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 친구 추가
마왕이라고 불리는 자가 대륙을 지배할 거라며 포르투에 쳐들어왔다. 그는 포르투 왕자의 심장을 꺼내 갔고, 더불어 아무르를 훔쳐 갔다. 둘 다 포르투에서는 꼭 필요한 것이며, 자신은 그것을 찾으러 왔다는 이야기는 클로디아의 짐작보다 짧게 끝났다.
클로디아는 희한하게도 그 이야기를 하며 어쩐지 예전과는 좀 달라진 자신을 느꼈다. 뭐랄까, 엄청난 비극으로 느껴지던 그 일을 조금은 무감정하게 바라볼 수 있었다.
그리고 데포포 또한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데포포는 이마를 찡그리며 지적했다.
“왜?”
“…저도 그 이유는 모릅니다.”
“아니, 당신한테 물은 게 아냐.”
데포포는 심란한 표정으로 팔짱을 끼었다.
“’왜’가 빠져 있군.”
“….”
“그 아무르라는 보석을 우리의 왕이 훔친 이유를 잘 모르겠어. 대륙을 지배하겠다고 한 건 맞나?”
[…맞아!]
그때까지 입을 다물고 있던 디자이어가 갑작스레 맞장구쳤다. 데포포는 갑자기 허공에서 들린 음성에 펄쩍 뛰었고, 약간의 소요 후 간신히 클로디아가 안고 있던 크고 긴 칼이 정령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데포포는 연신 신기한 눈으로 디자이어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러니까, 네가 우리의 왕을 직접 봤다고?”
[그래. 빨간 머리에 새카만 피부를 가지고 있었어. 손톱 끝은 아주 날카로웠지. 그 손톱으로 쥬버린의 가슴을 파헤치고 심장을 가져갔어.]
“희한하군.”
[뭐가?]
데포포는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일단 나는 자르지스 왕의 편을 들 수밖에 없다는 걸 전제로 알아둬. 하지만 이상해. ‘왜’가 없어. 그 아무르라는 보석이 없으면 섬이 침몰한다지?”
“그래요.”
“하지만 섬이 침몰하면 그 밑에 있는 대륙은 어떻게 되지?”
“아마 반쯤…. 괴멸하게 되겠죠.”
“그래.”
그제야 모두 다 데포포가 뜻하는 바를 알게 됐다. 대륙 위에 뜬 섬, 포르투가 아무리 작다 해도 섬은 섬이며 그 무게와 크기는 엄청나다. 그런 것이 대륙 가운데로 떨어지게 되면 네 개의 대륙 모두 약간씩은 피해를 입는다. 약간이면 차라리 나을 것이다. 섬이 떨어진 아래의 주민들부터, 그 주변에 끼칠 피해.
마왕이 정말 대륙을 지배하고 싶은 거라면 아마 대륙을 최대한 보존할 것이다. 자신이 먹을 음식이 최대한 먹음직스럽길 바라는 포식자의 심리와 비슷하다고 보면 될 것이다.
하지만 마왕은 굳이 포르투를 약화시키는 방법을 썼다. 그러지 않아도 되잖아? 라는 것이 데포포의 말뜻이었다. 클로디아는 이마를 찡그리며 생각에 잠겼다.
“아마 디자이어 때문이었을 거라고 생각해요. 생각보다 반격이 강해서가 아니었을까요? 아니면 혼란스러운 틈을 타 대륙을 완전히 장악하려고 한다던가….”
[에헴. 내가 한가락 하긴 하지.]
타이밍에 맞춰 디자이어가 으스댔으나 아무도 디자이어에게 동조해주진 않았다. 가엾은 디자이어는 조금 풀이 죽었다. 그러던 때 데미안이 입을 열었다.
“…다른 이유가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맞아. 혼란스러운 틈을 탄다? 그런 추측도 일리는 있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데포포는 시원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데미안, 너도 슬슬 알아챘을 거 같지만 우리의 왕은 그렇게 지배에 목을 매는 성격이 아니야. 대륙을 지배할 거라면 자르지스부터 지배했겠지. 하지만 내 기억에, 그가 이 자르지스를 지배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어.”
“…그전의 왕은….”
“우리의 왕은 80년 전부터 자르지스에 몸을 담고 있지.”
80년. 그 말에 세 사람은 서로를 쳐다봤다. 디자이어는 의심스럽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 마왕, 멀리서 보긴 했지만 꽤 젊어 보이던데….]
“아마 마법사이기 때문일 거야.”
“마법사요?”
“그래. 자르지스의 왕들은 마법으로 용의 화구를 진정시키는 것이 일이거든.”
마법사들 중에는 아주 오랫동안 젊음을 유지하는 이들이 있긴 하다. 그것은 마법이 자연의 힘을 이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연의 힘을 몸에 흐르게 하다 보면 노화가 느려진다나. 하지만 80년이 넘게 자르지스를 유지해왔다는 것은 의외였다. 그들이 생각에 잠긴 것은 아랑곳하지 않고 데포포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마왕성이라는 말도 아주 웃긴 농담 같던데. 정말 당신들 마왕성을 찾고 있는 거야?”
“예. 그러고 보니 그것도 궁금했습니다. 용의 화구 근처에서 마왕은 성을 짓고 살고 있다던데, 성 같은 건 조금도 보이지 않더군요.”
파하하, 하고 갑작스럽게 데포포가 웃었다. 웃는 것은 포폰도 마찬가지였다. 개 수인 둘이 풍성한 꼬리를 바닥에 탁탁 치며 웃으니 먼지가 사정없이 날렸다.
“마왕성! 그런 건 없어!”
“…없다고요?”
“그래! 그딴 게 성이라니 아주 웃기는 일이지!”
클로디아와 데미안이 서로를 마주 봤다가 질문을 이었다.
“혹시 거울 공작의 성처럼…. 낮은 산 같은 형태인 건가요?”
“저도 그런 생각을 안 한 것은 아닙니다만, 화구 근처에는 그런 산 같은 지형조차도 없어보였습니다. 대체….”
“아, 자네들 정말 재미있군. 아무것도 모르는데 여기까지 잘도 왔어.”
데포포는 눈물까지 닦으며 웃었다.
“아마 화구 바로 앞에 가면 내 말뜻이 뭔지 알게 될 거야. 굳이 내가 이야기해주고 싶진 않군. 자네들이 어떤 사람인지는 대강 알았지만, 그래도 만약을 위해서 말이지.”
“…예….”
그때 헬렌이 손을 번쩍 들었다.
“데포포. 그러고 보니 나도 궁금했어. 당신들의 왕은 어떤 사람이야? 사실 나는 마왕이라는 이야기만 듣고 아주 나쁜 사람인 줄 알았는데…. 당신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는 그런 사람 같진 않아.”
데포포가 흠, 하고 웃더니 포폰을 내려다봤다.
“포폰. 어릴 때 아빠가 해준 이야기 알고 있지?”
“…아나니아의 이야기요?”
“그래. 네가 한번 설명해주련?”
포폰은 이마를 약간 찡그렸다가, 이내 팔짱을 끼었다. 제 아버지와 아주 똑같은 모습이어서 클로디아는 속으로만 몰래 웃었다.
“좋아요!”
곧이어 소년은 입을 열었다.
자르지스에는 아주 오래전부터 왕이 있었다. 용의 화구 때문에 나누어진 자르지스의 북쪽과 남쪽을 이어주는 역할을 주로 하고 있었으나, 세 용이 날뛸 때 자신의 땅을 바친 왕 이후로 왕들은 주민들의 신뢰를 잃었다. 그 이후로 기괴하게 변해가다 못해, 결국은 마족이라고 불리게 된 주민들이 어떻게 왕을 신뢰하겠는가.
하지만 왕은 없어지지 않았다. 자르지스의 왕들은 용들이 사라진 이후로 자신들이 부릴 수 있던 재주를 활용해 용의 화구를 진정시키는 데 온 힘을 다 바쳤다. 미겔 포르투가 들쑤셔놓고 간 용의 화구는 용들이 사라진 이후로 폭발과 진정을 반복했다.
지금의 왕은 80여 년 전부터 자르지스에 존재했다. 다른 왕들은 마을에서 어울려 살았으나, 그는 성인이 된 이후로 화구 근처에서 홀로 살았다. 자르지스의 독기를 정화하고 화구를 진정시켰다. 그는 누군가 자신을 찾아오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으나 주민들은 그가 자르지스를 사랑한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너희들 북쪽 마을에 한 번 들렀다고 했지? 북동쪽은 거쳐왔니?”
“아니….”
클로디아가 고개를 젓자 포폰이 코를 킁킁거렸다.
“예를 들면 왕은 고아들을 모아서 살 터전을 마련해주곤 했거든. 북동쪽은 원래 사람이 살기 어려운 숲이었는데, 왕이 커다란 나무들을 베고 토지를 개간해주어서 거기 사람들이 살 수 있게 됐어. 북동쪽에 사는 애들은 왕에게 아주 맹목적으로 충성해. 그가 거기 사는 사람들을 모두 키워내다시피 했거든.”
클로디아는 데미안과 헬렌을 번갈아 바라보며 불안해졌다. 용의 이야기까지는 거울 공작의 이야기와 같았으나, 그 뒤의 이야기는…. 그러니까, 아나니아라는 자에 대한 이야기는 도무지 ‘마왕’이라는 사람에 대한 것이 아닌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포폰의 말을 들어보면, 아나니아라는 자는 그저 더없이 자신의 영토를 사랑하는…. 그런 사람 같았다.
“왜 우리가 댁들 이야기를 들어보겠다고 했는지 이제 알겠어?”
클로디아의 생각을 읽은 듯, 데포포가 그녀에게 물었다.
“우리의 왕은 이유 없이 남을 죽일 사람은 분명 아니기 때문이야.”
데포포는 한숨을 쉬었다. 그의 한숨은 여러 가지 의미를 담고 있었다. 여기까지 온 인간들에 대한 안타까움, 그리고 헬렌에 대한 고마움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남아 있는 경계심. 그는 다시 말하기 시작했다.
“그는 왕이라고 불리지만 우리에게 군림하지 않아. 그가 만약 너희의 귀한 물건을 가져왔다면…. 너희는 그것을 날치기에 가깝게 말하고 있지만 나는 거기에 틀림없이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해.”
“…데포포. 거기에는 동의할 수 없어요.”
그의 말에 클로디아가 드물게 날을 세웠다. 데포포가 말한 것도 이해는 간다. 정말로 그가 그런 사람이라면 데포포와 포폰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금 포르투가 위험하다는 것, 그리고 쥬버린이 가사 상태에 빠져 있는 것이 거짓이 되는 건 아니다. 데미안이 조심스럽게 클로디아의 팔을 붙잡았다.
“로드.”
“…그렇잖아요. 그가 좋은 사람이든 아니든, 그는 제 오빠의 심장을 꺼내 갔어요.”
“거기에는 나도 동의해. 어제까지는 분명 좋은 사람이었지만 다음날 갑자기 이웃의 뺨을 때리는 사람들이 없는 것도 아니거니와…. 데포포. 당신은 왕을 만나본 적 있어?”
헬렌의 말에 데포포는 잠시 침묵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헬렌이 후, 하고 낮게 웃었다. 힘 빠진 웃음이었다.
“당신들을 믿지 못하는 게 아냐. 하지만 우리 모두 마왕을 만나본 적은 없잖아. 그렇다면 어떤 것도 속단할 수 없어.”
“헬렌….”
“잊고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클로디아. 내가 자르지스에 온 이유는 한 가지야. 내 할아버지가 자르지스는 아주 아름답고 가엾은 곳이라고 이야기하셨기 때문이야.”
그제야 클로디아는 헬렌이 해 주었던 이야기를 어렴풋이 떠올렸다. 헬렌은 다리를 포개 앉은 채로 데포포와 포폰을 바라봤다.
“내 외할아버지는 젊은 시절 자르지스에 와 보신 적이 있다고 했어. 그리고 나는 외할아버지의 말이 어떤 뜻이었는지 이제 알 것 같아. 자르지스는 아름다운 곳이야. 너희 같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좋은 곳이라는 걸 알 수 있었지.”
그 자리의 모든 사람들이 입을 닫았다. 헬렌은 어깨를 으쓱했다.
“가엾은지는, 글쎄. 잘 모르겠어. 외할아버지는 이곳의 사람들 모습만을 보고 그렇게 말씀하셨을 것 같진 않거든.”
“….”
“뭐든지 직접 대면해봐야 해. 포폰. 나는 너와 네 아버지의 말을 믿어. 하지만 클로디아의 말을 믿기도 하지. 그가 우리에게 어떤 일을 저질렀든 이유가 있을 것이고, 그건 아주 잔인한 일이야. 그렇다면 그에게 이유를 묻고 대가를 치르게 해야지. 하지만 그전에 함부로 그를 다치게 하지도 말아야겠다고 생각해.”
헬렌의 말 하나하나 틀린 것이 없었다. 헬렌은 잠시 침묵했다가 입을 열었다.
“그러니 데포포, 우리를 모른 척해주지 않겠어?”
데포포가 헬렌의 말에 끙, 하고 신음했다. 아무리 그래도 자신들의 왕을 죽이러 왔다는 자들을 못 본 척하는 것은 그에게도 그리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하지만 데포포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솔직히 말하면 너희를 인간이라고 몰아 봐야 우리 손해기도 하고. 잘은 모르지만 너희들, 여기까지 오는 길이 쉬웠을 리도 없는데…. 우리도 지금 화구에서 나오는 악어들 때문에 너희에게 힘을 쓸 여유가 없어.”
“아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너희를 우리 마을에 둘 수도 없어. 여태까지는 헬렌, 너의 도움을 많이 받았지만 너희의 목적을 안 이상 계속 도움을 받을 수도 없지.”
데포포의 말에 셋 다 고개를 끄덕였다. 클로디아가 가장 먼저 입을 열었다.
“저는 대강 몸이 다 회복됐어요. 포폰의 도움을 받았으니, 더 이상 머무르는 것도 실례겠죠. 오늘 새벽에 떠나도록 할게요.”
“좋아.”
데포포가 천천히 일어섰다. 포폰이 제 아버지와 클로디아 일행을 번갈아 보더니 울상을 지었다.
“하지만, 아빠. 저 데미안도 아프다고 하고….”
“포폰. 우리 마을은 환자 합숙소가 아니란다. 우리는, 아니 너는 저들에게 충분한 호의를 베풀었어.”
데포포는 그렇게 말하며 포폰의 어깨를 붙잡아 안듯이 하며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자네들.” 마지막으로 입구의 천을 걷은 데포포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될 수 있으면 앞으로는 다른 마을에 들르지 않는 게 좋겠군. 그렇잖아도 혼란스러운 자르지스에 다른 혼란을 안겨주지 않았으면 해.”
도무지 자르지스에서 들을 수 있으리라 생각해본 적도 없는, 우아한 축객령이었다.
***
하늘이 새카맣게 물들기 시작할 때, 세 사람은 포폰의 집 뒤뜰에서 짐을 챙겼다. 재정비도 필요했다. 다행히도 포폰은 마을의 개울가 옆에다 집을 지어놔서, 물건들을 닦고 챙기는 데 큰 도움이 됐다.
그 외에도 헬렌이 클로디아의 마법 가방을 챙겨 들고 있었으므로 큰 문제는 없었다. 식량을 따로 챙길 필요도 없었다. 클로디아는 짐 안에서 예전에 챙겨두었던 가벼운 의상을 발견하고 기뻐했다. 소매는 길지만 섬유가 아주 얇으면서도 정갈했다. 약간의 보조 마법이 걸려 있어 그전까지 입고 다녔던 가죽 의상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그사이에 머리가 좀 길었는걸, 클로디아.”
“아하하, 그런가요? 그러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해요.”
클로디아는 귀밑에서 찰랑거리는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어색하게 웃었다. 헬렌이 뒤로 다가와 솜씨 좋게 제 헤어밴드로 머리카락을 넘겨주었다. 클로디아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반가워했다.
“어머나! 훨씬 가벼워요!”
“그렇지? 나도 요리할 때는 머리가 영 거추장스러워서. 짧은 머리가 편할 거 같지만, 이게 은근히 잘 넘어가지 않아서 짜증 나는 부분도 있거든.”
가벼운 상의를 챙겨 입은 클로디아에게 헬렌은 챙겨둔 긴 바지를 자르는 것 또한 권했다. 클로디아의 가죽 바지는 아주 좋은 물건이었으나, 이런 한여름 날씨에 가죽바지를 입는 것은 고역인 데다가 다리에 땀이 차기 십상이었다. 클로디아가 긴 바지를 허벅지 길이로 자르는 데에는 아주 큰 결심이 필요했지만, 그녀는 기어이 해냈다. 디자이어를 붙들고 바지를 잘라낸 것이다.
“아, 엄청나게 시원하네….”
잘라낸 바지를 입은 클로디아는 예전보다 훨씬 산뜻한 기분이 되어 팔짝 뛰었다. 부츠야 길다고는 하지만 마법이 걸린 물건이니 괜찮았다. 헬렌이 웃었다.
“좋아, 나 살던 데서는 그 정도 길이 바지 입는 여자들 많았다고. 애초에 이런 날씨에 긴 바지라니.”
그런 말을 하며 헬렌은 데미안 쪽을 바라봤다. 새 옷으로 갈아입은 것은 데미안 또한 마찬가지였는데, 데미안은 고개를 내저었다.
“저는 괜찮습니다.”
“정말? 그냥 바지통이라도 좀 넓히지?”
“…통 넓은 바지는 적과 싸울 때 방해가 됩니다.”
그렇게까지 말하는데 더 이상 강요할 수도 없다. 디자이어가 말을 보탰다.
[아주 똥고집이야, 똥고집.]
헬렌이 가방 안의 식량을 정리하다가 진득하게 눌어붙은 캐러멜 꾸러미를 발견했다. 그 와중에도 그거 하나 발견한 게 기뻐서 헬렌은 캐러멜 하나를 까 클로디아의 입에 던져 넣었다. 클로디아는 세상에서 가장 황홀한 표정으로 캐러멜을 녹여 먹었다.
“세상에, 씹어먹는 것도 너무 아까워….”
“아직 좀 더 있어. 하나 더 줄게.”
“안 돼요. 나머지는 아껴 둬요.”
그 말을 하며 클로디아는 손 안의 블라우스를 치댔다. 자신이 자르지스에 온 이후로 계속 입고 있던 실크 블라우스였다. 때가 엄청나게 묻고 흙먼지에 땀까지 얼룩져 원래의 흰 모양은 찾기 어려울 것 같았지만, 그래도 옷을 갈아입었을 때 빨아둬야 했다.
마을 옆의 개울은 다행히도 아직 재가 점령하지 않았고, 클로디아는 흥얼흥얼 노래를 부르며 블라우스를 물에 담갔다가 빼내서 몇 번이나 손으로 조물조물했다. 그 어설픈 손놀림에, 길을 걸을 때 짚을 지팡이를 만드느라 나무를 다듬던 헬렌이 피식피식 웃으며 “이리 내. 내가 도와줄게”라고 말했다. 하지만 클로디아는 “싫어요!” 하며 경쾌하게 답했다.
“제가 빨 거예요.”
“어설프게 빠느니 그냥 두는 게 나을 텐데?”
“음, 하지만 이 옷을 제가 꼭 빨게 될 거라고 말한 사람이 있거든요.”
그렇게 말하며 클로디아는 데미안 쪽을 곁눈질했다. 데미안은 디자이어가 치료해 둔 손 쪽의 감을 되찾기 위해 아까부터 저쪽에서 검을 들고 검기를 발현했다가, 다시 집어넣었다가 하는 중이라 클로디아 쪽에는 눈을 두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클로디아의 시선을 느꼈는지, 데미안이 이쪽을 힐끗 쳐다봤다. 클로디아는 재빠르게 고개를 돌리고 다시 블라우스를 물 안에 집어넣었다. 꼬로록, 소리를 내며 블라우스가 물 안으로 잠겨 들었다.
그렇게 몇 번이나 블라우스를 빨던 클로디아의 시선이 블라우스 앞, 리본이 빠져나간 구멍에 닿았다. 물에 젖은 손가락을 그 구멍 안에 괜히 집어넣어 보던 클로디아는 데미안의 뒷머리를 바라봤다. 머리카락에 여전히 묶여 있는, 제 리본.
흠.
괜히 웃음이 나왔다. 클로디아는 저도 모르게 입을 가리고 킥킥 웃었다. 옆에 있던 디자이어가 ‘너 좀 이상하다’고 구박할 정도였다. 뭐가 이상하냐며 디자이어와 투닥거리면서 클로디아는 블라우스를 헹구기까지 다 마쳤다. 펄럭, 하고 물기 찬 블라우스를 몇 번 털자 디자이어가 “짠!” 하며 블라우스의 물기를 한 번에 제거했다.
“오, 좀 하는데?”
[뭘 이 정도 가지고, 나 디자이어야!]
디자이어가 으스댔다. 물기가 한 번에 빠져나간 블라우스는 예전처럼 예쁘고 부드럽진 않았으나, 클로디아가 입고 이 마을에 들어올 때보다는 훨씬 깨끗해졌다. 클로디아가 블라우스를 돌돌 말아서 가방 안에 챙겨 넣을 때였다.
“어라.”
캐러멜을 우물거리며 나무를 다듬던 헬렌이 이상한 소리를 냈다. 포폰의 집 울타리를 따라 누군가가 저벅저벅 걸어왔기 때문이다. 클로디아는 황급히 근처의 로브를 뒤집어썼다. 데포포나 포폰이 아닌 다른 마족에게 인간의 모습을 들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몰랐다. 그러나 걸어온 인영은 새삼스럽다는 듯 볼멘소리를 냈다.
“뭐야. 나야.”
“어머나, 포폰!”
그림자 속에서 나온 것은 까만 개 인간, 포폰이었다. 포폰은 노란 눈썹을 들썩거리며 주섬주섬 로브를 다시 벗기 시작한 클로디아 쪽을 바라봤다.
“너희 저쪽에서부터 보이더라. 이제 와서 로브 뒤집어써 봐야 별로 큰 도움도 안 되거든? 계속 뒤집어쓰고 있진 못할망정.”
“어머, 그랬니? 몰랐어. 지금부터라도 쓰지 뭐!”
클로디아는 퉁명스러운 포폰의 말에도 불구하고 명랑히 웃으며 로브를 다시 둘렀다. 물론 그 로브 또한 가방에서 꺼낸 새것으로, 가벼운 소재로 된 것이었다. 포폰은 콧방귀를 뀌더니 이어 말했다.
“하여간 인간들이란 멍청해가지곤. 그렇게 주의를 줬는데도 부주의하게 빨래나 하고 있고.”
“그만해, 포폰. 무슨 일이야?”
헬렌이 웃음을 섞어 답하며 가까이 온 포폰에게 손짓했다. 포폰은 꽤 익숙한 듯이 그녀의 옆에 다가가 착 앉았다. 헬렌도 능숙하게 포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니까…. 개가 아니란 말이지….
클로디아는 피식피식 웃으며 로브의 잠금장치를 당겨 잠갔다. 저렇게 귀여운 얼굴로 퉁명스럽게 주의를 줘도, 솔직히 그리 매섭게 느껴지지 않았다. 뭐랄까. 익숙하달까.
클로디아의 생각 따윈 모르는 포폰이 어깨를 으쓱했다.
“내가 심사숙고를 해봤는데, 안 되겠어. 아무래도 너희가 너무 멍청해.”
“무슨 소리야?”
헬렌이 포폰의 턱을 살살 긁었다. 포폰은 기분 좋은 듯 턱을 한 번 치켜들었다가, 이내 선언했다.
“내가 멍청한 너희들과 함께 가주겠단 소리야!”
포폰은 처음부터 이 세 사람이 영 시원찮았다.
그야 이 파티의 구성 때문이다. 첫 번째로, 자칭 ‘인간의 대표’라는 못 먹어서 비리비리한 공주. 포폰은 아직도 클로디아가 공주라는 게 별로 믿기지 않았다. 자고로 공주라 하면 잘 먹고 잘 자라서 키도 크고 튼튼해야 하지 않겠는가? 물론 클로디아는 키가 크긴 했지만 튼튼해 보이진 않았다. 심지어 빈약한 팔을 들어 보이며 ‘근육이 제법 붙었다’고 항의하는 꼴을 보면 알만했다. 저게 근육이 붙은 거면, 포폰 자신은 호랑이 수인이라고 불러도 된다.
거기에 더해 독에 당한 기사. 아버지인 데포포는 데미안의 신중함을 높게 치는 것 같았지만, 포폰은 데미안이 신중하다는 것도 그리 믿기지 않았다. 물론 포폰은 자신의 아버지를 믿었다. 하지만 신중하다면 죽음의 바다에 안 뛰어들지 않을까? 게다가 해가 질 때면 헉헉거리며 가쁜 숨을 내뱉는 것도 어쩐지 별로였다. 키도 크고 덩치도 컸지만, 덩칫값도 못 하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클로디아에게 꼼짝 못 하는 것만 봐도 그랬다.
그리고, 헬렌.
포폰은 이 헬렌이 가장 신경 쓰였다. 키도 크고 덩치도 크면서, 사람 좋은 미소로 헤헤 웃으며 마족들에게 밥을 해먹인 사람이다. 기가 막혀서! 아무리 그래도 우리는 네 적이라며? 어떻게 저렇게 마냥 성격이 좋을 수 있는 거야? 우리 마을 사람들은 헬렌을 꽁꽁 묶어 창고에 처박았다구!
…해서.
“…그러니까, 우리가 영 아무래도 믿음직스럽지 못해서…. 도와주겠다는 얘기야?”
클로디아가 조심스럽게 포폰의 눈치를 봤다. 포폰은 에헴, 하고 팔짱을 끼고 선 채 잘난 척하듯 턱을 쳐들고 이야기했다.
“나는 너희와 동행하면서, 너희들이 마왕이라고 부르는 우리의 왕에 대한 오해를 풀어주기로 했어. 그리고 너희가 멍청하게 굴어서 그를 화나게 할 수도 있잖아?”
“…그…우리는 이래봬도 그를 죽이러 가겠다고 모인 사람들이거든…?”
죽일 건데 화가 대수냐. 클로디아가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포폰에게 일러주었지만, 포폰은 못 들은 척하며 헬렌 쪽을 쳐다봤다.
“너희가 만약 그를 화나게 해서 왕이 우릴 버리고 가기라도 한다면 고스란히 손해를 보는 건 우리들이라구, 암.”
“아니, 뭐 그렇겠지만….”
“나는 이 마을의 촌장 아들로서, 너희를 감시할 의무가 있다고 판단했어!”
세 사람은 서로를 돌아봤다. 아무래도 데포포가 이 마을의 촌장이었던 모양이다. 묘하게 통솔력 있는 데다가 침착하던 데포포의 모습이 납득되는 순간이었다. 포폰은 세 사람이 놀라든 말든 아랑곳하지 않고 거드름을 피웠다.
“만약 멍청한 너희가 혹시라도 운이 좋아 그를 해친다면 내가 앞서서 막아내어….”
꽁.
“악!”
갑작스레 나타난 주먹에 포폰의 거드름은 끝이 났다. 다름 아닌 데포포였다. 포폰의 뒤를 따라 집 앞쪽에서 나타난 데포포는 거드름 피우는 아들을 한심한 듯 내려보다가, 그 정수리를 쥐어박은 것이다.
“아버지!”
“이 녀석. 누가 그렇게 말하래. 그런 식으로 말하면 누가 데려가 준다든?”
“제가 데려가는 거거든요!”
“정신 차려라, 이 녀석아.”
데포포는 혀를 찼다. 포폰이 울상이 되어 머리를 어루만졌다.
“아무래도 제 집 놔두고 내 집에서 자꾸 뭘 챙기는지 부스럭거리는 게 신경 쓰여 따라와 봤더니 이런 소리를 하고 있군. 기가 막혀서.”
“아, 갈 거예요! 절 막으신다고 해도 저는 용감한 포폰이니까….”
“가라.”
“전설로 남을… 예?”
데포포의 앞에서 주먹을 꽉 쥐고 앞으로 전설이 될 걸음을 걷겠노라 일장 연설을 하려던 포폰이 눈을 둥그렇게 떴다. 데포포는 질렸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렇잖아도 이 세 사람에게 부탁하려고 했다.”
“어… 저를요?”
“그래.”
그렇게 답한 데포포는 세 사람 쪽을 바라봤다. 클로디아가 황급히 일어나 그와 시선을 맞췄다. 데포포는 나직하게 한숨을 쉬더니 입을 열었다.
“미안하지만 내 아들을 데려가 주지 않겠나.”
“…어… 촌장님. 저희는….”
“알아. 당신들이 우리들의 왕에게 그리 평화적인 목적으로 접근하는 게 아니란 걸 알지. 하지만, 나는 당신들이 우리들의 왕을 막상 만나게 되면 마음이 바뀌리라 믿네.”
데포포의 눈빛은 복잡해 보였다. 까만 눈동자 안에서는 오랫동안 작긴 하지만 서른 가구씩이나 되는 마을을 이끌어온 사람의 의무감 같은 것이 엿보였다.
“얼마 전부터 자르지스는 이상한 일들이 자꾸 일어났지. 나는 왕이 당신들의 보석을 빼앗은 것이, 그것과 무관하지 않다고 믿어.”
“데포포….”
“나는 당신들을 믿어서 이러는 건 아냐. 솔직히 말하면 인간 셋이서 우리 마을에 들어와서 무슨 짓을 할까 아직도 믿지 못하고 무섭게 여기는 마음도 있다네. 하지만….”
데포포는 헬렌 쪽을 바라봤다. 영문도 모르고 헬렌이 히죽 웃어 보였다.
“적어도 헬렌은 사흘 동안 우리 마을에서 도움이 돼줬어.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 그것도 자신을 홀대한 사람들에게 서슴없이 호의를 내보이기는 어려운 일이지.”
“어, 나는 그냥 음식 버리는 게 아까워서….”
“남의 것을 자신의 것처럼 아까워하는 것도 때론 미덕이지.”
데포포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 다른 마을 사람 이야기가 도움이 됐어.”
“다른 마을 사람이요?”
클로디아가 눈을 깜박였다.
“그래. 다른 마을에도 인간이 몇 년 전 왔었다고 했잖나. 그 늙은 인간은 단순히 자르지스가 궁금해 왔다며, 그 마을의 골칫거리를 해결해주고 갔다더군.”
데포포는 자르지스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그간 그가 겪은 인간은 딱 셋. 헬렌과 클로디아, 데미안뿐이다. 그리고 다른 마을 사람이 겪은 것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뿐. 하지만 그 모든 인간들이 그리 나쁘지 않았다.
데포포는 천천히 말했다.
“대뜸 호의부터 가진다는 게 이상할 수 있어. 그렇지만 나는 당신들 말이 훨씬 충격적이었어. 우리는 자르지스 밖으로 나갈 수 없으니 대륙에 누가 살고 있는지, 인간들이 어떻게 사는지를 잘 몰랐거든. 그러니 인간들에 관해서 어렴풋한 생경함 정도밖에는 없다네. 당신들이 우리를 겁내는 것도 좀 놀라웠지.”
“하지만, 북쪽 사람들은….”
클로디아의 말이 뜻하는 바를 포폰도 알아들었다. 포폰은 데포포의 말에 끼어들어 그녀의 말에 답했다.
“그야 북쪽 놈들은 미겔이라는 너희의 용사가 벌여놓은 일 때문에 피신한 사람들이니까! 인간들이 싫을 수밖에 없지!”
“…그래. 포폰의 말이 맞다.”
데포포가 포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자르지스의 남쪽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이 살던 터전을 잃지 않아서 남아 있을 수 있었던 자들이야. 하지만 북쪽 사람들은 다르지. 그러니 포폰을 데려가 달라는 거다.”
포폰이 귀를 쫑긋 세우며 제 아버지를 바라봤다. 데포포는 자신의 아들을 바라보며 심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포폰은 너희와 우리들 사이의 가교가 될 수 있을 거다. 물론 그런 숭고한 목적 때문에 포폰을 보내는 건 아니네. 나는, 자르지스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고 싶은 거야.”
“….”
“아마 그건 자네들을 따라가면 알 수 있겠지. 하지만 나는 악어들에게서 내 터전을 지켜야 해. 내 아내와 마을, 내가 살아온 터전 말이네.”
하지만 포폰은? 데포포의 말에 의문이 떠올랐다. 데포포 또한 클로디아의 의문을 모르지 않는 듯, 픽 웃으며 포포의 어깨를 두들겼다.
“이놈은 도움이 안 돼.”
큽. 헬렌이 뒤에서 웃다가 입을 틀어막았다. 포폰이 “아빠!” 하고 억울한 듯 주먹을 쥐었으나 데포포는 자신이 두들기던 포폰의 어깨를 밀었다.
“싸움에는 재능이 없어. 요리에 재능이 있는 것도 아니고, 마을을 챙기기엔 영 부족하지. 아직 어리니까. 다행히도 짐 하나는 잘 든다네. 힘은 좋아. 자르지스의 지리도 잘 알고. 쓸데없이 떼를 쓰는 아이도 아니고 나쁜 아이도 아니라네.”
“아버지….”
아빠에서 아버지, 아버지에서 아빠. 포폰이 참 솔직하고 알기 쉬운 소년이라는 것을 그 자리의 모두가 알 수 있었다. 포폰은 감동적인 표정으로 데포포를 바라보고 있었다.
“자네들이 왕을 죽이든, 대화를 하든, 왕에게 죽든 우리는 앞으로도 자르지스에서 살아가야 해. 그렇다면 내 아들로 하여금 자네들이 뭘 하는지 볼 수 있게 해주고 싶어. 안 되겠나?”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안 된다고 할 수도 없었다. 클로디아는 헬렌과 데미안을 번갈아 바라봤고, 두 사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클로디아 또한 데포포 쪽으로 고개를 끄덕여 보이자, 데포포는 환하게 웃으며 “고맙네!” 하고 클로디아의 손을 덥석 잡았다.
“어머나…?”
물론 데포포가 클로디아의 손을 그냥 잡은 건 아니었다. 클로디아는 자신의 손 안에 있는 동그랗고 투명한 흰 돌 하나와, 주머니를 바라봤다.
데포포는 코를 훔치며 머쓱하게 웃었다.
“별건 아니고, 불돌이네. 자르지스에서는 물건을 구입할 때 쓰지. 그리고 그 돌은…. 마법의 돌이네.”
“마법의 돌이요?”
“그래. 힘을 세게 해 주지.”
포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버지? 그런 물건이 있었어요?”
“녀석아. 그러면 내가 이 나이에 그 많은 자루들을 어떻게 끄떡없이 날랐겠냐!”
데포포가 하하, 웃으며 팔짱을 끼었다. 포폰이 억울한 듯 외쳤다.
“제가 힘센 거 아버지 닮은 거라면서요!”
“나도 젊을 땐 너만큼 셌다!”
클로디아는 어색하게 데포포와 돌을 번갈아 내려다봤다. 아무래도 물리적인 힘을 세게 해 주는 물건인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런 건 제게는 별 쓸모가 없고, 마을에 더 필요한 물건일 텐데….
클로디아의 생각을 읽었는지 데포포가 픽 웃으며 손짓했다.
“그거, 아주 예전에 내 아버지가 왕에게 받은 거라더군. 마을에 큰 우물을 파는 데 쓰라고 주었다던데.”
“아….”
“우리의 왕은 필요한 사람 앞이 아니면 모습도 잘 드러내지 않아. 그러니 왕을 만난 순간 그런 거라도 있어야 말을 틀 수 있지 않겠나.”
데포포는 자신의 아들을 함께 보내는 것에 더해, 세 사람을 걱정하고 있었다. 클로디아는 어쩐지 민망하고 고마워져서, 작게 고개만 끄덕였다.
***
“마왕성, 풉. 미안하네. 아무리 해도 그 단어에 익숙해지기가 어려워서. 아무튼 헤어진 자네들 동료는 단독으로는 절대 그곳에 접근하지 말라고 했다지.”
“네.”
데포포는 마을의 어귀까지 그들을 마중 나왔다. 시빌에 대해서 대강 들은 데포포는 “화구의 지리를 모르기에 할 수 있는 말”이라고 단언했다.
“용의 화구 근처에 가보면 알게 될 거야. 자네들의 친구는 쓸데없는 걱정을 했다는 걸.”
“네에…. 그러면 저희 친구를 만나는 것은 포기해야 할까요?”
“아니.”
고개를 저은 건 포폰이었다.
“마왕성 앞이라긴 뭐하지만, 화구의 앞이라고 할 수 있는 장소는 있어. 어차피 화구 쪽으로 가게 되면 그곳으로 갈 수밖에 없게 돼. 너희 친구도 아마 그곳을 봤다면 생각을 바꾸지 않았을까?”
“그래, 고마워 포폰. 그러면, 화구까지 부탁할까?”
클로디아가 웃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포폰은 자루로 급하게 만든 가방을 메고 기세 좋게 성큼성큼 나서며 그녀에게 답했다.
“좋아! 나만 따라오라구!”
포폰은 약간 흥분했는지 꼬리가 거세게 흔들리고, 고개를 뒤로 젖힌 채 힘차게 걸었다. 세 사람은 포폰의 뒤를 따르며 데포포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마을이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됐을 때, 헬렌이 툭 내뱉었다.
“흠, 내가 좀 걱정한 게 있는데. 아무래도 괜찮은 것 같아.”
“네? 걱정이요?”
클로디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헬렌을 올려다봤다. 헬렌은 어깨를 으쓱했다.
“음, 자르지스로 오기 전부터 뭐가 뒷목에 좀 계속 걸렸는데…. 아무래도 좀 섣부른 걱정이었던 것 같거든.”
“그래요? 말해줄 수 있나요?”
그녀의 말에 앞서서 포폰과 걷던 데미안까지 이쪽을 돌아봤다. 잠시 고민하던 헬렌은 고개를 저었다.
“아냐. 내가 쓸데없는 걱정을 사서 한 것 같아. 이제는 해소된 걱정인데, 굳이 말할 필요는 없을 것 같군.”
뭐지? 클로디아는 궁금해졌으나, 굳이 캐묻지 않기로 했다. 헬렌은 어른스러운 사람이었고, 그런 그녀가 말할 필요 없다면 정말 필요 없는 일일 것이다.
“뭐, 그래요. 헬렌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죠.”
그렇게 답하며 클로디아가 등에 멘 검집을 살살 흔들었다.
“얘, 일어나. 그만 자고. 우리 출발할 거야.”
[어? 어…? 뭐야? 여기 어디야?]
얼빠진 검의 신음에 포폰이 혀를 찼다.
“역시 이 멍청한 무리, 내가 따라오는 게 정답이었다니깐.”
달이 떴다. 새카만 하늘이었지만 아무것도 무섭지 않았다.
클로디아는 어둠 속에서 홀로 헤매던 때를 떠올리며, 그때와는 사뭇 다른 따뜻한 기분에 잠겼다. 제 옆에 누군가 있다는 건…. 좋은 것이었다.
***
캐러멜을 우물거리며 헬렌이 돌을 던졌다. 휙.
빠각.
단단한 덩굴에 돌이 박혔다. 클로디아가 “와!” 하고 호들갑을 떨었다.
“되게 신기하네요!”
헬렌이 씩 웃더니 클로디아의 왼손에 자신이 쥐고 있던 돌을 쥐여주었다. 데포포가 준, 마왕의 돌이었다. 매번 ‘마왕이 준 돌’이라고 말하는 것도 좀 웃겨서, 네 사람은 그 흰 돌을 그냥 마왕의 돌이라고 불렀다.
“클로디아도 해봐.”
거기서 그치지 않고 헬렌은 클로디아의 오른손에 돌을 하나 주워 쥐여준 다음, 그녀에게 돌팔매질을 하는 법을 가르쳐줬다. 클로디아는 방긋 웃고는 헬렌이 가르쳐 준 궤적대로 돌을 던졌다.
빡!
“와.”
평범한 자갈돌은 원래대로라면 덩굴에 맞고 튕겨 나갔겠지만, 돌은 목질화된 덩굴 표면에 큰 상처를 내고 떨어져 나갔다. 헬렌이 만족스럽게 턱을 쓰다듬으며 미소 지었다.
“내가 던졌을 때는 박히더니, 클로디아가 던지니 상처를 입는다…. 소유자의 본래 힘을 좀 타나 본데?”
“그런가 봐요. 저는 헬렌보다 힘이 약하니 박히지 않은 거겠죠?”
그쯤 해서 두 사람의 시선이 데미안 쪽으로 돌아갔다. 헬렌은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흰 돌을 데미안에게 내밀며 은근히 돌을 던져볼 것을 권했다.
“데미안, 궁금하다. 한번 던져 봐.”
“됐습니다.”
데미안은 한숨을 쉬었다.
포폰을 비롯한 네 사람은 마을에서 한참을 걸어가 산기슭에 도달했다. 어차피 밤새도록 걸을 수는 없으니 포폰이 적당한 곳에서 짧게 쉬고 아침에 다시 떠나자고 권한 차였다. 산 쪽으로 갈수록 정글은 점점 성글어지고 하늘이 보였으나, 포폰이 알려준 곳은 불을 피워도 제법 눈에 띄지 않을 만한 곳이었다.
불을 피우고 자리를 깐 건 좋은데, 다들 잠을 안 자는 게 문제였다. 그도 그럴 것이 클로디아를 비롯한 네 사람 모두 오후 내내 포폰의 집에서 쉬었기 때문이다. 헬렌은 포폰의 귀띔에 근처에 나 있던 연한 덩굴줄기를 벗겨내 불에 구웠고, 덩굴줄기 안에 배어 있던 달콤한 즙이 줄기 표면에 굳어 바삭바삭, 설탕을 입힌 듯한 식감이 됐다.
간식까지 갖춰졌으니 다음은 수다였다. 짧은 수다 끝에 데포포가 준 마왕의 돌 이야기가 나왔다. 그리고 포폰을 비롯한 세 사람은 번갈아 가며 돌을 쥐고 제 물리력이 얼마나 커지는지 시험해보고 있었다.
“이 중에는 네가 가장 힘이 세잖아?”
[나도 궁금해, 데미안!]
디자이어까지 거들고 있었다. 포폰의 합류 후로 네 사람의 분위기는 사뭇 부드러워졌는데, 그건 포폰의 명랑하고 뻔뻔한 성격 때문이었다. 물론 또 다른 이유도 있다.
시빌의 부재 때문이다.
여태까지 시빌이 있을 때의 네 사람은 언제나 시빌이 만드는 유연한 분위기에 익숙해져 있었다. 시빌은 딱딱한 데미안의 어깨를 치며 농담을 건넸고, 헬렌에게는 발랄하게 웃었다. 클로디아에게는 다른 의미로 부드러웠지만, 어쨌든 그의 유쾌함에 큰 덕을 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시빌이 없자 세 사람의 분위기는 사뭇 딱딱해져 버렸다. 정확히는 뻣뻣해졌다는 게 맞았다. 그러니 포폰이 만들어주는 여유가 고마울 수밖에 없다.
그리고 거기 가장 쾌활하게 웃는 것이 클로디아였다. 보호받는 클로디아와 그녀를 위하는 두 사람의 모습이라는 게 옆에서 보기에나 훈훈하지, 당사자 – 특히 클로디아 - 에게는 퍽 부담스러운 분위기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는 데미안에게 가장 간절히 눈을 반짝였다.
“수르 알파. 저도 궁금한데…. 안 돼요?”
데미안은 헬렌이 굽고 남은 줄기들을 모아 잘라내 다듬고 있었다. 작은 손칼로 줄기들을 먹을 만하게 다듬어 가방 안에 챙겨 넣는 작업은 단순하지만 분주했다. 데미안은 제 손 안의 줄기에서 눈도 떼지 않고 거절했다.
“안 됩니다.”
“왜요? 수르잖아요….”
“첫 번째. 로드는 주무셔야 합니다. 아직 체력이 회복되지 않으셨는데, 그렇잖아도 야외에서 잠을 청해야 하는 판에 늦게까지 깨어 계시는….”
“우우, 재미없다.”
포폰이 야유했다.
“클로디아, 너 어떻게 저런 인간이랑 둘이 여행한 거야? 훈장님인 줄 알았네!”
마족들의 마을에는 어린애들을 가르치는 훈장이라는 사람들이 으레 있다고 했다. 선생님 같은 존재였는데, 포폰은 자신을 가르치던 훈장님은 퍽 거드름이 많았다며 갑자기 데미안 앞에서 “에헴!” 하며 젠체까지 했다.
클로디아가 까르륵 웃었다.
“이것도 안 된다. 저것도 안 된다. 너 되는 게 뭐야?”
“…주무십시오.”
포폰이 데미안의 가까이에 얼굴을 들이밀고 코를 킁킁거렸지만, 데미안은 고개를 저으며 손을 피했다. 손칼 때문에 다칠까 봐 피하는 몸짓에 포폰은 장난스럽게 앙, 하고 데미안의 팔을 물었다. 파드득, 하고 데미안이 놀라 어깨를 떨었다. 그가 그렇게 놀라는 것을 처음 본 클로디아의 눈이 휘둥그레해졌다가, 박수를 치며 깔깔 뒤로 넘어갔다.
“웃겨!”
[데미안 방금 벌에 쏘인 것 같았는데!]
디자이어까지 반짝반짝 빛을 냈다. 헬렌이 웃으며 돌을 포폰에게 도로 쥐여주었다. 그러나 포폰은 손을 내저었다.
“됐어, 됐어. 난 필요 없어. 원래 힘이 세단 말이야.”
“그래?”
“응. 아빠야 너희 짐을 들어주라고 했지만…. 너흰 그렇게 큰 짐이 필요한 것 같지도 않고. 클로디아, 네가 갖고 있는 게 좋지 않아?”
클로디아가 눈을 깜박거리다가 자신을 가리켰다. “나?” 포폰은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암만해도 그 정령인지 검인지 뭐시깽인지를 드는 것만 해도 버거워 보이는데. 들고 있으면 좀 낫지 않을까?”
“그런가?”
“잡아 봐!”
주변에서 넣어주는 추임새에 클로디아가 민망해하면서도 돌을 제 바지춤에 집어넣고는 디자이어를 들어 올렸다. 오. 클로디아는 입술을 동그랗게 오므렸다. 확실히 전보다 가벼웠다.
붕붕.
[와!]
클로디아는 디자이어를 한 손으로 들고 한 바퀴 돌렸다. 디자이어가 환호를 질렀다. [하늘을 나는 것 같아!]
물론 진짜였다. 디자이어를 그렇게 다뤄본 적 없던 클로디아가 실수로 디자이어를 놓친 것이다.
“꺅!”
와장창! 디자이어는 엄청난 소리를 내며 근처의 돌에 갖다 박혔다. 겁먹은 클로디아가 비명을 질렀다.
“난 몰라! 디자이어, 괜찮아?”
[아이고야…. 내가 사람이었으면 너 관청에 고발했어….]
디자이어가 죽는 소리를 냈다. 그 와중에 벌떡 일어났던 데미안이 한숨을 쉬며 도로 털썩 주저앉았다. 클로디아가 벌인 소동에 놀란 게 분명했다. 아무 생각 없이 그쪽을 쳐다보던 헬렌이 화들짝 놀랐다.
“다쳤잖아!”
[아퍼! 하지만 안 다쳤어!]
씩씩하게 디자이어가 헬렌에게 답했지만 헬렌은 “너 말고!”라며 데미안에게 다가갔다. 디자이어를 주워들던 클로디아도 돌아서 그쪽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데미안의 손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괜찮아?”
“예. 큰 상처는 아닙니다.”
데미안은 자신이 들고 있던 손칼에 반대쪽 손가락을 베인 채였다. 넓게 베인 것은 아니었으나 왼쪽 둘째손가락을 깊게 찌른 듯했다. 피가 쉽게 멈추지 않아 디자이어가 호들갑을 떨었다. 헬렌이 붕대를 꺼내고, 포폰이 지혈초를 찾느라 한참을 헤맨 후에야 데미안의 손가락 상처는 봉합됐다.
그 뒤에서 안절부절못하던 클로디아는 데미안이 봉합된 손가락을 두어 번 움직여볼 때에야 입을 겨우 열었다.
“미, 미안해요.”
다른 둘과 달리 클로디아는 데미안 앞에서 앉지도 못했다. 데미안은 그런 그녀를 올려다보다가 나직하게 한숨을 쉬었다.
“…제게 미안하시면 얼른 주무십시오.”
“하지만….”
클로디아가 영 미안한 마음에 그의 앞에서 발을 동동 구르자, 데미안은 나직하게 코로 한숨을 쉬며 그녀를 똑바로 올려다봤다.
“방금 체험하셨듯, 갑자기 주어진 힘은 부작용을 일으킵니다.”
“….”
갑작스러운 말에 클로디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데미안이 말을 이었다.
“여태까지 새벽마다 제가 로드를 훈련시킨 이유입니다.”
“아.”
“최근에는 이래저래 정신이 없는 데다가 일이 많아 새벽에는 거의 걸렀죠. 내일부터는 다시 할 겁니다. 그러니까, 주무세요.”
그제야 클로디아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챘다. 갑작스럽게 세진 힘을 감당하지 못해 날아가 버린 디자이어를 봤으면, 빨리 가서 자고 내일 아침부터 다시 훈련을 시작하는 게 차라리 더 크게 도움이 된다는 뜻이었다.
민망해진 클로디아가 턱을 긁으며 꾸물꾸물 돌아섰다. 포폰과 헬렌 둘 다 눈알만 굴리던 때, 데미안이 다시 한마디 덧붙였다.
“늦었지만, 거울 공작의 제안을 거절하신 것도 잘하셨습니다. 비슷한 일이 일어났을 테니까요.”
“…어, 네.”
그녀는 얼떨결에 대답하고는 눈을 깜박이며 아까 헬렌이 깔아둔 자리에 누웠다. 들떴던 두 사람도 각자 자리에 눕고, 불침번인 데미안이 불을 낮췄다. 불에서 가까운 자리에 누운 클로디아는 힐끗 그를 쳐다보다가 그가 무슨 말을 한 건지 깨달았다.
강해지고 싶지 않냐던 거울 공작의 제안. 물론 그 힘에 관해 클로디아는 생각해볼 필요도 없이 다른 이유 때문에 거절했지만, 데미안은 그 제안을 받아들였더라도 방금전처럼 부작용이 있었을 거라고 말한 것이다.
***
데미안은 새벽에 그녀를 깨운 후, 마왕의 돌을 챙기라고 말했다. 하품을 하며 정글 한쪽의 공터에 선 클로디아는 그 돌을 데미안에게 내밀었으나, 데미안은 손을 내저었다.
“몸에 지니십시오.”
“어? 하지만 어제는….”
“갑작스럽게 생긴 힘은 부작용을 일으킨다 말씀드렸죠. 하지만 이미 있는 힘을 활용하지 않을 이유도 없습니다.”
클로디아는 눈을 깜박였다. 데미안은 팔짱을 끼고 클로디아에게 디자이어를 들어보라고 말했다. 종잇장처럼 가볍다…까지는 아니었지만, 기분 좋은 무게감이 손에서 전해져왔다. 전에는 양손으로 드는 것만 해도 끔찍하게 무거웠는데. 클로디아는 디자이어를 들고 휙휙 휘둘렀다. 어제 같은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 손에는 단단히 힘을 준 채였다.
데미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분간은 그 물건을 활용하십시오. 하지만 힘을 다루는 연습 또한 하셔야 합니다. 아마 예전보다 훨씬 힘든 연습이 될 겁니다.”
예전보다 힘이 세졌는데도 힘들다고? 클로디아의 생각을 읽은 듯 데미안이 말을 이었다.
“예를 들면 지금 디자이어를 힘을 주어 잡고 계시지요? 칼을 든 손에 힘을 주는 연습은 사실 굳이 할 필요가 없습니다. 검을 오랫동안 다루면서 자연스럽게 힘 조절이 되니까요. 하지만 로드께서는 지금 마법적 힘으로 물리력을 키우셨기에 요령을 익히는 과정이 필요해진 겁니다.”
그렇구나…. 클로디아는 디자이어를 흔들어봤다.
“오늘은 좀 힘드실 겁니다. 칼을 천천히 가로로 똑바로 긋는 연습을 오백 번 하십시오. 세로로도 오백 번 하셔야 합니다.”
그렇게 말하고 데미안은 시범을 보였다. 제 칼을 뽑아 천천히, 직선으로 눈앞에 팔을 뻗어 한 손으로 긴 궤적을 그어 보였다. 딱 봐도 까다로운 연습이었다.
“저걸 오백 번 하라고…?”
클로디아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그 말에 잠시 생각에 잠겼던 데미안이 툭, 내뱉었다.
“천 번, 모두 하시면 어제 궁금해 하셨던 것에 대한 답변을 드리죠.”
그날 아침, 포폰과 헬렌은 투쾅! 하는 소리에 강제로 기상해야 했다.
마왕의 돌을 쥔 수르 알파가 작은 돌멩이 하나로 집채만 한 바위 하나를 부숴버리는 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