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장. 유니콘과의 조우 (6/30)

2장. 유니콘과의 조우



 

디자이어가 만든 배는 소박했다. 기껏해야 대여섯 명이 탈 법한 크기였으나 있을 것은 다 있었다. 디자이어가 운행하고 바람을 탈 배라 사실 키나 돛은 크게 필요가 없었지만, 디자이어는 구색을 맞춰야 한다며 온갖 것을 다 만들었다.

디자이어가 배를 완성한 다음 시빌이 그 배를 축소했다. 손바닥만 한 크기였고, 이번에는 무게도 가볍게 했다. 클로디아는 자신의 손 안에 들어온 배를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배낭 안에 집어넣었다.

데미안은 일행을 숲에 모아놓고 앞으로의 일정을 이야기했다. 네 사람이 있는 투르는 동북부에 있는 대륙이다. 네 개의 대륙에서 자르지스로 갈 수 있는 곳은 남부 대륙. 동북부 대륙에서 배를 타고 자르지스로 가는 루트를 시빌이 제안했으나 기각됐다. 식량을 보급받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동북부 대륙에서 자르지스까지 가는 데는, 저는 뱃길은 잘 모르지만 한 달은 족히 걸린다고 들었습니다. 대륙과 대륙의 이음새에 있는 해류는 거세기도 하고요. 작은 배에 우리 모두를 먹여 살릴 식량을 실을 순 없습니다. 게다가 이 계절에는 태풍이 올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남부 대륙의 최남단 항구인 아트릭스까지 가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아트릭스까지는 약 두 달 반의 여정이 필요했다. 그것도 여행이 순조롭고 교통수단이 있을 때의 이야기다. 그래서 데미안은 교통수단의 구입을 제안했다.

“인원이 이렇게 많으니 마차를 구입하든, 말을 구입하든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중에서도….”

“마차가 좋지 않을까요?”

시빌이 손을 들고 말했다.

“저는 말을 잘 못 타요.”

“나도 그렇게 생각해. 나는 노새나 겨우 타본 게 전부라고.”

헬렌도 난색을 표하자, 클로디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수르 알파와 제가 말을 탈 줄 아니 두 사람을 태우고 가면 되지 않을까요? 좋은 말을 사면 두 사람이 타는 것 정도는 문제가 안 될 것 같고….”

“…공주님 말 잘 타요?”

굉장히 의외라는 시빌의 말투에 클로디아가 발끈했다.

“뭐예요? 저를 뭘로 보는 거예요? 승마는 왕족의 기본 소양이라구요!”

“저도 고려해 보았습니다만, 로드. 그 정도의 좋은 말을 구입하기는 지금 거의 어렵긴 합니다.”

데미안이 고개를 저었다.

“확실히 말을 타고 가는 쪽이 기동력은 월등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지금 왕국들이 각자 군비를 비축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두 사람씩 타고 두 달의 여정을 버티려면 군마로 쓰이는 말 정도는 사용해야 하겠지만, 아마 힘들 겁니다.”

“군비요? 왜… 아.”

클로디아가 물으려다 흠칫했다. 그렇다. 왕국들은 포르투의 멸망을 예측하고 있었던 것이다.

백 개의 왕국을 다스리는 포르투는 클로디아가 마왕을 무찌르지 못한다면 적어도 3년 안에는 멸망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왕국들은 클로디아의 실패를 예상했다.

“다들 전쟁을 예상하고 군대를 모으고 있죠.”

“사실 투르에서 영주가 클로디아를 붙잡으려고 했던 것도 같은 맥락이야.”

헬렌이 고개를 내저었다. 약소국은 약소국대로 살길을 모색하고 있었다. 물론 그 수단으로 클로디아의 납치를 꾀한 건 정말 용서하지 못할 일이었지만.

어쨌든, 몇 백 년 동안 네 개의 대륙 위에 군림했던 패자 포르투가 침몰한다면 대륙은 강자들을 가리기 위해 말도 못 할 만큼 처참한 아비규환의 소용돌이로 빠져들 것이다.

클로디아도 그 정도는 알 수 있었고, 그녀는 곧 침묵했다.

자신의 여정에 어떤 무게가 드리워졌는지 조금 실감이 났기 때문이다.

데미안은 그런 그녀를 못 본 척하며 말을 이었다.

“마차도 좋은 것은 구입하기 힘듭니다. 저희는 아마 짐마차에 타야 하겠죠.”

“엑.”

시빌이 노골적으로 싫은 기색을 했다.

“윤기가 흐르고 좋은 말을 구입하면 좋겠지만, 투르에서의 일도 있고, 저희는 당분간 눈에 띄지 않는 것을 목표로 할 것입니다. 평범하고 작은 말을 두 마리 살 겁니다. 마차도 되도록이면 가벼운 것으로. 다행히 저희는 짐이 없으니 그런 부담은 적습니다.”

“하긴 그래. 나는 당신들 짐이 없길래 잠깐 근처로 놀러 나온 사람들인가 싶기도 했다니까.”

헬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헬렌은 오늘 오전에 자신의 냄비며 요리 도구들이 모조리 데미안이 진 배낭 안으로 쏙 들어가는 것을 보고 감탄한 차였다.

“그러면 다음 도시에서 마차를 사는 건가?”

“예. 다만 고민되는 것은 이만한 무장 인원이 몰려다니는 것에 대한 우려입니다. 특히 저희가 다음에 지나쳐야 하는 왕국은 호전적이기로 유명한 멜라토르 왕국입니다.”

데미안의 말에 모두 자신을 돌아봤다.

확실히, 전운이 감도는 왕국들 사이에 이 일행들은 지나치게 눈에 띄었다. 일단 시빌이나 헬렌은 그렇다 쳐도, 데미안과 클로디아가 문제였다. 데미안은 누가 봐도 훌륭한 칼잡이였고, 클로디아의 등에 진 디자이어는 너무 튀었다.

멜라토르는 포르투에서도 언제나 골치로 여기는 왕국이었다. 가진 자원이 척박해 툭하면 근처 왕국들을 침략하기 때문이다. 그 국민들이 가진 기질도 험악해, 칼을 차고 다니는 외국인들이 눈에 띄면 분명 시비가 걸릴 것이었다.

“저 검도 그 배낭에 넣으면 안 되는 거야?”

헬렌의 말에 디자이어가 발끈했다.

[누굴 지금 짐 취급하는 거야?!]

“마음 같아서는 정말 그러고 싶습니다만.”

[데미안 너까지!]

데미안의 말에 디자이어는 기가 막혀 했다. 시빌은 배를 잡고 킬킬거렸다.

“정령과 마법은 상성이 나쁩니다. 시빌이 디자이어에 손대지 못하는 것만 해도 그렇죠. 이 배낭은 마법 배낭이라 아마 디자이어는 들어가지 못할 겁니다. 그리고 저도 마찬가집니다. 유사시에 로드를 지켜야 하는데 검을 배낭에 넣어놓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아무래도 저희 차림을 좀 손봐야겠죠.”

데미안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 한숨의 뜻을 클로디아는 다음 도시에 도착해서 알아차렸다.



 

***



 

다음 도시는 국경에 위치하고 있었다. 멜라토르와 인접한 곳이니만큼 상당히 살벌한 분위기를 예상했으나, 생각보다 활기찬 곳이었다. 시빌과 클로디아가 여관에서 쉬는 동안 데미안은 헬렌과 함께 나가 여러 가지를 구입했다. 가장 먼저 구입한 것은 마차였다. 그런데 그 마차가 가관이었다.

“이게 뭐야?”

시빌이 마차를 보고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했다. 말이 마차지, 거의 수레였다. 그것도 농가에서 쓰는 짐수레. 덮개도 없는 데다가 나무로 만들어졌다. 허름한 건 또 어떻고. 짚더미를 실어 나르던 수레를 농가에서 구입해 온 것인지, 지푸라기가 여기저기 아직도 묻어 있었다.

데미안은 어깨를 으쓱했다.

“이 정도가 가장 낫습니다. 굳이 멀쩡한 마차를 구입하면 몸수색을 피하지 못할 겁니다.”

데미안의 계획은 마차 바닥에 디자이어를 숨긴 뒤 그 위에 지푸라기를 덮는 것이었다. 헬렌이 피식 웃으며 시빌에게 말했다.

“다르게 생각하면 누워서 가는 거잖아. 좋게좋게 생각해.”

“하지만 비가 오면요?”

“덮개는 곧 마차 수리공이 와서 만들어 줄 겁니다.”

시빌은 여전히 구겨진 얼굴을 펼 줄 몰랐으나, 곧 헬렌이 시장에서 사 온 것을 보고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와하하, 이게 뭐예요?”

“마음에 들어?”

헬렌이 싱긋 웃었다. 헬렌은 농가의 여인으로 변장하기 위해 그 수레를 산 곳에서 주인 부부의 옷을 좀 샀다. 품이 크고 넉넉한 데다 낡은 옷은 헬렌에게 잘 맞았다. 짧은 머리가 좀 걸렸지만, 그것도 손수건으로 감싸니 그럴싸했다.

그리고 데미안은….

“내 연하 남편 역할이야!”

“푸하하하하!”

헬렌의 말에 시빌이 뒤집어졌다. 데미안은 무표정하게 팔짱을 끼고 있었으나, 입가가 약간 떨리는 것을 보이고 말았다. 클로디아도 결국 킥킥 웃고 말았다.

어쨌든 데미안은 키가 너무 컸고, 기골도 장대했다. 그 덩치를 어떻게 할 수 없었지만, 그나마 헬렌이 부여한 역할이 설득력을 주었다.

“몸이 좋아서 내가 열심히 꼬드겨서 자빠트렸다는 설정이야.”

죽도록 웃던 시빌은 거의 울고 있었다. 헬렌이 거드름을 피웠다. 클로디아가 떨떠름한 얼굴로 지적했다.

“그렇지만 칼은요?”

“하지만 남자에게 적극적인 아내의 바람기가 걱정되어서 낡은 칼이나마 들고 다닌다는 설정이기도 하지!”

그것을 증명하듯 데미안의 허리춤에 찬 검집은 가죽끈으로 둘둘 말려 있었다. 헬렌이 부연했다.

“그렇지만 클로디아 때문에 전부 기각.”

“저요…?”

클로디아가 눈을 깜박거렸다. 헬렌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녀는 클로디아를 자신의 동생으로 위장하기 위해 흔히 농가의 처녀들이 입곤 하는 작업복을 샀지만, 막상 들고 와서 클로디아의 얼굴을 보고 나니 맹점을 파악했다.

너무 예쁘게 생겼던 것이다.

“농가의 처녀로 위장하는 건 문제가 안 돼. 하지만 국경의 병사들은 나쁜 놈들이야.”

“아….”

“멜라토르로 넘어가는 거야, 농부들은 식량을 팔러 자주 다니니까 괜찮아. 하지만 클로디아의 얼굴을 보면 그놈들이 어떻게 할 것 같아?”

아. 시빌이 탄식했다. 헬렌은 말을 이었다.

“나 같은 선머슴도 국경을 넘을 때면 가끔 곤란을 겪곤 해. 여자 혼자 여행하는 건 약점이거든. 하물며 클로디아 정도 되는 얼굴은 분명 문제가 될 거야.”

“어떻게 하죠?”

그렇다고 해서 본래 신분을 밝혀가며 가는 곳마다 요란하게 다닐 수도 없었다. 클로디아가 난처한 기색이 되자, 시빌이 손을 들었다.

“제 아내라고 하면 안 되나요?”

“병사 놈들이 평민의 아내라고 해서 퍽이나 안 건드리겠다. 아무튼 저 얼굴을 어떻게든 해야 해.”

[아니면 차라리 아예 화려하게 꾸미는 건 어때?]

디자이어가 끼어들었다. 네 사람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눈에 띄는 게 문제라며. 그럼 아예 클로디아를 눈에 띄게 하되, 건드리지 못하게….]

“귀족 아가씨로 변장하라는 소립니까? 하지만 그것 또한 어렵습니다. 아가씨들은 가문의 신분패를 가지고 다닙니다. 게다가 멜라토르 국경을 넘는 귀족 아가씨는 어불성설입니다.”

데미안이 반대했으나, 디자이어는 전혀 다른 의견을 내놨다.

[그게 아냐. 차라리 떠도는 집시 같은 걸로 분장시키라고.]

“…집시라고요?”

[그래. 하늘섬에도 가끔 들어오잖아.]

집시들은 일정한 거처 없이 각 나라를 떠도는 자들이었다. 춤을 추고 노래하며, 가끔은 점을 보며 살아갔다. 확실히 집시로 꾸민다면 병사들도 그녀를 건드리지 않을 것이다. 집시들은 지저분한 데다 도둑질을 일삼았고, 집시 여인들의 유혹에 넘어갔다가 지갑을 몽땅 털린 사람들의 이야기는 유명했다. 하지만….

“그렇지만 클로디아가 집시처럼 행동할 수 있을까요?”

시빌이 의문을 제기했다. 집시 여인들이 돈을 버는 가장 빠른 수단은 몸을 파는 것이었다. 그러니 어딜 가도 남자들에게 들러붙었다. 세 사람의 시선이 클로디아에게로 향했다가 빠르게 흩어졌다.

“안 돼, 안 돼.”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마찬가지입니다.”

세 사람의 의견이 합의를 볼 때, 클로디아가 이마를 옅게 찌푸렸다.

“저도 잘할 수 있는데요…?”

“잘하긴 뭘 잘해. 안 돼.”

헬렌이 손을 내저었다.

농가의 마차에 잠시 몸을 의탁하는 집시 처녀.

그야 뭐 그럴싸한 이야기이기는 했지만, 결정적으로 분위기가 다르다. 저 클로디아 테 포르투의 보드라운 뺨과 가느다란 팔다리는 고생이라고는 해본 적도 없는 모습인 데다가, 집시는커녕 여느 귀족가의 요조숙녀 같기만 했기 때문이다. 귀족가 아가씨들은 몰래몰래 연애라도 한다지.

“요조숙녀면 차라리 낫지. 무슨 신전 사제님 같잖아.”

가만히 입을 다물고 손을 모은 채 다소곳이 앉은 모습은 저 신성 왕국의 대교황이라도 되는 것 같다. 이번 대의 대교황은 젊은 여자였는데, 그 자태가 자못 아리땁고 성결한 나머지 성녀라고 불린다나 뭐라나.

그때였다. 데미안이 “잠깐….” 하고 잠시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신성 왕국의 견습 사제라고 하는 건 어떻습니까?”

“…당신 천재야?”

헬렌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



 

신성 왕국 알카디아. 교국이라고도 불렸다. 신의 존재를 믿으며 교황을 왕보다 더 높은 존재로 모시는 알카디아의 국민들은 의무적으로 반드시 인생의 한 번은 2년 동안 사제로 일해야 했다. 2년의 과정이 끝난 후 본래의 삶으로 돌아가는 이들이 대부분이지만, 그 후 사제로 평생을 살아가는 이들도 있다.

그리고 사제가 되기 위해서는 3년 동안 백 개의 왕국을 돌아다니며 신의 말씀을 전파해야 한다.

알카디아 왕국의 사제들은 어딜 가나 존중받았다. 그들은 사제로서 왕국을 떠돌아다니며 신성력으로 사람들을 치료하고, 어려운 이들을 돕기 때문이었다.

클로디아가 사제로 분장한다면 병사들도 별말 없이 그녀를 보내줄 것이다.

“하지만…. 신성 왕국의 사제를 사칭한 것이 들키면 신성 왕국으로 끌려가요.”

“평생 신성 왕국에서 봉사하며 살아야 한다던데요.”

시빌이 말해놓고 으, 하는 표정이 되어 고개를 저었다.

“차라리 죽이는 게 낫지.”

만약 그녀가 사제를 사칭했다가 왕국에 끌려간다면, 포르투의 공주라는 사실을 밝히고 풀려날 수도 있겠지만, 망신살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게다가 신성력도 문제였다.

“사제들은 국경을 통과할 때 신성력을 내보이잖아요…. 저는 아무 힘이 없어요.”

[그거라면 내가 도와줄 수 있지 않을까?]

디자이어가 쫑알거렸다.

[내가 벼락이라도 치게 하면 되지!]

“그것 외에 별수가 없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데미안이 말했다. 클로디아는 머뭇거렸으나, 결국 수락하고 말았다. 어쨌든 자신이 편하자고 일행의 안전을 담보로 내걸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시빌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면 신성 왕국의 문장을 구해봐야겠군요. 그런 것쯤이야 사실 도둑 길드를 수소문하면 구입할 수 있겠지만…. 문제는 들키느냐 마느냐네요.”

결국 클로디아는 그날 오후 내내 디자이어를 휘두르는 훈련을 하며, 입으로는 신성 왕국 알카디아의 교리를 속성으로 외워야 했다.



 

***



 

헬렌은 머리에 수건까지 덮어쓰고 말을 능숙하게 몰아 국경을 건넜다. 데미안을 보고 병사들은 눈을 부릅떴으나, 헬렌이 데미안의 머리를 끌어안으며 호쾌하게 “제가 남편 하나는 잘 골랐죠?!” 하고 웃어 보이니 피식피식 웃으며 두 사람을 통과시켰다.

그다음은 시빌 차례였다. 시빌은 지푸라기가 잔뜩 덮인 수레에서 일어나 비척비척 걸으며 마법사 길드의 문장을 내보였다. 마법사들이 여행을 하는 것은 가끔 있는 일이었고, 병사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이 클로디아였다. 그녀는 수레에서 조심스럽게 내렸다. 옷 위에는 도둑 길드에서 문장과 함께 구한 신성 왕국 사제들의 로브를 걸치고 있었다. 병사들은 클로디아의 얼굴을 보고 눈을 부릅떴지만, 그녀가 신성 왕국의 문장을 내보이자 아쉬워하면서도 클로디아를 통과시켰다.

클로디아는 한숨을 쉬며 도로 수레에 탔다. 수레 뒤에 먼저 올라와 있던 시빌이 그녀의 손을 잡아 수레로 올려주었다.

클로디아는 살짝 웃으며 “고마워요.” 하고 말했다. 막 수레가 출발하려는 때였다.

“잠깐만!”

병사들이 갑작스럽게 수레를 세웠다. 헬렌이 눈을 둥그렇게 떴고, 클로디아는 저도 모르게 몸을 긴장시켰다.

‘혹시 들킨 건가?’

하지만 병사들의 기색을 봐서는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국경을 지키는 병사들 중 하나가 클로디아에게 말을 걸었다.

“저, 사제님.”

“예?”

“괜찮으시다면 혹시 이 근처의 마을에 잠시 들러 주실 수 있을까요?”

“무슨 일이신지….”

갈색 머리카락을 한 병사 하나가 머뭇거리며 나섰다.

“저는 이 길로 쭉 한 시간 정도 걸어가면 있는 마을에서 온 사람입니다. 마을 근처의 작은 숲에 최근에 괴물이 나타나서요….”

“앗…. 괴물이요?”

클로디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병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정체를 알 수 없는 괴물입니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 숲은 사람들이 열매도 따고 나무를 하는 곳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나타난 괴물이 사람들을 자꾸 다치게 해서요. 마을에 병자가 많습니다.”

“병자요….”

“예. 시간이 괜찮으시다면 저희 마을에 잠시 들러서 다친 사람들을 치료해주실 수 있을까요?”

그 말에 클로디아는 난처한 표정이 됐다. 말이 ‘시간이 괜찮으시다면’이지, 사실상 마을에 들러 달라는 요청이나 다름없었다. 신성 왕국의 사제들이 떠돌아다니는 이유는 구제를 위해서다. 따로 목적지 없이 아프고 힘든 사람들이 있다면 그쪽으로 향하는 것이 그들의 의무였다. 클로디아는 데미안 쪽을 바라봤다. 데미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은 승낙하라는 의미였다.

클로디아는 옅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제 힘은 치료에는 그다지 쓸모가 없지만, 들러 보도록 할게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청년은 대번에 얼굴이 환해졌다.

“저의 이름은 켈리입니다. 마을에는 사람이 얼마 없으니 켈리네 집을 찾으면 모두가 알려줄 거예요. 오늘은 저희 집에 묵으실 수 있도록….”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일단은 가 볼게요.”

“하지만….”

그때 병사들이 켈리를 재촉했다. 켈리는 “일단 있다가 마을에 도착해서 찾아뵙겠습니다!” 하고 인사를 한 후 멀어졌다. 국경을 통과하려는 이들은 많았고, 그들을 더 기다리게 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헬렌이 빠르게 말들을 움직였고, 곧 다각다각 소리가 났다.

“…어떻게 하죠?”

클로디아가 조금 후에 앞쪽을 향해 말했다. 데미안의 안색은 좋지 않았다.

“큰일이군요. 저희 중에는 치료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으니….”

“그냥 신경 쓰지 말고 가버리면 안 됩니까?”

시빌이 끼어들었다. 헬렌이 고개를 저었다.

“안 돼. 신성 왕국의 사제들은 환자 치료가 의무야. 분명히 이상하게 생각할 거라고.”

“극단적인 경우에는 쫓아올 수도 있습니다. 신성 왕국의 사제가 환자가 있다는 걸 알면서도 외면했다는 건 정말 이상한 일이거든요. 수상하게 여겨질 겁니다.”

데미안이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신성력이 꼭 치료만 가능한 건 아니잖아?]

디자이어가 참견했다.

[클로디아는 치료보다는 공격 쪽에 훨씬 재주가 넘치는 사람이라고 하면 되지!]

“그게 그렇게 간단할까요….”

시빌의 말을 데미안이 가로막았다.

“그렇다고 해도, 그 숲의 괴물을 없애 달라는 부탁이 돌아올 수도 있습니다.”

“이런….”

세 사람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숲의 괴물이 무엇인지도 모르는데 클로디아 혼자 나서서 싸울 수도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도망갈 수도 없다.

결론은 하나였다.

“마을에 들르기 전에 숲에 한번 가보도록 하죠.”

“…괴물이 어떤지 보겠다는 거야?”

“예. 어지간하면 제가 처치할 수 있을 겁니다.”

데미안의 말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백 명의 병사를 너끈히 상대할 수 있는 무력이다. 웬만한 괴물은 데미안 앞에서 맥을 못 출 것이다.

“가장 괜찮은 시나리오는 그 괴물을 만나서 제가 없앤 후, 그 병사가 돌아오기 전에 빠르게 마을에다가 오는 길에 괴물을 없앴으니 안심하라고 말하고 바로 떠나는 거군요.”

“꼭 바로 떠나야 해요? 거기서 하룻밤 대접받으며 잘 수도 있지 않을까요?”

시빌이 이의를 제기했으나 바로 기각됐다. 어찌 됐건 네 사람은 유람을 떠난 것이 아니다. 움직일 수 있는 여정은 빠르게 움직여야 했다. 데미안은 근처에 더 큰 도시가 있다고 말하며, 그곳에서 묵는 것이 낫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사람 사는 마을 근처의 숲에 자리를 잡았다는 게 영 이상한걸.”

헬렌이 말을 몰며 말했다.

“보통 몬스터들은 인적이 드문 곳에 사니 말이야. 어쨌든 괴물들은 필연적으로 사람을 싫어하게 돼 있어. 사람들은 자기 삶의 터전에 괴물이 개입하는 것을 싫어하니까.”

“그렇겠죠….”

“그럼 엄청 센 몬스터일 수도 있겠네요?”

“그렇다기보단….”

데미안이 턱을 어루만졌다.

“무리를 지어 사는 타입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랬다면 그 병사도 괴물들이라고 말했겠죠. 사람들이 다쳤다고 말했으니 사람들을 죽이지는 않았다는 것이고…. 아마 다친 짐승이거나 할 가능성이 더 높지 않을까요?”

사냥꾼에게 다친 대형 야수가 숲에 깃들었거나 할 가능성을 데미안은 더 크게 쳤다. 차라리 그렇다면 일이 더 쉬울 것이다.

클로디아는 여전히 불안했으나, 어쨌든 다른 곳으로 도망치는 것보다는 그쪽이 압도적으로 나았다.

덜컹덜컹. 바퀴가 큰 수레는 길의 요철에 큰 소리를 내며 굴러갔다. 시빌이 자신이 앉은 자리 옆을 탁탁 두들기며 클로디아에게 이리 오라고 종용했다. 클로디아는 웃으며 고개를 젓고는 수레의 난간에 매달려 쪼그려 앉았다.

확실한 게 아무것도 없는 여행은 매 순간이 불안했다. 남의 신분을 위조했으니 더욱 그랬다.

‘이런 순간 의지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게 이렇게 힘든 일일 줄은 몰랐어.’

그러나 클로디아는 그 생각을 구태여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



 

숲은 금세 나타났다. 그 병사는 걸어서 한 시간이라고 말했지만, 말이 끄는 수레를 타고 있었던 탓이다. 숲은 그리 크지 않은 데다가 들어가는 길이 좁아 네 사람은 고민했다. 수레를 놓고 가야 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헬렌이 수레를 지키는 것으로 낙점됐다. 데미안은 괴물 처치 때문에 숲으로 가야했고, 클로디아가 멍하니 수레에 앉아 있다가 돌아오는 병사에게 발견되기라도 하면 그림이 이상하기 때문이다.

시빌은 그런 클로디아의 호위를 맡아야 했다.

“잘 다녀와. 조금 걱정되지만….”

“…우리보다 당신이 더 걱정되는데요, 헬렌. 그게 대체 뭡니까?”

헬렌의 말에 시빌이 피식피식 웃으며 그녀의 손을 가리켰다. 헬렌은 뭔가 커다란 바가지 같은 것을 들고 있었다. 아마 나무 열매의 껍질만 남겨두고 속을 파낸 것을 굳힌 것일 테다. 헬렌은 바가지를 흔들며 웃었다.

“그야 내 술잔이지.”

“저희가 들어가서 고생하는데도 홀로 남아 술을 드시는 것은 그렇다 치고…. 하루 한 잔만 드시기로 한 거 아니었습니까?”

시빌의 말에 헬렌이 한쪽 눈을 찡긋했다.

“그거야.”

“예?”

“딱 한 잔만 먹겠다고 했잖아.”

그리고 헬렌은 자신이 든 바가지를 흔들어 보였다.

“이게 한 잔.”

“아이고야.”

“너희 중에 아무도 내 잔의 사이즈에 대해 지적한 사람 없잖아?”

시빌이 킬킬거렸다. 헬렌도 히죽히죽 웃으며 말들을 길의 나무에 슬쩍 묶었다. 작정하고 풀지 않는 이상 누군가가 말을 훔쳐 가거나 할 일은 없어 보였다.

“하지만 헬렌. 당신은 분명 자르지스에 가지 못한 속상함 때문에 술을 마신다고…. 이제 끊는 게 맞지 않습니까?”

데미안이 반박했으나 헬렌은 끄떡없었다.

“무슨 소리야? 클로디아한테 들었어. 당신은 비전투원이 이 그룹에 끼는 것을 가장 싫어한다며?”

“싫어한다기보단….”

“알아, 알아. 그냥 꺼린다는 거지? 당신이 호위해야 하니까. 하지만 그렇다면 나는 당연하게도 술을 마셔야 한다고.”

무슨 소리야? 하고 의아해하던 세 사람은 투르에서 여관 주인장이 헬렌에 관해 말하던 것을 떠올렸다. 헬렌은 술을 마시면 천하무적이라고. 세 사람의 생각을 짐작이라도 한 듯이, 헬렌은 씩 웃어 보였다.

“술에 취해야 내 수레를 빼앗아 가려는 무뢰한들이 나타난다 해도 맞서서 용감하게 싸우고 말들을 지켜내지 않겠어?”

하여간 말이라도 못하면, 이라는 표정이 데미안에게 스쳐 지나갔다. 클로디아는 킥킥 웃고는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저희는 돌아오면 술주정뱅이 마부가 끄는 수레를 타야 하잖아요?”

“그야 깨면 그만이지. 차가운 냇물에 머리라도 감을 테니 걱정하지 마, 공주님.”

헬렌이 눈을 찡긋했다. 저렇게까지 말하는 데야 당해낼 수도 없었다. 세 사람은 숲 안으로 들어갔다.



 

***



 

롤리아 숲의 웅장함과는 달리, 지금 들어온 숲은 안락했다. 그 규모가 작으니 그럴 것이다. 나무들도 그리 크지 않은 데다가, 사람들이 버섯이나 식량을 캐는 곳이라는 것을 증명하듯 빨간 나무 열매가 조롱조롱 매달려 있었다.

“제가 가진 지도에는 이 숲이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만…. 아마 작아서 그럴 겁니다.”

데미안이 지도를 들여다보며 말했다. 국경 근처의 이 지역은 데미안의 말에 의하면 마케아 영지라는 이름이 붙어 있었다.

“대충 마케아 숲이라고 부르죠, 뭐.”

“아니, 마케아 숲은 따로 있습니다. 영지의 중앙에 있는 큰 숲이죠.”

데미안의 말에 시빌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럼 마케아 아들 숲.”

말도 안 되는 이야기에 클로디아가 옅게 웃었다. 세 사람은 숲을 천천히 걸어 나갔다. 나무들 사이로 햇볕이 내리쬐었다. 최근 클로디아가 겪은 시간들 중 보기 드물게 평화로운 광경이었다.

물론 그들이 찾아가는 것이 상처 입은 짐승일지, 아니면 몬스터인지 모른다는 점에서는 그다지 평화롭지 않았지만.

데미안이 말을 이었다.

“나무들을 보니 이 숲이 생긴 지는 대략 2~30년 정도밖에 되지 않은 듯하군요.”

“…그런 것도 알 수 있어요?”

“예.”

클로디아가 신기한 듯 묻자, 데미안은 빠르게 나무들의 잎과 키, 마디를 보고 그 수령을 짐작하는 법을 알려주었다. 클로디아에게는 제법 놀라운 이야기들이었다.

시빌도 슬그머니 끼어들었다.

“수르라는 지위는 그런 것까지 알아야 합니까?”

“그냥 제가 흥미가 있어서요.”

나무 나이에 흥미가 있는 기사단장…. 시빌이 중얼거렸다. 데미안이 눈썹을 들어 올렸다.

“문제 있습니까?”

“아뇨. 의외라서요.”

시빌이 피식피식 웃으며 클로디아의 팔짱을 꼈다. 클로디아가 움찔했으나 그는 개의치 않았다.

“포르투는 꽤 평화로운 곳인가 봐요.”

“왜,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클로디아가 말을 더듬자 데미안이 시빌의 팔짱을 지적했다.

“로드께서 불편해 하십니다.”

“어라. 불편해요?”

시빌이 그녀에게 물었고, 클로디아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불편하다고… 해야 하나?

확실히 자신의 팔을 붙드는 감촉은 생경했다. 자신의 팔을 이렇게 감아오는 사람은 열아홉 평생 없었다. 하지만 그거야 그녀가 공주이기 때문이다. 가끔 귀족 아가씨들을 보면, 몇몇 아가씨들은 팔짱을 끼고 웃는 경우가 있었다.

“우리 친하지 않아요?”

“친하….”

그렇다. 클로디아가 본 포르투의 귀족 아가씨들도 친한 사이끼리만 저렇게 우애의 표시로 팔짱을 끼곤 했다.

그렇지만…. 보통 남녀 사이에 팔짱을 끼나?

“팔짱은 친한 사람끼리 끼는 거긴 하지만, 미안해요. 불편했어요?”

그런 클로디아의 의문을 짐작한 듯, 시빌이 말하다가 갑작스레 사과하며 팔을 놓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따뜻하던 팔뚝 상박에 한기가 돌았다.

“저는 우리가 친한 줄 알았는데….”

“어, 친, 친하죠. 친해요.”

“그래요? 그럼 팔짱 끼어도 돼요?”

“아….”

시빌의 말에 클로디아는 눈을 깜박이다가 뺨을 발갛게 붉히고 손을 내밀었다. 시빌은 냉큼 그 손을 붙잡고 재차 팔짱을 끼었다. 정확히는 클로디아의 팔을 자신의 옆구리에 끼었다는 말이 맞을 정도로 깊숙했다.

데미안이 표정을 찡그렸으나, 시빌은 화제를 돌렸다.

“기사단장이 나무 나이에 관심 있을 만큼 평화롭다는 얘기잖아요. 보통은 엄청 바쁘지 않나요?”

“그럴까요…. 확실히 큰 분쟁은 없지만….”

“클로디아도 말이죠. 대부분의 경우에는 이게 정말 그 공주님인가? 싶을 정도로 맹하고요. 아, 맹하다는 건 욕은 아니에요!”

순진하달까? 하고 말하며 시빌이 크게 웃었다. 클로디아의 얼굴이 조금 굳었다. 그 말은 마왕의 하늘섬 침범 이후로 그녀가 가장 싫어하는 말이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르 알파가 한가해서 그런 건 아닐 거예요.”

클로디아는 발걸음을 옮기며 조그맣게 말을 이었다. 앞서가던 데미안이 순간 멈칫하며 이쪽을 흘끗 바라봤다. 그녀는 애써 그의 눈을 피하며 말했다.

“수르 알파는 제가 아는 한 언제나 포르투에서 가장 바쁜 사람이거든요. 쉴 새 없이 하늘섬의 순찰을 감시하고, 경비 시설을 점검하고…. 신입 기사들의 훈련을 감독하고, 성의 손님들을 선별하니까….”

“호오.”

시빌이 눈을 깜박였다.

“손님도 기사단장이 선별하나요?”

“네에. 손님의 신분과 방문목적을 받아서 방문이 가능한 날짜를 정해 줘요. 아무래도 하늘섬을 방문하는 목적이 나쁜 사람도 섞여 있을 수 있거든요.”

“…마치 마왕처럼?”

마법사는 부드럽게 물었다. 그 말투는 여상했으나, 내용은 별로 달갑지 않았다.

“마왕은 포르투에 방문한 게 아니라, 침략했습니다.”

클로디아가 대답하기 전에 데미안이 먼저 말을 가로챘다. 듣다못해 끼어든 것이었다. 데미안은 눈썹을 잔뜩 찡그린 채였다.

“아니, 그러니까 손님이라는 게 아니라….”

“예. 시빌이 나쁜 목적으로 질문한 것이 아니라는 건 압니다. 하지만 방금 전처럼 말하는 건 좋지 않은 것 같군요. 마치 마왕이 포르투에 나들이라도 온 것 같은 말투이니 말입니다.”

데미안이 시빌의 변명을 딱 잘라 끊었다. 시빌은 잠시 허우적대다가, 울상을 지으며 클로디아를 바라봤다. ‘나 혹시 잘못했어요?’라는 뜻이 담긴 눈빛에 클로디아는 애매하게 웃었다.

“그리고 로드께서도 마냥 한가한 분은 아닙니다.”

클로디아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그녀와 데미안의 시선이 아주 짧은 순간 마주쳤으나, 데미안은 이내 다른 쪽으로 고개를 향했다.

“로드께서는 그 태생의 의무를 다하려 노력하신 분입니다. 순진함이라는 말은 그 단어가 품고 있는 의미 때문에 칭찬으로 사용되지만, 로드께 쓰이기에는 대단히 나태한 단어입니다. 로드의 선함을….”

거기까지 말한 데미안은 문득 말을 끊고 클로디아를 바라봤다. 검푸른 눈동자 안에서는 뭔가가 일렁이고 있었고, 클로디아는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그러나 그것은 아주 잠시뿐이었다. 이윽고 데미안은 돌아섰다.

“…폄하하지 마십시오.”

그게 끝이었다. 시빌이 뒤에서 “폄하한 건 아닌데요!”라며 볼멘소리를 했으나 그는 들리지 않는 것처럼 휘적휘적 걸어 나갔다. 마법사는 조금 투덜대며 클로디아의 팔에 매달렸으나 클로디아의 귀에 이미 시빌의 불만은 들리지 않았다.



 

***



 

헬렌은 술을 한 모금 마셨다. 길 한가운데 놓여 있는 농부의 수레를 눈여겨보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간혹 지나가는 이들이 있었으나, 그들은 지푸라기를 운반하는 데 지쳐 목을 축이는 키 껑충한 아낙에게 대단한 시선을 두지 않았다. 덕분에 그녀는 편안하게 쉴 수 있었다.

[심심하다.]

지푸라기 밑에 있던 디자이어가 불평을 늘어놨다. 클로디아는 디자이어를 지푸라기 밑에서 꺼내기 불편해 두고 간 참이었다. 헬렌은 싱긋 웃었다.

“너도 술을 마실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따지고 보면 불가능한 건 아냐. 인간 모습으로 현신할 수도 있거든.]

“정말?”

[물론 지금은 어렵지. 검으로 현신해 있잖아.]

헬렌은 디자이어에 관해 대략적인 건 알고 있었다. 포르투를 수호하던 정령이라든가, 힘을 분산시켜서 검으로 변해 있기 때문에 지금은 상당한 제약을 받고 있다든가.

하지만 아무리 제약을 받고 있다고 해도 디자이어는 꽤 대단한 정령이었다. 대부분 자연에 깃들어 있는 정령들은 의지가 있다 해도 힘을 디자이어처럼 마음대로 부릴 수 없었다.

“나 궁금한 거 있는데.”

[응?]

“너 정도의 정령이 흔해? 그러니까 내 말은, 너처럼 대단한 정령이야 잘 없겠지만….”

[듣기 좋은걸. 계속해봐.]

놀랍게도 헬렌은 거의 본능적으로 디자이어의 비위를 맞추는 법을 터득한 참이었다. 그야 클로디아는 남의 비위를 맞춰본 일이 없는 사람이고, 데미안도 그렇다. 시빌은 디자이어의 비위를 맞춘다기보다는 상하게 할 일이 거의 없었다.

그러니 그런 환경에서 자연스럽게 디자이어를 특별시하는 헬렌의 화법은 디자이어가 퍽 마음에 들어 할 만한 것이었다. 디자이어는 으스대며 헬렌의 말을 들었다.

“우리 외할아버지를 축복한 정령도 너처럼 힘을 자유자재로 다룰 줄 아니까 축복이라는 걸 한 거 아니겠어? 그러니까 나는 그게 궁금한 거지. 정령들은 대부분 자연 현상 그 자체인 거 아냐?”

[뭐, 그건 그렇긴 해. 뭣보다 지금 지상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정령들은 나에게 힘을 받은 아이들이라, 나보다 더 대단한 정령들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힘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정령들이 아예 없는 건 아냐.]

디자이어는 보기 드물게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었다. 그야 심심하기도 했던 탓이다.

[보통 백 년에서 이백 년 이상 된 정령들은 의지를 가지게 되고, 그것보다 훨씬 오래된 정령들은 차차 힘을 자기 마음대로 다룰 수 있게 되지. 자신의 근원이 어디냐에 따라서 물리력을 행사할 수도 있고, 정신력을 행사할 수도 있어.]

“호오.”

[나는 둘 다 행사할 수 있지!]

디자이어가 신나게 떠들었다.

애초에 초대 포르투 국왕에게 검으로 현신해 힘을 빌려줬던 이력이 있는 정령이다. 적어도 천 년은 넘은 정령이라는 뜻이다. 물론 천 년 넘은 것치고는 상당히 유치한 면이 있지만…. 헬렌은 그렇게 생각한 후, 그 말은 디자이어에게 하지 말자고 생각했다.

“거 대단하네. 그런데, 네 이름은 네가 지은 거야?”

[어?]

“디자이어 말이야. 보통 그런 거창한 이름을 정령에게 지어주지는 않지 않나?”

헬렌은 ‘디자이어’라는 이름이 상당히 궁금했다. 보통 정령들이 그 존재를 드러낼 때도 정령들에게 이름을 따로 붙여주는 일은 흔하지 않다. 바람의 정령, 물의 정령 정도면 모를까. 정령들은 그 자체로 자연에서 발생된 힘, 그러니까 자연 그 자체이기에 딱히 이름이 필요하지 않다. 그러나 디자이어는 별개의 개체로서의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음, 이건 초대 포르투 국왕이 지어준 이름이야.]

“오, 용사님이 지어주신 이름이군.”

[그래. 대륙의 구원을 바란다면서 지은 거지. 내 이름이라기보다는 이 검에 지어준 이름이지만…. 검이 나잖아?]

“아하?”

헬렌은 네 개의 대륙이 암흑으로 떠밀려 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나섰던 초대 포르투 국왕에 대한 이야기를 떠올렸다. 그러니까 대륙의 염원을 담아 지은 이름인가. 꽤 거창한데.

[그런데 나도 궁금한 거 있어.]

“응, 뭔데?”

[네 외할아버지 말이야. 자르지스에 다녀왔댔지? 바닷길을 건너서?]

“응? 아. 응.”

[나도 좀 비슷한 이야기를 알고 있거든? 그것도 시빌의 이야기야.]

어쩐지 흥미가 돋는 이야기에 헬렌은 귀를 기울였다. 디자이어는 시빌을 만났을 당시, 그가 흘리듯 했던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었다.

[시빌이 100년에 한 번 열린다는 바닷길을 통해 자르지스에 다녀왔다는 이야기를 했었거든. 근데 헬렌 너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고 들었어. 그때는 내가 자고 있어서 미처 듣지 못했지만…. 언뜻 클로디아에게 들었거든.]

“그랬어?”

[혹시 너희 둘 그곳에서 엇갈린 거 아닐까?]

“글쎄…. 그럴지도.”

헬렌은 눈알을 굴렸다.

“외할아버지는 소년 시절에 여행을 시작했고, 그때 딱 한 번 바닷길을 통해 자르지스에 다녀오셨다고 했거든. 백 년에 한 번, 단 하루 열리는 길이라고 했으니 아마 우리도 같은 날 자르지스에 가려고 했던 것 같네.”

[신기하네 그거.]

“물론 시빌은 아침 일찍 갔을 거야. 하지만 나는 밤늦게 가버려서, 바닷길이 거의 다 닫힌 것밖에 보지 못했어.”

그때를 생각하면 헬렌은 아직도 분하고 원통한 마음이 들었다. 그놈의 술버릇! 모두 때려 부수는 주사는 그 이후에 생긴 것이지만, 그녀는 언제나 술을 좋아했고 많이 마셨다.

할아버지가 이야기해주었던 날짜는 정확했다. 헬렌은 그 날짜에 맞춰 최남단의 항구 아트릭스로 향했다. 아트릭스 외곽에서 걸어서 30분 정도 걸리는 해안가에서, 자르지스로 향하는 외길이 열린다는 이야기를 머릿속에 새기고.

문제는 술 좋아하는 그녀의 버릇이었다. 그 전날 그녀는 아트릭스의 한 여관에서 묵었다. 도시 특성상 여관에는 선원들이 많았고, 그녀는 선원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다가 아트릭스에서 유명한 독주를 누군가가 권하는 바람에 한 병이나 내리 들이켰다.

좋은 술이었기에 숙취는 없었다. 다만 그녀의 다음 날도 없어졌다는 게 문제였다. 그녀가 잠에서 깼을 때는 이미 늦어, 하늘이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낭패라는 마음에 짐도 제대로 챙기지 않고 해안가로 뛰었으나 그녀가 목격한 것은 이미 닫히고 있는 바닷길이었다.

“길은 있었어. 아예 보이지 않았다면 나는 외할아버지의 말이 거짓말이었던 거 아닐까, 하고 의심했겠지만 아니었어. 누가 봐도 선명한 흰 모랫길이 서서히 닫히고 있었거든. 인적이 드문 데다가 바위 절벽을 오른 다음에야 보이는 길이었기에 사람들이 모르는 것도 이해가 됐지.”

그녀는 바위 절벽 위에서 황망하게, 서서히 가운데부터 사라지는 모랫길을 바라보았다. 자르지스에서 직선으로 이어지는 가장 짧은 길이라는 건, 죽음의 바다가 뿜어내는 독기가 가장 진한 곳이라는 뜻도 됐다. 그런 해안가이니만큼 사람들은 접근하지 않았다. 헬렌은 독기 때문에 따가워지는 눈을 계속 비비면서도 그 사라지는 길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내가 멍청한 건 알았지만, 그렇게까지 멍청한 줄은 몰랐어. 중요한 일이 있다고 거절했어야 하는데.”

[…그런 말을 하면서 술을 마셔봐야 별로 설득력 없거든?]

말을 하면서 저도 모르게 바가지를 입에 가져다 대던 헬렌이 멈칫했다가 웃었다.

“오, 예리한데.”

[말을 말자.]

헬렌은 꿋꿋이 술을 한 모금 마시고는 크, 하고 입을 닦았다.

“좋은 술을 마시는 기분이 얼마나 좋은데. 물론 지금 마시는 건 좀 싸구려 양조주지만….”

[난 그런 거 몰라.]

“그래, 그래. 알면 그때부터 신세계가 펼쳐지겠지만, 넌 지금은 술을 마실 수 없으니까. 맞지?”

뾰로통한 디자이어를 달래듯 말하며 헬렌은 다리를 쭉 폈다. 햇살이 좋았다.

“세 사람 다 지금쯤 숲에서 그 괴물이 뭔지 찾았으려나.”

[글쎄, 모르겠네.]

“아무튼 시빌이 오면 자르지스에 대해 물어 봐야겠어.”

자르지스에 대해 외할아버지는 가엾고 아름다운 곳이라고만 그녀에게 말했다. 어릴 때 헬렌은 그게 어떤 뜻인지 궁금해 할아버지를 졸랐지만, 그는 계속 대답해주지 않았고, 그 시절 쌓인 궁금증은 결국 헬렌에게 모험심을 유발했다.

그리고… 헬렌은 그때 자신이 봤던 해안길을 떠올렸다. 망연자실하면서도, 그 해안길에서 발자국 비슷한 걸 보고 자신 말고 또 누군가가 이 길을 걸었나? 하고 놀란 기억이 어렴풋이 있었다. 그게 시빌의 흔적이라면 말이 됐다.

“시빌은 나에게는 그런 이야기 안 했거든. 그 이야기를 했을 때도 별말 안 했는데….”

[그거 정보상에 비싸게 판 정보라고 그랬던 거 같아. 그래서 어디다 함부로 말하지 말라고….]

“그 인간 진짜 수전노네.”

투덜대던 헬렌이 멈칫했다.

“잠깐. 근데 좀 이상한데.”

[뭐가?]

“그때 그 해안길에 나 말고 다른 사람의 흔적이 있었다고 했잖아.”

[근데?]

“음…. 아냐. 내 기억이 잘못됐을 수도 있지.”

[뭐야. 뭔데? 말해줘.]

디자이어가 그녀를 졸랐다. 헬렌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답했다.

“그때 나는 닫히는 길을 보느라 경황이 없긴 했는데…. 발자국은 딱 한 줄기였거든.”

[그야 시빌 혼자였으니까 그랬겠지?]

“아냐. 그 말이 아냐.”

헬렌이 고개를 저었다.

“그 섬에 들어갔다가 나왔다면 발자국이 두 줄이 있어야 해.”

[어?]

“하지만 내가 본 건… 한 줄기였어.”

헬렌은 아직도 그 광경을 기억한다. 속상하고 슬펐지만, 제 실수의 결과려니 하고 두 눈에 똑똑히 담아가려고 더 열심히 그 해안길을 봤다.

그 해안길은 모래로 되어 있었고, 누군가가 지나간 흔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 흔적은….

“자르지스에서 바깥으로 나온 발자국뿐이었는걸.”

***



 

시빌은 쾌활하게 외쳤다.

“나와라, 괴물아!”

푸드득, 시빌의 큰 소리에 놀란 새 한 마리가 저편에서 날아올랐다. 클로디아는 시빌을 흘겨봤다.

“그렇게 해서 어디 괴물이 나오겠어요?”

“그럼요? 불이라도 지를까요?”

시빌은 눈을 접으며 웃었다. 클로디아는 옅게 한숨을 쉬었다. 디자이어는 무거운 데다가 딱히 자신이 디자이어를 들고 간다고 해서 대단히 활약할 것도 아니었으므로, 그 검은 헬렌의 곁에 놓고 왔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수색이 지루해지니 어쩐지 디자이어의 수다가 그리워지기까지 했다.

“작은 숲일 텐데….”

“예. 저희가 들어오기 전에 멀리서 봤을 때는 그리 크지 않았죠.”

데미안이 클로디아의 말을 받았다. 슬슬 숲이 끝날 때가 되었지만, 괴물은커녕 괴물 사촌도 보이지 않았다. 간혹 만나는 숲 토끼나 꿩, 산새 같은 것들이나 겨우 그들을 반겼다.

“아휴 힘들어. 수레에서 누워서 오다가 걸으니 좀 힘들긴 하네요, 저도.”

시빌이 너스레를 떨었다.

“저도 조금 다리가 아프긴 해요. 데미안, 조금만 쉬다 가면 안 될까요?”

“…그렇게 하시죠.”

세 사람은 숲을 조금 더 걸어 제법 쉴 만한 곳을 발견했다. 썩은 나무 둥치가 길게 뻗어 있고, 그 앞에는 들꽃이 조금 피어 있는 곳이었다. 둥치를 보자마자 클로디아는 그곳에 털썩 앉았다. 시빌도 조심스럽게 허리를 구부렸다.

“왜 그렇게 허리를 구부…. 아.”

시빌을 보던 클로디아가 박 터지는 소리를 냈다. 그가 옆구리를 다쳐 만사 조심하고 있는 것을 잊었기 때문이다. 시빌은 언제나 쾌활했으나, 그 어조와는 달리 행동은 언제나 조심스러웠다.

상처 때문이다. 마법으로 아픔을 없애고 상처가 더 진행되는 것을 막았다지만, 그렇다고 해서 상처가 어디 찔리거나 물리적으로 타격을 받는 것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하. 만사 조심해야죠.”

“으음…. 빨리 나아야 할 텐데.”

“뭐, 디자이어도 있으니까요. 저는 이만큼 호전된 것만 해도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시빌이 시원시원하게 웃었다.

“마법사 길드에서 치료할 수 있는 사람은 구해보지 않았습니까?”

데미안도 두 사람의 건너편에 앉아 물었다. 시빌은 어깨를 으쓱했다.

“글쎄요. 구인 공고를 낸다손 쳐도…. 마법 치료에는 돈이 드니까요.”

시빌이 엄청난 빚을 지고 있었던 것은 주지의 사실이었다. 두 사람의 안색이 흐려졌다. 그가 그동안 수전노라거나, 혹은 돈을 너무 밝힌다고 생각했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저 정도의 상처를 옆구리에 안고 있는데 돈을 벌려고 하는 건 당연하다.

“뭐, 자업자득이라고 치죠. 어쨌든 저는 운이 좋아 클로디아도 만났으니까요.”

시빌이 너스레를 떨며 클로디아의 손을 깍지 껴 잡았다. 빙긋 웃는 그 눈동자가 유난스레 다정해 보여 클로디아는 얼굴을 붉혔다.

“그, 저….”

“예?”

“손 좀….”

클로디아의 말에 시빌은 새삼스럽게 손을 내려다봤다.

“장갑 끼고 있잖아요?”

“…그렇지만, 저는 이런… 남자분하고 이런 종류의 접촉은 좀 생경하다고 할까, 그.”

“에이. 새삼스럽게 뭘 그래요. 우리 맨손도 잘 잡잖아요.”

“하지만, 그. 뭐랄까. 제가 익히 해본 경험이 아니고, 시빌의 손을 잡은 건 치료 차원이고….”

“음, 치료 차원이 아니면 돼요?”

“예?”

시빌의 말에 클로디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시빌은 빙긋 웃었다.

“치료 차원이 아니라면 어때요?”

“치료 차원이 아니라고요…?”

클로디아는 그만 더더욱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 그러나 시빌은 클로디아를 영 구제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오히려 더 가까이 얼굴을 들이대고,

쪽.

클로디아의 뺨에 가볍게 입 맞췄다. 앞서가다가 두 사람의 공방에 이쪽을 흘끗 돌아보던 데미안의 얼굴이 확 굳었다.

그리고 굳은 것은 클로디아도 마찬가지였다. 클로디아는 그야말로 기겁한 표정으로 움츠러들었다.

“시, 시빌.”

“어라. 저번에 투르에서도 했었는데. 이런 반응은 좀….”

그러나 시빌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그 앞에 들이대진 칼 때문이었다. 데미안은 살벌한 표정으로 시빌을 노려보며, 장검을 시빌의 목 앞에 겨누었다.

“시빌. 당신이 뭘 한 건지 알고 있습니까.”

“이런. 데미안. 진정해요.”

“왕족 희롱의 죄는 무겁습니다.”

시빌이 이마를 팍 구겼다.

“아니, 잠깐만. 희롱을 하려던 건 아니라고요. 뭣보다 저번에도 했는데…. 별말 없어서 괜찮은 줄 알았다고.”

“…그건.”

클로디아가 시빌의 말에 발끈했다. 확실히 시빌은 투르에서 병사들이 여관을 둘러쌌을 때, 그녀의 뺨에 가볍게 입 맞췄다. 하지만 그때는 워낙 경황이 없었던 데다가 시빌이 하도 들떠 있어서…. 그리고 그녀 또한 정신이 없었기에 시빌에게 지적을 하지 않고 넘어갔다.

그러나 그걸 승낙으로 받아들였다면 문제였다.

“그때는 워낙 일이 많아서 그냥 깜박하고 넘어갔을 뿐이에요.”

클로디아는 목소리에 힘을 주어 말했다. 시빌이 눈동자를 동그랗게 떴다.

“그랬어요? 미안해요. 하지만….”

“무엇보다, 시빌.”

클로디아는 일부러 시빌의 말을 잘랐다.

“마음이 없는데도 그렇게 행동하는 건 정말 나빠요. 언제나 여성들에게 이렇게 행동하나요? 시빌의 친구들은 어떤지 모르지만, 저는 포르투에서 그렇게 자라지 않았어요. 이런 행위는 아주 친밀한 연인 사이에서도 조심스럽게 해야 하는 것이라고요.”

“으음, 클로디아. 뭔가 착각하고 있는데.”

그러나 시빌은 클로디아의 선 긋기에도 흔들림 없이 여유 만만했다. 그는 데미안이 여전히 겨누고 있는 칼에 두 손을 드는 시늉을 하면서도 빙그레 웃었다.

“미안해요. 당신의 허락을 받은 거라고 생각한 건 제가 잘못했어요. 하지만 저는 마음이 없지 않은데요.”

“…네?”

그쯤 해서 시빌은 데미안 쪽을 흘끗 쳐다봤다. 무표정한 남자는 시빌이 뭐라든 꿈쩍도 하지 않았다. 시빌은 슬쩍 칼을 밀어봤지만, 칼 또한 마찬가지였다. 시빌은 으, 하는 표정으로 그 서슬 퍼런 칼을 내려다봤다가 다시 클로디아를 쳐다봤다.

“데미안은 알 거예요. 저는 클로디아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당신이 좋았어요.”

갑작스러운 말이었다. 클로디아의 얼굴이 순식간에 익은 감처럼 새빨개졌다.

“무, 무무무무무슨….”

“음, 뭐랄까. 사실 사랑한다는 말은 어폐가 있고요.”

“사사사사사사랑….”

클로디아가 당황한 것과는 반대로 시빌은 여유 만만한 얼굴이었다. 빨간 머리의 잘생긴 마법사는 환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저는 클로디아가 좋아요. 이렇게 말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뭐. 데미안에게는 먼저 말했었다고요. 클로디아를 만난 날 저녁에요. 클로디아는 정말로 예쁘고 사랑스러운 데다가 착해서, 가끔 갑갑할 때도 있지만 저는 그런 클로디아가 매력 있어 보여요.”

“그….”

“…라고 말하면 나를 거절할 것 같아서 말하지 않은 거예요. 어쨌든 그래서 저는 클로디아에게 호감이 있고, 앞으로도 좋은 가능성을 가지고 당신을 대하고 싶었던 거예요. 물론 동의를 얻지 않고 입 맞춘 건 정말 미안해요. 다시 한 번 사과할게요.”

하도 여유가 넘쳐 얄미울 정도였다.

“그러니까 데미안, 이 칼은 치워주지 않겠어요?”

“….”

데미안은 시빌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칼을 더 바짝 들이댔다. 마법사는 으, 하는 표정이 됐다.

“클로디아. 여전히 기분이 많이 상했나요? 그렇다면 저는 돌아갈게요. 헬렌의 옆에서 기다릴게요.”

시빌은 자못 비굴하게까지 느껴지는 얼굴로 그녀에게 잘못을 빌었다. 눈썹을 누그러뜨리며 제 눈치를 보는 얼굴을 클로디아는 차마 쳐다도 보지 못하고, 그저 바닥만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수르 알파.”

데미안은 이번에도 답하지 않았지만, 방금 전 시빌에게 보여준 것과는 사뭇 다른 액션을 취했다. 칼을 내리고 제 검집에 집어넣은 것이었다.

시빌이 휴, 하고 자신의 목을 쓰다듬었다.

“정말 죽는 줄 알았네. 아무튼, 클로디아. 기분이 나쁘다면 다시는 하지 않을게요.”

“…네.”

클로디아는 소리 죽여 답했다. 시빌은 상체를 숙여 클로디아와 시선을 맞추려고 했으나, 그녀는 고개를 돌려 바닥만 바라봤다. 붉어진 얼굴은 여전했다.

“클로디아?”

“…돌아가요.”

“어라. 정말요?”

“네.”

클로디아는 눈썹을 내리깔고는 말했다. 민망하고 난감한 표정이었다.

“시빌의 말은 알았어요. 지금 나와 관계 진전을 원하는 건 아니란 말이죠?”

“네에. 아, 혹시 이런 상황이 처음이라면….”

시빌의 말에 클로디아는 그제야 얼굴을 들었다. 그리고 푸른 눈으로 시빌을 쏘아봤다. 그 눈초리는 자신을 비난하는 듯해서, 시빌은 어이쿠 하고 움츠러드는 시늉을 했다.

“아뇨. 저는 이런 상황이 낯설지 않아요. 오히려 익숙하죠. 다만 제게 이렇게까지 스킨십해온 사람이 없을 뿐이에요.”

포르투에서 클로디아는 이런 상황을 익히 수십 번은 겪었다. 백 개의 왕국에서 구혼자들이 하루가 멀다고 그녀를 보기 위해 하늘섬으로 오는데, 모른다면 거짓말이다.

다만 시빌처럼 너무 가깝게 군 자가 없었을 뿐이다. 수많은 구혼자들은 그녀에게 결혼을 청했고, 좋은 가능성을 열고 자신을 대해주기를 청했다.

“저와 좋은 관계가 되고 싶다는 시빌의 말, 잘 알았어요.”

“어라. 그런 말 하면 보통 거절이 따라오던데.”

시빌의 말에 클로디아는 한참 동안 입을 다물었다. 어떻게 답해야 할지 조금 망설여져서였다. 솔직히 말하면….

‘싫진 않아….’

사실이었다. 시빌은 그동안 끈질기게도 클로디아의 옆에 붙어서 그녀를 살뜰히 챙겼다. 그녀를 안아 들고 땅굴에 내려서는 것 외에도, 식사를 할 때면 맛있는 것을 클로디아에게 먼저 주었고, 신기한 것이 있으면 클로디아를 먼저 불렀다. 그녀가 불안해하면 달래주었고, 여행할 때도 언제나 긍정적인 이야기들을 해 주었다. 명랑한 마법사 없이 무뚝뚝한 수르 알파와 단둘이 여행했다면 어땠을까.

시빌은 클로디아의 숨통을 터주는 존재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그런 사실을 말해주는 것은 아무래도 저어되는 일이다. 왜냐하면.

‘싫지 않지만, 좋지도 않으니까.’

클로디아는 구혼자들의 구혼을 즐겼으나, 그렇다고 해서 못된 짓을 하지는 않았다. 일부러 구혼을 안 받아주거나, 자신을 좋아하는 마음을 이용해 심술을 부리지는 않았다는 이야기다. 싫지 않은 것과 좋은 것은 분명히 다른 문제였다.

그리고 시빌이 자신의 동료라는 것도 문제였다. 시빌은 좋든 싫든 앞으로 마왕성까지 함께해야 한다. 최소 석 달. 그 기간 동안 클로디아는 시빌과 어색해질 것이 싫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좋다고 대답할 수도 없다. 그 순간 시빌은 그녀에게 애정 공세를 펼칠지도 모르니까. 클로디아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결론은 하나였다.

“지금 당장 대답하지는 않겠어요. 시빌도 지금 제게 대답을 바라는 것이 아닌 듯하니까.”

“맞아요. 저도 공주님을 죽도록 사랑하는 것은 아니거든요.”

시빌이 싱글싱글 웃었다. 클로디아의 딱딱하게 굳은 얼굴과는 정반대였다.

“수많은 구혼자들이 제게 그랬듯, 가능성은 열어두되 제게 무례하게 굴지 말아 주세요. 저는 시빌이 스스럼없는 것과 무례한 것을 구분할 줄 아는 사람이리라 믿어요. 우리는 앞으로도 여행을 계속해야 하는 동료이기도 해요.”

“그럼요. 저도 알고 있어요. 그러니 말하지 않은 것이랍니다.”

“저도 시빌을 일부러 밀어내거나 하진 않을 거예요. 하지만 적어도 지금은 시빌과 함께 있기는 어렵겠군요.”

클로디아는 데미안을 바라봤다.

“수르 알파. 혹시 저와 둘이서 숲 수색이 가능할까요?”

“…노력해 보겠습니다.”

이런 순간마저 공주님은 안전하다든가, 혹은 위험에 빠트리지 않겠다는 말을 하지 않는 것이 데미안다웠다.

‘하지만 그래서 당신과 파혼한 것이기도 하지.’

클로디아는 다시 한숨을 내쉬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았다. 어쨌든 두 남자 모두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시빌. 돌아가 헬렌의 옆에서 우리를 기다려 주세요. 힘닿는 대로 수색해보고 날이 저물기 전에 돌아가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다시 한번 사과할게요. 미안해요.”

“사과를 받아들일게요.”

그녀는 애써 웃어 보였다. 시빌은 씩 웃고는 과장된 몸짓으로 인사를 해 보였다. 그리고 그녀에게 방어 마법 몇 가지를 걸어주었다.

“물리적인 공격은 어느 정도는 피하실 수 있을 겁니다.”

“그래요. 고마워요.”

시빌은 미련 없이 돌아서서 걸어갔다. 곧 숲 사이로 빨간 머리카락이 사라졌고, 둘만 남았다.

클로디아는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머리가 아팠다.

“갈까요, 수르 알파.”

“…예.”

데미안이 다시 앞장섰다. 그러나 조금 전보다는 클로디아와 가까운 거리였다. 시빌이 없어졌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저벅저벅, 한동안 숲을 걷는 두 사람의 발걸음 소리만 들렸다. 수풀이 간혹 스치는 소리, 그리고 작은 소동물이 놀라 도망가는 소리 외에는 조용했다.

당장 시빌 하나가 사라졌다고 해서 이렇게나 지옥 같은 침묵이 자리하다니. 클로디아는 조금 전보다 더욱 불편해졌다. 클로디아와 비슷하게 올려 묶은 그의 검푸른 머리카락만이 눈앞에서 흔들렸다.

‘그는 편안할까.’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데미안 알파는 본래부터 크게 말이 많지 않았다. 지금이 오히려 그가 편안한 때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릴 때는 곧잘 웃었는데.’

클로디아가 철없는 소리를 하면, 그녀를 달래면서도 몇 번은 웃어주었다. 어린 클로디아에게 쥬버린 왕자가 부모에 가깝다면, 데미안 알파는 아마 오히려 쥬버린보다 더 오빠 같은 사람이었다. 클로디아가 속상하거나 지루할 때, 혹은 울다 지쳤을 때면 귀신같이 나타나 그녀를 위로해주고 즐겁게 해 주었던 기억이 어렴풋이 남아 있었다.

‘…물론 그것보다 생생한 건, 내가 울며 소리쳐도 벽같이 나를 대하던 모습이지만.’

클로디아는 입을 비죽거리며 제 머리카락을 둘둘 꼬았다. 나이를 먹은 데미안은 자신에게 웃어주는 일이 많지 않았다. 간혹 그녀가 데미안을 웃게 해 주려고 바보 같은 짓을 벌여도,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어쩌면 그 오빠 같은 점 때문에 그는 자신에게 정을 붙이지 못한 것일지도 모른다. 클로디아는 울적해졌다. 당시의 일이 기억나서다.



 

***



 

데미안 알파와의 약혼이 결정된 것은 클로디아가 열네 살 때였다.

클로디아는 다섯 살이 갓 넘었을 때부터 놀랍도록 깜찍한 소녀로 유명했다. 그 사랑스러움은 비할 데 없었다. 치매가 온 포르투 국왕은 난폭하기 그지없었으나, 그래도 그녀만 보면 빙긋 웃으며 온순한 아버지로 돌아갔다.

그녀가 결 좋고 탐스러운 금발을 흔들며 아장아장 걸어 포르투 국왕에게로 다가가면, 국왕은 그녀를 안아 올려 하늘섬의 바람을 마음껏 맞도록 했다. 그렇게나 끔찍이 사랑하는 딸이었다. 포르투의 국민들에게 자랑스러운 공주님이었음은 물론이다.

그러니 쥬버린 왕자가 클로디아가 혼인 적령기를 맞기도 전에 약혼자를 데미안 알파로 정해버린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데미안은 그 나이 열다섯에 검기를 발현해냈다. 그전까지 미다프 경의 종자 혹은 쥬버린 왕자의 놀이 상대로만 그를 기억하던 이들에게는 놀라운 일이었으나, 포르투의 기사들은 아무도 놀라지 않았다. 그가 노력하는 것을 익히 봐왔기 때문이다.

클로디아 또한 데미안을 자랑스러워했다. 바쁜 쥬버린 왕자 대신 클로디아의 놀이 상대는 언제나 데미안이었다. 클로디아는 미다프 경의 심부름을 하는 데미안을 찾아가 그의 옷소매를 붙잡고 놀자고 앙앙 울곤 했다. 물론 데미안은 그녀를 꽁무니에 매달고 기어이 미다프 경의 심부름을 다 해내는 소년이었다.

데미안의 그런 면들은 언제나 클로디아에게 존경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래서 클로디아는 쥬버린이 자신의 혼약자로 데미안을 낙점했을 때도 놀라기는커녕 달가워했다.

데미안은 쥬버린 왕자의 놀라운 미모에 가려지기는 했으나, 어쨌든 또래보다 압도적으로 잘생긴 소년이었다. 게다가 클로디아의 혼약자로 정해진 시절에 이미 포르투 국왕만큼 키가 커져 있었다.

게다가 신중한 성격은 모두에게 좋은 평가를 받았다. 말이 좀 없긴 했으나 그건 기사가 마땅히 지녀야 할 덕목이었지 단점은 아니었다. 포르투의 귀족 아가씨들이 아쉬워한 것은 물론이다. 클로디아는 속으로 좀 우쭐해지기까지 했다.

쥬버린 왕자가 데미안을 혼약자로 발표했을 때는 데미안이 미다프 경과 함께 원정을 나갔을 때였다. 그래서 클로디아는 데미안을 손꼽아 기다리곤 했다.

알파 경, 저는 너무 좋아요. 완전 좋아요, 하고 말하기 위해서였다.

정식 기사가 된 후 데미안은 언제나 자신을 ‘알파 경’이라고 부르라고 말했으니까.

그러나 원정에서 돌아온 데미안은 쥬버린에게 벌컥 화를 냈다. 맹세코 그가 쥬버린에게 화낸 일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데미안이 돌아왔다는 사실에 기뻐 노바라를 재촉해 쥬버린의 방으로 갔던 클로디아는, 응접실 문 뒤에서 데미안이 화내는 소리를 고스란히 들었다.

“대체 저한테 물어보지 않은 이유가 뭡니까?!”

“데미안, 나는….”

쥬버린이 웅얼거리는 소리는 바깥으로 잘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화를 내는 데미안의 목소리는 너무 잘 들렸다.

“저는 이 약혼을 승낙한 적도, 언질을 받은 적도 없습니다! 말도 안 됩니다!”

솔직히 말해 서운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클로디아는 공주였다. 그런 것에 일희일비하지 않는 것이 법도라고 배웠고, 그녀는 당황한 노바라에게 다시 제 방으로 돌아가자고 웃으며 말했다.

“오라버니와 알파 경이 의견 충돌이 있으신 모양이야. 곤란하실 테니 돌아갈까?”

그리고 클로디아는 자신의 방에서 얌전히 기다렸다. 아마 데미안이 상당히 곤란한 모양이지만, 아마 결국은 그도 나를 싫어하지 않으니 혼약은 취소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데미안이 클로디아에게 방문을 청했다. 클로디아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억누르며 만남을 승낙했다.

그야 불쾌한 모양이지만, 어쨌든 그런 것은 차치하고서라도 워낙 오랜만에 만나는 데미안이었다.

하지만 그녀를 만난 데미안은 시종일관 굳은 표정이었다. 데미안은 정중하게 공주에 대한 예를 취한 후,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쥬버린 전하께서 혹시 공주 전하의 의사를 무시하신 것은 아닙니까?”

“그럴 리가요. 저는 좋다고 했어요.”

클로디아는 생긋 웃으며 답했다. 그녀가 그렇게 웃으면 포르투 왕성의 사람들치고 그 미소에 홀리지 않는 자들이 없었다. 나이 든 자들은 그녀의 얼굴을 한 번 더 보고 웃음 지었고, 한창때의 소년들은 얼굴을 붉혔다. 소녀들은 질투하거나, 혹은 동경했다.

그 또한 그럴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부당합니다.”

데미안은 웃지도 않고 말했다. 클로디아 또한 조금 불안해졌다.

“쥬버린 전하께서는 전하의 맹목적인 애정을 받고 있는 분입니다. 아마 클로디아 전하께서는 쥬버린 전하의 말이니 추호도 의심하지 않고 받아들이셨겠지요.”

“…로드라고 불러주시면 안 되나요?”

클로디아는 그런 데미안이 낯설어 저도 모르게 그의 소매를 잡았다. 그러나 데미안은 오히려 화들짝 놀라 그녀의 손을 털어냈다. 그 격렬한 동작에 클로디아가 더 놀랐다.

“…죄송합니다.”

“괜찮아요. 원정 때문에 피곤했죠?”

아마 몬스터들이 들끓는다는 동부 늪에서 오랜 시간을 보냈기에 저도 모르게 예민해진 것이리라. 그 늪에는 몰래 숨어 있다가 방심한 기사들의 등 뒤를 습격한다는 개구리 괴물들이 드글거린다고 했다.

그래서일 거야. 클로디아는 애써 웃었다.

“오라버니가 제게 그렇게 말씀해주셨을 때 저는 기뻤는걸요. 좋아요. 너무 좋아요.”

데미안은 그런 그녀를 비스듬히 내려다보고 이마를 찡그렸다.

“진심이십니까?”

“왜 제 말을 의심하세요? 저는 정말 좋아요. 데미안이 저랑….”

거기까지 말하고 클로디아는 아, 하고 입을 가렸다. 데미안은 언제부턴가 그녀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싫어했다.

“미안해요. 아무튼 저는 경이 저와 약혼한다는 게 기뻐요. 언제나 제 옆에 계실 테니까요.”

그 말에 데미안은 한층 더 표정을 찌푸렸다. 왜일까. 클로디아는 더럭 불안감에 휩싸였다. 혹시 그는 자신과의 약혼이 싫은 것일까.

“…고작 그런 것 때문에….”

“네?”

작게 중얼거린 데미안은 한숨을 쉬었다. 진한 그의 눈매가 자신을 향했다.

“저와 약혼한다는 건 이후엔 저와 결혼도 하셔야 한다는 겁니다.”

“당연한 말씀을 하시네요, 경….”

클로디아는 난처한 얼굴로 그를 올려다봤다.

“저와 평생을 같이 하셔야 하는 거란 말입니다.”

그는 거의 이를 악물고 내뱉듯이 이야기했다. 그의 표정은 더할 나위 없이 괴로워 보였고, 클로디아는 당황했다.

포르투 성의 사람들은 모두 클로디아와 데미안의 결합이 축복받을 만한 일이라고 했다. 클로디아는 어느새 지나갈 때마다 성 사람들이 건네는 축하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데미안이 웃으며 자신을 안아줄 거라고 생각했다. 추호도 이런 일을 의심해본 적 없었다. 하지만 자신의 눈앞의 데미안은 마치, 그 약혼이 너무나 싫은 일인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그를 쳐다보던 가슴 속에 한 가지 의혹이 고개를 쳐들었다.

“…경. 혹시….”

“말씀하십시오.”

“혹시…. 성 바깥에 사랑하는 분이 따로 계신가요?”

클로디아는 그렇게 말해놓고 스스로도 놀랐다. 그 말을 하는 순간 가슴 한구석이 이상하게 뭔가로 꾹 누르는 듯 아파왔기 때문이다. 갈비뼈와 명치 사이의 어딘가가 지잉, 하고 울리는 듯했다. 그제야 클로디아는 알아챘다.

내가 알파 경을 좋아하고 있구나.

어릴 적부터 함께해온 소년은 아마 이슬비에 옷이 젖어들듯, 그렇게 어느새 열네 살, 어리디어린 클로디아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어렴풋이 사랑을 깨달은 클로디아의 앞에는 한없이 괴로운 듯 얼굴을 찌푸리고 있는 소년이 있었다. 비극적인 일이었다.

하지만 자신 외에 사랑하는 여자가 있다면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클로디아는 자신이 모르는 새 그의 마음을 사로잡은 여인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격렬한 슬픔을 느꼈으나, 마음을 다잡았다. 만약 그게 정말이라면 빨리 일을 바로잡아야 했다.

쥬버린이 자신을 귀애한 나머지 데미안의 마음을 외면해 벌인 일이라면….

“…아닙니다.”

그러나 데미안은 고개를 저었다. 클로디아는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의 대답에 가슴이 요동쳤기 때문이다.

“정말인가요? 혹시 제가 걱정되어 거짓말하시는 거라면 그러지 않아도 좋아요.”

클로디아는 그에게 다시 한 번 확인했다. 간혹 공주인 자신의 앞에서 뻔한 거짓말을 하는 이들이 있었다.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였다. 클로디아는 대부분의 그런 거짓말을 웃으며 넘어갔으나, 그만큼은 자신의 앞에서 그러지 않기를 바랐다.

데미안은 알 수 없는 눈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더니, 그녀에게 힘주어 말했다.

“맹세코 전하께서 말씀하시는 그런 상대는 없습니다.”

그 말에 클로디아는 안심했으나, 한편으로는 이상하게 속상했다. ‘그런 상대는 없다’는 말은 자신 또한 그런 상대가 아니라는 말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그러시는 거죠?”

“…저는 제가 전하께 어울리는 상대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번에야말로 클로디아는 기함하고 말았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네 개의 대륙과 포르투를 통틀어 검기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사람은 데미안과 미다프 경, 단 두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클로디아에게 어울리지 않는 상대라니.

“아니야. 왜 그렇게 생각해?”

가면이 부서졌다. 데미안이 언제나 제게 품위와 공주로서의 자세를 지적했기에 항상 그녀는 노력했지만, 흥분한 나머지 저도 모르게 데미안에게 친근하게 대하던 말투가 튀어나오고 말았다.

그러나 클로디아는 그걸 고치기는커녕 더 맹렬하게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데미안은 멋있어! 좋은 사람이란 말이야. 나는 데미안하고 결혼할 거야!”

“…전하.”

“싫어! 왜 그렇게 불러? 예전에는 로드라고 잘만 불렀잖아.”

클로디아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하게 매달렸다. 데미안은 난처한 듯 눈썹을 누그러트렸다.

“전하. 저는 당신을 그렇게 부를 수 없습니다.”

“무슨 상관이야? 나랑 결혼할 거잖아.”

“당신은 포르투의 공주님입니다. 그리고 저는….”

데미안은 뒷말을 삼켰다. 클로디아는 그의 태도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데미안을 좋아해. 진짜야. 그래서 데미안과 결혼하는 게 기뻐. 하지만 데미안은 아니야?”

그녀는 결국 다시 데미안의 손을 당겨 잡았다. 장갑을 낀 채였지만, 데미안은 화들짝 놀랐다. 그러나 클로디아는 데미안의 손을 놓지 않고 두 손으로 꼭 잡으며 말했다.

“데미안은 내가 싫어…?”

클로디아는 언제나 가녀렸지만, 그때는 미성숙한 몸까지 더해 더욱 더 가냘팠다. 아마 데미안이 그녀의 손을 뿌리치려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데미안은 깊은 눈으로 그녀를 말없이 내려다보기만 했다. 적어도 싫어하는 건 아니구나, 하는 자신이 섰다.

클로디아는 그의 손을 잡고 자신의 입을 맞췄다. 데미안이 흠칫하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데미안이 다시 나를 로드라고 불러주었으면 좋겠어….”

“…전하.”

클로디아는 그대로 잠자코 기다렸다. 자신이 솔직하게 마음을 고백했으니, 이제 데미안은 언제나 그랬듯 제 손에 입을 맞춘 후 웃어줄 차례라고 생각했다.

소년 시절 데미안은 ‘기사가 되면 가장 먼저 내 서약을 너에게 바치겠다’고 언젠가 말했다. 그리고 어쩌다 한 번씩은 클로디아가 조르는 대로 손등에 입을 맞춰 주기도 했다.

지금이야말로 데미안이 자신의 손등에 입 맞춰 줄 때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데미안은 가만히 속삭였다.

“손을 놓아 주십시오.”

클로디아는 찬물을 맞은 듯한 기분이 됐다. 아연하게 그를 올려다보자 데미안은 미미하게 웃어 보이며 자신의 손을 그녀의 손안에서 빼냈다.

“데미안….”

“전하의 말씀은 잘 알았습니다.”

“…약혼을 취소할 거야?”

그 말에 데미안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전하께 그런 이야기까지 하게 만들어 놓고, 어떻게 제가 감히….”

“…싫으면 그렇게 해도 돼.”

“싫지 않습니다.”

데미안은 그렇게 말하고 기사의 예를 취했다. 그리고 단정한 모습으로 되돌아 나갔다.

그때 자신의 방문이 닫히는 와중 흔들리던 검푸른 머리카락은 아직도 클로디아의 기억에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며칠 뒤 원정에서 돌아온 데미안 알파와 클로디아 테 포르투의 약혼 축하연이 열렸다. 원정을 나간 그 때문에 미루어두었던 연회였고, 클로디아는 모두의 앞에서 데미안과 춤을 추었다.

춤을 추는 동안 데미안은 단 한 번도 웃지 않았다. 하지만 클로디아는 데미안이 피곤해서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그가 웃지 않는다면 자신이 그만큼 더 웃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날의 클로디아는 어느 때보다 웃음이 많은 공주였다. 모두가 그들을 축복했다. 완고한 미다프 경마저도 웃는 날이었다.

클로디아는 자신의 옆에 앉은 데미안 알파가 웃는 것을 보고 싶었으나, 긴 머리카락에 가려 그의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 이후로도 오랫동안, 클로디아는 그가 웃는 것을 보지 못했다.



 

***



 

지금 생각해보면 그는 그저 오빠 같은 감정으로 자신을 대했기 때문에 그 약혼이 당혹스러웠던 건지도 모른다. 클로디아는 숲을 앞서가는 데미안의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시빌을 보니 그 확신이 더 굳어졌다.

사랑이라는 건 숨기기 힘든 감정이다. 어쩔 수 없이 티가 난다. 시빌이 자신의 뺨에 입을 맞춘 것처럼. 충동이든 아니든 언젠가는 들키는 것이다. 하지만 데미안은 단 한 번도 제 앞에서 그래 본 적이 없다.

쏴아아….

숲이 바람에 흔들렸다. 클로디아는 한때 그를 좋아했던 자신의 마음은 어땠을까, 하는 생각에 잠겼다.

‘좋아한다고 생각했던 것도 사실은 내 착각이 아니었을까.’

그때 데미안의 반응도 이해가 갔다. 자신은 어린애처럼 그에게 좋아한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오빠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여동생이라니. 그는 자신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랐을 것이다.

길게 묶어 늘어뜨린 머리카락이 바람에 사정없이 흔들렸다. 하도 길게 길러 묶은 머리라 가끔은 목이 무겁기까지 했다. 클로디아는 뻐근한 목을 이리저리 돌리며 뒤통수를 가볍게 긁었다. 머리카락을 높이 올려 묶으면 행동하기가 편했지만, 머리 뒤가 가렵곤 하다는 게 유일한 단점이었다.

그녀는 머리카락이 흐트러져 잔머리가 삐져나오지 않도록 신경 쓰며 뒤통수를 긁었다.

“수르 알파. 수상한 기척은 없는 것 같죠?”

“…아직까지는 그렇습니다.”

시빌이 돌아간 이후 처음으로 건네는 말이었다. 데미안은 짧게 대답하며 앞쪽을 경계했다. 말이 경계지, 그녀 쪽은 돌아보지도 않은 채였다. 그것이 시빌이 돌아간 후 어색한 둘 사이를 보여주는 것만 같아 클로디아는 입맛이 씁쓸해졌다.

“작은 숲이라서 더 찾아볼 건 없을 것 같은데….”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어쨌든 숲의 끝까지는 가보는 게 좋지 않을까 싶긴 하지만…. 정말로 그게 다친 짐승이라면.”

다친 짐승이라면? 데미안은 이상한 곳에서 말을 끊었다.

클로디아는 의아해서 고개를 들었다. 여전히 머리가 가려워 긁고 싶었지만, 혹시라도 데미안이 자신을 보고 청결하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질색이었다.

“데미안?”

“그, 로드.”

“네?”

데미안은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 표정은 언제나처럼 여상했으나, 말투만은 드물게 띄엄띄엄 끊겼다. 클로디아는 정말로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 수르 알파가 왜 저런 말투로 말하는 거지. 그는 언제나 분명하게 말을 끝맺는 타입이었다.

“죄송하지만… 이쪽으로 오시겠습니까?”

“네?”

클로디아는 눈썹을 찡그리며 데미안을 바라봤다. 데미안은 침을 삼키더니 자신에게 손을 내밀었다.

“잠시 제 쪽으로….”

말이 자신의 쪽이지, 데미안과 자신의 사이는 너무나 가까웠다. 한두 발걸음 정도. 그런데 지금 손을 내미는 건…. 자신에게 안기라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클로디아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무슨 소리예요, 지금? 혹시 시빌 때문에… 꺅!”

시빌 때문에 너도 지금 내게 혹시 집적대거나 하려는 마음이 생긴 거니? 그렇게 물으려고 했다. 그 데미안 알파이기에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그의 행동이 수상쩍기 그지없었으므로.

그러나 클로디아는 채 말을 끝맺기도 전에 자신이 휙 뒤로 당겨지는 것을 느꼈다. 누군가 제 머리카락을 잡아당기고 있었다.

아니, 그걸 잡아당긴다고 하는 건 너무 얌전한 표현일 것이다. 다음 순간 클로디아는 쿠당탕, 하고 뒤로 나뒹굴었다. 숲 바닥이 부드러운 흙으로 덮여 있지 않았다면 그야말로 크게 다쳤을 것이다.

그나마 생채기만으로 끝나긴 했지만, 그렇다고 아프지 않은 건 아니었다. 순식간에 뒤로 끌려가며 옷소매가 걷히고 팔이 까졌다. 가죽바지를 입고 있어 다행이었다.

“아악….”

클로디아는 숨도 쉬지 못했다. 다친 건 둘째치고 너무 놀라서였다. 게다가 여전히 그녀의 머리카락은 누군가에 의해 강하게 잡아당겨진 채였다.

누구지? 누가 내 머리카락을 이렇게 채어 잡은 거야?

가끔 양식 없는 아가씨들 중에는 서로의 머리채를 잡고 상대방을 휘두르는 싸움을 벌이는 일이 간혹 벌어진다고 듣기는 했다. 그러나 클로디아에게는 생경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누, 누구야….”

“움직이지 마십시오, 로드.”

그녀와 데미안이 거의 동시에 말했다. 클로디아는 데미안의 딱딱한 목소리에 저도 모르게 몸을 굳혔다. 데미안이 이렇게 긴장한 목소리로 말하는 것을 그녀는 거의 듣지 못했다.

반대로 말하면…. 데미안이 긴장할 만한 상대가 지금 자신의 머리채를 휘어잡고 있다는 뜻도 됐다.

“뭐, 뭐예요?”

그래서 클로디아는 그대로 몸을 구부린 채로 울먹이며 물었다. 그녀는 머리카락을 잡힌 탓에 제대로 자신을 붙잡은 자를 쳐다보기도 어려웠다.

혹시 마왕이라도 나타난 걸까? 내 머리카락을 휘어잡은 자는 마왕인 걸까?

그러나 전혀 뜻밖의 소리가 그녀의 귓가를 어지럽혔다.

푸르르르….

그녀는 화들짝 놀랐다. 뜨거운 콧김이 그녀의 뺨을 덥혔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것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 그 숨결은 명백히 짐승의 그것이었다. 사람의 숨결에서는 이렇게 푸릇푸릇하고 방금 잘린 풀냄새가 나지 않는다.

하지만 어지간한 짐승은 데미안에게 경계심을 심어주지 않을 텐데?

그녀는 겁먹은 눈으로 데미안 쪽을 쳐다봤다. 데미안은 긴장한 채로 이쪽을 바라보다가, 한 발짝 다가섰다. 그리고.

푸르르르륵!

“아아악!”

격렬한 숨소리와 함께 클로디아는 죽, 하고 뒤로 미끄러졌다. 제 뒤에 있는 짐승이 자신의 머리카락을 물고 뒤로 물러선 탓이다. 게다가….

따닥, 하는 소리가 났다. 제 뒤에 있는 짐승이 발을 굴렀기 때문이다. 이런 종류의 소리를 내는 짐승은 많지 않다.

데미안은 다시 빠르게 물러난 상태였다. 그러면서도 걱정스럽게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클로디아는 조심스럽게 그에게 물었다.

“…말이에요?”

“정확히는 좀 다릅니다. 믿을 수 없지만….”

그 동안에도 짐승은 다시 한 발짝 물러났다. 클로디아는 다시 질질 뒤로 끌려갔다. 무엇보다 머리카락이 너무 아팠다. 클로디아는 울고 싶어졌다.

“믿을 수 없지만, 뭔데요?”

데미안은 침을 삼켰다.

“…유니콘입니다.”

클로디아의 눈이 엄청나게 커졌다.

“유니, 뭐라고요?”

“유니콘입니다, 로드.”

데미안은 푸른 눈동자를 움직여 그녀의 머리카락을 물고 있는 말 비슷한 짐승을 바라봤다. 눈부시도록 새하얀 몸체는 매끈하게 빠졌다. 엄청나게 큰 크기는 가장 비싼 군마만 하다.

윤기 있는 털, 근육이 보기 좋게 잡힌 다리.

그러나 그것은 보통의 말은 절대로 아니었다. 이마에 달린 뿔과, 등에 달린 날개가 그것을 의미했다.

신성 동물 유니콘.

전설 속에서만 존재하던 유니콘이 지금 클로디아의 머리채를 물고 있었다.

“유니콘이요?!”

클로디아가 저도 모르게 빽 소리를 질렀다.

그 말을 증명하듯, 유니콘이 그녀의 머리채를 한 번 물고 흔들었다.

“꺅! 아퍼!”

클로디아는 결국 또륵, 눈물을 흘렸다. 머리채를 통째로 잡혀 있는데 당연히 그럴 것이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유니콘이 입을 벌려 클로디아의 머리카락을 놓은 것이다.

대신, 유니콘은 클로디아 위로 목을 늘어뜨렸다. 그제야 고개를 간신히 돌려 제 위를 쳐다본 클로디아가 기겁한 표정을 했다. 그러나 유니콘은 아랑곳하지 않고 혀를 내밀었다.

할짝.

유니콘은 혀를 내어 클로디아의 뺨을 핥았다. 말이 할짝이지, 거의 클로디아의 얼굴 전체에 침칠을 한 것이다. 클로디아는 잠시 멍해졌다. 이윽고.

“…아악!!!!”

온 숲이 떠나가라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근방의 작은 짐승들이 모두 놀라 달아난 것은 물론이다.

생각해 보라. 누가 제 머리채를 쥐어흔든 것이 유니콘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게다가 머리카락을 놓인 직후 얼굴을 유니콘의 침으로 세수하는 경험은 흔하지 않은 것이다. 당연한 결과로 클로디아는 엉엉 울고 말았다.

“이게, 이게 뭐야 징그… 크흡!”

그러나 유니콘은 그녀를 울게 놔두지 않았다. 몇 번이고 그녀의 얼굴을 핥아 올렸던 것이다. 그녀가 대여섯 번을 계속해 얼굴에 유니콘 침칠을 한 다음에야, 데미안은 침착하게 그녀에게 말을 건넬 수 있게 됐다.

“…로드. 유니콘이 아무래도 로드의 눈물을 핥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아아아아. 이게 뭐야. 더러워.”

데미안은 몇 번이고 유니콘의 이마를 쳐다봤다. 아름다운 무지갯빛을 내고 있는 곧은 뿔이 이마에 달려 있었다. 그리고 등에는 거의 클로디아만 한 날개가 두 개. 착각하려야 착각할 수도 없었다. 저건 유니콘이었다. 그리고 유니콘은….

순결한 처녀를 좋아하기로 유명하다.

데미안은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더럽지 않습니다. 유니콘은 백만 개의 아침이슬이 떨어진 가장 깨끗한 샘에서 태어나는 생물입니다. 진정하십시오.”

“지금 진정하게 생겼어요?! 수르 알파가 나라면, 크흡.”

버럭 화를 내던 클로디아는 다시 유니콘이 핥아오려는 말에 눈을 꼭 감았다. 그러나 유니콘은 잠시 고개를 갸웃하더니 입을 닫았다. 그녀가 눈물을 흘리지 않고 있는 탓이었다.

데미안은 한숨을 쉬었다.

“…죄송합니다. 로드의 심정은 이해합니다만….”

유니콘은 데미안의 말을 아랑곳하지 않고 이제 클로디아의 머리카락에 제 코를 들이대고 킁킁대기 시작했다. 클로디아는 화를 내고 싶었으나, 제게 뿜어져 오는 뜨거운 유니콘의 콧김에 질린 표정으로 말했다.

“이거 빨리 어떻게 좀 해 줘요….”

“…불가능합니다.”

“왜요?!”

데미안은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

“저는 유니콘을 상대하지 못합니다. 유니콘은 남자가 상대라면 그 어떤 이보다 더 강력해지는 생물이니까요.”

“…말이 돼요?!”

“사실입니다.”

클로디아의 얼굴이 울상이 됐다. 데미안은 혀를 찼다. 확실히 이게 숲의 괴물의 정체라면 이해도 갔다.

유니콘은 순결한 처녀를 좋아하지만, 그 외의 상대에게는 가혹한 생물이었다. 심지어 상대가 남자라면 가혹을 넘어 엄청난 괴물이 됐다.

데미안이 검기를 발휘한다 한들, 유니콘이라면 아마 너끈히 그의 칼을 막아낼 것이다. 신성 동물이라는 건 그런 존재였다. 신의 힘에 기대어, 대자연의 저울추에서 언제나 가장 무거워지는 존재.

남자는 유니콘을 계속해 관찰했다. 언뜻 봤을 때는 몰랐지만, 클로디아를 계속해서 핥아대는 유니콘의 가슴 아래쪽에는 피가 번져 있었다. 아마 어디선가 다친 것 같았다.

“유니콘이 어딘가 다친 모양이군요. 로드의 눈물을 핥는 이유도 그것 같습니다.”

“내 눈물이 왜요?”

데미안의 얼굴이 조금 벌게졌다.

“유니콘은 순결한 처녀의 눈물로만 치유할 수 있는 존재니까요….”

순결한 처녀, 라는 말을 입 밖으로 내는 것이 이렇게 부끄러운 일일 줄은 미처 몰랐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인 클로디아는 그런 것쯤은 신경도 쓰이지 않는 듯했다.

그야 얼굴을 통째로 핥아대는 유니콘이 자신의 눈앞에 있으면 순결이 어쩌고 하는 소리는 귀에도 들어오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대륙에서 가장 깊고 넓어서 1년에 수천 명씩 길을 잃는다는 레로 숲에서도 볼 수 없다는 유니콘이 왜 이런 마을 앞 작은 숲에 있는 걸까. 답은 뻔했다. 뭔가의 이유로 다친 유니콘은 본능적으로 순결한 처녀를 찾아 헤맸을 것이다. 평소 사람 사는 곳에 접근하지 않지만, 피가 저렇게 번져 나올 정도의 상처이니 아마 급한 일이었겠지.

마을 사람들이 숲에 들어왔다가 다친 것도 이해가 갔다. 가뜩이나 다쳐서 난폭해진 유니콘은 순결한 처녀 외의 생물이 제게 접근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 상대가 무엇인지 알아보기도 전에 뿔에 받히거나, 발에 밟혔겠지. 유니콘은 적을 앞에 두면 아주 날쌔고 예민한 생물이 된다. 지금이야 클로디아가 앞에 있어서 그 향에 흠뻑 취해 있는 모양이었지만.

클로디아는 데미안의 말에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고 입을 꾹 다물었으나, 집채만 한 유니콘이 제 앞에서 머리를 부벼대는 데는 장사 없었다.

유니콘은 객관적으로 아주 아름다운 생물이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 아름다운 생물이 뜨뜻한 혀로 자신의 얼굴을 핥다가 털 달린 머리를 제게 부벼대오면 그 모습을 감상할 여유 따윈 없어지는 것이다.

“이게 뭐야!!”

결국 클로디아는 앙앙 울고 말았다. 일어날 엄두도 못 낸 채, 그대로 주저앉아서 눈물을 펑펑 흘렸다. 데미안은 이도 저도 못하고 안절부절못했다.

그는 어쨌든 유니콘에게 다가갈 수 없었다. 유니콘이 클로디아의 바로 옆에 붙어있는 탓이다. 자신은 유니콘에게 다쳐도 괜찮다지만, 클로디아가 바로 옆에 붙어 있다가 난폭하게 돌변한 유니콘에게 다치기라도 한다면 큰일이었다.

유니콘은 계속해서 클로디아의 눈가를 핥았다. 처음에는 얼굴 전체를 핥다가 그것을 클로디아가 싫어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듯, 점점 동작을 줄여나갔다. 그러다가 마지막에는 혀끝으로 클로디아의 눈가를 찍어내기까지 했다.

어느 순간 클로디아가 울음을 멈췄을 때, 유니콘의 상처도 감쪽같이 사라져 있었다.

데미안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클로디아는 울음을 겨우 그치고 눈을 깜박거리고 있었다. 유니콘은 기분이 좋은 듯, 자신의 뺨을 클로디아의 머리카락에 부볐다.

유니콘의 침이 아직도 묻어 있는 머리카락은 축축하게 그녀의 얼굴에 달라붙었으나, 어쨌든 난폭해지지는 않을 것 같았다.

“로드. 제가 도와드릴 수 있는 건 없습니다. 제가 다가가면 그 유니콘은 난폭해질 테니까요. 그러니… 조금씩 일어나보시는 건 어떨까요.”

데미안이 침을 삼키며 말했다. 클로디아는 눈알을 굴려 슬쩍 유니콘의 눈치를 살폈다. 유니콘은 여전히 이마를 그녀에게 들이대고 있었다. 그 이마에 날카로운 뿔이 달려 있다는 것만 제외하면, 위협적인 기색은 없었다. 클로디아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유니콘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유니콘은 한층 더 즐거이 그녀에게 머리를 부볐다.

클로디아는 조심스럽게 일어섰다. 그러자 유니콘은 클로디아의 어깨에 제 머리를 한 번 묻더니, 이윽고 꿇어앉아 머리를 조아렸다. 유니콘의 복종. 순결한 처녀라고 할지라도 받아내기 어렵다는, 신성 동물의 호의였다.

“너 나한테 인사하는 거니?”

클로디아는 그것도 모르고 눈을 깜박였다. 데미안은 입을 열려고 했으나, 그것보다 유니콘이 빨랐다. 유니콘이 자신의 뿔을 만져달라는 것처럼 그녀에게 들이댔던 것이다. 클로디아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손을 내밀었다. 유니콘은 기다렸다는 듯이 뿔을 내밀었다. 뿔은 곧고 아름답게 뻗어 있었는데, 그 주변에 유선형으로 무지개색의 빛들이 휘 돌고 있었다. 누가 봐도 마법적인 것이었다.

“신기해라….”

클로디아가 이윽고 뿔을 두어 번 쓰다듬었을 때였다. 유니콘은 푸르르, 콧김을 내뿜으며 뿔에서 큰 빛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뻗어 나오기 시작한 무지갯빛은 이내 클로디아의 몸을 휘감았다.

빛은 마치 클로디아의 몸을 따라 흐르는 듯했다. 클로디아는 처음에는 놀랐다가, 이내 자신의 몸을 덮은 빛을 보고 까르륵, 웃었다. 빛은 아주 은은하고 부드러운 색을 띠고 있었고, 클로디아는 그 빛이 편안하게 느껴졌다.

게다가….

“어머나, 고맙다고? 너 말할 줄 아는 애였구나! 아. 내 덕분에 그렇게 된 거야? 다행이네!”

유니콘은 그녀에게 빛으로 말을 걸었다. 클로디아는 놀랍게도 그 모든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아까 전에는 미안. 좀 급해서 널 잡아당겼어.]

유니콘은 아름다운 몸을 빛내며 그렇게 클로디아에게 속삭였다. 그리고 자초지종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유니콘은 본디 깊고 큰 마케아 숲의 가장 깊숙한 곳에 살고 있었다.

그러나 어느 날 유니콘은 언제나 허공에 떠 있는 하늘섬이 궁금해졌다. 하늘섬은 네 개의 대륙 어느 곳에서나 희미하게나마 볼 수 있었고, 유니콘은 자신의 등에 달린 날개로 그곳에 날아가 보고 싶어졌다.

하지만 유니콘은 단 한 번도 날아본 적 없어 날개를 어떻게 퍼덕여야 할지 몰랐다. 유니콘에게는 부모가 없었다. 자연발생하는 생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유니콘은 어떤 사람을 만났다.

“어머, 사람이랑 다르게 생겨서 괴물인 줄 알았다고? 그랬구나.”

머리가 빨갛고 피부가 검었다. 유니콘은 그게 자신이 익히 마케아 숲에서 훔쳐본 인간들과는 사뭇 달라서 숲의 괴물인 줄만 알았다. 숲의 괴물들은 유니콘에게 정중했기 때문에, 유니콘도 괴물에게 친절하게 대했다. 그리고 괴물은 유니콘에게 나는 법을 가르쳐주겠다고 했다.

그 대신 자신을 하늘섬으로 데려다 달라고 했다. 클로디아의 얼굴이 굳었다.

“…하늘섬으로?”

유니콘은 고개를 끄덕였다. 신성 동물은 괴물을 태우고 마침내 날았다.

무지개가 떠 있고 언제나 반짝이는 하늘섬으로 향하는 길은 아주 즐거웠다. 괴물은 하늘섬에서 내린 다음 유니콘을 끌어안아 감사를 표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유니콘은 가슴에 깊은 상처를 입었다. 순식간이었다.

유니콘은 나는 법도 잊어버리고 아래로 추락했다. 그나마 자신을 지키는 법은 잊지 않았다는 것이 다행이었다. 유니콘은 상처 입은 곳을 숨긴 채 빠르게 동력 지대를 벗어났고, 그다음에는 숲 정령들의 힘을 빌려 이곳까지 올 수 있었다. 마케아 숲이 코앞이었다.

그러나 유니콘은 더 이상 힘이 없었다. 마케아 숲까지 가기에는 너무 멀었고, 이 작은 숲에는 정령이 없었다. 생긴 지 얼마 안 된 숲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유니콘은 이 숲에서 주저앉았다. 그리고 자신을 방해하는 인간들을 난폭하게 쫓아냈다.

“저런, 힘들었구나….”

클로디아는 손을 뻗어 유니콘을 토닥였다. 그동안 데미안은 넋을 잃고 클로디아를 쳐다봤다.

클로디아는 모르고 있었으나, 유니콘을 꿇어앉히고 온몸에 무지갯빛을 두른 그녀는 마치 성녀 같았기 때문이다. 행색은 꾀죄죄하고 머리카락은 잔뜩 곤두섰으나, 그런 것이 신경 쓰이지 않을 만큼….

“수르 알파.”

데미안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클로디아가 심각하게 자신을 부르고 있었다.

“포르투를 침범한 마왕이 어떻게 생겼다고 했지요?”

“…검붉은 피부에 빨간 머리를 가지고 있다고 했습니다. 머리에는 잔뜩 뿔이 돋고….”

클로디아는 다시 유니콘을 쓰다듬었고, 이내 유니콘이 맹렬히 고개를 끄덕였다. 클로디아는 장탄식했다.

“아, 불쌍해라.”

“무슨 일입니까.”

“아무래도 이 유니콘, 그 마왕에게 이용당하고 버려진 것 같아요. 버릴 때 공격까지 당한 것 같네요.”

데미안은 눈을 크게 떴다. 마왕이 하늘섬으로 대관절 어떻게 침투했는지 알 수 없었는데, 유니콘을 타고 왔다면 말이 됐다. 마족인 만큼 하늘을 나는 마법을 썼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지만, 하늘섬 주변은 디자이어가 경비하고 있었다. 마법을 썼다면 디자이어가 가장 먼저 알아챘을 것이다.

하지만 신성 동물인 유니콘을 타고 왔다면 디자이어가 경계하지 않을 만도 했다. 클로디아는 그동안 유니콘의 뿔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이거나, 웃거나 했다.

“잠깐만. 그런데 마왕은 남자 아니었어? 너는 남자를 싫어…. 뭐라고?”

클로디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데미안에게 말했다.

“…데미안. 얘가 자기에 대해 큰 오해가 있대요. 유니콘들은 순결한 처녀만 좋아하는 게 아니라는데요?”

“예?”

“그거 다 헛소문이래요. 잠깐만… 아하.”

클로디아가 아하하, 웃었다.

“그냥 인간 남자들은 더럽고 먼지투성이라 싫은 거래요!”

데미안이 눈을 찌푸렸다. 그러나 유니콘이 다시 그녀에게 볼을 부벼 클로디아의 주의는 그쪽으로 향했다.

“세상에, 그런 건 필요 없어. 뭐라고? 너도 필요 없어? 하지만 예쁘잖니. 너, 예쁜 게 얼마나 중요한지 알아? 뭐?”

클로디아의 말만 들어도 대강 어떤 느낌인지 알 것 같기는 했다. 클로디아는 까르르 웃더니 데미안에게 말했다.

“유니콘의 뿔이 귀한 건가요? 얘가 그걸 준대요.”

데미안은 숨을 삼켰다. 유니콘의 뿔은 예로부터 아주 귀중하고 모든 이들이 갈망하는 약재였다. 왜냐하면 유니콘의 뿔은 그 자체로 만병통치약이었기 때문이다.

갈아서 먹든, 씹어 먹든. 끓여 먹이든 어쨌든 그 뿔은 어떤 병도 낫게 하고 어떤 상처도 아물게 했다. 그러나 유니콘의 복종을 받아 자른 뿔이 아니면 그런 효과는 없었다.

한때 어떤 자가 유니콘을 사냥했으나 그 시체에서 잘라낸 뿔은 잘라내자마자 파스스 흩어졌다고 했다. 그러니 유니콘의 뿔은 부르는 게 값이었다. 아니, 값을 부를 수나 있을지 의문스러웠다.

“…만병통치약입니다.”

하지만 데미안은 그런 것들을 설명하는 재주가 없었고, 결국 한마디로 요약했다. 클로디아는 별 감흥 없는 표정으로 데미안의 말을 듣더니 고개를 돌렸다.

“네가 네 뿔을 먹을 수 있었다면 좋았을걸. 그럼 너도 이런 곳에서 주저앉을 필요 없고, 나도 헤어스타일을 망가뜨리지 않을 수 있었을 테니 말이야. 뭐? 난 예쁘다고? 알아!”

클로디아는 다시 한 번 꺄르륵 웃었다.

“아무튼 굳이 뿔을 주지 않아도 괜찮아. 뿔이 달려 있어야 예쁜 여자친구도 사귀지 않겠어? 자고로 남자는 잘생긴 게 최고야. 뭐? 못생겨도 진실한 게 최고라고? 그런 걸 어디다 쓰니?”

그녀의 말을 듣고 있던 데미안은 점점 어쩐지 자신이 바보가 되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아무튼 유니콘은 이쪽을 보더니 푸륵, 하고 콧방귀를 뀌는 듯이 굴었기 때문이다. 클로디아는 유니콘과 몇 마디 말을 더 듣더니 목을 푹 껴안았다.

“좋아, 내가 네 복수를 해 줄게. 왜냐하면 이건 비밀인데 말이야. 내가 널 괴롭힌 그 괴물을 무찌르러 가거든. 네가 그날 날아간 곳이 사실 내 집이야….”

공주는 한참 동안이나 유니콘의 목을 끌어안고 재잘거렸다. 유니콘도 기쁜 듯이 계속해서 빛을 뿜어냈다.

겨우 떨어진 뒤에, 데미안은 클로디아에게 그 유니콘이 클로디아에게 평생의 복종을 맹세했으며, 그녀가 부르면 어디든지 세 번은 가겠다고 약속한 것을 들었다. 유니콘의 뿔 또한 클로디아의 차지였다.

“자기 뿔을 먹으면 피부도 매끈해지고 젊어진대요. 하지만 저는 아직 스무 살도 안 됐잖아요? 그랬더니 일흔이 되면 쓰라는 거예요!”

클로디아는 아까 펑펑 운 사람 같지 않게 재잘댔다. 클로디아가 유니콘에게 데미안을 소개한 덕에 그 또한 곧 유니콘 곁에 다가설 수 있었으나, 유니콘은 끝내 그가 자신을 만지는 것만은 거부했다.

뭐, 이런 신성생물이 다 있담.

데미안은 슬그머니 부아가 치밀었으나, 그것 또한 신이 정한 섭리이려니 하고 마음을 달랬다.

“이제 갈 거래요. 마케아 숲으로 가서 쉰다고. 다시는 인간 같은 걸 믿지 않겠대요. 하지만 나는 믿어주렴. 내가 꼭 네 복수를 해줄 테니까. 알았지?”

유니콘은 즐거운 듯 푸르릉, 하더니 날개를 퍼덕였다. 곧 말이 하늘로 날아올랐고, 클로디아는 열정적으로 손을 흔들었다. 말이 허공으로 떠올라 아득한 점이 되고, 곧 사라질 때까지 계속.

“세상에, 데미안. 정말 예쁜 아이였어요. 그렇지요?”

클로디아는 손을 내린 후 곧장 뒤를 돌아봤다가 이내 어색한 얼굴이 됐다. 그제야 데미안과 또다시 단둘이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데미안은 멋쩍은 기분이 됐지만, 굳이 밖으로 티 내지는 않았다.

“…돌아가시지요.”

“그럴까요. 숲 괴물도 해결됐으니 말이에요. 근처의 마을에 괴물을 해결했다고 말해야겠어요. 아, 그 마을에서 하루 머물까요?”

“아마 그래야 할 것 같습니다. 숲에서 시간을 너무 많이 썼습니다.”

데미안은 고개를 끄덕이고 돌아서서 발걸음을 옮겼다. 클로디아는 뭐라고 말하려는 것 같았지만, 이내 입을 닫았다.

데미안에게는 익숙하고도 불편한 침묵이 다시금 시작됐다. 저벅저벅, 땅을 밟는 소리만 들렸다. 데미안은 묵묵히 걸으며 자신이 방금 들었던 말을 되새겼다.

‘세상에, 데미안. 정말 예쁜 아이였어요.’

아마 그녀는 몰랐을 것이다. 자신이 저도 모르게 데미안을 수르 알파가 아니라 이름으로 불렀다는 것을. 데미안은 그녀의 모습에서 자신이 한때나마 가장 행복하다 느꼈던 시절을 떠올렸다.

어리고 사랑스러운 공주님이 흰 성의 복도 저편에서 쪼르르 달려오면서, 자신을 ‘데미안’이라고 불렀던 때. 자신에게 꽃관을 만들어 씌워주던 예쁜 소녀가 제 이름을 부르며 그날 있었던 일을 속삭이던 시절.

클로디아가 자신의 이름을 부른 순간, 데미안은 잠시 자신이 그 순간으로 돌아간 듯한 착각을 했다.

더없이 그립고 애달픈 시절.

하지만 그 시간은 다시는 오지 않는다.

데미안은 입술을 깨물고 허리춤에 찬 검을 새삼스레 쥐었다. 자격 없는 자가 행복을 탐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데미안은 알고 있었다. 자신은 최근 어쩐지 전에 없었던 평온함을 맛보고 있다는 것을. 가끔 그녀가 예전으로 돌아간 듯 깜찍한 얼굴을 할 때, 그리고 자신을 싫어하던 것을 잊어버린 듯이 굴 때, 자신은 아주 약간의 죄책감과 함께 소량의 기쁨을 누리고 있었다.

…그 기쁨은 들켜서는 안 되는 일이다.

데미안은 힐끗 자신의 뒤를 돌아봤다. 그 감정은 바로 뒤에서 따라오고 있는 포르투의 공주님이 당한 비극 때문에 생겨난 것이므로.

그녀의 불행 앞에서, 아주 잠시나마 과거로 돌아간 것 같다며 기뻐하는 추함은 역시 자신처럼 저열한 이만이 가능한 일일 것이다.

‘신이시여. 제게 내릴 벌을 아끼지 마시되, 제발 그녀가 모든 일을 끝낸 후에 역사하시기를. 저는 당신의 아이이기 전에 그녀의 종이고 백성입니다.’

데미안은 빌었다.

자신이 부디 신의 벌을 받기 전에 모든 것이 끝나기를. 그리고 마지막의 마지막에, 그녀가 꼭 행복하기를.

그것만이 아주 예전부터 데미안이 바라오던 일이었다.



 

***



 

[…해서, 너무 궁금했단 말이야, 시빌.]

“그랬습니까?”

시빌은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헬렌은 심각한 눈으로 시빌을 보고 있었다. 그가 클로디아에게서 쫓겨나 수레로 돌아오자마자, 헬렌은 그를 추궁한 터였다. 자신은 분명 자르지스에서 나온 발자국 하나밖에 보지 못했다고.

디자이어 또한 헬렌의 말에 맞장구치며 시빌을 추궁했다. 백 년에 한 번 열리는 바닷길이 두 개도 아닐 것이다. 그랬다면 그게 비싼 정보도 아닐 테니까.

시빌은 눈웃음을 치며 헬렌의 옆에 엉덩이를 비비고 앉았다.

“그야 뻔하죠. 저는 마법사니까. 어땠을 것 같습니까?”

“…마법으로 발자국을 지운다?”

“땡!”

시빌은 손가락을 세워 흔들었다.

“마법사들이 얼마나 게으른 종족입니까. 저는 솔직히 그 바닷길을 보자마자 막막하기부터 했다고요. 아, 저걸 언제 걸어가.”

[…아하?]

“부유 마법을 걸어서 처음에는 날아갔습니다. 그야 죽음의 바다 때문에 보통은 날아서 가지 못하지만, 가다가 힘들면 그 바닷길로 떨어져 걸어가면 되니까요.”

헬렌이 디자이어를 흘끔 바라봤다. 듣고 보니 설득력이 있었다. 아무리 일직선의 길이라지만, 헬렌이 보기에도 그 길은 너무 길었다. 솔직히 하루 종일 걷는다고 해도 들어가서 나올 수나 있을까? 싶을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자르지스에 가보니 생각보다 난해하더라고요. 마력 구조는 대륙하고 다른 데다가 제가 발현하는 마법과 방식이 완전히 달랐습니다. 어느 정도 연습으로 자르지스에서 마법을 쓰는 일이 익숙해지기는 했지만, 마력이 다 떨어져 나올 때는 걸어 나와야 했죠.”

“이런, 그랬구나. 미안해.”

헬렌이 즉각 사과했다. 시빌이 피식 웃었다.

“그럼 뭔 줄 알았어요? 설마하니….”

시빌의 초록색 눈이 헬렌을 향했다. 마치 보석처럼 어여쁜 빛을 가진 눈은 장난스럽지만, 선한 빛을 띠고 있었다. 헬렌은 얼굴을 붉혔다.

“아, 마왕이라느니 그런 생각 안 했다고!”

“뭐야! 했네! 방금 자기 입으로 말했네!”

“아니야! 아니라고!”

헬렌이 고개를 푸르르 흔들었다. 그 뒤로도 한참이나 시빌은 투덜거리며 사람을 뭘로 보냐느니 하는 소리를 해댔다. 그 덕분에 헬렌은 마시던 술도 잊고 시빌의 마음을 풀어주는 척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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