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롤리아 숲
롤리아 숲은 동력 지대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사흘을 걸어가면 롤리아 강이 나오는데, 그 강을 거슬러 가면 롤리아 숲이었다.
시빌은 동력 지대를 벗어나 가장 먼저 만난 마을에서 부츠와 옷을 샀다. 어둠을 지나고 보니 그의 옷은 굉장히 지저분했다. 핏자국도 있었다. 클로디아가 그 눌러붙은 갈색 핏자국에 기함하자 시빌은 “동력 지대의 일상입니다”라며 웃었다. 그는 작은 가방도 하나 샀는데, 거기에 잔뜩 마력석을 사서 담았다.
“마법사들은 매일 아침 명상을 통해 마력을 충전해요. 그때 마력석이 있으면 조금 더 수월해지죠.”
“그렇구나. 충전한다는 말이 재미있게 들려요!”
클로디아가 재미있어하자 시빌이 웃으며 마력석 세 개로 저글링을 해 보였다. 클로디아가 짝짝 박수를 치자 마력석 두 개를 더 섞어 다섯 개로 저글링을 했다. 데미안이 “길에서 시선을 끄니 그만하지요”라고 말하고 나서야 그만두었다.
“사람들이 잠을 자고 나야 체력이 다시 생기는 것과 같습니다. 자연의 힘을 모아 마법을 부리니까, 명상으로 다 쓴 마력을 충전하는 겁니다. 그러니 제게 매일 아침마다 반 시간 정도 시간을 주셔야 해요.”
“그 정도는 예상했습니다.”
데미안이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클로디아가 말을 이었다.
“그렇군요! 그러면 제가 훈련할 때 옆에서 명상하면 되겠다!”
“훈련이오?”
시빌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클로디아가 디자이어를 가리켰다.
“얘가 너무 무거워서 드는 훈련을 하고 있거든요.”
“아하…?”
마법사는 디자이어를 보다가 손을 뻗어 봤다. 파팍. 스파크가 튀었다. 시빌이 디자이어를 만져 보려고 할 때마다 드는 현상이었다. 디자이어가 외쳤다.
[앗, 따가워! 만지지 말라니깐?]
“시간이 지나도 마찬가지네요.”
시빌이 낙담했다.
앞서 그는 클로디아의 등에 있는 디자이어를 만져보려고 애썼지만, 처음부터 지금까지 원인 불명의 스파크가 튀어 제대로 만져볼 수 없었다. 이 마을에 도착해 식사하는 와중에 손잡이를 억지로 쥐어보려다가, 엄청난 고통을 겪고 나서 시빌은 디자이어를 포기했다. 하지만 아직도 미련을 가지고 저렇게 한두 번씩 만져 보는 것이다.
“아깝습니다. 정령이시라 마법사와는 상성이 안 맞는 걸까요….”
[하지만 초대 포르투 국왕의 궁정 마법사들은 나를 잘 만졌는데!]
“저만 그런지도 모르겠습니다.”
시빌은 정말로 아깝다는 표정이었다. 마법사들은 호기심이 강하다더니 정말인 모양이었다. 클로디아는 배시시 웃었다.
“시간을 두고 친해지면 괜찮지 않을까요?”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클로디아는 동력 지대를 벗어난 후 조금씩 안정돼갔다. 하루종일 어두운 곳, 자고 일어나도 어둠이 사라지지 않는 곳에 관한 경험은 그녀에게 퍽 인상적이었던 모양이었다. 그녀는 길을 걸으며 시종일관 시빌에게 동력 지대에 대해 물었다. 정확히는 동력 지대의 어둠을 몰아낼 방법에 대해서였다.
“시빌, 마법으로 거대한 빛의 기둥 같은 걸 심으면 어떨까요?”
“발광 도마뱀을 교배해서 엄청 커다란 발광 도마뱀을 만드는 거예요!”
“아니면 포르투를 바다 위로 옮기면 안 될까요?”
앞의 두 개는 시빌이, 뒤의 하나는 데미안이 각자 안 된다고 대답했다. 제각각 그럴듯한 이유가 있었기에 클로디아는 시무룩해졌다.
시빌이 “자, 자. 동력지대같이 어두운 곳은 그냥 잊으세요”라며 어깨를 밀어대는데도 그랬다.
롤리아 강까지는 길이 넓고 컸다. 드문드문 길에서 여행자들이 보일 때마다 그들은 웃으며 인사했다. 가끔 안부를 묻기도 했다. 보기 드문 대검을 지고 있는 클로디아에게 호기심을 가지고 뭔지 묻는 사람들도 있었으나, 그들을 막는 건 데미안이었다.
“그게 뭐요?”
이렇게 물은 행상인에게 데미안은 북풍이 쌩쌩 부는 듯한 시선만 보냈던 것이다. 어쨌든 그 포르투의 기사단장이다. 일반인은 그와 시선을 마주하게 되면 아무래도 기가 눌리는 모양이었다. 어쨌든 본의 아니게 쾌적하긴 쾌적한 여행이었다.
“잠깐 쉬었다 가시죠.”
“그럴까요?”
아직 걷기 여행에 익숙하지 않은 클로디아를 위해 데미안이 쉬어가기를 청했다. 행상인들이 자주 쉬어가는지, 커다란 나무 밑에는 사람들이 앉을 만한 커다란 자리가 있었다. 세 사람은 저마다 다리를 뻗고 앉았다. 클로디아는 조심스럽게 다리를 모으고 앉아 어깨와 팔을 두들겼다.
“아휴.”
“어라. 어디 아프세요?”
시빌의 물음에 클로디아가 어색하게 답했다.
“앗…. 팔이랑 어깨가 좀….”
[그러게 데미안이 아침에 주물러준다고 할 때 말 듣지!]
디자이어가 톡 튀어나왔다. 클로디아는 저도 모르게 데미안을 쳐다봤다. 데미안은 이쪽을 쳐다보다가 클로디아와 눈이 마주치자 시선을 바로 돌려버렸다.
“주물러준다고요?”
“아, 그게….”
[클로디아가 아침에 훈련하고 나서 근육을 안 풀어서 그래!]
“아하….”
디자이어의 말이 맞았다. 클로디아는 아침에 데미안이 왜 팔을 주물러준다고 했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팔에 무거운 물건을 얹고 오랜 시간 한 자세로 고정한 채 서 있는 것은 상당한 무리를 일으켰다.
평생 작은 스푼보다 더 무거운 것은 들어본 적도 없는 클로디아에게는 더욱더 무리였다.
시빌이 고개를 갸웃하더니 말했다.
“그럼 제가 주물러드릴까요?”
“앗, 아뇨….”
“사양하지 마세요! 저도 오랜 노동으로 어디가 결리거나 아프면 마사지를 많이 해 봤답니다!”
시빌이 웃으며 앉아 있던 클로디아에게 다가섰다. 클로디아는 난처해졌고, 거절하려 했다. 그러나 클로디아보다 빠른 것이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 데미안이 검을 겨눈 것이다.
“헉.”
시빌이 갑작스레 들이대진 검에 놀라 물러섰다. 데미안은 검집에 검을 집어넣은 채였으나, 의도는 명백했다. 시빌이 그녀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막은 것이다.
“무례하게, 어디 맨손으로.”
“예?”
시빌이 당황한 눈으로 데미안에게 되물었다. 그러나 클로디아는 데미안이 왜 그렇게 했는지 바로 알았다. 시빌은 맨손으로 클로디아의 어깨를 주무르려 했던 것이다.
클로디아 또한 거절하려던 차였기에 일단 시빌이 물러난 것은 다행이었지만…. 데미안의 방식은 너무 거칠었다.
“안 됩니까?”
“귀족 여성의 맨살에 남자가 닿는 건 안 될 말입니다.”
“아.”
시빌이 놀란 듯 눈을 크게 뜨더니 뒤로 한 발짝 더 물러서서 손을 옆으로 들어 올렸다.
“몰랐습니다.”
“함부로 접근하지 마십시오.”
클로디아의 눈썹이 슬며시 들어 올려졌다. 그러나 정작 시빌은 어깨를 으쓱하며 천연덕스럽게 손을 내저었다.
“전 좋은 의도였는데, 무례했다면 죄송합니다.”
“…수르 알파, 손 치워요.”
“예, 로드.”
클로디아는 딱딱해진 말투로 데미안에게 명령했다. 데미안은 바로 검을 다시 제 허리춤에 찼다. 클로디아는 약간 짜증이 났다. 그가 클로디아에게 공주 같은 여행을 기대하지 말라고 했던 것이 바로 어제였기 때문이다. 그런 말을 해 놓고 저런 이유로 그녀를 보호하는 건 이율배반이었다.
한마디 할까, 말까? 하지만 그녀는 이런 종류의 이야기를 속에 쌓아놓고 묻어놓을 수 있는 종류의 사람은 아니었다. 결국 클로디아는 입을 열었다.
“수르 알파. 할 말이 있어요.”
“말씀하십시오.”
“제게 뭐라고 하셨죠?”
“….”
데미안이 무표정하게 그녀를 쳐다봤다. 클로디아는 이마를 좁힌 채 그를 올려다봤다.
“‘공주다운 여정이라고는 요만큼도 없을 겁니다’라고 하지 않았나요?”
“…예.”
“이건 공주다운 여정이 아니고 뭔가요?”
데미안이 곧바로 그녀에게 죄송하다고 말할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그가 그런 사람이었다면 클로디아는 그와 파혼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적어도 당황하거나 민망해하는 정도는 보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데미안은 미동도 없이 그녀를 한참이나 쳐다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공주다운 여정이 아니라고 한 뜻은, 로드께서 고생할 거라는 뜻이었지 제가 제 의무를 팽개칠 거라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
“저는 여행의 끝까지 언제나 로드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생각할 겁니다.”
클로디아는 화가 났다. 매번 자기만 옳지!
“그는 우리를 경호하기로 한 사람이잖아요!”
“그리고 당신의 명예와는 조금도 상관없는 사람이기도 하죠.”
데미안은 덤덤히 말을 이었다.
“로드의 여행이 끝나면 모두 로드의 명예가 지켜졌는지 궁금해 할 겁니다.”
여행이 끝나면, 나의 명예. 그의 말을 들은 클로디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데미안은 그녀가 여행이 끝나고 다시 결혼하고 싶어 할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모쪼록 나이 찬 청년들과 마왕성까지 장기 여행을 다녀온 처녀애에게 향할 눈빛은 뻔한 것이다.
클로디아도 그 정도는 알았다. 다만 지금까지는 딱히 생각해 본 적 없었을 뿐이다. 자르지스로 향하는 여정이 너무나 힘겹고, 성공하리라 희망을 걸기에는 지난한 일이기에.
하지만 데미안의 생각은 다른 모양이었다. 그는 말을 이었다.
“그때 저는 최전선에서 로드의 명예가 온전히 지켜졌음을 보증하고, 로드의 명예에 관해 논하는 자들과 결투를 해야 합니다.”
“….”
“그러기 위해선 저부터 나서서 로드의 명예를 지켜야겠죠.”
휘유.
시빌이 휘파람을 불었다.
“이래서야 제가 비싼 돈 받고 고용될 필요 없는 거 아닙니까?”
[그러게. 돈 아깝다!]
디자이어도 참견했다. 그러나 데미안이 시빌 쪽을 째려보자 약속이라도 한 듯 둘 다 입을 다물었다. 데미안은 말을 이었다.
“조금 쉬시고 더 걷도록 하죠. 오늘 저녁에 머무르는 마을에서 근육통에 좋은 약초를 구해보겠습니다.”
그리고 그는 조금 걸어 두 사람에게서 떨어져 앉았다. 클로디아는 망연자실해 있다가, 디자이어가 [뭐해? 앉아!]라고 말하는 통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한참이나 데미안 쪽을 훔쳐봤다. 등을 돌리고 길 쪽을 바라보고 있어 데미안의 얼굴은 볼 수 없었다.
***
클로디아는 엄청나게 더러운 여관을 각오했으나, 이날의 여관은 비교적 멀쩡한 곳이었다. 도착한 마을도 제법 큰 곳이었거니와, 데미안이 마을에서 가장 좋은 여관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시빌은 야호! 소리를 지르며 여관으로 들어갔다. 디자이어도 감탄했다. 여관은 3층이나 되는 건물이었고, 1층에는 널따란 식당이 있었다. 지하에는 욕탕도 있다고 했다.
클로디아도 그 말을 듣자마자 꺅, 하고 좋아하며 여관으로 들어갔다.
“식사부터….”
“저 씻을래요!”
클로디아는 본디 소식했다. 활동량이 늘어 배가 고프긴 했지만, 이 정도는 다이어트한다고 생각하면 나쁘지 않았다. 그보다는 머리카락을 감고, 씻는 것이 급했다. 다리도 알이 배겨 아팠다. 뜨거운 물에 들어가 풀고 싶었다.
여관 여종의 안내를 따라 욕탕으로 사라진 클로디아를 뒤로하고, 데미안은 1층에 앉아 식사를 주문했다.
“가장 빨리 되는 걸로 둘.”
급사는 주문을 받자마자 “여기 쇠고기 스튜 두 개요!”라고 외쳤고, 시빌이 죽상이 됐다.
“저는 스튜 먹는단 얘기 안 했는데.”
“그러면 느리게 먹고 혼자 방으로 오시든지 하시죠.”
“됐어요. 밥투정하는 어린애 같잖아요.”
시빌이 투덜거리며 앉았다. 그리고 두 사람 다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클로디아가 없으니 딱히 둘이 할 말이 없었던 것이다. 기실 오늘 오전부터 지금까지, 걸어오는 내내 클로디아와 시빌만 떠든 참이었다. 결국 먼저 입을 연 것도 역시 시빌이었다.
“저, 나으리.”
“데미안이라고 부르십시오.”
“예, 데미안. 그쪽, 공주님과 무슨 관계입니까?”
데미안이 이마를 찡그렸다. 시빌은 그게 어쩌면 짓궂은 친구끼리의 농담 같은 것을, 하늘 같은 공주님을 대상으로 했다는 데에 대한 화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시빌은 잽싸게 사과할 준비를 했으나, 아니었다.
“공주님이라고 부르지 마십시오.”
“어라.”
“신분이 노출됩니다.”
“아하…. 그럼, 저 거시기 뭐냐. 저도 로드라고 부릅니까?”
데미안이 한층 더 이마를 좁혔다.
“당신은 포르투의 국민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냥 클로디아라고 부르십시오.”
“예, 뭐.”
시빌이 멋쩍게 턱을 긁었다. 공주님 이름 부른다고 화낼 줄 알았는데 이건 또 의외였다.
그때 데미안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저는 로드의 호위 임무를 맡았습니다.”
순간 시빌은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물을 뻔했다가, 곧 그 말이 방금 전 자신이 던진 질문에 대한 답이라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두 분은 제가 알기로는 조금 다른 관계 아니신가요?”
시빌은 장난기가 다분한 성격이었기에 도저히 그 짓궂은 질문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시종일관 굳은 얼굴을 유지하는 눈앞의 이 남자가 당황하는 꼴이 한 번쯤은 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데미안 알파와 클로디아 테 포르투의 파혼은 너무나 유명한 이야기였다.
포르투의 귀하디귀한 공주님이 어린 나이에 포르투의 기사대장인 데미안 알파와 결혼을 약속한 소식은 백 개의 왕국에 널리 퍼졌다. 이미 열두 살을 넘을 무렵부터 어여쁘기로 소문난 그녀였기에 클로디아의 혼약 상대가 누가 될지 모두가 궁금해 했다.
그 상대가 수르 알파라는 사실이 알려졌을 때, 혹자는 ‘그러면 그렇지’ 하고 감탄했으며 혹자는 실망했다. 그리고 몇 년 후 그 두 사람은 파혼했다. 두 사람의 약혼만큼 파혼 또한 대단히 놀라운 소식이었기에 모두들 이유에 대해 미친 듯이 캐물었다.
하지만 아무도 그 이유를 몰랐다. 그렇게 클로디아는 새로운 구혼자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시빌은 지금 이 상황이 너무나 재미있었다.
파혼한 후에도 친구처럼 지내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시빌은 두 사람과 한나절을 걸어오며 이미 이 둘이 사이가 그리 좋지 않은 데다 대화도 거의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전 약혼녀와 함께 세상을 구하러 나서다니. 이 남자는 부처가 아니면 미련 뚝뚝 떨어지는 멍청이가 분명했다. 그리고 시빌은 이 남자가 부처일지, 멍청이일지 궁금했다.
그러나 시빌의 질문에도 눈앞의 남자는 눈썹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데미안은 한동안 시빌을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입을 열었다.
“어떤 대답을 원합니까?”
“어….”
시빌이 눈을 두어 번 깜박이자 데미안은 그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말했다.
“로드와 내가 한때나마 결혼을 약속했다는 것이 대단한 비밀도 아닐진대. 당신이 궁금해하는 ‘다른 관계’가 뭔지 나는 모르겠습니다. 어떤 대답을 바라고 그 질문을 한 겁니까?”
기껏해야 좀 당황하거나 아니면 말을 돌리는 정도일 줄 알았다. 하지만 데미안은 당황하기는커녕 어떤 동요도 없었다. 시빌은 이 상황이 꽤 흥미롭다고 생각했다. 그가 평온을 가장하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로 평온한 것인지 궁금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빌은 말을 이었다.
“바란 대답은 딱히 없고요, 그냥.”
“그냥?”
“…두 분이 아무 관계 아니시면 제가 한번 공주님께 대시라도 해 볼까 하고?”
마법사는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데미안은 여전히 무표정했다. 시빌은 한술 더 떴다.
“대륙 사는 사람이면 저 공주님 소문 한 번쯤은.”
“클로디아라고 부르십시오.”
하여간 깐깐한 남자였다. 시빌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클로디아도 문제 있는 거 아녜요? 그 이름 모르는 사람도 있어요? 아무튼.”
“….”
“예쁘기로 소문 자자해서 초상화 봤을 땐 솔직히 좀 실망했거든요. 근데 실물 못 따라가네요. 엄청 예쁜 데다가 성격도 귀엽고 착한 거 같고요. 저한테 그 돈 투척한 거 보니 돈도 엄청 많은가 봐요. 포르투 망한 줄 알았는데.”
“하고자 하는 말이 뭡니까? 요점만 말씀하십시오.”
“방금 말했잖아요. 제가 대시해볼까 한다고요.”
시빌이 턱을 괴고 웃었다.
“저 제 빚 갚아주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한테 인생 바치려고 했거든요.”
“….”
“그게 어떤 사람이든 상관없었는데, 그게 엄청 예쁘고 귀엽고 착하고 돈도 많은 ‘공주님’이네.”
일부러 공주님이라는 단어에 힘을 주었으나 데미안은 자신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시빌은 눈썹을 들어 올렸다.
“공주님 부마 되는 데 자격 요건 딱히 없죠?”
“…모릅니다.”
“에이. 본인이 한때는 그 후보셨잖아요.”
그때 마침 스튜가 나왔다. 점원이 탕, 탕 소리를 내며 두 사람 앞에 스튜 그릇을 내려놨다. 둔탁한 나무 그릇 안의 스튜는 동력 지대의 것과 달리 고기도 채소도 충분히 들어 있었다. 시빌은 신나라 수저를 들었다.
“와. 맛있겠다.”
“…식사 맛있게 하십시오.”
그제야 데미안이 입을 열었다. 하지만 시빌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클로디아와 결혼하면 이런 것보다 훨씬 맛있는 걸 매일 먹을 수 있겠죠?”
수저를 들려던 데미안이 멈칫했다. 시빌은 턱을 괴고 스튜 안을 수저로 빙글빙글 저으며 노래하듯 말했다.
“좋은 옷 입고, 좋은 침대에서 자고?”
“…마음대로 해보십시오.”
“오.”
시빌이 놀랐다는 듯 데미안을 쳐다봤다. 데미안은 시빌과 시선을 마주친 후, 곧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며 스튜를 떴다.
“로드는 가난한 남자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헐.”
“경박한 남자도 질색이시죠. 우아하고 기품 있는, 왕족 혈통의 남자를 선호하십니다. 자신을 즐겁게 해 주는 건 광대가 충분히 해내니, 믿고 인생을 함께할 수 있는 남자가 좋다고 예전에 왕실 인터뷰에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 어디 노력해보십시오.”
“…지금 제 욕 하는 거 같은데?”
“아닙니다.”
시빌이 못마땅하게 데미안을 쳐다봤다. 그러나 데미안은 이제 시빌은 쳐다보지도 않고 스튜를 입으로 가져가고 있었다. 즐겁고 맛있는 식사라기보다는, 끼니를 때운다는 표현에 걸맞을 법한 표정과 동작이었다.
다른 건 모르겠고, 시빌은 어쩐지 이 남자가 클로디아에게 파혼당한 이유를 알 것 같다고 생각했다. 말 한마디를 해도 밉살맞게 하는 타입이었다. 그야 단순히 무뚝뚝하다고 표현하면 그런가 싶기도 하지만.
“뭐, 이상형이란 건 바뀌는 거 아니겠습니까.”
시빌은 깐죽대며 스튜를 떴다. 두 사람 모두 식사를 끝낼 때까지 클로디아는 돌아오지 않았고, 데미안은 한 사람분의 식사를 클로디아의 방에 가져다 달라고 주문했다.
“여관 추천 요리로. 코스가 있다면 그쪽으로 부탁합니다.”
“예, 저희 추천 코스~!”
점원이 쾌활하게 웃으며 클로디아의 방이 어딘지 확인하고 사라졌다. 시빌이 입을 비쭉거렸다.
“저는 제일 빠른 요리 시켜줘 놓고서.”
데미안은 굳이 대답하지 않고 성큼성큼 앞장서 걸어갔다. 시빌도 어차피 이 남자와 함께 방을 써야 했기에 그의 뒤를 따라갔다.
들어간 여관방 안에는 디자이어가 덩그러니 기대어 있다가 두 사람을 반겼다.
[뭐야, 왜 이렇게 늦게 왔어!]
“식사를 했습니다. 로드께서는 아직 안 오신 모양이군요.”
[걔 뜨거운 물 들어가면 한나절이야. 밤이 깊어야 들어올걸?]
“헤에. 그런 걸 어떻게 알아요?”
시빌이 문을 닫으며 물었다. 디자이어가 툭 대답했다.
[나는 포르투의 정령이라고 말했잖아. 포르투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알고 있다고.]
“그렇다고 욕탕에 들어가는 시간도 알아요? 우와. 나도 정령 하고 싶다.”
[뭘 상상하는 거야? 이거 순 변태네. 알고 있다고 했지 욕탕을 들여다본다고는 안 했거든?]
“그게 그거 아니에요?”
[아니야!]
디자이어와 시빌이 티격태격하는 사이 데미안은 망토를 벗어 창문을 열고 한 번 털어 내렸다. 딱 봐도 엄청난 먼지가 떨어졌다. 그가 여행복을 벗어 내리는 걸 보고 시빌도 서둘러 셔츠를 벗었다. 가죽 갑옷을 챙겨 입은 데미안에 비해 시빌은 셔츠 위에 간단한 가죽 재킷 정도만 챙겨 입었기에 훨씬 빨랐다.
[어라, 너 옆구리에 그게 뭐야?]
시빌의 상처를 발견한 것은 디자이어였다. 시빌은 눈을 동그랗게 뜨다가 머리를 긁었다.
“아, 이거요. 마법적 상첩니다. 최근에 뭘 좀 하다가…. 맞다.”
[뭘 했길래?]
“그렇잖아도 물어보려고 했는데요, 디자이어. 이거 정령한테 입은 상처거든요.”
[뭐? 정령? 자세히 설명해 봐.]
데미안 또한 둘의 대화에 이번에는 흥미를 느낀 듯, 시빌 쪽을 봤다. 그리고 조금 놀랐다.
시빌의 오른쪽 옆구리에는 시커멓게 탄 상처가 있었기 때문이다. 상처는 얼마나 지독한지 몰랐다. 손바닥만 한 상처 안에서는 진물이 흘러나오고 있었고, 희끄무레한 것이 비치는 것이 뼈가 드러난 듯 보였다. 데미안은 대번에 얼굴을 심각하게 굳히고는 시빌에게 다가섰다.
“이거 뭡니까? 괜찮습니까?”
“아잇, 깜짝이야. 갑자기 확 다가오면 어떻게 해요? 그렇잖아도 크고 시커먼 양반이.”
시빌은 데미안을 타박한 뒤 말을 이었다.
“정령이 머문다는 샘이 있는데, 거기의 샘물을 마법적으로 가공해볼까 하다가 실수해서 정령의 보복을 받았습니다.”
[왜 그런 짓을 했어?]
“피부가 좋아지게 해 준다는 정령이었거든요. 물을 좀 갖다 팔면 돈벌이가 될까 해서 그랬습니다.”
[….]
데미안의 얼굴에 한심함을 가득 담은 표정이 스쳐 지나갔다. 시빌은 제 상처 위를 어루만지며 말했다.
“보통 상처는 마법으로 치료하면 되는데, 정령에게 당한 상처는 아물지 않더군요. 의사를 찾아가기에는 돈이 없어서 마법으로 대강 통증만 없애놨어요. 썩지 않도록 하는 게 제가 할 수 있는 전부였습니다. 혹시 디자이어가 좀 봐줄 수 있나요?”
[글쎄? 나는 잘 몰라. 너 나를 만지면 스파크가 일잖아?]
디자이어는 궁금해하면서 시빌에게 상처를 보여 달라고 말했다. 시빌은 디자이어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 샘은?]
“제가 실수해서 지금은 없어졌습니다. 그 정령도 어디론가 사라졌죠.”
[흠. 아마 생겨난 지 얼마 안 된 하급 정령일 거야. 그런 애들은 별 것 아닌 일에도 금방 놀라곤 하거든. 나 같은 고위 정령과는 차원이 다르지.]
우쭐대는 검 앞에 시빌이 다리를 포개고 앉았다. 디자이어는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
[물의 정령이라고 했나?]
“정확히는 몰라요, 저도.”
[이거 좀 재밌는데. 네가 나를 만지면 스파크가 인 게 이것 때문이 아닐까?]
“그런가요? 저도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은 해봤지만, 정령에 관해서는 전혀 모르거든요!”
그때였다. 누군가가 문을 똑똑 두들겼다. 디자이어가 반가운 기색으로 말했다.
[들어와!]
누구인지는 뻔했다. 문을 열고 고개를 쏙 내민 것은 따끈따끈한 뺨을 한 클로디아였다. 클로디아는 고개만 방 안에 들였다가, 웃통을 벗은 시빌을 보고 “어머나! 실례했어요!” 하고 문을 쾅 닫아버렸다.
“어라.”
시빌이 머리를 긁적였다.
[괜찮아, 클로디아! 들어와!]
“어떻게 들어가!”
문 바깥에서 비명 비슷한 게 들렸다. 데미안은 낮게 한숨을 쉬더니 시빌에게 그의 셔츠를 집어 던졌다.
“귀족 여성 앞에서 품위 없게 굴지 마십시오.”
“저는 평민인데요.”
시빌은 투덜거리면서도 셔츠를 다시 주워 입었다. 클로디아는 한참 후에야 겨우 들어왔다. 얼굴은 여전히 빨간 채였다.
“미안해요, 시빌. 몰랐어요. 들어오라고 해서….”
“에이. 괜찮아요. 제 몸 정도야 얼마든지 보셔도 돼요.”
“어떻게 그래요!”
클로디아가 펄쩍 뛰었다. 시빌은 헤헤 웃으며 클로디아에게 자신은 이미 다섯 살 때 옆집 여자아이에게 순결을 빼앗겼다는 둥 헛소리를 늘어놨으나, 데미안이 무시무시한 눈으로 노려보기 시작해 곧 그만뒀다. 한바탕 소동이 지나간 후 디자이어가 물었다.
[아, 잠깐만.]
“응?”
[클로디아. 나를 좀 잡아 봐.]
클로디아는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디자이어의 손잡이를 잡았다. 디자이어가 이어 말했다.
[나머지 한 손으로 시빌의 손을 좀 잡아볼래?]
“손?”
클로디아는 주뼛거렸다. 귀족 여성은 함부로 남자의 맨살을 만지면 안 되기 때문이었다. 그 사실을 익히 알고 있는 시빌이 쓴웃음을 지었다.
“손은 왜…?”
[아, 그게. 시빌이 꽤 큰 상처를 입었거든. 보니 나와 같은 속성의 정령 같아서, 내가 치료해줄 수 있을 것 같기도 한데….]
“상처?!”
클로디아가 펄쩍 뛰는 바람에, 시빌은 디자이어에게 했던 말을 그대로 다시 하고 셔츠를 걷어 그 상처를 보여줘야 했다. 클로디아는 처음에는 시빌의 상처를 보고 기절할 듯 놀랐고, 그 후에는 눈이 글썽글썽해졌다.
“세상에, 이게 무슨 일이야…. 의사를 찾아갈 돈이 없으면 말을 하지 그랬어요.”
“아, 어차피 동력 지대에는 의사도 없었고요.”
시빌이 너스레를 떨었다.
“마법으로 일단 상처가 진행되는 건 막았거든요.”
“하지만….”
그때 잠자코 보고 있던 데미안이 끼어들었다.
“그래도 그대로 놔두었으면 위험했을 겁니다. 어떤 마법도 영구적으로 작용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니까요. 어떻게 해, 이거….”
클로디아가 눈물을 그렁그렁하게 달고 속상해했다. 징그러워서 상처를 제대로 보지도 못하면서, 시빌의 고통을 짐작해 보려는 모양이었다. 시빌이 민망해하며 셔츠를 내리자,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 내려요?”
“아, 역시 디자이어 님이 치료하시기 어려우니 제가 도중에 큰 도시에서 의사를 잠깐 보는 게 나을 것 같아서요. 헤헤. 그런 의미에서….”
시빌이 두 손을 모았다.
“공주님, 다음에 제가 의사를 만날 때 돈 좀 빌려주시면 안 됩니까?”
“돈이요?”
“예. 받은 어음은 모두 빚 갚는 데 썼거든요. 빚은 제가 틈틈이 생기는 대로 갚겠습니다!”
시빌의 말에 클로디아는 눈알을 굴리다가 이내 결심한 듯 손을 내밀었다.
“아녜요. 일단 시도해 봐요.”
“예? 하지만….”
“귀족 여성은 무릇 남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을 의무도 있어요. 생명이 위급한 자를 구하는데 맨살이건 장갑을 꼈건 무슨 상관이에요?”
휘익. 디자이어가 휘파람을 부는 듯한 소리를 냈다. 시빌은 조금 감동한 표정이 됐다.
클로디아는 자신이 입은 셔츠 소매를 걷었다. 건틀렛은 끼지 않은 상태였기에, 하얀 손가락이 그대로 조명에 드러났다.
“그래도….”
시빌이 클로디아의 손을 홀린 듯 잡으려다, 곧 데미안의 시선을 눈치채고 그쪽을 바라봤다. 시빌의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에 데미안은 한숨을 쉬었다.
“빈민 구제는 왕족의 의무입니다. 받아들이셔도 됩니다.”
“그래요, 자요!”
다시 한번 클로디아가 손을 내밀기에 시빌은 “빈민이라뇨?! 물론 제가 빈민이긴 하지만!” 하고 쫑알대며 너스레를 떨었다. 하지만 클로디아는 그의 앞에서 손을 물리지 않았다. 희고 굳은살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손. 시빌은 눈을 두어 번 깜박거리고는 제 두 손을 내밀어 덥석, 클로디아의 손을 감싸 잡았다.
“아이고, 잘 부탁드립니다~!”
클로디아의 얼굴에 일순간 홍조가 도는 것을 시빌은 놓치지 않았다. 구제니 뭐니 해도 어쨌든 그녀는 남자의 손을 잡아보는 것이 처음이었던 것이다. 시빌은 부러 클로디아의 손을 더욱 꼭 잡았다.
“디자이어 님, 어때요?”
[기다려 봐. 음.]
디자이어가 잠시 침묵했다. 금세 지루해진 시빌이 뭔가 말하려던 때, 디자이어가 [오!] 하고 놀랐다.
[된다. 된다.]
“예?”
[된다. 네 옆구리 한번 봐.]
“어….”
클로디아와 데미안, 그리고 당사자인 시빌의 시선까지 모두 시빌의 옆구리로 모였다. 시빌의 상처는 아직도 여전히 시커멓고 끔찍했으나, 조금씩 변하고 있었다. 희끄무레하게 뼈가 드러난 부분에서 살이 약간이나마 차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우와?”
시빌이 놀라 감탄했다.
[에헴. 되지? 어때?]
“세상에, 디자이어 너 영 쓸모없는 애는 아니었구나!”
클로디아의 감탄도 뒤를 따랐다. 디자이어가 [쓸모없는 애라니!] 하고 화를 냈지만, 클로디아는 이어 폭풍처럼 디자이어를 칭찬하며 부추겼다.
“멋있어! 멋있어! 빨리빨리 더 해봐! 상처가 아물고 있다구!”
[끄응.]
디자이어는 그 뒤로도 조금 침묵하더니 의외의 대답을 내놨다.
[안 돼.]
“뭐?”
[오늘은 이 이상 무리.]
“엑, 왜!”
대검은 젠체하며 설명했다.
[아무리 하급 정령이라 해도 다른 애가 내놓은 상처에 함부로 간섭할 순 없어. 나나 되니까 이 정도 하는 거라고. 그리고 나도 힘이 깎여 있잖아. 이 정도도 감지덕지해야 해.]
“그럼요, 그럼요!”
시빌이 때를 놓칠세라 호들갑을 떨었다.
“이 정도만 해도 얼마나 다행인데요! 어휴 저는 내장이 썩기라도 할까 봐….”
“그게 무슨 끔찍한 소리예요!”
클로디아가 놀라 어깨를 떨었다.
“디자이어. 더는 안 될까?”
[‘오늘은’이라고 했잖아. ‘오늘은’. 내일 해야 돼.]
“어?”
시빌이 반색했다.
“그럼 내일도, 모레도 꾸준히 치료받으면 된다는 얘깁니까?”
[그래.]
디자이어가 으스댔다.
[매일 저녁 꾸준히 치료받도록 해.]
“매일 저녁이요,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시빌이 절이라도 할 기세로 답했다. 그러나 클로디아는 말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는 아직도 시빌의 손을 잡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아픈 이를 구제하겠다고는 했지만, 막상 잡은 남자의 맨손이 너무 생소해 그녀는 약간 혼란하던 참이었다.
그런 그녀의 마음을 알아본 걸까. 시빌은 클로디아를 보고 씩 웃었다.
“감사합니다, 공주님. 매일 저녁 잘 부탁드려요. 제가 잘 모실게요.”
“앗…. 네….”
클로디아가 민망한 듯 눈알을 굴리다가, 침대 한켠에 앉아 이쪽을 바라보는 데미안과 눈이 마주쳤다. 무뚝뚝한 남자는 표정 변화 없이 둘을 쳐다보다가, 클로디아와 눈이 마주친 순간 시선을 피했다. 그녀는 삽시간에 기분이 나빠졌다. 어쩐지 자신을 탓하는 듯한 눈빛으로 보였던 것이다.
그래서 클로디아는 짐짓 큰 소리로 외쳤다.
“좋아요! 치료될 때까지 언제든지 손잡아 줄게요!”
“고맙습니다!”
시빌이 환히 웃으며 잡았던 그녀의 손등에 입술을 꾹 눌렀다. 클로디아가 작게 꺅, 소리를 질렀으나 그다음에는 어머나…. 하고 놀라버렸다.
시빌이 입술을 누른 곳에서 퐁, 퐁퐁 하고 작은 꽃잎이 허공으로 퍼졌던 것이다. 분홍색과 하늘색, 사랑스러운 노란색의 꽃들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놀란 클로디아에게 시빌은 유들유들 웃으며 설명했다.
“제가 보답할 건 없고, 작은 환상으로라도 보답해 드리겠습니다.”
“어머, 예뻐라.”
“마음에 드시나요?”
“물론이죠!”
클로디아가 환호성을 지르며 시빌에게 더 해달라 조르기 시작했다. 시빌은 곧 방 안을 꽃으로 채우기 시작했다. 데미안이 “식사를 방에 가져다 두었습니다”라고 해도 클로디아는 떠날 줄 몰랐다.
결국 여관의 점원이 올라와 문을 두들기며 “다른 방에서 시끄럽다고 항의가 와서요…”라고 말한 후에야 클로디아는 아쉬움이 뚝뚝 떨어지는 얼굴로 제 방으로 돌아갔다.
***
데미안은 새벽같이 클로디아를 깨웠다. 클로디아는 눈곱만 겨우 떼고 일어나 아침부터 팔위에 디자이어를 올려놓고 끙끙대야 했다. 잠에서 막 깨어 힘도 잘 들어가지 않는 팔로 무거운 대검을 받치고 있으려니 죽을 맛이었다.
“정말이지…. 너는 왜 이렇게 무거운 거니? 살 좀 빼!”
당연히 엉뚱한 곳으로 분노의 화살이 날아갔다. 디자이어가 투덜댔다.
[나는 원래부터 이런 생김새였다고! 러브유어셀프 몰라?! 너 자신을 사랑하라! 나는 나를 사랑해! 살은 안 뺄 거야!]
“…검은 살을 못 뺍니다.”
두 사람의 한심한 대화 사이에 데미안이 끼어들었다. 디자이어도, 클로디아도 입을 다물었다. 클로디아의 이마에서 비 오듯 땀이 쏟아졌다.
‘이럴 줄 알았으면 오늘 아침에 씻을걸.’
여관의 욕탕은 뜨거운 물을 일일이 하인들이 길어와야 했기에, 손님들의 욕탕 이용은 하루 숙박에 한 번으로 한정되어 있었다. 수도꼭지를 돌리면 뜨거운 물이 나오는 포르투 황성에서 살던 클로디아로서는 정말 척박하기 그지없는 환경이었다.
“…들고 계시는 동안 롤리아 숲의 거인들을 만나기 위해 주의해야 할 점을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도무지 귀에 들어오지 않을 것 같았지만, 클로디아는 애써 귀를 기울였다. 땀이 이마를 타고 콧등으로 뚝뚝 흘렀다.
‘원래 땀도 많이 안 흘리는 체질인데!’
“거인들은 사람들이 많은 걸 싫어합니다. 저도 세계수의 씨앗을 받으러 간 것은 단 두 번뿐이었습니다. 처음은 제 전 기사단장을 따라 수행기사로, 두 번째는 제가 기사단장으로였죠.”
“네에….”
“거인들이 사람이 많은 걸 싫어하는 이유는 하나입니다. 사람들은 작아서 그들에게 잘 보이지 않고, 실수로라도 자신들이 밟을까 봐서 그렇습니다. 롤리아 숲의 거인들은 살생을 싫어합니다.”
거인들은 세계수를 키우는 것에 온 힘을 기울인다. 식물을 좋아하는 거인들에게 세계수는 가장 황홀한 애완식물이다. 씨를 심으면 곧 싹을 틔우고 하루 만에 빠르게 자란다.
심은 사람의 마음에 따라서 곧게도 자라고, 구불구불하게도 자란다. 거인들은 세계수를 기르며 마음을 다스렸다. 롤리아 숲은 그런 거인들의 가장 아름다운 안식처라고, 데미안은 설명했다.
‘…그래서 기사단장들은 매번 저런 사람만 뽑는 건가.’
클로디아는 부루퉁하게 입을 내민 채 생각했다. 데미안 알파 이전의 수르는 미다프였다. 수르 미다프는 백발이 성성한 사람이었는데, 그 또한 고집 세고 무뚝뚝하기로 이름이 높았다. 클로디아를 볼 때면 무서운 눈에도 기쁨이 깃들었지만, 그녀라고 마냥 봐주지는 않았다. 데미안은 그런 수르 미다프와 똑 닮았다는 소리를 듣곤 했다.
대대로 포르투의 기사단장들이 갖는 임무 중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세계수의 재배였다. 3년에 한 번씩 포르투를 받치기 위해 동력 지대의 경계에 심는 세계수의 모양은 매번 같았다. 곧고, 위에서 가지를 쭉 뻗어 하늘섬을 받친다. 일관적으로 길러내야 하기에 기사단장들의 인수인계는 일반적으로 아주 길었다.
“그래서 저희는 롤리아 숲에 아주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들어가야 합니다.”
“…예?”
클로디아는 놀라 순간적으로 팔에 힘을 뺐다. 그리고 필연적으로 콰장창! 소리를 내며 디자이어가 바닥에 떨어졌다. 디자이어가 빽 소리를 질렀다.
[아야!!]
“미, 미안…. 미안해요. 잠깐 놀라서….”
“…떨어트리셨으니 애당초 약속대로 다시 10분을 추가하겠습니다.”
“네….”
클로디아는 기어가는 목소리로 답했다. 정말이지 융통성이라는 건 요만큼도 없는 남자였다. 생각 같아서는 못 하겠다고 드러눕고 싶었다.
하지만 데미안 알파는 그녀에게 너무 어려운 남자였다. 클로디아는 눈치를 보다가 덜덜 떨리는 팔을 다시 내밀었다. 요령을 피우고 싶었지만, 그럴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데미안 알파와 자신은 불편한 관계였고, 트집 잡히고 싶지 않았다.
정확히는 그에게 싫은 소리를 듣기가 죽기보다 싫었다.
데미안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한 손으로 디자이어를 들어 올려 그녀의 팔위에 다시 올려놨다. 클로디아는 말도 안 된다는 표정으로 데미안을 바라봤다. 그 엄청난 대검이 데미안의 손 안에서는 이쑤시개처럼 가볍게 놀아났다.
“…제게 하실 말씀이 있으십니까?”
데미안의 말을 듣고서야 클로디아는 자신이 그를 너무 오래 쳐다봤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데미안은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순간 클로디아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아, 아뇨…. 그냥.”
“예. 그럼 설명을 잇겠습니다.”
덤덤히 말한 남자는 손을 뻗었다. 클로디아는 눈을 깜박였다가, 뒤늦게서야 남자가 뭘 한 것인지 깨달았다. 데미안은 흰 손수건으로 그녀의 이마 땀을 훔쳐냈다. 그 여상한 동작에 클로디아는 놀랄 순간도 놓쳐버린 것이다.
그러나 손수건을 집어넣는 데미안은 그녀의 놀람 따위는 알지도 못한 채 시선을 제 품에 고정하며 설명을 이었다.
“사람이 여기 있으니 밟지 말라고 광고하는 것이죠. 그러니 저희는 롤리아 숲 근처에서 큰 소리를 내는 북을 사야….”
클로디아의 얼굴이 피가 날 것처럼 검붉어진 것을 그는 끝까지 몰랐다.
***
롤리아 숲까지는 순조로웠다. 데미안은 큰 북을 안고 있었다. 시빌 또한 자그마한 심벌즈를 들고 있었는데, 그는 그 심벌즈에서 나는 소리가 즐거운 듯 간헐적으로 두 개의 심벌즈를 가볍게 마주쳤다. 심벌즈는 금속성의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떨렸다. 디자이어가 신경질을 냈다.
[아이, 시끄러워! 시빌, 너 제발 숲 전에는 그것 좀 안 두들기면 안 돼?]
“앗, 미안합니다. 하지만 어릴 적에 광대들을 동경했었거든요.”
시빌이 웃으며 심벌즈를 끈에 매달아 뒤로 매며 말했다.
“까마득하게 예전에 광대들을 본 적이 단 한 번 있거든요. 북을 치고 심벌즈를 울리면서 노래하고 춤을 추었죠.”
“…남부였나 보군요.”
“예?”
시빌이 놀란 눈으로 데미안을 바라봤다. 데미안은 태연한 얼굴로 말했다.
“광대들은 남부 대륙에만 주로 돌아다니니까.”
“예. 광대들의 도시가 남부의 끝에 있으니까요. 박식한 분이군요?”
“그냥 어쩌다 보니.”
시빌은 싱글벙글 웃었다. 클로디아가 신기한 눈으로 쳐다봤다.
“동력 지대에서 살다가 어떻게 남부에 살게 된 거예요? 그리고 동력 지대로 다시 돌아온 건가요? 혼자라면 몰라도 가족들도 거기 있다고….”
“아.”
시빌이 어깨를 으쓱했다.
“사람 일은 모르는 거니까요.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다고 말씀드릴게요, 저도.”
그렇게 말하곤 시빌은 데미안에게 한쪽 눈을 찡긋했다. 데미안은 시빌을 쳐다보지도 않고 걷다가 입을 열었다.
“주의할 게 있습니다. 잘 들으셔야 합니다.”
그렇게 말하며 데미안은 클로디아에게 웬 주머니를 건넸다. 클로디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주머니를 열어봤다. 클로디아의 손바닥만 한 작은 주머니 안에는 소금이 들어 있었다.
“롤리아 숲의 거인들은 요란한 소리를 들으면 인간이 왔구나, 하고 금세 알아챕니다. 문제는 그것을 알아채는 것이 거인뿐은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면요?”
“난쟁이들도 사람이 내는 요란한 악기 소리를 듣고 이쪽으로 몰려듭니다.”
클로디아는 생소한 이름에 고개를 갸웃했다.
“난쟁이가 왜요?”
“이런, 클로디아.”
시빌이 냉큼 끼어들었다.
“데미안 씨가 말하는 난쟁이는 단순히 키가 작은 사람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랍니다. 땅요정이라고도 불리는 자그마하고 고약한 몬스터들을 일컫는 말이죠.”
“몬스터요?”
클로디아의 눈이 동그래졌다. 시빌이 콧대를 세우며 잘난 척했다.
“예. 클로디아의 허벅지까지쯤 오는 키를 가지고 있는데, 인간들의 물건과 식량을 훔치는 데는 정평이 나 있는 놈들이에요.”
“하나하나를 상대하는 건 어렵지 않습니다. 문제는 난쟁이들은 무리를 지어 생활한다는 겁니다. 그들은 힘은 약하지만, 질긴 피부와 날카로운 이빨을 가지고 있죠. 로드께서는 난쟁이가 다가오면 그 소금을 뿌리십시오.”
그 말에 클로디아는 다시 주머니를 내려다봤다가, 데미안을 쳐다봤다.
“난쟁이가 소금을 싫어하나요?”
“예. 소금에 닿으면 그들은 진물이 나고 두드러기가 돋습니다. 이유는 모릅니다. 어쨌든 로드께서는 자신을 지킬 힘이 없으니, 제가 앞에 서고 로드가 가운데, 뒤는 시빌이 경호하도록 하지요.”
“예이.”
시빌이 한 손을 들며 쾌활하게 웃었다.
“제가 클로디아의 뒤를 안전히 지키겠습니다!”
“저도 최선을 다해 지킬 겁니다. 다만 난쟁이들은 생각도 못 한 곳에서 튀어나오는 종족이니 부디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데미안의 말에 클로디아는 겁을 먹었다. 저도 모르게 등에 진 디자이어 쪽을 어루만지니 디자이어가 웅웅거렸다.
[재미있겠는걸!]
“뭐래니, 얘가. 넌 이런 게 재미있을 것 같아?”
[그럼! 본격적인 모험 같지 않아?]
디자이어가 재미있다는 듯 물었다. 클로디아는 붕붕 고개를 흔들었다.
“정말이지 난 이런 건 너무 싫어.”
“…하지만 거인들은 나쁘지 않을 겁니다. 그들은 상냥하고 다정해요. 다만 식물의 안전을 해치는 자에게는 엄격할 뿐이죠. 그러니 길을 벗어나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길을 벗어나면 불가피하게 식물을 밟으며 나아가게 됩니다.”
데미안이 말을 이었다. 마치 그녀를 위로하려는 듯한 내용이었으나, 말투는 여전히 딱딱하기 그지없었다.
“숲에 길이 있나요?”
클로디아의 물음에 데미안이 답했다.
“롤리아 숲은 거대한 거인들의 정원이니까요. 멋모르고 들이닥친 인간들이 정원을 망친다면 거인은 저희에게 호감을 갖기 어렵겠죠. 당연히 거인들은 난쟁이들과도 사이가 나쁩니다. 숲의 덩굴을 헤집고, 나무 밑에 굴을 파서 숨으니까요.”
“아, 알겠어요.”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럴 만도 한 것 같았다. 클로디아는 신기하다 생각하며 걸었다.
옆으로 롤리아 강이 저 멀리 내려다보였다. 잔잔하고 큰 강은 평화롭게도 흘러가고 있었다. 마치 데미안의 말이 꿈인 것처럼.
***
그리고 몇 시간 후, 클로디아는 제발 이 상황이 꿈이었으면 하고 바라게 되었다.
“이꺅꺅갹꺅!”
난쟁이 열댓 마리가 기괴한 소리를 내며 세 사람을 포위하고 있었다. 데미안은 이미 검을 빼든 뒤였고, 시빌도 손을 들고 있었다. 클로디아는 소금 주머니만 꾹 쥐고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식물을 다치게 하면 안 됩니다.”
“압니다! 그거 아니었으면 진작 여길 그냥 불태웠을 거라고요!”
시빌이 경쾌하게 답했다. 데미안이 클로디아에게 주의를 주었다.
“제 뒤에 꼭 붙어 계십시오.”
“네, 네!”
클로디아의 대답이 신호라도 된 듯이, 난쟁이 한 마리가 “끼약!” 하고 뛰어올라 데미안에게로 달려들었다. 데미안은 망설임 없이 검을 그었다. 뛰어들었던 난쟁이는 단숨에 난쟁이였던 고깃덩이가 됐다. 그 모습을 보고 비명 지른 것은 난쟁이들뿐만은 아니었다.
“엄마야!!!”
클로디아 또한 놀라버렸던 것이다. 두 동강 난 난쟁이의 시체에서 꿀렁꿀렁 피가 솟아 나왔다. 클로디아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소리를 질렀다.
난쟁이들도 마주 소리 지르며 덤벼댔다. 시빌이 쳇, 하며 손을 휘저었다.
펑, 펑, 펑.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 난쟁이들의 머리를 차례로 산산이 조각냈다. 바람이었다. 공중에서 피가 터졌고, 난쟁이의 시체들이 투두둑 허공에서 바닥으로 떨어졌다.
정말이지 끔찍한 광경이었다.
난쟁이들은 아래, 위, 옆 할 것 없이 덤벼댔다. 이쪽은 키가 크고 저쪽은 키가 작으니 동시다발적으로 덤벼들 거라는 예상은 충분히 한 바였다. 그러나 이렇게 징그러울 정도로 덤벼들 줄은 몰랐다. 뭣보다….
‘더러워!’
난쟁이들은 땅굴을 파고 숨어 살았다. 몸에서는 냄새가 났고, 기다랗고 누렇게 썩은 손톱에는 뭐가 끼어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코가 유달리 길쭉한 난쟁이 하나가 “키약!” 소리를 내며 클로디아에게 달려들었다. 클로디아는 저도 모르게 ‘악!” 하며 소금을 흩뿌렸다.
다행히도 효과는 있었다. 스스로 뿌리면서도 ‘이런 게 효과가 있나?’ 싶었지만, 난쟁이는 소금이 닿자마자 히익 질겁을 하며 물러섰던 것이다.
소금을 맞은 곳을 거품을 물며 털어내는 난쟁이의 손바닥에 커다란 고름이 갑자기 부풀었다. 클로디아가 당황스러울 정도로 빠른 속도였다. 곧 얼굴과 팔, 다리 할 것 없이 소금이 닿은 곳이 짓물렀고 난쟁이는 바닥을 뒹굴었다.
“끼이이이!”
그 모습에 이쪽으로 달려들기 위해 눈을 희번덕거리던 난쟁이들이 흠칫했다. 키이, 키이 소리를 내며 난쟁이들은 물러섰고, 그 틈을 타 시빌이 마법을 썼다.
펑, 펑펑.
난쟁이들은 우스울 만큼 빠르게 죽었다. 곧 조용해졌고, 클로디아는 그제야 어깨의 힘을 한층 풀고 주변을 바라볼 수 있었다. 온통 난장판이었다.
아름다운 숲은 피범벅이었다. 소금을 맞은 난쟁이는 여전히 괴로워하며 뒹굴고 있었으나, 데미안이 빠르게 그 목에 검을 찔러 넣었다.
우드득.
난쟁이는 킥 소리도 내지 못하고 죽어버렸다. 시빌이 땀을 닦았다.
“휘유. 쉽지 않군요. 놈들이 워낙 작은 데다 재빨라서.”
“괜찮으십니까, 로드.”
“어, 네….”
주변을 황망히 둘러보던 클로디아는 엉겁결의 데미안의 말에 대답했다. 데미안은 난쟁이의 목에서 검을 뽑아내고는 후드득 털었다. 날카로운 검날에서 핏방울이 점점이 떨어졌다. 디자이어가 쫑알거렸다.
[내가 포르투였으면 이런 놈들 따위는 한 번에 죽일 수 있는데!]
“여긴 포르투가 아니니까요.”
시빌이 싱글싱글 웃으며 클로디아의 어깨를 툭 쳤다.
“정신 차리세요, 공주님. 괜찮으세요?”
“어어어…. 네….”
그제야 클로디아가 휘청, 했다. 심상찮은 것을 느낀 시빌이 눈썹을 들어 올렸다. 웃음은 곧 사라졌다. 현기증을 느낀 클로디아가 그대로 시빌의 품으로 쓰러졌기 때문이다.
“어어어어? 공주님? 공주님!”
“미, 미안해요. 시빌…. 잠깐만….”
벌레 한 마리 잡지 못하던 공주님이었다. 아무리 결심에 결심을 거듭했다 해도, 눈앞에서 난쟁이들의 내장이 터져나가는 모습을 생으로 보는 것을 무던히 받아들일 수 있을 리 없었다. 클로디아는 시빌의 팔을 잡고 버텼으나, 다리에 힘이 빠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주르륵, 발목이 미끄러졌고 시빌은 깜짝 놀라 그녀의 허리를 안았다.
“헉, 괜찮아요?”
[클로디아? 클로디아?]
디자이어가 놀라 그녀의 이름을 외쳤다. 클로디아는 갑작스러운 토기를 느꼈다. 안 돼, 시빌이 지금 나를 부축하고 있잖아. 하지만….
“…욱.”
클로디아는 간신히 고개를 돌려, 시빌의 품 안에 토하는 것만은 막을 수 있었다. 우웨에에엑, 소리와 함께 아침에 먹은 것들이 주르륵 게워져 나왔다.
시빌이 놀라면서도 그녀의 허리를 반대로 돌려 안았다. 그녀는 그렇게 시빌의 팔에 제 몸뚱이를 늘어트리듯 맡긴 채 구역질을 했다. 우욱, 욱.
‘적게 먹어서 다행이다….’
그 와중에 그런 생각이 드는 건 황당한 노릇이었다. 목덜미에는 땀이 배어 나왔고, 얼굴은 하얗게 질렸다. 그러나 겨우 괜찮을 만하면 눈에 들어오는 난쟁이들의 시퍼런 내장 때문에 클로디아는 다시 고개를 숙이고 속을 게웠다.
간신히 구토를 끝냈을 때는 클로디아도 시빌도 지쳐 있었다.
“끝났어요?”
“흐읍, 네.”
클로디아는 신물만 나오는 입을 닦으며 몸을 겨우 일으켰다. 힘이 하나도 없었다. 얼굴은 새빨갛게 부었고 목이 따가웠다. 그렇지만 사과는 해야 했다. 이렇게 추한 모습을 남에게 보여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미안해요. 놀랐죠….”
“어어, 아녜요.”
시빌이 난처하게 웃었다.
“첫 실습 나가는 마법사들이 많이 그러는 걸요. 저도 자주 봤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하지만 못난 꼴을 보였어요.”
클로디아는 시빌의 팔뚝을 잡고 겨우 몸을 세웠다. 시빌은 그녀의 어깨를 붙들고, 클로디아가 균형을 잡도록 도우며 말했다.
“뭘요. 공주님은 예쁘니까 괜찮아요.”
“그런가요….”
클로디아는 애써 웃어 보였다. 하지만 제대로 일어서기는 여전히 힘들었고, 그 뒤로도 한참이나 그녀는 시빌에게 의지해야 했다. 시빌은 친절하게도 그녀를 부축하고 계속 같은 자세로 서 있었다. 그러기 쉽지 않을 텐데. 이윽고 똑바로 선 클로디아는 기겁했다. 보기 좋게 묶어 올린 제 머리카락이 온통 엉망이 돼 있었던 것이다.
“어머, 나 이런 꼴로….”
“예쁜데요! 음, 머리를 다시 묶어 드릴까요?”
시빌이 친절하게 제의했다. 클로디아는 고개를 흔들었다.
“고맙지만 괜찮아요.”
“거인들을 만나기 전까지 또 이런 일이 없으리란 법이 없으니까요.”
그녀의 말을 받아친 것은 데미안이었다. 그제야 클로디아는 새삼스레 옆을 바라봤다. 그녀가 토하는 동안 난쟁이들의 시체를 한데 모은 데미안이 검을 검집에 집어넣고 있었다. 무심한 푸른 눈은 그녀가 구토한 것을 몰랐던 것처럼 심드렁하게 말을 이었다.
“괜찮아지셨으면 이동할까요.”
정말 싫은 남자였다.
***
“올 때마다 난쟁이들을 만났나요?”
“예.”
거인들이 공들여 키운다던 롤리아 숲은 정말로 아름답긴 했다. 거인들이 지나다니기 위해 만든 길은 아주 널찍하고 평평했다. 세 사람은 돌들이 촘촘히 박힌 길을 걸었다. 분명 길 위에 박혀 있는 돌은 자연석인데, 어디서 맞춰온 듯 모두 그 틈과 모양이 꼭 맞아 균일했다. 돌 틈 사이에 가지런하게 풀들이 피어났다. 클로디아는 조금의 여유만 있었더라도 분명 그 길을 즐길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난쟁이들은 잇달아 세 사람을 습격했다. 거인들의 눈에 띄기 위해서 엄청난 소리를 내는 그들은 어쩔 수 없이 난쟁이들의 타깃이 됐다. 클로디아는 벌써 세 번이나 난쟁이에게 목이 졸릴 뻔했다. 그녀가 걸고 있는 장미석 목걸이 때문이었다.
클로디아는 여행을 하면서도 예쁘게 꾸미고 싶어 했다. 화장은 하지 못해도, 투박한 여행복을 가느다랗고 예쁜 보석으로 장식하는 것은 클로디아의 마지막 자존심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반짝거리는 것을 좋아하는 난쟁이들은 클로디아에게 눈을 뒤집고 달려들었다.
결국 클로디아는 귀걸이와 목걸이, 팔찌, 허리띠처럼 반짝이는 종류를 모두 가방 안에 집어넣어야 했다. 그것도 손에 힘이 잘 들어가지 않아 시빌이 도와주어야 했다.
“이렇게나 고된 길이었나요? 세계수의 씨앗을 가지러 가는 길이 이렇게나 힘들다는 건 저는 몰랐어요. 들어본 적도 없고요.”
“거인들을 만나러 가는 사람이 포르투의 기사단장이어야 하는 이유도 난쟁이들 때문이긴 합니다만…. 확실히 이상하긴 합니다.”
데미안의 말에 시빌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렇죠?”
“예.”
“…뭐가 그렇다는 거예요?”
클로디아가 힘없이 묻다가 물을 마셨다. 하도 토해서 목이 아플 정도였다. 가죽으로 된 물통은 반쯤 비어 있었다. 거인들에게 물을 달라 해야겠다고 속으로 생각하던 때, 데미안이 말을 이었다.
“시끄러운 소리가 나면 거인들은 일부러 이쪽을 찾아옵니다. 거인들의 청력은 꽤 좋아서, 저희가 내는 소리를 잘 들을 수 있죠. 그들은 난쟁이들이 인간을 습격하는 것도 알고 있어서 소리를 들으면 즉시 찾아오게 마련입니다.”
“살생을 싫어해서인가요?”
“아뇨. 인간과 난쟁이가 싸우면 근처의 식물들에게 상처가 나기 때문이죠.”
클로디아가 미간을 찌푸렸다. 데미안이 말을 이었다.
“보통 이 정도 깊이까지 들어오면 거인들이 찾아오고도 남습니다. 그런데 거인들이 마중을 나오지 않는군요.”
“난쟁이들만 엄청나게 나오고요.”
[…세계수의 씨앗을 가져간 지 얼마 안 됐기에, 포르투의 사람이 아니라 전혀 모르는 인간이라고 생각하는 것 아니야?]
디자이어의 물음에 데미안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숲을 지나가는 인간들이 꽤 많은 건 사실이지만, 다들 거인을 만날 이유가 별로 없는 데다 난쟁이 때문에라도 조용히 지나갑니다. 이곳에 북과 심벌즈를 동원하는 사람들은 어떻게든 거인을 만나야 하는 사람들이죠. 거인들도 그걸 모를 리 없고요.”
“무슨 일이 생긴 걸까요?”
“글쎄요.”
데미안이 턱을 어루만졌다.
“아무튼 지금은 빨리 숲의 중심부에 가 보는 수밖에 없겠습니다.”
“그러죠.”
클로디아는 생각 같아서는 어디라도 주저앉아 쉬고 싶었다. 하지만 데미안이 저렇게 말하는데 마냥 쉬자고 하기도 어려웠다. 그녀는 따가운 눈가를 애써 문지르고는 다리에 힘을 주었다.
거인들을 만나면 쉴 수 있겠지.
그 뒤로도 난쟁이와의 접전이 있었다. 하지만 클로디아 때문에 두 남자는 일부러 손속에 여유를 뒀다. 시빌은 난쟁이들을 부유 마법으로 띄워 숲 멀리 던져 버렸고, 데미안은 검을 검집에 넣은 채 난쟁이들을 기절시키기만 했다. 클로디아는 미안해하며 그럴 필요 없다고 말하려 했으나, 아까 전의 광경을 떠올리자 말도 잘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몇 번이나 난쟁이 무리를 거치고 나서야 세 사람은 숲의 중심부에 도착했다.
“와아….”
그리고 중심부에 도착한 클로디아는 저도 모르게 입을 벌리고 말았다. 엄청나게 아름다운 풍경이었기 때문이다.
수백 년은 족히 된 듯한 거대한 고목들이 켜켜이 쌓여 있었다. 그 위에는 세월을 입은 이끼 더께들이 자리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세 사람이 걸어온 길보다 수십 배는 넓은 돌 광장이 있었다. 거대한 흰 돌기둥과 바닥, 그리고 그 위로 솟은 엄청난 크기의 덩굴나무가 광장 중앙에 서 있었다.
덩굴 기둥의 두께는 클로디아가 백 명은 있어야 족히 둘러쌀 수 있을 법했고, 크기는 포르투 황성의 열 배는 족히 될법했다. 클로디아는 그것이 바로 세계수라는 것을 알아챘다.
세계수의 나뭇잎 사이에는 작고 노란 과실들이 드문드문 달려 있었고, 그 사이로 환한 햇빛이 조금씩 들어왔다. 하지만 세계수가 워낙 크고 넓어 그 아래는 어둠이 졌는데, 수백 마리의 발광 도마뱀들이 쉴 새 없이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어 그 어둠마저 아름답게 보였다.
“세계수가 가지를 뻗고 잎을 피우고, 기둥이 목질화되어 열매를 맺으면 이런 모습입니다.”
“그렇군요….”
하늘섬을 받치고 있는 세계수는 그 목적에 부합하게 잔가지를 모두 잘라내고 굵은 기둥만 남겨 둔다. 과실을 맺을 수도 없고, 잎을 남겨두면 하늘섬의 주민들이 불편해한다. 클로디아는 새삼스레 포르투가 얼마나 많은 희생 위에 올라와 있는 섬이었나, 하는 상념에 잠겼다.
“하지만 정말로 이상하군요.”
“…네?”
“거인들이 아무도 없습니다.”
데미안의 얼굴은 정말로 심각했다. 클로디아는 눈을 깜박였다.
“롤리아 숲의 거인들은 하루를 숲 가꾸기로 보내기에 대부분 숲에 나가 있습니다만, 몇몇 거인들은 세계수 근처에서 쉬거나 자고 있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아무도 없다니….”
“…거인들도 마왕에게 피해를 입은 건 아닐까요…?”
조심스럽게 클로디아가 말했다. 데미안이 눈썹을 들어 올렸다.
“마왕이 물러갔다고는 하지만, 저희가 자르지스로 가는 것을 모를 리 없잖아요.”
“확실히.”
클로디아는 하늘섬을 떠나기 전에 영상 도마뱀들을 통해 포르투의 국민들에게 ‘마왕을 무찌르러 디자이어와 다녀오겠다’고 공표했다. 국민들의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고는 하지만, 대신들이 가장 걱정한 점은 마왕의 습격이기도 했다. 자신을 죽이러 오는 공주를 그냥 두겠냐는 것이다.
그리고 물러선 마왕은 공주를 습격하는 대신, 아예 그녀가 자르지스로 올 수단을 원천 차단한 게 아닐까.
“마왕이 어떤 수로 죽음의 바다를 건너왔는지는 몰라요. 하지만 그가 죽음의 바다를 건너오는 과정에서, 세계수로 배를 만드는 방법을 알았을지도 모르죠. 제가 만약 마왕이라면 저희를 방해할 거예요.”
클로디아는 대부분의 것에는 무지하지만, 바보는 아니었다. 그녀가 내놓은 추론에 데미안도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성은 있습니다. 이곳의 거인들은 무력으로는 상대가 어렵지만 숲을 온통 망쳐놨다거나 한다면, 거인들이 놀라 숲을 복구하러 갔겠지요.”
“…하지만 저희가 오면서 망가진 곳은 보지 못했잖아요?”
여태까지 팔짱을 끼고 듣고 있던 시빌이 손가락을 들어 올리며 물었다.
“그리고 제가 포르투를 무력화시킬 정도의 마왕이라면, 바로 공주님을 습격할 것 같은데요?”
그때 디자이어가 끼어들었다.
[아냐. 걔 힘들어 보였어.]
“무슨 소리예요?”
시빌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디자이어가 클로디아에게 물었다.
[말해도 돼?]
“그래.”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시빌은 우리와 자르지스까지 함께하기로 했으니까 이 정도는 말해야지.”
포르투를 공격한 마왕은 아무르를 훔쳐 갔다. 그러나 마왕은 왜 다시 포르투를 공격하지 않고 도망쳐 자취를 감추었는가. 그것은 보안 때문에 극비로 하고 있는 일이었다.
마왕이 아무르를 훔쳐 간 것부터, 그의 상태까지.
포르투의 국민들은 그저 마왕이 쥬버린 왕자를 죽이고 도망쳤다는 정도만 알고 있었다.
하지만 시빌이 자르지스로 간다면 이야기는 다르다. 어지간하면 모든 걸 공유해야 한다. 디자이어가 말을 이었다.
[마왕은 아무래도 나보다 쥬버린을 죽이는 게 먼저라고 생각했나 봐. 나는 평소에 아무르를 단단하게 감싸고 잠들어 있거든. 그런데, 걔가 쥬버린의 심장을 꺼내는 순간 나는 눈을 떠버린 거야. 내 임무는 하늘섬의 수호지만, 포르투 왕가를 수호하는 것이기도 하지.]
“그래요? 왜 그랬을까요…?”
시빌의 말에 클로디아가 냉큼 대답했다.
“오라버니는 현명한 분이니까요. 디자이어가 없어도 하늘섬을 어떻게든 재건할 방법을 고안해내실 분이죠.”
[으음, 그 말에 이의를 제기하고 싶지만, 쥬버린은 정말 머리가 좋아. 걔는 정말로 그런 방법을 찾아냈을지도 모르지. 아무튼….]
그때였다. 데미안이 두 사람의 말을 가로막았다.
“잠시만요. 소리가 들립니다.”
그리고 입술에 손가락을 대어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모두 약속이라도 한 듯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귀를 기울이자, 정말로 숲이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어디선가 구슬픈 소리가 들렸다.
흐으으….
흐흐흑….
클로디아의 등골이 서늘해졌다. 설마 유령인가? 클로디아는 어릴 적 유령을 가장 무서워했다. 하지만 데미안은 그런 그녀의 생각을 읽은 듯 고개를 저었다.
“익숙한 목소리로군요. 아마 제가 아는 자일 겁니다.”
“아는 자라면….”
그때였다. 쿵…. 진동이 울렸다. 모두 화들짝 놀랐다. 진동은 세 사람이 서 있는 땅에서 느껴졌다. 저도 모르게 모두 진동이 오는 쪽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쿵, 쿵, 쿵. 진동은 느리지만 비슷한 간격으로 더 울렸다. 그리고 어느 순간.
“흐아아아아아앙!”
엄청나게 큰 소리가 세 사람의 고막을 찢어놓을 뻔했다. 클로디아는 황급히 귀를 막았다. 누군가가 찢어지는 소리로 울고 있었다. 그것도 한 명이 아니었다. 적어도 다섯 사람은 되는 것 같았다.
“어엉엉엉엉!”
“우와아아앙!”
“흑. 흑흑. 롤리아 숲은 이제 끝났어.”
“그렇게 말하지 마!”
목소리는 다투는 듯도, 한탄하는 듯도 했다. 세 사람 중 동작이 가장 빠른 것은 데미안이었다. 데미안은 가볍게 한숨을 쉬고 뒤에 지고 있던 북을 앞으로 멨다. 그리고 북채를 꺼내 북을 두들기기 시작한 것이다.
둥, 둥둥둥둥둥….
클로디아와 시빌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순간 그가 뭘 하는지 몰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빌이 재빠르게 알아채고 마찬가지로 메고 있던 심벌즈를 손에 끼운 후 부딪쳤다.
깡!
심벌즈가 엄청난 소리를 냈다. 거인에게 자신들이 광장에 있음을 알리는 것이었다. 효과가 있었는지, 우는 목소리들은 일순간 조용해졌다. 그리고 후다닥, 이쪽으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쿵, 쿵쿵쿵쿵쿵쿵.
“꺄악.”
클로디아는 화들짝 놀라 작게 비명을 지르고 옆에 있던 시빌의 어깨에 매달렸다. 아무리 상대가 거인이라는 걸 알고 있다 해도 엄청난 진동이 자신에게로 향하는 것을 알아차리면 그렇게 반응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윽고, 그 얼굴들이 나타났다. 큰길 저편에서 이쪽을 향해 달려오는 거인들.
클로디아는 입을 딱 벌렸다. 그녀는 거인이라는 말에 어렴풋이 거대하고 큰 사람들을 상상해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의 상상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길 저편에서 뛰어오는 거인들은 정말 집채만큼 크긴 컸지만…. 그녀가 생각하던 사람의 모습은 아니었다. 피부는 연두색이었고, 팔다리는 나뭇가지처럼 가늘고 비쩍 말랐다. 얼굴은 길쭉했고 눈은 흰자위가 없이 새카맸다. 입은 길게 찢어져 있었다. 그 안에서 네모나고 넓적한 치아들이 엿보였다.
클로디아는 식겁해 시빌을 잡은 손에 힘을 줬다.
“엄마야! 저게 뭐야!”
“숲 거인입니다.”
자신의 당혹에 비해 놀랍도록 평온한 그 목소리는 당연하게도 데미안의 것이었다. 데미안은 북을 두들기며 이어 말했다.
“아무래도 무슨 일이 생기긴 했나 보군요. 표정들이 안 좋습니다.”
‘아니, 원래 안 좋게 생긴 것 같은데?’
클로디아는 속으로만 생각했다. 그 말을 입 밖에 내지 않은 이유는, 제 말을 들은 거인들이 화가 나 자신을 한 번에 집어삼킬까 봐 무서워서였다.
이윽고 이쪽까지 달려온 거인들이 세 사람 앞에서 상체를 굽히며 이쪽을 살펴봤다. 거인들은 정말로 컸다. 클로디아가 딸꾹질을 할 정도로.
클로디아가 스무 명은 있어야 이 거인들만큼 키가 커질 것 같았다.
“사람?”
“사람!”
“데미안이네!”
“뭐라고? 무뚝뚝한 그 꼬마가 왔다고?”
거인들은 얼핏 비슷해 보였지만, 제각각 달랐다. 비쩍 마른 초록색 팔을 마른 나뭇잎을 이어붙인 옷으로 가린 거인, 머리에 상처가 있어 머리카락을 모두 밀어버린 거인, 조금 작은 거인과 눈알이 유독 큰 거인. 그중 눈알이 큰 거인은 데미안을 향해 ‘무뚝뚝한 그 꼬마’라고 했다.
클로디아는 그 말에 잠시 무서움도 잊고 풋, 웃을 뻔했다. 꼬마라니. 맹세코 하늘섬의 주민이 수르 알파에게 ‘꼬마’라고 했다가는 야유를 받을 것이다. 데미안은 하늘섬의 국민들 중 키가 가장 컸다. 덩치도 컸다. 그런 그에게 꼬마라니.
‘…물론 이만한 크기라면 꼬마라고 할 수도 있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클로디아는 질린 표정으로 제 눈앞의 발을 쳐다봤다. 거인의 초록색 발은 거의 클로디아만 했다. 발에 달린 둘째발가락은 거짓말을 좀 보태서, 클로디아 반만 했다.
데미안은 아랑곳하지 않고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베인. 오랜만에 뵙습니다.”
“수르 알파!”
베인이라고 불린 대머리 거인이 반갑게 그를 불렀다.
“이게 무슨 일이야? 왜 이렇게 빨리 온 거지? 우리가 보고 싶어서 온 거야?”
“아뇨.”
데미안은 재빨리 대답했고, 거인들 사이에서 탄식이 터져 나왔다.
“저 꼬마는 정말 빈말 한마디 하는 법이 없다니까!”
“포르투는 언제쯤 나긋나긋하고 상냥한 여자아이를 수르로 임명하게 될까?”
“하지만 저기 나긋나긋하고 상냥한 여자애가 있는걸?”
“저게?”
거인들의 대화가 가리키는 건 명백했다. 클로디아였다. 마지막 말에 거인들의 눈이 클로디아를 향했고, 클로디아는 저도 모르게 몸을 긴장시켰다.
인사, 인사를 해야 해.
생각 같아서는 졸도하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유감스럽게도 클로디아는 왕족이었다. 그녀는 어떤 상황에서도 우아하게 인사하고 상냥하게 웃는 방법을 연습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기품 넘치는 자세로 인사를 해 보였다. 가슴 앞에 손을 모았다가 부드럽게 펼치며, 제 여행복 랩스커트를 드레스 대신 살짝 붙잡고 자연스럽게 무릎을 굽혔다.
“안녕하세요? 클로디아 테 포르투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여러분의 오늘에 웃음이, 내일에는 기쁨이 가득하기를 바라요.”
“포르투? 포르투라고?”
“하늘섬의 왕족이야?”
거기까지는 예상한 바였다. 하지만 그다음에 돌아온 말에 클로디아는 얼굴을 굳혔다.
“데미안! 설마 네 색시를 인사시키려 데려온 거야?”
클로디아는 ‘색시’라는 단어가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예상하지 않은 상황에서 돌아온, 친근하고도 기품이라고는 한 올도 없는 단어에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게다가 상대는 살면서 처음 만나는 거인이었다. 불운한 공주님은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녀를 구원한 것은 그녀의 기사단장이었다.
“아닙니다.”
데미안은 실로 간단하고 경제적인 네 음절로 그녀를 구원했다. 그 말에 거인들이 서로를 쳐다보다가 각자 왁자지껄 떠들기 시작했다.
“아니래!”
“그럼 뭐야? 포르투라며!”
“알게 뭐람. 됐어. 나는 찬성이야!”
“뭐가 찬성이야?”
“저 애가 데미안의 뒤를 이어 기사단장이 되는 거 아니야?”
“정말? 나도 좋아! 나는 인간 여자애들이 좋더라! 깨끗하고, 땀 냄새도 나지 않고!”
“하지만 쟤는 안 깨끗하잖아?”
“땀 냄새도 조금 나는 것 같은데?”
거인들의 수다에 클로디아는 얼굴을 빨갛게 붉혔다.
‘아니에요, 저도 원래는 깨끗해요! 땀도 안 흘린다구요!’
당신들을 찾아오느라 이 모양이 됐다는 말을 해도 될까, 클로디아는 잠시 망설였다. 그들이 주고받는 격 없고 어린애 같은 대화 덕분에 아까보다는 사뭇 덜 무서워졌다고는 해도, 그녀의 눈앞에 있는 것은 산 같은 덩치의 초록색 피부를 가진 거인들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때 나선 것은 또다시 데미안이었다.
“모두 아닙니다.”
“뭐가 아냐?”
“로드께서는 기사단장이 될 분이 아닙니다. 그리고 여기까지 오는 길이 힘들어서 다소 불편한 모습을 하고 계시지만, 여건이 된다면 분명 당신들의 마음에 드는 모습이셨을 겁니다.”
“그렇구나!”
“하지만 그렇다면 식물은 사랑하지 않겠지? 예쁜 애들은 꽃을 선물 받는 걸 좋아하잖아! 마구 꺾어서 자기 방에 장식하려고 들 거야!”
“자기 머리에도 꽂겠지!”
“꽃다발을 만들어 들고 다니다가 집에 돌아갈 때는 팽개치고 갈 거야!”
거인들은 제멋대로 떠들었다. 클로디아의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싱싱한 꽃이 제 방에 꽂혀 있는 건 맞지만, 그리고 가끔 머리에도 꽂긴 했지만…. 거인들의 오해를 불식시켜야만 할 것 같았다.
하지만 어떻게? 그때였다.
“알리.”
데미안은 마른 나뭇잎을 이어붙인 옷을 입은 거인을 불렀다. 알리라 불린 거인이 눈을 깜박였다. 데미안이 말을 이었다.
“무슨 일 있습니까?”
그는 어쨌든 거인들의 입을 가장 효과적으로 막을 줄 아는 사람이었다. 대번에 거인들이 입을 다물었다. 알리라고 불린 거인은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그건 왜?”
“오는 길에 난쟁이들이 너무 많이 덤볐습니다. 평소라면 제 북소리를 듣고 숲 가장자리까지 당신이 마중 나오셨을 텐데, 아무도 나와 보지 않더군요.”
수다쟁이 거인들이니 곧장 대답해줄 줄 알았던 클로디아의 예상은 틀렸다. 거인들은 서로를 마주 보며 불안한 표정이 됐던 것이다. 그때 베인이라는 거인이 흠, 흠, 하고 헛기침을 하며 나섰다.
“맞아. 큰일이 생겼어.”
“무슨 일입니까?”
“너에게는 말해주기 어려워. 알다시피 우리들은 외부인에게 숲의 일을 이야기하기 꺼려하는 걸. 하지만 네가 고생한 것 같으니 여기까지만 알려주는 거야.”
“알겠습니다.”
‘이야기하기를 꺼려한다고? 아닌 거 같은데?’
클로디아가 이마를 찡그렸다. 방금 전까지 거인들이 보여준 모습은 수다쟁이 외의 아무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막상 질문을 던진 데미안은 이미 거인들의 성향을 알고 있었던 듯, 깨끗하게 물러섰다.
베인이 다시 물었다.
“그런데, 너는 여기에 왜 왔어? 세계수 씨앗은 저번에 가지고 갔잖아?”
“예.”
데미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문제가 생겼습니다. 당신들밖에 해결해줄 수 없는 문제입니다.”
대번에 거인들의 눈이 호기심으로 들끓었다.
***
데미안의 설명은 간결하고 건조했다. 하늘섬이 당한 비극을 저렇게 말할 수 있다니. 옆에서 듣던 클로디아가 화가 날 정도였다.
그 안타깝고 속상하고 슬픈 이야기가, 데미안의 입을 거치면 마치 천 년 전에 있었던 남의 이야기처럼 들렸다. 클로디아 자신과는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 책에서나 나올 것 같은 모르는 사람의 비극으로만 들렸던 것이다.
어쨌든 데미안은 훌륭하게 그 일들을 모두 설명해냈다. 시빌도 ‘호, 그랬나요?’ 같은 추임새를 넣으며 귀 기울여 들을 정도였다.
그러나 데미안이 설명한 보람도 없이, 거인들은 세계수의 씨앗이 다시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고개를 내저었다.
“미안해, 안 돼.”
“어째서입니까?”
데미안이 이마를 찡그렸다. 베인이 가볍게 손을 휘둘렀다. 부웅, 바람이 불었다. 그는 안 된다는 뜻으로 손을 저은 것이겠지만, 저 솥뚜껑 같은 손바닥에 맞으면 자신의 목숨도 없겠구나 싶어 클로디아는 등골이 서늘했다.
베인은 심각한 표정이 됐다.
“세계수 씨앗은 우리도 필요할 때만 때에 맞춰 기르는 거라 수확이 좀 까다로운데… 문제가 좀 있어.”
“하지만 노란 열매가 저렇게 많지 않습니까?”
“저건 한참 기다려야 해!”
“사흘 정도는 기다릴 수 있습니다.”
의아한 표정의 클로디아에게 디자이어가 속삭였다. 디자이어는 거인들이 놀랄세라 목소리를 한껏 줄인 차였다.
[세계수는 빨리 자라잖아? 열매도 빨리 맺어. 꽃이 진 지 사흘이면 열매가 무르익지. 제대로 된 씨앗이 자라는 건 좀 다른 문제지만.]
그래서 사흘이구나. 클로디아가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시빌이 나섰다.
“안녕하세요, 거인 여러분! 저는 마법사입니다!”
“응? 마법사?”
“마법사라고?”
“우와! 나 마법사 처음 봐!”
“네! 마법사입니다!”
시빌이 손을 마구 휘둘렀다. 그러자 거인들 위로 퐁, 퐁, 하고 꽃송이가 갑작스레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거인들의 눈이 휘둥그레졌고, 광장에 앉아 있던 거인들 중 몇은 일어나 꽃송이를 잡기도 했다. 그러나 손에 잡힌 꽃송이는 펑, 하고 동그란 빛무리가 되어 사라졌다.
“와! 이것 봐!”
“대마법사다!”
“대마법사 라이덱인가 봐!”
“아하하, 대마법사는 아니고요.”
시빌이 머리를 긁으며 웃었다.
“좌우간, 저희가 조금 급해서요. 혹시 세계수의 씨앗이 너무 비싸다면 돈을 드리고 구입하는 건 어떻습니까? 좋은 값을 쳐 드리겠습니다!”
“돈?”
“돈이라고?”
서로를 쳐다보던 거인들의 분위기가 갑자기 변했다. 베인이라는 거인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우리는 돈이 필요 없어, 마법사야.”
“맞아. 우리는 인간들의 돈을 안 써.”
“앗, 그러면 거인의 돈을 구해서 드리면….”
그러나 시빌의 어깨를 짚은 것은 데미안이었다. 데미안은 어두운 눈으로 시빌을 쳐다보며 말했다.
“거인들은 돈을 쓰지 않습니다. 필요한 것은 물물교환으로 충당하지요.”
“아니, 하지만…. 그러면 나으리들, 혹시 필요한 것이 있으신지요?”
세상에 그런 게 어디 있냐는 표정으로 데미안을 바라보던 시빌은 곧 거인들을 쳐다보며 태도를 급변시켰다. 어지간한 장사꾼들도 혀를 내두를 정도의 빠른 태세 전환이었다.
“저는 마법사니까, 여러분들이 필요한 것이 있다면 도와드릴 수 있답니다! 예를 들면….”
시빌이 손가락을 딱, 튕겼다. 거인들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시빌의 머리 위에 갑자기 조그만 안개들이 몰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옆에 앉아 있던 클로디아도 눈을 깜박거리며 그 모습을 지켜봤다. 곧 안개들은 뭉글뭉글 뭉쳐, 재색 구름이 됐다. 그리고.
쏴아아아-.
비가 내렸다.
“와아아아!!”
거인들이 동시에 박수를 쳤다. 폭풍 같은 소리가 숲을 울렸고, 놀란 새들이 찌르르륵, 울며 숲을 잠시 날아올랐다가 다시 내려앉았다. 시빌의 머리 위에만 내린 비는 시빌을 푹 젖게 한 다음 곧 그쳤다. 구름이 흩어져서였다. 시빌은 잔뜩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웃었다.
“이렇게, 물이 필요한 곳에 비를 내리게 할 수도 있고요.”
또다시 그는 딱, 손가락을 튕겼다. 그 순간 거센 바람이 훅 불었다. 클로디아가 잠시 놀라 움츠러들 정도의 센 바람이었다. 거인들에게는 그리 센 바람은 아니었으나 시빌을 말리기엔 충분했다. 시빌은 반쯤 뽀송뽀송해진 머리카락을 흩으며 손을 벌렸다.
“낙엽이 많이 쌓인 곳에 바람을 불러와 흙을 뒤집어드릴 수도 있답니다! 물줄기를 바꿔드릴 수도 있죠. 숲 거인 여러분들은 훌륭한 정원사로 이름나 있으니, 제 도움이 필요한 부분이 좀 있지 않을까요?”
거인들은 서로를 쳐다봤다. 그들의 표정은 방금 전과는 조금 달랐다. 서로 생각하는 건 같은데, 이것을 입 밖에 내도 되는지 고민하는 얼굴이었다.
결국 데미안이 그들의 표정을 가늠하다가 물었다.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베인?”
아무래도 베인이 거인들의 우두머리 비슷한 존재 같았다. 베인은 잠시 망설이다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어찌나 큰 한숨인지, 그 앞에 있던 클로디아가 잠시 휘청할 정도였다.
“있잖아, 필요한 게 있기는 해.”
“예, 말씀해 보십시오.”
“마법사, 혹시 너는 땅굴을 뒤집을 수 있니?”
시빌이 반색했다.
“아, 혹시 식물을 갉아 먹는 큰개미의 땅굴이 문제이신가요?”
“아니. 그런 게 아니야.”
베인이 조금 망설이다가 말을 이었다.
“땅요정 왕의 땅굴 말이야.”
땅요정 왕의 땅굴? 그게 뭐지?
클로디아는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데미안과 시빌의 얼굴은 미묘해졌다. 아무래도 클로디아 말고 나머지 두 사람은 그게 뭔지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데미안이 물었다.
“그게…. 여기 있습니까?”
“…그래.”
베인이 다시 에휴휴,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클로디아는 또다시 휘청, 하고 뒤로 물러섰으나 그 옆에 있던 데미안이 자연스럽게 팔을 뻗어 그녀의 등을 받쳤다. 클로디아는 조심스럽게 고맙다고 말하려 했지만, 그녀의 말이 입 밖으로 나오기도 전에 데미안은 베인에게 다시 물었다.
“당신들이 말한 문제가 그것입니까?”
“그래.”
“그래서 한참 기다려야 한다고 하셨던 거군요.”
데미안이 노란 세계수의 열매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베인이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시빌도 심각한 표정이 됐다.
“땅요정 왕의 땅굴이라…. 말이 쉽지, 그건 땅굴이라고 부르면 안 되는 규모일 텐데. 저 혼자서는 아무래도….”
“그렇겠지?”
거인들이 시빌의 말에 낙담한 표정을 지었다. 클로디아는 더 이상 자신만 소외되는 이 분위기를 견디기 힘들었다.
‘아까부터 자기들만 아는 이야기를 하면서, 왜 아무도 설명 안 해주는 거야!’
“저기요!”
그래서 그녀는 손을 번쩍 들었다.
“죄송한데 땅요정 왕의 땅굴이 뭔가요?”
어쨌든 클로디아는 모르는 걸 참는 성격은 아니었다.
“…아.”
데미안의 표정이 흐려졌다. 거인들은 눈을 껌벅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오다가 땅요정들을 만났다고 하지 않았어?”
“그런데 땅요정 왕의 땅굴을 몰라?”
“저 애, 예쁘게 생겼는데 머리는 나쁜가 봐!”
…좀 짜증이 나려고 했다. 클로디아는 표정을 구기려다가 간신히 참았다. 어쨌든 엄지손가락에 간단히 힘만 한 번 주면 자신을 눌러 죽일 수 있는 상대들의 앞에서 험악한 표정을 짓는 것은 그리 좋은 선택은 아닌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르는 것에 대해 묻는 것은 미덕이기도 합니다.”
데미안이 그들 앞에 나섰다.
“죄송합니다, 베인. 당신들이 어떤 일을 당했는지 알기에 저는 애석함을 느낍니다만, 그녀가 당신들의 슬픔에 동감할 수 있도록 잠시 시간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저는 당신들의 친구이기 이전에 로드의 신하입니다.”
클로디아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러나 데미안은 그녀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거인들에게 마저 설명했다.
“저의 로드는 하늘섬에서 나고 자라, 많은 의무를 실천해왔습니다. 총명하고 공감 능력이 뛰어난 분이지만, 그렇기에 많은 이들의 원을 들어주느라 어떤 것들은 그녀의 눈 안에 들지 못했습니다. 제 의무는 로드에게, 그녀가 미처 알지 못했던 것들을 알려 드리고 그녀를 위험에서 보호하는 것입니다.”
“음.”
베인이라는 거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아는 척하는 인간보다는 모르는 걸 묻는 인간이 좋더라. 좋아, 데미안. 너희들이 아는 것을 그녀에게 설명하도록 해.”
“예.”
데미안이 그녀를 향해 몸을 돌렸다. 클로디아는 눈을 깜박이며 그를 쳐다봤다. 검푸른 눈이 조금 흔들리다가, 입을 열었다.
“아까 우리가 만난 난쟁이들은 기억하시지요?”
“네.”
“그 난쟁이들을 땅요정이라고도 부르지만, 정확히는 조금 다릅니다. 그들은 땅요정의 후손에 가깝죠.”
“후손…?”
“아주 옛날에는 요정들이 정말로 존재했지만, 지금은 모두 사라졌죠. 그때 땅요정 중 난쟁이들을 유달리 아껴 자신의 힘을 내어준 요정이 있었고 지금은 난쟁이들만 남아 땅요정의 이름을 이어간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옵니다.”
그때 시빌이 냉큼 끼어들었다.
“정확히는 조금 달라요. 땅요정이 용의 저주를 받아 난쟁이로 변했다는 가설이 훨씬 정확하죠.”
“…마법사들 사이에서는 그렇습니까?”
“예.”
시빌은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그가 뭐라고 설명하려 했지만, 데미안이 빨랐다. 데미안은 “다른 곳으로 샐 틈이 없으니 마저 설명하죠”라며 말을 이어나갔다.
난쟁이들은 인간이 걸친 반짝거리는 물건을 좋아한다. 하지만 그것으로 연명할 수는 없다. 그들은 땅요정이니만큼 큰 나무의 뿌리 밑에 굴을 파고 사는데, 인간의 식량을 훔치거나 나무 열매를 먹고 산다. 겨울에는 자신들이 굴을 판 나무의 뿌리를 갉아 먹는다. 겨울이 지나면 새 나무 밑에 굴을 파면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난쟁이들의 왕, 즉 땅요정 왕이 있다. 모든 난쟁이들은 땅요정 왕의 땅굴에서 태어나 자신이 살아갈 터전을 찾아 떠난다. 이 왕은 매번 땅굴을 새로 파야 하는 다른 난쟁이들과 달리 자신의 땅굴을 통째로 끌고 다닌다. 다만 난쟁이들이 안정적으로 태어나야 하기 때문에 터전을 옮기는 일이 많지 않다.
“보통 주기는 몇백 년에 한 번입니다.”
“아하….”
“대신 땅요정 왕의 땅굴이 있는 지역은 몇백 년에 걸쳐 사막화가 진행되죠.”
클로디아가 이마를 찡그렸다. 시빌이 또 끼어들었다.
“알랑케 사막을 아시죠? 초원 한가운데 있는 사막!”
“네. 설마….”
“딩동댕!”
시빌이 노래하듯 말했다.
“알랑케 사막은 가장 최근까지 땅요정 왕의 땅굴이 머물렀던 곳이랍니다!”
세상에. 클로디아가 질겁했다. 그렇다면, 땅요정 왕의 땅굴이 여기 있다는 건…. 클로디아의 시선이 거인들에게로 가 멎었다. 거인들은 구슬피 말했다.
“땅요정 왕이 롤리아 숲의 끄트머리에 새로 땅굴을 옮겨왔어!”
“숲이 말라가고 있다고!”
“게다가 세계수의 비료로 줄 생명수도 훔쳐 갔어!”
‘생명수…?’
데미안이 클로디아의 궁금증을 읽은 듯 설명했다.
“세계수가 열매를 맺는 게 다가 아닙니다. 새로운 세계수가 자랄 만큼 좋은 씨앗이 나려면 거인들의 생명수가 비료로 필요합니다. 보통 세계수의 꽃이 지고, 열매를 맺는 주기는 1년 정도지만, 생명수를 뿌리면 훨씬 빨라지죠. 디자이어, 당신이 정령을 태어나게 할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맞아!]
디자이어가 답했다. 거인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검이 말을 한다!”
시빌이 디자이어에 관해 거인들에게 설명하는 사이, 디자이어가 클로디아에게 잘난 척했다.
[내가 하늘섬 밑에 세계수를 기르는 것도, 세계수의 열매 대신 정령을 길러 태어나게 하기 위해서야. 지금은 어쩌다 보니 하늘섬의 받침대가 되었지만…. 원래는 매년 가을에 정령들이 태어나 대륙으로 흩어진다구.]
“너 그렇게 대단한 애였어?”
[내가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어쨌든, 거인들의 생명수 덕에 롤리아 숲의 세계수는 빠르게 열매를 맺을 수 있다. 좋은 씨앗도 생명수가 있어야 거둘 수 있다. 그러나 생명수를 땅요정 왕이 훔쳐 간 지금, 클로디아는 자칫하면 1년 동안 세계수가 열매를 맺기를 기다려야 할 수도 있다는 얘기다.
“기다려서 열리면 다행이죠.”
그리고 데미안은 그 기다림조차 헛된 것일 수도 있다고 말했다.
“땅요정 왕의 땅굴은 주변의 사막화를 진행시킵니다. 롤리아 숲이 말라가는 상황에 세계수라고 해서 대단히 잘 자랄 리 없잖습니까.”
“그래, 맞아….”
거인, 알리가 슬퍼하며 대꾸했다.
“그래서 우리는 며칠째 땅요정 왕의 땅굴을 찾아 부수려고 했지만 여의치 않았어.”
“입구를 찾았는데, 우리가 들어가기엔 터무니없이 작더라고.”
“부수어지지도 않아! 너무 단단해!”
거인들이 슬픈 얼굴로 앞다퉈 말했다. 시빌이 심각한 표정으로 팔짱을 꼈다.
“방법이 있기는 한데….”
“뭐? 뭔데?”
“말해봐!”
“독을 푸는 거예요.”
그 말이 담고 있는 무시무시한 내용과 달리 시빌의 말투는 너무나 여상했다. 순간 그 말을 들은 클로디아는 할 말을 잊었다. 거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정확히는 독가스를 그 굴 안에 흘려보내는 거죠. 안에 든 난쟁이들을 빠르게 죽일 순 있겠지만….”
“생명수도 그 안에서 묻히겠군요. 기각합시다.”
데미안이 시빌의 말을 잘랐다. 시빌도 어깨를 으쓱했다.
“네. 다 죽어버리는 데다 가스가 찬 채로 빠져나가지 않는다면 생명수를 되찾을 수가 없을 거예요.”
“그 생명수가 어디서 나는데요?”
클로디아의 물음에 거인이 답했다.
“생명수는 매일 아침 세계수의 이파리 끝에 맺힌 이슬을 해가 뜨기 전에 백 일 동안 모아서 만드는 거야.”
“해가 뜨면 효과가 없어지죠.”
뭐 그딴 게 있어! 클로디아는 노동집약적인 생명수의 탄생비화에 기함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거인들은 슬퍼하며 말을 늘어놓았다.
“난쟁이들이 요즘 더 설치는 것도 그 때문이야. 땅요정 왕이 난쟁이들을 계속 탄생시킬 거고, 롤리아 숲은 난쟁이들의 것이 되고 말 거라는 걸 알고 있는 거야.”
“땅굴 속에 손가락을 집어넣어 봤지만, 난쟁이들이 필사적으로 물어뜯어서 나는 재빨리 손을 빼낼 수밖에 없었어.”
도대체 땅굴이 얼마나 큰 크기길래, 그래? 클로디아가 궁금해했고, 시빌이 답했다.
“아마 커다란 갱도 두세 개 정도는 결합한 크기일 겁니다. 땅요정 왕의 땅굴은 마법사들 사이에서도 꽤 재미있는 던전으로 취급돼서 그 안을 탐험한 이들의 보고서를 본 적 있죠.”
“탐험해요?”
“예. 물론 길진 않습니다. 땅요정 왕의 땅굴은 어쨌든 난쟁이 소굴이라 마법사들이 혼자 들어가 오래 버틸 수 있는 곳은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흥미가 없고요.”
보통 난쟁이들의 땅굴이야 인간들에게서 훔친 귀중품이 꽤 있지만, 땅요정 왕의 땅굴은 조금 다르다. 난쟁이들이 태어나는 곳이니 귀중품 같은 것은 없는 데다 식량을 구할 곳도 없다. 마법사들이 재미 삼아 이틀 정도 탐험한 기록이 있을 뿐이다.
“그거다.”
그때 시빌의 말을 듣던 거인이 손을 모았다. 클로디아는 불길한 기분을 느꼈다. 설마.
“데미안, 너는 네 왕국에서 가장 대단한 기사라고 했지?”
“…미력한 재주를 좋게 본 이들이 있을 뿐입니다.”
데미안은 거인의 말에 담담히 답했다. 그러나 그도 거인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지 짐작한 듯, 표정이 애매하게 변했다. 그러나 이미 베인은 데미안 앞에 다가앉은 뒤였다.
“데미안! 우리 대신 그 안에 들어가서 땅굴을 부수어주면 안 될까?”
“…이런.”
“땅요정 왕에게서 생명수를 찾아다 주면 더 좋고!”
“맞다! 데미안은 그 안에 들어갈 수 있을 거야!”
거인들은 베인의 말을 듣고 왁자지껄 떠들었다.
“여기까지 오는데도 난쟁이들을 무찌르고 온 것 아냐?”
“그러네! 데미안은 들어갈 수 있겠네!”
“마법사도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아!”
그들은 자신들끼리 떠들고 머리를 맞대더니, 순식간에 계획을 짰다. 데미안이나 시빌이 말을 더할 틈도 없었다.
“데미안이 들어가서 생명수를 찾아다 주고, 땅굴을 부수면 씨앗을 주자!”
“그래! 그러면 되겠네!”
“데미안, 해 줄 거지?”
데미안은 무표정하게 베인의 말을 듣다가 시빌과 클로디아를 바라봤다. 남자가 먼저 물음을 던진 건 클로디아였다.
“로드. 저는 오로지 로드의 명령을 따릅니다. 이런 경우에는 제게 결정권이 없습니다.”
“제가… 결정해야 된다고요?”
“예.”
치사해! 이럴 수가! 행선지도 마음대로 정하고 여관도 마음대로 정하더니, 왜 이런 건 나한테 결정하라는 거야?! 클로디아가 기겁하고 뭐라 말하려 했으나, 데미안 뒤의 여덟 개의 눈동자가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엄청나게 큰, 거인들의 눈동자다.
“…저희가 만약에 들어가지 않으면 어떻게 되나요?”
“안 들어가 줄 거야?”
“정말?”
거인들이 술렁거리는 것을 뒤로하고 데미안이 침착하게 말했다.
“저희는 죽음의 바다를 건너는 다른 방법을 강구해야겠죠.”
“…다른 방법이 있긴 하고요?”
“아직 모릅니다. 찾아봐야죠.”
클로디아는 한숨을 쉬었다. 이래서야. 손발 다 잘라놓고 다른 길 찾아보라는 말과 다를 바 없다. 그녀는 애처롭게 시빌을 쳐다봤다.
“시빌, 같이 가 줄 수 있나요?”
“예? 저야 뭐, 고용된 처지인데. 같이 가자고 하시면 가야죠.”
시빌이 팔짱을 끼고 있다가 놀랍다는 듯 답했다.
“제가 가기 싫으면 안 가도 됩니까?”
“…누가 봐도 엄청 고생할 것 같은 일인데….”
“가야지요.”
클로디아의 말을 자른 건 데미안이었다. 데미안은 시빌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땅요정 왕의 땅굴에 대한 보고서를 봤다고 한 건, 같이 가려는 뜻 아니었습니까?”
“…이런.”
시빌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렇다는데요, 공주님.”
별수 없었다. 세 사람은 거인들의 환호성을 뒤로하고 땅굴로 들어가기로 결정했다.
***
“땅요정 왕의 땅굴은 그냥 단순히 작은 굴로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시빌이 설명한 바로는 땅요정 왕의 땅굴은 어지간한 지하 건축물 정도의 규모를 갖추고 있다고 했다. 일반적인 난쟁이들이 파는 땅굴은 인간 하나가 채 들어가지 못할 정도다. 그러나 왕이라는 이름답게, 땅요정 왕의 땅굴은 굉장히 컸다. 이틀을 그 안에서 모험한 마법사의 보고에 따르면, 한 층이 작은 정원만 하다나.
“작은 정원이라면….”
“그 마법사는 한 왕국의 왕실 마법사였습니다. 그 왕성의 작은 정원만 했다네요.”
클로디아의 얼굴이 밝아졌다. 포르투의 정원을 생각해서였다.
“뭐야! 생각보다 작네요?”
방글방글 웃는 그녀에게 데미안이 무표정하게 답했다.
“로드. 포르투의 정원을 기준으로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왜요?”
“하늘섬은 작으니까요.”
포르투 왕국은 대륙의 어느 왕국보다도 작은 왕성을 가지고 있었다. 하늘섬은 제한된 면적을 가지고 있었고, 땅값이 비쌌다. 포르투 왕성의 정원 또한 그리 크지 않았다. 그나마 클로디아 공주의 정원이 가장 컸지만, 그것도 대륙 기준으로는 터무니없었다. 데미안의 설명을 들은 클로디아가 입술을 부루퉁하게 내밀었다. 시빌이 애써 그녀를 달랬다.
“걱정하지 마세요, 공주님. 이틀간 그곳에 들어갔던 마법사는 모험 끝에 땅요정 왕의 방을 찾아냈다고 해요. 물론 식량도 없고 마력도 떨어져 그는 그 방까지 들어가지 않고 철수했지만요.”
“그렇군요….”
마법사들은 매일 아침마다 명상을 통해 마력을 끌어 모아야 했다. 그 마법사는 낮과 밤이 분간되지 않는 땅굴 아래에서 명상을 하지 못했고, 마력이 다 떨어져 아쉽게도 나와야 했다고 한다.
거인들은 세 사람에게 아낌없이 식량을 챙겨주었다. 도토리 가루를 섞어 구운 팬케이크와 나무 열매, 말린 과일 같은 것들이었다. 물론 거인 기준 크기의 식량이었고, 클로디아는 착실하게 그것들을 조각내어 가방 안에 집어넣었다. 그동안 데미안은 거인들의 샘에서 물을 채웠다.
준비를 마치자마자 거인들은 세 사람을 손에 들고 땅요정 왕의 땅굴 입구까지 데려다주었다.
“잘 부탁해, 데미안!”
“꼭 생명수를 가져와!”
“하지만 목숨이 위험할 것 같으면 어서 빠져나와야 해!”
“기다리고 있을게!”
땅굴 입구는 아주 조그마했다. 거인 하나가 손가락을 넣어 후볐다는 말을 증명하듯, 입구 근처에 모래산이 쌓여 있지 않았다면 그냥 땅에 구멍이 났구나…. 하고 지나갈 만한 크기였다. 거인들은 그 근처에 쪼그려 앉아 세 사람이 들어가기 쉽도록 구멍을 넓혀 주었다.
클로디아는 조금 머뭇거렸으나, 데미안은 두말하지 않고 구멍을 보자마자 몸을 던져 넣었다. 빨려 들어가듯 남자의 머리카락까지 순식간에 없어졌고, 곧 ‘탁’ 하는 소리가 났다. 적어도 안쪽은 데미안이 들어가도 충분한 공간이 확보돼 있다는 얘기였다.
‘무슨 사람이 저렇게 인간미 없담!’ 클로디아는 긴장하고 디자이어를 어루만졌다. 어쨌든 그녀는 적과 싸울 만한 능력이 아직은 없었다. 그러나 시빌이 웃으며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긴장되시죠? 같이 들어갈까요?”
“…그래 줄래요? 고마워요, 시빌.”
“별말씀을.”
시빌은 그녀의 손을 꼭 잡으려다, 고개를 저었다.
“괜찮으시면 제가 안고 들어가도 될까요?”
“네? 하지만….”
“잘못 착지하면 다칠 것 같거든요.”
클로디아는 머뭇거리다가, 자신들을 내려다보는 거인들을 보고 마음을 다잡았다. 어차피 맨살도 닿은 사이다.
“…잘 부탁할게요.”
“부디.”
시빌이 빙그레 웃으며 그녀에게 다가와 손을 딱 튕겼다. 클로디아는 제 발이 조금 붕 뜨는 것을 알아채고 놀랐다.
“어머.”
“부유 마법입니다. 공주님의 몸무게를 제가 감히 가늠할 순 없으니까요.”
“어쩜….”
예상한 바 없는 배려심에 그녀의 얼굴이 붉어졌다. 곧 클로디아가 디자이어를 품에 안았고, 시빌은 부드럽게 손을 뻗어 클로디아의 등과 무릎 안쪽을 붙들고 그녀를 들쳐 안았다. 망토를 둘렀지만 시빌이 몸을 긴장시키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클로디아는 너무 부끄러워 손을 움츠렸으나, 시빌이 그녀에게 자신의 목에 한쪽 팔을 두르길 청했다.
“제가 공주님을 떨어트릴지도 모르니, 꾹 잡아주세요.”
“네에….”
시빌이 자상하게 웃었다. 클로디아는 더욱 민망해 눈을 꼭 감았다. 시빌이 곧 움직여 땅굴 안으로 뛰어내렸고, 클로디아는 환하던 눈꺼풀 밖이 순식간에 어두워진 것을 알아챘다.
“…오셨습니까.”
“네에. 공주님, 이제 눈 뜨셔도 됩니다.”
“앗, 네.”
데미안의 목소리가 들렸고, 클로디아는 서둘러 눈을 뜨고 시빌이 내려주는 곳에 섰다. 그리고 사방을 둘러봤다.
“와아….”
“땅굴이라더니, 그렇게 부르면 땅요정 왕이 화내겠는데요.”
사방은 온통 새카만 흙벽이었다. 마치 광산의 갱도 같았다. 미리 데미안이 발광 도마뱀이 든 램프를 꺼내어두었기에 시야는 나쁘지 않았다. 공기는 조금 눅눅했지만, 숨 쉴 만은 했다. 흙벽은 아주 단단하게 잘 다져져 있었고, 누군가가 일부러 지은 건물 같기도 했다. 무엇보다 높이가 상당했다. 시빌이 눈으로 높이를 가늠했다.
“어른 두 사람은 있어야 이곳을 나갈 수 있겠군요.”
“그 말은, 시빌 당신이 부유 마법 세 번 정도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도 쓸 수 있게 남겨놔야 한다는 뜻입니다.”
데미안이 말을 보탰다. 그는 이미 몇 발자국 앞선 곳에서 흙벽을 만져보고 있었다.
“벽이 단단하군. 안쪽에 바위가 있는 것 같습니다.”
“아하….”
“일단 길을 가 보시죠.”
흙벽은 어디론가로 쭉 뻗어 있었다. 세 사람이 나란히 걸어갈 만한 크기의 흙길은 언뜻 봐도 외길은 아니었다. 당장 몇 걸음 앞에 갈림길이 있었고, 시빌은 이마를 찡그렸다.
“미로를 파훼하는 마법은 모르는데.”
“작은 건축물이고, 이틀 정도를 헤맸다고 했으니 천천히 가 봅시다.”
데미안이 앞으로 나섰다. 클로디아는 비전투인원이라 가운데 섰다.
본래는 데미안과 시빌이 자신들이 다녀올 테니 그녀는 밖에 있으라고 말했다. 그러나 클로디아는 같이 들어오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 초록색 거인들과 함께 있기 싫었기 때문이다.
‘너무 싫어!’
거인들은 대체로 상냥했으나 그녀에게는 지나치리만큼 무례했다. 클로디아는 그 정신없는 거인들 사이에서 최소 이틀, 길게는 사흘이나 나흘까지 보내야 한다는 사실이 싫었다. 뭣보다….
‘만약에 두 사람이 나오지 못하면….’
생각만 해도 눈앞이 깜깜했다. 만약 데미안과 시빌이 땅굴에서 난쟁이들에게 목숨을 잃는다면 그녀는 도로 포르투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두 사람과 함께 왔던 길을 되돌아 짚어가며, 그것도 혼자.
‘그건 싫어….’
클로디아는 그렇게 생각하며 앞을 흘깃 봤다. 머리카락을 높게 묶어 올린 남자의 뒷모습에서 그녀는 아무것도 읽지 못했다. 그녀는 괜히 불안해져서 뒤를 흘깃 되돌아봤다. 클로디아와 눈이 마주친 시빌이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클로디아도 애매하게 웃고는 다시 데미안을 따라 길을 걸었다.
‘그래도 시빌은 상냥해서 좀 낫네….’
시빌은 그녀에게는 숨통을 틔워주는 것이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클로디아는 데미안과 시빌이 여관에서 그녀가 없는 동안 나누었던 이야기를 전혀 몰랐고, 그저 시빌이 제게 잘 해주는 것이 참 다행이라 생각했다. 어쨌든 데미안과 여행하는 것은 그녀에게는 때때로 숨을 턱 막히게 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시빌 정도로 다정하게 대해주는 사람들만 늘 주변에 있었으니 어쩔 수 없다. 클로디아는 아까 시빌의 목을 끌어안았던 감촉을 새삼스레 되새기며 저도 모르게 얼굴을 붉혔다.
‘쥬버린 오빠도 나한테 그런 건 해주지 않았는데.’
쥬버린은 그녀를 보면 늘 다정하게 대했지만, 그녀를 안아 들어 올리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야 남의 손이 필요한 일이 있었으면 기사나 하인들이 대신했기 때문이지만…. 클로디아는 시빌을 흘깃 몰래 돌아봤다.
시빌은 빛 마법 몇 개를 공중에 띄워 주변을 밝히는 데 집중하고 있었다. 그러다 이따금 옆구리의 상처가 신경 쓰이는지, 그쪽을 어루만지곤 했다.
클로디아는 저도 모르게 마음이 아파졌다.
‘이곳에서 나가면 가장 먼저 디자이어에게 부탁해 시빌의 상처를 또 봐 달라고 해야지.’
남자의 몸에 난 상처는 보기만 해도 끔찍했다. 클로디아는 그나마 자신이 있어 디자이어가 그의 상처를 치료할 수 있다는 사실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저렇게 다정한 사람에게 자신이 뭔가 해줄 수 있는 게 기쁘다 생각하며 그녀는 데미안을 따라 전진했다.
***
클로디아는 땅굴의 의외의 장점을 발견했다. 그건 바로 난쟁이들이 습격해올 때 한 방향에서만 습격해온다는 것이다. 사방이 트인 롤리아 숲에서는 클로디아는 꺄악, 소리 지르며 쉴 새 없이 도망 다녀야 했지만 굴은 달랐다. 데미안과 시빌은 난쟁이들이 그들을 습격하면 클로디아를 한쪽 벽으로 몬 뒤, 앙쪽에서 난쟁이들을 막아냈다.
여전히 숲에서와 같이, 난쟁이들을 죽이지 않고 기절만 시키는 정도였다. 다만 그들의 배후를 습격하지 않게 하기 위해 시빌은 난쟁이들을 기절시킨 후 꼬박꼬박 속박 마법을 걸었다. 클로디아는 할 일이 없었다.
“키이이이익!”
마지막 난쟁이가 데미안의 일격을 맞고 괴로워하며 뒤로 나뒹굴었다. 데미안은 거기에 마지막 일격을 가했다. 난쟁이는 깩, 하고 목을 늘어트렸다.
땅굴에 들어온 지 한나절. 세 번째 습격이었다. 난쟁이들이 태어나는 곳이라 그럴까. 숲에서 만난 난쟁이들보다는 적은 수로 떼 지어 다녔기에 크게 어렵지 않았다. 방금 전의 습격은 네 마리였다.
“난쟁이들이 그래도 작아서 다행이네요.”
시빌이 혀를 내밀며 말했다. 데미안이 받아쳤다.
“아마 이곳에서 태어난 지 얼마 안 되는 난쟁이들이라 그럴 겁니다.”
“그렇겠죠?”
시빌은 착실하게도 난쟁이들이 완전히 기절했는지 확인했다. 데미안은 뒤에 서 있던 그녀를 챙겼다.
“괜찮으십니까.”
“예…. 도움이 안 돼서 어떻게 하죠.”
클로디아가 미안한 듯 데미안에게 말했다. 데미안은 고개를 저었다.
“로드께서는 안전하신 것이 최고의 도움입니다.”
다른 사람이 했다면 감동적인 멘트였겠으나, 그 데미안이 하는 말인 데다가 이런 상황이다. 클로디아는 어쩐지 그 말을 도무지 곱게 들을 수 없었다. 하지만 여기서 자신이 말을 보태 봐야 무슨 이득이 있단 말인가. 그녀는 한숨을 쉬며 몸을 털었다.
“생명수는 어디에 있을까요?”
“아마 최하층에 있을 겁니다. 난쟁이들이 생명수를 훔쳐 이곳으로 들어왔다면, 왕에게 가져갔겠죠.”
데미안이 답했다. 클로디아는 아까부터 궁금하던 것을 물어보기로 했다.
“그런데, 궁금한 게 있어요. 난쟁이들이 생명수를 대체 어디에 쓰는 걸까요?”
시빌 또한 말을 보탰다.
“맞아요, 저도 궁금했어요. 세계수를 기르는 생명수는 식물에만 쓰는 거 아닌가요? 왜 그걸 훔쳐 갔을까요? 식량도 아니고.”
“…잘 모르지만, 아마 땅굴의 유지를 위한 것 아닐까요.”
데미안이 검을 다시 검대에 고정시키며 답했다.
“난쟁이들의 땅굴은 나무뿌리 밑에 만들어지니까요. 왕의 땅굴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닙니다.”
[땅요정 왕의 땅굴은 몇 백 년을 한자리에 머무니까!]
디자이어가 끼어들었다.
[아마 그 몇 백 년 동안 근간이 되는 나무뿌리를 유지하려면 여러 가지 공이 들 거야.]
“그러고 보니 알랑케 사막도 마지막까지 나무 한 그루는 남아 있었죠.”
시빌이 턱을 어루만지며 흥미롭다는 듯 말했다.
“알랑케 사막처럼, 마지막 나무를 유지하기 위한 걸까요?”
“글쎄요…. 아무튼 가 봐야 알겠죠.”
그렇게 말하고 데미안은 몸을 돌렸다. 시빌이 “아, 난쟁이들 소지품 좀 뒤져 보죠!” 하고 말했으나 그는 멈추지도 않았다. 갓 태어난 난쟁이들에게 뭐 얼마나 대단한 소지품이 있으려고. 클로디아도 그렇게 생각하는 건 마찬가지였고, 그녀는 시빌에게 웃으며 “빨리 가요. 햇빛이 그립지 않나요?”라고 말했다.
시빌이 투덜대며 그 뒤를 따랐다.
***
“아무래도 이 땅굴은 인간의 건축물을 본뜬 게 맞는 것 같습니다.”
계단을 내려가던 데미안이 말했다. 땅굴 안에 들어온 지 한나절이 지난 차였다. 그동안 세 사람은 두 개의 층을 내려왔다.
땅굴은 끝없는 복도로 이루어졌으나, 간혹 커다란 방이 나타났다. 그 방에는 난쟁이들이 있을 때도 있었고, 난쟁이들이 모아놓은 식량이 있기도 했다. 방의 크기는 인간들이 열댓 명은 드러누워도 될 정도였다. 흙벽으로 된 미로 안에 간간히 방이 있다고 보면 됐다.
그리고 한 층에는 계단이 있었다.
첫 층에서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을 발견했을 때, 데미안은 섣불리 아래로 내려가지 말자고 못 박았다. 그는 계단에 표시를 해 둔 뒤 기어이 그 층을 모두 탐색한 후에야 아래로 향했다. 다음 층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운이 좋아 계단을 빠르게 발견했지만, 데미안은 그 층을 모두 탐색한 후에 다시 내려왔다.
그리고 지금 세 사람은 세 번째 층의 계단을 내려가는 중이었다. 시빌이 데미안의 말을 거들었다.
“난쟁이들의 땅굴이라면 이런 식으로 계단을 만들어놓기보다는 경사를 만들어놨을 것 같군요.”
“예. 계단은 인간의 보폭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진 것 같습니다.”
그런가? 클로디아는 디자이어를 끌어안고 내려가며 고개를 갸웃했다. 디자이어가 너무 무거워 등에 졌더니 등과 어깨가 뻐근한 탓이었다.
“몇 층까지 지어졌는가가 관건이군요. 그 마법사는 몇 개의 층을 내려갔다고 했습니까?”
“다섯 개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하지만 그 마법사가 덧붙여둔 것에 따르면 자신은 어둠 속에서 빛 마법에만 의지해 앞으로 나간 데다 시간 감각도 없었다고 해요. 착각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렇군요.”
데미안이 고개를 내저었다.
“어쨌든 저희는 난쟁이가 훔쳐 간 생명수만 찾으면 되니, 어지간하면 끝까지 내려가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군요.”
“하지만 생명수를 바깥에 팽개쳐뒀을 확률도 낮고요.”
[왜?]
시빌의 답에 디자이어가 냉큼 끼어들었다. 데미안은 클로디아 쪽을 비스듬히 바라보더니 말을 이었다.
“난쟁이들은 거인을 무서워합니다. 굳이 그들이 귀히 여기는 생명수를 훔쳐 갔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겠죠. 그리고 그 이유는 땅요정 왕에게 수렴됩니다.”
[왕 때문에 생명수를 훔쳐 갔을 가능성이 높은 거구나.]
“예. 땅요정의 왕이 뭐가 부족해서 그걸 훔쳐 와라 했을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저희랑은 상관없는 일입니다. 거인들은 땅굴을 부수어 달라고 했지만, 그게 우리의 목숨과 맞바꾸어서까지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말하며 데미안은 앞으로 쭉쭉 나아갔다. 세 번째의 층이었다. 그리고 계단을 내려가자마자 데미안은 작은 난쟁이와 마주쳤다. 여태까지와는 다르게 한 마리뿐이었고, 아주 작았다.
“끼익!”
작은 난쟁이는 이쪽을 보고 위협하듯 큰 소리를 내더니 슬그머니 다가왔다. 아무래도 인간을 처음 본 모양이었다. 여태까지 봐왔던 난쟁이들보다 훨씬 크기가 작고, 얼굴의 주름도 적었다. 클로디아는 신기한 마음에 그 난쟁이를 관찰하려고 했으나, 시빌이 빨랐다.
퍽.
클로디아는 끔찍한 소리와 함께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시빌이 그 난쟁이의 목에 마력의 칼날을 꽂아버린 탓이다. 난쟁이의 목이 뎅겅 잘렸고, 그 주변에는 피가 튀었다. 데미안마저 시빌의 무자비한 손속에 놀랐는지 뒤를 당황한 얼굴로 쳐다봤다. 그제야 시빌이 두 사람의 눈초리에 민망한 듯 웃었다.
“죄송합니다. 너무 빨리 튀어나와서 저도 모르게….”
“아, 아녜요.”
클로디아가 손을 내저었다.
“…꼭 죽일 필요는 없었던 것 같긴 합니다만.”
데미안이 입을 열었다. 시빌이 기어이 끔찍한 광경을 다시 연출한 것이 영 마음에 안 드는 눈치였다.
“그 난쟁이는 우리를 해치려던 의도는 없었던 것 같은데요.”
“그거야 우리가 난쟁이가 아니니 모르죠.”
시빌은 경쾌하게까지 느껴지는 투로 말했다. 클로디아도 뭐라 끼어들고 싶었으나, 자신은 전투에 관해 아는 바가 없었기에 입을 닫았다. 어쨌든 이런 경우 클로디아는 발언권이 별로 없었다.
데미안에게 말을 보태어 ‘너무 잔인했다’고 하고 싶었지만, 시빌은 자신의 경호를 위해 고용된 자다. 그는 의무를 다했을 뿐이다. 그걸 비난할 순 없었다.
게다가 어쩐지 데미안의 편을 드는 것 같기도 했다. 클로디아는 슬며시 데미안 쪽을 쳐다봤다. 그는 시빌이 한 짓이 마음에 안 드는 것 같았으나, 크게 뭐라 하지는 않았다. 게다가 디자이어가 갑자기 소리를 높이는 통에 모두의 주의는 곧 그쪽으로 쏠렸다.
[상자다!]
“상자?”
정말로 상자였다. 흙벽으로 다듬어진 곳 한쪽에 막다른 곳이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는 보란 듯이 낡은 나무상자가 놓여 있었다. 단단하게 닫혀 있었으나 힘을 주어 열면 열릴 듯했다. 클로디아가 신기한 듯이 다가가 보려고 했으나, 시빌이 그녀를 제지했다.
“고대의 몬스터 중에는 상자 모양을 한 몬스터가 있답니다, 공주님.”
“어…. 그래요?”
“그럼요. 지금도 대륙 곳곳의 던전에서 가끔 출몰하곤 하죠. 그러니 조심하세요.”
“시빌의 말이 맞습니다만, 이건 미믹은 아닌 것 같군요.”
시빌이 그녀를 가로막는 동안 그쪽으로 다가가 먼저 상자를 조심스럽게 두들겨본 데미안이 말했다.
“미믹이 아니라 진짜 상자입니다.”
“이런 위험한 짓을!”
시빌이 호들갑을 떨었다.
“방금 두들겨본 상자가 미믹이었으면 데미안 당신은 벌써 검을 빼앗겼을 거예요!”
“그렇습니까.”
데미안은 시빌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으며 상자를 검집으로 비틀어 열었다. 상자는 좀처럼 열리지 않았으나, 시빌까지 가세해 힘을 주니 텅, 하고 잠금쇠가 빠져나왔다. 그리고 열린 상자 안에는….
“열매?”
세계수의 열매가 있었다. 클로디아가 익히 봤던 노란 열매 몇 개가 말라비틀어진 채 들어 있었고, 그 외에도 인간들에게서 빼앗은 것이 분명한 장신구가 들어 있었다. 그리 예쁘지 않은 흰 월장석 목걸이 하나와, 귀걸이 몇 개. 시빌은 액세서리를 만져보더니 몇 개는 주머니에 넣고 월장석 목걸이는 클로디아에게 건넸다.
“달의 가호가 새겨져 있군요. 조금은 도움이 될 겁니다.”
“그런가요?”
[고대의 물건이구나!]
“예. 그런 것 같습니다.”
디자이어가 참견했다. 고대의 물건? 클로디아가 궁금해하자 디자이어가 설명을 늘어놨다.
[하늘섬이 생기기 전에는 마법과 정령들이 번성했거든! 그때 마법사들은 아무 데에나 마법을 걸었대!]
“달의 가호는 어둠 속에서도 밝게 볼 수 있게 해 줍니다. 발광 도마뱀보다는 좀 낫겠군요.”
클로디아는 시빌이 주는 목걸이를 걸었다. 기분 탓일까. 아까보다는 땅굴이 좀 잘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그동안 데미안은 세계수 열매를 쥐고 살펴보고 있었다.
“세계수 열매가 왜 여기에 있는 걸까요.”
[글쎄. 먹으려고 한 거 아냐?]
“뭐, 그럴 수도 있겠지만…. 세계수의 열매는 맛이 없습니다.”
[그래?]
데미안의 말에 모두 흥미를 가졌다. 데미안은 세계수의 열매를 보여주며 설명했다.
“세계수의 씨앗은 발아율이 낮습니다. 그 이유는 아무도 모르지만, 거인들은 세계수가 워낙 커서 다른 나무들처럼 왕성하게 자라면 이 대륙을 모두 덮을 수도 있기 때문이라고 추측합니다. 결국 세계수도 이 대륙의 일부니까요.”
[과일이 맛있는 이유는 그걸 먹은 동물들이 멀리 가서 종자를 널리 퍼트리기 위함이라지. 세계수는 그럴 필요가 없으니 열매도 맛이 없다는 거야?]
“그렇게들 생각합니다. 아무튼…. 하도 맛이 없어 거인들도 세계수 열매를 먹는 것은 좋아하지 않습니다.”
궁금해진 시빌이 데미안의 손에서 열매를 빼앗아 한 입 베어 물었다가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쓰고 떫군요.”
“예.”
그동안 클로디아는 주변을 살펴보고 있었다. 시빌의 말이 맞는 듯, 침침하던 눈이 한결 나아진 것 같았다. 흙벽의 결이 전보다 잘 보였고, 저 멀리 있는 돌도 그랬다. 그리고…. 클로디아의 눈이 커졌다. 난쟁이들이었다.
자그마한 난쟁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벽 뒤에서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대번에 겁을 집어먹고 시빌을 붙들었다.
“시, 시빌.”
“예?”
“저기 저쪽에.”
시빌이 그쪽을 바라보자 난쟁이들이 화들짝 놀라는 것이 느껴졌다. 데미안도 뒤늦게 그쪽으로 시선을 마주했다. 난쟁이들은 끼익, 끼익 소리를 내다가 서둘러 갑작스레 흩어졌다. 시빌은 이런, 하고 그쪽으로 향하려 했으나 클로디아가 그를 붙잡았다.
“시빌, 하지 말아요.”
“예?”
“우리를 굳이 공격해온 것도 아닌데….”
그녀의 말대로였다. 이쪽을 바라보던 난쟁이들은 조금 전 죽은 난쟁이와 마찬가지로 그리 크지 않았다. 다 자라지 못한 난쟁이들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냥 둘 순 없는 노릇이었다. 시빌은 그녀에게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하지만 저 난쟁이들은 무리 몬스터입니다. 더 많은 무리를 이끌고 오면요?”
“…어….”
클로디아는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했고, 시빌의 물음에 아연한 표정이 돼 버렸다. 시빌은 애매하게 웃으며 뺨을 긁었다.
“공주님께서 자상하신 것은 알고 있지만…. 여기는 저 난쟁이들의 본거지예요. 어디서 어떤 난쟁이들이 나타날지 모릅니다. 자칫하면 포위당할 수도 있고요.”
“그, 그렇군요….”
클로디아는 저도 모르게 민망해져 그의 옷자락을 놓았다. 시빌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야 공주님은 비전투원이니 자각이 어려우실 수도 있습니다만, 섣부른 동정은 금물입니다. 저것들이 자라서 저희를 롤리아 숲 초입부터 괴롭혔던 그 징그러운 난쟁이들이 되는 거라고요. 오늘 놓친 난쟁이들이 내일 제 목을 물어뜯을 수도 있어요.”
“미, 미안해요.”
시빌의 말은 틀린 구석이 한 가지도 없었다. 게다가 그녀에 대한 약간의 비난도 겸하고 있었다. 어쨌든 포르투를 구하러 나선 공주님이라고는 하지만, 클로디아는 전투에 관해 어떤 도움도 되지 않았다. 심지어 두 사람은 그녀를 배려해 일부러 난쟁이들의 목숨을 앗지 않도록 섬세한 전투를 하고 있었다. 덕분에 시간은 두 배로 들었다. 시빌은 그 지점을 지적한 것이었다.
전투에 참가하지도 않으면서 쓸데없이 동정심을 발휘하지 말라고.
“…사과하실 필요 없습니다.”
하지만 거기 끼어든 것은 데미안이었다. 클로디아가 시빌에게 사과하자, 그 광경을 여태 지켜보고 있던 남자는 차가운 말투로 그렇게 말했다. 클로디아가 저도 모르게 그쪽을 바라보자, 데미안은 시선을 마주쳐오며 다시 한번 말했다.
“로드께서 거기에 사과하실 필요 없습니다.”
“이런.”
시빌이 싱긋 웃었다.
“제가 공주님이 쥐면 꺼질까 불면 날아갈까 귀히 구시는 기사대장님의 심기를 건드렸나요?”
명백히 비아냥거리는 말투였다. 그러나 데미안은 눈 하나 꿈쩍하지 않고 방금 전과 같은 투로 말을 이었다.
“마법사. 당신의 말은 평범한 동행에게는 옳은 말이오. 하지만 로드는 그러실 필요가 없소. 동정은 지배자의 덕목 중 하나요.”
“그렇지만 공주님은 지금 지배자이기 전에 저의 동행이신걸요?”
시빌이 어깨를 으쓱대 보였다.
“제가 위대한 지배자의 행차 행렬에 속한 마법사 중 하나라면 응당 그 동정심에 감읍해야 옳으나, 여기는 롤리아 숲 끄트머리의 땅굴 속이고 저는 싸우지 못하는 공주님의 경호를 도맡아야 하거든요. 제 한 몸 챙기는 것도 어려운데 제 동행이 일을 늘리면 어떻겠어요? 이미 늘리고 계시기도 하고….”
[시빌.]
뜻밖에도 시빌을 지적하고 나선 건 디자이어였다. 디자이어는 황당하다는 말투였다.
[너 돈 받았잖아.]
“…돈을 받았다고 해서 제 목숨까지 맡긴 건 아니거든요.”
[그래. 하지만 네 말은 좀 심했어. 클로디아가 잘 싸우지 못하는 걸 알고도 경호에 나선 건 너잖아. 게다가 네가 받아 챙긴 거액은 또 어떻고? 큰돈 받았으면 그만큼 거추장스러운 일이라는 것도 알았을 거 아냐. 단순히 주의 정도만 주면 됐는데, 방금 그 말은 정도를 넘어섰어.]
디자이어의 말은 이치에 맞았다. 평소에 그 정령이 해대는 어이없는 말들을 생각해 보면 놀라울 정도였다.
게다가 디자이어는 곧 데미안도 지적하고 나섰다.
[데미안 너도 문제야. 적어도 시빌의 첫 말은 맞았어.]
데미안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러나 디자이어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마냥 클로디아를 자꾸 감싸려 들지 마. 그런 식으로 감싸봐야 클로디아에게 도움 되는 것은 하나도 없다구.]
“저는 감싼 게 아니라….”
[네 말도 옳아. 하지만 클로디아에게 지금 필요한 건 지배자의 덕목이 아냐. 맹목적으로 감싸는 네 보호도 아니라고. 그날 동력 지대에서 클로디아가 울게 내버려 둔 이유를 다시 생각해 봐.]
울게 내버려 뒀다고…?
클로디아는 조금 놀라 데미안을 쳐다봤다. 데미안은 이마를 찡그리더니 곧 항의했다.
“그런 적 없습니다. 디자이어, 뭘 잘못 알고 계시는….”
[아니, 넌 그날 밤을 새워 여관 복도에서….]
“디자이어!”
“여관 복도?”
데미안은 큰 소리로 디자이어의 말을 잘라버렸다. 뒤늦게 클로디아가 디자이어의 말을 멍하니 반복했으나, 데미안은 이쪽을 바라보지도 않고 디자이어만 쏘아보며 입을 열었다.
“…좋습니다. 제가 사과하죠.”
[….]
“미안합니다, 시빌. 로드의 경호를 신경 쓰다 보니 제가 다른 것을 놓쳤군요. 당신에게 강압적으로 굴 생각은 없었습니다.”
갑작스러운 사과에 얼떨떨해진 시빌이 눈을 끔벅이다가, 픽 웃으며 답했다.
“아닙니다. 뭐 이 정도의 언쟁은 언제나 있는 일입니다.”
“…하지만 제게 가장 우선은 로드입니다. 어쨌든 로드께서는…”
“예에, 예에.”
시빌이 입술을 말아 올리며 웃었다.
“포르투의 귀하신 공주님이죠. 저도 압니다. 다만 아까는 저도 심했습니다. 공주님께 비아냥거릴 생각은 없었는데, 아무래도 어두운 데다가 좁은 굴에서 오래 움직이다 보니 신경이 곤두섰나 봅니다. 미안해요, 공주님.”
“…괜찮아요. 저도 생각이 짧았어요.”
시빌의 사과에 클로디아도 얼결에 사과했다. 빨간 머리의 마법사는 디자이어 쪽으로 다가서 친근하게 웃었다.
“미안합니다, 디자이어. 앞으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할게요.”
[그래. 나도 인간들의 일은 인간들에게 맡기고 싶지만, 어쨌든 클로디아가 울면 골치 아프다고.]
“하하. 마음이 아픈 게 아니라 골치가 아픕니까?”
디자이어가 뻔뻔하게 답했다.
[검에는 마음이 없어.]
“머리도 없거든!”
그 말을 들은 클로디아가 검집을 괜히 쥐어박았다. 꿍꿍.
“진짜 검도 아니면서!”
[아아아, 정말 골 아파! 그렇게 때리지 마!]
디자이어와 한바탕 소란을 일으킨 뒤에야 세 사람은 출발할 수 있었다. 항상 그랬듯 데미안이 가장 먼저 앞장섰다. 시빌 또한 두어 걸음 뒤에서 사방을 경계하며 따라왔다. 층을 샅샅이 뒤지고, 난쟁이들과 두어 번 싸우는 동안 모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서로 그렇게 사과는 주고받았지만, 분위기가 어색해진 탓이었다.
클로디아는 조심스럽게 자신이 품에 안은 디자이어를 내려다봤다. 아까 디자이어가 했던 말이 마음에 걸려서였다.
여관 복도.
울게 내버려 뒀다.
동력 지대에서의 첫날 밤을 이야기하는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날 밤 무슨 일이 있었지?’
클로디아는 가만히 그때를 되짚어갔다. 그날 동력지대에서 지저분한 여관방을 보고 자신은 너무 많이 당황했고, 울었다. 앞으로도 그런 방에서 밤을 지새워야 할 자신이 너무 가엾고 불쌍해서였다.
데미안은 그날 여관 복도에서 밤을 지새웠다. 클로디아와 한 방을 쓸 수 없기 때문이었다. 클로디아는 그 사실을 돌이켜보고 문득 창피해졌다.
그날 그런 먼지 쌓인 침구에서 잠들게 된 스스로의 처지가 클로디아는 지독히도 슬펐다. 정말로 포르투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쥬버린 자의 말에 반발해 출발해 놓고 다시 하루 만에 돌아간다면 그보다 부끄러운 일도 없을 것이었다.
치기 어린 공주님이 되고 싶지 않았기에 그 방에서 잠을 청했지만, 사실은 굉장히 돌아가고 싶었다. 마왕이 밉고, 쥬버린이 미웠다. 예쁘고 아름다운 것들에 감싸여 살던 그 나날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하고 눈물바다에 잠겼다.
하지만 그날, 그 밤에 클로디아의 방문 밖에는 그녀보다 훨씬 거친 잠자리에 놓인 남자가 있었다. 데미안이라고 해서 그 잠자리가 대단히 기꺼웠을 리 없다. 그러나 그녀는 그런 데미안을 바깥에 놔둔 채 스스로의 슬픔에만 잠겨 울어댔다. 여관 복도는 키가 큰 데미안이 채 다리를 뻗기도 힘들 정도로 좁았다. 그런 곳에서 편안했을 리 없다. 아마 그는 밤을 새웠을 것이다.
그런 그는 문 안에서 비애에 빠진 왕녀가 얼마나 가소로웠을까.
클로디아의 얼굴이 귀까지 새빨개졌다. 자신이 비탄에 빠져서 제 생각만 하며 우는 동안 데미안은 그녀를 비웃었을 것이다. 자신만 아는 공주가 방이 험하다며 투정이나 하고 엉엉 우는 것을 다 들으며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디자이어가 ‘내버려 뒀다’고 말한 것이 어떤 뜻인지 알 것 같았다. 그는 분명 자신을 달랠 가치도 없다고 생각했으리라.
- 아니야, 임마.
그때 그녀의 생각을 디자이어가 가로막았다. 그녀는 화들짝 놀라 소리 질렀다.
“디자이어?!”
“무슨 일입니까?”
“공주님?”
그녀의 비명에 데미안과 시빌이 동시에 그녀를 돌아보며 물었다. 그녀는 디자이어를 들어 보이며 말했다.
“어, 방금 디자이어가….”
[내가 뭐?]
그러나 디자이어는 시치미를 뗐다. 그녀는 빨개진 얼굴로 “바, 방금 디자이어가 말을 걸었는데?” 하고 말했으나 디자이어는 [너 이제 헛소리도 듣냐. 데미안, 좀 쉬어가는 게 어때?]라고 할 뿐이었다. 그 말을 들은 데미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다음 층으로 내려가기 전에 좀 쉬고 잠도 청해야 할 것 같습니다. 사방이 어두워서 피로도도 빨리 쌓입니다. 쉴 만한 방이 나오면 그곳에서 쉬도록 하죠.”
“듣던 중 반가운 말씀.”
그 말을 들은 시빌이 걸음을 재촉했다. 클로디아는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디자이어를 내려다봤다. 하지만 분명 얘 목소리를 들었는데…. 그때, 다시 디자이어가 말을 걸었다.
- 야. 멍청아. 네 마음에 말을 걸었는데 소리를 지르면 어떻게 해?
클로디아는 멍청하지는 않았기에, 가까스로 펄쩍 뛰어오를 뻔한 것을 내리눌렀다. 그녀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디자이어를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너, 내 마음에 말도 걸 수 있어?’
- 그야 지금처럼 네가 상념을 술술술 흘리고 있으면 그렇지.
상념? 클로디아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방금 전에 내가 무슨 생각을 했더라…. 어….
- 바보야. 데미안 말이야.
아. 클로디아는 우뚝 멈출 뻔했다. 디자이어는 한숨 쉬는 소리를 내며 계속해서 말했다.
- 그때 데미안이 널 내버려 둔 건 맞는데, 널 비웃어서 그런 건 아냐.
‘…그러면?’
- 그날 여관 복도에서 널 울라고 내버려 둔 건, 네가 마음껏 울 수 있는 때가 그때뿐이어서 그래.
‘무슨 뜻이야 그게.’
-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났을 때 복도에서 나던 비린내 기억나?
비린내? 그런 냄새가 났나? 곰곰이 생각하던 클로디아는 곧 복도의 드문드문하던 얼룩과 비린내를 기억해냈다. 그랬다.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서, 좀 이상한 냄새가 난다고 생각했는데.
- 그거 데미안이 그런 거야.
‘뭐?’
- 정확히는 동력 지대의 강도들을 해치운 거야. 너 울다 자느라 몰랐지?
강도가 들었다고? 클로디아는 제 귀를 의심했다.
- 동력 지대에는 포르투에서 내려오는 사람들을 지켜봤다가 강도질을 하는 놈들이 많다고 데미안이 얘기했잖아. 그날 밤새 여관에 얼마나 많은 강도가 들었는데. 여관 주인은 일부러 문을 열어두고 자러 들어갔어. 동력 지대는 그런 곳이니까 데미안도 예상은 했지.
아. 클로디아는 아연해졌다. 그러면 데미안은 제가 울고 있던 방문 바깥에서….
- 데미안이 너한테는 비밀로 해 달라고 얘기했는데 도무지 봐줄 수가 있어야 말이지. 데미안 너 안 비웃었어. 그냥 너를 불쌍하게 생각하는 거 같더라.
클로디아의 가슴 한쪽이 선득해졌다. 불쌍하게 생각했다고?
- 너랑 달라서 데미안이나 시빌 같은 애들의 생각은 내가 읽을 수가 없어. 근데 그날 밤에 데미안이 싸우다가 잠깐 생각을 흘렸어. 가엾고 여린 분이라고.
‘가엾고, 여린….’
- 그래.
디자이어는 우쭐하며 설명했다.
- 어차피 앞으로는 더 힘든 곳도 많고 어려운 곳도 많다고 데미안이 나한테 그랬어. 그나마 눈물이라도 날 때 마음껏 울어놓는 게 좋다고 그랬는걸. 그래서 너에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내버려 두는 게 제일 낫다고 그랬어. 강도가 든 이야기도 아마 심란해질 테니까 말 안 하는 게 좋을 거라고 그래서 나는 가만히 있었어.
그녀는 동력 지대에서 데미안이 했던 말을 기억해냈다. 남자는 분명 클로디아에게 비슷한 말을 하긴 했었다.
‘식사하시기 전에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 올라가시면 따뜻하고 맛있는 저녁을 드시고 깨끗한 방에서 실크 잠옷을 입고 주무실 수 있을 겁니다.’
‘…돌아가지 않는다면 먼지 냄새나는 침대에서 잠도 오지 않는 밤을 지내고, 새벽에 일어나서 칼을 휘둘러야 합니다.’
‘지금 입으신 분홍색 옷은 빛에 바래 허옇게 색이 빠질 겁니다. 옷에 달린 프릴의 실밥이 나가고, 크라바트가 뜯겨나가는… 그런 것쯤은 문제도 아니죠. 재수가 없으면 며칠씩 머리도 감지 못하고, 모래땅 위에서 주무셔야 할 겁니다. 잠을 잘 수 있는 곳은 사정이 나은 편이죠. 땅이 요동쳐 잠을 잘 수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루에 한 시간도 자지 못하고 사흘을 걸으면 환상이 보이기도 합니다. 공주다운 여정이라고는 요만큼도 없을 겁니다.’
- 그치만 클로디아. 데미안은 너를 너무 맹목적으로 감싸.
디자이어의 말에 그녀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감싼다고?’
- 그래. 난쟁이들을 일부러 죽이지 않는 것도 그렇고, 지금도 시빌이랑 싸운 것을 봐. 데미안은 누가 네게 뭐라고 할 때마다 신경을 지나치게 곤두세워. 사실 네가 공주이긴 하지만, 이제는 뭐 딱히 대단한 공주는 아니잖아. 물론 포르투를 수호하던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디자이어는 말하다 말고, 기가 죽었는지 말끝을 흐렸다. 포르투를 수호하던 디자이어 또한 포르투의 지금 상태에 꽤 죄책감을 느끼고 있으리라.
‘…네 탓은 아냐, 디자이어. 그렇게 속상해할 필요 없어.’
- 그래. 아무튼, 데미안도 네게는 그렇게 싸늘하게 말하면서 너를 너무 나서서 보호해. 시빌은 필요한 말을 했을 뿐인걸. 물론 그다음에 한 말은 좀 심했지만….
클로디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디자이어의 말을 듣고 나니 데미안이 제게 왜 그랬는지가 어느 정도는 이해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는 나를… 무사히 보호해서 결혼시켜야 하니까.’
- 응?
‘너도 들었잖아. 오빠의 말을. 그는 내가 마왕을 잡지 못한다고 해도, 오빠의 말을 들어 나를 좋은 곳에 시집보내기 위해 노력할 거야. 그런 사람이니까.
- 야야야야야. 그게 아닌 것 같은데.
디자이어가 그녀의 생각에 태클을 걸었으나 그녀는 듣지 못한 척하고 눈앞의 남자를 쏘아봤다.
‘나를 불쌍히 여겼다 이거지. 데미안 알파.’
동정은 내려다보는 감정이다. 데미안이 자신을 가엾고 여린 분이라고 한 이유를 그녀는 알 것 같았다.
기실 동력지대의 그 밤, 클로디아는 스스로를 가엾이 여겼다. 그러나 남이, 나아가 데미안이 자신을 동정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드는 감정은 사뭇 달랐다.
그가 지배자의 덕목이니 뭐니 하는 걸 주워섬긴 이유도 클로디아는 알아차렸다. 그는 아직도 제게 지배자의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리라.
그때 데미안이 뒤돌았다. 클로디아는 저도 모르게 화들짝 놀랐으나, 곧 주변 풍경이 어느새 바뀐 것을 깨달았다.
“이 방에는 난쟁이들이 없군요. 쉬어 가시지요.”
“야호.”
시빌이 하품인지, 환호성인지 알 수 없는 소리로 대답하며 클로디아를 스쳐 지나가 흙바닥에 아무렇게나 드러누웠다. 데미안은 방 안을 둘러보고 자리를 깔았다. 거인들이 준 식량을 그가 펼쳐놓았지만, 클로디아는 모두 사양한 후, 구석에 디자이어를 안고 쪼그려 앉았다.
그리고 곧 그녀는 까무룩 잠들었다.
***
생각해 보면 그는 언제나 그랬다. 아주 어릴 때부터 자신을 언제나 비스듬히 내려다보면서, 알 수 없는 소리나 했다.
데미안 알파가 언제부터 포르투 왕성에 있었는지 그녀는 기억하지 못했다. 쥬버린 왕자는 데미안과 연치가 같아 데미안을 즐겨 찾았다. 포르투의 왕이 치매에 걸린 후, 동년배에 비해 과한 짐을 안고 있는 쥬버린을 위해 대신들도 데미안이 그의 말벗이 되는 것을 찬성했다.
클로디아는 아주 어릴 적부터 데미안을 봤다. 데미안은 아주 멋진 검을 차고 포르투 왕성을 순찰하거나, 미다프 경의 심부름을 하곤 했다. 그러다가 클로디아를 마주하면 딱딱한 얼굴로 인사했다. 아직 그가 소년 시절일 때였다. 바쁜 쥬버린 왕자 대신 클로디아가 데미안을 찾는 일이 잦아졌고, 데미안은 언제나 그녀에게 싫은 기색을 내비치지 않았다.
하지만 데미안이 수련 기사 과정을 마치고, 정식 기사가 된 후로는 조금 달라졌다. 그때 클로디아가 몇 살이었더라. 그녀가 데미안을 보러 기사들의 훈련장을 찾아가면 데미안은 입매를 굳히고 그녀를 내보냈다. 기사가 되기 전에는 그녀가 놀자고 팔을 붙들면 난처한 척하면서도 곧잘 놀아주곤 했으나, 그 후에는 달랐다.
클로디아는 아직도 기억한다. 클로디아보다 머리가 두 개는 더 큰 소년의 팔을 붙들어 안았을 때, 자신의 팔을 뿌리쳐버리던 소년을. 뒤로 나동그라진 클로디아는 앙앙 울었고 시녀인 노바라는 깜짝 놀라 클로디아를 부축했다. 적잖이 당황한 표정을 짓던 데미안은 미미한 사과만 건네고 그 자리를 떠났었다.
그녀와의 혼약을 쥬버린이 결정했을 때 데미안은 드물게 반발했다. 포르투의 공주가 자신 같은 사람과 결혼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포르투에서 클로디아와 연배가 맞는 청년들 중, 가장 괜찮은 사람은 데미안 알파라는 데 반발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그 까탈스러운 시녀들마저도 늠름하게 성장한 데미안이 부마가 된다는 것에 싫은 소리를 조금도 하지 않았다.
불만에 찬 것은 클로디아였다. 혼약이 결정된 후에도 데미안은 그녀에게 입바른 소리 한 번 하지 않았다. 도무지 좋은 소리를 해 준 적이 없었고, 그녀가 데미안과 시간을 보내려고 할 때마다 ‘이런 건 공주님이 할 일이 아니다’라는 이야기나 했다.
그렇지만, 내가 할 일이 대체 뭔데?
내가 할 일은….
***
“…드.”
“으음….”
“로드. 일어나십시오.”
익숙한 목소리에 클로디아는 눈을 반짝 떴다. 눈앞에는 무뚝뚝한 표정의 데미안 알파가 앉아 그녀를 깨우고 있었다.
“일어나실 때가 됐습니다.”
“아. 미안해요. 지금 얼마나 됐죠?”
“바깥 시간은 새벽 다섯 시 정도예요!”
저편에 앉아서 짐을 챙기고 있던 시빌이 경쾌하게 답했다. 그는 짐에서 말린 과일을 꺼내어 그녀에게 던졌고, 클로디아는 얼결에 그것을 받았다. 시빌은 눈을 찡긋하며 웃었다.
“배고프시죠?”
“아….”
“어제 식사도 안 하고 주무셨잖아요? 간단하게라도 드세요!”
그러나 클로디아는 그것을 바로 입에 넣지 않았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데미안을 쳐다봤다. 옆에서 허리춤의 검대를 점검하던 데미안이 그녀의 시선에 의아한 표정을 짓다 이내 그녀가 뜻하는 바를 알아차렸다.
“아. 오늘은 훈련이 어렵습니다.”
“…훈련은 매일 해야 한다면서요?”
“여기는 훈련할 만한 공간이 확보가 안 됩니다.”
데미안은 주변을 둘러봤다. 확실히 세 사람이 찾아든 방은 좀 좁았다. 넓은 방도 있었지만, 데미안이 습격에 대비해 일부러 좁은 방을 고른 것이다. 그러나 클로디아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 근력 훈련이라도 할래요.”
검을 들고 버티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데미안의 표정은 마뜩찮았으나, 그녀는 일부러 고집을 부리며 일어섰다. 디자이어가 희한하다는 듯 말했다.
[야 너 드물게 이상한 고집 부린다…?]
“고집 아냐.”
시빌도 옆에서 신기하게 쳐다보긴 했으나, 그는 빈둥거릴 시간이 생긴 것을 오히려 반기며 주저앉았다. 명상할 시간이 생겼다는 이유였다.
“저도 그러면 조금 더 마력을 모아볼까요!”
그가 옆에서 다리를 모으고 앉으니 데미안도 말릴 이유가 없었다. 데미안은 한숨을 쉬면서도 팔짱을 끼고 그녀의 자세를 고쳐 주었다. 클로디아는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기어이 정해진 시간 동안 디자이어를 들고 훈련했다.
훈련을 마치자 흘린 땀으로 몸이 찝찝했다. 그제야 후회가 조금 밀려왔으나, 땅굴 안에서 씻을 곳이 있을 리 만무했다. 클로디아는 데미안을 흘긋 쳐다봤다.
그는 훈련을 끝낸 클로디아에게 별다른 칭찬 한마디 없이 다시 배낭을 짊어지고 있었다. 클로디아는 괜히 얼굴을 구기고 제 망토를 대충 뭉쳐 배낭에 집어넣어 버렸다.
***
지루한 탐색이 되리라 예상했으나, 의외로 일행들은 빠르게 마지막 층에 다다랐다. 난쟁이들의 습격이 확연히 줄었기 때문이다. 세 사람은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각 층을 샅샅이 뒤졌다. 그 과정에서 몇 개의 세계수 열매와 장신구, 식량 같은 것들이 발견됐다.
그리고 마지막 층에 도달했다. 그곳이 마지막 층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것은, 계단을 내려가자마자 커다란 문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땅굴 안에 만들어졌다기에는 다분히 의식적인 종류의 문이었다. 난쟁이들을 낳아 기르는 것만이 목적이라면 저런….
“인간이나 드나들 법한 문을 만들어놓은 이유가 뭘까요.”
시빌이 통통, 하고 흙벽을 두들기며 말했다. 나머지 두 사람 다 시빌의 말에 동감했다. 세 사람의 앞에 있는 문은 엄청나게 크고, 장식적이었다. 벽과 마찬가지로, 흙으로 만들어지기는 했지만 그 크기는 난쟁이들이 드나들기엔 너무 높았고, 손잡이도 인간이 잡을 법한 높이에 만들어져 있었다.
“땅요정의 왕은 난쟁이가 아니라 인간 크기라거나?”
클로디아가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시빌이 답했다.
“그럴 수도 있죠. 저번에도 말했지만, 땅요정들이 저주를 받아 난쟁이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거든요.”
“원래는 인간만큼 컸다는 이야기인가요?”
“글쎄요. 저도 땅요정들이 있었던 시대에 살지는 않았으니.”
“마법사들은 기록을 남기지 않습니까?”
데미안이 물었다. 마법사 길드는 선대 마법사들의 기록을 공유한다. 대저 마법사들이란 어쨌든 기록과 연구에 충실한 종류의 인간들이니 아주 옛날의 기록도 남아 있지 않을까, 하는 물음이었다. 그러나 시빌은 고개를 저었다.
“고대의 마법사들은 지금처럼 기록에 힘쓰지 않았습니다. 애초에, 지금의 마법사들이 그렇게 기록에 집착하는 이유는 예전의 기록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아 소실된 마법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렇군요.”
[그럼 역시 열어보는 수밖에 없네!]
디자이어가 경쾌하게 말했다. 시빌은 짐짓 긴장한 척하며 빛을 몇 개 더 불러내었다. 둥실둥실 떠 있는 빛의 구들이 흙문을 비췄다.
“이 안에 땅요정의 왕이 있을까요?”
“모르죠. 보통은 그렇게 생각하지만, 사실 없을 수도 있고요.”
“…난쟁이들이 수십 마리는 있을지도 모릅니다. 긴장하세요.”
데미안의 말에 클로디아는 몸을 굳혔다. 그렇다. 데미안은 여기까지 내려오며 부쩍 난쟁이들의 습격이 적어진 것에 대해 걱정하고 있었다.
일행들은 난쟁이들이 침입자들에 대비해 땅요정의 왕을 지키려고 마지막 층에 모여 있을 가능성을 가장 크게 쳤다.
“다시 한 번 당부하지만, 시빌은 로드를 지키는 데 집중해 주십시오. 만약의 경우, 저는 놔두고 도망치셔야 합니다.”
“어라. 매정한 소리 하시네.”
시빌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웃었다. 클로디아는 그 말에 기가 막혔지만, 뭐라 달리 할 말도 없어 입을 닫았다.
당신 없이는 안 나간다는 말을 이 상황에서 해 봐야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클로디아는 미리 시빌이 시전해 준 마력장을 시험 삼아 통통 두들겨 봤다. 클로디아를 감싼 마력장은 외부의 충격을 어느 정도는 버티게 돼 있었다.
시빌이 찡긋, 한쪽 눈을 감아 보였다.
“자, 그러면 문을 열어 볼까요.”
시빌의 말에 데미안이 손을 뻗었다. 클로디아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문을 쳐다봤다. 저 안에는 뭐가 있을까. 범상치 않은 것이 있는 것은 분명했다.
끼익, 문이 열렸다. 동시에 흑흑, 하는 소리가 들렸다. 클로디아는 눈에 힘을 주고 안을 쳐다봤다. 시빌이 빛의 구를 안쪽으로 빠르게 띄워 보냈다. 그리고 세 사람은 당황스러운 광경을 보게 됐다.
문의 안쪽은 생각보다 그리 넓지 않았다. 포르투 왕성의 클로디아의 방보다 조금 큰 정도였다. 정확히는 인간이 마흔 명 정도 누우면 가득 찰 것 같은 공간이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이상한 것이 보였다. 클로디아는 월장석 목걸이 덕분에 나머지 두 사람보다 먼저 그게 뭔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흙무덤…?”
그 안에는 엄청나게 큰 봉분이 있었다. 클로디아는 그것이 처음에는 누군가의 무덤인 줄 알았다. 동쪽 대륙의 어떤 나라들은 사람의 무덤을 편평하게 다듬지 않고 동그랗게 봉분을 쌓아 올린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봉분은 무덤이 아니었다. 그녀는 그 위의 조그만 새싹들을 봤다. 그리고 그 뒤에서 흑흑, 우는 무언가도 알아차렸다.
난쟁이였다.
정확히는 인간만큼 큰 난쟁이.
인간의 신장을 하고 있었으나 손가락이 네 개뿐인 주름 가득한 손과, 기괴하게 일그러진 얼굴, 커다란 코와 벗겨진 머리까지 누가 봐도 난쟁이였다. 그리고 그 커다란 난쟁이는 무덤 뒤에서 울다가 이쪽을 보고 화들짝 놀랐다.
“끽!”
난쟁이의 외마디 비명에 클로디아도 놀라 주변을 살폈다. 동료 난쟁이가 있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누구도 튀어나오지 않았다.
데미안이 의심스럽게 그쪽으로 다가갔다. 난쟁이는 서둘러 물러났다.
“누, 누구?!”
뒤에 따라온 말에 세 사람은 저도 모르게 서로를 마주 봤다. 난쟁이가 인간의 말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말에 대답한 것은 데미안이었다.
“…인간이다.”
“인, 인간? 인간 왔어?”
난쟁이는 주춤주춤 다시 물러났다. 이제 데미안은 봉분 앞까지 다가가 있었다. 데미안은 봉분 위를 힐끗 봤다. 새싹들이 조금씩 고개를 내밀고 있었고, 그는 그게 무슨 싹인지 대번에 알아차렸다.
“세계수의 싹이군. 이걸 왜 네가 키우고 있지?”
“키익!”
그러나 난쟁이는 대답하지 않고 날을 세웠다. 데미안이 한 걸음 다시 다가갔다.
“다시 묻겠다. 세계수를 왜 네가 키우고 있지? 거인들의 생명수는 이것을 위해 훔친 것인가?”
“인간, 인간!”
난쟁이는 언뜻 봐도 패닉에 빠진 듯했다. 데미안은 혀를 찼다. 인간의 말을 할 줄 안다고 해서 의사소통이 되리라는 것은 너무나 희망적인 관측이었던 것이다. 이래서는 한도 끝도 없었다. 그는 난쟁이를 붙들고 생명수의 행방부터 찾기로 했다. 데미안은 빠르게 팔을 뻗어 난쟁이의 목줄기를 잡았다. 덩치 크고 추한 난쟁이는 도망도 치지 못하고 데미안에게 붙들려 비명을 질렀다.
“인간!”
“대답해라. 생명수는 어디에 있지? 네가 난쟁이들의 왕인가?”
“인간! 생명수! 키운다, 요정, 거인!”
난쟁이는 켁켁대며 데미안의 손 안에서 몸을 뒤틀었다. 난쟁이는 인간의 말을 제대로 할 줄 아는 것이 아니라, 단어를 나열하고 있었다. 그 단어들은 언뜻 데미안이 한 말들을 반복하는 것으로 들렸으나, 데미안은 뭔가 마음에 걸리는 것을 알아차렸다.
‘뭐지?’
“용, 받았다, 저주, 바뀐다, 요정. 푼다!”
“…저주를 받았다고?”
난쟁이는 데미안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계속 비명을 질렀다.
“마족! 변했다!”
마족? 데미안은 흠칫했다. 난쟁이의 시선이 어딘가를 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데미안은 저도 모르게 뒤를 돌아봤다.
그곳에는 생명수를 든 시빌이 서 있었다.
시빌은 데미안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야호!” 하고 소리 질렀다.
“찾았어요! 여기 있네요!”
거인들에게 설명 들은 그대로였다. 초록색 나무 열매로 만든 물통 속에 찰랑거리는 생명수.
시빌은 보란 듯이, 그러나 조심스럽게 그 물통의 뚜껑을 열었다. 반짝이는 빛을 머금고 있는 물이 어둠 속에서도 빛을 냈다. 틀림없었다. 생명수는 시빌의 손안에 있었다. 그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자, 그럼. 데미안! 손을 놔요!”
“뭐?”
데미안이 순간 영문을 몰라 눈썹을 들어 올렸다.
“아이 참.”
시빌은 눈썹 한쪽을 찡그리며 손을 딱, 튕겼다. 데미안은 순간 누군가 제 손에서 난쟁이를 홱 채가는 것을 알고 놀라 난쟁이를 붙들었다. 그러나 소용없었다. 난쟁이는 부유 마법에 걸려 공중에 떠올랐던 것이다. 난쟁이는 놀라 공중에서 몸부림치며 소리 질렀다.
“왕! 마족!”
“이제 용건 끝났죠?”
“잠깐만, 시빌!”
“예?”
데미안이 소리 질렀다. 시빌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데미안을 쳐다봤다.
“뭔가, 마음에 걸리는 게….”
“끼에엑!”
그때 난쟁이가 엄청나게 큰 소리를 질렀다. 클로디아도 깜짝 놀라 귀를 막을 정도였다. 데미안이 주춤한 사이, 봉분이 꿈틀거렸다. 새싹이 가득하던 봉분이 들썩이는 것을 보고 세 사람 다 눈이 커졌다. 시빌이 칫, 하고 혀를 찼다.
“어떻게 할 거예요?”
“…잠시만.”
데미안이 망설였다. 그의 직감은 뭔가 드러나지 않은 것이 더 있다는 것을 알리고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없었다. 봉분 안에서 작은 손이 불쑥 흙을 뚫고 튀어나왔기 때문이다. 손은 하나가 아니었다. 하나, 둘, 셋…. 점점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손들은 수를 늘렸다. 그리고 이윽고 난쟁이들이 고개를 내밀었다.
수십은 되는 작은 난쟁이들이 그 봉분 안에서 기어 나오고 있었다. 시빌에게 붙들려 있던 난쟁이 왕이 또다시 소리를 질렀다.
“키이익!킥!”
“키에에에!”
난쟁이 왕의 비명에 튀어나온 작은 난쟁이들이 마주 소리를 지른 후, 데미안에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데미안이 이를 악물며 검을 들었다. 결국 시빌은 소리 질렀다.
“안 되겠네. 공주님, 눈 감아요!”
“네?”
“젠장, 저쯤 되면 사정 못 봐줘요! 공주님 또 토한단 말이에요!”
클로디아는 시빌의 말을 즉각 알아들었다.
저만한 난쟁이들 수십 마리가 달려들면, 시빌로서도 여태까지 해온 방식으로 싸울 수 없다. 클로디아의 비위를 생각하자고 그 수십 마리를 모두 공주님처럼 귀히 모셔 기절시킬 수 없단 얘기다.
결국 그녀는 바로 눈을 질끈 감았다. 시빌은 클로디아가 눈을 감자마자 알 수 없는 소리를 내뱉었다. 엄청나게 큰 소리였다.
그리고 클로디아가 귀로 듣기만 해도 알 수 있는 상황이 벌어졌다. 퍽. 퍼버벅. 둔탁한 소리가 연이어 터졌다. 뭔가 두둑한 것이 터져버리는 소리. 그녀가 익히 이 땅굴에서 계속 들어왔던 소리였다. 그러나 땅굴 속에서 만나는 난쟁이의 수는 기껏해야 다섯 손가락을 넘지 않았기에 이렇게나 많은 소리가 나지 않았다.
클로디아는 감은 눈에 힘을 더 주었다. 너무 무서워서 눈물이 날 것 같아서였다.
“…이런.”
데미안이 탄식을 내뱉는 소리가 들렸다. 그마저도 여즉 고집해왔던 전투 방식을 버려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다음은 난전이었다.
병장기가 부딪히는 소리, 난쟁이들의 비명, 데미안이 기합을 넣는 소리와 시빌이 주문을 외우는 소리.
클로디아는 저도 모르게 쭈그려 앉았다. 눈을 뜰 수도, 나가서 싸울 수도 없는 자신이 무력하게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 클로디아는 잔뜩 웅크리는 것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검이 까가각! 하고 벽에 긁히는 소리와 시빌이 뛰는 소리, 그리고 데미안이 고함을 지르는 소리….
그녀는 쪼그려 앉은 채 자괴감과 싸웠다. 온갖 소리가 다 났다.
그리고 그 소리가 점점 낮아지고, 뜸해지고, 이내 조용해졌을 때.
누군가 클로디아에게 다가왔다. 그 몸에서는 피비린내가 훅 끼쳤고, 클로디아는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찔했다. 상대는 멈칫하더니 물었다.
“로드. 망토를 어디 두셨습니까.”
클로디아는 눈을 감은 채 입술을 덜덜 떨며 말했다.
“배낭, 배낭 안에….”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목소리의 주인은 배낭을 뒤지더니 그녀의 망토를 찾은 모양이었다. 곧 익숙한 모래 냄새가 나는 천이 그녀의 머리와 상반신을 덮었다. 클로디아는 그것이 이 상황에서의 마지막 배려라는 것을 알았다. 사방은 분명 처참한 상태일 것이다.
상대가 걸어오는 소리만 들어도 알 수 있었다. 땅에서는 질퍽거리는 소리가 났다. 멀쩡하던 땅굴 바닥이 늪으로 변했을 리도 없으니, 아마 난쟁이들의 시체가 그리 만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상대는 그런 것은 신경 쓰이지도 않는다는 듯 말했다.
“다 끝났습니다. 나가는 것을 도와드릴 테니 일어서시죠.”
“…다 끝났어요?”
“예.”
목소리는 늘 그랬듯 평온했다. 클로디아는 그제야 어깨를 늘어트리고 겨우 일어설 수 있었다. 그녀는 망토에 얼굴을 묻은 채, 아무것도 보지 않고 그곳을 나왔다.
자꾸만 눈물이 나오려는 것은 참아가면서.
***
“땅굴을 막아버렸다고?”
거인들은 감탄하며 시빌에게 캐물었다. 시빌은 에헴, 하고 헛기침하며 잘난 척할 기회를 맘껏 누렸다.
“그럼요. 난쟁이의 왕을 처치하고 나오면서, 그 안을 모조리 흙으로 메워 버렸답니다.”
“대단해!”
“…하지만 그 난쟁이가 땅요정 왕이라는 근거는 없긴 합니다.”
데미안의 말에 시빌이 흥이 식은 표정을 하고 그쪽을 돌아봤다. 데미안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인간만 한 크기의 난쟁이긴 했습니다만, 말을 섞으려고 하니 잘 통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자기 입으로 왕이라고 했잖아요?”
시빌이 이의를 제기했으나 데미안은 고개를 저었다.
“자신이 왕이라는 말을 하진 않았습니다. 왕이라는 단어를 입 밖에 냈을 뿐.”
“아….”
그러나 거인들은 아무래도 상관없는 모양이었다. 과연 땅요정 왕의 땅굴을 메운 보람이 있는지, 숲을 돌아다니던 난쟁이들의 움직임이 부쩍 줄었다는 것이다.
거인들은 연신 데미안을 칭찬해댔다.
“데미안! 네가 해낼 줄 알았어!”
“뻣뻣하기만 해서 걱정했는데!”
“고마워! 고마워!”
알리라는 거인은 생명수 통을 들고 춤을 춰댔다. 어찌나 흥겹게 추는지, 그가 발을 구를 때마다 주변의 새들이 화들짝 놀라 포르르 포르르 나무 사이를 옮겨 다녔다. 시빌은 그 생명수가 쏟아지지는 않나 불안한 눈으로 바라봤지만, 거인은 놀랍게도 생명수를 한 방울도 흘리지 않았다. 다른 거인들도 신이 나 몸을 흔들어댔다. 유일하게 베인만이 데미안의 이야기를 귀담아듣고 있었다.
“그런데, 그 난쟁이가 세계수를 키우고 있었다고?”
“예. 왜인지 물어보려고 했는데 그럴 수 없는 상황이어서 이유는 모릅니다.”
“흐음.”
베인이 턱을 쓰다듬었다. 데미안은 말을 이었다.
“그 봉분에 있는 것은 틀림없이 세계수 씨앗이었습니다. 제가 직접 포르투 밑에 심고 키워봤으니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밑에 난쟁이들이 들어 있었던 이유는 잘 모르겠습니다. 난쟁이들은 원래 그렇게 태어나는 것입니까?”
“아니, 우리도 난쟁이들이 태어나는 과정은 잘 몰라. 하지만 거기에 우리의 생명수가 들어간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어. 애초에 세계수에 주는 생명수는 우리만 만드는 거니까. 그런 과정이 있다면 우리는 진작 생명수를 몇 번이고 도둑맞았겠지.”
게다가. 데미안은 유독 그 큰 난쟁이의 말들 중에서도 마음에 걸리는 단어가 있었다. 그 난쟁이는 ‘마족’이라는 단어를 입 밖에 냈던 것이다.
요정, 세계수, 거인 같은 단어였다면 그도 난쟁이가 무서운 것을 주워섬기고 있거나, 아니면 현재 상태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혹은 자신의 이야기를 하려던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마족이라는 단어가 거기서 튀어나올 이유가 없었다. 애초에 마족이라는 건….
데미안은 이마를 짚었다.
마족은 마왕을 따르는 이들로, 자르지스에서 무리를 지어 살고 있는 종족이다. 기괴한 생김새로는 난쟁이를 비할 바가 아니었다. 하지만 마족과 난쟁이가 무슨 관련이 있단 말인가?
“그런데, 저 애는 괜찮아?”
“예? …아.”
베인이 턱짓한 곳에 있는 것은 클로디아였다. 클로디아는 망토를 두른 채 한쪽에 웅크려 앉아 있었다. 거인들이 쿵쿵 춤을 추고, 시빌이 벙글벙글 웃으면서 거인들이 내놓은 술을 마시는 것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데미안은 낮게 한숨을 내쉬고는 베인에게 말했다.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래? 네가 그렇다면 그런가 보다 하겠지만….”
베인이 어깨를 으쓱하며 일어났다.
“좋아, 어쨌든 약속한 거니까 세계수의 씨앗을 줄게. 오늘은 맛있는 것을 먹고 푹 자. 내일 아침이면 무르익은 세계수 열매를 갈라 씨앗을 가져갈 수 있을 테니까.”
“예. 고맙습니다.”
데미안은 무표정하게 답했다. 베인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정말이지, 너는 여전하구나. 미다프가 어린애 주제에 표정이 없다고 걱정할 때 곧 괜찮아질 거라고 다독인 보람이 없어!”
남자는 뚱하게 베인을 바라봤다. 베인은 데미안을 못 본 척하며 발돋움해 세계수의 열매를 땄다. 다른 거인들도 베인을 보더니 곧 일어나 열매를 따기 시작했다. 시빌이 앉아서 말린 과일을 집어 먹으며 물었다.
“어라, 열매는 왜 따시는 건가요?”
“그야 여물게 하기 위해서지!”
“따면 안 여물잖아요?”
“세계수의 열매들은 너무 많이 열려서, 제대로 잘 자랄 만한 좋은 씨앗을 뽑으려면 열매를 적게 남겨놔야 해!”
“아하….”
알리가 웃으며 설명했고, 시빌은 납득했다. 애초에 세계수 씨앗을 귀하게 여기는 이유는 여기 있었던 것이다. 한 번에 많이 뽑을 수 없으니 포르투에도 3년에 한 번, 딱 다섯 개만 준다.
포르투에 그들이 세계수의 씨앗을 주는 이유는 디자이어가 매년 세계수의 열매 대신 정령을 탄생시켜 세계의 비옥에 이바지하기 때문이다. 아마 그 땅요정들도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비슷한 일을 하려던 것 같았다.
생각을 마친 시빌은 클로디아 쪽을 바라봤다.
클로디아는 무릎을 모으고 거기 이마를 대고 있었다. 이곳에 도착한 뒤 그녀는 계속 저렇게 있었다. 아무래도 마지막의 전투가 그녀에게 꽤 안 좋은 영향을 미친 듯했다. 시빌은 짐짓 걱정되는 듯 그녀에게 말을 건넸다.
“공주님. 아까 새벽에 아침도 제대로 안 드셨어요. 식사 좀 하세요.”
“…괜찮아요.”
“음. 아무래도 지겹긴 하죠? 말린 과일에, 우리가 가져온 식량도 전부 말린 것들뿐이고. 요리사라도 있으면 좀 나을 텐데.”
클로디아는 시빌의 말에 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시빌은 넉살 좋게 웃었다.
“공주님, 미안해요. 어지간하면 공주님이 안 무섭게 하고 싶었는데, 저도 그렇게 많은 난쟁이를 일일이 기절시키긴 어려웠거든요.”
“…시빌 잘못이 아니에요.”
음울한 대답이 돌아왔다. 시빌은 코로 한숨을 쉬었다.
이 공주님이 왜 이러는지 알 것 같아서였다.
시빌의 말 때문이 아니라도, 그녀는 내내 땅굴 속에서 방해만 됐다. 정확히는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손끝 하나 까딱하지 않았던 그녀는 난쟁이들의 습격 한가운데에서도 눈을 감고 쪼그려 앉아 있었다.
시빌은 이 공주님에 대해 슬슬 파악한 참이었다. 그는 지배자들을 자주 본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높은 분들은 스스로에게만 자비롭기 마련이다.
하지만 클로디아는 그런 타입은 아니었다. 얼굴이 조금 예쁘고, 세상 물정을 남들보다는 덜 파악한 갓 열아홉 살 된 여자애.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런 여자애가 이런 상황에서 느끼고 있을 감정이란 뻔하다. 시빌은 쩝, 하고 입맛을 다셨다. 이럴 때 곰살맞게 굴어대면 그녀의 마음에 쏙 드는 것도 문제는 아니건만.
…저 기사대장이 눈을 부라리고 있으니 부마의 길도 영 요원했다. 시빌은 숲을 나가면 꼭 요리사를 고용하자고 클로디아를 졸라 보리라 다짐하며 과일을 씹었다.
***
클로디아는 꿈을 꾸었다. 난쟁이 하나, 난쟁이 둘. 귀여운 모자를 쓴 난쟁이들 수십 마리가 줄을 지어 숲을 걸어가고 있었다. 꿈이라서일까. 난쟁이들은 클로디아의 엄지손가락만 했다. 작은 난쟁이들이 줄지어 가는 광경은 귀여웠고, 클로디아는 저도 모르게 맨 뒤에 있는 난쟁이의 모자를 건드렸다.
톡, 하고 그녀가 난쟁이를 건드린 순간 앞에 가던 수십 마리의 난쟁이들이 일제히 뒤를 돌아봤다. 클로디아는 움찔했다. 그녀보다 한참은 작은 난쟁이들은 클로디아를 보더니 갑자기 떠들기 시작했다.
아파! 아파! 아파!
그리고 펑, 펑, 펑 터져버렸다. 잘 무르익은 새빨간 토마토처럼. 클로디아는 비명을 지르고 싶었으나, 비명조차 나오지 않았다. 아, 아아아. 아아아아.
“…공주님!”
클로디아는 눈을 확 떴다.
“괜찮아요?”
그녀의 눈앞에는 시빌이 있었다. 걱정이 가득 담긴 초록색 눈동자를 마주하니 그제야 정신이 좀 드는 것 같았다. 클로디아는 머리를 흔들었다. 쪼그려 있다가, 깜박 옆으로 쓰러져 잠든 것 같았다. 그러나 그녀의 밑에는 망토가 깔려 있었고, 목 밑에는 그녀가 포르투에서 챙겨 온 베개까지 받쳐 있었다. 그녀는 희미한 눈을 깜박이며 물었다.
“누가 저를 눕혔어요?”
“아.”
시빌이 조금 머뭇거리다가 씩 웃었다.
“죄송해요. 제가 공주님이 옆으로 쓰러지시는 걸 보고, 재워야겠다 싶어서 그랬어요.”
“아….”
“걱정하지 마세요. 공주님의 몸에는 손도 대지 않았으니까!”
부유 마법을 썼거든요! 시빌이 재잘거리며 그녀에게 손수건을 건넸다. 그제야 클로디아는 자신이 식은땀을 흘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켜 보니 주변은 고요했다. 어두운 것을 보니 한밤중인 듯했다. 저 멀리서 커다랗게 코를 고는 소리가 들렸다. 아무래도 거인들도 잠을 자고 있는 듯했다.
손수건을 받아 이마를 닦고 있으니 시빌이 물컵을 건넸다.
“마셔요. 아무것도 못 드셨으니 악몽을 꾸지.”
“악몽을… 꾸는 걸 어떻게 알았어요?”
“아니, 세상에. 거인 엉덩이에 깔린 것마냥 그렇게 끙끙대는데 누가 모릅니까.”
붉은 머리의 청년은 장난스럽게 어깨를 으쓱이며 웃었다. 클로디아는 그만 민망해져 버렸다. 잠들기 전에도 폐를 끼쳤다는 생각 때문에 우울해져 있었는데, 잘 때조차 그랬다니. 그가 자신을 유난이라고 생각할 것만 같아서였다. 하지만 시빌은 그런 것 따위는 전혀 신경도 안 쓰인다는 듯 재잘거렸다.
“주무시는 동안 다들 눈을 좀 붙였어요. 원래는 공주님을 더 재울까 했는데, 너무 끙끙거리시길래.”
“시빌은 안 자요?”
“저는 괜찮아요. 어떻게 아름다운 공주님이 악몽을 꾸는 걸 보고도 잘 수 있겠습니까. 뭐, 거인들 코 고는 소리가 한몫했다고는 말 못 합니다.”
마법사는 시시덕거리며 그녀가 다 마신 물컵을 받아 내려놓고 말린 고기를 건넸다. 클로디아가 받아들고 보니, 기름을 묻혀 불에 살짝 구워냈는지 말랑하고 따끈했다. 그녀가 가만히 그것을 내려다보자 시빌은 그 침묵을 뭘로 해석했는지 민망해했다.
“영 식량이 맛이 없기도 하고, 공주님 입맛에 안 맞는 거 같아서 조리를 시도해봤어요. 별 차이는 없긴 한데…. 그래도 덜 질기기는 해요.”
“그, 저는 싫은 게 아니라….”
클로디아가 우물쭈물하자 시빌이 슬쩍 몸을 붙였다. 그녀는 소스라치게 놀랐으나, 시빌이 더 빨랐다. 그는 클로디아의 귓가에 손을 가져다 대고 속삭였다.
“공주님, 그래서 말인데 우리 요리사 하나 구해요. 예?”
“요, 요리사요?”
“네. 먼 곳으로 무역을 다니는 상단들은 요리사도 몇 명씩 데리고 다니거든요. 그야 저는 말린 식량도 잘 먹지만, 이대로 가다간 공주님이 쓰러지실 거예요.”
시빌이 말하다 말고 한쪽으로 시선을 두었다. 클로디아도 자연스럽게 그쪽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등을 돌리고 누운 기사가 있었다. 데미안이었다.
시빌은 그쪽을 슬쩍 흘겨보더니 귀엽게 얼굴 양쪽으로 손가락을 세워 올리곤 뿔 모양을 만들어 내며 말했다.
“물론 저 기사님은 ‘말도 안 됩니다.’ 이런 소리나 하며 악마처럼 반대하시겠지만, 공주님이 힘드시다고 하면 해주지 않을까요?”
시빌이 흉내 내는 데미안의 말투는 실로 그럴듯해서, 클로디아는 그만 큽, 하고 웃고 말았다. 마법사는 클로디아가 웃는 것을 보더니 어, 웃었다! 웃었다! 하고는 자신도 씩 웃었다.
“공주님, 많이 놀랐죠?”
“어….”
“괜찮아요. 누구나 처음에는 그래요.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첫 원정을 나가는 마법사들 중에는 놀라서 마법 주문도 까먹는 놈들도 많다고.”
시빌은 마치 여동생에게 하듯 클로디아의 등을 가볍게 두들겼다. 클로디아에게는 퍽 생경한 스킨십이었지만, 어쩐지 그녀는 눈물이 핑 돌았다. 자신이 위로받을 입장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클로디아는 이런 다정한 위로를 받은 것이 처음이었던 것이다.
정확히는, 포르투가 그렇게 무너진 후 처음이었다.
“아, 아녜요.”
클로디아는 애써 목소리를 내어 말했다.
“놀라서 그런 게 아녜요. 정확히는…. 숲에 처음 들어왔을 때는 놀라긴 했지만요.”
어쩐지 목이 메려고 해서 그녀는 큼큼, 하고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그 와중에도 자고 있는 데미안이 신경 쓰여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그…. 제가 도움이 되기는커녕 방해만 되는 거 같아서요.”
“이런,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셨어요.”
시빌이 너스레를 떨었다. 클로디아는 낮게 한숨을 쉬었다.
“그냥요. 계속 그랬어요. 포르투가 무너진 다음부터요.”
이상했다. 클로디아는 공주로 살아오며 자신의 속 이야기를 남에게 하지 않는 것이 습관처럼 굳어져 있었다. 물론 그녀는 솔직했기에 시녀인 노바라에게 대부분의 이야기를 했지만, 그래도 가끔은 노바라에게조차 말하지 못한 것이 있었다. 예를 들면, 대신들에게 노골적으로 무시당한 날 느꼈던 감정 같은 것.
그런데 희한하게 지금은 약간이라도 털어놓고 싶었다. 시빌이 제게 따뜻하게 대해서일까. 클로디아는 탄식하듯 말했다.
“데미안도, 시빌도 저 때문에 고생하고 있는데… 정작 저는 싸우지도 않고 배려만 받고 있잖아요.”
“….”
“시빌은 저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어요?”
그녀의 물음에 시빌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제가 아는 건 얼마 없는데.”
“괜찮아요, 말해봐요.”
“음, 포르투의 귀한 막내 공주님이고…. 하늘섬을 습격한 마왕을 무찌르기 위해서 자르지스로 향하는 여정을 떠났다는 정도? 아, 정령 디자이어의 수호를 받고 있다는 거요.”
시빌이 손가락을 꼽으며 말하다가 제 옆구리를 탁탁 쳤다.
“제 상처를 낫게 해줄 분이라는 것도 알고 있네요! 그리고 아주 예쁜 분이라는 것도요!”
아하하. 클로디아가 낮게 웃었다. 시빌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덧붙였다.
“하마터면 한눈에 반할 뻔했다니까요! 의뢰인만 아니었으면 청혼할 뻔했어요!”
노골적인 아첨에 클로디아는 한쪽 눈을 찡그리며 웃었다.
“거짓말. 그런 기색은 하나도 없이 아주 능숙하게 저에게 돈을 뜯었잖아요.”
“뜯다뇨! 우와. 거래와 사랑은 다른 거죠. 거짓말 아니에요! 제가 지금 이 자리에서 청혼하면 믿으시겠어요?”
“아뇨.”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며 미소 지었다.
“믿기 전에 일단 가서 줄 서세요. 저한테 청혼도 못 해본 사람 엄청 많아요. 새치기는 안 돼요.”
“헐.”
시빌이 혀를 내밀었다. 클로디아도 어이없이 웃으며 눈가를 비볐다. 막 나오려던 눈물이 쏙 들어갔기 때문이다. 어쨌든 방금 전보다는 사뭇 나아진 기분으로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녀는 작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사실 제가 마왕을 무찌르겠다고 한 건 오기 때문이에요.”
“오기요?”
“네. 다들 저한테 포르투는 망했으니 그냥 남은 지참금이라도 챙겨서 시집이나 가라고 했거든요.”
그 말에 시빌의 시선이 데미안 쪽으로 슬그머니 향했다가, 다시 그녀를 향했다. ‘설마 저 사람도요?’라는 뜻이었다. 클로디아는 고개를 크게 끄덕여 보였다. 시빌은 잠시 고민하다가 납득했다는 듯 마주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왜 그러셨는지는 알 것 같네요….”
“사실 저도 알아요.”
그녀는 조그맣게 답했다. 클로디아는 어릴 때부터 예쁜 것, 사랑스러운 것만 보고 듣고 가지며 살았다. 그런 세상에서 살아온 그녀가 과연 아무르가 없어 곧 추락할 포르투를 재건할 수 있을까? 그녀 스스로조차도 답을 내놓을 수 없는 질문이었다. 하지만 모두가 ‘클로디아는 빨리 시집이나 가는 것이 좋다’고 말하자, 그녀의 마음에는 오기가 싹 터올랐다.
우습게도, 그들의 말마따나 마왕의 습격이 있기 직전까지도 그녀의 머릿속에는 행복한 결혼밖에 없었는데 말이다.
결국 그녀는 고집을 피웠다. ‘나도 할 수 있다’는 마음이었다. 쥬버린에게 화가 났고, 쥬버린의 말을 들으라고 하는 데미안에게 두 배로 화가 났다.
데미안을 여행의 보호자로 지정한 이유는 그가 포르투에서 가장 강한 기사라는 이유 외에도 다른 것이 있었다. 그의 코를 납작하게 눌러주고 싶었다. 보란 듯이 여행을 수더분하게 해내며, 날 우습게 보지 말라고 하고 싶었다.
그러나 이게 무슨 꼴인지.
첫날부터 울었다. 그것도 자신이 편하게 방 안에서 먼지 쌓인 이불과 더러운 벽에 투정을 부리는 동안, 자신을 우습게 본 남자는 그녀를 지키기 위해 밖에서 싸우고 있었다고 했다.
기가 막혔다. 코를 납작하게 눌러주기는커녕 자신이 가장 우스운 꼴을 보이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난쟁이들을 물리치는 것을 돕기는커녕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해 귀를 막고, 눈을 감고 쭈그렸다. 다 죽고 난 모습도 보지 못해 망토를 둘둘 두르고 땅굴에서 나왔다.
“차라리 그때 그들의 말을 듣고 시집이나 가는 게 나았을까요?”
“이런.”
“오빠가 자신은 죽어도 상관없다고 말했으니 저는 그냥…. 남은 보물을 긁어모아 포르투 사람들을 이주시키고…. 그리고 그냥 지상의 아무에게나 시집가는 게 모두를 위해 좀 더 나은 방법은 아니었을까요?”
조금 전 작게나마 웃던 클로디아는 다시 눈물이 차오르는 것을 느끼고 입을 닫았다.
그러나 이미 터진 둑이 도로 막힐 리 만무했다.
“크흥. 지금 와서 다시 돌아가서, 미안해요, 마왕을 잡으려고 했는데 못 했어요. 그러니까 모두 이사 갑시다, 하고 말하면 모두 저를 싫어할 거 아녜요…? 근데 그렇다고 이대로 자르지스로 간다고 해서 마왕을, 흑. 쳐부술 수 있는 것도 아닌 것 같아요. 킁. 크흥.”
클로디아는 손등으로 눈물을 닦으며 콧물을 삼켰다.
“이래서야 짐밖에 안 되잖아요.”
“아니, 뭐. 저를 고용하실 수 있는 돈이 있잖아요?”
시빌은 가까스로 그녀를 달래려 입을 열었다.
“원래 힘든 일은 남한테 외주 주는 거거든요. 근데 공주님은 돈이라도 있으니 얼마나 다행이에요?”
“….”
“게다가 짐만 되는 건 아니에요! 저를 치료해주고 계시잖아요! 저는 디자이어 님과 공주님이 아니었으면 상처를 치료하느라 엄청나게 골머리를 썩었을 거라고요!”
마법사는 엄청나게 대단하다는 듯 그녀를 추켜세웠다. 클로디아는 납득이 가지 않는다는 듯 그를 쳐다봤다. 그러나 두 사람의 대화는 더 이어지지 못했다.
저편에서 거인 하나가 “으암. 왜 이리 시끄러워….” 하고 잠결에 중얼거렸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반사적으로 숨을 죽였다.
한참 후, 클로디아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고마워요.”
“아뇨, 뭘요.”
시빌이 뭐라 말하려고 했으나, 클로디아는 애써 웃음을 지으며 그의 입을 막았다.
“미안해요. 괜한 얘기를 했어요. 내일부터는 저도 두 사람이 제게 신경 안 쓰도록 해볼게요.”
“아, 저는 신경 쓰는 게 좋은데.”
“그런 말을 해주는 것도 고마워요. 얼른 주무세요.”
클로디아는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자신의 자리에 누워 잠을 청하는 척했다.
시빌은 몇 마디 더하려다가 그녀가 돌아눕자 별수 없이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러다가 그는 문득 데미안 쪽을 바라봤다. 너른 어깨는 미동도 없었지만, 시빌은 그가 아까부터 깨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뭐, 알게 뭐람.
마법사는 한쪽에 놔둔 육포를 입에 넣고 질겅질겅 씹었다. 영 입맛에 안 맞았다.
***
거인들이 코를 고는 소리는 새벽까지 계속됐다. 덕분에 시빌은 아주 늦게야 잠들 수 있었다. 해가 중천에 떠서야 눈을 뜬 건 물론이다.
“시빌, 시빌. 일어나요!”
시빌은 하암, 하고 길게 하품하며 눈을 끔벅였다. 그의 눈앞에는 곱게 땋아 내린 금발이 찰랑거리고 있었다. 잠결에도 그게 클로디아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푸른 눈이 그를 들여다보고 웃고 있었다.
“아이 참. 빨리 일어나요.”
“아이고. 너무 늦게 자는 바람에….”
그는 입맛을 다시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고개를 두어 번 흔들고 물었다.
“이제 기분은 괜찮으십니까?”
“기분이요?”
클로디아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고는 눈을 귀엽게 깜박거렸다. 마치 어제 새벽에 했던 이야기는 감쪽같이 잊어버렸다는 듯이. 그리고는 환하게 웃었다.
“완전 좋아요! 날씨 엄청 좋거든요! 일어나 봐요!”
시빌은 즉각 제가 눈치 없이 굴었다는 걸 알아차리곤 벌떡 일어났다. 거인들이 저들끼리 웅성거리고 있었고, 데미안은 이미 짐을 모두 챙기고 앉아 있었다. 클로디아도 생글거리며 몸을 풀고 있는 것이, 자신만 일어나면 될 듯했다.
“어, 세계수 씨앗은요?”
“자리를 옮겨서 심을 겁니다. 오늘 아침까지 기다려서 잔뜩 무르익은 것을 땄어요.”
데미안이 손을 내밀었다. 그 안에는 감쪽같이 새빨갛게 익은 세계수의 열매가 있었다. 시빌은 감탄하며 그것을 들여다봤다. 그사이 거인들은 뒷짐을 지고 세 사람을 배웅했다.
“우리는 너희들을 배웅하지 못해. 하지만 난쟁이들이 부쩍 줄었으니 부디 편하게 나가기를 바랄게!”
“세계수는 당부했듯이, 꼭 롤리아 숲에서 한나절은 떨어진 곳에 심어야 해. 알았지?”
“데미안, 다음에 올 때는 꼭 색시와 와야 해!”
“건강하렴!”
그렇게 말하는 거인들의 얼굴에서는 걱정이라곤 씻은 듯이 없어져 있었다. 시빌은 코를 한 번 훔치고는 거인들의 배웅에 마주해 손을 흔들었다. 클로디아도 마찬가지였다. 데미안은 꾸벅 고개를 숙인 후, 바로 두 사람을 앞서가며 말했다.
“출발하시지요.”
“네-.”
클로디아가 노래하듯 답했다. 쾌활한 기색이, 정말로 어젯밤 일이 꿈같이만 느껴졌다. 시빌은 얼떨떨한 채로 클로디아 옆으로 바짝 붙었다.
“…정말 괜찮으세요?”
“뭐가요?”
클로디아는 이쪽을 바라보더니 헤헤 웃었다.
“어제 우울했다고 오늘까지 우울하면, 그것도 폐를 끼치는 거잖아요.”
“아.”
시빌은 멋쩍게 머리를 긁었다. 내일부터는 신경 안 쓰게 해본다더니, 이렇게나 순식간에 밝아지나. 놀라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빌이 만약 클로디아가 살아온 20여 년을 알았다면, 그녀가 그렇게 빠르게 기운을 차린 이유를 금세 알았을 것이다.
대저 공주라는 직업은 핏줄에 따라 결정되곤 하며 수많은 여자아이들의 동경을 받지만, 보통 생각하는 것처럼 마냥 저 하고 싶은 대로 살 수 있는 삶은 아니다. 전 대륙을 통치하는 포르투의 공주님이라고 해도, 남의 눈치를 보고 표정을 180도 바꾸는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해내는 능력은 꼭 익혀야 하는 것이다.
기분이 나빠도 항상 아름답게 웃기. 그날 처음 신은 구두가 발뒤꿈치에 피를 내도, 자신이 있는 곳이 연회장이라면 어디서나 당당하게 걷기. 누군가 눈치 없이 그녀에게 춤을 청한다 해도 거절하지 않고 부드럽게 앉을 수 있는 곳으로 안내하기 등등. 클로디아는 표정을 감추고 다른 가면을 쓰는 데 아주 능숙했다.
그래서 클로디아는 오늘 새벽에도 일어나 디자이어를 들 수 있었다. 데미안이 먼저 그녀를 깨우기도 전에 클로디아는 일어나 디자이어를 들고 서 있었다. 매번 아침마다 훈련이라기보다는 마치 벌서기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오늘의 클로디아는 차라리 그게 반갑기까지 했다. 폐를 끼친 벌.
그 덕에 디자이어를 들고 있는 자신에게 다가온 데미안에게 웃으며 인사를 할 수도 있었다. 그녀는 아주 오래간만에, ‘클로디아 테 포르투’의 얼굴을 하고 그에게 아침 인사를 했다.
“좋은 꿈 꾸었나요, 수르 알파? 지쳐 있을까 싶어서 먼저 훈련하고 있었어요.”
그렇게 말하는 그녀를 보며 데미안은 잠시 눈썹을 들어 올렸다가, 여상한 한마디를 던졌다.
“금세 디자이어에 익숙해지셨나 보군요. 오늘은 디자이어를 들고 휘두르기를 시작해 보도록 하시죠.”
이걸 들고 있는 것도 버거운데 휘두르라고? 클로디아는 아연해졌지만, 마음을 다잡았다. 어쨌든 언젠가는 휘두르고 마왕의 심장에 찔러 넣어야 하는 검이다. 그렇다면 빠르게 익숙해지는 게 좋았다. 그녀는 디자이어를 정확히 일흔세 번 휘둘렀고, 허리가 끊어질 것 같아 잠시 그것을 멈추었다.
데미안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그녀에게 “나머지 스물일곱 번은 천천히라도 좋으니 모두 마치십시오”라고 말했다. 그리곤 슬슬 깨어난 거인들에게 세계수의 열매를 받으러 갔다. 클로디아는 데미안이 돌아왔을 때까지 스무 번을 휘둘렀고, 그가 짐을 챙기는 동안 이를 악물고 나머지 일곱 번을 더 휘두르는 데 성공했다.
어쨌든 클로디아는 시빌에게 그렇게 털어놓은 후에도 한참이나 잠들지 못했던 터였다. 차라리 몸을 혹사시키니 좀 나았다.
‘다시 돌아가는 건 죽기보다 싫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금 당장 폐를 끼치지 않는 것도 불가능해.’
그렇다면 클로디아는 적어도 열심히 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녀는 자신이 마왕을 무찌르고 포르투를 다시 재건할 가능성을 셈해봤다. 아무리 잘 쳐줘도 3할을 넘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의 옆에는 디자이어가 있었다. 디자이어는 몰래 그녀에게 소곤거렸다.
- 야, 어차피 네가 마왕을 죽일 확률은 반반이야.
그게 무슨 소리야? 라고 묻자 디자이어는 대답했다.
- 걔를 죽이거나, 못 죽이거나. 반반.
뭐야. 그런 게 어딨어. 클로디아가 어이없이 웃었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그것도 그럴싸했다. 어쨌든 긍정적일 수 있는 방법은 한도 끝도 없었다. 게다가, 디자이어는 그녀에게 작게 소곤거렸다.
- 그리고 나 어제 발견한 거 있어.
‘뭔데?’
-나 그동안 포르투에서 쥬버린의 심장을 얼린 채 보관하느라고 힘을 나눠 놔서 아무것도 못 했거든? 그런데 어제 너희 다투는 거 들으면서 슬그머니 힘을 좀 불러일으켜 봤는데.
‘봤는데?’
- 힘이 약간 돌아온 것 같아!
클로디아는 놀라 디자이어에게 되물었다.
‘힘이 돌아왔다구? 그게 가능해?’
디자이어는 잘난 척하며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롤리아 숲은 식물들이 무성한 데다가 세계수까지 있는 만큼 디자이어에게 꽤 괜찮은 환경이었고, 디자이어는 숲에 있는 동안 약간 힘을 회복할 수 있었던 것 같다는 설명이었다.
‘그럼 뭐가 좋은데?’
- 음, 근력 강화 정도는 네게 심어줄 수 있을 것 같아. 아니, 심었어. 혹시 아까부터 등이 덜 뻐근하지 않니?
디자이어가 뽐내며 말했다. 클로디아는 그제야 제 등이 약간 가볍다는 걸 알아챘다. 항상 디자이어를 지고 걸으면 자연스레 등이 굽었는데, 오늘은 빳빳하게 허리를 편 채로 걷고 있었다. 그녀는 속으로 숨죽여 웃으며 기뻐했다. 긍정적인 마음을 먹으면 좋은 일이 따른다던데. 훈련이 조금 쉬워질 것 같았다.
***
한나절을 걸어간 후, 세 사람은 투르라는 마을에 도착했다. 정확히는 투르의 장로를 먼저 만났다. 세계수를 이 마을 근처에서 길러낼 예정이니, 너무 놀라지 말라는 부탁을 하기 위해서였다. 투르의 장로는 놀라워하면서도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소문을 들은 마을 사람들이 모두 구경하러 오고 싶어 했으나, 데미안은 고개를 저었다. 세계수가 자라는 데 잘못 휘말리면 그대로 까마득한 하늘까지 뻗는 가지에 매달려 영원히 내려오지 못할 수도 있다는 이유였다.
물론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은 두 배는 더 구경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투르의 장로는 “그 정도 크기라면 마을에서도 구경할 수 있을 걸세!”라며 사람들을 달랬고, 세 사람은 마을 주변의 숲에 짐을 푸는 데 성공했다.
데미안은 마을 사람뿐만 아니라 나머지 두 사람에게도 주의를 주었다.
“미리 말씀드리지만 세계수의 씨앗은 정말 금방 자랍니다. 우리가 필요한 것은 딱 배 크기 정도의 지름이니 금세 세계수의 성장을 멈출 겁니다만, 위험하니 피해 있기 바랍니다.”
그래 봐야 멀찍이서 구경하면 되지 않나? 하고 시빌이 의문을 제기했지만 데미안은 고개를 저었다.
“성장을 멈추는 데 제가 무슨 방법을 쓸 거라고 생각합니까?”
“글쎄요. 생명수 그만 뿌리기?”
“나무를 벨 겁니다. 한번에요.”
두 사람이 눈을 동그랗게 떴고, 검이 경탄했다.
[검기를 쓰려는 거구나!]
“예.”
데미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시빌의 눈이 놀라움으로 가득 찼다.
“검기요?!”
“예. 어설프게 도끼질을 하다가는 도끼가 줄기에 박힌 채 그대로 세계수가 자라는 속도를 따라 하늘로 올라갈 수 있으니까요.”
데미안은 진지하게 말했으나, 클로디아는 세계수 줄기에 도끼를 박은 채 순식간에 하늘로 올라가는 데미안을 상상하고 픽 웃고 말았다.
요는 그렇다. 세계수의 씨앗을 심은 후, 생명수를 부으면 열매가 익는 것처럼 씨앗도 금세 움이 트고 싹이 핀 후 폭발적으로 자란다. 세계수가 자라는 것을 막는 방법은 결국은 통째로 베는 수밖에 없는데, 도끼질은 세계수가 자라는 속도를 따라갈 수 없다. 그러니 데미안이 검기로 한 번에 베어 버린다는 계획이다.
시빌이 놀란 이유도 그것이다. 검에 자신의 마력을 모아 담아낸 검기는, 가장 강력한 금속도 무 자르듯 베어낸다고 했다. 하지만 검기라는 것은 위험한 만큼, 검을 제 몸처럼 다루는 자들도 쉽게 뿜어내기 어려운 것이었다. 마법사의 눈이 존경으로 가득 찼다.
“검기라니. 과연 포르투의 기사대장 자리를 젊은 나이에 차지한 분답네요. 저 그거 한 번도 실제로 본 적 없는데!”
“…가까이서는 안 됩니다.”
과연 데미안은 만만치 않았다. 마법사가 막 하려던 말을 귀신같이 캐치해내 거절한 것이다. 시빌이 시무룩해졌다.
“좀 보게 해주실 수도 있잖아요.”
“엄청난 크기의 나무를 베는 겁니다. 검기의 반경 내에는 들어오지 마십시오. 실수로 검을 휘둘렀다가, 삼백만 싱짜리 시체를 만들고 싶지 않습니다.”
“…굳이 따지자면 선금 백만 싱짜리 시체거든요.”
시빌이 풀죽은 소리로 반격했다. 하지만 어쨌든 그도 검기가 얼마나 대단한 살상력을 가지고 있는지 알고 있었기에 더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지는 않았다. 디자이어도 감탄했다.
[네가 포르투의 왕족이었다면 마왕도 순식간에 죽일 수 있었을 텐… 아차.]
디자이어는 말하다 말고 클로디아의 눈치를 봤다. 그러나 클로디아는 미소 지으며 대답할 뿐이었다.
“그러게 말이야. 다들 이렇게까지 고생하지도 않았을 텐데. 그치?”
디자이어는 뭐라 반격하고 싶었으나, 이 경우 자신이 먼저 실수했기 때문에 할 말이 없었다. 그래서 디자이어는 그냥 가만히 있기로 했다. 뭐 검이 평소에도 가만히 있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사실은 차치하고라도.
“그러면 모두 물러서 주시기 바랍니다.”
그사이 세계수 열매의 배를 가르고 씨앗을 꺼낸 데미안이 말했다. 세계수 열매의 껍질은 뾰족한 돌기로 덮여 있었는데, 그 안은 물컹하고 씁쓸한 향이 나는 과육으로 가득했다. 저게 얼마나 맛이 없는지 모두가 알고 있었으므로, 과육은 팽개치고 씨앗을 도려내는 데만 열중했다.
데미안의 손에 씨앗이 쥐어졌고, 시빌은 곱게 그의 발밑에 생명수를 놔두고 후퇴했다. 클로디아도 마찬가지였다.
“시작하겠습니다.”
데미안이 조심스럽게 손으로 흙을 팠다. 낙엽이 많은 자리를 일부러 골랐기에 흙은 부드러웠다. 흙 속에 씨앗을 넣고, 흙을 덮었다.
흙이 봉긋하게 올라왔다. 데미안은 심호흡을 하고 시빌이 놔둔 생명수 병을 쥐었다. 그리고는 물을 쪼르륵 부었다. 흙이 둔탁한 소리를 내며 물을 게걸스럽게 빨아들였다. 그리고.
불쑥, 하고 흙이 솟았다. 그 안에서는 노란색에 가까운 새싹이 올라오고 있었다. 멀리서도 확연히 보일 만큼 쨍한 색이었다.
클로디아는 어쩐지 긴장돼서 입을 막았다. 새싹은 빠르게 떡잎을 피웠다. 데미안 또한 새싹이 올라오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뒤로 빠르게 물러섰다. 정확히 그가 의도한 나무의 지름하고도 두 걸음을 더한 크기였다.
데미안이 물러서자마자 예상이라도 한 듯 싹은 갑자기 굵어지기 시작했다. 떡잎이 말리고, 새로운 싹이 올라왔다. 싹은 둥그렇게 이파리를 펼쳤고…. 하얗기만 하던 대가 순식간에 지름을 넓혔다. 싹은 가히 폭발적인 수준으로 커지고 있었다!
“우와.”
“어머나….”
[오랜만에 보네.]
클로디아와 시빌이 번갈아 감탄했으나, 디자이어는 사뭇 대조적으로 심드렁하게 말했다. 어쨌든 디자이어는 몇백 년 동안 세계수를 계속해 길러내 정령들을 탄생시켜왔던 것이다. 당연히 디자이어에게는 익숙한 풍경일 수밖에 없었다.
우두둑, 소리를 내며 덩굴이 뻗었다. 하늘섬을 떠받치고 있는 낯익은 덩굴이지만, 이렇게 줄기를 뻗고 가지를 넓히고, 잎을 피우는 과정은 클로디아에게 굉장히 생소했다. 마치 꿈틀거리는 생물처럼 빠르게 제 덩치를 키우는 세계수는 흰색에서 옅은 노란색으로, 다시 예쁜 노란색에서 연두색으로 변해갔다. 클로디아는 입을 벌리고 그 과정을 지켜봤다.
덩굴은 사방으로 커지며 아름다운 곡선을 그렸다. 시빌이 중얼거렸다.
“이런 것을 그 밑에 키우니….”
“음?”
“아, 아뇨.”
클로디아의 반문에 시빌이 애매하게 웃으며 멋쩍어했다.
“마법사들이 한 번쯤은 꼭 가 보고 싶어 하는 섬이 하늘섬인 걸 아세요? 저 덩굴을 보니 그게 생각나서요.”
“어머, 그래요?”
“예. 하늘섬을 수호하는 수많은 마법들은 마법사들에게 꽤 매력적이거든요.”
[그중에 가장 매력적인 건 나겠지?]
디자이어가 잘난 척을 하며 끼어들었다. 시빌은 장난스럽게 디자이어가 든 검집을 튕겼다.
“유감스럽게도 아닙니다.”
[뭐? 하늘섬을 수호하는 가장 큰 마법은 나라고!]
“당신은 정령이잖아요.”
시빌은 어깨를 으쓱했다.
“마법사들은 마법이 아닌 것에는 별 흥미가 없습니다. 정확히는 당신이 지키는 아무르가 가장 궁금하죠.”
“아하…?”
네 개의 대륙이 균형을 유지시키기 위해 초대 포르투 국왕이 찾아낸 마력핵, 아무르.
그 보석은 포르투 황성의 가장 높은 탑 꼭대기에서 빛나고 있었다. 대대로 포르투의 직계 왕족들만이 아무르를 볼 수 있으며, 평소에는 디자이어가 수호하고 있다.
“아무르가 네 개 대륙의 마력의 흐름을 관장하는 보석이라는 것도 알고 계십니까?”
“정말요?”
“예. 정확히는 네 개의 대륙에서 흘러나오는 잉여 마력으로 하늘섬을 떠받치고 있는 거죠.”
시빌이 허공에 그림을 그리며 설명했다. 네 개의 대륙은 본디 흘러넘치는 마력 때문에 각자 분리되어 바다의 끝으로 밀려나 암흑에 잠길 위험에 처했으나, 그것을 막기 위해 아무르를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시빌의 설명이 맞아. 아무르는 대지의 여신이 만들어낸 보석이라고도 불리지만, 사실은 네 개의 대륙에서 자연발생된 마력핵이지.]
“몰랐어요….”
[네가 몰랐던 것도 당연하지. 쥬버린이랑 같이 공부해야 할 시간에 너는 화관을 만들러 나갔으니까.]
“내, 내가 언제!”
[너 일곱 살 때 여름에.]
클로디아는 기억도 나지 않는 어린 시절의 이야기다. 대번에 말문이 막힌 클로디아가 입을 닫자, 디자이어는 설명을 이어갔다.
[그때 네 개의 대륙들은 아무르를 보관할 섬을 찾아야 했어. 두 개의 섬이 있었고, 초대 포르투 국왕은 그중 하나를 선택해 대륙 위로 띄웠지. 그리고 포르투 왕가는 대대로 인간을 대표해 아무르를 지키는 수호자 역을 맡은 거야.]
“와.”
감탄하던 클로디아가 문득 생각난 듯 말했다.
“그럼 내가 지금 아무르를 찾으러 떠난 것도 어찌 보면 원래 해야 하는 일인 거네?”
[뭐, 그렇게 볼 수도 있나.]
“아무튼 그렇게 하늘섬이 대륙 위로 올라간 뒤, 남은 하나의 섬은….”
시빌이 말을 이으려던 때였다. 데미안의 말이 셋 사이로 끼어들었다.
“조심하십시오!”
그 말에 클로디아는 고개를 돌리다가 기겁하고 말았다. 하늘로 뻗어야 할 덩굴이, 이쪽을 향해 뻗어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꺄악!”
“저게 뭐야!”
“시빌! 로드를!”
데미안의 말에 질겁하던 시빌이 빠르게 클로디아의 허리를 낚아챘다.
“실례!”
그렇게 말하고 시빌은 허공으로 훌쩍 날았다.
“엄마야!”
그 바람에 클로디아는 저도 모르게 시빌의 목을 끌어안았다. 마법사의 팔은 클로디아의 허리를 단단히 붙들고 있었으나, 발이 허공에 떠 안심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휘잉. 갑작스레 이뤄진 부유에 바람이 그녀의 귓가에 불어닥쳤다. 하나로 묶은 금발이 무섭도록 얼굴을 때렸다.
그러나 상황은 끝나지 않았다. 클로디아 쪽으로 뻗던 세계수 덩굴이 방향을 바꿔, 위로 자라기 시작했던 것이다. 제멋대로 아무 방향으로나 자라고 있던 덩굴들은 마치 목표한 것처럼 하나로 모여 회전하며 서로 꼬여 위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클로디아는 위에서 그 모습을 보고 당혹했다.
“저게, 뭐야? 디자이어, 원래 세계수라는 건 저렇게 자라?”
[아니…? 나도 처음 봐. 저게 대체 뭐지? 세계수가 저렇게 뭘 목적한 것처럼….]
그녀는 생각도 하지 못한 상황에 거듭 놀라며 어떻게 해야 할지를 고민했다. 하지만 상황은 의외로 금방 끝났다. 지상의 데미안도 가만히 있진 않았던 것이다.
데미안은 빠르게 움직였다. 본래 자신이 있는 곳까지 덩굴이 지름을 넓히면 벨 생각으로 기다리고 있었으나, 세계수 덩굴이 클로디아를 위협하듯 자라니 가만히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의 손에 쥐어진 검이 새하얀 기로 뒤덮였다. 검을 수련하는 자에게는 평생에 한두 번 발현하면 일생의 영광이 된다는 검기였다.
데미안은 검기를 길게 뻗었다. 그의 몸보다 훨씬 긴 길이로 뻗은 검기가 눈부신 빛을 냈다. 그리고 그는 그대로 세계수로 달려든 후, 팔을 휘둘러 밑둥을 단숨에 잘라버렸다. 세계수 덩굴 끝이 허공에 뜬 클로디아의 발 바로 근처까지 쇄도했을 때였다. 덩굴은 한 번 그 끝을 쭉 뻗었다가,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쿵, 쿠르르르….
살아 있는 것처럼 움직이던 덩굴은 축 늘어졌다. 엄청난 흙먼지가 일어서, 허공에 떠 있던 클로디아는 순간 데미안의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곧 흙먼지가 걷혔고, 시빌과 클로디아는 그 가운데서 심각한 표정으로 엄청나게 큰 덩굴 위에 서 있는 데미안을 발견했다.
“데미안! 괜찮습니까?”
시빌의 외침에 데미안이 고개를 들어 이쪽을 바라봤다. 분명 클로디아는 엄청나게 먼 허공에 떠 있음에도 불구하고, 찌푸려진 미간이 그 와중에도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데미안은 손을 들어 괜찮다는 사인을 보낸 후 검기를 거둬들였다. 순식간에 길게 뻗은 빛이 사라졌다.
시빌이 감탄사를 내뱉었다.
“과연 수르 알파군요. 한 세대에 한 명이 나오기도 힘들다는 검기 사용자인데, 심지어 저 수준이라니.”
“대단한 수준인가요…?”
“이런, 공주님.”
시빌이 제게 안긴 클로디아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웃었다.
“저는 사실 동력 지대에서 공주님의 호위로 데미안 한 사람만 붙인 걸 보고 포르투 사람들 모두 제정신인가? 하고 의심했거든요. 하지만 직접 눈으로 보고 나니 알겠군요. 그는 혼자서도 능히 기사 백 명을 감당할 만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땅굴에서는…. 클로디아는 그렇게 말하려다 입을 닫았다. 그 작은 지하 건축물에서 저런 것을 휘둘렀다간, 모두 무너져 죽었을 것이다. 검에는 문외한인 그녀조차도 쉽게 알 수 있었다.
“그럼 내려갈까요?”
“아앗, 네.”
생각에 잠겨 있는 그녀의 허리를 잡은 손에 시빌이 힘을 주었다. 그제야 클로디아는 자신이 시빌에게 다분히 묘한 자세로 안겨 있다는 것을 깨닫고 얼굴을 빨갛게 붉혔다.
허공에서 시빌은 그녀를 떨어트리지 않기 위해 제 몸에 그녀를 잔뜩 붙이고 있었고, 그녀 또한 그의 목에 양팔을 둘러 끌어안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을 알아차리자마자 클로디아는 고개를 떨어트렸다.
시빌도 공주님과 자신이 너무 친밀한 자세라는 것을 굳이 말하지 않고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그러나 이미 의식해버린 탓일까.
클로디아는 새삼스럽게 저를 안은 마법사가 생각보다 훨씬 단단한 몸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마법사라고 하면 흔히 비실비실한 남자를 생각하기 쉬운데, 시빌의 팔은 단단했으며 그녀가 끌어안고 있는 목부터 가슴까지도 꽤 넓었다.
‘그야 수르 알파의 곁에 있었으니 몰랐던 것도 당연한가….’
어쨌든 데미안 알파의 덩치 옆에 있으면 누구든 가냘파 보이게 마련이다. 하지만 막상 알고 나니 시빌 또한 건장한 남자였다. 아마 유독 미형인 데다가 엄청나게 키가 큰 데미안이 아니었다면 시빌을 보자마자 클로디아는 키도 크고 호감형인 청년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킴 왕자와 비교해 봐도 훨씬 괜찮았다.
“…이익.”
자신에게 청혼을 하기도 전에 물린 킴 왕자를 생각하고 클로디아는 저도 모르게 시빌의 목을 끌어안은 손에 힘을 주었다.
‘나쁜 놈! 삼대가 돌을 맞을 사람! 망해 버려라!’
“…공주님?”
그 바람에 땅에 도착하고 나서도 그녀는 한참 동안 시빌을 끌어안고 있었다. 결국 시빌이 민망한 듯 그녀를 불렀고, 생각에 잠겼던 클로디아는 깜짝 놀라버렸다.
“아, 앗. 미안해요. 불편했죠? 잠깐 뭘 생각하느라….”
“아닙니다.”
시빌이 이를 드러내고 시원하게 웃었다.
“공주님께서 안아주신다면 언제든지 환영이죠.”
“덧붙이자면 이제부터는 정말 이름을 부르길 권합니다.”
그사이 끼어든 것은 데미안이었다. 못마땅한 표정의 남자는 성큼성큼 다가와 시빌에게 말했다.
“숲이나 땅굴에서는 들을 사람이 없으니 로드를 공주님이라고 불러도 가만히 있었지만, 이제부터는 다릅니다.”
“눼눼 알겠쯥니다아. 클로디아~.”
시빌이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놀리듯이 말했다. 그리고는 덩굴 쪽으로 성큼성큼 다가가 감탄했다.
“이야! 위에서 볼 때도 굵다고 생각하긴 했는데 정말 크군요, 이거?”
“예. 하지만 우리가 목표했던 굵기보다는 좀 덜합니다.”
데미안이 미간을 찡그리며 말했다.
“본래 열 사람 정도는 탈 수 있어야 하는데, 이 굵기로 배를 만들면 좀 작은 배가 나오겠군요.”
[괜찮아! 어차피 자르지스에 많이 들어갈 거 아니잖아?]
디자이어가 참견하며 물었다.
[하지만 세계수가 왜 그랬을까?]
“모릅니다. 디자이어. 당신도 세계수를 기르며 이런 광경을 본 적 없습니까?”
[나는 한 번도 본 적 없어. 하늘섬의 밑에 세계수를 심는 건 대부분 기사대장들이었고, 나는 하늘섬 쪽으로 예쁘게 자라도록 세계수를 유도하곤 했지만, 이렇게 알아서 이쪽으로 온 것은 처음인걸.]
데미안은 디자이어의 말에 턱을 어루만졌다. 하지만 그라고 해서 답을 알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그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디자이어와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답을 알 수 없군요.”
[그러게. 그냥 얘가 원래 심던 곳이 아니라서 변종으로 자라난 것일 수도 있고. 아무튼 배부터 만들자!]
디자이어가 쾌활하게 말했다.
[사흘이면 될 거야!]
“그렇게 오래 걸려?”
클로디아가 놀라 물었다.
[별수 없어. 나도 힘이 떨어진 상태인걸? 여기서 배를 만들고, 그걸 운반할 수 있는 것만 해도 다행이라고 생각해.]
“아, 운반은 제가 축소 마법으로 도울 수 있을 것 같아요!”
시빌이 손을 들었다. 디자이어가 반색했다.
[정말? 도와줄래?]
“네! 대신 배를 만드는 광경을 구경하게 해 주세요!”
[그거야 상관없지!]
결국 그렇게 사흘의 휴식이 반강제로 결정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