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사랑에 빠진 황후 (1)
이른 새벽, 평소라면 곤히 자고 있을 시간이었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라시드는 일찌감치 일어나 황태자궁의 총괄 시녀 에바의 손을 빌려 단장을 하고 있었다.
그는 커다란 거울을 통해 제 모습을 살피며 말했다.
“셔츠 깃이 기니 좀 답답해 보이는군. 짧은 깃으로 바꿔 입는 게 좋겠어.”
“브로치 색이 영 별로군. 사파이어가 박힌 브로치를 가지고와.”
“다시 보니 아까 전 헤어스타일이 낫겠어.”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솔은 입을 쩍 벌렸다.
‘평소에는 셔츠가 셔츠고 바지가 바지다, 라며 대충 구색만 맞추어 입으셨던 분이 도대체 왜 저러시냐고. 제국에서 제일가는 남자를 사로잡기 위해 기 모으고 준비하는 레이디도 저렇게 열심히 꾸미진 않을 거야!’
그러나 한껏 경악한 솔과 달리 에바는 차분한 얼굴로 성심성의껏 라시드를 도왔다.
그렇게 몇 시간이 지났을까.
지루함을 참지 못하고 꾸벅꾸벅 졸던 솔은 아차 하고 눈을 떴다.
그러나 이내 솔은 으악, 하고 비명을 내지르며 두 눈을 질끈 감을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게 단장을 끝마친 라시드의 모습이 너무나 눈부셨기 때문이다.
깔끔하게 넘긴 은빛 머리카락 아래에 드러난 아름다운 얼굴.
치켜올라 간 눈매 아래로 보석처럼 선명한 보라색 눈동자가 반짝이고 있었다.
단단한 몸을 딱 맞게 감싼 새하얀 제복과 가슴께에 반짝이는 청보라색 브로치까지.
라시드의 곁을 수년간 모시며 적응이 된 솔조차 감탄이 나올 만큼 어마어마한 미모였다.
솔이 어버버, 하며 더듬거리다가 말했다.
“전하, 지금이라면 검을 들지 않아도 전쟁에서 이길 수 있을 겁니다. 제아무리 지독한 놈들이라도 전하께 마음을 빼앗겨 무릎을 꿇을 테니까요!”
라시드는 진담인지 농담인지 모를 말을 하는 솔을 무시하며 걸음을 내디뎠다.
“준비를 마쳤으니 어서 가자.”
“아, 네.”
솔이 고개를 끄덕이며 라시드를 따랐다.
두 사람이 향한 곳은 황제궁이었다.
잠시 후, 먼 여정을 마친 시아나가 모습을 드러낼 장소였다.
* * *
황제궁의 거대한 알현실에는 황궁에 사는 모든 황족이 모여 있었다.
드높은 단상의 가운데에는 황제와 황후가.
그리고 한쪽에는 황자와 황녀가, 다른 한쪽에는 4명의 황비가 나란히 앉아 있었다.
황제와 황후를 제외한 황족들은 모두 한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우아하게 앉아 있는 라시드였다.
라시드를 바라보며 황족들은 속으로 별의별 생각을 다 하고 있었다.
‘황태자 전하의 미모가 대단한 건 알았지만 이 정도였다니. 꼭 사람이 아닌 것 같아.’
‘젠장, 피가 반 섞인 형님께 설레서 어쩌자는 거야.’
‘오라버니, 한 번만 여기 좀 봐주세요, 흑흑.’
라시드에게 정신을 못 차리던 그들을 현실로 되돌아오게 한 것은 문밖에서 들린 시종의 목소리였다.
“시아나 공주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그 순간 넋 나간 표정을 짓고 있던 황족들은 표정을 정돈하고 알현실 입구로 고개를 돌렸다.
말없이 앉아 있던 황후도 마찬가지였다.
고요해진 황족 중에서 라시드만이 기쁨을 감추지 못한 얼굴로 주먹을 쥐었다.
‘시아나!’
수개월간 보고 싶고, 또 보고 싶었던 그녀를 볼 생각에 온몸의 피가 솟구쳤다. 이대로 터지는 것이 아닐까 싶을 만큼 심장도 쿵쿵거렸다.
이내 시아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구불거리는 밀색 머리카락, 반짝이는 에메랄드빛 눈동자, 하늘색 드레스를 입은 시아나를 본 라시드는 잠시 숨을 멈췄다.
‘너무 예뻐.’
지금 당장 달려가 그녀를 제 품에 끌어안고 싶을 만큼.
그러나 그 순간, 시아나가 라시드를 힐끗 바라보더니 눈썹을 내리며 빙그르 웃었다.
조금만 참아 달라는 듯이.
사랑스러운 미소에 라시드는 겨우 제 충동을 참을 수 있었다.
그것을 확인한 시아나가 황제와 황후의 앞에 서서 고개를 숙였다.
“고귀하신 황제 폐하와 황후 폐하께 인사드립니다. 그동안 강녕하셨는지요.”
오랜만에 만나 안부를 묻는 것처럼 편안한 목소리였다.
그러나 그와 달리 시아나를 맞는 황후의 목소리에는 엄격함이 어려 있었다.
“어서 오거라. 그대는 황후의 시련 마지막 시험을 치르기 위해 오랜 시간 제국을 떠났었지. 그래, 어떤 업적을 가지고 왔느냐.”
황후는 이런저런 사족을 늘어놓지 않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녀의 말대로 오늘 황궁에 있는 모든 황족이 모인 것은, 시아나가 가지고 온 업적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시아나가 입을 열었다.
“뿌리까지 썩어 있던 왕국을 끝내고 새 나라를 건국하는 데 힘을 보탰습니다.”
맑은 목소리로 차분하게 내뱉은 말의 내용은 엄청났다.
그럼에도 알현실에 있는 누구도 놀란 기색이 없었다.
왜냐면 황후를 포함한 황족들은 진즉 그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왕실의 보물인 신비로운 꽃을 가지고 제국과 협상을 하여 새 나라를 일으킨 것은 확실히 대단한 일이었다.
그러나 황후는 눈썹을 내렸다.
“하지만 그것은 순수한 그대의 능력으로 이룬 것이 아니다.”
“…….”
“그대의 가문에서 내려오는 신비로운 꽃이 없었다면, 제국에 그대를 편 들어 주는 황태자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어. 그러니 나는 그대의 업적을 인정하기가 힘들구나.”
황후의 말은 억지였다.
가문에서 내려오는 보물도, 황태자라는 인연도, 시아나가 가진 힘의 일부였다.
그것이 운이든, 노력에 의해서 얻게 된 것이든.
그러나 시아나는 그것을 가지고 황후와 왈가불가하는 대신 다른 말을 꺼냈다.
“그것이 부족하다고 하시니, 제가 이룬 업적을 하나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
생각지도 못한 말에 황후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긴장한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던 다른 황족들도 마찬가지였다.
시아나가 말했다.
“얼마 전, 새 시대의 문을 연 신 아실론드는 기존의 왕국과 전혀 다른 방법으로 나라를 이끌 자들을 뽑았습니다. 바로 백성들의 투표를 통해 선출된 이로 구성된 의회지요.”
“그런데?”
그것은 희귀한 경우이긴 했으나, 전혀 없던 경우는 아니었다.
그리 놀랄 만한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시아나가 말을 이었다.
“신 아실론드를 이끌어 갈 1대 총리는 바로 저, 시아나 아실론드 폰 실리테입니다.”
“……!”
그 순간 황후가 눈을 크게 떴다.
황족들도 놀란 얼굴로 입을 쩍 벌렸다.
그 모습을 보며 시아나는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시아나는 총리로 호명된 날 바로 길을 떠났다. 그러고는 한시도 쉬지 않고 가장 빠른 속도로 달렸다.
보람이 있었다.
황족들의 반응으로 보아 그 사실을 지금 막 안 모양이니.
시아나가 또렷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신 아실론드의 총리에 오르기 위해서는 혈통도, 가문도, 재력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오직 백성들의 지지만이 필요하지요. 저는 감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 명예로운 자리에 제가 서게 된 것은 실로 기적과 같은 일이라고요.”
아무도 그 말을 부정할 수 없었다.
황족이라는 이름을 떼면, 이 자리에 있는 이들 중 누구도 백성들의 지지를 받아 지도자로 추대될 수 있을 거라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에.
황후 또한 아무 말 못하고 시아나를 바라보았다.
숨 막히는 정적 속에서 짝짝짝, 하고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3황비 라일라였다.
그녀는 상기된 얼굴로 두 손을 마주치며 말했다.
“불과 18세의 소녀가, 그것도 옛 왕국의 공주가 백성의 마음을 사로잡아 왕과 다를 바 없는 총리직에 앉다니요. 실로 대단한 일이 아닙니까.”
옆에 앉아 있던 4황비 안젤리나 황비도 용기를 냈다.
“대단한 업적을 이루고 온 것을 축하드립니다, 시아나 공주. 아니 시아나 총리라고 불러야 할까요?”
안젤리나와 눈을 마주친 시아나가 웃으며 말했다.
“아실론드 왕국의 역사는 끝났으나 저의 직위는 남아 있습니다. 공주와 총리, 둘 다 제가 가진 신분이니 편하신 대로 불러 주시면 됩니다.”
잠시 후, 황족들이 하나둘씩 일어나 손뼉을 치기 시작했다.
시아나의 업적에 찬사를 보낸다는 표현이었다.
황후의 눈치를 살피던 1황비 요한나와 2황비 베아트리체도 은근슬쩍 일어나 박수를 쳤다.
그사이에 오직 황후와 황제만 가만히 앉아 있었다.
라시드가 두 사람을 바라보며 물었다.
“아바마마와 어마마마께서도 답을 해 주시지요. 시아나는 황후의 시련을 통과한 것입니까, 통과하지 못한 것입니까?”
당연히 황후는 ‘어림없는 소리, 그깟 업적 따위를 가지고 황후의 시련을 통과할 수는 없다!’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저를 보는 라시드와 황족들의 시선이 섬뜩했다.
황후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황제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황제는 멍한 얼굴로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다.
이 일에 조금의 관심도 없는 것처럼.
그것을 안 황후는 이를 악물었다.
이곳에 제 편은 아무도 없었다.
잠시 후, 황후가 일그러진 표정을 겨우 정돈하며 입을 열었다.
“축하한다, 시아나.”
“……!”
눈을 크게 뜬 시아나를 향해 황후가 말을 이었다.
“그대는 황후의 시련을 통과하였다. 그대를 라시드의 약혼녀로 인정하마.”
그녀의 말은 얼핏 두 사람의 관계를 흔쾌히 인정한다는 것처럼 들렸다.
하지만 황후와 마주 보고 있던 시아나는 그녀의 눈이 조금도 웃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기는커녕 푸른 눈동자 아래에는 선연한 분노가 어려 있었다.
‘사랑하는 남자의 어머니가 나를 저런 식으로 보는 것은 역시 유쾌한 일이 아니야.’
하지만 그뿐이었다.
시아나는 황후를 달래기 위해 제가 가장 가지고 싶었던 것을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시아나는 치맛자락을 들어 올려 고개를 숙였다.
“고귀하신 황제 폐하와 황후 폐하, 그리고 황족들의 환대에 마음 깊이 감사드립니다. 앞으로 전하의 약혼녀로서, 부끄럼 없는 모습을 보이도록 하겠습니다.”
그 말과 동시에 라시드가 의자에서 일어나 시아나에게 다가갔다.
“꺅!”
시아나가 작은 비명을 내질렀다.
라시드가 단번에 그녀를 안아 올린 것이다.
“저, 전하?! 이게 무슨……!”
갑작스러운 라시드의 만행에 기함하는 시아나를 향해 라시드가 환하게 웃었다.
“최고야, 시아나!”
라시드가 경악한 얼굴로 저를 바라보는 황후와 황족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제 그만 제 약혼녀를 데리고 가겠습니다. 너무 오랜 시간 떨어져 있었던지라 이 이상 그녀를 참는 것이 힘들군요.”
“라시드!”
황후가 정색을 했지만, 라시드는 신경 쓰지 않고 말을 이었다.
“약혼식은 곧 치르도록 하겠습니다. 모쪼록 모든 황족이 참석하여 축하해 주시길 바랍니다.”
그 말을 끝으로 라시드는 시아나를 안은 채로 알현실을 나왔다.
* * *
시아나는 라시드의 방에 도착했다.
라시드에게 안긴 그대로.
시아나가 토마토보다 새빨개진 얼굴로 발을 동동거렸다.
“전하, 도대체 어쩌자고 이런 짓을 하신 거예요!”
다른 이도 아닌 체면을 중시하는 황족들 앞에서 공주님 안기를 당했다.
‘거기에서 끝난 게 아니라 황태자궁으로 오는 동안 다른 시종과 시녀들에게도 이 모습을 보여 버렸잖아.’
둘만 있을 때면 모를까, 공개적인 장소에서 이토록 진한 스킨십이라니.
아무리 시아나라도 견디기 힘들 만큼 부끄러운 일이었다.
‘정말 너무해.’
시아나는 눈을 꾹 감고 라시드의 넓은 어깨를 콩콩 쳤다.
라시드는 다람쥐가 안마라도 하는 것처럼 간지러울 뿐이었지만.
라시드가 제 품에 안긴 시아나의 볼에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미안, 너를 너무 만지고 싶었어.”
“…….”
라시드의 입술이 시아나의 말랑말랑한 귓불에 닿았다.
“네 목소리가 너무 듣고 싶었어.”
“…….”
라시드의 입술이 시아나의 감긴 눈 위에 닿았다.
“네가 너무 보고 싶었어.”
“…….”
라시드의 입맞춤은 끝나지 않았다.
시아나의 동그란 코끝과 이마, 긴 머리카락, 매끈한 목, 살짝 튀어나온 쇄골까지.
애달플 만큼 필사적으로 사랑을 표현하는 남자를 향해 시아나는 더는 화를 낼 수가 없었다.
시아나가 스르르 눈을 떴다.
라시드의 보라색 눈동자가 시아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더할 수 없을 만큼 사랑에 푹 빠진 눈빛으로.
두근.
심장이 조여 드는 느낌을 받으며 시아나가 말했다.
“저도 너무 하고 싶은 말이 있었어요.”
“그게 뭐지?”
시아나의 입술 위로 한 번 더 쪽 입을 맞추는 라시드를 향해, 시아나가 말했다.
“사랑해요.”
“…….”
라시드는 멍하니 시아나를 바라보다가 작은 몸을 품속에 꽉 껴안았다.
맞닿은 그의 가슴에서는 시아나의 심장 소리보다 커다란 울림이 느껴졌다.
시아나는 그제야 실감이 났다.
그의 곁에 왔다는 것을.
커다란 창문 사이로 환하게 비치는 햇빛 아래, 라시드와 시아나는 서로를 끌어안고 긴 의자에 앉아 있었다.
라시드는 시아나의 손가락 하나하나까지 자세히 살펴보았다.
“다행히 다친 곳은 없구나.”
사실 시아나는 그간 부상을 아예 입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특히 왕궁이 불탔던 날은 자잘한 부상을 많이 입었다.
‘지금은 다 나았지만.’
지나간 상처로 굳이 라시드를 심란하게 만들고 싶지 않아 그저 웃으며 말했다.
“전하께서 보내 주신 블랙 쉐도우 기사단 덕분에 다칠 틈이 없었어요.”
“아아.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이군.”
“이곳에 도착할 때까지 기사단과는 제대로 대화를 나누기는커녕, 얼굴도 거의 보지 못했지만요. 도대체 어떤 명령을 내리셨기에 그렇게 조심스럽게 행동한 거예요?”
라시드가 대답했다.
“그림자처럼 숨어 있다가 네가 필요로 하는 순간에만 나타나 도우라고 했어.”
“제가 불편해할까 봐요?”
시아나의 말에 라시드는 웃었다.
실은 그 말은 반쪽 정답이었다.
나머지 반은 근육덩어리 남자들이 시아나와 말을 섞는 게 불쾌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라시드는 굳이 그리 대답하지 않고 다른 말을 꺼냈다.
“아실론드 왕국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세히 이야기해 줘.”
누구를 만났는지,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라시드는 짤막한 전보로는 다 알 수 없었던 시아나의 시간이 궁금했다.
시아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지난 몇 달간 겪었던 이야기를 시작했다.
시아나의 작은 손을 주물거리며 귀를 기울이던 라시드는 새 왕비의 이야기에 서늘한 눈빛을 했다.
“네게 그따위 짓을 한 여자에게 고작 그런 벌을 주다니, 너는 참 너그럽구나.”
“……그렇지 않아요. 재판이 진행되면 분명 사형이 선고될 거예요.”
“그러니 너그럽다는 거지. 내 눈앞에 있었다면 지옥보다 살아 있는 것이 더 괴롭다고 느낄 만큼 고통을 주었을 거야. 제발 죽여 달라고 빌어도 절대 쉽게 목을 베지 않았겠지.”
라시드의 목소리는 더없이 다정했지만 그 속에 담긴 내용은 섬뜩하기 짝이 없었다.
그래서 시아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중얼거렸다.
“잠시 잊고 있었는데 전하는 역시 무서운 구석이 있어요.”
그 말에 라시드가 대번 꼬리를 내리며 시아나를 꼭 껴안았다.
“무서워하지 마.”
라시드는 새 왕비 외에 베라의 이름에도 예민하게 반응했다.
“너를 대하는 모습이 영 불쾌한데.”
시아나가 기가 차다는 듯 눈썹을 모았다.
“베라는 여자인 데다가 저와 함께 새 나라를 건국한 동료일 뿐이에요. 지금은 저와 함께 나라를 이끌 의원이고요.”
그럼에도 라시드는 경계를 풀지 않았다.
다음에 신 아실론드에 가게 되면 꼭 자신도 따라가야겠다며.
결론적으로 시아나의 이야기를 다 들은 라시드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너를 총리로 추대하다니 그 나라의 국민들은 앞으로 태평 성대할 자격이 있군. 더없이 훌륭한 선택이야.”
라시드의 말에 시아나가 쿡쿡 웃었다.
총리직의 임기는 5년이었다.
그 짧은 기간 동안 얼마큼 나라를 발전시킬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최선을 다해 볼 생각이었다.
시아나가 라시드와 눈을 마주치며 물었다.
“전하도 어떻게 지냈는지 말해 주세요.”
전보를 통해 틈틈이 상황을 설명했던 시아나와 달리, 라시드는 제국의 상황을 자세히 말한 적이 없었다.
라시드가 긴 손가락 사이로 시아나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입을 열었다.
“시아나 네가 없는 동안 이곳에도 많은 일이 있었지. 가장 큰 일은 귀족의 7할 이상이 내 쪽으로 붙었다는 거야.”
“……!”
시아나가 눈을 크게 떴다.
시아나는 제국을 떠나기 전 라시드에게 귀족 세력을 모을 것을 당부했다.
‘하지만 7할이라니.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대단한데.’
라시드가 시아나의 의아함을 익히 짐작했다는 듯 말을 이었다.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어. 앙겔루스 공작을 내 편으로 만든 후에는 모든 것이 수월했으니까.”
과연 앙겔루스 공작의 힘은 대단했다. 그는 저를 따르던 귀족을 한 명도 빠뜨리지 않고 라시드 쪽으로 데려왔다.
“하지만 앙겔루스 공작의 힘만으로 나머지 귀족들을 전하의 편으로 만드는 데는 한계가 있었을 텐데요.”
귀족들 중에는 황제와 황후에게 충성하는 이들이 많았다.
시아나는 그들이 쉽게 라시드에게 오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안정된 권력을 쥔 황제와 황후를 등지면서까지 라시드를 택할 이유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시아나가 생각하지 못했던 변수가 있었다.
황제였다.
“아바마마께서 긴 요양을 다녀온 후 달라지셨다는 것은 너도 알고 있지?”
시아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는 긴 요양을 다녀온 이후로 변했다.
작은 것 하나 감시하고 간섭하며 불같이 화를 냈던 지난날과는 달리, 심드렁한 얼굴로 모든 것에 무관심해진 것이다.
라시드가 말을 이었다.
“워낙에 변덕스러운 분이니 다들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어. 저러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 호랑이처럼 으르렁거리실 거라고.”
하나 그 시간이 점차 길어졌다.
라시드가 대놓고 세력을 모아도, 황후와의 사이가 점차 악화되어도, 황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황제의 눈치를 살피던 귀족들은 생각했다.
‘저렇게 조용히 계시는 걸 보니 황제 폐하께서는 권력에 대한 야망을 잃으신 것이 아닐까?’
‘이제 정말 황태자 전하께 모든 권위를 양도하고 쉬고 싶으신 건지도 모르지.’
아예 가능성이 없는 말은 아니었다.
황제는 수많은 자식 중에 유독 라시드를 총애했으니까.
라시드가 눈을 깔고 말했다.
“그런 상황이니 귀족들은 굳이 나와 적대 관계에 놓일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어. 아바마마만 아니면 어마마마는 실상 힘이 없으니까.”
잔혹한 말이지만 진실이었다.
황후는 인자했기에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았으나 그것이 권력과 직결되지는 못했다.
그녀는 한미한 남작가의 딸이었으며, 황후가 된 후에도 그녀의 모든 권력은 황제와 아들인 라시드에게서 나왔기에.
황제와 라시드가 그녀의 손을 들어주지 않는다면 황후의 눈치를 볼 이는 없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야기를 듣던 시아나가 이제야 납득이 된다는 얼굴로 말했다.
“그래서 황족들과 황후 폐하께서 순순히 저의 업적을 인정해 주신 거군요.”
라시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라시드가 시아나의 부드러운 볼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그러니 시아나, 이제 걱정할 것 없어. 어마마마는 더 이상 우리의 관계를 반대하지 못하실 테니.”
라시드의 목소리가 묘했다.
기뻐하는 것 같기도 하고, 어딘가 씁쓸해하는 것 같기도 했다.
시아나는 복잡한 얼굴로 라시드를 바라보다가 그를 꼭 껴안으며 씩씩하게 웃었다.
“먼 곳을 다녀온 보람이 있네요.”
그러나 왜일까.
마음 한구석이 서늘했다.
친어머니에게 인정받지 못한 라시드에 대한 안타까움 때문일까.
‘그저 그것 때문이라면 다행인데…….’
시아나는 불안한 마음을 감추려는 듯 라시드를 안은 손에 힘을 주었다.
* * *
짝!
황후가 성난 얼굴로 매섭게 손바닥을 내리쳤다.
그녀에게 뺨을 맞은 이는 놀랍게도…… 황제였다.
황후가 소리를 질렀다.
“이 얼간이 같은 놈! 이 머저리!”
우아하고 인자한 황후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고는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독한 말이었다.
그럼에도 황제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 그저 무표정한 얼굴로 아픔이 느껴지는 제 뺨을 어루만질 뿐.
그것이 화가 나 다시 한번 뺨을 휘갈기려는 황후를 시녀 이블린이 막았다.
“그만하십시오. 한 번 더 손을 대면 때린 흔적이 남습니다.”
“…….”
황제의 곁에는 수많은 시종과 시녀가 있었다. 그들에게 불미스런 흔적을 내보여서 좋을 것이 없었다.
황제가 황후와 만난 직후라면 더더욱.
황후가 이를 악물더니 겨우 손을 내렸다.
황후가 이마를 감싸며 의자에 털썩 내려앉았다. 그녀의 곁으로 이블린이 다가왔다.
“괜찮으십니까?”
“아니, 조금도 괜찮지 않아.”
황후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황후는 긴 시간 황제를 설득하여 요양을 떠났다. 세간에 알려진 사실처럼 황제의 두통을 없애 주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황후는 오랜 시간을 들여 황제에게 정신 마법을 걸었다.
그 마법에 걸린 이는 흡사 바위처럼 감정이 사라진다. 그래서 어느 것에도 무관심하고, 어느 것도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게 된다.
겉으로만 멀쩡할 뿐, 바보 천치가 되는 것이다.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는데…….”
황후에게는 라시드가 있었다.
황제가 얌전히 있어 주면, 황후는 라시드를 통해 절대적인 권력을 잡는 것이 가능했다.
그러나 아니었다.
마리오네트처럼 제 말에 움직이던 라시드가 반항을 시작한 것이다.
한낱 여자에게 빠져.
황후는 정말이지 미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분노로 파르르 떠는 황후의 주먹을 감싸 준 것은 이블린이었다.
“진정해, 마리아.”
“…….”
“겨우 찾아 낸 마법사가 곧 황궁에 도착할 거야. 그자만 있으면 황제에게 더 강력한 마법을 걸 수 있어.”
이번에야말로 황제는 황후의 뜻대로 움직이는 인형이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더 이상 누구도 널 휘두를 수 없어. 이번에야말로 네가 원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어.”
황후는 그 말이 유일한 희망이라는 듯 애처로운 얼굴로 이블린을 바라보았다.
이내 황후가 이블린의 품속에 얼굴을 묻으며 중얼거렸다.
“꼭, 꼭 그래야 해. 저 끔찍한 남자도, 그자의 아들도 모두 불행해져야 한다고.”
그것이 그들이 죗값을 치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 * *
‘라시드의 연인 시아나가 황후의 시련을 통과했다.’
—라는 소식은 이내 일파만파 퍼져 나갔다.
특히 귀족들은 난리가 났다.
“세상에, 결국 그 시녀가 해냈군요.”
“시녀가 아니에요. 아실론드 왕국의 공주죠.”
“어머나, 그것도 온전한 표현은 아니네요. 지금은 공주가 아니라 새로 시작한 나라의 총리라던걸요?”
“총리라고요?”
구 아실론드 왕국의 마지막 남은 공주이자 신 아실론드의 총리.
상반된 두 신분을 갖게 된 시아나의 이야기는 흥미진진하기 짝이 없었다.
그뿐인가.
“황후의 시련을 통과하였으니 시아나 님이 황태자 전하의 약혼녀가 되시겠군요.”
불과 얼마 전까지 황궁의 시녀였던 시아나가 이 제국에서 손꼽히는 권력자의 옆에 나란히 선다는 말이었다.
귀족들은 눈을 번뜩였다.
그들은 권력의 냄새에 누구보다 기민하게 반응했다.
이내 귀족들은 앞다투어 애정과 관심을 듬뿍 담은 편지를 썼다.
수취인의 이름은 당연히 시아나 아실론드 폰 실리테.
그러나 다 쓴 편지를 봉투에 넣은 귀족들은 여지없이 눈썹을 찡그렸다.
“그런데 이 편지를 어디로 보내면 되는 거지요?”
누군가 대답했다.
황태자 전하의 궁으로 보내면 된답니다.
* * *
여전히 시아나는 황태자궁에서 지내고 있었다.
이전에 지냈던 방은 아니었다.
그보다 훨씬 크고 넓은 손님용 방을 받았다.
편안한 드레스를 입은 시아나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는 전하의 시녀가 아니라 예비 약혼녀이니 이 방에서 나가는 게 맞지만 그러질 못했어.’
별다른 이유 때문은 아니었다.
라시드가 떼를 썼기 때문이다.
[시아나, 너는 먼 곳에서 온 나의 소중한 연인이야. 나에게는 나의 아기 다람쥐에게 안전하고 따스한 숙소를 제공해 줄 의무가 있지. 그러니 이곳에서 지내도록 해.]
[하지만 전하…….]
[귀족들도, 아니 하다못해 평민들도 그러잖아. 귀한 손님이 오면 제 집에 있는 방 한 칸을 주고 묵게 하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야.]
묘하게 설득이 되는 말이었다.
결국 시아나는 잠시만 더 황태자궁에 머무르기로 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결혼도 하지 않았는데 계속 이곳에 있을 수는 없어.’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에 관해 많은 말이 나올 것이 분명했다. 시아나는 그런 구설수에 오르는 것은 사양이었다.
‘마땅한 숙소를 구하면 이곳을 나가자.’
물론 쉬운 일은 아니었다.
라시드를 설득해야 했기에.
게다가 시아나는 요즘 거처를 신경 쓸 만한 여유가 없었다. 왜냐하면…….
“시아나 공주님, 오늘 도착한 편지입니다.”
아실론드에서 따라온 시녀 가넷의 손에는 수북이 쌓인 봉투가 들려 있었다.
모두 제국 귀족들에게서 온 편지들이었다.
가넷이 놀란 얼굴을 감추지 못하고 중얼거렸다.
“요 며칠 내내 편지가 많이 왔는데도 도통 줄어들 기미가 안 보이네요.”
가넷의 옆에 있던 시녀 리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말이에요. 이 주일 동안 온 편지를 다 합하면 백 장은 족히 넘을 거예요.”
어마어마한 양이었다.
그러나 두 시녀를 더 놀라게 한 것은 시아나가 수백 장의 편지에 일일이 화답한다는 것이었다.
책상 앞에 앉아 몇 시간 내내 쉬지 않고 편지를 쓰는 시아나를 보며 가넷이 물었다.
“꼭 그렇게 하나하나 다 답장을 하셔야 하나요? 이러다가 공주님 건강이 상하시면 어쩌나 걱정돼요.”
시아나가 빙그르 웃으며 말했다.
“걱정해 주어서 고마워요. 하지만 괜찮아요. 가넷도 알다시피 나는 보기보다 체력이 좋잖아요.”
“하지만…….”
“그리고 이 일은 아주 중요한 일이에요.”
시아나는 눈을 내리깔았다.
라시드는 시아나가 없는 동안 수많은 귀족들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었다.
대단한 성과였다.
그럼에도 라시드와 귀족의 관계는 아직 불안정했다.
귀족들이 라시드를 따르는 것은 오로지 그의 막강한 힘, 그에 따른 두려움 때문이기에.
‘그것으론 안정적으로 힘을 다지는 데 한계가 있어. 전하는 황제가 될 분이니까.’
라시드와 귀족 사이에는 보다 깊은 신뢰와 긴밀하게 다져진 관계가 필요했다.
그래서 시아나는 편지를 보낸 모든 귀족들에게 답장을 했다.
지방에 작은 땅 하나 가진 것이 전부인 소귀족이나, 이제는 몰락하여 이름만 남은 귀족들도 빠뜨리지 않고.
그들은 아무 기대 없이 보낸 편지에 황태자의 약혼녀가 답장을 준 것만으로 크게 기뻐할 것이다.
“인망이라는 것은 높은 곳에서 아래로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아래에서부터 단단하게 기반이 다져지는 것이니까요. 이 편지로 인해 저에 대한 인망이 높아지면 자연스럽게 전하에 대한 인식도 달라질 거예요.”
시아나가 헤실헤실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신 아실론드의 입지도 높아지겠죠. 저로서는 1석 3조의 이득을 얻는 셈이랍니다.”
“…….”
멍하니 시아나를 바라보던 가넷이 중얼거렸다.
“역시 우리 공주님은 피의 황태자에게 너무 과분해.”
라시드가 들었다면 당장 도깨비 같은 얼굴을 할 말이었다.
어쨌건 시아나는 가넷의 응원 속에 답장을 다 썼다. 그렇다고 하루 일과가 모두 끝난 것은 아니었다.
오후에는 보다 본격적인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가넷, 리나. 연회장 갈 준비를 해 주세요.”
“네.”
시아나는 두 시녀의 도움을 받아 준비를 시작했다.
답장 한 장으로 모든 귀족들의 마음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만나 친분을 쌓아야 했다.
그래서 시아나는 매일 귀족들이 초대한 연회에 참석하고 있었다.
방 안에 있는 동안 화장기 없는 소담한 얼굴에 편안한 드레스 차림이었던 시아나는 이내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만개한 5월의 장미꽃처럼 화려해진 얼굴, 수백 개의 사파이어가 촘촘히 박힌 녹색 드레스, 바람에 살랑대는 밀색 머리카락은 비단실처럼 부드럽고 고왔다.
시아나의 치장을 도운 가넷과 리나가 평생 느껴 본 적 없는 희열을 느낄 만큼 엄청난 변화였다.
‘어쩜 우리 공주님은 이렇게 고우실까.’
오래전 시아나가 아실론드 왕국에 있을 때에는 전혀 몰랐던 아름다움이었다.
넋을 놓은 시녀들 사이로 깊은 호수처럼 낮고 은은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말 예뻐, 시아나.”
어느새 방에 들어온 라시드였다.
시아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기사단 훈련이 저녁 늦게까지 있다고 했잖아요.”
그래서 시아나는 라시드 없이 연회에 참석할 생각이었다.
어림없는 소리였다.
라시드가 시아나의 곁에 다가가 그녀의 손을 잡아 올리며 말했다.
“귀족 놈들이 바글바글한 곳에 너를 혼자 보낼 순 없지. ……게다가 연회장에서라도 함께 있지 않으면 너와 있는 시간이 부족하잖아.”
귀족들과의 관계를 다지느라, 약혼식 준비를 하느라 시아나는 바빴다.
라시드도 마찬가지였다.
최소한의 일만 하고 빈둥대기 일쑤였던 이전과 달리, 적극적으로 정무를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두 사람은 같은 궁에서 지내고 있어도 거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그나마 아침 식사 후의 티타임 때나 모든 일이 끝난 한밤중에 잠시 얼굴을 볼 뿐이었다.
라시드가 진지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약혼식이 아니라 결혼식을 해야 하는 것 아닐까. 그럼 적어도 어둠이 내려앉은 밤에는 너를 독차지할 수 있으니.”
“전하!”
망측한 이야기에 시아나가 눈을 부릅뜨며 소리를 질렀다.
이미 라시드의 저런 말에 면역이 된 시녀들과 호위 기사 솔은 또 시작이다, 라는 얼굴로 눈을 가늘게 뜰 뿐이었지만.
* * *
하프의 아름다운 운율과 만개한 형형색색 튤립. 황홀해질 만큼 아름다운 연회가 열린 곳은 크로이텐 백작가였다.
크로이텐 백작 부부와 외동딸 레이첼은 손님들을 맞으며 힐끗힐끗 연회장 입구를 살폈다.
잠시 후, 그들이 목 놓아 기다렸던 손님이 도착했다.
황태자 라시드와 그의 연인 시아나였다.
두 사람이 등장하는 순간 연회장이 술렁거렸다.
빠른 걸음으로 두 사람에게 다가 온 크로이텐 백작 부부가 상기된 얼굴로 인사를 건넸다.
“어서 오십시오, 황태자 전하. 그리고 시아나…….”
호칭을 어찌해야 할지 고민하는 백작을 향해 시아나가 웃으며 말했다.
“공주라고 불러 주십시오.”
시아나는 라시드의 연인으로 나선 자리에서 만난 이들에게는 공주라는 호칭을, 신 아실론드와 관련되어 만나는 이에게는 총리라는 호칭을 썼다.
시아나가 호칭을 정리해 주자 백작은 환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시아나 공주님, 요즘 공주님을 찾는 곳이 많을 텐데 저희 크로이텐 백작가를 선택해 주셔서 무한한 영광입니다.”
입에 발린 아부가 아니었다.
귀족들이 시아나에게 보낸 편지의 반은 연회의 초대장이었고, 사교계에서는 시아나가 오늘 어느 귀족가의 연회에 참석하느냐가 큰 이슈였다.
“저야말로 아름다운 연회에 함께하게 되어 기쁩니다.”
겸손하게 인사를 한 시아나는 저를 바라보는 백작의 딸 레이첼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일전에 황궁에서 레이첼 양을 만났을 때 크로이텐 백작가의 튤립 정원을 꼭 한번 보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드디어 보게 되었네요. 듣던 것보다 훨씬 아름답습니다.”
상냥한 말에 백작 부부와 딸 레이첼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인사를 마치자마자 수많은 귀족들이 라시드와 시아나에게 다가왔다.
귀족들의 시아나를 향한 관심은 단순히 그녀가 황태자의 약혼녀가 될 여인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귀족들은 정말로 시아나에게 궁금한 것이 많았다.
“신 아실론드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역사적으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평화롭게 새 나라가 건립되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뿐인가요. 공주님께서는 신 아실론드의 총리로 추대되셨다지요. 도대체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나요?”
일각에서는 신 아실론드에서 제국에 보낸 신비로운 꽃에 대한 관심도 지대했다.
“황궁에서 한번 보았을 뿐이지만 정말 아름다웠습니다. 듣기로 꽃이 가진 능력은 더 대단하다고 하더군요. 워낙 희귀한 보물인지라 이후에는 보기가 힘들어졌지만요.”
신비로운 꽃은 모두 황궁에서 엄격하게 관리를 하고 있었다.
덕분에 꽃에 관심이 많았던 귀족들은 안달이 났다.
“혹시 그 꽃을 개인적으로 구입할 수 없습니까?”
시아나는 귀족들 한 명 한 명에게 성의를 다해 대답을 해 주었다.
흥미로운 내용, 상냥한 말투, 우아한 태도, 깊이 있는 지식.
귀족들은 정말이지 시아나와 대화하는 것이 너무나 즐거웠다.
시아나의 옆에 선 황태자 라시드의 눈치를 살피는 것을 잊어버릴 만큼.
라시드는 눈을 가늘게 뜨고 시아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저 여자, 시아나에게 너무 가깝군. 저 여자는 왜 저렇게 실실 웃으며 시아나를 쳐다보는 거지?’
그나마 라시드가 얌전히 있을 수 있었던 것은 시아나의 곁에 있는 이들이 모두 여인이었기 때문이다.
남자들은 시아나에게 한 발짝도 다가갈 수가 없었다. 조금이라도 그런 낌새가 보이면 라시드가 섬뜩한 기운을 풍기며 눈을 부릅떴으니까.
제아무리 시아나가 매력적인 여인이라고 해도, 하나뿐인 목숨을 버려 가면서까지 대화할 생각은 없었다.
대신 은근슬쩍 라시드의 곁으로 다가와 말을 건넸다.
“황태자 전하를 이렇게 연회장에서 뵙게 되니 참으로 가슴이 벅찹니다.”
라시드는 오랜 시간 전쟁터에 있었고, 황궁에 머무를 때도 연회에는 거의 참석하지 않았다.
하지만 최근에는 매일 시아나와 함께 얼굴을 비치고 있었다.
엄청난 사건이었다.
남자들이 상기된 감정을 감추지 못하고 말을 이었다.
“전하, 정장을 갖춰 입으신 모습이 정말이지 눈부십니다. 연회장에 있는 여인들이 힐끗힐끗 쳐다보며 얼굴을 붉히는 것이 절로 이해가 된다고 할까요.”
“전하, 제가 전하의 빈 잔에 와인을 따라드려도 되겠습니까?”
그러나 열심히 말을 걸어오는 남자들이 불쌍할 정도로 라시드는 반응이 없었다.
그때였다.
“전하, 송구합니다만 전하와 시아나 공주님의 사랑 이야기를 궁금해하는 귀족들이 많습니다. 두 분이 어떻게 인연이 닿았는지 이야기를 해 주실 수 있나요?”
당돌한 말을 한 것은 아버지를 따라 연회장에 온, 이제 막 열네 살이 된 앳된 소년이었다.
그 말에 귀족들이 경악한 얼굴로 입을 쩍 벌렸다.
‘어찌 전하께 저런 무엄한 질문을 한단 말인가!’
다른 이도 아닌 피의 황태자였다.
일개 신하가 주인의 사생활을 캐묻느냐며 목을 날려 버려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러나…….
싸늘했던 라시드의 눈빛이 대번에 반짝였다. 라시드는 고개를 휙 돌려 소년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와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싶으냐?”
“예!”
힘차게 고개를 끄덕인 소년을 향해 라시드는 입을 열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질문을 한 소년과 얼떨결에 함께 이야기를 듣던 남자들은 괴로운 얼굴을 할 수밖에 없었다.
“시아나가 타 준 차 맛은 정말 최고야. 어떤 찻잎이라도 최고급 차로 만들지. 그뿐인가, 그녀가 차를 따르는 모습은 나비처럼 우아해. 그녀가 차 따르는 순간이면 숨 쉬는 것도 잊고 그녀를 바라볼 만큼.”
라시드가 하는 말은 온통 시아나가 훌륭하다, 시아나가 예쁘다, 시아나가 사랑스럽다, 시아나가 똑똑하다, 시아나가 음식을 꼭꼭 씹어 잘 먹는다, 따위의 내용이었다.
남자들은 억지웃음을 지으며 생각했다.
‘황태자 전하께서 시아나 공주님께 푹 빠져 있다고 하더니 아니었어.’
푹 빠져 있는 정도가 아니라 아주 그냥 미쳐 있었다.
그럼에도 남자들은 입꼬리를 풀 수 없었다. 제발 좀 그만하시라고 정색할 수도 없었다.
안 그래도 살짝 제정신이 아니었던 황태자가 지금은 완벽하게 제정신이 아니라는 사실에 큰 두려움을 느꼈기에.
저쪽에 있던 라시드를 바라보며 중년의 귀부인이 빙긋이 웃었다.
귀부인이 옆에 앉아 있던 시아나에게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늘 과묵하시던 황태자 전하께서 저렇게 사람들과 즐겁게 대화를 나누시는 모습을 보다니 정말 신기하네요. 저게 다 시아나 공주님 덕분이겠죠?”
귀부인의 말에 시아나는 난처하다는 듯 웃으며 대답했다.
“음, 아마도요?”
그런 시아나가 귀엽다는 듯 귀부인의 눈매가 더더욱 휘어졌다. 그 모습이 4황비 안젤리나와 꼭 닮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이분은 안젤리나 황비마마의 어머니이신 빌헬름 후작 부인이니까.’
시아나가 본격적으로 사교 활동을 시작한 첫날, 그녀가 먼저 시아나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제국 사교계는 쉽지 않은 곳이에요. 규모가 크고 복잡한 예법이 많은 데다 까탈스러운 구석이 있어서, 조금만 실수해도 사람들이 등을 돌려 버린답니다. 아무리 영특하신 공주님이라도 쉽지 않을 곳이 분명하지요. 그래서 말인데요. 제가 시아나 공주님이 사교계에 빠르고 원활하게 적응하실 수 있게 도움을 드려도 될까요?]
빌헬름 후작 부인이 그런 말을 건넨 것은 황태자의 약혼녀가 될 시아나에게 줄을 대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딸인 안젤리나와 손주인 레이시스를 도와준 시아나에 대한 감사의 의미가 컸다.
그것을 알고 있던 시아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후, 빌헬름 후작 부인은 시아나가 참석하는 연회마다 따라와 많은 것을 알려 주었다.
“에스타 후작 부인은 공주님에게 관심이 하나도 없는 것처럼 저 멀리 서 있지요? 하지만 그건 부인의 성격이 소심하고 겁이 많아 그런 것뿐, 공주님에 대한 관심이 대단하답니다. 공주님께서 먼저 다가가 주시면 분명 크게 기뻐할 거예요. 제가 가진 것을 다 내놓고 싶어 할 만큼이요.”
“아뮬란 백작 부인은 털털해 보이는 모습과 달리 속마음은 여우처럼 계산이 빠르고 약은 자랍니다. 조금의 손해를 보는 것도 참지 못하고 조금이라도 이득이 될 일이 있으면 기민하게 움직이죠. 그러니 그녀를 움직이고 싶은 일이 있다면 친분을 쌓기보다는 확실한 대가를 제시하세요.”
과연 그녀는 이름 높은 빌헬름 후작가의 안주인이었다.
빌헬름 후작 부인은 긴 시간 사교계에 몸담고 있었던 만큼 귀족들에 대해 많은 것들을 알고 있었다.
덕분에 시아나는 예상했던 것보다 수월하게 귀족들과 친분을 다질 수 있었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연회가 끝날 무렵이 되었다.
내내 시아나의 주위를 가득 채웠던 귀족들도 어느새 사라졌다. 시아나는 그 틈을 타 빌헬름 후작 부인에게 인사했다.
“오늘도 감사했습니다, 부인.”
빌헬름 부인이 곱게 웃었다.
“아니에요. 저야말로 공주님을 지켜보는 것이 무척 즐거웠는걸요.”
시아나는 열여덟 살이란 나이처럼 순진하게, 때로는 수십 년간 산 노부인처럼 노련하게 귀족들과 대화를 나누었다.
‘안젤리나가 왜 그렇게 이 어린 공주님이 대단하다고 칭찬했는지 알겠어.’
그리고 고약하기 짝이 없는 그녀의 남편, 빌헬름 후작이 시아나를 떠올리며 벌벌 떠는 것도 이해가 갔다.
과거, 안젤리나와 레이시스의 일로 저를 협박하던 시녀가 사실은 타국의 공주이며 황태자의 연인이라는 충격적인 사실을 안 빌헬름 후작은, 요즘 방 안에 틀어박혀 손톱을 깨물고 있었다.
혹 안젤리나와 시아나가 아직 저를 싫어하고 있으면 어떻게 해야 하냐며.
그 모습을 떠올린 빌헬름 후작 부인은 흥, 하고 비틀린 미소를 지었다.
‘못된 양반. 이 기회에 마음고생 제대로 하고 더러운 성질머리 좀 죽였으면.’
빌헬름 후작 부인은 진심으로 기도하며 와인 잔을 홀짝였다.
그런 빌헬름 후작 부인을 바라보던 시아나가 물었다.
“그런데 후작 부인, 한 가지 물어볼 게 있습니다.”
“무엇이지요?”
시아나는 최근 수많은 귀족들을 만났는데, 그사이 느낀 이상한 점이 있었다.
“귀족들이 너무 스스럼없이 제게 다가오더군요. ……황후 폐하의 눈치를 조금도 살피지 않고요.”
물론 시아나도 라시드에게 들어 황후의 현재 위치에 대해 알고 있었다.
황제가 황후를 포함해 모든 것에 무관심해지고, 라시드는 황후와 극명하게 대립했다.
두 남자에게 지지받지 못한 황후의 힘은 급격히 약해진 상태였다.
그러나 그것을 감안해도 귀족들의 태도 변화가 너무 심했다.
“심지어 귀족들 중 일부는 황후 폐하에 대해 안 좋은 말을 하는 이도 있었어요.”
귀족들은 그토록 아들을 끔찍하게 사랑하던 황후 폐하께서 이런 처지가 되셨으니 어쩌느냐며 혀를 찼다.
기쁨을 감추지 못한 눈으로.
그 순간 시아나는 생각했다.
‘황후 폐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어.’
하지만 그 모습이 사실은 모래성처럼 한순간 허물어질 수 있는 가짜였다면?
시아나가 목소리를 낮추며 물었다.
“혹시 귀족들은 황후 폐하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던 건가요?”
“……!”
빌헬름 후작 부인은 살짝 커진 눈으로 시아나를 바라보다가 이내 눈썹을 내렸다.
“공주님께서는 평소에는 무척 상냥하신데 이럴 때는 참 직설적으로 말씀하시네요.”
빌헬름 후작 부인은 곤란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답을 회피하지 않았다.
“사실 공주님께서 보신 것이 맞습니다. 귀족들 중에는 진심으로 황후 폐하를 따르는 이가 많지 않아요.”
“……어째서인가요?”
시아나는 황후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녀가 라시드에게 온전한 사랑을 주지 않았기 때문에.
하지만 그것을 빼면 황후는 흠잡을 데가 없었다.
사치를 하지도 않았고, 만인에게 너그러웠으며, 행동 또한 우아하고 조심스러웠다.
귀족들이 싫어할 이유가 없었다.
빌헬름 후작 부인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귀족들에게는 도저히 황후 폐하를 존경할 수 없는 결정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황후 폐하께서 한미한 남작가 출신이니까요.”
사실 ‘한미한 남작가’라는 표현조차 아까울 정도였다.
황후의 친정 가문인 보아르네 남작가는 수도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동쪽 변방에 자리 잡고 있었다.
거기에 오래전에 재산까지 모두 탕진하고 수북한 빚만 남은, 그야말로 귀족이라는 것조차 부끄러운 상태였기 때문이다.
빌헬름 후작 부인이 말을 이었다.
“그래서 황제 폐하께서 보아르네 영애, 그러니까 지금의 황후 폐하와 결혼을 하겠다고 발표했을 때 수많은 귀족 가문들이 노여워했답니다.”
아무리 황제 폐하께서 원하시는 일이라도 저런 집안의 여인을 황후로 맞이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고귀한 황가와 황제 폐하의 명예에 먹칠을 하는 일입니다.
“물론 황제 폐하께서는 그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으셨어요. 그러기는커녕 보란 듯이 보아르네 남작가에 막대한 선물을 보내셨죠.”
황제는 보아르네 남작의 허물어져 가는 집을 허물고 으리으리한 대저택을 지어 주었고, 엄청난 양의 황금과 보석을 하사하여 빚을 모두 탕감할 수 있게 해 주었다.
남작에게 후작위를 주어 직위를 높여 주려고도 했다. 어찌 된 일인지 중간에 흐지부지되어 버렸지만.
“황제 폐하께서 그토록 열렬하게 원하니 귀족들도 더 이상 반대할 수 없었지요.”
결정적으로 이대로 황제와 귀족 사이의 반목이 길어지면 나라에 악영향을 끼치게 될 테니까.
귀족들은 한 발짝 물러나기로 했다.
“귀족들은 황제 폐하와 황후 폐하의 혼인을 축하해 주었습니다. 특히 귀족 여인들은 수도에 처음 올라온 황후 폐하를 살뜰히 챙겨 주었지요.”
아무리 꽃 같은 여인이 속살거려도 냉정하기 그지없는 황제 폐하의 마음을 빼앗다니 황후 폐하는 정말로 대단하세요.
천사처럼 고운 미모와 상냥한 마음씨를 가지고 계시니 가능했던 일이겠지요.
하지만…….
“그 말은 진심이 아니었어요. 귀족 여인들 중에는 황제 폐하께 연심을 품은 이가 많았고, 황후의 자리를 노리고 있던 이도 많았으니까요.”
그런 귀족 여인들에게 황후는 질투와 미움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황제 폐하의 총애가 대단하니 감히 그 마음을 표낼 수는 없었어요. 대신 귀족들 사이에는 은밀하게 황후 폐하에 대한 더러운 소문들이 나돌았죠.”
조용히 이야기를 듣던 시아나가 눈썹을 내렸다.
“소문이라면…….”
빌헬름 후작 부인이 잠시 주변을 살폈다.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빌헬름 후작 부인은 시아나에게 가까이 다가가 귓가에 속삭였다.
“황후 폐하께는 사랑하는 남자가 따로 있다.”
“……!”
“결혼을 약속할 만큼 깊은 관계였으나 황후 폐하는 매정하게 사랑하는 연인을 버렸다. 황제 폐하가 주는 반짝이는 황금 왕관에 눈이 멀어.”
충격적인 이야기는 거기에서 끝이 아니었다.
“황후 폐하를 잊지 못한 남자가 여러 번 황궁을 찾아왔다. 과거가 밝혀질까 봐 초조해진 황후 폐하는 남자를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여 버렸다.”
순간 시아나는 등 뒤가 서늘해졌다.
눈을 부릅뜬 시아나를 향해 빌헬름 후작 부인이 눈썹을 내리며 웃었다.
순진한 아가씨에게 겁을 주어 미안하다는 듯이.
“아까 말했잖아요. 귀족들이 악의적으로 만든 소문일 뿐이에요.”
“……거짓이라는 건가요?”
“높은 확률로요. 그토록 자애로운 황후 폐하께서 그런 무서운 일을 벌일 리가 없잖아요.”
무엇보다 그 당시의 황제는 황후에게 미친 듯이 빠져 있었다.
황후가 일개 시종이나 다른 귀족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눈을 번뜩이며 분노할 정도였다.
황후에게 다른 남자가 있었더라면 황제가 몰랐을 리가 없다.
있다 해도 가장 먼저 알아차리고 손을 썼을 테지.
“하지만 그것도 말이 안 되는 일이지요. 만약 그런 일이 있었더라면 황제 폐하와 황후 폐하가 그토록 사이가 좋으실 순 없을 테니까요.”
황제와 황후는 결혼한 지 이십 년이 다 되어 가는 지금까지도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그렇기에 귀족들은 황후에게 본심을 숨기고 내내 웃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최근 와서는 상황이 많이 변했지요.”
빌헬름 후작 부인이 눈을 내리깔며 말했다.
“그 틈을 타 몇몇 귀족들은 오랜 시간 꾹 눌러 담았던 진짜 속내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죠.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에요.”
그제야 황후와 귀족들의 관계에 대해 알게 된 시아나는 마음이 착잡했다.
‘전하께 황후 폐하와 대적할 수 있는 세력을 만들라고 하긴 했지만, 나는 두 분이 영원히 적대하길 바라는 게 아니야.’
황후가 라시드를 휘두르며 힘들게 하지 않는다면, 더 이상 그녀와 악화된 관계를 이어 가고 싶지 않았다.
‘누가 뭐래도 황후 폐하는 전하의 친어머니니까.’
라시드는 시아나의 앞에서 대놓고 표를 내지 않았지만 황후를 마음 깊이 사랑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시아나는 황후와 잘 지내고 싶었다.
라시드를 위해서라도.
* * *
황후궁.
조용히 앉아 있는 황후의 앞에 후드를 뒤집어쓴 사람이 나타났다.
그는 얼굴을 가리고 있던 후드를 벗었다.
이내 신비로운 얼굴이 드러났다.
핏기 하나 없는 얼굴과 새하얗게 센 긴 머리카락. 새까만 눈동자는 유난히 커 흰자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사내인지 여인인지 알 수 없는 것은 외양만이 아니었다.
“오랜만에 뵙는군요, 황후 폐하.”
아직 2차 성장이 오지 않은 아이처럼 높고 기묘한 목소리였다.
‘언제 보아도 소름 끼치는군.’
황후는 속마음을 숨기며 온화한 얼굴로 말했다.
“그래, 그간 잘 지냈나?”
“네, 아주 잘 지냈습니다. 아무 걱정 없이 마법 연구에 매진할 수 있었으니까요. 다 황후 폐하의 덕분이지요.”
그자는 일전에 황후에게 의뢰를 받아 황제에게 감정을 없애는 마법을 건 마법사 융이었다.
융은 그 일에 대한 대가로 황후에게 어마어마한 돈을 받았다.
단순히 마법을 성공시킨 것에 대한 값만은 아니었다. 그 일에 대해 함구하는 것에 대한 값까지 치른 것이다.
‘물론 그 돈이 아니었어도 황제에 대해 떠벌리고 다닐 생각은 조금도 없지만.’
세상에 알려지면 황후만큼 융도 곤란했다.
두 사람은 같은 배를 탄 공범자인 셈이었다.
융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황후 폐하께서는 저와 헤어지며 이제 다시 만날 일이 없을 거라고 하셨지요. 저도 그리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 이후로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저를 찾으셔서 놀랐습니다.”
황후가 눈을 내리깔며 말했다.
“그렇게 됐네. 그대에게 한 가지 더 부탁할 일이 생겼거든.”
그 말에 융의 새까만 눈동자가 빛났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가늠이 되지 않는 마법사의 눈을 바라보며 황후가 말했다.
“황제에게 마법을 걸어 주게. 내가 원하는 대로 그를 조종할 수 있도록.”
“……!”
융의 눈이 커졌다.
현재 황제에게 건 마법은 단순히 감정을 억누르는 것이다. 몸의 고통을 잠시 잊게 만드는 마취제 같은 것이랄까.
황제의 몸에도 아무런 해가 없었다.
오히려 황제는 평생 고통받았던 두통이나 정신적인 자극에서 벗어나 최고로 편안한 상태를 즐기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하지만 정신 조작 마법은 그와는 전혀 달랐다.
융이 말했다.
“마력을 머릿속에 침투시켜 억지로 정신과 육체를 조종하는 겁니다. 조종당한 이는 극도의 스트레스와 고통을 느끼게 되지요.”
잠시 말을 멈춘 융이 다시 입을 열었다.
“높은 확률로 황제 폐하의 정신은 산산조각 날 겁니다. 혹은 정신의 붕괴를 버티지 못하고 육체가 죽음에 이르실지도 모르지요.”
섬뜩하기 그지없는 말이었다.
그럼에도…….
황후는 웃었다.
더없이 기쁜 말을 들었다는 듯이.
“그 악마 같은 남자에게 참으로 어울리는 최후로구나.”
“…….”
웃음을 거둔 황후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일 당장 죽어서는 곤란해. 적어도 내가 원하는 것을 가질 때까지는 이용해야 하니까. 마법을 걸면 얼마나 버틸 수 있겠나?”
“……황제 폐하의 신체는 아직 강건하시지요. 최소한 3년은 버티실 겁니다. 그 이후는 어떻게 될지 장담할 수 없지만요.”
3년.
황후는 눈썹을 찡그렸다.
예상보다 짧은 시간이었기에.
그럼에도 황후는 계획을 강행했다.
“은밀하게 자리를 마련해 주겠네. 황제에게 마법을 걸어 주게.”
말없이 서 있는 마법사에게 황후는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어마어마한 대가를 제시했다.
“황제를 조종하는 데 성공하면 그대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주지.”
대륙 곳곳에 있는 수천 개의 마력석이든, 황궁 깊숙한 곳에 숨겨져 있는 고대 왕국의 보물이든, 황후는 지불할 의사가 있었다.
융은 탐욕스러운 자였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황후가 황제를 조종하여 어떤 상황을 만들지도 너무나 궁금했다.
대부분의 마법사가 가지고 있는 짓궂은 호기심이었다.
그래서 융은 두 눈을 가느다랗게 휘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황태자궁.
시아나는 오늘은 연회에 나가지 않았다.
이 주 뒤에 열리는 약혼식 때 입을 드레스와 착용할 액세서리를 고르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넓은 방 안에는 수도에서 최고로 손꼽히는 디자이너가 시아나를 위해 만든 여러 벌의 드레스가 걸려 있었다.
연보라색 드레스를 입은 시아나가 몸을 빙그르 돌렸다.
“어때요?”
시아나의 앞에 서 있던 라시드가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정말 예뻐.”
시아나는 물색 드레스로 갈아입고 라시드를 바라보았다.
라시드는 이번에도 두 눈을 부드럽게 휘었다.
“최고로 예뻐.”
“…….”
이후에 시아나가 몇 벌의 드레스를 갈아입었지만 반응은 붙여 넣은 것처럼 똑같았다.
아니, 조금 다르긴 했다.
“쿵쿵거리는 심장이 갈비뼈를 뚫고 튀어 나갈 정도로 예뻐.”
“왜 천사한테 날개가 없을까 의아할 정도로 예뻐.”
“네가 예쁘다고 생각하는 사람 손들어 봐, 라고 물으면 온 세상 사람들이 만세를 해서 하늘이 가려질 만큼 예뻐.”
듣다 못한 시아나가 정색한 얼굴로 눈썹을 모았다.
“도대체 그런 해괴한 말들은 어디에서 배워 온 거예요?”
“며칠 전, 아리스에게 편지가 왔었잖아. 어디 한번 약혼식을 치러 보라고. 약혼식 당일 동부의 군대를 죄다 몰고 와서라도 널 빼앗아 갈 거라고.”
“……그래서요?”
도대체 아리스의 협박과 라시드의 꿀 같은 말 사이에 무슨 상관이 있는 건지 시아나는 알 수가 없었다.
얼굴을 찡그린 시아나를 향해 라시드가 말했다.
“나는 어린 동생에게 너를 빼앗길 생각이 없어. 그래서 나름대로 대비를 하는 거야. 어떤 상황이 와도 네가 나를 선택할 수 있게.”
그제야 시아나는 라시드의 의도를 깨달았다.
“……설마 나한테 점수를 따려고 저런 해괴망측한 말들을 한 거예요?”
놀랍게도 라시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리스가 이런 말들을 했을 때, 너는 늘 환하게 웃었잖아.”
천진한 얼굴로 말하는 라시드를 보며 시아나는 기가 막혀 입술을 깨물었다.
‘그거야 어린 공주님이 저런 말을 하니 귀여워서 그런 거죠! 다 큰 성인 남자가 하니까 엄청나게 부담스럽다고요!’
무엇보다 방 안에는 라시드와 시아나 둘만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드레스를 만든 디자이너와 그녀가 데리고 온 직원들, 시아나의 시녀 두 명까지 있었다.
여인들은 라시드가 말할 때마다 ‘어머, 어머, 세상에!’라며 호들갑을 떨었다.
정말이지 시아나는 부끄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어휴, 전하의 의견을 들으려 했던 내가 바보지. 예상은 했지만 역시 전하는 개미 똥만큼도 도움이 되지 않아.’
시아나는 라시드의 의견을 깔끔하게 포기하고 후다닥 드레스를 골랐다.
가장 처음에 입었던 연보라색 드레스였다.
그 후에, 드레스에 어울릴 만한 액세서리와 구두까지 거침없이 골랐다.
‘어차피 상인들이 가지고 온 물건들은 모두 최상급인걸. 물건의 완성도는 비슷하니 내게 가장 잘 어울리는 것을 선택하면 그만이야.’
그런 시아나가 유일하게 신중하게 고른 것이 있었다.
약혼 반지였다.
시아나는 가늘게 뜬 눈으로 보석상이 가지고 온 반지들을 살펴보였다. 꼭 보석의 가치를 매기는 감정사처럼 진지한 얼굴이었다.
시아나는 이 반지를 봤다가, 저 반지를 봤다가 엄청나게 고민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라시드가 ‘보석상이 가지고 온 반지를 모두 구입해 열 손가락에 끼도록 하지.’라며 시아나에게 별 도움 되지 않는 말을 하려던 차였다.
시아나가 결심했다는 듯 반지 한 쌍을 손에 들었다.
“이것으로 하겠어요.”
시아나가 고른 것은 백금으로 만든, 심플하면서도 우아한 모양의 반지였다.
시아나가 말을 이었다.
“대신 반지에 박힌 다이아몬드는 빼고, 보라색 사파이어와 에메랄드를 넣어 주세요.”
보석상이 아, 하고 손을 마주치며 말했다.
“황태자 전하와 공주님의 눈동자 색과 같은 보석을 원하시는 거로군요.”
시아나는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보석상은 두 눈을 부드럽게 휘었다.
“두 분의 총명하고 아름다운 눈동자와 최대한 비슷한 보석을 찾아 반지를 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네, 그럼 부탁합니다.”
그것으로 오늘의 일정은 모두 마쳤다.
사람들이 모두 나간 후, 라시드가 시아나를 품에 껴안았다.
“아, 힘들어.”
라시드의 말에 시아나가 새초롬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루 종일 물건을 고른 건 나인데 전하가 힘들 게 뭐가 있어요?”
시아나의 옆에 있던 라시드가 한 것은 해사하게 웃으며 예뻐, 좋아, 다 사자, 같은 말뿐이었다.
그럼에도 라시드는 더없이 억울하다는 얼굴로 대답했다.
“네가 나를 보며 웃을 때마다 껴안고 입을 맞추고 싶은 걸 참느라 얼마나 힘이 들었는데.”
그러고는 시아나의 입술 위로 입을 쪽 맞추었다.
이내 라시드의 뽀뽀 세례가 시작되었다.
시아나의 동그란 볼에, 작은 꽃망울 같은 코에, 말랑말랑한 귓불에.
도저히 끝이 나지 않을 것처럼 이어지는 입맞춤에 시아나의 심장이 콩콩 떨렸다.
‘전하에게 내 심장 소리가 들리면 어쩌지.’
하지만 그 걱정은 기우였다.
쿵, 쿵.
그 순간 라시드의 심장 소리는 시아나와 비교되지 않을 만큼 훨씬 더 컸으니까.
시아나의 가는 목 위로 입술을 댄 라시드가 말했다.
“역시 안 되겠어. 이 주 후에 약혼식이 아니라 결혼식을 하는 게 어때?”
라시드는 요즘 말끝마다 결혼 타령이었다.
시아나 앞에서만 그런 것이 아닌지 호위 기사 솔이 괴로운 얼굴로 소리칠 정도였다.
“전하, 제발 그만하십시오. 아주 그냥 결혼에 환장한 사람 같습니다!”
솔이 했던 말을 그대로 따라 하는 시아나를 향해 라시드가 뻔뻔한 얼굴로 말했다.
“그 말대로야.”
라시드가 시아나의 가는 허리를 제 쪽으로 잡아당기며 말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네 모습을 보고 싶어. 같이 아침을 먹고, 점심을 먹고, 저녁을 먹고, 차를 마시고 싶어.”
해가 진 후, 밤하늘 아래 손을 잡고 산책을 하고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같은 침대에서 꼭 끌어안고 잠들고 싶었다.
“시아나, 너의 부드러운 밀색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 주며 자장가를 불러 줄 거야. 네가 잠들 때까지.”
시아나는 멍하니 라시드를 바라보다가 곤란하다는 듯 웃었다.
“제발 참아 주세요. 아직은 때가 아니니까요.”
아무리 두 사람 사이가 애틋하고 애정이 넘친다 해도, 한 번에 모든 걸 이룰 수는 없었다.
라시드는 거대한 제국의 황태자였으니까.
‘사실 이렇게 약혼식을 치르게 된 것만으로도 내게는 엄청나게 기적 같은 일이라고요.’
시아나는 제 처치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제아무리 시아나가 신비로운 꽃을 가진 왕족이며 신 아실론드의 총리라고 해도, 제국의 황태자인 라시드에 비하면 한참 부족했다.
그래서 시아나는 더 노력할 셈이었다.
시아나가 황태자비로서 그의 옆에 서는 순간, 누구도 이의를 달 수 없을 만큼.
‘약혼식을 마치면 더 열심히 해야지.’
귀족들과의 관계를 더 공고히 하고, 신비로운 꽃을 이용하여 신 아실론드를 부강하게 만들 것이다.
시아나는 그렇게 다짐하며 라시드의 가슴 위로 얼굴을 묻었다.
쿵, 쿵.
그의 단단한 가슴 너머로 심장 소리가 귓가에 들렸다. 시아나는 그 울림을 듣는 것을 무척 좋아했다.
어느덧 시아나의 손가락에 깍지를 끼며 지분거리는 라시드를 향해, 시아나가 말했다.
“참, 전하에게 예전부터 물어보고 싶은 게 있었어요. 어쩌다 보니 자꾸 말할 기회를 놓쳤지만요.”
“뭔데?”
“혹시 제가 모르는 황족 중에 전하와 비슷한 연배의 여인이 있으신가요?”
시아나의 물음에 라시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의아해하는 라시드를 향해 시아나가 말을 이었다.
“실은요…….”
시아나는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이야기를 꺼냈다.
시아나가 수습 시녀였던 시절, 사과 농장에서 일하는 농부들을 초대하여 티 파티를 열었던 때의 일이었다.
“애플턴 남작 부인이라고 착각한 귀족 여인이 있었는데 전하와 정말 닮았었거든요.”
은빛 머리카락, 보라색 눈동자, 아름다운 얼굴.
여인을 떠올린 시아나가 지금 와서 생각해도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꼭 전하가 여자로 변신이라도 한 것 같았다니까요.”
“응, 맞아.”
“……네?”
라시드가 두 눈을 부드럽게 휘며 말을 이었다.
“내가 그 여자가 맞는다고. 가짜 애플턴 남작 부인.”
“…….”
시아나의 눈이 점점 커지나 싶더니, 이내 꺅 하고 소리를 질렀다.
“저, 전하가 그 여인이었다고요?!”
“응.”
“하, 하지만…….”
시아나는 여인을 떠올렸다.
여인치고 키가 크긴 했다. 목소리도 좀 낮았고.
하지만 봉긋한 가슴과 잘록한 허리, 부드러운 목소리를 가진 완벽한 여자였다!
“전하가 아무리 대단한 기술자를 불러 여장을 했다 해도 그렇게까지 바뀔 수는 없다고요!”
라시드가 그게 뭐가 문제냐는 듯 웃었다.
“신체를 바꿔 주는 마력석을 이용했지.”
“아, 그렇구나…… 라고 넘어갈 수 있을 리가 없잖아요! 왜 그런 중요한 사실을 지금까지 말하지 않은 거예요!”
큰 의미는 없었다.
그저 잊고 있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라시드는 시아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시아나의 얼굴이 토마토처럼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라시드가 슬그머니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화났어?”
“화난 게 아니라 너무 놀라서 그래요.”
“……미안. 꼭 말해야 할 만큼 중요한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어.”
진심이었다.
라시드는 시아나를 보면 그저 그녀가 좋다, 예쁘다, 사랑한다 따위의 말만 생각났으니까.
시아나는 기가 찬 얼굴로 라시드를 바라보며 말했다.
“우리는 연인 사이잖아요.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이야기하면 좋겠어요. 저는 전하께 하나도 숨기는 일이 없…….”
그 순간 시아나는 말을 멈추었다.
잊고 있었던 이야기가 하나 더 떠올랐기 때문이다.
시아나가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전하, 제가 황태자궁에 맨 처음 왔을 때 했던 이야기 기억나세요?”
“무슨 이야기?”
“겨울 왕국 공주님의 이야기요.”
“……!”
라시드는 단번에 시아나가 말한 이야기가 무엇인지 알아챘다.
추위를 많이 타서 방 밖을 나갈 수 없었던 겨울 왕국의 공주님.
그런 공주님에게 작은 새가 해님을 한 조각 선물해 주어, 공주님이 행복해졌다는 동화였다.
시아나에게 그 말을 들었던 라시드는 정색하며 시아나에게 물었다.
[그 이야기, 누구에게 들었지?]
시아나는 놀라 대답했다.
고향에서 전해져 오는 오래된 이야기일 뿐이라고.
하지만 아니었다.
“사실 저는 그 이야기를 다른 사람에게 들은 게 아니에요. 책에서 본 것도 아니고요. ……제가 만든 이야기예요.”
“……!”
눈을 크게 뜬 라시드를 향해 시아나가 눈썹을 내리며 말했다.
“거짓말을 해서 죄송해요. 그때 전하의 표정이 너무 심각해서 사실대로 말할 수가 없었어요.”
라시드는 화내지 않았다.
대신 시아나를 끌어안더니 소리쳤다.
“나에게 그 이야기를 해 준 사람이 바로 너였구나, 너였어!”
라시드의 목소리에는 엄청난 기쁨이 어려 있었다.
라시드의 품속에서 시아나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그때도 느꼈지만 전하는 그 이야기를 해 준 사람을 무척 찾고 싶었나 봐.’
그렇다면 좀 더 빨리 이 이야기에 대해 말하는 것이 좋았을까?
하지만 시아나는 그럴 수 없었다.
왜냐하면 시아나는 라시드에게 그 이야기를 해 준 사람이 자신일 거라고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시아나가 눈썹을 내리며 말했다.
“하지만 전하, 저는 이전에 전하를 만나 이 이야기를 해 준 적이 없어요.”
시아나가 눈썹을 모으며 중얼거렸다.
“8년 전에 한 아이를 만나 이야기를 들려 준 적이 있긴 하지만요. 하지만 그 아이는 전하가 아닐 거예요.”
그 아이는 라시드와 꼭 닮은 외모를 하고 있었다. 나이대도 얼추 맞았다.
그럼에도 시아나는 그 아이가 라시드와 동일인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때, 그 아이는 목숨을 위협받고 있었으니까.
시아나는 혹시나 싶어 그것에 대해 조사를 한 적이 있었다.
라시드는 황태자였다.
만약 그런 엄청난 일을 겪었더라면, 아무리 입막음을 했어도 흔적이 남았을 것이다.
그러나 황궁에서 오랜 시간 일했던 시녀나 시종들은 하나같이 고개를 내저었다.
단 한 번도 황태자 전하에게는 그런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난 적이 없다며.
라시드는 시아나의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래. 네 말대로 나는 한 번도 그런 일을 겪은 적이 없어. 적어도 내가 기억하는 한.”
“아…….”
“전에 말했었지. 나는 겨울 왕국 공주의 이야기가 기억날 뿐, 그 이야기를 해 준 사람의 얼굴은 조금도 기억나질 않는다고.”
라시드는 그 이야기를 몇 살 때, 어디에서 들었는지 하나도 생각나지 않았다.
마치 동그란 파이에서 한 조각을 완전히 잘라 낸 것처럼, 아무것도.
그럼에도 라시드는 확신할 수 있었다.
“그 이야기를 해 준 사람은 네가 분명해.”
왜냐하면…….
“그 사람의 목소리는 조금도 기억나지 않지만 어렴풋하게 남아 있는 느낌이 있거든.”
봄처럼 따뜻했다.
꼭 너처럼.
* * *
“나에게 그 이야기를 해 준 사람은 네가 맞아, 시아나.”
라시드가 너무나 강하게 확신했기에 시아나는 생각을 바꾸었다.
‘어쩌면 8년 전 남부의 휴양지에서 내가 본 아이가 전하였을지도 모르겠어.’
하지만 여전히 의문점은 남아 있었다. 왜 라시드는 그때를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것일까.
‘큰 충격을 받으면 기억을 잃는 경우도 있다고 들었어.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기억 한 뭉치가 완전히 사라진 건 너무 이상하잖아.’
여러 가지 고민 끝에 시아나는 한 가지 가설을 세웠다.
8년 전, 남부의 휴양지에서 라시드는 누군가에게 목숨을 위협당했다.
다행히 라시드는 살아남아 목숨을 부지했다.
그 후, 세상에 이 일이 알려지는 것을 원치 않았던 누군가가 황궁의 기록을 조작했다.
‘……어떤 방법을 썼는지 알 수 없지만 전하의 기억 또한.’
시아나의 얼굴이 굳었다.
‘만약 이 가설이 사실이라면 도대체 누가 그런 일을 벌인 거지?’
그만한 일을 그토록 조용하게 은폐했다면 대단한 권력자가 연관되어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이를테면 황제나 황후 같은.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시아나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설마.’
라시드는 황태자였다.
황제는 모든 자식들에게 무심한 것과 달리 라시드를 유독 총애했다.
황후도 마찬가지였다.
‘황후 폐하께서 전하를 손안의 인형처럼 조종하시고 싶어 하는 건 사실이야. 하지만 전하를 낳으신 친모인걸.’
그런 두 사람이 굳이 그런 일을 벌이고 덮을 이유가 없었다.
그러기는커녕 감히 라시드의 목숨을 해하려 했던 사건을 공개적으로 알리고, 범인을 잡아 더없이 잔혹한 형을 내렸을 것이다.
누구도 다시는 황태자에게 그런 짓을 할 수 없도록.
시아나의 얼굴이 혼잡해졌다.
도저히 어떻게 된 일인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시아나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중얼거렸다.
“제대로 조사를 해 볼 필요가 있겠어.”
하지만 시아나는 그럴 수 없었다.
며칠 뒤, 청천벽력 같은 황제의 명령이 내려졌기 때문이다.
“폐하께서 출정 명령을 내리셨다고요?”
시아나는 눈을 커다랗게 뜨고 물었다.
라시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오늘 라시드는 황제를 알현했다.
황제는 요양을 다녀온 후 모든 일에 무심했다. 그 어떤 사람도 먼저 부른 적이 없었다.
그렇기에 그것은 무척 이례적인 일이었다.
라시드가 눈을 내리깔며 말했다.
“갑자기 불러 무슨 말을 하실까 했더니, 병사를 이끌고 아슬란에 가라 하시더군.”
시아나는 눈을 크게 떴다.
아슬란. 대륙의 최북부에 위치해 있으며, 오직 눈과 얼음으로만 뒤덮인 혹독한 땅이었다.
누구도 관심 갖지 않는.
시아나가 굳은 얼굴로 물었다.
“그런 곳에 왜 가라고 하시는 건데요?”
“새하얀 눈의 땅에 제국의 깃발을 꽂고 오라고 하셨어.”
“…….”
잠시 할 말을 잃은 시아나가 화가 난 얼굴로 말했다.
“제국이 몇 년간 함락시켰던 다른 나라들과 달리 아슬란은 얻어 낼 게 아무것도 없어요. 자원이 있는 것도 아니고, 교통의 요지인 것도 아니고, 상징적인 의미가 있는 땅도 아니죠. 그런 곳을 점령하는 것은 무의미한 짓이에요!”
얼굴이 빨개진 시아나를 바라보며 라시드가 물었다.
“내가 떠나는 게 싫어?”
시아나가 소리를 빽 질렀다.
“당연하죠!”
사실 시아나는 라시드와 잠시 떨어져 있는 것으로 불안해하거나 슬픔에 사무칠 만큼 마음이 약하지 않았다.
필요한 일이라면 얼마든지 그를 기다릴 수 있었다.
“하지만 아슬란으로 가는 것은 납득이 갈 만한 이유가 전혀 없잖아요.”
그뿐인가.
그곳은 그저 다녀오는 것만으로, 생명을 장담할 수 없을 만큼 춥고 매서운 땅이었다.
시아나는 라시드를 그런 곳에 보내고 싶지 않았다.
시아나는 평소와 달리 초조함이 물씬 어린 얼굴로 말을 이었다.
“제가 황제 폐하를 만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 주세요. 황제 폐하를 어떻게든 설득해 볼게요. 이 의미 없는 출정 명령을 당장 거두어 달라고요.”
“…….”
라시드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는 얼굴로 시아나를 바라보다가 눈썹을 내리며 웃었다.
그러고는 참지 못하겠다는 얼굴로 시아나의 작은 몸을 꽉 껴안았다.
“그렇게 하지 않아도 돼. 내가 아바마마께 출정하지 않겠다고 말씀드릴 테니까.”
그의 말에 잠시 입을 다문 시아나가 라시드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그래도 돼요?”
사실 라시드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황제의 명령을 거역한 적이 없었다.
아니, 라시드만이 아니라 이 황궁에 있는 황족은 누구라도 마찬가지였다.
그만치 황제의 권력은 절대적이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아니지.”
황제가 편안히 황궁에서 사치를 일삼는 동안, 라시드는 전쟁터에서 피를 묻히며 군대를 장악했다.
황제가 몸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정무를 놓은 사이, 라시드는 수많은 귀족들을 제 편으로 만들었다.
라시드가 힘이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의 나는 아바마마라도 함부로 대할 수 없어.”
“…….”
시아나는 복잡한 얼굴로 입술을 깨물었다.
라시드의 말대로였다.
현재 황제와 황태자의 힘은 비등비등했다. 아니, 라시드 쪽이 미세하게 우위였다.
생기를 잃고 저물어 가는 황제와 달리 라시드에게는 젊음과 미래가 있었으니까. 시간이 갈수록 라시드의 세력은 점점 불어날 터였다.
하지만 여전히 황제는 만만한 존재가 아니었다.
‘전하가 명령을 거역하면 폐하께서 무척 노하실 거야. 그럼 전하께서는 무척 곤란해지시겠지.’
그럼에도…….
시아나는 라시드를 말릴 수 없었다. 아니, 말리고 싶지 않았다.
대신 시아나는 라시드의 목에 두 팔을 감으며 말했다.
“힘든 일이겠지만, 황제 폐하께 최대한 공손하게 말해 주세요. 황제 폐하께서 화를 내셔도 조용히 들어 주시고요. 부탁이에요.”
그 말에 라시드가 눈썹을 내렸다.
시아나의 목소리가 너무나 간절했기 때문에.
라시드는 알고 있었다.
시아나가 이토록 애달프게 제게 그런 말을 하는 이유를.
“나와 아바마마 사이에 싸움이라도 날까 봐 겁이 나나 보구나.”
“솔직히 그래요.”
라시드는 시아나의 두려움을 온전히 이해했다.
비록 그 힘이 예전 같지 않을지라도, 황제는 황제였다.
제대로 부딪힌다면 치열한 전쟁이 일어날 터였다.
라시드는 고개를 숙여 시아나를 내려다보았다.
저를 바라보는 시아나의 동그란 눈동자에 불안함이 가득 차 있었다.
‘그렇게 되면 너는 조금도 행복하지 않겠지.’
시아나의 평화로운 일상은 산산조각 나 버릴 것이다.
그것도 약혼식을 며칠 앞두고.
라시드는 시아나에게 그런 험난한 시간을 겪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라시드는 두 눈을 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아바마마께서 감히 내 명령을 거역하느냐며 손에 든 지팡이를 휘두르시거나 얼굴에 침을 뱉어도 그저 죄송합니다, 라고 말하며 고개를 숙일게.”
시아나는 그것은 또 그것대로 끔찍하다는 듯 울 것 같은 얼굴을 했지만, 라시드는 웃었다.
시아나가 원한다면 그런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 * *
라시드는 단정하게 옷을 갖춰 입었다.
황제를 알현하기 위해서였다.
황제궁 앞에 선 호위 기사 솔이 긴장 어린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그럼 다녀오십시오, 전하.”
라시드는 고개를 끄덕이며 궁 안으로 들어갔다.
공적인 대화라면 모를까, 황제는 사적인 대화를 할 때 다른 이가 곁에 있는 것을 싫어했다.
그래서 황제와 만날 때는 신하를 빼고 홀로 가야 했다.
드높은 천장과 으리으리한 기둥. 황금으로 번쩍거리는 황제궁을 거닐며 라시드는 잠시 생각에 빠졌다.
황제에게는 4명의 아들과 7명의 딸이 있었다.
황제는 자식들에게 무심했지만, 라시드에게는 유독 총애가 대단했다.
황제는 라시드가 태어난 날, 온 나라에 안식일을 선포하고 어마어마한 양의 황금과 비단을 신전에 바쳤다.
무사히 세상에 태어난 아들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서였다.
그뿐이 아니었다.
라시드가 황궁에서 일말의 부족함 없이 지낼 수 있도록 풍족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으며, 해마다 라시드의 생일에 맞추어 어마어마한 연회를 열어 주었다.
‘아바마마께 셀 수 없이 많은 것을 받은 것은 사실이야. ……하지만 아바마마의 사랑은 거기까지였지.’
라시드에게는 황제와 아무런 추억도 없었다.
황제는 어린 아들을 찾아오는 일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다만 일주일에 한 번씩 황제가 황후궁에 찾아와 함께 식사를 할 때면, 그는 종종 라시드를 불렀다.
늘 혼자 음식을 먹던 어린 라시드에게 아버지, 어머니와 함께하는 식사 시간은 무척 설레는 일이었다.
세 사람이 함께 긴 테이블에 마주 보고 앉았다.
황후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라시드에 대한 칭찬을 늘어놓았다.
[선생들이 하나같이 라시드가 영특하고 운동 능력도 뛰어나다고 놀란답니다.]
그때마다 황제는 대견하다는 듯 라시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라시드는 그 순간이 너무 좋아서 이 시간이 오래도록 계속되었으면, 하고 바랬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것이 말도 안 되는 바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식사를 마친 황제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황후는 웃으며 황제를 배웅했다.
황제가 황후궁을 나서자마자…… 황후가 몸을 비틀거렸다.
[어마마마!]
라시드가 놀라 황후에게 다가갔다. 작은 손으로 황후를 부축하려는 순간,
[만지지 마!]
황후가 새된 비명을 지르며 라시드의 손을 쳤다.
갑작스러운 통증에 눈을 부릅뜬 라시드를 멍하니 쳐다보던 황후가 이내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미, 미안하다, 라시드. 속이 안 좋아서 나도 모르게 손이 나가 버렸구나. 나는 좀 쉬어야겠으니 넌 이만 네 방으로 돌아가거라.]
자상한 목소리였다.
그러나 라시드는 아직도 선명히 기억했다.
그때 자신을 보는 황후의 눈빛에는 분노가 가득 차 있었다. 금방이라도 어린 아들의 목을 졸라 버릴 것처럼.
그리 즐겁지 않은 기억을 떠올린 라시드의 아름다운 얼굴에 표정이 사라졌다.
‘……이제는 다 지난 일일 뿐이야.’
라시드는 이제 부모의 사랑을 바라며 눈을 빛내는 아이가 아니었다. 황후에게 조금이라도 인정받고 싶어 애썼던 시기도 지났다.
나약한 소년에서 어엿한 남자로 자란 그에게 중요한 것은 이제 한 여인뿐이었다.
시아나.
동그란 얼굴과 선한 에메랄드색 눈동자를 떠올리자 가슴 한편이 간질거렸다.
그제야 딱딱했던 라시드의 얼굴에 미소가 살짝 어렸다.
‘아바마마와 한시 빨리 이야기를 끝내고 돌아가자.’
라시드가 거대한 문을 열었다.
라시드는 눈을 크게 떴다.
황금과 보석으로 번쩍이는 황제의 방에 두 사람이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황제와 황후였다.
“어마마마께서 왜 여기에…….”
라시드를 향해 황후가 눈을 내리깔며 말했다.
“폐하께서 너와 이야기를 나눈다고 하셔서 동석했다. 요즘 넌 내 궁에는 코빼기도 비치지 않아 얼굴 보기도 힘들지 않느냐.”
“…….”
“거두절미하고 말하마, 라시드. 폐하의 명령을 따르거라.”
아슬란으로 떠나란 이야기였다.
황후를 바라보던 라시드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꼭 5년 전 같군요.”
5년 전, 열세 살이 된 아들을 붙잡고 황후는 말했다.
[병사를 이끌고 출정을 하거라, 라시드. 전쟁에서 활약을 하면 단번에 황태자로 인정받을 수 있어.]
라시드는 군말 않고 황후의 말을 따랐다.
쉬지 않고 검을 휘둘러 사람의 목숨을 빼앗았다. 썩은 시체가 가득한 곳에서 식사를 하고 잠을 잤다.
고통스러운 시간이었다.
다행히 황후의 말처럼 대가는 확실했다.
전쟁터에서 돌아온 라시드는 불세출의 전쟁 영웅으로 추앙받으며 황태자의 자리에 올랐으니까.
라시드가 눈썹을 내리며 황후에게 말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때와는 상황이 다릅니다. 아슬란을 점령해 보았자 제국도 저도 얻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것은 네가 판단할 게 아니다. 황제 폐하께서 명령하시면 순순히 따라야지. 그것이 황태자의 도리란다.”
도리.
황후의 말에 라시드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제아무리 둔한 라시드라도 알고 있었다.
‘속으로는 아바마마께 치를 떠는 분이 그런 말을 하시다니.’
라시드가 눈썹을 내리며 말했다.
“이곳에 있는 것은 아바마마와 어마마마, 저 셋뿐이니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두 분은 사실 북쪽의 버려진 땅이야 어떻게 되든 상관없지 않습니까.”
“…….”
“두 분이 진짜 원하는 것은, 제가 다가올 약혼식을 치르지 못하고 황궁을 떠나는 것이 아닌지요.”
라시드의 말에 황후의 얼굴이 단번에 차가워졌다.
황제는 그저 말없이 라시드를 바라보고 있었다.
숨 막히는 정적 속에 황후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 말이 맞다.”
황후가 시아나를 인정한 것은 반박의 여지없이 황후의 시련을 통과했기 때문이다.
황후의 시련에 대한 결과는 제아무리 황제나 황후라도 군말 없이 받아들여야 했다.
그것이 오래된 규율이었다.
황후가 일그러진 얼굴로 말했다.
“하지만 난 여전히 그 아이가 마음에 들지 않아. 지금이라도 네가 그 아이와의 약혼을 파기했으면 좋겠구나. 아니면 기약 없는 원정을 떠나던가.”
그것이 황후의 속내였다.
당치도 않은 일이었다.
5년 전이라면 모를까, 라시드는 이제 어엿한 성인이며 힘을 가진 황태자였다.
제아무리 그녀가 황후이며 친모라 해도, 그를 이런 식으로 휘두를 수는 없었다.
하지만 라시드는 황후의 말에 반박을 하거나 분노를 표하는 대신 눈을 내리깔았다.
그리고…….
“……!”
황후가 눈을 부릅떴다.
라시드가 황제와 황후의 앞에 무릎을 꿇은 것이다.
라시드가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
“아바마마, 어마마마. 저는 그녀를 마음 깊이 사랑합니다. 그래서 그녀를 두고 먼 곳으로 떠나고 싶지 않습니다. 그것이 나라와 제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일이라면 더더욱.”
놀란 얼굴로 저를 바라보는 두 사람을 향해 라시드가 말을 이었다.
“원정은 떠나지 않겠습니다. 부디 저의 의사를 존중해 주십시오.”
맑고 고요한 목소리였다.
“…….”
황후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라시드는 황제와 황후의 적자였으며, 일찌감치 차기 황제로서 기대를 받으며 자랐다.
그렇기에 라시드는 누구에게도 무릎을 꿇거나 고개를 숙인 적이 없었다.
하물며 황제와 황후 앞에서도.
‘그런 애가 저런 모습을 보이다니…….’
어떤 여인은 생전 본 적 없는 아들의 모습에 가슴이 에이는 슬픔을 느낄 것이다. 또 누군가는 제가 바라는 것을 의젓하게 말하는 아들의 모습에 감탄을 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황후는 둘 다 아니었다.
그녀의 안에 꾹꾹 눌러 담았던 분노가 회오리처럼 휘몰아쳤다.
황후가 섬뜩한 얼굴로 라시드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나는 분명 마지막 기회를 줬어. 그것을 차 버린 것은 너야.”
“……?!”
이해할 수 없는 황후의 말에 라시드가 눈을 크게 떴다.
그 순간, 조용히 자리에 앉아 있던 황제가 벌떡 일어섰다.
“그럼 안 돼, 라시드. 어마마마의 말을 들어야지. 너는 착한 아이이지 않느냐.”
황제는 가까이에 있던 라시드가 알아듣지 못할 만큼 작은 소리로 웅얼거렸다.
그러더니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
라시드는 눈을 크게 떴다.
황제의 손에 날이 시퍼런 검이 들려 있었기 때문이다.
검의 크기는 작았으나 섬뜩한 칼날은 사람을 상처 입히기에 충분해 보였다.
검을 들고 저를 내려다보는 황제와 눈이 마주친 찰나의 순간, 라시드는 생각했다.
‘아바마마가 나를 해하려는 건가.’
만약 그렇다면 라시드는 황제에게 신체의 일부를 내어 줄 생각이 있었다.
황제에게 부상을 입는다면, 라시드는 황제와 대립할 수 있는 명분을 얻게 되는 셈이었으니까.
하지만…….
라시드는 눈을 부릅떴다.
황제의 손에 들린 검이 조금도 예상치 못한 곳으로 움직인 것이다.
팟-.
날카로운 검이 살을 베는 소리와 함께, 황제의 몸에서 피가 솟구쳤다.
쨍그랑.
황제의 손에 들려 있던 검이 바닥에 떨어졌다.
동시에 황후가 날카롭게 소리 질렀다.
“폐하!”
황후의 비명에 문 앞에 대기하고 있던 기사들이 방 안으로 밀려들었다. 황제의 호위 기사들이었다.
황제의 옆구리에서 새빨간 피가 뚝뚝 흐르는 것을 보고 기사들의 얼굴이 경악에 가득 찼다.
“도, 도대체 누가 이런 짓을……!”
황제는 핏기가 사라진 얼굴로 손을 들었다. 벌벌 떨리는 손이 가리킨 이는 라시드였다.
황제가 말했다.
“당장 저놈을 잡아라! 짐을 시해하려던 대역 죄인이다!”
조금도 예상 못한 상황에 라시드는 천천히 눈을 깜빡거렸다.
그리고 보았다.
황제의 뒤에서 미세하게 입꼬리를 올리고 있는 황후의 모습을.
* * *
황태자궁. 시아나는 초조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아바마마께 최대한 어여쁘게 이야기를 하고 올게. 그러니 걱정하지 마.]
라시드는 부드러운 얼굴로 말하며 황제를 알현하러 갔다.
시아나는 라시드를 믿었다.
‘전하는 살짝 제정신이 아니긴 하지만 거짓말은 절대 하지 않는 분이야.’
게다가 시아나에게 한 말은 무엇이라도 꼭 지켰다. 라시드는 시아나에게 말한 대로 행동할 것이다.
그럼에도 시아나는 불안함을 감출 수 없었다.
황제 때문이다.
시아나는 황제와 제대로 말 한마디 나눈 적 없었기에 그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그러나 황궁에서 지내며 황제의 변덕스러운 성정에 관해서 수없이 들어왔다.
‘황제 폐하는 아침에는 불꽃처럼 활활 타오르다가, 낮에는 얼음보다 차가워지신다지. 그러다가 밤에는 가을바람처럼 온화해지는 분이라고.’
그런 황제의 명령을 라시드가 거부하는 순간, 황제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도저히 예측할 수가 없었다.
시아나는 기도하듯 두 손을 마주잡으며 생각했다.
‘제발 일이 커지지 않고 이야기가 잘 끝나야 할 텐데…….’
그때였다.
시아나는 눈을 크게 떴다. 목에 걸려 있던 도토리가 빛을 내뿜은 것이다.
시아나가 놀란 얼굴로 도토리를 잡고 소리쳤다.
“라시드.”
주문을 외자 도토리에서 라시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아나./
시아나가 대답하기도 전에 라시드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너무 놀라지 마. 무서워하지 마. 걱정하지 마. 식사 잘 챙겨 먹고 잠도 잘 자도록 해. 금방 네게 돌아갈 테니./
“그게 무슨…….”
/사랑해./
그것이 끝이었다.
도토리에서 새어 나오던 빛이 사라지더니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시아나가 다시 한번 도토리를 향해 주문을 외려던 차, 벌컥 하고 문이 열렸다.
호위 기사 솔이었다.
솔의 일그러진 얼굴을 본 시아나는 무언가 안 좋은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확신했다.
솔이 다급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전하께서 황제 폐하 시해 미수범으로 몰려 체포되셨습니다!”
“……!”
상상도 못했던 이야기에 시아나는 숨을 멈추었다.
솔이 말을 이었다.
“분노한 황제 폐하께서 황태자궁에 있는 사람을 모두 잡아 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반역자와 공모를 한 한패거리라면서요.”
“……!”
“개소리죠. 일개 시종이나 시녀가 뭘 알겠습니까. 황제가 노리는 건 바로 시아나 님입니다.”
시아나를 손에 넣는 순간, 황제는 가장 손쉽게 라시드를 휘두를 있는 무기가 생기는 법이니까.
“지금 당장 황궁을 떠나십시오, 시아나 님. 전하께서 예상치 못한 일이 생기면 시아나 님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빠르게 말을 내뱉은 솔이 손을 들었다.
그 순간, 보이지 않는 곳에 숨어 있었던 블랙 쉐도우 기사단이 나타났다.
검은 갑옷을 입은 기사 한 명이 시아나를 안았다.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공주님의 발이 빠르신 건 알지만 지금은 일촉즉발의 상황이니 저희가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시아나는 당장 그들의 손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이대로 죄를 뒤집어쓴 라시드를 두고 떠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그럴 수가 없었다.
‘지금 여기에서 버텨 보았자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어.’
솔의 말대로였다.
잡히면 라시드를 옭아맬 사슬만 될 뿐이었다.
시아나는 하고 싶은 말을 참고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가는 두 팔에 힘을 주어 저를 안은 기사의 목을 안았다.
솔이 그런 시아나를 바라보며 인사를 건넸다.
“모쪼록 건강하십시오, 시아나 님.”
그 말이 황태자궁에서 들은 마지막 말이었다.
이내 블랙 쉐도우 기사단이 시아나를 데리고 번개처럼 빠른 속도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황궁의 깊숙한 곳에 위치한 새하얀 탑.
‘죄인의 탑’이라고 이름 붙여진 탑의 꼭대기 층에는 한 남자가 두 팔이 묶인 채 갇혀 있었다.
라시드였다.
라시드는 눈을 내리깔고 중얼거렸다.
“시아나.”
“…….”
“시아나.”
그러나 목에 걸린 마력석은 반응하지 않았다.
마력석에 부여되어 있던 세 번의 기회를 다 썼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아니, 사용할 수 있는 기회가 남아 있었다고 해도 시아나의 목소리는 연결되지 않을 것이다. 이곳은 모든 마력이 차단된 특수한 공간이었으니까.
그것을 알고 있음에도 라시드는 계속 시아나의 이름을 불렀다.
혹시나 기적 같은 일이 벌어져 잠시라도 그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며.
그때였다.
끼이익-.
저 멀리서 탑의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철창 너머로 등장한 이는 황후와 그녀의 시녀 이블린이었다.
이블린이 한 발짝 뒤로 물러서고, 황후는 철창을 향해 한 발짝 앞으로 나왔다.
황후가 라시드의 모습을 눈에 담으며 눈썹을 내렸다.
“정말이지 끔찍한 몰골이구나, 라시드.”
황제 시해 미수범으로 지목된 후, 라시드는 순순히 붙잡히지 않았다.
무기도 없는 상태에서 열댓 명의 기사들을 때려눕히고, 이후에는 기사들에게서 빼앗은 검을 가지고 수십 명이 넘는 기사들을 베었다.
과연 피의 황태자다운 대단한 솜씨였다.
하지만 마법과도 같은 능력은 거기까지였다.
아무리 라시드라도 갑옷과 무기를 제대로 갖춘 수십 명의 기사들을 모두 이겨 낼 수는 없었다.
결국 라시드는 붙잡혔다.
수많은 상처와 핏자국이 뒤엉킨 엉망진창인 모습으로.
라시드의 처참한 모습을 보며 황후가 츳, 하고 혀를 찼다.
“얌전히 붙잡히지 그랬느냐. 그랬다면 최소한 황태자로서의 품위를 지킬 수 있었을 텐데.”
라시드는 황후의 말에 반응하는 대신 물었다.
“아바마마의 상태는 어떠십니까.”
“폐하는 피를 많이 흘리셔서 정신을 잃으셨다가 지금 깨어나셨다. 한동안 안정을 취해야 하는 상태지만 다행히 생명이 위태롭지는 않단다.”
“…….”
“하지만 폐하가 죽지 않아 다행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폐하께서 일어나시자마자 네 목을 잘라야 한다고 노발대발 난리가 아니니까.”
감옥에 갇힌 아들에게 친부의 서슬 퍼런 분노를 알리는 황후의 얼굴에는 묘한 기쁨이 어려 있었다.
라시드는 그런 황후를 빤히 쳐다보다가 천천히 입술을 뗐다.
“어마마마께서 아바마마를 조종하고 계신 겁니까?”
허를 찌르는 말이었다.
그러나 황후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그러기는커녕 태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예상했던 대답이었다.
그럼에도 라시드는 온몸이 차갑게 식는 기분이 들었다.
라시드는 황후가 황제를 살뜰히 챙기고 웃어 주는 것이 모두 거짓인 것은 진즉 알고 있었다.
하지만 라시드는 그것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라시드는 황후가 황제를 미워해도 상관없었다.
왜냐면 라시드는 무조건 황후를 따를 생각이었으니까.
그래서 라시드는 황후가 전쟁터로 떠나라고 하면 떠났고, 황태자가 되라고 하면 됐다.
아마 황제에게 반역을 저지르라 했다면 그 말도 순순히 들었을 것이다.
‘……시아나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지금은 아니었다.
라시드는 더 이상 어머니의 손에 조종당할 수 없었다.
이제 라시드의 영혼과 육체를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그녀뿐이었으니까.
그렇기에 라시드는 한시라도 빨리 이곳을 빠져나가야 했다. 시아나를 위해서.
라시드는 바로 본론을 꺼냈다.
“제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시아나를 이 제국에서 쫓아내거라. 그리고 다시는 만나지 마.”
“……그녀가 그렇게 마음에 들지 않으십니까?”
라시드의 말에 황후는 우습다는 듯 작은 미소를 띠었다.
“그렇지 않다. 영특하고 귀여운 아이라고 생각해.”
“…….”
“다만 그 아이는 너를 너무 휘두르더구나. 네가 답지 않게 귀족들을 만나 세력을 다진 것도 다 그 아이 때문이 아니냐.”
약혼식을 치르기 전에도 이럴진대 결혼식을 치른 후면 더더욱 말할 것도 없었다.
시아나는 라시드를 등에 업고 황후와 대적할 것이다.
황후는 그따위 며느리는 사양이었다.
“그 아이와 헤어지면 너의 죄를 사면해 주고 황태자의 직위도 복권해 주마.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가는 거야.”
원래대로.
라시드는 그 안에 숨겨진 뜻을 알아챘다.
예전처럼 황후의 말에 순종하는 꼭두각시 인형이 되라고 말하는 것이다.
라시드의 아름다운 얼굴이 한없이 싸늘해졌다.
“…….”
지금 라시드의 상황은 최악이었다.
진실이야 어찌 되었건 라시드는 황제 시해 미수범으로 붙잡혔다. 아무리 라시드가 황태자라 해도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중죄였다.
황제의 명령만 있다면 내일이라도 라시드는 목이 잘릴 수도 있었다.
물론 라시드에게도 그를 지지해 주는 세력이 있었다.
귀족들과 군대였다.
그러나 라시드의 죄가 명확한 만큼 그들도 적극적으로 움직이기 힘들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라시드를 구해 줄 이는 황제를 조종하고 있는 황후뿐이었다.
……그럼에도 라시드는 황후의 손을 잡을 수 없었다. 그러고 싶지 않았다.
라시드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제가 어마마마의 제안을 거절하면 어쩌실 생각입니까.”
라시드는 황후의 욕망을 잘 알고 있었다.
황후는 어린 라시드를 엄격하게 가르치고 전쟁터로 내몰았다. 그것은 모두 라시드를 차기 황제로 만들기 위함이었다.
그런 황후가 자신을 이대로 버릴 수 있을까?
놀랍게도 황후는 그럴 생각이었다.
“예전과는 달리 폐하가 내 손아귀에 있어. 그가 있으면 두려울 것이 없지.”
“…….”
“말 안 듣는 인형은 버리면 그만이란다, 라시드.”
도저히 어미가 제 배로 낳은 자식에게 하는 말이라고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혹독하고 섬뜩한 말이었다.
그럼에도 라시드의 눈빛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저 알고 있었던 사실을 들은 것처럼 담담할 뿐이었다.
그것이 황후를 거슬리게 만들었다.
황후가 한 발짝 걸음을 내디뎌 철창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무표정한 라시드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 너는 예전부터 네 목숨 따위는 어찌 되든 상관없어 했지. 하지만 시아나가 연관이 되도 그렇게 태연할 수가 있겠느냐?”
“……!”
그 순간 고요했던 라시드의 눈동자가 번뜩였다.
그것을 본 황후의 눈빛에 희열이 가득 찼다.
황후가 말을 이었다.
“라시드 네가 이대로 황제 시해범의 낙인이 찍히면 약혼녀인 시아나 공주 또한 공범으로 몰아넣을 수 있다.”
시아나는 신 아실론드의 총리이며 유일한 공주였다.
그러나 그것은 제국 황실의 위엄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황후는 황제를 휘둘러 언제든 시아나를 짓밟을 수 있었다.
그녀의 신분, 위치, 그리고 목숨까지도.
그 순간이었다.
철컹-!
라시드의 두 손을 억압하고 있던 쇠사슬이 끊어졌다. 어마어마한 힘이었다.
초인 같은 힘에 황후가 놀랄 틈도 없이 라시드가 그녀의 곁으로 다가왔다.
라시드가 철창 사이로 팔을 뻗었다. 핏줄이 솟아난 손이 황후의 가는 목을 움켜잡았다.
라시드가 분노가 인 목소리로 말했다.
“시아나의 머리카락 하나도 손대지 마십시오. 그런 일을 벌이면 아무리 당신이라도 용서하지 않을 겁니다.”
“흐읍…….”
목을 죄여 오는 힘에 황후는 도저히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무섭고, 고통스러웠다.
죽음이 다가왔다고 느낀 순간이었다.
“마리아!”
이블린의 목소리에 황후는 눈을 크게 떴다.
눈을 깜빡인 황후는 그제야 방금 전 일이 현실이 아님을 깨달았다.
모든 것은 환상이었다.
저를 무시무시하게 노려보는 라시드의 보라색 눈동자와 마주친 순간, 밀어닥친 공포심이 보여 준 환상.
황후를 부축한 이블린이 말했다.
“괜찮아?”
“…….”
황후는 그 말에 대답하는 대신, 철창 너머에 있는 라시드를 보았다.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치운 악귀도 저런 눈빛은 하지 않으리라.
그제야 황후는 ‘피의 황태자’라는 아들의 끔찍한 별명을 떠올렸다.
황후가 입술을 벌벌 떨며 중얼거렸다.
“역시 넌 그 남자의 아들이야. 징그러워. 소름 끼쳐. 아예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걸!”
저주 같은 말을 내뱉은 황후는 겨우 감정을 가다듬고 말했다.
“오래 기다리진 않을 거다. 딱 일주일의 시간을 주마. 그때까지 답을 주거라.”
편하게 고민하라고 그만한 시간을 주는 것은 아니었다.
황후는 라시드에게 음식은 물론 물 한 모금도 주지 않을 생각이었다.
목숨을 위협하는 극한의 고통 속에서 라시드는 답을 내릴 것이다.
‘이대로 황제 시해범이 되어 개죽음을 당할지, 아니면 죄를 벗고 다시 나의 인형이 될지.’
황후가 라시드에게 들을 답은 둘 중 하나뿐이었다.
* * *
시아나는 황궁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저택에 와 있었다.
라시드가 비상사태를 대비하여 마련해 둔 비밀 거처였다.
저택에는 블랙 쉐도우 기사단, 그리고 시아나를 모시는 네 명의 하인들이 있었다.
시아나는 초조한 얼굴로 입술을 깨물며 의자에 앉아 있었다.
잠시 후, 블랙 쉐도우 기사 한 명이 문을 열고 들어섰다. 그를 본 시아나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상황이 어떻게 되고 있나요?”
“황태자 전하께서 황제 폐하와 황후 폐하를 알현하는 자리에서, 황제 폐하께 검을 휘두르셨습니다. 황제 폐하께서 상처를 입긴 하셨지만 다행히 목숨에 지장은 없다고 합니다.”
중요한 사실이었지만 시아나는 그보다 더 급하게 알고 싶은 것이 있었다.
“전하는요?”
“황제 폐하를 시해하려 한 죄로 죄인의 탑에 갇히셨습니다.”
“……!”
시아나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죄인의 탑.
극악무도한 짓을 저지른 황족을 가두는 곳이었다.
그곳에 갇힌 자는 누구도 만날 수 없었으며, 엄중한 감시로 인해 탈옥을 꾀할 수도 없었다.
죄인이 탑에서 나올 때는 오로지 황제가 내린 독약을 먹고 시체가 된 후뿐이었다.
시아나가 말도 안 된다는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전하는 황제 폐하를 시해하려는 짓 따위 하지 않았어요!”
감정적으로 라시드를 옹호하는 말이 아니었다.
라시드는 빠져나갈 틈도 없이 범인으로 몰릴 상황에서 그런 일을 저지를 만큼 감정적이지도, 멍청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시아나에게 상황을 보고한 기사가 난처한 얼굴로 대답했다.
“전하께서는 ‘피의 황태자’라는 섬뜩한 별명을 가지셨지요. 게다가 최근에는 눈에 띄게 자신의 세력을 다지기까지 하셨고요.”
기사가 말을 이었다.
“황제의 자리가 탐난 황태자 전하께서 앞뒤 가늠하지 않고 무자비한 짓을 벌인 것이 아니냐는 여론이 형성되고 있습니다.”
시아나의 얼굴이 창백하게 굳었다.
오랜 시간 제대로 정무를 보지 않아 권력이 약해지긴 했으나 황제는 황제였다.
그는 이 제국에서 가장 고귀한 존재였다. 그런 황제의 목숨을 해하려고 했다는 사실은 많은 이들을 분노케 만들었다.
제국의 영웅인 라시드라도 피해 갈 수 없을 만큼.
기사가 시아나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을 덧붙였다.
“일각에서는 황태자 전하라도 봐주지 말고 당장 사형시켜야 한다는 말이 나오고 있습니다.”
끔찍한 말에 시아나가 몸을 휘청거렸다.
옆에 있던 시녀 가넷과 리나가 시아나를 부축했다. 두 사람에게 몸을 지탱한 시아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황궁으로 돌아가 라시드의 무죄를 주장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황궁은 지금 라시드가 벌인 반역 행위의 공범일지도 모른다는 명목으로 시아나를 찾고 있기 때문이다.
잡히면 어떻게 될지 뻔했다.
시아나는 라시드를 움직일 미끼로 이용당할 것이다.
최악의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이렇게 가만히 있을 수는 없어. 어떻게든 전하를 구해야 해.’
시아나는 방 안으로 들어가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라시드의 편에 섰던 귀족들에게 도움을 청하는 편지였다.
시아나는 블랙 쉐도우 기사단을 통해 은밀히 편지를 전달했다.
시아나가 현재 있는 곳은 비밀이었기 때문에 답장은 기대하지 않았다.
대신 귀족들에게 한시라도 빨리 라시드를 위해 행동해 줄 것을 부탁했다.
‘귀족들이 힘을 모아 전하의 무죄를 주장한다면…… 아니, 거기까지 해 주지 않아도 좋아. 전하가 정말 황제 폐하를 시해하려 했는지에 대해 정식으로 조사를 해 달라는 말을 해 주는 것으로 충분해.’
그것만으로 일단 라시드는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귀족들이 모두 조용하다고요?”
황궁의 움직임을 살피고 온 기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사건이 일어난 직후 황제 폐하께서 상처 입은 몸으로 귀족들을 모아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라시드는 짐의 목숨을 해하려고 한 반역자다! 누구라도 그자를 옹호하는 자가 있다면, 함께 반역을 꿈꾼 죄인이라고 생각하고 용서하지 않겠다!]
눈을 번뜩이며 소리치는 황제의 모습에 귀족들은 바짝 몸을 움츠렸다.
당연한 일이었다.
최근, 이상할 정도로 점잖았던 황제는 사실 사자보다 흉폭하고 매서운 성정을 가지고 있었다.
저를 거슬리게 하는 이가 생기면, 그가 아무리 대단한 귀족이라도 끌고 가 모진 형을 내릴 정도였다.
시아나가 굳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래서 귀족들이 입을 꾹 다물고 몸을 사리고 있다는 거로군요. 황제 폐하가 무서워서.”
물론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귀족들은 지금 열심히 머리를 굴리고 있을 게 분명했다.
황제 시해 미수범으로 몰려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처치에 몰린 황태자와 다시 일어나 포효하는 황제 중 누구에게 붙어야 안전을 도모할 수 있는지를.
시아나는 이를 악물었다.
‘귀족들이 전하의 편에 서게 하기 위해 그토록 노력했는데……!’
부족했다.
라시드가 눈에 띄게 불리해진 상황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움직이게 할 만큼 그들의 마음을 빼앗지는 못했다.
시아나는 제 무능함이 분하고 한탄스러워 미칠 것 같았다.
작은 주먹을 쥐고 파르르 떠는 시아나를 보며 기사는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는 아실론드 왕국에서부터 제법 오래 시아나와 함께했다. 늘 해사하게 웃던 시아나가 저런 표정을 짓는 것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
잠시 후, 시아나가 조금 전보다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
“군부 측의 분위기는 어떤가요?”
사실 오랜 기간 전쟁터에 있던 라시드의 힘은 귀족보다는 군대에 있었다. 하지만 그 힘에도 허점이 있었다.
“수많은 기사들이 전하를 따르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전하께 모든 힘이 몰려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힘의 구심점이 되는 라시드가 죄인이 되어 죄인의 탑에 갇혀 버렸다.
지휘자가 사라진 갑작스러운 상황에 군대는 기민하게 대응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현 상황에서 군대가 움직이면 황제 폐하에 대한 반역이 되어 버립니다.”
제국과 황가에 충성을 바친 기사들로서는 쉽사리 움직이기 곤란한 상황이었다.
거기까지 말을 들은 시아나의 얼굴이 무섭게 일그러졌다.
‘그따위 것을 잴 생각하지 말고 당장 움직여 전하를 구하란 말이야!’
—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하지만 겨우 그 말을 참았다.
외쳐 보았자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철없는 말임을 알기에.
시아나는 무언가를 꾹 누른 목소리로 말했다.
“알겠습니다. 이제 나가 보세요.”
“……예.”
기사가 방을 나갔다.
그가 나간 직후, 시아나는 쓰러지듯 의자에 앉았다.
두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아무리 그래도 황제 폐하와 황후 폐하는 전하의 친부모잖아. 이대로 누명을 씌어 처벌하지는 않을 거야.’
아니, 시아나의 희망사항일 뿐이었다.
애초에 평범한 부모라면 친자식에게 이토록 무서운 짓을 벌일 수 없다.
그들에게 라시드는 피가 섞인 자식이 아니라 말 잘 듣는 개일 뿐이었다. 그런데 내내 순종적이었던 개가 말을 듣지 않으니 이제 없애려는 것이다.
그들의 매정함에 분노가 일었다.
그것을 예상하지 못하고 여유를 부렸던 자신에게 짜증이 치솟았다.
……그자들의 손아귀에 있는 라시드에 대한 걱정이 사무쳤다.
‘이렇게까지 일이 벌어진 이상 황제와 황후가 전하를 살려 둘 이유가 없어. 시간을 끌어 보았자 좋을 게 없으니 당장이라도 전하를 죽이려 하겠지.’
그 순간 엄청난 두려움이 밀려들었다.
시아나는 터져 나올 것 같은 눈물을 겨우 참았다.
“안 돼. 이런 생각에 사로잡혀서 어쩌겠다는 거야.”
지금 이 순간, 시아나에게 필요한 것은 감정이 아니라 이성이었다.
시아나는 새 왕비에게 시시때때로 괴롭힘을 당했을 때도, 제국군에게 가족들이 죽어 나갈 때도, 제가 살길을 찾았다.
그러니까 이번에도 끔찍한 상황을 헤쳐 나갈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떡해. 아무것도 생각이 나질 않아.’
시아나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처참한 모습으로 쓰러진 라시드, 그리고 그의 앞에 서서 피 묻은 검을 들고 있는 황제와 그의 옆에서 웃는 황후뿐이었다.
그것을 떠올린 순간 시아나는 절망어린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 * *
똑똑.
방문을 두들기는 소리와 함께 시녀 가넷과 리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공주님, 점심 식사를 준비해 왔습니다.”
방 안에 앉아 있던 시아나가 힘없는 목소리로 답했다.
“가지고 가세요. 입맛이 없습니다.”
“하지만 아침 식사도 하지 않으시지 않았습니까.”
오늘만이 아니었다.
시아나는 이 저택에 온 이후로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었다.
걱정스런 두 시녀의 목소리에도 시아나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다.
정말로 먹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넷과 리나는 시아나를 무척 걱정했지만, 늘 시아나의 의사를 최우선으로 했다.
그래서 문밖이 조용해지자, 시아나는 두 사람이 식사를 권하는 것을 포기하고 떠났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벌컥,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린 것이다.
‘허락도 하지 않았는데 방에 들어오다니…….’
가뜩이나 신경이 예민해져 있던 시아나는 저도 모르게 눈썹을 찡그리며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이내 시아나는 눈을 부릅뜰 수밖에 없었다.
허락도 받지 않고 무례하게 방 안에 들어온 이는 다름 아닌…….
“아, 아리스 공주님?”
장미꽃처럼 선명한 붉은 머리카락, 또렷한 보라색 눈동자는 분명 아리스가 맞았다.
“응, 시아나. 너의 공주님, 아리스야!”
만개한 꽃처럼 환한 미소를 지은 아리스가 우다다 달려오더니 시아나를 꼭 껴안았다.
시아나는 도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지 제대로 파악되지 않아 말을 더듬었다.
“고, 공주님께서 어떻게 여기에…….”
아리스가 있던 동부는 수도와 거리가 멀었다. 마차를 타고 며칠을 달려야 하는 곳이었다.
그런 아리스가 제 앞에 있는 것이 믿겨지지가 않았다.
“너와 오라버니 놈의 약혼식을 깽판 놓으러 왔지.”
“아……!”
그제야 시아나는 잊고 있었던 것을 깨달았다. 시아나는 며칠 남지 않은 약혼식을 준비 중이었다.
갑작스럽게 벌어진 사태로 모든 것이 엉망이 되고 말았지만.
아리스가 흥, 하고 눈썹을 찡그리며 말했다.
“나름 준비를 잔뜩 해 오던 참이었거든?”
시아나를 꼬드기기 위해 동부에서만 나는 귀한 보석들을 잔뜩 챙겼고, 동부에서 한가락 하는 우락부락한 용병들도 잔뜩 모아 왔다.
하지만 수도에 도착하기 직전 아리스는 충격적인 소식을 듣게 되었다.
라시드가 황제 시해범으로 잡혔고, 그와 약혼할 예정이었던 시아나는 모습을 감추었다는 사실이었다.
다행히 아리스는 어렵지 않게 시아나의 거처를 찾을 수 있었다.
라시드가 붙여 주었던 아리스의 호위 기사가 긴밀하게 블랙 쉐도우 기사에게 연락을 취했기 때문이다.
아리스가 손을 올려 시아나의 마른 얼굴을 쓰다듬었다.
“원래는 약혼식 날, 널 데리고 동부로 가 버리려고 했는데…….”
“…….”
“도저히 그런 못된 짓을 할 만한 꼴이 아니네.”
시아나의 눈 밑은 거뭇했고 피부는 거칠었다. 늘 반짝였던 에메랄드 눈동자에는 어둠이 드리워져 있었다.
처음 본 시아나의 흐트러진 모습에 아리스는 코끝이 찡해졌다.
아리스가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식사는 절대 거르면 안 돼. 잠도 충분히 자야 해. 그래야지 힘을 내서 사랑하는 사람을 지킬 수 있으니까. ……모두 네가 알려 준 것이잖아, 시아나.”
“……!”
시아나의 에메랄드색 눈동자가 세차게 떨렸다.
그런 시아나를 꼭 껴안으며 아리스가 말했다.
“걱정 마. 이번엔 내가 너의 힘이 되어 줄 테니까.”
도저히 열 살 아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든든한 목소리였다.
어린 공주에게 안긴 시아나는 멍한 얼굴로 눈을 천천히 깜빡이다가 울음을 터뜨렸다.
오랜 시간 참아 왔던 눈물이었다.
아리스는 작은 손으로 시아나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시아나의 울음소리가 사그라질 때까지.
* * *
아리스는 깐깐한 가정교사처럼 엄한 얼굴로 말했다.
“일단 밥부터 먹어.”
“넵.”
몇십 분 동안 내리 운 덕분에 눈이 퉁퉁 부은 시아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뜨거운 수프와 빵, 잘게 자른 고기로 배를 채우니 그제야 온몸에 힘이 돌았다.
“먹었으면 이제 자.”
“넵.”
이번에도 시아나는 아리스의 말을 순순히 따랐다.
시아나는 침대에 누워 이불을 덮었다. 아리스가 시아나의 옆에 따라 들어와 달라붙었다.
“재워 줄게.”
시아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장난스럽게 말했다.
“전하께서 이 사실을 알면 놀라실 거예요.”
“흥, 무슨 상관이야? 그러니 누가 너를 두고 죄인의 탑 같은 곳에 갇혀 있으래?”
아리스는 새침하게 말하며 시아나를 꼭 껴안았다.
아리스에게서 달콤한 향이 났다. 시아나가 루비궁에서 아리스를 씻겨 주었을 때 사용했던 비누 향이었다.
“여전히 이 비누를 사용하고 계시네요.”
“니니와 나나가 잔뜩 챙겨 왔으니까.”
“그렇군요.”
시아나는 아까 전 보았던 니니와 나나를 떠올렸다.
니니와 나나는 아리스와 함께 이곳에 왔다. 두 사람은 꼭 껴안은 아리스와 시아나의 모습을 보며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흑흑, 우리 공주님은 어쩜 저렇게 의젓하실까. 내가 시아나 님처럼 힘들어해도 저렇게 다정하게 위로해 주시겠지?]
[그럴 리가 있니, 니니. 시아나 님이 특별하니 저런 위로를 해 주시는 거지, 네가 그랬으면 당장 엉덩이를 뻥 차 버리면서 정신 차리라고 호되게 야단치셨을걸.]
[흥, 너야말로 그 계란 부침처럼 흐물흐물한 엉덩이를 차서 다시 동부로 보내 주리?]
[차 봐, 차 봐! 나도 네 그 밀가루 반죽처럼 질펀한 엉덩이를 뻥 차서 저 서쪽으로 날려 버릴 테니까. 다시는 공주님 곁에 얼씬도 못 하게.]
변함없이 티격태격하는 두 사람의 대화를 떠올린 시아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 시아나의 눈 위로 아리스의 작은 손이 덮어졌다.
“쓸데없는 생각 그만하고 어서 자.”
시아나는 요 며칠 제대로 잠을 자지 못했다. 잠시 잠이 들어도 조금만 소리가 나면 눈을 부릅뜨며 깨곤 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코끝을 간지럽히는 비누 향과 따뜻한 아이의 체온이 한없이 시아나를 편안하게 만들어 주었다.
파도처럼 수마가 몰려왔다.
시아나는 오랜만에 꿈을 꿨다.
햇볕이 내리쬐는 루비궁, 동그란 테이블에 사람들이 왁자지껄 모여 있었다.
눈썹을 모으며 소리치는 아리스, 그런 그녀가 너무나 사랑스럽다는 듯 황홀한 표정을 짓고 있는 니니와 나나, 산 같은 덩치를 하고 곤란한 얼굴을 하고 있는 솔, 그리고…….
시아나가 따라 준 찻잔을 홀짝이며 환하게 웃는 라시드의 모습이었다.
현실의 시아나가 눈을 감은 채 웅얼거렸다.
“조금만 기다려요. 내가 당신을 구해 줄게요.”
엄청난 의지가 어린 잠꼬대였다.
* * *
다음 날, 시아나는 상쾌한 얼굴로 눈을 떴다. 옆에는 아리스가 작은 콧소리를 내며 잠들어 있었다.
시아나는 저도 모르게 풋 웃었다.
‘어제는 다 큰 어른이 된 것만 같았는데 아니네.’
여전히 아리스는 작고 사랑스러웠다.
시아나는 아리스의 통통하고 보드라운 볼 위로 입을 맞추었다. 아리스가 잠결에도 기분이 좋은지 히죽 웃었다.
침대에서 일어난 시아나는 준비를 시작했다.
한참 후 아리스가 눈을 떴을 때는 시아나가 완벽하게 단장을 마친 후였다.
구불거리는 밀색 머리카락을 땋아 묶고 고운 드레스를 입은 시아나를 보며 아리스가 눈을 크게 떴다.
아리스는 시아나가 이렇게 꾸민 모습을 거의 본 적이 없었다.
오래전 장미꽃 연회 때 로즈안나로 변했을 때 딱 한 번뿐이었다.
그래서 아리스는 우와, 하고 놀란 얼굴로 소리쳤다.
“예뻐! 진짜 공주님이었구나, 시아나!”
아리스의 말에 시아나는 빙긋이 웃었다.
“네, 공주랍니다. 지금은 신 아실론드의 총리이기도 하고요.”
“그러니까 국민들이 뽑아 준 나라의 두목이라는 거지?”
두목이라는 말에는 어폐가 있으나 국민들이 뽑아 주었다는 말은 맞았다. 그래서 시아나는 애매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리스가 눈을 빛냈다.
“내 시녀가 알고 보니 공주에 한 나라의 두목이라니 진짜 대단하다! 엄청 멋져!”
잔뜩 상기된 아리스를 보며 시아나가 덧붙였다.
“그리고 황태자 전하의 약혼녀죠.”
“그건 별로지만.”
아리스가 단번에 정색을 하며 흥, 하고 눈썹을 찡그렸다.
시아나는 그런 아리스를 향해 웃으며 생각했다.
‘그래. 나는 전하의 약혼녀야.’
안전한 곳에 숨어서 그가 돌아오기만을 얌전히 기도할 것이 아니라, 그를 구하기 위해 움직여야 했다.
다행히 어제까지만 해도 굳은 석고처럼 딱딱했던 머리가, 지금은 방금 딴 도토리처럼 데굴데굴 굴러 가기 시작했다.
시아나가 말했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전하를 죄인의 탑에서 빼내는 것이에요.”
지금 라시드는 황제의 수중에 있었다. 그것도 황제 시해 미수범이란 죄를 뒤집어쓰고.
황제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죽일 수 있는 상황이었다.
일단은 황제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야 했다.
그러나 아리스는 눈썹을 찡그렸다.
“하지만 어떻게? 죄인의 탑에 갇혀 있는 죄인은 황제의 윤허가 없으면 절대 그곳을 나올 수 없어.”
죄인의 탑은 특수한 마법이 걸려있으며 수많은 기사들이 감시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무력을 써서 죄인을 탈출시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시아나가 눈썹을 내렸다.
“저도 알아요. 그래서 일단은 귀족들의 힘을 이용할 생각이에요. 귀족들이 입을 모아 황제와 황후에게 이 사건에 대한 의아함을 표하고, 정식으로 재판을 열어 달라고 요청한다면 아무리 황제 폐하라도 무시하기는 힘들 테니까요.”
황제가 한 발짝 물러나 재판을 열면 라시드는 잠시나마 죄인의 탑에서 나온다.
그럼 시아나는 라시드를 구출할 수 있는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재판장에서 그의 무죄를 밝히든, 그게 아니라면 재판장에 선 그를 데리고 도망치든.
아리스가 눈썹을 찡그렸다.
“하지만 귀족들이 순순히 그 말을 들어줄까?”
아리스의 걱정은 기우가 아니었다.
실제로 시아나는 얼마 전 귀족들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철저하게 무시당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를 거야.’
시아나는 편지 한 장으로 간절하게 부탁했던 그때와는 전혀 다른 방법을 써 볼 생각이었다.
시아나를 쳐다보던 아리스가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시아나, 너 지금 되게 무서운 표정을 하고 있어. 설마 귀족들 멱살을 쥐고 협박이라도 할 생각이야?”
시아나는 헤실헤실 웃었다.
그러나 결코 아니라고 부정하지는 않으며 다른 말을 꺼냈다.
“제가 귀족들을 맡는 동안 공주님께서 해 주실 일이 있어요.”
솔직히 말하면 아리스는 라시드가 어찌 되든 알 바 아니었다.
좀 더 자세히 말하면, 그 괴물 같은 인간이 죄인의 탑 같은 곳에서 얌전히 죽는 것이 도통 상상이 되지 않았다.
‘오라버니는 시아나를 두고는 절대 안 죽을걸. 설령 독을 먹어 심장이 멈춰도 기어이 일어나서 시아나를 보러 올 거야.’
그럼에도 아리스는 라시드를 구하는 데 온 힘을 보탤 생각이었다.
오로지 시아나를 위해서.
“뭐든 말해. 네 말이라면 무엇이든 들어줄 테니까.”
눈을 반짝이는 아리스를 향해 시아나가 말했다.
“부탁드리기에 앞서 공주님께 먼저 할 말이 있어요.”
“뭔데?”
아리스가 무슨 이야기인가 싶어 고개를 갸웃거렸다.
시아나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황후의 이야기였다.
이야기를 다 들은 아리스가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다는 얼굴로 소리쳤다.
“그토록 오라버니를 아꼈던 황후 폐하의 애정이 모두 거짓이란 말이야?!”
“적어도 어머니가 자식에게 갖는 평범한 감정은 아닐 거라 확신해요.”
“……그렇구나.”
아리스는 놀랐지만 시아나의 말에 조금도 의심을 품지 않았다.
대신 흥미진진하다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역시. 제일 착해 보이는 사람이 알고 보니 최종 악당이었다는 건 모든 이야기의 법칙이구나.”
그런 아리스를 보며 시아나가 말했다.
“제가 공주님께 부탁할 일은 최종 악당, 아니 황후 폐하에 대해 조사하는 거예요.”
라시드가 황제 시해 미수범으로 몰렸던 때에, 방 안에는 황제와 황후가 함께 있었다.
라시드에게 누명을 씌운 이는 황제 혼자가 아니라는 말이었다. 황후도 공범이었다.
“황후 폐하께서는 동부 출신이시죠. 동부에서 황후 폐하에 대해 샅샅이 조사하다 보면 의외의 사실들을 알게 될지도 몰라요.”
……예를 들어 황후의 옛 연인이라든가.
그것은 지극히 사소한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대단히 충격적인 이야기일 수도 있다.
만약 후자라면 황후를 휘두를 수 있는 무기가 될 것이 분명했다.
아리스가 눈을 빛냈다.
“그러니까, 나보고 황후 폐하의 약점을 알아내라는 거지?”
역시 아리스는 눈치가 빨랐다.
아리스의 뒤에는 동부를 주름잡는 메디치안 후작가와 황태후가 있었다.
그 힘을 빌리면 동부의 온갖 정보를 모으는 것이 가능했다.
아리스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게 맡겨. 동부는 이 아리스의 영역이니까!”
정말이지 든든한 모습이었다.
시아나는 와, 하고 박수를 쳤다.
아리스가 황태후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편지를 쓰는 사이, 시아나는 블랙 쉐도우 기사단과 함께 조용히 저택을 나왔다.
* * *
앙겔루스 공작가의 대저택. 호사스러운 방 안에는 수많은 귀족들이 모여 있었다.
앙겔루스 공작을 포함한 귀족들의 얼굴이 무척 심각했다.
며칠 전, 황궁에서 일어난 황제 시해 미수 사건 때문이다.
“황제 폐하께서 아직도 사자처럼 분노하고 계시다지요.”
“예. 죄인의 탑에 갇혀 있는 황태자 전하께 당장 독약을 먹이라고 난리도 아니랍니다.”
그 말에 귀족들은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
그들은 오랜 시간 황제를 모셨기에, 황제의 분노가 얼마나 매서운지 알고 있었다.
“요 몇 년 사이 성정이 좀 누그러지셨나 싶었더니 아니었군요.”
“그러게 말입니다.”
귀족들의 표정은 한층 더 복잡해질 수밖에 없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 그들은 권력의 추가 라시드에게 완전히 기울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단 며칠 만에 힘의 방향이 완전히 역전되고 말았다.
앙겔루스 공작을 필두로 라시드의 편에 섰던 귀족들에게는 곤란한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이 상태에서 황태자 전하의 편을 든다면 황제 폐하의 분노가 대단하실 겁니다. 감히 반역자 편을 드냐며 목을 베고, 가문을 통째로 짓밟아 버리실지도 모를 일이지요.”
“모를 일이 아니라 분명 그러실 겁니다.”
그토록 총애하던 황태자의 배신.
황제는 크게 분노했고, 라시드와 그를 지지하던 모든 세력에게도 대놓고 적의를 드러내고 있었다.
게다가 지금은 ‘반역’이라는 명분까지 있었다.
황제가 마음만 먹으면 피의 숙청이 가능했다.
그 모습을 상상한 귀족들의 얼굴에 핏기가 사라졌다.
“역시 지금은 움직일 시기가 아닙니다.”
“맞습니다. 일단은 목숨부터 부지해야…….”
귀족들은 말을 이을 수 없었다.
달칵, 하는 문소리와 함께 갑작스럽게 회의실에 모습을 드러낸 여인 때문이다.
귀족들은 ‘헉’ 하고 작은 비명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라시드가 황제 시해 미수죄로 잡혀 가면서 행방불명되었던 그의 약혼녀 시아나였기 때문이다.
귀족들이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말을 더듬거렸다.
“시, 시아나 공주님께서 어떻게 여기에…….”
그때 가만히 앉아 있던 앙겔루스 공작이 입을 열었다.
“내가 이 자리에 공주님을 초대했네.”
“예?!”
앙겔루스 공작은 귀족들에게 더 이상의 설명은 생략하고 시아나에게 자리를 안내했다.
테이블의 가장 상석이었다.
시아나는 앙겔루스 공작의 배려에 고맙다는 인사를 하며 우아하게 의자에 앉았다.
아직도 이 상황이 도통 이해 가지 않는 귀족들이 눈을 커다랗게 뜬 채 시아나를 바라보았다.
그들을 바라보며 시아나가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갑작스럽게 회의에 참석한 것에 대해 양해를 구합니다. 다들 알다시피 황궁에서 저를 기를 쓰고 찾고 있는 상황인지라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회의에 참석한다고 미리 말했다가 혹 그 사실이 황궁에 흘러들어가기라도 하면 무척 곤란해질 테니까요.”
귀족들이 그제야 아, 하고 작은 소리를 냈다.
시아나가 말을 이었다.
“사실 그건 딱히 중요한 사항은 아니지요. 상황이 급박한 만큼 바로 본론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귀족들 한 명 한 명과 눈을 마주치며 시아나가 말했다.
“전하를 위해 행동하실 분은 이 자리에 남아 주시고, 그렇지 않은 분들은 당장 나가 주십시오. 그토록 가볍고 졸렬한 충의 따위는 이쪽에서도 필요하지 않으니까.”
“……!”
시아나의 말에는 귀족들의 행동에 대한 명백한 지탄이 담겨 있었다.
그것을 알아챈 귀족들의 얼굴이 새빨갛게 붉어졌다.
귀족들 중 한 명이 억울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공주님, 저희가 황태자 전하께 충의를 바친 것은 사실이나 지금은 쉽게 움직일 수 없습니다. 자칫 잘못 움직이면 저 혼자만이 아니라 가문의 명운이 달려 있는 상황이란 말입니다.”
“그래서요?”
“그러니까 공주님의 말처럼 바로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그 순간, 시아나가 분노했다.
“황태자 전하께서 지금 황제 시해 미수범으로 몰려 죄인의 탑에 갇혔습니다! 황제 폐하의 손아귀에 잡혀 언제 죽을지 모르는 절체절명의 위기라는 말입니다!”
“……!”
“이런 곳에 모여 앉아 어떡하면 조금이라도 손해를 보지 않을까 시시덕거릴 여유 따위 없다고!”
저 작은 체구에서 어떻게 저런 목소리가 나올 수 있는지 신기할 만큼 쩌렁쩌렁한 목소리였다.
게다가 눈빛도 어찌나 섬뜩한지.
귀족들은 자신들을 매섭게 쏘아보는 에메랄드 눈동자에 저도 모르게 숨을 멈추었다.
회의실에 잠시 정적이 맴돌았다.
시아나는 작게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한결 안정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죄송합니다, 전하에 대한 걱정이 깊어 저도 모르게 흥분을 했습니다. ……그대들의 상황을 아예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닙니다. 그대들의 말처럼 황태자 전하의 편을 들었다가 모든 것을 잃으면 어쩌나 두려움이 많겠지요. 파도가 일 듯, 이리 선택을 해야 할까 저리 선택을 해야 할까 많은 고민이 되리라 생각됩니다.”
잠시 말을 멈춘 시아나가 입을 열었다.
“그래서 그런 여러분들의 결정을 돕기 위해 한 가지 말씀을 드릴까 합니다.”
그 말에 귀족들은 눈이 커졌다.
혹시 시아나 공주가 지금 우리를 꼬드기려는 것일까?
지금 발 벗고 나서서 황태자를 돕는다면, 이후 라시드가 권력을 잡았을 때 드높은 관직과 수많은 황금을 준다고 말이다.
하지만 시아나가 그들에게 내뱉은 말은 그런 달콤한 꿀 같은 것이 아니었다.
시아나가 눈썹을 추켜세우며 말했다.
“최악의 경우, 저는 군대를 움직일 생각입니다.”
그 순간 귀족들은 거대한 쇠망치로 뒤통수를 후려 맞은 충격에 휩싸였다.
“구, 군대 말입니까?”
“예.”
물론 일개 작은 나라의 공주이며 총리인 시아나에게는 그런 힘이 없었다.
하지만 라시드에게는 있었다.
비록 라시드가 죄인의 탑에 갇혀 있는 상태지만 그의 군대는 온전히 남아 있었다.
귀족들과 달리 기사들은 라시드에 대한 충성심이 대단했다. 그들은 당장이라도 라시드를 위해 나서고 싶어 했다.
그들이 지금까지 가만히 있었던 이유는 오로지 그들을 이끌어 줄 지휘자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하의 약혼녀인 제가 나선다면 그들은 기꺼이 따라 줄 테지요.”
물론 시아나는 라시드 본인이 아니었다.
그리고 여러 가지 상황들로 인해 군대를 온전히 움직일 순 없을 것이다.
많아야 반? 아니 반의반이라도 움직일까?
최악의 경우 일 할도 채 되지 않는 극히 일부만 시아나를 따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지금 당장 황궁으로 쳐들어가 전하를 구출하기에는.”
충격적인 말에 귀족들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그, 그런 일을 벌이면 명백한 반역입니다!”
황제는 제게 검을 들이댄 시아나와 기사들을 용서치 않을 것이다.
하지만 시아나는 뭐가 문제냐는 듯 살포시 웃었다.
“무엇이 문제란 말입니까. 그때는 이미 전하를 구한 후일 텐데.”
“……!”
귀족들은 그 말의 의미를 단번에 눈치챘다.
피의 황태자, 라시드.
그가 죄인의 탑에서 풀려나 검을 잡고 군대를 호령한다면…… 제아무리 황제라도 그를 막을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귀족 중 한 명이 말도 안 되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허무맹랑한 계획입니다. 황제 폐하께서 그렇게 되도록 놔두실 리가 없지 않습니까. 공주님이 전하를 구출하기 전에 전하의 목숨을 앗아 가시겠지요.”
그럼 시아나와 기사들은 끝이었다.
목적도 이루지 못한 채 반역자로서 처단될 운명만 남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시아나는 그게 뭐가 문제냐는 듯 눈썹을 내렸다.
“다들 잊으셨습니까? 제게는 신비로운 꽃이 있습니다.”
“……?!”
“제가 마음만 먹으면 당장이라도 수천 송이 꽃을 피우는 것이 가능하지요.”
사실과 달랐다.
꽃을 피우려면 오랜 시간이 걸렸다. 또한 시아나는 그 꽃을 개인적인 판단으로 쓸 수 없었다.
그러나 시아나는 굳이 그 말을 하지 않고 뻔뻔하게 말을 이었다.
“그 꽃을 이용하면 조금도 다치지 않고, 절대 죽지도 않는 불사의 군대를 만드는 것이 가능하지요. 그러니 만약 전하가 잘못된다 해도 저는 더더욱 이를 악물고 싸울 생각입니다.”
“…….”
“감히 나의 약혼자를 앗아 간 이들을 결코 용서할 수 없으니.”
귀족들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그들이 알던 시아나는 저런 여인이 아니었다.
작고, 부드럽고, 상냥했다.
그래서 그들은 시아나를 황태자의 여인으로 두 팔 벌려 환영했다.
서슬 퍼런 황태자와 달리 그녀는 너무나 만만했기에.
그렇기에 귀족들은 라시드가 황제 시해 미수 사건으로 붙잡힌 직후, 시아나가 보낸 애달픈 편지도 무시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들 앞에 있는 시아나는 이전과는 전혀 달랐다.
‘마치 전쟁터에서 피 묻은 검을 휘두르는 황태자 전하 같지 않은가.’
그만큼 귀족들을 바라보는 시아나의 눈빛은 섬뜩했다.
시아나가 그들의 마음을 안다는 듯 눈썹을 내렸다.
“미친 것은 아니니 안심하십시오. 제가 말한 방법이 제게도, 그대들에게도, 그리고 이 나라에게도 너무 폭력적이고 위험이 크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
“이런 최악의 수를 쓰지 않고 전하를 구해 낼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기꺼이 그것을 택할 것입니다. ……그럴 수 있도록 저를 도와주시겠습니까?”
방금 전까지 보였던 폭력적이고 과격했던 모습이 거짓말인 것처럼 우아한 목소리였다.
그럼에도 귀족들은 굳은 얼굴을 풀지 못했다. 시아나와 가장 가까이에 앉아 있던 앙겔루스 공작 또한 마찬가지였다.
앙겔루스 공작은 굳은 표정으로 몇 시간 전의 일을 떠올렸다.
시아나가 예고도 없이 공작가에 나타났다.
앙겔루스는 모습을 숨기고 있던 시아나가 위험을 무릅쓰고 저를 찾아온 이유를 단번에 알아차렸다.
황태자 전하를 도와 달라 부탁하기 위해 온 것이 분명했다. 얼마 전 보내온 편지만큼 애처로운 부탁 말이다.
하지만 그 예상은 틀렸다.
시아나는 앙겔루스 공작과 얼굴을 맞대는 순간 쩌렁쩌렁하게 소리 쳤다.
[그대의 딸과 손주를 지켜 준 은혜를 이렇게 갚는단 말인가!]
고작 열여덟 살의 소녀라고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어마어마한 기세였다.
공작은 깨달았다.
라시드가 제 자식을 가졌다는 몹쓸 거짓말을 했던 공작의 딸 베로니카를 용서하고, 그것을 이용하여 공작을 자신의 편으로 만든 것은 온전한 그의 의지가 아니었다는 것을.
그 뒤에는 시아나가 있던 것이 분명했다.
‘황제 폐하는 무서운 분이시지. 황태자 전하는 내일 당장 어떻게 되실지 모르는 위태로운 상황이고…….’
그래서 앙겔루스 공작은 사건이 일어난 후, 황제와 황태자 사이의 권력의 추가 어디로 향할지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확실히 마음을 정했다.
‘황제 폐하께서는 잠시라도 황태자 전하의 손을 잡았던 나를 고까워하지 않으실 거야. 그뿐인가. 이대로 방관하다가 황태자 전하가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앙겔루스 공작의 시선이 시아나와 마주쳤다.
시아나의 에메랄드 눈동자에는 섬뜩한 결의가 어려 있었다.
제 약혼자를 죽게 만든 비겁한 방관자들을 용서하지 않으리라는.
앙겔루스 공작은 침을 꿀꺽 삼켰다.
이런 상황에 그가 택할 수 있는 길은 하나뿐이었다.
앙겔루스 공작이 의자에서 일어섰다.
“전하께 충성을 맹세했던 신하로서, 전하의 목숨이 위태로운 순간에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에 대해 크나큰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앙겔루스 공작이 고개를 숙였다.
“이제 고민은 끝났습니다. 앞으로 황태자 전하를 위해 행동하도록 하겠습니다. 앙겔루스 공작가의 명예를 걸고.”
“……!”
긴 테이블에 앉아 있던 귀족들의 눈이 커졌다.
그 말은 앙겔루스 공작이 완전히 황태자의 편에 서겠다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이 자리에 있는 귀족들은 앙겔루스 공작가를 따르는 이들이었다. 그들은 저희들의 수장인 공작과 반목하며 다른 길을 걸어갈 이유가 없었다.
무엇보다 귀족들도 공작처럼 재빠르게 계산을 끝마친 뒤였다.
귀족들이 하나둘씩 일어섰다.
어느새 다 일어난 귀족들이 고개를 숙였다.
시아나는 제 앞에 수그린 귀족들을 내려다보며 씁쓸하게 웃었다.
‘진심을 담은 편지 한 장은 무시하더니, 험악한 얼굴로 생명을 위협하니 그제야 기민하게 반응하는구나.’
그러나 그들의 행태에 새삼 서운하거나 화가 나지는 않았다.
짧은 시간 동안 쌓았던 시아나의 인덕이 부족했을 뿐이니까.
‘어쨌건 중요한 것은 이제 저들을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는 거야.’
시아나의 에메랄드색 눈동자가 사냥을 앞둔 표범처럼 빛났다.
* * *
황제궁.
침대에 누워 있는 황제의 안색이 창백했다. 검에 베인 상처 때문이다.
목숨에 지장이 있는 정도는 아니었으나, 생살을 베어 피가 철철 흐를 만큼 큰 상처였다.
의사의 말로는 상처가 온전히 회복되는 데 몇 달은 걸릴 거라고 했다.
황후가 차가운 얼굴로 황제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내장이 다 헤집어질 정도로 배 속을 깊숙이 찔러 버렸으면 좋았을 텐데.”
섬뜩한 말에 대답한 이는 이블린이었다.
이블린이 황후의 어깨를 쓸며 말했다.
“그랬다가는 아무리 강건한 황제 폐하라도 버티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죽어 버렸을 겁니다.”
“……나도 알아.”
그렇기에 황후는 황제에게 교묘한 명령을 내린 것이다.
목숨에 위협이 가지 않을 만큼, 그러나 충분히 고통을 느낄 만큼 자해를 하도록.
황제는 황후의 말을 조금의 오차도 없이 철저하게 수행했다.
황제는 제 몸을 주저 없이 베고, 라시드를 저를 해한 범인으로 몰았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훌륭한 꼭두각시 인형이었다.
황후는 이제 모든 것이 제가 원하는 대로 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황후가 눈썹을 찡그리며 중얼거렸다.
“귀족들이 움직일 줄이야…….”
이틀 전, 앙겔루스 공작을 포함한 수많은 귀족들이 황궁 앞에 몰려와 소리치기 시작했다.
[황태자 전하께서는 이 제국에 수많은 승리를 가져오신 불세출의 영웅이시며, 황제 폐하께 차기 황제 자리를 약속받은 분이십니다. 그런 분이 황제 폐하를 시해하려는 끔찍한 짓을 저질렀다는 점이 도무지 믿기지가 않습니다!]
[다른 이도 아닌 황제 폐하의 옥체를 상처 입힌 엄중한 사건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되었는지 보다 면밀하게 조사를 하여야 합니다!]
[정식으로 재판을 열어 사건의 정황을 확실하게 밝혀 주십시오!]
귀족들을 떠올린 황후의 표정이 얼음처럼 싸늘해졌다.
황후는 몇 달 사이 라시드가 귀족들을 제 편으로 열심히 포섭한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황후는 그것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왜냐면 라시드는 전쟁터에서는 모두가 두려워할 만큼 강했지만, 정치와 사교에 대해서는 무능하기 짝이 없었기 때문이다.
라시드는 귀족들의 이름은커녕, 그들과 어떤 식으로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타인에게 한없이 무심한 라시드의 성정 탓만은 아니었다. 황후가 그렇게 만들었다.
‘라시드는 이 제국에서 가장 강한 무력을 가지고 있으면 그만이야. 귀족들을 다루는 법 같은 건 알 필요가 없지. 그 일은 내가 해 주면 그만이니까.’
그래서 황후는 라시드가 귀족과 맺은 관계를 우습게 생각했다.
라시드의 힘이 위태로워진 순간 끊어질 알량한 관계일 것이라고…….
황후가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조금이라도 피해 볼 것 같으면 즉시 숨어 버리는 비겁한 자들이 라시드를 위해 이토록 열성적으로 나서다니……. 의외로 라시드가 귀족들과 깊은 관계를 다진 모양이야.”
귀족들은 이 사건의 진위를 조사하는 재판을 열어 달라고 외치고 있었다. 그 안에 숨겨진 의도야 뻔했다.
정식으로 재판이 열리면 적어도 재판의 결과가 나올 때까지 라시드는 목숨을 부지하게 된다.
죄의 유무와 상관없이 말이다.
이블린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귀족들이 떠드는 건 재판뿐만이 아닙니다. 사교계와 거리에 은밀하게 온갖 소문을 내고 있는데, 개중에는 황태자 전하께서 간악한 음모에 휩쓸려 누명을 뒤집어쓴 것이라는 내용도 있습니다.”
황후는 저도 모르게 비틀린 웃음을 지었다.
사람들 사이에서 황당하다고 치부 당했을 것이 분명한 그 말이 진실이었기 때문에.
그러나 이내 황후는 미소를 지웠다. 웃을 만큼 여유로운 상황이 아니었다.
“귀족들이 힘을 합쳐 저만큼 목소리를 드높이다니……. 이대로 그자들을 무시하고 라시드를 처리하면 상황이 좋지 않게 흘러가겠구나.”
황후에게는 황제가 있었다. 그러나 황제는 요 근래 국정에서 멀어지며 권력이 약해져 있었다.
무엇보다 황제는 지금 온전한 상태가 아니었다.
황후의 말이라면 얌전히 따랐지만, 그 외의 것은 한없이 불안정했다.
그런 황제가 반발하는 귀족들을 얼마나 잘 통제할 수 있을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어쩌면 귀족들은 이 사건을 꼬투리 잡아 진짜 반역을 일으킬지도 모른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황후의 얼굴이 굳었다.
‘그자들에게 빼앗기기 위해 잡은 권력이 아니야.’
한참 후, 황후가 말했다.
“귀족들의 요구대로 재판을 열어야겠어.”
이블린이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그래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어차피 재판을 열어도 달라지는 건 하나도 없잖아.”
라시드가 황제를 상처 입힌 날, 아니 상처 입혔다는 누명을 쓴 날, 사건이 벌어진 방에는 세 사람뿐이었다.
황제, 황후, 라시드.
유일한 목격자인 황후는 물론 피해자인 황제가 라시드를 범인으로 지목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누구도 그날의 진실을 밝혀낼 수 없다.
“그때의 정황을 확실히 정리해 주면 귀족들도 조잘거리던 입을 다물 테지.”
그뿐이 아니었다.
“재판이 열리면 시아나가 모습을 드러낼 가능성이 있어.”
시아나는 사건이 있은 후부터 지금까지 감쪽같이 모습을 숨기고 있었다.
하지만 라시드의 생사가 달린 재판이 열린다면 참지 못하고 모습을 드러낼 가능성이 컸다.
그때 시아나를 잡는다면, 황후는 라시드를 움직일 수 있는 확실한 무기를 가지게 된다.
그러면 황후는 비로소 황제와 라시드라는 권력을 두 손에 움켜쥐게 될 것이다.
제 앞에 고개를 숙인 귀족들 앞에서.
황후의 얼굴에 비틀린 미소가 어렸다. 이블린이 그런 황후를 빤히 쳐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재판을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단, 준비는 철저히 하도록.”
실력 있는 기사들을 모아 재판정을 철저하게 둘러싼 후, 조금이라도 수상한 기색이 보이는 자가 있다면 모두 잡아낼 것이다.
특히 밀색 머리카락과 에메랄드 눈동자를 가진 여인이 있다면 더더욱 철저하게.
그날 오후, 황궁에 대대적인 소식이 전해졌다.
황제 시해를 시도한 황태자 라시드의 정식 재판이 열린다는 내용이었다.
* * *
죄인의 탑 꼭대기 층.
빛 하나 들어오지 않는 어두운 공간 속에 라시드가 쇠사슬로 두 팔이 묶인 채 갇혀 있었다.
조각상처럼 아름다웠던 얼굴은 야위고, 입술은 바짝 메말라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지난 며칠간 라시드는 식사는커녕 물 한 모금도 제대로 마시지 못했으니까.
아무리 강한 인간이라도 물을 마시지 않고는 며칠을 버틸 수 없었다.
라시드가 살아 있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인간을 벗어난 체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니었다.
톡-.
라시드의 입술 위로 물 한 방울이 떨어졌다.
“……!”
그 순간 라시드의 몸이 반응했다.
눈을 뜬 라시드의 시야 위로 황후가 보였다.
황후는 죽어 가는 벌레라도 보듯 차가운 표정으로 라시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황후의 손에는 맑은 물이 찰랑이는 유리병에 들려 있었다.
요 며칠, 라시드가 탈수로 정신을 잃을 때마다 물을 준 이는 다름 아닌 황후였다.
많은 양은 아니었다.
겨우 생명을 이어 갈 정도의 미약한 양이었다.
그럼에도 라시드의 메마른 육체에 닿은 한 방울의 물은, 참아 왔던 갈망을 증폭시키기 충분했다.
물을 마시고 싶어.
이 몸속에 물을 다 채우고도 넘쳐흐를 만큼, 마음껏.
원초적인 본능이었다.
그런 라시드의 눈빛을 본 황후가 눈썹을 추켜세우며 말했다.
“그래. 다시 이 어미의 품으로 오겠느냐, 라시드?”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이면 그만이었다.
그러면 황후의 손에 들린 물을 한껏 마신 후, 어둡고 눅눅한 탑을 떠나 따스하고 안락한 침실로 갈 수 있었다.
꿀같이 달콤한 음식을 먹고 안락한 수면을 취하며, 천국과도 같은 기쁨을 맛볼 수 있었다.
그럼에도…… 라시드는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물론 거짓으로 대답을 하고 이 순간을 모면하는 방법도 있었다.
하지만 라시드는 황후가 그런 수를 두고 볼 만큼 호락호락한 이가 아님을 알고 있었다.
라시드가 황후를 택하는 순간, 그녀는 라시드가 온전히 자신을 따르게 할 방법을 생각해 두었을 것이다.
‘아바마마에게 그랬듯 내게도 마법을 걸 테지.’
마법이야말로 라시드를 확실히 옭아맬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니까.
마법에 걸린 라시드는 황제처럼 자의를 잃고 황후가 원하는 대로 조종을 당할 것이다.
……그리고 평생 시아나를 잊게 될지도 모른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라시드의 보라색 눈동자가 섬뜩하게 빛났다.
그것을 본 황후가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소름 끼쳐.’
이상한 일이었다.
황후는 라시드의 목숨 줄을 쥐고 있었다. 그녀가 원한다면 지금이라도 당장 라시드의 목숨을 해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황후는 제가 라시드의 우위에 있다는 생각이 조금도 들지 않았다.
끔찍한 기분이었다.
황후가 지지 않겠다는 듯 서슬 퍼런 눈으로 라시드를 노려보았다.
“그 지경이 되면서까지 어미의 말을 듣지 않다니, 정말이지 괘씸하고 지독하구나.”
원래의 계획대로라면 황후는 끝까지 제 말을 듣지 않은 라시드에게 독약을 주어야 했다.
하지만 황후는 그 계획을 조금 변경하기로 했다.
“귀족들이 시끄럽게 굴어 네 죄를 묻는 재판을 열기로 했다, 라시드.”
“…….”
“물론 좋아할 것은 전혀 없다. 누구도 보지 않는 곳에서 조용히 죽을 수 있는 기회가 사라진 것뿐이니까.”
황후는 귀족들에게 라시드의 죄를 공표한 후, 그 자리에서 바로 형을 집행할 예정이었다.
“구름처럼 몰려든 사람들 앞에서 너는 독약을 마시고 쓰러질 거야. 독이 목과 내장을 태우는 고통에 울부짖겠지. 그러다가 서서히 온몸이 마비되어 침을 흘리고 피를 토하다가 정신이 멀어질 거야.”
“…….”
“참으로 수치스럽고 비참한 죽음 아니냐.”
황후의 고운 얼굴이 일그러진 미소를 띠고 있었다.
라시드는 황후의 의도를 알아챘다.
황후는 지금 흉흉한 말을 늘어놓으며 서슬 퍼런 협박을 하는 중이었다.
이래도 내 말을 듣지 않을 거냐며.
하지만 라시드는 황후의 위협에 반응하는 대신 눈을 감았다.
더 이상 그녀를 상대하고 싶지 않다는 듯이.
그것을 본 황후가 이를 으득이더니 독설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혹시나 지금까지 내가 널 살려 뒀다고 너를 계속 죽이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면 오산이야. 나는 너를 내 자식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니까. 너는 그저 그 남자가 내 배 속에 강제로 남긴 씨앗으로 태어난 악마일 뿐이야!”
응어리진 감정을 태풍처럼 쏟아 내는 황후의 외침 속에 라시드는 생각했다.
‘어마마마께서 저렇게 난리를 피우면서도 시아나에 대해 운운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녀가 무사하다는 거겠지.’
다행히도 시아나가 잘 숨은 모양이었다.
그것만으로 라시드에게는 최악의 상황이 아니었다.
물론 여전히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라시드의 두 팔을 옭아맨 쇠사슬은 튼튼했고, 부상을 입은 상태로 오랜 시간 물과 음식을 섭취하지 못한 몸은 손가락 하나 제대로 움직이기 힘들었다.
‘내가 이렇게 나약할 줄이야…….’
라시드는 난생처음 제 무능함을 절절히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지금은 사치였다.
라시드는 재빨리 생각의 방향을 바꾸었다.
‘쓸데없는 생각을 할 때가 아니야.’
며칠 후 재판이 열린다고 했다.
죄인의 탑을 나가게 된다는 말이다. 그러면 조금이나마 탈출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길지도 모른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라시드는 더 이상 생각을 이을 수 없었다.
머릿속에 뿌연 연기가 가득 차는 느낌이 들더니, 지독한 수마가 밀려들어왔기 때문이다.
한계에 다다른 육체가 어떻게든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택한 방식이었다.
이내 라시드는 정신을 잃었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그의 꿈속에는 시아나가 나왔다.
어린 라시드는 상처투성이가 된 몸으로 벌벌 떨고 있었다.
어린 라시드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자신이 있는 이곳이 어디인지, 자신이 왜 이렇게 끔찍한 상처를 입었는지…….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두려움이 한계에 다다랐다는 것이다.
빛 하나 없이 어둠으로 가득한 공간이 무서웠다. 온몸에 난 상처가 너무 아팠다.
……가장 끔찍한 것은 피 묻은 칼을 들고 저를 쫓아올 이에 대한 공포였다.
그렇기에 어린 라시드는 어두운 저편에서 달칵 하고 문이 열리는 순간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뚜벅, 뚜벅.
저를 향해 다가오는 발자국 소리에 어린 라시드는 거친 숨을 몰아 내쉬기 시작했다.
“시, 싫어. 싫어. 죽고 싶지 않아. 싫어…….”
당장이라도 몸을 일으켜 도망가야 했다. 그러나 도저히 몸이 움직이질 않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숨을 쉬는 것조차 힘겨웠다.
죽음과도 같은 고통 속에서 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 괜찮니?”
“……!”
그 순간 어린 라시드는 온몸을 조여 오던 두려움이 순식간에 걷히는 느낌이 들었다.
그만큼 맑은 목소리였다.
어린 라시드는 천천히 눈을 떴다.
어느새 어둠은 사라지고, 작은 창문 사이로 환한 빛이 내리쬐고 있었다.
그사이에 한 소녀가 있었다.
갓 구운 빵처럼 옅은 밀색 머리카락, 봄날의 새싹처럼 싱그러운 에메랄드색 눈동자, 동그란 얼굴을 가진 자그마한 소녀였다.
어린 라시드는 멍하니 소녀를 바라보다가 중얼거렸다.
“……시아나.”
그 말에 소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물었다.
“내 이름을 어떻게 알아?”
“그야 내가 너의 약혼자니까.”
“이상한 말을 하네. 많이 다쳐서 그런가?”
시아나는 짐짓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눈썹을 모았다. 그러나 이내 시아나는 이럴 때가 아니라는 듯 어린 라시드에게 손을 내밀었다.
“자세한 상황은 모르겠지만 너 지금 무척 힘들어 보여. 그러니까 내 손을 잡아.”
시아나가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내가 너를 도와줄게.”
“…….”
시아나는 어린 라시드보다 키가 두 뼘은 더 작았다. 손도 돌멩이 하나 제대로 들지 못할 것처럼 자그마했다.
그럼에도 어린 라시드는 온몸을 잠식하고 있던 두려움이 모두 사라지는 기분을 느꼈다.
신기한 일이었다.
어린 라시드가 반짝이는 눈으로 제 앞에 내밀어진 작은 손을 잡는 순간…… 시아나가 눈을 번쩍 떴다.
침대에 누운 시아나는 눈을 부릅뜬 채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이내 당혹스러운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때의 일을 꿈꾼 것 맞지?”
8년 전, 남쪽의 휴양지에서 라시드를 만났던 순간을 그대로 재현한 듯한 꿈이었다.
‘전하의 대사가 좀 다르긴 했지만.’
시아나의 심장이 쿵쿵거렸다.
꿈속에서 어린 라시드는 온몸에 상처를 입고 있었다. 시아나는 그런 라시드를 도와주었다.
……그렇다면 이 꿈은 흉몽일까, 길몽일까.
“당연히 길몽이지!”
시아나는 씩씩하게 외치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하늘이 검푸르렀다. 아직 많은 이들이 자고 있는 이른 새벽녘이었다.
그럼에도 시아나의 얼굴에는 졸음의 기운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러기는커녕 결연한 의지가 어려 있었다.
꿈에서처럼 시아나는 사랑하는 남자를 구할 생각이었다. 바로 오늘.
― 6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