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3 : 18살, 아리스
평온하던 황궁이 소란스러워졌다. 동부에서 온 손님 때문이었다.
거대한 검정색 말에서 내린 소녀는, 올해 18살이 된 아리스였다.
장미꽃처럼 선명한 붉은 머리카락과 화려한 이목구비는 그림처럼 아름다웠으나, 치켜 올라간 눈매와 보라색 눈동자는 육식동물처럼 강렬했다.
아리스는 아름다우면서도 강인해 보이는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아리스를 맞이한 것은 배가 볼록하게 튀어나온 시아나였다.
시아나는 환하게 웃으며 아리스를 껴안았다.
“어서 오세요, 공주님.”
“보고 싶었어, 나의 시아나.”
아리스가 시아나를 안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러다가 아차, 하고 손을 풀었다.
“나 때문에 아기가 눌린 거 아니야?”
“그 정도로 약하지는 않아요.”
“그래도 혹시 모르잖아.”
아리스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시아나의 동그랗게 튀어나온 배를 바라보았다.
시아나는 쿡쿡 웃었다.
‘공주님께서 들으면 싫어하시겠지만, 정말이지 남매가 꼭 닮았다니까.’
라시드도 시아나가 조금이라도 잘못될까 봐 전전긍긍했다.
첫째 아이를 낳고 둘째를 임신한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자기도 모르게 시아나를 꽉 안을까 봐 뒤에서만 껴안을 정도였다.
그뿐인가.
황궁의 체면도 잊고 궁 바닥마다 폭신한 카펫을 깔아놓았다. 시아나가 혹시라도 넘어졌을 때를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황후 폐하에 대한 사랑이 지극하신 건 알지만, 아무리 그래도 극성이셔.’
라고 사람들이 수군거릴 정도였다.
아리스는 폭신폭신한 카펫으로 가득 채워진 황궁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잘해 놨네. 이 정도면 안심해도 되겠어.”
역시 남매는 남매야.
시아나는 새삼 그 사실을 깨달으며 아리스의 뒤를 힐끗 보았다.
시녀 니니와 나나를 포함하여 수많은 이가 사탕 목걸이처럼 줄줄이 늘어서 있었다.
시아나가 아리스에게 소곤거렸다.
“가볍게 오실 거라더니 이번에도 엄청나게 많은 사람을 데리고 오셨네요.”
그들은 동부에서 아리스를 열혈히 따르는 이들이었다.
귀족, 기사, 상인, 종교인, 예술가……. 신분도 직업도 다양했는데, 놀라운 것은 아리스와 함께 오고 싶어 했던 이가 저들뿐만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아리스가 수도로 간다는 소식을 듣고 너도나도 황녀 저하를 모시고 다녀오고 싶다며 애원했다. 그들을 다 데려갔다가는 천 명이 넘는 대인원이 될 터였다.
결국 아리스는 가장 공평한 방법, 즉 제비뽑기를 통해 함께 갈 사람을 뽑았다.
시아나가 흥미진진한 눈으로 말했다.
“그러니까 저들은 행운의 여신의 선택을 받은 분들인 거군요.”
“뭐, 그런 거지.”
아리스가 한껏 오만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였다. 그 모습이 귀여워 시아나가 쿡쿡 웃었다.
“우리 공주님, 갈수록 인기가 어마어마해지고 계시네요. 이러다가 동부 사람들이 모두 공주님을 따르겠어요.”
시아나는 반쯤 농담으로 한 이야기인데 아리스는 진지한 얼굴로 눈을 빛냈다.
“머지않아 그렇게 될 거야. 나는 동부의 지배자가 될 생각이니까.”
“……!”
“그러니까 시아나, 오라버니가 마음에 안 들면 언제든 버리고 동부로 와. 오라버니보다 훨씬 더 소중하고 귀하게 보살펴 줄게.”
아리스가 10살 무렵 동부에 갔을 때부터 했던 말이었다. 그러나 18살이 된 지금은, 그때와 다른 무게감이 어려 있었다.
그래서 시아나는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넵.”
시아나의 대답에 아리스가 흡족한 듯 두 눈을 휘었다.
그와 동시에 아리스의 뒤쪽에 있던 사람들, 즉 아리스 추종자들은 난리가 났다.
“꺄아악! 다들 봤어요?”
“암요, 봤지요.”
“아리스 님의 미소는 정말이지 너무나 위협적이네요. 전 심장이 멈춰 버릴 뻔했답니다.”
“세상에, 아직 안 멈췄어요? 저는 이미 멈췄는데…….”
니니와 나나를 중심으로 온갖 말들을 떠들어 대는 이들을 무시하며, 아리스는 시아나를 에스코트하여 궁 안으로 들어섰다.
* * *
아리스는 시아나와 식사를 한 후, 티타임을 가졌다.
황실의 티타임에서는 차 담당 시녀가 차를 따라 주는 것이 관례였다.
황족은 가장 고귀하고 존귀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황족은 어떤 손님이 와도 직접 차를 따르는 일이 없었다.
하지만 시아나는 찻주전자를 손에 들고 우아하게 찻잔을 향해 기울였다.
쪼르르르…….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나며, 아리스 앞에 있던 찻잔에 뽀얀 차가 가득 찼다.
시아나가 아리스를 위해 만든 특제 밀크티였다.
아리스가 밀크티를 한 입 홀짝이더니 환하게 웃었다.
“역시. 시아나가 타 준 차는 최고라니까!”
“정말요?”
“그럼, 시아나도 알잖아. 난 다른 차는 하나도 못 마시는 거.”
18살, 어엿한 성인이 되었지만 여전히 아리스는 차를 좋아하지 않았다.
도대체 이 풀떼기 탄 물이 뭐가 좋다는 거야, 라는 생각만 들었다.
시아나가 타 주었던 것처럼 우유를 넣어 보기도 했지만 마찬가지였다.
“제 차를 좋아하시는 건 고맙지만 걱정이네요. 귀족 사회에서는 차를 마시지 못하면 힘이 들잖아요.”
사교의 대부분은 차와 함께하니, 차를 즐기지 못한다는 것은 치명적이었다.
아리스도 맞는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긴 하지.”
하지만 아리스가 시아나에게 말하지 않은 것이 하나 있었다.
아리스에게는 풀떼기 맛 나는 차보다 훨씬 더 귀족들과 가까워질 수 있는 무기가 있다는 것을.
술이었다.
아리스는 어린 나이답지 않은 엄청난 주당이었다. 게다가 코와 혀가 예민해서, 와인의 종류를 하나하나 꿰고 있었다.
귀족들 중에는 차만큼이나 술을 좋아하는 이들이 많았다.
그들은 아리스와 함께 와인을 즐기며 마음을 열었다. 그러다 보면 어떤 이는 술에 취해 은밀한 비밀을 털어놓거나, 고약한 술주정을 부리는 이도 있었다.
그것들은 모두 훌륭한 약점으로, 아리스의 힘이 되었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를 하면 시아나가 놀라겠지.’
결코 안 될 말이었다.
배 속에 아기가 있으니 더더욱.
‘아직도 내가 밀크티만 마시는 아이라고 생각하는 시아나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
그래서 아리스는 시아나에게 제 비밀을 말하지 않고, 찻잔을 홀짝였다.
부드럽고 달콤한 밀크티는 정말 맛있었다.
“그런데 아이리스는 어디 갔어?”
아이리스는 라시드와 시아나의 첫째 딸 이름이었다.
시아나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폐하와 함께 소풍을 갔어요.”
“소풍이라고?”
“네, 날씨가 이렇게 화창한 날이면 늘 함께 나간답니다. 폐하께서 직접 만든 샌드위치를 잔뜩 챙겨서요.”
딸과 함께 소풍.
직접 만든 샌드위치.
어느 것 하나 황제라는 직위와 어울리지 않았다.
그래서 아리스는 험악한 표정을 지었다.
“이 시간에 한량처럼 놀고 있다니. 그 인간 여전히 일을 하는 둥 마는 둥 하는구나?”
시아나가 고개를 붕붕 저었다.
“그렇지 않아요! 폐하께서 얼마나 성실하고 열심히 직무를 수행하시는데요.”
“그야 꼴불견인 모습을 보였다가 네게 미움받을까 봐 두려워서 억지로 하는 거겠지. 시아나 네가 없었으면 진즉에 나랏일은 부하들에게 맡겨 두고 쪼그만 동물들이랑 탱자탱자 놀기만 했을걸.”
아주 가능성 없는 말은 아니라, 시아나는 대답 대신 차를 홀짝였다.
아리스가 물었다.
“그런데 왜 너는 같이 가지 않았어?”
“아리스 공주님께서 궁에 도착하실 때가 되었으니까요. 먼 곳에서 오시는데 직접 맞아드려야죠.”
“……내가 오는 걸 그렇게 신경 썼어?”
“그럼요. 공주님이 궁에 온다는 편지를 받을 때부터 언제 오시나 얼마나 기대를 했는데요.”
해사하게 웃는 시아나를 보며 아리스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시아나 너무 좋아! 당장 동부로 데려가고 싶어!’
아리스는 그 충동을 참으며 차를 벌컥벌컥 마셨다. 시아나가 그 모습을 보며 방긋 웃었다.
“그리고 요즘은 배가 부쩍 불러서 함께 나가는 것이 힘들어요.”
아리스의 시선이 시아나의 배로 향했다.
아리스가 시아나를 마지막으로 만났던 것이 1년 전이었다. 그때 시아나는 한 아이의 엄마라는 것이 믿을 수 없을 만큼 가녀렸다.
하지만 지금은 배가 동그랗게 나와 있었다.
‘저렇게 작은 시아나의 배 속에 아기가 있다니 신기해.’
아리스는 그 사실이 믿기지 않아 시아나의 배를 빤히 쳐다보았다. 빤한 시선에 시아나가 부끄러운 듯 웃었다.
“제가 살이 좀 많이 쪘죠?”
“응?”
갑자기 무슨 말인가 싶어 아리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시아나가 말을 이었다.
“아이리스를 가졌을 때는 몸 상태가 좋아서 음식도 골고루 먹고 산책도 자주 해서 살이 거의 찌지 않았어요. 그런데 둘째 아이는 입덧이 고약해서 케이크 외에는 아무것도 먹지 못하는 데다 온몸이 퉁퉁 붓네요. 몸이 좋지 않아 산책도 거의 하지 못하고 있고요. 그랬더니 이렇게 뚱뚱해져 버렸어요.”
뚱뚱이란 말에 아리스가 정색했다.
“뚱뚱이라니 무슨 소리야, 누가 봐도 통통이지!”
아리스는 흥분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게다가 새하얗고 동그란 얼굴이 통통해진 모습이 얼마나 귀여운 데. 꼭 생크림을 빵빵하게 넣은 빵 같다고!”
시아나가 눈을 깜빡거렸다.
“……지금 칭찬하신 거죠?”
“그럼!”
“그렇게 말해 주시니 조금 위로가 되네요.”
시아나는 웃었지만 아리스는 웃지 못했다. 시아나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아리스가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왜 그런 말을 해? 혹시 무슨 일 있어?”
시아나는 원래 그런 것에 휘둘리는 성격이 아니었다.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보면 ‘얼굴이 어제보다 동그래졌네.’라고 생각하며 태연하게 케이크를 먹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건 제 생각이고 세상 사람들은 그렇게 느끼지 않더라고요.”
“그게 무슨 말이야?”
“그게…….”
시아나는 아리스에게 솔직하게 고민을 털어놓았다.
라시드는 오로지 황후만 바라보는 애처가에, 한 아이의 아버지가 되었지만 여전히 젊었다. 게다가 조각상처럼 아름답기까지 했다.
많은 여인들이 황제를 마음에 품었다.
“폐하께서 황후 한 명만을 아내로 맞이할 것이라 천명하셨지만, 귀족들은 그 말을 믿지 않아요. 결혼생활이 길어져 황후를 향한 들끓는 애정이 식을 즘, 마음에 드는 여인이 생기면 황비로 들일 거라고 생각하죠.”
그래서 황제를 마음에 품은 여인들은 황궁에서 연회가 열릴 때마다, 온 힘을 끌어모아 아름답게 꾸몄다.
젊은 황제의 마음 한편, 시선 한 자락이나마 얻고 싶어서.
하지만 패기 있게 꾸민 것이 무색하게, 라시드에게 가까이 다가갈 엄두도 내지 못했다.
라시드의 옆에 있는 시아나 때문이었다.
한여름의 장미꽃처럼 화사하고 아름답게 웃는 황후를 보며 여인들은 깨갱 꼬리를 내렸다.
“하지만 요즘은 그렇지 않더군요.”
시아나가 눈썹을 내리며 말을 이었다.
“연회장에서 폐하께 다가오는 여인이 생겼어요.”
그 말에 아리스가 쾅, 하고 주먹으로 테이블을 내리쳤다.
“그걸 가만뒀어!”
불꽃처럼 화내는 아리스와 달리 시아나는 호수처럼 잔잔했다.
“그녀는 그저 폐하께 다가와 인사를 하는 것뿐인걸요.”
진한 향수 내음이 곁들여진 고혹적인 눈웃음.
고작 그것을 가지고 감히 내 남자에게 무슨 짓을 하냐고 분노할 수는 없었다.
“저는 황후니까요.”
만약 시아나가 그런 것 하나하나에 반응하여 분노한다면, 귀족들은 황후의 투기가 심하다며 반발할지도 모른다.
시아나가 얼굴을 붉혔다.
“아이참, 공주님께 괜한 이야기를 꺼냈네요.”
배 속에 아이가 있어서일까. 저답지 않게 하지 않아도 될 말을 늘어놓을 때가 있었다.
시아나가 열이 오른 얼굴을 부채질하며 말을 이었다.
“넋두리할 곳이 없어서 한 말이니 신경 쓰지 마세요. 절대 심각한 일은 아니에요.”
정말이었다.
황후의 일상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평화로운 시간 속에서 그것은 아주 조금 거슬리는 일일 뿐. 시아나에게는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많았다.
아름다운 남편과 천사 같은 딸을 어떻게 하면 더 사랑할 수 있을지, 제국과 신 아실론드 공화국을 보다 풍요롭게 만들려면 어떤 정책을 써야 할지 등등…….
하지만 아리스는 아니었다.
세상에서 가장 심각한 사안을 알게 된 것처럼, 아리스의 얼굴이 험악했다.
아리스는 보라색 눈동자를 이글거리며 주먹을 쥐었다.
‘감히 내 시아나에게 상처를 주다니.’
아리스는 얼굴도 모르는 여인을 적으로 규정했다.
* * *
색색의 장미꽃이 만발한 황궁에 연회가 열렸다. 황궁의 오래된 전통인 장미꽃 연회였다.
장미꽃 연회는 사랑을 속삭이는 자리.
그것에 걸맞게 초대받은 귀족들은 제가 꾸밀 수 있는 가장 화려한 모습으로 연회장에 나타났다.
가문의 재정이 흔들릴 정도로 최선을 다해 꾸민 여인들은 부채를 살랑이며 서로를 향해 인사했다.
“못 본 사이에 피부가 더 좋아지셨네요. 꼭 갓 태어난 아기 피부 같아요.”
“호호, 과찬이세요. 영애야말로 허리가 더 가늘어졌어요. 꼭 한 송이 가냘픈 수국 같아요.”
“새로 맞춘 드레스가 정말 아름다워요. 100개의 다이아몬드를 수놓았다는 게 정말인가 보네요.”
서로를 잔뜩 칭찬했지만 본심은 전혀 달랐다.
역시 내가 제일 예뻐!
하지만 만개한 꽃처럼 스스로를 뽐내던 여인들은 잠시 후 할 말을 잃었다.
또각, 또각.
오만하게 느껴질 만큼 당찬 구두 소리와 함께 등장한 여인 때문이었다.
한여름의 장미꽃처럼 붉은 머리카락, 그 아래로 보이는 보라색 눈동자는 밤의 고양이처럼 강렬했다.
날렵한 콧대, 앙다문 입술.
모든 것이 화려하고, 오만하고, 아름다웠다.
18살이라는 싱그러운 나이와 맞물려, 더더욱.
엄청난 존재감을 가지고 나타난 소녀에게서 사람들은 시선을 떼지 못하며 신음을 흘리듯 말했다.
“아, 아리스 황녀 저하…….”
엄밀히 말하면 현 황제의 여동생이었으나, 아리스는 여전히 황녀의 직위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가진 힘은 그뿐이 아니었다.
당당하게 걷는 아리스의 뒤로 수많은 이가 따라 들어왔다. 하나같이 동부에서 여러 방면으로 이름 높은 자들이었다.
“아리스 황녀 저하께서 동부에서 꾸준히 세를 넓히고 계신다는 것이 사실이었군요.”
“그러게요. 동부에서 수도까지 거리가 어마어마하게 먼데도 함께 올 정도면 대단히 친밀한 관계인 것이 틀림없어요.”
수도의 귀족들은 긴장 반 감탄 반 어린 얼굴로 침을 꿀꺽 삼켰다. 조금 전까지 미모를 다투던 여인들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단 한 명, 후작가의 영애 샤론은 조금도 주눅 들지 않았다.
‘확실히 황실의 피를 진하게 이어받아 눈에 띄는 외모구나.’
하지만, 그래서 뭐?
샤론이 노리는 것은 이 연회장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 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가 노리는 건 오로지 한 남자였다.
잠시 후, 나팔 소리와 함께 시종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황제 폐하 납시옵니다!”
연이어 황후와 황녀의 등장을 알리는 소리도 들려왔다.
이내 장미꽃으로 꾸며진 입구에 세 사람이 나타났다.
은빛 머리카락 위에 황금의 관을 쓴 황제 라시드. 편하고 소담한 드레스를 입고 동그란 배를 감싸 안은 황후 시아나.
은빛 머리카락과 보라색 눈동자를 가진, 아빠를 꼭 닮은 황녀 아이리스였다.
그림처럼 아름답고 단란한 가족의 모습에 사람들의 눈빛에 온기가 머물렀다. 사람들은 제국을 상징하는 황가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고요해진 연회장을 바라보며 라시드가 입을 열었다.
“황후가 정성껏 준비한 연회이니 한껏 즐기고 가도록.”
화려한 연회의 오프닝이라고 하기엔 너무 심플해서 성의가 없게 느껴지는 말이었다.
시아나가 눈썹을 내리며 황제의 말을 이었다.
“다들 연회에 참석해 주어서 고맙소. 장미꽃 연회는 경쟁도 정치도 없이 순수한 사랑을 염원하는 자리. 이곳에 있는 모든 이들에게 장미꽃과 사랑의 여신 로즈린타의 축복이 있기를 기원하오.”
상냥해. 우아해. 똑똑해. 따뜻해.
예뻐. 예뻐. 예뻐.
라시드는 그 모든 감정을 담아 눈을 반짝거리며 시아나를 바라보았다.
시아나가 못 말린다는 듯 웃으며 손을 올렸다.
행사의 주최자인 황제와 황후의 임무인 오프닝 댄스를 추기 위해서였다.
연회라면 질색인 라시드가 유일하게 장미꽃 연회만큼은 좋아하는 이유기도 했다.
아름다운 선율 속에 라시드와 시아나는 춤을 추기 시작했다.
사랑을 기원하는 춤이니 만큼 일반 사교춤보다 농염하고 정열적으로 추어야 했다.
실제로 시아나는 작년까지만 해도 밀색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열정을 발산했다.
하지만 지금은 임신 중이라 그럴 수 없었다.
라시드는 더 없이 조심스럽게 시아나를 리드했다. 시아나도 최대한 몸에 무리가 가지 않게 스텝을 밟았다.
화려하진 않았으나, 서로를 향한 충만한 애정이 느껴지는 춤이었다.
‘엄마, 예뻐! 아빠, 멋져!’
호위 기사 솔에게 안긴 아이리스가 두 볼을 복숭아처럼 물들이며 눈을 반짝거렸다.
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사실 귀족 중에는 라시드가 황후 한 명만을 들인다고 선포한 것에 대해 반발하는 이들도 많았다.
황제는 힘을 가진 가문의 여인과 혼인을 하여 권력을 확장하고, 최대한 많은 자손을 낳아 권력을 공고히 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토록 서로를 사랑하는 황제와 황후를 보면 저도 모르게 표정이 풀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물론, 그렇지 않은 이들도 있었지만.
샤론도 그중 하나였다.
‘배가 돼지처럼 불룩 튀어나와서 사랑을 기원하는 춤을 추다니.’
올해 18살이 된 샤론에게는 그것이 전혀 낭만적이게 느껴지지 않았다.
‘폐하께 다른 비가 있었다면, 폐하께서도 저토록 우스꽝스러운 춤은 추지 않으셔도 됐을 텐데.’
임신한 황후를 대신하여, 젊고 늘씬하며 아름다운 황비가 황제의 손을 잡고 농염한 춤을 추었을 것이다.
그리고 샤론은 그 황비의 자리에 제가 있기를 바랐다.
그렇기에 이토록 고혹적인 화장을 하고, 반짝이는 보석으로 온몸을 치장하고, 값비싼 드레스를 입은 것이다.
황제를 유혹하기 위해.
‘어머니가 말씀하시길, 남자는 아내가 아이를 가지면 더 이상 여인으로 보지 않는다고 했어.’
제 자식의 엄마라 소중하게 생각하지만, 여인으로서 설렘과 매력은 전혀 느끼지 못한다고.
샤론은 그 말을 이해했다.
실제로 황후 시아나만 해도 임신을 하더니, 이전에 가지고 있던 여성으로서의 매력이 확 줄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샤론에게 기회였다.
‘황제 폐하께서 황후를 귀하게 여기시는 것은 알아. 하지만 그것은 가족에 대한 사랑이지. 폐하가 가진 남성의 욕망은 분명 찾고 있을 거야.’
새롭고, 젊고, 아름다운 여인을.
샤론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황비의 자리를 향한 야망과 황제를 향한 애정이 뒤섞인 눈빛이었다.
꽃처럼 아름다운 미소를 지은 샤론이 라시드를 향해 걸음을 내디디려던 차였다.
“……!”
샤론이 눈을 부릅떴다.
샤론의 앞을 붉은 머리카락의 여인이 가로막았기 때문이다.
아리스였다.
‘가까이서 보니 더 예쁘잖아!’
우습게도 그 생각이 먼저 들었다.
이내 샤론은 입꼬리를 올렸다.
샤론은 숱한 동부의 귀족들과 달리 아리스에게 일말의 관심도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황제의 여동생이자 수많은 이의 관심을 받는 권력자.
‘우호적인 관계를 맺어 두면 쓸모가 있을 테지.’
샤론은 그렇게 생각하며 상냥하게 말을 건넸다.
“아리스 황녀 저하,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저는 일리어스 후작가의 샤론이라고 합니다.”
“인사는 됐고.”
“……?!”
눈을 부릅뜬 샤론을 향해 아리스가 다가왔다. 아리스는 샤론의 귓가에 속삭였다.
“너, 이 이상 오라버니에게 추근대면 죽여 버린다.”
“……!”
끔찍한 말에 샤론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한 박자 늦게 정신을 차린 샤론은 아무리 황녀라도 어떻게 그런 말을 하냐며 소리 지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아리스가 샤론의 손을 잡아 깍지를 꼈기 때문이다. 악력이 어찌나 센지 아픔에 눈물이 찔끔 나올 정도였다.
그리고 아리스의 보라색 눈동자와 눈이 마주치는 보는 순간, 샤론은 알았다.
아리스의 말이 진심이라는 것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아리스에게 잡힌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아리스는 쿡쿡 웃으며, 샤론의 손을 잡아끌어 입을 맞추었다.
“다행히도 목숨이 위협당하는 상황을 모를 만큼 바보는 아닌 것 같구나. 그럼 앞으로 조심하렴.”
오만하고 매혹적이며 섬뜩한 미소였다.
샤론은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귀족 영애의 품위 따위 잊어버린 채.
“샤론 영애, 괜찮으세요?”
쓰러진 샤론을 보고 사람들이 몰려왔다.
샤론은 무릎을 꿇은 채 저 멀리 사라지는 아리스를 바라보았다.
바들바들 떠는 샤론의 눈빛에는 혼란스러움과 황홀함이 뒤섞여 있었다.
숱한 동부 귀족이 아리스를 마주했을 때처럼.
* * *
연회가 끝난 다음 날, 시아나가 아리스를 찾아왔다.
시아나가 우아한 솜씨로 밀크티를 타며 말했다.
“어제 연회에 참석했던 귀족들이 모두 난리예요. 아리스 공주님이 아름답고 멋지다고요.”
입바른 말이 아니었다.
어젯밤 열린 연회의 주인공은 단연 아리스였다.
아리스는 장미꽃처럼 화사한 미소를 짓고, 어떤 때는 불꽃처럼 화를 내었다. 제 생각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것이 익숙지 않은 수도 귀족들에게, 속마음을 거침없이 드러내는 당찬 그녀의 모습은 매혹적이었다.
시아나가 뿌듯한 얼굴로 말했다.
“공주님을 따라 동부로 간다고 한 귀족들도 있다던데요.”
아리스가 귀찮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안 그래도 귀찮은 놈들이 한가득인데 숫자가 더 늘어나 버렸어.”
아리스의 말에 시아나가 쿡쿡 웃었다.
‘말은 저렇게 해도 공주님은 사람을 좋아하시지.’
무엇보다 아리스는 인재를 통해 힘을 얻고 싶어 했다.
그래서 아리스는 사람을 얻기 위해 노력했고, 한번 제 사람이 되면 절대 놓아주지 않았다.
‘공주님이 화가 나면 반란을 일으킬 것이라는 폐하의 말이 마냥 농담은 아니라니까.’
시아나는 짐짓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하나 더 들은 이야기가 있어요.”
“뭔데?”
밀크티를 홀짝이는 아리스를 향해 시아나가 말했다.
“아리스 공주님께서, 황제 폐하께 불손한 마음을 가진 여인을 손봐주셨다고.”
아리스가 풉 하고 밀크티를 내뱉었다.
저런.
시아나가 눈썹을 내리며 아리스의 입을 손수건으로 닦아 주었다. 시아나의 손길에 얌전히 몸을 맡기며 아리스가 눈썹을 찡그렸다.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그 여자가 달려와서 불었어?”
“아니요, 샤론 영애는 그런 것을 떠벌리고 다닐 만큼 입이 가볍지 않아요. 그냥 제가 알아차렸어요.”
모를 수가 없었다.
연회만 열면 라시드에게 다가와 화사한 미소를 뿌리던 샤론이 어제는 창백한 얼굴로 라시드를 피해 다녔으니까.
그러면서 그녀는 힐끗힐끗 아리스를 보았다.
언제 저를 잡으러 올지 모르는 귀신을 보는 것처럼.
아리스가 입꼬리를 올렸다.
“말을 잘 알아듣는 여인이라 다행이야. 안 그랬으면 정말 피를 봤을…….”
아리스가 아차 싶은 얼굴로 입을 막았다.
시아나의 앞에서 내뱉기에는 너무 잔혹한 말이었다. 아직도 자신을 공주님이라 부르는 시아나가 제게 실망할까 봐 걱정이 됐다.
하지만 시아나는 아리스에게 그러면 안 된다고 말하는 대신 환히 웃었다.
“고마워요, 공주님.”
“…….”
“별일 아니라고 했지만 사실은 그녀가 내내 거슬렸어요. 더 이상 내 남자에게 더러운 추파를 던지지 말라고 소리치고 싶었답니다. 공주님께서 그녀를 퇴치해주셔서 얼마나 속이 후련한지 몰라요.”
“……정말?”
“네.”
티 없이 맑은 시아나의 대답에 아리스는 대번에 의기양양한 얼굴이 되었다.
“또 그런 여자가 나타나면 말해. 언제라도 달려와서 없애 줄게.”
시아나가 못 말린다는 듯 웃었다.
“사교계의 꽃이 되실 분이 무서운 말을 하시네요.”
“내가 사교계의 꽃이 된다고?”
시아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리스는 고작 18살임에도 엄청난 영향력과 매력을 가지고 있었다.
몇 해가 지나 지금보다 성숙해지면, 아리스는 명실공히 제국 사교계에서 가장 화려한 꽃이 되어 여인들을 호령할 것이다.
그러나 아리스는 말도 안 된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 없어. 왜냐면 내가 살아 있는 한, 사교계의 꽃은 너일 테니.”
“……!”
눈을 동그랗게 뜬 시아나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아리스가 말을 이었다.
“내가 그렇게 만들어 줄게. 너는 나의 시아나니까.”
갓 캐낸 보석처럼 보라색 눈동자가 번쩍였다. 그 보라색에 깃든 감정은 광기에 가까운 열망, 꺼지지 않는 애정이었다.
시아나는 눈썹을 내렸다.
‘역시 공주님은 폐하와 한 핏줄이야.’
한없이 아름다운 얼굴로, 오싹할 만치 진득한 감정을 다정하게 내뱉는 모습이 꼭 닮아 있었다.
그리고 시아나는 그것이 싫지 않았다.
“잘 키운 공주님 열 왕자님 안 부럽네요.”
시아나는 햇살처럼 밝은 미소로 아리스의 말에 화답했다.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