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요정의 동굴
클로디아와 데미안이 다시 숲을 나와 수레에 합류하고 나니 이미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헬렌은 수레 뒤에 드러누워 자다가, 시빌이 마구 흔들어 깨운 뒤에야 입맛을 다시며 일어났다.
“세상에, 그런 일이 있었다고요?”
말 하나가 흔들흔들 수레를 끌며 다음 마을로 가는 동안, 클로디아는 간략하게 있었던 일을 시빌과 헬렌에게 설명했다. 시빌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호들갑을 떨었다.
“우와!! 나도 유니콘 한번 보고 싶었는데!”
“음, 나중에 볼 수 있지 않을까요…?”
클로디아가 웃었다.
“자기가 필요하면 부르라고 했으니까요.”
“지금 부르면 안 되나요?!”
클로디아의 말이 끝나자마자 시빌이 물었다. 헬렌은 한심한 표정으로 시빌을 타박했다.
“필요하면 부르라잖아, 필요하면.”
“아, 제가 보고 싶은 것도 필요일 수 있죠! 그런 신성 동물의 정보가 얼마나 비싸게 팔리는지 아세요?”
시빌이 떠들었으나 모두 약속이라도 한 듯 답하지 않았다. 좌우지간 이런 종류의 헛소리에는 먹이를 금지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시빌은 그 뒤로도 유니콘이 언제 가장 마지막으로 발견됐는지 같은 이야기를 주구장창 떠들었다.
‘…다행이다. 어색하지 않네.’
클로디아는 수레에 앉아 시빌을 힐끔 쳐다봤다. 아까 그런 상황이 있었으니 그가 자신을 어색하게 대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시빌은 별 허물없이 굴고 있었다.
‘하긴. 시빌이 어색하게 굴면 더 이상할지도….’
시빌은 처음부터 붙임성 하나는 끝내주는 사람이었다. 마법사 길드에서 만났을 때도 천연덕스럽게 굴고, 자신들에게 자연스럽게 합류했다. 그러니 그런 그가 자신에게 어색하게 군다는 것 자체가 더욱 더 있을 수 없는 일처럼 느껴졌다. 클로디아는 작게 킥킥 웃었다.
“아, 마을이다.”
숲에서 얼마 안 가면 있다더니, 정말로 마을은 금세 나타났다. 낮은 구릉 위에서 봐도 얼핏 50가구가 채 안 돼 보이는 작은 마을. 클로디아는 긴장하며 신성 사제의 문장을 쥐었다. 어쨌든 적어도 멜라토르에서 그녀는 사제처럼 행동해야 했다.
마을에 들어서자, 마을의 경비를 서고 있는 자들이 그들을 막아섰다. 데미안은 친절하게, 자신은 큰 도시로 농작물 판매 대금을 받으러 가는 상인이며 뒤에 앉은 자들은 도시까지 삯을 주고 탔다고 설명했다. 국경 때처럼 자신의 신분을 증명하는 절차가 잠시 있었고, 클로디아를 보자 마을의 청년들은 얼굴이 환해졌다.
“켈리가 말한 분이군요!”
“국경의 그 병사분…이 벌써 도착하셨나요?”
“네, 그렇잖아도 조금 전에 마을에 오자마자 사제님이 혹시 오지 않았느냐고 묻더군요.”
클로디아와 데미안이 숲에서 헤맨 시간을 생각하면 충분히 그럴 법도 했다. 청년들은 이윽고 클로디아를 촌장의 집으로 안내했다. 그 과정에서 헬렌과 데미안, 시빌은 여관의 위치를 안내받았으나 헬렌은 고개를 저으며 클로디아를 따라가겠다고 말했다. 의아한 시선을 보내는 청년들에게 헬렌은 실로 훌륭한 이유를 둘러댔다.
“잠깐 동행하는 동안 저 귀엽고 예쁜 사제님한테 집적거리는 무뢰한들을 여럿 봤더니, 아무리 돈만 받은 사이라지만 혼자 보내진 못하겠어요.”
청년들은 곧 억울한 표정이 되었으나, 클로디아의 얼굴을 보고 어느 정도는 납득한 듯했다. 결국 네 사람은 모두 함께 촌장의 집으로 갈 수 있었다.
촌장은 클로디아가 숲의 마귀를 몰아내었다는 소식에 기쁜 표정이 됐다. 아무리 그래도 유니콘을 만났다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신성력이 치유보다는 마귀 퇴치 쪽에 집중되어 있다는 클로디아의 말에, 촌장은 애석한 표정이 됐다.
“할 수 없지요. 너무 많은 걸 바라는 것도 못 할 노릇입니다. 뭣보다 근원적인 이유를 없애 주셨으니 그걸로 충분합니다.”
“아마 앞으로는 숲에서 다쳐오는 사람이 없을 거예요.”
클로디아는 생긋 웃으며 말했다.
촌장은 클로디아에게 자신의 집에서 묵을 것을 권했으나,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봉사하는 이로서 촌로의 집에 신세를 질 수 없다는 그럴싸한 이유를 댔더니, 그는 한층 더 감격한 표정이 됐다. 덕분에 촌장이 끝끝내 고집을 부리며 자신의 집에서 묵어달라고 부탁하는 사태가 벌어지긴 했으나, 어떻게든 가까스로 클로디아는 여관에서 묵을 계획을 지킬 수 있었다.
“하지만 이곳의 여관은 그리 크지 않습니다. 불편하실 텐데….”
“괜찮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동력 지대만큼 할까. 그런 생각을 속으로 삼키며 클로디아는 생긋 웃었다. 촌장은 그래도 영 걱정된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여관 근처까지 바래다주겠다고 나섰다. 덕분에 클로디아와 늙은 촌장, 그리고 세 사람이 뒤를 쫄래쫄래 쫓아가는 형태가 됐다.
날이 다 저물었지만 마을 안쪽은 제법 환했다. 그도 그럴 것이, 숲의 괴물 때문에 공포에 질린 마을 사람들이 마을 안에 횃불을 켜 두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촌장이 이미 마을 사람들을 불러다가 “사제님이 숲의 괴물을 물리치셨다고 전하거라!”라고 한 뒤였고, 사람들은 벙글벙글 웃으며 나다니고 있었다. 간혹 이쪽으로 와서 감사 인사를 하는 이도 있었다.
“그런데, 숲의 마귀라니…. 거 참. 이럴 줄 알았으면 뒷산이라도 올라가볼 걸 그랬군요.”
촌장이 턱을 쓰다듬었다. 듬성듬성 난 턱수염을 보며 클로디아는 잠시 자신의 아버지를 떠올렸다. 포르투의 국왕도 턱수염이 듬성듬성했다. 그야 촌장은 먹고사느라 바빠서 턱수염을 멋지게 기를 틈이 없었던 것이고, 국왕은 치매를 앓느라 턱수염에 음식물을 흘리거나 잡아뽑고 해서 그런 모양이 된 것뿐이지만. 어쨌든 그녀의 아버지를 떠올리게 하기엔 충분했고, 그래서 클로디아는 상냥하게 웃으며 물었다.
“뒷산에 뭐가 있나요?”
“아. 그것이… 이 마을엔 말입니다, 자르지스의 마귀가 쳐들어온 적이 있거든요.”
클로디아의 얼굴이 굳었다. 자르지스의 마귀라 함은 마족을 말하는 것일 테다. 뒤의 세 사람도 눈을 동그랗게 떴다. 촌장은 말을 이었다.
“그게 벌써 백 년쯤 전이라고 합니다. 저는 이 마을에서 태어나 쭉 살아오고 있지만, 이 마을의 어르신들이 종종 이야기해주시곤 했죠. 어르신들도 어릴 적, 자르지스의 마귀가 쳐들어왔다고요.”
“그, 그래서 어떻게 되었나요?”
클로디아가 다급히 묻자 촌장은 껄껄 웃었다.
“그때 지나가던 사제님께서 마귀를 봉인했다고 합니다. 사제님이 가지고 있던 보물로 마귀가 꼼짝 못 하게 되었고, 마을 사람들이 힘을 합쳐 꼼짝 못 하던 마귀를 뒷산의 동굴에 가두었답니다. 끝내 그 마귀는 몇 달을 버티다 굶어 죽었다는데, 몇 년 후에 사람들이 동굴을 열어보니 그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는군요.”
“아….”
구전설화 같은 거구나. 클로디아가 눈을 깜박였다. 촌장은 팔짱을 끼며 진지하게 말했다.
“그래서 저는 그렇잖아도 최근에 그 동굴에 올라가볼 생각이었습니다.”
“왜요…?”
“아니, 자르지스의 마왕이 그 하늘섬을 다 때려 부수었다잖습니까.”
갑작스레 나온 화제에 클로디아는 입을 닫았다. 촌장은 이마를 찡그리며, 하늘섬이 부서진 이후 자신들이 얼마나 불안해하고 있는지를 설명했다. 자르지스의 마귀들이 금방이라도 이 마을로 쳐들어오면 어떻게 해야 할지 토의를 거쳤고, 그 와중에 동굴에라도 올라가서 백 년 전 전설의 보물을 찾아볼까 생각했다고 말한 촌장은 문득 주변을 둘러봤다.
“아니…. 그런데 왜 이렇게들 조용하십니까? 하, 참! 걱정하지 마십시오! 우리 멜라토르의 왕자님이 지켜주실 겁니다!”
촌장은 껄껄 너털웃음을 웃었다.
“우리 왕자님은 자르지스의 마왕이 하늘섬을 부수었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전국의 군비를 강화하셨지요! 무슨 일이 있어도 멜라토르만큼은 지킬 거라고 약속하셨답니다!”
“…방금 동굴에 가볼까 하셨다면서요?”
왕자님 믿는다면서 동굴 보물은 왜 찾으려고 들었어? 라는 의미가 담긴 말에 촌장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야 뭐 그냥 하는 말이지요. 어쨌든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사람인지라 신경이 쓰이는 법 아니겠습니까. 아, 여관입니다.”
때마침 촌장은 여관 앞에 멈춰 섰다. 클로디아는 꾸벅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그 말에 촌장이 더욱 깊게 허리를 숙였다.
“저야말로 감사합니다. 이 마을의 골칫거리를 해결해 주셨지 않습니까? 이봐! 루빈!”
촌장은 여관 안에 소리를 쳐 주인으로 보이는 자를 불렀다. 그리고 루빈이라 불린 여관 주인에게, 마을을 구한 분들이니 제발 귀히 모시라고 신신당부에 당부를 거듭했다. 루빈은 씩 웃으며 걱정하지 말라고 자신의 가슴을 두들겼다. 촌장은 몇 번이고, 루빈의 대접이 소홀하다면 자신의 집으로 오라고 말을 덧붙인 다음에야 돌아섰다.
***
저녁 식사 시간이 ‘마귀’에 대한 화제로 가득 찬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뒤늦게 이야기를 듣고 온 국경의 병사 켈리가 헐레벌떡 여관으로 왔고, 그는 자신이 네 사람의 식사를 책임지겠다고 호언장담했으나 여관 주인이 고개를 저었다. 네 사람의 저녁 식사는 마을 전체에서 내기로 했다는 것이다.
결국 켈리는 식사를 하는 네 사람 옆에서 바지런하게 떠들었다. 켈리의 수다는 조금 귀찮았으나 쓸모 있는 부분도 있었다. 예를 들면 멜라토르의 국경 수비가 예전보다 훨씬 강화됐다는 사실 같은 것이다.
“하지만 멜라토르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도 요즘 군비를 강화하면서 국경 수비에 공을 들이고 있지 않아?”
“예, 그야 그렇지요. 하지만 요즘은 좀 유난합니다.”
켈리는 눈알을 굴리며 설명했다.
“아무리 그래도 국경 수비에 저 같은 정도의 청년들까지 동원하지는 않거든요. 보통 국경은 수도에서 오신 기사님들과 전문 군인들이 담당하지만, 요새는 평민 남자들도 동원하고 있습니다. 저만 해도, 국경에서 마을이 멀어서 보통 이쪽까지는 징발이 안 옵니다.”
하지만 그런 자신도 얼마 전부터 국경에서 수비를 하고 있다는 말이었다.
“그렇다 보니 요즘 여행객들도 통 줄었습니다. 상인들도 점점 출입이 적어지고 있고요.”
여관 주인이 한마디 더 거들었다. 국경을 오전에 통과하면 딱 오후쯤 들를 수 있는 마을이다 보니, 루빈은 여관 숙박업보다는 식사 장사로 더 괜찮은 수입을 올리고 있었다. 하지만 요즘 같은 때에는 굶어 죽기 좋다는 게 루빈의 설명이었다.
“게다가 숲에서는 괴물까지 나타났으니… 솔직히 물리쳐주셨기 망정이지 저희는 수도의 기사단에 도움을 요청할 생각도 있었어요.”
“하지만 사제님께서 물리쳐주셨으니 얼마나 다행입니까?”
켈리가 때를 놓치지 않고 그녀를 찬양했다. 클로디아는 멋쩍은 기분이 됐다. 사실 어찌 보면 숲의 유니콘을 달래어 본래 살던 곳으로 보낸 건 그녀가 맞지만, 사제가 아니다 보니 기꺼이 칭찬을 받기가 참으로 미묘했다.
그때 시빌이 말을 이었다.
“아까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재미있는 이야기요?”
“아, 뒷산의 동굴 이야깁니다.”
시빌이 운을 떼자마자 루빈이 너털웃음을 웃었다.
“그거 촌장 어르신이 말씀하신 거죠?”
“엇, 예. 아세요?”
“어휴, 그 이야기 모르는 사람이 이 마을에 어디 있겠습니까. 저희도 어릴 때는 그런 이야기를 듣고 자랐죠. 하지만….”
루빈이 켈리를 슬쩍 쳐다봤다. 켈리가 피식 웃었다.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동네 꼬맹이들은 원래 자신이 용사가 된 기분으로 탐험하러 나서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켈리도 그 동굴에 가 봤단 이야기였다. 켈리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을 이었다.
“어릴 적에 제가 가 봤습니다. 그냥 평범한 곰 굴입니다.”
곰이 겨울잠을 자기 위해 만들어놓은 굴로밖에 보이지 않았다는 게 켈리의 설명이었다. 게다가 오래전에 맹수들에게 외면당한 듯, 안에는 썩은 낙엽 더미와 벌레들밖에 없었다고 그는 말했다.
“아, 재미있는 걸 보긴 했는데….”
재미있는 것? 모두의 눈에 호기심이 일었다. 켈리는 설명을 덧붙였다.
“동굴에 떠돌이들이 머물다 갔는지, 그림 같은 게 좀 있긴 하더군요. 바닥에도 요정의 원 같은 게 좀 있고요.”
“그림?”
“예. 근데 모르는 말이라서 그런가. 읽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굴은 마귀가 살 정도로 크거나 길지도 않고, 보물이 잠들어 있는 멋진 굴도 아니라고 켈리는 말했다.
“그야 조금 걸어 들어갈 만한 길이이긴 했지만… 끝이 막혀 있는 것까지 다 보고 왔죠.”
“아하.”
“하지만 촌장님은 진지하셨는데….”
클로디아가 아쉬운 듯 중얼거리자 이번에야말로 루빈이 킬킬 웃었다.
“그거야 오랜만에 마을에 온 손님께 허세라도 부리고 싶었던 거죠.”
“허세요?”
“저희 마을은 진짜로 아무것도 없으니까요.”
국경에서 온 상인들이나 여행자들이 머물기에는 애매한 위치에 있고, 특산물이 있는 것도 아니다. 가구 수가 많지도 않으니 그저 평범한 마을에 불과했다. 하지만 루빈의 말을 빌자면 촌장은 그런 마을을 특별하게 보이기 위해 외부 인구들에게 꽤 그럴싸한 허풍을 늘어놓는다는 것이었다.
“그야 마을 촌장이시니 그런 생각을 하시는 것도 이해하지만, 가끔 어린애들이 진짜로 뒷동산 동굴에 들어가도 되냐고 하면 웃음부터 터진다니까요.”
“제 동생도요! 들어가 봐야 낙엽 썩은 데에 발빠질 일밖에 없다는 데도 그런다니까요.”
켈리가 손을 내저었다. 식사는 거의 다 끝나가고 있었고, 루빈은 너스레를 떨며 빈 접시를 치웠다.
“아무튼 거기 뭐 별건 없습니다. 남쪽으로 가신다고 했지요?”
“예.”
데미안이 답하자 루빈이 피식 웃었다.
“어차피 가시는 길이니 한번 구경이나 해 보십시오. 촌장이 허풍을 떨었다는 걸 대번에 아실 수 있을 겁니다.”
그 동굴은 남쪽으로 가는 구릉 길목에 있다고 했다. 뒷동산에 가까운 높이의 산이었고, 길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동굴을 쉽게 찾을 수 있다는 말에 다들 헛웃음을 지었다.
애초에 마귀가 봉인된 동굴이라면 어디 그렇게 사람 지나는 길 근처에 있기 쉽겠는가. 차라리 요정이라도 나오면 모를까.
식사가 끝나자, 루빈은 방으로 네 사람을 안내했다. 낡았지만 깨끗하고 정갈한 방 세 개였다. 세 개? 의아한 눈으로 데미안이 루빈을 바라보자 루빈은 눈을 껌벅였다.
“…아내분과 주무시는 것 아닙니까?”
아차. 헬렌이 뒤에서 머쓱한 표정으로 이마를 긁었다. 그러니까, 부부라는 설정인 헬렌과 데미안이 한 방, 시빌이 방 하나, 클로디아가 방 하나인 모양이다.
헬렌은 커흠, 하고 헛기침을 한 후 “돈을 아끼기 위해 사제님과 제가 같은 방을 쓰고 있수다.” 하고 말했다. 그러나 루빈은 더더욱 잘 됐다는 표정으로, “괜찮습니다! 어차피 사제님께 감사해서 제가 숙박비도 안 받으려고 결심한걸요!”라며 한사코 데미안과 헬렌을 한 방에 넣었다. 루빈이 보는 앞이니 거절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렇게 시빌과 클로디아 또한 각자 한 방에 들어가게 됐다. 클로디아는 방에 들어가자마자 침대에 앉아 한숨을 쉬었다.
하루가 너무 길었다. 그녀는 자신이 입고 있는 사제의 옷을 내려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언제까지 이렇게 아슬아슬하게 여행하게 될까? 자신의 신분을 감추는 것도 모자라 남의 신분까지 사칭하며 여행하고 있다니. 변경 지역이라서 그렇지, 누군가 그녀를 알아보기라도 한다면 크게 문제가 될 상황이었다.
게다가…. 클로디아는 전운이 감도는 왕국들을 떠올렸다. 자신의 여행이 늘어질수록 전쟁 가능성도 높아진다. 얼핏 이야기가 나온 멜라토르의 왕자 또한 그녀가 익히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클로디아보다 나이가 열 살이 넘게 많은 그는 한때 클로디아의 파혼 직후 그녀에게 청혼했더랬다. 역시 너무 나이가 많아 거절했지만…. 그는 꽤 집요했던 기억이 있었다.
혹시라도 그가 클로디아의 행방을 알게 된다면 일어날 일들은 무궁무진했다. 클로디아는 더 조심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침대에 잠깐 누웠다. 조금 있다가 몸을 씻어야지.
그리고….
***
[나빴어, 나빴다구!]
디자이어는 아까부터 연신 떠들고 있었다. 버림받았다는 이유였다. 클로디아는 연신 사과했다.
“미안해, 어쩔 수 없었잖아.”
[흥, 어쩔 수 없긴! 너희 일부러 그랬지?]
그러니까, 모두들 수레에 디자이어를 내버려 둔 채 잠든 것이 문제였다. 디자이어는 너무 눈에 띄는 검이었고, 다들 어찌할까 머뭇거리다가 수레 안에 디자이어를 넣어놓고 그냥 놔뒀다. 어차피 남이 디자이어를 발견한다 해도 훔칠 수 있는 검도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바로 거기에 디자이어는 마구 짜증을 냈다.
[어떻게 그 축축하고 어두운 곳에 나를 밤새 놔둘 수가 있어? 특히, 너 클로디아! 내가 밤새 불러도 못 들은 척했지!]
“…못 들은 척이 아니라 정말 잠들었다니까….”
클로디아는 한숨을 쉬었다. 그렇게 사제복을 입은 채로 클로디아는 씻지도 않고 곧장 침대 위에서 곯아떨어졌다. 헬렌이 클로디아의 편을 들었다. 밤에 루빈이 간식을 갖다 줘서 나눠 먹으려고 클로디아의 방문을 열었는데, 그대로 죽은 듯이 자고 있어서 그녀를 침대 위로 옮겼다고 헬렌은 증언했다.
“제가 그렇게 잤어요…?”
“응. 들어 올려도 깨어나지도 않던데. 누가 업어 가도 모르겠더라고.”
헬렌이 피식피식 웃었다. 클로디아는 얼굴이 새빨개졌다. 어쩐지 이불이 덮여 있더라니.
“그럴 만도 했죠. 어제 낮에 오죽 일이 많았습니까.”
시빌도 수레에 누워서 머리 아래로 손깍지를 낀 채 말했다. 앞에서 수레를 모는 데미안만 말이 없었다.
“은근히 강행군하고 계시다고요. 한가한 것처럼 보여도….”
“아무튼 너무 화내지 마, 디자이어.”
[미워! 나는 잘 자지도 않는단 말이야! 그 짚더미 아래에서 내가 밤새도록 벼룩이랑 친구하고 있어야겠니?]
한참 후로도 디자이어는 속상했다고 칭얼거렸다. 귓가에서 하도 쨍쨍대는 통에 데미안을 뺀 세 사람 다 진이 빠졌다. 아침 일찍 일어나 마을을 떠나던 길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아침부터 나와 네 사람을 전송했다.
“어디 보자. 어이쿠, 푸짐하게도 싸 주셨군요.”
시빌이 슬쩍, 여관 주인이 건넨 바구니를 열어보고 너스레를 떨었다. 바구니 안에는 점심으로 먹으라고 마을 사람들이 싸 준 것들이 가득했다. 빵에 고기와 야채를 끼운 음식, 물, 고기를 구워 기름종이에 싼 것 등…. 평범한 듯 호화스러워 보이는 먹거리였다. 뭣보다 많았다.
“여덟 명은 먹겠네요….”
“뭐, 우리야 좋죠.”
“그렇지만 나는 영 역할을 못 하는 느낌이 드는데.”
헬렌이 중얼거렸다. 그녀는 요리사로 고용됐지만, 지금까지는 딱히 요리를 할 만한 일이 없었던 탓이다. 클로디아가 빙그레 웃었다.
“아이, 사람이 있는 곳에서 헬렌이 요리할 필요가 뭐가 있겠어요?”
본디 사람이 없는 곳에서도 그럴싸한 밥, 그것도 마법적 효과가 있는 밥을 먹기 위해 헬렌을 고용한 터다. 굳이 밥을 사 먹을 수 있는 곳에서 헬렌을 부리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헬렌은 머쓱하게 웃었다.
“어쩐지 해야 할 일을 안 하는 느낌이란 말이야.”
“사실 헬렌이 가장 크게 해줘야 할 일은 따로 있긴 합니다.”
“응?”
문득 앞에 있던 데미안이 입을 열었다.
“자르지스는 어떤 땅인지 우리가 잘 모릅니다. 시빌이 들어가 봤다고는 하지만, 거기서 충분한 시간을 보내지 못했죠. 그곳에 식량을 들고 들어갈 것이긴 하지만, 식량이 다 떨어지면 먹을 것도 현지 조달해야 합니다.”
“아하.”
“자르지스에서 뭐가 나는지, 어떤 것이 독성이 있는지 우리는 모르죠. 하지만 대개 사람이 먹을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에는 대체적으로 공통적인 특징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니까, 헬렌은 요리뿐만 아니라 일행의 목숨도 책임져야 할 판이었다. 그 얘기를 들은 헬렌이 갑자기 즐거워했다.
“무슨 이야기인지 알겠어. 그러니까, 빨간 버섯은 먹지 않는다는 법칙 같은 걸 말하는 거지?”
“예. 맞습니다.”
“왜요? 빨간 버섯은 왜요?”
헬렌의 말에 클로디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반문했다. 시빌이 빙그레 웃으며 첨언했다.
“숲에서 빨갛고 예쁜 버섯을 보신 적 있죠? 반들반들 윤도 나고요.”
“네, 맞아요. 정말 예뻐서 제 정원에 키우고 싶다고 생각했을 정도인걸요.”
“그거 먹으면 바로 죽어요.”
“예?!”
헬렌과 시빌은 버섯의 종류 같은 것에 대해 무지한 공주님을 향해 신나게 떠들었다. 딱 봐도 예쁘고 귀여운 것은 먹으면 안 된다, 그건 식물들의 함정이다, 같은 이야기를 듣고 클로디아는 눈이 동그래졌다.
“세상에….”
“뭐랄까. 자기를 지키기 위한 버섯의 필사적인 노력이랄까.”
“그리고 그런 것도 있죠. 빨갛고 자그마한 열매라고 해서 반드시 새콤하진 않은….”
“쓴맛이 나지.”
헬렌이 킥킥 웃었다. 산열매 또한 지나치게 눈에 띄는 열매는 고민해봐야 한다는 말에 크로디아는 “하지만 사과는 빨갛고 맛있잖아요?!”라고 되물었다. “그건 사람들이 보기 좋게 하려고 개량한 거지.”라는 헬렌의 말에 풀이 곧 죽었지만.
“그러면 숲에서도 아무거나 먹으면 안 되겠네요….”
“그럼. 내 말 잘 들어야 해.”
헬렌이 으스댔다. 그때였다.
[저기 뭐가 있는데?]
“어?”
디자이어가 갑작스레 그들을 저지했다. 수레에 있던 이들이 모두 한곳을 쳐다봤다. 커다란 바위였다.
클로디아가 반색했다.
“어제 켈리가 말한 곰 굴인가 봐!”
“오, 그렇군요. 이쯤 올라오면 있다더니.”
시빌이 수레에 턱을 괴고 심드렁하게 말했다. 커다란 바위가 보이면 그 뒤로 돌아가라고 했다. 그러면 곰 굴 입구가 있다나. 물론 그 안에는 별것 없다는 말도 함께.
“우리 안을 한번 들여다볼까요?”
“시간이 없습니다.”
데미안이 클로디아의 말을 잘랐다.
“오늘 저녁까지는 큰 도시에 당도해야 합니다. 거기서 내일 남쪽으로 쭉 내려가서, 모레쯤에는 남부 국경에 도착해 다른 나라로 넘어갈 겁니다.”
멜라토르에서 한시라도 빨리 나가고 싶은 것은 데미안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 역시 꽤 집요했던 멜라토르의 왕자를 기억하고 있는 탓이었다. 클로디아는 데미안을 바라봤고, 자신을 흘끗 쳐다보는 그의 눈에서 걱정의 기색을 읽을 수 있었다. 그 당시에 멜라토르의 왕자가 그녀에게 집착적으로 굴어 데미안은 앞장서서 그를 쫓아내야 했다. 지금은 그 왕자도 결혼했고, 아이까지 낳았다지만…. 사람 일은 모르는 것이다.
[하지만, 저기 좀 이상한 게 있는데?]
“응?”
그러나 데미안을 멈춰 세운 것은 디자이어였다. 디자이어는 계속해 쫑알거렸다.
[굴이 엄청 커. 그리고 안에 뭔가 신경 쓰이는 게 있는데….]
“크다고? 어제 켈리는 곰 굴이라고 했는데?”
[곰 굴? 그럼 다른 굴인가 보지. 아냐. 저거 엄청 커.]
모두 서로를 쳐다봤다. 데미안은 이마를 찡그리고 입을 열었다.
“디자이어. 우리는 시간이 없습니다. 혹시 쓸데없는 걸로 발걸음을 멈춘다면….”
[…아이, 정말!]
디자이어는 팩 토라졌다.
[어제부터 내 말은 아무도 안 듣더니! 이럴 때까지 내 말 무시하지? 이럴 줄 알았어. 이제 내 말은 필요도 없지? 쓸데없는 걸로 발걸음 멈추려고 해서 미안하다!]
…정말이지 검 주제에 왜 이렇게 잘 삐진담. 클로디아는 그렇게 생각하며 검 손잡이를 붙잡았다.
“미안해, 디자이어. 화났니? 신경 쓰인다는 게 뭐야? 혹시 말해줄 수 있겠니?”
[몰라!]
모두 서로를 쳐다보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푹 쉬었다.
“…일단 잠깐 둘러보기만 하죠.”
[됐어! 가긴 뭘 가? 너희들은 꼭 내가 삐진 티를 내야 말을 듣는 척을 하지? 생각해줘서 뭘 말을 해도 쓸데없는 거라는 말이나 하고, 아무튼 데미안 너는 특히….]
…정말로 안 가면, 이 빠르고 데시벨 높은 한탄을 저녁까지 들어야 할 것이다. 시빌은 귀를 막는 시늉을 하고 있었다. 클로디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어쩔 수 없이 데미안이 동굴 근처에 수레를 세웠다.
동굴 입구는 생각보다 컸다. 이끼가 잔뜩 끼어 있었고, 입구는 위험하기 때문인지 큰 바위와 나무들로 막혀 있었다. 앞의 돌만 치우려고 해도 한나절일 것이다. 그러나 디자이어는 시빌을 을러멨다.
[시빌! 평소 내가 치료해주던 은혜를 갚아!]
“…무슨 놈의 정령이 이렇게 알뜰합니까?”
시빌이 어이없이 웃으며 동굴 입구의 잔해를 걷어냈다. 엄청난 돌이 우레 같은 소리를 내며 빠져나가자, 안에서 훅, 하고 습기 찬 냄새가 풍겨져 나왔다.
“…진짜로 여길 들어가라고?”
[응! 나 안에 들어가고 싶어!]
디자이어는 아까보다 부쩍 흥분한 듯했다. 데미안이 석연찮은 얼굴로 클로디아 쪽을 바라봤다.
“답지 않게 집요하지 않습니까…?”
“음, 저도 그렇게 생각하는데….”
클로디아가 난처한 얼굴로 제게 안긴 디자이어를 내려다봤다. 디자이어는 이제 우웅, 하고 몸을 떨고 있었다. 그 진동이 얼마나 대단한지 옆에 선 헬렌도 눈을 둥그렇게 뜰 정도였다.
“디자이어. 대체 저 안에 뭐가 있기에 그러는 거니?”
[몰라, 하지만 엄청나게 신경 쓰여.]
디자이어가 답했다. 시빌이 혀를 찼다.
“일단 들어가 보는 수밖에 없겠군요.”
이렇게까지 디자이어가 집요히 구는데, 그냥 지나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데미안이 앞섰고, 세 사람이 순서대로 쭐레쭐레 데미안의 뒤를 따라가는 형태로 동굴에 들어갔다. 클로디아는 동굴에 발을 들이자마자 자신의 발이 푹, 하고 썩은 낙엽 더미로 들어가 기겁을 했다.
동굴은 아주 오래 방치된 것 같았다.
“휘유. 아주 푹 썩은 냄새가 나는데요.”
“기분 나쁜 냄새는 아니야. 풀과 낙엽 같은 게 썩은 냄새…. 하지만 정말 여기에 대체 뭐가 있다는 거야?”
헬렌이 중얼거리며 주변을 돌아봤다. 동굴은 그리 크지 않아서, 네 사람은 기껏 3분도 걷지 않았을 무렵 동굴의 끝에 당도했다. 동굴은 켈리의 말마따나 곰 굴에 가까웠다. 겨우내 잠을 자기 위해 곰이 찾아들 법한 크기의 굴. 이곳에 뭐가 있다는 것인지.
그때 시빌이 히야, 소리를 질렀다.
“저기 보세요.”
시빌은 곧장 빛의 구를 만들어 띄웠다. 모두의 눈이 동굴 벽으로 향했다. 클로디아도 우와, 하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동굴 벽에는 언뜻 어린애 낙서 같았지만, 아주 많은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그것은 돌로 긁은 것 같기도 하고, 재로 그린 것 같기도 했다. 규칙적이되 규칙적이지 않은 동그라미와 선, 각진 것들이 벽에 새겨져 있었다. 어떤 곳에는 도마뱀을 수렵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있었고, 구석에는 용도 그려져 있었다.
“켈리가 말한 재미있는 것은 이것들이었던 거 같군요.”
“모르는 말….”
클로디아는 저도 모르게 벽으로 다가섰다. 벽에는 몇 줄짜리 글이 새겨져 있었다. 정확히는 그것이 글자의 형태라는 것은 모두 알아봤지만, 일행 중 아무도 모르는 말이었다. 클로디아는 네 개의 대륙에서 쓰이는 네 개의 공용어를 모두 수준급으로 구사했지만, 그런 그녀 또한 모르는 언어였다.
“로드께서도 모르십니까.”
“네. 저는 이런 글자를 본 적이 없어요. 소수민족들의 글자일까요?”
“글쎄요….”
데미안의 표정이 미미하게 찡그려졌다. 그 또한 클로디아가 언어에 재능이 있다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런 그녀도 모르는 글자라니. 데미안은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러나 시빌과 헬렌은 전혀 개의치 않는 표정으로 동굴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와. 여기 정말로 뭔가가 있었던 걸까요? 이거 보세요!”
“이게 뭐야?”
시빌이 낙엽 사이에서 찾아낸 것은 묵직한 사슬이었다. 엄청나게 녹이 슬어서 시빌의 손에 빨갛게 녹이 묻어나올 정도였다. 헬렌이 관심을 표했다.
“신기하네. 진짜 여기에 뭘 가둬놓긴 했나 봐.”
“그쵸? 동굴 문이 그렇게 닫혀 있던 걸 보면 누군가가 인위적으로 문을 닫았다는 건데….”
클로디아 또한 이 동굴이 신기하긴 했다. 그러나 그녀는 시빌처럼 열성적이진 않았다. 어쨌든 그들은 갈 길이 바빴고, 그녀는 디자이어의 떼쓰기가 아니었다면 이 동굴에 들어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하품을 하며 디자이어를 아이 어르듯 두어 번 안고 흔들었다. 아직까지도 디자이어는 그녀에게 좀 무거워서, 그렇게 끌어안아야만 했다.
“디자이어. 이제 속이 시원해?”
[음….]
“여기 안의 뭐가 신경이 그렇게 쓰였어?”
[글쎄…. 잘 모르겠네.]
디자이어는 어딘가 석연찮은 기색이었다. 아이 참, 네가 떼를 써서 왔는데 그렇게 지지부진한 말을 하면 안 되지! 라고 그녀가 말하려고 할 때였다.
“음?”
그녀의 옷깃 안에서 뭔가 희미하게 빛났다. 클로디아는 저도 모르게 자신이 입고 있던 셔츠 목깃을 젖혀 안을 들여다봤다. 자신이 땅요정 왕의 땅굴에서 얻은 월장석 목걸이가 옅게 빛나고 있었다.
“뭐지?”
[클로디아. 그 목걸이를 꺼내봐.]
“이걸 꺼내라고?”
그녀는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손을 목깃에 집어넣어 목걸이를 뺐다. 목걸이는 여전히 옅게 점멸하고 있었다. 이게 어디서 나는 빛이지? 클로디아는 홀린 듯 그 목걸이를 바라봤다.
[이거였구나.]
“뭐?”
[클로디아, 뒤를 돌아 봐.]
“…로드?”
데미안의 부름과 거의 동시에, 클로디아는 뒤쪽을 바라봤다. 그리고 깜짝 놀랐다. 방금 전까지는 그저 의미 없는 그림에 불과하던 그림들이, 이상하게 빛나고 있었다.
“로드! 위험합니다. 이쪽으로…!”
“잠, 깐만.”
월장석 목걸이와 거의 같은 빛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데미안의 어조와 달리, 그 빛이 위험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빛은 포근했고, 또한 희미했다. 게다가….
클로디아는 한 발짝 벽에 다가섰다.
방금 전까지 읽을 수 없었던 글자들이 형태를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보호받으나 보호하는 자여…?”
그녀의 푸른 눈이 깜박였다. 글자들은 살아 있는 것처럼 움직여 뜻을 만들어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행운을 얻었으니.”
…시련을 끝내면 행운을 만나리.
그녀가 마지막 문단을 읽었을 때, 갑작스레 어두운 동굴에 바람이 휘몰아쳤다. 클로디아는 그제야 꺅, 하고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데미안이 소리 질렀다.
“로드!”
이상하게도 아까부터 데미안은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던 참이었다. 동굴의 글자들과 그림이 빛날 때부터, 세 사람은 클로디아가 있는 쪽으로 다가설 수 없었다. 그게 가능했다면 데미안은 클로디아가 글자를 읽기도 전에 그녀를 안아 올려 뒤로 후퇴했을 것이다.
그러나 세 사람은 누군가가 그 자리에 못 박아놓은 듯 움직이지 못했다. 희미하게 빛나던 그림들이 움직였다. 그것들은 한데 모여 흰색의 커다란 입구를 만들었다. 바람은 그 안쪽으로 불고 있었다. 알 수 없는 인력이 클로디아의 몸을 빨아들였다.
“이게 뭐야!”
클로디아가 울상이 됐다. 그녀는 급히 주변의 아무거나 붙잡으려 했으나, 디자이어가 그녀의 품에 안겨 있는 것이 문제였다. 그녀는 한 손을 데미안 쪽으로 뻗었다. 데미안 또한 저도 모르게 자신의 손을 내밀었으나, 그녀는 엉겁결에 디자이어를 떨어트릴 뻔하고, 다시 디자이어를 안았다.
그리고 그게 실책이었다. 그녀의 몸은 결국 둥실 하고 떠올랐다. “악! 수르 알파!”
바람에 클로디아의 옷이 무섭도록 펄럭였다. 귓가를 머리카락이 미친 듯이 때렸다. 하지만 그런 것을 신경 쓸 수는 없었다. 클로디아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그 입구 안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휘르륵, 바람이 우는 소리를 냈다.
“로드!!”
데미안은 버럭 고함을 지르고 앞으로 나아갔다. 겨우 발을 뗄 수 있게 됐지만, 늦었다. 클로디아의 머리카락 마지막 한 올까지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간 뒤였다.
쾅.
앞으로 달려나간 데미안의 어깨가 동굴 벽에 부딪쳤다. 입구는 이미 사라진 뒤였다. 쩡. 데미안이 들이받은 힘이 어찌나 강했는지, 동굴 전체가 우수수 흔들렸다.
“뭐, 뭐야 방금…? 클로디아?”
헬렌이 어안이 벙벙해진 채로 공주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공주는 어디에도 없었다.
***
[클로디아, 클로디아.]
그녀는 뜨겁고 부드러운 것 위에 누워 있었다. 뺨에 따뜻하고 축축한 것이 닿았다. 기분이 어쩐지 좋았다.
[일어나. 시간이 없어.]
하지만 자고 싶은데.
[안 돼. 여기서는 1분 1초가 급해.]
그녀는 결국 이마를 한 번 세게 찡그렸다가, 눈을 떴다. 눈앞은 온통 금빛이었다.
뭐지…? 클로디아는 눈을 깜박이며 부스스 일어나 앉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경악했다.
“여기 어디야?!”
[나도 몰라.]
디자이어가 드물게 침착하게 말했다. 클로디아는 커진 눈으로 사방을 둘러봤다. 그녀가 전혀 아는 바 없는 곳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는 부드러운 금색 이끼로 가득한 어떤 방 안에 주저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뭐야, 이게….”
그제야 클로디아는 자신이 정신을 잃기 전 있었던 상황을 차츰 기억해냈다. 디자이어가 유난히 신경 쓰인다는 동굴에 들어갔고, 월장석 목걸이가 반응했다. 그리고 동굴에 생긴 이상한 입구에 빨려 들어왔고….
거기까지 생각한 다음, 그녀는 덜컥 겁을 먹었다.
“…수르 알파?”
답이 없었다.
“시빌? 헬렌?”
여전히 다른 답도 없었다. 그녀는 사방을 황망하게 둘러봤다. 방은 흰색 동굴 같은 느낌이었다. 회백색 종유석이 가득 내려앉아 있었고, 바닥에는 부드럽고 따뜻, 아니 뜨거운 이끼가 가득했다. 그리고 바닥에는 디자이어가 놓여져 있었고…
그녀 혼자였다.
[…진정해, 클로디아.]
“뭐야, 나 혼자 남겨진 거야? 아니면 다른 곳으로 혼자 옮겨진 건가?”
클로디아의 눈에 눈물이 가득 찼다.
이 상황을 파악할 수 없었다. 분명한 건, 이게 꿈은 아니라는 거였다. 그녀는 데미안을 부르기 전, 이미 자신의 허벅지를 꼬집고 있었으니까. 기겁할 정도로 아프게 꼬집었지만, 꿈은 깨지 않았다.
“디자이어, 이게 뭐야?”
[…일단 미안.]
“뭐가 미안해? 여기 어디야? 넌 여기가 어딘지 알고 있는 거야?”
디자이어는 한동안 침묵했다. 그녀는 눈앞의 디자이어를 끌어와 눈앞에 세워놓고 물었다.
“뭐야? 왜 대답 안 해? 디자이어?”
[미안해, 클로디아. 내가 호기심 때문에 그만….]
“뭔데?”
디자이어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혹시 오래된 정령들이 뭐가 되는지 알고 있어?]
뜬금없는 말에 클로디아는 눈을 찌푸렸다.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여기가 어디냐고 물었는데, 갑자기 나이 먹은 정령이 뭐가 되는지 아느냐고 물으면 뭐라고 대답하란 말인가. 하지만 그녀는 어쨌든 디자이어가 이 상황에 관해 뭔가 할 말이 있다는 걸 알아챘고, 일단은 순순히 답했다.
“…몰라. 저번에 네가 너 같은 정령이 되는 거라며?”
[정확히는, 나보다 더 오래된 정령들 말이야.]
“몰라. 내가 정령도 아니고 그걸 어떻게 알아.”
그녀가 볼멘소리로 답했다. 디자이어는 그녀에게 화내지 않고 차분히 설명했다. 정확히는 화낼 수 없었다. 이곳에 그녀가 빠지게 된 것은, 따지고 보면 디자이어 때문이었기 때문이다.
[나보다 오래된 정령은 딱 둘이 있어. 하나는 태양. 나머지 하나는 뭐인지 알겠어?]
“…달?”
[맞았어.]
디자이어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었다.
[월장석은 달이 신이 되어 하늘로 올라가며 뿌려놓은 파편이야. 그래서 가끔 좋은 월장석의 마력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게 해 준다고 하지.]
클로디아는 투르에서 시빌이 월장석 목걸이를 걸고 어둠 속의 병사들을 정확히 공격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게 지금 이 상황이랑 무슨 상관인데?
[여기는 정령, 정확히는 요정들이 달빛 사이에 숨겨놓은 던전이야. 함정을 파놓은 소굴이라고.]
“…던전?”
[그래.]
이끼는 여전히 따뜻한 빛을 머금고 있었다. 클로디아는 멍하니 주변을 둘러봤다.
여기가 던전이라고…?
[그리고 너는 여기에서 요정들이 정해 놓은 뭔가를 하지 않으면 아마…. 나가지 못할 거야.]
***
나이를 먹어, 의지를 가졌지만 행사할 수 있는 힘은 많지 않은 정령들은 가끔 인간들에게 심술을 부린다. 달빛 사이에 뭔가를 숨겨놓고, 그 틈에 빠진 인간이 뭔가를 찾지 못하면 벌을 주는 식이다.
그러나 반대로 그 인간이 자신들이 원하는 바를 찾아내면, 좋아하며 상을 준다.
한마디로, 클로디아는 지금 어떤 정령이 오랫동안 숨겨놓은 틈, ‘던전’에 빠져버렸다는 이야기다.
그 이야기를 들은 그녀는 어이가 없어서 나오던 눈물도 쏙 들어갔다.
“그러니까, 내 의사는 상관없이 너희 마음대로 날 시험하는 거라고…?”
[너희라니! 걔네랑 나를 묶지 말아 줄래?!]
“너도 정령이잖아!”
[달라! 나는 영혼이고, 얘네는 요정에 가깝다고!]
디자이어는 한참이나 정령들에 관해 떠들었다. 자신은 차원도 다르고 등급도 다른 자연의 정수에 가깝고, 이런 장난을 하는 아이들은 정령보다는 ‘페어리’에 가까운, 그러니까 요정이라고 부르는 종류라나.
하지만 클로디아 입장에서는 어차피 그게 그거였다. 인간 입장에서는 산토끼나 들토끼나 어차피 다 같은 토끼다.
[…토끼랑 비교하지 말아 줄래?]
“조용히 해. 토끼는 귀엽기나 하거든?”
클로디아는 도끼눈을 뜨고 디자이어를 노려봤다. 디자이어는 입을 다물었다. 어쨌든 디자이어가 그녀를 을러메서 이 던전에 빠진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디자이어는 이 동굴에서 정령들의 향기를 맡았다. 그것 때문에 일행을 협박해가며 여기까지 온 것이었지만….
[던전에 빠질 줄은 몰랐지….]
디자이어가 시무룩하게 중얼거리는 것을 뒤로하고 클로디아는 주변을 둘러봤다. 주변은 클로디아가 처음 떨어졌던 대로 하얀색 벽에 금색 이끼가 낀 모습이었다. 광원은 어디인지 알 수 없었지만, 어둡지는 않았다. 그리고 금색 이끼는 아주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클로디아는 자신이 깔고 앉은 이끼 바닥을 만져보며 내심 감탄했다. 저 남쪽 지방의 유명한 카펫들도 이렇게 부드럽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가만히 관찰해보니 그 방에는 작은 입구가 있었다. 클로디아가 겨우 혼자 지나갈 만한 입구였다. 다만 이쪽은 밝았으나, 입구 저편은 까맣게 어두웠다. 그곳 말고는 딱히 방에서 나갈 수 있는 곳도 없어 보였지만….
“…던전이라는 건 뭘 해야 나갈 수 있어?”
[그건 요정마다 달라.]
오랜 세월을 살아온 요정들이니만큼 그들은 인간을 미로 속에 몰아넣고 토끼몰이하듯 노는 것을 즐겼다. 인간은 던전 속을 헤매며, 요정들이 설정해놓은 목표를 완주해야 나갈 수 있는 게 보통이다.
하지만 잔인하거나 피가 튀기는 것은 좋아하지 않아서, 아마 크게 위험하지는 않을 거라고 디자이어는 그녀를 위로하듯 말했다.
[모르긴 몰라도 죽지는 않을 거야.]
그러나 클로디아는 바보가 아니었다. 적어도 살 빠지고 예뻐진다는 말에 디자이어를 들었던 때보다는 발전해 있었다.
그녀는 디자이어를 노려보며 팔짱을 끼었다.
“그건 죽지만 않는다는 소리 아니야…?”
[….]
빙고. 클로디아의 눈이 더욱 더 가늘어졌다. 디자이어는 결국 클로디아에게 토해내듯 말했다.
[혹시 나무를 베다 말고 나무 틈으로 빨려 들어가서 요정들을 만난 나무꾼의 이야기를 들어본 적 있어?]
“…요정들과 파티하다 다음 날 돌아와 보니 50년이 지나 있었다는 동화 말이야?”
[그거 사실이야….]
한 나무꾼이 있었다. 그는 나무를 베어 늙은 어머니와 동생을 부양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자신이 베려던 자작나무에 이상한 틈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 안을 들여다보자 희한한 세계가 있었다. 밖은 분명 겨울에 가까웠는데, 나무 안은 봄이었던 것이다. 나무꾼은 홀린 듯 그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요정들이 그를 환영했다.
나무꾼은 요정들의 마을을 돌며 밤새도록 술을 마시고 춤을 추었다. 다음날 아침 나무꾼은 자작나무 앞에서 깨어났다. 그런데 자작나무는 전날과 달리 아주 두껍고 풍성해져 있었고, 계절도 봄이었다. 자신이 나무에 박아 넣었던 도끼를 집어 들자, 그 자루가 썩어 부러졌다.
나무꾼은 고개를 갸웃하며 자신이 살던 마을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는 끔찍한 현실을 마주하게 됐다.
어머니는 이미 50년 전 돌아가셨으며, 자신은 마을에서 50년 전 실종된 사람으로 처리됐다는 것이다. 동생은 자신보다 한참 늙은 모습으로 왜 이제 왔냐고 절규했다. 숲의 나무를 자꾸 베어가는 나무꾼에게 요정들이 내린 벌이었다.
그리고 클로디아는 그 동화를 기억해내자마자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럼 나는 50년 후에나 다시 돌아갈 수 있는 거야…?”
[…500년 후일 수도 있고.]
“야!!”
클로디아의 비명에 가까운 소리가 방을 쩌렁쩌렁 울렸다. 그녀는 기가 막혀서 디자이어를 꿍꿍꿍 두들겼다.
“너 이거 어떻게 할 거야! 어떻게 해!”
[지, 진정해. 클로디아. 일단 내가 알아낸 걸 알려줄게. 이 던전은 우리가 모르는 아공간에 형성된 건 아니야.]
“거짓말! 너 또 거짓말하는 거지 이 나쁜 애야!! 매번 이런 식이지 너는!”
[아니야! 진정해! 내가 잘못하긴 했지만, 나도 네가 기절하는 동안 여러 가지를 알아봤다고!]
정말로 자신이 잘못했다는 자각이 있어서 그런지, 디자이어는 여러 가지를 두서없이 늘어놨다.
그녀가 기절한 동안 디자이어는 자신이 포르투와 연결돼 있는지부터 확인했다. 디자이어의 힘이 끊긴다면 가장 먼저 쥬버린부터 죽은 목숨이었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디자이어는 여전히 자신이 포르투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너, 그런 위험한 소리를….”
물론 그 말은 반대로 하자면, 이 방이 자칫하면 요정의 나라로 납치돼버리는 틈이었다면 쥬버린은 바로 죽었을 것이라는 뜻이었다. 클로디아는 정말로 화가 났지만, 일단 입을 닫았다. 그녀가 지금 화를 내기 시작하면 화제가 끝 간 데 없이 다른 곳으로 빠질 것이기 때문이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아무튼….]
디자이어는 사과를 연신 반복하며 다른 것들도 설명했다. 이곳은 요정의 기색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요정의 힘이 가해진 만큼 향기는 진하게 남아 있었지만, 아마 오래전에 주인인 요정은 이곳을 떠났을지도 모른다고 디자이어는 설명했다.
[그때 촌장이 100년 전이라고 말했잖아? 아마 그때쯤 요정이 이곳을 만들었을 가능성이 높아. 마귀 어쩌고 하는 것까지는 무슨 소린지 모르겠지만…. 100년쯤 되면 요정들도 다른 곳으로 떠났겠지. 요정들은 싫증을 잘 내는 종족이거든.]
종합하자면 이곳은 요정이 떠난 던전이라는 것. 하지만 아주 나갈 수 없는 것은 아니었다.
요정의 향기가 남아 있는 이유는, 여전히 이곳이 누군가에 의해 클리어되지 않은 던전이기 때문이다. 디자이어는 이 던전의 완주 보상이 아마 던전 탈출일 것이라고 말했다. 대부분의 요정 던전들은 그런 식이다. 끝없이 헤매는 인간에게 탈출보다 더 멋진 보상이 어디 있을까.
클로디아는 심호흡했다. 어쨌든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는 없다. 그렇다면 적어도 이곳에서 나가려는 노력 정도는 해야 하겠지.
“…좋아. 나가야겠어.”
[…괜찮겠어?]
“그럼 여기서 백 년씩 울고 주저앉아 있을 수는 없잖아.”
[클로디아….]
디자이어의 말투에는 미안한 기색 외에도, 어쩐지 그녀에게 놀랐다는 투가 배어 있어서 클로디아는 조금 부아가 났다.
어쨌든 울기만 하는 건 이제 지겨웠다. 여기서 울고 있으면 누군가가 구해줄 거란 보장도 없었다.
아주 잠깐, 데미안과 시빌, 헬렌을 기다려볼까 생각했지만, 요정의 던전이 그렇게 허술할 것 같지도 않았다.
‘…수르 알파라면 어쩐지 해낼 수 있을 것 같기도 하지만.’
그녀는 데미안이라면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했다가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에게만 기대어 이곳에 주저앉아 있는 것도 싫었다. 자존심 상했다. 비록 디자이어 때문이라지만, 그녀는 끊임없이 계속 데미안에게 보호받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클로디아는 이곳으로 빨려 들어올 때 자신이 봤던 문구를 생각했다. 보호받으나 보호하는 자.
아마 그것은 자신을 가리키는 말이 아닐까.
정확히 무슨 뜻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 문구가 어쩐지, 이 던전에서 가만히 보호를 기다리기만 한다면 이곳에서 나갈 수 없다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으쌰.”
클로디아는 이끼를 딛고 일어났다. 다행히도 다친 곳은 별로 없었다. 디자이어를 짚고 일어난 다음, 등에 검을 메고 입구를 바라봤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빨리 나가자.”
[그, 그래. 내가 도와줄게.]
“네가 어떻게?”
그녀의 뾰족한 말에 디자이어는 잠시 시무룩했지만, 곧 힘차게 외쳤다.
[어떻게든!]
그래. 어떻게든. 클로디아는 심호흡하고 입구로 나아갔다.
그때였다.
“안녕! 네가 보호하나 보호받는 자예요?”
클로디아는 잠시 눈을 의심했다. 입구로 막 발을 딛으려는 그때, 그녀의 눈앞 허공에 하얀빛이 맺혔다가 이내 작은 빛으로 변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자신이 익히 포르투에서 본 것과 같았다.
그러니까…. 디자이어가 검으로 현신하기 전, 울고 있던 자신에게 현신한 모습. 그 작은 빛의 구체를 보고 디자이어가 숨 막히는 소리를 냈다.
[뭐야, 이게?]
“뭐긴 뭐예요? 요정이지!”
빛이 현란하게 움직였다. 그 움직임은 빛이 구사하는 명랑한 말투와 같았다. 클로디아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 빛을 바라봤다.
“…요정이라고?”
“그래요!”
그 빛은 쾌활하게 춤을 추며 클로디아에게 답했다.
“요정의 둥지에 온 것을 환영해요! 나는 시련에 도전하는 사람들을 위해 요정들이 안배해놓은 귀염둥이 요정이에요!”
[…요정이 확실해.]
빛의 말에 디자이어가 첨언했다. 클로디아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걸 어떻게 알아?”
[자기 입으로 스스로를 귀염둥이라고 말하는 자의식과잉 종족은 요정뿐이야.]
“세상에, 무례해라!”
빛이 마구 날뛰며 디자이어에게 다가갔다. 마치 그 빛이 디자이어를 해치려는 것 같아 클로디아는 깜짝 놀라 어깨를 움츠렸으나, 곧 빛은 디자이어에게서 퐁, 하고 튕겨 나온 다음 떼굴떼굴 굴렀다.
“앗, 이럴 수가. 당신은 누구세요?”
갑작스럽게 빛의 말투가 공손해졌다. 방금 전과 같이 명랑하긴 하지만, 확연히 예의를 갖춘 말투였다. 디자이어가 갑자기 에헴, 하며 체면을 차렸다.
[내가 누군지 알면 너는 깜짝 놀랄걸?]
“누구신지 부디 알려주세요!”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어쩐지 검 주제에 어깨라도 으스대고 있는 듯한 말투였다. 그러나 클로디아는 디자이어의 말을 기다려줄 생각이 없었다.
“얘는 디자이어야.”
[…야!]
“나는 클로디아고. 너는 요정이라고?”
“네!”
빛이 다시 한 번 춤췄다. 클로디아는 침착하게 빛에게 말을 걸었다. 이전이라면 너무 놀라고 당황스러웠겠지만, 그녀는 익히 같은 상황을 경험한 바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이 빛이 자신을 요정의 던전에서 끌어내 줄 유일한 희망이라는 것도 알아차렸다.
“미안하지만 나는 사실 여기 들어온 지 얼마 안 됐거든. 혹시 너는 내게 나갈 길을 알려주기 위해 나타난 거니?”
“…눈치가 빠른 분이네요! 맞아요!”
빛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하트 모양을 한 번 그린 후 말을 이었다.
“정확히는 이곳을 나가고 싶으시면 저희 요정들이 마련한 시련을 겪으셔야 해요!”
“…그거 많이 힘드니?”
요정은 잠시 망설였다.
“솔직히 잘 모르겠어요. 여태까지 여기 들어온 인간은 한 명도 없었거든요!”
클로디아는 이마를 찡그렸다.
“…단 한 번도?”
“네!”
“너 말고 다른 요정은?”
“어, 없어요!”
“왜?”
[요정들은 한곳에 오래 머무르지 않아. 방랑벽이 심하거든. 아마 얘는 이곳의 문지기로 낙점됐기 때문에 남아 있는 것일걸?]
디자이어의 참견에 빛이 동그라미를 그렸다.
“사실 저는 오랫동안 이곳에 들어올 인간을 기다렸어요! 인간이 한 명이라도 이 던전을 끝까지 완주해야 저도 풀려날 수 있거든요!”
“….”
“본래 그러면 안 되지만, 저는 이제 여기가 너무 지겨워요! 그래서 제가 도와드리러 나온 거예요.”
***
요약하자면 클로디아의 눈앞에 떠 있는 빛은 요정들 중 가장 어린 요정이었던 모양이다. 기껏 만든 던전을 재미도 못 보고 방치하고 떠나는 것이 요정들은 아까웠고, 그래서 빛으로 하여금 던전이 한 번이라도 완주되면 풀려날 수 있지만, 그전에는 던전을 떠나지 못하도록 제약을 걸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백 년 동안 이 던전에 들어온 사람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요정의 던전을 발견하려면 요정들의 조건을 만족시켜야 했다.
하지만 그 조건을 만족시킬 만한 사람이 이 동굴 안까지 들어오기는 어려웠다. 장소가 문제였다. 누군가가 일부러 돌로 막아놓은 동굴을 굳이 열고 들어오는 사람도 적었거니와, 조건을 만족하기까지 하려면….
“그 조건이 뭔데?”
“음, 착한 사람이요!”
클로디아는 요정의 말에 눈을 깜박였다. 착한 사람?
“나 착해?”
“아하하. 그걸 제가 어떻게 알아요?”
요정이 그녀를 약 올리듯 물결 모양을 그리며 주변을 돌았다. 클로디아는 볼을 부풀렸다. 디자이어가 첨언했다.
[…잘은 모르겠지만, 아마 요정의 조건에는 들어맞는 사람이긴 했겠지….]
“…넌 이럴 때는 응, 너는 착해! 라고 말해주면 좀 덧나니?”
디자이어가 입을 다물었다. 클로디아는 어쩐지 부아가 났다. 스스로를 착한 사람이라고 생각해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지만, 나쁜 짓도 해본 적 없는걸!
“어쨌든, 제가 물어볼 건 단 하나예요. 시련에 도전하시겠어요?”
요정의 말뜻은 명백했다. 이 던전에 도전하겠느냐는 말이렷다. 시련이라는 단어가 조금 마음에 걸렸지만, 이제 와 안 하겠다고 할 수도 없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녀의 말에 요정의 빛이 한번 확 퍼졌다가 다시 모였다.
“좋아요! 도전에 앞서 도전자에게 선물을 드릴게요!”
“선물?”
“월장석을 가지고 계시죠? 이제부터 도전자는 시련 안에서 남들이 보지 못하는 이면을 볼 수 있어요! 달의 뒷면 같은 것이죠!”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이라. 클로디아는 단어의 뜻을 곱씹었으나 아직은 알 수 없었다.
“도전자의 이름을 말해주세요!”
“…클로디아 테 포르투.”
요정의 빛이 잠시 더 환해졌다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언뜻 보기에는 놀란 것처럼 보였다.
“테 포르투요?”
“…나를 알고 있니?”
클로디아가 눈을 깜박였다. 요정은 잠시 점멸하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네! 요정들 중에 테 포르투를 모르는 이들은 없어요! 요정들의 고향인걸요!”
[그게 바로 내 덕분이다, 이거야.]
갑자기 디자이어가 으스댔다. 그제야 클로디아는 디자이어가 생명수를 길러내 그곳에서 열매 대신 정령의 씨앗을 전 대륙에 흩뿌린다는 것을 기억해냈다.
“하지만 너는 모르는 것 같은데?”
[…아냐! 야! 너 나 알지?]
그러나 빛은 디자이어의 말을 싹 무시하고는 제 하고 싶은 말만 했다.
“클로디아 테 포르투를 환영해요! 포르투의 이름을 가진 사람이 올 줄은 몰랐어요! 영광이네요!”
“고마워.”
[야!! 나 모르냐고!]
언뜻 들으면 듣기만 좋은 말이었으나, 그나마도 클로디아에게는 꽤 반가운 말이었다. 여행에 나선 이후, 모르는 자에게 공주 대접을 받은 역사가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미소를 지었지만, 이어지는 말에 다시 표정을 굳혔다.
“’포르투’의 이름에 따른 선물을 하나 더 드릴게요!”
“…또?”
이게 무슨 뜻이지? 의문은 곧 해결됐다.
“포르투의 이름과 당신의 성별에 따르자면, 도전자는 공주일 거예요. 맞나요?”
“…맞는데….”
“좋아요! 클로디아 테 포르투는 시련 안에서 공주의 권한을 가져요. ‘우리’에게 딱 세 번 명령할 수 있는 권한이에요!”
그리고 빛은 다시 가루처럼 허공에 확 퍼졌다. 클로디아는 잠시 넋을 놓았으나, 곧 정신을 차렸다.
“…뭔지는 모르지만 좋은 거지?”
“그럼요! 사용하기에 따라서는 당장 던전을 완주할 수 있는 권한이기도 하답니다!”
빛이 흥겹게 빙글빙글 돌았다. 그 말투는 어쩐지 그녀를 놀리는 것 같았다.
“좋아요. 이제 시련을 시작할까요? 준비는 되었나요?”
[…아, 어쩐지 불안한데.]
디자이어가 중얼거렸다. 클로디아는 빛의 말을 들으며 자신이 마주한 입구를 바라봤다. 눈앞에 새카만 입구가 뻥 뚫려 있었다. 안에서는 따뜻한 바람이 훅, 하고 불어왔다. 그녀는 자신이 있었던 이끼 방을 둘러봤다. 이곳과는 전혀 다른, 미지의 곳.
하지만 이 방이라고 해서 그녀에게 마냥 안락하고 익숙한 곳도 아니다.
어쨌든 빠르게 이곳에서 나가야 한다. 그나마 요정의 말이 약간의 위안은 됐다.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당장 던전을 완주할 수 있다고 하니 좋은 거겠지.
클로디아는 다시 한 번 후, 하고 심호흡했다.
[클로디아. 나 좀 무서워.]
디자이어가 불안해했다. 하지만 클로디아는 디자이어의 말을 무시했다. 애초에 이곳이 재미있어 보인다고 그녀를 끌고 온 것은 디자이어다.
‘그런 주제에 무섭다니! 사실 나도 되게 무섭거든?!’
그녀는 그렇게 말하는 대신 괜히 훅, 하고 심호흡했다.
“시련인지 뭔지는 모르지만, 알 게 뭐야. 난 나라도 망했는데.”
[…클로디아. 그 말은 좀…. 아직 안 망했어….]
“시끄러워. 나라 망한 것보다 더한 시련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
분명한 허세였다. 그것도 헬렌의 말투를 빌린. 하지만 클로디아는 이렇게라도 말하지 않으면 저 입구 안으로 뛰어들 용기가 나지 않을 것만 같았다. 그녀는 눈을 질끈 감았다.
“가자.”
[그래.]
클로디아 테 포르투는 던전으로 발을 내디뎠다.
***
입구 안은 생각 외로 그녀에게 그리 낯설지는 않았다. 정확히는 클로디아가 이미 접했던 공간과 비슷했다. 땅요정 왕의 땅굴.
요정의 던전 또한 동굴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다만 땅굴은 작은 땅요정들에게 최적화된 공간인지라 천장이 낮고 답답한 느낌을 주었다면. 요정의 던전은 엄청나게 큰 굴이었다. 종유석이 간간이 맺혀 있었고, 발광 도마뱀들이 동굴 사방을 정신없이 기어 다니고 있었다. 덕분에 그녀는 주변을 볼 수 있었다.
다만 희한한 메시지도 함께 보이는 것이 문제였다.
맨 처음 그 메시지를 봤을 때 클로디아는 눈을 의심했다. 발광 도마뱀의 꼬리에 붙은 흰 글씨.
<발광 도마뱀 / 약함>
<특이사항 없음>
“…디자이어. 너도 보여?”
[뭐가?]
“도마뱀 뒤에 붙은 글씨 말이야.”
[…글씨?]
디자이어는 잠시 침묵하다가 그녀에게 말했다.
[무슨 글씨 말이야…? 잘 모르겠는데.]
디자이어의 말투는 명백하게 그녀를 꺼리는 듯했다. 클로디아는 그 말에 담긴 함의를 즉시 알아차렸다.
“…나 미친 거 아니거든?”
“아하하, 맞아요. 클로디아는 미친 게 아니에요!”
빛이 통통 튀며 말했다. 아무래도 저 빛도 그 글씨가 보이는 듯했다.
“남이 볼 수 없는 것이란 그것을 말하는 것이에요. 요정들이 도전자를 위해 안배해놓은 시련들이 어느 정도의 위력을 가지고 있는 것인지 보여주는 것이죠!”
“위력?”
“네. 예를 들면 저 도마뱀은 아마 클로디아가 한 번 패대기치면 바로 죽어버릴 거예요.”
패대기…. 클로디아는 신음했다. 아무리 그래도 얌전한 도마뱀을 팽개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요정은 말을 이었다.
“그러니 클로디아는 만약 본인이 감당할 수 없는 시련이 오면, 도망치면 돼요!”
“…도망치면 여기서 못 나가는 거 아니야?”
“아하하, 아녜요. 그야 결국은 모든 시련을 끝내야 여기서 나갈 수 있지만, 차근차근 자신에게 맞는 시련을 극복해 나가면 점점 더 큰 시련을 감당할 수 있게 되거든요!”
이쯤 되면 클로디아는 요정이란 존재에 대해 새로 정의를 내릴 수밖에 없었다. 포르투에서 동화책을 읽던 어린 시절, 요정이라는 것에 대해 클로디아는 귀엽고 상냥하다는 인상 외에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애초에 살면서 요정이라는 걸 볼 일이 있을까? 싶었을 정도다.
하지만 클로디아는 지금이야말로 요정이 어떤 존재인지 말할 수 있었다.
“…악취미….”
취향이 나쁘다고밖에 말할 수 없었다. 사람을 강제로 가둬 놓고, 시련을 극복하란다. 그녀는 아까부터 찌푸린 얼굴이 잘 펴지지 않아 고생하고 있었다.
‘안 돼, 주름 생겨. 관리를 아무리 해도 이대로는 두 달 정도는 주름을 계속 달고 살아야 한다구.’
그녀는 애써 꾹꾹 이마를 눌러 펴려고 하며 말을 이었다.
“아까 말한 명령은 어떤 거야?”
“음, 글쎄요. 클로디아는 공주님이죠?”
“응.”
“모두 클로디아 앞에서는 어떤 명령이든 잘 듣죠? 잘 모르는 사람이라도요.”
클로디아는 응, 하고 고개를 끄덕이려다 말았다. 자신을 두고 비아냥거렸던 대신들이 떠올라서였다. 하지만 그런 것까지 지금 굳이 말할 필요는 없었고, 그래서 그녀는 애매하게 대답했다.
“…아마도?”
“그거예요. 클로디아를 잘 모르는 시련이라고 하더라도, 일단 당신이 말하면 듣게 돼 있어요. 딱 세 번뿐이지만. 아 참, 미리 말해두는데….”
“그럼 나를 여기서 나가게 해 줘.”
“…라는 명령은 안 된다고 말하려고 했어요.”
빛이 그녀를 놀리듯 꺄르르, 소리를 냈다. 클로디아는 이번에야말로 얼굴을 확 찡그렸다. 디자이어가 그녀 대신 화를 냈다.
[너 지금 누구 놀려? 사용하기에 따라서는….]
“에이. 그렇게 완주할 수는 없죠. 그건 나쁜 짓이에요.”
[너희 요정들이 아무리 이런 걸 좋아한다지만, 너희가 하는 짓이 더 나쁜 짓이라는 생각은 안 해?]
웬일로 디자이어는 옳은 소리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빛은 아랑곳하지 않고 반짝반짝 점멸하며 빛을 냈다.
“그래서 제가 있잖아요!”
[참 퍽이나 도움 된다.]
“어쨌든, 클로디아. 자신을 한번 돌아보겠어요? 마침 저기에 물이 있네요!”
나를 돌아보라고? 클로디아는 요정의 말을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곧 나타난 물웅덩이를 들여다보고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게 됐다.
물웅덩이는 새까맣고 고요했는데, 그 위로 클로디아가 얼굴을 기울이니 요정의 빛 덕분에 자신의 얼굴이 생생히 비쳐 보였다. 맨 처음 물 안에 비친 것은 헝클어진 자신의 머리카락과, 엉망으로 부은 얼굴이었다.
어머나, 난 몰라. 이런 모습으로…. 라고 말하려던 클로디아는 곧 자신이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곳에는 그녀를 제외하면 요정 하나, 정령 하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요정이 말한 건 무슨 뜻일까. 클로디아는 더 자세히 물웅덩이를 들여다봤다. 곧 희미한 글씨가 떠올랐다.
물속에 비친 클로디아의 머리 뒤에 떠오른 내용은 간단했다.
<클로디아 테 포르투 / 약함>
“…나 도마뱀하고 같은 레벨이야?”
“그럴 리가요! 아니에요!”
요정이 답했지만, 그녀는 어이없이 웃었다. 하지만 계속해서 다른 메시지가 같이 떠올랐다.
<도마뱀보다 조금 더 강함>
“도마뱀보다는 강하네요!”
“…응…. 별로 위로는 안 된다….”
[저기, 나 너희들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잘 모르겠어….]
홀로 소외된 디자이어가 투덜거렸다. 그러나 클로디아는 디자이어에 대한 대답은 뒤로 미뤘다. 그다음 글자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공주>
<보호하나 보호받는 자>
여태까지 그녀가 요정에게 들었던 말과 같았다. 보호하나 보호받는 자. 그녀는 그 말을 다시 곱씹었다. 어떤 뜻인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그녀는 포르투를 구하기 위해서 나섰으나, 끊임없이 일행들의 돌봄을 받았다. 그런 뜻일 것이다.
포르투를 보호하지만, 정작 보호가 필요한 자.
어쩐지 울컥, 하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 놀리나? 동시에 피곤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이렇게 자꾸 쓸데없이 머리를 굴리게 만드는 걸까?
“어떤 거냐면, 저희 요정들이 만들어놓은 분류 같은 건데요….”
요정이 디자이어에게 설명하는 이야기가 어렴풋이 들렸다. 그 사이 다음 글씨가 떴다.
<유니콘의 가호>
클로디아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세상에, 내가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
결론부터 말하자면 클로디아의 유니콘 소환은 장렬하게 실패했다.
“어디든지 날아오겠다며! 이 얄팍한 유니콘 같으니라구! 거짓말쟁이야!”
클로디아는 그 자리에서 주먹을 불끈 쥐고 자신이 만났던 유니콘을 불러댔다. 마음속으로 열심히 부르면 어디든지 날아오겠다더니, 글쎄. 유니콘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고, 순진한 포르투의 공주님은 마음에 상처를 받았다.
결국 그녀는 아앙, 하고 뒤로 드러누워 버렸다.
“나빠! 다 나빠!”
바닥을 마구 두들기며 화를 냈지만, 공허한 메아리만 그녀에게 돌아올 뿐이었다. 요정과 디자이어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침묵하고 있었다. 그녀의 화를 돋우지 않으려는 마음일 것이다. 클로디아는 마치 영광의 홀에서 쥬버린의 관을 앞에 두고 발버둥 쳤을 때처럼 마구 짜증을 냈다.
먼지가 풀썩풀썩 일어나든, 주변 도마뱀들이 모두 큰 소리에 놀라 도망가든 상관하지 않았다. 긴 머리가 동굴 바닥에 마구 헝클어져 엉키는 것도 지금만큼은 알 바 아니었다.
‘아무도 안 보는데 알게 뭐람!!’
클로디아는 계속 바닥을 두들겼고, 발을 굴렀다.
나중에는 숨이 차고 힘들어서 쓰러지고 싶은 지경이 됐으나, 그녀는 진정하는 대신 등에 멘 디자이어를 벗어던져 버렸다. 와장창! 무거운 대검이 바닥에 부딪히며 엄청난 소리를 냈다. 보통 때라면 디자이어도 크게 항의했겠지만, 지금 클로디아가 폭발한 데다가 그래 봐야 좋을 것이 없었다.
“다들 도와준다더니 하나도 안 도와주잖아! 도와주러 온다며!”
억울함이 터져 나왔다. 그건 비단 유니콘에 대한 것만은 아니었다. 그녀는 지금 모든 게 원망스러웠다.
“짜증 나아아아! 나빠! 완전 나빠! 엄청 못됐어!”
여태까지 단 한 번도 남들 앞에서 해본 적 없는 소리였다.
그녀가 포르투를 나선 이후로 계속 쌓여오던 화가 터진 것이다.
모든 게 원망스러웠다. 지금 오지 않는 유니콘은 계기일 뿐이다. 그녀를 귀하고 예쁜 공주 취급하면서, 모든 걸 바치겠다고 맹세했던 모든 사람들이 싫고 미웠다.
클로디아에게 청혼했던 킴 왕자는 언제나 그녀에게 모든 걸 줄 수 있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달고 살았다. 그야 포르투가 그의 왕국을 다스리고 있는 주체이니 그렇게 말하는 것도 무리는 없었다. 하지만 정작 그는 포르투가 마왕에게 습격당하자 발을 빼고 부리나케 자신의 나라로 돌아가고 말았다.
포르투의 대신들은 그녀에게 간도 쓸개도 빼줄 것처럼 굴었지만, 사태가 터지자 공주를 바보 취급했다. 온실에서 자라난 관상용 꽃은 온실이 부서지면 얼어 죽어버린다. 그녀는 그야말로 온실의 꽃 취급받았다. 정확히는, 곧 얼어 죽을 꽃으로.
포르투의 수호자라던 디자이어는 보기 좋게 그녀를 속여먹었다. 그래. 그것까지도 괜찮다. 그러나 그 직후 좋은 오빠였던 쥬버린도 사실 그녀를 바보 취급하고 있었다는 것에 클로디아는 큰 상처를 입었다. 그렇지만 이해하려 했다. 큰 사랑은 가끔 상대에게 해가 될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막상 포르투를 구하기 위해 나와서도 마찬가지였다. 동력 지대의 노파는 대놓고 강도들을 방치했고, 투르의 사람들은 그녀를 배신했다. 유니콘은 어디든 와서 도와준다더니 부름에 응답하지 않는다. 사실 클로디아도 알았다. 그런 일은 어디에나 있다는 거. 이곳이 요정의 던전이기 때문에 유니콘은 오고 싶어도 못 오고 있을 수도 있다는 거.
하지만 그걸 이해한다고 해서 클로디아의 화가 풀리는 건 아니었다. 요정이 자신을 놀리듯, 공주는 어떤 명령이든 할 수 있다는 말도 결정적이었다. 어떤 명령이든 다 할 수 있지만, 들어주는 건 아니잖아!
어떤 순간부터 계속해서 그녀의 가슴 속에 쌓여온 화가 결국 지금 터지고 만 것이다.
클로디아는 아악!! 하고 소리를 질렀다.
“다 싫어!!”
차라리 일행과 분리되어 있다는 것이 다행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그녀는 연신 화를 냈다.
“진짜 나쁜 사람들이야! 엄청나게 나빠!! 다 싫어! 못됐어! 나빠!!”
몇 번이고 소리를 지르면 시원해질 것 같았는데, 아니었다.
클로디아는 소리를 지르다 말고 왜 짜증이 풀리지 않는지 그 원인을 깨달았다. 아까부터 그녀는 같은 소리밖에 안 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쁘다, 로는 뭔가 부족했다. 못됐어, 도 아니었다. 뭔가 부족했다.
“죽었으면 좋… 이건 아니고. 넘어져라, 도 아니고.”
클로디아가 중얼거렸다. 문제는 그녀가 언제나 모범적이고 상냥한 공주였다는 데 있었다. 남들에게 나쁜 소리를 할 일이 없는 환경인 데다 들을 일도 없었으니 그쪽 방면으로는 언어 발달이 전혀 되지 않았다.
죽었으면 좋겠다, 라는 말이 머리를 스쳤지만 클로디아의 윤리의식이 너무 견고한 나머지 그녀는 자신이 더 상처받고 말았다.
‘남한테 죽었으면 좋겠다니! 그런 말은 하면 안 돼!’
요정의 ‘착한 사람’이라는 말뜻이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어쨌든 그녀는 킴 왕자도, 대신도, 디자이어도, 쥬버린도, 노파와 투르 마을 사람들도 모두모두 죽기를 바랄 정도로 미워하진 않았다.
“완전 나빠… 이것도 아니야! 아악! 죽을 정도로 나빠!! 이것도 아니고!!”
내팽개쳐진 채 입을 닫고 있던 디자이어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빡돌아는 어때?]
“그거다! 빡쳐!!”
쩌렁쩌렁, 클로디아 테 포르투의 ‘빡쳐’가 온 동굴에 울려 퍼졌다.
얼마나 큰 소리로 질렀는지, 동굴에 메아리가 칠 정도였다.
빡쳐…빡쳐…빡쳐….
그녀는 그 뒤로도 몇 번이나 디자이어의 가이드를 따라 소리를 질렀다. 개짜증 나! 멍청이들아! 완전 빡쳐! 개빡쳐! 디자이어가 간간이 ‘X같은 새끼들’과 ‘고자나 돼라’ 등을 끼워 넣었으나, 클로디아는 차마 거기까지는 말 못했다. 그래도 화는 풀렸기에, 그럭저럭 만족했다.
“휴.”
[…화 풀렸어?]
“응.”
풀렸다고는 하지만 디자이어 또한 원망의 대상 중 하나였기에 클로디아는 무심하게 답하고는 허리춤을 뒤적거렸다.
사제들의 복장 중에는 작은 주머니 같은 가방도 필수품 중 하나였는데, 그 가방을 비워놓는 것도 뭣해 클로디아는 그 안에 헬렌이 잘 말려서 두들긴 육포 같은 것들을 넣어놓은 참이었다. 그녀는 육포를 입에 넣고 우물거렸다.
<힘이 세집니다.>
“어?”
클로디아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머리 위에 뜬 글씨를 쳐다봤다. 방금 본 게 뭐지? 잠시 고민하던 그녀는 다시 육포를 한 입 베어 먹었다. 또다시 같은 글씨가 떴다.
<힘이 세집니다.>
“우와?”
클로디아는 곧 이게 무슨 일인지 알아차렸다. 헬렌의 음식으로 말미암아 효과를 봤던 것이, 요정의 던전 안에서 가시화된 것이다. 그녀는 손가락을 몇 번 움직여 보다가, 또 다른 육포를 다시 한 입 베어 물었다.
<기분이 좋아집니다. 몸 상태가 건강해집니다.>
이번에는 체력이 회복되었다.
확실했다. 육포마다 모두 다른 효과가 있었다. 단지 말린 육포일 뿐인데, 헬렌의 손이 닿았다는 이유만으로 마법적인 처치가 가해졌다. 그 신기한 메시지 때문에 클로디아는 육포를 입에 다 털어 넣었다.
그리고 일어나다가, 근처에 있던 웅덩이 안에서 놀라운 것을 발견했다.
<클로디아 테 포르투 / 조금 약함>
‘약함’이 ‘조금 약함’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뿐만 아니었다.
<도마뱀들의 공포>
도마뱀보다 조금 강하다는 말 대신, 도마뱀들의 공포라는 말이 씌여 있었다. 아니, 좀 우습긴 한데…. 클로디아는 기분이 금세 좋아졌다.
“디자이어! 네 말이 진짠가 봐!”
[어?]
“헬렌이 준 간식을 먹으니까 내가 강해졌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린가,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곧 클로디아에게서 설명을 들은 디자이어도 이해했다. 그러니까, 헬렌의 음식을 먹었더니 상태 표시가 변했다는 거지.
아까부터 계속 풀죽은 모습으로 클로디아의 근처를 맴돌던 요정도 용기를 내어 말을 다시 붙였다.
“좋아요 클로디아! 이대로 가자구요!”
“아직 너랑 말 섞을 기분 아니거든?”
클로디아의 뾰족한 말에 빛이 다시 쪼글쪼글, 뒤로 물러났다. 클로디아는 하, 하고 긴 한숨을 내쉬며 돌아섰다.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일단은 가야 하긴 하니까.”
“자, 잘 생각했어요….”
그녀는 요정에게 답하지 않고 디자이어를 줍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막 디자이어를 주우려는 때, 그녀의 눈에 글씨가 들어왔다. 이번에는 디자이어의 상태를 나타내는 것이었다.
<오래된 영혼 디자이어/ 위대함>
…나는 조금 약함인데 너는 위대함이야? 클로디아는 어쩐지 울컥했지만 나머지 글씨를 읽어 내렸다.
<용사의 검> <참견쟁이>
첫 문구는 비장함이, 그다음에는 웃음이 나왔다. 디자이어가 오래된 정령이라서일까. 온갖 타이틀이 다 붙어 있었다. 그녀는 숨죽여 그것들을 읽었다. <정령의 고향> <용살검>….
“디자이어 너, 용도 죽인 적 있어?”
[어? 어떻게 알았어? 예전 포르투 국왕이랑 다닐 때 스톤 드래곤을….]
디자이어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며 그녀는 나머지 타이틀을 읽어 내려갔다.
<미겔의 친구>.
“미겔이 누구야?”
[미겔? 참 나. 클로디아. 너는 정말….]
“왜?”
디자이어는 잠시 클로디아의 비위를 맞추던 것도 잊고 노골적으로 한심하다는 기운을 풍겼다. 클로디아는 저도 모르게 발끈했지만, 곧 이은 디자이어의 말을 듣고는 조용해졌다.
[미겔은 초대 포르투 국왕의 이름이라구! 미겔 테 포르투!]
…그랬지. 클로디아는 입술을 삐죽이며 걷기 시작했다. 손에 디자이어를 든 채였다. 디자이어가 가지고 있는 타이틀은 꽤 많았고, 그것들은 다 제각각의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거짓말쟁이>에서는 헛웃음을 들이켰고, <하늘섬의 보호자>에서는 갑작스레 평화로운 시절이 기억나 눈을 비볐다. 그 외의 많은 수식어를 읽으며 클로디아는 생각에 잠겼다. 어쨌든 디자이어가 가지고 있는 힘은 진짜인 모양이었다. 지금은 비록 힘이 깎였지만…. 그러다 클로디아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어라?”
[뭐야?]
디자이어가 그녀의 의문문에 놀라 물었다. 그리고 곧, 디자이어도 클로디아가 눈치챈 것을 알아차리고 [어라라??] 하고 내뱉었다.
[클로디아 너, 한 손으로 나를 들고 있네?]
그랬다. 클로디아는 생각에 잠긴 채 걷다가 자신도 모르게 디자이어를 한 팔로 옆구리에 끼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놀라 디자이어의 손잡이를 양손으로 잡고 휘둘러 봤다. 며칠 전 디자이어를 휘둘렀을 때보다는 확연히 가벼워진 느낌이 들었다. 물론 마구잡이로 휘두를 만한 정도는 아니었다. 아마 헬렌의 음식 덕분일 것이다.
“우와!”
클로디아는 뛸 듯이 기뻐졌다. 디자이어를 제대로 휘두르기 위해서 아침마다 연습했던 것들이 생각나서였다. 그녀는 활짝 웃으며 뒤로 돌았다.
“수르 알….”
그리고 그녀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뒤에 남겨진 공허한 어둠 때문이었다.
‘맞다, 여기 나 혼자였지….’
클로디아는 저도 모르게 시무룩해졌다. 자신이 조금이나마 힘이 세졌다는 것을 일행에게 얘기해주고 싶었는데,
이야기를 들을 사람은 여기 아무도 없었다. 헬렌도, 시빌도, 데미안도. 그녀는 자신이 막 부르려던 이름이 데미안의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두 배로 시무룩해졌다.
‘왜 하필 그 남자를 가장 먼저….’
물론 그녀는 그 이유를 알았다. 데미안 알파는 앞장서서 자신을 훈련시킨 사람이다. 그에게 훈련의 결과를 이야기하는 것은 당연하다.
‘…만약 이 이야기를 들었다면 조금은 기뻐해 줄까.’
클로디아는 데미안의 웃는 얼굴을 상상해보려고 애썼다. 그렇지만 잘 상상되지 않았다. 그가 웃는 모습을 본 건 너무 오래전이었다.
그때였다.
“저어, 클로디아.”
뒤에서 살금살금 따라오던 빛이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클로디아는 최대한 싸늘하게 답했다.
“왜?”
“헤헤. 기분이 안 좋으신 것 같지만…. 이건 이야기하고 가야 될 것 같아서요.”
“뭔데?”
“저기…. 잠깐 오른쪽을 좀 보실래요?”
요정의 말에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고 오른쪽을 바라봤다.
***
시빌은 돌아버릴 것 같았다. 인생 최대의 위기를 만났기 때문이다.
물론 클로디아의 실종이 시빌의 인생 최대의 위기는 아니었다. 원인이기는 했다.
정확히는, 사라진 클로디아 테 포르투 때문에 거의 반쯤 미쳐버린 데미안 알파가 주된 위기였다.
맨 처음 이상을 감지한 건 데미안이었다. 그는 어느 순간 자신이 전혀 발걸음을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심상찮은 일이었고, 그는 즉각 클로디아부터 찾았다. 무슨 일이든 간에 그녀의 안전 확보가 최우선이었기 때문이다.
“로드?”
그리고 그녀를 찾은 데미안은 눈을 부릅떴다. 클로디아의 뒤에 펼쳐진 벽들이 희게 빛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곧 희고 커다란 입구가 입을 쩍 벌렸다. 데미안의 외침에 시빌과 헬렌도 그쪽을 돌아봤고, 세 사람은 동시에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그 입구 안은 흰색으로 물들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처음에는 그것이 입구라는 것도 세 사람은 몰랐다. 그러나 벽면 가까이에 있던 클로디아가 디자이어를 끌어안은 채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로드!!”
데미안은 동굴이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큰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그게 다였다. 악, 수르 알파.
외마디 비명을 남겨두고 클로디아는 사라졌다. 입구가 막히고, 빛이 사라지고, 이윽고 익숙한 어둠만이 동굴에 자리할 때까지 세 사람은 그 벽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희게 빛나던 그림들은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아이의 낙서 같은 것들이 가득하던 동굴 벽면도 언제 그랬냐는 듯 깨끗해져 있었다.
“…클로디아?”
가장 먼저 입을 뗀 것은 헬렌이었다. 헬렌은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다시 한 번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공주님?”
발을 먼저 뗀 것은 시빌이었다. 시빌은 헬렌보다 앞서 벽면으로 다가간 후 손으로 그곳을 짚었다. 가느다랗고 긴 손가락들이 벽면을 재빠르게 탐색했다. 뭔가 나쁜 마법이 걸려 있을 가능성이 있었다. 하지만 시빌은 어느 곳을 짚어 봐도 나쁜 마법의 징후 같은 것은 발견하지 못했다. 말없이 빠르게 벽면 이곳저곳을 두들기는 시빌 뒤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한참 후, 끝내 시빌은 뒤돌아 말했다.
“…마력의 징후는 없습니다.”
“거짓말….”
헬렌이 그제야 당황해 그의 옆으로 다가와 벽면을 두들겼다. 헬렌은 시빌이 뭐라도 찾아낼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퉁, 퉁퉁. 돌로 된 종유석 동굴의 벽면은 끝없이 무겁고 탁한 소리만 낼 뿐, 어떤 것도 돌려주지 않았다.
“클로디아. 있으면 대답해 봐. 클로디아!”
벽이 어찌나 깊고 단단한지, 흠집 하나 나지 않았다. 헬렌은 주먹으로 동굴 벽을 계속 두들겼으나, 대답이 돌아올 리 만무했다. 그때였다.
쾅.
엄청난 충격이 돌벽을 강타했다. 헬렌은 식겁해 옆을 돌아봤으나, 시빌이 빨랐다. 시빌은 손을 뻗어 헬렌을 제 품으로 끌어당겼다. 그의 판단은 정확했다.
너무나 큰 충격에 천정에 달렸던 종유석 중 하나가 옆에서 우르르, 하고 떨어져 내렸고, 그 돌이 튀었던 것이다.
좌르르르….
헬렌은 놀란 채로 충격의 원인을 바라봤다. 데미안 알파였다.
그는 시빌도, 헬렌도 신경 쓰이지 않는다는 듯 검집에 든 검을 당겨 간격을 가늠하고 있었다. 동굴 벽을 때린 것이 그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두 번째로 벽을 두들기려 하고 있었다.
필요하다면 동굴을 다 부수기라도 할 기세였다.
“멈춰요, 데미안!”
“데미안!”
두 사람이 일제히 그를 불렀으나 데미안은 듣지 않았다. 그가 다시 한번 검을 들어 올렸다. 시빌은 칫, 하고 이를 악물고 손가락을 튕겼다. 쾅!
아까보다는 작고 둔탁한 소리가 났다. 그러나 동굴은 무너지지 않았다. 시빌이 데미안을 마력장 안에 가뒀기 때문이다. 데미안의 검은 동굴 벽이 아닌 그 앞의 마력장에 맞았다. 물론 시빌도 타격이 없진 않았다. 큽, 하고 시빌은 이를 악물었다. 급하게 마법을 쓴 데다가, 그 데미안 알파의 일격이다. 아무리 검기 없이 물리력만을 사용했다고 해도, 마력장이 한 번에 부서지는 것은 타격이 컸다.
“무슨 짓입니까, 시빌.”
“뭐 하는 거예요! 그러다 우리 다 죽어요!”
“…로드가 벽 저편으로 사라졌습니다.”
“당신 바보예요?! 클로디아가 정말 그 안에 있는 게 아니라는 거 모르지 않잖아!”
그 말에 데미안이 이쪽을 바라봤다. 시빌은 순간 흠칫했다. 데미안의 검푸른 눈이 새카맣게 가라앉아 있었다. 동굴이 어두워서, 빛이 없어서 따위의 이유 때문은 아니었다. 헬렌이 말을 거들었다.
“제발, 데미안.”
“…만약 이 안에 있다면 어떻게 할 겁니까?”
헬렌은 말문이 막혔다. 데미안의 말투는 막무가내였기 때문이다.
데미안 또한 이게 어떤 마법이나 현상의 일종이라는 걸 모르는 건 아니었다.
이럴 경우 높은 확률로 현상에 휘말린 자는 아공간으로 빠진다. 그 공간은 이 동굴 근처가 아니라, 아예 독립적인 어떤 차원일 가능성이 더 높았다. 혹은 아예 멀리 떨어진 다른 곳일 수도 있었다. 적어도 이 동굴 안은 아닐 게 분명했다.
하지만 시빌이 그 벽을 짚어낸 직후다. 마법이란 자연력을 억지로 인간의 힘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다. 자연스럽게 대부분 그 흔적이 남았다. 흔적이 없는 경우는 딱 두 가지다. 마법이 아니거나, 아니면 시빌보다 아주 높은 수준의 마법사가 일부러 흔적을 지웠거나.
그리고 그 두 경우 모두, 데미안으로서는 찾아낼 방법이 없었다. 그렇다면 적어도 아주 작은 가능성이라도 있는 쪽을 택한 것이다. 운이 나쁠 경우, 그 벽 안에 그대로 갇혀 있을 수도 있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는 더 설명하지 않고 다시 검을 들었다.
“데미안!”
시빌이 꽥 소리를 질렀고, 헬렌이 달려가 데미안의 허리춤을 붙잡았다.
“제발, 데미안. 이성을 찾아. 그러다가 동굴이 무너지면 당신도 죽어!”
“상관없습니다!”
이런 미친 새끼. 시빌이 얼굴을 찌푸렸다. 너 말고 우리도 죽는다고!
하지만 지금 그 말을 내뱉어봐야 데미안은 신경도 쓰지 않을 것이 뻔했다. 클로디아가 있는 상황에도 그는 시빌과 헬렌에게는 크게 마음을 두지 않았다. 지금은? 한층 더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뭐가 상관없어!”
버럭 소리를 지른 건 헬렌이었다. 헬렌은 어이가 없는 말투로, 그러나 빠르게 말을 이어갔다.
“클로디아가 여기로 다시 돌아오면, 셋 다 깔려 죽은 광경이라도 보여주게?!”
효과는 빠르게 나타났다. 데미안은 멈칫했다가, 검을 내렸다. 그리고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맞았다. 대부분의 공간이동 마법은 좌표가 필요했다. 만약에 공간이동 마법으로 어디론가 날아간 사람이 있다면 돌아오는 곳도 같아야 했다. 물론 그것은 왕복 좌표를 찍었을 때나 가능하지만….
데미안의 시선이 닿은 것은 시빌이었다.
“시빌.”
“…예?”
“마력을….”
“…마력의 징후는 없다고 제가 아까 말했잖아요, 데미안.”
시빌도 어깨를 늘어뜨렸다. 아무래도 이 남자는, 클로디아 테 포르투에 한해서는 생각이 그리 이성적으로 움직이지 않는 느낌이었다. 데미안은 시빌의 말을 듣고 이를 악물었다. 눈동자가 황망하게 움직였다. 헬렌은 결국 한숨을 쉬며 데미안을 끌어당겼다.
“제발, 데미안. 잠깐만 침착해져.”
그리고 그녀는 조금 놀랐다. 그가 워낙 표정이 없어 놀랐으나, 데미안의 손끝이 미미하게 떨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자신이 떨고 있다는 것도 모르는 듯, 어쩔 줄 모르는 시선으로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기만 했다. 생각을 아무리 해도 답이 나오지 않는 표정이었다.
헬렌은 가슴 끝이 턱 막혀오는 것을 느꼈다. 이들과 합류한 건 얼마 되지 않았지만, 이자가 이렇게까지 당황하는 것은 처음 봤다.
공주님은 어디로 간 거야, 대체.
***
“이제 어디로 가면 돼?”
클로디아는 디자이어를 등에 멘 채 요정에게 물었다. 빛이 아까보다는 한결 괜찮은 기세로 빙글빙글 돌며 대답했다.
“그야 첫 번째 시련을 만나러 가셔야죠!”
“그러니까, 그게 어디 있냐구.”
그녀는 입을 비죽이며 걸었다. 하지만 아까보다는 한결 기분이 나아진 참이었다. 그것은 그녀의 한쪽 팔에 걸려 있는 꽃바구니 때문이었다. 예쁜 바구니를 보며 클로디아는 미소 지었다.
요정이 그녀에게 오른쪽을 보라고 했을 때, 클로디아는 약간 긴장했다. 괴물이라도 튀어나오려는 걸까, 싶어서였다. 그러나 뜻밖에도 그곳에는 작은 상자가 하나 있었다.
“어머, 이게 뭐야?”
“요정의 선물이에요!”
[휘유. 사기꾼 냄새난다. 믿지 마, 믿지 마.]
디자이어가 진저리를 쳤으나, 클로디아는 짚이는 것이 있었다. 땅요정 왕의 땅굴에도 이것과 비슷한 상자가 있었던 기억이 났던 것이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다가가 그 끝을 디자이어로 살짝 짚어봤다. 상자는 미동도 없었다. 분명 미믹이라는 괴물은 닿기만 해도 그 손의 주인을 삼키려 든다고 했다. 그러니 이건 괴물은 아니겠지!
클로디아의 신중한 손길에 요정이 “절 뭘로 보시는 거예요?!” 하고 볼멘소리를 내었으나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몇 번 더 툭툭 쳐본 뒤 클로디아는 겨우 그 상자가 자신을 해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섰다.
그리고 그녀가 상자를 열었을 때, 얼굴에는 미소가 번졌다.
“어머나….”
상자 안에 든 것은 다름 아닌 오색 창연한 꽃들이었다. 섬세하게 짜여진 라탄 바구니 안에 든 싱싱한 꽃. 아침이슬이 맺힌 정원에서 막 딴 듯한 아름다운 꽃들이 보기 좋게 꽂혀 있었다. 그녀는 환하게 웃으며 바구니를 들어 올렸다.
“이게 뭐야? 선물?”
“그건 첫 번째 시련에 대비한 요정의 선물이에요.”
시련? 클로디아의 이마가 다시 한번 찌푸려질 뻔했으나, 그녀는 간신히 참았다. 주름….
아니지.
곧바로 든 생각에 클로디아는 다시 이마를 확 찌푸렸다.
‘주름 알 게 뭐야. 몰라. 어차피 지금 아무도 없잖아. 가뜩이나 짜증 나는데 왜 그런 걸 신경 써야 해?’
“시련? 무슨 시련?”
“그거야 첫 번째 시련을 만나게 되면 알 수 있을 거예요!”
“말해.”
“제게 명령하시는 거예요?”
요정이 즐거운 듯 빙글빙글 돌았다. 그리고 그녀는 ‘명령’이라는 말에 뭔가를 떠올렸다. 요정이 했던 말. 자신에게는 명령권이 있다고.
어쩐지 속는 기분이 들었다. 지금 그녀가 명령하면 요정은 제대로 설명을 할까? 아마 그럴 것이다. 하지만 클로디아는 요정이 했던 또 다른 말에 주목했다.
‘클로디아 테 포르투는 시련 안에서 공주만이 가질 수 있는 권한을 가져요. 딱 세 번, ’우리‘에게 명령할 수 있는 권한이에요!’
딱 세 번. 그리고 우리.
클로디아의 마음을 묘하게 긁는 부분이었다. 세 번 명령하면, 그다음부터는 그녀의 명령권은 사라진다. 혹시 이 명령은 꼭 필요할 때 쓰라고 주어진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드니 차마 그렇다고 답할 수 없었다. 클로디아는 짧게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그런 건 아니야.”
“그럼 말 안 할래요!”
“…부탁해도?”
“하지만 곧 알게 되실 거예요!”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억지로 강요할 수도 없었다. 그녀는 한숨을 쉬며 바구니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지금까지 온 것이다.
클로디아는 자신의 팔에 걸려 있는 바구니를 내려다봤다. 꽃들이 어찌나 향을 진하게 내뿜고 있는지, 그녀는 내내 꽃향기와 함께했다. 자신이 헤매고 있는 동굴에서는 내내 모래 냄새가 났기에 그녀는 그 향기를 마음껏 음미하고 싶었다. 모르긴 몰라도 다음 시련에서 사용한다니, 지금 아니면 이 향기를 맡을 수도 없겠지? 싶어서였다.
그나저나 다음 시련이라는 건 뭘까. 혹시 이 안에 있는 꽃들을 가지고 예쁜 꽃바구니라도 만들라는 걸까? 클로디아는 흐흐흥, 하고 콧노래를 부르며 자신이 예전에 배웠던 꽃꽂이를 떠올렸다. 요정들이 좋아할 만한 꽃바구니는 뭘까? 어떤 꽃을 좋아할까? 그렇게 생각하던 중이었다.
“자, 저쪽이에요.”
요정의 목소리가 갑자기 아주 작아졌다. 클로디아는 저도 모르게 긴장하며 요정이 가리키는 쪽을 살펴봤다. 그쪽은 어두웠지만, 작은 소리가 들렸다. 크릉, 크릉….
이상했다. 어쩐지 익숙한 소리였기 때문이다. 뭐지? 나는 이 소리를 분명히 들은 적 있는데. 크르릉…. 언뜻 들으면 개가 으르렁거리는 소리 같았지만, 그것보다는 훨씬 평화로운 분위기가 만연했다. 드르릉….
다음 순간 클로디아는 그 소리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그건 코 고는 소리였다.
어둠 저편에서부터 들려오는 코 고는 소리. 클로디아는 힘없이 어깨를 늘어뜨렸다. 이게 뭐야. 그 긴장감 없는 소리는 어쩐지 없던 힘까지 빠지게 했다. 그녀는 요정에게 속삭였다.
“…저게 뭐야?”
“조금 더 가까이 가 보세요!”
요정이 여전히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클로디아는 석연찮은 얼굴로 그쪽으로 향했다. 벽에 붙은 발광 도마뱀들이 사삭, 그녀의 움직임에 따라 움직였다. 아마 도마뱀들의 공포라는 말 때문이겠지…. 그녀는 그 웃기지도 않은 타이틀을 생각하며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였다.
“발밑을 조심하세요!”
빛이 속삭였다. 그 바람에 클로디아는 화들짝 놀라 내딛던 발을 멈췄다. 어느새 어둠은 작은 빛들에 걷혀 있었다. 덕분에 그녀는 자신의 발 앞에 뭐가 있는지 빤히 볼 수 있었다. 맨 처음 그녀의 눈에 들어온 것은 비늘이 덮인 다리였다. 비늘? 그녀는 눈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입을 막았다.
다리에는 새하얗고 작은 비늘이 오소소 붙어 있었다. 그 발끝에는 네 갈래로 갈라진 발가락과, 발톱. 그녀는 그게 어떤 것인지 알아차렸지만 섣불리 비명 지르지 않았다. 그랬다간 끝장이었다. 대신 그녀는 조심스럽게 시선을 올렸다. 앞뒤로 겹쳐진 다리. 그리고 가슴팍과, 꼬리. 웅크린 어깨와 우람한 등. 덩치에 비해 작은 날개에는 비늘막이 붙어 있었다. 그리고 다리 사이에 파묻은 머리 위에는 앙증맞은 벼슬이 있었다. 비늘은 그 모든 곳에 섬세하게도 나 있었다. 뱀의 머리에 수탉의 벼슬이 붙어 있는 괴물.
이게 대체 뭐지?
대답은 디자이어가 대신 했다. 디자이어는 클로디아의 마음속에만 들리는 목소리로 조용히 그녀를 타일렀다.
- 클로디아, 물러나.
‘…왜?’
- …그거 바실리스크야.
그 다섯 글자를 듣는 순간 그녀는 그야말로 그 자리에서 기절할 뻔했다.
그러나 클로디아에게는 마지막 이성이 남아 있었고, 그녀는 비명 지르는 대신 요정을 부릅뜬 눈으로 올려다봤다. 요정은 두어 번 아래위를 왕복하는 것으로 고개 끄덕임을 대신했다.
맞아요, 바실리스크예요.
기가 막혔다. 그녀의 앞에, 신화에서나 나오던 바실리스크가 잠들어 있었다.
“첫 번째 요정의 시련을 알려드릴게요.”
요정의 말소리에, 그녀는 반사적으로 두 손으로 빛을 감싸고 닫아버렸다. 빛이 항의하듯 그녀의 손 안에서 마구 움직였으나, 클로디아는 조용히 뒤로 물러났다. 한참이나 물러선 끝에, 드디어 안전하다는 확신이 섰을 때 그녀는 손바닥을 열었다. 빛이 확, 튀어나왔다.
“무슨 짓이세요!”
“세상에, 너야말로 무슨 짓이니?!”
제게 따지는 요정에게 클로디아는 기가 막혔다.
“바실리스크가 시련이라고? 너 나를 죽이려는 거야?!”
“무슨 소리예요! 안 죽어요!”
요정은 적반하장이었다.
“고만한 바실리스크한테 대체 어떻게 죽는다는 거예요?!”
고만한…. 기가 막혔다. 물론 그 바실리스크는 작았다. 클로디아는 자신이 방금 본 바실리스크의 모습을 떠올렸다. 작은 망아지만 했다. 하지만 그것은 망아지가 아니라 바실리스크였다. 목구멍에서 나오는 독기를 맡으면 단숨에 누구든 죽어버린다는. 보통 바실리스크는 집채만 하다지만, 그 바실리스크가 작다고 해서 독기도 옅으리란 생각은 도저히 들지 않았다.
대신 디자이어가 나섰다.
[…내가 물어볼 게 있어. 너희 요정들, 이 던전을 언제 만들었다고?]
“백 년 전이요!”
[참나. 야!!]
디자이어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요정이 움찔했다.
[백 년 전에 사라진 괴물을 여기다 가둬 놓고 시련이 뭐 어쩌고 어째?!]
“왜요!”
[우리가 바본 줄 알아?!]
디자이어가 화를 내다가 말을 바꿨다.
[아니, 내가 바본 줄 알아?!]
디자이어의 말에 공포에 질려 있던 클로디아가 그 와중에도 대번에 눈을 치켜떴다.
“야, 디자이어 너 그거 무슨 뜻이야!”
[별 뜻 아냐!]
“거짓말하지 마! 이 거짓말쟁이야!”
아주 잠깐 디자이어와 클로디아가 툭탁거렸다. 물론 상황은 곧 정리됐다. 클로디아는 바보 취급당하는 상황이 익숙했고, 동굴 저편에서는 바실리스크가 자고 있었다. 바실리스크가 언제 눈을 뜰지 모르는데 여기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것은 정말 자신이 바보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일밖에 안 됐다.
클로디아는 대신 디자이어를 바닥에 놓고 두어 번 꾹꾹 밟았다. 그야 디자이어에게는 별 타격도 안 되겠지만, 그녀에게는 상당히 의식적인 행동이었다. 디자이어가 죽는소리를 내면서도 요정에게 항의했다.
[아무리 작아도 바실리스크는 바실리스크야! 걔가 깨어나서 독기라도 한번 뿜으면 얘는 죽어!]
“그래서 안 죽는 시련을 주려고 하는 거예요!”
요정이 답답한 듯 한 바퀴 돌며 설명했다.
“저 바실리스크는 100년 전 요정의 숲에서 길을 잃어 울고 있던 것을, 요정들이 거두어 준 것이에요. 저 애는 엄마도 아빠도 잃어버리고 자기 혼자만 남았다는데 어떻게 저희가 저 애를 팽개칠 수 있겠어요?”
[팽개쳐! 팽개치란 말이야!]
“나빴어요!”
듣다 못 한 클로디아가 한마디 했다.
“너네 둘 다 완전 나쁘니까 설명이나 해!”
그러니까 요지는 그것이었다. 요정은 클로디아에게 바실리스크를 무찌르라거나, 깨우라거나 할 심산은 아니었다. 단지 바실리스크에게 다가가 바구니 안의 꽃을 앞에 놔 달라고 했다. 그리고 다른 꽃관을 바실리스크에게 씌워달라고 했다.
“파란 꽃을 바닥에 내려놓으면 그 애는 더욱 깊이 잠들어요. 걔는 엄마도 아빠도 없는 세상이 너무 무섭고 슬프다고 우리의 둥지에서 자기를 영원히 재워달라고 한걸요.”
“너 조금 설명이 길다고 생각 안 하니?”
클로디아가 싸늘하게 요정을 쳐다봤다. 요정은 더욱 시무룩해져서 말을 이었다.
“클로디아가 할 일은 저 애에게 꽃관을 씌워주는 거예요. 쟤가 좋은 꿈을 꿀 수 있도록.”
그 말을 듣자마자 그녀는 디자이어를 주워든 다음 검을 추궁하기 시작했다.
“너도 나한테 설명해. 피 튀기거나 위험한 일은 안 생길 거라며.”
[…너 여기 들어온 지 얼마나 됐다고, 성격 변했다?]
“내가 지금 안 변하게 생겼니!”
클로디아는 저도 모르게 가슴을 쳤다. 주먹을 쥐고 가슴 위쪽을 팡팡, 답답한 듯 두들기는 몸짓은 그녀를 보며 한탄하던 외무대신에게 배운 것이었다. 어찌나 많이 봤는지 아주 자연스러웠다.
“사방팔방 다 거짓말쟁이야 아주! 요정들은 원래 다 그러니?! 정령들도 다 그래?!”
[아니야!]
“아니긴 뭐가 아냐 너 거짓말쟁이 타이틀 붙어 있는 거 내가 다 봤어!”
그녀는 버럭 디자이어를 윽박질렀으나 어쨌든 선택은 정해져 있었다. 그녀는 이곳을 한시라도 빨리 나가고 싶었고, 그럼 어쨌든 요정의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클로디아는 한숨을 길게 쉬며 디자이어를 챙겨 들었다.
“…정말 안 위험한 거 맞지?”
“파란 꽃을 반드시 그 애의 코앞에 먼저 놔 주어야 해요.”
그래야 깊게 잠든다고 요정은 말했다. 클로디아는 요정의 말에서 뭔가 이상한 걸 느꼈다.
“잠깐. 그냥 깊게 잠들면 된다며 꽃관은 왜 씌워야 돼?”
“잘 때도 예쁘게 자면 좋잖아요.”
클로디아는 지금이야말로 디자이어에게 배운 말을 써먹을 때라고 생각했다.
“너 정말 사람 빡치게 만든다.”
“…공주가 그런 말 써도 돼요?”
“요정이 사람 협박하는데 공주라고 요정한테 고운 말 써줘야 한다는 법 있니?”
요정은 대답 대신 8자를 그리며 날았다. 클로디아는 얼굴을 팍팍 구겨가며 걸음을 옮겼다.
“기가 막혀서. 잘 때 예쁘게 자면 뭐가 좋아? 세상에. 너희 진짜 이상한 애들이야. 쟤한테 꽃관 씌우면 뭐? 쟤는 어차피 자는데 뭐가 예쁜지나 알겠어? 그리고 쟤 혼자잖아? 쟤보고 예쁘다고 말해줄 사람도 없다구.”
속사포처럼 입에서 말이 흘러나왔다. 궁시렁궁시렁궁시렁궁시렁. 바실리스크에 점점 가까이 다가갈수록 그녀의 말도 빨라졌다.
“봐줄 사람도 없는데 예쁘고 말고가 무슨 상관이야? 얘, 애초에 예쁘다는 건 상대적인 거라구. 사실 바실리스크 입장에서는 꽃관 같은 거 안 쓰는 게 예쁘다고 생각할 수도 있어. 그리구 좀 안 예쁘면 어떠니? 쟤는….”
클로디아는 어느 순간 말을 뚝 멈췄다. 바실리스크가 바로 근처에 있어서였지만, 꼭 그것 뿐만은 아니었다.
[…그런데 너 잘 때 예쁘게 자고 싶다고 실크 잠옷 챙겨왔잖아?]
디자이어의 말에, 자신이 꽤 이상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눈을 깜박였다.
…그러네?
잘 때 예쁘게 자면 뭐가 좋아…?
그런 의문이 들었으나, 클로디아의 무의식은 그녀의 생각보다 더 빠르게 디자이어에게 항변했다.
‘아니, 그렇지만 나는 그 잠옷을 꼭 입어야만 잠이 든단 말이야. 꼭 예쁘게 입기 위해서는 아니라고.’
[…그럼 너 귀에 한 장미석 귀걸이는?]
그녀는 반사적으로 손가락을 올려 자신의 귀걸이를 만지작거렸다. 클로디아가 매일 아침 일어나 옷을 입고 나서 꼭 귀에 다는 귀걸이. 여행도 예쁘게 하고 싶은걸, 예쁜 건 포기 못 해! 하며 짐에 챙겨 넣었던 귀걸이였다.
아니, 하지만 이건 봐 줄 사람이 있는걸. 일행이 있잖아…. 그녀는 스스로에게 서둘러 변명을 시작했다. 그러나 그 변명은 길지 않았다.
결국 바실리스크의 코앞에 당도하고야 말았기 때문이다. 그녀가 마냥 넋을 놓을 상황은 아니었다.
결국 클로디아는 생각을 뒤로 미루고 자신이 팔에 끼운 꽃바구니를 열었다. 파란 꽃, 파란 꽃. 그리고 그녀의 손가락이 움찔했다.
…파란 꽃이 좀 많은데?
클로디아는 바구니를 팔에서 빼 얼굴 가까이에 들이댔다. 바구니는 클로디아가 두 손바닥을 쫙 펼친 것보다 조금 큰 크기였고, 그 안에는 꽤 많은 꽃이 들어 있었다. 마치 방금 따온 듯 싱싱한 꽃들. 줄기에서 진액까지 뚝뚝 떨어지는 꽃도 있었다. 그렇게까지 꽃향기가 풀풀 풍길 정도였으니 당연했다.
문제는 그 꽃들 중에도 ‘파란 꽃’이 좀 많다는 거였다. 클로디아는 눈에 힘을 주었다. 언뜻 봐도 수국, 옥시페탈룸, 용담에 델피니움까지….
좀 많은 정도가 아닌데? 클로디아는 고개를 들었다. 요정에게 어떤 꽃을 말하는 것인지 물어보기 위해서였다.
“저기….”
하지만 그녀는 다음 순간 입을 벌렸다. 노란색 눈을 마주했기 때문이다.
가느다랗게 벌어진 바실리스크의 노란 눈이 느리게 감겼다가, 다시 뜨였다. 그리고 잠시 후 다시 스르르 감겼다. 아무래도 선잠이 깬 것 같았다. 클로디아는 침을 삼켰다. 지금 이 순간이 억겁 같았다. 제발 다시 잠들어라, 제발 다시 잠들어라…. 그리고 다음 순간, 명랑한 요정의 음성이 실내를 울렸다.
“네? 무슨 일이세요?”
분명 작은 소리였다. 아까와 같이 작은. 그러나 클로디아에게는 우레와도 같이 들렸다. 제발 조용히 해, 하고 입가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려는데, 무정한 요정이 말을 이었다.
“아, 혹시 파란 꽃을 찾으세요? 좀 많죠!”
꺄르륵, 말 뒤에 붙인 작은 웃음이 화룡점정이었다. 깜박깜박. 느리게 감겼던 눈이 방금 전과는 확연히 다른, 빠른 속도로 몇 번 감겼다 뜨였다. 탁하던 눈이 점점 맑아졌다. 클로디아는 제발 그 요정에게 입을 다물라고 빌고 싶었다. 손가락을 움직이는 것으로는 소용이 없을 것 같아, 그녀는 결국 입을 열었다.
“얘, 너….”
“예?”
그러나 그녀의 말은 이어지지 않았다. 작은 망아지만 한 바실리스크가 고개를 들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질린다는 말이 무엇인지 지금 이 순간 지독하게 체험하고 있었다. 바실리스크는 빠르게 눈알을 굴렸다. 파충류의 눈동자가 전후좌우로 회전했다. 차가운 피가 피부 아래에서 절절절절 끓는 소리가 났다. 끄륵끄륵. 바실리스크가 목구멍에서 작은 소리를 냈다.
그리고 동시에, 바실리스크의 머리 위에 글이 한 줄 떴다.
<새끼 바실리스크 / 꽤 강함>
그 글씨는 마치 그녀에게 경고라도 하듯, 빨간색이었다. 클로디아는 기절할 것 같은 기분이 됐다.
이… X같은 요정 같으니라고.
‘기절할 것 같은 기분’이란, 정말로 기절할 수는 없을 때 드는 것이다. 클로디아는 기절할 수 없었다. 정말로 우스운 일이지만, 그녀는 그 순간 포르투를 떠올렸다.
그녀가 지금 여기서 기절하면 어떻게 될까. 아마 십중팔구 죽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디자이어는 요정의 둥지, 혹은 던전에서 죽거나 하는 일은 없다고 말했지만, 저기 있잖아. 요정의 둥지에 바실리스크가 있다는 건 너도 몰랐잖아.
클로디아가 만약 이곳에서 죽으면, 포르투는 어떻게 될까.
오지 않는 그녀를 하염없이 기다리다가, 하늘섬은 끝내 무너지고 말 것이다. 아니, 그보다…. 클로디아는 잃어버리고 온 세 사람을 떠올렸다. 여태까지는 그들의 곁에 돌아갈 거라 생각했지만, 그러지 못할 수도 있다.
나무틈에 들어갔다가 50년이 흐른 나무꾼은 차라리 낫다. 여기서 자신이 죽어버리면 그 세 사람은 자신을 얼마나 기다릴까?
등골이 서늘해졌다. 클로디아는 이를 악물고 바구니 안에 손을 집어넣었다. 꽃이 마구잡이로 헤집혔으나 그녀는 그 꽃을 고를 시간이 없었다. 전부 손에 모아 쥐고 내밀었다. 바실리스크가 그르르륵, 소리를 냈다. 노란 눈이 껌벅껌벅했다. 마치 자신을 분간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
그동안에도 빨간 글씨는 계속해서 모양을 바꾸었다.
<잠자는 둥지의 도마뱀>
<백 년 동안의 고독>
그래. 어쨌든 그 요정이 거짓말을 하지는 않았다는 것을 알겠다. 그 말들을 보니 이 바실리스크가 백 년 전에 이곳에서 잠들었다는 건 확실했다. 어쩌면 그 촌장이 말한 ‘마귀’도 이 바실리스크를 말한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그런 생각에 골몰할 시간은 없었다. 클로디아는 꽃을 마구 흔들었다. 파스스스, 꽃이 흔들렸으나 바실리스크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깨어나자마자 맞닥뜨린 상황에 바실리스크 또한 놀란 것 같았다. 아니면 이 꽃이 너무 멀어서 그런 걸까? 클로디아는 잠시 생각하다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한 발짝 내디뎠다. 바실리스크가 움찔했다. 자그마한 망아지만한 바실리스크. 하지만 이 도마뱀이 길게 독기를 뿜는 순간 그녀는 죽고 말 것이다. 클로디아는 저도 모르게 숨을 참았다. 조금이라도 독기를 덜 들이마시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손을 다시 내밀었다. 푸른 꽃 한 아름이 그녀의 손에서 격렬하게 흔들렸다.
바실리스크의 노란 눈이 이리저리 꽃을 따라 흔들렸다. 그 눈은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감기고 있었다. 그러나 클로디아는 뜻밖의 위기에 직면했다.
“힘내요, 클로디아!”
그러니까, X같은 요정 자식이 큰 소리로 그녀를 응원했던 것이다. 큰 소리를 들은 바실리스크의 감기던 눈이 확, 뜨였다. 동시에 클로디아는 결국 울음 섞인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엄마야!!”
[클로디아! 물러서!]
그녀의 비명과 동시에 디자이어 또한 소리 질렀다. 클로디아는 저도 모르게 뒤로 두어 발짝 빠르게 물러섰다. 그러나 한 손에 쥐고 있던 디자이어는 여전히 무거웠고, 그녀는 검을 질질 끌듯 물러서고 말았다. 그 바람에 꽃들이 흩어져 땅에 떨어졌음은 물론이다.
“아앗! 소리를 지르면 어떻게 해요, 클로디아!”
그 와중에도 요정은 허공에서 빙빙 돌며 징징거리고 있었다. 어이가 없었다. 먼저 소리 낸 건 너잖아? 요정의 말투는 마치 자신을 놀리는 듯했다.
클로디아는 정말 저 요정이 실체가 있다면 잡아 터트리고 싶었으나, 지금 그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바실리스크에게서 조금이라도 눈을 돌렸다가는 그녀 또한 어떤 습격을 받을지 몰랐으므로.
다행인 것은 저 바실리스크 또한 멈칫하며 그녀에게 더 다가오지 않고 있다는 것이었다. 새끼라서 겁이 많은 걸까? 아니면….
그때였다. 그녀의 머릿속에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명령. 요정은 자신에게 명령할 수 있다고 했다. 세 번. 딱 세 번의 명령권을 그녀는 이 던전 안에서 가질 수 있었다.
‘…누구라도 내 말을 들어야 한다고 했지?’
그렇다면 지금 눈앞의 바실리스크에게 자신을 죽이지 말라고 명령하면 되는 거 아닌가? 클로디아는 점점 침착함을 되찾아갔다. 그야 바실리스크가 엉금엉금 옆으로 조금씩 발을 옮기면서도, 그녀를 경계할 뿐 다가서거나 위협하지는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명령. 바실리스크에게 명령하면 그녀는 지금 목숨을 건질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하지만, 클로디아는 이상하게 뒷머리가 주뼛 서는 기분이 들었다. 그 기분은 클로디아가 익히 몇 번을 접해온 것이었다. 그러니까 이를테면 디자이어가 자신을 바보 취급했을 때 같은 것이다. 그러나 그것보다는 훨씬 더 익숙하고도 큰 무언가.
그녀는 침착하게 머리를 굴렸다.
‘이 기시감을 어디서 맛봤지?’
뭔가 놓치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바보 취급. 바보 취급….
바보 취급.
그녀는 순간 머릿속이 개운해졌다. 이 기분은…. 그래. 기억났다.
‘사람들이 내 등 뒤에서 비웃고 있는 것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던 때의 기분….’
가끔 그런 이들이 있었다. 곤경에 빠져 당황한 클로디아를 두고 숨죽이며 키득거리며 구경하는 사람들. 적당히 그녀가 다치지 않고, 화를 내면 이쪽이 예민한 사람이 되는 장난을 쳐 놓은 다음, 그녀가 어떻게 할지를 관찰하는 사람들의 시선.
예쁘고 착한 공주님이라는 존재는 사실 마냥 사랑받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그녀는 그런 종류의 장난을 잊을 만하면 한 번씩은 겪었다. 그때마다 그녀는 웃으면서 그 장난들을 넘겼다.
그리고 그녀가 지금 느끼는 기분은 정확히 그것과 같았다. 요정이라는 빛 덩어리는 뻔히 위험한 상황에 자신을 빠트려 놓고도 저 위에서 너무하다는 소리나 하며 맴돌고 있다. 순진한 요정이 상황의 위기감을 모르는 거라기에는 무리가 있다.
바실리스크의 앞에서 큰 소리를 내던 요정.
방금 막, 마치 급하게 딴 듯한 꽃.
명백했다. 이건 꾸며진 상황이다. 요정들이 꾸민 던전이라는 소리가 아니었다. 클로디아는 이 상황이 어떤 것인지 이제 확신했다. 요정들이 떠났다고?
그럴 리가.
이런 재미있는 구경거리를 만들어놓고 나서 왜 도망가겠어?
[클로디아?]
그녀는 눈을 가늘게 떴다.
항상 장난을 치는 자들은 그 장난을 그녀가 극복할지, 아닐지를 궁금해한다. 나갈 구멍이 도저히 없는 종류의 장난을 벌여놓고서, 뻔뻔하기도 하지.
물론 디자이어의 말이 맞는 부분도 있었다. 어쨌든 요정들은 피가 튀거나, 누군가 죽는 장난은 치지 않았다.
그녀는 다시 한 번 자신이 이곳에서 겪었던 것들을 돌이켜 생각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녀가 해야 할 행동은 많지 않았다. 결국 클로디아는 자신이 생각해낸 것을 행동에 옮겼다.
한 발짝, 도마뱀에게 다가선 것이다.
[클로디아, 너 뭐 하는 거야?]
“…기다려 봐.”
“클로디아?”
요정이 의심스러운 듯 그녀를 불렀다. 클로디아는 못 들은 척하며 한 걸음 다시 내디뎠다. 푸른 꽃들 중 일부가 그녀의 발걸음에 으스러졌다.
그때였다.
바실리스크가 한 발짝 물러섰다. 노란 눈은 의심과 공포로 뒤룩거리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생각이 옳았다는 것을 알아챘다. 클로디아는 내친김에 두어 걸음 다가섰다. 바실리스크가 화들짝 놀라더니 이번에는 한 움큼, 저만치 물러섰다.
“클로디아!”
클로디아는 지금 이 순간이, 바로 디자이어가 가르쳐준 말 중 차마 하지 못한 말을 읊조릴 때라고 생각했다.
“이….”
“…예?”
하지만 역시 그 단어를 생각만 하는 것과 입으로 내뱉는 것 사이에는 꽤 많은 차이가 있었고, 그녀는 마지막 순간 단어를 바꿨다.
“…이 개 같은 요정 새끼야.”
[…클로디앜?]
디자이어가 그녀를 부르다가 삑사리 비슷한 소리를 내고 말았다. 클로디아는 아랑곳하지 않고 소리 질렀다.
“이 거지같은 장난 그만 쳐.”
“…명령하시는 거예요, 지금?”
요정의 말투가 명백하게 달라졌다. 그녀는 머리끝까지 치밀어오는 짜증을 이기지 못하고 다시 한 번 높은 소리로 요정을 향해 말했다.
“내가 두 번 말해야겠니?”
“…알겠어요. 하지만 눈앞의 바실리스크는 어떻게 하죠?”
요정이 그녀에게 대꾸했다. 그 말투에 이제야 디자이어도 상황을 파악한 듯, 탄식을 내뱉었다.
[…이런 미친.]
“어떻게 하긴 뭘 어떻게 해? 그걸 왜 나한테 물어?”
클로디아는 이를 악물고 디자이어를 들어 바실리스크를 향해 겨누었다.
“내가 얘를 정말로 상처 입히면 너희들이 그만둘래?”
바실리스크가 파르륵, 몸을 떨었다. 클로디아는 더 기다리지 않았다. 그녀는 성큼성큼 바실리스크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까끄륵…. 바실리스크가 빠르게 물러섰으나 클로디아가 더 빨랐다. 그녀는 디자이어를 내려쳤다. 쾅. 대검은 도마뱀의 피부를 갈랐다. 요정이 비명을 올렸다.
“꺄아악! 그만 해요, 클로디아! 잘못했어요!”
그 순간 사방이 환해졌다. 갑자기 수십 개의 빛무리가 나타난 탓이다.
클로디아는 이 웃기는 광대놀음이 끝났음을 직감했다.
***
백 년 전, 이곳에 바실리스크 한 마리가 들어왔다.
왜인지는 모른다. 바실리스크는 어미를 잃은 상태로 자신이 어디에서 왔는지도, 여기가 어디인지도 모른 채 사방을 돌아다녔다. 인간들은 기겁했고, 그 바람에 숲에서 노닐던 요정들도 그 소동을 알아버렸다.
요정들은 사람들에게 다친 바실리스크를 가엾이 여겼다. 때마침 근처를 떠돌던 한 사제가 인간들의 부탁을 받고 동굴로 왔다.
요정들은 사제에게 제발 가엾은 바실리스크를 살려달라고 부탁했다. 사제는 바실리스크를 불쌍하게 여겼다. 어린 바실리스크는 사제의 신성한 문장을 꼬리에 감고 독기를 잃었다. 그들은 수천 년 동안 다른 요정들이 해왔듯이, 달빛 틈에 바실리스크를 숨겼다.
하지만 요정들은 태생적으로 장난을 좋아했다. 곧 숨겨둔 바실리스크로 장난을 치고 싶어 하는 요정들이 생겼다. 놀라고 무서워하는 인간들을 봤기 때문이다. 요정들은 둥지를 크게 고치기 시작했다. 동굴 벽에도 귀엽고 장난스러운 그림을 그렸다. 요정들 나름의 환영 문구였다. 문제는 인간이 없다는 것이었다. 인간들이 바실리스크가 기어들어 간 동굴을 아예 막아버리고 나서는 드문드문 들어오던 발길도 끊겨버렸다.
“그런데… 당신이 온 거예요.”
요정들이 맨 처음 클로디아에게 호기심을 가진 이유는 세 가지였다.
그녀에게서는 진한 정령의 향기가 났다. 디자이어 때문이었다. 게다가 사제 복장을 하고 있었다. 요정들은 백 년 전 자신들의 부탁을 들어준 사제를 떠올리고 그녀에게 호감을 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월장석을 가지고 있었다. 달이 신이 되며 뿌린 조각들. 오랫동안 지루해하던 요정들에게는 정말 재미있는 사건이었다.
그리고 그 모든 이야기를 들은 클로디아는 한심한 눈으로 요정들을 내려다봤다. 엄청난 수의 빛무리들은 마치 벌을 서듯 그녀 앞의 바닥에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그러니까 다 장난이고 거짓말이었다고?”
“아니에요! 아니에요! 처음엔 거짓말이 아니었어요!”
요정들은 한사코 변명했다. ‘보호하나 보호받지 못하는 자’는 사제를 뜻하는 말이었다. 클로디아는 그 말을 듣고 장탄식했다. 사람이라는 건 본래 자기 위주로 생각하는 법이었고, 그녀는 그게 자신의 처지를 뜻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요정들은 맨 처음에 사제를 불러서 오랜만에 요정들의 연회를 열 생각이었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막상 불려온 그녀는 사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게다가 그녀가 디자이어와 금색 이끼의 방에서 주고받는 말을 듣던 요정들은 슬그머니 장난기가 고개를 쳐드는 것을 느꼈다.
누가 뭐라 할 것도 없이 요정들은 앞다퉈 던전을 크게 키웠다. 잠자고 있던 바실리스크를 옮겨놓고, 꽃을 따왔다. 월장석으로 장난을 칠 준비를 끝내 놓고, 막 발을 내딛던 그녀에게 나타나 거짓말을 했다.
“…다 거짓말은 아니었지만요….”
“어느 부분이?”
클로디아가 다그쳐 물었다. 요정들은 망설이다가 답했다.
“…시련을 다 완주해야 여기서 나갈 수 있다는 부분이?”
[너네 진짜 죽을래?]
참다못한 디자이어가 한마디 했다. 빛들은 쪼글쪼글 작아졌다.
***
그러니까 요정들은 급조한 것 치고는 꽤 열심히 그놈의 ‘시련’을 짜기는 했다. ‘도마뱀보다 조금 더 강함’ 같은 것이 그랬다. 바실리스크는 도마뱀이니까, 걔보다 조금 더 강하다는 힌트를 넣어주자! 같은 거였다. 중간에 클로디아가 육포를 먹는 모습을 보고, ‘도마뱀들의 공포’라는 문구를 붙여준 다음 요정들은 키득키득 웃었다. 자신들이 꽤 재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클로디아가 보았던 ‘정보’들은 전부 맞긴 했지만, 전부 장난에 기반한 거라고 생각하니 그녀는 혈압이 오르는 기분이었다.
“아, 참고로 ‘시련’은 사제님이 하시던 말씀에서 따온 거예용!”
“사제님은 매일 시련을 극복해야 한다고 하셨거든요!”
요정들은 설명하다 말고 자아 도취해 쓸데없는 설명까지 했다. 디자이어가 말을 보탰다.
[너네 진짜 시련이 뭔지 가르쳐줄까?]
클로디아가 싸늘하게 손에 쥔 것을 들어 올렸다. 그녀가 아까 전 자른 바실리스크의 꼬리였다. 끝에는 백 년 전에 사제가 달아주었다던 성물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요정들이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바실리스크는 꼬리만 남겨두고 어디론가 도망친 뒤였다.
“그래서 너희 시련이라는 게 뭔지 설명해볼래? 설마 이 도마뱀 꼬리는 아니겠지?”
“…그건 아니고요….”
요정들이 우물쭈물하다가 하나가 앞으로 나섰다.
“그… 바실리스크한테 화관을 씌워주는 거랑요….”
“또.”
“가지고 계신 월장석 목걸이를… 던전 안쪽의 샘에 던져주시는 거랑….”
클로디아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요정이 황급히 변명했다.
“저희는 월장석을… 좋아하거든요….”
“그 위에 앉아 있으면 따끈해요!”
“빛도 커져요!”
또 수다가 시작되려고 해서 클로디아는 눈에 힘을 주고 요정들을 노려봤다. 요정들의 빛이 또다시 쪼글거렸다. 그 와중에 그 요정들 위에는 <수다쟁이 요정> <참견쟁이 요정> 같은 글씨까지 퐁퐁 떠서 그녀를 짜증나게 만들었다. 말 그대로 복장 터진다는 것이 어떤 뜻인지, 클로디아는 알 것 같았다.
“…이 글씨 없어지게 못 해?”
“앗. 그건 저희도 못 해요….”
[왜?]
“말씀드렸다시피… 완주를 하셔야….”
그녀는 이제 반쯤 포기한 기분이 됐다.
“바깥 상황이 어떤지도 모르고?”
“그게 저희도 던전 바깥으로 나가야 알 수 있는 거라서요….”
클로디아는 한 가지는 알 수 있었다. 이 상황에 납치된 것이 데미안이었다면 그는 망설임 없이 이 요정의 던전을 모두 무너트려 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데미안이 아니었고, 요정들이 원하는 대로 해줄 수밖에 없었다. 뭣보다 그녀가 그놈의 완주를 해주지 않으면 그녀뿐만 아니라 요정들도 나갈 수 없단다. 이 망할 요정들. 어쩌겠는가. 완주인지 뭔지 해줘야지.
“그게 다야?”
“아뇨, 하나가 더 있는데….”
“뭔데?”
요정들은 쉽사리 나서지 못하고 우물거렸다. 결국 클로디아가 눈을 부라리고 나서야 마지못해 한 녀석이 말문을 열었다.
“죄송하지만 머리카락을 좀 잘라주시면….”
클로디아는 머리가 띵, 하고 울리는 것 같았다. 수다쟁이 요정이 또다시 말을 거들었다.
“저희는 금발 머리를 좋아하거든요….”
“누가 마지막 시련을 그렇게 정했어?”
“나는 아냐!”
“나도 아냐!”
“누구야, 누구?”
“쟤일걸?”
‘쟤’로 지목당한 빛은 무시무시한 클로디아의 말에 확 움츠러들었다. 그 빛 위에는 <예쁜 것을 좋아하는 요정>이라는 글씨가 쓰여 있었다. 가지가지 한다. 클로디아는 싸늘한 기분으로 생각했다. 거의 꺼질 듯이 작아진 후에야 그 빛이 이유를 댔다.
“반짝반짝 빛나는 머리카락이 예쁘길래, 그물을 짠 다음 그 위에서 자고 싶어서….”
[…난 몰라. 너희 이제 다 끝났어. 영원히 여기서 살아.]
그 한심한 말들을 다 듣고 있던 디자이어가 포기한 듯이 말했다. 요정들이 전부 한꺼번에 히잉, 하고 고개를 숙이듯이 아래로 비실비실 내려앉았다. 그러나 개중에도 분위기 파악 못 하는 놈이 하나 있긴 있었다.
“머리카락은 또 기르면 되지 않아요?”라는 질문을 굳이 하고 나선 요정이 있었던 것이다.
디자이어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도마뱀 꼬리도 또 기르면 되는데 너희는 왜 아까 비명을 질렀니?]
히잉. 요정들이 한층 더 작아졌다. 그 모습을 한참 동안 지켜보던 클로디아는 한숨을 쉬고 입을 열었다.
“그 도마뱀 데려와.”
요정 하나가 놀란 듯 반짝, 빛났다.
“네? 왜요?”
진짜 내가… 인심 쓴다…. 클로디아는 그렇게 말하는 대신 다른 답을 내놨다.
“화관 씌워 주게.”
***
꼬리를 자른 도마뱀이 화관을 썼다. 그 위로 <도마뱀을 좋아하는 요정> <꽃향기를 좋아하는 요정>이 둥둥 떠다녔다. 물웅덩이에서 막 건져와 물방울을 뚝뚝 떨어트리는 월장석 위에 오글오글 모여 앉은 <월장석을 좋아하는 요정>과 <따뜻한 걸 좋아하는 요정>이 신이 나는 듯 반짝반짝 빛을 냈다. 그 요정들 옆에는 한결같이 똑같은 문구가 쓰여 있었다.
<강약약강>
이놈의 요정들. 강한 자한테는 약하고 약한 자한테는 강하다, 이거지. 클로디아는 그 문구를 바라보며 부아가 나는 것을 억눌렀다. 어쨌든 나가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이 정도면 돼?”
클로디아는 지금 디자이어를 자신의 긴 머리카락에 댄 채였다. 엉망으로 헝클어진 머리카락은 요정들에게 잘라주기 위해 모두 풀어헤친 채였다. 디자이어는 연신 못마땅한 말투로 궁시렁댔으나, 어쩔 수 없었다. 공주의 머리카락은 모두 풀어헤치고 나니 허리까지 찰랑거렸다. 그녀는 자신의 등허리까지 디자이어를 갖다 댄 채였다.
많이 안 잘라줘도 되겠지.
그녀의 생각이었지만 <예쁜 것을 좋아하는 요정>의 생각은 다른 모양이었다.
“조금만 더….”
클로디아는 코를 찡그리고는 디자이어의 날을 자신의 상박까지 가져다 댔다. 요정이 또다시 웅얼거렸다,
“거기에서 쪼금 더….”
클로디아의 얼굴이 팍 찌푸려졌다. 결국 디자이어의 날을 어깨까지 가져다 댄 뒤에야 요정이 기쁜 듯이 아래위로 연신 춤을 추었다. 클로디아는 제 손에 쥐인 금발 머리를 내려다봤다. 비록 헝클어지고 더러워졌지만, 그녀가 목숨처럼 가꾸고 기른 머리카락이었다. 그런데 이런 곳에서 지들이 만든 던전도 스스로 못 나갈 만큼 멍청한 요정들에게 빼앗기다니.
눈물이 나려고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요정들의 말처럼 머리카락은 다시 나는 거니까.
그녀는 디자이어를 자신의 머리카락에 들이댔다가, 다시 손에 힘을 풀었다. 탐스럽고 예쁜 머리카락을 자르려니 쉽게 손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이만큼 기르려면 대체 얼마나 길러야 하지? 나 시집가기 전에는 이 정도까지는 다시 기를 수 있겠지? 오만 생각이 다 들었다. 혹시 다시는 못 기르는 건 아니겠지?
[…클로디아. 내가 다른 방법을 찾아볼게. 차라리….]
디자이어가 걱정스러운 말투로 그녀를 타일렀다. 그 말에 클로디아는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냐. 이게 제일 빠른 방법이라면 이쪽이 나아.”
고민이 기니 디자이어에게도 걱정을 끼친 모양이었다. 그도 그럴 수밖에. 디자이어는 그동안 포르투에서 클로디아가 어떻게 머리카락을 관리해왔는지 다 알고 있었다. 클로디아는 질끈 눈을 감고 손에 힘을 주었다.
투두둑. 소름 끼치는 소리가 머리카락을 통해 두피로 전달됐다.
머리카락은 그리 쉽게 잘리지 않았다. 그녀의 머리숱이 워낙 많고 튼튼한 덕이었다. 클로디아는 몇 번이고 머리카락을 잘라야 했다. 마침내 다 자른 머리카락 타래가 완전히 그녀의 머리카락에서 떨어져 나왔다. 머리는 길고, 탐스럽고, 예뻤다.
와아, 와아, 와아. 요정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머리카락을 든 요정과, 월장석을 든 요정이 서둘러 바실리스크의 머리 위로 올라탔다. 꼬리를 잘린 바실리스크는 영문도 모르고 노란 눈을 데굴거렸다. 화관 위가 요정들로 북적거렸다. 요정들이 빙글빙글빙글 돌았다.
익히 설명을 통해 그것이 던전을 끝내는 방법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클로디아는 가만히 그것을 바라보았다. 솔직히 눈물이 날 줄 알았는데, 그렇다기보다는 개운했다. 스스로도 어이가 없을 정도였다.
<도마뱀을 좋아하는 요정> <꽃향기를 좋아하는 요정> <월장석을 좋아하는 요정>과 <따뜻한 걸 좋아하는 요정>….
요정들의 글씨가 섞이고, 겹쳐 보였다. 빛이 마구 돌았다. 흥겨운 노래가 울려 퍼졌다.
고마워요 공주님!
저희들을 위해주셔서!
요정의 축복을 드릴게요!
“필요 없어!”
클로디아는 진저리를 치며 머리를 흔들었다. 엉망으로 잘린 머리카락 끝이 함께 흔들렸다.
도마뱀 꼬리도 드릴게요! 필요하실 거예요!
“싫어!!”
슬픈 일은 없도록 해드릴게요! 약속했으니까!
“…그건 좋아.”
공주님이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할 수 있도록 축복을 드릴게요!
“…너네들 축복은 필요 없다니까?”
아주 잠깐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도 더 볼 수 있도록 해드릴게요!
보호하나 보호받아야 하는 슬픔은 없어질 거예요!
행운도 드릴게요!
가장 필요할 때를 위한 작은 용기를 드릴게요!
예쁜 것, 좋은 것, 아름다운 것은 죄송하지만, 저희가 가질게요!
“…죽을래?”
대신 거짓말을 가져갈게요!
눈물도 가져갈게요!
안 돼, 눈물은 있어야 해!
왜?
울고 싶을 때는 울어야 하니까!
노래가 길어졌다. 그녀는 더 이상 대꾸하기를 포기하고 주저앉아 있었다, 가만히 앉아 있으면 요정들이 알아서 그녀를 돌려 보내줄 테니까.
한참 동안 말이 없던 디자이어는 그녀에게 말을 건넸다.
[너 머리카락 안 아까워?]
“…안 아깝겠니….”
[내가 방법 찾아본다니깐.]
클로디아는 헛웃음을 지었다.
“됐어. 괜찮아. 어차피 볼 사람도 많지 않은데, 뭐.”
그녀답지 않은 대답이었고, 디자이어는 필사적으로 말을 돌리려 애썼다.
[그런데 아까는 어떻게 알았어?]
“어?”
[요정들 말이야. 걔들이 거짓말하고 몰래 뒤에서 다 보고 있는 거 어떻게 알았냐구.]
“난 또.”
클로디아는 어깨를 으쓱했다.
“원래 남을 곯리려는 사람들은 말이 많거든. 그 요정 말이야. 이상하게 말 많지 않았니?”
[아하.]
“성에서 내게 장난치던 사람들도 그랬어. 내 앞에서는 이리저리 말을 비비 꼬면서, 결국은 내가 곤란한 모습을 보려고 했지. 예를 들면 무도회 때 내 드레스에 누군가가 와인을 엎었는데….”
그때였다. 휭, 하고 바람이 불었다. 여태까지 따뜻한 공기만 가득하던 요정의 던전에 갑작스레 차가운 바람이 들이친 것이다. 요정들이 꺅, 하고 웅크리면서도 계속해서 춤을 추었다. 노래는 작아졌고, 빛도 가물가물해졌다.
클로디아는 자신이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걸 알아차리고 일어섰다. 디자이어를 집어든 채였다. 사방이 점점 흰 빛으로 가득해졌다.
“어디로 보내주는 거야? 동굴이야, 아니면….”
그러나 요정들은 답하지 않았다. 까르륵, 까르륵, 웃음소리만 들리다가 점점 멀어졌다. 눈이 부셔왔고, 클로디아는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그러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분명 순간일 테지만 영원처럼 느껴지는 시간이 지나갔다.
이윽고 감은 눈꺼풀 저편이 편안해졌다. 찌르르…. 어디선가 벌레 소리가 들렸다. 차갑고 신선한 공기가 그녀의 뺨을 간지럽혔다.
“…로드?”
익숙한 목소리가 그녀의 귀를 두드렸다. 클로디아가 익히 알고 있는, 그리고 너무나 싫어하는 사람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그녀는 눈을 번쩍 떴다. 그리고 반갑게 웃으며 인사했다.
“수르 알….”
정확히는 인사하려고 했다. 하지만 클로디아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그녀의 혀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데미안 알파/아주 강함>
<초월자>
<기사>
보이지 않는 것을 보게 해준다더니, 요정들은 약속을 지킨 모양이었다. 그 글씨가 아직도 보이는 것으로 미루어 보니.
데미안의 수식어는 아주 많았다. 너무 많아서 글씨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녀의 눈을 붙잡은 것은 두 가지였다. 설마. 잘못 본 걸 거야.
하지만 그 글씨들은 착각하려야 착각할 수도 없는 내용이었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충격으로 몸이 떨렸다.
<……>
그리고 한 가지 더 보이는 것이 있었다.
‘당신을 사랑한다’는 말보다 더 놀라운 말이 세상에 있을 줄 클로디아는 몰랐다. 그녀는 그대로 기절했다.
***
헬렌은 겨우 데미안을 뜯어말리는 데 성공했다. 물론 거기에는 데미안이 딱히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사실이 주효했다. 데미안은 새카만 눈으로 동굴 앞까지 간신히 걸어 나온 뒤 아무 데나 주저앉았다. 방금 전까지 그렇게 눈을 부릅뜨고 날뛰던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별수 없이 헬렌은 한숨을 쉬며 시빌에게 턱짓했다.
“시빌, 불 좀 피워.”
“…여기에서요?”
“우리 지금 아무 데도 못 가.”
시빌은 곧장 헬렌의 말을 알아들었다. 클로디아가 그렇게 사라진 뒤다. 데미안이 이곳을 떠날 리가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데미안만 두고 둘이 어디로 갈 수도 없었다. 이 일행은 각자의 목적을 위해 결성된 일행이 아니었다. 클로디아를 무사히 자르지스로 데리고 가기 위한 일행이었다. 오로지 그 목적 하나 때문에 모인 세 사람이, 클로디아가 사라졌다고 해서 곧장 ‘아, 그렇습니까. 이제 우리 각자 갈 길 가도록 하시죠’라며 헤어질 수 있을 리 없다.
시빌 또한 기가 막혔으나 별수 없었다. 여기서 불이라도 피우고, 며칠 정도는 새울 각오를 해야 했다. 헬렌은 빠르게 풀숲 사이로 사라졌다가, 수레를 끌고 나타났다. 길가에 잠시 묶어놓은 말은 착하게도 주인을 기다린 모양이었다. 헬렌은 나무 둥치에 말을 느슨하고 길게 묶었다. 여기에 며칠 있어야 할지 모를 일이라는 걸 그녀도 짐작하고 있었다.
그사이 시빌은 땅을 정리하고 불을 피웠다. 얼마나 당황스러운 일을 겪었는지 세 사람 다 미세하게 떨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당황스러운 것은 데미안이었다. 언제나 어깨를 펴고 걷던 데미안은 잔뜩 웅크리고 넋을 놓은 표정으로 바닥만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빌이 불을 피우는 사이 헬렌은 데미안의 손에서 가방을 벗겨냈다. 별 저항이 없었다. 정확히는 아예 손을 놔버렸다는 표현 쪽이 맞았다. 헬렌은 기가 막혀 하면서도 가방에서 냄비와 요리도구를 꺼냈다. 본래 마을 사람들이 챙겨준 점심거리가 있었지만, 이럴 땐 따뜻한 것이 필요했다. 뭣보다….
지지대를 세우지도 않고 헬렌은 냄비를 불 위에 얹었다. 한 가지는 확실했다. 셋 다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안정이 우선이었다. 치익. 그녀가 급하게 냄비에 올린 버터가 빠르게 녹아들었다. 익숙한 냄새가 사방에 퍼졌다. 그제야 헬렌은 안심할 수 있었다. 그녀도 놀란 건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헬렌이 완성한 요리는 굉장히 볼품없는 데다가 허술한 것이 되고 말았다. 버터를 녹인 다음에야 뭘 요리할지 고민한 탓이었다. 버터는 탔고, 재료는 빈약한 수프. 그러나 그 와중에도 시빌은 그 수프를 받아들고 미소 지었다.
“고마워요.”
맛은 떨어졌다 해도, 그녀가 요리한 만큼 마법적 효과는 확실했다. 시빌은 방금 전까지 두근거리던 가슴이 잦아드는 걸 확인하고 데미안을 쳐다봤다. 데미안은 헬렌이 권하는 수프를 받기는커녕, 우두커니 앉아 바닥만 쳐다보고 있었다. 머리가 복잡한지, 아니면 머리가 텅 비어 있는지도 구분이 안 가는 표정이었다.
시빌은 혀를 찼다.
“…좀 먹어봐요, 데미안.”
데미안은 답하지 않았다. 헬렌이 고개를 저었다.
“놔둬.”
“아니, 하지만 이거 먹으니까 마음이 좀 진정돼서 그래요. 데미안. 예? 한 술만….”
“…괜찮습니다.”
시빌의 말을 데미안이 잘랐다. 데미안의 눈은 여전히 새카맣게 가라앉은 채였다. 헬렌이 일부러 시빌에게 물었다.
“그, 어떻게 된 걸까?”
“글쎄요. 솔직히 저도 모르겠습니다. 마력의 흔적이 전혀 남지 않았어요. 이런 경우는 얼마 안 됩니다. 딱 두 가지죠.”
“뭔데?”
“저보다 높은 수준의 마법사가 흔적을 지웠거나, 아니면 마법이 아니거나.”
시빌의 설명에 헬렌이 이마를 찡그렸다.
“…여기 그냥 시골 국경이잖아? 너보다 수준 높은 마법사가 일부러 그럴 이유가….”
“…없으니 저도 후자라고 생각합니다.”
“후자일 경우엔?”
“글쎄요. 간혹 세상에는 자연의 힘이 비정상적으로 모여 구멍 난 공간이 있거든요. 그런 곳이거나, 아니면….”
시빌은 턱을 긁었다.
“이건 아주 오래된 전승이지만, 요정의 짓이거나요.”
“요정?”
“정령 중에서도 유독 장난기가 심하지만 힘이 없고 의지만 있는 축들이죠.”
그때 시빌은 자신을 향한 시선을 알아차렸다. 데미안이 슬그머니 얼굴을 들어 자신의 말을 듣고 있었다. 시빌은 크흠, 하고 헛기침을 했다. 말을 길게 해야겠구만. 안 그러면 저치는 또 고개를 바닥에 처박을 것이었다. 주의가 돌아왔을 때 어떻게든 생각을 다른 곳으로 돌려야 했다.
“그게 사실 어떤 얘기냐면요, 혹시 이런 동화를 들어보신 적 있습니까? 나무꾼 이야기인데요….”
***
해는 금세 저물었다. 두어 번, 길 근방에서 모닥불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궁금하게 여긴 길 가는 이들이 기웃거린 것을 빼면 세 사람을 방해하는 이들은 없었다. 물론 그 방해는 그리 달갑지 않았다. 세 사람은 암묵적으로 클로디아의 귀환을 기다려보기로 결론 낸 상태였고, 제발 그녀가 다시 돌아와 빠르게 셋의 침묵을 방해해주길 바랐다. 클로디아가 있을 때는 그렇게 수다가 끊이지 않던 일행들은 침묵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가장 먼저 지친 시빌이 잠들었다. 그는 어떻게든 필사적으로 계속 떠들었지만, 결국 자신 혼자 떠들거나 헬렌만 간간이 맞장구치는 상황에 지쳐버린 듯했다. 헬렌도 한숨을 쉬고는 억지로 누웠다. 어차피 데미안은 오늘 잠을 자지 못할 것이 뻔했고, 그렇다면 자신이라도 눈을 붙여두는 게 이득이었다.
데미안은 홀로 깨어 있었다. 그는 아까부터 계속 한 가지만을 곱씹고 있었다.
‘수르, 알….’
그녀는 마지막 순간에 자신을 불렀다. 그는 그것이 견딜 수 없었다.
클로디아가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자신을 의지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이토록 괴로울 줄이야. 한참 동안 앉아 있던 그는 결국 벌떡 일어났다. 주변을 서성거리려다가, 잠든 헬렌이 뒤척이는 것을 보고 뒤로 물러났다.
데미안은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동굴 안은 조용했고, 게다가 밤인지라 아무것도 안 보였다. 결국 그는 견디지 못하고 다시 동굴을 나왔다. 모닥불은 바로 옆에 있었지만, 데미안은 다시 불 옆으로 갈 생각이 조금도 들지 않았다. 방금 전까지 넋 놓고 가만히 앉아 있던 것이 거짓말처럼 느껴질 정도로, 몸을 움직이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클로디아.
데미안은 이를 악물었다. 그 이름을 생각하노라면 그 스스로가 견딜 수 없이 비루하게 느껴지는 밤은 워낙 많았고, 익숙했다. 하지만 이렇듯 원망스럽게 느껴지는 것은 처음이었다.
맹세코 살아오며 데미안은 그녀의 이름을 원망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녀가 자신을 원망스러워하면 몰라도. 그녀가 자신에게 파혼하는 그 순간조차 절망스러웠으나 순리로 느꼈던 그이니만큼 지금의 감정은 유난스러웠다. 물론 그는 그 이유도 알고 있었다.
당신은 대체 왜 그 순간에 나를 불러서!
끔찍한 죄책감이 데미안을 휘감고 있었다.
‘제가 어디를 가든 저를 경호하실 건가요?’
‘예.’
‘자르지스라도?’
‘예.’
그녀의 물음에 망설임 없이 답했던 자신을 향해 데미안은 가감 없이 크나큰 질책을 했다.
책임지지 못할 대답을 그때 왜 그렇게 자신 있게 했지?
데미안은 자신의 오만함을 후회했으며, 동시에 그녀가 자신에게 보낸 공고한 신뢰를 원망했다. 그 순간 자신의 이름을 부른 것이야말로 그 어떤 것보다 확실한 신뢰였다. 그리고 그는 거기에 보답하지 못했다.
원망과 미련이 그의 피부 안에서 들끓었다. 그녀가 싫어하더라도 한 발짝 뒤에 서 있어야 했다는 생각이 그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클로디아가 그에게 ‘당신이 싫어요’라고 말한 날부터 데미안은 그녀에게서 멀찍이 떨어졌다.
항상 포르투 왕성 안에 있는 그녀를 그가 경호할 필요는 거의 없었으므로, 일부러 피해 다니기도 했다. 하지만 여행을 떠나오던 순간부터 그런 것은 불가능했다.
동력 지대로 내려가는 승강기에서, 저도 모르게 위태위태한 그녀를 붙잡을 때 알아차렸다. 데미안은 그녀에게 가까이 갈 수 없었다. 한 발짝 뒤? 그런 거리에 있었다가는….
데미안은 일부러 여행에서도 그녀의 앞에 섰다. 클로디아가 자신의 눈앞에 있는 상태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아서였다. 항상 그녀를 뒤에 두고 자신이 앞으로 나갔다. 그러고 나니 조금 마음이 편했다. 자신의 뒤에서 시빌과 떠드는 그녀는 예전보다 명랑해 보였고, 즐거운 듯했다. 그대로만 가면 된다고 믿었다.
하지만 동굴에서 데미안이 그녀를 두고 돌아선 순간, 클로디아는 어이없이 사라져버렸다. 견딜 수 없는 허탈함에 데미안은 주먹을 쥐고 바로 옆의 나무를 후려쳤다. 쾅. 죄 없는 나무가 흔들렸다. 찌르르르륵! 졸고 있던 새들이 놀라 후두둑 날아올랐다.
“…아이고, 깜짝이야.”
그 바람에 깬 것은 마법사였다. 빨간 머리의 마법사는 잠이 덜 깬 눈으로 사방을 바라보더니 아이구, 하는 얼굴이 되어 상반신을 일으켰다. 데미안은 뒤늦게 자신이 멍청한 짓을 했음을 깨달았다. 세상에 노숙하고 있는 일행을 이렇게 요란하게 깨우는 일이라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데미안은 빠르게 사과했다.
“…미안합니다.”
“아니, 아닙니다. 흐암. 그러고 보니 불침번도 안 정하고 잠들어버렸군요. 지금부터라도 좀 주무세요.”
시빌이 마저 일어나려 해서 데미안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오늘은 제가 밤을 새우겠습니다.”
두 남자 다 완강했고, 결국 두 사람은 모두 뜬눈으로 밤을 새우기로 했다. 누가 뭐라 할 것도 없이 서로 결정한 거였다. 시빌은 모닥불 앞에 앉는 대신 일어나 겅중겅중 제자리에서 두어 번 뛰었다. 잠을 깨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어쩔 줄 몰라 하다가, 그의 옆으로 다가왔다. 데미안은 고개를 돌렸으나 시빌이 빨랐다.
“혹시나 싶어 말하는 건데, 당신 탓이 아닙니다.”
“…예.”
대답만 예, 였지 말투는 정반대의 뜻을 담고 있었다. 시빌은 한숨을 쉬었다.
내가 이럴 것 같아서 도로 잠도 안 잤지.
피곤함이 묻어났다.
“그건 사고였어요. 아무리 생각해도요. 그런 게 일어날 리 없는 곳이었단 말입니다.”
“….”
시빌은 말을 이으려다 입을 닫았다. 더 이상 말해봐야 아까 헬렌과 나눈 말의 반복이었다. 요정, 아니면 모르는 마법. 같은 이야기를 반복해봐야 뭐 한단 말인가. 한참 동안 침묵이 흘렀다. 시빌은 물끄러미 고개 숙인 데미안을 바라보다가 또다시 한숨을 길게 쉬고는 그에게 다가갔다.
“…뭐.”
데미안이 흠칫했다. 시빌이 팔을 벌려 그를 끌어안았기 때문이었다. 뜻하지 않은 친밀한 몸짓이었고, 데미안에게는 더더욱 겪어본 적 없는 일이었다. 덕분에 데미안은 시빌을 떨쳐낼 기회를 완전히 놓쳤다. 시빌은 데미안의 상박을 꽉 안고, 그의 등을 두어 번 두들겼다. 그리고 속삭였다.
“그러지 마세요.”
“시빌.”
데미안이 난처한 듯 몸을 뒤틀었다. 시빌은 다시 한 번 그를 꽉 끌어안았다.
“애초에 공주는.”
그러나 시빌은 말을 잇지 못했다. 낯선 바람이 갑자기 확 불어왔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평범한 바람이 아니었다. 까르르, 까르르…. 작은 웃음소리가 섞여 들렸다. 두 사람 다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도 못한 채 눈을 부릅떴다.
“어디로 보내주는 거야? 동굴이야, 아니면….”
명랑한 말소리가 이어졌다. 시빌은 자신의 뒤, 그러니까 데미안이 바라보고 있는 쪽에 그 목소리의 주인이 있다는 것을 알아채고 등을 굳혔다. 돌아봐야 하는데, 돌아볼 수 없었다. 행여나 착각일까 봐.
“…로드?”
하지만 이어진 데미안의 말에 시빌은 눈을 감았다. 아.
“수르 알….”
돌아왔구나.
그리고 생각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마법사는 들판에 내팽개쳐졌다. 바닥에 나동그라진 시빌의 시야에, 화살같이 튀어 나가 무너져 내리는 공주를 안아 올리는 남자가 보였다.
하하.
시빌은 헛웃음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