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장. 용사왕에 대하여 (19/30)

6장. 용사왕에 대하여



 

클로디아는 펄쩍 뒤로 뛰며 소리 질렀다.

“아무래도, 초대 국왕이 찜찜해요!”

“그걸 지금 말하는, 이유가 뭐야!”

마주 답한 건 헬렌이었다. 헬렌은 격렬한 움직임으로 팔을 내리쳤다.

깡!

헬렌이 든 프라이팬에 맞은 상대가 얼얼한 표정으로 뒤로 물러났다. 클로디아는 그 상대의 바로 뒤에서 크게 숨을 들이켰다.

[그래, 클로디아. 지금이야! 찔러!]

“이야압!”

클로디아는 눈을 부릅뜨고 디자이어를 들고 앞으로 찔러넣었다. 푹, 하고 기분 나쁜 감촉이 손에 전해졌다. 으. 클로디아는 이를 악물었다. 클로디아의 키 반만 한 악어가 디자이어에 꿰뚫려 있었다. 악어는 소리를 질렀다.

“꽤애애액!”

그 끔찍한 비명을 무엇에 비할 수 있을까. 클로디아는 질린 표정으로 물러났다. 눈을 감고 싶었지만, 데미안은 검을 휘두를 때 눈을 감는 건 절대로 안 될 말이라고 했다. 클로디아는 성실한 학생이었으므로 그저 검을 악어에게서 빼내는 데 집중했다. 그러나 노력도 소용없이, 악어는 그대로 질질 디자이어에 딸려 왔다. 뚝. 퍼런 체액이 디자이어의 검결을 따라 흐르다가 바닥에 떨어졌다. 히익. 클로디아가 입을 우그러뜨렸다. 그때였다.

파앗.

디자이어에게 꿰뚫린 상처 부분에서 빛이 뿜어져 나왔다. 예상했던 결과였기에 클로디아는 검을 꼭 잡은 채로 그 빛을 노려봤다. 그리고 잠깐 사이 반짝이던 빛이 사라진 곳에.

툭.

작은 도마뱀이 떨어져 나왔다. 악어는 온데간데없이, 그곳에 자리한 것은 클로디아의 손바닥만 한 도마뱀뿐이었다. 상처도 없었다. 도마뱀은 쉬잇, 쉿쉿 소리를 내더니 빠른 속도로 주변을 둘러보고는 네 다리를 움직여 사라졌다. 쫓아갈 수도 없었다.

벌써 세 번째였다.

“역시….”

[또 악어가 도마뱀으로 변하잖아?]

클로디아와 디자이어가 번갈아 말을 내뱉었다. 클로디아의 건너편에 있던 헬렌도 이럴 것 같았다는 듯 혀를 차곤 주변을 둘러봤다.

“아무래도 뭔가 문제가 있는 것 같은데, 다음 악어를….”

그리고 헬렌은 저편에 펼쳐진 광경을 보고 어깨를 으쓱했다.

“…잡을 필요는 없겠군. 아니, 잡을 수도 없다고 해야 하나?”

데미안의 주변에는 족히 열 마리는 넘는 악어가 죽어 있었다. 한결같이 검기에 베어 깨끗하게 잘린 절단면에서 푸른 체액을 울컥울컥 뱉어내는 시체들을 보고 헬렌은 눈을 질끈 감았다.

으, 소리를 내는 헬렌의 어깨를 클로디아가 잡았다.

“그러게요…. 수르 알파, 대단하다고 해야 할지.”

“…끔찍하다고 해야 할지. 물론 저 정도의 실력자가 있다는 건 고마운 일이지만 말이야.”

헬렌이 창백한 얼굴로 클로디아의 허리를 감아 끌어안았다. 클로디아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헬렌이 고개를 갸웃했다.

“넌 안 무서워?”

“아.”

클로디아가 데미안 쪽을 바라봤다. 데미안은 검에서 악어들의 체액을 떨어내느라 이쪽으로 접근하기는커녕 일행에게서 더 멀리 떨어지고 있었다.

그런 데미안을 보고 클로디아는 어깨를 움츠렸다.

“너무 무서워하면 섭섭해할 테니까요.”

“다 끝났어~?!”

저편 덤불에서 포폰의 목소리가 들렸다. 디자이어가 혀를 차는 소리를 냈다.

[저 녀석, 맨 앞에서 싸울 것같이 말하더니.]

“전투의 미덕 중에는 깜냥이 안 되는 싸움에서는 빠지라는 것도 있거덩?!”

용케 디자이어의 말을 들었는지, 포폰이 버럭 화를 냈다.

헬렌이 피식 웃으며 클로디아의 허리에서 손을 풀고 포폰이 숨어 있는 덤불 쪽으로 다가갔다. 포폰이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헬렌은 그 목덜미를 북북 긁어주고는 클로디아 쪽에 손짓했다.

클로디아가 옅게 웃었다.



 

***



 

본격적으로 포폰의 안내를 따라 용의 화구에 진입한 것이 오늘 아침이었다. 일행들은 이틀간 완만한 경사를 따라 용의 화구가 있는 민둥산에 오르기 시작했다. 산은 야트막한 경사를 가지고 있어 오르는 데는 큰 힘이 들지 않았으나, 문제는 화구를 오를수록 나타나는 괴물들이었다.

소문의 ‘악어’를 클로디아는 민둥산을 오르던 첫날에 만났다. 그 ‘악어’들은 클로디아가 아는 악어 같지는 않았다. 마치 독 오른 도마뱀의 얼굴을 인간의 몸에 단 것 같은 형상이었는데, 그 키가 클로디아의 반만 해 마치 예전에 거인들의 숲에서 본 땅요정 같았다.

땅요정보다 아주 조금 더 크다고 해야 하나. 꼬리에는 가시가 달려 있고 그 발톱은 엄청나게 날카로웠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악어라는 이름과는 달리 이빨과 턱은 그리 단단하지 않았다.

처음 악어들을 만났을 때, 데미안은 가장 앞장서서 악어들의 턱을 깨부숴놨다. 적게는 다섯 마리에서 많게는 열댓 마리까지 무리 지어 다니는 악어들이었지만 검기 사용자가 함께 있으니 두려울 것이 없었다. 주로 데미안이 주변을 경계하고 일행들은 천천히 데미안 뒤를 따라가는 식으로 화구를 올랐다.

이상을 발견한 것은 어제저녁이었다.

우연히 데미안을 피한 악어가 클로디아의 가까이 왔는데, 클로디아가 놀라 저도 모르게 디자이어를 휘둘렀던 것이다. 디자이어에 베인 악어는 비명을 지르며 팔을 허우적댔다. 클로디아는 엉겁결에 디자이어를 놓쳤는데, 그 직후에 본 것이 바로 도마뱀으로 변한 악어였다.

악어는 팔을 허우적대던 모습 그대로 조그마한 도마뱀으로 변해 뽈뽈뽈 기어 도망쳤다. 클로디아가 붙잡을 새도 없었다. 일행 모두 놀라 서로를 쳐다봤다. 그다음에는, 마주친 악어 무리들 중 가장 작은 악어를 일부러 고립시킨 다음 디자이어로 베어 봤다.

마찬가지였다. 디자이어에 베여 구역질 나는 체액을 뱉던 악어는 어디로 가고, 조그만 도마뱀 한 마리가 바닥으로 떨어져 도망쳤다. 일행들은 아무래도 디자이어가 가진 힘이 악어들을 도마뱀으로 변신시키는 것 같다고 추측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많은 악어들을 모두 일일이 그런 식으로 베어서 도마뱀으로 바꿀 수는 없었다. 그게 악어들을 치우는 가장 자비로운 방법이라는 것에는 모두가 동의했으나, 악어들의 발톱은 제법 날카로웠고 그 수도 많았다.

“모두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할 수 있는 만큼만 하시고, 나머지는 제가 엄호하겠습니다.”

데미안이 그녀에게 말했고, 클로디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지금에 이른 것이다.

클로디아는 악어들을 마주칠 때마다 최대한 자신이 그들을 베어 없애려고 애를 썼다. 주로 그녀를 돕는 것은 헬렌이었다. 헬렌 또한 피를 덜 흘릴수록 좋다고 보는 편이었고, 자신이 지닌 손칼은 집어넣고 요리도구를 써서 악어들을 제압했다. 덕분에 냄비도 프라이팬도 쭈글쭈글 이상한 흠집이 나기 시작했지만, 클로디아는 그쪽이 훨씬 좋았다.

다만 이상하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악어들을 도마뱀으로 계속해 바꿔가며 클로디아가 발견한 것이 있었다. 작은 도마뱀들의 모습은, 악어들이 커진 모습보다 훨씬 정교했다. 자신들을 보면 괴성을 지르며 달려오는 악어들은 어딘가 잘못 만들어진 것처럼 삐뚤빼뚤했다. 이가 박힌 턱만 해도 그랬다. 이빨들의 사이는 울퉁불퉁한 데다가 간격이 고르지 못했고, 이의 크기도 마찬가지였다. 악어라면 응당 가지고 있어야 할 긴 턱은 없고 대부분 짧았다. 눈알의 색도 제각각이었고 초점도 분명하지 않았다. 턱에서 질질 흘리는 침을 제대로 삼키지 못하는 것도 그랬다.

여태까지 일행들은 모두 그 ‘악어’들이 자르지스에서 봐온 마족 같다고 생각했지만, 마족과도 그 악어들은 좀 달랐다.

‘마치… 그저 살생하기 위해 급히 만들어진 피조물 같달까.’

하지만 디자이어가 베어낸 후 변한 도마뱀들은 그녀가 포르투에서 봐온 도마뱀들과 다르지 않았다.

‘그렇다면, 혹시 디자이어가 그 악어들을 변하게 하는 게 아니라, 사실은 본래의 모습대로 돌려놓는 것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면 말이 된다. 삐죽삐죽 제멋대로 생긴 외모도, 악어들이 이지라고는 없이 마음대로 행동하는 것도. 자르지스 사람들은 악어들이 민둥산을 순찰 다니는 것처럼 이야기했으나, 이틀간 일행들이 본 바로는 전혀 달랐다. 악어들은 무리 지어 다니면서도 민둥산을 그저 아무 목적 없이 떠돌았다. 그러다가 일행이 자신들 앞에 나타나면 공격했다. 마치 장애물을 치우려는 것처럼.

갑자기 나타났다는 악어들. 그리고 자르지스의 왕.

명확한 부분이 하나도 없었다. 클로디아는 한참이나 악어들과 왕의 이야기를 곱씹었다. 그리고 불현듯, 악어들과 싸우며 떠올린 것이 있었다.

왕이 최근 화구에 아무르를 보관했다는 것.

[그거랑 미겔이 찜찜한 게 무슨 상관인데?]

디자이어가 클로디아에게 캐물었다. 악어들을 물리친 후, 일행은 민둥산 한쪽의 바위들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슬슬 날이 저물어 야영할 곳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민둥산이라고는 하지만 바위들과 잔돌들, 가끔 뿜어 나오는 연기들 때문에 일행이 노숙할 곳을 찾기는 어렵지 않았다. 불을 피워도 아무 문제 없었다. 클로디아는 데미안이 피워놓은 작은 모닥불에 가지를 하나 집어넣으며 말했다.

“디자이어. 미겔 폐하는 어떤 분이었어?”

[뭐? 그건 왜….]

“있잖아. 나는 잘은 모르지만…. 자르지스에서 들은 바로는 미겔 폐하는 상당히 무책임하신 분 같거든.”

아주 오래전에 이 세상을 구하고, 포르투를 세운 뒤 천수를 다한 용사왕.

클로디아는 제 까마득한 조상이 자르지스에서 무엇을 했을지 궁금해졌다. 자르지스 사람들의 말대로라면, 그리고 시빌이 아트릭스에서 말해준 대로라면 미겔은 자신이 알고 있던 것과는 사뭇 다른 행보를 걸어온 셈이 된다.

여태까지 들어온 것을 종합하면, 그는 포르투와 대륙을 위해 자르지스를 희생하고, 자르지스를 구해주겠답시고 위험에 빠트렸다. 그리고 끝내는 자르지스를 고립시켰다.

무책임한 사람.

여태까지 훌륭한 조상님이라고 배워온 것을 생각하면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클로디아는 그렇다고 해서 자르지스 사람들이 거짓말을 했다고 믿고 싶지도 않았다.

‘뭔가 오해가 있을지도 몰라.’

그래서 클로디아는, 미겔과 함께 모험했던 디자이어에게 묻는 것이었다. 디자이어라면 미겔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므로.

[글쎄. 미겔은 명랑하고, 착한 사람이었어. 자르지스를 내버려 둔 건 미겔의 고의가 아니었어. 미겔은 자신에게 도움을 청하는 사람들이라면 외면하지 않고 언제나 달려갔는걸. 내가 아는 한 그래.]

“그렇구나.”

클로디아가 굵은 가지로 모닥불을 계속 헤집자 불똥이 튀었다. 보다 못한 포폰이 그녀에게서 가지를 부드럽게 빼앗아 한쪽에 두었다. 모닥불 위에서는 헬렌이 수프를 끓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클로디아는 민망한 듯 웃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있지, 나는 그 악어들이 생긴 게…. 아무래도 마왕이 아무르를 화구에 넣은 부작용이 아닌가 싶어.”

“어? 그러고 보니….”

옆에 앉아 있던 포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악어가 나타난 시기와 좀 비슷한 거 같은데? 왕이 대륙에서 돌아와 상처를 입고 사라진 때랑….”

“그러니? 내 생각이 조금은 들어맞기도 하는구나.”

클로디아가 옅게 웃었다. 디자이어가 중얼거렸다.

[…설득력이 없진 않군. 아무르의 힘은 끌어모아서 구체화시키는 것이니까. 근데, 미겔은 무슨 상관인데?]

“나는, 마왕의 그 행동이…. 미겔 폐하에게서 힌트를 얻은 게 아닌가 싶은 거야.”

클로디아는 끝없이 생각했다.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데미안과 단둘이 자르지스를 헤맸을 때는 여유가 없어 하지도 못 했던 생각들이, 일행들을 만나고 웃음을 찾자 겨우 제 뇌리를 찾아들었다.

“가능성은 있습니다.”

대화에 끼어든 것은 데미안이었다. 하루 종일 검을 휘둘렀음에도 불구하고 데미안은 피로하지도 않은 듯 분명한 표정으로 클로디아를 바라봤다. 클로디아는 눈을 깜박이며 데미안의 말을 기다렸다.

“듣자 하니 마왕의 목적은 자르지스에서 용의 화구를 잠재우는 것, 혹은 그에 준하는 일을 벌이는 것에 가깝다고 봐도 되겠군요. 그렇다면 아무르 또한 그런 목적으로 탈취했다고 보는 것이 옳습니다.”

“…당초 그가 말했던 것처럼, 대륙을 지배하겠다는 목적은 아닌 거겠죠?”

“예. 그래 보입니다. 하지만….”

데미안은 나직하게 한숨을 쉬었다.

“확실한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섣불리 미겔 폐하에 대해 뭔가 의심하는 건 좋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의심이라뇨, 수르 알파….”

클로디아가 말을 이으려 했지만 데미안이 더 빨랐다. 데미안은 고개를 내저으며 말을 이었다.

“로드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지 알겠습니다. 그렇지만 그건 자르지스의 사정일 뿐입니다. 그것도 아직 확실하지 않은.”

“…데미안의 말이 맞아.”

보기 드물게 헬렌이 데미안을 거들었다. 헬렌은 클로디아와 데미안을 번갈아 쳐다보며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나는 잘은 모르지만, 클로디아 네가 그렇게 의심하는 이유는 알겠어. 자르지스 사람들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과 너무 다르니까….”

그렇게 말하는 헬렌의 눈이 포폰 쪽을 향했다. 포폰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귀를 쫑긋거리며 입을 열었다.

“혹시 너희 대화, 지금 내가 들으면 안 되는 거야?”

“아, 그런 건 아니지만.”

“그러면 자리를 피해 줄까?”

열일곱 소년치고는 눈치가 빨랐다. 클로디아는 작게 웃었다. 눈치가 빠른데도 불구하고, 그렇다고 그들의 말에 화를 내거나 섣불리 끼어들지 않는다는 점이 신기했다.

그러니까, ‘마족’이라는 단어에서 그녀가 단 한 번도 상상해보지 않았던 모습이었다. 자르지스의 모든 사람들은 오만하면서도 자신감이 넘친다. 그러면서도 자신들의 울타리 안에 들어온 이에게는 배려를 아끼지 않는다.

그런 포폰을 보고 헬렌이 “괜찮아.” 하며 소년을 쓰다듬었다.

“…포폰의 이런 태도도, 네가 그런 의문을 품게 된 이유겠지.”

“예.”

클로디아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녀가 자르지스에 들어와 마족들… 아니, 자르지스의 사람들과 함께하며 갖게 된 의문들은 점점 더 커졌다. 저런 사람들을 다스리는 왕이, 대륙을 지배하겠다며 아무르를 훔쳐 갔다고?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는 부분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 의심은 다른 곳으로 향했다.

‘용사왕 미겔은 어쩌면 세간에 알려진 것만큼 훌륭한 사람이 아니지 않았을까?’

그 사람은 훌륭하고 멋진 용사로 알려져 왔지만, 그가 채 수습하지 못하고 잊어버린 일들이 여전히 남아 사람들을 괴롭히고 있었다. 그렇다면 아나니아라는 마왕은 사실 그저 자신의 백성을 지키기 위해서….

[클로디아.]

그때였다. 디자이어가 낮은 음성으로 클로디아를 불렀다. 클로디아는 제 옆에 놓인 검을 쓰다듬었다.

[네 마음은 알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아나니아라는 마왕이 포르투를 부순 것이 없던 일이 되진 않아.]

“…디자이어.”

“제가 하려던 말도 같습니다, 로드.”

클로디아의 눈이 데미안을 향했다. 데미안은 바람에 약하게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가볍게 쓸어 넘긴 후, 말을 이었다.

“그자가 화구에 숨긴 것은 아무르만이 아닙니다. 쥬버린 전하의 심장도 함께 훔쳐 숨겨두었죠.”

“….”

“아무리 거룩하고 숭고한 목적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는 포르투와 네 개의 대륙을 공포에 밀어 넣었습니다. 평화를 목적 삼아 폭력을 수단으로 삼는 것은 온당합니까?”

데미안의 말이 모두 맞았다.

클로디아는 우울한 기분이 됐다. 그녀의 생각들이 아귀가 맞지 않는 것에는 저 이유도 한몫했고, 데미안의 지적은 정확하게 그녀가 마왕에게 갖는 의구심과 같은 부분을 집어냈다. 설사 마왕의 목적이 대륙 지배가 아닌 자르지스 보존이라 하더라도, 그가 포르투를 위험에 빠트린 것은 자명하다. 포르투 성은 마왕의 습격으로 반파됐으며 그날 죽어나간 사람들도 수두룩했다. 쥬버린의 부재로 네 개의 대륙은 혼란투성이였다.

소수의 행복을 위해 다수의 평화를 깨트린 것은 그 어떤 것으로도 합리화할 수 없다.

하지만….

클로디아는 명쾌하지 못한 기분에 입술을 깨물었다. 그때 포폰이 입을 열었다.

“있잖아. 클로디아는 데미안이 말하는 입장과는 정반대의 기분인 거 아냐?”

“…무슨.”

“나는 자르지스 사람이라서 좀 공평하지 못한 말일지도 모르지만, 들어봐. 클로디아는 공주라며? 인간의 대표고.”

“그래.”

헬렌이 희미하게 웃으며 포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포폰은 클로디아 쪽으로 몸을 낮추어 그녀의 표정을 들여다봤다. 클로디아는 애써 웃어 보였다.

포폰은 그녀의 팔에 콧등을 비비고는 이어 물었다.

“클로디아는 혹시, 그동안 대륙의 인간들이 자르지스의 고통 위에서 평화를 영위해 왔을지도 모른다고 느껴서 괴로운 거 아니야?”

이것 또한 정확했다.

클로디아는 잠시 뭐라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미겔 포르투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했던 이유 중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저것이었다. 자르지스와 포르투, 두 개의 섬을 놓고 한 섬만 대륙 위로 띄워 올렸던 미겔. 미겔 포르투는 자르지스의 일을 해결해준다고 들어왔으나 용들을 모두 죽이기는커녕 자르지스를 대륙에서 완전히 고립시켰다. 대륙에서는 자르지스를 저주받은 마족들이 사는 곳이라고 생각하며 경원시했으나, 사실 자르지스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청천벽력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그런 자르지스를 놔두고 대륙의 사람들은 행복하게 수백 년 동안 살아온 것이다.

마왕이라는 존재를 무의식 속에 묻어놓고 잊어버릴 만큼.

클로디아의 눈길이 디자이어를 향했다. 그런 그녀의 마음을 읽은 듯 디자이어가 답했다.

[클로디아. 네가 무슨 의심을 하고 있는지 알겠어. 그럴 수 있어. 너는 착한 아이니까.]

“…디자이어.”

[하지만, 클로디아. 만약 미겔이 나쁜 사람이었다면 내가 미겔이 세운 포르투를 왜 그렇게 열심히 지켰을까, 하는 생각은 안 해봤어?]

클로디아는 잠시 말을 잊었다. 그랬다. 디자이어는 의지가 있는 정령이었다. 디자이어는 으쓱으쓱 뽐내듯이 말했다.

[미겔의 자취에 의문을 가질 순 있을 거야. 하지만 미겔은 아주 선한 애였어.]

“그랬니?”

[미겔도 그렇고, 미겔의 후손들도 그렇고. 너까지 다 그래. 클로디아. 네 선함은 미겔을 닮았어.]

클로디아는 눈을 깜박였다. 디자이어는 말을 이었다.

[너무너무 착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자르지스를 도우려고 했던 것. 그것이 미겔의 패착이었을 수는 있어. 하지만…. 미겔은 결코 나쁜 사람은 아니었어. 자르지스를 외면하고, 일부러 들쑤셔놓거나 내팽개칠 수 있는 아이는 아니었단 소리야.]

“그렇구나….”

무거운 분위기에 귀를 연신 쫑긋거리던 포폰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기, 있잖아.”

“으응, 포폰.”

“아까부터 헬렌이 계속 수프에 물을 타고 있거든…?”

그제야 데미안과 클로디아의 눈이 헬렌 쪽으로 향했다. 헬렌은 머쓱하게 웃으며 자신이 요리하던 냄비를 들어 보였다. 냄비 안에는 따끈하게 끓고 있던 고깃국물이 한층 더 진해진 채로 맛있는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그러니까, 대화를 끊기가 뭐해서 졸아드는 국물에 물을 타며 식사를 하자고 할 타이밍을 재고 있었단 소리다. 클로디아는 아하하, 하고 웃어버렸다.

“그래, 밥 먹자 포폰. 배고프지?”

“사실 엄청 배고프다고.”

포폰이 웡웡, 하고 작게 짖는 소리를 냈다. 헬렌은 어깨를 으쓱하며 나무 접시를 꺼내어 세 사람에게 나누어주었다. 접시 안에 따끈한 국물이 가득 찼고, 클로디아는 그 접시에 입을 대며 생각했다. 복잡한 생각은 잊자고.

헬렌의 수프는 아주 훌륭했고, 섬세한 맛에 클로디아는 완벽하게 잡생각을 잊을 수 있었다.



 

***



 

마왕의 돌 때문일까. 제법 칼을 휘두를 정도는 되었다는 게 다행이었다. 클로디아는 데미안에게 배운 대로 그럭저럭 정석적인 움직임은 할 수 있었다. 검은 여전히 다루기 힘들긴 했지만, 전처럼은 아니었다.

“마왕의 심장에 내가 과연….”

클로디아는 디자이어의 손잡이를 붙잡고 힘을 주어 눈앞의 악어에게 칼을 박아 넣었다. 다음 날 아침이 되자마자 근처를 돌고 있던 악어들에게 발견된 참이었다. 클로디아는 잠이 깨기도 전에 악어들을 마주하고 싸워야 했다.

물론 데미안에게 맡길 수도 있었지만, 클로디아는 아무래도 자신이 악어들을 도마뱀으로 바꿔놓는 게 훨씬 마음이 편했다.

하지만 체력이 따라주지 않았다. 이에 그녀는 움직이는 내내 숨이 차서 말을 끊어가면서 하고 있었지만, 디자이어는 클로디아의 말을 아주 잘 알아들었다.

“칼을 박아 넣을 수….”

[있겠느냐는 말이지?]

빛이 뿜어져 나왔다. 악어가 까륵, 하는 소리를 내질렀다. 빛이 없어진 다음에는 어김없이 도마뱀이 툭 떨어졌다.

클로디아는 작은 연두색 도마뱀이 주변을 둘러보다가 깩, 소리를 내고 빠르게 저편으로 사라지는 것을 확인하고 뒤돌았다. 뒤에는 커다란 망치를 든 포폰이 악어 한 마리를 쓰러트린 채 등을 밟고 의기양양하게 서 있었다.

“여기야, 클로디아!”

“고마워!”

클로디아는 그곳까지 빠르게 뛰어가 악어의 머리를 찔러 넣었다. 빛이 또다시 뿜어져 나왔고, 이번에는 까만 도마뱀이 악어가 사라진 자리에 나타났다. 노란 눈을 가진 도마뱀은 도망치려 했으나 포폰이 도마뱀의 꼬리를 집어 들었다.

“이거 제법 귀여운데? 키울까?”

하지만 포폰의 말이 무색하게도 도마뱀은 꼬리를 툭 떨어내고 도망쳤다.

“에이.”

포폰이 실망한 투로 도마뱀이 사라진 자리를 바라봤다. 디자이어가 키득키득 웃었다.

[앙 물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

“저거 물어? 으.”

손에 남은 도마뱀 꼬리가 꿈틀거리는 것을 보고 질색한 포폰이 꼬리를 내다 버렸다. 클로디아는 바닥에서 두어 번 움직이는 까만 꼬리를 보고 빙그레 웃었다. 갑작스러운 습격에 일행의 짐을 챙겨두기 바빴던 헬렌이 슬그머니 바위 뒤쪽에서 나오는 것이 보였다. 포폰은 꼬리를 흔들며 “괜찮아? 헬렌!” 하며 그녀에게로 뛰어갔다.

살랑거리는 풍성한 포폰의 꼬리털은 도마뱀의 그것과는 분명 달랐지만, 움직이는 모습은 비슷하다고 생각하며 클로디아는 피식피식 나오는 웃음을 참았다.

디자이어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뭐, 포폰 같은 친구들하고 함께라면 괜찮지 않을까?]

“음…. 그렇겠지?”

[데미안도 있고 말이야.]

디자이어의 말에 클로디아는 뒤를 돌아봤다. 클로디아의 뒤에는 한결같이, 능숙하게 악어들의 시체를 쌓아놓은 데미안이 서 있었다. 데미안은 착잡한 표정으로 악어들을 내려다보다가, 이쪽을 문득 바라봤다.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이전이라면 분명 데미안의 눈을 피했을 것이다. 하지만 클로디아는 이상하게도 그 눈을 피할 생각 같은 것은 들지 않았다. 밤바다를 담은 듯한 저 눈 안에 지금 뭐가 있는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클로디아는 단 한 가지는 알고 있다.

저 눈과 함께하면 괜찮다는 것.

“뭐, 그렇겠지. 아마 수르 알파는 세상에서 가장 센 사람일 거고….”

[응. 데미안을 보면 미겔이 생각나.]

클로디아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손에 든 디자이어를 내려다봤다. 디자이어는 어딘가 그리운 듯한 말투였다.

[물론 미겔은 데미안처럼 무뚝뚝하거나 말 없는 성격은 아니었어. 오히려 단호하지 못해서 고생을 많이 했지.]

“그랬어?”

[하지만 자기가 지키기로 맹세한 것을 지킬 때는 번복이 없었어. 뒤로 후퇴하지도 않았지. 검을 휘두르는 궤적이나, 상대를 부수면서도 슬퍼하는 건….]

디자이어의 뒷말은 들리지 않았다.

자기가 지키기로 맹세한 것. 어쩐지 그 울림이 익숙해 클로디아는 두어 번 중얼거리며 데미안을 쳐다봤다. 데미안은 자신 쪽을 바라보다가, 이내 그녀와의 눈맞춤이 계속되자 조금 당황한 듯 고개를 돌렸다. 아주 예전에는 저것조차 자신을 싫어해서라고 생각했지만…. 그렇게 생각하자 갑자기 이상하게 가슴 안쪽이 쩡, 하고 울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당신이 싫어요.’

언젠가 했던 말이 진심이 아니라고 그에게 말할 수 있는 때가 올까.

아마 그건 마왕을 죽인 후에야 가능할 것이다. 클로디아는 마음을 다잡았다.

‘마왕성’이 코앞이었다.



 

***



 

“그런데, 시빌이 정말 거기에 있을까?”

“모르겠어요.”

네 사람, 정확히는 네 사람과 한 정령은 오후의 산등성이를 오르며 시빌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헬렌과 헤어져 사라진 시빌은, 그가 정해둔 시일이 지나도 해변가에 나타나지 않으면 마왕성에는 접근하지 말라고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기약 없이 화구 근처를 맴돌 수는 없다. 민둥산에 오기 전 마지막으로 해변에도 들러 봤지만 여전히 시빌의 흔적은 없었다.

[정해둔 시일 안에 해변가에도 못 온 애가 어떻게 마왕성 앞에는 올 수 있었을까?]

“그러게. 심지어 마왕성 앞에서 만날 수 있는 가능성도 있는데 말이야.”

헬렌이 볼멘소리를 하며 눈앞의 돌멩이를 걷어찼다. 말은 저렇게 해도 다들 시빌을 걱정하고 있었다. 디자이어가 한술 더 떴다.

[걔도 참 웃겨. 사실 걔는 마왕성 앞까지만 클로디아를 경호하기로 했잖아. 그럼 마왕성 앞에서 만약에 만난다면, 출석 체크만 하고 바이바이, 할 거야?]

“…그렇네.”

클로디아는 디자이어의 말에 키득키득 웃었다. 애초부터 시빌은 마왕성 앞까지 클로디아의 경호를 맡기로 하고 그녀에게 돈을 받았다. 하지만 마왕성 앞에서 만나면 뭐 어떻게 하지?

이제 마왕성 앞에서 만났으니, 잘 들어가세요! 바이바이! 들어가시는 뒷모습을 제가 따스한 눈길로 쳐다봐 드릴게요! 라고 말할까?

‘하지만 시빌은 정말 그럴 것 같기도 하네.’

클로디아는 시빌의 익살스러운 말투를 생각하며 입가를 올렸다. 그는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사람이다. 계속해서 클로디아 일행에게 농담을 건넸던 것도 그렇고, 그녀에게 부드럽게 대했던 것도 그렇고…. 거기까지 생각하고 클로디아는 갑작스레 얼굴이 빨개졌다. 아트릭스에서 시빌이 제게 고백했던 것이 기억나서였다.

‘저 아직 포기 안 했거든요.’

‘말했잖아요. 나는 클로디아를 좋아해요.’

‘입 맞춰도 돼요?’

그렇게 말했던 마법사의 말이 갑작스레, 민들레 홀씨가 확 퍼지듯이 클로디아의 머릿속에 둥실둥실 떠다녔다. 거기에 더해, 자신이 그때 마법사의 앞에서 눈을 감았던 것까지 떠올라 버렸다. 클로디아는 눈을 질끈 감았다.

‘망할, 망할!’

왜 그랬지?

험한 소리가 머릿속에서 마구 굴러다녔다. 젠장! 클로디아는 주먹을 꾹 쥐었다. 그때 자신은 분명 시빌이 입 맞추기를 기다렸다. 돌이켜 보면, 그때 퍽 낭만적인 기분에 젖었던 것 같기도 했다. 노을이 지고 있었고, 술도 몇 모금 마셨다.

그때의 클로디아는 일행과 함께 있으면서도 이상하게 외로워했다. 그야 당연했다. 몇 달 전까지는 잘 알지도 못하던 사람들과 함께 여행하고 있으면서, 심지어 영 대하기 버거운 구남친까지 있었으니까.

하지만, 지금 와서는 그때의 자신이 왜 그랬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클로디아는 그때 제 심리상태를 냉철하게 바라보려고 했지만 불가능했다.

조금 외로워서? 시빌이 잘생겨서? 그때 분위기가 좋아서?

그 무엇도 아니었지만 그 모든 게 이유가 될 수 있었다. 환장할 노릇이었다. 클로디아는 저도 모르게 거칠게 머리를 북북 긁었다. 그 바람에 묶어놓은 머리카락이 엉망이 됐고, 헬렌이 눈을 깜박였다.

“뭐야. 클로디아, 머리가 가려워?”

“아, 아녜요!”

저 그렇게 안 더러워요! 하고 말하려고 했지만 헬렌이 빨랐다. 헬렌은 씩 웃으면서 “하긴, 며칠째 머리 안 감아서 좀 가렵지? 사실 나도 그래. 머릿수건 한 장 줄까?”라고 눙치기까지 했던 것이다. 그렇잖아도 붉어졌던 클로디아의 얼굴이 더 빨개졌다.

“아아, 아니라니까요…!”

그렇게 말하며 클로디아는 흘깃, 앞에서 걷고 있는 데미안을 바라봤다. 본래 앞에서 하는 이야기는 뒤쪽에는 잘 안 들리지만, 뒤에서 하는 이야기는 앞에는 잘 들리기 마련이다. 방금 이야기도 못 들었을 리 없는데.

일부러 모른 척하는 걸까, 못 들었을까. 제발 못 들었다면 좋겠는데. 그렇게 생각하며 클로디아는 손부채질로 얼굴을 식혔다. 그리고 생각했다.

‘그래도 그때 입 맞추지 않은 건 정말 다행이야….’

전통적으로, 구애하는 남녀 사이에서는 암묵적인 승낙으로 통하는 상황이 있다. 입맞춤은 가장 대표적인 승낙의 제스처다. 그러니 만약 그 상황에서 만약 클로디아가 시빌의 입맞춤을 허락했다면. 정확히는 그 입맞춤이 이뤄졌다면 시빌은 어떻게 했을까? 아마 자신의 연인이 된 양 행동했을 것이다. 네 명이 일행인데 그중 두 명이 그렇게 연인이 된다면 분위기는….

‘…생각보다, 파탄 분위기는 아니었으려나.’

클로디아는 입술을 내민 채 생각했다. 아주 잠깐 고민해본 것이지만, 아마 그녀와 시빌이 연인이 된다 해도 데미안은 크게 태도를 바꾸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녀가 킴 왕자에게 청혼받기 전, 포르투에서 킴 왕자의 팔짱을 끼고 데이트했을 때도 데미안은 그랬다.

정원에서, 킴 왕자의 에스코트를 받고 있는 자신을 본 데미안이 무표정하게 고개를 숙였던 적이 있다. 그때 클로디아는 보란 듯이 데미안이 지나가는 길 앞에서 일부러 킴 왕자와 데이트를 하고 있었으므로, 그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었다. 하지만 데미안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은 얼굴로 표표히 사라졌다.

그때는 그것이 엄청나게 분했는데.

아마 시빌이 제 연인이 되었어도 그랬을 것이다. 시빌이 저를 끼고도는 것을 눈앞에서 보면서도 무심하게, 아닌 척. 모르는 척. 클로디아는 자신의 손을 떠났다는 양.

클로디아는 속이 쓰라려 오는 것을 느꼈다. 제 앞에서 걸어가는 그 뒷모습이 그저 야속했다. 어쩜 그렇게 아무 티도 내지 않을 수 있을까. 그녀는 자신이 요정의 동굴에서 탈출했을 당시를 다시 한번 생각했다.

데미안의 머리 위에 떠 있던 요정들의 메시지.

[당신을 사랑합니다.]

나를, 사랑한다.

사랑하면서도 그렇게나 제게 심드렁해 보일 수 있는 비결은 무엇일까. 클로디아는 한숨을 쉬다가 다른 곳에 생각이 미쳤다.

‘그러고 보니 시빌은 어땠더라?’

자신이 요정의 동굴에서 막 나왔을 때, 데미안의 옆에는 시빌 또한 있었다. 데미안이 자신을 보고 당황해 달려왔고, 시빌도 그 옆에서 뭔가….

‘뭔가…. 뭐지?’

클로디아는 이마를 찌푸렸다. 이상했다.

‘그때의 기억은 다 돌아온 줄 알았는데?’

분명 거울 공작은 그녀에게 마왕의 주박을 일부 풀어주었다고 말했다. 마왕이 그녀의 기억을 새카맣게 칠해놓았노라고. 하지만…. 그건 정말로 일부였을 뿐인 걸까? 클로디아는 명확하지 못한 기억을 더듬느라 미간을 문질렀다.

‘애초에 그러고 보니 이상한 건 더 있었어.’

대체 마왕의 주박에 자신이 어떻게 걸렸으며, 언제 걸렸단 말이야? 거울 공작의 성에서 벌어진 일들은 너무나 많았고, 그녀가 요구하는 것이 하도 어처구니없어서 놓쳤던 부분을 클로디아는 이제야 떠올렸다.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아나니아가 네게 주박을 걸었어.]

거울 공작은 분명 그렇게 말했다.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불명확했다. 어이가 없었다. 주술이 걸렸다면 그게 언제인지, 어떻게 걸렸는지도 알아야 했다. 주술, 혹은 마법이라는 것은 그렇다.

예를 들어 시빌만 봐도 그렇다. 마법이라는 건 직접 옆에서 걸어야 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마법은 만능이 아니기 때문이다. 헤어져 있는 사람들끼리 서로를 추적하기 위해서는 미리 추적 마법을 걸어놨어야 한다.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사람을 아무런 단서 없이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나니아의 주박이라는 것도 마법과 크게 다르지 않은 종류일 것이리라고 클로디아는 추측했다. 만나지 않았다면 불가능한데….

‘잠깐. 그런데 시빌은 왜 헬렌에게 추적 마법을 걸어놓지 않았지?’

클로디아는 눈을 깜박였다. 헬렌은 시빌과 헤어질 때, 그가 했던 말과는 달리 자신에게 추적 마법을 걸지 않은 것 같다고 말했다. 갑작스레 떠오른 생각은 이상하게 찝찝함을 몰고 왔다.

뭔가, 뭔가 뒤통수에서 단단히 걸려 있었는데 그게 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뭐지 대체?

그때였다.

“저기야!”

포폰이 갑자기 큰 소리를 냈다.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포폰이 가리키는 쪽을 바라봤다. 귀를 쫑긋거리며 맹렬히 꼬리를 흔들거리는 포폰이 산등성이 어드멘가를 가리키고 있었다.

“저 동굴이야!”

“동굴…?”

“저 동굴이 너희가 말하는 ‘마왕성’이라고!”

뭐? 클로디아는 급히 포폰의 손끝을 눈으로 더듬었다. 바위만이 가득한 민둥산 한쪽에, 분명 동굴 같은 게 있긴 했다. 있긴 있는데….

“저게…. 마왕성이라고?”

그 동굴은 아주 커다란 바위 아래에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바위와 바위들 사이의 돌 틈에 가까웠다. 워낙 그 바위들이 크고, 틈도 사람이 드나들 만큼 넓기에 동굴이라고 부를 수 있는 종류였던 것이다. 그리고….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세 사람의 표정이 묘해졌다. 헬렌이 중얼거렸다.

“그냥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돌 틈 같은데…. 그냥 좀 큰 것뿐이고….”

포폰은 팔짱을 끼고 것 보라는 표정이었다.

“내가 말했잖아. 너희가 생각하는 으리으리한 마왕성은 아닐 거라고.”

“하지만…. 저게 동굴이기는 해?”

“…아마?”

포폰은 클로디아의 반문에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클로디아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포폰 쪽을 바라봤다.

“포폰, 혹시 헛갈린 것 아니야?”

“아니야! 저 바위들 사이의 하얀 돌로 알 수 있다구! 왕은 오랫동안 저 동굴에 살면서, 사람들이 혹시라도 자신을 찾아올 일이 있을 때 착각하지 않도록 돌 틈 사이에 새하얀 돌을 박아 놓았어!”

그 말을 증명하듯, 돌 틈 사이에는 눈부시도록 새하얀 돌 하나가 박혀 있었다. 어찌나 하얀지, 돌이 아니라 꽃잎 같았다. 돌 틈 사이에 핀 아름다운 꽃. 하지만 여전히 믿기는 어려웠다.

그 돌 틈은 사람이 드나들 수 있는 크기이긴 했지만, 그 모습은 바람 빠지는 구멍에 가까웠지 누군가가 그 안으로 들락거릴 만한 느낌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포폰이 설명을 이었다.

“우리의 왕은 용의 화구를 아주 오랫동안 다스렸어. 저 돌 틈은 용의 화구와 가장 가깝게 통하는 통로이자, 왕의 집으로 가는 길이지.”

“….”

“물론 함부로 저길 들어갈 수는 없어. 왕의 집이라고는 하지만, 클로디아. 내가 알기로는 너의 방도 아무나 들락거릴 수 있는 곳은 아니잖아?”

“그렇긴 하지….”

클로디아가 얼빠진 표정으로 동굴을 바라보며 맞장구쳤다. 포폰은 어깨를 으쓱했다.

“만약 왕을 해치려 하거나, 왕과 아무런 연이 없는 사람이라면 저 안에서 아무것도 찾지 못하고 나올 거야.”

“아….”

“실제로 화구 근처에 사는 어린애들은 다들 한 번쯤은 왕의 집에 가보려고 했다가 그 안에서 헤매고 허탕을 친 경험이 있어.”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들어가야 하는 거야? 클로디아가 황당한 눈으로 포폰을 바라보자 포폰이 흐흠, 하고 웃었다.

“우리의 왕은 똑똑해. 아주 오래 산 마법사니까 말이야. 자기가 진짜로 필요하다고 생각되면 스스로 우리들을 맞으러 나온대.”

“…그 말은, 우리가 그를 만나지 못할 수도 있다는 뜻 아냐?”

헬렌이 포폰의 말에 의문을 제기했다.

“우리는 어쨌든 그의 심장에 검을 찔러 넣고 아무르와 쥬버린 왕자의 심장을 찾으러 온 거잖아.”

“글쎄.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포폰이 얼굴을 긁었다. 거기에는 열일곱 소년의 순진함과, 동시에 자신의 왕을 향한 신뢰가 묻어났다. 소년은 미심쩍은 얼굴로 말을 이었다.

“내가 그랬잖아. 그는 이유 없이 남을 죽일 사람이 아니라고.”

“…포폰.”

헬렌이 엄격한 얼굴이 됐다. 단순히 호의적인 추측만으로 이야기하진 말자는 뜻이었다. 포폰도 역시 헬렌이 그런 표정이 되는 건 무서웠는지, 어깨를 약간 움츠리면서 말을 이었다.

“나는 솔직히 조금은, 그가 너희에게 아무르가 필요하다는 것을 모를 수도 있었다고 생각하거든. 오해도 있을 것 같고. 만약 너희가 그 보석이 정말로 필요해서 찾으러 온 거라면….”

“…돌려줄 리가 있겠습니까?”

포폰의 말을 가로막은 것은 피곤한 목소리였다. 낯선 목소리에 포폰이 털을 확 세우고 뒤를 돌아봤다. 개 수인이 나직하게 으르렁거렸으나, 클로디아는 이 목소리의 주인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포폰에게는 낯설지만 나머지에게는 익숙한 목소리.

“…시빌!”

붉은 머리의 마법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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