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황제폐하
황제의 장례식 준비는 결국 황태자인 라시드가 맡게 됐다.
라시드는 황제에 대한 예우를 갖추어 성대한 장례식을 열었다.
황궁에 있는 수많은 황제의 여인과 자식, 그리고 제국의 내로라하는 귀족들이 장례식에 참석했다.
모인 이들은 착잡한 얼굴을 했다. 누군가는 울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은 황제가 죽음으로써 제가 가진 이득이 사라진 것에 대한 안타까움 혹은 다른 이의 눈을 의식한 연기일 뿐.
그 어떤 이의 눈빛에도 진심 어린 슬픔 따윈 어려 있지 않았다. 오히려 기쁨을 참는 이도 있었다.
아리스는 새까만 드레스를 입고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아리스가 비틀어진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그 인간, 어지간히 못난 사람이었구나.”
어린 소녀의 목소리에는 마지막까지 얼굴 한번 보지 못한 아비에 대한 경멸이 가득 묻어 있었다.
때앵- 때앵-!
서글픈 종소리만이 지독히 이기적이었던 남자의 죽음을 애도해 줄 뿐이었다.
황제의 장례식이 끝나자마자 앙겔루스 공작이 말을 꺼냈다.
“황제 폐하께서 급작스럽게 세상을 떠나신 것은 너무나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마냥 슬퍼할 수는 없습니다.”
지난 몇 달간, 황궁에서 일어났던 일은 내전에 버금갈 만큼 큰일이었다.
황족은 물론 귀족들과 백성들도 큰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대로 두어서 좋을 것이 없었다.
“황태자 전하께서 한시라도 빨리 황좌에 오르셔야 합니다. 이 제국을 위하여.”
앙겔루스 공작과 그를 따르는 귀족들이 라시드의 앞에 고개를 숙였다.
라시드는 그들의 요청을 거절하지 않았다.
황태자 라시드가 황제로 즉위한다.
그 소식이 알려지자 황제의 죽음으로 인해 침울해 있던 분위기가 단숨에 바뀌었다.
사람들은 눈을 반짝이며 앞으로 다가올 새 시대에 대한 기대감을 표했다.
호위 기사 솔이 거대한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무섭기만 했지 막상 하시는 일은 없으셨던 선대 황제 폐하와 달리 황태자 전하께서는 어린 나이부터 전쟁터에서 활약하신 제국의 영웅이니까요.”
제국민은 황태자를 마음 깊이 존경했다.
게다가 피의 황태자라는 섬뜩한 별명과 달리, 라시드는 정신이 나간 아버지를 살뜰히 돌보고 장례식까지 정성껏 치러 주었다.
또한 끔찍한 짓을 저지른 어머니도 유배를 보내는 것으로 벌을 끝냈다.
그런 것을 보아 황태자 전하는 의외로 자애로운 분이실지도, 라는 소문이 퍼졌다.
솔은 그 말을 전하며 푸하하, 하고 웃었다.
“전하께서 자애롭다니. 차라리 호랑이가 당근을 좋아한다든가, 토끼가 고기를 좋아한다는 말을 믿는 것이…….”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솔은 말을 멈추었다.
라시드가 눈을 내리깔고 솔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옆에 앉아 있는 시아나 또한 눈썹을 내리고 그건 아니라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제야 솔은 제가 큰 실수를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놈의 입방정.’
솔은 잽싸게 근엄한 표정을 지으며 차렷 자세를 했다.
솔이 우렁찬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튼 결론은 제국민이 전하의 즉위 소식에 열광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중에서 가장 기뻐하는 사람은 솔일 것이라고 시아나는 생각했다.
‘당연한 일이지. 솔 님은 전하께서 황자였던 시절부터 함께했으니까.’
솔은 방금 전 표정을 가다듬었던 것이 무색하게 다시 히죽 웃었다.
“원래 이런 식으로 급작스럽게 황위를 물려받으면 분위기가 흉흉하기 마련인데 정말이지 기쁜 일이지요. 그러니 두 분도 아무 염려 마십시오.”
보고를 마친 솔은 경쾌한 발걸음으로 방을 나갔다.
솔이 사라지자마자 라시드가 시아나를 바라보았다. 라시드의 의도를 눈치챈 시아나가 살짝 붉어진 얼굴로 그의 허벅지 위에 앉았다.
일명 시아나 지정석.
라시드가 고집 반 어리광 반으로 만들어 낸 성과였다.
‘멀쩡한 의자를 두고 전하의 무릎 위에 앉는다는 게 너무 부끄럽고 이상했는데, 이것도 적응이 되네.’
적어도 처음처럼 떨리지 않았다. 혹시나 라시드가 무거워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도 되지 않았고.
시아나는 시선이 꼭 맞게 된 라시드와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온 세상이 전하의 황제 즉위 소식으로 난리인데, 정작 전하께서는 그리 기뻐하는 것 같지 않아요.”
“마냥 기뻐하기에는 정신이 없어서.”
황제가 죽고, 황후가 떠나고, 귀족들이 얌전히 라시드를 따르게 되었다고 해서 세상만사가 쉬워진 것은 아니었다.
라시드는 여전히 할 일이 많았다.
갑작스러운 황제의 죽음이 영 수상하다며 털을 바짝 세우고 있는 몇몇 귀족들도 상대해야 했고, 이제는 과부가 되어 버린 전 황제의 황비와 후궁들의 거취도 정해야 했다.
열심히 라시드를 돕고 있는 시아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긴 하죠.”
그뿐인가.
라시드를 심란하게 만드는 일이 하나 더 있었다.
생전 라시드의 방 밖으로 나가지 않았던 쭉쭉이(흰 페럿)와 냠냠이(다람쥐)가 툭 하면 외출을 하고 있었다.
라시드가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
“내가 궁을 떠나 있는 동안, 안젤리나 황비와 레이시스가 그 아이들을 데려가 돌봐 주었지.”
그것에는 마음 깊이 고마움을 느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변수가 있었다.
안젤리나 황비와 레이시스가 워낙에 최선을 다해 보살펴 준 덕분에, 라시드밖에 모르던 작은 동물들이 두 사람에게 푹 빠져 버린 것이다.
라시드에게 돌아온 이후에도, 틈만 나면 두 사람에게 놀러 갈 만큼.
쭉쭉이와 냠냠이에 대한 서운함에 라시드의 볼이 볼록해졌다. 그것이 귀여워 시아나는 쿡쿡 웃었다.
시아나가 라시드의 부푼 볼을 콕 누르며 물었다.
“그래서, 격한 업무들과 밖으로 나도는 애들 때문에 황제가 되는 것에 기뻐할 틈이 조금도 없다는 건가요?”
대답 없는 라시드를 향해 시아나가 말을 이었다.
“황제로 즉위하는 걸 원치 않는 건 아니고요?”
허를 찌르는 질문이었다.
라시드가 눈썹을 내렸다.
“왜 그런 생각을 하지?”
“전하께는 그럴 만한 이유가 여러 가지 있잖아요.”
시아나가 손을 들어 손가락 세 개를 펼쳤다. 그러곤 손가락 하나하나를 접어 가며 말을 잇기 시작했다.
“하나, 전하는 원래 황궁에서 얌전히 일하는 것을 끔찍이 싫어하죠.”
생사가 오가는 전쟁터에서 검을 휘두르는 것이면 모를까. 라시드는 기본적으로 침대에서 여유롭게 뒹구는 것을 좋아했다.
“둘. 일에 대한 욕심이 없으니 권력욕이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그것도 아니고요.”
라시드는 그저 작은 동물들에게 간식을 만들어 주고 산책을 시키는 일상에 흡족해하는 사람이었다. 그에게는 수많은 이들에게 존경과 찬양을 받고 싶다는 욕망이 조금도 없었다.
“셋. ……애초에 전하가 황제가 되고 싶었던 건 전하의 생각이 아니라 황후 폐하께서 강요했기 때문이었어요.”
어느 것을 보아도 라시드에게는 황제를 꿈꿀 이유가 없었다.
시아나는 라시드의 볼을 어루만지며 속삭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도 마찬가지였죠. 전하가 황제의 자리에 앉기를 바랐어요.”
하지만 그것은 라시드에게 황후라는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때 시아나에게는 라시드를 지킬만한 힘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에요. 황제 폐하와 황후 폐하는 이곳에 없어요. 설령 다른 적이 나타난다 해도 제게는 이제 전하를 지킬 힘이 있고요.”
“…….”
“전하가 황제의 자리에 앉는 걸 원치 않는다면 그래도 돼요.”
라시드는 멍하니 시아나를 바라보더니, 하, 하고 작은 웃음소리를 냈다.
그러더니 참을 수 없다는 얼굴로 시아나를 안았다.
“황제가 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듣는 건 처음이야. 그런데 의외로 기쁘군. 아주 좋아.”
“…….”
“하지만 네가 모르는 것이 있어. 네가 이렇게 사랑스러운 말을 할수록, 나는 황제가 되고 싶어.”
시아나의 말대로 라시드는 거대한 제국을 지배하고 싶은 야망 따위는 조금도 없었다. 그럼에도 라시드는 결심했다.
세상 누구도 흔들 수 없는 힘을 가질 것이라고.
“그래야 더없이 완벽하게 너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있을 테니.”
“…….”
“나는 내가 가진 제국 최고의 혈통과 권력이 좋아, 시아나.”
진심 어린 목소리에 시아나의 가슴이 찌르르 울렸다.
콩. 시아나가 라시드의 이마에 제 이마를 콩 맞대며 배시시 웃었다.
“그럼 다행이고요.”
* * *
보통 황제 즉위식을 준비하는 것은 황제의 친모였다. 그러나 황후는 죄인이 되어 유배지로 떠났기에 시아나가 그 일을 맡았다.
황실에서 가장 실력 있는 재봉사가 즉위식 날 황제가 입을 옷을 가지고 왔다. 옷을 꼼꼼히 확인한 시아나가 손뼉을 마주쳤다.
“정말 멋진 옷이에요!”
시아나의 칭찬에 재봉사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러나 시아나의 이어진 말에 재봉사의 얼굴은 급속도로 굳었다.
“하지만 목깃과 소매에 들어간 자수가 너무 화려하네요. 그대도 알다시피 황태자 전하께서는 이목구비가 무척 뚜렷하셔서 이런 화려한 옷을 입으면 너무 과해 보입니다. 자수 모양을 좀 더 심플하게 바꾸는 편이 좋겠어요.”
아니요, 제 의견은 다릅니다. 황태자 전하께서는 눈부시게 아름다운 미모를 가지고 있으니 이 옷이 딱입니다.
장미꽃은 화려하게 포장할수록 아름다운 법이니까요!
—라고 재봉사는 외치고 싶었다.
그러나 재봉사는 그 말을 꾹 참았다.
동그란 얼굴을 한 시아나는 얼핏 만만해 보였으나 결코 그렇지 않았다.
황후의 음모에 빠졌던 황태자를 구한 영웅이자 황태자의 사랑을 듬뿍 받는 연인이었다. 또한 신 아실론드 왕국의 유일한 공주이며 총리였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하잖아!’
시아나는 의상 디자인에서부터 제작까지 허투루 넘어가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재봉사는 수십 번이나 수정 요청을 받아 재작업을 해야 했다.
‘다른 시녀들의 말은 다 뻥이야.’
황궁 시녀들은 모이기만 하면 시아나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대부분의 시녀들이 시아나에게 큰 호감을 가졌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시아나가 황궁 시녀로 일한 경험이 있다는 것이다.
가재 사정은 가재가 아는 법이다. 저 높은 곳에만 있던 황족이나 귀족들과 달리 시아나는 황궁에서 일하는 이들의 사정을 잘 알고 이해해 줄 것이다.
‘……는 무슨. 더한다, 더해!’
오늘도 고된 야근을 할 생각에 재봉사는 속으로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울먹이는 재봉사를 보며 시아나가 눈썹을 내렸다.
“내가 너무 까다롭게 굴어 힘들지요?”
“네.”
저도 모르게 솔직하게 대답한 재봉사는 곧바로 고개를 흔들었다.
“아뇨! 아닙니다! 얼마든 저를 소처럼 부려 주십시오. 그러라고 있는 황실 재봉사인걸요.”
어째 말하면 말할수록 불만을 표출하는 느낌인데…….
당황한 재봉사가 식은땀을 흘리는데, 시아나가 말했다.
“전하의 일생에 한 번뿐인 중요한 날이니 최선을 다해 준비해 드리고 싶습니다. 그러다 보니 하나하나 쉽게 넘어갈 수가 없네요.”
“아무렴요. 그래야지요.”
“대신 즉위식이 끝나면 전하께 말하여 그대에게 특별 휴가를 주도록 하겠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말에 재봉사의 눈이 튀어나왔다.
“휴, 휴가 말입니까?”
“예. 전 황제 폐하의 장례식과 새 황제 폐하의 즉위식이 연이어 열리는 바람에 고생이 많았으니까요. 고되게 일한 만큼 쉬어야지요.”
“…….”
“휴가비도 넉넉히 지급할 예정이니, 휴가를 어떻게 보낼지 고민해 보세요.”
그 순간, 재봉사의 죽어 가던 눈이 번쩍하고 빛났다. 재봉사가 언제 풀 죽었냐는 듯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외쳤다.
“당장 목깃과 소매를 고쳐 오겠습니다!”
재봉사가 옷을 들고 쌩 하고 사라졌다.
“뭐야, 재봉사에게 무슨 말을 했기에 저런 표정으로 나가? 자꾸 그렇게 사람 홀리고 다니지 말랬지.”
새침한 목소리를 내며 들어온 이는 아리스였다. 아리스의 뒤로 그녀의 시녀인 니니와 나나가 쪼르르 따라왔다.
시아나가 눈썹을 내리며 대답했다.
“별말 안 했어요. 그저 전하의 옷을 만드는 데 최선을 다해 달라고 부탁했을 뿐이에요.”
“흥, 그런 말을 할 때는 눈을 뾰족하게 뜨고 최대한 험악하게 말하란 말이야. 생글생글 웃지 말고.”
“네, 명심할게요.”
웃으며 대답하는 시아나를 향해 아리스가 물었다.
“일은 끝난 거지?”
“의복을 점검하는 일은요.”
아직 할 일이 많았다. 대관식장이 잘 꾸며지고 있는지 확인해 보아야 했고, 대관식에 초대할 명단도 정리해야 했다.
아리스가 입을 오리처럼 쭉 내밀었다.
“그건 조금 있다 해도 되잖아.”
“그건 그렇지만…… 왜요? 저와 하고 싶은 일이라도 있으세요?”
아리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두 눈을 반짝였다.
“응, 싸움 구경.”
“예?”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시아나의 손을 잡고 아리스가 궁을 나섰다. 니니와 나나도 함께 따라갔다.
네 여인이 도착한 곳은 며칠 전 황제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돌아온 그레이스 황녀의 궁이었다.
그레이스를 만나러 온 건가 싶었는데, 아리스가 시아나를 이끈 곳은 정원 한편의 수풀이었다. 마치 좀도둑처럼 수풀 속에 몸을 숨기게 된 시아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공주님, 이게 대체…….”
“쉿.”
아리스가 시아나의 입을 막으며 한 곳을 가리켰다. 시아나는 ‘앗!’ 하고 작은 비명을 질렀다.
몇 발짝 떨어진 곳에 그레이스와 그녀의 약혼자인 아이작이 서 있었다.
시아나가 놀란 얼굴로 아리스에게 소곤거렸다.
“아이작 저분 아직도 살아 있…… 아니, 아직도 안 차였어요?”
“나도 그레이스 언니가 진즉 차 버린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고.”
정확히 말하면 그레이스는 아이작을 완전히 잊고 있었다. 그녀는 신 아실론드 왕국을 오가느라 정신이 없었으니까.
게다가 일개 백작의 셋째 아들인 아이작은 황제의 장례식에 초대받지도 못했다.
참으로 오랜만에 재회하게 된 두 남녀였다.
그레이스가 고개를 까닥거렸다.
“오랜만입니다, 아이작 님.”
“…….”
그러나 여유롭기 만한 그레이스와 달리 아이작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그레이스를 찾아온 아이작은 나름 철두철미한 계획이 있었다.
황제가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이했다. 아무리 아버지에 대해 큰 정이 없는 그레이스라 해도 서글프게 울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
이럴 때야 말로 약혼자의 상냥한 위로가 필요한 법이지.
아이작은 그레이스를 다독이며 식을 대로 식어 버린 그녀의 마음에 다시 불을 지필 생각이었다.
하지만…….
“지, 지금 운동을 하고 계시는 겁니까?”
“예.”
그레이스는 심드렁한 얼굴로 거대한 돌덩이를 들어 올렸다. 그 순간 두툼한 이두박근이 봉긋 솟았다.
제국을 떠났을 때보다 한층 더 우람해진 근육에 아이작은 충격받았다.
아이작의 시선을 눈치챈 그레이스가 아, 하고 말했다.
“일부러 키운 것은 아닌데 신 아실론드 왕국에서 공사하는 것을 돕다 보니 자연스럽게 이리되었답니다. 무거운 것을 들고 운동하는 것 보다 훨씬 근육이 잘 붙더군요.”
세상 뿌듯한 얼굴을 한 그레이스를 보며 아이작은 참지 못하고 소리를 내질렀다.
“제발 그만하십시오! 더 이상 못 들어 주겠습니다!”
“…….”
“솔직히 말할까요? 그레이스 공주님의 지금 모습, 정말 흉합니다. 근육은 불끈하고 피부는 햇볕에 그을리고 머리카락은 남자처럼 짧고…… 그 어떤 남자도 아름답다고 생각하지 않을 거라고요.”
어마어마한 독설이었다.
그럼에도 그레이스는 조금도 상처 받은 표정을 짓지 않았다. 단지 불쾌한 듯 눈썹을 찡그리며 중얼거렸을 뿐.
“남자에게 아름답다는 말을 듣고 싶어 만든 근육이 아니야.”
“……?!”
눈을 부릅뜬 아이작에게 그레이스가 생긋이 웃었다.
덩치가 커지고 머리카락은 귀 끝까지 짧았지만, 화려한 이목구비는 여전했기에 그녀의 미소는 아름다웠다.
저도 모르게 얼굴에 빨개진 아이작을 향해 그레이스가 말했다.
“우리 이제 그만 파혼합시다.”
“예?!”
아이작이 황당한 얼굴로 입을 쩍 벌렸다. 한 박자 늦게 정신을 차린 아이작이 말을 더듬었다.
“가, 갑자기 파혼이라니요. 설마 제가 방금 한 말 때문에 그러십니까? 다소 격하긴 했으나 그레이스 공주님을 위해 드린 말씀이었습니다. 저는 그레이스 공주님이 어떤 모습이라도 좋아…….”
그레이스가 아이작의 말을 단칼에 잘랐다.
“당신이 내 모습을 좋아하든 말든 상관없어요. 중요한 건 내 마음이니까요.”
“……!”
“근육도 없고, 체격도 작고, 힘도 약한 주제에 입만 나불거리는 남자에게 나는 아무런 매력도 느끼지 못하겠습니다.”
아이작의 얼굴에 열이 확 올랐다.
그레이스가 아무리 황족이라 해도 결국은 여인이었다. 여인에게 저런 말을 들으니 자존심이 상해 견딜 수가 없었다.
이를 으득거리는 아이작을 보며 그레이스가 피식 웃었다.
“꼬우면 덤비시던가요.”
“……!”
아이작은 그 말의 의미를 단번에 눈치챘다.
그레이스는 지금 아이작을 도발하고 있는 것이다. 제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장갑을 던져 결투를 요청하라고.
아이작이 정색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십시오. 결투는 강인한 남자들 사이에서만 이뤄지는 겁니다. 어찌 가녀린 여인에게…….”
그 순간 그레이스가 아이작의 앞으로 팔을 내밀었다. 어마어마한 팔의 두께에 아이작이 저도 모르게 ‘히익!’ 하고 비명을 내질렀다.
창백해진 아이작을 향해 그레이스가 말했다.
“결투가 부담스러우면 팔씨름도 좋습니다.”
그레이스가 팔에 힘을 주자 근육이 한껏 부풀어 올랐다. 그와 비교하면 아이작의 팔은 어린아이처럼 가늘고 여려 보였다.
아이작은 더 이상 이 수모를 견딜 수 없었다.
“공주님과 제 약혼은 가문 대 가문으로 약속된 일입니다. 파혼은 절대 하지 않을 겁니다.”
아이작은 그 말을 남기고 도망치듯 사라졌다.
혼자가 된 그레이스는 두 팔을 허리에 얹고 입을 열었다.
“구경 다 했으면 나와.”
그 말에 저쪽에 있던 수풀이 흔들리더니, 시아나와 아리스, 니니와 나나가 쪼르르 나왔다.
아리스가 상기된 얼굴로 그레이스에게 달려갔다.
“언니, 좀 멋지더라? 근데 좀 약했어. 번쩍 들어서 던져 버리지 그랬어. 그럼 겁을 잔뜩 먹어서 다시는 이곳에 얼쩡거릴 생각을 못 할 텐데.”
“아무리 그래도 그건 좀…… 약자는 보호해야지.”
어깨를 으쓱이는 그레이스를 향해 시아나가 다가왔다.
“그런데 그렇게 일방적으로 파혼이야기를 꺼내도 괜찮은 건가요?”
아이작의 말대로, 그레이스와 아이작의 약혼은 어린애 장난이 아니었다. 황가와 백작가의 수많은 이익이 얽혀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레이스가 문제없다는 듯 말했다.
“괜찮아. 어마마마께서 내 맘대로 하라고 하셨으니까.”
시아나의 눈이 동그래졌다.
“라일라 황비마마께서요?”
“그래.”
“…….”
“예전에는 내 쪽에서 먼저 파혼을 하면 이것저것 손해 보는 게 많다고 절대 안 된다고 하셨지. 정 파혼을 하고 싶으면 사람들이 납득할 만한 그럴싸한 이유를 만들든가, 아니면 아이작 측에서 먼저 파혼하고 싶게 만들라고 말이야. 하지만 요즘 어마마마께서는 그런 잔소리를 할 의욕이 전혀 없으셔.”
시아나가 눈썹을 내렸다.
“혹시 황태자 전하께서 황제로 즉위하게 되어 그런 건가요?”
라일라 황비는 네 명의 황비 중 가장 권력에 욕심이 많았다. 황비 중 유일하게 그녀는 제 아들을 황제로 만들고 싶어 했다.
그러나 결국 라시드가 황제에 즉위하게 되면서 그 야망이 깨진 셈이니 속상할 만했다.
그레이스가 풋, 하고 웃었다.
“그건 아니야. 사실 그건 그리 가망 없는 야망이었잖아. 옛날부터 라시드 오라버니의 힘이 너무 막강했으니까.”
“…….”
“어마마마께서 풀죽은 이유는 다름 아닌 황후 폐하 때문이야.”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던 이름에 시아나가 눈을 크게 떴다.
“황후 폐하요?”
“그래. 황후 폐하께서 북쪽의 유배지로 떠난 후에 아주 그냥 울상이라니까.”
“……라일라 황비마마께서는 황후 폐하를 미워하시는 것 아니었나요?”
라일라 황비는 고귀한 가문에서 태어나 줄곧 황후를 꿈꿨다. 그런데 황후의 등장으로 그 꿈이 부서졌으니 원망이 큰 것이 당연했다.
그래서 라일라 황비는 툭하면 황후와 대립했다. 그 덕에 시아나도 많은 덕을 보았고.
그레이스가 말했다.
“맞아. 그런데 그렇게 미워할 때는 언제고 막상 황후 폐하께서 황궁에서 사라지니 마음이 울적한 모양이야. 애증인지 연민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떤 감정이라도 영 이해가 되지 않아 그레이스는 어깨를 으쓱였다.
“아무튼 어마마마는 기가 쪽 빠져서 아무래도 좋다고 뭐든 다 나 좋을 대로 하래. 그래서 이 틈에 파혼하려고.”
그 말에 시아나를 포함한 정원에 있던 여인들이 모두 엄지손가락을 척 들어 올렸다.
그녀들의 응원에 그레이스가 씩, 하고 시원한 미소를 지었다.
얼마 후, 그레이스는 그녀가 원했던 대로 파혼을 했다. 아이작은 이럴 수 없다고 길길이 날뛰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는 일개 백작가의 삼남, 그레이스는 전 황제의 딸이자 현 황제의 여동생.
권력의 차가 너무 컸다.
아이작은 일그러진 얼굴로 파혼 서류에 사인을 하며 저주 같은 말을 내뱉었다.
[단언컨대, 공주님은 저보다 나은 귀족 남성과 약혼하기 힘들 겁니다. 세상 사람들은 신성한 약혼을 제멋대로 파투 낸 극악무도한 여인을 결코 좋게 보지 않을 테니까요.]
아이작이 예견한 대로였다. 파혼 후, 그레이스의 신붓감으로서의 평판은 바닥을 쳤다.
근육이 우람한 데다 남자 같은 행색을 하고 다녔으니 더더욱.
물론 그러거나 말거나 그레이스는 신경 쓰지 않았지만.
그런 그레이스가 일생의 짝을 만나게 된 것은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난 후였다.
* * *
시아나가 까르르 웃으며 말했다.
“결투를 신청하라는 그레이스 황녀 저하를 보고 겁에 질린 아이작놈, 아니 아이작 님의 얼굴이 정말 대단했다니까요. 솔직히 말하면 엄청 고소했어요.”
라시드가 말했다.
“내 앞에서 다른 남자 이야기는 하지 마.”
제법 서늘한 목소리였지만 시아나는 조금도 무섭지 않았다.
왜냐면 라시드는 지금 침대에 누워 잘게 썬 오이를 얼굴 위에 붙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아나가 마지막 오이를 라시드의 얼굴 위에 올려 주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질투는 오이 팩이 끝난 후에 해 주세요. 열심히 붙인 오이가 떨어지면 안 되니까요.”
시아나의 말에 라시드는 입을 꾹 다물었다.
며칠 후, 제국에서 가장 고귀하고 강대한 존재가 될 라시드가 지금 이런 모습으로 있는 것은 대관식 때문이다.
황금의 관을 물려받는 이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벽하게 꾸민 모습으로 나타나야 했다. 역대 황제 중 가장 아름다운 미모를 자랑할 것이라 예상되는 라시드도 그 규율을 피해 갈 수 없었다.
원래는 이런 일을 전문적으로 하는 시녀들이 라시드를 관리해 주어야 했다. 그러나 시아나가 다른 여인 손에 라시드를 맡길 수 없다며 이 일을 맡았다.
‘매일 아침저녁마다 전하의 얼굴에 팩을 해 주고, 머리카락에 향유를 바른 후 빗겨 주고, 푹 잘 수 있게 매일 밤 자장가도 불러 주고 있지.’
꽤 번거로운 일이었지만 시아나의 얼굴에는 조금도 힘든 기색이 없었다.
사랑하는 남자를 보살피는 행복함 때문만은 아니었다. 제가 손을 댈수록 아름다워지는 존재에 대한 뿌듯함이 컸다.
라시드의 얼굴에서 얇은 오이를 모두 떼어 땐 시아나는 입을 틀어막았다.
‘오이가 가지고 있던 모든 생기가 전하의 얼굴에 스며든 것 같아!’
그 정도로 라시드의 얼굴은 촉촉하고 환했다.
그뿐인가. 지난 며칠간의 정성 어린 관리로 은빛 머리카락은 반짝거렸고, 보라색 눈동자는 한없이 맑았다.
홀린 얼굴로 저를 보는 시아나를 보며 라시드가 두 눈을 부드럽게 휘었다.
아름다운 남자의 해사한 미소에 시아나는 저도 모르게 눈을 꾹 감았다.
“너무 그렇게 환하게 웃지 말아 줄래요? 눈부시다고요.”
라시드가 재미있다는 듯 쿡쿡 웃었다.
“이 얼굴이 그렇게 마음에 들어?”
“마음에 드냐, 마냐, 라는 질문은 의미가 없어요. 전하의 얼굴은 취향을 따질 수 있는 얼굴이 아니니까요.”
세상 사람들의 취향이 아무리 다양하다 해도, 절대적인 미의 기준이란 것은 크게 다르지 않은 법이다.
비 온 뒤 해가 쨍쨍한 새파란 하늘, 5월의 만개한 장미꽃, 반짝이는 다이아몬드.
조각상처럼 완벽한 모양과 비율을 갖춘 라시드의 얼굴.
모든 이들이 그것들을 보며 아름답다고 생각할 것이다.
시아나의 말에 라시드가 기분 좋은 듯 입꼬리를 올렸다. 그런 라시드의 얼굴을 매만지며 시아나가 말을 이었다.
“나는 타인의 외모에 그리 까다롭지 않거든요. 그래서 내가 사랑하는 남자가 이렇게 엄청난 미남일 줄은 상상도 못했어요.”
“그렇군.”
“전하는 어땠어요? 나 같은 연인이 생길 거라고 상상해 본 적 있어요?”
의외로 라시드는 조금의 고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말하지 않았던가? 시아나 너는 내가 아주 오래전부터 꿈꾸던 이상형이야.”
라시드의 말에 시아나는 황당한 얼굴을 했다.
시아나는 결코 못난 얼굴이 아니지만 빼어난 미녀도 아니었다.
수수한 옷을 입고 조용히 서 있으면, 대부분의 사람이 아무 의식하지 않고 지나칠 만큼 평범했다.
그러나 라시드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종종 귀족이나 부하가 내게 물어보곤 했어. 어떤 외양의 여인이 좋으냐고. 그럴 때마다 나는 늘 이렇게 대답했지.”
라시드가 두 손으로 시아나의 동그란 얼굴을 가두며 말했다.
“동그란 얼굴에 살짝 쳐진 눈, 흰 우유처럼 뽀얀 얼굴, 한 품에 쏙 들어올 만큼 작은 여인에게 매력을 느낀다고 말이야.”
“……정말이요?
“그래. 네 모습은 내가 가장 예쁘다고 생각하는 외양을 그대로 재현한 것처럼 생겼어.”
어머나.
시아나는 어느새 제가 침대에 누워 있음을 깨달았다. 그녀의 위로 라시드가 있었다.
라시드의 보라색 눈동자에 어린 선연한 열망에 시아나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러나 시아나는 필사적으로 마음을 다잡았다.
‘요즘 툭하면 이런 식으로 야릇한 분위기를 만드는데 절대 넘어가선 안 돼.’
시아나는 혼전순결주의자였다.(큰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었고 그저 결혼식 첫날밤의 로망 때문이다.) 그것을 위해 라시드를 막아야 했다.
시아나가 생각나는 대로 말을 꺼냈다.
“전하의 이상형, 진짜 나인 것이 아닐까요? 전하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우리 8년 전에 만났었잖아요. 그때 나를 보고 전하가 한눈에 반한 거죠.”
웃자고 한 이야기였는데 라시드는 전혀 웃지 않았다.
더없이 진지한 얼굴로 대답해 주었을 뿐.
“사실 나도 그런 게 아닐까 생각해. 그때의 일이 조금도 기억나지 않아 확인할 수 없지만.”
라시드는 그렇게 말하며 기어이 시아나에게 다가와 입술을 포갰다.
시아나는 말도 안 된다는 얼굴로 생각했다.
‘방금 전 팩을 할 때 전하의 입술 위에는 오이를 얹지 않았는데…….’
라시드의 입술은 말도 안 될 만큼 촉촉하고 부드러웠다. 결국 마음이 약해진 시아나가 작게 입을 벌리려는 순간이었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라시드는 가뿐히 무시하려 했지만 시아나는 그럴 수 없었다. 시아나가 라시드를 저지하듯 그의 가슴을 살짝 밀었다.
라시드는 눈썹을 찡그렸다.
시아나는 세상에서 가장 영특하지만 남자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게 분명하다.
‘이 상태에서 멈추라니…….’
그것은 너무나 고통스럽고 초인적인 인내가 필요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라시드는 순순히 물러났다. 라시드가 떨어지자 시아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내 문밖에서 호위 기사 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하, 시아나 공주님.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누구냐.”
살기 어린 라시드의 물음에 솔이 대답했다.
“미스틱 상단의 키르안입니다.”
* * *
라시드가 황궁을 점령했을 때, 키르안은 떠났다. 황제에게 마법을 건 마법사를 찾기 위해서였다.
“미스틱 상단의 모든 것을 동원하여 가까스로 도망친 마법사를 잡아왔지만 이미 늦었군요.”
키르안이 씁쓸한 얼굴로 황제의 죽음을 애도했다.
키르안은 긴 쇠사슬을 들고 있었는데, 그 끝에는 한 남자가 꽁꽁 묶여 있었다.
마법사 융이었다.
그를 본 시아나가 침을 꿀꺽 삼켰다.
‘이자가 마법사구나.’
마법사는 워낙에 숫자가 적고 은밀하게 몸을 숨기며 사는 이들이었다.
그래서 시아나는 직접 마법사를 대면한 것이 처음이었다.
융은 피가 흐르지 않는 게 아닐까 싶을 만큼 모든 것이 새하얗다. 긴 머리카락도, 나이를 알 수 없는 얼굴도.
그 와중에 흰자가 전혀 보이지 않는 눈동자만이 새까맣게 빛날 뿐이었다.
‘사람이 아닌 듯한 기괴한 느낌이 드는 자로구나.’
키르안이 그런 시아나의 마음을 알아챈 듯 말했다.
“걱정 마세요, 공주님. 마력을 억제하는 쇠사슬로 묶어 두었으니까요. 제아무리 강인한 힘을 가진 마법사라도 이 쇠사슬에 묶여 있는 한 평범한 인간입니다.”
융은 키르안을 원망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당근으로 토끼를 꼬드기듯, 황금으로 순진한 마법사를 꾀어내 이렇게 묶어 버리다니……. 대륙에 있는 모든 마법사들이 당신을 가만두지 않을 겁니다.”
키르안이 썩은 표정으로 대꾸했다.
“개뿔. 다른 마법사들에게 네가 벌인 흉악한 짓에 대해 알리고, 너의 처벌에 대한 동의도 받았어. 그러니 쓸데없는 걱정은 집어치우고 어떡하면 조금이라도 편안하게 죽을 수 있을지 고민해 봐.”
융의 얼굴이 한층 시무룩해졌다. 마치 못된 짓을 하다가 걸린 어린아이처럼.
시아나는 그를 복잡한 얼굴로 바라보다가 물었다.
“황후 폐하께 의뢰를 받아 황제 폐하께 마법을 건 게 사실인가?”
심증뿐이었던 사건의 확인을 위해 물은 것이다. 융은 당당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아주 어렵고 까다로운 마법이었죠. 하지만 조금의 실패 없이 완벽하게 성공했습니다. 황후 폐하의 명령으로 황제 폐하께서는 스스로 목숨까지 끊으시지 않았습니까.”
“……!”
융의 얼굴에는 제 마법으로 목숨을 잃은 황제에 대한 어떠한 죄책감도 없어 보였다.
그저 제 마법이 성공했다는 자부심만이 느껴질 뿐.
시아나는 그에게 본능적인 거부감이 일었다.
그런 시아나를 향해 키르안이 말했다.
“마법사는 평범한 인간의 상식으로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족속들입니다. 그러니 이자를 이해하려 하지 마세요.”
키르안의 말대로였다.
시아나는 마법사가 왜 그런 짓을 벌였는지 알 필요가 없다. 중요한 것은 결국 황제가 비참하게 죽어 버렸다는 사실이다.
황제를 죽게 만든 것은 황후였으나, 그것을 가능하게 한 것은 마법사의 힘.
융은 살인을 도운 명백한 죄인이었다.
시아나가 싸늘해진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키르안, 마법사에게 줄 수 있는 가장 끔찍한 벌이 뭐지?”
보통 인간에게는 사형이 가장 큰 벌이겠지만, 마법사는 일반적인 상식을 가진 이가 아니니 다를지 모른다.
시아나의 생각대로였다.
“마법사는 제 목숨보다 제 안에 있는 호기심을 더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그 호기심을 충족시키지 못하게 하는 것이 저자에게 가장 괴로운 일이라는 거구나.”
고개를 끄덕인 키르안을 향해 시아나가 말했다.
“저자가 연구하던 것이 있다고 했지. 그것을 모두 불태워 없애 버려.”
“……!”
그 순간 사람 좋게 웃고 있던 융의 얼굴이 변했다.
융은 새까만 눈동자를 부릅뜨며 악마 같은 모습으로 시아나를 노려보았다. 마법사의 분노는 무시무시한 것이다.
그럼에도 시아나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한없이 차가운 시아나의 눈빛을 보며 융은 그녀가 방금 한 말을 쉽게 물리지 않을 것을 깨달았다.
융은 인간의 정신을 조종하는 마법을 연구했기에 마법사치고 눈치가 좋았다.
지금은 바짝 엎드려야 할 때다.
융이 방금 전과는 달리 정중한 태도로 시아나에게 고개를 숙였다.
“부디 무서운 말씀을 거두어 주십시오, 공주님.”
“내가 왜 그래야 하지?”
“저는 실력 있는 마법사입니다. 그런 저를 죄인으로 만들어 죽여 버리거나 끔찍한 벌을 주어 적으로 돌리는 것보다는, 유용하게 써먹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시아나가 불쾌한 말을 들었다는 듯 눈썹을 추켜세웠다.
“나는 사람을 조종하는 마법 따위 필요치 않아.”
“공주님께서는 그러시겠죠. 하지만…….”
융의 시선이 시아나의 옆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팔짱을 낀 라시드가 서 있었다.
라시드는 제 아버지를 죽인 마법사를 마주쳤음에도 내내 조용히 있었다. 융에 대해 아무 감정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그저 참은 것뿐이다.
조금이라도 몸을 움직이면, 그대로 저 역겨운 자의 목을 베어 버릴 것 같아서.
‘시아나의 앞에서 그런 잔혹한 짓을 저지를 수는 없잖아.’
하나 행동하지 않을 뿐, 라시드의 보라색 눈동자에는 융을 향한 경멸이 짙게 배어 있었다.
그런 라시드의 눈빛에 융은 소름이 돋았지만 기어이 할 말을 했다.
“황태자 전하께서는 제가 필요하실 겁니다.”
침묵하는 라시드를 향해 융이 말을 이었다.
“왜냐면 저는 전하께서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아 드릴 수 있으니까요.”
시아나와 라시드가 동시에 눈을 크게 떴다.
융의 말대로 라시드에게는 잃어버린 기억이 있었다. 8년 전, 시아나를 처음 만났을 때의 기억이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아는 이는 라시드와 시아나뿐이었다.
라시드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내가 기억을 잃었다는 걸 어떻게 알았느냐.”
“황태자 전하께 마법이 스쳐 지나간 흔적이 보이거든요. 누군가 마법으로 전하의 머릿속에 있는 기억을 지운 게 분명합니다.”
이번에는 시아나가 물었다.
“지워진 기억을 다시 복구할 수 있다는 건가?”
융이 의기양양하게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평범한 마법사라면 힘들겠지만 저는 일평생 정신계 조작에 대해 연구한 마법사니까요.”
라시드와 시아나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시아나가 먼저 입을 뗐다.
“난 저 마법사의 도움을 받고 싶지는 않아요. 황제 폐하에게 했던 짓을 전하께 할지도 모르잖아요.”
시아나의 말에 융이 억울하다는 얼굴을 했다.
“저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거짓말로 현혹하여 마법을 걸 만큼 야비한 인간이 아닙니다. 황제 폐하를 조종했던 것도 황후 폐하께서 막대한 황금을 약속하셨기 때문이지…….”
시아나는 그 말을 무시하며 말을 이었다.
“게다가 한번 사라졌던 기억을 다시 되돌리는 건 부작용이 있을 수도 있어요. 전하만 괜찮으면 굳이 그 기억을 찾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라시드는 늘 시아나의 말을 따랐다. 하지만 이번에는 아니었다.
“시아나, 나는 궁금해.”
도대체 그때 자신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예전부터 라시드는 그때의 일이 이상하리만치 관심 가지 않았다.
마치 본능이 거부하는 것처럼.
하지만 라시드는 알고 싶었다.
“8년 전의 네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었는지, 내게 어떤 말을 해 주었는지 알고 싶어.”
“…….”
라시드의 보라색 눈동자에는 과거를 기억하고 싶다는 애틋한 감정이 어려 있었다. 그래서 시아나는 곤란하다는 듯 눈썹을 내렸다.
그때 키르안이 나섰다.
“염려 마세요, 공주님. 사실 공주님처럼 마법사를 믿지 못하는 이들을 위해 만들어진 물건이 있거든요.”
수백 년 전부터 미스틱 상단은 마법사에게 마법을 의뢰했다. 마법사들은 대부분 약속을 잘 지켰으나, 어떤 이는 그렇지 않았다.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다른 마법을 걸기도 하고 심지어 대가만 받고 도망가는 일도 있었다.
그 때문에 여러 번 피해를 본 미스틱 상단은 대마법사에게 의뢰하여 특수한 아이템을 제작했다.
키르안이 품속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얼핏 평범해 보이는 종이는 자세히 보면 은은한 빛이 어려 있었다.
“일명 마법사의 계약서라고 불리는 종이죠. 이 종이에 마법사에게 의뢰할 내용을 적은 후에 마법사의 인장을 찍으면 계약이 완료됩니다.”
계약의 내용을 이행하지 않는다면, 마법사의 마력은 모두 종이 속에 흡수된다.
마법사로서의 생명이 끊어진다는 말이었다.
융이 경멸 어린 얼굴로 중얼거렸다.
“대마법사라는 자가 저런 끔찍한 도구를 만들다니. 그자는 필시 수많은 마법사의 저주를 받아 지옥에 떨어질 겁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시아나는 키르안에게서 종이를 받았다.
‘저자에게 마법을 의뢰하는 게 여전히 찝찝하긴 하지만 전하가 예전 기억을 되찾길 원하니 어쩔 수 없지.’
시아나는 종이 안에 글씨를 가득 채운 후 융에게 내밀었다. 빠른 속도로 글씨를 읽어 내린 융이 눈썹을 일그러뜨렸다.
종이 안에 있는 내용은 황태자의 사라진 기억을 복구하는 것만 요구하는 것이 아니었다.
앞으로 백 년 동안 라시드가 하는 말은 무엇이든 들어야 한다는 내용도 있었다.
“이런 불공정하기 짝이 없는 노예 계약서를 작성하시다니……. 공주님은 보기와 달리 무척 악독한 분이시군요.
시아나가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이건 계약서가 아니라 네가 저지른 죄에 대한 벌이다.”
키르안도 합세했다.
“군말 말고 인장이나 찍어. 연구하던 물건들을 확 다 태워 버리기 전에.”
도저히 도망갈 길이 없음을 안 융은 한숨을 내쉬며 엄지손가락을 깨물었다. 순식간에 새빨간 핏방울이 맺힌 손가락을 종이 하단부에 꾹 찍었다.
융과 라시드가 마주 보며 섰다.
융이 라시드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더니 말했다.
“소문으로 듣긴 했으나 정말 완벽한 비율과 형태를 가지고 계시는군요.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허울 없는 칭찬에 대한 답은 한없이 매정했다.
“역겨운 소리 말고 기억이나 복구해.”
보라색 눈동자에 어린 섬뜩한 살기에 융이 어깨를 움찔거렸다.
마법사를 겁먹게 하다니. 황태자는 외모도 특출 나지만 기운 또한 범상치 않다.
단번에 얌전해진 융이 말했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먼저 눈을 감으십시오. 제가 끝났다고 말할 때까지 절대 움직여서는 안 됩니다.
라시드는 눈을 감았다.
그런 라시드의 머리 위로 융이 손을 올렸다.
이내 라시드가 눈썹을 찡그렸다.
검은 연기 같은 것이 머릿속을 파고드는 기분이 들었다. 무척 불쾌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잠시 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머릿속 한편의 텅 비어 있던 곳이 채워지는 느낌과 함께, 사라졌던 기억이 돌아오기 시작한 것이다.
* * *
올해 열 살이 된 어린 황자 라시드는 나이답지 않게 늘 차분했다. 그런 라시드의 얼굴이 잔뜩 상기되어 있었다.
황후와 함께 여행을 떠나게 되었기 때문이다.
‘어마마마와 함께 여행을 가는 것은 처음이야.’
라시드는 정말이지 너무나 설렜다.
라시드와 황후가 향한 곳은 대륙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극찬받는 남쪽의 휴양지, 몰디아스였다.
과연 그 이름대로였다.
흰 뭉게구름이 낀 새파란 하늘, 따사로운 햇빛과 그 아래에 반짝이는 에메랄드 색 바다. 흰 모래사장 너머에는 초록 나무들이 늘어져 있었다.
평소에 무엇을 봐도 크게 감흥이 없던 라시드마저 넋을 놓고 바라볼 만큼 황홀한 풍경이었다.
그러나 황후의 반응은 전혀 달랐다.
황후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마치 끔찍한 광경이라도 본 것처럼.
그 모습을 본 이블린이 항구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하인에게 말했다.
“황후 폐하께서 오랜 시간 배를 타신 탓에 몸이 좋지 않으시네. 어서 별장으로 가 주게.”
“예!”
하인은 빠른 속도로 마차를 움직였다. 이내 마차는 바닷가 근처에 있는 새하얀 건물에 도착했다.
황실 전용 별장이었다.
마차에서 내린 황후는 그대로 제 방에 들어가 문을 쾅 닫아 버렸다.
“어마마마!”
마차에서부터 내내 안절부절못했던 라시드가 황후를 쫓아가려 했다.
하지만 이블린이 그를 막았다.
“황후 폐하께서는 안정을 취하셔야 합니다. 전하께서 함께 계시면 그러지 못하시지 않습니까.”
이블린은 황후가 가장 아끼는 시녀였다. 황후는 어떤 상황에서든 이블린의 말을 제 말처럼 들으라고 종종 말하곤 했다.
그래서 라시드는 괴로운 얼굴로 이블린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어마마마를 잘 보살펴 주거라.”
“걱정 마십시오.”
쌀쌀한 목소리로 대답한 이블린이 황후가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홀로 남은 라시드는 닫힌 문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쓸쓸한 얼굴로 몸을 돌렸다.
당혹스러운 얼굴로 서 있던 별장 관리인이 라시드에게 다가왔다.
“방으로 안내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황자 저하.”
별장 관리인이 안내해 준 방은 황궁에 있는 라시드의 방보다 크기는 작았으나, 이국적인 인테리어가 돋보였다. 게다가 커다란 창문 너머로 푸르른 바다가 훤히 보였다.
라시드는 창가에 걸터앉아 아름다운 풍경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라시드의 얼굴에는 아까 같은 감탄은 조금도 어려 있지 않았다.
라시드의 작은 머릿속을 가득 채운 생각은 어마마마에 대한 걱정, 그리고 그녀에게 아무런 힘이 되어 주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환멸뿐이었다.
시간이 지나 어두운 밤이 되었다. 그때까지도 황후는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라시드가 무릎 사이로 얼굴을 파묻은 채 중얼거렸다.
“몸이 많이 안 좋으신 걸까…….”
아무래도 황후의 상태를 한번 확인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라시드는 방을 나왔다.
수많은 시종과 병사가 지키고 있는 황궁과 달리, 별장의 복도는 고요하고 적막했다.
황족의 조용한 휴식을 위해 별장을 관리하는 이들은 모두 건물 바깥의 별채에 묵었기 때문이다.
잠시 후, 황후의 방 앞에 도착한 라시드가 눈을 크게 떴다.
어찌 된 일인지 방문이 조금 열려 있었다. 게다가 문 근처에는 술병이 여러 개 나뒹굴고 있었다.
‘설마 어마마마께서 술을 마신 건가?’
라시드가 놀란 얼굴로 열린 문틈 사이를 보았다.
그 순간, 라시드는 저도 모르게 숨을 멈추었다.
황후가 이블린을 끌어안고 있었다.
황후는 수많은 황궁의 시녀를 제치고 늘 이블린만 가까이에 둘 만큼 그녀를 아꼈다.
그럼에도 두 사람이 저런 식으로 스킨십하는 걸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어쩐지 봐서는 안 될 것을 본 느낌에 라시드의 얼굴이 굳었다.
그때, 황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곳은 엘리엇 님이 내게 오자고 했던 곳이야. 자꾸 엘리엇 님이 생각나 미치겠어.”
황후의 말투는 평소처럼 우아하고 차분하지 않았다. 마치 울먹이는 어린아이처럼 뭉그러져 있었다.
라시드는 대번에 황후가 술에 취했음을 알아챘다.
라시드는 혼란스러웠다.
‘엘리엇이라는 사람이 누구기에 어마마마께서 저렇게 괴로워하시는 거지?’
라시드가 그것에 대해 더 생각할 틈 없이 황후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자는 분명 나와 엘리엇 님 사이의 일을 알고 이곳에 가라고 한 게 분명해. 이런 식으로 엘리엇 님을 생각나게 만들어서 날 지옥에 있는 것처럼 괴롭게 만들려고. 나는 그자가 심심할 때마다 건드리는 싸구려 장난감이니까!”
황후의 망상이었다.
그자, 황제는 죽어 버린 남자 따위에게 조금도 관심 없었다.
황제가 황후에게 라시드를 데리고 남쪽 휴양지에 다녀오라고 한 것은 순수한 호의였을 뿐이다. 변덕스럽기 짝이 없는.
하지만 황후에게 이 여행은 고문처럼 끔찍하기만 했다.
황후가 창백한 얼굴로 쉴 새 없이 같은 말을 중얼거렸다.
“미워. 그자가 너무 미워. 눈앞에 있으면 당장 죽이고 싶을 만큼.”
그때였다.
열린 문 틈 사이로 황후와 라시드의 눈이 마주쳤다.
‘어마마마, 죄송해요. 몰래 훔쳐 볼 생각은 아니었어요. 저는 그저 어마마마가 걱정되어서…….’ 라고 라시드는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라시드는 그 말을 할 수 없었다.
황후가 문 사이로 손을 뻗어 라시드의 은빛 머리카락을 휘어잡았기 때문이다.
가는 팔에서 어떻게 이런 힘이 나오나 싶을 만큼 엄청난 악력이었다.
황후는 그대로 라시드를 방 안으로 끌고 들어왔다.
라시드는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에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아 돌처럼 굳어 버렸다. 그런 라시드의 가는 목 위로 거센 악력이 느껴졌다.
황후가 말했다.
“너는 황제가 아니야. 끔찍한 살인자, 흉악한 죄인일 뿐이지.”
“……!”
“이제 그만 죗값을 치러! 네 목숨으로!”
황후는 지금 제정신이 아니었다.
황후에게는 라시드가 어린 아들이 아니라 황제로 보였다.
“크흡…….”
라시드는 고통에 허우적대다가, 힘을 모아 황후를 밀쳤다.
황후가 작은 비명을 내지르며 라시드에게서 떨어졌다.
하지만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황후는 이내 바닥을 짚고 일어나 다시 라시드를 향해 다가왔다.
핏기 하나 없는 창백한 얼굴, 부릅뜬 새파란 눈동자.
그녀는 더 이상 라시드를 향해 자애롭게 웃던 어머니가 아니었다.
저를 해하려는 악귀일 뿐.
“으아악!”
라시드는 커다란 비명을 내지르며 방을 뛰쳐나갔다. 등 뒤로 황후가 저를 쫓아오는 것이 느껴졌다.
뒤늦게 이블린이 나서서 황후를 막았다.
“마리아, 그만해!”
이블린에게 몸을 억압당한 황후가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이거 놔, 이블린. 난 기필코 저자를 죽여야 해. 죽여야 한다고!”
죽여야 해.
죽여야 해.
수십 번이나 반복된 말이 라시드의 귓가에 선명히 남아 사라지지 않았다.
그래서 라시드는 쉬지 않고 달렸다.
별장을 나가고, 수풀이 우거진 길을 지나, 계속, 계속.
그렇게 얼마나 달렸을까.
앞도 잘 보이지 않는 밤길을 달린 탓에, 라시드는 엉망이 되어 있었다.
나뭇가지에 걸려 얇은 옷은 곳곳이 찢어졌고, 몇 번이나 넘어진 탓에 몸은 상처투성이였으며, 흙길을 달린 맨발에서는 피가 났다.
“허억, 허억.”
숨이 턱까지 차오른 라시드의 앞에 작은 통나무집이 보였다.
사람이 살고 있지 않는 것이 분명한 낡은 집의 문을 연 것은, 이성적인 판단이 아니라 본능적인 선택이었다.
라시드는 이제 몸도, 정신도 모두 한계였으니까.
끼이익-.
나무문이 뻑뻑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통나무집의 내부는 먼지가 잔뜩 쌓여 있었고, 오랫동안 환기를 시키지 않은 퀴퀴한 냄새가 났다.
그러나 라시드에게는 그런 것을 조금도 따질 여유가 없었다.
라시드는 통나무집 구석에 가 털썩 주저앉았다. 이내 작은 몸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죽고 싶지 않았다.
삶에 대한 열망 때문이 아니었다.
‘사랑하는 사람의 손에 죽다니…… 그건 너무 끔찍하잖아.’
라시드는 이를 악물었다. 보라색 눈동자에는 서글픈 눈물이 어렸다.
라시드는 눈물을 닦아 낼 생각도 못한 채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영원할 것 같던 밤이 지나고 해가 떴다. 날이 밝았음에도 라시드는 여전히 구석에서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그때 끼이익- 하고 거친 문소리가 들렸다. 그 순간 밤사이 겨우 진정되었던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공황 상태에 빠진 라시드의 머릿속에 온갖 생각이 가득 찼다.
‘어, 어마마마면 어쩌지? 사, 살려 달라고 빌면 날 살려 줄까? 지금이라도 다른 곳으로 도망갈까?’
그런 라시드를 향해 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 괜찮니?”
어마마마의 악의에 찬 목소리가 아니었다. 이블린의 허스키한 목소리도 아니었다.
한 점의 악의도 없는 맑은 목소리였다.
“…….”
라시드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구불거리는 밀색 머리카락과 에메랄드빛 눈동자를 가진 작은 소녀가 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환한 햇살 아래에서.
그 순간 라시드는 황당한 생각을 했다.
‘여신께서 나를 불쌍히 여겨 천사를 보내 준 걸까?’
그런 라시드를 향해 소녀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너 상태가 많이 안 좋아 보여. 도와줄 사람을 불러 올게.”
그 말에 라시드가 정색하며 소리 질렀다.
“아, 안 돼. 내가 이곳에 있다는 걸 알면 분명 날 찾아올 거야. 그럼 이번에야말로 난 죽어.”
라시드는 당장이라도 황후가 저를 찾아올까 봐 두려웠다.
라시드의 창백한 얼굴을 본 소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그럼 내가 너를 도와줄게.”
소녀는 라시드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묻지 않았다. 그저 약과 빵을 챙겨 와 라시드를 살뜰히 보살피기 시작했다.
소녀는 라시드의 몸에 난 상처를 따뜻한 수건으로 닦고, 그 위에 약을 발랐다. 조심스럽게 붕대를 감는 소녀를 보며 라시드가 말했다.
“능숙해 보이네.”
“나도 자주 다치거든. 새어머니가 좀 엄하셔서.”
“…….”
어처구니없게도 라시드는 그 말에 한 줌의 위로를 받았다.
나만 그런 게 아니구나. 어쩌면 어머니가 날 해치려고 한 일은 그다지 대수롭지 않은 일인지도 몰라.
붕대 감긴 목을 매만지는 라시드를 향해 소녀가 말했다.
“너 배가 홀쭉한 걸 보니 식사도 제대로 못했지? 허겁지겁 먹었다가 배탈이라도 나면 안 되니 내가 먹여 줄게.”
소녀는 부드러운 빵을 먹기 좋게 잘라 라시드의 입 속에 넣어 주었다. 라시드의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라시드는 황자로서 엄격한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말도 잘 하지 못했던 어린 시절부터 철저한 식사 예절을 지키며 스스로 음식을 먹어야 했다.
이런 식으로 누가 밥을 먹여 준 것은 처음이었다.
‘꼭 아무것도 못하는 아기가 된 것 같아.’
부끄러운데도 묘하게 기분이 좋았다.
그래서 라시드는 묵묵히 소녀가 주는 빵을 받아먹었다.
그 후, 소녀는 라시드가 앉아 있던 자리에 담요를 펴 주며 말했다.
“혹시 누가 쫓아오면 내가 바로 말해 줄게. 그러니까 안심하고 푹 자.”
라시드는 지난밤 한숨도 자지 못한 탓에 몸이 피로했다. 하지만 절대 잠이 오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아직까지 어젯밤의 공포가 선명히 남아 있었으니까.
그러나 놀랍게도 라시드는 눈을 감자마자 잠이 들었다. 꿈도 꾸지 않을 만큼 깊게.
한참 후에 라시드가 눈을 떴을 때, 그의 옆에는 여전히 소녀가 있었다.
창문으로 새어 들어오는 노을빛 속에서, 소녀가 두 눈을 부드럽게 휘었다.
“잘 잤어?”
착각이 아니다. 말도 안 되는 상상도 아니다.
‘저 애는 천사가 분명해.’
라시드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 후로 소녀는 매일 라시드를 찾아왔다.
소녀는 올 때마다 라시드의 상처에 새 약을 발라 주고, 품속에 가득 챙겨 온 음식을 보기 좋게 차려 주었다.
라시드가 입을 우물거리며 식사를 시작하면, 소녀는 신난 얼굴로 이야기를 조잘거렸다.
마치 오랜만에 제 이야기를 들어주는 이를 만나 신난 수다쟁이 할머니처럼.
“오늘의 이야기는 겨울 왕국 공주님과 작은 새의 이야기야.”
라시드는 귀를 쫑긋하고 소녀의 목소리에 집중했다.
소녀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아주 추운 겨울 왕국에 아름다운 공주님이 살았어.
하지만 공주님은 추운 것을 조금도 견딜 수 없어서 벽난로를 피운 성에서만 지내야 했어.
공주님에게는 유일한 친구가 있었는데, 바로 공주님의 방에 있던 작은 창문으로 들어온 작은 새였어.
작은 새는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공주님이 안타까웠어.
[저 하늘 위의 해님은 늘 따스하잖아. 해님이라면 공주님이 따뜻해지는 방법을 알고 있지 않을까?]
작은 새는 해님을 만나기 위해 길을 떠났어. 하지만 그 길은 결코 쉽지 않았지.
거센 바람이 불고, 눈보라가 쳤어. 어느 날은 우르릉 쾅쾅 번개가 치기도 했지.
작은 새는 결코 포기하지 않았어. 그리고 마침내 해님을 만났지.
해님이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어.
[하늘 위에서 너를 계속 지켜보았단다. 공주님을 위해 노력한 너를 위해 선물을 주마.]
해님은 일렁이는 자기 몸을 한 조각 떼어 작은 새에게 주었어. 작은 새는 공주님에게 돌아가 그것을 건넸어.
[공주님, 이제 성 밖에 나가도 춥지 않을 거예요.]
공주님은 작은 새가 준 해님 한 조각을 품에 안고 성 밖을 나왔어. 성 밖에는 흰 눈이 쌓여 있었고 세찬 바람이 불고 있었지.
하지만 공주님은 조금도 춥지 않았어.
공주님은 해님 한 조각을 품에 안고 환하게 웃었어.
[고마워, 작은 새야.]
흥미진진한 얼굴로 시아나의 이야기를 듣던 라시드가 말했다.
“나도 추위를 많이 타는데. 공주님이 부러워.”
그 말을 들은 소녀가 재미있다는 듯 키득 웃었다.
“나랑 반대네. 나는 추위에 강한 대신 더운 건 질색이야. 몸에 열이 많거든.”
그러더니 소녀는 손을 내밀어 라시드의 손을 잡았다. 부드러운 손이 닿는 순간 라시드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저보다 한마디는 큰 라시드의 손에 제 손을 얹은 소녀가 말했다.
“우와, 정말 손이 차네. 꼭 한겨울 날의 얼음 같아.”
얼굴이 살짝 붉어진 라시드가 말했다.
“너야말로 너무 따뜻해. 꼭 갓 구운 빵처럼.”
“숙녀의 손을 보고 빵이라니, 실례야.”
제가 실수했다는 생각에 라시드가 놀란 얼굴로 말했다.
“미안.”
“농담이야. 난 빵 좋아해. 부드럽고 맛있잖아.”
시아나가 배시시 웃더니 말을 이었다.
“좋은 생각이 났는데 이러면 어때? 더운 여름날에는 네가 나한테 손을 빌려 주고, 추운 겨울날에는 내가 너한테 손을 빌려 주는 거야. 그럼 여름이든 겨울이든 무섭지 않겠지?”
진지하게 한 말이 아니었다. 그저 장난처럼 내뱉은 실없는 농담이었다.
하지만 그 말은 라시드의 가슴속을 파고들어 심장을 간지럽혔다.
긴장으로 심장이 쿵쿵거린 적은 있지만, 이런 식으로 콩콩 뛰는 것은 처음이었다.
소녀가 석양이 진 하늘을 보더니 아, 하고 일어났다.
“이제 가 봐야겠어.”
며칠이나 반복된 이별이었다. 그럼에도 라시드는 오늘도 필사적인 얼굴로 소녀의 치맛자락을 잡았다.
“내일도 와 줄 거지?”
소녀는 씩씩하게 대답했다.
“당연하지. 내일은 달콤한 디저트를 잔뜩 가져올게.”
“……응.”
라시드는 고개를 끄덕이며 소녀를 보냈다.
소녀가 떠나고 어두운 밤이 찾아왔다.
라시드는 창백한 얼굴로 몸을 웅크렸다.
같은 공간이었건만 천국처럼 느껴졌던 한낮의 시간과 달리, 혼자 있는 밤은 지옥 같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새까만 어둠 속에서 황후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죽여야 해!]
순간 목이 졸리는 느낌이 들었다. 숨이 턱 막혔다.
라시드는 두 손으로 붕대가 감겨진 목을 만지며 쉴 새 없이 속삭였다.
“괜찮아. 괜찮아.”
이곳에는 어마마마가 없어.
어마마마는 날 죽일 수 없어.
식은땀을 흘리며 수백 번, 수천 번 같은 말을 되뇌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어둠이 사라지고, 환한 햇살이 들어왔다.
그제야 라시드는 안도했다.
“……이제 됐어, 아침이야.”
소녀는 늘 아침 해가 뜬 후 왔다. 곧 도착할 소녀를 떠올리니 라시드의 얼굴에 흐릿한 미소가 걸렸다.
하지만…….
그날, 소녀는 오지 않았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도.
소녀가 오지 않은 지 삼 일째 되던 날, 라시드는 결심한 얼굴로 문고리를 잡았다.
순간 엄청난 공포가 밀려들어왔다.
‘문을 연 순간 어마마마가 나를 기다리고 있으면 어떡하지? 술 냄새를 풍기며 다시 나를…….’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라시드에게는 곧 벌어질 일처럼 느껴졌다.
그럼에도 라시드는 이를 악물고 문을 열었다.
소녀를 찾기 위하여.
오랜만에 나온 바깥세상. 쨍한 햇볕에 라시드는 머리가 빙그르 돌고 심장이 쿵쾅거렸다.
그러나 라시드는 필사적으로 숨을 들이마셨다.
“후아.”
그것을 몇 번 반복하자 극도로 긴장했던 몸 상태가 조금 안정됐다.
라시드는 소녀를 어떻게 찾아야 할지 고민했다.
함께 있던 며칠의 시간이 무색하게 라시드는 소녀의 이름을 알지 못했다.
황후가 저를 찾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에 소녀에게 제 이름을 알려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소녀 또한 라시드에게 자신의 이름을 말하지 않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이름을 물어볼걸.’
라시드가 아는 것은 소녀의 외양, 그리고 이 근처 어딘가에 살고 있다는 것뿐이다.
‘눈에 띄게 예쁜 아이니까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금방 찾을 수 있을 거야. ……그 아이가 정말 천사라면 찾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겠지만.’
하지만 라시드는 본격적으로 소녀의 행방을 찾기 전에 잡혀 버렸다.
“여기 계셨군요, 황자 저하!”
라시드는 그들이 누군지 한눈에 알아보았다. 별장을 관리하는 시종들이었다.
순식간에 시종들에게 붙잡힌 라시드가 눈을 번뜩이며 소리쳤다.
“이거 놔!”
라시드가 불같이 반항했다. 그러나 아무리 또래보다 크다 해도 라시드는 고작 열 살이었다. 게다가 소녀가 없는 동안 제대로 식사를 하지 못해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시종들은 발버둥 치는 라시드를 등에 업고 새하얀 별장으로 데려갔다.
그리고 그곳에 황후가 있었다.
황후를 본 라시드는 몸이 뻣뻣이 굳었다. 온몸이 떨려 왔다. 숨이 가빠졌다.
그런 라시드에게 다가간 황후가, 작은 몸을 끌어안았다.
“……!”
눈을 부릅뜬 라시드를 향해 황후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리 별장 바깥이 궁금했다고 해도 말도 하지 않고 몰래 나가다니……. 며칠이나 돌아오지 않아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아느냐?”
라시드는 도대체 황후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런 황후를 보며 한 남자가 다가왔다. 라시드를 잡아 왔던 시종 중 한 명이었다.
“안심하십시오, 황후 폐하. 황자 저하의 몸에 작은 상처가 조금 있긴 하지만 큰 상처는 없었습니다. 며칠간 숲속에서 헤매시느라 고생하긴 했어도 위험한 일을 겪으신 것 같진 않습니다.”
그 시종이 말을 덧붙였다.
“길을 잃고 별장에 돌아오지 못한 탓에 조금 놀라신 것 같긴 하지만요.”
황후가 라시드를 안은 채 눈물을 글썽였다.
“황자를 찾아 주어 고맙네.”
고귀한 황후의 감사 인사에 시종들은 감히 상상도 못한 말을 들은 듯 펄쩍 뛰며 말했다.
“아닙니다. 황후 폐하께서야말로 그간 황자 저하를 찾으시느라 마음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지금이라도 황자 저하를 찾아 정말 다행입니다.”
황후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눈썹을 내렸다.
“그런데 이 일은…….”
황후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시종들은 대번에 눈치챘다.
황자가 몰래 별장을 나갔다가 길을 잃었다는 것은 단순한 일이 아니었다. 만약 이 사실이 황제나 다른 황족들에게 알려지면, 어린 황자를 제대로 보호하지 못한 것에 대한 책망을 들을 수도 있다.
황후도, 그리고 별장의 일꾼들도.
시종이 말했다.
“염려 마십시오. 절대 말이 새어 나가지 않게 조심하겠습니다.”
그 말에 황후가 안심한 얼굴을 했다.
“그래, 믿고 있겠네.”
잠시 후, 시종들이 인사를 하고 방을 나갔다. 이내 방 안에는 황후와 라시드만이 남았다.
그때까지도 라시드는 황후의 품속에 안겨 있던 상태였다.
라시드는 황후에게 이런 식으로 안겨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토록 안겨 보고 싶었던 어머니의 품이건만 라시드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창백한 얼굴로 굳어 있는 라시드를 내려다보며 황후가 입을 열었다.
“라시드.”
황후의 목소리에 라시드는 천천히 시선을 들었다. 그리고…… 마주친 황후의 얼굴은 그날 밤과 같았다.
오직 증오만이 가득한, 섬뜩한 악귀의 눈빛.
“으아악!”
그 순간 라시드의 머릿속에서 그때의 공포가 재현됐다. 라시드가 비명을 내지르며 황후의 품속을 벗어나려 했다.
하지만 황후는 라시드의 어깨를 두 팔로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작은 몸을 꽉 잡아 누르며 황후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안심하거라. 내가 미워하는 건 네 아비야.”
“……!”
“네 아비가 자식이 죽는다고 고통스러워할 인간이라면 진즉 너를 죽였을 거야. 하지만 그는 그런 평범한 부성애 따위를 가진 자가 아니지. 네가 죽으면 슬퍼하기는커녕 너를 대신할 자식을 낳으라고 명령할 거야. 그리고 그 더러운 몸을 내게 들이대겠지.”
순간 황제와의 끔찍했던 첫날밤이 떠올랐다. 황후의 푸른 눈동자에 지독한 경멸이 어렸다.
그뿐이 아니었다.
황후에게는 야망이 있었다.
황제가 가진 모든 것을 부숴 버리고, 그를 절망 속에 빠뜨리는 것.
그 꿈을 위해서는 라시드가 필요했다.
영민하고, 강건하며…… 어미만을 하염없이 따르는 순종적인 아들이.
황후는 라시드를 내려다보았다. 저를 올려다보고 있는 라시드의 눈빛에는 전에 없던 공포와 불신이 어려 있었다.
황후가 눈썹을 내렸다.
“하지만 이대로는 곤란하겠구나. 넌 예전처럼 순순히 내 말을 듣지 않을테니.”
황후가 손을 들어 라시드의 입을 막았다. 라시드가 눈을 부릅떴다.
“……!”
입 속으로 작은 알약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것은 평범한 약이 아니었다.
라시드가 황후에게서 도망친 후, 황후가 다급히 마법사 융에게 의뢰하여 받은 마법 약이었다.
“사실 진즉 너의 위치는 파악하고 있었단다. 네가 낡은 집에 처박혀 얌전히 있어 다행이었지. 덕분에 약을 받을 시간을 벌 수 있었으니.”
황후가 일그러진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이것은 기억을 없애주는 약이란다. 눈을 뜨면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갈 거야. 나는 자애롭고 다정한 너의 어미로, 너는 그런 어미의 사랑을 갈구하는 아이로.”
이내 라시드의 눈동자가 초점을 잃더니, 작은 머릿속에 있던 기억들이 흩날리는 모래처럼 사라지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제게 약을 먹이며 섬뜩한 미소를 짓던 황후의 모습이.
그 후에는 싫다는 저를 기어이 잡아 황후에게 간 시종들의 모습이.
그리고…… 밀색 머리카락과 에메랄드 눈동자를 가진 소녀가 나타났다.
[내일은 달콤한 디저트를 잔뜩 가져올게.]
[좋은 생각이 났는데 이러면 어때? 더운 여름날에는 네가 나한테 손을 빌려 주고, 추운 겨울날에는 내가 너한테 손을 빌려 주는 거야. 그럼 여름이든 겨울이든 무섭지 않겠지?]
[혹시 누가 쫓아오면 내가 바로 말해 줄게. 그러니까 안심하고 푹 자.]
며칠간 함께했던 소녀의 모습이 하나하나 사라지기 시작했다.
라시드는 일그러진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아, 안 돼. 싫어.”
라시드는 소녀의 모습을 잊고 싶지 않았다. 기억하고 싶었다.
라시드는 필사적으로 소녀를 기억하기 위해 애썼다.
갓 구운 빵처럼 고운 밀색 머리카락, 푸르른 바다 같은 에메랄드 눈동자.
동그랗고 귀여운 얼굴.
따뜻하고 작은 손.
다정하고 맑은 목소리.
라시드가 초점을 잃은 눈으로 눈물을 뚝뚝 흘리며 중얼거렸다.
“……절대 잊지 않을 거야.”
그래서 너를 다시 만날 거야.
꼭.
이내 소녀의 모습이 모두 사라지고, 새까만 어둠만이 남았다.
* * *
라시드가 천천히 눈을 떴다. 시야가 밝아지며 보인 것은…….
“전하, 괜찮아요?!”
밀색 머리카락과 에메랄드 눈동자. 그때보다 조금 더 크고 성숙해지긴 했지만…….
분명 그녀는……!
라시드가 팔을 뻗어 시아나를 끌어안았다.
아아, 너는 여전히 봄처럼 따스하구나.
라시드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보고 싶었어.”
“…….”
“내, 첫사랑.”
“……!”
시아나는 라시드가 오래전의 만남을 기억했음을 알아챘다.
시아나의 눈가에 눈물이 차올랐다. 시아나는 눈물을 머금은 얼굴로 환하게 미소 지었다.
* * *
새하얀 눈이 내리는 겨울날, 대관식이 열렸다.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새로 즉위하는 황제를 축하하기 위해 수많은 이들이 황궁 앞에 모여 함성을 질렀다.
개중에 대관식에 초대받은 이들은 황궁 안으로 향했다.
제국에서 손꼽히는 귀족, 외국의 왕족, 수많은 이들이 믿는 종교를 이끄는 종교 지도자, 하나같이 대단한 이들이었다.
그러나 우아한 모습으로 걷던 그들은 헉, 하며 어깨를 움츠렸다.
즉위식이 열리는 대신전 입구에 선 호위 기사 솔 때문이었다.
‘전하의 대관식이야. 쥐꼬리만 한 불미스러운 상황도 생기게 하지 않을 테다.’
솔은 호랑이처럼 눈을 부릅뜬 채 신전 앞에 서서 들어서는 이들을 하나하나 확인했다.
안 그래도 덩치가 산만한 데다 허리춤에 검까지 찬 남자가 위협적인 표정을 짓고 있으니 그 위세가 대단했다.
손님들은 잔뜩 겁먹은 얼굴로 솔에게 초대장을 보여 주고 신분을 확인받았다.
한 발짝 떨어진 곳에서 그 모습을 보던 솔의 부하들, 즉 제국 최고의 기사단은 작은 목소리로 소곤거렸다.
“전쟁터도 아니고 황태자 전하께서 황제로 즉위하시는 좋은 날인데 꼭 저렇게까지 해야 해?”
“그러니까. 단장님 검 솜씨는 대륙 최고인데 가끔 보면 바보…… 아니 영 눈치가 없다니까.”
기사들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저 나이 되도록 여자 손 한번 못 잡아 봤지.”
“헐? 얼마 전까지 엄청나게 예쁜 남작가의 아가씨와 만나셨잖아.”
“진즉 끝났어.”
며칠 전, 가녀리고 어여쁜 남작 영애의 앞에 솔은 고개를 숙였다.
[미안합니다. 노력해 봤지만 저는 도무지 영애 같은 작고 가녀린 분은 여자로 느껴지질 않습니다.]
철썩. 여인은 수치스러운 얼굴로 솔의 뺨을 때렸다.
이야기를 들은 기사가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로 말했다.
“작고 가녀린 여자가 싫으면 도대체 어떤 여자가 좋다는 건데?”
한 기사가 솔의 목소리를 흉내 내며 말했다.
“대화를 할 때 나와 시선이 맞을 만큼 키가 커야 해. 바위처럼 단단한 육체는 물론 소 한 마리는 거뜬히 들 만큼 힘도 세야지.”
“그게 뭐야. 곰을 신부로 맞고 싶다는 거야?”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단장의 취향에 심각한 표정을 짓던 기사들이 일순 눈을 크게 떴다.
도무지 세상에 없을 것 같던 단장의 이상형이 나타난 것이다!
평범한 성인 남성보다 머리 하나는 큰 키에, 옷이 터질 것 같은 엄청난 근육을 가진 여인.
시녀 츄츄였다.
그런데 더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그녀를 본 솔의 얼굴이 살짝 붉어진 것이다. 기사들은 ‘뭐야 뭐야. 왜 저러는데.’라며 조용히 소란을 피웠다.
그런 분위기를 알 리 없는 츄츄가 솔에게 다가가 고개를 꾸벅였다.
“날이 추운데 고생이 많으시네유.”
솔이 딱딱한 얼굴로 대답했다.
“괘, 괘, 괜찮다.”
츄츄는 잠시 고민하더니 두르고 있던 보슬보슬한 털목도리를 풀어 솔의 목에 걸어 주었다. 솔이 놀라 눈을 부릅떴다.
그러거나 말거나 츄츄는 양손으로 솔의 목에 감긴 목도리 끝을 콱 잡아당겼다.
보통 사람이라면 ‘지금 내 목을 졸라 날 죽일 셈이냐!’라며 소리를 지를 만한 악력이었다.
하지만 솔에게는 딱 적당하게 야무진 힘이었다.
츄츄가 솔의 목에 감긴 털목도리를 보며 히죽 웃었다.
“동생들이 만들어 준 양털 목도리인데 참말로 따뜻하구만유. 경호를 서는 동안 하고 계세유.”
솔이 터질 것처럼 새빨개진 얼굴로 대답했다.
“고, 고, 고맙다.”
그런 두 사람을 바라보던 기사들이 이른 축배를 들었다.
우리 단장님, 드디어 장가가신다!
바깥 못지않게 대신전 안도 많은 사람들로 복작거렸다.
사람들은 아름답게 꾸며진 대신전의 위용에 감탄했다.
그중에서 특히 사람들의 시선을 빼앗은 것은 단상 위에 걸려 있는 커다란 그림이었다.
자애로운 미소를 짓고 있는 여신, 그리고 그 곁에 있는 새하얀 날개를 단 천사들.
마치 꿈속에 있는 것처럼 황홀한 그림이었다.
“레이시스 황자 저하의 작품이라지요?”
“엄청난 재능을 가졌다는 건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어린 나이에 저런 작품을 그리다니 믿기지가 않는군요.”
“저 정도면 그냥 재능이 좀 있는 수준이 아니지요. 레이시스 황자 저하는 백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천재가 분명합니다.”
쏟아지는 칭찬에 안젤리나 황비가 얼굴을 붉혔다.
안젤리나 황비에게 다가온 사람들이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레이시스 황자 저하께 인사를 드리고 싶은데 어디 계신가요?”
안젤리나 황비가 눈썹을 내렸다.
원래 이 자리에는 모든 황족이 참석해야 했다. 하지만 레이시스는 이곳에 없다.
“레이시스는 사람이 많은 자리를 불편해해서 오지 않았습니다.”
안젤리나 황비의 말에 사람들은 한껏 아쉬운 얼굴을 했다.
그런 그들을 위로하듯 안젤리나 황비가 말했다.
“요즘 레이시스를 찾는 분들이 많아, 첫 전시회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괜찮으시면 그때 와 주십시오.”
안 그래도 그녀의 주위에 모인 이들은 레이시스의 엄청난 팬이었다. 사람들은 한껏 기대감 어린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꼭 잊지 말고 초대해 주십시오.”
“저도요.”
안젤리나 황비가 수많은 이들의 관심 속에 있을 때, 네 명의 황비 중 가장 강한 권력을 가진 라일라 황비는 한껏 우울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사람들은 그녀를 보고 ‘제 아들이 아닌 라시드가 황제가 되는 것을 보려니 속이 뒤틀리나 보다.’라며 소곤거렸다.
하지만 라일라 황비의 옆에 앉아 있는 그레이스 황녀는 알고 있었다.
늘 당찬 어머니가 저렇게 풀이 죽은 이유는 유배지로 떠난 황후 때문이었다.
그레이스가 라일라를 보며 말했다.
“어마마마, 그렇게 황후 폐하가 신경 쓰이면 차라리 한번 찾아가지 그래요?”
“황후는 큰 죄를 짓고 유배지에 갇힌 것이라 외부인의 면회가 불가능하잖아.”
그레이스가 우람한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원칙적으로는 그렇지만, 어마마마께서 원하면 시아나에게 부탁해 볼게요. 오라버니가 시아나 말이라면 껌뻑 죽으니 면회 허가를 받을 수 있을 거예요.”
그 말에 몇 주 동안 침울했던 라일라 황비의 눈이 초롱초롱해졌다.
“당장 시아나 공주에게 부탁해서 북쪽으로 떠나자. 죄인이 되어 초라한 몰골이 된 그 여자를 보고 한껏 약 올릴 거야. 당신의 아들이 제국의 황제가 되었건만, 정작 당신은 이런 춥고 험난한 곳에서 죽을 때까지 살아야 하다니 이 무슨 기구한 인생이냐고 말이야.”
호호호, 하고 사악한 미소를 짓는 라일라 황비를 바라보며 그레이스는 질린 얼굴로 중얼거렸다.
“하여간 황후 폐하를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모르겠다니까.”
한편 한쪽에서 모인 여인들이 작은 목소리로 소곤거렸다.
“너무 갑작스럽게 치러진 데다 봐주는 황실의 어른도 없어 대관식이 허술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전혀 그렇지 않네요. 아주 훌륭해요.”
대관식이 치러지는 대신전의 꾸밈새, 초대받은 손님들의 명단과 자리 배치, 수많은 이들이 전혀 불편함을 느끼지 않게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시종과 시녀들까지.
모든 것이 완벽했다.
그리고 이러한 대관식을 준비한 이는 바로 시아나였다.
금빛 드레스를 입고 곱게 화장을 한 그녀는 우아하면서도 아름다웠다. 얼마 전까지 시녀복을 입고 황궁에서 일했던 것이 전혀 상상되지 않을 만큼.
차질 없이 대관식이 진행되도록 홀 안을 두루두루 살피는 시아나를 바라보며 한 여인이 말했다.
“새 황제 폐하께서는 시아나 공주님을 황후 폐하로 맞이하시겠지요?”
누구도 그 말에 이의를 다는 사람이 없었다.
시아나는 이제 일개 시녀가 아니라 신 아실론드 왕국의 공주이자 총리였다. 신 아실론드 왕국은 소국이었으나, 최근 신비로운 꽃을 가지고 본격적인 사업을 시작하여 수많은 나라의 관심을 받고 있었다.
그뿐인가. 결정적으로 시아나는 황후에게 잡혀 위기에 빠졌던 라시드를 구했다.
그것은 누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는 업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인들의 눈빛에는 아쉬움이 어렸다.
제국 여성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자리에 대한 야망, 그리고 젊고 강인하며 아름답기까지 한 새 황제에 대한 연정 때문이다.
여인들이 눈을 빛냈다.
‘황제 폐하는 권력을 단단히 다지기 위해 많은 자손을 낳을 의무가 있어.’
그것은 라시드라도 피해 갈 수 없는 일이었다.
‘황후는 놓쳤지만 황비, 아니면 후궁이라도 노리면 돼.’
‘진짜 승부는 그때부터라고.’
여인들이 야망에 찬 눈동자를 이글거렸다.
한 발짝 떨어진 곳에서 그런 여인들을 무서운 눈빛으로 노려보는 소년이 있었다.
미스틱 상단의 키르안이었다.
키르안이 성난 여우처럼 으르렁거렸다.
“저 여자들, 대체 무슨 생각을 하기에 저런 재수 없는 눈빛으로 시아나 공주님을 보고 있는 거야?!”
키르안의 옆에 있던 캐롤라인이 눈을 흘겼다.
“너야말로 재수 없는 눈빛 그만둬. 저분들은 모두 이름 높은 귀족 가문의 아가씨나 한 나라의 공주님이라고. 즉, 우리 미스틱 상단의 훌륭한 고객님이시라는 거지.”
“흥, 고객은 무슨. 나는 앞으로 시아나 공주님께만 물건을 팔 거야.”
“예전부터 기미가 보이긴 했지만 얘가 진짜 미쳤네. 그러다 아주 그냥 시아나 공주님에게 미스틱 상단을 통째로 바치겠다?”
티격태격하는 남매의 머리통 위로 번개 같은 주먹이 날아왔다.
“으윽.”
머리통을 잡고 괴로워하는 남매를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는 이는, 남매의 어머니이자 미스틱 상단주 레드락이었다.
“둘 다 시끄러워.”
“…….”
“새 황제 폐하께서 즉위하시는 자리에 참석하게 된 것은 미스틱 상단의 역사에 없던 큰 영광이야. 그것을 잊지 말고 얌전히 있거라.”
미스틱 상단은 대륙에서 제일가는 마력석 전문 상단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꺼리는 마법 물품을 다룬다는 것과 신분이 평민이라는 이유로, 미스틱 상단은 이런 큰 행사 때 한 번도 초대받은 적이 없었다.
하지만 라시드는(정확히 말하면 시아나가) 미스틱 상단을 즉위식에 초대했다.
키르안 덕분이었다.
캐롤라인이 어이없다는 얼굴로 키르안을 바라보며 말했다.
“어머니께 허락도 받지 않고 마력석을 몰래 훔쳐 가서, 이번에야말로 엉덩이가 터지도록 혼이 날것이라 생각했는데…….”
키르안의 철없는 행동은 결과적으로 미스틱 상단에 큰 도움을 주었다.
키르안이 시아나에게 준 공간 이동 마력석 덕분에 황태자를 구출했으니까.
게다가 키르안은 전 황제에게 사악한 마법을 건 마법사를 찾아 바치기까지 했다.
라시드는 저를 도운 키르안에게 확실한 대가를 약속했다.
앞으로 미스틱 상단은 새 황제의 편애 속에 더더욱 왕성하게 상단을 키워 나갈 것이다.
레드락이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맨날 사고만 치던 아들놈이 도움이 될 줄이야. 오래 살고 볼 일이야.”
* * *
시아나는 사람들이 앉아 있는 곳을 훑어보았다. 마련된 의자는 한자리도 빠짐없이 채워져 있었다.
‘초대한 손님이 다 도착했구나.’
시아나는 홀을 빠져나와 대신전 한편에 있는 방으로 갔다.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흥분된 분위기를 띤 홀과 달리 조용한 방은 라시드가 있는 대기실이었다.
그런데 라시드 혼자 있어야 할 방에 다른 이가 있었다. 아리스였다.
아리스는 금방이라도 라시드에게 달려들 것 같은 흉흉한 얼굴로 말했다.
“뭔가 착각할까 봐 말해 두는데, 오늘 오라버니가 황제의 자리에 오르는 건 오라버니가 대단해서가 아니라 시아나 덕분이야. 시아나가 아니었다면 오라버니는 아직도 황후 아줌마의 손에 놀아나느라 정신이 없었을걸?”
아무리 동생이라도 무례하기 짝이 없는 말이었다.
그럼에도 라시드는 평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라시드의 반응에 아리스가 한결 더 흉흉해진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뿐인 줄 알아? 내가 오라버니보다 더 일찍 태어났더라면, 오늘 황제가 되는 건 나일 수도 있었어!”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다.
단순하기 짝이 없는 라시드와 달리 아리스는 계략을 짜고 그것을 실행시키는 능력이 가히 천부적이었다.
전쟁터에서 강한 것은 라시드지만, 정치판에서 강한 것은 아리스다.
라시드는 그 말 또한 부정하지 않았다.
라시드가 부드러운 말투로 말했다.
“네가 영특한 것 또한 잘 알고 있어. 그러니 앞으로 나를 많이 도와주거라.”
그 말에 아리스가 소리를 빽 질렀다.
“내가 미쳤어?!”
아리스가 토마토처럼 새빨개진 얼굴로 소리쳤다.
“지금 내가 얌전히 있다고 오라버니 편이라고 생각하지 마. 오라버니가 조금이라도 황제로서 틈을 보이는 순간 뒤통수를 후려칠 테니까.”
아리스는 온힘을 모아 라시드가 가진 것을 빼앗을 것이다.
황좌도, 시아나도, 모두.
그러나 아리스는 그 말을 다 하지 못했다.
“아리스 공주님!”
어느새 문을 열고 들어온 시아나가 그게 무슨 말이냐는 얼굴로 아리스를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아나는 아리스가 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응원해 주었다.
하지만 라시드에 관한 것만큼은 아니었다. 선을 넘어 라시드를 건들면 아무리 아리스라도 얄짤 없었다.
그것을 아는 아리스의 얼굴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아리스는 순진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오해하지 마, 시아나. 오라버니에게 축하한다는 말을 하고 있었던 것뿐이니까.”
아리스는 라시드의 어깨를 툭 치며 말을 이었다.
“오늘 실수하지 말고 잘해, 오라버니. 내가 똑똑히 지켜보고 있을 테니까.”
얼핏 응원하는 것 같지만 뾰족한 가시가 느껴지는 말이었다.
그 후 아리스는 고개를 돌려 시아나를 바라보았다.
“시아나, 특별히 오라버니와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허락해 줄게. 대화가 끝나면 잊지 말고 내 옆자리로 와.”
그 말을 끝으로 아리스는 방에서 사라졌다.
시아나가 복잡한 얼굴로 눈썹을 내렸다.
“정말이지 고작 열 살 소녀의 행동거지가 아니에요. 대체 공주님은 얼마나 대단한 어른이 되려는 걸까요?”
라시드가 심드렁한 얼굴로 대답했다.
“크면 클수록 내게 있어 무척 위협적인 적이 되겠지.”
그러니 라시드는 황제가 된 후에 더더욱 노력해야 했다. 시시탐탐 제 것을 노리는 여동생에게 가진 것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라도.
‘정말이지 이 남매는…….’
시아나는 못 말린다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참, 이럴 때가 아니지.’
시아나는 이곳에 온 목적을 말했다.
“이제 곧 대관식이 시작해요. 그걸 알려 주러 왔어요.”
시아나가 라시드의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며 물었다.
“긴장되진 않아요?”
그 말에 라시드가 살포시 웃음을 터뜨렸다.
어릴 때라면 모를까, 성인이 된 후에는 한 번도 긴장한 적이 없었다.
얼마나 담력이 센지,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전쟁터에서도 편안히 잠을 잘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런 라시드에게 대관식은 긴장이 되기는커녕, 졸릴 만큼 따분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저를 챙겨 주는 시아나가 좋아 라시드는 약한(척하는) 표정을 지었다.
“응, 너무 너무 긴장돼.”
“…….”
“그러니까 나를 도와줘.”
시아나는 라시드가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는 것을 알아챘지만, 그의 요청을 거절하지 않았다.
더할 바 없이 사랑스러운 어리광임을 알고 있었으니까.
시아나는 그의 옷에 주름이 가지 않게 조심하며 그를 꼭 안았다.
그리고 다정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잘할 수 있어요, 라시드.”
그제야 라시드의 얼굴에 흡족한 미소가 지어졌다.
* * *
대신전 안.
수많은 이들이 자리했지만 거대한 공간은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을 만큼 고요했다.
잠시 후, 맑은 종소리와 함께 오늘의 주인공이 나타났다.
라시드의 모습을 본 사람들은 이곳이 엄숙한 자리임을 잊고 작은 비명을 내질렀다. 누군가는 너무 놀라 몸을 휘청거리기도 했다.
그만큼 라시드의 모습은 엄청났다.
반짝이는 은빛 머리카락, 여신이 세심하게 조각한 것 같은 완벽한 이목구비의 얼굴.
금실 자수가 수놓아진 흰색 옷은 한없이 고결했고, 어깨 아래로 길게 늘어진 붉은 망토는 위풍당당했다.
그야말로 압도적인 아름다움이었다.
넋이 나간 사람들을 보며 시아나가 한껏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한 달 동안 열심히 전하를 꾸민 보람이 있네.’
황홀함 가득한 시선들 속에 라시드가 단상 앞으로 올라갔다.
단상 위에 놓인 은빛 테이블에는 황제를 상징하는 세 가지 보물이 올라 있었다.
황제의 혈통을 상징하는 왕관.
황제의 무력을 상징하는 검.
황제의 권위를 상징하는 지팡이.
라시드가 가장 먼저 잡은 것은 수십 개의 다이아몬드가 박힌 황금 왕관이었다.
라시드는 왕관을 머리 위에 썼다.
그 후, 양손에 검과 지팡이를 들었다.
제국 17대 황제 라시드 레비쥬앙 드 아르덴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사람들의 얼굴에 위대한 순간을 목격한 감격이 가득 찼다.
그러나 사람들은 필사적으로 터져 나오려는 환호성과 감탄을 참았다. 아직 의식이 모두 끝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새 황제의 연설이 남아 있었다.
이 연설을 통해 황제는 재위 기간 동안 어떤 나라를 만들지에 대해 세상에 천명하게 된다.
‘전 황제 폐하께서는 황궁 안에서 귀족들과 시시콜콜한 권력 싸움을 하거나 황궁에서 사치스러운 시간을 보내는 것에만 관심이 있으셨지. 하지만 새 황제 폐하는 그와는 전혀 달라.’
라시드는 불과 열세 살의 나이부터 전쟁터를 누비며 수많은 나라를 정복했다.
‘새 황제 폐하는 역사상 가장 강력한 제국을 만드실 것이 분명해.’
제국 황족과 귀족들의 눈빛에 기대감이 어렸다. 반면 타국 왕족들의 눈빛에는 두려움이 가득 찼다.
시아나 또한 긴장한 얼굴로 라시드를 바라보았다.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 속에 라시드가 입을 열었다.
“황제 라시드 레비쥬앙 드 아르덴은 한평생, 시아나 아실론드 폰 실리테만을 사랑할 것이다.”
“……?!”
그 순간 사람들의 얼굴에 경악이 어렸다. 시아나도 두 눈을 크게 뜬 채 돌처럼 굳어 버렸다.
‘내 귀가 잘못됐나? 그래서 이토록 괴상한 말이 들리는 건가?’
누군가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해 체통도 잊고 손가락으로 귀를 후볐다.
설마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나 싶어 제 볼을 꼬집어 보는 이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노력이 무색하게, 라시드는 더없이 우아하고 위엄 있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나의 몸과 마음, 영혼은 모두 시아나 아실론드 폰 실리테의 것. 그러니 나는 앞으로 그녀가 원하는 나라를 만들도록 노력하겠다.”
그녀가 풍요로움을 원한다면 황금과 보석이 넘쳐 나는 나라를.
그녀가 명예를 원한다면 가난한 이들을 도와 수많은 이들에게 존경을 받는 나라를.
그녀가 평화를 원한다면 모든 힘을 다해 온 세상의 전쟁을 막는 강대한 나라를 만들 것이다.
라시드의 보라색 눈동자가 한쪽에 앉아 있는 시아나를 향했다.
라시드가 물었다.
“그러니 말해 줘, 시아나. 너는 내가 어떤 황제가 되길 바라지?”
시아나는 정말이지 곤란하다는 얼굴로 눈썹을 찡그렸다.
‘황제 폐하가 된 첫날, 이런 대형 사고를 칠 줄이야.’
정말이지 너무너무 창피해서, 마법사 융을 시켜 사람들의 기억을 지우고 싶은 충동마저 일었다.
그러나 이내 시아나의 얼굴이 풀어졌다. 시아나는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겠어. 이미 벌어진 일인걸.’
이제 와서 황제의 숨 막히는 카리스마를 보여 주거나, 제국을 위한 멋진 포부를 밝히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그에게 맞춰 주는 편이 좋지 않을까?
‘누가 뭐래도 오늘만큼은 그가 주인공이니까.’
그래서 시아나는 조금 뻔뻔한 얼굴로, 그러나 진심을 다해 말했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황제 폐하가 되어 주세요.”
그 말에 라시드가 환하게 웃었다.
그 옛날 시아나가 만든 이야기 속, 작은 새에게 따뜻한 해님 한 조각을 선물받은 공주님처럼.
* * *
제국의 17대 황제 라시드 레비쥬앙 드 아르덴은 즉위식 날 수많은 이들에게 한 맹세를 지켰다.
라시드는 시아나 아실론드 폰 실리테를 황후로 맞이한 후, 그 어떤 여인에게도 관심 갖지 않았다.
황후 시아나만이 라시드의 유일한 아내이며 사랑하는 여인이었다.
라시드는 매일 아침 시아나의 입맞춤에 눈을 뜨고, 하루에 세 번씩 시아나가 따라 주는 차를 마시고, 시아나와 나란히 앉아 정무를 보았다.
그러다 해가 지고 밤이 되면 시아나의 가슴께까지 이불을 덮어 주었다.
푹신한 침대에 누운 시아나가 졸음이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오늘도 내가 먼저 잠이 들 것 같아요. 같이 자고 싶었는데…….”
시아나의 옆에 비스듬히 누워 그녀를 토닥이던 라시드가 피식 웃었다.
“늦잠꾸러기인 나와 달리 새벽부터 일어나서 열심히 움직였잖아. 졸린 게 당연하지.”
“그건 그렇지만…….”
“어서 자.”
라시드는 시아나의 부드러운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잠시 후, 시아나가 눈을 감더니 작은 숨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라시드는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다가, 커다란 품속으로 작은 몸을 끌어안았다.
따뜻한 온기에 젊은 황제의 입꼬리가 스르르 올라갔다.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미소였다.
<공주보다 시녀가 천직이었습니다>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