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아실론드의 공주 (2)
* * *
국경 지역.
새파란 하늘과 드넓은 녹색 평야가 펼쳐진 아름다운 풍경과 달리, 이곳은 인가가 전혀 없었다.
그래서 여행자들은 배고픔을 참고 이곳을 지나거나 미리 챙겨 온 도시락으로 소박한 식사를 해야 했다.
시아나 일행에게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었지만.
“다들 맛있게 드세유!”
츄츄가 씩씩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레이스와 시아나도 웃으며 식전 인사를 나누었다.
초록색 들판 위에 흰색 천을 깔고 앉은 세 사람의 앞에는 어마어마한 진수성찬이 차려져 있었다.
말린 소고기, 사과, 세 종류의 쿠키, 초콜릿, 와인, 건포도, 아몬드, 치즈까지.
시아나가 쿠키를 우물거리며 생각했다.
‘이 음식이 다 그레이스 황녀 저하의 가방에서 나온 것이라니. 언제 봐도 놀랍다니까.’
한 끼라도 굶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
—라는 철칙에 맞추어 그레이스는 가방에 보관이 쉬운 음식들을 가득 채웠다.
식당이 있는 곳에서는 꺼낼 일이 없었지만, 이렇게 먹을 곳이 마땅치 않은 곳에선 가방의 음식들이 아주 요긴했다.
덕분에 시아나는 여행 내내 한 끼도 굶은 적이 없었다.
아니, 굶기는커녕 매끼 푸짐하게 먹었더니 얼굴에 살이 통통하게 올라 버렸다.
‘나름대로 고생을 무릅쓰고 시작한 여행인데 팔자가 너무 좋잖아.’
시아나는 복잡한 감정을 느끼며 아몬드를 오독오독 씹었다.
육포 10개를 한 번에 입에 넣고 씹던 그레이스가 시아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아실론드 왕국은 어떤 곳이야?”
그레이스와 츄츄는 아실론드 왕국에 대해 아는 것의 거의 없었다.
제국에서 멀리 떨어져 있기도 할뿐더러, 워낙 소국이라 이름만 겨우 아는 나라였다.
시아나가 담담한 얼굴로 대답했다.
“아실론드 왕국은 썩을 대로 썩은 나라랍니다.”
왕족과 귀족은 제 입속에 들어갈 한 끼의 맛있는 음식과 제 몸을 치장하는 보석에만 관심이 있었다.
매일같이 화려한 성찬이 차려진 무도회를 열고 깔깔깔 웃었다.
반면 그 아래에 있는 평민들은 하나같이 죽은 생선처럼 퀭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걸음마를 떼는 순간부터 혹독한 노동을 해야 했고, 권력자에게 조금이라도 거슬리면 목이 날아가는 삶을 살아야 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제국군이 쳐들어오지 않았어도 아실론드 왕국은 오래가지 못했을 거예요. 자멸했거나 또 다른 나라의 침략을 받아 무너졌겠죠.”
시아나의 말을 끝으로 정적이 감돌았다.
츄츄와 그레이스는 양손에 가득 먹을거리를 든 채 멍하니 시아나를 바라보았다.
늘 해사하게 웃던 시아나의 눈빛이 겨울바람처럼 싸늘했다.
그레이스와 츄츄가 침을 꿀꺽 삼켰다.
츄츄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시아나, 너는 네 나라를 싫어혀?”
생전 처음 들어 본 질문에 시아나가 당황했다.
솔직히 말하면 시아나는 고국에 아무런 애정도 느낄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게 시아나는 아실론드 왕국에서 좋은 추억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없었다.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는 온통 고통스러운 기억뿐이었다.
그래서 일부러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
그럼에도…….
“마음 한편에는 늘 그 이름이 걸려 있었어. ……나는 아실론드 왕국의 공주니까.”
그래서 아실론드 왕국에 가는 것을 결정했다.
시아나의 에메랄드색 눈동자에는 고작 열여덟 살의 소녀답지 않은 묵직한 감정이 어려 있었다.
도대체 그간 어떤 일을 겪었는지 가늠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
그레이스와 츄츄가 눈치를 살피다가 조심스럽게 시아나의 작은 몸을 껴안았다.
“따라오길 잘했구먼.”
“힘들면 언제든 우리한테 기대.”
커다랗고 듬직한 품속에서 시아나가 눈썹을 내리며 웃었다.
‘그저 안아 주는 것만으로 이렇게 마음이 따듯해지는데…….’
고국에는 이런 식으로 시아나를 안아 준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
그것이 시아나를 씁쓸하게 만들었다.
* * *
황궁을 떠난 지 2주째.
드디어 시아나 일행이 탄 마차가 아실론드 왕국에 도착했다.
긴 여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시아나는 큰일을 하나도 겪지 않았다.
‘도적이 들끓는다는 국경 지대에서도, 괴수가 나온다는 산맥에서도 아무 일도 없었지.’
시아나는 그것이 기적 같은 행운 덕분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여행 내내 시아나 일행을 완벽하게 보호해 준 블랙 쉐도우 기사단 덕분이었다.
‘가까이 있어도 괜찮다고 해도 계속 모습을 숨겨서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했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의사소통 하는 법을 익혔다.
시아나가 두 손을 동그랗게 만들어 대충 아무 데나 바라보며 소리쳤다.
“도와주셔서 감사해요! 덕분에 잘 도착했어요!”
그 순간 저쪽에 있던 수풀이 사라락 움직였다.
꼭 화답이라도 하는 것처럼.
마부가 창문으로 얼굴을 내민 시아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어디로 모실까요?”
“왕궁으로 가 주세요.”
이내 마차가 왕궁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마차에 달린 창문으로 수도의 풍경을 바라보던 그레이스가 중얼거렸다.
“사람도 많이 보이지 않고 무척 조용한 곳이구나.”
츄츄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유. 꼭 제 고향처럼 한적하니 정이 가는구만유.”
두 사람의 말에 시아나는 난처한 얼굴로 웃었다.
사실 저 정도면 두 사람이 애써 좋게 표현해 준 것이다.
건물은 낡았고 도로는 정비되지 않았으며, 거리를 다니는 사람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음울했다.
도저히 한 나라의 수도라고는 생각지도 못할 만큼 낙후되어 있었다.
그러나…….
왕궁에 도착한 그레이스와 츄츄는 입을 쩍 벌렸다.
“오면서 보았던 거리의 모습과 너무 다르잖아?”
“그러게 말이에유.”
츄츄도 경악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실론드 왕궁은 제국의 황궁만큼 거대하진 않았으나, 눈이 부실 정도로 화려하고 아름다웠다.
천장 가득 그려진 그림, 섬세한 문양이 새겨진 기둥과 창문, 곳곳에 놓인 수많은 조각들.
그레이스가 청동으로 만든 여신상을 매만지며 말했다.
“하나같이 고급스러워 보이는군. 돈이 제법 들었겠어.”
결국 시아나의 얼굴이 뜨겁게 달군 냄비처럼 빨갛게 달아올랐다.
무너져 가는 거리와 너무나 대비되는 화려한 왕궁은 왕과 새 왕비의 작품이었다.
국가의 재정이 파탄 났음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끊임없이 성을 꾸몄다.
왕궁 문에 장식된 보석 하나면 궁 밖에서 굶주리고 있는 백 명의 백성들이 한 달은 거뜬히 먹을 수 있다는 사실 따위는 그들에게 그리 중요한 사실이 아니었다.
그래서 시아나는 이곳이 너무 부끄러웠다.
다행히 그때 궁 안쪽에서 한 남자가 나왔다.
은색 갑옷에 제국 문양이 박힌 망토를 두른 남자는 세 사람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먼 길 오시느라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남자가 말을 이었다.
“저는 아실론드 왕국에 상주 중인 제국군 지휘자 달탄입니다. 황태자 전하께 미리 연락을 받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정중한 인사에 시아나는 미소 지으며 인사했다.
“환대에 감사드립니다.”
그레이스도 고개를 까닥였고 츄츄는 90도로 꾸벅 인사를 했다.
세 사람은 달탄의 안내를 받아 응접실로 들어갔다.
차 한 모금을 마신 시아나가 물었다.
“현재 아실론드 왕국의 상황은 어떤가요?”
달탄이 대답했다.
“일전에 편지로 보고 드린 대로입니다.”
수개월 전, 제국군은 아실론드 왕국을 점령했다.
성이 함락당한 날 시아나를 제외한 모든 왕족은 처형을 당했고, 귀족들은 제국군 앞에 바짝 엎드리며 목숨을 구걸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순탄하게 흘러간 것은 아니었다.
“아실론드 왕국의 평민들이 혁명군이라는 것을 조직하여 새 나라를 만들겠다며 제국군과 귀족에게 대항하고 있습니다.”
물론 아무리 저항이 심하다고 해도 그들 대부분은 제대로 된 무기도 없는 일반인이었다.
제국군이 본격적으로 나선다면 진압이 가능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던 이유는 라시드가 절대 그런 식으로 아실론드의 백성들을 무참하게 짓밟아서는 안 된다는 명령을 내렸기 때문이다.
‘점령한 후에는 그 나라가 어떻게 되든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던 전하께서 왜 그렇게 안 어울리는 명령을 내리시나 했더니, 이런 이유가 있었을 줄이야.’
달탄은 지금 제 앞에 있는 앳된 여인이 아실론드 왕가의 유일한 생존자이자, 황태자 라시드의 연인이라는 사실이 믿기지가 않았다.
그만큼 기가 찬 이야기였다.
그러나 그것을 티낼 만큼 어수룩하지 않았기에 달탄은 차분한 얼굴로 말했다.
“공주님께서 나서 주시면 혁명군의 기세도 사그라들겠군요. 그들 중에는 새 나라를 만들고 싶은 욕망 때문이 아니라, 아실론드 왕가가 사라져 버렸다는 상실감에 동조하는 이들도 많으니까요.”
왕가의 혈통을 이어받은 공주가 나타난다면 그들은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갈 것이다.
그뿐인가.
제국군과 혁명군의 눈치를 살피던 귀족들도 시아나를 중심으로 힘을 모아 아실론드 왕국의 생명을 연장할 방법을 모색할 것이다.
제국군으로서는 전혀 나쁠 것이 없는 상황이었다.
수많은 개미 떼들을 상대하는 것보다는 한 마리의 여왕 개미와 적당히 우호적인 관계를 맺어 왕국을 지배하는 편이 훨씬 효율적이었으니까.
달탄이 말했다.
“내일이라도 공식적으로 공주님의 귀환을 알리겠습니다. 또한 제국군은 공주님을 유일한 아실론드 왕족으로 존중하며, 이 나라의 통치권을 일부분 인정한다는 사실을 통보하겠습니다.”
달탄은 제가 생각해도 시아나에게 더할 나위 없는 달콤한 제안이라고 생각했다.
어떤 점령국이 힘없는 공주에게 이토록 많은 배려를 해 준단 말인가.
이 모든 것이 시아나가 황태자의 연인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시아나는 눈썹을 내리며 말했다.
“달탄 장군, 무언가 단단히 착각을 하고 계시는군요. 제가 이곳에 온 것은 공주로서 신분을 회복하여 권력을 쥐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
의외의 말에 달탄이 눈을 크게 떴다.
시아나가 말을 이었다.
“감옥에 잡힌 혁명군이 있다 들었습니다. 그자들을 만나게 해 주세요. 긴밀히 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 * *
달탄은 도대체 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시아나 님은 황태자 전하의 약혼녀로 인정받기 위해 황후의 시련을 치르는 중이라고 들었어. 그럼 공주로서의 직위를 되찾은 후 적당한 업적을 찾아 제국에 돌아가면 되는 것 아닌가. 도대체 왜 혁명군을 만나려는 거지?’
그러나 라시드에게 미리 ‘무조건 시아나에게 협조하라.’는 전언을 받은 터라 달탄은 복잡한 심정을 숨기고 시아나를 감옥으로 안내했다.
감옥 앞에 선 시아나가 말했다.
“원활한 대화를 위해 혼자 만나고 싶습니다. 달탄 장군께서는 여기서 기다려 주세요.”
“하지만 공주님, 이곳에 있는 자들은 혁명의 중심에 서서 과격하게 활동했던 자들입니다. 왕족에 대한 적의가 대단합니다.”
시아나에게 위협적인 행동을 할 수도 있다는 말이었다.
그러나 시아나는 괜찮다는 듯 웃었다.
“무기도 없이 철창 안에 있는 이들이 제게 무슨 짓을 할 수 있겠어요.”
“칼은 손에만 있는 게 아닙니다. 공주님께 직접 손을 대진 못해도 험악한 말을 늘어놓을 겁니다. 아주 끔찍하고 더러운 말들을 듣게 되시겠지요.”
달탄이 보기에 시아나는 동그란 얼굴에 처진 눈초리를 가져 아주 순진해 보였다.
도저히 그들이 내뱉는 독한 말들을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럼에도 시아나는 의지를 꺾지 않았다.
[시아나의 말을 거역하는 것은 내 명령을 거역하는 것보다 큰 죄다. 그러니 시아나 말은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따르도록.]
라시드의 전언을 떠올린 달탄은 한숨을 내쉬었다.
‘힘없는 일개 군인이 뭘 어쩌겠어.’
끼이익.
녹이 슨 쇳소리와 함께 감옥 문이 열렸다.
시아나가 홀로 어두컴컴한 감옥 안으로 들어갔다.
또각또각.
스산한 감옥과 어울리지 않는 경쾌한 구두 소리에, 쇠창살 안에 가두어 져 있던 이들이 매섭게 눈을 빛냈다.
* * *
수도의 뒷골목.
얼핏 평범한 술집처럼 보이는 가게는 사실 혁명군의 은신처였다.
그곳에는 낡은 의자에 삐뚜름하게 앉아 다리를 꼬고 앉아 있는 여인이 있었다.
혁명군의 리더 베라였다.
싸구려 담배를 입에 문 베라가 물었다.
“그래서 남쪽 지역의 분위기는 어때?”
혁명군의 정보를 담당하고 있는 요한이 말했다.
“저번 달보다 혁명군에 대한 지지가 늘었어. 15% 정도.”
그 말에 베라가 눈썹을 찡그렸다.
오랜 시간 이 나라를 지배하던 왕족이 처형당한 날, 베라는 혁명군을 일으켰다.
이 기회에 썩어빠진 아실론드 왕국을 없애고 새로운 나라를 만들자.
베라는 모든 국민들이 제 말에 동조하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치 않았다.
어떤 이는 이날만을 기다렸다는 듯 열광적으로 호응했으나, 어떤 이는 눈살을 찌푸리며 어떻게 그런 짓을 하느냐며 혀를 찼다.
“귀족 놈들이 그러는 것은 이해가 돼.”
지금까지 그래 왔듯 그들은 편안하고 안락하게 살고 싶을 테니까.
그러기 위해서 그들은 아실론드 왕국이 어떻게든 유지되길 바랐다.
“하지만 왜 평민들까지 그러느냐고. 지금까지 윗놈들에게 목줄을 잡혀 개돼지보다 고통스럽게 살았으면서!”
요한이 안경을 올리며 말했다.
“무지한 거지. 혹은 현재의 체계를 벗어나 만들어질 새 나라가 두렵거나.”
베라는 어이없다는 얼굴로 한숨을 내쉬며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그런 베라를 바라보며 요한이 말했다.
“어찌 되었건 혁명군이 새 나라를 세우기 위해서는 평민들끼리라도 완벽하게 단합해야 해.”
아무리 약자일지라도 뭉치면 힘이 생긴다.
평민들이 힘을 합쳐 새 나라에 대한 큰 파도를 만들면, 제아무리 오만한 귀족이나 잔혹한 제국군이라도 만만히 볼 수 없을 것이다.
요한이 눈썹을 내렸다.
“다만 한 가지 소식이 걸려.”
“시아나 공주에 대한 이야기?”
“응.”
아실론드 왕국은 현재 상황이 좋지 않아 외부의 정보를 받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혁명군은 온갖 연줄을 동원하여 대륙의 갖가지 소식을 받았는데, 최근 받은 소식 중 가장 충격적이었던 것이 시아나 공주에 대한 이야기였다.
아실론드 왕국의 첫 번째 공주 시아나 아실론드 폰 실리테가 살아 있다.
제국의 시녀로.
그것만으로도 충격적인 이야기건만 더 놀라운 내용이 이어졌다.
베라가 일그러진 얼굴로 말했다.
“어떻게 아실론드 왕국의 공주가 황태자의 약혼녀가 되냐고.”
제국은 이 나라를 침략한 적군이었다. 그 적군의 지휘자가 황태자 라시드였고.
유일하게 살아남은 공주가 그런 자의 여인이 되었다는 소식은 속이 울렁거릴 만큼 역겨웠다.
실제로 베라는 처음 그 소식을 들었을 때 세상에 있는 온갖 욕을 다 떠들었다.
요한은 베라만큼 분노가 일진 않았다.
애초에 이 나라의 썩은 왕가에게 일말의 기대감도 없었기 때문이다.
단지 걱정이 되었다.
“시아나 공주가 황태자를 등에 업고 아실론드 왕국에 돌아오면 어떡하지?”
그녀가 나타나면 무너진 왕권이 다시 회복될 것이다.
그럼 기를 못 펴고 있던 귀족들이 그녀를 중심으로 모일 테고, 순식간에 기존의 권력자들이 다시 힘을 잡을 게 분명했다.
그럼 혁명군은 끝이었다.
새 나라를 일으키겠다는 꿈은 짓밟히고, 모든 것이 예전으로 돌아가겠지.
아니, 시아나 공주와 귀족은 제국군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별별 짓을 다 할 테니 이전보다 훨씬 끔찍할 것이다.
지옥 같은 광경을 상상한 베라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절대 그렇게 일이 진행되게 두진 않을 거야. 필요하다면 시아나 공주의 목숨을 빼앗아서라도.”
그녀는 새 나라를 만드는 데 가장 불필요한 존재였으니까.
그때였다.
“대장!”
벌컥 문을 열리더니 한 남자가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베라와 요한의 눈이 커졌다.
“잭?!”
잭은 얼마 전 혁명 운동을 하다가 제국군에 잡혀 감옥에 갇혔다.
베라가 놀란 눈으로 잭을 바라보며 말했다.
“네가 어떻게 여기에…… 설마 감옥을 탈출한 거야?”
요한은 다른 의견을 내놨다.
“아니면 제국군에게 혁명군의 정보를 팔았나?”
잭이 소리를 꽥 질렀다.
“둘 다 아니야!”
잭은 학교 선생으로 아주 점잖고 도덕적인 남자였으며, 혁명 활동에도 누구보다 순수한 열정을 가진 남자였다.
저런 식의 오해를 받는 것은 사양이었다.
다행히 베라와 요한도 농담으로 한말이었다. 두 사람은 잭에 대한 신뢰가 대단했다.
“그럼 어떻게 감옥에서 나온 거야? 제국군 놈들이 쉽게 풀어 주지 않았을 텐데.”
뇌물을 썼나? 가난뱅이 잭은 그럴 돈이 없을 텐데.
설마 미인계? 설령 감옥을 지키는 간수가 눈이 보이지 않는 장님이라 해도 그건 무리일 텐데?
따위의 어이없는 생각을 하는 베라를 향해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가 풀어 주었어요.”
너무나 맑은 목소리였다.
제대로 된 등불 하나 없는 이 칙칙한 가게와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이내 잭의 뒤에서 동그란 얼굴이 쏙 하니 튀어나왔다.
“안녕하세요, 여러분.”
혁명군의 리더로 활동하는 만큼 베라는 경계심이 많았다. 그러나 순간적으로 경계심이 확 사라졌다.
왜냐면 갑작스럽게 나타난 얼굴에 긴장감이라곤 개미 똥만큼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기는커녕…….
‘귀엽잖아.’
그러나 이어진 여인의 말에 베라의 눈빛이 순식간에 험악해졌다.
“제 이름은 시아나 아실론드 폰 실리테. 아실론드 왕국의 제1 공주입니다.”
“……!”
그 순간, 베라가 치마를 걷어 허벅지에 고정해 두었던 단검을 뽑았다. 요한도 책상 위에 있던 검을 빼들었다.
두 사람의 손에 든 무기가 시아나의 목을 향했다.
금방이라도 그녀의 목숨을 빼앗아 갈 것처럼.
시아나는 제 목에 겨누어진 섬뜩한 무기들에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두 손을 들었다.
“나는 싸울 생각으로 온 것이 아니에요. 여러분과 대화를 나누고 싶습니다.”
그런 말을 하는 시아나의 에메랄드색 눈동자가 너무나 침착하고 무해해서 베라와 요한은 똥 씹은 얼굴을 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상황이지?
* * *
허름한 술집 안, 그나마 깨끗한 테이블에 시아나와 베라가 마주 앉았다.
팔짱을 낀 베라는 가는 눈으로 시아나를 바라보았다.
‘저 하얗고 뽀얗고 동그란 여자가 시아나 공주라고?’
베라는 아직도 그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왜냐면 시아나는 베라가 생각했던 공주의 이미지와 너무 달랐기 때문이다.
공주는 오만하며 화려하고 악독하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시아나는 그런 이미지와 전~혀 거리가 멀었다.
화려한 무도회에서 사치스러운 드레스를 입고 부채를 살랑이며 웃는 것보다는, 북적이는 시장에서 빵이 든 바구니를 흔들며 걷는 편이 훨씬 잘 어울릴 것 같았다.
그럼에도 베라는 그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잭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기 때문이다.
“시아나 공주님이 나를 감옥에서 풀어 주는 조건으로 혁명군의 수장과 만나게 해 달라고 했어. 그에 응하자 달탄 장군이 직접 나서서 감옥 문을 열어 주었고.”
제국군 지휘자 달탄이 나섰고 그가 공주라는 것을 부정하지 않았다면, 눈앞의 여자가 진짜 시아나 공주인 것이 틀림없었다.
‘그래. 귀여운, 아니 얼핏 귀여워 보였던 저 여자가 시아나 공주라고 치자.’
그럼에도 여전히 이 상황이 쉽게 납득되지 않았다.
베라가 매서운 눈빛으로 물었다.
“귀하신 공주님이 왜 이런 곳까지 온 거지? 혹시 나를 잡아 혁명군을 박멸하고 싶은 거라면 큰 보람은 없을 거야.”
애초에 혁명군은 권력을 잡고 싶은 이들이 만든 것이 아니었다.
한 명의 권력자를 위해 천 명의 사람들이 희생하는 세상을 바꾸기 위해 모인 것이다.
리더는 형식일 뿐.
베라가 잡혀가거나 죽으면, 다음 사람이 그 자리에 오게 되어 있었다.
시아나가 눈썹을 내렸다.
“만약 그런 의도로 찾아왔다면 혼자 오는 게 아니라 병사들을 이끌고 왔을 겁니다.”
“…….”
확실히 시아나는 혼자 왔다.
뒤에 누군가 따라온 것이 아닌가 싶었지만 시간이 한참 흐른 지금도 그런 기색은 전혀 없었다.
그래서 더 수상했다.
“이곳은 새 나라를 외치는 이들이 모여 있는 곳이야. 이런 곳에 공주님이 나타나면 무슨 취급을 받을지 모르나?”
일부러 눈을 부릅뜨고 호랑이처럼 험악하게 말했건만, 시아나는 조금도 겁먹지 않고 담담하게 말했다.
“최악의 경우 죽을 수도 있겠죠.”
“……?!”
“아니면 이대로 납치를 당할 수도 있고요. 이름뿐인 공주이긴 하지만 요긴하게 쓰일 곳이 많을 테니까요.”
베라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것을 알면서도 혼자 이곳에 왔다고?”
“네.”
“……어째서?”
“말했잖아요.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요.”
멍하니 시아나를 바라보던 베라가 중얼거렸다.
“당신은 지금까지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잖아.”
제국군에게 나라가 짓밟힐 때도, 그보다 전에 왕족과 귀족들의 횡포에 나라가 썩어 들어갈 때도.
왕실의 1공주 시아나 아실론드 폰 실리테는 마치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처럼 침묵했다.
“그랬던 사람이 지금 와서 우리들과 대화를 하고 싶다고? 내내 숨어 있던 비겁한 공주님 따위가!”
베라의 갈색 눈동자에는 시아나를 향한 짙은 적의와 경멸이 담겨 있었다.
시아나는 그 눈빛을 피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물론 시아나에게도 나름의 사정이 있었다.
어떻게든 저를 비싸게 팔아넘기고 싶어 하는 왕과 틈만 나면 저를 괴롭히는 새 왕비 아래에서, 시아나는 제 몸 하나 건사하는 것도 힘들었다.
나라와 백성을 챙길 수 있는 여유 같은 것은 조금도 없었다.
그럼에도 시아나는 아실론드의 공주였다.
그래서 시아나는 고개를 숙였다.
“공주로서 책임과 의무를 다하지 못한 것을 인정합니다.”
“……!”
갑작스러운 시아나의 행동에 눈을 부릅뜬 베라를 향해 시아나가 말을 이었다.
“혁명군은 아실론드 왕국의 시대를 끝내고 새 나라를 만들고 싶어 한다고 들었습니다.”
그 순간 베라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역시 저 여자가 이곳까지 온 건 우리를 살살 구슬려 혁명에 대한 의지를 접게 하기 위해서가 분명해.’
시아나는 마지막 남은 왕족이었다. 새 나라를 외치는 이들이 거슬릴 것이 당연했다.
문제는 그녀의 뒤에 제국의 황태자가 있다는 것이다.
그녀가 마음먹고 제국군과 합심하면 혁명군을 쓸어버리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절대 그렇게 두어선 안 돼.’
혁명군은 이제 막 꽃망울이 피기 시작하는 단계였다.
이 상태에서 짓밟혀 버린다면 앞으로 꽃이 피기는커녕, 다시 꽃망울이 나는 것조차 힘들어질 것이다.
그럼 모두가 웃을 수 있는 새 나라는 영영 물거품이 되어 버릴지도 모른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베라의 눈동자가 사냥감을 앞에 둔 늑대처럼 서늘해졌다.
‘지금 시아나 공주를 잡자.’
시아나는 납치의 가능성을 예상했음에도 겁 없이 혼자 이곳까지 왔다.
세상물정 모르는 순진함 때문인지 다른 무언가를 노리고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혁명군 측에게는 더없는 기회였다.
‘시아나 공주는 왕국의 유일한 왕족인 동시에 제국 황태자의 연인이야. 그녀를 데리고 있으면 제국군과 귀족은 우리를 함부로 건들 수 없을 거야.’
표정이 사라진 베라가 시아나를 향해 손을 뻗으려던 순간이었다.
“제가 그것을 돕겠습니다.”
“……?!”
순간 베라는 시아나의 말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뭘 도와? 내가 당신을 납치하려는 것을 돕는다고?’
잠시 후, 베라는 한 박자 늦게 시아나의 말을 이해했다. 그러고는 뒤통수를 거대한 망치로 휘갈겨진 표정을 지었다.
베라가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말했다.
“새 나라를 만드는 것을 돕겠다고?”
너무 어이가 없어서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놀랍게도 시아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
눈을 부릅뜬 베라를 향해 시아나가 말을 이었다.
“혁명군이 새 나라를 만드는 것은 결코 녹록지 않은 일이에요. 귀족들은 물론 제국군도 그것을 허락하지 않을 테니까요.”
베라가 눈썹을 찡그렸다.
“새 나라를 만드는 데 그놈들의 허락은 필요 없어. 그치들은 모두 이 땅을 좀 먹는 벌레들일 뿐이니까.”
시아나는 베라의 감정을 이해했다.
하지만 혁명이란 감정만으로 성공 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시아나가 냉정한 얼굴로 말했다.
“귀족들은 몰라도 제국군의 힘은 막강해요. 제국군이 본격적으로 혁명군을 탄압한다면, 혁명군은 가루가 되어 무너지고 말 겁니다. 힘의 차이가 역력하니까요.”
그 말에 베라가 입술을 깨물었다.
열 받긴 했지만 시아나의 말은 사실이었다.
혁명군이 이만치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그나마 제국군이 봐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제국군과 맞서는 것이 아니라 구슬리는 작전을 쓰도록 하죠.”
“……뭐?”
예상하지 못했던 말에 베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런 베라를 바라보며 시아나가 말을 이었다.
“대대로 왕가에 비밀리에 내려오는 보물이 있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제국군과 새 나라에 대한 협상을 하지요. 제국에서도 구미가 당길 만한 물건이니 분명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거예요.”
“…….”
“제국군이 이쪽 편이 되어 준다면 귀족들도 반발하지 못할 테니, 혁명군은 조금의 피도 흘리지 않고 새 나라를 만들 수 있어요.”
베라가 뭐라 형용할 수 없는 얼굴로 시아나를 바라보았다.
등장부터 모든 것이 놀라웠지만 지금 한 말이 가장 충격적이었다.
시아나는 아실론드 왕국에 남은 유일한 왕족인 데다가, 제국 황태자와 특별한 관계이기까지 했다.
거기에 그녀의 말처럼 왕가의 보물이라는 것이 있다면, 시아나는 무너진 아실론드 왕국의 권력자로 완벽하게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그런데 그것을 새 나라를 위해 쓰겠다고?
도저히 납득이 되질 않았다.
“도대체 왜 그런 제안을 하는 거지?”
“…….”
“당신한테는 조금도 이득이 되지 않는 일이잖아.”
“……왕족으로서 백성들을 제대로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한 죗값을 조금이나마 갚고 싶습니다.”
베라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순간 시아나가 눈썹을 내리며 말을 이었다.
“—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래선 안 되겠죠. 감히 그런 말을 입에 담아서는 안 될 만큼 저는 나라에 무심했으니까요.”
“…….”
“사실 이 일을 통해 개인적으로 얻고자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 말에 베라의 눈빛이 변했다.
그럼 그렇지. 세상 어떤 바보가 제 손에 쥔 보물을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고 남에게 주겠어?
베라는 한순간이나마 시아나에게 막연한 기대감을 품었던 자신을 비웃으며 삐뚜름한 미소를 지었다.
“그게 뭔데?”
“그건…….”
그러나 지금까지 술술 말했던 모습과 달리 시아나는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결국 시아나는 속에 있는 말을 삼키며 말했다.
“그건 왕실의 보물을 가지고 제국군과 무사히 협상을 마친 후에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때 이야기를 들어 보고 가능하다면 제 부탁을 들어주세요.”
“…….”
눈앞의 여자는 왕족이었다.
평민 따위는 그저 저를 모시기 위해 태어났다고 믿으며 개돼지보다 못한 취급을 했던 왕족.
그러나 시아나의 에메랄드빛 눈동자에는 위압감이나 오만함, 악랄한 감정 같은 것은 조금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오히려 아주 맑고 곧았다.
그렇기에 베라는 혼란스러운 감정을 감출 수가 없었다.
베라가 손가락으로 이마를 내리누르며 말했다.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던 이야기라 바로 대답하기가 곤란하군.”
“이해합니다.”
고개를 끄덕인 시아나가 말을 이었다.
“다만 제가 여유롭게 기다릴 형편이 되지 않습니다. 혁명군이나 제국군, 그리고 귀족의 입장도 마찬가지일 테고요. 그러니 최대한 빨리 결정을 내리셨으면 좋겠군요.”
“그렇게 하지.”
베라의 대답을 끝으로 대화는 끝이 났다.
의자에서 일어난 시아나가 참, 하고 중얼거리더니 말했다.
“잭 외에도 혁명 운동으로 붙잡힌 이들을 내일 중으로 풀어 주도록 하겠습니다.”
“공주님의 제안을 군말 없이 받아들이라고 주는 사탕인가? 아니면 공주님이 얼마나 대단한 힘을 가졌는지 과시하고 싶은 거야?”
베라의 비아냥거리는 말투에도 시아나는 불쾌한 내색을 조금도 내비치지 않고 말했다.
“아무 죄가 없는 이들이기에 풀어 주는 것뿐이에요.”
그들이 한 활동은 지극히 온화했다.
신문을 써서 곳곳에 뿌리거나, 사람들을 모아 토론을 한 것뿐이었다.
시아나가 말을 이었다.
“새 나라를 열망하는 것은 결코 죄가 될 수 없죠.”
이따위 지옥 같은 나라에서는 더더욱.
들릴 듯 말 듯 한 작은 목소리에 베라는 눈을 크게 떴다.
그런 베라를 향해 시아나는 치맛자락을 들어 우아하게 인사했다.
“그럼 답변을 기다리겠습니다. 생각을 정하면 왕궁으로 서신을 보내 주십시오.”
* * *
시아나가 탄 마차가 왕궁에 도착했다. 시아나가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그레이스와 츄츄가 달려들었다.
“괜찮아?”
“험악한 놈들이 못된 짓을 하지 않았느냔 말이여!”
두 사람은 그렇게 말하며 시아나의 얼굴, 목, 머리통, 손가락 하나하나까지 꼼꼼히 확인했다.
‘우와. 내가 식재료 관리실에서 일했을 때 매일 아침 살펴보았던 야채가 된 느낌이야.’
그 정도로 꼼꼼하고 섬세한 검사였다.
시아나의 몸에 조금의 상처 자국도 없음을 확인한 두 사람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시아나가 말했다.
“걱정 마세요. 우려할 만한 일은 조금도 없었어요.”
그럼에도 두 사람의 눈빛에는 여전히 걱정이 어려 있었다.
그레이스가 눈썹을 찡그리며 말했다.
“무사히 돌아와서 다행이지만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쩔 뻔했어?”
츄츄가 고개를 끄덕였다.
“왕국을 아예 없애 버리고 싶어 하는 자들에게 호위도 없이 가다니. 바짝 성이 난 고양이한테 싱싱한 물고기가 제 발로 가는 것과 뭐가 달러.”
두 사람의 말대로 시아나가 홀로 혁명군의 대장을 만나고 온 것은 위험부담이 큰 일이었다.
시아나가 눈썹을 내리며 대답했다.
“하지만 병사들을 이끌고 갔다면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눌 수 없었을 거예요.”
대화는커녕, 시아나가 저들을 잡으러 왔다고 생각해 전투가 벌어지거나 뿔뿔이 도망가 버렸을 것이다.
그래서는 곤란했다.
“그리고 저도 아무 생각 없이 위험을 자처한 것은 아니에요.”
시아나에게도 믿는 구석이 있었다.
하나는 혁명군의 성격이었다.
지금까지의 혁명군 활동을 살펴보면 무척 온화했다.
최대한 피를 보지 않고 평화롭게 새 나라를 세우고 싶어 하는 의지가 느껴졌다.
그런 혁명군의 리더라면 시아나에게 위해를 가하거나 납치를 하는 것보다는, 시아나의 제안에 관심을 가질 것이라 생각했다.
예상은 적중했다.
‘바로 대답해 주진 않았지만, 내 제안에 어떤 계략이나 위험 요소가 없다고 판단하면 분명 수락할 거야.’
시아나는 떠나기 직전 보았던 베라의 눈빛에서 확신할 수 있었다.
그리고 또 하나, 혼자 다녀오기로 결심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가 있었다.
“이건 비밀인데, 사실은 혼자 다녀온 것이 아니에요.”
“뭐?”
그레이스와 츄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시아나가 헤실 웃으며 말했다.
“블랙 쉐도우 기사단분들이 함께 가 주었어요.”
“……?!”
물론 시아나는 그들에게 따로 동행을 부탁하지 않았다. 그들이 따라온다는 어떤 낌새도 느낄 수 없었다.
그것은 혁명군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하지만…….
시아나는 손나팔을 만들어 커다랗게 외쳤다.
“어딘가에서 지켜보고 있다가 제게 위험이 닥치면 나서 줄 생각이셨죠?”
그 순간 정원에 있던 커다란 나무들이 사라락 흔들렸다.
시아나의 말에 대답하듯이.
그레이스와 츄츄는 눈처럼 흩날리는 나뭇잎을 기가 찬 얼굴로 바라보았다.
어쨌든 시아나가 대책 없이 다녀온 것이 아니라니 다행이었다.
그레이스가 한숨을 내쉬며 시아나의 팔짱을 꼈다.
“아무튼 고생 많았어. 식사를 준비해 두었으니 밥이나 먹자.”
츄츄도 시아나의 한쪽 팔에 팔짱을 꼈다.
“왕국에 도착하자마자 감옥에 있던 혁명군을 설득하고 혁명군 대장까지 만나고 오느라 내내 식사를 제대로 못했잖여.”
시아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두 사람과 팔짱을 낀 채 식당으로 향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블랙 쉐도우 기사들은 생각했다.
꼭 사자와 곰에게 연행되어 가는 작은 토끼 같다고.
* * *
식사를 마친 시아나는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누웠다. 그 순간 피로가 확 밀려들었다.
제국에서부터 마차를 타고 쉼 없이 달리고, 왕궁에 도착해서는 더더욱 정신이 없었으니 당연했다.
‘내일도 할 일이 많아. 어서 자자.’
시아나는 눈을 감았다.
하지만…….
몸에 피로가 잔뜩 쌓였음에도, 도무지 잠이 오질 않았다.
‘흔들리는 마차에서도, 황궁에서 수습 시녀로 일했던 동안 묵었던 거미줄 쳐진 낡은 방에서도 잘만 잤는데…….’
어느새 눈을 뜬 시아나가 방 안을 바라보더니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이곳에서는 결코 편하게 잘 수가 없어.”
물론 이곳은 시아나가 태어나고 자란 고향이며, 집이었다.
심지어 지금 시아나가 누워 있는 방은 그녀가 어린 시절부터 쓰던 곳이었다.
방은 시아나가 지냈을 때보다 훨씬 깨끗하고 따스하게 꾸며져 있었다.
달탄 장군의 배려였다.
그럼에도 시아나에게는 이 방이 너무나 불편했다.
오랜 시간 지냈던 방에는 따스한 추억보다는 끔찍한 기억이 가득했기 때문이다.
눈을 내리깐 시아나는 어린 시절의 기억 한 자락을 떠올렸다.
이제 막 6살이 된 시아나는 방에 틀어박혀 흐느끼고 있었다.
오늘 열렸던 왕의 생일 연회에서 있었던 일 때문이다.
시아나는 수줍은 얼굴로 왕에게 동그란 자수를 내밀었다. 그러나 왕은 그것을 보고 기뻐하기는커녕 혀를 쯧쯧 찼다.
이따위 형편없는 것을 어찌 선물로 주느냐며.
자수는 바닥에 버려졌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깔깔깔 웃었다.
그때를 떠올린 시아나는 너무나 서러워서 도저히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달칵.
노크 소리도 없이 열린 문에 시아나는 눈을 크게 뜨고 고개를 들었다.
놀랍게도 방에 들어선 이는 새 왕비였다.
새 왕비가 시아나의 방에 찾아온 것은 처음이었다.
우습게도 그 순간 시아나는 어리석은 기대를 했다.
‘혹시 나를 위로해 주려고 오신 걸까.’
그러나 눈물이 젖어 있는 시아나의 작은 얼굴을 바라보며 새 왕비가 내뱉은 말은, 시아나의 예상과 전혀 다른 것이다.
“지나가는데 네가 우는 소리가 복도 밖까지 들리더구나. 공주가 되어 이 무슨 체통 없는 행동이냐.”
“……!”
사실 시아나는 할 말이 많았다.
한 달 동안 손가락이 부르트도록 열심히 만든 자수를 아바마마께서 마음에 안 들어 하셔서 너무 속상했어요.
게다가 그 자수는 제가 지금까지 만든 것 중 가장 예쁘게 완성한 작품이었는걸요.
그러나 어린 시아나는 그런 말을 해 보았자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저를 내려다보는 새 왕비의 눈빛이 너무나 싸늘했으니까.
시아나가 두 손을 바들바들 떨며 겨우 입을 열었다.
“자, 잘못했어요.”
“…….”
“이, 이제 울지 않을게요. 정말 이에요.”
살기 위해 필사적으로 내뱉은 말이었다.
그러나…….
“말 한마디로 그냥 지나갈 일이 아니다. 아무리 어려도 공주는 공주. 그에 걸맞은 우아한 몸가짐에 대해 엄격하게 배울 필요가 있어.”
언제나 그렇듯 새 왕비는 어린 공주의 사정 따위는 봐주지 않았다.
새 왕비가 시녀에게 회초리를 받아 들며 말을 이었다.
“치마를 걷고 서거라.”
“…….”
새 왕비의 눈빛이 섬뜩했다.
시아나는 싫다는 말을 하거나 도망갈 생각도 못하고, 벌벌 떨며 그녀의 앞에 섰다.
새 왕비는 회초리를 휘둘렀다.
겁에 질린 시아나가 울다, 울다, 또 울다가 결국은 눈물이 메말라 울지 않을 때까지.
새 왕비가 시아나를 내려다보며 붉은 입술을 삐뚜름하게 올리며 말했다.
“그래, 이제야 울음을 멈추는 법을 배웠구나. 오늘을 잘 기억하거라.”
열여덟 살의 시아나가 중얼거렸다.
“입술을 깨물고 울음소리를 삼켜. 계속, 계속. 그러면 소리 나지 않게 울 수가 있어.”
시아나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다 잊어버린 줄 알았는데…….”
한동안은 확실히 잊었었다. 제국으로 가 시녀로 일하면서부터였다.
이른 새벽부터 일어나 늦은 밤까지 몸을 움직여야 했으니 잡생각을 할 틈이 없었다.
황태자궁으로 옮겨 몸이 편안해진 후로도 마찬가지였다.
시아나는 가라앉은 눈동자로 천장을 바라보다가, 가슴 안쪽에 손을 넣었다.
이내 옷 속에 가려져 있던 목걸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가죽 끈으로 만들어진 목걸이에는 동글동글하고 매끈한 도토리 한 알이 달려 있었다.
황궁을 떠나기 전 라시드가 준 선물이었다.
방금 전보다 눈에 띄게 얼굴이 밝아진 시아나가 말했다.
“아마 이 도토리는 세상에서 가장 예쁜 도토리일 거야. 하지만 도토리의 진짜 능력은 따로 있지.”
겉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도토리 안에는 반짝이는 보석이 하나 들어 있었다.
마력석이었다.
[이 마력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끼리는 서로의 목소리를 주고받을 수 있어. 그러니 언제든 내 목소리가 듣고 싶거든 도토리에게 말해.]
시아나의 목에 목걸이를 매달아 주며 라시드가 했던 말이었다.
그러나 시아나는 긴 여행 기간 동안 한 번도 도토리의 힘을 사용한 적이 없었다.
“온 세상의 도토리나무를 다 합해도 이 도토리 하나 가격보다 적을걸. 그러니 아무리 전하가 주신 선물이라도 쉽게 사용할 수 있을 리가.”
게다가 도토리의 힘을 사용할 수 있는 건 단 세 번뿐이었다.
시아나는 그에게 꼭 연락을 해야만 하는 중요한 순간을 위해 그 힘을 아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시아나는 복잡한 얼굴로 도토리를 바라보다가 결심한 듯 눈썹을 올렸다.
“도토리에 대고 주문을 외우면 된다고 했지?”
그러면 마력석에 담긴 마법이 발동되어 라시드가 가지고 있는 마력석으로 시아나의 목소리가 전달된다고.
사실 한 번도 사용한 적이 없었기에 그런 신기한 일이 가능하다는 것이 믿겨지지가 않았다.
그래서 시아나는 살짝 긴장이 어린 얼굴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라시드.”
그 순간 도토리에서 환한 빛이 새어 나왔다.
그리고…….
/시아나./
“꺅!”
마력석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시아나가 작은 비명을 내질렀다.
/왜 그래, 괜찮아?/
시아나는 가슴을 콩닥이며 도토리를 귓가에 가져갔다.
분명 라시드의 목소리였다.
“막상 전하의 목소리가 나오니 놀랐어요.”
/아아……./
“게다가 이렇게 바로 응답이 올지는 예상하지 못했거든요.”
솔직히 말하면 시아나는 라시드에게서 응답이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지금 이 순간 라시드가 무얼 하고 있는지 전혀 알 수가 없기 때문에.
라시드가 잠을 자고 있거나, 다른 업무를 보고 있으면 바로 대답하지 못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걱정과 달리 라시드의 응답은 번개처럼 빨랐다.
시아나가 헤실 웃으며 말했다.
“꼭 하염없이 마력석을 붙들고 기다리고 있었던 사람 같아요.”
/……./
“……혹시 제 말이 정답이에요?”
라시드는 그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대신 평소보다 살짝 빨라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내가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았던 것은 결코 아니야. 어마마마나 다른 황족들의 동향도 잘 살피고 있고, 앙겔루스 공작과도 이야기를 잘 끝냈어. 앙겔루스 공작과 함께 내 쪽에 설 귀족들을 포섭하고 있단다./
변명하듯 말을 내뱉던 라시드가 작은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겨우 너와 대화를 하게 되었는데 이따위 냄새나는 놈들의 이야기만 하다니./
라시드의 말에 시아나가 웃었다.
“왜요, 전 좋은걸요.”
/……이런 내용이 취향이야?/
“그럴 리가요. 그냥 전하의 목소리를 들으니까 좋아요. 엄청 듣고 싶었거든요.”
잠시 말이 없던 라시드가 살짝 뾰로통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것치고 연락이 너무 늦었는데./
“솔직하게 말하면 황궁을 떠난 날 바로 연락을 하고 싶었어요. 하지만 엄청난 의지와 인내로 참았죠. 정말 필요한 때를 대비해서 말이에요.”
/그렇다는 건 지금이 꼭 연락을 해야 할 때라는 거군./
라시드가 살짝 낮아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무슨 일이야. 혹시 누가 널 괴롭히기라도 해?/
“그렇다고 하면 당장 쫓아와 때찌라도 해 주시려고요?”
/당연하지. 가장 빠른 말을 타고 가면 5일이면 그곳에 도착할 거야. 그때까지 너를 괴롭힌 놈들을 어떻게 혼내 줄지 잘 생각하고 있어./
한없이 달콤한 말에 키득거리던 시아나는 잠시 후 불길한 예감에 헉 하고 눈을 크게 떴다.
“설마 진짜 오려고요?!”
/……./
시아나는 라시드의 침묵에서 긍정을 읽었다.
시아나가 황급히 물었다.
“지금 어디예요?”
/황태자궁 밖./
“세상에. 무슨 사람이 번개보다 빨라.”
황당한 얼굴로 중얼거린 시아나가 폭주하는 말을 달래듯 말했다.
“다시 방으로 들어가세요. 그리고 얌전히 침대에 누워요, 제발.”
/하지만……./
“나는 전하에게 와 달라는 말을 하려고 연락을 한 게 아니에요. 그냥 평범하게 수다를 떨고 싶었던 거라고요!”
‘그렇게 내 마음을 몰라요?’라는 작은 원망이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다행히 시아나는 더 이상 라시드를 설득하지 않아도 됐다.
이내 라시드의 목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다시 돌아와서 침대에 얌전히 누웠어. ……그러니까 화내지 마./
“화낸 거 아니에요. 조금 당황한 것뿐이지.”
/……./
두 사람 사이에 잠시 정적이 맴돌았다.
잠시 후, 먼저 입을 연 것은 라시드였다.
/많이 힘들어?/
“……사실 좀 그래요.”
침대 위에 쭈그려 앉은 시아나는 무릎에 얼굴을 기대며 말을 이었다.
“아실론드 왕국에 도착하니 제국군 장군과 병사들은 저를 극진히 맞아 주더군요. 전하와 특별한 관계니 더할 바 없이 귀한 분이라고요. ……그런데 아실론드인들의 반응은 전혀 달랐어요.”
감옥에 있던 혁명군들, 낡은 술집에서 만난 혁명군 리더, 그리고 아직까지 왕궁에 남아 있던 몇 명의 시녀와 시종들.
“그들의 눈빛에 어린 감정은 결코 호의가 아니었어요. 경멸과 적의에 가까웠죠.”
그러나 시아나는 그들에게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나는 왕실에서 조금도 사랑받지 못한 구박데기 공주님이었어요. 그저 내 목숨 하나 지키는 데 급급해서 나 말고는 아무것도 살필 겨를이 없었어요.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겠어요. 나는 나라를 버리고 떠난 무능하고 이기적인 공주일 뿐인데.”
/……./
“그러니 충분히 예상했었던 것인데도 막상 겪어 보니 마음이 아프더라고요. ……좀 많이.”
단순히 그들에게 서운해서만은 아니었다.
그들을 살피지 못한 것에 대한 부끄러움과 죄책감이 더 컸다.
괴로운 얼굴로 입술을 깨문 시아나에게 라시드의 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만약 내가 너 같은 환경에서 태어나고 자랐더라면 나는 아마…… 진즉 죽어 버렸을 거야./
“……!”
/혹은 죽여 버렸겠지. 나를 둘러싼 모든 자들을./
시아나는 라시드에게 제가 아실론드 왕국에서 어떻게 지냈는지에 대해서 자세히 말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라시드는 시아나에게 스쳐 지나가며 들었던 몇몇 이야기들과 달탄이 보내온 정보를 통해 그녀가 얼마나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냈는지 알았다.
라시드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넌 그렇지 않잖아. 끝끝내 살아남았고, 지금은 웃고 있어./
그러니까 그런 점이 너무 무책임하고 이기적인 것이라고…….
그리 생각하는 시아나를 향해 라시드의 목소리가 부드럽게 울려 퍼졌다.
/그런 너를 존경해. 그런 강함은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게 아니지./
“…….”
시아나는 잠시 숨을 멈췄다.
한참 후, 시아나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못 본 사이에 위로하는 방법이 무척 세련되어지셨네요.”
/위로가 아니라 진심이야. 그리고 나는 이렇게 말로만 위로하는 건 취향이 아닌데./
라시드가 낮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위로는 만나서 제대로 해 줄게./
“……!
평범한 말이 왜 이렇게 야릇하게 느껴지는 걸까.
시아나는 어쩐지 얼굴에 열이 확 올랐다.
그때 마력석의 빛이 깜빡거리기 시작했다.
시아나가 아, 하고 소리치며 말했다.
“마력석을 이용할 수 있는 시간제한이 있다고 했죠?”
/신경 쓰지 마. 마력석의 빛이 사라지면 다시 한번 내 이름을 부르면 되잖아./
마력석의 힘을 또 쓰라는 말이었다.
그러나 시아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싫어요. 아끼고 아껴 두었다가 오늘처럼 꼭 필요할 때 쓸 거라고요.”
라시드가 작게 한숨을 내쉬더니 중얼거렸다.
/시간 여유만 더 있었더라면 도토리 100알은 챙겨 주었을 텐데./
시아나는 라시드의 말에 푸훗, 하고 웃었다.
만약 그랬다면 시아나는 여행 내내 라시드와 대화를 나눌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때마다 대저택 값이 하나씩 날아갔겠지.’
제아무리 이 제국에서 손꼽히는 재력을 가진 라시드라도 휘청일 만한 금액일 게 분명했다.
‘그건 곤란하지.’
키득 웃은 시아나가 도토리를 가까이대고 말했다.
“이만 인사해요.”
/……./
얼굴이 보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라시드가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입술을 오리처럼 쭉 내밀고는 잔뜩 아쉬운 얼굴을 하고 있겠지.
일순 마음이 약해졌지만 시아나는 다시 마음을 다잡고 속삭였다.
“잘 자요.”
/……잘 자./
“사랑해요.”
대답은 한 박자 늦게 들려왔다.
/……사랑해./
그 말을 끝으로 도토리에서 빛이 사라졌다.
시아나는 평범한 도토리로 돌아온 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신기한 일이었다.
그저 라시드와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눈 것뿐인데, 가슴속에 뭉쳐 있던 무언가가 뻥 뚫린 느낌이었다.
시아나는 입꼬리를 올리며 행복한 얼굴로 눈을 감았다.
오늘 밤은 푹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라시드는 전혀 아니었지만.
제국의 황태자궁, 라시드는 빛이 사라진 도토리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런 말을 들었는데 어떻게 자라고.”
당장이라도 동그랗고 말랑말랑하고 앙증맞은 시아나를 꼭 끌어안고 싶었다.
어느덧 배 위로 올라와 꼬물거리는 쭉쭉이(흰 페럿)와 냠냠이(다람쥐)를 안아 보았지만 소용없었다.
라시드는 괴로움이 가득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 * *
어린 시아나는 제 방에서 울고 있었다. 소리가 조금이라도 새어 나갈까 봐 베개에 얼굴을 파묻은 채로.
달칵. 창문이 열리는 소리에 어린 시아나는 ‘힉’ 하고 작은 비명을 내질렀다.
‘어떡해. 어마마마께서 또 오셨나 봐!’
하지만 방 안에 들어온 이는 붉은 입술을 한 새 왕비가 아니라 작은 요정이었다.
은빛 머리카락과 보라색 눈동자를 한, 엄청나게 예쁜 요정.
요정이 투명한 날개를 파닥이며 말했다.
“난 슬픔을 없애 주는 요정이야. 네 얼굴을 보니 지금 많이 힘든가 보구나.”
“…….”
어린 시아나는 멍하니 요정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가 그 슬픔을 없애 줄까?”
“……응.”
어린 시아나는 이번에도 고개를 끄덕였다.
요정이 두 눈을 부드럽게 휘며 웃더니 어린 시아나의 눈가로 다가왔다.
그러더니 동그란 눈동자 아래에 대롱대롱 맺혀 있던 눈물을 핥았다.
“꺅, 이게 무슨 짓이야?!”
어린 시아나가 놀라 소리쳤다.
요정이 말했다.
“이게 내가 슬픔을 없애는 방법이야. 어때, 기분이 좋아지지 않았어?”
“……잘 모르겠어. 그냥 너무 간지러운데.”
“그래도 조금 더 내게 눈물을 맡겨 봐. 금세 실실 웃음이 나오게 될걸?”
“…….”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요정을 바라보던 어린 시아나는 고민 끝에 고개를 끄덕였다.
요정은 다시 한번 왕 하고 입을 크게 벌려 시아나의 눈물방울을 먹기 시작했다.
너무너무 맛있다는 얼굴로.
침대 위에서 눈을 번쩍 뜬 시아나가 말했다.
“세상에. 별 황당한 꿈을 꿔 버렸네. 이런 게 개꿈이라는 거구나.”
시아나가 눈을 깜빡이며 천장을 바라보다가 중얼거렸다.
“……그래도 좋았어. 요정이 전하를 꼭 닮았었는걸.”
그러나 흐뭇한 마음과는 별개로 너무나 부끄러운 내용이었기에 시아나는 꿈이라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나 말고는 아무도 모를 테니까.’
자리에서 일어난 시아나는 두 팔을 뻗어 기지개를 켰다.
오랜만에 몸이 아주 개운했다.
푹신한 침대에서 숙면을 취한 덕분이었다.
시아나가 창문 너머로 보이는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오늘도 힘내자!”
* * *
시아나는 제 방에서 산더미처럼 쌓인 서류들을 읽고 있었다.
달탄 장군에게서 받은 서류에는 아실론드 왕국에 대한 자세한 정보가 빼곡히 적혀 있었다.
‘왕궁 내에 남아 있던 자료들은 모두 너무 오래된 데다 정확하지가 않아서 적군의 지휘자가 모은 자료를 읽어야 한다니. 정말 창피한 일이야.’
씁쓸한 현실이었지만 서류 안에 담긴 내용은 그보다 더 끔찍했다.
시아나는 암담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썩을 대로 썩은 나라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였을 줄이야…….”
오랜 시간 나라를 다스린 왕족과 귀족들의 사치에 국가 재정은 파탄이 난 지 오래.
그나마 농사를 지어 겨우 먹고살았지만 워낙에 토지가 척박한 데다가 작물 재배에 대한 연구도 없던 지라 갈수록 흉작이 심해지고 있었다.
읽으면 읽을수록 우울하기만 했다.
“……지옥 같은 곳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
지금의 아실론드 왕국은 지옥이란 표현도 부족했다.
몇몇 귀족을 제외한 평민들은 궁핍함에 치여 고통스럽게 살고 있을 것이다.
“…….”
시아나는 혁명군 리더를 만나러 갔던 날 보았던 수도의 뒷골목을 떠올렸다.
살집 하나 없이 비쩍 마른 사람들. 그들은 하나같이 퀭한 얼굴로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의 눈동자에는 행복이나 희망, 미래에 대한 기대감 따위는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오늘 하루를 어떻게 살아남아야 할지에 대한 고단함이 있을 뿐.
시아나가 중얼거렸다.
“뭉그적거릴 틈이 없어. 최대한 빨리 일을 진행해야 해.”
그때였다.
똑똑, 하고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문을 열어 보니 제국군 장군 달탄이 당혹스러운 감정이 어린 얼굴로 서 있었다.
시아나가 무슨 일이냐고 묻기도 전 달탄이 말했다.
“혁명군의 리더, 베라 펄슨이 공주님을 찾아왔습니다.”
제국군과 마주치면 좋을 게 없는 여인이 제 발로 당당하게 황궁에 나타나다니. 그것도 공주를 만나기 위해.
기함할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그러나 정작 시아나는 기다렸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 * *
화려한 응접실에는 그곳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차림의 여인이 앉아 있었다.
혁명군의 리더, 베라였다.
허름한 드레스를 입은 베라는 눈썹을 찡그린 채 싸구려 담배를 입에 물고 앉아 있었다.
이내 시아나가 등장했다.
한없이 배경과 이질적이었던 베라와 달리 물빛 드레스를 입은 시아나는 고급스러운 방과 제법 잘 어울렸다.
시아나가 치맛자락을 들어 정중하게 인사했다.
“어서 오십시오.”
베라도 고개를 까닥였다.
공주에게 하는 인사라고 하기에는 불경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었다.
베라가 눈을 내리깔며 말했다.
“며칠 전에 공주가 나를 찾아와 한 방 먹였기에 똑같이 해 주려고 기껏 여기까지 찾아왔는데, 전혀 놀란 기색이 아니군.”
베라의 말에 시아나가 부드러운 얼굴로 말했다.
“혁명군이 이성적인 사고로 판단하는 집단이라면 당연히 저의 제안을 받아들일 거라 생각했으니까요.”
베라가 코끝을 찡긋거렸다.
사실 시아나의 말대로였다.
시아나가 다녀간 후 혁명군 간부들 사이에서 회의가 열렸다. 며칠간 밤새워 의견을 나눈 끝에 내린 결론은 하나였다.
시아나 공주가 왜 이런 일을 진행하는지 내막은 알 수 없으나, 이것은 혁명군에게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기회다.
어떻게든 이 기회를 잡아 새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 베라가 직접 이곳으로 온 것이다.
“하지만 공주의 제안에 응하기 전에 한 가지 확인하고 싶은 게 있어.”
“말씀하십시오.”
“당신이 말한 왕실의 보물. 도대체 그게 뭐지?”
“…….”
“기껏 당신을 믿고 따르기로 했는데, 별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와서 제국군과 협상을 하자고 하면 곤란하잖아.”
시아나는 저를 믿지 못하냐며 화내지 않았다. 감히 왕실의 보물을 우습게 보냐고 불쾌해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당연한 말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가진 무기가 궁금하시겠죠. 이왕 이렇게 오셨으니 지금 보여 드리겠습니다.”
“……?!”
“다만 오늘 본 것은 때가 올 때까지 절대 비밀로 하셔야 합니다. 그 정도는 약속해 주실 수 있겠죠?”
그 목소리에는 이전에 없던 위압감이 어려 있어 베라는 살짝 긴장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시아나는 베라를 데리고 왕궁의 안쪽으로 향했다.
황금으로 장식된 거대한 방문을 열며 시아나가 말했다.
“왕의 침실입니다. 왕과 왕이 허락한 이들 외에는 누구도 출입이 허락되지 않은 곳이죠.”
심드렁한 얼굴로 방에 들어선 베라는 이내 입을 쩍 벌렸다.
‘왕궁을 거닐며 호화스러운 풍경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이곳은 아예 급이 다르잖아!’
제국군의 삼엄한 경비 아래 완벽하게 보존된 왕의 방은 어마어마했다.
수십 명의 사람이 누워도 여유로울 것 같은 거대한 크기에 벽 전체에 금을 발라 사방이 번쩍거렸다.
천장에는 보석이 촘촘히 박힌 거대한 샹들리에가 매달려 있었고 곳곳에 화려한 예술품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사람이 잠을 자는 방이라기보다는 온갖 보물을 모아 놓은 미술관 같았다.
베라가 기가 찬 얼굴로 방을 바라보다가 중얼거렸다.
“우리들은 빵 한 쪽이 없어서 굶어 죽어 갈 동안 고작 잠이나 자는 곳을 이렇게 사치스럽게 꾸며 놓고 시시덕거리며 살았구나, 망할 돼지 새끼. 제국군이 아니라 내 손에 죽었어야 했는데.”
왕에 대한 강렬한 원망이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시아나를 향해 고개를 돌린 베라가 분노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설마 이 방이 그토록 당당하게 말했던 왕실의 보물이야?”
확실히 아무것도 모르는 평민의 눈으로 봐도 토 나올 만큼 화려하게 꾸며진 방이긴 했다.
하지만 보물이라 불릴 만큼의 가치가 느껴지진 않았다.
다행히 시아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에요. 왕족 외에는 누구도 알 수 없을 만큼 은밀하게 내려온 보물인걸요. 이렇게 표 나는 곳에 둘 리가요.”
시아나가 거대한 침대 뒤편으로 다가가더니 벽면 한쪽을 손으로 꾹 눌렀다.
그 순간 드르륵- 하는 소리와 함께 벽이 움직이더니 어딘가로 들어가는 입구가 나타났다.
베라가 놀라 소리쳤다.
“도대체 이게 뭐야?!”
어느새 방 한편에 있던 등불을 챙긴 시아나가 대답했다.
“보물을 보관한 비밀 공간으로 가는 길이랍니다. 따라오세요.”
뚜벅, 뚜벅.
빛 하나 들어오지 않는 어두운 공간에 두 사람의 발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베라가 눈썹을 찡그렸다.
‘조금 걸으면 금방 다른 공간이 나올 줄 알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아.’
도대체 끝이 어딘가 싶을 만큼 끊임없이 길이 이어져 있었다.
‘게다가 복잡해.’
한 길로 쭉 이어져 있는 것이 아니었다.
어떤 때는 양 갈래로 나뉘어져 있었고, 또 어떤 때는 여러 개의 입구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기도 했다.
궁 안이 아니라 복잡하게 동선이 꼬인 동굴 안이나 미로 속에 들어온 느낌이었다.
‘제대로 준비를 하지 않고 덜컥 들어왔다가는 돌아가는 길을 잃어버리기 딱 좋겠어.’
다행히 베라의 앞에서 등불을 든 시아나는 거침없이 걷고 있었다. 그 점이 베라를 안심시켰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시아나가 걸음을 멈추었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시아나가 새까만 벽면을 더듬거렸다. 이내 달칵, 하는 소리와 함께 무언가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놀랍게도 벽이라 생각했던 곳은 문이었다.
그리고…….
열린 문 사이로 드러난 작은 방에는 붉은색과 보라색, 푸른색이 뒤섞인 오묘한 색상의 꽃 한 송이가 핀 화분이 하나 있었다.
시아나가 화분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게 바로 아실론드 왕실에 대대로 내려오는 보물이에요.”
“……뭐?”
베라는 어이가 없었다.
물론 베라도 왕족이나 귀족들 사이에서는 일부 꽃이나 나무가 다이아몬드보다 비싼 가격에 거래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쩌면 저 아름다운 꽃도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제아무리 비싸고 귀한 꽃이라도 꽃은 꽃이지. 고작 꽃 한 송이로 어떻게 제국군과 흥정을 해?’
엄청난 황당함은 순식간에 분노로 바뀌었다.
베라는 배신당한 얼굴로 시아나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시아나는 그 눈빛에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차분히 말했다.
“이 꽃은 평범한 꽃이 아니에요.”
“평범한 꽃이 아니면 뭔데. 비범한 꽃이라도 돼?”
“맞아요.”
“……뭐?”
시아나가 화분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이 화분 속에 있는 것은 흙이 아니라 마력석이에요. 이 식물은 마력석을 양분 삼아 꽃을 피우거든요.”
“……!”
베라는 마력석에 대해 거의 아는 것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게 마력석은 평민은 물론 웬만한 귀족들도 평생 구경하지 못할 만큼 귀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그런 것들도 있대, 라고 동화 속 이야기처럼 이따금 들은 적이 있을 뿐이었다.
그런 베라조차 마력석이 엄청난 힘을 가진 것을 알고 있었다.
눈을 부릅뜬 베라를 바라보며 시아나가 말했다.
“이 식물의 꽃잎을 먹거나 상처 부위에 붙이면 어떤 상처라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깨끗하게 나아요. 검에 찔린 상처, 불에 그슬린 화상 자국…… 심지어 날카로운 것에 눈동자가 다쳐도 회복이 가능하죠.”
“…….”
엄청난 말에 베라는 입을 크게 벌렸다.
그 정도면 단순히 상처를 치유한다고 표현하는 범위를 넘어섰다.
그야말로 마법 같은 힘이었다.
시아나가 말을 이었다.
“세상에는 솜씨 좋은 의사가 많고 찾아보면 상처를 치유하는 능력을 가진 마력석도 있겠죠. 하지만 이런 꽃은 세상에 단 하나예요. 진귀한 능력에 보기에도 아름답죠. 그러니 분명 제국군도 이 엄청난 보물을 가지고 싶어 할 거예요.”
베라도 그 말에는 동의했다.
하지만…….
“제국군이 굳이 이 물건을 두고 우리와 협상을 해 줄 이유가 있을까? 내가 제국군이라면 그런 귀찮은 짓을 하는 것보다는 당신의 손에서 그 꽃을 빼앗는 것이 훨씬 더 매력적인 방법으로 느껴질 것 같은데.”
시아나는 예상했던 질문이라는 듯 웃었다.
“이 꽃을 피우는 방법은 아주 까다로워요. 아실론드 왕족에게만 대대로 내려왔기에 현재는 저만이 알고 있죠. 저는 이 방법을 누구에게도 알려 주지 않을 거예요.”
제국이 이 신비한 꽃이 탐난다고 제멋대로 가져갔다가는, 꽃은 이내 죽어 버리고 보물은 영영 사라져 버릴 것이다.
그럼 제국은 아무것도 얻을 수가 없다.
그러나 베라는 한 번 더 물었다.
따지는 목소리였다.
“공주를 납치라도 하면 어떡할 건데. 목에 칼을 들이대도 입을 다물 수 있어?”
네, 라고 대답하는 대신 시아나가 말했다.
“황태자 전하가 계시는 한 누구도 그런 식으로 제게 손을 댈 수 없어요.”
“…….”
그제야 베라는 시아나의 입장을 떠올렸다.
그녀는 단순한 아실론드의 공주가 아니었다. 그녀의 뒤에는 제국의 황태자가 있었다.
새삼 느낀 사실에 속이 울렁거렸다.
베라가 삐딱해진 표정으로 말했다.
“그럼 굳이 일을 이렇게 복잡하게 진행할 필요 없는 것 아냐? 공주가 황태자에게 졸라 이 나라에 자유를 달라고 하면 그만인 것 아니냐고.”
“…….”
베라는 반쯤 비꼬려고 한 말이었지만, 놀랍게도 현실성이 있었다.
만약 시아나가 그런 부탁을 했다면 라시드는 주저 없이 그 말을 들어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쉽게 얻은 것은 그만큼 쉽게 잃을 수 있는 법이지.’
일단 사사로운 감정으로 점령국을 풀어 준 라시드와 그런 부탁을 한 시아나를 향해 제국민의 엄청난 비난이 쏟아질 것이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제국군이 떠나간다면 이 나라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겠죠.”
“…….”
“이 나라는 배워야 해요. 나보다 힘이 강한 자들에게서 제 몸을 지키는 방법, 더는 타인에게 짓밟히지 않게 제 몸을 강하게 만드는 방법을요.”
베라는 멍하니 시아나를 바라보다가 물었다.
“……어떻게?”
시아나는 생각해 둔 계획을 차분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제국군과 주기적으로 꽃을 피워 납품한다는 조건으로 새 나라의 건국과 자치권을 인정해 달라는 협상을 하는 거예요.”
어차피 제국군이 아실론드 왕국을 침략했었던 것은 제국군의 깃발을 하나 더 꽂기 위해서였을 뿐이었다.
그러니 그들이 탐낼 만한 물건을 주고 나가라 하면 기꺼이 그 제안을 받아들일 것이다.
“제국군을 이쪽 편으로 만들면 귀족들은 큰 문제가 아니에요. 어차피 그들은 거의 모든 힘을 잃은 상태니까요.”
하지만 그것만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었다.
베라가 탐탁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
“거기까지는 좋아. 하지만 언제까지 제국에 꽃을 납품할 건데? 평생 그놈들의 엉덩이나 빨아 주며 살라는 거야?”
“새 나라를 만든다 해도 이 나라가 약한 나라라는 것은 달라지지 않아요. 그러니 당분간은 제국군과 이어져 있는 편이 나아요. 그럼 아무도 이 나라를 건들 생각을 하지 않을 테니까요. 그 틈을 타서…….”
시아나가 꽃을 매만지며 말을 이었다.
“이 꽃을 연구하여 대량으로 생산하는 거예요. 그것에 성공하면 온 대륙에 꽃을 팔 수 있게 되고, 새 나라에는 엄청난 돈이 들어오기 시작하겠죠. 그 돈을 이용해 제대로 운영한다면 이곳은 엄청난 속도로 발전할 수 있어요. 크기가 작은 만큼 변화도 빨리 이루어질 수 있는 법이니까요.”
“…….”
“힘을 가지면 제국도, 어떤 나라도 우리를 쉽게 휘두를 수 없어요. 제국과도 대등하게 교역을 할 수 있게 되겠죠.”
“…….”
멍하니 시아나의 말을 듣던 베라는 저도 모르게 제가 꿈꾸던 새 나라를 떠올렸다.
작은 항구에 들어찬 배들과 커다란 짐을 들고 힘차게 오가는 사내들.
벅적이는 시장 속에서 호호 웃으며 바구니 가득 오늘 저녁 재료를 고르는 여인들.
두 손 가득 빵과 책을 들고 뛰어다니는 아이들.
소박한 행복과 희망이 가득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 길은 너무 멀게 느껴졌어.’
자신과 함께 목소리를 내 줄 줄 알았던 평민들은 오랜 시간 핍박을 받아 무기력했고, 힘이 다한 줄 알았던 귀족들은 제 권력을 놓지 않으려 끈질기게 버티고 있었다.
제국군은 또 어떤가.
그들은 혁명군을 무참하게 짓밟지는 않았으나 호랑이 같은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언제든 자신들을 거스르면 곧장 물어뜯을 것 같은 위압감으로.
그래서 베라는 제가 할머니라 불리는 때가 되어서야 그 모습을 볼 수 있거나, 최악의 경우 눈을 감고 나서도 그 모습을 보지 못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베라가 떨리는 눈동자로 시아나를 바라보았다.
꽃 한 송이를 들고 있는 작은 여인이 말하는 미래는 희망찼다.
심장이 쿵쿵 뛸 만큼.
그러나 잠시 후, 한 줌의 이성이 돌아온 베라가 일그러진 얼굴로 물었다.
“당신의 말은 너무 낙관적이야. 그 모든 것이 진짜로 가능하리라 생각해?”
심장이 두근거릴 만큼 반짝이는 미래였지만 변수가 너무 많았다.
그러나 시아나는 담담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있잖아요.”
“……!”
시아나는 제가 황태자의 연인이 된 것이 아실론드 국민들에게 비난받아 마땅한 일이라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그것은…….
“저를 이용하면 모든 것이 가능해요.”
“……!”
“제가 그렇게 만들게요.”
순간 베라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처음 시아나 공주가 황태자와 특별한 관계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더할 바 없이 끔찍하게 느껴졌다.
그런데 그것이 이런 식으로 돌아올 줄이야…….
복잡한 얼굴로 시아나를 바라보던 베라가 한참 후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공주의 제안을 받아들이도록 하지. 이제부터 혁명군은 당신과 함께할 거야.”
그 말에 시아나가 하아, 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두 눈을 부드럽게 휘었다.
고마운 대답을 들은 것처럼.
* * *
그 후, 시아나는 베라와 여러 차례 만났다.
새 나라를 어떻게 만들지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서였다.
왕궁은 너무 눈에 띄기에 주로 혁명군의 비밀 기지에서 만났는데, 시아나는 올 때마다 산처럼 쌓인 서류 더미를 가지고 왔다.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근면성실하게 자리를 지켰던 행정가들과 경제학자들의 목록을 뽑아 왔어요. 그 분들을 혁명군 편으로 끌어들이면 분명 큰 도움이 될 거예요.”
베라의 옆에 앉아 있던 혁명군 정보 담당 요한이 입꼬리를 올렸다.
늘 무표정한 그로서는 엄청나게 환한 미소를 지은 것이다.
시아나가 그간 가지고 온 정보 덕분에 요한은 일평생 알았던 것보다 수십 배 많은 지식을 익혔고, 그것은 혁명군에게 큰 도움이 되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요한은 시아나에게 고개를 꾸벅이며 인사를 했다.
“요긴하게 써 주시니 기쁠 따름입니다.”
시아나도 웃으며 인사를 받았다.
화기애애한 모습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베라는 기가 찬 얼굴을 했다.
‘도저히 왕족과 혁명군이라고는 볼 수 없는 장면이군. 게다가 왕족이라면 책 사이에 끼어 죽어 있는 벌레보다 경멸하던 그 요한이 말이지.’
어이없는 광경은 이곳뿐만이 아니었다.
술집 뒤편의 마당에서는 더 엄청난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우르르 모여 있는 사람들 앞에 듬직한 체구의 두 여인이 서 있었다.
그레이스와 츄츄였다.
츄츄가 두터운 이두박근을 뽐내며 말했다.
“체력과 근력만 키우면 무슨 일이든 잘해 낼 수 있어유. 농사일이건, 싸움질이건 말이예유.”
옆에 있던 그레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암, 뭐든 기본이 중요한 법이지.”
두 여인의 말에 모인 사람들이 존경 어린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모두 강한 육체에 동경을 가진 이들이었다. 그러니 말처럼 단단한 근육을 가진 두 여인에게 홀린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츄츄가 바위처럼 커다란 돌을 양손에 들며 말했다.
“자, 가지고 온 돌덩이로 운동을 시작합시다!”
그레이스도 츄츄에게 지지 않을 만큼 거대한 돌을 들며 우렁차게 말했다.
“다들 날 따라 하도록. 돌을 하늘을 향해 힘껏 들며 ‘우리는!’ 돌을 아래로 내리며 ‘할 수 있다!’ 자, 시작.”
사람들은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츄츄와 그레이스와 동작을 맞추어 소리쳤다.
“우리는!”
“할 수 있다!”
열정과 땀방울이 넘치는 아름다운 풍경이 아닐 수 없었다.
작은 창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베라가 눈을 가늘게 뜨고 중얼거렸다.
“하루에도 몇 번씩 다 죽어 가는 얼굴로 ‘혁명군이 정말 성공할 수 있을까?’라면서 울상 짓던 놈들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기운이 넘치는군.”
요한이 엄청난 속도로 서류를 읽어 내리며 말했다.
“그럴 수밖에. 그레이스 님이 그렇게 비쩍 말라서 어떻게 힘을 내냐며 먹을거리를 잔뜩 가지고 온 덕분에 오늘도 배를 빵빵하게 채웠으니 말이야.”
“…….”
베라는 할 말을 잃었다.
그녀의 배도 볼록했기 때문이다.
베라는 배를 쓰다듬으며 흠, 하고 헛기침을 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며칠 전과는 전혀 분위기가 다르잖아.’
시아나 공주 일행이 처음 왔을 때에는 혁명군 전체에 경계심과 적의가 어려 있었다.
비록 의견이 맞아 손을 잡긴 했지만, 여전히 그들에게 시아나 공주는 원수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기색이 전혀 없어. 그러기는커녕 당장이라도 혁명군 따위 그만두고 시아나 공주에게 충성을 바치겠다는 놈들이 있어도 놀랍지 않을 정도라니까.’
벨도 없는 놈들 같으니라고.
베라는 한심하다는 얼굴로 혀를 쯧쯧 찼다.
그런 베라를 향해 시아나가 말했다.
“참, 제국군 측과의 협상 날짜가 정해졌습니다.”
“언제지?”
“한 달 뒤요.”
베라가 눈을 크게 떴다.
“……빠르군.”
“내놓은 물건이 워낙 훌륭하니까요. 꽃을 보여 주자 당장 협상을 하길 원하더군요.”
시아나는 웃으며 제국군 장군 달탄에게 꽃을 보여 주었던 순간을 떠올렸다.
시아나가 신비로운 꽃을 내놓는 순간 달탄은 입을 쩍 벌렸다.
“세상에. 있는 것이라고는 무능하고 겁 많은 귀족 놈들과 우울해 보이고 퀭한 백성들뿐인 줄 알았던 나라에 이런 귀한 보물이 있었을 줄이야.”
달탄은 홀린 듯한 얼굴로 꽃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나 시아나는 어림없다는 얼굴로 잽싸게 화분을 품에 안아 그의 손을 막았다.
“이 꽃은 아실론드 왕국의 것입니다. 이 꽃이 탐나면 저희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십시오.”
달탄은 내가 왜 점령국 공주님의 말 따위를 들어주어야 하냐며 꽃을 빼앗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그의 앞에서 약 올리듯 꽃을 뽐낸 여인은 제국 황태자의 연인이었기 때문이다.
달탄은 곤란하다는 얼굴로 시아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좋습니다.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시아나가 말했다.
“매 분기마다 일정량의 꽃을 보내겠습니다. 대신 아실론드 왕국에 세워질 새 나라를 인정해 주세요. 그리고 그 후에 이 나라에서 군대를 철수해 주십시오.”
파격적인 이야기였다.
그럼에도 달탄은 기꺼이 그 말을 받아들였다.
“듣던 중 반가운 제안이군요. 애초에 저를 비롯한 제국군은 모두 하루라도 빨리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 미칠 지경입니다. 토끼 같은 마누라와 생쥐 같은 자식 놈들이 너무나 보고 싶단 말입니다.”
물론 달탄이 좋다고 해서 술술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달탄은 어디까지나 일개 군인일 뿐이었으니까.
대신 달탄은 신비로운 꽃에 관한 오만 가지 감탄과 과장을 섞어 제국 수도로 서신을 보냈다.
가장 빠르게 속도로.
시아나가 베라를 바라보며 말했다.
“달탄 장군이 이쪽에 무척 협조적이니, 황실에서 긍정적인 답변만 오면 협상은 무난하게 진행될 거예요.”
시아나의 말을 듣던 베라가 심란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제국 황실이 순순히 우리의 말을 들어줄까?”
시아나가 문제없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제국의 황족과 귀족들은 이름도 잘 모르는 작은 나라보다는 평생 본 적 없는 꽃이 더 탐날 거예요. 그리고…….”
그곳에는 라시드가 있었다.
라시드는 앙겔루스 공작과 함께 시아나의 뜻대로 일이 진행되도록 분위기를 몰아갈 것이다.
아실론드 왕국에서 온 갑작스러운 소식에 의아함을 느낀 황후조차 손을 쓰지 못할 만큼.
‘이 정도는 전하의 도움을 받아도 괜찮겠지.’
시아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 이제부터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제국이 우리의 말을 들어줄지 말지에 대한 것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제국군을 상대로 성공적인 협상을 할 수 있게 빈틈없이 준비를 하는 거예요.”
베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 * *
“……살려 줘.”
눈 밑이 거뭇해진 베라가 책상 위에 엎어져서 신음을 흘렸다.
반면 맞은편에 있던 시아나는 밝은 얼굴로 웃으며 손을 마주쳤다.
“고생했어요. 이제야 서류가 완벽하게 정리가 되었네요.”
두 사람은 제국군에게 요구할 사항을 정리하기 위해 꼬박 일주일을 밤샜다.
말이 일주일이지, 수십 장의 종이에 빼곡하게 글자를 적고, 그 글자를 수없이 다시 살피고 고치는 것은 여간 고된 일이 아니었다.
견디다 못한 베라가 ‘이 빌어먹을 제국군 놈들아, 남의 나라에서 얼쩡거리지 말고 니네 나라로 꺼져!’라고 대충 쓰자고 말할 때마다 시아나는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아 다르고 어 다르다고, 문장을 어떻게 쓰냐에 따라서 느끼는 게 달라지는 법이에요. 최대한 상대방이 이익을 보는 것처럼 느끼게 만드는 척하며 우리 쪽으로 이익을 가져와야 해요.]
[이 요구 조건은 제국 측에서 책잡을 수도 있겠네요. 그것에 대비해서 요구 조건을 조금 바꾸도록 하죠.]
……꼭 금지옥엽 공주님이 아니라 노련한 장사꾼 같았다.
시아나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검토한 서류를 바라보며 뿌듯하게 웃었다.
“이 종이에 쓴 것의 반만 이루어도 꽃으로 받을 수 있는 최대한의 값을 받는 셈이에요.”
그런 시아나를 바라보며 베라는 침을 꿀꺽 삼켰다.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얼굴을 하고서는 머릿속으로는 이쪽에 개미 똥만큼이라도 더 이득이 올 수 있게 계산을 하다니.’
적이 되면 절대 곤란할 타입이었다.
그런 베라의 생각을 알 리가 없는 시아나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협상 내용은 정리되었으니 남은 기간 동안 할 일은 최대한 많은 사람들이 새 나라의 건국을 지지하도록 만드는 거예요.”
다행히(?) 이전 왕국에 대한 환멸이 가득했던 평민들은 새 나라에 대한 열망이 높았다.
이전 왕국을 지지하며 혁명군에 반발하는 이들도 있긴 했지만, 유일하게 살아남은 왕족인 시아나가 혁명군의 편에 섰다는 소식을 들으면 무던히 이쪽으로 넘어올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남은 집단은 하나였다.
귀족이었다.
베라가 눈썹을 찡그렸다.
“왕국에서 팔자 좋게 꿀 빨던 놈들이 새 나라의 건국을 지지할 리가 없잖아. 귀족 놈들 따위 지랄을 하든 발광을 하든 그냥 무시하는 게 어때?”
시아나가 눈썹을 내렸다.
“그들 또한 아실론드 왕국의 일원인걸요. 그리고 귀족들을 그대로 둔 채 일을 진행하면 분명 앞으로 일을 진행하는 데 두고두고 문제가 될 거예요.”
사사건건 새 나라의 건국을 방해할 것이다.
어찌어찌 새 나라가 만들어진 후에도, 몸속의 독이 되어 새 나라를 망칠 기회를 살피겠지.
그렇게 둘 수는 없었다.
“귀족들 문제는 제 쪽에서 해결할 테니 신경 쓰지 마세요. 베라 님은 혁명군과 함께, 평민들이 새 나라의 건국을 열망하는 분위기를 만들어 주시면 됩니다.”
그렇게 말을 끝낸 시아나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때까지 책상 위에 얼굴을 반쯤 묻고 있던 베라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가려고?”
“네. 실은 며칠 후에 귀족들과 이야기를 나누기로 했거든요. 그것에 대한 준비를 해야 해요.”
그 말에 베라가 눈썹을 찡그렸다.
“일주일 내내 밤을 새고 또 무슨 준비를 한다고 그래. 그러지 말고 좀 쉬었다가 가.”
시아나가 의외의 말을 들은 것처럼 눈을 크게 떴다. 그러고는 두 볼을 살짝 붉히며 물었다.
“지금 저를 걱정해 주시는 건가요?”
베라가 단번에 정색을 했다.
“상식적인 인간이라면 당연히 드는 감정일 뿐이야. 나도 머리가 띵하고 온몸에 힘이 하나도 없는데 연약한 공주님은 상태가 더 안 좋을 거 아냐. 제대로 쉬지 않으면 누적된 피로가 한 번에 폭발해서 쓰러져 버릴 수도 있다고. 그렇게 훅 가고 싶어?”
베라가 눈 밑이 거뭇해진 무서운 얼굴로 섬뜩하게 말했건만 시아나는 씩씩하게 웃었다.
“전 괜찮아요. 이래 봬도 몸 하나는 튼튼하거든요. 안 그러면 어떻게 두 명 중 한 명은 도망간다는 제국 황궁의 수습 시녀 기간을 버텨 냈겠어요.”
말을 내뱉은 시아나가 아차, 하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베라는 시아나가 제국에서 어떻게 지냈는지에 대한 대략적인 이야기를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적국의 황궁에서 시녀로 일한다는 사실은 태연히 입에 담을 만큼 당당한 일이 아니었다.
민망하다는 듯 입을 꾹 다문 시아나를 바라보던 베라가 말했다.
“하나만 물어봐도 돼?”
“……네.”
“왜 제국의 시녀 따위가 된 거야?”
아무리 적군에게 왕궁이 짓밟힌 정체절명의 순간이라 해도 시아나는 일국의 공주였다.
그런 그녀가 그런 선택을 한 것이 조금도 이해가 되질 않았다.
‘소문대로 황태자와 한눈에 사랑에 빠져서 그런 선택을 한 건가? 아니면 이 썩은 나라를 어떻게든 벗어나 화려한 제국에 가고 싶었던 거야?’
그러나 시아나의 답은 베라의 예상과 전혀 달랐다.
“……살고 싶었어요.”
그리고 작은 목소리가 이어졌다.
“죄송합니다.”
“……!”
베라가 눈을 크게 떴다.
그런 베라를 향해 시아나는 치맛자락을 들어 올려 인사했다.
베라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시아나가 사라진 후였다.
“…….”
베라는 복잡한 얼굴로 시아나가 있던 자리를 눈에 담았다.
책상 위에 산더미 같은 종이가 쌓여 있었다.
지난 일주일간 시아나가 노력한 흔적이었다.
시아나는 허름한 의자에 앉아 허리를 곧게 펴고 수백 번, 수천 번 서류를 고쳤다.
처음에는 ‘피곤할 텐데 저렇게 바르게 앉아 있다니. 공주란 참 대단하군.’이라고 생각했다.
그 후에는 ‘허어. 보기완 다르게 집중력이 대단하네. 졸리지도 않나?’ 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지금은…….
베라가 중얼거렸다.
“필사적이었지.”
마치 제가 저지른 잘못을 조금이라도 수습하려는 것처럼.
베라는 입술을 깨물었다.
때려죽여도 시원찮을 왕족 따위에게 조금도 느끼고 싶지 않았던 감정이 일어났기에.
* * *
베라와 혁명군은 광장에 사람들을 모아 소리쳤다.
“왕족과 귀족, 선택받은 몇몇 인간들의 행복을 위해 수만 명이 지옥 같은 고통을 견뎌야 했던 시대를 끝냅시다!”
“비쩍 말라 죽은 아이가 아니라 행복하게 웃는 아이를 품에 안을 수 있는, 어제보다 나은 내일을 꿈꿀 수 있는 새 나라를 만듭시다!”
혁명군에게 동조한 평민들의 커다란 목소리가 작은 나라 곳곳에서 울려 퍼졌다.
소리치는 사람들 속에 파묻혀 있던 한 여인이 불안한 얼굴로 옆에 있던 친구에게 속삭였다.
“그런데 이렇게 모여서 대놓고 새 나라를 외쳐도 되는 거야?”
왕국에 주둔해 있는 제국군이 이런 소란을 가만히 놔두겠냐는 말이었다.
친구가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 혁명군의 뒤에는 시아나 공주님이 계시잖아.”
행방불명 상태였다가 최근 모습을 드러낸 시아나 공주. 생존 소식보다 놀라운 것은 파격적인 공주의 행보였다.
시아나 공주는 공식적으로 혁명군을 지지했다.
하지만 여인은 불안이 가시지 않은 얼굴로 다시 물었다.
“공주님이 있다고 해도 그게 무슨 의미가 있어. 그분께 무슨 힘이 있다고.”
“어머, 왜 힘이 없어. 너 그 소문 모르니?”
“무슨 소문?”
친구가 여인의 귓가에 속삭였다.
“공주님이 제국의 높은 분과 특별한 관계라는 이야기 말이야. 공주님의 눈치를 살피느라 제국군도 혁명군에게 별말을 하지 못하고 가만두는 거래.”
충격적인 말에 여인의 눈이 커다래졌다.
“그게 정말이야?”
“그래. 그 소문이 거짓이네 마네 말들이 많은데 나는 진짜라고 봐. 얼마 전까지 제국군 눈치를 슬금슬금 보면서 조심히 활동하던 혁명군이 공주님이 돌아오신 후에는 저렇게 의기양양해진 것을 보면 답이 나오잖아.”
기가 찬 얼굴로 눈을 깜빡거렸던 여인이 말했다.
“그런데 공주님이 왜 새 나라를 만드는 데 힘을 보태 주시는 거야? 공주님이야말로 새 나라가 열리는 것을 가장 반대해야 하는 분이잖아.
“글쎄. 나 같은 무식한 계집애가 고매하신 분의 생각을 어떻게 알겠니.”
빈정거리는 투로 말한 친구가 눈을 빛내며 말을 이었다.
“어쨌건 잘됐지, 뭐. 혁명군이 말하는 새 나라가 들어서면 몸이 부서져라 일해도 하루에 한 끼도 먹기 힘들었던 때보단 상황이 나아질 테니.”
끼니 걱정하지 않고 세끼를 온전히 챙겨 먹는 삶.
소박한 바람이었지만 그들에게는 간절한 꿈이었다.
여인은 친구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두 사람은 입을 크게 벌리고 혁명군을 따라 외쳤다.
“새 나라를 만들자!”
고조되어 가는 분위기 속에 초조한 얼굴을 한 이들이 있었다.
귀족들이었다.
번쩍이는 금붙이로 장식된 왕궁의 회의실에는 화려한 복장을 한 이들이 모여 있었다.
시아나 공주의 초대장을 받고 모인 귀족들이었다.
그러나 한껏 꾸민 모습과 달리 그들의 표정은 조금도 밝지 못했다.
죽은 줄 알았던 시아나 공주가 살아 돌아왔다. 게다가 제국 황태자의 연인이 되었단다.
정보통에게 전해 들은 은밀한 소식에 귀족들은 축배를 들었다.
[이제 제국군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겠군요! 아실론드 왕국은 다시 부활할 겁니다.]
그러나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귀족 중 한 명이 테이블을 주먹으로 치며 소리쳤다.
“다른 이도 아닌 공주님이 새 나라 따위를 입에 담는 혁명군 놈들의 손을 들어주다니요. 도대체 이 무슨 끔찍한 일이란 말입니까!”
“국왕 폐하와 왕비 폐하께서 살아 계셨을 때 시아나 공주님께 유독 엄하게 굴지 않으셨습니까. 그것에 대한 울분을 품고 이러시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 말에 귀족들이 한탄 어린 신음을 내뱉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공주라는 분이 어떻게 그렇게 철이 없고 음습한 행동을 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귀족들 중 가장 상석에 앉아 있던 악테르 후작이 이마를 내리누르며 중얼거렸다.
“기껏 살아남아 이따위 짓을 할 거라면 그냥 그날 죽어 버렸으면 좋았을걸…….”
섬뜩한 말에 귀족들이 조용해졌다.
그러나 귀족들 중 누구도 어떻게 공주님께 그런 말을 하냐며 후작을 탓하지 않았다.
그만큼 시아나를 향한 귀족들의 분노와 배신감이 엄청났다.
게다가 귀족들에게 각인된 시아나의 모습은 형편없기 짝이 없었다.
‘흥, 이름만 공주였지, 뭐 대단한 게 하나라도 있었나?’
성 밖으로 거의 나오지 않는 시아나를 볼 수 있는 것은 왕궁에서 열리는 연회장뿐이었다.
그때마다 시아나는 구석에 조용히 서서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느라 바빴다.
그러다가 결국 책을 잡혀 새 왕비에게 혼이 났고, 이를 본 왕은 혀를 찼으며, 귀족들은 키득거리며 웃었다.
그러나 그 어떤 순간에도 시아나는 화 한 번 내지 않았다. 울지도 않았다.
그저 웃을 뿐이었다.
그 모습을 보며 귀족들은 생각했다.
‘천하의 바보 천치 공주님.’
귀족들은 하나같이 시아나를 무시했다.
한 귀족이 이를 으득거리며 말했다.
“도대체 그런 공주님이 피의 황태자의 마음을 어떻게 훔친 것인지 알 수가 없군요. 얼굴이 조금 귀여운 편이긴 했지만 황태자만 한 남자를 한눈에 반하게 할 만큼 특출한 외모를 가진 건 아니지 않습니까.”
“뭐, 살기 위해 무슨 짓을 못했겠습니까. 다른 건 몰라도 슬슬 눈치를 보며 기분을 맞춰 주는 실력만큼은 제법이지 않았습니까.”
“공주의 신분도 잊고 적국의 황태자에게 꼬리를 흔들었다는 말이군요.”
“더럽기는.”
귀족들은 원색적인 비난을 쏟아 내는 사이, 시아나에게 막연하게 품었던 두려움이 점점 사라지는 기분이 들었다.
귀족들이 한층 성난 얼굴로 말을 주고받았다.
“어떤 품위나 영특함도 갖추지 못한 공주님이 이렇게 멋대로 나라를 망치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습니다.”
“맞는 말씀입니다. 지금까지는 공주님이 알현을 거부하여 어쩔 수 없었지만, 오늘 이 자리에서 확실히 알려 드립시다. 공주님이 무슨 짓을 저지르고 계신지, 그 때문에 저희가 얼마나 화가 났는지 말입니다.”
그때였다.
“시아나 공주님께서 드시옵니다!”
시녀의 우렁찬 목소리가 회의실 안에 울려 퍼졌다.
귀족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눈을 매섭게 뜨고 입을 꾹 다물었다
시아나가 나타나면 귀족들은 호랑이처럼 매섭게 그녀를 몰아붙일 생각이었다.
새 왕비가 그러했듯이.
그럼 시아나는 벌벌 떨며 잘못했다고 고개를 숙일 것이다.
새 왕비에게 그러했듯이.
그러나…….
또각, 또각.
구두 소리와 함께 나타난 여인은 그들이 아는 모습과 너무 달랐다.
짙은 남색 드레스, 눈초리가 올라간 뾰족한 눈매, 붉은 입술.
지옥에서 온 것처럼 표독스럽게 생긴 여인이 그곳에 있었다.
귀족들은 턱이 빠져라 입을 쩍 벌렸다.
“시, 시아나 공주님?”
귀족들 중 누군가 믿기지 않는다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 순간, 시아나의 뒤를 따라오던 덩치 큰 두 시녀 중 한 명이 무엄하다는 얼굴로 소리쳤다.
“공주님께서 허락도 하지 않으셨는데 누가 감히 먼저 입을 떼느냐!”
“……!”
호랑이 같은 시녀의 기색에 입을 열었던 귀족은 저도 모르게 헙, 하고 입을 다물었다.
숨 막히는 고요 속에서 시아나는 천천히 걸음을 내디뎠다.
시아나가 앉은 곳은 놀랍게도…… 단상의 중앙에 있는 황금 의자였다.
귀족들의 눈빛이 세차게 흔들렸다.
왜냐면 그곳은 왕의 자리였기 때문이다.
귀족들 사이에 있던 악테르 후작이 일그러진 얼굴로 입을 열었다.
“공주님, 인사를 올리기 전에 발언하는 것을 허락해 주십시오.”
“……하십시오.”
“……!”
악테르 후작과 귀족들은 또 한차례 눈을 부릅떴다.
시아나의 목소리가 이전과 전혀 달랐기 때문이다.
봄바람처럼 따스했던 목소리는 한겨울 바람처럼 서늘해져 있었다.
‘정말 저 여인이 시아나 공주가 맞나? 같은 것이라고는 머리카락과 눈동자 색, 작은 체구뿐이잖아.’
악테르 후작은 진심으로 의아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을 따지는 것 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었다.
악테르 후작이 위엄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리 공주님이라도 국왕 폐하의 의자에 앉는 것은 법도에 맞지 않은 일입니다. 그 옆에 있는 의자에 앉으시지요.”
왕의 의자는 언제나 왕을 위해서만 존재했다.
혹여 왕이 이곳에 없거나 죽은 후라도 그 사실은 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시아나는 제가 실수를 했다며 당황해하는 대신, 붉은 입술을 삐뚜름하게 올렸다.
“나는 아실론드 왕국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왕족입니다. 내가 이 자리에 앉지 못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
충격적인 말에 귀족들은 얼이 빠진 얼굴을 했다.
아무리 마지막 남은 공주라지만 불충하기 짝이 없는 말이었다.
이성이 돌아온 귀족들이 시아나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그러나 험악한 눈빛과 달리 그들은 시아나에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단상 위에서 자신들을 내려다보는 시아나의 눈빛이 형형했기 때문이다.
귀족들은 저 눈빛을 잘 알고 있었다.
‘꼭 생전의 왕비마마 같지 않은가.’
어느새 귀족들의 눈빛에는 분노가 아닌 두려움이 어려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시아나는 속으로 조소를 내뱉었다.
기고만장한 귀족들이 유일하게 두려워했던 이는 다름 아닌 새 왕비였다.
새 왕비의 잔혹함은 유명했다.
그녀는 사람들 앞에서도 개의치 않고 시종과 시녀들을 향해 채찍을 휘둘렀고, 종종 귀족들에게도 서슬 퍼런 분노를 내뱉고는 했다.
새 왕비의 험담을 했다는 이유로 목이 잘린 귀족도 있었다.
‘뼛속까지 파고든 두려움은 쉽게 사라지는 것이 아니지.’
그걸 알기에 시아나는 일부러 짙은 화장을 하고 악랄한 표정을 지었다.
꼭 새 왕비처럼.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늘 시아나를 제 아래로 생각하며 키득거렸던 귀족들은 어느새 창백해진 얼굴로 바짝 꼬리를 말고 있었다.
‘미소 짓던 내게는 그토록 오만했던 이들이, 싸늘하게 구니 눈빛부터 달라지다니…… 참으로 우습고 한심하구나.’
조용해진 분위기 속에 입을 연 것은 시아나의 양옆에 있던 시녀들이었다.
새까만 단발머리를 한 시녀가 귀족들을 쏘아보며 말했다.
“그런데 아실론드 왕국의 귀족들은 최소한의 예법도 익히지 않은 것인가? 당장 공주님께 인사를 하지 않고 무엇 하나!”
그 옆에 있던 덩치 큰 시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말입니더. 다들 얼뜨기만 모여 있나.”
“……!”
일개 시녀들이 내뱉는 말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오만하고 무엄한 말이었다.
그러나 귀족들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두 시녀는 제국풍의 고급스러운 드레스를 입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눈빛이며 말투가 심상치 않았다.
‘제국 귀족인 것이 분명해.’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귀족들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귀족들은 황급히 허리를 숙였다.
“시아나 공주님께 인사드립니다.”
머리를 조아린 귀족들을 구경하던 시아나는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
“고개를 드세요.”
“…….”
허리를 편 귀족들의 얼굴은 빨갛고 창백하고 일그러지고 난리가 아니었다.
시아나는 속으로 웃었다.
‘내게 휘둘리는 것이 어지간히 분한 모양이야. 그러면서도 내 옆의 시녀들은 무섭고.’
그 꼴이 우스워 조금 더 골려 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으나 참았다.
시아나는 오늘 귀족들에게 얻어 내야 할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에만 집중할 셈이었다.
시아나가 말했다.
“왕궁에 돌아온 후 경들의 알현 신청이 쇄도했으나 바쁜 일이 많아 그에 응하지 못했습니다. 이제야 자리를 마련하게 된 것을 이해 부탁드립니다.”
말만 정중하지 표정과 말투는 조금도 이해를 구하는 투가 아니었다.
니들이 어쩔 건데, 라는 얼굴이었다.
시아나의 눈빛을 읽은 귀족들의 얼굴이 구겨졌다. 개중 가장 험악한 표정을 지은 악테르 후작이 입을 열었다.
“저희도 그렇게 생각하려 했습니다. 공주님께서도 큰일을 겪으셨다가 겨우 왕국에 돌아오셨으니 하실 일이 많으실 거라고요. 하나 공주님이 보여 주신 행보를 보며 실망을 감출 수가 없었습니다.”
“무엇이 그렇게 실망스러웠습니까?”
뻔뻔하게 묻는 시아나를 향해 악테르 후작이 기가 차다는 얼굴로 목소리를 높였다.
“공주님께서 그 벌레만도 못한 혁명군 놈들을 지지하지 않으셨습니까!”
“…….”
“공주님께서 조금 전에 말씀하신 것처럼, 공주님은 아실론드 왕가의 유일한 생존자이십니다. 이 나라를 지켜야 할 의무와 책임이 있으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어찌 그런 행동을 하실 수 있단 말입니까! 정녕 이 땅을 산산조각 내어 없애 버리고 싶으신 겁니까!”
쩌렁쩌렁한 노인의 목소리에는 힐난과 원망이 가득 담겨 있었다.
게다가 그 뒤에는 수십 명의 귀족들이 함께 눈을 번뜩이고 있어 제법 위협적이었다.
그럼에도 시아나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답했다.
“이 땅을 살리고 싶어 그런 선택을 한 겁니다.”
“뭐, 뭐라고요?!”
눈을 부릅뜬 후작을 향해 시아나가 말을 이었다.
“경들도 알다시피 이 나라는 오랜 시간 동안 썩어 들어갔습니다. 왕족과 귀족은 백성을 보살피는 것보다는 어떡하면 그들을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짜낼 수 있을지에 대해 고민하였고, 백성들은 오늘 죽어도 일말의 아쉬움이 없을 만큼 고통스러운 시간을 견뎌 내야 했지요.”
권력자들의 부정부패, 횡포, 사치, 탐욕만 남은 나라.
희망과 정의가 사라진 나라.
시아나가 붉은 입술을 열었다.
“나는 지옥보다 끔찍했던 왕국을 이제 그만 끝내려고 합니다. 그것이 이 나라의 마지막 남은 왕족, 시아나 아실론드 폰 실리테가 이 나라를 위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입니다.”
“……!”
충격적인 선언에 귀족들은 잠시 숨을 멈추었다.
귀족들은 방금 전까지만 해도 시아나가 혁명군 편을 드는 것이 지극히 사사로운 감정 때문이리라 생각했다.
시아나는 저를 힘들게 했던 귀족에 대한 반발심 때문에 혁명군을 지지하는 것뿐이다.
그러니 그것으로 귀족들을 마음껏 휘두르고 곤란하게 만들어 원하는 만큼 한을 풀면, 못 이기는 척하고 귀족들과 다시 손을 잡을 것이다.
그리고 그 후에는 혁명군을 버리겠지.
아실론드 왕국의 유일한 공주에게 새 나라를 외치는 이들은 훼방꾼에 불과할 테니까.
하지만 아니었다.
시아나 공주는 진심으로 새 나라의 건국을 지지하고 있었다.
경악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악테르 후작의 주름진 손이 바들바들 떨리기 시작했다.
분노와 배신감에.
“도대체 왜 그렇게 끔찍한 생각을 하시게 되었는지 알 수가 없군요!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합니다. 공주님께서 이대로 일을 진행하시면 분명 크게 후회하게 되실 겁니다. 저희 귀족들이 합심하여 어떻게든 그 일을 막을 테니까요.”
수십 명의 귀족들을 뒤에 엎고 내뱉은 위협적인 말이었건만 시아나는 웃었다.
그런 게 뭐가 겁나겠냐는 듯이.
“그리하고 싶은 분이 있다면 막지 않겠습니다. 다만 한 가지는 알고 계십시오.”
시아나가 눈을 내리깔며 말을 이었다.
“새 나라가 도래하면 기존에 있던 것들 중 많은 것이 사라질 겁니다. 가장 먼저, 온갖 특혜를 받으며 호사스러운 생활을 누렸던 귀족 가문부터 없앨 예정이지요.”
“……!”
“하지만 새 나라를 만드는 것을 지지하는 분께는 조금의 배려를 해 줄까 합니다. 귀족의 호칭과 가문의 이름을 지켜드리지요.”
그것은 배려가 아니었다.
서슬 퍼런 협박이었다.
내 말을 듣지 않으면 너희가 목숨보다 소중히 여기는 것들을 모두 가져가 버리겠다는.
“공…….”
분노로 부르르 떨던 악테르 후작이 입을 열려던 순간, 시아나가 손을 들었다.
“그만. 그대들의 이야기는 듣고 싶지 않습니다. 어차피 뻔한 말들만 늘어놓을 것 아닙니까.”
“하지만…….”
그 순간 시아나의 옆에 있던 두 시녀가 육중한 팔뚝을 꿈틀거리며 소리쳤다.
“입을 다무시오. 감히 누가 공주님의 말씀에 토를 단단 말이오!”
누가 말 한마디라도 했다가는 다리뼈라도 부서뜨릴 기세였다.
회의실 안에 숨 막히는 정적이 감돌았다.
흡족한 미소를 지은 시아나가 입을 열었다.
“나는 이 일을 지지부진하게 끌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니 나와 함께 새 나라의 건국을 지지하고자 하는 경들은 일주일 내로 서신을 보내 주십시오. 그때까지 서신을 보내지 않은 귀족들은 나와 다른 길을 걷는 걸로 알고 있겠습니다.”
시아나는 거기에 어떤 불행이 따를지에 대한 협박을 조목조목 덧붙이진 않았다.
그럼에도 충분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더없이 오만하고 섬뜩했기에.
* * *
귀족들은 악에 받친 얼굴로 소리쳤다.
“공주님께서 미치신 게 분명합니다!”
“동감입니다. 제정신이라면 이런 끔찍한 짓을 할 수가 없습니다.”
시아나를 향한 귀족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귀족들은 이글거리는 눈으로 말했다.
“저는 절대 그따위 말에 동조하지 않을 겁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공주님의 뒤에 제국군이 있건 혁명군 놈들이 있건 두려워하지 않고 아실론드 왕국의 이름을 지켜 낼 겁니다.”
귀족들의 중앙에 있던 악테르 후작도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그래야지. 공주가 제국군을 등에 업고 막무가내로 말하긴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우리를 무시하고 일을 진행할 수는 없네.”
귀족들을 적으로 둔 채 새 나라를 일으킨다면 나라는 둘로 분열된다. 그럼 새 나라가 정착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시아나도 그런 상황까지 가는 것을 원하지 않을 게 분명했다.
귀족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굳건한 단결의 의지가 느껴지는 눈빛이었다.
“알렉시아 백작의 서신이 도착했어. 새 나라를 지지한다는 동의서야.”
“샤론 남작의 동의서가 왔구먼. 히야, 이쪽은 내용이 아주 구구절절하네. 새 나라를 위해 필요한 일이 있다면 뭐든 시켜 달라는디.”
그레이스와 츄츄의 말에 시아나는 두 눈을 곱게 휘며 웃었다.
“그것참 고마운 말이네요.”
그레이스는 시아나를 보며 눈을 깜빡거렸다.
‘저 얼굴을 보고 누가 생각할 수 있겠어. 얼마 전에 희대의 악녀 같은 얼굴로 귀족들을 협박했던 사람과 같은 사람이라고.’
시아나가 귀족들과 대면했던 날, 그레이스와 츄츄는 시아나의 시녀를 자청했다.
제대로 된 시녀 한 명 없는 시아나를 위해서였다.
그리고 그날, 그레이스와 츄츄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첫째는 짙은 화장을 하고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변한 시아나의 모습 때문에.
둘째는 누구라도 만만히 대할 수 없을 만큼 오만한 시아나의 행동에.
그리고 셋째는……
“귀족들이 이렇게 나올 것을 어떻게 알았어? 회의가 끝나고 본 귀족들의 얼굴이 어마어마했잖아. 그래서 나는 그들이 쉽게 네 말을 들어주지 않으리라 생각했단 말이야.”
츄츄도 그레이스의 말에 공감하며 시아나를 바라보았다.
시아나가 태연한 얼굴로 대답했다.
“대단한 것을 예측한 것은 아니에요. 그저 이 나라의 귀족에 대해 잘 파악하고 있었을 뿐이죠.”
시아나에게 아실론드 왕국의 전통을 운운했던 것과 달리 귀족들에게는 일말의 애국심 따위 없었다.
그들이 관심 있는 것은 오로지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이득을 볼 수 있나, 하는 얄팍한 계산뿐이었다.
시아나가 말을 이었다.
“최근 혁명군의 기세가 만만치 않은 데다가 결정적으로 제 뒤에는 제국이 있잖아요.”
물론 시아나는 그것을 대놓고 으스대거나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시아나가 그레이스와 츄츄를 바라보며 말했다.
“제 시녀로 서 있는 두 여인이 제국풍 드레스를 입고 있는 데다가 제국억양을 썼죠.”
게다가 그레이스는 황족 특유의 위압감과 기품이 넘쳐흘렀다.
귀족들은 어렵지 않게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레이스가 제국 고위층의 여인이라는 것을.
“겉으로는 표내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기함을 했겠죠.”
저만 한 여인을 시녀로 부리다니.
시아나 공주가 제국에서 가진 권력은 우리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대단한 게 틀림없다고.
시아나의 말에 그레이스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뭐, 나도 좀 노렸던 거긴 하지만…….”
츄츄가 뿌듯한 얼굴로 웃었다.
“공주님이 의도하신 대로 겁을 먹어 주었다니 다행이구만유.”
회의가 끝난 후 두 사람은 귀족들을 향해 더 세게 윽박지를걸, 하고 아쉬워했다.
그러나 속속 도착하는 서신들을 보니 충분했던 모양이었다.
그레이스가 테이블 위에 쌓인 종이봉투를 바라보며 말했다.
“제국의 눈치를 보고 순순히 이쪽을 따르기로 한 것은 알겠어. 하지만 그걸 감안해도 이해가 안 가는 점이 있어.”
그건 바로 귀족들이 보내온 서신의 내용이 엄청나게 구구절절하다는 점이었다.
“그러게 말이여유. 누가 보면 시아나가 당장 내 편에 안 서면 목을 잘라 버리겠다고 협박이라도 한 줄 알겠다니께유.”
츄츄는 농담으로 한 말이었다.
그러나 시아나는 어떻게 알았냐는 듯한 얼굴로 말했다.
“사실 협박 비슷한 걸 하긴 했지.”
“뭐?”
그레이스와 츄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런 두 사람을 바라보며 시아나가 말했다.
“저는 회의가 끝난 직후에 귀족들 한 명 한 명에게 편지를 보냈어요.”
그 편지에 적힌 내용은 단순히 새 나라의 건국에 동의할 것을 촉구하는 편지가 아니었다.
<샤론 남작 부인, 혹시 기억하실까요?
오래전 열린 티 파티에서 부인은 어마마마께 말했죠.
제가 어마마마가 안 보는 곳에서 귀족들에게 삐딱하게 인사를 하고 저급한 욕설을 입에 담으니 이 일을 어쩌느냐고요.
도대체 왜 그런 거짓말을 하셨나요?
수많은 부인들이 그러했듯 어마마마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저를 이용하신 건가요?
만약 그런 거라면 성공이에요.
티 파티에서 돌아온 어마마마께서는 저를 찾아와 왜 그런 행동을 했냐며 회초리를 휘두르셨거든요.
기쁨을 참지 못하여 입꼬리를 양옆으로 올린 채 말이에요.
물론 어마마마와 달리 제게는 너무나 고통스러운 시간이었답니다.
저는 아마 평생 그 일을 잊을 수 없을 거예요.
어마마마도, 그리고 어마마마를 조종한 샤론 남작 부인의 이름도.>
<알렉시아 백작, 백작의 사랑스러운 둘째 딸이며 늘 성심성의껏 저를 괴롭힌 로제는 잘 지내나요?
로제가 제게 한 짓은 셀 수 없이 많지만, 그중 가장 인상 깊은 것은 제 데뷔탕트 무도회가 열렸던 날 벌인 일이에요.
로제는 발을 걸어 저를 넘어뜨렸어요.
그리고 바닥에 쓰러진 저를 내려다보며 오만한 얼굴로 속삭였죠.
‘멍청한 얼굴에 키도 자라다 만 난쟁이 따위가 어떻게 공주야?’
그리고 한마디를 덧붙였답니다.
‘분하면 국왕 폐하와 왕비 폐하께 일러보든가.’
아아, 영특하고 못돼 먹은 로제.
그녀는 제 편이 되어 줄 사람이 없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어요.
그러니 그녀는 지금의 상황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겠죠?
로제에게 묻고 싶네요.
로제, 이제 너와 네 가문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악테르 후작, 후작과 저는 특별한 인연이 있지요.
후작이 부인과 사별 후 왕궁에 청혼서를 보내셨잖아요. 고작 18살인 제게 말이에요.
할아버지 같은 분과 결혼이라니, 저는 기함을 했지만 놀랍게도 아바마마와 어마마마는 기뻐하셨어요.
왜냐면 당신이 나와 결혼하기 위해 제시한 지참금이 어마어마했으니까요.
제국군이 쳐들어오지 않았다면 어쩌면 그 말도 안 되는 혼사가 이루어졌을지도 모르겠어요.
어쨌든 그렇게 스쳐 지나간 것도 인연이니 후작을 위해 한마디 할게요.
역겨운 짓 그만하고 얌전히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어, 이 빌어먹을 노인네야!>
“…….”
그레이스와 츄츄는 멍하니 시아나를 바라봤다.
두 사람은 시아나가 과거에 귀족들에게 제대로 대접받지 못했던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저 정도일 줄은 몰랐다.
두 사람은 봉인이 풀린 괴물처럼 분노 어린 표정을 지었다. 탄탄한 팔 근육도 터질 듯이 부풀어 올랐다.
그레이스와 츄츄는 핏줄이 툭 튀어나온 거대한 주먹을 쥐며 말했다.
“또 누가 무슨 짓을 했는지 하나하나 자세히 말해 봐. 당장 찾아 가서 이빨을 날려 버릴 테니까.”
“이빨 가지고 되나유. 아주 그냥 몸속에 있는 뼈를 하나하나 분리해 버려야쥬.”
당장 그래 주세요!
—라고 외치며 시아나는 귀족들의 이름과 악행을 조목조목 적은 쪽지를 두 사람에게 건네줄 뻔했다.
시아나가 당장이라도 튀어 나갈 듯 이 씩씩거리는 거대한 두 여인을 막아서며 말했다.
“저를 위해 화내 주어서 고마워요. 하지만 괜찮아요.”
“뭐가 괜찮아. 설마 그런 놈들을 용서하겠다는 거야?!”
눈을 번뜩이는 그레이스를 향해 시아나가 눈썹을 내리며 말했다.
“아니요. 그에 걸맞은 벌을 줄 예정이니 괜찮다는 말이에요.”
“……!”
사실 귀족들이 모르는 사실이 하나 있었다.
귀족들은 지금이라도 시아나의 비위를 맞추고 새 나라를 만드는 데 협력하면, 제가 가진 모든 것을 지킬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물론 시아나는 약속을 지킬 것이다.
하지만…….
“내가 약속한 것은 귀족이라는 신분뿐이에요. 가문의 명예와 돈까지 지켜 준다는 말은 하지 않았죠.”
새 나라가 시작되는 순간, 귀족들은 새 나라를 지지하든 지지하지 않든 재산 대부분을 환수당할 것이다.
거기에서 끝이 아니었다.
“이전에는 귀족이 지은 죄를 함부로 물을 수 없다는 법이 있었기에 수많은 죄를 저질렀어도 그냥 넘어갔어요. 하지만 새 나라는 아니에요.”
새 나라는 귀족이라도 봐주지 않고 과거의 죄를 조목조목 조사할 예정이었다.
그러면 감옥에 끌려가지 않을 귀족이 없었다.
거의 모든 귀족들이 돈으로 벼슬을 사고팔고, 평민들을 노예처럼 부려 먹다가 때려죽이고, 나라의 재산을 제 것처럼 흥청망청 썼기 때문이다.
그들은 모두 끔찍한 범죄자였다.
귀족들은 엄격한 법의 심판을 받아 저지른 죄에 맞는 형을 받게 될 것이다.
시아나가 눈을 내리깔며 중얼거렸다.
“그들을 지켜 주던 특혜와 돈은 사라지고 징벌과 가난만 남을 거예요. 그 정도면 그들이 했던 악독한 짓에 대한 대가로 충분하겠지요.”
그레이스와 츄츄는 입을 쩍 벌리고 시아나를 쳐다보았다.
그레이스가 소곤거렸다.
“사실 회의 날 보았던 모습이 시아나의 진짜 얼굴이 아닐까?”
츄츄가 식은땀 한 방울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일주일이 채 되지 않아 아실론드 왕국의 모든 귀족들에게서 새 나라 건국 동의서가 도착했다. 혁명군을 중심으로 새 나라를 외치는 소리도 거리마다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무르익은 분위기 속에 두 사람이 만났다.
아실론드 왕국의 공주 시아나와 제국군 장군 달탄이었다.
새 나라에 대한 협상을 위해서였다.
조금이라도 이득을 보기 위해 치열하게 싸우는 것이 보통이건만, 협상은 놀라울 만치 시원하게 진행되었다.
달탄이 시아나가 건넨 서류를 받으며 말했다.
“제국군은 공주님께서 말하신 요구 조건을 모두 수용하겠습니다.”
새 나라가 세워지는 것을 인정하고, 제국군 병사들도 모두 철수하겠다는 이야기였다.
“대신 제국에 분기마다 한 번씩 신비로운 꽃 서른 송이를 보내 주십시오. 서른 송이의 꽃은 조금이라도 상하거나 능력이 훼손되지 않은 온전한 상태여야 합니다.”
테이블 맞은편에 허리를 곧게 펴고 앉아 있던 시아나가 빙그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협상은 놀랄 만치 깔끔하게 끝이 났다.
이야기를 전해 들은 혁명군 대장 베라는 기가 찬 얼굴을 했다.
“이렇게 되게 하기 위해 계획을 짜고 쉬지 않고 움직이긴 했지만, 그 제국이 정말로 꽃 몇 송이를 받고 이 나라를 얌전히 떠난다고 하다니…….”
베라가 하, 하고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피의 황태자의 힘이 세긴 센 모양이군.”
시아나는 그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제국 수도에 있는 라시드가 일이 수월하게 진행될 수 있도록 도움을 준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하지만 오로지 라시드의 힘 때문만은 아니었다.
시아나가 말했다.
“예상했던 대로 제국 황족과 귀족들 사이에서 꽃에 대한 반응이 엄청나다고 하네요. 점령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작은 나라에 대한 지배권 정도는 쉽게 포기할 수 있을 만큼이요.”
베라는 눈썹을 찡그렸다.
“하여간 높이 있는 놈들의 생각은 알 수가 없어. 제아무리 신비한 능력을 가지고 있어도 결국 풀떼기일 뿐이잖아. 도대체 이게 뭐라고.”
“1개의 보물을 가진 자보다는 99개의 보물을 가지고 있는 자가 또 다른 1가지 보물에 더 목을 매는 법이니까요.”
많은 것을 가진 자일수록 더 많은 것을 가지고 싶어 한다.
그것이 인간의 욕망이었다.
베라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얼굴로 시아나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그래서 이제는 어떻게 하면 되지?”
“꽃 서른 송이가 다 피려면 시간이 필요해서 일단 열 송이가 피면 제국에 건네기로 했어요. 그러면 왕국에 주둔해 있던 제국군의 반절이 나가고, 나머지 스무 송이를 다 받은 후에는 모든 제국군이 이 땅을 나가게 될 거예요.”
그러나 그때까지 기다리기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다.
그래서 시아나는 제국군이 1차로 철수하는 날을 디데이로 잡았다.
“그날, 아실론드 왕국의 끝을 알리고 새 나라의 시작을 선포하겠습니다. 이 땅에 사는 모든 사람들 앞에서.”
시아나의 말에 베라는 사뭇 긴장한 얼굴로 침을 꿀꺽 삼켰다.
새로 시작하는 나라는 이전에 있던 아실론드 왕국과는 전혀 달랐다.
가장 큰 차이점은 백성들이 뽑은 이들로 이루어진 의회가 나라를 운영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왕족과 귀족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백성들 중에는 아직 아실론드 왕국에 대한 그리움과 미련이 남은 이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왕족과 귀족이 한순간 사라지는 변화는 용납하기 힘든 일 이었다.
그것이 새 나라에 대한 거부감으로 이어질 수도 있었고.
그래서 시아나는 왕족과 귀족의 이름을 형식적으로나마 유지하기로 했다.
“하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겉모습만 남아 있는 것일 뿐, 왕족과 귀족이 가진 모든 특혜와 권력은 사라질 거예요.”
또렷한 목소리로 말하는 시아나를 베라는 복잡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가끔 내 앞에 있는 이 자그마한 공주님이 고작 18살이라는 걸 잊게 돼.’
평소에는 그저 순하고 친절한 소녀처럼 보였다. 하지만 공주로서 일을 진행할 때는 누구보다 영특하고 냉철했다.
그리고 언제부터인가 시아나가 그런 행동을 할 때마다 베라는 심장 한편이 쿵쿵 뛰었다.
베라는 그것이 어이가 없어 이를 깨물었다.
‘나보다 10살은 어린 여자애한테 대체 왜 심장이 뛰느냐고.’
혁명군 활동을 시작하며 오랫동안 연애를 안 해서 이러나?
아니면 그녀를 만난 후 말도 안 될 만큼 일이 잘 풀려서 몸에 이상이 생긴 것일까?
대체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나게 된 건지 고민에 빠진 베라에게 시아나가 무언가를 건넸다.
두툼한 종이 더미였다.
베라가 눈썹을 찡그렸다.
“이건 또 뭔데?”
“그간 정리한 권리위임서입니다.”
“……!”
눈을 부릅뜬 베라는 종이 한 장 한 장을 읽어 내렸다.
종이에 적힌 내용은 대부분 이런 것들이었다.
<왕족이 가지고 있던 모든 재산과 토지는 나라의 소유로 바꾼다.>
<왕족이 사용하던 왕궁은 나라의 행정 업무를 처리하는 시설로 변경하며, 왕궁 내에 있던 책자와 예술 작품은 모든 이가 읽고 감상할 수 있도록 공개한다.>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던 것을 마주한 얼굴로 종이를 넘기던 베라의 손이 한 곳에서 멈추었다.
베라가 기가 차다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신비로운 꽃에 대한 모든 권리도 나라에 위임한다고?”
시아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제 막 시작하는 새 나라에 신비로운 꽃은 엄청나게 중요했다.
거대한 제국으로부터 제 몸을 지킬 수 있는 방패였고, 아무것도 없는 폐허 같은 땅에 돈과 먹을거리를 가져다 줄 수 있는 희망이었다.
그러나 꽃에는 특이점이 있었다.
아실론드 왕족의 피를 이어 받은 직계 혈족의 목소리로 주문을 외워야만 꽃이 핀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은 이 세상에서 오로지 시아나만이 그 꽃을 피울 수 있었다.
시아나가 말했다.
“새 나라가 성장하는 데 가장 중요한 자원인데 저 혼자 이 꽃을 관리하는 것에 많은 사람들이 불안함을 느끼리라 생각해요. 그래서 권리서를 작성했어요.”
시아나가 말을 덧붙였다.
“그 서류가 있는 한 저를 포함한 그 누구도 개인적인 감정으로 꽃을 함부로 쓰거나 팔 수 없어요. 그 꽃은 나라의 재산이니까요.”
“…….”
시아나의 말에 베라는 입을 쩍 벌렸다.
시아나는 이미 혁명군에게 더없이 많은 것을 주었다.
혁명군을 지지하여 다른 백성들의 지지를 얻어 냈고, 귀족들의 동의서도 받아 냈으며, 성공리에 제국군과 협상을 마무리했다.
그런데 여기서 또 무언가를 주다니…….
베라가 일그러진 얼굴로 시아나를 바라보다가 따지는 투로 말했다.
“이봐, 공주님. 당신이 무슨 시골에 사는 내 할머니라도 돼? 아니면 내가 자주 가는 단골집 식당 주인이야?”
“……아닌데요?”
고개를 갸웃거리는 시아나를 향해 베라가 소리쳤다.
“그러면 왜 자기 것을 하나라도 더 못 줘서 안달난 사람처럼 구는 건데!”
베라의 말에 시아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이내 눈썹을 내리며 웃었다.
“그 말은 전제가 잘못되었네요. 애초부터 그것들은 모두 제 것이 아니었어요.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는 것뿐이랍니다.”
“……!”
시아나가 맑은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러니 전혀 고마워할 필요도, 불편해할 필요도 없어요. 당당하게 받으시고 이 땅에 설 새 나라를 위해 써 주세요.”
제 어깨까지 오는 조그마한 공주의 말에 베라는 어쩐지 울 것 같은 얼굴이 되었다.
‘젠장. 심장이 또 뛰잖아.’
그것도 방금 전까지처럼 ‘쿵쿵’이 아니라 ‘쿵! 쿵!’이었다.
베라는 난감한 얼굴로 시아나가 준 종이 더미를 꽉 쥐었다.
* * *
베라가 떠난 후, 방으로 돌아온 시아나는 말미잘처럼 흐느적거리며 침대에 털썩 쓰러졌다.
“후아아. 몸이 물에 젖은 솜처럼 무거워.”
시아나는 아실론드 왕국에 도착한 이후 몇 달 동안 최소한의 수면과 식사를 하며 쉬지 않고 움직였다.
하지만 덕분에 보람이 있었다.
시아나가 푹신한 베개에 한쪽 볼이 눌린 채 말했다.
“예상했던 것보다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되었어.”
제국과의 협상도 잘 마무리됐고, 귀족들의 입도 조용히 시켰다.
가장 걱정스러운 것은 혁명군을 포함한 평민들의 반응이었는데, 다행히 그들도 시아나의 말에 무척 적극적으로 협조해 주었다.
“뭐, 내가 좋아서라기보다는 새 나라에 대한 열망이 큰 덕분이겠지만…….”
시아나는 몇 달 동안 함께하며 본 평민들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들은 하나같이 영특하고, 재빨랐으며, 부지런했다.
왕과 왕비가 어린 시아나에게 툭 하면 말했던 것과는 전혀 달랐다.
[평민 놈들은 잘해 줄 필요가 없어. 그놈들은 벌레처럼 멍청한 데다가 조금이라도 틈이 있으면 게으름 피우고 싶다는 생각뿐이니 말이야.]
시아나는 흥, 하고 눈을 가늘게 뜨며 중얼거렸다.
“누구보고 멍청하고 게으르다는 거야? 자기소개를 한 거냐고요.”
게다가 평민들 중에는 왕족이나 귀족들보다 지식이나 기술이 뛰어난 자들도 많았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왕족과 귀족들은 노력하지 않아도 돈과 음식이 넘치니 매일같이 무도회나 열며 깔깔거렸지만, 평민들은 그렇지 않았으니까.
살아남기 위해서는 뭐든 해야 했던 치열함이 그들을 강하게 만들어 준 셈이었다.
시아나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작은 크기에 풍족하지도 않은 나라지만, 이 나라의 사람들은 가진 게 많아. 성실하고 똑똑하지. 그러니 평민들을 짓눌렀던 왕족과 귀족이 사라지고, 조금의 기회만 주어진다면 분명 성장할 수 있을 거야.”
시아나의 머릿속에 다가올 새 나라가 그려졌다.
푸른 하늘 아래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 그들은 웃으며, 화내며, 슬퍼하며, 자유와 행복을 찾게 될 것이다.
어쩐지 심장 한편이 간지러워졌다.
그저 지옥 같다고 생각했던 곳을 이렇게 희망차게 상상한 적이 없었기에.
얼굴이 살짝 상기된 시아나가 저도 모르게 목에 달린 도토리를 어루만졌다.
그간 라시드와 아예 연락을 주고받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블랙 쉐도우 기사단을 통해 며칠에 한 번씩 전보를 주고받고는 했다.
“하지만 그건 목소리를 들은 건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이제 이곳에서의 일도 마무리 단계이고.”
그러니 아껴 두고 아껴 두었던 두 번의 기회 중 한 번을 써도 되지 않을까.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인 시아나가 도토리에게 ‘라시드’ 하고 주문을 말하려던 순간이었다.
벌컥, 문이 열리더니 그레이스와 츄츄가 나타났다.
두 사람이 동시에 소리쳤다.
“어서 방을 나와, 시아나!”
“왕궁에 불이 나 버렸구먼!”
충격적인 말에 시아나가 눈을 크게 떴다.
* * *
시아나는 재빠르게 방을 나왔다.
그레이스와 츄츄의 말처럼 왕궁 곳곳에 새빨간 불길이 치솟아 있었고, 사람들이 정신없이 대피하고 있었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에요?”
시아나의 손을 잡아끌며 그레이스가 대답했다.
“확실하게는 모르지만 평범하게 난 불은 아닌 것 같아. 불의 진원지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이것저곳에서 불길이 치솟고 있거든. 꼭 마법사가 마법이라도 쓴 것처럼 말이야.”
“……!”
눈을 크게 뜬 시아나를 향해 츄츄가 소리쳤다.
“일단 한시라도 빨리 왕궁 밖으로 나가야 혀. 불길이 어찌나 사나운지 왕궁이 금세 잿더미가 되어 버릴 지경이랑께.”
하지만 조급한 두 사람의 말에도 시아나는 걸음을 멈추고 소리쳤다.
“꽃! 꽃을 가지고 와야 해요!”
“……!”
시아나의 말에 그레이스와 츄츄가 눈을 크게 떴다.
두 사람도 시아나에게 이야기를 들어 왕궁 깊숙이 숨겨져 있는 신비로운 꽃에 대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꽃이 문제야? 위험하다니까! 불길이 어디로 튈지 몰라!”
그레이스가 정색하며 소리쳤지만 시아나는 물러서지 않았다.
“새 나라로 가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에요. 이대로 두고 갔다가 꽃이 다 타 버리면 지금까지 준비한 것이 모두 날아가 버려요.”
절박한 목소리였다.
그레이스와 츄츄는 곤란한 얼굴로 시아나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그럼 우리가 가지고 올게. 아니면 발이 빠른 병사들에게 시키자.”
“그려. 그렇게 해.”
그러나 시아나는 고개를 저었다.
“꽃은 왕의 침실에서 이어지는 비밀공간에 있어요. 그곳까지 가는 길을 정확히 아는 건 저뿐이고요.”
“……!”
“저는 발이 빨라요. 왕궁의 길도 속속들이 알고 있고요. 그러니 걱정 말고 두 사람은 안전한 곳으로 대피하도록 하세요. 저도 금방 따라갈게요.”
그렇게 말하며 시아나는 두 사람의 손에서 제 손을 떼어 내고 저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시아나!”
등 뒤에서 그레이스와 츄츄의 소리가 들려왔지만 시아나는 발을 멈추지 않았다.
다행히 도착한 왕의 방에는 불길이 조금도 붙지 않은 상태였다.
시아나는 서둘러 침대 뒷면의 벽을 눌렀다. 벽이 열리며 어두컴컴한 길이 나타났다.
시아나는 쉬지 않고 길을 달렸다.
시아나는 이내 꽃이 핀 비밀의 방 앞에 도착했다.
“하아, 하아.”
어느새 시아나의 얼굴에는 땀방울이 가득했다. 시아나는 거친 숨을 내쉬며 벽에 손을 대었다. 벽처럼 생긴 문이 빙그르르 돌며 안쪽 공간이 나타났다.
그리고…….
고요하고 조용한 방.
아름답고 신비한 꽃이 핀 그곳에 한 여인이 있었다.
오래전 죽은 줄 알았던…… 새 왕비였다.
순간 시아나의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그러나 이내 시아나는 침착함을 되찾았다.
왜냐면 이곳으로 오며 왕궁에 소란을 일으킨 자가 새 왕비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꼭 마법으로 불을 낸 것처럼 여기저기 불길이 치솟고 있었지.’
새 왕비는 희한한 능력을 지닌 마력석을 여러 개 가지고 있었고, 종종 제 즐거움을 위해 사용하기도 했다.
‘게다가 왕궁은 제국군이 주둔해 있어 경비가 삼엄해.’
그런 왕궁에 몰래 들어와 일을 벌이는 것도 그녀라면 가능했다.
그녀는 왕궁 곳곳에 숨겨진 비밀 통로를 꿰뚫고 있었으니까.
무엇보다 제국군이 왕궁을 함락시켰던 날, 시아나는 새 왕비가 죽는 것을 확실히 보지 못했다.
두려움에 덜덜 떠느라 주변을 제대로 보지 못한 것이다.
‘어마마마는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하여 저와 비슷한 용모의 시녀를 옆에 두고 다녔어. 어마마마라면 그 시녀를 이용하여 위험한 상황을 빠져나갔을지도 몰라.’
그럼에도 그 모든 것은 너무나 가능성이 희박한 일이었다.
그래서 시아나는 새 왕비의 생존 여부를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잘못된 판단이었어.’
새 왕비는 살아 있었고, 왕궁으로 돌아왔다.
물론 지금 그녀의 모습은 마지막에 보았을 때와 확 달라져 있었다.
불혹의 나이답지 않게 윤기가 흘렀던 새까만 머리카락은 하얗게 새었고, 붉은 입술은 메마른 나무처럼 퍼석퍼석했다.
그럼에도 형형한 눈빛은 여전했다.
새 왕비가 퀭한 눈으로 시아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뭘 멍청하게 보고만 있니? 제대로 인사를 해야지.”
날카로운 것으로 유리를 긁는 듯한 신경질적인 목소리에, 시아나는 손끝이 차가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새 왕비가 저런 식으로 말한 후에는 늘 고통이 따라왔다. 그것을 기억한 몸이 자동적으로 반응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시아나는 예전처럼 겁먹은 얼굴로 그녀에게 머리를 조아리지 않았다.
대신 눈을 마주치고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손에 들고 있는 꽃을 주십시오. 순순히 꽃을 주시면 불을 낸 것에 대한 벌을 일부 감면해 드리겠습니다. 적어도 사형은 면하게 해 드리지요.”
마치 거지에게 선심이라도 베푸는 듯한 말에 새 왕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감히 누구에게 사형을 운운하느냐!”
새 왕비가 꽃을 품속에 안으며 말을 이었다.
“나는 이 나라의 왕비야! 누구라도 나와 마주치면 하늘을 보듯 우러러보고, 여신을 숭배하듯 칭송해야 한단 말이야!”
새 왕비는 실제로 그런 삶을 살았다.
빛나는 왕관을 머리에 쓰고, 금과 보석이 수천 개 박힌 화려한 드레스를 입으며 번쩍이는 조명 아래에서 행복하게 웃었다.
하지만 그 일상은 한순간에 무너졌다.
붉은 망토를 휘날리며 들이닥친 제국군에 의해.
새 왕비가 손톱을 깨물며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해. 제국군이 왜 갑자기 이 나라에 쳐들어왔지? 지금까지 그놈들은 이곳에 아무런 관심도 없었잖아.”
이내 새 왕비가 답을 찾았다는 얼굴로 눈을 부릅뜨더니 시아나를 노려보았다.
“너지?!”
“……!”
“네가 그 악마 같은 놈들을 이 나라로 불러들인 거지? 우리를 짓밟아 달라고 말이야.”
어느덧 새 왕비의 눈빛에는 일말의 이성도 보이지 않았다.
새 왕비가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흔들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너 때문에 모든 것이 망가졌어. 내 나라도, 내 일상…… 내 자식들도 모두!”
매섭게 몰아치던 목소리가 끝에 가서는 비통하게 갈라졌다.
새 왕비가 눈썹을 치켜올리며 입꼬리를 올렸다.
마치 화내는 것 같기도, 우는 것 같기도 한 섬뜩한 얼굴이었다.
“재수 없는 년, 진작 죽여 버렸어야 했는데.”
그렇게 말하며 새 왕비는 시아나를 향해 손을 올렸다.
그러나…….
새 왕비는 시아나에게 손끝 하나 댈 수 없었다.
시아나가 새 왕비의 손을 막았기 때문이다.
새 왕비의 손목을 잡은 시아나가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더 이상 힘없는 어린아이가 아니에요.”
제대로 먹지 못했는지 해골처럼 수척해진 새 왕비와 달리 시아나는 몇 달 동안 고된 시녀 일을 하며 근력을 길렀다.
힘의 차이가 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시아나는 그대로 새 왕비를 밀쳤다.
“아악!”
새 왕비가 외마디 비명을 내지르며 바닥에 쓰러졌다.
시아나가 새 왕비를 내려다보았다.
‘이렇게 작았던가.’
예전에는 거인처럼 커 보였던 그녀가 지금은 너무나 초라하고 볼품없게 보였다.
말없이 왕비를 바라보던 시아나는 품속에서 무언가를 빼 들었다. 손바닥만 한 크기의 칼이었다.
그것을 본 새 왕비가 눈을 크게 떴다.
“서, 설마 그걸로 나를 찌르려는 건 아니겠지?!”
“왜 아니라고 생각하세요? 아무 잘못도 없는 저를 끔찍하게 괴롭혔잖아요. 그럼 그에 대한 보복을 당하는 게 맞지 않나요?”
“뭐?!”
숨을 멈춘 새 왕비를 향해 시아나가 검을 휘둘렀다.
“으악!”
새 왕비가 비명을 내질렀다.
그러나…….
시아나의 검은 새 왕비의 이마나 심장에 박히지 않았다. 그저 새 왕비의 얼굴을 스쳐 작은 상처를 냈을 뿐이었다.
그러나 새 왕비는 목숨이 끊어진 것 같은 어마어마한 공포를 느꼈다.
그만큼 방금 전 보았던 시아나의 얼굴이 섬뜩했다.
“하악, 하악.”
창백한 얼굴로 버들버들 떠는 새 왕비를 바라보며 시아나가 중얼거렸다.
“내 손으로 죽이진 않을 거예요. 당신의 피 따위로 내 손을 더럽히고 싶지 않으니까.”
“……!”
시아나가 허공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거기 계시면 저 좀 도와주시겠어요?”
그 순간 어디에선가 검은 갑옷을 입은 기사들이 나타났다.
블랙 쉐도우 기사단이었다.
갑작스럽게 등장한 기사들의 모습에 새 왕비가 작은 비명을 내질렀다.
“뭐, 뭐야, 이것들은!”
시아나는 친절하게 그들의 정체를 설명해 주는 대신 명령했다.
“저 여자를 포박하세요. 궁에 불을 지른 죄인입니다.”
기사 한 명이 새 왕비의 두 팔을 잡아 결박했다.
“놓아라! 감히 누구에게 손을 대는 거냐!”
새 왕비가 소리 지르며 반항했지만 소용없었다.
아무리 애를 써도 풀어질 기세가 보이지 않자 새 왕비가 시아나를 바라보며 악을 쓰기 시작했다.
“시아나! 어미에게 이게 무슨 짓이냐. 당장 이놈들을 치우고 내게 용서를 빌거라. 그렇지 않으면 당장 회초리로 때릴 테다!”
“…….”
“그 후에는 일주일 동안 방에 가두고 물 한 모금 주지 않을 거야. 그렇게 벌을 주면 바닥에 머리를 조아리고 손이 발이 되도록 빌지 않았느냐. 죽기 싫어 발버둥 대는 벌레처럼!”
새 왕비의 말이 계속될수록 블랙 쉐도우 기사들의 무표정한 얼굴이 조금씩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그녀의 말 속에는 끔찍한 학대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작 피해자였던 시아나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시아나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기절시키세요.”
그 말에 새 왕비를 잡고 있던 기사가 번개 같은 속도로 그녀의 뒷목을 쳤다.
이내 새 왕비의 몸이 축 늘어졌다.
꼭 줄이 끊어진 인형처럼.
시아나가 새 왕비의 곁으로 다가갔다.
새삼스럽게 새 왕비의 생존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시아나가 새 왕비를 잡고 있는 기사에게 손을 내밀었다.
“꽃을 주세요.”
기사가 아, 하고 놀란 얼굴로 새 왕비에게서 빼앗은 화분을 건넸다.
화분을 품에 안은 시아나가 웃었다.
“감사합니다.”
지금의 상황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천진한 얼굴에 기사는 저도 모르게 대답했다.
“별말씀을요.”
인사는 거기까지였다.
시아나가 눈을 또렷이 빛내며 말했다.
“언제 여기까지 불길이 치솟을지 몰라요. 서둘러 나갑시다.”
블랙 쉐도우 기사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 * *
왕궁의 불길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있었다.
왕궁 밖에서 그것을 지켜보던 츄츄가 울 것 같은 얼굴로 말했다.
“더는 못 기다리겠구만유. 지금이라도 들어가서 시아나를 데리고 나올게유.”
그러나 그레이스가 츄츄의 거대한 몸을 막았다.
“안 돼.”
물론 그레이스도 마음 같아서는 당장 그러고 싶었다.
하지만 신비로운 꽃이 있는 방으로 가는 길은 너무 복잡했다.
무작정 들어갔다가는 시아나를 구하기는커녕 길을 잃어 위험에 빠질 것이 뻔했다.
츄츄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도 전 가야겠어유. 친구가 불타 죽어 가고 있을 수도 있는데 어떻게 그냥 둬유. 제발 놔주세유, 공주님.”
발버둥 치는 츄츄를 보며 그레이스가 입술을 깨물었다.
활활 타오르는 왕궁을 보며 옥신각신하던 두 사람의 눈이 커졌다.
흩날리는 불꽃과 회색 연기 속에서 검은색 갑옷을 입은 기사들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의 중앙에 꽃을 든 시아나가 있었다.
두 사람은 시아나에게 한걸음에 달려갔다.
“괜찮아, 시아나?”
시아나가 두 사람을 안심시키듯 말했다.
“걱정 마세요. 조금도 다치지 않았어요. 블랙 쉐도우 기사단 분들이 지켜 주셨거든요.”
“아아, 다행이다.”
그레이스와 츄츄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시아나를 껴안았다. 거대하고 단단한 두 여인의 품은 너무나 따스했다.
하지만 시아나는 그 안에서 편히 쉴 틈이 없었다.
시아나가 두 사람의 품속에서 빠져나오며 말했다.
“한시라도 빨리 불을 꺼야 해요. 왕궁은 화재에 대한 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아서 이대로 두면 불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질 거예요.”
시아나는 먼저 제국군 장군 달탄을 찾았다.
다행히 달탄은 무사히 궁을 빠져나와 흩어진 병사들을 모으고 있었다.
시아나가 말했다.
“달탄 장군님, 모은 병사들을 4개의 조로 나누어 주십시오. 왕궁의 동서남북으로 구역을 나누어 화재를 진압하도록 합시다.”
시아나는 챙겨 온 종이를 펼친 후, 그곳에 빠른 속도로 그림을 그렸다.
간략하게 그린 왕궁의 지도였다.
“왕궁의 동쪽과 서쪽에 연못이 있으니 이곳에서 물을 퍼 쓰면 됩니다. 그리고 북쪽에 있는 창고에는 불이 붙으면 위험한 물건들이 많으니 특히 조심해야 해요.”
시아나는 병사들이 꼭 알아야 할 지점에 표시를 하고 설명을 덧붙였다.
그런 시아나를 달탄이 멍하니 쳐다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공주님의 지시대로 움직이도록 하겠습니다.”
달탄은 병사들을 이끌고 왕궁의 불을 끄기 시작했다.
그레이스와 츄츄가 물었다.
“우리는 뭘 할까?”
어떻게든 도움이 되고 싶어 안달이 난 두 사람을 향해 시아나가 말했다.
“황녀 저하와 츄츄는 저와 함께 부상자들을 돌볼 수 있는 임시 병동을 만들도록 해요.”
“알겠어.”
“알겠구먼.”
그레이스와 츄츄는 커다란 목소리로 대답하며 몸을 움직였다.
두 사람은 연기가 닿지 않는 곳에 담요를 깔아 부상자들을 눕힐 만한 곳을 마련했다. 그리고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부상자들을 찾아 데려오기 시작했다.
그사이 시아나는 발이 빠른 시종들을 찾아 마을에 있는 의사와 약을 모아오라고 부탁했다.
그 후에 다치지 않은 시녀들을 모아 부상자들을 치료했다.
워낙에 갑작스럽게 난 불이었기에 다친 사람들이 많았다.
어떤 이는 상처가 경미했지만, 어떤 이는 끔찍한 화상을 입기도 했다.
“사, 살려 주세요! 제발!”
몸의 반절이 녹은 시녀 한 명이 비명을 지르며 울부짖었다.
끔찍한 모습을 본 사람들의 얼굴이 창백하게 굳었다.
그러나 시아나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시녀를 살폈다.
‘화상이 너무 심해. 도저히 약으로 치료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야.’
시아나는 품속에서 유리병을 꺼냈다. 작은 유리 병 안에는 오묘한 색상의 액체가 들어 있었다.
신비로운 꽃을 짓이겨 만든 즙이었다.
시아나는 즙 한 방울을 환자의 상처 부위에 떨어뜨렸다.
이내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녹아 내렸던 피부가 재생되더니 이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깨끗해진 것이다.
반쯤 정신이 나가 울부짖고 있던 시녀를 포함하여 이 모습을 지켜본 모든 사람들이 입을 쩍 벌렸다.
잠시 후, 수많은 부상자들이 시아나에게 손을 뻗었다.
“고, 공주님. 제게도 그 약을 주세요.”
“부러진 다리가 너무 아픕니다.”
저도요, 저도.
애처로우면서도 어딘가 섬뜩한 목소리였다.
그러나 시아나는 냉정하게 고개를 저었다.
“이것은 생사를 오갈 만큼 상태가 심각한 사람들에게만 사용할 겁니다. 생명이 위태로운 이들을 위해 양보해 주십시오.”
순간 몇몇 이들의 눈빛에 불만이 어렸다.
그것을 본 그레이스가 눈을 내리깔며 한마디를 내뱉었다.
“이상한 데 불만 갖지 마. 저 약을 쓸 만큼 온몸이 다 타 버린 것보다, 붕대 며칠 감는 것만으로 나을 만큼 다친 것이 백 배 천 배 행운인 거니까.”
츄츄가 고개를 끄덕였다.
“옳으신 말씀.”
그렇게 말하며 두 사람은 부상자의 붕대를 감던 팔뚝을 부풀렸다.
조금만 더 힘을 주면 붕대로 감고 있던 부위가 낫기는커녕 더 부러지는 것이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들 만큼 어마어마한 근육에 부상자들은 입을 꾹 다물었다.
긴 밤이 정신없이 지나갔다.
왕궁의 불이 꺼진 것은 다음 날 새벽 무렵이었다.
달탄이 큰 소리로 말했다.
“큰 불은 다 껐습니다! 이제 한숨 놓으셔도 됩니다.”
그 말과 동시에 잠시도 쉬지 못하고 불을 껐던 병사들과 부상자들을 치료했던 시녀들이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수십 명의 부상자들을 병동으로 옮기고 치료했던 그레이스와 츄츄도 마찬가지였다.
손가락 하나 움직이기도 힘들 만큼 피곤했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 뽈뽈거리며 움직이는 사람이 있었다.
시아나였다.
시아나는 왕궁을 한 바퀴 돌며 작은 불씨가 없나 확인했다. 그 후에는 마을에서 가지고 온 빵과 물을 사람들에게 나눠 주었다.
그 모습을 보며 그레이스와 츄츄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입을 쩍 벌렸다.
‘어떻게 사람이 저럴 수 있지?’
사람들은 밤사이 보았던 시아나의 모습을 선명하게 기억했다.
시아나는 달탄이 병사들과 함께 불을 수월하게 끌 수 있도록 지시를 내렸고, 병동을 만들어 부상자들을 챙겼다.
어쩌면 이곳에 있는 사람 중 가장 힘들었을 그녀가 쉬지 않고 움직이는 모습은 경이롭기까지 했다.
그런 묘한 분위기 속에 한 여인이 나타났다.
혁명군의 리더 베라였다.
베라는 다른 지역의 혁명군과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어젯밤 수도를 떠났다가, 왕궁에 일이 생겼다는 말을 듣고 허겁지겁 달려온 참이었다.
“세상에.”
검게 그을린 왕궁의 모습에 베라는 작은 신음을 내뱉었다.
그 후, 베라는 시아나를 마주 하고는 아예 할 말을 잃었다.
시아나의 얼굴에는 검은 재가 덕지덕지 묻어 있었고, 손끝에는 작은 상처와 화상 자국이 수없이 나 있었다. 게다가 옷은 여기저기 그을리고 찢어진 데다 핏자국까지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도저히 일국의 공주라고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끔찍한 몰골이잖아.”
일그러진 얼굴로 중얼거린 베라에게 시아나가 짧게 상황을 설명했다.
“왕궁에 불이 났었습니다. 다행히 사망자도 없고 왕궁 불도 모두 진압되었으니 염려 마세요.”
“…….”
시아나가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신비로운 꽃도 걱정할 것 없습니다. 안전한 곳에 보관해 두었으니까요.”
순간 베라의 한쪽 눈썹이 추켜올라 갔다.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시아나가 말을 이었다.
“다만 한 가지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개인적인 판단으로 꽃 한 송이를 사용해 버렸어요.”
“……뭐?”
“꽃을 함부로 쓰지 않겠다는 권리 위임서까지 작성했는데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해 죄송합니다. 서약을 어긴 것에 대한 대가는 꼭 치르도록 하겠습니다.”
“…….”
멍하니 시아나를 바라보던 베라가 이내 이를 으득거렸다. 잔뜩 화가 난 얼굴이었다.
그때, 그레이스와 츄츄가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그레이스가 베라의 어깨에 팔을 기대며 말했다.
“이봐, 혁명군 대장님, 너무 정색하지 말고 좀 봐줘. 시아나가 자기를 위해 쓴 것도 아니고, 부상자들의 상태가 너무 심해서 쓴 거란 말이야.”
츄츄가 맞는 말이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대로 뒀으면 몽땅 타 버렸을 꽃들을 시아나가 목숨 걸고 챙겨 나온 덕분에 멀쩡한 거잖아유. 한 송이 정도는 시아나가 맘대로 쓸 수도 있는 거 아닌가유.”
거기에서 베라의 분노는 한계에 달했다.
베라가 시아나의 자그마한 어깨를 잡고 소리쳤다.
“그게 정말이야?”
시아나가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뭐가 정말이라는 건가요? 꽃을 부상자들에게 썼다는 걸 물으시는 건가요, 아니면…….”
“그런 거 말고. 목숨 걸고 꽃을 가지고 나온 게 정말이냐고!”.
“……목숨을 걸었다고 표현할 만큼 위험한 상황은 아니었어요.”
베라가 소리를 빽 질렀다.
“이렇게 왕궁이 잿더미가 되도록 큰 불이 났는데 어떻게 위험한 상황이 아니야!”
베라는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었다.
불길이 치솟은 왕궁에서 꽃을 들고 달렸을 시아나의 모습을.
베라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말을 이었다.
“공주님, 당신 진짜 왜 그래? 그러다가 크게 다치기라도 하면, 아니 죽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랬어! ……그따위 꽃이 뭐라고.”
시아나가 눈썹을 내리며 말했다.
“그따위 꽃이 아니에요. 새 나라를 빛나게 할 희망의 꽃이죠.”
맑은 목소리였다.
베라는 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베라가 저보다 한 뼘 작은 시아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얼마 전, 궁에서 일했던 자들을 만나 이야기를 들었어.”
“……!”
“그들이 말하길 당신은 왕과 왕비에게 고운 말 한 번 듣지 못하고 살았다더군. ……세상에 그렇게 비참하고 불쌍한 공주는 없을 거라고.”
“…….”
베라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이렇게까지 할 필요 없잖아. 좋은 기억도 없는 나라를 위해 왜 가진 것을 다 털어 주냔 말이야.”
눈을 크게 뜨고 베라를 바라보던 시아나가 천천히 입을 뗐다.
마치 속마음을 고백하듯이.
“베라 님이 아는 것처럼 저는 행복하게 자라지 못했어요. ……그래서 사실은 공주로서 이 나라를 지켜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껴 본 적이 없어요. 그저 제 목숨을 부지하는 것에만 급급했으니까요. 하지만…….”
시아나는 아실론드 왕국에 돌아와서 보았던 것들을 떠올렸다.
아무것도 가지지 못했음에도 눈을 빛내며 미래를 꿈꾸던 사람들, 가뭄으로 바짝 갈라진 땅 사이로 피어난 작은 꽃.
시아나가 수줍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제가 몰랐던 이 나라의 모습을 보며 사랑스럽다고 생각하게 되었어요. 제가 할 수 있는 온 힘을 다해 보살펴 주고 싶을 만큼이요.”
“…….”
“죄송합니다.”
베라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도대체 뭐가 그렇게 미안한데.”
“저는 떳떳한 입장이 아니니까요.”
어쨌건 시아나는 결국 이 나라를 고통 속에 빠뜨렸던 왕족 중 하나이며, 적국의 황태자와 손을 잡은 배신자였다.
시아나는 제 입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순간…….
“……!”
베라가 더는 참을 수 없다는 얼굴로 시아나를 껴안았다.
쿵, 쿵.
시아나에게 들릴 만큼 큰 심장 소리를 내며 베라가 말했다.
“이제 구질구질한 사과 따위 그만해. 그런 걸 할 시간에…….”
“…….”
“우리를 더 열심히 보살펴 주세요.”
아이가 엄마에게 칭얼거리는 것 같은 목소리에 시아나가 눈을 커다랗게 떴다.
두 사람을 지켜보던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바로 옆에 있던 그레이스와 츄츄는 턱이 빠져라 입을 쩍 벌렸다.
일생 동안 한 번도 보지 못할 거라 생각했던 해괴한 장면을 보기라도 한 것처럼.
* * *
달탄이 말했다.
“불을 다 끄긴 했지만 한동안 궁에서 지내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왕궁 가까이 있는 귀족 저택 중에 공주님께서 편히 묵으실 수 있는 곳을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그 말에 베라가 눈을 번뜩이며 소리쳤다.
“저희 집으로 오십시오, 공주님!”
거절하기라도 하면 엄청나게 울거나 화낼 것 같은 기세였다.
그래서 시아나는 넵, 하고 대답하며 그레이스, 츄츄와 함께 베라의 집으로 향했다.
베라의 집은 혁명군의 비밀 기지로 쓰였던 술집의 2층이었다.
베라가 계단을 오르며 말했다.
“안심하십시오. 거지 같은 1층과 달리 2층은 그럭저럭 안락하니까요. 게다가 요한에게 방을 정리해 두라고 시켰으니, 재수 없는 귀족 놈들 집보다는 지내기 좋으실 겁니다.”
그러나 방문을 연 베라는 소리를 빽 질렀다.
“요한! 내가 분명 제대로 방을 꾸며두라고 했잖아!”
그때까지 방을 정리하고 있던 요한이 억울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했어. 빗자루와 걸레질을 싹 해서 수북이 쌓여 있던 먼지도 싹 없애고, 냄새 나는 이불도 깨끗이 빨았다고.”
그뿐인가.
잭의 집에서 작은 꽃이 핀 화분을, 엘리사네 집에서는 레이스가 달린 커튼까지 받아 와 칙칙했던 방을 화사하게 꾸몄다.
그러나 요한의 구구절절한 말에도 베라의 구겨진 얼굴은 조금도 펴지지 않았다.
베라가 성난 얼굴로 말했다.
“여기도, 저기도 얼룩이 묻어 있잖아!”
요한이 눈썹을 찡그렸다.
“그건 아주 오래전부터 있던 얼룩이라 무슨 수를 써도 지워지지 않아. 저걸 없애는 것보다 이 건물을 몽땅 부수고 새로 짓는 편이 빠를걸?”
“그럼 그렇게 했어야지!”
“…….”
순간 요한은 손에 들고 있던 먼지떨이로 베라의 등짝을 휘갈기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그만큼 황당한 말이었다.
그러나 그는 종종 제정신이 아닌 베라와 달리 지극히 이성적인 인간이었다.
그래서 요한은 크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공주님을 저렇게 세워 두고 미친 말을 계속할 거야?”
그제야 이성을 차린 베라가 아앗, 하고 당황해했다.
시아나와 그레이스, 츄츄가 어색한 얼굴로 문가에 서 있었던 것이다.
밤새 불을 끄고 바로 온 탓에 엉망인 몰골로.
“이런, 제가 생각이 짧았군요. 피곤하실 텐데 일단 편히 앉아 계십시오. 한시라도 빨리 식사와 목욕물을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말한 베라는 시아나가 뭐라고 말할 틈도 없이 방을 쌩 나가 버렸다.
“…….”
베라가 사라진 방에 묘한 정적이 맴돌았다.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그레이스였다.
“아니, 도대체 갑자기 왜 저러는 거야? 무슨 마법이라도 걸린 거야?”
지금까지 베라는, 아니 오늘 왕궁에 막 도착했을 때까지만 해도 그녀는 시아나에게 건방지게 굴었다.
공주인 시아나에게 반말을 찍찍 내뱉는 것은 물론이고, 틈만 나면 눈을 부릅뜨며 적의와 원망을 드러냈다.
그 모습을 알고 있던 그레이스가 기가 찬 얼굴로 말했다.
“그랬던 사람이 갑자기 시아나를 덥석 껴안더니, 그 후에는 마치 다른 사람처럼 태도가 바뀌었잖아.”
시아나에게 극진한 존댓말을 쓰기 시작한 것은 물론이고, 시아나가 무슨 말을 하던 눈을 빛내며 열정적으로 반응했다.
츄츄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누가 보면 시아나한테 푹 빠진 줄 알겠다니까유.”
츄츄는 반쯤 농담으로 내뱉은 말이었건만, 놀랍게도 아직까지 방에 남아 먼지를 털고 있던 요한이 맞장구쳤다.
“맞습니다.”
충격적인 말에 그레이스와 츄츄의 눈알이 튀어 나갈 듯 커졌다.
요한이 아, 하고 말을 덧붙였다.
“걱정 마십시오. 에로스적인 사랑을 말하는 것이 아니니까요. 베라는 시아나 공주님을 지도자로서 존경하고 있습니다.”
“……!”
생각지도 못한 말에 시아나의 눈이 커졌다.
요한이 무표정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놀라셨지요? 저도 놀랐습니다. 베라도 놀랐죠. 베라는 이 나라의 왕족과 귀족을 끔찍하게 싫어했으니까요. 가게 구석에 기어 다니는 쥐들이나 바퀴벌레보다 왕족과 귀족이 더 혐오스럽다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그것은 시아나를 처음 봤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공주님과 만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베라는 흔들렸습니다. 그래도 계속 그럴 리 없다며 자존심을 부리더니 결국은 제 마음을 인정한 모양입니다.”
상상도 못했던 이야기에 시아나가 살짝 붉어진 얼굴로 입을 막았다.
그런 시아나를 바라보며 요한이 말했다.
“베라는 앞으로 공주님께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바쳐 마음을 표현할 겁니다. 워낙 단순해서 중간이 없는 여자니까요.”
그러니 각오하십시오, 라는 말이 들리는 듯했다.
식사 준비가 끝났다는 말에 시아나는 1층으로 내려갔다.
오늘 처음 가 본 2층과 달리 1층은 종종 와 보았던 곳이었다. 그러나 시아나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늘 제대로 정리가 되지 않아 엉망진창이었던 식탁이 말끔하게 치워져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위에는 거대한 멧돼지 한 마리가 통째로 노릇노릇하게 구워져 있었다.
베라가 의기양양한 얼굴로 말했다.
“사냥꾼 몰리가 멧돼지를 잡았다기에 빼앗아…… 아니, 얻어 왔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다양한 음식을 차려 드리고 싶지만 주머니 사정이 넉넉지 않네요.”
그렇게 말하며 베라는 멧돼지 구이의 기름진 뱃살을 큼직하게 잘라 시아나 앞에 있는 접시 위에 놓아주었다.
“이래 봬도 동네에서 음식 잘하기로 소문난 할머니께 배운 특별 조리법으로 만들어서 맛이 제법 괜찮습니다. 드시지요.”
“……잘 먹겠습니다.”
시아나는 윤기가 좔좔 흐르는 고깃덩이를 바라보다가 작게 썰어 입에 넣었다.
이내 시아나가 헤실 웃었다.
“우와, 멧돼지고기를 먹는 건 처음인데 정말 맛있네요.”
“그렇죠?!”
베라는 상기된 얼굴로 멧돼지 구이의 이 부위 저 부위를 잘라 시아나의 접시에 내려놓기 시작했다.
“담백한 목살도 드셔 보세요. 다리 살이 아주 쫀득쫀득합니다. 처음 한 번은 그냥 드시고, 한 번은 소금에, 다음번은 토마토로 만든 특제 소스에 찍어 드세요. 멧돼지고기의 진가를 느끼실 수 있을 겁니다.”
그레이스와 츄츄는 기가 차단 얼굴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입 안 가득 육즙이 팡팡 터지는 고기를 우물거리며.
베라의 애정 표현(?)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식사가 끝난 후, 시아나는 욕실에 들어섰다. 나무 욕조에는 알록달록한 꽃잎이 산처럼 수북이 쌓여 있었다.
눈을 동그랗게 뜬 시아나를 향해 베라가 말했다.
“귀한 댁 아가씨들은 이렇게 목욕을 한다고 해서 준비해 봤습니다. 산에서 보이는 대로 꽃을 뽑아 왔지요.”
베라가 시아나의 눈치를 슬쩍 살피며 물었다.
“마음에 드시나요?”
“……네, 예쁘네요.”
조금 과하긴 하지만.
꽃잎이 너무 많아서 도대체 이게 물로 몸을 씻는 건지, 꽃잎으로 몸을 씻는 건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
어쨌든 목욕을 끝내고 나오니 상쾌하기 그지없었다.
‘온몸에 묻어 있던 연기와 재를 깨끗이 씻어 내니 기분이 너무 좋아.’
시아나는 젖은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말리며 2층 방으로 들어갔다.
방에 들어오니 먼저 씻고 들어온 그레이스와 츄츄가 나무 의자를 내렸다 올렸다, 하며 심각한 얼굴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베라 저 여자, 시아나를 향한 마음이 존경인지 사랑인지는 모르겠는데 애정 표현이 너무 과한 것 아니야?”
“그러게 말입니더. 저는 괜스레 옆에 있다가 팔뚝에 닭살이 다 돋았다니까유.”
그레이스가 나무 의자를 하늘 높이 들며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모습을 봐서는 시아나의 치맛자락을 붙잡고 제국에 돌아가지 말고 여기에서 함께 살자고 질척거려도 놀랍지 않을 정도라니까.”
“오메, 그럼 안 되는디. 황궁에서 오매불망 시아나만 기다리고 있는 황태자 전하는 어떡해유.”
“뭘 어떡해. 시아나가 이쪽이 좋다면 아무리 오라버니라도 버려야지. 무릇 여자가 큰일을 하려면 일개 남자 한 명에게 휘둘리면 안 되는 거야.”
황당한 소리를 늘어놓는 두 사람을 향해 시아나가 눈을 가늘게 떴다.
“절대 안 버려요. 그러니 무시무시한 말 그만하세요.”
제법 호기롭게 말했으나 그레이스는 물러서지 않고 말했다.
“시아나, 그렇게 단언하지 말고 넓게 생각해. 지금은 오라버니가 세상에서 제일 잘생겨 보이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언제 그 마음이 바뀔지 모른다고.”
“그래도 전하보다 잘생긴 남자를 만나는 건 힘들지 않을까유?”
“그건 그렇지만.”
귓가로 두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시아나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지독한 수마가 쏟아졌기 때문이다.
어젯밤 내내 쉬지 않고 움직였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전하께 연락을 해야 하는데…….’
시아나는 반쯤 감긴 눈으로 목에 걸린 도토리를 만지작거리다가 결국 잠이 들어 버렸다.
이상한 일이었다.
화려하게 꾸며진 왕궁의 방보다, 천장이 낮고 창문 사이로 바람이 살짝 새어 드는 이 낡은 방이 훨씬 더 편안했다.
* * *
다음 날, 눈을 뜬 시아나는 왕궁으로 향했다.
먼저 와 기다리고 있던 달탄이 상황을 보고했다.
“어제 왕궁을 떠나시기 전 확인하신대로입니다.”
기민하게 움직여 불을 끄긴 했지만, 화재 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던 왕궁은 피해가 컸다.
건물 곳곳이 검게 그을렸으며 아예 다 타 버려 재만 남은 곳도 있었다.
잠시 머물렀던 달탄조차 마음이 씁쓸해지는 광경이었다.
그러나 정작 궁의 주인인 시아나는 담담하기만 했다. 그래서 달탄은 눈썹을 찡그렸다.
“제 눈이 이상한 겁니까? 공주님께서는 그다지 속상하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시아나는 달탄의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보신 그대로예요. 값비싼 귀중품과 책들을 재빨리 옮긴 덕분에 보기보다 금전적 피해가 크지 않잖아요. 천만다행으로 사망자도 없고요.”
큰 부상을 입은 자들이 몇몇 있기는 했으나, 시아나가 신비로운 꽃을 사용한 덕분에 별 탈 없이 나았다.
그 외에는 가벼운 상처를 입은 것이니 시간이 지나면 건강해질 것이다.
“그리고…….”
시아나가 눈을 내리깔며 혼잣말하듯 말을 이었다.
“긴 시간 백성들의 피와 눈물을 먹고 살았던 왕궁에게 어울리는 최후라는 생각이 들어요. 낡은 왕국은 완전히 사라지고 그 위에 새로운 나라가 시작될 테죠.”
말을 마친 시아나가 달탄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화재 진압을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 편히 쉬셔도 됩니다. 베라 님이 혁명군과 마을 사람들을 데리고 오셨으니까요. 불탄 잔재를 치우고 새 건물을 짓는 것은 그들이 하게 될 거예요.”
달탄은 시아나의 의도를 깨닫고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이제부터 제국군은 아실론드 왕국과 관련된 일에서 손을 떼도록 하죠. 엄연한 타국의 일이니까요.”
달탄의 말에 시아나가 빙긋이 웃었다.
협조해 주어서 고맙다는 듯이.
왕궁의 상태를 살펴보는 것은 어느 정도 마무리가 되었으니, 이제 남은 일을 처리해야 했다.
웃음을 거둔 시아나가 말했다.
“어마마마께 안내해 주십시오.”
* * *
새 왕비는 왕궁 한편에 있는 창고에 갇혀 있었다.
달탄이 시아나를 안내하며 말했다.
“조사를 해 보니 아실론드 왕궁이 무너지던 날, 시녀와 옷을 바꿔 입어 궁을 탈출했던 모양입니다. 그 후에 은신처에 숨어 목숨을 부지했더군요. 그다지 편안하게 지내진 못했던 것 같지만요.”
시아나는 어제 보았던 왕비의 모습을 떠올렸다.
헝클어진 머리카락, 오물이 묻어 있는 옷, 바짝 마른 몸에서는 썩은 생선 같은 악취가 났다.
확실히 누군가의 시중을 받으며 호사스럽게 살았던 모습은 아니었다.
달탄이 말을 이었다.
“한 가지 의문인 것은, 지금까지 조용히 숨어 있다가 왜 갑자기 왕궁에 침입하여 신비로운 꽃을 훔치려 했냐는 겁니다.”
시아나가 어렵지 않은 문제를 맞추듯 대답했다.
“꽃이 어디 있는지 자신만이 알고 있으니 언제든 꽃을 가져갈 기회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제가 돌아왔다는 말을 듣고 초조해졌겠죠. 제가 언제 그 꽃에 손댈지 모르니까요.”
“그렇군요.”
달탄이 이제야 납득이 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시아나에게는 아직 한 가지 의문이 남아 있었다.
‘새 왕비는 신비로운 꽃을 끔찍하게 싫어했어.’
오래전 새 왕비는 상태가 온전치 않은 아들을 호전시키기 위해 몇 번이나 꽃을 먹였다.
그러나 꽃은 육체에 난 상처만 치유해 줄 뿐, 정신이나 마음을 고쳐 주진 못했다.
아들의 상태가 조금도 차도가 없자 새 왕비는 크게 분노하여 신비로운 꽃을 짓이기려 했다. 왕에게 들켜 성공하지 못했지만.
그 후로 새 왕비는 꽃에 대해 일절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랬던 그녀가 왜 왕궁에 불을 지르면서까지 꽃을 가지러 온 것일까?’
시아나는 의아한 마음을 품으며 문을 열었다.
끼이익-.
묵직한 소리를 내며 녹슨 문이 열렸다.
작은 방 바닥에는 양손이 결박된 새 왕비가 앉아 있었다. 죽은 사람처럼 축 늘어져 있던 새 왕비는 발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방에 들어온 이가 시아나라는 것을 확인한 새 왕비는 눈을 부릅떴다.
새 왕비는 어제처럼 시아나에게 추악한 욕을 내뱉으며 달려들지 않았다.
대신 무릎을 꿇은 상태로 시아나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시, 시아나. 내가 잘못했다, 다 잘못했어. 이렇게 사과할 테니 꽃 한 송이만 다오. 부탁이야.”
늘 사람을 내려다보며 악독하게 웃던 여인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처절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시아나는 무표정한 얼굴로 물었다.
“꽃을 어디에 쓸 생각이었습니까?”
꽃을 가져가 잃어버린 부귀영화를 다시 누리고 싶었던 것일까.
아니면 시아나가 꽃을 이용하여 새 나라의 건국을 돕는다는 사실을 알고 방해하고 싶었던 것일까.
그러나 새 왕비에게서 들려온 답은 시아나의 생각과 전혀 다른 것이었다.
“알렉스와 엘리자벳을 살려야 해! 그 꽃이 있으면 그 애들이 살아날 수 있어.”
“……!”
그 순간 시아나의 눈빛이 흔들렸다.
알렉스, 엘리자벳.
새 왕비가 낳은 자식들의 이름이었다.
‘설마 그 애들도 살아 있었나?’
그러나 옆에 있던 달탄이 재빠르게 말했다.
“어젯밤 정신을 차린 후 저 말을 반복하기에 땅에 묻었던 시체를 확인해 보았습니다. 알렉스 왕자와 엘리자벳 공주는 죽은 것은 확실합니다.”
그 순간 흐느끼던 새 왕비가 귀신 같은 얼굴로 소리를 빽 질렀다.
“아니야! 죽지 않았어!”
달탄조차 어깨를 움찔거릴 만큼 쩌렁쩌렁한 목소리였다.
새 왕비가 부들부들 떨며 말을 이었다.
“그 애들도 나처럼 어딘가에 살아 있어. 다만 어딘가 크게 다쳐서 어미에게 오지 못하고 있는 거라고.”
“…….”
“아니지. 죽었어도 상관없어. 꽃을 있는 대로 다 모아서 뿌려 주면 되니까. 내 아들의 영혼에는 조금도 도움이 되지 못한 쓸모없는 꽃이지만, 몸에 난 상처를 치유해 주는 능력 하나는 대단하잖아.”
새 왕비가 입꼬리를 양옆으로 올리며 말했다.
“시체의 입 속에 꽃을 우겨 넣으면 분명 숨을 쉴 거야. 가슴 위에 올려 두면 심장이 쿵쿵 뛸 거야. 팔 위에 올려 두면 다시 나를 안을 거란 말이야…….”
어느새 새 왕비의 눈에는 눈물이 어려 있었다.
젖은 눈동자에 어린 감정은 자식에 대한 애달픈 사랑뿐이었다.
그제야 시아나는 확실히 알았다.
새 왕비는 미쳤다.
……자식을 잃은 슬픔에.
시아나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래, 당신은 늘 그랬지. 다른 사람의 목숨은 길가의 돌멩이보다 하찮게 생각하면서 그 애들은 끔찍하게 아꼈어. 그래서 나는…….”
시아나는 과거의 날들을 떠올렸다.
새 왕비에게 욕설을 듣고, 맞고, 비웃음을 당했던 지옥 같은 날들을.
그중 가장 괴로웠던 건 제게 악마처럼 굴던 새 왕비가 어린 동생들에게는 환하게 미소 지은 것이다.
그때마다 시아나는…….
‘사실은 부러웠어. 나도 그렇게 사랑받고 싶었어.’
얼마나 비참하고 가련한 생각이었던지.
하지만 이제는 해묵은 과거의 일일 뿐이었다.
지금 시아나는 새 왕비에게 어떠한 감정도 없었다.
미움도, 원망도.
시아나가 흐느끼는 새 왕비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꽃의 능력이 아무리 뛰어나도 죽은 사람을 되살릴 수는 없습니다. 알렉스와 엘리자벳은 이제 당신 곁으로 돌아오지 않아요.”
시아나의 목소리는 덤덤했다.
그러나 새 왕비에게는 지옥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보다 더 무섭게 느껴졌다.
얼굴을 일그러뜨린 새 왕비가 고개를 저었다.
“내 아이들은 죽지 않았어! 살아 있어! 내가 살려낼 거야!”
그러나 새 왕비의 처절한 외침은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았다.
시아나와 달탄이 방을 나왔기 때문이다.
시아나의 옆에 서 있던 달탄이 물었다.
“왕비를 어떻게 할까요?”
달탄이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죽일까요?”
새 왕비가 현재 이곳에 갇혀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렇기에 소리 소문 없이 그녀의 목숨을 해치는 것은 조금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공주님은 왕비에게 모진 짓을 수없이 당했다고 들었어. 그러니 저 여자를 당장 이 세상에서 없애고 싶다 해도 놀랄 일이 아니지.’
그러나 시아나의 대답은 달탄의 생각과 전혀 달랐다.
“저 여인은 왕궁에 불을 질렀습니다. 또한 왕궁의 보물을 훔치려 했죠.”
그뿐 아니었다.
새 왕비는 이전에 권력이 공고했을 때, 샐 수 없이 많은 이들을 상처 입히고 죽였다.
“그녀는 죄인입니다. 정식으로 재판을 열어 마땅한 벌을 받게 하죠.”
“……그래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어차피 제대로 형을 받으면 사형을 면치 못할 거예요. 그런 자에게 굳이 제가 뭘 더 할 필요는 없죠. 그리고…….”
시아나가 눈을 내리깔며 말을 덧붙였다.
“저는 제게 아무 의미 없는 사람에게 이 이상 어떤 것도 쓰고 싶지 않아요. 그것이 감정이든, 시간이든.”
달탄은 잠시 말을 잃고 시아나를 바라보았다.
처음 마주쳤을 때는 작은 다람쥐처럼 마냥 귀여운 여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시아나는 강했고, 영민했으며, 어느 순간에는 무척 냉정했다.
그녀가 고작 열여덟 살이라는 앳된 나이라는 것을 잊을 만큼.
달탄이 연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황태자 전하께서 왜 공주님을 짝으로 선택하셨는지 알 것 같습니다.”
“좋은 의미로 하시는 말씀이시겠죠?”
“물론입니다.”
달탄은 거짓 없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 * *
혁명군을 중심으로 모인 사람들 덕에 왕궁은 빠르게 재건되었다.
특히 츄츄와 그레이스의 활약이 컸다.
“저 건물이 완성되면 도서관으로 만들어 사람들에게 개방한다네유. 내 여섯 번째 동생도 책을 엄청 좋아하는디 너무 비싸서 볼 엄두도 못 냈는디, 참말로 좋은 생각이예유!”
츄츄가 콧구멍을 벌름거리며 산더미처럼 쌓인 벽돌을 등에 이고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은 지지 않겠다는 듯 근육을 꿈틀거리며 벽돌을 날랐다.(츄츄의 반의반도 들지 못했지만.)
그렇게 온 힘을 다해 일을 하다가 기운을 다 쓰고 바닥에 쓰러져 널브러진 사람들 앞에 그레이스가 나타났다.
먹을거리를 한가득 채운 수레를 가지고.
그레이스가 박수를 치며 우렁찬 목소리로 소리쳤다.
“다들 고생했어. 배 좀 채우고 하자고.”
그레이스가 챙겨 온 음식은 흔한 일꾼들의 새참과는 전혀 달랐다.
노릇노릇 구운 닭고기구이, 둥그런 치즈 덩어리, 다섯 종류의 과일, 거기에 평민들은 먹을 엄두도 내기 힘든 달콤한 케이크까지.
평생 한 번도 보기 힘들었던 푸짐한 음식에 사람들은 눈이 뒤집혀 달려들었다.
사람들이 양 볼 가득 음식을 채우며 말했다.
“그런데 그레이스 님은 도대체 뭐 하시는 분이기에 이런 음식들을 때마다 가지고 오실 수 있는 거지?”
오랜 시간 흉년이 지속되었기에 현재 아실론드 왕국에서는 빵 하나도 구하기 힘든 실정이었다.
옆에 있던 남자가 속삭였다.
“왕궁에서 일하는 친구에게 은밀하게 들은 이야기인데 그레이스 님은 제국의 황녀님이라는군. 그래서 제국군을 통해 귀족들을 협박해서 음식을 싹싹 긁어 오시는 거래.”
“뭐얏?”
그 순간 음식을 먹던 사람들이 경악한 얼굴로 행동을 멈췄다.
얌전히 이 땅을 떠난다고 발표하긴 했지만, 여전히 제국은 껄끄러운 상대였다.
그런 나라의 황녀라니.
……그러나 이들이 놀란 것은 단순히 그녀의 정체 때문만은 아니었다.
“황녀님이나 되는 분이 음식을 저렇게 먹어도 되는 거야?”
저쪽에 앉은 그레이스는 두 손에 거대한 고깃덩이를 잡고 우적우적 씹고 있었다. 그리고 맥주 한 잔을 한 번에 들이켜고는 캬, 하고 아저씨 같은 소리까지 냈다.
도저히 일국의 황녀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얼굴이었다.
그러나…….
우물거리던 그레이스가 저를 보는 사람들을 보더니 씨익 웃으며 손을 들었다.
“다들 맛있게 먹도록 해.”
가을바람처럼 시원한 미소였다.
순식간에 사람들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확실히 미인이시긴 하지만.”
“맞아. 게다가 힘도 세시지. 불탄 기둥이 내려앉아 위험했던 순간에 그레이스 님이 달려와 구해 주셨어. 기둥을 번쩍 들더니 내게 어서 빠져나가라고 하셨다고.”
“나는 나무 더미가 너무 무거워서 바들바들 떨면서 옮기고 있는데 옆으로 조용히 다가오시더니 나무 더미를 들어 주시더라.”
남녀 상관없이 많은 이들이 제가 본 그레이스의 무용담(?)을 자랑하듯 말하기 시작했다.
한 발짝 떨어진 곳에서 그 이야기를 듣고 있던 시아나가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황녀 저하의 인기가 대단하시네.’
그레이스는 이곳에 와 백성들의 마음을 얻었다.
그것은 앞으로 그녀가 황족으로 살아가는 데 큰 힘이 될 것이 분명했다.
이내 시아나는 고개를 돌려, 왕궁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며칠 전까지 화마에 휩싸여 잿빛이던 참혹한 모습은 사라지고, 나무와 벽돌로 만든 새 건물들이 지어지고 있었다.
‘몇 달 후면 이곳은 전혀 다른 모습이 되어 있겠지.
사치스럽게 꾸며져 왕족과 귀족만 오고 갔던 예전과 달리, 많은 이들이 자유롭게 오가며 나라에 대한 번영을 고민하는 장소가 될 것이다.
다가올 미래를 생각하며 시아나는 빙긋이 웃었다.
그런 시아나를 향해 새초롬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뭘 그렇게 예쁘게 웃고 계십니까, 사람 설레게.”
베라였다.
베라는 날이 갈수록 시아나를 향한 애정을 격렬하게 표현하고 있었다.
베라의 말에 도대체 어떻게 대답해야 하나 고민하는데 베라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이자들이 공주님께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해서 데리고 왔습니다.”
베라의 옆에는 왕궁에서 일하는 시녀와 시종들이 서 있었다.
두 손을 마주잡고 머뭇거리는 시녀와 시종들을 향해 시아나가 먼저 말을 건넸다.
“다들 몸은 괜찮으신가요?”
그들은 왕궁이 불에 탔던 날, 큰 부상을 입어 시아나에게 치료받았던 이들이었다.
시아나가 가운데에 서 있는 시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특히 당신은 몸의 절반이 화상을 입어 상태가 아주 심각했잖아요. 하지만 지금은 상처 자국 하나 없이 건강해 보이네요. 신비로운 꽃의 효과가 좋아서 다행이에요, 가넷.”
가넷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제 이름을 아세요?”
“그럼요.”
시아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옆에 선 이를 한 명 한 명 바라보며 말했다.
“가넷, 리나, 다란, 마크, 다 알고 있어요. 다들 제가 어렸을 때부터 이 왕궁에서 일했던 분들이잖아요. 왕궁이 제국군에게 침략당한 이후에도 이곳을 지켜 주어서 늘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그 순간 시녀와 시종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사실 지금까지 시종과 시녀들은 시아나에게 일말의 애정도 없었다.
그들에게 시아나는 그저 의무적으로 모셔야 했던 대상일 뿐이었기에.
그래서 그들은 어린 시아나가 왕과 왕비에게 괴롭힘을 당했을 때도 그리 안타까워하지 않았고, 시아나가 왕국에 귀환했을 때도 크게 기뻐하지 않았다.
하지만…….
온몸이 타는 고통에 미친 듯이 비명을 지르는 그들을 시아나는 온 힘을 다해 치료해 주었다.
그들은 그것을 생생히 기억했다.
눈가가 빨개진 시녀와 시종들이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공주님 덕분에 큰 상처를 입지 않고 나을 수 있었습니다.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
눈을 크게 뜬 시아나를 향해 시녀와 시종들이 말을 이었다.
“이제 와 이런 말을 하는 것이 부끄럽습니다만 앞으로는 공주님을 진심을 다해 모시고 싶습니다. 부디 허락해 주십시오.”
시아나는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은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하지만 전…….”
시아나는 새 나라의 건국에 대해 공표한 후, 아실론드 왕국을 떠날 예정이었다.
그러나 시녀와 시종들은 다 알고 있다는 얼굴로 말했다.
“어디를 가시든 따라가겠습니다. 저희가 모시고 싶은 분은 아실론드 왕국의 왕족이 아니라 시아나 님이니까요.”
그 말에 시아나가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이내 환한 미소를 지었다.
상상도 못했던 귀한 선물을 받은 것처럼.
* * *
구름 한 점 없이 푸르른 하늘과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람 속에서, 역사 속에 길이 남을 날이 시작되었다.
겨우 시간을 맞추어 정돈한 왕궁 안의 광장에 많은 이들이 구름 떼처럼 몰려들었다.
사람들은 잔뜩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아직도 믿기지가 않아. 그 지옥 같던 나라가 끝나고 새 나라가 시작되는 것을 내 눈으로 볼 줄이야.”
“내 평생 가장 의미 깊은 날이 될 거야. 그래서 딸도 데리고 왔다고.”
남자의 어깨에 타고 있던 작은 여자아이가 앙, 하고 대답하며 아빠의 얼마 없는 머리카락을 움켜잡았다.
남자가 중얼거렸다.
“이게 다 시아나 공주님 덕분이야.”
사실 이전까지 시아나는 있는지도 모를 만큼 존재감이 없는 공주였다.
백성들 앞에 정식으로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었고, 제국군의 침략을 받았을 때는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기까지 했다.
그 후 백성들은 시아나를 잊었다.
그녀가 죽었든 살아 있든 달라질 것은 없으니까.
어차피 이 나라의 미래에는 절망뿐이었다.
하지만…….
시아나가 돌아왔다.
그리고 믿기지 않은 행보를 보여 주었다.
시아나는 제국군과 협상을 하여 그들을 이 땅에서 내보내는 데 성공했으며, 혁명군을 지지하고 귀족들을 설득하여 새 나라를 여는 데 큰 공헌을 했다.
물론 그녀의 업적과 별개로 여전히 눈살을 찌푸리는 이들도 많았다.
무능한 왕족에 대한 깊은 원망과 제국의 높은 이와 특별한 관계를 맺었다는 소문 때문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시아나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잠시 후, 나팔 소리와 함께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아나 공주님께서 납시옵니다!”
그 말에 떠들어 대던 사람들이 입을 다물고 광장 앞에 있는 단상 위를 바라보았다.
이내 시아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시아나는 하늘빛 드레스에 반짝이는 왕관을 쓰고 아실론드 왕가의 문양이 그려진 망토를 두르고 있었다.
그린 듯이 아름다운 공주님의 모습이었다.
사람들은 넋을 놓고 그 모습을 눈에 담았다.
순식간에 고요해진 공간에서 시아나가 입을 열었다.
“이 자리에 참석해 준 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오늘 이렇게 자리를 마련한 것은 중대한 발표를 하기 위해서입니다.”
시아나가 또렷한 눈동자로 군중들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발표에 앞서 먼저 아실론드 왕가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지금까지 아실론드 왕가는 백성의 안위를 조금도 살피지 않고 사치를 일삼았습니다. 그러다 결국 적군에게 나라를 침략당하는 비극을 초래했지요. 왕가의 마지막 남은 공주로서 여러분께 크나큰 부끄러움과 잘못을 느낍니다. 죄송합니다.”
시아나가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였다.
공주님의 사과라니.
충격적인 장면에 사람들은 놀란 얼굴로 수군거렸다.
한참 후 고개를 든 시아나가 말했다.
“하지만 이 죄는 단순히 사과 한마디로 끝낼 수 있는 일이 아니지요. 그래서 저는 살아남은 최후의 왕족으로서 마땅한 책임을 지고자 합니다.”
이후 놀라운 말이 이어졌다.
“저 시아나 아실론드 폰 실리테는 오늘부로 아실론드 왕국의 긴 역사를 끝내고, 새 나라의 건국을 지지하는 바입니다.”
모두가 예상했던 이야기였다.
그럼에도 막상 시아나의 입으로 그 말을 들으니 사람들은 이루 말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이 들었다.
개중에는 눈물을 흘리며 흐느끼는 사람도 있었다.
아무리 썩은 나라였어도 실낱같은 애정이 남아 있던 탓이었다.
그런 의미로 가장 슬퍼해야 할 사람은 시아나이건만, 그녀의 얼굴은 담담하기만 했다.
“새 나라에 모든 것을 맡기고 무책임하게 사라지겠다는 말은 아닙니다. 새 나라에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제 일개 조력자일 뿐, 새 나라를 이끄는 것은 여러분입니다.”
소수의 왕족과 귀족들이 움직였던 아실론드 왕국과 달리, 새 나라는 백성들이 뽑은 이들로 구성된 의회가 나라를 이끌 예정이었다.
시아나가 옆에 있던 시종에게 종이 한 장을 받으며 말했다.
“일주일 전, 각 지역에서 투표가 진행되었지요. 백성들의 지지를 받아 선출된 50명의 의원들을 발표하겠습니다.”
시아나가 뽑힌 이들의 이름을 한 명 한 명 나열하기 시작했다.
“요한 바르테, 진 나엘, 리나 펠라렛…….”
이름이 불린 사람들이 나와 단상 위에 섰다.
대부분 평민이었으나, 귀족도 몇 명 있었다.
썩어 빠진 귀족들 사이에서도 기적적으로 품위를 지켜 존경을 받았던 이들이었다.
그 속에는 혁명군의 리더 베라도 있었다.
이내 50명의 이름이 전부 불려졌다.
시아나가 그들을 바라보며 부드러운 얼굴로 말했다.
“앞으로 이들이 백성들을 대표하여 새로운 나라를 운영하게 될 겁니다.”
물론 의원들에게는 왕과 귀족이 가졌던 무한한 권력과 특혜는 주어지지 않았다. 그러기는커녕 보다 무거운 의무와 엄격한 잣대로 평가될 것이다.
그럼에도 단상에 선 이들의 눈은 하나같이 보석처럼 반짝였다.
아름답고 풍요로운 나라를 만들고자 하는 열정이었다.
그것을 본 시아나가 입꼬리를 올렸다.
‘이제 내가 할 일은 왕가의 마지막 공주가 되어 조용히 이들을 응원하는 거야.’
시아나는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동시에 의원들 사이에 서 있던 베라가 단상의 중앙으로 나왔다.
베라가 광장에 모인 이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백성들을 대표하는 의원으로 인사를 하기 전 공표할 것이 있습니다. 새로 시작하는 나라, 신 아실론드에는 왕이 없습니다. 그러나 나라의 대표직을 마냥 비워 둘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그래서 50명의 의원들이 의견을 나누어 한 명의 대표를 뽑았습니다. 뽑힌 이는 신 아실론드의 총리가 되어 대내외적인 활동을 하며 의회의 균형을 잡는 역할을 하게 될 것입니다.”
미리 언론을 통해 예고한 내용이었기에 시아나는 놀라지 않았다. 광장에 모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궁금한 것은 총리의 역할이 아니라 뽑힌 총리가 누구냐 하는 것이다.
베라가 입을 열었다.
“신 아실론드의 1대 총리는…….”
베라 펄슨.
시아나는 당연히 그 이름이 나올 거라 생각했다.
베라는 혁명군의 리더로서 대단한 인망을 가진 데다 새 나라를 건국하기 위해 가장 애를 쓴 인물이므로.
하지만 베라의 입에서 나온 이름은…….
“시아나 아실론드 폰 실리테, 입니다.”
“……?!”
시아나가 상상도 못했던 말을 들은 것처럼 눈을 부릅떴다.
한참 후에야 상황을 파악한 시아나가 당황한 얼굴로 소리쳤다.
“저는 전 왕국의 공주예요. 새 나라가 청산해야 할 과거의 상징이죠. 그런 제가 새 나라를 이끄는 대표가 되다니 말도 안 돼요.”
정색한 시아나와 달리 베라는 털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건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저희가 공주님을 총리로 뽑은 이유는 오로지 능력 때문이니까요.”
“……!”
“저희들은 대부분 이 작은 나라에만 있었기에 국외 정세 같은 건 전혀 모릅니다. 그와 달리 공주님께서는 국외 정세에 무척 밝으신 데다가, 실리를 따져 원하는 것을 얻으시는 수완까지 뛰어나시죠. 신 아실론드의 대표로 이만한 인재는 없습니다.”
입바른 아첨 따위가 아니었다.
조금의 피도 흘리지 않고 평화롭게 새 나라를 시작하는 이 자리야말로, 시아나의 능력을 보여 주는 것이었으니.
그러나 시아나의 굳어진 얼굴은 조금도 풀어지지 않았다.
시아나가 바로 앞에 있던 베라에게만 들릴 만큼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전 제국의 황태자 전하와 특별한 사이입니다.”
이 나라를 침범했던 제국의 황태자와의 긴밀한 관계는 결코 환영받지 못할 일이었다.
그러나 베라는 고개를 저었다.
“제국군이 멋대로 나라를 침략한 것은 사실입니다만 의외로 백성들의 반발심은 그리 심하지 않습니다.”
제국군은 주둔하는 동안 단 한 번도 왕국의 백성들에게 패악질을 부리거나 물건을 앗아 가지 않았다.
오히려 아실론드의 왕족이나 귀족들보다 훨씬 점잖았다.
덕분에 일부 사람들은 이대로 제국에 흡수되는 것이 낫지 않겠냐는 말을 하기도 할 정도였다.
베라가 눈썹을 찡그리며 말했다.
“순진한 생각이죠. 제국군이 그토록 얌전히 있었던 것은 그들이 호인이거나 이 나라가 예뻐서가 아니라, 황태자의 입김 때문이었는데 말이죠.”
베라가 말을 이었다.
“어쨌건 이런 상황이니 공주님이 황태자와 특별한 사이라는 사실이 알려진다 해도 사람들은 크게 신경 쓰지 않을 겁니다. 그러기는커녕 좋아하겠죠.”
무섭기로 소문난 피의 황태자가 우리 공주님에게 푹 빠졌다니, 이만한 경사가 어디 있겠느냐며.
실제로 시아나가 제국의 권력자와 특별한 사이라는 소문이 돌고 있음에도 백성들은 크게 반발하지 않았다.
그뿐인가.
“다른 나라도 이 땅을 쉽게 넘볼 수 없을 겁니다. 만만하다고 손댔다가 제국 황태자에게 짓밟힐까 두려울 테니까요. 여러모로 공주님과 황태자의 관계는 저희에게 도움이 됩니다.”
“…….”
그러나 시아나는 여전히 입을 꽉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시아나는 도저히 베라처럼 좋게 좋게 생각할 수가 없었다.
시아나에게는 왕족으로서 이 나라를 제대로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있었으니까.
시아나를 빤히 바라보던 베라가 말했다.
“……아니면 이번에도 우릴 버릴 셈인가요?”
“……!”
방금 전까지 기세등등했던 베라의 눈빛이 어느새 바뀌어 있었다.
마치 버림받을까 두려워하는 어린아이처럼.
그 순간 시아나는 숨이 멈추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사실 시아나는 아실론드 왕국에 오기 전, 한 가지 욕심을 품었다.
새 나라를 만들고, 그 나라의 왕이 되어 제국으로 돌아가자. 그래서 황후의 시련을 당당하게 통과하자고.
그러나 혁명군을 만나고 그 욕심을 버렸다.
지극히 개인적인 일로 그런 야망을 품었던 것이 너무 미안하고 부끄러워서.
하지만…….
시아나는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베라의 뒤에 있던 49명의 의원들, 그리고 반짝이는 눈으로 저를 쳐다보는 수많은 민중들.
그들은 열망하고 있었다.
그림자처럼 숨어 조용히 응원하는 망국의 공주가 아니라…… 강력하고, 온화하며, 현명한 지도자를.
‘……나는 그런 대단한 사람이 아니야.’
그때 광장에서 누군가 소리쳤다.
“시아나 공주님 만세!”
이내 파도가 밀려오듯 광장에 시아나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연이어 울렸다.
시아나는 울 것 같은 얼굴로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그런 시아나를 향해 베라가 눈빛으로 말했다.
‘저렇게 당신을 원하는데 정말 이대로 모른 척할 셈이야?’
“…….”
아니.
시아나는 이 나라의 사람들에게 그만치 매정할 수 없었다.
잠시 후, 시아나는 단상 앞으로 한 발짝 나갔다.
“저를 믿고 이런 귀한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시아나는 치맛자락을 들고 우아하게 고개를 숙였다.
“……앞으로 이 나라의 번영과 행복을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제가 가진 온 힘을 다하여.”
여리지만 단단한 힘이 어린 목소리였다.
그것에 화답하듯 사람들에게서 기쁨어린 함성 소리와 함께 우레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다.
* * *
시아나는 총리로 뽑힌 것을 기뻐할 새도 없이 왕국을 떠날 채비를 해야 했다.
한시 빨리 제국으로 돌아가야 했기 때문이다.
놀랍게도 츄츄와 그레이스는 이곳에 남기로 했다.
갈색으로 보기 좋게 그을린 팔뚝을 꿈틀거리며 츄츄가 말했다.
“일꾼들이 열심히 왕궁을 재건하고 있는데 나만 쏙 빠지는 게 영 그려. 일이 마무리될 때까지 도와야 마음이 편하겠구먼.”
그레이스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보탰다.
“게다가 시아나 네가 떠나면 쥐 죽은 듯 조용히 눈치를 살피고 있는 귀족 놈들이 언제 또 날뛸지 모르잖아. 적어도 내가 있으면 그러진 못하겠지.”
그레이스가 제국의 황녀라는 사실은 이제 소문이 다 퍼져 모르는 이가 없었다.
귀족들은 그레이스만 보면 고양이를 마주친 쥐처럼 벌벌 떨었다.
그레이스는 그것을 철저히 이용하여 귀족들의 콧대를 지하 깊은 곳까지 눌러 줄 참이었다.
두 사람의 말에 시아나가 웃었다.
“덕분에 저도 마음 편히 제국에 갈 수 있겠네요.”
두 사람이 빠졌지만 시아나 혼자 길을 떠나는 것은 아니었다.
가넷, 리나, 다란, 마크.
오랫동안 아실론드 왕궁에서 일했던 시녀와 시종이 동행을 자처했다.
“그간 제대로 모시지 못한 몫만큼 최선을 다해 시아나 공주님을 모시고 싶습니다.”
제국으로 돌아가면 시아나는 일개 시녀가 아니게 된다. 신 아실론드에서 온 귀빈이었으며, 황태자의 약혼녀가 될 터였다.
저를 보필해 줄 사람들이 필요했다.
그래서 시아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사람과 함께 밖으로 나온 시아나는 눈을 크게 떴다.
마차 앞에 궁에서 일하는 시종과 시녀들, 그리고 베라와 요한이 서 있었기 때문이다.
시아나가 난처하다는 얼굴로 눈썹을 내렸다.
“개인적인 용무를 보기 위해 다녀오는 것이니 배웅은 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잖아요.”
베라가 뻔뻔한 얼굴로 말했다.
“무려 제국의 황태자비가 되러 가는 건데, 그게 어떻게 개인적인 일입니까. 나라의 흥망성쇠가 달린 일이죠.”
베라의 옆에 있던 요한이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이것은 지극히 대외적인 활동이라고 봐야 합니다. 총리님의 행보로 인해 신 아실론드의 국제적인 위치가 달라질 테니까요. 그러니 잘하고 오십시오.”
두 사람의 말대로 시아나는 아실론드 왕국의 마지막 공주이자, 신 아실론드를 대표하는 총리였다.
시아나의 행보 하나하나가 이 작은 나라에 큰 의미를 가졌다.
18세의 소녀에게는 너무 무거운 짐이었다.
그럼에도 시아나는 웃으며 씩씩하게 대답했다.
“네. 그 사실을 잊지 않고 열심히 해서 이 나라를 지킬 수 있는 힘을 얻어 돌아오겠습니다!”
그 순간 베라가 크흡, 하고 괴상한 소리를 내며 입을 막았다.
그 모습을 본 요한이 눈썹을 찡그렸다.
“설마 지금 우는 거야?”
“당연하지. 작고 귀여운 분이 저렇게 의젓한 말을 하는데 어떻게 안 울 수 있어?! 사람이라면 절대 그럴 수 없는 거야.”
“……너도 참 중증이다.”
요한은 혀를 쯧쯧거렸다.
그런 두 사람을 바라보며 시아나가 쿡쿡 웃음을 터뜨렸다.
본의 아니게 총리직을 맡자마자 자리를 비우게 되었지만, 크게 걱정되지는 않았다.
자신이 없는 동안 두 사람을 비롯한 의원들이 풍요롭고 행복한 나라를 만들기 위해 노력할 테니까.
“그럼 다녀올게요.”
시아나가 마차에 올라탔다.
마차가 출발하기 직전 모여 있던 사람들이 고개를 숙였다.
“건강히 잘 다녀오십시오.”
저를 배웅하는 사람들을 보며 시아나는 새삼 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처음 아실론드 왕궁에 왔을 때는 아무도 나를 반겨 주지 않았는데…….’
그러기는커녕 하나같이 시아나를 보면 경멸과 비난 어린 눈을 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그 사실이 시아나를 더없이 기쁘게 만들었다.
사람들의 응원 속에 시아나가 탄 마차가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수도를 지나, 국경을 지나, 제국을 향해.
어느덧 시아나의 눈빛이 바뀌어 있었다.
한껏 감동에 취해 있던 공주님의 눈빛에서 승리를 거머쥔 장군의 눈빛으로.
‘냉정하게 평가해도 내가 일군 일은 대단한 업적이야. 무리 없이 황후의 시련을 통과할 수 있을 만큼.’
그 순간 엄청난 희열이 시아나를 가득 채웠다.
한시라도 빨리 라시드의 곁으로 가, 그의 손을 붙잡고 소리치고 싶었다.
누가 뭐래도 이제 내가 당신의 약혼녀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