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장. 여행의 시작 (3/30)

3장. 여행의 시작



 

주변은 쥐죽은 듯 조용했다. 클로디아는 데미안에게 화를 내려고 했지만, 그 압도적인 적막감에는 그녀도 소리를 줄일 수밖에 없었다. 클로디아는 저도 모르게 위를 올려다봤다.

허.

당황감이 섞인 감탄 비슷한 게 제 입에서 튀어나왔다. 엄청난 크기의 하늘섬이 새카맣게 위를 뒤덮고 있었다. 자신이 타고 내려온 승강기의 연결줄 끝은 거의 보이지도 않았다. 클로디아는 자신이 살던 아름다운 하늘섬의 삭막한 밑면에 놀라고 말았다.

그녀는 흔히 여인들과 함께 ‘화장을 지우면 다들 내 얼굴 못 알아볼걸요?’ 같은 소리를 농담으로 하곤 했지만, 이건 화장을 지웠다 수준이 아니었다.

“저게 뭐야….”

지상에서 올려다보는 하늘섬은 마치 괴물 같았다. 클로디아는 저도 모르게 등골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그때 침묵을 깬 것은 데미안이었다.

“주변에는 아무도 없군요. 내리시지요.”

그 말에 놀란 클로디아가 데미안을 쳐다봤다. 데미안은 그새 검을 뽑아 들고 주변을 경계하고 있었다. 그녀는 처음에는 데미안의 주의 깊음에 놀랐다가 곧 반성했다. 자신은 지상에 아무리 처음 내려왔다고는 하지만, 위나 쳐다보며 바보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좋아. 나도 데미안처럼… 하고 생각하며 디자이어를 뽑아 들려던 그녀는 당황했다. 디자이어가 너무 무거워서 잘 뽑히지 않았던 것이다. 저도 모르게 휘청거리자, 디자이어가 짜증을 냈다.

[뭐 해?]

“이익, 있어 봐. 너 왜 이렇게, 안 뽑히니? 앗!”

제 등 뒤에서 대검을 뽑아 들겠답시고 생전 해보지도 않은 동작을 하니 몸이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하마터면 앞으로 고꾸라질 뻔했고, 그런 그녀를 붙든 건 데미안이었다.

“조심하십시오.”

데미안은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가 그녀가 균형을 되찾자마자 빠르게 제 손을 빼냈다. 그게 꼭 방금 전, 남자가 제게 했던 말을 연상시켜서 그녀는 마음이 퍽 불편해졌다.

‘…저를 싫어하시는 건 익히 알고 있습니다.’

남자는 굉장히 퉁명스러운 얼굴로 그 이야기를 했다.

맞다. 싫어한다.

그런데 남자가 제 입으로 그 말을 하니 어쩐지 자신이 큰 잘못을 한 것만 같았다. 클로디아는 괜히 데미안이 원망스러워졌다. 왜 그런 이야기를 해서 나를 죄책감에 시달리게 하지?

하지만 데미안은 클로디아가 그런 생각에 빠질 틈을 주지 않았다.

“나오십시오. 이동해야 합니다.”

승강기의 문을 연 데미안이 주변을 경계하며 그녀에게 손짓했다. 그녀도 자연스레 조심스럽게 발을 내디뎠다. 그리고 몇 발 가지 않아 코를 싸쥐었다.

“앗, 냄새…. 이게 무슨 냄새죠?”

뭔가 썩은 냄새 같았다. 아니면 꿉꿉한 곰팡이 냄새 같기도 했다. 아무튼 고약했고, 클로디아는 견디지 못하고 코와 입을 막았다. 데미안은 낮게 답했다.

“동력 지대는 그늘 때문에 위생 상태가 좋지 않습니다. 이런 냄새는 동력 지대 전역에서 흔하게 납니다.”

“세상에….”

“아무튼 빨리 이쪽을 떠나서 머물 만한 곳을 찾아보시죠. 노숙할 순 없으니.”

“그래요, 쥬버린 오빠도 제가 첫날부터 땅바닥에서 자기를 원하진 않았을 거예요.”

그때였다. 사사삭, 뭔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저도 모르게 클로디아가 앗, 하고 비명을 질렀고 데미안은 그쪽을 급히 경계했다.

“누구냐?”

그러나 아무것도 없었다. 클로디아가 눈을 비비고 찾아봐도 그쪽에는 쓰레기더미만 엄청나게 쌓여 있을 뿐이었다.

“…쥐인가.”

“악! 쥐가 있다고요?”

데미안의 말에 클로디아가 기겁했다.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동력 지대는 어두워서 쥐 같은 건 앞으로 여상하게 보실 겁니다.”

“아악, 싫어. 우리 그냥 오늘 빨리 다른 마을로 가면 안 돼요?”

“안 됩니다. 포르투 밑의 동력 지대는 생각보다 넓습니다. 지금 길을 나서면 밤새도록 걸어야 할 텐데, 로드의 체력이 따라주지 않을 겁니다.”

“쥐보다는 나은데….”

클로디아의 얼굴이 울상이 됐으나 데미안은 강경했다.

“그렇게 말씀하시지만, 막상 로드께선 내일 새벽이 되면 차라리 쥐가 나오는 여관일망정 눕겠다고 하실 수도 있습니다.”

아, 진짜 얄밉다. 클로디아는 데미안을 노려봤다. 그러나 남자는 여전히 엄격한 얼굴을 하고 고갯짓했다.

“가시죠.”

뭐라고 타박이라도 하고 싶은데, 딱히 트집거리가 없었다. 클로디아는 부루퉁한 얼굴로 남자를 따라가다가 문득 물었다.

“근데, 수르 알파는….”

“앞으로는 데미안이라고 부르십시오.”

“….”

“마법사를 구하기 전까지는 신분 노출을 막아야 합니다. 로드께서도 따라주시기 바랍니다.”

아, 너무 싫어. 남자는 틀린 말 한 번 하지 않았고, 클로디아는 이를 악물고 남자를 따라가다가, 살짝 제 뺨을 두들겼다. 사각턱 된다, 사각턱.

어쨌든 클로디아는 여행이 끝나면 살 빠지고 예뻐지고, 근육도 좀 생겨서 제법 볼 만한 신부가 되겠다는 꿈을 아직까지는 포기하지 않은 터였다.

그래서 클로디아는 제 뺨을 문지르느라 누군가가 자신들을 보고 있다는 것은 눈치채지 못했다. 앞장서 가던 데미안 또한.



 

***



 

동력 지대는 포르투와는 사뭇 달랐다. 회색이라기도 뭐한 곰팡이색 벽, 그리고 금속으로 된 수백 개의 관이 온 거리를 휘감고 있었다. 벽과 벽, 무너진 벽돌 사이를 지나다니는 푸른 관과 그 위에 묻어 있는 먼지.

제대로 다듬어지지 않은 길에는 종종 웅덩이가 있었는데, 그 안에는 시커먼 기름때가 둥둥 뜬 물이 보행자들의 신발을 위협했다.

물론 동력 지대라고 해서 모든 곳이 삭막한 쓰레기 지대 같지는 않았다. 대부분의 지역은 폐허에 가까웠지만, 사람 사는 구역은 나름대로의 마을 비슷한 곳이 형성돼 있었다. 거리에는 발광 도마뱀들이 유리구에 담겨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빛은 약하기 그지없었다. 발광 도마뱀들은 낮에 빛을 흡수하고 밤에 그 빛을 내보낸다. 아마 동력 지대는 낮에도 빛이 드는 곳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라고 클로디아는 생각했다.

클로디아는 시종일관 더러운 망토를 벗고 싶어 했으나 데미안이 고개를 가로젓는 바람에 어쩔 수 없었다. 사람 사는 거리도 도로가 제대로 정비돼 있지 않기는 마찬가지여서, 클로디아는 거의 깽깽이 발로 걸었다.

“같이 가요!”

데미안은 클로디아와 사뭇 달랐다. 절도 있는 움직임으로 긴 다리를 쭉쭉 뻗어 걸었다. 계속해서 발밑을 내려다보는 그녀와는 달리 도로를 보지도 않고 걷는데도 웅덩이에 한 번 빠지지도 않았다.

‘여기에 한 번 와봤나?’

클로디아는 거리에 익숙해 보이는 데미안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데미안 또한 포르투 출신이지만, 그는 기사단장이니까 이곳에 내려와 봤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걸 물어보기에는 사정이 여의치 않았다. 여관에 도착한 뒤 물어봐야지.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며 웅덩이 하나를 건너뛰었다. 저 멀리 선 데미안이 클로디아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 거리에 들어서서 벌써 몇 번째 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표정 없이 자신을 쳐다보는 표정이 꼭 그녀의 느린 속도를 책망하는 것만 같아, 클로디아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거리의 한쪽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건물 앞에서 데미안은 멈췄다.

“여기가 어디예요?”

지저분한 건물이었다. 층은 고작 2층이 전부였다. 그야 포르투 바로 밑이니 높은 건물은 짓지 못하게 되어 있기도 했다. 데미안은 가운뎃손가락을 굽혀 손마디로 건물의 입구 옆 작은 표지판을 가리켰다.

‘여관.’

클로디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설마!”

“동력 지대에는 여관 자체가 드뭅니다. 여기에 머무르고 싶어 하는 사람이 없으니까요. 다른 곳을 찾을 수는 없을 겁니다.”

“악….”

그녀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데미안이 먼저 문을 열고 들어섰다. 훅, 곰팡이 냄새가 끼쳤다. 그녀는 차마 들어가지도 못하고 머뭇거렸다. 그러나 데미안은 신경 쓰지 않고 안쪽의 테이블에 앉아 있는 노인에게 말했다.

“머물 방 두 개가 있습니까?”

노인은 코웃음 쳤다.

“두 개씩이나 있을 것 같아?”

건물은 아주 작았고, 2층에 방이 있다 해도 하나뿐일 게 분명했다. 데미안의 얼굴이 어두워졌으나 그는 곧 나와 클로디아에게 말했다.

“방은 하나뿐이라고 합니다.”

“…싫어요!”

“예. 그러실 것 같습니다만, 이곳 외에는 다른 대안이 없습니다.”

“다른 곳을 찾아보면 안 돼요? 드물지만 다른 여관이 없다고는 말 안 했잖아요!”

데미안이 고개를 저었다.

“동력 지대는 별이 뜨고 나면 돌아다니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동력이 꺼지고 나면, 치안이 급속도로 나빠집니다.”

“하지만….”

클로디아가 머뭇거렸다. 데미안은 한숨을 쉬고 말을 이었다.

“제가 로드와 방을 같이 쓰겠다는 말은 아닙니다. 무엇 때문에 망설이시는지 알고 있습니다.”

“…방은 한 개라면서요?”

“저는 신경 쓰지 마십시오.”

어이가 없었다. 클로디아는 안쪽을 들여다봤다. 군데군데 발광 도마뱀이 유리구도 없이 기어 다니고 있었다.

1층의 홀은 노파의 살림집과 작은 식당을 겸하는 것 같았고,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하나뿐이었다. 그 계단마저도 아주 좁았다. 데미안은 한숨을 쉬었다.

“기사단의 훈련 중에는 앉아서 자는 것도 있습니다.”

“…하지만.”

“로드. 아직 출발한 지 한 시간도 안 됐습니다. 피로하지 않으니 괜찮습니다.”

데미안의 말에는 아무 감정도 없었다. 클로디아에게 자신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타이르는 말마저도 그랬다. 다정하지도, 머뭇거리는 그녀를 탓하지도 않는. 하지만 클로디아는 그래서 그가 더 매정하다고 느꼈다.

“…알겠어요.”

클로디아는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가 내쉬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 더러운 건물에 들어서는 것은 큰 결심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노인이 눈썹을 들어 올리며 “묵을 거야?” 하고 물었다. 클로디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까이서 보니 노인이 여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노파는 계단을 기던 발광 도마뱀 한 마리를 잡아챘다.

“따라와. 아가씨만?”

“예. 한 사람은 문 앞에 앉아있어도 상관없지요?”

“…상관은 없는데.”

노파는 두 사람의 아래위를 훑어봤다.

“나 보기 민망해서 그러는 거면 신경 안 써도 돼.”

킥킥킥, 노파가 웃으며 계단 위로 올라섰다. 삐걱, 소리가 났다. 클로디아는 계단이 무너지는 건 아닌가 걱정하느라, 노파가 2층까지 올라간 후에야 겨우 발을 내디딜 수 있었다. 폭이 좁고 높은 계단을 올라가는 데만도 식은땀이 흘렀다.

데미안 또한 클로디아의 걱정을 눈치챈 듯, 그녀가 다 올라가고 나서야 계단을 올랐다. 무거운 남자가 올라서니 계단 소리도 묵직해졌다. 삐이걱…. 노파는 신경 쓰지도 않고 2층을 도마뱀으로 비추었다. 뀌이익. 노파 손에 쥐어진 도마뱀이 작고 트릿한 소리를 냈다.

클로디아가 세 발 걸으면 끝날 것 같은 복도 옆에 문 하나가 있었다. 복도의 폭마저도 좁았다. 노파는 어깨를 으쓱하며 걸어가 문을 열었다. 그리고 쥐고 있던 발광 도마뱀을 그 안에 집어 던졌다. 철퍼덕, 작은 소리가 났다.

“저기서 자면 돼. 물은 홀을 열어둘 테니 떠다 마셔.”

“저어, 식사는….”

“식사? 끝났는데.”

“부탁합니다.”

그때 데미안이 말을 얹었다. 노파는 데미안을 흘겨보다가, 그가 동전 두어 개를 쥐여주자 혀를 차며 “알았어.” 하고 내려갔다. 그리고 데미안은 그때까지 문가에 멈춰 서 있던 클로디아를 향해 말을 걸었다.

“로드?”

문간에 선 채로 클로디아는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데미안은 눈을 두어 번 껌벅이곤 그녀의 뒤에 서서 물었다.

“뭐 하십니까?”

“….”

“로드?”

클로디아가 그제야 삐걱거리는 듯한 동작으로 뒤를 돌아봤다.

“그…. 수르 알파.”

“데미안입니다.”

“예, 데미안. …여기서 제가, 방으로 들어가는 문이 어디냐고 여쭙진 않겠지만, 그러니까 저도 바보가 아니니까…. 그런데.”

데미안은 처음에는 클로디아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방 안을 들여다보고 곧 그녀의 말을 이해했다.

여관방 안은 그야말로 클로디아가 포르투 황성에서 쓰던 화장실보다 더 좁았던 것이다. 흔한 비유 따위가 아니다. 사람 셋이 겨우 몸을 펴고 누우면 가득 찰 듯한 방 안에는 작은 침대 하나와 테이블 하나뿐이었다. 짐을 풀 만한 자리도 없었다.

게다가 오래 청소하지 않은 듯 먼지 냄새가 떠돌았다. 클로디아는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이 되어 그 안을 보고 있었다. 노파에 의해 던져진 발광도마뱀이 사사삭 벽을 길 때마다 벽 위의 땟국물이 너무나 잘 보였다.

“…여기서 자야 되는 거지요…?”

“…예.”

데미안은 한참 침묵한 후에 대답했다.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일어날 일을 너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클로디아의 눈이 그렁그렁해졌다.

“그, 여기서, 제가.”

“예.”

“…원래 여관이라는 건 다 이런 곳인가요?”

정말이지 데미안 알파는 좋은 말을 해 주고 싶었다. 어쨌든 그녀는 앞으로 장기간 여행해야 했고, 출발한 지 한 시간도 되지 않아 그녀의 사기를 꺾는 것은 좋지 않았다. 하지만…. 데미안은 차라리 꺾일 거면 빨리 꺾이는 게 낫다고도 생각했다.

돌아갈 거면 첫날이 낫다. 그리고 그는 거짓말을 물 흐르듯 할 수 있는 타입도 아니었다.

“아닌 곳도 있고, 더 지저분한 곳도 있습니다.”

클로디아는 침을 삼키고 방 안으로 몇 발 내디뎠다. 방은 정말 좁아서 그녀가 조금만 걸어도 침대 옆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녀는 손을 뻗어 검지손가락과 엄지손가락으로 시트를 집어 올렸다. 시트에서 훅, 먼지 냄새가 올라왔다.

그녀는 울상이 됐다.

“…더러워….”

그리고 그대로 시트를 떨어트리고 멍청하게 서 있었다. 문간에서 그녀를 지켜보던 데미안이 말했다.

“돌아갈까요.”

“네?”

클로디아가 화들짝 놀라 데미안을 쳐다봤다. 데미안은 미동도 없이 말했다.

“돌아가실 거면 지금이 낫습니다. 한참이나 이동해서 남부라든가, 혹은 바다 한가운데에서 돌아가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것보다는 빨리 결정하시는 게 좋죠.”

“…그….”

“저는 복도에 있을 테니 편하게 말씀해 주십시오.”

그녀는 입을 벌렸다. 데미안의 말투는 여상했으나 내용은 더없이 폭력적이었다. 기가 막혔다.

“제가 돌아갈 거라고 생각하세요?”

데미안은 가만히 그녀를 쳐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아직 저녁을 드시지 않으셨으니 결정이 빨라진다면, 늦은 저녁을 하늘섬에서 드실 수도 있을 겁니다.”

“수르 알, …데미안!”

“예, 로드.”

나오던 눈물이 쏙 들어갔다. 기가 막혔다.

이 남자!

클로디아는 데미안이 자신을 믿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자신이 열심히 여행 준비를 하고, 시녀들과 울고불고 이별하는 것을 봐 놓고서도 이런 소리를 한단 말인가?

“당신은 지금 하는 말이 제게 모욕감을 주고 있다는 걸 알고 있나요?”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지금 조금 모욕당하고, 몸이 편한 게 나으실 수도 있습니다.”

클로디아가 기함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남자는 웃지도 않았다.

“식사하시기 전에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 올라가시면 따뜻하고 맛있는 저녁을 드시고 깨끗한 방에서 실크 잠옷을 입고 주무실 수 있을 겁니다.”

“돌아가지 않을 거예요!”

“…돌아가지 않는다면 먼지 냄새나는 침대에서 잠도 오지 않는 밤을 지내고, 새벽에 일어나서 칼을 휘둘러야 합니다.”

칼? 순간 클로디아가 멍청한 표정을 짓자 데미안이 말했다.

“매일 아침 제게 훈련받기로 하셨지 않습니까.”

그제야 클로디아는 자신이 그와 했던 약속을 떠올렸다. 매일 아침 그에게 디자이어를 다루는 연습을 받기로 했다. 하지만, 내일부터 당장? 적어도 동력 지대를 떠나서….

그러나 그녀는 그 말을 지금 내뱉으면 그가 자신을 비웃을 거라고 확신했다. 돌아가지 않을 거라고 소리 질러 놓고, 훈련은 조금 후에 하자니 아이러니한 말이었다.

데미안의 말이 이어졌다.

“지금 입으신 분홍색 옷은 빛에 바래 허옇게 색이 빠질 겁니다. 옷에 달린 프릴의 실밥이 나가고, 크라바트가 뜯겨나가는… 그런 것쯤은 문제도 아니죠. 재수가 없으면 며칠씩 머리도 감지 못하고, 모래땅 위에서 주무셔야 할 겁니다. 잠을 잘 수 있는 곳은 사정이 나은 편이죠. 땅이 요동쳐 잠을 잘 수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루에 한 시간도 자지 못하고 사흘을 걸으면 환상이 보이기도 합니다. 공주다운 여정이라고는 요만큼도 없을 겁니다.”

“…데미안도 경험해본 적 없으면서….”

“저는 더한 경험도 겪어봤습니다.”

클로디아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당신이? 대체 언제? 포르투 출신으로 알려진 기사단장은 클로디아가 알기로 정규 훈련이나 사신으로 가는 것이 아니면 포르투를 떠난 적이 거의 없었다. 포르투 기사단의 여정도 그리 험하진 않았다. 데미안은 덧붙였다.

“그래서 저는 쥬버린 왕자님의 말씀에 동의한 겁니다. 로드는 여행이라고 말씀하셨지만, 제 의견은 좀 다릅니다. 이건 보답이 약속되지 않은 고행입니다.”

“….”

“저는 디자이어를 믿지 않습니다. 잠을 자지도 않는 주제에 이럴 때는 입을 닫는 것만 봐도 뻔합니다. 로드를 꼬여내 놓고도 조금의 죄책감도 없이, 지금도 불리하니 아무 말 하지 않고 있죠. 그렇지 않나.”

마지막 말은 디자이어를 향한 거였다. 클로디아가 눈을 깜박이는데, 화들짝 놀란 목소리가 들렸다.

[아냐!]

“가만히 지켜보니 너는 네가 불리할 때는 아무 말도 하지 않더군. 나는 네가 마왕의 앞에서 제대로 힘을 발휘할지도 의심스러워.”

[아니라고! 나는 마왕을 무찌를 수 있어!]

“하지만 발도 없어서 로드가 아니면 그 앞에 가지 못하지.”

둘의 말에 끼어들 틈도 없었다. 대립은 첨예했다. 그 순간, 클로디아는 등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고 화들짝 놀랐다. 디자이어가 화내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데미안 멍청아! 너야말로 진심도 아니면서!]

“…나는 언제나 진심이다.”

[거짓말! 너야말로 거짓말쟁이야! 야, 클로디아 너 쟤가 얼마나 거짓말쟁이인지 알아?]

등은 이제 정말로 뜨거워졌다. 클로디아는 몸서리치며 등에 메고 있던 디자이어를 팽개쳤다. 와장창, 소리가 났다.

[갹!]

“둘 다 그만해!”

클로디아가 소리를 질렀다. 그녀는 흥분하지 않으려 애쓰며 말을 골랐다.

“거짓말쟁이들아!”

실패했다.

“디자이어 너는 나한테 할 말 없어! 거짓말은 네가 먼저 했어! 그리고 데미안! 나는 안 돌아가요!”

“….”

“안 돌아가니까 그렇게 알아요! 내가 죽음의 바다를 헤엄쳐 건너다가 뼈가 녹아서 죽어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안 돌아갈 테니 그렇게 말하지 말아요. 알았어요?!”

데미안이 뭐라 말하려고 입을 벌렸다가 닫았다. 디자이어도 조용해졌다. 클로디아는 화를 참을 수 없어 외쳤다.

“둘 다 미워!”

말해놓고 너무 유아적인 것 같아 덧붙였다.

“데미안, 복도에서 외로울 것 같으니 디자이어랑 끌어안고 자요!”

대번에 항의가 들어왔다.

[야! 싫어!]

알 게 뭐람. 클로디아는 콧방귀를 뀌었다.

“디자이어, 너도 복도에서 벌 서!”

[싫다고!]

“알 게 뭐야, 어차피 너 발도 없잖아!”

[쟤도 싫을걸? 쟤는 발 있잖아, 데미안 말해봐!]

클로디아의 시선이 데미안을 향했다. 데미안은 잠시 침묵하다가 답했다.

“…원하신다면.”

[아악! 싫어!]

그때 밑에서 땡땡, 종소리가 들렸다. 식사가 완성된 것이 분명했다.

두 사람의 식사가 상당히 조용한 분위기에서 이어졌음은 물론이다. 클로디아는 그 식사라는 것이 소금물에 채소 쪼가리 몇 개를 띄우고 딱딱한 빵 한 덩어리를 같이 낸 것에 불과하다는 데 경악했으나, 그렇게 화를 내놓고 또 투정할 기운도 없어 두 입도 먹지 않고 식사를 물렸다.



 

***



 

클로디아는 방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삐걱대는 문이 닫힌 뒤, 데미안 또한 잘 준비를 했다. 복도는 좁았지만, 사람 하나가 벽에 기대어 잘 만은 했다. 그는 자신이 두르고 있던 더러운 망토를 한 번 털어내고 바닥에 깐 뒤 앉았다. 허리가 조금 불편해 배낭을 벽과 허리 사이에 끼웠더니 있을 만했다.

데미안은 시간을 가르쳐주는 마력 시계를 들여다봤다. 작은 모래시계 두 개가 결합한 것처럼 되어 있어, 눈금에 따라 시간을 볼 수 있었다. 동력 지대는 하늘이 보이지 않으니 시간을 가늠하려면 어쩔 수 없었다. 클로디아가 훈련할 시간까지는 약 대여섯 시간 정도가 남아 있었다. 그는 한숨을 쉬었다.

여관은 형편없이 지어져 있었고, 방음이 하나도 되지 않았다. 데미안은 잠시 아까의 소란을 가늠했다. 밑에서 음식을 하고 있던 노파는 두 사람의 대화를 들었을까. 디자이어의 소리는 두 사람을 빼고 다른 사람에게는 들리지 않았을 터. 아마 노파는 두 사람을 퍽 정신 나간 일행으로 생각하고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정신 나간 일행으로 생각하는 쪽이 백배는 낫다. 동력 지대의 여관에 묵는 사람은 딱 한 가지 종류라는 것을 데미안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늘섬에서 내려와 다른 곳으로 가는 사람들이다.

왕국에서 하늘섬을 방문한 사람들은 대개 커다란 비공정을 타고 내린다. 승강기를 통해 동력지대를 통과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뒤가 구렸고, 동력 지대의 강도들은 그런 사람들을 노렸다.

방음이 되지 않는 여관은 방 안에서 울고 있는 여자애의 흐느낌도 그대로 들려줬다. 데미안은 한숨을 쉬었다. 그녀가 울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좀 늦게 눈물이 터졌다 싶었다.

데미안은 그녀가 울지 않기를 바라지는 않았다. 오히려 빨리, 많이 울기를 바랐다. 그래야 지쳐 잠드는 것도 빨라지기 때문이다. 여행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수면 부족이다.

[야.]

벽에 기대어 세워놓은 디자이어가 말을 걸었다. 데미안은 대답하지 않고 허공을 쳐다봤다. 낡은 여관의 천장에는 발광 도마뱀 몇 마리가 가만히 웅크려 있었다.

[야. 야.]

“…듣고 있다.”

[쟤 울잖아. 가서 안 달래줘?]

디자이어가 낮게 속삭였다. 클로디아에게 들릴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데미안은 낮게 한숨을 쉬었다.

“네가 상관할 바 아니다.”

[왜 상관할 바가 아냐?]

“내가 들어가면 더 싫어하실 거다.”

[흠. 하긴. 너네 헤어진 지 오래됐지.]

디자이어의 말에 데미안은 잠시 짜증을 낼 뻔했으나 참았다. 이 검이 아주 오래전부터 포르투를 지켜왔고, 하늘섬의 사정을 속속들이 다 알고 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었다.

어느새 울음소리가 잦아들었다. 침묵이 계속됐다. 클로디아가 지쳐 잠든 게 분명했다. 데미안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야.]

“알아.”

그는 거의 들리지도 않게 대답하며 자신의 검을 움켜쥐었다. 절그럭, 소리가 났다. 끼익. 계단이 삐걱거렸다. 그가 낸 소리는 아니었다.



 

***

똑똑.

똑똑똑.

반복적인 소리가 들렸다. 앵무새인가. 아닌데…. 나무를 두드리는 새는 앵무새가 아니라 다른 새라고 했는데…. 딱따구리인가.

“로드.”

하지만 딱따구리는 사람 말을 못 하잖아? 저건 역시 앵무새인가 봐….

“로드. 일어나십시오.”

다음 순간 클로디아는 벌떡 일어났다. 똑똑. 똑똑똑. 그녀의 눈에 들어온 것은 낯선 풍경이었다. 낮은 천장과 낡은 방. 더러운 벽과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는 발광 도마뱀들….

아.

클로디아는 그제야 자신이 포르투를 떠나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지. 어제 하늘섬을 떠나 승강기를 타고 내려와서…. 동력 지대로 왔고….

“로드.”

그녀의 상념을 방해하는 것은 낯익고도 달갑지 않은 목소리였다. 클로디아는 한숨을 쉬었다. 저 문 앞에 있는 것은 데미안 알파였다.

“일어났어요.”

그녀는 습관적으로 일어나 발끝으로 바닥을 더듬다가 알아챘다. 아, 여긴 포르투 왕성이 아니지. 보드라운 슬리퍼는 없었다. 대신 부츠 하나가 발에 채였다. 어제 울다가 잠들었을 때는 분명 부츠를 신고 있었는데, 아마 자다가 잠결에 벗어버린 모양이었다. 그녀는 다시 한숨이 나오려고 했다. 어깨가 아팠고, 눈도 뻑뻑했다.

‘화장도 못 했는데….’

그녀는 부츠를 당겨 신으며 생각했다. 화장이 뭐야. 세수도 못 했다. 어젯밤에 식당에서 노파에게 씻을 곳이 있냐고 물어봤지만, 노파는 희한한 소리를 듣는다는 듯 그녀를 흘겨보기만 했다. 세수는 당연히 자기 전에도 못 했다.

‘지금 얼굴 엄청 엉망일 텐데.’

어젯밤에 그녀는 엄청나게 울었다. 거짓말 조금 보태서 눈알이 녹아 흐를 정도로 울었다. 데미안과 거세게 싸우고, 돌아가지 않겠다고 소리를 질렀지만, 막상 방문을 닫고 나니 너무 적막하고 외로워졌기 때문이다.

포르투에 있는 그녀의 방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더럽고 작은 방, 거기에 누운 자신의 처지. 누군가를 불러 말벗을 하려 해도 그녀의 옆에 있는 것은 그 수르 알파뿐이었다. 쪼그려 침대 위에 앉으니 눈물이 났다. 울지 않으려 해도 소용없었다. 하도 울어서 지쳐 누워서도 눈물이 계속해서 났다. 그렇게 훌쩍훌쩍 울다가, 잠든 것 같다.

“로드.”

“나간다니까요.”

재촉하는 남자의 말에 그녀는 다소 신경질적으로 반응했다. 아무튼 틈이라는 걸 안 주는 남자였다. 바깥은 깜깜해서 시간 분간도 안 가지만, 남자가 자신을 깨우는 걸 보니 아침일 것이다. 얼굴이라도 어떻게 정돈하고 싶었는데. 결국 클로디아는 여관의 어둠에 의지하기로 하고 문을 열었다.

어쨌든 자신은 예쁘니까 괜찮을 것이다.

끽.

“…좋은 꿈 꾸셨습니까.”

문 앞에 서 있던 남자가 어색하게 인사했다. 둘 다 서로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얼굴 볼 사이는 아니었으니 더더욱 서먹했다. 클로디아는 ‘댁은 좋은 꿈 꿨을 것 같아요?!’ 하고 쏘아붙이고 싶었으나 간신히 참았다. 어쨌든 마법사를 구할 때까지는 둘이 다녀야 하는데, 싸워봐야 자신만 손해였다.

[안녕, 클로디아!]

“안녕.”

벽에 기대 있는 디자이어도 명랑하게 말을 걸었다. 그게 꼭 어두운 자신의 기분을 헤아려주는 것 같아 클로디아는 괜히 멋쩍게 디자이어를 들어 멨다.

[잘 잤어?]

“…응.”

[오늘부터 나랑 훈련하는 거지? 기대된다!]

“그래, 나두.”

남자는 말 없이 앞서 계단을 내려갔다. 클로디아는 남자를 따라 내려가려다 코를 킁킁거렸다.

“이상하다.”

[응?]

“이게 무슨 냄새지?”

[무슨 냄새가 나? 나는 칼이라 잘 몰라!]

“어…. 비린내 같은 게….”

어제 계단을 올라왔을 때는 먼지 냄새와 곰팡내 같은 게 났는데, 오늘은 이상하게 비린내 같은 것이 났다. 쇠 비린내 같은….

클로디아는 고개를 갸웃했다.

“착각인가?”

“로드. 갈 길이 멉니다. 한 시간 정도 훈련한 후에 식사를 하고 떠나야 합니다.”

계단 밑의 남자가 그녀를 재촉했다. 그녀는 아리송해 하며 계단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계단에서 이상하고 거먼 얼룩들을 발견했다. 뭐지?

“데미안, 무슨 비린내 안 나요? 기분 탓인가…. 저 얼룩 같은 건 어제도 있었던가?”

“…로드.”

“아, 알겠어요.”

아무튼 융통성이라고는 약에 쓸래도 없는 남자였다. 클로디아는 투덜거리며 계단을 내려갔다.



 

***



 

데미안의 훈련은 어떤 걸까. 클로디아는 포르투의 기사단이 하던, 허수아비에 검을 찔러 넣거나 검을 챙챙 맞부딪히는 훈련을 상상했다. 아마 다른 사람이 없으니 데미안이 자신의 상대가 될 거라고도 생각했다. 그의 엄청난 검술에 검을 놓치면 어떻게 하지? 열심히 꽉 쥐어서, 견습 기사들이 당하는 창피는 당하지 말아야지! 아니면 그를 놀라게 해 볼까?

…그리고 그녀의 상상은 유감스럽게도 실현되지 못했다. 데미안이 그녀를 쓰러트려서가 아니다. 데미안은 그녀가 상상했던 그 어떤 것도 시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관의 쓰레기가 잔뜩 쌓인 뒤뜰에서 데미안은 그녀에게 팔을 쭉 뻗게 시켰다.

“발은 어깨너비로 벌리고, 팔을 앞으로 펴십시오.”

그녀는 영문도 모르고 팔을 나란히 앞으로 폈다.

“십 분 버티십시오.”

“어?”

데미안은 그녀의 팔 위에 디자이어를 올려놨다. 그녀는 순식간에 휘청했고, 디자이어는 바닥에 떨어졌다. 깡그랑….

“….”

“앗, 모, 몰랐어요. 이런 걸 시킬 줄. 다시 해요!”

“예. 팔을 뻗으십시오.”

그녀는 팔을 뻗었다. 다시 데미안이 디자이어를 그녀의 팔에 올려놨다. 이미 예상했던 거라 그녀는 팔에 힘을 주어 버텨냈다. 제법 무거운 검이었지만, 볼썽사납게 떨어트리는 것은 간신히 면했다. 그러나.

“윽….”

순식간에 땀이 흘렀다. 데미안은 그 앞에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클로디아는 이를 악물었지만, 디자이어는 꽤 짧은 시간 후에 다시 떨어졌다. 까강깡 깡….

[야, 좀 버텨!]

“너 너무 무거워!”

디자이어가 그녀에게 핀잔을 주었다. 클로디아는 얼굴이 새빨갛게 된 채 항의했다. 데미안은 마력 시계를 보며 무심히 말했다.

“…일 분도 안 지났습니다.”

“그….”

“더 버티세요.”

“으으윽….”

클로디아는 다시 검을 올리며 물었다.

“이게 훈련이랑 대체 무슨 상관이에요?”

데미안은 막힘없이 바로 답했다.

“팔 힘부터 기르셔야 합니다. 검을 제대로 쥐고 서 있지도 못하는데 칼을 휘두르는 훈련을 해 봐야 소용없습니다.”

그랬다. 그녀는 여전히 디자이어를 쥐고 제대로 서 있는 것도 힘들었다. 칼을 휘두르며 허수아비를 베거나, 데미안과 칼을 부딪치겠다는 것은 그녀의 욕심에 불과했다. 그것도 주제를 엄청나게 뛰어넘는 욕심.

“오늘은 디자이어를 들고 버티는 훈련을 할 겁니다. 그다음에는 머리 위로 들고 버티는 시간입니다.”

“으으….”

십 분 동안 클로디아는 디자이어를 정확히 열여섯 번 떨어트렸다. 그다음에는 디자이어를 머리 위에 들고 서 있었다. 마치 벌서는 학생 같아 기분이 나빴다. 디자이어는 클로디아가 힘들거나 말거나 쾌활하게도 떠들어댔다.

[힘내라, 클로디아! 할 수 있다, 클로디아!]

“으, 조용히 해!”

[누가 응원이라도 해야 힘도 나고 잘할 수 있는 거라구! 힘내라!]

디자이어가 떠드는 소리가 더 짜증이 났다. 간신히 십 분을 버텼을 때, 데미안은 빠르게 손을 뻗어 디자이어를 내려 주었다. 팔이 뻐근하다 못해 비명을 질렀다.

“그만하셔도 됩니다.”

“…하지만 한 시간이라고 했잖아요?”

“나머지 사십 분은 근육을 푸는 시간입니다. 아마 오늘 하루종일 팔을 못 쓰실 겁니다. 지금까지 한 이십 분만으로도 충분합니다.”

클로디아가 눈을 껌벅이는데, 데미안이 장갑을 끼었다.

“…좀 기분이 나빠도 이해해 주십시오.”

“음?”

“로드의 팔에 손을 대겠다는 이야기입니다.”

“…아.”

클로디아가 당황해 손을 내저었다.

“괜, 괜찮아요!”

데미안은 무표정하게 말했다.

“안 괜찮습니다. 오늘 풀어두지 않으면 내일 못 씁니다.”

[그래, 클로디아. 데미안 말 들어.]

“하지만….”

클로디아의 얼굴이 울상이 됐다. 데미안은 낮게 말했다.

“맨손이 아니니 괜찮을 겁니다.”

포르투의 여성들은 남자들과 손 외에 맨 살갗이 닿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무릇 정숙한 여인이라면 남자들에게 허점을 내어주면 안 되는 법이다. 그러니 데미안 또한 장갑을 끼고 그녀의 팔을 풀어주겠다고 나선 것이었다. 하지만, 하지만.

“…싫으시면 그만두겠습니다.”

망설이는 클로디아를 보고 결국 데미안이 물러섰다. 클로디아는 데미안 쪽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저 남자가 제게 직접 닿는 것은 좀 싫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들어서자 노파가 어제저녁과 다르지 않은 메뉴를 내놓았다. 클로디아는 어제보다 정확히 한 입 더 먹었다. 데미안이 조금 더 먹기를 권했으나 그녀는 고개를 흔들었다.

“다이어트하고 좋네요.”

“…점심은 괜찮은 곳으로 찾아보도록 하죠. 마법사 길드를 방문한 후에….”

괜찮은 곳이라 해봐야 어차피 똑같은 동력 지대다. 클로디아는 이곳에서 아무것도 먹지 않는 게 낫겠다고 마음을 굳힌 차였다. 다이어트를 한창 할 때는 포르투 왕성에서도 하루종일 아무것도 안 먹은 적도 있다.

‘그때 그러고 보니 데미안에게 한 소리 들었었지….’

그때는 아직 그녀가 눈앞의 남자와 약혼했을 시절이었다. 그녀는 생각을 떨쳐버리기 위해 다른 질문을 했다.

“동력 지대에도 마법사 길드가 있어요?”

“예. 유명무실하긴 하지만 있습니다.”

데미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동력 지대도 마력석 공장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마법사 인력이 필요한 곳입니다. 마법사 길드는 광역 연락이 가능하니 빠르게 필요한 인력을 수배할 수 있을 겁니다.”

“좋아요. 그럼 어서 가죠. 아….”

그렇게 이야기하며 일어서다가 클로디아는 멈칫했다. 데미안이 아직 수저를 놓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안해요. 마저 식사해요.”

상대방이 식사하는 것을 기다리는 건 당연한 예의인데! 클로디아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러나 데미안은 고개를 저으며 수저를 놓았다.

“괜찮습니다. 일어나시죠.”

“하지만 식사 다 못 한 것 아닌가요?”

“아닙니다.”

그렇게 말하며 데미안은 가방을 집어 들고 일어났다. 디자이어가 쫑알거렸다.

[네가 굶긴 거야!]

“조용히 안 해?”



 

***



 

그러나 막상 마법사 길드에 도착했을 때, 두 사람은 난관에 직면했다.

“행선지가…. 자르지스요?”

인력을 구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적어야 하는 것들이 있었다. 이름과 신분, 그리고 행선지와 구인의 목적. 클로디아의 신분 노출을 막기 위해 두 사람은 일부러 행선지를 바꿀까 고민했으나, 결국 마법사와 끝까지 동행하기 위해선 노출을 막지 않는 편이 낫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두 사람은 최대한 솔직하게 서류를 기입했다. 그리고 길드에 앉아 있던, 얼굴이 가무잡잡하고 빨간 머리를 가진 접수원은 서류를 받아들고 괴상한 표정이 됐다.

“자르지스? 어느 미친놈이 여길 가요? 어디 보자. 아. 포르투의 공주님이시네.”

“….”

보통 뒤쪽에서도 놀라야 하는 거 아닌가. 클로디아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접수원은 고개를 흔들었다.

“포르투의 공주님이 아니라 공주님 할머니라도 자르지스는 안 될 것 같은데. 나머지 한 분은 어떤 미친놈인가…. 아. 포르투의 기사단장이시군요. 안 미쳐도 따라가야 할 입장이시고, 이쪽은.”

클로디아는 빠르게 데미안에게 물었다.

“원래 마법사들은 이렇게 무례해요?”

“…유감스럽게도 그렇습니다.”

데미안이 묘하게 해탈한 듯한 말투로 답했다.

마법사들은 대륙의 법칙에서 약간 빗겨나가 있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어떤 국가에도 얽매이지 않았다. 포르투도 마찬가지였다. 따지고 보면 그녀에게 굳이 예의를 갖출 필요는 없지만…. 그래도. 클로디아가 당황하거나 말거나 마법사는 고개를 마구마구 흔들었다.

“안 돼요, 안 돼. 자르지스라니.”

“왜요?”

“거긴 마법이 빗나간다구요.”

저주받았다거나 힘든 곳이라서 안 된다는 이야기를 들을 줄 알았다. 그러나 마법사가 한 말은 의외였다. 클로디아와 데미안이 서로를 쳐다봤다. 길드원은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두 사람을 쳐다보며 설명했다.

“자르지스는 우리가 사는 대륙하고는 다른 마력이 흘러요. 대륙에서 사용하던 마법과는 완전히 다른 술식을 써야 해서 거기에 가도 마법사들은 마법을 쓸 수가 없습니다.”

“어….”

“그야 연구 목적으로 가려는 놈들도 있긴 하지만…. 거의 드물고, 게다가 일단 자르지스에 도착한 놈이 없어요. 도착해서 돌아온 놈도 없죠. 관두세요.”

생각도 못 한 사유였다. 클로디아는 데미안을 보고, 그 또한 이런 이유로 거절당하리라고는 전혀 몰랐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표정에 당황이 역력했던 것이다.

“…그러면, 자르지스로 가기 직전까지만이라도 구할 수 있을까요?”

“가기 직전?”

“예. 여정을 모두 공개할 수는 없지만, 하다못해 자르지스로 가는 배를 타기 직전까지만이라도요. 경호를 위한 마법사가 필요합니다.”

“흐음. 그 정도라면 가능할지도….”

길드원이 턱을 긁적였다.

“하지만 포르투의 공주님이죠?”

“…예.”

“위험수당이 엄청날 겁니다.”

그 말이 뜻하는 바는 명백했다. 클로디아가 마왕을 무찌르러 떠난다는 이야기는 전 대륙의 사람들이 다 알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미 소문이 짜하게 퍼졌을 테니까. 포르투의 공주님. 마왕의 습격은 물론이고, 그녀 자체를 노리는 이들이 없을 거라고 장담하기 어려웠다. 데미안이 동력 지대를 빠르게 떠나려 하는 이유도 그것이었다.

“게다가 여기는 동력 지대예요.”

길드원은 사방을 둘러보고는 속삭였다.

“실력 있는 마법사들은 이곳에 없어요.”

“하지만 상주 인력이 몇 명 있는 걸로 아는데.”

데미안의 말에 길드원이 이마를 찡그리고 고개를 저었다.

“없어요, 없어. 아마 마법사 길드에 구인 공고를 띄우긴 할 텐데, 여기서 구하긴 어려우실 겁니다. 구인이 되면 중간지에서 만나든가 하셔야 해요.”

“상관없습니다.”

“그래요? 어디 보자….”

길드원이 허공에 뭔가의 수식을 그렸다. 데미안과 클로디아는 멍하니 그것을 바라봤다. 두 사람에게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으나, 길드원은 곧 짝, 하고 손뼉을 쳤다.

“됐습니다.”

“예?”

“구인 공고를 냈어요. 곧 신청이 올 겁니다.”

“아니, 그새에….”

그때였다. 퐁! 경쾌한 소리와 함께 어두운 천장에 뭔가가 팟, 하고 생겨났다. 클로디아는 저도 모르게 위를 쳐다봤다. 종이 한 장이 허공에 떠 있었다. 그리고 그 종이는 곧 목적지를 정한 듯 팔랑팔랑 떨어져 길드원의 손안에 안착했다.

“어디 보자. 탈락.”

“예?”

“탈락이라고요.”

클로디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 탈락….”

“이제 갓 마법사가 된 돌꼬맹이예요. 레벨이 낮아서 경호 마법사로는 안 될 겁니다.”

길드원은 클로디아를 쳐다보지도 않고 서류를 두 사람에게 밀어주었다. 데미안이 서류를 받아보더니 과연, 하고 신음을 흘렸다. 서류에 기입된 내용만 봐도 이제 막 마법사 자격증을 딴 어린이였다.

그리고 곧이어 서류 몇 장이 퐁, 퐁 하고 허공에서 떨어져 내렸다. 퐁퐁퐁, 퐁. 길드원은 불빛을 키우고 안경을 써서 서류를 훑어보고, 그 가운데 몇 장을 착착 내밀었다.

‘구인이라는 게 이렇게 빨리 이뤄지나?’

클로디아가 당황했으나 데미안은 태연하게 서류를 받아 검토했다.

“이 사람은 안 되겠군요. 너무 나이가 많습니다. 노인을 데리고 여행하긴 어렵습니다.”

“마법사들은 다 제 앞가림은 하지 않나요?”

“신체적인 나이는 무시하지 못합니다.”

앞에서 듣고 있던 길드원이 두 사람의 대화에 피식피식 웃었다.

“맞아요. 활력을 돌아오게 하는 마법도 있지만, 마력이 사라지면 그냥 노인이 돼버리죠.”

“마력이 사라져요?”

클로디아가 되묻자 길드원은 슬그머니 그녀를 타박했다.

“정말이지, 아시는 게 뭐예요?”

“…제가 모를 수도 있죠!”

“예 예. 마법사를 구인하면 그때 물어보세요.”

“왜요? 그냥 알려주시면 안 돼요?”

길드원은 픽 웃었다.

“그다음은 유료입니다.”

나 참. 클로디아는 기가 막혀 뒤로 물러났다. 마법사란 사람들은 원래 다 이런가? 클로디아가 그러든가 말든가, 길드원이 성의 없이 서류 몇 장을 더 내밀었다. 데미안은 이마를 찌푸리며 서류들을 골라냈다.

“이 사람은 범죄 이력이 있어서 안 됩니다. 이 사람은… 중간 도시까지만 이동 가능? 이게 무슨 임시직도 아니고. 이 여자도 범죄 이력….”

“마법사들이 왜 이렇게 범죄 이력이 많아요?”

클로디아가 슬그머니 데미안 옆에서 서류를 들여다보다 물었다. 데미안이 답했다.

“마법사들은 호기심이 많다 보니 사람들 사이의 법규를 무시하는 일이 많습니다.”

“어허. 인간이 정한 규칙 따위 자연의 위대한 힘 앞에서는 의미 없어요.”

길드원이 툭 끼어들었다. 클로디아는 눈썹을 들어 올리고는 나머지 서류를 같이 들여다봤다. 데미안은 계속해 서류를 걸러냈다. 이 사람은 이래서, 저 사람은 저래서. 모두 문제가 많았다. 구인 공고에 전송돼오던 서류들의 행렬은 멈춘 지 오래였다.

데미안이 마지막 서류를 도로 내밀었을 때, 접수원은 짜증을 냈다.

“아니, 그 많은 사람들이 다 싫다고요?”

“몇몇 괜찮은 사람도 있었지만, 합류 지점이 너무 멉니다.”

접수원은 기가 막히다는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봤다.

“당신들 근 백 명을 봤다고요.”

“실제로 그쪽이 저희에게 준 서류는 스무 명도 안 됩니다.”

“그야 자격 요건에 안 맞는 지원자는 전부 걸러냈으니 그렇죠. 흠.”

접수원이 턱을 어루만지며 심각한 표정이 됐다.

“당신들 자격 요건이 자르지스까지의 경호죠?”

“예. 자르지스에서도 경호를 맡아준다면 몰라도….”

“두 가지만 묻겠습니다. 첫 번째. 자르지스까지 갈 수 있습니까? 저주의 바다를 건널 방법이 없다면 아무리 날고 기는 마법사라도….”

그 말에 데미안이 답했다.

“문제없습니다.”

“아하?”

접수원의 눈이 빛났다. 마치 답을 찾은 듯한 눈빛이었다.

“그럼 두 번째. 혹시 자르지스까지 가는 데 삼백만 싱을 낼 수 있나요?”

삼백만 싱. 데미안이 눈썹을 들어 올렸다. 삼백만 싱이면 땅값 비싼 포르투에서도 커다란 저택 하나는 살 수 있는 금액이었다. 마법사의 고용비는 비싸긴 하지만, 이건 너무 비쌌다.

“삼백만 싱이요? 너무 비싸지 않습니까?”

“제가 알고 있는 마법사가 있긴 하거든요.”

“어떤 사람인데 이렇게 비쌉니까? 대마법사 라이덱이라도 됩니까?”

위대한 마법사로 평생을 살다가 죽어 하늘의 별이 되었다는 라이덱이라도 경호 마법에 삼백만 싱을 받지는 않았을 것이다. 데미안이 불만스럽게 묻자 길드원이 손가락을 흔들었다.

“라이덱은 아니지만, 돈값은 합니다. 자르지스에서도 마법을 쓸 수 있는 사람이거든요. 아마 자르지스에 가자고 해도 갈 겁니다.”

“…자르지스에서 돌아온 사람은 없다면서요?”

“그야 믿거나 말거납니다. 하지만 마법사들은 거짓말은 안 해요.”

확실히. 데미안은 신음했다.

마법사들은 호기심이 많아 법을 어기지만, 그들은 자신들에게 솔직하다. 대마법사 라이덱이 차마 자신의 연인에게 거짓말을 하지 못해 결국 별을 따다 준 이야기만 들어도 그랬다. 데미안은 한숨을 쉬었다.

“일단 서류나 봅시다.”

“아, 서류는 필요 없어요.”

“예?”

길드원이 씩 웃으며 안경을 벗었다.

“저거든요.”



 

***



 

길드원은 시빌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웃으며 자신의 신상명세를 털어놨다.

“동력 지대에서 태어났습니다. 세상을 모험하다가 고향으로 돌아와서 길드원 노릇을 하며 월급을 받고 있죠.”

“…자르지스로 가겠다는 말이 진짭니까? 아까는 어느 미친놈이….”

“아, 그거야.”

시빌은 어깨를 으쓱했다.

“제가 미친놈이니까요.”

클로디아가 이마를 찡그렸다. 공주님은 바보가 아니었고, 시빌에게 자세하게 캐묻기 시작했다.

“자르지스에 대해서 당신이 알고 있는 건….”

“예. 저는 자르지스에도 가 본 적이 있습니다.”

시빌이 시원스럽게 말했다. 그는 일찌감치 세상을 돌아다닐 때, 우연히 자르지스로 가게 될 기회가 있었다고 말했다. 그것은 100년에 한 번 열리는 바닷길 덕분이었다고 말했다.

“참고로 이 정보는 제가 아주 비싼 값을 주고 정보 길드에 팔아넘긴 거니까 바깥에 누설하지 마세요.”

시빌이 짐짓 비밀이라는 듯 속삭이는 데는 클로디아도 할 말을 잃었다.

“바닷길이 100년에 한 번 열린다고요?”

“예. 저는 우연히 마법 문헌을 보다가 100년에 한 번 열리는 바닷길을 봤거든요. 그건 딱 하루 동안만 열리는 길이었고, 모르는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 길이었습니다.”

마법사들은 마법에 관해서는 거짓말을 하지 않으니 진짜일 것이다. 클로디아는 더 물으려 했으나, 시빌은 손을 내저었다.

“이 다음은 유료예요. 단, 삼백만 싱을 내고 저를 고용하시면 알려 드립니다.”

“…어째 마법사가 아니라 사기꾼 같군.”

“그렇습니까?”

시빌이 빙긋 웃으며 손가락 끝에서 불을 피워 올렸다. 명백하게 수준 높은 마법이었다. 보통 마법사들은 불을 손끝에 피워 올리기 위해서는 주문을 외우는 등 사전 동작이 필요했다. 그러나 그는 어떤 동작도 없이 순식간에 작은 불을 피운 채 손가락으로 자유롭게 가지고 놀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삼백만 싱은 너무 비싸요!”

클로디아가 말했다. 그녀가 아무리 금전 감각이 낮대도 이게 터무니없이 비싸다는 건 알고 있었다. 삼백만 싱이면 그녀의 가장 좋은 드레스를 열 벌은 합한 가격이었다.

‘어라?’

클로디아는 거기까지 생각하다가 잠시 멈췄다.

드레스 열 벌…. 그렇게 생각하면 괜찮지 않나? 어차피 당분간 자신은 드레스를 입을 일도 없을 테고. 그사이 시빌이 말을 이었다.

“저도 한 번에 다 받겠다는 소리는 아닙니다. 선금 백만 싱. 그리고 자르지스로 들어가기 전에 또다시 백만 싱. 일이 끝난 후 마지막 백만 싱.”

“…무슨 마법사가 돈 욕심이….”

“제가 왜 이런 실력으로 동력 지대에 처박혀 있다고 생각하세요?”

시빌이 웃었다.

“갚아야 할 빚이 있습니다. 그 빚 때문에 여길 떠나지도 못해요. 하지만 그 돈을 내고 저를 고용한다면 제가 나서겠습니다.”

하지만 데미안은 의심의 눈길을 거두지 않았다.

“…당신, 그 말을 하려고 그 서류를 모두 걸러낸 것 아닌가?”

“허어?”

시빌이 어이없다는 듯 데미안을 쳐다봤다. 데미안이 말을 이었다.

“서류를 탈락했답시고 처음부터 눈에 안 차는 자만 내게 건네준 것 아니냐는 말이야. 당신을 고용하게 하기 위해서.”

“참나! 어이가 없네! 저를 뭘로 보는 겁니까?”

시빌은 기가 막혀 하며 데미안을 보고 씨근덕거리다가, 제 앞에 쌓여 있던 서류를 집어 데미안에게 건넸다.

“보세요, 어디! 당신이 본 서류보다 훨씬 수준 떨어지는 작자들이 대부분입니다. 심지어 성범죄자도 섞여 있다고요!”

“…일단 보고 얘기하지.”

보통 사람이면 시빌에게 먼저 미안하다고 사과할 것이다. 서류를 건네는 것 자체가, 정말 떳떳하다는 의미니까. 하지만 데미안은 시빌에게 서류를 건네더니 정말로 그것들을 한 장씩 뒤적이기 시작했다. 잠시 침묵이 흘렀고, 빠르게 서류를 본 데미안은 시빌에게 도로 서류를 돌려주었다.

“의심해서 미안하군요.”

“어디 의심할 게 없어서 마법사를 의심합니까?”

시빌이 씩씩거리며 서류를 챙겨 넣었다.

“자르지스에서도 마법을 쓸 수 있다는 건 진짜인가요?”

그때 질문한 것은 클로디아였다. 시빌은 눈썹을 들어 올리며 그녀를 보고는, 헤헤 웃는 얼굴이 됐다.

“그러믄요. 저는 하루 동안 자르지스에 가서 마법을 사용해봤습니다. 마력 체계가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도 저뿐일 겁니다. 저주가 걸린 곳이라더니 과연 마력을 섣불리 사용하면 큰일 나겠더군요.”

“…데미안.”

“너무 비쌉니다, 공주님. 초반부터….”

“제 드레스 열 벌 가격이에요.”

클로디아의 말에 시빌이 휙, 하고 휘파람을 불었다.

야유하는 것처럼 들렸으나 클로디아는 신경 쓰지 않았다.

“저는 한동안 드레스를 입을 일도 없고, 잘은 모르지만 이렇게 우리에게 들어맞는 인재를 구하기는 어려울 것 같아요. 아닌가요?”

“확실히…. 하지만.”

“그럼 제가 새 드레스 안 입으면 되잖아요.”

데미안은 이마를 찡그렸다. 그러나 별수 없었다. 그 또한 시빌만큼 적절한 인재를 찾을 수 없다는 사실에는 동의했던 것이다.

“…당신, 언제부터 합류할 수 있습니까?”

자신을 고용하는 것이 확정된 분위기에 시빌이 씩 웃었다.

“빚을 갚는 순간?”

“정확히 진 빚이 얼마입니까?”

“백만 싱.”

그러면 삼백만 싱이나 받을 필요가 없잖아? 두 사람의 얼굴에 쓰인 의문에 시빌이 말을 더했다.

“일단 선금으로 빚은 갚겠지만, 저도 딸린 식구가 있다구요. 식구들 먹고 살 길은 만들어 줘야죠.”

“식구가 얼마나 되는데요?”

“뭐, 그건 프라이버시. 아무튼 저랑 계약하실 겁니까?”

“…그래.”

“오케이. 그럼 계약서를 쓰죠.”

시빌이 딱, 하고 손가락을 튕겼다. 허공에서 종이 한 장이 팔랑, 하고 떨어졌다. 클로디아의 손바닥에 내려앉은 그 종이에는 계약서라는 글자가 쓰여 있었다.

“최종 목적지는 마왕성 앞까지.”

“마왕성?”

두 사람이 눈을 껌벅였다. 시빌은 눈을 찌푸렸다가 픽 웃었다.

“…당신들 자르지스에 마왕성이 있는 것도 모릅니까?”

“…가본 적이 없어서 몰랐어요.”

클로디아가 서둘러 대답했다. 그야 자르지스는 지도조차 없는, 알려지지 않은 섬이다. 마왕성이 있다는 걸 아는 게 더 신기하다. 시빌이 어깨를 으쓱했다.

“아무튼 저도 마왕성까지 들어가는 건 싫습니다. 목숨이 아깝다고요.”

“…마왕성까지 들어가는 데는 얼마를 더 드리면 되죠?”

클로디아가 급하게 물었다. 시빌이 피식 웃었다.

“에헤이. 목숨에 가격이 어딨습니까?”

돈을 얼마를 더 준다 해도 들어가지 않겠다는 이야기였다. 데미안은 한숨을 쉬었다.

“알겠습니다. 마왕성 앞까지로 계약하죠.”

“좋습니다. 기간은….”

“3년이요.”

클로디아가 끼어들었다. 어차피 3년 후면 포르투가 무너진다. 그때는 마왕을 물리칠 필요도 없으리라…. 라는 계산에서였다. 시빌이 슥 그들을 보더니 계약서에 3년, 이라고 적어 넣었다.

“선금은 백만, 자르지스에 가는 배를 타기 전에 추가 백만. 그리고 마왕성 앞에서 백만. 주요 업무는 경호.”

데미안이 시빌의 마법사 자격증을 확인했다. 계약금은 클로디아가 어음을 쓰는 것으로 지불했다. 시빌은 포르투 왕성 명의의 어음은 처음 본다며 호들갑을 떨며 마법사 길드에 그것을 접수했다. 시빌이 손가락을 튕기고 수인을 맺을 때마다 계약서가 사라졌다가 도장 찍힌 채 나타났고, 어음이 사라졌다.

“좋습니다. 가죠.”

“…예?”

이윽고 시빌이 일어났을 때, 두 사람 모두 당황했다. 시빌이 눈을 껌벅였다.

“당신들 뭐 더 여기에 볼일 있어요?”

“어…. 이렇게 빨리요?”

클로디아는 이 여행을 준비하는 데 꼬박 하루를 소비했다. 그것도 챙겨줄 시종들이 있으니 가능했다. 그러나 시빌은 어깨를 으쓱했다.

“마법사들은 여행에 큰 준비물이 필요 없습니다. 그야 가다가 부츠나 옷 한 벌 정도는 사야 되겠지만요. 어차피 제 집에 가도 뭐 별게 없어요.”

“그런가요….”

“지금이 오전이니 빠르게 걸으면 동력 지대를 벗어나서 점심을 먹을 수 있겠군요. 다음 목적지가 어딥니까?”

마찬가지로 당황하던 데미안이 금세 정신을 차리고 답했다.

“롤리아 숲입니다.”

“롤리아 숲이요? 거기는 숲 거인들이 있잖아요?”

시빌이 눈을 둥그렇게 뜨며 물었다. 데미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 거인들을 만나러 갈 겁니다.”



 

***



 

마법사 길드를 나서자마자 클로디아는 비싼 값에도 불구하고 시빌을 고용하기를 정말 잘했다고 생각했다. 동력 지대는 여전히 캄캄했지만, 시빌은 선선히 두 사람을 위해 커다란 빛을 불러냈던 것이다. 어두운 동력 지대에서 그것은 정말로 큰 도움이 됐다.

동력 지대의 거리를 지나가는 사람들이 모두 휘둥그레진 눈으로 세 사람을 쳐다봤다. 빛을 달고 있는 시빌은 명랑하게 떠들었다.

“이 길을 쭉 가면 동력 지대의 관문이 있습니다. 그림자가 사라지는 경계에 위치해 있으니 문만 나가면 밝아질 겁니다.”

“하지만 시빌. 가족들은 안 만나요?”

“안 만나는 게 속 편합니다.”

빛 덕분에 클로디아는 어둠 속에서 갈색으로만 보이던 시빌의 머리카락이 타오르는 듯한 붉은 색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빨간 머리카락을 한 시빌은 빛 아래에서 보니 경쾌하고 장난기 넘치는 인상이었다. 피부는 가무잡잡했으며 키는 꽤 컸다. 클로디아보다는 크고. 데미안보다는 약간 작았는데 그 몸집이 상당히 다부졌다. 마법사들은 비실비실하다는 선입견을 깨는 인상이었다. 초록색 눈은 장난기가 가득했다. 영락없이 십 대 후반으로만 보이는데, 나이는 스물한 살이라고 했다.

“제가 어마어마한 빚을 지고 있다는 걸 이곳의 사람들은 대강 다 알고 있거든요. 제가 빚을 갚았다는 걸 알게 된 사람들이 제 식구에게 어떤 해코지를 할지 모릅니다.”

“어….”

“아까 어음 접수하면서 집에다가 편지 보냈어요. 멀리 도망가라고.”

클로디아는 당황했다.

“도망이라고요…? 돌아올 집은요?”

“집이요?”

시빌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환하게 웃었다.

“아하하, 그런 건 필요 없어요.”

공주는 뒤늦게 자신이 꽤 무례한 말을 한 건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세상에는 다양한 가족의 형태가 있고, 반드시 그들 사이에 사랑이 존재한다는 보장은 없기 때문이다. 분명히 알고 있으면서도 왜 그런 말을 했을까. 후회가 그녀의 가슴을 덮었다. 하지만 시빌의 다음 말이 그녀의 속상함을 부수었다.

“세상이 다 저의 집이니까! 저는 지금 집으로 돌아가는 길인 셈이죠!”

까르륵, 마법사 청년은 경쾌하게도 웃었다. 하도 시원시원해 순간 당황한 클로디아 자신이 더 바보 같아지는 웃음이었다. 클로디아는 민망해하면서도 기분이 좋아졌다.

옆의 데미안은 아까부터 침묵하고 있었다. 이렇게 과묵한 남자와 둘이 계속 여행한다니, 암담하기만 했던 참이었다. 새로운 여행 멤버가 이렇게 명랑한 사람이라면 좋은 일이다.

물론 그밖에도 좋은 점은 있었다. 빛을 켜고 걸어가는 세 사람은 너무나 눈에 띄는 존재였던 것이다. 동력 지대의 강도들이 두어 차례 그들을 습격했다. 그러나 시빌은 하품을 하며 손가락을 튕겨 그들의 눈에 불을 붙였다. 강도들이 고통으로 비명을 지르며 몸을 뒤트는 것을 밟고 지나가기까지 했다. 클로디아가 겁먹어 뒤로 물러섰지만, 시빌은 그녀를 보고 웃으며 부드럽게 그녀의 눈을 가리고 인도하기까지 했다.

클로디아는 정말로 시빌이 좋아졌다. 동력 지대를 벗어나기도 전에.

동력 지대의 관문을 벗어나는 건 어렵지 않았다. 포르투의 동력을 담당하고 있기에 들어오는 건 까다롭지만, 나가는 것은 상대적으로 쉬웠다. 관문의 경비병들은 세 사람의 신분증을 제대로 확인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클로디아는 놀라버렸다.

그림자 바깥의 세상이 이렇게 아름다운 줄 처음 알았기 때문이다. 관문 바깥으로 한 걸음 걷자마자 클로디아는 그림자를 벗어났다. 끔찍한 괴물 같았던 포르투의 그림자에서 벗어나니, 바깥세상은 아름답고 찬란한 빛으로 가득 차 있었다.

가장 먼저 소리 지른 건 의외로 디자이어였다.

[으아아! 살 것 같다!]

“어라.”

시빌이 금세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방금 무슨 소리입니까?”

“아.”

클로디아는 자신의 등 뒤를 가리켰다.

“인사해요. 디자이어예요.”

“허어?”

[나는 디자이어야! 포르투를 수호하는 정령이지!]

시빌이 입을 벌렸다.

“말하는 검이라니! 말로만 듣던 마검입니까?!”

[어디 나를 마검 같은 거 하고 비교해? 나는 정령이라고!]

한바탕 투덕거림이 지나간 뒤에야 시빌은 디자이어가 검으로 변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정말 신기하네요. 만져봐도 되나요?”

“얼마든지요.”

클로디아가 등을 돌렸다. 시빌이 디자이어와 뭐라 뭐라 대화했지만, 그녀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아직 시간은 오전이었고, 새벽에 내린 이슬 덕분에 관문 바깥의 길가에 피어 있는 식물들은 습기를 머금고 햇빛에 빛나고 있었다.

나비 한 마리가 한가하게 날고 있었다. 꽃들이 바람에 흔들렸다. 초록색과 연두색, 빛을 받아 노란색으로도 빛나는 이파리들이 제 존재감을 뽐냈다.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클로디아의 눈에서 눈물이 툭, 굴러떨어졌다. 한 방울, 두 방울. 방울방울 눈물이 떨어져 스스로도 당황할 정도였다.

“어, 어….”

“…괜찮으십니까?”

오랜만의 빛에 눈을 깜박이며 빛에 적응하던 데미안이 당황해 물었다. 클로디아는 서둘러 눈을 감았다 떴다 했지만, 좀처럼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시빌도 놀라 다가와 그녀를 보더니 말했다.

“아마 동력 지대의 긴 어둠에 적응한 눈이 시리거나 해서 그럴 거예요. 눈을 감고 계세요.”

“아….”

클로디아는 시빌의 말에 눈을 감았다. 그러나 눈물은 계속 흘러나왔다.

“흐윽.”

“공주님, 많이 시리세요?”

“아니, 그게 아니라….”

클로디아는 눈을 감은 채로 말했다. 울음이 섞여 나왔다.

“동력 지대….”

“예?”

“시빌은 동력 지대에서 태어났다고 했죠?”

“네에.”

시빌의 목소리가 들렸다. 클로디아는 눈을 감았지만, 흐리게 빛이 자신의 눈꺼풀을 뚫고 들어오는 것을 느끼며 계속 눈물을 흘렸다.

“동력 지대가 저런 곳인지 몰랐어요.”

두 사람이 모두 입을 닫았다. 그녀는 말을 이었다.

“저는 하루도 있지 않았는데도 저기서 벗어나니 이렇게 기쁜데….”

끝없는 어둠이었다. 바깥 지대에서 들어오는 빛은 동력 지대의 어둠을 비추기 충분하지 않았다.

거대한 하늘섬, 포르투의 그림자 때문에 영원히 어둠 안에서 살아가야 하는 포르투의 사람들.

클로디아는 머리로는 동력 지대라는 곳을 알고 있었지만, 그곳에서 벗어난 순간 깨달았다.

영원히 저곳에서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도 있음을.

클로디아는 하늘섬을 사랑했다. 하늘섬은 수려한 경관으로 이름났고, 사각지대 같은 것은 없기로도 유명했다. 치안이 좋고 곳곳이 모두 세심하고 유려하게 꾸며져 전 대륙의 사람들은 하늘섬에 한 번쯤 여행 오는 것이 평생의 꿈이었다. 하지만 클로디아는 깨달은 것이다. 사각지대가 없는 게 아니었다. 분명 있었다. 그녀의 바로 발아래에.

그림자 아래에서 사는 사람들. 그들에게 어떤 사연이 있는지는 몰랐다. 아주 짧은 시간 겪었으니 그녀는 그곳을 전부 안다고도 할 수 없었다. 이렇게 눈물 흘리는 게 가벼운 일이라고도 생각했다. 하지만, 하지만.

너무 나빴다.

“너무 나빠요.”

“공주님….”

곧 얼굴에 손수건이 닿았다. 클로디아는 눈을 살며시 떴다. 시빌이 제 눈물을 천천히 닦아주고 있었다. 그가 들고 있는 가제 손수건 건너편에서 체온이 느껴졌다.

“울지 마세요. 저곳보다 훨씬 비참한 곳이 널렸는걸요.”

“시빌.”

시빌이 웃으며 뭐라 말을 건네려 했을 때였다.

“…동력 지대는 필요에 의해 생성된 후 주민이 유입된 곳입니다.”

클로디아의 눈이 옆으로 향했다. 데미안이었다. 그는 그녀가 아닌, 옆의 풀숲을 쳐다보며 말하고 있었다.

“지금의 주민이 살기 전부터 하늘섬은 이 자리에 있었습니다. 포르투의 초대 국왕은 일부러 사람이 거의 살지 않는 곳을 골라 하늘섬을 띄웠죠. 그리고 노는 땅을 놀리기 아까워 동력 지대를 세웠고, 주민들이 유입된 것입니다. 어둡다고는 하지만 동력 지대에서 댐을 돌리는 자들은 엄연히 포르투의 관리입니다. 충분한 봉급을 받고 있습니다.”

“….”

“그들을 제외한 동력 지대의 주민들은 대부분 자신의 선택으로 이곳에 들어온 곳입니다. 죄를 지어 도망쳐 들어온 자들도 상당하죠. 그러니….”

너무 슬퍼하실 필요 없습니다. 뒷말은 이어지지 않았으나, 데미안의 말뜻은 분명했다.

하지만 클로디아는 조금 부아가 났다. 자신의 선택으로 들어왔다고 해서 저런 어둠을 감당하는 것도 지당하지는 않은데.

그렇다고 해서 그와 지금 싸움을 벌이고 싶진 않았다. 어쨌든 동력 지대에서 벗어난 것만으로도 그녀는 충분히 기뻤으므로.

“자, 가실까요?”

시빌이 어색하게 웃으며 손수건을 그녀에게 쥐여주었다. 그녀는 얼굴을 닦다가, 그제야 그 손수건이 데미안의 것임을 알아차렸다. 그녀는 조금 당황했지만, 데미안은 이미 저 앞에서 걸어가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