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 사랑에 빠진 황후 (2)(6권) (22/27)

10. 사랑에 빠진 황후 (2)

* * *

황궁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황태자 라시드에 대한 재판이 열리기 때문이다.

황궁에서 가장 큰 회의실이 재판정으로 꾸려졌다.

재판정 안으로 사람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제국 모든 이의 관심이 쏠린 재판의 방청객으로 참석하게 된 이들은 하나같이 대단한 인물이었다.

네 명의 황비, 그들의 자식인 황자와 황녀, 그리고 앙겔루스 공작을 포함한 이름 높은 귀족들.

앙겔루스 공작이 자리를 채운 이들을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제국의 권력자들이 모두 모였군.”

그의 옆에 앉아 있던 귀족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만큼 중요한 자리니까요.”

라시드는 이곳에 앉아 있는 모두에게 특별한 존재였다.

어떤 이에게는 충성을 바친 주군이었으며, 어떤 이에게는 함께 길을 걷는 아군이었고, 또 어떤 이에게는 이참에 사라지면 좋을 적이었다.

그런 라시드의 명운이 걸린 재판이었으니 많은 이들의 관심이 모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귀족이 물었다.

“그런데 오늘 재판이 황태자 전하께 도움이 될까요?”

앙겔루스 공작을 포함한 몇몇 귀족들은 시아나의 협박 같은 설득에 라시드의 편에 서기로 했다.

그리고 황제와 황후를 압박하여 재판까지 여는 쾌거를 이뤄 냈다.

하지만 그렇다고 라시드의 무죄를 온전히 믿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기에는 라시드의 죄가 너무나 명명백백했다.

앙겔루스 공작이 심란한 얼굴로 대답했다.

“상처를 입으신 황제 폐하 본인이 황태자 전하가 범인이라고 말씀하시는 한, 전하의 무죄를 밝히는 것은 불가능할 테지.”

그러기는커녕, 이 재판을 통해 라시드가 제 아비를 죽이려 했다는 끔찍한 사실이 온 세상에 공개적으로 알려지게 될 것이다.

그러면 황제는 당당하게 제 아들을 사형시킬 수 있었다. 그를 통해 몇 년간 희미해졌던 위엄 또한 되찾게 될 터였다.

라시드에게도, 앙겔루스 공작과 그를 따르는 수많은 귀족들에게도, 여러모로 불리한 재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앙겔루스 공작과 귀족들이 재판을 열기 위해 애쓴 것은 오로지 시아나의 말 때문이다.

[정식 재판만 열리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황태자 전하를 구하겠습니다.]

라시드만 무사히 구한다면, 힘의 방향은 다시 이쪽으로 넘어올 게 분명했다.

그러나 그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중요한 자리이니 만큼 호위가 엄중할 거라 예상했다. 그러나 실제 와 보니 예상했던 것 이상이었다.

갑옷을 입고 긴 검을 든 기사들 수백 명이 재판정 곳곳에 배치되어 있었다.

흡사 재판정이 아니라 일촉즉발의 전쟁터 같은 모습이었다.

앙겔루스 공작은 침을 꿀꺽 삼켰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시아나 공주님이 도대체 어떻게 전하를 구하신다는 건지…….’

그의 굳어 버린 머리로는 도저히 어떤 방법일지 가늠이 되질 않았다.

그때였다.

“황제 폐하와 황후 폐하께서 납시옵니다.”

쩌렁쩌렁한 시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후, 재판정 안에 황제와 황후가 모습을 드러냈다.

재판정의 한편에 앉아 있던 이들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황후에게 부축을 받으며 들어오는 황제의 모습 때문이다.

황제의 옆구리에 난 검상은 옷에 가려져서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부쩍 핼쑥해진 황제의 얼굴에서 아직 낫지 않은 상처의 고통이 여실히 느껴졌다.

황제를 지지하든 지지하지 않든, 이 나라의 황제가 온전치 않은 모습을 보는 것은 마음이 복잡해지는 일이었다.

단상 위에 놓인 의자에 앉은 황제가 짜증 섞인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대들이 하도 재판 타령을 하기에 자리를 만들었소.”

황제의 형형한 눈빛이 앙겔루스 공작을 포함한 몇몇 귀족들을 향했다.

“감히 황제 시해를 시도했던 죄인에게 재판을 해야 하느니 마느니 운운한 그대들의 충심이 어디로 향하는지는 잘 알았소. 재판이 끝나면 짐에게 이런 우스운 짓거리를 하게 만든 죄를 철저하게 물을 것이오.”

분노가 서린 말의 의미는 명백했다.

라시드의 편에 섰던 귀족들을 용서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것을 안 귀족들이 굳은 얼굴로 침을 꿀꺽 삼켰다.

재판정의 분위기가 얼음장처럼 싸늘해졌다.

황제가 이마를 매만지며 말을 이었다.

“오늘의 재판은 짐이 진행할 것이오.”

그 말에 귀족들은 이견을 내지 않았다.

제국에서 가장 고귀한 권력자인 황제는 모든 재판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피해자인 황제가 재판장을 겸임하는 희한한 광경이 연출되었지만 상관없었다.

어차피 중요한 것은 재판의 과정이나 결과가 아니었으니까.

귀족들은 이 재판을 통해 라시드를 구출하고 싶었고, 황제는 라시드에게 형을 내리고 싶었다.

두 집단이 원하는 바가 극명하게 대립하고 있었다.

황제가 입을 열었다.

“열흘 전, 나는 라시드를 내 방으로 불렀소. 황태자와 공적인 업무에 대해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였지. 그러던 중 라시드가 품속에서 검을 꺼내 내게 달려들었어. 그 검을 가까스로 피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그날 죽었을 테지.”

황제가 제 옆에 앉은 황후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렇지 않은가, 황후.”

놀랍게도 황후는 제 아들을 범인으로 모는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저 괴로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었으나 사람들은 새삼 충격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다른 이도 아닌 라시드의 친모인 황후의 증언이었기 때문이다. 라시드가 끔찍한 짓을 저지른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런 분위기 속에서 앙겔루스 공작이 손을 들었다. 앙겔루스 공작이 말했다.

“존귀하신 황제 폐하께서 그토록 두렵고 끔찍한 사건에 휘말리신 것에 대해 신하로서 헤아릴 수 없는 슬픔을 느낍니다. ……하나 한편으로는 황태자 전하께서 갑자기 왜 그런 행위를 하셨는지 도무지 이해를 할 수 않습니다.”

황제가 뭐라 말하기 전 앙겔루스 공작이 말을 이었다.

“황태자 전하의 말씀을 들어 보고 싶습니다.”

“…….”

황제가 서슬 퍼런 눈으로 앙겔루스 공작을 노려보았다.

감히 황제를 시해하려 한 반역자의 말을 듣고 싶다니 괘씸하기 짝이 없는 말이었다.

그럼에도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귀족들의 눈치가 보여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어차피 황제는 그들에게 라시드를 보여 줄 생각이었다.

황제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죄인을 데리고 오거라.”

시종이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재판정 문이 열렸다. 그리고 지난 며칠간 제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라시드가 모습을 드러냈다.

“……!”

라시드를 본 사람들은 좀 전에 황제를 보았던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큰 충격을 받았다.

라시드의 아름다운 얼굴에는 치료받지 못하고 방치된 상처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반짝였던 은색 머리카락은 뒤엉켜있었으며, 아무 장식 없는 허름한 흰 옷은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그리고 두 팔에는 묵직한 쇠사슬이 감겨 있었다.

한때 전쟁터를 호령했던 남자의 처참한 모습에 사람들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숨이 막힐 정도로 가라앉은 분위기 속에, 앙겔루스 공작이 입을 열었다. 앙겔루스 공작은 라시드의 모습을 보고 충격받은 감정을 애써 숨기며 물었다.

“황태자 전하께 묻고 싶습니다. 왜 그런 짓을 저지르셨습니까.”

따지는 것이 아니었다.

어떻게든 라시드의 죄를 덜 답을 듣기 위한 필사적인 물음이었다.

나는 황제 폐하를 시해하려 하지 않았소. 그것은 아바마마께서 스스로 상처를 입혀 저지른 일이야.

라시드는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죄인의 탑을 나오기 전, 황후가 강제로 먹인 약 때문이다.

굳은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라시드를 바라보며 황제가 스산한 표정을 지었다.

“막상 자리를 마련해 주니 할 말이 없나 보군. 하긴, 극악무도한 짓을 벌인 죄인이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아니, 그런 것이 아니었다.

앙겔루스 공작을 포함하여 대부분의 사람들은 라시드의 상태가 이상함을 감지했다.

앙겔루스 공작이 말했다.

“폐하, 전하는 지금 제대로 말을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닌…….”

그 순간, 더 이상 참지 못하겠다는 듯 황제가 소리쳤다.

“짐의 관대함은 여기까지요, 앙겔루스 공작!”

부상자가 맞나 싶을 만큼 쩌렁쩌렁한 목소리였다.

황제가 앙겔루스 공작을 잡아먹을 듯한 눈으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저놈은 감히 짐에게 검을 들이댔소. 그것에 어떤 의도가 있는지 들어 줄 필요 없이, 당장 목을 베어야 할 용서받지 못할 죄란 말이오.”

“…….”

“그러나 내가 진즉 벌했어야 할 놈을 지금까지 살려 두고 이런 우스꽝스러운 자리까지 마련한 것은 오로지 황후 때문이오! 황후가 라시드를 위해 간절히 부탁했으니까. 지금까지 나라를 위해 헌신했던 황태자를 한 번만 용서해 줄 수 없냐고.”

황제가 손을 올렸다.

그 순간 라시드의 양옆에 있던 기사 중 한 명이 검을 들어 라시드의 목 근처에 가져다댔다.

황제가 라시드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이것이 짐이 네게 주는 마지막 기회다, 라시드. 지금이라도 너의 죄를 용서받길 바란다면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이거라. 그럼 너의 죄를 씻을 수 있을 기회를 주마.”

“…….”

“하지만 그러지 않고 지금처럼 목을 빳빳이 들고 잘못을 뉘우치지 않는다면, 네게 검을 들이대고 있는 기사들에게 참형을 명령할 것이다.”

황제의 선연한 진보라색 눈동자와 마주친 라시드는 알 수 있었다.

황제가 하는 말이 아니었다. 그의 옆에 앉아 있는 황후의 말이었다.

라시드는 섬뜩한 눈빛으로 황후를 빤히 쳐다보았다. 황후 또한 분노한 눈빛으로 아들을 바라보았다.

인내심이 다다른 황제가 기사에게 라시드의 목을 치라는 명령을 하려는 찰나였다.

“황태자 전하께서는 황제 폐하를 시해하지 않으셨습니다!”

긴장감이 팽팽하게 어려 있던 재판정에 맑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수많은 사람들이 커다랗게 눈을 뜨고 목소리가 난 방향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헉’ 하고 신음을 내뱉었다.

재판정 입구에 시아나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라시드는 눈을 부릅떴고, 황제는 무표정했으며, 황후의 얼굴은 일그러졌다.

‘어떻게 이곳까지 온 거지?!’

황후는 황궁 입구에서부터 재판정까지 수많은 병사들을 배치했다. 혹시나 찾아올 시아나를 잡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황후의 노력이 무색하게 시아나는 당당하게 재판정에 모습을 드러냈다.

방법은 의외로 간단했다.

시아나는 황궁 앞을 지키고 있던 병사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나는 지금 열리고 있는 재판의 결정적인 내용을 알고 있는 참고인이다. 나를 재판정 안으로 데려가 달라.

몰래 숨어 있다가 들킨 것이라면 모를까, 수많은 사람들이 훤히 보는 곳에서 당당하게 모습을 드러낸 시아나를 강제로 끌고 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무엇보다 시아나는 황태자의 약혼녀였다.

아무리 황태자가 현재 죄인이 되었다 해도 병사들은 황태자를 경외했다. 그러니 병사들은 그녀를 결코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

‘어차피 황후 폐하가 시아나 님을 잡으라고 한 것은 황제 폐하 시해 시도 사건에 대한 것을 묻기 위해 서잖아.’

그렇다면 재판정에 바로 데려가도 큰 문제가 아닐 것이다. 그것이 병사들의 판단이었다.

덕분에 유유히 재판정에 들어선 시아나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쪽에 흐름이 넘어왔을 때 한시라도 빨리 할 말을 해야 했다.

“황태자 전하께서는 황제 폐하께 상해를 입히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증명해 주실 분이 있습니다.”

그 말에 재판정에 있던 이들이 눈을 크게 떴다.

“그, 그게 정말입니까?”

“도대체 그게 누구입니까!”

예상치 못한 상황이 이어지자 황후는 당황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시아나를 잡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 그런 행동을 한다면, 사건의 내막에 대해 알고 있다는 시아나의 입을 막은 것에 대해 귀족들이 의문을 품을 것이다.

그렇게 만들어 좋을 게 없었다.

짧은 사이, 황후는 결론을 내렸다.

‘시아나의 말은 조금도 두려워할 것 없는 허풍일 뿐이야.’

사건이 일어났던 때, 방 안에는 황후와 황제, 라시드뿐이었다. 시아나가 말한 증인은 어딘가에서 매수한 가짜일 게 틀림없었다.

설령 극히 적은 확률로 방 안에 누군가 몰래 숨어 있었다 해도 큰 문제는 없었다.

거짓 증언을 한다고 몰아붙이면 그만이니까.

‘내게는 황제가 있어.’

피해자인 황제가 라시드가 범인이라고 소리치는 한, 그 누가 범인이라 나서도 라시드의 무죄는 결코 밝혀지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황후는 조금 더 상황을 살펴보기로 했다.

……그러나 그것이 그녀의 패착이었다.

시아나가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황태자 전하의 무죄를 증언해 줄 분은 바로…….”

시아나의 손가락이 단상 위에 앉은 황제를 가리켰다.

“황제 폐하십니다.”

* * *

며칠 전, 시아나는 인적이 드문 숲속에서 한 남자를 만났다.

안젤리나 황비의 친부이자 레이시스 황자의 조부인 빌헬름 후작이었다.

그는 시아나가 황태자의 연인이라는 것을 안 이후, 안젤리나와 시아나의 앞에 일절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쥐죽은 듯 지내고 있었다.

그런 그가 안젤리나 황비를 통해 시아나를 만나고 싶다는 편지를 보내왔다.

시아나는 모습을 숨기고 있는 상황이었기에 후작을 만나 좋을 것이 없었다. 그럼에도 시아나가 이 만남에 응한 것은 편지의 내용 때문이다.

시아나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황제 폐하에 관해 할 말이 있다고요.”

“그렇습니다.”

빌헬름 후작이 말을 이었다.

“공주님께서도 황제 폐하의 상태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셨겠지요.”

시아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시아나는 황궁을 빠져나온 후, 안젤리나 황비를 통해 황궁의 소식을 듣고 있었다.

황제는 시해 미수 사건 이후, 극도로 불안정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저를 치료하는 의사의 뺨을 휘갈기거나, 식사를 가지고 온 시종에게 뜨거운 찻물을 들이부었다. 그러다가도 또 어느 날은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며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을 중얼거리기도 했다.

그럼에도 황궁 사람들은 황제를 이해했다.

아들에게 죽을 뻔한 끔찍한 일을 겪었으니 놀란 게 당연하다고.

하지만…….

빌헬름 후작이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어느 날, 네 명의 황비가 황제 폐하의 병문안을 간 날 벌어진 일입니다.”

침대에 누워 네 명의 황비에게 차례대로 인사를 받던 황제는 눈을 부릅떴다. 그러더니 3황비 라일라의 머리채를 잡고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알량한 가문과 하나 있는 아들을 등에 업고 감히 황좌를 욕심내느냐!]

그야말로 날벼락이었다.

라일라 황비는 비명을 지르고, 나머지 세 명의 황비는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그때 황후가 나타났다.

황후가 입을 열었다.

[그만하십시오, 폐하.]

그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성난 소처럼 날뛰던 황제가 바로 얌전해진 것이다.

네 명의 황비는 경악했다.

황제는 누가 말한다고 듣는 위인이 아니었다. 게다가 황후는 감히 황제를 시해하려고 했던 라시드의 친모가 아닌가. 황제의 날 서린 분노가 가장 강하게 닿았어야 할 존재였다.

그런데 저렇게 황후의 말을 순순히 따르다니…….

이해하기 힘든 상황이었으나, 중요한 것은 황제가 황후를 총애한다는 사실이었다.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맹목적으로.

그것을 깨달은 네 명의 황비는 황후의 앞에 바짝 고개를 숙였다.

빌헬름 후작이 말했다.

“안젤리나가 말하길 그 일에 대해 황비들이 많은 말을 주고받았다고 합니다.”

황태자가 저지른 죄 때문에 혹여 황후가 곤란해질까 봐, 황제가 황후를 더더욱 신경 쓰는 것이 아닐까.

황제가 죽을 고비를 겪고 나니 황후에 대한 마음이 한결 더 애틋해진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빌헬름 후작은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한 가지 가설을 떠올렸다.

“……혹시 황제 폐하께서 황후 폐하께 조종을 당하는 것이 아닐까요?”

“……!”

충격적인 이야기에 시아나가 눈을 크게 떴다.

시아나가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물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빌헬름 후작이 잠시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일전에 저는 레이시스의 상태를 호전시키기 위하여 마법사를 찾은 적이 있습니다.”

사실 그건 성공이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마법사의 수는 지극히 적은 데다가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은신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빌헬름 후작이 마법사를 찾을 수 있었던 것은 막대한 돈이 필요했던 마법사가 후작 앞에 먼저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마법사가 말하길, 레이시스가 제가 하는 말을 순순히 따르도록 만들어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어떤 명령이든 말입니다.”

빌헬름 후작의 말에 시아나의 얼굴이 굳었다.

듣는 것만으로 소름 끼치는 이야기였다.

빌헬름 후작이 말을 이었다.

“대신 부작용이 하나 있는데, 강제적으로 정신을 조종하는 탓에 신경이 무척 예민해지고 포악한 행동을 할 수도 있다고 했습니다.”

시아나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에메랄드 눈동자에는 그런 끔찍한 짓을 어린 손주에게 하려고 했냐는 경멸감이 어려 있었다.

빌헬름 후작은 그것에 관해 나름 할 말이 있었다.

레이시스에게는 그런 부작용이 나지 않을 만큼 아주 잠시만 마법을 걸 생각이었다고.

하지만 이 타이밍에서 그런 말을 할 만큼 눈치가 없진 않았기에 빌헬름 후작은 불편한 마음을 누르고 입을 열었다.

“그 마법사가 말한 것과 황제 폐하의 증상이 너무나 비슷합니다. 말도 안 되는 예측일 수도 있습니다만 일말의 도움이 될까 싶어 말씀드리는 겁니다.”

마력석이 은밀하게 사용되고 있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마법은 터부시되는 것이다.

그것도 정신을 조작하는 류의 마법은 더더욱.

그런 불길한 힘을 황후가 황제에게 썼다는 말은 ‘혹시…….’라고 전제를 붙인다 해도 사형을 당할 수도 있는 큰 죄였다.

시아나는 복잡한 눈빛으로 빌헬름 후작을 바라보다 물었다.

“제게 이런 이야기를 해 주시는 이유가 뭡니까?”

빌헬름 후작은 그리 어려운 질문이 아니라는 듯 대답했다.

“공주님께서도 아시다시피 레이시스가 황좌에 대한 욕심을 내려놓은 후, 빌헬름 후작가의 입지는 완전히 작아졌습니다. 황태자 전하께서 레이시스를 보살펴 준다는 소문이 퍼진 탓에 이제 와 황제 폐하께 다가가기도 곤란한 형편이고요.”

“가문의 번영을 도모하기 위해 황태자 전하 편에 서고 싶다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빌헬름 후작은 고집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에게는 사실 시아나에게 말하지 않은 내용이 하나 더 있었다.

일전에 빌헬름 후작이 국무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황궁에 들렀을 때의 일이었다.

길을 걷던 빌헬름 후작은 우연히 레이시스와 안젤리나를 보게 되었다.

아름답게 가꾸어진 정원에서 레이시스는 그림을 그리고 있었고, 그 옆에 선 안젤리나는 꽃처럼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날 처음으로 후작은 딸과 손주를 위한다고 했던 모든 행동들이 잘못된 판단이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빌헬름 후작은 그것을 순순히 인정할 만큼 좋은 성격이 아니었다.

대신 빌헬름 후작은 안젤리나와 레이시스에게 그런 미소를 짓게 한 이를 기억했다.

‘황태자 라시드와…… 시아나.’

빌헬름 후작은 제 앞에 선 시아나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빌헬름 후작가의 가풍은 주고받는 게 확실하다는 거지. 내 딸과 손주에게 도움을 준 것에 대한 대가라고 생각하시오.’

물론 빌헬름 후작의 말은 추론에 불과했다.

그의 말이 감옥에 갇힌 라시드에게 도움이 될지, 그렇지 않을지는 시아나가 그 이야기를 어떻게 써먹느냐에 따라 다를 터였다.

“제가 할 말은 여기까지입니다. 황태자 전하의 무사 귀환을 바랍니다.”

빌헬름 후작은 그 말을 끝으로 사라졌다.

시아나는 빌헬름 후작의 말대로 황후가 황제를 조종할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완전히 확신할 수는 없었다.

아무런 증거도, 증인도 없었기 때문에.

그러나 지금, 시아나는 빌헬름 후작의 예측이 진짜였음을 확신했다.

“황태자 전하의 무죄를 증언해 줄 분은 바로 황제 폐하십니다!”

시아나가 그 말을 외친 순간, 황제의 옆에 있던 황후의 얼굴이 변했기 때문이다.

황후는 눈을 부릅떴다.

마치 절대 들켜서는 안 될 비밀을 들킨 것처럼.

그때 저쪽에 앉아 있던 앙겔루스 공작이 물었다.

“그, 그게 도대체 무슨 말입니까. 황제 폐하께서 황태자 전하의 무죄를 증언해 주실 거라니요?”

시아나가 대답했다.

“모두가 알다시피 황태자 전하께서는 황제 폐하에 대한 존경심이 크십니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황제 폐하께 반기를 드신 적이 없었죠. 그런 전하께서 갑자기 황제 폐하께 끔찍한 짓을 저질렀다는 것이 저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시아나의 말대로였다.

라시드는 ‘피의 황태자’라 불리는 섬뜩한 별명과 달리 지극히 온화하고 이성적이었다.

전쟁터를 제외하면 단 한 번도 호전적인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

그런 라시드가 범인으로 몰릴 것이 명확한 상황에서 황제를 덮쳤다는 것은 누구나 의아해하는 부분이었다.

시아나가 말을 이었다.

“분명 이 사건의 뒷면에 어떠한 내막이 있을 거라 생각하고 저는 조사를 진행했습니다. 그리고 가까스로 알아냈지요.”

시아나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말을 이었다.

“사악한 마법사의 주술에 걸린 황제 폐하께서 본인의 의지를 잃은 상태로 황태자 전하께 누명을 씌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거짓이었다.

시아나는 그런 조사를 한 적이 없었다. 정확히 말하면 조사를 하려고 시도는 했으나 황궁의 감시가 너무 철저하여 얻어 낸 정보가 아무것도 없었다.

시아나는 그저 빌헬름 후작의 추론과 방금 전 보았던 황후의 얼굴을 보고, 확신을 했을 뿐이다.

그럼에도 시아나는 결정적인 증거라도 잡은 것처럼 당당하게 말했다.

누구라도 그녀의 말이 진짜구나, 라고 홀릴 만큼.

너무나 충격적인 말에 잠시 할 말을 잃었던 앙겔루스 공작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공주님의 말은 지금 황제 폐하께서…….”

잠시 숨을 멈춘 앙겔루스 공작은 굳은 얼굴로 말을 이었다.

“조종이라도 당하고 계시다는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그 순간, 황후가 벼락처럼 소리쳤다.

“무엄하구나! 감히 황제 폐하께 그따위 불온한 말을 하다니 더 이상 들을 수가 없구나.”

서슬 퍼런 소리에도 시아나는 물러서지 않았다.

“불온한 말이 아닙니다. 진실입니다.”

“증거가 있느냐!”

황후는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를 들으며 생각했다.

마법사는 황후궁의 가장 깊숙한 곳에 숨어 있었다. 누구도 그의 존재를 알 수 없을 만큼 은밀하고 조용하게.

그를 찾지 못하는 한, 황제에게 걸린 마법을 증명할 방법 따윈 없다.

하지만 시아나는 기다렸다는 듯 품속에서 새하얀 돌을 꺼냈다.

“이것은 미스틱 상단을 통해 구한 마력석입니다. 이 마력석이 닿으면 사람이나 사물에 걸려 있는 모든 마법이 사라진다고 합니다. 황제 폐하께서 마법사에게 조종당하고 계시는 중이라면 분명 효력이 있을 테지요.”

시아나는 황후에게 이 마력석을 사용해도 되냐고 묻지 않았다. 대신 황제를 향해 마력석을 힘껏 던져 버렸다.

시아나의 의도를 눈치챈 황후가 사색이 되어 소리쳤다.

“황제 폐하를 엄호하라-!”

황후의 말이 끝나기도 전, 재판정에 있던 병사들이 황제의 주위에 몰려들었다.

그러나 황후의 예상은 틀렸다.

시아나의 목표는 황제가 아니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황제에게 쏠린 사이, 시아나가 한걸음에 달려간 곳은 라시드가 있는 곳이었다.

‘황제에게 던진 마력석은 가짜야!’

시아나가 마력석을 구한 것은 사실이나, 그녀가 가진 마력석은 방금 전 했던 말과는 전혀 다른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시아나는 품속에서 푸른 돌을 꺼내며 다른 한 손을 뻗어 라시드의 손을 꽉 잡았다.

라시드를 지키고 있던 기사들의 대열이 흐트러졌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 순간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파지직.

번개가 치는 소리와 함께 시아나와 라시드가 환한 빛에 휩싸인 것이다.

그리고……,

라시드와 시아나의 모습은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

마치 처음부터 이곳에 없었던 것처럼.

* * *

라시드는 공간이 뒤틀리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잠시 후 눈을 뜬 라시드가 있는 곳은 재판정이 아니었다.

죄인의 탑도 아니었다.

커다란 창문으로 환한 햇빛이 비치고 있었고, 포근한 방 안에서는 좋은 냄새가 났다.

라시드는 한눈에 시아나의 은신처에 온 것을 알아챘다.

라시드가 뭐라고 말하기 전 시아나가 그의 손을 꼭 잡고 말했다.

“미안해요. 하루라도 빨리 구해 주었어야 하는데 너무 늦었죠.”

시아나는 아이처럼 울먹거렸다.

방금 전, 황제와 황후 앞에서 위풍당당하게 소리치던 모습과는 전혀 달랐다.

하지만 이 모습이 시아나의 진짜 속내였다.

재판정에서 라시드를 본 순간, 시아나는 주저앉아 울음을 터뜨릴 뻔했다.

상처가 덕지덕지 남은 창백한 얼굴, 생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야윈 몸.

라시드는 금방이라도 죽어 버릴 것 같았다.

그럼에도 시아나가 이성을 유지하고 계획했던 대로 행동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라시드를 구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다.

“얼마나 아팠을까, 얼마나 무서웠을까…….”

라시드를 보며 눈물 어린 얼굴로 중얼거리던 시아나가 아, 하고 작은 소리를 내더니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갈빛 액체가 든 작은 유리병이었다.

시아나가 바들바들 떠는 손으로 유리병 뚜껑을 열며 말했다.

“이, 일단 상처부터 치료하도록 해요. 신비로운 꽃으로 만든 즙을 바르면 아픔이 사라질 거예요.”

겨우 뚜껑을 연 시아나가 라시드의 몸에 난 상처 위로 액을 뿌리려는 순간이었다.

찰랑.

라시드가 쇠사슬이 묶인 손을 움직여 시아나의 가는 손목을 잡았다. 그리고 제 품으로 잡아당겼다.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모습에서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강인한 힘이었다.

“……!”

라시드의 품속에 얼굴을 파묻게 된 시아나가 눈을 크게 떴다.

그가 떨고 있었다.

시아나와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세차게.

라시드는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시아나를 안으며 생각했다.

사실 재판정에 시아나가 나타났을 때, 라시드는 이성이 날아갈 뻔했다.

시아나가 다치기라도 할까 봐. 혹은 그녀가 황후에게 잡혀 다시는 보지 못하게 될까 봐.

그럼에도 라시드가 조용히 있었던 이유는 오로지, 자신을 구하기 위해 적지로 쳐들어온 시아나를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녀의 노력을 헛되게 할 수 없었기에.

하지만…….

‘너무 무서웠어.’

아직 사라지지 않은 공포가 선명하게 남아 그를 떨게 만들었다.

시아나가 고개를 올려 라시드와 눈을 마주쳤다.

“전하…….”

라시드는 저를 바라보는 시아나의 얼굴을 세차게 떠는 손으로 어루만졌다.

시아나를 만나면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잘 지냈어? 혼자 무섭지는 않았어? 많이 힘들었지? 보고 싶었어. 사랑해.

그러나 정작 라시드가 꺼낸 첫마디는 그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약의 영향을 받아 제대로 나오지 않는 목소리로 라시드가 말했다.

“나와 결혼해 줘, 시아나.”

“……!”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던 말에 시아나는 눈을 크게 떴다.

시아나가 에메랄드빛 눈동자 아래로 끝내 참지 못한 눈물 한 방울을 뚝 떨어뜨리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좋아요.”

조금의 고민도 느껴지지 않는 대답이었다.

길고긴 포옹 끝에 시아나가 겨우 라시드를 밀어냈다.

“계속 이러고 싶지만 그러기에는 전하의 상태가 좋지 않네요. 치료부터 해요.”

라시드는 아쉬운 얼굴을 했지만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시아나는 블랙 쉐도우 기사를 불러 라시드의 두 팔을 얽매고 있던 쇠사슬을 잘랐다.

시아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오랜 시간 쇠사슬을 매달고 있던 탓에 손목이 처참하게 짓물러 있었기 때문이다.

시아나는 조심스럽게 신비로운 꽃의 즙을 라시드의 손목에 발라 주었다.

그 후에 라시드의 상처 난 얼굴과 몸 곳곳에도 즙을 발랐다.

작은 손이 제 몸 위를 왔다 갔다 하는 느낌에 라시드가 키득거렸다.

꽃 즙을 한 방울 마신 덕분에 돌아온 목소리로 라시드가 말했다.

“꽃을 개인적으로 사용하면 안 된다고 하지 않았어?”

“그건 신경 쓸 필요 없어요. 지금 쓰는 꽃은 신 아실론드의 것이 아니라 내 것이니까요.”

왕국을 떠나기 직전, 의회는 신비로운 꽃의 일정량을 시아나의 소유로 가져가기를 요구했다. 시아나는 그 요구를 받아들였다.

“앞으로 내가 가진 꽃은 모두 전하를 위해 쓸 거예요. 그러니까 다친 곳이 있으면 참지 말고 내게 오세요. 알았죠?”

“……응.”

분명 꽃의 힘으로 목이 나았음에도 라시드의 목소리가 살짝 살라졌다.

이내 라시드의 몸에 나 있던 자잘한 상처와 흉터가 모두 사라지고 이전의 반짝이는 미모를 되찾았다.

그럼에도 시아나는 라시드를 침대에 눕힌 후, 이불을 가슴까지 덮어주며 단호한 얼굴로 말했다.

“꽃의 힘으로 상처는 사라졌지만, 오랜 시간 몸을 결박당한 데다가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했으니 몸 상태가 완전하지 않을 거예요. 몸이 괜찮아질 때까지 제가 전하의 시중을 들도록 할게요.”

라시드는 시아나의 말을 거절하지 않았다.

그러기는커녕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얼굴로 시아나의 손에 제 몸을 맡겼다.

“아-.”

시아나의 말에, 침대에 기대어 앉아 있던 라시드가 아기 새처럼 입을 벌렸다.

미리 준비한 수프가 든 접시를 한 손에 든 시아나가 라시드의 입 안으로 부드럽고 따뜻한 수프를 넣어 주었다.

“괜찮아요?”

시아나는 라시드가 그간 음식물을 거의 섭취하지 못한 것을 알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라시드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맛있어.”

라시드의 말에 시아나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소화가 힘들 것 같아서 아주 묽게 만들었어요. 소금과 건더기도 거의 넣지 않았고요. 내일은 더 맛있게 끓여 줄게요.”

“응.”

식사 후에는 티타임을 가졌다.

“홍차를 타 주고 싶지만 몸에 무리가 갈 수 있으니 오늘은 보리차를 타 줄게요.”

시아나의 말에 라시드는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이내 그 감정이 사라졌다.

찻주전자를 손에 든 시아나의 모습 때문이다.

너무 예뻤다.

그녀의 손에 들린 것이 고급스러운 홍차든, 수수한 보리차든 상관없이.

그의 또렷한 시선을 느끼며 시아나가 우아한 몸짓으로 차를 따랐다.

또르르르.

김이 모락모락 나는 맑은 보리차가 찻잔에 가득 찼다.

침대에 기댄 채 찻잔을 받은 라시드가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이내 라시드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물을 마시지 못해 끔찍한 갈증이 이는 와중에 이 차 맛이 얼마나 그리웠는지 몰라.”

“…….”

“역시 네가 끓여 준 차가 최고야, 시아나.”

아이처럼 해사하게 웃는 라시드를 보는 순간 시아나의 심장이 찌릿해졌다.

친모의 손에 갇혀 혹독한 시간을 보낸 그가 안쓰러웠다. 결국은 제게 다시 돌아와 아름다운 미소를 짓는 남자가 주체하지 못할 만큼 사랑스러웠다.

파도처럼 밀려오는 감정을 참지 못하고 라시드를 향해 손을 뻗은 순간이었다.

쾅!

커다란 소리를 낸 것은, 어느새 침대 옆에 놓인 테이블에 앉아 있던 아리스였다.

테이블 위에 제가 마시던 보리차를 내려놓은 아리스는, 무시무시한 눈으로 라시드를 노려보며 말했다.

“오라버니, 상처도 치료하고 밥도 먹고 차도 마셨으니 한숨 자는 게 어때?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을 테니 무지 피곤할 거 아냐.”

의외로 라시드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라시드는 시아나를 바라보며 긴 속눈썹을 내리깔았다.

“시아나, 눈을 감으면 네가 다시 사라질까 봐 무서워. 도저히 편히 잠이 들 수 없을 것 같아.”

시아나가 다정하게 말했다.

“걱정 마세요. 내가 계속 옆에 있어 줄 테니까요.”

그러나 라시드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시아나가 말했다.

“손도 잡아 줄게요.”

그러나 이번에도 라시드는 고개를 저었다. 도대체 그가 원하는 게 무엇인가 싶어 눈을 동그랗게 뜬 시아나를 향해 라시드가 말했다.

“침대에서 함께 자 주었으면 좋겠어.”

그 순간, 아리스가 소리를 빽 질렀다.

“그게 무슨 끔찍한 소리야! 절대 안 돼!”

얼굴이 시뻘게져 정색하는 아리스와 눈을 마주치며 시아나가 말했다.

“공주님, 전하는 그간 무척 험한 시간을 보냈어요. 꽃의 힘으로 몸에 난 상처가 다 나았다고 해도 마음에 난 상처는 그렇지 않은 법이에요. 전하는 지금 보살핌이 필요해요.”

아리스는 기가 찼다.

‘시아나. 그건 네 착각이야! 저 인간 지금 완전 멀쩡하다고!’

겉모습만 보고 그렇게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라시드의 보라색 눈동자는 또랑또랑 했고, 그의 목소리는 생기가 넘쳤다.

그런데도 시아나는 바람 한번 불면 바스러질 여린 꽃처럼 라시드를 대하고 있었다.

환장할 노릇이었다.

그러나 지금 이 상황에서 ‘오라버니는 지금 너한테 시중받는 것이 좋아서 저렇게 가증스러운 연기를 하고 있는 거야!’라고 말해 보았자 시아나에게 씨알도 먹히지 않을 것이다.

그러기는커녕 아무리 그래도 오라버니인데 너무 야박하다며 실망을 할지도.

그래서 아리스는 눈썹을 추켜세우며 다른 말을 꺼냈다.

“오라버니가 정 시아나랑 같이 자야겠다면 나도 같이 잘래! 침대가 넓으니까 셋이 나란히 누워 자도 상관없잖아.”

그러나 라시드는 단호하게 동생의 제안을 거절했다.

“싫어.”

“왜 싫은데! 잠드는게 힘들어서 시아나가 같이 있어 주길 원하는 거라면, 내가 옆에 있든 없든 상관없잖아.”

“상관있어, 아주 많이.”

“하, 도대체 내 시녀에게 무슨 추잡한 짓을 하려고.”

“말은 바로 해야지, 아리스. 시아나는 이제 네 시녀가 아니다. 내 여자지.”

“무슨 소리. 시아나는 아직 시녀직을 정식으로 그만두지 않았어. 그러니 지금은 내 시녀야.”

치열한 말싸움(?) 끝에 결국 한 발짝 물러서기로 한 것은 아리스였다.

뻔뻔한 얼굴로 말을 내뱉던 라시드가 어지러운 듯 이마를 감싸 쥐는 것을 보자 더 이상 고집을 피울 수 없었다.

‘그래. 꽃의 힘으로 대충 상처를 치유하긴 했지만 완전히 건강해지진 않았겠지. 내가 봐준다.’

대신 아리스는 이를 으드득거리며 한 가지 조건을 걸었다.

라시드가 누운 침대의 중앙에 알록달록한 천을 이어 만든 긴 끈이 놓여 있었다.

마치 침대를 반으로 가르듯이.

아리스가 무시무시한 얼굴로 끈을 가리키며 말했다.

“오늘 하루만 같은 침대에서 자는 걸 허락해 줄게. 하지만 내가 용납할 수 있는 건 거기까지야. 오라버니는 여기, 시아나는 여기, 둘 다 절대 이 선을 넘으면 안 돼. 손도 잡을 생각하지 말고, 아무 감정 없는 바위처럼 가만히 잠만 자란 말이야. 알겠어?”

시아나는 씩씩하게 대답했다.

“네, 그럴게요.”

대답이 없는 라시드를 향해 아리스가 눈을 부릅떴다.

“오라버니는 왜 대답 안 해?”

만약 라시드가 여기서 더 고집을 피운다면, 아리스는 당장 시아나를 데리고 나갈 생각이었다.

라시드가 잠을 자지 못하든, 불안감에 엉엉 울든, 일체 상관 않고.

다행히 라시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영 탐탁지 않는다는 얼굴이었지만.

그때를 맞추어 타이밍 좋게 나타난 니니와 나나가 아리스의 양쪽 팔에 각각 팔짱을 끼었다.

“그럼 이제 공주님도 침실로 돌아가요.”

“따뜻한 우유를 준비해 두었답니다. 마시면 몸이 따뜻해져서 기분이 좋아지실 거예요.”

“햇볕에 말린 뽀송뽀송한 이불을 침대에 깔고 복슬복슬한 솜을 가득 넣은 인형도 만들었어요. 안으면 얼마나 기분이 좋은데요.”

“무엇보다 어젯밤에 읽었던 소설의 다음 권을 구해 왔다고요. 여자주인공이 일곱 명의 남자 중 누구를 선택할지 엄청나게 궁금해하셨잖아요. 어서 가서 함께 읽어요, 공주님.”

니니와 나나의 유혹은 강력했다.

아리스는 두 사람의 손에 이끌려 얌전히 라시드의 방을 나왔다.

물론 방문이 닫히는 순간까지도 라시드를 노려보며 “약속 어기면 가만두지 않을 거야.”라는 섬뜩한 말을 잊지 않았지만.

쿵.

문이 닫히고 방 안에 두 사람이 남았다.

침대에 누워 있던 라시드가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어서 내 옆으로 와, 시아나.”

“……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시아나는 이 일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왜냐면 그동안 라시드와 별의별 스킨십(?)을 다 했으니까.

‘포옹을 하거나 입을 맞추는 것과 비교하면 침대에 나란히 눕는 일은 무척 건전한 일이잖아.’

……아니었다.

폭신한 침대 위로 올라가는 순간 심장이 쿵쿵쿵 뛰기 시작했다.

‘도대체 왜 이러니.’

아리스가 그은 선을 넘지 않고 조심스럽게 침대에 누운 후에는 더더욱 엄청난 것(?)이 시아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알록달록한 끈 너머에서 시아나를 빤히 바라보는 라시드의 얼굴이었다.

라시드는 오랜 시간 제대로 식사를 하지 못해 살이 부쩍 빠진 상태였다.

‘그럼 보통 얼굴이 쾡 말라서 안돼 보이지 않아?’

그러나 상처 자국이 멀끔히 사라지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은 라시드에게는 전혀 그런 느낌이 없었다.

오히려 한결 날렵해진 얼굴에는 이전에는 없던 위태로운 아름다움마저 감돌고 있었다.

저도 모르게 넋을 놓고 라시드를 바라보는데, 맑은 목소리가 들렸다.

“고마워, 시아나.”

라시드의 말에 정신을 차린 시아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뭐가요?”

“나를 구해 준 것도, 나를 보살펴주는 것도, 모두.”

시아나가 곤란한 말을 들은 것처럼 눈썹을 내렸다.

“전하는 내가 사랑하는 남자잖아요.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이에요.”

그러나 라시드는 아니라는 듯 고개를 살짝 저었다.

라시드는 알고 있었다.

사람과 사람이 아무리 긴밀한 관계로 이어져 있다 한들, 애정이 당연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심지어 저를 낳아 준 어머니마저 자식에게 그토록 냉혹하지 않았는가.

그렇기에 라시드에게는…….

“네가 나에게 주는 모든 것이 기적 같아.”

시아나는 라시드와 함께 있으면 즐겁다는 듯 웃고, 라시드가 아픈 것을 보고 울고, 라시드를 괴롭히는 이를 보면 화를 냈다. 라시드를 안으며 수없이 사랑한다고 속삭여 주었다.

라시드는 그런 시아나의 사랑이 너무나, 너무나 고마웠다.

라시드가 입을 열었다.

“나는 앞으로 평생 너를 위해 살 거야. 네 행복을 위해 나의 모든 것을 바치마.”

제국의 꼭대기에 있는 권력. 대륙을 재패한 강력한 군대. 백 명의 기사를 벨 수 있는 단련된 몸.

……그 안에 담긴 마음 한 자락까지.

라시드가 가진 것은 모두 시아나를 위한 것이다.

라시드가 시아나와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그러니 계속 내 곁에 있어 줘. 네게 받은 사랑을 내가 다 갚을 수 있도록.”

보라색 눈동자에 어린 감정은 더없이 간절했다. 혹여 시아나가 제 마음을 거절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 느껴지기도 했다.

그래서 시아나는 눈물이 나올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시아나는 그간 힘든 삶을 살았다.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어머니는 죽고, 아버지는 딸에게 일말의 애정이 없었으며, 못된 계모에게 모진 학대까지 당했다.

그럼에도 시아나는 단 한 번도 스스로가 불쌍하다고 느낀 적이 없었다.

그런데…….

‘나보다 훨씬 크고 강한 이 남자는 왜 이렇게 안쓰러워 보이는지…….’

시아나는 눈물을 꾹 참으며 환하게 웃었다.

“그럴게요. 앞으로 계속 전하의 옆에 있을게요. 그러니 바라시는 대로 저를 행복하게 해 주세요.”

그 순간, 라시드가 도저히 참을 수 없다는 얼굴로 몸을 움직였다.

순식간에 아리스가 올려 둔 끈을 넘어와 제 위에 올라탄 라시드를 보며 시아나가 눈을 크게 떴다.

“전하, 공주님과 약속을…….”

“너는 그대로 있었으니 약속을 지키지 않은 건 나뿐이야.”

“…….”

“그럼 큰 문제가 되지 않지. 애초에 나는 이런 말도 안 되는 약속 따위 지킬 생각 없었으니까.”

라시드가 고개를 숙여 자신의 두 팔 사이에 갇힌 시아나에게 입을 맞추었다.

그녀의 입술은 너무나 부드럽고 달콤했다.

지난 몇 주간, 제대로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해 생긴 갈증이 단번에 사라질 만큼.

* * *

시아나의 감은 눈이 움찔거렸다.

‘아침이구나.’

어제 하루 종일 무리를 한 탓에 몸이 무거웠다. 조금 더 이대로 누워 잠을 자고 싶었다. 그럼에도 시아나는 애써 눈꺼풀을 올렸다.

늦잠을 잘 만한 여유로운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할 게 많아. 황궁의 상황도 살펴야 하고, 귀족들도 모아서 대책을 의논해야 하고.’

겨우 눈을 뜬 시아나는 아, 하고 작은 소리를 내뱉었다.

옆에 누워 곤히 자고 있을 줄 알았던 라시드가 침대 옆에 서서 시아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언제 일어난 것인지 라시드는 편안한 잠옷을 벗고 짙은 셔츠를 입고 있었다.

부스스했던 머리카락은 단정히 빗겨져 있었고 보라색 눈동자는 최고급 보석처럼 빛났다.

그에게는 지난 며칠간 겪었던 고단함이나 어젯밤에 느껴졌던 위태로움 같은 건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압도적인 위압감과 넘치는 생명력만이 느껴질 뿐이었다.

라시드를 멍하니 바라보던 시아나가 눈썹을 내리며 말했다.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어요. 조금 더 자지.”

라시드는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시아나의 눈빛에 한껏 걱정이 어려 있었기 때문이다. 마치 라시드가 무리라도 하는 것처럼.

그러나 시아나의 걱정과 달리 라시드의 몸 상태는 완전히 돌아왔다. 신비로운 꽃의 힘과 초인적인 체력 덕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시드는 어제처럼 시아나에게 어리광을 피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그녀에게 보살핌을 받았던 순간이 너무나 행복했기에.

하지만 라시드는 그런 짓을 할 만큼 철이 없진 않았다.

라시드는 허리를 숙여 침대에 누워 있는 시아나의 머리카락을 쓸어 주며 말했다.

“몸은 완전히 나았어. 그러니까 걱정 말고 더 자도록 해.”

“……정말요?”

“그래.”

그 말에 얼마나 안심이 되는지.

그제야 시아나는 라시드가 없는 동안 제가 엄청나게 긴장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긴장이 풀리니 참지 못할 만큼 강한 졸음이 밀려왔다.

“그럼 조금만 더 잘게요.”

시아나는 배시시 웃으며 다시 눈을 감았다. 이내 한편에 밀어 두었던 수마가 시아나를 덮쳤다.

라시드는 잠이 든 시아나를 한참 보다가 방을 나왔다.

라시드를 맞이한 것은 팔짱을 낀 채 무시무시한 표정을 짓고 있는 아리스였다.

아리스가 밤새 잠을 자지 못한 퀭한 얼굴로 따지듯 물었다.

“솔직히 말해. 내가 그은 선 넘었어, 안 넘었어?”

라시드는 아리스의 작은 머리통을 쓰다듬으며 웃었다.

“걱정 마. 시아나는 약속을 지켰으니까.”

그 말에 아리스가 불안감을 느끼며 몸을 바들바들 떨기 시작했다.

“오, 오라버니는?”

“…….”

라시드의 침묵에 아리스가 소리를 빽 질렀다.

“왜 대답을 안 하는데!”

“어린 동생을 위해 거짓말을 하는 게 나을지, 그래도 솔직하게 진실을 말하는 게 좋을지 고민 중이란다.”

“……!”

그 말의 의미를 깨달은 아리스가 ‘으아아아!’ 하고 소리를 지르며 라시드에게 달려드려는 순간, 니니와 나나가 아리스의 양쪽 팔을 잡았다.

“참으세요, 공주님! 이렇게 원초적인 공격은 공주님께 어울리지 않아요.”

“맞아요. 황태자 전하께서 꼼짝 못할 만한 모략을 세워 처절한 피의 복수를 하자고요.”

“난 그런 거 몰라! 지금 당장 저 인간의 머리채를 뜯어 버릴 거야!”

라시드는 소란스러운 세 여인을 무시하며 걸음을 옮겼다. 잠시 후, 라시드는 한 청년과 마주쳤다.

오렌지색 머리카락과 금빛 눈동자를 한 청년은 바로 키르안이었다.

키르안이 이곳에 온 것은 얼마 전의 일이었다.

빌헬름 후작에게 황후가 황제를 조종하고 있을 수도 있다는 말을 들은 시아나는, 키르안에게 급하게 서신을 보냈다.

[만약 황제 폐하께서 마법사에게 조종을 당하고 있는 게 사실이라면, 그 마법을 풀 수 있는 마력석이 필요해.]

키르안의 친모가 운영하는 미스틱 상단은 대륙에서 가장 많은 마력석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키르안은 눈썹을 찡그릴 수밖에 없었다. 미스틱 상단에 시아나가 원하는 능력을 가진 마력석이 없었기 때문이다.

대신 키르안은 시아나가 원했던 또 다른 마력석을 챙겨 이곳으로 왔다.

공간을 이동할 수 있는 힘을 가진 마력석이었다.

그 힘 덕분에 시아나는 라시드를 데리고 재판정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시아나에게 그 이야기를 전해 들었던 라시드가 고개를 살짝 숙였다.

“도움을 받았군.”

“……!”

라시드의 인사에 키르안의 고양이 같은 눈이 부릅떠졌다.

‘피의 황태자’가 이토록 순순하게 감사 인사를 할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기에.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한 키르안이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말했다.

“인사는 필요 없습니다. 공짜로 도와준 것도 아니니까요.”

공간을 이동할 수 있는 마력석은, 온갖 마력석을 가진 미스틱 상단에서도 보물로 취급하는 귀한 물건이었다.

그런 물건을 말도 없이 몰래 가지고 나왔으니…… 키르안은 집에 돌아가는 순간 분노한 어머니와 누나에게 맞아 죽을 것이 뻔했다.

“시아나 공주님을 위해 죽는 것이라면 여한이 없지만, 황태자 전하를 위해 그런 개죽음을 당할 생각은 없습니다. 전하께 마력석의 값을 청구할 겁니다.”

원래 받아야 할 값보다 열 배는 넘게 바가지를 씌어서.

무례하기 짝이 없는 말이었으나, 라시드는 당연한 말을 들었다는 듯 평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원하는 값은 얼마든 지불하지. 다만 도움을 하나 더 받고 싶군.”

“……뭡니까?”

“마법으로 정신을 조종당하는 자를 어떻게 하면 원래대로 돌려놓을 수 있지?”

“……!”

훅 들어온 말에 키르안이 눈썹을 추켜세웠다.

라시드가 말한 조종당하는 자가 황제인 것을 알기 때문이다.

마법사가 일국의 황제를 조종하고 있다니. 정말이지 끔찍하고 황당한 일이었다.

키르안이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시아나 공주님께도 말씀드렸지만 마법을 무효화시키는 마력석은 없습니다. 적어도 미스틱 상단에는요.”

대륙 최고의 상단도 가지고 있지 않다면, 그런 마력석은 존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마력석이 없다고 해도 큰 문제는 아닙니다. 마법을 건 마법사를 찾아 마법을 풀면 보다 확실하게 상황을 해결할 수 있으니까요.”

“……마법사를 찾는 게 가능한가?”

모습을 숨긴 마법사를 찾는 건 기적에 가까울 만큼 어려운 일이었다.

그럼에도 키르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미스틱 상단은 마력석의 거래를 위해 마법사들과 긴밀하게 연락하고 있었고, 덕분에 대륙에 있는 수많은 마법사들의 정보를 가지고 있었다.

키르안이 말했다.

“정신을 조종할 수 있는 힘을 가진 데다가, 이런 짓을 할 만큼 미친 마법사는 많지 않습니다. 마법사 융이 분명합니다.”

대번에 황제에게 술수를 건 마법사의 이름을 맞춘 키르안이 말을 이었다.

“융은 마법사치고 속물적인 데다가 탐욕적이에요. 게다가 어린아이처럼 호기심이 왕성한 자이니 그자가 흥미를 가질 만한 미끼를 흔들면 나타날 겁니다. 시간이 좀 걸리긴 할 테지만요.”

“얼마나?”

라시드의 물음에 키르안은 어깨를 으쓱였다.

“저희가 찾아가 잡는 것이 아니라 그쪽에서 미끼를 물기 위해 나와야 하는 것이라 그건 확신할 수 없습니다. 내일 당장 나타날 수도 있고, 최악의 경우 몇십 년 후에야 모습을 드러낼 수도 있죠.”

라시드의 눈이 가늘어졌다.

기약할 수 없는 시간을 기다릴 만큼 라시드는 인내심이 많지 않았다. 그럴 만한 시간도 없었고.

그런 라시드를 본 키르안이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말했다.

“혹시 공주님께 아직 말씀을 못 들으셨습니까?”

“……무슨 이야기?”

“마법석이 없어도, 마법사를 찾지 않아도, 황제 폐하를 원래대로 돌아오게 할 수 있는 방법 말입니다.”

“……!”

키르안의 말에 라시드의 눈이 커졌다.

키르안은 아름다운 얼굴이 제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흔들리는 것에 묘한 쾌감을 느끼며 말했다.

“죄인의 탑. 황궁에 있는 그 신비로운 탑에는 모든 마력을 없애는 능력이 있죠. 황제 폐하께서도 죄인의 탑에 들어가면 정신이 돌아올지도 모른다, 라고 시아나 공주님이 말하셨습니다.”

“……!”

라시드가 아, 하고 작은 소리를 냈다. 확실히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였다.

어쩐지 이긴 듯한 기분에 키르안이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표정을 보니 공주님께서 아무 말도 하지 않은 모양이군요.”

키르안의 말대로, 시아나는 라시드에게 황제나 황후에 대한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모진 일을 당하고 온 그가 단 하루라도 온전히 쉬길 원해서였다.

하지만 시아나는 아무 생각 없이 라시드와 여유를 즐긴 것이 아니었다.

시아나에게는 계획이 있었다.

키르안이 의기양양한 얼굴로 말했다.

“공주님께서는 전하를 구한 직 후, 수도 전역에 전단지를 뿌렸습니다.”

황제 폐하께서 마법사에게 조종당하고 있다. 마법을 풀기 위한 방법이 있다. 모든 마력이 사라지는 죄인의 탑에 들어가면 황제 폐하는 마법사의 주술에서 벗어나리라.

시아나의 의도를 알아 챈 앙겔루스 공작을 포함한 수많은 귀족들이 황궁 앞에 모여 소리쳤다.

[황제 폐하, 부디 죄인의 탑으로 향하셔서 저희들의 마음속에 생긴 불안함을 없애 주십시오!]

귀족들의 요구에 황제는 불같이 화를 냈다.

감히 짐이 조종당한다고 의심을 하느냐. 이 이상 불경한 말을 하는 자는 누구라도 용서하지 않겠다!

그러나 황제의 격한 반응은 귀족들의 의심을 더더욱 크게 만들 뿐이었다.

“덕분에 어제부터 황제와 귀족들은 난리도 아닙니다. 황제는 조종당하지 않았다, 귀족들은 그럼 그것을 증명해 달라, 밤새도록 대립하는 중이죠.”

갈등은 치열했다.

황제 시해 미수죄를 뒤집어쓰고 도망가 버린 라시드에게 신경을 쓰지 못할 만큼.

“만약 이대로 황제가 죄인의 탑에 들어가지 않고 버티면, 황제에 대한 신뢰도가 바닥으로 떨어질 겁니다.”

그럼 자연스럽게 황제를 따르는 이들도 그에게서 멀어질 수밖에 없다.

황제의 세력이 줄면 자연스럽게 반대편에 있는 라시드의 세력이 늘어난다.

팔짱을 낀 키르안이 이죽거리듯 말했다.

“그러니 전하께서는 이곳에서 팔~자 좋게 쉬다가, 기회가 왔을 때 움직이면 됩니다. 세상에서 가장 똑똑한 시아나 공주님께서 판을 모두 깔아 주었으니까요.”

그제야 라시드는 긴박한 상황에서도 시아나가 저를 돌보며 여유를 부린 이유를 깨달았다.

시아나는 라시드가 다시 힘을 얻어, 가장 쉽고 안전하게 황궁에 입성할 수 있을 때를 기다리고자 한 것이다.

라시드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역시 대단해, 시아나.’

라시드는 시아나의 영특함과 다정함이 미치도록 사랑스러웠다. 그녀가 계획한 대로 순순히 따르고 싶었다.

하지만…….

라시드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더 이상 이 일을 질질 끌어 너를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아.”

방금 전까지 휴가를 즐기는 귀족 도련님처럼 나른했던 라시드의 분위기가 한순간 바뀌었다.

나긋했던 눈매는 또렷해지고 입가의 미소가 일절 사라졌다.

라시드가 한쪽 손을 들었다. 그 순간, 보이지 않는 곳에 숨어 있던 블랙 쉐도우 기사단이 나타났다.

무릎 꿇은 기사단을 내려다보며 라시드가 말했다.

“수도에 있는 군대를 모두 소집하라. 황태자 라시드 레비쥬앙 드 아르덴의 이름으로.”

블랙 쉐도우 기사단은 우렁찬 대답 대신 조용한 고갯짓으로 주인의 명령에 대답했다. 이내 기사들의 모습이 연기처럼 사라졌다.

키르안이 기가 차다는 얼굴로 말했다.

“이보세요, 황태자 전하. 당신은 아직 황제를 시해하려 한 죄인이라고요. 재판을 받다가 도망까지 쳤으니 죄는 더더욱 무거워졌죠. 그런 당신이 오란다고 군대가 움직일 리 없잖아요.”

실제로 라시드가 죄인의 탑에 갇혀 있을 때 그의 군대는 아무 행동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라시드는 평온한 얼굴로 말했다.

“그때는 내가 어떤 명령도 내릴 없는 상태였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지. 나의 부하들은 제멋대로 판단해서 행동할 만큼 영악하지 못하거든.”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황궁을 나온 라시드가 직접 명령을 한 이상, 그들은 그의 뜻에 복종할 것이다.

라시드를 향한 존경심과 충성심, 그리고 오랜 시간 함께 전쟁을 겪으며 몸에 새겨진 두려움 때문이다.

그들에게 라시드는 절대 거역할 수 없는 지휘관이었다.

키르안이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그래서 군대를 모아서 어쩔 건데요. 설마 황궁에 쳐들어간다는 미친 생각을 하시는 건 아니겠죠?”

놀랍게도 라시드는 그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대신 당장이라도 사냥을 나가려는 사자처럼 보라색 눈동자를 섬뜩하게 빛냈다.

* * *

시아나는 눈을 떴다. 창문에 비친 하늘은 어느새 붉은 석양이 지고 있었다.

그것을 본 시아나가 눈썹을 찡그리며 중얼거렸다.

“나도 참. 아무리 전하가 푹 자라고 했다고 해도 이 시간까지 자다니…….”

엄청난 늦잠이었다.

시아나는 단숨에 침대에서 일어나 방을 나갔다. 그런데 저택의 분위기가 어딘가 이상했다.

‘묘하게 고요하다고 할까. 이게 무슨 느낌이지?’

눈썹을 찡그린 시아나가 가장 먼저 마주친 사람은 복도에 서 있던 아리스였다.

아리스가 꺄, 하고 눈을 빛내며 두 팔로 시아나의 허리를 안았다.

“일어났구나, 시아나. 얼마나 곤히 잠을 자는지 잠자는 숲속의 공주님인 줄 알았다니까. 이대로 계속 깨지 않으면 뽀뽀를 해 주려던 참이었어.”

아리스의 작은 머리통을 쓰다듬으며 시아나가 웃었다.

“신경써주셔서 고마워요. 그런데 전하는 어디 계신가요?”

대수롭지 않게 던진 질문이었다.

라시드가 갈 곳은 기껏해야 조용한 방 안이나, 저택 밖의 숲속일 거라 생각하며.

그러나 아리스가 내놓은 답변은 충격적이었다.

“오라버니는 황궁으로 떠났어.”

그 말에 시아나가 눈을 크게 떴다.

“화, 황궁이요?”

“응.”

아리스는 시아나가 잠든 사이 있었던 일들을 말해 주었다.

라시드가 출격 명령을 내린 후, 놀랍게도 수도에 있던 수많은 병사가 일말의 고민 없이 움직였다.

그것도 번개처럼 기민한 속도로.

“병사들이 일제히 황궁을 향해 진군을 시작했다는 보고를 듣고 오라버니도 황궁으로 갔어. 블랙 쉐도우 기사단과 함께 말이야.”

아리스는 은빛 갑옷을 입고 허리에는 검을 매단 채, 거대한 군마를 탄 라시드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때 아리스는 처음으로 깨달았다.

내 오라버니가 작은 동물들 똥이나 치워 주며 헤실거리는 바보가 아니었구나, 하고. 그는 누가 뭐래도 ‘피의 황태자’라는 섬뜩한 별명을 가진 전쟁의 영웅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좀 멋있었어.’

아리스는 분하다는 얼굴로 작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런 아리스를 보며 시아나가 물었다.

“……그래서요?”

“그게 끝이야.”

그 말에, 시아나가 감정의 동요를 숨기지 못하고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제가 잠든 반나절 사이에 이런 엄청난 일이 진행되었을 줄이야. 정말이지 어이가 없고 화가 났다.

시아나의 눈치를 살피며 아리스가 말했다.

“오라버니가 그러는데 군대를 움직인 이상 최대한 빠르게 일을 진행해야 한대.”

“그래서 절 깨우지 않고 혼자 가버리셨다고요?”

원망이 한껏 밴 시아나의 목소리에 아리스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것도 있고…… 오라버니가 너를 편히 자게 두고 싶다고 했어. 그동안 너무 힘들게 했다고.”

그 말에 시아나의 눈동자가 조금 흔들렸다. 그러나 이내 시아나는 눈썹을 한껏 올리고 눈에 힘을 주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건 아니야.’

시아나는 라시드 혼자 이 사태를 해결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것도 군대까지 동원하여 피를 흘리는 방식으로는 더더욱.

‘일단은 전하를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자.’

시아나는 서둘러 저택을 나갔다. 그런데 놀랍게도 저택 밖에는 커다란 마차와 검은 갑옷을 입은 기사들이 서 있었다.

마치 시아나를 기다리고 있던 것처럼.

기사 중 한 명이 말했다.

“시아나 님께서 황궁에 가길 원하시면 안전하게 모시고 오라는 황태자 전하의 명령이 있었습니다. 타시지요.”

시아나는 기가 찬 얼굴로 기사를 보다가 주저 없이 마차에 탔다.

그런 시아나의 뒤로 아리스가 쪼르르 따라오더니 건너편 자리에 앉았다. 시아나가 눈썹을 내리며 말했다.

“공주님은 이곳에 계세요. 군대까지 움직인 이상 긴박한 상황일 가능성이 커요.”

“그러니까 더더욱 함께 가야지. 너 혼자 보냈다가 위험한 상황에 처하기라도 하면 어떡해.”

어느새 따라와 아리스와 시아나의 옆에 앉은 니니와 나나가 말을 보탰다.

“걱정 마세요, 시아나 님. 아리스 공주님은 저희가 지킬 테니까요!”

“이래 봬도 제가 동부에서 배워 온 호신술 실력이 제법 쓸 만하답니다. 위험한 놈이 나타나면 손가락으로 확 눈알을 터뜨리고 놈의 다리 사이를 발로 차서 거기도 확 터뜨려 버릴게요.”

팔짱을 낀 채 고집스러운 눈을 한 아리스, 의욕이 넘치는 두 사람.

시아나는 도무지 세 사람을 설득할 자신이 없었다. 그럴 만한 여유도 없었고.

결국 시아나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리스, 니니와 나나가 야호, 하고 두 손을 올렸다.

네 여인을 태운 마차가 출발하기 시작했다. 아리스가 ‘참!’ 하고 소리를 치더니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었다.

“시아나, 네게 줄 선물도 있었다고. 날 두고 갔으면 이 귀한 물건을 한참 후에나 받았을 걸?”

아리스가 품속에서 꺼낸 것은 종이봉투였다. 아리스가 그것을 시아나에게 내밀며 말했다.

“할마마마께 온 편지야. 조금 전에 도착했어.”

“……!”

아리스의 말에 시아나가 눈을 크게 떴다.

얼마 전, 아리스는 동부에 있는 황태후에게 황후에 대한 것을 알아 봐 달라는 부탁을 했다. 그 편지에 대한 답이 도착한 것이다.

아리스에게 봉투를 건네받은 시아나가 물었다.

“혹시 안의 내용을 읽어 보셨나요?”

“아니. 이 편지가 필요하다고 한 것은 너잖아.”

물론 아리스도 황후의 비밀이 엄청나게 궁금하긴 했다. 하지만 꾹 참고 보지 않았다.

저 안에는 한 여인의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가 담겨져 있을 것이 분명하기에.

아리스는 그런 것을 호기심이나 재미로 볼 만큼 철이 없지 않았다.

그런 아리스에게 대견함을 느끼며 시아나가 종이봉투를 열었다.

편지를 읽는 시아나의 표정이 점점 굳어 갔다. 마치 알아서는 안 될 이야기를 안 것처럼.

시아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던 아리스가 입을 열었다.

“왜? 알고 보니 황후 폐하가 엄청 착하고 순수한 소녀였는데, 아바마마 같은 나쁜 놈한테 걸려서 이 고생 저 고생 하다가 결국 지금의 악녀가 되었다, 뭐 그런 이야기야?”

시아나가 놀란 얼굴로 물었다.

“그걸 어떻게 아세요?”

아리스가 의기양양한 얼굴로 말했다.

“최고로 힘이 센 악당들은 이런저런 사정을 가지고 있기 마련이니까. 소설 속의 뻔한 공식이지.”

멍하니 아리스를 보던 시아나가 입을 열었다.

“그럼 소설 속 악당은 결국 어떻게 되나요?”

“그냥 밑도 끝도 없이 나쁜 놈들은 죽고 끝나지만, 그런 식으로 사정이 있는 악당들은 주인공에게 죄를 용서받고 착해지더라. 완벽한 해피엔딩이지.”

“……그렇군요.”

시아나가 복잡한 얼굴로 편지지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이내 시아나가 탄 마차가 황궁에 도착했다.

놀랍게도 마차는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황궁 안에 들어섰다. 시아나는 단번에 그 의미를 알아챘다.

라시드가 황궁을 점령한 것이다. 그것도 겨우 반나절 만에.

시아나는 새삼 그 사실이 놀랍지는 않았다.

‘나는 전하가 아실론드 왕국을 짓밟는 것을 내 눈으로 봤어. 손발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고 자신의 명령에 따르는 군대가 있다면 전하는 누구보다 강해. 마음만 먹으면 황궁 같은 것은 언제든 점령할 수 있을 만큼.’

그러나 시아나의 얼굴은 조금도 풀어지지 않았다.

‘때를 기다리면 전하가 훨씬 더 수월하게 황궁으로 돌아갈 기회가 생겼을 거야. 그런데 병사들을 모아 황궁을 기습하다니…….’

라시드의 목표는 단순히 황태자의 직위를 복원하려는 게 아닐지도 모른다.

어쩌면 라시드는…….

‘복수를 하려는 건지도 몰라.’

마차에서 내린 시아나가 창백한 얼굴로 달려간 곳은 황후궁이었다.

* * *

황후는 일그러진 얼굴로 입술을 깨물었다.

‘도대체 왜 이렇게 되어 버린 거지?’

불과 어제 아침까지만 해도 황후는 모든 패를 쥐고 있었다.

황제는 제 말을 철저하게 따랐고, 라시드는 제 말 한마디면 목숨이 날아갈 죄인이 되어 갇혀 있었다.

그러나 황후가 가진 모든 것은 산산조각이 나 버렸다.

어제, 재판정에 나타난 시아나의 한마디로 인해.

“사악한 마법사의 주술에 걸린 황제 폐하께서 본인의 의지를 잃은 상태로 황태자 전하께 누명을 씌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 말을 끝으로 시아나는 라시드와 함께 사라져 버렸다. 그러나 황후는 두 사람을 쫓을 새가 없었다.

앙겔루스 공작을 포함한 귀족들이 경악한 얼굴로 황제를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모습을 본 황후가 굳은 얼굴로 소리쳤다.

“다들 지금 무슨 생각하는 건가. 방금 시아나가 했던 말은 라시드를 탈출시킬 기회를 잡기 위해 아무 말이나 내뱉은 것뿐이오!”

그때 다른 황비들과 함께 앉아 있던 라일라 황비가 나섰다.

“혹 황후 폐하께서 황제 폐하의 상태에 관해 무언가 알고 계신 게 아닙니까?”

황후의 가슴이 철렁했다.

“그, 그게 무슨 소리인가!”

“조금 전 시아나 공주가 마법을 푸는 마력석이라며 황제 폐하께 흰 돌을 던졌을 때, 황후 폐하께서 기함을 하시지 않았습니까. 황제 폐하께 마력석이 닿으면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말입니다.”

“폐하의 옥체를 해치는 흉악한 물건일까 하여 그런 것뿐이야!”

황후는 억울한 얼굴로 소리쳤다.

그러나 그녀를 보는 황족과 귀족의 눈빛에는 진득한 의심이 어려 있었다.

방금 전, 시아나가 마력석을 던진 순간 보였던 황후의 모습 때문이다. 평소 자애롭기만 하던 모습이 완벽하게 사라진 황후는 섬뜩한 얼굴로 황제를 보호하려 했다.

누가 보아도 ‘무언가 있구나.’라고 의심할 만한 모습이었다.

라일라 황비가 또렷한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

“황후 폐하께서 자꾸 시아나 공주의 말을 헛된 말이라고 하시는데 제 생각은 그렇지 않습니다. 요 근래 황제 폐하의 언행과 행동은 이상한 점이 너무나 많았으니까요.”

“그건 라시드에게 큰일을 당한 탓에 충격을 받으셔서 그런 것 아닌가.”

“아니요. 만약 그 이유였다면 모든 이에게 공평하게 불안한 모습을 보이셨어야지요. 황제 폐하께서는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기분이 왔다 갔다 하시는 와중에도 황후 폐하의 말만큼은 너무나 잘 따르셨습니다. ……마치 조종이라도 당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대놓고 황제를 조종하는 이가 황후라고 의심하는 말이었다.

그 순간, 황후는 고민했다.

재판정에는 제 말에 반응하는 병사들이 가득 차 있었다. 그들에게 명령하여 지금 당장 라일라 황비의 목을 베어 버릴까?

그 후에 또 저따위 불경한 말을 지껄이는 자가 나오면 계속 베어 버리는 거야.

모든 이들이 조용해질 때까지.

그러나 황후는 머릿속을 가득 채운 잔혹한 충동을 겨우 참았다.

제아무리 그녀에게 황제가 있다 한들, 황족과 귀족들이 몽땅 적으로 돌아서면 감당할 수가 없었다.

황후는 끔찍한 짓을 저지른 죄인이 되어 비참한 말로를 보게 될 것이다.

결국 황후가 택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더 이상 이런 불쾌한 분위기 속에 있고 싶지 않군. 다들 물러가게.”

황후는 병사들을 시켜 귀족들을 황궁 밖으로 쫓아냈다. 황족들도 그들의 궁으로 돌려보냈다.

그러나 상황은 조금도 진정되지 않았다.

황제를 죄인의 탑으로 데려가면 주술이 풀릴 거라는 내용이 담긴 전단지가 수도 곳곳에 뿌려졌기 때문이다.

재판정에서 쫓겨났던 귀족들과 전단지를 보고 찾아온 평민들이 황궁 밖에 모여 한목소리로 소리쳤다.

황제 폐하를 죄인의 탑에 모시고 가 진실을 밝혀야 합니다!

황후는 정말이지 돌아 버릴 것 같았다.

황후가 두 손을 벌벌 떨며 중얼거렸다.

“황제의 마법은 절대 풀리면 안 돼. 제정신을 차리면 그가 날 가만두지 않을 거야.”

황제는 황후가 가장 괴로워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자였다.

그는 단순히 황후의 목숨을 앗아 가는 것으로 보복을 끝내지 않을 것이다. 황후가 가장 아끼는 것을 해칠 것이다.

황후가 창백해진 얼굴로 이블린을 끌어안았다.

“너, 너마저 잘못되면 나는 살 수가 없어, 이블린.”

패닉 상태에 빠져 온몸을 떠는 황후의 등을 어루만지며 이블린이 말했다.

“진정해, 마리아. 지금 황제는 네 말만 듣는 꼭두각시 인형이야. 황제만 있다면 지금의 상황은 얼마든지 뒤집을 수 있어.”

이블린의 말에 황후는 겨우 마음을 다잡았다.

‘그래. 아직 확실하게 밝혀진 것은 아무것도 없어. 증거 없는 의심만 있을 뿐이지.’

물론 그들의 의심은 의심이 아니라 사실이었지만, 그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고약한 의심으로 끝내면 그만이니까.

‘일단은 황제를 지지하는 귀족들을 모으자. 그리고 그들을 이용하여 여론을 바꾸는 거야.’

라시드와 그를 따르는 귀족들이 황제 폐하가 마법사에게 조종당한다는 황당하고 무엄한 소문을 내고 있다고.

황좌를 차지하고 싶은 욕심으로.

그것은 반역이다.

‘반역은 절대 용서받을 수 없고, 누구에게도 지지받을 수 없는 죄야.’

그런 죄에 엮여 있는 한, 라시드는 아무리 강한 힘을 가지고 있어도 원래의 자리로 복귀할 수 없다. 그러한 기간이 길어지면 귀족들도 차차 그를 떠날 것이고.

하지만 황후는 황제파의 귀족들을 모을 수 없었다. 그들에게 보낼 편지를 다 쓰기도 전에 일이 터졌기 때문이다.

황급히 문을 열고 들어온 이블린이 소리쳤다.

“황태자 전하께서 군대를 몰고 황궁에 침입했습니다!”

“뭐야?!”

황후는 당황했다.

라시드가 황궁에 쳐들어올 수도 있을 거라 생각은 했다. 하지만 예상했던 것보다 너무 빨랐다.

“고작 하루 만에 병사들을 모아 보았자 얼마나 모았겠느냐. 황궁의 근위대와 시종들을 모두 집결시켜 라시드를 막아라!”

황후의 말대로 라시드가 데려온 병사들의 숫자는 많지 않았다.

그가 움직일 수 있는 병력의 극히 일부였을 뿐이다.

그러나…… 라시드는 불과 열세 살의 나이부터 전쟁터를 누비며 수많은 승리를 쟁취한 전쟁 영웅이었다.

게다가 황궁 안은 황제와 황후에 대한 의심이 팽배해져 있었고, 근위대와 시종들 중에는 라시드를 존경하는 이들이 많았다.

몇 시간 만에 라시드는 황궁을 점령했다.

“황후 폐하, 피하십시오!”

문밖에서 이블린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얼굴이 창백해진 황후가 이블린의 상태를 살피러 문밖으로 나갈 새도 없이, 방 안으로 한 남자가 들어섰다.

라시드였다.

라시드는 어제 재판정에서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상처가 깨끗이 사라지고 생기가 돌아온 아름다운 얼굴. 균형 잡힌 몸 위에는 단단한 은빛 갑옷이 걸쳐져 있었고, 검은 장갑을 낀 손에는 날이 섬뜩한 검을 들고 있었다.

검날에서는 붉은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그것을 보고 일그러진 황후의 얼굴을 보며 라시드가 말했다.

“걱정 마십시오. 어마마마께서 끔찍하게 아끼는 시녀의 피는 아니니까요. 이것은 저를 막아섰던 병사들의 피입니다.”

“……!”

“저를 막는 자는 누구도 용납하지 않을 거라고 하니 대부분의 병들이 물러났습니다. 그럼에도 버티는 자들이 있더군요. 목숨을 바쳐 아바마마와 어마마마의 명령을 따를 만큼 충심이 대단한 이들이었으나 벨 수밖에 없었습니다. 안타까운 일이지요.”

라시드의 목소리는 온화했고 그의 태도는 지극히 정중했다.

그럼에도 황후의 얼굴은 조금도 풀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황후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고얀 놈. 이곳은 전쟁터가 아니라 황궁이다. 네가 한 짓은 반역이고 살인이야! 이런 짓을 벌이고도 네가 무사할 것 같으냐!”

온몸의 기운을 보아 쩌렁쩌렁 소리를 질렀음에도 라시드의 얼굴은 지극히 평화로웠다.

라시드가 망토 끝자락으로 검에 묻은 핏자국을 닦아 내며 말했다.

“아니요, 사람들은 오늘의 사건을 이렇게 알게 될 겁니다. 간악한 마법사에게 조종당하는 황제 폐하를 구하기 위해 황태자가 목숨을 바쳐 황궁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황제를 구출하는 데 성공했다.”

황후가 정색했다.

“누가 그따위 말을 믿겠느냐!”

“믿을 겁니다. 그 말이 모두 진실이니까요.”

라시드는 황제를 어떻게든 원상태로 돌려놓을 생각이었다.

죄인의 탑에 데려가든, 마법사를 찾아 마법을 풀든.

황위를 찬탈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음에도 그러지 않고 황제의 저주를 풀기 위해 노력한 황태자.

누구도 황궁을 침범한 라시드를 비난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제가 보살필 분은 아바마마뿐입니다.”

“……!”

“아바마마를 저런 끔찍한 상태로 만든 것은 어마마마시죠. 뿐만 아니라 어마마마께서는 아바마마를 조종하여 친아들인 제게 모반의 혐의를 씌우려고 하셨습니다. ……그건 아무리 자애로운 황후라도 용서받지 못할 죄입니다.”

황후가 멍하니 라시드를 보다가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

“설마 날 죽일 생각이냐?”

놀랍게도 라시드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라시드의 모습을 황후는 믿을 수 없었다.

황후는 처음부터 라시드에 대해 일말의 애정도 없었다. 그렇기에 그토록 라시드에게 모질게 구는 것이 가능했다.

하지만 라시드는 아니었다.

라시드는 보통 사람보다 감정에 둔했지만 제 어미에게만큼은 애정이 대단했다.

한 움큼의 온기라도 받기 위해 늘 제 눈치를 살피고 발버둥 쳤다.

그런 라시드가 자신을 죽인다니.

황후가 눈을 부릅뜨며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너는 날 죽일 수 없어.”

황후의 생각처럼 라시드는 황후를 사랑했다.

어린 시절부터 숨 쉴 틈 없이 이어지던 모든 수업을 묵묵히 해낼 만큼. 전쟁터에 나가 수많은 이들을 도륙할 만큼.

하지만 황후가 모르는 것이 있었다.

이제 그 감정보다 훨씬 더 큰 감정이 라시드를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시아나를 향한 마음이었다.

라시드에게는 이전에는 없던 욕심이 생겼다.

오랫동안 그녀를 보고 싶다.

마음껏 그녀를 안고 싶다.

온 힘을 다해 그녀를 사랑하고 싶다.

평생 그녀를 행복하게 해 주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 라시드는 오래도록 살아야 했다. 흔들림 없이 권력을 지켜야 했다.

그런 라시드에게 있어 황후는 가장 위협적인 존재였다.

“제가 어마마마의 말을 듣지 않는 한 당신은 계속 제가 미울 겁니다. 죽이고 싶을 테죠.”

“…….”

“그렇기에 저는 더 이상 당신을 살려 둘 수 없습니다.”

“……!”

무표정한 얼굴로 내뱉는 아들의 말에 황후의 얼굴에 핏기가 사라졌다.

라시드가 말을 이었다.

“물론 이대로 어마마마를 잡아 재판을 진행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죄가 밝혀지면 어마마마는 극형을 면치 못하시겠지요.”

구름처럼 몰려든 이들의 흥미 어린 시선 속에서 황후는 목이 잘려 생을 마감할 것이다.

라시드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하지만 어마마마께서는 수치스러운 것은 질색인 분이니까…….”

그래서 라시드는 이 방법을 택했다.

누구도 보지 않는 이곳에서, 조금의 고통도 느낄 새 없이 목숨을 끊어 주는 것.

그것이 라시드가 황후를 위해 해 줄 수 있는 유일한 것이다.

그제야 황후는 라시드가 진심임을 깨달았다.

순식간에 죽음에 대한 공포가 밀려왔다.

새빨간 핏줄이 일어난 눈동자 아래 눈물이 어렸다. 그럼에도 남아 있는 자존심 때문에 알량한 구걸도 하지 못했다.

황후가 이를 악물며 뒷걸음질 쳤다. 그런 황후를 따라 라시드가 한 발짝 다가왔다.

라시드가 무표정한 얼굴로 천천히 검을 들어 올린 순간이었다.

“안 돼요, 전하!”

쩌렁쩌렁한 목소리와 함께 시아나가 방 안으로 뛰어들었다.

엄청난 속도로 달려와 제 손을 잡은 시아나를 보며 라시드가 눈썹을 내렸다.

“이거 놔, 시아나. 위험해.”

“싫어요. 이 손을 놓으면 황후 폐하의 목숨을 해칠 거잖아요.”

라시드는 시아나의 끔찍한 말을 조금도 부정하지 않고 답했다.

“시아나, 어마마마는 나를 죽이려 했어. 그리고 나를 조종하기 위해 너를 붙잡으려고 했지.”

만약 황후가 시아나를 잡는 데 성공했다면, 시아나는 이리저리 이용당하다가 결국 죽어 버렸을지도 모른다.

그것을 떠올린 라시드의 보라색 눈동자가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라시드의 감정을 안 시아나가 입술을 깨물었다.

라시드의 말대로 황후는 용서받기 힘든 죄를 저질렀다. 시아나도 황후가 미웠다.

그럼에도…… 시아나는 라시드의 손을 꽉 쥐며 말했다.

“그래도 이건 아니에요, 전하.”

시아나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전하의 손에 황후 폐하의 피를 묻힌다면, 전하는 평생 괴로울 거예요.”

“…….”

“저는 전하가 그런 괴로움 속에서 살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런 고통 같은 것 없이 그저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시아나의 에메랄드색 눈동자에는 제 손으로 친모를 죽이려는 라시드에 대한 경멸도, 두려움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라시드에 대한 애타는 걱정이 어려 있을 뿐.

황후를 앞에 두고 내내 무표정했던 라시드의 얼굴에 처음으로 감정이 어렸다.

라시드가 곤란하다는 듯 눈썹을 내리며 중얼거렸다.

“이래서 네가 잠든 사이에 모든 일을 끝내려고 했던 건데…….”

“…….”

시아나라면, 제 굳은 결심을 너무나 쉽게 꺾어 버릴 것을 알았다.

지금처럼.

라시드는 들고 있던 검을 내렸다. 섬뜩하게 빛났던 보라색 눈동자에도 온기가 돌았다.

황후가 그 모습을 일그러진 얼굴로 바라보다가 비틀거렸다.

목숨을 건진 것에 대한 안도감인지, 아니면 마법에 걸린 황제처럼 시아나의 말을 순순히 따르는 아들에 대한 충격 때문인지는 그녀도 알 수 없었다.

* * *

황태자궁.

오랜 시간 비웠던 방에 라시드와 시아나가 앉아 있었다. 그리고 두 사람의 앞에는 무릎을 꿇은 거대한 남자가 있었다.

라시드의 호위 기사 솔이었다.

황궁 감옥에 갇혀 있던 솔은 라시드가 황궁을 기습함과 동시에 구출되었다. 솔은 감옥에서 나오자마자 라시드의 군대에 합류하여 능숙하게 병사들을 지휘했다.

솔이 우렁찬 목소리로 말했다.

“보고드립니다. 황궁 병사들이 모두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였고 황족들과 시종들도 조용해졌습니다.”

가장 먼저 황제궁으로 쳐들어간 것이 정답이었다.

침대에 누워 있던 황제는 제 방에 들이닥친 병사들을 보고도 멍한 얼굴로 어떤 반응도 하지 않았다.

덕분에 라시드는 원활하게 황제의 신병을 확보할 수 있었고, 이후 황궁 진압은 수월하게 진행되었다.

솔이 말을 이었다.

“전하께서 지시하신 대로 귀족들의 저택과 거리에 전단지도 뿌렸습니다.”

황태자 라시드가 황후의 모략으로 마법사의 저주에 걸린 황제 폐하를 구하는 데 성공했다.

앞으로 황태자 라시드는 황제 폐하를 극진히 모시며,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황제 폐하께 걸린 마법을 풀 것이다.

소식을 들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라시드의 진정성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라시드가 정말 권력을 노린 것이라면, 지금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황제의 목을 베고 황좌를 차지했을 테니까.

라시드는 그러지 않았다.

또한 라시드는 황족들을 불러 황제의 신변에 전혀 이상 없다는 사실 또한 보여 주었다.

솔이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전하를 황제를 시해하려 한 반역자라고 비난했던 자들이, 지금은 황제를 구한 영웅이라며 추켜세우고 있습니다!”

불과 하루 만에 만들어 낸 기적이었다.

라시드는 다시 예전처럼, 아니 이전보다 더욱 견고한 힘을 가진 황태자가 되었다.

그럼에도 라시드의 얼굴에는 조금의 기쁨도 보이지 않았다. 시아나도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 사이에 감도는 싸늘한 분위기를 눈치챈 솔이 침을 꿀꺽 삼켰다.

‘분위기가 왜 이래?’

가뜩이나 감옥에 끌려가 죽을 뻔했는데, 숨 막히는 공기에 짓눌려 목숨을 위협 받고 싶지 않았다.

솔이 거대한 몸을 움직여 슬금슬금 뒷걸음질 쳤다.

“그럼 저는 나가 보겠습니다. 편히 쉬십시오.”

솔이 재빠르게 방을 탈출하자, 넓은 방에는 라시드와 시아나만이 남았다.

고요한 분위기 속에 시아나가 먼저 움직였다.

시아나는 라시드의 앞으로 다가갔다. 라시드를 내려다보며 시아나가 눈썹을 내렸다.

“얼굴에 피가 묻었어요.”

시아나는 손수건에 물을 적신 후, 그의 얼굴에 묻은 핏자국을 닦아 주기 시작했다.

황궁의 문이 열리는 순간, 라시드는 병사들의 가장 앞에 서서 달렸다.

다른 이도 아닌 황태자, 그것도 ‘피의 황태자’라는 섬뜩한 별명이 붙은 그가 앞장서니 황궁의 병사들은 당황하여 어쩔 줄 몰라 했다.

물론 개중에는 라시드를 침입자로 단호하게 규정하고 달려든 이도 있었지만, 그 결과는 참혹했다.

라시드는 저를 막는 이들을 단칼에 베어 버렸다.

사람들은 그 모습을 한시라도 빨리 황제를 구출하고 싶은 황태자의 충성심으로 생각했다. 혹은 아버지를 향한 아들의 사랑이라고.

그러나 시아나는 라시드가 그토록 치열하게 피를 묻힌 이유를 알고 있었다.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어머니를 죽이기 위해서.’

……생각만 해도 온몸이 차갑게 식을 만큼 잔인한 일이었다.

의자에 앉아 시아나를 올려다보던 라시드가 말했다.

“너무 무서워하지 마.”

“…….”

라시드의 목소리에는 시아나에게 미움을 사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 어려 있었다.

시아나는 형용할 수 없는 얼굴로 라시드를 바라보다가, 품속에서 종이봉투를 하나 꺼내 내밀었다.

라시드가 물었다.

“이게 뭐지?”

“황태후 마마께서 보낸 편지예요.”

“……!”

그 순간 라시드의 눈이 커졌다.

편지가 어떤 내용일지 예상이 갔기 때문이다. 저 종이봉투 안에는 그가 몰랐던 황후의 비밀이 적혀 있을 것이다.

라시드는 고개를 저었다.

“태워 버려. 보고 싶지 않아.”

라시드는 황후를 없애기로 마음먹었다. 지금 와서 그녀에 대한 어떤 것도 알고 싶지 않았다.

그럼에도 시아나는 라시드의 손에 편지 봉투를 쥐여 주며 말했다.

“전하의 마음을 이해해요. 그래서 저도 이 편지를 드려야 할지 말지 고민을 많이 했어요.”

황후를 적으로 규정한 라시드에게 괜히 고통을 더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시아나는 라시드가 이 편지의 내용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전하가 어떤 결정을 하든 나는 무조건 전하의 편이에요. 그러니까 하고 싶은 대로 하세요. 황후 폐하를 용서하든…… 그러지 않든.”

“…….”

“다만 후회가 남지 않는 결정을 했으면 좋겠어요.”

가족에게 일말의 애정도 남아 있지 않았던 시아나와 달리 라시드는 황후를 사랑했다.

그 마음은 결코 한순간에 사라지는 것이 아니었다. 아무리 독한 결심을 했다 해도.

라시드는 흔들리는 눈빛으로 시아나를 바라보다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시아나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편지를 읽는 동안 나가 있을까요?”

그러나 라시드는 고개를 저으며 시아나의 옷자락을 잡았다. 마치 편지 봉투를 여는 순간 무서운 괴물이라도 튀어나올 것처럼.

시아나는 눈썹을 내리며 라시드의 옆에 앉았다. 그러고는 그의 손을 꼭 잡아 주었다.

시아나의 온기에 라시드의 굳은 표정이 조금 풀어졌다.

라시드가 천천히 봉투를 열었다.

* * *

“마리아.”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열일곱 살의 앳된 소녀가 고개를 돌렸다.

구불거리는 금빛 머리카락과 호수처럼 파란 눈동자. 동부의 작은 마을에 있는 유일한 귀족 가문, 뷔숄 남작가의 딸 마리아였다.

마리아를 부른 이는 그녀의 아버지인 뷔숄 남작이었다.

뷔숄 남작이 족제비처럼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얌전히 수나 놓고 있지 어딜 가려는 거냐.”

몰락한 남작가의 가주인 뷔숄 남작은 형편없는 자였다.

하루가 멀다 하고 술을 마시고, 이틀에 한 번 꼴로 도박을 했으며, 나머지 시간에는 늘어지게 잠만 잤다.

그래서 마리아는 아버지와 마주 보고 이야기를 할 때면 저도 모르게 얼굴이 굳었다.

본능적인 거부감이었다.

마리아가 애써 표정을 정돈하며 말했다.

“이블린을 만나기로 했어요.”

그 말에 뷔숄 남작의 쾌쾌한 눈이 반짝였다.

이블린은 제법 큰 상단을 운영하는 집안의 딸이었기 때문이다. 이 지역에서의 입지로만 따지면 몰락한 귀족 가문보다 대단했다.

뷔숄 남작은 거만한 얼굴로 콧수염을 만지며 중얼거렸다.

“평민이긴 하지만 그 정도 재력을 가지고 있으면 그럭저럭 어울릴 만하지. 잘 놀고 오거라.”

“예.”

대답을 마친 마리아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집을 나왔다.

마리아는 이내 한 저택에 도착했다.

저택은 마리아가 사는 초라한 집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크고 아름다웠다.

잘 가꾸어진 정원, 드높은 천장과 커다란 창문 사이로 들어오는 환한 햇빛.

그곳에서 한 소녀가 달려 나와 마리아를 와락 껴안았다.

귀까지 오는 짧은 보라색 머리카락과 회색 눈동자를 가진 이블린이었다.

“어서 와, 마리아.”

마리아와 이블린이 처음 만난 것은 10년 전, 두 사람이 지금보다 훨씬 작은 아이였을 때였다.

생활고를 이기지 못한 뷔숄 남작 부인이 조금이나마 돈을 벌기 위해 이블린의 예법 수업을 맡았다.

뷔숄 남작 부인은 술에 취한 남편 곁에 어린 딸을 두는 게 영 불안했다. 그래서 그녀는 마리아를 데리고 와 수업을 했다.

이블린은 그때를 회상하면 늘 황홀한 표정을 지었다.

“너를 처음 보고 얼마나 놀랐는데. 뷔숄 남작 부인이 공주님을 데리고 온 줄 알았다니까.”

낡은 드레스를 입고 밋밋한 리본으로 머리를 묶고 있었음에도 마리아는 반짝반짝 빛이 났다.

이블린의 칭찬에 마리아가 수줍게 미소 지었다.

“나도 놀랐어. 네가 너무 멋있어서.”

이블린은 마리아와 같은 나이였음에도 키가 훌쩍 컸다. 게다가 겨우 목을 덮는 짧은 머리에 흰 셔츠와 승마용 바지를 입고 있었다.

수많은 소녀들이 꿈꾸던 백마 탄 왕자님 같은 모습이었다.

마리아의 칭찬에 이블린이 허스키한 목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좀 잘생기긴 했지.”

“맞아. 네가 남자였다면 나는 분명 사랑에 빠졌을 거야.”

마리아의 말에 이블린이 짓궂은 눈빛으로 말했다.

“흐음, 그래서 엘리엇을 좋아하는 거야? 나랑 똑같은 얼굴이니까?”

그 말에 마리아의 뽀얀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엘리엇은 이블린을 꼭 닮은 한 살 많은 오빠였다. 그리고 마리아의 첫사랑이자 짝사랑 상대였다.

토마토처럼 붉게 물든 마리아의 얼굴을 보며 이블린이 키득키득 웃었다.

그때였다.

“이블린, 너 또 마리아 님을 괴롭히고 있구나.”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정원에 한 소년이 나타났다.

이블린의 오빠, 엘리엇이었다.

이블린이 엘리엇을 향해 눈을 흘겼다.

“뭐야. 모처럼 마리아와 즐겁게 노는데 왜 끼어 드는 거야? 게다가 오빠는 지금 수업 시간이잖아.”

“오늘은 선생님께서 일이 있으셔서 수업이 빨리 끝났어.”

“방금 시작한 수업이 벌써 끝났다고?”

“그렇다니까.”

누가 봐도 수상한 얼굴로 대답한 엘리엇이 재빨리 향한 곳은 마리아의 앞이었다.

엘리엇은 허리를 살짝 숙여 인사했다.

“오랜만입니다, 마리아 님.”

정중한 신사의 인사였다.

마리아도 두 뺨을 복숭아처럼 물들이며 치맛자락을 끌어올렸다.

“오랜만이에요, 엘리엇 님.”

엘리엇은 마리아와 만날 때마다 정중하게 예를 갖추었다.

마리아도 마찬가지였다.

마리아는 엘리엇을 평민이 아닌 귀족 가문의 도련님처럼 예의를 갖춰 대했다.

그런 두 사람을 본 이블린이 피식 웃었다.

“고작 일주일 만에 만나는 건데 오랜만은.”

이블린이 아, 하고 장난스럽게 말을 이었다.

“마리아는 몰라도 엘리엇에게는 고작이 아니겠구나. 마리아가 또 언제 오냐고 하루에도 수십 번씩 물어보았잖아. 마리아, 마리아, 마리아, 아주 귀에 딱지가 생기는 줄 알았다니까.”

“이블린!”

엘리엇이 당황한 얼굴로 소리쳤지만 이블린은 왜, 뭐, 어쩌라고, 라는 눈빛을 하며 마리아를 끌어안았다.

키가 큰 이블린의 품속에 아담한 마리아가 쏙 들어왔다.

“엘리엇, 늘 말하지만 마리아는 내가 가장 사랑하는 친구야. 나는 내 친구를 오라버니 따위와 공유할 생각 없어.”

“이블린, 네가 마리아 님을 사랑한다면 절대 그래서는 안 돼. 많은 사람을 만나 교제할 수 있도록 해 주어야지.”

“그래? 그럼 마리아에게 다니엘이나 에드워드를 소개시켜 줘야겠다. 안 그대로 그 애들이 한 번이라도 마리아를 만나게 해 달라며 아우성이었거든.”

그 말에 엘리엇이 정색을 하며 소리쳤다.

“그건 절대 안 돼!”

“…….”

“…….”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감돌았다.

눈을 동그랗게 뜬 마리아, 새빨개진 얼굴로 자신의 입을 막은 엘리엇, 그리고 입가를 실룩거리는 이블린.

이블린은 참지 못하고 푸하핫, 하고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장난기 많고 뻔뻔한 이블린과 달리 엘리엇은 배려심이 많고 정직해서 놀려먹기가 좋았다.

‘마음 같아서는 더 놀리고 싶지만…….’

이블린은 슬쩍 눈동자를 아래로 돌렸다.

마리아가 커다란 눈에 원망을 잔뜩 담고 이블린을 바라보고 있었다.

‘너무해, 이블린. 엘리엇이 난처해하잖아.’

—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마리아를 아는 사람들은 그녀를 그저 예쁘고 얌전한 소녀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마리아의 가장 가까운 친구인 이블린은 알고 있었다.

‘다른 건 몰라도 마리아는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을 건드리는 것은 절대 참지 못해.’

그러니 여기서 더 엘리엇을 건드렸다가는 마리아가 진짜 화를 낼 것이다.

마리아의 감정을 상하게 할 생각은 없었기에 이블린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알겠어. 엘리엇도 껴 줄게. 셋이 놀자.”

늘 그랬듯이.

정원에 있는 동그란 테이블 위에 따뜻한 차와 알록달록한 과자를 올려 두고 세 사람은 신나게 수다를 떨었다.

햇빛이 쨍쨍한 날은 근처 호수에서 낚시를 했고, 또 어느 날은 이블린의 집 한편에 마련된 서재에서 좋아하는 책을 골라 읽었다.

엘리엇은 쉴 새 없이 많은 순간, 마리아에게 시선을 빼앗겼다.

햇빛에 반사되어 반짝이는 금빛 머리카락, 내리깐 긴 속눈썹, 여린 몸을 감싼 살랑거리는 드레스.

그녀는 너무 예뻤다.

정신이 혼미해질 만큼.

그러다가 마리아와 눈이 마주치면 엘리엇의 얼굴이 순식간에 새빨개졌다. 그것은 마리아도 마찬가지였다.

무르익어 터질 것 같은 한여름의 토마토처럼.

그럼에도 두 사람은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어쩔 줄 모르겠다는 얼굴로 웃으며 어색하게 말을 주고받을 뿐이었다.

“그 책 재미있죠?”

“네, 재미있어요.”

그런 두 사람을 보며 이블린은 한숨을 내쉬었다.

‘바보들. 저렇게 좋아하면서 어린애들처럼 뭘 하는 거야. 당장 손을 잡고 입을 맞추고 정식으로 사귀라고!’

그러나 겁 없는 이블린과 달리 엘리엇과 마리아는 신중하고 조심스러운 성격이었다.

그렇기에 두 사람의 애정은 한없이 느리게, 그러나 촘촘하게 쌓여 갔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엘리엇이 잔뜩 긴장한 얼굴로 말했다.

“마리아 님, 제가 며칠 전에 무척 멋진 곳을 발견했습니다. 괜찮으시면 같이 가 보시겠어요?”

엘리엇이 말을 덧붙였다.

“이블린은 빼고요.”

그 순간 마리아의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포갠 두 손에 땀이 차고 입이 바짝 말랐다.

그럼에도 마리아는 겨우 침착한 얼굴을 유지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두 사람이 도착한 곳은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숲속 이었다.

하늘 높이 솟은 울창한 나무 아래, 푸르른 호수가 반짝였다. 그 위에는 하얀 새들이 날아다녔다.

마리아가 감탄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정말 아름다운 곳이네요.”

풍경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마리아를 바라보며 엘리엇이 말했다.

“그렇죠? 저도 처음 이곳을 보고 놀랐답니다. 언젠간 책에서 보았던 몰디아스의 풍경과 무척 닮아 있었거든요.”

“몰디아스요?”

“네, 몰디아스는 남부에 있는 유명한 휴양지의 이름이에요. 그곳에 가면 이곳처럼 하늘 높이 뻗은 나무들이 잔뜩 심어져 있고, 그 건너편에는 아름다운 에메랄드빛 바다가 펼쳐져 있다고 해요. 제국은 물론 온 대륙의 사람들이 천국 같은 곳에서 시간을 보내기 위해 그곳을 찾는다고 하더군요.”

궁핍한 살림 탓에 마리아는 한 번도 여행을 가 본 적이 없었다. 머나먼 남부에는 더더욱.

그래서 마리아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듣는 아이처럼 눈을 반짝였다.

엘리엇이 말을 이었다.

“몰디아스의 풍경 그림을 보고 결심한 것이 있습니다. 언젠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꼭 가고 싶다고 말이에요. ……그곳에 저와 함께 가 주시겠어요?”

엘리엇의 말이 너무 자연스럽게 이어져 마리아는 잠시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다 한 박자 늦게 눈을 크게 떴다.

“예?”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엘리엇이 마리아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러고는 품속에서 작은 상자를 꺼내 뚜껑을 열었다.

상자 안에는 반짝이는 반지가 들어 있었다.

엘리엇이 귀까지 빨개진 얼굴로 말했다.

“너무 갑작스럽게 이런 말을 꺼내서 죄송합니다. 원래는 숲속을 걸으며 천천히 이야기를 꺼낼 생각이었는데 도무지 마음이 진정되질 않아서…….”

제정신이 아닌 얼굴로 이 말 저 말 떠들어 댄 엘리엇이 말을 멈추었다. 그 후, 크게 숨을 들이마시더니 말했다.

“저와 결혼해 주시겠습니까?”

“…….”

드넓은 숲속에 정적이 맴돌았다.

마리아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엘리엇을 바라보았다.

마리아의 침묵이 길어지자 엘리엇이 눈썹을 내렸다.

“……제가 마리아 님께 너무 부족하지요?”

그제야 정신을 차린 마리아가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않아요.”

마리아가 귀족이긴 했으나, 이제는 이름만 남은 몰락한 가문일 뿐이었다. 게다가 마리아는 딸이라 작위를 물려받지도 못했다.

그에 반해 엘리엇은 부유한 상단의 하나뿐인 후계자였다.

어느 한쪽이 확 기우는 관계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엘리엇은 진심으로 마리아가 제게 과분한 여인이라고 생각했다.

“마리아 님의 가문 때문만은 아닙니다. 마리아 님은 눈부실 만큼 아름답고, 일국의 공주님처럼 우아하시고, 목소리는 노래하는 새처럼 맑은 데다가, 무슨 일이 있어도 쉽게 화를 내지 않는 침착한 성격에…….”

줄줄 이어지는 칭찬을 듣다 못한 마리아가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그만하세요. 대놓고 그런 과한 칭찬을 들으니 듣기가 너무 힘드네요.”

“죄송합니다! 난처하게 만들 생각은 아니었습니다. 그저 진실을 말했을 뿐인데…….”

마리아의 얼굴이 조금 더 붉어졌다. 엘리엇은 낭패 어린 얼굴로 눈을 질끈 감았다.

‘쓸데없는 말 좀 그만해, 엘리엇 홀트!’

겨우 감정을 정리한 엘리엇이 입을 열었다.

“중요한 건 그런 마리아 님을 제가 아주 오래전부터…… 사랑하고 있다는 겁니다.”

“…….”

“마리아 님을 행복하게 해 주고 싶습니다. 부디 제게 그럴 수 있는 기회를 주시겠어요?”

마리아는 시선을 내려 엘리엇을 바라보았다.

무릎을 꿇고 마리아를 올려다보고 있는 엘리엇의 얼굴은 안쓰러울 만큼 새빨개졌다. 그럼에도 그의 회색 눈동자는 또렷이 빛나고 있었다.

마리아를 향한 순수하고 따뜻한 사랑으로.

마리아는 눈썹을 내렸다.

‘이토록 사랑스러운 남자의 청혼을 누가 거절할 수 있겠어.’

마리아는 울 것 같은 얼굴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엘리엇은 마리아의 왼쪽 네 번째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 주었다.

반짝이는 눈으로 반지를 바라보는 마리아를 향해 엘리엇이 물었다.

“반지가 어떤가요? 마음에 드시나요?”

“네, 정말 예뻐요.”

“다행입니다. 사실 이 반지, 제가 만들었거든요.”

마리아가 눈을 크게 떴다.

“엘리엇 님이요?”

“예, 마리아 님의 손가락에 끼는 결혼반지만큼은 제 손으로 만들고 싶어서요. 열심히 만들기는 했지만 고급 액세서리점에서 파는 반지와 비교하면 부족하지요?”

“아니요, 그렇지 않아요!”

마리아는 단호한 얼굴로 소리쳤다.

빈말이 아니었다.

반지는 화려하거나 섬세한 세공이 들어가 있진 않았으나, 심플해서 세련된 느낌이 났다.

“특히 반지에 달린 푸른 보석이 마음에 들어요.”

그 말에 엘리엇의 얼굴이 환해졌다.

“마리아 님의 눈동자 색과 같은 보석을 찾기 위해 애쓰다가 겨우 발견한 보석이랍니다. 엘란도산 사파이어예요.”

“…….”

“마음에 드신다니 정말 기쁘네요.”

엘리엇이 곱게 눈을 휘었다.

마리아의 심장이 다시 한번 쿵쿵 뛰기 시작했다. 이러다 그의 귓가에 제 심장 소리가 들리면 어쩌나 걱정이 들 만큼.

그날, 두 사람은 숲속을 함께 거닐었다.

처음으로 두 손을 꼭 맞잡고.

엘리엇이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결혼식이 끝나면 함께 몰디아스로 여행을 가요. 그곳의 초록 숲길을 걷고 푸른 바다를 보고 행복한 시간을 보내요.”

상상만 해도 행복한 이야기에, 마리아는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 * *

마리아는 이블린에게 엘리엇에게 청혼을 받았다고 말했다.

이블린은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그러기는커녕 환하게 웃었다.

“그럼 이제 너와 내가 친구에서 가족이 되는 거네?”

친구와 가족은 전혀 달랐다.

같은 집에서 눈을 뜨고, 식사를 하고, 이야기를 나누고, 여행을 가고…….

“분명 즐거울 거야. 참, 네가 아기를 낳으면 내가 돌봐 줄게. 아이는 영 질색이지만 마리아의 아기라면 분명 사랑스러울 테니까.”

그러나 당분간 마리아와 엘리엇이 결혼을 약속했다는 것은 비밀로 하기로 했다.

엘리엇의 계획 때문이었다.

[상단에서 오랜 시간 준비했던 거래가 있습니다. 거래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돌아오면 뷔숄 남작가에 청혼서를 넣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뷔숄 남작 부부께서도 한결 편한 마음으로 결혼을 허락하시겠지요.]

아무리 몰락했다 해도 마리아는 귀족, 엘리엇은 평민이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신분이라는 벽이 있었다.

엘리엇은 마리아에게 조금 더 어울리는 남자가 되어 그녀를 신부로 맞이하고 싶었다.

엘리엇이 돌아오는 것은 세 달 후.

마리아는 그를 기다리는 시간은 조금도 힘들지 않았다. 오히려 설레고 즐거웠다.

그가 돌아오면, 봄꽃처럼 아름답고 따스한 날들이 기다리고 있음을 알기에.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마리아의 어머니 뷔숄 남작 부인이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마리아, 메디치안 후작가에서 대대적인 연회를 연다는구나. 15세부터 24세까지, 결혼하지 않은 귀족 가문의 여인은 모두 참석하라고 말이야.”

메디치안 후작가.

동부에서 제일가는 대귀족으로, 현 메디치안 후작의 누이는 무려 제국의 황태후였다.

작은 시골에 있는 뷔숄 남작가는 감히 만나는 것조차 상상하기 힘든 가문이었다.

하지만 마리아는 메디치안 후작가의 초대에 조금도 기뻐할 수 없었다.

초대 조건이 너무 이상했기 때문이다.

“열다섯 살부터 스물네 살의 미혼 여인을 초대했다고요?”

그러나 마리아와 달리 뷔숄 남작 부인은 조금도 의아함을 가지지 않았다. 그런 것은 전혀 중요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네가 언제 메디치안 후작가가 여는 연회에 갈 수 있겠니. 이건 정말 좋은 기회야.”

뷔숄 남작가는 가세가 기울면서 다른 귀족 가문의 연회에 초대받지 못했다. 마리아도 마찬가지였다.

그것이 늘 걸렸던 뷔숄 남작 부인에게 이 초대장은 뜻하지 않게 받은 기쁜 선물이었다.

하지만 마리아는 눈썹을 내렸다.

“어머니, 저는 연회에 입고 갈 만한 드레스도 없는걸요.”

“걱정 말거라. 이럴 때를 대비하여 숨겨 놓은 비상금이 있단다. 새 드레스를 사는 것은 무리지만, 내가 젊었을 때 입었던 드레스를 그럴듯하게 수선하는 것은 가능해.”

궁핍한 생활에 찌들어 늘 우울해 있던 어머니의 밝은 모습에 마리아는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와서 가고 싶지 않다고 하면 어머니가 무척 실망할 것 같았다.

그래서 마리아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뷔숄 남작 부인은 정성껏 딸의 연회 준비를 해 주었다.

처녀 적에 입고 장롱 속에 고이 넣어 두었던 드레스를 수선하고, 그녀가 몸에 걸치고 있던 목걸이와 귀걸이도 광택을 내어 딸에게 걸어 주었다.

그것을 본 뷔숄 남작이 ‘별 쓸데없는 짓을 다 하는군. 그럴 돈이 있으면 나한테 줘.’라고 달려드는 것을 겨우 막으면서.

그렇게 마리아는 메디치안 후작가의 연회에 참석하게 되었다.

낡은 마차에서 하늘색 드레스를 입은 마리아가 내렸다. 그리고 그녀의 옆에는 수수한 남색 드레스를 입은 이블린이 있었다.

마리아가 웃었다.

“함께 와 주어서 고마워, 이블린.”

“인사는 필요 없어. 내가 오고 싶어서 온 건데, 뭐.”

이블린은 마리아의 하녀 역을 자청했다.

표면적인 이유는 ‘나도 그 대단하다는 메디치안 후작가의 연회에 가 볼래.’였지만 진짜 이유는 ‘마리아를 그런 곳에 혼자 보낼 수 없어.’였다.

이블린 덕분에 마리아는 한결 편안한 얼굴로 저택에 들어설 수 있었다.

이내 마리아와 이블린은 눈을 크게 떴다.

저택의 모든 것이 눈이 부실 만큼 화려하고 고급스러웠다.

다이아몬드를 박은 것처럼 번쩍이는 샹들리에를 바라보며 이블린이 중얼거렸다.

“확실히 이름 높은 후작가는 다르구나. 조금 먹고살 만한 작은 상단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사치스러워.”

“……그러게.”

부족한 게 없을 만큼 부유하게 자란 이블린이 놀랄 정도니, 무너져 가는 저택에서 사는 마리아는 충격이 더 컸다.

마리아를 놀라게 한 것은 저택뿐만이 아니었다.

연회장에 있는 여인들도 하나같이 화려하고 아름다웠다.

‘내가 너무 부족하게 꾸미고 온 건가.’

—라는 걱정이 들 만큼.

심란한 얼굴이 된 마리아를 본 이블린이 속삭였다.

“걱정 마. 여기에서 네가 가장 예쁘니까.”

그저 마리아를 위로하기 위해 하는 소리가 아니었다.

마리아는 티끌 하나 없는 새하얀 피부에 색이 밝은 금빛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다. 파란색 눈은 크고 맑았으며, 체구는 하늘하늘 가녀렸다.

그것은 수수한 차림으로 가려질 것이 아니었다.

그것을 알아챈 몇몇 여인들이 마리아를 힐끔힐끔 쳐다보며 소곤거렸다.

“저 영애는 누굴까요?”

“그러게요. 처음 보는 분인데…….”

결국 호기심을 참지 못한 여인들 몇 명이 마리아에게 다가왔다. 제 이름을 묻는 여인들에게 마리아가 대답했다.

“뷔숄 남작가의 마리아라고 합니다.”

여인들 중 한 여인이 아, 하고 눈을 크게 뜨더니 제 옆의 여인들에게 속삭였다.

“그 이름을 들어 본 적이 있어요. 먼 시골에서 사는 귀족 가문인데, 빚더미에 앉은 지 오래라 평민보다 가난하게 산다는군요.”

그 말에 여인들이 눈썹을 내렸다.

“어머나. 그렇구나.”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여인들이 사라지고 또 다른 여인들이 왔다. 마리아는 그들에게도 제 이름을 밝혔다.

그런 것을 몇 번이나 반복하자 마리아를 향한 여인들의 관심은 일절 사라졌다.

다행이었다.

애초에 마리아는 조금도 눈에 띄고 싶지 않았으니까.

연회장에는 하녀들이 들어올 수 없었기에, 마리아는 구석에 홀로 서서 조용히 자리를 지켰다.

‘이쯤 있었으면 됐어. 이만 돌아가자.’

마리아는 조용히 연회장을 나왔다.

그런데 연회장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던 이블린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이블린이 기다리는 것이 따분해지면 정원을 산책하고 온다고 했지.’

아직 돌아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마리아는 잠시 고민하다가 정원으로 향했다.

그러나 이블린을 찾으러 온 것이 무색하게 마리아는 넋을 놓고 걸음을 멈추었다.

드넓은 정원에 만개한 꽃들 때문이다. 그중에서 마리아의 시선을 빼앗은 것은 흐드러지게 핀 흰 수국이었다.

마리아는 흰 수국에 얼굴을 가져다댔다. 은은한 꽃향기에 저도 모르게 미소가 어렸다.

‘정말 예쁘다. 이블린과 엘리엇 님에게 한 송이씩 선물해 주고 싶어.’

홀트 남매는 꽃을 좋아했다.(정확히는 마리아가 꽃과 함께 있는 모습을 좋아하는 것이지만, 마리아는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수국을 들고 ‘주니까 받긴 하지만 대체 이런 건 왜 주는 거야?’라고 눈썹을 모으는 이블린과 ‘감사합니다, 마리아 님!’이라며 환하게 웃을 엘리엇을 떠올린 마리아가 쿡쿡 웃었다.

그때였다.

“너, 누구야?”

“……!”

심장을 쿵 내려앉게 만드는 낮은 목소리였다. 마리아가 놀란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새까만 밤하늘, 노란 달 아래, 위협적일 만큼 체격이 큰 남자가 마리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은빛 머리카락과 진보라색 눈동자를 가진 남자는 아름다움과 강인함이 동시에 느껴지는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마리아는 남자의 미모에 조금도 감탄할 수 없었다.

남자에게서 느껴지는 숨 막히는 위압감 때문이다.

꼭 한숨 자고 일어났다가 어슬렁거리며 사냥을 나온 사자 같았다.

바짝 굳은 마리아를 향해 남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누구냐고 물었을 텐데?”

그의 목소리에는 왜 바로 대답하지 않느냐는 짜증이 배어 있다.

고급스러운 차림새, 오만한 말투.

마리아는 어렵지 않게 남자가 이름 높은 귀족 가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오늘의 연회는 여인들만 초대받았지. 그렇다면 메디치안 후작가의 사람인 걸까?’

귀족이라도 다 같은 귀족이 아니었다.

저보다 서열이 높은 이에게는 깍듯해야 했다. 그것이 귀족의 규율이었다.

마리아는 불편한 감정을 숨기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뷔숄 남작가의 마리아입니다.”

“뷔숄? 거기가 어디지?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데.”

“동부의 작은 시골 마을에 있는 가문입니다.”

마리아는 그 대답을 끝으로 이 숨 막히는 대화를 끝마치고 싶었다. 하지만 남자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시골 마을에 있는 가문이라고? 그래서 이렇게 촌스러운 거군. 화장도 거의 하지 않은 데다가, 장식 하나 달려 있지 않은 초라한 드레스에, 싸구려 보석이 달린 귀걸이라니.”

여인의 자존심을 무참히 짓밟는 말이었다.

마리아의 표정이 굳었다. 그러나 마리아는 그에게 한마디 쏘아 붙이는 대신 몸을 돌렸다.

더 이상 이 정체불명의 오만하고 사악한 남자를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남자는 황급히 인사를 하고 떠나려는 마리아의 손목을 잡아챘다.

마리아가 이게 무슨 무례한 짓이냐고 말하기도 전에 남자가 중얼거렸다.

“가늘군. 힘을 주면 부러질 것 같아.”

“……!”

마리아는 남자가 겉모습만 그럴듯할 뿐, 제정신이 아니라고 확신했다.

마리아는 눈썹을 올리며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 손 놓으십시오.”

“안 놓으면 어쩔 셈이지? 내 뺨이라도 때릴 텐가? 아니면 소리를 지를 건가?”

그의 눈이 빛났다. 마치 마리아가 무슨 짓을 할지 궁금해하는 어린애처럼.

마리아는 엄청난 수치심과 분노가 밀려들었다. 마치 남자의 싸구려 장난감이 된 기분이 들었다.

당장 그의 얼굴에 침을 뱉고, 잡히지 않은 반대편 손으로 따귀를 날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행동을 했다가는 연회장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모여들 것이다. 남자 측이 마리아보다 훨씬 대단한 가문인 것이 분명하니 누구도 마리아의 편이 되어 주지 않을 터였다.

마리아는 그런 상황을 바라지 않았다.

하지만 남자는 기어코 마리아를 한 번 더 긁었다.

“어서 말해 봐. 대답을 듣기 전까지 손을 놓아주지 않을 거야.”

그 말에 마리아는 속 안에 꾹 눌러 담았던 분노가 폭발했다.

마리아는 커다란 눈을 추켜올려 남자를 노려보며 매섭게 말했다.

“제 고향에서는 모성애와 복수의 여신 메그나타를 극진히 섬기고 있습니다. 여신 메그나타는 온화하지만, 자신이 사랑하는 이를 상처 입힌 이들은 결코 용서하지 않고 복수하지요.”

“……?”

“저는 매일 밤 여신께 기도할 거예요. 그저 잠시 잠깐의 재미로 나를 모욕했던 남자를 어떤 식으로든 불행하게 만들어 달라고 말입니다.”

조곤조곤한 말투로 신의 이름을 빌려 위협하는 마리아를, 남자는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이내 이마를 잡고 쿡쿡쿡 웃었다.

“개미 한 마리 죽이지도 못할 얼굴을 하고 있기에 천사인 줄 알았더니 아니었어. 무서운 마녀였군.”

키득거리던 남자는 웃음을 멈추고 마리아를 바라보았다.

남자의 섬뜩한 진보라색 눈동자와 마주치는 순간, 마리아는 한시라도 빨리 남자에게서 도망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리아는 그에게 잡혀 있는 손목을 세차게 흔들었다. 그러나 소용없었다.

마리아는 반대쪽 손으로 그의 손을 빼려 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남자의 손은 꿈쩍하지 않았다.

두려움을 느낀 마리아가 귀족 영애의 정숙이나 체면 따위를 따질 새 없이 소리를 지르려던 순간이었다.

“마리아, 어디 있어?”

이블린의 목소리였다.

마리아가 기회를 놓치지 않고 큰 소리로 대답했다.

“여기야, 이블린!”

마리아의 목소리를 들은 이블린이 이쪽으로 다가왔다. 발자국 소리가 가까워지자 남자는 아쉽다는 얼굴로 마리아의 손을 놓았다.

마리아는 남자를 노려보거나 원망을 토해 내지 않고, 단숨에 몸을 돌렸다.

남자를 일말이라도 상대하고 싶지 않다는 듯이.

마리아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흐트러진 수국 꽃 사이에 홀로 선 남자가 중얼거렸다.

“겁을 잔뜩 먹어 손을 덜덜 떨면서도 그런 눈으로 나를 위협하다니…….”

남자가 입꼬리를 올렸다.

“귀엽잖아, 마리아 드 뷔숄.”

마리아는 진심으로 연회 날 보았던 무례하고 섬뜩했던 남자를 다시 보는 일이 없기를 바랐다.

하지만 마리아의 바람과 달리 남자는 다시 눈앞에 나타났다.

여섯 마리의 말이 끄는 거대한 마차와 수십 명의 시종과 기사를 이끌고.

“오랜만이군, 마리아 드 뷔숄.”

“…….”

마리아는 갑작스러운 남자의 출연이 믿기지 않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굳었다.

그런 딸을 향해 뷔숄 남작이 다급한 얼굴로 말했다.

“어서 인사를 하지 않고 무엇 하는 거냐, 마리아.”

뷔숄 남작 부인도 더듬으며 말했다.

“황제 폐하시란다.”

말도 안 돼!

그것이 그 말을 들은 순간 마리아가 가장 먼저 한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 말을 입 밖에 내뱉는 순간 마리아는 당장 황제 모독죄로 큰 벌을 받을 터였다.

그래서 마리아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고개를 숙였다.

“고귀하신 황제 폐하를 뵈옵니다. 뷔숄 남작가의 딸 마리아입니다.”

그 순간, 마리아는 보았다

황제라 불린 남자는 한쪽 입꼬리를 들어 웃고 있었다. 제 앞에 무릎 꿇은 이를 보는 오만한 권력자의 얼굴이었다.

황제가 말했다.

“뷔숄 영애와 단둘이 이야기를 나누고 싶군.”

황제의 말 한마디에 뷔숄 남작 부부를 포함한 수십 명의 시종과 기사가 순식간에 집을 나갔다.

낡은 저택 안에는 황제와 마리아 둘만이 남았다.

순식간에 황제와 독대하게 된 마리아는 잔뜩 굳은 얼굴로 그의 앞에 서 있었다.

그와 달리 황제는 막 낮잠에서 깬 나른한 사자처럼 편안한 얼굴로 말했다.

“너와 내가 만났던 연회. 그 연회가 왜 열렸는지 아나?”

메디치안 후작은 동부에 있는 젊은 아가씨들을 초대했다.

연회장에 모인 여인들은 이 연회의 진짜 의도에 대해 속닥였다.

자식이 없어 외로운 메디치안 후작이 다른 가문의 여식을 입양하려는 게 아닐까?

아니지, 그것보다는 그가 지금이라도 자식을 낳기 위해 젊고 건강한 아내를 구하려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어.

어느 것 하나 확실하지 않은 말들이었다. 그래서 마리아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황제는 연회장에서 무슨 이야기가 돌았는지 다 안다는 얼굴로 피식 웃었다.

“메디치안 후작이 그런 연회를 연 것은 내 어머니께 부탁을 받아서야.”

수도와 멀리 떨어진 동부의 작은 시골 마을에 사는 마리아는 알지 못했지만, 막 즉위한 젊은 황제의 사생활은 문란하기 짝이 없었다.

수도에 있는 미인 중 둘에 한 명은 황제와 밤을 보냈다, 라는 말이 돌 만큼.

황태후는 그것이 마뜩잖았다.

그러나 황태후가 아무리 잔소리를 하고 화를 내도, 황제는 그녀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참다못한 황태후는 황제를 결혼시키기로 결심했다. ‘황후가 생기면 황제도 조심을 할 테지.’라는 기대감에서였다.

“다시 말해 그 연회는 메디치안 후작이 은밀하게 황후 후보를 고르는 자리였던 거지.”

“……!”

조금도 생각지 못했던 말에 마리아가 놀란 얼굴을 했다.

그런 마리아를 바라보며 황제가 말을 이었다.

“어마마마의 의도에 맞추어 메디치안 후작은 조건에 맞는 여인들을 추려 명단을 보내 주었지.”

황후가 되기에 손색없는 가문 출신의 아름답고 성격이 온순한 여인들이었다.

하지만 황제는 그들 중 누구도 선택할 생각이 없었다.

황제가 오만한 얼굴로 말했다.

“마리아 드 뷔숄, 내 아내가 되어라.”

농담이나 장난으로 하는 말이 아니었다.

황제는 짧은 시간 동안 마리아에 대한 모든 것을 조사했다.

나이는 올해로 열일곱 살. 몰락한 뷔숄 남작가의 딸. 몇 대를 내려오는 동안 재산을 탕진하여 가문에 남은 것은 감당 안 되는 빚과 낡은 저택뿐.

기댈 만한 가까운 친척 하나 없었다.

말 그대로 이름만 귀족일 뿐, 평민과 다를 바가 없는 여인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마리아를 택한 이유였다.

‘이런 여인을 황후로 맞이한다고 하면 어마마마가 어떤 반응을 보일까.’

분명 말도 안 되는 일이라며 길길이 날뛸 것이다. 화를 참지 못해 결국 쓰러져 버릴지도.

그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 황제는 웃음이 나왔다.

‘게다가…….’

황제의 진보라색 눈동자가 천천히 마리아를 위에서부터 아래로 훑었다.

마리아의 모습은 연회장에서 보았을 때보다 훨씬 더 초라했다.

장식이 거의 없는 낡은 드레스, 액세서리 하나 걸치지 않은 매끈한 목과 가는 손가락.

화장도 전혀 하지 않았고 향수도 뿌리지 않았다.

값비싼 드레스와 보석으로 치장한 수도의 화려한 여인들과 비교하면 채색하지 않은 흰 종이처럼 밋밋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었다.

‘그럼에도 계속 시선이 간단 말이지.’

황제의 눈빛에 선연한 욕망이 어렸다. 그러나 마리아는 그의 눈빛이 어떤지 눈치채지 못했다.

황제가 제게 꺼낸 말이 너무나 충격적이었기 때문에.

마리아는 지극히 온순한 성격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귀족 아가씨가 불쌍하게 산다고 쯧쯧거리는 마을 사람들에게 한 번도 화를 낸 적이 없었다. 술 취한 아버지가 ‘귀족 여인이면 자고로…….’ 라며 지긋지긋한 잔소리를 해댈 때도 조용히 그 이야기를 들었다.

하물며 황제의 말이다.

절대 거역하면 안 되는.

하지만 마리아는 도무지 고개를 끄덕일 수 없었다.

마리아는 파리해진 얼굴로 황제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화, 황제 폐하. 모쪼록 그 생각을 거두어 주십시오.”

황제의 잘 다듬어진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하룻밤 잠자리 상대로 즐기고 싶다는 말을 한 게 아니었다.

무려 그녀를 황후로 맞고 싶다고 말한 것이다. 그것은 말 그대로 기적 같은 일이었다.

그러나 마리아의 얼굴에는 기쁨의 흔적이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기는커녕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말을 들은 것처럼 벌벌 떨었다.

황제가 서늘한 눈빛으로 물었다.

“네가 손해 볼 것이 전혀 없는 혼인일 텐데?”

황제는 뷔숄 가문에 있는 빚을 청산해 주는 것은 물론 황후의 친정 가문으로서 가져야 할 많은 혜택을 줄 셈이었다.

그러나 황제의 말에도 마리아의 얼굴은 조금도 풀어지지 않았다.

황제는 마리아가 저런 반응을 보이는 이유를 생각했다.

‘설마…….’

수도에 있는 귀족 여인들은 아무리 나이가 어려도 결혼과 사랑을 엮지 않았다. 결혼은 철저하게 이득을 따져 진행하는 사업과 같은 것이니까.

하지만 마리아는 작은 시골 마을에 사는 허울뿐인 귀족이었다. 그녀라면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해야 한다는 유치하고 고리타분하기 짝이 없는 생각을 하고 있을지 모른다.

아니. 마주 본 마리아의 푸른 눈동자에는 그보다 절박한 감정이 어려 있었다. 그것은 막연히 사랑 없는 결혼은 할 수 없다고 징징거리는 철없는 여인의 눈빛이 아니었다.

황제가 물었다.

“남자가 있는 건가?”

마리아는 벌벌 떨면서도 또렷하게 대답했다.

“예. 제게는 사랑하는 분이 있습니다.”

“…….”

무려 황제의 청혼, 아니 명령을 거절한 것이다.

마리아는 황제의 벼락같은 분노가 내릴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황제가 저 말도 안 되는 명령을 거두고 떠나기만 한다면.

그러나…….

“그래서?”

“……예?”

“네게 남자가 있든 말든 그건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니야. 내가 바라는 것은 그저 마리아 드 뷔숄이 내 아내가 되는 것뿐이니까.”

“…….”

“물론 남자는 결혼 전에 정리를 해야겠지. 과거야 어쨌든 내 아내의 사생활이 추잡한 것은 기분이 더러우니.”

제 예상과 전혀 다른 황제의 반응에 마리아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이내 정신을 차린 마리아가 고개를 저었다.

“폐하, 그냥 사랑하는 남자가 아닙니다. 저는 그분과 결혼을 약속…….”

“그만. 네 시시콜콜한 사생활 따위는 전혀 궁금하지 않구나.”

“……!”

그제야 마리아는 깨달았다.

황제의 차가운 진보라색 눈동자에 어린 감정을. 그는 정말로 마리아에게 일말의 관심이 없었다.

……인간이 작은 동물이나 곤충을 보며 배려의 필요성을 조금도 느끼지 않듯이.

마리아는 깊은 절망감을 느꼈다.

‘아니야. 그래도 이렇게 이야기를 끝낼 수는 없어.’

용기를 쥐어짠 마리아가 다시 한번 입을 열려는 순간이었다.

의자에 앉아 있던 황제가 몸을 숙이더니 무릎 꿇고 있는 마리아의 턱을 잡았다.

커다란 손에 작고 갸름한 턱이 잡혔다.

황제가 섬뜩한 얼굴로 마리아와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만약 네가 황궁의 시녀였다면 당장 끌려가 회초리를 맞았을 거야. 아니, 대단한 귀족가의 여인이었어도 다를 건 없지. 감히 황제에게 말대답을 하는 것은 절대 용서받지 못할 죄니까.”

“……!”

“하지만 나의 황후가 될 사람이니 봐주도록 하지.”

겁먹은 마리아를 보며 황제는 입꼬리를 올렸다.

“물론 봐주는 것은 이번 한 번뿐이야. 다음에 만났을 때는 황제에 대한 예를 철저히 갖추어야 할 거야, 마리아 드 뷔숄.”

살짝 흘리는 발음은 우아했으나, 그의 목소리에는 권력자의 포악함이 어려 있었다.

마리아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황제가 떠났다.

홀로 남은 마리아를 향해 뷔숄 남작 부부가 다가왔다.

뷔숄 남작 부부가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마리아, 시종님께 이야기를 들었다. 황제 폐하께서 메디치안 후작가에서 열린 연회 때 너를 보고 한눈에 반하셨다는구나. 너를 황후로 맞고 싶다고.”

“이런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나다니. 정말 믿기지가 않아.”

늘 우울해 있던 남작 부부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어려 있었다. 마치 갑작스럽게 강림한 신에게 구원받은 것처럼.

하지만 마리아에게 이것은 구원이 아니었다.

끔찍한 폭력이며 저주이며 재난일 뿐이었다.

결국 마리아는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싫어요. 저는 황제와 결혼하고 싶지 않아요. 제게는 이미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요. 엘리엇과 결혼을 하고 행복한 가정을 꾸리려 했다고요. ……제발 이 결혼을 막아 주세요.”

절절한 딸의 고백에 부부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다른 것도 아닌 황후.

제국에서 가장 고귀한 여인이 될 수 있는 기회가 딸에게 찾아온 것이다.

고작 상인 나부랭이의 자식 따위 때문에 큰일을 망칠 수 없는 노릇이었다.

* * *

황제가 몰락한 뷔숄 남작가의 딸 마리아에게 청혼했다는 놀라운 소식은, 작은 마을은 물론 멀리 떨어진 수도에까지 널리 퍼졌다.

‘황제가 첫눈에 반한 여인’, ‘미약한 가문에서 태어나 황후가 될 기적의 여인’이라는 세간의 평가와 달리, 마리아의 모습은 비참했다.

오랜 시간 햇빛을 보지 못해 얼굴은 생기 하나 없이 창백했고, 제대로 식사를 하지 못한 몸은 부러질 것처럼 가늘었다.

뷔숄 남작이 방에 가두고 제대로 식사를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뿐이 아니었다.

뷔숄 남작은 매일 딸을 협박했다.

“다른 분도 아닌 황제 폐하께서 너를 마음에 들어 하신다는데 그것에 감사할 생각은 못하고 싫다고 고집을 피우다니 네가 제정신이냐?! 계속 이렇게 반항을 하면 머리카락을 사내처럼 짧게 잘라 수도원에 보내 버리겠다!”

뷔숄 남작 부인도 매일 딸에게 애원했다.

“마리아, 귀족 여인은 애초에 사랑 같은 것으로 결혼할 수 있는 게 아니란다. 계속 이런 식으로 나오면 황제 폐하의 사랑이 분노로 변할지도 몰라. 그렇게 되어도 정말 괜찮니? 너는 물론 이 어미가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는 거냐고.”

아버지와 어머니의 끊임없는 협박과 애원에도 마리아는 고개를 숙였다.

“죄송해요. 그래도 전 황제 폐하와 결혼하고 싶지 않아요.”

끝까지 고집 피우는 딸의 모습에 참지 못한 뷔숄 남작이 손을 올렸다.

철썩.

뺨에 가해지는 고통.

어떤 때는 가죽으로 만든 회초리로 종아리에 피멍이 들도록 맞았다.

남작은 마리아가 황제를 거부한다는 소문이 날까 봐 두려워, 일절 다른 사람과도 만나지 못하게 했다.

덕분에 마리아는 몇 달 동안 부모를 제외한 이들과 대화해 본 적이 없었다.

마리아가 시체 같은 얼굴로 침대에 쓰러져 있었다. 그녀는 목에 걸린 반지를 잡고 중얼거렸다.

“어떻게든 엘리엇 님을 만나야 해.”

난 결코 황후가 되고 싶지 않아요.

그럼 분명 엘리엇 님은 나를 데리고 황제의 눈길이 미치지 않는 곳으로 떠나 줄 테지.

그것이 마리아의 한 줄기 희망이었다.

그 희망이 깨진 것은 비가 세차게 오던 날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온 뷔숄 남작이 싸늘한 얼굴로 말했다.

“따라 오거라.”

늘 마리아에게 호통을 치거나 폭력을 휘둘렀던 뷔숄 남작이 방 밖으로 나오라고 한 것은 처음이었다.

마리아는 긴장된 얼굴로 그를 따랐다.

이내 도착한 곳은 저택의 가장 아래층. 그곳에서도 계단 하나를 더 내려간 지하실이었다.

뷔숄 남작이 거대한 철문을 잡고 밀었다.

끼이익.

햇빛 하나 들어오지 않는 어두운 공간. 퀴퀴한 곰팡이 냄새가 나는 그곳에…… 엘리엇이 있었다.

“……!”

마리아는 차마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입을 막았다.

의자에 묶여 있는 엘리엇의 모습이 너무나 처참했다.

얼굴은 피멍이 들어 퉁퉁 부어 있었고, 온몸에는 크고 작은 상처가 나 가득 나 있었다.

뷔숄 남작이 말했다.

“죽은 것은 아니니 안심해라. 잠깐 기절한 것뿐이야.”

“아, 아버지. 대체 엘리엇 님께 무슨 짓을…….”

“나도 처음부터 저런 식으로 대할 생각은 아니었다. 하지만 아무리 쫒아내도 너를 한 번이라도 만나게 해달라며 자꾸 찾아오니 별수가 없지 않느냐.”

뷔숄 남작이 스산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괜히 놈을 보여 줬다가 네가 더 고집을 피울 거란 생각에 말하지 않았는데……. 네 표정을 보니 내가 잘못 판단했구나.”

아무리 굶기고 때려도 흔들림 없던 마리아의 눈이 완전히 무너져 있었다. 뷔숄 남작은 제 딸을 흔들 무기를 얻었음을 깨달았다.

“마리아, 황제 폐하가 선택한 이상 너는 황후가 되어야 해. 그렇지 않으면 너도, 나도, 네 어미도, 그리고 저놈도 끔찍한 몰골로 죽게 될 거다.”

그제야 마리아는 깨달았다.

내 사랑을 지키려 노력할수록 그를 고통스럽게 만든다는 사실을.

그날, 마리아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엘리엇 님을 돌려보내 주세요.”

뷔숄 남작은 순순히 딸의 요청을 들어주었다.

드디어 마리아가 큰 결심을 했음을 알았기에.

마리아는 멋대로 방을 나가려 하지 않았다. 황제와 결혼하기 싫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 마리아를 보며 뷔숄 남작 부부는 안도와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 * *

마리아는 하녀들의 도움을 받아 치장을 했다.

수개월 전, 메디치안 후작가의 연회에 참석했던 이후 처음으로 꾸미는 것이었으니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진주알을 부숴 만든 뽀얀 가루를 얼굴에 바르고, 장미꽃잎을 짓이겨 만든 즙으로 입술을 붉게 물들였다. 드레스 또한 동부에서 최고로 이름난 디자이너의 작품이었다.

곱게 꾸민 마리아를 보며 뷔숄 남작 부부는 흐뭇함을 감추지 못했다.

시체처럼 핼쑥하고 비참했던 며칠 전의 모습이 조금도 상상이 되지 않을 만큼, 마리아는 우아하고 아름다웠다.

황제가 하사한 화려한 마차를 타고 마리아가 향한 곳은 이블린의 집이었다.

마리아를 늘 감탄하게 했던 저택은 이전과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싱그럽게 피어 있던 꽃은 메말라 있었고, 늘 화목했던 집안에는 떨칠 수 없는 우울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그곳에 엘리엇이 있었다.

엘리엇은 지하실에서 마주쳤을 때보다는 안색이 나아졌지만, 여전히 바짝 마르고 생기가 전혀 없었다.

……그리고 휠체어를 타고 있었다.

끔찍한 폭행이 남긴 흔적이었다.

그는 이제 두 다리로 달리지 못하리라. 영원히.

뷔숄 남작에게 익히 들어 알고 있던 사실임에도 가슴이 아파 왔다.

마리아는 이를 악물었다.

‘안 돼. 이러려고 온 것이 아니잖아.’

마리아는 흔들린 표정을 겨우 정리했다.

한 달 동안 매일 거울을 보며 연습했던 것이 효력이 있었다. 마리아는 겨울바람처럼 차가운 얼굴로 엘리엇에게 다가갔다.

엘리엇은 제 앞에 나타난 마리아를 믿기지 않는다는 눈으로 바라보다가, 그녀를 향해 달려오려 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인을 만나자 고장 난 다리가 나았다는 기적 따위는 일어나지 않았다.

엘리엇은 비참한 모습으로 바닥에 고꾸라졌다.

“……!”

그 모습에 마리아는 저도 모르게 엘리엇을 부축할 뻔했다. 그러나 두 손을 맞잡아 겨우 그 충동을 참았다.

마리아가 바닥에 있는 엘리엇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황제 폐하께서 결국 황태후 마마와 귀족들을 설득하는 데 성공하셨어요. 몰락한 귀족가의 마리아 드 뷔숄이 황후로 즉위하게 되었다는 말이죠.”

“……!”

마리아가 무슨 말을 하는지 깨달은 엘리엇은 듣기 힘들다는 듯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마리아는 독하게 말을 이었다.

“저는 이제 황제 폐하의 여인입니다. 그러니 저와 함께했던 추억은 모두 잊으세요.”

절절한 부탁이 아니었다.

싸늘한 협박이었다.

……제발 그렇게 느껴지길 마리아는 바랐다. 그래야 엘리엇이 자신을 포기할 수 있을 테니까.

마리아는 무언가 더 말하려다가 입술을 깨물었다.

더 이상은 한계였다. 그에게 모진 말을 하는 것도, 그의 앞에서 싸늘한 표정을 짓는 것도.

바닥에 쓰러져 저를 올려다보는 안타까운 남자를 향해 마리아는 무언가를 던졌다.

챙-.

초록 잔디밭에 나뒹군 것은 파란 사파이어가 박힌 은색 반지였다.

엘리엇이 마리아에게 주었던, 그의 사랑이 듬뿍 담긴 반지.

멍하니 반지를 바라보는 엘리엇을 보며 마리아가 결국 참지 못하고 한마디 말을 내뱉었다.

“행복하세요. 부디.”

……해서는 안 될 말이었다.

그에 대한 위선이나 미련밖에는 되지 않는 말.

눈을 부릅뜬 엘리엇이 소리쳤다.

“마, 마리아 님. 잠시만요!”

당신을 이렇게 보낼 수 없습니다. 조금만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눈을 마주치고, 손을 잡고, 진짜 당신의 생각을 듣고 싶어요.

그러나 엘리엇의 필사적인 외침을 무시한 채 마리아는 몸을 돌렸다.

제대로 걷지 못하는 엘리엇은 마리아를 쫓아올 수 없었다. 그저 바닥을 기며 마리아의 이름을 불렀을 뿐.

마리아는 순식간에 정원을 빠져나왔다.

그런 마리아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이블린이었다. 이블린은 괴로운 얼굴로 마리아를 바라보았다.

“인사는 잘 했어?”

“응.”

“……그럼 잘 가, 마리아.”

이블린은 예전처럼 나의 사랑하는 친구라고 말해 주지 않았다.

마리아도 이블린을 안지 않았다.

이제 두 사람은 그런 것이 허락되지 않는 사이였다.

마리아는 무표정한 얼굴로 마차에 탔다. 마차 문이 닫히는 순간, 마리아는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다.

거대한 마차가 덜컹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런 것 따윈 조금도 중요한 게 아니라는 듯이.

얼마 지나지 않아 마차가 황궁에 도착했다.

흰 대리석과 번쩍이는 황금, 이름 높은 화가의 그림으로 꾸며진 웅장한 황궁.

대귀족도 감탄을 금치 못하는 황궁의 위용에 마리아는 아무런 감흥을 느끼지 못하며 걸음을 내디뎠다.

그녀가 도착한 곳은 까마득히 높은 단상 위에 앉아 있는 황제 앞이었다.

황금의 관을 쓴 황제는 더없이 오만한 얼굴로 마리아를 내려다보았다.

황제의 시선이 마리아를 위아래로 훑었다.

마리아는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와 같은 볼품없는 모습이 아니었다. 보기 좋게 살이 올랐고 눈동자는 반짝였으며, 꾸밈새도 화려했다.

황제가 흡족한 얼굴로 두 눈을 휘었다.

“제법 봐줄 만하게 변했군. 보기 좋아.”

마리아는 추잡한 말에 반응하는 대신 무릎을 꿇었다.

“황제 폐하의 명에 따르겠습니다.”

황제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승리자의 미소였다.

황제가 의자에서 일어나 마리아에게 다가갔다. 그러고는 손을 뻗었다.

마리아는 천천히 그의 손 위에 손을 올렸다. 그 순간 황제가 마리아를 제 쪽으로 잡아당겼다.

“이제야 내 곁에 왔구나, 마리아 드 뷔숄.”

그간 황제는 마리아를 아예 모른 척한 것이 아니었다. 부하를 시켜 마리아에게 벌어진 일을 샅샅이 알고 있었다.

황제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사랑하는 남자와 이별했다고 너무 속상해 말거라. 제국의 모든 여인이 탐내는 황후의 자리, 그것이 네 것이 됐으니.”

몇 달 후, 황제와 마리아의 국혼이 치러졌다.

황태후는 끝끝내 제게 반대한 아들에게 큰 실망을 하여 결혼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황제에게 반대하였다가 반쯤 협박당해 마음을 돌린 귀족들은 불쾌한 속내를 숨기며 자리를 채웠다.

순백의 웨딩드레스를 입은 마리아가 나타난 순간 귀족들이 수군거렸다.

“확실히 외모만은 봐줄 만하군요.”

“그러면 뭘 합니까. 평민과 다를 바 없는 하찮은 가문 출신인데.”

한껏 비웃긴 했으나 귀족들은 내심 안도했다.

뒷배 없고 유약한 황후는 절대 귀족들을 휘두르지 못할 테니까.

황후가 된 마리아에게는 지켜야 할 규율이 있었다.

늘 아름답게 외모를 가꾸고 기품을 유지하여, 황제를 즐겁게 만들어야 한다.

절대 황제의 말에 거역하지 말고, 늘 상냥한 말투로 황제를 살뜰히 보살펴야 한다.

또한…… 황제와의 잠자리를 기쁘게 받아들여야 하며, 황제의 핏줄을 이어받은 건강한 아기를 낳아야 한다.

마리아는 순순히 규율을 따랐다.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첫날밤이었다.

‘벌레가 몸 위를 돌아다니는 것 같아.’

혐오감과 거부감에 이를 악문 마리아와 달리 황제는 마리아를 안고 흡족하게 웃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얼굴을 하고 이렇게 남자를 안달 나게 하다니. 역시 너는 재밌어, 마리아 드 뷔숄.”

“……그리 말씀해 주시니 영광입니다.”

그러나 다정한 목소리와 달리, 황제에게 보이지 않는 마리아의 눈빛은 선연한 분노를 머금고 있었다.

끝내 제 편을 들어주지 않았던 부모만큼, 아니 그와 비교되지 않을 만큼 황제가 미웠다.

소중하고 소중했던 제 사랑을 망친 것은 결국 황제였다.

앞으로 마리아는 황제의 발밑에 바짝 엎드려 그의 말을 순순히 따를 것이다.

그가 원하면 언제든 웃어 주고, 비위를 맞출 것이다.

그렇게 신임을 얻다가 틈이 보이는 순간…….

‘당신을 파멸시킬 거야.’

마리아의 푸른 눈동자에 한 맺힌 눈물이 한 방울 어렸다.

* * *

마리아 드 뷔숄, 아니 이십 년이 넘는 세월이 지나 이제는 완벽한 황후의 모습을 한 여인이 작은 방에 앉아 있었다.

중죄를 지은 황족을 가두는 독방이었다.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열렸다. 방 안에 들어선 이는 시아나였다.

황후는 시아나에게 개인적인 원한은 조금도 없었다. 하지만 시아나가 라시드를 구하기 위해 벌인 행동 때문에 모든 계획이 망가졌다.

그래서 황후의 눈빛에는 한줌의 원망이 배어 있었다.

그런 황후를 향해 시아나가 말했다.

“전하를 대신하여 황후 폐하께 말씀을 드리기 위해 왔습니다.”

“…….”

황후는 미동 없이 입을 꾹 다물었다. 시아나가 말을 이었다.

“황후 폐하께서 혼인하시기 전의 일을 알게 됐습니다. 황후 폐하께서는…….”

시아나가 말을 잇기 전 황후가 갈라진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만!”

내내 침묵했던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섬뜩한 눈빛이었다.

“무슨 이야기를 들었는지 몰라도 감히 아는 척할 생각이라면 닥치거라. 너는 몰라. 아니, 누구도 몰라.”

자신이 얼마나 끔찍한 지옥 속에 있었는지. 아무도.

시아나는 그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황후의 말대로 시아나는 남이었다. 황후의 고통을 가늠할 수 없었다.

그러나…….

“황후 폐하의 고통에 대해선 알지 못하지만 적어도 황후 폐하와 엘리엇 님의 이야기의 끝에 대해서는 압니다.”

“……!”

마리아가 황제의 여인이 되겠다는 모진 말을 하고 떠난 후, 엘리엇은 괴로워했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났을까.

엘리엇이 중얼거렸다.

[아니, 마리아 님은 나를 사랑한다고 했잖아. 그런 그녀가 황제에게 진짜 마음을 주었을 리가 없어.]

분명 황제가 강제로 아름답고 여린 마리아를 취한 것이 분명하다. 마리아는 흉포한 남자의 품에서 고통받고 있을 것이다.

어떻게든 마리아 님을 구해야 해.

엘리엇은 돈을 모아 수도의 한 귀족을 찾아갔다.

엘리엇의 상단과 긴밀한 관계에 있는 귀족이었다. 엘리엇은 그에게 가지고 온 돈을 내보이며 부탁했다.

얼마 전 즉위하신 황후 폐하를 알현하게 해 달라고.

귀족은 난처한 요청이라는 듯 혀를 쯧쯧 찼지만, 엘리엇이 돈을 더 내놓자 선심 쓰듯 고개를 끄덕였다.

엘리엇은 귀족의 도움을 받아 황궁에 들어섰다.

운이 좋았던 것일까.

엘리엇은 황후궁에 도착하기 전에 마리아를 발견했다.

그러나 그토록 고대하던 여인을 만났음에도 엘리엇은 한 발짝도 다가갈 수 없었다.

마리아는 더 이상 그가 알던 수수하고 수줍음 많은 소녀가 아니었다. 수십 개의 보석이 박힌 황금 왕관을 쓰고 금빛 드레스를 입은 고귀한 여인이었다.

그뿐이라면 좋았을 텐데…….

마리아는 봄꽃처럼 환한 미소를 지으며 황제를 바라보고 있었다.

엘리엇은 깨달았다.

제 생각은 모두 이기적인 판단이었음을.

그녀는 행복해. 다른 남자의 곁에서.

엘리엇은 절망했다. 이전에 느꼈던 절망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처참하게.

엘리엇은 마리아를 뒤로하고 황궁을 나왔다.

“……그리고 홀로 목숨을 끊으셨다지요.”

시아나의 말에 황후가 눈을 부릅떴다.

황후의 버들거리는 눈빛엔 네가 그 이야기를 어떻게 아냐는 의문이 담겨 있었다.

시아나가 대답했다.

“이블린 님이 말씀해 주셨어요.”

“……!”

라시드가 황궁을 점령하고 황후가 독방에 갇힌 후의 일이었다. 이블린은 라시드에게 알현을 요청했다.

평소의 차분한 모습이 사라진 이블린은 라시드에게 무릎을 꿇고 이야기했다.

[목을 맨 오라버니를 보고 저는 황후 폐하를 찾아가 소리쳤습니다. 오라버니가 죽은 것 네 탓이야! 오라버니에게 조금이라도 미안함을 느낀다면 황제에게 복수해!]

황후가 벌인 모든 짓의 배후가 자신이었다는 말이었다.

황후는 일그러진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이블린이 나를 찾아온 것은 오로지 나를 위해서였어. 엘리엇이 사망했다는 소식에 내가 무너지지 않도록 버팀목이 되어 주기 위해서. 그녀는 이 일과 아무 상관 없어!”

필사적으로 이블린을 변호하는 황후의 모습에 시아나는 눈썹을 내렸다.

이블린과 황후. 두 여인이 얼마나 서로를 위하는지 여실히 느껴졌다.

‘황후 폐하는 피도 눈물도 없는 사악한 여인이 아니야.’

그녀는 단지 한 남자를 마음 깊이 사랑했던 여인일 뿐이다. 오만한 권력자의 눈에 들어 그 사랑이 비극이 되어 버린 가련한 피해자.

시아나는 진심으로 그녀에게 안타까움을 느꼈다.

하지만, 그럼에도…….

시아나가 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서는 안 됐어요.”

“…….”

“당신의 배 속에서 태어난 전하는 아무 잘못이 없잖아요.”

그저 당신을 사랑했던 아이를 미워하고, 죽음으로 내몰고, 끝내 죄를 뒤집어씌워 죽이려고 한 것은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죄였다.

시아나의 동그란 눈동자에 어린 원망과 분노를 본 황후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새삼 아들에 대한 죄책감이 든 것은 아니었다.

사랑하는 남자를 잃을 뻔했던 시아나의 마음을 절절히 이해했기에.

그뿐이었다.

황후가 가라앉은 얼굴로 물었다.

“내가 밉겠구나. ……나를 죽일 셈이냐?”

네, 라고 시아나는 대답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아무리 끔찍한 짓을 저질렀다 해도 그녀는 라시드의 어머니였기에.

시아나의 분노보다 중요한 것은 라시드의 마음이었다. 시아나는 진심으로 그것을 지켜 주고 싶었다.

“전하께서는 그것을 바라지 않으십니다.”

“……!”

생각지도 못한 말에 황후가 눈을 크게 떴다.

라시드가 피가 묻은 검을 들고 저를 죽이려던 모습이 생생했다. 그런 그가 저를 죽이고 싶지 않아 한다고?

시아나가 엄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황후 폐하의 죄를 사면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황후는 사람이 오가지 않는 머나먼 유배지에서 한평생 지내게 될 것이다. 시녀 이블린과 함께.

그 부분에서 황후의 눈이 커졌다.

“이블린을 내게 돌려준다고?”

“황후 폐하의 소중한 사람이니까요. 더 이상 황후 폐하께 그런 사람을 빼앗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전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황후는 복잡한 눈빛으로 입을 다물었다.

그토록 서린 눈빛으로 검을 들었던 것이 무색하게, 결국 라시드는 황후의 목을 베지 못했다.

그러기는커녕 황후에게 더없이 너그러운 벌을 주었다.

황후가 중얼거렸다.

“그래서 널 더 철저하게 미워했다, 라시드.”

안 그러면 끔찍한 남자의 핏줄에게 한 줌의 정이라도 줄까 봐. 그것이 소름 끼치게 싫어서.

그러나 황후의 라시드에 대한 마음은 거기까지였다.

끝내 황후의 눈빛에는 아들에 대한 그 어떤 미안함이나 애틋함이 어리지 않았다.

그래서 시아나는 괴로운 얼굴로 몸을 돌렸다.

밉고, 안타깝고, 싫고, 불쌍한…… 너무 많은 감정을 들게 하는 여인을 더 이상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 * *

황후의 유배가 결정되자 사람들은 불만을 터뜨렸다. 아무리 황후라 해도 황제 폐하를 조종한 간악한 죄인에게 너무 관대한 벌이라고.

그러나 그들은 그 말을 크게 소리치지는 못했다.

그 벌을 내린 이가 다름 아닌 라시드였기 때문이다.

황태자 라시드는 이제 명실공히 제국의 일인자였다. 그런 라시드에게 친모를 죽이라는 말을 하는 것은 목숨을 걸 만큼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하지만 다른 말은 할 수가 있지.’

라일라 황비가 나서서 말했다.

“전하, 이제 황궁의 상황도 정리되었으니 황제 폐하를 당장 죄인의 탑에 모셔서 주술을 풀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라일라의 말에 수많은 황족과 귀족이 맞는 말이라며 동조했다.

특히 라시드를 지지하지 않았던 황족과 귀족들은 더더욱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이대로 라시드가 황권을 잡으면 어쩌나 두려워했다. 비록 이전만큼 강대하지 못할지언정 황제가 정신을 차리고 황좌를 굳건히 지켜 주길 바랐다.

놀랍게도 라시드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소식을 들은 시아나가 말했다.

“황제 폐하께서 제정신으로 돌아오면 전하께 불리한 상황이 될지도 몰라요.”

아니, 분명 그럴 것이다.

황제가 저를 원상태로 돌아오게 해 준 라시드에게 고마움을 느끼든 그러지 않든, 그는 황제였다.

자신의 권력을 다시 굳건하게 만들고 싶을 터였다.

그러나 라시드는 전혀 걱정할 것 없다는 듯 웃었다.

“상관없어. 이제 아바마마는 어떤 식으로도 나를 휘두르실 수 없으니까.”

황제 시해 미수 사건이 일어났을 때처럼 권력의 추가 아슬아슬하게 중간에 놓인 것이 아니었다.

이제는 압도적으로 라시드 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이 흐름은 쉽게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설령 황제가 다시 자해를 시도하여 라시드를 죄인으로 내몬다 해도.

시아나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시아나의 얼굴은 풀어지지 않았다.

“……황제 폐하가 밉지 않으세요?”

황제는 황후에게 끔찍한 짓을 저질렀다. 그 죄의 여파가 라시드에게까진 이어진 셈이었다.

라시드가 싸늘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역겨워.”

“…….”

“그러니 더더욱 제정신을 차리셔야지. 아바마마께서는 본인이 벌인 죄의 대가를 치르셔야 해.”

그 말에서 시아나는 깨달았다.

정신을 차린 황제는 결코 이전 같은 평온하고 사치스러운 일상 따위는 보내지 못하리라.

시아나는 눈썹을 내리며 라시드의 손을 잡았다. 라시드는 피식 웃더니 그녀를 제 품속으로 끌어당겼다.

그러나 많은 이들의 바람과 달리 황제는 죄인의 탑에 가지 못했다.

일이 벌어진 것은 라시드가 시아나와 함께 차를 마시고 있을 때였다.

“화, 황태자 전하. 황제 폐하께서……!”

다급한 시종의 목소리에 라시드와 시아나는 황제궁으로 향했다. 황제궁 주변에는 다른 황족들과 시종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의 시선은 모두 한곳을 향해 있었다.

건물의 지붕. 까마득히 높은 그곳에 황제가 위태롭게 서 있었다.

라시드가 눈썹을 찡그렸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황제는 정신이 오락가락하여, 대부분 침실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황제의 시종이 창백한 얼굴로 대답했다.

“화, 황제 폐하께서 너무 오랜 시간 누워 있어서 답답하니 산책을 다녀오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너무 멀쩡한 모습으로 명령하셨는지라 도저히 거역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였다.

지붕 위의 황제가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나는 구제받지 못할 죄인이다!”

영문 모를 말을 내뱉은 황제가 말을 이었다.

“이 권력을 이용하여 너무 많은 이를 고통스럽게 만들었어. 이제 그 죗값을 치르고자 한다. 그것이 짐의 죄를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는 길이니.”

그것이 황제의 마지막 말이었다.

황제는 지붕 아래로 몸을 내던졌다.

그 순간, 라시드와 시아나가 동시에 서로의 눈을 가리기 위해 손을 움직였다. 그러나 시아나 쪽이 조금 더 빨랐다.

시아나의 작은 두 손이 라시드의 보라색 눈동자를 가렸다.

쿵!

묵직한 것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꺄아악!” 하고 비명이 주변을 가득 채웠다.

이성을 유지한 사람 몇몇이 황제에게 다가갔다. 황제는 뼈가 꺾이고 내장이 터진 채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제국에서 가장 고귀한 남자는, 그렇게 끔찍한 모습으로 죽어 버렸다.

* * *

갑작스러운 황제의 서거 소식에 황궁 안은 물론 온 제국이 충격에 휩싸였다.

한편에서 말이 나왔다.

“혹시 황태자 전하께서 흉악한 짓을 저지르신 게 아닐까?”

그러나 그 말은 많은 이들의 지지를 얻지 못하고 사라졌다.

라시드는 그간 황제를 살뜰히 모신데다, 황제를 죄인의 탑으로 데려가려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그런 황태자 전하께서 지금 와서 그런 끔찍한 일을 저지를 이유가 없지 않소.”

라시드를 지지하는 앙겔루스 공작이 근엄한 얼굴로 말했다. 의심을 표했던 귀족들은 아무 말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일말의 의심이 남아 있긴 했지만, 그것을 표 내기엔 라시드가 가진 권력이 너무 막강했다.

이제 라시드는 황태자가 아니라 황제가 될 남자였으니까.

황제의 장례식 준비가 시작되었다.

원래는 황제와 가장 가까운 가족, 즉 친모인 황태후나 아내인 황후가 준비를 하는 것이 마땅했다.

그러나 동쪽에 있는 황태후는 황궁으로 돌아오는 것을 거부했다.

“먼 길을 오가기에 몸이 너무 좋지 않구나. 이곳에서 황제를 추모하겠네.”

그 말은 일부 사실이었으나, 일부는 변명일 뿐이었다.

황태후는 아들이 죽음에 이른 순간까지도, 그에 대한 원망과 미움이 사라지지 않았다.

동부에서 황제의 장례를 치러 주며 눈물을 흘리긴 했으나 그녀의 모정은 거기까지였다.

시아나가 가라앉은 얼굴로 말했다.

“상황이 이러니 일각에서는 황후 폐하께서 장례식을 준비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말도 나오고 있습니다.”

시아나의 앞에 있는 이는 황후였다.

황후는 아직 유배지로 떠나지 않아 황족을 가두는 방 안에 갇혀 있었다.

황후가 눈썹을 찡그렸다.

“황제를 조종한 내게 장례식을 준비하라고? 제정신인가.”

“황후 폐하께서 황제 폐하를 조종했을지도 모른다는 정황이 있을 뿐, 아직 마법사를 찾지 못해 온전한 증거가 나오지 않았으니까요. 그래서 어떤 이들은 황후 폐하께서 무서운 누명을 쓴 것일 뿐, 무고하시다고 믿고 있습니다.”

황후는 단 한 번도 권력을 이용하여 약한 자를 괴롭힌 적이 없었다. 늘 상냥했다.

그래서 황궁에 있는 시종들은 아직 황후를 존경했다. 그것을 아는 황후가 눈썹을 내렸다.

‘어리석은 자들. 내가 그들에게 잘해 주었던 것은 결코 좋은 마음으로 그랬던 것이 아닌데…….’

이 자리를 조금이라도 수월하게 유지하기 위해 연기했던 것뿐이었다.

복잡한 표정을 짓는 황후를 보며 시아나가 다시 물었다.

“황후 폐하께서 원하신다면 장례식을 준비하실 수 있게 해 드리겠습니다.”

물론 완전히 풀어 준다는 것은 아니었다. 황후는 엄중한 감시를 받게 될 것이다.

시아나의 말이 우스워 황후는 비틀어진 미소를 지었다.

“내가 그따위 것을 원한다고 생각하느냐? 그렇게 멍청한 아이는 아닐 텐데…….”

“장례식은 관심 없으셔도 황제 폐하의 시체를 보기를 원하실 수는 있죠. 황후 폐하께서 황제 폐하를 죽인 범인이니까요.”

“……!”

황후는 잠시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내 여린 얼굴에 미소가 감돌았다. 섬뜩한 미소였다.

“역시 눈치가 빠르구나.”

황제를 조종하게 되었을 때, 황후는 가장 먼저 이 말을 속삭였다.

[내 목소리를 열흘 이상 듣지 못한다면, 세상에 네가 저지른 죄를 고하고 가장 비참한 방법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어.]

저주와 같은 말은 그 어떤 명령보다 깊이 황제의 머릿속에 박혀 있었다.

그리고 황후를 보지 못한 지 열흘이 되었던 날, 황제는 그 명령을 따랐다.

자살이 아니었다.

명백한 타살이었다.

끔찍한 짓을 저질렀음에도 황후는 더할 나위 없이 기뻐 보였다.

“이 방에 갇혀 초조한 마음으로 기다렸지. 혹여 황제를 당장 죄인의 탑에 데려가거나, 마법사를 찾아내 마법을 풀면 어쩌나 하고. 하지만 다행히 시간을 맞췄구나.”

복잡한 얼굴로 황후를 바라보던 시아나가 물었다.

“……원하는 바를 이루셔서 행복하신가요?”

황후가 피식 웃더니 대답했다.

“그럴 리가 있겠느냐. ……애초에 행복 따위를 바라고 한 일이 아니란다.”

엘리엇이 죽은 후부터, 황후의 안에 있는 감정은 괴로움뿐이었다.

그럼에도 꾸역꾸역 살아 목숨을 유지했던 것은, 행복이 아닌 복수를 위해서였다.

‘원래는 황제를 조종하여 그가 아꼈던 모든 것을 파괴한 후에, 그를 제정신으로 돌아오게 만들 셈이었지.’

제가 아꼈던 것이 모두 사라진 것을 보고 더없는 절망감을 느낄 수 있게. 황후가 느꼈던 그대로.

그 후에 황제를 가장 고통스러운 방법으로 죽일 셈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결국 원하는 바를 다 이루지 못했음에도 황후는 마음이 편안했다.

‘이럴 줄 알았다면 진즉 황제를 죽여 버릴걸.’

황후의 눈에 어려 있던 진득한 분노와 원망이 사라졌다. 텅 빈 눈동자를 한 황후를 바라보며 시아나가 말했다.

“죽지 마십시오.”

“……?!”

“황후 폐하를 위한 말이 아닙니다. 전하를 위해서 하는 말씀입니다.”

“…….”

“전하께서는 아직 황후 폐하에 대한 마음이 정리되지 않았습니다.”

시간이 흐른 후, 라시드는 친모를 용서하고 사랑할 수도 있을 것이다. 반대로 친모에 대한 정을 끊을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지금 상황에서 황후가 죽는 것은 그에게 큰 상처가 될 터였다.

시아나는 라시드가 그런 아픔을 가지길 원치 않았다.

황후는 살아야 했다.

적어도 라시드가 그녀를 사랑하는 한.

“이 시간 이후로 황후 폐하께 감시를 붙일 겁니다. 절대 허튼짓을 하실 수 없게 말입니다.”

기가 찬 얼굴로 시아나를 바라보던 황후가 중얼거렸다.

“라시드가 여자 하나는 잘 골랐구나. 지독히도 저를 위하는 자를 만났어.”

“전하께서는 상냥하고 다정한 사람을 좋아하시거든요. 그리고 그런 상대가 생기면 제가 가진 모든 것을 줄 만큼 온 영혼을 다하여 사랑하시죠.”

시아나가 말을 이었다.

“꼭 황후 폐하처럼 말입니다.”

“……!”

그 말에 황후의 푸른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시아나가 의자에서 일어났다.

“장례식 준비를 하는 것은 원치 않는 걸로 알겠습니다. 참석도 마찬가지시겠지요.”

그럼 더 이상 황후는 이곳에 있을 이유가 없었다.

다음 날, 황후는 갇혀 있던 방을 나왔다.

바깥에는 허름한 검은 마차가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 이블린이 초라한 몰골로 서 있었다.

이블린은 울 것 같은 얼굴로 황후를 껴안았다.

“다시는 못 보는 줄 알았어.”

떨리는 목소리에서 그간 이블린이 얼마나 괴로워했는지 느껴졌다. 황후는 눈썹을 내리며 이블린을 안았다.

그러나 두 여인의 애틋한 재회는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기사가 험악한 얼굴로 말했기 때문이다.

“시간이 없습니다. 타시지요.”

기사의 목소리에는 황후에 대한 존경은 조금도 없었다. 오로지 죄인을 대하는 매정함이 있을 뿐이었다.

황후는 그것을 책망하는 대신 조용히 마차에 올라탔다. 마차 안에 들어서기 전, 황후는 고개를 돌렸다.

이내 그녀의 눈이 커졌다.

저 먼 곳에 은빛 머리카락에 보라색 눈동자를 가진 아이가 저를 보고 서 있었기 때문이다.

아이가 햇살 같은 미소를 지으며 소리쳤다.

[어마마마-!]

애정이 듬뿍 실린 목소리였다.

그러나 이내 아이의 모습은 사라졌다.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황후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이제 와 미련이라니. ……죄책감이라니.’

가당치 않은 일이었다.

“왜 그래, 마리아?”

이블린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 황후가 아무것도 아니라며 마차에 탔다. 이내 두 여인을 태운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세찬 눈보라가 치는 북부로.

두 여인은 그곳에서 평생 죄의 대가를 치르게 될 터였다.

두 여인이 떠나는 순간, 라시드는 창가에 서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라시드의 얼굴은 무표정했다.

그럼에도 시아나는 한없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라시드를 보았다. 시아나가 그의 커다란 손을 잡았다.

“너무 괴로워 마세요. 앞으로 내가 전하를 행복하게 해 줄게요.”

저를 위로하는 목소리에 라시드는 눈썹을 내렸다.

아버지가 죽었어도, 어머니가 떠났어도, 라시드는 괜찮았다.

제게 중요한 이는 더 이상 그들이 아니었기에.

그럼에도 라시드는 어리광을 피우듯 시아나를 꼭 끌어안았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그녀의 품이 너무 좋아, 라시드는 두 눈을 부드럽게 휘었다.

그로부터 몇 년 후, 황후와 이블린은 북부의 향토병에 걸려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그 소식을 들은 라시드가 참지 못하고 눈물 한 방울을 흘렸을 때, 시아나는 그를 꼭 안아 주었다.

꼭 지금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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