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장. 거울 공작의 성 (13/30)

6장. 거울 공작의 성



 

후덥지근하고 숨쉬기 힘든데, 어깨도 무겁다. 그런 와중에 사방이 어둡기까지 하면 어떻게 될까. 클로디아는 어둠 속에 주저앉아 망연자실해 있었다.

“여기가 어딜까요…?”

“…상황상, 아무래도 그 바위성 안인 것 같습니다.”

어둠 속에서 데미안의 목소리가 들렸다. 클로디아는 그쪽으로 더듬더듬 기어갔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서 촉각에 의지해야 했다. 곧 뭔가에 부딪혔고, 그녀는 “수르 알파, 나예요!”라고 말해야 했다. 그래도 데미안은 클로디아보다 사정이 좀 나았다. 그는 어둠 속에서도 어느 정도는 잘 볼 수 있는 듯했다. 그 증거로 부딪쳐온 클로디아를 잽싸게 부축했으니.

클로디아는 공포심에 저도 모르게 데미안의 어깨를 붙잡았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거죠….”

“…마법적 힘인 듯합니다. 마족들 중에 마법을 쓸 줄 아는 자가 없으리란 법도 없으니까요.”

데미안의 옆에서 클로디아는 밭은 숨을 내쉬었다. 뜨거운 공기가 폐를 조여왔다. 밖에서도 숨쉬기 힘들었지만, 이곳은 더 힘든 것만 같았다. 실내라서 그럴까. 땀이 흘렀다. 데미안이 그녀에게 로브를 덧씌웠다. 클로디아는 속으로 누굴 쪄 죽이려는 건가, 하고 생각했으나 그럴 만도 했다. 어둠 속에서 마족이라도 하나 공격해온다면 둘 다 꼼짝없이 당하고 말 것이다.

게다가 조금 후에는 뜨거운 공기가 제 살을 간지럽히지 않아 이쪽이 조금 더 편하다는 걸 클로디아도 알아챘다. 숨을 쉬면 폐가 괴로운 것은 어쩔 수 없었지만, 그래도 아까보다는 나았다.

클로디아는 자신이 이곳에서 정신을 차리기 직전의 일을 떠올렸다.



 

***



 

산등성이를 타고 가까이까지 내려와 보니 성의 일부는 바위가 아니라 자잘하고 작은 벽돌을 쌓아 올려 첨가해 만든 형태였다. 그러니 이런 유선형의 성이 가능한 것이리라. 클로디아는 더 가까이 가서 보고 싶었으나, 위험하다는 데미안의 경고를 떠올리며 애써 참았다. 그리고 해안숲으로 들어갔다.

해안숲이라고는 하지만 파도의 범람을 막기 위해 얼기설기 심어놓은 숲이라 크게 어둡지 않았다. 마족들이 이 황폐한 섬에서 일부러 뭔가를 심어놓았다는 것 자체가 수상하긴 했지만, 데미안 또한 숲을 약 한 시간 정도 관찰하고 나서 내린 결론이었다.

“지나가도 좋을 법합니다. 맹수도 없는 듯하고요.”

게다가 바다에 심어놓은 나무들이라 그럴까. 잎이 가늘고 넓게 퍼진 나무들이 많았다. 세월이 가면서 소복하게 쌓인, 뾰족하니 마른 나뭇가지들은 폭신폭신했다. 클로디아는 바닥을 걸으며 처음으로 편안해했다. 그간 정글이나 다름없는 뜨거운 숲을 지났으니 무리도 아니었다. 대부분의 바닥은 진흙투성이인 데다가 가끔은 물웅덩이에 발을 빠트리기도 했다. 그녀의 부츠가 마법 걸린 물건이 아니었다면 정말 울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어쩐지….

클로디아와 데미안은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숲이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챘다. 데미안은 처음에 맹수가 없어 보인다 했으나, 이곳은 아예 짐승의 자취가 없었다. 그동안 그들이 지나온 숲은 끊임없이 벌레 울음소리와 짐승들이 지나다니는 기척이 가득했다. 하지만 이 해안숲은, 아무리 환하다고 해도 좀 이상했다.

“데미안, 여기 너무 조용하지 않아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런 경우가 흔해요?”

“…흔하지 않죠. 인위적으로 짐승들을 다 잡아 죽였다 해도 보통은 흘러들어온 짐승들이 터를 잡기 마련입니다. 아주 큰 맹수가 도사리고 있는 숲에는 이런 경우가 가끔 있긴 합니다만….”

아주 큰 맹수, 라는 말에 클로디아는 흠칫하며 데미안의 팔을 붙잡았다. 데미안도 그녀에게 바짝 붙으며 말했다.

“그렇다 해도 벌레 소리는 들리기 마련입니다.”

[어머나, 벌레 소리가 왜 안 들려?]

그때, 갑자기 낯선 목소리가 그들 사이에 난입했다. 클로디아는 화들짝 놀라 숨을 들이켰다. 데미안도 경계하며 위를 올려다봤다. 하지만 목소리의 출처를 찾을 수는 없었다. 여자의 것으로도, 남자의 것으로도 착각할 법한 이상한 목소리는 숲 전체에서 들려왔기 때문이다.

[웬 벌레들이 내 숲에 들어왔나 했더니.]

“…데미안, 이거.”

“…꽉 붙잡으십시오.”

데미안이 검을 빼 들었다. 하지만 목소리는 여유롭게 웃는 소리를 냈다.

[아하하, 너무 예쁜 벌레들이네.]

“누구냐!”

[글쎄. 보통 그런 건 주인이 침입자에게 묻는 거 아닌가? 침입자들이 주인에게 할 말은 아니지 않아?]

두 사람 다 침묵했다. 주인…. 예상이 맞다면 그 거울 공작이라는 자가 분명했다.

클로디아는 애써 입을 열었다.

“저어, 저는 클…로드라고 해요.”

클로디아라고 말하려다가, 혀를 깨물 뻔했다. 클로디아라는 이름이 자르지스까지 알려져 있는지는 모르지만,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다.

“저희는 용의 화구가 있던 마을에서 도망쳐 나왔어요. 하지만 가족들과 헤어지는 바람에, 거기로 돌아가서 그들을 찾아보려고 해요. 제발 저희가 여길 지나가는 걸 봐 주실 순 없을까요?”

[싫은데? 내가 왜?]

보통은 이런 이야기를 하면 흥미라도 보이던데, 목소리의 주인은 정말로 클로디아의 말에는 요만큼도 흥미가 없다는 듯 바로 거절했다. 누군가에게 거절을 말하는 것이 익숙한 말투는, 권력자의 그것이 분명했다.

클로디아는 이를 악물었다.

“자비로우신 공작님, 제발요.”

[이런, 내가 공작이라는 걸 알면서도 들어왔단 말야?]

“…죄송해요! 지나가는 비루한 자들은 신경 쓰지 않으실 줄 알았어요! 저희는 너무나 비천하니까, 공작님의 시선 끝조차 붙잡지 못할 줄만 알았어요!”

클로디아의 변명에도 목소리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건 내가 알아서 할 일이지. 그나저나, 너.]

“예?”

[인간처럼 말하네?]

클로디아는 기겁해 저도 모르게 데미안을 쳐다봤다. 데미안도 황망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공작은 퍽 궁금하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비루하다느니 비천하다느니. 그렇게 말하는 애들은 너무 오랜만이야. 마치 오래전의 그 멍청이 같아. 아, 그렇지.]

“….”

[어차피 너희 머릿속을 뒤져보면 될 일이지.]

머릿속을 뒤져본다고? 어떻게? 클로디아의 머릿속에 의문이 가득 찼다. 하지만 공작은 둘이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내 숲에 자진해 들어왔으니, 어디 한번 나를 찾아와보렴. 나를 찾아온다면 이곳을 통과시켜줄게.]

그 목소리가 끝나자마자 갑자기 발밑이 와르르, 무너졌다. 클로디아는 기겁해 비명을 질렀다.

“꺄악!”

푹신하던 숲의 바닥은 어느새 새카만 입을 벌리고 두 사람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클로디아는 필사적으로 데미안의 허리를 붙들었다. 주변의 나무들도 함께 흙째로 그들과 함께 새카만 구멍으로 떨어졌다. 바위가 떨어지고, 흙이 떨어지고 나뭇가지들과 나뭇잎들이 두 사람의 주변을 메웠다. 와르르르….

끝 간 데 없는 암흑으로, 두 사람은 그렇게 빨려들어 갔다.



 

***



 

그리고 지금.

클로디아는 새카만 어둠 안에서 데미안의 팔만 붙들고 의지하고 있었다. 사방에 보이는 게 없으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데미안 또한 아주 가까운 주변 외에는 잘 보지 못하는 듯했다.

“그 목소리는 거울 공작이 맞았겠죠…?”

“그런 듯합니다. 자신을 찾아보라는 말은 아마 여기서 빠져나와 보라는 것 같은데….”

“하지만 여기가 대체 어딘데요?”

두 사람 모두 침묵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덥고 무거운 공기만 어깨를 짓누르는 어두운 공간. 대체 여기서 뭘 할 수 있단 말이야? 클로디아는 기가 막혔다. 거울 공작은 늘 이렇게 자신의 성 주변에 접근하는 이들을 어두운 땅 밑에 가둬버렸던 걸까? 그렇다면 다들 거울 공작을 두려워한 것도 무리는 아니다.

클로디아는 한숨을 쉬었다.

“…일단 일어날까요?”

“괜찮으시겠습니까?”

“안 괜찮아도 일어나야지, 어쩌겠어요.”

제 말투가 비아냥대는 것인지 체념한 것인지 클로디아도 잘 구분이 가지 않았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곱게 말이 나온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성인군자일 것이다. 클로디아는 데미안의 옆에서 벌떡 일어났다. 물론 어둠 때문에 균형을 바로 잡을 수 없어서 잠시 휘청거려야 했다.

“그럼 제가 앞설 테니, 제 옷을 붙들고 뒤따라오시겠습니까?”

그나마 어둠에 익숙한 데미안이 주변을 조금 더 볼 수 있어 앞서겠다 제안했다. 그러나 클로디아는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싫어요.”

“….”

“뒤따라가다가 놓치면 어떻게 해요?”

“제가….”

“같이 가 주세요.”

데미안이 잠시 망설이는 것 같았지만, 곧 그녀의 옆에 섰다. 남자의 인기척이 제 왼쪽에 오자, 클로디아는 조금 안심이 됐다. 앞서서 가는 그의 인기척이 갑자기 어둠 속으로 사라질까 봐 걱정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걷다 보니 보폭이 문제였다. 매번 자신보다 넓게 걷는 그가 조금씩 앞서나갔기 때문이다. 클로디아는 잰걸음을 놀렸지만 희한하게도 데미안과 매번 약간은 차이가 났다. 게다가 어느 순간 든 생각 때문에 그녀는 더럭 겁이 났다.

“저기 혹시, 거울 공작이라는 사람이 이 새까만 어둠을 틈타서… 제 옆의 당신을 바꿔치기하진 않겠죠?”

“…저는 데미안 알파가 맞습니다.”

“하지만 그런 말투도 똑같이 흉내 내는 다른 사람이면 어떻게 해요?”

어둠은 불안을 가중시킨다. 데미안은 제 옆의 공주님이 왜 이러는지 알고 있었다. 동력 지대에서 나오자마자 왈칵 울어버렸던 클로디아를 떠올려보면 간단하다. 그녀는 언제나 환하게 불이 밝혀져 있고, 낮에는 푸른 하늘을 가장 먼저 맞는 포르투에서 살아온 여인이다. 이렇듯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 심지어 자신의 손끝도 볼 수 없는 - 어둠 속에서라면 평소에는 가당치도 않다 생각했던 상상도 그럴싸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악몽이라는 것이 괜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게다가 데미안은 동력 지대 출신이었다. 이제는 잘 기억도 나지 않지만, 그 끝없는 어둠 속에서 자신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뒹굴던 감각만은 끔찍하게도 생생했다.

그때의 경험 덕분이라긴 뭐하지만, 데미안은 그래서 클로디아에게 동정심을 느꼈다. 데미안의 속마음도 모른 채, 멈춰선 그에게 클로디아는 다시 다른 말을 늘어놓고 있었다.

“…미, 미안해요. 짜증나죠. 생각해보면 말도 안 되는 상상인데….”

“아닙니다.”

“아무 말 안 할게요. 하지만 조금이라도 밝은 게 좀 있었으면 좋겠다….”

클로디아가 다시 걷기 시작하며 애써 밝게 말했다.

“그때 요정 동굴에서 요정 한 마리만 잡아 올 것을 그랬나 봐요. 걔네들 반짝반짝 잘 빛나던데. 좋겠다.”

“….”

“뭐라도 의지할 게 있다면 참 좋을 텐데….”

그 말도 사실이었다. 어둠 속에는 아무 이정표도 없었고, 심지어 길도 없었다. 두 사람은 자신들의 정면이라고 생각되는 길을 걷고 있었지만, 이게 길인지, 혹은 정면인지 아무도 몰랐다. 분간할 수도 없었다. 또다시 불안해진 클로디아가 중얼거렸다.

“혹시 이렇게 걸어갔는데, 다음 발을 내디뎠더니 그 끝에 절벽이 있다든가 하는 일은 없겠죠…?”

그쯤 해서 데미안은 결심을 굳혔다. 그는 오른쪽 손에 낀 장갑을 벗고, 그녀의 왼쪽으로 돌아서 섰다. 클로디아가 화들짝 놀라 그를 불렀다.

“수르 알파?”

“잠시만 실례하겠습니다.”

“어….”

굳은살이 잔뜩 박인 손이 클로디아의 왼손을 파고들었다. 그 동작이 너무나 생경해서 클로디아는 맨 처음에 그가 무엇을 하는지 눈치채지 못했다. 하지만 길고 굵은 손가락들이 보드랍고 둥근 손바닥 안을 파고들어 오는 순간, 그녀는 파드득 튀어 올랐다.

“수르 알…파!”

데미안은 부러 무뚝뚝하게 내뱉었다.

“부득이한 일입니다. 이해해 주십시오.”

“….”

클로디아는 처음으로 자신이 어둠 안에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마 자신의 얼굴은 귀까지 새빨갛게 물들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어둠 속임에도 불구하고 고개를 푹 숙이고 얼굴을 식히는 데 집중했다. 그래서 미처, 데미안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에 대한 것은 생각하지 못했다.



 

***



 

시빌을 치료하기 위해 손을 맞잡았을 때는 까르륵 웃음이 나왔다. 마주 앉은 채로 디자이어와 셋이서 농담하고 있으면 웃기고 행복해서 손 잡은 건 신경도 쓰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상했다. 지금 클로디아는 제 오른손의 감각이 이렇게까지 예민했나, 하고 생각 중이었다.

오른손에 땀이 배어 나왔다. 자신의 손가락이 데미안의 손가락들과 얽혀 있었고, 손가락 마디마디가 깍지껴 맞닿은 부분이 미치도록 신경 쓰였다. 손바닥에 찬 습기 때문에 손바닥을 바지에 문질러 닦고 싶었지만, 이 상황에서 그녀가 손을 빼내서 닦은 후에, 다시 잡을 수 있을까?

거기까지 생각하고 클로디아는 흠칫했다.

다시 잡을 생각이 만만한 자신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너무 어둡고…. 의지할 사람은 이 사람뿐이잖아. 그러니까 다시 잡는 게 맞지 않나? 하고 그녀는 애써 합리화했다.

아마 어두워서 그럴 것이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이니, 그 손에 모든 감각이 집중되는 것도 당연하다 - 클로디아는 그렇게 생각하며 옆을 돌아봤다. 당연히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절벽은 없을 겁니다.”

그 와중에도 데미안은 그녀의 손을 잡고 걸으며 그렇게 말했다. 어쩌면 심드렁하게 들리기도 하는 말투였다.

“아까 위에서 지형을 내려다봤는데, 이곳은 해안선에 인접해 있다 보니 절벽 같은 곳이 있을 수 없습니다. 물론 마법적 지형을 조성해놨을 수도 있으나, 그 공작은 자신을 찾아와보라고 했지 않습니까.”

“…그렇, 죠.”

클로디아가 어물어물했다. 데미안이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저희를 기다렸으면 기다렸지, 저희를 죽일 생각은 없을 겁니다.”

그때, 클로디아는 흠칫했다. 어느 순간, 바닥만 보고 걷던 자신의 시야 안에 뭔가가 희끄무레하게 들어오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고, 이쪽을 바라보는 데미안과 시선이 마주쳤다. 어둠 속이었지만 분명했다. 그녀의 눈에, 데미안이 보였다!

“데미안, 이거….”

“빛이군요.”

데미안이 맞받았다. 저편 어딘가에서 아주 약한 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자연스레 두 사람의 주변도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둘은 빠르게 걸음을 재촉했다. 바닥은 돌로 만들어진 보도블록에 가까웠고, 주변은 넓고 아무것도 없는 홀이었다. 뒤를 돌아봤지만, 약한 빛이 보여주는 것 이상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 빛에 다가선 둘은, 그것이 작은 문 안에서 새어 나오고 있는 빛임을 깨달았다. 작고 녹슨 철문은 클로디아의 허리 정도까지 올 정도로 낮았는데, 그 안에서는 누렇고 희미한 빛이 조금씩 새어 나오고 있었다. 반가움에 클로디아는 그 문에 손을 댔다가, “앗, 뜨거!” 하고 놀라버렸다.

문은 아주 뜨겁게 달아올라 있었던 것이다.

“괜찮으십니까?”

데미안이 다급히 물었다. 클로디아는 손을 바지에 비비며 고개를 내저었다.

“델 정도로 뜨겁진 않아요. 그냥 좀 뜨겁긴 한데….”

막 조리한 음식을 담은 그릇이 이럴까. 데지는 않았으나 놀란 것도 사실이었다. 데미안은 그녀에게 신신당부했다.

“이 문을 나가야 할 것 같은데, 그전에 당부드릴 것이 있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먼저 뭔가에 손대지 마십시오.”

“네….”

“요정의 동굴 때만 해도 로드 혼자 빨려들어 가셨지 않습니까.”

“…네.”

클로디아는 어쩐지 죄스러운 기분이 들어 고개를 수그렸다. 데미안의 말이 십분 맞았다.

“그때는 운이 좋아 금세 빠져나오실 수 있었지만, 여기서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릅니다. 더욱이 이런 공간을 만들어 놓은 걸로 봐서는, 아마 강력한 마법을 부릴 수 있는 마족일 겁니다. 조심하십시오.”

“…운이 좋은 것만은 아니었는데요….”

클로디아가 중얼거렸으나 데미안은 못 들은 척했다. 따지고 보면 요정들의 장난을 금세 알아챈 클로디아 또한 기지가 넘쳤지만, 그건 요정들이 순했기 때문이다.

거울 공작이라는 자는, 글쎄. 그가 악의를 가지고 자신들을 대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했다. 적어도 좋은 감정은 아닌 것으로 보였다.

데미안이 문에 장갑을 낀 오른손을 대 봤다. 장갑을 끼고 손잡이를 잡으니 온도가 크게 뜨겁지는 않았다. 문제는 안에서 빛과 함께 김이 조금씩 새어 나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아마 이 안쪽은 지금보다 더 더울 것이 분명했다. 데미안은 잠시 고민하다가, 한 번에 힘을 주어 문을 열었다.

끼익….

문은 쉽게도 열렸다. 철문이라 무겁긴 했지만 그뿐이었다. 이윽고 데미안은 클로디아 쪽을 돌아본 후, 왼손을 놓았다. 그때까지 손을 붙잡고 있었던 것이다.

“제가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괜찮을까요….”

“괜찮을 겁니다, 일단은.”

일단은이라니. 클로디아는 뭐라고 말을 보태고 싶은 기분이 들었지만 데미안은 그녀를 기다려주지 않았다. 그가 먼저 허리를 숙이고 철문으로 들어갔고, 클로디아는 로브를 손에 감아 그 철문을 지탱했다. 데미안이 안에 들어간 동안, 그녀는 남은 오른손을 괜히 들여다봤다. 어쩐지 허전했다. 얼마나 잡고 있었다고.

그때, 데미안의 목소리가 들렸다.

“들어오셔도 됩니다.”

“앗, 네!”

“하지만…. 로브는 벗으셔야 할 것 같습니다.”

“네?”

무슨 소리야? 눈을 깜박이며 허리를 구부리던 클로디아는, 그 안으로 들어가고 나서야 그게 무슨 뜻인지 알게 됐다.

가장 먼저 그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클로디아가 느낀 것은 지독한 습기였다. 김이 될 만큼 엄청난 습기와, 훅 끼쳐오는 엄청난 더위. 문 안에서 빛과 함께 새어 나오던 것은 습기였던 것이다.

습기를 헤치고 들어서니 바닥에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클로디아는 바닥을 내려다보고 의아한 표정이 됐다. 잘 다듬어진 나무로 된 바닥이었다.

그때, 나무에 투두둑, 하고 까만 자국이 났다. 그녀는 순간 당황했으나 곧 그게 자신의 땀방울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덥고 습한 곳에 들어서 있으니 땀방울이 맺히는 건 당연지사였다.

“지금 이것저것 가릴 때가 아니군요. 여기에서 로브를 쓰고 계시다간…. 들키기 전에 목숨이 위험하실지도 모릅니다.”

데미안이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클로디아는 고개를 들어 그를 봤다가, 그게 로브를 벗어 건네 달라는 뜻임을 알아차리고 주섬주섬 로브를 벗었다. 끈을 풀면서 주변을 둘러보니, 바닥과 다르게 주변은 누런 흙벽돌로 마감돼 있었다. 그리고 뭣보다….

“엄청난 높이네요….”

“예.”

흙벽돌로 된 천장은 둥그런 돔 형태였다. 그리고 까마득하게 높았다. 군데군데 뭔지 모를 쇠뚜껑이 달려 있었는데, 거기서 뭐가 나오는지는 알 수 없었다. 누런 흙벽돌 사이에는 빈 홈들이 중간중간 존재했다. 아무래도 습기는 그 안에서 흘러나오는 것 같았다. 그리고 출구는….

없었다.

“여기, 나가는 곳이 없네요…?”

“저 쇠뚜껑이 설마 나가는 곳이진 않을 테고요. 아무래도 잘못 들어온 것 같은데….”

클로디아가 소매로 땀을 닦았다. 땀이 비 오듯 흘렀다. 데미안도 마찬가지인지, 그는 머리를 한 번 더 올려 묶은 후 팔을 걷어붙였다. 어찌나 땀이 나는지 팔에 난 상처 위의 굳은 고름들도 조금씩 벗겨지고 있었다.

“들어온 곳으로 다시 나가봐야 암흑일 겁니다. 이곳 외에는 유의미한 좌표를 찾는다는 보장도 없고….”

“그렇겠죠? 하지만 여기 너무 더워서…. 들락날락하며 찾아야 할 것 같네요.”

“그래야 할 것 같습니다. 일단 로드께서는 나가 계시죠. 위험한 것은 없어 보이니 번갈아 가며 찾는 것도 방법일 듯합니다.”

클로디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땀을 한 번 더 닦고 허리를 숙였다. 열어둔 문으로 나가기 위해서였다. 그때, 이변이 일어났다.

쾅.

아무도 닫은 적 없는데, 열어놨던 문이 닫힌 것이다. 클로디아는 당황해 문을 당겼다.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약속이라도 한 듯이, 곧 노래하는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런! 습기가 빠져나가게 두면 안 되지! 그건 버릇없는 짓이야!]

“…공작!”

데미안이 이를 갈며 칼을 뽑았다. 하지만 주변에는 여전히 아무것도 없었다. 자욱한 습기뿐.

그리고 목소리는 후후 웃고는 곧 사라졌다. 클로디아는 몇 번 문을 더 당겨보다가, 울상이 됐다.

“이거 안 열려요….”

데미안도 합세해 문을 당기고 밀어봤지만, 문이 열리지 않는 건 마찬가지였다. 사내는 당혹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큰일이군요. 여기 오래 있으면 탈진할 텐데….”

엄청난 습기와 더위. 비 오듯 떨어지는 땀방울. 클로디아도 동감했다. 이런 환경에 오래 있으면 온몸의 수분을 다 뺏기고 탈진해 쓰러질 것이다. 그때였다.

“앗, 저기….”

클로디아는 뭔가를 발견했다. 방금 전까지는 아무것도 없었던 돔 천장에, 거대한 모래시계가 있었다. 모래시계 위층에는 분홍색 모래들이 아래를 향해 조금씩 떨어지고 있었다. 분명 방금 전 공작이 나타났을 때, 함께 나타난 물건이 분명했다.

시간제한…?

클로디아는 그 모래시계를 보자마자 생각했다. 데미안도 이를 갈았다. 같은 생각을 한 것이 분명했다.

“저 시간 안에 여기를 탈출하지 않으면 뭔가 문제가 생기는 것 같습니다.”

“문제라면….”

“괴물이 나타난다던가, 아니면 더 단순한 문제일 수도 있죠. 그저 쓰러져서….”

데미안은 그다음 이야기를 잇지 않았다. 하지만 클로디아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그저, 아무 일도 안 생긴다 해도 여기 갇혀 있는 것만으로 두 사람은 아마 목숨을 빼앗길 것이다. 클로디아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어, 어떻게 하죠? 여길 나갈 방법을 찾아야…!”

“…방법은 있을 겁니다. 이런 자들은 악취미가 있어서, 항상 나갈 방법을 마련해두고 사람들이 곤란해하는 것을 즐기거든요.”

“무슨 방법일까요?”

“…가령 숨겨둔 탈출구라던가….”

그 말에 두 사람의 시선이 위쪽으로 향했다. 딱 사람 하나가 나갈 수 있을 것 같은 넓이의 쇠뚜껑.

“저런 거요…?”

“가능성은 있습니다.”

하지만 이 돔은 너무 높았다. 데미안이 세 사람은 있어야 할 것 같은 높이였다. 클로디아는 절망하고 싶었지만, 절망한다면 진짜로 목숨을 잃게 되고 만다. 무엇보다, 벌써 그녀는 머리가 어지러워지는 기분이었다.

“…수르 알파. 저를 어깨에 태워주실 수 있나요?”

“높이가 닿지 않을 텐데요.”

“시도는 해 봐야죠. 수르 알파의 어깨 위에 선다면 손이 닿을지도 몰라요.”

돔 형태의 천장. 쇠뚜껑은 천장 중앙이 아니라, 조금 낮은 옆에 있었다. 그녀는 벽에 기댄 채 자신이 데미안의 어깨를 밟고 까치발을 한다면 조금은 닿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손이 닿는다 해도 올라가는 게 문제입니다.”

“그건 손이라도 닿은 다음에 생각해봐야죠. 혹시 알아요? 제 손이 닿는다면 저 뚜껑이 자동으로 열릴지. 가만히 있는 것보단 나아요. 시간이 없잖아요.”

땀이 비 오듯 흐르고 있는 상황이다. 그녀의 말에 데미안도 곧 납득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뭐라도 시도해봐야 했다.

“좋습니다.”

데미안이 바로 로브를 바닥에 내팽개치고 쇠뚜껑이 붙은 쪽에서 가장 가까운 벽이 어딘지 가늠한 뒤, 그 앞에 서서 자세를 낮췄다. 그녀는 어릴 적 자신의 아버지가 어깨에 무등을 태워줬던 것을 기억하며 데미안의 목 뒤에 올라앉았다.

그 와중에도 땀이 축축한 가죽바지가 그에게 영 끔찍한 느낌으로 남을 것 같아 미안했지만, 그런 걸 따지고 있을 때가 아니다. 데미안이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아까 같은 수줍은 느낌 따위는 없었다. 클로디아는 입술에 찝찔한 맛이 도는 것을 알아차렸다. 얼굴에 맺힌 땀이 흘러들어오고 있는 것이다.

데미안이 일어섰다. 클로디아는 조심스럽게 한쪽 벽을 짚고 그의 어깨에서 일어서기 시작했다. 데미안이 그녀의 다리를 붙잡아주지 않았다면 그대로 떨어질 뻔한 아찔한 상황이 계속됐다.

그 와중에도 모래시계는 착실하게 모래를 떨구고 있었다. 분홍색 모래는 이제 반 이상 떨어졌다. 클로디아는 현기증이 도는 기분이 됐다. 입안에 감도는 짠맛을 애써 무시하며 클로디아는 이를 악물었다.

거울 공작인지 뭔지 만나면 정말 죽일 것이다.

사람을 이런 사우나 같은 곳에 가둬 놓고서…!

어?

그 순간, 어떤 생각이 그녀를 사로잡았다.

클로디아는 침착하게 데미안에게 자신을 내려달라고 말했다. 데미안은 의아해하면서도 그녀를 조심스럽게 바닥에 내려주었다. 클로디아는 다시금 주변을 찬찬히 둘러보고 확신했다.

“…데미안, 앉아요.”

“예?”

“제 생각이 맞다면 이건 탈출해야 하는 감옥 같은 게 아니에요. 오히려 그 반대죠.”

데미안은 이마를 찌푸렸으나, 그녀의 말에 순순히 따랐다.

그녀는 후, 하고 길게 숨을 내쉬고는 머리카락을 뒤로 넘겼다. 땀에 젖어 번들거리는 하얀 이마가 드러났다. 욕설이 절로 나왔지만, 그녀의 예상이 맞다면 저 모래시계는 시간 내에 탈출해야 하는 장치 따위는 아닐 것이다.

분홍색 모래가 사르르륵 떨어지는 소리가 계속됐지만, 그녀는 침착하게 눈을 감고 심호흡했다. 후, 하고 거친 숨이 나왔다가 다시 그녀가 훅, 하고 들이마시자 뜨거운 공기가 폐로 밀려들어 왔다. 클로디아는 자르지스에 들어온 후 어느 때보다 평온하게 굴었다.

반면 옆에 앉은 데미안은 초조해 보였다. 그는 연신 클로디아와 천정의 모래시계를 번갈아 봤다. 그녀의 말대로 하기는 했지만, 이곳에서 계속 시간을 보내는 것이 과연 맞는 일인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이윽고 모래시계가 똑, 하고 마지막 모래를 떨어트렸다. 그리고 클로디아는 눈을 떴다. 주변에는 아무 변화도 없는 듯 보였으나….

끼익, 하고 갑자기 천정의 쇠뚜껑이 열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 뚜껑 안으로 돔 안의 습기들이 갑자기 엄청난 속도로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쉬익, 쉬익 하는 소리가 났다. 데미안은 어안이벙벙한 표정으로 쇠뚜껑을 쳐다보고 있었다. 곧 돔 안의 습기가 어느 정도 다 빠져나가 시야가 확보됐을 때였다.

끼익.

방금 전까지는 아무것도 없던 곳에, 갑자기 커다란 문 하나가 생겼다. 방금 전 그들이 들어왔던 철문과 비슷해 보였지만, 이번에는 나무문이었다. 그리고 방향은 정확히 반대에 나 있었다. 클로디아는 그 문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예상이 맞아 들었던 것이다.

“가요, 수르 알파.”

“…예. 하지만….”

“나가서 설명해줄게요.”

“바깥이 위험할 수도 있으니, 제가….”

“아뇨, 아마 안 위험할 거예요.”

그녀는 나무문에 조심스럽게 손을 댔다. 철문이 아니라 그런지 그리 뜨겁지 않았다. 클로디아는 문을 열고 허리를 숙인 채 바깥으로 나갔다.

차가운 공기가 그들을 맞았다. 처음으로 자르지스에서 맞는 상쾌한 공기였다. 훅, 하고 부는 바람에 클로디아는 허탈함마저 느꼈다. 뒤따라 나온 데미안도 당황했다.

“이건….”

문을 나온 후 그들이 맞닥뜨린 것은 커다란 의자와 샘이었다. 의자는 누울 수 있도록 긴 모양이었고, 샘은 방금 전 돔 안쪽과 같이 누런 벽돌로 그 벽이 만들어져 있었다. 클로디아는 망설임 없이 샘에 손을 넣으려다가, 데미안의 말이 생각나 고갯짓했다.

데미안이 먼저 다가가 그 샘에 손을 넣었다.

“특별할 것 없는 물입니다.”

“그럴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 둘을 위한 것처럼, 샘 옆에는 물 긷는 커다란 동이도 있었다. 클로디아는 그 동이로 찬물을 길은 다음, 그대로 머리 위에 쏟아부었다. 살 것 같았다. 바로 두 번째 물을 길어 데미안에게도 퍼부었다. 데미안 또한 한결 낯빛이 나아졌다. 데미안은 클로디아의 손에서 동이를 넘겨받은 후, 다시 한번 클로디아에게 끼얹어 주며 물었다.

“이게 뭔지, 그리고 어떻게 나오는 법을 아셨는지 여쭤봐도 됩니까?”

“뻔하죠. 이걸 눈치 못 챘다니 제가 다 기가 막힐 정도예요.”

클로디아는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어이가 없는 데다가 거울 공작이라는 마족에게 호승심마저 생겼기 때문이다.

“이건 베크에 왕국의 사우나예요.”

“사우….”

“수르 알파가 모르는 것도 당연하죠. 이건 미용과 건강을 위한 요법이니까요.”

“예?”

데미안이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클로디아는 머리를 푸르르 털어내고는 어둠만 가득한 천정을 노려봤다.

그 돔은 전형적인 사우나였다. 베크에 왕국은 네 개의 대륙 중 북서쪽에 위치한 커다란 왕국이다. 숲이 많고 눈이 많이 오는 기후라서, 베크에 왕국 사람들은 숲속에 사우나라는 것을 설치했다. 물을 끓여 습기로 건조함과 낮은 온도, 두 마리 토끼를 다 잡는 장치다.

“베크에 왕국의 왕자가 제게 사우나 돔을 갖다 바치며 청혼한 적 있었어요. 그때 써 보지 않았으면 몰랐을 거예요.”

“그런….”

“그 모래시계는, 사우나를 탈출해야 하는 시간이 아니라 사우나 안에 있어야 하는 시간이에요.”

뜨거운 김을 쐬어 땀을 빼면 피부에 좋다고 베크에 사람들은 믿었다. 베크에의 왕자는 미용에 관심이 많은 클로디아를 위해 사우나 돔을 통째로 포르투로 운반했다.

클로디아는 크게 기뻐했지만, 문제는 돔에 드는 연료가 너무 많은 데다가 무겁다는 것이었다. 하늘섬 포르투는 아무르에 너무 큰 부하를 걸지 않기 위해 사람들이 반입하는 짐의 무게에 엄격하게 굴었다. 베크에의 왕자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었다. 하지만 문제는 베크에의 왕자가 그 돔을 몰래 반입했다는 것이었다.

클로디아는 그 돔이 제게 선물로 왔을 때, 적법한 절차를 거쳤음에 별 의문을 갖지 않았다. 하지만 사우나 안의 습기를 제거하는 쇠뚜껑 장치는 너무 무거워 보였고, 그녀는 노바라를 통해 사우나 돔을 쥬버린이 허가해주었는지 알아보게 했다.

그때 베크에 왕자가 한 말이 걸작이었다.

‘그런 것은 공주님께서 신경 쓰실 일은 아닙니다. 그저 누리세요.’

결국 크게 화가 난 쥬버린이 베크에의 왕자에게 하늘섬 출입 금지를 명했다. 클로디아가 그 돔을 사용한 것은 단 두어 번. 그 돔은 다시 하늘섬 아래로 내려 보내졌다.

클로디아는 새삼 그때의 베크에 왕자가 자신을 얼마나 우습게 봤던 것인지 곱씹었다.

‘다 죽었으면 좋겠다.’

후. 자조의 웃음이 클로디아의 입매에 머물렀다. 예전에는 별생각 없었던 것들인데, 이 상황에 와서 돌이켜보자니 얼마나 왕자란 것들이 빌어먹을 인간들인지 알 것 같았다.

포르투의 습격에 저를 배신한 킴 왕자도 그렇고….

“로드?”

그때 데미안이 입을 열었다. 여전히 그의 얼굴에 의아함이 남아 있었다. 그제야 클로디아는 자신이 갑자기 상념에 빠졌던 것을 알아차리고 손을 내저었다.

“아. 미안해요. 잠시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예….”

“아무튼 이건, 거울 공작의 농간이군요. 단순한 사우나 돔일 뿐인데, 이런 상황이었으니 탈출해야 할 공간으로 오해한 것도 무리는 아니에요.”

아무튼 찬 물이 있는 것도 방금 전 그 공간이 사우나였던 것과 무관하지 않으리라. 사우나에서 갓 나온 사람들이 찬물을 끼얹는 것은 상식이었다.

클로디아는 다시 물을 길어 동이에 입을 대고 마셨다. 망설임 따위는 없었다.

“마셔요, 수르 알파.”

“…예.”

데미안은 클로디아와는 사뭇 대조적으로 머뭇거렸다. 클로디아가 의아하게 그를 바라봤다가, 곧 그가 동이 채로 물을 마시는 자신을 보고 당황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하지만 그깟 게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더워 죽겠는데.

“…지금 이것저것 가릴 처지가 아니라는 건 잘 알아요. 그러니까 수르 알파, 저를 너무 과보호하지 마세요.”

데미안이 동이를 받아든 채 잠시 망설였다. 하지만 클로디아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아까부터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수르 알파. 아니 사실은 며칠 전부터요.”

“….”

“저를 보호하는 게 당신의 의무이긴 하지만, 그건 제 생명에 국한된 거예요. 제가 비 한 방울 맞지 않게, 혹은 귀한 보석처럼 보호하는 것은 어려워요. 당신도 처음 출발할 때는 그렇게 말했잖아요.”

데미안은 포르투를 나설 때 분명 시녀들에게 클로디아가 직접 옷을 빨래할 수도 있고, 더 험한 곳에서 구를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정작 본인은 클로디아를 쥐면 꺼질까 불면 날아갈까, 유리구슬처럼 다루고 있는 것이 종종 드러났다.

클로디아는 그에게 말하면서, 줄곧 느꼈던 답답한 감정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데미안은 유독 그녀에게만 이율배반적으로 굴고 있었다.

“수르 알파. 초반에 제가 많이 울었던 것, 그리고 피를 보기 두려워했던 것 알아요. 그게 당신에게 알게 모르게 부담을 줬다는 것도요. 하지만요….”

가슴이 답답했다. 클로디아는 줄곧 채워뒀던 크라바트를 풀어내고, 셔츠의 단추도 두어 개 풀면서 말을 이었다.

“결국 마지막의 마지막에는, 제가 디자이어를 마왕의 심장에 직접 찔러 넣어야 하는 거잖아요?”

클로디아는 며칠 동안 이곳까지 오며 많은 생각을 했다. 데미안은 대부분의 경우 그녀에게 많은 말을 하지 않았고, 숲에서 계속해서 헤매는 시간들은 클로디아에게 의외의 도움이 됐다.

데미안은 그녀에게 세계를 구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 말은, 적어도 그는 자신의 목숨이 붙어 있는 한 마왕의 앞까지 그녀를 데리고 갈 것이라는 뜻도 됐다. 그리고 클로디아는 데미안 알파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한 말은 끝까지 지키는 사람이다.

‘예를 들면…. 자신과 결혼할 수 없다고 했던 말까지도 그는 어떤 형태로든 결국 고수했지.’

하하. 클로디아는 나직하게 웃었다.

하지만, 데미안이 대신 마왕을 해치울 수는 없다.

디자이어는 클로디아의 손에서만 그 힘을 발휘할 수 있다. 그렇기에 세계수를 기르고, 배를 만들어 죽음의 바다를 건너온 것이다. 비록 지금은 디자이어를 잃어버렸지만, 오로지 클로디아만이 할 수 있는 일을 하기 위해서 그녀는 이곳에 있다. 거울 공작인지 뭔지가 부리는 개수작을 어떻게든 이겨내고, 디자이어를 되찾고…. 끝내는 디자이어를 마왕의 심장에 꽂아 넣을 것이다.

그건 클로디아만 가능한 것이다.

“이 상태로는 전 아무것도 하지 못할 거예요, 수르 알파.”

“아닙니다.”

“거짓말하지 말아요, 수르 알파.”

클로디아는 비스듬히 웃었다.

“칼질이라고는 식탁 위에 오른 부드러운 고기를 자르는 것밖에 하지 못하는 계집애가, 어떻게 한 번에 사람을 죽일 수 있겠어요? 하물며 마왕인데요.”

베크에 왕자를, 킴 왕자를, 그리고 쥬버린을 떠올리며 그녀는 이제 제 상황이 지긋지긋해졌다. 제 눈을 가리고 뭐든지 다 해주겠다는 태도를 생각해 보면, 자신이 사랑하는 쥬버린조차도 그들과 다를 바 없었다.

그리고 이제 클로디아는, 더 이상 누군가가 자신을 보호하겠다며 짐을 떠맡는 것을 좌시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데미안 알파는 더더욱 그랬다. 그는 자신을 바보로 만드는 데 일조하고 있었다. 심지어 자르지스 한복판에서마저도.

“겨우 물동이에 입을 대고 마시는 것으로 그렇게 놀란 얼굴 하지 말아요. 저는 상처받아요.”

“그….”

데미안은 할 말을 찾는 것 같았다. 클로디아는 손을 내저었다.

“알아요. 제가 할 수 있는 건 고작 그것뿐이죠. 당신처럼 검을 잘 휘두르는 것도, 그렇다고 토끼 한 마리 잡을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에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손을 놓고 있는 걸 당연하게 여기진 않겠어요.”

“….”

“수르 알파, 아까 제게 그랬죠. ‘운이 좋아서’ 요정의 동굴에서 빠져나왔다고.”

“…죄송합니다.”

“사과를 받으려는 게 아녜요.”

그녀는 젖은 머리를 세차게 쓸어넘겼다. 차가운 물방울이 튀는 것이 기분이 좋았다.

“저는 그때도 운이 아니라 필사적으로 나가려고 노력했어요. 지금도 그랬고요. 제가 운이 좋다는 걸 부정하지는 않겠지만, 제 행운은 제가 포르투의 공주로 태어난 것으로 끝났어요. 제가 진짜 운이 좋았다면 마왕은 포르투를 습격하지 않았겠죠.”

‘누가 알겠어?’

진짜 운이 좋았다면 거울 공작의 성에 말려들지도, 자르지스에 표류하지도, 나아가 포르투도 습격받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지금 자르지스에 있다.

“제가 체득하고 익힌 것들은 모두 제 것이에요. 저는 보잘것없는 재주로나마 노력할 테니, 당신도 저를 아끼지 마세요.”

“…예.”

데미안이 굳은 얼굴로 답했다. 하지만 그 표정에는 명백하게 약간의 즐거움, 혹은 놀람이 겹쳐져 있었다. 사실 저렇게 놀라는 것도 크게 기껍진 않지만, 어쩌겠어. 클로디아는 픽 웃었다. 그때였다.

[대화 끝났어?]

경쾌한 목소리가 두 사람의 사이를 흔들어 놨다. 둘 다 반사적으로 놀라 위쪽을 바라봤으나, 여전히 목소리만 들릴 뿐 그 실체는 보이지 않았다. 목소리는 즐거운 듯 웃었다.

[이거 예상외의 거물이 오셨네. 아, 미안. 좀 엿들었어. 하지만 남의 집에서 그렇게 떠들면 다 듣고 만다구. 포르투의 공주님.]

“…각오는 했어요.”

클로디아는 어디선가 자신을 보고 있을 거울 공작을 생각하며 천장을 노려봤다. 그러나 목소리는 여전히 유쾌한 듯 웃음 섞인 소리를 냈다.

[수르 알파란 소리를 들었을 때는 무슨 소리야? 라고 생각했지. 그 새 포르투의 수르가 바뀌었군, 흐음.]

“…자르지스의 마족들에게도 포르투의 소식은 궁금한가 보지요?”

[그건 나만 그렇지. 아, 오해할까 봐 말하는데 나는 포르투를 좋아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었다. 클로디아는 여전히 위쪽을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그거야말로 믿을 수 없는 소리네요. 정말로 포르투를 좋아한다면 저를 당장 보내주세요.”

[그건 싫어. 너 나한테 거짓말했잖아?]

거짓말? 그녀는 곧 그게, 처음 용의 화구가 어쩌고저쩌고하는 이야기라는 것을 알아챘다. 거울 공작은 계속해서 떠들었다.

[어쩐지 인간같이 말한다 했어. 자르지스 놈들은 죽었다 깨나도 자기를 향해 비루하다느니 비천하다느니 하는 소리는 하지 않는다구. 차라리 처음부터 포르투의 공주님이라고 말하지 그랬어. 그럼 널 아나니아 앞에 갖다 줬을 텐데.]

아나니아? 클로디아는 생소한 이름에 고개를 갸웃했다. 거울 공작은 그녀의 반응을 보고 있는 듯, 즉각 물었다.

[아나니아를 몰라?]

“제가 그게 뭔지 알아야 할 필요가 있나요?”

공격적인 말투에 거울 공작이 쯧쯔, 혀를 찼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너는 알아야지. 아나니아가 누구의 이름인데.]

“…설마.”

이쯤 되면 모르는 게 바보였다. 클로디아가 눈에 힘을 주고 되물었다.

“마왕의 이름이 아나니아인가요?”

[딩동댕. 그게 풀네임은 아니지만 나는 아나니아라고 부르지. 그게 귀엽잖아?]

“…그의 앞에 저를 데려다줄 수 있다고요? 하지만 그는 자르지스에 없다고….”

[어머나~. 그것까지 알고 있었어? 그러면 용의 화구에 가는 이유도 아나니아가 없는 틈에 그가 훔쳐 온 보물을 찾아오려는 거였겠군.]

아차. 클로디아가 입을 닫았다. 유도신문에 당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거울 공작은 그녀의 목적엔 별 흥미가 없는 듯 다른 화제로 말을 이어갔다.

[안타깝지만 그건 어려울걸. 아나니아가 돌아왔거든.]

“….”

마왕이 자르지스에 돌아왔다.

클로디아는 속으로 낙담했다. 최대한 몰래 아무르와 쥬버린의 심장을 되찾아올 수 있었다면 좋으련만. 물론 용의 껍질이 있는 것도 아니니, 그녀가 마왕이 없는 동안 그럴 수 있었으리란 보장도 없었지만 그래도 마왕이 돌아왔다는 말을 막상 들으니 기분이 좋지 않았다.

[하지만 난 자기 편이야.]

“…어설픈 유혹은 그만두세요.”

[어머나, 혹시라도 내가 임자 있는 여자 탐하는 거란 생각은 말고. 나는 치정 싸움 싫어해.]

임자? 그 말에 클로디아는 저도 모르게 데미안을 쳐다봤다. 설마 수르 알파를 말하는 건가? 거울 공작이 웃었다.

[뭐야. 너희 둘 연애하는 거 아냐? 아주 사랑이 쏟아지던데.]

“…아니거든요?”

[아. 연애 전인가 보군.]

“아니라고요!”

[좋을 때다.]

클로디아가 버럭 소리를 질렀으나 거울 공작은 일부러 그녀의 말을 외면하는 것처럼 굴었다. 그녀는 바짝 약이 올랐다.

“수르 알파, 당신도 뭐라 말 좀 해요!”

[아유, 시끄러. 됐고, 어쨌든 나는 너희 그냥은 못 내보내 줘. 내가 말했잖아. 나를 찾아와보라고.]

막 입을 벌렸던 데미안이 도로 입을 닫았다. 거울 공작은 말을 이었다.

[하지만 사우나를 알아맞힌 건 재미있었어. 그거 원래 내가 다른 마족들하고 같이 쓰던 건데, 요즘은 혼자 쓰느라고 마력 아끼느라 불을 좀 꺼놨거든. 너희 좋다고 손 잘 잡고 다니더라. 깔깔깔.]

이 더운 곳에 사우나를 설치했다니, 악취미가 따로 없었다.

“장난치지 마세요…!”

[어머, 싫다 얘. 나 이렇게 재밌는 거 오랜만인걸.]

거울 공작인지 뭔지 만나면 제일 먼저 화낼 거야. 짜증 낼 거야. 때릴 거야!

클로디아가 주먹을 쥐고 화를 막 내려고 하는데, 거울 공작이 말을 이었다.

[네가 공주님이라니까 널 위해서 특별히 다른 미로를 열어줄게. 원래는 아득한 거울의 미로 속에 집어넣을까 했는데, 거기 들어가는 애들치고 안 미치는 애들 없더라고. 이상하지?]

“….”

[포르투의 공주님이라니까, 격에 맞게 대접해 드려야지.]

그다음 순간, 딱, 하고 불이 켜졌다. 클로디아의 눈이 휘둥그레해졌다. 그들이 찬물을 끼얹던 공간 바로 옆에 자그마하고 아기자기한 문이 하나 있었다. 그 문은 데미안의 키보다 두어 뼘쯤 작았고, 뭣보다…. 하트 모양이었다. 분홍색 하트.

[오빠 심장 찾으러 온 분이니 내가 거기 맞춰드려야지. 예쁘지?]

“누구 놀려요?”

[잘 해봐. 내가 성심성의껏 마련했어.]

거기까지였다. 클로디아는 악다구니를 썼으나, 거울 공작은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다. 한참을 허공에다 대고 화를 내던 클로디아의 어깨에, 데미안이 손을 올렸다.

“…제 생각에는 저 안에 들어가지 않는 한, 거울 공작은 더이상 나타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열 받잖아요! 뭐 저런 사람이 다 있어요? 누굴 통에 든 쥐처럼 구경하면서 놀리는데…!”

“그러니 찾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데미안이 나직하게 말했다. 클로디아는 문득 이질감을 느끼고 그의 얼굴을 바라봤다. 잔뜩 굳은 그의 얼굴은, 그 역시 짜증이 나 있음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럴 만도 했다. 갑자기 사람을 지하에 빠트리더니 자신을 찾아보란다. 게다가 놀리는 듯한 말투가 결정적이었다. 클로디아는 한숨을 쉬고, 옆에 내팽개쳐진 로브를 주워들었다.

“좋아요. 가요. 뭐가 됐든 눈앞에 있어야 때려 주기라도 할 수 있겠죠.”

“동감입니다.”

거울 공작이 수작을 부린 것인지, 덥고 습하던 아까의 공기는 온데간데없었다. 오히려 쾌적할 정도였다. 클로디아는 이제 제법 땀이 식은 이마를 만져봤다. 찬물을 끼얹은 덕인지 보송보송했다.

“사람 가둬놓고 놀린 걸 후회하게 해 주겠어요.”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두 사람은 여행을 시작하고 나서 처음으로 의기투합했다. 하지만 거대한 분홍색 하트 문 앞에 서자 의욕도 어쩐지 도로 사라지는 기분이 들었다. 꽃분홍 핑크 하트 문에, 손잡이는 금색이다. 게다가 손잡이에는 부조로 꽃까지 아름답게 새겨져 있었다. 이런 문이 포르투의 왕성에 있었다면 정말 좋았겠지만…. 악취미인 마족이 자신을 위해 마련해놨다고 말하기까지 한 문이다.

“들어가기가 좀 싫으네요.”

“…제가 열까요?”

“아뇨, 제가 열게요.”

아까까지 자신을 아끼지 말라고 해 놓고, 여기서 당신이 열어보라고 하면 그것도 좀 우스운 노릇이다. 클로디아는 심호흡하고는 문을 열었다.

“!”

놀랍도록 향긋한 냄새가 문이 열린 순간, 사정없이 그녀를 습격했다. 꽃향기? 아니면…. 그녀는 문을 완전히 열고, 그 안으로 홀린 듯 들어섰다.

그 안은 미친 핑크색 성애자의 천국이었다.

“이건….”

“…뭐죠?”

클로디아의 감탄사에 뒤이어 데미안이 물었다. 그러니까, 클로디아가 마주한 광경은…. 거대한 핑크색 발판들이 끝없이 펼쳐져 있는 공간이었다. 푸른 하늘, 그 아래에는 풀밭이 있었다. 그 위에 핑크색 매끈매끈한 발판들이 수십 개, 수백 개…. 아니, 수만 개라고 해도 될 만한 광경이었다. 그게 수만 개라는 것을 어떻게 알았느냐 하면, 그 핑크색 발판들이 아주 조금씩 미세하게 달랐기 때문이다. 탁한 핑크 옆에 연한 핑크, 그 위에는 보라색에 가까운 핑크, 그리고 그 옆에는 또다시 쨍한 형광핑크색 발판이 놓여 있었다.

“저도 잘….”

클로디아가 서 있는 발 앞에는 작은 하천이 놓여 있었다. 핑크색 발판들이 펼쳐진 공간과 그녀가 있는 공간을 분리하는 유일한 장치로 보였다. 그리고 그 위에는, 발판들의 향연으로 건너갈 수 있게끔 작은 핑크색 다리가 놓여져 있었다. 정말 핑크색을 좋아하던 클로디아지만, 이쯤 되면 질릴 법한 광경이었다.

그때, 데미안이 자신의 발밑에서 뭔가를 발견했다. “뭐가 있습니다.” 그의 말에 클로디아도 정신을 차리고 발밑을 쳐다봤다. 클로디아의 바로 발 앞, 핑크색 다리에는 숫자가 하나 쓰여 있었다.

‘1’.

무슨 뜻이지? 클로디아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 위를 쳐다보았다. 핑크색 다리는 모두 미묘하게 다른 핑크색을 띤 일곱 개의 블록으로 이뤄져 있었는데, 그 블록들 위에는 제각각의 숫자가 쓰여 있었다. 1-2-3-4-5-6-7.

“…알 것 같기도 한데….”

“저 발판들과 공통점이 있지 않을까요?”

클로디아는 다리를 보고, 다시 발판들을 쳐다봤다. 데미안은 거의 질린 표정이었다.

“무슨 핑크색이 이렇게….”

“그러게요… 저도 핑크색을 좋아하긴 하지만 이건 너무한데요….”

그녀는 거울 공작의 말을 되새김질했다. 널 위해 성심성의껏 준비했다는 말. 혹시 내가 핑크색을 좋아하는 걸 알고 그러는 건가? 하지만 내 취향까지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그런 것까지 이렇게 멀고 먼 자르지스의 공작이 알 것 같지는 않은데….

‘이거 혹시 공주라고 놀리는 건가?’

공주님은 분홍색, 왕자님은 하늘색. 어릴 적부터 포르투에 쥬버린과 클로디아를 위한 선물은 꽤 자주 들어왔다. 신기한 일인지, 아니면 그만큼 사람들의 편견이 강한지는 모르겠지만…. 대부분의 왕국들은 두 사람의 선물을 준비할 때면, 꼭 클로디아의 것은 분홍색, 쥬버린의 것은 하늘색으로 준비했다. 꼭 맞춘 듯이. 가끔은 클로디아도 하늘색이 갖고 싶을 때가 있었는데…. 그녀는 절로 부아가 났다.

“사람 놀리나.”

그러거나 말거나, 데미안은 피곤한 듯 눈을 문질렀다.

“현기증 날 것 같습니다. 세상에 이렇게 많은 분홍색이 있다니…. 다채롭기도 하군요. 보는 제 눈이 아플 지경입니다.”

“어이가 없네요. 세상의 모든 핑크색을 다 모아놨나. 저를 놀리려고 그러는… 잠깐만.”

클로디아는 말하다 말고 눈을 부릅떴다. 뭔가 잡힐 것 같았기 때문이다. 세상의 모든 핑크…. 많은 핑크색이 있다니… 눈이 아프다….

“수르 알파!”

그녀는 저도 모르게 큰 소리를 내며 눈을 비비던 데미안의 팔을 붙들었다. 데미안이 화들짝 놀라 그녀를 내려다봤다.

“…예?”

“저 핑크색이 뭘로 보여요?!”

“뭐라뇨. 분홍색이고, 음… 건너편에 놓인 바닥은 유리 같지만, 다리는 벽돌로 보이….”

“아니, 1번 블록은 무슨 핑크로 보이냐구요!”

“예? 분홍이 다 같은 분홍이지….”

‘아, 젠장. 이거로군.’

클로디아는 기가 막혀 웃음을 터트렸다. 아하하하!

“미친, 이거 빡치네. 사람 우습게 본 게 분명해.”

난데없이 튀어나온 험한 소리에 데미안이 눈을 부릅떴다. 하지만 그는 마지막 인내심을 발휘해, 그녀에게 아무 말 하지 않았다. 다만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클로디아는 이를 악물고 데미안의 팔을 붙잡은 다음, 1번이라는 글자가 붙은 벽돌을 가리켰다.

“잘 봐요, 데미안. 저건 베이비 핑크예요.”

“베… 예.”

“그리고 2번. 저건 살몬 핑크예요.”

“살몬 핑크….”

“3번은 뭔지 알아요? 코스모스 핑크라고요. 4번은 인디언 핑크! 5번은 코럴 핑크! 6번은 핫핑크! 7번은 마젠타!”

“…예?”

“하늘 아래 같은 핑크는 없다고요!”

그녀는 환희와 짜증을 담아 허공에 소리 질렀다.

“당신 사람 진짜 우습게 봤어! 만나자마자 죽여 버릴 거야!”

데미안이 얼떨떨해하는 사이 클로디아는 다리를 성큼성큼 건넜다. 시험 삼아 엉뚱한 코럴 핑크색 타일을 찔러 봤다. 타일은 훅, 뒤집혔다. 그 안으로 새카만 공허가 보였다. 클로디아는 코웃음 친 뒤 베이비 핑크색 타일을 찾아 발을 내딛었다. 타일은 뒤집히지 않았다. 그다음은 살몬 핑크, 코스모스, 인디언, 코럴, 핫, 마젠타. 다시 베이비 핑크! 그녀는 “아악! 짜증 나!” 하며 데미안에게 손짓했다. 데미안도 곧 정신 차리고 그 뒤를 똑같이 따랐다.

클로디아는 약 한 시간 만에 그 미친 분홍색 세계를 탈출했다. 데미안도 함께했음은 물론이다.

그 뒤로도 클로디아와 데미안은 온갖 희한한 미로를 건너야 했다.

꽃향기 두 개를 맡은 후, ‘그중에 데이지 향기는 무엇일까요~?’ 같은 소리를 하는 문제들을 끊임없이 맞혀야 문이 열리는 정원 미로, 똑같은 빨간 보석을 늘어놓고 ‘이 중에서 아빠 앞에 걸고 나가도 덜 혼나는 보석을 고르시오.’ 같은 문제.

후자의 문제 앞에서 클로디아는 손을 들고 외쳤다. “정답! 우리 아바마마는 그깟 걸로 안 혼내!” 소리 없이 보석으로 장식된 문이 열렸다. 데미안이 투덜거렸다.

“문제가 좀 치사하군요. 답을 보기에 놓지 않고 고르라니….”

“공주에게 맞췄다잖아요.”

클로디아는 씨근거리고 있었다.

“공주님이 얼마나 힘든지 알기나 해요? 저 개 같은 분홍색들의 향연 중에서 지난 연회에서 다른 나라의 공주님이 입었던 분홍색 드레스는 어떤 색이었을까요? 같은 걸 떠올려야 한다고요. 예외 상황도 언제나 있어요. 보기에 없는 답을 고르는 건 제게 너무나 익숙한 일이에요.”

“그, 렇군요….”

데미안은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클로디아는 그런 그의 얼굴을 보고 내뱉듯 말했다.

“알아요. 당신 같은 사람이 보기엔 굉장히 의미 없고 한가해 보이는 일들이겠죠.”

“그런 뜻은 아니었습니다.”

“아, 그래요. 당신은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아니니까. 하지만 실제로 제 앞에서 그깟 분홍색 따위를 구분하는 게 얼마나 의미 없냐고 묻는 사람들도 있긴 하거든요.”

클로디아는 이 거울 공작이 정말로 자르지스의 마족인지 의심스럽기까지 했다. 자신을 놀리는 용도라면 이 미로는 너무나 훌륭하게 구성돼 있었기 때문이다.

향기를 구별하는 법, 드레스의 소재 중 입으면 두드러기가 나는 옷감을 고르는 법 등.

심지어 방금 전 그녀와 데미안이 통과한 문제는 웬 방에 덩그러니 침대 매트리스 마흔 개를 깔아놓고, ‘이 매트리스 안에 들어 있는 물체가 무엇일까요? 누워서 맞춰보세요!’라는 어처구니없는 것이었다.

물론 클로디아는 그 위에 눕지도 않고 바로 “정답! 완두콩!”이라고 외쳐 통과했다.

데미안은 서른아홉 번째의 매트리스 밑에서 으깨진 완두콩을 발견해내고 감탄했다는 표정이 됐다.

“완두콩도 얼마나 어이없어요?”

“그거, 좀 여쭙고 싶었던 부분입니다만….”

“어떻게 눕지도 않고 알았느냐는 거죠?”

포르투의 하나뿐인 공주님은 씩씩거리며 벌판을 걷고 있었다. 미로를 탈출한 직후에는 언제나 보상이 주어졌다. 따뜻한 차나 예쁜 목걸이, 혹은 맛있는 과자 같은 것이었다.

클로디아는 차를 벌컥벌컥 마시고, 목걸이는 팽개쳤으며 과자는 입안에 욱여넣으며 걸었다. 시간 낭비하기 싫다는 뜻이었다. 지금도 보상으로 주어진 돌돌 만 웨하스를 바삭바삭 입안에서 부서트리며 말하고 있었다.

“폭풍우 치는 밤에 성문을 두들긴 공주님의 이야기 알아요?”

“잘 모릅니다. 누가 포르투 성문을 두들긴 적이 있습니까?”

“아뇨, 이건 동화예요. 공주들에게 흔히 들려주곤 하는 동화니 당신은 모를 법도 하죠.”

클로디아는 심술이 잔뜩 난 표정으로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가 내쉬었다.

“옛날에 어떤 왕자가 신붓감을 찾고 있었어요. 어머니인 왕비님은 왕자에게 ‘진짜’ 공주님을 배필로 맞이하게 하려고 공주님을 찾는다는 공고를 내걸었죠. 수많은 처녀들이 찾아와 자신이 공주라고 주장했어요. 하지만 왕비님은 그 처녀들이 모두 가짜라며 내쳤죠. 그리고 어느 폭풍우 치는 어두운 밤, 누군가가 성문을 두들겼어요.”

성문을 두들긴 여인은 자신이 공주라고 주장했다. 왕비는 초라한 그녀의 행색을 보고 어이가 없었지만, 폭풍우 속에 사람을 방치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그녀를 성에 들였다. 그리고 그녀의 잠자리를 마련해주며 수십 개의 매트리스 위에 그녀의 침구를 깔았다. 처녀는 고맙다고 인사하고는 잠에 들었다.

다음 날, 왕비는 그녀에게 잘 잤느냐고 아침에 인사했다. 처녀는 웃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불평했다.

‘세상에, 침대 안에 뭐가 들었는지 허리가 너무 아파서 밤새 한숨도 못 잤답니다!’

왕비는 크게 기뻐했다. 그녀는 처녀의 잠자리를 마련하며 매트리스의 맨 밑에 몰래 완두콩 한 알을 넣어두었기 때문이다. 왕비는 그녀야말로 진짜 공주라는 것을 확신하고, 왕자를 데려왔다. 왕자 또한 공주에게 한눈에 반했고, 두 사람은 결혼해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들은 데미안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그게… 동화입니까?”

“네.”

세상에 이렇게나 모욕적인 말은 없다는 듯, 클로디아는 코웃음 쳤다.

“진짜 공주님은 깃털처럼 폭신폭신한 매트리스에서 간곡한 보살핌을 받으며 자라왔기 때문에, 완두콩 같은 것은 금세 구분할 수 있다는 뜻이죠. 그런 걸 구분할 수 있는 처녀야말로 진짜 공주라는 거예요.”

“그게 공주와 무슨 상관….”

“그러게요?”

클로디아의 말투는 다분히 비아냥을 가득 담고 있었다. 데미안은 자신이 더 말을 보탤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아채고 입을 닫았다.

“우습게도 네 개의 대륙의 공주들은 모두 그 동화를 알고 있답니다. 그리고 진짜 공주님이 되기 위해서 다분히 노력하죠. 어릴 때부터 수많은 핑크색의 이름을 다 외우고, 천을 만져보며 향기를 구분해요. 곱게 화장하는 법을 익히고, 보석의 가치를 구분하죠. 하지만 조향사가 될 만큼은, 재단사가 될 만큼은, 감정사가 될 만큼은 아니에요. 그것들은 정확히 공주가 알 만큼만 가르쳐지는 거예요.”

“….”

“그리고 그 모든 걸 배운 공주는 뭐가 되는지 아세요? 왕자의 아내가 돼요.”

클로디아는 거기까지 말하고 이를 악물었다. 공주님에게 맞췄어, 라고 말하던 거울 공작이 말하려는 뜻을 알 것 같아서였다.

- 얘, 네가 정말 포르투의 공주라면 이런 건 다 맞출 수 있겠지? 어디 힘내봐.

- 그런데, ‘진짜 공주’가 뭐 하러 여기까지 왔니? 너 이것 외에는 할 줄 아는 것도 없잖아.

클로디아는 거울 공작이 무엇을 말하려는지 확신했으며 동시에 크나큰 상실감을 느꼈다.

“왕자랑 결혼이나 하지, 아무것도 할 줄 아는 거 없는 주제에 여기까지 와서 뭐 하고 있느냐고… 날 놀리는 거라고요.”

하늘색의 눈동자가 습기를 머금었다. 울지 않으려고 했는데 눈물이 났다. 눈가가 발개져서, 클로디아는 소매로 눈가를 꾹꾹 찍었다.

“화가 나.”

여태까지 대신들이 저를 비웃을 때, 교황이 저를 불쌍하게 취급할 때, 그리고 데미안이 제게 의무 운운하며 싸고돌 때도 짜증이 났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거울 공작은 그녀가 자르지스에 오기까지 계속해서 느꼈던 것들을 정확하게 찔러냈다.

네가 배운 것들이 뭔지 알아. 이렇게 곱게 키워진 공주님이지? 하지만 네가 무얼 할 수 있겠니? 마왕을 무찌르겠다고? 정말?

미로가 파훼될 때마다 클로디아는 기쁨과 동시에 모욕감을 느꼈다. 그녀가 배워온 것들을 처음으로 써먹을 수 있었으나, 써먹을수록 제가 긴 세월 동안 대체 무엇을 한 것인가 싶었다.

덧붙여 수많은 왕자들이 그녀를 무시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깨달았다.

포르투에서는 웃고, 떠들고, 아름답기만 하면 됐던 그녀는 제 손에 쥐여져 있던 웨하스를 내려다보고, 손에 힘을 주었다. 파스스, 얇고 먹음직스러운 웨하스가 부서져 바닥으로 떨어졌다.

보상으로 주어진 물건조차 쓸모 있는 것이 없었다. 예쁘고 사랑스럽고 맛있고, 하지만 마왕을 무찌를 수는 없는 것들.

“내가 우스워?”

클로디아는 울먹거렸다. 너무 화가 나는데, 화를 풀 방도가 없었다. 완두콩 문제를 푼 후, 지금까지 아무 문제도 미로도 나타나지 않았다. 거울 공작이라도 나타나야 하는데, 그인지 그녀일지 모를 이도 나오지 않았다.

“내가 우습냐고….”

“우습지 않습니다.”

그녀의 말에 답한 것은 데미안이었다.

데미안은 누구보다 그녀의 말을 잘 이해했다. 공주로 자라난 클로디아를, 가장 가까이에서 본 사람 중 하나가 그 자신이었다. 쥬버린이 자신을 데리고 공부할 때 클로디아는 자수를 놓거나 거울 앞에 있었다.

그녀는 어릴 적 공부를 싫어하고 선생이 설명해도 잘 듣지 않았다. 하지만 그건 대부분의 어린애들이 다 그렇다. 공주든, 왕자든, 평민의 어린애이든 심지어 동력 지대에서 주워진 어린애든.

나이를 조금 먹은 후에 데미안은 자신이 알고 있는 것 중, 클로디아가 모르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너무 똑똑한 여자애는 안 귀엽잖아요?’

누군가 지나가면서 그런 이야기를 했다. 아마 클로디아의 시녀 중 하나였을 것이다.

데미안은 어렴풋이 생각했다. 그런 것은 상관없이 그녀는 사랑스러운데.

하지만 데미안의 생각과는 상관없이 그녀는 그렇게 자라났다. 데미안은 그게 클로디아의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아니, 정말로 잘못이 아니었다. 그녀가 그런 것들을 배우지 않았다면…. 저기에 앉아 이쪽을 보고 있는 여인이 나타났을 리 없으니까.

데미안은 푸른색 벌판의 한쪽을 가리켰다.

“저 여인에게로 도달하게끔 한 것은 로드입니다.”

그제야 울고 있던 클로디아가 화들짝 놀라 그쪽을 바라봤다. 벌판의 한가운데에, 화려하게 장식된 의자가 있었다. 포르투의 왕좌보다 몇 배는 크고 몇 배는 아름다운. 번쩍이는 왕좌는 휘황찬란한 보석으로 뒤덮여 있었으며, 거기 앉아 있는 여인 또한 그 왕좌에 뒤지지 않는 모습이었다. 발치까지 늘어트린 윤기 나는 새카만 머리카락 사이사이에는 희고 자잘한 진주가 장식돼 있었으며, 새빨간 입술과 검은 눈동자에는 힘이 있었다.

그녀는 클로디아와 눈을 마주치고 웃어 보였다.

자칭, 거울 공작이 분명했다.

데미안은 거울 공작을 바라보면서도, 제 옆의 공주에게 나직하게 속삭였다.

“아무도 공주님을 우습게 여기지 않습니다. 단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한 적도 없습니다. 적어도 저는 그렇습니다.”

“…수르 알파.”

“공주님이 아니었다면, 저는 그 분홍색 방에서 무저갱으로 떨어져 지금쯤 목숨조차 부지하지 못하고 있었을 테니까요.”

거기까지 말하고 데미안은 조심스럽게 클로디아의 눈치를 살폈다. 방금 전까지 그런 것들을 알고 있다는 사실 자체에 회한을 느끼던 그녀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것조차 부정적으로 받아들여질까 봐서였다.

하지만 클로디아는 발개진 눈으로 그를 느리게 올려다봤다. 그리고 이내 옅게 웃었다.

“…고마워요.”

“예.”

데미안은 안심하며 그녀의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이미 한참 전부터 이 안에서, 클로디아는 데미안보다 앞서서 전진하고 있었다. 이곳에서만큼은 데미안은 클로디아에 의해 보호받았고, 그녀 덕분에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감히 거울 공작의 앞에서 그녀를 보호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모실 뿐이다.

두 사람을 지그시 쳐다보던 검은 머리의 여인이 빙그레 웃었다.

“보기 좋네. 원래 사랑은 시련을 극복하면서 단단해진대.”

“당신의 착각이 어디서부터 어디까진지는 모르겠지만, 굳이 부연하지 않겠어요. 그것 자체가 당신이 절 우습게 보는 이유가 될 테니까.”

클로디아가 말하며 여인의 앞으로 걸어갔다.

“저를 놀리는 것은 재미있었나요, 거울 공작님?”

“아하….”

거울 공작이 턱을 괴고 한가롭게 웃었다.

“내가 널 놀리는 줄 알았어?”

“그럼 무엇인가요?”

“딱히 그런 건 아니었는데, 공주님 마음을 상하게 한 것 같네, 내가.”

그녀는 의자에서 일어나 이쪽으로 다가왔다. 왕좌에서 일어나니 그녀는 생각보다 키가 작았다. 클로디아에게 그녀의 정수리가 보일 정도였으니. 클로디아를 올려다보는 새카만 눈은 웃음기를 머금고 있었다.

“사과할게.”

“받아들일게요.”

“좋아. 공주님답네.”

“당신이 절 공주인지 아닌지 판별하는 것은 자유지만, 저는 더 이상 당신에게 낭비할 시간이 없어요.”

클로디아는 그녀를 쏘아보고 말했다.

“저와 수르 알파를 이곳에서 빨리 내보내 주세요.”

하지만 거울 공작은 클로디아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팔짱을 낀 채 그녀를 올려다봤다.

“아, 잠깐만. 보내줄게. 약속은 한 거니까. 하지만 내 말 듣고 가.”

“뭐죠?”

“그대로 아나니아와 싸울 생각이야, 너?”

클로디아는 눈을 가늘게 떴다.

“무슨 뜻이죠?”

“말 그대로야.”

거울 공작이 입술을 말아 올렸다.

“너 그대로 가면 그냥 죽어. 아나니아는 정말 못돼 처먹은 데다가 엄청 강하거든.”

“당신이 겁을 준다고 해서 도망칠 순 없어요. 저는….”

“아니, 그게 아냐.”

공작이 손을 내저었다.

“강해지고 싶지 않으냐고 묻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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