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장. 악의의 기원 (10/30)

3장. 악의의 기원



 

예상대로라고 해야 할까. 교황은 다음 날 아침 짧은 사과와 함께 성기사들의 합류를 제안해왔다. 다만 놀랄 만한 것도 있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스완 세이비어입니다. 익히 알고 계시듯, 스완 경이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클로디아는 눈을 깜박였다. 당황을 감추기 위해서였다. 스완 경은 미소 지으며 무릎을 꿇고 클로디아의 손을 청했다.

클로디아가 손을 내밀자, 그는 그 손에 자신의 이마를 댔다.

그가 일전에 클로디아에게 취했던 포르투의 의식과는 다른, 교국 성기사들의 예절이었다. 보통 그들이 교황에게 바치는 경애의 의미이기도 했다.

클로디아가 당황해 스완 경을 내려다보자, 스완 경은 미소 지었다.

“교황 성하께서는 공주님을 자신과 같이 모시라 명하셨습니다. 그에 공주님을 제 몸과 같이 모시겠습니다.”

“그, 네…. 하지만 스완 경께서는 공사가 다망하시지 않은가요?”

“지금 대륙에서 공주님의 일을 돕는 것보다 훨씬 큰 일은 없습니다. 제게 내려진 의무를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부디 저를 종으로 부려주십시오.”

그러니까 제가 아무리 포르투 공주라도 남의 나라 성기사단장을 종으로 부리는 건 좀 부담스럽거든요….

클로디아는 한숨을 쉬었다. 어쩐지 켈록스 2세가, 자신의 귓가에 ‘요 공주님아, 어디 한번 정말 포르투 왕족처럼 굴어보시지!’ 하고 음험하게 웃는 것 같았다.

망상인 데다가 켈록스 2세는 제 앞에서 끝까지 예의를 지켰지만…. 클로디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스완 경이 합류한 것은 부담 이상으로 기쁜 일이었다. 스완 경은 네 사람의 최종 목표지가 남부의 최남단 항구, 아트릭스라는 것을 밝히자 환한 표정으로 말했다.

“잘 됐군요! 아트릭스에는 지금 성기사단 중 한 명이 임무를 위해 파견돼 있습니다!”

“정말요?”

클로디아는 부담도 잊고 눈을 반짝반짝 빛냈다. ‘성스러운 길’을 쓰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이렇게 일이 잘 풀릴 줄은 몰랐던 탓이다. 스완 경은 웃으며 설명했다. 자르지스의 마왕 때문에 자르지스와 가장 가까운 아트릭스도 지금 흉흉한 기운에 휩싸여 있으며, 여러모로 불안정한 탓에 성기사 한 명이 파견돼 있다고.

결정은 빨랐다. 스완 경은 ‘성스러운 길’을 준비했으며, 교황을 비롯한 사제 일원이 클로디아 일행의 배웅을 위해 저택 앞으로 나왔다. 클로디아는 몸 둘 바를 몰랐다. 단 다섯 사람을 배웅하기 위해 나온 인원은 백 명 가까이 됐다.

생각해 보면 하늘섬에서도 클로디아와 데미안을 배웅한 사람들은 열 명도 되지 않았다. 이렇게 거한 출정식을 치르는 것은 처음이었다.

켈록스 2세가 나와 클로디아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공주 전하. 어제의 실례를 부디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제가 용서하고 말고 할 게 아닙니다. 세상이 혼란하니 성하 또한 힘이 드시겠지요. 저는 제 일을 할 테니, 성하께서도 부디 힘써주시기 바랍니다.”

두 미인이 손을 맞잡고 웃었다. 겉으로 보기엔 훈훈한 광경이었지만, 요약하자면 ‘야, 한 방 먹었다. 미안.’ ‘됐어, 우리 뒤끝 남기지 말고 각자 갈 길 가자.’ 같은 소리였다.

스완 경이 슈니첸으로 왔던 것처럼 성스러운 길을 열었다. 길 저편에서는 교국의 다른 성기사가 문을 열고 기다리고 있었다. 아트릭스까지는 약 하루. 물론 두 달을 걸어가야 하는 것에 비하면 감사한 일이었다.

“마지막으로 이것을 드립니다.”

“뭐죠?”

“아무르와 그 기원을 같이하는 보석으로 만든 펜던트로, 제 신성력을 담았습니다.”

켈록스 2세가 그녀의 손에 목걸이 하나를 쥐여주었다.

“이렇게 귀한 것을…. 감사해요.”

“언제나 전하의 가는 길마다 신의 가호가 있길 바랄 뿐입니다.”

끝이었다. ‘성스러운 길’로 네 사람이 들어서서 이내 무지갯빛 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교황과 사제들은 내내 바라봤다. 마지막으로 스완 경이 고개를 숙였다. 교황이 엄숙한 얼굴로 스완 경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자르지스의 악한 자들에게 신의 벌을.”

“성스러운 임무를 삼가 받듭니다.”

“부디 돌아오시오.”

스완 경이 인사하려다 멈칫했다. 교황은 길 쪽을 바라보더니 눈을 내리깔았다.

“…지금 대륙의 상황을 설명하지 않아도 그대가 더 잘 알겠지. 공주는 선하나 순진하오. 나는 그대가 공주의 순진함에 희생되지 않기 바라오.”

“성하의 뜻을 받들겠습니다.”

공주는 죽는다 해도 너는 살아오라는 말이었다. 스완 경이 고개를 숙인 후 일어서 성스러운 길 속으로 사라졌다.

교황은 싸늘한 표정으로 점점 사라지는 무지갯빛 길을 보다가 몸을 돌렸다. 그 망할 공주님을 다음에 만나면 꼭 한 방 먹여주겠다고 결심한 차였다.

물론 그 공주님이 자르지스에서 살아 돌아온다면 말이다.



 

***



 

아트릭스는 푸른 하늘과 짠 바람이 매력적인 항구였다. 1년 내내 뜨거운 바람이 가시지 않는다는 아트릭스에 도착하자마자 클로디아는 참았던 숨을 터트렸다.

“세상에! 바다예요!”

새파란 하늘과 맞닿은 지평선이 끝없이 출렁거리고 있었다. 바다는 검푸른 것이라고 배웠는데, 막상 클로디아가 본 바다는 초록색이었다. 빛을 받아 반짝거리는 물결과 짜고 후덥지근한 냄새.

클로디아는 바다를 보자마자 머리끝까지 흥분해 바다 앞으로 달려나갈 뻔했다.

스완 경이 아니었다면 틀림없이 그랬을 것이다.

“바다를 처음 보십니까?”

“앗, 네!”

성스러운 길을 닫은 스완 경이, 아트릭스에서 그들을 마중한 성기사와 인사한 후 클로디아에게 물었다. 클로디아는 주먹을 꼭 쥐고 바다와 스완 경을 번갈아 쳐다봤다.

“하늘섬에서는 바다가 보이지 않습니까?”

“네!”

네 개의 대륙 위에 떠 있는 곳이라고는 하지만, 하늘섬에서 바다는 거의 보이지 않았다. 보이는 것은 대륙들을 나눈 큰 강과 산맥, 왕국들 정도다. 그렇다고 클로디아가 하늘섬을 떠날 일도 많지 않았기에, 바다가 처음일 수밖에 없었다. 통신 도마뱀으로, 혹은 책으로 익히 알았던 곳이지만, 실제로 보는 것과는 그 감상이 달랐다.

차례로 길을 걸어 나온 일행들도 눈을 찡그렸다. 강한 햇살 때문이었다. 데미안은 눈을 가늘게 떴으며, 시빌은 “내 눈!” 하더니 눈을 가렸다. 헬렌만이 태연했다.

“하하, 아트릭스 오랜만이네!”

“맞다, 헬렌은 이곳에 온 적이 있다고 했죠?”

“그래. 두 번째야.”

머릿깃을 세운 새들이 재빠르게 주변을 날아다녔다. 클로디아는 감탄하며 바다를 바라봤다. 초록색 바다가 부드럽게 넘실거리는 것이, 마치 클로디아를 환영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우와아….]

그리고 디자이어도 마찬가지였다. 클로디아는 어차피 크게 상관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등에 멘 디자이어를 빼서 바다 쪽으로 들이밀었다.

“봐, 디자이어! 바다야!”

[바다를 보는 건 정말 오랜만이야.]

“뭐? 너 언제 나 빼고 바다 보러 왔어?”

[멍청아! 네가 태어나기도 훨씬 전의 일이야! 미겔이랑 같이 봤다고!]

“바보야! 농담도 못 하니!”

클로디아와 디자이어가 투닥거렸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아트릭스의 3번 항구였다.

아트릭스는 엄청나게 큰 항구 도시였고, 배가 들어오는 곳만 네 곳이었다. 그중에서도 3번 항구는 가장 번화하고 발전한 곳이었다.

스완 경은 미리 연락을 받은 성기사의 안내대로 그들을 이끌고 3번 항구의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시빌이 잽싸게 거리의 잡화상에게서 새카만 안경을 샀다.

“그게 뭐예요, 시빌?”

“아, 이건 선글라스라는 겁니다. 까만 유리에 마법을 걸어 햇빛을 차단하죠. 마법사 길드의 독점 생산품입니다.”

“우와. 저도요!”

클로디아는 헬렌과 데미안의 것까지 세 개의 선글라스를 샀다. 스완 경은 웃으며 사양했다. 까만 안경을 쓴 클로디아는 “세상이 어두워 보여요! 눈이 너무 편해!” 하며 까르륵까르륵 웃었다.

헬렌이 클로디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오랜만에 네가 웃는 걸 보니 좋네!”

“그랬나요? 헬렌도 그 안경을 쓰니까 너무 멋있어요! 이곳이랑 잘 어울려요!”

“그야 내 고향은 남부니까 그렇지.”

클로디아가 슈니첸에 있을 때만 해도 머리가 짧은 탓에 힐끔힐끔 희한하다는 시선을 받았는데, 아트릭스는 달랐다. 클로디아나 헬렌처럼 머리를 짧게 자른 여자들이 길을 활보했다. 심지어 남자처럼 머리를 박박 깎은 여인들도 있었다. 옷의 길이들이 짧고 가벼운 것은 물론이었다.

“날이 더워서 다들 옷을 짧게 입나 봐요….”

“한낮에는 땀을 뻘뻘 흘리게 되니까 어쩔 수 없어. 클로디아는 덥지 않아?”

“아, 조금 덥긴 해요.”

클로디아는 자신이 입은 셔츠 목덜미 쪽을 가볍게 펄럭거리며 웃었다.

“부츠는 마법이 걸려 있어 괜찮은데, 옷은 아무래도 덥긴 하네요.”

“옷을 좀 사서 갈아입을까?”

“음, 괜찮아요.”

데미안이 말을 보탰다.

“포르투의 귀족 여인들은 바깥에 맨살을 보이는 것에 대해 별로 좋지 않게 생각합니다.”

“그야 그럴 수도 있겠지만…. 여긴 아트릭스라구.”

헬렌이 이마를 찡그렸다. 포르투 사람들이 볼 것도 아닌데 무슨 상관이야? 시빌도 나섰다.

“그래요, 살이 타는 게 싫다면 제가 마법을 걸어줄게요!”

“아니에요, 그렇다기보다….”

클로디아가 우물쭈물했다. 그제야 헬렌은 클로디아 본인이 살을 내놓는 것에 대해 거부감이 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 그렇지. 익숙하지 않으면 그럴 수도 있지.”

“헤헤. 저도 너무 더우면 고민해볼게요.”

클로디아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동안 시빌은 데미안을 보고 감탄하고 있었다.

“클로디아는 그렇다 치고 데미안은 정말 대단하네요. 안 더워요?”

“괜찮습니다.”

아트릭스에 도착하자마자 클로디아는 자신이 둘렀던 로브를 모두 풀어버린 참이었다. 그러나 데미안은 먼지 쌓인 무거운 망토를 풀지도 않았다. 땀도 한 방울 흘리지 않는 모습에 시빌은 혀를 내둘렀다.

“인간도 아냐.”

“글쎄요, 시빌. 당신 같은 복장이어야 인간 취급받을 수 있다면….”

거기까지 말하고 데미안은 입을 닫았다. 모두의 눈이 시빌에게로 가 닿았고, 시빌이 새빨갛게 얼굴을 붉혔다.

“왜요! 뭐요!”

그는 마법사의 로브 끝을 모두 들어 올려 허리띠에 둘둘 말아 집어넣은 후였다. 자연스레 아래로 보이는 바지도 걷어 종아리가 다 드러났다. 팔은 또 어떻고. 잔뜩 걷어서 팔뚝도 다 보이는 채였다. 원래 피부가 가무잡잡한 그였지만, 햇빛을 잘 보지 않은 덕인지 그의 팔은 주변을 돌아다니는 아트릭스 사람들의 새카만 팔과 사뭇 대조적이었다.

“더운데 어떡합니까?”

“적어도 스완 경과 비교하면 굉장히 인간적이긴 하네.”

헬렌이 킥킥 웃었다.

“저 말입니까?”

헬렌의 말에 앞에서 걸어가다가 이쪽을 돌아보는 스완 경은, 성기사들의 갑옷을 입은 채였다. 그것도 중장비. 그야 성기사들은 스스로의 소속집단을 굉장히 자랑스러워한다고는 하지만….

이 더위에 저런 갑옷을 걸치고 돌아다니면 머리가 이상해지지 않을까?

시빌의 의문에 대답하듯 스완 경이 시원스럽게 웃었다.

“성기사들이 입는 갑옷에는 경량화 마법과 더불어 온도조절 마법이 걸려 있습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런, 그것 봐요. 내가 정상이라니까.”

용기를 되찾은 시빌이 턱을 쳐들었다. 하지만 땀을 뻘뻘 흘리고 있어 그리 모양새가 좋지는 않았다.



 

***



 

여관은 굉장히 호화로웠다. 스완 경이 부탁해서일까, 아트릭스에 머무르고 있던 성기사가 미리 그들을 위해 예약한 곳이었다. 건물만 해도 5층에, 유리 창문도 달려 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멋진 건물에 클로디아의 눈이 반짝반짝해졌다.

“우와….”

“숙녀분들은 올라가셔서 짐을 풀고 쉬십시오.”

“스완 경. 자르지스로는….”

데미안의 말에 스완 경이 웃으며 답했다.

“자르지스로 가기 위해서는 식량도 준비해야 하고, 시간을 좀 가지는 게 낫습니다. 사흘 정도는 쉬시면서 만반의 준비를 하시는 게 어떨까요.”

“맞아, 식량은 비축해야지! 그래야 내가 가서 요리를 하지 않겠어?”

헬렌이 맞장구쳤다. 시빌도 외쳤다. “제 상처 치료도요!” 일행들이 답하자 데미안은 입을 닫고 고개를 끄덕였다.

클로디아는 기쁘게 여관 문으로 들어섰다. 금으로 멋지게 장식된 여관 문이, 클로디아가 들어서자 자동으로 열렸다. 마법이었다.

“와아, 멋져요!”

그래서 클로디아는 데미안의 흐려진 얼굴은 보지 못했다.



 

***



 

“자르지스에 들어가면 가장 먼저 지도를 구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늦은 점심식사를 하며 스완 경이 꺼낸 말이었다. 모두 고개를 갸웃했다.

클로디아가 되물었다.

“하지만 그런 게 자르지스에 있긴 할까요?”

“자르지스의 마족들이라고 지성이 없는 것이 아닐 테니까요. 마왕만 봐도….”

“시빌, 너 자르지스에 가 봤다고 했잖아.”

갑작스레 시선이 몰렸다. 시빌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애매하게 웃었다.

“저는 자르지스에 들어가자마자 눈에 안 띄는 곳을 찾아 숨기부터 했습니다. 시간은 하루밖에 없는 데다가, 마력이 너무 절 향해 희한하게 몰려들어 그것부터 연구하느라 바빴거든요.”

“아하….”

“자르지스에 들어가 보신 적이 있다고요?”

스완 경이 이마를 찡그렸다. 시빌이 고개를 끄덕였고, 헬렌이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스완 경은 두 사람의 설명을 듣고 감탄했다.

“그런 방법이 있었군요.”

“예. 뭐 사실 믿거나 말거나 식으로 기술되어 있는 길이라 저도 반신반의하며 가보았습니다만, 신기하긴 하더군요. 제가 마법사가 아니었다면 아마 저도 갈 생각은 안 했을 겁니다.”

시빌이 에헴, 하고 콧대를 세웠다. 스완 경이 픽 웃었다.

“하긴, 오죽하겠습니까. 하늘도 거스른다는 마법사들인데요.”

“…어째 저한테 시비 거시는 것 같습니다?”

“이런, 맹세코 그런 일은 없습니다만…. 혹시 거슬리셨다면 미안합니다.”

시빌이 눈을 매섭게 떴으나 스완 경은 고개를 저었다. 눈꼬리를 늘어뜨린 얼굴은 정말로 그런 적 없다는 듯 억울해 보였고, 클로디아가 시빌의 손등을 톡톡 두들겼다.

“시빌, 스완 경이 일부러 그러신 건 아닐 거예요.”

“…네, 뭐.”

시빌이 입을 비죽거렸다. 헬렌이 얼른 시빌의 입에 흰 빵을 구겨 넣었다. 시빌은 별말 없이 그 빵을 오물오물 먹으면서도 못마땅한 듯 스완 경을 쳐다봤다. 클로디아는 난처해하다가 분위기를 환기하기 위해 질문을 던졌다.

“자르지스로 들어가기 위해서 준비할 게 뭐가 있을까요, 데미안?”

“…가장 먼저 준비해야 될 건 아무래도 식량입니다. 자르지스에서 먹을 것을 구할 수 있을지 잘 모르니까요. 그러니 헬렌이 아마 가장 바쁠 겁니다.”

“아, 그래서 아까 올라오면서 여관의 종업원들에게 근처 시장을 물어봤어. 아무래도 클로디아의 말을 들으니 비축 식량을 좀 만들어놔야 할 것 같아서.”

데미안의 말에 헬렌이 손을 들었다. 스완 경이 고개를 갸웃했다.

“간편식 같은 것을 구입하면 되지 않습니까? 혹시 돈이 부족하다면….”

“그게 아니라, 헬렌은 축복을 받은 요리사거든요!”

클로디아가 미소 지으며 헬렌에 관해 설명했다. 스완 경은 처음에는 축복받은 요리사라는 것을 잘 이해하지 못하다가 이내 클로디아가 헬렌의 음식을 먹고 겪은 일들에 대해 늘어놓자 흥미로운 표정이 됐다. 덧붙여 클로디아가 근력이 붙었다는 말을 가장 재미있어하면서도 믿을 수 없어 했다.

“힘이라는 것은 오랜 수련을 바탕으로 붙는 것입니다. 음식을 먹는 것만으로 그게 가능하다는 겁니까?”

“그럼요! 저만 해도 디자이어를 오랫동안 들고 있는 게 정말 힘들었는데 지금은 백 번 휘두르기도 할 수 있는걸요!”

스완 경의 온화한 얼굴에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하늘섬의 공주님께서 검을 백 번이나 휘두른다니 정말 대단하십니다.”

“에이, 데미안의 기준에는 한참 멀었는걸요.”

“아니, 무슨 소리를 하십니까.”

클로디아의 말에 스완 경이 정색했다.

“여기 앉아 있는 데미안 알파 경은 대륙을 통틀어 두 번째로 강한 검사가 아닙니까. 그런 사람의 기준에 공주님께서 맞추실 수 있을 리 없지 않습니까.”

“스완 경.”

조용히 앉아 있던 데미안이 입을 열었다. 스완 경은 미소를 띤 채 데미안을 바라봤다.

“미리 부탁드리지 못한 것이 있습니다. 로드를 직함으로 부르지 말아 주십시오.”

“예? 공주님을 공주님이라고 부르지 않으면… 아.”

스완 경은 곧 데미안의 말뜻을 알아차렸다. 아무리 호화로운 여관이라고 해도 이 일행들은 너무 많은 눈길을 끌었다. 스완 경이 합류한 후에는 더욱 그랬다. 성기사들의 중장비 갑옷을 입고 있는 걷기만 해도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저는 교국의 성기사입니다. 클로디아 공주님을 공주님이라고 부른다 한들, 불온한 무리들이 감히 접근하지도 못할 겁니다.”

“스완 경의 교국에 대한 자부심은 본받을 만합니다.”

데미안은 스완 경의 말을 그렇게 받았다. 알겠고 내 말 들어, 란 소리였다.

두 사람을 제외한 시빌과 클로디아, 헬렌은 조심스럽게 눈알만 굴렸다. 두 사람이 미묘한 자존심 싸움을 하고 있다는 것은 누가 봐도 알 수 있었다.

성스러운 길을 지나올 때만 해도 그랬다. 스완 경은 계속해서 데미안에게 치근덕댔다. 정확히는 자꾸 검을 겨뤄보고 싶다고 들이댔다.

그럴 만도 했다. 스완 경은 검의 정수로 이름난 세이비어 가문의 적자였으며, 그중에서도 엄청난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자랐다.

스완 경은 어릴 적부터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그 재능에 감탄한 이들이 모든 곳에서 스완 세이비어의 이름을 거론했다. 그가 열네 살의 나이에 선대 교황에게 성기사로 뽑혔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이 납득했다.

이윽고 스무 살의 나이에 스완 경은 성기사단장이 됐다. 성기사는 신실함만 있다고 되는 것이 아니었다. 검술만 해도 남들보다 월등한 자들이 성기사단에 모였으며, 자신의 검에 신의 힘을 깃들게 하는 것은 더더욱 어려웠다. 하지만 스완 경은 그 모든 것을 해냈다. 수르 미다프에 이어 검기를 깨우칠 자가 있다면 그것이 바로 스완 세이비어라고 일컬어질 정도였다.

하지만 데미안 알파가 나타났다. 스완 세이비어가 스물다섯 살 때였다.

수르 미다프의 양자라고만 알려졌던 그는 검기를 발현한 후 하늘섬의 기사가 되며 순식간에 그 이름을 알렸다.

그리고 지금까지 스완 세이비어는 검기를 깨우치지 못했다. 그가 데미안 알파와 겨뤄보고 싶어 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호승심이 다른 이들보다 배로 들 것이다.

그러나 데미안은 스완의 제의를 내내 거추장스러워했다. 정확히는 계속해서 거절했다.

클로디아의 곁에서 그녀를 보호해야 하는데, 스완 경 정도 되는 강자와 겨룬다면 자신의 체력도 다할 것이 분명하며 자연스레 클로디아의 경호에 소홀해진다는 이유였다. 스완 경은 자신이 데미안의 체력 회복을 책임지겠다고 했으나, 그는 고개를 저으며 대련을 기약 없는 나중으로 미뤘다.

데미안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저는 수르 알파입니다. 알파 경이 아닙니다.”

“호칭만 다를 뿐, 같은 의미라고 생각했습니다만 불쾌하시다면 고치겠습니다.”

스완 경은 미소 지었으나, 데미안의 말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수르는 경이라는 의미도 있으나, 하늘섬의 수호자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단순히 기사를 부르는 호칭이 아닙니다.”

“….”

“더불어, 아무리 스완 경이 있다 해도 위험은 어디서 들이닥칠지 모릅니다. 계속해서 스완 경이 로드를 직함으로 부르신다면, 저는 스완 경과의 동행을 다시 검토할 수밖에 없습니다.”

분위기가 냉랭해졌다.

자꾸 그렇게 행동한다면 일행에서 빼겠다는 경고나 다름없었다. 스완 경은 애써 웃으며 말했다.

“그 말씀은 마치 이 일행의 통솔권이 알파 경에게….”

“수르 알파라고 해 달라 말씀드렸습니다.”

“…미안합니다, 수르 알파. 제가 버릇이 되어 실수를 했군요.”

이제 나머지 세 사람은 가시밭길을 걷는 기분이 됐다.

헬렌은 클로디아에게 눈짓했다.

‘원래 저런 사람이야?’

클로디아도 애써 웃으며 눈으로 답했다.

‘원래 저래요….’

시빌도 눈으로 말했다.

‘와, 저 소화 안 돼요.’

그러거나 말거나 두 사람은 말을 이었다.

“어쨌든, 수르 알파께서 이 일행의 통솔권을 가지고 있다는 것 같습니다. 저는 공, 아차. 클로디아 님께서 이 일행의 통솔자인 줄 알았는데요.”

“로드께서는 저를 다스리십니다만, 하늘섬 바깥의 일에 대해서는 저에게 일임하셨습니다.”

“사실입니까, 클로디아 님?”

갑작스레 자신을 부르는 말에 클로디아는 하마터면 사레가 들릴 뻔했다. 기침을 하지 않은 것은 순전히 행운이었고, 클로디아는 음식을 간신히 삼킨 후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저는…. 부끄럽게도 이전에는 하늘섬 바깥으로 나가본 적이 거의 없어요. 있다 해도 아바마마와 함께, 혹은 오라버니와 함께 큰 일행을 이끌고 나온 정도였죠. 당연히 이런 종류의 여행에는 면역이 없습니다. 여행길의 안전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예요….”

기어들어 갈 것 같은 목소리에 스완 경은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수르 알파의 말씀을 따르겠습니다.”

“그래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덧붙여, 이후로도 숙소나 식량, 도시에 머무는 날짜에 관한 계획이 있으시다면 저와 상의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예.”

스완 경의 눈이 가늘어졌다.

‘자신에게 말하지 않고 숙소를 잡은 것에 화가 난 건가.’

그는 데미안 알파에 관해 그간 가지고 있던 평가에 한 줄을 더했다. ‘생각보다 옹졸함.’

되짚어보면, 그는 아까 여관에 도착했을 때부터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자신이 사흘간 머무르자고 한 것도 마음에 안 들었던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같은 일행으로서, 그저 제의 정도로 받아들여 주는 정도의 여유도 없단 말인가.

스완 경은 앞으로의 여행이 생각보다 지난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가벼운 한숨이 나왔다. 그때 헬렌이 슬그머니 손을 들었다.

“저기…. 그러면 나는 시장에 좀 다녀올게.”

“벌써요?”

“응. 어떤 재료가 있는지도 궁금하고, 보존식을 어떤 것을 만들지 계획을 좀 세워놓는 게 좋을 것 같아.”

“저, 저도 같이 가면 안 되나요?!”

클로디아가 벌떡 일어났다. 그러자 데미안이 눈썹을 들어 올렸고, 헬렌이 난처한 얼굴이 됐다.

클로디아가 바깥에 나간다면 데미안 또한 함께 따라가야 한다는 의사 표현이나 다름없었다. 클로디아는 몰라도 데미안까지 함께하면 아무래도 일행이 많아 거추장스러워진다.

헬렌의 난감한 기색에 클로디아의 눈썹이 처졌다.

“아녜요. 다녀오세요….”

“…제가 같이 갈까요?”

그때 뜻밖의 구원이 그녀를 향했다. 시빌이었다. 시빌은 클로디아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빙그레 웃었다.

“데미안도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했잖아요. 스완 경 때문에 주목을 좀 모으긴 했지만, 클로디아를 알아볼 사람은 별로 없을 거예요.”

그렇게 말하며 시빌이 클로디아의 머리끝을 만지작거렸다.

“뭣보다 머리카락 때문에라도요.”

그랬다. 머리카락이 길었던 때도 아니고, 클로디아는 마치 아트릭스의 거주민처럼 머리카락이 짧은 상태였다. 게다가 키도 껑충해 얼핏 뒤에서 보면 소년 같기도 했다. 물론 얼굴이 보이지 않았을 때다.

“하지만….”

데미안이 입을 열었으나, 시빌이 그 말을 가로막았다.

“그리고 저를 삼백만 싱에 고용한 목적은 사실 클로디아의 경호 아닌가요?”

“….”

“데미안, 당신도 그간 너무 클로디아의 주변에 신경을 곤두세웠어요. 요정의 동굴 때만 해도 그래요. 당신만 클로디아를 걱정하고 보호하는 건 아니라고요.”

요정의 동굴이라는 말에 스완 경이 궁금한 표정이 됐지만, 시빌은 구태여 그를 배려하지 않았다. 다만 데미안을 살살 구슬렸다.

“먼 데 가는 것도 아니고, 시장만 다녀올 거예요. 그동안 제가 클로디아를 무사히 보호할게요. 사람 많은 도시라고 하지만, 뭐 큰 위험 있겠어요? 안전한 곳으로만 골라 다닐 테니 데미안도 오늘은 좀 쉬는 게 어때요?”

“그래요, 수르 알파.”

클로디아도 거들었다. 시빌의 말을 듣고 보니 틀린 것이 하나도 없었다. 게다가 데미안이 자신 때문에 여행 내내 신경을 곤두세웠다는 것도 듣고 보니 미안할 따름이었다.

“자르지스로 들어가기 전이잖아요. 수르 알파도 푹 쉬어놔야 해요.”

“…저는 괜찮습니다.”

“제가 안 괜찮아요. 수르 알파. 가끔은 저도 수르 알파의 호의가 부담스럽다는 걸 알아주세요.”

그녀는 딱 잘라 말했다.

데미안은 클로디아의 말에 뭐라 말하고 싶은 표정이 가득했으나, 끝내 일어나지 못했다.



 

***



 

시장은 여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었다. 아트릭스의 3번 항구에서도 가장 번화한 상업 지구라 그런지 별것이 다 있었다. 짠 냄새와 환한 햇빛, 바글거리는 사람들 사이에서 클로디아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와아….”

“클로디아, 왜 그렇게 놀라? 시장 처음이야?”

“아뇨, 처음은 아니지만….”

하늘섬에도 시장이 있긴 하다. 그러나 인구가 통제되고 조절되는 하늘섬의 시장과, 아트릭스의 시장은 생동감부터가 달랐다.

시장에 들어찬 사람들의 모습부터가 그랬다. 인종이 다르고, 피부색이 다른 사람들이 서로 다른 말씨를 쓰며 섞이는 모습은 신기했다.

소금 냄새를 물씬 풍기는 남자들이 험한 말투로 시장의 상인에게서 과일을 샀다.

생선 파는 여인은 시종일관 손님들에게 사근사근하게 굴었으나, 자신의 남편이 술에 취해 돌아오자 무시무시하게 화를 내며 생선으로 그의 머리를 갈겼다.

한쪽에서는 누군가의 지갑을 도둑질한 소년이 도망가다가 뒷덜미를 잡혔으며, 고양이 한 마리가 몰래 건어물을 물고 지붕 위로 훌쩍 올라갔다.

그 모든 것이 클로디아에게는 너무나 신기한 광경이었다. 수백 명의 사람들이 길 위에서 얽히고설키는 모습.

“저 이렇게 많은 사람을 한꺼번에 보는 게 너무 신기해요.”

“그런가?”

헬렌이 고개를 갸웃하다가 옆의 어물전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어, 이 도미 물이 너무 좋다. 얼마예요?”

“아, 한 마리에 50싱!”

“뭐 이렇게 비싸?!”

“도미가 50싱이면 거저 주는 거지!”

생선 장수가 눈을 부라렸다. 헬렌도 눈을 부릅떴다.

“이 계절에 잡히는 도미 살도 무르고 맛없는 걸 모를 줄 알아?!”

“알면서 왜 사!”

“말려서 먹을 거니까!”

“꺼져! 가뜩이나 요즘 더워죽겠는데!”

그렇게 첫 가게부터 쫓겨났다.

헬렌이 허허, 하고 웃었다.

“언제부터 아트릭스 인심이 이렇게 험해졌담. 흥정도 안 하고 쫓아내네. 옛날보다 더위가 심해져서 그런가.”

“아차, 클로디아 조심.”

그사이 옆에 서 있던 시빌이 사람들에 치이는 클로디아를 붙들었다. 클로디아가 빙그레 웃으며 시빌을 돌아봤다.

“고마워요, 시빌.”

“무슨 말씀을. 근데, 클로디아는 옷 안 사요?”

“옷이요? 그야…. 조금만 버티면 자르지스로 출발할 텐데요, 뭘.”

“이런, 클로디아. 자르지스는 아트릭스보다 더 더운 곳이에요.”

“어머?”

클로디아가 그제야 눈을 크게 떴다. 클로디아는 본디 아트릭스에 머물면서도 새 옷은 사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야 잠깐 머물 곳이라는 인상이 강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빌은 클로디아의 생각이 얼마나 짧은지 설명했다.

“다들 남부가 덥다는 생각은 하지만 왜 더운지 잘 모르죠? 그건 자르지스에 용의 화구가 있기 때문이에요. 거긴 아트릭스보다 더 더울 테니 옷을 갈아입는 게 좋을 거예요.”

“용의 화구요?”

“네.”

어느새 헬렌도 옆에 와서 궁금한 듯 시빌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그게 뭔데? 대단한 거야?”

“음….”

시빌은 곤란한 듯 한쪽 눈을 찡그리며 웃었다.

“이런. 이 정보는 유료인데.”

“시빌….”

클로디아가 시빌을 흐린 눈으로 쳐다봤다.

야, 너 삼백만 싱 받았잖아, 라는 의미를 가진 눈초리를 보고 시빌은 한숨을 쉬었다.

“좋아요, 알려줄게요. 이건 아주 옛날부터 내려온 얘긴데, 하늘섬하고도 연관이 되어 있어요.”

“하늘섬하고요?”

“네. 포르투의 초대 국왕인 용사 미겔이 네 개의 대륙을 구하고, 두 섬 중 하나를 하늘에 띄워 하늘섬을 만들었다고 알려져 있죠?”

“맞아요, 맞아요!”

시빌이 싱긋 웃으며 근처 점포에서 사과를 들었다 놨다. “여기 물건 괜찮은걸?” 헬렌이 냉큼 그 점포에서 과일을 흥정했다. “아저씨, 여기 사과!” 과일 상점 주인이 과일을 내어 주는데, 냉기가 흘렀다. “마법을 쓰는 상점인 모양이군요. 과일들이 아주 싱싱해요.” 시빌이 기웃거리다가 이내 설명을 이었다.

“이 세계가 넓고 평평한 바다 위에 떠 있는 네 개의 대륙과 하늘섬으로 이뤄져 있는 건 알죠?”

“네.”

“그 바다 끝에는 뭐가 있죠?”

“암흑이요!”

“네, 맞았어요.”

클로디아가 입을 삐죽였다.

“어린애들도 다 알고 있는 얘기잖아요!”

“그렇지요. 하지만 들어봐요. 암흑으로 떠밀려가던 네 개의 대륙을 구하기 위해 모험을 떠난 용사 미겔은, 보석 아무르를 발견해요. 그 아무르는 대륙 네 개를 모두 붙잡아놓을 수 있는 힘이 있었죠. 그리고 그 아무르로 대륙을 붙잡기 위해 미겔은 바다에 떠 있는 섬 두 개 중 하나를 하늘로 띄워 하늘섬을 만들었는데, 나머지 한 개의 섬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어?”

클로디아가 눈을 깜박였다.

그러게?

그때 헬렌이 끼어들었다.

“나머지 한 개가 자르지스지?”

“딩동댕.”

“뭐라고요?!”

클로디아는 그 자리에서 놀라 비명 지르듯 묻고 말았다. 헬렌이 얼떨떨하게 그녀를 쳐다봤다. 엄청나게 커진 하늘색 눈동자가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그게 진짜예요?”

“예. 진짭니다. 마법사들의 전승에 내려오는 거죠.”

시빌이 빙그레 웃었다.

클로디아는 따지듯 물었다.

“저는 그런 거 배운 적 없어요!”

“당연하죠.”

시빌이 어깨를 으쓱했다.

“뭐랄까, 너무 오래돼서 잊혀졌달까. 솔직히 말하면 이 사실도 제가 마법사들의 곰팡이 핀 도서관 안에서 겨우 찾아낸 겁니다. 보통 사람들은 잘 모르죠.”

“헬렌은 알고 있잖아요?!”

헬렌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야 나는 남부 사람이니까, 그렇지.”

남부 사람… 그게 뭐…. 클로디아가 이해할 수 없다는 눈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헬렌은 웃다가 클로디아의 손을 이끌었다. 클로디아는 속절없이 헬렌에게 붙잡혀 어디론가로 끌려갔다. 골목골목을 돌아 헬렌은 조금 높은 지대로 그녀를 데리고 갔다. 인적이 점점 드물어지고, 보도블록보다는 풀밭이 늘어났다. 그리고, 세 사람은 아트릭스의 한 해안절벽 위에 도달했다.

쏴아….

끝없는 파도가 몰아치고 있었다. 클로디아는 미친 듯이 부는 바닷바람을 이겨내려 애쓰며 절벽 끝에 섰다. 헬렌은 클로디아의 어깨를 끌어안고 바다 끝을 가리켰다.

“저거 혹시 보여?”

“네? 잘….”

“저 끝을 잘 봐. 푸른 바위 같은 게 보이지 않아?”

헬렌의 말에 클로디아는 눈을 찌푸렸다. 맑은 날이었지만 헬렌이 가리키는 끝은 어쩐지 그곳만이 흐린 듯 잘 보이지 않았다.

뭘까, 저게….

“저기만 흐려서 잘 안 보여요….”

“그래. 잠깐만 기다려 봐. 햇빛이 조금 가려지면, 새카맣고 검푸른 바위가 보일 거야.”

그때 해가 구름 사이로 가렸다. 그리고 클로디아의 시선 안에, 마법처럼 검은 바위가 갑작스레 나타났다. 그녀는 눈을 부릅떴다.

“저게 뭐예요?!”

“자르지스야.”

헬렌이 픽 웃었다.

“아트릭스를 비롯한 남부 항구에서는 대부분 자르지스를 볼 수 있어. 아주 흐린 날이나, 지금처럼 구름에 해가 가렸을 때만.”

“…세상에.”

“그래서 남부 사람들은 자르지스를 아주 잘 알고 있지.”

시빌이 거들었다.

“용사 미겔은 아무르를 품을 섬을 고르기 위해 남부까지 내려왔습니다. 용의 화구 근처에 있는 두 개의 섬에는 아무도 살고 있지 않을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죠.”

클로디아는 넋을 잃고 저 먼바다를 쳐다봤다.

자르지스를 이렇게 보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어렴풋이 저 멀리, 바다 건너에 있을 거라고만 생각했는데, 아트릭스에서 볼 수 있다니.

클로디아의 감탄에 시빌이 어깨를 으쓱했다.

“안 보일 정도로 멀면 제가 하루 안에 다녀올 수도 없지요.”

“맞아. 시빌은 저질 체력이라고.”

헬렌이 킬킬거리며 클로디아의 목덜미를 주무르면서 말을 이었다.

“아무튼, 미겔은 두 개의 섬으로 건너갔어. 미겔이 어떻게 두 섬 중 하나를 골랐는지는 몰라. 아무튼 한 개의 섬은 하늘섬이 되었고, 나머지 하나는 자르지스가 되었지.”

“아, 어떻게 골랐는지 헬렌은 모르지만 저는 압니다.”

시빌이 거세게 부는 바닷바람에 새빨간 머리카락을 걷어내며 웃었다. 남부의 햇살에 그새 살이 탄 것인지, 조금 더 거무스름해진 피부가 어쩐지 햇살 아래서 멋지게 빛났다.

클로디아는 황급히 제 소매를 걷어 팔을 내려다봤다. 다행히 긴 옷 때문인지 피부가 타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 계속 덥다면 짧은 팔을 입어야겠지. 시빌은 남자라 피부가 조금 타도 멋지지만, 나는 안 예쁠 텐데….’

클로디아는 생각하며 시빌의 말을 마저 들었다.

“용의 화구는 자르지스 옆에 있거든요. 자르지스는 그때도 뜨거운 섬이었지요. 용사 미겔은 자르지스로 건너갔다가 그 숨 막히는 불길에 황폐해진 자르지스를 보고 아름다운 포르투 쪽을 하늘섬으로 만들기로 결심합니다.”

“포르투가 원래 하늘섬의 이름이었어요?”

“예. 지금은 미겔의 성이 포르투였다는 쪽으로 다들 알고 있지만, 원래 하늘섬의 이름은 포르투였답니다.”

시빌이 아까 산 사과 하나를 꺼내어 소매에 슥슥 닦았다. 어떻게 하려나 보는데, 그는 의외로 쉽게 손에 힘을 주어 사과를 반 쪼갰다. 헬렌이 휙, 휘파람을 불었다.

시빌이 사과 반쪽을 권했지만 헬렌은 거절했고, 클로디아가 받아들었다.

잘 쪼개진 사과의 단면이 반짝거렸다. 시빌이 손가락에 힘을 주어 누른 부분만 조금 갈색으로 뭉그러져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자르지스의 주민들이 고통받는 걸 외면할 순 없었죠.”

“주민이요…?”

시빌이 클로디아의 질문에 픽 웃었다.

“지금은 마족들이라고 부르는 자들 말입니다.”

클로디아의 얼굴이 흐려졌다. 마족들이 그때부터 있었나. 아니, 그보다….

“미겔은 자르지스에 사람들이 살고 있는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자르지스 또한 원래는 아름다운 섬이었으나, 언제부턴가 자르지스에 둥지를 틀고 살고 있던 세 마리 용 때문에 그렇게 변한 것이었죠. 용의 화구에 있었던 것은 세 마리의 용이었습니다. 미겔은 그 용들과 맞서 싸우고 용의 화구에서 용들을 쫓아냈어요. 두 마리의 용은 도망갔고, 한 마리는 죽었습니다.”

“아!”

클로디아가 시빌의 말에 뭔가 생각났다는 듯 소리 질렀다.

“용살검!”

“…예?”

“요정의 동굴에서 디자이어를 봤을 때, 용살검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어요!”

“아하?”

시빌이 눈썹을 들어 올렸다.

클로디아는 그때 디자이어가 했던 말들을 되새김질했다. 그때 디자이어는 스톤 드래곤과 싸웠다는 이야기를 했었다. 그럼 그게 용의 화구에 있던 용들을 가리켜 한 말이었을까?

시빌은 클로디아의 설명을 듣고 흥미를 보였다.

“재미있는 이야기군요. 이건 또 몰랐는데…. 그러고 보니, 미겔의 이야기는 디자이어가 가장 잘 알겠군요.”

“그러네요. 함께 싸운 동료일 테니까….”

“자르지스에 직접 간다는 생각 때문에 디자이어에게 그런 걸 물어볼 생각을 하지 못했군요. 이런, 마법사 실격입니다.”

시빌이 이마를 치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때 헬렌이 그를 재촉했다.

“그래서, 그다음은?”

“예?”

“용을 죽인 다음에 어떻게 됐어?”

아무래도 헬렌은 시빌이 들려주는 옛날이야기가 퍽 재미있었던 모양이다.

그야 자르지스에 대해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지만, 이렇게 자세한 설명을 듣는 것은 처음일 테니 그럴 만도 했다.

시빌이 빙그레 웃으며 이어 말했다.

“용을 죽이자 용의 화구의 불길은 잦아들었습니다. 다만 도망가던 용 중 한 마리가 미겔을 피해 도망가다가 꼬리에 불을 잘못 붙였어요. 결국 그 한 마리는 꼬리를 끊어내고 바다로 도망쳤지만, 끝내 죽어버렸습니다. 그 용의 저주가 죽음의 바다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이런….”

“그래서 미겔을 비롯한 인간의 후손들은 죽음의 바다를 건널 수 없다는 것이죠.”

세 사람은 어느새 절벽을 내려와 마을로 다시 접어들고 있었다.

그새 해가 조금씩 지고 있어서 노을이 마을을 비추었다. 주홍색 햇빛에 물든 항구 마을은 오후와는 또 다른 활기가 있었다. 큰 소리로 입항을 알리는 배들과 시장의 좌판을 닫는 상인들, 하나라도 더 주워 먹으려 시장 주변을 떠도는 갈매기들과 뛰어가는 아이들. 어디선가 들려오는 음유시인의 노랫소리.

주홍색 햇빛을 등진 시빌이 클로디아를 향해 빙그레 웃었다.

“뭐, 우리는 디자이어 덕분에 건널 수 있게 됐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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