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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마왕의 주박 (16/30)

3장. 마왕의 주박



 

맨 처음 어둠 속으로 빠졌을 때 클로디아는 당황했으나 곧 정신을 차렸다. 그녀가 자신의 말을 듣길 바란다던 거울 공작은 손가락 하나를 튕기는 것만으로 자신을 어두운 지하로 몰아넣었다. 데미안을 불러 봤으나 데미안은 대답하지도, 보이지도 않았다.

대신 클로디아의 눈앞에 나타난 것은 커다란 거울이었다. 클로디아 그 자신보다 몇 배는 큰. 거울 안에는 주저앉아 있는 클로디아의 모습이 똑똑히 보였다.

궁금증이 앞섰으나 그녀는 거울에 섣불리 손을 뻗지 않았다. 함부로 나서거나 뭔가를 건드리지 말라던 데미안의 말이 기억나서였다. 요정의 동굴에 빠졌던 경험을 그녀는 아직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다만 눈앞에 있는 것이 거울이라는 점이 마음에 걸렸다.

거울 공작은 영원한 거울의 미로에 빠진 자들이 다 미쳤다고 했다. 그렇다면 이 거울을 보고 있으면 미치는 걸까?

클로디아는 그쯤 생각하자 겁에 질려 거울에서 슬며시 고개를 돌리려 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고개를 돌리려던 그녀의 눈에 걸린 것은, 그녀의 고향이었기 때문이다.

“포르투?!”

거울 속에 비치던 자신은 어디로 가고, 거울은 포르투를 비추어냈다.

클로디아는 거울을 피하려던 것도 잊고 화들짝 놀라 거울 앞으로 달려들었다. 물론 거울에 손을 대진 않았다.

거울 안에 비치는 것은 분명히 하늘 위에 뜬 섬, 포르투였다. 클로디아가 몇 번이나 눈을 비볐지만 포르투 외의 다른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도 없었다. 네 개의 대륙 위에 자란 거대한 세계수 덩굴, 그리고 그 위에 얹히듯 떠 있는 하늘섬. 섬을 붙들고 있는 덩굴의 색은 붉었다.

‘이상하다. 지금 포르투를 감싸고 있는 세계수 덩굴 색은 초록색인데….’

답은 나왔다. 곧 거울은 어린 클로디아의 모습을 비추어냈기 때문이다. 쥬버린 옆에서 하품을 하는 어린 자신을 보고, 클로디아는 이 거울이 적어도 십여 년 전의 포르투를 비추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자신을 쳐다보는 데미안과 데미안의 손을 잡고 조르는 자신, 혹은 뛰어놀다 말고 빽 소리 지르는 자신이 연이어 거울 속에 지나갔다. 이윽고 다시 떠올리고 싶지도 않았던 열다섯 살 생일 연회, 그리고 모닝문의 축제가 거울 위에 떠오르자, 클로디아는 그대로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클로디아는 뭐에 홀린 듯 거울 안의 자신을 들여다봤다.

거울 속의 클로디아는 내내 망연자실했으며, 잔뜩 부었고,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 눈동자는 초점을 찾지 못해 황망히 움직여댔고, 손은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가느다란 팔에는 힘이 없었으며 그녀를 지탱하고 있는 것은 오로지 드레스 자락을 받치는 파니에뿐이었다.

‘내가, 저랬나.’

안타깝고 슬펐다. 할 수 있다면 거울 속의 소녀를 안아주고 싶었다. 잊고 싶었고, 잊으려고 했기에 어느새 정말로 잊게 되어버린 기억들이었기에 클로디아에게는 그 소녀가 더욱 생경히 다가왔다.

그러나 더 안타까운 것은 따로 있었다. 그때의 클로디아는 정말로 몰랐던 것. 지금의 클로디아에게는 분명히 보이는 것.

데미안이었다.

그녀에게 애써 대답하던 어린 데미안, 조금 자란 그녀를 볼 때마다 눈동자가 흔들리던 데미안. 그리고 쥬버린에게 화내는 수르 미다프와… 자신과의 약혼은 말도 안 된다고 부인하는 데미안.

아름다운 옷 따위에는 관심도 없었던 데미안은, 잔뜩 차려입은 제 옆에서는 언제나 똑같이 멋지게 차려입었다. 약혼자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것이 드러날까 봐 잔뜩 움츠린 공주의 뒤에서, 그녀를 사랑한다고 나지막하게 남들에게 웃어 보이는 청년이 있었다.

그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열다섯 살 소녀의 앞에서, 멈칫멈칫 웃으려다가도 그것이 혹시나 그녀에게 희망을 줄까 봐, 그래서 자신이 미련을 가지게 될까 봐 막상 그녀의 앞에서만은 끝내 웃지 못한 남자.

제 앞에서 울지 않으려 입술을 깨무는 공주를 쳐다보며 죄송하다는 말만 되풀이하는 기사는 밤새도록 공주를 보고 있었다.

남자의 검푸른 눈동자에 대체 뭐가 들었는지 그때의 클로디아는 정말로 몰랐다. 알고 싶지도 않았기에 그녀는 남자를 단 한 번도 쳐다보지 않고 춤을 추었다.

하지만 지금의 클로디아는 알 수 있었다. 내내 자신을 쳐다보는 눈동자 안에는 가장 뜨거운 열기가 있음을.

‘어떻게 모를 수가 있었을까.’

클로디아의 속이 심란해졌다.

거울 속의 어린 소녀에게 입 맞추는 남자의 얼굴이 너무도 괴로워 보여서다. 남자는 제게 입 맞추라고 명령하는 소녀를, 결국은 우느라 얼굴을 가린 소녀를 한참이나 내려다봤다.

억겁 같은 시간 동안 고민하는 열여섯의 데미안을 보며 클로디아는 그 또한 몸이 자랐을 뿐, 어린 소년에 불과했었음을 깨달았다.

끝내 데미안은 무릎을 꿇었다. 단정한 얼굴에 아주 약간의 열기가 드러났다가 사라졌다. 입 맞추라는 명령이 그를 조금도 강제하지 못했음을 클로디아는 알 수 있었다. 남자는 처음이자 마지막일 입맞춤을 짧게 끝냈다.

너무나도 짧게.

거울은 이내 새카맣게 변했다. 그녀는 이제 어둠 속에 자신만 남았음을 깨달았다. 일어나서 어디론가 가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쉽게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데미안.

그녀는 대체 자신이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 머리가 아팠고, 죽고 싶었다. 창피함과 난감함, 심란함과 화, 분노가 뒤죽박죽 섞였다. 그녀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나한테 왕자를 주면 되지.”

저도 모르게 던진 혼잣말에 대답이 돌아오자 클로디아는 놀라고 말았다. 그녀에게 대답한 것은, 흑단나무 같은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트린 거울 공작이었다. 언제 나타났는지, 거울 공작은 클로디아의 옆에 방만하게 누운 듯한 자세로 둥둥 떠 있었다.

클로디아는 놀라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화를 냈다. 제 창피한 기억이 속속들이 드러났으니 화가 나는 건 당연했다.

“이게 뭐예요? 당신, 포르투 왕성에 간자라도 심어놓았나요?”

먼 곳의 광경이라도 통신 도마뱀을 통한다면 얼마든지 볼 수 있으니, 거울에 자신의 모습이 비친다 한들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포르투 왕성은 통신 도마뱀의 포육이 금지된 곳이었다. 왕성의 모습을 바깥에 함부로 보여줄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거울 공작은 화내는 포르투의 공주를 보고 쯧쯧 혀를 찼다.

“나 그렇게 안 부지런해.”

“그럼 이건 무엇인가요? 적어도 자르지스에서 포르투를 십여 년 전부터 노렸다는….”

“말했잖아, 난 영원한 거울의 미로를 가지고 있다고. 이건 그저 미로의 거울 중 하나일 뿐이야.”

“…무슨 소리죠?”

클로디아가 거울 공작을 노려봤다. 공작은 어깨를 으쓱했다.

“사람들이 영원한 거울의 미로에서 미쳐버리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해? 거울에 내가 비쳐서? 아니면 거울이 깨져서?”

“….”

“미로의 거울들은 비친 사람들의 삶의 궤적을 보여주지. 자신도 잃어버린 기억들, 혹은 기억하고 있는 것들, 자랑스러운 기억, 슬픈 기억, 가장 감추고 싶은 부분들까지.”

클로디아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거울 공작과 거울을 번갈아 쳐다봤다. 거울 공작은 이제야 눈치챘냐는 듯 픽 웃었다. 그녀는 거울에 비치지 않는 각도에 교묘하게 떠 있었다.

“나라고 해서 거울에게서 자유롭진 않지.”

클로디아는 즉시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공작은 잽싸게 거울 뒤로 날아가 거울을 클로디아 쪽으로 바꿔 세웠다. 몇 번이나 그렇게 거울에 비추어지던 클로디아가 분통을 터트렸다.

“…치사해!”

“알아. 어쩔 거야? 내가 이곳의 주인인데.”

공작이 피식 웃었다.

“…상관없어요! 몰라! 저는 공주예요! 제 일거수일투족이 남들에게 알려지는 건 하루 이틀도 아니라고요!”

“그래?”

공작이 턱을 괴고 비웃었다.

“그런 것 치곤 좀 많이 창피해 보이는데.”

“시끄러워요! 그러는 당신은 우리 오빠 나쁘다면서 왜 갖고 싶어 하는데요?!”

“난 나쁜 남자 좋아해.”

골 때리는 대답이었다. 띵. 머리가 아찔해졌다. 공작은 피식피식 웃으며 말을 이으려고 했으나, 클로디아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기가 막혀! 당신 말 더 안 들을 거예요! 수르 알파는 어디 있어요?! 당신이 감췄지요?”

공작을 더 이상 상대해봐야 정신적으로도, 물질적으로도 손해였다. 공작은 자신을 두고 놀리며 계속 시답잖은 소리나 하고 있었다. 차라리 이곳에서 빨리 나가는 게 나았다.

뭣보다 저 거울이 들쑤셔 놓은 창피한 기억이, 계속 클로디아를 심란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공작은 그녀의 말을 들을 생각은 않고 공중에서 빙그르르, 한 바퀴 돌더니 뒤로 드러누웠다.

“그 남자 만나게 해 주면 지금 그 얼굴을 똑바로 볼 수는 있고?”

정확했다.

클로디아가 미간을 모으자 거울 공작은 턱을 괴고 이죽댔다.

“내 말 더 듣는 게 좋을걸. 더 말해줄 것도 있고.”

“뭐가 좋은데요? 당신 계속 말도 안 되는 소리만 하잖아요?”

“음, 이건 네가 네 오빠를 주겠다고 한 다음에 말해주려 했는데.”

공작이 머리 뒤로 깍지 낀 손을 넘기며 입을 열었다.

“아나니아가 네게 주박을 걸어놓은 건 알고 있어?”

“…뭐라고요?”

아나니아. 공작의 말대로라면 그건 마왕의 이름이었다. 클로디아는 이마를 찡그렸다.

“무슨 수작을 부리려고….”

“아니, 나도 보통 때라면 이런 말까지는 안 하지만, 네가 정말로 내 말을 안 들을 것 같아서 말해주는 거야.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아나니아가 네게 주박을 걸었어.”

“…증거 있어요?”

클로디아가 도끼눈을 뜨고 그녀를 바라봤다. 공작이 오, 하고 입술을 오므리며 박수쳤다.

“그새 많이 늘었네. 예전의 너라면 그냥 덥석 믿었을 텐데.”

“…그만 놀리라고요!”

“흠. 좋아.”

공작은 그녀에게 웃어 보이고는 거울을 쓰다듬었다. 거울 속의 영상이 흐려지더니 이내 다른 곳으로 바뀌었다.

요정의 동굴. 요정들이 자신을 둘러싸고 춤추는 모습이었다. 반짝이는 황금 가루가 날리고, 요정들이 웃으며 빙글빙글 도는….

그때는 어지럽고 화가 나 있었지만, 거울을 통해 보니 굉장히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뭣보다, 그 안에 앉아 있는 자신의 모습은 빛을 받아 아주 아름다웠다. 클로디아의 입이 자신도 모르게 헤벌어지려다가 이내 닫혔다. 거울을 어루만지던 공작이 그런 자신을 보고 피식피식 웃고 있는 걸 알아챘기 때문이다.

“…이게 뭐요?”

“참을성 봐라. 이 다음을 볼래?”

클로디아는 눈을 찌푸렸다. 거울 속의 제 머리카락이 휘날리고, 디자이어가 재잘거렸다. 동굴이 사라지고 밤의 풀밭에 내려선 자신이 보였다. 그녀는 천천히 눈을 떴다. 그리고….

뚝.

거울이 암흑으로 물들었다.

클로디아는 눈을 깜박였다.

“…뭐예요?”

거울 속에 보이는 자신의 모습 위에, 새카만 물방울이 떨어지듯 뭔가가 떨어졌다. 그 암흑이 순식간에 퍼지며 클로디아의 모습은 감쪽같이 사라졌다.

거울 공작이 쓰게 웃었다.

“그다음은 없어.”

“…무슨 뜻이죠?”

“이런 식이라고. 네 모습이 군데군데 없어. 이 거울은 단순히 네 기억만을 비춰주는 게 아니라, 네가 살아온 인생을 비추어주지. 그런데 인생이 끊겨 있는 거야. 세상에 없었던 사람처럼.”

“말이 돼요?”

클로디아는 당황해 물었다.

“당신이 무슨 술수를 부린 건 아닌가요?”

“아냐. 나도 처음엔 이걸 보고 많이 놀랐다고. 생각해 봐. 평소엔 하도 교묘해서 모르고 있었겠지만…. 너, 기억이 뭔가 불분명한 부분이 있지 않아?”

그녀는 푸른 눈을 깜박였다. 공작은 흐린 눈으로 설명했다.

“평소에는 의식한 적 없지만, 의식하고 나면 지나칠 때마다 자꾸 보게 되는 그림자처럼, 하지만 잊어버리면 그런 게 있었는지도 기억나지 않는 흙구덩이 같은…. 애매한 기억 말이야. 머릿속에 누군가가 먹을 칠해놓은 것처럼.”

“먹…. 하지만 저때 저는 기절했어요. 그래서 그런 건 아닌가요?”

“말했잖아. 저건 네 기억이 아니라 그냥 너 전부를 비추어주는 거라고.”

공작이 손을 내저었다.

“그것이야말로 아나니아가 용의 화구 속에서 발견한 가장 대단한 마법이야. 타인의 마음속에 들어가, 몰래 먹칠하는 것. 자신을 싫어하는 자들의 마음속에서 나쁜 마음에는 먹을 칠하고, 자신을 좋아하는 감정만 남겨두는 것. 혹은 모든 기억을 사라지게 하는 것.”

“…그게 가능한가요?”

“항상은 아니지. 생각해 봐. 정말 그런 게 네 머릿속에는 없어?”

클로디아는 이마를 찡그렸다.

새카맣게 먹칠된 기억. 새카만….

그때 불현듯 뭔가 떠올랐다. 내리깐 까만 속눈썹에 맺히던 햇빛, 그리고 숨을 죽이던 자신. 제 머리카락 끝에 매달린 손가락의 온기. 사각사각, 머리카락을 자르던 소리와 순간순간 드러나던 남자의 이마. 찌르르 아파오던 관자놀이….

그리고 그녀의 눈앞에 나타났던, 요정의 글자들.

<당신을 사랑합니다.>

데미안의 머리 위에 떠 있었던 글자였다. 클로디아는 갑작스레 확, 어둠을 뚫고 올라오듯 나타난 기억에 아찔해졌다. 요정의 동굴에서 나온 순간 보였던 남자 둘. 데미안과 시빌. 그리고 데미안의 수식언들 사이 새겨져 있던 그 말.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랬다. 그녀는 그때 그 말들을 보고 당황했다. 데미안이 나를 사랑한다고? 하는 놀라움과, 말도 안 돼! 하는 불신감이 몰아쳤다. 하지만 그녀를 더 당황시킨 건 그다음이었다.

그다음…. 클로디아는 이마를 찡그렸다.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분명히 뭐가 있었는데. 나를 놀라게 한 것….

그녀는 공작 쪽을 가늘게 뜬 눈으로 쳐다봤다.

“…더 말해 봐요.”

공작이 위험하게 웃었다.

“내가 더 말할 게 뭐가 있겠어? 너는 이미 답을 알고 있는데.”

“…무슨 답이요?”

“너, 방금 뭔가 기억났지? 아무리 애써도 기억나지 않았던 어떤 것.”

정답이었다. 공작은 유유히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아나니아의 주박은 그런 식이지. 네가 무언가의 계기로 다시금 깨닫게 되지 않는 한, 그 기억은 수면 아래로 가라앉아서 영원히 떠오르지 않아. 하지만 나는 그 주박을 풀어줄 수 있지.”

“…대체 어떻게…. 저는 마왕을 만난 적도 없는데….”

클로디아가 아연해하거나 말거나 공작은 어깨를 으쓱했다.

“말했잖아. 그 왕자를 내게 줘. 그럼 널 여기서 내보내 주고 다 설명해 줄게. 난 그럴 수 있거든. 아나니아의 주박도 풀어주고.”

“…오라버니를 물건 취급하지 말라고 했잖아요.”

“하지만 너는 물건 취급당했잖아.”

공작이 여상하게 말했다. 클로디아의 얼굴이 찡그려졌다.

“제가 언제….”

“아니라고 말할 수 있어? 거울 안에서 봤을 것 아냐?”

검은 머리의 미녀는 자신이 입은 드레스를 탁탁 폈다. 둥둥 떠 있는 그녀의 다리 라인을 따라 아름다운 섬유가 차르륵 소리가 날 듯이 떨어져 내렸다. 그녀는 요염한 포즈로 클로디아를 유혹하듯이 누워 생긋 웃어 보였다.

“나 예쁘지?”

“….”

“예쁘기만 하면 뭐든 될 줄 알았지, 나도.”

그녀는 노골적으로 비아냥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 대상은 클로디아도, 쥬버린도 아니었다. 이제 이곳에는 없는 누군가를 향해 공작은 증오와 사랑을 보내고 있었다.

“네가 네 오빠를 좋아하는 것처럼 나도 내 아버지를 좋아했단다. 물론 너의 아버지처럼 훌륭한 사람은 아니었지.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좋아했어. 그렇잖아? 아버지라는 건 대부분 딸에게 그런 존재야. 세상에 태어나서 가장 처음 만나는 지옥이었지.”

“….”

“네 아버지가 너무 훌륭해서 그럴까, 네 오빠가 네게 마치 내 아버지처럼, 폭군처럼 굴었던 걸 너도 봤잖아.”

공작의 말이 맞았다. 클로디아는 거울 안에서 제 오라버니의 몰랐던 면을 보고 놀라고 있었다. 아마 데미안의 마음을 몰랐던 것처럼, 어려서 그 또한 몰랐을 것이다.

포르투의 왕이 그렇게 되고 나서, 의지라고는 할 곳 없었던 클로디아는 쥬버린에게 매달렸다. 쥬버린은 제 앞가림을 위해 그녀를 가장 교묘하게 방치했다.

‘예쁘게, 사랑스럽게, 아름답고 현숙해지렴.’

왜냐고 물으면 쥬버린은 그때도 지금도 똑같이 답할 것이다.

‘너의 행복이라는 건 그런 거니까.’

클로디아는 거울을 바라봤다. 새카맣게 칠해진 거울에 클로디아의 모습이 비쳐졌다.

반짝반짝 빛나는 금발머리와 하늘을 닮은 푸른 눈. 오뚝한 코와 어여쁜 입술. 세상에 비할 바 없는 미인이라고 불리워지는 그 얼굴은 쥬버린과도 꼭 닮았다. 클로디아는 제 얼굴에 쥬버린의 얼굴을 겹쳐봤다. 언제나 자신을 보면 환하게 웃던 얼굴.

하지만 자신과 똑같은 얼굴을 한 오빠는 제멋대로 클로디아의 인생을 안배했다. 자신에게 매달려오는 클로디아의 손을 부드럽게 쥔 다음 떼어놓으며 공주님의 행복을 찾으라고 속삭였다.

화가 치밀었다.

클로디아는 어렴풋이나마 이 여행의 처음부터 느끼고 있던 미묘한 감정의 정체를 찾아낸 기분이 들었다. 제게 포르투를 외면하고 성의 재산을 처분해 시집가라고 했던 쥬버린에게 느꼈던 감정이 단지 서운함뿐인 줄만 알았다.

하지만 이제 클로디아는 그 미친 분홍색의 벌판에서 느꼈던 짜증과, 잠들어 있던 쥬버린이 디자이어를 통해서 한 말을 듣고 느꼈던 슬픔이 같은 종류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자신이 사랑했던 데미안을 약혼자라는 이름으로 밀어줘 놓고, 어쨌든 잘된 것 아니냐고 말하는 일방적인 애정. 그런 건 애정이라고 할 수조차 없다.

클로디아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진짜 나빴어.”

“….”

“나빠.”

공작은 슬며시 거울 뒤로 돌아가 모습을 감추어줬다. 클로디아가 얼굴을 일그러뜨렸기 때문이다. 그녀는 울 것 같은 얼굴로 저릿저릿한 속을 달래고 있었다.

클로디아는 지극히 슬펐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악역이 나쁜 것에는 그리 놀라지 않는다. 하지만 정말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이가, 사실은 자신에게 가장 독이 되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의 슬픔은 그리 만만하지 않다. 하지만 클로디아는 고개를 내젓곤 공작을 불렀다.

“…안 울 거니까 나와요.”

머쓱한 표정으로 공작이 다시 거울 뒤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시간 줄게. 안 울어?”

“안 운다고요.”

눈물이 글썽이기는 했으나 클로디아는 간신히 눈물을 떨구지는 않았다. 그녀는 손끝으로 축축한 눈을 훔치며 말했다.

“이런 걸로 울기는 너무 아까워.”

“시간이?”

“그것도 그렇고요.”

클로디아는 자신이 너무 많이 울었다고 생각했다. 울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어김없이 이런 순간들이면 눈물이 나왔다. 그러나 또 울고 싶지는 않았다.

클로디아는 입을 열었다.

“이 거울로 당신이 뭘 말하려는지는 알았어요. 기억은 미화되기 마련이죠. 하지만 제 선택은 바뀌지 않아요.”

“이런. 완강한 공주님이군.”

공작이 어깨를 으쓱했다. 클로디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이 저를 내보내 주지 않는다 해도, 그리고 마왕의 주박을 풀어주지 않는다 해도 어쩔 수 없어요. 전 그러지 않을 거예요.”

“네 오빠가 네게 한 짓을 되돌려줄 뿐이라니까?”

“의미 없는 도돌이표를 찍기 위해서 제가 여기 온 건 아니니까요.”

클로디아는 공작을 노려봤다. 더 이상 똑같은 얘기를 여러 번 반복하지는 않겠단 뜻이었다. 공작은 입을 비죽였다. 클로디아는 침묵 끝에 다시 덧붙였다.

“공작님. 대신 약속할게요. 오라버니가 깨어난다면 당신을 구해주러 이곳에 꼭 와 달라고 하겠어요.”

“그렇게 말하고 오지 않으면?”

“저는 약속을 지켜요.”

“네가 착한 아이라는 걸 난 알아. 하지만 쥬버린이 깨어나자마자 바쁜 척하고 이곳에 오는 걸 미루면 어떻게 하지? 그는 제 누이조차 애정을 핑계로 뒤로 미뤄버린 사람인데.”

뼈아픈 말이었다. 클로디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때였다.

“저 또한 약속하겠습니다.”

데미안이었다. 어둠 속에서 홀연히 나타난 그를 보고, 공작은 놀란 얼굴이었다. 클로디아는 반갑게 제 뒤에서 나타난 데미안을 향해 외쳤다.

“수르 알파!”

“죄송합니다. 미로에서 길을 찾는 법은 알고 있었지만….”

데미안이 한숨을 쉬었다. 그때 공작이 황당하다는 듯 물었다.

“어떻게 나왔지? 분명 거울의 미로에 가두었는데….”

“예. 어둠 속에서 의지할 곳이라곤 거울뿐이더군요.”

영원한 거울의 미로는 모든 길이 거울로 되어 있는 구조였다. 그곳에 빠진 자들은 거울에 의지해 길을 찾아야 하지만, 거울 안에 자리한 제 과거에 이내 눈길을 뺏겨버리고, 그러다 영원히 길을 잃게 된다. 그러나 데미안은 그러지 않을 수 있었다.

“저는 어둠 속에서 자랐지 않습니까.”

아, 젠장.

데미안의 과거를 미리 뒤져봤던 공작이 탄식했다. 데미안이 미미하게 웃었다.

“그런 것이 도움이 될 줄은 몰랐지만요. 어쨌든.”

“어쨌든 뭐?”

“저 또한 약속하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클로디아는 데미안을 올려다봤다. 데미안은 제 가슴에 손을 대고 공작에게 이어 말했다.

“수르의 직위를 걸고, 쥬버린 왕자님이 깨어난다면 이곳 자르지스에 업어서라도 제가 데려오겠습니다.”

“…어떻게 오려고?”

쥬버린이 깨어난다는 것은, 디자이어가 다시 잠들지도 모른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세계수로 만든 배 또한 소용없다. ‘네가 약속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뜻이었으나, 데미안은 그 의문을 가볍게 받아넘겼다.

“그야 당신이 내보내 주셔야 다시 올 수도 있겠지요.”

한마디로 내보내 달라는 뜻이다.

공작은 하, 하고 웃었다. 그러나 그 웃음에는 즐거운 감정이 담겨 있음을 클로디아는 알아차렸다. 비웃음이 아니었다.

“좋아.”

“정말요?”

클로디아가 펄쩍 뛰었다. 공작은 여전히 모로 누운 채로, 클로디아에게 웃음을 섞어 말했다.

“어차피 계속 설득해봐야 안 들을 애들 내 미로에 가둬놔 봐야 뭐 하겠어. 재미없게.”

“….”

“하지만 대신 아나니아의 주박은 풀어주지 않을 거야.”

주박이라는 말에 데미안이 얼굴을 굳혔다. 클로디아는 그런 그의 눈치를 보며 눈을 깜박이다가 말했다.

“베풀 수 있을 때 은혜를 베풀어두는 것도 공주의 미덕이에요.”

“이런, 클로디아 테 포르투. 미안하지만 난 빈한한 자르지스의 공주였다고 말 안 했나?”

공작이 한쪽 눈을 찡긋했다.

“베푸는 미덕 같은 건 내게 없어. 네가 약속하지 않으니 나도 주박을 풀어주지 않는 것뿐이야.”

“하지만….”

“이미 넌 반쯤 얻어갔잖아. 넌 주박 하나를 내 덕에 풀었지. 그리고 또 다른 주박이 네게 걸려 있다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도 이득 아냐?”

분하지만 공작의 말은 이치에 맞았다. 클로디아는 거래에 응하지 않는 자신이 대가만을 요구하는 것이 꽤 비겁한 일임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작게 한숨 쉬며 물러났다.

“좋아요.”

“저는 약속했지 않습니까?”

데미안이 항의했으나 공작은 모른 척했다. 공주의 약속이 아니라면 그녀에게는 의미 없었다.

공작은 빙긋 웃으며 팔을 휘둘렀다. 순식간에 주변의 풍경이 바뀌었다. 클로디아가 잠시 휘청한 순간, 그녀는 사방이 확 밝아졌다는 것을 알아챘다.

그뿐인가. 바람이 불었다. 짠 냄새가 나는, 찐득하고 후덥지근한 바람.

세 사람은 어느새 공작의 성 근방, 해안선의 숲에 서 있었다. 시간은 어느덧 뉘엿뉘엿 해가 지고 있었다. 클로디아는 놀라 주변을 둘러봤다.

“시간을 엄청나게 보낸 것 같은데…. 얼마 안 지난 거 아녜요?”

“무슨 소리야.”

공작이 피식 웃었다.

“너희들 내 성에서 만 하루는 보냈다고.”

클로디아는 눈을 크게 떴다. 그러고 보니 피로감이 몰려오는 듯도 했다. 하지만… 공작은 두 사람이 어떻든 신경 쓰지 않는 듯 보였다.

보통 이럴 때는 체력이라도 좀 보충하게 쉬고 갈 수 있게 배려해주지 않아?!

어쩐지 원망스러움도 함께 몰려왔다.

“나빠요, 정말.”

“나 궁금한 게 있는데. 너 정말 그 말밖에 할 줄 몰라?”

“예?”

“그 정령이 네게 여러 가지를 가르치던데. X같다든가.”

천연덕스러운 공작의 말을 듣고 클로디아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공작은 깔깔깔 소리 높여 웃었다. 때마침 불어온 바람에 그녀의 탐스러운 흑발이 나부꼈다. 해 저무는 저녁놀을 따라 그 머리카락은 빨갛게, 또는 노랗게 보였다. 그 가운데서 클로디아는 마법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어떤 세월의 더께 같은 것을 그녀에게서 느꼈다.

“…알지만, 하기 싫어요.”

“하지만 제법 스트레스 해소는 될 텐데.”

“그거랑 상관없어요.”

클로디아가 시무룩하게 입술을 내밀었다. 공작이 픽 웃었다.

“좋아. 클로디아 테 포르투. 약속한 거야. 나는 오로지 네 말만 믿고 내 집을 침범한 너희를 보내주는 거라고.”

“이왕이면 선의에 의해서라고 해주세요.”

눈을 가늘게 뜨는 공작을 보고 클로디아가 두 손을 모으고 눈을 빠르게 깜박여 보였다. 그 애교 넘치는 몸짓에 공작이 어이없이 웃으니 클로디아가 덧붙였다.

“그쪽이 훨씬 우아하잖아요.”

“그런 모습으로 하기엔 좀 웃기는 말인데?”

땀에 절은 데다가 자르지스의 날씨 때문에 묻은 흙 때가 씻겨나가지도 않았다. 머리카락은 봉두난발이었고, 옷은 채 마르지 않아 쿰쿰한 냄새가 났다.

하지만 클로디아는 우아하게 고개를 높이 들었다.

“제 겉모습이 어떻든, 중요한 것은 그 안에 있으니까요.”

“완두콩 공주처럼?”

클로디아가 흥흥 웃었다.

“그렇다고 해 두죠.”

“좋아, 클로디아 테 포르투. 네가 바라는 대로, 나는 너의 행복한 여행과 목표 성취를 기원하며, 선의로 너를 해방해 주는 것으로 해 두지.”

“저 또한 당신에 대한 선의와, 당신이 보냈을 오랜 세월에 대한 경의로 당신을 존중하며 또한 약속하겠어요. 반드시 쥬버린 오라버니로 하여금 당신을 구원… 아니.”

막힘없이 줄줄 읊던 클로디아가 말을 멈추고 고개를 흔들었다.

“당신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 수 있도록 하겠어요. 기꺼이 잡는 것은 당신의 몫이며 저는 당신의 행복을 기원합니다.”

“나 또한.”

그녀는 공작의 말이 끝나자마자 망설임 없이 몸을 돌렸다. 데미안 또한 그녀를 따라 해안선을 걸었다. 클로디아는 노을이 지는 해안선을 걸으며 단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



 

하지만 품위와 우아함은 해안선 숲을 벗어나자마자 사라졌다. 클로디아는 주변을 확인한 후, 공작의 사정거리에서 완전히 벗어났다는 생각이 들자마자 대뜸 소리를 질렀다.

“아아아아악!!”

데미안이 눈썹을 꿈틀했다.

“그….”

“수르 알파. 저 어디 아픈 곳 없어요. 저 지금 되게 화나요. 하지만 욕할 수 없으니까 소리 질렀어요. 끝.”

“….”

“거기서 화내고 싶지 않아서 있는 대로 제 인내심을 끌어서 쓴 것뿐이에요.”

클로디아는 코를 찡그리며 씩씩거렸다. 그리고 재차 소리 질렀다.

“정말 짜증 나!”

파르르르륵, 숲에서 새 한 마리가 날아올랐다. 클로디아는 후, 하고 한숨을 쉬었다. 묘하게 개운해 보이는 그녀를 데미안은 물끄러미 쳐다봤다. 클로디아는 얼굴을 붉혔다.

“됐어요. 끝났으니 가요.”

“…예.”

공작성에서 나오니 두 사람이 처음 목표로 하던 해안은 훨씬 가까웠다. 안쪽으로 훅 들어간 해변가 근처는 절벽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다.

클로디아는 이마에 손을 가져다 대며 그쪽으로 시선을 향했다.

“저기겠죠?”

“그런 듯합니다. 저희가 이곳에 조난당한 지는 며칠이 지났으니…. 두 사람이 아직 저곳에 있을지는 모르지만요. 그전에 저곳에 무사히 도착했을지도 미지수군요.”

“…아, 공작에게 그런 거나 물어볼걸.”

클로디아가 아쉬워했다.

“그 여자, 정말 다 아는 것처럼 굴었는데! 심술이나 부리면서 정말로 제대로 된 건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았잖아요.”

“그런 사람이니, 아마 디자이어가 저기 있는지도 말 안 해주었을 겁니다.”

“…진짜 못됐어….”

데미안은 그런 클로디아를 보며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어쩔 수 없지요. 답을 얘기해준다 해도 다른 걸 요구했을 것 같고요.”

씩씩대던 클로디아는 데미안과 눈이 마주쳤고, 얼굴이 확 붉어졌다. 데미안이 고개를 갸웃했다.

“로드?”

“…아녜요. 어서 가요!”

“예. 앞에 엄폐물이 없으니, 저는 뒤에서 따르겠습니다. 천천히 가시지요.”

데미안의 말에 클로디아는 삐걱삐걱, 어색하게 그의 앞으로 나섰다. 데미안은 그녀를 힐끗 쳐다보고는 왼쪽 뒤에 섰다. 뒤쪽에서 혹시라도 튀어나올 적을 경계하는 것이었다.

덕분에 클로디아는 해안선을 걷는 내내 뒤쪽이 아주 신경 쓰이게 됐다.

‘…심란해….’

이유는 하나였다. 잠시 잊고 있었지만, 그녀가 거울 안에서 봤던 데미안 때문이었다.

클로디아는 과거의 자신이 데미안과 파혼할 당시를 봤고, 그가 사실은 자신을 싫어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됐다. 정확히는, 그가 자신을 아직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때는 정말 나를 싫어하는 줄만 알았는데….’

왜 그렇게 생각했을까. 그때는 제게 입 다물고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 데미안이 원망스럽기만 했다. 남들 앞에서는 사랑한다는 말을 눈도 깜짝하지 않고 하면서, 오로지 자신의 앞에서만 굳은 표정으로 죄송하다고만 말하던 데미안 알파.

그의 굳은 표정이, 사실은 격정을 감추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은 감쪽같이 몰랐다. 클로디아는 뒤쪽을 흘끔 쳐다봤다. 데미안은 좌우를 경계하며 걷고 있다가,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로드?”

“…아, 아녜요!”

그리고 클로디아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와 아주 잠시 눈이 마주친 것만으로도 얼굴이 새빨개질 것만 같아서였다. 괜히 걸음까지 빨라졌다. 데미안이 그녀의 뒤에서 “로드, 걸음이 빠릅니다”라고 지적하고 난 뒤에야 클로디아는 다시 처음의 걸음 속도를 회복했다.

‘왜 그랬을까.’

데미안이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하지만 클로디아에게는 아직도 남은 의문이 있었다.

‘어째서?’

솔직한 클로디아에게는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었다. 클로디아는 자신이 데미안의 입장이었다면 어땠을까, 하고 생각해봤다. 만약 자신이 데미안을 오랫동안 좋아해 왔는데, 쥬버린이 갑자기 제게 데미안과 결혼하길 명령한다면.

갑작스럽긴 하지만, 그녀는 곧 뛸 듯이 기뻐했을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약혼 선언 당시 그녀는 그랬다. 스쳐 지나가듯 쥬버린에게 데미안이 좋다고 떼를 썼고, 쥬버린이 데미안을 자신의 약혼자로 낙점했을 때 클로디아는 환한 얼굴로 데미안을 바라봤던 것이다.

하지만 데미안은 대체 자신을 왜 거부했을까?

그녀는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아무래도 뭔가 중요한 이유가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데미안의 앞에서 천천히 뒷짐 지고 걸으며 생각에 잠겼다.

그는 언젠가 제게 그렇게 말한 적 있다.

‘공주님께서는 아주 귀하고, 훨씬 좋은 환경에서 자란…. 티 한 점 없이 맑은 그런 분을 만나게 되실 겁니다.’

그때 클로디아는 ‘바보는 싫어요!’ 하고 답했었다. 지금 생각하면 웃기는 일이었다. 데미안이 그 말을 하면서 자신을 염두에 두었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으니까. 클로디아는 피식 웃었다. 데미안은 그녀야말로 귀하고, 좋은 환경에서 자랐으며 티 한 점 없이 맑다고 생각했기에 그런 말을 했을 것이다.

제 입으로 자신을 바보라고 말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머리 아파….’

정말로 머리가 아픈 것은 아니었다. 그저 복잡했다. 클로디아는 데미안을 제대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단지 그가 자신을 사랑해서가 아니다. 어렸던 자신이 데미안에게 모종의 상처를 입혔음을 이제 그녀도 모르지 않았다.

자신을 바라보던 데미안은 모닝문의 축제에서 제 고백을 받고 어떤 생각을 했을까? 자신을 좋아한다고 말한 주제에, 곧장 다른 남자들과 춤을 추는 클로디아를 보는 그의 마음이 어떠했을까.

입 맞춰 달라고 말한 자신에게, 마른 입술을 아주 잠시 붙였던 그는 대체 어떤 마음이었을까.

당장이라도 그에게 물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클로디아는 제 질문에 답이 돌아오기는 요원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남자였다면, 그는 클로디아가 파혼을 통보하기 전에 답했을 것이다.

열다섯의 클로디아는 모닝문의 축제 후, 열이 내리자마자 쥬버린에게 가서 사흘 밤낮을 울며 파혼해달라 졸랐다. 쥬버린은 아주 난처해했으며, 그 사흘 동안 데미안을 불러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계속해 물었다. 하지만 데미안은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런 남자다.

클로디아는 심란한 마음을 달래며 계속 걸었다. 두 사람은 어느새 해안선 숲을 벗어나 모래가 가득한 해변을 걷고 있었다. 노을은 어느새 사라지고, 짙푸른 어둠이 점점 바다에 드리우고 있었다. 아직 디자이어가 목표로 했던 해안만까지는 꽤 남았다.

‘게다가, 그런 이야기를 물어보면 더 어색해질지도 몰라….’

데미안에게 클로디아가 ‘당신, 혹시 그때 나 사랑하는데 거절한 이유가 뭔가요?’라고 물으면 데미안은 일단 부인할 것이다. 공작의 거울에서 봤다고 해도 착각이라고 부정할지 모르지.

게다가…. 요정의 동굴에서 봤다고 한들 어떻게 할 것인가.

나를 아직 사랑하나요?

‘…그렇게 물을 순 없잖아.’

클로디아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데미안이 아니라고 한다면 차라리 다행이다. 하지만, 혹시라도 그렇다고 대답한다면?

자신은 어떻게 말해야 하는가?

아무리 심란한 상황이라고 한들, 클로디아는 지금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지 않았다. 모를 수도 없었다.

밤이라고 해도 후덥지근하기 짝이 없는 공기, 그리고 툭하면 튀어나오는 저주받은 마족들과 짐승들.

자르지스에 자신이 온 이유는 마왕을 무찌르기 위해서다. 데미안에게 사랑을 고백받기 위해서가 아니다.

목표를 앞에 두고 다른 곳에 정신을 팔수는 없었다.

…하지만….

클로디아는 다시 제 뒤를 힐끗 쳐다봤다. 그리고 자신을 걱정하듯 바라보던 데미안과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제풀에 놀라 빠르게 고개를 돌렸다.

‘왜 데미안과 둘만 떨어진 거야!’

차라리 시빌이었으면 나았을까? 헬렌이었으면 어땠을까? 그녀는 하필 데미안과 둘만 남겨진 작금의 상황에 개탄했다. 어색해도 이렇게 어색할 수는 없었다. 그 거울의 미로에서 그녀가 본 것을 데미안도 봤는지는 알 수 없다. 그가 모른다 해도 상황은 변하지 않는다. 클로디아는 그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아버렸고, 아무래도 그를 자연스럽게 대하기가 어려웠다.

그때였다.

“로드.”

“예예예예예?!”

갑작스레 뒤쪽에서 들려온 목소리와 숨결에 그녀는 펄쩍 뛰어올랐다. 그 바람에 바로 뒤에서 그녀를 불렀던 데미안이 화들짝 놀라 뒤로 한 발짝 물러섰다. 놀라서 휘둥그레진 클로디아의 새파란 눈과, 역시 놀라 커진 데미안의 눈동자가 마주쳤다. 그는 두어 번 눈을 껌벅이다가, 묘한 표정이 되어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놀라게 해 드릴 생각은 아니었습니다.”

“아아아아아니에요, 나도….”

“…무슨 일 있으십니까?”

“예?”

데미안의 질문에 클로디아는 거의 비명 지르듯 되물었다. 데미안은 이마를 약간 좁히곤 다시 물었다.

“아까부터 자꾸 뭔가 궁금하신 듯이 쳐다보시기에….”

“제제제가 그랬어요?!”

“…예.”

클로디아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아무래도 자신이 너무 티를 낸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데미안에게 ‘나 사랑해요?’ 하고 물을 수는 없었다. 그녀는 눈알을 두어 번 굴리고는 손을 내저었다.

“아, 아니에요. 그냥 저는, 그저, 그러니까….”

무슨 말을 해야 하지? 고민하던 클로디아의 눈에 데미안의 상처가 들어왔다. 목덜미에 새까맣게 번진, 죽음의 바다의 저주. 대번에 그녀는 풀이 죽었다.

“…그, 목이랑 팔은 괜찮은가 하고….”

“…아.”

데미안이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자신의 손을 들어 올려 봤다. 아직도 새까만 고름 덩어리들이 우툴두툴 올라와 있는, 괴물 같은 손. 클로디아는 저도 모르게 찡그린 표정으로 그 손을 쳐다봤고, 데미안은 그녀의 시선을 눈치채고 빠르게 그 손을 뒤로 감추었다.

“괜찮습니다. 저는….”

“미, 미안해요.”

데미안이 뭐라 말하려는 찰나, 데미안이 왜 손을 감추었는지 이해한 클로디아가 빠르게 사과했다. 그녀는 징그럽다거나 끔찍하다는 생각보다는, 데미안의 아픔이 걱정되었던 것이지만 막상 남자는 그녀의 걱정을 오해한 모양이었다.

클로디아는 두 손을 내저으며 필사적으로 변명했다.

“징그러워서 그런 건 아니었어요. 그저 아프겠다 싶어서….”

“…그렇습니까. 저도 그렇게 생각하시리라 생각한 건 아니었습니다.”

클로디아의 변명에 데미안이 미미하게 표정을 풀고 어색하게 중얼거렸다.

“그저 로드께서 보시기 흉할 것 같아….”

“…아녜요….”

클로디아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부인했다. 두 사람 다 한참을 그렇게 서 있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클로디아였다.

“…수르 알파.”

“말씀하십시오.”

“…고마워요.”

갑자기 무슨 소리냐는 듯 데미안이 눈을 느리게 껌벅였다. 클로디아는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

“그 안에서 손 잡아준 거 말예요.”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이제 나왔으니 잊으십….”

“저 진짜 무서웠거든요.”

데미안의 말을 자르고 클로디아가 덧붙였다.

“제 손끝 하나 보이지 않는데, 당신은 옆에서 목소리만 들리고, 인기척만 있고…. 제 옆의 당신이 다른 사람이 아닐까, 당신을 흉내 낸 괴물은 아닐까 싶어서 더럭 겁이 났어요.”

“….”

“고마워요. 당신 온기가 정말 많은 도움이 되었어요.”

클로디아 딴에는 정말 많은 용기를 낸 말이었다. 그녀는 그렇게 말해놓고는, 슬쩍 데미안을 바라봤다. 그는 여느 때와 같이 미미하게 풀린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클로디아는 조금 더 용기가 났다. 하지 못한 말을, 지금이라면 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예.”

“…미안해요.”

사과를 입 밖에 낸 클로디아는 말없이 데미안을 바라봤다.

그 순간 모든 것이 확실해졌다. 주변의 모든 것이 그녀에게 한꺼번에 쏟아졌다.

새까맣게 넘실거리는 검푸른 바다. 그 위에는 새파란 어둠 사이 하얀 달이 떠 있었다. 달빛에 반짝이는 해변과 희게 부서지는 파도. 후덥지근하고 짠 바람에 흩날리는 모래알과, 오랜 여행에 지저분해진 행색의 남자.

“괜찮습니다.”

남자가 아주 희미하게 웃었다. 그 눈빛은 사무치게 다정했다. 클로디아는 자신이 이 순간을 아주 오랫동안 기억하게 될 것을 직감했다.

그녀가 다시 한번 사랑에 빠지게 된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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