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마왕, 하늘섬을 습격하다
상황은 간단하나 심각했다.
‘마왕’의 습격이었다.
“마왕이라고요?!”
클로디아가 머리카락을 헝클어트린 채 외쳤다. 포르투의 경호 마법사가 처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클로디아를 위해 폭죽을 준비하던 마법사들은 갑작스러운 습격을 받았다. 마법사들을 습격한 자는 자신을 ‘마왕’이라고 칭했다. 잔뜩 일그러진 괴물 같은 얼굴에, 불길한 붉은 머리와 검게 탄 피부를 가진 마왕은 마법사들을 공격했다.
그 자리에 있던 마법사들의 반수 이상이 그 자리에서 절멸했다. 그뿐만 아니었다. 마왕은 포르투의 외곽을 누비고 다니며 눈에 보이는 대로 모든 곳을 파괴했다. 왕성의 하늘을 장식할 폭죽 더미는 그대로 왕성탑에 쏘아졌다. 아름답던 하늘섬의 흰 왕성은 반 이상이 처참하게 무너졌다.
“그래서요?!”
마법사는 피해 상황을 보고했다.
마왕은 “하늘섬을 멸망시키고 대륙을 내가 지배하겠다!”고 외쳤다 했다. 마왕은 정말로 거의 성공할 뻔했다.
성이 마비된 사이 그 안으로 들어가 쥬버린 왕자까지 습격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 결과로….
클로디아는 자신이 앉아 있는 영광의 홀 한쪽을 쳐다봤다.
그곳에는 창백한 표정으로 누워 유리관 안에 모셔져 있는 쥬버린 테 포르투가 있었다. 아름다운 쥬버린 왕자의 심장은 마왕의 손에 얼어붙어 버린 것이다.
“오빠….”
클로디아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언제나 자상하고 다정하게 웃던 왕자는 얼음덩이가 된 채 왕성 마법사에게 발견됐다. 마법사는 빠르게 왕자를 왕성에서 가장 큰 홀로 옮겼다. 속칭 ‘영광의 홀’이었다.
예로부터 하늘섬에서 포르투 왕가를 수호해오던 정령인 ‘디자이어’가 머무르고 있는 곳이 바로 그 ‘영광의 홀’이었다. 쥬버린 왕자가 생명을 유지하고 있는 것도 디자이어 덕분이었다.
디자이어는 쥬버린 왕자의 가슴에서 마왕이 심장을 꺼내는 순간 그를 얼렸다. 쥬버린을 살리기 위한 최대한의 조치였다. 쥬버린 왕자가 들어 있는 유리관 또한 디자이어의 현신이었다.
클로디아는 유리관으로 다가가 그쪽을 쓰다듬었다.
“마왕이라니, 오빠….”
정말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아버지는 치매를 앓고 있었고, 하늘섬을 비롯한 전 대륙의 통치는 쥬버린 왕자의 손에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쥬버린 왕자가 얼음이 되어버린 지금 전 대륙의 통치권은 클로디아에게 있었으나 그녀는 아무것도 몰랐다.
정말로 아무것도.
어느 정도였냐면.
“공주님. 비상 경호권을 주십시오.”
“비상 경호권이요? 그게 뭔데요?”
마법사가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르’가 없어졌으니, 그 자리를 마법사들이 메워야 합니다.”
“…아무르가 없어진 거랑 그게 무슨 상관인데요?”
또는.
“공주님, 대륙 전역에서 포르투의 안부를 묻는 비상 통신이 빗발치고 있습니다. 답을 해야 합니다.”
“무슨 답이요?”
통신부의 대신이 아연한 표정이 됐다.
“그야 포르투의 건재함을 알리고, 아무 문제가 없음을 알려야 왕국들이 안심할 것 아닙니까.”
“포르투는 건재하지 않잖아요?”
“…포르투가 지금 건재하지 않다는 것을 알리면, 왕국들이 뭐라고 할 것 같습니까?”
대신은 이제는 기가 막힌다는 표정이었다. 클로디아 공주는 정치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랐다. 클로디아 공주는 눈을 깜박거리며 말했다.
“도와준다고 하지 않을까요?”
“…공주님!”
이건 모르는 수준 정도가 아니었다. 백치에 가까웠다. 대신들은 패닉에 빠졌다.
쥬버린 왕자는 언제나 현명하고 상황판단이 빨랐으며, 대신들보다 한참은 더 내다보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클로디아 공주는 쥬버린 왕자와는 완전히 달랐다. 쥬버린 왕자가 어릴 적부터 그리 예뻐하고 싸고 돌며 키운 것이 독이 됐다.
백 개의 왕국에 도움을 청하자, 혹은 쥬버린 왕자의 상태를 알리고 당분간 알아서 잘하라고 편지를 보내자는 클로디아의 말에는 그 자리의 모든 이들이 머리를 감싸 쥐었다.
클로디아 공주는 울상이 됐다.
“…안 돼요?”
“안 되는 수준이 아닙니다, 공주님….”
“포르투는 끝장이야….”
대신들은 이제 노골적으로 클로디아 앞에서 투덜거리거나 좌절을 표했다. 이제 고작 이틀이 지났을 뿐이다.
그러나 국가비상사태가 벌어진 지금, 이틀이라는 시간은 그들이 클로디아를 바보 취급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기도 했다.
“그, 그러면 오빠는 무사하다고 하면… 될까요?”
클로디아도 그 분위기를 모르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더듬거리며 말씀을 꺼냈다. 그러나 대신들은 한숨을 쉬며 손만 내저었다.
“됐습니다. 저희가 알아서 하도록 하겠습니다.”
“하지만….”
클로디아의 말에 내무대신이 탄식하듯 답했다.
“공주님은 적당히 오후에 하늘섬의 주민들 앞에 나타나 주십시오. 주민들을 안심시켜야 하니까요.”
“지, 지금 나갈게요!”
“…그 꼴로요?”
내무대신이 클로디아를 응시했다. 그제야 클로디아는 자신의 몸을 내려다봤다. 연분홍색 벨벳 드레스. 물총새 깃털로 만든 신발. 별빛의 왕관.
그 모든 것이 아름답지 않았다.
이틀 내내 입고 있었으니 당연했다. 드레스는 엉망으로 구겨져 있었고, 신발은 하도 신고 왕성을 뛰어다녀 끝이 다 닳았다. 뒤축은 구겨져 있었다. 별빛의 왕관은 그런 걸 쓰고 있는지도 잊어버릴 정도였다. 이틀 내내 왕관을 머리에 매단 채 성을 돌아다녔으니 머리는 당연하게도 잔뜩 헝클어져 있었다.
“그….”
“국민들을 그 꼴로 안심시킬 수 있으실 것 같습니까?”
누군가 중얼거렸다. “위기감도 없군….” 또 다른 사람이 맞받아쳤다. “상황판단력도 떨어지는군요.” 소곤거리는 척했으나, 명백히 들리라고 한 소리였다.
클로디아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 그러면….”
“들어가서 씻고 주무십시오. 조금이라도 주무셔야 피부가 좋아 보일 테니까요. 씻고 나서 치장하고, 빈틈없이 머리를 틀어 올린 후 국민들 앞에 나서십시오. 섬 전역에 공주님의 예쁜 모습을 내보내야 국민들도 안심하지 않겠습니까?”
내무대신은 노골적으로 클로디아를 경멸하는 듯 말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 제가 어떻게 잘 수 있겠어요!”
그에 클로디아는 용기를 내서 답했다. 하지만 더한 비웃음이 돌아왔다.
“그러면 공주님께서 하실 수 있는 일이 있습니까?”
침묵이 흘렀다. 클로디아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 말이 맞았다. 이틀 내내 클로디아는 왕성을 돌아다니며 피해를 살폈지만, 뭐가 뭔지 아무것도 몰랐다. 제게 허가를 구하는 이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를 몰라 제대로 답하지도 못했다. 누군가 하, 하고 웃는 소리가 들렸다.
클로디아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그녀는 이를 악물었으나 여지없이 눈물이 넘쳐흘렀다.
“울지 마십시오, 공주님.”
그때 누군가 그녀에게 손수건을 건넸다. 클로디아는 반사적으로 손수건을 받아들며 그쪽으로 애써 웃어 보였다. 평소에도 그녀에게 다정히 대하던 외무대신이었다. 중년의 여인인 외무대신은 부드럽게 웃으며 그녀에게 타일렀다.
“울면 얼굴이 붓고 핏줄이 터집니다. 국민들 앞에 운 얼굴로 나서실 순 없습니다.”
클로디아의 뒤통수가 차가워졌다. 여인은 말을 이었다.
“그런 얼굴로 국민들 앞에서 무슨 말을 하실 겁니까? 제가 연설문은 준비해 드리겠으니 어서 가서 조금이라도 주무세요.”
위로인데, 위로가 아니었다. 다정한 듯 건네는 걱정은 기만이었다.
클로디아는 뭐라고 말하려고 입을 벌렸으나 아무것도 말할 수 없었다. 머릿속에 그 어떤 말도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슨 할 말 있으신가요?”
“그….”
여인이 상냥하게 웃었다.
“나중에 들어드릴 테니 일단은 들어가세요. 지금은 모두 바빠서 공주님의 말씀을 들어드릴 여유가 없습니다.”
노골적인 축객령이었다. 클로디아는 이제 기가 막혀 입을 뻐끔거렸다.
‘여기서 내가 화를, 화를 내야 하지 않나? 내가 이곳에서 가장 높은 사람인데?’
하지만 그녀는 이곳에서 가장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사람이기도 했다. 클로디아는 이틀 동안 그것을 가장 뼈저리게 느꼈다.
‘그러면…. 외무대신의 말대로 침실에 가야 하나…?’
클로디아는 황망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그때였다.
“다들 좀 지나치신 것 같습니다.”
묵직한 음성이 울렸다. 모두 그쪽을 바라봤다. 클로디아도 마찬가지였다. 노골적으로 그녀를 두둔하는 말이었기에, 그녀는 일말의 기대를 가지고 그쪽을 바라봤다.
그러나 목소리의 주인이 누군지 확인한 순간, 클로디아의 얼굴은 확연히 굳었다. 클로디아에게서 가장 먼 자리에 앉아 있었지만, 길고 검은 머리카락만으로도 그가 누구인지는 분명했다.
데미안 알파. 통칭 ‘수르 알파’였다. 하늘섬을 수호하는 기사단장이자, 쥬버린의 경호를 책임지는 남자.
그리고… 한때는 그녀의 약혼자였던 남자.
남자는 무표정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클로디아 공주님께서 상황을 모르시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만, 대신들의 비난이 지나친 것 같군요.”
“경, 지금은 비상사태입니다. 한시가 급박한데, 아무것도 모르는 분을 두고 저희가 일일이 허락을 구하는 건 효율이 나쁩니다.”
외무대신이 여전히 자상한 목소리로 타이르듯 말했다. 그녀는 언제나 모두에게 그렇게 말했으나, 이런 때에는 노골적인 비아냥으로 들렸다.
그건 자신이 비뚤어져서일까? 클로디아는 구분할 수 없었다. 그리고 데미안 알파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서 지도자를 소외하고 일을 처리할 생각입니까?”
“소외가 아니라….”
“당장의 효율 때문에 나라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아예 공주님을 배제하자고요?”
“배제가 아니라, 경!”
“이게 배제가 아니면 뭡니까?”
외무대신도 답답했는지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러나 남자는 강경했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공주님을 배제할 겁니까? 쥬버린 왕자님이 언제 깨어날지, 깨어날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데?”
모두 입을 닫았다. 그리고 클로디아는 더욱 충격을 받았다.
‘쥬버린 오빠가 언제 깨어날지 모른다고?’
클로디아가 입을 뻐끔거리자, 옆에 있던 외무대신은 클로디아를 힐끗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클로디아는 그녀의 팔을 잡았다.
“이게 무슨 소리예요, 외무대신. 오빠가 못 깨어날지도 모른다고요?”
클로디아의 푸른 눈이 그 자리에 모인 내각들을 향했다. 모두의 표정은 달랐으나, 거의 비슷했다. 비웃거나, 그럴 줄 몰랐다고 지금 말하는 것이냐고 묻거나. 혹은 말도 섞기 싫다는 표정.
외무대신은 눈을 꾹 감았다 떴다.
“…그렇습니다.”
“아무도, 아무도 그런 얘기를 안 했는데….”
“그게 가장 문제입니다.”
클로디아의 말을 자른 것은 데미안이었다. 데미안 알파는 저 끝에서 이쪽을 팔짱 끼고 바라보다가, 코로 한숨을 내쉬었다.
“쥬버린 왕자님이 무슨 상태인지도 모르는 공주님을 앉혀놓고 아무 설명도 안 하고 바보 취급하고 있군요, 당신들은.”
“경, 말조심하시오.”
“말조심해야 할 건 당신들입니다.”
“애초에 경이 제자리에만 있었어도 왕자님이 죽지도 않았소!”
클로디아의 눈이 커졌다. 이게 무슨 소리야? 그러나 데미안은 클로디아가 이해할 틈을 주지 않고 노호성을 내질렀다.
“누가 죽었습니까?! 말조심하라고 내가 말했습니다!”
항상 말 없는 남자가 보기 드물게 화를 내는 모습에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앞서 말한 자도 찔끔하여 입을 다물었다. 남자는 이를 악물고 말을 이었다.
“효율이 어쩌고 하며 왕족을 기만하지 마시오. 당신들이 이 재난을 틈타 저마다 자신의 잇속을 차리려고 머리를 굴리고 있다는 것은 다 알고 있습니다. 나는 하늘섬의 기사단장으로서 포르투 왕가를 수호할 의무가 있으며, 어설픈 잇속 챙기기를 좌시하지 않을 것입니다. 쥬버린 왕자님의 생사에 관해 함부로 논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남자는 클로디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제가 공주님에게 상황을 설명하는 데에 시간을 쓰는 것에, 반대할 사람 있습니까?”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
이 세계는 네 개의 대륙과 하늘에 떠 있는 섬인 ‘하늘섬’으로 이뤄져 있다.
하늘섬 위에 세워진 포르투 왕국은 전 대륙의 왕국을 지배한다. 대륙의 왕국은 모두 100개. 포르투 왕국까지 더하면 101개다.
포르투가 그 모든 왕국을 지배할 수 있는 것은 바로 포르투가 정령 디자이어의 수호 아래 만들어진 왕가이기 때문이다. 네 개의 대륙은 거대한 바다 위에 있는데, 그 바다의 끝으로 나아가면 까마득한 암흑뿐이라고 한다.
하늘섬은 네 개의 대륙이 균형을 유지하며 만들어낸 보석 ‘아무르’의 힘으로 떠 있다. 아무르와 디자이어, 두 개의 힘이 포르투 왕가의 권력의 핵심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하늘섬을 습격한 마왕은, 하늘섬을 멸망시키는 데는 실패했지만 대신에 아무르를 훔쳐 가는 데는 성공했다.
마왕은 ‘자르지스’라고 불리는 외딴 섬에 살고 있었다. 네 개의 대륙 외에 아무도 살고 있지 않은 커다란 무인도가 있었는데, 언젠가부터 그 섬에 마족들이 살기 시작했다. 마족들은 기괴한 외모와 마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들의 왕은 마왕이라고 불렸다.
마왕을 위시한 마족들은 호시탐탐 풍요로운 네 개의 대륙을 노렸으며, 100개의 왕국들은 포르투 왕가가 부리는 디자이어의 힘에 기대어 매번 마왕에게 맞섰다.
그래서 마왕은 디자이어를 파괴하기 위해 하늘섬에 접근했다는 것이다.
마왕은 사뭇 계획적이었다. 그는 클로디아 테 포르투의 열아홉 생일을 앞두고 일주일간 엄청난 연회가 열릴 거라는 정보를 미리 입수했다. 쥬버린 왕자는 클로디아 공주를 위해서라면 뭐든 하는 사람이었다. 그날만은 폭죽을 터트리기 위해 경비 마법사들이 모조리 폭죽에 집중할 것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마왕은 가장 먼저 경비 마법사들을 무력화시켰다. 그리고 엄중히 경호 받던 평소와 달리 호위기사 다섯 명만 데리고 있던 쥬버린 왕자의 심장을 꺼냈다.
“…수르 알파, 그대는 어디에 있었죠?”
클로디아의 질문에 남자는 무표정하게 답했다.
“저는 쥬버린 왕자님의 지시로 공주님께서 킴 왕자와 들어설 홀의 경호를 점검하고 있었습니다.”
클로디아는 탄식하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아냈다. 본래 쥬버린을 한시도 빈틈없이 경호해야 할 수르 알파는 공주의 약혼식을 위해 동원됐던 것이다.
…자신의 탓이었다.
그가 말을 이었다.
“다행히도 정령 디자이어는 마왕의 접근을 막아냈습니다. 하지만 디자이어는 심장을 잃은 쥬버린 왕자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힘을 분산시켰죠. 그 바람에 마력핵인 아무르가 무방비하게 노출됐습니다.”
심장을 잃은 쥬버린 왕자는 즉사해야 했으나, 디자이어는 쥬버린 왕자를 얼려 그 생명이 빠져나가는 것을 막아냈다. 그러나 그 일에 디자이어의 힘이 생각보다 많이 소모됐다는 것이 문제였다. 아무르를 둘러싸고 있던 디자이어의 힘이 약해진 것이다.
마왕은 디자이어에게 반격당해 뒤로 물러섰으나, 아무르가 약해진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디자이어를 공격하는 대신 아무르를 훔쳐 물러났다. 아무르가 없다면 하늘섬이 침몰할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하늘섬은 어떻게 떠 있는 거죠?”
클로디아의 질문에는 내무대신이 답했다.
“저 거대한 세계수 때문입니다.”
클로디아는 내무대신의 말에 고개를 돌렸다. 포르투 황성의 창문 바깥으로, 커다란 네 개의 덩굴가지가 하늘로 뻗어 있는 것이 보였다. 내무대신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나무의 힘이 하늘섬을 받쳐 주고 있는 거죠.”
세계수는 언젠가부터 디자이어가 하늘섬의 아래에 취미 삼아 기르기 시작한 덩굴이었다. 거대한 콩덩굴 같은 모습을 한 ‘세계수’는 하늘섬 밑을 빈틈없이 받쳤고, 그곳에서는 수많은 정령들이 태어나 이 세계의 각지로 흩어졌다.
그러나 문제는 이 세계수가 단순한 여러해살이풀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디자이어는 통상적으로 3년에 한 번씩 세계수를 새로 심습니다. 세계수는 그 엄청난 생명력 외에는 마법적인 힘이 없는, 단순히 거대한 식물일 뿐이기 때문에 금세 시들거든요.”
“그 말은….”
클로디아의 말을 받아친 것은 데미안이었다.
“최대 3년 안에 아무르를 되찾아오지 못하면, 하늘섬은 멸망합니다.”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그러면 어떻게 해요…?”
“…마왕을 무찔러야죠.”
공허한 외무대신의 답이 돌아왔다. 클로디아는 의아함을 느꼈다.
“왜 그렇게 말하죠?”
“….”
“네 개의 대륙, 백 개의 왕국에서 군대를 조직해 마왕을 무찌르러 자르지스에 가면 되잖아요?”
“그게 말이 쉽지 않습니다.”
외무대신은 팔짱을 끼고 의자에 기대앉았다.
“백 개의 왕국이 포르투의 지배를 받고 있는 것은 순전히 아무르 덕분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그 지배를 반기리라 보십니까?”
“…여태까지는 받아왔잖아요!”
“자신의 머리 위에 누군가 오랜 시간 올라앉아 있는 것을 반기는 사람은 드뭅니다.”
내무대신이 말했다.
“더욱이 자르지스는 죽음의 바다를 건너가야 하는 섬입니다. 그 섬이 오랜 시간 무인도로 방치돼 있었던 이유는 죽음의 바다를 건널 방도가 없었기 때문이죠.”
“마왕은 건너왔잖아요.”
“그는 마왕이니까요.”
한숨이 나왔다.
“백 개의 왕국들은 절대로 군대를 내주지 않을 겁니다.”
“그러면….”
“따로 부대를 조직해야겠죠. 하지만….”
내무대신은 좌중을 둘러봤다.
“포르투에 지금 그럴 만한 여력이 있습니까?”
고개를 내저은 것은 데미안이었다.
“하늘섬이 가지고 있는 병력은 고작해야 오백여 기입니다. 본래 칠백여 기였으나, 마왕의 습격에 다치거나 죽은 사람이 많습니다. 이마저도 마왕이 다시 습격해올 것을 대비한다면 아주 모자라죠.”
“이상입니다.”
클로디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절망적이었다. 그러나 그때 그녀에게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킴 왕자.”
“예?”
“킴 왕자는 제게 청혼했어요. 그이의 왕국은 백 개의 왕국 중에서도 가장 강한 군대를 가지고 있잖아요? 킴 왕자에게 도움을 청하면….”
외무대신이 고개를 저었다.
“공주님, 실례지만 그건 어려울 겁니다.”
“킴 왕자님은 좋은 분이에요!”
“….”
침묵이 감돌았다. 클로디아는 내각들을 둘러봤다. 아까와는 좀 다른 종류의 고요함이 사방에 떠돌고 있었다.
“뭐죠? 킴 왕자가 저와 약혼식을 치르지 않았다고 해서 그분을 믿지 못하는 건가요?”
“….”
“그분은 신의를 아는 분이에요! 그리고….”
이런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았는데. 클로디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만에 하나, 오라버니가 잘못된다면…. 그분이 제 남편이 되어 포르투를 통치하게 될 가능성도 높잖아요?”
고요한 분위기는 한층 더 이상해졌다. 오빠의 생사를 논하지 말라고 수르 알파가 말한 후에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해서 그럴까. 하지만 사실이었고, 클로디아는 다그쳐 물었다.
“그런데 그분이 군대를 내주지 않겠어요? 하다못해 이익이 있을 거라는 의사만 내비쳐도….”
제가 한 말치고는 상당히 정치적인 말이었다. 클로디아는 말하면서도 스스로 약간은 만족했다. 다들 그녀를 조금이나마 다시 볼 것이다.
‘나도 이 정도 계산은 할 수 있단 말이야!’
“교섭이 어렵다면 제가 부탁해 볼게요. 다들 바쁘시니까….”
하지만 모두 눈을 피하고 있었다. 이제 클로디아는 이 분위기가, 단순히 자신을 무시하거나 한심하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챘다. 그렇다고 해서 자신에게 감탄하는 분위기는 더욱더 아니었다. 다들 서로의 옆구리를 몰래 쿡쿡 찌르거나, 시선을 교환했다. 이건, 마치….
“저어, 공주님.”
침묵을 깬 것은 내무대신이었다.
“말하세요.”
“…외람되오나 말씀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그 사안이 중대하지 않아 보고를 뒤로 미루었으나….”
“…대관절 무슨 내용이기에 이렇게 질질 끄시는지….”
내무대신은 정말로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오늘 오전, 제게로 킴 왕자님의 서신이 도착했습니다.”
“서신이요?”
“…자신의 입에서 청혼의 말이 나온 바 없으니, 클로디아 테 포르투 공주님과의 약혼은 성립되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받고 싶다는… 공주님!!”
클로디아 테 포르투는 그대로 뒤로 넘어가 기절했다.
***
그녀가 눈을 떴을 때는 이미 한밤중이었다. 국민들에게 얼굴을 보여 모두를 안심시키겠다는 계획은 하루 미뤄졌다. 그 때문에 가산될 불안은 어쩔 수 없었다. 정작 공주 본인이 기절해서 의식이 없는데, 대체 누가 국민들을 안정시키겠단 말인가.
클로디아가 침대에서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본 것은 시녀 노바라였다. 노바라는 홀로 눈물을 닦으며 울고 있었다. “우리 공주님, 약혼도 전에 소박맞으신 게 소문이 다 나고…. 결혼도 못 하면 어떻게 해….” 클로디아는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노바라에게 설명을 요구했고, 곧 킴 왕자가 파혼을 요구한 게 사방에 소문이 다 났다는 걸 알게 됐다.
클로디아는 넋을 잃고 앉아 있었다. 노바라는 클로디아보다 더 울었다. 클로디아를 딸까지는 아니더라도 제 조카처럼 기르며, 그녀의 행복한 결혼을 누구보다 더 바랐던 여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하도 죽을 것처럼 울어 클로디아는 그녀를 물렸다.
그렇게 새벽까지 넋 놓고 있다가, 클로디아는 유령처럼 일어났다.
포르투 황성은 사고 수복 때문에 인력들이 사정없이 시달렸다. 본래라면 새벽에도 복도에 시종들이 있었을 것이나, 지금은 모두 지쳐 곯아떨어졌을 것이다. 클로디아는 아무의 방해도 받지 않고 영광의 홀에 들어설 수 있었다.
영광의 홀에는 경비조차 없었다. 그야 쥬버린 왕자가 디자이어의 힘에 의해 보호받고 있으니, 경호를 설 필요가 없었던 덕이다.
아이러니했다. 이 성에서 가장 안전한 것이 바로 심장이 없는 왕자라니.
쥬버린 왕자는 생전과 다를 것 없는 안색으로 유리관 안에 조용히 잠들어 있었다. 마치 동화 속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아름다운 얼굴. 하지만 저 감긴 눈이 뜨여 푸르게 반짝이는 것을 다시 볼 수 있을까?
클로디아의 눈에 다시 눈물이 차올랐다.
죽고 싶었다.
클로디아는 관 옆에 쭈그리고 앉아 훌쩍훌쩍 울었다.
제 신세가 너무나 비참했다. 열아홉 살 생일에 마왕의 습격을 받아 오빠는 유리관 안에 갇히고, 그녀는 파혼당했다. 심지어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내각들에게 무시당했다. 이 상황을 타개할 어떤 방법도 없었다.
차라리 저 관 안에 있는 게 나였다면.
“흐어어어어어엉….”
사람들 앞이라면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떨어트리며 입을 다물고 울었을 것이다.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아름답게. 하지만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고, 클로디아는 마구 입을 우그러뜨리며 소리 내고 울었다.
“허어어어어. 오빠아아아. 허어엉. 허엉. 흐어어엉. 왜 죽었어. 오빠.”
제 다정한 오빠 앞에서 클로디아는 언제나 어리광을 부렸다. 그러면 쥬버린은 클로디아를 아주 예쁘다는 듯 내려다보며 머리를 쓰다듬고 안아주었다. 그녀가 눈에서 눈물이라도 떨어트리면 큰일 날 듯 굴었다.
오빠 한 사람이 사라진 것만으로 제 세계가 부서졌다.
“미워, 오빠 미워. 디자이어도 미워. 다 미워. 어어어어엉. 흐어어어어….”
클로디아는 이제 바닥에 쓰러져서 울었다. 금발이 먼지에 흐트러졌으나 아랑곳하지 않았다. 팔로 가슴을 치고, 다리를 마구 흔들며 울었다. 눈물과 콧물이 섞였다. 콧물이 입에 들어가 짭짤한 맛이 났다.
“나만 놔두고 가면 어떻게 해. 클로디아는 아무것도 모른단 말이야. 차라리 날 데려가지 그랬어. 디자이어 미워. 차라리 오빠랑 내 심장을 바꿔줘. 내가 유리관 안에 있을 테니까. 엉어어어엉. 엉엉엉.”
맹세코 뭔가 바라고 한 말은 아니었다. 그래서 클로디아는 누군가가 제게 말 걸었을 때 식겁했다.
“그건 불가능해.”
“허어, 허어어어, 허….어?”
“그건 어렵다고. 하지만 다른 건 가능해.”
클로디아는 화들짝 놀라 말소리가 들려온 쪽을 바라봤다.
목소리는 유리관 안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오빠?”
“너네 오빠 아니야.”
클로디아는 눈물이 가득한 눈을 깜박거렸다. 내가 지금 울다 지쳐 헛것을 보고 있는 걸까?
하지만 아니었다. 유리관 쪽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남녀를 분간할 수 없었으나, 어쨌든 제 오빠는 확실히 아니라는 걸 곧 클로디아는 알아차렸다.
“누, 누구야?”
화들짝 놀라 일어나 오빠가 누워 있는 유리관을 다시 올려다봤다. 쥬버린 왕자는 여전히 평온한 얼굴로 누워 있었다.
클로디아는 문득 자신이 사고 이후 오빠의 모습을 제대로 자세히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아름다운 쥬버린 왕자의 가슴에는 구멍이 나 있었다. 얼어붙은 구멍. 새카만 피가 가슴에 난 구멍 둘레에 차갑게 얼어 있었다. 쥬버린 왕자가 입은 옷은 놀랄 정도로 멀쩡했으나, 그건 구멍이 나자마자 디자이어가 가슴을 얼려버린 덕이었다.
‘…디자이어!’
그리고 클로디아는 뒤이어 제게 말을 건 목소리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클로디아의 머릿속을 알아차린 듯, 목소리는 말을 이었다.
“그래. 내가 디자이어야.”
“어디 있어?”
클로디아는 주변을 둘러봤다. 포르투를 세계의 시작부터 지켜왔다는 정령 디자이어가 말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이렇게 디자이어와 말하는 게 쉽단 말이야? 하고 의심했을지도 모르지만, 클로디아에게 그런 것을 의심할 만한 여력은 없었다.
“나는 모든 곳에 있지만 모든 곳에 없지.”
“…무슨 소리야? 잘 모르겠어.”
“음, 너를 이해시키려면 아주 어려울 테니까, 내가 조금 힘을 쓸게.”
뭔진 모르지만 지금 나한테 욕한 건가? 클로디아가 눈을 찌푸리는 동안, 홀의 중앙에 희끄무레한 빛이 나타났다. 빛은 흐리고 약했으며, 간간히 점멸하고 있었다.
“쥬버린을 지키느라 힘을 크게 쓸 수가 없어. 이 정도로 이해해 줘.”
클로디아는 입을 벌리고 유리관과 그 빛을 번갈아 쳐다봤다. 빛은 클로디아의 손안에 들어올 정도로 작았는데, 클로디아가 멍하니 서 있는 것을 보고는 짜증이 나는 듯 몇 번 움직여 8자를 그렸다.
“나야, 디자이어라고!”
“아…. 그래….”
클로디아가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하지만 포르투 왕국 건국설화에 디자이어는 아주 큰 빛의 소용돌이라고 했는데….”
“몇 번 말해야 알아들어? 나는 지금 쥬버린을 지키고 있다고! 생명을 멈추어 놓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아?”
포르투를 축복했다는 정령은 퍽 까칠한 성격을 가진 모양이었다. 클로디아는 다급히 손을 내저었다.
“미안, 미안. 너를 깔본 건 아니었어.”
“…알아. 아무튼.”
“어, 응.”
빛무리는 뽀르르 날아 클로디아의 앞으로 다가왔다. 클로디아는 신기해 그 빛을 쳐다봤다. 빛은 클로디아의 앞에서 한 번 위아래로 움직였다. 마치 인사하는 것 같아서, 클로디아도 저도 모르게 포르투 왕가의 예절대로 무릎을 굽혔다.
“내가 네 오빠와 너를 바꿔줄 순 없어.”
“…다 들었어?”
“당연하지! 내 앞에서 그렇게 발버둥 치며 우는데 어떻게 못 듣니?”
디자이어가 톡 쏘아붙였다. 이상했다. 어둡고 넓고 춥게만 느껴지던 영광의 홀이, 주먹만 한 빛 하나 있다고 희한하게도 아까보다는 조금 따뜻한 것 같았다.
클로디아는 민망해하며 말했다.
“미안, 네가 듣고 있는 줄은 몰랐어.”
“내가 듣고 있는 줄 알았다면 네가 그랬겠니? 너는 예쁜 척 아니면 시체인 애잖아.”
클로디아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나를 알아?”
“모르겠니?”
빛무리-디자이어가 다시 한번 크게 8자를 그렸다.
“나는 포르투의 모든 공주와 왕자를 안다구. 네가 태어나기 훨씬 전부터 나는 의지를 가지고 포르투 왕가를 수호했어. 네가 걸음마를 걷고, 첫 왕관을 쓰고, 춤을 배우고, 인사를 하는 것까지 다 알아.”
“와아….”
“열두 살 때의 네 첫사랑이 쥬버린 왕자라는 거나, 쥬버린과 결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날 피부 관리 핑계를 대며 꿀을 술과 섞어 바르다가 술을 마시고 취해 잉잉 운 것도 알지.”
클로디아의 얼굴이 사색이 됐다. 디자이어는 잘난 척하며 말을 이었다.
“네가 파티 전엔 이틀 내내 굶고 원래 날씬한 척하는 것도 알고, 살찔까 봐 물도 잘 안 마시는 것도 알아. 그런 주제에 초콜릿을 좋아해서 맨날 초콜릿을 먹은 다음에 잉잉 울며 노바라에게 왜 초콜릿을 주었느냐고 투정을….”
“그만, 그만!”
클로디아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클로디아는 허공을 휘저었으나 디자이어는 그녀를 약 올리듯이 한 바퀴 휘 돌았다.
“그런 거 말고, 다른 방법!”
“뭐?”
“아까 그랬잖아, 오빠랑 나랑 바꿔줄 수는 없어도 다른 건 가능하다고.”
“아하.”
디자이어가 다시 한 바퀴 휘 돌았다.
“가능하지.”
“뭘 말하는 거야?”
“너, 네 오빠를 구하고 싶은 거 아니야?”
디자이어가 말했다. 클로디아는 눈을 깜박이다가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내가 쥬버린을 구하게 도와줄 수 있어.”
“…어떻게?!”
“아까 너희들 하는 얘기를 다 들었거든.”
디자이어가 휙 허공으로 올라가 영광의 홀 천정을 훑으며 한 바퀴 돌았다. 그 몸짓은 마치 디자이어가 영광의 홀을 내내 내려다보고 있었다는 것을 뜻하는 것 같아 클로디아는 저도 모르게 “와아….” 하고 탄성을 내질렀다. 디자이어가 으쓱으쓱 움직이며 말했다.
“너, 화난 것 같더라.”
“어?”
“그 대신들이 너를 깔보더라고. 아무것도 모른다고.”
“으응….”
“그들이 왜 그러는지는 알아. 하지만 어쩌겠어. 이미 사고는 일어났는데. 그 사람들은 너한테 화풀이를 하더라고. 나는 포르투 왕가를 수호하는 정령이라 그게 정말 화나더라.”
“그랬어?”
클로디아는 나직하게 웃었다. 정령은 빛을 경직시키듯 쭉 퍼졌다가 다시 부피를 줄였다.
“네가 공주의 의무에 소홀했던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아예 바보 취급하면 안 되지!”
“고마워.”
“흥. 사실 쥬버린이 가장 나쁘지만, 이런 얘기는 나중에 하자.”
디자이어가 다시 빙글 돌았다.
“어쨌든, 지금 쥬버린의 심장과 아무르를 돌려받아야 하는 거지?”
“어? 심장을 돌려받는다고?”
“그래. 마왕은 쥬버린의 심장을 터트리지 않고 챙겨갔거든. 쥬버린은 아직 죽지 않았어. 살아날 가능성도 있지. 그 자리에 있던 자들은 쥬버린이 죽은 것으로만 생각했겠지만.”
클로디아는 놀라 입을 막았다. 수르 알파의 말이 맞았던 것이다!
“이 사실을 빨리 알려야.”
“잠깐 잠깐, 클로디아. 내 말 좀 들어봐.”
디자이어가 뒤를 돌아 뛰어가려던 그녀를 돌려세웠다.
“그 꼴로는 어차피 대신들도 못 만나. 그러니 천천히 내 얘기를 들어봐.”
“뭔데?”
“나도 이틀 동안 쥬버린과 함께 고민했거든.”
“오빠와 함께…?”
클로디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디자이어는 고개를 끄덕이듯이 아래위로 힘차게 흔들렸다.
“쥬버린은 얼어붙어 내 안에 있지만, 그의 의식은 나와 함께하고 있어. 쥬버린은 지금 네게 아주 미안해하고 있어.”
놀란 건 잠시였다. 디자이어의 말에 클로디아는 잠시 얼어붙었다가, 이내 입을 막았다. 눈물과 함께 흐느낌이 나와서다.
“오빠….”
“앗, 울지 마. 아직 내 말 안 끝났다고.”
디자이어가 서둘러 그녀를 달랬으나, 클로디아는 한참을 흐느낀 후에야 겨우 진정했다. 오빠, 오빠! 하는 원망과 그리움이 담긴 울음을 토해낸 클로디아 앞에서 디자이어는 난감한 듯 흔들렸다.
“아무튼, 그래서 고민해봤는데, 클로디아.”
“으응.”
“좋은 방법이 있어. 내가 네게 힘을 빌려줄 테니, 한번 해 보지 않을래?”
“무슨 힘인데? 뭘 하면 되는 거야?”
디자이어가 속삭였다.
“있지, 어차피 나도 아무르가 아니면 혼자서는 하늘섬을 띄울 수 없어. 나는 사실 원래 수호와 방어, 공격에 특화된 정령이거든.”
“으응….”
“내 힘을 조금 떼어서 네게 줄 테니, 네가 오빠를 구해보지 않을래?”
“…뭐라구?!”
클로디아는 화들짝 놀라 뒤로 두어 걸음 물러섰다. 그러나 빛은 마치 클로디아를 유혹하듯 한 바퀴 회전했다.
“너무 놀라지 마. 어차피 그 대신들도 너를 남는 잉여 인력 취급했잖아. 그런 취급을 받느니, 나랑 합작해서 쥬버린을 구해보자는 거야.”
“…오빠도 동의했어?”
디자이어는 또다시 회전했다.
“쥬버린은 사실 지금도 나를 엄청나게 말리고 있어.”
“…아.”
“쥬버린은 너를 너무 사랑하고 아끼기 때문에, 네가 손톱만큼도 위험하지 않았으면 하거든.”
클로디아의 눈가에 또다시 눈물이 괴려고 해서, 정령은 한바탕 춤을 추어야 했다. 이제는 정령도 클로디아가 한 번 울면 꽤 시간을 쓴다는 것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클로디아, 어차피 쥬버린이 없는 채로 3년이 지나면 넌 이 하늘섬에서 죽어.”
“….”
아무르가 없는 하늘섬은 세계수가 말라 죽는 3년의 시간이 지나면 그대로 대륙 위로 침몰할 것이다. 클로디아 또한 비슷한 운명을 맞이하겠지. 디자이어는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있잖아. 내가 어떻게 포르투 왕가를 수호하게 됐는지 알아?”
이 정도는 알고 있다. 어릴 때부터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었기 때문이다. 클로디아는 저도 모르게 입 밖에 외워진 말을 내뱉었다.
“초대 포르투 왕인 미겔이 네 개의 대륙이 암흑의 바다에 잠기는 것을 막으려고 모험하던 시절 너를 발견해서….”
“그래. 초대 포르투 왕은 그때 뭐라고 불렸게?”
“모르겠어. 뭐라고 불렸는데?”
“용사님.”
클로디아에게 디자이어가 속삭인 단어는 그녀도 익히 들어본 것이었다. 동화 속에서나 들어본 용사님이라는 말. 클로디아의 눈이 반짝였다.
“내가 너를 새로운 세계의 용사님으로 만들어줄게, 클로디아.”
“어, 어떻게?”
“한마디만 하면 돼.”
“무슨 말…?”
디자이어가 뒤로 휙 물러났다. 클로디아는 저도 모르게 한발 다가섰다. 디자이어가 말을 이었다.
“‘디자이어, 세계를 구할 힘을 빌려줘.’”
“그거면 돼…?”
클로디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래. 너는 그러면 세계를 구할 힘을 손에 넣게 될 거야.”
“저, 정말?”
“그래. 그 대신들도 너를 비웃지 못할 거고!”
공주의 입이 약간 벌어졌다. 디자이어는 말을 더했다.
“살도 빠지고 예뻐질걸?”
“세계를 구할 힘이 살도 빠지고 예뻐지게 해줘?”
“못 믿겠어?”
클로디아는 이마를 찡그렸다.
“그런 동화는 들어본 적이 없는데….”
“바보야. 동화 속에서 세계를 구하는 용사님은 다 멋지다고들 하잖아. 그게 공주님이면 예쁜 게 당연해.”
“그런가?”
“그래.”
뭔가 이상한데…. 클로디아의 머릿속에서 수상하다는 기분이 고개를 쳐들었다. 클로디아가 머뭇거리자 디자이어가 고민하다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너, 세계 최고의 신부감이 될걸?”
“어?”
“그 킴 왕자, 네게 파혼장을 보냈다며?”
킴 왕자. 그 말을 듣는 순간 또 클로디아는 울음이 터지려고 해서, 주먹을 꼭 쥐었다. 간신히 그 눈물을 넘긴 뒤, 클로디아는 입을 열었다.
“…그래. 맞아. 나 오늘 파혼당했어.”
“하지만 네가 마왕을 무찌르고 쥬버린 왕자를 구해내면 어떻게 될까? 전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너를 동경하게 될걸?”
“저, 정말 그럴까?”
“그럼!”
오랜 세월이 흐른 후에도 클로디아는 이 순간을 계속해서 곱씹게 된다. 다단계 사기에 넘어가는 사람이 따로 있는 게 아니다. 왕족이라고 예외가 없는 것이다. 세계를 구한 용사 클로디아 테 포르투는 자서전에서 당시의 자신을 향해 이렇게 일컬었다.
‘빡대가리’.
하지만 어쨌든 그건 나중의 일이다.
이때의 클로디아는 망설이지 않고 입을 열었다. 할게, 어떻게 할까? 같은 질문 따위는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이미 모든 건 제게 주어졌지 않은가.
“디자이어, 세계를 구할 힘을 빌려줘!”
“좋아.”
빛이 갑작스레 환해졌다. 웃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 빛은 순식간에 엄청나게 커져서, 영광의 홀을 뒤덮고 끝내는 포르투 왕성을 모두 채웠다. 하늘섬의 맨 끝에 사는 주민들까지 잠에서 깨어 나와 볼 정도로 엄청난 빛이 포르투 왕성에서 하늘을 향해 쏘아졌다.
“계약 성립.”
클로디아 테 포르투는 그렇게 사기당했다.
***
새벽에 포르투 왕성을 가득 메운 빛을 보고 가장 먼저 달려온 것은 수르 알파였다. 그는 왕성을 경호하는 경비대장이었기 때문에, 그 새벽에도 잠을 자지 않고 성을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빛은 한참 후에 사라졌다. 그사이에 빛의 근원지를 찾아 기사 몇 명과 영광의 홀로 달려온 데미안 알파는 당황스러운 광경을 볼 수 있었다.
홀 가운데에 있는 쥬버린 왕자의 유리관, 그리고 주저앉은 클로디아.
클로디아 공주는 상당히 흐트러진 모습이었다. 속옷이나 다름없는 하늘하늘한 슬립 드레스 차림에도 불구하고 수르 알파가 고개를 돌리지 않은 이유는 단 하나였다.
그녀의 앞에 엄청나게 빛나는 장검 하나가 박혀 있었기 때문이다. 그 장검은 영광의 홀 바닥에 박혀 김을 뿜고 있었다.
습격이다.
수르 알파는 그렇게 판단했고, 클로디아에게로 달려갔다.
“전하!”
그때까지도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던 클로디아는 그를 보고 기겁한 표정이 됐다. 데미안은 아랑곳하지 않고 물었다.
“습격입니까?!”
그렇게 말하며 바로 공주의 앞을 견제하듯이 막아서 주변을 경계했다. 기사들도 당황했지만 빠르게 경계 태세를 취했다. 그러나 이상한 일이었다. 주변은 고요했기 때문이다.
“수르.”
“예, 전하.”
“이, 이걸 어떻게 얘기해야 할지.”
“말씀하십시오.”
수르 알파는 자신이 달려온 영광의 홀 문과, 사방 천장을 경계하며 답했다. 클로디아에게는 시선 하나 주지 않은 채였다.
“습격당한 게… 아니에요.”
“…예?”
“습격이 아니라, 이게.”
수르 알파는 자신의 옷자락이 당겨지는 것을 느끼고 뒤를 돌아봤다. 바닥에 주저앉은 공주는 어쩔 줄 모르는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정령 디자이어가 제게 응답했어요.”
“…무슨 소립니까?”
클로디아는 손을 뻗어 검을 가리켰다.
“저게 디자이어예요.”
“…예?”
황당한 소리에 기사들이 모두 경계태세를 지우고 이쪽을 바라봤다. 데미안 또한 눈을 부릅뜨고 그녀를 내려다봤다가 흠칫했다. 공주가 흠, 흠 하고 얼굴을 붉혔기 때문이다.
그제야 데미안은 당황해 주변 기사들에게 명령했다.
“모두 고개를 돌리고 홀 문 쪽을 경계해라.”
“예!”
공주는 거의 헐벗은 거나 마찬가지였다. 기사들도 민망한 건 마찬가지였는지 빠르게 고개를 돌렸다. 데미안은 혀를 차며 제가 둘렀던 망토를 서둘러 끌러 그녀에게 건넸다.
“급한 대로 이것이라도 두르십시오.”
“…고마워요.”
공주는 망토를 두르고 일어섰다. 보통 때라면 기사가 그녀를 일으켜줘야 옳으나, 데미안은 한발 물러서 그녀가 홀로 일어설 때까지 기다렸다. 그녀는 제 손이 닿는 것도 끔찍해 할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공주는 나직하게 한숨을 쉬고 말했다.
“디자이어가 제게 힘을 주었어요.”
“…무슨 소리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데미안의 대답에 공주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걸음을 옮겼다. 바닥에 박힌 장검을 향해 다가간 그녀는 그 장검을 새삼스러운 눈으로 보더니, 손을 뻗어 검을 뽑으려 했다.
그러나 이내 그녀의 표정이 변했다. 검이 쉬이 뽑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찰나의 순간 끙끙대는 그녀를 보고 데미안이 입을 열었다.
“제가 도와드려도 되겠습니까?”
“…그러세요.”
공주가 한 걸음 물러났고, 데미안은 빠르게 다가가 검을 뽑았다. 곧장 무릎을 꿇고 그 장검을 두 손으로 올려바치자, 공주는 한 손으로 검의 손잡이를 잡아 받아들려다가 휘청, 했다. 데미안이 미리 알아채고 검날을 받치지 않았더라면 큰일이 날 뻔했다.
“고, 고마워요.”
“아닙니다. 그런데 대체 무슨 일….”
그때였다. 문이 소란스러워졌다. 비상사태에 성에서 자고 있던 대신들이 헐레벌떡 뛰어온 것이다. “무슨 일이냐!” “왕자님!” 공주는 그쪽을 바라봤다. 데미안도 마찬가지였다. 이윽고 홀 안에 들어온 대신들은, 유리관 앞에서 커다란 검을 들고 수르 알파의 망토를 두른 채 서 있는 공주를 보았다.
클로디아는 입을 열었다.
“방금 정령 디자이어가 현신해 제게 힘을 주었습니다.”
“예? 그게 무슨 소리….”
“이 검은 디자이어입니다.”
그 말에 모두 눈을 크게 떴다. 공주는 옅게 미소 지으며 말을 이었다.
“디자이어는 제게 검으로 현신할 테니 쥬버린 오라버니를 구해달라고 했어요. 저는 이 검을 쥐고 마왕을 무찌르러 갈 겁니다.”
포르투 왕성이 뒤집어졌다.
***
그 새벽에 영광의 홀을 메운 대신들은 클로디아 공주의 선언에 수군거렸으나, 눈치 빠른 양 대신은 클로디아 공주를 보고 ‘저런 차림으로 많은 사람들 앞에 세울 수 없다’는 핑계를 대고 그녀의 내실로 데려갔다.
대체 무슨 일이냐고 묻는 외무대신에게 클로디아 공주는 검을 쥐여주었다. 외무대신은 그 검을 쥐어보고 기겁했다.
검이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검은 자신이 정령 디자이어이며, 클로디아 공주를 통해 쥬버린을 구하고 마왕을 죽이겠다고 말했다. 외무대신도 하마터면 그 말에 넘어가 디자이어에게 무릎이라도 꿇을 뻔했다.
그때 데미안 알파가 들어서지 않았더라면 분명 그랬을 것이다.
데미안 알파는 외무대신에게서 검을 건네받았다. 그는 특유의 침착한 말투로 물었다.
“묻겠습니다, 디자이어. 마왕을 어떻게 죽일 겁니까?”
[나의 힘이라면 마왕을 죽이는 건 충분해!]
“수르 알파.”
클로디아가 이마를 찡그렸으나 검을 쥔 데미안 알파는 무심하게 대꾸했다.
“그러니까 어떻게 죽일 거냐고 묻는 겁니다. 디자이어. 당신이 정령 디자이어가 확실하다는 전제하에서 묻겠습니…”
[나는 디자이어가 맞아!]
동시에 꽈르릉. 클로디아 공주의 내실 창문 밖에서 마른벼락이 쳤다. 모두 기겁하는 가운데 데미안은 창문 밖으로 걸어가 바깥을 쳐다봤다. 정원의 바위가 반쪽이 나 있었다.
“…당신이 디자이어라는 건 믿겠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마왕을 죽일 겁니까?”
[아까부터 왜 자꾸 같은 걸 물어?]
“제겐 제대로 된 답이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데미안 알파는 이마를 잔뜩 구기고 검을 향해 물었다.
“검엔 발이 없습니다.”
“수르 알파. 그러니 내게 디자이어가 임무를 맡긴 것 아닙니까?”
클로디아가 제 가슴을 짚으며 말했다. 그녀는 그새 데미안의 망토가 아닌 두툼한 가운을 입고 있었으나, 데미안이 보기엔 그도 속옷이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그는 시선을 돌렸으나, 클로디아는 그의 시선을 일부러 따라가 그와 눈을 마주쳤다.
“디자이어를 내가 들고 마왕에게 찔러넣겠습니다.”
“…공주 전하.”
데미안 알파의 표정이 더더욱 구겨졌다.
“지금 디자이어를 들어보시겠습니까?”
“왜요?”
“일단 들어보십시오.”
클로디아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데미안에게서 검을 건네받았다. 그리고.
휘청, 하고 검을 떨어트렸다.
쿵.
카펫 위로 무거운 검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데미안은 다시 말했다.
“다시 들어 올려 보십시오.”
“자, 잠깐만요. 디자이어. 몸무게를 좀 가볍게 해줘.”
디자이어는 대답이 없었다. 클로디아의 가슴에 선득한 불길함이 스쳐 지나갔다.
“디자이어?”
[…내가 사람도 아니고 다이어트를 어떻게 해?]
“…너 정령이잖아?”
[불가능해.]
“뭐라고?”
그제야 외무대신의 표정이 굳어졌다. 데미안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클로디아는 저편에서 아직도 상황 파악이 채 되지 않은 내무대신을 보다가, 겁먹은 표정으로 바닥에 떨어진 디자이어의 손잡이를 힘주어 들었다. 끙, 소리가 절로 나왔다.
“드, 들었어요.”
“예. 잘하셨습니다.”
데미안 알파의 말투에는 어떤 비난도, 한심함도 없었다. 그러나 클로디아는 그 말이 어떤 맹렬한 비난보다도 날카롭다고 느꼈다. 그도 그럴 것이, 클로디아는 디자이어의 손잡이를 양손으로 잡고 있었으나 그 손목에는 엄청난 하중이 느껴졌고 검 끝은 사정없이 흔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 이제 저를 공격해 보시겠습니까?”
“어, 어떻게.”
클로디아가 부들부들 떨며 말했다. 무서워서가 아니었다. 부채보다 무거운 것을 들어본 적 없는 늘씬하고 가느다란 손목은 장검을 감당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데미안은 표정 없이 말했다.
“그대로 찌르시면 됩니다.”
클로디아는 눈치를 보다가 그대로 팔을 내밀었다.
“에잇!”
데미안이 옆으로 한 걸음 걸어 피했다. 그 움직임은 지독히도 평범했다. 그저 옆으로 한 걸음 이동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클로디아는 그를 찌르기는커녕 근처에도 닿지 못했다. 그녀는 온 힘을 다해 팔을 뻗었고, 포즈는 우스꽝스러웠다. 생전 해본 적 없는 동작을 하느라 팔은 무리했고 엉덩이는 뒤로 쭉 뺀 상태였다.
갑작스러운 무게 중심 변화 때문에 몸은 휘청거렸다. 결국….
“어머나, 공주님!”
곁에서 그녀를 지켜보고 있던 시녀 노바라가 튀어나와 부축하지 않았다면 그녀는 기어이 쓰러졌을 것이다. 챙강. 디자이어가 바닥에 떨어졌다.
클로디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데미안이 입을 열었다.
“디자이어. 그대는 공주님에게 뭐라 말했습니까?”
[세계를 구할 힘을 주겠다고 했어.]
“하지만 세계를 구하기 위해 당신을 휘두를 검술이 필요하다는 건 설명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런 건 상식 아냐?]
클로디아의 푸른 눈이 부릅뜨였다. 데미안의 표정이 약간 변했다.
“공주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무게를 줄이는 게 어렵다면, 공주님께 검에 대한 지식을 주입하는 식의 마법은 가능합니까?”
[나는 정령이지 마법사가 아니야.]
“…세계를 구할 힘은 구체적으로 무엇입니까?”
[그야, 자르지스의 마왕은 돌 같은 심장을 가지고 있거든! 나는 그 심장을 한 번에 부술 수 있어!]
“…디자이어.”
[왜?]
데미안은 낮게 한숨을 쉬었다.
“그럼 제가 당신을 쥐고 휘두르는 건 가능합니까? 공주님이 아니라도 제가 당신을 모시고 자르지스에 가서 마왕을 찌르면 어떻습니까?”
[안 돼. 그게 아니었다면 클로디아를 꼬시지도… 아차.]
사방이 조용해졌다.
***
“으아아아아앙!”
클로디아는 울고 있었고, 외무대신은 머리를 짚고 있었다. 클로디아에게서 자초지종을 들은 것은 내각 중에서도 극히 일부였다. 외무대신과 내무대신, 그리고 데미안 알파 정도였다.
디자이어는 한참 동안 침묵했다가 클로디아가 울기 시작한 순간 열렬히 떠들었다.
[어, 어쩔 수 없었다고! 원래의 나는 이렇게 생긴 검이었어! 그리고 포르투 왕가의 혈족 손에서가 아니면 힘을 발휘할 수 없단 말이야!]
[지금 남은 포르투는 쟤뿐이잖아! 나보고 어떡하라고!]
[나도 하늘섬을 지키고 싶어! 나쁜 뜻은 아니었어!]
데미안 알파는 조용히 울고 있는 공주를 보다가 디자이어를 잡고 물었다.
“묻겠습니다, 디자이어. 그렇다면 죽음의 바다를 건널 방법은 있습니까?”
[있어!]
한 줄기 희망이었다. 죽음의 바다는 자르지스 근방의 바다를 일컫는 것으로, 그 해상 구역에 들어서면 배들이 모조리 독기 있는 물에 썩기 시작해 끝내는 가라앉았다. 허공을 날아가는 마법사들도 그 근처에는 접근하지 못했다. 자르지스까지 날아갈 마력도 없거니와, 실수로 힘을 조정하지 못해 바다에 빠지면 그대로 죽음만이 기다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적어도 그 죽음의 바다를 건널 방법은 있는 모양이었다.
“어떻게 이동하면 됩니까?”
[배를 타고 건너야지!]
데미안 알파는 클로디아 공주 앞에서 화를 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번에만은 화를 참을 수 없었다.
콰직.
디자이어가 클로디아 공주의 내실, 대리석 바닥에 그대로 푹 박혀 들어갔다. 정확히는 검을 망가뜨릴 것처럼 돌에 내리꽂았다는 게 맞았다.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눈알이 튀어나올 것처럼 그 광경을 쳐다봤다. 울던 클로디아마저 눈물을 그쳤다.
[으악! 으악!]
디자이어가 찢어질 듯한 비명을 질렀다. 데미안은 여전히 고요한 톤으로 물었다.
“말장난하지 마십시오, 디자이어.”
[장난이 아니라고!]
디자이어가 억울하다는 듯 말을 이었다.
[큰 배는 아니지만, 적어도 열 명 정도가 탈 만한 작은 배는 내 힘으로 보호할 수 있어. 물론 클로디아의 손에 쥐어져야 힘을 발휘할 수 있지만!]
“그렇군요. 실례했습니다.”
데미안은 그 말을 듣자마자 다시 대리석에서 검을 뽑아냈다. 외무대신이 그 광경을 보고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저어…. 지금 수르 알파께서 바닥재를 부술 수 있으신 걸 보면, 디자이어 님을 수르 알파가 다루실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아냐. 이건 그냥 얘가 날 몽둥이처럼 쓴 것뿐이라고!]
“실례지만 무슨 뜻인지….”
부연설명을 한 것은 데미안이었다.
“외무대신. 저는 대신께서 들고 계신 지팡이로도 이 바닥재를 부술 수 있습니다. 디자이어가 말하는 힘은, 아마 물리적인 개념은 아닐 겁니다. 마법적인 힘이겠죠.”
[그래! 그거야!]
“제가 제 검으로 마왕의 심장을 찔러도 그것이 부서지지는 않을 겁니다. 하지만 공주님께서 디자이어를 들고 마왕의 심장을 찌른다면 부서질 거란 이야기입니다.”
[맞췄어! 야, 너 똑똑하네!]
데미안, 속칭 수르 알파는 검의 달인이었지만, 동시에 포르투의 기사단장이었다. 하루에도 몇백 명의 기사를 훈련시키는 그는 훌륭한 선생이기도 했고, 외무대신은 즉각 그의 말을 알아들었다.
“그렇다면….”
“예.”
데미안과 외무대신이 클로디아를 쳐다봤다. 뒤늦게 내무대신 또한 그 이야기를 이해하고 클로디아 쪽으로 시선을 향했다. 그러나 클로디아보다 먼저,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고 있던 시녀 노바라가 대경실색했다.
“안 됩니다! 우리 공주님은 검 같은 건 잡아본 적도 없으세요!”
“…방금 잡아봤지 않습니까.”
내무대신이 썰렁한 농담을 했다. 그러나 아무도 그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클로디아는 눈물이 방울진 눈썹을 깜박여 눈물을 털어내고 있었다. 노바라는 안타까운 듯 그녀를 내려다보다 이어 말했다.
“방금 보셨잖아요! 공주님이 검을 들고 마왕을 무찌른다니, 말도 안 됩니다!”
“예. 말도 안 됩니다.”
뜻밖에도 그 말을 거든 건 데미안이었다. 데미안은 심각한 얼굴로 디자이어에게 물었다.
“그러니까 종합하자면, 공주님이 마왕의 앞에 가기까지는 순전히 공주님 힘으로 해내야 하며, 디자이어께서 말한 ‘세계를 구할 힘’은 결정적인 순간에 몇 번 마법적인 효과를 발휘하는 것이 다로군요.”
[맞지만…. 어째 되게 내가 나쁜 것처럼 들리는데.]
“나쁩니다….”
외무대신이 얼굴을 감싸 쥐었다. 내무대신도 속이 뒤집히는 표정이었다.
그때 클로디아가 억울한 듯 외쳤다.
“너, 나한테 세계를 구할 힘을 준다고 했잖아!”
[그래. 주겠다니까? 세계를 구할 힘. 마왕의 심장을 부수는 힘.]
정말 얄밉다.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지만, 차마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대체로 디자이어는 몇백 년 동안 포르투에서 신성한 존재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새벽부터 지금까지 그 신성한 이미지가 완전히 무너져 내리기는 했으나, 아직도 디자이어에게 클로디아를 제외한 모두는 존댓말을 쓰고 있었다.
클로디아가 다시 물었다.
“사, 살도 빠지고 예뻐진다는 말은 그럼 뭐였어?!”
…어째 기특하게도 왕국을 구할 생각을 했다 했더니. 저런 꼬임에 넘어갔군. 그 자리에 있던 양 대신은 속으로 생각했다.
그럼 그렇지. 저 철없는 클로디아 공주가 그렇게 긍휼한 마음을 가졌을 리 없다…는 게 그녀를 오래 보아온 두 대신의 속마음이었다. 디자이어가 답했다.
[아, 그거야 나 정도의 무거운 검을 계속 휘두르다 보면 살도 좀 빠지고 몸에 근육도 붙고 해서 예뻐질 거 아냐!]
“뭐…?”
클로디아의 얼굴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일그러졌다. 그리고 그녀는 소리를 질렀다.
“너 아주 나쁜 애구나!!”
[내가 뭐!]
“나한테 작정하고 거짓말을 했어! 너 정말 나쁜 애야! 악마! 어떻게 나한테 그럴 수 있니?!”
[야! 악마라니! 나 정령이야!]
…어쨌든 클로디아 공주에게 좋은 점이 있긴 했다. 그녀는 적어도 선하고 바르게 키워진 나머지, 남에게 욕설을 하지 못했다. 지금도 ‘나쁘다’ ‘못됐다’ ‘어쩜 그래’ 같은 이야기를 했지만, 욕설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리고 근육이라니!! 어떻게 그런 말을 해! 내가 세계 최고의 신붓감도 될 거라며!”
[그래! 마왕을 무찌르면 널 신부로 맞고 싶다는 사람들이 줄을 설걸!]
“근육 붙은 신부가 어떻게 세계 최고의 신붓감이야?!!”
와아아아앙. 클로디아가 다시 눈물을 터트렸다.
그러니까… 그녀는… 쥬버린 왕자의 아래에서 파티와 드레스와 연회, 달콤하고 사랑스러운 것만 즐기며 가녀리고 아리따운 것이 여자의 미덕이라고 굳게 믿는 생활을 20년 꼬박 유지해온 사람이었다….
[너 지금 근육 붙은 여자들 무시해? 야, 클로디아. 근육 붙고도 멋진 신부들 많거든?]
“나는 근육 붙은 신부 되기 싫다고!!”
그리고 이제 디자이어는 한술 더 뜨고 있었다. 디자이어와 클로디아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점점 한심한 기분이 됐다. 외무대신은 머리를 짚고 있다가,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마왕을 무찌를 방법은 디자이어뿐이라는 거지요?”
[어? 그래. 맞아.]
디자이어는 으스대며 말했다.
[너희가 내 앞에서 토론하는 걸 들었어. 인간의 군대를 조직해서 보내고 싶다며? 하지만 틀렸어. 죽음의 바다를 인간들은 건너지 못하거든. 원래부터 건널 수 없게 돼 있어.]
“왜지요?”
캐물은 건 데미안이었다.
[신이 그렇게 만들었어. 하지만 나는 신보다 더 오래 나이 먹은 정령이라서 약간의 힘은 보탤 수 있다구. 나를 이용하면 너희는 죽음의 바다를 건널 수 있어.]
“…열 명 남짓 탈 만한 배에 의지해서 말이죠.”
“군대를 보낼 수도 없겠군요.”
대신들이 눈길을 주고받았다. 디자이어는 계속 떠들었다.
[그리고 마왕은 자르지스의 마기를 오래 쬐어서, 그 심장이 돌처럼 굳어져 있지. 일반적인 금속으로는 그 심장을 깰 수 없어. 하지만 내가 누구야? 디자이어지. 나만 있다면 마왕을 죽이는 것도 어렵지 않아!]
“확실합니까?”
[지금 나를 의심하는 거야?]
디자이어가 확 짜증을 냈다.
‘지금 짜증 낼 사람이 누군데!’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디자이어는 막무가내였다.
[너희 그래서, 지금 이대로 관둘 거야? 너희들이 하도 어제 답도 없으면서 짜증 나게 구니까 내가 현신이라도 한 거잖아!]
다들 시선만 마주쳤다. 디자이어는 말을 이었다.
[너희 두 대신, 공주 무시하는 거 내가 아주 잘 봤어. 그런데 너희 나보다 훨씬 좋은 대책 있어?]
없었다. 대신들이 슬그머니 눈을 피했다.
[너희들 입으로 대책 없다고 그랬잖아? 내가 클로디아한테 조금 말 안 한 게 있기로서니 이렇게 나를 사기꾼으로 몰 셈이야?]
“그게 어떻게….”
말을 듣고 있던 클로디아가 기가 막혀 입을 벌렸으나 디자이어는 클로디아의 말을 가로막고 계속 떠들었다.
[내가 그러지 않았으면 너는 내 힘을 빌리지도 않았을 거 아냐! 멍청아!]
멍청이라니!
모두 클로디아를 볼 때마다 생각했지만, 한 번도 입 밖으로 내지는 못했던 말이었다!
클로디아의 눈에 또다시 눈물이 괴었다.
[울보야! 울지 마! 너 울라고 이런 소리 한 거 아냐! 쥬버린이 나빠!]
“오빠 욕하지 마!”
[할 거야! 쥬버린 나쁜 놈! 쥬버린 멍청이! 동생을 아끼고 사랑하는 건 좋지만, 이렇게까지 아무것도 안 가르쳐 놓은 것도 그 애잖아! 따지고 보면 네가 무시당한 것도 쥬버린 때문이라구!]
“아니야!”
[맞아 바보야! 그리고 다시 한번 말하는데 울지 마! 쥬버린은 여전히 나랑 의식을 공유하고 있으니까!]
그 말에 모두 놀라 디자이어를 쳐다봤다. 디자이어는 인간이었으면 한숨을 쉬는 것으로밖에 들리지 않았을 소리를 내고는 말했다.
[쥬버린의 말을 전해줄게. 지금은 쥬버린이 유리관 안에서 얼어버린 지 얼마 안 돼서 아직은 의식이 있어. 하지만 곧 쥬버린은 더 깊은 잠에 빠져버릴 거야.]
“그런….”
[쥬버린은 클로디아, 너에게 미안해하고 있어. 그리고 내게 속은 것도 자기 탓이라고 슬퍼하고 있어.]
클로디아는 입을 막았다. 대신들도 슬픈 표정이 됐다. 노바라는 이제 자신이 울 것 같은 표정이 됐다.
[데미안 알파.]
놀랍게도 그 순간 디자이어에게서 쥬버린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모두들 굳은 채 그 말을 들었다. 지목당한 데미안은 정작 여상하게 대답했다.
“예.”
[클로디아를 부탁해.]
“….”
[그대가 클로디아를 불편하게 여기는 건 나도 알아. 하지만 내가 이렇게 된 이상, 클로디아를 부탁할 사람은 그대뿐이야. 부디 클로디아를 보호해 줘.]
쥬버린의 말에 대답한 것은 클로디아였다. 그녀는 흔들리는 눈으로 물었다.
“보호라니, 오빠?”
[클로디아.]
쥬버린은 한참이나 말을 골랐다.
[네게는 정말로 미안하게 생각해. 사랑하는 내 동생. 나는 정말로 너를 아낀단다.]
“오빠, 아냐. 미안해하지 마. 오빠 잘못도 아니잖아…!”
[아냐. 내 잘못이야. 클로디아. 나는 네가 행복한 인생을 살아가길 바랐단다. 하지만 그게 네게 해가 될 줄 몰랐어. 물론 네게 그런 말들을 한 두 대신을 원망하지는 않아. 그들도 그들의 일을 할 뿐이니까. 하지만, 클로디아.]
클로디아는 슬픈 눈으로 디자이어를 바라봤다. 그 자리에 마치 쥬버린 왕자가 서 있기라도 한 듯이.
[나는 네가 의무 때문에 원하지 않는 일을 하지 않기 바란단다. 포르투라는 성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네가 힘든 일을 할 필요는 없어.]
그 자리의 모두가 귀를 의심했다.
뭐지?
쥬버린 왕자의 말투는 뭔가 이상했다. 클로디아를 격려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쥬버린의 말이 이어졌다.
[어쩌면 이게 하늘섬의 끝일지도 모른다고 나는 생각해. 포르투 왕가가 언제까지나 대륙을 통치할 필요는 없잖아.]
클로디아는 멍하니 입을 벌렸다.
[너는 부디 수르 알파의 보호를 기꺼이 받으렴. 그가 껄끄럽겠지만…. 그의 보호하에 안전히, 그리고 천천히 신랑을 다시 골라 보기를 바라. 포르투 왕가의 재산이라면 가능할 거야.]
쥬버린은 클로디아에게 마왕을 무찌르지 말고, 모든 것을 포기하고 좋은 곳에 시집을 가라고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너는 예쁘고 다정한 데다가 좋은 아이니까, 너를 행복하게 해 줄 신랑감을 만날 수 있을 거야.]
“오, 오빠. 진심이야?”
[나는 언제나 진심이란다, 사랑하는 클로디아.]
쥬버린의 말에는 애정이 뚝뚝 묻어났다. 누구도 쥬버린 왕자의 말을 의심할 수 없었다. 저것은 진실한 애정이었고, 제 동생에게 퍼붓는 따뜻함이었다.
노바라는 이제 “오, 왕자님. 당신이야말로 위대한 분이셨어요.” 하고 연신 눈물을 찍어내고 있었다.
허나.
“오빠, 아냐. 내가 오빠를….”
[클로디아.]
따뜻한 목소리가 그녀의 말을 가로막았다.
[나는 네가 언제나 가장 아름답고 깨끗하며 따스한 이불에서 잠들길 바란단다. 네가 좋은 것만 누리며 일상을 행복하게 보냈으면 해. 좋은 남편의 보호를 받으며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고, 예쁜 아이들을 낳아 기쁨만 느끼는 인생을 산다면 나는 이대로 죽어도 상관없단다.]
클로디아는 얼어붙었다.
[세상의 모든 것엔 끝이 있어, 클로디아. 무엇보다 너의 인생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렴.]
쥬버린은 분명 좋은 오빠이고, 자상한 왕자님이었다. 그가 하는 말에는 틀림이 없었고 옳은 부분도 있었다. 하지만, 하지만….
지나치게 이기적이었다.
“오빠.”
[부탁한다, 클로디아. 너의 인생을 살아. 아아, 잠이 오는구나….]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미안하오, 대신들…. 나는 좋은 왕이 되진 못할 것 같아….]
그게 끝이었다.
지독한 침묵이 내실을 맴돌았다.
“정말 좋은 분이에요! 그렇지요?”라고 감탄하던 노바라조차 이제는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닫고 눈알을 굴리고 있었다. 클로디아는 눈을 부릅뜨고 디자이어를 쳐다보고 있었다. 눈을 한 번 깜박하지도 않았다.
그녀에게 뭐라 말을 건넬 수도 있었지만, 디자이어 또한 침묵하고 있었다. 대신들은 눈알만 굴릴 뿐 입을 열지 않았다.
침묵을 깨트린 건 데미안이었다.
“…저는 왕자님의 말을 따르겠습니다.”
“수르 알파!”
내무대신이 당황해 그를 불렀다. 데미안은 무표정하게, 그러나 주저앉아 있는 클로디아의 옆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쥬버린 왕자님의 명을 따라 이 시간부터 클로디아 공주님의 신변 보호를 책임지겠습니다.”
클로디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데미안이 말을 이었다.
“물론 공주님이 저를 껄끄러이 여기신다면 공주님의 의사도 충분히 고려한 경호를 하겠습니다.”
여전히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이 자리에서 두 사람의 복잡하고 불편한 관계를 모르는 자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미안 알파는 그녀의 신변 보호를 하겠다고 선언했다.
“수르 알파.”
그때였다. 클로디아가 그를 부른 건. 클로디아의 시선은 여전히 디자이어에게 향해 있었으나, 입을 열어 그에게 말했다.
“제가 어디를 가든 저를 경호하실 건가요?”
“예.”
“자르지스라도?”
모두 움찔했다. 노바라가 당황해 그녀의 팔을 흔들었다.
“공주님! 안 돼요! 거기가 어디라고 가신다는 거예요? 쥬버린 왕자님도….”
“예.”
노바라의 말을 자르고 대답한 것은 데미안이었다. 데미안의 검푸른 눈이 약간 흔들렸으나, 곧 잠잠히 가라앉았다. 그리고 다시 대답했다.
“그게 어디든, 왕자님은 공주님께서 결혼할 때까지 제게 신변 보호를 부탁하셨습니다. 저는 포르투의 기사단장 수르로서, 왕자님의 명령을 들어야 합니다.”
그제야 클로디아가 움직였다. 그녀는 가장 먼저 손을 들어 제 뺨을 닦았다. 눈물이 잔뜩 그녀의 손등에 묻어났다. 그녀는 고개를 흔들며 외무대신을 바라봤다.
“외무대신, 백 개의 왕국에 통신을 보내줘요. 쥬버린 왕자는 디자이어에 의해 보호받고 있으며, 그 보호는 길지 않을 거라고요.”
“그러면….”
“저도 잘 모르겠어요. 아무것도 확답하지 못해요. 하지만, 내무대신.”
“예에.”
중년 남자가 재빨리 허리를 숙였다.
“최대한 빨리 국민들에게 모습을 보일 수 있도록 통신을 준비해 줘요. 통신 도마뱀을 통해서 모든 국민들에게 알려야 하니까요.”
“무엇을 알리시겠습니까?”
클로디아는 가볍게 고개를 흔들고 일어났다. 급작스럽게 일어난 터라 기립성 빈혈이 잠시 그녀를 휘청거리게 했지만, 공주는 다시 일어나 디자이어를 잡았다. 디자이어는 여전히 조용했다.
“제가, 디자이어의 힘을 빌려 마왕을 무찌르러 가겠다고요.”
“…괜찮으시겠습니까?”
공주는 내무대신을 보고 울 것 같은 얼굴을 했다.
“안 괜찮아요. 이렇게 된 이상 할 수밖에 없잖아요.”
“…예.”
그녀에게서 결의의 말 같은 것이 나올 줄 알았던 내무대신은 황급히 허리를 숙였다. 노바라가 “공주님.” 하고 다시 한번 그녀의 치맛자락을 잡았지만, 공주는 고개를 저었다.
“노바라, 얼음물을 준비해 줘. 얼굴이 퉁퉁 부어서 이대로는 통신 도마뱀에 얼굴을 비출 수 없어. 국민들을 안심시켜야지.”
“…정말 하실 거예요?”
“일단은.”
클로디아는 한숨을 쉬었다.
“그렇다고 왕국을 멸망하게 둘 수는 없잖아.”
“하지만….”
“왕자님께서는 멸망하게 두라고 하셨습니다.”
묵직한 목소리가 클로디아를 찔렀다. 클로디아는 데미안을 바라봤다. 열여섯 살에 그와 파혼한 이후, 한마디도 섞지 않은 상대였다. 그녀는 여전히 그가 불편했다. 포르투의 기사단장은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말했다.
“솔직히 말해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지금도 디자이어를 겨우 들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래서요?”
“왕자님의 말씀대로 하시는 것이 훨씬 편하실 겁니다.”
클로디아의 눈이 뾰족해졌다.
“편하다고요?”
“예.”
“제가 정말 편할 수 있겠어요?”
“…적어도 몸은 편하실 겁니다.”
데미안이 입을 닫았다. 클로디아는 이를 악물었다.
“지금 그게 무슨 의미가 있죠?”
“….”
“수르 알파. 똑바로 말해요. 하고 싶은 말이 뭐죠? 칼 하나 들 수 없는 계집애는 시집이나 가라는 말인가요?”
“그것보다는 좀 더 예의를 차린 말입니다만, 의미는 같습니다.”
데미안의 말에 외무대신이 짧게 신음하더니 그 방을 빠르게 나가버렸다. 공주에게 본래 구해야 하는 허락도 구하지 않은 채였다. 내무대신도 눈치를 보더니 슬금슬금 방을 나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은 직후 클로디아가 다시 말했다.
“당신이 싫어요.”
“…알고 있습니다.”
“왕족에 대한 예의도, 배려심도 없고 심지어 무례함을 솔직함으로 포장하다니. 단 하나도 변하지 않았군요, 당신은.”
“송구합니다.”
검은 머리카락의 남자는 딱딱한 얼굴로 고개를 숙여 보였다. 클로디아는 손을 뻗어 문을 가리켰다.
“당장 나가세요. 꼴도 보기 싫어요.”
“…피해 상황을 점검하고, 기사단의 저녁 점호 후 보고 때 뵙겠습니다.”
“필요 없어요.”
클로디아의 모진 말에도 데미안 알파는 고집스럽게 고개를 숙이고, 왕족에 대한 예의를 취한 채 뒤돌아 나갔다. 그가 나가자마자 노바라가 클로디아에게 눈물을 닦을 손수건을 내밀었으나, 그녀는 노바라의 손을 밀어냈다.
“시간 없어. 세숫물이나 가져와.”
노바라는 놀라웠다. 클로디아는 보기 드물게 화가 나 있었다. 이 정도로 화가 난 것은 어릴 적부터 클로디아의 곁을 지켜 온 노바라도 몇 번 보지 못했다.
노바라는 그런 클로디아를 건드리면 곤란해진다는 것도 알았다. 그래서 그녀도, “찬물을 가져올게요.” 하며 총총 사라지기를 택했다.
***
하늘섬의 국민들은 밤새 불안에 떨었으나, 다음 날 오후 뜻밖의 소식을 듣게 되었다. 포르투 전역에 통신 도마뱀을 통해 전해진 소식은 다음과 같았다.
‘포르투를 수호하는 힘, 디자이어가 현신해 클로디아 테 포르투 공주님을 돕는다!’
‘클로디아 공주님은 직접 마왕을 무찌르러 나서시기로 했다!’
‘디자이어는 그런 클로디아 공주님의 용기에 감화되어 직접 초대 포르투 국왕의 손에 쥐어졌던 검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공주님은 검이 된 디자이어를 앞세워 전 대륙에 퍼져 있는 마왕의 공포를 불사르실 것이다!’
포르투의 국민들은 환호했다. 클로디아 공주님이 쥬버린 왕자님을 구하다니!
대저 포르투에서 클로디아 공주는 현명하고 아름다운 공주로 이름나 있었다. 본래 쥬버린 왕자 때문에라도 단 한 번도 정치에 손댄 적 없었으나 위급 상황에 그 몸을 아끼지 않고 용감히 나선 공주를 위해 국민들은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파괴된 포르투 왕성의 재건을 위해서 왕성에 가서 일을 시켜달라고 청한 것이다. 마왕의 습격이 있고 나서 사흘간 국민들은 겁이 나 집 밖에 나오지 않았으나, 가냘픈 여인의 몸으로 검을 잡고 나선 클로디아 공주의 이야기를 들으니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왕성의 돌이라도 나르게 해 주세요!”
“기꺼이 돕겠습니다!”
클로디아 공주에게 감화된 사람들이 왕성 앞에 줄을 섰다. 여인들은 다친 사람들을 위해 구호소에서 물을 끓이고 붕대를 감았다. 남자들은 무너진 왕성을 다시 세우고, 아직도 성 밑에 묻혀 있는 사람들을 구조하려 애썼다.
클로디아 공주는 국민들의 성원에 감화되어 눈물을 흘렸다…고 전해졌으나.
정작 클로디아 본인은 화가 나 있었다.
목욕을 하고, 화장을 하고, 머리를 틀어 올리면서도 내내 화를 진정시키지 못했다. 그러나 그녀는 공주였다. 공주라는 직함을 가진 자는 무릇 화를 바깥에 드러내면 안 되는 법이다. 그녀는 타고난 우아함으로 제 화를 드러내지 않는 데 성공했고, 웃으며 국민들을 안심시켰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의 내실에 틀어박혔다. 어차피 그 밖의 일은 대신들이 다 하니 상관없었다. 그녀는 무릎에 얼굴을 묻고 생각했다.
디자이어의 말이 맞았다.
쥬버린이 가장 나빴다.
쥬버린은 그 순간에도 제 행복을 바란다고 말하며, 포르투를 버리라고 했다. 자신은 이대로 죽음을 맞아도 상관없으니 클로디아는 행복한 결혼을 하라고.
클로디아는 행복한 결혼이 좋은 인생을 만들어준다고 믿었으나, 역시 쥬버린의 말이 이상하다는 것쯤은 알았다. 공주는 비록 국정을 잘 몰랐으나 머리가 나쁘지는 않았다. 그녀는 오히려 영리한 축에 속했다.
다만 쥬버린은 그녀에게 머리 아픈 공부는 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고, 그래서 클로디아는 다른 것을 배웠다. 드레스의 색 조합이라거나, 예쁜 자수를 놓는 법이나, 화장품을 조합해 피부를 좋게 만드는 법.
남자에게 사랑받는 법. 여자의 인생을 꾸리는 방법.
어떤 구두가 드레스에 잘 어울리는지, 보라색이 초록색과 어울리지 않는 이유라든지. 아니면 제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지만, 그녀를 욕하는 아가씨들의 속마음 같은 것도 잘 알았다. 눈치가 빨라 제 뒷말을 하는 사람들도 금방 알아챘다.
국정은 배우지 않아 몰랐을 뿐이다.
그녀는 그래서 알아차렸다.
쥬버린이 제게 준 사랑이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걸.
공주이기 때문에 알고 있었다. 자신이 누리는 사치, 허영, 좋은 옷과 비싼 보석, 맛있는 음식 같은 것에는 반드시 의무가 따른다는 것을.
그래서 클로디아는 그간 국가 행사에 성실히 나갔다. 도망치지도 않았다. 공주로서 얼굴을 보여야 할 때는 꼭 나갔다. 가끔 꾀병을 부리기는 했지만, 그건 쥬버린이 충분히 커버할 수 있는 날뿐이었다. 쥬버린이 지독히 바쁠 때는 자신도 얼굴을 비추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지금 행복한 결혼을 하겠다고 도망치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니, 아주 나쁜 것이었다. 손가락질당할 만한 일이었다. 그것은 행복이 아니었다.
‘오빠는 대체 나에게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지?’
와락 울음이 나왔으나 그녀는 눈물을 참았다. 하도 울어 얼굴이 퉁퉁 붓고 입술은 부르튼 차였다.
너무 많이 울면 눈가가 짓물러서 상처가 난다는 것을 클로디아는 이번에 처음 알았다. 국민들 앞에 나설 일이 없었다면 화장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화장을 지우고 싶었으나 여의치 않았다. 곧 수르 알파가 올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성실한 그 남자는 제가 한 말을 지킬 것이었다. 클로디아는 제가 흐트러진 모습으로 그의 앞에 서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물론 지난 새벽과 오늘 오전에는 어쩔 수 없었지만. 슬립 드레스 차림에, 화장도 하지 않은 얼굴로 그 남자 앞에서 엉엉 울어댄 건 아직도 짜증 나는 일이었다.
게다가….
‘왕자님의 말씀을 들으시는 것이 훨씬 편하실 겁니다.’
그 또한 쥬버린과 같은 말로 자신을 무시했다. 아니, 더 나빴다! 클로디아는 주먹을 꾹 쥐었다. 길게 길러 다듬은 손톱이 손바닥을 아프게 파고들 정도로.
너 같은 여자애가 대체 뭘 할 줄 알겠어? 너는 못 해. 꿈도 꾸지 말고 시집이나 가. 쥬버린 왕자 말이니까 지켜주긴 하겠지만.
데미안은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지만, 클로디아는 그가 그런 눈을 하고 자신을 내려다봤다고 생각했다.
정말이지 예전부터 너무 싫은 남자였다. 한때는 자신이 그와 약혼했었다는 사실도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어.’
클로디아는 자르지스에 가겠다고 결심한 차였다. 혼자서는 도저히 불가능했다. 그의 도움을 받아야만 했다.
똑똑.
정말, 제 생각만 하면 귀신같이 찾아오는 남자였다. 클로디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들어오세요.”
데미안 알파는 절도 있는 걸음으로 들어와 클로디아의 앞에 섰다. 아침과 달리 정돈된 복장이었다. 그녀와 마찬가지로.
“데미안 알파입니다. 부름을 받고 왔습니다.”
정말이지 정떨어지는 남자였다. 그가 데미안 알파인 건 알고 있다. 그녀가 불러서 온 것도 맞다. 한 번쯤은 생략할 만도 한 인사를 그는 언제나 절도 있게 했다. 그녀와 약혼했을 시절에도.
클로디아의 머리가 지끈거렸으나 그녀는 놀라운 인내심으로 그것을 참았다.
“수르 알파.”
“예.”
“저와 함께 자르지스에 가 주세요.”
“예.”
의외로 순순한 대답에 클로디아는 깜짝 놀랐다. 그가 반대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클로디아는 반격의 대답을 몇 개나 준비했던 터다. 그러나 데미안은 조금의 이의도 제기하지 않았다.
“…반대하지 않으시나요?”
“예.”
“어째서죠?”
명령한 사람이 묻는 것도 뭐 했지만, 클로디아는 정말로 궁금했다. 데미안은 잠시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대답해야 합니까? 명령이시라면 대답하겠습니다.”
“….”
클로디아는 저도 모르게 이를 악물고 싶은 걸 참았다. 사각턱 된다.
이 남자는 원래 이렇게까지 삐딱하진 않았던 것 같은데. 파혼한 이후로 더 그녀를 피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여기서 화를 냈다가는 죽도 밥도 안 된다. 클로디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예. 대답해주세요.”
“…전하께서는 하겠다고 결심하신 건 언제나 하셔야 직성이 풀리는 분이니까요.”
…죽이든 밥이든 알 게 뭐야. 클로디아는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었다. 정말이지 좋은 말이라곤 한마디도 해주지 않는 남자였다.
“그게 다입니까?”
“예.”
“다른 이유는 없습니까?”
클로디아의 말에 남자가 멈칫했으나 이내 고개를 저었다.
“예. 쥬버린 왕자님의 말씀도 전하를 경호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전하께서 자르지스에 가신다면 저도 그곳에 가야겠지요.”
“좋아요. 우리에게 시간이 얼마나 남았지요?”
“…최대 3년입니다. 정확히는 2년 8개월 정도.”
그녀는 뒷목이 뻐근해져 오는 것을 느끼고 노바라에게 눈짓했다. 한쪽에 서 있던 노바라가 조심스럽게 다가와 그녀의 어깨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클로디아는 제 앞에 있던 테이블을 두들겼다. 데미안은 그녀의 수신호에 테이블로 다가왔다.
“좋아요. 그러면 여정을 짜 보도록 하죠.”
데미안은 묵묵히 테이블을 내려다봤다. 테이블 위에는 세계 지도가 있었다. 네 개의 대륙과 그 위에 떠 있는 하늘섬. 그리고 따로 떨어져 있는 자르지스. 남자는 공주에게 ‘진심이십니까?’ 혹은 ‘어떻게 하시려고요?’ 같은 것을 묻는 성격은 아니었다. 그는 쓸데없는 것을 싫어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뭔지를 정리해보고, 가는 길을 모색해보도록 해요. 저는 보다시피 아무것도 몰라요. 여행 전문가와 호위 기사들을 좀 차출해야 할 것 같아요.”
“필요 없습니다.”
“….”
데미안은 대번에 클로디아의 말을 잘라 버렸다. 클로디아는 눈썹을 들어 올렸으나 그에게 짜증을 내지는 않았다. 그녀는 정말로 비전문가였기 때문이었다.
미용은 스페셜리스트에게. 그녀의 신조였다. 섣부르게 피부 손질을 해보려다가 얼굴에 뾰루지가 나 버린 역사가 몇 번이던가.
아마 여행도 같을 것이다. 자신보다는 데미안이 낫겠지. 적어도 그녀는 자신이 모르는 것에 관해서는 함부로 나서지 않았다.
“어차피 남부 대륙에서 자르지스로 가려면 배를 타야 합니다. 배에는 열 명 남짓밖에 타지 못한다고 디자이어가 말했습니다. 굳이 호위기사며 전문가를 부른답시고 일행을 늘려, 마왕에게 공주님의 여정을 노출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위험하지 않을까요?”
“대신 마법사를 고용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마법사요?”
“예.”
데미안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늘섬에서 내려가자마자 마법사 길드로 가셔서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 낫겠습니다. 하늘섬에는 마법사 길드가 없으니까요. 여기서 전령을 보내는 방법도 있지만, 길드에서 여기까지 전령이 왔다갔다 하며 서신을 보내는 것보다는 훨씬 빠르겠지요.”
“…어떤 도움이요?”
“가는 길까지 우리를 보호하고 공주님의 체력을 회복시키는 것을 말하는 겁니다.”
클로디아는 발끈하고 말았다.
“제 체력이 왜요?”
“…전하께서 무도회에서 열 곡을 연달아 추실 수 있는 분이라는 걸 압니다. 하지만 여행은 다릅니다.”
데미안이 말을 이었다. 클로디아는 그 남자가 건방지다고 생각했으나 그의 말이 맞았다.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을 뿐이었다.
“회복과 경호를 도울 마법사가 필요합니다.”
“체력을 기를게요!”
“시간이 십 년 정도 남았다면 저도 그쪽이 훨씬 낫다고 말씀드렸을 겁니다.”
‘아…. 재수 없어….’
클로디아는 생각했다. 정말 싫다. 남자의 말은 모두 옳았으나 짜증 났다. 원래 맞는 말 하는 놈이 가장 얄미운 법이다.
“그다음엔 남부로 내려가 배를 구해야겠죠. 작은 배면 충분하겠지만, 배를 몰 수 있는 인력도 필요한 게 문제입니다. 자르지스까지 동행할 만한 사람이 있는지가 가장 문제군요.”
[앗, 그건 내가 도울 수 있어!]
“깜짝이야.”
잠자코 클로디아의 의자 옆에 기대어 있던 디자이어가 갑자기 끼어들었다. 클로디아는 화들짝 놀랐다가 말했다.
“너 자는 거 아니었니?”
[나는 안 자! 아무튼 배를 몰 걱정은 안 해도 돼! 내가 몰 거니까!]
“너한테 선장의 재능도 있었니?”
[아냐. 그게 아니라…. 세계수 있잖아?]
“아, 응.”
[세계수의 재질로 배를 만들면 돼!]
디자이어는 어리둥절한 클로디아에게 빠르게 설명했다. 세계수는 디자이어와 상성이 맞는 거대한 풀덩굴이다. 그러나 그 재질은 단단했고, 배를 만들기도 나쁘지 않았다. 디자이어와 마력 상성이 잘 맞으니, 세계수로 배를 만들면 충분히 몰고 자르지스로 갈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세계수를 베어 버리면 하늘섬은 추락하잖아?”
[아이, 그 세계수를 말하는 게 아냐. 세계수의 씨앗을 심어 기르면 되지.”
“씨앗? 그런 게 있어?”
“예. 있습니다.”
뜻밖에도 고개를 끄덕인 것은 데미안이었다.
“디자이어가 심어 기르는 세계수의 씨앗을 구해오는 건 대대로 포르투의 기사단장이 해오던 임무입니다. 저도 해왔지요.”
“아…. 그럼 남는 씨앗 있어요?”
클로디아는 질문하면서도 자신이 조금 멍청해 보인다고 생각했다. 데미안은 고개를 저었다.
“세계수의 씨앗은 숲 거인 종족이 기릅니다. 귀하기 때문에 포르투에도 삼 년에 한 번씩 단 다섯 알만 내어 주지요. 게다가 최근에 새로 받아와 세계수를 바꿨지 않습니까? 쉽게 내주진 않겠죠.”
[하지만 세계 멸망이 달렸는데 내주지 않을까?]
데미안이 고개를 저었다.
“잘 모르겠습니다. 가봐야 알겠죠.”
“씨앗을 받았다 해도…. 기르는 데 오래 걸리지 않을까요?”
[아냐. 세계수는 거인들의 생명수를 뿌리면 금방 자라. 눈 깜짝할 새에 집채만큼 자라니 문제없어!]
디자이어가 으스댔다. 클로디아는 한숨을 쉬었다.
“그러면 일단 마법사를 구하고, 거인에게 가서 세계수 씨앗을 받으면 되겠군요.”
“예. 그 후에 솜씨 좋은 조선공을 구해 배를 만들고, 자르지스로 들어갑니다. 여기서부터가 문제죠.”
데미안은 표정을 굳힌 채 지도를 가리켰다. 자르지스였다.
“자르지스는 그곳에 들어가 본 이들이 없어 안쪽이 어떤 구조로 되어 있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들어가서 지도부터 구해야 할 겁니다. 사실 지도가 있는지조차도 알 수 없습니다.”
“아….”
그때 디자이어가 말했다.
[나는 다녀와 본 적 있는데!]
데미안이 곧장 받아쳤다.
“하지만 그게 벌써 몇백 년 전이잖습니까. 그것도 초대 국왕 전하와 함께한. 지금 그곳은 마족들끼리만 몇백 년을 살아온 둥지니까요. 마족들이 우리같이 지도를 보는 종족이 아닐 수도 있으니 여전히 지도의 존재 여부는 미지수입니다.”
클로디아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릅니다. 그러니 전하. 미리 약조를 받고 싶습니다.”
데미안이 뜻밖의 이야기를 하기에 클로디아는 얼떨떨하게 고개를 들었다. 데미안의 검푸른 눈이 클로디아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무슨….”
“제게 매일 아침 훈련을 받으십시오.”
“훈련이요?”
“예. 디자이어를 전혀 다루지 못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남자의 눈길이 클로디아 옆의 디자이어를 향했다. 가벼운 세검이었다면 클로디아도 들고 휘두르는 정도는 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디자이어는 누가 봐도 대검이었다. 태초에 포르투를 수호하기 전부터 검의 형태를 하고 있었기에 모습을 바꾸기 어렵다고 디자이어는 토로했다. 그렇다면 클로디아가 디자이어에 맞출 수밖에 없었다.
“…네.”
“적어도 마왕의 심장에 칼을 꽂아 넣으려면 디자이어를 들고 중심 정도는 잡을 수 있으셔야 합니다. 마왕은 단신으로 쳐들어와 포르투 왕성을 반파시킨 강자입니다.”
클로디아는 입을 닫았다. 그렇다. 마왕은 단신으로 쳐들어왔다. 믿을 수 없지만, 아무르의 수호를 혼자 뚫고 성을 폭파시켰다. 화약의 도움을 받았다지만, 무서운 실력을 가졌음은 분명했다.
“마왕이라고 얌전히 앉아서 칼을 받진 않을 겁니다. 마법사도 그래서 구하는 것이고요. 속박 마법을 쓸 수 있어야 합니다. 운이 좋아 그를 얌전히 만든 후 칼을 박아 넣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안 된다면 적어도 기회 포착 정도는 할 수 있는 실력이 되셔야 된다고 봅니다.”
“…그게 어느 정도인데요?”
데미안의 눈은 흔들리지도 않았다. 클로디아는 식은땀을 흘렸다. 그녀도 가끔 지나가다가 포르투의 호위기사단이 훈련하는 모습을 본 적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사들도 머리를 짧게 박박 깎고 거의 헐벗다시피 하며 칼을 휘둘렀다.
“저도 모릅니다. 공주님이 완전히 재능이 없으실 수도 있죠. 그때는 다른 방법을 강구해야 하겠지만, 그래도 훈련은 계속 받으셔야 합니다. 체력은 길러야 하니까요.”
“…알겠어요. 하지만….”
클로디아는 망설였다. 그녀가 훈련을 받기 싫은 이유는 따로 있었다. 데미안은 기사들을 훈련시킬 때 너무나 엄격했기 때문이다. 클로디아와 약혼 관계일 때, 그녀는 딱 한 번 데미안이 휘하 기사들을 부리는 훈련장을 찾아가 본 적 있었다. 데미안은 서슬 시퍼렇게 기사들을 굴렸다. 소리 지르기 일쑤였으며, 어처구니없는 실수로 칼을 떨어트린 신입 기사에게는 ‘세상에 비할 데 없는 멍청한 놈’이라고 일갈했다.
그때 클로디아는 처음 보는 그의 모습에 놀라 울먹거렸다.
“…모멸감을 주시지 않겠다고 약속하세요.”
“모멸감이요?”
그래서 클로디아는 데미안에게 다짐을 받아내기로 했다. 데미안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수르 알파가 동료들을 훈련시키는 방식이 저와 안 맞을 수도 있잖아요. 열심히 하겠다고 약속은 하겠지만….”
“…알겠습니다.”
그는 뜻밖에도 수더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클로디아는 그제야 안심했다. 훈련을 해야 한다는 것도 납득했다. 열심히 해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자신은 초보자다. 그때도 클로디아는 신입 기사에게 소리 지르는 데미안을 보며 너무하다고 생각했다.
초보 신입 기사가 실수할 수도 있는데, 그렇게 뭐라고 하면 너무 불쌍하잖아.
그리고 클로디아 또한 그런 소리를 듣지 않으리라는 법 없다. 클로디아는 대부분의 일들은 그러려니 하며 넘길 수 있었지만, 이 남자가 제게 멍청하다고 소리 지른다면 그건 정말로 견딜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어떤 것을 걱정하시는지 알겠습니다. 저도 물론 제 부하들을 대하듯 전하를 대하지는 않을 겁니다. 그럼….”
남자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지금부터 전하를 로드라고 부르겠습니다.”
“…로드요?”
“예. 딱히 틀린 호칭도 아닙니다. 쥬버린 전하가 잠드신 지금, 전하께서 지금 포르투의 통치권을 가지고 계시니까요.”
그 말이 맞았다. 훈련할 때도 그녀를 로드라고 부르게 되면, 아마 그는 폭언을 하려다가도 멈칫하게 되지 않을까, 하고 클로디아도 생각했다. 합리적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세요.”
“예, 로드.”
…그게 묘하게 클로디아의 애칭 같다는 건 넘기기로 했다.
***
채비는 빠르게 이뤄졌다. 노바라는 거의 엉엉 울면서 클로디아의 짐을 챙겼다. 충성스러운 노바라는 클로디아를 따라나서겠다고 했지만, 데미안에게 일언지하에 거절당했기 때문이다.
“로드 하나로도 힘듭니다. 무력이 전혀 없는 사람을 둘이나 지키기엔 제 여력이 부족합니다.”
데미안의 차가운 말에 노바라는 ‘제 목숨을 잃어도 상관없다’고 나섰으나, 노바라의 가족들에게는 상관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결국 클로디아는 데미안과 단둘이 포르투를 떠나게 됐다.
[나까지 셋이지!]
…디자이어까지 셋이었다.
출발일 이틀 전 저녁이었다. 클로디아의 옷을 만들던 재단사들은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으로 그녀의 여행복을 펼쳐 놨다.
“저희가 이런 옷을 만들게 될 줄은 몰랐어요….”
“하지만 공주님의 아름다움이 감춰지지 않는 옷을 만들었답니다. 조금이나마 위로를….”
여행복은 정말로 튼튼해 보였다. 최고급 가죽으로 된 바지와 벨트, 목 보호대만 봐도 그랬다. 안의 셔츠는 부드럽고 질긴 섬유였다. 그리고….
“안 됩니다.”
“왜요!”
그녀의 여행복 차림을 점검한 데미안이 딱 잘라 말했다. 재단사가 반발했다.
“추울 땐 따뜻하고, 더울 땐 시원한 섬유입니다!”
“장식이 쓸데없이 많잖습니까? 공주님한테는 무리입니다.”
“뭐가 무리라는 겁니까? 이것보다 더 화려한 옷을 천 벌은 가지고 계시다고요!”
재단사의 말에 데미안이 정말 짜증난다는 표정이 됐다.
“로드께서 이런 프릴 달린 옷을 제대로 빨래하실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쿠궁. 모두의 얼굴이 한 대 얻어맞은 표정으로 바뀌었다.
“…빤다고요?”
“예.”
“공주님이요?”
“그럼 누가 빨 것 같습니까?”
노바라가 현기증 난다는 표정을 했다. 재단사는 기가 막힌 얼굴이 됐다.
“도시마다 여관에서 세탁 서비스를 받으면 되지 않습니까!”
데미안은 정말 짜증이 난 것 같았다. 참을 이유도 없었다. 재단사는 데미안보다 한참 지위가 낮았다.
“지금 로드가 소풍 간다고 생각하나!”
그의 일갈이 재단사의 귓구멍을 관통했다. 데미안은 화난 얼굴로 소리 질렀다.
“자르지스에 여관과 세탁 서비스가 있을 것 같나?!”
“하, 하지만….”
재단사가 울먹였다.
“공주님의 귀여움을 살리려면….”
“…로드. 제가 이 재단사를 벌하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데미안은 뜻밖에도 클로디아를 향해 말했다. 클로디아가 놀라 답했다.
“벌…이요?”
“로드께서 어떤 마음가짐으로 포르투를 구하러 나섰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심지어 로드를 기만하고 있습니다.”
“기만…은 아닌 것 같은데요.”
재단사가 바들바들 떠는 것을 보며 클로디아가 애써 말했다. 그녀는 손사래를 쳤다.
“재단사는 언제나 내가 좋아할 법한 아름다운 드레스만 만들어오던 사람이에요. 그의 직업 정신도 이해해주어야 해요.”
“저는 재단사의 직업 정신은 항상 옷을 입을 사람에게 가장 적합한 옷을 만들어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름다움도 때론 그 적합함에 속하죠. 너무 탓하지 말아요.”
클로디아는 재단사에게 다가가 방긋 웃었다.
“고마워요. 하지만 수르 알파가 저렇게 말하니, 장식을 조금만 줄여주면 좋겠어요.”
그리고 그녀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빨래와 장식이 무슨 상관이죠? 장식이 많으면 다 빨면 되잖아요.”
“…때가 좀처럼 지지 않는 데다가 마르는 시간도 많이 걸립니다. 비효율적이에요. 힘드실 겁니다.”
“수르 알파, 설마 전하에게 정말로 매번 빨래를 시키시겠다는 말씀이세요?!”
데미안의 말에 시녀 하나가 화들짝 놀라 물었다. 데미안은 눈을 가늘게 뜨고 시녀와 클로디아를 번갈아 보다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어지간하면 제가 할 겁니다. 하지만 다들 염두에 두셔야 할 게 있는데.”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클로디아는 눈을 깜박였다.
저 수르 알파가 내 빨래를 한다고?
뭐라 묻기도 전에 데미안이 말을 이었다.
“이 여행은 제가 죽어도 계속돼야 합니다. 공주님이 혼자 남으셨을 때를 다들 염두에 두시기 바랍니다.”
뜻밖의 심각한 이유였다. 갑자기 좌중이 숙연해졌다. 클로디아도 뭐라 말하려다가, 그냥 관뒀다. 맞는 말이었다.
대신 클로디아는 자신이 입은 셔츠의 소맷깃을 봤다. 과연 소맷단에 가득한 프릴과 귀여운 리본들은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녀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곤 재단사에게 말했다.
“그러면 우리 타협해요. 시간이 얼마 없긴 하지만…. 내 블라우스 중에 소매산이 봉긋하고 끝단에 넓은 프릴이 달려 걷을 수 있게 된 것이 있죠?”
“예, 예!”
“그것과 같은 것을 조금 길게 만들어줄 수 있겠어요?”
“가능합니다!”
“좋아요. 추울 때는 목에 두를 수 있게 크라바트도 달아 줘요.”
“알겠습니다!”
재단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클로디아는 데미안 들으라는 듯 속삭였다.
“앞섶에 살짝 자그마한 핀턱 정도는 넣어도 돼요. 저도 예쁜 게 좋아요.”
“예!”
“아, 가죽 셔츠 끝단에 작게 장식도 넣어줄 수 있나요? 그리고 뷔스티에는 핑크색으로 해주세요.”
“얼마든지요!”
잠깐의 대화 끝에 재단사는 무슨 일이 있어도 다음 날 저녁까지 공주의 마음에 쏙 드는 사랑스럽고 편한 여행복을 만들어오겠다고 다짐하며 나갔다. 그다음은 궁내부장이었다. 궁내부장은 한숨을 쉬며 공주에게 배낭 하나를 내놨다.
“포르투의 보물창고를 하루 꼬박 뒤진 끝에 찾아왔습니다. 마법 배낭입니다.”
“어머나!”
궁내부장은 배낭의 입구를 쩍 벌렸다. 배낭은 작은 항아리만 했지만, 그 입구는 엄청나게 늘어났다.
“꽤 많은 물건을 최대 90일까지 안전하고 신선하게 보관하실 수 있습니다. 무게는 거의 느껴지지 않을 정도죠.”
그 안에 시녀들이 그녀의 물건을 차곡차곡 챙겨 넣겠다고 말했다. 데미안과 함께 여행하며 쓸 돈과 식량, 그리고….
“잠깐. 그건 왜 넣는 거지?”
“예?”
노바라가 고개를 갸웃했다.
“공주 전하께서 어디에 가시든 부끄럽지 않게 해드리기 위한 거예요.”
“…로드께서 드레스를 입을 일이 대관절 어디 있단 말이야?”
시녀가 챙겨 넣는 것은 아름다운 드레스였다. 비교적 간단하게 입을 수 있긴 하지만, 그래도 클로디아가 한껏 끌어안아야 할 정도의 부피였다. 노바라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전하께서 여행하면서 어떤 왕족도 만나지 않으시리라고 장담하실 수 있나요? 최소한의 품위는 챙기셔야죠. 명색이 포르투의 왕위 계승자이신데.”
“좋은 지적이군. 그렇지만 그대의 말에는 어폐가 있는데.”
“뭐죠?”
“로드. 저 드레스를 혼자 입으실 수 있습니까?”
클로디아가 눈을 깜박였다.
‘드레스는 혼자…. 입으려면 못 입을 것도 없긴 하지만…. 구겨진 것도 펴야 하고….’
“기각.”
“저 아직 대답 안 했어요, 수르 알파.”
“바로 대답이 안 나오면 못 입는 겁니다. 애초에 로드께서는 유람 여행을 떠나는 게 아닙니다.”
노바라가 투덜대며 드레스를 치웠다. 그러나 그녀는 실크 잠옷 드레스 한 벌만은 포기하지 않았다.
“전하는 실크가 아니면 제대로 주무시지 못한단 말이에요!”
데미안은 머리가 지끈거리는 듯 이마를 짚었다. 클로디아는 일부러 데미안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그는 제발 이 시녀들을 클로디아가 말려주길 바라는 듯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지만, 글쎄. 클로디아는 시녀들에게 더 하라고 응원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건 얼굴이 타지 않게 하는 크림이에요. 전하, 매일 아침 꼼꼼히 발라주세요. 거울도 같이 넣을게요.”
“응응. 나 입술이 트지 않게 하는 크림도 같이 넣어 줘.”
“물론이죠! 공주님, 그리고 이건….”
그렇게 몇 개의 크림과 거울, 화장수가 배낭에 들어갔다. 노바라가 분홍색 커다란 주머니를 꺼냈을 때, 데미안은 폭발했다.
“그만 좀 하십시오.”
그는 노바라의 손에서 분홍색 주머니를 빼앗았다. 노바라가 놀라 데미안에게서 주머니를 돌려받으려고 했으나, 키가 엄청나게 큰 기사단장에게서 일개 시녀가 뭔가를 빼앗는 것은 불가능했다.
“돌려주세요! 그건 꼭 필요한 거라고요!”
“아까부터 필요하지 않은 것만 계속해서 나오고 있지 않나? 대관절 이건 또 뭐야?”
“열지 마세요!”
“쓸모없는 거니까 열지 말라는 거겠지.”
데미안은 그 주머니를 열어 탈탈 바닥으로 털었다.
투둑.
툭.
그리고 그 결과 그 자리의 모두가 굳어버렸다.
주머니에서 떨어진 것은 생리대였기 때문이다.
그렇다. 장기간의 여행을 떠나는 여자들이라면 누구나 챙길 만한 물건이었다. 덧붙여 언제 끝날지 모를 공주님의 여행을 위해, 노바라는 정말로 주머니가 빵빵하도록 생리대를 챙겨 넣은 참이었다. 그러나 그 모든 생리대가 바닥에 흩어졌고, 시녀들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데미안의 얼굴이라고 멀쩡하진 않았다. 그 또한 이마 끝까지 새빨개져서 잠시 말을 잃었고, 노바라가 소리 질렀다.
“난 몰라!! 제가 열지 말라고 했잖아요, 수르 알파!!”
그리고 클로디아는 대노했다.
“당장 나가요, 수르 알파!!”
포르투의 기사단장은 두말하지 않고 그대로 쫓겨났다. 물론 쫓겨나기 전에 뭐라 더듬대며 사과를 하려고 했으나, 클로디아는 그마저도 듣지 않고 밀어내 버렸다. 시녀들이 가장 열심히 데미안의 어깨를 밀어낸 건 물론이다. 노바라는 진짜로 엉엉 울면서 생리대를 주워 모았다.
“전하, 안 가시면 안 돼요? 저는 정말로 저 둔해빠진 수르 알파와 전하가 함께 가셔야 한다니 안심할 수 없어요!”
“…거기에 흔쾌히 안 가겠다고 말할 수 없는 게 나의 비극이란다, 노바라.”
시녀들 또한 문을 닫은 다음 주절주절 데미안을 욕했다.
“미쳤나 봐요! 대체 자기가 뭐라고 공주님의 짐을 검사하는 거예요?!”
“아까 봤어요? 공주님이 혼자 남아서 빨래를 해야 한다잖아요!”
“세상에, 공주님을 지킬 생각은 하지 않고. 공주님, 이 크림은 손을 곱게 유지해주는 크림이에요. 꼭 바르셔야 해요.”
노바라가 눈물을 찍어내며 칭얼댔다.
“공주님. 저는 정말 걱정돼 죽겠어요. 이게 뭐예요. 예쁜 귀걸이 하나 못 챙겨가고.”
“…여행이 아니잖니.”
클로디아는 혀를 내밀었다.
“하지만 나도 역시 얼마 전에 받은 장미석 귀걸이는 포기할 수 없어서, 몰래 챙겨 넣었단다.”
“앗, 그거 공주님께 정말 잘 어울려요. 잘하셨어요.”
“그렇지?”
“참, 공주님. 이 빗은 머리카락의 윤기를 유지해주는 마법이 걸려 있어요. 매일 아침 한 번씩만 빗으시면 하루종일 머리가 찰랑거릴 거예요.”
“이 가죽 부츠는 통기성이 좋고 공주님의 발을 보호해주는 마법이 걸려 있습니다.”
궁내부장이 한몫 거들었다. 그가 가지고 온 부츠는 낡아 보였으나, 보물 창고에서 가장 오래된 마법이 걸려 있는 유물 중 하나라고 궁내부장은 말했다. 클로디아는 신기해하며 부츠를 신어보았다. 신을 때는 좀 큰 듯했으나, 그녀가 신자 사이즈가 줄어들어 그녀의 발에 잘 맞는 편안한 부츠가 됐다.
“어머, 신기해라.”
“포르투에는 고대부터 내려온 마법 물건이 많으니까요. 초대 포르투 국왕께서 청년 시절 모으신 물건들인데….”
“백 개의 왕국을 다스리는 곳이잖아요! 포르투의 보물 창고에 그런 물건이 없으면 어떻겠어요?”
[아, 그 보물창고에 아마 그것도 있을 텐데. 궁내부장. 좀 뒤져봐. 작은 은제 컵이 있는데 아마 어떤 물이라도 깨끗한 물로 바꿔주는 컵일 거야.]
“오오! 그런 게 있습니까?”
디자이어가 참견했다. 궁내부장은 반색하며 보물창고로 달려갔다. 클로디아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디자이어를 바라봤다.
“너 잘 안다?”
[포르투의 보물창고는 내가 가장 잘 알지.]
디자이너가 콧대를 높였다. 계속해서 시녀들이 짐을 챙겨 넣었다. 맛 좋은 양념이 된 육포와 소금, 말린 과일과 금화 주머니와 보석들.
“캐러멜도 넣을까요?”
“초콜릿도 넣어요! 기분이 안 좋을 때 드시면 좋을 거예요!”
“맞아. 수르 알파 같은 사람과 여행하는데, 수시로 기분이 나빠지실 거예요. 제가 얼른 가서 간식거리를 챙겨달라고 할게요!”
그렇게 새벽이 될 때까지 짐 챙기기가 계속됐다. 웃음이 새어 나오는 공주의 방 앞을 당번 시종들이 지나가다 기웃댔다.
***
공주가 떠나는 날짜는 극비에 부쳐졌다. 공주가 마왕을 무찌르러 떠나는 것 자체는 떠들썩하게 알려졌으나, 여정이 알려지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그래서 데미안은 클로디아와 아예 그날 저녁에 떠나기로 했다. 포르투 밑의 동력 지대가 완전히 깜깜해지는 것을 기다리기 위해서다. 하늘섬인 포르투의 자원 공급을 맡고 있는 포르투 아래쪽의 어두운 땅. 햇빛을 항상 하늘섬이 가리고 있어 낮에도 어둡지만, 밤에는 완전히 새까맣게 변했다.
두 사람은 동력 지대로 가는 입구 앞에서 해가 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조금 후 이곳을 통해 지상에 내려가면 눈에 크게 띄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클로디아는 동력 지대로 가는 낡은 승강기를 보고 겁에 질렸다. 하늘섬의 외진 곳 구석에 설치돼있는 승강기는 오랫동안 사람이 타지 않아 녹슬어 있었다. 데미안도 한숨을 쉬었다. 동력 지대는 거의 버려진 곳이나 마찬가지라, 오가는 사람이 없을 거라는 건 알았지만 이건 정도가 심했다.
마중 나온 시녀들은 아까부터 울고 있었다. 내무대신과 외무대신은 계속 한숨만 쉬고 있었다. 클로디아가 없어지면 당분간 두 사람이 포르투를 다스려야 하니 당연했다.
“공주님, 보고 싶을 거예요.”
“아아, 공주님의 손톱이….”
클로디아의 손톱을 매주 손질하던 시녀가 눈물지었다. 햇살 좋은 오후에 손톱에 마법약을 바르고 보석을 얹던 그녀는, 아무것도 없이 매끈한 클로디아의 손톱을 보고 세상이 무너질 것 같은 표정이 됐다.
그뿐만 아니다. 매일 클로디아의 머리를 구불구불하게 말아주던 다른 시녀도 하나로 높이 묶은 그녀의 머리카락을 보고 평민 같다며 슬퍼했다. 그녀가 가죽 바지를 입은 모습을 본 재단사의 표정도 씁쓸했다. 아무튼 그런 종류의 슬픔은 끝도 없었다.
하지만 정작 클로디아는 다른 것이 가장 짜증 났다. 바로 등에 진 디자이어였다. 디자이어는 대검치고는 가벼웠지만, 어쨌든 그녀가 그 검을 허리춤에 차고 걸어 다닐 수는 없었다. 키가 큰 편임에도 불구하고 클로디아는 디자이어를 등에 져야 했고, 자연스레 허리가 굽었다. 매일 무거운 드레스를 입고 높은 구두를 신고도 꼿꼿이 걸었던 클로디아에게는 정말 싫은 자세였다.
“동력 지대에 뭐가 있을지 모르겠군요. 제가 먼저 내려갈 거긴 하지만 조심하십시오.”
“네에.”
클로디아의 마법 배낭은 데미안이 졌다. 배낭이 있는 이상 다른 짐을 지고 갈 필요가 없어서다. 데미안 또한 항상 성에서 입던 기사단장의 제복 대신 허름한 여행복을 입고 있었다. 눈에 띄지 않기 위해서였다. 유일하게 그가 두른 망토만이 본래 기사단장의 것이었다. 그러나 그 상태는 굉장히 별로였다.
군데군데 헐어빠진 두꺼운 갈색 망토를 보고 외무대신은 참담한 표정이 됐다. 일부러 낡아 보이게 만들기 위해 포르투의 수호기사들이 오늘 아침 그 망토 위를 모두 한 번씩 걸어 지나간 참이었다.
“해가 지네….”
하늘섬은 석양에 있어서는 사각지대가 별로 없었다. 클로디아는 구름 한 점 없어 온통 주홍색으로 물든 하늘을 바라보았다. 바람이 불었다. 휘잉. 올려 묶은 머리카락들이 바람을 따라 소용돌이쳤다. 하늘 저편에 반쯤 부서진 포르투 왕성이 새카맣게 그림자 진 채로 서 있었다.
클로디아는 울컥, 눈물이 날 뻔한 걸 간신히 참았다. 제 머리카락이 뺨을 사정없이 때려서 그녀의 감상을 방해하지 않았다면 정말 울고야 말았을 것이다. 그녀는 이를 악물고 머리카락을 걷어내며 성을 바라봤다.
“오빠를 잘 부탁해요, 외무대신.”
중년의 여인이 안타까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쥬버린 왕자님은 저희들의 정신적 지주입니다. 공주님이 안 계시더라도 저희가 잘 보살피겠습니다.”
[그래그래! 나도 쥬버린과 연결돼 있으니 무슨 일이 있으면 곧장 알아챌 수 있다구!]
디자이어가 떠들었다. 클로디아는 한숨을 쉬었다. 알아채보았자 그녀가 자르지스에 있다면 어차피 소용없지 않은가.
데미안이 그녀를 재촉했다.
“곧 내려가야 합니다. 밤이 되면 동력 지대의 에너지 공급도 끊겨 이 승강기를 탈 수가 없어요.”
“알겠어요. 그럼….”
“공주님.”
그때 나선 것은 내무대신이었다. 딱딱한 인상의 남자는 다정히 웃어 보이려 애쓰며 클로디아를 바라봤다.
“공주님께 했던 모든 말들은 진심이 아닙니다. 경황이 없다는 핑계로 공주님께 심한 말을 했던 것을 사과드립니다.”
“…괜찮아요. 저도 알아요.”
클로디아는 잔잔하게 웃었다. 내무대신보다 더 심한 말을 한 사람도 있는데 뭐. 내무대신은 하늘섬 아래를 흘깃 보고 말을 이었다.
“포르투의 국민 모두와 백 개의 왕국민들이 공주님을 존경하고 사랑하고 있습니다. 부디 몸조심하시고 건강히 돌아오십시오.”
“네. 그럴게요. 포르투를 잘 부탁해요.”
“수르 알파에게도. 공주님을 부탁드립니다.”
데미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포르투의 가장 빛나는 보석 아무르에 맹세코….”
그리고 포르투에서 가장 즐겨 쓰이는 약속어를 내뱉다가 입을 다물었다. 아무르는 지금 마왕의 품에 있는 탓이다. 클로디아가 픽 웃었다.
“그래요. 아무르에 맹세해요.”
“…공주님을 무사히 모시고 다녀오겠습니다.”
때마침 승강기 문이 열렸다. 삐걱대며 열리는 문을 보고 클로디아가 “괜찮을까….” 하고 중얼거렸으나 시간이 없었다. 두 사람은 승강기에 올라탔다. 노바라가 울며 소리쳤다.
“공주님! 건강하세요!”
“노바라! 나보다 먼저 시집가면 미워할 거야!”
“돌아오셨을 땐 귀여운 딸을 보여드릴게요!”
덜컹, 승강기가 닫혔다. 승강기는 공중에 뜬 쇠 바구니처럼 생겨서 노바라의 말이 아주 잘 들렸다. 클로디아는 웃으며 ‘안 돼!’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승강기가 갑작스레 흔들리는 통에 그럴 수 없었다.
쿠르릉…
“꺄악!”
승강기는 흡사 용이 트림하는 듯한 소리를 내며 크게 한 번 흔들리고는 밑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끼리리릭, 쿠르르르르….
“눈 뜨셔도 됩니다.”
발작적으로 승강기 난간을 움켜쥐고 눈을 감았던 클로디아는 옆에서 들리는 남자의 말에 살며시 눈을 떴다. 바람을 가릴 가림막 하나 없는 승강기라 머리카락이 사정없이 휘날리는 가운데, 남자가 제 앞에 서 있었다.
데미안 알파.
클로디아는 저도 모르게 남자를 멍하니 올려다봤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길게 묶어 올린 머리카락, 어둡게 가라앉은 푸른 눈동자. 단단한 턱과 날렵한 코, 키가 큰 클로디아도 턱을 들어올려야 얼굴을 볼 수 있을 만큼 큰 키.
덜컥, 겁이 났다. 남자와 이렇게 가까이에 선 건 너무 오랜만이었다. 어린 시절 이후로 처음이었고, 클로디아는 저도 모르게 뒤로 한 발짝 물러섰다.
데미안이 눈썹을 들어 올렸다.
“위험합니다.”
순식간에 남자의 손이 뻗어져 나와 제 팔을 움켜쥐었다. 클로디아는 저도 모르게 “꺅.” 하고 작게 비명 질렀다. 데미안이 얼떨떨한 표정이 됐다가, 금세 억울함을 안면 가득 띄웠다.
“…그렇게 뒤로 물러나시면 떨어지실 것 같아서 붙잡았을 뿐입니다.”
“그, 저도 모르게….”
“아닙니다.”
남자는 화가 난 듯했지만, 그 화풀이를 그녀에게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억울함은 어쩔 수 없는 것 같았다.
“…저를 싫어하시는 건 익히 알고 있습니다.”
저런 이야기를 굳이 하는 걸 보면 말이다. 클로디아는 조금 부아가 났지만, 딱히 틀린 말도 아니었다. 그래서 그녀는 가만히 바깥을 내다봤다.
높았던 시야가 점점 낮아지고 있었다. 주홍색 하늘과, 군청색의 땅의 대비 또한 아주 잘 보였다. 저 까만 수평선이 높아지고 있는 걸 보면, 땅에 가까워지고 있는 것이리라.
클로디아는 아래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동력 지대. 포르투의 바로 밑, 그림자가 떨어지는 곳에 있다. 지상에서는 포르투에 가장 가까운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포르투에서는 절대로 볼 수 없는 아이러니함을 가지고 있는 곳이기도 했다.
저곳에는 열 개의 순환 댐과 더불어 마법석을 가공하는 공장들이 들어서 있다고 클로디아는 알고 있었다. 그야말로 포르투만을 위한 지대다.
하루 24시간 내내 어두워서, 기피되는 지역이기도 하다.
“동력 지대에 내려서기 직전이 가장 위험합니다.”
데미안도 그녀의 시선을 따라간 듯 입을 열었다.
“동력 지대의 사람들은 포르투를 싫어합니다. 이 승강기는 잘 쓰이지 않는 물건이지만, 지나가던 사람들이 저희를 보고 습격할 가능성도….”
“포르투를 싫어한다고요?”
클로디아는 데미안의 설명을 듣다 말고 놀라 물었다. 포르투를 싫어하다니, 왜? 포르투는 백 개의 왕국민들이 모두 동경하는 나라였다. 포르투의 국민이 되어 하늘섬에 살기 위해서는 치열한 시험을 통과해야 했고, 그마저도 몇 년에 한 번씩만 시험을 볼 수 있었다. 하늘섬은 부유하고 아름다웠으며, 포르투의 국민들은 언제나 행복하기로 유명했다. 포르투 사람들이 다른 왕국으로 여행을 가면 언제나 동경의 시선을 받았다.
그런데 포르투 국민들을 싫어한다고?
데미안은 클로디아를 잠시 쳐다보다가 말을 이었다.
“동력 지대는 그럴 수밖에 없죠. 동력 지대 사람들이 햇빛을 보지 못하고 그늘에 살아야 하는 이유가 바로 포르투니까요.”
“무슨 소리예요? 그늘이라서 동력 지대로 만든 거잖아요?”
클로디아가 놀라 물었다. 동력 지대는 백 개의 왕국 중에 유일하게 어떤 왕국의 소유도 아니었다. 정확히는 모든 왕국들이 소유를 거부했다. 하루종일 그림자가 져 있어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포르투는 그곳에 열 개의 순환댐을 만들었다. 애초에 사람이 거의 살지 않았고, 살더라도 이주해 떠나던 곳이니 포르투가 그곳을 사용하겠다 해도 어떤 왕국도 반대하지 않았다.
그런데 포르투를 싫어한다고? 클로디아는 이해할 수 없었다. 동력 지대에 살던 사람이라면 일이 없어서 애먹었을 텐데, 포르투에서 일거리를 만들고 먹고살 수 있게 해준 것 아냐? 실제로 포르투는 동력 지대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상당한 양의 식량을 분배하고 있었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인과 관계를 토대로 생각하고 살진 않으니까요.”
데미안의 얼굴에 흐린 빛이 돌았다. 클로디아는 기가 막혔다.
“그러니까, 다들 포르투에서 주는 식량을 먹고살면서도 하늘섬이 해를 가리고 있다고 화를 내고 있다는 건가요?”
“예.”
“하지만 하늘섬이 사라지면 그 사람들도 당장 먹고살 일이 막막해지잖아요.”
“배고프지만 더 나은 삶을 구가할 수 있다고 믿고 있기도 하죠.”
“기가 막혀….”
클로디아가 혀를 찼다. 그중에도 승강기는 계속해서 내려가고 있었다. 이제는 지상에 거의 다 내려온 듯했다. 해도 이제는 다 져서 하늘은 짙푸른 색이 되었고, 동력 지대의 복잡한 구조가 클로디아에게도 보였다.
“그러고 보니, 저는 지상은 처음이네요….”
“포르투 바깥으로 가시는 것 자체가 처음이시죠.”
“네.”
“일단 이걸 입으시지요.”
데미안은 가방에서 뭔가를 꺼냈다. 클로디아는 그것을 보고 기가 막혀 했다.
“더러워…. 그게 뭐예요?”
“망토입니다. 밤의 지상은 춥습니다.”
“싫어요! 저 안 추워요. 가죽옷을 입었단 말예요.”
남자는 혀를 찼다. 그게 철없는 동생을 대하는 눈초리인 것만 같아서 클로디아는 이마를 찡그렸다.
“추위 같은 건 사실 별문제가 안 됩니다.”
“그러면요?”
“로드의 복장이 너무 눈에 띕니다.”
“…제 복장이 왜요?”
“모르시겠습니까? 이런. 일단 입으십시오.”
클로디아는 손을 내저어 데미안이 못 오게 막았으나, 남자가 머리 위에 크고 더러운 망토를 뒤집어씌우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더러워! 악….”
쿵.
승강기가 지상에 안착한 것은 그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