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재회
해안선을 따라간 만에는 당연하지만 아무도 없었다. 새까만 바다를 배경으로, 얼마 되지도 않는 길이의 해변을 끝에서부터 끝까지 걸어간 클로디아는 한숨을 쉬었다.
“그래도 혹시나 하고 기대했는데…. 시빌도, 헬렌도 디자이어도 없네요….”
해변은 깨끗하기 그지없었다. 처음부터 아무도 오지 않은 것처럼 조용한 밤바다가 원망스러울 뿐이었다.
클로디아는 결국 푸념을 했다.
“자르지스에 온 뒤로 되는 일이 없는 것 같아요.”
“너무 속상해하시기는 이릅니다. 아무리 용의 화구 근처라고 해도 여기는…. 사방이 노출된 해변이니까요.”
그렇게 말하며 데미안은 해변 안쪽의 초원으로 눈을 돌렸다. 해변은 근방의 절벽 안에서 그곳만 안쪽으로 쑥 들어간 형태였다. 절벽에 오르지 않으면 잘 보이지 않는 지형이었지만, 반대로 절벽에 오른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잘 보이는 곳이었다.
“하지만 배도 없고….”
“감춰뒀을 가능성이 큽니다. 시빌이 있다면요. 없다 해도 헬렌은 항구에 익숙한 사람입니다. 이런 곳에 배를 그냥 내버려 두면, 용의 화구에서 탈출하려던 마족들에게 탈취당할 가능성이 높다는 걸 알고 있겠죠.”
“아….”
데미안은 설명하며 그녀에게 물주머니를 내밀었다. 샘을 발견했을 때 채워둔 것이었다. 해변가의 바위에 앉아 잠시 쉬던 클로디아는 신기한 듯 데미안을 쳐다봤다.
“수르 알파는 정말 잘 아네요….”
“…수르 미다프께 배웠습니다. 원정을 다니던 시절에….”
원정을 다니던 시절에, 까지 말하던 데미안은 곧 입을 닫았다. 아마 예전의 기억들이 떠오른 것이겠지.
클로디아는 옅게 웃어 보였다.
“미다프 경이 함께 있으면 참 좋을 텐데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아무래도 미숙하다 보니….”
“…아, 수르 알파가 그렇다는 의미로 말한 건 아니었어요!”
데미안의 말에 클로디아는 놀라 손을 내저었다. 데미안이 어색하게 그녀에게 시선을 두었다. 클로디아는 벌떡 일어난 후, 허리에 손을 짚고 미다프 경의 걸음걸이와 말투를 흉내 내기 시작했다.
“흠, 미다프 경이었다면 이렇게 말할걸요? ‘흠, 공주님. 남들은 공주님처럼 얼간이 같지 않습니다. 이런 곳에 배를 막 내팽개칠 것 같습니까? 참나.’ 어때요?”
마지막은 데미안에게 한 말이었다. 데미안은 이번에야말로 픽 웃었다. 미다프는 클로디아에게 퍽 공손한 태도와 무례한 말투를 동시에 구사하기로 유명했기 때문이다. 그나마 클로디아나 되니까 공손한 것이다. 그 양자인 데미안에 이르러서는….
클로디아는 어깨를 으쓱했다.
“미다프 경이 있었다면 재미있었을 거예요. 물론 이것도 수르 알파가 재미없단 뜻은 아니에요. 그저…. 뭐랄까.”
데미안이 앉은 채 그녀를 바라봤다. 클로디아는 어색하게 귓불을 만지작거렸다.
“솔직히 우리가 그렇게 좋은 사이는 아니었잖아요.”
“…그렇습니까.”
“가끔은 수르 알파가 혼자 너무 많은 것들을 감당하는 것 같았거든요.”
거울 공작의 미로를 나온 후 클로디아는 확실히 데미안을 좀 다르게 보게 됐다. 그리고 그녀가 가장 크게 느낀 아쉬움은, 데미안에게 의지가 될 사람이 없다는 것이었다. 자신은 그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으니, 그가 의지할 만한 사람이 있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성기사인 스완 경을 보낸 것이 이제와서는 조금 아까웠다.
그는 데미안과 부딪치기는 했지만, 이럴 때는 그와 의견을 주고받으며 제법 괜찮은 분위기를 만들 수 있지 않았을까?
데미안은 그 말 한마디에 그녀의 생각을 읽은 듯했다. 그는 잠시 클로디아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내저었다.
“그렇지 않습니다.”
“…하지만….”
“로드. 저는 수르입니다.”
수르.
단순히 포르투의 기사단장에게 주어지는 호칭은 아니다. 수르라는 단어에는 대륙의 수호자라는 뜻이 담겨 있다. 포르투만을 지키는 것이 아닌, 네 개의 대륙 전체를 보듬는 자. 포르투 기사단이 끊임없이 대륙의 곳곳에 원정을 다녀오는 것도 그것 때문이다. 네 개의 대륙에서 벌어지는 싸움을 막고, 중재하고, 문제를 제거한다.
그래서 수르는 쉽게 명명되지 않는다. 포르투의 역사 속에는 수르의 직위가 몇 년간 비어 있었던 적도 있었다. 적절한 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말에 클로디아는 모든 것을 이해했다. 이 모든 것은 수르라는 이름을 받은 자가 응당 감당해야 할 일이라고 그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그를 걱정하는 것이 오히려 모욕이 될 수도 있다. 클로디아는 가볍게 코로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데미안은 그녀에게서 물주머니를 받아 챙겨 일어섰다.
“밤이 어두워 어차피 해변 근처를 떠나기가 어렵습니다. 오늘은 해변 안쪽의 숲에서 자고, 내일 아침에 일찍 일어나도록 하죠.”
그 나름의 대화를 종결하는 방식이었다. 클로디아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부츠를 당겨 신었다.
***
클로디아는 절벽 아래의 큰 틈에서 모닥불을 피웠다. 오랫동안 지속적으로 파도가 들이쳐서 생긴 작은 동굴이, 뭔가의 충격으로 일부가 부서져 드러나 있었다. 불을 피운다 해도 연기가 크게 눈에 띄지는 않을 것이다.
데미안은 자신이 불을 피우겠다고 했으나, 클로디아도 헬렌에게 배운 요령이 있었다. 잘 마른 나뭇가지를 빠르게, 나름의 요령으로 비벼내자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 불에 손을 쬐고 있자니, 자신이 그래도 뭔가 해낸 것 같아 클로디아는 금세 기분이 좋아졌다. 자르지스의 낮은 굉장히 더웠지만, 저녁은 상대적으로 서늘했다.
곧 데미안이 돌아왔다. 한 손에는 클로디아가 본 적 없는 생소한 생물을 든 채였다. 앞의 집게는 두툼한 것이 마치 게 같았지만, 몸은 마치 도마뱀 같았다. 그러니까, 철갑 같은 껍질을 두른 도마뱀에 앞다리 대신 커다란 집게가 달려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게다가 크기는 거의 큰 토끼만 했다. 당연하게도 클로디아는 데미안의 손에 들린 그것을 보고 질겁했다.
“그, 그게 뭐예요…?”
“…먹을 수 있을 듯하여.”
“그그그그그걸요?”
데미안은 그녀의 눈앞에서 사냥해온 것을 감추듯이 뒤로 돌려 쥐었다. 그 와중에 그 생물은 위협하듯 집게를 딱딱 부딪쳤다. 클로디아는 최대한 침착하려고 애썼다.
“…살아 있네요?”
물론 내용은 침착하지 않았다. 데미안은 클로디아와, 그 도마뱀 비슷한 것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한숨 쉬듯 말했다.
“경험상 이렇게 생긴 생물들은 독이 없습니다. 그 몸뚱어리를 단단한 껍질로 둘러싸고 있는 이유는 그 안의 살이 여리고 부드럽기 때문이지요.”
“그그그렇군요….”
“혹시 몰라 과일같이 생긴 것도 조금 따 왔습니다. 맛을 봤는데 시긴 했지만, 독은 없습니다.”
클로디아는 또다시 미안해졌다. 데미안이 자신이 혹시 그 징그러운 생물에 질겁할까 봐 과일을 따왔다는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예전에는 참 배려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이제는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그녀는 조금 눈치를 보다가, 데미안에게 손을 내밀었다.
“주세요.”
“…예?”
“제가 해볼게요. 전에 헬렌이 게를 손질하는 걸 본 적이 있어요. 비슷하다면, 할 수 있을 거예요, 저도. 요령도 배웠는걸요.”
약간의 실랑이 끝에, 데미안이 그 생물의 숨을 끊어놓고 클로디아가 해체하기로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미안은 역시 안심이 되지 않는지, 그녀의 옆에 붙어 앉았다. 클로디아는 상대적으로 널따란 바윗돌 위에 축 늘어진 그 생물을 뒤집어 올렸다. 그리고 데미안에게 빌린 검 끝을 생물의 배, 관절 안에 비틀어 넣었다.
쩍.
그것은 생각 외로 빠르게 두 쪽으로 갈라졌다. 안에서 반투명한 여린 살점과 내장이 쏟아졌다. 데미안이 조금 놀란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고, 클로디아는 헤헤 웃었다.
“이런 관절에는 반드시 빈틈이 있다고 헬렌이 알려줬어요. 이렇게 실습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내친김에 집게와 몸통도 분리했다. 내장도 빼내 버렸다. 그다음은 흰 살점을 나무 꼬챙이로 꿰어 모닥불 위에 올려 지글지글 굽는 것이었다. 새파랗던 껍질의 표면은 불이 닿자 새빨간 색으로 익었다. 맛있는 냄새가 나서 클로디아는 과일 따위는 까맣게 잊어버렸다.
죽음의 바다에서 나온 생물이었기에 독성이 있을까 봐 데미안이 조금 잘라 맛을 먼저 봤다. 그리고 눈이 커졌다.
“생각보다 나쁘지 않습니다…?”
“정말요?”
그 말을 들은 클로디아도 빠르게 꼬챙이 위에서 살점을 분리했다. 노릇노릇하게 구워진 살점에서는 연한 단맛이 났다. 집게 쪽은 훨씬 맛이 진했다.
“세상에! 나쁘지 않은 정도가 아니잖아요?”
토끼만 한 생물이었기에 두 사람이 배부르게 먹고도 남을 만한 양이었다. 클로디아는 곧 부른 배를 두들기며 나른히 눕게 됐다. 데미안도 말은 없었지만, 만족스러운 표정이었다.
“발자국을 봤습니다.”
적당히 주변을 치우고 나서 데미안이 입을 열었다. 주변을 둘러보다가 모래밭에서 작은 발자국들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다만 그것에 헬렌이나 시빌의 것인지는 고민을 좀 해봐야겠다고 데미안은 말했다. 크기가 생각보다 작은데다가 모두 같은 일행의 것이 아니라고 했다. 흩어져 다니는, 근처 주민의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추측이었다.
“제 생각대로라면 이곳까지 사냥을 나오거나 하는 사람이 있는 듯합니다. 주변에 마을이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거기 헬렌이나 시빌이 있을까요?”
“장담하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만약 두 사람이 이곳에 있었다면 저 발자국을 못 보진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게 말하며 데미안은 자신의 망토를 바닥에 폈다. 클로디아는 그 망토를 보고 풋 하고 웃어버렸다. 데미안이 민망한 표정으로 말했다.
“좀 더럽지만…. 맨바닥보다는 나으실 겁니다.”
“아니, 그게 아녜요. 음…. 더러워서가 아니라, 수르 알파가 처음 포르투를 떠날 때, 포르투 기사단원들이 그 망토를 밟고 찢었던 게 생각나서요.”
데미안은 그 망토를 낡아 보이게 만들기 위해서 오만 노력을 다했다. 하지만 지금 와서 정말로 형편없이 더러워진 두꺼운 망토를 보니, 그렇게까지 노력 안 해도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클로디아는 웃으며 제 뒷머리를 손으로 떨어 보였다.
“저 봐요. 머리는 며칠째 감지도 못했다구요. 그런데 지금 제가 망토 더러운 게 신경 쓰이겠어요?”
“…그렇군요….”
“아, 그 요정들에게 머리카락을 잘라 줄 때는 정말 신경질 났는데. 막상 이렇게 되니 좀 편하긴 하네요.”
클로디아는 일부러 망토를 깐 바닥 한쪽에 털썩 앉았다. 지저분한 자신의 조끼를 벗어 둘둘 만 다음 목덜미에 받치고 누우니, 넓은 망토의 한쪽이 텅텅 비었다. 일부러 그렇게 누운 것이었다. 데미안이 영 불편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으나 클로디아는 그를 힐끗 보고 등 돌려 누웠다.
“저 그렇게 나쁜 공주 아니에요. 편하게 누워요.”
“…저는 불을 좀 보겠습….”
“그럼 저도 안 잘 거예요.”
“불침번은 필요합니다.”
“농담하는 거죠? 수르 알파.”
검기 사용자들의 장기로 알려진 것 중에는 자신의 주변에 접근하는 인영을 언제든 알아챌 수 있다는 점도 있었다. 심지어 자고 있을 때도. 그래서 일행들은 여태까지 몇 번 안 되는 노숙 때도 불침번을 굳이 세우지 않았다.
“지금도 날이 이 정도로 서늘한데, 새벽엔 추울 거예요.”
그렇게 말하고는 클로디아는 제 어깨를 넘겨다보며 코로 웃었다.
“손끝 하나 안 건드릴 테니 안심하고요.”
“…그런 생각 안 했습니다!”
클로디아의 되바라진 말에 데미안이 펄쩍 뛰었다.
“그럼 됐네요.”
클로디아는 부러 심드렁하게 말하며 다시 돌아누웠다. 데미안은 한참이나 망설이는 듯했지만, 이내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또 한참이 지난 후 자신이 누운 망토가 조금 당겨지는 것을 클로디아는 잠결에 알아차렸다. 이미 지독한 수마가 그녀의 머리 위에 내려앉은 가운데 등 뒤로 따뜻한 체온이 어렴풋하게나마 느껴졌다.
자르지스에 온 이후로, 처음으로 조금은 마음 편한 밤이었다. 그녀는 눈을 감았다.
***
마을을 발견한 것은 다음 날 아침이었다. 일찍 깬 두 사람은 빠르게 채비하고 길을 나섰다. 어지럽게 흩어진 발자국들은 작은 길로 통해있었고, 두 사람은 저 멀리 피어오르는 연기 두 줄기를 봤다. 하나는 작은 마을에서 피어오르는 것, 하나는 저 뒤의….
“저게 용의 화구….”
“그런 듯하군요.”
클로디아는 작은 바위 위에 서서 멀리 펼쳐진 나지막한 화산을 바라봤다. 온통 정글로 뒤덮인 자르지스에서, 그 화산은 지나치게 눈에 띄었다. 일단 민둥산이라는 점이 그랬고, 두 번째는 가운데 뻥 뚫린 거대한 구멍에서 계속해서 뜨거운 연기와 재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최근 점점 더 뜨거워지고 있는 데다가 작은 폭발에 다친 자들도 있다는 것이 충분히 짐작 갈 만한 광경이었다. 다만 그 재가 바다 쪽으로 흩날리고 있다는 점이 특이했다.
“보통 화산재는 저렇게 한 방향으로만 흩날리지는 않지 않나요?”
“글쎄요, 어떤 마법적인 힘이 깃들어 있을지 모를 일이죠. 용의 둥지였던 데다가, 초대 국왕 폐하께서도 들어가셨다고 하니….”
그 외에도 하나 더 있다. 마왕. 하지만 두 사람은 그 이야기를 구태여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대신 데미안이 화제를 바꾸었다.
“하지만 열기만은 엄청나군요.”
“그러게요.”
용의 화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는 엄청났다. 저 화구 때문에 남부까지 영향을 미칠 정도니, 근처의 열기가 얼마나 대단한지 말하기도 어려웠다. 데미안도 더워서 웃옷을 들썩일 정도였다.
“…일단 마을부터 가 보도록 하죠.”
“그래요.”
마을로 걸음을 옮기는 동안 클로디아는 망토를 다시 걸쳤다. 땀이 뻘뻘 흘렀지만, 어쩔 수 없었다. 데미안의 목과 팔에 번진 독기는 마족들에게 동족으로 인식되는 요소인 모양이었으나, 클로디아는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어제 잠을 잘못 잔 탓인지 허리가 연신 쑤시고 배가 꾸르륵거렸다.
‘그 도마뱀 비슷한 게 뭔가 잘못된 걸까….’
클로디아는 조심스럽게 데미안에게 속은 괜찮냐고 물어보려다가 관두었다. 그녀가 질문하면 데미안은 왜냐고 물어볼 것이고, 또다시 쓸데없는 걱정을 살 것이다.
지금도 자신이 쓸데없이 노출될까 걱정하는 판인데. 그냥 걷자고 생각하며 그녀는 망토 속에서 연신 땀을 훔쳤다. 덥고 힘드니 생각이 많아졌다.
“…초대 국왕 폐하는 자르지스를 왜 이렇게 내버려 두셨을까요?”
클로디아의 질문은 충동적이었다. 데미안이 멈칫했다. 딱히 대답을 바라고 한 질문은 아니었기에 클로디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르로 포르투를 하늘에 띄우고, 네 개의 대륙이 안정된 다음에라도 자르지스를 다시 찾아올 수도 있었을 거 같은데….”
“…국가라는 것은 시시때때로 돌봄이 필요하니까요. 아마 바쁘셔서….”
“아무리 바빠도요.”
클로디아는 그렇게 말하고 입을 닫았다. 그녀는 나라를 다스리는 것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에 생각이 미쳐서였다. 매일매일 제대로 잠도 못 자고 일하던 쥬버린의 모습도 생각났다.
초대 국왕도 쥬버린처럼 일했을까? 그렇다면 바쁘다는 말도 이해는 간다.
‘하지만, 아무리 바빠도 자르지스 사람들처럼 고통스럽진 않았을 텐데….’
클로디아가 자르지스에 들어온 지는 약 열흘이 되어가고 있었다. 정확히는 모르지만 확실히 그 정도는 됐을 것이다. 자르지스에서 평생을 살아온 사람들에 비하면 극히 한순간일 뿐이지만, 클로디아는 벌써부터 자르지스가 지긋지긋했다.
아무리 밤에 서늘해진다고 해도, 그건 부글부글 끓는 물에 잠시 찬물을 조금 부은 정도의 효과뿐이다. 이런 곳에서 평생을 살아온, 나아가 몇 백 년을 살아온 자르지스의 주민들.
미겔 포르투는 정말로 자르지스를 잊어버린 걸까?
심란한 마음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녀가 보고 들은 것을 종합해 보면, 마족들 또한 그저 인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네 개의 대륙에서 긴 세월 동안 격리되었다. 더운 날씨와 죽음의 바다 때문에 그 모습은 변형됐고, 그것을 목격한 자들에 의해 ‘자르지스에는 마족이 산다’는 이야기로 변질됐을 것이다.
“…죽음의 바다 때문에 이곳을 본 사람들이 없을 텐데, 어째서 마족이 산다는 이야기가 전설처럼 내려온 걸까요…. 마왕도 그렇고요.”
“시빌이 100년에 한 번 열린다는 길을 사용했다지 않습니까. 그 외에도 아마 마고뜨 같은 사례가 없지 않았을 겁니다.”
데미안이 대답했다. 클로디아는 그제야 까끄륵, 하고 소리를 내던 조그만 여자아이를 기억해냈다, 머리에 뿔이 달린 여자아이는 스완 경과 지금쯤 포르투로 잘 가고 있을까?
“마고뜨, 스완 경과 싸우진 않았겠죠…. 사이좋게 지내야 할 텐데.”
“…스완 경은 자신이 해야 할 일과 개인적 증오를 구분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믿을 수밖에요.”
클로디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사이 피어오르는 연기는 점점 더 가까워졌다. 길을 천천히 헤치고 가니 드러난 곳은 나무를 얼기설기 둘러 만든 울타리. 정말로 마을이었다. 적어도 서른 가구는 돼 보이는 작은 마을.
“용의 화구 근처에도 이렇게 큰 마을이….”
“그 해안만 근처에는 작은 시내가 있었습니다. 지금 보니 이 마을도 그 시내를 끼고 있군요.”
그제야 클로디아는 마을 뒤쪽을 휘돌아 흐르는 작은 시내를 발견했다. 언뜻 봐도 깨끗해 보이는 물이었다. 재가 흩날리는 화구 근처에서 저렇게 깨끗한 물이라니. 감탄이 절로 나왔다. 데미안은 천천히 주변을 경계하며 앞서 나갔다.
가까이 가니 주변에는 제법 오가는 마족들이 많았다. 클로디아는 뒤집어쓴 로브 사이로 눈알을 굴렸다. 늑대의 몸에 사람의 얼굴이 붙은 자, 어깨에 두꺼운 줄기의 꽃이 피어 있는 자…. 대부분의 사람들이 대륙인들의 눈으로 보면 해괴해 보이는 신체를 가지고 있었다.
“여기서부터는 로브를 벗으시면 안 됩니다.”
“네….”
클로디아는 데미안의 말에 로브를 더욱 꾹 쥐었다.
그때였다.
“저기요! 이봐요!”
“…?”
큰 소리에 클로디아는 저도 모르게 옆을 쳐다봤다. 그곳에는….
‘소년?’
그러니까, 클로디아에게서 한 열 걸음쯤 떨어져 있는 곳에 웬 소년이 주저앉아 있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소년이라고 추측할 뿐이다. 키가 작은 소년은 낡은 옷을 입고 있었는데, 성별을 추측할 방법이 딱히 없었고 목소리는 아주 앳되었기 때문이다. 성별을 추측할 방법이 없는 이유는 분명하다. 그 소년은 새카만 개의 머리를 달고 있었다. 얼굴 대신.
“그래요, 당신! 저 좀 도와주세요!”
‘개, 개가 말을 해!’
새의 날개를 팔 대신 단 사람도 봤고, 저쪽에는 늑대의 몸을 한 자도 있다. 하지만 클로디아는 역시 이 상황이 적응이 안 됐다. 새까만데, 눈썹뼈만 노란 털이 붙은 까만 개가 두 발로 서서 이쪽을 향해 손짓하고 있었다. 사람의 말을 하면서.
“제발요! 당신도 밥 먹고 싶으면요!”
“…그냥 가시지요.”
데미안이 속삭였으나 까만 개 소년은 데미안이 한 말을 눈치 챈 듯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이 씨! 당신들 밥 안 준다?! 그냥 가면 사흘 밤낮 굶길 거야! 굶은 상태로 설마 그 악어들과 싸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악어? 두 사람은 저도 모르게 서로를 쳐다봤다. 아무래도 뭔가 문제가 있는 것 같은데….
클로디아가 데미안에게 물었다.
“…무슨 소릴까요.”
“글쎄요. 일단… 제가 가 보도록 하죠.”
“조심해요.”
클로디아의 말에 데미안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녀를 내려다봤다. 갑작스러운 시선에 클로디아가 당황해 입을 여는데, 앞쪽의 개 소년이 버럭 짜증을 냈다.
“아! 진짜!”
…그 개 성질 한번 고약하다. 클로디아는 한 발짝 뒤로 물러섰고, 데미안은 반대로 소년에게 다가갔다. 소년은 커다란 자루의 입구를 쥐고 있었는데, 그 소년의 근처에는 엄청나게 커다란 열매들과 나무뿌리 같은 것들이 꽤 많이 흩어져 있었다. 아무래도 자루에 이것들을 모아쥐고 가다가 다 쏟은 것 같았다.
“뭐지?”
“뭐냐니? 이것 좀 같이 담아서 들고 가 줘.”
“…내가 네가 누군지 알고?”
그 말에 소년은 눈썹을 들어 올렸다. 눈썹만 노란색 털로 돼 있어서 표정이 아주 잘 드러났다.
“뭐야, 당신들. 마을에 가는 거 아냐?”
“…맞는데.”
“…군대 모집에 지원하려던 거 아니었어?”
“군대 모집?”
데미안의 말에 소년은 기가 막힌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뭐야. 그것도 몰라? 어디서 왔기에?”
“…화구 반대편.”
“이런. 도망쳐 온 거야?”
“그래.”
소년이 의심스러운 눈으로 데미안을 훑어봤다. 데미안은 부러 신분을 입증이라도 하듯 자신의 목덜미와 손등을 내보였다. 소년은 한숨을 내쉬었다.
“급해서 바다에 뛰어들었나 보네. 우리 마을에도 그런 사람 있어.”
“…그래. 아무튼, 군대 모집이 뭐지?”
“모르는 것도 당연하지. 화구를 빙 돌아서 온 거지? 그럴 만도 해. 사흘 전에 왕이 모두들 몸을 피하라고 했거든.”
왕. 데미안은 클로디아 쪽을 힐끗 바라봤다가 소년에게 질문했다.
“…아나니아?”
소년이 펄쩍 뛰었다.
“왕 이름을 그렇게 막 부르다니! 너 들으면 경을 친다! 아무튼, 그가 최대한 화구를 피해 도망치라고 했어. 악어들 때문에.”
“악어…?”
이제 소년은 데미안 쪽을 흘겨봤다.
“너 아는 게 뭐야?”
데미안은 일부러 두 손을 들어 보이며 천연덕스럽게 손을 내저었다.
“미안. 정말로 아는 게 없어. 저기 내 동생 보여? 얼굴에 크게 입은 화상 때문에 죽다 살아났어. 열흘 내내 화상을 치료하느라고 아무것도 못 하고, 이제야 겨우 사람들을 찾아 나온 참이라고.”
데미안이 제법 그럴싸하게 핑계를 대자, 소년의 눈이 클로디아를 향했다가 안타까운 듯 누그러졌다.
데미안은 넉살 좋게도 그사이 주변에 흩어진 열매와 뿌리를 주워 담기 시작했다. 멀리 있던 클로디아도 재빠르게 눈치를 보며 그 일을 도왔다. 열매와 뿌리를 주워 담은 자루는 엄청나게 무거웠지만, 세 사람이 드니 그럭저럭 들 만했다. 소년은 마을로 그 자루를 옮기는 동안 빠르게 주변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며칠 전부터 용의 화구에서 작은 악어의 모습을 한 괴물 같은 것들이 점점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마족들인 줄 알았는데, 그 악어들은 모두 똑같은 모습을 하고 마족들을 공격했다.
작은 어린아이만 한 크기부터, 어지간하게 큰 어른만 한 것들까지 그 덩치는 다양했다. 그것들은 적으면 셋, 많으면 열 몇 마리까지 무리 지어 다니며 근방 마을을 약탈했다. 그것 때문에 없어진 마을이 벌써 다섯 개가 넘어갔다.
마왕, 그러니까 소년의 말을 빌자면 왕-아나니아라는 자-은 한동안 자리를 비웠다가 최근 다시 돌아왔다. 그는 악어들을 보고 크게 당황했고, 가장 먼저 화구 근처의 마을 사람들에게 피하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그런데 군대 모집이라니….”
“뭐, 이제 다들 슬슬 왕이 어떤 사람인지 알잖아. 또 혼자서 다 감당해낼 셈이라고.”
“….”
데미안은 물끄러미 소년을 바라봤다. 소년은 자루가 무거운지 연신 추켜들면서도 끊임없이 말을 쏟아냈다.
“북쪽 해안가의 비겁쟁이들과 우린 다르잖아? 다들 왕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어서 군대를 모집하기로 한 거야. 그 악어들이 아직까지는 화구 근처만 맴돌고 있으니까. 앗, 조심해!”
마지막 말은 자루의 끝을 붙잡고 있는 클로디아에게 한 말이었다. 클로디아는 두 사람이 들고 있는 자루 끝을 붙들고 가다가, 배가 아파 잠시 두 사람이 이야기하는 동안 배를 쓸어보던 참이었다. 그러나 그 바람에 망토가 쏠렸고, 천을 붙잡던 클로디아는 옆으로 휘청하고 말았다. 물론 가까스로 넘어지지는 않았다.
“괜찮습,”
“괘, 괜찮아….”
조건반사적으로 존댓말 하려던 데미안이 입을 닫자마자 클로디아는 빠르게 말했다.
“나는 괜찮아, 오빠!”
클로디아의 말에 데미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에게서 자루를 완전히 빼앗아 들었다. 그리고 뭐라 뭐라 말했으나 클로디아에게는 그 말이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녀의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망했다….’
그러니까, 정말로 배탈이 난 것 같았다.
***
개의 머리를 한 소년의 이름은 포폰이었다. 포폰의 이야기로, 데미안은 대강의 상황을 파악했다.
자르지스에는 아나니아라는 이름의 왕이 있다. 정황상 그가 마왕이 확실했다. 하지만 포르투 사람들이 상상해오던 마왕과는 사뭇 달랐다. 왕은 누군가를 거느리지 않았으며, 그저 용의 화구 근처에서 오랫동안 살았을 뿐이지만, 자르지스 사람들은 그를 꿋꿋이 왕이라고 불렀다.
그가 오랫동안 용의 화구를 틀어막고 있었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 용의 화구가 느닷없이 거세게 폭발하기 전까지는.
자르지스에 있는 용의 화구는 몇백 년 동안 간헐적으로 폭발해왔다. 자르지스의 왕들은 대부분 용의 화구 근처에서 화구를 다스리곤 했다. 그 과정에서 왕들은 마을을 만들거나 사람들을 거느렸지만, 이번 대의 왕은 달랐다. 그는 홀로 살았다.
그리고 그랬기에 그가 자리를 비웠을 때, 누구도 폭발에 대비하지 못했다. 여느 때보다 더 큰 규모였고, 주변은 뜨겁게 달아올랐다. 왕은 뒤늦게 돌아와 화구를 대강 틀어막았으나 폭발은 더욱 거세졌다.
게다가 며칠 전부터는 알 수 없는 악어 괴물들까지 화구에서 튀어나오고 있었다. 그 악어들은 그나마 얼마 남지 않은 화구 주변의 숲을 마구 훼손하고 다녔다. 왕은 근처에 아직 남아 있는 자르지스 주민들에게 대피를 명령했으나, 주민들은 오히려 똘똘 뭉쳐서 악어들을 무찌르겠다고 군대를 모집하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어떻게 무찌르려고?”
“그놈들은 몰려다니고 이빨이 강하지만, 덩치가 작은걸! 힘도 그리 세지 않대! 어저께 우리 마을 순찰대가 악어 한 마리를 처치했는데, 생각보다 그리 어렵지 않댔어!”
포폰이 명랑하게 자루를 털어내며 말했다. 마을에는 포폰의 말대로 꽤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집들은 대부분 개방돼 있었고, 마을 광장에는 배식대 같은 것이 차려져 있었다. 포폰이 자루를 털어낸 것은 배식대 뒤의 작은 창고였다.
“얼추 백 명 정도 모였으니 다들 순찰을 돌면서 악어를 보이는 대로 처치하면 좋지 않을까 하고 논의하는 중이지!”
“그렇군…. 이 뿌리는 식량인가?”
“그래. 우리 마을은 작으니까, 이 많은 사람들을 다 먹이려면 숲에서 이것저것 캐 와야 한다구.”
포폰이 어깨를 으쓱했다. 귀를 쫑긋하며 꼬리를 흔드는 것이 제법 귀여웠다. 평소였다면 클로디아는 포폰의 머리를 쓰다듬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을 것이다. 하지만….
“저어…. 포폰.”
“…음?”
클로디아는 포폰과 데미안의 말이 끊겼을 때 용기 내어 입을 열었다.
“혹시…. 배탈약 같은 거 있니?”
“…약? 너 어디 아파?”
포폰이 눈을 깜박였다. 클로디아는 혹시나 몰라 로브를 더더욱 세게 여미며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기, 속이 너무 쓰려. 그리고….”
“그리고?”
클로디아는 데미안 쪽을 힐끗 쳐다보고 포폰의 귀에 속삭였다.
“화장실 좀….”
“아. 그거라면 저쪽에 있어.”
“고마워!”
포폰은 클로디아의 말을 듣자마자 창고 근처의 작은 건물을 가리켰고, 클로디아는 잽싸게 그쪽으로 발을 옮겼다. 그러나 포폰이 데미안에게 하는 말이 그녀의 발을 붙잡았다.
“네 동생 되게 부끄러움 많이 타네? 화장실 간다는 말도 잘 못 해?”
“화장시…. 음.”
데미안이 포폰의 말을 무심코 따라 하다가 말을 멈췄다. 그 대화를 고스란히 듣고 있던 클로디아는 정말 울고 싶은 심정으로 뒤에 외쳤다.
“아니야! 아니라구! 손 씻으러 가는 거야!”
“…누가 뭐랬나.”
포폰이 갑작스러운 클로디아의 외침에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데미안을 올려다봤다. 데미안은 난감한 얼굴로 눈을 피하고 있었다. 클로디아는 얼굴이 홧홧하게 불타오르는 것을 진정시키려 애쓰며 기를 쓰고 건물로 뛰어 들어갔다.
화장실 가는 게 이제 와서 창피한 건 아니었다. 그랬다면 포폰에게 말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예전의 그녀였다면 그냥 조용히 주변 건물들을 관찰하며 화장실이 어딘지를 찾든가 했겠지. 클로디아는 두어 달의 여행을 지속하며 화장실 없는 여행길에 익숙해진 지 오래였다.
하지만 이상하게 데미안에게는 굳이 그런 이야기들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제 와서 새삼 물만 먹는 예쁜 공주님처럼 보이길 원하는 건 아니지만…. 배탈이 났다는 걸 굳이 알려주고 싶지도 않단 말이야….’
***
문제는 클로디아의 얼굴이 불타오르는 것이, 단지 창피해서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녀는 계속해서 제 손이 뜨끈뜨끈하게 달아오르는 것에 관해 의심하게 됐고, 데미안을 부른 것은 화장실에 다녀와서도 역시 자신의 상태가 그리 좋지 않다는 것을 확신한 후였다.
“저기….”
“무슨 일이시죠, 로드.”
군대에 지원하는 척하며 마을의 이것저것을 살피고 온 데미안이 그녀를 걱정스럽게 내려다봤다. 클로디아는 “우리는 배탈이 나면 이걸 씹어!”라며 포폰이 물려준 풀뿌리를 씹느라 창고 뒤편에 홀로 쭈그려 있었던 차였다.
클로디아는 주변을 둘러보고는 데미안에게 속삭였다.
“아무래도 몸이 안 좋은 것 같아요. 수르 알파는 괜찮아요?”
“…아까부터 짐작은 했습니다만, 계속 안 좋으십니까?”
클로디아는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었다. 데미안은 멈칫했으나, 제 장갑을 벗고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표정이 굳었다.
“잠깐 실례를….”
데미안은 그녀의 손을 내려놓고 로브 안으로 손을 뻗었다. 클로디아의 이마를 짚은 데미안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열이 심합니다. 언제부터 이랬지요?”
“잘 모르겠어요. 더운 건 아침부터 더웠는데…. 속이 너무 안 좋은 데다가 피곤해서…. 그냥 로브를 써서 더운 줄 알았어요. 데미안은 괜찮아요? 저 아무래도 어제 먹은 게….”
거기까지 말하고 클로디아는 아차, 하고 말을 돌렸다.
“…너무 많이 먹었나 봐요.”
혹시라도 그가 도마뱀을 잘못 잡아와서라고 자책할까 봐 클로디아는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데미안은 그녀가 왜 그렇게 말하는지까지 눈치챈 듯했다.
마른세수를 거칠게 하고 난 데미안은 그녀에게 나직하게 말했다.
“쉴 곳을 좀 찾아보겠습니다. 일단 로브를 벗을 수 있는 곳이 있어야겠습니다. 로브를 벗고 얼굴만 가리고 계십시오.”
“하지만, 들키면….”
“열이 이렇게 오른 분이 계속 몸을 감싸고 있는 것이 더 위험합니다.”
데미안은 혀를 차더니 말을 이었다.
“그냥 이곳을 나가지요. 마을에는 외지인이 하도 많아서 ‘외부에서 온 사람을 보지 못했느냐’고 묻는 것이 별 의미가 없더군요. 헬렌과 시빌이 이곳에 있을 가능성도 있지만, 이대로 계시는 게 더 위험합니다.”
“…그래요.”
클로디아는 비틀비틀 일어섰다. 아까부터 식은땀이 줄줄 나고 손이 덜덜 떨리는 것이, 데미안의 말을 따르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그러나 다리에 힘이 없었다. 데미안은 한숨을 쉬고 그녀를 부축했다.
“미안해요. 겨우 쉴 수 있겠다 싶었는데….”
“아닙니다. 애초에 마족들 마을에서 쉴 생각은 하지도 않았습니다. 다만 약이 없는 게 문제인데….”
데미안은 클로디아의 사과에 조금만 참으라는 말로 대답을 대신했다. 기력이 없어 아무것도 못 할 것 같은데, 한숨은 잘도 나왔다. 어쩜 이렇게 짐덩이 같은 몸일까. 자책하며 간신히 창고를 돌아나왔을 때였다.
“와, 포폰! 많이 모아왔네! 혼자서 장하다!”
“그렇지? 그런데 혼자 아니야!”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클로디아는 남은 기력을 쥐어짜내 목소리가 들려온 쪽을 봤다. 데미안 또한 놀란 건 마찬가지였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쾌활한 목소리….
“오늘 마을에 온 애들이 도와줬어! 그러니까, 아. 저기 있다!”
이쪽을 가리키는 포폰의 옆에 서 있는 사람. 갈색의 짧은 머리, 큰 키. 좀처럼 볼 수 없는 대검을 등에 진….
“…헬렌?”
“뭐야. 셋이 아는 사이….”
“데미안?! 옆은 그럼….”
“…아.”
헬렌이었다. 클로디아는 하, 하고 웃었다. 하하. 하하하. 그리고 눈앞이 핑 돌았다.
“클로디아?!”
“헤, 헬렌. 만나서 정말…. 정말 반가워요 그런데….”
“뭐야? 데미안. 클로디아 왜 이래?”
헬렌의 물음에 데미안이 창백한 얼굴로 답했다.
“잘 모르겠습니다만 식중독 같습니다. 어제…. 식사를 하지 못해 해변에서 사냥을 했습니다.”
“뭘 먹었길래?”
“뭔지는 모릅니다만, 철갑을 두른 도마뱀에 집게 같은 것이 달린….”
“바다 도마뱀인데?”
두 사람의 빠른 대화에 끼어든 것은 포폰이었다. 포폰은 고개를 갸웃하며 데미안에게 물었다.
“파란 집게 달린 거?”
“그렇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먹었는데?”
“구워 먹었습니다.”
“구워 먹었으면 괜찮을 텐데. 그거 독성은 있지만 그냥 배앓이 수준이고… 잠깐만.”
포폰은 세 사람을 번갈아 보더니 “설마….” 하고 중얼거렸다. 헬렌이 한숨을 쉬었다.
“그래, 그 설마야.”
“또 인간….”
“…포폰. 제발. 알잖아. 내가 찾던 그 친구들이야.”
아무래도 헬렌이 인간이라는 사실은 이 마을에 널리 알려진 것 같았다. 게다가 그 사실에 상당히 거부감을 느끼는 것 같았지만…. 포폰은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쩔 수 없지. 헬렌 친구들이라면야…. 따라와.”
“…고마워, 포폰!”
짧은 걸음 끝에 클로디아가 눕혀진 것은 작은 움막이었다. 나뭇가지들을 얼기설기 엮어 만든 지붕과 야트막한 토담이 어우러진 집.
포폰이 살고 있는 집이었다.
“…내 침대에 일단 눕히자. 잠깐, 근데 인간에겐 너무 작지 않나?”
“괜찮아. 일단은….”
포폰의 침대는 마른 나뭇잎들을 가득 깔고 그 위에 천을 깐 형태였다. 동그란 형태라 인간에게는 그리 편안한 축은 아니었으나 그런 것을 따질 겨를은 없었다. 헬렌이 빠르게 그녀의 로브를 벗겨낸 후, 클로디아의 이마에 흐르는 땀에 기겁했다.
“세상에, 땀으로 아주 목욕을 했네. 데미안. 아까 그 배식소 뒤에 우물이 있어. 거기서 찬물을 좀 길어와.”
“예.”
“클로디아. 정신 차려. 지금 기절하면 안 돼.”
“헬렌….”
클로디아는 눈을 꾹 감았다 떴다. 옆에 있던 포폰이 혀를 찼다.
“바다 도마뱀은 우리 같은 자르지스 사람들은 자주 먹어서 괜찮지만…. 처음 먹는 사람들은 배앓이를 해. 게다가 너희 독샘도 제거 안 하고 먹었나 보네.”
“독샘이라면….”
“집게를 혹시 먹었니?”
“…응.”
“어휴, 집게가 가장 단맛이 나지만, 그건 사실 독샘 때문이거든. 아까 내가 준 풀로는 당연히 치료가 안 되지. 잠깐만 있어 봐.”
포폰은 벌떡 일어섰다.
“이럴 때 씹는 버섯이 어디 있을 거야. 좀 캐와야겠다.”
“포폰. 고마워.”
헬렌이 미안한 듯 포폰에게 웃어 보였다. 포폰은 혀를 찼다.
“헬렌, 네가 우리 마을 사람들에게 베푼 걸 생각하면 이 정도는 일도 아냐. 하지만 밖에 나가지는 말고 여기서 기다려. 알지? 헬렌 너 혼자는 괜찮지만, 무리를 지은 인간은 문제가 달라.”
“…알았어.”
“고마워요, 포폰….”
헬렌이 고개를 끄덕이는 가운데, 클로디아가 미약한 소리로 감사 인사를 했다.
포폰은 귀를 두어 번 쫑긋거리더니, 대답하지 않고 움막을 나갔다. 하지만 그의 꼬리가 약하게 살랑살랑 흔들리는 것은 분명히 보였다. 문이 닫히자, 헬렌이 클로디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휴, 반가워하지도 못하겠네. 대체 어디 있었던 거야? 클로디아. 그리고….”
그러나 헬렌이 채 말을 끝내기도 전에 다른 목소리가 그녀의 말을 잘랐다.
[클로디아! 클로디아!]
“…아.”
[클로디아! 보고 싶었어! 클로디아!]
어린애 같은 목소리는, 실체가 없었지만 물기를 띠고 있었다. 클로디아는 옅게 웃었다.
“디자이어….”
***
클로디아는 포폰이 가져온 버섯을 억지로 씹고서도 이틀 동안 비몽사몽이었다. 헬렌이 간간이 버섯 우린 물을 그녀의 입에 떠넣어 주며, 아마 자르지스에 와서 내내 긴장하고 있던 것이 지금 풀린 것 같다고 말했다.
클로디아는 이틀 동안 눈을 떴다가, 헬렌 혹은 데미안의 얼굴을 확인하고 힘겹게 눈감는 것이 전부였다. 시빌은 어디 갔는지, 헬렌은 왜 디자이어와 둘이 이곳에 있는지 묻고 싶었으나 현실은 고작 멀건 죽 몇 스푼을 입에 떠넣고 다시 잠드는 것이었다. 그만큼 열이 높고 힘들었다.
디자이어는 그런 그녀 옆에서 내내 속삭였다.
[미안해, 클로디아. 미안해.]
대체 얘는 뭐가 이렇게 미안한 걸까.
클로디아는 잠결에 디자이어가 몰래 속삭이는 것을 들으며, ‘내가 멋대로 모자를 잡겠다고 손을 뻗었는걸…’이라고 대답하고 싶었지만, 그럴 기력조차 없이 다시 잠들었다.
자다가 깨면 디자이어는 반짝반짝 빛을 내고 있었다. 그게 어쩌면 디자이어가 슬퍼하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클로디아는 생각했다. 일어나면 꼭 디자이어에게 괜찮다고 말해줘야지.
내가 미안해, 디자이어.
클로디아는 사흘째 되던 날 오후에 눈을 떴다. 그녀는 흐릿하게 눈을 떴고, 몸이 전보다는 조금 가볍다는 걸 깨달았다. 시험 삼아 몸을 조금 움직여볼까 하고 손을 들어 올리니 힘이 없어 덜덜 떨리긴 했지만, 그래도 전보다 훨씬 몸 상태가 나아진 것을 알 수 있었다.
‘손 되게 거칠어졌네….’
그녀는 물끄러미 제 눈앞의 오른손을 바라봤다. 손은 더럽고 상처투성이였다. 아무리 장갑을 끼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그 정글을 그렇게 헤매고 다니니 손이 상하지 않을 리 없었다. 보드랍고 굳은살 하나 없던 예쁜 손은 어디로 가고, 여행자의 손이 있었다.
‘이래서야 약혼반지도 못 끼겠다.’
그렇게 생각하고 클로디아는 픽 웃었다. 자신이 생각해놓고도 어이없는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이 판국에 약혼반지 생각이라니. 약혼반지를 낄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주제에 참 태평한 생각 한다고, 웃고 있던 순간이었다.
“로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클로디아는 손을 내리며 옆을 돌아봤다. 그곳에는 계속해서 그녀의 옆에 있었던 것인지, 데미안이 피곤한 안색으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클로디아는 옅게 웃었다.
“미안해요, 폐를 끼쳤군요.”
“아닙니다. 목소리가….”
“아, 그래요. 지금은 괜찮아요.”
그 이틀 동안 클로디아는 말할 기력도 없어 작고 쉭쉭 소리가 새는 목소리로 간신히 ‘물 좀…’ 같은 소리나 하는 게 다였다. 하지만 지금은 기력이 상당히 돌아온 것 같았다.
클로디아가 천천히 몸을 일으키려다 옆을 봤다. 디자이어가 반짝거리고 있었다. 클로디아는 미소 짓고 디자이어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들겼다.
“디자이어. 오랜만이야.”
[…클로디아! 괜찮아?]
“그래. 이제 괜찮아.”
그렇게 말하고 클로디아는 잠깐 고민하다가 덧붙였다.
“울보야.”
[누가 울보라는 거야!]
“너 말이야, 너. 엄청 우는 거 내가 다 봤거든?”
[뻥치시네! 완전 쓰러져 있었던 주제에!]
방금 전까지 물기 어린 목소리로 괜찮냐고 물었으면서, 디자이어는 금세 버럭버럭, 저는 그런 적 없다 성을 냈다.
[…중간중간 너무 앓길래 진짜 죽는 줄 알았어. 진짜 괜찮은 거야?]
“그래. 진짜 괜찮아. 어제까지는 눈도 흐릿했는데, 지금은 나아졌는걸.”
그래놓고서는 또 금세, 다시 한 번 지금은 괜찮냐고 묻는 모습이 새삼스레 귀여웠다. 평소에는 참 얄밉더니, 오래 헤어져 있었어서 그럴까. 클로디아가 피식 웃으며 데미안 쪽을 돌아봤다.
“수르 알파. 당신은 괜찮은가요? 우리 같은 걸 먹었는데….”
“아, 저는 괜찮습니다.”
원인이야 분명했다. 포폰은 클로디아가 독성이 있는 바다 도마뱀을 먹고 식중독에 걸렸다고 했다. 하지만 그 독은 자르지스의 주민들은 자주 먹어 익숙한 물건이라고도 했다. 그렇다면 데미안도 배앓이를 해야 맞을 텐데….
클로디아의 의문을 알아챈 듯 데미안은 낮게 답했다.
“저는…. 원정을 다니며 이것저것 먹어보았으니까요. 아마 저는 먹어본 종류의 독이었겠지요.”
“그런가…. 포르투 기사단도 참 힘든 일이네요. 여태까지 몰랐어요.”
“꼭 원정 때문만은 아니지만…. 어쨌든 제가 너무 안일했습니다.”
데미안은 통렬하게 반성하고 있었다.
포르투 기사단은 대부분 풍족한 물자를 지니고 원정을 떠나지만, 수르 미다프와 함께 원정을 다닐 때, 더욱이 그가 검기를 깨우치고 나서는 대부분 그렇게까지 풍요로운 원정을 다닐 순 없었다. 필요한 물자는 현지에서 조달할 수밖에 없었던 원정 때와 같이, 먹을 만한 것을 골라 사냥한 것은 좋았다.
하지만 클로디아가 내내 어느 정도 가공된 요리만 먹어왔던 것을 간과한 게 데미안의 실책이었다. 이런 종류의 배앓이를 하게 될 줄 몰랐던 것이다.
데미안은 이틀 새 핼쑥해진 클로디아의 얼굴을 보고 심란한 표정이 됐다. 클로디아는 데미안과 눈이 마주치자, 어쩐지 민망해서 고개를 숙였다. 데미안의 잘못이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그가 자책하고 있다는 것이 여실했기 때문이다.
두 사람 사이의 어색한 분위기를 깬 것은 디자이어였다.
[…뭐냐 너네. 이상하다?]
“…어?”
[너네 되게 다정하네? 뭐야? 나 없는 사이에 무슨 일 있었어?]
“무슨 일이라니, 나는 원래 다정했거든?”
의뭉스럽게 물어오는 디자이어의 말에 당황한 클로디아가 저도 모르게 콩콩 디자이어를 두들겼다. 디자이어가 뭐라뭐라 쨍알댔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클로디아가 디자이어에게 그간의 일을 물은 것은 한참 후였다.
[그러니까, 우리가 어떻게 여기에 있느냐 하면….]
***
우지직, 난간이 부서졌을 때 가장 먼저 비명 지른 것은 디자이어였다.
[클로디아!]
디자이어는 배와 긴밀하게 이어져 있었기에 자신이 만든 난간이 부서졌고, 그 위에 있던 두 사람이 바다에 떨어진 것을 바로 알아차렸다. 헬렌이 놀라 디자이어를 붙든 손에 힘을 풀었으나, 그녀를 꽉 잡은 것은 시빌이었다.
“위험해요! 놓지 마세요!”
“시빌! 클로디아가 떨어졌다고! 데미안도!”
“그래서 당신도 떨어질 셈입니까!!”
시빌이 고함을 질렀다.
헬렌은 그 말에 정신이 퍼뜩 들었다. 눈앞에 새카만 죽음의 바다가 넘실거렸다. 마치 살아 있는 듯 움직이는 새카만 촉수들이 지금도 텅, 텅텅 하며 배를 사정없이 두들기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을 포기하란 말이야?
“헬렌, 선창으로 들어가십시오!”
“그럴 순….”
“마법을 쓸 겁니다! 방해된단 말입니다!”
헬렌은 그 짧은 말에서도 시빌의 뜻을 알아차렸다. 이렇게 사정없이 흔들리는 배 안에서 마법을 쓰면서 헬렌까지 엄호할 순 없다는 뜻이리라.
대인 전투라면 헬렌도 그렇게까지 보호만 받을 일은 없을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들은 죽음의 바다 위였고, 헬렌이 자칫하다 시빌을 방해할 수도 있었다. 헬렌은 혀를 차며 흔들리는 배 위에서 선창 아래로 들어갔다. 그동안에도 디자이어는 울부짖으며 클로디아를 불렀다.
[클로디아!! 데미안!]
“디자이어! 죽음의 바다를 탐색할 수 있습니까?”
반면 시빌은 침착하게 디자이어에게 다그쳐 물었다.
“죽음의 바다에는 제 마법이 통하지 않습니다! 디자이어 당신이 어느 방향인지 탐색해서 말해준다면 제가 그들을 빨리 건져내 보겠습니다!”
시빌의 제의에 디자이어는 혼란스러운 가운데 힘을 펼치려 애썼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반짝반짝, 어두운 바다 위에서 빛을 내는 정령이 힘을 쓰려 할 때마다 바다는 더욱 거세게 배를 두들겼다. 두꺼운 돛대를 붙들고 버티고 있던 시빌도 몇 번이나 손을 놓칠 뻔했다.
[안 돼, 안 돼…. 클로디아…. 제발….]
정령이 절망적으로 중얼거렸다. 시빌은 이를 악물고 손을 뻗었다. 디자이어 옆으로 가려는 심산이었다. 디자이어는 바다 안을 탐색하려 했으나, 용의 저주가 고인 바다는 그리 만만하지 않았다. 마치 사나운 맹수가 배를 물고 흔드는 듯한 움직임이 몇 번이나 계속됐다. 시빌은 디자이어 쪽으로 가려다가 자신이 빠질 뻔한 위기를 세 번째 겪고 나서야 포기했다.
“안 되겠습니다! 포기합시다!”
[어떻게 포기해!]
“이봐요! 그럼 어쩌란 말입니까? 디자이어 당신이 그렇게 혼란스러워하면서요!”
[겨우 자르지스에 다 왔는데…. 겨우….]
아무리 용을 써도 새카만 바닷속으로 사라진 두 사람을 찾을 수가 없었다. 마치 일부러 감춘 듯이. 디자이어는 이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다. 자신은 피로써 포르투 왕가와 연결돼 있었다. 데미안은 몰라도 적어도 클로디아가 어느 방향에 있는지 정도는 알 수 있어야 했다. 하지만 죽음의 바다는 자신을 놔주지 않았을뿐더러, 도저히 클로디아의 방향을 찾을 수 없었다.
혹시.
디자이어는 어떤 가능성을 생각했다.
혹시, 클로디아의 숨이 벌써 끊어져 버린 건 아닐까.
그 공주님은 허약하기 그지없다. 최근에는 데미안의 훈련을 따라오고, 헬렌의 음식을 먹으면서 축복을 차곡차곡 쌓아가 그나마 봐줄 만했지만, 그것도 사실은 건강한 일반인 정도 수준이었다. 그런 그녀가 죽음의 바다에 빠지자마자 죽었을 가능성은 한없이 많았다. 떨어지자마자 충격에 목이 부러졌거나, 물을 삼켜 그대로 익사했거나. 거기까지 생각한 디자이어는 비명을 질렀다.
[으아악! 으아아악! 안 돼!]
“디자이어! 침착해요! 젠장!”
[클로디아! 안 돼! 내가 너를 이곳에서 잃으려고 데려온 게 아니란 말이야!]
“압니다, 디자이어! 제발!”
[클로디아!]
그쯤 해서 시빌은 결단을 내렸다. 저 정령이 패닉 상태에서 완전히 돌아버리기 전에, 그래서 남은 두 사람마저 빠져 죽기 전에 어떻게든 원상태를 회복해야 했다. 시빌은 돛대를 붙들고 간신히 디자이어 쪽을 향해 손가락을 튕겼다.
펑!
[클로디…악!]
어린애 머리통만 한 화염이 디자이어가 매달린 키에 그대로 꽂혔다. 키는 새카맣게 그을렸다. 시빌은 다시 손가락을 튕겼다. 펑! 이번에는 키 아래쪽의 기둥에 화염이 튕겼다.
[무슨 짓이야!]
“정신 차리라고요! 지금 뭐 하는 짓입니까! 나와 헬렌조차 죽일 셈입니까!”
시빌의 고함에 디자이어가 겨우 잠잠해졌다. 시빌은 다시 소리 질렀다.
“당신이 그랬잖습니까! 해류를 따라간다고!”
[클, 클로디아를 찾을 수….]
“바다에 빠진 사람을 찾을 수 없는 건 당연합니다. 젠장! 이런 걸 일일이 말해줘야 하다니 빌어처먹을 정령 같으니라고!”
[시빌 너 말조심해!]
“디자이어 당신이나 정신 차리세요! 지금 클로디아는 못 찾아요!”
[그럼 어떻게 하란 말이야?!]
정령에게는 몸이 없다. 하지만 시빌은 지금 이 순간 눈앞의 검이 울먹이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시빌은 한숨을 쉬었다.
“자르지스로 가야 합니다. 해류를 따라 해안으로 빠르게 흘러갑시다. 돛은 펴지 마세요. 죽음의 바다는 우리 생각보다 그리 깊지 않습니다.”
[…해안으로….]
“운이 좋으면 그대로 살아남을 겁니다. 죽음의 바다라고는 하지만, 데미안은 검기 사용자입니다. 검기 사용자들의 기술 중에는 검기로 몸을 감싸는 것도 있습니다. 해류를 따라가 닿은 해안에 그들 또한 다다를 가능성도 충분하죠.”
[하지만….]
“그럼 포기하고 도로 돌아갈 겁니까?!”
시빌의 말에 디자이어는 그제야 정신 차린 듯 파르륵, 빛무리를 공중에 띄웠다. 죽음의 바다가 넘실거리며 그들을 위협하고 있는 상황이었지만, 시빌은 디자이어의 사소한 감정 변화 하나하나를 알 수 있었다.
디자이어가 곧 결심한 듯이 말했다.
[…좋아. 자르지스로 가.]
“그래요. 최대한 빨리 해류를 따라가야 하니 짐은 다 버리죠.”
[괜찮겠어?]
“짐이라고 해봐야 얼마 안 되는 식량이나 무기 같은 겁니다. 당신은 배를 조종하는 데만 집중하세요.”
[아, 알았어.]
침착한 시빌의 지시에 디자이어는 곧 다시 배를 운전하기 시작했다. 처음과 같은 쾌활함은 더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시빌이 선창에 들어가 무거운 짐들을 들고 나왔고, 곧 헬렌도 따라 나와 돛을 썰기 시작했다. 필요 없는 무게는 줄여야 했다.
그렇게 셋은 만신창이가 된 상태로 자르지스에 다다랐다.
자르지스에 가까워질수록 죽음의 바다는 점점 고요해졌다.
괜찮을 거야, 괜찮을 거야.
헬렌이 디자이어를 끌어안고 위로해주었으나 디자이어는 점점 침울해지고 말수가 없어졌다. 이내 배가 자르지스의 해변에 닿고, 쿵 소리가 났을 때도 디자이어는 아무 말 하지 않았다.
해변에 가장 먼저 내려선 건 시빌이었다. 헬렌은 뜨겁고 무거운 공기에 질린 표정으로 디자이어와 데미안의 가방을 들고 내렸다. 짐을 다 갖다버려도 셋 다, 데미안이 들고 있던 가방만은 버리지 않았다. 그 안에는 클로디아를 위한 물건들뿐이었는데도.
해류를 따라 내린 곳은 당초에 처음 가려던 곳이 아닌, 한참 북쪽의 해안이었다. 시빌의 말 대로, 두 사람이 만약 파도에 떠밀려왔다면 닿았을 만한 곳에 온 것이었다. 꼬박 하루를 물에 실려 온 셋 모두 지쳐 있었지만,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시빌은 말없이 배를 작게 줄여 데미안의 가방에 넣었다. 헬렌이 그 가방을 챙겼고, 디자이어를 끌어안았다.
“이곳 주변을 둘러보면서 이틀 정도 체류하죠.”
“체류라니….”
체류 다음에는? 헬렌이 말끝을 흐렸다. 시빌은 한숨을 내쉬었다.
“수많은 가능성을 고려해야죠. 저는 두 사람이 우리보다 먼저 정신을 차리고 이곳을 떠났을 가능성도 높다고 생각합니다.”
시빌의 말은 사실로 나타났다.
이틀째 되던 날 낮에, 헬렌은 꽤 멀리 나갔다가 희한한 것을 보았다. 해변에 널린 시체였다. 가까이 가서 보니 그것들은 모조리 마족들의 시체였다. 더운 날씨에 잔뜩 부패해 있는 그 시체들은 냄새도 심하고 모양을 알아보기가 벌써 어려웠으나, 헬렌은 그 마족들이 한 번의 칼질에 한꺼번에 죽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헬렌은 그게 누구의 솜씨인지 알았다.
검기를 쓰는 사람.
“데미안이야!”
헬렌은 헐레벌떡 시빌을 찾아와 설명했고, 시빌은 헬렌을 따라가 본 후 납득했다. 문제는 그 이후였다.
“…클로디아와 데미안은 어디로 갔을까요?”
디자이어가 이쪽에 있는 이상, 클로디아와 데미안은 자르지스에 무사히 도달했다 해도 목적을 완수할 수 없다. 마왕의 심장에 디자이어를 꽂지 않는 이상 마왕은 죽지 않기 때문이다. 클로디아는 아마 디자이어를 위시한 셋이 자르지스에 도착했을 가능성을 셈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였다.
[처음 오려고 했던 해안만으로 가자! 거울 공작의 성 근처로!]
그러나 디자이어의 말에 시빌은 고개를 저었다.
“마왕성으로 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시빌의 설명은 간단했다. 클로디아와 데미안은 처음부터 일행에게 목적을 명확히 제시했다. 자르지스에 있을 마왕성으로 들어가서, 마왕을 죽이는 것. 그렇다면 역설적으로 생각해서, 클로디아와 데미안 쪽이 ‘시빌과 헬렌이 마왕성으로 찾아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목적지는 한 곳이었던 만큼, 최종 목적지에서 합류하자는 생각을 하는 사람도 세상엔 많아요. 간과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해안만에 갔다가 마왕성으로 가도 되잖아? 우린 마왕성 위치도 모르고….”
[그래. 해안만까지 다시 배를 타고…는 어렵겠지.]
디자이어가 죽음의 바다를 보고 한숨 쉬듯 말했다. 해변 쪽이야 죽음의 바다가 고요하지만, 다른 곳으로 가기 위해 먼 바다로 나갔을 때 다시 그 전쟁을 겪는 것은 피하고 싶었다. 시빌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헤어지죠.”
[뭐라고? 지금도 갈라졌는데….]
“무작정 헤어지자는 게 아닙니다. 헬렌은 디자이어와, 저는 단독으로. 헬렌과 디자이어는 그 해안만으로 가십시오. 저는 마왕성의 위치를 알아보고 그쪽을 다녀와 보겠습니다. 추적 마법이 있으니 제 쪽이 헬렌에게 합류하는 것은 쉽습니다.”
“하지만….”
헬렌이 만류하듯 입을 열었으나 시빌은 고개를 저었다.
“저는 마법사입니다.”
그러나 헬렌은 그 말이 도저히 시빌 자신의 안전을 보장한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시빌이 이미 진즉 말한 적 있지 않은가.
자르지스의 마력은 대륙과 다르게 흐른다고.
“너, 자르지스에서도 마법을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어? 어렵다고 했잖아.”
그 말에 시빌은 허를 찔린 듯 잠시 입을 다물었다. 헬렌은 눈을 부라렸다.
“요게 어디 누나를 속이려고. 너 내가 바보인 줄 알아?!”
“아, 그러면 어떡해요! 셋이서 똘똘 뭉쳐 다닌다고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닌데!”
“흩어지면 뭐 방법 있어?!”
“예! 지금보단 훨씬 효율적이죠!”
그렇게 말하며 시빌은 다시 손가락을 몇 번 튕겼다. 이전과는 달리 입안에서 뭐라고 웅얼거리기도 했다. 그러자 휙, 하고 상쾌한 바람이 불었다. 더운 자르지스에서는 보기 드문 맑은 바람이었기에 헬렌이 저도 모르게 눈을 동그랗게 떴다. 시빌은 억울한 듯 말을 이었다.
“말했잖습니까. 저는 이미 여기 와본 적이 있다고. 완전히 멍청이가 되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몇 번의 실랑이 끝에 결국 시빌은 보름의 유예를 약속했다.
“보름 후에는 꼭 헬렌에게 합류하겠습니다. 다만, 보름 이상 제가 돌아오지 않는다면 저를 기약 없이 기다리진 마세요.”
“…하지만….”
“애초에 제가 없어도 헬렌이 클로디아를 만난다면 목적은 달성될 수 있습니다. 제가 없어도 큰 문제는 없단 얘기죠. 물론 데미안 경이 클로디아 곁에 있을 경우를 상정한 거지만.”
그렇게 말하고 시빌은 헛웃음을 웃었다.
“제가 돌아오지 못한다는 건 마왕성에 뭔가 문제가 있단 얘깁니다. 절대로 단독으로 마왕성에 접근하지 마세요. 클로디아와 데미안을 만나기 전에는요. 그리고, 헬렌.”
거기까지 말한 뒤 마법사는 손을 뻗어 헬렌의 머리카락을 만졌다. 헬렌이 눈을 동그랗게 뜨는데, 시빌은 킥킥 웃었다.
“선물입니다. 그게 있으면 인간이란 게 들키지는 않을 거예요.”
“뭐?”
시빌의 말에 헬렌은 눈을 동그랗게 뜨다가, 디자이어의 말에 마법사가 제게 곰 귀를 달아주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그뿐인가. 환상으로 만든 곰 꼬리도 달려 있었다. 헬렌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이게 뭐야!”
“마족들은 대부분 이곳의 척박한 환경에 적응하다 보니 동물과, 혹은 식물과 결합한 형태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저주 때문에 아예 다른 생물이 되어버린 경우도 허다하죠. 물론 헬렌의 경우는 너무 귀엽지 않나 싶지만.”
“이런….”
시빌이 어깨를 으쓱했다. 헬렌이 곰 귀를 어색하게 만져보는 동안, 시빌은 몇 가지를 더 설명한 다음 돌아섰다. 마법을 쓰고 있는지 그 모습이 순식간에 확 거리를 벌렸다. 작별을 할 시간도 아깝다는 듯.
헬렌은 그런 시빌을 망연자실하게 쳐다보다가, 디자이어에게 말을 걸었다.
“어쩌지, 디자이어?”
[…시빌 말대로 하는 수밖에.]
이미 시빌이 출발한 이상 이제 와 붙잡기도 뭐하다. 디자이어는 한숨을 쉬며 자신을 헬렌에게 내맡겼다. 헬렌은 데미안의 가방을 허리춤에 매달고, 디자이어를 등 뒤에 맨 채 본래 가려고 했던 해안선으로 출발했다.
***
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안 데미안은 마을 사람들과 정찰을 다녀와야 한다며 나갔다. 클로디아는 어쩐지 손에 땀까지 쥐어가며 헬렌의 말을 듣고 있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와아, 고생했군요….”
“뭐, 그렇게 고생하진 않았어. 시빌 덕분에 나는 마족들 마을을 굉장히 많이 거쳤거든. 차라리 편할 정도였지. 요리를 팔아서 돈도 벌었고.”
“돈이요?”
[불돌이라고 부르는 거 알아?]
디자이어가 참견하는 동안, 헬렌이 가방에서 익히 클로디아가 본 적 있는 돌을 꺼냈다. 클로디아는 신기한 듯 그 돌을 보다가, 헬렌을 쳐다봤다.
“그런데, 포폰은 당신이 인간인 걸 알고 있잖아요…?”
“아, 그게.”
헬렌이 머리를 북북 긁었다.
“헤어진 지 일주일이 되는 날 마법이 풀렸어.”
“…예?”
“아마 기한이 있는 마법이었겠지. 멀쩡하던 곰 귀가 사라진 거야.”
***
헬렌은 심란한 마음으로 정글을 헤쳐나갔다. 시빌은 헤어지기 전에, 사전에 대강 어느 위치에 마족들의 마을이 있는지를 가르쳐줬다. 어째서 그렇게나 자세히 알고 있는지 모를 일이었다. 헬렌은 마족인 척하며 마을에서 먹고 잤다. 먹을 수 있는 음식을 관찰해본 다음, 간헐적으로 요리를 해주고 돈도 받았다.
그렇게 해안선에 도착했을 때는, 시빌과 헤어진 지 일주일이 좀 안 됐을 때였다.
[여기가 원래 내가 오려고 했던 해변이야.]
“와!”
디자이어가 여전히 시무룩하게 해변을 소개했다. 절벽 사이에 둘러싸인 해변은 아름다웠다. 아마 아무 일 없이 다섯 명이 도착했다면 멋지다고 감탄했겠지. 하지만 지금 이 해변에는 헬렌과 디자이어, 단둘뿐이었다. 헬렌은 어쩐지 안타까운 마음에 디자이어를 빼내 토닥토닥 검신을 두들겼다. 마치 애라도 달래주는 것처럼.
“멋진데? 디자이어. 클로디아도 좋아했을 거야.”
[그래…. 그렇겠지.]
그렇게 답한 후 디자이어는 조그맣게 덧붙였다.
[클로디아 보고 싶다.]
헬렌은 한숨이 절로 나왔다. 정령은 클로디아가 그렇게 바다에 빠진 이후로 부쩍 기력 없이 굴었다. 그럴 만도 하다. 일주일 동안 헬렌은 디자이어의 푸념을 쭉 들어준 참이었다. 단순히 클로디아가 없어서 마왕을 쓰러트리지 못한다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었다.
디자이어는 데미안만이 살아서 자르지스에 남았을 가능성을 걱정하고 있었다. 이유는 하나였다.
[클로디아마저 사라지면…. 포르투는 정말로 끝이야.]
디자이어가 미겔 포르투부터 지금까지 몇백 년간 포르투 왕가를 지켜온 정령인 것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었다. 헬렌은 디자이어의 푸념에 아무 말도 덧붙일 수 없었다. 얼음이 되어 포르투에 잠든 쥬버린을 깨울 수 있는 사람은 클로디아뿐이었다. 그런 클로디아가 사라진 이상 포르투 왕가의 혈통도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헬렌은 분위기를 환기시켜보려 애써 농담을 던졌다.
“그, 선대 국왕이란 분은 혹시 바람은 안 피우셨대? 혹시나….”
[…벨루가는 그런 사람 아냐.]
디자이어는 한층 더 시무룩해진 목소리로 답했다. 아니, 웃자고 한 말인데! 하지만 헬렌은 자신이 정말로 잘못했다는 자각 정도는 있었고, 그저 조용히 디자이어에게 사과했다.
“어휴, 어쩌지. 어쨌든 이 해안가에는 아무도 없는 것 같은데.”
사실 헬렌이 그 해안가에서 팔짱을 끼고 있을 때, 클로디아와 데미안은 바로 근처의 거울 공작의 성에서 고전하고 있었다. 하지만 헬렌이 그것을 알 리 없었고, 그녀는 해가 지기 전까지 해안 근처를 샅샅이 살피다가 결국은 포기하고 말았다.
간헐적으로 해안 안쪽의 숲을 돌아다닌 몇 개의 발자국 외에는 특기할 만한 것이 없었다. 게다가 그 마을들은 헬렌이 이미 지나쳐온 곳들이었다.
“안 되겠다. 일단 마을로 돌아가자.”
헬렌은 이미 지나쳐온 해안선 안쪽의 마을로 가기로 결심했다. 이 해안에 올 때는 마음이 급해 들르지 않고 지나쳤지만, 오늘 밤은 그 마을에서 보내야 할 것이다. 그녀는 별생각 없이 디자이어를 등에 메고 마을로 향했고, 거기서 마족들의 경악한 반응을 온몸으로 겪어야 했다.
“…인간?!”
“인간이 어떻게 여기에?!”
“세상에!!”
하필이면 그 마을은 그놈의 군대 모집 때문에 북적였고, 마족들은 인간이 자신들의 마을에 들어왔다는 사실에 경악했다. 헬렌은 뒤늦게 제 머리를 만져봤지만, 시빌이 달아줬던 곰 귀는 감쪽같이 사라진 뒤였다.
“젠장!”
헬렌은 빠르게 달아나려 했으나, 그 뒤 또한 마족들에 의해 막힌 뒤였다. 그녀는 곧 무기를 빼앗기고 마을 창고에 던져졌다. 디자이어도 빼앗겼음은 물론이다. 헬렌은 다급하게 디자이어를 뺏기기 직전 속삭였다.
“디자이어, 말하지 마. 절대로 말하지 마. 내가 곧 구해줄게.”
“뭐라는 거야, 이 인간이?”
그렇게 말한 마족은 개의 머리를 한 남자였다. 정확히는 포폰의 아버지였으나 그건 나중에야 알았다. 헬렌은 속절없이 닫힌 창고 안에 주저앉았다.
한참을 그렇게 앉아 있을 때였다. 고소한 냄새가 솔솔 풍겼다.
헬렌은 창고를 둘러봤다. 어둡고 허름한 데다가 나무로 얼기설기 만들어진 창고라 냄새가 풍기는 곳을 찾기는 쉬웠다. 지푸라기로 둘러싸인 한쪽 벽에, 유독 커다란 틈이 보였다. 헬렌은 뒤로 묶인 손으로 낑낑대며 그 틈 밖을 쳐다봤다. 창고 바깥, 헬렌이 쳐다보고 있는 벽 앞에는 커다란 솥을 막대기로 젓고 있는 포폰이 있었다.
마족들이 마을에 몰리면서 인원을 수용할 곳이 적어진 데다가, 식량도 부족해 양을 나눠 먹기 위해 수프를 끓이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아무도 그 마을에서 대인원의 식사를 만들어 본 사람이 없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어느 정도 나이가 차고 싸울 수 있는 이들은 남녀 불문하고 모두 정찰을 나갔다. 자연스레 어린 포폰이 식사 담당이 됐다.
포폰은 울상을 짓고 있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그럴싸하게 맛있는 수프를 끓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마을의 어린애들이 나무뿌리나 열매 등의 채집은 도와주었으나 요리는 온전히 포폰의 몫이었다. 포폰은 벌써 세 끼째 식사를 만들고 있었지만, 계속해 실패하고 있던 참이었다.
포폰의 식사를 먹고 혀를 차던 몇몇이 고기를 넣어봐라, 혹은 향초를 채집해다 넣어봐라, 같은 조언들을 했지만 척박한 자르지스에서는, 게다가 요리 초보인 포폰에게 맛있는 요리란 영 요원한 일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포폰은 누군가가 잡아 온 돼지토끼 세 마리를 가지고 오십인 분의 수프를 만들어야 했다. 돼지토끼는 굉장히 덩치가 컸지만, 산에서 뛰어다니며 살아 고기가 질기고 맛이 없었다. 게다가 잡내까지 났다. 그런 것을 가지고 수프로 만들려니 고역이었다. 냄새를 잡으려고 향초를 넣었는데, 풍기는 냄새는 좋았으나 막상 입에 넣으니 역겨웠다.
아무거나 잘 먹는 포폰에게도 그러니, 정찰을 다녀와 수프를 먹을 사람들의 반응은 뻔했다.
“뭐가 문제야?”
그때 제 뒤에서 들린 말소리에 포폰은 거의 놀라 쓰러질 뻔했다. 화들짝 놀라 귀를 바짝 세운 포폰이 뒤를 돌아봤으나 아무도 없었다. 포폰은 자신이 환청을 들었나 의심하며 주변을 둘러봤다. 그때 다시 말소리가 들렸다.
“여기야, 여기.”
“…앗.”
포폰을 부른 말소리는 창고 안이었다. 포폰은 낮게 으르렁거렸다. 그 창고에 누가 있는지 포폰도 모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포폰이 아르르르 소리를 내자 창고 안에서 헛웃음이 들렸다.
“나참, 안 해쳐. 안 해친다고.”
“인간, 개수작을 부리면 용서하지 않겠어.”
“너 그 모습으로 그런 얘기 해도 돼?”
포폰은 잠깐 인간이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갸웃했다가, 자신이 한 말의 맹점을 깨달았다. 그러니까 개 머리를 한 자신이 그런 소리를 하면 웃겨 보인단 사실 말이다.
포폰은 한층 더 화가 났다.
“무슨 속셈이야?”
“아니, 별 속셈은 아니고. 좀 곤란해 보이기에.”
“하나도 안 곤란하거든?!”
포폰은 버럭 소리 지르고 돌아섰다. 그리고 잠시 후 다시 헬렌 쪽으로 돌아섰다.
“…너 요리할 줄 알아?”
“물론이지. 그래서 말 걸었는데. 나 요리사야.”
이 인간이 요리사라고?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포폰은 귀를 낮추고 경계하면서도 헬렌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수프를 끓여야 하는데 맛이 없어. 왜인지 알아?”
“…소금간은 했지?”
“날 뭘로 보고!”
포폰이 다시 아르릉거렸다. 확실히 소금간은 했다. 그러나 냄새가 문제였다. 포폰은 잠시 고민했으나, 주변에 어른들이 없는지 살피고는 다시 물었다.
“…고기 맛이 영 안 나. 아무래도 역겨워.”
“흠, 무슨 맛이길래?”
“…목구멍으로 넘어갈 때 진흙 맛이 나.”
진흙 맛이 난다, 라는 표현일 뿐이었는데 헬렌은 단번에 포폰의 문제가 뭔지 알아차렸다.
“고기 잡내를 안 잡았구나?”
“잡내? 그게 뭔데?”
냄새가 난다고만 생각했지, ‘잡내’라는 개념조차 모르던 포폰의 귀가 쫑긋거렸다. 헬렌은 으스대며 말했다.
“내 가방 아까 빼앗아간 거 있지? 거기 안에….”
가방 안에 후추가 있으니 그것을 뿌려 보라고 할 심산이었다. 하지만 헬렌이 너무 순진했던 걸까? 포폰은 단박에 헬렌이 말하고자 하는 뜻을 알아듣고 험악하게 얼굴을 찌푸렸다.
“인간, 어설픈 수작은 하지 말라고 했어. 네가 넣으라는 게 독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아?”
“이런….”
헬렌이 고민하다가 쾌활하게 말했다.
“내가 먼저 먹어보면 되잖아?”
“내가 바보인 줄 알아?! 인간에게는 독이 아니지만, 우리에게는 독일 수도 있잖아!”
포폰은 이제 버럭 소리 지르며 온몸의 털을 바짝 눕히고 코를 찡그렸다. 정말 짜증이 난 상태였다.
헬렌은 고개를 저었다.
눈앞의 개 인간이 아무래도 요리에 어려움을 겪는 것 같아서 도와주려던 것인데, 도리어 경계심만 더 키운 것 같았다. 고민하던 헬렌은 포폰 뒤쪽에 쌓여 있는 요리 재료들을 봤다. 잔뜩 쌓여 있는 풀과 향초, 작은 뿌리채소들. 저걸 불쏘시개로 가져온 것은 아닌 것 같고, 아마 헬렌이 생각하는 게 맞을 것이다.
흠. 헬렌은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저어, 개 인간.”
“죽을래? 나는 포폰이거든?”
“그래. 포폰. 음…. 그러면 혹시 그 뒤에, 좀 매운 향신료 같은 게 있니?”
“향신료? 그게 뭐야?”
“후추 같은….”
“…그게 뭔데?”
헬렌의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아무래도 자르지스에는 후추가 없는 것 같았다. 그러면 향신료 개념은…. 헬렌은 자신이 꽤 큰 난관에 부딪혔다는 것을 깨달았다.
눈앞의 개 인간, 아니 포폰이 어려서 향신료라는 개념을 모르는 걸까, 아니면 원래 자르지스에 그런 개념이 없는 걸까부터 고민해야 했기 때문이다. 헬렌은 깊게 심호흡했다. 아무래도 누구를 돕는다는 걸 너무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특히 이 자르지스에서는. 헬렌은 빙그레 미소 지으며 침착하게 볏짚 틈 사이로 말하기 시작했다.
“좋아, 포폰. 향신료라는 건 말이야….”
***
그날 저녁, 정찰을 끝내고 마을에 돌아온 마족들은 놀라운 경험을 했다. 그날 점심까지만 해도 영 먹을 만한 것을 내놓지 못하던 포폰이 꽤 먹을 만하고 감칠맛 나는 수프를 끓여냈기 때문이다. 특히 포폰의 아버지는 포폰을 크게 칭찬했다.
“요 녀석! 대체 이런 재주는 언제 익혔담? 이렇게 빨리 요리가 늘다니! 천재 아냐, 천재?”
포폰은 착한 아이였다. 자신이 받은 도움에 관해 모른 척하는 이가 아니었다는 뜻이다. 포폰은 한참이나 망설이다가, 식사를 마치고 그릇을 돌려주는 어른들에게 털어놨다. 창고에 갇혀 있는 인간에게 도움을 받았노라고.
포폰은 틀림없이 혼날 거라고 생각했고, 몇몇 어른들은 실제로 그를 혼냈다.
“세상에, 포폰! 마을 사람들이 먹을 음식에 인간이 참견하는 걸 그냥 두다니! 네가 제정신이냐!”
“아녜요, 아저씨. 그 인간은 재료 중에 뭐가 있는지 물어보고, 어떤 맛이 있는 걸 넣으라는 지시만 했어요. 넣고 요리하는 건 제가 했다구요. 만약 독이 있는 재료가 들어갔다면 제가 가장 먼저 알고 빼냈을 거예요.”
“그렇다고 해도 철이 없구나!”
“…그 인간에게 가장 먼저 먹여봤다고요! 혹시라도 배합으로 독이 생겼을 수도 있으니까!”
그 결과 포폰은 자신이 꽤 신중한 소년이라는 것을 사람들에게 알릴 수 있었다.
처음에는 단순히 마을 음식에 인간의 입김이 닿았다는 것만으로도 그에게 화를 내던 어른들이 포폰의 말에 “흠, 그렇다면야….” 하고 누그러졌다. 그리고 거기에 더해, 다른 마을에서 온 몇몇 사람들이 슬그머니 손을 들었다.
“그, 인간이라고 꼭 나쁜 건 아닌 것 같던데 말이야….”
“자넨 또 무슨 소린가!”
포폰의 아버지가 벌컥 화를 냈다. 그에 다른 마을에서 온 이가 눈치를 보다가 중얼거렸다.
“그게, 이건 비밀이긴 한데…. 몇 년 전에 우리 마을에도 인간이 온 적 있거든…?”
화구의 폭발 때문에 마을이 아예 통째로 타서 없어졌다는 사나이에게는 사마귀 팔이 달려 있었다. 포폰은 사내에게 달려 있는 사마귀의 날개가 아주 멋지다고 생각하던 차였다. 그가 자신을 도와주니 자연스럽게 귀가 쫑긋했다.
맨토디아라는 남자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사실 우리 마을에, 어떤 인간이 방문한 적 있었어. 며칠 머무르지 않고 떠나긴 했지만…. 우리 마을에는 은인이었다구.”
“그게 무슨 소리야?”
“우리 마을에 갑작스럽게 작은 화구가 생겼었거든.”
용의 화구 근처에는 지열을 견디지 못하고 작은 폭발과 함께 반영구적인 화구가 생기는 일이 흔했다. 사내는 더듬거리며 자신의 마을에 화구가 생겼지만, 어디선가 홀연히 나타난 늙은 인간이 그 화구를 막아주고 사라졌다고 털어놨다.
“그 인간이 그랬어. 자르지스에 올 만한 인간들은 모두 자기처럼 제정신이 아니니 따뜻하게 대해주라고….”
“…제정신이 아니란 소리는….”
“자, 잘은 모르겠지만 우리 마을 사람들은 그게 그 늙은 인간처럼 우리를 돕는다는 뜻으로 알아들었어. 그렇잖아. 인간들은 우리를 마족으로 부르고 적대시하던데…. 우리를 도우니.”
마을 사람들은 상의 끝에 헬렌을 창고에서 끌어냈다. 포폰의 아버지가 심문에 앞장섰다. 그는 헬렌을 두고 몇 번이고 물은 끝에야, 헬렌이 식당에서 일했으며 대인원을 위한 식사를 만드는 데 능숙하다는 대답에 확신을 가졌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곧장 헬렌을 요리하게 놔두진 않았다.
헬렌은 다음 날 총 150인분의 식사를 지휘했다. 배식대 앞에 앉아서, 입으로만.
“고기는 깍둑썰기해요! 앗, 깍둑썰기가 뭔지 모른다고?”
“그래! 그 채소는 사각사각해서 씹는 맛이 있게 볶아! 채소의 결이 너무 연해서 오래 볶으면 흐늘흐늘해진다구!”
“그 풀은 향긋하긴 하지만 이렇게 근육이 튼튼한 고기랑 섞으면 오히려 잡내만 강조하기 십상이야! 넣지 마!”
그리고 다음 날 저녁, 마을 사람들은 만장일치로 헬렌을 풀어주고 사과했다. 순전히 입만 놀려서, 남의 손으로도 맛있는 요리를 만들어내는 사람은 마족이고 인간이고 흔하지 않다. 게다가 헬렌은 재료를 낭비하지 않는 데에도 일인자였다. 옆에서 돕던 다른 이가 망친 요리에도 환하게 웃으며 “그거 살릴 수 있어!”라며 독려하고, 끝내 요리를 살려냈던 것이다.
결국 헬렌은 군대를 모집하는 마을의 요리장이 됐다. 그리고 헬렌이 요리장이 된 지 이틀째, 클로디아와 데미안이 이 마을에 나타난 것이다.
***
헬렌에게 마저 자초지종을 들은 클로디아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까르륵 웃어버렸다.
“세상에, 어쩜. 사람들 정말 다 똑같구나….”
“어떤 점이?”
“맛있는 것에 경계를 풀어버리는 점이요….”
“그런가.”
헬렌이 머쓱하게 머리를 긁었다. 디자이어가 옆에서 참견했다.
[그뿐인가? 다들 헬렌의 손이 직접 닿은 요리를 먹고 기운이 펄펄 난다며 놀라워했다구. 우리도 느꼈지만, 마족들은 우리보다 헬렌이 요리에 부여하는 축복을 몇 배는 훨씬 민감하게 느끼는 모양이야.]
“그, 그래?”
클로디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헬렌이 민망한 웃음을 지었다.
“거 참 면목 없네….”
“면목 없다뇨, 좋은 일 한 거잖아요. 헬렌, 왜 그렇게 쑥스러워해요?”
“왜 그렇게 쑥스러워하냐니. 클로디아.”
헬렌이 당황해 망설이자 디자이어가 끼어들었다.
[한마디로 헬렌은 적을 더 강하게 만들어줬단 말씀!]
“…아.”
디자이어의 말이 맞았다. 마을 사람들은 어찌 보면 적이었다. 자르지스의 마족에 맞서 싸우기 위해 이곳에 왔다는 최초의 목적에 비추어보면 말이다. 클로디아의 얼굴이 어색해졌다.
맞다, 그렇지 참.
헬렌이 영 그녀의 얼굴을 보기가 민망한 듯 코를 훔쳤다.
“그게, 요리를 하면서 사람들이 신기해하는 걸 보니까 퍼뜩 생각나더라고. 클로디아가 날 데려온 이유가 바로 그거였는데…. 남 좋은 일 한 건 아닌가 하고 말이야.”
타당한 죄책감이었으나 클로디아는 그런 헬렌을 보다가 피식 웃어버렸다.
“무슨 상관이에요. 어쨌든 그 덕분에 헬렌이 마을에서 무사히 지낼 수 있었던 거잖아요.”
“그런가….”
“게다가 헬렌, 좀 착각하는 게 있는데요. 저 섭섭해요.”
클로디아가 슬며시 헬렌을 향해 눈을 흘겼다. 헬렌은 당황해 눈을 깜박였다.
“저는 헬렌이 우리에게 요리로 축복을 내려서 함께하고 싶었던 것만은 아니에요. 헬렌이 좋은 사람이기 때문에, 좋아서 부탁한 거라구요.”
클로디아는 그 말을 하며 헬렌의 미소를 기대했으나, 돌아온 건 전혀 다른 반응이었다. 헬렌의 얼굴이 순식간에 홍당무처럼 물들었던 것이다.
클로디아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헬렌?”
“…그, 뭐냐. 갑자기 칭찬을 들으니까….”
[오, 헬렌 쑥스러워한다. 창피해한다.]
디자이어가 옆에서 추임새를 넣었다. 헬렌은 클로디아의 눈치를 보다가 잽싸게 디자이어에게 콩, 하고 꿀밤을 먹였다. 아무래도 이것만은 클로디아의 영향을 받은 게 분명했다. 디자이어가 빽 소리를 질렀다.
[아이고! 클로디아, 네가 착각한 게 분명해! 이렇게 금방 폭력을 쓰다니!]
클로디아가 다시 까르르 웃었다.
“하지만 진짜예요. 헬렌은 정말 좋은 사람인걸요. 저라면 그렇게 바로 포폰을 도울 생각은 못 했을 거예요.”
“너희도 날 도왔잖아?”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클로디아는 화들짝 놀라서 뒤를 돌아봤다. 작은 집에는 문 대신 천이 입구에 늘어뜨려져 있었는데, 포폰이 바로 그 천을 걷고 들어오고 있었다. 포폰은 무뚝뚝하게 말했다.
“도와달라니까 바로 도와줘 놓고선.”
“…포폰!”
클로디아는 포폰의 등장에 놀라 그와 디자이어 쪽을 번갈아 봤다. 혹시라도 그가 디자이어의 말소리를 들었을까 걱정했기 때문이다.
포폰은 퉁명스럽게 클로디아 앞에 뭔가를 내려놨다. 클로디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것을 내려다봤다. 포폰이 가지고 온 것은 말린 버섯이었다. 클로디아가 내내 씹던.
“…아직 안심 못 하니까 마저 씹으라고 가지고 왔어. 바다 도마뱀의 독은 처음 먹는 어린애들에게 심한 배앓이를 안겨주곤 해.”
“그, 그렇군요. 포폰, 고마워요….”
“…왜 갑자기 존댓말이야? 여태까지 반말 잘했으면서.”
클로디아의 말에 포폰이 눈썹을 들어올렸다. 클로디아는 두 손으로 입을 가리고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로브로 가렸을 때는…. 그래도 될 것 같아서….”
“뭐야? 얼굴도 모르는 수상한 애가 반말하는 게 기분으로 따지면 더 별로거든?”
그렇게 말한 포폰은 콧김을 흥 뿜더니 말을 이었다.
“그냥 반말해. 나도 그게 더 편해.”
“고, 고마워요, 아니 고마워, 포폰.”
“그래. 그리고 너도 그냥 말해.”
포폰이 가리킨 것은 디자이어였다. 클로디아는 화들짝 놀라 제 옆에 떨어져 있던 디자이어를 끌어안았다. 포폰은 콧방귀를 뀌곤 클로디아의 의구심 가득한 눈초리에 답했다.
“헬렌이 밤늦게 몰래 그 검하고 이야기하는 걸 내가 몰랐을 것 같아? 난 처음에 헬렌이 미친 줄 알았다고.”
“…언제부터 알았어?”
헬렌이 민망하게 웃으며 포폰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포폰은 귀를 파닥이며 콧대를 높였다.
“숲에 같이 풀뿌리를 캐러 갔을 때. 내가 멀리 떨어진 줄 알고 검이랑 이야기했지? 이래 봬도 내 청력은 아주 끝내준다구!”
“어머나, 그랬구나. 어쩐지.”
클로디아가 입을 가리고 놀라다가 저도 모르게 웃으며 포폰의 귀에 손을 가져갔다. 그녀의 손이 닿자마자 포폰이 파르륵, 귀를 떨더니 코를 찡그리고 그녀를 바라봤다.
“뭐야?”
“미, 미안. 너무 귀여워서 나도 모르게….”
“귀엽…. 안 귀엽거든!”
“앗, 미안해.”
클로디아의 말에 포폰이 다시 귀를 세우고는 항의했다. 그 모습을 보던 헬렌이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귀여운데.”
“…안 귀엽다고! 나 벌써 열일곱 살이거든!”
귀여운데.
하지만 클로디아는 그 말을 삼키고 웃으며 버섯을 들어 입에 넣었다. 고맙다는 인사를 다시 한번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포폰은 흥, 하고 팔짱을 끼었다.
“그래서, 너희들 어쩔 셈이야?”
“어쩔 셈이냐니….”
“왕을 정말로 죽이러 온 거야?”
포폰의 말을 들은 클로디아가 화들짝 놀라 헬렌을 바라봤다. 포폰에게 자신들의 목적을 말했느냐는 눈빛이었다. 헬렌은 고개를 거세게 흔들었다.
‘그럴 리가. 내가 바보도 아니고.’
‘하지만 그럼 어떻게 안단 말이에요?’
두 사람의 눈빛 대화에 포폰이 한숨을 쉬었다.
“너네 무슨 얘기 하는지 다 보이니까 그만해.”
“앗…. 들켰어?”
클로디아가 어색하게 웃었다. 포폰이 킁, 하고 콧소리를 한 번 내고는 말했다.
“자르지스에도 통신도마뱀 정도는 있다구. 그야 북쪽 마을에 한 마리, 이쪽에 한 마리 정도지만. 그리고, 통신 도마뱀을 데리고 있던 마을 사람이 오늘 아침에 우리 마을을 찾아왔어.”
포폰의 말은 간단했다.
자르지스에도 어째서인지 통신 도마뱀이 있고, 자르지스 주민들은 그 도마뱀으로 대륙의 근황을 파악하곤 했다. 대체로 자르지스에서는 통신을 보내지는 않고, 대륙의 통신을 훔쳐 듣곤 했다. 그러니 자르지스에서도 클로디아가 그들의 왕을 죽이러 왔다는 소문은 천천히 퍼지고 있었던 것이다.
“용의 화구가 폭발하는 바람에, 자르지스 남부에 유일하게 한 마리 있던 통신 도마뱀이 죽어버렸어. 마을도 폭발한 건 물론이고. 그래서 소식이 늦었는데 그 마을 사람이 오늘 우리 마을에서 그 얘기를 해주더군. 인간들이 왕을 죽이러 올 거라고. 이미 출발했다고.”
“…그래서?”
헬렌이 불안하게 포폰을 쳐다봤다. 포폰은 잠시 헬렌을 쳐다보다가 한숨을 쉬었다.
“일단 우리 마을 사람들은 함구하고 그 사람을 내보냈어. 다들 헬렌에게 도움을 받은 데다가, 헬렌은 ‘인간들’이 아니니까.”
그러니까, 이 마을 사람들은 그래도 헬렌의 음식을 먹은 것을 잊지 않았던 모양이다. 거기에 더해 헬렌의 일이 소문날까 봐 다른 마을에서 온 사람에게 ‘우리 마을은 더 이상 다른 군대를 수용할 수 없다. 미안하지만 산기슭의 다른 마을로 가 봐라’며 안내까지 붙여 보냈다.
헬렌이 복잡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정말 고맙지만 감사를 표하기엔 이른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걸….”
“그래. 왜냐면 헬렌 말고 다른 인간이 또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질 테니까 말이야.”
포폰이 한숨을 내쉬었다. 클로디아는 겁에 질려서 주변을 돌아봤다. 갑작스레 아까 나간 데미안이 걱정된 탓이다. 디자이어가 그런 그녀가 걱정됐는지 첨언했다.
[데미안은 마을 사람들과 함께 순찰을 나갔는데도 아무도 데미안이 인간인 줄 몰랐어! 걱정하지 마! 네가 잠들어 있는 동안 독이 더 번져서 정말 마족 같거든!]
“…뭐?”
얘는 지금 그걸 안심하라고 하는 소리야, 아니면 더 걱정하라고 하는 거야. 클로디아의 얼굴이 황망해졌고 헬렌은 이마를 짚었다. 포폰은 둘을 번갈아 보다가, “너희도 알 만하다…”며 기막혀했다.
“나도 영락없이 데미안은 마족인 줄 알았는데. 혹시 그 검, 거짓말을 못 하는 저주 같은 거 걸려 있는 건 아니지?”
방금 전 디자이어의 말로 포폰 또한, 데미안까지 인간이라는 것을 알아버린 것이다.
클로디아는 악! 하고 짧게 비명 지르며 디자이어를 원망했다.
“너 어디서 왔어! 너 마족이지! 자르지스에서 왔지! 그치!”
[아아아아아아. 젠장. 몰랐다구! 나는 틀림없이 포폰이 다 아는 줄만 알고….]
“…진짜 기가 막힌다, 너네. 바보야?”
포폰은 이제 팔짱까지 끼고 비아냥대고 있었다. 헬렌은 마른세수를 한참이나 했다. 데미안에게 옮은 버릇이 분명했다. 클로디아는 난감한 표정으로 포폰을 올려다봤다.
“저어, 포폰. 그….”
“어디까지 알고 있느냐는 거지? 뭐, 사실 우리들도 훔쳐 듣는 통신이니까 그렇게까지 자세한 건 모르지만. 그러니까….”
포폰은 손… 그러니까 털이 잔뜩 난 손가락을 하나하나 꼽아가며 말했다.
“포르투의 공주가 여기 왔다는 이야기, 그리고 공주가 마왕을 무찌르러 왔다는 이야기. 우리의 왕이 뭔가 너희에게 소중한 걸 훔쳤다는 이야기 같은 거 말이야.”
“…다 아는구나….”
클로디아가 한숨을 내쉬었다. 포폰은 코를 킁킁거리며 이어 말했다.
“그럼! 나도 추리력 하나는 지지 않는다고. 그 말하는 검은 아마 짐작건대 너희들의 귀한 물건이겠지?”
[딩동댕! 이 몸으로 말할 것 같으면, 포르투를 수호하는 정령님이다 이 말씀이야.]
기회를 놓치지 않고 디자이어가 갑작스레 끼어들어 잘난 척했다. 클로디아는 기가 막혀 디자이어를 째려봤다. 디자이어가 칼이라서 표정을 알 수 없다는 것이 천추의 한이었다. 뻔뻔한 표정을 하고 있다면 달려들어서 뺨을 늘려버릴 텐데! 그러거나 말거나 포폰도 으스댔다.
“그럴 줄 알았지! 검도 좋아 보이지만, 말까지 하다니 귀한 것임이 틀림없다고 생각했거든. 그러면 헬렌!”
“어, 엉?”
헬렌이 엉겁결에 자신을 가리켰다. 포폰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답해 봐. 이제 어떻게 할 셈이야?”
“어? 나는…. 클로디아가 하자는 대로…?”
헬렌이 눈알을 굴리다가 클로디아와 포폰을 바라봤다. 그러다 다급하게 덧붙였다.
“아, 아니. 포폰, 네가 어떻게 나올지 봐서…?”
“나 참. 한심하군. 역시 인간들은 나약하다더니.”
포폰이 고개를 내저었다.
“아무리 공주님이라지만, 이럴 때를 대비한 대책은 생각해 놨어야지. 너희들이 마족이라고 부르는 나 같은 사람에게 너희의 목표나 술술 불고, 게다가 마족들의 배까지 불리고. 한심한 공주님이네.”
“…어?”
“게다가 시녀가 하자는 대로 하겠다니. 이 얼마나 나약한….”
그쯤해서 클로디아와 헬렌은 뭔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다. 두 사람은 슬며시 눈빛을 교환했다.
‘아무래도 이거….’
‘맞는 거 같지?’
그러거나 말거나 포폰은 계속해서 떠들고 있었다.
“내가 처음에 딱 알아봤어야 하는데! 아무튼 지금이라도 알아봤으니 다행이지만, 내가 가장 먼저 눈치챈 걸 다행으로 알아! 그래도 헬렌 네가 공주님답게 착한 마음씨를 가졌으니, 내가….”
그랬다.
포폰은 클로디아가 아닌, 헬렌을 공주님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이었다.
헬렌의 얼굴이 우스꽝스럽게 변했다. 클로디아는 에헴, 하고 코를 쳐들고 있는 이 개 소년이 이제는 귀여워 죽을 것 같았지만 동시에 이걸 어떻게 말해야 하나 난감해졌다. 물론 이런 상황에는 눈치 볼 필요 없는 이가 나서는 것이 적격이다.
[아, 잠깐만. 포폰. 헬렌이 공주님이라고? 푸하하하하!]
크게 웃음을 터트린 것은 디자이어였다. 디자이어는 아이고 배야! 아이고 배야! 하고 추임새까지 넣어가며 웃었다. 포폰의 얼굴이 괴상해졌다.
“뭐야. 공주님 아냐? 그, 아까는 맞다고…. 너희 우리 왕 죽이러 온 거라며?”
“그게, 포폰. 아이고. 맞긴 맞는데.”
“맞아? 뭐야?”
헬렌이 다시 이마를 짚었다. 이 상황을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난감해하고 있는 헬렌 대신 클로디아가 피식 웃으며 답했다.
“저어, 포폰. 기대를 배반해서 미안하지만…. 그 공주님은 나야.”
“뭐어?!”
이번에는 포폰이 정말로 펄쩍 뛰었다. 어찌나 높이 뛰었는지, 그 믿을 수 없다는 제스처에 클로디아가 약간 서운해질 정도였다. 디자이어가 말을 받았다.
[아하하하! 어떻게 헬렌이 공주님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 그야 클로디아 상태가 말이 아니긴 했지만!]
“아니, 아무리 그래도….”
한참 동안이나 당황해 말을 잇지 못하던 포폰이 이윽고 조금 기가 죽어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포폰은, 헬렌이 귀하디귀한 말하는 검 디자이어를 메고 있는 데다가 체격도 좋고 발육도 좋고, 마음씨까지 착해 공주님이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공주님 치고는 허물이 없어도 너무 없지 않냐?]라는 디자이어의 말에 포폰은 “아니, 우리 왕도 허물 엄청 없거든!”이라고 항변했다.
게다가 로브 안에서 튀어나온 클로디아의 모습이 너무 허름했던 것도 한몫했다. 그러니까 헬렌은 시빌이 곰 귀를 달아준 덕분에 비교적 위생적이고 편안한 여행을 해왔지만 클로디아는 달랐다. 며칠을 꼬질꼬질한 상태로 정글을 돌아다니고, 땀투성이인 데다가 머리도 감지 못했고 마지막엔 아파서 창백한 데다가 여위기까지 했다. 포폰이 보기엔 너무 말랐고 비리비리한 데다가 볼품까지 없어 클로디아가 공주란 생각은 하지도 못한 것이다.
자르지스의 여인들은 강인한 것을 최고로 치는 것까지 더해, 종합적으로 포폰의 머릿속에서는 ‘공주=헬렌’이라는 공식이 성립된 모양이었다.
포폰은 한참을 툴툴댔다.
“아니, 대륙 인간들은 이렇게 비리비리한 애를 공주로 모신단 말이야?”
“그러게. 하하.”
클로디아가 웃으며 별생각 없이 받아친 말이었지만, 포폰은 한층 더 콧김을 뿜었다.
“말이야 바른말이지! 공주라면 귀한 사람 아니야? 그런데 그런 공주가 이렇게 비리비리하다니. 너희 인간들은 공주를 굶기는 거야?”
“음, 그건 아니지만…. 아닌가…?”
클로디아가 눈알을 굴렸다. 따지고 보면 누군가가 그녀를 굶긴 적은 없었지만, 그녀 스스로 굶은 적은 있었으니 아니라고 하기도 애매했다.
포폰은 한술 더 떠 클로디아의 팔을 들어 보이며 흥분했다.
“봐! 무슨 팔이 꼬챙이 같은데 이런 애가 공주라니 개가 웃겠다!”
“…너는 안 웃고 있는 거 같은데.”
옆에 앉아 있던 헬렌이 피식피식 웃으며 농담했다. 포폰은 바락 소리를 질렀다.
“나 개 아니라고!”
뭐 그렇다기엔 너무 귀엽고 사랑스러운 까만 개의 얼굴이긴 했지만. “어이구 알았다, 우리 포폰 개 아니에용.”
헬렌이 웃으며 손을 뻗어 포폰의 머리를 두어 번 쓰다듬자, 포폰은 눈을 껌벅이다가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그러니까, 저걸 보고 누가 개가 아니라고 생각하겠어…라고 클로디아가 웃을 뻔했다는 건 여담.
***
저녁에는 데미안이 돌아왔다. 클로디아는 데미안이 돌아오자마자, 그가 입은 옷을 열어 보여 달라고 부탁했다. 데미안은 망설이다가 목의 단추를 풀었다. 갑갑할 정도로 잠가 놨던 옷 안쪽에는 새파란 고름과 독 자국이 잔뜩 퍼져 있었다. 클로디아는 울상이 되어 디자이어에게 물었다.
“디자이어, 저건 어떻게 치료할 방법이 없어?”
[솔직히 말해도 돼?]
“그럼 거짓말할 셈이었어? 빨리 말해.”
클로디아가 디자이어의 손잡이를 잡고 꽝꽝 바닥에 두들기자, 디자이어가 항의했다. [아, 정신없어! 너 날 너무 함부로 다루는 거 아니냐?!] 약간의 소요 후에 디자이어가 한숨 쉬듯 말했다.
[완벽하게는 어려워.]
“무슨 뜻이야?”
[그 용의 저주는 사실 엄청나게 대단한 건 아니야. 알겠지만, 오래된 저주들은 두 가지 양상을 보이지. 점점 약해지거나, 강해지거나. 원래 마법이란 게 다 그래. 유동적인 것에 걸린 마법은 점점 약해질 수밖에 없어.]
“바다에 걸린 마법이라 저주가 약해진다는 거야?”
[그래. 웬일로 똑똑하게 대답하네!!]
클로디아는 씩씩하게 디자이어를 걷어찼다. 깡, 깡그르르르….
[아, 진짜!]
“똑바로 대답 안 할래?”
[아, 좀 웃자고 한 말이거든!]
씩씩대던 디자이어가 흠흠, 하고 다시 분위기를 가다듬더니 말했다.
[용의 저주는 좀 오래간 축이긴 해. 그야 용쯤 되는 놈들이 목숨을 불살라가면서 건 저주니까 그렇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바다처럼 고정되지 않은 사물에 걸어놓은 저주는 점점 약화되기 마련이야. 데미안이 아직까지 목숨을 부지하는 것도 그래서지. 데미안, 요즘 상태 어때?]
갑작스레 지목받은 데미안이 움찔했지만 곧 침착하게 말했다.
“괜찮습니다. 가끔 운신이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만….”
그의 시선이 문득 클로디아를 향했다. 안타까운 표정으로 그의 목덜미 언저리를 바라보던 클로디아가 움찔하자, 데미안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로드께서 걱정하실 정도는 아닙니다.”
[아니, 정확히 좀 말해봐. 그런 식으로 퉁 치면 걱정하는 게 당연하지, 답답아!]
디자이어가 팩 짜증을 냈다.
[데미안 넌 아무튼 네 상태를 제대로 말하는 훈련을 할 필요가 있어. 운신이 어려울 때는 있대 놓고 걱정할 정도는 아니라니, 걱정하란 거야 말란 거야?]
그 말에 헬렌이 킥 웃었다. 디자이어의 말에 뺄 부분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클로디아도 웃음이 나올 뻔했지만, 아무래도 운신이 어렵다는 말을 들은 참이다. 마냥 웃기에는 조금 민망했다. 한참 망설이던 데미안은 조심스럽게 눈을 내리깔고 말했다.
“해가 질 즈음이 가장 힘듭니다.”
“….”
“아침 해가 뜨기 직전, 온몸이 욱신거립니다. 하지만 이건 괜찮습니다. 크게 문제도 없고요. 사실 어디 얻어맞은 통증 정도라고 하는 게 정확합니다. 가장 속수무책일 때는 해가 질 때입니다.”
데미안은 손목을 내보였다.
“멍울진 고름들이 해가 지면 픽픽 터지곤 합니다. 이건 마법적 효과인 것 같은데…. 정확히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그때 즈음이면 독이 온몸을 파고드는 기분이 듭니다. 매캐한 냄새가 나는데, 아무래도 고름에서 나는 냄새 같고요. 그때는 검기를 발현하기도 좀 어렵습니다.”
[이리 좀 와봐. 독이 번진 쪽 손으로 나를 쥐어볼래, 데미안?]
디자이어의 말에 데미안이 조심스럽게 디자이어를 쥐었다. 팍, 하고 스파크가 튀었다. 헬렌이 눈썹을 들어 올렸고, 디자이어는 쯧쯧 혀를 찼다.
[죽음의 바다의 저주 때문에 직접 치료할 순 없어. 시빌과 같은 방법을 써야겠군.]
“…괜찮습니다.”
시빌과 같은 방법이라 하면, 클로디아가 그의 손을 잡고 디자이어에게서 기운을 받아 데미안에게 전달하는 것이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데미안은 난색을 표했다.
그놈의 맨살! 맨살!
클로디아는 좀 짜증이 나서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대체 뭐가 매번 괜찮다는 거예요? 손 내놔요.”
“…로드.”
“이제 와서 처음 잡는 것도 아니면서. 줘요.”
[우와. 너네 나 없는 동안 손 잡았어?]
디자이어가 감탄했으나, 클로디아는 얼굴을 붉히지도 않고 쏘아붙였다.
“그래. 한 번도 아냐.”
“장족의 발전인데.”
헬렌도 옆에서 놀랍다는 듯 휘파람을 불었다. 민망해하는 것은 데미안뿐이었다. 그는 미미하게 귀 끝을 붉히고서는 힘겹게 답했다.
“그건 생존을 위해….”
“지금도 생존이 걸린 일이잖아요, 수르 알파.”
클로디아는 한숨 쉬듯 말했다. 헬렌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맹세코 이 공주님이 남에게, 그것도 수르 알파에게 이렇게 신경질적으로 구는 것을 처음 봐서였다.
디자이어도 추임새를 넣듯 거들었다. [올, 클로디아. 좀 하는데.] 그러거나 말거나 클로디아는 데미안 쪽을 노려보며 말했다.
“저는 당신이 저의 별것 아닌 일과 당신의 목숨을 저울질하는 꼴을 더 이상 좌시하지 않을 거예요.”
“별것 아닌 것이라뇨, 로드. 저는 로드의 명예를 지킬….”
“언제까지 답답하게 굴 거예요?”
클로디아가 데미안의 말을 잘랐다. 그녀는 데미안이 왜 저따위로 구는지 알고 있었고, 동시에 알지 못했다.
자신을 사랑하고 있기에 세상에 다시 없는 등신처럼 굴었으나, 왜 사랑하는데도 저런 머저리처럼 구는지 몰랐다. 그러니 짜증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제 명예요? 제가 지금 당신 앞에서 저 스스로를 멍청이라고 호칭하길 바라요?”
그녀의 말에 데미안이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폭언에 놀란 건 헬렌도 마찬가지였으나, 이쪽은 좀 달랐다. 놀란 채로 곧 히죽히죽 웃게 된 것이다.
클로디아는 미간을 찌푸리고 말을 이었다.
“당신이 제 명예 지킨다고 치료도 안 받다가 죽어버리면 제 명예는 땅에 떨어져요. 당신 손 잡았다고 오해할 사람도 없고, 오해한다고 해도 상관없어요. 이상한 고집 부리지 말고 손 내놔요.”
클로디아의 말이 맞았다. 마왕을 잡기도 전에 데미안이 죽어버리면 그녀는 어차피 포르투를 구할 수 없고, 명예 같은 걸 신경 쓰는 사람은 없어질 것이다. 그리고 만약 데미안이 죽은 후에 그녀 혼자 포르투를 구한다 해도 수르 알파를 죽이고 돌아왔다는 비난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데미안은 그녀의 말을 곧장 이해한 듯, 고개를 떨구고는 힘없이 손 장갑을 벗으려 했다.
그 앞에 엉덩이를 끌고 다가앉아 장갑을 벗겨내는 클로디아가 아니었다면, 데미안이 장갑을 벗는 데에는 틀림없이 한나절이 걸렸을 것이다. 클로디아는 씨근대며 데미안의 장갑을 확 벗겨내 버렸다. 그리고 놀란 그의 손을 깍지껴 잡고, 한 손으로는 디자이어를 잡았다.
“자, 이 벽창호 기사님을 얼마나 치료할 수 있는지 빨리 알아봐.”
[…너 진짜 캐릭터 변했다.]
“네가 그런 말 하면 안 되거든?”
[내가 왜!]
“이게 따지고 보면 다 너 때문이거든? 너…!”
더 이상 말을 끌고 가면 내가 불리하다. 디자이어는 그렇게 생각했다. 실제로 맞는 생각이기도 했다. 애초부터 온실의 꽃같이 곱고 사랑스럽던 클로디아를 끌어내서 이 험한 섬에서 굴리게 된 게 다 디자이어가 그녀에게 사기를 쳐서가 아닌가. 그래서 디자이어는 빠르게 큰 소리를 냈다.
[앗! 이것은!]
효과는 좋았다. 뭐라 말하려던 클로디아가 입을 닫고 디자이어에게 주목했기 때문이다. 디자이어는 흐음, 흐음 하며 자신의 마력을 클로디아를 통해 데미안에게 흘려보냈다.
[좋아, 치료는 할 수 있을 것 같아. 하지만 이건 역시 시빌과 좀 비슷한데… 다르기도 해.]
“음? 무슨 소리야?”
[그러니까, 시빌의 경우 정령 때문에 다친 거잖아? 그러니까 외부의 마력 때문에 몸을 다쳤다는 점에서는 데미안도 비슷해. 다만 시빌은 나와 같은 근원의 힘을 가진 정령에 의해 다쳤기 때문에 내 힘으로 완치가 가능하지만, 데미안을 다치게 한 힘은 나와는 완전히 다른 용의 힘이지.]
그러니까, 데미안을 완벽하게 저주에서 꺼내기는 어렵다는 게 디자이어의 의견이었다. 디자이어가 저주를 상쇄하는 힘을 데미안에게 줄 수는 있지만, 보다 비슷한 힘이 필요하다고 디자이어는 말하고 있었다.
“비슷한 힘이라면….”
[용의 힘이 가장 좋은 대책이 되겠지.]
용의 힘. 죽음의 바다에 도사리고 있는 것은 용이 목숨을 불사르며 만든 저주의 힘이었다. 그것과 근원이 같은 힘이 필요하다고 디자이어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너희가 만난 거울의 공작이라는 사람도 용의 힘을 부린다며?]
“으응, 하지만…. 아마 그녀가 데미안의 저주를 풀 수 있다면 그 얘기부터 가장 먼저 하지 않았을까? 게다가….”
그녀의 시선이 데미안에게 머물렀다가, 재빠르게 디자이어 쪽으로 돌아왔다.
‘부끄러운 생각이라 말하기는 좀 그렇지만….’
아무리 그래도 거울 공작에게 ‘쥬버린을 물건처럼 거래할 수는 없다’고 말했던 그녀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은 참으로 간사한 것이라, 쥬버린의 독단에 데미안이 그렇게 휩쓸려 부유했던 것, 힘들어했던 것을 보자 어쩐지 마음속에서 오빠에 대한 불신과 약간의 화가 싹트기 시작했던 것이다.
아마 그녀가 데미안의 저주를 풀어주겠다는 것을 조건으로 내걸었다면 아마 클로디아는 고개를 끄덕였을지도 모른다. 아니, 아마가 아니라….
‘오빠가 나한테 약혼자를 밀어붙였던 것처럼, 오빠도 어디 잠든 사이에 새신랑 되어보라지!’ 하며 거울 공작의 거래 요청을 냉큼 받아들였을 것이다. 클로디아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 얘긴 아무한테도 하지 말아야지.
[게다가 뭐?]
“아냐. 아무튼 그게 가능해 보이진 않았어. 그러면….”
[음, 용의 화구에서 답을 찾아보긴 해야겠지. 어차피 아무르 때문에라도 들어가야 하니….]
디자이어가 그녀에게 맞장구쳤다. 헬렌이 불안하게 중얼거렸다.
“화구에 답이 있을까?”
[글쎄, 있을 거라고 믿어야지. 어쨌든 미겔도 화구에서….]
“화구에서?”
디자이어가 말을 얼버무리자, 클로디아가 재차 물었다. 디자이어는 화들짝 놀라 너스레를 떨었다.
[아, 아냐. 이건 내 기억이 정확하지 않아서…. 뭔가 좀 생각해봐야겠어. 아무튼 데미안의 독 진행을 막는 정도는 할 수 있으니, 지금부터라도 치료를 해 보자. 알겠어?]
“좋아. 수르 알파. 그 손 놓지 마요.”
클로디아는 디자이어의 말에 맞장구치며 슬그머니 힘을 풀고 있던 데미안의 손을 당겨 잡았다. 데미안을 노려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데미안은 계면쩍은 얼굴로 헛기침했지만, 곧 제 몸을 뒤덮는 푸르스름한 빛에 아까보다는 확실히 편해진 얼굴이 됐다. 헬렌이 피식피식 웃으며 팔짱을 끼는 찰나, 움막의 천이 걷혔다.
포폰과, 포폰의 아버지였다.
곧장 문을 닫고 돌아선 포폰의 아버지 - 역시 이쪽 또한 포폰과 꼭 닮은 까만 개의 머리를 하고 있는 - 가 심각한 얼굴로 세 사람을 내려다본 직후, 입을 열었다.
“그래. 확실히 문제는 문제로구나.”
***
포폰은 마을 사람들에게 클로디아와 헬렌에 대해 제대로 얘기하지 않았다. 뒤숭숭한 자르지스의 분위기 속에서 마을에 인간이, 그것도 셋씩이나 된다는 이야기를 굳이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헬렌의 존재야 마을 사람들이 알고 있지만, 그나마도 헬렌에 대해 흰눈을 뜨는 마족들이 많았다. 그런데 인간이 셋이나 된다고? 그들을 마을에 머무르게 해선 절대 안 된다고, 나아가 쫓아내거나 죽이자고 핏대를 세우는 이들이 나올 건 뻔했다.
그렇다고 해서 셋을 그냥 내버려 둘 수도 없다. 포폰은 세 사람이 자신들의 왕을 죽이러 왔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물론 포폰이 보기에는 비리비리한 공주와 요리사, 그리고 독에 중독된 검사라는 이 파티가 목적을 쉽게 달성할 수 있을 것 같진 않았지만…. 작은 바람을 내버려 뒀다가는 큰 파도로 돌아오기에 십상이다.
그래서 포폰은 자신이 아는 사람 중 가장 현명한 사람을 찾았다. 그야 뻔하다. 포폰의 아빠였다.
굳은 얼굴로 천막에 들어온 개 수인 둘을 보고 세 사람 모두 굳었다. 갑작스럽게 들어오자마자 저들을 보고 문제라니, 그럴 수밖에.
포폰의 아버지는 세 사람을 보고 한참을 턱을 괴고 고민하다가, 재차 말을 이었다.
“포폰에게 이야기는 들었다. 세 사람 모두 인간이라고.”
그의 눈이 데미안을 향했다. 데미안은 굳은 얼굴로 그를 쳐다봤다. 그도 그럴 것이, 데미안은 오후에 포폰의 아빠가 함께 있는 정찰대에서 일대를 함께 순찰한 터다. 포폰의 아빠인 데포포는 데미안이 일행의 가장 앞에서 풀숲을 헤치고 길을 만드는 모습을 본 터라, 내심 데미안이 꽤 믿음직하다고 생각하던 차였다. 약간의 배신감과 심란함, 그리고 한숨이 데포포의 눈에 섞였다.
데미안이라고 그런 눈초리를 모를 리 없었지만, 그는 가만히 데포포를 올려다봤다. 섣불리 변명하는 것이 오히려 더 이상해 보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일단은 포폰, 잘했다.”
가장 먼저 데포포는 포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포폰이 조금 놀라 제 아빠를 올려다봤다. 데포포는 한숨을 쉬며 팔짱을 끼었다.
“이렇게 많은 인간들이 마을에 들어왔다는 게 알려지면 모두들 혼란스러워할 게다. 게다가 지금 마을도 위험한 상황이니 더 그렇겠지.”
클로디아는 불안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데포포는 힐끗 그녀를 쳐다보더니 털썩, 하고 세 사람 앞에 앉았다. 그리고 곧장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그쪽이 포르투의 공주라고? 인간의 대표?”
“…네. 저는 클로디아 테 포르투예요.”
그녀가 이름을 대고 말을 이으려 하자, 데포포는 고개를 흔들며 손을 내저었다.
“긴 수식어는 필요 없어. 나는 그런 건 잘 몰라. 하지만 한 가지는 알지. 당신들, 우리 왕을 죽이러 왔다며?”
“…앞뒤관계가 좀 있습니다만, 설명을 드려야 할까요?”
“본래는 그 이야기를 들을 필요도 없이 당신들을 내쫓아야겠지만 말이야….”
데포포가 턱을 쓰다듬더니 데미안 쪽을 쳐다봤다.
“특히 자네. 제법 이거저거 묻고 다니더니 그게 다 인간이라서였군.”
“죄송하다고 말씀드리지는 않겠습니다.”
데미안이 뻣뻣하게 목을 굳히며 말했다. 그 자세에 헬렌이 나직하게 한숨을 쉬었다. 알 만하다는 듯 데포포가 어이없이 웃었다.
“자초지종은 대강 포폰에게 들었어. 우리의 왕이 먼저 너희들에게 필요한 것을 빼앗아왔다지?”
“…예.”
“너희들이 정말로 우리의 왕을 죽이러 왔다면 우리는 왕에게 의리를 지켜야 해. 하지만….”
데포포의 눈은 여전히 데미안 쪽을 향해 있었다.
“이상하게 요즘 자르지스에 일어나는 일이 그것과 무관하지 않은 것 같아서 말이야. 데미안 자네는 알겠지.”
뭘 알아요?
클로디아가 슬쩍 눈으로 묻자 데미안이 고개를 저었다. 지금 설명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데포포는 그들 앞에서 자신의 무릎을 탕탕 치며 말했다.
“당신들 사정부터 일단 들어보고 싶은데, 제대로 설명해보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