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장. 공주와 기사 (15/30)

2장. 공주와 기사



 

데미안은 준수한 소년이었다.

어린애들은 대체로 뼈가 자라는 과정에서는 그 외모가 준수하기가 꽤 어렵다. 어릴 적에는 준수하다고 해도, 나이가 어느 정도 들어서도 괜찮은 외모를 유지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수르 미다프가 양자로 들인 소년은 내내 준수했다. 매일 성의 한켠, 햇볕이 잘 드는 곳에 가만히 앉아 있는 데미안을 보고 수군거리고 지나가는 어린 시녀들이 늘었다. 가지런하다 못해 어여쁜 소년은 피아를 구분하기 어려울 적부터 시선을 모았다.

포르투의 국왕은 데미안을 왕자의 말 상대로 삼았다. 수르 미다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소년은 쥬버린과 함께 교육받았다. 쥬버린의 말 상대이기에, 쥬버린과 같은 수준의 교육을 받는 것이 지당하다는 것이 왕의 의견이었다.

“말상대를 하려면 교육 수준도 맞아야 하지 않겠는가?”

물론 그건 딸인 클로디아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어느 순간부터 데미안과 쥬버린 사이에 앉아 있는 금발의 소녀를 보고 데미안은 처음에는 막연히 불편해했다. 수업 시간 내내 눈을 빛내며 수업을 경청하는 쥬버린과 달리 소녀는 언제나 딴짓을 하기 일쑤였다. 그리고 데미안은, 자신의 시선을 언제나 그녀에게 뺏기고 있다는 것을 머잖아 깨달았다.

쥬버린만 옆에 있을 때는 데미안도 가만히 수업을 들으면 됐다. 가끔 선생이 데미안에게 답을 요구하면, 데미안은 어떤 대답이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클로디아가 온 이후로는 영 어려워졌다. 소녀는 둘 사이에 앉아 다리를 쭉 뻗고 꼼지락거리거나, 손을 가만히 두지 못했다. 비싼 깃펜을 잉크에 적셔가며 낙서를 했고, 까맣게 물든 손을 보고 울상을 지었다.

끝내는 수업하다 말고, 선생에게 빨리 자신의 손을 씻겨달라고 졸랐다. 그리고 데미안은 어김없이 그런 소녀에게 생각을, 의식을 빼앗기기 일쑤였다. 가끔은 선생에게 혼난 소녀가 시무룩한 채 가만히 있다 해도 마찬가지였다. 데미안의 검푸른 눈은 언제나 결국 소녀에게 머물렀다. 그 조그만 소녀가 제 이름을 지어준 상대라는 것은, 소녀는 잊어버리고 그만 기억하고 있는 사실이었다.

클로디아는 쥬버린과 불과 두 살 차이였으나, 그 나이대에 두 살 차이란 어마어마한 간극이다. 서른 살과 예순 살의 수준 차이쯤 될까?

그녀는 수업을 듣는 쥬버린을 쿡쿡 찌르거나, 간지럽혔지만 그때마다 쥬버린은 어린애치고는 엄청난 인내심으로 참아낸 후 마저 수업을 들었다. 클로디아의 상대를 하지 않고 무시하는 것이 그때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것을 쥬버린은 이미 알았던 것이다.

그러나 데미안은 그럴 수 없었다. 흘끗흘끗 자신을 쳐다보는 데미안을 클로디아가 모를 리 없었다. 그녀는 파란 눈을 빛내며 데미안의 팔을 붙들고 놀러 나가자고 칭얼거리곤 했다.

게다가 한술 더 떠, 클로디아가 쥬버린을 붙들 때는 넌지시 말리던 선생들은, 클로디아가 데미안을 붙들고 지분대기 시작하면 ‘뭐 하니? 어서 그 방해꾼을 데리고 정원으로 사라지지 않고’라는 눈빛을 보내기 일쑤였다. 결국 데미안은 클로디아의 등쌀에 못 이겨 그녀의 손장난을 받아주거나, 그녀가 입에 넣어주는 간식거리를 받아먹게 됐다. 시간이 조금 지난 후에는 클로디아의 손을 붙들고 테라스에 나가주기도 했다. 그동안 쥬버린은 마음 편하게 공부할 수 있었다.

유난히 바람이 불던 날이었다. 덜컹덜컹 흔들리는 창문 소리에 클로디아는 일찌감치 집중력을 놨다. 쥬버린과 데미안에게 대륙의 왕국들이 가지고 있는 혼맥을 외우게 하던 선생은 흠, 흠 하고 헛기침을 했다.

“클로디아 공주님, 나중에 커서 어떤 왕자님과 결혼할지 궁금하지 않으세요?”

클로디아가 그제야 눈을 깜박이며 선생을 올려다봤다. 갈색 머리를 보기 좋게 틀어 올린 선생은 부드럽게 웃으며 혼맥도의 한쪽을 가리켰다.

“공주님도 나이를 먹으면 시집을 가실 거잖아요?”

“나 시집가요?”

“아주 나중에 어른이 되시면요. 보세요.”

선생은 손가락을 꼽아가며 왕자들의 이름을 줄줄 외웠다. 클로디아와 나이가 같은 왕자, 한 살이 많은 왕자, 세 살이 많은 왕자, 열 살이 넘게 많은 왕자까지.

클로디아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렇게 많아요?”

“그러믄요.”

“하지만 어마마마는 아바마마와만 결혼했잖아요.”

그제야 선생은 클로디아가 어떤 착각을 하고 있는지 깨달았다. 공주님은 그 모든 왕자님과 모두 결혼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공주 전하께서도 한 분과 결혼하셔야 해요.”

“한 명만 결혼해야 해요?”

“그럼요.”

“그럼 쥬버린 오라버니와 결혼할래!”

왕자 중에 쥬버린 오라버니가 가장 좋아!

클로디아의 말에 선생은 가볍게 웃고는 타일렀다.

“쥬버린 왕자님은 안 돼요. 가족이니까요.”

“가족은 안 돼?”

“결혼은 가족이 아닌 사람과 가족이 되는 거야, 클로디아.”

그때까지 옆에서 듣고 있던 쥬버린이 부드럽게 일렀다. 가족이 아닌 사람과 결혼함으로써 가족이 되고, 왕국 간의 신뢰를 두텁게 한다-는 이야기를 클로디아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혼맥의 개념을 설명하려니 영 복잡했고, 저렇게 말하는 것이 그때는 쥬버린의 최선이었다.

클로디아는 눈을 깜박이며 물었다.

“그럼 누구랑 해야 해?”

“그건 네가 결정하는 거지, 클로디아. 네 가족이 돼 주었으면 싶은 사람을 골라서, 함께 가족을 꾸리는 거야.”

“…수르 미다프처럼?”

클로디아가 가장 좋아하는 것이 수르 미다프였으니, 어쩌면 당연한 대답이었을 수도 있다. 그 대답에 선생은 큽 하고 웃고 말았고, 쥬버린은 난감한 표정이 됐다.

“수르 미다프는… 나이가 너무 많잖아.”

“나이가 많으면 안 돼?”

클로디아는 혼맥도에서 열 살 많은 왕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 왕자도 나이가 많은데?”

“…수르 미다프는 아주, 아주 나이가 많잖아. 저 왕자는 조금 많고.”

“열 살은 조금이야?”

어린 공주의 궁금함은 끝 간 데 없었고, 똑똑하기로 이름난 쥬버린도 클로디아의 의문에 다 답하기는 어려웠다. 쥬버린은 잠시 고민하다가, 궁여지책으로 데미안의 어깨를 잡았다.

“그럼 데미안은 어때?”

“데미안?”

“데미안은 수르 미다프보다 나이가 어리고, 데미안과 결혼하면 수르 미다프도 네 가족이 된단다, 클로디아.”

열 살도 되지 않은 쥬버린은 스스로 그것이 꽤 괜찮은 대답이라고 생각했다. 클로디아는 눈을 깜박이며 데미안을 올려다봤다. 선생은 난감한 표정으로, 하지만 입을 닫고 아이들의 문답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윽고 공주가 입을 열었다.

“데미안은 왕자가 아니잖아?”

쥬버린은 빙그레 웃었다.

“하지만 네가 하기에 따라서는 네 왕자가 될 수도 있지.”

어린 클로디아는 쥬버린의 말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으나, 어쨌든 데미안과 결혼할 수 있다는 것만은 이해한 듯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좋아!”

쥬버린이 싱긋 웃어 보였다. 그때 클로디아가 물었다.

“그런데 데미안은 나랑 가족이 되고 싶어?”

데미안은 그때 자신이 뭐라고 대답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리 흔쾌히 대답하지는 않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지금은 그래도 제법 말이 늘었지만, 그때의 데미안은 정말로 입을 여는 것 자체가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클로디아가 그래, 좋아라고 답했던 순간만은 이따금씩 기억나곤 했다.

좋아, 라고 말하던 입 모양과 가족이 되고 싶냐고 묻던 눈망울을 생각하면 데미안은 마치 그 순간으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 됐다. 바람에 흔들리던 창문과 어둑어둑한 실내, 혼맥도가 펼쳐져 있던 벽과 선생의 어색한 미소. 흔들리던 촛불과 소매 끝에서 삐져나온 자신의 손가락 끝까지 모두.



 

***



 

나이를 조금 더 먹은 데미안과 쥬버린은 노선이 나뉘었다.

그것은 아주 불행한 어떤 사고 때문이었다. 인자하던 포르투의 국왕은 사고 이후 피아를 구별하지 못했다. 어린애처럼 변해버린 국왕은 여전히 좋은 사람이었으나, 네 개의 대륙을 다스릴 수는 없었다.

열세 살의 쥬버린은 왕 대신 왕국들을 다스리기에 나섰다. 어린 왕자를 우습게 보는 왕국들이 행패를 부렸으나, 그 행패를 쥬버린은 능숙하게 정리해나갔다. 쥬버린이 왕국들을 다스린 지 몇 년이 흐르자 그의 능력을 의심하는 이들은 없었다.

다만 쥬버린은 바빠서 예전처럼 데미안과 말을 섞을 시간이 많지 않았다. 자연스레 데미안을 찾아오는 이는 적어졌다. 쥬버린은 물론이고, 쥬버린을 모시던 시종들도 데미안을 찾아오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데미안이 예전처럼 햇빛 아래서 맥없이 앉아 있지는 않았다. 가장 큰 이유는 수르 미다프였다. 데미안을 가만히 놔두었던 예전과 달리 수르 미다프는 데미안을 훈련시키기 시작했다. 자신의 종자로 들인 후 심부름을 시키며, 검술의 궤적을 따르게 했다.

사람들은 수르 미다프가 자신의 양자에게 뒤늦게 유난스러운 부모처럼 구는 이유에 대해 불안감 때문이라고 말했다. 왕이 치매에 걸리며 능력 있는 대신들은 일에 시달려 피로해져 갔다. 쥬버린 왕자는 자신의 사람을 만들 틈도 없이 국정에 노출됐다. 수르 미다프는 여전히 포르투의 수호자였으나 수르 미다프만큼 왕자를 헌신적으로 지킬 자가 없었다. 그래서 수르 미다프가 양자를 닦달해 왕자의 검으로 쓰려는 것이라고 모두들 떠들어댔다.

그리고 어린 공주는 홀로 남았다.

클로디아가 툭하면 바쁜 쥬버린의 옷자락을 붙들고 눈물을 떨어트린 건 당연했다. 클로디아는 아버지와 오빠와 데미안, 셋 다 순식간에 잃어버렸다. 아침에 검을 휘두르는 기사단의 수련장에서 데미안이 쉬기를 기다리다가 끝내 돌아가는 일이 잦아졌다. 점심에 제 오라버니와 식사를 하겠다고 왔다가 식사는 뜨는 둥 마는 둥 일에 치이는 쥬버린과 말 한마디 하지 못하고 마지막에는 혼자 식탁에 남곤 했다.

그녀를 가르칠 사람도 없었다. 쥬버린의 선생들은 현명한 만큼 대부분 쥬버린을 도와 일했기 때문이다. 공주를 가르칠 만큼 똑똑한 이들은 모두 일해야 했다. 반대로 말하면 포르투 왕은 그만큼 많은 일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연스럽게 공주는 시녀들의 손에 자랐다. 물론 쥬버린이 공주를 완전히 내팽개치진 않았다. 다만 공부에 그다지 집중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제 혈육에게 공부를 강요할 만큼 모질지도 못했다. 쥬버린은 고민 끝에 클로디아를 ‘공주답게’ 가르치기로 했다.

클로디아는 포르투 왕성의 그늘에서 쑥쑥 자랐다. 유달리 키가 컸던 왕을 남매가 모두 닮았다. 하지만 키가 컸다고 마음까지 자라지는 않았다. 오후의 햇살 아래 차를 마시며 깔깔 웃다가도, 공주는 드레스 자락을 쥐고 우두커니 앉아 있곤 했다.

외로움을 토로하며 칭얼거리는 그녀에게 쥬버린은 선물을 잔뜩 안겼다. 클로디아가 어떤 무리한 요구를 해도 쥬버린은 들어주었다. 그 또한 갑자기 홀로 된 제 혈육의 외로움을 모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쥬버린이, 클로디아의 짝으로 데미안을 지목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준수하고 성실한 데다가 잘난 척할 줄 모르는 소년을 싫어하는 이는 없었다. 게다가 클로디아는 데미안을 좋아했다. 왕의 빈자리, 바빠진 오빠를 제외하고 나면 외로운 공주가 애정을 갈구할 상대는 단 하나뿐이었다. 열두어 살이 된 클로디아가 무도회에 가노라면 그 옆자리를 지키는 것은 언제나 데미안이었다.

클로디아의 열네 살 생일에 쥬버린은 공주의 약혼자로 데미안 알파를 지목했다.

“클로디아 테 포르투와 데미안 알파의 약혼이라는 기쁜 소식을 전하려 하오.”

그 말에 연회에 있던 모두가 놀라 눈을 부릅떴으나 곧 미소 지었다. 언제나 붙어 다니던 두 사람의 약혼은 모두가 예상한 바였다. 클로디아는 뛸 듯이 기뻐하며 손을 맞부딪치곤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멈칫했다.

제 왼쪽 한발 뒤에 항상 서 있던 소년의 눈에는 경악과, 이해할 수 없다는 감정이 서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클로디아가 알아차린 감정을 다른 이들이라고 모를 리 없었다. 축하의 인사를 건네러 다가왔던 이들이 멈칫했다.

“데미안?”

클로디아가 조심스럽게 그를 부를 때까지, 소년은 얼어붙은 듯 서 있었다. 그러다가 그녀의 말에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클로디아를 내려다봤다.

클로디아는 애써 웃었다.

“기쁘지 않아요?”

돌아온 대답은 예상 밖의 것이었다. 혼란만이 가득한 검푸른 눈동자로 그녀를 내려보던 소년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

“이건… 안 됩니다.”

공주와 기사의 약혼은 시작부터 파국이었다.

하고 싶은 건 다 했고, 갖고 싶은 건 다 가졌다. 어릴 적에는 왕이 클로디아를 엄히 가르쳤지만, 그마저도 왕이 아프고 나서는 모두 한층 더 클로디아를 귀히 여겼다. 모든 사람들이 클로디아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었고, 그녀가 원하지 않더라도 일단 갖다 바쳤다.

그러니 클로디아에게 데미안의 거절은 충격적이었다.

공주는 연회에 모인 사람들이 쳐다보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울었다. 기사는 더듬거리며 사람들 앞에서 자신이 공주에게 너무나 모자란 사람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그 대답도 공주의 눈물을 그치게 하지는 못했다. 클로디아 테 포르투는 납득하지 못했고, 쉬어야겠다며 들어갔다. 사람들은 웅성거리며 데미안을 쳐다봤다. 기사는 망설이다가 클로디아를 쫓았다.

한참 후에야 공주가 도로 나왔다. 울었던 것이 거짓말인 양 환한 얼굴이었다. 그제야 사람들은 안심했다. 클로디아는 방긋 웃으며 데미안과 첫 춤을 추었다. 데미안의 얼굴이야 여전히 굳어 있었으나, 그가 무심한 얼굴 외에 다른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이 도리어 희귀한 일이었다.

연회가 끝나고 나서 클로디아는 커다란 티 파티를 열었다. 포르투에 체류 중인 공주들과 귀족 아가씨들이 모여 그날의 일에 관해 궁금해했다.

“알파 경이 자신에게는 제가 너무 과분하다고 생각했대요. 하지만 저를 사랑한다고 말해주셨답니다.”

보드라운 뺨을 붉히며 저렇게 말하는 클로디아를 보고 모두가 부러워했다. 그야 네 개의 대륙을 모두 통치하는 포르투의 귀하디귀한 공주님이다. 수르 미다프의 양자에게는 과분하게 느껴지기도 할 것이다.

좋은 일에 앞서 두려워하는 감정이야 흔한 일이며, 키 크고 준수한 청년에게 의외의 수줍은 면모가 있었다는 것에 모두가 놀라워하면서도 클로디아를 부러워했다.

하지만 그것이 거짓말이라는 걸 알았어도 그랬을까.

클로디아가 티 파티에서 한 말은 네 개의 대륙에 모두 퍼졌다. 그녀의 생일 연회에서 일어난 소동에 관해 귀를 쫑긋 세웠던 이들이 그제야 납득했다. 호사가들은 좋은 입방아 거리가 사라졌다고 아쉬워했다. 납득하지 못한 것은 데미안, 본인뿐이었다.

공주가 했다던 말을 전해들은 날 저녁, 데미안은 클로디아와 식사했다. 쥬버린이 바빠 클로디아와 식사할 짬을 내지 못하게 된 이후로, 데미안은 대부분의 저녁 시간을 클로디아와 함께 보내곤 했다. 평소 두 사람의 식사 자리에는 꽤 많은 시종들이 시중을 들었으나, 그날 데미안은 시종들을 모두 내보냈다.

“왜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까.”

다그치지도, 그렇다고 책망하는 말투도 아니었다. 그러나 클로디아는 데미안이 자신을 비난한다고 느꼈다. 열다섯 해를 살아올 동안 그녀에게 그런 식으로 말하는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다. 클로디아는 이를 앙다물고 대꾸하지 않았다.

데미안은 한참 후 다시 말했다.

“저는 그런 적이 없지 않습니까.”

연회에서 도망쳐 엉엉 우는 공주를 시녀들이 쩔쩔매며 달랬다. 데미안은 한참 동안 그 앞에 서 있었다. 클로디아가 울음을 그치고, 부은 눈을 가라앉힐 때까지도 데미안은 그 앞에 우두커니 서 있을 뿐이었다. 클로디아는 데미안을 쫓아냈고, 데미안은 그녀가 화장을 고치는 것을 기다렸다가 그녀가 연회장에 들어가자 그 뒤를 따랐다.

그에게 한마디도 건네지 않았던 클로디아는 무도회장으로 들어가자마자 방긋 웃으며 데미안의 팔을 붙들었다. 첫 춤을 춘 것은, 순전히 클로디아가 데미안을 데리고 원 안으로 들어갔기 때문이었다. 데미안은 그녀가 이끄는 대로 춤을 추었으며 간헐적으로 클로디아가 던지는 인사와 말들에 대답하고 추임새를 넣었다. 하지만 클로디아가 한 것 같은 말은 단 한 번도 하지 않았었다.

두 사람은 식탁을 사이에 두고 대치했다. 한참 후에야 바닥만 쳐다보던 클로디아가 입을 열었다.

“정말 내가 싫어요?”

“…싫은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게 싫은 거잖아.”

클로디아가 내뱉듯 말했다. 데미안은 뭐라고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어 그녀가 숙인 이마만 바라봤다. 클로디아는 입술을 비죽이며 감정을 진정시키려 노력하는 듯했다.

“그러면 거기서 내가 약혼자에게 차였다고 말할까요?”

데미안은 당혹스러웠다. 차이다니. 언감생심 그런 생각은 해 본 적도 없었다. 그는 식탁에서 주먹을 쥐었다 폈다를 반복했다. 머릿속에 너무 많은 것들이 지나갔기 때문이다. 한참 동안 대답이 없는 데미안에게 클로디아 또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길고 긴 대치 상태를 끝낸 것은 공주였다.

“…쥬버린 오라버니가 깜짝 놀라게 해 주려고 그랬다고 사과했어요.”

사과를 받은 것은 데미안도 마찬가지였다. 쥬버린은 누가 보나 클로디아가 데미안을 따르고 있었고, 데미안 또한 클로디아를 아끼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에 그랬노라고 그에게 말했다. 그러면서도 쥬버린은 슬며시 데미안에게 클로디아를 달래 달라고 권유했다.

데미안은 그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막상 클로디아를 대면하니 그는 그럴 수가 없었다. 무슨 말로 그녀를 달래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클로디아는 언제나 자신이 원하는 것을 데미안에게 말하는 데 거리낌 없었다. 하지만 이번의 클로디아는 도무지 뭘 원하는지 알 수 없었다. 데미안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날, 사람들 앞에서 그런 것은 정말로… 죄송합니다.”

“….”

“전하에게 모욕감을 안겨드리려 한 건 아니었습니다.”

그 말에 클로디아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봤다. 그 눈 안에 작은 원망이 담겨 있었다. 데미안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

“그거 말고 할 말은 더 없나요?”

“….”

“…정말?”

답 없이 손바닥만 쥐었다 펴는 그를 보고 클로디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데미안은 나를 사랑하지 않아요?”

여전히 답은 없었다. 클로디아는 기가 막혔다. 그녀는 맹목적인 애정을 갈구하기는 했으나 자신이 데미안에게 바라는 애정이 어떤 것인지 모를 정도로 바보는 아니었다.

클로디아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사실은 내가 쥬버린 오라버니에게 졸랐어요.”

“….”

“데미안이 좋다고요. 결혼한다면 데미안과 하게 해 달라고 했어요.”

그 말에 데미안은 목이 졸리는 듯한 기분을 느꼈으나 간신히 입을 열었다.

“저 같은 것보다… 더 괜찮은 사람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결국 클로디아는 벌떡 일어나 나가 버렸다. 데미안은 망연자실하게 앉아 있다가, 들어온 시종들이 손도 대지 않은 식탁을 보고 불안해하는 소리에 일어나 힘없이 퇴장했다.



 

***



 

공주가 티 파티에서 한 말을 전해 들은 것은 수르 미다프도 마찬가지였다. 어느 날 아침, 수르 미다프는 마뜩잖은 얼굴로 수련장에 버티고 서서는 훈련 중이던 데미안에게 다그쳐 물었다.

“네게 그렇게 말할 수 있을 정도의 언변이 있다니 실로 놀라운 일이로구나. 진짜냐?”

“….”

“클로디아 공주님은 거짓말을 잘 못 하는데, 거짓말이 아니라기엔 네놈 말재주가 영 변변찮고….”

사실이었으나 또한 사실이 아니었다. 클로디아는 거짓말을 하면 얼굴이 빨개지곤 했다. 그녀가 거짓말을 하려고 결심하자마자 귀부터 빨개져서, 모두가 그녀가 거짓말을 하면 금세 알았다.

하지만 그날의 클로디아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데미안이 하지 않은 말을 지어냈다. 데미안은 도무지 클로디아가 왜 그랬는지 짐작하기도 힘들었다.

아니, 사실은 알고 있었다.

데미안은 수르 미다프의 말에 답하지 않고, 마저 검을 휘둘렀다. 수르 미다프가 코를 찡그렸다.

“망할 놈. 아무튼 남의 말 무시하는 데에는 도가 텄어.”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답할 말이 없어서였다. 클로디아 공주가 거짓말을 했다고 답할 수도, 그렇다고 자신이 그렇게 말했다고 할 주변머리도 없었다. 데미안은 검을 잡은 손에 힘을 주며 클로디아를 떠올렸다.

어린 공주가 한때, 매일 데미안을 찾은 적이 있었다. 아마 쥬버린과 클로디아가 아주 작은 일로 씩씩대며 싸운 직후였을 것이다. 클로디아는 쥬버린에게서 데미안을 빼앗겠다며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데미안을 불렀다.

그즈음의 클로디아는 데미안과 아침 식사를 하고, 점심식사를 하고, 쥬버린에게 함께 가 공부를 하고, 저녁도 먹은 후 침대에서 데미안의 손을 쥐고 잤다. 데미안은 항상 그 작은 여자애의 통통한 손가락 안에 제 손가락을 쥐여 어색하게 앉아 있다가, 공주가 잠들면 손가락을 조심스럽게 빼냈다.

조금 더 나이를 먹은 후의 클로디아는 그런 것을 기억하지도 못하는 모양이었지만, 데미안은 아직도 그때의 온기를 가끔 기억하곤 했다. 그 무렵 조그만 손이 발휘하는 힘은 놀랍도록 센 것 같아서, 데미안은 가끔 미다프 경보다 클로디아가 더 강력한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이를 악물고 검을 휘두르던 데미안의 손에서 검기가 희게 뻗어 나갔다.

수르 미다프가 혀를 찼다.

“저런 놈에게 검기라니, 돼지 목의 진주지, 암.”

물론 말과는 달리 수르 미다프가 자신을 자랑스러워한다는 것을 데미안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수르 미다프는 데미안이 검기를 쓰는 모습을 보고 만족스러워하다가도, 문득문득 한숨을 쉬었다. 어린 나이에 검기를 깨우친 소년을 수르 미다프는 어떻게 다뤄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가끔 수르 미다프는 왕의 정신이 온전했을 때를 그리워했다.

“아버지 노릇은 폐하께서 백배는 더 잘하실 텐데 말이다.”

그렇게 말하며 수르 미다프는 데미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데미안은 수르 미다프와 다른 이유로 왕을 그리워했다. 왕이 있었다면, 그는 맹세코 클로디아를 자신에게 보내지 않았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기 때문이다.

자신은 클로디아에게, 그녀가 고스란히 보내는 애정을 그만큼 돌려줄 수 없었다. 그럴 자격도 없었다. 아주 더럽고 조그맣고 비참했던 스스로를 기억하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녀를 사랑하지 않아서도 아니었다. 사랑이라는 것은 때로는 일방적이기 짝이 없지만, 적어도 데미안은 클로디아를 싫어하지 않았다. 아니, 싫어하지 않는다는 말로는 부족했다.

데미안은 거기까지 생각하고 손에 든 검에서 검기를 거둬들이고 수르 미다프 쪽을 향해 섰다. 날이 무딘 단검으로 머리를 긁고 있던 수르 미다프가 눈썹을 들어 올렸다.

데미안이 입을 열었다.

“…공주 전하께서는 기억하지 못하실 일이 있습니다.”

“뭐?”

뜬금없는 말머리였지만, 수르 미다프는 그의 양자가 보기 드물게 제 속 얘기를 하고 있음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그는 단검을 슬그머니 내려놓고 팔짱을 끼었다.

“…제 서임식 날에, 전하를 오랜만에 만났습니다.”

아마 클로디아는 정말로 기억하지 못할, 그런 순간이 있었다.

데미안은 수르 미다프에게 이끌려 이곳저곳을 수련이라는 명목으로 돌아다녔고, 바쁘고 인기 많은 공주였던 클로디아는 데미안이 없어도 할 일이 많았다.

검기를 발현했음에도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데미안의 기사 작위 수여는 계속 미뤄져 왔지만, 기어이 미룰 수 없는 때가 왔다.

뒷배경도, 이렇다 할 말재주도 없는 소년이 어린 나이에 두각을 드러내는 것에 관해 수르 미다프는 혀를 찼으나 검기를 발현한 소년을 그냥 둘 수도 없었다. 데미안은 서임식을 위해 지급된 갑옷을 입었다. 종자가 없는 신임 기사인지라 기사단의 시종들이 도와주었으나 시간을 꽤 허비한 참이었다. 데미안은 서둘렀으나 사람들은 미래의 기사단장에게 인사를 건네두고 싶어 했다. 열몇 번째의 인사에 데미안이 내심 진저리를 치던 참이었다.

‘어머나, 데미안.’

자신을 아는 척하는 말에 이번엔 또 누구야-라고 말할 뻔했다. 그러나 뒤로 돌았을 때, 데미안은 깜짝 놀랐다. 자신의 가슴께까지밖에 오지 않는 작은 소녀가 거기 있었다. 밝은 금발을 곱슬곱슬하게 말아내리고, 뺨은 사과같이 붉힌 어여쁜 소녀. 그녀가 푸른 눈을 뜨며 활짝 웃더니, 주변을 의식한 듯 존댓말로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이에요!’

클로디아였다.

그리고 그 순간 데미안은 깨달았다. 세상에는 오랜만이에요, 라는 말 한마디로 사랑을 일깨우는 소녀도 있음을.

사랑이라는 것은 들불과 같아 한 번 일어난 순간부터는 걷잡을 수 없다. 서임식 날 아침의 데미안이 그랬다.

데미안은 갑작스럽게 자신의 척추를 타고 올라오는 충동에 절로 놀라버렸다. 소녀의 흰 뺨에 입 맞추고 싶은 충동이었다.

그것은 정말로 깜짝 놀랄 만큼 갑작스러운 감정이었다. 여태까지의 데미안이 그녀를 싫어했다고는 결코 말할 수 없으나, 그렇다고 해서 그녀에게 입 맞추고 싶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당연하게도 데미안은 당황했다.

식은땀이 배어 나왔다. 뭘 어찌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는 눈을 깜박이고 있는 소녀 앞에서 망연자실했다. 그러나 클로디아는 그가 뭘 할 틈도 없이 팔을 벌렸다. 잠시 소녀가 뭘 하는지 알아채지 못했던 데미안은 다음 순간 화들짝 놀라 몸을 굳혔다.

클로디아는 팔을 벌려 그를 꽉 끌어안았던 것이다.

“기사 서임식이라지, 축하해! 나도 거기 가는 길이야!”

클로디아는 언제나 자신의 아버지를 만나면 꼭 끌어안는 습관이 있었다. 그건 쥬버린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사랑을 많이 받은 소녀였고, 그녀는 언제나 가족에게는 아낌없이 제 사랑을 내주었다. 새침데기처럼 예쁜 척 굴기도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남들에 한해서였다. 적어도 데미안은 그녀에게 남은 아니었다. 지금도 기껏 존댓말을 했다가 곧장 친근하게 말해버리는 것을 보면 그랬다.

데미안 또한 그것을 알았기에 더는 당황하지 않으려 애썼다. 그러나 다음 순간, 데미안은 찌르는 듯한 시선을 느꼈다.

성의 복도에 선 모든 사람들의 눈이 이쪽을 향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눈빛들은 저열하게 번들거렸다. 데미안은 바로 그 눈빛들이 뜻하는 것을 알아차렸다. 또래보다 훨씬 키가 크고, 사랑스러운 데다가 포르투의 유일한 공주님 클로디아가 서슴없이 끌어안는 상대가 쥬버린이나 국왕이 아닌, 데미안인 것에 대한 의문.

‘왜 너를?’

눈빛 안에는 의문을 가장한 비난이 가득했다. 데미안은 그 눈빛들이 뜻하는 바를 알았다. 얼마 전의 안타까운 사건 이후로 자신이 이 왕성에 있을 자격이 없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그녀와 얽히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데미안은 그 뺨을 쥐고 입 맞추고 싶은 소녀야말로 자신에게 가장 안 어울리는 여인임을 깨달았다.

정확히는, 자신이 어울리지 않았다.

그는 가만히 손을 올려, 클로디아의 어깨를 쥐고 밀어냈다. 클로디아가 눈을 깜박거리며 그를 올려다봤다. 데미안은 딱딱하게 몸을 굳혔다.

얼굴이 빨개졌다. 소녀의 어깨를 쥔 순간 속절없이 끌어당겨 입 맞추고 싶은 마음에 방금 전까지의 깨달음은 다 잊어버릴 뻔했다.

“데미안?”

“죄송합니다.”

데미안은 눈이 동그래진 클로디아를 놔두고 그대로 몸을 돌렸다. 들불은 커지기도 전에 가라앉았다.



 

***



 

데미안은 보기 드물게 솔직한 소년이었다. 오래전에 자신이 한순간 공주에게 품었던 감정을 데미안은 수르 미다프에게 덤덤하게, 정확히는 덤덤한 척하며 털어놨다. 이야기를 듣고 수르 미다프는 혀를 찼다.

데미안은 수르 미다프에게 자신이 클로디아를 포기한 듯 말했으나, 수르 미다프는 정말로 포기한 자는 그 포기를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데미안의 이야기를 듣자마자 쥬버린을 찾았다.

대신들에게 둘러싸여 있던 쥬버린이 수르 미다프의 방문에 웃으며 그를 맞았다. 수르 미다프는 빙그레 웃고 입을 열었다.

“클로디아 공주님에게 제 자식놈은 너무 아깝습니다.”

“…수르 미다프.”

쥬버린이 온화한 미소로 응답했다.

“클로디아에게 데미안이야말로 가장 좋은 남편이 될 겁니다.”

“좋은 오빠가 응당 좋은 남편이 되리란 기대를 한 몸에 받는 이유야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만, 데미안은 아닙니다.”

“음….”

보기 드물게 완강한 수르 미다프에게 당황한 쥬버린은, 횡설수설 항변을 내놓았다.

“클로디아는 데미안을 좋아하는걸요. 데미안도….”

“공주님은 더 좋은 남자를 만나실 수 있을 겁니다. 이 포르투의 공주님이시니까요.”

“…수르 미다프. 말 속에 가시가 있군요.”

쥬버린은 한숨을 쉬고 주변의 대신들을 물렸다. 흥미로운 표정으로 두 사람의 대치를 보고 있던 대신들이 빠르게 물러갔다. 수르 미다프는 완고한 얼굴로 쥬버린 앞에 서 있었다. 쥬버린은 팔짱을 끼고 의자의 등받이에 기대 말했다.

“그렇게 말한다면, 데미안은 어떻습니까? 수르 미다프의 말은 마치 데미안에게는 클로디아보다 더 좋은 여자가 있다는 것으로 들리는데? 설마하니 데미안이 사랑하는 여인이 있는 건 아니겠고.”

쥬버린이 눈을 가늘게 떴다. 수르 미다프는 옅은 미소를 띤 채 말했다.

“클로디아 공주님이 네 개의 대륙을 통틀어 가장 유명하고 아름다운 신붓감이라는 것은 저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데미안에게 좋은 신붓감은 아니다?”

언제나 온화한 왕자는 그 동생에 대해 말하는 기사단장의 말투에 울컥한 듯 보였다. 포르투 국왕이 좋지 않은 일을 당했을 때도 무너지지 않았다는 단단한 마음이, 그 동생의 일에 한해서는 파도처럼 일렁이는 모양이었다.

수르 미다프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데미안에게는 아닙니다.”

“어째서입니까?”

“그건 왕자님께서 가장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 지금 공주님과 데미안이 어떤 상태인지 알고 계십니까?”

쥬버린 왕자의 일방적인 약혼 발표 이후 살얼음을 걷는 듯한 성내의 분위기를 왕자라고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쥬버린 왕자는 일부러 모른 척했다.

그는 클로디아가 데미안을 만날 때마다 까르르 웃는 모습을 몇 년간 봐왔고, 지금 당장은 어색하더라도 곧 사이가 회복되리라 믿었기 때문이다.

쥬버린은 손을 내저었다.

“어릴 적 동기와 갑작스레 결혼하라면 어색할 만도 하지요. 내버려 두면 괜찮아질 겁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수르 미다프. 포르투 왕가와의 결혼은 수르 미다프에게도 큰 경사 아니오?!”

결국 쥬버린은 벌컥 짜증을 내고 말았다. 클로디아의 약혼 발표 소식에 아쉬움을 표하는 편지들이 수백 통이었다. 대부분은 클로디아에게 혼담을 넣었던 왕국의 왕자들이 보낸 연서였다.

“네 개의 대륙을 다스리는 왕국의 공주입니다. 그런 여인이 며느리로 집안에 들어온다는 건 영광이라고 모두가 말합니다!”

“그게 영광이라고 생각할 사람이었으면 제가 여기 왔겠습니까?”

“수르 미다프.”

쥬버린이 한숨을 쉬었다.

“아바마마께서 평소 그대의 고집을 꺾을 수 없어 고개를 젓는 것을 여러 번 보았지만, 막상 내 일이 되니 난감하고 속이 다 뒤집히오.”

“데미안의 속이라고 편안할 줄 아십니까?”

“뭐가 문제요, 대체?”

중년의 기사는 어린 왕자를 바라봤다. 겨우 열여섯이 된 왕자의 어깨에는 백 개의 왕국이 얹혀 있었다. 아무리 유능하고 현명한 왕자라도, 모든 것을 잘할 순 없다. 반드시 뭔가 한 가지는 놓치게 마련이다. 왕자는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었다.

수르 미다프는 한숨을 쉬었다.

데미안은 클로디아를 사랑하고 있었다. 수르 미다프가 그 나이의 소년이 앓고 있는 미열을 짐작하지 못할 리 없었으며, 데미안은 그에게 솔직하게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은 참이었다. 나이를 먹은 수르 미다프 또한 비슷한 순간들을 거쳐온 바 있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수르 미다프는 소년이 안쓰러웠다.

데미안 알파에게는 시간이 필요했다. 데미안이 만약 좋은 집에서 사랑받고 자란 소년이었다면 수르 미다프가 이런 식으로 마음을 써야 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쥬버린의 실수를 배려로 받아들이며 제게 생긴 행운을 기꺼이 누렸을 수도 있다. 클로디아에게 향한 마음을 천천히 키워나가며 순진하고 귀여운 첫사랑을 만들었을지 모르지.

하지만 데미안은 그럴 수 없는 처지였으며, 그런 성격을 가진 소년도 아니었다. 뭣보다 데미안은 자신을 뒤덮은 죄책감에서도 아직 헤어나지 못했다.

쥬버린은 그것을 모르고 있었다. 모를 만도 했다. 왕은 자신의 아이들에게만은 말하지 말라고 부탁했으니까.

수르 미다프의 가슴 안에서 안타까움과 조급함, 짜증과 분노, 그리고 속절없음이 함께 얽혔다. 데미안을 향한 안타까움, 빨리 이 상황을 끝내고 싶은 조급함과 이 일에 한해서는 한없이 무도한 쥬버린에 대한 짜증과 분노, 하지만 이유를 설명할 수 없는 자신에 대한 무력감.

수르 미다프는 한참 동안 침묵한 후 입을 열었다.

“공주님을 위해서라도 취소해 주십시오.”

“이미 네 개의 대륙이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오.”

“모두 다 알고 있는 사실이 뒤집히는 일은 이 세상에 너무나 많습니다.”

“클로디아가 망신을 당하란 말이오?”

“필요하다면 제가 당해도 좋습니다. 공주님께서 저라는 작자를 도저히 웃어른으로 모실 수 없다고 말씀하실 정도의 패악은 뭐가 있을까요. 술 먹고 광장에서 벌거벗으면 될까요?”

“대체 왜 이러는 거요, 수르 미다프! 이유도 없이!”

웃기지도 않는 농담에 쥬버린은 결국 화를 냈다. 왕을 대신해 의무를 지고 있는 왕자는 자신의 의견을 반대하는 중신이 짜증났다. 당시의 쥬버린은 아무리 열심히 해도 국왕을 따라가지 못했고, 대신들은 쥬버린을 은근히 깔보며 그의 의견 하나하나에 반대를 표하기 일쑤였다. 지금 와서야 현명하고 나라를 잘 다스리는 왕자로 자리 잡았지만, 그 당시의 쥬버린 또한 어린아이에 불과했다.

“나는 약혼을 취소하지 않을 것이오. 무슨 일이 있어도!”

수르 미다프는 자신이 왕자의 고집을 꺾지 못할 것임을 깨달았다. 그는 반사적으로 창문을 바라봤다. 모닝문의 축제가 곧이었다. 그 증거로 초저녁이지만 달은 하늘에 보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팔푼이 같은 양자가 모닝문이 뭔지도 모를 것이라는 데 전 재산을 걸 수도 있었다.

‘하지만 클로디아 공주님은 그렇지 않겠지.’

작은 기념일에도 목숨을 거는 어린 공주님이 차라리 이 기회에 파혼을 선언해준다면 고마운 일이었다. 그러나 사람들 앞에서 데미안이 하지도 않은 말을 자존심 때문에 지어낸 것을 보면, 그리 쉽게 포기하지 않을 게 뻔했다. 수르 미다프는 한숨을 쉬고 물러났다.

쥬버린은 수르 미다프가 문을 닫고 나갈 때까지 그쪽을 보지 않았다.



 

***



 

포르투에서는 1년에 한 번, 여름 아침에 달이 떴다. 그것은 포르투가 아무르를 품고 나서부터 생긴 현상이었다. 혹자는 달의 여신이 미겔 국왕을 축복하기 위해 그리했다고 말했고, 혹자는 그저 네 개의 대륙을 끌어당기는 아무르가 달 또한 끌어당겨서 그렇다고 말했다.

진짜가 무엇이든 간에 모두들 모닝문 축제를 좋아했다. 연인들은 아침에 달이 뜰 때까지 밤새도록 놀다가, 아침에 뜬 달을 보고 입을 맞췄다. 해가 뜨기 전 모닝문 밑에서 입을 맞추면 영원히 행복해진다는 전설 때문이었다. 당연히 모닝문은 연인들의 축제가 될 수밖에 없었다.

포르투 왕성에서 열리는 무도회에서 밤새 춤추기 위해 단단히 준비한 연인들이 팔짱을 끼고 성으로 들어오는 것을, 클로디아는 가장 높은 탑의 창에서 보고 있었다.

“오늘 정말 예쁘세요, 공주님.”

클로디아의 머리카락을 두 시간 동안 정성 들여 말아 땋은 다음 화관과 함께 엮어낸 노바라가 감탄했다. 노바라는 갈수록 미모가 피어나는 클로디아의 시녀가 된 것을 자랑스러워하곤 했다. 오죽하면 클로디아를 꾸며주는 것이 노바라의 낙이라고 할까.

“데미안 경도 한눈에… 아니, 재차 반하실 거예요.”

노바라가 아차 하며 말을 고쳤다. 클로디아는 노바라가 들고 있는 작은 거울에 눈길을 줬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럽고 귀여운 소녀가 거기 있었다.

“…정말 그럴까?”

“그러믄요. 이렇게 깜찍한 공주님은 대륙 어디에도 없을걸요.”

“아하하.”

클로디아가 작게 웃다가 덧붙였다.

“하지만 그건 노바라에게만 그런 건 아닐까?”

“무슨 소리세요, 정말!”

노바라가 허리춤에 손을 올리고 짐짓 엄한 표정을 지었다.

“이 노바라의 말을 믿지 않으시는 건가요? 제가 얼마나 정직하고 거짓말을 못 하는 사람인데요!”

“하지만 며칠 전에 노바라는 아무르의 자수를 다 놓으면 날 바깥에 데려가 준댔잖아. 지키지 않아놓고선.”

클로디아가 피, 하고 입술을 비죽였다. 클로디아는 자수에 특히 소질이 없었는데, 자수야말로 여인의 소양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던 노바라는 클로디아에게 며칠 전 아무르를 수로 놓으면 포르투 한켠의 작은 숲에 소풍을 가자고 약속했다. 하지만 쥬버린은 위험한 데다 성의 호위를 내어주기에는 성의 치안이 불안하다며 클로디아의 외출을 기각시켰다. 결국 노바라는 본의 아니게 거짓말한 셈이 돼 버린 것이다.

“그건….”

노바라의 얼굴이 빨개졌다. 클로디아는 손을 내저었다.

“알아, 알아. 오라버니가 내 생각을 한 거.”

손끝에서 분홍색 보석을 이은 팔찌들이 차르륵 차르륵 흔들렸다. 클로디아는 옅게 웃었다.

“어쩔 수 없지. 오라버니에게 도움이 되지도 못하는 동생인데, 폐를 끼쳐서야 되겠어?”

잠도 자지 못하고 일을 하는 쥬버린에게 클로디아도 돕겠다 나선 적이 있었다. 그러나 쥬버린은 고개를 저으며, 클로디아에게 “너는 아직 이런 일을 하기엔 이르니 가서 푹 자고 더 어여뻐지는 것이 나를 도와주는 일이다”라고 말했다. 그때 노바라는 어쩜, 하고 감탄했고, 클로디아는 조금 감동했다.

하지만 이렇게 막상 멀거니 앉아서 머리나 손질하고 있으면, 어쩐지 그녀는 점점 무력해졌다. ‘내가 이렇게 놀고 있어도 될까?’ 같은 죄책감을 곱씹다 보면, 그때의 감동이 거짓말은 아닌가… 생각하게 되곤 했다.

그때였다. 똑똑. 문을 누군가 두들겼다. 시녀 하나가 문밖으로 나갔다가, 상기된 표정으로 들어왔다.

“데미안 경이세요.”

“어머나, 벌써.”

노바라가 큰 소리로, 열린 문 사이로 들리라는 듯 외쳤다.

벌써라고 하기에는 민망한 일이다. 그야 클로디아는 데미안을 벌써 한 시간째 기다리게 하고 있었으니까. 그녀는 데미안이 도착하자마자 안절부절못하며 나가려고 했으나, 노바라는 연모하는 상대가 왔다고 곧장 나가는 것은 채신머리에 맞지 않는다며 그녀를 만류한 참이었다.

“들어오시라 전해라.”

곧 데미안이 들어왔다.

1년 사이 데미안은 부쩍 키가 더 컸다. 수르 미다프를 따라 포르투 기사단의 원정을 다녀올 때마다 한 뼘씩은 크고 있는 데다가, 어깨도 넓어지고 점점 더 기사라는 말에 적합한 남자가 되어갔다. 이전의 데미안이 예쁜 소년이었다면, 지금의 데미안은 늠름한 청년이 다 돼 있었다.

탄탄한 가슴도, 두툼해진 팔도. 길고 고생스러운 원정 때문에 채 자르지 못한 나머지 묶고 다니는 머리카락마저 뭇 여인들의 환성을 들을 만했다.

오늘의 그는 클로디아가 예전에 보지 못한 검푸른 예복을 입고 있었는데, 클로디아는 그것이 제 오라비가 그에게 선물한 옷이라는 것을 알아봤다. 아마 원정을 다녀올 때마다 몸이 자라고 길어져 포르투 기사단의 예복이 맞지 않은 탓일 것이다.

연인들의 축제라는 모닝문 연회는 본래 미혼의 왕족 중 혼기가 찬 이가 주관해 여는 것이 관례였다. 다만 쥬버린은 오늘도 바쁜 데다가 약혼자가 없어 모닝문 연회의 주최를 클로디아에게 맡겼다.

그런 자리니 그녀를 모실 기사가, 심지어 그녀의 약혼자가 작은 옷을 입고 온다면 얼마나 우습겠는가.

“어쩜, 멋지세요.”

언제나 데미안을 얄미워하는 노바라도 오늘만은 저도 모르게 그에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데미안은 노바라의 말은 듣지도 않고, 클로디아 앞에 무릎을 꿇고 예를 갖췄다.

“모시러 왔습니다.”

그 흔한 날씨에 대한 인사조차 할 만한 말주변이 그에게는 없었다. 노바라가 클로디아 대신 치, 하고 데미안을 흘겨봤다. 그러나 클로디아는 옅게 미소 지었다.

“어서 와요. 기다리게 해서 면목이 없어요.”

“마땅히 할 일입니다.”

거칠게 기른 머리카락도 오늘만큼은 제대로 멋을 낸 듯 윤기가 흘렀다. 아마 쥬버린이 그에게 자신의 미용사를 붙여준 덕일 테다. 데미안은 꾸미는 것을 거추장스러워하곤 했지만, 쥬버린이 ‘클로디아를 위해’라며 그에게 미용사며 재단사를 붙여주면 언제나 말없이 따르곤 했다. 그 흔한 거절 한 번 하지 않았다. 클로디아는 찰랑거리는 그의 앞머리를 보며 잠시 입을 닫았다.

본래는 가자고 말하고 일어나야 했는데, 어쩐지 일어나고 싶지 않았다.

“…공주님?”

노바라가 의아한 얼굴로 클로디아를 들여다봤다. 클로디아는 노바라를 힐끗 올려다보곤 애매하게 웃었다.

“음, 지금 가야 해?”

클로디아가 아주 어릴 때부터 수족처럼 붙어 있던 노바라인지라, 그녀는 클로디아의 말뜻을 곧장 알아들었다. 노바라는 빙그레 미소 지었다.

“아침부터 아무것도 드시지 않아 피곤하고 몸에 힘이 없으시지요? 아직은 시간이 조금 있답니다. 아무래도 머리 모양을 내느라 오래 앉아 있었던 것이 힘드셨나 보아요. 알파 경, 혹시 조금 더 기다리실 수 있나요?”

“…예.”

데미안이 무릎 꿇은 채 답했다. 노바라는 짐짓 목소리를 높였다.

“공주님께 요기할 거리를 챙겨드려야겠어요. 연회에 가면 인사를 받느라 한동안 아무것도 못 드실 테니까요. 알파 경께도 차를 같이 올릴 테니 앉아 계시겠어요?”

“저는 괜찮습니다.”

“알파 경.”

괜찮다고 거절하는 데미안을 부른 것은 클로디아였다.

클로디아는 부드럽게 타이르듯, 데미안의 성을 불렀다. 언제부턴가 자신에게 거리를 두는 데미안에게, 클로디아 또한 시위하듯이 부르게 된 호칭이었다.

“그대를 기다리게 했는데, 더 세워놓을 수는 없어요.”

“괜찮습니다.”

그리고 데미안은 더 듣지도 않고 문간으로 가 섰다. 클로디아는 잠시 아연해 했지만, 곧 작게 한숨을 내쉬고 노바라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가 저런 식으로 딱딱하게 구는 것이 이젠 우습지도 않았다.

곧 시녀들이 손바닥만 한 접시에 작은 과자 몇 개를 받쳐 내왔다. 요깃거리라고는 해도 클로디아는 다이어트 중이었다. 오늘 가장 예뻐 보이기 위해 일주일 전부터 거의 먹지 않았으니 힘이 들만도 했다.

시녀들이 클로디아의 팔다리를 주무르는 가운데 클로디아는 차를 마시고 천천히 과자를 씹어 삼켰다. 빈속에 먹을 것이 들어가니 배가 고팠지만 이 정도는 익숙했다. 그래도 배 속에 뭐라도 들어갔으니 몇 시간 정도는 버틸 만할 것이다.

클로디아는 차를 다 마시고, 과자 두세 조각을 먹어치운 후 접시를 밀어냈다. 시녀가 접시를 치우려 하자, 데미안이 입을 열었다.

“…개회 선언까지는 아직 시간이 있습니다. 마저 드셔도 괜찮을 듯합니다.”

그로서는 보기 드물게 먼저 입을 연 것이었다. 클로디아는 잠시 눈을 동그랗게 떴으나, 이내 애매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다른 사람 앞에서, 그것도 이 남자 앞에서 게걸스럽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아뇨, 배불러요.”

“…오늘 연회는 밤새 열립니다.”

“배가 고프면 그곳에서 식사를 하면 돼요.”

“하지만….”

“알파 경. 오늘따라 내게 친근하게 구네요.”

클로디아가 입술을 부드럽게 휘었다. 미소는 아름다웠으나 그 안에는 칼날이 있었다. 평소에는 자신을 본체만체하면서, 이럴 때 쓸데없이 간섭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데미안은 “…죄송합니다”라며 다시 입을 닫았다. 시녀들이 눈치를 보며 접시를 치우고, 클로디아의 입술을 닦아준 후 연지를 다시 발라주었다. 눈썹에 내려앉은 먼지를 살짝 털어내고, 아름답게 구불거리는 머리카락을 한 번 더 빗어 풍성하게 만든 다음 그 위에 늘어뜨린 진주를 다시 정리했다.

“가요.”

“예.”

클로디아가 일어나자 데미안이 익숙하게 그녀에게 다가와 팔을 내밀었다. 클로디아는 우아하게 그의 팔에 자신의 손을 감았다. 클로디아가 오늘 입은 드레스는 별빛을 닮은 푸른색이었다. 가슴은 검푸른색 비단으로, 그 위에 금으로 된 납작한 물결 모양 장식들을 군데군데 붙여 별을 표현했다. 아래로 갈수록 하늘색으로 변하는 비단과 면사포를 이용한 장식은, 밝아오는 새벽의 빛 같았다. 거기에 검푸른 예복을 입은 데미안이 함께 서니 보기만 해도 완벽한 한 쌍이었다.

“어머나, 정말 잘 어울리세요. 두 분.”

시녀 중 가장 어린 아이가 저도 모르게 감탄했다. 노바라가 그녀를 빠르게 흘겼고, 시녀는 어리둥절해 했다. 클로디아는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고마워.”

분명히 감사의 인사인데, 인사 사이에 새파란 얼음 결정이 흩날리는 것만 같이 차가워 시녀가 당황했다. 클로디아는 걸음을 옮겼다. 데미안은 당황하지도 않고 그녀와 보폭을 맞췄다.

복도로 나서자 주변을 지나다니던 사용인들이 조심스럽게 길을 비켜섰다. 모닝문의 축제에 가는 두 사람은 그 자체로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으나, 그 사이에 살얼음판이 있음은 공주의 시녀들 사이에서는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자신들을 따르는 시선을 느끼며 클로디아는 작게 속삭였다.

“원정에서 돌아오지 않은 줄 알았네요.”

“…죄송합니다.”

수르 미다프는 최근 데미안과 몇몇 기사들만 끌고 북쪽으로 원정을 다녀왔다. 귀환한 직후 수르 미다프는 클로디아를 곧장 찾아왔으나, 데미안은 그러지 않았다. 길고 긴 여정을 다녀와 놓고 약혼자인 자신을 한 번 찾지도 않은 것을 탓하는 말에도 데미안은 그저 사과만 할 뿐이었다.

“그 흔한 핑계 하나 없나요?”

“…송구스럽습니다.”

클로디아는 이마를 찌푸리고 싶었으나 간신히 참았다. 오늘은 좋은 날이었다. 자신이 지난여름 약혼한 이후, 일 년 만에 열리는 모닝문의 축제. 데미안과 약혼한 이후로 처음이었다. 적어도 오늘만은 화를 내거나, 짜증내어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

‘사랑하는 내 동생. 데미안은 그저 부끄러움이 많을 뿐인 걸 알지 않니? 그 애는 원래 그랬던 걸 우리 둘 다 알고 있잖아. 그 애는 너를 좋아해. 정말이야.’

쥬버린의 말을 생각하며 클로디아는 애써 화를 지워냈다.

“…첫 춤을 춰야 할 거예요. 괜찮겠어요?”

무도회의 첫 춤은 언제나 클로디아와 쥬버린의 것이었다. 하지만 모닝문의 축제에서 두 사람이 춤출 수는 없다. 당연하게도 클로디아의 파트너는 데미안이었다.

평소 거의 춤이라고는 추지 않는 데미안이었기에 그녀는 조금 걱정되었으나, 데미안은 여전히 그녀를 내려다보지도 않고 정면만 보며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미력한 재주로나마 애쓰겠습니다.”

“…그래요. 어디 애써 봐요.”

그렇다고 해서 클로디아 또한 분위기를 풀고 그에게 굳이 말을 더 붙일 만큼 성격이 좋지는 않았다. 애초에 붙임성 없이 구는 것은 데미안이었다. 그녀가 대체 뭘 잘못했기에 그에게 꾸준히 말을 건단 말인가. 클로디아는 정말이지 데미안이 원망스러웠다.

물론 무도회장에 들어간 후에는, 그 원망스러움은 감추고 온화한 웃음으로 사람들을 대했다.

“오늘 정말 아름다우셔요.”

“정말이지 한 쌍의 완벽한 커플이시네요.”

마찬가지로 약혼한 연인들, 혹은 미혼의 귀족들이 그녀에게 다가와 저마다 인사를 건넸다. 백 개의 왕국에서 온 왕족들도 군데군데 보였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네 개의 대륙 중 달에서 가장 가까운 것은 포르투였고, 포르투에서 보는 모닝문만큼 크고 아름다운 달은 없다고 소문난 덕이다.

수백 명은 되는 이들에게 인사를 받고, 가끔은 손등에 입 맞추는 이들에게 응대를 하고. 개회 선언을 하고 나니 모두가 박수를 쳤다. 클로디아는 방긋 웃으며 데미안의 에스코트를 받아 가운데로 내려왔다.

두 사람의 첫 춤을 그 자리의 모든 이가 기다리고 있었다.

음악이 천천히 흘러나왔고, 그녀는 데미안의 어깨와 상박에 제 손을 얹었다. 데미안은 조금도 머뭇대지 않고 큰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감쌌다. 따뜻한 손의 온도가 허리에 전해지는 순간, 클로디아는 저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지는 걸 느끼고 애써 고개를 숙였다.

‘설레지 않겠다고 결심했는데.’

평소에는 손끝이 스치는 일조차 드물지만, 이럴 때의 데미안은 언제나 망설임이 없었다. 단 한 번도 남들 앞에서 트집잡힐 짓거리를 하지 않는다는 것에 가까웠다. 품위 있고 우아하게, 한 발 한 발 그녀를 이끄는 데미안은 춤조차 완벽했다. 아마 평소의 그에게 춤을 춰 보라고 하면, 그저 고개를 젓는 것으로 대신할 텐데.

‘이렇게 잘하는데, 왜 당신은….’

뺨이 겨우 식은 뒤 클로디아는 천천히 데미안을 올려다봤다. 남들이 볼 때는, 연인과의 춤에 얼굴을 붉히는 풋풋한 소녀로 보일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속내는 새까맣게 타들어 갔다. 데미안은 이런 때마저 그녀에게 웃음 한 자락 내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름답고 싸늘한 얼굴.

클로디아는 데미안의 표정을 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검푸른 눈은 깊이를 알 수 없다. 날렵한 코 아래 자리한 입술 끝에는 미소 한 점 없다.

그저 클로디아를 쳐다보는 것만이 자신이 마땅히 할 일이라는 듯, 시선만을 고정하고 있는 데미안의 모습은 어쩐지 그녀에게 점점 화를 불러일으켰다.

“…나랑 춤추기 싫어요?”

“…무슨 말씀을….”

질문은 충동적이었다. 데미안의 얼굴이 처음으로 난처한 표정을 띠었다. 클로디아는 차라리 그 표정이 반가웠다. 아까처럼 숨 막히게 무표정한 모습은 보지 않아도 돼서였다.

클로디아는 빙그레 웃었다.

“이런 날 연인과 춤추면서 조금도 웃지 않는 당신 모습이 어떨 것 같아요?”

“…긴장한 줄 알 겁니다.”

클로디아는 입술을 깨물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았다. 지금 입술을 깨물면 시녀들이 정성 들여 발라준 입술연지가 지워지기 때문이다.

“알파 경.”

“…예.”

“나는 당신을 좋아해요.”

한참의 망설임과 며칠의 생각 끝에 한 고백이었다. 클로디아는 나직하게, 그러나 분명하게 데미안에게 말했다. 데미안의 눈이 잠시 흔들렸으나, 그 눈은 금세 평정을 찾았다. 클로디아는 잠시의 텀을 두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단 한 번도 제대로 말한 적 없는 것 같아서요.”

“….”

“오라버니가 갑작스럽게 약혼을 시킨 것은, 그래요. 당황스러울 수 있겠죠. 하지만… 1년이 지났잖아요.”

“….”

“이제는, 나를 좋아해 줄 수 없나요?”

경쾌한 음악과 웃음소리, 나직한 연인들의 속삭임과 빠르게 움직이는 발끝에서 나는 소리들. 휘황찬란한 빛무리와 사람들의 미소 사이에서 클로디아는 연인에게 부탁했다. 데미안의 입술 끝이 조금 움직였다. 올라갈 듯, 올라갈 듯.

“…죄송합니다.”

그러나 그 입술은 끝내 미소 짓지 않았다.



 

***



 

두 사람이 춤을 끝냈을 때, 가장 먼저 다가온 것은 킴 왕자였다. 다른 이들보다 두 배쯤 덩치가 큰 킴 왕자는 데미안과 견주어도 전혀 뒤지지 않았다. 주홍색 머리카락이 눈에 띄어 멀리서도 그가 다가오는 것을 알고 있었던 클로디아는 한숨을 쉬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았다.

‘어디라도 가서 찬 바람을 쐬고 싶은데.’

데미안에게 막 거절당한 참이다. 그러나 클로디아는 공주였고, 연회의 주최자였다. 사람들이 말을 걸면 받아줄 수밖에 없었다. 킴 왕자는 멋들어진 자세로 그녀에게 인사하고 손등을 청했다. 클로디아가 손을 내밀었고, 그는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포르투의 영원한 영광을 공주님께. 두 분의 모습 정말 멋졌습니다.”

“고맙습니다.”

킴 왕자뿐만 아니었다. 그가 한 번 물꼬를 트자 연회장의 모든 왕족, 귀족들이 앞 다투어 몰려들었다. 자신의 연인이 있는 자들은 그래도 자리를 지켰으나, 연인 없이 이 자리에서 인맥을 트고자, 혹은 누군가를 소개받고자 온 사람들은 한 번씩은 클로디아에게 다가왔다. 클로디아는 정신없이 인사를 나눴다.

오랜만이에요, 잘 오셨어요, 잘 지내셨지요….

클로디아의 웃음소리는 높았다가, 낮았다가 시종일관 사라질 줄 몰랐다.

사람들은 그녀 옆의 데미안에게도 말을 걸었다. 데미안이 미소를 지으며 클로디아와 같이 인사를 받았다.

예. 수르께선 강녕하십니다. 미욱한 자입니다만 왕자 전하께서 잘 봐주시어….

평소 말 없고 붙임성 부족한 것으로 소문났기에 모두들 의외라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그에게 말 걸기를 멈추지 않았다. 놀란 것은 클로디아도 마찬가지였다. 클로디아는 시험 삼아 다른 사람들과 말하다가 데미안의 팔을 끌어당겼다.

“그렇지요, 알파 경?”

“…예?”

갑작스러운 클로디아의 물음에 한창 다른 이와 인사를 나누고 있던 데미안은 얼떨떨해했다. 클로디아는 녹아내릴 것 같은 미소를 지으며 데미안에게 말했다.

“아이참. 제게 그때 후원에서 다정하게도 말씀하셨잖아요. 부끄러움을 타셨다고.”

데미안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클로디아와의 약혼 당시를 말하는 것임을 그 역시 알아들었던 것이다. 클로디아의 심술이었다. 이를테면, 사람들 앞에서 어디 나를 망신시켜 보라는 시위 같은 것이랄까. 그녀는 첫 춤에서 데미안에게 자신을 좋아해 달라 애걸했고, 거절당했다.

그리고 이내 데미안이 스르르 입술을 말아 올렸다.

“…예.”

어머나….

주변에 서 있던 여인들 몇이 입을 가렸다. 다정하게 미소 짓는 데미안 알파라는 것은 꽤 희귀한 광경이었기 때문이다. 데미안은 클로디아를 금방이라도 끌어안을 듯한 표정으로 웃었다.

“송구스럽지만 그때 당시는 정말로 어쩔 도리가 없었습니다. 이게 꿈이 아닌지, 모두가 합심해 저를 놀리는 것이 아닌지 의심부터 하게 되었으니까요.”

“….”

“그래서 모두의 앞에서 공주님을 거절한 것입니까?”

호기심 어린 질문이 던져졌다.

클로디아는 그쪽을 바라봤다. 눈에 악의 어린 웃음이 가득한 어떤 남자였다. 클로디아의 기억 속에도 있는 그는, 언젠가 클로디아에게 청혼했지만 쥬버린에 의해 거절당했다. 그리고…. 클로디아가 알기론, 그 또한 데미안과 클로디아를 감싼 냉기 어린 소문에 대해 모르지 않을 것이었다.

그러나 데미안은 미소 지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부끄럽고 죄송하게도 그랬습니다. 사실 지금도 어느 정도는 그렇습니다. 이 약혼은 말도 안 되지요.”

“호오. 어째서지요?”

이제는 모두들 흥미로운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열기 어린 분위기에 클로디아만이 유일하게 당황했다.

‘설마 정말로 지금, 다시 한번 나를 거절하려는 걸까.’

막상 반문을 들은 데미안은 질문한 사람을 한 번 쳐다보더니, 이윽고 클로디아 쪽을 바라봤다. 깊고 검푸른 눈이 그녀를 관통하려는 듯 직시하고 있었다. 미소는 지워지지 않은 채였다.

“…공주님께서는 저 같은 자보다 훨씬 좋은 사람을 만나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 대륙에서 대체, 알파 경보다 좋은 남자를 어떻게 만난단 말이에요? 다른 건 차치하더라도, 이렇게나 공주님을 위하시는데요! 안 그래요?”

장난기를 머금은 여자 목소리가 던져졌고, 그 말이 끝나자마자 모두들 와르륵 웃었다. 데미안은 환하게 웃었다.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그러믄요! 공주님을 사랑하지 않으세요?”

그 말에 몇몇 사람은 몸을 일으켰고, 누군가는 웃음을 터트렸다. 어떤 사람들은 반사적으로 몸을 굳혔고, 또 누군가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그 모든 사람들 가운데에서, 데미안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사랑하고말고요.”

“…알파 경.”

클로디아는 더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그만하라고 말할 참이었다. 하지만 데미안은 그녀를 지그시 내려다보곤 말을 이었다.

“아침에 일어나 잠이 들 때까지.”

“경.”

클로디아의 얼굴이 다시금 붉어졌다. 사람들은 그녀가 부끄러워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달랐다. 클로디아는 화를 내고 있었다. 그리고 데미안도 그것을 모르지 않았다. 그러나 남자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잠이 들면 꿈에서도, 공주님을 생각합니다.”

“…경!”

클로디아는 끝내 큰 소리를 냈으나, 주변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더 컸다.

공주님이 부끄러워하시네요. 이럴 수가. 이런 모습이 다 있었군요, 알파 경에게도. 아무튼 정말로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에요.

클로디아는 결국 참지 못하고 걸음을 옮겼다. 아무 데라도, 사람이 없는 곳으로 가고 싶었다. 빠르게 움직이는 그녀를 보고 사람들은 더 크게 웃었다.

“세상에! 알파 경, 어서 쫓아가세요!”

“오늘 두 분 행복해지시겠어요.”

귀까지 새빨갛게 물들어 걸음을 옮기는 공주의 뒤를, 기사 또한 빠르게 쫓았다. 사람들은 부끄러운 나머지 도망친 두 사람이 오늘의 달 아래서 입 맞추리라 의심하지 않았다.

공주와 기사가 사라진 곳을 향해 소곤소곤 속삭이던 사람들은 이내 흩어졌다. 모닝문이 뜨기 전까지 연인을 , 혹은 연인이 될 사람을 찾기 위해서였다.



 

***



 

“…저를 놀려요?”

“감히 그런 적 없습니다.”

“그러면 왜….”

사람이 없는 테라스에서 클로디아는 데미안에게 눈을 부릅뜨고 따져 물었다. 울고 싶지만 울 수도 없었다. 새빨간 눈으로 연회장에 다시 들어서는 공주를 보고 사람들이 뭐라고 생각할지 뻔했기 때문이다. 그녀를 쫓아온 데미안은 무표정하게 그녀의 말에 답했다.

“사람들 앞에서, 공주님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할까요.”

“…어떻게….”

클로디아는 기가 막혔다.

“차라리 입을 다물지….”

“그것 또한 공주님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거짓말했어요?”

“….”

공주의 물음에 기사는 입을 닫았다. 클로디아는 입술을 깨물었으나, 데미안은 장갑 낀 손을 들어 그녀의 입술을 쓸었다. 클로디아가 화들짝 놀라자 데미안이 말했다.

“…화장이 지워집니다.”

…그깟 화장 따위!

클로디아는 정말로 머리끝까지 화가 났다. 지금 화장이 지워지는 게 문제란 말이야?

“당신 너무 싫어요.”

“…죄송합니다.”

“어떻게, 그 순간에….”

클로디아는 팔을 뻗어 데미안의 가슴을 두들기려 했다. 그러나 데미안은 그녀의 팔을 붙들었다.

“오늘 거의 안 드셨습니다. 힘을 빼시면 안 됩니다.”

“…당신이 대체 무슨 상관이에요! 날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두 팔을 데미안에게 붙들린 채, 클로디아는 화를 냈다. 데미안은 그녀에게 대답하지 않은 채 그대로 클로디아를 응시했다. 숨이 막혔다. 연회장의 빛에 반사된 검푸른 눈 안에 대체 뭐가 있는지 클로디아는 알 수가 없었다.

‘나를 사랑하지 않으면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내가 창피해할까 봐? 사랑하지 않으면서 내가 창피해하는 건 중요해? 대체 왜?’

그때, 연회장에서 가느다랗게 음악이 흘러나왔다. 두 번째 춤곡이 시작된 듯했다. 첫 번째 춤을 클로디아가 추었으니 이제부터는 본격적인 연인들의 장이었다. 까르륵, 웃음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발랄한 음악 소리와 발소리. 연인들의 즐거운 한담이 한데 섞여 그 순간의 클로디아에게 말로 다 할 수 없는 상실감을 선사했다.

모닝문의 축제에서 오직 그녀만이 비참했다.

“…공주님이시니까요.”

데미안이 끝내 그렇게 이야기했을 때, 클로디아는 결국 참을 수 없어서 소리를 질렀다.

“그럼 내가 시키는 건 뭐든지 다 하나요? 그래서 당신은 나와 약혼한 건가요? 내가 공주님이라서?”

대답하지 마, 제발.

그렇게 소리 지르면서도 클로디아는 마음속으로 빌었다. 어릴 적에 그저 항상 옆에 있었던 소년이 제 사랑이 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았건만, 그녀의 첫사랑은 클로디아에게 너무 잔인하게 굴었다. 그리고 그 잔인함은 일관적이었다.

데미안이 입을 열었다.

“예.”

클로디아는 도무지,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울어야 하나? 화내야 하나? 하지만 울 수도 없었고, 화는 이미 내고 있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해? 아연해진 채로 그녀는 데미안을 바라봤다. 그때까지도 그녀의 팔을 잡고 있던 데미안은, 조심스럽게 그녀의 손을 놨으나 곧 다시 그녀를 붙들 수밖에 없었다. 클로디아가 그대로 그 자리에 무너져 내렸기 때문이다.

턱.

다리에 힘이 풀린 그녀의 팔을, 그리고 허리를 잡아챈 데미안이 흠칫했다. 자신도 모르게 그녀를 와락 안은 꼴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를 놓을 수는 없었다. 그가 손을 놓는 순간 클로디아는 그대로 주저앉으리라. 공주의 드레스가 지저분해진 꼴을 보이면 안 된다. 틀림없이 말이 나올 것이다.

데미안은 그래서 그녀를 안은 채 엉거주춤하게 서 있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는지도 모른다.

이윽고 공주가 입을 열었다.

“…놔요.”

“예.”

데미안은 불안해하면서도 손을 놨다. 클로디아는 꼿꼿이 서서 데미안에게 잡혔던 손을 거두어들였다. 더러운 것이라도 닿은 듯, 짜증 나는 표정이었다.

“좋아요. 알파 경.”

“예.”

“저기에 나의 권좌가 보이지요?”

클로디아는 유리창 안쪽, 연회 홀의 가장 높은 곳을 가리켰다. 그녀를 위한 자리였으나 모닝문의 축제에서 클로디아가 거기 앉으리라고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권좌 근처에는 아무도 없었다. 데미안은 그쪽을 힐끗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거기 서 있어요. 내가 돌아올 때까지.”

“…예.”

클로디아는 그에게 명령하고 대답을 듣자마자 돌아서 홀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데미안은 나직하게 한숨을 쉬고 그녀 뒤를 따라갔으나, 클로디아는 어느새 연회 홀 안의 귀족들과 어울리고 있었다.

연인을 찾는 왕자에게 손등을 내밀고 입맞춤을 받은 다음, 웃으며 춤을 추었다. 간혹 그들이 데미안을 찾는 듯하면, 그녀는 손을 뻗어 자신의 권좌를 가리켰다.

그리고 데미안은 그녀의 자리 옆에서 클로디아를 내려다봤다. 왕자들은 의아해하면서도 그녀와 춤을 추었다.

클로디아는 술을 마시고, 깔깔 웃어댔다. 연인이 없는 남자들의 파트너가 기꺼이 되어주기를 자처했다. 그야 연회의 주최자이니 이상한 일은 아니다. 모닝문의 축제에서 연인을 미처 찾지 못한 이들에게 공주가 잠시나마 손길을 내미는 것은 흉을 볼거리가 아니었다. 오히려 고맙고 기쁜 일에 가까웠다.

모든 남자가 환히 웃으며 공주의 손에, 뺨에 입 맞추었다. 가끔은 그녀의 허리를 단단하게 끌어안기도 했다.

데미안은 밤새도록 다른 남자들과 춤추는 클로디아를 지켜보고 있었다.

밤이 깊었다가, 이내 하늘이 새파래지고, 희끄무레하고 커다란 아침의 달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낼 때까지.

연인들이 하나둘씩 밀회 장소를 찾아 사라지고, 그 밤에 연인을 찾거나 혹은 찾지 못한 이들도 자취를 감추기 시작할 때까지.

인적이 드물어진 홀에서, 이제는 술에 취하다 못해 늘어진 자들과 아직도 미련을 버리지 못한 자들. 그리고 클로디아만이 남아 있었다.

악사들도 설마 이 시간까지 자신들이 남아 있으리라고 생각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본래대로라면 이 시간쯤 되면 홀에는 대부분 술주정뱅이들만 남게 마련이며, 하인들이 그들을 떠메고 가며 파장 분위기가 되곤 했다. 악사들은 그럴 때 슬슬 눈치를 보며 악기를 거뒀다. 그러나 공주가 홀에 남아 있는데, 악사들이 함부로 자리를 물릴 수는 없었다.

클로디아 또한 그 분위기를 모르지 않았다. 그녀는 주변을 둘러봤다. 이제 바깥은 새파랗게 변했고, 엄청나게 큰 모닝문이 점점 분명히 보이고 있었다.

고요한 주변. 악사들이 음악을 멈춘 지는 조금 됐다. 곳곳에서 주정뱅이들이 잠꼬대하는 소리, 그리고 소곤대는 소리가 들렸다. 미련을 버리지 못한 이들은 ‘혹시’ 하는 눈으로 공주를 바라보고 있었고, 아직도 연인과 적당한 밀회 장소를 찾지 못한 연인들은 이상하다는 듯 클로디아를 쳐다봤다.

그 홀의 모두가 그녀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클로디아는 이제는 정말로 자신이 사라져야 할 시간이라는 걸 깨달았다. 물론 혼자 사라질 수는 없다. 저 높은 자리, 그녀가 밤새도록 단 한 번도 쳐다보지 않았던 그곳에 우뚝 서서 내내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을 남자와 사라져야 하겠지.

‘하지만 죽기보다 싫어.’

그녀는 상실감에 몸부림치고 싶었다. 울고 싶었고, 짜증이 났다. 자신의 첫 모닝문 축제가 이럴 줄은 꿈에도 몰랐다. 차라리 어젯밤, 그 테라스에서 사라졌다면 좋았을까. 오기가 생겨 일부러 그의 앞에서 숱한 남자들과 춤추는 내내 클로디아는 이를 악물고 있어서 이제는 머리가 아플 정도였다. 지나치게 많이 마신 과일술은 비록 그 도수가 약하다 한들 술이었다. 게다가 클로디아는 어제 과자 몇 개 말고는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 않은 채였다. 지끈거리는 뒷목과 뜨거운 몸.

클로디아는 망연자실해졌다.

그때였다. 술에 잔뜩 취한 누군가가 클로디아에게 다가왔다.

“공주님, 연인은 여기 두고 대체 무엇…. 어이쿠쿠.”

잔뜩 꼬부라진 혀로 그녀에게 치근대던 주정뱅이는 클로디아 쪽으로 발을 헛디뎌 넘어지려 했다. 아마 그 주정뱅이의 목적은 그렇게 공주를 한 번이라도 더 붙들어보려는 심산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누군가가 그보다 더 빠르게 주정뱅이의 목덜미를 붙들어 올렸다.

“취했으면 돌아가시지요, 롬만 왕자.”

클로디아는 반사적으로 그쪽을 바라봤다. 데미안이었다. 내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을 남자는, 희미한 새벽의 빛이 비치는 연회장에서 주정뱅이의 눈을 쳐다보고 있었다. 주정뱅이는 제풀에 놀라 어이쿠, 하고 어깨를 움츠리고 뒤로 물러서다가 뒤로 넘어졌다. 그가 왕자라니. 개가 웃을 노릇이었다.

그 모습을 전부 다 보고 있던 데미안이 그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너무 오래 계셨습니다.”

“…그래요.”

어지러운 새벽에 제게 내밀어진 도움의 손길을 클로디아는 모른 척하지 않았다. 데미안이 팔을 내밀었고, 그녀는 입을 다물고 손을 그의 팔에 올렸다. 하지만 어제저녁처럼, 부드럽게 감아올리지는 않았다.

숨 막히는 거리감이 두 사람 사이에 존재했다. 데미안은 딱 클로디아의 보폭만큼 천천히 걸었다. 술에 취하고, 머리가 아픈 클로디아가 그에게 의지해 나아갈 수 있을 만큼만.

얼마나 걸었을까. 클로디아는 눈을 질끈 감고 멈춰 섰다. 숙취와 피곤함 때문에 도저히 걸을 수 없을 지경이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옆에 가만히 서 있는 데미안에게, 클로디아는 신음하듯 말했다.

“…머리가 아파요. 잠시만 앉았다 가요….”

“이쪽에는 공주님께서 쉬실 만한 곳이 없습니다.”

그 말에 클로디아는 이마를 찌푸린 채 주변을 둘러봤다. 그의 말대로였다. 클로디아가 멈춰선 곳은, 그녀가 어젯밤 몸치장을 하던 탑으로 가는 길이었다.

아이러니했다.

모닝문의 연인들을 구경하고 싶다는 핑계로 축제 기간에만 가장 높은 탑으로 그녀의 투왈렛 룸을 옮겼지만, 사실 모두가 알고 있었다. 클로디아의 투왈렛 룸은, 포르트 왕성에서 모닝문이 가장 잘 보이는 곳이었다. 본래는 그곳에서 데미안과 함께 아침의 달을 구경하고 싶었기에 그녀는 그 탑으로 제 방을 옮겼다….

클로디아는 갑자기 왈칵 눈물이 났다.

“…흑.”

갑작스럽게 눈물이 흘렀으나 그녀는 어제저녁처럼 참지 않았다. 어차피 연회는 끝이 났기 때문이다. 그녀가 여기서 운다 한들 아무도 그녀를 보고 의아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시시때때로 복도를 오가던 왕성의 하인들도 이 시간에는 잠이 들었을 것이다. 혹은 자신의 연인과 밀회를 즐기거나.

“괜찮으십니까.”

“내가 괜찮을 것 같아요?”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졌다. 머리가 아파서인지, 짜증이 나서인지, 속상해서인지 클로디아도 알 수 없었다. 한 번 나온 눈물은 이유를 모른다고 해서 멈추지는 않았다. 그녀는 결국 데미안의 팔을 뿌리치고 그대로 쭈그려 앉았다.

울면서 그녀는 중얼거렸다.

“술을 너무 많이 마셨나 봐…. 머리가 너무 아파….”

죽어도 데미안 때문에 운다고 생각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자존심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의 그런 말들은 역효과를 냈다. 그녀의 앞에 서서 난감해하던 데미안은 클로디아에게 물었다.

“조금만 더 걸어가시면 되는데, 안 되시겠습니까.”

“지금, 흑. 그럴 수 있을 것 같아 보여요?”

클로디아는 울음을 삼키며 머리를 무릎에 묻었다. 한참 말이 없던 데미안은 그녀의 머리 위에서 통보했다.

“어쩔 수 없군요. 아프시니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무슨… 꺅!”

순식간이었다. 데미안의 팔이 그녀의 등과 무릎 뒤를 감싸 안았다. 하도 갑작스러워서 클로디아가 놀라 비명을 질렀을 때는, 이미 그녀는 데미안에게 안겨 있었다. 정확히는, 자신의 망토로 그녀를 감싸 안은 데미안에게. 이런 순간에마저 그는 클로디아에게 제 손끝 하나 대지 않았다. 클로디아는 엉겁결에 데미안의 목을 감싸 안았다. 데미안은 그녀를 내려다보며 무표정하게 말했다.

“혼자 걸으실 수 없을 것 같아서.”

클로디아의 눈이 놀란 토끼처럼 커졌다. 데미안은 그녀에게 동의조차 구하지 않고 성큼성큼 걸었다.

“이게 뭐야, 내려줘요!”

뒤늦게 정신 차린 클로디아가 데미안의 가슴을 두들겼으나 데미안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걸음을 더 빨리할 뿐이었다.

“내려 줘!”

“예.”

다시 한 번 그녀가 소리 질렀을 때, 데미안이 대답했다. 뜻밖의 대답에 클로디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는 동안, 데미안은 얇고 섬세한 유리 조각을 다루듯 그녀를 내려놨다.

어느새 탑 꼭대기의 방에 도착한 것이었다.

투왈렛 룸으로 꾸며졌던 방은 그새 깨끗이 치워져 있었고, 부드러운 재질의 쿠션이 가득한 긴 의자와 맛 좋은 간식들로 채워진 테이블이 방 한쪽, 커다란 테라스에 놓여 있었다. 시녀들이 모닝문을 보러 돌아올 클로디아와 데미안을 위해 마련해 둔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클로디아는 자신이 그 긴 의자 위에 누워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데미안이 혀를 찼다.

“침대가 분명 있었는데….”

그러니까, 아마 시녀들은 어린 공주님이 부디 모닝문 축제에서 사랑하는 연인과 로맨틱하게 입맞춤하기를 바랐지만, 결코 그 이상의 분위기가 되길 바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데미안이 그런 것을 알 리 없었고, 그는 공주의 방에서 침대를 찾을 수 없음에 난감해했다.

그리고 클로디아는 그 모든 것을 알아차린 참이었다. 안절부절못하던 데미안이 이내 그녀에게 돌아서서 “다른 방을 찾아보겠습니다”라고 말했을 때, 그녀는 이마를 찌푸리고 고개를 저었다.

“됐어요. 그냥 가요. 시녀들이 곧 올 거예요. 아침이니까….”

사실은 거짓말이다. 모닝문의 축제에서, 아침에 연인을 방해하는 이들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클로디아는 데미안과 한시라도 빨리 헤어지고 싶었다. 눈이 새빨개진 클로디아는 이마를 짚는 척하며 얼굴을 가렸다. 데미안은 한참이나 그런 그녀를 쳐다보다가, 고개를 숙였다.

“…예.”

“거짓말이에요. 가지 말아요.”

아니다.

데미안이 답하자마자 클로디아는 빠르게 입을 연 후 고개를 들었다. 데미안이 엉거주춤하게 서 있었다. 클로디아는 소파에 기대 누운 채로 그를 쳐다봤다.

“…당신도 밤새도록 서 있었을 테니 힘들겠지요. 앉아서 쉬다가 날이 완전히 밝으면 가도록 해요.”

“…예.”

그는 클로디아에게 가타부타 따지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고는 맞은편에 앉았다. 그러나 그 자세는 조금도 편해 보이지 않았다. 클로디아는 누운 채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계속 그곳에 있었나요?”

홀의 권좌 옆을 말하는 것이었다. 데미안은 무표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왜요?”

질문은 갑작스러웠다.

데미안은 왜 그런 것을 물어보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았으나, 이내 안타까운 듯 눈썹을 누그러뜨렸다. 열여섯의 클로디아는 어리고 충동적이었으며, 솔직하려 했으나 그 솔직함이 완전하지는 못했다.

데미안은 잠시 망설이다가 답했다.

“…제가 할 일이기 때문입니다.”

“무슨 뜻인가요.”

이번에야말로 데미안이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바라봤다. 클로디아는 되도록이면 차분하려 애쓰며 말을 이었다.

“내 약혼자이기 때문인가요? 아니면 내가 명령했기 때문인가요?”

“…둘 다입니다.”

“…제가 명령했으니 밤새도록 그 자리를 떠나지 않고 나를 기다렸다는 것인가요?”

“예.”

의미 없는, 그러나 확실하게 그녀의 상처를 헤집는 문답이었다. 하지만 더 괴로운 듯한 표정을 하고 있는 건 데미안이어서 클로디아는 화가 났다.

클로디아는 두통을 감수하고 다시 이를 악물었다가, 고개를 숙이고 바닥을 보고 있는 데미안에게 물었다.

“내가 명령하면 뭐든지 할 건가요?”

“…예.”

울고 싶지 않았는데 다시 눈물이 흐르려 했다. 짜증이 나는지, 화가 나는 건지 슬픈 건지 그것도 아니면 혼란스러운 건지 정말로 알 수 없었다. 클로디아는 눈을 크게 떠 눈물을 떨구지 않으려 애쓰며 말했다.

“그럼 저한테 입 맞춰요.”

내내 고개를 숙이고 바닥을 보고 있던 데미안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황망한 표정이었다. 그 표정에 클로디아는 죽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당장.”

“…공주님.”

“내 명령은 뭐든지 한다면서요.”

클로디아가 입술 끝을 올렸다.

“거짓말쟁이.”

그 말을 끝으로 그녀는 팔을 들어 눈을 가렸다. 이제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내내 솔직했으나 데미안은 그렇지 않았다. 자신에게는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해주지 않았으면서 남들 앞에서는 그녀를 사랑한다고 웃으며 말했다. 대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잘못된 건지 알 수 없었다.

쥬버린에게 데미안이 좋다고 말하지 말았어야 했던 걸까? 클로디아는 이제 쥬버린까지 원망스러웠다. 자신이 지나가듯 한 말에 쥬버린은 약혼을 결정했고, 결과는 참담했다.

그때였다. 커다란 그림자가 그녀의 위로 내려앉았다. 클로디아는 순간 움찔해 팔을 들어 위를 올려다봤다. 눈썹을 모은, 이상한 표정의 데미안이 제 앞에 무릎을 꿇고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눈은 울 것 같은 표정이어서, 클로디아는 순간 이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왜 당신이 울어?’

“…공주님.”

그게 무슨 뜻인지 생각하기도 전에, 그의 커다란 손이 자신의 손목을 붙잡아 내렸다. 그 생경한 감촉에 당황하는 와중 바짝 마른 입술이 제 입술에 와닿았다, 남자의 내리감은 속눈썹 끝이 클로디아의 볼을 간지럽힌다고 느낀 순간, 입술은 속절없이 그녀에게서 떨어졌다. 여전히 그 속을 알 수 없는 깊은 눈이 자신을 흐릿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데미안이 떨리는 목소리로 다시 말했다.

“…죄송합니다.”

클로디아의 커다란 푸른 눈이 순식간에 젖어 들었다. 한 방울, 두 방울 떨어지던 눈물은 강을 이뤘다. 클로디아는 결국 엉엉 울어버리고 말았다.

이게 뭐야. 싫어. 정말 싫어.

자신에게 입 맞추자마자 죄송하다고 하는 남자와 약혼했다니 믿을 수 없었다. 클로디아는 폭포수처럼 눈물을 떨어트리며 온갖 말을 쏟아냈다. 그 말들은 지금 와서는 도저히 떠올릴 수 없지만, 그녀는 한 가지만은 명확하게 기억했다.

“당신이 너무 싫어요…. 정말 싫어.”

클로디아는 몇 번이나 그 말을 해댔다. 데미안이 뭐라고 했는지,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렇게 울고 또 울다 지쳐서 잠들었고, 클로디아는 남은 모닝문의 축제를 열에 들떠 침대에서 보내야 했다.

며칠 후, 클로디아와 데미안의 파혼이 결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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