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나약한 왕자님과 강인한 공주님 (2)
* * *
루비궁.
아리스는 시아나와 마주 앉아 있었다.
아리스에게 황태후가 한 말을 전해 들은 시아나는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메디치안 후작가라니. 황태후마마께서 정말 대단한 선물을 공주님께 주시려고 하시네요.”
“……메디치안 후작가라는 곳이 그렇게 대단한 곳이야?”
아리스는 아직 정세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지라 상황 파악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시아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동부에서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대귀족가예요. 제국 전체를 통틀어도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곳이고요.”
그래서 타국의 공주인 시아나 또한 그 이름을 알 정도였다.
시아나는 아리스가 황태후에게 받아 온 서류를 건네받았다.
황태후가 아리스를 위해 메디치안 후작가에 대해 정리한 서류였다.
아리스가 읽기에는 어려운 글자가 많고 내용이 복잡하여 시아나가 대신 읽어 주기로 한 것이다.
서류를 다 읽은 시아나가 말했다.
“……이런 상황이라 황태후 마마께서 공주님께 그런 제안을 하시게 된 거군요.”
옆에서 기다리고 있던 아리스가 재촉했다.
“뭔데, 자세히 말해 줘.”
시아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아리스에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동부의 명문가 메디치안 후작가의 가주는 황태후의 친남동생이었다.
그러나 얼마 전 그가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문제는 메디치안 후작가에 적합한 후계자가 없다는 것이다.
죽은 메디치안 후작은 슬하에 자식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후작가의 방계 가문에서 가문을 잇겠다는 자들이 나타났다.
그 수가 모두 넷.
후작위를 둘러싼 후계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시아나의 말에 아리스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황태후마마께서 메디치안 후작 가에 복귀하시면 어떻게 될까요?”
황태후는 황제와 결혼했지만, 메디치안의 성을 버리지 않았다. 그건 곧 황태후가 현재 메디치안 가의 유일한 직계 혈통이란 말이었다.
아리스가 황당하단 얼굴로 말했다.
“설마 할마마마께서 지금 와서 메디치안 후작이 된다는 건 아니지?”
“……황태후마마께서 원하신다면 가능하긴 해요. 어쨌건 황태후마마는 방계 가문에서 나온 이들보다 훨씬 적합한 혈통을 가진 후계자니까요.”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정론을 따졌을 때의 일.
황태후는 황제와 사이가 멀어져 이빨 빠진 호랑이가 된 지 오래인 데다가 나이도 너무 많았다.
그녀가 가주가 된다고 나선다면, 노망난 노인네가 친정에 찾아와 횡포를 놓는다며 엄청난 비난만 받을 것이 뻔했다.
목적을 이룰 수 없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아리스가 눈썹을 모았다.
“그럼 할마마마께서 동부로 가 봤자 적만 생긴다는 거잖아.”
그러나 시아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제가 방금 말한 것은 어디까지나 황태후마마께서 후계 전쟁에 직접 뛰어들 경우의 이야기예요. 만약 황태후마마께서 간접적으로 후계 전쟁에 뛰어든다면 어떻게 될까요.”
“도대체 그게 무슨 말인데!”
더 쉽게 말해 달라는 아리스에게 시아나가 설명을 덧붙였다.
“현재 방계 가문에서 나온 네 명이 후계 전쟁 중이에요. 그 네 명의 힘은 비등비등한 상태죠. 그런 상태에서 황태후마마가 끼어들어 이중 한 명의 손을 들어 준다고 하면…….”
그제야 시아나가 말하는 것의 의미를 깨달은 아리스가 눈을 크게 떴다.
시아나가 눈을 빛냈다.
“그래요. 황태후 마마에게 선택받은 자는 순식간에 나머지 세 명을 짓밟고 올라설 수 있을 거예요. 황태후마마께서 메디치안 후작가의 킹메이커가 되시는 거죠.”
“……!”
“비록 많은 권력을 잃기는 하셨으나 황제의 친모이신 데다가 메디치안 후작가의 적통인 황태후마마에게는 그럴만한 힘이 있어요.”
그것이 황태후의 수였다.
“아마 황태후마마께서 동부에 가시면 후계 전쟁 중인 네 명을 만나 까다롭게 평가하실 거예요. 그리고 이 중 아리스 공주님께 가장 도움이 될 자를 골라 그분을 지지해 주시겠죠.”
“…….”
아리스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어린 소녀는 생각지도 못했던 수였기 때문에.
하지만 아리스가 놀란 것은 그 때문만이 아니었다.
아리스가 말했다.
“……왜? 할마마마께서 왜 그렇게 하려는 건데?”
황태후는 사람들과 얽히는 것을 지독히 싫어했다. 그래서 그나마 있던 권력도 버리고 별궁에 가 지냈던 것이 아니었던가.
오로지 자신의 평온한 삶을 위하여.
그런 그녀가 후계 전쟁이 발발한 곳까지 가며, 아리스에게 힘을 만들어 주려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시아나가 눈썹을 내리며 복잡한 얼굴로 말했다.
“메디치안 후작이 갑작스럽게 사망을 했다고 했죠. 사망 원인은 바로 심장마비였어요.”
“……!”
“그 소식을 듣고 황태후마마도 초조해지신 거겠지요. 마마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을 하시는 건지도 몰라요.”
황태후는 어린 손녀에게 줄 수 있는 것을 모든 것을 해 주고 싶은 것이다.
제 삶이 다하기 전에.
시아나가 한 말의 의미를 깨달은 아리스는 뭐라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시아나는 말없이 그런 아리스를 쳐다보았다.
아리스가 황태후를 따른 것은 다분히 계획적인 일이었다.
궁에 의지할 곳이라곤 없는 아리스가 저를 보호해 줄 한 자락 힘을 얻기 위하여.
계획은 성공했고 황태후는 아리스의 든든한 뒷배가 되어 주었다.
그리고 지금 황태후는 아리스가 원했던 것보다 더 대단한 힘을 주려는 것이다.
아리스로서는 분명 기뻐해야 할 일이었다.
하지만…….
아리스의 얼굴은 일그러져 있었다.
당혹과 슬픔이 뒤섞인 눈빛이었다.
시아나가 조심스럽게 다가가 아리스를 품에 안았다.
“괜찮으세요?”
“……당연히 괜찮지. 내가 괜찮지 않을 게 뭐 있어.”
“…….”
“고약한 할망구가 내게 홀라당 넘어가서 다 준다잖아. 내가 이렇게 못된 계집애인지도 모르고.”
“…….”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는 아리스를 향해 시아나는 서글픈 얼굴로 웃었다.
고작 열 살의 소녀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벅찬 감정과 현실이었다.
시아나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아리스의 작은 등을 토닥여 주는 것뿐이었다.
“공주님이 원하는 대로 하세요.”
라는 작은 속삭임과 함께.
* * *
며칠 후 아리스는 황태후를 찾아갔다.
다행히 황태후는 쓰러졌던 날보다는 혈색이 좋아져 있었다.
“함께 동부로 갈게요.”
아리스의 말에 황태후가 안도한 얼굴로 말했다,
“정말 잘 생각했다.”
“…….”
“메디치안 후작가를 네 편으로 만들면 이제 누구도 너를 무시할 수 없을 거야. 내가 그렇게 만들어 주마.”
황태후는 웃었다.
아리스에게 힘이 되어 줄 수 있어 더할 나위 없이 기쁘다는 듯이.
아리스는 그 모습을 보며 일그러진 얼굴로 웃었다.
‘……바보 같은 할망구. 내게 이용당하는지도 모르고.’
아리스는 황태후가 주는 것을 다 받은 뒤, 황태후가 죽기 직전 제 안에 있는 진실을 말할 생각이었다.
‘나는 사실 당신을 끔찍하게 싫어했어.’
라고.
아리스는 제가 가진 황태후에 대한 미움을 없애지 못했다.
아직까지는 그랬다.
그러나 5년 후…… 메디치안 후작가에 있는 작은 방.
어엿한 레이디로 성장한 아리스의 얼굴은 일그러져 있었다.
충격적인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황태후가 메디치안 가의 후계 전쟁에 끼어들기 위해 황태후의 직위를 버렸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황태후가 죽음을 목전에 둔 순간에도 황궁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황태후로서 받아야 할 모든 특혜가 사라진 채, 메디치안 후작가 저택 한편에서 죽음을 맞이해야 했다.
아리스가 떨리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왜 그런 선택을 한 거예요!”
황태후는 바짝 마른 입술로 말했다.
“어쩔 수 없었다. 메디치안의 성을 온전히 쓰기 위해서는 황실의 성을 버려야 했으니까. 제아무리 유일한 직계 혈통이라도 다른 성을 가진 이가 가문을 휘두를 수는 없지 않느냐.”
“…….”
아리스의 일그러진 얼굴을 바라보며 황태후가 살며시 웃었다.
“그런 얼굴 하지 말래도. 나는 황실의 성에 조금의 미련도 없어. 그 성을 받은 후로 나는 행복한 적이 없으니까.”
황후가 된 후 황태후는 내 자식을 어떻게 황제로 만들까만 고민해야 했다.
그 결과는 참혹했다.
제대로 보살피지 못한 딸은 죽었으며, 아들은 저를 몰아붙이기만 한 어미가 지긋지긋하다며 적이 되었고, 남편과는 진작 남보다 더 냉랭한 사이가 되었다.
황태후는 철저히 혼자였다.
……사람들이 싫어 별궁에 들어간 여인은 사실 끔찍하게 고독했다.
그런 황태후의 옆에 한 소녀가 나타났다.
붉은 머리카락과 보라색 눈동자를 한 작은 소녀.
[할마마마.]
저를 부르며 웃기도 하고, 화내기도 하는 싱그러운 소녀.
황태후는 어느덧 아름다운 숙녀가 된 소녀를 바라보며 주름진 눈을 휘었다.
“그래도 너를 만난 후에는 지옥 같던 황궁에서의 생활이 즐거웠다.”
“…….”
“고맙다, 아리스.”
황태후의 목소리가 가늘었다.
누구라도 이제 곧 그녀의 생명이 끝나리라는 것을 알 수 있을 만큼.
아리스는 입술을 깨물었다.
오래전 결심한 것이 있었다.
황태후가 죽기 직전 귓가에 속삭여 주리라.
‘당신은 내 엄마를 죽게 내버려 두었어요.’
‘당신은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날 내버려 두었어요.’
‘당신은 겨우 찾아간 나를 보고 딸의 모습만 찾으려 했어요.’
‘나는 사실 당신이 미워요.’
하지만…….
도저히 말할 수가 없었다.
생명이 다하는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까지, 저를 위해 모든 것을 준 늙은 여인에게 그런 모진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아리스가 눈물이 어린 얼굴로 웃었다.
“저도 할마마마를 만나 다행이었어요.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할머니.”
“…….”
황태후의 흐릿한 눈이 살짝 커졌다.
이내 그녀는 주름진 눈으로 웃었다. 눈초리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다.
“아리스, 너는 정말 착한 아이야.”
그렇게 황태후는 인생의 마지막에서 유일하게 사랑했던 손녀의 앞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그러나 그것은 나중의 이야기.
아리스는 아직 열 살.
제게 큰 잘못을 한 할머니를 용서하기에는 어린 나이였다.
* * *
아리스가 동부로 가는 것이 정해지자, 루비궁은 분주해졌다.
최대한 빨리 짐을 꾸려야 했기 때문이다.
니니가 아리스의 옷을 챙기며 물었다.
“동부에 가면 한동안 황궁에는 오지 않는다고 했지?”
나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워낙 거리가 멀어서 왔다 갔다 하는 것이 힘들다잖아.”
아마 황궁에 큰일이 있지 않는 한, 이번에 동부에 가면 반년 이상은 동부에 있게 될 것이다.
다행히 니니와 나나는 어디에서든 적응을 잘했다. 황궁이든, 동부든, 아리스의 시중을 즐겁게 들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하나 걸리는 게 있었다.
니니가 눈썹을 내리며 말했다.
“시아나 님은 우리랑 같이 떠나도 괜찮은 건가.”
니니의 말에 나나도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러게.”
요즘 보이는 시아나의 모습은 평소와 같았다.
하지만 니니와 나나는 시아나가 예전과는 어딘가 다르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루비궁에 손님이 오면 하던 것을 멈추고 문을 바라보더라.”
그러나 이내 들어온 이를 보고는 고개를 돌렸다.
아쉬움이 가득한 눈빛을 하고는.
니니가 중얼거렸다.
“황태자 전하를 기다리시는 거겠지?”
나나가 당연하다는 얼굴로 대꾸했다.
“그렇겠지.”
그러나 라시드는 며칠 전부터 루비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시아나 님이 도대체 그날 무슨 말을 했길래 전하께서 코빼기도 비치지 않으시는 걸까.”
“별거 있겠어? 더는 찾아오지 말라고 엄포를 놓으신 거겠지.”
니니는 도무지 이해가 안 간다는 얼굴을 했다.
“도대체 왜? 전하는 잘생기고, 몸도 좋고, 싸움도 잘하는 데다가 권력에 재력에 모자란 게 없으시잖아. 세상에 저런 남자가 존재할 수 있나 싶을 만큼 완벽하다고!”
“그러면 뭘 해. 불장난에 빠지면 결국 마지막에 고생하는 건 시아나 님뿐이잖아.”
어찌 보면 현명한 대처였다.
제아무리 사랑한다고 한들 황태자와 일개 시녀 사이에 행복한 엔딩을 기약할 수 없기 때문에.
숱한 로맨스 소설과 달리 현실은 냉혹한 법이니까.
그럼에도 두 사람은 아쉬운 감정을 지울 수가 없었다.
“두 분이 나란히 있으면 엄청 잘 어울리는데.”
“맞아. 잘생기고 귀엽고 난리도 아닌데.”
니니와 나나는 동시에 크게 한숨을 내쉬더니 말했다.
“쓸데없는 생각 말고 짐이나 싸자.”
“그래. 그런데 이 드레스도 챙겨 갈까?”
“당연히 가져가야지. 공주님, 그 드레스 입으면 엄청 우아하시잖아.”
“그럼 이 드레스도 챙겨 가자. 공주님이 이 드레스 입으면 엄청 깜찍하시니까.”
두 사람은 드레스 룸에 있는 드레스를 죄다 가져갈 기세로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그래서 두 사람은 알지 못했다.
문밖에 굳은 얼굴을 한 아리스가 서 있다는 사실을.
* * *
어두운 밤, 시아나는 책 한 권을 들고 아리스의 방에 들어왔다.
니니와 나나와 부쩍 친해진 후에도, 아리스는 잘 때면 시아나만 찾았기 때문이다.
“공주님, 오늘은 어제 읽었던 동화책의 뒷권을 읽어 드릴게요.”
시아나는 맑은 목소리로 말하며 침대에 다가갔다.
그런데 아리스의 반응이 이상했다.
평소 같으면 눈을 빛내며 시아나를 맞이했을 아리스가 복잡한 얼굴로 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왜 그러세요? 혹시 어딘가 불편하기라도 하세요?”
시아나의 다정한 목소리에 아리스의 커다란 눈이 흔들렸다.
잠시 후, 아리스가 고집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난 절대 너랑 떨어지지 않을 거야. 동부에 꼭 같이 갈 거라고.”
“……왜 갑자기 그런 말씀을 하세요?”
아리스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솔직하게 말했다.
“네가 오라버니를 신경 쓸 것 같아서. 너, 오라버니랑 친하잖아.”
“……!”
눈을 커다랗게 뜬 시아나는 이내 눈썹을 내렸다.
어린 공주님이 저렇게 생각을 할 만큼 제가 라시드를 스스럼없이 대했나 싶어 민망했다.
시아나는 아리스의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공주님의 말대로 저와 황태자 전하는 평범한 황태자와 시녀라고 하기에는 사이가 좀 가깝긴 해요.”
“…….”
“하지만 거기까지예요.”
시녀에게 애정을 품은 황태자와 그런 그의 관심이 곤란한, 하지만 아주 싫지는 않은 시녀.
이 정도면 그럭저럭 그럴 수도 있다며 지나갈 만한 관계였다.
시아나가 눈을 내리깔며 말했다.
“솔직히 말하면 조금 걱정이 되긴 해요. 공주님도 아시다시피 황태자 전하께서는 장래에 황제가 될지도 모르는 분이 저래도 되나 싶을 만큼 사람들과 교류가 없잖아요.”
라시드가 왕래하는 곳은 루비궁이 유일했다.
“루비궁이 비면 전하께서는 좀 심심해지실 거예요.”
휑한 그의 방에 앉아 홀로 차를 마시는 라시드를 생각하면, 시아나는 가슴이 조금 시렸다.
일개 시녀가 세상에서 가장 강한 힘을 가진 남자를 향해 이런 감정을 느끼다니.
제 마음이 우스워 시아나는 메마른 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어쩌겠어요. 그분은 이 궁을 지켜야 하는 황태자 전하이시고, 저는 공주님을 모시는 시녀니까요. 각자 있어야 하는 위치에서 해야 할 일을 해야죠.”
“…….”
시아나의 얼굴은 평소처럼 부드러웠다. 목소리도 담담했다.
하지만 아리스는 시아나가 애써 괜찮은 척하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왜냐면 아리스도 니니와 나나가 말했던 모습을 본 적이 있기에.
평소의 시아나는 라시드에게 시녀로서 한없이 정중하기만 했다.
그러나 아주 가끔, 시아나가 따라 준 차를 마시며 행복해하는 라시드를 멍하니 바라보곤 했다.
뺨을 살짝 붉히며.
그 감정이 무엇인지 모를 만큼 아리스는 둔하지 않았다.
아리스는 이를 악물었다.
‘……그래도 안 돼.’
아리스에게 시아나는 누구보다 특별한 존재였다.
혼자였던 제게 손을 내밀어 준 사람, 저를 따뜻하게 안아 준 사람.
아리스는 그런 시아나를 제 품에서 놔줄 생각이 없었다.
아리스가 시아나를 꽉 안았다.
“앞으로 내가 더 잘해 줄게. 네가 원하면 밤하늘의 별도 따 주고, 깊은 바닷속에 있다는 전설의 고래도 잡아 줄 거야. 그러니까 내 곁에 꼭 붙어 있어.”
로맨틱한 말로 저를 붙드는 어린 공주님을 향해 시아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작은 머리통을 쓰다듬었다.
‘그래, 황태후 폐하가 친딸보다 아끼고 니니와 나나라는 훌륭한 시녀가 생겼다 해도 공주님은 아직 어려. 이분께는 내가 필요해.’
황태자와 미래를 기약할 수 없는 연애놀음을 할 때가 아니었다.
이 타이밍에 동부로 가게 되어 차라리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 *
“전하.”
“…….”
“전하!”
솔은 우렁차게 소리쳤지만 라시드는 도무지 반응이 없었다.
초점 없는 눈으로 의자에 널브러진 라시드를 바라보며 솔은 한숨을 내쉬었다.
‘상태가 진짜 심각하시네.’
라시드가 저렇게 영혼 없는 상태가 된 것은 시아나가 철저하게 선을 그은 후였다.
라시드는 마치 세상이 끝난 사람처럼 굴고 있었다.
솔은 오랜 시간 라시드의 곁에 있었기에 그의 수많은 모습을 보았다.
안락하게만 살았을 것 같은 라시드의 인생에는 의외로 다양한 고난이 있었다.
전쟁터에서 적의 함정에 빠져 전멸 위기에 빠졌다던가, 아끼던 부하에게 배신을 당해 상처를 입었다던가.
하지만 라시드가 저토록 우울한 얼굴로 넋을 놓은 모습을 본 건 처음이었다.
솔은 슬슬 걱정이 들었다.
“전하, 그러지 말고 다시 루비궁에 찾아가서 시아나 님을 만나 보십시오.”
라시드가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시아나가 싫어할 거야.”
“아, 좀 싫어하면 어떻습니까. 박력 있게 밀어붙여 보세요. 시아나 님이 너무너무 좋아서 미치겠다고요. 아무리 시아나 님이라도 전하의 얼굴이면 싫다 싫다 하다가도 좋다 할 겁니다. 제 말을 믿어 보세요.”
제법 의기양양하게 말했으나 라시드에게는 전혀 그 말이 와 닿지 않았다.
라시드는 현재의 상황이 두렵기만 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더 내 멋대로 다가가면 시아나가 나를 정말 미워하게 될지도 몰라.’
그 때문에 라시드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제 궁에 틀어박혀 있었다.
그러던 중, 한 시녀가 황태자궁을 찾아왔다.
의욕이라곤 하나도 없는 라시드를 대신하여 시녀를 맞은 솔이 돌아와 보고했다.
“황태후궁에서 보낸 시녀입니다.”
황태후궁, 이라는 말에 일말의 기대감이 묻어 있던 라시드의 눈빛이 심드렁해졌다.
그런 라시드를 향해 솔이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황태후마마께서 보내신 서신입니다. 시녀 말로는 다급한 사안이니 빠르게 확인하시고 답장을 달라 하셨습니다.”
황태후는 아리스를 제외한 손주들에게 철저하게 무관심했다. 그것은 유력한 황제 후보인 라시드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아리스라는 접점이 있음에도 황태후와 라시드 사이에는 아무런 교류가 없었다.
그런 황태후에게서 온 서신이라니.
조금도 흥미가 가지 않았다.
‘귀찮아.’
라시드는 서신을 보지 않으려다가 생각을 바꿨다.
황태후가 굳이 제게 서신을 보낼 일이라면 아리스와 관련된 일일 가능성이 컸다.
그리고 아리스의 일이라면 시아나와도 밀접한 일일 것이다.
라시드는 황태후의 서신을 읽어 내렸다.
내용은 단순했다.
황태후가 건강이 좋지 않아 동부에 있는 친정 가문으로 돌아가 요양을 하려 한다.
혼자 가기 적적하여 황녀 아리스를 데려가려 하니 황제 대리로서 그것을 허락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라시드의 표정은 싸늘하게 굳을 수밖에 없었다.
아리스가 떠나면 당연히 최측근 시녀인 시아나도 함께 갈 것이 뻔했기에.
“말도 안 돼.”
라시드는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더니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갑작스러운 라시드의 행동에 솔이 눈을 크게 떴다.
“저, 전하?”
“…….”
“어디를 가십니까, 전하!”
솔의 말을 무시한 채 라시드가 향한 곳은 루비궁이었다.
우연히도 라시드가 루비궁에 도착했을 때, 시아나도 외부에서 볼일을 보고 돌아오던 참이었다.
두 사람은 루비궁 문 앞에서 마주쳤다.
며칠 만에 보는 라시드를 보고 눈을 크게 뜬 시아나가 고개를 숙였다.
“고귀하신 황태자 전하께…….”
그러나 시아나는 인사를 다하지 못했다.
조급함이 잔뜩 묻어난 라시드의 목소리 때문이었다.
“아리스와 떠나는 거냐?”
그 말을 듣는 순간 시아나는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그러나 이내 시아나는 감정을 가다듬었다.
아직 성년식을 치르지 않은 아리스가 긴 시간 황궁을 떠나기 위해서는 황제의 허락이 필요했고, 그러니 머지않아 황제 대리인 라시드가 그 사실을 알게 될 것을 예상했기 때문이다.
시아나는 차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렇습니다.”
“……!”
라시드는 잠시 숨을 멈추었다.
알고 있던 사실이었음에도 막상 시아나의 입으로 확인하니 머릿속이 뒤엉켰다.
황궁을 떠나면 고생이 많겠어, 아리스를 잘 부탁한다, 따위의 격식 차린 말은 많았다.
그러나 라시드가 괴로운 얼굴로 꺼낸 말은 그런 것과는 거리가 먼 한마디였다.
“궁을 떠나지 않겠다고 했잖아.”
“……!”
“분명 얼마 전에 네 입으로 그리 말했어. 그렇지?”
라시드의 목소리에는 시아나에 대한 원망이 어려 있었다.
마치 배신이라도 당한 것처럼.
라시드의 이런 얼굴을 상상한 적은 없던지라, 시아나의 담담했던 표정이 깨졌다.
시아나가 변명하듯 말했다.
“그때와 지금은 상황이 변했어요. 아리스 공주님께서 동부로 가시고자 결정하셨고, 저는 공주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왜?”
“……그야 저는 공주님의 시녀니까요.”
시아나의 말에 라시드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처음 시아나를 아리스의 시녀로 보냈을 때는 그저 즐거웠다.
시아나가 아리스의 마음을 열고 변화시키는 모습을 보는 것이 재미있었다.
그러나 언제부터였을까.
시아나에게 정성 어린 보살핌을 받는 어린 동생이 부러워지기 시작했다.
눈을 뜨고 일어나 가장 먼저 보는 얼굴이 시아나라면 얼마나 행복할까.
매 시간, 시아나가 타 준 차를 마시면 얼마나 즐거울까.
그녀가 동그랗고 반짝이는 눈으로 오로지 나만을 바라봐 주는 건 어떤 느낌일까.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을 만큼 유치한 감정은 깊어졌고, 어느샌가 라시드는 덧없는 바람을 가지게 되었다.
‘시아나가 나의 시녀면 좋을 텐데.’
그러나 차마 그 말을 할 수 없었던 것은 아리스와 시아나가 돈독한 유대감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제 감정 때문에 그것을 끊을 수 없기에 라시드는 원하는 것을 마음속 깊이 숨겼다.
하지만 이 순간만큼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
라시드는 시아나의 손을 잡아, 그녀의 가는 손가락 사이로 긴 손가락을 끼워 넣었다.
눈을 크게 뜬 시아나를 향해 고개를 숙여 눈을 마주친 라시드가 말했다.
“내게도 네가 필요해.”
“……!”
“나도 네가 없으면 안 돼.”
“…….”
“그러니까, 가지 마.”
시아나는 이전에도 라시드에게 이 말을 들어 본 적이 있었다.
키르안이 찾아와 시아나를 데리고 황궁을 떠난다고 했을 때도 그는 시아나를 붙잡았다.
간절하고 처연하게.
하지만 지금은 그때와는 달랐다.
시아나를 내려다보는 라시드의 보라색 눈동자에는 뜨거운 열망이 담겨져 있었다.
시아나의 손에 깍지를 낀 커다란 손에는 전에 없던 힘이 느껴졌다.
절대 제 곁을 떠나게 하지 않겠다는 선연한 소유욕이었다.
처음 보는 라시드의 모습에 시아나는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두려움일까?
……아니, 설렘이다.
숨 막히도록 아름다운 남자가 이토록 나를 원한다고 하는데 어떤 여자가 아무렇지 않을 수 있을까.
시아나는 그 정도로 둔감하지 않았다.
하지만…….
“죄송합니다, 전하.”
“…….”
모든 것을 잊고 그러겠다고 대답할 만큼 라시드에게 푹 빠진 것도 아니었다.
시아나는 아리스의 시녀로서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시아나가 또렷한 눈동자로 말을 이었다.
“손을 놔주세요. 누가 볼까 두렵습니다.”
“…….”
라시드는 멍하니 시아나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러다 필사적인 얼굴로 이를 악물었다.
아무리 지금 제정신이 아니라 해도, 제 안에 있는 말을 다 내뱉으면 안 된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또한 그 말을 내뱉는다 해도 시아나가 제 어리광을 받아 주지 않을 것도.
‘나는 그녀에게 아무것도 아니니까.’
이 순간 라시드는 아리스에게 시아나를 보낸 것이 미치도록 후회스러웠다.
“처음부터 내가 가졌어야 했는데…….”
“…….”
“그랬으면 너는 내 곁에 있었겠지?”
그것이 순수한 애정 따위 없는 의무감이라 해도.
그래도 상관없을 만큼 라시드는 시아나가 가지고 싶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시아나는 아리스의 시녀였고, 라시드는 그녀에게 특별한 의미가 될 수 없었다.
그것을 깨달은 라시드는 천천히 시아나에게서 손을 놓았다.
절대 떨어지지 않을 것처럼 강하게 잡고 있던 커다란 손이 시아나의 작은 손을 떠나갔다.
떨어지는 손을 바라보는 시아나를 향해 라시드가 한층 낮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더 이상 너를 곤란하게 하지 않겠다고 해 놓고 또 일을 저질렀구나.”
“…….”
“너무 나를 미워하지 않기를.”
그리고 그것으로 끝이었다.
라시드는 더는 시아나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황망한 눈빛으로 시아나를 바라볼 뿐.
“……송구합니다, 전하. 공주님께서 기다리셔서 이만 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 눈빛을 마주 보는 것이 힘들어 시아나는 황급히 인사를 하고 도망치듯 떠났다.
라시드는 우두커니 제자리에 서서 시아나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 * *
다음 날, 시아나는 제대로 자지 못해 수척해진 얼굴로 나타났다.
그런 시아나를 향해 니니가 충격적인 소식을 전했다.
“오늘 새벽에 수도 북쪽 외각에 마물이 나타났다는 보고를 듣고 전하께서 직접 기사단을 이끌고 출정 하셨대요.”
나나가 말을 이었다.
“원래 그런 일이 일어나면 전하께서는 보고만 받고 기사단만 보내는 게 보통인데 말이에요.”
시아나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얼굴로 말했다.
“하지만 그럼 황제 폐하의 자리가 비어 버리잖아요.”
황제의 자리는 절대 공석이 될 수 없었다.
그래서 황제 대리를 맡고 있는 라시드는 어떤 상황에서도 황궁을 떠나서는 안 된다.
니니와 나나가 심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요. 그래서 중앙 궁에서는 난리가 난 모양이에요. 갑작스러운 전하의 부재로 귀족 관료들과 시종들이 급하게 모였다고 하네요.”
“다행히 마물이 나타난 상황이 심각하지는 않아서 전하께서 금방 돌아오실 거래요.”
니니와 나나는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말했지만 시아나는 심장이 뛰었다.
어제 본 라시드의 얼굴 때문이다.
‘……전혀 괜찮아 보이지 않았는데.’
눈빛은 흔들렸고 얼굴은 창백했다.
그 상태로 마물이 날뛰는 곳으로 갔다니 불안이 밀려들었다.
시아나는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내가 괜한 걱정을 하는 걸 거야.’
라시드는 강했다.
‘피의 황태자’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그는 손꼽히는 실력을 자랑했다.
그에 반해 이따금 숲에서 나와 민가를 덮치는 마물은 그리 강력한 존재가 아니었다.
잘 훈련받은 기사단이라면 멧돼지를 사냥하듯 수월하게 진압할 수 있다는 것이 일반적인 상식이었다.
그것을 알기에 황궁에 있는 이들은 크게 동요하지 않은 것이다.
수개월간 얌전히 궁에 있던 황태자의 작은 일탈이라고 생각했기에.
그러나 모두의 예상은 틀렸다.
“크, 큰일이에요! 황태자 전하께서 환궁하셨는데 상처가 크시대요!”
니니의 외침에 시아나는 들고 있던 책을 떨어뜨렸다.
시아나는 아리스와 마주 앉아 동부의 문화에 대해 알려 주고 있던 참이었다.
아리스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시아나가 몸을 일으켰다.
아리스에게 허락도 맡지 않고 시아나가 달려간 곳은 황태자궁이었다.
황태자궁 앞에는 많은 이들이 모여 있었다.
상처를 입고 돌아왔다는 황태자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찾아온 자들이었다.
벅적거리는 이들 사이에서 어쩔 줄을 몰라 하는 시아나의 손을 누군가 잡았다.
황태자궁에서 늘 시아나를 맞이했던 시녀였다.
“따라오십시오.”
놀란 얼굴로 시녀를 본 시아나는 곧 고개를 끄덕였다.
시아나는 시녀의 안내를 받아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황태자궁으로 들어갔다.
많은 사람들이 몰린 바깥 풍경과 달리 안은 고요했다.
침실로 들어선 시아나는 이내 작은 비명을 내뱉으며 입을 막았다.
라시드가 창백한 얼굴로 누워 있었기 때문이다. 침대 아래에는 새빨간 피로 물든 갑옷과 옷이 널브러져 있었다.
침대 옆에 서 있던 솔이 시아나를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시아나 님이 어떻게 여기에…….”
시아나의 굳은 얼굴을 본 솔은 아, 하더니 말을 이었다.
“소식을 듣고 오셨군요. 하여간 이놈의 황궁. 별것도 아닌 일에 난리도 아니네요.”
“……뭐라고요?”
순간 시아나는 분노가 차올랐다.
시아나가 솔을 노려보며 엄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주인이 다쳤는데 호위 기사가 어떻게 그런 말을 늘어놓을 수 있죠?”
“예?”
“게다가 지금 보니 아직 의사도 부르지 않은 모양이군요!”
“그건 전하의 명령입니다. 전하께서는 의사를 끔찍하게 싫어하시거든요. 멋대로 부르면 난리가 납니다.”
“핏기 없는 얼굴로 정신까지 잃은 분을 앞에 두고 그게 무슨 바보 같은 말이에요? 당장 의사를 불러와서 제대로 된 치료를 받게 하세요!”
엄청난 기세였다.
솔은 저도 모르게 넵, 하고 대답할 뻔했다.
그러나 겨우 정신을 차린 솔이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
“하지만 시아나 님.”
“됐어요. 그렇게 눈치가 보이신다면 제가 의사를 불러오죠.”
방을 나가려는 시아나를 솔이 잡았다.
“제 말을 들어 보세요, 시아나 님.”
“이거 놓으세요.”
시아나는 솔을 상대할 틈이 없었다.
한시라도 빨리 의사를 불러야겠다는 생각만 가득했다.
그러나 이어진 말은 시아나의 걸음을 세우기에 충분했다.
“전하께서는 지금 잠이 드신 것뿐이란 말입니다!”
“……!”
솔의 말에 시아나는 눈을 부릅떴다.
시아나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솔을 바라보다가, 침대에 누워 있던 라시드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의 입가에 귀를 가져가자 쌕쌕 하고 작은 숨소리가 들려왔다.
믿을 수 없어 이마에 손을 얹어 보니 열도 나지 않았다.
‘그럼 저건 뭔데!’
시아나는 당혹스러운 얼굴로 침대 밑에 널브러져 있는 피 묻은 옷을 쳐다보았다.
솔이 얼굴을 긁적이며 대답했다.
“마물들의 피입니다.”
“그럼 전하께서 다친 곳은…….”
솔은 잠이 든 라시드의 얼굴을 가리켰다.
조각상처럼 잘생긴 얼굴의 한편에 작은 상처가 나 있었다. 손톱으로 휘갈긴 듯한 작은 상처였다.
새빨간 흉터는 아파 보이긴 했지만 목숨을 위협할 만큼 치명적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
그제야 제가 엄청난 오해를 했음을 깨달은 시아나의 얼굴이 토마토처럼 새빨갛게 물들었다.
부끄러움이 머리끝까지 밀려들었다.
시아나는 당장 황태자궁을 떠나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몸을 일으킨 시아나는 새빨개진 얼굴로 솔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제대로 이야기를 듣지도 않고 건방진 소리를 늘어놓았습니다. 죄송합니다, 솔 님.”
“아닙니다. 오죽 전하가 걱정되면 그러셨겠습니까.”
“…….”
“그리고 오해할 만도 하셨어요. 전하께서 죽은 시체처럼 잠들어 계시니까요.”
그 말에 시아나가 눈썹을 내렸다.
“……전하께선 원래 이렇게 깊게 잠이 드시나요?”
옆에서 시아나가 그 난리를 쳤는데도 라시드는 전혀 깨어날 기색이 없어 보였다.
그래서 시아나는 혹시 마물에게 입은 상처 때문에 라시드의 몸 어딘가 이상이 생긴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솔이 대답했다.
“잠을 잘 주무시는 편이긴 하지만 이 정도로 둔감하지는 않으십니다. 다만…….”
솔은 시아나를 힐끗 쳐다보며 눈치를 보더니 말을 이었다.
“최근 시아나 님과 분위기가 안 좋았잖습니까. 그래서 요 근래 제대로 주무시지 못하셨어요. 식사도 하는 둥 마는 둥 하셨고요.”
“…….”
시아나는 며칠 전 보았던 라시드의 얼굴이 부쩍 수척했다는 것을 떠올렸다.
“그러다가 마물이 나타났다는 보고를 들으시더니 대뜸 말을 타고 궁을 달려 나가서 미친놈처럼, 아니 미친 듯이 검을 휘둘러 마물을 썰어 대셨으니 아무리 튼튼한 몸이라도 버틸 수가 있나요. 궁에 돌아오자마자 기절하듯 잠이 들어 버리셨습니다.”
그제야 시아나는 어떤 상황이 벌어졌는지 이해가 갔다.
시아나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다행이다”
“…….”
“정말 다행이야.”
두 번이나 되뇐 말에는 깊은 안도감이 배어 있었다.
솔은 그런 시아나를 복잡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시아나가 손가락을 꾸물거리다가 물었다.
“그런데 전하의 얼굴 상처는 아직 제대로 치료를 하지 않은 거죠?”
“네. 이제 막 도착한지라…….”
“그럼 제가 치료를 해도 될까요?”
시아나의 말에 솔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시아나 님께서요?”
“네. 그 정도 처치는 저도 할 수 있어요.”
전하께서 아시면 엄청 좋아하시겠네요. 쥐죽은 듯 곯아떨어지셔서 모르겠지만.
솔은 라시드에게 미약한 동정심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해 주시면 저야 편하죠. 잘 부탁드립니다.”
솔은 침대 밑에 널브러져 있던 피 묻은 갑옷과 옷을 챙겨 눈치 있게 침실을 나왔다.
드넓은 침실에는 라시드와 시아나, 두 사람만이 남았다.
침대 옆에 선 시아나는 솔이 주고 간 약통 뚜껑을 열었다. 상처가 아무는 것에 도움을 준다는 약에서는 씁쓰름한 향이 났다.
시아나는 라시드의 얼굴에 난 상처 위로 조심스럽게 약을 바르기 시작했다.
상처에 약이 닿아 쓰라릴 텐데도 라시드는 미동도 없었다.
‘정말 지독하게 피곤했나 봐.’
시아나에게 라시드는 늘 ‘강한 사람’이었다.
그는 늘 여유로웠고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런 그가 이렇게 모든 기력이 쇠한 것처럼 잠든 것이 믿기지가 않았다.
‘……그리고 그가 이렇게 된 이유가 나 때문이라는 것도.’
시아나의 가슴이 옭아매진 듯 조여왔다.
그때였다.
“……!”
라시드가 게슴츠레 눈을 떴다.
드러난 보라색 눈동자에 시아나가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라시드가 입을 열었다.
“와, 시아나다.”
“…….”
라시드는 두 눈을 부드럽게 휘었다.
해사한 미소를 짓고 있는 얼굴에는 방금 전까지 보였던 고단함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순수한 행복만 느껴질 뿐이었다.
라시드가 제대로 뜨지 못한 눈으로 무언가를 웅얼거렸다.
불분명한 발음에, 바람에 꽃잎이 스치는 것보다 작은 목소리였지만 시아나는 분명히 들었다.
“좋아해.”
“……!”
그 순간 시아나의 귀 끝까지 열이 올랐다.
다행히도 라시드의 만행(?)은 거기까지였다.
라시드는 다시 눈을 감았다.
쌕.
평온한 숨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시아나는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하아.”
겨우 숨을 골랐지만 거기까지였다.
다른 곳은 도저히 진정이 되질 않았다.
열이 올라 뜨거워진 얼굴, 파르르 떨리는 손.
쿵쿵거리는 심장.
시아나는 울 것 같은 얼굴로 라시드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왜 이렇게 나를 흔들어요.”
자꾸 그러니까 나도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흔들리고 싶잖아.
나답지 않게.
* * *
동그란 얼굴, 눈꼬리가 살짝 내려간 순한 눈, 작은 입술.
분명 제 두 손 위에 있는 작은 생명체는 시아나가 맞았다.
라시드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시아나, 왜 이렇게 작아진 거냐.”
시아나가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원래 모습으로 돌아간 거예요. 저는 사실 요정이거든요.”
라시드는 그녀의 말이 하나도 놀랍지 않았다. 그저 역시 그랬구나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라시드를 보며 시아나가 눈썹을 모았다.
“그런데 전하, 문제가 생겼어요.”
“무엇이니.”
“이런 몸으로 어떻게 일을 하죠?”
라시드가 걱정하지 말라는 듯 웃었다.
“내가 해 주면 되지.”
“네?”
“네가 시키는 대로 움직일게. 그러니 뭐든 말만 하거라.”
감히 황태자에게 너른 마당을 빗자루질 시키고, 작은 바늘로 옷을 기우게 하고, 산더미 같은 옷을 빨랫방망이로 두들기게 하라고요?
시아나는 난감한 듯 얼굴을 찡그렸지만 이내 어깨를 으쓱거렸다.
“꼭 해야 하는 일이니 어쩔 수 없네요.”
라시드는 환하게 웃으며 시아나를 제 가슴 쪽 주머니 안에 넣었다.
작아진 시아나는 그 안에 쏙 들어갔다.
주머니 바깥으로 얼굴을 쏙 내민 시아나가 저쪽으로 팔을 쭉 뻗으며 말했다.
“자, 그럼 정원 청소부터 시작합시다.”
“응.”
라시드는 고개를 끄덕이며 시아나가 말한 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난생처음 해 보는 궂은 노동이었지만 하나도 힘들지 않았다.
그저 너무나 즐거웠다.
시아나와 함께였으니까!
게다가 주머니 안에서 꿈틀거리며 일을 지시하는 시아나는 엄청나게 귀여웠다.
긴 걸레 자루를 든 라시드가 눈을 빛내며 물었다.
시아나, 이제 어디를 닦을까?!
라시드는 눈을 크게 떴다.
눈을 여러 번 깜빡인 후에야 라시드는 방금 전까지 제가 꿈속에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순간 짜증이 치솟았다.
‘절대 일어나면 안 됐는데!’
무슨 수를 쓰더라도 계속 자야 했다.
지금이라도 다시 자기 위해 눈을 감으려는 순간 험악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대체 무슨 꿈을 꾸었기에 바보처럼 실실 웃다가 일어나자마자 사람 죽일 것 같은 얼굴을 해?”
그제야 라시드는 침대 옆에 앉아 있는 사람을 발견했다.
팔짱을 낀 아리스가 짜증스러운 얼굴로 라시드를 쳐다보고 있었다.
라시드는 눈을 크게 떴다.
“네가 왜 여기에…….”
아리스가 라시드의 궁에 온 것은 처음이었다.
라시드가 이따금 놀러 오라고 한 적이 있었지만, 그럴 때마다 아리스는 내가 왜 그런 곳에 가냐며 매몰차게 거절하곤 했다.
“딱히 오고 싶어서 온 건 아니야. 병문안 겸 하고 싶은 말이 있어 온 거지.”
“……!”
아리스의 말에 라시드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다.
아리스가 굳이 제게 찾아와 할 말은 하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동부에 가는 것을 허락해 달라고 찾아온 건가.’
라시드는 아직 황태후의 서신에 답장을 주지 않은 상태였다.
황제의 동의를 받는 순간 아리스는 제가 원하는 곳은 어디든 갈 것이다.
시아나와 함께.
그것을 떠올린 라시드는 입술을 깨물었다.
아리스는 가라앉은 라시드의 표정은 상관 않고 새초롬한 얼굴로 말했다.
“할마마마께 이야기 들었지? 한동안 동부에 가 있을 생각이야.”
“…….”
“할마마마께서 동부의 문화와 메디치안 후작가에 대해 잘 아는 시녀가 있어야 좋을 것 같다 하셔서, 동부에 가면 새 시녀를 뽑을 생각이야. 그러면 지금의 시녀 3명 다 데려가는 게 좀 부담스럽더라?”
“……?”
라시드는 아리스의 말이 제가 생각한 것과 다르게 흘러간다는 것을 깨달았다.
의아한 얼굴을 한 라시드를 향해 아리스가 말했다.
“그래서 시녀 한 명은 황궁에 두고 갈까 하거든. 빈 궁에 혼자 남겨 두는 것은 불안해서 그 시녀를 오라버니의 궁에 보내려고 하는데, 어떻게 생각해?”
“……뭐?”
바보처럼 눈을 깜빡거리는 라시드를 향해 아리스 “으~.” 하고 눈썹을 찡그리더니 “후-.”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정말이지 하기 싫은 말을 하는 얼굴로 말했다.
“딱 한 번만 말할 테니 잘 들어. 시아나를 오라버니에게 보낸다는 말이야.”
“……!”
라시드는 눈을 크게 뜨고 입을 벌렸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듯이.
‘왜? 그래도 괜찮아?’ 따위의 말도 없이 라시드는 냉큼 아리스의 말을 받았다.
“평생 시아나를 행복하게 해 주마.”
“……저기요. 시아나를 시집보낸다는 게 아니거든. 내가 동부에 가 있는 동안만 잠시 데리고 있어 달라는 것뿐이야.”
정색한 아리스의 얼굴에 라시드는 재빨리 말을 정정했다.
“시아나에게 최고의 근무 환경을 제공할 것을 약속하지. 황궁에서 나오는 급여 외에 추가 임금을 지급하는 것은 물론 매끼 최고급 식사를 제공하고 그녀가 원하는 시간만 일하게 하마.”
방금 전까지 죽어 가던 얼굴을 하던 라시드가 눈을 반짝이며 말을 늘어놓는 것을 본 아리스는 기가 찼다.
‘알고는 있었지만 이 인간, 시아나가 관련되면 제정신이 아니네.’
그래도 한 가지 다행인 것은 좋은 쪽으로 제정신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라시드는 험난한 황궁에서 어떤 일이 일어난다 해도 시아나를 소중히 지켜 줄 것이다.
그리고 아리스가 라시드에게 시아나를 보내기로 결심한 이유는 한 가지가 더 있었다.
“오라버니.”
“그래.”
라시드는 현재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기쁨이 충만한 상태였다.
라시드는 아리스가 어떤 말을 하든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이며 환호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런 라시드를 향해 아리스가 말을 이었다.
“오라버니가 내게 시아나를 보내 준 거지?”
“…….”
물론 라시드는 아리스에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아리스는 니니와 나나를 통해 자연스럽게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다른 시녀들에게서 이야기를 들어 보니 시아나 님이 아리스 공주님의 궁에 들어온 것은 우연이 아닌 것 같아요.]
갓 정식 시녀가 된 수습 시녀가 배정받는 곳은 보통 세탁실이나 주방 같은 곳이었다.
처음부터 황족의 궁에 가는 것은 황족 측에서 먼저 원한 것이 아니면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아무리 그 황족이 버림받은 공주라 해도.
그러나 시아나는 정식 시녀가 되자마자 아리스가 있는 루비궁에 보내졌다.
[황태자 전하께서 입김을 넣으셨다는 말이 있더라고요. 전하께서 공주님께 훌륭한 시녀를 붙여 주고 싶으셨나 봐요.]
저희도 진작 공주님께 왔으면 좋았을 텐데 말이에요.
—라는 말을 덧붙이며 니니와 나나는 헤실헤실 웃었다.
두 사람의 모습을 떠올리며 아리스는 고개를 들어 라시드와 눈을 마주쳤다.
아리스가 말했다.
“고마워.”
“…….”
“오라버니가 시아나를 보내 준 덕분에 내 인생이 달라졌어.”
아리스는 이따금 시아나가 없었다면 제가 어떻게 살았을까 생각했다.
아마 제대로 씻지 않아 엉망인 모습으로 시녀들을 괴롭히며 살아갔겠지.
저를 이렇게 내버려 두는 세상을 원망하며.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시아나를 만나서 난 제대로 된 공주가 되었어. 더는 시녀들을 싸잡아 미워하지도 않고 할마마마라는 뒷배가 생겨 무시도 당하지 않아.”
“…….”
“오라버니에게도 시아나를 통해 나와 같은 기적이 일어나길 바라. 진심이야.”
멍하니 아리스를 바라보던 라시드가 놀란 기색을 숨기지 않고 물었다.
“네가 날 이렇게까지 좋아하는지 몰랐는데.”
“무슨 끔찍한 소리야?! 오라버니가 예뻐서 하는 말이 아니라 내게 시아나라는 보물을 보내 준 것에 대한 보답을 하는 것뿐이거든?”
질색하며 대답한 아리스가 말을 이었다.
“다시 말하지만 영원히 시아나를 준다는 게 아니야. 동부에서 힘을 얻어 돌아올 때까지만 맡기는 거라고.”
아리스는 황태후가 떠먹여 주는 메디치안 후작가라는 힘을 얌전히 받아먹고만 있을 생각은 아니었다.
황태후가 없어도 온전히 제 편이 되어 줄 만한 세력으로 만들 생각이었다.
아무도 저를 무시할 수 없게.
열 살의 어린 소녀치고는 대담한 포부였다.
라시드가 감탄 어린 눈빛으로 말했다.
“어쩌면 내가 황좌로 가는 길에 가장 큰 라이벌은 너일지 모르겠구나.”
차기 황제로서 누구보다 단단한 입지를 가진 황태자가, 지지해 주는 가문 하나 없는 막내 공주에게 라이벌이라니.
황당한 말이었다.
그러나 아리스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고개를 흔들지 않았다.
대신 두 손을 허리에 올리고 오만한 얼굴로 한마디를 내뱉었다.
“흥, 그걸 이제 알았어?”
위풍당당한 아리스의 모습에 라시드는 웃음을 터뜨렸다.
* * *
아리스는 황태자궁을 나왔다.
궁 앞에 시아나가 서 있었다.
평소와 달리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는 시아나를 향해 아리스가 말했다.
“오라버니와 이야기를 끝냈어. 내가 동부로 떠나면 너는 황태자궁으로 가도록 해.”
아리스의 말에 시아나의 눈이 흔들렸다.
아리스가 저 말을 꺼낸 것은, 어제 시아나가 라시드의 궁에 다녀온 후였다.
황태자궁으로 근무처를 옮기라는 아리스의 말에 시아나는 놀랐다.
왜 갑자기 그런 말을 하냐고 묻는 시아나에게 아리스가 대답했다.
[네가 그랬잖아. 동부로 가면 황궁과 멀어지니 내게 직접 황궁의 소식을 세세하게 알려 줄 사람을 만들고 가는 게 좋겠다고.]
시아나가 그런 제안을 한 것은 사실이었다.
‘황궁의 상황을 기민하게 파악하여 재빠르게 움직여 줄 시녀를 물색하여 공주님의 소식통으로 삼으려 했는데…….’
그 일을 제게 맡길 줄은 상상도 못했다.
뭐가 그렇게 놀랍냐는 듯 아리스가 말했다.
“내게 너만큼 영특하고 믿을 만한 시녀는 없어.”
그러니 그런 일을 맡기기 딱이라는 아리스를 향해 시아나가 물었다.
“정말 그 이유만으로 저를 두고 가시는 건가요?”
“…….”
시아나의 말에 아리스는 입술을 깨물었다.
사실 아리스가 이런 결정을 하게 된 것은, 라시드가 마물에게 상처를 입고 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본 시아나의 모습 때문이었다.
창백하게 질린 얼굴, 흔들리는 눈동자.
아리스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라시드를 향한 시아나의 애정이 생각보다 깊고 애달프다는 것을.
그러나 황태자궁에서 돌아온 후에도 시아나는 아리스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궁에 남고 싶다는 일말의 내색도 없이 동부로 갈 준비를 했다.
그런 시아나의 모습을 보며 아리스는 마음을 정했다.
‘시아나, 나는 네가 행복해졌으면 좋겠어.’
너로 인해 내가 행복해진 만큼.
그러나 아리스는 그 말을 하는 대신 일부러 심술궂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실은 너를 두고 가는 이유가 또 하나 있긴 해.”
그게 뭐냐는 듯 저를 바라보는 시아나를 향해 아리스가 어깨를 으쓱였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잠깐 떨어져 있는 건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거든. 편지로 연락을 주고받으면 되고 정 보고 싶으면 만나러 가면 되잖아.”
“…….”
“그런데 나약한 오라버니 놈은 그게 아닌가 봐. 시아나 네가 멀리 간다는 말을 듣고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시름시름 앓고 있더라고. 하여간 한심해서.”
경멸을 담은 얼굴로 혀를 쯧쯧거린 아리스가 말을 이었다.
“그래서 사람 한번 살리는 셈치고 너를 두고 가기로 한 거야. 물론 네게는 미안하게 생각해. 귀엽고 깜찍한 나를 모시다가 저런 커다랗고 제정신이 아닌 생물체를 모셔야 한다니 싫겠지.”
“…….”
아리스 까치발을 들고 손을 뻗었다.
시아나는 아리스의 의중을 깨닫고 무릎을 굽혔다. 이내 아리스의 작은 손이 시아나의 동그란 턱에 닿았다.
아리스가 시아나와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하지만 이래저래 네가 가장 안전하게 있을 곳은 오라버니 궁이니까 조금만 견뎌 줘. 내가 동부에서 돌아와 온전히 너를 지켜줄 수 있을 때까지.”
“…….”
시아나는 눈도 깜빡이지 못하고 아리스를 바라보았다.
아직 열 살인 아리스는 시아나의 허리쯤 올 만큼 작았다.
하지만 이 순간만큼은 시아나보다 훌쩍 크게 느껴졌다.
‘어느새 이렇게 크셨지.’
벌써 이렇게 크면 앞으로는 얼마나 더 크려고…….
시아나는 눈가가 뜨거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것을 숨기며 시아나는 예를 갖추어 허리를 숙였다.
“공주님의 명을 받들겠습니다.”
어린 공주를 향한 고마움과 존경이 담겨 있는 목소리였다.
* * *
아리스는 니니와 나나에게도 시아나가 황궁에 남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전했다.
그 말을 들은 니니와 나나가 가장 먼저 보인 반응은…….
“그럼 저희는요?”
“설마 저희도 두고 가신다는 건 아니죠?”
불안한 얼굴로 저를 바라보는 두 시녀를 향해 아리스가 말했다.
“너희는 당연히 데리고 가지. 너희는 나 없으면 못 살잖아.”
아리스의 말에 니니와 나나는 다행이다, 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시아나에게 몇 번이나 말했다.
“시아나 님, 아리스 공주님은 걱정하지 마세요.”
“저희가 파리 새끼 한 마리도 다가오지 못하게 공주님을 지킬 테니까요.”
“전 동부로 가자마자 호신술을 배울 생각이에요. 혹시라도 못된 놈들이 튀어나와도 공주님을 지킬 수 있게요.”
“저는 의료 기술을 배울 생각이랍니다. 혹시나 공주님께 다급한 상황이 올 때를 대비해서요.”
니니와 나나의 이글거리는 눈빛에는 엄청난 의지가 담겨 있었다.
‘어쩌면 몇 년 후에 아리스 공주님의 곁에는 제국 최고의 시녀들이 있을지도 모르겠어.’
시아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두 사람에게 종이뭉치를 넘겼다.
“동부의 문화와 메디치안 후작가에 관한 것을 정리한 서류예요. 숙지해 두면 공주님을 모시는 데 도움이 될 거예요.”
니니와 나나는 머리 쓰는 것에는 영 자신 없지만 어떻게든 해 보겠다는 결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후, 시아나가 찾아간 곳은 황태자궁이었다.
“어서 와, 시아나.”
언제나처럼 라시드가 시아나를 맞이했다.
시아나는 놀랐다.
고작 며칠 전에 보았던 라시드의 모습과 전혀 달랐기 때문이다.
은빛 머리카락은 반짝였고 보라색 눈동자에는 생기가 넘쳤다. 거기에 마물에게 입었던 상처가 말끔히 사라진 피부는 아기처럼 매끈매끈했다.
‘꼭 결혼을 앞둔 신부처럼 번쩍번쩍 하잖아!’
눈이 부실 정도의 광채였다.
호위 기사 솔이 시아나의 생각을 안다는 듯 속삭였다.
“시아나 님께서 황태자궁에 온다는 말을 들으신 후 저렇게 광이 나십니다. 너무 눈이 부셔서 보기 힘들 정도라니까요.”
“…….”
“아무튼 힘든 결정을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시아나 님. 덕분에 살았습니다.”
아마 시아나가 동부로 떠나 버렸다면 라시드는 병든 닭처럼 우울해하다가 쓰러져 버렸을지도 모른다.
솔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솔, 쓸데없이 말이 길구나.”
저쪽에서 들려온 라시드의 목소리에 솔은 어깨를 흠칫하더니 재빠르게 응접실을 나갔다.
초록 잎이 가득한 응접실에는 라시드와 시아나만이 남았다.
두 사람 사이에 잠시 정적이 감돌았다.
요 며칠 라시드와 제 사이에 흘렀던 분위기가 분위기였던지라 시아나는 어색함을 느꼈다.
‘그래도 할 말은 해야지.’
시아나가 준비한 말을 하기 위해 입을 열기 전, 라시드가 말했다.
“아리스가 내게 확실히 이야기했어. 제가 동부에 가는 동안 혼자 남게 된 시녀를 맡기는 것뿐이라고.”
“…….”
“그래서 나는 너를 아끼는 동생이 맡긴 시녀로 대하려고 해.”
시아나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그 말은 라시드가 앞으로 시아나에게 선을 긋겠다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라시드의 말은 거기에서 끝이 아니었다.
“다른 사람들이 있을 때는 말이야.”
“네?”
“네가 그랬잖아. 너에 대한 내 마음을 다른 자들이 알까 봐 두렵다고.”
“…….”
“하지만 내 마음이 싫다고 하지는 않았지.”
“……!”
라시드가 시아나에게 한 발짝 다가갔다.
살짝 허리를 숙여 시아나의 에메랄드색 눈과 눈을 마주친 라시드가 두 눈을 부드럽게 휘며 말했다.
“그래서 단둘이 있을 때는 최선을 다해 너를 유혹할 생각이다.”
“……?!”
“네가 먼저 선을 넘어 내게 다가올 때까지.”
그것이 라시드가 며칠 만에 내린 결론이었다.
생각도 못한 말에 시아나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불과 얼마 전까지 궁에서 떠나지만 말아 달라고 애절하게 붙잡았던 사람 맞아?’
그러나 시아나는 이전처럼 안 된다고 단호한 거절을 할 생각은 들지 않았다.
왜냐면 절대 열어 주지 않으려고 했던 성벽이 조금 허물어진 상태였기 때문에.
그래서 시아나는 귀 끝까지 붉어진 얼굴로 뻔뻔하게 말했다.
“어디 한번 해 보세요. 그리 쉬운 일은 아닐 테지만요.”
새침한 시아나의 말에 라시드는 순간 숨을 멈추었다.
짜릿한 무언가가 몸의 중심을 관통했다. 심장이 아릴 만큼 쿵쿵거렸다.
고작 그녀의 허락을 받았다고 이래서야, 앞으로 그녀를 유혹하는 일은 쉽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럼에도 라시드는 웃었다.
기적과도 같은 기회를 잡았기에.
* * *
며칠 후, 황태후와 아리스가 떠나는 날이 되었다.
라시드는 떠나는 동생을 위해 많은 것을 준비했다.
크고 아름다운 마차, 제국에서 가장 잘 달리는 말들과 실력 좋은 마부, 먼 동부에서 안전을 책임질 호위 기사들까지.
“오라버니께 이런 것을 받는 건 영 질색이지만, 시아나를 그냥 양보하기에는 배가 너무 아프니 어쩔 수 없이 받는 거야.”
아리스의 새침한 말에 배웅을 나온 라시드가 말했다.
“그런 이유라면 이것으로 택도 없지. 동부에 다른 것도 보내 놓을 테니 잘 쓰거라.”
이후 동부에 도착한 아리스는 거대한 저택과 최고의 일꾼들, 그리고 방을 채운 수많은 드레스와 보석을 마주치게 된다.
지금은 전혀 모르고 있지만.
라시드의 옆에 서 있던 시아나가 아리스에게 말했다.
“그래도 이 정도로 전하의 호의를 내세우고 가면 동부의 누구도 공주님을 전혀 우습게 보지 않을 거예요. 그러기는커녕 후작위를 놓고 다투는 네 명의 후보자들이 황태후마마가 아닌 공주님께 줄을 서야 한다고 생각할지도 몰라요.”
“흥, 그래야지.”
아리스의 오만한 얼굴을 보며, 시아나는 진심으로 이 어린 공주가 미래에 대단한 권력자가 될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아리스, 곧 출발해야 하니 어서 인사를 끝내거라.”
마차 안에 먼저 앉아 있는 황태후의 목소리였다.
다행히 황태후는 시아나가 라시드의 궁에 간다는 말을 듣고도 별말을 하지 않았다.
아리스의 최측근 시녀가 아닌 상태에서라면 시아나가 뭘 하든 상관이 없는 모양이었다.
‘어떻게 생각하면 참 쉬운 분이야.’
시아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아리스를 바라보았다.
“그럼 잘 다녀오세요, 공주님.”
시아나의 인사는 담담했다.
순간 아리스는 제가 먼 동부가 아니라 황궁 밖으로 잠시 바람을 쐬러 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하긴, 잠시 황궁을 떠나는 것뿐인 건 맞잖아.’
아리스는 곧 다시 돌아올 터였다.
보다 강해진 모습으로.
그때를 떠올리며 아리스는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시아나, 돌아오면 누구보다 너를 행복하게 해 줄게. 그러니 딴 놈 보지 말고 기다려야 해.”
찐득한 집착이 가득 담긴 말에 시아나는 키득 웃었다.
“네. 그럴 테니 부디 공주님이 원하는 모든 것을 이루시고 돌아오세요.”
“응!”
아리스는 씩씩하게 대답하며 시아나를 꼭 껴안았다.
아리스는 시아나를 안은 채로 고개를 돌려 옆에 있는 라시드를 째려보았다.
“몇 번이나 말하지만 잠시 황태자궁에 맡기는 것뿐이야. 고생시키면 가만 안 둬.”
말로는 부족했는지 아리스는 꽉 쥔 주먹을 내밀었다.
무시무시한 동생의 협박에 라시드는 환하게 웃었다.
“잘 다녀와.”
아리스는 제 머리통을 쓰다듬는 라시드의 손을 질색한 얼굴로 쳐 냈다.
“아리스.”
다시금 들려온 황태후의 목소리에 아리스는 눈썹을 찡그렸다. 더 꾸물거렸다가는 황태후가 잔소리를 늘어놓겠다 싶었다.
“그럼 정말 간다.”
아리스는 힘차게 손을 흔들며 마차 안으로 쏙 들어갔다.
이내 아리스가 탄 마차의 문이 닫히고 저 멀리 떠나기 시작했다.
시아나는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마차가 시야에서 사라진 후에야 시아나는 고개를 돌렸다.
예상대로(?) 라시드가 저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어찌나 날 보는 눈빛이 강렬한지 얼굴에 구멍이 뻥 뚫리는 줄 알았다니까.’
시아나는 흠, 하고 헛기침을 하며 얼굴에 오르는 열을 식혔다.
‘어쨌건 오늘부터 황태자 전하의 궁에서 일하게 되었으니 제대로 인사를 해야지.’
시아나는 치맛자락을 들고 허리를 숙여 정중히 인사했다.
“고귀하신 황태자 전하께 시녀 시아나 인사드립니다. 앞으로 최선을 다해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주인을 향한 시녀의 깍듯한 인사였다.
라시드는 지그시 시아나를 바라보더니 허리를 곧게 폈다.
그러고는 한쪽 손을 왼쪽 가슴 위에 올리고 허리를 숙였다.
“나야말로. 나의 시녀에게 최선을 다할 것을 약속하지.”
그러나 말과는 달리 라시드의 모습은 숙녀를 향한 신사의 인사였다.
라시드가 두 눈을 부드럽게 휘며 말을 덧붙였다.
“몸과 마음을 다해서 말이야.”
‘도, 도대체 그게 뭔데요!’라고 시아나는 따지듯 물을 뻔했다.
* * *
텅 빈 루비궁을 뒤로하고 시아나는 황태자궁으로 향했다.
손에는 옷가지 몇 벌이 들어 있는 소박한 짐을 들고.
막상 오늘부터 낯선 환경에서 일을 한다고 생각하니 긴장이 되었다.
‘어떤 일을 하게 될지, 그 일을 잘 할 수 있을지도 걱정이지만 가장 신경 쓰이는 것은 황태자궁의 시녀들이야.’
어마어마한 황태자궁의 크기만큼 루비궁과 비교도 하지 못할 만큼 시녀들의 수가 많을 테고, 개중에는 갑작스럽게 이동한 시아나를 고깝게 생각하는 이들도 많을 터였다.
‘첫날부터 내 기를 꺾어 놔야 한다며 다양한 이벤트를 준비해 놓았을지도 몰라.’
제대로 된 일을 주지 않고 없는 사람처럼 무시한다든가, 같은 일을 수십 번 반복하여 시킨다든가, 일을 잘 못한다는 트집을 잡아 벌을 준다든가.
시녀들의 괴롭힘은 무궁무진했다.
그러나 시아나는 그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다.
시아나를 맞이한 시녀는 단 한 명이었기 때문이다.
시아나가 황태자궁에 올 때마다 깍듯하게 맞이해 주었던 상급 시녀였다.
“어서 오십시오, 시아나 님. 저는 황태자궁의 총괄 시녀인 에바입니다. 황태자궁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그녀의 정중한 태도에 시아나는 당황했다.
일전에야 황태자의 손님으로 온 것이라 격식 있게 맞았다 쳐도, 지금은 일하러 온 일개 중급 시녀인데 저런 반응은 과했다.
“말을 낮추십시오, 에바 님.”
그러나 간곡한 시아나의 부탁에도 시녀는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대답했다.
“전하께서 당부하셨습니다. 아리스 황녀 저하께서 동부에 가신 동안 아끼는 시녀를 맡긴 것이니 정중히 대하라고 말입니다.”
시아나는 에바의 흔들림 없는 눈빛에서, 저를 아랫사람으로 편하게 대해 달라고 해도 그녀가 그 말을 듣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알았다.
에바가 말을 이었다.
“일단 짐을 놓아야 하니 앞으로 시아나 님이 지낼 방으로 안내하겠습니다.”
“네.”
에바는 방으로 향하며 시아나에게 황태자궁의 상황을 간략하게 이야기해 주었다.
“황태자궁에는 총 15명의 시녀와 10명의 시종이 있습니다.”
그 말에 시아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마어마한 황태자궁의 크기를 생각하면 터무니없을 만큼 적은 숫자였기 때문이다.
시아나의 생각을 짐작한다는 듯 에바가 말을 덧붙였다.
“이곳의 모든 시녀와 시종은 인당 100인분을 하는 베테랑이기에 황태자궁을 관리하는 데는 전혀 지장이 없습니다.”
“아…….”
“그리고 황태자 전하께서는 오랜 시간 궁을 비우셨으니까요. 전쟁터에서 돌아오신 지금도 손님을 초대하는 일이 거의 없으시고, 주로 혼자 방에 계시기 때문에 할 일이 많지 않습니다.”
그제야 시아나는 황태자궁에서 일하는 일꾼들의 숫자가 적은 이유를 납득했다.
에바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황태자궁에는 꼭 지켜야 할 규율이 있습니다.”
“무엇인가요?”
“궁에서 일어나는 어떤 일에도 궁금해하거나 관심 갖지 않으며 본인이 맡은 일만 충실히 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것은 다른 황족의 궁도 마찬가지였다.
황족은 제 일거수일투족에 관해 아랫사람들이 떠벌리는 것을 끔찍하게 싫어했다.
그러나 시아나는 에바의 이어진 말로 황태자궁은 그러한 규율이 보다 엄격하게 지켜지고 있는 것을 알았다.
“만약 궁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조금이라도 외부에 흘리거나 정해진 업무를 제외한 일을 하다가 걸리면, 이유 불문 즉각 사형입니다.”
“…….”
서늘한 말에 시아나의 얼굴이 굳었다.
에바는 그런 시아나를 다독이듯 말했다.
“물론 어디까지나 규율을 어겼을 때의 일입니다. 맡은 바 일만 잘하면 절대 일어나지 않을 일이니 너무 겁내지 마십시오.”
“……네.”
시아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아무리 입단속을 시켜도 이런저런 말들이 나돌기 마련이었다.
어떤 분위기인지, 어떤 사건이 있었는지…….
그러나 시아나는 단 한 번도 황태자궁에 대한 말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이래서였구나. 이렇게 보안이 철저하니 아무도 황태자궁에 대해 알 수가 없었던 거야.’
매일같이 루비궁에 들락거리며 헤실헤실 웃었던 라시드가 엄청난 권력자라는 것이 새삼 느껴졌다.
힘을 가진 자는 그만치 적도 많은 법이다.
그러니 이처럼 철저하게 관리를 하는 것일 테고.
허술하기 짝이 없던 루비궁과는 확연히 다른 분위기였다.
‘나도 괜한 실수하지 않게 조심해야지.’
시아나는 진지한 얼굴로 다짐했다.
그런 시아나를 향해 에바가 말했다.
“이곳이 앞으로 시아나 님이 지낼 곳입니다.”
방 안에 들어선 시아나는 눈을 부릅떴다.
보통 시녀들의 방은 궁의 가장 구석진 곳에 위치해 있으며, 작은 공간에 딱딱한 침대와 책상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는 것이 전부였다.
그런데 이곳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창문이 딸린 넓은 방.
여유롭게 들어오는 햇빛 덕분에 환한 방 안에는 고급 원목으로 만든 침대와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꼭 귀한 손님이 묵는 방처럼.
시아나는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물었다.
“여기가 제 방이라고요?”
“그렇습니다.”
“…….”
“너무 놀라실 필요 없습니다. 황태자궁은 다른 궁보다 일하는 이들의 숫자가 적은 만큼 예산이 여유로워 처우가 훨씬 좋거든요.”
“……그렇군요.”
시아나는 놀라운 마음을 숨기지 못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에바가 말했다.
“그럼 일단 짐을 풀고 쉬십시오.”
“네.”
시녀가 나간 후 침대 끝에 풀썩 앉은 시아나는 꺅 하고 소리쳤다.
“침대가 왜 이렇게 푹신푹신해?”
등만 대도 잠이 올 것 같은 엄청난 안락함이었다.
이불과 베개도 거위 털을 꽉 채워 만든 게 틀림없었다.
옷을 정리하기 위해 벽장 문을 연 시아나는 또 한 번 꺅 하고 소리쳤다.
“이 옷들은 다 뭐야?”
벽장에는 부들부들한 잠옷과 저녁에 걸치기 좋은 가벼운 카디건, 심플하지만 고급스러운 일상용 드레스에 슬리퍼까지 준비되어 있었다.
거기에서 끝이 아니었다.
동그란 테이블 위에는 꽃 한 송이가 꽂힌 꽃병이 놓여 있었고, 그 옆의 나무 접시에는 간편히 먹을 수 있는 다과가 놓여 있었다.
살필수록 자꾸 뭐가 나오는 방을 보며 시아나는 기가 찬 얼굴로 중얼거렸다.
“이런 최고급 호텔 같은 곳이 시녀의 방이라고?”
아무리 처우가 좋다 해도 이럴 수는 없었다.
결국 시아나는 돌아온 에바에게 물었다.
“제가 특혜를 받고 있는 건가요?”
“아까 말했다시피 황태자궁의 시녀에 대한 대우는 황궁에서 제일입니다만…… 그보다 더 신경을 쓰긴 했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는 에바를 보며 시아나는 눈썹을 내렸다.
“배려해 주신 것은 감사히 받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해야 할 일 만큼은 봐주지 말고 주셨으면 좋겠어요. 윗분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셨든 저는 이제 황태자궁의 시녀니까요.”
물론 시아나도 한가롭게 침대에서 뒹굴거리는 것을 좋아했다. 하지만 지금 이곳에서 그러고 싶지 않았다.
시아나는 녹색 제복을 입은 중급 시녀였으니까.
그 이름에 걸맞은 일을 하고 싶었다.
황태자의 과도한 호의에 기대어 제 본분도 잊고 깔깔거리는 것이 아니라.
내내 무표정이었던 에바가 새삼스러운 눈빛으로 시아나를 바라보더니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찰나의 순간이라 금세 사라져 버렸지만.
에바가 말했다.
“그런 것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시아나 님이 할 일은 제대로 마련해 두었으니까요.”
“……!”
시녀의 말에 시아나는 각오를 다진 얼굴로 눈에 힘을 주었다.
빗자루질이든, 빨래든, 무엇이든 능숙하게 할 자신이 있었다.
* * *
에바가 시아나를 데리고 온 곳은 라시드의 방이었다.
“전하께서 직접 업무에 관한 일을 말씀하신다 하셔서 저는 나가 보겠습니다.”
에바가 나간 후 홀로 남은 시아나는 불안한 얼굴로 눈을 깜빡거렸다.
‘도대체 무슨 일을 시키려고 직접 말하신다는 거지? 설마 변태 같은 일을 시키려는 셈은 아니겠지.’
예를 들어 목욕 시중을 시킨다든가.
시아나의 아버지인 아실론드 왕이 그러했다.
늙은 왕은 시녀들의 목욕 시중을 받으며 즐거워했다.
시아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 없어. 전하께서 제정신이 아니긴 하지만 절대 음흉한 분은 아니잖아.’
게다가 라시드는 시아나에게 조금이라도 미움받을까 봐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그가 아무리 권력의 최상위층에 있는 황태자라 해도 시아나에게 그런 짓을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아마도.’
찝찝한 결론을 내며 눈썹을 찡그리는데 달칵 하는 소리와 함께 안쪽에 있던 문이 열렸다.
청량한 비누 향과 함께 나타난 라시드를 본 시아나는 눈동자가 빠지는 게 아닐까 싶을 만큼 눈을 크게 떴다.
왜냐면…….
왜냐면 라시드가 얇은 샤워 가운 하나만을 걸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은빛 머리카락에는 물방울이 맺혀 있는 채로.
라시드가 시아나를 보며 두 눈을 부드럽게 휘었다.
“왔구나, 시아나.”
“왜, 왜 그런 모습을…….”
“목욕을 하는 중이었어. 네가 왔다는 말을 듣고 급히 나왔지.”
“…….”
여전히 굳은 시아나의 얼굴에 라시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는 정말 뭐가 문제인지 모르는 것 같았다.
시아나는 속으로 소리쳤다.
‘성인 남성이 제대로 옷도 갖춰 입지 않고 다른 사람 앞에 나타나는 건 어마어마한 무례라고요!’
원치 않게 그 모습을 보게 된 쪽은 희롱을 당한다고 느낄 수도 있을 만한 일이었다.
그러나…….
젖어 있는 은빛 머리카락과 보기 좋게 혈색이 도는 입술 때문일까.
라시드의 얼굴은 평소보다 청초하면서도 야릇했다.
게다가 또 몸은 어떻고.
벌어진 샤워 가운 사이로 보이는 섬세한 쇄골과 단단한 가슴 근육.
남자의 몸이 이토록 외설적으로 보일 수 있는지 시아나는 처음 알았다.
“……시아나?”
낮은 목소리에 시아나는 아차 하고 정신을 차렸다.
라시드가 천진한 얼굴로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에 시아나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래, 이상한 생각 하지 마. 이곳은 전하의 침실이잖아. 나는 전하의 시녀고.’
시녀가 하는 일에는 주인이 의복을 벗고 입는 것을 도와주는 것도 있었다.
고작 저 정도 노출에 호들갑을 떠는 건 시녀답지 않았다.
그래서 시아나는 최대한 표정을 가다듬으며 고개를 숙였다.
“고귀하신 황태자 전하께 인사드립니다. 시녀 시아나, 오늘부터 전하를 모시게 되었습니다.”
시아나의 말에 라시드는 환하게 웃었다.
더없이 듣고 싶었던 말이라는 듯이.
“믿기지 않을 만큼 기쁜 순간이야.”
그러니까…….
‘왜 그런 말을 하는 타이밍에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며 눈을 내리까는 건데요!’
시아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뜨며 힘겹게 말을 이었다.
“에바 님께 전하께서 제가 황태자궁에서 할 일을 알려 주신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앞으로 제가 어떤 일을 하면 될까요?”
“아, 그건 말이지.”
고개를 숙인 라시드가 시아나의 귓가에 속삭였다.
“내게 --- 줘.”
시아나가 가지고 들어온 카트 위에는 뜨거운 물이 담긴 찻주전자와 찻잔이 놓여 있었다.
그렇다.
시아나가 맡게 된 일은 바로 황태자의 차 시중이었다.
[내게 차를 타 줘.]
시아나는 그 말을 꼭 그렇게 야릇한 목소리로 말했어야 했는지에 대한 의문을 품으며 말했다.
“차 준비를 해 왔습니다, 전하.”
다행히(?) 라시드는 그사이 가운을 벗고 흰색 셔츠를 입고 있었다.
라시드가 시아나를 지그시 바라보며 말했다.
“기분이 좋아 보이는데.”
“어머나, 표가 나나요?”
사실 시아나는 조금 들떴다.
방금 전 차를 준비하기 위해 들어간 탕비실의 풍경 때문이다.
아쌈, 다즐링, 닐기리, 얼그레이, 누와라엘리야, 라벤더, 로즈마리, 애플티…….
“그렇게 다양한 찻잎이 한자리에 모여 있는 것은 처음 보았어요.”
게다가 하나같이 최고급품이었다.
그뿐인가.
선반에는 예술 작품처럼 아름다운 찻주전자와 찻잔이 수십 개 놓여 있었다.
“정말이지 사치스럽고 호사스럽기 짝이 없는 탕비실이더군요. 앞으로 일할 곳이 그런 곳이라니…… 매우 만족스럽습니다.”
솔직한 시아나의 말에 라시드가 귀엽다는 듯 웃었다.
“그래서 나의 시녀는 첫 차로 어떤 차를 골라왔지?”
보통은 주인이 원하는 차를 가져오라고 하기 마련이지만 라시드는 시아나에게 메뉴 선택을 맡겼다.
시아나가 살포시 내민 유리병 안에는 자주색 찻잎이 들어 있었다.
라시드가 눈을 가늘게 떴다.
“사프란이구나.”
“네. 사실 제가 사프란 차를 마셔 본 적이 없거든요.”
같은 무게의 다이아몬드보다 비싸서 웬만한 부호도 아껴 마셔야 한다는 최고급 찻잎.
그래서 시아나는 주저 없이 사프란을 골랐다.
물론 마시는 건 제가 아니라 라시드였지만 상관없었다.
옆에서 그 모습을 구경하는 것만으로 좋은 경험이 될 것 같았으니까.
‘포악한 왕이나 예민한 왕비도 나른하게 만든다고 전해지는 향도 궁금하고 말이지.’
시아나가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말했다.
“그럼 차를 타 드리겠습니다.”
그때 라시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
눈을 동그랗게 뜬 시아나를 바라보며 라시드가 말했다.
“오늘은 네가 황태자궁에 온 첫날이잖아. 환영의 의미로 오늘은 내가 타 주고 싶구나.”
“네?”
시아나가 황당하다는 얼굴을 했지만 라시드는 상관 않고 두 손으로 시아나의 어깨를 살포시 눌러 의자에 앉혔다.
시아나가 뭐라 말할 틈도 없이 라시드는 차 통의 뚜껑을 따 찻잎을 찻주전자의 망 안에 넣었다.
그리고 찻물이 우러난 찻주전자를 들어 따르기 시작했다.
“…….”
라시드는 아직 목욕을 한 흔적이 남아 있었다.
촉촉한 머리카락, 은은한 비누 향.
거기에 살짝 몸을 숙여 셔츠 사이로 비치는 곧은 쇄골과 가슴.
‘내, 내가 지금 뭘 보는 거야?!’
뒤늦게 정신을 차린 시아나가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사자를 피해 도망간 곳에 드래곤이 있다고 했던가.
숨 막힐 정도로 아름다운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다 탔어, 차.”
“……아.”
두 눈을 깜빡이며 시아나는 시선을 내려 찻잔을 보았다.
찻잔 안에 노란빛의 찻물이 채워져 있었다.
어서 마셔 보라는 라시드의 눈빛에 시아나는 천천히 찻잔을 들어 입가에 댔다.
과연 다이아몬드보다 값비싼 이유가 있었다.
차는 더없이 감미로웠다.
“……맛이 정말 좋아요. 향도 훌륭하고요.”
“그래?”
시아나의 말에 라시드는 두 눈을 곱게 휘었다.
“……!”
그 모습에 시아나는 들고 있던 찻잔을 떨어뜨릴 뻔했다.
겨우 잡은 찻잔을 테이블 위에 놓은 시아나가 괴로운 얼굴로 물었다.
“전하, 설마 매일 방에서 이러고 계셨던 거예요?”
“무슨 말이야?”
“그러니까…….”
목욕을 한 후에 제대로 옷도 갖춰 입지 않고 돌아다닌다든가, 이런 식으로 순진한 시녀에게 눈웃음을 왕왕 날린다든가 하는 무자비한 행동 말이다.
시아나가 그 말을 입 밖에 내지 않았음에도 라시드는 그녀의 눈빛에서 그 생각을 읽고 웃음을 터뜨렸다.
“이야기를 전해 듣지 못했느냐?”
“무엇을요?”
“정복을 입을 때가 아니면 의복을 입는 것도, 목욕도, 차를 마시는 것도 혼자 한다. 자잘한 것은 솔이 도움을 주지.”
“그 말은…….”
“그래, 나는 최측근 시녀가 없다. 내 방에 들어오는 시녀는…….”
라시드가 손을 뻗었다.
어깨를 움찔한 시아나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라시드가 입을 열었다.
“너뿐이야, 시아나.”
“…….”
다정한 목소리와 달리 라시드의 보라색 눈동자에는 진한 애정이 담겨 있었다.
시아나는 저도 모르게 찻잔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제야 언젠가 라시드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단둘이 있을 때는 최선을 다해 너를 유혹할 생각이다.]
그때는 몰랐다.
그 유혹이 이만치 강렬할 줄은.
시아나는 아찔해지는 기분에 눈을 질끈 감았다.
* * *
<아리스 공주님께
공주님, 잘 지내고 계시나요?
저는 황태자궁에서 잘 지내고 있어요. 너무 잘 지내서 부담스러울 정도랍니다.
하루에 세 번 나오는 식사는 최고급 레스토랑에 견주어도 부족하지 않을 만큼 맛이 있고, 휴게실에 가면 달콤한 쿠키와 차를 원하는 만큼 먹을 수 있답니다.
침대는 거위 털이 누벼져 있어 누우면 솔솔 잠이 오고요.
제일 놀라운 것은 시녀가 사용할 수 있는 공용 욕실에 늘 따뜻한 물이 나온다는 거예요!
귀한 황족 분들의 욕실에나 설치되어 있는 마력석이 설치된 덕분이에요. 정말 기가 찰 만큼 대단한 일이죠?
에바 님(전에 말씀드렸죠? 황태자궁의 총괄 시녀님이세요.)께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냐고 물어보니, 무덤덤한 얼굴로 말씀하시더라고요.
“황태자궁에서 일하는 자의 특혜라고 할까요.”
이래서 황태자궁에서 일하는 시녀와 시종이 절대 이곳을 그만두지 않는가 봐요.
이곳에서 일하는 분들은 모두 전하를 모신 지 10년이 넘었다고 하네요.
하나같이 일을 정말 잘해요. 친절하고요.
다들 과묵해서 많은 대화를 나누진 않지만요.
공주님의 하루는 어떠셨나요?
공주님의 시녀, 시아나>
<내 심장의 주인 시아나에게
안녕, 나의 시아나. 나도 잘 지내고 있어.
루비궁보다 족히 5배는 큰 저택에서 생활하는 것도 이제 익숙해졌고, 할머니께 추천을 받아 동부 출신의 시녀들도 뽑았어.
나랑은 아직 어색한데 니니와 나나와는 꽤 친해져서 시녀들 사이가 꽤 좋아.
그리고 오늘 드디어 메디치안 후작가의 후계자 후보 네 명을 만났어.
후보 네 명을 차례대로 만났는데 처음 만난 사람은 나한테 ‘어여쁜 공주님’이라면서 징그러운 웃음을 짓는 아저씨였어.
우웩. 토하는 줄.
두 번째 만난 사람은 엄청나게 무섭게 생긴 덩치 큰 할아버지였는데 할마마마께 꼼짝을 못 하더라?
예전에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모양인데 그게 뭘까.
세 번째 만난 사람이 제일 최악이야. 못되게 생긴 아줌마인데 대놓고 날 무시하더라고.
무희 출신의 어미를 가진 천출 운운하면서 말이야.
당장 그 아줌마에게 달려들 만큼 화가 났는데 그래도 네 번째 후보를 만나고 마음이 좀 풀어졌어.
올해 18살 된 남자인데 나를 보더니 무릎을 꿇고 나와 눈을 마주치며 인사를 하더라.
꼭 시아나 너처럼.
그래서 마음에 들었어.
아주 쬐에끔이지만 말이야.
아무튼 이만 자야겠어.
내일은 아침 일찍 승마를 배우기로 했거든. 엄청 기대돼.
그럼 꿈에서 봐, 시아나
-추신
참, 오라버니가 이상한 짓 하거든 당장 일러야 해. 내가 아주 혼쭐을 내줄 거야!
너의 사랑스러운 공주, 아리스>
한 자 한 자 꾹꾹 눌러쓴 편지지를 보며 시아나는 웃었다.
‘역시 공주님은 대단해.’
아리스는 놀랄 만치 잘 지내고 있었다.
오히려 답답한 황궁을 벗어나 보니 세상에 재미있는 것이 이렇게 많았냐며 즐거워했다.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걱정이 되는 건 나지.’
시아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시아나는 아리스에게 차마 말하지 못한 것이 있었다.
그건 바로…….
시아나는 찻주전자와 찻잔을 담은 카트를 끌고 방문을 열었다.
라시드가 기다렸다는 듯 환하게 웃었다.
“어서 와, 시아나.”
“…….”
시아나는 우뚝 멈춰 섰다.
시아나가 살짝 굳은 얼굴로 물었다.
“전하, 오늘은 대외 업무가 없어서 궁에서 쉬실 거란 말을 들었습니다만.”
“맞아.”
그러나 라시드의 모습은 지금 당장 무도회에 나가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반짝거리고 있었다.
탄탄한 몸이 느껴지는 황태자의 제복.
머리카락을 깔끔하게 넘겨 시원하게 드러난 이마와 이목구비가 조화롭게 위치해 있는 아름다운 얼굴.
거기에 귀에는 반짝이는 귀걸이까지.
‘누가 봐도 작정하고 꾸민 모습이잖아요!’
시아나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그런 시아나를 향해 라시드가 눈을 내리깔며 물었다.
“시아나.”
“네.”
난감한 표정으로 대답하는 시아나를 향해 라시드가 말을 이었다.
“오늘 내 모습 어때?”
“…….”
“마음에 들어?”
“…….”
“별로인가?”
아 정말! 그런 얼굴로 그렇게 꾸몄는데 마음에 들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마음에 들어요.
아주 그냥 완벽하다고요!
그렇게 소리치고 싶은 것을 겨우 참으며 시아나가 말했다.
“시녀는 모시는 분의 외양을 평가하지 않습니다. 그럼 차를 따르도록 하겠습니다.”
“…….”
시아나가 찻잔을 채우는 사이 라시드가 테이블 위에 놓인 케이크를 포크로 폭 떴다.
그러고는 시아나의 앞에 몽글몽글한 케이크 덩어리를 가져다댔다.
이게 뭐냐고 눈을 크게 뜬 시아나를 향해 라시드가 입을 열었다.
“아-.”
“…….”
황태자가 시녀의 입에 케이크를 넣어 준다니 당치도 않은 행동이었다.
시아나는 정중히 케이크를 거절하려 했다. 그러나…….
“어서 먹어 봐. 아침부터 너를 위해 만든 케이크야.”
“네?”
시아나는 라시드가 저를 위해 케이크를 만들었다는 것에 놀랄 틈도 없었다.
“어서.”
라시드의 아름다운 얼굴이 살짝 기울어지며 귓가의 귀걸이가 찰랑거렸다.
일순간 숨이 막힐 만큼 고혹적인 모습에 시아나는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라시드는 그 틈을 파고들어 보드라운 케이크를 작은 입 속으로 집어넣었다.
부드러우면서 달콤한 치즈의 풍미가 입 안 가득 느껴졌다.
시아나는 새삼 라시드의 실력에 놀라며 케이크를 꿀꺽 삼켰다.
그런 시아나를 바라보며 라시드가 물었다.
“맛있어?”
“……예.”
시아나의 대답에 라시드가 화사하게 웃었다.
누구라도 그가 사랑에 빠졌음을 알 수 있을 만큼 달콤하고 애틋한 눈빛이었다.
시아나는 치맛자락을 꽉 잡았다.
‘공주님, 이 요망한 황태자 전하를 어쩌면 좋을까요.’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시아나는 이성을 잃고 라시드에게 달려들 것 같았다.
시녀 인생 최대의 위기였다.
* * *
사실 시아나는 라시드의 차 담당 시녀니 그를 마주할 시간이 길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보통 혼자 즐기는 티타임은 30분, 길어야 1시간 정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라시드의 티타임 시간은 엄청났다.
‘오늘 오전에는 무려 2시간, 오후에는 3시간이나 차를 마셨지.’
그나마 중간에 호위 기사 솔이 저녁에 회의가 있다며 끌고 가지 않았더라면 밤이 될 때까지 차를 마셨을지도 모른다.
해가 진 후, 에바가 라시드의 말을 전했다.
“전하께서 차를 마시고 싶다 하십니다. 준비해 주십시오.”
에바의 말에 시아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 가지 다행인 것은 에바가 시아나에게 딱 업무에 관한 것만 말한다는 것이다.
라시드가 왜 그렇게 오랜 시간 차를 마시는지, 그동안 방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같은 것에 대해 조금도 관심 갖지 않았다.
아마 에바가 그에 관한 것을 물어본다면 시아나는 무척 난감했을 것이다.
‘전하께서 제 이성을 박살 내기 위해 최선을 다해 유혹을 하고 계시답니다.’
—라는 말을 할 수는 없으니 말이다.
시아나는 탕비실에서 차 준비를 했다.
오늘 고른 차는 숙취에 좋다는 녹차였다.
라시드가 술을 마셨다는 말을 듣고 준비한 것이다.
‘회의를 하며 곁들인 와인이니 만큼 많이 드시진 않았겠지만 그래도 속이 풀어지는 데 도움을 주겠지.’
카트를 밀고 간 시아나는 눈을 크게 떴다.
황태자의 방문 앞에 솔이 서 있었기 때문이다.
호위 기사답게 솔은 내내 라시드의 곁에 붙어 있는데, 시아나가 차 시중을 들 때면 은근슬쩍 밖으로 나가곤 했다.
그러나 지금처럼 시아나가 오기도 전에 나와 있는 것은 처음 보았다.
“솔 님, 왜 밖에 나와 계신가요?”
“안에 있기가 난감해서요.”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들어가 보시면 아실 겁니다.”
솔은 정중한 태도로 문을 열어 주었다.
시아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방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이내 솔이 말한 의미를 깨달았다.
“…….”
긴 소파에 기댄 라시드가 살짝 발그레해진 얼굴로 눈을 감고 있었다.
그런데 그 모습이 엄청났다.
회의에 참석하느라 몸에 딱 맞는 검정색 정장을 입고 있었는데, 답답했는지 단추가 반쯤 풀려 있었고 그 틈으로 단단한 가슴 근육이 보였다.
시아나의 얼굴에 열이 확 올랐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벽하게 단장한 남자가 저렇게 흐트러져 있다니. 반칙이잖아.’
어쩐지 보는 것만으로 죄를 짓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시아나는 시선을 내리며 말했다.
“전하, 차를 준비해 왔습니다.”
“…….”
그러나 라시드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몇 번이나 같은 말을 한 후에야 시아나는 그가 잠이 들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어쩌지.’
시아나는 난감한 표정을 짓다가 고개를 들어 라시드의 곁으로 한 발짝 다가갔다.
“전하?”
여전히 미동도 없었다.
“전하.”
조금 더 가까이서 불러 봤지만 소용없었다.
“…….”
무슨 생각이었을까.
시아나는 슬그머니 고개를 숙여 라시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가는 은색 머리카락, 그것과 똑같은 긴 속눈썹.
조금의 오차도 없이 빚어 낸 조각상처럼 절묘하게 위치한 이목구비.
누구라도 넋을 잃고 바라볼 만큼 아름다운 얼굴은 어딘가 천진한 구석마저 있었다.
‘하지만 그렇지 않잖아요.’
눈을 뜨는 순간 그는 한 여인의 마음을 열렬히 원하는 남자로 변할 것이 틀림없다.
꼭 지금처럼.
어느새 눈을 뜬 라시드의 선명한 보라색 눈동자 위로 시아나가 비쳤다.
놀란 시아나가 한 발짝 벗어나려는 찰나, 라시드가 팔을 뻗어 그녀의 허리를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순식간에 라시드에게 안긴 시아나가 놀란 얼굴로 소리쳤다.
“저, 전하!”
“추워.”
“그럼 담요를 가져다드리겠…….”
“싫어.”
“…….”
“이게 제일 좋단 말이야.”
“…….”
잠이 덜 깬 목소리로 칭얼거리는 말에 시아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아니야. 아무리 그래도 황태자 전하와 이런 모습으로 있는 건 말도 안 된다고.’
한시라도 빨리 라시드의 품속에서 빠져나와야 했다.
그러나 그의 품은 넓었고 따뜻했으며 달콤한 와인 향이 났다.
시아나는 마치 덫에 걸린 생쥐처럼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쿵쿵, 누구 것인지 알 수 없는 심장 소리를 들으며 시아나는 난감한 얼굴로 눈을 꾹 감았다.
그렇게 얼마가 지났을까.
낮게 잠긴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마워, 시아나.”
“……뭐가요.”
“순진한 시녀를 희롱한다고 뺨을 때리지 않아 주어서.”
희롱한다고 내치기엔 전하가 너무 잘생기셨어요.
시아나는 그 말을 속으로 숨기며 물었다.
“혹시 오늘 회의 때 무슨 일이 있으셨어요?”
“왜 그런 걸 묻지?”
“술을 많이 드신 것 같아서요.”
라시드는 평소에 술 한 모금도 입에 대지 않았다.
라시드가 순순히 그 사실을 인정했다.
“회의를 가기 전에 전보가 도착했어.”
“……?”
“아바마마와 어머마마께서 곧 환궁하신다더군.”
시아나는 눈을 크게 떴다.
황제와 황후는 근 1년간 황궁을 떠나 있었다.
부재가 길어지자 시녀들은 늘 도대체 두 분이 언제 돌아오나 수군거리곤 했다.
시아나가 머뭇거리더니 물었다.
“……혹시 전하께서는 황제 폐하와 황후 폐하께서 돌아오시는 게 불편하신가요?”
“그렇지 않아. 건강하게 돌아오셔서 다행이라고 생각해. 하지만 긴장이 되는 건 어쩔 수 없군. 아바마마와 어마마마는 무척 엄격하시니까 말이야.”
시아나가 눈을 커다랗게 떴다.
“세상 무서울 것 없어 보였던 전하께서 그런 생각을 하시다니 놀랍네요.”
“……너무해. 내가 안쓰럽진 않느냐?”
“에이. 아버지가 황제 폐하고 어머니가 황후 폐하면 어려운 게 당연해요.”
“……그런가?”
“그럼요. ……그래도 조금 힘들어 하시는 것 같으니 응원해 드릴게요.”
라시드는 눈을 크게 떴다.
라시드에게 안겨 있던 시아나가 팔을 뻗어 그의 머리를 쓰다듬기 시작한 것이다.
다정하고 따스한 손길이었다.
“과연. 기운이 샘솟는군. 최고의 응원법이야.”
천진하게 웃는 라시드를 내려다보며 시아나는 생각했다.
‘……그래. 아무리 어른스럽고 강해 보여도 전하께서는 아직 열여덟 살이지.’
법적으로 어엿한 성인이긴 했으나, 아직 부모의 위압감에 짓눌리는 앳된 나이.
시아나는 새삼 라시드가 강인한 남자가 아니라, 아직 온전히 제 힘을 가지지 못한 위태로운 소년처럼 보였다.
* * *
고요했던 황궁이 술렁거렸다.
황제와 황후가 환궁한다는 소식 때문이다.
황궁 곳곳에서 대대적인 대청소와 정비가 이루어졌다.
분주하게 움직이는 시녀들과 시종들에게서는 전에 없던 활기가 느껴졌다.
그래서 시아나는 의외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황제 폐하와 황후 폐하의 인기가 대단한가 봐요.”
시아나의 말에 대답한 것은 황태자궁의 총괄 시녀 에바였다.
“정확히 말하면 황제 폐하보다는 황후 폐하의 인기입니다. 황제 폐하께서는 성정이 불같으셔서 모시기가 까다로운 분인 반면, 황후 폐하께서는 아랫사람들에게 무척 자상하시니까요.”
시아나도 궁에서 일하며 그런 말을 많이 들었다.
시녀들은 틈만 나면 성품이 온화하고 아름다운 황후에 대한 찬양을 늘어놓곤 했다.
물론 황후가 인기가 많은 것은 그것 때문만이 아니었다.
한편의 동화 같은 황후의 이야기 때문이다.
* * *
20년 전.
황궁은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불과 24세의 나이로 황좌에 오른 젊은 황제의 성정 때문이었다.
그는 오만하고 난폭하며…… 난잡했다.
시시때때로 젊은 시녀를 희롱했고 약혼자가 있는 귀족 여인과 깊은 교제를 하기도 했다.
재미있는 것은 그런 와중에도 많은 여인들이 황제를 흠모했다는 사실이었다.
제국 최고의 권력자에 혈기왕성한 나이, 훤칠한 외모까지 가졌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황제는 매일밤 다른 여자를 만났다.
그러던 중 황제에게 한 여인이 나타났다.
한미한 남작 가문의 딸, 마리아였다.
마리아는 눈처럼 뽀얀 피부에 단아한 얼굴, 길고 가는 금빛 머리카락을 가진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황제는 그녀에게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벌이 꽃에게 날아들 듯 황제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눈을 마주쳐 주고 웃어 주면 여인은 얼굴을 붉히며 제게 안겨 올 것이다.
다른 여인들이 그러하듯이.
그러나 마리아의 반응은 황제의 예상과 전혀 달랐다.
“송구합니다, 폐하. 저는 무례한 남자에게 조금의 매력도 느끼지 못합니다.”
마리아는 황제를 거절했다.
황제는 화가 났다.
감히 저를 거절한 여자에게 분노가 들끓었다.
동시에 그녀를 어떻게든 갖고 싶은 욕망이 일었다.
난생처음 느낀 감정이었다.
황제는 마리아에게 꽃을 선물하고 최고급 보석과 드레스를 자택으로 보냈으며 데이트 신청을 했다.
그러나 마리아는 쉽게 마음을 열지 않았다.
어떻게 해도 제 손에 들어오지 않는 여인을 향해 황제는 결국 무릎을 꿇었다.
“제발, 나의 황후가 되어 줘. 그렇게만 해 준다면 네게 나의 모든 것을 주마.”
황제의 애달픈 구애에 마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는 세상을 다 가진 듯 기뻐했다.
“꼭 동화 속에 나오는 이야기처럼 로맨틱하지 않어?”
눈을 반짝이며 말하는 이는 츄츄였다.
시아나는 오랜만에 그레이스 황녀의 궁에 놀러 와 있었다.
츄츄의 옆에 앉아 있던 그레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 귀족 여인들과 시녀들이 황후 폐하를 존경하는 거지. 천하의 바람둥이에 제멋대로인 황제 폐하를 발밑에 굴복시키다니 얼마나 멋져.”
“…….”
그러나 시아나는 두 사람의 말에 신나게 고개를 끄덕일 수 없었다.
왜냐면 현실은 ‘두 사람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라고 끝나는 동화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열렬한 사랑을 맹세하신 황제 폐하는 몇 년 후에 황비와 후궁을 줄줄이 들이셨죠.”
시아나의 말에 소녀처럼 상기되었던 츄츄와 그레이스의 얼굴이 대번에 가라앉았다.
핑크빛 동화 속에서 칙칙한 현실로 돌아온 것처럼.
그레이스가 심드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황제는 수많은 후계자를 만들어야 하니 어쩔 수 없지.”
그럼에도 뒷맛이 씁쓸한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레이스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래서 더 황후 폐하가 대단한 거야. 아바마마가 다른 후궁을 들여도 단 한 번도 화를 내거나 질투를 하지 않으셨으니까.”
그러기는커녕 상냥하게 챙겨 주었다.
그렇기에 황궁의 여인들은 황후를 존경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황제도 마찬가지였다.
비록 세월이 흘러 20년 전의 불꽃같은 사랑은 사라졌지만, 황제는 여전히 황후를 아꼈다.
마음이 식으면 버리다시피 하는 후궁들과는 확연히 다른 처우였다.
그레이스가 말했다.
“그토록 변덕스러운 아바마마가 매주 일요일 아침마다 잊지 않고 황후 폐하와 식사를 하시잖니.”
츄츄도 거들었다.
“게다가 황궁을 떠나 요양지까지 함께 가실 정도잖아요. 부부 금실이 얼마나 좋으세유.”
황제와 황후가 적대 관계이거나 냉랭한 것보다는 훨씬 좋은 상황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분위기를 만들어 주는 것은 누가 뭐래도 온화한 황후 덕분이었다.
츄츄가 살짝 발그레해진 얼굴로 말했다.
“지가 오고서 곧 황후 폐하께서 요양지로 떠나셔서 제대로 뵌 적이 없구만요.”
“내 옆에 있으면 곧 뵙게 될 거야.”
그레이스의 대답에 눈을 빛낸 츄츄가 물었다.
“황후 폐하께서 정말 그렇게 아름다우신가유?”
“그래. 라시드 오라버니의 얼굴은 그냥 나온 게 아니라니까. 어머니와 아버지의 역할이 컸다고.”
“오마나. 설레라.”
까르르 웃는 두 사람 앞에서 시아나는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며칠 전 보았던 라시드의 얼굴 때문이다.
황제와 황후가 돌아온다는 소식을 들은 라시드는 그리 기뻐 보이지 않았다.
‘아주 싫어하는 것 같지도 않았지만 그래도 이상해. 다른 황비의 딸인 황녀 저하는 저토록 좋아하시는데 친아들인 황태자 전하는 그렇지 않다는 게.’
그뿐인가.
시아나는 예전부터 의아한 것이 있었다.
라시드가 고작 열세 살의 나이에 전쟁터로 향했다는 것이다.
‘전하께서 전쟁터로 간 것이 누구의 의지였는지는 모르지만, 저만치 황제의 신뢰를 받는 황후 폐하라면 아들을 보낼 수 없다고 막을 수 있었을 텐데…….’
아들이 공을 세워 굳건하게 황태자의 직위를 가지게 하기 위해서였을까?
만약 그런 것이라면 ‘자애롭고 온화한 황후’라는 별명과는 다른 분일 수도 있다고 시아나는 생각했다.
* * *
며칠 후, 황제와 황후가 황궁에 돌아오는 날이 되었다.
근 1년 만에 돌아온 궁의 주인들을 위해 환영식이 열렸다.
화려하게 꾸며진 중앙 정원에 황궁에 사는 모든 황족이 나와 섰다.
4명의 황비, 4명의 황자, 7명의 황녀.
거기에 수많은 후궁들까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화려하게 꾸민 이들이 서 있는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시녀와 시종들도 한편에 모여 서 있었는데, 시아나도 그곳에 있었다.
비록 구석진 곳이긴 했지만.
‘어쨌건 일개 중급 시녀가 이 자리에 껴 있기 쉽지 않은데 전하의 특혜를 받은 거지. 이왕 배려해 주신 것 열심히 구경해야지.’
—라고 생각하며 시아나는 허리를 곧게 폈다.
이내, 황제와 황후가 모습을 드러냈다.
시아나는 눈을 크게 떴다.
‘와…… 듣던 대로 두 분 다 인물이 대단하구나.’
몸이 좋지 않아 요양까지 갔다 온 황제는 아직 몸이 다 회복되지 않은 것인지 얼굴이 조금 수척해 보였다.
그럼에도 또렷한 이목구비를 가진 미남이었다.
‘게다가 은빛 머리카락과 보라색 눈동자가 전하를 꼭 닮았어.’
라시드가 나이가 들면 꼭 저런 얼굴이 될 것 같았다.
시아나는 어쩐지 얼굴에 열이 오르는 것을 느끼며 황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많은 이들이 외모도 마음도 아름답다고 극찬하는 황후는 금빛 머리카락과 단아한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가녀린 체구에서 우아한 기품이 느껴졌다.
그런 두 사람을 맞이한 것은 황태자 라시드였다.
황족들의 맨 앞에 서 있던 라시드가 두 사람의 앞에 다가가 고개를 숙였다.
“고귀한 황제 폐하와 황후 폐하께 황태자 라시드 인사드립니다.”
황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보는 이가 민망할 만큼 무뚝뚝한 대답이었다.
그러나 황후의 반응은 달랐다.
황후가 두 눈을 곱게 휘며 말했다.
“그간 우리가 없는 동안 황궁을 보살피느라 고생이 많았지?”
“도와주는 이들이 많아 힘들지 않았습니다.”
아들이 대견하다는 듯 눈을 한층 부드럽게 휜 황후가 두 손을 뻗어 라시드를 안았다.
“보고 싶었다, 내 아들.”
“……네.”
살벌한 황궁에서 보기 드문 따스한 광경에, 모여 있던 황족들과 시녀들의 얼굴이 부드럽게 풀어졌다.
라시드를 안았던 손을 뗀 황후가 다른 황족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번거로웠을 텐데 이렇게 나와 환영을 해 주어 고맙네. 내 피곤이 풀리면 그대들과 이야기를 나눌 자리를 마련할 테니 그때 보세.”
사려 깊은 말에 황족들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황후의 인사는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황후는 시녀와 시종들에게도 인사를 전했다.
“오랜만에 왔는데도 궁이 깨끗하게 관리가 되어 있더구나. 고생 많았다.”
시녀와 시종들은 생각지도 못한 칭찬에 눈을 부릅떴다. 어떤 이는 눈가에 눈물이 어리기까지 했다.
그들 사이에 서 있던 시아나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우와, 대단하다.’
황후의 직책에 올라간 이가 이런 식으로 아랫사람들까지 챙기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궁의 모든 사람들이 왜 그렇게 황후를 존경하는지 알게 되는 순간이었다.
황후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라시드의 손을 잡았다.
“오랜만에 만났으니 그간 못한 이야기를 나누자꾸나.”
라시드는 고개를 끄덕이며 황제와 황후의 곁에서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그린 듯이 아름다운 세 사람의 모습에 사람들은 황홀한 표정을 지었다.
* * *
황제궁.
거대한 연못 앞에 놓인 테이블에 황후와 라시드가 나란히 앉아 있었다.
세 사람은 식사를 한 후 차를 즐기고 있었다.
황제는 차 한 잔을 마시자마자 자리를 떠, 지금 라시드의 앞에는 황후뿐이었다.
라시드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아바마마께서 말씀도 부쩍 줄고 표정도 없으시더군요. 혹시 건강에 문제라도 있으신 건…….”
황후는 걱정 말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오랜 시간 마차를 타고 왔더니 피곤하신 게지.”
“……그렇습니까.”
“그래, 어딘가 불편하다면 저렇게 조용할 분이 아니잖니.”
몇 년간 만성 두통을 앓고 있던 황제는 머리가 지끈거릴 때마다 불같이 화를 냈다.
심할 때에는 물건을 던지거나, 제 아픔을 제대로 고치지 못하는 의사를 윽박지를 때도 있었다.
그 모습을 아는 라시드는 황후의 말을 순순히 믿었다.
“요양지에서 아바마마의 두통이 나아졌다니 다행입니다.”
“……그러게 말이다.”
차를 한 모금 홀짝인 황후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라시드, 요양지에서 이상한 소식을 들었다.”
“무엇입니까?”
“네가 하루가 멀다 하고 루비궁에 들렀다 하더구나.”
“…….”
“그리고 동부에 간 아리스 공주를 지원해 준 것도 너지? 동부에서는 아리스 공주가 황태자의 위용을 등에 업고 나타났다고 난리가 났단다.”
근 1년을 한적한 요양지에 있었다는 것을 믿기 힘들 만큼 황후는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라시드는 어쭙잖게 황후의 말을 부정하는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어마마마께서 알고 계신 그대로입니다.”
라시드의 긍정에 황후는 눈썹을 내렸다.
“라시드, 내가 늘 말했잖아. 황제의 자리를 두고 다투는 사이에 형제의 정을 나눌 수 없는 거라고.”
“…….”
“어떤 생각으로 아리스 공주를 챙겼는지 몰라도 그것들은 그 아이의 힘을 키워 주기만 할 뿐이야. 네가 얻는 것은 아무것도 없지. 그러니 이제 그 아이를 향한 관심을 거두렴.”
황후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그러나 그 안에는 단호한 의지가 어려 있었다.
잠시 두 사람 사이에 정적이 감돌았다.
황후는 그것이 전혀 불편하지 않았다.
결국 라시드가 여느 때처럼 고개를 끄덕일 것을 알고 있었기에.
라시드는 아름답고 상냥한 어머니에게 절대 거역하는 법이 없었다.
그러나…….
“어마마마, 아리스는 제 동생입니다. 그 아이가 제대로 된 힘을 가질 때까지 보살펴 주고 싶습니다.”
“……!”
일순 황후의 눈빛이 세차게 흔들렸다.
황후는 커다래진 눈으로 라시드를 바라보다가 물었다.
“……꼭 그래야겠니?”
“네.”
“이 어미가 싫다 말해도?”
“……죄송합니다.”
라시드의 말에 황후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괴로운 얼굴로 이마를 감싼 황후가 말했다.
“어미 말에 반박을 하다니 네가 크긴 컸구나.”
“송구합니다.”
“됐다.”
“…….”
“피곤해서 더는 대화를 하기가 힘들구나. 이 이야기는 나중에 다시하자. 이만 가 보렴.”
“……예.”
라시드는 황후의 축객령을 순순히 따랐다.
라시드가 사라진 후 테이블에는 황후만이 남았다.
찻잔을 든 황후가 눈을 내리깔고 말했다.
“폐하와 내가 없는 동안 라시드는 어린 동생과 노는 게 꽤 즐거웠던 모양이야.”
“그러게 말입니다.”
혼잣말 같던 황후의 말에 대꾸한 것은 그녀의 뒤에 있던 시녀였다.
허스키한 목소리를 가진 여인은 황후의 최측근 시녀 이블린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어린 동생과 친해졌다고 해도 저렇게까지 변하는 데는 다른 이유가 있는 법이지.”
“…….”
“이블린, 라시드에 대한 것을 조사해 오렴. 내가 모르는 뭔가가 있는 것 같으니.”
이블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 * *
황태자 라시드에 관해 무언가를 알아내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이었다.
라시드는 극소수의 부하만 주변에 두는 데다, 그들은 하나같이 입이 무거웠으니까.
어쭙잖은 뇌물이나 협박은 통하지 않았다.
그러나 황후의 시녀 이블린에게는 그들의 입을 여는 특별한 방법이 있었다.
바로 그녀가 모시는 이가 라시드의 친모이며 황궁에서 가장 자애로운 황후라는 것이다.
황태자궁에서 일하는 시녀들 중 몇 명은 황후에게 라시드에 대한 정보를 넘기는 것에 거리낌이 없었다.
그렇게 이블린은 라시드에 관한 이야기를 가지고 왔다.
이블린에게 이야기를 전해 들은 황후가 눈을 내리깔았다.
“라시드에게 새 시녀가 생겼다고?”
“예. 아리스 공주님께서 동부로 간 동안 맡긴 시녀라고 하는데, 아리스 공주님을 대하듯 정중히 대하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합니다.”
“아리스를 아끼는 마음이 크면 그런 말을 할 수도 있지.”
“그렇긴 하지요. 하지만 여기에서 끝이 아닙니다. 그 시녀는 전하의 차 시중을 맡게 되었는데…….”
이 부분에서 황후의 고운 눈썹이 움찔했다.
왜냐면 라시드는 시녀와 시종을 가까이 두는 것을 끔찍하게 싫어했기 때문이다.
꼭 필요한 일이 아니면 대부분의 일은 혼자 할 정도였다.
그런 라시드가 차 시중 시녀를 두다니.
놀랄 만한 일이었다.
이블린이 말을 이었다.
“전하의 티타임 시간이 부쩍 길어지셨다고 합니다.”
“……차를 마시는 동안 시녀와 함께 있는 것이냐?”
“예.”
“…….”
황후의 얼굴이 굳었다.
사실 궁에서 그다지 특별할 것 없는 이야기였다.
황자 중에는 젊고 아름다운 시녀에게 호감을 가지는 경우가 많았으니까.
황자는 마음에 든 시녀를 가까이하거나 거기서 더 발전하면 애인처럼 농밀한 관계를 가지기도 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시녀가 묵직한 돈주머니를 받고 황궁을 떠나며 관계가 끝났다.
하지만 라시드는 결코 그런 타입이 아니었다.
“사람에게 무심한 라시드가 그렇게까지 예뻐하다니…… 두 사람이 깊은 관계일지 모르겠군.”
이블린은 황후의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황후의 얼굴이 심란해졌다.
라시드가 아리스 공주에게 잘해 주는 것보다 이쪽이 더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황후가 말했다.
“그 시녀를 만나 보고 싶어.”
* * *
라시드가 궁을 비운 틈을 타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던 시아나에게 손님이 찾아왔다.
손님의 정체를 안 시아나는 크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황후 폐하께서 저를 보고 싶어 하신다고요?”
황후의 측근 시녀 이블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치 못한 말에 시아나는 심장이 쿵쿵 뛰었다.
‘설마 황후 폐하께서 나와 전하의 관계를 알게 되신 건가?’
물론 라시드와 시아나는 전혀 특별한 사이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조금만 조사하면, 두 사람 사이에 미묘한 기류가 흐르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황후가 그랬듯이.
‘그래도 이건 너무 빠른데…….’
황궁에 돌아온 지 며칠 안 된 황후가 벌써 눈치챌 줄은 몰랐다.
시아나의 굳은 얼굴을 보며 이블린이 말했다.
“황후 폐하께서 기다리신다. 따라오거라.”
이블린의 눈빛이 엄했다. 게다가 그녀는 시녀 두 명도 데리고 온 터였다.
시아나가 싫다고 거절하면 강제로라도 끌고 갈 기세였다.
‘게다가 중급 시녀가 황후 폐하의 명을 거절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야.’
황실 모독죄로 사형을 당할 수도 있는.
그래서 시아나는 도망가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이블린을 따라갔다.
황태자궁만큼 거대한 황후궁은 아름다웠다.
황궁 곳곳을 장식한 싱그러운 생화에서는 달콤한 향기가 났고, 금으로 만든 장식품은 하나하나 섬세한 모양으로 세공되어 있었다.
그러나 시아나는 그것에 조금도 감탄할 새가 없었다.
황후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일개 시녀가 주제도 모르고 황태자를 꼬드겼냐며 회초리질을 당하면 어떡하지.’
혹은 찻물을 끼얹으며 당장 라시드의 곁을 떠나라고 고함을 칠지도 모른다.
권력자의 냉혹한 어미들이 그러하듯이.
알현실에 도착한 시아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인사했다.
“고귀하신 황후 폐하께 인사드립니다. 황태자 전하를 모시는 시녀 시아나라고 합니다.”
“고개를 들거라.”
“…….”
천천히 고개를 든 시아나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금빛 머리카락과 단아한 얼굴을 한 황후가 부드러운 눈빛으로 시아나를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지금 그녀는 시아나의 뺨을 후려치거나, 찻물을 던질 것 같지 않았다.
황후가 말했다.
“갑자기 불러 많이 놀란 모양이구나.”
“아닙니다.”
“라시드가 요즘 너를 아낀다고 듣고 불렀다. 까다로운 애가 차 시중을 들게 하다니 네 차 맛이 아주 훌륭한 모양이야.”
“황송한 칭찬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미약한 실력을 가지고 있을 따름입니다.”
“겸손은. 내게도 차 한잔 따라 줄 수 있겠느냐? 라시드가 감탄한 맛이 어떤 것인지 느껴 보고 싶구나.”
“…….”
어느 안전이라고 거절을 할까.
시아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테이블 옆에 찻주전자와 찻잔이 준비되었다.
찻잎은 노란색을 띤 캐모마일이었다.
시아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찻주전자를 들었다.
‘이렇게 긴장한 채로 차를 따르는 것은 오랜만이네.’
라시드에게 차를 따라 주었던 최근은 더더욱 이런 분위기와 거리가 멀었다.
라시드는 시아나가 어떻게 차를 따라 주든 행복하게 웃었으니까.
그래서 시아나는 차를 잘 따라야겠다는 생각보다, 어떻게 하면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를 고요하게 만들지에 대해 걱정해야 했다.
‘황후 폐하의 앞이야. 실수 없이 잘 해야 해.’
시아나는 속으로 긴 숨을 내쉬며 차를 따르기 시작했다.
한 가지 다행인 것은, 황후의 눈빛은 시아나가 차를 따를 때마다 어떻게든 책을 잡으려고 했던 새 왕비와는 다르다는 것이다.
그저 차분하고 담담했다.
이내 황후의 앞에 있는 찻잔에 갈 빛의 차가 채워졌다.
황후는 말없이 찻잔을 입가에 대었다.
한 폭의 그림처럼 우아한 모습으로 차를 한 모금 마신 황후가 입꼬리를 올렸다.
“과연, 대단한 실력이구나. 라시드가 푹 빠질 만해.”
후한 평가에 시아나는 안도했다.
시아나는 콩닥거리는 심장 소리를 감추며 고개를 숙였다.
“황송하옵니다.”
“…….”
황후가 시아나를 바라보다가 입을 뗐다.
“그러나 라시드가 빠진 것은 차 맛만이 아니겠지?”
“……!”
단번에 치고 들어온 황후의 말에 시아나는 눈을 크게 떴다.
황후가 ‘라시드가 네게 품은 감정을 알고 있다’라고 직접적으로 말한 것이기 때문이다.
예상했던 상황임에도 시아나는 쉽게 답을 할 수 없었다.
‘황태자 전하는 제게 아무 감정이 없습니다?’
사실이 아니었다.
그러니 황후도 제 말을 믿지 않을 것이다.
‘황태자 전하와 저는 아무 사이도 아니옵니다?’
이건 사실이었지만 말해도 큰 의미가 없었다.
황후는 둘 사이가 어떤 사이인지 궁금한 게 아니라, 아들이 관심을 두는 시녀가 거슬리는 것일 테니.
‘아니면 지금이라도 무릎을 꿇고 일개 시녀로서 분란을 일으켜 잘못했다며 빌어야 하나.’
그러나 이 역시 달라질 것은 없을 것 같았다.
오히려 전하를 제가 유혹했습니다, 라고 인정하는 꼴이었다.
“…….”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입술을 깨문 시아나를 보며 황후가 눈썹을 내렸다.
“그리 두려워할 필요 없다. 너를 탓하려고 부른 것이 아니야. 라시드가 특별하게 생각하는 여인이 생겼다기에 확인하려고 부른 것뿐이지.”
“…….”
“이리 마주 보니 영특하고 유순해 보이는구나.”
그 속내가 어떠하든 칭찬이었기에 시아나는 굳은 얼굴로 예를 다해 답했다.
“황송합니다.”
황후가 웃었다.
“라시드는 황태자이니 만큼 챙겨 줄 것이 많다. 성심을 다해 보살펴 주거라.”
“…….”
지극히 온화한 말, 상냥한 목소리, 인자한 얼굴.
황후의 모든 것은 권력자를 아들로 둔 어머니의 날 선 반응이 아니었다.
시아나는 그제야 사람들이 왜 그렇게 그녀를 존경하는지 알았다.
“황후 폐하의 현명한 말씀, 명심하도록 하겠습니다.”
시아나는 혼란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 * *
시아나가 떠난 후, 황후는 홀로 의자에 앉아 있었다.
황후의 뒤에 서 있던 이블린이 말했다.
“차를 타 드릴까요?”
황후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블린은 뜨거운 물을 가져와 새로 차를 탔다.
차를 한 모금 마신 황후가 기가 막힌다는 듯 웃었다.
“같은 찻잎인데도 이토록 맛이 다르다니.”
이블린은 왕비가 아까 마신 시아나의 차 맛과 제가 탄 차 맛을 비교하는 것을 눈치채고 물었다.
“어느 쪽의 맛이 더 훌륭하다는 겁니까?”
“그 애 쪽.”
이블린이 의외의 대답이라는 듯 눈을 살짝 크게 떴다.
“아까 그 시녀를 칭찬하던 말이 사실이셨군요.”
“그래. 영특해 보인다고 했던 말도 사실이다. 하지만…….”
황후는 눈을 내리깔았다.
동그란 얼굴에 눈초리가 쳐진 시아나는 얼핏 유순해 보였다.
손에 빵을 들고 있으면 남에게 죄다 빼앗길 것처럼.
그러나 첫인상이 무색하게 시아나는 한 번도 실수하지 않았다.
“일개 중급 시녀라 믿기 힘들 만큼 예법을 잘 지키고, 긴장한 기색이 어리긴 했으나 내 눈빛을 피하지 않더구나.”
황후는 시아나를 떠올렸다.
정확히는 저를 올려다보던 또렷한 에메랄드 눈동자 색을.
“결코 누군가의 말을 쉽게 따라 줄 만큼 유순해 보이지 않았어.”
“……그 누군가가 황후 폐하라도 말씀이십니까?”
이블린의 말에 황후가 눈썹을 내렸다.
“그래. 그러니 곤란한 거지.”
“…….”
“그런 아이를 라시드의 곁에 둘 수는 없어.”
황후의 얼굴은 여전히 인자했다. 그러나 그녀가 내뱉은 말은 그냥 흘려들을 말이 아니었다.
이블린이 허스키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 선에서 처리를 할까요?”
황후가 고개를 저었다.
“끔찍한 소리 마, 이블린. 그 애는 아무 잘못이 없어. 황태자가 좋다고 쫓아다니니 받아 줄 수밖에 없었을 테지.”
가만히 듣고 있던 이블린이 말했다.
“마리아, 과거의 네가 그랬듯이?”
갑작스러운 이블린의 하대에도 황후는 조금도 화내지 않았다.
그저 한결 위엄이 사라진 얼굴로 말을 돌릴 뿐이었다.
“아무튼 그 애를 건들 생각은 없어. 굳이 건드려 보았자 역효과만 날 테고.”
“그럼 어떻게 할까?”
황후가 눈을 내리깔고 말했다.
“그동안 미루어 왔던 것을 실행해야지.”
이블린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황후를 뒤에서 껴안았다.
이블린이 허스키한 목소리로 황후에게 속삭였다.
“마리아, 모든 것은 네가 원하는 대로.”
이블린의 말에 황후가 웃었다.
사람들 앞에서 보여 주었던 온화한 미소와는 달리 어딘가 일그러진 미소였다.
* * *
무사히 황태자궁으로 돌아온 시아나는 고민 끝에 라시드에게 말했다.
“오늘 황후 폐하를 뵙고 왔습니다.”
눈을 크게 뜬 라시드는 생각보다 훨씬 격렬하게 반응했다.
“어마마마가 왜 너를 보자고 하신 거야? 혹시 안 좋은 말이라도 하신 건…….”
시아나는 고개를 저었다.
“전혀 그렇지 않아요. 제가 전하의 차 시중을 담당한다는 말을 듣고 차 맛이 어떤지 궁금해 불렀다 하셨어요. 황후 폐하께 차를 따라드리니 웃으시며 드셨고요.”
“그것뿐이야?”
“그리고 제게 황태자 전하를 잘 챙겨 달라고 하셨답니다.”
“…….”
묘한 표정을 지은 라시드를 향해 시아나가 눈썹을 내리며 웃었다.
“사람들이 왜 그렇게 황후 폐하를 존경하는지 알았어요. 정말 상냥하신 분이더군요.”
“……그렇긴 하지.”
그제야 안도한 듯 라시드는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의자에 앉았다.
시아나가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다가 물었다.
“전하, 혹시 황후 폐하와 사이가 좋지 않으신가요?”
라시드의 눈빛이 흔들렸다.
시아나의 말처럼 황후는 자애롭고 상냥했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절대 그녀가 라시드의 마음을 무겁게 할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런 질문을 들어 본 것은 처음이었다.
“……왜 그런 걸 묻지?”
묘한 표정으로 묻는 라시드를 향해 시아나가 말했다.
“전하께서 황후 폐하를 대하는 모습이 그리 편해 보이지 않아서요.”
지금만 해도 그렇다.
라시드는 시아나가 황후에게 다녀왔다는 말을 듣자 지극히 예민하게 반응했다.
마치 제 어머니가 시아나에게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른다는 것처럼.
시아나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라시드와 황후의 관계가 돈독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한참 후에 라시드가 대답했다.
“어마마마와 사이가 안 좋은 것은 아니야. 어마마마께서는 슬하에 자식이 나뿐이고 나를 아끼시지. 하지만…….”
이런 말을 해도 될까 머뭇거리는 듯 시선을 돌렸던 라시드가 말을 이었다.
“나는 어마마마의 사랑을 온전히 느껴 본 적이 없어.”
생각지도 못한 말에 시아나는 눈을 크게 떴다.
라시드가 가라앉은 얼굴로 말을 이었다.
“어렸을 때는 뭐가 이상한지 몰랐어. 어마마마께서는 늘 내게 친절하셨으니까.”
라시드에게 험한 말 한마디 하지 않고 곱게 말했다. 화를 낸 적도 없었다.
그린 듯이 아름다운 어머니의 모습이었다.
그럼에도 어린 라시드는 어머니에게 충족되지 않는 것이 있었다.
도대체 뭘까?
뭐가 부족한 걸까?
그것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깨달은 것은 7살 때였다.
“한 귀족이 황궁에 제 아들을 데리고 왔는데 머리를 쓰다듬어 주더군.”
“…….”
“그리고 볼을 매만지고, 이마에 뽀뽀를 하며 사랑한다는 말을 해 주었어.”
그 순간 라시드는 쇳덩이로 머리통을 쿵 내리찍는 느낌을 받았다.
“어마마마는 내게 한 번도 그래 준 적이 없었어.”
스킨십이 아예 없었다는 것은 아니었다.
황후도 라시드에게 포옹을 하거나 손을 잡을 때가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모두 사람들의 앞에서였다.
라시드와 둘이 있을 때, 황후는 단 한 번도 그런 행동을 한 적이 없었다.
라시드는 고민했다.
‘어마마마께서는 사람을 만지는 행위를 싫어하시는 걸까?’
‘……아니면 내가 뭔가 잘못했나?”
그러다가 용기를 내 보기로 했다.
황후에게 다가가 두 팔을 뻗어 그녀를 안은 것이다.
황후는 일그러진 얼굴로 라시드를 밀어냈다.
“그 순간에 본 어마마마의 표정이 아직도 기억나.”
마치 벌레라도 닿은 것처럼 끔찍하다는 얼굴이었다.
물론 황후는 재빨리 표정을 가다듬고 말했다.
[말도 없이 다가와 놀랐잖니, 라시드.]
변함없이 상냥한 얼굴이었지만 라시드의 심장은 쿵쿵 뛰었다.
민망함과 두려움.
……그리고 가슴이 에이는 슬픔.
그날 처음으로 라시드는 어마마마는 저를 사랑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신경 쓸 것도 없는 일이지. 그렇다고 어마마마께서 나를 때리거나 욕을 한 것은 아니니까. 어마마마는 나름대로 나를 아끼고 계셔.”
“…….”
“그래도 어마마마가 마냥 편하지는 않구나. 성인이 된 지금도.”
제가 생각해도 유치한 감정이라 라시드는 민망한 듯 웃었다.
그런데 시아나의 표정이 이상했다.
라시드가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왜 그러느냐. 마치 울 것처럼…….”
“아니거든요. 저는 그 정도 말에 울 만큼 마음이 여린 사람이 아니에요.”
“그래도 눈가가…….”
시아나는 라시드의 말에 반론하는 대신 두 팔을 뻗어 라시드를 꼭 안았다.
라시드가 오래전 황후에게 그랬던 것처럼.
라시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도대체 이게 무슨 상황이지?”
“갑자기 좀 춥네요.”
“…….”
라시드의 방은 늘 최적의 온도로 유지되고 있었다.
하물며 라시드는 체온이 낮고 시아나는 체온이 높은 편이었다.
지금도 그랬다.
시아나 쪽이 훨씬 따뜻했다.
그럼에도 라시드는 시아나의 말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언제나 그녀가 절실한 그에게는 더없는 기회였기에.
시아나의 온기가 라시드의 온몸을 구석구석 따스하게 데워 주는 느낌이 들었다.
‘좋아해, 시아나.’
라시드는 사랑스러운 그녀에게 하고 싶은 말을 꾹 참으며 웃었다.
신기한 일이었다.
어머니를 떠올리면 늘 가슴 한편이 답답했는데, 지금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마법 같은 그녀의 힘이었다.
시아나가 라시드와 떨어진 것은 한참이 지나서였다.
“모시는 분이 우울해할 때 위로해 주는 것 또한 훌륭한 시녀의 덕목이지요.”
—라는 변명 같은 말을 남긴 후 시아나는 도망치듯 라시드의 방을 떠났다.
다행히 라시드는 시아나를 붙잡지 않았다.
제 방으로 돌아온 시아나는 침대에 누워 베개를 쾅쾅 쳤다.
‘미쳤어, 미쳤어, 시아나!’
지금까지 라시드가 어떤 유혹을 해도 잘 견뎌 냈는데, 짠한 모습 조금 보았다고 그를 껴안다니.
‘이래서야 정말 황후 폐하께서 나와 전하가 무슨 사이냐고 물어도 할 말이 없잖아!’
시아나는 민망한 얼굴로 눈을 꾹 감았다.
잠시 후, 시아나가 눈을 뜨며 중얼거렸다.
“그런데 정말 이게 끝이야?”
아무리 생각해도 오늘 황후의 모습은 너무 온화했다.
시아나를 향한 어떤 악감정도 없어 보였다.
“전하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황후 폐하께서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아들에 대한 관심이 크지 않은 것 같아.”
그래서 아들의 주변에 일개 시녀가 어슬렁거려도 신경 쓰이지 않는 것일까?
시아나는 가는 눈으로 말을 내뱉었다.
“그럴 리가 없는데.”
아들에 대한 애정이나 감정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어찌 되었건 그녀는 황후였다.
황후는 아들의 여자에 관심이 있을 수밖에 없다.
왜냐면 라시드가 어떤 여인을 만나냐에 따라 황좌로 가는 길에도 영향을 받을 테니까.
당연히 권력이 높은 여인일수록 많은 도움이 될 테고…….
“일개 시녀 따위는 황좌로 가는 길에 방해만 될 테지.”
시아나는 냉정하게 자신의 처지를 평가했다.
그리고 그녀의 예상대로였다.
며칠 후, 황후는 라시드의 앞에 한 여인을 데리고 왔다.
* * *
“고귀하신 황태자 전하께 인사드립니다. 전하, 그간 너무너무 보고 싶었답니다.”
굵직한 웨이브가 진 보라색 머리카락. 그 사이로 보이는 도도한 얼굴.
부드러운 어깨선과 가슴이 대담하게 드러나는 화려한 드레스.
육감적인 매력을 가진 아름다운 여인은 남부를 호령하는 앙겔루스 공작가의 외동딸 베로니카였다.
그러나 그녀의 앞에 선 라시드의 표정은 더없이 싸늘했다.
라시드는 고개를 돌려 그녀의 옆에 서 있는 황후를 바라보았다.
“어마마마께서 저와 차를 마시고 싶다고 하여 왔습니다만 다른 손님이 계실 줄은 몰랐군요.”
“베로니카 공녀가 수도에 왔다고 해서 불렀단다. 오랜만에 셋이 오붓한 시간을 보내자꾸나.”
라시드는 별로 그러고 싶지 않았다.
애초에 다른 이와 어울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데다가 상대가 베로니카 공녀였기 때문이다.
베로니카는 황후가 아끼는 귀족 여인 중 한 명이었는데, 라시드와 마주칠 때마다 귀찮을 만큼 달라붙곤 했다.
그러나 라시드는 겨우 그 마음을 참았다.
제멋대로 행동했다가는 황후가 곤란해질 것을 알았으므로.
아무리 어색한 사이라고 해도, 라시드는 황후에게 그 정도 예의를 지킬 만큼의 애정이 있었다.
라시드가 의자에 앉는 것을 보고 두 눈을 부드럽게 휜 황후가 베로니카를 바라보았다.
“오랜만에 공녀가 끓인 차를 마시고 싶군. 차를 한 잔 따라 주겠나?”
“그럼요!”
호기로운 대답과 달리 베로니카의 차 따르는 모습은 그리 훌륭하지 못했다.
한눈에 보아도 설렁설렁 예법을 배운 티가 났다.
그럼에도 황후는 귀엽다는 듯 따스한 눈빛으로 베로니카를 바라보았다.
차를 한 모금 마신 황후가 부드럽게 웃었다.
“맛이 좋군.”
황후의 입바른 칭찬에 베로니카의 표정이 밝아졌다.
베로니카는 고개를 돌려 라시드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라시드는 속을 알 수 없는 얼굴로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차를 바라보기만 할 뿐 전혀 움직임이 없었다.
보다 못한 황후가 한마디 했다.
“어서 마셔 보렴, 라시드.”
어머니의 재촉에 못 이겨 라시드는 찻잔을 들었다.
그 모습을 본 베로니카는 저도 모르게 하, 하고 작은 신음 소리를 내었다.
눈을 내리깔고 찻잔을 든 라시드의 모습이 숨 막히게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차를 한 모금 삼킨 라시드는 눈썹을 찡그렸다.
“더는 마시지 못하겠군요.”
베로니카가 당황한 얼굴로 끼어들었다.
“왜요?!”
라시드는 뭘 묻느냐는 듯 대답했다.
“맛이 없으니까.”
“……!”
차를 따라 준 이의 면전에서 차 맛을 비난하다니, 아무리 황태자라 해도 무례하기 짝이 없는 행동이었다.
베로니카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당황한 것은 황후도 마찬가지였다.
“라시드!”
황후가 엄한 목소리로 라시드의 이름을 불렀지만 소용없었다.
라시드는 의자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송구합니다, 어마마마. 요즘 워낙 훌륭한 차를 마셨더니 다른 차는 마실 수가 없게 되었거든요.”
“그게 무슨…….”
“어마마마께서 심심하시다고 하여 온 것인데 함께 대화를 나눌 사람이 있으니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황후에게 일방적인 인사를 한 라시드는 고개를 돌려 베로니카를 바라보았다.
일그러진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여인을 향해 라시드는 고개를 대충 까닥였다.
그것이 끝이었다.
“저, 전하!”
“라시드!”
황후와 베로니카가 동시에 라시드를 불렀지만 소용없었다.
라시드는 긴 다리로 성큼성큼 걸어 응접실을 떠나 버렸으니까.
라시드가 나간 방향을 황당한 얼굴로 바라보던 황후는 이내 정신을 가다듬었다.
난생처음 본 라시드의 행동에 놀랄 때가 아니었다.
사실 황후는 일부러 라시드가 오는 시간에 맞추어 베로니카 공녀를 초대했다.
저 때문에 창피한 일을 겪게 된 공녀에게 이해를 구해야 했다.
그러나 베로니카를 본 황후는 할 말을 잃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울상이었던 베로니카가 황홀한 눈빛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쩜, 못 본 사이에 더 멋있어지셨지.”
황후는 헛웃음을 지었다.
‘오랜만에 만나도 이 애는 변한 게 없구나.’
앙겔루스 공작가의 외동딸 베로니카.
젊고 아름다운 그녀에게는 한 가지 흠이 있었다.
보통 사람과 정신세계가 약간 다르다는 점이었다.
지능이 조금 모자란 것이 아닐까 싶을 만큼.
그녀는 창피를 몰랐고 눈치가 없었다.
그래서 앙겔루스 공작은 그녀를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공작가의 영지에서 지내게 했다.
괜히 외부에 자주 내보여 보았자 신붓감으로서 점수만 깎일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황후는 베로니카를 골랐다.
‘가문의 골칫덩이 딸을 황태자비로 데려가 준다면 공작은 내게 큰 은혜를 입었다고 느낄 테지.’
그뿐인가.
베로니카는 귀족 여인들이 흔히 가지고 있는 권력욕도 없는 데다가, 어린아이처럼 단순해서 조종하기가 쉬웠다.
‘라시드에게 딱 맞는 짝이야.’
황후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두 볼을 빨갛게 물들인 채 라시드가 마신 찻잔을 문질거리고 있는 베로니카를 향해 황후가 물었다.
“베로니카 공녀는 여전히 라시드에게 호감이 있는 모양이군.”
베로니카는 조금의 주저 없이 대답했다.
“네, 황후 폐하. 저는 전하가 정말 좋습니다. 어찌할 수 없을 만큼이요.”
제 마음을 확실히 표현하는 것을 우아하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보통의 귀족 여인들과는 확실히 다른 반응이었다.
황후는 그 모습에 우스운 감정을 느끼며 말했다.
“그럼 내가 한 번 더 자리를 만들어줄까?”
베로니카의 얼굴이 단번에 밝아졌다.
“정말이요?!”
“그래. 나는 공녀를 아끼니까.”
“감사합니다. 역시 제 편은 황후 폐하뿐이어요!”
베로니카는 감동받은 얼굴로 두 손을 맞잡았다.
* * *
라시드는 요즘 기분이 좋지 않았다.
한 여자가 자꾸 눈앞에 알짱거렸기 때문이다.
“전하, 어서 오세요.”
환한 미소를 지으며 라시드를 맞이하는 여인은 공녀 베로니카였다.
그 얼굴을 보는 순간 라시드는 짜증이 치밀었다.
요 며칠 라시드가 베로니카와 만난 것은 어느덧 일곱 번이었다.
보고 싶어 본 것이 아니었다.
황후가 불러 가면 꼭 그녀가 있었다.
이쯤 되면 의도가 명백했다.
‘어마마마께서는 나를 저 여자와 이어 주고 싶어 하시는구나.’
그나마 그동안은 황후가 함께 있더니, 오늘은 여인 홀로 있었다.
“전하, 앉으셔요. 황후 폐하께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라고 먹음직스러운 요리를 준비해 주셨답니다.”
베로니카는 싹싹하게 말하며 라시드의 팔을 잡았다.
그 순간 라시드는 정색하며 그녀의 팔을 내쳤다.
“함부로 만지지 마.”
얼음처럼 서늘한 목소리였다.
베로니카는 움찔하며 얼굴을 굳혔지만 물러서지 않았다.
“하, 하지만 황후 폐하께서 식사를 같이하라고 하셨어요. 황후 폐하의 말을 듣지 않으면 저희 둘 다 혼이 날지도 몰라요.”
두 눈에 힘을 주고 어린애 같은 유치한 협박을 하는 베로니카의 모습에 라시드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라시드는 정말이지 그녀가 싫었다.
라시드는 인사도 하지 않고 몸을 돌려 응접실을 나갔다.
“전하, 어디 가세요!”
베로니카가 라시드를 잡으려 했지만 그럴 틈도 주지 않고 거리를 벌렸다.
라시드가 빠른 걸음으로 향한 곳은 황후의 방이었다.
갑작스럽게 나타난 아들을 보고 황후가 눈썹을 내렸다.
“라시드, 네가 왜 여기 있니. 베로니카 공녀는?”
“…….”
“설마 베로니카 공녀를 혼자 두고 온 거니? 만약 그런 거라면 엄청난 실례야. 당장 돌아가렴.”
황후의 말투는 어린 아들을 타이르듯 상냥했다.
그러나 라시드는 어머니의 말을 곱게 받아 줄 수가 없었다.
라시드가 감정을 억누른 목소리로 말했다.
“가지 않을 겁니다.”
“…….”
“그리고 앞으로 한 번만 더 이런 식으로 공녀와 마주치게 하면 다음부터는 어마마마의 부름에 따르지 않겠습니다.”
반항 한 번 한 적 없던 아들이었다.
늘 제 말이면 무엇이든 따랐던 라시드가 저런 말을 하다니.
황후가 실망이 가득한 눈빛으로 말했다.
“시아나 때문이냐?”
“…….”
“시아나 때문에 이렇게 내게 매정하게 구는 것이지?”
라시드는 황후의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네.”
“……!”
“그러나 오해는 마십시오. 지금 저와 시아나는 어떤 사이도 아니니까요. 그저 제가…… 그녀를 혼자 마음에 품고 있는 것뿐입니다.”
황후는 기가 찼다.
황태자가 일개 시녀를 짝사랑한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대화에서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라시드, 나는 딱히 그 애를 반대하는 게 아니야. 그래서 일전에 그 애를 불렀을 때도 별말 하지 않은 것이고.”
이후에도 황후는 라시드에게 시아나에 관한 것을 묻지 않았다.
그래서 라시드는 황후가 지금까지처럼 저의 사생활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겠다는 줄 알았다.
아니었다.
“그 애가 좋으면 마음껏 예뻐하거라. 하지만 결혼은 다른 문제야.”
“……!”
“넌 네가 황좌로 가는 길에 도움을 주는 여인과 혼인을 해야 해.”
황후의 말에 라시드의 아름다운 얼굴이 일그러졌다.
늘 이런 식이었다.
그녀가 라시드에게 요구하는 것의 끝에는 늘 황좌가 있었다.
그게 아니라면 황후는 라시드에게 일절 관심이 없었다.
라시드가 무얼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아무것도.
어느 순간부터 라시드는 그것을 받아들였다.
어머니에게 그런 관심을 바라지 말자.
대신 어머니가 바라는 모든 것을 해 드리자.
그래서 라시드는 작은 손에 굳은살이 박이도록 검술을 익히고, 밤이 새도록 공부를 했으며, 13살의 나이에 참혹한 전쟁터로 향했다.
그렇게 하면 어머니가 웃어 주었으니까.
그것이 너무 좋아 라시드는 황후의 말이라면 열심히 따랐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어머니가 아주 가끔 보여 주는 미소보다 훨씬 소중한 존재가 생겼다.
그래서 라시드는 서린 목소리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어마마마.”
“…….”
“저는 시아나가 아닌 다른 여자와는 어떤 식으로든 얽히고 싶지 않습니다.”
황후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어 버렸지만 라시드는 제 말을 주워 담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꾸벅여 인사한 후, 허락도 받지 않고 황후궁을 나가 버렸을 뿐.
라시드가 사라진 자리를 멍하니 바라보던 황후가 이마를 잡고는 휘청거렸다. 시녀 이블린이 다가와 황후를 부축했다.
“괜찮으십니까, 황후 폐하.”
“……라시드가 내게 반항을 한 것이 벌써 몇 번째지?”
궁으로 돌아온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았건만, 그간 라시드는 제게 여러 차례 반기를 들었다.
하나는 아리스에 대해 이야기했을 때, 그리고 또 하나는 베로니카와 만나게 했을 때.
그리고 지금.
라시드는 그 어느 때보다 단호한 목소리로 제가 하고 싶은 바를 말했다.
시녀 따위에게 빠져서.
황후가 스산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하는 짓이 지 아비와 똑같아. 여자에게 환장을 하는군.”
눈을 크게 뜬 이블린이 황후를 두 팔로 안았다.
“진정해, 마리아.”
다행히 효과가 있었다.
험악하게 일그러져 있던 황후의 얼굴이 원래의 온화한 얼굴로 돌아왔다.
이블린의 가슴에 머리를 기댄 황후가 입을 열었다.
“이블린, 생각했던 것보다 라시드가 많이 변했어.”
“전하도 이제 열여덟 살이니까요. 그럴 때가 되었지요.”
라시드는 이제 어미의 품속에서 벗어나 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황후는 그대로 둘 생각이 없었다.
라시드는 알아야 했다.
제 나이가 몇이건, 라시드는 결국 황후가 원하는 대로 움직여야 한다는 것을.
* * *
고요했던 황궁에 발칙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황태자 전하와 베로니카 공녀님이 특별한 사이라고?”
“그래. 요즘 베로니카 공녀님께서 황궁에 자주 오셨잖아. 황후 폐하를 뵈러 오는 척했지만 실은 황태자 전하를 만나기 위해 온 거래.”
“어머머머.”
용맹한 황태자와 아름다운 공녀의 스캔들은 자극적일 수밖에 없었다.
소문은 빠르게 퍼져 나갔다.
베로니카 공녀와 라시드가 함께 있는 것을 본 적이 있다, 두 사람은 농밀하게 입을 맞추고 있었다.
거기에서 끝이 아니었다.
베로니카 공녀가 이른 새벽 저택으로 돌아간 날이 있는데, 함께 밤을 지새운 이가 황태자 전하라고 한다.
“……라는 말까지 돈다고 합니다.”
호위 기사 솔의 말에 라시드는 하, 하고 기가 찬 얼굴을 했다.
얼마 전 처음으로 저와 베로니카가 엮였다는 소문을 들었을 때도 어이가 없었는데, 그사이 소문은 눈덩이처럼 불어나 있었다.
“역겨워.”
라시드가 중얼거렸다.
솔은 그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한 가지 다행인 것은 자극적인 스캔들을 진심으로 믿는 이가 거의 없다는 것이었다.
베로니카 공녀가 황궁에 자주 들락날락거렸다는 것은 사실이었으나, 그 외에는 어떤 증거도 증인도 없었다.
황궁과 사교계에 흐르는 수많은 뜬소문 중 하나일 뿐이었다.
솔이 말했다.
“그래도 이런 소문을 그냥 둘 수는 없으니 하루빨리 해결을 하는 게 좋겠습니다.”
“어떻게?”
“전하께서 사람들의 앞에 서서 ‘나는 베로니카 공녀 따위에게 개미 똥만큼도 관심이 없다!’라고 소리치신다든가?”
“볼만하겠군.”
“네, 그럴 겁니다.”
두 사람 사이에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솔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사실 전하께서 이런 허황된 소문을 일일이 해명하는 것은 무리가 있습니다. 전하의 명예에도 손상이 가고요. 그것보다는 헛된 소문을 내고 다니는 범인을 찾아 공개적으로 벌을 주는 편이 좋을 듯합니다.”
그러나 솔의 말에 라시드는 고개를 저었다.
“굳이 그럴 필요 없다.”
“범인을 그냥 두시겠다고요?!”
“그래.”
솔은 말도 안 된다는 듯 호랑이처럼 눈을 부릅떴다.
“말도 안 됩니다. 더러운 소문을 낸 대가를 치르게 해야지요!”
솔은 틈만 나면 제 주인을 속으로 욕하곤 했지만, 다른 자가 이런 식으로 라시드를 곤란하게 만드는 것은 결코 용납할 수 없었다.
솔은 거대하고 두툼한 근육을 한껏 부풀리며 소리쳤다.
“제게 명령을 내려 주십시오. 그럼 내일이라도 이따위 소문을 내고 다니는 저열하고 추잡하고 더러운 자를 찾아내어 전하의 앞에 데려다 놓겠습니다.”
이글이글한 두 눈에는 라시드를 향한 충의가 엿보였다.
하지만 라시드는 솔에게 그것을 허락해 줄 생각이 없었다.
왜냐하면…….
“소문의 발원지는 황후 폐하시죠?”
찻주전자를 든 시아나가 말했다.
눈을 크게 뜬 라시드는 이내 눈썹을 내렸다.
역시 네게는 숨길 수 없네, 라는 얼굴이었다.
“어떻게 알았어?”
“그리 어렵지 않았어요.”
황후가 베로니카 공녀를 황궁에 초대하기 시작한 후 나기 시작한 스캔들.
타이밍이 절묘했다.
그뿐이 아니었다.
“원래 황궁에서 이런 불미스러운 소문이 나면 황후 폐하께서 가장 먼저 나서서 진압하는 게 보통인데 전혀 그런 모습이 보이지 않더군요.”
사람들은 점잖은 황후가 이런 추잡한 일을 상대하는 것이 싫어 무시하는 거라고 생각했지만, 시아나의 판단은 달랐다.
황후가 이 사태를 방관하는 것은 소문을 낸 것이 본인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고고한 여인이 이런 소문을 낸 이유는…….
시아나가 살짝 굳은 얼굴로 물었다.
“혹시 저 때문인가요?”
“…….”
“황태자 전하의 곁에 서 있는 시녀가 거슬려서 황후 폐하께서는 이런 소문을 퍼뜨리신 건가요?”
시아나의 눈빛이 어두웠다.
당연했다.
다른 이도 아닌 황후가 저를 의식하고 있다는 사실은 일개 시녀로서 견디기에는 버거운 일이었으니까.
그런 시아나를 향해 라시드가 고개를 저었다.
“너 때문이 아니야.”
“……정말이요?”
“그래. 그러니 겁먹을 것 없어.”
시아나를 안심시키려는 듯 라시드가 말을 이었다.
“너와는 별개로 어마마마께서는 이제 내가 혼인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신 것뿐이야. 황좌로 가는 길에 가장 도움이 되는 여자와 말이야.”
순간 시아나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라시드는 보지 못했지만.
잠시 두 사람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라시드가 괴로운 얼굴로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더니 한마디를 내뱉었다.
“미안.”
“……뭐가요?”
라시드는 요즘 와서야 제가 시아나와의 관계에 대해 얼마나 쉽게 생각했는지 깨닫고 있었다.
“난 몰랐어. 사람들의 입에 이런 일로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이 얼마나 더럽고 역겨운 일인지.”
“…….”
“예전에 네가 걱정했던 게 이런 거겠지?”
이내 시아나는 라시드가 무슨 말을 하는지 깨달았다.
라시드가 시아나에 대한 마음을 고백했을 때, 시아나는 라시드에게 이상한 소문이 돌까 겁이 난다고 했다.
그것을 말하는 것이었다.
“아마 우리 두 사람에 관한 소문이 났다면, 너는 지금의 나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힘이 들었을거야.”
그나마 라시드는 혼자 불쾌해하고 끝이지만, 시아나는 수많은 이들에게 욕설과 경멸 어린 말을 들었을 것이다.
시아나는 일개 시녀니까.
약자를 향한 비난은 훨씬 더 잔혹한 법이었다.
“…….”
시아나는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은 얼굴로 라시드를 바라보았다.
라시드의 얼굴이 어두웠다.
마치 시아나에게 큰 죄를 저지른 사람처럼.
* * *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던 시아나가 중얼거렸다.
“오늘도 날 안 부르셨어.”
며칠째 라시드는 시아나를 부르지 않고 있었다.
하루에 세 번 이상은 불러 최소 2시간씩 차를 마시던 그 라시드가 말이다.
“흐음.”
시아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잠시 후, 시아나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찾아간 건 호위 기사 솔이었다.
솔은 저를 찾아온 시아나를 보고 힉, 하고 놀랐다.
“웬일로 저를 찾아오신 겁니까?”
“여쭈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요.”
“그럼 어서 하시고 돌아가십시오.”
솔이 창백해진 얼굴로 속삭였다.
“제가 시아나 님과 만난 것을 아시면 전하께서 무슨 짓을 하실지 모르니까요. 요즘 시아나 님을 만나지 못해 안 그래도 제정신이 아니시던 분이 더 제정신이 아니시란 말입니다.”
그 말에 시아나가 눈썹을 찡그렸다.
“그런 분이 왜 저를 부르지 않으세요?”
“……!”
솔의 눈이 이만치 커졌다.
“혹시 전하께서 일부러 저를 피하시는 건가요?”
솔의 눈이 방금보다 더 커졌다.
잠시 후, 솔이 모기처럼 자그마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
시아나는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도대체 왜요?”
“……요즘 들어 부쩍 많은 이들이 전하를 주시하고 있지 않습니까.”
예전에도 시녀들은 라시드에 대해 곧잘 입에 담곤 했으나, 그것은 아름답고 잔혹한 황태자에 관한 감상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사람들의 관심은 젊은 황태자의 연애사에 쏠려 있었고, 시간이 갈수록 추잡하고 진득해지는 중이었다.
“전하께서는 혹시나 그런 이야기에 시아나 님이 엮이실까 걱정을 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저를 부르지 않는 거라고요?”
“예. 황태자궁에서 일하는 시녀와 시종들은 과묵하지만 어디서 말이 나갈지 모르는 일이니까요.”
“…….”
시아나는 가슴 위에 돌이 얹힌 것처럼 답답해졌다.
‘세상 두려울 것 없이 굴던 사람이 갑자기 왜 그렇게 상식적인 걱정을 하는 건데!’
물론 시아나도 그런 소문이 돌까 걱정을 하긴 했다.
하지만 이건 조심하는 정도가 너무 심했다.
‘아무리 상황이 그래도 차 시중 담당 시녀를 불러 차 한 잔 정도는 마셔도 되는 거잖아.’
입술을 깨문 시아나를 보며 솔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럼 궁금한 것에 대해 답변해 드렸으니 저는 이만 가 봐도 될까요?”
슬금슬금 사라지려던 솔을 붙잡은 시아나가 물었다.
“전하는 지금 어디 계세요?”
* * *
시아나가 향한 곳은 황궁 남쪽에 있는 녹색나무숲이었다. 이름답게 녹음이 우거진 나무가 빽빽하게 늘어선 숲이었다.
솔은 이곳으로 라시드가 작은 동물들을 데리고 산책을 갔다 했다.
바닥에 깔린 나뭇잎을 밟으며 시아나는 라시드를 만나면 할 말을 생각했다.
‘전하, 제가 이상한 추문에 휩싸일까 봐 지금 저를 멀리하시는 거죠? 사람이 안 하던 짓을 하면 병이 난답니다. 평소처럼 하세요!’
다행히 시아나는 라시드를 금세 발견했다.
푸르른 나무 사이로 서 있는 은빛 머리카락의 아름다운 남자.
거기에 양 어깨에 흰 페럿과 작은 다람쥐를 올린 모습은 꼭 동화의 한 장면처럼 비현실적이었다.
그러나 라시드에게 다가가려던 시아나는 눈을 크게 뜨더니 나무 뒤로 몸을 숨겼다.
라시드의 앞에 서 있는 한 여인 때문이었다.
시아나는 단숨에 그녀의 정체를 알아챘다.
‘베로니카 공녀!’
최근 황궁에서 가장 뜨거운 스캔들의 주인공이니 만큼 시아나도 베로니카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개중에는 그녀의 외모에 대한 묘사도 있었다.
한여름의 포도처럼 진한 보라색 머리카락과 푸른 눈동자를 가진 화려한 미인이라고.
소문은 사실이었다.
‘그런데 공녀님이 왜 여기에…….’
설마 전하와 단둘이 만나고 있었던 것일까?
그 생각을 하자 시아나는 심장이 쿵 내려앉은 기분이 들었다.
그때, 살랑대는 바람과 함께 베로니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하, 보고 싶었습니다. 전하께서도 베로니카가 보고 싶으셨죠?”
보는 이의 심장이 간지러울 만큼 애달픈 감정이 담겨 있는 목소리였다.
그러나 이어진 라시드의 목소리는 싸늘하기만 했다.
“전혀.”
그의 대답에 시아나는 굳었던 표정이 풀렸다.
‘약속을 하고 만난 것이 아니구나.’
그러기는커녕 라시드는 베로니카를 마주친 것에 대해 엄청나게 불쾌해하고 있었다.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리는 시아나의 귓가에 베로니카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전하는 정말 너무 냉정하세요. 베로니카는 전하가 그리워 제대로 식사도 하지 못하고…….”
베로니카는 말을 잇지 못했다.
라시드가 그녀의 반대편으로 몸을 돌려 버렸기 때문이다.
눈을 크게 뜬 베로니카가 황급히 걸음을 옮기더니, 라시드를 등 뒤에서 껴안았다.
그러고는 소리쳤다.
“가지 마세요, 전하!”
“……!”
“베로니카는 전하를 마음 깊이 사랑하고 있습니다. 제발 제 마음을 받아 주세요.”
공작가의 영애가 하는 말이라기에는 민망할 만큼 솔직한 표현이었다.
그러나 베로니카의 얼굴에는 그것에 대한 어떠한 부끄러움도 없었다.
그저 라시드를 향한 뜨거운 갈망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돌아온 답은 매서울 만큼 차가웠다.
라시드는 짜증스러운 얼굴로 공녀의 손을 떼어 냈다.
그러고는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것이 닿은 것처럼 눈썹을 찡그리며 말했다.
“공녀, 마지막으로 경고하건대 또 한 번 이런 식으로 나를 만졌다가는 손목을 잘라 버릴 거야.”
섬뜩한 눈빛은 전혀 장난이 아니었다.
“아아……. 어떻게 제게 그런 끔찍한 말을.”
베로니카는 충격받은 얼굴로 뒷걸음치다 돌에 걸려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그 순간 어디에 숨어 있던 것인지 하녀가 나타나 베로니카를 부축했다.
“세상에, 이를 어째. 바닥에 부딪쳐 고운 손이 다 까졌어요. 괜찮으세요, 아가씨?”
베로니카는 대답 대신 울음을 터뜨려버렸다.
“흐윽.”
하녀가 ‘가여운 우리 아가씨’라며 호들갑을 피웠지만 라시드는 일말의 시선도 주지 않고 발걸음을 옮겼다.
라시드가 멀어질수록 베로니카는 처절하게 흐느꼈다.
마치 오랜 연인에게 내쳐진 여인처럼.
처연한 울음소리가 가득했던 푸르른 숲이 고요해졌다.
라시드와 베로니카가 떠난 장소에 모습을 드러낸 이는 시아나였다.
시아나가 눈을 내리깔고 중얼거렸다.
“……공녀님이 전하를 마음에 품고 있었구나.”
사실 그동안 시아나는 두 사람의 스캔들을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라시드가 베로니카에게 일절 관심이 없는 것을 알았기에, 진실인가 아닌가를 따질 필요도 없는 헛소문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니었다.
적어도 베로니카 공녀는 소문처럼 라시드를 열렬히 사랑하고 있었다.
끔찍한 사실을 마주한 것처럼, 시아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 * *
시아나는 오늘도 저녁을 굶었다.
‘며칠째 배가 전혀 고프지 않네. 입맛도 없고.’
대신 한 가지가 간절했다.
결국 시아나는 참지 못하고 황태자궁을 나왔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친구를 보고 츄츄가 놀란 얼굴을 했다.
“시아나, 이 시간에 여기까진 웬일이여?”
츄츄는 아직 하급 시녀였지만, 그레이스 황녀가 가장 총애하는 시녀인 것을 인정받아 개인 방을 쓰고 있었다.
그래서 다른 시녀의 눈치를 보지 않고 친구를 방 안으로 들어오라 할 수 있었다.
비록 작은 공간에 침대 하나와 낡은 테이블과 의자 하나가 전부였지만.
방문을 닫은 츄츄는 눈을 크게 떴다.
시아나가 주섬주섬 앞치마 주머니에서 꺼낸 물건 때문이었다.
적색 액체가 찰랑이는 술병이었다.
츄츄가 당황한 얼굴로 소리쳤다.
“뭐, 뭐여, 그건?!”
“걱정 마. 훔친 거 아니니까. 황태자궁의 관리시녀님께 부탁해서 한 병 얻었어.”
츄츄는 기가 찬 얼굴을 했다.
당연히 황궁 내에서 시녀들의 음주는 금지되어 있었다.
하지만 시녀들은 암암리에 술을 구해 몰래 마시곤 했다.
‘하지만 다른 시녀도 아니고 시아나가 저럴 줄은 몰랐는디.’
시아나는 타인에게는 물렁한 반면 자신에게는 매우 엄격하여 황실의 규칙을 철저하게 지켰다.
그런 시아나가 술병을 가지고 오다니.
츄츄가 눈썹을 내렸다.
“왜 그려. 무슨 일 있는 겨?”
“…….”
시아나는 대답 대신 풀죽은 얼굴로 술병 뚜껑를 잡고 끙끙거리기 시작했다.
츄츄는 그런 시아나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다가 술병을 가져갔다.
뽕.
시아나가 아무리 힘을 주어도 열리지 않았던 뚜껑이 손쉽게 열렸다.
뚜껑이 열린 술병에서 진한 포도주향이 올라왔다.
당연하게도 와인 잔 같은 건 없었기에 츄츄는 허름한 나무 컵에 술을 따라 시아나에게 주었다.
시아나는 술 한 모금을 들이켰다.
썼다.
목구멍이 뜨겁게 느껴질 만큼.
그렇게 몇 잔을 내리 마신 시아나가 살짝 붉어진 얼굴로 입을 열었다.
“츄츄, 나 며칠 전에 엄청난 걸 봤다?”
“뭔디.”
“황태자 전하랑 베로니카 공녀가 같이 있는 모습.”
그 말에 츄츄가 눈을 크게 떴다.
요즘 궁에서 워낙 말이 도는지라 츄츄도 황태자와 베로니카 공녀의 스캔들을 알고 있었다.
“오메, 두 분 사이에 뭐가 있긴 한가 부네.”
“…….”
“그레이스 공주님께서 그러는데 베로니카 공녀님은 외모도 출중하고 가문도 훌륭한 데다 정신도 살짝 이상한 구석이 있어서 전하께 딱 어울리는 짝이라는구먼. 이참에 두 분이 결혼하면 좋겠는데 말이여.”
츄츄는 라시드가 일방적으로 시아나에게 집적거린다고 알고 있었다.
그래서 스캔들이 사실이면 잘됐다고 생각했다.
순진한 시녀를 희롱하던 황태자의 관심이 다른 데로 넘어간 것일 테니까.
그러나 한참 잘못 짚은 생각이었다.
“무슨 소리야! 둘이 나란히 있는 모습이 정말이지 하~~나도 안 어울렸거든?”
무서운 얼굴로 정색하는 시아나의 모습에 츄츄가 놀란 곰처럼 근육을 부풀렸다.
“그, 그려?”
“그려!”
시아나가 커다란 목소리로 대답하며 술을 한 모금 더 마셨다.
그러고는 따지듯이 말했다.
“게다가 베로니카 공녀님은 정말 무례하시더라. 가만히 서 있는 남자를 대뜸 껴안지를 않나…….”
시아나는 베로니카가 라시드를 뒤에서 껴안았던 장면을 떠올렸다.
순간 며칠 동안 배 속에서 부글부글 끓어올랐던 무언가가 훅 올라왔다.
“아니, 전하도 전하야. 평소에는 그렇게 재빠른 분이 왜 그런 짓을 당하고 있어? 손이 닿기도 전에 피했어야지.”
물론 라시드가 멀뚱히 당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곧장 베로니카의 손을 내리치고 서슬 퍼런 협박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시아나에게 아무런 위로가 되지 않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를 유혹하겠다고 온갖 달콤한 말을 늘어놓았으면서, 요즘엔 전혀 그럴 생각도 없어 보이고.”
“……!”
“지켜 주고 싶다니 뭐니 하는 되도 않는 생각으로 나를 부르지도 않고.”
“…….”
“정말이지 전하 따위 미워 죽겠어.”
눈을 부릅뜬 채 시아나의 말을 듣던 츄츄가 ‘에, 어’ 하고 말을 고르더니 물었다.
“시아나, 너 혹시…… 황태자 전하를 좋아혀?”
시아나는 이번에도 정색을 했다.
“그럴 리 없잖아!”
“…….”
“나는 패전국 출신의 일개 시녀일 뿐이고 그분은 이 제국의 차기 황제가 될 황태자야. 어떻게 내가 그분을 좋아하겠어.”
감히 그런 마음을 품은 것 자체가 죄가 될 일이었다.
그래서 시아나는 라시드에게 다가갈 수 없었다. 저를 향해 환하게 웃는 남자를 향해 곤란한 듯 눈썹을 찡그리기만 했다.
라시드를 잡는 순간 받게 될 비난과 고통이 두려워서, 그것을 감당하는 것이 버거워서.
그럼에도…….
“그 여자에게 다가가 소리치고 싶었어.”
“…….”
“왜 남의 남자를 만지냐고. 한 번만 더 이런 짓을 하면 여자의 질투가 얼마나 무서운지 알게 해 줄 거라고.”
어느새 시아나의 에메랄드색 눈동자 아래 눈물이 어려 있었다.
놀란 츄츄가 근육질 팔을 뻗어 작은 친구를 안았다.
단단하고 따뜻한 친구의 품에서 시아나는 힝 하고 울상을 지었다.
“어쩌지, 츄츄?”
“…….”
“사실은 네 말이 맞아.”
“…….”
“전하가 좋아.”
그의 옆에 다른 여자가 서 있는 것을 본 것만으로 피가 거꾸로 솟을 만큼, 마음 깊이.
* * *
이른 새벽, 한숨 자고 일어난 시아나는 초췌한 얼굴로 말했다.
“미안해, 츄츄.”
지난밤 시아나는 술 한 병을 마시고는 전하는 잘생겼어, 목소리도 좋아, 팔뚝도 엄청 굵어, 애교 부릴 때는 또 엄청 귀엽다, 따위의 별별 말을 늘어놓더니 결국 장렬하게 쓰러졌다.
방의 침대는 둘이 같이 쓰기엔 너무 작았기에, 츄츄는 시아나를 침대위에 눕혀 준 후 자신은 딱딱한 나무 의자에 앉아 잤다.
‘아무리 친구라고 해도 이런 민폐를 끼치다니.’
시아나는 너무 창피하고 미안했다.
그러나 츄츄는 무슨 일이 있었냐는 얼굴로 손을 내저었다.
“됐어. 그럴 수도 있지 뭐.”
“…….”
“둘 다 정신을 놓으면 안 될 것 같아서 함께 술을 마셔 주지 못한 게 아쉽구먼. 다음에는 같이 외출허가증을 받아서 밖에서 제대로 마시자. 코가 삐뚤어지도록 상대해 줄 테니께.”
시아나는 감동받은 얼굴로 츄츄를 바라보다가 까치발을 들어 거대한 몸을 껴안았다.
“츄츄, 넌 어쩜 이렇게 다정하니?”
“맨날 훌쩍이는 쪽은 내 쪽이었는디 반대가 되니 기분이 묘하구먼.”
츄츄가 전혀 싫지 않다는 듯 히죽 웃었다.
츄츄가 곰발처럼 커다란 손으로 시아나의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
“나한테 속마음을 다 이야기해 줘서 고마워.”
어젯밤 시아나는 츄츄에게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던 속내를 비쳤다.
츄츄는 놀라지 않았다. 감히 시녀 따위가 무슨 허황된 꿈을 꾸느냐며 비난하지도 않았다.
그저 마음을 다해 응원해 주었을 뿐.
“너무 고민하지 말고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혀.”
“…….”
“넌 똑똑하고 당찬 애잖어. 황태자 전하는 정신이 좀 회까닥하시긴 하셨지만 제국에서 가장 강하신 분이고. 그러니 둘이 손을 맞잡으면 어떻게든 될 거여.”
패전국 출신의 시녀와 고귀한 황태자라는 막막한 관계라도, 두 사람이라면 앞으로 나아갈 수도 있을 것이다.
츄츄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
이상한 일이었다.
대책 없을 만큼 낙관적인 친구의 말에 시아나는 가슴속에 꽉 차 있던 무언가가 뻥 뚫리는 기분이 들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
시아나의 물음에 츄츄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원래 사랑은 쟁취하는 것이여!”
츄츄는 두꺼운 팔뚝을 들어 주먹을 꾹 쥐었다.
사랑하는 이를 위해서라면 전설 속의 드래곤도 때려잡을 것 같은 용맹한 모습이었다.
시아나는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환하게 웃으며, 친구의 거대한 주먹에 작은 주먹을 가져다 대었다.
“고마워, 츄츄. 네 말대로 해 볼게.”
시아나는 용기를 내 보기로 했다.
* * *
시아나는 결심했다.
‘더 이상 바보처럼 혼자 끙끙 앓지 않을 거야.’
시아나는 라시드에게 솔직히 제 감정을 말할 생각이었다.
전하를 좋아하고 있다고.
시아나는 라시드가 어떻게 반응할 까 생각해 보았다.
‘부담스러워할지도 몰라.’
시아나가 라시드와 같은 마음이라고 고백하는 순간, 선을 넘을 듯 말 듯 했던 애매모호한 관계가 깨어져 버리게 되는 것이다.
어쩌면 라시드는 장난 같은 지금의 관계가 이어지길 바랄 수도 있다.
‘혹은 내가 갑자기 말을 바꾼 것에 대해 경계를 할지도 모르지.’
라시드는 황태자였다.
그런 그의 옆에 서고 싶다는 것은 권력을 향한 야망으로 보일 수도 있었다.
그 외에도 라시드가 시아나의 말에 부정적으로 반응할 이유는 많았다.
그럼에도…….
“하나같이 상상이 안 돼.”
선명히 떠오르는 모습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을 크게 뜨더니 환하게 웃는 라시드의 얼굴뿐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기쁜 말을 들은 것처럼 보라색 눈동자를 곱게 휜 아름다운 남자의 얼굴을 떠올리니 심장이 찌르르 울렸다.
두 볼이 발개진 시아나는 거울 앞에 섰다.
“아무리 그래도 마음을 고백하는 건데 초라한 모습으로 할 수는 없잖아.”
물론 시아나는 시녀였기에 꾸미는 것에 한계가 있었다.
그럼에도 시아나는 최선을 다해 단장을 했다.
깨끗하게 몸을 씻고, 다리미질을 하여 주름 하나 없이 빳빳하게 만든 진녹색 제복을 입었다.
그 후에는 밀색 머리카락을 빗질하여 부드럽게 만들었다.
“머리를 풀어 볼까?”
곱슬거리는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리는 편이 확실히 더 예뻐 보였다.
그러나 이내 시아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아무리 그래도 시녀가 이런 머리 스타일을 하는 건 과해.”
시아나는 평소처럼 밀색 머리카락을 길게 땋았다.
대신 서랍장 문을 열어 립스틱 하나를 꺼냈다.
언젠가 아리스가 선물해 준 것이다.
‘공주님께 받은 후에 거의 쓰지 않았지.’
시아나는 입술 위로 립스틱을 발랐다.
색이 연한 립스틱이라 드라마틱한 변화가 생긴 것은 아니었으나, 입술색이 고와지며 얼굴에 한결 생기가 돌았다.
‘바르는 편이 더 낫지? 아닌가?’
그 후로도 시아나는 제 모습을 몇 번이나 살펴본 후, 긴 숨을 내쉬며 방을 나섰다.
시아나가 향한 곳은 라시드의 방이었다.
라시드는 시아나를 부르지 않았고 부름을 받지 않은 시녀가 주인을 찾아 가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시아나는 딱 오늘 하루만 그런 규율을 무시하기로 했다.
시아나는 라시드의 방 앞을 지키고 있던 호위 기사 솔에게 뻔뻔한 얼굴로 말했다.
“전하를 뵈러 왔습니다. 들어가 보아도 될까요?”
갑작스러운 시아나의 방문에 눈을 크게 뜬 솔이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전하께 의중을 여쭈어보겠습니다.”
다행히 라시드는 시아나를 피하지 않았다.
“들어가십시오.”
시아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방 안으로 들어섰다.
이내 긴 의자에 앉아 있는 라시드의 모습이 보였다.
라시드는 조금 놀란 얼굴이었다.
“네가 먼저 나를 찾아오다니 놀랐어.”
“…….”
“혹시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거야?”
라시드의 목소리에는 시아나를 향한 걱정이 한가득 느껴졌다.
그럼에도 시아나는 속상한 듯 눈썹을 모았다.
“며칠 만에 보는 건데 제게 할 말이 그 말뿐이에요?”
“……뭐?”
“전하는 제가 보고 싶지 않았나 봐요.”
“……!”
눈을 부릅뜬 라시드를 향해 시아나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저는 전하가 엄청 보고 싶었는데.”
“…….”
라시드는 차마 눈을 깜빡이지도 못한 채 멍하니 시아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뭘 잘못 들었나?’
그래, 그런가 보다.
너무 오래 시아나를 보지 못해서, 머릿속으로 오만 가지 시아나를 상상해서, 환청을 듣고 있는 거야.
그게 아니라면 그녀가 저런 말을 할 리가 없잖아.
혼란스러워 하는 라시드를 향해 시아나가 말을 이었다.
“전하께서 요즘 왜 저를 부르시지 않았는지 알아요.”
“…….”
“요즘 전하를 주시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그러신 거죠? 전하에 대한 추잡한 소문에 제가 휩싸일까 봐 걱정이 되어서요.”
라시드는 부정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무리 황태자궁이라 해도 완전히 비밀이 유지되는 것은 아니야. 그러니 조심하는 게…….”
“싫어요.”
“……?!”
라시드의 눈이 아까보다 더 커다래졌다.
시아나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저는 전하를 자주 보고 싶어요. 설령 더러운 소문에 휩싸여도 상관없어요. ……각오했으니까.”
“…….”
또렷한 목소리도, 선명한 에메랄드색 눈동자도 너무나 생생했다.
환청도, 환각도 아닌 것처럼.
‘설마…….’
라시드는 믿기지 않는 얼굴로 시아나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손을 뻗었다.
커다란 손안에 시아나의 동그랗고 따스한 뺨이 온전히 느껴졌다.
현실이었다.
라시드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냐.”
“…….”
“나는 바보라서 돌려 말하면 잘 알지를 못해. 다시 한번 정확히 말해 줘.”
시아나는 두 손으로 제 뺨을 만지는 라시드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라시드와 눈을 마주쳤다.
“앞으로 저는 전하와…….”
특별한 사이가 되고 싶어요.
—라고 말하려던 순간이었다.
쾅!
문이 열리고 거대한 체구의 남자가 들어왔다.
솔이었다.
그 순간 몽환적인 꿈속에 있는 것처럼 황홀하게 빛났던 라시드의 눈빛이 더없이 매서워졌다.
‘네가 정녕 죽고 싶구나, 솔.’
이런 눈빛이었다.
무시무시한 눈빛에 솔이 헉 하고 비명을 내질렀지만, 이내 용기를 쥐어짜 소리쳤다.
“그런 눈으로 쳐다보지 마십시오, 전하. 저도 결코 이 타이밍에 들어오고 싶진 않았습니다.”
“…….”
여전히 형형한 눈으로 저를 바라보는 라시드를 향해 솔이 외쳤다.
“하지만 다급한 상황이 생겨 어쩔 수 없었습니다.”
아니, 천 년간 잠들어 있던 드래곤이 깨어난다고 해도, 은둔해 있는 마법사들이 모여 반란을 일으켰다고 해도, 설령 내일 세상이 사라진다고 해도!
방금 전보다 중요한 일은 없었다.
그런 라시드를 진정시킨 것은 시아나였다.
“일단 이야기를 들어 봐요, 전하.”
“하지만…….”
“다급한 일이라고 하잖아요.”
시아나는 혹시나 중대한 일이 생긴 것은 아닐까 걱정이 되었다.
라시드는 찡그린 얼굴로 시아나를 바라보다가 작은 한숨을 내쉬더니 솔을 바라보았다.
“말해.”
시아나를 봐서 들어는 주지, 라는 라시드의 모습에 솔은 울컥했지만 애써 감정을 억누르며 대답했다.
“앙겔루스 공작님께서 전하를 찾아오셨습니다.”
제국에서 가장 이름 높은 귀족의 이름이었건만 라시드의 답은 더없이 매몰찼다.
“지금 바쁘니 꺼지라고 해.”
“그럴 수가 없습니다!”
솔이 황급하게 말을 이었다.
“왜냐면 앙겔루스 공작님께서 분노한 얼굴로 말씀하시길, 따님이신 베로니카 님이 임신을 하셨다고 합니다.”
“……?”
“그리고 그 아기의 아버지가 황태자 전하라고…….”
“……!”
그 순간 라시드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옆에 있던 시아나도 마찬가지였다.
잠시 후 두 사람의 반응이 극명히 달라졌다.
“절대 아니야. 나는 전혀 모르는 일이다, 시아나.”
당황한 얼굴로 부정하는 라시드와 달리 시아나는 싸늘해진 얼굴로 말했다.
“일단 앙겔루스 공작님을 만나서 정확한 상황을 파악하시지요, 전하.”
* * *
황태자궁의 응접실.
라시드의 앞에는 근엄한 인상의 남자가 있었다.
앙겔루스 공작이었다.
제국에서 최고로 손꼽히는 대귀족답게 앙겔루스 공작은 위엄이 넘쳤고, 젊은 황태자의 섬뜩한 분위기에도 전혀 짓눌린 기색이 없었다.
앙겔루스 공작은 입바른 칭찬을 늘어놓으며 긴 서두를 꺼내는 대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전하, 입에 담기 망측하오나 저의 외동딸 베로니카가 아기를 가졌습니다.”
“그런데?”
도대체 왜 그런 소식을 나한테 알려 주냐는 라시드의 눈빛에 앙겔루스 공작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어떻게 그렇게 매정하게 반응하실 수 있습니까.”
“나야말로 묻고 싶군, 공작. 뜬금없이 나를 찾아와 딸의 임신에 대해 늘어놓으며 따지는 이유가 뭐지? 나를 불쾌하게 만들고 싶은 건가?”
짜증이 가득 찬 라시드의 눈빛에 앙겔루스 공작의 다부진 어깨가 움찔했다. 그러나 이내 그는 지지 않겠다는 듯 눈에 힘을 주었다.
“따지러 온 것이 아니라 알려 주러 온 것입니다. 베로니카의 배 속에 있는 아기는 전하의 아이니까요.”
“무엄한 말이다. 난 그대의 딸과 아무런 관계도 없어.”
그 말에 앙겔루스의 감정은 결국 폭발하고 말았다.
“참으로 뻔뻔하시군요! 최근 황궁과 사교계에는 전하와 베로니카의 소문에 대해 모르는 이가 없습니다!”
“헛소문이야.”
라시드는 단칼에 그 소문을 부정했지만 앙겔루스 공작은 그 말을 전혀 믿을 생각이 없었다.
“저도 그럴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여 내내 가만히 있었습니다. 결혼도 안 한 딸이 추잡한 소문에 휩싸인 것이 당혹스럽긴 하지만, 진실이 아니라면 이대로 조용히 넘어가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하지만…….”
“…….”
“며칠 전부터 베로니카가 제대로 식사도 하지 못하고 잠도 자지 못하더군요. 그러다 결국 쓰러져 버려서 다급히 의사를 불러 진찰하게 하니 임신이라는 진단을 내렸습니다.”
그때를 떠올린 앙겔루스 공작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결혼도 안 한 외동딸의 임신 소식은 가히 충격적인 것이다.
앙겔루스 공작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배 속의 아이 아빠가 누구인지 물어보니 베로니카가 울먹이며 말하더군요. 라시드 황태자 전하와 하룻밤을 보낸 후 생긴 아기라고요.”
그 순간 라시드는 제 앞에서 괴상한 말을 늘어놓는 공작의 혀를 잘라 버리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
그만큼 개소리였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아무리 라시드라도 곤란한 상황에 휩싸일 것이다.
그래서 라시드는 폭력적인 충동을 참으며 말했다.
“그녀가 뭐라고 하든 사실이 아니야. 난 그녀와 손도 잡아 본 적이 없으니까. 앞으로 이따위 불쾌한 일로 나를 찾아오지 않았으면 좋겠군.”
라시드의 차가운 목소리에서 앙겔루스 공작은 확신했다.
눈앞에 있는 젊은 황태자는 제가 한 짓을 책임질 생각이 조금도 없다는 것을.
앙겔루스 공작이 일그러진 얼굴로 라시드를 바라보다 말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어쩔 수 없군요.”
“…….”
“황제 폐하와 황후 폐하께 이 일을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비겁하신 전하와 달리 두 분께서는 현명하고 책임감 있는 판단을 내리겠지요.”
그 순간 보인 라시드의 얼굴이 꼭 귀신처럼 섬뜩했다.
그러나 앙겔루스 공작는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절대 물러서지 않았다.
사악한 남자에게 농락당해 아기까지 가져 버린 가여운 딸을 위해서라도.
* * *
앙겔루스 공작의 말은 허풍이 아니었다.
그는 황제와 황후를 찾아가 이야기를 전했다.
심드렁한 황제와 달리 황후는 크게 충격을 받았다.
“그게 정말이오, 앙겔루스 공작?”
“예. 베로니카는 요즘 제 방에서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임신을 했다는 소식을 전한 후에도 찾아오지 않는 황태자 전하를 그리워하며 말입니다.”
“세상에.”
황후는 창백해진 얼굴로 입을 막았다.
앙겔루스 공작이 침통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정말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황후 폐하께서도 아시다시피 결혼도 하지 않은 귀족가의 여인이 아기를 낳는다는 것은 절대 용서받지 못할 일이지 않습니까.”
사교계에서 매장당하는 것은 당연했고, 평생 정숙하지 못한 여자라는 꼬리표가 붙어 홀로 살아야 했다.
그래서 원치 않은 임신을 하게 된 이들은 어떻게든 배 속의 아기를 사산시켜 없던 일처럼 굴거나, 요양을 빌미로 먼 곳으로 가 몰래 아기를 낳은 후 수도원에 버렸다.
앙겔루스 공작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딸아이의 배 속에 있는 아기는 고귀한 황족의 핏줄이니 말입니다.”
황족은 존귀하다.
황족의 핏줄은 절대적으로 보호하며 존중해야 한다.
그래서 앙겔루스 공작은 가문과 베로니카의 명예가 실추될 것을 알면서도 이 일을 제멋대로 무마시킬 수 없었다.
“황제 폐하, 황후 폐하. 부디 딸아이의 배 속에 있는 귀한 아기를 위해 현명한 판단을 내려 주소서.”
황제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을 지을 뿐 아무 반응이 없었지만, 황후는 아니었다.
황후는 공작의 마음을 잘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황후는 바로 라시드를 불렀다.
이내 라시드가 모습을 드러냈다.
예를 갖추어 인사하는 라시드를 향해 황후가 말했다.
“앙겔루스 공작이 다녀갔다.”
예상했던 말이었기에 라시드는 태연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가 무슨 말을 했든지간에 사실이 아닙니다. 공녀와는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황후는 정말이냐고 묻지 않았다. 사실 확인을 하지도 않았다.
그저 실망스러운 얼굴로 말할 뿐이었다.
“그렇게 잡아떼서 넘어갈 일이 아니란다.”
다른 이도 아니고 제국에서 하나뿐인 공작의 외동딸과 관련된 일이었다.
아무리 라시드가 엄청난 권력을 가진 황태자라 해도 조용히 넘어갈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황후는 이 사건을 해결할 가장 손쉬운 해결 방법을 제시했다.
“베로니카 공녀와 혼인을 하거라, 라시드.”
놀라운 말은 아니었다.
얼마 전부터 황후는 대놓고 라시드가 베로니카 공녀와 이어지길 바랐으니까.
그래서 황후는 라시드와 베로니카 공녀의 추잡한 소문을 냈고…….
‘어쩌면 공녀가 겁을 상실한 채 내 아기를 가졌다는 거짓말을 늘어놓는 것도 어마마마의 계획일지도 모르지.’
황후는 그럴 수 있는 사람이었다.
한없이 자애로운 얼굴로 웃다가도, 제가 원하는 것이 있다면 무슨 수를 쓰더라도 얻어 내곤 했다.
라시드는 피로가 급격히 밀려드는 걸 느꼈다.
예전에는 황후의 저런 점이 전혀 거슬리지 않았다. 왜냐면 라시드는 황후를 무조건적으로 따랐으니까.
황후가 어떤 요구를 해도 라시드는 늘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라시드가 또렷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싫습니다, 어마마마.”
단호한 말에 황후가 눈썹을 찡그렸다.
황후가 감정을 억누르며 달래듯 말했다.
“라시드, 지금 상황은 단순히 싫다고 하여 해결될 일이 아니다. 앙겔루스 공작을 적으로 돌릴 셈이니?”
앙겔루스 공작은 수많은 제국 귀족들의 꼭대기에 선 자였다.
그와 척을 진다면 라시드에게 좋을 것이 하나도 없었다.
어쩌면 다른 황자들 뒤에 붙어 라시드의 황태자 자리마저 위협할지도 모른다.
심각한 일이었다.
그러나 라시드는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
“공작이 적으로 돌아서도 상관없습니다. 제 목줄을 쥐고 저를 휘두르려는 자들이라면 제 쪽에서 사양입니다.”
차라리 적으로 분류되면 일이 쉬웠다.
그저 쓸어버리면 그만이니까.
다른 건 몰라도 그것만큼은 자신 있었다.
황후는 일그러진 얼굴로 라시드를 바라보았다.
감히 제게 반기를 드는 아들에게 화가 났다.
그럼에도 참을 수 있었던 것은 라시드의 저런 반응을 예상했던 덕분이었다.
‘평소엔 충성스러운 개처럼 내 말을 따르다가도, 제가 아니다 싶은 것이 있으면 절대 물러서지 않지.’
황후는 아들에 대해 잘 알았다.
그래서 이번 혼사에 관한 일만큼은 말 몇 마디로 저를 따르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진즉 예측했다.
그래서 황후는 서린 얼음처럼 분노하는 대신 한 가지 제안을 했다.
“그럼 이렇게 하면 어떻겠니.”
“……?”
눈을 가늘게 뜬 라시드를 향해 황후가 말을 이었다.
“이 일을 어떻게 해결하면 좋을지 락타의 생각을 들어 보는 거야.”
황후가 꺼낸 이름에 라시드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현자 락타.
제국의 수많은 신 중 하나인 오르오를 모시는 종교의 수장이었으며, 제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이 중 한 명이었다.
그녀는 황족의 핏줄을 타고 났음에도 고귀한 신분을 버리고, 신을 섬기며 수많은 이들을 돌보고 기도했다.
또한 누구에게나 공평했고 현명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문제가 생기면 이에 관한 락타의 생각을 듣곤 했다.
개중에는 황족이나 귀족들도 있었다.
치열한 갈등 끝에 결국 전쟁밖에 남지 않았을 때, 그러나 그런 최악의 수단만큼은 피하고 싶을 때, 그들은 현자 락타를 찾았다.
락타는 어느 편에도 서지 않고 중립적인 위치에서 이야기를 듣고 증거와 증인을 모아 제 생각을 말했다.
그러면 락타를 찾아간 이들은 그 판단에 따랐다.
물론 라시드는 정색했다.
“베로니카 공녀가 일방적인 거짓말을 하는 것인데 제가 왜 그렇게까지 해야 합니까.”
“그건 네 생각이지.”
라시드와 베로니카가 특별한 관계일지도 모른다는 소문은 곳곳에 깔려 있었다.
지금까지는 말도 안 되는 헛소문이라 여기는 이가 대부분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베로니카가 불룩해진 배를 하고 나타나면 어떻게 될까.
그것도 눈물 어린 얼굴로 ‘이 아이의 아빠가 황태자랍니다.’라고 한다면…….
많은 이들은 일말의 의심도 하지 않고 그녀의 말을 믿게 될 것이다.
베로니카의 아버지, 앙겔루스 공작이 그랬듯이.
황후가 라시드를 설득하듯 말했다.
“시간이 갈수록 너만 곤란해질 거야. 하지만 락타께서 공녀의 말이 거짓말이라 판단한다면 그 모든 불안이 깔끔하게 해결된다. 네게도 더없이 좋은 일 아니니.”
“…….”
라시드는 불쾌감에 속이 뒤틀렸다.
그럼에도 황후의 말을 반박할 수 없었다.
그녀의 말대로 이 더러운 사건을 해결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락타에게는 그만한 힘이 있었다.
‘그리고 락타라면 어마마마나 앙겔루스 공작이 조잡한 수를 써도 흔들리지 않을 테지.’
라시드는 특별히 락타를 존경하진 않았지만, 오랜 세월을 산 현자의 공정함에는 의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만큼 락타가 쌓아 온 신뢰는 대단했다.
결국 라시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대신 락타께서 저와 베로니카 공녀 사이가 아무 관계도 아니라고 판단하시면, 다시는 제게 어떤 여인도 붙이지 마십시오.”
“그러마. 대신 너도 약속하거라. 만약 락타께서 너와 베로니카 공녀를 특별한 사이라고 판단하면 공녀와 혼인하여 책임을 다하기로.”
그러나 흔쾌히 고개를 끄덕인 황후와 달리 라시드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것이 괘씸했지만 황후는 별말하지 않았다.
어차피 라시드의 의사 따윈 그리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락타께서 베로니카 공녀의 편을 들어 준다면, 온 세상 사람들이 라시드가 공녀와 혼인을 해야 한다고 소리 칠 텐데 제가 어쩌겠어.’
제아무리 피의 황태자라는 섬뜩한 별명을 가진 라시드라도 그만한 원성을 모른 척하기는 쉽지 않으리라.
* * *
황실과 앙겔루스 공작가는 현자 락타에게 서신을 보냈다.
[소녀처럼 순수한 사랑을 염원하는 앙겔루스 공작가의 외동딸 베로니카가 결혼도 하기 전에 아기를 가졌다. 베로니카는 아기의 아빠를 황태자로 지목하였다.
그러나 명예와 진실을 추구하는 황태자 라시드는 그 말을 강력하게 부정하는 바, 두 사람 사이의 첨예한 갈등에 대해 현자 락타의 생각을 듣고 싶소.]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라시드와 베로니카에 관한 스캔들을 아는 것은 황궁의 사람들과 소문에 밝은 일부 귀족들뿐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아니었다.
고귀한 황실과 공작가가 락타에게 이런 망측한 문제를 의뢰했다는 사실은 순식간에 수도 곳곳에 퍼졌다.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였다.
사람들을 모이기만 하면 이 흥미로운 사건에 대해 떠들었다.
“생각해 봐. 이렇게 일이 커져서 가장 곤란해지는 사람이 누구야? 바로 베로니카 공녀님이라고.”
지체 높은 공작가의 외동딸. 그것도 결혼도 하지 않은 아가씨가 아기를 가졌다.
그 자체로 엄청난 비난이 쏟아질 만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공녀는 그 사실을 숨기지 않고 표면으로 띄었다.
“그 이유가 뭐겠어. 공녀님의 말이 사실이란 말이지. 공녀님의 배 속에 있는 아기는 황태자 전하의 핏줄임이 분명해.”
“아아. 하룻밤 불장난의 대가치고는 너무 고된 대가를 치르고 계시는구나, 불쌍한 공녀님.”
반면 라시드에 대한 평은 혹독하기 짝이 없었다.
“황태자 전하께서는 피의 황태자라 불릴 만큼 냉혹하고 차가운 분이시잖아. 그분은 하룻밤을 함께 보낸 여인이 제 아기를 가졌건 말건 신경 쓰지 않으실걸.”
“신경 쓰지 않는 게 뭐야. 일을 키워 저를 귀찮게 한다며 공녀님을 없애 버리고 싶어 할지도 모르지.”
라시드는 오랜 시간 전쟁터를 누비고 수많은 승리를 가져온 제국의 영웅이었지만, 그에 관한 사람들의 마음은 존경심보다는 두려움이 컸다.
그렇기에 일이 터지자 사람들의 동정의 추는 한쪽으로 쏠릴 수밖에 없었다.
세상에 두려울 것 없는 냉혹한 황태자와 그런 황태자에게 농락당하고 버림받은 귀족 아가씨.
어느 쪽이 악당일지는 한눈에 보아도 명백했다.
“내가 악당인가?”
라시드의 말에 솔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악당이 아니라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남, 여자를 하룻밤 농락하고 버리는 인간 말종, 지 핏줄도 죽여 버릴 인간쓰레기…….”
“……그만해.”
“넵.”
솔은 재빠르게 입을 다물었다.
잠시 후, 라시드의 눈치를 살피며 솔이 다시 입을 열었다.
“여론이 이렇게까지 한쪽으로 쏠리다 보니 걱정이 되긴 합니다. 아무리 락타께서 공명정대한 분이라고 해도 수많은 이들의 목소리를 들으면 흔들릴 수도 있지 않습니까.”
“고작 그 정도에 흔들릴 자 같았으면 지금처럼 추앙받지도 않았어.”
물론 라시드는 순진하게 락타를 믿고 있는 것만은 아니었다.
락타에게 이 문제를 의뢰하기 직전, 라시드는 락타에 대해 철저히 조사했다.
황후나 앙겔루스 공작이 락타에게 물밑 작업을 한 흔적이 있다면 그것을 잡아내어 역으로 이용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하긴, 어마마마나 앙겔루스 공작도 바보는 아니니까. 락타께 어쭙잖은 수를 쓰다가 걸리면 모든 것을 잃을 테니 그런 도박을 하진 않겠지.’
락타는 제게 뇌물을 보내 회유하려고 하거나 협박하는 이가 있으면, 그게 누구라도 그 즉시 만인에게 그 사실을 공개했다.
그렇기에 락타가 존경받는 것이었다.
‘저쪽이나 이쪽이나 더러운 수를 쓰지 못한다면, 이 판은 철저하게 락타의 생각에 의해 웃는 자가 결정될 거야.’
그런 면에서 라시드는 당당했다.
소문과 달리 저와 베로니카는 정말 아무 사이도 아니니까.
‘락타는 감정에 휘둘려 진실을 보지 못하는 자가 아니지.’
락타는 확실한 증거나 증인이 없으면 죄에 대한 낙인을 함부로 찍지 않았다.
라시드에게도 그럴 터였다.
라시드는 락타의 그러한 냉철함을 믿고 있었다.
하지만 한 가지 문제가 남아 있었다.
라시드가 중얼거렸다.
“그날 밤 일이 걸리는구나.”
라시드의 말에 솔도 고개를 끄덕였다.
베로니카가 앙겔루스 공작에게 말한 라시드와 하룻밤을 보냈다고 했던 날.
라시드와 베로니카가 만난 것은 사실이었다.
그것도 황태자궁에서.
물론 약속된 것이 아니었다.
라시드가 외출을 하고 돌아오니 베로니카가 그의 방에 있었다.
라시드는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 들었다.
차갑게 굳은 라시드를 향해 베로니카가 붉은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어떻게 해도 저를 만나 주지 않기에 이곳에서 전하를 기다렸답니다.”
황태자궁은 자객도 쉽게 들어올 수 없을 만큼 경비가 삼엄했다.
그런데 일개 귀족 영애가 이처럼 태연하게 들어왔다는 것은…….
“어마마마로군.”
라시드의 경멸 어린 눈빛과 달리 베로니카는 상큼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황후 폐하께서 도와주셨답니다. 황후 폐하께서 말씀하시길 아무리 전하께서 냉정히 대해도 쉽게 포기하지 말라 하셨어요. 사랑이란 노력하여 쟁취하는 것이라면서요.”
그러더니 베로니카는 몸에 두르고 있던 망토를 내렸다.
정숙한 귀족 여인이 입기에는 파격적인 드레스 아래로 육감적인 몸매가 드러났다.
베로니카가 라시드를 향해 한 발짝 다가오며 말했다.
“전하, 베로니카는 전하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어요. 부디 제 사랑을 받아 주셔요.”
순간 라시드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아마 허리춤에 칼을 차고 있었다면 당장 눈앞의 여인을 베어 버렸으리라.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은 맨손.
아주 잠깐이라도 그녀를 만지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라시드는 베로니카에게 손대는 대신 서늘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공녀, 지금 당장 내 눈앞에서 사라지지 않으면 그대를 포함하여 앙겔루스 공작 가문을 파멸시켜 버릴 거야. 이후의 역사 속에서 이름 한 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철저하게.”
섬뜩한 말이었건만 베로니카는 호호 웃었다.
“전하, 어찌 그리 황당하고 무서운 농담을…….”
그러나 이내 베로니카는 입을 다물었다.
라시드의 선연한 보라색 눈동자에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섬뜩한 적의가 어려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베로니카가 제정신이 아니라 해도, 황태자에게 이런 일을 벌일 만큼 제멋대로라고 해도, 그녀에게도 살고자 하는 본능이 있었다.
이러다가 정말 죽겠구나.
라시드가 진심임을 안 베로니카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주춤주춤 뒷걸음질을 하던 베로니카는 흐아앙, 하고 울음 섞인 비명을 지르더니 도망치듯 나가 버렸다.
그것이 보름달이 떴던 밤에 일어났던 일이었다.
그 일을 알고 있던 솔이 눈썹을 찡그렸다.
“베로니카 공녀님이 락타의 앞에서도 그날 밤 전하와 함께 밤을 보냈다고 말한다면, 전하의 입장이 무척 곤란해질 겁니다. 어쨌건 공녀님께서 황태자궁을 다녀가신 것은 사실이니까요.”
“……락타께 진실을 꿰뚫는 눈이 있다는 말에 기대를 걸어 봐야지.”
두 사람 사이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어찌 되었건 이미 공이 락타에게 넘어가 버린 사안. 이제 와 고민을 해 보았자 할 수 있는 건 많지 않았다.
곤란한 표정으로 작은 한숨을 내쉬는 솔에게 라시드가 물었다.
“그런데 시아나는?”
왜 저걸 안 물어보나 했다.
솔은 익숙한 질문이라는 듯 대답했다.
“조용히 방 안에서 쉬고 계십니다.”
“……그래.”
방금 전까지만 해도 심각한 일을 앞둔 이가 맞나 싶을 만큼 태연했던 라시드의 얼굴이 대번 침울해졌다.
며칠 전, 라시드를 찾아온 시아나는 무슨 말을 하려고 했다.
[앞으로 저는 전하와…….]
그러나 솔과 앙겔루스 공작의 훼방으로 그 뒤의 말을 들을 수 없었다.
그때 했던 말이 무엇이냐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라시드에게 터진 사건이 사건인지라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눈치라고는 옥수수 한 알만큼도 없는 라시드였건만 어쩐지 시아나에게는 눈치가 보였기 때문이다.
대신 라시드는 시아나에게 매우 진지하고, 매우 억울한 얼굴로 베로니카에 관한 것을 부정했다.
[시아나, 나는 그녀와 결코, 정말, 진짜, 아무 사이도 아니야.]
그러나 필사적인 라시드의 외침이 무색하게 시아나는 담담하게 네, 하고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리고 끝이었다.
“뀨?”
쭉쭉이(흰 페럿)가 왜 그러냐는 듯 라시드의 어깨를 타고 올랐다.
“찍?”
냠냠이(다람쥐)도 고개를 갸웃거리며 작은 발로 라시드의 손등을 꾹꾹 눌렀다.
그러나 사랑스러운 동물들의 위로에도 가라앉은 마음이 풀어지지 않았다.
라시드가 시무룩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시아나는 내게 아무런 관심이 없는 걸까?”
물론 이따위 추잡한 사건에 그녀가 관심을 갖길 바라는 것은 아니었다.
아무리 라시드라도 이런 일에 엮인 모습을 보이는 것은 창피했으니까.
되도록 시아나가 이 사건에 대해 모르길 바랐다.
그럼에도 그녀가 보이지 않으니 심장 한편이 따끔했다.
참으로 유치한 감정이었다.
* * *
라시드는 이른 아침부터 준비를 했다.
깨끗한 물에 몸을 씻고 자수가 일절 새겨지지 않은 새하얀 셔츠를 입었다. 그리고 몸에는 은으로 만든 액세서리만 걸쳤다.
오늘이 바로 현자 락타가 황실과 앙겔루스 공작가에 벌어진 갈등에 대한 생각을 말하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락타의 생각은 오르오 신전에서 들을 수 있었고, 그 어떤 것도 숨겨서는 안 된다는 오르오 신의 규율에 맞추어 신전에는 많은 구경꾼들이 몰려들 예정이었다.
그렇기에 라시드는 최대한 경건하게 단장을 한 것이다.
솔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참으로 진실 되고 맑아 보입니다, 전하. 지금 전하의 모습이라면 이 세상에 태어나 욕이라고는 ‘이 바보’ 외에는 한 적이 없고, 인생에서 해 본 가장 나쁜 짓이라고는 실수로 길가의 작은 들꽃을 밟은 것이 전부라고 해도 사람들은 그 말을 믿을 겁니다.”
물론 겉모습만 그렇다는 것이다.
라시드는 그간 전쟁터에서 수천 명의 목숨을 앗아 간 잔혹한 남자였다.
‘현자 락타와 오르오 신전에 모인 사람들이 저 모습에 취해 그것을 잠시 잊는다면 좋을 텐데.’
솔은 라시드의 외모가 여론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길 간절히 기도했다.
그런 솔을 향해 라시드가 물었다.
“어마마마와 아바마마는?”
“황제 폐하께서는 피로하셔서 오지 않으신다 하시고, 황후 폐하께서는 시간에 맞추어 오신다고 합니다.”
“그래.”
아들을 혼인시키려 이 일에 누구보다 열성적인 황후와 달리, 황제는 일말의 관심이 없어 보였다.
물론 전혀 서운할 일은 아니었다.
예전부터 황제는 제가 흥미 있는 일이 아니면 철저하게 무심했으니까.
‘요양지에서 돌아온 후 그런 면이 더 심해지신 것 같긴 하지만…….’
황제에 대해 생각하며 방을 나선 라시드는 눈을 크게 떴다.
텅 빈 복도에 진녹색 제복을 입은 시아나가 서 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모습이었다.
라시드의 얼굴이 단번에 밝아졌다.
“시아나.”
라시드가 긴 다리를 성큼성큼 움직여 금세 시아나의 앞으로 다가갔다.
“내 시녀인데 이렇게 오랜만에 얼굴을 보다니…….”
“송구합니다.”
시아나가 담담하게 대답하며 라시드와 눈을 마주쳤다.
짧은 순간 라시드는 고민했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그동안 왜 나를 찾아오지 않았어? 얼마나 보고 싶었는데.’
이건 너무 따지는 것 같잖아.
‘내 순정과 순결을 증명하고 오마.’
굳이 이런 말을 하는 게 더 수상해 보여.
‘그럼 다녀올게.’
그래, 이게 좋겠다.
이편이 가장 별일 아닌 것 같아 보였다.
그러나 라시드가 그 말을 입에 담기 전에 시아나가 먼저 말했다.
“전하.”
“응.”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
“……?”
부탁이란 말에 라시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런 순간에 마주친 시아나가 제게 무언가를 부탁한다는 사실이 신기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내 라시드는 두 눈을 부드럽게 휘었다.
“무엇이든 말해.”
시아나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전하의 이름을 한번 불러 보아도 될까요?”
“……!”
생각지도 못한 말에 라시드는 눈을 크게 떴다.
일개 시녀가 황족의, 그것도 황태자의 이름을 불러보고 싶다니.
무엄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그러나 라시드에게는 이 세상에서 가장 달콤하고 황홀한 부탁으로 느껴졌다.
라시드가 일말의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새 솔은 자리를 피하고 드넓은 복도에는 두 사람뿐이었다.
천장이 높고, 화려한 장식이 달린 고요한 복도에 시아나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라시드.”
“…….”
라시드는 순간 시간이 멈추는 기분이 들었다.
그만큼, 비현실적이었다.
라시드.
그녀의 입 밖으로 나온 세 글자의 위력은 너무 강력했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질려 버릴 만큼.
저도 모르게 숨을 멈출 만큼.
콩닥거리던 심장이 멈춰 버릴 만큼.
한참 후에나 정신을 차린 라시드가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응, 시아나.”
“…….”
라시드는 과거에도 그녀의 이름을 종종 불렀기에, 시아나는 라시드만큼의 충격을 받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와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심장이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쿵쿵 뛰었다.
온몸이 뜨거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이제 시아나는 그것을 피할 생각이 없었다.
시아나가 두 볼이 살짝 발그레해진 채 말했다.
“곤란한 부탁을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확실하게 결심할 수 있게 되었어요.”
라시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엇을?”
“그런 게 있어요.”
애매한 대답에 눈썹을 찡그린 라시드를 향해 시아나가 말을 돌렸다.
“저도 전하와 함께 오르오 신전에 가도 괜찮을까요?”
라시드는 놀랐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간 시아나는 이 일에 전혀 관심이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라시드가 눈썹을 내렸다.
“좋은 꼴을 보지는 못할 텐데.”
아무리 라시드가 뻔뻔하다 해도 좋아하는 여자에게 이런 일에 휘말린 모습을 보이고 싶진 않았다.
라시드의 생각을 헤아린 시아나가 눈썹을 내리며 웃었다.
“그래도 제가 가면 분명 도움이 될 거예요.”
“어떻게?”
“상황이 전하께 불리하게 흘러가는 것 같으면, 솔 님과 함께 깽판이라도 칠게요. 우리 황태자 전하는 절대 그런 몹쓸 짓을 할 분이 아니에요. 좋아하는 것이라고는 작은 동물들의 똥을 치우고 간식 주는 것뿐인 순진무구한 분이라고요!”
장난기가 가득한 말이었다.
그럼에도 시아나의 눈빛에는 단호한 의지가 어려 있었다.
단순히 구경꾼이 되어 지켜보겠다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라시드에게 힘이 되어 주고 싶다는 강한 의지가.
라시드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이따위 일에 연루되었던 불쾌감이 한순간 날아갈 만큼.
“그거 든든한걸.”
진심이었다.
* * *
공명정대함과 진실을 추구하는 오르오신의 신전.
고요하면서도 엄숙한 느낌을 주는 흰색 신전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황태자 라시드와 베로니카 공녀의 스캔들이 어떤 국면을 맞이할까 궁금해 찾아온 이들이었다.
사람들이 낮은 목소리로 소곤거렸다.
“이 좋은 구경거리를 볼 수 있다니 운이 좋았어.”
사람들이 과도하게 몰릴 것을 예상한 오르오 신전은 신전에 참석할 수 있는 이를 제한했다.
일단 이 갈등의 주요 인물인 라시드와 베로니카, 그리고 두 사람의 가족 자리는 빼 두었다.
그리고 나머지 자리는…… 놀랍게도 신청자를 받아 제비뽑기를 했다.
일부 귀족들은 황족과 대귀족이 관계된 사건인데 어찌 그런 저급한 방법으로 참석자를 뽑느냐 불만을 내비쳤지만, 오르오 신전 측에서는 한마디를 내뱉을 뿐이었다.
[공명정대한 신 오르오의 취지에 맞춘 가장 공평한 방법입니다.]
지금 신전에 있는 이들은 그렇게 뽑힌 행운의 구경꾼들이었다.
사람들의 얼굴은 무척 상기되어 있었다.
“과연 락타께서 오늘 어떤 판단을 내리실까?”
“말해서 뭐 해. 당연히 베로니카 공녀님의 편을 들어주겠지.”
대부분의 여론이 베로니카의 편이었다.
물론 아주 가끔 라시드 편을 들어주는 이도 있긴 했다.
“황태자 전하께서 얼마나 피도 눈물도 없는 잔혹한 분인데. 그분은 인간 여자를 안는 것보다는 차라리 죽이는 것에 더 희열을 느끼실걸?”
이따위 의견들이 대부분이었기에 그다지 도움은 되지 않았다.
잠시 후, 신전 안이 소란스러워졌다.
스캔들의 주인공인 두 남녀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가장 먼저 라시드에게 시선을 빼앗겼다.
‘세상에.’
흉악하기 짝이 없던 소문과 달리 흰 옷을 입은 라시드의 모습은 너무나 아름답고 고귀해 보였다.
일평생 지은 죄라고는 아무 생각 없이 숨을 쉬고 있다가 애꿎은 여인들의 마음을 빼앗아 버린 것 외에는 없을 것 같았다.
물론 보다 냉정해지는 이도 있었다.
‘잊으면 안 돼. 저런 얼굴로 수많은 전쟁터를 핏빛으로 물들이신 분이라고.’
원래 그냥 미친놈보다는, 안 그렇게 보이는데 미친놈이 더 무서운 법이었다.
겨우 정신을 차린 사람들은 고개를 돌려 라시드의 맞은편에 선 여인을 바라보았다.
베로니카는 평소에 입는 화려한 드레스가 아닌 펑퍼짐하고 소박한 임산부용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물론 임신 초기였기에 배는 거의 나오지 않았지만, 어찌 되었건 공작가의 여인이 화장기 없는 서글픈 얼굴로 서 있는 모습은 안쓰럽기 그지없었다.
잠시나마 라시드에게 흔들렸던 여론은 일제히 베로니카에게 되돌아갔다.
‘저렇게 여린 아가씨께서 피의 황태자라는 분께 거짓말을 할 리가 없잖아.’
‘그러게 말이야. 간이 배밖에 튀어나온 것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그런 미친 짓을 하겠어.’
“—라고 생각하고 있겠지, 이블린?”
황후가 말했다.
황후는 신전 한편의 가림막이 쳐진 곳에 앉아 있었다.
사람들의 관심과 시선에서 황후를 보호하기 위해 특별히 만들어진 자리였다.
황후의 뒤에 있던 이블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지요. 사람은 누구나 약자에게 마음이 기울기 마련이니까요.”
이블린의 말에 황후는 웃음을 터뜨렸다.
이 자리에는 귀족과 평민이 섞여 있었다.
그러나 그들 중 제국 최고의 명문가 앙겔루스 공작가의 외동딸보다 강한 힘을 가진 이는 없었다.
그럼에도 베로니카 공녀를 약자인 양 안쓰러워하고 있었다.
‘하긴. 이때가 아니면 저들이 언제 공작가의 여인을 동정해 보겠어.’
황후는 그런 사람들이 우스워 비틀린 웃음을 지었다.
황후가 말했다.
“그나저나 놀라울 따름이야. 아무리 베로니카 공녀의 성격이 별나다 해도 이런 대담한 수를 쓰다니…….”
물론 최근 몇 달 동안 라시드와 베로니카의 스캔들을 퍼뜨린 것은 황후였다.
시시때때로 두 사람을 만나게 했고, 베로니카를 꼬여내어 라시드의 침실로 안내하기도 했다.
그러나 베로니카가 임신을 했다며 라시드를 붙잡으리라는 것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이블린이 허스키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만큼 베로니카 공녀도 필사적이었다는 말이겠지요. 앙겔루스 공작도요.”
베로니카는 라시드가 가지고 싶어서 충격적인 말을 내뱉었고, 앙겔루스 공작은 모자란 딸을 황태자비로 밀어 넣기 위해 그 말을 덥석 믿었다.
물론 황후는 모든 상황이 우스울 뿐이었다.
베로니카의 말이 거짓말임을 알았기 때문에.
“라시드는 제가 싫어하는 사람하고는 같은 공간에서 숨 쉬는 것도 끔찍해하는 성격이야. 베로니카 공녀가 무슨 짓을 해도 끌리기는커녕 베어 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했을걸.”
그럼에도 황후는 앙겔루스 공작이 그러하듯, 베로니카의 말을 믿기로 했다.
그것이 황후가 원하던 것이었기에.
“베로니카 공녀 덕분에 라시드의 혼사가 생각보다 빨리 진행되겠구나.”
그뿐인가.
베로니카는 황후에게 약점이 잡혔다.
감히 배 속의 아이가 황태자의 아이라는 거짓말을 하다니…….
‘내가 그것을 들먹이면 벌벌 떨며 꼼짝을 못하겠지.’
안 그래도 조종하기 쉬운 아이가 더 다루기 쉬워진 것이다.
여러모로 황후가 얻을 게 많은 상황이었다.
이블린이 물었다.
“그런데 전하와 베로니카 공녀가 혼인을 하면 공녀의 배 속의 아기는 어쩌실 겁니까.”
“당연히 낳게 해야지.”
황후는 더러운 황실의 피 따위 이어지게 할 생각이 없었다.
그렇기에 더더욱 베로니카는 라시드에게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신붓감이었다.
베로니카가 황태자비가 되어 아기를 낳고 그 아기가 후에 황좌에 오르면…….
고약한 황실의 핏줄이 끊어진다.
그것을 떠올린 황후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행복한 미소였다.
“그러니 부디 락타께서 현명한 판단을 내려 주셔야 할 텐데…….”
황후가 고개를 들었다.
가림막 사이로 보이는 단상 위에 는 어느덧 현자 락타가 서 있었다.
* * *
하얗게 센 머리카락과 주름진 얼굴, 살집 하나 없이 깡마른 몸.
락타는 마치 오래된 나무 같은 노인이었다.
그러나 눈빛만큼은 어린아이처럼 맑았다. 그러면서도 가늠할 수 없을 만큼 깊었다.
오묘한 분위기에 회의장 안에 앉아 있는 사람들의 얼굴에 묘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락타가 입을 열었다.
“이 자리에서 진실을 말하는 이는 신의 용서를 받을 것이며, 거짓을 말하는 이는 신이 내린 철퇴를 받게 될 것이니.”
“…….”
“일단 서로 다른 주장을 하는 이들의 말을 들어 보도록 하지요.”
먼저 입을 연 것은 베로니카였다.
베로니카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처연한 얼굴로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하듯 말했다.
“현명하신 락타시여, 베로니카의 말을 들어 주셔요. 저는 풍요로운 남부에서 지내다가 두 달 전 수도에 왔습니다. 황후 폐하를 뵙기 위해 황궁에 놀러 갔다가 황태자 전하를 만나는 날이 많아졌고, 남자답고 늠름한 전하께 흠뻑 빠져 버렸답니다.”
베로니카의 침울했던 눈빛이 순간 따스해졌다.
마치 라시드와 함께한 나날들을 추억하는 것처럼.
베로니카가 말을 이었다.
“보름달이 떴던 어느 날 밤, 전하가 저를 잡았습니다. 결혼을 한 사이도 아니니 전하의 손을 뿌리쳤어야 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이미 제 가슴속에는 전하뿐이었으니까요. 그렇게 저는 전하와 잊지 못할 하룻밤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망측한 이야기에 듣고 있던 사람들이 당황한 얼굴로 웅성거렸지만, 베로니카를 비난하는 기색은 많지 않았다.
솔직하게 이야기를 털어놓는 베로니카의 모습이, 문란한 귀족 여인보다는 사랑의 열병에 빠져 실수를 해 버린 순진한 아가씨 같았기 때문이다.
물론 라시드는 전혀 아니었지만.
라시드의 눈빛은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눈빛만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누구라도 마주치는 순간 즉사해 버릴 만큼.
그러나 베로니카는 그런 라시드의 시선 속에서도 꿋꿋이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하지만 그날 이후, 전하께서는 제게 차갑게 대하기 시작하셨어요. 전하의 갑작스러운 변화에 어찌할 바를 모르는 상태에서 증상이 나타났지요.”
월경을 하지 않고 속이 울렁거렸다. 먹기만 하면 헛구역질이 올라왔다.
베로니카가 두 손으로 배를 감싸 안으며 말했다.
“제 안에 황태자 전하의 아기님이 들어선 것이지요.”
그 모습이 어찌나 처량하고 안쓰럽던지.
모여 있던 사람들은 결혼도 하기 전에 아기를 가져 버린 저 가여운 여인을 어찌하느냐며 혀를 찼다.
그러나 락타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은 인자한 얼굴로 말했다.
“제게 갈등의 해결을 의뢰한 후, 베로니카 공녀님은 오르오의 사제들과 함께 세 번의 진찰을 받았습니다. 앙겔루스 공작가의 의사에게 한 번, 황태자 전하의 주치의에게 한 번, 마지막으로 오르오 신전 소속의 의원에게 진찰을 한 결과…….”
락타가 말을 이었다.
“베로니카 공녀님께서 임신한 것은 사실입니다.”
회의장에 모인 이들이 사뭇 심각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익히 알고 있었던 일이었지만 락타의 말로서 ‘혹시나?’ 싶었던 일말의 의문마저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환한 얼굴로 눈을 빛내는 베로니카에게서 고개를 돌린 락타가 라시드를 바라보았다.
“전하께서도 하고 싶은 말을 하시지요.”
이제야 제가 말할 차례임을 안 라시드가 서늘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라시드는 구구절절한 사정을 말하는 대신 짧게 말했다.
“베로니카 공녀가 임신을 한 것이 사실이건 아니건 나와는 하등 관계없는 일이오. 난 공녀와 아무런 연도 없으니까. 함께 밤을 보내기는커녕 친밀하게 대화를 나눈 적도 없어.”
얼음 같은 표정은 진심으로 베로니카에게 일말의 감정도 없어 보였다.
그래서 더더욱 사람들은 라시드에 대한 불신이 커졌다.
저토록 냉정하고 무서운 남자니 하룻밤 여자를 안고 버릴 수도 있을 것이라고.
물론 눈이라도 마주칠까 두려워 라시드 쪽을 제대로 보지도 못했지만.
그러나 이번에도 락타만큼은 예외였다. 락타는 라시드와 눈을 똑바로 마주치며 말했다.
“아무 연이 없다고 말하기에는 어폐가 있더군요, 전하. 제가 조사한 결과 최근 두 달 동안 전하와 공녀께서 황궁에서 종종 함께 있으셨던 것은 사실입니다. 황궁에 몸담고 있는 많은 이들이 그것을 증명하였습니다.”
“그건…….”
황후가 자리를 만들어 생긴 일이라고 말하기 전 락타가 말을 이었다.
“하나, 그것만으로 두 분이 특별한 사이였다고 단정 짓는 것은 무리가 있더군요. 왜냐하면 앞서 황태자 전하의 말대로, 전하께서 공녀님을 대하는 태도가 무척 냉담하였으며 어쩌다 만나더라도 금세 자리를 피하셨다고 하니까요. 공녀님과 함께 있는 것을 조금도 원치 않는 듯 말입니다.”
그 말에 라시드의 눈빛이 조금 풀어졌고 반대로 베로니카는 눈썹을 찡그렸다.
베로니카가 억울하다는 듯 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락타시여, 제가 보름달이 떴던 밤 황태자궁에 간 것은 사실입니다. 황궁의 목격자들을 조사하셨다면 그때 저를 본 이도 찾으셨겠지요?”
“물론입니다.”
사실 황궁에서 근무하는 이들에게 어떤 증언을 받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들은 입이 무거웠고, 혹여 잘못 입을 놀렸다가 큰 벌을 받게 될까 조심스러워했다.
그러나 그들에게 물은 것이 오르오 신을 모시는 락타였기에 많은 이들이 성심껏 답했다.
그렇기에 락타는 보름달이 떴던 밤에 황태자궁에서 벌어진 사건의 일부를 들을 수 있었다.
“그날 밤, 베로니카 공녀님께서 황태자궁을 나오는 것을 본 이들이 있습니다.”
베로니카의 얼굴에 대번에 화색이 돌았죠.
“그것 보세요. 제 말이 맞잖아요. 야심한 밤에 방에서 남녀가 단둘이서 무얼 했겠어요?”
저질스러운 행위를 상상하게 만드는 말에 라시드가 질색을 하며 말했다.
“락타시여, 그날 밤 공녀는 내가 궁을 비운 사이에 내 방에 들어와 허락도 없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뿐이오. 그것을 본 나는 공녀를 당장에 내쫓았고. 그 또한 조사해 보면 알 것이오.”
놀랍게도 락타는 그것도 조사를 마친 후였다.
“맞습니다. 황태자 전하께서 돌아온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베로니카 공녀님이 방을 나오셨더군요. 남녀 간의 깊은 관계가 이루어지기에는 극히 짧은 시간이었습니다.”
상황이 불리해짐을 느낀 베로니카가 소리쳤다.
“누가 그리 말했는지 몰라도 거짓말이에요! 그날 밤 전하와 저는 입을 맞추고 사랑을 속삭이며 깊은 정을 나누었어요. 분명 그랬다고요.”
베로니카는 락타가 아닌, 뒤편에 앉아 있던 사람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락타는 몰라도 이자들만큼은 제 편이라는 사실을.
베로니카는 그것을 이용하기로 했다.
“제발, 제발 부탁이니 더 이상 저를 비참하게 만들지 말아 주세요. 제 아픔 때문에 배 속에 있는 아기가 잘못될까 두렵습니다.”
베로니카는 두 손에 얼굴을 묻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흑흑…….
서글픈 울음소리가 회의장에 가득 찼다.
공작가의 우아한 아가씨가 체면도 잊고 우는 모습은 사람들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술렁거리는 사람들 속에서 누군가 용기를 내어 소리쳤다.
“황태자 전하, 비겁하게 회피하지 마시고 남자답게 책임을 지십시오. 공녀님이 너무 가엽습니다.”
어쨌든 이 사건은 제아무리 락타가 현명하다 한들 확실하게 결론을 낼 수 없는 일이었다.
목격자들을 샅샅이 모아도 남녀 사이에 은밀한 일이 벌어졌냐 아니냐를 확실하게 조사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으니까.
[그러니 중요한 것은 여론을 얻는 것이란다. 사람들을 네 편으로 만들면 너는 라시드를 가질 수 있어. 아무리 라시드가 제멋대로라도 제 아기를 가졌다는 공녀를 그냥 둘 수는 없으니까.]
며칠 전 베로니카를 부른 황후가 해 준 말이었다.
두 손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베로니카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저 잘하고 있죠, 황후 폐하?’
휘장 안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황후가 중얼거렸다.
“그래, 아주 잘하고 있다, 베로니카 공녀. 다른 것은 멍청하기 짝이 없지만 떼쓰는 것 하나는 정말 최고로구나.”
흐름은 완전히 베로니카 쪽으로 넘어왔다.
이제 락타의 생각이 어떠하든, 라시드의 말이 무엇이든, 여론에 큰 영향을 끼치지 못할 것이다.
제가 원했던 상황에 황후가 붉은 입꼬리를 올리는 순간이었다.
“공녀님의 말은 모두 거짓입니다!”
“……?!”
신전에 울려 퍼진 맑은 목소리에 베로니카와 황후가 표정을 굳혔다.
웅성거리던 사람들도 말을 멈추고 목소리의 주인공을 바라보았다.
사람들 사이에서 우뚝 일어선 이는 황궁 시녀의 상징인 진녹색 제복을 입고 있는 자그마한 여인이었다.
‘시아나?!’
예상치 못한 시아나의 등장에 라시드가 눈을 크게 떴다.
사람들의 시선 속에서 시아나가 말했다.
“락타시여, 저는 황태자 전하를 모시는 시녀 시아나라고 합니다. 공녀님께서 거짓 진술로 황태자 전하를 곤혹스럽게 만드는 것을 더는 볼 수가 없어 용기를 내게 되었습니다. 부디 제 말씀을 들어 주십시오.”
황당한 얼굴로 시아나를 바라보던 베로니카가 분노 어린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일개 시녀 따위가 어딜 끼어들어?!”
그런 베로니카를 락타가 말렸다.
“공녀님, 이 자리는 오르오 신과 많은 이들이 지켜보는 자리입니다. 그것을 아는 데도 이름과 얼굴을 밝히며 나섰다면 필시 각오한 바가 있을 테지요. 이야기를 들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지만…….”
베로니카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락타의 엄숙한 눈빛 때문이다.
락타는 다시 시아나를 바라보았다.
시아나는 고개를 숙여 락타에게 감사를 표하며 입을 열었다.
“베로니카 공녀님께서 전하와 깊은 관계라는 것이 사실이라면 공녀님께서는 제 질문에 대답을 하실 수 있을 겁니다.”
시아나가 잠시 뜸을 들이다 말을 이었다.
“황태자 전하의 신체에는 벚꽃 모양으로 난 흉터가 있습니다. 옷을 벗은 몸을 보았다면 그냥 지나칠 수 없을 만큼 눈에 띄는 흉터이니, 함께 밤을 보냈다면 필시 알고 계실 겁니다.”
“……!”
앳된 시녀가 내뱉기에는 너무나 망측한 말이었다.
신전 안에 있던 모든 이들의 얼굴이 새빨개질 만큼.
저 멀리 있던 라시드도 할 말을 잃은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았다.
그런 분위기 속에 락타만이 눈을 빛냈다.
락타는 저 질문이 이 지지부진한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답이 될 수 있으리라 판단했다.
락타가 베로니카를 바라보며 물었다.
“베로니카 공녀님, 대답해 주십시오. 전하의 몸 어디에 흉터가 있었습니까?”
“그, 그건…….”
본디 베로니카는 영특한 편이 아니었다.
오늘 여기까지 분위기를 끌어낸 것도, 아버지와 황후의 조언 덕분이었다.
그런데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이 발생하니 도저히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베로니카는 필사적으로 생각했다.
‘한눈에 보이는 흉터라고 했지?’
그렇다면 다리나 팔이 아닌 몸 쪽에 있을 확률이 높았다.
베로니카는 제 몸을 애매하게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이, 이쪽쯤에 흉터가 있었습니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내린 답이었지만 락타는 성에 차지 않는다는 듯 눈썹을 모았다.
“더 정확하게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사, 사실 그날 밤 너무 정신이 없었기에 또렷하게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분명 또렷한 흉터를 보았어요. 정말이에요!”
그 순간 시아나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갔다.
시아나가 눈을 가늘게 뜨고 중얼거렸다.
“공녀님은 역시 고약한 거짓말쟁이예요.”
“뭐야?!”
눈을 부릅뜨며 시아나를 노려보던 베로니카가 허억, 하고 소리를 냈다.
가만히 서 있던 라시드가 ‘내 시녀의 말을 증명하지’라는 한마디를 툭 내뱉더니 셔츠 단추를 하나하나 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입을 쩍 벌린 채 경악한 얼굴로 굳어 버렸다.
베로니카의 뒤편에서 이를 갈고 있던 앙겔루스 공작 부부도, 가림막 뒤에 앉아 싸늘한 표정을 짓고 있던 황후도 할 말을 잃었다.
그만큼 충격적인 모습이었다.
사람들 앞에서 옷을 벗는 황태자라니.
그 와중에 놀라운 것은 그런 파격적인 행동을 함에도 황태자의 격이 전혀 떨어져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성스러운 의식이라도 치르는 듯 경건해 보였다.
라시드가 단추를 다 풀었을 즈음, 시아나가 다가갔다.
라시드가 눈을 크게 뜨더니 눈썹을 내리며 복잡한 얼굴로 시아나에게 몸을 맡겼다.
시아나는 능숙한 손길로 라시드의 셔츠를 벗는 것을 도왔다.
이내 라시드의 몸이 드러났다.
오랜 시간 전쟁터를 누볐다는 사실을 증명하듯 단단한 근육이 잡힌 몸.
그러나 놀랍게도 흉터 자국은 보이지 않았다.
그 어디에도.
베로니카가 말도 안 된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주절거리기 시작했다.
“아, 아까는 너무 당황하여 기억에 혼선이 온 것뿐이에요. 다른 곳에 흉터가 있어요. 그, 그러니까 다리 쪽에…….”
라시드가 하, 하고 경멸 섞인 미소를 지었다.
“나보고 여기에서 바지까지 벗으라는 건가. 그건 곤란한데.”
“……!”
“하지만 락타께서 사실 확인을 위해 필요하다고 한다면 벗겠소.”
그 말에 락타는 처음으로 당황한 기색을 내비쳤다.
“그렇게까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단호한 말로 라시드를 막은 락타가 말을 이었다.
“황태자 전하의 당당한 모습을 보아하니 애초에 흉터 자국 같은 건 없으신 게 아닙니까?”
그 말에 라시드와 시아나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베로니카는 제가 속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창백해진 베로니카의 귓가에 락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애초에 이 일은 제가 어떤 식으로도 확실하게 증명할 수 없는 문제였습니다. 그럼에도 제가 이 갈등을 풀어 보겠노라 받아들인 것은 제국에서 가장 큰 힘을 가진 황실과 앙겔루스 공작가 사이에 심각한 갈등이 일어날까 우려했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야기를 들어 본 결과…….”
락타의 시선이 베로니카를 향했다.
“베로니카 공녀님의 말은 주장이 명확한 것과 달리, 그것을 뒷받침해 줄 만한 정황이 보이질 않는군요. 더불어 오르오의 신전에서 거짓을 입에 담으신 점은 큰 유감입니다.”
“라, 락타시여, 그건…….”
베로니카가 울먹였지만 락타는 그것을 신경 쓰지 않고 라시드에게 시선을 돌렸다.
상체를 드러낸 채 팔짱을 끼고 당당히 서 있는 라시드를 바라보며 락타가 말했다.
“두 사람이 정말 특별한 사이인지는 확실치 않으나 황태자 전하의 말은 증언과 정황이 일치했습니다. 저 락타는 황태자 전하의 말에 더 신뢰가 가는군요.”
물론 락타의 말이 어떤 법적 효력이나 구속력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평생 동안 책을 읽고, 사람들에게 봉사했던 한 인간의 생각일 뿐이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현자라고 불리며 존경받을 만큼 지혜로운 존재였기에, 그 판단에는 엄청난 힘이 있었다.
적어도 사람들은 이제 예전처럼 베로니카의 말을 귀 기울여 들어 주지 않을 것이다.
그것을 깨달은 베로니카는 바닥에 주저앉아 엉엉 울기 시작했다.
“아니야, 아니라고요. 내 배 속에 있는 아기의 아빠는 전하가 분명하단 말이야……!”
그런 베로니카의 앞에 시아나가 다가왔다.
눈물을 흘리는 베로니카를 안쓰럽게 바라보며 시아나가 속삭이듯 말했다.
“공녀님, 걱정하지 마세요.”
“……?!”
“공녀님의 배 속에 있는 아기 아빠는 제가 어떻게든 찾아드릴 테니까요.”
“……!”
베로니카가 눈을 부릅떴다.
시아나는 더할 나위 없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분이 까마득히 먼 곳으로 떠났더라도 혹은 이미 목숨이 끊어져 저승길을 걷고 있더라도, 어떻게든 그분을 찾아오겠습니다. 그 후에 더는 발뺌할 수 없게 온 세상에 그 분의 이름을 널리 알리도록 할게요.”
아무리 눈치 없는 베로니카라 해도 알 수 있었다.
베로니카를 위하는 척하는 말이 명백한 협박이라는 사실을.
베로니카가 핏기가 사라진 얼굴로 시아나를 바라보다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너 뭐야? 도대체 뭐기에 일개 시녀가 주제도 모르고 끼어들어 일을 엉망으로 만든 거냐고!”
시아나가 베로니카의 귓가에 속삭였다.
“말은 바로 해야지. 끼어든 건 내가 아니라 당신이야.”
“……!”
베로니카는 눈을 부릅떴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저를 내려다보는 시아나의 눈빛이 섬뜩했기 때문이다.
눈꼬리가 쳐진 순한 눈매에 왜 이렇게 오한이 드는지 의아할 지경이었다.
거기에서 끝이 아니었다.
시아나의 옆으로 다가온 라시드의 말은 더 잔혹했다.
“황족을 능멸한 죄는 크지. 아기가 무사히 세상에 나올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할 거야, 공녀.”
베로니카는 두 사람을 바라보다가 덜덜 떨리는 손으로 배를 감쌌다.
마취가 풀린 것처럼, 뒤늦게 파도 같은 두려움이 밀려들었다.
* * *
오르오 신전을 나와 황궁으로 돌아가는 마차 안, 라시드와 시아나는 나란히 앉아 있었다.
라시드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시아나가 라시드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제가 갑자기 끼어들어서 놀라셨죠? 죄송해요.”
라시드가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시아나에게 장단을 맞추어 주긴 했지만, 두 사람은 서로 말을 맞춘 것이 아니었다.
시아나가 변명하듯 말을 이었다.
“분위기가 급격하게 공녀 쪽으로 흐르는 것을 보고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어요.”
시아나는 옆에 있던 솔에게 물어 라시드에 대한 정보를 알아낸 후 미끼를 던졌다.
다행히 베로니카 공녀는 쉬운 상대였다.
베로니카는 시아나의 미끼를 덥석 물었고 일은 순식간에 끝나 버렸다.
물론 상황이 안 좋게 흘러갈 수도 있었다.
“만약 베로니카 공녀가 기억이 나지 않는다며 대답을 아예 회피하거나, 전하에 관해 철저하게 조사를 마쳐 정답을 말했다면 일이 복잡해졌겠죠.”
“…….”
“하지만 그것에 관해서도 어떻게 대응할지 생각을 해 두었어요. 베로니카 공녀님보다 더 서럽게 울음을 터뜨리며 말하는 거죠.”
아무리 그래도 전하께서 베로니카 공녀님과 하룻밤을 보냈다는 건 거짓말이에요. 왜냐하면 전하는 요즘 제게 푹 빠져 계시니까요.
보름달이 떴던 그 밤에도 저와 함께 계셨답니다.
시아나는 두 손을 모아 우는 흉내를 냈다.
시아나는 제 얼굴을 잘 알았다.
‘워낙에 맹한 얼굴이라 무시당하거나 괴롭힘을 당할 때도 많지만, 반대로 이런 상황이 되면 제법 요긴하지.’
누구도 시아나가 거짓말을 늘어놓는 악당이라고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그뿐인가.
뜬소문 외에는 아무 정황도 없는 베로니카와 달리, 시아나는 라시드와 얽힌 일이 무궁무진했다.
라시드의 힘으로 황궁 시녀가 되었고, 라시드의 언질로 그가 아끼는 아리스 공주를 모시게 되었다.
거기에 지금은 황태자궁에서 라시드의 차 시중을 들고 있었다.
누가 보아도 라시드와 시아나 사이에 뭔가 있을 거라 예상할 만한 일들이었다.
‘락타께서 그것을 조사하여 밝혔다면, 사람들은 내 말을 철저하게 믿었겠지. 그렇게 되면 베로니카 공녀에 대한 관심이 모두 내게로 옮겨졌을 거야.’
생각에 빠져 있던 시아나는 묘한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올렸다.
“…….”
라시드가 아까보다 더 일그러진 얼굴로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왜 그렇게 보냐고 시아나가 묻기 전에 라시드가 말했다.
“대체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시아나.”
“그야 전하께서 베로니카 공녀라는 질척질척하고 뻔뻔한 거짓말쟁이에게 벗어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를…….”
“네 말대로 했다면 상황이 어떻게 될지 몰라서 그래?”
아니, 사실 지금의 상황도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시아나는 사람들의 앞에 나서서 라시드의 몸 어디에 흉터가 있냐는 질문을 했다.
……질문을 한다는 것은 답을 안다는 것이었다.
‘저 시녀는 전하의 그런 은밀한 비밀을 어떻게 아는 걸까?’
‘도대체 전하와 어떤 관계이기에 이런 긴박한 순간에 끼어들어 대담한 말을 늘어놓는 것일까?’
오늘 신전에 있던 사람들은 이제 베로니카 공녀가 아니라 시아나라는 시녀를 라시드와 엮어 수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을 테지.
그것이 라시드의 기분이 한없이 가라앉았던 이유였다.
‘소중하고 소중한 내 시아나.’
그런 그녀의 이름이 사람들의 더러운 혓바닥 위에 오른다고 생각하니 참을 수가 없었다.
“조금이라도 네 이름을 입에 담는 자가 있으면 혀를 자르마. 이 제국에서 누구도 너에 대해 함부로 말하지 못하게 할 거야.”
진심이 담긴 섬뜩한 말에 시아나가 고개를 저었다.
“그러지 마세요.”
“하지만…….”
“저는 이제 그런 말들에게서 도망치지 않을 생각이니까요.”
“……?!”
그 순간 라시드는 커다란 망치로 머리통을 쾅, 하고 얻어맞은 기분이 들었다.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시아나의 말이 선뜻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을 하고 또 해 보아도 답이 나오질 않았다.
꼭 한순간에 바보가 되어 버린 것처럼.
그런 라시드를 향해 시아나가 말했다.
“전에 못다 한 말을 마저 할게요, 전하.”
시아나는 숨을 한번 들이마셨다 내뱉었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저는 앞으로 전하와 정식으로 교제를 하고 싶어요.”
“…….”
“……전하는 어떠세요?”
환청이라고 하기엔, 꿈속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또렷한 목소리였다.
* * *
호위 기사 솔이 의자에 앉아 있는 라시드를 바라보며 말했다.
“전하.”
“…….”
“전하.”
“…….”
그러나 아무리 불러도 라시드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
‘하긴 내가 불렀다고 반응할 리가 없지.’
쭉쭉이(흰 페럿)가 머리 위로 올라가 은빛 머리카락을 헤집어 엉망으로 만들고, 냠냠이(다람쥐)가 라시드의 열 손가락 끝을 앙앙 깨무는 데도 아무 반응이 없을 정도였으니.
하지만 솔에게는 바보가 되어 버린 라시드를 제정신으로 돌려놓을 비장의 무기가 있었다.
“시아나 님이 차를 준비해 왔습니다.”
“……!”
그 말에 죽은 사람처럼 멍해 있던 보라색 눈동자에 대번에 생기가 돌았다.
그뿐인가.
라시드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갑작스럽게 움직인 주인 덕분에 쭉쭉이와 냠냠이가 폭신한 의자 위에 떨어져 캭, 하고 소리를 냈지만 라시드는 그것을 듣지 못한 채 방 한편에 놓여 있던 거울 앞에 섰다.
쭉쭉이가 새둥지를 만들어 놓은 머리카락을 재빨리 정리하고, 삐뚤어져 있던 목깃도 정리했다.
고개를 돌린 라시드가 솔에게 다급하게 물었다.
“이상한 곳은 없지?”
아니요. 제가 본 전하의 모습 중에 지금이 제일 이상합니다만.
—이라고 솔은 대답하고 싶었다.
농담이 아니었다.
라시드가 망가진 인형처럼 이상해진 것은 어제부터였다.
정확히는 오르오 신전에서 돌아와 황궁에 도착한 후, 마차 문을 열었을 때부터였다.
[송구합니다. 할 일이 많아 먼저 내리도록 하겠습니다!]
기다렸다는 듯 한마디를 내뱉은 시아나가 마차에서 폴짝 내려 쪼르르 사라졌다.
마치 도망이라도 치듯이.
궁중 예법을 철저히 지키는 시아나답지 않은 행동에 솔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마차 안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경악했다.
라시드가 입을 벌리고 돌처럼 굳어 있었기 때문이다.
[저, 전하, 왜 이러십니까. 못된 마법사의 주술에라도 걸리신 겁니까?!]
그러나 솔이 무슨 말을 해도 라시드의 상태는 나아지지 않았다.
결국 보다 못한 솔은 라시드를 보릿자루처럼 끌어 황태자궁의 침실에 데려다놓았다.
하룻밤 지나면 제 정신으로 돌아오시겠지, 라고 생각했는데 전혀 아니었다.
‘도대체 어제 마차 안에서 시아나 님과 무슨 일이 있었기에…….’
눈을 가늘게 뜬 솔을 향해 라시드가 말했다.
“어서 시아나를 들여보내거라. 그 자그마한 몸으로 문 앞에서 서 있으려니 얼마나 힘들겠느냐.”
“……네.”
솔은 못 들을 말을 들은 것 같은 강렬한 느낌이 들었지만 애써 모르는 척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문이 열리고 시아나가 찻주전자와 찻잔이 세팅된 카트를 끌며 들어섰다.
동그란 테이블 옆에 카트를 세운 시아나가 고개를 숙였다.
“고귀하신 황태자 전하께 인사드립니다.”
시아나의 인사는 시녀의 격식을 갖추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시아나는 두 눈을 부드럽게 휘며 말을 덧붙였다.
“봄의 여신께서 소풍을 나온 것처럼 햇살이 따사로운 아침이에요, 전하. 좋은 꿈 꾸셨나요?”
일개 시녀가 황태자에게 건네는 인사라고 하기엔 지극히 사적이고, 심하게 달콤했다.
‘이게 도대체…….’
혼란스러운 얼굴로 눈을 깜빡이던 솔에게 더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시아나가 인사를 하면 늘 보이지 않는 꼬리를 흔들며 부드럽게 웃던 라시드가, 얼굴을 확 붉혔기 때문이다.
마치 첫사랑 상대를 마주한 소녀처럼.
……솔은 진심으로 이 상황이 무서워졌다.
* * *
“전하, 아무래도 옥체에 큰 이상이 생기신 듯합니다. 지금이라도 신관에게 찾아가 어떤 저주를 받았는지 확인을 해 보아야…….”
그러나 솔의 진심 어린 걱정이 무색하게 라시드는 평소대로 돌아갔다.
“나가.”
……솔에 한해서지만.
솔은 더없이 싸늘한 목소리로 저를 내보내는 주인의 모습에…… 크나큰 안도감을 느끼며 쏜살같이 방을 나갔다.
넓은 방 안에는 라시드와 시아나 둘이 남았다.
어색한 정적 속에 시아나가 찻주전자와 찻잔을 테이블 위에 세팅했다.
시아나는 짐짓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오늘 고른 찻잎은 닐기리랍니다.”
유리병에서 바짝 말린 찻잎을 한 스푼 뜨며 시아나가 말을 이었다.
“닐기리에는 사람의 마음을 안정시켜 주는 효과가 있다고 하여 골랐답니다. 전하께서 그간 고생이 많으셨으니까요.”
“……응.”
라시드는 어색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시아나는 그런 라시드를 힐끗 바라보더니 유려한 동작으로 차를 탔다.
이내 라시드의 앞에 놓인 찻잔에 연한 갈빛의 차가 채워졌다.
헤실거리며 차를 마시던 평소와 달리 찻잔을 빤히 쳐다보고만 있는 라시드를 향해 시아나가 눈썹을 내렸다.
“혹시 닐기리를 좋아하지 않으신가요?”
아무리 차를 좋아해도 취향이 있는 법이었다. 그가 싫어하는 차를 골랐나 싶어 아차 싶었다.
그러나 라시드가 아니라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야. 좋아…… 해.”
말꼬리를 흐리며 얼굴을 붉게 물들인 라시드가 난감한 얼굴로 황급히 찻잔을 입에 가져갔다.
차를 홀짝이는 라시드를 본 시아나가 다행이다, 라고 중얼거리며 두 눈을 부드럽게 휘었다.
그 모습에 라시드가 눈을 부릅떴다.
이내 시아나가 꺅, 하고 작은 비명을 질렀다.
“전하, 찻물이……!”
라시드가 들고 있던 찻잔이 기울여져 찻물이 테이블 위로 쏟아진 것이다.
시아나가 놀란 얼굴로 황급히 앞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테이블 위에 흥건하게 고인 찻물을 닦기 위해 시아나가 라시드의 곁에 다가간 순간이었다.
“……!”
라시드가 어깨를 흠칫하더니 몸을 뒤로 옮겼다.
마치 시아나를 피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시아나는 눈을 크게 뜨고 라시드를 바라보았다.
사실 라시드가 평소와 다르다는 것은 방 안에 들어서자마자 눈치챘다.
그럼에도 아무렇지 않은 척 그를 대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긴장하다니. 꼭 내가 몹쓸 짓이라도 한 것 같잖아.’
서운했다.
……동시에 불안해졌다.
시아나가 입술을 깨물며 물었다.
“혹시 어제 제가 한 말이 전하께 부담이 되었나요?”
“아니!”
의외로 대답은 번개처럼 나왔다. 게다가 천둥처럼 목소리가 우렁찼다.
그래서 시아나는 한결 안도한 얼굴로 물었다.
“그럼 왜 이러시는 건데요. 제가 방 안에 들어온 후 전하는 한 번도 저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셨어요. 알고 있으세요?”
“그건…….”
라시드는 허를 찔린 듯한 얼굴로 말을 주저했다.
한참 후에야 라시드가 터질 듯이 새빨개진 얼굴로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네가 너무 예뻐서.”
“…….”
“눈이라도 마주쳤다간 심장이 터질 것 같아서 그런 거야.”
은빛 속눈썹을 파르르 떠는 라시드에게는 평소의 여유는 조금도 없어 보였다.
한껏 긴장한 남자의 모습만 있을 뿐이었다.
그런 라시드를 멍하니 바라보던 시아나가 눈썹을 내리며 고백하듯 말했다.
“저도 그래요.”
그 한마디에 라시드는 날 선 검으로 심장이 푹 뚫리는 느낌을 받았다.
그만치 충격적이었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라시드를 향해 시아나가 말을 이었다.
“실은 어젯밤 제대로 잠을 자지 못했어요. 전하께서 제게 어떤 답을 해 줄지 너무 궁금했거든요.”
어제 시아나는 끝끝내 라시드의 답을 듣지 못하고 마차에서 내렸다.
라시드가 충격을 받다 못해 얼빠진 얼굴로 넋을 놓았기 때문이다.
시아나는 그가 정신을 차리고 차분히 생각을 할 때까지 기다리려 했다. 그러나…….
“이 일만큼은 인내심 있게 기다리기가 힘들더라고요. ……지금 교제 신청에 대한 답을 받을 수 있을까요?”
“……!”
그제야 라시드는 깨달았다.
제가 비현실적인 상황이 믿기지 않아 나사 하나 빠진 것처럼 멍해 있는 동안, 시아나는 마음을 졸이며 초조하게 밤을 지새웠던 것이다.
이 바보 머저리!
라시드가 일그러진 얼굴로 말했다.
“미안. 너무 당연한 것이라 대답을 해야 한다는 걸 잊었어.”
변명이 아니라 정말이었다.
라시드에게 시아나의 교제 신청은 ‘졸리니까 잘까요?’, ‘배고프니까 먹을까요?’와 다를 바 없는 말이었던 것이다.
그래도 확실히 했어야 했는데.
“……!”
시아나가 눈을 크게 떴다.
라시드가 시아나의 앞으로 와 한쪽 무릎을 꿇은 것이다.
꼭 공주님께 충성을 맹세하는 기사처럼.
고개를 들어 보라색 눈동자에 시아나를 가득 채운 라시드가 말했다.
“나도 좋아.”
“…….”
“네가 좋아, 시아나.”
“…….”
“너와 특별한 사이가 되고 싶어.”
황태자와 시녀 같은 사이가 아니라.
그보다 더 가깝고 애틋하며, 은밀한 사이로.
멍하니 라시드를 바라보던 시아나의 두 눈이 부드럽게 휘었다. 작은 입술 끝이 올라가며 동그란 볼이 볼록해졌다.
초여름의 복숭아처럼 환한 미소였다.
* * *
“그럼 오늘이 우리가 사귀기 시작한 첫날이네요.”
헤실 웃는 시아나를 바라보며 라시드도 해사하게 웃으며 말했다.
“당장 국무대신에게 말해 오늘을 나라의 국경일로 지정하도록 하지. 특별한 날이니까.”
“……제발 그만둬 주세요.”
시아나의 말에 라시드는 실망한 얼굴을 했지만, 이내 눈을 반짝였다.
“이제 황태자와 시녀가 아니라 사귀는 사이니, 하고 싶었던 것을 맘껏 해도 되는 거지?”
그 말에 시아나는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지금 제 앞에서 웃는 남자가 작정하고 유혹할 때 얼마나 야릇하고 요망했는지 생각났기 때문이다.
‘아무리 그래도 첫날부터 성난 황소처럼 스킨십 진도를 나가면 곤란해요. 저는 그 정도로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
—라고 대답하려던 시아나는 눈을 크게 떴다.
라시드가 두 팔을 크게 벌리더니 시아나를 꼭 안아 버린 것이다.
라시드에게 안긴 적은 여러 번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시아나를 제 품속에 숨기듯 폭 안은 것은 처음이었다.
‘……따뜻해.’
그뿐이 아니라 그의 품 안은 넓고 편안하며 좋은 향기가 났다.
이 안에 있는 것만으로 모든 걱정이 사라져 버릴 것 같다고 느껴질 만큼.
라시드의 품속에서 시아나가 조잘거렸다.
“엄마 새가 품고 있는 알이 어떤 느낌인지 알 것 같아요.”
머리 위로 라시드가 키득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알을 품고 있는 엄마 새의 마음을 알 것 같은데. 더 세게 안았다가 깨지기라도 하면 어쩌나 조마조마해.”
이번엔 시아나가 킥킥 웃었다.
그러더니 한마디 말을 내뱉었다.
“하지만 엄마 새는 이렇게 심장이 쿵쾅거리진 않겠죠?”
시아나의 귀에 닿은 라시드의 가슴 쪽에서 들리는 소리가 엄청났다.
라시드는 그것을 숨길 생각이 없었기에 그저 웃었다.
고개를 한껏 들어 그 모습을 본 시아나가 눈썹을 내렸다.
‘그리고 어떤 알도 이렇게 심장이 뛰지는 않을 거야.’
로맨스 소설에서 숱하게 읽었다.
사랑에 빠지면 심장이 뛴다는 글귀를.
그러나 그 감각이 이처럼 황홀하고 떨릴 줄은 상상도 못했다.
‘너무 좋아.’
생각했던 것보다 더, 더, 더 많이.
라시드의 품속에서 시아나가 꿈결 속에 있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전하.”
“라시드라고 불러 줘.”
“……라시드.”
심장이 또 한 번 찌릿했다.
시아나는 그 감각을 선연하게 느끼며 말을 이었다.
“당신이 좋아요.”
라시드에게 한 첫 고백이었다.
한참 후에야 대답이 들려왔다.
“나도 당신이 좋아요.”
장난스러운 말투와 달리 낮은 목소리에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떨림이 듬뿍 묻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