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권-1장. 적과 친구 (5/30)

1장. 적과 친구



 

디자이어는 데미안이 잘라낸 세계수 밑둥을 가늠하더니 말했다.

[데미안, 저거 두 번째 가지 있는 부분까지 잘라내 줘.]

“알겠습니다.”

데미안이 고개를 끄덕이고 쓰러진 세계수를 잘라냈다. 그 뒤로도 디자이어는 데미안에게 몇 번의 가지치기를 지시했고, 검을 안고 있던 클로디아는 결국 한마디 하고 말았다.

“얘. 디자이어. 이거 네가 만드는 게 아니라 수르 알파가 만드는 거 아냐…?”

[아이 참. 그런 자잘한 작업까지 내가 하기에는 힘이 딸려서 그렇지!]

그럼 수르 알파는 힘이 넘쳐서 가지치기를 하나. 클로디아는 그렇게 말하려다 관뒀다. 자신이 어쩐지 데미안을 두둔하는 것 같아 기분이 이상해졌기 때문이다.

데미안이 세계수 덩굴을 가지치기해 만든 것은 커다란 원통형 줄기였다. 줄기의 단면에서는 끈적끈적한 진액이 조금씩 배어 나왔다. 디자이어는 콧노래를 불렀다.

[보통의 나무판을 이어 붙여서 배를 만들면 죽음의 바다를 건너지 못해. 자르지스로 갈수록 죽음의 바다가 띠고 있는 독기가 배 이음새를 파고들어서 결국 사람들을 바다에 빠지게 만들거든!]

그래서 원통형으로 만드는 거구나. 디자이어가 클로디아에게 주의를 줬다.

[나는 원래 잠을 안 자지만, 힘을 쓰면 잠들 거야. 내일 아침에 일어날 테니 나를 잘 간수해야 해!]

“뭐야, 그게.”

[나 참. 쥬버린 때도 그래서 처음에 하루 동안 잠들어버린 거라구!]

디자이어의 말에 클로디아는 저도 모르게 데미안을 쳐다보다가, 그와 눈이 마주쳤다. 검푸른 눈은 별다른 감정을 담고 있지 않았지만, 눈이 마주친 순간 클로디아는 괜히 죄를 지은 듯 고개를 돌렸다.

쥬버린 왕자의 심장을 지키느라 잠들어버린 디자이어 대신, 하루 동안 온전히 성의 경호를 도맡았던 기사는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클로디아는 계속해서 자신이 열아홉 생일에 폭죽놀이를 하지 않았으면 쥬버린이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드문드문 해왔다. 하지만 디자이어가 이렇게 남들 앞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그 이야기를 꺼내면 이상하게 움찔하곤 했다.

죄책감 때문일까.

클로디아는 아스라한 감정을 다스리느라 디자이어를 꼭 끌어안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디자이어는 이상한 노래를 흥얼거리며 세계수 줄기를 들어 올렸다. 아직도 초록색을 띠고 있던 줄기는 잠시 빛나더니, 순식간에 바짝 말라버렸다.

“우와.”

시빌이 감탄했다. 디자이어가 잘난 척했다.

[세계수의 진액 채로 말려버리면 독기가 침범할 수도 없지!]

그다음은 배 모양으로 예쁘게 다듬는 작업이다. 하지만 야심차게 [이제 돌려깎아 볼까!]라고 하던 디자이어는 자신감이 무색하게 금세 죽는소리를 해댔다.

배에는 선실도 있어야 하고, 키도 있어야 하고, 돛대도 있어야 하는데 그것들을 만들기 위해 남은 덩굴들을 한참 말리다가 힘이 다 떨어진 것이다.

[나… 너무 졸려 클로디아….]

“야! 너 이렇게 잠들 거야?”

[미안…. 내일 봐….]

쿵. 말이 끝나자마자 방금 전까지 디자이어가 말려놓은 다른 가지 몇 개가 바닥에 떨어졌다. 클로디아는 기가 막혀 디자이어를 몇 번 흔들었으나 소용없었다. 잠들어버린 검은 대답이 없었다.

시빌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으며 클로디아의 어깨를 두드렸다.

“오늘은 그만 쉬시는 게 좋을 것 같네요.”

“하지만 이걸 누군가 훔쳐 가면 어떻게 하죠?”

클로디아는 걱정하는 눈으로 덩굴들을 바라봤다. 투르는 외진 마을이었지만, 이 근처를 우연히 지나가던 사람이 좋은 목재라며 가져가면 어떻게 하느냔 말이야? 그 말에 대답한 것은 시빌이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축소 마법으로 돕는다고 했잖아요?”

그리고 시빌은 가볍게 주문을 외웠다. 덩굴들이 쏙쏙, 손가락만큼 작아졌다. 클로디아는 감탄하며 그 앞으로 뛰어가 작아진 덩굴을 주우려다 당황했다.

“덩굴이…. 안 줍히는데?”

“그야 마력을 아껴야 해서. 무게는 안 변했습니다. 누가 주워가고 싶어도 안 보여서 못 주워갈 겁니다.”

시빌이 눈을 찡긋했다.

“그러니 돌아가시죠. 아까 듣자 하니 투르에 딱 하나 있는 여관 1층의 식당 음식이 그리 맛있다고들 하더군요.”

촌장에게 데미안이 동의를 구하는 동안 시빌은 마을 사람들과 제법 말을 붙여본 모양이었다. 빨간 머리의 마법사는 클로디아의 어깨를 감싸며 친근하게 그녀를 마을 쪽으로 유도했다.

“땅굴 속에서 맨 말린 과일만 먹었잖습니까. 거인들의 식단은 맛이 없진 않은데, 너무 천편일률적이에요.”

“아하하. 그런 걸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럼요. 저야 아무거나 먹어도 괜찮지만, 클로디아는 귀한 몸 아닙니까?”

숲에서는 내내 공주님이라고 부르던 시빌은 이제 그녀를 자연스럽게 클로디아라고 부르고 있었다. 클로디아는 슬쩍 시빌의 손이 얹힌 제 어깨 쪽으로 시선을 두었다. 너무 친근한 것 같긴 하지만, 뭐 상관없나.

두 사람은 뭘 먹을까, 같은 소리를 하며 마을 쪽으로 신나게 걸음을 옮겼다. 데미안이 그 뒤를 잠자코 따랐다. 평화로운 저녁이 될 것 같았다.



 

***



 

투르는 작은 마을이었지만, 사람들이 꽤 많이 오가는 곳이었다. 여관은 하나뿐이었지만 꽤 컸다. 2층 건물이었고, 방도 여러 개였다. 1층의 식당은 음식 맛이 좋다는 말이 사실이었는지, 저녁을 먹기 위해 온 사람들이 꽤 많았다.

수염이 부숭부숭하게 난 여관 주인은 세 사람을 보고 “손님들 운이 좋은데요!”라고 쾌활하게 말했다. 본래 여관에는 오늘 그들이 묵을 방이 없었는데, 어떤 상인들이 취급하던 물건에 문제가 생겨 자신들의 방을 취소하고 급히 돌아갔다는 것이다. 남아 있는 방은 딱 두 개. 데미안은 클로디아에게 망설임 없이 더 큰 방을 내주었다.

하지만 시빌의 반항은 거셌다.

“아니 우리가 두 명인데 대체 왜 클로디아가 큰 방을 씁니까?”

“그래요, 데미안. 나는 작은 방을 써도 괜찮아요.”

“선택의 여지가 있다면 언제나 훨씬 나은 쪽이 로드의 것입니다.”

데미안은 시빌과 클로디아의 말에도 꿈쩍하지 않고 버텼다. 정확히는 작은 방 열쇠를 손에 쥐고 내놓지 않았다. 보다 못한 여관 주인이 말을 보탰다.

“거, 큰 방 침대는 두 사람이 잘 정도로 크지만, 작은 방 침대는 작은 것 하난데 말입니다.”

“제가 바닥에서 자면 됩니다.”

데미안이 팔짱을 끼고 말했다. 클로디아가 기가 막혀 하던 찰나였다. 시빌도 잽싸게 태도를 바꾼 것이다.

“아, 저도 그냥 작은방이 낫겠네요.”

“시빌은 왜요?”

“저는 남자랑 한 침대 안 씁니다.”

실로 설득력 있지만, 어처구니없는 이유였다. 하지만 이번에도 여관 주인이 도왔다.

“그럼 아가씨는 지하로 내려가서 씻어야겠는걸. 큰방은 욕실이 따로 없어요. 작은방은 얼마 전에 시설을 바꾸면서 마침 옆에 상수관을 놓을 수 있길래 욕실을 만들었거든. 비싸기는 작은방이 더 비싸요.”

“….”

데미안의 얼굴이 조금 변했다. 시빌이 옆에서 이죽거렸다.

“더 나은 쪽이 로드의 거라면서요?”

“…로드.”

“네에, 네에.”

클로디아는 한숨 쉬듯이 데미안의 말을 자르며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데미안이 끙, 하는 표정이 되더니 작은 방의 열쇠를 내놓았다. 클로디아는 그의 손바닥에서 열쇠를 탁, 소리가 나도록 채갔다. 시빌이 코웃음 쳤다.

“저랑 한 침대 쓰시겠네요.”

데미안은 시빌의 말에는 눈썹만 한 번 들어 올리고는 클로디아의 뒤를 따라 2층으로 올라갔다. 자신이 메고 있는 일행의 배낭에서 클로디아의 짐을 빼기 위해서다.

작은 방은 깔끔했다. 시설을 바꾸었다더니 가구도 최근에 바꾼 모양인지, 꽤 새것 같았다. 침대에서는 새 지푸라기 냄새가 났다. 시트 안의 지푸라기도 자주 갈아주는 모양이었다.

방에 들어간 클로디아는 데미안이 내민 배낭 안에서 챙겨온 크림과 잠옷, 베개를 빼냈다. 귀여운 분홍색 잠옷을 보고 문간에 서서 팔짱을 끼고 있던 시빌이 휘파람을 불었다.

“귀여워요. 본래 성에서부터 입던 건가요?”

“네에. 저 사실 잠옷을 꼭 입어야 잠이 잘 오거든요!”

클로디아가 부끄러워하면서도 배시시 웃었다. 동력 지대의 여관에서는 잠옷도 더럽혀질까 봐 잔뜩 몸을 오그리고 잤었다. 여기에서는 그럴 필요가 없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클로디아는 내친김에 배낭에서 방향제까지 꺼내 주변에 폭폭 뿌렸다. 동그랗고 사랑스러운 방향제 병에서 달콤한 냄새가 났다.

시빌이 킁킁거리다가 이내 웃고 말았다.

“참 나. 이런 사람은 처음 봅니다.”

“무슨 사람이요? 저처럼 예쁜 사람이요?”

클로디아가 말해놓고 까르르 웃었다. 시빌은 무언으로 긍정했다. 데미안은 그녀가 짐을 다 꺼내자 빠르게 배낭을 닫고 나오며 시빌의 목덜미도 붙들었다.

“어어어, 이렇게 안 해도 가요. 간다니깐?”

그러면서도 시빌은 두 손을 모아 입가에 대고 클로디아에게 외쳤다.

“곧 봐요! 밥 먹어요!”

“네에!”

클로디아가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데미안은 거칠게 큰 방문을 열고 시빌의 목을 잡아다 안에 집어넣었다. 큰 방은 작은 방의 딱 두 배 정도였다. 방 가운데에는 꽤 큰 나무 침대 하나가 있었다. 시빌은 한숨을 푹 쉬었다. 방금 전과는 사뭇 다른 표정이었다.

“내가 살다 살다 남자랑 한 침대를 써야 하다니.”

“저라고 딱히 좋은 기분은 아닙니다.”

데미안이 방문을 닫으며 망토를 벗었다. 며칠 내내 땅굴 안에서 입고 있던 망토는 흙먼지가 풀썩였다. 그는 눈을 찡그리며 망토를 어떻게 할까 잠시 고민하다가 창문 밖으로 털었다.

펄럭펄럭. 거짓말 조금 보태 먼지가 자욱했다.

시빌은 으, 하고 질린 표정을 지었다.

“포르투가 아무리 마왕한테 침략당했다고 해도 돈이 많이 모자랍니까? 망토 꼴 하곤….”

“로드가 너무 유명하기 때문입니다. 번쩍거리는 갑옷을 입고 수행할 순 없습니다. 눈에 너무 띄니까.”

나름대로는 클로디아를 보호하려는 방편이었다. 포르투가 마왕의 습격으로 위험해진 이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클로디아를 응원하고는 있지만, 그녀를 납치해 포르투를 아예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트리려는 이가 없을 거라고는 말할 수 없었다.

데미안이 시빌에게 내내 공주님이라는 호칭을 금지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러나 시빌은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번쩍거리는 갑옷이 아니라도 당신은 너무 눈에 띄던데요.”

“무슨 뜻입니까?”

“여관에서만 해도, 평범하진 않죠. 누가 봐도 과보호를 넘어서 주인을 모시는 사람이구나, 할 만하게 굴고요. 이 험한 시기에 금발에 파란 눈을 가진 예쁜 십 대 여자애를 주인처럼 모시며 여행하는 검은 머리 덩치 큰 남자. 조금만 머리를 굴리면 답 나오죠.”

“….”

데미안은 침묵했다. 시빌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의 말이 맞다며 클로디아를 제 부하 취급할 수도 없었다. 그게 데미안이 양보할 수 있는 마지막 선이었다.

“게다가 저 공주님 너무 아직도 머리가 꽃밭인 것도 한몫하네요. 누가 여행 중에 여관에서 실크 잠옷을 입고 방향제를 뿌립니까? 내가 귀한 집 아가씨라고 광고하는 것도 아니고.”

데미안이 이마를 찡그렸다. 지금 시빌은 클로디아의 험담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피식피식 웃고 있긴 하지만 노골적인 비아냥이었다.

“뭐 하는 겁니까?”

“예?”

“제 앞에서 로드의 험담을 하는 이유가 뭡니까?”

데미안의 말에 시빌이 어이없이 웃었다.

“그게 공주님 험담으로만 들려요?”

“….”

“저는 두 사람 다 문제가 있다고 말하는 겁니다. 한쪽은 과보호, 한쪽은 꽃밭. 이래서 무슨 조용히 자르지스에 갑니까? 아주 여기 클로디아 테 포르투가 있네, 광고하는 수준인데요.”

시빌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뭐, 좋습니다. 지적이 험담으로 들릴 수도 있죠. 계약을 할 때 제가 더 신중했어야 하는데. 아무튼 아직까지는 큰 위험이 없지만, 글쎄요. 저는 당신이 클로디아가 정말 위험해졌을 때, 오늘의 일을 후회하지 않을까 걱정스럽네요.”

데미안은 시빌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마법사는 “이래서 칙칙하게 남자랑 방 쓰는 거 싫다니까.” 하고 나직하게 투덜거리며 로브를 벗기 시작했다.



 

***



 

여차저차해서 세 사람 모두 먼지를 씻어내고 개운한 얼굴로 식당에 앉았을 때는 많이 늦은 시간이었다. 저녁을 먹던 사람들도 모두 각자의 방에 돌아가서, 식당에는 세 사람뿐이었다. 장부를 적고 있던 갈색 머리의 여자는 세 사람이 내려오자 불퉁한 표정이 됐다.

“늦어서 미안합니다. 세 사람 식사 됩니까?”

그 표정의 원인을 파악한 데미안이 재빠르게 사과했다. 아무래도 식당을 책임지는 사람인 듯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주는 대로 먹어야 되는데. 괜찮겠어?”

여자의 말투는 불손했다. 데미안은 초면에 반말을 하는 여자의 말투가 썩 맘에 들지는 않았으나, 방금 시빌에게서 들었던 이야기를 상기하고 참았다. 애초에 저녁 시간을 빗나가 온 손님들이 달갑지는 않을 것이다.

“예. 상관없습니다.”

“세 사람이네. 요리 네 개에 디저트 하나 간신히 되겠군.”

“전부 주십시오.”

“알겠어. 저쪽에 앉아 있어.”

여자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세 사람을 식당 중간의 테이블로 인도했다. 그리고는 짧은 머리를 수건으로 넘겨 묶고 주방으로 들어갔다. 클로디아가 감탄했다.

“신기하다.”

“뭐가요?”

“아, 남부에서는 여성들도 머리를 짧게 자른다는 이야기를 듣긴 했는데 이곳에서 볼 줄은 몰랐거든요.”

주방으로 들어간 여인의 머리 스타일을 말하는 것이었다.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인은 머리카락을 짧게 잘랐다. 귀 바로 아래로 머리카락이 잘려 목덜미가 다 드러나 보였다. 시빌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요. 남부는 덥고 습하다 보니 다들 목을 드러내곤 하죠. 하지만 투르는 굳이 따지자면 동북부인데…. 남부 출신인 모양이군요.”

“예전에는 어떻게 여자가 머리카락을 짧게 자르지? 하고 생각했는데…. 막상 보니 멋져 보여요. 편해 보이기도 하고.”

클로디아는 포르투에서는 본 적 없는 짧은 머리 스타일을 보며 놀라워하고 있었다. 포르투의 여성들은 대부분 머리카락을 길게 길러 예쁘게 꾸미기 때문이었다. 긴 머리카락은 여성의 아름다움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예전에 남부 여자들은 머리가 짧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끔찍스럽다고 생각했지만, 클로디아는 지금 짧은 머리를 한 여인을 보며 그저 편하겠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클로디아도 한번 잘라볼래요?”

“아하하, 그러고 싶긴 해요.”

클로디아는 젖은 채 말리지 않고 동그랗게 머리 위로 틀어 올린 머리카락을 툭툭 건드렸다.

“머리카락이 막상 여행을 다니니 너무 무겁고 불편하거든요. 뛸 때는 제 머리카락에 제가 맞을 때도 있고.”

“이런. 제가 멋지게 잘라드릴게요. 이래봬도 솜씨가 제법이랍니다.”

“고맙지만 사양할게요. 저 시집가야죠.”

공주가 까르륵 웃으며 턱을 괴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주방에서 여인이 돌아왔다. 한쪽 손에는 커다란 철냄비를 든 채였다.

“포토푀. 접시에 덜어 먹어요.”

클로디아가 있어서 그럴까. 그녀는 클로디아에게만 씩 웃어주고 돌아갔다.

“포토푀?”

“아, 저 이거 좋아하는데. 추운 지역 요립니다. 이거저거 한꺼번에 넣어서 끓여 먹는 거죠.”

시빌이 끼어들었다.

“맛있을 겁니다.”

데미안이 빠르게 국자로 접시에 포토푀를 떠서 클로디아 앞에 놓았다. 시빌도 놓인 접시를 받고 싱글벙글 웃었다.

“저녁 맛있게 먹어요, 두 사람 다.”

“로드도 편히 식사하십시오.”

“맛있게 먹읍시다! 먹어봐요, 클로디아!”

“좋아요. 제가 도전해볼게요.”

클로디아가 빙그레 웃으며 수저를 들었다. 감자와 채소, 고기를 듬뿍 넣은 포토푀를 몇 번 저은 다음, 후후 불어 입에 넣는다.

그리고 클로디아는 그대로 멈추고 입을 가렸다. 갑작스레 그녀가 보인 움직임에 데미안이 눈썹을 꿈틀하며 들던 수저를 도로 놓았다.

“…로드. 뭔가 문제라도….”

“대박.”

“예?”

“시빌 이거 엄청 맛있어요! 시빌 말대로 대박이에요!”

“제가 뭐랬습니까!”

클로디아의 감탄에 시빌이 거 보라는 듯 환하게 웃었다. 클로디아는 입안에 음식을 넣고 말하는 것은 버릇없어 보인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도저히 감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포토푀가 엄청나게 맛있었던 것이다.

“이거 대체 무슨 음식이에요? 저는 처음 먹어보는 건데! 원래 이런 맛이에요?”

그녀의 반응에 시빌이 고개를 갸웃하더니 자신도 포토푀를 떠먹었다. 그의 눈이 즉각 커졌다.

“평범한 포토푀가 맞는데요. …아니 그런데 이걸 평범하다고 할 수가 있나? 너무 맛있는데? 데미안! 먹어보세요! 엄청납니다!”

두 사람의 호들갑에 데미안이 이마를 한층 더 찌푸렸으나, 별말 없이 다시 수저를 들었다.

클로디아와 시빌은 데미안이 포토푀를 한 수저 떠 입에 넣는 것을 가만히 지켜봤다. 데미안은 두 사람의 시선이 퍽 부담스러운지 내내 얼굴을 구기고 있었으나, 음식을 넣은 후에는 그의 얼굴도 부드러워졌다.

기사의 표정이 풀리자 시빌이 “맛있죠!” 하고 즐거워했다.

“…예.”

클로디아도 다시 한 수저를 떠 넣었다. 아무리 그간 말린 과일과 휴대식량만 먹어왔다고는 하지만, 20년 가까이 포르투 왕성에서 맛있는 것만 먹고 산 입맛이다. 어지간한 음식에는 그리 감동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포토푀는…. 클로디아는 감격을 금치 못했다. 오래 끓여낸 고깃국물에서는 잡내가 하나도 나지 않았다. 농후한 버터 풍미와 더불어 뜨끈한 국물이 배 속을 덥혀주는 듯했다. 고기는 또 어떻고. 분명 오래 끓인 것 같은데, 씹는 맛이 살아 있는 데다가 옅은 훈제향까지 남아 있었다. 이럴 수가 있나? 감자도 포슬포슬하니 국물을 머금고 입안에서 부드럽게 부서졌고, 함께 끓여낸 다른 채소들도 물컹하기는커녕 제각각의 씹는 맛을 가지고 있었다.

대체로 포르투의 궁정 요리에는 이런 종류의 진한 국물 요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비프 부르기뇽 같은 요리만 해도 오래 고기를 끓이긴 하지만, 고기만 요리로 취급될 뿐이다.

이 국물은 궁정 요리처럼 세련되지는 않았지만, 오랫동안 땅굴을 헤맨 클로디아에게는 너무나 감동적이었다. 마치 얼굴도 본 적 없는 포르투 성의 요리사가 그리워지는 맛이랄까.

“닭요립니다.”

퉁명스러운 얼굴의 여자가 접시를 내려놨다. 접시 위에 올라간 닭들은 토막 쳐 튀긴 후 뭔가의 소스를 끼얹은 것 같았다. 클로디아와 마찬가지로 포토푀에 감동하고 있던 시빌이 빠르게 개중 가장 부드러워 보이는 부분을 들어 클로디아의 앞에 놔 주었다. 클로디아는 기대에 가득 찬 눈으로 닭을 쳐다보다가, 포크와 나이프로 살을 분리해 입안에 넣었다.

천국이었다.

부드러운 살은 닭기름을 잔뜩 머금고 있었다. 바삭한 튀김옷과 그 위에 뿌려진 새콤한 소스는 자칫 느끼해질 수 있는 닭의 맛을 한 번 더 잡아주면서도 본연의 맛을 해치지 않았다.

클로디아가 살을 씹자 고소 달콤한 맛이 배어 나왔다.

미쳤나 봐!

“대박이다.”

클로디아와는 달리 닭을 손으로 찢어 입에 넣은 시빌이 수많은 감상을 한마디로 피력했다. 실로 품위 없는 모습이었으나, 클로디아는 마음 같아서는 시빌처럼 손을 쓰고 싶었다. 포크와 나이프로 잘 찢어지지 않는 닭을 어떻게든 예쁘게 발라내려고 애쓰고 있는데, 눈앞에 발라낸 닭고기가 다가왔다.

“뭐, 뭐예요?”

“클로디아, ‘아’ 하세요.”

시빌이 씩 웃으며 닭고기를 그녀의 입 앞에 갖다 댄 것이었다. 클로디아의 얼굴이 대번에 새빨개졌다.

“아, 아니….”

“포크로 좀 불편해 보여서요. 맛있죠? 얼른요.”

“그치만….”

클로디아는 피가 날 것처럼 빨개진 얼굴로 주변 눈치를 봤다. 그러다 이쪽을 바라보는 데미안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이마를 찡그리고 말했다.

“시빌. 로드가 싫어하지 않습니까.”

“어? 싫어요?”

시빌은 놀랐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다가 애매하게 웃었다.

“아, 손가락으론 역시 좀 더러운가요? 저 그래도 밥 먹기 전에 손 씻고 왔는데….”

“아뇨!”

마법사가 손을 거두려는 찰나, 클로디아는 저도 모르게 큰 소리로 답했다. 시빌이 멈칫했다. 클로디아는 빨개진 얼굴로 다시 말했다.

“괜찮아요. 주세요! 먹을게요!”

“엇. 그러면 아앙.”

시빌은 대번에 환하게 웃으며 클로디아에게 닭고기를 들이댔다. 클로디아가 아, 하고 입을 벌리자 커다란 닭고기가 입안에 들어왔다. 닭고기를 넣는 임무를 수행 완료한 마법사는 씩 웃으며 클로디아를 바라봤다.

“맛있죠?”

클로디아는 닭을 채 씹기도 전에 고개를 맹렬히 흔들었다. 그 바람에 시빌이 까르륵,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뭐야. 씹고 말해요. 아직 씹지도 않고선.”

그제야 클로디아는 입안에 들어온 고기를 우물거렸다. 시빌은 클로디아를 아주 예쁘다는 듯 보고 웃으며 닭을 집었던 손가락을 대수롭잖게 두어 번 닦고 다시 닭을 뜯기 시작했다.

“저 예전에 동생들한테 고기 이렇게 뜯어주면 애들이 엄청 잘 받아먹었거든요. 보기만 해도 배가 불러서 아주.”

“아….”

“클로디아도 되게 예쁘게 먹네요.”

예쁘게. 그 말에 겨우 진정한 줄 알았던 얼굴이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클로디아는 겨우 고기를 삼키고는 “네?” 하고 되물었다.

시빌은 마치 일생의 중요한 예술 작품이라도 만들듯이 심혈을 기울여 닭을 발라내더니, 여상하게 닭고기를 다시 그녀에게 들이밀며 웃었다.

“나중에 아내한테도 꼭 이렇게 발라주려고 했는데, 공주님께 제가 이러고 있을 줄은 몰랐어요.”

“…시빌.”

데미안이 그의 이름을 낮게 불렀다. 그제야 시빌은 알아차렸다는 듯 너스레를 떨었다.

“아아, 미안해요. 클로디아라고 불러야 하는데 자꾸 실수하네. 아무튼 클로디아, 아앙.”

그녀는 잠자코 닭을 받아먹었다. 예쁘다는 말이나, 아내 어쩌고 하는 말 같은 소리가 다시 나올까 봐서였다. 닭은 아주 맛있었고, 그 뒤로 나온 샐러드나 돼지고기 삶은 것도 대단히 맛이 좋았다.

“이게 마지막입니다.”

여전히 퉁명스러운 여인이 그들의 앞에 작고 귀여운 접시 세 개를 내려놨을 때, 클로디아는 이번에야말로 감탄하고 말았다.

‘판나코타! 판나코타잖아!’

우유를 굳혀 말랑말랑하게 만든 디저트를 이곳에서 보게 될 줄은 몰랐다. 우유 자체가 비싸기도 해서 밖에서는 거의 볼 수 없는 음식이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잽싸게 수저를 들었다.

그때였다.

“야, 임마 헬렌!!”

누군가 저벅저벅 걸어오며 화를 냈다. 클로디아는 놀라 옆을 쳐다봤다. 여관에 들어올 때 만났던 여관 주인이었다.

“너 또 이런 데 우유를 낭비한 거냐!”

털이 부숭부숭한 여관 주인은 천둥처럼 목소리가 컸다. 덕분에 수저를 든 클로디아는 그가 말할 때마다 움찔움찔 떨고 말았다. 주방으로 돌아가던 여인이 뒤돌아 이쪽을 바라보고 이마를 찡그렸다.

“낭비라니. 음식을 판 거잖아?”

“너 임마! 가격 이야기는 했어?!”

두 사람의 대화에 시빌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여인을 바라봤다. 헬렌이라고 불린 여인은 여관 주인의 말에 낮게 한숨을 쉬더니 세 사람을 향해 돌아섰다.

“내가 가격 이야기를 안 했네. 그거 한 접시에 100싱이에요.”

“컥.”

시빌이 목이 틀어막히는 시늉을 했다. 100싱이면 어지간한 요리 두세 접시는 되는 가격이었다. 이런 여관에서 대충 주문했을 때 나올만한 식대는 아니었던 것이다. 시빌의 표정을 본 여관 주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 자식이 또 말도 안 하고 팔았구만.”

“…비싸면 됐어. 아직 안 먹었으니까, 도로 가져갈게.”

헬렌도 표정을 구긴 채 다시 테이블로 돌아와 손을 뻗었다. 그러나 클로디아가 더 빨랐다. 그녀는 잽싸게 접시를 들어 끌어안고 낼름 숟가락으로 판나코타를 덜어 제 입에 쏙 집어넣었던 것이다.

갑작스러운 클로디아의 행동에 모두가 눈을 크게 떴다. 클로디아의 동작은 그만큼 필사적이었다. 그녀는 입을 오물거리며 빠르게 판나코타를 씹어 삼킨 다음 말했다.

“이제 먹었으니 못 가져가요!”

“….”

“클로디아…?”

헬렌이 잠시 침묵했고, 시빌이 그녀를 불렀다. 클로디아는 접시를 꼭 끌어안은 채 분연히 말했다.

“가져가긴 뭘 가져가요! 판나코타를 눈앞에 보여주고 뺏어가다니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이번에는 그녀 앞의 네 사람이 모두 침묵했다. 말을 잃었다는 쪽이 맞았다. 그러나 클로디아는 지지 않고 판나코타를 한입 더 떠먹었다. 그 모습이 사뭇 전투적인 나머지 비장해 보일 정도였다.

“엄청 맛있네! 이것도 진짜 맛있어요! 이런 걸 비싸다고 안 먹다니 무슨 짓이에요! 만든 사람한테 예의가 아니잖아요?”

“그, 클로디아….”

시빌이 재차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클로디아는 시빌에게 대답하지 않았다. 모두가 여태껏 간과하고 있는 사실이 있었다. 그녀는 포르투의 공주님이었다.

다시 말해, 매일 달콤한 디저트를 식사 때마다 맛봐온 사람이었다는 얘기다. 한창 단것을 좋아할 나이다. 클로디아는 풍미 좋은 판나코타를 입에 물었을 때, 눈물이 날 뻔했다. 오후면 달콤한 과자들과 함께 곁들여 마시던 차가 생각나서다.

포르투는 하늘에 떠 있는 곳이라 어디에서든 바람이 불었지만, 그녀의 방에 딸린 테라스는 바람이 유독 살랑살랑 불었다. 햇살 좋은 날이면 테라스에 테이블을 놓고 바람을 즐기며 맛있는 디저트들을 즐기던 생각이 나서 눈물마저 핑 돌았다.

클로디아는 분연히 소리쳤다.

“저는 돈 낼 거예요!”

가격은 됐으니 닥치고 내 돈 받아.

그녀의 푸른 눈 안에서 이글이글 타오르는 불꽃에 모두 할 말을 잃었다. 클로디아는 빠르게 음식에 대한 감상을 피력했다.

“세상에. 우유를 굳히기만 한 게 아니라 위에 우유 크림도 올렸네요? 같은 색이라 눈치를 못 챘는데. 풍미가 엄청나게 진해요. 그리고 달아요! 설탕 맛은 아닌데? 무슨 맛이죠?”

잠자코 있던 헬렌이 답했다.

“설탕은 비싸서 이런 촌동네에서는 못 써. 사탕수수즙을 짜서 넣었지.”

“그래서 이런 진한 맛이 낫구나! 풀냄새도 조금 나고요! 거친 냄새지만 오히려 다른 잼과 곁들이지 않은 덕분에 재미있는 맛이 됐어요!”

클로디아는 맞받아치더니 활짝 웃었다.

“정말 맛있어요!”

“…다행이네.”

헬렌이 옅게 웃었다. 이어 데미안도 그런 클로디아를 보더니 숟가락으로 판나코타를 떠서 입에 넣었다. 그리고는 헬렌에게 “맛있습니다.” 하고 짤막하게 말했다. 시빌이 볼멘소리를 했다.

“뭐야, 이러면 내가 제일 나쁜 사람 되잖아요!”

“무슨 상관이에요, 솔직히 식비 내가 다 내잖아요!”

“그건 그렇지만! 피고용인이 고용주 눈치 보는 건 당연하죠!”

“저는 밥값으로 피고용인 눈치 보게 하는 악덕 고용주 아니거든요! 안 먹을 거면 내놔요!”

클로디아의 말에 시빌이 코를 찡그리며 웃더니 마저 남은 판나코타 한 접시를 제 앞으로 끌어당겼다.

“별수 없군요. 저도 멋지게 한 접시 먹어치우는 수밖에.”

세 사람이 하는 양을 지켜보던 여관 주인은 당혹스러운 얼굴이었다. 그는 잠시 고민하더니 세 사람에게 말했다.

“정말 죄송합니다만 손님, 제가 혹시 손님들께 부담을 드렸다면 죄송합니다. 억지로 드시라는 의도로 헬렌을 구박한 건 아니었습니다.”

“저 억지로 먹은 적 없어요! 엄청 맛있는데요!”

클로디아가 대답했다. 주인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래도 죄송합니다. 그게 저 녀석 밥은 엄청나게 맛있어서 손님들이 대체로 만족하시기는 하는데, 아무래도 가격이 부담되는 메뉴가 가끔 있어서 말입니다.”

“우유가 남는데 어떻게 하란 말이야?”

헬렌이 짧은 머리카락을 흔들며 짜증을 냈다. 주인도 맞받아쳤다.

“보관해뒀다가 내일 팔라고!”

“말이 좋아서 보관이지, 상하면 어쩌려고?”

“그렇다고 이렇게 우유가 많이 들어가는 요리를 해? 지금 운이 좋아서 그렇지, 이 손님들이 화를 냈으면 어쩔 뻔했어? 여기 들어간 우유를 모조리 버리는 셈이잖아!”

주인은 허리에 손을 짚고 짜증을 냈다. 그러나 헬렌도 만만치 않았다.

“아무도 내 요리 먹고 돈 내기 싫어한 적 없었거든?”

“얼씨구. 그야 네가 있었던 루메토에서나 그렇지! 다들 웃으면서 먹긴 하지만, 뒤에는 내게 와서 너무 비싸다고 불평한다구! 그리고 족히 일주일은 식당에 발길을 끊어!”

루메토. 자르지스로 가는 길목에 있는 남부 도시다. 클로디아에게는 익숙한 지명이었다. 주인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세 사람에게 사정 설명을 했다.

“그게 말입니다, 이 지역은 대부분 음식을 사 먹거든요. 그런데 저 녀석이 가끔 묻지도 않고 내는 요리가 너무 비싸서 다들 툴툴대지 뭡니까.”

얘기를 들어보니 투르는 오가는 사람이 많아 작은 마을치고는 제법 식재료 공급이 원활했다. 재료가 싸니 식당도 염가에 음식을 팔았다. 게다가 마을 사람들은 대부분 근처 도시를 오가며 상업에 종사했다. 농사가 아니다. 그러다 보니 식당에서 음식을 사 먹는 것이 훨씬 편하다는 인식이 투르 전체에 퍼졌다.

“어쩐지 사람들이 맛있는 음식이 있는 집을 너무 잘 알고 있더라니.”

시빌이 클로디아에게 속삭였다.

“대부분 지역들은 사람들이 술집이나 대강 추천해주기 마련이거든요. 작은 마을이라면 음식은 다들 집에서 해 먹기 마련이니까. 그런데 여긴 좋은 식당 이름이 바로 나오더군요.”

“아무튼, 저희 집 음식도 원래는 평범했는데 저 녀석이 오고 나서는 성황이었습니다. 그야 드신 만큼 아시겠지만, 솔직히 맛은 있거든요.”

주인이 이어 호소했다.

“그런데 문제는 할 수 있는 메뉴를 정해놓고 주문받는 게 아니라, 제멋대로 주문 없이 만들어 내놓는다는 겁니다. 그리고 설명도 하지 않아서, 들어간 재료에 따라 엄청 비싼 요리도 가끔 나오거든요. 신나게 먹어놓고 나서 돈을 내려고 보니 일주일 치 식비가 훅 나가 버리는 경우가 생기는 겁니다.”

“어이쿠….”

시빌이 어깨를 움츠렸다. 확실히 작은 마을에서 동네 장사를 하는 사람이라면 신경 쓰일 법한 사연이다. 동네 장사는 맛도 중요하지만, 가격도 굉장히 중요하기 때문이다.

“손님들처럼 마음씨 좋은 분들은 신경 쓰지 않고 드신 후에 돈을 내시겠지만, 마을 사람들에게서는 불만이 들어오니 저도 신경을 안 쓸 수가 없습니다. 게다가 지금 드신 음식은 우유가 엄청나게 들어가거든요. 우유는 잔으로 팔아도 꽤 가격이 나가는 건데, 그렇게 팔아버리니까!”

어쩐지 점점 주인의 하소연이 되어가는데…. 눈알을 굴리던 클로디아가 손을 들었다.

“그러면 헬렌을 안 쓰시면 되는 거 아닐까요…?”

주인이 이마를 구겼다.

“저도 그러고 싶은데, 이 녀석이 저한테 빚을 졌거든요.”

“빚이요?”

클로디아의 물음에 주인은 헬렌에게 턱짓을 했다.

“잘난 네가 설명해라.”

“…술 먹고 격투를 조금.”

격투? 클로디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주인은 한껏 비아냥대는 목소리로 말했다.

“겨억투우? 격투? 그게 격투냐?”

“저기, 무슨 문제라도….”

“혼자 술에 취해 멀쩡한 제 가게와 한판 붙은 것도 격투라면 격투일 수 있겠죠!”

“….”

세 사람은 곧 눈앞의 헬렌이 꽤 대단한 주사가 있으며, 이 마을을 잠시 지나가던 중 여관에 묵으며 늦은 식사를 하다가 술을 마시고 이 가게의 집기를 모두 때려 부순 이야기를 듣게 됐다. 당황해 입을 뻐끔거리는 클로디아에게 주인이 한숨을 쉬었다.

“문제는 이놈이 돈이 한 푼도 없다는 겁니다. 그날 식당 집기를 변상하려면 적어도 반년은 일을 해줘야 하게 생겼죠. 저도 울며 겨자 먹기로 데리고 있는 겁니다.”

“울며 겨자 먹기라니! 이렇게 실력 있는 요리사를 놔두고!”

헬렌이 발끈했지만, 주인이 짜증을 냈다.

“애초에 나 혼자 운영해도 괜찮았거든!”

“괜찮긴! 내가 식당 다 때려 부수는 것도 모르고 나가서 소 젖 짜고 있었던 놈이!”

그리고 세 사람은 곧 헬렌에게서, 여관 주인이 본래는 아내와 이 여관을 운영하고 있었지만, 아내가 출산 때문에 쉬러 친정 마을에 가 버린 바람에 최근에는 계속 혼자 운영 중이었다는 뜻밖의 투머치 인포메이션까지 알게 되었다. 디저트 한 그릇 먹으려다가 쓸데없는 이야기를 듣게 된 시빌의 눈이 아래위로 굴렀다.

그때였다.

“아무튼 잘 먹었습니다.”

“어머나, 데미안. 언제 다 먹었어요?”

데미안은 그사이 조용하게 판나코타 접시를 싹 비운 뒤였다. 클로디아가 눈을 깜박거리며 신기해하다 말고 생각난 듯, 제 접시를 빠르게 비워냈다. 그리고는 주인에게 안타까움을 표현하면서도 헬렌을 이해해달라고 당부했다.

“하지만 다양한 재료로 좋은 요리를 하는 건 요리사들의 자부심 아니겠어요? 조금이라도 더 맛있는 요리를 손님들에게 대접하려는 사고방식은 멋지다고 생각해요.”

“맞아!”

헬렌이 첨언했으나 주인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그녀의 귀를 잡아당겼다.

“아야야야야.”

“하지만 이런 시골에서는 그런 사고방식은 곤란하다고. 넌 가서 설거지나 해. 아무튼 고맙습니다, 손님들. 하지만 내일부터는 부디 헬렌에게 무슨 메뉴인지, 얼마인지 정도는 물어봐 주세요.”

“네에!”

클로디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헬렌과 주인이 서로 티격태격하며 주방 안으로 사라졌다.



 

***



 

“있잖아요, 공주님. 아까의 그 헬렌 어떻습니까?”

“헬렌이요?”

시빌은 웃옷을 온통 벗고 침대 위에서 클로디아의 치료를 받고 있었다. 디자이어는 잠에 들었지만, 디자이어의 힘은 시빌에게 그럭저럭 전달되고 있는 모양이었다. 치료라고는 해도 대부분 손을 잡고 멍하니 앉아 있으면 되는 종류의 마법이었고, 두 사람은 매번 어떻게든 말할 거리를 찾았다. 지금도 그랬다.

“예. 빚이 좀 있다고 했잖습니까.”

“네 그렇게 말했어요.”

“저희가 빚을 갚아주고 요리사로 영입하는 건 어때요?”

시빌은 아까 전 판나코타를 그렇게 열심히 먹은 이유에 관해 클로디아에게 긴 설명을 들은 참이었다. 휴대식량을 취식하던 요 며칠은 이 공주님에게 생각보다 꽤 괴로운 기간이었던 모양이다. 그나마도 땅굴에서 거인들이 준 말린 과일이 약간의 당분 공급은 해 주었지만, 그게 어디 설탕을 듬뿍 쓴 음식과 같겠는가.

시빌의 제안에 클로디아는 대번에 혹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한쪽에 기대앉아 검을 손질하고 있던 데미안이 고개를 저었다.

“곤란합니다.”

“왜요?”

“아시지 않습니까. 그렇게 여유 있는 여행이 아닙니다. 천천히 세상을 유람하시는 여행이라면 몰라도, 저희는 배가 완성되면 바로 자르지스로 향해야 합니다. 앉아서 불을 피우며 맛있는 음식을 즐기기란 요원합니다.”

단 하나도 틀린 말이 없었다. 클로디아의 손을 잡고 있던 시빌이 그녀 대신 엑-하는 표정을 지었다.

“데미안. 당신 친구 없죠.”

“…그 이야기가 지금 왜….”

“맞는 말도 너무 얄밉게 해서요.”

그제야 클로디아가 킥킥 웃었다. 데미안은 고개를 저었다.

“제 말에 틀린 점이 하나도 없다는 얘기도 되는군요.”

“우와, 진짜 얄미워….”

“로드를 지키는 데도 한계가 있습니다. 여기서 비전투원이 하나 추가되면 정말 어려워집니다. 로드, 요리사를 데리고 움직이는 게 가능했다면 저는 포르투에서 로드의 시녀가 따라오겠다고 했을 때부터 승낙했을 겁니다.”

클로디아는 울며 따라오겠다고 한 노바라를 떠올렸다. 갑자기 지독히도 그녀가 보고 싶어졌다. 아니, 포르투가 그리웠다. 달콤한 설탕 때문에 이런 기분이 드는 걸까. 금세 시무룩해진 클로디아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곤 말이 없어졌다. 시빌이 데미안에게 입 모양만으로 말했다.

당신 분위기 싸하게 만드는 거 취미죠.

데미안은 시빌을 무시했다.



 

***



 

클로디아는 새벽에 눈을 떴다. 평소라면 조금 더 잤을 테지만, 희한하게 몸이 개운했다. 얼마 못 잤을 텐데 왤까. 어제저녁에 제대로 씻고 잠옷을 챙겨 입고 잔 덕일까? 클로디아는 고개를 갸웃하며 일어나 앉았다. 잠을 더 청해보려고 했지만, 잠이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창밖을 보니 아직 바깥은 어둑어둑했지만 하늘이 새파란 게, 곧 동이 틀 것 같았다. 어차피 동이 트면 나가야 하니까 일찍 나갈까? 웬일로 기특한 생각을 했다며 속으로 스스로를 칭찬한 클로디아가 키득키득 웃었다.

실크 잠옷을 예쁘게 개어보려고 했지만 쉽지 않았다. 시녀들은 어떻게 그렇게 옷을 예쁘게 정리하는 걸까. 그녀는 궁금해 하며 디자이어를 콩콩 두들겼다. 디자이어는 아직도 자는 듯했다.

“잠꾸러기.”

클로디아는 디자이어에게 핀잔을 주었다. 그러나 여전히 응답이 없는 걸로 봐서, 정말 잠이 깊게 든 모양이다.

‘뭐, 상관없지 않을까? 훈련은 딱히 디자이어가 깨어 있어야만 할 수 있는 건 아니니까.’

그녀는 셔츠와 가죽바지를 입고, 부츠를 신었다. 위에 옷을 더 껴입을까 했지만, 디자이어를 들고 휘두르다 보면 땀이 줄줄 났다. 옆구리에 디자이어를 끼고 여관 1층으로 내려와 탁 트인 뒤뜰로 향했다. 공기는 차가웠고, 새벽별만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으흠. 좋당.”

클로디아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차가운 공기가 가슴 속으로 들어오는 게 어쩐지 오늘은 좋은 일이 있을 것 같았다.

‘쥬버린 오빠가 가끔은 새벽에 일어나 공기를 마셔 보라고 했던 게 이런 기분 때문이었을까?’

쥬버린 왕자는 늘 새벽에 잠들고 새벽에 일어났다. 언제 자는지도 모르게 밤늦게까지 일했고, 가장 일찍 일어나 일했기 때문이다. 클로디아는 늘 해가 중천에 떠야만 겨우 일어났는데. 그녀는 새삼스럽게 오빠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을 후회하며 걸었다.

어디선가 붕붕 소리가 들렸다. 벌들도 아침 일찍 일어난 걸까? 하지만 나를 쏘면 싫은데! 그렇게 생각하며 뒤뜰에 도착한 그녀는 깜짝 놀랐다.

“…로드?”

“어, 어머.”

아직 자고 있을 거라고 생각한 데미안이 뒤뜰에 있었기 때문이다. 벌 소리라고 생각했던 소리는 데미안이 검을 휘두르는 소리였다. 이마에 약간 맺힌 땀이, 그가 이미 나온 지 좀 됐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이 시간에 어쩐 일로….”

“잠이 좀 일찍 깨서요! 아하하. 데미안은…. 혹시 잠 못 잤어요?”

“아닙니다.”

데미안은 고개를 흔들었다.

“저도 희한하게 눈이 뜨여서 다시 잠을 청했는데, 더 잠이 오지 않더군요. 그래서 로드가 나오시기 전에 잠시 몸을 풀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말한 데미안은 조금 망설이다 덧붙였다.

“…최근 저도 훈련을 게을리한 것 같아서요.”

게을러요? 누가요? 클로디아는 황당한 기분을 감출 수 없었다. 저 데미안 알파가 게으르다면 세상의 모든 사람 중 게으르지 않은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녀가 당황한 기색을 눈치챘는지, 데미안이 다시 말을 더했다.

“아닙니다. 그보다 허리는 괜찮으십니까.”

“어, 음…. 어라? 그러고 보니….”

클로디아가 허리를 돌려 보다 눈을 동그랗게 떴다.

“허리가…. 괜찮네요?”

“그렇습니까. 다행입니다.”

놀라운 일이었다. 어제저녁까지만 해도 디자이어를 백 번 휘두른 여파로 죽을 것 같았는데, 지금은 말짱했다. 데미안이 아주 옅게 미소 지었다.

“잘 드시고 푹 쉬신 것 같군요.”

“그, 그런가요?”

“예. 여관의 침대가 좋은 것 같습니다.”

“시빌은요?”

“글쎄요. 제가 나올 때는 자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만….”

남자랑은 한 침대 안 쓴다더니 잘만 자네.

클로디아가 피식 웃고는 디자이어를 잡았다. 여전히 무거웠지만, 어쩐지 어제보다 훨씬 가벼운 것 같기도 했다. 그녀는 데미안이 뭐라 말하지 않아도 먼저 디자이어를 들었다. 데미안은 그런 클로디아 옆에서 조금 비켜나 하던 훈련을 마저 하기 시작했다. 그녀를 가만히 쳐다보느니 하던 훈련을 마저 하겠다는 심산이었다.

놀랍게도 데미안이 자신의 훈련을 모두 마칠 때까지, 클로디아는 디자이어를 한 번도 떨어트리지 않았다.

‘이상하다?’

분명 며칠 전만 해도 무거워서 팔이 바들바들 떨렸는데. 그사이 익숙해졌나. 데미안도 그녀를 이상하게 여긴 건 마찬가지였다.

“오늘은…. 어쩐지 잘 견뎌내시는 것 같군요.”

“그러게요…?”

그녀가 디자이어를 들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곧이어 데미안은 그녀에게 휘두르기 백 번을 시켰다. 이번에야말로 힘들겠구나. 그녀는 각오하고 디자이어를 휘둘렀다.

그리고 백 번을 모두 휘둘렀을 때, 이번에야말로 그녀는 정말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저기, 데미안.”

“…예.”

“저 백 번 다 채운 거 맞죠?”

“…맞습니다. 좀 이상하군요…. 원래 이렇게 체력이 좋으셨던 것인지.”

데미안이 가느다랗게 눈을 뜨며 그녀를 쳐다봤다. 클로디아는 저도 모르게 손을 내저었다.

“혹시나 해서 말하지만, 저 절대로 꾀 같은 거 안 부렸거든요!”

“…그런 생각 한 적 없습니다.”

데미안은 그녀를 못 미덥다는 듯 다시 쳐다보고는 말을 이었다.

“괜찮으시다면 가로로 베기를 한번 해 보시겠습니까? 휘두르기와는 조금 다르지만, 동작의 기본은 같습니다.”

“네, 그럴게요. 어떻게 하는 건가요?”

데미안이 자신의 검을 들고 선보였다.

“제 검은 한손검이지만, 디자이어는 양손검이니 자세만 참고하십시오. 똑바로 서서 발은 어깨너비로 벌리고….”

동작은 단순했다. 데미안은 오십 번을 주문했고, 클로디아는 몇 번 자세를 지적받았으나 오십 번도 기어이 해냈다. 그녀가 가로로 베기를 끝냈을 때, 하늘에는 하얗게 해가 떠 있었다. 아침을 맞은 새들이 뽀르르, 하고 가지에서 가지로 날았다.

그리고 두 사람 다 강렬한 의문에 휩싸였다.

“왜… 멀쩡하죠?”

“…혹시 어제 시빌이 체력 강화 마법이라도 걸어주었습니까?”

데미안의 질문에 클로디아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런 건 없었어요. 이상하네요. 이 여관에 혹시 체력 강화 마법이 걸려 있는 건 아닐까요?”

대륙에는 간혹 몇백 년 된 건물들이 존재했다. 그런 건물들 중에는 고대로부터의 마법이 걸려 있는 곳이 가끔 있었다. 하지만 정말 그런 마법이 걸려 있다면 그들이 숙박하기 전에 여관 주인이 말이라도 한마디 했을 것이다.

“아니, 애초에 그런 마법이 걸려 있는 건물은 엄청나게 비쌉니다. 그런 건물에서 푼돈을 받는 여관이나 하고 있을 리 없는데….”

“뭘까요…?”

클로디아는 땀도 거의 흘리지 않고 있었다. 목 뒤가 약간 뜨끈거리긴 하지만 그뿐이다. 며칠 여행했다고 체력이 이렇게나 늘어날 리도 없는데…. 두 사람은 그대로 서서 이 이상하도록 체력이 늘어난 상황에 대해 고민했다. 데미안은 수많은 가능성을 제기했다. 롤리아 숲에서 뭔가 일이 있었다거나, 아니면 뭔가 땅굴에서 먹었다거나. 하지만 모두 가능성이 낮았다.

“애초에 로드께 무슨 일이 있었다면 제가 모를 리가 없는데….”

데미안이 턱을 어루만지며 고민했다. 클로디아는 그사이 제 체력을 가늠해보려 다시 가로로 베기를 시도하고 있었다. 데미안이 그녀를 만류했다.

“그만두십시오. 우리가 모를 이유로 아주 잠깐만 체력이 좋아진 거라면, 이후 돌아올 후폭풍이 클 겁니다.”

“그럴까요…?”

“예.”

데미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클로디아는 영문을 모른 채 데미안을 바라봤다.

“조금 후에 디자이어에게 물어봐야겠군요. 일단은 팔이라도 풀어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어, 팔이요?”

“예. 로드께서 일찍 나오셔서… 생각보다 훈련이 일찍 끝났기에.”

그러니까, 데미안은 혹시 모를 후폭풍을 위해 클로디아의 팔을 마사지해주겠다고 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섰다.

“아, 아니 괜찮아요.”

“…그때 사흘을 내리 근육통에 시달리셨던 것 같아서요. 싫으시다면 알겠습니다.”

데미안은 빠르게 손을 거두었다. 클로디아는 왠지 머쓱해져서 디자이어를 잡은 손을 꼼지락거렸다.

“그게 아니라…. 지금은 정말로 안 아파서요. 땀 냄새도 나고….”

“예.”

기사는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시원스럽게 돌아섰다. 어쩐지 클로디아가 다 아쉬워질 정도였다. 그때였다.

“두 분 여기 계셨어요? 일찍부터 고생하시네요!”

시빌이 눈을 반짝이며 이쪽으로 돌아 들어오고 있었다. 클로디아가 손을 들어 인사했다.

“좋은 아침이에요, 시빌. 어쩐지 잠이 일찍 깨서….”

“그렇습니까? 저는 방금 명상을 마친 참인데, 좀 신기한 일을 겪어서요!”

“신기한 일이요?”

시빌은 양손을 들어 마치 경사라도 일어난 사람처럼 흔들었다.

“지금 저는 대마법사 같은 기분입니다!”

“예?”

“오늘 명상하는데 희한하게 마력이 충만하게 들어차더니, 평소의 두 배는 되는 마력이 들어찼지 뭡니까! 이 여관 터가 좋은가 봐요!”

데미안과 클로디아는 시빌의 말을 들은 다음 순간 시선을 마주했다.



 

***



 

“클로디아도 그렇다고요?”

시빌은 놀랍다는 듯이 눈을 크게 떴다. 어차피 식당이 영업을 시작하기까지는 조금 시간이 남아서, 클로디아도 데미안도 각자 씻고 다시 모인 후였다.

헬렌이 잠이 덜 깬 얼굴로 주문을 받았다. 어제의 일 때문인지 오늘 아침 메뉴는 빵과 수프라고 알려주기까지 했다.

그녀가 주방으로 들어가자, 클로디아는 오늘 아침 신기하게도 체력이 남아돌았던 이야기를 했다. 데미안도 마찬가지였다.

“오늘 아침에 둘 다 눈이 일찍 떠졌거든요. 심지어 해도 뜨기 전에, 하늘이 새카만데 말이에요.”

“저도 그랬는데!”

“제가 일어났을 때 시빌, 당신은 자고 있었는데요.”

시빌의 말을 데미안이 맞받아쳤다. 마법사는 눈을 실룩거리며 웃었다.

“그야 당신 일어난 건 알고 있었죠. 그냥 좀 늑장 부렸을 뿐입니다.”

“늑장…?”

“생각을 해 보세요. 데미안이 일어났는데 제가 눈을 뜨면서 ‘일어나셨어요?’라니. 그게 무슨 애매호모한 아침 풍경입니까. 저는 아침부터 일어나서 남자 얼굴에다가 아침 인사 하고 싶지 않다고요. 심지어 저랑 같은 침대 쓴 남자라니. 죽어도 사절입니다.”

“….”

경박한 말이었지만 어떤 뜻인지는 알 것 같아 클로디아는 입을 가리고 킥킥거렸다. 데미안의 얼굴은 변함없이 무표정했으나, 어쩐지 그 뒤로 삐죽삐죽 솟은 가시가 보이는 것만 같았다.

[아함. 무슨 일이길래 이렇게 호들갑이야?]

그때 디자이어가 깨어났다. 세 사람은 동시에 디자이어를 반겼다.

“디자이어! 좀 들어봐!”

[뭔데?]

클로디아는 다시금 시빌에게 했던 말을 늘어놨다.

“우리 셋 모두 희한하게 오늘 아침에 상태가 좋다니까! 이상할 정도로 말이야!”

시빌도 고개를 갸웃했다.

“뭔가 마법적인 일이 있었던 걸까요? 사실 저도 터가 좋은 곳에서 명상을 하면 마력이 충만해지는 경험은 종종 했지만, 이런 곳은 처음이거든요.”

데미안이 마지막으로 첨언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새벽에 검기를 뻗어봤는데, 하마터면 뒤뜰 근처의 나무를 날릴 뻔했습니다.”

검기가 데미안이 평소에 내던 것보다 훨씬 길게 뻗었다는 소리다.

[희한하네. 셋 다 나 자는 사이에 뭐 했어?]

“아니, 밥 먹고 씻고 잤는데?”

[그럼 뭐지? 그냥 푹 쉬어서 그런가? 내가 인간이 아니라 알 길이 없네. 유독 마력이 충만한 곳도 아닌 것 같은데, 여긴.]

그때였다. 헬렌이 주방에서 한 손에는 냄비를 들고, 한 손에는 그릇 세 개를 들고 나타났다. 그릇 세 개 위에는 폭신한 흰 빵이 올라와 있었는데, 갓 구운 듯 기막힌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클로디아는 체면도 잊고 코를 킁킁거렸다.

“손님들이 이렇게 일찍 일어날 줄 몰랐어. 그래서 재료 준비할 시간이 없어서, 방금 구운 빵과 수프뿐인데.”

괜찮아요! 라고 답하려고 했다. 그러나 디자이어가 빨랐다.

[저거다!]

세 사람, 아니 네 사람 다 움찔했다. 헬렌은 놀란 나머지 그릇을 놓칠 뻔했던 것이다. 그녀는 기겁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봤다.

“뭐야? 무슨 소리야?”

[이거네! 이거야!]

“히익, 뭐야?”

헬렌이 겁을 집어먹는 통에, 클로디아가 그녀를 진정시켜야 했다. “죄송해요, 시빌이 복화술을 좀 하는데….”

졸지에 복화술사가 된 시빌이 당황한 눈으로 그녀를 쳐다봤지만, 이내 하하 웃으며 말했다.

“맞아요! 저는 근방에서 버금가는 복화술사죠!”

“…손님, 그런 걸 할 때는 좀 예고라도 해주길 바라.”

그제야 헬렌이 진정한 듯 그릇을 내려놓고 말했다. 그녀는 조금 짜증이 난 듯했다.

“뜨거운 수프를 들고 있는 요리사를 놀래키면 돌아오는 건 화상뿐이라고.”

“죄송합니다. 맛있을 게 뻔한 수프를 보니 너무 즐거워져서 그만.”

시빌은 변죽 좋게 웃어 보이며 헬렌에게 치댔다. 한술 더 떠 “제 복화술은 비싼데, 요리가 맛있어서 특별히 보여드리려고 한 거라고요!”라는 소리까지 지껄였다.

“됐어. 기다려 봐. 파테 쪼가리라도 조금 썰어올 테니.”

헬렌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었지만, 어쨌든 확실히 기분은 좋아진 듯 돌아서 주방으로 들어갔다. 그제야 클로디아가 검집을 흔들었다.

“무슨 짓이야, 디자이어. 헬렌이 놀랐잖아.”

“그보다…. 저거라는 게 무슨 뜻입니까?”

[너희 앞에 있는 음식!]

“예?”

[너희 어제저녁에도 저거 먹었니?]

디자이어는 보기 드물게 흥분한 듯했다. 클로디아가 검집을 몇 번 더 흔들고서야 디자이어는 말을 이었다.

[이 음식들, 정령의 가호를 받았다고.]

“뭐라고? 그게 가능해?”

[너희들 눈에는 안 보이나 본데, 저 수프도 빵도 먹은 사람을 건강하게 만들어달라는 기원이 깃들어 있다고.]

세 사람이 시선을 마주했다.

“기원이요…?”

“그야 당연히 직업의식이 투철한 사람이라면 그런 기원은 하겠지만…. 그런 건 음식을 만드는 사람은 대부분 생각하는 거잖아요?”

[아냐, 아냐. 이건 조금 달라.]

디자이어는 딱 잘라 말했다.

[아마 저 요리사는 정령의 축복을 받았을 거야.]

정령의 축복. 디자이어는 어떤 정령인지는 모르지만, 음식에서 오래된 정령의 기운이 느껴진다고 말했다.

[모르긴 몰라도 그것 때문에 너희들이 그런 것 같은데. 앗, 나온다.]

일단은 헬렌이 어떤 사람인지 모르니 디자이어의 정체는 감춰두는 것이 좋았다.

클로디아는 빠르게 테이블에 턱을 괴고 헤헤 웃었다. 뭔가를 가지고 나오던 헬렌이 한쪽 눈썹을 이상하다는 듯 찡그렸다. 그야, 세 사람 모두가 신기한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뭐야?”

“아니, 수프가 너무 맛있어서요!”

“…너희들 모두 숟가락을 든 흔적이 없는데?”

헬렌은 다가와 날카롭게 지적했다. 클로디아가 말을 더듬었다.

“아, 아니…. 수프가 너무 맛있을 것 같아서 다들 설레서 숟가락도 못 들 정도였어요.”

“…내 요리가 맛있긴 하지만, 그 정도는 아닌데. 모셔 놓고 구경하라고 만든 음식이 아냐. 식기 전에 빨리 먹어.”

헬렌이 콧방귀를 뀌며 가지고 온 것을 내려놓았다. 고기 으깬 것에 버섯과 견과류, 통후추를 섞어 굳힌 뒤 훈제로 익힌 파테였다.

“나 먹으려고 만든 건데, 너희들한테도 맛이나 보라고 가져온 거야. 더 달래도 못 주니까 수프에 곁들여서 빵이랑 먹어.”

“세상에.”

클로디아가 감격한 눈을 했다. 그때 시빌이 잽싸게 물었다.

“저기, 헬렌. 뭐 하나 여쭤봐도 됩니까?”

“응? 뭐야?”

“제가 사실은 마법사거든요.”

헬렌은 시빌의 말에 놀란 듯이 오, 하고 입술을 오므렸다. 어쨌든 마법사라는 것은 생각보다 흔하지 않은 존재였기 때문이다. 다들 제 연구실이나 마탑에만 처박혀 있기 때문에, 나돌아다니는 마법사를 만나기란 꽤 어렵다.

“그랬어? 그런데 그게 뭐?”

“그, 헬렌이 만든 음식이 마법적으로 꽤 효과 있어 보여서….”

“뭐야. 아첨은 관둬.”

헬렌이 어이없이 몸을 흔들며 웃었다. 머리카락이 경쾌하게 찰랑거렸다.

“마법으로 착각할 만큼 맛있다는 칭찬이라면 유쾌하게 듣지!”

“…그게 아니라.”

끼어든 것은 데미안이었다. 데미안은 빵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희 마법사가 이 요리에 마법적 기운이 깃들어 있다고 말한 겁니다. 사실 이 마법사는 대부분 허튼소리를 하지만….”

시빌이 눈을 부릅뜨고 데미안에게 이를 드러내 보였다. 그러나 데미안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어제 당신의 요리를 먹고 나서 우리 셋 모두 아주 잘 잔 것은 물론이고 아침부터 힘이 넘칩니다.”

“아하하, 그랬어? 그야 당연하지! 내가 만든 요리를 먹은 사람들은 모두 그렇게 말한다고! 그렇게 정색하고 말할 것까지야 없는데.”

헬렌이 호쾌하게 웃었다. 그러나 데미안은 고개를 저었다.

“그게 단순히 좋은 아침으로 마무리됐다면 저희도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게 심상찮은 수준이라 여쭤보는 겁니다. 마법사는 정령의 가호 같다고 하더군요.”

“맞아요, 맞아요.”

시빌이 잽싸게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 혹시 정령의 축복을 받은 적이 있나요? 음식에 일시적으로 마법을 거는 건 마법사들 사이에서도 흔한 연구긴 하지만, 마법은 음식이 소화되는 순간 없어져 버리거든요. 하지만 이렇게 상태가 유지된다는 건 정령밖에 없어요.”

그제야 헬렌이 눈을 껌벅였다. 클로디아도 첨언했다.

“있죠, 저는 사실 며칠 전까지 이 검을 제대로 들지도 못했거든요. 그런데 오늘은 이 검을 백 번 넘게 휘둘렀다고요.”

“저는 평소보다 두 배가 넘는 마력을 모았답니다!”

“저도 비슷합니다.”

세 사람이 입을 모아 효과에 대해 논하자, 헬렌은 영 어리둥절한지 머리를 긁었다.

“이거 참. 이런 얘기는 처음인데….”

“가르쳐 주세요. 혹시 정령의 축복을 받았나요? 아니면 다른 거라도 특별한 이유가 있을 것 같은데….”

헬렌은 시빌의 말에 아리송하다는 얼굴로 조금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그게, 비슷한 이야기는 있긴 한데.”

“뭐죠?”

***



 

헬렌은 남부의 루메토라는 도시 출신이었다. 그녀는 그곳에서 나고 자랐지만, 그녀의 어머니는 아니었다. 어릴 적부터 외할아버지와 떠돌던 헬렌의 어머니는 처녀 시절 잠시 머무른 루메토에서 헬렌의 아버지를 만났고, 사랑에 빠졌다.

결국 외할아버지는 헬렌의 어머니를 두고 여행을 떠났다. 그렇지만 몇 년에 한 번씩 루메토에 들러 헬렌의 어머니와 아버지를 만났다. 몇 년 후 태어난 헬렌도 퍽 예뻐했음은 물론이다. 여행을 하지 못할 만큼 늙은 나이가 되자, 외할아버지는 루메토에 작은 집을 샀다. 헬렌은 자주 외할아버지의 집에 놀러 가 그가 들려주는 여행 이야기를 듣곤 했다.

“할아버지는 종종 자신이 정령의 축복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했어. 젊은 시절 여행을 하다가 동굴에 갇힌 정령을 풀어주었고, 그 정령이 대대로 남을 행복하고 건강하게 해주는 사람들이 될 거라는 가호를 내렸다고 했지. 그러니 나도 남을 행복하고 건강하게 해줄 거라고.”

헬렌이 어깨를 으쓱했다.

“하지만 그거야 나이 먹은 할아버지가 손녀에게 흔히 해줄 법한 말이야.”

[그 정령이 어떤 정령인지는 말 안 해줬어?]

이야기를 듣던 디자이어가 다급했는지 갑자기 팍 튀어나와 참견했다. 헬렌은 화들짝 놀랐다가, 시빌을 흘겨봤다.

“얌마. 적당히 해.”

“죄송합니다…?”

시빌이 헬렌에게 사과하면서 억울한지 클로디아가 쥔 검집을 슬그머니 째려봤다. 하지만 디자이어는 얄밉게도 대답하지 않았다. 헬렌이 말을 이었다.

“어떤 정령인지는 잘 기억이 안 나. 게다가 우리 엄마는 요리를 너무 못했다고.”

“….”

“어릴 적부터 집에서 요리는 대부분 내가 했어. 아빠는 지독한 미맹이라 엄마가 하는 음식은 다 맛있다고 했지만, 그건 아빠 얘기고. 나도 먹고살아야 할 거 아냐. 외할아버지 말이 사실이라면 그 딸인 엄마 음식을 먹고 나도 건강해졌어야지. 난 매번 배탈이 났다고.”

클로디아가 눈을 굴려 디자이어 쪽을 바라봤다. 헬렌은 그녀의 시선에 의아해하면서도 덧붙였다.

“내 음식을 먹은 사람들이 흔히 기분이 좋아졌다, 어쩐지 힘이 나는 것 같다 정도의 말을 하긴 했지만…. 이런 반응은 나도 처음이고.”

“하지만 그건 아마 저희처럼 단적으로 바로 효과를 보는 사람들이 없어서 그랬을 겁니다.”

데미안이 헬렌의 말에 첨언했다.

“루메토는 작은 어촌이죠?”

“응. 항구도시라곤 하지만 사실 배들은 작은 고깃배가 대부분이지.”

“그런 곳이야 대부분 어업에 종사할 테니, 저희처럼 바로 효과를 눈으로 직시하긴 어려웠을 겁니다. 저만 해도.”

데미안이 검을 꺼냈다. 갑작스럽게 검집에서 그가 검을 뽑자 헬렌은 기겁했다. 그리고 데미안이 검기를 은은하게 뿜어내자, 두 배로 기겁했다.

“검기? 당신….”

“예. 저는 기사입니다. 그리고 저는 오늘 제가 평소에 뽑아낼 수 있던 검기의 두 배를 뽑아냈습니다.”

헬렌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우와. 짱이네.”

“…남의 일 말하듯….”

데미안이 당황했지만, 헬렌은 씩 웃었다.

“그거야 눈앞에 이런 미남이 있는데, 검기까지 뽑으면서 날 칭찬하면 당연히 남의 일 같지. 내 일 같겠어?”

난데없는 헬렌의 칭찬에 데미안의 얼굴이 미미하게 굳었다. 시빌은 눈이 이만큼 커지고 인중을 길게 늘이더니,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미남…은 미남이긴 하죠….”

성격이 안 예뻐서 그렇지.

마지막 말은 아주 작았지만, 그 자리의 다른 세 사람 모두 똑똑히 들었다. 데미안은 이마를 구겼고, 클로디아는 눈알을 다른 쪽으로 굴리며 모른 척했다. 그리고 헬렌은….

“아하하. 왜. 성격이 나빠?”

“에, 뭐. 당사자 앞에서는….”

“쯔쯔. 마법사 씨가 뭘 모르네. 나긋나긋한 미남보다는 성격 나쁜 미남이 몇 배는 좋은 거야.”

“여자들은 다 나쁜 남자를 좋아한다더니.”

시빌이 툴툴거렸다. 헬렌은 어깨를 으쓱했다.

“나쁜 남자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 나쁘게 굴어도 될 만한 이유가 있는 남자를 좋아하는 거지.”

“무슨 이유요?”

웃음기 다분한 말에 클로디아가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헬렌은 눈을 가늘게 뜨며 클로디아를 내려다보다가 씩 웃었다.

“아가씨 몇 살?”

“저요? 전 열아홉….”

“아하.”

그리고, 헬렌은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클로디아는 그녀가 하는 손짓이 뭔지 잘 몰라서 눈을 깜박거리기만 했다. 그녀가 제 손짓을 알아보지 못하자, 헬렌은 눈썹을 들썩거리며 미소 짓곤 낮게 속삭였다.

“이유는 대부분 침대 위에 있지.”

“어머!”

그제야 알아들은 클로디아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데미안은 이번에야말로 얼굴을 와장창 구겼다. 그리고 시빌은 “크히힉!” 하고 웃으며 테이블에 머리를 박았다.

어쨌든 짧은 머리카락을 찰랑거리며 다시 일어선 헬렌은 팔짱을 끼고 어깨를 으쓱였다.

“뭐, 아무튼 그런 효과를 봤다니 기분은 좋은걸. 고마워. 칭찬으로 들을게. 이 빵도 오늘 내가 새벽부터 밀가루를 반죽해서 구운 거야. 본래는 빵집에서 사 오지만, 이 동네 빵은 맛이 없거든. 빨리 식기 전에 먹어.”

“앗, 네….”

그렇게 답하고 클로디아는 엉겁결에 빵을 집어 들었다. 아직도 따끈한 기운이 남아 있는 빵은 보드라웠다. 궁에서 먹던 흰 빵보다는 거칠었지만, 그야 이런 시골에서 구할 수 있는 밀가루란 한계가 있을 것이다.

“맛있게 먹으렴.”

헬렌이 클로디아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클로디아는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지만, 헬렌은 이미 주방으로 뒤돌아 총총 걸어 들어가고 있었다.



 

***



 

[잘은 모르지만 아마 건강의 정령이나 기술의 정령이 아닐까?]

“그런 정령이 있어?”

디자이어는 여전히 세계수 덩굴을 다듬고 있었다. 시빌이 본래대로 돌려놓은 덩굴의 속을 파고, 반으로 자른 다음 옆을 막는다. 진액을 발라내 빈틈없이 막고, 다시 감싼다. 보통 바닷가에서 볼 수 있는 범선이나 작은 고깃배와는 사뭇 다른 모양새였지만, 그럭저럭 귀엽게 생겼다.

클로디아의 질문에 디자이어는 건성으로 답했다.

[솔직히 잘 몰라. 정령들은 사람들의 마음에서 자라나거든. 그것도 아주 오랜 시간을 거쳐서 태어나다 보니 자기가 뭐 하는 정령인지도 모르는 애들도 가끔 있어.]

“어머나. 그럼 네가 매년 세계수에서 태어나게 하는 정령들은 뭐야?”

[좋은 질문이야. 그 애들이 바로 씨앗이 되어 사람들 사이에 퍼졌다가, 점점 자라나면서 의지를 갖게 되는 거거든.]

디자이어가 으쓱댔다.

[나야말로 지금 대륙에서 태어나는 정령들의 부모 같은 존재랄까!]

“정말? 정령들도 그럼 너를 부모로 모셔?”

[…그건 아니야.]

방금 전 의기양양했던 주제에 금세 축 처져서는. 클로디아가 왜인지 궁금해하자, 대답은 데미안에게서 돌아왔다.

“낳은 부모와 기른 부모가 다르니까요. 낳은 부모가 생육권을 주장해도 대부분의 양자들이 기른 부모 쪽을 양육자로 인정하는 것과 같은 거 아닐까요.”

[…비슷하긴 해.]

그럴까? 클로디아는 고개를 갸웃했다. 잘 이해할 순 없지만….

‘쥬버린 오빠 같은 걸까?’

포르투 국왕은 클로디아가 어릴 적 치매에 걸려, 그녀의 양육에 대한 결정권은 거의 쥬버린에게 있었다. 쥬버린은 그녀에게 부모이자 오빠였으며, 가끔은 엄한 선생님이기도 했다. 클로디아는 만약 아버지와 오빠가 서로 상반된 명령을 내린다면 어떨까? 하고 생각해 보고는 곧 데미안의 말을 이해했다. 자신도 아마 머뭇거리긴 해도 쥬버린의 말을 따를 것이다.

“아무튼 마력이 넘치는데 딱히 할 일이 없다는 건 조금 아쉽네요. 이럴 때 팡팡 공격 마법도 쓰고, 적들도 물리쳐야 하는데.”

뒤에서 사과를 먹고 있던 시빌이 말했다. 실제로 그들은 오늘 아침을 먹은 후에도 기운이 넘치는 것을 느꼈다. 빵과 수프, 정성 들인 파테의 효과는 굉장했던 것이다. 클로디아는 밥을 먹은 후 여관에 양해를 구하고 마구간을 닫는 긴 쇠막대를 하나 빌렸다. 디자이어가 힘을 쓰고 있을 때, 막대를 들고 훈련하기 위해서였다.

[뭐, 효과는 당분간 지속되긴 할거야.]

“뭐라고요?”

시빌이 벌떡 일어났다. 디자이어가 심드렁하게 중얼거렸다.

[음식이 소화되고 나서도 지금 그 효과를 누리고 있잖아, 너희들. 물론 같은 사람의 기원이기 때문에 중복 효과를 누리진 못하겠지만 아마 지금 불어난 체력은 저주라도 받지 않는 한 당분간은 계속될걸?]

“헉. 미쳤다.”

시빌이 입을 가렸다. 데미안도 당황해 눈에 힘을 주었다.

“그럼….”

[그 요리사, 아마 변두리 마을 같은 곳에 계속 있었을 테고…. 너희 같은 자들이 가끔 스쳐 지나갔다곤 해도 바로바로 효과가 눈에 나오는 사람은 없었을 거야. 검기를 휘두르는 사람이 흔한 건 아니잖아. 그래서 몰랐겠지만 귀띔해주는 게 어때?]

“귀띔 정도가 아닙니다. 사람들이 알게 되면 그 사람 몸값은 엄청나게 뛸 거라고요!”

시빌이 자신의 당황을 피력했다.

“제가 그런 재주가 있다면 대충 빵 한 덩이에 천 싱은 받을 거예요!”

“…실례되는 말이긴 하지만 그래서 정령들은 시빌에게 그런 축복을 안 내리는 거 아닐까요….”

클로디아가 중얼거렸다. 데미안도 첨언했다.

“그때 피부가 좋아지게 해 주는 정령을 잡으러 갔다가 다쳤다고 했었던 것 같습니다.”

[정령들이 저주를 내릴 수 있다면 저런 놈부터 내릴 거야.]

졸지에 세 군데서 공격을 받게 된 시빌이 항의했다.

“아, 저도 먹고살아야 할 거 아닙니까! 정령은 돈 없어도 살잖아요!”

[마법사한테 노예처럼 잡혀서 팔리라고 내가 죽도록 고생해서 만들어낸 애들 아니거든?]

디자이어의 말이 뾰족해졌다. 시빌은 곧장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잘못했습니다.”

[됐어.]

“하지만…. 그러면 역시 그분을 영입해보는 건 어때요?”

클로디아가 제의했다. 데미안에게 하는 말이었다.

“당분간이긴 하지만, 영구적인 효과는 아닌 거잖아요? 저는 그분을 영입하면, 저희가 자르지스에 도착해서도 잘 싸울 수 있을 것 같은데….”

“저는 빼고요.”

시빌이 끼어들었다. 클로디아는 그를 향해 살짝 눈을 흘겼다. 그렇게 말 안 해도 당신 계약 마왕성 앞까지인 거 나도 알거든!

그래서라도 더 헬렌의 능력이 필요했다. 마왕성 앞까지야 어떻게든 시빌의 경호 하에 들어간다고 쳐도, 마왕성 안에서는 데미안과 둘 뿐이다. 마왕성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으니만큼 아마 그 안에는 마족들이 득시글할 것이다. 마왕 앞까지 갈 수나 있으면 다행이게?

“그분의 요리를 먹고 마왕성에 들어가면 좀 더 잘 싸울 수 있을 테니까요.”

“문제는 우리가 가는 섬이 자르지스라는 겁니다.”

데미안이 그녀에게 답했다.

“그 요리를 제외한다면, 헬렌은 평범한 사람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자르지스라는 말만 들어도 기절할 듯한 표정을 지어요. 남부 출신이라면 더더욱 죽음의 바다를 두려워합니다.”

헬렌이 자르지스라는 행선지를 들으면 대번에 영입을 거절할 것이란 뜻이었다. 클로디아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럴까요….”

“예. 잘은 모르지만, 그녀는 지극히 현실적인 타입 같아 보였습니다. 칭찬을 받는 모습만 해도 그렇지요.”

데미안은 여상하게 헬렌에 대해 평했다.

“로드가 어젯밤 그녀에게 내놓은 음식평은 사실 평범한 사람의 것은 아닙니다. 요리를 생업으로 하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로드께서 아무 음식이나 먹던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챘겠지요. 높은 신분이라는 것도 알았을 거고요. 그런 사람에게 진심을 담은 칭찬을 받고도 들뜨지 않는 성격입니다.”

“아.”

“칭찬은 고맙게 듣겠지만, 우리의 엉뚱한 말은 흘려버리는 겁니다. 쓸데없는 욕심도 부리지 않고요. 그런 사람이 마왕을 죽이러 간다는 우리와 선뜻 동행하겠다고 나설까요?”

클로디아는 이제 고개를 숙였다. 어젯밤과 마찬가지로 시무룩해진 것이다. 시빌은 ‘또 저런다, 또.’ 하는 표정으로 쳐다봤다. 분위기를 싸하게 만드는 데는 아무튼 1인자였다. 하지만 데미안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일단 영입은 제안해 보겠습니다.”

그 말에 클로디아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데미안은 작게 한숨을 내쉬더니 말했다.

“공주님의 말씀도 옳습니다. 어쨌든 그녀가 보여준 요리의 효과는 진짜입니다. 제가 눈으로 확인했으니 더 말을 보탤 필요도 없죠. 그녀가 여관에 진 빚을 갚고, 그를 훨씬 상응하는 보수를 제안해 보도록 하죠.”

“그거면 될까요…?”

“뭐, 그게 아니라면 하늘섬의 거주권을 주는 것도 나쁘진 않겠죠.”

하늘섬의 거주권. 포르투에 사는 것은 대부분의 대륙인들이 꿈꾸는 삶이었다. 클로디아의 눈이 초롱초롱해졌다.

“그런 방법이 있었군요!”

“예. 그리고…. 포르투의 상업 거리에서 식당을 차릴 수 있게 전폭적으로 지원하는 것도 좋겠군요.”

어지간한 사람이라면 모두 혹할 제안이었다. 클로디아는 대번에 기분이 좋아져 디자이어를 재촉하기 시작했다.

“빨리빨리 해! 얼른! 나 빨리 가서 헬렌한테 함께 여행하자고 말할 거란 말이야!”

[세상에는 재촉해서 되는 일이 있고 아닌 일이 있거든?!]

디자이어는 성을 내면서도 한층 더 작업에 속도를 붙였다.

그래도 어제보다는 한층 배 모양을 갖춘 물건이 완성되고 있었다. 디자이어가 잠들고, 시빌이 어제와 같이 축소 마법을 걸고, 클로디아는 배를 들어보려다 또 실패하고 까르르 웃은 다음 세 사람은 마을로 향했다.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



 

식사는 어제저녁과 마찬가지로 훌륭했다. 헬렌을 번거롭지 않게 하기 위해 세 사람은 씻지도 않고 저녁 식사에 임했다. 덕분에 남들과 같은 저녁을 먹을 수 있었다. 오늘의 식사도 좋았지만, 그 후에 간식으로 맛보라고 모두에게 한 점씩 나온 포가 최고였다. 민물생선을 뜨거운 김에 쪄서 말린 후, 그것을 두들겨 포로 만든 물건이었다. 허브를 곁들여 찐 덕에 비린내가 하나도 나지 않았다. 클로디아는 그 포를 야금야금 먹으면서 헬렌의 일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헬렌이 마주 앉았을 때, 데미안은 그녀에게 비장하게 영입을 제안했다.

“어…. 그러니까 당신들하고 여행하면서 식사를 만들어 달라고?”

“예.”

“그 대가로 얼마… 얼마라고?”

“백만 싱입니다.”

셋 중에 가장 차분하고 상식적으로 보인다는 이유로 시빌과 클로디아는 데미안을 지목했다. 그러나 데미안이라 할지라도, 백만 싱은 꽤 비현실적인 금액이었다. 그 증거로 헬렌의 얼굴에 떠오른 감정은 황당함이었기 때문이다.

“백 싱 아니고 백만 싱?”

“예. 현금이 없어 어음으로 지급하겠지만 확실한 금액이고, 언제든 대륙 은행에서 지급받으실 수 있습니다.”

“허.”

헬렌은 팔짱을 끼고 의자 뒤로 기대앉았다. 데미안이 덧붙였다.

“당신이 여관에 진 빚은 백만 싱에서 제외되긴 합니다만….”

“이보세요. 제가 여관에 진 빚은 달랑 만 이천 싱이거든?”

“만 이천 싱도 ‘달랑’이라고 할 순 없는 것 같은데….”

시빌이 끼어들었다가 클로디아의 눈 흘김을 받고 조용해졌다. 헬렌은 머리를 흔들었다.

“백만 싱에 비하면 ‘달랑’이 맞지. 나 참. 이렇게 파격적인 금액으로 스카우트 될 줄은 몰랐는데. 당신들 어디의 귀족이기라도 해? 아니, 근데 백만 싱이면 어지간한 귀족도 못 낼 금액인걸.”

“앗, 저는….”

클로디아가 엉겁결에 자기소개를 하려다가 데미안의 저지에 가로막혔다. 그제야 클로디아는 자신의 신분이 일단은 비밀이라는 것을 깨닫고 얼굴을 붉혔다. 어쨌든 헬렌에게 목적지를 밝히게 되면 결국은 알려질 신분이지만, 그 전에 함부로 말하지 않는 편이 좋다고 이미 데미안에게 주의를 들은 뒤였다.

헬렌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 되겠어.”

“아니, 들어보지도 않고….”

“들어볼 가치도 없어.”

단호한 말로 시빌의 반문을 자른 헬렌은 데미안을 쳐다봤다.

“검기를 쓰는 것을 내 눈으로 확인했으니 당신들이 어디서 온 사기꾼이 아니라는 건 알겠어. 솔직히 내 입장에서는 반가운 제안이긴 하지만, 내가 그 돈을 받을 만한 사람은 아니거든.”

“….”

“위험수당이 아니고서야 이렇게 큰돈을 줄 리가 없지.”

당연하다. 마왕성으로 가는 거니까.

데미안은 차근차근하게 자신의 말을 들어보라고 할 심산이었지만, 헬렌이 빨랐다.

“나에게 설명하려고 하지 마. 대개 이런 종류의 의뢰는 결국 ‘음식에 독을 타 달라’ 같은 걸로 끝나거든. 마법사에 검기를 쓰는 검사라니. 당신들 겉으로는 좀 우스워 보이지만 평범한 사람들은 아냐.”

우스워 보이는…. 그 평가는 어쩐지 클로디아 자신 때문인 것 같아서 그녀는 또 시무룩해졌다. 헬렌은 말을 이었다.

“당신네 같은 사람들에게 의뢰 내용을 들어놓고 나서, ‘아. 역시 안 되겠네요. 못하겠습니다.’ 하고 내가 거절하면 어떻게 될 것 같아? 당신네들이 내 입을 막아야 한다는 결론으로 귀결되면 내 인생만 망가지는 거라고.”

루메토의 시장을 비롯해 여러 도시에서 음식점 일을 했다더니, 산전수전 다 겪은 모양이었다. 클로디아는 저도 모르게 감탄했다. 위험해 보이는 건 접근조차 하지 않으려는 태도는 방어적이었지만, 그래서 어른 같았다.

“안 해.”



 

***



 

고용비를 아무리 많이 책정해봐야 막상 의뢰 내용도 들으려고 하지 않으니 섭외 자체가 안 됐다. 클로디아는 시빌의 손을 잡고 시무룩하게 앉아 있었다. 시빌은 제 허리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이제 뼈는 거의 다 붙었군요. 한시름 놨습니다.”

“그렇게 치료했는데도 아직도 뼈가 안 붙은 게 저는 더 걱정될 거 같아요….”

클로디아가 기가 죽은 채로 말했다. 시빌은 나직하게 웃었다.

“뭐 마법이라는 건 가끔 사람을 터무니없이 이상하게도 만드니까요.”

“이상하게요?”

“예. 마법사들 중에는 마력이 비정상적으로 돌아 온몸이 뒤틀린 사람도 있는걸요.”

“어마나….”

클로디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떻게요?”

“뭐, 팔이 세 개 난다든가 하는 건 예사고요.”

“세상에!”

“피부가 보라색으로 변하는 경우도 있죠. 꼭 마법사가 아니라도 마법적 저주를 받은 사람들 중에는….”

시빌이 계속 창자가 계속 흘러나와 주워 담으며 걸어 다닌 사람이라던가, 머리에 뿔이 세 개나 돋은 사람 이야기를 해서 클로디아는 결국 “손 놓고 귀 막을 거예요!” 하고 본의 아니게 그를 협박하고 말았다.

여전히 한쪽에서 검을 손질하고 있던 데미안이 고개를 저었다.

“시빌. 너무 장난치지 마십시오.”

“뭐, 계속 장난치면 저도 치료를 못 받을 것 같으니 그만하겠습니다.”

시빌이 시원스럽게 웃으며 클로디아의 손을 꼭 쥐었다. 공주는 조금 놀랐다가, 뺨을 발갛게 붉혔다. 몇 번 잡아서 이제는 익숙해졌다고는 해도, 이 마법사가 가끔씩 친근하게 해오는 스킨십은 매번 클로디아를 싱숭생숭하게 만들었다.

‘혹시 시빌이 나를 좋아하는 걸까?’

하늘섬의 시녀들은 가끔 그녀에게 자신의 연애 이야기를 미주알고주알 늘어놓았다. 어쨌든 클로디아를 바로 옆에서 모시는 시녀들이다 보니 꽤 어여쁘고 집안도 좋은 처녀들이 많았고, 그녀들에게 눈독을 들이는 남자들도 많았다. 개중에는 시빌 같은 타입도 분명 있었다. 은근슬쩍 손목을 잡으며 친근함을 어필하는 자들.

클로디아는 이럴 때면 노바라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시녀들이야 그런 남자들에게 익숙해 대응도 능숙하게 했지만, 아무래도 클로디아는 공주다 보니 그런 남자를 경험하려야 경험할 수 없었던 것이다.

‘내 손목을 잡는 순간 목이 베였겠지.’

클로디아는 피식 웃고 말았다.

“로드?”

그러나 의아한 듯 자신을 부르는 남자의 목소리에 그 웃음도 곧 굳었다. 클로디아는 당황해 옆을 돌아봤다. 검 손질을 끝낸 데미안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죄송합니다. 말을 해도 못 들으시기에….”

“앗, 미안해요. 잠시 생각을 좀 하고 있었어요.”

“그렇군요. 어쨌든 헬렌 말인데.”

다행히도 데미안은 클로디아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묻지 않았다. 데미안이 그녀에게 ‘무슨 생각을 그렇게 깊게 하셨습니까?’ 하고 물었다면 클로디아는 혀를 깨물고 죽고 싶어졌을 것이다. 눈앞에 있는 남자는 자신의 옛 약혼자였으므로.

그러고 보니, 저 남자도 내 손목을 잡은 적이 있었던가…. 클로디아는 잠시 예전을 회상했다. 자신과 약혼했을 때의 데미안은 마치 결벽증에라도 걸린 듯 그녀 곁에서 걷는 것도 저어했지만, 딱 한 번 그녀의 손목을 잡은 적이 있었다. 그건….

“…로드.”

“아!”

또다시 그녀는 데미안의 말을 놓치고 말았다. 데미안은 정말로 이상하다는 듯 그녀를 쳐다봤다.

“피곤하십니까?”

“아, 아녜요. 미안해요. 계속 다른 생각이….”

“무슨 생각을 하시기에 제 손을 이렇게 정열적으로 잡으실까요?”

빙글빙글 웃으며 농담을 건넨 건 시빌이었다. 그는 클로디아와 잡은 손을 들어 보이며 씩 웃었다.

“치료는 아까 끝났는데.”

“어머! 미안해요!”

클로디아는 시빌의 말이 끝나자마자 불에라도 덴 듯 화닥닥 손을 뺐다. 시빌이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그렇다고 해서 꼭 그렇게 바로 번개처럼 빼실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아니, 저도 모르게 놀라서….”

“…아무튼 헬렌 말입니다.”

타이밍 좋게도 데미안이 어물어물하는 클로디아의 말 뒤에 바로 들어왔다. 클로디아는 반사적으로 그를 쳐다봤다. 데미안은 마른세수를 한 번 하고 말했다.

“리스크를 최대한 피하는 타입 같습니다. 아무래도 산전수전 다 겪었으니 위험한 일도 많았겠죠. 저 정도로 요리가 맛이 있다면 흥미 삼아 불렀을 귀족들도 꽤 있을 테고요.”

“…그 과정에서 독을 넣어달라느니 하는 이야기를 들었겠군요.”

“예. 정적을 살해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워낙 많으니까요.”

좋은 요리사가 있다며 주변에 추천한다. 그리고 흥미가 생긴 정적이 그를 불러 음식을 먹고 싶어 할 때, 독을 탄다. 요리사는 당장 불려가 벌을 받겠지만, 그 벌에서 반드시 구해주겠다고 하나 마나 한 약속을 하는 것이다. 헬렌은 모르긴 몰라도 그런 일을 꽤 많이 겪은 것 같았다.

“시골 마을만 다녔다고 했는데….”

“시골이라고 해도 누군가의 영지일 수는 있으니까요. 아무튼 헬렌의 영입은 포기하는 게 좋겠습니다.”

“그렇겠죠…?”

“예. 어차피 이 마을에 있는 것도 하룻밤이 겨우 남은 터이니…. 그녀의 요리를 더 즐기는 정도로 만족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클로디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아쉽긴 했지만, 본인이 저렇게 완강히 거절하는 데야 어쩔 수 없었다.

“대신 내일은 홍옥으로 파이를 만들어 달라고 할래요. 아까 여관 주인이 홍옥을 한 상자 들고 들어가는 걸 봤거든요.”

“오, 파이 저도 좋아하는데.”

“한 판 통째로 만들어달라고 할까요? 본래 포르투에 있을 때는 살이 찌니까 딱 두 입만 먹었지만, 요즘 같아서는 움직이는 양이 워낙 많으니….”

클로디아와 시빌은 디저트 이야기로만 한참을 떠들었다. 결국 데미안이 시빌의 목덜미를 끌고 나간 후에야 이야기가 끝났다. 클로디아는 잠옷을 갈아입고 누워 촛불을 훅 껐다. 그 뒤에도 한참이나 시빌이 떠올랐다가, 데미안이 떠올랐다가 했다.



 

***



 

일은 다음 날 저녁에 일어났다. 그날도 새벽에 일어나 헬렌의 요리 덕을 보며 열심히 훈련하고, 배를 만들고, 그 와중에 시빌과 농담을 해 가며 하루를 보냈다. 세계수를 키운다는 말을 들었던 투르의 촌장과 마을 사람들이 배를 만드는 현장에 잠시 기웃거렸으나, 데미안이 쫓아 보내는 통에 모두 별 수확 없이 돌아갔다.

[음냐. 마무리만 하면 되는데…. 너무 졸리다. 나머지는 내일 아침에 일어나서 할래.]

디자이어는 완성을 앞두고 저렇게 말하며 잠들어 버렸다. 이번에야말로 완성을 기대했던 클로디아는 디자이어를 몇 번이고 꽁꽁 두들겼으나 디자이어가 대답할 리 없었다. 별수 없이 세 사람은 여관으로 돌아왔다. 한창 저녁 주문을 할 시간대가 지나 있었으나, 헬렌은 예상했다는 듯 그들을 위한 음식을 따로 준비해놓고 있었다.

“내일 출발한다며? 맛있는 거 먹고 푹 자.”

그렇게 말하며 헬렌은 씩 웃었다. 클로디아는 앞에 놓인 요리들을 보고 감격하며 헬렌에게 감사를 표했지만, 그녀는 별것 아니라는 듯 말했다.

“내 음식 맛있게 먹어주고, 고마운 제안까지 해줘서 내가 더 고맙지.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오늘 빨리 접고 술 먹으러 가려고 그런 거니까 너무 감격하지 마.”

“하지만….”

“먹고 그릇만 대강 포개서 놔줘. 내일 내가 치울 거니까.”

헬렌은 정말로 바쁘다는 듯 대충 손을 내저으며 문을 열고 나갔다. 짧은 머리가 찰랑거리며 문 저편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던 시빌이 흠, 하고 눈을 껌벅였다.

“그래도 사흘 동안 대강 정은 든 것 같네요…?”

“그런가 봐요. 음식도 정말 맛있겠네요. 차갑게 먹는 요리도 있어요!”

세 사람을 다분히 신경 쓴 듯, 요리는 꽤 호화스러웠다. 클로디아는 차갑게 식힌 편육에 얹은 채소 소스를 맛보며 역시 헬렌이 정말 아깝다고 생각했다. 이런 요리를 매일, 아니 일주일에 한 번이라도 먹는다면 이 여행도 꽤 할 만할 텐데.

게다가 레몬 젤리까지 있었다. 클로디아는 최대한 레몬 젤리를 천천히 아껴 먹었다. 기다리다 못한 시빌이 눈총을 줄 때까지 숟가락을 쪽쪽 빨며 마지막 만찬을 즐겼다. 당분간 단맛이 들어간 디저트는 맛보기도 어려울 텐데, 시빌이 눈치 주는 것은 대수도 아니었다.

하지만 결국 저녁 만찬은 끝났다. 여관 주인이 “손님들, 저희 슬슬 홀 불을 끄고 나가야겠는데요.” 하고 나서고 나서야 클로디아는 힝, 하고 일어섰다. 데미안이 주인에게 물었다.

“나간다고요? 주무시지 않으십니까?”

“아. 오늘 밤에 촌장님이 마을 사람들은 다 모여서 술이나 한잔 하자고 해서요.”

“아하, 헬렌이 간 것도 그 이유군요?”

시빌이 끼어들었다. 주인은 피식 웃었다.

“그렇습니다. 뭐 사람들이 있으니 과음은 안 하겠지만 영 그 주사가 무섭긴 합니다. 한번 술에 취하면 아무것도 눈에 안 들어오니, 원.”

“그 정돕니까?”

“우리 여관 홀을 다 부숴놓은 거로도 모자라 날아 차기로 간판을 부쉈다니까요?”

주인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뭐, 저도 다음 주에 아내가 돌아오면 이제 좋은 시절 다 갔으니 마지막으로 술이나 좀 마셔볼까 합니다.”

“좋은 시절 다 갔다는 분치고는 얼굴이 좋으신데요?”

클로디아의 지적은 정확했다. 주인은 벙글벙글 웃고 있었기 때문이다.

“앗, 그렇습니까.”

“아내분을 무척 사랑하시나 봐요.”

“뭐, 그렇다기보다는….”

별생각 없이 말했는데, 주인은 갑자기 클로디아에게 자신의 험난한 연애 이야기부터 결혼에 골인하기까지의 이야기를 떠벌리기 시작했다. 이웃 마을에서 가장 예쁜 아가씨의 마음을 어떻게 곰 같던 자신이 사로잡았는지. 장인어른의 마음은 또 어떻게 녹였는지.

그러던 중이었다. 갑작스레 데미안이 쉿, 하고 손가락을 입에 갖다 댔다. 신나게 떠들던 여관 주인이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 그러십니까, 손님? 아, 제가 너무 많이 떠들었….”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데미안은 뭐라 말하려다 얼굴을 굳혔다.

“…말할 시간이 없군요. 주인장. 혹시 여관에 숨을 곳이 있습니까?”

“예?”

“사방에서 숨기지도 않은 적의가 득시글합니다. 이상하네요. 여긴 시골 마을일 텐데.”

“…설마.”

주인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지만, 이 손님들이 자신에게 그런 거짓말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아챘다.

“도적들…? 하지만 도적들이 들어왔다면 이미 마을이 한바탕 난리가 났을 텐데….”

“도적들은 아닌 모양입니다. 정규 훈련을 받은 움직임인데, 이 여관을 목표로 접근해 오고 있습니다. 이런. 시간이 없군요. 주인장. 당장 2층으로 올라가요. 지금 나가면 안 됩니다.”

“저, 저도 뭔진 모르지만….”

데미안이 검을 뽑으며 주인을 똑바로 쳐다봤다.

“안 됩니다. 군인이라면 당신이 불리해요.”

“하지만 이 아가씨는….”

“로드도 마찬가집니다. 주인을 따라가세요.”

클로디아는 겁을 집어먹고 데미안을 바라봤다. 데미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눈빛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누군가가 클로디아를 노리고 온 것이었다.

“이런. 간만에 실력 발휘를 좀 해봐야겠군요.”

시빌이 기지개를 켰고, 데미안은 곧장 그에게 경고했다.

“여관을 망가뜨리면 안 됩니다.”

“뭐야, 그런 게 어딨어요!”

“여긴 주인장의 장사 터전입니다. 돈으로 배상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에요.”

“젠장.”

시빌이 투덜거렸다. 그동안에 주인은 2층으로 도망치기를 결심한 모양이었다. 그가 털이 부숭부숭한 손으로 클로디아의 어깨를 두드렸다.

“뭔진 모르지만, 일단 올라가시죠, 손님.”

“…네.”

또다. 또 보호받고 있다. 클로디아는 한심한 기분에 사로잡혀 걸음을 옮기려고 했다. 그때였다.

“뭐야? 진짜잖아? 이 빌어먹을 놈들! 비겁하게 대체 몇 명이 몰려온 거야? 서른 명은 되겠네!”

바깥에서 익숙한 고함이 들려왔다. 네 사람은 저도 모르게 서로를 마주 봤다. 와자작! 바깥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젠장! 이 미친년은 뭐야? 꺼져!”

“내가 왜 꺼져? 이 죽일 놈들이! 너희들이나 꺼져!”

…헬렌의 목소리였다.

시빌이 빠르게 창문으로 다가갔다. 여관의 창문은 싸구려 유리로 막혀 있어서 투명도가 높지 않았지만, 바깥은 충분히 관찰할 수 있었다. 시빌이 허, 하고 혀를 찼다.

“데미안 말이 맞습니다. 병사예요.”

“병사?”

데미안이 되물었다.

“혹시 투구에 월계수 잎이 새겨져 있습니까?”

“월계수인지는 모르겠네요. 솔직히 너무 어두워서 투구인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 말에 반응한 건 클로디아였다. 그녀는 시빌의 말에 제가 계속 걸고 있던 월장석 목걸이를 기억해낸 것이다. 땅굴에서 발견한 월장석 목걸이는 어두운 곳에서도 잘 보게 해주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클로디아는 빠르게 목걸이를 풀어낸 후 시빌에게로 다가가 그것을 건넸다. 시빌은 처음에는 영문을 몰라 하다가, 그녀가 쥐여주는 목걸이를 손에 쥔 후 이유를 알아챘다.

“오, 잘 보이네요.”

“어떤 상황입니까?”

그 와중에도 바깥에서는 큰 소리가 오갔다.

“나쁜 새끼들아! 왕국의 놈들 주제에 하늘섬의 은혜도 몰라봐?!”

“뭐야, 네년도 일행이야?!”

“일행은 무슨!”

와장창, 소리가 났다. 뭔가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였다. 시빌이 급히 외쳤다.

“아이고! 헬렌이 여관 앞뜰에 세워둔 말구유를 던졌습니다!”

그 말에 겁먹고 계단에서 주춤거리던 주인이 아이고, 하는 얼굴로 이마를 짚었다. 시빌은 기가 막힌 표정을 지으며 데미안 쪽을 바라봤다.

“어떻게 하죠?”

“인원은?”

“대략 서른 명!”

“나갑시다.”

문답은 신속했다. 데미안은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 콰당,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을 박차고 나간 것이다.

“누구냐!”

데미안의 대답 대신 챙, 하는 소리가 들렸다. 억, 하는 비명이 쇄도했다. 시빌은 곧장 나가지 않고 목걸이를 클로디아에게 내밀었다. 클로디아가 당황하자 시빌은 “빨리 채워주세요. 보여야 마법도 쓰는 법입니다.” 하고 씩 웃었다. 그제야 그녀는 시빌이 목걸이를 제 목에 채워달라고 말하는 것임을 알아채고 손을 놀렸다. 두어 번 손을 미끄러트렸으나 시빌은 곧 목걸이를 찰 수 있었다. 건장한 붉은 머리의 남자가 목에 귀엽고 아기자기한 월장석 목걸이를 하자 당연하게도 안 어울렸다. 그러나 시빌은 씩 웃으며 클로디아의 손을 잡았다.

“고마워요. 얼른 올게요.”

그리고 그녀를 끌어당긴 후, 뺨에 입을 맞췄다. 쪽. 귀엽고도 낯뜨거운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하도 순식간이라 클로디아가 밀어내고 할 틈도 없었다.

시빌은 열린 문으로 나간 후, 문을 꽉 닫았다. 잠금 마법이었다.

“요놈들!”

어안이벙벙해 있던 클로디아는 곧 정신을 차리고 유리창으로 바깥을 넘겨다보았다. 시빌은 여관 앞마당에서 의기양양하게 손바닥에 불을 피우고 있었다. 덕분에 주변이 아까보다는 한층 더 잘 보였다. 데미안은 저 앞에서 병사들을 쓰러트리고 있는지, 검푸른 머리카락이 휘날리는 것만 보였다. 헬렌은….

“잘 싸우네…?”

병사에게서 빼앗았는지, 커다란 창을 제 몸처럼 휘두르고 있었다. 키가 큰데다가 체격도 좋은 그녀는 창끝으로 병사들을 몰아 쓰러트렸다. 그 후에는 시빌이 머리카락에 불을 붙였다.

“꺄하하! 대머리나 돼라!”

시빌의 말에 헬렌이 웃음을 터트리면서도 한 손으로 병사의 투구를 붙잡고 옆에 있는 큰 나무에 갖다 박았다. 병사는 그대로 기절했다.

“…저놈의 주사가 소용 있을 때도 있군요.”

그사이 옆으로 다가온 여관 주인이 헛웃음을 지으며 클로디아의 말에 대답했다. 그녀는 놀란 토끼 눈으로 주인에게 대답을 종용했다. 주인은 “헬렌은… 술에 취하면 천하무적이 됩니다….” 하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서른 명이라고는 하지만, 포르투의 기사단장과 마법사가 있었다. 게다가 헬렌이 보인 의외의 활약도 있어, 여관 주변의 소란은 금세 제압됐다. 몇 명이 기세에 몰려 여관 안으로 들어오려 했지만, 시빌이 부린 잠금 마법 때문에 아무도 들어오지 못했다.

그래서 클로디아는 싸움이 끝난 후, 시빌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유유히 바깥으로 나올 수 있었다. 여관 마당에는 기절한 병사들이 한쪽에 시체처럼 쌓여 있었고, 몇몇 불운한 병사들은 포박된 채 헬렌에게 뒤통수를 얻어맞고 있었다.

“정의는 반드시 승리한다, 이거야!”

주먹을 불끈 쥐며 웃는 헬렌을 보고 데미안은 약간 질린 표정이었다. 시빌이 데미안에게 속삭였다.

“누가 비전투원이라고요?”

“…낮과는 다른 호쾌함을 가진 분이군요.”

“워. 배운 남자.”

정중하고도 예의 바른 표현에 시빌이 휘파람을 불었다. 그사이 헬렌이 다가와 클로디아의 어깨를 덥석 잡았다. 클로디아는 저도 모르게 움찔했으나, 헬렌은 약간 발개진 뺨으로 그녀를 바라보더니 크게 말했다.

“당신 공주님이었어?!”

음…. 클로디아는 조심스럽게 데미안의 눈치를 봤다. 이쪽을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보고 있던 데미안이 클로디아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말해도 된다는 뜻이었다.

“이 병사들이 모르고 온 것 같지는 않습니다. 헬렌도… 그런 것 같군요.”

데미안의 말에도 불구하고 클로디아는 조금 망설였지만, 반짝이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헬렌을 보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

뭐랄까. 하늘섬에서 가끔 포르투의 국민들을 만날 때 마주했던 종류의 눈빛이었다. 그것도 주로 대여섯 살 꼬맹이들에게서 볼 수 있는.

클로디아는 그래서 미소 지으며 헬렌에게 답했다.

“네. 저는 클로디아 테 포르투예요.”

“우와!”

“대륙에서 가장 먼저 해를 맞는 포르투의 공주가 저랍니다.”

헬렌은 정말로 흥분한 것 같았다.

“나 공주님 처음 봐!”

그야 그럴 것이다. 시빌은 이제 노골적으로 옆에서 비실비실 웃고 있었다. 헬렌에게서는 술 냄새가 풍겼지만, 클로디아는 우아하게 그녀에게 인사를 건넸다.

“고마워요, 헬렌. 당신이 우리를 도운 것 같군요.”

“뭘! 사람이라면 지당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지!”

헬렌이 콧김을 뿜으며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때 데미안이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

“어쨌든 상황은 정리된 것 같은데, 설명을 좀 들을 수 있겠습니까.”

“오, 그래.”

그녀는 쾌활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가, 눈썹을 찡그렸다. 데미안이 저도 모르게 움찔하는데, 헬렌은 거기에다 대고 눈을 깜박이며 물었다.

“그럼 당신이 수르 알파야? 하늘섬에서 제일가는 기사단장?”

“…그렇습니다만.”

“와!! 나 기사도 처음 봐!”

공주님과 기사야! 답지 않게 흥분한 헬렌은 한참이나 방방 뛰었다. 결국 여관 주인이 한숨을 내쉬며 술 깨는 약을 들고 와 그녀의 목구멍에 쑤셔 넣은 뒤에야 간신히 모두는 그녀에게서 사정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



 

투르는 어쨌든 작은 마을이었다. 인구수가 사백 명도 안 되는 곳이기에 서로서로 다 알고 지냈다. 투르의 촌장은 어제부터 사람들을 오늘 저녁에 모이라며 불렀다. 간만에 좋은 술이 잔뜩 들어왔으니 마을 사람들이 모두 함께 술이라도 마시면서 단합하자는 것이었다.

보통 이런 경우에는 외부인들은 부르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촌장은 여관에 머무르는 상인이나 외부인들도 대부분 불렀다. 부르지 않은 것은 여관에 머무르는 데미안과 클로디아, 시빌뿐이었다.

헬렌은 처음에는 그 사실을 몰랐다. 촌장이 자신에게도 와서 술을 마시라고 하기에, “저 주사 엄청난데요. 괜찮으세요?”라고 물었을 뿐이다. 촌장은 껄껄 웃으며 헬렌의 어깨를 두들겼다. “뭐 어때! 굉장하다는 그 주사 한번 구경하세나!”라는 것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일찍부터 근처 숲의 큰 공터에 모여 술을 기울이고 있었다. 가을의 수확 철이 되면 그곳에서 작게나마 축제도 치른다는 말 같은 것을 들으며 헬렌도 술을 몇 잔 얻어 마셨다. 거의 모든 마을 사람들이 모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은 봄이잖아요? 한창 바쁠 때 왜 이러셨답니까?”

헬렌의 말에 앉아서 술잔을 채우던 마을의 남자들은 서로 시선을 기울이다가 “뭐, 상관없겠지?” 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사흘 전 마을을 찾아온 여행객 세 명에 대한 이야기였다. 여행객들은 촌장을 찾아가 마을 근처의 숲에서 세계수를 키울 것인데 너무 놀라지 말라고 했단다.

촌장은 처음에는 놀랐으나, 곧 여행객들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여행객들 중 두 명은 바로 마왕을 무찌르기 위해 여행 중인 포르투의 공주 클로디아와 그 유명한 기사단장 데미안 알파였던 것이다.

갑작스레 마을 근처에서 엄청난 크기로 자라날 세계수에 인근 주민들은 놀랄 것이 뻔했다. 데미안은 정체가 드러나더라도 주민들을 배려하려고 했고, 그 배려는 그다지 좋지 않은 형태로 그들에게 돌아왔다. 촌장의 아들이 놀라 영주에게로 달려간 것이다.

투르는 소왕국인 이 지역에서도 시골에 속했다. 영주는 포르투의 공주가 자신의 영지에 와 있다는 것을 알고 갈등했다. 못 본 척할 것이냐, 아니면 그녀를 납치할 것인가.

마왕이 포르투를 공격해 포르투가 거의 마비된 상태라는 것을 모르는 왕과 영주들은 이제 대륙에 없었다. 통신 도마뱀에 대고 클로디아가 여행을 떠나겠다 선언한 것은 대륙 전역에 퍼져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클로디아를 응원했지만, 지배 계층은 조금 다른 생각을 했다. 포르투가 오랫동안 백 개의 왕국을 다스려온 것에 대해 불만을 품은 자들이 제법 있었던 것이다. 혹은 유일한 포르투의 왕위 후계자가 된 공주와 결혼해 포르투의 왕이 되고자 하는 이들도 몇몇 있었다.

영주는 클로디아를 손에 넣고자 했다. 본인이 포르투의 왕이 되거나, 포르투의 지배에서 벗어나겠다는 야심은 없었다. 단지 그는 포르투의 공주를 손에 넣어, 조금 더 큰 권력을 쥐고자 했다.

적어도 그녀를 좋은 값에 다른 자들에게 넘길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하다못해 이 왕국의 왕에게라도 진상하면 자신은 더 큰 영지를 다스릴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클로디아 테 포르투의 곁에 데미안 알파가 있다는 것을 간과한 것이 그의 실책이었다. 어쨌든 시골 영지의 영주님은, 포르투의 기사단장이 어느 정도의 무력을 가지고 있는지 몰랐던 것이다. 영주가 가진 사병은 백여 명. 그중에 자신을 지킬 인원을 남기고 서른 명을 보냈다.

투르 촌장은 영주에게서 연락을 받고 대경실색해 자신의 아들을 크게 혼냈다. 그러나 하늘같은 영주님이 내린 명령을 거역할 순 없었다. 마을 사람들을 데리고 세 사람이 배를 만드는 현장에 기웃거렸다. 병사들에게 추가 인원이 없는지 보고하기 위해서였다.

데미안이 그들을 가볍게 쫓아 보냈고, 촌장은 병사들에게 “데미안 알파라는 사람은 덩치가 클 뿐, 그리 위협적이지는 않은 것 같다”고 보고했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술자리에서 들은 헬렌은 분개했다.

그녀의 음식을 맛있게 먹어주고, 구체적인 감상을 피력하는 소녀가 꽤 귀한 집 딸이라는 것은 헬렌도 익히 짐작한 바였다. 하지만 그렇게나 귀한 사람일 줄은 몰랐던 것이다. 거기에 한술 더 떠, 하늘섬의 공주님이라는 것도 한몫했다. 어떤 사람이든 간에 ‘공주님’이라는 존재에 대한 동경을 어릴 적 품어보지 않은 사람은 없었다.

거기에 더해, 헬렌도 마왕을 무찌르기 위해 직접 여행에 나선 클로디아 공주님의 이야기는 풍문으로나마 전해 들었던 참이다. 열아홉 살의 소녀가 나라를 구하기 위해 단신으로 죽음의 바다를 건널 용기를 냈다는 것에 대해 헬렌은 대단하다고 생각한 참이었다.

게다가.

“내 목적지도 자르지스란 말이야! 하지만 나는 너무 위험해서 한번 포기했다고! 그런데 그런 곳에 가는 용감한 여자애를 비겁하게 병사들이 떼거리로 덤벼 납치하겠다니 무슨 파렴치한 짓이야!”

헬렌이 벌떡 일어서서 외쳤다.

이야기를 듣던 클로디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목적지가… 자르지스라고요?”

“그래!”

헬렌이 잔뜩 화가 난 표정으로 긍정했다.

“어릴 적부터의 꿈이었다고! 하지만 죽음의 바다를 아무도 건널 수 없어서 포기했는걸! 심지어 마법사도 고용해 볼까 했지만, 그 넓은 죽음의 바다를 부유 마법으로 건널 수는 없다고 해서 울면서 북쪽으로 온 참이란 말이야!”



 

***



 

그러니까, 헬렌은 어릴 적부터 외할아버지의 여행 이야기를 듣고 자랐다. 그녀의 외할아버지는 대륙 전역을 젊은 시절부터 구석구석 쏘다녔고, 아득한 옛날에는 자르지스에도 딱 한 번 가 본 적이 있다고 했다. 바로 100년에 한 번 열리는 바닷길을 건너서였다.

외할아버지는 자르지스에 관해 ‘아름답고 가엾은 곳’이라고 표현했다. 그 외에는 헬렌에게 한마디도 해주지 않았다. 자르지스를 뺀 다른 지역에 관해서는 얼마든지 말해주었지만, 자르지스에 관해서는 헬렌이 묻기라도 하면 항상 입을 다물었다.

그래서 헬렌은 외할아버지가 건넜다는 바닷길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나 몇 년 전 단 하룻밤 열린 바닷길을 그녀는 놓쳐버렸다. 술을 마시고 자버렸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좌절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내가 갈 곳은 아니었나 보다’라고 생각하며 북쪽으로 향했다. 남쪽의 자르지스에 갈 수 없다면 북쪽 끝까지 여행해보자는 것이 헬렌의 결심이었다.

그렇지만 중간에 술을 먹고 남의 집기를 부숴버린 바람에 한동안 투르에서 머물게 됐다. 그리고 투르의 여관에서 일하던 중, 클로디아의 소식을 통신 도마뱀으로 전해들은 헬렌은 저도 모르게 클로디아를 존경해버렸다. 죽음의 바다를 건너기 위해 남쪽까지 그녀가 간 길만 해도 엄청나게 험난했기 때문이다. 헬렌은 나이도 서른이 넘었고, 요리사로 일하며 제법 경험치도 쌓였다. 게다가 어지간한 남자들만큼 키도 크고 체격도 좋았다. 싸움 실력도 나쁘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런 헬렌도 남쪽까지 가는 것이 너무 힘들었다. 그런데, 저렇게 가녀린 열아홉 여자애가. 그것도 공주님이 마왕을 무찌르러 떠나겠다니. 가능 여부를 떠나서 굉장한 용기라고 생각했다.

“나라면 그냥 도망쳤을 것 같은데, 굉장하다고 생각했어. 혹시나 여행 중에 만나면 잘해주겠다고도 생각했다고! 그런데 그 공주님이 내 손님인 것도 모자라서 병사들이 단체로 납치하겠다잖아!”

헬렌은 마을 남자에게 그 소리를 듣는 순간 술병을 쥐고 뛰쳐나왔다. 누군가 자신을 불렀지만, 기억도 잘 나지 않았다. 술에 반쯤 취한 머릿속에는 그 여자애를 도와줘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거기까지 설명한 헬렌은 고개를 푸르르 흔들고는 말했다.

“어, 아직도 머리가 아프네. 아무튼 저 새끼들 진짜 나쁜 놈들이야! 죽여야 해! 용감한 여자애를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몹쓸 짓이나 하려고 들다니.”

“헬렌….”

클로디아는 그만 눈물이 그렁그렁해지고 말았다. 여관 주인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오지랖 한번 대단하구만….”

“뭐, 이쪽은 그 오지랖 덕을 톡톡히 봤지 뭡니까.”

그 말을 받아친 건 시빌이었다. 시빌은 싱긋 웃으며 무릎 꿇은 병사들 중 제일 멋진 투구를 쓴 놈을 걷어차 깨웠다. 기절해 있던 병사가 “으음” 하고 깨어났다가, 주변 상황을 살피고는 이내 겁먹은 표정이 되었다.

“데미안? 다음은 당신한테 맡기는 것 맞죠?”

“…예.”

이미 여관 주변은 겁먹은 마을 사람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헬렌이 뛰어나가는 통에 웅성웅성하다가 뒤늦게 촌장을 앞세워 찾아온 참이었다. 모두들 헬렌을 비롯한 일행들이 병사들에게 당할 줄로 알고 왔다가, 뜻밖의 풍경에 놀란 모양이었다.

데미안은 싸늘한 눈으로 여관 울타리 밖의 사람들을 쳐다봤다. 그 눈초리에 사람들이 움찔했다. 그가 뭐라 하지도 않았는데, 사람들 사이에서 촌장이 뛰어나와 벌벌 떨며 빌었다.

“나, 나으리. 저희가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닙니다요. 저는 높은, 높은 분들이 오셔서…. 영주님께 보고한 것뿐입니다요.”

아무도 촌장에게 대답하지 않았다. 촌장은 서늘한 침묵을 견디지 못하고 거의 통곡하듯이 몸을 던졌다.

제발 목숨만은 살려달라는 말이 떨어졌고, 마을 사람들도 무릎을 꿇었다. 서른 명이나 되는 병사를 제압하는 데미안의 모습을 조금이나마 그들은 목격한 참이었다. 이 서슬 퍼런 남자 하나가 무서워 몇백 명이 벌벌 떨었다.

“로드, 어떻게 할까요.”

클로디아 또한 헬렌에게 감동해 글썽였던 눈물이 쏙 들어간 참이었다. 그녀는 나지막하게 한숨을 쉬고 돌아서서 촌장을 바라봤다. 마음이 바싹바싹 마르는 기분이 들었다.

여행을 떠난 이후로 데미안은 수없이 경고해왔다. 그녀에게 공주님이라고 부르는 시빌에게 주의를 주고, 가끔 어린애처럼 구는 클로디아에게 차라리 돌아가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녀는 데미안의 말을 잘 듣지 않았다. 정확히는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클로디아는 데미안을 북풍처럼 매섭고 차가운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왔다. 그가 유독 세상 사람들에 관해 시니컬한 것뿐이라고. 사실 사람들은 자신을 응원하고 있다고만 생각했다. 나쁜 사람들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그런 이들은 극소수라고만….

그렇게만 생각했는데.

클로디아는 이제야 눈을 덮고 있던 뭔가가 한 꺼풀 벗겨진 느낌이었다. 머리 뒤가 서늘했다. 그녀는 자신의 국민들에게 언제나 따뜻한 공주님이었으나, 그녀를 해치려 한 자들에게 쓸데없는 자비를 베풀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동시에 눈앞의 사람들도 누군가에게 몰려 이런 짓까지 하게 됐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그녀는 어쨌든 영리했으니까.

“수르 알파.”

“예.”

“이곳 영지의 영주성까지는 얼마나 걸릴까요.”

“병사들은 반나절이 걸려 왔다고 했습니다.”

“영주를 내일 아침까지 내 앞에 데려오세요.”

“알겠습니다.”

포르투의 공주는 수르 알파에게 명령했다.

“맨발로 땅을 걷게 하세요. 걷기를 거부한다면 묶어 땅에 끌고 오세요. 아무 죄 없는 남을 해치려 한 벌은 목숨으로도 갚지 못할 것입니다.”

“예.”

데미안은 군말 없이 몸을 돌렸다. 그가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동안 아무도 말을 보태지 못했다. 클로디아는 마을 주민들에게 말했다.

“여자와 아이들은 집으로 돌아가세요. 남자들은 지금 선 자리에서 머리를 조아리고 내일 아침까지 침묵으로 내게 잘못을 비세요. 입 밖으로 소리를 내는 순간 평생 말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지금 선 자리에서 끝없이 자신의 양심을 돌아보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녀도 여관으로 들어갔다. 시빌이 휘익, 휘파람을 불며 그녀를 따라 들어갔다. 헬렌은 공포로 질려 있는 마을 사람들을 돌아보다가 한숨을 쉬었다.

“멍청이들.”

헬렌의 말이었다. 마지막으로 마당에 남은 여관 주인은, 마른세수를 하다가 여관으로 따라 들어가 버렸다.

마을 사람들은 한동안 아무도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



 

데미안은 아침이 채 밝기도 전에 늙고 비루한 남자를 여관 앞마당까지 끌고 왔다. 저 멀리서부터 신음을 내며 걸어오고 있는 남자의 몰골은 처참했다. 그 새벽까지 여관 앞마당에서 엎드려 있던 사람들은 그 처참한 사람이 자신들이 얼마 전까지 떠받들던 영주라는 것을 똑똑히 알아보고 경악했다.

고급스러운 옷은 온통 찢겨 있었고 머리에는 피가 말라붙어 있었다. 입에는 재갈이 물렸으며 클로디아가 말한 대로 맨발이었다.

묶인 남자의 등이 막 갈아낸 밭고랑처럼 온통 헤집혀 있는 광경을 보고 사람들은 ‘영주님’이 묶인 채 끌려오다가 엉엉 울며 빈 후 비척비척 걸어오는 모습을 상상했다. 실제도 그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데미안은 마당에 도착한 후 재갈을 풀고 영주를 집어던졌다.

영주는 죽는소리를 내며 엎어졌다.

“아이고! 나으리 살려주십시오….”

그 말에 대한 대답은 여관 안에서 들려왔다.

“누가 수치심도 없이 나의 앞에서 떠드는 것이지요?”

낭랑한 목소리였다. 투르 사람들이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목소리이기도 했다. 데미안은 입을 열었다.

“명을 받들어 영주를 데리고 왔습니다.”

“아하.”

여관의 문이 열렸다. 오래도록 보아온 평범한 여관 건물일 뿐인데, 마을 사람들은 마치 무섭고 거대한 성의 문이 열리는 기분을 느꼈다. 문 안에서는 꼿꼿한 자세의 클로디아가 걸어 나왔다.

그녀는 영주를 내려다보았다.

영주는 본능적으로 그녀가 공주라는 것을 알았고, 거의 기듯이 클로디아의 앞까지 몸을 움직여 갔다.

“잘못했습니다! 살려주십시오!”

“제가 만약 병사들에게 붙들려 당신의 앞에 갔다면 당신은 저를 어떻게 했을까요?”

갑작스럽게 던져진 질문에 영주는 입을 벌린 채 대답하지 못했다. 클로디아는 속으로 셋을 세었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녀는 정말로 안타깝다는 듯이 영주를 바라보았다.

“무릎 꿇은 후에도 남에게 자비를 청할망정, 자신의 자비를 장담하지 못하는 자로군요.”

“아, 아니…. 아닙니다! 저는 공주님을 따뜻하게 대접하고 좋은 잠자리를 내어드렸을 겁니다!”

“너무 늦은 대답은 필요 없어요.”

영주가 울부짖었으나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는 시간이 없어요. 당신을 처벌하는 데도 많은 시간을 들이고 싶지 않답니다. 쓸데없이 잔인하게 굴고 싶지도 않아요.”

“살려, 살려주십시오!”

“살려주겠어요.”

“살… 예?”

영주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 클로디아는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자를 보는 눈으로 그를 쳐다보며 말했다.

“수르 알파. 그의 보금자리는 어찌 되었나요?”

“남김없이 부수었습니다.”

데미안의 대답에 영주는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그랬다. 데미안 알파는 새벽에 영주관에 도착하자마자 그 집을 모두 부수어 놨다. 새벽에 잠옷만 입고 뛰쳐나온 영주는 자신의 식솔들과 함께 큰 저택이 무너지는 것을 봐야 했다.

“당신을 풀어줄 테니 이제부터 맨발로 다시 당신의 저택에 돌아가세요. 햇빛 아래에서 부서진 당신의 보금자리를 감상한 후 당신의 왕에게 가서 내 말을 전하세요. 클로디아 테 포르투는 수르 알파와 함께하고 있노라고.”

“어….”

“당신의 왕에게 말을 전한 후에는 또 다른 왕에게 가세요. 그 왕에게 말을 전한 후에 다시 다른 곳의 왕에게 가세요. 내가 수르 알파와 함께하고 있다는 사실을 열 개의 왕국에 알린 다음 폐허가 된 당신의 보금자리로 돌아가세요. 내가 죽음의 바다를 건너 마왕을 물리친 후 다시 대륙으로 돌아왔을 때, 대륙 전역에 당신의 말이 퍼져 있지 않다면 어젯밤 당신이 겪은 악몽은 다시금 반복될 것입니다.”

영주는 파르르 떨었다.

며칠 전까지도 영주는 마왕을 무찌르겠다는 금발의 어린 여자애의 이야기에 코웃음을 쳤으나, 눈앞의 공주는 도무지 그가 생각했던 어리기만 한 계집아이가 아니었다.

그는 어쩐지 클로디아 테 포르투는 반드시 다시 돌아올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녀가 돌아왔을 때, 자신이 그 말을 듣지 않은 것을 안다면 그때야말로 자신의 목숨은 없을 거라는 확신이 생겼다.

결과적으로 영주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클로디아에게 그러겠노라 약속하고 말았다. 데미안 알파는 그를 묶은 밧줄을 검기로 가볍게 잘랐다. 희게 빛나는 검기를, 영주는 공포스러운 눈으로 쳐다봤다.

어젯밤 자신의 저택을 부순 흰 빛이었다.

“떠나세요.”

클로디아의 말이 끝나자마자 영주는 맨발로 빠르게 도망쳤다. 뒤꽁무니에 불이라도 붙은 듯 부리나케 뛰는 모습을 보면서도 아무도 웃지 못했다. 시빌이 “훠이, 훠이. 다들 돌아가세요!”라고 새를 쫓듯이 손을 내젓고 나서야 마을 사람들도 하나둘씩 뒷걸음질 쳤다.

여관은 다시 고요해졌다.



 

***



 

클로디아는 여관에 들어오자마자 식당 테이블에 그대로 엎드려 앉았다. 그녀는 한참이나 얼굴을 묻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시빌은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클로디아 주변을 왔다갔다 했다. 보다 못한 헬렌이 시빌을 만류했다.

“마법사. 좀 앉아. 정신없어.”

“아니, 나는.”

시빌이 뭐라 말하려다가 못마땅한 듯 입을 닫고 의자 하나를 빼서 앉았다. 여관 주인은 그들을 따라 들어온 후, 문을 닫고 일부러 자리를 비켜준 뒤였다.

데미안은 말없이 입구에 기대서서 그런 클로디아를 지켜봤다. 그의 얼굴에는 여전히 표정이 없었으나, 아까 전까지 돌던 냉기는 씻은 듯 사라졌다는 것을 헬렌과 시빌은 알 수 있었다.

“…데미안. 그런데 정말 영주의 저택까지 다녀왔습니까?”

“예.”

“우와. 밤새워서요?”

“포르투의 기사들은 사흘 밤을 새우고도 끄떡없게끔 훈련을 받습니다.”

데미안은 여상하게 시빌의 물음에 답했다. 시빌은 오오, 하고 감탄했다. 그때였다. “흐아아아앗!” 엄청난 소리를 지르며 클로디아가 벌떡 일어났다. 세 사람 다 그 바람에 흠칫했으나 클로디아는 그 자리에 서서 팔을 쭉 폈다.

“기절할 뻔했네!”

그리고 그녀는 뒤돌아 자신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는 이들과 눈을 마주쳤다. 헬렌, 시빌, 그리고 데미안. 클로디아는 생긋 웃고 문간에 기대 있던 데미안에게 다가갔다. 데미안이 팔짱을 낀 것을 풀고 그녀의 앞에 무릎 꿇었다.

헬렌과 시빌은 몰랐으나, 데미안은 포르투 기사들이 으레 지배자에게 하듯 예를 갖추고 있었다.

클로디아는 그 앞에 서서 우아하게 오른손을 내밀었다.

“고생했어요, 수르 알파.”

“포르투에게 영광을.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습니다.”

“내 손등에 입 맞춰도 좋아요.”

데미안은 그녀의 손을 바라봤다. 그새 조금 닳은 가죽 장갑이 끼워진 손.

본래 포르투의 기사들은 군주에게서 손등에 입 맞출 것을 허락받으면 그 손에 끼워진 실크 장갑을 벗겨내고 입 맞췄다. 군주의 장갑을 벗겨내는 것은 지극히 영광으로 여겨졌으나, 데미안은 어쩐지 망설이고 있었다.

클로디아는 그런 데미안을 내려다보다가, 손을 거두었다. 기사단장은 드물게 당황했으나, 곧 자신이 모시는 군주가 장갑을 직접 벗고 맨손등을 내미는 것을 보고 침착함을 되찾았다.

“손에 피가 묻어 그러는 거라면 괜찮아요.”

그제야 데미안은 조심스럽게 그녀의 손을 받아 입 맞췄다. 공주는 미소 짓고 그의 입술이 떨어지는 것을 기다려 방금 입맞춤 받은 오른손을 왼가슴 위에 올렸다. 군주의 심장 위에 기사의 숨결을 더함으로써 서로의 신뢰가 공고함을 알리는, 포르투의 의식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환하게 웃으며 돌아섰다.

“아! 정말이지 놀라운 밤이었어요. 그렇죠?”

방금 전의 고고함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평소의 클로디아였다.

시빌은 홀린 듯이 그녀를 바라보다가, 클로디아의 말에 정신이 돌아왔다. 클로디아는 왼손에 들고 있던 가죽장갑을 도로 끼며 투덜댔다.

“간만에 공주인 척하느라 힘들었어요. 나쁜 사람들이 왜 이렇게 많을까요?”

“공주인 척?”

“그럼요.”

시빌의 되물음에 클로디아가 어깨를 으쓱했다.

“쥬버린 오빠가 늘 그랬는걸요. 정말 나쁜 사람들 앞에서는 제가 누구인지를 생각하라고. 그러다 보면 마음이 차분해지고,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있다고 했어요. 정말이네요.”

“이런. 클로디아. 나는 정말로 놀랐다고요.”

시빌이 너스레를 떨었다.

“나는 클로디아라면 울면서 매달릴 거라고 생각했는데.”

“당신 바보야? 공주님이잖아!”

클로디아가 대답할 틈도 없이 시빌을 구박한 것은 헬렌이었다. 헬렌은 허리에 양손을 짚고 시빌을 가르치듯 말했다.

“백 개의 왕국을 다스리는 공주님이 나쁜 놈들 앞에서 의연해지는 건 당연하잖아!”

“음, 뭐 꼭 그렇지는 않지만요….”

클로디아가 애매하게 웃으며 볼을 긁었다. 말을 받은 것은 데미안이었다.

“고생하셨습니다.”

어느새 일어나 그녀의 뒤로 다가온 기사는 덤덤하게 그녀에게 위로를 건넸다. 잘했다거나, 귀감이 되었다거나 하는 말은 감히 입 밖에 내지도 않았다.

클로디아는 그가 왜 그러는지 알고 있었고, 서운해 하지 않았다. 대신 옅게 웃었다.

“수르 알파가 더 고생했는걸요.”

“괜찮습니다. 디자이어는?”

[나 진작에 깼어.]

테이블 위에 눕혀져 있던 디자이어가 퉁명스러운 소리로 떠들었다.

[대체 내가 자고 있던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바보야. 네가 자고 일어났을 때 내가 없을 뻔했어.”

[나 참! 하필 내가 무력할 때를 노려 습격해오다니! 내가 깨어 있었으면 모두 죽은 목숨이었을 텐데!]

디자이어는 데미안이 오기 전 깨어나 시빌에게 대강의 이야기를 들은 참이었다. 디자이어는 흥분한 목소리로 모두 배은망덕하다느니, 은혜를 모르는 짐승은 더 큰 벌을 받아야 한다느니 하며 화를 냈다.

클로디아는 그러나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시선 끝에는 헬렌이 있었다. 신기한 듯, 검으로 변한 정령을 바라보던 헬렌이 클로디아의 시선에 움찔했다.

“어, 그러니까 이 검이… 포르투를 수호하는 정령인 거지?”

“맞아요. 헬렌, 정말 고마워요.”

“아, 아냐. 나는 꽥꽥 소리나 지른걸, 뭐.”

헬렌이 얼굴을 붉혔다. 그녀는 전날 자신이 술에 잔뜩 취해 정의니 공주님이니 했던 것을 조금 부끄럽게 여기고 있는 모양이었다.

클로디아는 그녀에게 미소 지었다.

“그 소리가 제게는 가장 큰 위로가 됐어요. 고마워요.”

“으음….”

헬렌은 클로디아의 이야기를 듣다가 끝내 얼굴을 감싸 쥐고 마른세수를 했다. 귀까지 새빨개진 채였다. 클로디아는 미소 지으며 그녀를 계속해서 바라봤다. 이윽고 헬렌이 손을 떼고 입을 열었다.

“있잖아. 공주님.”

“네, 헬렌.”

“한 번 거절한 주제에 민망하지만…. 혹시 내게 하려고 했던 영입 제안 말이야.”

헬렌은 정말 민망한 듯 머리를 긁으며 말을 꺼냈다. 그러나 클로디아의 눈은 초롱초롱해져 있었다. 어서 말해보라는 듯한 시선에 헬렌은 코를 한번 훔치고는 말을 이었다.

“세 사람…. 자르지스로 가는 거지? 돈은 주지 않아도 좋으니.”

“좋아요!”

헬렌은 자신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나온 클로디아의 말에 조금 놀랐다가, 하하 웃었다.

“뭐야. 내 말 아직 다 듣지도 않았잖아.”

“좋아요, 좋아요! 무조건 좋아요! 완전 좋아요! 저랑 같이 가 주시는 거잖아요!”

클로디아는 주먹을 꼭 쥐고 헬렌 앞에서 흔들며 기쁨을 표현했다. 그 동작은 마치 어린아이 같아서, 방금 전의 그 우아한 공주님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귀여움에 헬렌이 어이없이 눈을 흘기면서도 미소 지었다.

“음, 일단 내 말을 다 듣고 얘기하는 게 좋겠어.”

“네네 좋아요! 하지만 돈은 드릴 거예요!”

“그러니까, 내 말 좀 들어보라고.”

헬렌이 웃음을 섞어 클로디아의 이마를 슬쩍 밀었다. 시빌도 빙글빙글 웃으면서 클로디아의 어깨를 잡아 뒤로 당겼다. 겨우 그녀가 진정한 후에야 헬렌은 입을 열었다.

“어제 얼핏 말한 것 같지만, 내 목표는 자르지스였어. 내가 술을 마시고 저녁부터 잠이 들어버리는 바람에 자르지스에 가는 것이 요원해졌지만. 그 뒤로 나는 목표를 북쪽 끝으로 돌렸지만, 사실은 자르지스를 포기하지 못했나 봐. 그 후에 주사가 좀 생겼거든.”

주사라면 주변의 모든 걸 다 집어던지고 부수는 그것….

시빌이 눈알을 굴렸다. 정말 무시무시한 주사였다. 건장한 병사들과 맞장을 뜰 정도니 말이다.

“공주님 혹시, 내게 영입을 제안하면서도 목적을 말하지 못한 건 목적지가 자르지스이기 때문이었어?”

“…네.”

클로디아는 슬쩍 그녀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그녀에게 함께 여행해달라고 하면서도 목적을 말하지 못한 이유. 자르지스라는 곳이 얼마나 사람들에게 미지의 공포를 심어주었는지 알기 때문이다. 신분 노출도 문제가 됐다. 사실 이전까지는 신분 노출에 대해서 잘 걱정하지 않았으나, 어젯밤의 일을 겪은 다음에는 그녀도 생각이 달라졌다. 어쨌든 데미안이 쓸모없는 걱정을 하지는 않은 것이다.

하지만 역시 헬렌에게는 말할 것을 그랬다고, 클로디아는 생각했다. 헬렌이 안타까운 표정으로 웃었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목적지가 자르지스라고 말했다면 나는 두말없이 승낙했을 텐데. 이렇게 엇갈릴 뻔했다니.”

그녀는 얼굴을 숙이고 잠시 침묵했다. 짧게 자른 갈색 단발머리가 와르르 쏠려 바닥으로 향했다. 이윽고 헬렌은 고개를 들어 클로디아를 바라봤다.

“클로디아. 네가 당한 일은 굉장히 싫은 일이겠지만, 사실 나는 조금은 다행이라고 생각했어. 네가 누구인지 알게 됐거든. 공주님이라니. 그것도 내가 가기를 포기했던 곳으로 가는 공주님.”

그제야 클로디아는 헬렌의 눈동자가 아주 예쁜 검은 올리브색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평소에는 검은색 같지만, 빛을 받아 생기를 띄면 짙은 푸른색이 조금씩 보이는.

그리고 지금 그 눈동자는 사흘간 클로디아가 본 어떤 모습보다 생생히 빛나고 있었다.

헬렌은 힘주어 말했다.

“클로디아. 혹시 내게 너를 따라갈 기회를 줄 수 있을까?”

“당연하죠!”

클로디아는 헬렌의 말이 끝나자마자 답했다.

“저야말로 환영이에요! 돈도 줄 거예요! 포르투에도 가게를 차려드릴게요!”

“아니, 그런 건 필요 없어.”

헬렌이 웃음 지었다.

“돈도 포르투도 내가 알아서 할게. 둘 다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긴 하지만 그건 먼 훗날의 일인 데다, 내가 혼자 이룩해야 더 뿌듯한 일이거든.”

“하지만 저랑 동행하시는 것도 헬렌이 이룩한 거 아닌가요?”

클로디아가 시무룩해졌다. 헬렌은 눈을 찡그리며 웃곤 클로디아의 코를 비틀었다.

“포르투 성이 그 정도로 무너졌으면 돈을 아껴야지 무슨 소리야.”

“동의합니다! 필요 없다는 사람에게 주지 말고 저 같은 불우이웃에게 사랑을!”

기회를 놓칠세라 시빌이 끼어들었다. 클로디아가 시빌을 째려보았다.

“삼백만 싱 받은 사람은 조용히 해욧!”

“삼백만? 저거 사기꾼 아냐?”

헬렌이 클로디아의 말에 기함하며 시빌을 쳐다봤다. 시빌은 주춤 물러서다가 갑자기 손을 들었다.

“잠시만요! 헬렌의 영입을 반대합니다! 이유는 제가 불리할 것 같아서!”

“기각!”

클로디아 역시 손을 들고는 시빌의 말을 잘랐다. 서서 말을 듣고 있던 데미안마저 옅게 웃음 지었다.

“좋아요, 헬렌. 정식으로 당신을 저의 요리사로 영입하겠어요. 앞으로 자르지스까지 가는 동안, 당신은 환경이 허락하는 한 우리에게 매 끼니 맛있는 요리를 해 줄 것!”

“좋아.”

헬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클로디아가 손가락을 꼽아가며 말을 이었다.

“수행 조건은 시빌과 동일해요. 마왕성 바로 앞까지.”

“뭐? 마왕성 안까지는 들어가지 말라는 거야?”

“왜, 왜요…?”

뜻밖의 반응에 클로디아가 눈을 깜박였다. 헬렌은 말도 안 된다는 듯 팔짱을 끼고 고개를 저었다.

“안 돼. 나도 마왕성까지 따라 들어갈 거야.”

“엥…. 위험한데….”

“이왕 거기까지 가서 마왕 얼굴도 안 보고 온다는 게 말이 돼? 나는 무조건 들어갈 거야!”

“죽, 죽을 수도 있는데….”

“상관없어. 갈 거야.”

헬렌이 싱긋 웃고 손가락을 하나 더 세웠다.

“나도 한 가지만 더 요구할게. 환경이 허락하는 한, 나에게 매일 술 한 잔씩을 허락할 것!”

“어머나. 한 잔으로 되겠어요?”

헬렌이 어깨를 으쓱했다.

“두고 봐. 되는지 안 되는지.”

“좋아요! 완전 좋아요!”

클로디아가 웃으며 헬렌의 팔짱을 끼었다.

“물리기 없어요!”

그렇게 요리사가 한 명 더 늘었다. 전투 능력까지 겸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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