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아나니아시빌리
클로디아는 떨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시빌이 빛을 띄워놓아 환했음에도 불구하고 지독하게 눈이 침침한 기분이었다. 시빌은 클로디아의 말을 들은 뒤에도 웃음을 지우지 않았다. 정확히는 멎어 있었다. 시빌이 두어 번 눈썹을 깜박거리지 않았다면 정말로 시간이 멈춘 것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포르투를 습격한 마왕은 붉은 머리와 새카만 피부를 가지고 있었다고 말했다. 디자이어는 마왕의 손아귀에서 쥬버린을 구해내는 데 급급해서 마왕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물론 단지 그런 것들 때문에 그를 마왕이라고 생각한 건 아니었다. 요정의 동굴을 나온 다음 있었던 일들이 계기였다. 데미안에 대한 기억은 살아났음에도 남아 있는 구멍은 끊임없이 클로디아의 무의식 저편에서 그녀를 건드렸다.
사람의 기억에는 하나쯤 존재하기 마련인 구멍들. 혹은 석연치 않은 부분들. 사람의 인생이 모두 완벽히 맞아떨어지는 것은 아니기에 지나쳤던 것들.
‘하지만 그 구멍이 너무 많다면?’
그 구멍들이 가리키는 것은 오직 한 가지였고, 의심은 형태를 갖췄다.
클로디아는 검을 고쳐 쥐었다. 그녀가 칼을 겨눈 곳은 정확히 시빌의 심장 쪽이었다. 지금 손에 쥔 검이 디자이어가 아니라는 점이 가장 애석한 부분이었지만, 클로디아는 자신이 지금 시빌의 심장을 찌를 수 있다고 확신하지도 않았다.
시빌은 여전히 빙그레 웃으며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이윽고,
“아하하.”
고요한 대치는 시빌이 소리 내어 웃음으로서 깨졌다. 시빌은 정말로 웃기다는 듯, 환하게 눈을 접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 말 정말 웃기네요, 클로디아.”
“…전 안 웃긴데요.”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어요? 제가 어떻게 마왕이라고 생각할 수 있어요? 말도 안 돼요.”
“….”
“-라고 말해야 할까요?”
마법사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공기가 빠르게 바뀌었다. 클로디아는 방금 전 자신이 느꼈던 침침함이 이제는 무게가 되어 제 어깨를 짓누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시빌이 줄곧 일행들을 위해 달구었던 마력장이 깨어진 것이다.
금세 팔이 벌벌 떨렸다. 이런 나약함이라니. 마왕의 가슴에 칼을 겨누는 순간을 그간 끝없이 상상해왔지만, 클로디아는 지금 이 순간 자신이 약하다는 것을 그 어느 때보다 더 지독하게 절감했다.
“…제 추측이 틀렸다면 그냥 그렇게 말해주세요, 시빌.”
클로디아는 간신히 힘겹게 입을 뗐다.
“정말 웃긴다고 말하면서, 정작 조금도 웃기지 않은 눈으로 쳐다보지 말고요.”
그녀의 말에 시빌의 말려 올라가 있던 입매마저 축 처졌다. 환하게 웃던 마법사의 얼굴은 이제 완전히 무표정해졌다.
“클로디아.”
“제발요, 시빌.”
클로디아의 말은 숫제 애원이었다. 모든 상황이 당신이 마왕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나는 당신이 마왕이 아니라고 믿고 싶으니, 제발 그렇게 말해주세요, 라는 뜻을 담은 간결한 말들. 그러나 그 말에 시빌은 다시 희미하게 웃었다.
방금전의 경직된 미소와는 사뭇 다른, 장난스러운 웃음이었다. 덥수룩한 빨간머리 밑, 초록색 눈동자가 심술궂게 반짝였다.
“당신도 나도 그 거짓말을 원하죠.”
“….”
“하지만 알잖아요. 이미 드러난 것을 다시 감추려면 수백 배의 노력이 필요해요. 그리고 우리는…. 사실 그런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없는 사이고요.”
시빌의 말이 뜻하는 것은 단 하나였다. 클로디아의 추측이 맞아떨어졌다는 것. 클로디아는 절망에 잠기는 동시에 상대를 경계하느라 무진 애를 썼다. 하지만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왜, 어째서?’
입안에 맴도는 말은 한도 끝도 없이 많았다.
당신이 진짜 마왕이라고요? 어떻게 그 동력 지대의 마법사 길드에 앉아 있었나요? 처음부터 우리를 노렸나요? 왜 우리와 함께했나요? 어째서 여기까지 왔나요?
그러나 그 의문들보다 그녀에게 더 무겁게 내려앉은 말이 있었다.
‘그런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없는 사이’.
모든 관계에는 노력이 필요하다. 서로를 사랑하기 위한 노력, 혹은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노력. 그 노력은 배려이거나, 설득이거나, 가끔은 호의이며 어떤 때는 사랑의 형태를 갖춘다.
하지만 시빌은 그 모든 것이 두 사람에게는 애초부터 필요 없는, 그저 그런 사이일 뿐이었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간의 모든 호의도 거짓이었나요?
나를 좋아한다는 말도 거짓말이었나요?
클로디아의 목구멍 안에서 질문이 차마 튀어나오지 못하고 저들끼리 섞였다가 다시 쪼개지기를 반복했다. 미소와 웃음, 위로와 온기는 위선과 거짓, 가식으로 몇 번이고 바뀌었다가 다시 돌아왔다. 간신히 입안에서 튀어나온 말은 짧았다.
“어떻게….”
그 뒤를 수식할 수 있는 말도 수백 가지는 될 것이다. 어떻게 내게? 어떻게 그럴 수 있었나요? 어떻게, 어떻게…. 시빌은 눈을 가늘게 뜨며 웃었다.
“클로디아 테 포르투.”
“….”
“내 이름을 제대로 알려준 적이 없었죠?”
“시빌….”
“예. 그것도 나의 이름이죠.”
시빌은 바위에 앉은 채 무릎 하나를 모아 몸쪽으로 끌어당겨 안았다. 그 자세는 마치 친구와 한담이라도 늘어놓을 것 같은 모습이었다. 즐거운 듯한 표정의 시빌은 고개를 약간 기울이며 말을 이었다.
“내 이름은 아나니아시빌리.”
거울 공작은 마왕을 아나니아라고 불렀다. 클로디아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남겨두었던 몇 개의 수수께끼 중 하나가 그렇게도 간단하게 풀리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시빌의 말이 이어졌다.
“저는 제가 기억하는 최초의 순간부터 이곳의 왕이었답니다.”
***
미겔 포르투가 떠난 후의 자르지스에서 왕이 될 수 있는 자격은 하나뿐이었다. 마법사.
갈수록 험난해지고 더워지지만 탈출할 길은 요원한 자르지스에서 사람들을 보살피려면 마법 없이는 살 수 없었다. 처음의 자르지스 왕들은 마법사의 도움을 받았으나, 나중에는 마법사들이 왕이 됐다. 자르지스의 왕은 혈통에 의존해서 되는 것이 아니었으므로.
왕들은 자르지스를 위해 수많은 기록을 남겼으며 마법을 물려주었다. 아나니아시빌리는 선대 왕에게서 네 가지를 물려받았다. 이름, 왕좌, 마법, 그리고 반불사.
언제부터 자르지스의 왕들이 늙지 않았는지는 잘 모른다. 다만 너무 많은 마법에 둘러싸여 살다 보니 그랬을 거라고, 아나니아시빌리도 짐작만 했다.
아나니아시빌리는 처음에는 그를 시빌이라고 부르는 자들에게 둘러싸여 살았다. 자르지스의 수많은 마을들이 그렇듯이, 왕이 있는 마을이라고 대단히 훌륭하진 않았으나 시빌에게는 행복한 시절이었다.
시빌은 사람들을 사랑했으며 자르지스를 좋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민둥산의 어딘가에 새로 생기는 화구를 막거나, 몸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이들을 마법으로 보호하는 것이 왕이 하는 일이었다.
늑대의 머리를 가진, 뱀의 허리를 가진 이들이 시빌을 아끼고 사랑했다. 하지만 그들은 늙지 않는 시빌을 두고 모두 죽었다. 가족도, 친구도, 그냥 알던 사람까지도.
그들이 죽은 후에는 시빌은 마을을 나와 용의 화구 안에서 홀로 살았다. 용의 화구에서 살면 불길을 다스리기 편해서라는 이유도 있었지만, 사실 가장 큰 이유는 따로 있었다. 시빌이 애정을 가지고 이름을 외우자마자 죽어버리는 이들이 하도 많아서였다.
수명이 다해서 죽는 자보다 자르지스의 혹독함 때문에 죽는 이들이 더 많았다. 매번 그들의 죽음에 눈물 흘리기에는 시빌이 할 일이 너무 많았다.
***
“그래도 그게 힘들다고 생각하진 않았답니다. 왜였을까요?”
시빌은 공주에게 웃으며 물었다. 공포가 가득한 하늘색 눈동자가 파르르 떨리는 것을 시빌은 즐거운 기분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실수가 많다고는 생각했지만 이렇게나 빨리 결론에 도달할 줄은 몰랐다. 모르는 게 많지만 멍청하진 않은 클로디아가, 진실을 눈치채면 어떻게 할까? 하고 궁금해한 적이 꽤 많았다.
이렇게나 정직하게, 제게 물어올 줄은 정녕 몰랐다.
‘…그래서 당신을 싫어할 수가 없다.’
그렇게 생각하며 시빌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그것보다 덜 힘든 적이 없어서, 세상엔 더 편한 삶도 있다는 것을 아예 몰랐거든요.”
“…시빌.”
“아마 평생 몰랐을 거예요. 그 길이 아니었다면요.”
100년에 한 번 열리는, 자르지스와 대륙을 잇는 길.
그 길이 아니었다면 시빌은 아마 원래 삶이란 그런 것이겠거니 하며 살았을 것이다.
***
오랜 세월에 걸쳐 자르지스를 다스린 왕들은 후대를 위해 정말 많은 기록을 남겼다.
왕들의 서재는 마법사의 서재라기보다는, 자르지스에서의 표류기와 같았다. 혹은 자르지스 보수록이라고 해도 될 것이다. 그만큼 왕들은 삐걱거리는 섬 자르지스를 사람 살 만한 곳으로 만들기 위해 숱한 노력을 기울였다.
예를 들면, 서쪽 해변의 코조개들이 모조리 혀를 늘어트리고 기어 올라와 죽어 있다면 만조를 타고 해변으로 독기가 올라오는 것이니 사람들을 피신시켜라.
화구 근처의 불돌들에 붉은색이 올라와 있다면 그것은 화기가 커지는 것이니 화구 근처에 발걸음을 삼가라…. 같은 기록들이 숱했다. 그 기록들은 방대했으며 조잡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용의 저주는 변덕스러웠으니까.
왕들은 그 기록을 정리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자르지스에서의 하루하루는 길고 고단했으며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는 사건사고들을 처리하기만 해도 하루가, 이틀이, 열흘과 1년이 훌쩍 사라졌다. 하지만 시빌은 반불사를 물려받았다. 그는 잠을 많이 잘 필요가 없었으며 홀로 살기 시작한 다음부터는 시간이 꽤 남았다. 그래서 시빌은 오랜 세월에 걸쳐 그 기록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기록을 발견했다.
100년에 한 번 나타나는 길에 대한 기록.
전대 왕이 그 길을 통해 자르지스에 하루 머물렀던 모험가에 대해 서술해 놓은 것을 발견한 건 순전히 우연이었다. 가끔 흘러들어오는 외부인에 대한 기록은 있었으나 대부분은 바다에 떠밀려온 이들이었고, 그들은 죽음의 바다에서 저주받아 시름시름 앓다 죽기 일쑤였다.
하지만 그 기록 속의 모험가는 달랐다. 단 하루 머무르다가 길이 닫힐 조짐을 발견하고 돌아가 버린 모험가. 시빌은 기록들을 정리하면서, 그에 관련된 기록들은 죄다 따로 분류했다. 이후 그는 그 기록들을 종합해봤고, 그 길이 100년에 한 번 열린다는 결론을 냈다.
그 길이 왜 열리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이유 따윈 중요하지 않았다. 정말로 그런 길이 있는지가 중요했고, 시빌은 그 길이 열리는 시기가 머지않았다는 것을 알아챘다.
달이 크게 뜨는 날, 길은 열렸다. 오후의 노란 햇빛과 함께 열린 길을 걸어 시빌은 길 건너편으로 향했다. 그 건너편에 뭐가 있는지도 모르면서, 홀린 듯이.
그 길을 걸으며 시빌은 놀라운 경험을 했다. 항상 무겁던 어깨가 가벼워졌다. 더워서 가쁘게 쉬어야 하던 숨이 편하게 쉬어졌으며, 발걸음도 편해졌다. 자르지스를 짓누르던 저주받은 용의 마력이 사라지니 당연한 일이었지만 그때는 그것을 몰랐기에 그는 단지 자신이 황홀경을 본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해가 저물 무렵 도착한 아트릭스에서 시빌이 본 광경은, 온 도시를 화려하게 수놓은 빛이었다.
자르지스의 해변은 고요하다. 저주받은 바다에서는 어떤 생물도 제대로 살아 있기 어렵고, 독기를 잔뜩 품은 물고기들을 먹을 새들은 없다. 가끔 정글에서 우짖는 새들이 있을 뿐, 하늘을 수놓는 새떼나 하얀 해변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다. 그런 광경을 평생 보고 살아왔기에 시빌은 원래 바다라는 건 그렇게 우중충한 광경인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분주하게 해변을 오가는 사람들, 귓가를 어지럽히는 바람과 축제를 위해 해변을 온통 차지한 흰 가제보의 행렬, 아름답게 석양을 받아 빛나는 해변과 분홍색과 붉은색으로 물든 하늘. 끼룩거리며 바다 위를 떠다니는 새떼와 입항에 서두르는 수십 척의 배들. 그 뒤로 늘어선 끝없는 건물과 빛. 해변을 뛰어가는 작은 개와 아이들. 변이는커녕 티끌 한 점 찾아볼 수 없는 매끄러운 피부 위에 입 맞추는 연인들.
그날은 하필 모닝문의 축제일이었다. 달이 크게 뜨는 날 중에서도 가장 크게 뜬 날. 사람들의 얼굴 위에 하나같이 꽃핀 웃음.
시빌이 봐온 것들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자르지스에서 시빌이 가장 많이 들었던 것은 비명과 고함이었다. 모닝문의 축제가 열리는 아트릭스에서 시빌의 귀를 가득 메운 것은 웃음소리와 환호였다. 시빌은 혼란스러워졌다.
자르지스로 흘러들어오는 외부인의 존재로 인해 인간들을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인간들이 이렇게 풍요하게 살고 있다고는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시빌은 어느새 축제로 북적거리는 인간들에 떠밀려 시장의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펄떡거리는 생선과 신선한 채소, 배에 실려 막 항구에 도착한 과일들이 넘쳐흘렀다.
시장에서 팔고 있는 빨간 사과에 시선이 닿은 것은 왜였을까. 평범한 사과알조차, 자르지스에서 나는 것보다 몇 배는 컸다. 시빌은 다른 이들이 불돌 대신 주고받는 화폐를 눈여겨본 후 마법으로 만들어냈다. 그리고 천천히 걸어 상점 앞으로 갔다. 입을 열었는데, 순간 다른 소리가 났다.
“까끄륵….”
“…뭐라고?”
그 소리에 다른 데 한눈을 팔고 있던 상점 주인이 이쪽을 바라봤다. 시빌에게 시선을 둔 상점 주인의 얼굴이 험악해졌다. 시빌은 제 목구멍에서 난 소리가 자르지스와 전혀 다른 공기 때문에 지나치게 높아졌다는 것을 금세 알아채고 목에 마력을 둘렀다.
“죄송합니다. 이거 한 알에 얼마를 드리면 됩니까?”
“…안 팔아.”
“예?”
“깜둥이한테는 안 판다고! 꺼져!”
시빌의 눈이 커졌다. 이게 무슨 소릴까. 그러나 곧 알 수 있었다. 상인의 말에 이쪽을 바라본 몇몇 이들의 얼굴이 혐오로 일그러졌기 때문이다. 시빌은 그제야 주변 사람들과 제 피부색이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알아챘다. 하얀 얼굴, 노란 얼굴, 가끔은 햇볕에 타 가무잡잡한 얼굴.
그러나 시빌처럼 새카만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원래도 가무잡잡한 데다가 자르지스의 화구에서 용의 불에 수십 년을 탔던 몸이었다. 아트릭스 사람들과 비슷할 리 없었다. 시빌은 재처럼 새카만 피부를 반사적으로 감추려 애썼다. 하지만 아트릭스 사람들의 시선은 점점 더 험해졌다.
시빌은 뒤로 한 발짝, 두 발짝 물러서다가 이내 뒤돌아 뛰었다. 사람들이 불에 덴 듯 놀라 길을 비켰다. 시빌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시빌에게 닿지 않기 위해서였다. 누군가 중얼거렸다.
“어휴, 자르지스의 마족인 줄 알았네. 당최 저게 뭐람?”
시빌의 이가 딱딱 부딪혔다. 떨리는 몸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아트릭스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시빌은 인간들의 적의를 온몸으로 마주해야 했다. 자르지스에서는 모두가 서로와 달랐기에 경험해본 적 없던 혐오가 시빌 혼자에게로 남김없이 쏟아졌다. 시빌이 걷는 곳마다 사람들은 그를 피했다. 처음에는 아트릭스의 정경에 놀라 모르던 시선들을 의식하고 나니, 더는 얼굴을 드러내고 걸을 수 없었다.
곧 해가 저무니, 밤이 되면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밤에도 낮처럼 환한 도시는 시빌을 감춰주지 않았다. 돈만 내면 식사를 할 수 있다는 식당은 시빌을 받아주지 않았다. 시빌이 어눌한 말로 말을 걸자, 한 남자는 “재수가 없으려니까!” 하며 자리를 떴다.
아트릭스뿐만은 아니었다. 시빌은 마법사였고, 자르지스보다 대륙 쪽이 몇 백 배는 마법을 부리기 편했다. 하늘을 날아 다다른 도시들에서 인간들은 한결같이 시빌을 경원시했다. 모든 왕국의 모든 도시가 모닝문의 축제 때문에 밤새도록 빛을 발하고 있었고, 시빌을 감춰줄 곳은 없었다. 시빌의 검은 피부가 드러날 때마다 사람들의 적의도 드러났다.
결국 시빌은 몸을 띄워 공중으로 날았다. 북적이는 사람들을 피해 홀로 있을 수 있는 곳은 하늘뿐이었다. 반짝반짝하는 도시들은 하늘에서 더 잘 보였다. 커다란 달에 가까이, 더 가까이 날 때마다 지상은 점점 더 새카매졌다. 밤에는 하늘보다 지상이 훨씬 더 어두운 법이다. 새카만 지상을 수놓은 도시의 별빛들. 별을 부수어 가루를 내 뿌리면 저런 광경이 될까.
하지만 시빌은 도무지 그 광경이 아름다워 보이지는 않았다. 대륙의 인간들은 자르지스와는 비교할 수 없는 풍요를 누리고 있는데, 그 풍요를 나누는 데에는 인색하게 굴었다. 자신과 다른 이들에게는 적의를 드러냈으며 아주 조금의 호의를 나누어 주려고도 하지 않는 비루한 삶을 살았다.
‘그렇다면, 미겔의 도시는 어떨까.’
시빌은 왕들의 기록을 떠올렸다. 미겔은 자르지스 왕의 부탁을 받고 용을 잡으러 갔다. 비록 반쯤은 실패했으나 그것이 선의에서 기반한 일이었다고 명백히 기록된 바 있었다. 대륙이 악의로 그를 대했을지언정 시빌은 미겔 포르투라는 사람에게 여전히 기대를 갖고 있었다. 확신이라고 해도 좋았다.
시빌이 만약 어릴 적 동화책을 보고 자란 대륙의 아이들이었다면 그는 미겔 포르투를 영웅으로 생각했을 것이었다. 그리고 왕의 기록 속 미겔 포르투가 시빌에게 준 인상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모닝문 아래에서 그 어떤 도시보다 가장 찬란하게 빛나고 있는 포르투를 방문하기는 아주 쉬운 일이었다. 자르지스에서 마법으로 열 걸음을 걷기 위해 쓰는 노력의 반만 들여도 대륙에서는 수천 걸음을 걸을 수 있었다. 시빌은 밤하늘을 날아 하얗게 빛나는 하늘섬에 도달했다.
하늘섬은 조그마했다. 자르지스의 반도 안 되는 그 작은 섬을 보고 시빌은 맨 처음에 실소하고 말았다. 조금의 흔들림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단단한 연두색 덩굴이 대륙에서부터 뻗어 섬을 받치고 있었다. 그 덩굴에는 자그마한 정령의 씨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는데, 모닝문의 빛을 받아 반짝반짝 빛났다. 섬 위에는 푸른 동산과 작은 숲도 있었고, 온통 하얀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휘황찬란한 성이 지어져 있었다. 자르지스에 있는 거울 공작의 성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공이 든 건물이었다. 작은 공예품이라고 표현해도 모자라지 않을 만큼 예쁘고 화려했다.
성 아래의 고급 저택들, 쭉 뻗은 길, 그곳을 웃으며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입은 옷은 고급스러웠다. 마법으로 밝힌 빛이 섬을 가득 수놓고 있었다.
천국이 있다면 저럴까.
시빌은 천천히 포르투로 발을 내디뎠다. 하지만 그는 포르투에 들어가지는 못했다.
탁.
허공에서 이상한 소리가 났고, 곧 시빌은 제 발에서 반탄력을 감지했다. 뭔가 발에 와 닿은 후 그를 가볍게 튕겨냈던 것이다. 시빌은 이마를 찡그리고 다시 포르투로 내려가려 시도했다.
이번에는 조금 더 큰 소리가 났다. 텅, 하고 튕기는 소리였다. 시빌은 또다시 포르투로 다가갔다. 하지만 이번에도 소용없었다. 아무르는, 그리고 디자이어는 허가를 받지 않은 침입자를 포르투에 들이지 않았다. 무슨 마법을 써도 포르투에는 들어갈 수 없었다. 투명한 막 같은 것이 포르투를 감싸고 있었고, 시빌의 손가락 하나도 포르투에 다가갈 수 없었다,
다만 그 방어막은 시빌을 거부할 뿐, 공격하지는 않았다. 지친 시빌은 덕분에 포르투의 허공에 주저앉을 수 있었다. 휭, 바람이 불었다. 자르지스에서는 겪어본 적 없는 차갑고 상쾌한 바람이었다. 차가운 공기에 소름이 돋은 팔뚝을 시빌은 자신도 모르게 넋 놓고 바라봤다.
휘황찬란한 모닝문이 시빌을 비웃듯이 둥그렇게 그와 그 아래의 포르투를 비췄다. 달빛에 드러난 자신의 새카만 피부가, 그 아래의 하얀 성과 뚜렷이 대비돼 보였다.
그리고 그 아래에 자리한 동력 지대 또한 아주 약간 들여다보였다. 하얀 성, 까만 어둠. 휘황찬란하고 번쩍이는 섬의 그림자 속에서 서로를 죽이는 인간들이 시빌에게는 보였다. 아이러니했다. 모든 대륙이 모닝문 아래에서 찬란한 빛을 즐기고 있었으나 정작 포르투의 바로 아래에는 끝없는 어둠이 자리하고 있으니.
시빌은 그 대비에 어이없이 웃었다.
미겔은 용사왕이었다. 그가 알기로 미겔은 대륙의 모든 위험한 것을 물리치고 인간들의 번영을 가져온 자였다. 하지만 그런 자가 대체 무엇이 무서워서 이렇게 제가 살던 섬을 꽁꽁 보호해놓았단 말인가.
허탈함과 의심 사이에서 시빌은 모닝문 옆의 새벽별을 바라봤다. 평소에는 가장 밝은 별이지만 모닝문의 빛에 가려 눈을 잔뜩 찌푸려야 보이는 새벽별.
그게 마치 미겔이라는 자에게 가려져 있는 자르지스같이 보였다.
선한 미겔, 착한 미겔, 자르지스를 구하려 했던 미겔.
하지만 실패한 미겔.
아무도 미겔이 실패했다는 것조차 모른다. 용사왕의 실패 덕분에 자르지스는 완전히 고립됐기 때문이다. 미겔이 준 풍요를 누리느라 바쁜 인간들은 자르지스의 슬픔을 모른다.
시빌은 하늘을 걸어 자르지스로 돌아갔다. 길이 닫히기 전에 돌아가지 않으면, 자신이 없는 그 섬은 예정된 멸망을 맞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서서히 닫히는 그 길에 찍힌 자신의 발자국이 보였다. 그 길을 나오던, 한나절 전의 자신이 가졌던 기대감과 설렘 따위는 진작에 부서진 채였다. 시빌은 허탈한 마음으로 하늘을 걸었다. 그러나 자르지스에 가까워질수록 그는 점점 힘겨워져 땅으로 내려올 수밖에 없었고, 날개라도 단 듯 가볍던 발걸음은 푹푹 모래에 파묻혔다. 무시무시한 열기가 또다시 시빌을 괴롭혔다. 포르투 하늘에서의 쾌적함과는 비교도 할 수 없었다.
시빌은 자르지스의 해변에 무릎을 꿇고 울었다. 견딜 수 없는 비애와 동정 때문이었다.
‘처음부터 몰랐으면 좋았을걸.’
그 길을 가지 않았다면 시빌은 계속해서 자르지스에서 살았을 것이다. 그것이 슬프고 험난한 삶이라는 것도 모르고. 삶이란 것은 원래 그런 것이겠거니 하며.
하지만 알게 된 이상 예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시빌은 금방이라도 제 목을 태우고 튀어나올 것 같은 분노에 전율했다. 여태까지 그는 이렇게까지 무시무시하게 화가 난 적이 없었다. 배가 불러 서로에게 증오를 겨누다 못해, 본 적도 없는 자르지스를 미워하고 있는 인간들에게.
‘자르지스의 마족인 줄 알았네.’
남자의 혐오감 어린 말이 아직도 시빌의 귓가에 메아리쳤다. 시빌은 어느새 눈물을 뚝뚝 흘리며 자신이 돌아왔던 길이 사라지는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시간이 흐르고, 모닝문이 사라졌다. 그 직후 해가 떴다. 기다렸다는 듯 뜨겁고 무거운 바람이 시빌의 온몸을 괴롭혔다. 햇볕 아래 지글지글 타는 살갗이, 이곳이 자르지스라는 것을 시빌에게 똑똑히 일러주는 기분이었다.
시빌은 눈물을 훔쳤다. 그는 그날부터 다시 용의 화구 속, 제 집에 틀어박혔다. 그는 왕의 기록을 샅샅이 살폈다. 미겔의 실패를 만회할 방법을 찾아 헤맸다. 미겔이 자르지스에 방문했을 때의 대화를 끝없이 복기했고, 포르투의 상공에서 자신이 느꼈던 차가운 바람을 자르지스에 불러올 마법을 연구했다.
하지만 시빌은 계속해서 실패했다.
죽음의 바다가 가진 저주를 해소할 방법을 끝없이 찾아 헤맸지만, 용의 분노를 잠재울 방법은 아무도 몰랐다. 용이 있던 시절 공존하던 전설적인 존재들이라면 방법을 알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진작에 자르지스에서 도망쳐 대륙으로 갔거나, 혹은 사라졌다.
그리고 몇 년에 걸친 생각 끝에, 시빌이 도달한 결론은 단 하나였다.
‘아무르.’
저주를 해소할 길이 없는 이상, 자르지스라는 섬을 아예 통째로 다른 곳에 옮기는 것밖에는 답이 없었다. 그러나 시빌의 마법은 섬 하나를 옮길 만큼 강대하지는 않았다. 대륙에서는 가능할지도 모르지만, 자르지스의 무거운 공기 아래에서는 시빌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의 생각이 마력핵 아무르로 귀결되는 것은 당연했다.
아무르는 네 개의 대륙을 끌어모으는 힘을 가진 단 하나의 보석이었다. 포르투가 하늘섬이 된 것 또한 아무르 덕이었다.
‘하지만 아무르를 가져오면 포르투는 가라앉을 텐데.’
시빌은 그렇게 생각했으나 곧 마음을 고쳐먹었다. 정확히는 분노가 그의 마음을 비뚤게 만들었다.
‘가라앉으면 뭐 어때?’
자르지스를 잊은 인간들은 벌을 받아 마땅했다. 적어도 미겔의 후손들은 그래야 했다. 찰나의 순간 들여다봤던 동력 지대와 포르투의 대비가 미겔의 위선처럼 보였다. 빛 속에서 깔깔 웃던 인간들은 외면했던 그림자 속으로 침몰하는 순간 어떤 표정을 지을까.
자신에게 지었던 것처럼 끔찍한 얼굴이 될까?
***
클로디아의 검 끝은 어느새 처져 있었다. 무리도 아니었다. 시빌이 풀어내는 이야기들은 클로디아를 사정없이 흔들었고, 그녀는 평온을 유지할 수 없었다. 하지만 시빌은 이야기를 시작했던 때와 같은 자세로 변함없이 클로디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붉은 머리카락 아래 가무잡잡한 피부가 클로디아의 눈에 새삼스럽게 비쳤다.
피부색, 혹은 생긴 것으로 남들을 차별하는 나라가 간혹 있다는 건 클로디아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클로디아는 그런 사람들을 직접 겪은 바가 없었다. 그렇기에 시빌의 말은 생경했으며 당혹스러웠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클로디아는 시빌이 당한 일을 없는 일이라고 치부할 수는 없었다. 클로디아는 포르투의 공주였기 때문이다. 그녀 앞에서 그런 성향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이가 있을 리 없었다. 거기에 더해, 클로디아는 자신이 자르지스까지 오며 겪은 수많은 일들 속에서 자신이 모르는 일은 아주 허다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공주여서 모르는 일, 공주이기 때문에 모르는 일들.
“저는 오랜 세월 동안 결론을 내렸습니다. 용사왕 미겔은 착한 사람이 아니에요.”
“….”
“모두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했을 뿐이죠.”
“시빌,”
자신의 앞에서 까마득한 선조의 험담을 하는 시빌에게 클로디아는 조금의 분노도 느끼지 않았다. 그저 아릿한 아픔이 그녀의 가슴 아래쪽 어딘가를 괴롭혔다.
“사람은 실수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착한 사람은 실수를 저지른 후에도 자신의 실수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기 마련이죠.”
“….”
“하지만 미겔은 자르지스에서 자신이 저지른 실수를 그저 묻어두고 잊었습니다.”
“그건….”
“클로디아. 당신의 선조를 두둔하려는 것은 이해합니다.”
시빌이 가볍게 팔짱을 끼며 눈을 휘었다.
“그래도, 제게 그러지 말았으면 좋겠군요.”
그게 아니었다. 미겔을 두둔하려 한 것이 아니었다. 클로디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시빌의 아픔을 위로하고 그가 겪었을 괴로움이 너무나 참담해서, 당장이라도 그를 안아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가 내려다본 자신의 손에는 칼이 들려 있었다. 그를 겨눴던, 그리고 지금도 검집에 차마 집어넣지 못한.
“모두의 부탁을 들어주려고 노력하는 것은 착한 사람이 아니에요. 그건 그저 우유부단한 사람이죠. 완전히 거절하지도 못해 일을 틀어지게 만드는, 그리고 실수를 외면하는 사람을 우리는 뭐라고 부릅니까?”
“….”
“클로디아에게 이런 걸 물으면 안 되겠죠. 당신이 저지른 일도 아니니까. 그러니 묻겠습니다, 디자이어.”
뭐라고?
시빌이 부른 이름에 클로디아는 황급히 뒤돌아봤다. 그곳에는 디자이어- 정확히는 디자이어를 든 데미안이 버티고 서 있었다. 언제부터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시빌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데미안은 클로디아와 눈이 마주치자 가볍게 묵례한 후 앞으로 나섰다. 클로디아는 엉겁결에 디자이어를 건네받았고, 곧 데미안의 뒤에서 이쪽을 살피던 포폰과 헬렌의 잔뜩 긴장한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과 말을 나눌 수는 없었다. 여전히 등 뒤에는 시빌이 버티고 서 있었기 때문이다.
[…말해.]
경황없이 양쪽을 번갈아 쳐다보던 클로디아는 디자이어가 겨우 말을 꺼낸 뒤에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디자이어는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로 시빌에게 답했다.
“디자이어 당신 또한 자르지스의 참담함을 봤을 겁니다. 어떻던가요. 미겔은 좋은 사람입니까?”
[…자르지스의 모습은 옛날과 많이 다르지 않아!]
시빌의 눈썹이 꿈틀했다. 디자이어는 웅얼거리며 말을 이었다.
[용 세 마리가 살고 있던 시절의 자르지스는…. 지금의 자르지스와 크게 다르지 않아. 화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도, 험난한 삶도….]
“하지만 미겔은 사람들이 도망칠 길조차 없애 버렸습니다, 디자이어.”
클로디아와 이야기할 때는 웃음기마저 띠고 있던 목소리는 이제 확연히 건조해졌다. 시빌은 높낮이 없는 목소리로 평이하게 말을 이었다.
“그는 기만자예요.”
[미겔을 욕하지 마!]
“스톤 드래곤의 껍질을 그가 왜 팔았는지 당신은 알고 있잖아요, 디자이어.”
갑자기 그 이야기가 왜 나오지?
클로디아는 눈을 깜박였다. 시빌은 끌어안고 있던 한쪽 다리를 다시 풀고 섰다. 팔짱을 끼고 서 있는 시빌의 키가 유독 커 보였다.
[그건, 귀찮아서….]
“저는 말입니다. 포르투를 습격하겠다고 생각하며 자르지스를 나와서도 한참을 망설였습니다.”
시빌의 말이 이어졌다.
“자르지스를 저 혼자 나올 수는 없었어요. 또다시 백 년을 기다렸죠.”
“그럴 수가, 왕은 팔십 년을 살았다고….”
저도 모르게 중얼거린 포폰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포폰에게로 몰렸고, 포폰은 화들짝 놀라 귀를 접고 어깨를 움츠렸다. 하지만 시빌은 포폰 쪽을 보고 싱긋 웃었다.
“사랑스러운 나의 친구. 지금 자르지스에서 백 년 전의, 이백 년 전의 나를 기억하는 친구들은 모두 땅으로 돌아갔답니다.”
“….”
“팔십 년을 살았다고 말하는 친구는, 팔십 년 전 나를 알았던 친구겠지요. 저는 생각보다 오래 살았어요.”
반불사의 마왕은 포폰에게만은 녹아내릴 정도로 다정하게 말했다. 포폰이 자르지스 사람이라서일까? 클로디아에게 말하던 건조한 목소리와는 사뭇 다른 말투에 그녀는 마음이 아렸다. 자르지스 사람들이 그를 왕으로 부르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는 자르지스 사람들에게만은 눈물 나게 다정한 왕이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만 같은 말투였기에.
“백 년을 기다리며 아무르를 가져오려고 했어요. 저는 자르지스에서 나가던 중, 어떤 노인을 만났답니다. 그는 저를 보더니 인사를 했지요.”
“….”
“그리곤 제게 악수를 청했습니다. 저는 마음이 흔들렸어요.”
시빌의 녹색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았다.
***
시빌은 길이 열리는 것을 기다렸다. 백 년 동안 기다렸던 순간이었다. 혐오스러운 인간들이 풍요를 누리며 살았을 백 년 동안, 자르지스는 더더욱 살기 팍팍한 곳이 되어갔다. 동물과 섞인 사람들은 사람의 외형보다는 동물에 더욱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화구가 폭발한 어떤 마을의 사람들은 뜨거움을 견디지 못해 바다에 몸을 던졌다가, 독기에 기절해 해류에 휩쓸려 영영 돌아오지 못했다.
길이 열리자마자 그는 발걸음을 내디뎠다. 무거운 자르지스의 마력 때문에 얼마간은 걸어가야 했다. 그리고 길의 중간에서 시빌은 머리가 허옇게 센 노인을 만났다.
그 노인은 아주 허름한 차림을 하고 있었다. 녹슨 칼을 지팡이 삼아 걸어오던 노인은, 길을 걸어 나오는 시빌을 보고 놀란 듯이 눈을 크게 떴다. 시빌은 그가 무슨 말을 하든 곧장 베어버릴 생각이었다. 어차피 자신의 까만 피부를 보고 그가 할 말은 뻔했으므로.
“안녕하신가!”
하지만 인사가 터져 나올 줄은 정녕 몰랐다. 시빌은 멈칫했다. 그의 손에서 형태를 갖추어가던 불의 구가 사그라들었다. 노인은 시빌이 방금 무슨 짓을 하려고 했는지는 모른 채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전설이 정말이었군! 당신은 자르지스의 사람인가?”
“….”
시빌은 말없이 그를 경계했다. 노인은 머쓱한 듯 자신의 손바닥을 쳐다보다가 호탕하게 웃었다.
“아하, 길이 열리는 걸 기다리는 동안 모래로 성을 좀 만들었다네! 좀 지저분하지?”
어린애나 할 법한 흙장난을 하다가 손이 지저분해졌다는 노인. 흰 머리와는 반대로 말하는 것은 쾌활하기 그지없었다. 마치 이삼십 대 청년을 보는 것만 같았다.
“길에서 사람을 만날 줄은 몰랐다네! 자르지스에서도 사람이 나올 거란 생각은 못 했거든! 들어가서 씻으려고 했는데. 반갑군!”
“….”
노인은 묻지도 않은 말을 계속해서 떠들었다. 시빌은 이마를 찡그렸으나 노인은 그의 표정을 보고도 아랑곳하지 않고는 자기 하고 싶은 말만 했다.
“자르지스는 많이 더운가? 지금도 더운데, 들어가면 더 덥겠군!”
“…거길 왜 가려고 하나.”
간신히 시빌이 물은 것은, 노인의 목적이었다. 자신을 보고도 놀라기는커녕 반가움부터 표하며 친근히 구는 노인에게 뭐라고 대해야 할지 몰라 잠시 할 말을 잊었으나, 그가 자르지스에 들어가 이상한 짓을 하려 한다면 막아야 했다. 그러나 노인은 싱글벙글 웃으며 말을 더했다.
“자선사업 중이거든!”
“…뭐라고?”
노인의 말은 간략했다. 노인이 될 때까지 자신이 세상에 받은 것이 많아 죽음을 목전에 두고 신세를 갚으러 다닌다는 것이었다. 이 말을 믿어야 할까…. 시빌은 노인을 아래위로 훑어봤다.
노인의 팔다리는 깡말랐고, 피부는 그을렸다. 분명 그 나이치고는 정정하기는 했으나 자르지스에 도착하면 곧장 죽을지도 몰랐다. 자르지스 사람들은 죽음의 바다를 통해 들어오는 외부인들을 경계했으므로. 대부분은 금세 죽었으나 가끔은 사람들을 마족이라 부르며 해독제를 내놓으라고 날뛰기도 했다. 이 노인이라고 그런 취급 당하지 않으리란 법 없다.
시빌은 고개를 젓고 자신의 망토를 벗어 노인에게 건넸다. 노인은 눈을 껌벅이기만 했다.
“…이걸 입고 몸을 가려. 외부인이라는 것이 들키면 죽음을 당할지도 모른다.”
노인이라고는 하지만 시빌은 훨씬 오래 살았다. 존댓말을 할 이유는 없었다. 그러나 상대는 시빌의 나이를 모르니 갑작스레 벌컥 화를 낼 가능성도 있었다.
“아이고야! 이 타스테도 정말 다 죽었구만! 이런 새파란 청년에게 걱정을 다 받고!”
놀랍게도 노인은 환하게 웃으며 이마를 쳤다. 시빌의 얼굴이 미묘해졌다. 노인은 손을 내저으며 호쾌하게 웃었다.
“괜찮다네, 넣어둬! 나도 로브 정도는 있다네!”
“…그러면 됐다.”
쓸데없는 걱정을 했다, 고 시빌은 속으로 혀를 차며 도로 망토를 둘렀다. 타스테라고 스스로를 부른 노인은 껄껄 웃으며 물었다.
“좋구만! 자르지스는 다 자네처럼 좋은 사람들뿐인가?”
그 말에 시빌은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망설였다. 하지만 노인은 시빌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그는 가볍게 허리에 손을 얹고 호탕하게 웃었다.
“가보면 알겠지! 아무튼 고맙네!”
그리고는 성큼성큼, 시빌을 지나쳐 걸어가는 것이었다. 시빌은 순간 당황해 뒤를 돌아봤다. 그와는 사뭇 대조적으로 노인은 쭉쭉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왜일까, 시빌은 그 노인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노인이 시야에서 흐려질 무렵 시빌은 겨우 다시 앞으로 향할 수 있었다. 자신이 걸어가는 길에는 노인이 걸어온 발자국이 뚜렷이 남아 있었다. 한결같이 확신에 찬 발걸음이 깊이 팬 발자국에 남아 있었다.
대륙에 도착할 때쯤, 어쩐지 분노가 치민 시빌은 그 발자국을 모두 지워버렸다. 노인 같은 사람이 하나라도 더 자르지스로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 라고 시빌은 스스로에게 변명했다. 하지만 그럴 거라면 자신의 발자국도 지워야 했으나 그러고 싶지 않았다. 네 개의 대륙에 등장해 발을 딛자마자 모든 것을 불태우겠다고 결심했으나, 시빌은 아무것도 못 했다. 심지어 자신의 발자국을 지우는 것마저도.
‘자르지스는 다 자네처럼 좋은 사람들뿐인가?’
그 말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시빌은 정처 없이 대륙 남부를 떠돌았다. 여전히 가무잡잡한 피부로 포르투를 제외한 대륙을 돌아다녔다. 어쩌면 자신의 생각이 틀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나는 단 하루, 대륙을 봤을 뿐이다.’
그 생각이 시빌을 사로잡았다. 시빌은 그 노인 같은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 노인과 같은 자를 단 세 명만 더 만난다면, 나는 아무르를 포기할 것이다.”
결과적으로 시빌은 포기하기에 실패했다.
***
“그래서…. 당신은 어떻게 했나요?”
시빌에게 묻는 클로디아의 목소리가 떨렸다. 답은 정해져 있었지만, 어쩐지 그에게 묻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었다. 시빌은 씁쓸하게 웃었다.
“결과를 알고 있잖아요, 클로디아.”
“….”
“제가 대륙을 떠도는 동안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말하는 건 별 의미가 없겠죠. 저는 아무르는 인간들에게 필요 없다는 결론을 내렸고, 포르투로 갔어요. 그리고….”
[내게 다쳤구나.]
시빌의 말에 답한 것은 디자이어였다. 디자이어는 아까보다 한결 차분해진 말투였다.
[돌처럼 단단한 심장이 시빌, 네 거였어.]
“예. 당신이 날 무찔러야 한다며 클로디아를 앞세운 것은 좀 놀라웠어요.”
디자이어가 파르르 진동했다.
[나는 그 돌처럼 단단한 심장이 오래전 봤던 스톤 드래곤의 것과 같다고만 생각했어. 지상에서 가장 단단한 심장…. 그런 걸 부술 수 있는 건 나뿐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상해, 시빌. 난 너를 동력 지대에서 봤을 때도 그렇지만, 단 한 번도….]
“제 마법은 대륙에서 더 강해지니까요, 디자이어.”
시빌이 한 발짝 다가서며 자신의 가슴을 어루만졌다. 가무잡잡한 손가락을 남자답다고 생각했을 때도 있었지만, 지금은 어쩐지 그 불거져 나온 손마디가 지독히도 외로워 보였다.
“제 심장 또한 그렇답니다. 당신이 그렇게 생각한 것도 무리는 아니죠.”
그의 심장은 자르지스에서는 평범해진다. 클로디아가 꼭 여기 와야 할 필요는 없었다는 이야기였다. 데미안이 흘깃 그녀의 안색을 살폈으나, 클로디아가 뭐라 반응하기도 전에 시빌이 말을 덧붙였다.
“재미있는 걸 알려드릴까요, 클로디아?”
“…그리 재미있을 것 같진 않지만 말해요.”
“제가 그 노인과 같은 사람들을 만나긴 했답니다. 그것도 세 사람이나.”
초록색 눈이 어쩐지 슬퍼 보이는 것도 착각일까.
“…포르투를 부순 후에요.”
시빌은 그렇게 말하고 심장 부분에 얹었던 손을 다시 늘어뜨렸다. 포폰이 신음했다.
“그거 설마….”
“예. 포폰. 당신도 그런 사람들을 만났지요.”
시빌은 포폰에게 다정하게 눈을 접으며 웃어주었다.
“당신들 셋 말이에요.”
클로디아는 이를 악물었다. 그러지 않고는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 붉은 머리카락의 왕은 언제나 그랬듯이, 익숙한 몸짓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참 아이러니해요. 내가 대륙에서 만난 가장 괜찮은 사람들이, 포르투를 제가 부수지 않았다면 만나지 못했을 사람들이라는 게.”
“시빌.”
“포르투를 부수고 아무르를 손에 넣었지만, 디자이어에게 입은 상처 때문에 저는 자르지스로 돌아올 수 없었어요. 동력 지대로 숨어든 저는 어둠 속에서 정말 많은 사람들을 죽였답니다. 동력 지대의 인간들은 제가 만난 이들 중에서도 가장 추했어요. 그들을 죽이면서 저는 ‘아, 포르투를 부순 건 잘못된 게 아니었어’라고 생각했답니다.”
유니콘을 유혹해 포르투로 들어가는 데 성공했지만, 디자이어에게 큰 상처를 입은 게 문제였다.
상처 입은 시빌은 동력 지대로 굴러떨어졌다. 그의 손아귀에서 번쩍이는 아무르를 본 동력 지대 사람들은 시빌을 공격했고, 시빌은 그들을 모두 죽였다. 죄책감 따위는 없었다. 디자이어에게 입은 상처는 처참했으나 일반적인 마법으로 치료할 수는 없었다. 정령에게 입은 상처를 복구할 방법은 정령뿐이었다.
마법사 길드로 숨어들어 길드원들을 모두 죽인 다음 그는 길드원으로 가장해 스스로를 치료할 방법부터 찾았다.
시빌이 한창 도망칠 방법을 찾고 있던 시기, 클로디아가 마왕 토벌을 선포했다. 그리고 그녀는 동력 지대로 데미안과 함께 내려왔다.
“…설마.”
클로디아가 신음했다. 시빌이 장난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아무르는 줄곧 당신 곁에 있었답니다. 저도 자르지스에 들어오고서야 아무르를 화구에 가져다 놓을 수 있었지요.”
“말도 안 돼,”
“사실이에요.”
“…쥬버린 폐하의 심장은.”
“아하, 그거요.”
마왕이 웃으며 손목을 두어 번 돌렸다. 마치 꽃을 피우는 듯한 손짓이었고, 다음 순간 클로디아는 눈을 부릅떴다. 시빌의 새카만 손 안에, 붉은색으로 펄떡거리며 뛰는 심장이 있었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날카로운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오라버니!”
“아, 이건 그저 심장일 뿐이지, 쥬버린이 아녜요.”
시빌은 눈을 가늘게 떴다.
“…하지만 당신에겐 그로 느껴지는 것 같군요, 엇차!”
마지막 말은 데미안이 빠르게 검을 휘둘렀기에 시빌이 뒤로 훌쩍 뛰어오르며 낸 소리였다. 그는 얄밉게까지 느껴지는 가벼운 몸짓으로 휙, 공중으로 떠올랐다. 손에 쥔 검에서 검기를 뿜어낸 데미안이 잇소리를 빠득 하고 냈다.
“조심해요, 데미안. 심장이 베이면 쥬버린도 죽어요.”
“…당신, 그동안 우리를 농락했군.”
“억울한가요?”
시빌이 싱긋 웃었다.
“하지만 미겔이 우리를 몇백 년간 기만한 것에 비하면 약과 아닌가요?”
[미겔은 그런 애 아냐!]
“…디자이어. 아직도 그를 변호할 셈인가요?”
붉은 머리카락을 뒤로 거칠게 쓸어올린 시빌이 손을 두어 번 휘두르자 다시 심장이 사라졌다. 클로디아는 순간 안타까운 신음을 냈다. 분명 그 심장을 안전한 어딘가로 숨겨둔 것이겠지만, 마치 자신의 눈앞에서 쥬버린이 죽어버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시빌은 픽 웃었다.
“그래요, 스톤 드래곤의 껍질 얘기를 마저 마치지 않았군요. 그가 귀찮고 무거워서 그 껍질을 팔아치웠다고요? 글쎄요, 디자이어. 당신도 그게 아니란 걸 알고 있잖아요. 그는 돈이 없어서 그 껍질을 팔았어요.”
“….”
“미겔은 용사가 되기 전에도 좋은 가문의 귀족이었죠. 그런 사람이 왜 돈이 없었을까요? 긴 여행에 모두 써서? 아니에요. 그는 용사라는 이름으로 수많은 국가의 후원을 받았어요. 그런 그가 돈이 없었던 이유를… 디자이어. 당신은 알고 있죠?”
클로디아는 물끄러미 디자이어를 내려봤다. 디자이어는 한참 침묵한 후, 시무룩하게 중얼거렸다.
[…미겔은 가는 길 내내 거지들에게 적선하지 못해 안달하는 사람이었으니까….]
“그거예요!”
시빌이 손가락을 딱 튕겼다.
“그는 언제나 곤란해하는 사람이었어요. 모든 이들의 부탁을 들어주느라 자신이 기아에 시달렸죠. 스스로 배곯아가며 남에게 적선한 사람이었죠.”
[….]
“남의 행복을 위해 자신이 굶는 것을 마다하지 않던 사람은, 결국 다수의 행복을 위해 소수에게 굶기를 강요할 수 있었던 거예요. 기만자.”
방금 전까지 시빌의 말에 버럭 하며 미겔을 변호하던 디자이어는 이제 침묵을 고수하고 있었다. 모든 이들이 시빌의 말에 충격받아 입을 벌리고 있는 가운데, 시빌 혼자 즐거운 듯이 웃고 있었다.
클로디아는 그 상황을 도저히 견딜 수 없었고, 한 발짝 나섰다. 데미안이 그녀를 저지했으나 클로디아는 데미안의 손을 밀어냈다. 시빌은 그런 그녀가 입을 열기를 가만히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서 당신이 하고 싶은 말은 뭐예요?”
“…클로디아.”
클로디아는 주먹을 꾹 쥐었다. 아까부터 시빌은 빙빙 말을 돌리고 있었다. 이미 몇백 년 전에 죽어버린 용사왕이 기만자라고 해서, 어떻다는 건가. 이미 그는 살아서 돌아올 수도 없는데. 클로디아는 이런 비생산적인 대화가 반복되는 것이 싫었다.
“당신은 그렇게 저를 통해 아무르를 자르지스에 가져왔겠죠. 그래서요?”
“….”
“…시빌. 당신, 자르지스를 띄우는 데 실패했죠?”
그녀의 말에 시빌이 옅게나마 지었던 미소를 싹 지웠다. 순간 주변의 공기가 확 달라지는 기분이 들었다. 화구에서 불이 일어나는 기분이랄까.
“아마 우리와 헤어진 후, 곧장 아무르를 이곳으로 가져왔겠죠. 헬렌마저 떼어놓고요. 그리고 실패한 거야. 아마 당신이 성공했다면 진작에 자르지스는 허공으로 떠올랐겠지만 어째서인지 실패한 거예요. 그렇죠? 그래서 내 앞에서 이런 소리를 늘어놓고 있는 거고요.”
말이 많은 자들이 있다. 가진 것이 변변치 못한 자들이 대부분 그렇다. 자신이 가진 것을 어떻게든 크게 부풀리고 싶어서, 혹은 실패를 감추기 위해 그들은 끊임없이 본질과 별 상관없는 것들에 대해 떠든다.
왕족인 클로디아는 그런 남자들을 아주 많이 봐왔다. 가진 게 비루한 남자들일수록 그녀 앞에서 허세를 부리고 쓸모없는 말을 늘어놨다. 시빌 또한 그랬다.
그가 만약 정말로 클로디아가 필요 없다면, 그는 진작에 그녀를 죽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왜 여기서 저런 이야기들을 늘어놓고 있는 걸까. 답은 뻔하다.
클로디아가, 혹은 그에 준하는 뭔가가 필요한 것이다.
시빌이 무표정하게 입을 열었다.
“클로디아.”
“….”
“나는 아무르를 가져와서 자르지스를 포르투처럼 아름답게 만들고 싶었어요. 하지만 저 혼자의 힘으로는 불가능했죠.”
[…포르투는 내 작품이니까.]
디자이어가 말을 보탰다. 시빌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거라고 생각했어요. 아무르는 그저 힘 자체일 뿐, 이지가 없어요. 디자이어, 아니면 미겔의 혈통만이 할 수 있는 뭔가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죠. 그 악어들을 보고 깨달았어요.”
악어는 화구에 던져진 아무르가 낳은, 일종의 부작용이었다. 용의 화구에서 살던 작은 발광 도마뱀들은, 아무르의 힘을 받고 이상한 생물로 변했다. 몸이 커지고, 제멋대로 삐죽삐죽 이가 돋았다. 머리는 비대해지고 몸은 불균형해졌다.
그것들을 보고 시빌은 비탄에 잠겼음을 솔직하게 고백했다.
“디자이어, 클로디아. 나를 도와줘요. 자르지스를 하늘로 띄워주세요. 저 저주의 바다에서 자르지스를 구원해 주세요. 그러면 쥬버린의 심장을 돌려 드릴게요.”
[…미안해. 안 돼.]
“…그 기만자들의 섬 때문입니까?”
시빌의 말투가 날카로워졌다. 클로디아는 저도 모르게 디자이어를 꼭 끌어안고 한발 물러섰다. 하지만 반사적으로 제 입이 열렸다.
“포르투는 나의 왕국이에요!”
“클로디아. 자르지스 또한 나의 왕국입니다.”
말문이 대번에 막혔다. 백성을 보호해야 하는 왕족의 의무를 클로디아가 논한다면, 시빌은 자르지스의 왕인 자신 또한 같은 논리로 말하겠다고 선언한 것이었다. 시빌은 흐리게 웃었다.
“그래요. 내게 자르지스가 소중하고 불쌍한 만큼 당신에게도 포르투는 포기할 수 없는 곳이겠죠. 당신은 착한 사람이니까.”
“….”
“당신은 이제 자르지스에서, 꼭 당신이 아니라도 나를 누구든 죽일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고요. 그렇다면 당신은 종내에는 나를 죽이고 아무르를 가져갈 수도 있겠군요. 저 사람을 통해서요.”
시빌이 손가락을 들어 데미안을 가리켰다. 그는 여전히 클로디아 앞을 막아선 채 검 끝에서 검기를 일렁이며 서슬 퍼런 눈으로 시빌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가 지금 가만히 있는 것은 오로지 클로디아가 시빌을 추궁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만약 지금 이 자리에서 데미안이 시빌을 죽이려고 든다면, 그걸 누가 막을 수 있을까.
“아무리 나라도 검기 사용자는 좀 무섭거든요. 붙어서 이길 수 있다는 보장도 없고요.”
클로디아는 슬퍼졌다. 시빌의 말이 의미하고 있는 잔인함을 짐작했기 때문이었다. 시빌은 싱긋 웃었다.
“하지만 클로디아. 당신이 나를 죽이고 아무르와 쥬버린의 심장을 가졌다고 칩시다. 포르투로 돌아간 당신은 과연 자르지스를 잊을 수 있겠어요?”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미겔처럼 말이에요.”
클로디아의 눈가가 젖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