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6 (20/27)

외전 6

어딘가 오싹할 만큼 스산한 기운이 도는 황태자궁.

긴 의자에 기대어 앉은 라시드가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시아나는 나를 잊어버린 걸까?”

네, 아무래도 그런 것 같습니다.

—라고 호위 기사 솔은 솔직하게 대답하고 싶었지만 참았다.

그런 말을 했다가는 안 그래도 영혼이 반쯤 날아간 듯한 라시드의 상태가 더 심각해질 것 같아서.

대신 솔은 어색할 만큼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시아나 님께서는 요즘 아실론드 왕국에서 눈코 뜰 새도 없이 바쁘시지 않습니까.”

물론 라시드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게다가 연인에게 무참하게 차인 것처럼 구는 라시드의 얼굴과 달리 시아나가 아예 연락을 안 한 것도 아니었다.

시아나는 블랙 쉐도우 기사단을 통해 라시드에게 며칠에 한 번씩 서신을 보냈다.

그럼에도 라시드는 시아나가 부족했다.

‘글자 몇 자 따위로는 이 마음이 조금도 충족되지 않아. 시아나가 보고 싶어. 안고 싶어. 목소리도 듣고 싶어.’

다행히 라시드에게는 그 바람 중 하나를 이룰 수 있는 물건이 있었다.

먼 거리에 있는 사람끼리 말을 주고받을 수 있는 마력석이었다.

‘내가 먼저 시아나에게 이것으로 연락을 해 볼까?’

하루에도 몇 번씩 그런 충동이 일었다. 그러나 라시드는 그 감정을 애써 참았다.

‘시아나에게 언제 마력석을 써야 할 일이 생길지 몰라. 그때를 위해서 마력석의 힘을 아껴 두어야 해.’

일전에 시아나와 마력석을 이용하여 대화를 한 적이 있으니, 이제 마력석을 사용할 수 있는 횟수는 두 번뿐이었다.

그것을 제멋대로 써 버릴 수는 없었다.

세상에서 가장 심각하고 괴로운 얼굴로 마력석을 만지작거리는 라시드를 바라보며, 솔은 머리를 긁적거렸다.

‘그래도 낮에는 귀족들과 만나고 군대를 정비하느라 정신이 없어서인지 그럭저럭 멀쩡해 보이시는데, 밤만 되면 부쩍 상태가 안 좋아지신단 말이지.’

아무리 라시드의 비정상적인 모습에 익숙해진 솔이라도 보기가 힘들 정도였다.

솔은 주인을 조금이라도 위로하기 위해 말을 꺼냈다.

“그러지 말고 쭉쭉이(흰 페럿) 발톱을 깎아 주시면 어떻습니까. 요 녀석이 그새 발톱이 뾰족하게 자랐습니다.”

그러나 라시드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 그럼 냠냠이(다람쥐)에게 간식을 주시는 건요? 두 볼에 해바라기 씨를 가득 채운 냠냠이를 보면 까무러칠 만큼 귀엽지 않습니까.”

그러나 놀랍게도 라시드는 이번에도 고개를 내저었다.

솔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미친 사람처럼 실실거릴 만큼 좋아했던 일을 전부 거부하시다니!’

솔은 전에 없던 사태의 심각함을 느꼈다.

어떻게 전하의 기운을 북돋아 줘야 할지 고민하는데 라시드가 벌떡 일어났다.

“전하, 이 밤중에 갑자기 어디를 가십니까.”

놀란 얼굴로 쫓아오는 솔에게 라시드가 말했다.

“바람이라도 쐬어야겠다.”

방 안에 계속 있다가는 시아나에 대한 그리움으로 미쳐 버릴 것 같았다.

황태자궁을 나온 라시드가 향한 곳은 루비궁이었다.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아 고요한 궁에는 시아나와의 추억이 많았다.

그래서 라시드는 그곳에 있으면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루비궁에 들어선 라시드가 눈을 크게 떴다.

작은 정원에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안젤리나 황비와 그의 아들 레이시스였다.

라시드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여기서 뭘 하고 있었습니까.”

갑작스럽게 들린 라시드의 목소리에 안젤리나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라시드를 본 안젤리나가 당황한 얼굴로 인사하며 말했다.

“산책 중에 시아나 공주가 생각나 루비궁에 들렀다가 잠시 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기도?”

“네.”

안젤리나가 얼굴을 붉히며 대답했다.

“달의 여신께서는 먼 길을 떠난 자를 지켜보신다고 하지요. 마침 보름달이 떴기에 여신께 부탁드렸습니다. 시아나 공주가 부디 건강히 잘 다녀오게 해 달라고요.”

“…….”

라시드는 조용히 안젤리나를 내려다보다가 중얼거렸다.

“어마마마와는 전혀 다른 행동을 하시는군요.”

시아나가 떠난 후, 황후는 은밀하게 시아나의 행적을 쫓으려 애썼다.

라시드의 방해로 결국 조금의 정보도 얻지 못했지만.

그러다가 며칠 전에야 간신히 황후는 시아나가 어디에서 무얼 하고 있는지 알게 되었다.

아실론드 왕국에서 보내온 신비로운 꽃, 그 꽃을 보내어 협상을 제안한 이가 다름 아닌 시아나였기 때문이다.

황후는 정색하며 말했다.

[고작 이런 꽃 몇 송이를 받고 정복한 나라를 놓아줄 순 없네.]

그러나 앙겔루스 공작과 그를 따르는 수많은 귀족들이 반대 의견을 제시했다.

[가지고 있어 보았자 얻을 것이라고는 없는 작은 나라에서 손을 떼는 대신 이처럼 훌륭한 보물을 받다니, 이만한 거래가 어디 있습니까. 제국의 국익을 위해 제안을 받아들여야 마땅합니다.]

그래도 안 된다고 고개를 젓는 황후에게 조용히 있던 라시드가 한마디를 내뱉었다.

[혹 어마마마께서는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로 이 협상을 반대하시는 것 아닌지요?]

[뭐?!]

[이 협상을 제안한 것은 아실론드 왕국의 시아나 공주입니다. 시아나 공주는 현재 황후의 시련을 치르고 있는 중이죠. 혹, 그녀가 하는 일을 방해하고자 반대하시는 게 아니냐고 묻는 겁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황후는 평소의 그녀답지 않게 분노했다.

황후의 시련은 황실의 이름으로 치러지는 시험이었다. 그것을 방해하는 것은 아무리 황후라도 큰 죄였다.

라시드가 눈을 내리깔고 말을 이었다.

[그런 게 아니라면 이 협상을 반대하는 합당한 이유를 알려 주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귀족들도 납득이 갈 테니까요.]

라시드는 부드럽게 두 눈을 휘었다.

더없이 부드럽고 아름다운 미소였지만, 황후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네가 어떻게 나에게 그럴 수 있냐는 듯한 원망의 눈빛을 담아.

안젤리나도 황비로서 같은 장소에 있었기에 그때의 일을 잘 알고 있었다.

아니, 꼭 황비라는 위치가 아니라도 현재 수도에는 황후와 라시드가 조용히 대립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자가 없었다.

안젤리나가 어쩔 줄 모르는 얼굴로 라시드를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황후 폐하께서는 전하의 친어머니이시니 저와는 입장이 다르시겠지요. 이렇게 멋진 아들이니 며느릿감에 얼마나 욕심이 나실까요.”

라시드의 마음을 위로하기 위해 아예 없는 말을 지어낸 것이 아니었다.

만약 안젤리나에게 라시드 같은 아들이 있었다면, 눈에 불을 켜고 최고의 신붓감을 찾는 극성 엄마가 되었을 것이다.

제가 한 생각이 부끄러워 안젤리나는 민망한 듯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 더더욱 시간이 지나면 시아나 공주를 받아들일 거예요. 시아나 공주는 누구보다 영특하고 우아하고 마음까지 상냥한 숙녀니까요.”

여린 목소리에는 그 말이 꼭 이루어질 것이라 생각하게 만드는 힘은 없었다.

그러나 불쾌한 기분 한편을 어루만져 주는 따스함이 있었다.

라시드는 말없이 안젤리나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같이 기도해도 되겠습니까?”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 안젤리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더니 환하게 웃었다.

“물론이죠.”

동그란 보름달 아래 안젤리나와 라시드는 눈을 감고 두 손을 모았다.

한 발짝 떨어진 곳에 있던 레이시스가 그 모습을 보더니, 들고 있던 종이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슥삭, 슥삭.

이내 흰 종이 안에 기도하는 두 사람이 그려졌다.

무언가를 간절히 바라는 두 사람의 위로 노란 달빛이 보석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 * *

매일 밤, 달의 여신에게 기도를 한 덕분일까.

라시드는 어마어마한 꿈을 꿨다.

꽃이 잔뜩 핀 동산이 에메랄드색 눈동자를 반짝이는 시아나로 가득 찬 것이다!

‘하늘 위에서 쨍쨍 빛나는 해님도 시아나.’

‘알록달록한 꽃송이도 시아나.’

‘초록 나무에 아롱다롱 걸려 있는 사과도 시아나.’

천국 같은 광경에 라시드는 황홀한 얼굴을 했다.

“좋으세요?”

맑은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어느새 진짜 시아나가 라시드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를 본 순간 라시드는 눈물이 나올 뻔했다.

그만큼 행복했다.

“응, 정말 좋아. 영원히 이곳에 있고 싶을 만큼.”

라시드가 두 눈을 부드럽게 휘며 시아나의 작은 손을 잡았다.

“……아무래도 영원히는 무리일 것 같습니다, 전하. 5분도 힘들 것 같아요.”

굵직한 목소리에 라시드는 온몸의 체온이 사라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는 곧장 일그러진 얼굴로 눈을 부릅떴다.

그와 동시에 라시드에게 솥뚜껑만 한 손을 붙잡힌 솔이 보였다.

솔은 난감한 얼굴로 침대에 누워 있는 라시드를 바라보다가, 이내 히익 하고 비명을 질렀다.

“왜 그런 눈으로 쳐다보십니까! 저는 그저 전하를 깨우러 왔다가 손이 붙들린 죄밖에는 없다고요.”

“그게 죄다.”

“네?”

도대체 무슨 말이냐는 듯 묻는 솔을 향해 라시드가 으르렁거렸다.

지금 이 순간, 눈앞에 있는 자가 시아나가 아니라는 것이 죄였다.

그것도 도저히 용납할 수 없을 만큼 극악무도한 죄!

“아이고, 호위 기사 살려!”

목숨의 위협을 감지한 솔이 비명을 내지르는 순간이었다.

라시드의 목에 걸려 있던 마력석이 반짝거렸다.

그 순간 라시드의 얼굴이 변했다.

금방이라도 사람을 짓이기려고 했던 호랑이 같은 얼굴에서, 세상에서 가장 큰 선물을 받은 아이 같은 얼굴로.

라시드가 재빨리 마력석을 입가에 대고 주문을 외웠다.

“시아나.”

그 순간 마력석이 빛나더니 맑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전하, 제 목소리 들리세요?/

응, 들려.

—라고 대답을 해야 하건만, 다른 말이 튀어 나갔다.

“보고 싶어.”

밑도 끝도 없이 나간 말이었건만, 시아나는 무슨 말이냐며 당황해하지 않았다.

대신 작은 웃음소리와 함께 대답했다.

/저도 그래요./

시아나가 말을 이었다.

/이제 모든 일이 다 끝났어요. 하루빨리 전하의 곁으로 돌아갈게요./

그 순간 라시드는 할 말을 잃었다.

지난 몇 달간 그토록 기다렸던 말이었기에.

잠시 후, 라시드가 우와! 하고 몸속 깊숙한 곳에서 끌어올린 감탄사를 내뱉으며, 허공을 향해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 어떤 전쟁에서 승리를 한 후에도 보여 준 적 없던 기쁨의 세리머니였다.

외전 6 fin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