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공주의 자격
클로디아가 가장 먼저 느낀 것은 두통이었다. 어딘지 모르게 술에 취한 것 같은 느낌이 클로디아를 괴롭혔다. 그녀는 무의식중에도 아주 예전에 들었던 설화를 기억해냈다. 요정의 나라에 다녀온 사람들은 숙취 같은 두통에 시달린다던가.
그렇구나, 이거 숙취구나. 클로디아는 아주 예전에 과일술을 마시고 잔뜩 취해서 잠들었다가 깨어난 날 아침을 떠올렸다. 그날 아침 눈을 뜨자마자 왜 세상이 멸망하지 않는지 의심했다. 그때 자신은 누워 있는데도 천장이 빙글빙글 돌아서 토할 것 같은 기분에 하루 종일 시달렸으니까.
결국 왕성을 경호하는 마법사 하나가 시녀의 닦달에 끌려와 그녀에게 숙취 해소 마법을 걸어주었다.
하지만 지금은 마법사가 없잖아….
아니, 잠깐. 있나?
클로디아는 눈을 번쩍 떴다.
맨 처음 보인 것은 낯선 천장이었다. 클로디아는 몇 번이나 눈을 깜박거렸다. 천장은 드문드문 누런 얼룩이 져 있었다. 맹세코 포르투의 왕성은 아니었다. 포르투 왕성의 천장은 모두 황금색으로 마감되어 있었으니까.
‘여기는 어디지.’
어쨌든 익숙한 곳은 아니었다. 클로디아는 누운 채로 기억을 더듬었다. 일어나고 싶었지만 지독한 현기증이 그녀의 머리를 괴롭혔다. 음, 그러니까.
요정의… 요정의 동굴에서 헤맸었다. 그리고 요정들이 도마뱀을 데리고 오고, 머리카락을 자르고….
그다음 돌아왔고, 돌아온 순간….
클로디아는 이마를 찡그렸다. 돌아온 순간 뭔가 자신을 괴롭혔는데, 이상하게 기억이 나지 않았다. 클로디아는 누운 채로 기억을 몇 번 더 더듬었으나 놀랍도록 머릿속은 새카맸다. 숙취만 오는 게 아니라 기억도 끊기나. 술을 지독하게 마시면 기억도 잃는다더니, 아침을 맞은 주정뱅이의 기분이 이럴까.
그녀는 다시 고개를 옆으로 돌려 주변을 바라보려다 포기했다. 머리를 아주 조금 움직이는 것만으로 미칠 것 같은 현기증이 몰려왔다. 어쨌든 조금 눈알을 굴린 것만으로 대강은 알 수 있었다. 자신이 누워 있는 방은 익히 그간 봐왔던 여관들과 비슷했다. 얼룩이 진 벽과 대강 마감된 모서리들. 그래도 제법 맵시가 나는 가구들을 보면 아마 근처에서도 꽤 괜찮은 여관일 것이다.
내가 왜 여기 누워 있지, 하고 생각하던 그녀는 곧 깨달았다.
‘어머, 나 기절했지.’
갈피를 잡기 힘든 머릿속에서 실낱같은 기억 한 줄기가 떠올랐다. 지긋지긋한 요정들에게 작별을 고한 다음 돌아왔을 때, 그녀에게 익숙한 두 남자를 봤다.
데미안 알파, 그리고 시빌.
그녀는 반가운 마음에 둘 중 하나를 불렀는데,
‘누구였더라?’
클로디아는 이마를 찌푸렸다. 자신이 누군가를 부른 건 기억이 났다. 그리고 그다음은…. 모르겠다. 뭔가가 제 머릿속을 일부러 새카맣게 칠해놓은 것처럼, 군데군데 얼룩져 있었다.
‘아니, 두 사람이 좀 이상한 모습이었던 건 기억이 나는데….’
그녀가 마지막으로 본 두 사람은 서로 얼싸안고 있었다. 정확히는 데미안을 시빌이 으스러져라 안고 있었다. 클로디아는 약하게 미간을 찌푸렸다. 둘이 그렇게 친했던가?
“끙.”
별생각 없이 그녀는 신음했다. 그때였다. 부스럭, 소리가 났다. 클로디아는 저도 모르게 그쪽을 쳐다봤다. 금세 머리가 깨질 것 같은 통증이 몰려왔지만 소리의 정체는 알 수 있었다.
데미안이었다.
“수르 알파.”
그녀는 신음했다. 보아하니 데미안은 자신이 누워 있는 곳 곁에 줄곧 앉아 있었던 모양이었다. 묶여 있는 머리카락도, 입고 있는 옷도 정갈했지만 얼굴에 드리운 그늘과 벌겋게 충혈된 눈은 어떻게 감출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데미안이 입을 열었다.
“깨어나셨습니까, 로드.”
“여기가 어디예요?”
데미안은 잠시 그녀를 내려다봤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근처의 마을입니다.”
“머리가 깨질 것같이 아파요….”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그렇게 말하고 데미안은 일어나 문밖으로 소리쳤다.
“헬렌! 시빌을 불러주십시오!”
“뭐? 클로디아는?”
복도 밖에서 허겁지겁 이쪽으로 다가오는 소리가 났다. 곧 익숙한 얼굴이 나타났다. 잔뜩 헝클어진 머리의 헬렌이었다.
“세상에, 클로디아!”
그녀는 빠르게 다가와 클로디아의 손을 덥석 잡았다. 괜찮아? 걱정했어, 따위의 말들이 오간 후 헬렌은 빠르게 다시 복도로 나갔다.
“어떻게 된 거예요?”
“저야말로 묻고 싶은 말입니다, 로드.”
그사이 그녀의 옆에 선 데미안이 말했다. 클로디아는 곧 그의 말뜻을 이해했다.
“지금 얼마나 지났죠? 수르 알파는 그렇게 나이를 먹은 것 같지는 않은데….”
아하하. 웃으며 농담했지만, 데미안의 표정은 여전히 굳어 있었다. 맞다. 이 사람 농담이 안 통하는 사람이었지…. 클로디아는 민망함에 얼굴을 붉혔다.
“일주일입니다.”
“어머.”
클로디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것밖에 안 지났어요?”
“….”
데미안은 아무 말도 보태지 않았으나, 하루가 천년 같았다는 얼굴이었기에 클로디아는 바로 반성했다. 그녀는 이것저것 물어보고 싶었으나 데미안에게 뭘 물어본다는 것 자체가 여전히 그녀에게는 영 어색한 일이었기에 입을 닫았다.
다행히 곧 헬렌에게 멱살을 잡히듯 끌려 온 시빌이 나타났다. 손에 커다란 고깃덩이를 든 채 헐레벌떡 뛰어온 시빌의 모습을 보고, 클로디아는 두통도 잊고 까르륵 웃고 말았다.
“뭐예요, 시빌. 시장 봤어요?”
“아니, 지금 그런 게 문제예요?”
시빌은 고깃덩이를 바닥에 던지듯 내려놓은 후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또다시 헬렌이 했듯 괜찮냐, 어떠냐, 같은 소리가 오갔고 클로디아는 자신이 숙취에 가까운 두통에 시달리고 있음을 고백했다. 시빌은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요정들이랑 술 마셨어요?”
“차라리 그러면 덜 억울하겠죠…. 빨리 치료나 해 줘요.”
“숙취에는 그저 물마시고 푹 자는 게 최곤데, 원.”
시빌은 혀를 차면서도 진통 마법을 걸어주었다.
마법사 최고다. 클로디아는 그렇게 생각하며 몸을 일으켰다. 온몸에 힘이 하나도 없어 ‘아이고….’ 소리가 절로 났다.
“회복 마법은 없어요?”
“누굴 사제인 줄 알아요?”
시빌이 어깨를 으쓱하며 이 정도만 해도 대단한 거라고 잔소리를 시작했다. 클로디아는 혀를 내밀었다.
“그게, 어떻게 된 거냐면….”
“음. 설명은 안 해도 돼요, 클로디아.”
그녀가 눈을 크게 떴다. 헬렌이 한숨 돌렸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디자이어가 설명해줬어.”
“어머나, 맞다. 디자이어….”
클로디아는 그제야 자신이 열심히 지고 다니던 검을 생각해냈다. 데미안이 그녀의 침대 옆에 기대어 있는 디자이어를 당겨 왔다.
“디자이어?”
보통 때였다면 진작 먼저 말을 걸었을 검이 이상하게 조용히 클로디아는 디자이어를 불렀다. 그제야 디자이어는 그녀에게 답했다.
[클로디아. 괜찮아?]
“응, 나는 괜찮아. 왜 그래?”
디자이어의 말투는 어쩐지 자신이 없는 듯했다. 클로디아는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고, 디자이어는 울 것 같은 말투로 말했다. 물론 검이었기에 울지는 않았다.
[미안해, 클로디아. 나 때문에….]
그녀는 디자이어로 인해 그간의 일을 대강 알 수 있었다.
***
빛에 휩싸여 두 사람이 현실로 돌아온 순간, 클로디아는 갑자기 데미안을 부르다 쓰러지고 말았다.
“로드!”
놀란 데미안이 이쪽으로 달려와 막 기절하는 그녀를 받아냈다. 시빌은 굳어 서 있다가 다가와 “무슨 일이예요?!” 하고 물었다. 당황스러운 것은, 디자이어는 제정신이었다는 것이다. 검의 정령은 클로디아의 실신에 놀라 [나, 나도 몰라!] 하고 비명을 질렀다.
그제야 시빌이 디자이어를 붙들었다.
“대체,”
파박, 스파크가 거세게 튀었다.
“!”
시빌이 놀라 디자이어를 내팽개쳤다. 그는 자신이 디자이어를 붙들면 문제가 생긴다는 것도 잊고 있을 만큼 놀랐던 것이다. 디자이어는 횡설수설하며 설명했다. 요정들의 던전을 같이 탈출해서 돌아왔는데, 클로디아가 왜 이런지는 잘 모르겠다고.
디자이어가 설명하는 동안 데미안은 클로디아의 얼굴을 살폈다. 그녀는 새파란 안색으로 정신을 잃고 있었고, 데미안은 빠르게 손가락을 그녀의 코 밑에 댔다. 다행히도 숨은 쉬고 있었다. 그다음은 등을 만지며 전신을 살폈다. 언뜻 봐서는 외상은 없었다.
데미안은 아주 잠깐 고민했으나 판단은 빨랐다. 그는 시빌을 바로 불러 클로디아가 다친 곳이 없는지 물었다. 시빌은 고개를 저었다.
“저는 간단한 회복 마법 정도야 걸 수 있지만, 이렇게 외상이 없는 경우엔 저도 알아보기가 어려워요.”
그러면서도 시빌은 부질없어 보이는 마법을 몇 번 그녀에게 걸었다. 희미한 분홍색 빛이 그의 손안에서 빛났다가 사라지길 반복했다.
여전히 클로디아는 깨어날 기미가 없었다.
그때 부스럭거리며 헬렌이 나타났다. 그녀는 자고 있다가 갑작스럽게 시끄러워진 숲속 때문에 깨어 무슨 일인지 보러 온 참이었다. 그녀는 데미안이 안고 있는 클로디아를 보고 크게 놀란 표정을 지으며 이게 무슨 일이냐 캐물었다.
“갑자기 나타났어요. 저희도 지금 그걸 알 수 없어서 망설이던 참이에요. 헬렌, 혹시… 클로디아를 좀 봐줄 수 있을까요? 저희는 아무래도 클로디아의 옷에 손대기는 힘들어요.”
시빌이 빠르게 그녀에게 물었다. 헬렌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두 사람을 물린 후 클로디아의 옷 안쪽을 살폈다. 특별한 상처는 없었다. 그사이 클로디아의 숨소리는 고르게 변했다. 세 사람이 클로디아를 옮기기로 한 데에는 디자이어의 설명도 한몫했다.
“아마 요정들이 한번 데려갔다 온 충격 때문일 거야….”
“충격이오?”
“시빌이 정령의 샘에 손댔다가 상처 입은 것과 비슷해. 요정들에게 끌려갔다 오면 간혹 정신력이 소모되곤 하는 사람들이 있거든….”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디자이어는 침통하게 말했다.
“내가 잘못했어….”
애초에 디자이어가 그 동굴에 들어가 보자고 조르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었다. 하지만 세 사람은 구태여 디자이어에게 책임을 묻지 않았다. 그러기에는 클로디아를 돌보는 쪽이 더 급했다.
헬렌이 데미안에게 고갯짓했다.
“좋아, 내가 디자이어를 안고 갈 테니 당신이 클로디아를 업어.”
시빌이 디자이어에 손댈 수 없으니 별수 없었다. 데미안은 잠시 망설이다가 클로디아의 목과 무릎 뒤에 손을 넣었다. 마차 안에 제대로 자리 잡은 후, 충격이 그녀에게 가지 않도록 안았다.
시빌은 한숨을 길게 내쉰 후, 마부석에 앉아 조용히 말을 몰았다.
가까운 마을에는 의사가 없을 가능성이 컸다. 네 사람은 새벽을 넘겨 아침이 되어서야 근처의 도시에 도착할 수 있었다.
밤새 달려온 흔적이 역력한, 이슬 맺혀 축축한 마차를 도시의 병사들이 수상쩍게 여겼다. 게다가 눈에 띄는 환자까지 있으니 다들 통과를 시켜주지 않으려 했다.
데미안은 노호성을 지르려 했으나, 헬렌이 변죽 좋게 병사들에게 은화 하나씩을 쥐여주며 사정했다.
“우리도 중간에 만난 사제님인데, 아, 글쎄 국경의 괴수를 퇴치하고 나서 힘이 다하셨는지 갑자기 쓰러지셨지 뭡니까요. 나으리들, 좋은 일 하신 분이니 되도록이면 사정 좀 봐주십시오.”
물론 헬렌의 호소보다는 은화가 훨씬 효과가 좋았다. 병사들은 못 이기는 척하고 네 사람을 통과시켰다.
***
“…그렇게 해서 여기 묵게 된 겁니다.”
시빌이 클로디아에게 설명을 마치고 어깨를 으쓱했다. 클로디아는 놀란 표정으로 시종일관 그 모든 말들을 듣고 있다가, 자신을 제외한 세 사람을 쳐다봤다.
“세상에, 세 사람에게 걱정을 시켰군요. 정말 미안해요.”
“아닙니다.”
재빠르게 대답한 것은 데미안이었다. 그는 가볍게 한숨을 쉬고는 팔짱을 끼었다.
“아무튼 별일이 없으시다니 됐습니다. 다른 아픈 곳은 없으십니까.”
“글쎄요….”
클로디아는 상반신을 일으킨 채 어깨를 돌려보고, 팔을 움직여 봤다. 다리도 꼼지락거렸다. 별 느낌은 없었다.
“괜찮은 것 같아요.”
헬렌의 얼굴이 환해졌다.
“뭔가 먹을 순 있겠어? 너 일주일 동안 아무것도 못 먹었다구.”
“어머나….”
그녀가 그렇게 말한 다음에서야 클로디아는 갑작스레 허기를 느꼈다. 그전까지는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지났다는 것에 놀라느라 몰랐는데.
“배…고파요.”
그 말에 헬렌이 씩씩하게 뛰어나갔다.
“기다려! 혹시 몰라서 네가 깨어날 때 주려고 만들어놓은 게 있어! 금방 데워올게!”
클로디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설마 일주일 전에 만든 건 아닐 테고….”
“그녀는 일주일 내내 매일 아침 요리를 했어요. 못 일어나는 날이 길어질수록 점점 묽은 걸로.”
시빌이 그녀의 옆에 다가앉으며 빙그레 웃었다.
“저기 내가 내팽개친 고깃덩이도 내일 만들 고깃국물을 위한 거였답니다.”
클로디아는 크게 감동했다. 세상에. 헬렌은 정말로 헌신적인 사람이었다.
“저는 다이어트 했다고 치면 되는데….”
그 말에 시빌이 어이없이 웃었다.
“일주일 내내 통으로 굶는 다이어트요?”
“뭐, 큰 연회가 있을 때나, 통신 도마뱀으로 뭔가 포르투에 널리 말해야 할 때는 몇 번 그래 봤는걸요.”
공주는 약간 으스댔다. 하늘섬의 주민들은 대부분 평화로운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고, 자연스레 그들의 가십거리나 재미는 포르투 왕성에 집중돼 있었다. 클로디아가 조금 더 날씬해지면 하늘섬의 아가씨들이 그녀를 따라 허리를 졸라맸고, 클로디아의 뺨이 약간이라도 포동포동해지면 하늘섬의 주민들은 클로디아가 시집은 갈 수 있을까 궁금해했다.
“그러니 살을 안 빼고 배기나요? 어쨌든 저는 하늘섬에서 제일 예쁜 여자애였어야 했으니까요.”
“뭐, 아마 백 개의 왕국을 다 뒤져도 클로디아보다 예쁜 여자는 찾기 힘들겠죠. 아무튼.”
시빌이 자연스럽게 그녀의 볼을 톡톡 건드리며 웃었다.
“뭐 생각나는 거 없습니까?”
“생각나는 거요?”
“그래요. 막 돌아왔을 때 기절했잖아요. 디자이어의 설명도 납득은 가지만, 뭔가 다른 문제가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그렇게 말하며 시빌은 그녀를 들여다봤다. 장난스럽게 빛나는 초록색 눈동자를 보고 클로디아는 잠시 침묵했다. 그 눈동자는 걱정의 빛을 가득 담고 있었으나, 클로디아는 그 건너편에서 어쩐지 마음에 걸리는 무언가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건 마치, 그녀에게 걸리는 뭔가 있는지 알아내려는 듯한 눈빛이었다.
뭐지, 저건….
클로디아는 저도 모르게 눈을 가늘게 떴다. 시빌도 진중하게 그녀를 쳐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클로디아.”
“…네?”
“이런 거리에서 그렇게 쳐다보면 보통의 청년들은 입이라도 맞춰달라는 신호로 오해합니다.”
“어머나!”
화들짝 놀란 그녀가 뒤로 물러섰다. 시빌이 키들키들 어깨를 흔들며 웃었다.
“하지만 저는 한 번 차인 사람이니까 오해하기 전에 그렇게 말해주는 거라고요.”
“무례합니다, 시빌.”
데미안이 빠르게 그를 가로막고 나섰다. 시빌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뭐야. 농담도 못 해요?”
“음…. 좀 부적절하긴 했죠?”
클로디아가 애써 웃었다.
“좋아요, 좋아. 물러난다고요.”
시빌이 손을 내저으며 조금 뒤로 떨어졌다.
“아무튼, 생각나는 건 정말 없는 겁니까?”
“아, 네.”
클로디아가 눈을 깜박였다. 시빌이 휴, 하고 한숨을 쉬었다.
“그러면 다행인데….”
“아마 별일 아니었을 거예요. 디자이어의 말대로 그냥 충격을 받은 걸지도 몰라요.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말아요.”
그렇게 둘러대며 클로디아는 디자이어를 쳐다보다가 조금 놀랐다.
둘러대? 이 사람들에게? 내가 왜?
하지만 클로디아가 의문에 잠기려던 순간, 시빌이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만졌다. 사락, 헝클어진 머리카락이 가닥가닥 떨어졌다.
“하지만 역시 이쪽에 있던 사람들은 놀랄 수밖에 없다고요. 갑자기 빛 사이에서 당신이 나타났는데, 이쪽을 부르다가 갑자기 쓰러지지 않나. 가까이 갔더니 얼굴은 하얗게 질렸지, 머리카락은 이렇게 무참하게 잘려가지고.”
“어, 어머나.”
맞다. 클로디아는 그제야 자신의 어깨를 바라봤다. 길고 탐스럽게 늘어져 있던 금발 머리는 어디로 가고, 그녀의 어깨 위로 깡총하니 잘린 머리카락이 생소한 리듬으로 찰랑거리고 있었다.
“이건 요정들한테 잘라 주느라….”
“들었어요, 망할 요정들.”
시빌이 어이없어하며 요정들을 욕했다.
“세상에, 대관절 만든 놈들도 못 나오는 던전이 어디 있답니까. 게다가 뻔뻔하게시리 공주님 머리카락까지 요구하고.”
“그러게 말이에요. 얼마나 화가 나던지.”
[하지만 클로디아가 머리카락을 정말로 잘라주는 걸 보고 놀랐어!]
얌전히 있던 디자이어가 한마디 거들었다.
“그랬니?”
클로디아가 데미안에게 디자이어를 가져다 달라고 졸라 그가 검을 가져왔다. 그녀는 검신을 손가락으로 부드럽게 쓸며 웃었다.
[네가 그 머리카락을 얼마나 열심히 길렀어? 매일매일 탐스럽고 윤기 나는 머리를 위해 꽃물에 머리카락을 헹궜잖아,]
“으음, 그럴 때가 있었네….”
시빌이 고개를 갸웃했다. 디자이어가 약간 흥분한 것과 정반대로, 클로디아는 심드렁하게까지 느껴지는 목소리로 대답했기 때문이다. 시빌이 입을 열었다.
“…안 아까워요?”
“네?”
“아니, 내 허리까지 치렁치렁한 머리카락이었잖아요. 게다가 결 좋은 황금색 머리카락! 가발로 팔아도 엄청나게 비쌌을걸요. 내가 다 아까운데. 막상 클로디아 본인이 영 미련 없는 것처럼 말해서.”
“아, 그러네요.”
클로디아가 눈을 깜박이더니 쑥스러운 듯 작게 웃었다.
“안 아깝지는 않은데요….”
“…혹시 클로디아의 마음속에 우리가 모르는, 요정들을 위한 긍휼한 마음이 존재하기라도 했나요?”
시빌의 말에 그녀는 어이없다는 듯이 손을 내저으며 웃었다.
“그럴 리가요. 뭐, 요정들 말마따나 머리카락은 또 자라니까요.”
“하지만 아깝고….”
“뭐, 시집갈 것도 아닌데 어때요.”
“예?”
클로디아의 말에 시빌이 얼빠진 목소리로 답했다. 그녀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저 최대 3년 안에는 어차피 하늘섬 못 돌아가잖아요. 그 안에 시집가거나, 하다못해 파티라도 갈 건 아닌데 뭐 어때요. 3년이면 전만큼은 아니어도 길게 길어서 늘어트릴 수 있을 정도로는 기를 수 있겠죠.”
“이런. 깊은 뜻을 몰랐습니다.”
시빌이 과장된 모습으로 박수쳤다. 클로디아 역시 귀족의 예로 우아하게 답례 인사를 했다.
“하지만 방금 전까지는 자랑스럽게 다이어트 얘기하시더니?”
“그러니까 그건 하늘섬 있을 때!”
웃음이 터졌다. 뒤늦게 따뜻하게 데운 수프를 들고 온 헬렌이 문을 두들겼다. 클로디아는 환성을 질렀다.
“세상에! 벌써 냄새 퍼지는 것 봐! 빨리 가져다줘요, 제발!”
웃음이 터졌다.
클로디아를 제외한 세 사람은 마치 세상에 갓 태어난 어린애가 이유식 먹는 것을 구경하는 것처럼 둘러앉아 그녀만 쳐다봤다.
결국 클로디아는 세 사람을 다 쫓아내고서야 편안한 식사를 할 수 있었다.
***
“문제가 좀 생겼습니다.”
클로디아가 천천히 식사를 마치고 만족스럽게 등을 기대려는 순간, 데미안이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저 남자는 항상 이럴 때 산통을 깨는 재주가 있다니까. 그러나 클로디아는 데미안을 책망하는 대신 말해보라는 듯 턱을 들었다.
데미안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 도시에는 의사가 있지만, 신전도 있습니다.”
“신전이요? 그게 왜…. 아.”
클로디아는 빠르게 데미안이 하려는 말을 알아챘다. 시빌이 혀를 찼다.
“그것만 들어도 알아듣겠어요? 와. 공주님이 괜히 공주님이 아니네.”
“하늘섬의 공주님 노릇만 19년을 해왔는걸요. 무시하지 말아요.”
짐짓 도도한 척 턱을 들면서도 클로디아의 마음속에서는 슬그머니 죄책감이 고개를 들었다. 그러니까, 그녀는 지금은 공주님이라면서 유식한 척하지만 사실 그렇게 열심히 공부한 축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하늘섬이 그렇게 뒤집어졌어도 머릿속이 꽃밭이었지. 바보같이.’
그렇게 생각하다가 클로디아는 화들짝 놀랐다. 세상에, 자기 자신을 비하하는 건 나쁜 거라고 노바라가 그랬는데! 나쁜 생각 하지 말아야지! 그러면서도 입에서는 신전에 대한 말이 술술 나왔다.
“제 복장이 문제가 됐군요?”
“예. 그렇습니다.”
“신전의 사제들에게 문제가 생기면 보통 신전으로 가기 마련이지만, 저희는 여관에 왔죠. 소문이 났겠군요.”
“비슷합니다.”
교국은 신전을 각국의 도시에 크건 작건 하나씩은 지어두었다. 그건 신의 교리를 설파하기 위함도 있지만, 상대적으로 작은 교국의 규모를 종교에 의지해 키워보려 하기 위함이었다. 사제들은 백 개의 왕국에서 신성력으로 봉사했다. 처음에는 작은 선행에 불과했지만, 자연스레 세월이 흐르자 백 개의 왕국 중 교국에 빚 하나 지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교국을 비롯한 사제들까지 이곳저곳에서 존중받는 이들이 됐다. 신전들도 점점 교국의 영토로 인정받기 시작했다. 그러니 사제들은 세계 각지를 여행하다 문제가 생기면 신전에 몸을 의탁했다.
그래서 여관 주인은 맨 처음 일행에게 업혀 온 사제 복장의 여인을 보고, 바로 신전으로 향하라고 권했다. 사제들이 아프면 신전에서 치료받으면 그만이다. 회복의 힘을 가진 이들이 차고 넘치는 게 신전이다. 이 도시의 신전은 아주 작았고 관할 사제는 늙었으나 신성력은 그만큼 오래됐고 그 힘이 컸다.
하지만 세 사람은 여관 주인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짐을 풀었다. 여관 주인은 짐을 푼 후에 사제를 신전에 데려다주려나, 하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나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도 사제는 깨어나지 않았고, 일행은 그 사제를 데려다주지도 않았다. 보다 못한 주인이 신전으로 가 관할 사제를 모셔왔으나, 데미안은 묵묵히 거절했다.
여관 주인이 세 사람을 의심하게 된 건 당연했다. 여관 주인뿐만 아니었다. 관할 사제도 당황했다. 그때 여관에서 일행의 마차를 보관하던 마구간 하인이 어렴풋이 일행을 맞았을 때의 기억을 되살렸다. 검은 머리의 남자에게 안겨 있던 사제의 얼굴을 얼핏 보았는데, 그 얼굴이 새하얗게 질리기는 했으나 아주 아름다워 순간 자신이 헛것을 보나 싶었다 했다.
아름다운 사제, 건장한 남자 둘과 넉살 좋은 여자 하나. 사제는 정신을 잃었고 남자들은 다른 이의 접근을 불허한다. 여관의 사용인들은 이제 엄청난 범죄자들이 자신들의 도시에 온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하기 시작했다. 관할 사제는 매일 여관 문턱을 드나들며 아프다는 자매를 한번 보여나 달라고 물었으나 데미안은 완강했다.
결국 관할 사제는 보다 못해 어제 아침, 근처의 큰 도시에 있는 신전에 통신 도마뱀으로 기별을 넣었다. 하늘섬에는 흔한 통신 도마뱀이었으나 대륙으로 내려오면 귀한 도마뱀들이었다. 그런 통신 도마뱀까지 사용했을 정도니 늙고 선한 사제의 마음이 얼마나 애탔을지는 불 보듯 뻔했다.
그 사제는 정말로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자매님에게 성심성의를 다할 만큼 좋은 사람이었던 것이다.
문제는 별로 필요 없는 호의라는 거지만.
클로디아는 한숨을 쉬었다.
“어떻게 되나요?”
“저희는 이 도시를 나가기 어렵게 됐습니다. 큰 신전에서 이곳으로 와 저희의 신분을 확인할 겁니다.”
시간을 단축해도 모자랄 여정인데, 자꾸 들르는 곳마다 발목을 잡히고 있었다. 클로디아는 이마를 짚었다. 아까 사라진 줄 알았던 두통이 다시 돌아오는 것만 같았다.
“용케 구금은 안 당했네요.”
“제가 있으니까요.”
시빌이 자랑스럽게 웃었다. 그랬다. 마법사가 속한 일행을 함부로 구금하려 시도할 만큼 간 큰 이는 없었다.
헬렌의 넉살 좋음도 한몫했다. 헬렌은 일주일 동안 클로디아가 깨어나면 먹을 요리를 만들기 위해 근방의 시장으로 매일 장을 보러 다녔고, 시장 사람들은 사제에게 범죄를 저질러 놓고 그 사실을 감추고 있다는 소문의 주인공이 헬렌임을 알면서도 믿기 어려워했다.
‘저렇게 성격이 좋은데 범죄를 저질렀다고?’
‘예끼 이 사람아. 원래 선한 얼굴로 사기 치는 법이야.’
헬렌의 뒤에서 떠드는 소리가 다 들렸지만, 어쨌든 결정적으로 해코지하는 이는 없었다.
“신분은… 역시 얘기해야겠죠. 어떤 직급의 사제가 온다던가요?”
큰 신전에서 오는 사제들을 속일 순 없지만, 적어도 좀 낮은 직급의 이가 왔으면 했다. 클로디아가 신분을 밝혀도 놀라 자빠지며 지레 겁을 먹고 비밀을 지키기로 약조할 만한. 그러나 데미안은 고개를 저었다.
“운이 좀 나쁜 편입니다.”
“…설마.”
“성기사들이 온다더군요.”
클로디아의 얼굴이 굳었다. 사제가 아니라 성기사라면 문제가 좀 달랐다. 교국에서는 교리에 어긋나는 일을 저지른 사제를 처벌하거나, 사제들을 대상으로 범죄행위를 저지른 이들을 처벌하기 위해 성기사들을 두고 있었다. 교국의 성기사들은 기껏해야 오십여 기. 그러나 그 개개인은 대단히 고강한 무용을 자랑한다고 알려져 있었다. 게다가 그 신성력도 높은 축에 속했다.
“그쪽 도시에 하필 범죄를 저지른 이가 있어 와 있던 성기사 두 명이 이쪽으로 출발했다고 합니다.”
“…대충 넘어갈 수는 없겠군요.”
“예.”
백 개의 왕국 중 교국에 빚 안 진 나라가 없다지만 하늘섬만은 예외였다. 아무르 덕에 포르투의 국민들은 큰 병에 시달리는 일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백 개의 왕국을 다스리는 곳이니 전쟁에 휘말릴 일도 없었다. 지금 교국의 교황은 그 미모로도 유명했지만 야심차기로도 한 가락 하는 자였다.
아마 사제를 사칭한 사람이 클로디아라는 것을 알게 되면, 단단히 약점을 쥔 것처럼 굴 것이다. 혹은 작은 빚이라도 지워 두든가.
“쥬버린 오라버니를 볼 면목이 없게 됐네요….”
“…이해하실 겁니다.”
쥬버린이 가장 신경 써왔던 것도 교국과의 교류였다. 교국은 계속 끈질기게도 부왕의 지병을 치료하겠다고 덤벼왔으나, 쥬버린은 교국의 사제들을 일부러라도 하늘섬에 들이지 않았다. 여러 가지로 얽히고 싶지 않았다는 것이 맞았다.
“어쩔 수 없죠.”
클로디아가 그렇게 말하는데, 갑작스레 눈앞에 작은 스푼이 들이밀어졌다. 클로디아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헬렌이 빙그레 웃으며 옅은 노란색의 투명한 액체를 그녀의 입 앞에 대고 있었다.
“꿀물이야.”
“세상에, 헬렌!”
클로디아는 압, 하고 그 스푼을 물었다. 달콤한 맛이 입안에 퍼졌다. 헬렌이 씩 웃었다.
“심각한 건 알겠지만 일주일 내내 누워 있던 환자를 데리고 너무 긴 이야기는 하지 말자고.”
“아.”
그제야 데미안은 클로디아가 깨어난 지 얼마 안 됐다는 것을 자각한 듯 놀란 표정을 지었다.
클로디아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제가 알아야 될 일인걸요.”
그러면서도 헬렌의 손에서 꿀물을 받아 꼴깍꼴깍 마시는 건 잊지 않았다. 헬렌이 귀엽다는 듯 클로디아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기운 차리면 내일 오전에는 씻자. 누워 있을 때 땀도 좀 흘리고 해서 공주님한테는 좀 힘들 것 같네. 도와줄게.”
“어머….”
그제야 클로디아가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며 재빨리 꿀물이 담긴 그릇을 옆 탁자에 올리고 이불 속으로 숨었다.
“난 몰라!”
일주일 내내 씻지 못했으니 머리카락은 자기들끼리 가닥가닥 뭉쳐 있었고, 얼굴도 그리 상태가 좋진 않았다. 헬렌이 웃었다.
“나가, 둘 다.”
“예에.”
멋쩍어하던 데미안이 뒤로 물러섰다. 시빌도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일어났다. 한마디 더 덧붙이는 건 잊지 않았다.
“괜찮아요, 예쁜데 뭘. 전 당신이 못 씻은 것도 몰랐는걸요.”
“이제 알잖아요!”
이불 속에서 비명이 울렸다. 시빌이 킬킬대며 문을 나갔다. 데미안이 문을 닫으려는데, 클로디아가 소리 질렀다.
“헬렌도요!”
“뭐야, 나도? 수발들어줄 사람이 필요하지 않아?”
“저 이제 쉴 거니까, 괜찮아요!”
하지만 헬렌이 더 완강했다. 헬렌은 결국 클로디아의 옆구리를 살살 간지럽혀 그녀가 까르륵 웃다 못해 이불 밖으로 기어 나오게 만들었고, 클로디아는 헬렌이 머리카락을 살살 쓰다듬어주는 가운데 꿀물을 다 마시고 이불에 누워 잠들었다. 그 바람에 그전에 생각했던 것들은 모두 까먹어버렸다.
***
다음 날 아침 일어나자마자 두 남자는 손수 뜨거운 물을 길어왔다. 정확히는 데미안이 여관에서 쓰는 나무 들통에 찬 물을 길었고, 시빌이 그 물을 덥혔다.
클로디아는 그 안에 쏙 들어가 씻으려 했으나 여관에서 준 비누는 거품이 너무 안 났다. 결국 그녀는 소리를 높여 헬렌에게 도움을 청했고, 헬렌은 웃으며 여관에서 같이 준 까슬한 식물 줄기에 비누를 문질렀다.
“어머나.”
“하늘섬에서는 좋은 비누를 썼을 테니까 손으로 문질러도 거품이 났겠지만, 이런 데서 쓰는 비누는 아무래도 거품이 잘 안 나지. 그래서 식물 줄기 말린 걸 같이 주는 거야.”
“저는 비누 받침인 줄 알았어요!”
헬렌도 이름을 까먹었다는 식물은 단면이 까슬까슬하면서도 손끝에 부드럽게 감겼다. 비누와 같이 줬을 때는 바싹 마른 데다가 납작해 비누 받침인 줄로만 알았으나 물에 적시니 포슬하게 부피를 늘렸다. 클로디아는 비누를 그 위에 문지르는 데 재미를 붙였다. 거품이 퐁퐁 올라왔다.
헬렌은 웃으며 몸을 닦을 천을 갖다 놓고 나갔다.
씻고 나서 나른한 기분으로 앉아 있자니 다시 헬렌이 들어왔다.
“성기사들을 만나기 전에 어쨌든 그 머리는 어떻게 해야 하지 않겠어?”
“음? 머리요? 저는 이 길이도 괜찮은데!”
클로디아가 명랑하게 말하자 헬렌이 한쪽 눈만 가늘게 떴다.
“클로디아, 거울 안 봤구나.”
“거울… 왜요?”
그 말에 불길함을 감지한 클로디아가 거울을 요청했다. 그리고 그녀는 세상에, 하고 놀라버렸다. 여태껏 본 적 없는 거친 모습의 자신이 그 안에 있었다. 헬렌이 뒤에서 팔짱을 끼고 웃었다.
“좀 전위적인 시도라면 성공했지만, 성기사들한테 공주님이라고 말할 거라며. 그 머리로 괜찮겠어?”
“디자이어! 내가 이렇게 자르고 있었으면 네가 좀 도와줬어야지!”
그 말에 방 한 켠에 덩그러니 놓여 있던 디자이어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지금 네가 자르지스에 왜 가는지 생각해볼래?]
칼에는 발이 없다. 당연히 손도 없다. 디자이어가 그녀의 머리 다듬는 걸 도와줄 수 있을 리 만무하다는 뜻이었으나 클로디아는 울상을 지었다.
“아이, 어떻게 이렇게 하고 사람을 만나….”
[요정들의 동굴 안에서는 보는 사람 없으니 괜찮다며.]
“이거랑 그거는 다르지! 공주님이라고 말해야 하는데!”
[여기 네가 공주님인 거 모르는 사람 있냐.]
디자이어가 말을 보탰으나 클로디아는 여전히 얼굴을 펼 줄 몰랐다. 그녀는 헬렌에게 간절하게 물었다.
“저기, 헬렌. 혹시 머리카락 잘 다듬어요?”
손재주 좋은 사람이니 손으로 하는 건 대충 다 잘 하지 않을까? 하는 염원이 담긴 물음이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헬렌은 고개를 저었다. 곧 시빌이 불려왔다. 그러나 시빌도 고개를 저었다. 클로디아가 한숨을 내쉬었다.
“아휴, 어쩔 수 없죠. 하나로 묶든 수를 써야겠네요….”
“저기.”
“네?”
헬렌이 고개를 갸웃했다.
“데미안한테는 안 물어봐?”
“어….”
헬렌의 의문은 지당했다. 클로디아는 시빌에게도 헬렌에게도 머리카락을 잘 다듬느냐고 물어봤지만, 데미안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클로디아가 난처하게 웃었다.
“그야 수르 알파는 당연히 검을 쓰는 분이니까…. 이런 일은 잘 못 하실 테니….”
“내가 알기론 기사들은 종자부터 시작하는 거잖아? 종자들은 자기가 모시는 기사들의 머리도 깎아주지 않아?”
요리사는 정말로 순진하게까지 느껴지는 얼굴로 물었다. 데미안은 입을 닫았으나. 헬렌이 “아니야?” 하고 다그쳐 묻자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제가 만져본 건 남자들 머리뿐입니다. 여자분들의 머리카락은….”
“근데 지금 뭐 어려운 거 시키는 거 아니잖아. 끝만 좀 예쁘게 다듬어주면 된다고.”
헬렌이 클로디아의 머리카락 끝을 붙잡고 말했다.
“뭐 고불고불 말고 그런 건 지금 할 수도 없잖아. 근데 지금 공주님 머리카락이 무슨 계단처럼 층져 있는 걸 두고 볼 수는 없어. 이런 머리는 묶어도 티가 나.”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클로디아의 머리카락을 모아 올려 보였다. 헬렌의 말이 맞았다. 클로디아의 머리카락은 하나로 높이 올려 묶이지도 않았거니와, 아래로 늘어트려 묶으니 끝이 층이 져서 보기가 싫었다.
시빌도 데미안의 어깨를 슥 밀었다.
“그래요, 그래. 모시는 공주님이 저런 모양으로 성기사들을 만나는 건 좀 그렇잖아요.”
“저, 전 괜찮아요.”
클로디아가 시빌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러나 시빌은 손가락을 세워 양쪽으로 흔들어 보였다.
“무슨 소리야? 그렇게 겉모습에 신경 쓰면서.”
“딱히 겉모습에 신경….”
그녀는 소리를 높였다가, 잠시 말을 멈췄다. 그리고는 고민 끝에 말을 골라 이었다.
“…이제는 안 쓰려고 하거든요?”
“에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어요.”
시빌이 노골적으로 웃기는 소리 말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클로디아가 발끈하려던 순간, 둘 사이를 데미안의 말이 가로막았다.
“로드. 제가 가진 도구가 없어 마음에 안 드실 수 있습니다.”
“…어….”
“지금이라도 싫으시면 말씀해 주십시오.”
“하겠다는 거야, 말겠다는 거야.”
데미안의 말을 들은 헬렌이 투덜거렸다. 클로디아는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눈을 피했다. 어쩐지 그 눈을 보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건 어제 깨어나기 직전에 꾼 꿈이 생각나서이기도 했다.
클로디아는 눈을 뜨기 직전 꿈을 꿨다. 자신이 아주 어리디어릴 적이었다. 처음에는 치매를 앓기 전의 부왕이 반갑고 그리웠으나, 이내 그 꿈에서의 데미안이 눈에 밟혔다.
자신이 바라봤을 때, 눈을 피하던 어린 데미안.
하도 오래전인 데다가 자신이 너무 어릴 적이라 그 기억이 맞는 건지, 아니면 단지 꿈일 뿐인 건지 가물가물했으나 그녀는 어쩐지 그 데미안이 자꾸만 생각났다. 지금의 데미안과는 조금 다른 모습이기에 더 긴가민가한 반면, 계속해서 되새김질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이윽고 생각에 잠겼던 그녀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좋아요, 수르 알파. 머리끝만 좀 다듬어 주세요.”
“예. 그러면 제 방에서 단검을 가지고 오겠습니다.”
데미안은 빠르게 방에서 나갔다.
“좋아, 그럼 클로디아는 빨리 머리를 다듬고 있다가 식당으로 와. 여관 주인에게 식당을 좀 빌려서 맛있는 걸 만들었으니까.”
시빌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여관 주인이 우리 의심하고 있다지 않았어요?”
“응. 그래서 돈 대신 다른 거 받더라.”
“뭔데요?”
“마법사가 지펴주는 어마무지한 화력의 불!”
뭐라고요! 누구 맘대로!
시빌이 비명을 올렸다. 헬렌은 코웃음 치며 시빌의 목덜미를 쥐고 방 밖으로 향했다. 시빌이 질질 끌려가며 구슬픈 비명을 질렀다. “제가 삼백만 싱에 몸 팔았다고 너무 막 쓰시는 거 아닙니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
덕분이라긴 뭐하지만, 그래서 데미안 알파는 방으로 돌아왔을 때 상당히 곤란한 상황에 직면했다. 자신이 모시는 상사가 오도카니 앉아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녀는 침대에 앉아 데미안이 들어오는 걸 바라보다가, 그의 시선이 자신에게 닿자 고개를 숙여 버렸다.
“…두 사람 다 나갔어요.”
“예.”
데미안은 단답하며 단검을 내려놔 클로디아가 볼 수 있게 했다. 단검 중에서도 날이 손가락만 한 종류였다.
“보통 기사들은 머리를 이것으로 다듬습니다. 짧게 끝만 빨리 다듬어 드리겠습니다.”
“네.”
클로디아는 눈을 깜박이다가 방 한쪽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데미안은 빠르게 그 뒤에 섰다. 조그맣고 동그란 정수리가 보였다. 가녀리고 작은 어깨도.
데미안은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장갑을 끼고 오겠습니다.”
귀족 여성의 맨살에 손가락을 댈 수는 없는 법이다.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이었고, 그는 몸을 돌렸다. 그러나 클로디아의 말이 그를 붙잡았다.
“수르 알파, 그냥 해요.”
“…예?”
“그냥 하라고요.”
“하지만 맨살이….”
클로디아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한숨 쉬듯이 말했다.
“어차피 시빌도 매일 저녁 저랑 손잡는걸요. 이제 와서 그런 거 지켜서 뭐 해요.”
“저는 로드의 명예를 지킬 의무가 있습니다.”
그제야 클로디아가 눈썹을 조금 들어 올리고 이쪽을 바라봤다. 막 방문을 나가려던 데미안은 이도 저도 아닌 어정쩡한 자세로 그녀를 마주 봐야 했다.
클로디아는 다시 한 번 조그맣게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아무도 모르잖아요.”
“모른다고 해서 없던 일이 되는 건 아닙니다.”
“…무슨 상관이에요. 포르투에서는 당신이랑 나랑 대충 할 거 다 한 줄 아는 사람들도 많은데.”
저도 모르게 거칠게 말이 나갔다. 클로디아는 지레 놀라 입을 닫았다. 데미안의 얼굴이 희미하게 굳었으나, 그는 이내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방문을 나갔다. 클로디아는 짜증이 치밀어오려는 것을 참고 의자에 앉아 그를 기다렸다. 곧 가죽장갑을 낀 데미안이 다시 들어왔다. 클로디아는 아까 헬렌이 가져왔던 거울을 앞에 두고 그 안에 비친 데미안을 바라봤다.
완고한 얼굴의 그는 지금 클로디아의 머리카락을 들여다보느라 그녀가 자신을 보고 있다는 것도 모르는 듯싶었다.
‘꽉 막혀선.’
클로디아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 망할 요정의 동굴이 클로디아에게 그나마 좋은 영향을 미친 게 있다면, 그녀에게 ‘빡쳐’라는 말을 가르친 정도였다. 험한 말을 처음 입 밖으로 내뱉을 때는 이래도 되나, 싶었지만, 말이라도 그렇게 하고 나니 스트레스가 조금은 해소되는 느낌이었다.
‘아, 따지고 보면 가르친 건 디자이어인가.’
요정보다, 정확히는 검의 정령이 가르친 거지만.
클로디아는 짜증 나, 하고 생각하며 거울 속 데미안을 바라보다가, 그가 갑자기 말을 걸어 화들짝 놀랐다.
“가위가 아니라 손이 거칩니다. 아프면 말씀 주십시오.”
“…네.”
데미안의 내리깐 속눈썹에 창문으로 들어온 햇빛이 맺혔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숨을 죽였다. 데미안은 클로디아의 뒷머리를 붙들고 끝을 조심스럽게 잘라내고 있었다. 작은 칼로 자르고 있으니 클로디아의 머리도 당겨야 마땅한데, 조금도 아프지 않은 걸 보니 손에 힘을 꽤 주고 있는 것 같았다. 자연스럽게 데미안은 집중하느라 그녀의 머리카락에 코를 박고 있다고 표현할 만큼 고개를 숙이게 됐고, 클로디아는 편하게 데미안을 감상할 수 있었다.
‘이럴 때 보면 그 말도 진짜인 것 같은데…. 어?’
클로디아는 혼자 생각하다가 저도 모르게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말? 무슨 말? 동시에 관자놀이가 찌르르, 아파 왔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이마를 찡그렸다.
“아파….”
“불편하십니까.”
그 말에 데미안이 손을 멈추고 물어왔다. 클로디아는 화들짝 놀랐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 아녜요. 두통이 좀 와서….”
“…시빌을 부를까요.”
“아니, 잠깐만 그랬어요. 지금은 괜찮아요.”
“예.”
데미안은 짧게 답하고 다시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다시 생각에 잠겼다.
‘이상하네….’
뭔가가 머리 한구석에 새카만 어둠이 도사리고 있는 것 같았다. 자신이 중요한 걸 잊어버리고 있는 기분인데, 그게 뭔지 생각해내려고 하면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고, 관자놀이가 아파왔다.
‘마치 예전에… 노바라가 기다리고 있는 걸 잊어버렸을 때 같은데.’
하늘섬에서의 클로디아는 잘 까먹는 공주님이었다. 그러니까 눈앞의 예쁜 것에 집중하다가 댄스 교습에 조금 늦는 종류의 일은 그녀에게 퍽 흔했다.
하지만 노바라가 기다렸던 날은 그게 한층 더 심해서, 꽃으로 화관을 만들다가 노바라가 기다리고 있던 것을 잊어버렸다. 뭔가 중요한 걸 잊어버린 것 같은데, 하고 화관을 만든 후에야 기억이 나서 그녀는 너무 깜짝 놀라 화관을 집어던지고 노바라에게로 달려갔다. 노바라가 그때 웃었던가, 아니던가.
아마 크게 화를 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노바라는 그런 사람이니까.
‘아니, 그냥 내가 공주님이라 그런 걸지도 모르지.’
클로디아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녀도 이제는 대강 자신의 지위가 만들어내는 사람들의 이중성에 관해 어렴풋이는 짐작하고 있었다. 하늘섬에서 그녀는 모두가 자신을 좋아한다고 생각했으나, 그건 스스로가 공주님이기 때문에 만들어졌던 환상이다.
하늘섬의 모든 이들이 그녀의 앞에서는 미소 지었다. 하지만 그 사람들은 뒤에서도 미소 지었을까? 자신만 보면 딸처럼 귀여워하던 외무대신은 쥬버린이 잠든 후 그녀를 멍청이 취급했고, 투르 사람들은 그녀에게 친절하게 대했지만 결국 영주에게 자신을 팔아넘기려 했다.
어쩌면 노바라도 자신에게는 매일 웃어주었지만, 뒤에서는 그 멍청한 공주는 자신이 없으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렇게 생각하니 클로디아는 조금 속이 상했다.
“이 정도로 괜찮으신가요.”
그때 데미안이 말을 걸었다. 클로디아는 깜짝 놀란 것을 들키지 않으려고 애쓰며 거울을 바라봤다. 머리카락은 어깨에 닿을락말락한 길이로, 그나마 자연스럽게 다듬어져 있었다.
‘아마 툭툭 잘려버린 것을 수습하려면 이 정도로 자르는 건 어쩔 수 없었겠지….’
하지만 작고 지저분한 거울 속의 자신이 낯선 건 어쩔 수 없었다. 클로디아는 가만히 거울 안을 바라봤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손이 많이 가는 공주님.
하늘섬에서는 예쁘기라도 했지만, 이제는 지저분하게 머리카락까지 잘리고 볼품없는 여자애가 그 안에 있었다. 얼굴은 푸석푸석하고 기운도 없다. 자신이 봐도 비웃음 나올 정도니, 헬렌이 왜 머리라도 다듬으라고 했는지 알 것 같았다.
‘이런 몰골로 내가 클로디아 테 포르투라고 말하면 비웃음이나 당하는 건 아닐까.’
“로드?”
생각에 잠긴 그녀를 데미안이 불러서, 그제야 그녀는 정신을 차렸다.
“아, 괜찮아요. 그대로 잘라주세요.”
“예.”
데미안이 어색한 손놀림으로 그녀의 뒷머리를 잘라내기 시작했다. 여전히 머리카락이 잡아당겨지는 느낌도 나지 않을 정도였다. 아마 클로디아가 불편해하는 것을 못 견디는 그의 성격 때문일 것이다.
그녀는 거울을 가만히 바라봤다.
데미안 알파.
그녀와는 달리 아무것도 훌륭한 것을 걸치지 않았지만 누가 봐도 어딘가에서 한 가락 하고 있다는 느낌이 물씬 나는 남자가, 제 머리카락 같은 것에 매달려서 끙끙대는 모습.
아이러니했다. 클로디아는 피식 웃었다.
거울 속의 자신은 정말로 별것 아닌 계집애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지금의 클로디아는 공주인 것을 증명할 수 있는 수단을 하나도 가지지 못했다. 디자이어도 없고, 길고 탐스러운 금발도 없다. 그나마 얼굴이 조금 볼만하긴 하지만 반반한 얼굴 하나로 공주가 될 수 있다면 대륙에는 백 개가 아니라 몇 천 개의 왕국이 생겼을 것이다.
클로디아 자신마저도 거울 속의 스스로가 너무나 평범하고 보잘것없어 보이는데, 하물며 데미안은 어떨까.
이 남자도 사실은 그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멍청하고 손 많이 가는 공주. 제 머리카락 하나도 제대로 자르지 못해서 이런 곳에서까지 손질을 맡기는….
‘아냐.’
마음 한곳에서 불쑥, 부정이 고개를 들었다. 클로디아는 느리게 눈을 깜박이며 거울을 봤다. 거울 속의 남자는 그녀의 뒷목에 거의 얼굴을 파묻듯이 웅크리고 그녀의 머리카락을 자르고 있었다. 옆머리를 자르는 내내 손에 얼마나 힘을 줬는지, 장갑 끝이 잔뜩 주름져 있었다.
클로디아의 마음 한구석이 욱신거렸다.
‘이 사람은… 그냥 원래 상냥해….’
사실은 알고 있다. 데미안이 얼마나 다정한 사람인지. 그는 예전부터 지금까지, 자신에게 상냥한 말 한마디 한 적 없지만, 줄곧 그녀의 머리카락 하나 다치는 것을 그냥 보아 넘기지 않았다. 하늘섬에서 내려와서도 지금까지, 줄곧 그를 싫어한다고 말하고 퉁퉁대던 제게 언제나 같이 대했다.
클로디아는 눈가가 습해지려는 것을 간신히 참아 넘겼다.
안 돼. 울어버리면….
‘너무 많이 울었어….’
자신은 하늘섬에서 내려온 후 너무 많이 울었다. 공주도 못 되는 평범한 여자애보다 더 나쁜 건, 울기만 하는 여자애다. 눈물을 흘리는 것은 당장의 동정은 살 수 있을지 모르나, 상황 자체에는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다는 것을 그녀는 숱한 눈물 끝에 알아차렸다.
적어도 울지 않는 여자애 정도는 되어야 한다. 그래야 마왕도 무찌를 수 있을 테니까.
클로디아는 입을 꾹 다물고 거울 속의 자신을 바라봤다.
한참 후에야 데미안이 겨우 고개를 들었다. 그나마 봐줄 만하게 다듬느라 머리카락은 아까보다 길이가 더욱 짧아졌고, 그녀의 목덜미가 다 드러났다.
“…끝났습니다.”
“그래요.”
클로디아는 거울을 들여다보며 얼굴을 이리저리 돌려봤다. 머리카락은 헬렌만큼 짧지는 않았지만, 공주님의 헤어스타일치고는 상당히 파격적이었다. 예전처럼 머리카락을 곱슬곱슬하게 말아 늘어뜨리려면 대체 얼마만큼의 시간이 걸릴까?
‘그전에, 마왕부터 무찔러야겠지.’
마왕을 없애야 그녀는 예전처럼 다시 연회에 멋진 드레스를 입고 머리카락을 장식한 후 즐겁게 춤출 수 있을 것이다.
그건 가능한 일일까? 어쩌면 이렇게 세계를 떠돌다가, 영원히 포르투를 구하지 못하고 하늘섬의 추락을 멀거니 보게 되는 것은 아닐까?
클로디아는 부정적인 생각을 애써 지우려 하며 거울을 바라봤다. 자신의 드러난 목덜미를 복잡한 얼굴로 내려다보는 데미안 알파가 거기 있었다.
“수르 알파.”
“예.”
클로디아는 그대로 거울에 비친 데미안을 향해 말했다.
“고마워요.”
“…예.”
데미안은 짧은 침묵 끝에 답했다. 클로디아는 제 말 안에 녹아든 감사를 그가 얼마나 알아차렸을지 궁금했지만, 구태여 말을 덧붙이지는 않기로 했다. 어차피 제대로 얼굴을 쳐다보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인데, 그런 것을 그가 알아 무엇할까.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며 거울을 보고 머리카락을 몇 번 쓸어보았다. 예전보다 확실히 뒤통수가 가볍기는 했다. 길고 탐스러운 머리채는 그녀의 자랑이었지만, 클로디아의 목을 뻐근해지게 만드는 원인이기도 했다. 클로디아는 몇 번 얼굴을 돌려 보고, 웃어도 보이고, 눈도 깜박여 보였다.
예전처럼 보자마자 미인이라는 소리는 듣기 힘들지도 모르지만…. 뭐, 나름대로 나쁘지 않았다. 그때였다.
“수르 알파?”
물끄러미 거울 건너로 여전히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남자를 그녀는 그제야 알아챘다. 클로디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부르자, 그녀를 응시하고 있던 검푸른 눈동자는 갑작스레 꿈에서 깨어난 듯 화들짝 놀랐다.
“…죄송합니다. 잠시 다른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요.”
“바닥은 곧 치우겠습니다.”
“놔두세요. 제가 알아서 할게요.”
“…예.”
그가 나가고, 문이 닫혔다. 클로디아는 한숨을 쉬었다. 거의 말도 섞지 않았던 사람인데, 그가 나가자마자 갑자기 지독한 고독이 몰려들었다.
오늘도 날이 길 것 같았다.
***
아무튼 성기사들이 찾아온다고 해서 쉴 수는 없는 노릇이다. 클로디아는 너무 많이 누워 있었고, 온몸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왜 쉬었는데 몸이 더 아플까요?”
“그야 네 의지로 컨트롤한 게 아니잖아. 아플 만도 하지.”
아침을 그렇게 많이 먹여놓고도 걱정이 되었는지, 헬렌은 여관 마당 앞에서 검을 들고 휘두르는 클로디아의 바로 옆에 딱 붙어 있었다. 디자이어가 감탄했다.
[확실히 근력이 붙긴 붙었네, 클로디아!]
“맞아아, 잇! 헬렌 덕분이야!”
“나?”
에잇, 하고 클로디아가 마지막 백 번째 가로 베기를 한 후 뒤로 돌았다. 얼굴은 땀범벅이었으나 막 일어났을 때보다는 기운이 돌았다.
“요정의 동굴 이야기를 디자이어가 다 안 했나 봐요. 저 헬렌이 쥐여준 육포 아니었으면 정말 힘들었을 거예요.”
헬렌이 아리송하다는 얼굴을 했다. 클로디아는 손부채질을 하면서도 그녀에게 동굴 안에서 그녀의 육포를 먹자 힘이 붙었던 이야기를 했다. 헬렌이 흥미롭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런 걸 눈으로 보여줬단 말이야?”
“네에. 재미있었어요.”
“그럼 아까 먹은 식사도 그러려나.”
“아마 그렇지 않을까요? 몸에 유난히 기운이 도는 걸 보면요.”
클로디아가 그렇게 말하며 건틀렛을 낀 손을 몇 번 쥐어 보였다. 그때 마침 다가온 시빌이 그녀에게 찬물을 건넸다.
“마법사 특별 서비스! 살얼음 낀 물!”
“와!”
클로디아가 반갑게 받아 물을 마셨다가, 갑작스레 찬 것을 먹은 반동으로 이마를 찡그렸다.
“아아아….”
“천천히 드시지. 아무튼, 뭐 그건 헬렌 덕도 있고 몸을 오랜만에 움직인 덕도 있을 겁니다.”
시빌은 자연스럽게 그녀의 뒤로 돌아 어깨를 주물렀다. 클로디아가 “땀 냄새 나요.” 하며 얼굴을 붉혔지만, 시빌을 말릴 수는 없었다.
“사람은 마냥 누워 있을 때보다 좀 몸을 더 움직이는 게 훨씬 더 좋습니다. 적당한 운동이야말로 장수의 비결이에요.”
“그 말은 맞아. 아무튼, 그럼 계속 내 요리를 먹으면 클로디아도 데미안처럼 강해지나?”
헬렌의 말에 클로디아는 눈동자를 굴렸다.
“그러면 좋긴 하겠지만…. 수르 알파만큼은 어렵지 않을까요?”
“뭐 현존 인류 최강이라는 분 아닙니까.”
“최강은 아닙니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기가 막히게 타이밍을 맞춘 데미안의 목소리가 들렸다. 시빌은 질렸다는 표정으로 뒤를 돌아봤다. 여관의 뒷마당으로 통하는 문간에는 데미안이 팔짱을 끼고 기대 서 있었다.
“전 수르였던 미다프 님이 계시니까요.”
“아, 나도 그 사람 알아.”
헬렌이 반색했다.
“엄청 무섭게 생긴 할아버지지!”
“아하하하.”
헬렌의 말에 클로디아가 소리 내 웃었다. 어릴 때부터 봐온 미다프 경을 남들이 무섭게 생겼다고 하는 것은 알았지만, 이렇게 눈앞에서 들으니 새삼 놀라웠기 때문이다.
“무섭게 생겼지만, 좋은 분이에요.”
“뭐, 공주님에게는 그렇겠지만, 저희 같은 사람들한테는 무서운 건 사실이죠.”
“아, 마법사들은 특히 그렇지.”
시빌의 말에 헬렌이 맞장구쳤다. 대대로 마법사 길드와 포르투 기사단은 사이가 좋지 않았다. 마법사들은 하늘섬을 볼 때마다 아무르를 연구하고 싶어 안달 냈고, 포르투를 수호하는 포르투 기사단들은 그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결정적으로 몇 대 전의 포르투 기사단장이 아무르를 몰래 훔쳐 가려던 한 마법사를 본보기로 처형하며 일이 커졌다. 마법사 길드에서는 죄를 지은 마법사를 정식으로 재판해달라고 했으나 포르투 기사단은 마법사 길드의 말을 무시하고 포르투의 법대로 처분했다.
그 뒤로 마법사들은 포르투 기사들을 싫어하게 됐다. 물론 포르투 기사단도 마법사를 양식 없는 사람들이라며 경멸하긴 마찬가지였다. 연구를 위해서 범죄도 무릅쓰는 이들과, 뭔가를 지켜야 하는 이들 사이에는 항상 충돌이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그분이 아직도 데미안보다 훨씬 세다는 거야? 나이가 있으시잖아.”
“예.”
데미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미다프 님은 지금도 정정하십니다. 사실 수르 칭호도 제가 이어받기에는 너무 일렀죠.”
“그래? 왜 데미안에게 그렇게 빨리 물려줬는데?”
그러나 데미안은 헬렌의 물음에 고개를 저어 보였다.
“그런 걸 설명하기에는 지금 상황이 애매하군요. 너무 기니 나중에 기회가 되면 말씀드리겠습니다.”
“음?”
“로드. 성기사단이 찾아왔습니다.”
“아. 그래요? 생각보다 빨리 왔네요…? 오늘 저녁에나 올 줄 알았는데.”
클로디아가 눈을 깜박였다. 데미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그럴 줄 알았는데, 만나 보니 이유를 알겠더군요.”
“왜죠?”
“온 사람 중 한 명이 스완 경입니다.”
“…세상에.”
클로디아는 놀라 입을 벌렸다. 헬렌도 눈을 부릅떴다. 시빌만 고개를 양쪽으로 돌려가며 왜요? 왜요? 하고 물었다.
대답은 클로디아가 했다.
“교국의 성기사단장이에요.”
“데미안이 아니었다면 미다프 할아버지 다음으로 검기를 깨우쳤을 거라고 일컬어지는 사람이지.”
설명은 헬렌이 덧붙였다. 물론 약간 경멸 어린 시선도 함께했다. 헬렌은 시빌을 가늘게 뜬 눈으로 쳐다봤다.
“이런 것도 모르다니, 너 대체 아는 게 뭐야?”
“…억울합니다! 저는 마법에 정진하느라 평생 공부에 매진한 죄밖에 없거든요! 게다가 헬렌이야말로 미다프 님을 막 아무렇게나 미다프 할아버지라고 하고!”
“수르는 데미안 거잖아! 내가 그 사람 부하도 아니니 님을 붙일 수도 없고, 뭐라고 불러?!”
투닥투닥하는 소리를 들으며 클로디아는 가볍게 웃었다. 데미안이 여관의 수건을 내밀었고, 그녀는 그 수건을 받아들고 땀을 닦았다.
“어디죠?”
“여관 홀을 통째로 빌렸습니다. 홀로 가시면 됩니다.”
“곧 간다고 전해주세요.”
클로디아는 계단 위로 사라지려다 막 생각난 듯 덧붙였다.
“가로 베기랑 찌르기는 백 번씩 다 했어요. 검 끝 흔들기만 남았어요! 헬렌한테 확인하면 돼요!”
“…알겠습니다.”
무표정하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는 남자를 뒤로하고 클로디아는 바쁘게 계단을 올랐다. 얼른 세수만 하고 내려가야겠다.
***
교국의 성기사는 단 10여 기뿐이다. 그러나 그 위명은 꽤 컸다. 그중에서도 스완 경은 이름보다 구원자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했다. 물론 그것은 하필이면 세이비어 가문에서 태어난 탓이 가장 크다. 하지만 그래서 스완 경이 거기 어울리지 않는 자냐고 물으면, 절대로 아니라고 클로디아는 말할 수 있었다.
‘엄청 커….’
데미안보다 큰 사람은 처음 봤다. 데미안은 포르투에서 키가 가장 큰 사람이었지만, 잔 근육이 많고 날렵한 타입이었다. 스완 경은 애초에 부피부터 달랐다. 데미안보다는 한 뼘 정도가 더 컸고, 어깨와 팔 둘레, 허벅지 둘레는 무지막지했다. 그런 사람이 성기사들의 갑옷을 걸친 채 여관 홀의 한가운데 앉아 있으니, 꽤 큰 홀은 갑자기 작은 단칸방 같이 느껴졌다.
얼굴은 놀라운 미남이라기보다는 인상이 좋은 호남형이었는데, 그는 클로디아를 보자마자 환하게 웃으며 일어났다.
“하늘섬의 후계자를 뵙습니다.”
“어….”
처음부터 자신의 신상을 그가 알고 있을 거라는 사실은 미처 듣지 못했기에 클로디아는 조금 놀라 데미안을 쳐다봤다. 그러나 그 시선에 대한 대답은 스완 경이 했다.
“데미안 알파가 옆에 꼭 붙어 있는 금발의 여인이 대체 누구겠습니까. 이 시국에, 용감한 길을 나선 공주님께 경애를 표합니다.”
그렇게 말한 스완 경은 클로디아의 앞에 무릎 꿇었다. 그리고 손을 내밀었다.
“부디 그 손등에 입 맞추는 영광을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클로디아는 당황했으나 이럴 때 자신이 뭘 해야 하는지는 똑똑히 알고 있었다.
“제 이름은 클로디아 테 포르투. 교국의 구원자에게 제 신뢰를 보냅니다.”
“포르투에 번영을.”
스완 경은 클로디아의 왼손 손등에 입 맞춘 후, 그 손을 자신의 가슴에 얹었다. 엄연히 포르투의 의식이었으며 교국의 성기사가 그녀에게 취할 예는 아니었으나, 클로디아는 그것을 일종의 외교적 제스처로 이해하기로 했다.
즉, 그녀가 사제를 사칭한 것에 대해서 호의적으로 대하겠다는 뜻인 것이다.
시빌은 성기사들은 영 거북하다며 방으로 올라가 있었고, 헬렌은 데미안과 함께 저쪽에서 팔짱을 끼고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니 스완 경과 대화해야 하는 것은 오직 자신뿐이었다.
“송구스럽게 생각해요. 스완 경께 불필요한 걸음을 하시게 만들었군요.”
“이것 또한 인연입니다. 평소 하늘섬의 기쁨으로 이름 높은 공주님을 한 번쯤은 뵙고 싶었습니다.”
“그러셨나요? 저 또한 구원자의 명성은 익히 들었답니다.”
서로를 칭찬하는 말이 몇 마디 오가니 분위기가 부드러워졌다. 스완 경은 쥬버린과 비슷한 인상을 가지고 있었는데 - 물론 쥬버린과 같이 아름다운 얼굴은 아니었지만 - 제법 잘생긴 얼굴인 데다가 금발에 푸른 계열의 눈을 가진 것까지 비슷했다. 다만 스완 경의 금발은 물이 빠진 듯한 밀짚 색이었으며 눈은 쥬버린의 파란 색과 달리 초록색이었다. 하지만 밀짚 색조차 이 사람에게는 잘 어울렸다. 잘 영근 밀알의 색 같달까.
“각자 지금 상황은 알고 있을 테니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교황 성하를 한 번 뵙고 가 주십시오.”
스완 경은 말을 빙빙 돌리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이럴 것 같기는 했지만, 이렇게나 직접적으로… 클로디아는 당황한 척하며 속눈썹을 내리깔았다.
“저도 교국에 계신 성하를 뵙게 된다면 일생의 영광으로 여기겠다고 생각해왔지만, 아무래도 지금은 어렵습니다.”
“마왕 때문입니까.”
“예에. 제 목적을 아신다면 저희가 왜 멜라토르를 지나고 있는지 아실 거라 생각합니다.”
스완 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최단 경로로 자르지스에 가기 위해서겠죠.”
“그렇습니다. 하늘섬의 생명이 하루가 다르게 위태로운 이때, 시간을 헛되게 낭비할 수는 없습니다.”
…요정의 동굴 같은 데에서 낭비했지만. 클로디아는 뒷말은 삼키고 다시 말을 이었다.
“물론 교황 성하와의 복된 만남을 낭비라고 칭하는 것은 아닙니다. 근본적으로는 저의 신성사제 사칭이 교국을 욕되게 한 처사라는 것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벌을 내리시지는 않을망정 이렇듯 만남을 직접 청하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렇지만….”
스완 경이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클로디아는 유수처럼 말을 이었다.
“다만 교국은 이곳에서 한 달은 가야 당도할 수 있는 데다가, 그곳에서 자르지스로 가려면 길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저희가 예상했던 여정보다 훨씬 시간이 걸리게 되지요. 저희의 처지를 이해하시고 교국 방문은 자르지스에서의 마왕 토벌 이후로 미룸은 어떠할는지 감히 요청드립니다.”
그녀의 길고도 유려한 말에 헬렌이 놀란 표정을 지으며 저 건너편에서 가볍게 엄지를 치켜세웠다. 데미안 또한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클로디아는 두 사람에게 눈을 찡긋하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참았다.
그때 스완 경이 말을 이었다.
“그렇군요. 외람된 말이지만, 교국이 멀다는 것 외에 다른 이유는 없으신 것인지요?”
한마디로 거리 핑계를 대는 것인지, 단지 그것 때문인지 확실하게 노선 정하라는 이야기였다. 클로디아는 어쩐지 불안한 기분이 들었지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별다른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습니다. 백 개의 왕국이 저의 자르지스 정벌만 기다리고 있는 이때, 저의 영광만을 위하여 시간을 쓰는 것은 아무래도 저어됩니다.”
“다행이군요.”
“예. 저도 유감… 예?”
클로디아는 저도 모르게 큰 소리를 냈다. 스완 경은 정말로 기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교황 성하께서 마침 방문하고 계십니다. 저희 성기사들이 이용하는 성스러운 길을 이용하시면 하루 만에 가실 수 있는 곳이니, 잠시 들러주시면 어떨까요.”
“…어디인지 여쭤봐도 될까요?”
“슈니첸입니다.”
이런 망할.
클로디아의 이마가 미묘하게 찡그려졌다.
***
슈니첸은 멜라토르의 수도였다. 스완 경은 교황이 극비리에 슈니첸에 와 있는 것은, 멜라토르의 개전 선언을 막기 위해서라고 설명했다.
“최근 왕국들이 심상찮은 조짐을 보이고 있는 건 알고 계시지요?”
“예. 알고는 있습니다.”
스완 경에게 넙죽넙죽 대답하는 것치고는 영 좋지 않은 표정의 클로디아가 답했다. 스완 경은 조금 당황했지만, 말을 이었다.
“그중에서도 멜라토르는 가장 먼저 전쟁을 준비하러 나선 곳 중 하나입니다. 하지만 포르투의 자르지스 정벌 선언과 더불어, 교국에서도 필사적으로 개전을 막기 위해 왕국들을 오가고 있습니다.”
해달라고 한 적 없는데.
빈정거리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은 클로디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포르투가 없는 사이에 교국이 왕국들 사이의 의견 전달자라도 되는 듯 행동했다는 말이다.
본래 하늘섬이 이런 상황이 아니라면 교국은 아마 포르투의 눈치를 보느라 이런 짓은 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니, 쥬버린 오라버니가 잠들지 않았다면 애초에 멜라토르가 전쟁을 준비하지도 않았겠지.’
클로디아가 씁쓸하게 생각했다. 스완 경이 덧붙였다.
“최근 멜라토르의 왕자님께서 근방을 순시하다가 좋지 않은 일을 당하셨습니다. 문제는 상대가 근방 국가의 지방 영주였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멜라토르의 왕자는 지금은 결혼했지만, 결혼 전에는 아름다운 여자들만 보면 정신을 못 차리는 타입이었다. 클로디아 또한 그에게 잠시 시달린 경험이 있었다. 스완 경은 최대한 설명을 돌려가며 했지만, 클로디아는 짧은 시간에 걸쳐 그 왕자가 국경의 숲에서 사냥하다가, 근방의 호수에 소풍을 나온 지방 영주의 딸을 발견한 후 겁간하려 했다는 이야기로 아주 잘 알아들었다.
그리고 그런 주제에, 그 영주의 딸이 자신을 거부하고 상처를 입히자, 실수로 국경을 넘었다는 점을 들어 전쟁을 일으키려 하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클로디아의 얼굴이 한층 더 이상하게 변했다.
“…그러면….”
“어떻게든 성하께서 중재하려 하십니다. 그 영주 가문은 마침 성하의 먼 친척이기도 하거든요.”
“그런가요….”
하지만 어찌 됐든 클로디아와는 별 관계 없는 이야기였다. 그녀는 눈썹을 들썩였다. 이런 이야기를 길게 하는 이유는 뭘까. 스완 경이 빠르게 덧붙였다.
“이런 이야기까지 공주님께 하는 이유는, 성하께서 불필요한 의심이나 문제가 될 만한 소지는 모두 제거하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가문의 일 때문에 성하께서 직접 발 벗고 나섰다는 이야기가 퍼져봐야 저희 쪽도 좋을 것이 없으니까요.”
“그렇군요.”
“성하께서도 많은 시간을 빼앗지 않으실 겁니다.”
스완 경이 이렇게까지 말하는 데야 별수 없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자면 이건 권유가 아니라 거의 강요였다. 클로디아가 댔던 핑계가 소용없어진 이상, 그녀도 결국 슈니첸에 들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클로디아가 고개를 끄덕이자 스완 경은 정말로 기쁜 듯이 감사하다며 연신 인사했다.
“하늘섬의 계승자를 제 손으로 직접 모시게 되다니 영광입니다.”
“저야말로요. 출발은 언제로 할까요?”
“음, 성하께서는 모레 오후에 뵙자고 하셨습니다. 여유 있게 내일 출발하셔도 되겠지만….”
모레 오후란 시간이 즉각 나오는 걸 보니 아마 이들은 작정하고 클로디아를 데려가려던 것 같았다. 이제 클로디아도 이 정도는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거절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지만.
클로디아는 조심스럽게 일어났다.
“좋아요. 지금 바로 출발하도록 하지요.”
“괜찮으시겠습니까?”
“네. 별로 걸리는 것도 없고요.”
클로디아의 말에 스완 경은 감사하다며 가볍게 인사했다.
“저도 곧 성스러운 길을 준비하겠습니다.”
“부탁드립니다.”
클로디아는 고개를 숙였다. ‘성스러운 길’은 성기사들의 여정이 워낙 길어 신이 보다 못해 그들에게 내려줬다는 신성 능력이었다. 성기사들끼리는 서로 간의 물리적 거리를 반 이상 단축할 수 있었다. 성기사들의 일행들도 마찬가지였다. 클로디아는 거기까지 생각하다가 문득 다른 것을 떠올렸다.
‘혹시 남부에 있는 성기사는 없을까?’
그럼 적당히 교황과 만나 성기사들의 ‘성스러운 길’을 사용할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해볼 텐데.
하지만 먼저 죄를 지어놓고 대놓고 부탁하기엔 영 면구스러운 일이기도 하다. 클로디아는 이럴 때는 공주라는 것이 참 불편하다고 생각하며 한숨을 쉬었다. 자르지스에 가서 마왕을 토벌한다는 핑계는 좋았다. 하지만 마왕을 죽이기 위해 사제 사칭이라니. 이게 무슨 개망신이란 말인가….
***
방으로 돌아와 짐을 꾸렸다. 물론 데미안이 가장 반대했으나 그도 사실 별 수단이 없긴 마찬가지였다.
문제는 시빌이 펄쩍 뛰었다는 것이다.
“저도 가야 해요?!”
“네. 무슨 문제라도….”
“저는 사제들이 너무 싫은데!”
마법사와 사제들이 상성이 맞지 않는 건 익히 다들 알고 있는 것이긴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시빌만 떼어놓고 갈 수도 없는 노릇이다. 결국 시빌은 투덜대면서 자신은 교황이든 사제든 만나는 자리에는 절대 가지 않을 거라고 맹세했다.
“디자이어는 내 맘 알죠?”
[몰라, 내가 어떻게 알아.]
마법사와 상성 나쁘기로는 한 가락 하는 디자이어도 어이없어하며 딱 잘랐다.
[너 삼백만 싱 받았잖아.]
“와, 디자이어 진짜. 그 돈 자기가 낸 것도 아니면서.”
[굳이 따지자면 포르투 왕가에서 나오는 돈은 내 덕에 생긴 거거든?]
디자이어와 시빌이 입씨름하는 동안, 데미안은 말없이 짐을 꾸렸다. 헬렌이 견과류와 꿀을 굳혀 만든 과자를 클로디아의 입안에 넣어주었다. 단것이 입안에 들어오니 그나마 기분이 좀 좋아졌다.
“그러면 가서 교황만 만나고 바로 돌아오면 되는 건가.”
“그럴 거예요. 어차피 잠깐 만나서 ‘죄송합니다’ 사과하고, 이걸로 너희한테 빚졌다고 공고하게 박아주는 거니까요, 뭐. 교황은 이 기회에 하늘섬 기를 좀 꺾어보겠다 이거겠죠.”
클로디아가 콧방귀를 뀌었다. 클로디아의 입에 과자를 물려주던 헬렌의 표정이 미묘하게 바뀌었다.
“클로디아, 너….”
“예?”
“희한하네. 요정의 동굴에 다녀온 뒤로 사람이 좀 바뀌었달까. 뭔가….”
시빌이 바로 끼어들었다.
“말투가 엄청 험해졌어요.”
“그거다!”
클로디아는 눈이 동그래졌고, 헬렌이 손가락을 딱 튕겼다.
“맞아! 클로디아는 항상 거친 말을 잘 못 하는 타입이었는데 깨어난 다음부터 좀 미묘하게 말투가 거칠어졌어.”
“제가요…?”
“그래. 뭐 예를 들면…. 방금 말했던. ‘공고하게 박아주는’ 뭐 그런 거?”
헬렌의 말에 클로디아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야 비속어긴 하지만…. 헬렌이 킥킥 웃었다.
“나야 그런 말 쓰는 클로디아도 귀엽지만, 공주님은 그런 거 조심해야 하는 거 아냐?”
“그, 그랬나요….”
클로디아는 새빨개진 얼굴로 디자이어를 노려봤다.
“이게 다 너 때문이야.”
[갑자기 내가 왜!]
“네가 동굴에서 이상한 거 가르쳐서 그렇잖아!”
“이상한 거요?”
시빌이 흥미로워했다. 디자이어는 억울하다는 듯 주절주절 동굴에서 있었던 일을 늘어놨다. 클로디아가 화를 냈던 일과, 그것과 별개로 아무리 열이 받았어도 나빠! 화가 나! 바보! 같은 말밖에 할 줄 몰라 자신이 여러 가지 의미로 스승 노릇을 했음을. 시빌은 배를 잡고 웃었고, 헬렌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데미안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는 너도 맞장구 잘 쳤으면서 나한테 왜 그래!]
“너는 나를 말렸어야지!”
“뭐, 말이라는 건 가끔 스트레스 해소 수단이 되기도 하니까요.”
시빌이 눈에 괸 눈물을 닦고 둘을 말렸다.
“가끔 너무 곱게 말하는 클로디아가 사실 저는 좀 놀랍긴 했죠. 제가 클로디아 상황이었으면 말끝마다 입에 욕을 달고 살았을 것 같은데, 예쁘게만 말하니까.”
“으이그, 귀여워 죽겠네.”
헬렌이 클로디아의 볼을 두어 번 두들겼다. 시빌은 본격적으로 클로디아가 배운 말들에 대해 흥미로워했다.
“그래서 무슨 말들을 주로 했는데요? 디자이어, 뭐 가르쳤어요?”
디자이어는 신이 나 늘어놨다.
[빡친다, 나쁜 새끼들, 고자나 돼라….]
“푸학학학학!”
공주님 입에서 나왔다고는 믿을 수 없는 말들뿐이었고, 클로디아는 즉각 항의했다.
“저 중에 심한 건 뺐거든요!”
“심한 거요? 어느 거~?”
시빌이 그녀를 재미 삼아 놀렸고, 클로디아의 얼굴이 더 새빨개졌다. 그때였다.
똑똑. 누군가 문을 두들겼다. 모두가 방문을 쳐다봤고, 클로디아가 “들어오세요!”라고 말했다.
“실례합니다. 저희는 ‘성스러운 길’의 준비가 모두 끝났습니다.”
“아.”
문을 열고 들어온 건 스완 경이었다. 시빌이 펄쩍 뛰더니 데미안의 뒤로 도망갔다. 마법사들이 사제들을 싫어하는 건 알지만, 저 정도인가? 하고 클로디아는 의아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습니다. 저희도 곧 나갈게요.”
“예. 그럼 밑에서 기다리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스완 경은 문을 닫으려다가, 틈새로 말했다.
“동료분들이 사이가 참 좋으시군요.”
그런가. 클로디아는 방 안을 둘러보다가, 환하게 웃었다.
“감사합니다.”
스완 경도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며 문을 닫았다.
[우리 사이가 좋아 보인다고? 저 사람 눈이 삐었나 봐!]
디자이어가 투덜댔으나 클로디아는 디자이어에게 주먹을 들어 보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
교국이 조그맣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교황쯤 되면 꽤 권위 있는 자다. 어딜 가나 환영받았고, 설령 종교에 관심이 없는 자라고 해도 그를 홀대하기는 어려웠다.
더욱이 지금의 교황이라면 더욱 그랬다. 교황인 켈록스 2세는 머리 회전이 빠른 자였다. 젊은 여인의 몸으로 교황에 오른 것부터가 그녀의 수완을 입증했다. 물론 거기에는 성녀라고 불릴 정도인 그녀의 미모도 한몫했다. 어쨌든 예쁜 외모는 그렇지 않은 것보다 상대에게 호감을 사기 쉽다.
켈록스 2세는 슈니첸 외곽의 큰 저택에 머물고 있었다. 멜라토르의 왕자는 그녀에게 왕성에 머물길 권했으나, 그녀는 정중하게 거절했다. 이유야 종교에 귀의한 자가 속세의 권력에 의지해 그 그늘에서 몸을 쉬는 것이 그리 좋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으나, 실상은 달랐다.
멜라토르의 왕자가 끈덕지게도 그녀에게 집적댔던 것이다. 왕자의 여성 편력은 이미 유명했으나, 교국의 수장인 자신에게도 이럴 줄은 몰랐던 터라 그녀는 좀 짜증이 나 있었다.
“클로디아 테 포르투는?”
“모셔왔습니다. 지금은 쉬고 계십니다만, 빠른 접견을 원하신다는 의견을 전달해 오셨습니다.”
켈록스 2세의 가장 자랑스러운 기사인 스완 경이 자신에게 보고해왔다.
솔직히, 이곳의 소도시에서 일어난 사제 사칭 건을 그녀는 대수롭잖게 생각했다. 그야 작은 도시의 늙은 사제쯤 되면 그에게는 상당히 엄청나고도 곤혹스러운 일이겠지만, 교국의 사제를 사칭하는 사람들은 제법 된다. 도둑 길드에서는 사제복을 아예 몰래 팔고 있다고 하니 그 수가 얼마나 될지 짐작도 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그 사제를 사칭한 자가 클로디아 테 포르투라면 좀 달랐다. 슈니첸에서의 일은 대강 해결된 것 같으니 자신이 가겠다고 스완 경이 자원했을 때만 해도 ‘왜 굳이….’ 하는 생각이었지만, 교황은 그때 지원해준 스완 경에게 고마워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클로디아 테 포르투라니.
“어때 보이던가?”
“음….”
스완 경이 미간을 모으며 고민하다가 말했다.
“솔직히 그리 좋아 보이지는 않으셨습니다.”
“어떤 면이?”
“…대저 가장 천한 자야말로 가장 귀한 자라고 일컬어지기는 합니다만, 자르지스 정벌을 위해서라고 하기엔 일행이 너무나 초라합니다. 데미안 알파가 아니었다면 제 눈을 의심했을 것입니다.”
하늘섬의 왕자와 공주 남매는 네 개의 대륙에서 가장 유명한 이들이었다. 쥬버린 테 포르투는 모든 미혼 아가씨들의 선망을 받았으며, 클로디아 테 포르투는 대륙에서 쇄도하는 청혼장과 선물을 모두 모으면 하늘섬이 가라앉을지도 모른다는 농담의 주인공이었다.
그러나 스완 경은 클로디아 테 포르투의 모습이 자신이 익히 아는 것과는 상당히 달랐다고 말했다.
“아마 그 여정을 노출하지 않기 위해서였겠지만, 사람들이 클로디아 테 포르투에 대해 아는 모습과는 사뭇 다릅니다.”
“이를테면?”
“조금 후 만나면 아시겠지만….”
스완 경은 미간을 모았다.
“허술하다고 표현하기에는 그 표현이 조금 모자라고, 순진하다는 것이 맞을 것 같습니다. 뭐랄까….”
켈록스 2세는 흥미롭게 스완 경의 말을 들었다. 스완 경은 대부분의 경우 누군가에 대해 꽤 직관적으로 논했지만, 이번에는 그게 조금 힘든 것 같았다.
클로디아 테 포르투가 대관절 어떤 모습이기에.
“되었다. 있다 만나보면 알겠지. 아무튼, 스완 경.”
“예.”
“채비를 해.”
켈록스 2세의 말에 스완 경의 눈동자에 이채가 돌았다. 그녀는 스완 경의 그런 모습을 재미있어했다. 스완 경은 성기사로서 일생의 반 이상을 여정으로 보낸 자다. 성기사가 된 15세 때부터, 삼십 대 초반이 된 지금까지 그에게 긴 여정을 명령한 것은 잦았고, 스완 경은 언제나 신실함에 기대어 그 명을 받았다. 그런 스완 경이 이렇듯 기뻐하는 것은 처음 보았다.
“경을 이렇게 기쁘게 만든 것은 클로디아 테 포르투인가, 아니면 데미안 알파인가.”
“…송구스럽습니다.”
“뭐, 좋겠지. 그 나이에도 향상심이 남아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켈록스 2세는 짙은 미소를 지었다. 이제 클로디아를 만나는 것이 기대되기까지 했다. 대륙을 호령할 만큼의 미모를 가진 공주는 대체 어떤 모습이기에 스완 경에게 저런 소리를 하게 만들었단 말인가.
***
“아, 좋다….”
켈록스 2세와 스완 경이 만난 그때 클로디아는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고 있었다. 그녀의 옆에 있던 시녀가 빙그레 웃으며 클로디아의 어깨에 다시 따뜻한 물을 끼얹었다.
“물 온도는 괜찮으신가요, 전하?”
“네, 고마워요.”
신분을 따지자면 클로디아가 그들에게 하대하는 것이 맞았으나, 그녀는 도무지 모르는 사람에게 반말을 하기가 어려웠다. 하늘섬의 시녀들도 사실은 클로디아와 십 년 이상 알았기 때문에 편하게 하대를 했던 것에 가까웠다. 시녀는 민망한 듯 웃었다. 클로디아에게 계속 하대하라고 부탁했으나, 끝까지 말을 놓지 않는 공주님이 조금은 불편하게 느껴진 탓이다.
물에서는 좋은 향기가 났다. 욕실은 스무 명의 클로디아가 손을 잡고 춤을 춰도 될 만큼 넓고 깨끗했으며, 생화가 장식돼 있었다. 클로디아는 뭣보다 생화 장식에 깊은 감명을 느꼈다. 포르투 왕성에서는 매일같이 본 광경이었으나, 그간 작은 마을들 위주로 여행해온 그녀에게는 감동적인 순간이었다.
생화 한 송이를 뽑아 만지작거리고 있는 그녀를 보고 시녀가 무엇을 생각했는지 그녀에게 물었다.
“혹시 꽃잎을 띄워드릴까요?”
“음? 아니에요, 괜찮아요. 나 때문에 그런….”
“무슨 소리세요. 귀한 분들을 위한 것인걸요. 부담 갖지 마세요.”
그렇게 말하는 시녀의 얼굴에는 ‘얘 하늘섬의 공주 맞아?’라는 표정이 역력했다. 클로디아는 눈알을 굴리다가, 뜨거운 물에 코까지 담가버렸다.
‘그러게. 나 왜 이런 게 부담스럽지.’
하늘섬에서는 적어도 이틀에 한 번씩은 장미꽃잎에 목욕하고 향유로 발을 씻었는데.
결국 말을 전달받은 다른 시녀가 분홍색 장미꽃잎을 어디선가 빠르게 가져와서, 물 위에 와르르 쏟았다. 물 위에 동동 떠다니는 꽃잎들을 클로디아는 물끄러미 바라봤다.
너무 예뻐….
하지만, 불편해….
이 불편함이 어디서 온 감정인지 잘 알 수 없었다. 호화스러운 대접인지, 아니면 이 저택에 머물고 있는 교황 때문인지.
클로디아는 코로 숨을 내쉬었다. 뽀그르르르, 물방울이 수면 위로 올라왔다.
스완 경은 직접 ‘성스러운 길’을 열어 그들을 슈니첸으로 안내했다. 그 길은 무지갯빛으로 이뤄져 있었으며 일행들은 발끝을 디딜 때마다 폭신폭신 구름 위를 걷는 듯한 감촉에 굉장히 신기해했다. 디자이어마저 감탄할 정도였으니 오죽했겠는가.
스완 경은 하루 정도가 걸린다고 했지만, 정확히 ‘성스러운 길’을 통해 슈니첸 외곽의 저택까지 도착하는 데는 네 시간 정도가 걸렸다. 일행들은 융숭한 대접을 받고 각자의 방으로 안내됐다. 시빌은 성기사들 같은 건 싫다고 말했던 것은 까맣게 잊은 듯, 저택의 호화스러운 식사와 아름다운 방에 매료되어 겅중겅중 뛰었다.
“클로디아! 내 방의 침대를 좀 봐요! 제가 파묻힐 것 같다고요!”
식사가 끝나고 모인 시빌의 방에서 그가 하도 부산스럽게 구는 통에 헬렌이 결국 시빌의 목덜미를 잡고 꿀밤을 먹인 후에야 다들 상의 비슷한 걸 할 수 있었다.
“교황이 그럼 클로디아를 만나서 뭐라고 할까?”
“뭐, 별말은 안 할 거예요.”
“우리도 가야 해요?”
“일단은요. 모두들 저의 사제 사칭을 도와준 사람들이잖아요. 일종의 공범인 거니까….”
공범이라는 말에 다들 데룩데룩 눈을 굴렸다. 그때 시빌이 손을 들었다.
“저기, 저는 빠지면 안 되나요?”
“이런, 시빌. 아무리 마법사라도….”
“그게 아니라요.”
시빌이 어깨를 으쓱했다.
“옷이 없거든요.”
뜻밖의 말에 클로디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시빌이 투덜거렸다.
“뭐 공주님이나 데미안은 괜찮을지 모르겠지만, 저는 그렇게까지 높은 분이라고 하니까 좀 무섭거든요. 게다가 이런 허름한 옷을 입고 그 사람들 앞에 가도 될까? 싶고요.”
그제야 클로디아는 시빌을 쳐다봤다. 시빌은 로브 안에 언제나 면 셔츠와 바지를 입고 있었는데, 그 옷들은 마법 덕에 그리 지저분하지는 않았으나 호화스러운 방에 어울리는 복장은 아니었다. 시빌이 말을 이었다.
“솔직히 전 아까 이 방에서 자면 된다고 했을 때 이 옷으로 저 하얀 침대에 누워도 되나? 세탁비 받는 건 아닌가? 싶었다니까요.”
헬렌이 아, 하고 말을 보탰다.
“조금 철없는 말이긴 하지만, 나도 시빌의 말에는 동감해. 물론 침대에 누워도 되나? 하는 말은 아니고…. 혹시 나 같은 사람이 클로디아 옆에 있어서 안 좋은 취급을 받을까 봐.”
“어머나,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클로디아가 사색이 되어 헬렌의 말에 답했으나 헬렌은 고개를 저었다.
“클로디아는 높으신 분들을 몰라. 물론 클로디아는 대륙에서 가장 높은 사람이라고 해도 무방한 데다가, 우리는 클로디아의 성격이 상냥하다는 걸 잘 알아. 하지만 대부분의 높은 분들은 좀 다르지. 우리 같은 평민들은 그 사람들에게 꽤 눈에 거슬리는 존재라구.”
시빌이 침대 위에 앉아 턱을 괸 채 맞받아쳤다.
“거슬리는 존재라기보다는 솔직히 시야에 없는 존재죠. 저희 같은 사람들이 그 사람들 앞에 서면, 다들 ‘이런 게 있었나?’ 하는 눈으로 쳐다본다니까요.”
“그런….”
“그래서 말하는 거야, 클로디아. 우리는 네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지만, 교황이라는 사람은 다를 수도 있잖아. 귀한 공주가 우매한 평민들 때문에 범죄를 저질렀다고 생각할 수도 있어. 물론 완전히 틀린 말도 아니고.”
“무슨 소리예요. 헬렌은 저를 도우려고….”
헬렌이 클로디아의 말에 손을 내저었다.
“요는, 우리 같은 사람이랑 같이 있는 광경만으로 안 좋아 보일 수 있다는 거야. 나는 내가 섣불리 클로디아 옆에 섰다가 클로디아가 오해를 사는 걸 막고 싶어.”
클로디아는 불안한 눈으로 데미안을 쳐다봤다. 그러나 데미안은 뜻밖에 헬렌의 말에 공감하는 대답을 내놨다.
“일리는 있습니다.”
“…수르 알파.”
“켈록스 2세는 빈민 구제에 큰 뜻을 품고 공격적으로 사제들을 늘리는 데 집중하고 있는 사람으로 유명합니다만, 또 다른 면모도 있습니다.”
“뭔데요?”
“50여 명의 성기사들 중, 그녀를 호위하는 10여 명의 성기사들은 모두 좋은 가문 출신들입니다.”
클로디아는 눈을 깜박였다. 그랬던가…? 데미안은 말을 이었다.
“스완 경만 해도 검의 정수라는 세이비어 가문 출신입니다. 그야 무력 덕분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성력은 반드시 귀족 가문의 자제에게서만 나는 것은 아니지요. 하지만 켈록스 2세는 대부분의 성기사들을 왕족, 혹은 귀족들로만 뽑았습니다. 각 대륙의 유력한 가문 출신 기사들이 교국에 다 모여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
“켈록스 2세에게 나쁘게 보여서 좋을 것이 없는 입장입니다. 고민을 해보시는 게….”
그러나 데미안의 말에 클로디아는 바로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면 더욱 싫어요.”
“…로드.”
“평민이든 아니든 그런 건 상관없어요. 나는 헬렌과 시빌을 좋아해요.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로 나를 가늠한다면, 그것 또한 저에게는 좋은 일이에요. 두 사람은 아주 좋은 사람들이고, 저는 더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겠죠.”
“클로디아.”
헬렌이 감격한 표정을 지었다. 클로디아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두 사람 때문에 제가 안 좋은 평가를 받는다 한들 상관없어요. 그렇다고 해서 제가 클로디아가 아니게 되는 것도 아닌걸요. 오히려 저는 켈록스 2세가 제게 그런 소리를 한다면 그녀야말로 교황의 자격이 있는지 의심하게 될 것 같아요.”
“…로드의 말씀이 맞습니다. 제가 어리석었습니다.”
데미안은 바로 클로디아에게 답했다. 시빌만 꿍얼거렸다.
“하지만 싫은데….”
[솔직히 말해봐, 시빌.]
그때 디자이어가 짓궂게 물었다.
[옷은 핑계고 너 그냥 교황이 싫은 거잖아?]
그런 건가. 클로디아가 눈을 가늘게 뜨고 시빌을 바라봤다. 시빌은 눈을 피하다가, 결국 다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드러누웠다.
“아! 마법사들 사이에는 신전 한번 잘못 디디면 3년은 재수 없다는 농담도 있단 말이에요! 근데 지금 저는 성기사들도 모자라서 교황을 만나게 됐으니 안 불안하고 배겨요?”
“그딴 미신을….”
“미신이라니! 저는 지금 마왕을 무찌르러 가는 중인데, 하나라도 안 좋은 건 피하고 싶은 심정을 모르겠어요?”
헬렌이 쓴웃음을 지었다. 클로디아는 한숨을 쉬며 웃었다.
“어쩔 수 없죠. 그렇게 싫어하는 걸 시킬 순 없는 노릇이니…. 시빌은 방에서 쉬어요.”
“감사합니다!!”
시빌이 기다렸다는 듯 넙죽 클로디아의 호의를 받아들였다. 디자이어가 [삼백만 싱….] 하고 중얼거렸으나 이미 결정된 일에 입을 더 대기도 뭐했다. 그 밤은 그렇게 지나갔다.
그리고 클로디아는 지금 물속에서 어쩐지 시빌의 마음을 십분 이해할 것 같은 기분이 됐다. 꽃잎 목욕에다가, 저쪽에는 그녀를 위한 향유병과 부드러운 수건들이 준비돼 있었다. 시녀들은 공손하게도 그 옆에서 손을 모으고 있었다.
“혼자 할 수 있는데….”
그간 여관에서 홀로 씻은 기간이 얼마나 된다고, 남의 손이 더 불편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결국 물 밖으로 나온 클로디아는 그녀들의 손에 의해 머리를 말리고 속옷을 갈아입었다. 그녀를 위해 준비된 속옷을 입다 말고 클로디아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건….”
드레스를 입기 위해 걸쳐야 하는 슈미즈였다. 시녀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성하께서 오랜 여정에 미처 복장을 준비하지 못하셨을 전하를 위해 배려하셨답니다.”
“아….”
클로디아는 잠시 슈미즈를 만지작거렸다. 클로디아의 망설임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시녀가 덧붙였다.
“전하의 푸른 눈동자와 아주 잘 어울릴 만한 새파란 드레스랍니다. 급하게 준비한 것 치고는 좋은 옷이니 아마 마음에 드실 거예요. 담비 털로 만든 하얀 숄도 함께 걸치면….”
“…괜찮아요.”
“전하?”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분에 넘치는 대접이에요. 그냥 제가 입고 온 옷으로 갈아입겠습니다.”
“하지만….”
클로디아는 도무지 그 드레스를 입고 싶지 않았다. 첫 번째는 어제 시빌에게 그렇게 이야기했기 때문이다. 교황의 배려는 아주 훌륭했다. 원래대로라면 드레스를 입고 가는 것이 좋다. 교황의 호의를 받아들였다는 인상을 주는 것이 좋으니까.
하지만 시빌에게 그런 말을 한 마당에 자신만 드레스를 입고 가는 것도 웃기는 노릇이다. 물론 그녀의 말도 모두 진심이었기 때문에, 클로디아는 굳이 그 멋진 옷을 입고 싶지 않았다.
드레스를 입지 않는다고 해서 자신이 클로디아 테 포르투가 아니게 되는 것은 아니다.
클로디아는 어제 스완 경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데미안 알파가 붙어 있는 금발의 여인이 대체 누구겠습니까.’
스완 경을 만나기 바로 직전, 클로디아는 거울에 비친 자신을 보며 생각했다. 대체 드레스도 입지 않은 자신을 누가 공주로 믿어주겠느냐고. 하지만 그녀는 곧 스완 경의 말 덕에 알 수 있었다. 꼭 그런 것만이 자신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라는 걸.
데미안 덕분이기는 했지만, 클로디아는 다른 것 또한 자신을 증명할 수단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그때 어렴풋이 깨달았다. 데미안 알파라는 이름 외에 다른 것을 넣어 보면 금세 알 수 있다.
공주라는 이름을 증거 하는 것들은 뭐가 있을까.
우아한 태도, 명석한 머리? 정치적 스탠스?
그제야 그녀는 쥬버린이 그렇게도 열심히 공부한 이유를 약간은 알게 된 한편, 그가 얼마나 이율배반적인 태도를 갖고 있었는지도 알아챘다. 쥬버린은 자신의 놀이 상대에 불과했던 데미안과도 항상 같이 공부했다. 교육이라는 것이 사람을 얼마나 충실하게 만드는지, 나아가 자신을 증거 할 수 있는 수단이 된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쥬버린은 자신에게는 여자의 행복만을 늘어놨다. 좋은 남편, 예쁜 얼굴, 아름다운 삶.
물론 그게 쥬버린의 배려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클로디아는 이제는 그 배려가 제게 독이 되었다는 것을 여실히 알게 됐다.
“…전하?”
시녀의 물음에 그녀는 상념을 멈췄다. 그리고 미소 지어 보였다.
“말씀드린 대로예요. 제가 입고 온 옷들을 가져다주세요.”
클로디아의 말투는 강력했다. 시녀는 자신이 몇 번을 권해도 그녀가 제 말을 듣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알아챘고, 고개를 숙였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클로디아는 시녀가 가지고 온 셔츠와 가죽 재킷을 꿰입으며 심호흡했다.
나는 클로디아 테 포르투, 클로디아 테 포르투.
***
“클로디아 테 포르투입니다. 켈록스 2세 성하를 만나 뵙게 되어 기쁩니다.”
‘애걔.’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다. 켈록스 2세는 오후의 시원한 바람이 가장 잘 드는 자리에 클로디아 테 포르투를 청했고, 그 자리에 온 그녀를 보고 저렇게 생각했다. 대저 켈록스 2세가 봐온 왕족 여인들은 대부분 아름답게 치장한 모습이었으며, 그녀가 봐온 클로디아의 초상화 속 모습은 화려하게 성장한 모습이었기에 그 괴리감이 더 컸을 것이다.
클로디아 테 포르투는 꽤 생경한 모습이었다. 길고 탐스러운 머리는 어디로 갔는지, 뚝 잘린 머리카락이 처참해 보일 정도였다. 슈니첸에 어제 도착한 그녀에게 별 불편함이 없게 하라고 지시한 덕에 얼굴은 좋아 보였다. 다만 그녀가 입은 옷은…. 켈록스 2세는 눈썹을 들어 올렸다.
“전하를 만나 뵈어 저 또한 큰 기쁨을 느낍니다. 하늘섬의 공주님, 부디 신의 종에게 말씀을 높이지는 말아 주세요.”
본디 하늘섬의 왕족들은 네 개의 대륙, 백 개의 왕국 중 어디를 가도 모두에게 하대를 해도 별문제가 없었다. 그들이야말로 대륙의 구심점이었기 때문이다. 교황 또한 하늘섬의 왕족들과 나란히 서면 뒤를 따라야 하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클로디아는 그녀를 성하라고 부르며 말을 높이고 있었다.
켈록스 2세는 그게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아마 사제를 사칭했기에 먼저 알아서 기는 것일 테지.
클로디아는 켈록스 2세의 머릿속은 알지 못한 채 미소 지으며 답했다.
“하늘섬의 왕족이라고 해서 다른 이들의 머리를 밟고 서지는 않습니다. 하물며 저는 성하의 힘이 되지는 못할망정 우려를 끼친 사람입니다. 덧붙여 저는 언제나 처음 만나는 모든 이들에게 존대한답니다.”
“그것이 평민이라도요?”
“예.”
켈록스 2세는 그녀의 뒤에 선 두 사람을 바라봤다. 그녀의 시선을 알아챈 클로디아가 미소 지으며 그들을 소개했다.
“이쪽은 수르 알파. 하늘섬의 기사단장입니다.”
“익히 명성은 들었습니다. 반갑습니다, 수르 알파.”
“이쪽은 헬렌. 저의 친구랍니다.”
“반갑습니다, 헬렌.”
켈록스 2세는 간결하게 인사를 마쳤다. 두 사람 모두 고개를 숙였다. 일행 중에 마법사가 있다고 들었으나, 그는 켈록스 2세가 예상한 바대로 접견에는 불참했다. 하늘을 거스르는 마법사들의 고약한 기질은 켈록스 2세 또한 익히 알고 있었으므로, 크게 신경 쓰지 않았으나 클로디아는 그 사실에도 크게 사과했다. 켈록스 2세는 기분이 좋아졌다.
‘이렇게까지 저자세라면 일이 좀 편하겠는데….’
켈록스 2세는 그제야 스완 경이 클로디아 테 포르투에 대해서 설명했던 것에 관해 이해할 수 있었다.
아무튼 그들은 도무지 마왕을 정벌하기 위해 나선 공주님의 일행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클로디아 테 포르투의 옷은 좋은 소재로 되어 있었지만, 아름답다고 하기에는 영 모자랐고, 낡고 먼지 낀 재킷을 입은 데미안 알파에 이르러서는 한숨밖에 나오지 않았다. 차고 있는 검은 가죽끈으로 칭칭 감아놓아 저잣거리의 깡패나 들고 다닐 법한 물건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뭔가의 경지에 도달한 이라 괴팍한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으나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켈록스 2세는 사제 사칭에 관한 일을 지극히 진지한 태도로 사과하고 있던 클로디아에게 답하려 입을 열었다.
“전하의 성심 넘치는 태도가 아니라도 이미 악의적인 일이 아니라는 것은 짐작했답니다. 지금같이 어려운 시기에 대륙을 가로질러 자르지스로 가는 여정에는 수많은 위험이 따르기 마련이죠.”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더욱이, 투르에서의 일도 익히 들었습니다.”
켈록스 2세의 말에 클로디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얼마 되지 않은 일이라 그녀가 알고 있다는 것에 대해 놀라움을 표하는 것이었다. 켈록스 2세는 만족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어쨌든 켈록스 2세의 정보력은 남들이 쉽게 무시할 만한 것은 아니었으니까.
“멜라토르는 호전적인 곳이니만큼 신분을 드러내지 않고 가시는 것이 가장 안전한 일이었겠지요.”
“그렇습니다….”
“큰일이 없어 다행입니다. 하지만….”
켈록스 2세는 정말로 안됐다는 듯 슬픈 표정을 지으며 눈썹을 늘어트렸다.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저러지. 클로디아가 절로 긴장할 정도였다.
“대륙을 위해 길고 험난한 여정에 오른 전하의 모습이 제 마음을 아프게 하는군요.”
마음이 아프다지만 아마 거짓말일 것이다. 정확히는 클로디아의 행색에 관해 논하는 것이었고, 이 정도는 예상했던 터라 클로디아는 아무렇지 않게 대응할 수 있었다.
“위기에 놓인 대륙의 사람들을 생각하면 어떤 험난함이라도 감수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답니다. 성하의 마음 씀씀이에 감사드립니다.”
“그렇다 한들 저 또한 교황이기 이전에 대륙의 신민입니다. 백 개의 왕국을 위해 용감히 나선 전하를 이렇게 뵈었는데, 성의 표시 정도는 하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합니다.”
성의 표시라.
클로디아는 잠시 입을 닫고 켈록스 2세를 바라봤다.
새카맣고 결 좋은 머리카락을 땋아 늘어트린 흰 피부의 여인은 언뜻 유약해 보였으나, 클로디아는 그 가느다랗고 작은 여인이 얼마나 똑똑한지 대강은 알고 있었다.
예전이었다면 성의 표시라는 말에 어떤 선물이 돌아올까 두근두근 기대했을 것이나, 지금의 클로디아는 저 말이 조금 무섭기까지 했다.
“성의 표시라면….”
“괜찮으시다면 교국의 성기사를 전하의 호위로 붙여드려도 괜찮겠습니까.”
호위.
그 말이 뜻하는 바는 간단했다.
얘. 팔자에도 없는 사제 노릇 하느라 고생했다. 우리 성기사 하나 붙여줄게, 그런 짓 하지 말고 편안하게 다니렴.
엄청난 조건이었다. 교국의 성기사들은 그 적은 인원으로 대륙에서 일어나는 온갖 종교적 트러블을 해결하기 위해 하루가 모자랐다. 그러니 성기사 하나하나가 소중한 인력이었다. 게다가 대륙 신민들을 위해 일하는 자들이니만큼 성기사들은 어느 나라 국경에서나 아무것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통과시켰다.
그런 성기사를 클로디아의 신분패로 붙여주겠단 것이다. 그것만 해도 클로디아의 여정은 엄청나게 쉬워질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클로디아는 이제 너무 달콤한 제안에는 독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후의에 감사하다고 말하는 대신, 켈록스 2세를 똑바로 쳐다봤다.
“성하, 비록 제가 어리석어 교국에 폐를 끼쳤으나 더 이상의 폐를 끼치면 안 된다는 자각은 있습니다.”
“이런, 그런 말씀 하지 마세요. 폐가 아니라 제 작은 마음이랍니다.”
“하지만 그 마음이 제게는 부담이 됩니다.”
“부담 갖지 말아 주세요. 성기사들에게도 마왕 토벌은 크나큰 숙원이랍니다.”
마왕 토벌. 그 말에서 클로디아는 교황의 속셈을 알아챘다. 교황은 지금 클로디아의 여정에 숟가락을 얹으려는 것이었다.
자르지스에는 저주받은 마족들이 산다. 교국의 존재 의의는 신의 말을 대륙에 퍼트리는 것에 있으며, 당연히 마족들은 신에게 반하는 족속들로 간주되었다. 본래대로라면 교국은 마족들을 토벌해야 하나, 여태까지는 자르지스에 접근할 방법이 없어 교국은 자르지스를 외면하고 있었다. 물론 마족들이 대륙을 건드리지 않고 있다는 명분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마왕이 하늘섬을 침략했으며, 대륙은 그 때문에 술렁거리고 있었다. 오죽하면 교황이 멜라토르까지 와 전쟁을 막아야 할 정도로 급박한 것이다. 이런 때에 교국이야말로 자르지스 토벌에 성의를 다해야 할 입장이기도 했다.
그러나 여전히, 디자이어를 지닌 공주 외에는 아무도 자르지스로 갈 수 없었다. 그렇다면 공주의 일행에 성기사를 끼워 면목을 세우자는 것이다. 이 제안을 거절하는 것은 상당히 지난한 일이 될 것이었다. 하지만…. 클로디아는 몸을 바로 세웠다.
“성하. 시간이 없으니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갑작스러운 변화에 교황은 눈을 가늘게 떴다.
“저에게는 호위가 필요 없습니다. 정확히는 더 이상의 호위가 필요 없다는 말이 맞겠지요.”
수르 알파. 클로디아는 그쪽에 턱짓을 했다. 켈록스 2세의 눈이 수려한 남자 쪽을 향했다. 네 개의 대륙에 그 위명을 떨치고 있는 포르투의 기사단장은 클로디아의 말에도 표정 변화 없이 서 있었다. 그 자세는 오래도록 검을 익힌 자 특유의 절도가 배어 있었다.
“하지만 성하의 입장을 이해합니다. 저 또한 하늘섬의 왕족이기에, 국가의 존속이 얼마나 다채로운 욕망을 만족시켜야 가능한 일인지 정도는 알고 있죠.”
디자이어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거짓말쟁이….] 하고 중얼거렸을 것이다. 클로디아 스스로도 이게 얼마나 뻔뻔한 말인지 정도는 알고 있었다. 적어도 데미안 앞에서 이런 말을 하게 될 줄은 정녕 몰랐다.
영광의 홀에서 애처럼 울었던 공주가 이렇듯 낯짝을 두껍게 하고 국가의 존속 운운하는 것을 그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클로디아는 얼굴을 붉히지 않으려 애쓰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 성하, 제게 베푼다는 태도를 취하지 마시고 부탁하시기 바랍니다.”
켈록스 2세의 표정 변화는 느렸으나 확실했다. 미소는 굳었으며, 이내 입이 조금 벌어졌다.
“저는 클로디아 테 포르투. 성하께서는 제게 베푸실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직역하자면 그런 말이었다.
얘. 숟가락 얹고 싶으면 부탁을 해. 남의 약점 잡아 갑질 하려 들지 말고.
옛날 같았으면 너 나 만나기도 어려워.
켈록스 2세의 하얀 얼굴은 변화가 없었다. 하지만 클로디아는 저 얼굴 안의 피가 수천 도를 넘나들며 요동치고 있을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상상은 거의 들어맞았다.
‘이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계집애가!’
켈록스 2세는 분노와 수치로 벌컥 화를 낼 뻔했다. 망하기 직전인 하늘섬의 공주도 공주라고, 제 앞에서 턱을 들고 말하는 모습이 뻔뻔하기 그지없었다. 그녀가 수집한 정보에 따르면, 클로디아 테 포르투는 마왕이 침략하기 직전까지 외모를 꾸미는 것과 남자 외에는 아무것에도 관심 없었던 철없는 공주였다.
그렇기에 쥬버린 테 포르투가 그 심장을 잃고 난 직후, 하늘섬은 유례없는 침묵을 했다. 클로디아 입장에서야 급박하고 험난한 3일간이었지만, 외부에서 보기엔 너무나 이상한 침묵이었다. 포르투 왕은 치매에 걸려 사람 노릇이 어려웠으니 클로디아 테 포르투가 하늘섬을 빠르게 정리하고 수습에 나서는 게 당연한 수순이었다.
결국 사흘 후 클로디아가 마왕 토벌을 선언하기는 했으나, 켈록스 2세는 그 침묵에 관해 정보를 수집했다. 그리고 정보원의 말에 따르면, 클로디아 테 포르투는 이틀 내내 멍청하게 울기만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디자이어에 의해 억지로 토벌에 나섰다고 했다. 데미안 알파가 그녀의 여행에 따라나선 것 또한, 멍청한 포르투의 혈통을 보전하기 위해서였다 전해 들었다. 그야 그런 목적이라도 없으면 이미 파혼한 상대와 어떻게 여정을 함께하겠는가.
투르에서 자신이 받은 모욕에 관해 클로디아 테 포르투가 취한 것은 데미안 알파를 부리는 것이었다. 데미안 알파는 인간 같지 않은 실력으로 지방 영주의 성을 하루 만에 부수어 버렸다. 켈록스 2세는 확신했다.
‘무능한 공주가 데미안 알파를 부려 마왕을 토벌하고, 제 위명을 떨치려 하는구나.’
하늘섬의 정보원에게 전해 들은 클로디아 테 포르투는 좋게 말하면 순진하고 대놓고 말하면 멍청했다. 사람의 호의를 의심할 줄 모르며 모든 것이 자신 위주로 돌아간다고 생각하는 사고의 소유자였다.
오죽하면 디자이어가 그녀를 꼬실 때 ‘대륙 최고의 신붓감이 될 것’이라고 했다지 않은가. 디자이어와 클로디아 테 포르투가 계약 당시 주고받은 말의 내용은 극비로 취급되었으나, 켈록스 2세는 정보에 돈을 아끼는 타입이 아니었다.
그래서 켈록스 2세는 클로디아 테 포르투를 상대하는 것이 퍽 쉬우리라 생각했다. 그녀에게 호의를 빙자해 스완 경을 함께 달려 보낸 후, 마왕 토벌에 교국의 힘이 컸음을 선전하려 했다.
그러나 클로디아 테 포르투는 자신들의 이름을 빌린 주제에 지금 그녀의 앞에 앉아서, 제게 부탁해보라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태도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수준인 것도 아니었다. 하늘섬이란 곳은 네 개의 대륙을 다스리는 곳. 교국 또한 백 개의 왕국 중 한 곳이었으며 단지 종교를 토대로 만들어졌다는 이유로 조금 더 괜찮은 대접을 받을 뿐이었다.
그렇지만 지금 켈록스 2세는 클로디아의 태도를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첫째는 그녀의 죄를 빌미로 이곳에 불렀음이며, 둘째는 하늘섬의 침몰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 그녀는 모두에게 무릎을 꿇고 원조를 부탁해도 모자랄 지경이다.
그러나 저 건방진 태도는 대체 어디서 나오는 것인가.
그 생각이 켈록스 2세의 조급함을 부추겼다. 그녀는 입을 열었다.
“…교국의 이름을 빌리신 분께서 베풀 수 있는 것이 없다 하시니 조금은 당황스럽습니다.”
그러나 클로디아 테 포르투는 그 말에 미소를 지었다.
“성기사들에게도 마왕 토벌은 크나큰 숙원이라 하셨지요. 그 숙원을 위한 저의 여정에 교국의 이름이 보태질 수 있다면 그 또한 영광된 일 아니겠습니까. 대저 신화와 설화, 이야기는 크나큰 고난과 모험으로 가득 찼을 때야말로 흥미 있는 일이겠지만 저는 대륙 사람들의 흥미를 위해 여정에 나선 것이 아닙니다. 되도록 빠르고 안전하게 마왕을 토벌하려던 저의 시도는 교국으로서는 오히려 반갑게 받아들이셔야 하는 일 아니겠습니까?”
빌어먹을.
켈록스 2세는 자신의 말이 제 발목을 잡았음을 알아차렸다. 클로디아 테 포르투가 미안하다고 말했을 때, 크나큰 죄를 지었으니 벌을 받으라고 해야 했나.
그러나 말도 안 되는 상상이었다. 제후국이 어찌 군주에게 벌을 내릴까. 켈록스 2세의 실책이었다. 상대가 곤경에 처했다고 해서 건방을 떨다가 그 이빨에 걸린 셈이었다.
클로디아는 켈록스 2세의 말을 기다리지 않고 빙그레 웃었다.
“덧붙이자면 저 클로디아 테 포르투는 성하의 성의 표시는 받아들일 마음이 없으나, 가장 충직한 친구이자 제후국의 충성이라면 받아들일 용의가 있습니다.”
“….”
켈록스 2세의 침묵을 기다리지 않고 클로디아는 일어났다.
“오늘은 이미 늦었으니 저는 내일 아침 떠날 것입니다. 그전에 성하의 답변을 들을 수 있으면 좋겠군요.”
***
“…허억, 나 숨 막혀 죽는 줄 알았어…요.”
클로디아의 방에 돌아온 헬렌이 눈치를 보며 입을 열었다. 클로디아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헬렌? 말투가 왜 그래요?”
“아, 아니…. 투르에서도 익히 알았지만.”
헬렌이 놀랐다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클로디아, 정말 공주님이구나….”
“아하하, 그러면 가짜 공주님이겠어요?”
클로디아가 까르륵 웃었다. 헬렌이 마주 웃었다.
“나는 그 교황이라는 사람 보자마자 좀 쫄았거든. 원래 높으신 분들은 다 저렇게 예쁜가? 클로디아도 엄청 예쁜데? 핏줄 보일 정도로 얼굴이 하얗네 같은 생각을 하는데 입을 여니까 친절한데 더 무섭더라고. 근데 표정이 몇 배는 더 무섭더라. 웃고 있는데 눈은 안 웃어! 와!”
헬렌이 속사포같이 켈록스 2세를 만난 감상을 전했다. 클로디아는 헬렌의 말에 웃으면서도 침대로 쓰러졌다. 어깨를 잔뜩 긴장시킨 채 교황을 만났더니 갑자기 피로가 몰려와서였다.
“으아아, 저도 좀 무서웠다구요.”
“전혀 안 그래 보이던데….”
헬렌이 의심스레 중얼거리며 클로디아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좋은 머릿기름을 바른 머리카락은 찰랑거리며 뒤로 넘어갔다. 클로디아가 간지럽다며 키득거렸다.
“게다가 말이야. 크. ‘저에게는 호위가 필요 없습니다.’ 그 말 정말 멋지더라. 맞아, 이 사람 검기 사용자였지 하는 생각이 팍 들더라니까.”
갑자기 지목된 데미안이 눈을 껌벅거렸다. 그 또한 클로디아의 방에 따라 들어오던 참이었다. 클로디아가 작게 미소 지었다.
“명색이 대륙 최강인걸요. 사실 성하께서 하시는 말 대부분 웃으며 들을 수 있었지만, 도저히 호위란 말은 참을 수 없었어요. 그건 포르투를 무시하는 거예요.”
“포르투의 기사단장이 옆에 붙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인가.”
헬렌이 엄지를 들어 보였다. 데미안에게였다.
“데미안, 멋진데.”
“…켈록스 2세가 우리에게 성기사를 붙여줄 것 같습니까?”
“뭐냐. 말 돌리는 거야? 부끄러워?”
야유를 보내는 헬렌의 말은 못 들은 척하고 데미안은 클로디아에게 말했다. 클로디아가 답했다.
“글쎄요, 잘 모르겠지만, 아마 붙여줄 거라고 생각해요. 오늘 저녁은 말고, 내일 오전에 우리가 출발할 때쯤 못 이기는 척 성기사 한 명을 보내겠지요.”
“…지금 세력 확장을 위해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것은 교국도 마찬가지니까요.”
데미안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결국은 교국 또한 자국의 이익 앞에서는 그 얼굴을 드러내고 마는 것이다.
“애초에 성기사를 붙여준다 한들 수르 알파가 나의 옆에 있는 이상 큰 활약을 하기 어려워요. 그러니 심리적인 빚을 지우게 하려는 속셈이었겠고, 나아가 교국의 선전을 할 마음이었겠죠. 하지만 저는 포르투의 이름을 교국이 가리게 하지는 않을 거예요.”
“하지만 나쁘지 않은 제안인 것만은 분명합니다.”
데미안이 대답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교황의 말대로 우리가 얻는 건 많아요. 신분 증명도 그렇고…. 불확실한 변장 따위를 하며 트러블을 피해 다닐 이유가 없겠죠.”
“그리고 ‘성스러운 길’도 이용할 수 있을 테고요.”
데미안의 말에 클로디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본래는 교황과 이야기가 잘 진행되면 한 번쯤 쓸 수 있게 부탁하려고 했는데, 교황 쪽이 먼저 일행 합류를 제안하는 바람에 훨씬 일이 쉬워졌다. 만약 성기사가 합류하게 되면 ‘성스러운 길’을 사용해 여정을 단축할 수 있을 것이다.
“성기사들 중에 남쪽에 파견된 이들이 있으면 좋겠다는 건 제 욕심일까요?”
“…그 욕심은 저도 부리고 있으니 괜찮습니다.”
데미안이 뱉은 의외의 말에 그녀는 눈을 크게 떴다가 아하하, 하고 웃어버렸다. 어찌나 크게 웃었는지 침대가 들썩거렸다. 헬렌도 말을 보탰다.
“그리고 요번처럼 클로디아가 고생할 일도 없지 않을까?”
“고생이요?”
“왜, 시빌은 진통 마법은 부릴 수 있지만, 외상 치료 마법은 사실 낮은 수준이잖아.”
“아하….”
뜻밖의 생각이었다. 일행에게는 커다란 회복을 전담할 만한 인원이 없었다. 물론 시빌이 있었지만, 만약 위급한 상황이 닥치면 그에게만 의지할 수는 없었다.
“경호와 공격은 시빌에게, 회복은 성기사에게.”
“좋은 계획인걸요. 세상에. 왜 그 생각까지는 못 했을까요? 성기사들이야말로 회복의 정수인데.”
클로디아의 얼굴이 기쁨으로 들어찼다. 헬렌이 근처에 놓인 사탕통에서 사탕을 꺼내 클로디아의 입에 물려주었다. 공주는 이내 행복한 듯 사탕을 입안에서 굴렸다. 방금 전, 교황의 눈앞에서 오만하도록 턱을 쳐들었던 아가씨라고는 상상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그러면 오늘은 모두 푹 쉬는 것만 남았군요.”
“그래. 내친김에 나는 오늘은 좀 일찍 잘까 해. 내가 저녁을 요리할 일도 없을 테니.”
“그러세요. 그동안 헬렌도 정말 고생했으니까요.”
헬렌은 어깨를 으쓱했다. 자신이 한 게 뭐 있다고 그런 소리를 하냐는 말에, 클로디아는 자랑스럽게 팔을 들어 보였다. 억지로 팔을 당기며 근육을 만들어 보이는 모습이 귀엽기 그지없었다.
“저 요즘 정말로 몸에 활력이 넘친다구요! 헬렌, 나중에 꼭 우리 왕성 전속 요리사가 되어주세요!”
“안 돼.”
“왜요!”
“‘대륙을 구한 클로디아 공주도 감동한 맛!’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장사해서 떼돈을 벌어 부자가 될 거란 말이야.”
뭐예요. 클로디아가 웃으며 헬렌을 밀어댔다. 헬렌과 클로디아는 몇 번 씨름하다가, 이내 헬렌이 클로디아의 이마에 입을 맞추는 것으로 실랑이가 끝났다. 어쨌든 빨리 가서 쉬고 싶은 마음이 큰 모양이었다. 헬렌이 나가려다가 데미안을 돌아봤다.
“데미안? 안 가?”
“…저는 로드께 드릴 말씀이 있어서.”
“어머나, 그래요….”
뜬금없는 말에 클로디아가 눈을 크게 뜨며 주섬주섬 침대에서 일어났다. 머리가 온통 헝클어진 채였다. 헬렌은 빠르게 사라졌고, 문이 닫힌 후 데미안이 입을 열었다.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도 외람된 노릇이지만, 잘하셨습니다.”
“…수르 알파.”
클로디아는 당황으로 눈을 깜박거렸다.
“아까 그 말은 헬렌도….”
“…예.”
데미안이 그 말에 이쪽을 쳐다봤다. 클로디아는 문득 그의 검푸른 눈에서 넘실거리는 감정을 눈치챘다. 언제나 무심하다고 생각했던 그 눈에는 오늘따라, 온기가 역력했다.
“정확히는 제가 하늘섬에서부터 줄곧 드리고 싶은 말이었습니다.”
“방금 그 말이요…?”
“예.”
데미안은 그 말을 내뱉은 다음 그녀가 앉은 침대 앞에 우두커니 서서, 정말로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어조만은 확실했다. 데미안은 잠시 손을 들어 제 입을 가렸다가, 다시 클로디아를 바라보고 확실하게 한 자 한 자 힘주어 말했다.
“로드께서 검을 잡고 마왕을 무찌르는 것에 대해, 말도 안 된다고 했던 것을 사과드립니다.”
“수르 알파….”
“제가 주제넘었습니다.”
“….”
“로드께서는 틀림없이, 모두를 구하실 수 있을 겁니다.”
클로디아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데미안은 한참 동안 그녀를 쳐다보다가, 고개를 숙였다. 그가 인사를 고하고, 방 밖으로 나가고, 문이 닫힐 때까지 그녀는 눈만 깜박거렸다.
철컥.
문이 닫혔다.
동시에 클로디아의 얼굴이 새빨갛게 불타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