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장. 자르지스로 (12/30)

5장. 자르지스로



 

[어이~쌰!]

디자이어가 흥겹게 소리쳤다. 롤리아 숲에서부터 곱게 챙겨온 배를 띄우는 순간이었다. 철썩, 하고 시빌이 크게 만들어 놓은 배가 바다에 내려앉았다.

바닷물이 사정없이 튀었으나, 클로디아는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와! 귀여워!”

초록색 세계수 덩굴로 만든 배는 작은 조각배만 한 크기였는데, 그 모양이 귀엽기 그지없었다. 이름이 마고뜨라는 마족 여자아이도 그 배를 보고 꺄악, 하고 좋아했다. 바다 위에 띄우니 참으로 동글동글하니 사랑스러웠기 때문이었다.

배를 띄운 것은 아트릭스의 6번 항구였다. 6번 항구는 주로 고기잡이배들이 드나드는 작은 규모의 뱃길이었다. 덕분에 일행들이 세계수 줄기 배를 띄워도 크게 눈에 띄진 않았다.

“이게 세계수로 만든 배입니까?”

“네! 귀엽죠!”

“참으로….”

배에 내려선 스완 경은 안쪽을 둘러보며 할 말을 찾는 듯 보였다. 그의 눈이 데룩데룩 굴렀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지? 클로디아가 눈을 깜박였다. 답은 지나가던 선원들이 했다.

“헤이, 아가씨. 뱃놀이는 저쪽 14번 항구에서 시작하라구.”

“왜, 아가씨가 고기잡이를 하고 싶을 수도 있잖아?”

선원들은 히죽거리며 클로디아의 배 옆에서 야유를 보냈다. 그제야 클로디아는 그 배가 어떤 느낌으로 보이는지 알아챘다. 초록색으로 동글동글한 배는, 아마 부잣집 아가씨의 취미생활처럼 보일 것이다. 유선형으로 만들어진 고기잡이배들과는 그 모양부터 달랐다. 마치 물 위에 띄워놓은 술잔 같달까.

물론 선원들의 응징은 스완 경이 했다. 그는 배 위에서 도움닫기도 없이 바로 뱃나루로 내려섰다. 쿵. 갑옷을 차려입은 거한이 갑작스레 내려앉는 소리에 선원들이 눈을 크게 떴다.

“무슨 뜻으로 말한 것이지?”

스완 경이 미소 지으며 묻자, 선원들은 서로를 쳐다보다가 뒤로 물러섰다.

“별, 별 뜻 아닌데요…?”

“그래?”

스완 경은 웃으며 팔짱을 끼었다.

“그럼 갈 길 가게.”

“예!”

스완 경의 말에 선원들은 냅다 줄행랑쳤다. 배 안에 있던 클로디아가 그 모습을 보고 피식 웃었다.

“고마워요, 스완 경.”

“아닙니다.”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다시 배 안으로 들어오지는 않았다. 그 또한 오늘 포르투 쪽으로 출발할 참이었기에 할 일이 많았다.

“겉치레를 중시하는 이들이야말로 그 속이 비어 있기 마련입니다. 저런 자들의 말에 크게 신경 쓰실 필요 없습니다.”

“음, 그런가요….”

“예. 모양새만 번지르르하고 아름다운 배들보다 훨씬 크고 원대한 목표를 가진 배 아닙니까.”

말을 끝낸 스완 경이 반들반들한 배의 몸체를 어루만졌다. 클로디아는 대답하지 않고 옅게 웃었다. 스완 경의 말이 마치 자신에게 하는 말 같았기 때문이다. 물론 그는 자신을 놀릴 의도 따위는 요만큼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준비가 끝났습니다.”

그때 마침 데미안이 배 밑에서 올라왔다. 디자이어가 만든 배는 나름 있을 것은 다 있었다. 배 밑의 창고와 작은 선실, 그리고 돛대와 키. 물론 운전하는 것은 디자이어이고, 바람 같은 것에는 큰 영향을 받지 않는다지만 구색은 갖춰야 한다는 디자이어의 주장 때문이었다.

그리고 데미안과 시빌, 헬렌은 그 안에 식량 따위를 잔뜩 실은 참이었다. 클로디아의 가방도 용량에는 한계가 있었고, 식량이 많아서 나쁠 것은 없다는 헬렌의 주장 덕분에 창고는 먹을 것으로 가득 찼다.

“고생했어요, 수르 알파.”

“예.”

데미안이 대답한 후 그녀를 흘끗 봤다. 클로디아는 민망한 듯 웃으며 모자를 고쳐 썼다. 어저께 저녁, 밧줄과 작은 고리 같은 것들을 구입해 온 데미안이 자기 전에 그녀에게 건넨 모자였다. 햇볕에 타는 것을 조금이나마 막아준다나. 챙이 엄청나게 넓었고, 한쪽에는 작은 리본 같은 게 달려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쨍한 햇빛을 본 클로디아는 바로 그 모자부터 챙겨 썼다.

‘이래선 스완 경의 말에 대답할 수도 없다니까….’

겉치레를 중시하는 사람이 돼버린 클로디아는 속으로만 생각했다.

‘하지만 어쨌든 피부가 타는 건 싫은걸! 햇볕에 타면 1년은 넘게 까만 피부로 있어야 한단 말이야!’

자르지스는 덥다며 시빌이 짧은 옷을 입길 권했으나, 그녀는 결국 고집을 부려 흰 셔츠와 긴 가죽바지는 고수했다. 시빌이 투덜거리며 그 옷에 온도 조절 마법을 걸어주었다.

물론 영구적인 마법은 아니었다. 영구적으로 걸어줄 수는 없느냐는 클로디아의 말에, 시빌은 이마를 찡그리며 제정신이냐는 눈초리로 그녀를 바라봤다.

‘제가 무슨 대마법산 줄 아십니까? 포르투 왕성에서 가져오신 물건들은 그 시대의 대마법사들이 만졌던 물건이라고요.’

그런가, 하고 민망함에 볼을 긁은 것이 바로 어젯밤이었다. 어쨌든…. 그녀는 눈을 몇 번 깜박이며 데미안을 쳐다봤으나, 데미안은 그런 그녀의 시선에 되물었다.

“할 말이라도 있으십니까, 로드?”

“…아뇨.”

정말! 짜증 나는 구남친 같으니라고!

클로디아는 모자를 바다에 집어 던지고 싶은 마음을 참고 웃었다.

어쨌든 정말로 출발할 시간이 다가왔다.

시빌에게 내내 안겨 있던 마고뜨가 까끄르륵, 하는 소리를 내며 도리질 쳤으나, 결국은 스완 경의 품에 안겼다. 아이는 낯선 것을 보는 눈빛으로 스완 경을 쳐다보았기에, 시빌은 아이에게 나직하게 몇 마디를 속삭여야 했다.

“백 밤만 자면 오빠가 데리러 갈게. 그때 오빠랑 결혼하자. 알았지?”

“양심도 없는 자식.”

헬렌의 추임새에 시빌이 아, 왜요 왜 뭐 왜! 하고 짜증을 냈으나 웃음으로 마무리됐다. 나루 옆에 서서 아이를 안은 스완 경이 손을 저으며 인사하자, 디자이어가 즐겁게 외쳤다.

[이제 간다! 자르지스로!]

“아이고야. 길었다. 이젠 좀 자르지스로 갑시다, 얼른. 예?”

어쩐지 세상 다 산 듯한 시빌의 멘트가 그 뒤를 이었다.

클로디아가 깔깔 웃었다.

나루에 선 스완 경이 대신 말뚝에 묶인 밧줄을 풀었다. 곧 배가 둥실, 하고 떴다. 구색을 갖추려 단 돛이 펄럭거렸다. 하늘은 파랬고, 날은 뜨거웠다.

클로디아는 모자를 한 손으로 누르고는 스완 경 쪽으로 손을 흔들었다. 스완 경도 손을 흔들었고, 그에게 안긴 아이도 조그맣게 손을 흔드는 모습이 보였다.

바닷새들이 우는 소리가 길게 늘어졌다.

예감이 좋았다. 클로디아는 정신없이 부는 바닷바람에 깔깔 웃었다. 파도가 배에 부딪쳐 하얗게 부서졌다.



 

***



 

디자이어는 키에 자신을 묶어달라고 했다. 비록 직접 현신해 키를 붙잡고 배를 몰 수는 없지만, 선장의 기분만이라도 느끼고 싶다는 이유였다. 클로디아는 어이없이 웃으며 디자이어를 키에 단단히 묶었고, 검은 만족스러운 듯이 배를 몰았다.

자르지스까지는 배를 타고 꼬박 하루가 넘게 걸린다고 했다. 걸어서도 하루면 되는 거리를 왜 그렇게 오래 가는 거야? 라는 의문에 디자이어는 해류 때문이라고 말했다.

“해류?”

[클로디아, 너는 모르겠지만 바다에도 길이라는 게 있어.]

“바다에 길이 있다고?”

시빌이 디자이어의 말을 받았다.

“바다에도 파도가 센 곳이 있고, 아닌 곳이 있거든요. 예를 들면 바다 안에도 계곡이 있는데….”

“바다에 계곡이 있다고요?!”

눈을 커다랗게 뜨고 묻는 클로디아를 보고 할 말을 잃은 시빌은 잠시 음…. 하고 웃다가 바다에 대해 길고도 긴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우리가 사는 대륙은 사실은 커다란 하나의 파이 같은 겁니다. 예를 들면 애플파이만 해도 사과 과육이 높게 쌓인 부분은 높고, 아닌 부분은 낮지요? 애플파이 위에 물을 쏟았다고 생각해 보세요. 높은 과육은 우리가 사는 대륙이고, 낮아서 물에 잠긴 과육은 바다인 겁니다.”

“아하, 알겠어요!”

그 뒤로도 시빌의 바다 특강이 이어졌다.

클로디아는 그저 공부를 하기 싫은 것이었지 멍청한 학생은 아니었기 때문에, 시빌의 말을 흥미롭게 들었다. 바다 위에서 할 일이 없는 것은 헬렌과 데미안도 마찬가지여서, 시빌은 갑작스레 세 명의 학생이 생긴 선생님의 기분을 만끽했다.

[…어쨌든 시빌의 설명대로, 해류 중에서도 유독 거센 물살들이 있어서, 그걸 피해가려는 거야. 물론 죽음의 바다가 가지고 있는 저주도 마찬가지고.]

“그렇구나!”

[사실 내 기억이 정확한지 잘 모르겠어. 나도 미겔과 자르지스에 간 게 너무 오래전이라 지형이 변했을 가능성도 있긴 하거든.]

그렇게 말하면서도 디자이어는 자신이 배를 댈 곳은 변하지 않았을 거라며 으스댔다. 미겔과 맨 처음 자르지스로 상륙했던 안쪽 해안 중 안전한 곳이 있다는 것이다.

[자르지스에서도 안쪽에 형성된 해안이야. 파도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는 데다가, 용의 화구에서도 멀어.]

“하지만 그런 곳이라면 마족들도 많지 않겠습니까? 마고뜨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지금 몸을 피하는 마족들이 엄청나게 많다는 것 같은데요.”

데미안의 말에 디자이어가 경쾌하게 답했다.

[괜찮아. 거긴 거울 공작의 성 바로 옆이거든.]

“거울 공작?”

[마족들 중에서도 엄청나게 오래 산 마족이지!]

디자이어의 말에 의하면, 거울 공작이라는 괴팍한 마족이 그곳에 살고 있다고 했다. 대륙의 작위인 공작으로 자신을 칭하는 그 마족은 땅에 거대한 굴과 같은 지하성을 만들어 오랫동안 칩거하는 중인데, 성격이 하도 괴이하고 예민한 데다가 갈피를 잡을 수 없어서 다른 마족들도 슬슬 피한다고 했다. 게다가 힘도 강대해서 그의 성격을 건드리면 즉시 죽음을 맞는다나.

“…그거 되게 위험한 거 아냐, 디자이어…?”

[음? 아냐. 아마 괜찮을 거야.]

“어떻게 장담해?”

[그야 클로디아 네가 있으니까….]

클로디아는 웬일로 디자이어가 기특한 이야기를 하는지는 모르지만, 나는 아무 능력도 없는 데다가 그런 마족을 만나면 바로 도망갈 거거든! 이라고 대답하려고 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덜컹, 하고 크게 배가 흔들렸기 때문이다. 덕분에 입을 열었던 그녀는 옆으로 확 쏠렸고, 결과적으로 혀를 깨물었다. 악, 하고 싶었지만 그럴 여유도 없었다.

배가 계속해 흔들렸다.

클로디아는 당황해 아무거나 붙잡으려고 손을 뻗었다. 순간 그녀의 손을 다른 이가 맞잡았다. 데미안이었다.

“으악, 뭐야!”

대신 소리 지른 것은 헬렌이었다. 헬렌은 디자이어가 매달린 기둥을 꽉 붙들고 있었다. 디자이어가 대답했다.

[뭐야, 생각보다 빠른데?]

“뭐가요?!”

[저주 말이야!]

“꽉 붙잡으십시오. 배가 요동치고 있습니다.”

디자이어의 말을 배경으로 데미안이 그녀의 팔을 붙들며 말했다. 데미안도 흔들리는 배 때문에 한쪽 팔을 배의 난간에 단단히 감아쥐고 있었고, 나머지 한 팔은 클로디아의 팔을 붙들고 있었다. 얼마나 힘을 주었는지 그녀의 상박이 아려왔다.

클로디아는 아프다고 말하고 싶었으나, 시선을 빼앗는 검은 것 때문에 순간 할 말을 잃어버렸다. 데미안의 등 뒤로, 검은 바닷물이 마치 촉수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탕, 하고 촉수가 일어나 뱃전을 두들겼다. 탕, 탕탕. 마치 그게 신호라도 되는 듯, 검은 촉수 수십 개가 연이어 배를 강타했다.

“꺄악!”

클로디아가 눈을 감으며 저도 모르게 데미안에게 매달렸다. 시빌은 옆의 다른 기둥을 붙들고 있다가, 도저히 안 되겠는지 헬렌이 붙잡은 키 기둥을 함께 잡았다.

[쟤들이 죽음의 바다를 건너는 배들을 두들겨 부수는 거야. 헤헹! 하지만 괜찮아! 이 몸이 누구냐?]

“괜찮은 거 맞아?!”

매달린 사람들은 죽을 지경인데 디자이어만 신나게 떠들어댔다. 얄미울 정도였다. 클로디아가 소리 지르자, 디자이어가 노래하듯 대답했다.

[걱정 마시라! 멀미만 조금 견디면….]

그때였다. 휙, 하고 바람이 불었고 클로디아는 순간 화들짝 놀라 눈을 떴다. 자신이 쓴 모자가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날려간 것이다.

“어머?!”

클로디아는 저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그 순간이었다. 탕! 유난히 커다란 촉수가 배를 퉁겼다.

“꺅!”

발이 미끄러진 클로디아가 데미안을 놓치는 건 순식간이었다. 하지만 데미안은 당황하지 않고 손을 뻗어 그녀의 허리를 붙잡았다.

문제는 데미안이 붙잡고 있던 난간이었다. 우지직, 갑작스러운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난간이 부서졌다.

[클로디아!]

기겁한 디자이어의 음성이 그녀의 귀를 두들겼다.

풍덩, 꼬르르르륵. 그녀의 시야를 새카만 물이 메웠다.

기다렸다는 듯 뭉클거리는 뭔가가 그녀의 목구멍으로, 귀로 밀려들어 왔다.

공포는 그것보다 더 빨리 그녀를 잠식했다.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려고 입을 벌렸으나 입안으로도 물이 들어왔다.

허리를 붙든 희미한 온기를 마지막으로, 클로디아는 정신을 잃었다.



 

***



 

얼굴이 뜨거웠다. 목도 아팠고, 뭣보다 머릿속이 아득했다. 뭐지. 왜 이렇게 힘들지. 클로디아는 눈을 감은 채로 생각했다. 왜지? 온몸이 들끓고, 그야말로 숨이 넘어갈 것 같은데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다음 순간, 가슴께에 강한 충격이 왔다. 그리고 클로디아는 자신이 괴로운 이유를 알아차렸다.

콜록!

제 목구멍에서 단 한 번도 나와 본 적 없는, 꿈에도 생각해 본 적 없는 괴이한 소리가 나왔다. 쿨러헉, 케헥, 켁, 크엑. 클로디아는 눈도 못 뜨고 격렬하게 기침했다. 콜록콜록콜록. 잔기침이 한동안 계속해서 나와서, 그녀는 정신없이 몸을 웅크렸다. 자신이 어디엔가 누워 있다는 것도 그제야 알았다.

잔기침이 겨우 멎어갈 때쯤, 클로디아는 자신의 등을 두드리는 큰 손바닥의 온기를 겨우 알아챘다. 온몸이 차갑지 않았다면 그마저도 알아차리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녀는 겨우 눈을 가늘게 떴다가, 다시 눈을 감았다. 소금기 때문에 눈이 너무 시려웠다.

“괜찮으십니까?”

그 목소리는 눈을 뜨지 못하는 클로디아에게 자신이 누구인지 알려준다는 듯이 나직하고 침착하게 굴었다. 그래서 클로디아는 앞이 잘 보이지 않는데도 안심할 수 있었다.

데미안이었다.

“수르 알파….”

메마르고 탁한 목소리가 나왔다. 그뿐인가. 목이 너무 아프고 따가웠다. 클로디아는 데미안을 부른 후 몇 번 더 잔기침하며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떠올리려 애썼다. 그러니까, 모자를 붙잡으려고 했었다. 그리고 데미안이 자신의 팔을 잡았고…. 데미안이 붙잡고 있던 배의 난간이 우두둑 뜯겨 나갔다. 클로디아의 잔기침이 뚝 멈췄다. 온몸이 차가워지는 것 같았다. 그녀는 한참 후에 간신히 눈을 뜨고 제 옆을 올려다 봤다.

엉망인 데미안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숨은 쉬어지십니까?”

“예, 예….”

클로디아는 황망하게 데미안을 쳐다봤다. 데미안은 항상 깔끔하게 올려 묶었던 머리카락을 온통 헝클어트린 채 그녀를 거의 끌어안듯이 하고 있었다. 무리도 아니었다. 클로디아는 제대로 앉지도 못한 채 반쯤 누워 데미안의 품 안에서 기침하고 있었으니까. 그녀는 자신의 가슴을 세게 누른 것도 데미안이라는 것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숨을 쉬지 못하는 자신에게 응급조치를 취한 것이리라. 그 후에 안아 올려 등을 두드렸을 것이다. 그를 증명하듯, 데미안의 얼굴에는 정체불명의 액체가 튀어 있었다.

‘저거…. 내가 토한 바닷물인 거지…?’

클로디아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러나 데미안은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가닥가닥 나눠진 머리카락에는 소금기가 말라붙어 있었다. 바닷물일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한 클로디아가 흠칫 놀랐다.

‘맞아, 바다!’

그녀의 생각이 맞다면 두 사람은 죽음의 바다에 빠졌던 것이 분명했다. 새카만 촉수가 뱃전을 거칠게 두들기던 것이 눈에 아직도 선했다. 그 순간, 데미안이 주었던 모자가 하늘로 날아갔고…. 클로디아는 저도 모르게 손을 뻗었던 순간을 기억해냈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그렇게 비싸고 귀한 모자도 아니었거늘. 하지만 그때 머리보다 먼저 몸이 나갔다.

그리고 자신은 지금, 해변에 있었다.

클로디아는 다급히 주변을 둘러봤다. 새하얀 모래사장, 새까만 하늘…. 검은색 바닷물과 부옇게 모래사장에 번지는 회색 파도. 데미안이 그런 그녀의 기색을 눈치채고 입을 열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이곳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대륙으로 밀려왔나 했으나…. 바다가 검은색인 것을 보면, 그리고 공기가 무거운 것을 보면 자르지스인 듯합니다.”

자르지스!

클로디아는 그 말에 흠칫 놀라 몸을 굳혔다. 데미안에게도 고스란히 느껴질 만큼 당황한 몸짓이었다. 데미안은 잠시 망설이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제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로드께서 물에 잠겨 계셔서…. 급히 로드의 숨이 남아 있는지 확인하느라 실례를 저질렀습니다. 죄송합니다.”

실례라는 말은 아마 제 가슴을 압박해 폐에 들어찬 물을 빼낸 것을 말하는 것일 테다. 그 과정에서 제 가슴을 본의 아니게 만졌다는 사죄겠지만, 멍청이도 아니고 그런 걸 일일이 따지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애초에 그럴 만한 정신도 아니었기에 클로디아는 간신히 고개를 내저었다.

“괜찮아요. 그보다…. 여기가 자르지스라고요?”

“예. 그래 보입니다.”

데미안은 클로디아에게 몸을 세울 수 있겠냐 물은 후, 그녀를 해변의 작은 바위에 기대게 했다. 그 과정이 상당히 힘겨웠으나 클로디아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것들이 다닥다닥 붙은 바위에 기대는 것에 간신히 성공했다. 공기가 무거운 것은 물론이고 후덥지근했다. 아트릭스보다 몇 배는 더. 클로디아는 시빌이 종종 자르지스와 비슷한 환경을 구성해봤다며 불러내던 마력장을 떠올렸다. 그것과 거의 비슷한 공기였다. 시종일관 무거운 마력이 어깨를 내리누르고, 습하고 뜨거운 공기가 숨을 쉴 때마다 폐를 괴롭히는.

“바다에 빠진 순간….”

데미안은 잠시 망설이다 말을 이었다.

클로디아를 붙잡고 함께 바다에 빠진 그는 그녀를 놓치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다. 살아 있는 듯 움직이는 촉수는 그런 데미안을 그녀에게서 빠르게 분리해내려고 용을 썼으나, 데미안은 바닷속에서 검기를 발현해냈다. 데미안이니 가능한 일이었다. 새카만 바다 안에서 검은 물은 마치 괴물이라도 되는 듯 검기를 피해 도망쳤다.

하지만 그것도 오래 가지 않았다. 인간은 수중생물이 아니다. 데미안도 결국 숨이 턱에 차올랐다. 한 손에 클로디아를 데리고 있는 것은 더 힘에 부쳤다. 정말로 짧은 시간 후에 데미안도 결국 물속으로 가라앉고 말았다.

그러나 그는 자르지스의 해변에서 눈을 떴다.

눈뜬 그의 시선에 들어온 것은, 모래에 얼굴을 박고 있는 클로디아였다. 클로디아를 서둘러 들어 올린 그는 그녀가 숨을 쉬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 황급히 바로 눕힌 후 가슴부터 두 손으로 압박했다. 다행히도 클로디아는 금세 숨을 쉬었다. 물을 많이 먹지 않아 가능했던 일이었다.

“바다가 검다고 해서 다 자르지스는 아닐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건 제가 확인했습니다.”

“어떻게…?”

데미안의 말에 클로디아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데미안은 쓰게 웃으며 왼팔을 들어 올려 보였다. 다음 순간 그녀는 너무 놀라 입을 막고 말았다. 데미안이 걷어붙인 팔은 온통 새까만 색이었다.

“세상에, 이게 대체….”

“죽음의 바다의 독입니다.”

시퍼렇게 피멍이 들거나 하는 정도가 아니었다. 데미안의 팔은 명백하게 중독당한 채였다. 클로디아의 눈가가 발갛게 물들었으나, 데미안은 그녀가 울 틈도 없이 질문을 던졌다.

“로드, 제가 로드를 보자마자 깨우느라 미처 확인하지 못했습니다만…. 혹시 욱신거리거나 아픈 곳은 없으십니까.”

데미안의 팔은 극저의 온도를 띠고 있었다. 중독되지 않은 부위는 따뜻했으나 왼쪽 팔만은 얼음장 같았다. 독 때문일 것이다. 클로디아는 고개를 내저었다.

“없어요….”

“그렇군요. 다행입니다.”

다행은 뭐가 다행. 자기는 저렇게 다쳐놓고. 클로디아는 기가 차서 한숨을 내쉬었다. 방금전 데미안의 말을 들으며 잡아 본 팔은 엄청나게 차가웠다. 분명 추울 텐데….

“데미안, 춥지 않아요?”

“저는 괜찮습니다. 그보다….”

데미안이 주변을 둘러보고 픽 웃었다.

“추울 틈도 없겠군요.”

클로디아는 그제야 자신들이 포위당했다는 걸 알아차렸다. 새빨간 등껍질을 둘러쓴, 갑각류 비슷한 것들이 무리 지어 이 주변을 둘러싸고 있었다. 그것들의 모습이 일반적인 갑각류와 다른 것은, 거의 하나하나의 개체 크기가 데미안만 했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그 밑에 사람의 다리가 달려 있다는 것이었다.

말로만 듣던 마족들이 분명했다. 클로디아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지, 징그러워….”

“너희들은 누구냐?”

그 갑각류가 말했다. 생각 외로 인간의 말을 쓰고 있었다. 클로디아는 놀라 입을 벌렸으나, 데미안은 싸늘하게 답했다.

“그저 표류한 자들일 뿐이다. 너희들 갈 길을 가라.”

“너는 그래 보이지만, 뒤의 그건….”

갑각류 중 하나가 고개를 갸웃하듯이 더듬이… 아니, 눈을 움직였다. 한쪽 눈을 길게 빼고 이쪽을 보는 모습이 너무나 생생해서 클로디아는 기절할 것 같은 기분이 됐다.

“인간 같은데?”

데미안은 반사적으로 클로디아를 바라봤다. 갑각류가 말을 이었다.

“일그러진 부분이 하나도 없어. 저건 대륙의 인간이야.”

다른 갑각류가 말을 받았다.

“인간이야.”

“인간.”

웅성웅성, 갑각류들이 떠들어댔다. 그 광경을 보고 있는 클로디아는 기절할 것 같은 기분이 됐고, 반면 데미안은 제가 허리에 찬 검을 뽑았다. 그새 검집에도 물이 들어갔었는지, 소금물이 뚝뚝 검을 따라 흘러 모래사장에 떨어졌다.

“갈 길 가라고 했다.”

“못 가.”

“안 가.”

갑각류들이 떠들어대자 데미안은 두말하지 않고 검기를 주입했다. 하얀빛이 검을 따라 주변으로 퍼져나가자, 게들이 일제히 눈을 바르르 떨었다.

“저게 뭐야!”

하지만 검기를 발현한 데미안은 그들을 봐줄 생각이 없었다. 데미안은 그 자리에서 한 발짝 움직이지도 않고 칼을 휘둘렀다. 곧 모래사장에는 꽤 많은 시체가 생겼다. 물론 갑각류들의 시체다.

“…괜찮아요?”

“예. 괜찮습니다. 그보다 디자이어는….”

클로디아의 물음에 데미안이 눈을 찡그리며 대답했다. 그제야 클로디아는 자신의 수다쟁이 검에 생각이 미쳐 화들짝 놀랐다.

“디, 디자이어! 맞다, 디자이어!”

갑각류들의 시체가 널린 모래사장에서 클로디아는 빠르게 디자이어를 찾으며 돌아다녔으나, 그런다고 없는 디자이어가 땅에서 솟아나진 않았다. 금세 클로디아의 얼굴에 낙심이 깃들었다.

“어떻게 해요. 키에 묶어놨죠, 참….”

“무리도 아닙니다. 저도 기대하지 않았으니 너무 속상해하지 마십시오.”

“하지만….”

“로드께서 그 순간에 디자이어를 챙기셨다면 더 놀랐을 겁니다.”

데미안은 그렇게 말했다가, 잠시 침묵 후 다시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사과 받아들일게요.”

클로디아는 방금 전 자신을 거의 화나게 할 뻔했던 남자의 사과를 받아들였다. 데미안의 말은 그 순간 디자이어를 챙겨오는 게 더 이상하다, 그 정도로 너는 할 줄 아는 게 없지 않으냐, 라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항상 저런 식으로 말하는 남자였지, 참….’

어이가 없었다. 클로디아는 자신이 왜 데미안과 파혼했는지를 기억해내고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말 한마디를 해도 정중하긴 하지만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리는 법이 없었다. 제게 예쁘다 귀엽다 사랑한다 말한 적도 당연히 없었지만, 같은 말도 기분 상하게 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런 그를 두고 수르 미다프는 사람들 사이에서 섞여 살아본 적 없어 그렇다며 기사단 사이에서 한층 무섭게 굴렸으나…. 수르 미다프의 예상과는 달리, 기사단들과 굴러 탄생한 것은 예쁘게 말하고 사회성 밝은 예의 바른 청년이 아니라 말수는 더욱 적어지고 검만 무섭게 휘두르는 검기 사용자였다.

그가 처음 검기를 발현했을 때 수르 미다프는 “왜!!”라고 부르짖었다던가. 무리도 아니었다.

“이제 어떻게 하죠?”

“…일단은 이 자리를 떠나야 할 것 같습니다. 사방에 훤히 노출된 데다가 엄폐물도 하나 없군요.”

클로디아는 찜찜한 얼굴로 갑각류들의 시체를 바라봤다. 사람 말을 하는 마족…. 상상도 하지 못했다. 아트릭스에서 만난 여자아이, 마고뜨는 끼익끼익 하는 소리나 냈는데. 공기 때문일까. 클로디아는 제 폐가 짓눌리는 듯한 기분에 밭은 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렸다. 자신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말하는 이들을 데미안이 한순간에 쓸어버리는 모습은 생각보다 충격이 컸다.

하지만 살육이란, 정벌이란 그런 것이다. 여기서 눈을 돌려봤자, 결국 마지막의 마지막에 마왕의 심장에 칼을 찔러 넣을 사람은 바로 자신이다. 클로디아는 기를 쓰고 일어났다. 마력이 무거웠으나, 데미안의 말대로 이 자리에 계속 있을 순 없었다. 소금기가 가득한 머리카락이 가닥가닥 뭉쳐 무거웠다. 머리카락을 잘라내 버린 게 다행이다 싶었다. 치렁치렁 긴 머리카락은 이럴 때는 아무 도움이 되지 않았을 테니까.



 

***



 

“어디로 가야 할까요.”

“일단은 디자이어가 말했던 해안을 찾아보도록 하죠.”

데미안도, 클로디아도 디자이어가 배에서 거울 공작이 어쩌고 하는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디자이어는 거울 공작이 사는 곳 근방이라면 다른 마족들이 접근하지 않을 거라고 말했다.

“하지만…. 우리가 배에서 떨어졌는데 디자이어가 자르지스까지 마저 왔을까요?”

“그렇게 믿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두 사람 사이를 침묵이 메웠다. 데미안과 클로디아는 빠르게 해안선 안으로 들어왔다. 해변을 벗어나니 숲이 그들을 맞이했다. 자르지스의 숲을 메운 나무들은 잎이 넓고 그 모양이 덩굴에 가까웠다. 마치 세계수를 연상케 하기도 했다.

클로디아는 더워서 헉헉거렸다. 무리도 아니었다. 클로디아는 여전히 긴 옷을 입고 있었고, 가죽옷들은 소금물에 젖어 한층 더 무거워졌다. 아트릭스에서 짧은 옷들을 구입했으나 그 짐은 모두 디자이어의 배에 실려 있었다. 물론 클로디아의 마법 가방도 마찬가지였고, 두 사람이 현재 가진 짐은 데미안의 검뿐이었다.

게다가 시빌이 옷에 걸어준 온도 조절 마법도 어느새 풀린 것이 분명했다. 클로디아는 자신이 땀을 그렇게나 흘릴 수 있는지 미처 몰랐다.

그러나 설상가상, 데미안은 그녀에게 자신이 두르고 있던 로브를 건넸다.

“이것을 두르십시오.”

클로디아는 원망스러운 눈으로 그것을 바라봤다. 그것은 먼지 쌓이고 낡고 찢어져 있긴 했지만, 본래는 포르투의 수르들이 걸치는 로브였다. 말하자면 상당히 무겁고, 방한을 위해 꽤 두텁기까지 했다.

“수르 알파…. 저 더워요.”

“어쩔 수 없습니다.”

뭐가 어쩔 수 없다는 거야? 나를 더위에 쪄죽이려면 어쩔 수 없어? 아니면 씻지 못하는 대신 땀에 샤워하게 만들려면 어쩔 수 없어?

더위에 예민해진 클로디아의 눈이 데미안을 향했다. 데미안은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아까의 그 마족들이 하는 말을 들으셨잖습니까. 이곳의 마족들은 인간과 비슷하지만 어딘가 변한 부분이 있습니다. 하지만 로드께서는 누가 봐도 인간입니다.”

“당신도 그렇잖아요?”

반발심에 냉큼 대꾸했던 클로디아가 다시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고 보니.”

아까의 갑각류들은, 클로디아를 향해서는 인간이라고 단언했으나 데미안에 한해서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표류자라는 말에 ‘너는 그렇게 보이지만’이라고 말했다.

클로디아는 데미안을 불안한 눈으로 바라봤다.

“당신은 괜찮다는 건가요?”

“예.”

데미안이 난처한 기색이 됐다. 그 이유를 말하고 싶지 않다는 노골적인 표정이었다. 그러나 클로디아 또한 당장 말하라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설명을 종용하는 클로디아의 눈에 잠시 망설이던 그는, 길게 풀어헤쳐진 머리카락을 들어 올려 제 뒷목덜미를 보였다. 클로디아의 눈이 커졌다.

“이게 뭐예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만, 아마 죽음의 바다…의 영향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의 목덜미에는 누가 봐도 새파랗거나 혹은 보라색으로 엉긴 기운이 얼룩덜룩하게 물들어 있었다. 블루베리를 잔뜩 바른다면 이런 모양이 될까? 피부 위에는 반점과, 수포와, 수포가 터져 생긴 보라색 고름이 한데 엉겨 있었다.

“이건 언제 알았어요?”

“조금 전에 알았습니다.”

숲 안에서 헤맬 때, 희한하게도 데미안이 목덜미를 자꾸 어루만진다 싶었다. 하지만 클로디아는 혼자 헉헉거리느라 그런 것을 미처 알아보지 못했던 것이다. 그 독기는 데미안의 뒷목덜미를 지나 왼쪽 어깨, 그리고 장갑을 벗어 보니 손등까지 번져 있었다.

“독기가 퍼진 곳에는 희한하게도 마력을 운용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리고 아까 그 마족들에게서도 비슷한 독기가 느껴졌죠. 아마 그 마족들도 제게서 독기를 느껴서 그렇게 말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데미안은 느릿느릿, 힘겹게 설명을 이어갔다. 말하는 게 어렵다기보다는, 자신의 상태를 남에게 설명하는 데에 어려움을 느끼는 것 같았다. 아까까지 왼팔은 그저 차갑기만 했다.

그러나 이젠 잔뜩 굳은살이 배인 손 위까지 올라와 있는 울긋불긋한 독기를 보고 클로디아는 눈물이 글썽해졌다.

“…괜찮아요?”

“예? 괜찮습니다. 싸우는 데는 별 문제가 없는 것 같습니다. 아까 그 해변에서 검기를….”

“그딴 거 말고요!”

클로디아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데미안은 얼떨떨한 표정이 됐다. 그녀는 데미안의 손등을 붙잡고 손가락으로 고름을 쓸었다. 부스스, 굳은 고름이 바스라졌다. 아직 찐득하게 늘어진 고름들도 클로디아의 손가락 끝에 묻어났다. 데미안이 당황해 손을 빼려고 했으나 클로디아는 손으로 그 고름들을 일일이 닦아냈다.

“이게 뭐야….”

고름을 닦아낸 안에서는 독기가 배어 나왔다. 희한하게도 피는 나지 않았으나, 새파란 체액 같은 것이 계속해서 피부 안에서 수포와 함께 부풀고 있었다.

“안 아파요?”

그제야 그녀가 왜 그러는지 알아챈 데미안이 어색한 얼굴로 손을 빼려고 했다. 아플까 봐 그리 세게 잡지도 않았기 때문에 데미안의 손은 빠르게 클로디아의 손을 떠났다. 미묘하게 굼뜬 동작으로 팔을 감추려는 데미안을 보고 클로디아는 화가 났다.

“지금 싸우는 게 문제가 아니잖아요….”

하지만 화를 내려는 마음과, 자신 때문에 이렇게 된 것이라는 죄책감이 충돌했다. 클로디아가 모자를 붙잡으려 들지만 않았어도 괜찮았을 것이다. 그 상황에서 얌전히 배에 붙어 있지는 못할망정 데미안과 함께 바다에 빠지다니. 짐덩이라고 비난받아도 할 말이 없었다. 그러니 화내는 것도 적반하장인 것만 같았다. 그런 그녀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데미안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중요합니다.”

대체, 라고 말을 내뱉으려다 말았다. 데미안이 말을 이었다.

“지금 로드께는 디자이어가 없습니다. 시빌도, 헬렌도 없죠. 지금 상황에서 가장 우선되는 것은 로드의 신변 안전입니다. 여차하면 제가 나서 싸울 수 있는 상황과, 그렇지 못한 상황은 아주 다릅니다.”

“….”

“제 팔은 괜찮습니다. 큰 아픔은 없으니 로드께서는 제 걱정보다는 본인의 안전을 챙기십시오.”

그렇게 말하고, 데미안은 실랑이하는 사이에 바닥에 떨어진 로브를 다시 주워 내밀었다. 클로디아는 뭐라 말해야 할지 모르는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다가, 이윽고 그 로브를 받아들어 걸쳤다.

“더우시겠지만 조금만 견뎌 주십시오.”

그제야 클로디아는 잠시나마 자신이 더위를 잊고 있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다시금 습한 공기와 더위가 그녀의 목덜미를 파고들었다. 하지만 클로디아는 뒤집어쓴 후드를 단단히 쥐었다.

데미안과 자신이 자르지스에 둘만 떨어진 일은, 분명 잘못한 일이지만 이미 벌어진 일이다. 그렇다면 데미안이 쓸데없이 힘을 빼는 일이라도 막아야 했다. 덥다고 칭얼거리며 후드를 벗거나, 예기치 않았던 싸움을 부르는 것은 그녀도 원치 않았다.

클로디아는 푹푹 찌는 숲 한가운데에서, 앞서 걸어가는 남자의 등을 쳐다봤다. 남자는 그녀에게 붙잡혔던 팔이 신경 쓰이는지, 걸어가면서 소매를 다시 내리고 단추를 꼭꼭 잠갔다. 그 위에 다시 장갑을 끼고, 팔 보호대를 두른다. 마지막으로 그 손을 검의 폼멜 위에 두었다. 언제든지 검을 뽑을 수 있도록.

클로디아는 다시금 되뇌었다. 울지 말자. 울면 안 돼.



 

***



 

두 사람은 해안선을 따라 돌았다. 자르지스의 지리를 모르니 그게 가장 나은 선택이었다. 하지만 커다란 해안을 마주한 마을을 발견했을 때, 둘은 서로를 쳐다봤다.

한나절을 헤맨 후였다. 슬슬 날이 어둑해져가는 참이었고, 데미안은 잘 곳을 찾아봐야겠다고 말하던 중이었다. 어느 순간 시야가 트였고, 나무 사이로 누가 봐도 민가 같은 것들이 밀집해 있는 곳이 보였다. 아직 해가 지지 않은 참이었고, 마을에서는 연기가 곳곳에서 피어올랐다. 평화롭기까지 한 광경이었다.

다만 대륙의 마을과 다른 것은, 커다란 건물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멀리서 봐서 잘 알 수는 없지만, 지붕들은 잘 말린 나뭇잎들을 이어 만든 것인지 모두 갈색에 가까운 회색이었다. 그리고 모두 낮은 단층이었다. 해안에 인접해 있지만, 작은 하천이 근처에 흐르고 있는 걸 봐서는 전형적인 사람 사는 마을이었다.

“…자르지스에 마을이라니….”

“그야 디자이어 또한 초대 국왕인 미겔이 자르지스의 주민들을 구했다고 했으니까요. 주민들이 있다는 건 주지의 사실이긴 했지만….”

“마족 마을일까요?”

“그럴 가능성이 높겠지요. 아까 마족들의 반응을 보셨지 않습니까.”

그녀가 인간이라는 사실만으로 마족들은 둘을 공격했다. 저곳이 인간 마을이라면 마족들은 그 마을을 가만두지 않았을 것이다.

“혹시 거북하거나 힘드시다면 지나치지요.”

“아뇨, 들어가요.”

“로드.”

클로디아는 데미안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다. 벌써 하루 가까이 정글을 헤맨 참이었다. 둘 다 바다에 빠졌다가 나온 상황이라 식량 따위는 꿈도 꾸지 못했다. 숲을 돌며 나무 열매 같은 것을 발견했으나, 몇 번 깨물어 먹어 본 데미안이 이마를 찡그리며 뱉었다. 사람 먹을 것이 아니었다.

꼬박 굶은데다가 휴식도 취하지 못한 상황이다. 게다가 클로디아는 자신보다 데미안이 더 문제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데미안의 뒤를 따라 걷기만 했으나, 데미안은 계속해서 사방을 경계하느라 자신이 보는 것보다 더 지쳐 있을 것이 뻔했다.

하지만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보다는,

“저 배고파요.”

“….”

“힘들고 지쳐요. 눕고 싶어요.”

클로디아는 투정부리듯 말했다. 당신이 힘들 것 같아요, 배고프지 않아요? 같은 소리를 해봐야 이 남자에게는 씨알도 안 먹힐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안 힘들어요? 쉬어요, 수르 알파, 하고 그녀가 말한다면 그는 괜찮다고 답할 것이다. 당신은 식사를 해야죠, 하고 말한다면 자신은 며칠 굶어도 끄떡없다고 말할 사람이다.

“…알겠습니다.”

클로디아의 예상대로였다. 데미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족 마을이라고 한들, 인간형에 가까운… 마고뜨의 경우 아트릭스의 음식도 문제없이 먹었으니까요. 아마 먹을 수 있는 것이 있을 겁니다. 다만…. 여관 같은 것이 있는지가 관건이로군요.”

“없어도 상관없어요. 일단 식사를 해요.”

응석 부리는 것만큼은 자신 있었다. 그녀는 언제나 노바라에게, 쥬버린에게 응석 부리듯 뭔가를 졸라댔으므로. 데미안은 앞장서서 마을 쪽으로 걸었다. 클로디아는 뒤에서 조금 웃었다. 자르지스에 온 후, 그녀가 웃는 것은 처음이었다.



 

***



 

두 사람은 마을에 들어섰다. 약 백여 호 정도 되는 마을은 꽤 컸다. 아마 하천 덕분일 것이다. 마을에 다가가면서 관찰한 하천에는 맑은 물이 흘렀다. 숲 안에서도 이 정도로 맑은 물은 발견하지 못했기에, 둘은 물을 마음껏 마셨다. 내친김에 클로디아는 내내 소금기 때문에 끈적거리던 몸도 씻고 싶었지만, 이후로 미뤘다. 물을 마시니 정말로 허기가 몰려왔기 때문이다.

마을에는 그 흔한 경비병 하나 없었다. 생각보다 평화로운 곳인 모양이었다. 두 사람이 마을에 들어섰을 때는 완전히 해가 져 깜깜했는데, 이곳에도 발광 도마뱀이 있었다. 재미있는 건, 인간의 도시에서는 발광 도마뱀을 유리구에 넣어 길렀는데 이곳 마을 사람들은 도마뱀의 몸에 조끼 같은 것을 입히고 그 뒤에 긴 줄을 매달아 자신의 집 주변을 돌아다닐 수 있게 했다. 도마뱀들은 줄이 닿는 범위라면 어디든 돌아다니며 집을 밝혔다.

“귀여워….”

어떤 집은 도마뱀을 애완동물처럼 여기는 모양이었다. 조끼에 꽃도 달아주고, 풀로 만든 장식도 달아주었다. 손으로 엮은 게 분명한 풀조끼를 입은 도마뱀이 낼름, 혀를 내밀어 벌레 한 마리를 잡아먹었다. 클로디아는 그것을 보고 작게 웃었다. 묘하게 평화로운 광경이었다.

하지만 길을 돌아다니는 주민들에 이르러서는 역시 웃을 수 없었다. 정말로 이곳은 마족 마을이었던 것이다. 커다란 동물의 귀 같은 것이 달린 사람이 이쪽을 지나쳐 반대쪽 길로 사라졌다. 머리부터 상반신까지가 온통 돌인 사람이 앉아서 연초 같은 것을 피우고 있었는데, 클로디아는 그가 조금 전 자신의 눈에서 흘러내리는 용암으로 그 연초에 불을 피우는 것을 분명히 보았다.

그리고 자신들 근처에 멈춰선 어떤 사람은 꽤 놀라운 광경을 연출했다. 상반신은 사람이지만, 하반신은 말과 비슷한 동물인 그 사람은, 자신의 등에서 머리에 뿔이 돋은 다른 주민을 내려주고는 돌 두 개를 받아 챙겼던 것이다.

“너는 승차감 좀 개선해라!”

“빌어먹을 자식아, 그럴 거면 네가 걸어오던가!”

그리고 그 광경을 본 데미안이 중얼거렸다.

“저 돌을 화폐처럼 쓰는 모양이군요….”

기가 찰 지경이었다. 클로디아가 본 적 없는, 꿈에도 생각 못 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새 한 마리가 삐로록, 지저귀며 날아 어떤 지붕 위에 앉았다. 그 지붕 위에는 팔 대신 날개가 달린 여자가 한가롭게 앉아 새를 보고 있다가 이쪽과 눈이 마주쳤다.

“어머, 외지인이 여기까지 왔네.”

클로디아는 바짝 몸을 굳혔다. 팔이 있어야 할 부분에 달린 날개만 아니었다면 인간과 흡사했다. 아니, 인간이었다. 그녀는 팔을 퍼득거리면서 이쪽으로 소리쳐 말을 걸었다.

“너희들도 화구에서 도망쳐 온 애들이야?”

화구에서 도망쳐?

클로디아의 머리에 의문이 떠올랐으나 곧 그녀는 마고뜨가 했던 - 시빌이 통역해주었던 - 자르지스의 상황을 기억해냈다. 용의 화구가 갈수록 뜨거워져서 마족 마을이 불탔다고 했던가. 도망치거나 다른 마을로 이주하는 마족들도 흔하다고 했다. 너무 뜨거워서 바다에 몸을 던졌다가 죽은 마족들도…. 데미안과 그녀의 눈이 마주쳤다. 데미안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 나서, 그쪽을 향해 소리쳤다.

“예. 이틀을 헤맸습니다. 혹시 먹을 것을 구할 수 있겠습니까?”

“어머나.”

까끄르르르륵…. 여자는 마고뜨와 비슷한 소리를 목에서 냈다. 새 같기도 했다.

“불돌은 있고?”

“불돌…이요?”

불돌이 뭐지? 둘 다 당황했으나 여자는 그 당황을 제멋대로 해석한 모양이었다. 그녀는 펄쩍 뛰어서 이쪽으로 내려앉은 후 다가왔다. 여자의 날개가 펄럭펄럭 바람을 일으켰다.

“세상에, 불돌도 못 챙기고 도망쳐왔나 보군. 몰골이 이게 뭐야? 너는….”

여자는 별생각 없이 날개 끝으로 클로디아의 로브에 손을 댔다. 그러나 데미안이 그녀를 막아섰다. 여자는 눈썹을 들어 올렸다. 클로디아는 로브 사이로, 여자의 눈썹 또한 자잘하게 난 깃털 한 올 한 올로 이뤄져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뭐야?”

“그녀는…. 몸에 지독한 화상을 입었습니다. 들추지 마십시오.”

“그래? 이런. 여자앤가 보네. 미안해.”

데미안이 더듬거리며 말하자, 여자는 수더분하게 뒤로 물러섰다.

“우리 마을에 의사는 없는데.”

“상관없습니다. 그보다….”

“아, 그래. 먹을 것.”

여자가 마을의 길 한 쪽을 턱짓했다.

“요새 너희 같은 자들이 많아져서 식당을 하던 한스가 여관도 열었지. 저쪽으로 가봐. 하지만 불돌이 없는 게 문제네. 한스는 수전노인데….”

여자의 말로 미뤄보아, 불돌은 이들 사이의 돈인 듯했다. 아까 사람을 태우고 왔던 자가 승객과 주고받은 돌이 불돌인 걸까. 그게 없으면 식사를 할 수 없다는 거겠지.

“흠. 너희 지금 아무것도 없는 거야? 그 검은….”

여자는 눈을 찡그리며 데미안이 찬 검을 바라봤다. 데미안이 드물게 당황했다. 이곳은 마족의 마을이고, 마족들도 인간과 비슷한 직물을 걸치고 있기는 했지만, 이곳 사람들이 검을 쓰는지, 쓰지 않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여자는 멋대로 납득했다.

“꽤 비싸게 주고 샀겠어.”

“예? 아, 예….”

“인간들 물건을 살 정도면 본래 살던 데서는 제법 살았나 본데. 그거 쓸 줄은 알아?”

“…예.”

칼을 쓸 줄 아냐고? 맹세코 그는 전 세계에서 그 물건을 가장 잘 쓰는 사람일 것이다. 클로디아는 웃음이 비져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여자는 날개 끝으로 턱을 어루만졌다.

“어느 정도로?”

“…짐승을 사냥할 줄은 압니다.”

“힘도 제법 있겠고…. 좋아. 그럼 너, 내가 맡기는 일을 하나 해 줄래? 그렇잖아도 요즘 몸이 좀 안 좋았거든. 근처 숲에 만드라고라 밭이 있는데, 만드라고라 세 뿌리만 캐다 줘. 그럼 불돌을 두 개 줄게. 요즘 내가 장작을….”

여자의 말을 끊고 데미안이 물었다.

“…만드라고라요?”

“왜, 싫어? 싫으면….”

“아뇨, 하겠습니다.”

데미안이 급하게 여자의 말에 답했다. 여자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



 

만드라고라 밭은 바로 마을 근처에 있었다. 그리고 클로디아는 풀뿌리 세 개를 캐는 일에 불과한 것을 그녀가 왜 그들에게 맡겼는지, 첫 번째 뿌리를 뽑고서야 알게 됐다.

“끼아아아아아아아악!”

가공할 만한 소리에 클로디아는 급히 귀를 틀어막았다. 그것은 만드라고라를 뽑던 데미안도 마찬가지였다. 데미안은 풀뿌리에서 빠르게 손을 뗀 후 귀를 막았으나, 현기증이 오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아무래도 이 풀뿌리는 누군가가 뽑으면 소리를 지르는 듯싶었다. 풀뿌리에는 근엄하게 생긴 얼굴이 새겨져 있었는데, 반쯤 뽑힌 만드라고라 뿌리는 그 입으로 끊임없이 소리를 질러댔다. 아악! 아악! 아악! 귀를 막고 있어서 그나마 괜찮았지, 귀를 막지 못한다면 아마 귀에서 피라도 날 것이다.

그를 증명하듯 곧 엄청난 후폭풍이 두 사람을 덮쳤다. 클로디아는 하늘이 노래지는 것을 느끼며 동시에 주저앉았다. 데미안은…. 그래도 서 있기는 했다. 이마를 잔뜩 찌푸리며 휘청거리고 있어서 그렇지.

‘상처 없이 뽑아 와야 해. 알았지? 그리고 꼭 한 번에 뽑아야 하는 건 알고 있지?’

자신들에게 일을 부탁한 여인이 왜 그렇게 말했는지 알 것 같았다. 데미안은 비명을 계속 지르다가 끝내 지쳐 늘어져버린 풀뿌리를 간신히 다시 뽑아내는 데 성공했으나, 자신이 뽑아낸 풀뿌리가 여자의 요구를 충족하지 못한다는 것을 곧 알아챘다. 계속해서 소리를 지르던 만드라고라는 입처럼 생긴 구멍에서 피를 뿜어내고 있었던 것이다. 소리를 지른 후유증이 분명했다.

한 번에 뽑아야 상처가 적으리라. 데미안의 얼굴에 난감함이 서렸다. 귀를 막으면서 풀을 뽑을 수는 없었다. 그때 클로디아가 데미안에게 다가왔다.

“제가 수르 알파의 귀를 막을게요.”

“안 됩니다.”

“저는 괜찮아요.”

“안 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수르 알파. 저를 보호하려면 수르 알파는 무사해야죠.”

“말도 안 됩니다. 로드를 보호하기 위해 제가 무사하려고 로드를 위험에 노출시키라고요?”

“…치. 안 통하네.”

클로디아의 혼잣말에 데미안의 미간에 주름이 패였다.

“저를 뭘로 보시고….”

“하지만 데미안이 귀를 안 막고 저걸 뽑게 할 수도 없어요! 방금 휘청거렸잖아요! 그쵸!”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만….”

데미안이 고개를 저었다.

“휘청거리는 정도입니다.”

“처음 휘청거렸으면 그다음에는요? 그다음엔 기절할 수도 있어요!”

그 여자가 두 사람에게 이 일을 맡긴 이유도 분명했다. 혼자서는 뽑을 수 없고, 게다가 그 여자는 손 대신 날개만 가지고 있었다. 날개로 귀를 막아봐야 소리는 거의 차단되지 않을 것이다. 클로디아는 한참을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럼 이건 어때요?”

클로디아가 제시한 방법을 듣고 데미안은 또다시 말도 안 된다, 고 부인했으나 클로디아가 더 완강했다. 그녀는 싸늘한 눈으로, 숲에서 귀를 막을 만한 것을 찾아오겠다고 주장하는 데미안을 바라보며 다시 강조했다.

“데미안. 저 배고파요.”

“….”

“저는 제 명예 따위를 지키기 위해 굶어 죽진 않을 거예요.”

“조금만 기다려 주시면….”

“저 덥고 짜증나요. 기다리다가 죽어버릴 거예요. 저는 포르투라는 온실에서 자란 연약한 공주라고요.”

“….”

말이야 맞는 말인데.

데미안은 잠시 고민했으나 더 좋은 방법이 딱히 없었다. 클로디아는 의기양양하게 고개를 쳐들고 팔짱을 끼었다. 저런 얼굴로 연약한 공주라고 말하는 꿍꿍이야 뻔했다.

공주는 진짜 짜증 나는 것도, 배가 고픈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죽을 때까지 이 일은 비밀로….”

“언제까지 떠들 거예요?”

“….”

데미안은 끝내 한숨을 쉬며 풀뿌리들 앞에 쭈그려 앉았다. 클로디아가 그의 옆에 바싹 다가앉은 다음 후드를 걷었다. 머리카락도 귀 뒤로 잘 넘긴 다음, 그녀는 데미안의 얼굴에 제 얼굴을 가져다 댔다. 데미안은 숨조차 멈추었다. 클로디아가 제 귀를 데미안의 귀 한쪽에 바짝 붙인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데미안을 끌어안듯 팔을 뻗어 반대쪽 귀를 막았다. 나머지 한 팔로는 제 귀를 막은 것은 물론이다.

말하자면, 공주는 데미안의 바로 옆에 서서 뺨을 바짝 맞대고 그를 감싸 안은 것이었다. 퍽 친근한 사이의 친구라 할지라도 취하기는 참 민망한 포즈였다.

“자, 뽑아요, 데미안! 빨리!”

그녀가 생각해낸 것은 어이없는데다가 꽤 볼썽사나운 모습이었으나 정말 쓸 만은 했다. 데미안은 이를 악물고 눈앞의 풀뿌리를 한 번에 힘주어 뽑았다.

끼아아아악….

제법 성공적이긴 했다. 완전히 소리가 차단되지는 않았으나, 그렇다고 방금 전처럼 타격이 오지도 않았다. 만드라고라 뿌리는 완전히 뽑혀 나오자마자 입을 꾹 닫고 눈을 감았다. 아까처럼 피 흘리는 뿌리가 없다는 부분에서는 긍정적이었다. 클로디아는 잘 뽑혀 나온 뿌리를 보자마자 얼굴을 떼고 환하게 웃었다.

“맞죠! 제 말 맞잖아요!”

“…예.”

“우리 나머지 두 개도 빨리 뽑아요!”

그리고 클로디아는 다시 그의 얼굴에 제 뺨을 붙였다. 데미안은 한숨을 쉬었다. 다른 남자에게 맨살이 닿는 것은 포르투 귀족 여성의 명예가 어쩌고 해 봐야 그녀는 듣지 않을 것이다. 이미 제 손도 잡은 후다. 물론 그녀는 의식하지 못하는 것 같았지만.

“마저 해요, 데미안!”

데미안은 빠르게 뿌리 두 개를 뽑아냈다. 마찬가지로 굳게 입을 다문 뿌리 두 개를 확인한 후, 클로디아는 자신들이 뽑은 뿌리를 재빠르게 상자 안에 챙겼다. 여자가 뿌리를 담아오라고 내준 상자였다. 반만 뽑아 피를 흘리는 뿌리도 혹시 몰라 클로디아는 자신의 주머니에 챙겨 넣었다. 이것도 싼값에 사줄 수도 있잖아.

그리고 그 직후 뒤를 돌아보자, 여자가 익히 경고했던 것이 그 뒤에 있었다. 커다란 뿔이 달린 멧돼지 한 마리가 뒤에서 콧김을 뿜고 있었던 것이다. 대륙에서 종종 나타나는 멧돼지와 생김새는 비슷했으나, 이 쪽은 털이 하나도 없고 머리에 엄청난 뿔이 달려 있다는 점이 달랐다.

여자는 뿔멧돼지가 만드라고라를 아주 좋아하지만, 스스로 뽑을 수가 없어서, 마을 주민들이 만드라고라를 뽑는 소리를 멀리서 듣고 있다가 달려와 풀뿌리를 빼앗아간다고 경고했다.

데미안은 칼을 뽑았다.

그녀가 칼을 쓸 줄 아느냐고 물었던 것도 이 이유였다. 덧붙여 그녀는 뿔멧돼지의 뿔과 고기는 아주 비싼 값에 팔리니, 어지간하면 챙겨서 팔아 쓰라고도 했다. 물론 뿔멧돼지를 물리칠 수 있다면 말이지만-이라는 사족이 붙었으나, 데미안에게는 그런 사족은 필요 없었다.

뿔멧돼지가 씨근대던 숨을 멈추고 달려왔고, 데미안은 칼을 휘둘렀다. 마족들도 단칼에 끝일진대, 뿔멧돼지 따위가 그에게 대적할 수는 없었다. 뿔멧돼지의 숨은 한 번에 끊겼다.

“와!”

멀리서 지켜보던 클로디아가 짝짝, 손뼉을 쳤다. 데미안은 머쓱하게 웃어 보였다. 마을로 돌아가 상자를 확인한 여자가 기쁨의 날갯짓을 하며 불돌 두 개를 안겨준 것은 물론이다. 뿔멧돼지의 고기를 본 여관 주인 한스는, 자신이 고기를 사겠다고 매입을 제의했다. 만드라고라를 먹고 자란 뿔멧돼지의 고기는 보양식으로 팔린다나. 두 사람이 묵을 방도 구한 것은 물론이었다.



 

***



 

불돌이란 것은 말하자면 용의 화구 주변에서 나는 돌이었다. 그중에서도 특수한 구조를 가진 돌들이었는데, 이 돌들은 용의 화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불을 머금고 있었다. 불을 따로 붙일 필요가 없었고, 이것은 자연스레 화폐 대신으로 쓰였다. 크기에 따라 가치가 다르긴 했지만, 대부분은 큰 차이가 나지 않았다. 다만 정해진 수요에 따라 그 기준이 확확 변한다는 게 문제였다. 용의 화구 근처에 있는 마을들은 불돌이 흔해빠져서 불돌보다는 다른 것을 물물교환한다고 했다.

문제는 마족들의 음식이 생각보다 그리 먹을 만하지는 않다는 것이었다. 클로디아는 여관에서 나온 음식을 한 입 맛본 뒤, 정말로 헬렌이 지독히 그리워졌다. 양념을 전혀 하지 않은 풀을 기름에 볶은 것, 누린내가 그대로 나는 고기 같은 것들을 먹고 있으려니 어쩐지 인생에 회의가 느껴졌다.

“…억지로라도 드십시오.”

“네에….”

시장이 반찬이라지만 다이어트 때문에 굶는 것이 일상이었던 클로디아는 포크를 들고 깨작거렸다. 그래도 데미안이 저렇게까지 말하면 먹는 게 나을 것이라고 되뇌며 영 맛없는 풀쪼가리를 입에 집어넣었다. 기름지기만 하고 짠 기운이 하나도 없는 풀볶음은 정말로 넘기기가 고역스러웠다.

여관은 생각 외로 나쁘지 않았다. 본래 식당이었다는 낮은 건물의 주인 한스는, 주변에 빈집 몇 개를 지어놓고 여관 영업을 했다. 나무로 지은 것도 아니고, 흙을 쌓아 만든 둥그런 움집에 가까웠으나 그래도 안쪽은 아늑했다. 다만 방이 없다는 게 문제였다. 용의 화구 때문에 피난해온 마족들이 꽤 있었던 것이다. 결국 두 사람은 같은 움집을 쓰게 됐다.

그나마 그들이 뿔멧돼지 고기를 팔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여관 주인은 두 사람에게 “어떤 사람들은 불돌이 모자라 움집 하나에 모르는 이들끼리 다섯 명이 잔다네!” 하고 웃었다.

“왜 가는 곳마다 방이 없을까요….”

“혼란스러운 게 문제일 겁니다.”

누군가의 농간이 분명해, 하고 신을 원망하려던 클로디아는 데미안의 말에 생각하던 것을 멈췄다. 데미안은 대륙의 상황과 이곳의 상황이 다르지 않음을 지적했다.

“용의 화구를 다스리는 마왕이 여기 없는 것은 아마 하늘섬의 지도자가 부재한 대륙과 비슷한 일일 겁니다. 다들 불안하고….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를 테지요.”

거기에 더해 자르지스는 너무나 가난한 섬이었다. 소금은 죽음의 바다 때문에 채취가 어려웠다. 바닷물을 떠다가 쓰기에는 용의 저주 때문에 중독되는 이들이 속출했다. 데미안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움집에 들어온 데미안은 여관 주인이 내준 발광 도마뱀을 붙들어 놓고 왼팔의 상처를 살폈다. 상처는 변화가 없었다. 더 심해 보이기까지 했다. 수포가 둥그렇게 부풀어오른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아프지 않아요?”

“괜찮습니다. 그보다, 쉬십시오.”

아마 덩치가 작은 사람들이라면 여관 주인의 말마따나 다섯 명은 누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데미안도 클로디아도 키가 컸다. 두 사람이 안에 앉자 움집은 퍽 비좁아 보였고, 데미안은 옷을 정돈하고 식기를 정리한 후 나가려 했다.

그러나 클로디아는 고개를 저었다.

“데미안, 쉬어요.”

“동력 지대 때와 다르지 않습니다. 제가 바깥에….”

“달라요, 데미안.”

클로디아의 말투는 강경했다. 데미안이 멈칫했다. 클로디아는 앉아서 데미안을 똑바로 쳐다봤다. 새파란 눈에는 힘이 있었다.

“당신 상태는 정상이 아녜요. 쉬어요.”

“하지만….”

“여기서 제가 클로디아 테 포르투라는 걸 아는 사람은 없어요. 게다가 다들 지쳐 있다고요.”

여관의 움집에 머무는 이들은 모두 지쳐 있었다. 화구의 불길을 피해 도망쳐온 이들의 여정이 여유로웠을 리 없다. 그에 더해, 클로디아는 내내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화상을 크게 입었다는 설명에 모두 납득했다.

“당신이 움집 밖에서 밤새도록 앉아 있는 쪽이 훨씬 눈에 띈다고요.”

“….”

클로디아의 말은 틀린 구석이 없었다. 데미안은 어색하게 도로 주저앉았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으나, 눈길을 먼저 피한 것은 데미안이었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 움집 안의 지푸라기 침대에 어색하게 앉았다.

아무래도 자신하고 이렇게 좁은 공간에 둘만 있는 게 불편해서겠지.

클로디아는 잠시 고민하다가, 침대에 누워 로브를 덮은 후 바로 돌아누웠다. 자기 전에 씻고 싶었지만 역시 무리였다. 새벽에 일어날 수 있을까. 새벽에 일어나게 되면 꼭 씻어야지…. 생각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수마가 그녀를 덮쳤다. 도저히 저항할 수 없는 괴물이었다.

곧 고른 숨소리가 움집 안에 울려 퍼졌다. 데미안은 여전히 침대에 앉은 채였다. 그는 까무룩 잠든 여인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부쩍 지저분해지고 먼지가 앉은 금발은 회색에 가까웠다. 작은 어깨가 천천히 올라왔다가 내려앉길 반복했다.

사실은 금방이라도 기절할 것처럼 피곤했고, 팔은 계속해서 따가웠다. 처음 해변에서 깼을 때는 몰랐지만, 독기에 물든 팔은 점점 아려왔다. 시험 삼아 검기를 몇 번 발현해봤을 때만 잠시 통증이 사그라들었다. 하지만 검기라는 것은 사용자의 기력을 쓰는 것이다. 팔이 아프다고 계속해서 검기를 사용한다면 그는 끝내 쓰러지고 말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무지 데미안은 침대에 누울 수 없었다. 클로디아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해변에서 깨어난 직후부터 계속 제게 미안해하고 있는 것을 그는 익히 알고 있었다. 뿔멧돼지를 잡을 때 잠시 명랑해지긴 했으나, 그 뒤로도 계속 그녀는 잊을 만하면 자신의 눈치를 봤다.

그녀도 아마 머리가 복잡할 것이다.

자르지스에 들어왔다 해도 디자이어가 없었다. 마왕을 죽이려면 디자이어 없이는 불가능했다. 물론 마왕이 자르지스에 없다고는 하지만, 언제 그가 다시 나타날지 모를 일이다. 더욱이 용의 화구에 들어 있다는 아무르와 쥬버린의 심장을 꺼내 오려면 용의 껍데기가 필요했다. 손발이 다 잘린 상태나 마찬가지였다.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는 상태에서 거울 공작이라는 이름만 찾아 가는 것이 얼마나 지난하게 느껴질 것인가.

데미안은 여관 주인에게서 아까 식사를 받아올 때 나눈 대화를 떠올렸다. 그는 거울 공작의 성 근처에 사는 마족들이 거의 없다는 것을 떠올려, 여관 주인에게 그곳에서 왔다고 말했다. 예상대로 주인은 놀라며 “거기 살았다고? 대단하네!” 하고 감탄했다.

‘하지만 그곳에서 하도 경황없이 뛰쳐나오다 보니 숲에서 길을 헤맸습니다. 사실 이곳이 어딘지도 모릅니다. 혹시 돌아갈 길을 알려주실 수 있습니까?’

‘어, 알려줄 수는 있는데…. 거기로 돌아간다고?’

‘예. 저와 함께 온 동생 말고도 다른 가족들이 거기에 있습니다.’

데미안은 최대한 간절하고 안타까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연기에는 재능이 없었지만, 별수 없었다. 주인은 데미안을 힐끔 보더니 혀를 찼다.

‘말리고 싶지만, 가족들이 남아 있다니 어쩔 수 없구만. 하지만 동생이 그렇게 다쳤는데, 남은 가족들이라고 멀쩡하겠어?’

‘멀쩡하지 않아도 돌아가 보기는 해야지요.’

‘흠. 거기는 저 산을 넘어서 동쪽 해안선을 따라서 가면 돼. 하루 반나절만 걸으면 두 번째 산이 나오는데, 거울 공작의 성을 등지고 있는 해안선에 도달하게 될 거야. 하지만…. 역시 말리고 싶은걸.’

그 말에 데미안은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여관 주인도 고개를 젓고 말았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거울 공작의 성 근처의 해안에 먼저 가야 했다.

하지만 거기 시빌이나 헬렌, 디자이어가 없다면 어떻게 하지?

데미안은 자신을 기른 수르 미다프를 생각했다. 그 괴팍한 노인은 자신에게 수르 지위를 넘겨준 후 대륙을 방랑하러 떠났다. 지금 같은 혼란의 시기에 그는 대륙의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 것인가. 적어도 자신보다는 꽤 능숙하게 클로디아를 이끌 수 있을 텐데. 데미안은 제게 수르 직위를 넘기던 때 그 노인이 지었던 홀가분한 표정을 떠올렸다.

‘너도 이만하면 사람 노릇은 하겠구나.’

검기 사용자를 두고 사람 노릇을 겨우 했다고 일컫다니. 사람들이 들으면 어이가 없을 말이었지만, 데미안은 그 말이 뜻하는 바를 알았다. 노인은 동력 지대에서 나온 후 십 년이 넘게 지났어도 쥬버린 외의 다른 사람과 제대로 된 이야기를 나누지 못하는 자신을 영 못 미더워했다. 클로디아와 그가 약혼했을 때, 노인은 클로디아가 상처받을 것부터 걱정했다. 그리고 그 걱정대로 됐다. 파혼한 지금도 여전했다.

자르지스에 올라온 직후부터 클로디아는 자신의 등을 떠밀기 위해 철없는 공주 노릇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속내가 그것이 아니라는 건 데미안이 더 잘 알았다. 저 배고파요, 데미안. 덥고 짜증 나요, 라고 말하던 그녀의 새파란 눈동자 안에서는 여지없는 상냥함만 깃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수많은 말들이 그의 입안을 맴돌았으나, 끝내 그는 결국 한마디만을 내뱉었다.

“…죄송합니다.”

자고있는 클로디아는 미동도 없었다. 데미안은 한숨을 쉬며 움집 벽에 기대앉았다. 몸은 누우라고 종용하고 있었으나 그럴 순 없었다. 언제든지 뽑을 수 있도록 검집을 양손에 든 채로 눈을 감았다. 클로디아를 습격했던 수마는 어김없이 데미안에게도 몰려왔으나, 그는 의식의 마지막 구석만은 양보하지 않았다. 아무리 피곤해도, 그는 아주 어릴 때부터 어둠 속에서 선잠을 자는 것이 버릇이 돼 있었다.



 

***



 

새벽 일찍 일어나겠다고 결심한 것이 무색했다. 클로디아가 겨우 깼을 때는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 겨우 눈곱을 떼고 나서 식사를 한 후, 두 사람은 빠르게 마을을 떠났다. 처음 만드라고라 채취를 부탁했던 여자 덕분에 소문을 듣고 여관을 찾아왔던 이들이 실망했으나, 더 시간을 허비할 수는 없었다.

“그나저나 뽑지도 못하면서 만드라고라는 왜 키운대요?”

“죽음의 바다의 독기를 약간이나마 중화해주는 효과가 있다는군요.”

“뭐라고요?!”

그 말을 듣자마자 클로디아가 앞서 가던 데미안의 어깨를 붙잡았다. 데미안이 그녀를 돌아보자 클로디아는 잔소리를 퍼부었다.

“그런데 그냥 왔어요?!”

“…약간입니다. 그리고 완전한 해독은 어렵습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대여섯 뿌리는 뽑아왔어야죠!”

씨근대는 그녀에게 데미안은 별 대답하지 않고 길을 재촉했다.

뭐 저런 답답한 인간이 다 있어?

클로디아는 진저리를 치며 그 뒤를 따랐다.

그렇게 걷던 산속에서 작은 샘을 발견했을 때였다. 클로디아는 망설임 한 점 없이 그 안에 풍덩 뛰어들었다. 물론 로브는 벗은 채였다. 데미안이 뭔가 말하고 싶은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봤으나 클로디아는 이것이 가장 편하다고 우겼다.

“옷을 다 벗어서 빨고 말리려면 오래 걸린다고요! 바닷물에 쫄딱 젖어서 전부 소금기를 먹었는데 그럼 어떻게 해요?!”

말리면 뭐, 내가 홀딱 벗고 옷 말리는 거 두고 보기라도 할 거야? 라는 눈길에 데미안은 입을 닫고 뒤로 물러섰다.

산속이라 그럴까, 아니면 씻고 싶었던 한을 풀고 싶었던 것일까. 클로디아는 샘 안에서 머리까지 한바탕 감은 뒤에야 나왔다. 물기를 닦을 수건도 없으니 그대로 바람에 말려야 했다. 그나마 머리가 짧은 것이 다행이었다.

‘요정들을 그렇게 저주했는데, 점점 갈수록 괜찮은 것 같은 기분이 드는걸.’

생각하다 말고 클로디아는 옆을 바라봤다. 데미안이 로브를 들고 그녀 옆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클로디아는 머리카락을 털며 그를 올려다봤다. 그 또한 바다에서 나온 뒤 계속 씻지 못한 건 마찬가지라 꾀죄죄했다. 클로디아는 그에게도 씻으라고 말하려다가 입을 닫았다. 백날 말해봐야 소용없는 작자다. 그 대신 클로디아는 샘으로 다가갔다.

“데미안, 이리 좀 와 봐요. 가까이.”

데미안은 고개를 갸웃하며 그녀에게 다가섰다. 클로디아는 씩 웃고 데미안의 어깨를 힘껏 밀어버렸다. 풍덩. 맹세코 클로디아가 그럴 것이라 예상하지 못했을 남자는, 큰 소리를 내며 빠져버렸다.

클로디아는 깔깔깔깔, 큰 웃음소리를 냈다.

샘은 클로디아의 무릎까지 오는 깊이였다. 그 안에 나동그라져 주저앉은 남자는 잠시 이게 무슨 상황인가, 하고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클로디아가 제게 이런 장난을 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기 때문일 것이다.

“아하하!”

클로디아는 그 표정이 자신이 데미안을 본 이후 그가 제 앞에서 지어 보인 표정들 중 가장 멍청해 보인다고 자신할 수 있었다. 그는 어제부터 줄곧 머리카락을 묶을 적당한 끈을 찾지 못해서 계속 풀어헤치고 있었는데, 물에 쫄딱 젖어 그 머리카락이 온통 머리를 뒤덮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내는 간신히 상황 파악을 한 듯, 제 얼굴을 덮은 머리카락을 걷어내며 신음했다.

“로드….”

“하늘섬에 돌아가서 자랑할 거리가 생겼네요! 세상에, 제가 수르 알파를 쓰러트리다니!”

난공불락의 요새와도 같다고 일컬어지는 데미안이었다.

한때 포르투의 기사단에서 데미안 쓰러트리기가 유행한 적 있었다. 아직 어린 데미안이 기사단장이 되는 것을 몇몇 기사들이 반대한 데서 생겨난 것인데, 당시 수르 미다프는 ‘앞으로 보름 동안 너희들 중 데미안을 한 번이라도 넘어지게 하는 자가 있다면 그에게 기사단장을 맡기겠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그 보름 동안 데미안이 넘어진 것은 단 한 번뿐이었다. 그마저도….

거기까지 생각하고 클로디아는 웃음을 멈췄다.

데미안이 넘어졌던 건, 어린 클로디아가 ‘그럼 저도 기사단장 할래요!’라고 말하며 그의 방 입구에 비누를 칠했을 때였다. 그때 수르 미다프는 ‘일부러 넘어져 준 건 해당 사항이 없습니다. 게다가 바닥에 비누칠이라니 대체 무슨 위험한 짓입니까?’라며 철없던 그녀에게 무섭게 굴었고, 결국 클로디아는 울음을 터트렸었다. 완전히 잊고 있었던 기억인데, 하필 지금 기억나는 이유는 뭘까.

그사이 데미안은 머리를 뒤로 넘기고 얼굴을 문지르고 있었다. 클로디아는 침착하게 되물었다.

“…다친 덴 없죠?”

“예. 괜찮습니다….”

괜찮다는 말끝에 한숨이 묻어 있는 건 기분 탓일까. 클로디아는 빠르게 변명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수르 알파는 제가 씻으라고 해도 보호가 어쩌고 하며 그대로 갈 게 뻔하니까! 그리고 상처는 씻는 게 좋아요!”

“압니다.”

“…화났어요?”

“아닙니다.”

그렇게 말하며 데미안은 샘 안에서 일어섰다. 쭈르르륵, 물길이 그의 옷소매를, 바지를 따라 떨어졌다. 사내는 잠시 제 몸을 내려다보다가, 나직하게 허, 탄식하고는 검집부터 빠르게 풀어냈다.

그제야 클로디아가 아차…. 하고 신음했다. 그녀도 그도 가죽옷을 입고 있었지만, 클로디아의 바지는 물에 별로 영향을 받지 않았다. 무두질이 잘 되어 있는 데다가 표면에 기름을 잘 먹인 것이기 때문이다. 귀하디귀한 공주님이 입을 것이니 포르투 사람들이 오죽 정성 들여 준비했을까. 그리고 그녀의 부츠는 마법이 걸린 물건이라 샘에 들어갔다 나온 지금도 발만은 편안했다.

하지만 데미안은 사정이 좀 달랐다. 데미안은 일부러 하늘섬을 나올 때 허름한 옷을 골라 입었다. 그가 입고 있는 바지는 두꺼운 면직물이었지만 그 위에 덧댄 것은 거친 가죽이었다. 아마 물을 만나면 많이 당길 것이다. 게다가 검집 또한 가죽으로 된 물건이었다.

“미, 미안해요….”

클로디아는 주눅 들어 그에게 사과했다. 옷의 물기를 짜고 있던 데미안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그녀를 쳐다봤다.

“괜찮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니까, 데미안은 자신의 화법이 얼마나 클로디아를 주눅 들게 만드는지 잘 몰랐다. 그가 한 말 때문에 클로디아는 한층 주눅 들어 그의 눈치를 보며 주절대기 시작했다.

“검 생각을 미처 못했어요. 그러니까, 수르 알파가 더울 거라고 저는 생각했고…. 하지만….”

“…로드.”

“변명 그만할게요. 제가 어리석었어요.”

“로드.”

“저 정말 폐만 끼치죠, 그러지 말았어야 되는데 순간적으로 장난치고 싶어져서…. 철이 좀 들어야 되는데, 시빌도 헬렌도 디자이어도 찾아야 할 때 장난칠 생각이나….”

“로드!”

클로디아는 퍼뜩 고개를 들었다. 옷을 짜다 말고 샘에서 올라온 데미안이 그녀의 바로 앞에 서서 그녀를 안타까운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저는 정말로 괜찮습니다.”

“하지만….”

“로드.”

다시 한 번 데미안이 그녀를 불렀다. 클로디아는 죄지은 기분이 돼서 고개를 수그렸으나, 데미안은 그녀에게 “고개를 들어 저를 봐 주십시오.” 하고 말했다. 클로디아는 조심스럽게 다시 남자를 올려다봤다. 남자는 안타까운 표정이었다.

“자르지스에 오셔서 계속 제 눈치를 보셨던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

“로드를 보호하는 것은 제 의무입니다. 그리고 로드는 그것에 죄책감 갖지 않으셔도 됩니다.”

왜일까. 그 순간 속에서 뭔가 울컥하고 올라왔다. 남자의 얼굴을 쳐다보고 있던 시선에 조금씩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남자는 계속해 말을 이었다.

“지금도…. 괜찮습니다. 마음에 여유가 없을 때일수록 조금이라도 웃을 거리를 찾는 게 중요합니다. 줄곧 힘들어하셨던 것을 알고 있습니다. 웃으셨으니….”

거기까지 하고 데미안은 뭔가 이상한 것을 눈치챘다. 클로디아가 이마를 찡그리고 있었던 것이다. 미안해서 울려거나, 혹은 죄책감 때문에 일그러진 표정은 아니었다. 오히려 화난 것에 가까웠다. 아니, 화가 난 것이었다.

“로드?”

의무. 클로디아는 그의 입에서 저 이야기를 신물 나도록 들었다. 아니, 말하는 그야말로 입안에서 단내가 나지 않을까?

‘의무, 의무, 의무! 괜찮다고? 뭐가 괜찮은데?’

차라리 그가 제게 화라도 한 번 내길 바랐다. 그러나 그는 단 한 번도 제게 화내지 않았다. 그래서 클로디아는 더 끔찍한 기분이 들었다.

아주 예전부터 그랬다. 데미안을 쓰러트리겠다고 방 입구에 비누를 칠하다니. 아무리 엄청난 장난꾸러기라도 비난받을 만한 일이다. 그러나 그때도 수르 미다프만이 그녀를 혼냈을 뿐, 데미안은 괜찮다고 말했었다.

하지만 여기서 클로디아가 왜 화내지 않느냐고 그에게 화내기 시작하면 적반하장밖에 되지 않는다. 사람 빠트려놓고 괜찮다는 말에 화를 내다니! 남들이 보면 미친 사람인 줄 알 것이다.

클로디아는 침착하려고 애썼다. 눈을 깜박거리며 눈꺼풀에 힘준 것을 풀려고 애썼다. 잘 되지 않았다.

“…고마워요.”

그래서 겨우 목이 메는 소리로 한마디만 했다. 데미안은 걱정스러운 눈으로 이쪽을 쳐다봤으나, 곧 고개를 숙이고 물기를 마저 짰다. 클로디아는 머리를 흔들었다. 생각이 너무 많아서 그럴 것이다. 다른 걸로 잊어버리자. 다른 걸로….

“…아.”

클로디아는 머리카락을 말리고 있던 그를 보고, 잊고 있던 걸 생각해냈다. 자신의 젖은 블라우스에는 리본이 장식돼 있었던 것이다. 왕실 재단사가 급하게 만들긴 했으나, 가죽 뷔스티에 안쪽 안 보이는 부분에는 장식용 리본이 블라우스의 홈을 통과하게 되어 있었다. 게다가 제법 길이도 길었다.

“수르 알파, 잠시만요.”

그녀는 뷔스티에의 끈을 빠르게 풀어냈다. 데미안이 갑작스레 옷을 벗는 그녀를 보고 어안이벙벙해 하다가, 이내 얼굴을 붉히고 돌아섰다.

‘아니, 그거 아니거든!’

그러나 클라우디아는 굳이 변명하지 않고 대신 블라우스 안쪽에 매여 있는 리본을 풀어내 쭉 잡아당겼다. 물에 젖은 리본이 살을 스치고 빠져나오는 감각이 생생했다.

그 리본을 데미안에게 내밀었다.

“이걸로 머리카락을 묶어요.”

그제야 데미안이 머뭇거리며 돌아봤다가, 클로디아가 내민 리본에 뜻밖이라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아. 감사합니다.”

“별말씀을. 물에 빠트린 대신 주는 거예요.”

“예.”

젠체하는 말에도 데미안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것으로 머리를 묶으려 했다. 더 이상 말을 섞지 않으려 했던 클로디아는 결국 잔소리 한마디를 더하고 말았다.

“아직 덜 마른 머리카락을 묶으면 어떻게 해요? 금방 지저분해진단 말이에요.”

“아….”

데미안은 멈칫하다가 어색하게 리본을 제 품에 집어넣었다. 클로디아는 흥, 하고 코웃음 쳤다. 머리를 길게 길러놓고도 저런 것도 모르다니. 정말이지 아닌 척하면서 손이 가는 남자였다.



 

***



 

하루를 걷고, 두 사람은 작은 동굴에서 잠을 청했다. 여전히 맛없긴 했지만, 그전 마을에서 미리 챙겨온 식량이 있었기에 괜찮았다. 자고 일어난 후에는 또다시 걸었다. 별다른 대화는 하지 않았다.

얼마나 더 가야 이 길이 끝나는 걸까? 하고 생각했을 때였다. 두 사람의 눈앞에 갑작스레 넓은 산자락이 펼쳐졌다. 여관 주인이 말했던 두 번째 산 정상에 도달한 것이었다. 물론 산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할 만큼 야트막한 것이었지만, 그래도 산은 산이었다. 갑자기 확, 하고 숨이 트이는 기분이 들어 클로디아는 눈을 크게 떴다.

나무 사이, 발아래로 근처의 전경이 보였다. 삐죽삐죽 솟아 있는 산들, 그리고 곳곳에 뻗은 산줄기들. 그 아래에, 희게 빛나는 낮은 성이 있었다. 아니, 성이라고 할까….

클로디아는 눈을 가늘게 떴다. 햇빛을 받아 빛나는 성은 하얗고 커다란 바위를 깎아 만든 것으로 보였다. 인간의 성과는 명백히 다른 형태였다. 거의 낮은 동산만 한 바위에 큰 문이 달려 있었고 군데군데 창문과 망보기 구멍 같은 것들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클로디아는 그게 성이라는 것을 아주 잘 알 수 있었다.

“저게, 거울 공작의 성….”

“그리고 디자이어가 말했던 해안은 저쪽이겠군요.”

데미안이 손을 뻗어 성의 뒤쪽을 가리켰다. 그쪽에는 명백히 안쪽으로 동그랗게 파여 있는 해안선이 있었다. 그쪽만 유난히 안쪽으로 들어가 있어서, 클로디아도 금세 알아볼 수 있었다.

“저기에 디자이어와 시빌, 헬렌이 있을까요?”

“…있다고 믿어야겠죠.”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싶었지만 클로디아는 고개를 저었다. 그의 성격상 확답은 못 할 것이었다. 자신에게 그가 그렇게 묻는다 한들, 더 좋은 대답을 내놓을 자신도 없었다. 데미안은 그런 그녀의 생각은 모른 채, 성을 한참동안이나 내려다보며 그쪽을 피해 해안까지 갈 방법을 강구하고 있었다.

“거울 공작이 누군진 모르지만, 마족 중에서도 높은 자라면 저희에 대한 공격성이 높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렇겠죠….”

“저쪽 숲으로 돌아간다면 어떨까요.”

데미안은 거울 공작의 바위성 동쪽 해안선에 가늘고 길게 조성된 해안숲을 가리켰다. 파도를 막기 위해 조성한 숲이리라. 저 정도 규모라면 일부러 만들었다고 봐도 무방했다. 클로디아는 불안하게 데미안을 올려다봤다.

“괜찮을까요?”

“반대쪽으로 산자락을 타고 가는 것도 고려해봄 직하지만, 일단 시간이 없습니다. 산자락은 너무 돌아서 가는 길인 데다가 여태까지는 운이 좋아 짐승을 만나지 않았습니다만….”

데미안이 말을 흐렸다. 그랬다. 둘 다 해안선을 따라 걸었기에 깊은 산 속에서 나올 법한 짐승은 만나지 않았다. 중간중간 멧돼지 같은 정도의 짐승은 만났지만, 데미안의 능력으로 충분히 커버가 가능했다. 하지만 거울 공작의 주변에 있는 산은 그들이 넘어온 두 개의 야트막한 산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훨씬 크고 넓고, 숲이 울창했다. 저 숲을 질러간다면 이틀은 족히 걸리리라.

반면 저 해안숲은 파도를 막기 위한 용도일 뿐이었다. 인적은 보이지 않았다. 뭣보다, 거울 공작의 바위성 근처에는 인적이 전혀 없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거울 공작을 다른 마족들이 피한다고 했잖아요. 혹시 아예 마족들과 안 어울리는 타입인 건 아닐까요?”

클로디아가 의문을 제기했다. 데미안 또한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스스로를 공작이라고 부를 정도니까요. 아주 공격성이 높거나, 아니면 괴팍할 수도 있습니다. 혹은… 칩거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죠.”

“공작쯤 되면 성 근처에는 경비 정도는 둘 텐데 말이에요. 제가 너무 인간 위주로 생각하나요?”

데미안은 고개를 저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어쨌든 저런 규모의 성을 유지할 수 있을 만큼의 위력을 가진 자가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는다는 건 이상합니다. 마을만 해도 인간과 흡사하게 살고 있는 모습을 확인했으니까요.”

운이 아주 나쁘지 않다면, 해안숲을 무사히 통과할 수 있을 겁니다, 라고 데미안이 덧붙였다.

하지만 데미안이 간과한 게 있었다. 생각해보면, 클로디아는 운이 지독히도 나쁜 부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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