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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클로디아 테 포르투 (1/30)

1장. 클로디아 테 포르투



 

열여덟 살의 클로디아 테 포르투는 장점이 많은 아가씨였다. 백 개의 왕국을 다스리는 구심점인 포르투의 유일무이한 공주님이라는 것, 영리하다는 것, 아주 부유하고 성격은 천진난만하다는 것.

클로디아 테 포르투, 속칭 ‘클로디아 공주님’은 적당히 선했고 적당히 사랑스러웠다. 가끔은 그 사랑스러움을 이용해 제 구혼자들에게 퍽 심술궂게 굴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은 장난기가 많다는 설명 정도로 치울 수 있는 범위였으며, 클로디아는 무례한 선은 절대로 넘지 않았다.

몇 해 전 포르투 최고의 기사인 데미안 알파와 파혼한 것이 유일하게 그녀를 구설에 오르게 만들긴 했다. 그러나 그마저도 ‘무뚝뚝하고 고지식한 수르 알파를 열여섯 소녀가 대체 어떻게 감당해냈겠느냐’라는 이해로 버무려졌다.

수르 알파는 그 온화한 왕자 쥬버린 테 포르투조차 가끔 곤란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클로디아는 백 개의 왕국 전역에서 사랑받는 아가씨였다. 그러나 가장 사랑받은 이유이자 그녀가 가지고 있는 장점 중 가장 대단한 점은 뭐니 뭐니 해도 그 어마무시한 미모였다.

결 좋은 금발과 보석 같은 벽안, 진주처럼 매끄럽고 하얀 피부와 가느다란 목. 쥬버린 왕자보다 조금 작지만 훤칠한 키. 또래의 신사들 중 복을 타고나지 못한 이들에게는 다소 곁에 서기 꺼려지는 키였다.

손가락도 가늘고, 손목은 잡으면 부서질 것 같았다. 걸으면 작은 사슴 한 마리가 숲을 뛰노는 듯 경쾌함이 돋보였고, 뛰면 호수의 정령을 보는 기분이라는 칭송이 뒤따랐다.

물론 그 안에는 여인이 아니라 속칭 ‘하늘섬’ 포르투를 향한 속셈이 담겨 있는 경우도 많았지만, 뭐 어떤가. 클로디아는 그 모든 칭찬들을 기분 좋게 받아들였다.

이제 막 마흔을 넘긴 포르투의 왕이 이유 불명의 치매에 걸렸다는 소식에도 백 개의 왕국은 하늘섬을 향한 경애를 낮추지 않았다. 쥬버린 왕자 덕분이었다.

쥬버린 왕자는 현명한 데다 그 성정이 온순했다. 포르투 왕이 막 이십 세를 넘겼을 무렵 얻은 쥬버린 왕자는 열세 살이 되던 날부터 백 개의 왕국 중 서른 개를 직접 다스렸다.

열일곱이 되던 해에는 오십 개를 다스렸으며, 쥬버린 왕자가 스무 살이 되던 해 백 개의 왕국이 쥬버린 왕자의 손 아래 평온을 누렸다.

그보다 두 살 어리고, 자신과 꼭 닮은 여동생 클로디아 테 포르투를 쥬버린은 끔찍이도 귀애했다. 달콤함과 부드러움에 감싸인 공주님은 파티를 가장 좋아했다. 쥬버린은 하늘에 떠 있는 왕국 포르투에서 매일 클로디아를 위한 연회를 열어주었다.

백 개의 왕국에서 매일 사신이 오가고 네 개의 대륙을 다스리고 있는 하늘섬이니 무리는 아니었다. 쥬버린 왕자가 만들어 준 천국에서 클로디아는 사랑을 누렸다.

사흘에 한 번은 불꽃놀이를 했다. 열흘에 한 번은 연회장을 과자로 장식했다. 일 년에 한 번은 포르투를 온통 꽃으로 채웠다. 그것이 쥬버린의 사랑이었다.

수르 알파와 클로디아 테 포르투가 파혼한 이후, 쥬버린 왕자는 백 개의 왕국에서 가장 멋진 남자를 뽑아 공주의 부마로 맞겠노라 선언했다. 수많은 왕자와 귀족, 신사와 전사, 기사가 모두 모여 클로디아의 사랑을 애걸했다. 클로디아는 기꺼이 그 상황을 즐겼다. 수백의 남자가 제게 앞다투어 사랑을 고백하고 선물을 안기는 것은 여성의 영예이자 가장 큰 기쁨이라고 클로디아는 생각했다.

그런 클로디아가 끝내 거머쥔 훈장은 킴 왕자였다.

킴 왕자.

하늘에 떠 있는 섬 포르투를 제외하면 가장 강대한 나라에서 온 자였다. 그 용맹함과 늠름함은 수르 알파도 능가한다고 알려졌을 정도다. 심지어 아주 잘생겼다.

클로디아는 킴 왕자를 지난해 연회에서 처음 봤을 때부터 마음에 담아 두고 있었다. 자신과 아주 잘 어울릴 법한 푸른 눈, 그리고 떡 벌어진 어깨와 잘생긴 얼굴. 주홍색 머리카락이라는 점이 조금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공주의 시녀인 노바라는 “그래도 귀엽지 않나요?” 하고 클로디아를 설득했다.

포르투보다 고작 한 단계 아래였다. 네 개의 대륙 위에 군림한 하늘섬보다 더 대단한 나라가 없으니 사실상 클로디아가 고를 수 있는 신랑감 중 최고의 인사였다. 킴 왕자는 우아했으며, 예의를 알았다. 클로디아에게 정열적으로 대시하면서도 때로는 클로디아를 애타게 했다. 한마디로 밀고 당기는 데는 타고난 타입이었다.

그것이 클로디아를 기껍게 했다. 수르 알파와의 파혼 이후 지루하고 재미없는 남자와는 절대로 결혼하지 않겠다고 맹세했기 때문이다. 아마 킴 왕자와의 결혼생활은 퍽 재미있는 것이 되리라. 클로디아는 매일 밤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클로디아가 기다리던 순간이 바로 눈앞에 다가왔다.

날이 좋았다. 하늘섬의 날씨는 언제나 날씨탑에 의해 포근하고 부드럽게 유지됐지만 오늘은 한층 더 좋았다. 클로디아가 그리하라고 연통을 넣었기 때문이다. 오늘의 온도와 밤바람, 실려 오는 꽃향기까지 모두 클로디아에게 날씨탑이 맞춘 것이었다.

클로디아는 꽃향기에 둘러싸여 포르투 왕성의 정원에 앉아 있었다. 그녀가 입은 드레스는 그녀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연한 분홍색 벨벳 드레스였다. 아름다운 리넨 원피스 위에 벨벳 가운을 걸치고, 연결부마다 작은 보석으로 장식된 드레스는 클로디아가 이 날을 위해 특별히 맞춘 것이었다.

그녀가 신은 신발은 푸른 물총새들의 깃털 중 가장 부드러운 속날개, 그중에서도 옅은 핑크빛을 띠고 있는 몇 개의 깃털만 모으고 모아 만든 구두였다. 머리카락은 또 어떻고. 시녀들이 몇 시간을 고불고불 말아 가닥가닥 빛 가루를 뿌리고, 작은 진주 백여 개를 달았다. 머리 위에 얹은 별빛의 왕관까지 합해지니, 마치 클로디아의 머리 위에 수십 개의 별이 떠 있는 것만 같았다.

킴 왕자는 넋을 잃었다. 클로디아는 넋을 잃은 듯 보이는 그 시선에 대만족했다. 자신이 바라던 반응이었기 때문이다.

“…그.”

클로디아가 가볍게 눈을 찌푸렸다. 포르투의 날개 아래 있는 모든 왕국의 왕족들은 포르투의 성을 가진 자들에게 경애를 표하지 않고서는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클로디아의 옅은 눈썹이 움직이는 모양에 킴 왕자 또한 제 무례를 알아차린 듯, 황급히 다가와 무릎을 꿇었다.

“하늘섬의 가장 귀한 여인에게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경애를 표합니다, 클로디아 테 포르투.”

“용서하겠어요.”

클로디아는 짐짓 도도하게 고개를 쳐들었다. 킴 왕자가 일어나며 활짝 웃었다. 과연 절세미남이었다. 그 웃는 모양새가 과히 보기 좋은 것을 보면. 클로디아는 킴 왕자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대를 보면 제 마음이 폭죽처럼 터져 하늘로 날아갈 듯하답니다. 오늘은 제 예의조차 같이 날아간 듯합니다.”

클로디아가 고개를 까딱였다. 그녀는 남자의 모든 말에 대답해주지 않는 것을 제 신조로 여겼고, 킴 왕자 또한 그런 그녀에게 익숙했다. 그가 말을 이었다.

“열아홉 해 동안 그대를 공들여 빚으신 신은 대체 어떤 분이실까요.”

“….”

“전하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빛이 한눈에 제 마음을 앗아갔답니다.”

클로디아는 코웃음을 치고 싶은 것을 참았다.

마치 오늘 자신을 처음 본 듯이 이야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작은 코웃음으로 이 순간을 망칠 수는 없었다.

오늘은 그녀의 열아홉 생일이었다. 오늘을 위해 쥬버린 왕자는 일주일간의 긴 생일 파티를 열어주었다.

그리고 생일 당일인 오늘 밤.

오늘 밤, 킴 왕자가 제게 청혼하게 만들기 위해 얼마나 큰 공을 들였는지 말도 못 할 것이다.

클로디아는 오래전부터 스무 살이 되는 해에 결혼하고 싶다는 바람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가 결혼하기 전 받아야 할 프러포즈는 가장 완벽해야 한다고도 생각했다. 아름다운 꽃, 예쁜 드레스, 보석, 신나는 파티, 왕자님 같은 것들은 요소요소 빠짐없이 자리해야 했다.

그날만은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어야 했다. 클로디아에겐 그랬다!

대체 몇 명의 시녀를 동원해 킴 왕자에게 ‘공주님은 열아홉 생일 밤에 청혼받고 싶으시대요’라고 속삭여야 했는지 모른다. 이 날 날씨탑의 감시자를 회유하기 위해 얼마나 큰 보석을 내주어야 했는지 모른다. 이날 여태까지의 폭죽보다 열 배는 큰 폭죽을 터트리기 위해 쥬버린 왕자를 얼마나 졸라댔는지 모른다.

쥬버린 왕자는 “화재 위험 때문에 곤란하단다, 나의 동생아.” 하며 그녀의 요청을 몇 번 거절했으나, 결국 사랑하는 제 동생이 삐진 척하는 것을 못 이겼다. 아마 하늘섬의 화약고에서는 오늘 유례가 없는 커다란 폭죽을 준비하고 있을 것이다.

“…전하?”

아차. 클로디아의 상념이 흩어졌다. 잠시 다른 생각을 하고 말았던 것이다.

눈앞에는 주홍색 머리카락을 멋들어지게 넘기고 초록색 연회복을 차려입은 킴 왕자가 멀뚱히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킴 왕자의 모습에 클로디아는 약간 짜증이 났다.

‘초록색 연회복은 내 핑크색 드레스랑 안 어울린단 말이야.’

오늘 자신이 연분홍색 벨벳 드레스를 입을 거라고 그렇게 몰래 언질을 주었건만! 누가 킴 왕자의 의상 담당인지는 모르지만, 자신과 결혼하면 즉시 해고해 버려야겠다고 클로디아는 생각했다.

제 생각을 시녀인 노바라가 듣는다면 “참으로 자애로우셔요! 다른 왕족이었다면 목이 달아났을 일인데!” 하며 칭송할 것이다.

아무튼, 모든 것이 완벽하긴 참 어렵구나…. 하고 클로디아는 생각하며 부드럽게 웃었다. 이 순간의 작은 짜증 같은 건, 나중에 아이를 낳고 나이를 먹은 후쯤에는 제 남편과의 재미있는 이야깃거리가 될 것이다.

그때를 위해서라도 지금 이 순간의 광경을 차곡차곡 제 머리에 쌓아 기억해야지. 클로디아는 조금 긴장한 듯한 킴 왕자를 위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미안해요. 바람이 좋아 잠시 호숫가를 거닐었던 추억을 생각했답니다.”

“아, 얼마 전의 이야기를 하시는군요. 그때 전하께 제가 양산을 씌워드렸지요.”

“예에. 저를 위해 손수 양산을 드시는 모습에 감격했답니다.”

시녀들이나 드는 양산을 직접 드는 킴 왕자의 모습에 모든 아가씨들이 감동한 것은 며칠 전의 일이다. 몇몇 남자들은 ‘남자답지 못하다’고 그를 비난했으나 그 일이 클로디아에게서 큰 점수를 얻은 것만은 분명했다.

클로디아의 미소에 킴 왕자는 자신감을 얻은 듯한 발짝 다가와 부드럽게 무릎을 꿇었다. 방금 전 제게 예의를 표하던 것과는 사뭇 다른 움직임이었다.

올 것이 왔구나. 클로디아는 바르게 앉은 자세를 더욱 바르게 했다. 청혼을 받는 여인의 자세가 방만한 것은 하등 자랑할 것이 못 되었다.

킴 왕자가 입을 열었다.

“클로디아 테 포르투.”

“예에.”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말씀이야 편안히 하시면 될 것을 이리도 극진한 예의를 갖춤은 어쩐 일이실까요?”

후후, 클로디아가 웃었다. 다 알면서 짓는 미소에 킴 왕자 또한 흰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그리고 곧 그가 손을 제 품 안으로 집어넣었다.

아마 저 품 안에는 하늘섬의 폭포 안에서만 나는 하늘석이 박힌 반지가 있을 것이다. 극도로 구하기 힘들어 포르투의 남자들 중 가장 용감한 이만이 가질 수 있다는 하늘석.

클로디아마저도 포르투의 왕비들이 대대로 물려준 반지들에서나 가끔 볼 수 있는 것이었다. 킴 왕자는 아마 온갖 술수를 다 부려 하늘석을 구해 왔을 것이다. 클로디아가 몇 년 동안 기회가 닿을 때마다 가장 갖고 싶은 것으로 꼽은 것이 바로 하늘석 반지였으므로.

“부디….”

킴 왕자가 말을 이으려던 때였다.

펑!

엄청난 소리가 등 뒤에서 났다.

클로디아의 이마가 약간 구겨졌다.

‘누구야, 이 중요한 순간에? 폭죽을 벌써 터트리다니! 화약고 담당자가 누군지는 모르지만 내가 엄중히 문책할 거야!’

당황한 것은 클로디아만이 아닌 듯했다. 클로디아의 바로 앞에 서 있던 킴 왕자 또한 말하다 말고 약간 입을 벌렸기 때문이다. 그의 눈은 클로디아의 뒤쪽 하늘에 고정돼 있어서, 그녀는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야 평소의 열 배로 크게 하라고 지시했으니 아마 어마어마한 장관이긴 할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순간에 날 놔두고 폭죽에 한눈을 팔다니, 너무한걸.

“왕자.”

“전, 전하.”

킴 왕자에게 가볍게 주의를 주려던 때였다. 킴 왕자가 무려 그녀의 말을 가로막은 것이다! 클로디아는 기가 막혀 하다가, 킴 왕자의 기색이 심상찮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킴 왕자는 이제 완전히 입을 크게 벌리고, 그녀의 뒤를 손가락질하고 있었다.

그야 대단하겠지…. 클로디아는 좀 짜증이 난 표정으로 뒤를 돌아봤다. 분위기는 완전히 망쳤으니 어디 그 대단한 폭죽이나 감상하자는 심산이었다.

그리고 클로디아의 입도 한껏 벌어지고 말았다. 하지만 아무도 공주를 품위 없다 비난하지 않았다.

클로디아의 등 뒤, 아름답던 포르투의 흰 왕성이 불타고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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