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장. 마왕성이란 (20/30)

7장. 마왕성이란



 

하도 오랜만에 봐서 얼굴 까먹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클로디아는 그 걱정이 다 쓸모없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조금 길어진 새빨간 머리카락은 봉두난발이었고, 햇빛을 보지 못해서 파리하던 낯빛은 어디로 갔는지 자르지스의 햇살 아래 조금 타 까매져 있었다. 아트릭스에서도 타서 갈색이 되어가던 피부였지만, 지금은 조금 더 가무잡잡해졌다. 게다가 길고 무겁던 로브는 모두 걷었고, 그 아래로 잔근육이 드러났다.

그 모든 것이 낯설었으나 동시에 낯익었다. 클로디아는 눈물이 핑 도는 것을 느꼈다.

“하하, 정말로 여기까지 오셨네요.”

시빌의 얼굴은 피로해 보였다. 피곤한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이쪽은 넷이서 여행했으나 시빌은 여기까지 홀로 왔을 테니까. 클로디아는 마음이 아파졌다.

그 틈을 메우려는 듯, 디자이어가 반갑게 떠들었다.

[시빌, 시빌!]

“디자이어. 잘 지냈습니까? 다들 건강합니까?”

[응응, 나는 건강해! 당연하지만!]

“이런, 시빌. 얼굴이 엄청나게 핼쑥한데. 그래도…. 세상에. 고생했어.”

가장 먼저 시빌에게 다가간 것은 헬렌이었다. 헬렌은 안타까운 듯 시빌의 어깨를 두들긴 후 한 번 끌어안았다. 시빌은 에고에고, 하며 죽는 소리를 내면서도 헬렌의 포옹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리고는 헬렌의 어깨 너머로 눈을 깜박이는 개 인간을 바라봤다.

“못 보던 사이에 귀여운 친구가 늘어났군요. 그리고… 클로디아!”

포폰이 인사를 하기도 전에 시빌은 클로디아에게 눈을 돌렸고, 반갑게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세상에, 살아 있었군요. 그러리라고 믿었습니다. 어디 봅시다. 건강한가요?”

시빌은 헬렌을 부드럽게 밀어낸 후, 빠른 걸음으로 그녀에게 다가왔다. 클로디아는 입을 꾹 다물고 있다가, 시빌이 제게로 다가오자 흐린 표정이 됐다. 시빌은 그녀의 울 것 같은 표정을 보자 심각해졌다.

“왜 그래요, 클로디아? 클로디아 맞지요? 혹시 바다에서 떨어진 충격으로 나를 잊어버렸다거나…?”

마지막 말은 헬렌에게 한 것이었다. 헬렌은 그럴 리가, 라는 표정으로 어이없이 웃으며 고개를 가볍게 저어 보였다. 클로디아는 그렁그렁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다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시빌.”

“예, 시빌이에요.”

시빌이 싱글벙글 웃었다. 클로디아는 와앙, 하고 시빌에게 안겼다.

“어이쿠!”

시빌이 죽는시늉을 했지만 클로디아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마음 깊이 아끼던 마법사가 이렇게나 눈물 나게 반가울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그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낯설었고, 곧 그가 자신에게로 팔을 벌리자 갑자기 울컥하는 마음이 용솟음쳤다.

“미안해요, 응. 미안해! 내가 배에서 괜히 떨어져 나가서, 시빌을 고생시켰어요!”

“아하하하, 뭐예요. 그게 미안해서 아는 척하지 않은 거예요? 세상에. 클로디아. 울지 말아요.”

으아아앙.

거울 공작의 성에서도 흘리지 않았던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시빌은 곤란한 듯 웃으면서도 클로디아의 등을 토닥였다. 마치 어린애 달래듯 하는 몸짓이었지만, 클로디아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클로디아는 얼굴을 시빌의 어깨에 문지르며 울었다.

“보고 싶었어요!”

“뭐야, 이 격렬한 반응은. 저 이렇게까지 사랑받고 있었습니까? 아, 데미안. 당신도 반갑습니다. 무사했군요.”

시빌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데미안 쪽을 향해 물었다. 그러나 그에게 대답한 것은 클로디아였다. 클로디아는 눈물을 연신 흘리며 시빌에게 답했다.

“흑, 수르 알파가 같이 있었으니까요, 무사했어요. 그런데 나는 당신이 없어지면 어떻게 하나 하고, 그러니까.”

“아이고야, 우리 공주님. 이렇게 울보였습니까?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훌쩍이던 클로디아가 울음을 그치고 시빌에게서 떨어진 건 한참 후였다.

“십 년 전에 헤어진 오빠라고 해도 믿겠다….”

포폰이 간간이 중얼거렸고, 헬렌이 피식피식 웃었다. 데미안은 말없이 팔짱만 끼고 그 광경을 바라봤다. 겨우겨우 시빌의 품에서 떨어져 나온 클로디아가 엄지손가락 끝으로 눈물을 훔치며 물었다.

“그동안, 어디 있었어요?”

“아, 저요. 북쪽으로 해서 빙 돌아와 봤습니다.”

시빌이 클로디아의 흐트러진 머리를 쓰다듬으며 웃었다. 클로디아가 울며 제 품에서 쏟아낸 말들로, 시빌은 대강 클로디아와 데미안, 헬렌이 어떻게 만났는지 들은 차였다. 시빌은 머리를 긁으며 눈을 찡그렸다.

“이런. 정말 말 안 듣는 어린이들이로군요.”

어린이들…. 그 어감에 모두가 피식피식 웃었다.

하지만 웃는 것도 잠시였다. 시빌이 불꽃 같은 잔소리를 뿜어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애초에 헬렌! 제가 말하지 않았습니까! 마왕성 앞에는 단독으로 접근하지 말라고! 정말 드럽게 말 안 듣네요! 제 말 전한 거 맞습니까?”

“아아니…. 그게….”

헬렌이 눈알을 굴렸다. 정확히 전하긴 했다. 그렇지만 클로디아와 데미안이 그렇게 판단했을 뿐이다. 시빌이 없다고 해서, 마왕성에 가지 않고 자르지스를 맴돌 수는 없다고. 그것도 맞는 말이었기에 헬렌은 클로디아를 따랐다.

결과는 폭풍 잔소리였다.

“대관절 저 없이 대체 어떻게 마왕성에 들어갈 작정이었습니까?!”

“아, 어차피 네 경호는 마왕성 앞까지였다며!”

시빌에게 말로 얻어맞은 헬렌이 변명하듯 내뱉었다. 헬렌의 말을 들은 시빌이 한쪽 눈을 찡그렸다.

“예?”

“클로디아랑 디자이어가 그랬어! 어차피 마왕성 앞에서 바이바이 하기로 했는데, 시빌이 있으나 없으나….”

“아니, 제가 언제 그랬어요, 헬렌!”

헬렌의 말을 클로디아가 급하게 가로막았다.

“그냥 시빌이 있든 없든 마왕성에 가야 하는 건 같다고 했지!”

“그 말이 그 말이지!”

헬렌이 다급하게, 악의는 없이 말했다. 헬렌의 말을 다 들은 시빌이 가늘게 뜬 눈으로 클로디아 쪽을 바라봤다. 하, 하하.

“그러니까, 시빌. 제 말은 그런 뜻이 아니라.”

“됐어요. 다 알았어요. 쳇. 클로디아 날 그렇게 생각했군요.”

시빌이 짐짓 부루퉁한 듯 고개를 돌렸다. 클로디아가 애써 시빌의 어깨를 두들겼다.

“그런 건 아니지만, 사실….”

“뭐 틀린 말도 아니지 않습니까.”

클로디아의 말을 막은 것은 데미안이었다. 무심한 얼굴의 남자는 내내 포폰의 옆에서 팔짱을 끼고 있다가, 자신에게 일행의 시선이 집중되자 다시 툭 내뱉었다.

“마왕성 안까지는 안 들어갈 거 아닙니까, 당신.”

“아니, 데미안. 못 본 사이에 많이 차가워졌군요?”

시빌이 너스레를 떨었다.

“그래도 저는 클로디아의 경호를 맡지 않았습니까? 제가 원래 해야 할 건 여기까지 오는 여정에서 클로디아의 안전을 책임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단독으로는 절대 마왕성에 접근하지 말라고 할 법도 하죠!”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당신 없이 이곳 앞까지 올 수 있었군요.”

포폰이 눈으로 클로디아에게 물었다.

뭐야. 데미안 저 사람한테 왜 저래? 싸움 거는 거야? 둘이 사이 나빠?

아니.

클로디아도 눈으로 답했다. 포폰은 더욱 당황한 눈으로 물었다.

그럼 뭐야? 데미안 성격이 원래 저래?

그런 것도 아닌 것 같은데….

그러거나 말거나, 시빌은 데미안 앞에서 “흠!” 하고 코를 찡그리더니 입을 열었다.

“…혹시 부분 환불 원합니까? 안 되는데?”

그 말에 헬렌이 콜록, 하고 기침을 뱉었고 데미안의 얼굴은 황당함으로 일그러졌다. 그리고 클로디아는 순간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하다가, 데미안의 다음 말에 겨우 시빌의 말뜻을 이해했다.

“…그런 뜻은 아닙니다.”

“에이! 난 또 긴장했네!”

시빌은 데미안이 제게 부루퉁하게 시비를 걸 듯한 자세로 구는 것을, 아무래도 처음 클로디아가 그에게 계약을 맺으며 지급한 거액 중 일부를 돌려달라는 뜻으로 오해했던 모양이었다. 그를 뒷받침하듯 시빌이 중얼거렸다.

“아니, 마법사 길드에도 간혹 있거든요. 일 맡겨 놓고 자기 부하들이 의외로 일 잘해서 마법사인 네 수고가 줄었으니 돈 반은 도로 토해내라고 하는 분들이. 근데 웃기죠. 제가 일을 안 한 것도 아닌데 그쪽 고정고용노동자들이 알아서 일 더 했으니 저한테 환불을 하라는 게 얼마나 진상….”

“마법사들은 원래 저렇게 수다쟁이야?”

아까보다는 분위기가 좀 유해졌다고 생각했는지, 포폰은 이번에는 소리를 내어 클로디아에게 물었다. 클로디아가 풋 하고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글쎄, 그건 시빌의 성격인 것 같은데….”

“…아무튼 환불은 아니라니 다행입니다! 데미안. 혹시 삐졌어요? 고용노동자로서 제가 무거운 짐을 맞들었어야 하는데, 혼자 클로디아를 보호했어야 해서 초과노동한 데 대한 화풀이입니까?”

정말 그런 건가?

그 말에 클로디아의 눈이 동그래졌다. 순간 클로디아와 데미안의 눈이 마주쳤고, 데미안은 버럭 짜증을 냈다.

“무슨 말입니까. 내가 당신 같아 보입니까?”

“아, 아니면 됐고.”

시빌이 손을 내저으며 유쾌하게 웃었다. 그리고는 데미안의 팔을 덥석 잡았다.

“아무튼 다시 만나 반갑습니다!”

“…예.”

데미안이 한숨을 내쉬며 시빌의 손을 떼어냈다. 시빌은 다시 클로디아에게로 다가와 인사했다. 정확히는 디자이어에게.

“디자이어, 잘 있었나요?”

[응! 나는 잘 있었어! 시빌 괜찮아?]

“저야 항상 괜찮지요.”

[아니, 상처 말이야!]

디자이어의 말에 시빌의 얼굴이 약간 온화해졌다. 그러니까, 시빌이 디자이어의 힘을 빌려 치료 중이던 상처를 말하는 것이었다.

시빌은 기꺼운 태도로 제 로브를 훌렁 들쳐 보이는 시늉을 하며 웃었다. 꺅, 클로디아가 저도 모르게 얼굴을 가렸으나 잠시뿐이었다. 시빌은 킥킥 웃으며 입을 열었다.

“괜찮습니다. 완치는 아니었지만, 상처가 문제가 될 정도로 위험한 상황은 없었으니까요.”

[그럼 다행이구….]

“하지만 저 말고도 다른 환자가 있긴 하군요?”

시빌은 그렇게 말하고 데미안을 돌아봤다. 목덜미에서 턱 즈음까지 올라온 보라색 자국을 말하는 것이었다. 며칠 동안 클로디아가 디자이어와 함께 데미안의 상처를 치료하긴 했지만, 근본적으로는 다른 힘이라 그런지 큰 차도가 없었다. 더 이상의 진전을 막는 정도랄까.

“자초지종을 설명하려면 좀 오래 걸려요. 그게….”

“압니다. 아마 죽음의 바다에 빠진 부작용일 테지요.”

시빌은 어깨를 으쓱했다. 삽시간에 할 말이 없어진 클로디아는 눈만 깜박였다.



 

***



 

“왕이 그런 사람이라….”

일단 마왕성 앞의 반가운 해후는, 조금 후퇴해서 마저 즐기기로 했다. 사방에 엄폐물이 조금도 없는 민둥산에서 - 그것도 마왕의 코앞에서 - 그들이 왁자지껄 떠드는 것은 위험하다고 데미안이 판단했기 때문이다. 마왕성에 관해 궁금했던 것도, 후퇴한 곳에서 포폰에게 듣기로 했다. 포폰은 자신이 몰랐던 일행의 재회를 방해할 생각은 없는 듯, 일단 조금 물러나자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뿐인가.

“북동쪽 사람들도 왕에 대한 신뢰는 꽤 있는 것 같더군요.”

“당신 북동쪽까지 거쳐서 왔어?”

시빌의 말에 포폰이 신기한 듯 눈을 반짝였다. 시빌은 환하게 웃었다.

“예. 혹시 몰라서, 해류가 닿는 지역까지는 모조리 훑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결국 헬렌과 약속한 날짜는 맞추지 못했죠.”

시빌은 헬렌과 약속한 날짜까지 남쪽 해변에 가려고 했지만, 여러 가지 예상하지 못한 일들이 겹쳐 늦었다고 했다.

“그러면 마왕성 앞에는 어째서….”

“뻔하죠, 뭐.”

시빌이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저와 만나지 못한 당신들이 어디로 갈 것 같겠습니까?”

시빌의 말에 헬렌이 분한 듯 버럭 짜증을 냈다.

“…아깐 단독 접근하지 말랬는데 왔다고 혼냈으면서!”

“그거야 다른 문제지요!”

웃음이 터졌다.

시빌은 클로디아가 겪은 악어에 대해 듣더니 진지한 표정이 됐다.

“그 악어들이라면 저도 만났습니다. 그야 저도 마법으로 때려눕히고 도망쳤지만…. 만약 당신들이 만나면 데미안이 처리하겠다 싶었기에 당신들 걱정은 하지 않았죠. 그런데, 그런 방법이 있었다고요….”

“…방법이요?”

“예. 도마뱀으로 ‘돌려보내는’….”

시빌의 말에 클로디아가 반색했다.

“시빌도 눈치챘어요?”

“예?”

“그 악어들이 원래는 도마뱀이었던 게 맞죠?”

클로디아의 말에 시빌이 입을 잠깐 벌렸다가 닫았다. 클로디아는 기쁜 듯이 말을 이었다.

“어쩐지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악어들이 누가 대충 만든 인형처럼, 모두 생김새가 이상했거든요. 뭐랄까…. 바느질을 잘못한 불량품 인형 같았어요. 근데 그게 시빌이 봐도, 본래는 도마뱀들이었을 것이 변해 그렇게 된 것처럼 보인다는 거 아녜요?”

“…음, 예. 맞습니다.”

시빌이 고개를 끄덕였다.

“게다가 저 생각난 게 한 가지 더 있어요. 땅요정 왕의 땅굴 말예요. 그때 세계수를 훔친!”

“예? 아, 예.”

“그 땅요정들, 용의 저주를 받아 그렇게 추한 모습이 되었다고 하지 않았어요? 꼭 자르지스 이야기 같지 않아요?”

클로디아의 말에 디자이어가 신기하다는 듯 감탄사를 내뱉었다.

[뭐야, 그러고 보니 그래. 신기하네. 클로디아 예상대로 혹시 아무르 때문인가, 정말로?]

“아무르요?”

[아무르 힘의 영향을 받아서 원래 이곳에 살던 도마뱀들이 그렇게 변했다고 하면 이상하진 않으니까….]

시빌은 디자이어의 말에 뒷목을 벅벅 긁었다. 아리송한 표정이었다. 그때 포폰이 끼어들었다.

“그거 그렇게 생각하면 우리와도 비슷하지 않아?”

“어?”

갑작스러운 포폰의 말에 모두가 그쪽을 집중했다. 포폰은 까만 개의 형상을 하고 있는 자신을 가리키며 말했다.

“생각해봐, 우리도 원래 너희처럼 사람이었잖아.”

“…지금도 사람이 맞아.”

헬렌이 빠르게 포폰의 말을 정정했다. 포폰은 픽 웃으며 헬렌의 팔을 철썩 때렸다.

“알아! 우리가 사람이 아니라는 이야기가 아냐!”

그 바람에 잠시 미소가 일행 사이에 번졌다.

“먼 옛날, 포르투와 자르지스가 함께 바다 위에 떠 있을 때…. 용의 저주가 있기 전에는 자르지스의 주민들도 인간의 모습이었다는 이야기는 이미 들었댔지?”

“응.”

“우리는 하지만 환경의 영향 때문일까…. 자르지스의 동물들과 섞였어. 환경에 적응한 건지, 아니면 누가 일부러 섞어놓은 건지는 모르지만…. 나 같은 사람들은 물론이고, 물속에서밖에 살 수 없는 물고기와 섞인 인간들도 나타났지.”

그런 형상이라면 이미 자르지스에서 봤다. 게의 모습에, 사람의 다리가 달려 있던 끔찍한 형상을 생각하며 클로디아는 진저리쳤다. 데미안의 표정도 좋지는 않았다. 포폰이 어깨를 으쓱했다.

“혹시 그 악어들도 우리처럼 변한 게 아닐까? 다만, 우리는 오랜 세월에 걸쳐 이렇게 살았지만…. 걔들은 갑자기 변해서 그렇게 되었다거나?”

“음, 가능성은 있군요. 하지만.”

시빌이 포폰의 말에 답했다. 하지만? 모두의 눈이 시빌 쪽으로 향했다. 시빌은 맑게 웃으며 손뼉을 두어 번 쳤다.

“포폰에게는 정말 미안한 말이지만, 우리에게는 사실 그런 게 중요하진 않죠.”

“그럼….”

“다들 잊고 있는데 말입니다. 우리의 목적은 아무르와 왕자님의 심장을 찾아내는 게 더 중요하다고요.”

[마왕도 죽여야 하는데?]

디자이어가 툭 내뱉듯 물었다. 빨간 머리의 마법사는 피식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물론 그것도 맞지만, 마왕을 죽인다고 모두 해결되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지….”

시빌의 말이 맞았다. 마왕을 먼저 만나서 죽인다 한들 그가 아무르의 위치를 내놓지 않으면 말짱 도루묵이다. 그렇다면 화구에 먼저 들어가서 아무르를 찾아와야 하나? 하지만 포폰이 고개를 갸웃했다.

“너희 그 화구에 어떻게 들어가게?”

…갑자기 분위기가 급속도로 침울해졌다. 아무도 굳이 지적하지 않던 일을 포폰이 짚은 탓이었다. 시빌이 중얼거렸다.

“귀여운 개 어린이, 눈치가 없군요….”

“나 개 아니야!”

포폰이 씨근댔으나 다들 포폰을 챙겨줄 여유보다는 화구로 들어갈 방법을 골몰했다. 용의 화구에 들어갈 수 있는 자는 없다. 마왕이 어떤 비결을 가지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용의 껍질 정도는 뒤집어 써 줘야 한다.

[그때 그 스톤 드래곤의 껍질 팔지 말라고 할걸….]

디자이어가 중얼거렸다. 미겔은 스톤 드래곤을 잡았으나 그 껍질을 다른 곳에 팔아치웠다고 했다. 헬렌이 문득 아, 하고 생각난 듯 얘기했다.

“저어, 용사왕이 팔아치운 용의 껍질이라면…. 유명세를 타고 어딘가에 전시되거나 하지 않았을까?”

“유명하겠지만 그건 대륙입니다. 저희가 대륙까지 다시 가서 스톤 드래곤의 껍질이 어디 있는지 알아보고, 그걸 사 오는 데 얼마의 시간이 걸릴지는 모르죠. 애초에 그런 건 희귀한 물건들을 좋아하는 수집가들이나 모으는 것이다 보니, 상대가 팔아줄지도 미지수고요.”

데미안이 차가운 어조로 답했다. 헬렌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전설에서나 나오는 동물이 이렇게 내 인생에 큰 영향을 미칠 줄 알았으면, 용 껍데기의 행방 정도는 알고 있는 인생을 살 것을….”

용 같은 건 동화책에나 나오는 줄 알았다고, 헬렌이 투덜거렸다. 그때였다.

클로디아가 “아!” 하고 박 터지는 소리를 냈다.

“전설의 동물!”

“음?”

“전설의 동물 말예요! 나 그거 하나 알아요!”

“…무슨 말입니까?”

“유니콘! 유니콘 말예요!”

클로디아의 부르짖음에 모두 눈을 둥그렇게 떴다. 그래, 그러고 보니 그녀가 유니콘을 만난 적이 있었다. 클로디아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꼭 쥐었다.

“자기가 필요하면 어디든지 오겠다고, 딱 세 번 부르면 세 번은 오겠다고 했어요. 용의 화구라고는 하지만, 유니콘도 신성 생물이잖아요.”

“그렇…죠?”

시빌이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클로디아는 “아이참!” 하고 부르짖었다.

“유니콘에게 혹시 우리를 그 안에 태워다 줄 수 있는지 불러서 물어보도록 하는 건 어떨까요?”

[오, 그거 좋은 생각…]

“…안 돼요.”

뜻밖에도 클로디아의 의견을 반대하고 나선 것은 시빌이었다. 시빌은 고개를 저었고, 클로디아는 조금 당황했다.

“그때는 유니콘 지금 당장 불러보자고 했잖아요?”

“그거야 제가 궁금해서 그런 거고, 안 됩니다.”

“왜요…?”

시빌의 녹색 눈동자가 묘한 빛을 띠었다. 클로디아는 눈을 깜박이며 그 시선을 마주했다. 시빌이 한숨을 내쉬었다.

“유니콘은 신성 생물입니다. 하지만 그 등에 탄 우리도 신성 생물은 아니잖아요.”

“아….”

“그리고 그 유니콘이 우리를 한꺼번에 다 태울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고작 한두 명일 텐데, 유니콘이 우리를 태우느라 들락날락하는 동안 화구 안에 남겨진 사람은 타죽으면 됩니까?”

의외의 맹점이었다. 클로디아는 낙심한 듯 “아아아아아. 젠장.” 하고 푸념했다. 그 말에 시빌이 눈 한쪽을 웃으며 찡그렸다.

“이럴 수가. 나의 공주님은 제가 없는 사이 제법 입이 험해졌군요?”

“그런가요?”

클로디아가 어깨를 으쓱했다. 시빌은 흠흠, 하고 헛기침을 했다.

“아무튼 그건 큰 대안이 될 수 없습니다.”

“…포폰.”

그때였다.

한참 동안 시빌과 클로디아의 논의를 듣고 있던 데미안이 포폰을 불렀다. 연신 귀를 쫑긋거리며 일행의 말을 경청하던 포폰이 데미안을 쳐다봤다.

데미안은 포폰에게 무심한 듯 물었다.

“화구라는 건…. 이틀 동안 내가 이곳을 오르며 관찰했는데, 혹시 화산처럼 생긴 게 맞는 것인지 알고 싶어.”

“어? 화산?”

“그러니까….”

데미안이 눈을 가늘게 뜨고 손가락으로 흙 위에 화산 모양을 그렸다. 세모 모양의 산을 그리고, 그 꼭짓점 부분을 손가락으로 슥 지운 다음 그 위에 오목한 구멍을 그린다.

“이런 식으로, 이 위가 뚫려 있는 건지 궁금한 거다.”

“아하!”

포폰이 빙그레 웃었다.

“비슷해! 가운데가 뚫려 있는 건 맞지만, 이렇게 구멍이 크지는 않아. 음…. 뭐랄까?”

포폰은 위가 뚫린 세모 모양의 몸통 군데군데에 손가락으로 구멍 몇 개를 그렸다. 꼭대기에 난 구멍보다는 작은 것들이었다.

“이런 식으로, 구멍이 군데군데 뚫려서 이곳에서 김이 새는 거야. 뭔가 구멍 뚫린 냄비 같은 거랄까?”

“용 세 마리가 살았던 보금자리라는 걸 잊으면 안 됩니다.”

시빌이 포폰에게 말을 보탰다. 시빌은 완만한 능선을 손으로 더듬은 뒤, 길고 동그란 곡선을 크게 팔 벌려 그렸다.

“이만한 곳에, 용들이 드나드는 구멍이 군데군데 있는 것이죠. 나무가 없는 것은 그것 때문입니다. 가운데에는 빈 공동이 있는데, 거기 나무가 뿌리를 내렸다가는 용들은 자다가 지붕이 무너지는 봉변을 당할 테니까요.”

“그렇군요.”

“그런데 그건 왜 갑자기 궁금해합니까?”

데미안이 잠시 고민하다가 시빌을 바라봤다.

“화산 같은 형태라면, 그러니까 가장 큰 구멍이 있는 곳이라면…. 내가 올라가서 갈라놓은 후, 안의 열을 한 번에 빼 보는 건 어떨까 고민하던 참이었습니다.”

산을 가른다.

평범한 사람이 말했다면 코웃음을 칠 만한 말이었으나. 검기 사용자인 데미안이 말하니 그 무게가 달랐다. 다들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서로를 바라보다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말이 돼?!”

“너무 힘들어요! 반대합니다!”

“안 됩니다!”

모두 반대한다는 점에서는 같았으나, 어조는 각자 틀렸다. 헬렌은 데미안이 말한 것 자체를 황당해하는 반응이었으며, 클로디아는 중독된 상태의 데미안을 걱정했다. 그리고 가장 목소리가 큰 시빌은…. 그저 반대했다. 데미안은 이마를 찡그렸다.

“첫째. 말이 됩니다. 둘째. 그 정도는 그리 힘이 들지 않습니다. 셋째. 왜 안 됩니까?”

헬렌은 물러났고, 클로디아는 중독된 사람이 치료도 하지 않고 그 정도의 힘을 발휘한다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고 떠들어댔다.

“수르 알파! 나는 수르 미다프를 알아요! 그 또한 코카 왕국의 거대한 바위산을 갈랐지만, 그 바위산을 가른 다음 보름을 쉬었다고요!”

“저도 그때의 이야기를 미다프 경께 들었습니다. 미다프 경께서는 사실 멀쩡했으나, 그냥 놀고 싶어서 쉬셨다고 제게 몰래 고백하셨습니다.”

존경하던 은사가 사실 게으름뱅이였다는 충격에 휩싸인 클로디아가 잠시 휴전을 선언했다. 비틀거리는 클로디아에게서 시선을 거둔 데미안이 시빌을 향했다.

“왜 안 됩니까?”

재차 반복해 묻는 데미안에게 시빌이 한숨을 쉬곤, 손을 내저었다.

“저건 화산이 아닙니다. 용의 보금자리라고요.”

“제가 간과한 부분이 무엇입니까?”

“저만한 민둥산이 무너지면 주변 마을은 멀쩡할 것 같습니까?”

그 말에 잠자코 듣고 있던 포폰이 눈을 희번덕거렸다. 시빌은 저 민둥산의 안쪽은 뜨거운 열과 불로 가득 차 있으며, 열과 불을 다 비워내기 전에 흙먼지와 재로 주변 마을이 엉망이 될 거라고 말했다. 포폰은 삽시간에 자신의 마을과 근처 마을들이 당할 재앙을 셈해보고 공포에 질린 표정이 됐다. 데미안은 포폰의 당황한 표정을 보고 바로 결론 내렸다.

“안 되겠군요.”

“제게 설득돼주셔서 감사하다고 말해야 하나요?”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데미안의 시선이, 아까 물러섰던 동굴 틈 앞쪽으로 향했다.

“이렇게나 오래 논의했는데, 결국 귀결은 마왕을 죽이는 것이군요.”

“….”

“마왕성이라고도 부르기 뭐한 저 동굴 안으로 들어가서, 그를 어떻게든 만난 후, 죽이든 살리든 아니면 아무르만 뜯어내든….”

마왕이야말로 용의 화구를 오랫동안 다스렸으니 아마 화구로 들어가는 법을 알 것이다. 거기에는 일행들 모두가 동의했다. 하지만 마왕을 만나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아무도 모른다. 일행들은 불안한 눈으로 동굴 쪽을 바라봤다.

“…시간을 너무 오래 허비했군요.”

오후의 노란 햇볕이 내리쬐고 있었다. 너무나 평화로운 그 햇살 아래,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어쨌든, 이제는 정말로 저곳으로 가야 할 시간이었다.



 

***



 

‘마왕성’ 진입에 관한 일행의 의견은 엇갈렸다. 밖에서 자고 일어나서 아침 든든히 먹고 가자는 요리사의 의견, 그리고 들어가면 밤낮은 상관없으니 그냥 신중히 살피면서 천천히 들어가자는 기사의 의견, 무섭다는 개 수인의 의견에 더해 아무래도 자기는 안 들어갈 거니까 상관없다는 마법사의 의견까지.

일행의 리더인 클로디아는 결론을 내렸다.

“지금 들어가죠. 그리고 시빌은 같이 가요.”

“아니, 전 안 간다니까요!”

시빌이 펄쩍 뛰었다. 클로디아는 건조하게 그를 쳐다보며 말했다.

“나 좋아한다면서요. 아닌가 보다.”

“우와, 대박.”

포폰이 눈앞에서 펼쳐지려는 치정 관계에 눈을 반짝였고, 시빌은 방금 전의 두 배로 펄쩍 뛰었다.

“아니, 좋아하는 거랑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나 사랑하면 원래 목숨 버려야 돼요. 그렇게 돼 있어요.”

“그게 무슨 무시무시한 운명이에요!”

“어릴 적에 동화책도 안 봤어요? 공주 좋아하는 남자들이 목숨 거는 거.”

지금 농담하는 거야, 뭐야.

시빌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클로디아를 바라봤으나, 헬렌이 말을 보탰다.

“와, 시빌 진짜 대박이다. 난 삼백만 싱씩 받아놓고 저렇게 양심 없기도 힘든 것 같은데.”

“심지어 좋아한다며….”

방금 전까지 눈을 반짝이던 포폰도 저렇게 거들었다. 시빌은 진저리를 치며 결국 동굴 안에 들어가는 데 동의했다. 물론 그의 동의에 이르기까지 숱한 비난과 개탄, 유혹이 뒤따랐음은 물론이다. 결정적인 건 디자이어였다.

[시빌. 너 상처 마저 치료 안 할 거야?]

사실상 시빌이 상처를 치료할 유일한 수단이 디자이어였다. 시빌은 얼굴을 울 것처럼 일그러트리곤 “알았습니다! 알았어!” 하고 고개를 저었다.

그와는 사뭇 대조적으로, 시빌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데미안은 무심한 표정으로 칼을 빼 들었다.

“제가 맨 앞을 엄호할 테니, 시빌이 뒤를 엄호하시죠.”

어차피 이럴 줄 알았다는 그의 태도에 시빌이 입술을 비죽였다. 하지만 생각 외로 시빌은 더 이상 토를 달지 않았다. 그뿐인가. 동굴 안으로 들어갈 때는, 작은 빛을 만들어 그들의 몸 여기저기에 붙여 줬다.

“우와….”

포폰이 놀라 감탄했다. 시빌이 으쓱했다.

“발광 도마뱀 덕에 대륙에서는 별로 쓸 일이 없는 재주죠.”

그 말대로였다. 반짝이는 마법의 빛은 대륙에서는 거의 쓰이지 않았다. 비싼 마법사를 고용할 바엔 사람들은 훨씬 거창한 일을 이루고 싶어 했다.

동굴로 들어가며 포폰이 “왕을 만나지 못할 수도 있는데…”라며 걱정했으나, 헬렌이 포폰의 등을 두들기며 걱정을 가라앉혔다. 어차피 들어가야 할 것, 그런 생각은 안 해도 된다는 말에 포폰은 느릿하게 꼬리를 흔들었다.

바위들이 서로 맞물리며 생긴 틈을 따라 들어가자, 서늘한 바람이 훅 끼쳐왔다. 클로디아는 무심코 입구에서 위쪽을 올려다봤다가 감탄하고 말았다. 엄청나게 큰 바위들이 위에서 서로를 지탱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금방이라도 무너져내릴 듯한 바위들이 절묘한 균형으로 물려 있었다.

“대단해….”

“그러게. 살 떨린다. 무너지면 어떻게 하지?”

헬렌이 어깨를 부르르 떨며 클로디아에게 맞장구쳤다. 동굴은 흙먼지와 바위로 되어 있었다. 대부분은 바위였고, 습한 기운에도 불구하고 박쥐가 살거나 물이 떨어지지는 않았다. 이게 다 사람 사는 증거인 걸까.



 

***



 

[엄청난 마력이 느껴져.]

디자이어가 갑작스럽게 툭 내뱉듯 말했다. 한참을 걸어 들어간 시점이었다. 바위틈을 헤매는 데 지쳐 있던 클로디아가 “응?” 하고 되묻던 순간, 데미안이 맞장구치듯 입을 열었다.

“공동입니다.”

“어….”

그 말에 모두가 앞을 바라봤다. 데미안의 앞에는 새카만 공간이 펼쳐져 있었는데, 여태껏 일행들이 들어와서 본 것과는 사뭇 다른 광경이었다. 데미안의 바로 뒤에 있던 클로디아는 여태까지 동굴 안에서 좁고 바위투성이인 광경만 보고 있었으나, 그 앞에 갑자기 까마득한 구멍 하나가 새로 생긴 기분이었다. 시빌이 빛 하나를 만들어내 그 공동 안으로 띄웠다.

“와아아….”

저도 모르게 포폰이 감탄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공동은 엄청나게 큰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새까맣거나 허여멀건한 바위들이 아까보다 더욱 절묘하게 맞물린 형태의, 커다란 홈. 혹은 돔?

“용이 살았던 공간이라는 게 실감이 나네요….”

“아마 우리는 아직 용의 화구까지 본격적으로 들어온 것은 아닐 겁니다.”

클로디아가 감탄하자 시빌이 말을 보탰다.

시빌은 이곳이 전혀 열기가 없으며, 이 정도의 공동은 자신이 기록에서 본 용의 크기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작다고 말했다. 그 말에 클로디아는 더더욱 크게 감탄했다.

시빌이 천장 끝까지 쏘아 올린 빛은 점점 커져 공동 전체에 빛무리를 흩뿌렸는데, 어림짐작으로 봐도 포르투 왕성에서 가장 큰 태양의 홀보다 두 배는 높은 것 같았다. 천 명은 수용할 수 있어 커다란 연회가 주로 열리던 태양의 홀을 생각해보고는 클로디아는 한숨을 쉬었다.

세상은 정말로 넓구나….

“하지만 사람이 산 흔적은 거의 없군요.”

데미안이 조심스럽게 공동 안을 둘러보며 말했다. 모두들 그 말에 동의했다. 공동의 바닥은 천정보다는 좀 작은 바위들로 메워져 있었는데, 그 바닥 군데군데가 마치 사람이 다듬은 듯 탄탄해 누군가가 머무르기에는 적절한 곳이었다. 큰 바위들이 곳곳에 흩어져 있어 엄폐물도 많았다. 마왕이 동굴에 산다면 아마 이곳에 제 보금자리를 만들어놓지 않았을까? 싶은 곳이었다.

하지만…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여기가 아닌 걸까요? 아니면….”

“포폰의 말대로 왕이 자신을 만나지 못하게 하려고 우리를 빙빙 미로 속으로 내돌리고 있을 수도.”

헬렌이 말했다. 클로디아는 한숨을 쉬었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정말로 방법이 없는 건데요….”

“물이다!”

근처를 뽀르르 돌아다니던 포폰이 반가운 비명을 질렀다. 공동의 구석에서 맑은 물이 솟아나고 있었다.

“동굴에서 이런 물이 솟아나는 경우도 있나요?”

클로디아의 의문도 아랑곳하지 않은 포폰은 물에 손가락을 담가 보더니 환한 미소를 지었다.

“물이 아주 깨끗해!”

“마실 수 있을까요?”

[마법이 걸려 있으면 안 될 것 같은데.]

시빌이 정리했다. “마법도 안 걸려 있고, 지열 때문에 뜨겁긴 하지만 마실 수 있는 물 같습니다.”

헬렌이 환호를 질렀다. 그녀는 재빠르게 제의했다.

“우리 밥 먹고 쉬다 가자!”

동굴 안에서 꽤 오래 걸어 일행들 모두 신경이 곤두서 있는 상태였다. 아무도 반대하지 않았다. 데미안마저 곧장 고개를 끄덕였으니. 공동은 여러 사람이 저마다 흩어져서 제각기 할 일을 하기 적당했고, 이곳에서 괜찮으면 잠까지 자자는 의견이 제시됐다. 길도 모르는 동굴을 계속 헤매다 지쳐서 좁은 통로에서 자느니 적당한 곳에서 휴식을 취하다 가자는 것이었다. 만장일치였다.

헬렌이 가방 안에서 말린 고기를 꺼내어 물에 넣고 끓였다. 자신이 챙겨온 분말과 야채 말린 것들도 함께였다. 공동의 천장이 높아 큰 걱정은 안 됐지만, 그래도 최대한 간단한 음식을 만들었다는 것이 헬렌의 설명이었다.

하지만 맛은 전혀 간단하지 않았다. 수프를 다 마신 포폰은 입맛을 다셨고, 클로디아는 호쾌하게 수프를 들이킨 후 “한 그릇 더 마시고 싶어요!”라고 웃었다. 물론 헬렌은 인원수를 완벽하게 맞추어 조리했기 때문에 추가는 불가능했지만, 어쨌든 칭찬을 받은 그녀는 기뻐했다.

평화로웠다.

식사를 마친 데미안은 주변을 잠시 둘러보고 오겠다며 일어섰다. “악어가 동굴 안에는 없는 것이 마음에 걸립니다. 아무것도 없는 동굴이라는 것이…. 글쎄요. 마왕이 정말 여기에 살고 있다면 자기 삶의 편의를 위해 괴물들은 들어오지 못하게 했을 수도 있지만, 안심은 안 되는군요.”

포폰이 용감하게 “내가 모두를 지킬게!”라며 나섰다가 헬렌에게 귀여움을 받았다. 클로디아는 까르륵, 웃었다가 데미안에게 숙제를 받았다.

“제가 돌아올 때까지 이백 번, 칼을 휘두르십시오.”

대번에 시무룩해진 클로디아의 볼을 시빌이 귀엽다며 잡아 늘였다. “무엄해요! 공주에게!” 그렇게 말해놓고 클로디아는 킥킥 웃었다.

하지만 어쨌든 동굴 안에 들어와서, 부쩍 몸을 한 번 덥혀야 한다고 생각하기는 했다. 바깥과 달리 이 동굴은 습하고 약간 추웠으므로, 클로디아는 아까부터 조금 몸이 으스스하다고 느꼈기에 조금은 데미안의 숙제가 반가웠다. 그녀는 디자이어를 들고 근처에 있는 큰 바위 뒤로 갔다. 그곳이 적당히 일행에게서 제 모습을 가려주는 데다가, 큰 평지가 있어 검 연습을 하기가 좋았다.

[잘한다, 클로디아! 예쁘다, 클로디아!]

하지만 중간중간 추임새를 넣는 디자이어 때문에 클로디아의 비밀 연습은 금세 일행의 구경거리가 되고 말았다. 클로디아는 얼굴을 붉히며 디자이어를 던져 버렸다.

깡그랑!

디자이어가 비명을 질렀다.

[검 살려!]

“너 시끄러워서 안 되겠어! 시빌, 칼 좀 줘요.”

“칼이요? 제가요?”

“저번에 긴 칼 하나 갖고 있는 거 봤어요.”

그녀는 시빌의 허리춤을 턱으로 가리켰고, 시빌은 피식피식 웃으며 로브 안에서 작은 중검을 내놨다. 디자이어보다는 한참 가볍지만, 그래도 제법 그럴싸한 모양은 갖춘 물건이었다. 클로디아는 일행들을 뒤로 물렸지만, 시빌은 “어허, 초보자인 공주님이 내 검을 망가뜨리면 어떻게 합니까?” 하며 물러서지 않았다.

결국 헬렌과 포폰이 물러가고, 시빌만 남았다. 클로디아는 천천히 팔을 뻗었다. 데미안이 가르쳐준 궤적대로 검 끝을 맞추려니 팔이 벌벌 떨렸다.

“데미안이 가르쳐준 겁니까?”

“네.”

“대단하군요. 자르지스에서 둘만 남았을 때도 계속 수련했습니까?”

“할 수 있을 때는요.”

마왕의 돌 덕분에 힘이 어느 정도는 남아 있었고, 클로디아는 시빌의 말에 대꾸하면서도 충분히 검을 그을 수 있었다. 나머지는 단지 집중의 문제였다.

“할 수 없을 때는 언제였는데요?”

“음…. 거울 공작의 성이라거나?”

“확실히 그곳에서는 검 수련을 하고 있을 순 없었겠죠….”

시빌이 피식피식 웃으며 주변을 둘러봤다.

“그에 비하면, 좀 웃기긴 하군요, 지금 상황이.”

“예를 들면요?”

“예를 들고 말고 할 것도 없이, 여기가 바로 마왕성이잖아요.”

“그런가요?”

클로디아는 칼끝을 바라봤다. 디자이어와는 다른 가벼운 느낌이었는데, 오히려 더 어려웠다. 데미안은 무거운 검보다 가벼운 검이 훨씬 균형 맞추기가 힘들다고 말한 적 있었다.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이제는 알 것 같았다. 너무 가볍다 보니 휙휙, 멈춰야 할 곳에서 멈추지 않고 궤적을 쉽게 지나쳐버린다. 진중하게 직선으로 그어야 할 검이 파르르 떨리느라 파도를 그렸다.

클로디아는 그게 마치 시빌 같다고 생각했다.

진중함이라고는 요만큼도 없이, 모든 것을 웃음과 너스레로 넘겨버리는 가벼움. 그 깃털 같은 느낌 때문에 까르르 웃을 수 있지만, 언제나 중요한 부분은 놓쳐버린다. 때론 그녀에게 진지한 눈빛으로 다가오지만…. 글쎄.

그것마저 사실은 본질을 흐리려는 시도였다면 어떨까?

공주는 파르르 떨리는 검끝을 바라봤다. 제자리에 한참 멈추려고 시도하고 있었지만, 검끝은 떨림을 멈출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아니, 정확히는…. 클로디아 자신이 떨고 있었다.

그녀는 입을 열었다.

“시빌.”

“말해요, 클로디아.”

근처의 바위에 엉덩이를 붙이고 팔짱을 낀 채 클로디아를 쳐다보고 있던 시빌이 장난기를 지우지 않은 채 답했다. 클로디아는 방금 전 하던 대화를 자연스럽게 이었다.

“마왕성 안에서 이렇듯 검 연습을 하는 모습이 웃긴가요?”

“음, 여기가 통상의 마왕성이었다면 진짜 웃겼겠지만요.”

그렇게 말하고는 시빌은 눈썹 한쪽을 들어 올렸다.

“혹시 기분 상했어요?”

“아뇨, 기분이 상하진 않았고…. 뭐랄까. 시빌에게는 지금이 정말 웃긴 상황일 수도 있긴 하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왜 그렇게 생각해요?”

장난스럽게 빛나는 눈을 응시했다. 클로디아는 침을 삼켰다. 검 끝은 여전히 고정되어 있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가 고정시키려고 노력할수록, 더 떨렸다.

공주는 입을 열었다.

“당신이 마왕 아니에요?”

평화가 멎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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