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데미안
‘그것’은 오랫동안 그림자 속에서 살아왔다. 정확히는 ‘그것’은 그림자가 그림자라는 사실도 몰랐다. ‘그것’에게 세계는 까마득한 어둠뿐이었다.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허공에 떠 있는 빛의 띠에 의지해 주변을 더듬으며 살았다.
그 어둠 속의 주민들은 모두 그렇게 살았다. 서로에게 말 걸지 않고, 서로를 쳐다보지 않았다.
‘그것’은 피아를 구분할 줄도 몰랐다. 다만 ‘그것’이 명확하게 아는 사실이 단 하나 있었다.
가끔 빛의 띠를 가르고 뭔가가 허공에서 내려왔다. 그것들에게서는 좋은 냄새가 났다. ‘그것’이 맡아본 적도 없는 좋은 냄새.
어둠 속의 주민들은 그것들을 습격해 식량을 얻었다.
그러나 ‘그것’에게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그것’은 약했고, 작았다. 주민들은 ‘그것’이 발에 걸리면 마구 걷어찼으며, ‘그것’은 그럴 때마다 꽁지가 빠져라 도망을 갔다.
그렇게 도망치다가 목이 마르면 바닥의 구정물을 마셨고, 배가 고프면 쓰레기더미를 뒤졌다.
누군가는 ‘그것’을 보고 하루하루를 비참하게 연명한다고 말했지만, ‘그것’은 그게 비참한 줄도 몰랐다. 비참하다는 것은 상대적인 것이다. 더 좋은 삶이라는 것을 보고 배운 적 없었기에 ‘그것’은 하루하루를 똑같이 살았다.
그래도 ‘그것’은 이따금 빛의 띠를 쳐다봤다. 빛의 띠는 매일매일 환하게 빛나다가 푸른색이 되었고, 다시 붉은색이 되었다가 새카매지기를 반복했다. 빛의 띠가 환하게 빛나면 어둠 속의 주민들은 거기에 의지해 하루를 시작했고, 빛의 띠가 검어지면 주민들도 하루를 마감했다. 마감할 수밖에 없었다.
반짝반짝 빛나는 빛의 띠. ‘그것’은 빛의 띠가 색을 바꾸는 모습을 좋아했다. 축축한 쓰레기더미 사이에 앉아 있어도 빛의 띠가 푸른색에서 점점 붉은색으로 물드는 모습을 보면 기분이 좋았다.
***
배가 고프던 어느 날이었다. ‘그것’은 어둠의 가운데로 비척비척 걸어가고 있었다. 아무리 주변을 뒤져도 먹을 것을 찾을 수 없었다. ‘그것’은 얼마 전 주운 동물의 뼈를 아쉬운 듯 핥았다. 뼈에서는 상한 고기 냄새가 났지만, ‘그것’에게는 익숙했다.
그날따라 어둠의 가운데에는 주민들도 없었다.
‘그것’은 의아해하며 주변을 둘러봤다.
빛의 띠를 가르고 나타나는, ‘좋은 것’들은 언제 나타날지 기약이 없었기에 어둠 속의 주민들은 항상 어둠의 가운데에서 ‘좋은 것’을 기다렸다. 이날은 달랐다. 가운데에는 누구도 없었다.
‘그것’이 그 이유를 알게 된 것은 한참 후였다.
‘어둠 속의 주민’들은 동력 지대의 주민들이었다.
그리고 그날 포르투의 기사단장이 동력지대의 점검을 위해 내려오기로 되어 있었던 것이다. 빛의 띠는 동력 지대의 성벽과, 동력 지대 위에 떠 있는 포르투 사이의 하늘이었다는 것을 ‘그것’은 나중에 알게 됐다.
어쨌든, 포르투의 기사단장을 습격하고도 살아남을 만한 이는 없으니, 동력지대의 강도들은 포르투의 기사단장을 피해 자신의 집에 틀어박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포르투의 기사단장이 내려오기로 한 것을 알 리 없었다. ‘그것’은 털썩 자리에 주저앉아 손에 쥐고 있던 뼈를 핥으며 멍하니 빛의 띠를 바라봤다.
그때였다. 빛의 띠 사이를 가르고 누군가 내려왔다. ‘그것’은 기뻐 벌떡 일어났다.
좋은 것! 좋은 것이다!
배가 고픈 것도 ‘좋은 것’들에게서 나는 좋은 냄새를 맡으면 해결될 것만 같았다.
평소에는 동력지대의 강도들 때문에 ‘좋은 것’에 가까이 다가갈 엄두도 내지 못했지만, 아무도 없는 지금은 ‘그것’이 가까이 다가가도 괜찮을 것 같았다.
드르륵, 드르륵. 쾅. 승강기가 내려앉는 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빠르게 기어 승강기 근처로 접근했다. 벌써부터 좋은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킁킁, 킁킁킁. ‘그것’은 한껏 코를 벌름거렸으나 좋은 냄새는 도통 나지 않았다.
당시 포르투의 기사단장이었던 수르 미다프는 자신의 기척을 지우는 데에는 일인자였으나, ‘그것’이 그런 사실을 알 리 없었다.
‘그것’은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좋은 것’은 두 개였다. 여전히 냄새는 나지 않았다.
“조용하군.”
“어둡고요. 젠장. 동력 지대는 정말 싫은데.”
‘좋은 것’들이 뭐라고 떠들었다. 동시에 갑자기 쇠 냄새가 진하게 풍겼다. 수르 미다프를 수행하던 기사가 검을 뽑아 들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쇠 냄새에 움찔했다. 하지만 가까이 가면 좋은 냄새가 풍기지 않을까? 조금만, 조금만 더….
“뭐야, 이게?”
‘그것’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기사 중 하나와 눈이 마주친 후였다. 어둠 속에서 빛나는 네 개의 눈알. ‘그것’은 뒤늦게 깜짝 놀라 후다닥 달아나려고 했으나, 이미 수르 미다프에게 뒷덜미를 잡힌 뒤였다.
‘그것’은 벌거벗고 있었기에 수르 미다프는 갑작스레 조우한 어린애의 목덜미를 붙들 수밖에 없었다. 수르 미다프를 수행하던 기사가 기가 막힌 듯이 말했다.
“…짐승입니까?”
“아니, 어린애다.”
수르 미다프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 자신이 붙든 벌거벗은 어린애를 들어 올렸다. 더러운 어린애는 얼마나 안 씻었는지, 온몸에 끈적거리는 것들이 묻어있는 데다가 머리카락은 길게 길러 기름져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사람의 아이였다. 수르 미다프는 혀를 찼다. 동력 지대가 아무리 엉망이라지만 이런 꼬마까지 이렇게 짐승처럼….
그때 콱, 하고 통증이 수르 미다프의 손목을 습격했다. 수르 미다프는 움찔했으나 어린애를 놓치지는 않았다. 어린애는 이를 드러내고 수르 미다프를 물고 있었다.
“아이구, 이놈아!”
옆에 있던 수행기사가 더 기겁했다. 그러나 수르 미다프는 나머지 한 손을 내저으며 어린애를 쳐다봤다. 눈을 희번덕거리는 어린애는 수르 미다프의 손목을 피가 날 정도로 깨물어댔다.
그리고 조금 후, 어린애는 눈치를 보다가 이를 뗐다. 수르 미다프의 미간이 희미하게 찌푸려졌다.
“어느 집의 어린애지?”
“글쎄요. 동력 지대에 그런 게 있겠습니까.”
“부모는 있을 것 아닌가.”
“아이구, 단장님. 여기가 괜히 동력 지대가 아닙니다. 온갖 범죄자들 소굴이죠. 이놈 꼴 좀 보십쇼. 이게 부모가 있는 어린애의 행색입니까?”
“…그렇군.”
수르 미다프는 잠시 고개를 갸웃하다가 물었다.
“너, 이름이 뭐냐?”
‘그것’은 수르 미다프가 뭐라 말하는지 알 수 없었다. 눈알만 데굴데굴 굴리며 자신을 붙잡고 있는 ‘좋은 것’이 빨리 놔주기만을 기다릴 뿐이었다. 콱 물었는데도 불구하고 자신을 놔주지 않는 걸 보면 자신의 공격은 전혀 소용없는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이런 사정을 알 리 없는 수르 미다프는 한숨을 내쉬었다.
“말을 모르는 건가?”
“그럴 수도 있습니다.”
수르 미다프는 ‘그것’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기사가 얼굴을 구겼다.
“설마, 단장님.”
“그렇잖아도 집의 집사가 개라도 키우라는 말을 하더군.”
“사람의 어린앱니다!”
“뭐 어때.”
“아니, 그 애 부모가 찾으면요!”
“방금 자네가 말하지 않았나. 동력 지대에 그런 게 어딨겠냐고.”
기사는 한숨을 쉬었다.
‘그것’은 수르 미다프와 기사를 번갈아 쳐다보며 빨리 달아날 수 있기만을 바랐다. 그러나 ‘그것’의 뜻대로 되지는 않았다. ‘그것’은 그날 하루 종일 쇠 냄새 나는 ‘좋은 것’들에게 달랑달랑 들려 다니다가, 마지막에는 승강기를 탔다.
드르르륵, 드르르륵.
‘좋은 것’들에게 들려 다니는 것도 지쳤을 때쯤 탄 승강기는 ‘그것’의 주의를 빼앗기 충분했다. 승강기 문이 쿵, 닫혔고 겨우 ‘좋은 것’들에게서 놓여난 ‘그것’은 달아나려고 무진 애를 썼다.
그러나 소용없었다. 어른의 허리까지 오는 승강기의 벽은 ‘그것’에게는 너무 높았다. 수르 미다프는 ‘그것’이 발발 기어 다니는 것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껄껄 웃으며 ‘그것’을 다시 들어 올렸다. ‘그것’이 바둥바둥 발버둥을 쳤다.
“아무래도 하늘이 보고 싶은 모양이지?”
“아닌 것 같은데요.”
기사가 코를 막으며 물러섰다. ‘그것’에게서 나는 고약한 냄새 때문에 기사는 종일 미다프 경에게서 몇 걸음 떨어져 다닌 차였다. 하지만 승강기에서는 도저히 물러날 공간이 없었다. 수르 미다프는 ‘그것’을 들여다보다가 웃으며 자신이 쥔 몸뚱이를 돌려 바깥을 보게 했다.
“보려무나. 하늘이다. 마침 해가 지는구나.”
그때만큼은 ‘그것’도 바둥거리는 것을 잊었다. ‘그것’은 입을 헤 벌리고 가까워진 빛의 띠를 바라봤다. 승강기를 타고 보는 ‘빛의 띠’는 장엄했다.
‘그것’은 그때 처음으로 ‘빛의 띠’ 건너편에 뭔가가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동력 지대의 성벽과 하늘섬의 밑바닥 사이로 보이는 아득한 주홍색 하늘.
구름이 떠다녔고, 새가 날았다. 끝없는 숲이 펼쳐져 있었으며 저 멀리서 꼬물거리는 뭔가가 움직였다. 성벽 아래로는 들어오는 법 없는 차가운 바람이 ‘그것’의 코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것’은 화들짝 놀라 재채기를 했다.
푸엣취.
“어라, 추운 건가.”
“벌거벗었잖습니까. 어린애한테 저녁 바람은 춥죠. 동력 지대에는 바람이 잘 안 들지 않습니까.”
“그렇군. 망토 좀.”
“…예?”
“내 망토는 폐하께서 주신 것 아닌가. 자네 건 지급품이고.”
“…단장님!”
기사가 비명을 질렀으나 수르 미다프는 기사를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 결국 기사는 투덜거리며 자신의 붉은 망토를 벗어 건넸고, ‘그것’은 난생처음 겪어보는 좋은 냄새와 부드러운 감촉에 놀라 쥐고 있던 동물 뼈를 떨어트렸다. 하지만 뼈를 떨어트린 것도 모를 정도로 좋았다.
승강기가 ‘하늘섬’에 도달했을 때 ‘그것’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가 이내 찡그렸다. 오랫동안 동력 지대의 어둠 속에서만 살아왔던 눈이, 빛을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밤에도 휘황찬란하게 빛나는 포르투 왕성이 거기에 한몫했다. 포르투 왕성 정문 앞, 아치 모양의 조형물 가운데에 박혀 있는 아무르는 언제나 새빨갛고 아름다운 빛을 내고 있었다. 수르 미다프는 껄껄 웃으며 ‘그것’을 들어 올려 아무르를 구경시켜 주었다.
“보려무나, 저게 아무르란다.”
“설명해주면 알겠습니까.”
“이 애 이름은 뭘로 하지? 아무르?”
“…단장 네이밍 센스 실홥니까…. 보아하니 남자애 같은데요….”
“내가 뭘!”
수르 미다프가 벌컥 화를 냈다. 기사는 혀를 끌끌 찼다.
어쨌든 동력 지대의 감시 차원에서 내려간 것이니 보고부터 마쳐야 했다. 수르 미다프는 ‘그것’을 포르투 왕성의 시녀들에게 맡겼다. 시녀들은 아악, 소리를 내며 ‘그것’을 피했으나 기사단장이 맡기는 데는 별수 없었다. 나이든 중년의 시녀가 큰 결심을 한 듯 팔을 걷어붙이고 ‘그것’을 따뜻한 물 안에 집어넣었다. ‘그것’은 혼비백산해 목욕장을 온통 뛰어다녔고, 목욕장은 검은 땟국물투성이가 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그것’이 겨우 사람의 어린애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을 만한 꼴이 됐을 때는, 시녀들도 기진맥진한 후였다. ‘그것’은 킁킁대고 있었다. 자신에게서도 좋은 냄새가 풍겼기 때문이다. 때마침 수르 미다프가 도로 찾아왔다. 시녀들은 수르 미다프에게 “추가수당이라도 주세요!” 하고 항의해댔다.
수르 미다프는 시녀들에게 좋은 향유를 선물하겠노라 약속한 후 ‘그것’을 들어 올렸다.
“네 이름을 방금 정했다. 누가 정해주었는지 아니?”
‘그것’은 여전히 수르 미다프의 말을 알아듣지 못해 눈을 끔벅거렸다. 수르 미다프는 주름 가득한 얼굴에 처음으로 미소를 띠며 말했다.
“클로디아 공주님이란다. 클로디아 공주님은 알고 있니?”
“그전에 그 애가 말을 알아듣는지부터 의심스러운데요….”
시녀 하나가 뒷정리를 하며 투덜거렸다. 수르 미다프는 아랑곳하지 않고 벌쭉 웃었다.
“하늘섬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여자애지!”
‘그것’은 어쩐지 수르 미다프의 웃는 얼굴이 거북해져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수르 미다프는 ‘그것’의 몸통을 가까이 당겨 눈을 맞추었다.
“네 이름은 데미안이다.”
데미안, 알파.
***
그날 이후로 모두가 ‘그것’을 데미안이라고 불렀다. ‘그것’은 그 말이 자신을 부르는 호칭이라는 걸 금세 알아챘으나 딱히 와 닿지는 않았다. ‘그것’은 몸을 굽혀 기지 않고 두 발로 걷는 법을 금세 익혔으며 곧 말을 할 수 있게 됐다. 배고파요, 잘게요. 안녕하세요.
“내가 천재를 주운 것 같은데?”
수르 미다프는 턱을 쓰다듬으며 그렇게 말했다. 결혼도 하지 않은 수르 미다프가 뒤늦게 얻은 자식 같은 아이를 두고 팔불출 짓을 하는 것에 뭐라 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물론 말을 할 줄 안다고 해서 잘 떠드는 것으로 직결되지는 않았다. ‘그것’은 꼭 필요한 말이 아니면 하지 않았다. 딱히 많은 말이 필요한 환경도 아니었다.
‘그것’은 왕성 안을 나다니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대부분 왕성 서쪽의 기사단 건물과 시녀들이 오가는 길만 돌아다녔다. 왕성의 세탁장은 ‘그것’이 가장 좋아하는 곳이었다. 그곳에서는 언제나 좋은 냄새가 났다.
말이 별로 없는 어린애가 세탁장 구석에 앉아서 햇볕 쬐는 것을 싫어하는 이들은 별로 없었다. ‘그것’은 그곳에서 따뜻한 햇볕을 쬐는 것을 좋아했다.
‘그것’은 이제 ‘빛의 띠’가 하늘이라는 걸 알고 있었고, 새파란 하늘 아래서 태양빛이 닿는 모든 것들을 하염없이 바라보기를 좋아했다. 어둠 속에 갇혀서 단 한 번도 제대로 보지 못했던 세계가 거기 있었기 때문이다.
성의 사용인들은 지나가다가 그런 ‘그것’의 입에 사탕을 한 알 물려주거나, 과일 한쪽을 주고 가곤 했다. 누군가가 ‘그것’에게 먹을 것을 건네면, ‘그것’은 몸을 둥글게 말고 있던 것을 펴고 이쪽을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었다.
그 모양이 마치 작은 고양이 같아서, 다들 어쩐지 애완동물을 기르는 것과 같은 느낌으로 ‘그것’을 돌봤다. 정작 ‘그것’ 본인은 잘 몰랐지만.
고양이 같은 어린애와 고양이는 엄연히 달랐다. 하지만 어떤 어린애에게는 같은 것으로 들렸던 모양이다. 그날도 어김없이 세탁장 근처의 햇볕이 잘 드는 곳에 웅크려 앉은 ‘그것’ 앞에 누군가가 나타났다.
“야옹이!”
“…그러니까 아니라고 말씀드렸잖아요, 공주님. 아이, 참. 동물이 아니에요.”
‘그것’은 굽은 등을 폈다. 눈앞에 호박을 잘 말려 설탕을 조금 바른 것이 내밀어졌다. 좋은 냄새. ‘그것’은 킁킁거리다가, 이내 그 손의 주인을 살피려 고개를 들었다.
‘그것’이 태양 아래로 나와 본 것 중, 가장 ‘예쁜 것’이 거기 있었다.
사과 같은 뺨은 붉고 통통했고, 젖살이 잔뜩 올라와 있었다. 태양빛을 받아 반짝반짝 빛나는 금발은 곱슬곱슬하게 말려 몸을 흔들 때마다 어지럽게 흔들리며 놀라운 광경을 냈다.
‘그것’의 반이 될까 말까 한 작은 몸집은 시녀의 발치에 대롱대롱 매달려 이쪽으로 한껏 몸을 내밀고 있었다. 무엇보다 ‘그것’을 사로잡은 것은 그 파란 눈이었다.
하늘이 거기 있었다.
‘그것’은 눈을 껌벅거렸다. 그런 ‘그것’을 두고 상대는 뭘 생각했는지, 다시 한 번 작고 통통한 손을 내밀었다.
“자!”
‘그것’은 저도 모르게 움찔해 몸을 뒤로 물렸다. 상대의 눈이 커졌다가, 작게 처졌다. ‘그것’은 어쩐지 뭔가 잘못됐다는 느낌을 받았다. 예쁜 것은 시녀를 올려다보더니 울상을 지었다.
“안 먹어….”
“공주님도 방금 전에 드시던 식사를 물리셨잖아요. 마찬가지예요.”
“물리…?”
예쁜 것이 어려운 말에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것’은 ‘공주님’이 예쁜 것을 부르는 이름이라는 걸 금세 알아챘다.
공, 주님.
‘그것’이 눈을 깜박이는 동안 공주님은 이쪽을 다시 쳐다봤다.
“안 먹어…?”
“네에. 그런 것 같아요. 그리고 일단 이 애는 야옹이가 아니랍니다.”
“아니야?”
“네. 얼마 전에 공주님께서 이름을 지어주셨잖아요.”
공주님은 전혀 모르는 일이라는 듯 시녀를 쳐다봤다. 시녀는 피식 웃었다.
공주는 얼마 전 미다프 경의 ‘공주님, 부하가 하나 생겼는데 이름을 지어달라’는 말에 자신이 한창 매료되어 있던 이야기 속의 왕자님 이름을 붙여줬다. 하지만 이 나이 때의 어린애들은 그런 일 같은 건 금방 잊어버린다.
“데미안이라고요.”
“데미안?”
공주님은 눈을 깜박거리다가 ‘그것’을 쳐다봤다. 어쩐지 표정이 이상해서 ‘그것’은 겁을 먹었다.
“이거 데미안 아냐….”
“아닌가요? 공주님이 붙여주신 이름인걸요.”
“데미안은 왕자야…. 이거 아냐….”
그러니까, 이야기 속의 왕자님들은 대부분 금발에 파란 눈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공주님의 눈앞에 있는 ‘그것’의 머리카락은 새카만 색이었다. 그 길이로 말할 것 같으면 정신없이 길러놓은 데다가, 눈은 검푸른 색이었다.
공주님은 자신이 이름을 붙여준 것도 까먹어버리고, ‘그것’을 보곤 고개를 도리질 쳤다.
시녀가 가볍게 웃었다.
“하지만 데미안도 공주님이 좋아하는 왕자님만큼 잘생기지 않았나요?”
그 말에 공주님은 다시 시녀의 치맛자락을 붙잡고 이쪽을 빤히 쳐다봤다. 아마 잠깐이었겠지만 ‘그것’에게는 꽤 긴 순간으로 느껴졌다.
이윽고 공주님이 입을 꾹 닫더니, 상당히 미진한 움직임이기는 했으나 고개를 끄덕였다.
“응….”
방금 전과는 달리 ‘그것’은 갑자기 배 속이 편안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게 안심이라는 걸 알게 된 것은 얼마 후였지만, 그때는 그걸 몰랐다.
공주님은 다시 한 번 호박 말린 것을 내밀었다. 먹으라는 뜻이었다. ‘그것’은 눈알을 굴리다가 슬그머니 손을 내밀어 호박을 조금 집었다. 공주님은 놀란 듯 눈을 크게 뜨더니, 환하게 웃었다.
“안녕, 데미안!”
데미안은 어깨를 움찔하다가, 벌떡 일어났다. 어쩐지 그 자리에 있기 싫어서였다. 거북한 감정이 배 속을 찌르르 울렸다. 데미안은 그대로 달아났다. 손에 호박 말린 것을 꼭 쥔 채였다.
***
포르투 왕성에는 어린아이가 딱 둘 있었다. 점점 사람의 구색을 갖춰가는 데미안은 그 어린아이들의 놀이 상대가 되기에 더할 나위 없어 보였다.
그러니까, 포르투 왕의 눈에.
치매에 걸리기 전의 포르투 왕은 좋은 사람이었다. 수르 미다프에게 데미안을 내어놓으라고 윽박지르면서도 데미안을 위해 내내 웃는 낯을 유지했을 정도로.
“쥬버린은 그 나이에 비해 너무 어른 같아. 또래가 필요하네.”
“그게 왜 데미안입니까?”
“수르 미다프가 쥬버린과 개구리를 잡으며 놀아줄 순 없잖나?”
“…원하십니까?”
중년의 기사단장은 이마를 찡그리며 쥬버린 왕자를 돌아봤다. 왕이 대신 답했다.
“수르 미다프. 치매에 걸려 다섯 살이 된 다음 다시 오게.”
오랜 친구이기에 가능한 악담이었으나 옆의 시종장이 끄흐으으음, 하고 헛기침을 해댔다. 그때 쥬버린이 빙그레 웃었다.
“음, 개구리를 잡을 것 같지는 않지만요. 수르 미다프만 괜찮으시다면 저는 좋습니다.”
“…개구리는 안 잡고, 뭘 하실 겁니까?”
“요즈음 기계공학을 배우고 있습니다. 하늘섬을 아무르의 가호 없이도 허공에 띄울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하기 위해….”
“개구리를 잡으셔야겠군요.”
쥬버린의 말을 단호히 자른 수르 미다프가 왕에게 단호히 말했다. 기계공학이 어쩌고 하는 소리는 다섯 살 어린애가 할 만한 말이 아니었다. 왕은 이제야 내 마음 알겠나, 라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데미안. 나가서 개구리를 잡아라. 쥬버린 왕자님과 함께다.”
데미안은 물끄러미 수르 미다프를 올려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을 들은 쥬버린이 아쉬운 듯 웃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갈까, 데미안.”
대답 대신 데미안은 쥬버린이 지나가게 하기 위해 한발 비켜섰다. 쥬버린이 걷자 한 발 뒤를 자연스럽게 따르는 데미안에게, 수르 미다프가 말을 덧붙였다.
“다섯 마리 잡기 전에는 돌아오지 마라.”
“아하하, 수르 미다프. 포르투 황성의 정원에는 개구리가 그렇게 많지 않아요!”
왕자는 웃으며 답하고 방을 나갔다. 데미안과 함께였다.
쥬버린 왕자와 데미안이 친해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데미안은 세상 자체에 익숙하지 않았고, 쥬버린 왕자는 또래 중에서는 월등히 성숙하고도 선한 꼬마였다. 좋은 스승이기도 했다. 쥬버린은 데미안이 모르는 모든 것을 알았고, 침착하게 가르쳤다.
쥬버린은 대부분의 경우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왕자이기 때문이다. 수많은 선생들이 아침 일찍부터 쥬버린의 방을 찾아 그를 가르쳤다. 쥬버린은 데미안도 불러 수업을 같이 들었다.
“너도 배워 둬야 해. 교육은 사람의 인생에 정말 큰 영향을 미친단다.”
다섯 살짜리 꼬맹이가 어른이나 할 법한 말을 하니 웃길 법도 했으나 쥬버린은 정말로 근엄한 꼬맹이였다. 데미안은 매일 쥬버린의 옆에 앉아 가만히 수업을 들었다.
어떤 오후였다. 왕은 오전 내내 책상 앞에 앉아 있던 두 꼬마의 앞에 와서 “모름지기 꼬맹이들이라면 흙장난을 해야 하는 거다!”라고 선언했다. 목덜미를 쥐인 꼬마들이 왕성의 정원으로 내몰린 것은 당연지사였다.
쥬버린은 멋쩍은 얼굴이 됐으나, 이내 모래흙 앞에 앉았다. 어쨌든 쥬버린은 성실함까지 갖췄고, 그 성실함은 그에게 부왕이 시킨 모래 장난까지 착실하게 수행하게끔 했다. 데미안은 그 앞에 주저앉아 손을 뻗었다.
그때였다.
“이 꼬맹이는 선물이다!”
갑자기 정원수 사이에서 부스럭거리며 나타난 왕이 호탕하게 웃으며 뭘 하나 더 던졌다. “악!” 왕의 무릎 정도 높이에서 달랑거리던 다리가 재주 좋게 바닥을 디뎠으나, 푹 파이는 모래를 이기지 못하고 데미안 앞으로 고꾸라졌다.
와락, 그 뭔가가 데미안에게 안겼다. 파르륵 흩어지는 금빛이 데미안의 시야를 온통 가렸다. 데미안은 놀라 저도 모르게 ‘그것’을 덥석 안았다.
동시에 좋은 냄새가 났다. 쥬버린이 당황해 일어났다.
“클로디아?”
“아아, 아바마마!”
데미안에게 안긴 ‘그것’은 벌떡 일어나 째지는 소리를 냈다. 데미안은 눈이 동그래져 앞을 쳐다봤다. 얼마 전 봤던 ‘공주님’이었다. 공주님은 엄청나게 큰 소리를 내며 왕에게 덤볐으나, 소용없었다.
“어린애들은 앉아서 흙장난이나 하란 말이야! 쪼그만 게 하루종일 얼굴에 분칠이나 하고 있지 말고!”
“폐하!”
뒤늦게 높은 소리를 내며 정원수 저편에서 시녀들이 뛰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왕은 하하 웃으며 성큼성큼 걸어 돌아갔다. 체격이 좋은 터라 엄청나게 빠른 속도였다. 뒤늦게 시녀들이 이쪽으로 달려왔다.
“공주님, 괜찮으세요?”
“괜찮아!”
네 살 먹은 공주님이 볼을 잔뜩 부풀리며 화를 냈다. 왕은 쥬버린과 데미안뿐만 아니라, 공주 또한 거울 앞에서 소꿉놀이 비슷한 것을 하고있는 게 영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쥬버린이 애매하게 웃으며 그녀의 손목을 잡아당겼다.
“아바마마께서 네가 얼굴에 뭘 바르는 걸 별로 안 좋아하는 걸 알고 있잖아. 이왕 이렇게 된 거 여기 앉아서 나와 놀자, 클로디아.”
공주는 조금 더 투덜댔으나, 어쨌든 쥬버린의 말은 착실하게 잘 들었다. 이내 그녀는 쥬버린의 옆에 쪼그려 앉았다.
“뭐 하는 건데?”
“음…. 흙장난?”
쥬버린은 웃으며 모래를 의미 없이 쌓았다. 동그란 언덕 비슷한 게 생겨 있었다. 별 재미는 없어 보였고, 공주는 입을 삐죽거리며 앞을 바라봤다. 그리고, 계속 자신을 쳐다보고 있던 검푸른 눈과 마주쳤다. 데미안은 그 새파란 눈동자가 이쪽을 응시하는 순간 화들짝 놀라 시선을 피했다.
그에 쥬버린이 아, 하고 웃었다.
“클로디아, 알아? 이 애는….”
“알아.”
“어, 알아?”
“데미안이잖아.”
공주는 새침하게 눈을 깜박이며 데미안을 쳐다봤다. 마치 ‘맞지?’라고 물어보는 듯한 시선이었다. 데미안은 잠시 저기에 대답을 해야 하나, 하고 고민했다. 그러나 곧 쥬버린이 그에게 물었다.
“데미안도 그럼 클로디아를 알아?”
“그럼!”
대답은 공주가 했다. 쥬버린이 의심스럽게 그녀를 쳐다봤다.
“…모르는 것 같은데?”
“아냐, 알아! 그렇지?”
공주는 데미안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데미안은 놀라 당황해 그녀를 쳐다봤으나,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공주는 웃으며 그에게 제 이름을 말해보라 야단법석을 떨었다. 끝내 데미안은 입을 열었다.
“…클로디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