 그녀를 흔들었다.

“아니오. 제 실수 때문입니다.”

데미안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디자이어가 [일어나지 마, 데미안!]하고 만류했으나 그는 이를 악물고 일어났다. 클로디아는 그가 뭘 하는지 가만히 지켜봤다. 데미안은 그녀의 앞에 몸을 세워 앉았다. 그저 일어난 것뿐인데 식은땀이 나는 것이, 상처만 겨우 아물었을 뿐 안쪽은 그리 멀쩡하지 않은 게 분명했다.

데미안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는 동력 지대 출신입니다.”

“알아요.”

어렴풋이는 알고 있었다. 데미안은 한 번도 직접 그녀에게 말해준 적 없었으나, 그녀가 데미안과 파혼한 후 클로디아의 비위를 맞추려던 자들이 지겹도록 속삭였기에. 하지만 그 이야기가 왜 나오는 걸까. 클로디아는 희한하게도 점점 차분해지는 것을 느꼈다. 데미안의 표정에서 죄책감을 읽었기 때문이다. 그가 지금부터 할 말의 내용을, 클로디아는 어쩐지 알 것만 같았다.

“그날의 원정에 제가 동원된 이유는 포르투에서 가깝다는 것 외에도 저 자신이 동력 지대 출신이라는 것도 있었습니다. 동력 지대의 어둠은 어지간한 기사들에게도 버거운 것이니까요. 하지만…. 저는 기대에 보답하기는커녕 어둠 속에서….”

데미안은 말을 멈췄다. 손바닥을 접었다 폈다. 주먹을 쥐었다가 다시 힘을 풀길 반복하고 있는 그를 보며 클로디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뭔가 이유가 있을 거라고 그간 생각해오긴 했다. 지금의 데미안은 그녀가 봐온 것 중 가장 약한 모습이었다. 이렇듯 그가 작은 목소리로 주저하는 모습을 그녀는 본 적이 없었다.

한참 후에야 데미안은 입을 겨우 열었다.

“…폐하께서는 저를 보호하시다가 도리어 제가 잘못 휘두른 칼에 다치셨습니다. 그리고, 병을 얻으셨습니다.”

“….”

[….]

모든 실마리가 풀리는 기분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자신만 보면 고개를 돌리던 데미안 알파. 제가 아무리 매달려도 자격이 없다는 말만 반복하던 그의 알 수 없는 죄책감이 어디서 기원했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그런데,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그녀는 할 말이 없었고, 디자이어 또한 마찬가지였다. 데미안과는 사뭇 달랐다. 할 말을 찾지 못하는 두 사람과 대조적으로, 데미안은 할 말은 많은데 그중에서 어떤 말부터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모양새였다.

데미안은 이를 바드득 갈았다. 분하거나 화가 나서가 아니었다. 전신에 힘이 너무 들어가서였다.

결국 그가 택한 것은 사과였다.

“죄송합니다….”

그 순간 클로디아는 부정적인 감정이 갑자기 확 치밀어오르는 것을 알아차렸다. 제 가슴 아래쪽 어딘가에서 목구멍까지 치받은 감정. 여태까지 그녀가 이 남자를 대하며 부정적인 감정을 느낀 것은 수도 없었다. 다만 지금 그녀가 절감하고 있는 것은, 그간의 어떤 감정과도 다른 종류였다. 슬픔도, 안타까움도, 분노도, 절망도 아니었다.

지긋지긋함이었다.

클로디아는 이런 그림을 아주 잘 알고 있다. 자신이 그에게 뭔가 따져 물으면, 데미안은 결국 사과로 모든 것을 종결했다. 저는 괜찮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숙인다. 익숙한 검은 머리카락이 찰랑거리며 함께 밑으로 떨어지면, 그녀의 시야에는 고개를 숙인 데미안의 머리 꼭대기만 보이곤 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앉기는 했지만, 그는 땅으로 꺼질세라 머리를 숙이고 있었다.

몇십번이나 본 그의 정수리. 클로디아는 이제 그런 건 그만 보고 싶었다.

제게 고개를 숙이는 모습이 아니라, 그의 얼굴이 보고 싶었다. 길게 기른 머리카락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 검푸른 눈, 고집스레 다물린 입술과 단단한 턱 같은 것들.

아마 그 얼굴은 지금 죽고 싶은 표정이리라.

하지만 그런 것을 보기 위해 여기까지 온 게 아니다. 그에게 돌이키지도 못할 일을 몇 년이나 지나 사과받기 위함도 아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 몰랐던 일이 여상히 받아들여지는 것도 아니었다.

클로디아는 찰랑찰랑 차오른 눈물을 삼키기 위해 허공을 바라봤다. 눈물이 흐르지 않길 바라서였다.

아바마마.

미안해요. 클로디아는 몰랐답니다.

클로디아가 몰랐던 게 너무 많아요. 미안해요.

클로디아는 선대 왕을 생각했다. 자신을 보면 크게 벌어지던 입과 환하게 웃던 얼굴. 자신을 낳다 목숨이 다한 왕비의 부재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공주를 사랑하고 아꼈던 부왕은 지금쯤 뭘 하고 있을까. 그날 이후, 부왕은 대부분의 경우 볕이 좋은 잔디밭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지금도 아바마마는 졸고 계실까?’

모를 일이었다. 자신에게 천리안이 있는 것도 아니다. 갑자기 미치도록 부왕이 보고 싶었으나 그녀는 지금 가장 중요한 일이 뭔지 알고 있었다.

울면서 부왕에게 달려가 버린다면 그다음은 없다. 그럴 수도 없고.

울며 부왕에게 가는 것은 모든 게 끝난 다음의 일이었다.

클로디아는 눈앞의 남자를 바라봤다.

그녀의 앞에 쌓인 일들은 산처럼 많았다. 생각할 것도 많았다. 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차근차근,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부터 하는 것이 순서이기 마련이다. 거창한 것보다는 작은 것부터.

그녀는 지금 당장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작은 일이 뭘까 고민했다. 답은 금세 나왔다.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침묵을 지키고 있는 데미안이 이쪽을 보게 하는 것.

“…고개 들어요, 수르 알파.”

“….”

“당신에게 사과를 들으려고 물은 것이 아니에요. 두 번 말하게 하지 말아요.”

그 말에 데미안이 얼굴을 들었다. 혼란으로 일렁거리고 있는 눈을 보며 클로디아는 말을 이었다.

“몇 년 전에 끝난 일을 가지고 지금 이 순간 제게 사과해봐야 해결되는 일은 아무것도 없어요. 그러니까 내 말에 대답해요. 고개 숙이지 말고.”

“…예.”

“부왕께서는 종종 포르투 기사단의 원정에 동참하곤 하셨어요. 언제나 사고를 걱정해 대신들이 읍소했던 기억이 내게도 있죠. 내가 궁금한 건 부왕께서 왜 다쳤느냐가 아니에요. 그 일을 왜 시빌이 언급했는지예요.”

클로디아는 감정에 휩쓸리지 않으려 애썼다. 시빌이 그렇게 사라지고서부터였다. 자신이 모르는 일들은 너무나 많았고, 그것에 일일이 매달려 감정적으로 반응한다면 그녀는 자르지스든 포르투든 구하기도 전에 아마 가루가 되어 흩날려버릴 것이다.

무슨 일이든, 알아야 했다. 시빌이 말하는 방식은 클로디아를 너무나 크게 흔들어놨다. 자신이 모르는 게 있다면 적어도 데미안을 통해 듣고 싶었다. 이런 식으로는 더이상 버티기 어렵다는 걸 클로디아도 알고 있었다.

데미안은 주저하다가 입을 열었다.

“…시빌이 그것을 알고 말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추측한 것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예.”

“포르투 기사단의 창설과 원정의 주목적은 평화 유지라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조금 다릅니다. 수르들은 수르의 호칭을 받을 때, 평화 유지가 아닌 대륙의 수복을 맹세합니다.”

“….”

“폐하께서는 종종 그것에 대해 궁금해하셨습니다. 포르투 기사단의 원정이 무엇을 수복하는지요. 하지만 아시다시피, 포르투 기사단의 원정은 대부분 훈련이나 각 국가에 보내는 한가로운 문안 인사에 가깝습니다.”

디자이어가 조심스럽게 말을 보탰다.

[그거야 포르투 기사단이 가장 강하니까.]

“포르투 기사단은 대륙에서도 가장 강한 이들을 뽑습니다. 하지만 전쟁은 수백 년 동안 없었고, 폐하께서는 그 강한 기사들이 무엇의 수복을 위해 존재하는지 생각하셨습니다. 그리고…. 동력 지대 원정은 그 첫발이었죠.”

선왕은 대륙에서 ‘수복’되어야 하는 것이 대체 무엇인지 고민했다.

답은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그는 데미안을 보고 동력 지대를 생각해냈다. 동력 지대는 포르투의 이면 같은 곳이었고, 매해 점검을 하고 있었지만, 어둠 속에서 온갖 범죄가 자행되는 곳이었다.

선왕은 동력 지대를 시찰하기로 했다. 적어도 포르투의 그림자를 없앨 수 없다면, 그곳을 어떻게든 해 보기로 작정하고 내려갔다.

그리고, 그는 첫발을 내딛자마자 사고를 당했다.

데미안은 시빌의 말에, 먼 예전의 그 기억을 떠올렸던 것이다.

“포르투 기사단은 미겔 폐하께서 만든 것입니다. 저는 어쩌면 그 대륙 수복이 사실은 자르지스를 두고 한 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이곳에 와서 했습니다.”

선한 미겔은 자신이 망친 부탁을 잊지 않고, 자르지스를 위해 기사단을 안배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선왕의 사고는 완전히 엉뚱한 곳을 짚어낸 결과였다. 데미안은 시빌의 말이, 마치 ‘그게 자르지스를 잊은 자들의 결과’라고 조롱하는 것만 같았다. 나아가 자신을 비난하는 것처럼 들렸다.

게다가, 시빌이 즐거운 듯 떠드는 상대는 바로 클로디아였다. 데미안이 끝까지 제 죄책감을 숨기고 싶은 상대. 그는 마음이 급해졌고, 손이 거칠어졌다. 그리고 끝내 시빌에게 꺾였다.

[…미겔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겠네.]

“…디자이어.”

[있지, 클로디아. 미안해.]

갑작스레 튀어나온 사과에 클로디아는 디자이어를 바라봤다. 디자이어는 풀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도 너에게 말하지 않은 것들이 있었어.]

“…내가 모르는 게 또 있니, 디자이어?”

[…그냥, 내 사소한 거짓말들이야. 들어봐, 클로디아.]

디자이어는 몇백 년 동안 포르투에 머문 정령이었다. 지금은 포르투가 위기 상황이기에 의식을 가지고 형태를 갖추어 그녀의 손에 들려 있지만, 처음에는 그 미겔의 손에 들려 전 대륙을 모험한 친구였다. 그전에는, 자유롭게 세상을 돌아다니던 디자이어는 왜 미겔과 함께했을까.

[나는 미겔을 정말 좋아했어. 그래서 그 애의 실수 같은 것들은 좀, 숨겨주고 싶었어. 그 애가 계속해서 사람들에게 위대한 미겔로 남길 바랐으니까.]

“….”

[그래서 처음에, 죽음의 바다는 용 때문에 생긴 거라고 말하지 않고 신의 뜻이라고 네게 말했어. 미겔은 죽을 때까지 거기에 관해서는 내게 따로 입도 벙끗하지 않았고, 나도 이 여행에서 그게 중요한 건 아니라고 생각했으니까….]

요정들은 디자이어에게 거짓말쟁이의 수식을 주었다. 용살검과 하늘섬의 보호자 뒤에는 거짓말쟁이라는 말도 함께였다. 그때는 그저, 클로디아에게 거짓말을 한 것 때문이라고 생각했었지만…. 디자이어는 작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시빌에 관해서는 정말 몰랐어. 그 마왕이 시빌이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었어.]

“…왜?”

클로디아는 겨우 입을 열어 물었다. 디자이어는 풀이 죽어 답했다.

[포르투가 습격당한 날, 내가 본 마왕은 온통 새까만 가운데 돌처럼 굳은 심장을 가지고 있었어. 그건 아집과 증오, 박탈감과 절망으로 똘똘 뭉쳐 백 년을 넘게 살아온 존재만 가질 수 있는 것이었어. 정령이 절망한다 해도 그보다는 훨씬 나은 모습일 거야. 그런 것들은 사람이 부술 수 없지. 나 정도의 힘을 가진 정령이, 미겔의 후손을 통해서만 부술 수 있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날 데리고 가라고 말한 거야….]

한참의 침묵이 흘렀다. 디자이어의 말이 불러오는 안타까움 때문이었다.

클로디아는 자신이 들은 것들에 관해 생각했다.

자신은 포르투를 지켜야 한다. 그러나 아무르를 되찾고, 포르투를 다시 하늘섬의 영광으로 돌려놓으려면 시빌과 자르지스를 포기해야 한다.

아무것도 모르던 때라면 어떻게든 시빌의 심장에 검을 꽂아 넣으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자신이 도저히 그럴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자르지스를 이대로 놔둔다면, 포르투는 그대로 추락할 것이다.

‘생각을 해 보자, 생각을….’

그녀는 초조하게 무릎을 두드렸다.

시빌은 아무르와 디자이어로 하여금 대륙 위에 띄워 죽음의 바다에서 자르지스를 분리할 셈이었다.

‘방법이 없을까.’

진퇴양난이었다. 하나를 선택하면 하나가 파멸하는 양상. 하지만 여기서 울며 주저앉고 싶지 않았다.

‘네가 누구인지를 생각하렴, 클로디아. 그러면 마음이 가라앉고, 곧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있게 된단다.’

아, 빌어먹을 오라버니.

클로디아는 쥬버린이 제게 어떤 짓을 했는지는 차치하고, 어쨌든 그가 자신의 인생에서 얼마나 큰 존재인지 이럴 때야말로 절감했다. 결정적일 때는 요만큼도 도움이 안 되는 오라버니가 한 말에 지금도 매달려 있다는 사실이 우습기도 하고 서글프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는 조용히 머릿속을 정리했다.

그녀는 클로디아 테 포르투였고, 대륙을 구할 사람은 그녀뿐이었다. 울며 포기한다 해도 대신 그녀의 일을 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윽고 그녀는 눈을 떴다.

“결정했어요.”

“….”

“될지는 모르지만, 둘 다 살려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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