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 아실론드의 공주 (1) (18/27)

9. 아실론드의 공주 (1)

솔은 아주 오래전부터 라시드를 모셨다.

라시드는 모시기 까다로운 주군이었으나 장점도 많았다.

일단 라시드는 얼음처럼 서린 외모와 달리 아랫사람에게 험한 말을 하지 않았다.

‘대신 큰 잘못을 하면 변명을 늘어놓기도 전에 목을 베어 버리셨지만.’

이런저런 귀찮은 일을 시키는 경우도 거의 없었다.

‘딱히 부하를 위해서라기보다는 남의 손을 타는 것을 끔찍하게 싫어하셔서 그런 거지만.’

무엇보다 보상만큼은 과하다 싶을 만큼 넉넉하게 챙겨 주었다.

‘사실 그게 전하의 가장 좋은 장점이지. 얼마 전에도 천만 골드를 상여금으로 챙겨 주셨잖아.’

그것도 솔만이 아니라 솔이 지휘하는 기사단 전체에게.

하지만…… 하지만 그럼에도…….

‘요즘은 정말 힘들다.’

—라고 솔은 생각했다.

죽상이 된 솔의 눈앞에 앉아 있던 라시드의 얼굴은 반짝거리다 못해 번쩍거리고 있었다.

그런 라시드는 손수건 한 장을 손에 들고 있었다.

라시드가 황홀한 얼굴로 손수건을 바라보며 말했다.

“솔, 정말이지 완벽한 손수건이지 않느냐. 보들거리는 질감, 섬세하게 수놓아진 문양, 은은하게 배어 있는 라벤더 향까지. 이보다 훌륭한 손수건은 본 적이 없다.”

저는 본 적 있는데요. 엄청 많아요.

—라고 말했다가는 라시드가 싸늘하게 식은 눈으로 저를 노려볼 것을 알았기에 솔은 썩은 미소를 지었다.

“그러게 말입니다. 정말이지 시아나 님의 솜씨가 훌륭합니다.”

어쩔 수 없이 맞장구를 쳤을 뿐인데도 라시드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렇지?”

“…….”

“그렇게 작은 손으로 어떻게 이렇게 엄청난 것을 만들 수 있는 걸까. 그녀는 사실 마법사가 아닐까?”

네, 그런 것 같습니다.

살얼음처럼 냉랭하시던 전하를 이렇게 팔푼이로 바꿔 버리다니 말입니다.

정말이지 시아나 님은 대단해!

—라고 말하고 싶은 것을 참으며 솔이 입술을 꾹 깨물었다.

‘아무리 봐도 두 분이 사귀는 것 같지?’

사실 두 사람의 관계가 이렇게까지 깊어진 것은 크게 놀랄 일은 아니었다.

이전부터 전조가 보였으니까.

하지만 솔은 쉽사리 이 상황을 납득하기 힘들었다.

왜냐하면…….

‘전하는 몰라도 시아나 님은 둘만 좋다고 괜찮을 문제가 아니라는 걸 알 텐데. 무슨 생각으로 전하를 받아들이신 거지?’

혹시 사랑의 열병에 빠져 시아나 또한 영특함을 잊어버린 것일까.

‘만약 그런 거라면 큰일인데.’

두 사람의 관계는 평범하게 유지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적어도 두 사람 중 하나는 제정신을 꽉 잡고 있어야 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솔의 걱정은 기우였다.

* * *

정원에서 차를 마시던 라시드를 향해 시아나가 물었다.

“전하, 베로니카 공녀의 일은 어떻게 되었나요?”

라시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락타의 판결이 난 후, 여론은 급속도로 라시드 쪽으로 옮겨졌다. 베로니카는 도망치듯 남부의 영지로 돌아가 버렸다.

물론 라시드는 그대로 그녀의 일을 덮을 생각이 없었다.

‘그따위 더러운 거짓말로 나를 흔든 자를 그냥 둘 수는 없지.’

당한 것이 있다면 열 배로 갚아라. 그래야만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는다.

오랜 전쟁터를 누비며 갖게 된 라시드의 지론이었다.

라시드는 베로니카가 임신을 하기 전의 행적에 대해 끈질기게 조사했다.

배 속 아기의 아빠를 찾아내기 위해서였다.

물론 쉽지 않았다.

베로니카가 그간의 흔적을 철저하게 지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집요한 조사 끝에 결국은 꼬리를 하나 잡았다.

베로니카의 최측근 하녀를 포섭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정확히는 당근인 척하고 꼬여낸 후 덫에 가두어 협박을 한 것이지만 그것까지 자세히 말할 필요는 없겠지.’

아무리 연애에 흠뻑 빠져 제정신이 아닌 라시드에게도 그 정도 눈치는 있었다.

라시드가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

“앙겔루스 공작가의 마차를 모는 마부와 베로니카 공녀가 하룻밤을 보낸 적이 있다더군.”

시아나가 헉, 하고 입을 막았다.

마부라니.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존재였다.

두 사람의 옆에서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솔이 말을 덧붙였다.

“말처럼 덩치가 크고 힘이 좋아서 여인들 사이에서 인기가 제법 있는 사내라더군요. 보름달이 떴던 밤, 베로니카 공녀님은 전하께 거부당한 충격에 마차 안에서 흐느꼈고, 공녀님을 위로하던 마부와 눈이 맞아 그대로…….”

“그만.”

라시드가 단번에 말을 잘랐다.

조금도 알고 싶지도 않은 더러운 이야기로 시아나의 귀를 더럽히고 싶지 않았다.

솔은 ‘넵’ 하고 후다닥 입을 닫았다.

라시드가 말을 이었다.

“어쨌건 유력한 용의자가 나왔으니 그를 확보하고 몇 가지 증거만 더 찾아내면 베로니카 공녀는 이제 끝이야.”

공작가의 딸이 평민, 그것도 가문에서 일하는 마부와 하룻밤을 보내어 아기를 가졌다.

거기에서 끝나지 않고 베로니카는 그 아기를 황태자와 엮어 고약하기 짝이 없는 거짓말까지 했다.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죄였다.

이 일을 터뜨리면 앙겔루스 공작가의 이름과 베로니카의 인생은 나락으로 떨어질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조용히 라시드의 말을 듣던 시아나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전하, 그 사실을 공개하지 않으면 어떨까요?”

“……!”

시아나의 말에 라시드와 솔이 눈을 커다랗게 떴다.

라시드가 눈썹을 찡그리며 물었다.

“공녀를 동정하는 것이냐?”

그러나 의외로 시아나는 정색하며 고개를 저었다.

“설마요. 저는 내 남자에게 그렇게 악랄한 짓을 한 사람을 안쓰러워할 만큼 착하지 않아요.”

내 남자.

라시드는 그 말에 볼이 발그레해졌다.

솔은 똥 씹은 얼굴을 했지만.

전혀 다른 표정을 한 두 남자를 향해 시아나가 말을 이었다.

“저도 처음에는 베로니카 공녀의 상대를 공표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보복이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분노가 사그라진 시아나는 생각을 바꾸었다.

“하지만 그러면 앙겔루스 공작은 가문과 딸을 망친 원망으로 전하를 적대하겠죠.”

“상관없어.”

진심이었다.

라시드는 애매하게 저를 긁는 이보다, 완벽하게 이를 드러낸 적을 상대하는 편이 훨씬 편했으니까.

머리를 굴려 교묘하게 괴롭히는 것은 질색이었지만, 다시는 일어설 수 없게 박살 내고 짓밟는 것은 자신 있었다.

그러나 시아나의 생각은 달랐다.

“하지만 아무리 전하라 해도 제국 최고의 공작가를 적으로 두면 곤란한 일이 많이 생길 거예요. 그보다는 그를 전하의 편으로 만드는 것이 훨씬 이득이죠.”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뜬 라시드와 솔을 바라보며 시아나가 말을 이었다.

“전하의 말대로 베로니카 공녀의 배 속에 있는 아기가 사실은 마부의 핏줄이고, 그런 아기를 전하의 핏줄이라며 거짓말을 한 것은 공작가가 흔들릴 만큼 큰 사건이에요. 하지만 반대로 그 일을 터뜨리지 않고 가지고 있으면 앙겔루스 공작을 휘두를 수 있는 약점이 될 수도 있죠.”

그제야 라시드는 시아나의 생각을 알아챘다.

시아나는 이번 일을 기회로 앙겔루스 공작가에 목줄을 채우고 싶은 것이다.

물론 몇 가지 노력이 필요하긴 했다.

시아나가 눈을 내리깔며 말했다.

“무작정 협박을 하면 먹히지 않을 테니 당근과 채찍을 함께 주는 편이 좋겠지요.”

라시드가 베로니카 공녀가 마부와 하룻밤을 보냈다는 사실을 숨겨 주는 데서 끝내지 않고, 베로니카 공녀를 비호하면 어떻게 될까?

베로니카 공녀가 황태자에게 한 악랄한 거짓말은 갑작스럽게 배 속에 들어선 아기를 지키기 위해서였다고.

황태자가 아빠라고 하면 아기를 무사히 낳을 수 있을 것 같아서.

라시드가 아이를 위해 거짓말할 수밖에 없었던 공녀를 이해하며 그녀의 죄 또한 용서한다고 한다면?

“다른 이도 아닌 피해자였던 전하께서 그렇게 말한다면, 베로니카 공녀에 대한 비난이 순식간에 사라지겠죠. 그럼 공녀와 앙겔루스 공작가는 전하께 크나큰 빚을 지게 되요.”

라시드가 가문의 명예를 땅에 떨어뜨릴 만한 수단을 가졌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가문의 격을 지킬 수 있도록 도움을 준다면?

그렇게 되면 앙겔루스 공작의 선택지는 자연스럽게 하나뿐일 터였다.

황태자의 편이 되는 것.

감사함 때문이든, 두려움 때문이든.

“이번 일로 평판이 떨어지긴 했지만 앙겔루스 공작가는 제국 제일의 귀족 가문이죠. 같은 편이 된다면 앞으로 전하께 큰 도움이 될 거예요.”

적어도 적이 되었을 때보다는 비교할 수 없을 만치 많은 것을 얻을 것이다.

긴 말을 쏟아 낸 시아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라시드와 솔이 저를 묘한 시선으로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 하고 작은 소리를 낸 시아나가 손을 내저었다.

“물론 제 생각일 뿐이에요. 전하께서는 베로니카 공녀 때문에 끔찍한 거짓말에 휘둘리셨어요. 어떤 식으로든 얽히는 것을 원치 않는다면 제 말은 무시하셔도 돼요. 전하께서 하고 싶은 대로 하세요.”

“…….”

대답 없는 라시드를 향해 시아나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혹시 제가 섣부른 말을 해서 기분이 상하셨나요?”

“……그게 아니라.”

말을 끊은 라시드가 중얼거렸다.

“그동안 아리스가 이런 기분이었을까 싶어서.”

“예?”

고개를 갸웃거리는 시아나를 향해 라시드가 빙그르 웃었다.

“끝내준다.”

입을 벌리고 있던 솔도 고개를 끄덕였다.

“동감입니다. 저 지금 팔뚝에 소름이 돋았다니까요.”

진심이었다.

‘적을 발견하면 달려가 목을 벤다, 다시는 꿈틀대지 못할 때까지.’

라는 다소 무식한 싸움 방법이 몸에 익은 두 남자에게 시아나의 생각은 영특하기 짝이 없었다.

과한 칭찬에 얼굴이 살짝 붉어진 시아나가 말했다.

“그럼 제 말대로 하실 생각인가요?”

“그래.”

라시드는 일말의 여지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하게 말하면 라시드는 앙겔루스 공작가의 힘 따위 탐나지 않았다.

거슬리는 이를 그만치 정성을 들여 상대해야 한다니 생각만 해도 귀찮았다.

‘하지만 시아나가 그걸 원하니까.’

그녀가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해 주고 싶었다.

한 가문과 친구가 되는 것이든.

한 가문을 박살 내는 것이든.

* * *

“마부가 아직까지 살아 있다는 건 저희에게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기회예요. 그를 데리고 있으면 전하께서는 앙겔루스 공작가를 휘두를 더없이 훌륭한 체스 말을 가지게 되는 셈이니까요.”

시아나의 말에 솔이 씩씩하게 대답했다.

“당장 마부를 납치, 아니 신병을 확보하여 보호하도록 하겠습니다.”

“앙겔루스 공작에게 이 사실이 알려지면 당장 목이 날아갈 것이란 말을 전하면 알아서 솔 님의 품으로 날아들 거예요.”

“예입!”

솔은 사냥감을 발견한 곰처럼 상기된 얼굴로 방을 나섰다.

쾅, 하고 문이 닫힌 순간 라시드가 시아나를 꼭 껴안았다.

더는 참지 못하겠다는 듯이.

둘만 있으면 라시드는 이런 식으로 그의 품속에 숨기듯 시아나를 안곤 했다.

시아나가 고개를 올려 라시드를 바라보며 눈썹을 내렸다.

“미안해요.”

“뭐가?”

“전하께 너무 가혹한 방법을 생각했잖아요.”

시아나는 제가 말한 것이 라시드에게 상처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왜냐면 시아나는 단순히 그를 모시는 시녀가 아니라, 그의 연인이니까.

“바꿔 말해서 제가 다른 남자에게 희롱을 당했는데…….”

그 순간 라시드의 눈빛이 사나워졌지만 시아나는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전하께서 그것을 이용하여 이것저것 이익을 따지면 기분이 엄청 나쁠 것 같거든요.”

딱히 그렇지는 않았다.

라시드는 시아나만큼 섬세하지 않으니까.

그럼에도 시아나가 그런 생각을 한 것이 귀여워 라시드는 살포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그걸 알면서 왜 내게 이런 말을 한 거야?”

“그건…….”

시아나는 복잡한 얼굴로 눈을 내리깔았다.

시아나가 떠올린 것은 락타의 생각을 들었던 날 본 황후의 얼굴이었다.

사람들이 모두 나가고 고요해진 신전. 가림막이 걷히고 황후가 모습을 드러냈다.

황후는 나란히 서 있던 라시드와 시아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한마디를 내뱉었다.

[나설 데와 그러면 안 되는 곳을 아는 영특한 아이인 줄 알았는데…… 실망이 크구나.]

시아나를 향한 말에는 선연한 적의가 드러나 있었다.

황후는 그 말을 끝으로 몸을 돌렸다.

오명을 벗게 된 아들을 향한 축하의 인사는 한마디도 없었다.

그저 제 생각대로 상황이 풀리지 않은 것에 대한 분노만이 느껴졌다.

시아나는 그 모습에 확신했다.

‘황후 폐하께서는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상냥한 분이 아니야.’

그런 분이라면 이렇게까지 아들을 내몰 수 없다.

다른 이에겐 모르겠지만 적어도 라시드에게는 너무나 가혹한 분임이 분명했다.

시아나의 마음속에서 불분명했던 황후의 색이 칠해졌다.

흑색.

황후는 언제 라시드의 목을 물어뜯을지 모르는 적군이다.

그에 대한 대비가 필요했다.

시아나는 제 손가락에 하나하나 깍지를 끼며 꾸물거리는 라시드를 바라보며 물었다.

“현재 정무는 황제 폐하께서 보고 계신다고 했죠?”

“그래.”

라시드가 황제 대신 보던 업무는 다시 주인에게 돌아간 상태였다.

“황궁 내부를 관리하시는 것은 황후 폐하시고요.”

이번에도 라시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와 황후의 권력은 막강했다.

물론 라시드에게도 그에 못지않은 힘이 있었다.

바로 강력한 군대였다.

‘전하께서는 황태자의 자리를 거저 얻은 것이 아니야. 5년간 전쟁터를 누빈 덕분에 충성스러운 기사단과 병사를 얻었지.’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불안했다.

권력이란 무력으로만 쟁취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전하께서는 황태자라는 대단한 직위를 가졌지만, 그에 반해 정치적 기반이 너무 약해요.”

라시드는 오랜 시간 황궁을 떠나 전쟁터에서만 살았고, 그렇기에 드높은 명성과 달리 귀족들과의 관계가 긴밀하지 못했다.

귀족들은 라시드를 어려워하거나 두려워했다.

물론 라시드를 지지하는 이들도 많았지만, 그것은 제국 최고의 권력자인 황제와 황후와 한 배를 탄 황태자이기에 따르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만약 황제 폐하나 황후 폐하께서 전하와 선을 긋는 일이 생긴다면 어떻게 될까?’

많은 확률로 그들은 전하에게서 돌아서겠지.

“그렇기에 앙겔루스 공작의 힘을 꼭 가져야 해요.”

시아나와 깍지를 낀 손을 흔들며 라시드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황제가 되기 위해서?”

그러나 시아나는 무슨 말이냐는 듯 눈썹을 올렸다.

“아니요. 당연히 사람들 앞에서 우리 둘이 당당하게 서기 위해서죠.”

“…….”

그 순간 라시드는 숨을 멈췄다.

시아나는 그것을 눈치채지 못한 채 라시드와 깍지 낀 손가락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저는 전하와 교제하는 것을 숨기지 않을 거예요. 하지만 그렇다고 사람들에게 이런저런 비난과 멸시를 당하고 싶은 건 아니에요. 제대로 인정받고 싶어요.”

“…….”

“그러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해요.”

힘이 생기면 절대 무시당하지 않는다.

이전에는 그것을 알면서도 힘을 가지기 위해 필살의 노력을 하지 않았다. 혹은 노력을 하려다가도 금세 포기해 버렸다.

그 길이 너무 고독하고 힘들어서.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시아나가 고개를 들어 라시드와 눈을 마주쳤다.

동그란 에메랄드 눈동자에 제가 비치는 순간 라시드는 정신이 아찔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제 품에서 저와 함께하고 싶다는 시아나의 모습이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더 꽉 안고 싶어.’

하지만 그랬다가 뭉그러지면 어떡하지.

‘그래도 안고 싶은데.’

안 된다니까.

어찌할 바를 몰라 혼란스러운 남자를 향해 시아나가 더없이 다정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러니 하는 말인데요, 전하.”

“……응.”

"전하, 우리 --할까요?"

이어진 시아나의 말에 라시드가 두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이내 환한 미소를 지었다.

세상에서 가장 황홀한 말을 들은 것 처럼.

* * *

황후는 요즘 기분이 좋지 않았다.

단순히 베로니카 공녀를 라시드의 짝으로 이어 주는 것에 실패한 것 때문이 아니었다.

감히 황태자를 더러운 추문에 끌어들인 베로니카 공녀를 크게 벌해야 한다는 귀족들과, 황후가 락타를 끌어들여 일이 더 커졌으니 이를 어쩌느냐고 원망하는 앙겔루스 공작에게 시달렸기 때문만도 아니었다.

베로니카의 뒤를 잇는 황태자의 새로운 스캔들 때문이었다.

“황태자 전하께서 한 시녀와 특별한 사이라지요. 황궁과 사교계에 소문이 자자합니다.”

노래하듯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한 여인은 3황비 라일라였다.

그 순간 그녀와 함께 긴 테이블에 앉아 있던 3명의 황비가 표정을 굳혔다.

그러나 라일라는 그것을 신경 쓰지 않고 사근거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황태자 전하께서 오랜 시간 전쟁터를 누비신 덕에 외로움을 타신 모양입니다. 그러니 가까이에 있는 시녀에게 마음이 혹하셨겠죠. 저는 전하를 이해한답니다.”

황후의 인자한 얼굴이 살짝 굳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 이 자리에서 굳이 저 말을 꺼낸 의도가 명백했기 때문이다.

황후를 들쑤시고 싶은 것이다.

황후는 라일라 황비의 말에 휘둘리는 대신 부드럽게 웃었다.

“그리 말해 주니 고맙군.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 혈기왕성한 나이에 가까이에서 살뜰히 보살펴 주는 시녀에게 마음이 갈 수 있지. 물론 잠시일 뿐이야. 금세 마음을 정리할걸세.”

그러나 라일라 황비는 눈썹을 내렸다.

“꼭 그래야 할 텐데요.”

“…….”

“전하의 총명함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나 조금 걱정이 되긴 합니다. 전하께서 워낙에 그 시녀에게 흠뻑 빠져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말입니다.”

라일라의 말대로였다.

락타의 말을 듣던 날,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낸 동그란 얼굴의 자그마한 시녀.

사람들은 강렬한 궁금증을 가졌다.

도대체 라시드와 저 시녀는 어떤 사이일까?

궁금증은 이내 풀렸다.

이후, 목격담이 무성했기 때문이다.

“황태자 전하께서 그 시녀와 함께 황궁의 정원을 산책하는 것을 본 이가 여럿입니다. 시녀를 보는 전하의 눈빛이 그토록 다정하고 따스했다고요.”

평소에는 더없이 차가운 라시드였기에 그 간극은 엄청난 충격일 수밖에 없었다.

그뿐인가.

“황태자궁에서도 말이 나왔습니다. 전하께서 시녀를 온종일 방 안에 두고 물고 빤다고요. 어머 실례, 망측한 말을 해 버렸네요.”

라일라 황비가 ‘헙’ 하고 입을 막았지만 이미 늦어도 한참 늦은 후였다.

황후의 얼굴이 싸늘했다.

나머지 세 황비의 얼굴도 아까보다 더 굳어 있었고.

숨 막히는 분위기 속에 라일라 황비가 눈썹을 내렸다.

“송구합니다, 황후 폐하. 제가 경망스럽게 너무 많은 말을 늘어놓았습니다.”

물론 말과는 달리 라일라 황비의 얼굴엔 미안함이라고는 조금도 없었다.

오히려 황후를 약 올리려는 듯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 있었다.

그것을 아는 황후는 속으로 이를 악물었다.

‘괘씸한 여자 같으니라고.’

3황비 라일라는 애초부터 황후에게 오냐오냐 순응하던 이가 아니었다.

그녀는 북부를 호령하는 켈트락 후작가 출신이었으며, 그녀의 아들인 3황자 율리시스는 정치와 행정에 참여하여 제법 영특한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저 정도로 간을 배밖에 내놓은 행동을 하진 않았는데…… 내가 꽤 우습게 보이나 보구나.’

많은 이들이 황후를 존경하면서 한편으로 두려워했던 것은 라시드 때문이었다.

피의 황태자라 불리는 냉혹한 남자가 절대적으로 따르는 어머니였기에.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라시드는 일개 시녀에게 흠뻑 빠져 있었다.

당연히 황후가 그런 것을 바랄 리가 없는데도.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사람들은 기민하게 알아챘다.

두 사람 사이에 균열이 일어났다.

물론 황후는 사람들이 그렇게 제멋대로 여기게 둘 생각이 없었다.

황후가 미소 띤 얼굴로 네 명의 황비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대들이 무엇을 걱정하는지 알고 있어. 장차 황제가 될 황태자가 시녀와 노닥이는 것이 걱정되겠지. 아무리 잠시라도 말일세.”

누구 마음대로 황제야?!

—라고 3황비 라일라는 속으로 소리쳤다.

그런 라일라 황비를 지그시 바라보며 황후가 말을 이었다.

“그런 의미로 오랜만에 황궁에서 연회를 할까 하네.”

갑작스러운 말에 라일라 황비가 물었다.

“연회요?”

“그래. 라일라 황비가 말한 것처럼 라시드가 한낱 시녀에게 빠진 이유는 너무 오랜 기간 전쟁터에서 살았기 때문이야. 나라를 부강하기 만들기 위해 한 선택이었지만 그 때문에 여자와 너무 인연이 없었지. 미모와 우아함을 갖춘 귀족 여인들을 보면 그 애도 생각이 바뀔 거야.”

지금까지 조용히 있던 1황비 요한나가 입을 열었다.

“연회에서 황태자비 후보를 찾으실 생각이십니까?”

“그렇게만 되면 바랄 게 없지.”

온화하게 대답한 황후가 말을 이었다.

“그러니 다들 협력해 주면 좋겠어. 그대들이 아는 아름다운 숙녀들에게 초대장을 보내 주게.”

네 명의 황비는 눈을 크게 떴다

며느릿감을 추천해 달라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1황비 요한나는 생각했다.

‘우리에게 저런 부탁을 하다니……. 황후 폐하께서 황태자 전하의 일로 무척 초조하긴 한 모양이구나.’

그녀의 옆에 있던 2황비 베아트리체는 가라앉은 눈빛으로 생각했다.

‘좋은 아가씨를 추천하여 전하와 연결된다면, 황후 폐하와 황태자 전하께 호의를 얻을 수 있는 기회야.’

3황비 라일라는 어이없다는 얼굴로 입꼬리를 실룩였다.

‘흥, 적이 며느리감을 구하는 데 협조할 리 없잖아. 제국에서 소문난 추녀에 악독한 귀족 여인들을 모아 초대장을 보여 주지. 황태자 전하께서 여자에게 아주 학을 떼 버리게 말이야.’

그리고 테이블의 가장 끝자락에 앉은 4황비 안젤리나는 손가락을 꼬물거리며 찻잔을 바라보고 있었다.

심란한 얼굴이었다.

* * *

황궁이 분주해졌다.

한 달 후, 황후의 지휘 아래 열리는 연회 때문이다.

정신없는 와중에도 시녀들은 모여 수군거렸다.

“이번 연회는 평범한 연회가 아니래. 황후 폐하께서 이번에야말로 황태자 전하께 제대로 된 짝을 만들어 주기 위해 만든 자리래.”

“시녀에게 흠뻑 빠진 전하를 정신 차리게 하기 위해서 말이야.”

황궁에 있는 이들 중에 ‘라시드의 연인’에 대한 이야기를 모르는 자가 없었다.

시녀들의 반응은 제각각이었다.

“황후 폐하께서는 정말이지 너무 인자하셔. 일개 시녀가 전하와 붙어먹는 것을 왜 그냥 두고 보시는 거지? 내가 황후 폐하였으면 당장 끌어내서 황궁 밖으로 쫓아냈어.”

“전하께서 난리를 치실까 봐 그러시는 거겠지. 황후 폐하께서 워낙 전하를 아끼시잖아.”

“에휴,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말세다, 말세.”

옆에서 열심히 이불을 널던 시녀가 말했다.

“다들 왜 그리 야박하니. 난 전하께서 시녀와 특별한 사이라니 좋던데?”

“뭐?!”

“들어 보니 전하께서 하룻밤 장난감 취급하는 것도 아니고 시녀를 무척 애지중지하신대. 황태자 전하와 시녀의 사랑이라니 로맨틱하지 않아?”

“나도 동감. 같은 시녀라 그런지 꼭 내 일처럼 설렌다니까.”

옆에 있던 시녀가 히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들의 모습에 방금 전 한숨을 푹푹 쉬었던 시녀들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이 철없는 것들아!”

바로 반박이 들어왔다.

“우리가 철없는 거면 너희는 옹색하기 짝이 없는 애들이야. 다 큰 남자 여자 둘이 좋아서 꽁냥거리는 게 뭐 그리 잘못이라고 욕을 하니? 아랫사람과 엮이면 큰일 나는 줄 아는 윗분들이면 몰라도 우리까지 그럴 필요는 없잖아.”

“뭐얏?!”

미주알고주알 시녀들 사이에서 말싸움이 오갔다.

이런 분위기였으니 시아나라고 편할 리 없었다.

시아나가 모습을 드러낸 순간, 모여 있던 시녀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입을 꾹 다물었다.

숨 막히는 정적 속에 시아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우와. 그저 지나가는 것뿐인데 시선들이 엄청나네.’

시녀들은 시아나를 힐끗힐끗 쳐다보았다. 그 시선에는 다양한 감정이 얽혀 있었다.

황태자와 스캔들이 난 시녀를 향한 호기심.

권력자의 사랑을 받게 된 시녀를 향한 질투와 부러움.

그리고…….

‘도대체 저렇게 밍밍한 얼굴로 어떻게 황태자 전하의 마음을 얻은 거지?!’

‘잘 봐 줘야 실력은 그럭저럭 좋지만 가난한 할머니가 없는 살림에 만든 빵 쪼가리처럼 생겼잖아. 모양은 동그라니 예쁘지만 앙꼬 하나 없는 시골 빵 말이야.’

의아함.

이것만큼은 시녀들의 생각이 똑같았다.

이런 분위기였기 때문에 시아나는 황태자궁 밖으로 외출을 거의 하지 않았다.

괜히 이곳저곳 얼쩡거리다가 황궁의 분위기를 흐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시아나가 오랜만에 황태자궁을 나와 향한 곳은 4황비 안젤리나의 궁이었다.

시아나를 만나고 싶다는 안젤리나의 서신을 받고 찾아온 것이다.

시녀의 안내를 받아 궁에 들어서며 시아나는 마주 잡은 두 손에 힘을 쥐었다.

‘전하와 스캔들이 난 후에 황비마마를 뵙는 것은 처음이지?’

긴장이 되었다.

왜냐하면 현재 황족들 사이에서 시아나에 대한 분노가 엄청나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으니까.

안젤리나라고 다를 바가 없었다.

‘워낙 상냥한 분이니 냅다 따귀를 때리거나 화를 내진 않을 테지만…….’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시아나에게 지금이라도 라시드와 헤어지라고 채근을 할지도 모른다.

만약 그런 말을 한다면 시아나의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죄송합니다, 마마.]

눈썹을 일그러뜨리며 실망하는 안젤리나의 얼굴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어.’

마음을 다잡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런 시아나를 향해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아나.”

“…….”

오랜만에 듣는, 봄바람처럼 여린 목소리였다.

시아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시아나는 눈을 크게 떴다.

저를 바라보는 안젤리나의 얼굴 때문이다.

고운 얼굴에 어려 있는 감정은 시아나를 괘씸해하는 것도, 한탄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순수한 걱정뿐이었다.

안젤리나가 말했다.

“괜찮니?”

“…….”

“황족이나 시녀들 중에 괴롭히는 사람은 없어?”

“…….”

대답하지 못하는 시아나의 볼을 쓸어 만지며 안젤리나가 말을 이었다.

“다행히 얼굴이 많이 상해 보이진 않는구나. 그래도 마음고생이 심하지? 갑작스럽게 큰일을 겪게 되어 얼마나 힘이 드니.”

아니요, 하나도 힘들지 않아요.

저에 대한 소문이 난 후부터 전하께서는 저를 한시도 떨어트려 놓지 않고 품에 안고 지켜 주는걸요.

—라고 생각했다.

방금 전까지는.

……하지만 아무리 라시드라도 시아나를 한 치의 틈도 없이 완벽하게 보호할 수는 없었다.

황태자궁의 시녀와 시종은 이전보다 훨씬 깍듯했으나, 개중에는 시아나에 대한 환멸을 숨기지 못하는 이가 있었다.

가끔 황태자궁 밖으로 나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지나치는 사람들 중 시아나를 향해 대놓고 뭐라 하는 이는 없었지만, 시아나를 힐끗거리며 저희들끼리 쉴 새 없이 수군거렸다.

그럴 때면 시아나는 가끔 숨이 막혔다.

이 드넓은 황궁에 제 편은 라시드와 그의 호위 기사 솔뿐이라는 생각에.

예상했던 일임에도 앞으로의 가야 할 길이 새삼 버겁게 느껴져서.

“어머.”

안젤리나가 당황했다.

시아나의 동그란 눈에 눈물이 어렸기 때문이다.

“역시 많이 힘들었구나. 어쩜 좋아.”

안젤리나가 발을 동동 구르더니 시아나를 꼭 안았다.

그러고는 어떻게든 시아나를 위로해 주려는 듯 이런저런 말들을 내뱉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하루라도 빨리 너를 만날걸. 너를 어찌 대할지 고민하다 보니 시간이 지나 버렸어.”

안젤리나의 말에는 미안함이 한가득 묻어 있었다.

‘그런 말 마세요. 이 눈물은 마음고생을 해서 난 게 아니라 황비마마의 마음에 감동을 받아 나는 것뿐이라고요.’

—라고 시아나가 대답하려는 순간이었다.

방문이 달칵 열리더니 듬직한 두 명의 여인과 가녀린 소년 한 명이 방에 들어섰다.

그레이스 황녀와 츄츄, 레이시스였다.

안젤리나의 품에 안겨 훌쩍이는 시아나를 보고 세 사람은 헉 하고 눈을 크게 떴다.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그레이스였다.

“왜 울어? 기어코 누가 널 괴롭혔구나.”

그레이스가 못 본 사이 더 두터워진 팔뚝을 꿈틀거리며 말을 이었다.

“누군지 말해 봐. 누구라도 가루로 만들어 버릴 테니까.”

옆에 있던 츄츄는 더 가관이었다.

츄츄가 순식간에 눈물을 줄줄 흘리며 말했다.

“저도 동참하겠어유! 아주 그냥 먼지가 되도록 뽀샤 버릴 거구만유!”

험악한 말을 늘어놓는 두 여인 사이에 있던 레이시스는 멍한 얼굴로 안젤리나와 시아나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다가갔다.

그러고는 두 사람을 가는 팔로 꼭 안았다.

“……!”

서툰 손짓이었으나 의도가 명확했다.

위로를 해 주고 싶은 것이다.

그 모습에 ‘흡!’ 하고 감동받은 얼굴을 한 그레이스와 츄츄는 쿵쿵 거리며 다가오더니 듬직한 팔을 벌려 세 사람을 꽉 안았다.

* * *

아쉽게도 다섯 사람의 감동적인 포옹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살려 주세요!”

그레이스와 츄츄의 근육에 짓눌린 시아나가 참지 못하고 소리쳤기 때문이다.

“앗, 미안.”

그제야 그레이스와 츄츄가 재빨리 팔을 내렸다.

안젤리나와 레이시스도 살았다는 얼굴로 숨을 내쉬었다.

레이시스는 한순간이나마 저를 움직이지 못하게 한 것이 싫었는지, 솜방망이 같은 손으로 안젤리나와 그레이스를 콩콩 때리고는 방을 나가 버렸다.

“레이가 화났나 봐요. 지금이라도 사과를 하고 올까요?”

걱정스러운 얼굴로 묻는 그레이스에게 안젤리나가 고개를 저었다.

“저 정도는 그냥 두어도 괜찮아요.”

“그럼 다행이지만.”

대화를 나누는 그레이스와 안젤리나의 모습이 무척 친해 보였다.

그래서 시아나는 조금 놀랐다.

루비궁에서 종종 만나며 친분을 쌓긴 했지만 저 정도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시아나의 생각을 읽은 안젤리나가 쿡쿡 웃으며 대답했다.

“너와 황태자 전하의 스캔들이 난 후, 그레이스 황녀 저하께서 부쩍 자주 놀러 오셨거든.”

그레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함께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지.”

“어떤 이야기요?”

눈을 깜빡거리는 시아나를 향해 안젤리나와 그레이스가 동시에 대답했다.

“시아나를 어떻게 도와줄 수 있을까?”

“……!”

생각지도 못했던 말에 시아나는 숨을 멈추었다.

잠시 후, 시아나가 복잡한 얼굴로 입술을 뗐다.

“두 분은 황족이시잖아요. 제 편을 들면 다른 황족들이 언짢아하실 텐데요.”

그뿐인가.

황궁 내부를 장악하고 있는 황후에게는 완벽하게 찍히게 된다.

조심스러운 시아나의 말에 안젤리나가 눈썹을 내리며 대답했다.

“어차피 나는 다른 황족들과 그리 친하지 않은걸.”

게다가 레이시스가 황좌를 완전히 손에 내려놓은 후에는, 이름만 황비일 뿐 존재감마저 희미한 상태였다.

내려갈 만한 명예나 지켜야 할 권력도 없는 상태라고 할까.

“지금 와서 내가 뭘 하든 크게 달라질 건 없단다.”

안젤리나가 살짝 부끄러움이 어린 얼굴로 대답했다.

시아나는 복잡한 얼굴로 안젤리나를 바라보다가 그레이스를 바라보았다.

그레이스는 안젤리나와 상황이 달랐다.

그녀의 친모는 황궁의 권력 중심부에 있는 라일라 황비였으니까.

딸이 이런 일에 끼어든 것을 알면 라일라 황비의 벼락같은 분노가 내리칠 것이다.

그러나 그레이스는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

“놀랍게도 어마마마께서는 시아나 네 편이야.”

“네?”

“어마마마께서는 늘 황후 폐하와 라시드 오라버니 사이에 금이 가기를 오매불망 바라셨거든. 요즘 황후 폐하의 얼굴이 아주 볼만하다며 신나 하시더라.”

그레이스 말을 덧붙였다.

“내 어머니지만 성격이 좀 고약하셔.”

“……그렇군요.”

놀란 얼굴로 눈을 깜빡거리는 시아나를 향해 그레이스가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물론 내가 너를 돕고 싶은 건 절대 그런 음흉한 이유가 아니야.”

그레이스는 시아나에게 고마움을 가지고 있었다.

괴로웠던 저를 도와주었고, 가장 아끼는 시녀인 츄츄의 동무이다.

그녀 덕분에 아리스와 레이시스라는 동생들과도 가까워졌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 라시드 오라버니를 함락하다니 정말 대단해, 시아나.”

그레이스는 진심으로 시아나의 능력에 감탄하고 있었다.

흔한 황가의 형제들이 그러하듯, 그레이스는 라시드와 친분이 깊지 않았다.

그러나 이것 하나만은 확실히 알았다.

라시드는 여자에게 끔찍하리 만큼 관심이 없다는 것.

“꿈지럭거리면서 지나가는 지렁이만큼도 여자에게 관심 없는 오라버니를 도대체 어떻게 반하게 만든 거야?”

“어, 음, 그게…….”

훅 들어온 질문에 어쩔 줄 모르는 시아나를 향해 그레이스가 상기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내가 살면서 오라버니가 여자에게 관심을 가진 것을 본 것은 딱 한 번뿐이거든. 일전에 열린 장미꽃 연회 때 파트너로 참석했던 …….”

애매하게 말을 끊은 그레이스가 ‘어?’ 하더니 눈을 크게 뜨고 시아나를 바라보았다.

장미꽃 연회 때 라시드의 파트너로 섰던 로즈안나는 눈앞에 있는 시아나와는 전혀 달랐다.

고양이처럼 또렷하고 새침한 눈매를 가지고 있었고, 붉게 칠한 입술 끝은 오만하게 올라가 있었다.

말투는 도도했으며, 웃음소리도 새침했다.

하지만…….

밀색 머리카락과 선명한 에메랄드빛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그레이스는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로즈안나?”

“……?!”

그 말에 헉, 하고 안젤리나와 츄츄가 입을 막았다.

두 사람은 연회에 참석하지 않아 로즈안나를 실제로 보지 못했지만 그 당시 황궁을 휩쓸었던 소문을 통해 알고 있었다.

……놀랍게도 시아나가 슬며시 손을 들었다.

“넵.”

‘들켜 버렸네요’라는 얼굴이었다.

잠시간 정적이 맴돈 후, 난리가 났다.

“세상에. 변신이야? 마법이야? 어떻게 그러 일이 가능하지?!”

로즈안나를 직접 눈으로 봤던 그레이스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발을 동동 굴렀다.

안젤리나와 츄츄도 입을 동그랗게 벌리며 ‘와, 와’거렸다.

어찌 되었건 나쁜 분위기는 전혀 아니었다.

그래서 시아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것을 감쪽같이 숨겼었냐며 괘씸해하거나 아쉬워할까 걱정했는데…….’

그러기는커녕 세 사람은 눈을 반짝이며 대화를 나누었다.

“그래서 라시드 오라버니께서 그런 얼굴을 하고 있었구나.”

“어떤 얼굴이요?”

소녀 같은 얼굴로 묻는 안젤리나의 말에 그레이스가 대답했다.

“꿀벌이 날아오면 어쩌나 걱정이 될 만큼 꿀이 뚝뚝 떨어지는 눈으로 시아나를 보고 있더라고요.”

“옴메. 진작 두 사람 사이가 오붓했구만유.”

츄츄가 단단한 근육을 꿈틀거리며 낄낄거렸다.

‘이 분위기 뭔가 익숙한데.’

저 먼 동부에 가 있는 아리스와 니니, 나나가 떠올랐다.

몰랑몰랑한 분위기는 좋았지만 제가 화제의 중심이 된 것이 부끄러워 입을 꾹 다문 시아나를 향해 안젤리나가 말했다.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무척 아름답고 우아한 숙녀였다고 들었어. 예법을 잘 익힌 것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내가 아는 것보다 더 대단한가 보구나.”

“과찬이십니다.”

민망해하는 시아나를 보며 안젤리나가 눈썹을 내렸다.

“그럼 내가 도와줄 일이 딱히 없겠네.”

“무슨 말씀이신가요?”

눈을 동그랗게 뜬 시아나를 향해 안젤리나가 말했다.

“황궁에서 곧 열리는 연회에 대해 알고 있지?”

시아나는 최근 황태자궁에만 있었지만 황궁의 소식은 기민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그래서 시아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시아나의 답에 복잡한 표정을 지은 안젤리나가 말을 이었다.

“그럼 황후 폐하께서 그 연회에 제국의 수많은 젊고 아름다운 귀족 여인들을 초대한 것도 알고 있니? 황태자비를 찾는다는 명목으로 말이야.”

“……그것도 알고 있습니다.”

안젤리나가 시아나를 안쓰럽다는 듯 바라보며 말했다.

“혹시 네가 그 연회에 참석하고 싶다면 너를 도와주고 싶었단다.”

“아…….”

“치장하는 법이나 예법, 춤 같은 것을 말이야. 그런데 네가 로즈안나라면 그럴 필요가 없겠구나.”

그레이스도 아쉽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러게 말이에요. 그때 보니 오히려 제가 한 수 배워야 할 정도 던걸요.”

두 사람은 동시에 미간을 모았다. 옆에 있던 츄츄도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시아나를 어떻게 도와주지?’라는 얼굴이었다.

그 모습을 멍하니 쳐다보던 시아나의 입꼬리가 스르르 올라갔다.

‘이 궁에도 내편이 있었어.’

라시드 외에도, 저 멀리 떠난 아리스 외에도, 시아나의 힘이 되어 줄 사람들이 있었다.

가슴이 간질거렸다.

시아나가 맞잡은 손가락을 꾸물거리며 말했다.

“실은 부탁드릴 게 있긴 한데요.”

동시에 세 사람이 시아나를 향해 휙 하고 고개를 돌렸다.

뭐든 말해!

—라는 눈빛으로.

* * *

황후가 주최하는 연회가 시작됐다.

거대한 황궁의 문이 열리고, 화려하게 꾸민 귀족 여인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네 명의 황비들에게 초대장을 받고 온 여인들은 꽃처럼 아름답고 보석처럼 빛이 났다.

멀쩡한 사내라면 누구라도 정신을 놓고 사랑에 빠질 만큼.

그러나 정작 네 명의 황비에게 아리따운 아가씨를 초대해 달라고 부탁했던 황후의 눈빛은 싸늘하기 짝이 없었다.

“꽃 같은 여인이 수없이 많아도 라시드는 일말의 관심도 없을 테지.”

황후는 제 아들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라시드는 까다로웠다.

제아무리 대단한 미인이나, 제국에서 손꼽히는 가문 출신, 혹은 빛나는 지성이나 봄바람처럼 온화한 성품을 가진 여인이라도 라시드의 마음을 빼앗지 못할 것이다.

‘마음은커녕 시선 한 자락도 가져가지 못하겠지.’

그것을 그토록 잘 알면서 이런 연회를 연 이유가 있었다.

황후가 눈을 내리깔며 물었다.

“라시드와 시아나가 함께 참석한다고 했지?”

황후의 옆에 서 있던 이블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단호하게 연회에 참석하지 않는다는 라시드를 향해 황후는 한발 물러나는 척을 하며 말했다.

[네가 원하면 시아나와 함께 참석해도 좋다.]

라시드는 덥석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시아나에게 단단히 홀린 상태니 막연히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겠지?’

제가 마음에 둔 여인을 사람들에게 보일 수 있는 자리일 것이라고.

그 단순한 생각에 시아나가 어떤 일을 당할지도 모르고.

‘제아무리 예법에 밝고 영특하다 해도, 일개 시녀일 뿐이야.’

시아나는 감히 저와 견줄 수도 없을 만큼 화려하고 고귀한 여인들을 보며 움츠러들 테지.

그리고 좌절감을 느끼게 될 것이다.

‘나는 황태자 전하께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구나.’

황후는 시아나에게 그런 감정을 느끼게 해 줄 생각이었다.

시아나가 지쳐 라시드의 곁을 떠나고 싶어질 때까지.

그러나…….

황후는 눈을 크게 뜨고 연회장에 나타난 시아나를 바라보았다.

길게 풀어헤친 밀색 머리카락.

살짝 쳐진 눈초리 아래로 빛나는 에메랄드빛 눈동자.

샛노란 드레스를 입고 곱게 화장한 여인은 누구라도 호감을 가질 만큼 화사한 미인이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고귀하신 황후 폐하께 인사드립니다. 이토록 멋진 연회에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양손으로 치맛자락을 잡고 인사하는 모습이 더할 나위 없이 우아했다.

황후는 당황했다.

‘이 아이가 시녀치고 예법에 능하다는 건 알고 있었어. 하지만 이렇게까지 완벽할 수가 있나?’

황후가 할 말을 잃고 시아나를 바라보는데, 옆에 있던 라시드가 말을 꺼냈다.

“어마마마, 어서 인사를 받아 주십시오. 시아나의 작고 동그란 머리통이 떨어져 버리겠습니다.”

“……!”

황후는 아들을 향해 욕설이 나갈 뻔했다.

그만큼 황당한 말이었다.

그러나 사람들 앞에서 그런 교양 없는 짓을 할 수는 없는지라 황후는 애써 감정을 정리하며 말했다.

“그래.”

시아나가 기다렸다는 듯 허리를 곧게 폈다.

노란색 드레스를 입고 해사하게 웃는 시아나와 그 모습을 사랑스럽다는 듯이 바라보는 라시드.

황후는 속이 뒤틀리는 기분을 숨기며 손짓했다.

“손님들이 너희들에게 쏟는 관심이 대단하다. 가서 이야기 상대를 해 드리거라.”

물론 순수한 마음으로 권한 것이 아니었다.

어디 한번 제대로 망신을 당해 보라는 취지였다.

‘솜씨 좋은 시녀에게 맡기면 외모는 그럴듯하게 꾸밀 수 있지. 예법도 선생에게 배울 수 있는 것이고. 하지만 사교계의 대화는 절대 그렇지 않아.’

풍부한 교양과 지식, 제국에서 내로라하는 귀족들 앞에서도 주눅 들지 않는 강단까지 필요했다.

그것은 단기간 노력해서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괜히 끼어들려 노력하다가 망신만 당할 테지. 아니, 끼어들 수나 있을까.’

황후의 예상대로였다.

사람들은 시아나를 따돌렸다.

주로 이런 식이었다.

“고귀하신 황태자 전하께 인사드립니다. 크로이텐 백작가의 레이첼입니다.”

레이첼은 환하게 웃으며 라시드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자연스럽게 그의 옆에 있는 시아나에게는 인사를 생략했다.

‘흥, 주제도 모르고 황태자의 옆에 선 시녀 따위에게 말 한마디 걸줄 알고?’

저를 무시하는 행동에 수치스러워하거나 불쾌해하는 것이 당연한데, 놀랍게도 시아나는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크로이텐 백작가라면 튤립으로 유명한 곳이죠? 그래서 튤립 모양의 머리 장식을 하셨군요. 레이첼 님께 정말 잘 어울리네요.”

“……!”

귀족들은 가문에 대한 프라이드만큼, 가문에 대한 칭찬에 약했다.

그러니 마음에 단단히 철벽을 쳤던 레이첼도 대꾸를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고맙습니다.”

새침한 여인의 인사에 시아나는 웃었다.

“언젠간 꼭 그림처럼 아름답다는 크로이츠 백작가의 튤립 정원을 눈으로 보고 싶네요.”

놀라운 건 다음 장면이었다.

시아나의 옆에 조용히 서 있던 라시드가 레이첼을 바라보며 말한 것이다.

“기회가 되면 나의 아기 다람쥐와 나를 그대의 영지에 초대해 주면 좋겠군.”

“예?!”

레이첼이 화들짝 놀라며 눈을 크게 떴다.

라시드는 차기 황제에 가장 가까운 자였기에 그에게 줄을 서고 싶은 귀족이 한두 명이 아니었다.

그러나 귀족들의 애타는 마음과 달리 라시드는 사교계에 코빼기도 비추지 않아 인연을 맺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런 라시드가 제 입으로 먼저 방문을 하고 싶다고 하다니…….

레이첼은 이런 기회를 놓칠 만큼 아둔하지 않았다.

“전하께서 원하실 때 언제든 오십시오. 크로이텐 백작가는 황태자 전하와…….”

레이첼은 라시드의 옆에서 세상 무해한 표정을 짓고 있는 시아나를 힐끗 보더니 말을 이었다.

“전하의 아기 다람쥐님을 환영합니다.”

“어머나, 기뻐라.”

시아나가 두 손을 마주치며 까르르 웃었다.

그 모습을 본 레이첼은 저도 모르게 생각했다.

‘이 시녀, 꽤 귀엽잖아?’

레이첼은 제가 한 생각에 놀라 헉, 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황후의 생각대로 시아나는 제국 귀족들과 개인적인 친분이 전혀 없었다.

하지만 시아나는 그들에 대한 수많은 정보를 꿰고 있었다.

일전에 장미꽃 축제에 참석했을 때 공부해 둔 덕분이었다.

그것이 많은 도움이 되었다.

“아이리스 남작가는 향수 사업을 하고 있지요? 혹시 지금 레이디께서 뿌린 향수도 남작가에서 만든 제품인가요?”

“……맞아요.”

“향기가 상큼하니 정말 좋네요. 꼭 한여름 날의 오렌지 농장에 있는 기분이에요.”

시아나의 순수한 칭찬에 여인이 얼굴을 붉혔다.

몰랑몰랑해진 분위기 속에 라시드가 한마디를 보탰다.

“내 아기 다람쥐의 코를 이토록 즐겁게 해 주다니 훌륭한 제품임이 틀림없군. 아이리스 남작가에서 만든 향수를 종류별로 황궁에 보내 주게.”

“……예?!”

여인이 눈을 부릅떴다.

황궁에 납품하는 것만으로 대단한 홍보가 되어 향수의 이름값이 올라간다.

즉, 아이리스 남작가의 향수 사업이 도약할 수 있는 엄청난 기회를 잡은 셈이었다.

여인은 흥분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답했다.

“특별히 아기 다람쥐님께 잘 어울리는 향수도 조합하여 함께 보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어쩜, 감사합니다.”

시아나가 기쁨에 찬 얼굴로 웃었다. 여인이 뿌듯해질 만큼 환한 미소였다.

대화가 이런 식으로 흘러가니 점점 많은 이들이 은근슬쩍 라시드와 시아나의 곁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이 기회를 빌려 말 한마디 건네기 어려웠던 라시드와 대화를 트려는 목적이었지만, 정신을 차리고 보면 다들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기 다람쥐님, 귀여워.’

물론, 수많은 손님 중 일부가 그랬다는 말이다.

여전히 많은 이들이 시아나에게 적대적이었다.

둥글게 모여 선 여인들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웃고 있는 시아나를 흘겨보며 속삭였다.

“시녀라서 그런지 아부를 아주 잘 떠네요.”

“그러게 말입니다. 황태자 전하의 총애 덕에 이 자리에 있는 것을 창피해할 줄도 모르고.”

당장이라도 시아나에게 다가가 시녀 주제에 어디서 귀족 흉내를 내냐며 혼쭐을 내주고 싶었다.

그러나 시아나의 옆에 있는 라시드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다.

게다가 라시드는 그냥 서 있는 것도 아니었다.

라시드의 시선은 쭉 시아나의 얼굴에 고정되어 있었고, 라시드의 몸은 시아나가 움직일 때마다 함께 움직였다.

제아무리 둔한 사람도 ‘전 이 여자에게 푹 빠졌습니다. 환장하게 좋아요.’라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니 여인들은 더더욱 속상할 수밖에 없었다.

제국의 수많은 여인들이 그러하듯, 그녀들 또한 라시드를 흠모했기 때문에.

“전하께서 도대체 저 시녀가 뭐가 좋다고 저렇게 푹 빠지신 걸까요.”

물론 시아나는 아름다운 미모에 시녀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몸가짐이 우아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피의 황태자를 홀릴 수는 없었다.

“미천한 시녀가 황태자 전하를 꼬드길 수 있는 방법이 뭐겠어요. ‘저는 다른 세속적인 귀족 여인들과 달라요. 전하를 진심으로 사랑한답니다’ 따위의 말을 하며 고백을 했겠죠. 얼굴이 순진하니 그런 말 하기 딱 좋게 생겼잖아요.”

“아니면 홀딱 벗고 요사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유혹을 하던가.”

시아나가 들었더라면 ‘아니거든요? 제가 당했어요!’라고 소리칠 만한 말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시아나에 대한 험담을 열심히 늘어놓아도 답답한 마음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던 중 한 여인이 아, 하고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 말했다.

“우리, 오랜만에 ‘그것’을 해 보면 어때요?”

여인의 말에 모여 있던 이들의 눈빛이 섬뜩하게 빛났다.

시아나는 눈을 크게 떴다.

귓가에 들린 여인들의 목소리 때문이다.

시아나에게서 한 발짝 떨어진 여인들은 부채를 살랑이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들이 나누는 언어가 낯설기 짝이 없었다.

“ÆÐĦIJĿ ŁØÐĦÞ ÆÐĦIJĿ ŁØÐĦÞ.”

“ŁØÐĦÞ ÐĦIJ ĿÆÐ ÆÐÆÐ ØÐĦÞ.”

시아나의 옆에 있던 라시드가 중얼거렸다.

“그랑시아어로군.”

그랑시아어는 오래전 사라진 고대 국가에서 쓰던 말로 현재는 쓰이지 않았다.

그러나 귀족들은 교양의 일환으로 그랑시아어를 익혔고, 종종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보통은 자신들의 지식을 뽐내고 싶어 어쩔 줄 모를 때 쓰지만…… 지금은 그런 순수한 목적은 아니겠지.’

시아나는 그녀들의 의도를 단번에 알아차렸다.

‘어지간히 내게 망신을 주고 싶은가 보구나.’

시아나의 생각대로였다.

라시드의 옆에 서서 입을 꾹 다문 시아나를 바라보며 여인들은 쿡쿡 웃었다.

‘우리가 무슨 말을 하나 궁금해 죽겠지?’

‘이게 바로 너와 우리의 차이란다. 이곳은 너같이 비천한 것이 끼어들 세계가 아니야.’

‘주제 파악 했으면 어서 떠나렴.’

그러나 잠시 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시아나가 라시드를 바라보며 입을 연 것이다.

“ØÐĦÞÐĦIJĿÆÐ ÞÐĦ IJĿ ÆÐÆÐØÐĦÞ.(전하, 역시 제국 귀족분들은 대단해요. 이토록 어려운 그랑시아어를 능숙하게 쓰시다니.)”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발음이었다.

라시드가 허를 찔린 듯이 눈을 크게 뜨더니 입꼬리를 올렸다.

“ÐÆÐØÐĦ ÆÐØIJĿ IJĿ ØÐĦ ÆÐØIJÐØÐ Ø IJØÐĦ.(그러게 말이야. 엄한 선생에게 회초리를 맞아 가며 배웠지만 쓸 일이 없었는데 이런 곳에서 쓰게 되는군.)”

시아나가 동감한다는 듯 쿡쿡 웃었다.

시아나 또한 이것저것 무식하게 가르쳤던 새어머니 덕분에 익혔던 말이었기 때문이다.

미소 짓는 시아나를 다정하게 바라보며 라시드가 말을 이었다.

“ØÐĦ ÆÐØIJĿØÐĦ, ÆÐØIJ? IJĿ…….(그런데 왜 갑자기 이따위 짓들을 하는 거지. 심심한가? 아니면…….)”

라시드의 시선이 대화를 나누고 있던 귀족들 몇몇을 향했다.

“ÆÐØIJĿ ØÆÐØIJ IJ? (내 아기 다람쥐를 시험하고 싶은 건가?)”

“……!”

그 순간 라시드와 눈이 마주친 여인들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저를 바라보는 보라색 눈동자가 섬뜩하기 짝이 없었다.

그런 라시드의 등을 톡 두들긴 시아나가 눈썹을 모으며 말했다.

“손님들께 무서운 표정 지으면 안 돼요, 전하.”

얼음처럼 싸늘했던 라시드의 눈빛이 순식간에 봄 햇살처럼 부드럽게 휘어졌다.

“응.”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은 돌처럼 굳어 버렸다. 그만치 충격적인 장면이었다.

이제 이 연회장에 있는 이들 중 라시드가 시아나에게 얼마나 흠뻑 빠졌는지 모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경악한 표정을 짓고 있는 사람들을 보며 시아나는 입꼬리를 올렸다.

‘연회에 참석한 보람이 있네.’

시아나가 이곳까지 온 것은 단순히 황후의 신경을 박박 긁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사람들에게 라시드와 제 관계를 뽐내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오늘 연회에서 내가 얻어 낼 것은 그것만이 아니야.’

시아나가 눈짓을 했다.

그녀의 눈빛을 받은 것은 저쪽에 서 있던 그레이스 황녀였다.

그레이스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옆에 서 있던 3황비 라일라에게 무언가를 속삭였다.

라일라 황비가 눈을 반짝이더니 이내 우아한 걸음을 내디뎠다.

그녀가 향한 곳은 연회장 한편에 마련된 의자에 앉아 귀족들과 이야기를 나누던 황후였다.

라일라 황비가 고양이처럼 치켜 올라간 눈초리를 부드럽게 휘며 말을 건넸다.

“황후 폐하, 저는 정말이지 놀랐습니다.”

라일라 황비는 아무 이유 없이 황후에게 싹싹하게 말을 건넬 여인이 아니었다.

그래서 황후는 살짝 경계를 하며 물었다.

“무엇이 말인가?”

“시아나라는 시녀, 우려했던 것과는 달리 너무나 훌륭한 아가씨이지 않습니까. 아름다운 외모에 완벽한 예법, 귀족들과 대화를 나누는 솜씨까지. 정말이지 감탄을 금하지 못하겠습니다.”

그 순간 황후의 한쪽 눈썹이 추켜올라갔지만 라일라는 신경 쓰지 않고 말을 이었다.

“무엇보다 다른 여인들에게 그토록 냉담하던 황태자 전하께서 저토록 다정한 눈빛으로 쳐다보시니……. 저만한 황태자비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라일라 황비!”

라일라가 꺅 하고 비명을 질렀다.

“갑자기 소리를 지르셔서 놀랐습니다, 황후 폐하.”

라일라의 호들갑에 눈썹을 찡그린 황후가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말했다.

“그대가 너무 무엄한 말을 하니 그런 것 아닌가.”

“무엄한 말이었습니까?”

“그래.”

라일라 황비가 어울리지 않게 시무룩한 얼굴을 했다.

“그렇게 느껴지셨다면 죄송합니다. 저는 그저 황후 폐하께서 황태자 전하를 너무나 사랑하시고 아끼시니, 대놓고 표현은 하지 못하셔도 저와 같은 마음이 드신 건 아닐까 하여 말을 꺼낸 것입니다.”

그제야 황후는 저를 향한 시선들을 의식했다.

연회장에 있는 수많은 이들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의 눈빛에 어린 감정은 대부분 라시드가 시녀와 놀아나는 것을 보고 황후가 얼마나 속이 쓰릴지에 대한 걱정이었지만, 한편으로는 라일라 황비의 말에 동조하는 이들도 있었다.

아들을 끔찍하게 사랑하고 아랫사람에게도 자애로운 황후라면, 마음이 흔들릴지도 모르겠다고.

황후가 지끈거리는 두통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라시드의 마음이 애틋하여 두 사람을 연회에 초대하긴 했네. 하지만 내가 이해해 주는 것은 거기까지야.”

“그렇습니까?”

눈썹을 내린 라일라 황비의 말에 황후는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무리 숙녀로서의 소양을 갖추었다 해도 제대로 된 성도 없는 시녀가 아닌가. 고귀한 황태자비의 자리에 그런 여인을 세울 순 없어.”

이쯤에서 그만두면 좋으련만 라일라 황비는 한 번 더 꼬투리를 잡고 늘어졌다.

“그럼 만약 시아나가 시녀가 아니라 마땅한 신분을 가지고 있다면 황태자 전하의 짝으로 괜찮으시다는 건가요?”

황후는 정말이지 이 대화가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황후는 다른 권력자의 어미와 다를지도 모른다는 묘한 기대감을 품은 사람들의 시선 또한.

한시라도 빨리 이 대화를 끝내고 싶었다.

그래서 마음에도 없는 대답을 했다.

“그래. 만약 그렇다면 내가 반대할 게 뭐 있겠나.”

그 순간 라일라 황비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물고기를 낚은 고양이처럼.

라일라가 눈을 빛내며 물었다.

“그런데 황후 폐하, 이렇게 대화를 나누다 보니 문득 궁금해지는군요. 시아나는 외국인이라 들었는데 고향에서는 어떤 신분이었을까요?”

사실 황후는 진즉에 시아나에 대한 조사를 마친 후였다.

시아나는 제국에게 점령당한 구라틴이라는 작은 나라의 몰락한 상인 집안의 딸이라고 했다.

그러나 황후는 시아나의 뒷조사를 했다는 것을 표내고 싶지 않았기에 에둘러 말했다.

“중급 시녀로 일하고 있으니 평민 출신이겠지.”

황궁에 있는 하급 시녀와 중급 시녀는 대부분 평민이었다.

귀족은 상급 시녀로 일하는 것이 일반적이었고, 이따금 귀족이 중급 시녀로 일하는 경우가 있긴 했으나 워낙 드문 일이라 바로 소문이 났다.

그러나 라일라 황비는 의아하다는 얼굴을 했다.

“저토록 예법이 뛰어나고 귀족들과 허물없이 대화를 나눌 만큼 상식을 갖춘 이가 평민이라고요?”

“평민 중에도 교육을 통해 일정 수준에 도달하는 이가 많네.”

“그래도 혹시 모르지 않습니까. 우리가 예상했던 것보다 대단한 가문일지도. 이 기회에 한번 확인해 볼까요?”

“뭐?”

눈을 크게 뜬 황후가 뭐라 말을 잇기 전에 라일라 황비가 시녀를 라시드와 시아나에게 보냈다.

잠시 후, 라시드와 시아나가 황비와 황후의 곁으로 다가왔다.

마치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거기서부터 황후는 무언가 잘못되어 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워낙 순식간에 일이 진행되어 막을 틈이 없었다.

굳은 얼굴의 황후를 무시하며 라일라 황비가 물었다.

“다름이 아니라 황후 폐하와 대화를 나누던 중 궁금한 것이 생겨 두 분을 불렀습니다.”

라일라의 시선이 시아나를 향했다.

“시아나 양은 외국에서 왔다지요?”

“그렇습니다.”

“어느 나라 출신입니까?”

구라틴 왕국.

그러나 시아나는 황후의 생각과 다른 답변을 했다.

“아실론드 왕국입니다.”

황후가 눈을 부릅떴다.

라일라 황비가 물었다.

“평민이었나요?”

예.

그러나 이번에도 시아나의 답은 황후의 생각과 달랐다.

“아니요.”

“그럼 귀족이었습니까?”

“아니요.”

황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시아나가 맑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저는 아실론드 왕실의 첫 번째 공주였습니다.”

그 순간 드넓은 연회장이 조용해졌다.

그리고 잠시 후 폭탄이 터지듯 난리가 났다.

* * *

패전국 출신의 중급 시녀가 사실은 공주였다니.

충격적인 사실이 아닐 수가 없었다.

사람들은 경악한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아무리 패망했다 해도 그렇지 일국의 공주가 어떻게 일개 시녀가 되어 일을 하고 있을 수 있어?”

“그러니까 말이야. 혹시 황태자 전하께서 한눈에 반해 시녀로 데려온 건가? 어떻게든 곁에 두고 싶어서 말이야.”

“어머머, 세상에.”

사람들은 도대체 라시드와 시아나가 어떻게 만나 맺어지게 된 것인지 궁금해 미칠 것 같았다.

연회장에 있는 이들이 대부분 한창 사랑에 관심이 많은 젊은 여인들이라 더더욱 그랬다.

소란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라시드가 황후를 바라보며 눈썹을 내렸다.

“중요한 사실을 미리 말씀드리지 못하여 죄송합니다, 어마마마.”

옆에 있던 시아나도 고개를 숙였다.

“일부러 속인 것은 아니니 부디 용서하십시오, 황후 폐하. 고통스러웠던 공주의 신분을 버리고 시녀로 살고 있었던 터라 말씀드리지 못했습니다.”

황후는 기가 찼다.

이 모든 것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상황임을 알아챘기 때문이다.

‘일부러 가짜 정보를 흘려 나를 방심시켰구나. 그 후에 라일라 황비를 이용하여 일을 벌였어!’

시아나는 황후의 생각을 읽으며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꽤 번거로운 일을 벌였죠.’

시아나가 이런 판을 벌인 이유는 최대한 많은 사람들의 앞에서 제 신분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가장 극적인 방법으로.

그리고 아직 시아나의 계획은 다 끝난 것이 아니었다.

라일라 황비가 환하게 웃으며 황후의 손을 잡았다.

“황후 폐하, 어찌 이런 기적 같은 일이 있단 말입니까! 황후 폐하께서 시아나 양에게 아쉬운 점이 신분뿐이라 하였는데 사실은 왕족이었다니요.”

“…….”

“일국의 왕녀라면 황태자비감으로 손색이 없지 않습니까? 참으로 경하드립니다!”

온 세상 사람들 다 들으라는 듯 커다란 목소리로 소리치는 라일라 황비의 모습에 황후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라일라 황비는 분위기를 몰아가고 싶은 게 분명했다.

자애롭고 인자한 황후가, 제가 사랑하는 아들과 그의 여인을 축복해 주는 아름다운 광경을.

라일라 황비의 의도는 어느 정도 성공한 것 같았다.

연회장에 있던 사람들은 한편의 연극처럼 벌어진 이 극적인 상황에 황후가 어떤 대답을 할지 흥미진진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황후는 이런 분위기에 휩쓸려 실수를 할 만큼 바보가 아니었다.

황후가 엄한 얼굴로 말했다.

“확실히 증명되지도 않은 것을 가지고 소란을 피우면 곤란하네.”

그러나 라일라 황비는 꿈쩍도 않고 반박했다.

“조사를 하면 바로 확인이 되는 일인데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게다가 시아나 양, 아니 시아나 공주의 몸가짐을 보세요. 어느 시녀가 저런 예법을 익히고 있답니까. 누가 보아도 일국의 공주가 확실합니다.”

라일라 황비의 말에 사람들이 동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생각에도 시아나가 일개 시녀라는 것보다는 신분을 숨기고 있던 공주라는 편이 훨씬 더 이해가 갔다.

황후도 그 사실은 인정했다. 하지만…….

“설령 시아나가 아실론드의 공주라 해도 달라질 건 없네. 아실론드 왕국은 지도를 펴 놓고 찾아도 잘 보이지 않을 만큼 작은 곳이야. 게다가 얼마 전 제국에게 짓밟혀 지금은 사라진 왕국과 같지. 그런 나라의 공주라는 것에 대체 어떤 의미가 있단 말인가.”

여전히 라시드에 비하면 한참 모자라다는 말이었다.

라일라 황비가 눈썹을 내리며 중얼거렸다.

“황후 폐하께서도 참 욕심이 참 많으시네요. 본인께서도 한미한 남작가의 출신으로 고귀한 황후의 자리에 오르셨으면서…….”

“……!”

그 말에 내내 유지하던 황후의 자애로운 얼굴이 산산조각 깨져 버렸다.

무시무시한 얼굴에 라일라 황비가 히익, 하고 어깨를 움츠리며 제 옆에 있던 그레이스의 드넓은 등 뒤에 숨었다.

순식간에 연회장에 싸늘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숨 막히는 정적 속에 입을 연 것은 라시드였다.

“어마마마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불길한 예감을 느끼고 황후는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런 황후의 앞에 라시드가 무릎을 꿇었다.

“저는 시아나를 마음 깊이 사랑합니다. 앞으로도 그녀와 평생을 함께하고 싶습니다. 그러니 그녀와의 약혼을 허락해 주십시오.”

“……!”

충격적인 선언이었다.

툭, 하고 황후가 부채를 떨어뜨릴 만큼.

라시드와 함께 시아나도 황후의 앞에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았다.

앳된 얼굴의 두 남녀가 무릎을 꿇고 황후를 바라보는 모습은 보는 사람이 애달플 정도로 간절해 보였다.

그러나 황후는 입술을 깨물며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기껏해야 연애놀음이나 할 줄 알았더니 약혼이라니.’

당연히 안 될 말이었다.

그러나 황후가 그 말을 입에 담기 전 라시드가 말했다.

“어마마마께서는 늘 저의 행복을 바라지 않으셨습니까. 저는 시아나와 함께 있을 때 가장 큰 기쁨을 느낍니다.”

“하지만…….”

라시드가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아니면 또 저를 제 아이를 가졌다고 거짓말하는 끔찍한 여인과 엮으시려는 겁니까?”

“……!”

황후가 부릅뜬 눈으로 라시드를 보았다.

라시드는 옅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러나 그 미소에는 하염없이 순종적이었을 때는 느끼지 못했던 분노가 어려 있었다.

생전 처음 보게 된 아들의 감정에 황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두 사람 사이에 숨 막히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팽팽한 긴장감을 깨드린 것은 맑은 목소리였다.

“두 분, 고정하십시오.”

황후가 눈을 크게 떴다.

목소리의 주인공이 다름 아닌 안젤리나 황비였기 때문이다.

늘 조개처럼 입을 꽉 다물고 조용히 있었던 그녀가 이런 식으로 나선 것은 처음이었다.

안젤리나가 살짝 긴장이 어린 얼굴로 말을 이었다.

“부모가 자식이 데려온 상대가 마음에 안 들었을 때, 그러나 자식도 제 의지를 꺾지 않을 때, 황실에서는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 있다 들었습니다.”

황후가 눈썹을 찡그렸다.

“설마 황후의 시련을 말하는 건가?”

안젤리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먼 옛날, 제국의 2대 황제 아슈레이는 친모인 황태후와 대립했다.

황제와 황태후가 황후감으로 선택한 여인이 서로 달랐던 것이다.

황제와 황태후의 갈등이 점점 심해졌다.

제가 원하는 여인을 황후에 올리기 위해 두 사람이 전쟁이라도 불사하려던 순간, 황족 중 한 명이 해결책을 내놓았다.

두 명의 황후 후보를 시험하여, 그 시험에서 보다 훌륭한 결과를 내는 이를 황후로 삼기로 한 것이다.

두 여인은 치열하게 시험에 임했고, 그 결과 황제가 원했던 여인이 황후의 왕관을 쓰게 되었다.

그것이 바로 황후의 시련이었다.

시험을 통해 영특한 황후를 뽑을 수 있었기에, 제국 초기에는 황후 후보를 여러 명 뽑아 이 시련을 치르게 하기도 했다.

시간이 흐른 지금은 그저 해묵은 전통이 되어 버렸지만.

황후가 탐탁지 않은 얼굴로 눈을 내리깔았다.

“하나 황후의 시련은 황후감을 뽑을 때나 치렀던 시험이야.”

안젤리나 황비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름 때문에 그리 알려져 있긴 하지만 황태자비나 황비를 뽑을 때도 이 시험을 치르는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황족끼리의 갈등을 최소화하고 황실에 어울리는 여인을 효과적으로 뽑을 수 있는 방법이니까요.”

잠시 숨을 고른 안젤리나가 말을 이었다.

“시아나 공주가 이 시련을 통과하면 대내외적으로 황실에 어울리는 능력을 갖추었다고 인정을 받게 됩니다. 그러면 황후 폐하께서도 염려가 덜 하실 테고, 황태자 전하께서도 사람들에게 보다 당당하게 짝을 소개할 수 있을 테니 두 분께 다 좋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안젤리나의 얼굴에는 어떠한 사심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순수하게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방법을 내놓은 것처럼 느껴졌다.

사실은 전혀 아니었지만.

‘시아나가 알려 준 대로 말하긴 했는데 황후 폐하께서 과연 이 제안을 받아들이실까?’

안젤리나는 못된 짓을 하는 느낌에 가슴을 콩닥이며 황후를 바라보았다.

사실 황후는 안젤리나의 말에 조금도 메리트를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애초에 황후가 시아나를 반대하는 진짜 이유는 그녀의 직위나 능력 때문이 아니었으니까.

‘저 애는 너무 영특해. 분명 라시드를 제멋대로 휘두르려 할 거야. 얼마 지나지 않아 라시드는 어미도 몰라보고 제멋대로 행동하게 되겠지.’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니 황후는 시아나가 이 이상 긴밀하게 라시드와 엮이는 것을 원치 않았다. 하지만…….

“…….”

황후는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네 명의 황비, 몇 명의 황족, 그리고 수많은 귀족들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많은 이들의 눈빛에 황후가 고개를 끄덕일 것이라는 기대감이 차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들을 끔찍하게 사랑하며 싸움을 싫어하는 온화한 황후에게, 이만큼 좋은 방법이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황후는 눈을 감았다.

차오르는 분노에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그러나 황후는 겨우 그 감정을 억누르고 눈을 떴다.

황후가 말했다.

“안젤리나 황비의 의견을 받아들이겠소. 시아나에게 황후의 시련을 치르게 하지.”

“……!”

사람들이 와, 하고 작은 비명 소리를 내며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 시아나가 조용히 주먹을 쥐었다.

‘해 냈다!’

많은 이들의 앞에서 선언했으니 황후는 절대 말을 물리지 못할 것이다.

‘게다가 황후의 시련을 통과했다는 것은 그 자리에 가장 적합한 여인으로 인정을 받았다는 거야.’

황족이나 귀족, 어느 누구도 라시드의 옆에 시아나가 있는 것에 대해 왈가불가할 수 없게 된다.

시아나는 오늘의 연회에서 원하던 것을 다 이루었다.

잠시 후, ‘아’ 하고 정신을 차린 시아나가 황후의 앞에 고개를 숙였다.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황후 폐하. 온 힘과 마음을 다해 시련에 임하여 황실의 인정을 받도록 하겠습니다.”

선명한 에메랄드 눈동자는 반짝였고, 미소가 어린 얼굴은 맑았다.

밝은 에너지와 총기가 어린 모습이었다.

황후의 속은 한없이 뒤틀렸지만.

* * *

연회장을 나와 황태자궁으로 향하는 길.

새하얀 돌로 만든 산책로를 걷는 시아나를 바라보며 라시드가 말했다.

“기뻐 보여.”

“그럴 수밖에요. 황후의 시련만 통과하면 이제 당당하게 전하의 연인이 될 수 있잖아요.”

“연인이 아니라 약혼녀.”

라시드가 진지한 얼굴로 시아나의 말을 정정했다.

그의 말에 시아나의 뺨이 복숭앗빛으로 물들었다.

‘약혼녀라니.’

그것도 황태자의 약혼녀.

조용히 살고 싶었던 시아나에게는 참 버거운 이름이었다.

그럼에도 먼저 그 말을 입에 담은 건 시아나였다.

[전하, 우리 약혼할까요?]

그 순간 보았던 라시드의 표정이 아직도 잊히지 않았다.

처음에는 눈을 크게 떴고, 잠시 후에는 웃었고, 마지막에는 울 것 같은 얼굴을 했다.

그러고는 시아나를 꼭 껴안으며 말했다.

[지금 당장 결혼도 할 수 있어.]

아니, 그건 좀.

당황한 얼굴로 라시드를 말려야 했던 순간을 떠올리며 시아나가 입을 열었다.

“상류 사회는 보수적이에요. 결혼을 약속하지 않은 남녀 간의 만남은 방탕하게 노는 것으로 비난받기 일쑤죠.”

시아나는 그런 것을 원치 않았다.

온 세상 사람들의 축복을 바라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손가락질 받는 사랑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기에 약혼을 결심했다.

시아나의 생각을 안 라시드는 성난 코뿔소처럼 약혼을 진행하려 했다.

황제고 황후고 뭐고 다 무시하며 우리만의 약혼 라이프를 즐기려는 라시드를 시아나가 말렸다.

그런 식으로 약혼을 하면 우호적인 여론이 만들어지긴커녕, 적대감만 커질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황후의 시련에 통과하여 약혼을 하게 되면, 저에 대한 황족과 귀족들의 반발심이 확 줄어들 거예요.”

그것은 큰 의미를 가졌다.

시아나가 앞으로 제대로 된 힘을 키우기 위해서라도.

“두고 봐요. 전하의 약혼녀가 되면 눈에 불을 켜고 사교 활동을 시작할 테니까요. 눈 깜빡 할 새에 전하와 저를 지지해 줄 세력을 만들 거예요.”

시아나는 작은 두 주먹을 쥐고 눈을 빛냈다.

넋을 놓고 시아나를 바라보던 라시드가 도무지 참지 못하겠다는 얼굴로 시아나를 꼭 안았다.

“이렇게 작고 귀여운데, 어떻게 이토록 강할 수 있지?”

“원래 쪼그만 애들이 힘이 세요. 개미만 해도 자기 몸보다 열 배는 큰 과자를 등에 지고 다니잖아요.”

시아나의 말에 라시드가 웃음을 터뜨렸다.

사실 라시드는 시아나에게 이런 고된 길을 걷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제 품속에서 맛있는 것을 먹이고, 세상의 예쁜 것을 모두 보여 주고, 따스한 햇볕 아래에서 편안하게 잠들게 하고 싶었다.

하지만…….

제 품속에만 고이 숨겨 두기에 시아나는 너무나 씩씩했다.

‘그래서 더 좋아.’

라시드는 시아나를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혹시나 그녀가 아파할까 봐 극도로 조심하며.

* * *

연회가 끝난 다음 날, 황태자의 연인인 시녀가 사실은 외국의 공주님이었다는 이야기가 황궁과 사교계에 쫙 퍼졌다.

시아나가 물었다.

“시녀들의 분위기는 어때?”

츄츄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엄지손가락을 척 들어 올렸다.

나라가 멸망하던 순간, 망국의 공주와 적군의 황태자가 눈이 마주쳤다.

황태자는 어쩐지 공주가 신경 쓰였다.

그래서 황태자는 공주의 목숨을 살려 주는 대가로 그녀를 황궁의 시녀로 데리고 왔다.

공주는 목숨을 부지했다는 것에 감사함을 느끼며 시녀로서 열심히 일을 했다. 황태자는 한 발짝 떨어진 곳에서 공주를 지켜보았다.

공주에 대한 마음이 점점 깊어지는 황태자.

황태자는 결국 참지 못하고 공주에게 제 마음을 고백했다.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당연히 황태자를 밀어낼 줄 알았던 공주가 눈물이 어린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 것이다.

실은 나도 당신을 사랑하고 있었어요. 감히 품어서는 안 될 마음이라 차마 티 낼 수 없었지만…….

동화 같은 이야기에 시녀들은 현혹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다들 모이기만 하면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그 얘기만 하는구먼. 원래 시녀들은 그런 이야기에 사족을 못 쓰잖어.”

옆에 있던 그레이스도 고개를 끄덕였다.

“황족들도 마찬가지야. 다들 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안달이 났어. 황후 폐하의 눈치가 보여서 대놓고 표를 내진 못하지만 말이야.”

물론 딱 한 명, 라일라 황비는 제외였다.

라일라 황비는 황후가 뭐라 하든 말든, 아니, 황후가 뭐라 하니 더더욱 신나게 라시드와 시아나에 대해 떠들고 다니는 중이었다.

[이 얼마나 낭만적이고 아름다운 이야기란 말입니까. 라시드 황태자 전하와 시아나 공주는 꼭 이루어져서 이 칙칙하기 짝이 없는 황궁의 한 줄기 빛이 되어 주셔야 합니다.]

시아나가 눈썹을 내리며 말했다.

“연회 날도 그렇고 라일라 황비마마께 많은 도움을 받았어요.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네요.”

그레이스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런 것 따위 안 해도 돼. 어마마마는 황후 폐하를 골탕 먹이는 것을 생애 최고의 행복으로 여기는 분이니까. 도리어 너에게 고마워할걸?”

그 말에 옆에 있던 안젤리나가 작은 웃음을 터뜨렸다.

“라일라 황비는 정말 대단해요. 어쩜 그렇게 호쾌하실까요? 나는 황후 폐하의 앞에 서서 말을 하는 것만으로 입 안이 바싹 마르던데…….”

안젤리나는 황후의 시련을 제안하는 역할을 맡았다.

정치적인 야망이 전혀 없는 그녀였기에, 구경하던 사람들과 황후는 큰 반발 없이 그녀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의도했던 것을 이루었지만 안젤리나의 얼굴은 어두웠다.

“그나저나 시아나가 황후의 시련을 잘 통과해야 할 텐데 걱정이네요.”

그레이스도 팔짱을 끼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말입니다. 황후의 시련이라고 쓰고 황후의 개고생이라고 읽을 만큼 고약한 난이도로 유명하지 않습니까.”

츄츄가 울상을 지었다.

“하이고, 황태자 전하의 약혼녀 되기 참말로 힘들구만요.”

세 사람은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세 사람을 바라보며 시아나는 아실론드의 공주라는 사실을 밝혔던 날을 떠올렸다.

놀랍게도 세 사람의 반응은…….

[역시 그랬구나.]

—라는 한마디로 끝이었다.

대단한 비밀을 밝히는 것처럼 심장이 콩콩거렸던 시아나가 머쓱해질 만큼 담담한 반응이었다.

“이제부터 고생길이 훤한데 뭐가 좋다고 그렇게 웃고 있어?”

그레이스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리니 세 사람이 시아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사뭇 심각한 얼굴들이었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인 시아나는 큰 걱정이 없었다.

‘내가 의도해서 깐 판인걸. 나름대로 대비를 해 두었어.’

마냥 쉽지는 않을 테지만, 막막할 만큼 어렵지도 않을 것이다.

그래서 시아나는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너무 걱정 마세요. 잘해 낼 테니까.”

신기한 일이었다.

얼핏 졸려 보이기까지 하는 맹한 얼굴이 그렇게 말하는 순간 어떻게든 잘되겠지, 라는 생각이 들다니.

잠시 후, 그레이스가 입꼬리를 올리며 주먹을 내밀었다.

“시아나의 성공을 기원하며 응원 한번 할까요?”

츄츄가 고개를 끄덕이며 솥뚜껑 같은 주먹을 내밀었다. 안젤리나도 수줍은 얼굴로 주춤주춤 손을 내밀었다.

모여 있는 세 개의 주먹을 향해 시아나가 작은 주먹을 가져가 콩, 하고 쳤다.

이 시련을 이겨 내면 시아나는 모두가 인정하는 황태자의 약혼녀가 된다.

* * *

황후의 시련에 임하는 첫날.

시아나는 시녀복을 벗고 드레스를 입기로 했다.

황태자궁의 총괄 시녀 에바가 드레스 입는 것을 도와주었다.

풍성한 치맛자락을 정리해 주는 에바를 바라보며 시아나가 말했다.

“에바 님은 제가 황태자 전하와 교제한다는 것을 밝혔을 때도, 제가 외국의 공주라는 것을 알았을 때도 늘 한결같으시네요.”

그녀는 어떤 상황에서도 바위처럼 반응이 없었다.

에바가 차분한 얼굴로 대답했다.

“저의 본분은 황태자 전하를 편안히 모시는 것뿐입니다. 그 외에는 어떤 일도 신경 쓸 바가 아닙니다.”

얼핏 냉정하게 들릴 수 있는 말이었다.

그러나 에바는 혼잣말처럼 말을 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황태자 전하께 좋은 짝이 생기면 바랄 게 없군요. 요즘처럼 전하께서 행복해하시는 걸 보는 건 처음이니까요.”

“…….”

시아나는 어쩐지 가슴 한편이 간지러웠다.

오늘은 연회에 참석하는 것이 아니기에 장식은 생략하고 단정하게 갖춰 입었다.

방을 나오니 라시드가 시아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라시드가 시아나를 보더니 두 눈을 부드럽게 휘었다.

“오늘도 예뻐.”

눈을 동그랗게 뜬 시아나가 흠, 하고 목을 가다듬으며 대답했다.

“전하도 그래요.”

눈을 마주치며 킥킥 웃은 두 사람이 향한 곳은 황제궁이었다.

궁에 들어서자마자 엄청난 위압감이 감돌았다.

중앙에 황후와 황제, 그 옆에 네 명의 황비가, 그리고 반대편에는 황자와 황녀들이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라시드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시아나와 눈을 마주쳤다.

‘괜찮아요.’

시아나가 빙긋이 웃었다.

라시드가 복잡한 얼굴로 시아나를 바라보다가, 힘겹게 발걸음을 떼 그의 자리로 향했다.

황자들의 맨 앞쪽이었다.

라시드가 자리에 착석한 후, 황후가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 시아나 아실론드 폰 실리테의 황후의 시련을 시작한다. 이 시련을 무사히 통과할 시 그대는 황가의 일원으로서 받아들여지게 될 것이다.”

“예. 최선을 다해 임하겠습니다.”

고개를 숙여 대답하는 시아나를 향해 황후가 말을 이었다.

“반대로 시련을 통과하지 못하면 황가에 어울리지 않는 여인임을 만천하에 증명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해야 할지 알고 있겠지?”

주저 없이 라시드의 곁을 떠나란 말이었다.

라시드가 불쾌한 듯 눈썹을 찡그렸지만, 시아나는 씩씩하게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입꼬리를 비튼 황후가 입을 열었다.

“황후의 시련은 총 세 가지의 시험으로 이루어져 있다. 첫 번째 시련은 황궁의 여인으로서 가져야 할 기본적인 소양을 보는 것이다. 엄격하게 선별한 10명의 황족들에게 예법과 지식을 검증받아야 한다.”

시아나는 10명의 황족들에게 능력을 평가받는 자리를 가졌다.

가장 먼저 예법을 선보였다.

걷기, 인사, 식사, 춤, 화술, 다도, 시 낭독, 자수, 글씨.

두고 보자, 라는 눈빛으로 시아나를 바라보던 10명의 황족은 이내 눈을 크게 뜨고 입을 막았다.

“……정말이지 완벽하군요.”

“공주님이란 말이 사실이었어요.”

어린 시절부터 몸에 익히지 않으면 절대 나올 수 없는 몸놀림이었다.

시아나는 속으로 히죽 웃어 보였다.

‘예법은 자신 있다고요.’

문제는 교양이었다.

교양은 제국의 역사와 문화에 관한 지식을 말하는 것인데, 시아나는 외국인이라 아는 것에 한계가 있었다.

이날을 대비하여 며칠을 밤새워 공부하긴 했지만 한계가 있었다.

시아나는 10명의 황족들이 묻는 질문에 몇 가지를 답하지 못했다.

그러나…….

“교양 점수가 낮지만 예법 점수가 만점이라…… 두 점수를 합치니 아슬아슬하게 합격이구나.”

황후의 말에 시아나는 속으로 만세를 불렀다.

두 번째 시련은 황족들의 마음을 얻는 것이다.

방법은 간단했다.

후궁을 제외한 황족들에게 붉은색 구슬과 파란색 구슬을 나누어 준다. 10일 후, 황족은 시아나에 대해 판단하여 구슬을 상자에 넣는다.

붉은색 구슬은 호, 파란색 구슬은 불호.

두 명 이상의 후보가 경쟁할 때는 붉은색 구슬을 많이 받는 자가 승리하게 되지만, 시아나는 혼자 시련에 임하고 있는지라 붉은색 구슬이 파란색 구슬보다 많으면 시련을 통과한 것으로 인정된다.

황후는 손안에 있는 붉은색 구슬과 파란색 구슬을 매만지며 생각했다.

‘흥, 10일 동안 황족들에게 열심히 꼬리를 살랑거리며 아부를 떨어 보라지. 그래 봐야 망국의 공주, 게다가 지금은 일개 시녀지. 뭘 해도 황족들에게는 격에 맞지 않아 불쾌한 존재일 뿐이야.’

그뿐인가.

황궁을 꽉 잡고 있는 황제와 황후가 시아나를 반대하고 있었다.

제아무리 라시드가 무섭다고 해도 이쪽의 눈치가 더 보일 터였다.

……그러나 그것은 황후의 잘못된 판단이었다.

10일 후, 상자에서 나온 유리구슬은 빨간색이 훨씬 더 많았다.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을 한 황후를 바라보며 시아나는 생각했다.

‘구슬을 넣은 사람들은 말만 같은 황족이지, 결국 황좌를 사이에 둔 경쟁자일 뿐이야.’

그들은 황가에 어울리지 않은 여인에 대한 불쾌감이나 황제와 황후의 눈치를 보는 것보다, 황태자인 라시드가 권력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 여인을 황태자비로 맞는다는 기쁨이 더 컸다.

‘황태자 전하께 턱없이 부족한 내 조건이 도움이 된 셈이지.’

시아나는 복잡한 미소를 지으며 황후를 바라보았다.

황후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어 있었다.

그러나 이내 황후는 표정을 정리했다.

황후가 온화한 얼굴로 모여 있는 황족들을 바라보며 한마디를 내뱉었다.

“그대들의 생각을 잘 알겠네.”

“……!”

그 말에 황족들은 어깨를 조금 움찔하긴 했지만 큰 걱정은 하지 않았다.

구슬은 모두 익명으로 넣었기 때문이다.

‘누가 뭐래도 나는 파란색 구슬을 넣었다고 하면 돼.’

뻔뻔한 거짓말만큼은 자신 있었다.

아무튼 그렇게 세 번째 시련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황후의 시련의 백미라 할 수 있었다.

* * *

황후가 눈을 내리깔며 말했다.

“황태자의 약혼녀는 단순히 황태자의 몸과 마음을 만족시키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추후에 황태자비가 되고 황후가 되어 나라를 다스릴 수도 있다는 말이야.”

무능한 여인에게 결코 그런 중대한 역할을 맡길 수는 없다.

황가의 여인은 영특해야 한다.

그것을 증명하기 위한 시험이었다.

황후가 시아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학계에 엄청난 진보를 가져오는 발견이든, 백성들을 위한 봉사든, 나라 하나를 통째로 사 오든, 그대의 지혜와 용기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좋다. 황가의 모두가 납득할 수 있는 업적을 가지고 오거라. 그것이 황후의 시련의 마지막 관문이다.”

업적.

일개 여인 한 명에게 요하는 것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부담스러운 것이다.

그렇기에 이 시험을 통과하기 위해서 여인은 제가 가진 재력, 인맥, 모든 것을 동원하여 할 수 있는 가장 큰 결과물을 가지고 와야 했다.

시아나는 생각했다.

‘참으로 고약한 시험이야.’

그러나 그렇기에 의미가 있었다.

어려운 만큼, 이것을 해낸다면 오만한 황가의 사람들이 군말 없이 시아나를 인정하게 될 테니까.

시아나는 고개를 숙였다.

“황가의 고귀한 분들을 만족시킬만한 것을 가지고 오겠습니다.”

당돌한 말에 황후의 눈썹이 추켜 올라갔다.

얼마나 대단한 것을 가지고 올지 두고 보마, 라는 눈빛이었다.

* * *

황태자궁 정원. 동그란 테이블에 라시드와 시아나, 솔이 마주 앉았다.

솔이 호쾌하게 웃으며 박수를 쳤다.

“정말 대단하십니다, 시아나 님. 그 어렵다는 황후의 시련을 순식간에 통과하고 이제 마지막 관문만 남았다니요.”

시아나가 눈썹을 내렸다.

“그 마지막 관문이 제일 어려운 걸요.”

게다가 둘 이상의 여인이 경쟁할 때는 상대적으로 훌륭한 쪽의 손을 들어 주는 방식이라 둘 중 하나는 무조건 통과했다.

하지만 혼자 시련에 임하고 있는 시아나는 누구와 비교하지 않고 그 자체로 확실하게 인정받을 만한 성과를 내야 했다.

훨씬 까다로운 상황이었다.

솔이 걱정할 것 없다는 듯 말했다.

“시아나 님의 곁에는 황태자 전하가 있지 않습니까. 무엇이든 원하시는 걸 말씀하시면 전하께서 이루어 주실 겁니다.”

그럼 그럼. 고개를 끄덕인 라시드가 물었다.

“시아나, 어떤 업적을 이루고 싶어?”

마치 ‘어떤 사탕이 가지고 싶어?’라는 느낌으로 물은 라시드가 말을 이었다.

“북쪽 산맥에 잠들어 있다는 드래곤을 잡아 올까?”

“네?!”

시아나가 눈을 크게 떴다.

“최정예 기사단과 마법사들을 모아 원정단을 만들면 잡을 수 있을 거야. 고생을 좀 하긴 하겠지만.”

기가 차다는 듯 흐릿해진 시아나의 눈빛을 본 라시드가 이게 아닌가 싶어 재빠르게 말을 돌렸다.

“아니면 제국의 서쪽과 동쪽을 잇는 도로를 만들까? 이름은 시아나 도로로.”

길을 만드는 것은 엄청난 돈이 들어가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라시드는 가능했다.

라시드에게는 다이아몬드 광산이 있는 영지와 수없이 많은 전쟁을 통해 축척한 천문학적인 재산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내 라시드가 눈썹을 내렸다.

“하지만 도로 건설은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는구나.”

그건 곤란했다.

라시드는 다른 것이 또 뭐가 있을까, 라고 중얼거리며 눈썹을 모았다.

그 모습을 보며 시아나는 하하 웃었다.

‘예상했던 것보다 내 남자의 능력이 대단한 것 같아.’

라시드에게 도움을 받는다면 시아나는 어렵지 않게 이 시련을 통과할 수 있음이 분명했다.

하지만…….

시아나가 말했다.

“전하, 사실 업적에 관해서는 생각해 둔 것이 있어요.”

“그게 뭐야?”

라시드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시아나가 무슨 말을 하든, 하물며 저 하늘 위의 달을 가지고 오고 싶다 해도 들어줄 생각이었다.

그러나 시아나가 내뱉은 말은 라시드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말이었다.

“아실론드 왕국에 다녀오려 해요.”

“……?!”

눈을 크게 뜬 라시드에게 시아나가 말을 이었다.

“그곳에 저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어요.”

시아나가 생각한 업적.

그것은 패망한 나라를 다시 일으키는 것이다.

라시드가 놀란 눈으로 시아나를 바라보더니 중얼거렸다.

“그래서 그랬구나.”

라시드와 정식으로 교제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시아나는 한 가지 부탁을 했다.

아실론드 왕국의 현 상황에 대해 자세히 알려 달라고.

라시드는 시아나가 고향에 대한 그리움 때문에 묻는 줄 알았다.

아니었다.

“황후의 시련을 염두에 두고 물은 거였어.”

라시드의 말에 시아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그 순간 시아나를 보는 라시드의 눈빛에 황홀한 감정이 감돌았다.

라시드가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내일이라도 아실론드 왕국으로 함께 가자. 그곳에서 네가 원하는 것을 다 이루어 주마.”

라시드의 말은 허풍이 아니었다.

아실론드 왕국와 제국은 어린아이와 어른처럼 힘의 차이가 명백했다. 게다가 라시드는 그 제국에서도 권력자로 손꼽히는 남자였다.

라시드는 시아나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녀의 발아래에 가져다줄 수 있었다.

그러나 잔뜩 신이 난 라시드의 얼굴이 무색하게 시아나는 고개를 저었다.

“전하의 도움은 받지 않을 거예요.”

그 순간 반짝거리던 라시드의 얼굴이 돌멩이처럼 굳었다.

시아나가 그런 라시드를 달래듯 날렵한 얼굴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저는 아실론드 왕국을 제 맘대로 좌지우지하고 싶은 게 아니에요. 전하의 옆에 있는 것에 대해 누구도 불만을 토로하지 못하게 능력을 인정받고 싶은 것뿐이죠. 그러려면 온전히 제 힘으로 성과를 내야 의미가 있어요. 그리고…….”

시아나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전하는 아실론드 왕국을 멸망시킨 존재잖아요.”

물론 아실론드 왕국은 썩을 대로 썩어 있던 나라였기에, 라시드가 아니었어도 곧 쓰러졌을 것이다.

그러나 라시드의 손에 의해 실낱같은 왕국의 숨통이 끊긴 것은 사실이었기에, 아실론드 왕국에서는 라시드에 대한 반감이 엄청났다.

그런 라시드에게 도움을 받는다면…….

‘전하는 물론 조국을 멸망시킨 남자를 데리고 와 휘두르는 나에 대한 미움과 원망이 엄청나겠지.’

아실론드 왕국의 국민들에게 존경이나 충성을 바라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게까지 관계가 꼬이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시아나가 말했다.

“그러니 아실론드 왕국에는 저 혼자 갈게요. 전하는 이곳에서 기다려 주세요. 전하의 눈이 이만큼 커다래질 만한 대단한 업적을 가지고 올 테니까요.”

“…….”

라시드는 복잡한 눈빛으로 시아나를 바라보다가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팔을 뻗어 시아나의 허리에 팔을 감은 후 제 품 안으로 쏙 잡아당겼다.

시아나를 품에 안은 라시드가 속상한 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말했다.

“너는 늘 놀랄 만큼 합리적이고 영특하지만…… 영악하지가 않아.”

시아나는 그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시아나가 조금 더 뻔뻔한 성격이었다면 애초에 황후의 시련 따위 치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저 라시드의 품속에 숨어, 그가 두 사람 앞에 놓인 모든 역경과 고난을 물리쳐 주길 기다렸을 테지.

하지만 시아나는 그런 것을 원치 않았다.

시아나가 새침한 얼굴로 말했다.

“이래 봬도 저는 누군가에게 보살핌당하는 것보다 누군가를 보살피는 게 더 취향이랍니다. 부디 저의 즐거움을 존중해 주세요.”

라시드가 멍하니 시아나를 바라보다가 그녀를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도저히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는 듯이.

* * *

……그래도 역시 같이 가는 게 좋지 않을까?

내 신분을 숨기면 되잖아. 내 외모가 눈에 띈다고? 그럼 가면을 쓸게. 그게 더 수상해 보인다고? 그럼 여장이라도 할까.

응? 응? 응?

따위의 말을 줄줄 늘어놓으며 시아나와의 동행에 미련을 놓지 못하는 라시드를 겨우 떼어 냈다.

‘알고는 있었지만 전하는 너무 끈질겨.’

지친 얼굴로 방에 돌아온 시아나는 눈을 크게 떴다.

황태자궁의 총괄 시녀 에바가 방문 앞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무슨 일이세요?”

“시아나 님께 전해 줄 것이 있어 왔습니다. 마침 오셔서 다행입니다.”

에바가 손에 들고 있던 작은 종이봉투를 건넸다.

“아리스 공주님께서 보내신 편지입니다.”

“……!”

그 순간 시아나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갔다.

황후의 시련을 시작하기 전, 시아나는 아리스에게 편지를 보냈다.

라시드와 정식으로 교제를 하게 되었으며 앞으로 그의 옆에 서기 위해 약혼을 하고자 한다.

……그리고 나는 사실 아실론드의 공주다.

—라는 내용이었다.

어느 것 하나 충격적이지 않은 내용이 없었다.

그래서 시아나는 편지를 보낸 후 늘 마음 한편이 무거웠다.

아리스가 시아나에게 배신감을 느낄까 봐, 저를 속인 시아나를 원망하게 될까 봐.

‘충분히 그러실 수 있어. 공주님은 나를 누구보다 신뢰하고 아꼈으니까.’

그러니 시아나는 아리스가 무슨 말을 해도 담담히 받아들이고, 아리스의 마음을 풀기 위해 노력할 작정이었다.

그럼에도 긴장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지라 시아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조심스럽게 편지봉투를 열었다.

편지의 가장 윗줄에 늘 쓰여 있던 달콤한 인사말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왁!!!!!!!!!!!!!!!!!!!!!!>

빼곡한 느낌표로 편지가 시작되었다.

시아나는 귓가에 아리스의 커다란 비명 소리가 들리는 느낌을 받으며 편지를 읽어 내렸다.

<오라버니와 사귄다고? 게다가 약혼까지 할 생각이라고?

시아나, 너 정말 미쳤어? 아니면 마녀에게 조종이라도 당하는 거야?

네가 뭐가 부족해서 오라버니 같은 놈을 선택해?!

오라버니는 할 줄 아는 것이라고는 콩알 같은 애들 먹이 주는 것과 전쟁터에서 칼춤 추는 것밖에 없는 머저리라고!>

공주님, 저 안 미쳤어요. 조종당한 것도 아니고요. 그리고 아무리 그래도 오빠인데 평가가 너무 매정하세요.

냉철한 판단이긴 하지만.

—이라고 생각하며 시아나는 중얼거렸다.

“……그래도 걱정했던 것과 달리 서운해하시는 것 같지는 않네.”

서운함은 일절 느껴지지 않는 대신 라시드에 대한 엄청난 분노가 느껴졌다.

그래서 시아나는 긴장이 조금 풀렸다.

<도대체 왜 오라버니인데! 혹시 그나마 봐줄 만한 겉모습 때문에 그래? 너 은근슬쩍 오라버니를 넋 놓고 쳐다볼 때가 있었잖아.

만약 그런 거라면 딱 7년만 기다려 봐.

그때쯤이면 내가 이 제국에서 최고로 손꼽히는 미녀가 되어 있을 테니까!

반면 라시드 오라버니는 할미꽃처럼 한풀 꺾인 칙칙한 아저씨가 되어 있겠지.>

시아나는 7년 후의 아리스를 상상해 보았다.

장미꽃보다 붉은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고양이처럼 도도한 보라색 눈동자를 빛내는 열일곱 살의 소녀.

이제 막 만개한 꽃처럼 아리스는 싱그럽고 아름답게 빛이 날 것이다.

그 누구라도 넋을 놓고 바라볼 만큼.

‘하지만 공주님의 말과 달리 전하도 크게 달라지지는 않을 거야.’

7년 후면 라시드는 고작 스물다섯 살.

세월의 흐름을 맞기에는 아직 창창한 나이였다.

그러기는커녕 지금보다 성숙한 어른의 여유가 흘러 훨씬 더 위압적이고 매혹적인 남자가 될 테지.

열일곱 살의 아리스와 스물다섯 살의 라시드가 나란히 있는 모습을 떠올린 시아나는 저도 모르게 비명을 내질렀다.

“꺅!”

상상만 해도 얼굴에 열이 올랐다.

시아나는 손으로 부채질을 하며 중얼거렸다.

“진정하자, 진정해.”

시아나는 후우, 하고 크게 숨을 내쉰 후 다시 편지지를 읽어 내렸다.

<아니면 너, 황금의 왕관이 탐나는 거야? 만약 그런 거라면 더더욱 오라버니를 택할 이유가 없어.

내가 오라버니를 밀어내고 그 자리를 꿰찰 테니까.

내가 황제가 되면 나의 황금 왕관을 너에게 씌워 줄게.

그러니까 나를 택해, 시아나.>

진담인지 농담인지 구분되지 않는 말에 시아나는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을 지었다.

시아나는 곤혹스러운 얼굴로 눈동자를 아래로 내렸다.

<—라고 말하고 싶지만…… 나보다는 오라버니 쪽이 황제가 될 가능성이 높겠지? 어디까지나 지금으로서는 말이야.>

편지는 다음 장으로 이어졌다.

첫 장에는 아리스의 성난 감정을 대변하듯 휘날렸던 글씨체가 조금 차분해져 있었다.

<어제 메디치안 후작가의 가주 후보들을 만나고 왔어. 할마마마와 애매모호한 대화를 하며 뭉그적거리는 그들에게 대놓고 물었어.

당신을 메디치안 후작으로 만들어 주면 내게 무엇을 줄 수 있냐고.

처음에 그들은 할마마마의 사랑을 듬뿍 받는 어린 공주가 철없이 군다며 정색을 하거나 코웃음을 쳤어.

하지만 나와 눈을 마주치는 시간이 길어지자 점점 표정을 바꾸었어.

마치 할마마마를 보는 것처럼.

나는 그들 중 내게 가장 많은 것을 줄 수 있는 자를 뽑아 메디치안 후작가의 가주로 만들 거야.

그리고 함께 동부를 장악하여 힘을 키울 거야.

황제도, 황태자도, 그 누구도 나를 무시하지 못할 만큼.>

아직 어린 나이가 여실히 느껴지는 동그란 글씨체에는, 여느 어른에게서도 느낄 수 없는 강력한 의지가 느껴졌다.

편지가 이어졌다.

<그러니 기다려, 시아나.

네가 황태자의 연인이든 약혼녀든…… 설령 황후가 되어도 상관없어.

나는 너를 다시 빼앗아 올 거야.

네 심장의 도둑(이 될 예정인) 아리스. >

시아나는 곤란하단 얼굴로 편지를 어루만졌다.

편지에는 결국 시아나가 공주였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일말의 언급도 되어 있지 않았다.

그런 것은 조금도 관심이 없다는 듯이.

그저 시아나에 대한 아리스의 절절하고 탐욕스러운 사랑이 가득할 뿐이었다.

시아나는 중얼거렸다.

“못 본 사이에 정말로 로맨스 소설 속 남자주인공이 다 되어 버렸네, 우리 공주님.”

늘 귀엽기만 했던 아리스의 말에 처음으로 심장이 콩콩 뛰었다.

물론 라시드에게는 절대 비밀이었지만.

* * *

다음 날, 시아나는 바로 아실론드로 떠날 준비를 시작했다.

라시드가 말했다.

“채비하는 것이라도 돕게 해 줘.”

라시드가 직접적으로 도움을 주는 것은 거절했으나, 이 정도는 도움을 받아도 될 것 같아 시아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게 뭐죠?”

눈을 커다랗게 뜬 시아나의 앞에 있는 것은 거대한 마차였다.

그것도 새하얀 산호와 번쩍이는 황금으로 치장한 호사스럽기 짝이 없는 마차.

라시드가 두 눈을 부드럽게 휘며 말했다.

“제국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손꼽히는 마차야. 제국 최고의 예술가이자 목수인 레오샤르세가 만들었지.”

“…….”

“겉모습만 훌륭한 게 아니야. 푹신한 거위 털을 누빈 후 부드러운 소가죽으로 감싼 의자, 아무리 거친 땅이라도 부드럽게 굴러 가는 바퀴 덕분에 오랜 시간 마차를 타도 엉덩이가 아플 틈 없이 안락하단다.”

뿌듯한 얼굴로 말하는 라시드를 보며 시아나가 두 손을 짝 마주치며 말했다.

“우와, 정말 대단해요! 이 마차를 타면 조금만 외곽에 나가도 숨어 있던 도적떼들이 ‘이얏호, 끝내주는 먹잇감이 왔다’ 하고 소리치면서 달려들 것 같아요!”

“…….”

라시드는 시아나가 한 말의 의미를 대번에 알아챘다.

먼 길을 여행하기에 너무 눈에 띈다는 말이었다.

그러나 라시드는 바보가 아니었다. 그도 다 생각해 둔 것이 있었다.

라시드가 엄지와 검지를 마주쳐 탁, 하고 소리를 냈다. 이내 시아나의 눈이 아까보다 더 커졌다.

쿵쿵쿵쿵, 하는 엄청난 발소리와 함께 새까만 갑옷으로 무장한 기사단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기사단을 바라보며 라시드가 말했다.

“내가 가장 신뢰하는 기사단이야. 이들이 경호를 한다면 그 어떤 도적떼도 네 머리카락 한 올도 건드릴 수 없을 거야. 그러니 안심해, 시아나.”

“…….”

라시드의 말대로 저들을 데리고 다니면 도적이나 산적은 찍소리도 내지 않고 숨어 있을 것 같았다.

‘다만 들르는 마을마다 적군이 쳐들어왔다며 난리를 칠 것 같지만.’

그만큼 어마어마한 숫자에 흉흉한 기운이 느껴지는 기사단이었다.

시아나는 작은 한숨을 내쉬며 라시드를 바라보았다.

“전하, 저는 최대한 조용히 다녀올 생각이에요. 그러니 저것들은 모두 제게 너무 부담스러워요.”

시아나의 단호한 말에 라시드가 대번에 실망한 얼굴을 했다. 그런 라시드를 위로하듯 시아나가 말했다.

“전하가 주는 걸 받지 않겠다는 게 아니에요.”

시아나는 라시드에게 제가 바라는 것을 상세하게 말했다.

마차는 누가 봐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할 만큼 수수한 겉모습이면 된다.

대신 오랜 시간 마차를 탈 예정이니 안은 최대한 안락하게 꾸미고, 바람처럼 빠르게 달릴 수 있는 말과 마부를 준비했다.

시아나는 한결 평범해진 마차를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이 정도면 충분해요.”

반면 라시드의 얼굴은 썩 탐탁지 않아 보였다.

마음 같아서는 밋밋하기 짝이 없는 마차에 눈부신 보석과 화사한 꽃을 달아 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시아나가 아까처럼 흐린 눈을 할 것을 알기에 욕망을 꾹 참고 물었다.

“그럼 기사단은 어쩔 생각이야? 설마 데려가지 않겠다는 건 아니겠지?”

그것만큼은 절대 양보할 수가 없었다.

사실 라시드는 시아나가 황궁을 떠나는 것이 불안해 미칠 지경이었다.

혹여 사고가 나서 다치기라도 하면 어쩌지, 못된 놈을 만나 납치라도 당하면 어쩌지.

“실실 웃으며 달콤한 사탕을 흔드는 사기꾼에게 홀릴 수도 있어. 황궁 밖은 무서운 곳이니까.”

라시드의 심각한 얼굴을 향해 시아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모르는 사람을 쫄쫄 따라갈 만큼 순진하지는 않지만 전하의 걱정은 충분히 이해가 돼.’

여자 혼자 긴 여행을 떠나는 것은 여러모로 위험 요소가 너무 많았다.

그래서 시아나도 호위를 물릴 생각은 없었다.

“다만 이만큼 어마어마한 숫자는 필요 없어요. 아실론드 왕국을 점령하러 가는 것이 아닌걸요. 제 몸을 지켜 줄 수 있는 인원이면 충분해요.”

다행히 라시드는 ‘싫어! 다 데려가!’라며 드러누워 발버둥 치지 않았다.

“……알겠어. 그럼 기사단 중에서도 실력이 좋은 이들을 뽑아 동행시키도록 할게.”

“부디 그렇게 해 주세요.”

그렇게 마차와 호위 기사 문제는 일단락되었다.

물론 라시드의 도움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지만.

라시드는 시아나를 황태자궁 안쪽에 있는 방으로 데려갔다.

방에 들어선 시아나는 헉, 소리를 지르며 입을 막았다.

방 안에는 검, 화살, 도끼, 창, 채찍 등등……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무기가 준비되어 있었다.

시아나가 난생처음 보는 무기도 있었다.

‘도대체 이건 어떻게 쓰는 거지?’

철봉과 철봉이 사슬로 연결된 무기를 들고 빙글빙글 돌리는 시아나를 향해 라시드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아무리 호위 기사가 있다고 해도 어떤 위험한 순간이 올지 몰라. 그때를 위해서 호신용 무기는 하나 가지고 있는 것이 좋아.”

시아나는 라시드의 말에 강력하게 동의했다.

테이블 위에 놓인 무기들을 신중하게 살피던 시아나는 팔을 쭉 뻗어 작은 검 하나를 잡았다.

“이게 좋겠어요. 제 손에 딱 맞아서 잡고 휘두르기 편할 것 같아요.”

“하지만 칼날이 작고 얇아 살상력이 약할 텐데.”

“칼날에 맹독을 묻히면 되지 않을까요?”

“좋은 생각이야. 스치기만 해도 목숨을 앗아 가는 독을 묻혀 줄게.”

“참, 혹시 모르니 해독제는 따로 챙겨 주세요.”

뒤편에서 두 사람을 지켜보던 호위 기사 솔은 왠지 정신이 아득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평소에는 전하만 제정신이 아닌 것 같은데, 저럴 때 보면 두 분 다 똑같이 제정신이 아니라니까.’

* * *

“드디어 끝났다!”

시아나는 방 안에 있는 침대에 풀썩 쓰러졌다.

요 며칠 먼 길을 떠날 준비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뭐 하나를 해도 도통 소박하게 할 생각이 없는 라시드를 말리느라 더더욱.

“……드디어 내일이면 황궁을 떠나는구나.”

오랜만에 돌아가는 고향이었음에도 아무런 감정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불편한 친척집에 찾아가듯 가슴 한편이 묵직하기만 했다.

그것이 시아나를 씁쓸하게 만들었다.

그러던 중 똑똑, 하고 노크 소리가 들렸다.

문을 연 시아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문밖에 라시드가 서 있었다.

두 사람이 교제 중이긴 했으나, 대부분의 만남은 라시드의 방이나 황태자궁의 정원에서 이루어졌다.

이런 식으로 라시드가 시아나를 찾아온 일은 거의 없었다.

그것도 이런 늦은 밤에.

시아나가 놀란 얼굴로 라시드의 손을 잡아끌었다.

“일단 들어오세요.”

철저하게 보안이 되는 라시드의 방과는 달리 시아나의 방은 사람들에게 노출이 될 위험이 컸다.

쿵.

문을 닫은 시아나가 라시드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무슨 일로 여기까지 오셨어요?”

혹시 깜빡하고 챙겨 주지 않은 것이 있어서 왔나, 라고 생각하는 시아나를 향해 라시드가 말했다.

“……내일 나도 같이 가면 안 돼?”

“…….”

시아나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라시드의 얼굴이 꼭 나를 두고 가지 말라고 낑낑거리는 강아지처럼 필사적이어서.

그래요, 우리 함께 가요!

—라는 대답이 튀어 나갈 뻔했다.

그러나 시아나는 그런 마음을 꾹 참으며 힘겹게 말했다.

“마음 같아서는 저도 그러고 싶어요. 하지만 몇 번이나 이야기했듯이 저 혼자 가야 의미가 있어요. ……그리고 제가 없는 동안 전하도 할 일이 많잖아요.”

시아나가 떠난 후에도 라시드는 팔자 좋게 시아나 타령을 하며 흐물거릴 수 없었다.

황후를 비롯한 누구라도 시아나의 여정을 방해할 수 없도록 막아야 했기 때문이다.

또한, 현재 반쯤 넘어온 앙겔루스 공작가를 완전히 제 편으로 만든 후, 그것을 기반으로 다른 귀족 가문들을 하나하나 포섭해야 했다.

라시드가 독자적인 힘을 갖기 위해 꼭 필요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라시드가 괴로운 얼굴로 시아나를 품에 꼭 안으며 말했다.

“너를 잠시라도 보지 못할 걸 생각하면 무서워.”

“…….”

매일, 매시간, 노래하듯 맑은 목소리가 듣고 싶고, 따스한 온기가 감도는 이 작은 몸을 안고 싶을 테지.

그걸 어떻게 참을 수 있을까.

벌써부터 이토록 두렵고 힘겨운데…….

시아나를 안은 라시드의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아름다운 보라색 눈동자는 금방이라도 눈물이 뚝 떨어질 것처럼 서글퍼 보였다.

그 모습에 시아나의 심장 한편이 찌릿찌릿해졌다.

‘아마 전하는 모를 거야. 내가 얼마나 무서운 여자인지.’

제국에서 가장 강인한 남자가 이토록 여린 모습을 보여 줄 때, 시아나의 가슴에는 안쓰러움과 동시에 사랑스러운 마음이 가득 찼다.

이 사람은 내가 없으면 안 되는구나.

그것이 시아나의 마음을 벅차게 만들었다.

시아나가 라시드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속삭였다.

“그래도 함께 갈 수는 없어요.”

“…….”

예상했던 말임에도 상처가 되었는지, 라시드의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은빛 속눈썹을 어루만지며 시아나가 말을 이었다.

“대신 전하께서 힘차게 저를 기다릴 수 있게 선물을 하나 줄게요.”

“……?”

선물이라는 말에 라시드가 기민하게 반응했다.

눈을 반짝이는 라시드를 바라보며 시아나가 까치발을 들었다.

이내 라시드의 눈이 커다래졌다.

그녀의 작은 입술이, 그의 입술 위에 닿은 것이다.

꼭 천사가 만든 푸딩처럼 탱탱하고 부드러웠다.

그리고 거기에서 끝이 아니었다.

살짝 벌어진 입 안으로 앞선 느낌보다 훨씬 부드러운 것이 들어왔다.

라시드의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 * *

다음 날, 호위 기사 솔이 시아나의 귓가에 속삭였다.

“시아나 님, 전하께 또 무슨 짓을 하신 겁니까?”

시아나가 어깨를 움찔거렸다.

대답하지 않는 시아나를 보며 솔이 말을 이었다.

“오늘 아침 전하의 방에 가 보니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침대 위에 누워 계시더군요. 한숨도 주무시지 못하신 것 같았습니다. 침대에 머리만 대면 잠이 드시는 분이 말입니다.”

그뿐인가.

몇 번을 불러도 반응이 없어 솔은 혹시 라시드가 눈을 뜨고 기절한 것은 아닌가 걱정했다.

숨을 쉬고 있는 것을 확인하려고 코밑에 손가락을 대는 솔을 향해 라시드가 이렇게 말했다.

“‘솔, 이 세상이 너무나 아름답구나. 너의 그 단순하고 무식한 얼굴조차 오늘은 제법 사랑스러워’라고요.”

라시드의 목소리를 흉내 낸 솔이 끔찍한 기억을 떠올린 듯 거대한 몸을 으스스 떨었다.

더 끔찍한 것은 라시드의 만행이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솔, 천사가 만든 푸딩을 입 안에 넣어 본 적이 있느냐? 혹은 여신이 재배한 포도 알을 먹어 본 적이 있어? 나는 안다, 이제 알아. 정말로 부드럽고 달콤하단다……’ 따위의 징그러운 소리를 늘어놓으셨단 말입니다!”

솔은 고통스러운 얼굴로 귓가를 막았다.

라시드의 말 때문에 썩은 귀가 아직도 원상 복귀되지 않은 것 같았다.

괴로워하는 솔을 보며 시아나는 차마 할 말이 없었다.

‘사실은 어젯밤 제가 참지 못하고 전하의 입술을 덮쳐 버렸답니다.’

—라는 말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시아나는 자기 때문에 고생한 솔에 대한 미안한 마음에, 그 거대한 등을 토닥여 주었다. 아니, 토닥여 주려 했다.

등에 손을 대는 순간 솔이 창백한 얼굴로 ‘히이익! 이게 무슨 짓입니까! 기어코 전하께 제 목이 달아나는 걸 보고 싶으신 겁니까!’라며 뒷걸음질을 쳐 실패해 버렸지만.

“……죄송합니다.”

시아나가 공중에서 어색하게 멈춘 손을 내리며 사과했다. 솔은 그 사과를 받아들였다.

“다음부터는 제발 조심해 주십시오. 저는 코끼리 같은 아내를 맞이하여 백 살 때까지 사는 것이 꿈이란 말입니다.”

“그럴게요.”

시아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이렇게 희희낙락하며 수다를 떨 틈이 없었다. 오늘은 시아나가 아실론드 왕국으로 떠나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솔이 말했다.

“여행 채비는 완벽하게 갖추었으니 이제 가시면 됩니다.”

시아나가 맞잡은 손가락을 꾸물거리며 물었다.

“전하는…….”

“걱정 마십시오. 절대 방을 빠져나오실 수 없게 조치를 해 두고 나왔으니까요.”

라시드는 시아나를 따라가고 싶은 마음을 참기 힘들 것 같다며, 솔에게 자신을 막아 달라고 했다.

주군의 말이라면 무엇이든 따르는 충성스러운 부하인 솔은 라시드의 몸을 쇠사슬로 칭칭 감아 버렸다.

솔이 말했다.

“온 힘을 다해 묶었으니 제아무리 괴물 같은 전하라도 절대 빠져나오실 수 없을 겁니다.”

“……솔 님, 입꼬리가 올라갔어요.”

“헛, 그만 본심이.”

당황한 얼굴로 중얼거린 솔은 가까스로 표정 관리를 하며 말을 이었다.

“어서 떠나십시오. 시아나 님이 수도를 나간 후에야 전하를 풀어드릴 수 있으니까요.”

“…….”

시아나는 라시드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떠나는 것이 너무나 아쉬웠다.

그러나 제 몸을 묶으면서까지 저를 보내 주려는 라시드의 마음을 알기에 시아나는 씩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다녀올게요.”

몸을 돌린 시아나의 등 뒤로 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부디 원하는 것을 모두 이루고 오십시오, 시아나 님. 오매불망 시아나 님을 기다릴 전하를 위해서라도.”

시아나는 주먹을 번쩍 들어 화답했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황궁을 나간 시아나가 향한 곳은 궁 근처의 숲이었다.

그곳에는 라시드가 시아나를 위해 준비한 것이 기다리고 있었다.

겉은 투박하지만 안은 섬세하게 꾸며진 튼튼한 마차와 번개처럼 빠른 다리를 가진 말, 솜씨 좋은 마부.

그리고…….

시아나가 눈을 크게 떴다.

따뜻한 햇볕과 초록 나뭇잎 아래에 듬직한 두 여인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츄츄와 그레이스였다.

시아나가 눈을 깜빡거리며 말했다.

“어떻게 여길…….”

츄츄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며칠 전 전하께서 찾아오셔서 함께 가 달라고 부탁하셨구먼.”

그레이스가 쿡쿡 웃으며 말했다.

“시아나 혼자 보내기가 영 걱정스럽다고 말이야. 오라버니의 그런 얼굴은 처음 봤어.”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시아나는 당황했다.

“하지만 아실론드 왕국에 다녀오는 건 하루 이틀 걸리는 일이 아니에요. 두 분 다 그렇게 오래 황궁을 비우면 안 되잖아요.”

그러나 걱정 섞인 시아나의 말과 달리 그레이스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대답했다.

“문제없어. 어마마마께 허락받았으니까.”

“예?!”

“말했잖아. 어마마마는 네 편이라고. 네가 대단한 업적을 가지고 와서 황후 폐하께 한 방 먹일 것을 얼마나 기대하고 있는지 몰라.”

“…….”

그래, 그레이스는 그렇다고 치자.

보호자의 허락이 있다면 황녀의 외출은 큰 문제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츄츄는?

“츄츄 넌 정식 시녀가 된 지 얼마 안 된 하급 시녀잖아.”

황궁의 시녀는 외출서를 작성하여 황궁 밖에 나갔다 올 수 있긴 했다.

하지만 그 날짜가 너무 길어지면 성실하지 못하다는 낙인이 찍힌다.

그렇게 되면 앞으로의 승진에 영향을 끼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재수 없으면 그것을 책잡혀 시녀직에서 해고당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츄츄가 전혀 문제없다는 듯 웃었다.

“걱정 말어. 나는 친구를 쫓아가는 것이 아니라 모시는 공주님의 시중을 들기 위해 궁 밖을 나가는 것뿐이니께. 휴가를 낸 게 아니니 다른 시녀님들에게 찍힐 일도 없고 급여도 따박따박 나오는구먼.”

그레이스와 츄츄가 의기양양하게 시아나를 바라보았다.

‘이제 됐지?’라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하나 더 남아 있었다.

“가는 길이 많이 고될 거예요. 위험한 상황에 마주칠 수도 있어요.”

시아나는 나름 심각하게 말했건만 츄츄와 그레이스는 푸핫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츄츄가 시아나의 동그란 머리통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런 걱정은 우리가 할 게 아니라 네가 해야지. 누가 봐도 네 쪽이 훨씬 쪼그맣고 힘도 약하잖여.”

그레이스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게다가…….”

그레이스가 저쪽 어딘가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이봐, 어서 나와 봐.”

“……?!”

“안 나오면 시아나의 이마에 꿀밤을 꽁 때려 버린다?”

그 말이 농담이 아니라는 듯, 그레이스는 엄지와 중지를 모아 시아나의 동그란 이마에 가져다 대었다.

그 순간, 수풀 속에서 덩치 큰 이들이 우르르 튀어나오더니 시아나를 감쌌다.

순식간에 사람들 사이에 둘러싸인 시아나는 황당한 표정이 되었다.

“이게 대체…….”

놀란 시아나와 달리 그레이스는 예상했다는 듯 중얼거렸다.

“이럴 줄 알았어. 그 라시드 오라버니가 너를 그냥 보낼 리가 없지.”

그레이스가 시아나를 감싼 이들을 바라보며 물었다.

“어떤 기사단에 소속되어 있는 기사들이지? 홍염 기사단? 물보라 기사단?”

시아나를 둘러싼 기사 중 한 명이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그레이스를 바라보다가 대답했다.

“블랙 쉐도우 기사단입니다.”

그 말에 내내 여유로웠던 그레이스가 눈을 크게 뜨더니 우와, 하고 감탄을 내뱉었다.

“라시드 오라버니가 가진 수많은 기사단 중에서도 최고의 실력을 가진 이들만 모여 있다는 그 블랙 쉐도우 기사단? 기사 한 명당 천 명의 병사를 벨 수 있다는 그 블랙 쉐도우 기사단 말이야?!”

아름다운 공주님이 저토록 상기된 얼굴로 띄워 주니, 아무리 무뚝뚝한 기사들이라도 입술 끝이 실룩일 수밖에 없었다.

그레이스가 흥분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게다가 그런 기사단의 기사가 무려 열 다섯 명이라니! 이 정도면 어디를 가도 안전하겠어.”

기사 한 명이 기쁨을 참지 못하고 반응해 버렸다.

“응당 맞는 말씀입니다. 세 분께서 여행하시는 동안 저희 블랙 쉐도우 기사단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철저하게 호위를 할 테니, 안전에 관해서는 털끝만큼도 걱정 마시고 마음 편히 지내십시오.”

원하는 말을 들은 그레이스가 씨익 웃으며 시아나를 바라보았다.

시아나는 할 말이 없었다.

‘전하께서 호위 기사를 붙인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저 정도로 대단한 기사들을 붙였을 줄이야.’

시아나는 결국 눈썹을 내리며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함께 가요.”

“야호!”

시아나의 말에 츄츄와 그레이스가 커다란 손을 짝, 소리가 나게 마주쳤다. 그러고는 신난 얼굴로 마차에 짐을 옮기기 시작했다.

시아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작은 가방 하나가 끝이었던 시아나와 달리 그레이스의 가방이 엄청나게 거대했기 때문이다.

마차의 짐칸에 도저히 들어가질 않아 마차 위에 올려 고정시켜야 할 정도였다.

‘짐이 꽤 많으시네. 드레스를 여러 벌 챙겨 넣으셨나?’

그러나 그것은 그레이스에 대해 잘 알지 못한 것이다.

시아나가 가방 속에 든 물건의 정체를 안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 5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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