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세 번째 용의 저주
‘칼질이라고는 식탁 위에 오른 부드러운 고기를 자르는 것밖에 하지 못하는 계집애가, 어떻게 한 번에 사람을 죽일 수 있겠어요? 하물며 마왕인데요.’
거울 공작은 자신의 거대한 저택을 헤매다 말고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그녀는 무한히 넓은 거울로 자신의 저택 어디든, 나아가 저 먼 대륙까지도 살펴볼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그 저택 안에서라면 그녀는 어떤 일이든 할 수 있었다. 그 저택은 다름 아닌 자르지스의 세 번째 용이 지은 영원한 거울의 미로 위에 세워져 있었으므로.
그녀의 오래된 취미는 제 저택 안에 들어온 이들의 과거와 현재를 구경하는 것이었다. 자르지스에서 수백 년을 살다 보면 결국 어떤 취미에든 질리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 취미만은 세월이 지나도 질리지 않았다. 궁핍한 자르지스에서 거울 공작의 저택을 노리는 무뢰한들은 얼마든지 있었고, 그녀는 그 무뢰한들을 거울의 미로에 떨어트리고는 지쳐 쓰러질 때까지 그들의 과거를 뒤져봤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의 저택에 들어온 두 사람이 어떤 사람들인지 대번에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어떤 관계인지도. 참으로 흥미롭고도 끼어들고 싶게 하는 관계였다.
하지만 그런 건 나중에 할 일이다. 공작은 턱을 괴고 방금 들은 말을 곱씹었다.
‘제가 할 수 있는 건 고작 그것뿐이죠. 당신처럼 검을 잘 휘두르는 것도, 그렇다고 토끼 한 마리 잡을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에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손을 놓고 있는 걸 당연하게 여기진 않겠어요.’
하. 웃음이 나왔다.
그 미겔의 후손이 하는 말치고는 꽤 되바라졌다.
맨 처음 자신의 미로에 들어온 벌레 중 하나가 미겔의 후손이라는 걸 알았을 때, 공작은 당장이라도 손을 뻗어 그 벌레를 눌러 죽이고 싶었다.
하지만 그 감정과는 별개로, 거울 공작은 이게 어쩌면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거울 공작은 신중했다. 그녀는 용감하기만 한 공주에게 자신의 기회를 맡기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공작은 공주를 시험했다. 공주님의 소양 같은 건 그녀 또한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네가 정말 공주님이라면 이 정도는 잘 알 거야. 그렇지?
혹시라도 클로디아가 엉엉 울며 주저앉는다면 공작은 미련 없이 그녀를 무저갱으로 떨어트릴 준비가 되어 있었다. 정확히는 그쪽이 훨씬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클로디아는 끝끝내 그녀를 찾아냈다.
그리고 자신의 앞에서 되묻고 있었다.
“강해지고 싶지 않으냐고요?”
클로디아는 말도 안 된다는 듯이 그녀를 쳐다봤다. 거울 공작은 빙그레 웃으며 자신의 권좌에 털썩 주저앉았다. 용의 머리가 돋을새김 된 팔 받침은 그런 그녀를 감싸 안듯이 받아냈다.
“그래.”
“무슨 뜻이죠?”
“나는 네가 하는 말을 들었거든. 검을 잘 휘두르지도, 토끼 한 마리 잡을 능력도 없는 공주님.”
클로디아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공작은 나른하게 턱을 괴며 미소 지었다.
“내가 아무렴 너희 대화를 못 들었을 것 같니?”
“실례지만.”
그때 나선 것은 데미안이었다. 데미안은 눈에 힘을 주고 여인을 바라봤다.
이 여인은 메마르고 황폐한 자르지스에서 지나치게 이질적이었다. 아름다운 옷과 장신구는 둘째치고, 핏기없고 창백하지만 고운 피부가 그랬다. 마치 고귀한 공주님이라도 되는 듯한 그녀는, ‘거울 공작’이라는 말만 가지고 납득하기엔 참으로 이상한 존재감을 가졌다.
“허황된 말은 그만하시고 약속을 지키십시오, 거울 공작.”
“약속?”
“당신을 찾으면 내보내 주겠다는 약속 말입니다.”
거울 공작은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여 눈앞의 남자를 쳐다봤다. 다부진 체격을 가진 남자는, 태산 같은 존재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야말로 ‘공주님의 기사’라는 말에 걸맞은 모습이었다.
그녀는 미소 지었다.
“아, 내가 그렇게 약속했었지.”
“….”
“하지만 너희도 내게 거짓말한 처지에, 내게 약속을 지키라는 말은 너무 웃기지 않아? 공주님. 이름이 뭐라더라? 클로드라고?”
거울 공작이 입술을 말아 올렸다.
“재미있는 변명이었어. 어딘가의 선머슴 같은 이름이라 너와 전혀 안 어울리긴 했지만.”
클로디아는 무표정하게 거울 공작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재미있으셨다니 다행이에요.”
“정말 그렇게 생각하니?”
“아뇨. 하지만 당신 비위를 맞추지 못하면 이곳을 나갈 수 없으니까.”
공작의 물음에 클로디아는 무감히 대답했다. 공작은 정말로 재미있다는 듯 깔깔 웃었다.
“세상에 얘 좀 봐! 막 나가기로 결심한 거니?”
“그것도 아뇨. 당신이 그랬잖아요. 저희 머릿속을 뒤져보겠다고. 그게 정확히 무슨 뜻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클로디아가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이었다.
“제가 거짓말을 해 봐야 소용없다는 뜻으로 들려서요.”
“…나는 이래서 공주님들이 싫어.”
클로디아의 말에 공작이 툭, 내뱉었다. 무슨 뜻일까. 거울 공작의 새카만 눈을 바라보며 클로디아는 의문을 곱씹었다.
“눈치가 빨라서, 내가 무슨 말을 하든 거기 넘어가는 법이 없다니까.”
“…마치 공주들을 기백 명쯤 만나보신 것같이 말씀하시네요.”
“그래? 딱히 틀린 말도 아니긴 하지.”
거울 공작은 다리를 뻗고 흔들었다. 권좌에 앉았다기에는 좀 경망스러운 행동이었으나, 이상하게도 그녀에게는 잘 어울렸다.
클로디아는 그녀를 가만히 바라봤다. 공작은 한참 동안 바닥을 바라보다가, 미소 지었다.
“내가 누구인지부터 설명해야겠군.”
“…마족 아닌가요?”
“뭐, 비슷해.”
공작은 새카만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새침한 얼굴을 했다.
“내 이름은 몰라도 돼. 알아봐야 기억하지도 못할 테니까. 하지만 내가 어떤 사람인지는 알아야 말이 빠르겠군.”
“….”
“나는 세 번째 용의 포로다.”
세 번째 용?
그 말을 들은 클로디아와 데미안이 서로를 쳐다봤다. 세 번째 용이라니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거지? 갑자기 무슨 용이… 거기까지 생각하던 클로디아가 아, 하고 입을 벌렸다. 그리고 동시에 거울 공작을 바라봤다.
“설마.”
“항상 설마가 사람을 잡지.”
거울 공작이 어깨를 으쓱였다. 클로디아는 당혹한 표정으로 물었다.
“하지만 용들은 아주 옛날에 다 죽었잖아요…?”
“아주 옛날에 다 죽었지만, 아직도 그 저주는 자리에 남아 사람을 괴롭히지. 너희도 마찬가지잖아?”
공작은 데미안 쪽을 턱짓했다.
데미안은 영문 모르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클로디아는 대강 알아들은 눈치였다.
그 증거로, 그녀는 데미안의 팔을 강하게 붙들었던 것이다. 데미안은 이쯤 해서 다시 한 번 자신이 되물을 수밖에 없다고 느꼈다.
“…죄송하지만 로드. 저는 무슨 뜻인지 도통….”
“공주들이 어릴 적 자기 전에 듣는 수많은 동화 중에는 용에게 잡혀간 공주님의 이야기도 수두룩하지.”
데미안의 말을 자른 것은 공작이었다. 그녀는 손가락 끝으로 용의 머리를 톡톡 두드리며 웃었다.
“왕자님이 구해주지 않으면 영원히 용의 포로로 살아가야 하는 그 공주님의 이야기가 어디서 유래한 건지, 궁금하지 않아?”
***
먼 옛날 불의 용 세 마리가 있었다. 암흑의 바다에 둘러싸인 네 곳의 대륙은 그 용들에게 너무 추웠다. 얼음의 용이나 모래의 용, 혹은 바위의 용이었다면 괜찮았을 것이다. 하지만 불에서 태어난 용들은 대륙의 온도를 견딜 수 없었다.
용들은 불을 피우기로 했다. 인간들도 추우면 불을 피워 몸을 데웠으니 탓할 만한 일은 아니었다. 다만 용들이 너무 크다는 게 문제였다. 용들이 아무 곳에서나 불을 피우면 인간들이 타죽고 말 것이었다.
용들은 고민 끝에 대륙이 아닌 섬을 택했다. 자르지스. 그곳이라고 인간이 살지 않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적게 살았다.
많은 희생 대신 적은 희생을 택했으니 인간들도 불평할 수 없겠지!
그게 용들의 생각이었다. 용들은 인간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들의 윤리관 또한 인간의 기준을 따르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용 세 마리는 자르지스에 불을 피웠다. 세 마리가 모두 들어갈 정도로 널찍한 화구 안에 불을 피우니 대번에 따뜻해졌다.
하지만 인간들은 대번에 새까맣게 타 버렸다. 화구 근처에 있다가 불타 죽은 이들은 차라리 사정이 나았다. 화구에서 먼 곳에서 살고 있던 자들은 피부가 새까매졌다. 그 용의 불길들이 얼마나 강한지, 대륙 남부에 있던 사람들도 가무잡잡해졌다. 남부에는 정글이 생겼고, 늪이 생기기까지 했다.
그때 용사 미겔이 나타났다. 대륙을 구하기 위해 나선 그가 자르지스의 고통이라고 외면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바위의 용을 죽이고 껍질을 뒤집어쓴 그는 용의 화구에서 잠들어 있던 첫 번째 용을 죽여 불에 던졌다. 불이 삽시간에 사그라들었다. 둘째 용은 놀라 도망가다가 실수로 꼬리에 불을 붙이고 말았다. 꼬리를 잃고 바다로 뛰어든 둘째 용은 저주를 퍼부었다.
‘아무도 이 자르지스에서 나가지 못하리라!’
문제는 세 번째 용이 미겔을 피해 자르지스의 땅을 파고들었다는 것이다. 세 번째 용은 미겔에게서 도망치기 위해 수백 개의 거울을 자신이 도망친 미로에 세워뒀다. 그 안에서 미겔이 길을 잃고 자신을 찾지 못하길 바란 것이다.
용사 미겔이 아무리 강하다 해도 용이 작정하고 만든 미로 속에서 쉽게 길을 찾아 나가기란 요원했다.
미겔은 열흘 동안 거울의 미로 속에서 헤매다가 결국 세 번째 용을 잡지 못하고 탈출했다. 한시바삐 아무르로 네 개의 대륙을 붙들어놔야 한다는 임무가 그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때문에, 땅속에서 숨죽이고 숨어 있던 세 번째 용은 자르지스를 나갈 방도를 영원히 잃었다. 둘째 용의 저주는 세 번째 용에게도 적용됐던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미겔의 손에 죽은 둘째 용의 저주는, 그 원수인 미겔에게는 아무 영향력을 미치지 못했다.
***
그제야 클로디아는 자신이 죽음의 바다에서도 아무 저주를 받지 않고 살아나온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 데미안도 중독되었는데, 자신은 멀쩡한 것이 이상하다고 계속 생각해오던 차였다.
하지만 그게 미겔의 혈통이기 때문이라면 다 설명됐다. 공작 또한 그녀의 생각을 꿰뚫어 본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너만은 그 바다를 건널 수 있어.”
“…디자이어는….”
“그 순진한 척 구는 정령이 그걸 모를 것 같아?”
공작은 어깨를 으쓱했다.
“하지만 너 혼자 바다를 건너봐야 아무 소용없기 때문에 그런 척했겠지.”
“디자이어는 그런 애 아니에요.”
“아, 그러셔.”
검은 머리의 여인은 노골적인 비웃음을 띠었다.
“수백 년을 살아온 정령에게 ‘그런 애’라고 말할 수 있는 순진함을 오랫동안 간직하길 바라.”
비아냥거리는 말투 속에 뼈가 있었다.
“아무튼, 모든 사람이 미겔에게 죽은 첫 번째 용과 저주의 바다를 만든 둘째 용은 기억하지만, 세 번째 용을 기억하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뿐이지. 자르지스에서 그 용이 나가지 못했기 때문이야.”
거울 공작은 차분하게 웃었다. 클로디아는 한 발 물러서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당신은, 그렇다면….”
“당신이 세 번째 용인 것은 아닙니까?”
그러나 클로디아의 노력이 무참하게 데미안이 입을 열었다. 거울 공작은 다시 자신의 권좌에 앉은 채로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였다. 미소는 잃지 않은 채였다.
“그랬다면 너희들은 이곳에 들어온 순간 거울의 미로에 떨어져서 영원히 헤매고 있었겠지.”
“…용이 아니라고요?”
“그래. 나는 용이 아냐.”
공작은 자신의 손가락으로 권좌를 두들겼다. 권좌 끝에 새겨진 조각은 아이러니하게도 용의 머리 모양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을 납치해온 강대한 용을 생각했다.
***
자르지스에 인간이 얼마 없다 해도, 사람이 모이는 한 인간들은 사회를 구축하기 마련이다.
자르지스에도 작은 왕국이 있었다. 왕국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할 정도였지만, 화구가 생기기 전의 자르지스는 분명 나쁘지 않은 곳이었다.
화구가 생긴 다음의 자르지스에서 사람들이 그나마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던 것은, 왕국이 있었기 때문이다.
자르지스의 왕은 고통받는 자르지스의 사람들의 삶을 그나마 살 만하게 보살피는 존재였다.
미겔이 용을 잡겠다고 나섰을 때, 자르지스의 왕은 그것을 만류했다. 혹시라도 미겔이 실패했을 때 용들이 인간에게 표할 분노 때문이었다. 하지만 자르지스의 주민들은 대부분 미겔을 따랐다. 용들에게 고통받아온 세월은 그만큼 길었다.
왕은 미겔을 내버려 두고 주민들과 섬을 떠나려 했다. 하지만 두 번째 용의 저주가 미처 떠나지 못한 그들을 가로막았다.
자르지스의 주민들은 그곳에 고립됐다.
공작의 말투는 덤덤했으나 클로디아는 입을 틀어막았다.
“그럴 수가….”
그녀는 분명 자르지스로 떠나기 전, 항구도시에서 이 비슷한 이야기를 들은 적 있었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들까지 알지는 못했다. 그녀가 뭐라 말하기 전에, 데미안이 다시 입을 열었다.
“미겔 전하가 자르지스를 팽개쳤다는 겁니까?”
“그래.”
공작의 새카만 눈에는 방금 전의 비아냥과는 다른 분노가 깃들어 있었다. 그녀는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말했다.
“인류를 구할 용사든, 용이든 자르지스의 주민들에게는 다르지 않았다. 그들은 대다수를 위해 소수를 포기했어.”
“…아니야….”
클로디아의 얼굴이 당황과 황망함으로 물들어 있었다. 공작은 희미하게 웃었다. 클로디아가 부정한다고 해서 사실이 거짓이 되는 것은 아니다.
미겔 포르투는, 자르지스를 포기했다.
네 개의 대륙이 암흑의 바다로 떠밀려가고 있었던 상황에서 그라고 해서 대단한 것을 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시간을 조금이라도 지체한 순간 대륙들은 세계의 끝에서 무저갱으로 떨어졌으리라.
미겔은 포르투에 아무르를 박아 넣고 대륙의 중앙에 띄웠다. 아무르는 네 개의 대륙을 묶어 포르투를 중심으로 단단히 고정했다. 아무르의 힘은 세계의 끝조차도 어떻게 할 수 없을 만치 강대했고, 세계는 구원받았다.
그리고 잊혀진 자르지스의 사람들은 용에게서 분노를 떠안았다.
세 번째 용이 살아 있으니 용의 화구는 그 불의 화기는 약해졌으되 사라지지 않았다. 용은 영원한 미로 안에 지나가는 인간들을 끌어들여 모두 미쳐버리게 만들었다. 사람들은 생각 끝에 용에게 제물을 바쳐야 한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새카만 피부를 가진 사람들 중 가장 고귀한 처녀가 용에게 바쳐졌다.
자르지스 왕의 딸이었다.
용이 자신을 보고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 어찌하여 자신을 살려두었는지 이제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숱한 밤과 숱한 낮을 거쳐, 용은 미로에 사람들을 가두지 않았다. 대신 공주를 제 옆에 두었다.
용이 노쇠해 죽음을 앞뒀을 때, 그는 온 힘을 다해 그녀에게 저주를 걸었다.
공주를 구할 왕자 없이는 그녀 또한 영원히 이곳을 빠져나가지 못할 것이라고.
일종의 심술이었다. 아마 그녀를 두고 영원한 생명을 가졌으리라 일컬어지는 종족인 자신이 먼저 죽어버리는 데 대한 것이었으리라. 오갈 길 막힌 자르지스에 왕자라니. 웃음 터질 노릇이었다.
그녀는 용의 뒤를 이어 거울 미로의 주인이 됐다. 소용없는 짓이라는 걸 알면서도 이 미로를 지나가는 이들의 과거와 현재를 뒤졌다. 왕자를 찾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중에 왕자는 없었다. 용의 재보를 훔치러 온 좀도둑, 그리고 멋모르고 길을 지나가던 마족들. 시간이 좀 더 흐른 후 그곳이 용의 미로라는 사실이 잊혀지자 좀도둑들의 발길도 끊겼다. 다만 화구의 불길을 피해 도망치는 마족들이 더 많았다.
***
“하지만 그렇다면 마왕은….”
“아나니아는 내 동생 같은 거지. 뭐, 동생으로 따진다면 몇백 살쯤 어린 동생이겠지만.”
그녀를 바친 후 자르지스의 사람들은 용의 분노에서 벗어났다. 하지만 그건 엄청나게 무거운 등짐에서 달걀 한두 개를 덜어낸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자르지스는 여전히 험난했고 사람들은 저주에 괴로워했다. 자르지스에 적응하기 위해 변하는 사람들이 생겼다. 뿔이 난 사람, 날개가 돋은 사람, 피부가 돌이 된 사람….
“그게 너희들이 말하는 마족이야.”
“….”
클로디아가 입을 가렸다. 그녀의 말대로라면 마족들이야말로 가장 억울하게 피해 입은 자들이었다. 초대 국왕이 포기함으로써 사람의 인생도 잃은.
클로디아는 마을에서 자신들에게 만드라고라를 뽑아달라고 부탁하던 날개 달린 여인을 생각해냈다. 그녀는 불손하기는 했으나 친절했다. 마을에서 뿔돼지 고기를 사주며 그들의 어깨를 도닥이던 여관 주인도 생각했다. 화구로 간다는 그들을 걱정하던 그의 말투가 아직도 귀에 선연했다.
“그 사람들이… 마족이 아니라, 원래는 인간이었다는 건가요?”
“글쎄. 내게는 걔들도 인간으로 보이는데.”
공작의 심드렁한 대답과 함께 기억은 수없이 거슬러 올라갔다. 클로디아의 기억이 해변에서 데미안에게 살해당한 갑각류들에게까지 닿았을 때, 그녀는 저도 모르게 데미안을 올려다봤다. 그리고는 곧 그의 깊이를 알 수 없는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고, 그녀는 당황했다. 자신도 모르게 그를 비난한 것처럼 돼 버렸던 것이다.
클로디아의 기색을 알아챘는지 데미안 역시 고개를 돌렸다. 그 모습에 클로디아는 지독한 자괴감이 들었다. 이런 상황에, 그에게까지….
어떻게 하지. 그녀의 머릿속이 혼란으로 가득 찼다. 마족들은 인간이고, 초대 국왕은 용사가 아니라…. 자르지스의 원수였다. 그리고 눈앞의 여인은 그런 국왕의 피해자 중 하나였다.
그녀는 대체 자신이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 것인지 종잡을 수도 없었다. 게다가 그녀의 말대로라면, 디자이어도 자신에게 말하지 않은 것들이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디자이어를 명랑하고 속없는 정령이라고만 생각하고 있던 그녀에게는 충격적인 일이었다.
그때였다.
누군가가 그녀의 어깨를 쥐어 왔다. 클로디아는 화들짝 놀라 오른쪽 위를 올려다봤다. 데미안이었다.
“로드.”
“…예, 예?”
“폐하의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폐하…? 아바마마 말예요?”
“정확히는…. 쥬버린 전하께서도 하신 말씀 말입니다.”
오라버니? 왜 지금 그가 쥬버린의 이야기를 하는지 순간 당황했던 클로디아는 퍼뜩 알아차렸다.
혼란스럽다면, 혹시 네가 나쁜 사람 앞에 있다면 네가 누구인지를 생각하렴, 클로디아 테 포르투.
그러다 보면 마음이 차분해진단다. 그리고 곧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있지.
마을 사람들이 나쁜 영주의 말을 듣고 그녀를 위협했던 투르에서, 그녀가 다른 사람들에게 했던 이야기였다. ‘쥬버린 오빠가 늘 그랬는걸요. 정말 나쁜 사람들 앞에서는 제가 누구인지를 생각하라고. 그러다 보면 마음이 차분해지고,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있다고 했어요.’
‘하지만, 폐하라고? 아바마마께서도 그런 이야기를 하셨나?’
그쯤 해서 클로디아는 정신을 차렸다.
아바마마가 했는지, 쥬버린이 했는지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 중요한 건, 자신이 지금 스스로를 위험에 빠트렸던 적의 말을 듣고 혼란에 빠져 있었다는 사실이다. 명확하지 않은 정보는 그녀의 시야를 흐리게 한다.
데미안은 그런 자신에게 경고한 것이다.
‘당신이 누구인지를 생각하세요. 그렇다면 당신이 할 일은 명확해집니다.’
그녀는 머릿속을 정리했다. 눈앞의 여인이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따로 있을 것이다. 자신을 혼란에 빠트리려고? 하지만 그렇다기엔 공작이 아까 했던 말이 마음에 걸렸다.
‘차라리 처음부터 포르투의 공주님이라고 말하지 그랬어. 그럼 아나니아 앞에 갖다 줬을 텐데.’
‘하지만 난 자기 편이야.’
클로디아는 침착하게 숨을 골랐다. 공작은 그런 그녀를 지그시 쳐다보고 있었다.
묘한 미소를 지은 채. 그녀는 저런 시선에 익숙했다. 무언가 바라는 것이 있는 자의 눈이다.
그제야 거울 공작의 장황한 옛이야기도 조금은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만약 그녀가 클로디아를 죽이거나 해치고 싶었다면, 그럴 수 있는 순간은 얼마든지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클로디아를 시험이라도 하듯, 이런저런 미로에 가두었다. 그런 행동을 하는 사람의 이유는 단 한 가지다.
바라는 게 있기 때문이다.
클로디아는 입을 열었다.
“당신의 말대로라면 당신은… 마왕의 친척 아닌가요? 그런데 그런 저를 아나니아 앞에 가져다 놓겠다고 말했지요?”
“그래.”
“제게 강해지고 싶지 않냐고도 물었죠.”
공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클로디아는 빠르게 눈을 깜박였다.
“당신은 마왕이 죽길 바라는 건가요?”
“조금 달라.”
“어설픈 문답은 사절이에요, 거울 공작님. 대체 제게 바라는 게 뭐죠?”
“네게 바라는 건 아냐. 그냥 나의 오랜 소망이지.”
공작은 가슴에 자신의 손을 모았다. 그 조그만 손이 언뜻 가녀려 보여 클로디아는 잠시 거기 시선을 빼앗겼다.
공작은 흐리게 웃었다.
“나는 이곳에서 나가고 싶어.”
이곳에서 나가고 싶다고? 클로디아는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공작은 음험하게 읊조리기 시작했다.
“세 번째 용은 나를 이곳에 가둬놓고 혼자 죽어버렸어. 제기랄. 인간이 미웠으면 그냥 그대로 같이 죽으면 되지, 평생 이루지도 못할 저주 같은 걸 걸어놔서는 나는 수백 년째 여기서 죽지도 못하고 갇혀 있다고.”
이루지도 못할 저주.
클로디아는 다시금 공작이 말했던 것을 떠올렸다. 왕자님이 구해주어야…. 거기까지 생각하고 클로디아는 자신의 머릿속에 떠오른 가능성 하나를 타진해봤다.
“…혹시 제가 당신을 데리고 밖으로 나가주면 되는 건가요?”
“내 말 뭘로 들은 거야? 자기야. 왕자님이 구해주러 와야 한다고, 나를.”
공작이 붉은 입술을 일그러트렸다. 말투는 다정했으나 내용은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저도 공주니까….”
클로디아가 어물어물하자 데미안이 나섰다.
“성별이 문제인 건 아닙니까? 그렇다면….”
공작은 데미안에겐 한층 더 가차 없었다. 그가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어떤 이야기를 할지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 냅다 끊어버리고 짜증을 냈기 때문이다.
“네가 왕자야? 그야 저기 있는 포르투의 공주님한테는 그럴지도 모르지만 아니거든?”
“저, 저한테 왜요!”
놀란 건 클로디아였다. 엉겁결에 소리 지른 그녀를 보고 공작은 투덜거렸다.
“난 정말이지 남의 연애 사정에 끼는 건 별로 안 좋아하니까 더 말은 안 섞을게. 하지만 내가 너한테 바라는 건 따로 있다고. 클로디아 테 포르투.”
“연애… 아니거든요!”
“아, 그래그래. 아무튼.”
공작은 권좌에 앉은 채로 지루한 듯 손을 내저었다.
“아까 하던 말을 계속할게. 너는 토끼 한 마리도 제대로 죽일 수 없는 공주야. 하지만 나는 너를 강하게 해줄 수 있지. 네가 내게 필요한 것을 준다면.”
“…얼마나요?”
“글쎄. 이 성을 부술 수도 있는 힘이지.”
데미안이 이마를 찌푸렸다.
“거절하십시오.”
“이봐. 아나니아를 죽일 수 있는 힘이라고.”
공작이 투덜거렸다. 그러나 데미안은 지지 않았다.
“당신이 바라는 게 무엇이든 말이 되지 않습니다. 그런 힘이 당신에게 있다면 왜 이곳을 나가지 못합니까?”
“말했잖아, 저주라고.”
아름다운 여인의 손끝이 희게 물들었다. 팔 받침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서였다.
그녀는 이마를 잔뜩 찌푸리고 말을 이었다.
“나는 미로를 헤매는 너희들의 과거와 현재를 봤어.”
“….”
“그리고 너희들의 기억 안에서 쥬버린이라는 이름의 왕자를 봤지.”
“…잠깐.”
클로디아가 당황했다. 그러나 공작은 신경 쓰지 않고 덧붙였다.
“그를 내게 줘. 대신 너는 마왕을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해치울 수 있을 만큼 강해질 수 있어.”
황당한 말이었다. 하지만 너무 황당하기에 오히려 믿을 수밖에 없는 말이었다. 공작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아무래도 습관인 듯했다. 바닥까지 닿는 치렁치렁한 긴 머리카락을 손으로 빗어 넘기며 그녀는 중얼거렸다.
“다른 왕자는 필요 없어. 너희가 아나니아를 죽인다 해도 아마 죽음의 바다를 건너올 수 있는 건 그뿐일 테니까. 모든 것이 끝나고 나면, 그가 이 섬으로 와서 나를 데리고 나가주기를 바라.”
“…그것뿐인가요?”
“그것뿐이냐니, 당연히 아니지.”
공작이 어깨를 으쓱했다.
“내가 그렇게 호구로 보여?”
아름다운 여인은 오만하게 다리를 꼬며 클로디아를 올려다봤다. 왜소하다는 말에 가까운 그녀가 앉아서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는데도, 어쩐지 클로디아는 그녀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그건 아마 자신을 다 알고 있다는 저 오만한 눈빛 때문이리라.
“세 번째 용은 내게 이곳에서 나갈 수 있는 길만 빼고 모든 걸 내게 물려줬어. 거울의 미로를 내가 괜히 다룰 수 있는 것 같아? 내가 너에게 줄 수 있는 힘은 무궁무진해. 나는 그런 걸 단순히 내 탈출에만 쓰진 않을 거야.”
“그럼 대체 무슨 뜻을….”
“나는 나의 탈출까지 포함해서, 그 아름답고 못돼 처먹은 왕자를 가지고 싶은 거야.”
공작의 붉은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그녀의 시선은 정확히 클로디아를 향해 있었다. 있을 수 없는 말을 들었다는 듯, 얼굴이 붉어진 그녀를 똑바로 쳐다보며 공작은 말했다.
“혹시나 싶어 말하는데, 네 오빠를 말하는 거 맞아. 포르투의 성 중앙에 얼어붙어 누워 있는 그 남자 말야.”
“…오라버니가 못돼 처먹었다니, 대체 무슨….”
“그럼 좋은 사람이니?”
클로디아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거울 공작은 오만한 얼굴로 웃으며 그녀를 다시 한번 다그쳐 물었다.
“그는 네게 좋은 오빠였니? 말해봐, 클로디아 테 포르투.”
“…오라버니를 가져서 대체 뭐하려고요?”
대답을 피했다. 정확히는 시간을 벌어보려는 것에 불과했다.
이상했다. 쥬버린은 분명 클로디아에게 다정한 사람이었다. 언제나 그녀의 행복만을 기원했고, 그녀를 위해서라면 아낌없이 베풀었다. 클로디아 또한 그것을 차고 넘치게 알고 있었다. 하지만 왜 그가 좋은 오빠였다고 섣불리 답할 수 없을까?
공작은 웃음을 지우지 않고 답했다.
“글쎄. 남편으로 삼을까?”
“…하늘섬의 왕비가 되고 싶으신 거예요?”
“무슨 소리야? 그런 것 따위 돼서 뭐 하라고?”
“그럼 대체….”
여인은 팔짱을 끼고 그녀를 똑바로 쳐다봤다. 클로디아는 그녀의 웃음 속에 의뭉스러움과 슬픔이 동시에 존재한다고 느꼈다. 이윽고 그녀가 입을 열었다.
“온 대륙을 호령하는 자기만큼 대단한 공주는 아니었지만, 나도 한때는 왕의 딸이었지, 하지만 나는 단 한 번도 내 멋대로 굴어본 적이 없었어. 태어날 때부터 용에게 바쳐질 때까지.”
“….”
“내 인생은 모두 내 아버지와 내 친척, 내 오빠들이 멋대로 정했지. 그리고 내 최후마저도 세 번째 용이 마음대로 정해버렸어. 그런 내가 이제 와 온 대륙을 다스리던 남자 하나 갖고 싶은 게 이상하니?”
클로디아는 아연하게 여인을 바라봤다. 눈앞의 공작은 아름다운 쥬버린 왕자를 가지고 싶어 했다.
그 뜻은 자명했다. 먹겠다는 것도, 찢어버리겠다는 것도, 그 가련한 목숨을 거두겠다는 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그저 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남자 하나가 갖고 싶은 것뿐이었다. 하필 그게 클로디아의 오빠라는 게 문제였지만.
공작이 연이어 말했다.
“왜 네 오빠냐고 묻는다면, 물론 죽음의 바다를 건너올 수 있다는 게 가장 크겠지만, 글쎄. 네 오빠에게서 내 아버지와 내 오빠를 봤다면 믿어주겠니?”
“…당신의 아버지요….”
“그래. 나를 용에게 바친 나의 아버지.”
공작은 손가락을 빙글빙글 돌리며 용머리를 쓰다듬었다.
“네 오빠는 행복한 삶을 멋대로 정해놓고 너를 거기 끼워 맞췄지.”
“…오라버니는 좋은 분이셨어요!”
“이런, 늦었어. 그 말은 내가 아까 물어봤을 때 했어야지.”
공작이 눈을 접으며 미소 지었다. 클로디아는 당황해 입을 닫았다. 설득력 없는 말을 했다고 스스로 실토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거울 공작은 말을 이었다.
“내 아버지는 나를 맘대로 부렸단다. 아마 용에게 제물로 바쳐지지 않았어도 나는 다른 사내에게 넘겨졌을 거야. 내 아버지가 아니라도 내 오라비가 그랬겠지. 처음에는 네 과거를 보고 그가 증오스러웠단다. 하지만 곧 아름다운 얼굴과 백치 같은 그의 미소를 보니 마음이 바뀌더라고.”
“대체….”
“왕자들이 공주를 아내로 맞아 인형처럼 앉혀놓듯, 나도 왕자를 남편으로 맞아 나의 미로에 앉혀둘 수도 있지 않겠니?”
공작은 거기까지 말하고 아, 하고 뭔가 생각난 듯 덧붙였다.
“포르투의 왕위야, 네 오빠가 이은 것도 아니니 네가 이으면 되겠지. 내 힘을 가지고 아나니아를 물리친다면 네가 왕위에 앉을 명분 또한 생길 것이고. 그러니 걱정 말고 내게 네 오빠를 주렴.”
클로디아는 그쯤 해서 그녀와 말을 그만 섞기로 결심했다.
그녀가 어떤 말을 하는지는 십분 이해했다. 클로디아 또한 쥬버린이 제게 어떻게 대했는지, 그가 자신을 어떻게 천치 취급했는지 지금에 와서는 모르지 않았으므로.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쥬버린이 없는 자리에서 ‘예, 그러세요. 저희 오라버니를 남편으로 맞으세요.’ 하고 마음대로 내어줄 수는 없다.
‘그건 오라버니가 내게 한 짓과 같은 것이야.’
클로디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강해지고 싶었다. 그녀가 용의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아예 안 믿기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 미친 사우나와 핑크빛 방을 보고 있으면 안 믿는 것이 더 이상했다. 자신이 실로 강해져서, 이곳을 나가 아나니아라는 이름을 가진 마왕의 심장에 칼을 꽂아 넣고 빠르게 돌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거부감이 들었다.
“…싫어요.”
“싫다고?”
공작이 검은 눈썹을 꿈틀했다. 클로디아는 빠른 속도로, 하지만 버릇없어 보이지는 않을 정도로 말했다.
“당신 말은 제가 포르투 왕위를 이어받은 후 오빠를 당신에게 보내라는 것이죠? 하지만 오빠가 제게 그랬다고 해서, 저도 오빠의 인생을 마음대로 결정하란 말인가요?”
“어차피 너 아니면 그대로 죽어버릴 왕자 아냐? 꽤 후한 조건이라고 생각하는데, 난.”
검은 머리의 미인은 권좌에 몸을 깊숙하게 기댔다.
클로디아는 한숨을 쉬었다. 그녀의 말이 맞다. 한시라도 빨리 마왕을 물리치고 쥬버린 왕자의 심장을 가지고 돌아가지 않으면, 포르투는 영원히 아름답고 총명한 왕자를 잃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똑같은 사람이 될 수는 없었다.
“자기가 싫은 짓을 당했다고 해서 도로 갚아주는 건 똑같은 사람이나 하는 짓이에요. 예, 맞아요. 당신 말대로 쥬버린 오라버니는 자기 마음대로 제 행복을 결정했고, 한때 저는 그게 좋은 일이라고 믿었죠.”
“….”
“그리고 저는 강해지고 싶기도 해요. 당신이 정말 용의 힘을 가졌다면 마왕을 쓰러트릴 수도 있겠죠. 그렇지만….”
클로디아는 입술을 축였다. 입이 말라서였다.
“저는 당신 말은 듣지 않겠어요.”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조심스럽게 제 옆에 서 있던 데미안의 손을 쥐었다. 데미안이 흠칫 놀라다가, 그녀의 손을 꽉 쥐었다. 클로디아는 데미안의 손을 들어 보였다.
“제 과거를 보셨다고 말했어요. 그렇다면 수르 알파가 제 손을 잡은 것이 얼마나 대단한 변화인지도 아시겠죠.”
공작이 노골적으로 따분한 표정을 지었다.
“난 너희들의 연애 이야기는 별로 안 궁금하지만….”
“…연애가 아니라!”
거기까지 말하고 클로디아는 데미안의 눈치를 슬쩍 살폈다. 하지만 데미안은 당황하지도 않고 그녀의 말에 고개를 강하게 끄덕여 보였다. 어찌나 긍정하는지 클로디아가 조금 서운할 정도였다. …그러나 지금 당장은 이런 것에 일일이 서운해할 때가 아니었다.
클로디아는 한숨을 쉬고 거울 공작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사람은 변해요.”
“….”
“오라버니는 제가 이곳에 온 줄도 모르고 있어요. 깊은 잠에 빠지기 전에, 오라버니는 제게 성의 살림을 정리해 좋은 남자에게 시집가고 포르투를 내팽개치라고 하셨죠. 하지만 저는 여기 있어요. 그리고 수르 알파는 제 손을 잡고 있죠.”
짧지도 않은 말을 늘어놓으며 클로디아는 오히려 덤덤해졌다.
사람은 변한다. 그게 나쁜 쪽이든 좋은 쪽이든.
하지만 클로디아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향상심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다. 어떤 사람들이든 모두들 자신이 나아지기 위해 뭔가를 꾸준히 한다. 비록 그러기 위해 나쁜 일을 저지른다 해도, 그 근원은 사실 ‘더 좋아지고 싶다’는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다.
쥬버린이 자신에게 맹목적으로 굴었다고 해서, 심술을 부리며 그에게 똑같은 짓을 해 보았자 클로디아가 더 나아지는 건 없다. 마왕을 무찌를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떤 사람의 가능성을 무시하고 얻어낸 힘으로 마왕을 무찌른다고 해서, 더 좋은 결과가 찾아올까?
클로디아는 아니라고 믿었다.
그녀는 자신의 힘으로 마왕을 무찌른 후에, 포르투로 돌아가 눈을 뜬 쥬버린에게 심통을 부리고 싶었다. 어쩌면 그런 말을 눈도 한 번 깜짝하지 않고 하냐고. 죽어가는 와중에도 어쩜 그렇게 무정하게 남은 사람 생각은 하지도 않고 그게 클로디아의 행복이라고 믿을 수 있냐고 을러메고 싶었다.
그러면 쥬버린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아마 눈을 껌벅이며 놀랄 것이다. 미안해할 수도 있다. 쥬버린이 자신의 진짜 행복이 무엇인지 알아차리고 변할 가능성에 클로디아는 모든 것을 걸고 싶었다.
눈을 뜬 그가 변화하기도 전에 ‘미안해요, 오라버니. 오라버니가 살아나는 대신 오라버니를 어떤 여인에게 팔았답니다.’ 하며 쥬버린을 먼 곳으로 보내고 싶진 않았다.
그러나 클로디아는 그 많은 말을 하는 대신 두 발을 벌리고 버텨 섰다.
“당신의 제안은 정말로 구미가 당기는 일이에요. 하지만 저는 당신의 말을 듣지 않겠어요.”
“…거절하는 건가?”
“네. 수르 알파가 제 손을 잡았듯, 그리고 몇 개월 전에는 예쁜 옷과 파티만 생각했던 제가 여기에 있듯이….”
클로디아는 가슴에 손을 얹었다.
“저는 제가 스스로의 힘으로 더 강해질 수도 있다고 믿으니까요.”
약간은 거짓말이다. 내가 정말로 마왕을 무찌를 수 있을까? 그녀는 아직도 현실을 믿지 못했다.
이제 겨우 마왕의 이름을 알게 된 참이다. 그런데 마왕이 어떤 힘을 가지고 있을지는 미지수다. 마왕은 어쩌면 클로디아의 열 배쯤 덩치가 클지도 모른다. 혹은 데미안보다 몇십 배는 더 셀 수도 있지. 그런 그를 자신이 대체 어떻게 이기겠어?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미지의 힘과 제 오빠의 삶을 막무가내로 바꾸고 싶지 않았다.
정확히는, 제게 그럴 권리란 없었다.
“후회하지 않겠어?”
“후회하겠죠.”
뜻밖의 말에 공작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클로디아는 옅게 웃었다.
“앞으로 힘들 때마다 이 순간을 복기하겠죠. 그때 말 들을걸, 한 번에 마왕을 작살낼 수 있는 힘을 달라고 할걸, 하고요.”
“….”
“하지만 제 선택은 바뀌지 않아요.”
클로디아는 데미안의 손을 다시 한번 힘주어 잡았다. 데미안은 아까부터 말이 없었다.
왜일까? 그녀의 말을 듣고 있는 걸까?
그녀는 데미안을 살짝 올려다봤다. 그리고 조금 놀랐다. 그의 얼굴이 벌게져 있었기 때문이다.
“아. 그러셔.”
그리고 클로디아는 그 순간 뭔가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것을 알아챘다. 공작이 영 못마땅한 얼굴로 일어서서 팔짱을 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연설 아주 잘 들었어, 공주님. 그러니까 이제 내 말 듣길 바라.”
딱, 소리와 함께 그녀는 영원한 무저갱으로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