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 : 황제와 황후의 첫날밤
라시드가 황제로 즉위한 지 3년이 되었을 때였다.
아름답고 젊은 황제는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시아나 아실론드 폰 실리테를 황후로 맞이하겠다.”
시아나는 외국인이었다. 게다가 아실론드 왕국은 멸망해 버려, 왕족이라 부르기도 애매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도 그 말에 토를 달 수 없었다.
지난 3년간 시아나는 더없이 많은 것들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시아나는 신 아실론드의 총리로서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었다. 또한 상처를 치유하는 신비로운 꽃을 재배하고 판매하는 데 성공하여 엄청난 부를 거머쥐었다.
그뿐인가.
시아나는 라시드의 약혼녀로서 수없이 많은 일을 해냈다.
사교계 활동을 하며 귀족들과 관계를 돈독하게 만들고, 평민들을 위한 학교와 도서관도 만들었다.
“시아나 공주님 만세!”
“아니지, 총리님이라고 불러야지.”
“아니, 아니지, 이제 황후 폐하라고 불러야지.”
호칭이 좀 정리되지 않긴 했지만, 어쨌건 제국민들은 시아나를 황후로 기쁘게 받아들였다.
시아나의 조국인 신 아실론드의 국민들도 마찬가지였다.
시아나가 제국의 황후가 됨으로서 나라에 가져올 막대한 이득을 알았기 때문이다.
유일하게 시아나의 보좌관인 베라만 분한 얼굴로 소리쳤다.
“가진 것이라고는 대륙 제일의 부와 땅, 봐줄 만한 얼굴과 몸뿐인 남자와 결혼을 하다니, 우리 시아나 공주님이 천배 만배 아깝습니다!”
술에 취해 훌쩍이는 베라의 등을 토닥이며 시아나는 생각했다.
‘어쨌건 3년간 쉬지 않고 노력한 보람이 있네.’
드디어 사람들의 축복 속에 결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내가 바랐던 대로!’
시아나는 햇살처럼 환한 미소를 지었다.
* * *
황궁을 비운 황태후를 대신하여, 선대 황비 안젤리나가 결혼 준비를 맡았다.
그녀는 제 자식의 결혼처럼 꼼꼼하고 정성스럽게 일을 진행했다.
“시아나 님은 너무 화려한 걸 좋아하지 않으시니, 드레스는 심플하면서 우아한 것이 좋아. 참, 노출은 최대한 없어야 한다. 황제 폐하께서 흥분하여 무슨 사고를 치실지 모르니까.”
“황제 폐하의 예복은 최대한 화려하게 꾸미도록 해. 폐하께서는 시아나 님 앞에선 누구보다 아름답길 바라시거든.”
결혼식은 새하얀 복숭아꽃이 만개한 날 치러졌다.
화사한 꽃과 반짝이는 보석으로 꾸민 황궁에 수많은 이가 모였다.
제국의 황족, 귀족, 신 아실론드의 의원들.
그들은 상기된 얼굴로 식장에 앉아 오늘의 주인공을 기다렸다.
잠시 후, 웅장한 음악 소리와 함께 젊은 황제와 황후가 모습을 드러냈다.
황금의 관을 쓰고 손을 맞잡은 라시드와 시아나의 모습은,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사람들은 진심을 담아 소리쳤다.
“황제 폐하, 만세!”
“황후 폐하, 만세!”
“부디 백년만년 해로하시어 제국을 보살펴 주소서!”
드넓은 황궁에 두 사람을 축복하는 말이 가득 찼다.
시아나는 환호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이내 시아나는 눈썹을 내렸다.
‘역시 아리스 공주님께서는 오지 않으셨구나.’
시아나와 라시드가 결혼식을 한다는 소식을 듣고 아리스는 무척 속상해했다.
독한 술 대신 달콤한 핫초코를 며칠 내내 마시며 엉엉 훌쩍였다.
그러다가 결혼식 전날, 시아나를 찾아와 말했다.
[미안해, 시아나. 나 네 결혼식에 참석할 수 없을 것 같아. 시아나가 웨딩드레스를 입은 모습을 보면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려 버릴 거야. 그리고 오라버니한테 달려가서 내 시아나를 내놓으라고 멱살을 잡을 거야. ……네 결혼식을 망치고 싶지 않아.]
시아나는 괜찮다고, 아리스가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등을 다독였다.
시아나는 진심으로 아리스의 마음이 조금이라도 풀리기만을 바랐다.
‘그래도 막상 아리스 공주님의 얼굴을 보지 못하니까 아쉽긴 하네.’
시아나가 씁쓸한 마음으로 생각한 순간이었다. 시아나의 눈이 크게 떠졌다.
사람들 틈 속에서, 아리스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붉은색 드레스를 입은 아리스는 화려하고 아름다웠다.
이제 겨우 13살 소녀라는 것을 잊을 만큼.
또각, 또각.
아리스는 구두 소리를 내며 라시드와 시아나의 앞으로 다가갔다. 아리스는 눈을 치켜뜨며 라시드를 노려보았다.
“나의 시아나를 조금이라도 힘들게 하면 가만두지 않을 거야.”
라시드는 험악한 인사를 하는 어린 동생을 바라보며 두 눈을 휘었다.
“당연하지.”
그러니까 그렇게 순수하게 받아들이지 말라고! 그런 식으로 나오니까 아예 싸우질 못하잖아!
아리스는 분한 얼굴로 라시드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아리스는 시아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눈부신 햇빛 아래, 새하얀 웨딩드레스를 입고 은방울꽃 부케를 들고 있는 시아나는 참 예뻤다.
아리스는 시아나의 허리에 매달리며 소리쳤다.
“결혼하지 마, 시아나! 나를 평생 보살펴 주기로 했잖아. 나랑 함께 있어. 내가 행복하게 해 줄게. 오라버니 놈보다 널 사랑해 줄게!”
……하지만 그 모든 것은 상상이었다.
아리스는 그러고 싶은 것을 꾹 참았다.
‘오늘은 시아나에게 중요한 날이니까.’
시아나를 곤란하게 하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이 아니었다.
아리스는 톡 치면 터져 나올 것 같은 눈물을 참으며, 입을 열었다.
“결혼 축하해, 시아나.”
시아나는 동그란 눈으로 아리스를 바라보다가, 더없이 기쁜 얼굴로 미소 지었다.
“고마워요, 아리스 공주님.”
아리스는 시아나를 꼭 껴안았다. 굽 높은 구두를 신었는데도 아직도 시아나보다 키가 작았다.
그 점이 분했다.
‘시아나보다 일찍 태어났더라면 좋았을 텐데’
아쉬운 마음으로 인사를 끝내고 아리스는 하객석으로 돌아왔다.
아리스를 맞아 준 것은 언니인 그레이스 황녀였다.
몇 년 사이 한결 더 우람해진 그레이스는 아리스에게 말했다.
“잘했어. 멋지더라.”
그 말을 듣고 나서야 아리스는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다.
“흐아아앙!”
그레이스는 탄탄한 근육질 팔을 움직여 아리스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동생의 슬픔이 사그라들 때까지.
* * *
결혼식은 해가 져서야 끝이 났다.
라시드와 시아나는 하객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한 후, 두 손을 맞잡고 황궁 안으로 들어왔다.
앞으로 황제와 황후가 함께 사용할 신방은 황제궁 가장 안쪽에 준비되어 있었다.
신방에 들어간 황제와 황후는 원래 시녀들의 도움을 받아 첫날밤을 치를 준비를 해야 한다.
하지만 라시드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다들 나가거라.”
시녀들은 젊은 황제의 단호한 명령을 즉각 따랐다.
시녀들이 나가자마자, 라시드가 허리를 숙여 시아나의 귓가에 속삭였다.
“드디어 둘만 있을 수 있게 되었구나.”
“……!”
그 목소리가 너무 나긋하고 농밀하여, 시아나는 얼굴이 빨개졌다.
솔직히 말해 시아나는 결혼식을 치르는 내내 긴장을 거의 하지 않았다.
제국의 고위 귀족을 상대하는 것도, 사람들 앞에서 의식을 치르는 것도, 익숙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첫날밤이라니.’
떨렸다.
그냥 떨리는 것도 아니고 아주 많이.
시아나는 3년이나 라시드의 약혼녀로 지냈다. 게다가 신 아실론드가 먼 곳에 있다는 이유로, 줄곧 황궁에서 지냈다.
자연스럽게 라시드와 매일 함께 있었다.
둘만 있을 때면 입을 맞추었다.
어느 날은 그보다 더 농밀한 스킨십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두 사람은 아직 ‘진짜’ 밤을 보낸 적이 없었다.
‘어떡해. 진정이 안 돼.’
시아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저를 바라보는 라시드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시아나와 달리 라시드는 한없이 여유로워 보였다. 그것을 깨달은 순간 시아나는 저도 모르게 입술이 툭 튀어 나갔다.
라시드가 시아나의 볼록하게 튀어나온 입술을 매만지며 물었다.
“왜 아기 오리가 되었지?”
“나만 긴장을 했잖아요. 폐하는 아무렇지도 않지요?”
“그렇게 생각해?”
라시드는 빙긋 웃으며, 시아나의 손을 제 가슴 위로 올렸다. 시아나의 눈이 동그래졌다.
작은 손바닥 아래로, 라시드의 심장 박동이 느껴졌다.
쿵!
쿵!
쿵!
그의 심장이 격하게 뛰고 있었다. 저러다 터져 버리면 어쩌나 걱정이 들 정도로.
라시드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어젯밤은 잠을 조금도 자지 못했어. 드디어 너와 결혼한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거든.”
라시드는 황제로 즉위하자마자, 시아나와 결혼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그 마음을 참았다.
시아나가 제가 라시드와 어울리는 사람이 될 때까지 기다려 달라고 부탁했기 때문이다.
“사실 지금도 믿기지 않아. 내가 너의 남편이 되었다는 것도, 네가 나의 아내가 되었다는 것도.”
“…….”
“현실인 것을 확인할 수 있게 해 줄래?”
꿀이 뚝뚝 떨어질 만큼 달콤한 목소리였다.
시아나는 사과처럼 빨개진 얼굴로 라시드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라시드가 시아나에게 입을 맞추었다.
가벼운 베이비 키스가 아니었다. 남자의 정염이 담긴 진득한 키스였다.
라시드가 시아나의 흰 목으로 입술을 옮기며 속삭였다.
“사랑해, 나의 시아나.”
그의 고백은 밤새도록 계속되었다.
농밀한 키스, 야한 손놀림.
아무리 물을 마셔도 갈증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듯 애타는 눈빛과 함께.
* * *
시아나가 떨리는 목소리로 애원했다.
“라시드, 제발…….”
라시드가 들뜬 목소리로 사과했다.
“시아나, 미안…….”
라시드는 정욕이 거의 없는 편이었다.
전쟁터를 누빌 때도 그런 쪽으로 심하게 담백해서, 부하들 사이에서 ‘황태자 전하께 문제가 있는 게 아니냐.’라는 걱정을 할 정도였다.
걱정은 기우였다.
라시드는 시아나를 제 품에 안고 놓아주지 않았다.
시아나가 바들거리는 손으로 라시드를 밀어냈다.
“이제 그만…….”
라시드는 시아나의 말이라면 무엇이든 들어주었다.
아주 작은 부탁도, 나라를 흔들 만한 큰 요구도.
하지만 지금만큼은 아니었다.
라시드는 시아나의 작은 몸을 껴안으며 속삭였다.
“조금만 더.”
시아나의 눈가에 눈물이 핑 돌았다.
아아, 신이시여!
* * *
신방에 들어간 황후와 황제가 무려 일주일 동안 나오지 않고 있었다.
황궁의 시녀들은 난리가 났다.
“설마 오늘도 나오지 않으시는 건 아니겠지?”
“어머어머어머!”
“그럴 때를 대비해서 영양이 듬뿍 든 식사를 준비해야겠다. 오늘도 뜨거운 밤을 보내실 수 있도록 도와드려야지.”
도통 끝나지 않는 황제와 황후의 첫날밤에 잔뜩 상기된 시녀들 틈으로, 츄츄만 걱정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시아나, 괜찮은 건가.’
츄츄는 알고 있었다.
제아무리 손가락 하나로 제국을 뒤흔드는 황제라 해도, 시아나의 앞에서는 한낱 발닦개라는 것을.
황제가 시아나를 강제로 밀어붙일 거라는 걱정은 들지 않았다.
하지만…….
‘시아나도 황제 폐하께 꼼짝을 못하는 게 문제란 말이지.’
시아나는 상냥하고 남을 잘 챙겨 주는 성격이었다. 사랑하는 남자에게는 더했다.
라시드가 원한다면, 무리를 해서라도 들어줄 것이다.
아무리 힘들어도.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츄츄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츄츄는 솥뚜껑 같은 주먹을 쥐며 다짐했다.
‘오늘도 안 나오면 내가 신방에 음식을 가져다드려야것어.’
음식에 ‘이러다가 시아나가 죽겠구먼유! 그만 좀 하세유!’라는 쪽지라도 끼워 넣을 생각이었다.
그것도 통하지 않으면 신방으로 쳐들어가서 날뛰는 늑대, 아니 황제를 기절시키든가.
다행히 츄츄는 그런 끔찍한 일을 벌이지 않을 수 있었다.
그날, 신방의 문이 열렸기 때문이다.
* * *
장장 7일이나 이어진 첫날밤이 끝나고, 황후와 황제가 모습을 드러냈을 때 사람들은 기대했다.
더없이 다정한 두 사람의 모습을.
하지만…….
시아나가 눈을 내리깔며 말했다.
“오늘도 제 방에서 혼자 자도록 할게요.”
라시드가 못 들을 말을 들은 것처럼 얼굴을 굳혔다. 그러나 시아나는 그가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쐐기를 박았다.
“몸이 너무 힘들어요.”
“……!”
라시드는 무려 일주일 동안, 눈물 흘리는 시아나를 품속에 안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때는 정염에 취해 보이는 것이 없었으나, 이성이 돌아온 지금은 아니었다.
라시드는 너무나 작고 여린 시아나에게 무리를 시켰다는 죄책감이 있었다.
라시드가 잘못을 저지른 아이처럼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그럼 의사를 데리고 황후의 방에 가지.”
그러나 이번에도 시아나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괜찮아요.”
“……!”
“혼자 조용히 쉬고 싶어요.”
라시드는 더 이상 시아나를 잡을 수 없었다.
시아나는 그녀답지 않은 무표정한 얼굴로 라시드를 지나쳤다.
라시드는 차마 시아나를 붙잡지도 못하고, 버림받은 강아지 같은 얼굴로 시아나의 뒷모습만 바라보았다.
그렇게 첫날밤 이후, 시아나는 라시드를 피하고 있었다.
동침만 하지 않는 것이 아니었다.
결혼 전에는 매일 함께하던 티타임도, 식사도, 시아나는 혼자 하고 싶다고 했다.
시녀들이 소곤거렸다.
“아무래도 두 분이 싸운 것 같지?”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싸운 게 아니라, 황후 폐하께서 화가 나신 것 같아.”
시녀 한 명이 시아나의 마음을 알겠다는 듯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다.
“어쩜. 첫날밤이 너무 고되셨으니 그럴만하지.”
어쨌건 이렇게 분위기가 삭막할 때는 최대한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있는 것이 답이었다.
시녀들은 입을 꾹 다물고 딱 할 일만 했다.
봄날의 황궁에 때아닌 겨울이 온 것 같았다.
* * *
하루가 지날수록 황궁의 분위기가 삭막해졌다.
그나마 황후 폐하는 괜찮았다. 시아나는 라시드를 피할 뿐, 다른 이들에게는 예전처럼 친절했으니까.
하지만 황제 폐하는 아니었다.
딱히 라시드가 분노를 내뿜거나 난폭한 행동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느껴지는 기운이 엄청났다.
‘폐하를 보는 것만으로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아!’
황궁 사람들은 새삼 그가 예전에 ‘피의 황태자’라는 살벌한 별명으로 불렸다는 것을 기억해 냈다.
제국 최고의 귀족 앙겔루스 공작도 마찬가지였다.
라시드를 황제로 만든 충신이며 동시에 귀족들의 수장인 그는, 라시드에게 말했다.
“폐하, 최근에 새로 부과하신 세율 때문에 귀족들이 부담을 느끼고 있습니다. 폐하께 마음 깊이 충성하는 이들인 것을 감안하여 조금이라도 세율 부담을 덜어 주시면…….”
그 순간, 앙겔루스 공작은 라시드의 보라색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공작의 등 뒤로 식은땀이 주룩 흘렀다.
공작은 고개를 꾸벅였다.
“귀족들에게 살고 싶으면 닥치라고 하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공작은 후다닥 도망치듯 사라졌다.
라시드의 옆에서 그 모든 것을 지켜본 호위 기사 솔은 진정으로 공작이 부러웠다.
저토록 마음 편히 황제 폐하의 곁을 떠날 수 있으니까.
솔은 아무리 숨이 턱 막히고, 먹은 음식이 다 체할 것 같고, 기껏 만든 근육이 쪼그라들 것 같아도, 절대 그럴 수가 없었다.
자신은 황제의 호위 기사였으니까.
‘에효. 출세를 해도 먹고사는 건 여전히 힘들구나.’
솔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라시드를 바라보았다.
잘못 건드리면 누구라도 당장 목을 베어 버릴 것처럼 흉흉한 얼굴을 한 라시드를 향해 조심스럽게 말했다.
“폐하, 예상보다 알현이 일찍 끝나서 다음 일정까지 시간이 많이 남았습니다. 황제궁으로 가셔서 쉬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한참 뒤에 라시드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황후궁에…….”
“…….”
“……가면 시아나가 싫어할까?”
솔은 거짓말을 못했다.
“아마 그렇겠지요.”
그 말에 콕 하고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 같던 라시드의 얼굴이 무너져 내렸다.
‘내가 너무 심했어.’
첫날밤, 라시드는 자신을 제어할 수 없었다. 미친 사람처럼 끊임없이 시아나를 갈구했다.
한 번만, 한 번만 더.
그래서는 안 됐었는데.
지금 와서 후회해도 늦었다.
이미 일은 벌어졌고, 시아나는 제게 실망했다.
주인에게 버림받은 강아지처럼 풀죽은 라시드를 보며 솔은 당황했다.
늘 여유로웠던 라시드가 저러는 모습을 보니 여러모로 속이 편치 않았다.
“너무 땅 파지 마십시오. 어쨌건 시아나 님께서는 폐하를 사랑하시지 않습니까. 지금은 꼴 보기 싫어하셔도 시간이 지나면 마음이 풀리실 겁니다. 아마도.”
충성스러운 부하의 괘씸한 말은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라시드는 아름다운 얼굴로 말했다.
“마음이 답답하니 오랜만에 대련이라도 하자꾸나.”
“……!”
솔의 얼굴이 지옥에 가자는 말을 들은 듯 창백해졌지만, 도망갈 수 없었다.
그는 황제의 호위 기사였으므로.
* * *
“황후 폐하, 황제 폐하께서 꽃을 보내셨습니다.”
시녀의 말에 시아나는 고개를 돌렸다.
시녀는 만개한 꽃을 한 아름 안고 있었다.
평범한 꽃이 아니었다. 꽃이 흔한 봄날에도 보기 힘든 품종의 귀한 꽃들이었다.
보석보다 아름답게 빛나는 꽃을 보며 시아나가 말했다.
“예쁘구나. 방에 장식해 주렴.”
“예.”
잠시 후, 시녀가 말했다.
“황제 폐하께서 직접 주방 시녀에게 지시해서 만든 디저트가 도착했습니다.”
시녀가 가지고 온 케이크는 한눈에 보아도 범상치 않았다.
금보다 비싸다는 수엘라산 최고급 초콜릿을 이용해 만든 케이크 위에는 식용이 가능한 순금 가루가 별처럼 뿌려져 있었다.
금으로 만든 스푼은 다이아몬드로 장식되어 있었다.
황제의 선물은 거기에서 끝이 아니었다.
다이아몬드가 촘촘히 박힌 드레스, 일 년에 딱 스무 개만 난다는 희귀한 과일로 만든 주스, 장미꽃 향이 진하게 풍기는 향수.
몇 시간마다 하나씩 도착하는 선물을 보며 시아나가 난처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이러다가 황제 폐하께서 황후 를 맞은 후 사치를 한다는 소문이 나겠어.”
황후궁에 놀러 와 있던 그레이스 황녀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런 소문이 나도 어쩔 수 없지. 황제 폐하께서는 황후 폐하의 마음이 풀리지 않아 한없이 마음이 불안한 모양이니.”
그레이스의 옆에 있던 츄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께유. 보기 안쓰러울 정도로 시무룩해 하신다니께유.”
그레이스가 단단한 팔 근육을 꿈틀거리며 물었다.
“시아나, 첫날밤이 그렇게 최악이었어?”
시아나가 마시던 차를 풋, 하고 내뱉었다.
“왜 그런 걸 물으세요?”
그레이스가 손수건으로 시아나의 입가를 닦아 주며 말했다.
“첫날밤 이후로 둘 사이가 싸늘해졌잖아. 그 이후로 동침도 전혀 하지 않고 있고.”
츄츄가 조심스러운 얼굴로 말을 이어 말했다.
“그래서 시녀들 사이에 엄청난 말이 나돌고 있구먼. 황제 폐하께서 끓어오르는 정념을 참지 못하고 너를 많이 힘들게 한 탓에 이 지경이 된 것이라고.”
꺄아아아아악!
시아나는 황후의 체면이고 뭐고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그게 아니면 당장 이불을 뒤집어쓰고 바동거리고 싶었다.
‘황후가 되면 많은 사람들에게 일거수일투족이 보일 것은 알고 있었어.’
하지만 막상 저런 말을 대놓고 들으니 너무 창피했다.
시아나의 얼굴이 가을날의 사과처럼 새빨개졌다.
그 모습을 보며 그레이스는 눈썹을 내렸다. 시아나를 괴롭히는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할 말은 해야 했다.
“황궁 사람들 사이에서 은밀하게 돈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 오라버니께서는 어마어마하게 뛰어난 용모를 가지셨지만 여자 경험이 거의 없다고 해.”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거의’가 아니라 ‘아예’였다.
믿을 수 없지만, 라시드는 시아나가 첫 여자일지도 모른다.
그레이스는 굳이 그 내용까지 입에 담지 않는 대신 다른 말을 했다.
“그러니 오라버니께서 많이 서툴렀어도 이해해 줘. 오라버니가 너를 상처 주려고 그런 것은 결코 아닐 테니까. 오라버니는 너를 정말 사랑하잖아.”
츄츄가 맞는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려, 그러니까 속상한 게 있으면 피하지 말고 솔직하게 말하고 풀어. 이렇게 계속 데면데면하다가 진짜로 두 사람 사이가 틀어질까 봐 겁나는구먼.”
그런 불안감을 느끼는 것은 츄츄만이 아니었다.
황궁 사람들 모두 막 결혼한 황제와 황후의 사이가 나빠질까 봐 신경 쓰고 있었다.
그런 분위기가 지속되면 황궁뿐 아니라 제국 전체에도 영향을 끼칠 터였다.
‘정말 황제 폐하와 결혼하는 건 아무나 하는 게 아니구나. 부부 사이에 조금만 문제가 생겨도 나라를 뒤흔드는 대사건이 되다니.’
시아나는 복잡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두 사람 다 꺼내기 어려운 이야기를 해 주셔서 감사해요. 하루빨리 문제를 해결할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시아나의 말에 덩치 좋은 두 여인의 얼굴이 환해졌다.
* * *
다음 날 아침, 황제궁이 난리가 났다. 시아나가 찾아왔기 때문이다.
특히 호위 기사 솔은 감격에 찬 얼굴로 소리쳤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황제 폐하께서 아직 취침 중이시라 당장 깨우도록 하겠습니다!”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되요.”
“하지만…….”
시아나가 해사하게 웃으며 말했다.
“내 남편의 방인걸요. 편하게 들어가고 싶어요.”
솔이 입을 쩍 벌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시아나는 조용히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갔다.
황제의 침실.
이곳에 황제의 허락을 받지 않고 들어올 수 있는 이는 오로지 시아나뿐이었다.
거대한 방을 조금 걸어 들어가자, 새하얀 침대 위에 잠들어 있는 남자가 보였다.
시아나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아침 햇빛 아래에 반짝이는 은빛 머리카락. 그 아래에 보이는 얼굴은 조각상처럼 아름다웠고, 벌어진 실크 잠옷 사이로 보이는 몸 또한 단단했다.
시아나는 발갛게 물든 얼굴로 중얼거렸다.
“신이시여, 저 남자가 정말 내 남편이란 말인가요.”
이따금 이 현실이 믿기지가 않았다.
시아나는 한 발짝 더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고는 살짝 무릎을 굽혀 라시드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라시드는 몇 해 전까지만 해도 ‘피의 황태자’라는 흉악한 별명을 가지고 있었다. 황제로 즉위한 후 한없이 온화한 모습을 보였음에도 그 이미지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라시드가 가진 위압감 때문이었다.
라시드가 ‘오늘은 시아나랑 뭘 하고 놀까.’라는 고민에 눈썹을 살짝만 찌푸려도, 사람들은 창백해진 얼굴로 겁을 먹었다.
하지만…….
‘자는 모습은 소년 같아.’
그것도 엄청 예쁜 소년.
시아나는 홀린 듯한 시선으로 라시드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얼마나 지켜보았을까.
라시드의 감긴 눈이 천천히 떠졌다. 선명한 보라색 눈동자가 드러났다.
라시드가 잠이 덜 깬 눈을 깜빡거렸다.
“시아나?”
시아나는 놀란 눈으로 라시드를 바라보다가 눈썹을 내리며 웃었다.
“좋은 아침이에요, 라시드.”
“……!”
그 순간 라시드가 긴 팔을 뻗어, 시아나를 제 쪽으로 잡아당겼다.
“꺅!”
졸지에 라시드의 아래에 갇힌 시아나가 작은 비명을 내질렀다. 라시드는 시아나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사랑해.”
라시드가 시아나의 입가에 입을 맞추었다.
“사랑해.”
라시드는 시아나의 동그란 콧등 위에 입을 맞추었다.
“사랑해.”
라시드의 고백은 끝없이 이어졌다.
시아나의 볼, 이마, 정수리, 열 개의 손가락, 손등…… 그녀의 모든 곳에 입을 맞추며 끊임없이 속삭였다.
“사랑해.”
“…….”
시아나의 얼굴은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빨갛게 달아올랐다.
라시드가 두 팔로 시아나를 부서질 듯 껴안으며 말했다.
“사랑해. 그러니 제발 나를 미워하지 마.”
시아나의 심장이 찌르르 떨려왔다.
“내가 왜 폐하를 미워해요.”
“첫날밤 때문에 나를 피하는 거잖아.”
“……!”
“걱정했어. 네가 많이 아팠나 보다. 정말 힘들었나 보다.”
그 말은 사실이었기에 시아나는 새초롬하게 눈썹을 모았다.
“그렇게 걱정되었으면 내게 오지 그랬어요.”
시아나가 라시드를 거부하긴 했으나, 진심으로 거부한 것은 아니었다. 라시드가 황후궁에 찾아왔다면 못 이기는 척 문을 열어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라시드는 단 한 번도 황후궁을 찾아오지 않았다.
그것이 못내 서운했다.
라시드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만약 그랬다가 진짜로 네게 미움받으면 어떡해.”
“밤에 조금 힘들게 했다고 사랑하는 남자를 내칠 만큼 냉정한 여자가 아니에요, 나는.”
“하지만…….”
라시드가 보라색 눈동자에 시아나를 가득 담고 말했다.
“너와 단둘이 있으면 또 참지 못할 것 같았단 말이야. ……꼭, 지금처럼.”
“……!”
시아나는 라시드의 눈을 보았다.
보라색 눈동자에는 그날 밤과 같은 강렬한 욕망이 어려 있었다.
라시드가 괴로운 얼굴로 눈을 내리깔았다.
“미안, 시아나.”
낮은 목소리에는 짙은 죄책감이 어려 있었다. 동시에 어찌할 줄 모르겠다는 혼란스러운 마음이 느껴졌다.
시아나는 복잡한 얼굴로 라시드를 바라보다가, 두 손을 뻗었다.
희고 가는 팔이 라시드의 목을 휘감았다. 라시드를 제 쪽으로 끌어당기며 시아나가 말했다.
“그런 말 하지 말아요. 조금 많이 힘들기는 했지만 결코 싫지 않았어요. 사랑하는 남자와 함께하는 밤이 싫을 리 없잖아요.”
믿기 힘든 말을 들은 것처럼 라시드의 눈이 커졌다.
“그럼 왜 나를 피한 거야?”
“그건…….”
시아나는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말을 머뭇거렸다. 잠시 후, 시아나가 귀 끝까지 빨개진 얼굴로 대답했다.
“폐하의 얼굴을 보는 게 너무 부끄러워서요.”
“…….”
“나야말로 미안해요. 너무 어린아이처럼 굴어서 당신을 힘들게 했어요.”
시아나는 진심을 담아 사과했다. 설령 라시드가 그런 거였냐며 화를 내도 이해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라시드에게는 시아나의 사과가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다른 것이었으니까.
라시드가 열에 들 뜬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너를 또 안아도 돼?”
“……!”
시아나의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이내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라시드는 시아나에게 달려들었다.
마치 사슬이 풀린 늑대처럼.
두 사람은 첫날밤보다 뜨겁고 진득한 하루를 보냈다.
그리고 그날 밤, 아기가 찾아왔다.
열 달 후, 태어난 아기는 은빛 머리카락에 보라색 눈동자를 가진, 아빠를 꼭 빼닮은 공주님이었다.
“정말 예뻐요, 우리 아기.”
시아나가 눈물 어린 얼굴로 아기를 안으며 말했다.
시아나가 아기를 낳는 동안 내내 옆에서 함께 있어 주던 라시드도 환하게 웃었다.
“응.
젊은 황제는 더없이 기쁜 얼굴로 아내와 아기를 껴안았다.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