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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마족 소녀 (11/30)

4장. 마족 소녀



 

헬렌은 과일 상점부터 들렀다. 클로디아는 헬렌이 과일을 고르는 동안, 주인이 맛보라고 준 과일을 깨물었다. 아삭아삭한 맛이 좋았다. 크게 달지는 않았지만 상큼했는데, 헬렌은 그 과일에 설탕을 뿌려 말린 후 다시 한 번 녹인 설탕을 끼얹으면 괜찮은 보존식이자 간식이 된다고 말했다.

“설탕이 비싸서 그렇지, 음식을 보존할 때 쓰면 참 좋지.”

“예산 괜찮아요?”

“클로디아 있잖아.”

과일 가게에서 매입을 마치고 나온 헬렌이 눈을 찡긋했다. 그 뒤에서 시빌이 끙끙거리며 과일이 잔뜩 든 종이봉투를 들고 따라 나왔다. 클로디아는 헬렌의 능청스러운 말에 아하하, 웃었다.

“자르지스 한복판에서 설탕 맛을 볼 수 있다면 정말 좋겠네요! 얼마든 낼게요!”

“그런 의미에서, 짠!”

헬렌은 주머니를 주섬주섬 뒤지더니 손바닥 위에 뭔가를 올려놨다. 클로디아가 헬렌의 손바닥을 들여다보다가 비명을 질렀다.

“꺅! 이게 뭐예요!”

“캐러멜이다!”

“악! 너무 좋아!”

“너무 좋은 거 맞습니까? 거의 괴물을 만난 급의 비명인데….”

시빌이 클로디아의 과격한 반응에 뒤에서 의심스럽게 중얼거렸으나. 클로디아는 아랑곳하지 않고 헬렌의 손에서 캐러멜을 들어 올렸다. 기름종이로 감싼 캐러멜이 번들거렸다.

“이거 어디서 났어요?”

“아까 노점에서 팔길래 살짝 샀지. 하지만 너무 비싸서 딱 세 개만 샀어. 그러니까 데미안과 스완 경에게는 비밀이다?”

시빌 하나, 클로디아 하나, 헬렌 하나. 세 사람은 캐러멜을 입안에 넣고 단맛을 음미했다.

클로디아는 황홀한 얼굴이 됐다.

“아, 헬렌이 아니었다면 여행길에 이런 맛을 볼 생각은 하지도 못했을 거예요.”

“나야말로. 예전의 판나코타 감상은 정말 인상 깊었다고.”

헬렌이 빙그레 웃으며 근처의 주류 가게로 들어갔다. 아트릭스는 선원들이 많았고, 독한 주류만을 전문으로 파는 곳도 많았다. 주류 가게 안에는 보기만 해도 엄청난 병들과 술통이 잔뜩 쌓여 있었고, 헬렌은 술통을 내려다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이만한 술통이 클로디아의 가방에 들어갈까?”

“안 들어가지 않을까요…?”

“그래? 아쉽다. 병으로 사야겠네.”

“자르지스에서 술 마시려고요?”

시빌이 눈을 둥그렇게 떴다. 헬렌은 어깨를 으쓱했다.

“거기서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는데 술 정도는 있어야지.”

갑작스레 그녀가 던진 말의 무게감에 클로디아가 움찔 놀랐다. 헬렌은 그녀의 반응을 보고 놀라 다른 말을 덧붙였다.

“농담이야, 농담. 술은 몸을 덥혀주니까.”

“그, 그렇지요…? 하긴, 술이 있으면 상처도 소독할 수 있고….”

클로디아가 눈알을 데굴데굴 굴리는데, 가게 주인이 헬렌에게 마침 그녀가 찾던 술병을 가져다줬다. “이거 자네가 말한 것보다는 좀 더 비싼 거긴 한데….” 헬렌은 술병의 라벨을 보더니 환호성을 질렀고, 곧 클로디아에게 물었다.

“잠깐만, 여기 좋은 술이 좀 많은 것 같은데 약간 기다려줄 수 있겠어?”

“그럼요.”

헬렌이 술을 좋아하는 것을 잠시 잊고 있었다.

클로디아는 빙그레 웃고는 바깥으로 나왔다. 헬렌은 한참이나 주인과 이야기하는 것 같더니, 술을 맛보고 이내 지하에 있는 창고까지 잠시 둘러보고 오겠다 했다.

그동안 클로디아는 가게 모퉁이의 빈 술통에 걸터앉아 복잡한 심정으로 바깥에 진열된 술들을 내려다봤다. 캐러멜을 먹으며 느꼈던 달콤한 기분이 거짓말처럼 사라진 뒤였다.

그렇지, 곧 자르지스로 들어가지….

자르지스, 자르지스 하고 계속 말해왔지만, 막상 눈앞에서 자르지스를 확인하고 나니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눈에는 보이지만 막상 그 안에는 뭐가 있는지 아무도 모르는 섬.

자르지스의 마왕은 그 안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쥬버린 오빠의 심장은 무사할까?

온갖 생각이 들었다. 그때 옆에서 술집 주인이 맛보라고 건네준 술잔을 든 시빌이 그녀의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무슨 생각 해요?”

“아, 시빌. 그냥…. 술 마시면 기분이 좋을까? 같은 생각을 했어요.”

“음, 사람마다 다르죠.”

시빌이 그녀 앞에 장난스레 팔짱을 끼고 섰다.

“기분이 좋아지는 사람도 있지만, 마시면 우는 사람도 있답니다.”

“그래요?”

“그럼요. 한 말 또 하는 사람도 있고, 가끔은 그냥 잠들기도 하지만 다른 사람에게 화내는 사람도 있고.”

클로디아는 픽 웃었다.

“시빌은 어때요?”

“저요?”

시빌이 자신을 가리켰다가 싱긋 웃었다.

“어떨 거 같아요?”

“많이 웃을 것 같은데요!”

“틀렸어요. 벌주로 한 잔.”

마법사는 자신이 든 술잔을 클로디아에게 건넸다. 클로디아는 얼굴을 찡그리며 웃다가, 그 술잔을 받아 마셨다.

연회에서는 언제나 가벼운 발포주만 마셨는데, 항구의 술은 향기부터 독했다. 하지만 쌉싸름하면서도 목구멍에서 감도는 여운이 있었다.

클로디아가 남은 술맛을 느끼기 위해 입맛을 다시는데, 시빌이 입을 열었다.

“저는 예전에 아주 친한 친구들 몇과 술을 마신 적 있었는데….”

빨간 머리의 마법사는 자신이 친구들과 술을 마시다가 넘어져서 모르는 여자에게 실례를 저지른 얘기를 맛깔나게 들려줬다.

그 여자를 끌어안고 넘어져서 연신 사과하는데, 문제는 그 여자도 술에 취해 있어서 시빌의 사과는 듣지 않고 가장 먼저 그의 뒤통수를 병으로 후린 후, 머리카락을 죄 뽑아버리겠다고 날뛰었던 이야기를 어찌나 재미있게 하는지.

이야기가 끝났을 때, 클로디아는 얼굴까지 손에 묻고 웃느라 죽을 뻔했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상태로 얼굴을 들자, 시빌이 씩 웃고 있었다.

“기분은 좀 풀렸어요?”

“…아.”

클로디아가 조금 입을 벌렸다.

“어떻게 알았어요?”

“왜 몰라요, 클로디아 얼굴만 봐도 다 알죠.”

시빌이 어깨를 으쓱하며 그녀의 바로 옆에 있는 술통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그렇게 티가 나요?”

“뭐, 그것도 그렇고.”

술통은 그리 크지 않아서, 두 개가 나란히 있는데도 시빌이 앉으니 그의 어깨가 클로디아의 어깨에 닿아왔다.

클로디아는 조금 옆으로 비켜서 그에게 자리를 내주려고 했으나 시빌이 더 빨랐다. 시빌은 그녀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 안아 클로디아가 앉기 편하게 해 주었다.

클로디아의 얼굴이 새빨개졌으나 시빌은 본체만체 하며 말을 이었다.

“옆에서 클로디아가 얼마나 부담을 안고 있는지 다 봤잖아요. 곧 자르지스로 들어가기 직전인데, 클로디아가 느끼는 무게감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런가요….”

“아까 헬렌이 했던 말에 얼굴이 흐려지는 것도 그렇고요.”

“….”

클로디아는 입을 닫았다. 그랬다. 헬렌의 말은 여러 가지 뜻을 담고 있었고, 클로디아는 그 안에서 가장 어두운 말을 읽어냈다.

그 안에서는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른다.

차마 잊지도 못해, 술이 있어야 잠들 수 있는 밤이 올지도 몰랐다.

그녀는 상당히 운이 좋은 편이었다.

그야 자신이 하늘섬의 공주라는 것도 한몫했고, 뭣보다 데미안과 시빌이 있었다. 데미안은 가장 적합한 동료를 그녀에게 찾아줬고, 짧은 순간 위기가 찾아와도 이내 데미안이나 시빌 덕에 편하게 넘길 수 있었다. 교황만 해도 그렇다. 그녀가 공주가 아니었다면, 스완 경의 합류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자르지스에서는 다르다.

그녀가 공주라는 것이 아무 쓸모없는 곳이다. 나아가 그녀가 하늘섬의 공주라고 말하는 순간 마족들은 클로디아를 찢어발기려 들 것이다. 어떤 일이 일어나도 차마 놀랄 수도 없었다. 놀랄 시간에 빨리 도망가지 않으면 위험할 테니.

시빌은 그런 그녀의 마음을 다 알고 있는 듯, 자신이 감싼 클로디아의 어깨를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그렇지만요, 클로디아. 자르지스에 들어가기 전에 이 말은 꼭 해주고 싶었어요. 무슨 일이 있어도 혼자 고민하지는 말아요. 그리고, 저와 다른 사람들에게 얼마든지 의지해 주세요.”

“시빌.”

시빌이 다정하게 웃어 보였다.

“가만 보면 클로디아는 생각이 너무 많아요. 아마 그건 제가 이해할 수 없는 클로디아만의 세계겠죠. 마법사의 세계와 공주의 세계는 다르기 마련이니까요.”

“….”

“하지만 달라도 이해할 수는 있잖아요.”

클로디아는 물끄러미 시빌을 바라봤다. 항상 자신과 시선이 마주치면 부드럽게 바뀌는 눈 안에는, 저무는 해가 담겨 있었다.

“거기서 무슨 일이 있을지는 정말 모르죠. 헬렌의 말대로 술이 꼭 필요할지도 모르고요. 하지만 되도록이면 그런 일을 막으려고 저나 데미안, 헬렌이 있어요. 그리고 클로디아와 고민을 나누기 위해서이기도 하고요.”

“…네.”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생각보다 훨씬 좋은 곳일 수도 있잖아요? 어쩌면 자르지스가, 하늘섬보다 멋진 곳일 수도 있어요.”

그럴 리는 없다. 하지만 시빌이 해주는 말은 너무나 상냥해서, 클로디아는 잠시 눈물이 날 뻔했다.

그녀의 복잡한 생각을 어쩌면 이렇게나 다 본 듯이 알고 있을까. 클로디아는 시빌을 조심스럽게 올려다봤다.

“시빌.”

“네에.”

“고마워요, 정말로.”

그녀는 진심을 담아 시빌에게 인사했다. 꼭 필요할 때마다 다가와 자신의 다정을 나누어주는 이 마법사가 지금 이 순간 참으로 고마웠기 때문이다. 그녀의 말에 시빌이 아하하, 웃으며 자신의 입술을 가리켰다.

“고마우면 여기 뽀뽀.”

“…정말!”

시빌이 내뱉은 말에 다시 얼굴이 새빨개진 클로디아가 그의 가슴팍을 밀어냈으나, 청년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도리어 유쾌하게 웃으며 그녀의 이마에 제 이마를 부딪쳤다.

“헬렌의 음식을 먹은 건 클로디아뿐만은 아니라고요?”

제법 힘이 세지긴 했지만, 시빌을 밀어내기는 역부족이었다. 클로디아는 씩씩대며 시빌의 가슴을 몇 번 두들겼지만, 마법사는 웃기만 하다 속삭였다.

“해주는 게 싫으면, 내가 해도 돼요?”

“…뭐라고요?”

“저 아직 포기 안 했거든요.”

시빌의 장난스러운 눈이 이쪽을 향했다. 클로디아는 눈을 깜박거렸다. 이거….

“말했잖아요. 나는 클로디아를 좋아해요.”

“…시빌.”

클로디아는 불안한 듯 마법사에게 속삭였다. 그러나 청년은 자신의 팔 안에 클로디아를 가둔 채, 이마를 맞대고 즐거운 듯이 말했다.

“그때 클로디아도 저를 거절하지 않았잖아요. 물론 빨리 대답을 듣고 싶어서 이러는 건 아녜요.”

“….”

“하지만 클로디아가 어서 저를 의식해줬으면 좋겠다고요. 이렇게 옆에 막 앉아도 아무 생각 없이 절 남자로 의식 안 하는 걸 보면 얼마나 분한지 알아요?”

“그… 함께 여행 중인 동료를 일일이 의식할 순 없어요!”

클로디아가 몸을 꼼지락거렸으나, 그 동작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는 것은 그녀도 시빌도 알았다. 시빌은 슬쩍 술집 쪽을 보았다. 헬렌은 아직 창고에서 나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해가 뉘엿뉘엿 지며 푸르스름해진 하늘, 활기찬 항구의 상업 골목에는 인적이 드물지 않았으나, 술집 옆 통로에 앉아 있는 남녀를 눈여겨보는 사람들은 별로 없었다. 한번 떠나면 몇 달씩도 돌아오지 않는 선원들이 넘치는 아트릭스에는 길 위에서도 입 맞추는 연인들이 흔했다.

골목 저편에서는 누군가가 노래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마법사의 팔 안에는, 시선을 피하고 있는 붉은 얼굴의 공주님.

시빌은 상황을 가늠했다. 그리고 슬쩍 물었다.

“입 맞춰도 돼요?”

클로디아의 어깨가 움찔, 튀었다.

그녀는 잠시 갈등했으나, 이내 제 앞의 남자를 바라봤다. 두 사람의 눈동자가 마주쳤다. 미소 짓고 있는 시빌의 얼굴은 클로디아에게 아주 가까웠다. 입술 사이에는 종이 몇 장이 들어갈 정도의 공간 말고는 남지 않았다.

이런 곳에서 누군가와 입맞춤을 하리라고 생각해본 적 없다. 자신의 키스 상대는 멋진 왕자님일 줄만 알았다. 그리고…. 이렇게 망설여지리라고는 상상하지도 못했다. 누군가에게 입 맞추기를 결정하는 게, 이렇게나 고민스러운 일일 줄이야.

그렇지만 눈앞의 눈동자는 너무나 다정했고, 자신의 어깨를 감싼 손은 따뜻했다.

갈등하던 클로디아는 스르르 눈을 감았다. 기다란 속눈썹을 내려다보던 시빌의 미소가 더 진해졌다.

하지만 보통, 키스에 도달하기는 생각보다 참 어려운 법이다.

와장창.

뭐가 깨지는 소리가 바로 옆에서 요란하게 났다. 클로디아는 화들짝 놀라 눈을 뜨고 옆을 돌아봤다.

그곳에는 조그만 여자아이가 넘어져 있었다.

클로디아는 놀라 시빌을 올려다봤다가, 반사적으로 그를 벌컥 밀어버렸다. “억!” 당황한 것은 시빌도 마찬가지였는지, 그는 어이없이 뒤로 나동그라졌다. 클로디아는 자신이 더 놀라 “어머! 미안해요!” 하고 비명을 올렸다가, 옆을 내려다봤다.

“흐윽.”

기다란 천 쪼가리를 뒤집어쓴 여자애가 이를 악물고 눈물을 방울방울 흘리고 있었다. 클로디아는 시빌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그쪽으로 황급히 다가갔다.

“얘, 너 괜찮니?”

그러나 여자애는 이쪽을 보더니 흠칫하고 몸을 움츠렸다. 그리고는 자신이 뒤집어쓴 천 쪼가리로 급히 몸을 둘렀다. 예상외의 방어적인 반응에 클로디아는 조금 놀랐으나, 상냥하게 웃었다.

“넘어졌구나. 일어설 수 있겠니?”

“….”

하지만 반응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여자애는 뒤로 슬금슬금 물러났다. 그제야 클로디아는 여자애가 어디서 튀어나왔는지 알 수 있었다.

주류 판매점의 뒤쪽, 어둡고 아주 좁은 골목이었다. 아니, 골목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너무 작고 조그마한 길이라, 어른이 지나다니기는 어려웠다.

가게 주인은 그쪽에 잡동사니를 쌓아놓고 있었고, 여자애는 그곳을 헤쳐 나오려다가 실수로 철로 된 판을 떨어트린 것 같았다. 그 증거로 길에는 잡목 같은 것들이 잔뜩 흩어져 있었다.

“저기, 나 나쁜 사람 아냐. 다친 데는….”

클로디아는 난처하게 여자아이를 바라봤다. 여자애는 지금 보니 만신창이였다. 천 쪼가리를 두른 곳은 가려져 잘 보이지 않았으나, 천 아래로 보이는 다리는 어디에서 다쳤는지 긁히고 맞은 상처투성이였다. 신발도 신지 않은 맨발에는 흙이 잔뜩 묻어 있는데다가 발톱도 깨져 있었다.

“…많구나.”

“이런.”

그때 나동그라졌던 시빌이 이마를 찡그리며 이쪽으로 다가왔다. 이쪽 역시 흙투성이였다.

“클로디아, 그렇게 미는 게 어딨어요. 아프잖아요.”

“미, 미안해요.”

클로디아는 화끈거리는 얼굴로 시빌을 슬쩍 올려다봤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그렇고 그런 분위기였는데, 큰 소리에 저도 몰라 그를 밀어버린 것이다. 하지만 시빌은 화가 난 것 같지는 않았다. 오히려 웃고 있었다.

“정말이지~. 이거 기억해 둘 거예요. 어디 보자, 어라.”

“….”

분위기가 사뭇 달라진 것은 여자애 쪽이었다.

클로디아를 단순히 피하려는 정도로 그쳤던 여자애는, 시빌이 나타나자 극도로 경계하는 기색을 보였다. 크으으으응. 여자애가 사나운 소리를 냈다. 짐승과는 좀 다른 소리였다.

“그, 여자애가 다친 것 같아요, 시빌….”

“…너.”

시빌이 눈을 가늘게 떴다. 여자애는 시빌의 표정에 흠칫하며 뒤로 엉덩이를 빼고 도망치려 했다. 하지만 뒤쪽은 여자애가 빠져나오다 넘어져, 잔뜩 무너진 잡동사니뿐이었다.

여자애는 그쪽과 이쪽을 번갈아 바라보며 절망적인 표정이 됐다.

천 사이로 잔뜩 떡진 머리카락이 길게 빠져나왔다. 그림자 아래로 보이는 뺨 역시 오물이 묻어 지저분했으나 클로디아는 개의치 않았다.

“저기, 안 해칠게. 이리로 올래? 너 많이 다친 거 같은데 엄마는 어디 계시니?”

“클로디아.”

“잠시만요. 너 이름이 뭐니? 어머나, 세상에, 손 좀 봐….”

클로디아가 내민 손끝에 여자애는 몸을 바싹 움츠리며 천을 꼭 쥐었다. 그 손끝은 온통 피멍이 들어 있었다. 손톱은 다 부러져 있었고, 흘러나오다 굳은 피딱지도 뭉쳐 있었다.

클로디아는 그 손을 보고 너무 놀라 눈을 부릅떴다.

“왜 이래? 너 누가 이랬니?”

“잠깐만요, 클로디아. 애가 무서워하잖아요.”

“제가 아니라 시빌이 무서운 것 같은데, 으음.”

그러나 시빌은 쪼그려 앉은 클로디아의 어깨를 잡고 끌어당긴 후 자신의 뒤로 뺐다.

클로디아는 몸에 힘을 주었으나 시빌은 그런 그녀의 볼 옆에 가볍게 입 맞췄다. “아까 못 한 복수예요.” 귓가에 내려앉는 쪽, 소리에 클로디아가 너무 놀라 힘을 빼자마자 시빌은 능숙하게 그녀를 밀어내고 여자애 앞에 쪼그려 앉았다.

“괜찮아. 널 해치지 않는단다.”

여자애는 바짝 몸을 긴장시켰으나, 시빌은 아랑곳하지 않고 손을 내밀었다. 시빌의 조금 탄 손끝이 여자애에게 닿자, 여자애는 히익 소리를 냈다. 이윽고 시빌의 손가락이 여자애의 볼에 닿자, 아이는 잔뜩 입을 벌려 시빌의 손가락을 깨물려고 했다.

“위, 위험,”

클로디아가 저도 모르게 시빌에게 말했으나, 아이는 그 순간 멈추고 시빌을 올려다봤다. 그제야 머리카락과 천에 가려진 보라색 눈동자가 보였다. 그 눈동자는 홀린 듯이 시빌을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이내 흐려졌다.

시빌이 낮게 미소 지었다.

“옳지. 이리 올래?”

그 뒤에 일어난 일은 마치 마법 같았다.

여자애는 조금 머뭇거리다가 손을 뻗었다. 시빌도 마주 손을 벌렸고, 여자애는 이내 그에게 푹 안겼다. 그리고는 아앙, 하고 울어버렸다. 흐아아아앙. 여자아이는 대여섯 살 남짓한 덩치였고, 시빌은 그 자그마한 여자애를 손쉽게 안아 올렸다.

아이는 그대로 시빌의 어깨에 머리를 묻고 눈물을 흘렸다. 클로디아는 안타까운 듯 여자애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여자애가 뒤집어쓴 천은 엄청나게 낡아 있는 데다가 먼지도 꽤 타 있었다.

“이런…. 길을 잃어버린 애일까요?”

“글쎄요, 항구의 고아 같기도 한데요.”

“고아….”

“사람이 오가는 도시에는 고아들도 있기 마련이죠.”

시빌은 한숨을 쉬며 여자애를 도닥이며 큰길로 나갔다.

“뭐야?”

그때 마침 술병을 잔뜩 사 들고 나오던 헬렌이 그들과 마주쳤다.

“그 애는 누구야?”

“저도 모르겠어요. 갑자기 뒤에서 와장창 소리가 나서 쳐다보니….”

시빌은 아이를 달래기 바빠, 클로디아가 헬렌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물론 시빌과 입 맞출 뻔했다는 부분은 빼 버리고서다.

“그래? 이 주변 애인가? 행색을 보니 부모가 있는 애는 아닌 것 같은데….”

헬렌 또한 아트릭스에 와본 적 있어 아이가 고아일 거라는 추측을 쉽게 해냈다. 그 와중에도 아이는 계속 시빌에게 안겨 울고 있었다.

“어떻게 하죠?”

클로디아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아이를 바라봤다. 헬렌은 고개를 갸웃했다.

“어? 왜?”

“…왜라뇨, 고아라고 하니, 갈 곳이 없을 게 분명한데….”

“아아, 아냐. 아마 이 애는 같이 다니는 애들이 있을 거야.”

“같이 다니는… 아이들이요?”

“아, 고아들이란 대개 자기 무리가 있기 마련이지. 하다못해 도둑 길드에라도 몸을 의탁하고 있을 거야.”

헬렌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녀의 설명에 따르면 부모를 잃은 아이들은 혼자서 거리에서 살 수 없었다. 자연스레 자신과 같은 처지인 아이들끼리 모이게 되며, 그렇지 않다면 필연적으로 도둑 길드에라도 매이게 된다. 부모의 보호가 없는 아이들의 처지란 그런 것이다.

“주변에 아마 이 애를 아는 사람들이 있거나 할 거야. 그냥 뭐라도 사주고 보내자.”

“그런….”

그 아이를 데리고 갈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차가운 헬렌의 면모에 클로디아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헬렌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그러면 그 애를 자르지스까지 데리고 가게?”

“….”

의외의 말에 말문이 막혔다. 그랬다. 그녀는 며칠 후에는 자르지스로 들어간다.

“갈 곳 없는 아이를 며칠은 방에 재워주고 맛있는 걸 먹여줄 수 있겠지. 하지만 그다음에는 어떻게 하려고? 자르지스에 저 애를 데려갈 순 없어.”

헬렌의 말은 싸늘해 보이지만 맞는 말이었다. 이런 도시의 관청은 길거리를 떠도는 고아들에게는 관심이 없다. 그것보다 훨씬 바쁜 일들이 산적해 있기 때문이다. 보호소 같은 건 꿈꿀 수도 없거니와, 보호소가 있다 해도 거리의 아이들은 보호소에 오래 머무르지 않는다.

“클로디아, 네가 착하고 다정한 건 알지만, 때로는 쓸모없는 다정도 있어.”

“….”

“뭣보다 그만한 여자애를 우리가 어떻게 보호하겠어? 너 하나에도 데미안은 그렇게 신경을 곤두세우는데.”

아. 클로디아는 작게 입을 벌렸다. 그랬다. 그녀 또한 일행에게 보호받는 처지였다. 만약 클로디아가 이 여자애를 데리고 간다면, 하다못해 자르지스까지 가기 전만이라도 돌볼 수야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말하면 다른 일행에게는 두 배나 되는 짐이 불어나는 셈이었다.

헬렌은 클로디아의 어깨를 가볍게 두들기며 말했다.

“알아. 네 마음. 나도 한때는 모든 아이들이 불쌍해 보여서 가끔은 먹을 것을 나눠주었어. 하지만 지금 우리가 동정을 베푸는 건 사치야.”

“…네.”

“어디 보자. 얘, 네 친구 어디에 있니?”

헬렌이 그사이 슬슬 눈물을 그친 아이의 팔을 살살 건드렸다. 아이는 아직도 속눈썹에 눈물을 방울방울 매달고 있었으며, 헬렌의 말에는 입을 꾹 닫고 대답하지 않았다.

헬렌이 어깨를 으쓱했다.

“뭐, 이런 애들은 모르는 사람이랑 말을 잘 안 하긴 하지.”

“…일단 번화가로 가시죠. 이런 애들은 그런 곳에 모이기 마련이니까.”

시빌이 아이를 고쳐 안으며 말했다. 그러나 그의 이마는 약간 찡그려져 있었다. 아이가 풍기는 지독한 냄새 때문일까? 며칠을 씻지 못한 게 분명한 여자애에게는 시큼한 냄새가 났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그것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았다. 헬렌은 한숨을 쉬며 술병이 든 주머니를 고쳐 들었다. 클로디아가 얼른 헬렌의 손에서 술병 몇 개와 과일 주머니를 나눠 들었다.

어느새 주변은 어둑어둑해져 있었다. 해가 지자마자 순식간에 밤이 찾아온 것이다.

그러나 번화가는 밤에도 반짝반짝 빛났다. 발광 도마뱀을 개량한 커다란 도마뱀들이 집집마다 환하게 앞을 밝히고 있었다. 상점 앞에 커다란 유리집을 만들어 놓고, 그 안에 도마뱀들을 살게 한 것이다. 덕분에 상점가는 이 시간에도 꽤 많은 사람들이 돌아다녔다. 몇몇 노점에서는 도마뱀이 든 대나무통을 식탁 위에 두고 사람들이 길에서 식사를 할 수 있도록 해 놓기도 했다.

“이 애를 어디다 내려준다….”

“너 집이 어디니?”

헬렌이 여자애를 콕콕 찔렀다. 여자애는 아무 말 없이 헬렌의 손가락을 내려다보다가, 한쪽 손을 들어 그녀의 손가락을 탁 쳐냈다.

시빌이 킬킬 웃었다.

“헬렌이 싫은가 봐요.”

“젠장. 나도 너 싫어, 임마.”

그렇게 말하면서도 헬렌은 손가락에 침을 묻혀 여자애의 볼을 문질렀다. 여자애가 노골적으로 싫은 표정을 하며 몸을 뒤로 물렸으나, 헬렌의 우악스러운 손길을 당해낼 수는 없었다.

“으이그, 얼굴 좀 씻고 다니지. 계집애야. 인생이 힘들어도 청결은 중요한 법이란다. 청결하지 않으면 가장 먼저 건강이 상하는데….”

“노인네 같은 소리 좀 하지 말아요, 헬렌. 이 애가 그런 소리를 알아듣긴 하겠어요?”

시빌의 말에도 헬렌은 아랑곳하지 않고 반대쪽 볼을 문질렀다.

“이게 다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조언이에요. 응?”

양쪽 볼을 다 닦아낸 헬렌이 여자애가 뒤집어쓴 천을 벗겨내려 할 때였다. 여자애가 “익!” 하고 소리 지르며 자신이 쥔 천을 꾹 쥐고 버텼다. 헬렌은 두어 번 힘을 주었으나 여자애는 틈을 주지 않았다. 결국 헬렌은 혀를 내두르며 손을 거뒀다.

“야, 넌 애가 무슨 힘이 이렇게 세냐. 거리에서도 밥 굶진 않겠다. 응?”

하지만 아이는 헬렌에게 대답하지 않고 천을 쥔 채 그녀를 노려보기만 할 뿐이었다.

클로디아가 웃으며 뭐라 말하려고 입을 벌렸을 때였다.

“찾았다!”

“응?”

세 사람이 눈을 껌벅였다. 웬 남자가 시빌을 손가락질하고 있었다. 정확히는 시빌이 안은 아이를 향해서였다.

여자애가 움찔, 하고 시빌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그러나 금세 남자 다섯 명이 더 몰려들었다. 그들은 세 사람을 빠르게 둘러쌌다.

“어머나…. 무슨 일이세요?”

클로디아가 놀라 물었다.

“그 애, 어디서 찾았나?”

그중에 눈매가 유독 날카롭고 인상이 더러운 남자가 물어왔다.

“찾다뇨….”

클로디아는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기어들어 가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상황이 너무 험악했다. 밤의 길거리를 가던 사람들은 놀라 이쪽을 슬금슬금 피해 갔고, 남자들은 세 사람을 둘러싼 참이었다. 헬렌이 이마를 찡그리고 나섰다.

“뭘 좀 착각한 모양인데, 우린 이 애를 몰라.”

“모른다고?”

“그래. 이 애가 길에 다쳐서 나동그라져 있는 걸 보고 도와주려 했을 뿐이야.”

“그렇군.”

맨 처음 질문했던 남자가 픽 웃더니 손을 내밀었다.

“그 애는 내 조카야. 잃어버려서 한참 동안 찾고 있었어.”

“…찾고 있었다고요?”

클로디아가 물었다.

“이 애를요?”

“그래. 문제 있나?”

“문제야 있지요.”

시빌이 심드렁하게 답했다. 그는 아이를 고쳐 안으며 남자를 노려봤다.

“이 애는 아무래도 밖에서 생활한 지 한참 된 것 같은데, 조카를 언제 잃어버리신 겁니까?”

“…며칠 전에.”

“정확히 며칠 전에요?”

“이익!”

남자는 짜증을 냈다.

“그게 너희들과 무슨 상관이야? 그 애를 알지도 못하잖아? 이리 넘겨!”

그러나 시빌이 한 발 물러섰다. 그리고 헬렌도 시빌과 남자 사이를 가로막았다.

“그럴 순 없지. 당신이 명확하게 대답하지 않으면 이 애를 넘겨주지 않을 거야.”

“…일주일 전에 잃어버렸다!”

“일주일 전이라고요?”

“그래.”

남자가 코웃음 쳤다. 헬렌은 시빌 쪽을 돌아보며 아이에게 물었다.

“저 사람 말이 사실이니?”

그러나 여자아이는 불안하게 떨며 시빌의 품으로 파고들기만 할 뿐이었다. 남자는 다시 이어 말했다.

“그 애는 말을 하지 못해. 그러다 보니 찾기 어려워서 일주일이나 걸린 거야.”

“하지만 얘는 당신을 모르는 것 같은데?”

“익.”

남자가 다시 화를 내려 할 때였다. 클로디아가 손을 들어 주의를 집중시켰다.

“저어, 그러면 여쭤볼게요.”

“뭐?”

“이 애 이름은 뭔가요?”

클로디아의 말에 남자가 흠칫하다가 자신의 동료들을 노려봤다. 그리고는 내뱉듯이 말했다.

“알리샤.”

“알리샤라고요?”

“그래. 뭐 잘못됐나?”

“하지만 이 애는 아까 자기 이름이 노바라라던데요?”

“뭐? 그게 말을 할 줄 안다고?”

“야, 이 병신아!”

남자가 순간 놀라 되물었고, 동료들이 그에게 곧이어 짜증을 냈다. 뒤늦게서야 남자는 자신이 클로디아의 말에 넘어갔다는 것을 알아챘다.

쳇. 남자가 혀를 차며 품에서 칼을 꺼냈다.

“꺄아악!”

이쪽을 힐끔대던 사람들이 놀라 물러서거나, 도망쳤다. 헬렌이 한숨을 쉬었다.

“이럴 것 같긴 했지만….”

“됐고, 내놔!”

“…저어, 여쭤볼 게 있는데요.”

“뭐야?”

“이 애를 데려가서 따뜻한 밥을 먹이고 잠을 재우기 위해서 그러시는 건 아니죠?”

클로디아의 질문에 남자가 기가 찬다는 듯 답했다.

“뭐? 미쳤어?”

“아닌가 봐요, 시빌.”

“그래 보이죠?”

두 사람의 한심하게까지 느껴지는 대화에 남자들은 코웃음 치며 그들을 둘러싼 포위망을 좁혀왔다. 시빌은 눈알을 굴리다가 그들에게 말을 걸었다.

“저어, 나으리들.”

“뭐?”

“여기는 너무 사람이 많은데, 좀 자리를 피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우리가 왜?”

“그래요? 그러면 어쩔 수 없고.”

시빌은 빙그레 웃으며 아이를 안지 않은 쪽의 손가락을 튕겼다. 딱, 하는 순간 쾅! 하고 지면이 흔들렸다.

“으악!”

쾅, 쾅, 쾅, 쾅.

지면은 정확히 다섯 번 폭발했다. 다섯 남자의 발밑에서였다. 남자들은 비명을 지르며 나뒹굴었다. 보도블록이 깨져 사방의 건물로 튀었다.

시빌이 아이를 안은 채 바닥에 쓰러진 남자들을 내려다봤다.

“지금은 다른 곳으로 좀 가고 싶은 마음이 드셨어요?”

대답을 들을 필요도 없었다. 남자들은 다리에서 피를 줄줄 흘리며 눈물 콧물을 쏟았다.



 

***



 

“아이고, 나으리들. 왜 이러십니까….”

“궁금해서요.”

헬렌과 시빌은 사정 봐 주지 않고 남자들을 근처의 으슥한 골목에 던져놨다. 그동안 아이는 클로디아가 안은 채였다. 내내 시빌에게 꼭 붙어 있던 아이는, 처음에는 클로디아에게 가지 않으려 했지만, 시빌이 나직하게 뭐라 뭐라 타이르자 신기하게도 클로디아에게로 순순히 안겼다. 아이는 더럽고 냄새가 났지만, 클로디아는 그 아이의 조그마한 손이 피투성이가 되어 있는 것이 너무 마음 아픈 나머지 그 애를 꾹 안았다.

“이 애는 조카가 아니지요?”

“무슨 당연한 소리를 하고 있어, 클로디아. 고아를 팔아먹으려는 도둑놈들이야, 이거.”

헬렌이 놈들의 고간을 걷어찼다. 억, 하고 한 놈이 나동그라졌다. 시빌이 난처하게 웃었다.

“살살 하십쇼, 살살.”

클로디아도 피식 웃어버렸다.

“이 동네에 아직도 고아를 잡아다 배에 팔아넘기는 놈들이 있을 줄은 몰랐는데.”

“배에 팔아넘겨요?”

“음…. 이런 이야기를 너한테 해도 되는지 모르겠네.”

헬렌은 조금 망설였지만, 결국 입을 열었다. 항구에는 고급스러운 배만 드나드는 게 아니다. 몇 달이고 바다에서 고기를 잡는 배들도 있고, 몇 십 년 전까지만 해도 그런 배들에 고아 여자애들을 팔아넘기는 일들이 있었다. 성인 여자는 배에 타면 재수가 없다고 하여, 꼭 어린애들로만 태웠다. 이야기를 들은 클로디아가 입을 막았다. 그 애들이 어떤 일을 당했을지는 불 보듯 뻔했다.

하지만 클로디아의 아버지가 하늘섬의 국왕으로 즉위한 후에는 이야기가 달라졌다.

그는 국왕으로 즉위하고 10여 년 동안 네 개의 대륙을 돌아다니며 직접 사람들을 돌봤는데, 그때 아트릭스에서 자행되는 인신매매를 목격하고 그것을 뿌리 뽑았다. 그 후 몇 십 년 동안, 그런 일은 자취를 감췄다.

“마왕의 영향이 이런 곳에도 미칠 줄은 몰랐는데. 하늘섬이 약해진 틈을 타서….”

“아닙니다!”

헬렌의 말에 다른 남자가 큰 소리로 답했다.

“그런 게 아닙니다! 그건 사람이 아니라구요!”

“…뭐라고?”

“그건 자르지스의 괴물이란 말입니다!”

클로디아가 이마를 찡그렸다.

자르지스, 라는 말에 자신에게 안긴 아이가 파르륵 하고 갑작스레 몸을 떨었기 때문이다. 아까 시빌이 부린 마법의 영향으로 다리가 부러진 남자는 엉엉 울며 말했다.

“그것이 두른 걸 걷어보십쇼! 사람이 아닙니다!”

클로디아는 그 남자와 아이를 번갈아 바라봤다. 그녀가 한참이나 망설이자, 헬렌이 다가와 조심스럽게 아이가 두른 천을 걷어냈다. 저항이 엄청나서 헬렌은 꽤 애를 먹었지만, 결국 아이는 때 묻고 더러운 천을 놓치고 말았다. 아이의 얼굴이 어둑어둑한 하늘 아래 드러났다.

“…!”

여자아이의 지저분한 이마에는 자그마한 뿔이 나 있었다. 산양의 뿔과 같이 소용돌이치는 모양이었다. 크기는 클로디아의 손가락 한 마디만 했다. 천에 감싸여 있어서 잘 몰랐으나, 아이의 귀 뒤에는 털이 나 있었다. 머리카락 색과 비슷한 누런 색이었다.

경악한 세 사람을 본 남자가 울며 사정했다.

“그건 자르지스에서 흘러온 괴물들입니다! 저희는 인신매매를 하지 않았습니다!”

“….”

남자는 더듬거리면서 최근 사람과 비슷한 마물들이 가끔 해변에 쓸려온다고 설명했다.

처음에 그것을 발견한 것은 이 지역의 도둑들이었다. 해변에 누운 시체를 보고 사람인 줄 알고 다가갔다가, 신체가 변형된 것을 보고 기절할 뻔했다.

그러나 비슷한 일들이 점점 자꾸 일어났다. 개중에는 살아 있는 것들도 있었으며, 몇몇은 죽었지만 몇몇은 살아났다. 그중에서도 사람의 말을 할 수 있는 것들이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자르지스에서 떠밀려왔으며, 자신을 돌려보내 달라고 애원했다.

“…그래서?”

“그, 그야….”

시빌의 되물음에 남자가 눈알을 데룩데룩 굴렸다. 헬렌이 무심하게 덧붙였다.

“가져다 팔았군,”

“…사, 사람도 아니지 않습니까.”

세상에는 이상한 생물들을 수집하는 이들이 있다. 동물만 해도 사냥해서 박제하는 이들이 있으니, 좀 더 이상한 생물을 수집한다 한들 딱히 대단히 튈 것은 없었다. 땅요정이나 고블린, 페어리 같은 것들은 양반이다.

클로디아가 만났던 유니콘만 해도 천문학적인 액수를 내걸고 찾는 이들이 많았다. 그러니 자르지스의 마물이라고 해서 수집하지 않을 리 없었다.

게다가 그 생김새가 인간과 비슷하니, 이상한 취향을 가진 자들이 꼬였다. 시체는 박제로 만들어 팔았고, 살아 있는 것들은 철창에 가두어 팔았다. 마물 중에서도 여성체에 가까운 것들, 그리고 모습이 해괴할수록 훨씬 높은 값을 받았다. 뿔 두 개 달린 것보다 뿔 세 개 달린 것이 더 비쌌고, 인간의 발이 아니라 말굽이 달린 것들은 큰 환영을 받았다.

물론 수집가들에게.

“그래서 이 애도 팔려고 했던 건가?”

“….”

남자는 눈치를 보다가 고개를 떨궜다. 그 모습을 보던 시빌은 천천히 일어서 싸늘한 얼굴로 남자의 턱을 걷어찼다.

“컥!”

남자가 숨 막혀 하는 소리를 냈다. 그러나 이번만은 클로디아도 말릴 기분이 들지 않았다. 자신의 품에 안겨 있는 여자아이는 뿔과 털을 빼면 인간 여자아이와 다를 바 없었던 것이다. 아이는 클로디아의 팔을 꼭 쥐고, 남자들이 시빌에게 얻어맞는 모습을 보다가 얼굴을 클로디아의 품에 묻었다.

얼마나 공포에 질려 있었는지 알만했다.

“클로디아, 헬렌. 먼저 돌아가세요.”

“시빌….”

“전 딱 요만한 여동생이 있어요. 그리고 그 애는 어릴 적에 인신매매범들에게 팔려 갔죠.”

시빌은 두 사람을 쳐다보지도 않고 말했다. 그가 이렇게까지 화가 난 것은 처음 보는 것이라, 클로디아도 차마 뭐라고 말하지 못했다. 헬렌은 클로디아의 어깨를 붙잡고 돌려세운 후, 술병들을 챙겨 들었다.

“너무 늦지 말고 돌아와.”

“네.”

시빌의 대답은 짧았다. 클로디아는 어쩐지 마음이 아파왔으나, 이렇게 된 이상 그를 말릴 수도 없었다.

두 사람이 골목을 나서자마자 뒤에서 남자의 비명이 들렸다. 엄청난 소리였다. 클로디아는 아이를 꼭 안은 채 도망치듯 여관으로 향했다.

자신이 보지 말아야 할 시빌의 어떤 부분을 본 것만 같아 가슴이 아팠다.



 

***



 

“일어나.”

클로디아와 헬렌이 떠난 골목은 거의 반쯤 부서져 있었다. 피가 낭자했다.

그러나 주변 건물에서는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남자들은 시빌에게 얻어맞는 동안 돼지처럼 고래고래 비명을 질렀으나, 어떤 누구도 도와주러 오지 않았다.

아트릭스는 싸움이 잦은 도시다. 남의 싸움에 휘말렸다가는 본전도 못 건진다는 말은 아트릭스 시민들의 좌우명이었다.

시빌은 제 손 안에서 타오르는 불꽃을 들고, 무릎이 박살 나 엉덩이로 기는 남자를 내려다봤다.

남자는 엉엉 울다 못해 다 쉰 목소리로 애원하며 도망치려 하고 있었으나, 소용없었다. 제 동료들은 팔이 날아가거나 아니면 머리가 으스러졌다. 그 참혹한 광경을 보고 한 놈은 실성해서 학학학, 웃다가 혀를 깨물었다.

아무리 싸움이 흔한 도시라 해도, 이 정도로 일방적인 살육의 현장은 처음 보았을 것이다.

시빌은 감정이라고는 하나도 담기지 않은 얼굴로 도망치는 남자의 머리를 다시 한 번 걷어찼다. 퍽, 하고 뭔가 깨지는 소리가 났다. 남자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쓰러졌다.

“그래놓고도 너희들이 인간이란 건가.”

시빌은 쓰러진 남자 앞에 쭈그려 앉아 그의 목을 받친 후, 목구멍에 불꽃을 쑤셔 넣었다. 어어어어억. 남자가 눈을 까뒤집었으나 시빌은 성실하게도 남자의 목 안을 헤집었다.

“괴물이라고?”

남자는 대답하지 못했다. 목이 다 탔으니 당연하다. 하지만 시빌은 계속해서 물었다.

“괴물이어서, 팔아넘기고 박제했나? 그 불쌍한 사람들을?”

조금 후, 시빌에게 붙들린 남자는 끝내 숨을 다한 듯 축 늘어졌다. 시빌은 어두운 눈으로 골목을 돌아봤다.

피바다였다.

하지만 자르지스의 마물들은 이것보다 훨씬 많은 피를 흘렸을 것이다. 붉은 머리의 마법사는 이를 악물었다. 인간이란 것들은 도무지 정이 들지 않았다.

여자아이가 제게 파고들며 속삭였던 말이 아직도 가슴에 깊게 남았다.

왕을 찾아야 해요.

왕이 없으면 저희는 저 불타는 섬에서 다 죽고 말 거예요.

우리의 왕을 찾아주세요.

시빌은 얼굴을 두 손에 묻었다.

대체 괴물은 누구인가.

피 웅덩이 속에서, 마법사는 한참 동안이나 가만히 울었다.



 

***



 

아이를 안고 돌아온 클로디아와 헬렌을 보고 두 남자는 당황했다. 그렇게 클로디아를 보내 놓고도 걱정돼 여관 앞에서 서성이고 있던 데미안이 특히 그랬다. 천으로 아이의 얼굴을 둘둘 감다시피 해서 감싸 안고 온 클로디아는 데미안을 보고 울 것 같은 표정이 됐다.

스완 경은 그 아이가 자르지스의 마족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칼을 빼 들었다.

그러나 데미안이 그를 막았다.

“안 됩니다.”

“신을 거스르는 존재입니다.”

“신의 뜻에 따르기 전에 제 뜻을 따르십시오. 분명 몇 시간 전에 일행의 통솔권자는 저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두 남자의 시선이 허공에서 사납게 부딪쳤다. 헬렌이 한숨을 쉬었다.

“둘 다 그만해.”

“하지만….”

헬렌이 눈에 힘을 주고 스완 경을 쳐다봤다. 스완 경이 움찔했다.

“스완 경. 나는 종교가 없는 사람이지만, 교국은 정말로 대단하다고 생각해. 신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그 긍휼함을 나눠주니까.”

“….”

“그 긍휼함은 자르지스에는 해당 사항이 없는 거야?”

“마족은 신을 거슬렀기에 흉측한 몰골이 된 종족입니다. 타락한 자들을 구원할 길은 죽음뿐입니다.”

“신한테 물어봤어?”

헬렌의 말에 스완 경이 순간 얼빠진 표정이 됐다.

“예?”

“신한테 물어봤냐고.”

헬렌이 일어서서 데미안의 가슴팍을 슬쩍 밀고 그 자리에 자신이 대신 섰다. 그녀의 짙은 눈썹은 힘을 주니 한층 더 짙어 보였다. 스완 경은 헬렌의 강렬한 시선에 주춤했다.

“나는 마족들을 본 적 없어서 몰라. 하지만 걔들이 잘못해서 이마에 뿔이 났다면, 그래 그렇다 치자. 근데 얘 조그만 건 보여?”

그 자리에 있던 모두의 눈이 아이에게로 쏠렸다. 아이는 정말 아무리 많이 쳐 줘봐야 일곱 살 정도에 불과할 것이었다. 헬렌이 말을 이었다.

“얘는 내 인생의 사 분의 일도 안 살았어. 얘가 신한테 무슨 잘못을 했는진 모르겠지만, 그렇게까지 천인공노할 죄를 저지를 시간이 있어 보이지는 않는데.”

“원죄라는 것이 있습니다.”

“하지만 죄를 지은 마족들을 신은 왜 살려뒀을까? 생각해본 적 없어?”

헬렌은 한마디도 지지 않았다. 저렇게 말 잘하는 사람이었나, 싶을 정도였다.

스완 경이 이마를 찡그렸다.

“신의 뜻을 감히 종이 짐작할 수 없습니다.”

“난 짐작할 거야. 종 아니거든.”

“….”

“스완 경. 인간들도 죄를 지어. 마족 아이가 신기하다고 해서 이 애를 납치해서 팔아버리려던 놈들과 이 아이 중에 누가 더 많은 죄를 지었을까? 뻔하잖아. 제발 그냥 놔둬.”

스완 경 또한 아이가 겪었을 일들을 클로디아에게 들은 차였다. 그는 잠시 일행을 둘러보다가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는 천천히 검을 검집에 집어넣었다.

“알겠습니다. 이번만은 일행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고마워.”

헬렌이 빙긋 웃으며 스완 경의 어깨를 두드렸다. 스완 경은 여전히 얼굴에 불만이 가득해 보였지만, 더 이상 말을 내뱉지는 않았다.



 

***



 

시빌이 돌아온 것은 밤에 가까운 때였다. 헬렌이 늦은 저녁을 권했으나 시빌은 지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깨끗하게 씻은 아이가 클로디아의 방에서 나왔을 때는, 미소를 지으며 아이를 안아 올렸다.

“아이구, 예뻐라. 씻으니까 엄청 예쁘네! 오빠한테 시집올까?”

아이는 아까보다는 확연히 나아진 얼굴이었다. 따뜻한 물속에 들어가지 않으려고 해서 클로디아는 결국 아이를 데리고 본인이 같이 들어가야 했다.

클로디아가 옷을 벗고 씻는 모습을 보여주자, 아이는 조심스럽게 물에 손을 담갔다.

그렇게 아이를 깨끗이 씻기는 데에만 몇 시간이 걸렸다. 자신이 스스로 씻는 것도 아직 서툰 클로디아가 남까지 씻기려니 당연한 결과였다. 결국 헬렌까지 합류해야 했고, 그 결과로 아이는 뽀독뽀독 깨끗하게도 변했다. 아직 물기가 남아 있는 누런 머리카락에서는 좋은 냄새가 났다.

“어이구, 좋아. 밥 먹었어요? 많이 먹었어요? 배 빵빵한 거 봐! 귀여워 죽겠네!”

아이는 시빌이 배를 간지럽히자, 이곳에 와서 처음으로 까르륵, 웃었다. 클로디아가 턱을 괸 채 그런 시빌을 보며 놀랍다는 얼굴이 됐다.

“어째 꽤 의외의 면모를 보게 되는 것 같은데요. 이렇게 가정적인 사람이었어요?”

“뭐, 수전노들이 집에서는 가정적으로 구는 경우가 가끔 있지.”

“뭐야, 두 사람 다 너무합니다. 제가 이래 봬도 여동생 둘을 업어 키웠거든요?!”

시빌이 웃으며 아이의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아이는 시빌의 품에 안겨 보라색 눈을 반짝이더니 앙앙, 하고 뭐라고 중얼거렸다. 시빌이 오, 그렇구나. 하고 눈을 동그랗게 뜨며 비슷한 소리를 냈다. 끼기기긱. 기긱.

뭐 하는 거야. 클로디아가 흰눈을 뜨며 물었다.

“…알아들어요?”

반쯤 비아냥거린 것이었으나, 시빌은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알아듣는다고요?!”

클로디아를 비롯한 모두가 눈을 부릅떴다.

시빌이 오기 전까지, 네 사람은 아이의 거취에 대해 고민하던 참이었다.

자르지스의 마족이니 자르지스로 데려가야 한다, 혹은 아트릭스의 관청에 맡겨야 한다. 여러 가지 의견이 나왔으나 괜찮은 건 하나도 없었다.

자르지스로 데려가는 것은 첫째, 아이의 부모가 누군지 몰랐다. 자르지스에는 수많은 마족이 있다고 했다. 여태까지는 한 수백 두 정도 된다고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을 가능성도 높았다. 거기까지 가서 아이를 데리고 부모를 찾아줄 수는 없었다.

아트릭스의 관청에 맡기는 것은 더 말도 안 됐다. 아트릭스 관리들은 항상 엄청난 업무에 시달렸다. 그런데 이 아이가 마족이니 좀 돌봐주세요? 아무리 하늘섬의 공주라도 부탁할 것이 있고, 부탁하면 안 되는 것이 있다.

마왕을 토벌하러 가는 공주가 마족을 보호해달라는 것도 우스운데, 그게 전혀 연고 없는 아트릭스의 관청이라니. 바로 기각됐다.

답답했던 클로디아가 아이의 손을 잡고 “너 말할 줄 아니? 사람 말 할 줄 아는 마족들도 있다던데, 너도 말 좀 해보면 안 되니?” 하고 중얼거리기까지 한참이었다.

아이는 몇 마디를 했는데, 그건 말이라기보다는 거의 원숭이 우는 소리에 가까웠다. 끼기긱, 끽끽, 혹은 아앙, 아왕왕왕.

그런데 그 말을 알아듣는다니!

스완 경이 가장 먼저 시빌을 의심스러운 눈으로 쳐다봤다.

“마법사들은 원래 마족들하고 대화할 수 있습니까?”

“아하하, 아뇨. 이건 저만 되는 겁니다. 마족들은 마력을 토대로 말을 하는데, 이곳과 자르지스의 마력 구조가 달라서 생기는 문젭니다. 저는 자르지스의 마력 구조를 알기 때문에…. 이렇게.”

시빌이 딱, 하고 손가락을 튕겼다. 순간 뭔가 공기가 바뀌었다. 아까까지는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갑작스레 무거운 무형의 뭔가가 어깨를 짓누르는 기분이 들었다.

클로디아가 윽, 하고 가장 먼저 책상에 엎어졌다. 스완 경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자신의 목덜미 부근을 손으로 휘저었다.

“무, 무거워요….”

“이게 자르지스의 마력장입니다. 제가 연구한 끝에 최근 대륙에서도 만들어낼 수 있게 됐죠. 자….”

시빌이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모두에게 인사해보겠니?”

네 사람의 시선이 일제히 아이에게 꽂혔다. 아이는 깜짝 놀란 눈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아. 아아. 아…?”

“그래. 말해보렴.”

“…천벌을 받을 인간 놈들…?”

아이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에 모두 입을 딱 벌렸다. 그리고 시빌을 향해 눈을 가늘게 떴다.

야. 인사해보라며. 이게 마족 인사야?

물론 반응이 전혀 다른 축도 있었다.

[푸하하하하!]

디자이어였다.

[얘들아, 쟤 마족 맞는 거 같아!]

“…맞다고요?”

데미안이 의심스러운 눈으로 디자이어를 내려다봤다. 디자이어는 이 상황이 재미있는지 재잘거렸다.

[나 예전에 미겔 따라서 용 죽이러 갔을 때 저런 애들 봤었거든! 외형은 좀 달랐지만…. 입만 열면 남들 욕을 하는 애들이었어!]

디자이어의 말에 의하면 미겔이 자르지스에 가서 만난 섬의 주민들은 모두 부정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고 했다. 그야 용의 화구 옆에서 언제 죽을지 모르는 목숨을 부지하고 있으니 무리도 아니었으리라.

“하지만 용의 화구에서 용을 쫓아냈다면서?”

[용이야 쫓아냈지만, 날씨는 여전히 덥잖아. 욕 나오게. …잠깐, 클로디아,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내가 얘기해준 적 없는데? 설마….]

“아, 그게….”

[수업시간에 배웠던 걸 이제야 기억해낸 거야?!]

디자이어의 말에 클로디아가 금시초문이라는 듯 눈을 부릅떴다.

“나 수업시간에 그런 거 배웠어?!”

[뭐야. 아닌가보네.]

“대답해!”

결국 데미안이 클로디아에게 손을 내젓고 나서야 둘의 대화가 일단락됐다.

“로드. 그런 얘기는 나중에 하시지요.”

클로디아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지만, 일단은 입을 다물었다. 시빌이 빙그레 웃으며 아이의 어깨를 살살 흔들었다.

“자아, 더 말해보련? 아까 내게 말해줬던 것들을 얘기해줘.”

“…아까 말해줬던 거요?”

“그래. 네가 자르지스에서 왜 나왔는지 말이야.”

나왔다고…?

모두 놀란 얼굴로 아이와 시빌을 쳐다봤다. 아이는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나는 왕을 찾으러 왔어.”

“왕… 마왕?”

“네.”

당혹스러운 감정이 다섯 사람을 휘감았다. 아니, 네 사람. 빙그레 웃고 있는 시빌을 빼고.

“마왕이라니…. 그는 자르지스에 있는 것 아니었어?”

아이는 잠시 시빌을 올려다봤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마왕님은….”

“자, 여기까지.”

시빌이 딱, 하고 손가락을 튕겼다. 순식간에 모두를 짓누르고 있던 마력장이 사라졌다.

클로디아는 어깨가 가벼워지는 것을 느끼고 몸을 세웠다. 살 것 같았다. 하지만 아이의 말소리도 또다시 그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로 돌아갔다.

앙앙아암. 기기긱. 소리를 내던 아이가 당황하며 입을 닫았다. 이전과 같이 말하고 있었으나, 네 사람이 더 이상 자신의 말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채서였다.

“시빌?”

“저도 힘듭니다. 공간의 마력 구조를 완전히 바꾸는 일이라 길게 하기 힘들어요.”

“하지만….”

“오늘자 마력은 이제 끝. 저는 오늘 마법 못 씁니다. 아이고야.”

시빌이 아이를 토닥이며 죽는시늉을 했다. 스완 경이 그를 노려봤으나 마력이 다 떨어졌다는 데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결국 시빌이 아이의 말을 통역하는 식으로 대화가 진행됐다. 응, 그래. 그랬구나! 용감하네! 시빌은 웃으며 아이를 토닥였다. 마침내 이야기가 끝난 시빌이 일행에게 입을 열었다.

“이 애는 마왕을 찾아서 자르지스를 나왔다고 합니다. 최근 아트릭스 근방의 해변에서 발견된 마족들도 모두 마왕을 찾아 대륙으로 나온 자들이라고 하네요.”

“그런…. 마왕은 자르지스에 있는 것 아니었어요?”

“정확히는 좀 다릅니다. 마왕은 대륙에서 아무르와 쥬버린 왕자의 심장을 들고 자르지스로 돌아갔지만, 상처가 컸다고 해요.”

[내 덕분이지!]

디자이어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으스댔다. 시빌은 디자이어를 향해 웃으며 말을 이었다.

“예. 디자이어의 반격이 생각보다 큰 영향을 미쳤는지, 자르지스에서 자취를 감췄다는군요.”

침묵이 일행을 휘감았다.

그렇다면 마왕은 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는 마족들도 모른다고 합니다. 다만, 자르지스의 불을 다스릴 수 있는 것은 마왕뿐인지라 그가 오래 자리를 비우지는 않을 거라고 하네요. 뭣보다….”

시빌이 고개를 갸웃했다. 여행하는 사이 조금 길어진 붉은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아무르와 쥬버린 왕자의 심장을 용의 화구 안에 넣어두고 사라졌다고 합니다. 어차피 우리는 자르지스로 가야 해요.”



 

***



 

마왕은 회복을 위해 자취를 감췄다. 그리고 아무르와 쥬버린 왕자의 심장은 용의 화구 속에 있다. 마족들이 마왕을 찾아 나온 이유는, 자르지스의 불이 거세져서 마족들이 살기 힘들어져서라고 했다. 마족들의 마을이 불탔고, 마왕의 측근들은 모두 마왕을 찾기 위해 자르지스를 버리고 죽음의 바다를 건너기를 감행했다.

하지만 죽음의 바다를 건너기 어려운 것은 마족들도 마찬가지였다.

본래 용의 화구에 익숙해져 있는 신체이기에 죽음의 바다의 독도 견뎌낼 수 있었으나, 전부는 아니었다. 몇몇은 죽었고, 몇몇은 죽지 않았다. 아이는 운 좋게 바다를 건넜으나 건너자마자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인간들에게 붙잡혀 팔려갈 뻔했다가, 탈출해 클로디아 일행을 만난 것이다.

자초지종을 들은 모두가 침묵했다. 가장 참담한 표정을 하고 있는 것은 스완 경이었다.

“인간들이 마족을 팔다니….”

“그것도 꽤 많이 팔려간 것으로 보입니다. 시체도 박제해서 남김없이 팔아치웠다니까요.”

시빌은 어느새 잠든 아이를 업은 채로 방 안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아이는 이마의 뿔과 귀 뒤의 털만 아니라면 마치 인간 아이와 다를 것이 없는 모습이었다. 평화롭게 잠든 얼굴만 봐도 그랬다.

“대체 어디까지 악해지려는 것인가….”

“글쎄요. 저야 모르죠.”

스완 경의 탄식에 시빌은 놀리듯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스완 경이 발끈했다.

“마법사, 당신은 대체….”

“저는 더 추한 것도 많이 봤거든요.”

시빌의 말에 스완 경이 입을 닫았다.

“마법을 연구하다 보면 재미있는 것을 많이 보게 됩니다. 인간은 생각보다 더 이상해요. 예를 들면 자신에게 없는 힘을 갈구하느라 돌아버린 사람을 보셨어요?”

“….”

“천성적으로 마력을 다룰 수 없으면 마법사가 될 수 없는데, 어디서 제물을 바치면 마법사가 될 수 있다는 말도 안 되는 미신을 주워듣고 백 명의 갓난아이 배를 가른 사람을 보면 마족이 따로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클로디아가 입을 막았다. 시빌은 빙그레 웃으며 아래로 자꾸만 처지는 아이를 들쳐 업었다.

“그런데 머리에 뿔 좀 난 게 뭐 문제겠어요.”

모두가 조용해졌다.

한참의 침묵 끝에 입을 연 것은 데미안이었다.

“어쨌든 우리가 자르지스로 가야 하는 건 이전과 같군요.”

마왕 토벌의 궁극적인 목적은 아무르와 쥬버린 왕자의 심장을 되찾는 것이다. 마왕이 부재중이라면, 그들은 최대한 빠르게 자르지스로 들어가서 몰래 목적한 것을 되찾아오는 것도 고려해봄 직하다.

데미안의 말에 시빌도 고개를 끄덕였다.

“뭐, 용의 화구 안에 들어가야 하는 게 좀 의외이긴 하지만요.”

“거기 많이 위험해요?”

“많이 위험하냐고요?”

시빌이 싱긋 웃었다.

“들어가면 순식간에 재가 될걸요.”

“….”

웃으며 한 말치고는 엄청난 내용이었다. 다들 다시 침묵했다. 그때 클로디아가 생각난 듯 디자이어를 꽁꽁 두들겼다.

“디자이어, 디자이어. 일어나봐.”

[뭐, 미겔이 어떻게 했는지 물어보려고 그래?]

내내 이야기를 듣고 있던 디자이어가 심드렁하게 답했다. 클로디아가 다급하게 되물었다.

“방법을 알고 있어? 아니, 기억해?”

[그럼. 근데 너희들은 못 할걸.]

“뭔데?”

[스톤 드래곤을 죽인 다음에 그 껍데기를 뒤집어쓰고 들어갔어.]

“….”

이번에야말로 무게감이 엄청난 침묵이 맴돌았다. 용. 용의 껍데기라….

“…그 껍데기는 어떻게 했습니까?”

[혹시 포르투 왕성의 보물창고에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라면 관둬, 데미안. 그거 미겔이 포르투 왕성으로 들고 가려다가 중간에 무겁다고 팔아먹었어.]

팔아먹….

클로디아의 얼굴이 한심함으로 가득 찼다.

“초대 국왕님은 대체 어떤 분이셨던 거야?”

[어땠긴. 멍청이였지.]

디자이어가 한숨처럼 말했다.

[애초에 대륙이 암흑으로 끌려간다는 말에 세상을 구하겠다고 나서는 남자가 뭐 얼마나 대단한 놈이겠어?]

“대단한 사람… 아냐?”

[잘 들어, 클로디아. 내가 네게 말하긴 좀 그렇지만, 세상을 구하는 사람은 딱 두 가지 중 하나야. 바보 아니면 멍청이.]

“…야!”

세상을 구하겠다고 나선 클로디아가, 세상을 구하라고 꼬신 디자이어에게 소리를 질렀다.

새빨개진 얼굴로 씩씩대는 클로디아를 보고 시빌이 킥킥 웃었다. 하지만 스완 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포르투의 세 번째 국왕 팔라두가 한 말이죠. ‘바보나 멍청이가 아니라면 세상을 구할 수 없다. 세상 앞에서 자신을 내려놓을 수 있는 자들은 그들뿐이니까.’ 개인의 이익을 바라지 않는 자들은 극히 드물며, 스스로를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는 자들만이 남들을 구할 수 있다는 격언이죠. 하지만 그런 사람들을 범인들은 보통 바보나 멍청이라고 부릅니다.”

“아앗…. 그래요?”

클로디아의 얼굴이 이번에는 다른 의미로 빨개졌다.

스완 경이 희미하게 웃었다.

“디자이어 님은 클로디아 님을 비웃은 건 아니실 겁니다.”

[맞는데?]

디자이어가 깐죽댔다.

[팔라두 녀석이 내가 한 말을 표절했구만?]

“표절이라면….”

[나는 팔라두 녀석이 왕관을 쓸 때까지는 의식이 있었거든. 내가 아는 포르투 왕들 중에서도 유난히 재미없는 놈이었어….]

스완 경이 감탄한 표정이 됐다.

“팔라두 님은 그 긍휼함으로 성기사들이 본받고 싶은 위인으로 꼽는 사람 중 하나입니다. 디자이어 님께서 팔라두 님을 가르치신 것이군요.”

[그럴 리가. 역사는 포장되기 마련이라지만 팔라두 그 멍청이는….]

디자이어는 급작스레 잘난 척을 시작했지만, 클로디아가 디자이어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만! 수다는 나중에 떨어. 지금 할 이야기가 많다고,”

[쳇.]

“지금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건…. 아무래도 저 아이로군요.”

일행들의 시선이 시빌의 등에 업혀 자고 있는 아이에게로 향했다. 아까 하던 이야기의 연장선이었다.

마족의 아이.

하지만 자르지스로 데리고 갈 수는 없다. 시빌과 말이 통하긴 하지만, 아이를 자르지스에 무작정 풀어놓을 수도 없었다. 아이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자르지스는 지금 불 때문에 마족들도 도망쳐 나오는 곳이라지 않은가.

“그렇다고 이곳에 두고 갈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제가 제의하고 싶은 것이 하나 있습니다.”

데미안이 입을 열었다. 의외였다. 그에게 해결책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는데.

클로디아가 귀를 쫑긋거리며 그를 쳐다보자, 남자는 한숨을 쉬다가 스완 경을 바라봤다.

“스완 경이 협조해주셔야 합니다.”

“뭔진 모르지만 일단 들어보도록 하죠. 뭡니까?”

“…이 아이를 스완 경께서 보호해 포르투 왕성까지 데려가 주시기 바랍니다.”

스완 경이 눈에 힘을 주었다. 데미안은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잠깐만요.” 놀란 클로디아도 입을 열었으나 데미안이 더 빨랐다.

“이 아이를 보호할 곳은 포르투뿐입니다. 그러나 포르투로 데리고 가기엔 저희도 시간이 없죠. 누군가 모르는 사람을 고용해 맡길 수도 없습니다. 아무리 많은 돈을 준다 해도 마족을 맡아줄 이들이 누가 있겠습니까.”

“지금 저를 놀리시는 겁니까?”

“아닙니다. 제 말을 마저 들어주시죠.”

데미안은 차분하게 답했다.

“저는 이 아이가 대륙의 구원이 가까웠음을 상징하는 의미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가 하는 말은 복잡했으나 곧 그 의미를 모두가 깨달았다.

클로디아가 마왕 토벌을 위해 떠난 지 한 달이 넘어 두 달에 가까워져 가고 있다. 그들은 마을이나 도시에 들를 때마다 한두 번씩 포르투의 소식을 들었으나, 포르투는 재난 복구에 한창이라는 이야기밖에 들려오지 않았다.

반대로 말하자면 공주의 소식도 포르투 쪽에서는 모르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대륙의 분위기도 갈수록 험악해지게 됐다.

정치라는 건 선전이다. 끊임없이 국민에게는 안심을 시켜줘야 하고, 제후국들에게는 포르투의 고강함을 주지시켜줘야 한다.

하지만 쥬버린 왕자가 가사 상태에 빠지고, 유일한 왕권 후계자인 클로디아 공주는 데미안 알파와 마왕 토벌을 선언한 후 두 달 가까이 소식이 없다. 제후국들이 점점 다른 생각을 하는 것은 당연지사다.

그러다 보니 투르나 멜라토르처럼, 클로디아를 납치하거나 교황이 직접 트러블을 막으러 나서야 하는 일들이 생긴다.

이런 상황에서 클로디아가 마족 아이를 스완 경의 편에 보낸다면, 그 자체로 복합적이고 긍정적인 소식이 된다.

클로디아가 자르지스에 돌입한 동시에 교국의 협조를 얻어 순조롭게 마왕 토벌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증거인 셈이다.

“마침 스완 경은 백 개의 왕국에 이름난 기사분이시지요. 본래는 마족이라면 모두 베어야 하는 분께서, 마족 아이를 감화시킨 로드에게 감명받아 그 뒤를 따른다는 이야기가 얼마나 매혹적이겠습니까.”

스완 경이 입술을 비틀어 올렸다.

“수르 알파의 말씀은 잘 알겠습니다. 저를 선전 도구로 쓰시겠다는 말씀이시군요.”

“예.”

“제가 그 말을 들을 것 같습니까?!”

데미안의 답이 끝나자마자 스완 경은 테이블을 내리쳤다.

쾅, 하는 소리에 클로디아가 화들짝 놀랐다. 갑작스러운 소음에 시빌이 이를 드러내며 마족 아이를 돌아보았다. 다행히도 아이는 놀란 듯 눈을 떴다가, 별 이상 없이 다시 졸기 시작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랑곳하지 않고 스완 경은 데미안을 노려봤다.

“교국도 아닌 포르투의 도구로 저를 쓰시겠다는 말씀도 모욕적이지만, 다른 속셈도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말씀하십시오.”

“저를 클로디아 님의 일행에서 배제시키실 셈 아닙니까?”

두 남자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클로디아는 숨도 쉴 수 없었다. 모두가 두 사람이 처음 합류부터 불협화음을 냈음을 알고 있었다.

정확히는 일방적으로 스완 경이 데미안에게 치근덕댔고, 데미안은 그것을 무시한 채로 스완 경의 실수를 지적했다.

데미안은 잠시 침묵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스완 경. 저는 당신이 우리 일행에 필요하지만, 동시에 필요 없다고도 생각합니다.”

“교황 성하를 모욕하시는 겁니까? 아니면 성기사단 전체를….”

“교황도 성기사단도 아닙니다. 저는 스완 세이비어, 당신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야 너네 좀 무섭다….]

디자이어가 조그맣게 속삭였으나 두 사람 모두 디자이어의 말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스완 세이비어. 당신의 능력은 출중하며 회복이 특히 그렇습니다. 아마 자르지스에서 당신의 힘은 꼭 필요하겠지요. 하지만, 당신은 로드가 아니라 교황 성하에게 충성합니다.”

스완은 데미안의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데미안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솔직히 말하면 당신 정도의 전력을 내보내는 건 저로서도 굉장히 아쉬운 일입니다. 저와 비등한 전투력을 갖춘 전사를, 그것도 회복이 가능한 사람을 데리고 가기란 요원합니다. 그러나 저는 위험 요소가 되었을 때의 당신 또한 고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수르 알파. 저는 배신하지….”

“모든 일이 잘 끝났다 칩시다. 만약 교황 성하께서 마왕의 목을 가져오라면 로드의 손에서 마왕의 목을 훔쳐 교국에 바치실 것 아닙니까? 그게 무슨 뜻인지 정말 모릅니까?”

“훔치다뇨, 수르 알파!”

데미안은 스완의 고함에 마른세수를 했다.

“비유일 뿐입니다. 하지만 스완 세이비어. 나는 가장 위험한 순간에 배신하는 이들을 알고 있습니다. 감히 당신이 그런 부류라고 말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러나 교국의 이익을 포르투보다 앞세워야 할 경우, 당신은 로드에게 충분히 등을 돌릴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저와 비등한 전투력을 갖췄다는 것, 그리고 같이 가야 하는 곳이 자르지스라는 것을 고려했을 때, 우리는 당신과 함께하기 어렵습니다.”

“공주님과 상의하신 겁니까?”

그 말에 데미안은 클로디아 쪽을 바라봤다. 찰나의 순간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고, 데미안은 다시 눈을 돌려 말했다.

“아뇨. 저의 독단입니다.”

스완 경은 기가 막힌 듯 클로디아를 바라봤다. 그러나 데미안이 더 빨랐다.

“저는 로드의 안전에 관해서라면 독단 이상의 독재를 할 것입니다. 난폭자가 된다고 해도 상관없습니다. 그리고, 공주님이라고 부르지 말아 달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저 똥고집!

모두 머릿속으로 같은 생각을 했다. 스완 경의 얼굴에 어이없다는 듯한 웃음이 떠올랐다.

“…클로디아 님께서는 수르 알파의 저런 말에도 아무 이의가 없으십니까?”

자신에게 돌아온 질문에 클로디아는 잠시 고민했으나, 어차피 제가 할 말은 정해져 있었다.

클로디아는 옅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수르 알파의 뜻이 저의 뜻이며, 저의 뜻이 수르 알파의 뜻입니다.”

“…지금 그 말씀은….”

“스완 경. 경이 뭐라 생각하셔도 제 입장은 항상 같습니다. 수르 알파는 자르지스 정벌을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런 수르 알파를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조금 다른 말씀을 드려볼까 해요.”

수르 알파! 나중에 이 빚은 꼭 받을 거야!

클로디아는 그렇게 생각하며 애써 웃음을 유지했다.

여기서 데미안의 말이 무조건 옳다고 말할 수만은 없다. 이대로 끝난다면, 켈록스 2세에게 스완 경이 가서 할 말은 뻔했다. 클로디아 테 포르투가 데미안 알파에게 휘둘리고 있는 인형에 불과하다고.

클로디아는 한숨을 쉬고 싶은 것을 참으며 말을 이었다.

“저 또한 교국의 협조와 이해, 그리고 봉사에 굉장히 감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스완 경, 당신과 수르 알파가 보여주는 모습은 데면데면함 그 이상을 넘어섰어요. 물론 스완 경만의 잘못은 아닙니다. 정확히 말하면…. 수르 알파가 문젭니다.”

데미안의 눈썹이 꿈틀했으나 클로디아는 무시하고 덧붙였다.

“나무토막 같죠? 저도 짜증 나요.”

큽. 시빌이 입을 틀어막았다. 헬렌은 고개를 돌렸으며, 디자이어는 폭소했다.

[푸하하하하하!]

“저도 어릴 때부터 봐온 그를 이렇게 여기는데, 하물며 처음 본 스완 경은 어떻겠습니까. 솔직히 말하면 수르 알파는 친해지기 너무 어려운 사람이에요. 아시죠?”

그리고 클로디아는 눈을 꾹 감았다 떴다. 이 말을 입 밖으로 꺼내는 데는 정말 큰 용기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저도 결국 못 친해져서 약혼 깬 거.”

“….”

예상대로 스완 경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그럴 것이다. 클로디아 테 포르투와 데미안 알파의 파혼은 전 대륙의 가십거리였으나, 당사자가 저렇게 말을 꺼내면 어떤 사람이든 받아칠 수 없기 마련이다.

클로디아는 생긋 웃었다.

“그런 사람이니, 자르지스처럼 험난한 곳에서 친해지기는 더욱 힘들 거예요. 뭐, 고난 속에 우정이 쌓이는 일도 있다지만, 글쎄요. 수르 알파는… 제가 스완 경이라면 절대로 고난을 함께하고 싶지는 않을 것 같아요.”

“로드.”

데미안이 억울한 듯 눈썹을 누그러뜨리고 그녀를 불렀다. 하지만 클로디아는 깔끔하게 데미안을 무시하고 말했다.

“스완 경께서 지금 걱정하시는 것을 저도 알아요. 켈록스 2세 성하께서는 스완 경께서 자르지스 정벌에 기여하고, 교국의 명성을 드높이시길 바랄 테니 말이에요. 그러니 저도 약속할게요. 스완 경. 지금 여기서 저 아이를 데리고 포르투 왕성까지 무사히 도착한 후 제 소식을 전해주신다면, 교국에는 섭섭지 않은 후의를 약속할게요. 더불어 자르지스 정벌에의 기여도도 높게 책정하겠습니다.”

“클로디아 님….”

그쯤 해서 클로디아는 마지막 무기를 꺼내 들기로 했다. 그녀는 일부러 눈썹을 누그러뜨리고 힝, 하고 콧소리를 냈다.

“저도 이해 좀 해주세요, 스완 님.”

“…그,”

“뻣뻣한 데다가 싸움만 잘하는 구남친 수습도 하루 이틀이죠. 자르지스까지 가서 그러고 싶지 않아요, 저도.”

구남친.

경쾌하기까지 한 그 단어에 결국 스완 경도 얼굴을 무너트리고 말았다. 흡, 하고 아주 짧은 순간이지만 코웃음 소리를 낸 것이다. 어이가 없기도 할 것이다.

그 뻣뻣하고 콧대 높은 데미안 알파가 클로디아 테 포르투의 입에서는 한낱 구남친 소리를 듣고 있었다.

“로드….”

데미안은 이제 안타까울 정도로 가련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시빌은 맹세코 데미안이 이런 목소리를 내는 것은 처음 봤다고 생각했다. 차마 클로디아에게 화는 내지 못하고, 하지만 클로디아의 말이 사실이 아니라고 부정하기에는 스완 경을 설득해야 하는 일이 걸린다.

결국 스완 경은 입을 막고 조금 웃다가, 이내 얼굴을 정돈한 후 클로디아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알겠습니다. 클로디아 님께서 이 정도로 말씀하시는데…. 제가 고집을 피우면 저도 그 ‘구남친’과 같은 사람이 되겠죠.”

스완 경의 평소 언행을 생각하면 상당한 수준의 비아냥거림이었다. 그러나 클로디아는 반색했다.

“예? 그럼!”

“정확히는 저도 조건이 있습니다.”

스완 경이 어깨를 바로 펴고 클로디아를 바라봤다. 그녀 또한 스완 경이 진심으로 제 말을 받아들여 줬다는 것을 알아채고 몸가짐을 바르게 했다.

“클로디아 님께서 약속하신 것들을 모두 지켜주신다는 전제하에, 저 또한 저 아이를 보호하며 포르투로 가겠습니다. 그리고 거기 더해, 포르투에서 클로디아 님의 귀환을 기다리겠습니다.”

“제 귀환을요?”

“정확히는 수르 알파의 귀환입니다.”

데미안이 눈썹을 꿈틀하며 이쪽을 바라봤다. 스완 경은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그리고 그때야말로 수르 알파가 저와 진심을 다해 겨뤄주기 바랍니다.”

“아….”

클로디아는 입을 가렸다. 스완 경은 내내 데미안에게 지겨울 정도로 대련을 해 달라고 매달렸으나 데미안은 그 모든 것을 거절했다. 스완 경이 욕심부리는 것은 다름 아닌 데미안이었던 것이다.

스완 경은 미소를 띤 채로 말을 이었다.

“물론 다른 목적도 있습니다. 포르투에 성기사가 올라가는 것은 켈록스 2세 성하의 즉위 이후로 처음입니다. 이왕 가는 김에, 교국의 교리를 전파하며 봉사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요. 제가 올라간 후, 교국의 사제들로 하여금 포르투의 재건을 돕게 해주십시오.”

이쪽이 자신을 선전 도구로 이용하는 만큼, 스완 경 또한 켈록스 2세를 위한 정치적 고려를 내민 것이다. 하지만 이 정도라면 못 들어줄 것도 없었다.

클로디아는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죠. 포르투로서도 교국의 도움을 환영할 테니까요.”

“수르 알파 또한 동의하십니까?”

스완 경의 물음에 데미안이 그쪽을 쳐다봤다. 정확히는 스완 경의 앞에서, 자신을 웃는 얼굴로 쳐다보는 클로디아를 바라봤다. 클로디아의 하늘색 눈은, 환하게 웃고 있었지만… 묘하게 데미안을 노려보고 있었다.

‘제가 여기까지 했는데 거절하면 정말 다시는 안 볼 줄 알아요.’

수르 알파, 하늘섬의 수호자이자 클로디아 테 포르투의 ‘구남친’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스완 경이 빙긋 웃었다.

어차피 켈록스 2세는 그에게 최대한 목숨을 보전하고 돌아오라고 했다. 이 정도의 핑계라면 그녀 또한 납득할 것이다. 그리고…. 스완 경은 포르투로 가는 길에 교국에 들를 것이다. 포르투까지 최대한 빨리 가라고는 아무도 말하지 않았으니까.

스완 경의 속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클로디아 테 포르투는 생글생글 웃었다. 어쨌든 모두 원하는 것을 얻었으니 좋은 밤이었다.



 

***



 

헬렌은 콧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자르지스로 나서기 위한 준비를 하는 중이었다. 그녀는 과일 말린 것들을 짚단 위에 올린 후, 설탕을 낮은 온도에서 녹인 물을 그 위에 끼얹었다.

머리에 가벼운 모자를 쓴 여자아이가 그 옆에서 꺄악, 꺄악 소리를 질렀다. 단순한 비명 같지만 그게 그 나름으로는 신나게 떠들고 있는 것임을 헬렌도 모르지 않았다.

그녀는 빙그레 웃으며 설탕물 묻은 과일 하나를 집어 아이의 입에 넣어주었다. 아이는 반짝반짝한 눈으로 과일을 씹었다.

“맛있니?”

“아앙.”

말은 통하지 않아도 어느 정도는 알아볼 수 있었다. 아이는 아직도 대부분 시빌과 붙어 있기는 했으나, 일행에게 상당히 경계심을 풀고 있었다. 지금만 해도 헬렌의 옆에서 곧잘 먹을 것을 받아먹고 있으니 말이다.

“네가 우리 말을 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그렇게 중얼거리며 헬렌은 과일칩 위에 또다시 설탕물을 뿌렸다. 아이가 손가락을 뻗었다가, 뜨거운 기운에 다시 손을 움츠렸다. 이 아이를 두고 이틀 전 데미안과 스완이 대치한 것을 생각하면 헬렌은 걱정만 앞섰다.

‘그 남자는 그래도 데미안보다는 제법 말이 통하는 것 같지만, 그래도 뻣뻣한 건 데미안과 좀 비슷하단 말이야.’

교국의 교리는 마족을 처단하는 것. 아무리 그래도 스완 경이 마족 아이를 데리고 포르투까지 다시 올라갈 수 있을까? 헬렌은 의문을 가졌다.

물론 데미안은 그날 저녁, 신에 대한 맹세를 스완 경에게 시켰다. 성기사들이 신의 이름으로 맹세하게 되면, 그 맹세를 깨는 순간 신성력을 잃어버리게 된다. 그 정도로 맹세했으니 아마 어기지는 않겠지만.

“다들 참 이런 어린 여자애를 허우대만 멀쩡한 다 큰 남자 하나한테 달려 보내면서 걱정도 없다….”

헬렌은 스완 경이 들으면 결투를 신청할지도 모르는 말을 중얼거리며 설탕물을 저었다. 뜨거운 설탕물은 슬슬 갈색을 띠고 있었다. 저번에 먹었던 캐러멜의 맛이 기가 막혀서, 겸사겸사 설탕을 산 김에 흉내를 좀 내 볼 작정이었다.

자신은 사실 잘 모르겠지만 일행들 모두가 제 요리를 먹으면 힘도 붙고 괜찮다고 하니, 뭐든 간에 직접 만드는 것이 훨씬 좋지 않을까 하는 심산이었다.

설탕물에 버터를 섞은 후 그것을 적당히 한 김 식혀 굳혔다. 제법 괜찮은 모양이 나올 것 같아 헬렌은 만족스럽게 웃었다. 시빌에게 기름종이를 사 오라고 심부름을 보냈으니, 다 굳은 후에 썰어 기름종이에 싸면 휴대하기도 편할 것이다.

“자. 너도 하나 먹어볼래?”

헬렌은 캐러멜을 조금 잘랐다. 아직 덜 식었는지 갈색 캐러멜이 주욱 늘어났다. 늘어난 끝을 손끝에 감아서 아이의 입에 집어넣자, 아이가 기쁜 듯이 헬렌의 손가락을 빨았다.

그 감촉이 간지러워 헬렌은 킥킥 웃으면서 아이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귀 뒤에 난 털은 마치 고양이의 배털 같았다. 부드럽고 따뜻해 만지기가 좋았다.

“그러고 보니 네 이름을 모르네. 시빌에게 물어볼 걸 그랬다. 제일 중요한 걸 안 물어봤잖아? 다들 머리가 어떻게 된 거야….”

사흘 내내 그들은 시빌을 통해 아이에게 자르지스의 사정을 물어봤다. 아이는 넙죽넙죽 잘도 대답했고, 시빌이 통역했다.

자르지스는 지금 용의 화구가 갑자기 크게 달궈지면서, 엄청나게 뜨거워졌다고 했다. 화구 근처에 살던 마족들 중에는 타죽은 이들도 있으며, 마족들의 마을 중에는 불타버린 곳도 여러 곳이라고 했다. 몸이 뜨거워져 바다에 몸을 던진 마족들도 있었다.

그렇게 뜨거운 곳에 우리가 갈 수 있을까? 하고 일행들은 고민했으나, 시빌이 으쓱했다.

‘괜찮을 겁니다. 그곳의 마력장은 우리에게는 굉장히 무겁지만, 영향도 더디죠. 밀도가 더 짙다고 할까요?’

‘무슨 소린지는 모르겠지만 대충 괜찮단 소리지?’

헬렌의 말에 시빌이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갈수록 적응이 될 테고요. 그전까지는 제가 되는 한 자르지스의 마력장을 구현해 볼 테니, 적응 훈련을 해 두시기 바랍니다.”

덕분에 일행들은 모두 하루에 몇 시간씩, 시빌이 만들어낸 무거운 마력장 안에서 생활해야 했다. 이제 사흘째. 그 안에서 가장 먼저 적응한 것은 데미안이었다. 데미안은 어깨가 짓눌리는 상황에서도 평소처럼 검을 휘둘러 모두의 감탄을 자아냈다. 스완 경은 의욕이 앞서 마력장 안에서 데미안과 겨뤄보고 싶다고 제안했으나, 데미안은 무뚝뚝한 얼굴로 거절했다.

예상대로 클로디아가 가장 빌빌거렸다. 클로디아는 등을 굽히고 목을 늘어뜨린 채로 마력장 안에서 죽겠다는 말만 중얼거리며 걸어 다녔다.

단순히 걷는 것도 힘든 모양이었다.

‘잠깐. 그런데….’

헬렌은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마음에 뭐가 자꾸 남았다. 시빌의 마력장 때문이었다. 자르지스의 마력장을 줄곧 연구해왔다는 시빌의 말은 일리가 있었으나…. 뒤통수에 자꾸 걸리는 것이 있었다. 그러나 헬렌은 그것이 무엇인지 명확히 설명할 수 없었다. 다만 모든 것이 너무 딱 맞아떨어진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아니지. 딱 맞아떨어지면 좋은 건가.’

헬렌은 고개를 내저으며 캐러멜을 다시금 찔러봤다. 캐러멜은 이제 딱 알맞게 굳어 있었고,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캐러멜을 썰기 시작했다.

아이의 보라색 눈은 그런 헬렌의 뒤통수를 오래도록 뾰족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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