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나약한 왕자님과 강인한 공주님 (1)
“저 멀리 있는 동쪽 나라의 찻잎이라니 확실히 향이 독특하네요.”
시아나가 차를 따르며 말했다.
멍하니 시아나를 바라보던 라시드가 응,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라시드의 찻잔에 연초록색 찻물이 가득 찼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차는 보지도 않고 저를 쳐다보고 있는 라시드를 향해 시아나가 눈썹을 내렸다.
“차를 드시지 않고 뭐 하세요?”
“네가 너무 예뻐서.”
“…….”
그 순간 루비궁이 적막에 빠졌다.
시아나는 물론 그녀의 옆에 서 있던 니니와 나나, 라시드의 뒤에 있던 호위 기사 솔도 얼굴이 돌처럼 굳었다.
쾅!
라시드의 맞은편에 앉아 있던 아리스는 도무지 참을 수 없다는 얼굴로 테이블을 내리치며 소리쳤다.
“오라버니, 당장 내 궁에서 나가!”
“…….”
“내 말 못 들었어? 당장 내 궁에서 꺼지라니까!”
감히 황태자에게 하기에는 너무나 거친 말이었건만 라시드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여전히 시선은 시아나를 향한 채로.
“안 돼. 이곳을 나가면 시아나를 못 보잖아.”
“……!”
이번에는 정적 정도가 아니었다.
루비궁에 있던 사람들은 지진이 일고 벼락이 치는 충격을 받았다.
방금 전까지 호기롭게 소리쳤던 아리스마저 말문을 잃을 정도였다.
그나마 개중에서 정신을 유지한 한 사람, 시아나는 토마토보다 새빨개진 얼굴로 라시드를 노려보았다.
‘정말 왜 이러세요! 지금 저를 곤란하게 하려고 작정하신 거예요?!’
제법 험악한 눈빛을 했건만, 시아나와 눈이 마주친 라시드는 행복하다는 듯 웃었다.
두 볼을 살짝 붉게 물들이기까지 하며.
“……!”
그 순간 시아나는 확신했다.
드디어 라시드가 회까닥 돌아 버린 것이 분명하다고.
* * *
아리스가 아무리 욕을 하고 소리를 쳐도 꿋꿋하게 자리를 지키던 라시드는 겨우 몸을 일으켰다.
황제 대리로서 해야 할 업무 때문이다.
라시드는 한껏 아쉬운 얼굴로 시아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또 오마.”
난처한 얼굴을 한 시아나가 뭐라 대답하기 전에 아리스가 끼어들었다.
아리스는 도깨비처럼 험악한 얼굴로 쏘아붙였다.
“또 오긴 뭘 또 와! 다시는 오지 마! 와도 절대 문 안 열어 줄 거야!”
라시드는 아리스의 말을 무시하지는 않았다.
대신 허리를 숙여 아리스와 눈을 마주하며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면 못써, 아리스. 내 하인들이 문짝을 떼었다 다는 수고를 해야 하잖니.”
“뭐, 뭐어?!”
황당해서 입을 쩍 벌린 아리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라시드가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이따가 올 때는 레플랑 장인이 만든 치즈케이크와 호두를 듬뿍 넣어 만든 파이를 가지고 오마.”
아리스는 라시드와 솔이 사라진 후에야 정신을 차리고 소리쳤다.
“아, 진짜 왜 저러는데!”
쾅!
아리스가 시럽이 듬뿍 담긴 복숭아주스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기어코 우려했던 상황이 온 것 같아.”
아리스의 옆에 앉아 있던 니니와 나나가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리스가 이를 으득거리며 말을 이었다.
“오라버니가 시아나에게 푹 빠진 게 분명해.”
이번에도 니니와 나나는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반박할 여지가 없다는 듯이.
그도 그럴 것이 요 며칠간 라시드의 행동은 생판 모르는 남이 보아도 의도가 명확했기 때문이다.
며칠에 한번 들렀던 루비궁에 하루에 두세 번씩 오는 것은 물론이고, 올 때마다 시선은 시아나만을 향하고 있었다.
니니가 살짝 붉어진 얼굴로 말했다.
“저는 황태자 전하가 아니라 해바라기인 줄 알았다니까요.”
나나도 똑같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해바라기 말고, 해님에게 환장한 잘생긴 해바라기.”
두 시녀의 말을 들으며 아리스는 속이 타들어 가는 분노를 느꼈다.
“망할 해바라기. 다시는 해님을 보지 못하게 꺾어 버릴 테다!”
그때 세 사람을 향해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송구합니다만 공주님, 황태자 전하와 전 아무 사이도 아닙니다.”
지금껏 세상 민망한 얼굴로 세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시아나였다.
아리스가 휙 하고 고개를 돌려 시아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 아무 사이도 아니겠지, 지금은!”
“…….”
“하지만 그렇게 계속 눈이 마주치다가 손을 잡고, 입을 맞추고, 정신을 차렸더니 아침 새가 짹짹거리는 게 바로 남녀 사이야!”
시아나는 정말이지 기가 찼다.
고작 열 살의 나이로 인생을 열 번쯤 산 거 같은 망측한 말을 내뱉는 공주님이라니.
아리스는 흥, 하고 눈썹을 올리며 말을 이었다.
“난 절대 그 꼴 못 봐! 어떻게든 오라버니를 루비궁에 못 오게 할 거야. 아니면 시아나 널 오라버니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 숨겨 버리든가.”
농담 같은 말을 진담으로 하는 아리스를 보며 시아나는 담담한 척 웃었다.
그러나 가슴은 쿵쿵거리고 있었다.
시아나는 바보가 아니었다.
장미꽃 연회 이후, 라시드가 저를 보는 눈빛은 작은 동물을 귀여워하는 감정 따위가 아니었다.
왜 모르겠는가.
[시아나.]
부드럽게 휘는 그의 눈빛에 이전에는 없던 설렘이 숨겨져 있는데.
마치 처음 사랑에 빠진 소년 같았다.
……정말이지 곤란하기 짝이 없었다.
* * *
“황태후 마마께서 저를요?”
시아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황태후의 최측근 시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공주님께는 말씀하지 마시고 은밀히 찾아오시랍니다.”
무슨 일일까 싶어 시아나는 즉시 황태후궁으로 향했다.
시아나가 황태후를 만나는 것은 오랜만이었다.
아리스는 시아나에게 개인 시간을 주고 싶다며 황태후에게 갈 때는 니니와 나나만 데리고 갔기 때문이다.
시아나가 황태후의 앞에 허리를 숙였다.
“고귀하신 황태후 마마를 뵙습니다.”
“……고개를 들거라.”
황태후의 허락을 듣고 고개를 든 시아나는 눈을 크게 떴다.
‘아리스 공주님께 요즘 들어 황태후 마마의 기운이 조금 없어 보인다는 말을 듣긴 했지만…….’
황태후는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보다 훨씬 야위어 있었다.
그러나 근엄한 얼굴과 고고한 기세는 여전했다.
황태후가 말했다.
“오랜만이구나.”
“예.”
시아나는 짧게 대답하며 황태후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다행히 황태후는 말을 돌리지 않고 바로 본론을 꺼냈다.
“요즘 라시드가 루비궁에 자주 찾아간다지?”
시아나는 머리가 띵, 하고 울리는 충격을 받았다.
“……그러하옵니다.”
“그래.”
시아나의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황태후가 무슨 말을 할지 어렴풋이 예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황태후가 말했다.
“예전에는 라시드가 루비궁에 간다는 말을 들으면 기뻤다. 아리스를 아껴서 그러는 거라 생각했으니까.”
“…….”
“하지만 요 며칠 보이는 라시드의 모습은 단순히 그런 것이 아닌 것 같더구나. 아무리 동생이 귀여워도 하루에 몇 번씩이나 찾아가는 경우는 없으니 말이다.”
황태후의 매서운 눈동자가 시아나를 향했다.
“혹시 라시드가 아리스가 아니라…… 널 보기 위해 루비궁에 찾는 것이냐?”
시아나는 눈을 부릅떴다.
시아나가 뭐라고 말하기 전 황태후가 말을 이었다.
“아니라는 말도 그렇다는 말도 할 필요 없다. 대답을 듣기 위해 물은 것은 아니니까.”
“…….”
“중요한 것은 내 눈에 그렇게 보인다는 것이다. 다행히 라시드가 제 행선지를 공공연히 밝히지 않아 아직 그 사실을 아는 자는 많지 않아. 하지만 궁에는 수십 개의 눈과 귀가 있는지라 곧 소문이 나겠지.”
“…….”
“그럼 나와 같은 오해를 하는 이들도 늘어날 것이다.”
황태후가 눈을 내리깔고 말했다.
“일이 그렇게 되면 곤란해지지 않겠느냐. 너도, 아리스도.”
황태후는 사실 라시드가 시녀를 희롱하든, 시녀에게 푹 빠져 있든 관심 없었다.
라시드에게 아무런 애정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아리스에게 영향을 끼친다면 그것은 심각한 문제였다.
황태후가 엄한 눈빛으로 시아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너는 아리스가 가장 아끼는 시녀지. 게다가 몸가짐도 우아하고 영특해. 그래서 나도 네가 오래도록 아리스의 곁에 있길 바란다. 그러려면 추잡한 소문이 나지 않게 행실을 바로 해야지.”
황태후가 하는 말은 명백했다.
아리스를 위해서라도 잘 판단하라고.
쿠궁.
시아나는 내리치는 벼락과 함께 달콤한 꿈에서 깨어나는 느낌이 들었다.
* * *
루비궁으로 돌아오는 길.
시아나는 눈을 내리깔고 생각에 잠겼다.
황태후는 라시드가 시아나와 모종의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며 시아나를 냉정하게 몰아붙였다.
……그리고 시아나는 절대 그런 사이가 아니라고 강력하게 부정할 수 없었다.
‘어느 정도는 사실이니까.’
시아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사실 시아나도 느끼고 있었다.
라시드와 제가 평범한 황태자와 시녀 사이를 넘어섰다는 것을.
하지만 시아나는 스스로에게 변명하듯 생각했다.
‘전하와 교제를 하겠다는 게 아니잖아. 방탕하게 몸을 뒤섞겠다는 것도 아니고.’
그저 조금.
아주 조금, 마음의 온기를 나누는 것쯤은 괜찮잖아, 하고.
하지만 그 얼마나 안일하고 이기적인 생각이었던가.
시아나는 일개 시녀였고 라시드는 이 제국에 하나뿐인 황태자였다.
두 사람 사이에 미묘하게 흐르는 작은 설렘 정도는 그럭저럭 넘어갈 수 있는 일이었으나, 그 이상은 아니었다.
작은 호감이 또렷한 애정이 되고 그 애정이 다른 이들의 눈에 띄는 순간 평온한 시간은 엉망이 될 것이 뻔했다.
시아나의 삶도.
그리고 시아나와 가장 가까이에 있는 아리스의 삶도.
……시아나는 결코 그런 것을 바라지 않았다.
* * *
황제 집무실.
커다란 책상 옆에 선 호위 기사 솔은 울상을 지었다.
“전하, 도대체 황제 대리 업무를 제대로 하실 생각이 있으신 겁니까, 없으신 겁니까!”
라시드는 상큼한 얼굴로 대답했다.
“없어.”
뻔뻔한 대답에 솔은 기가 차 입을 쩍 벌렸다.
라시드는 그러든가 말든가 상관하지 않으며 책상 위에 쌓인 서류를 가리켰다.
“어쨌건 오늘 해야 할 일은 다 했어.”
아주 엉망진창으로.
솔은 속으로 라시드가 빼먹은 말을 하며 이를 으득거렸다.
“알겠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하지만!”
“…….”
“오후에는 림블랑 백작과 에버 백작과의 접견이 잡혀 있습니다. 두 백작의 영지가 맞닿는 곳에서 자꾸 분란이 생겨 전하께 중재를 요청한 사안입니다.”
귀족 간의 분란을 조정하는 것은 매우 까다로운 일이었다.
전후 관계를 따지기 위해 많은 조사와 시간을 들여야 했으며, 뒷말이 나오지 않을 명확한 판결을 내야 했다.
그러나 라시드는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
“앞으로 이유가 뭐든 상대 영지에 먼저 발을 내디딘 가문을 멸문시킨다 고 해.”
“예?!”
황당해하는 솔의 얼굴을 본 라시드가 말을 정정했다.
“멸문은 좀 심한가? 그럼 가주의 목을 자른다고 해. 제 목을 위해서라도 조심시키겠지.”
“…….”
“이 말을 전하고 접견은 취소하거라. 나는 그런 일로 일일이 사람을 만나 줄 만큼 한가하지 않으니까.”
라시드는 그렇게 말하며 몸을 일으켰다.
눈을 깜빡거리며 라시드를 바라보던 솔이 겨우 정신을 차리고 소리쳤다.
“여유가 없긴 뭐가 없으시다는 겁니까. 고작해야 시아나 님을 보러 가고 싶어서 그러시는 거잖아요!”
그러나 그 말을 들어야 할 라시드는 이미 보이지 않았다.
라시드는 긴 다리를 휙휙 뻗어 진작 방을 나간 상태였으니까.
그 모습에서는 방금 전까지 느낄 수 없었던 행복과 기대감이 물씬 느껴졌다.
빠른 걸음으로 달려와 라시드의 옆에 선 솔이 울상을 지었다.
“전하, 정말 또 시아나 님을 보러 가시려고요?”
“그래.”
“오전에도 보고 오시지 않았습니까.”
“지금은 오후잖아.”
“루비궁에 다녀온 지 세 시간 밖에 지나지 않으셨습니다.”
“벌써 세 시간이나 지난 거겠지.”
“…….”
따박따박 받아치는 라시드의 모습을 보며 솔은 말로는 절대 주군을 막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솔은 결심한 듯,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자꾸 이러시면 시아나 님이 전하를 싫어할걸요?”
그제야 두려움 없이 앞으로 나가던 라시드가 걸음을 멈추었다.
“……무슨 의미냐.”
만약 솔이 라시드가 시아나의 왕국을 멸망시켰다는 말 따위를 한다면 무시할 생각이었다.
시아나가 분명 그 일은 괜찮다고 말했으니까.
하지만 솔이 꺼낸 말은 그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원래 여자들은 이렇게 끈질기게 쫓아다니는 남자 안 좋아합니다.”
그런데 하필 그 순간, 구름 사이에 숨겨져 있던 햇빛이 라시드를 비추었다.
살랑대는 은빛 머리카락, 그 아래로 보이는 조각상같이 완벽한 이목구비.
긴 속눈썹과 선명한 보라색 눈동자.
숨 막히도록 아름다운 얼굴로 라시드가 물었다.
“그게 정말이냐?”
아니요, 다시 생각해 보니 그런 얼굴이면 24시간 내내 쫓아다녀도 싫지 않을…… 이라고 말이 튀어 나가는 것을 겨우 막으며 솔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렇다니까요. 그러니까 아리스 공주님도 점점 화를 거세게 내시지 않습니까.”
라시드는 눈을 가늘게 떴다.
최근 라시드의 눈에는 시아나만 선명히 보이는 터라 아리스의 모습이 확실히 기억나지 않았다.
겨우 떠올린 흐릿한 모습의 아리스는 제게 오리처럼 떽떽거리고 있었다.
“……그랬던 거 같기도 하고.”
라시드의 반응에 겨우 희망을 붙잡은 솔이 이 틈을 놓치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러니 조금만 참았다 가십시오. 제발이요.”
“…….”
라시드는 깊은 생각에 잠긴 얼굴로 눈을 내리깔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라는 것이 무색하게 라시드는 결국 30분도 참지 못하고 루비궁에 와 버리고 말았다.
“시아나.”
만개한 꽃 한 송이를 품에 들고 웃는 아름다운 남자를 바라보며 시아나는 할 말을 잃었다.
라시드가 살짝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황태자궁에 핀 꽃이 무척 아름답더구나. 네게도 보여 주고 싶어 가지고 왔어.”
“…….”
“꽃을 좋아한다고 했잖아.”
라시드는 살포시 웃으며 시아나에게 꽃다발을 건넸다.
시아나는 복잡한 얼굴로 라시드를 바라보았다.
시아나는 늘 라시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제 앞에서 꽃다발을 건네는 남자의 눈빛에 어린 감정은 순수하고 단순했다.
사랑.
‘……그래, 사랑.’
그것이 시아나의 가슴을 싸늘하게 만들었다.
그녀에게는 너무 부담스러운 마음이었다.
시아나가 아무 말 없이 저를 쳐다보자 라시드가 눈썹을 내렸다.
“왜 그래? 이 꽃은 싫어하니?”
늘 여유가 넘쳤던 그의 얼굴에 불안함이 어렸다.
피의 황태자라느니, 차기 황좌에 가장 가까운 권력자라느니 따위의 말이 전혀 어울리지 않는 순진한 얼굴이었다.
시아나는 라시드를 바라보다가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꽃은 좋아합니다. 하지만 이 꽃은 받고 싶지 않아요.”
눈을 크게 뜬 라시드가 한 박자 늦게 물었다.
“……그게 무슨 의미지?”
“요 며칠 전하께서는 하루에도 몇 번씩 루비궁에 오고 계시죠. 솔직히 부담스럽습니다. ……루비궁에 전하께서 마음에 둔 여인이라도 있는 것이 아니냐는 소문이라도 날까 봐서요.”
어느새 다른 사람들은 모두 사라지고 루비궁의 정원에는 두 사람뿐이었다.
초록 잎이 우거진 정원에 잠시 적막이 흘렀다.
라시드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러면 안 돼?”
그답지 않게 떨리는 목소리에 시아나는 또렷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왜?”
“물론 전하께는 큰일이 아닐지도 몰라요. 고귀한 신분을 가진 남자 중에는 종종 저보다 낮은 신분의 여인에게 호감을 표현하는 경우가 있으니까요. 사람들은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답니다. 무료함에 지친 남자가 순진한 여자에게 장난을 친다며 낄낄거리거나, 어쩌다 저런 여자에게 정신이 팔렸냐며 혀를 쯧쯧 차는 것이 다예요.”
“…….”
“하지만 여자 측이 받는 영향은 그 정도가 아니랍니다.”
작정하고 남자를 꼬드긴 악녀.
남자의 권력이 탐나 몸도 마음도 줘 버린 천박한 여자.
평생 끔찍한 꼬리표가 붙어 여자의 인생을 망가뜨려 버린다.
평범한 귀족 남자를 상대로 스캔들이 나도 그럴진대, 황태자가 상대라면 어떻게 될까.
“만약 전하께서 저를 특별하게 여긴다는 소문이 나면 이제 저는 더는 평범한 시녀로 지낼 수 없을 테지요. 실제로 저와 전하의 사이가 어떻든 말이에요.”
시아나의 목소리는 평소처럼 부드럽고 따스했다.
그러나 그 목소리에는 단호함이 있었다.
이 이상 제게 다가오지 말아 달라는.
라시드는 멍한 얼굴로 생각했다.
‘솔의 말대로구나.’
제가 너무 시아나를 집요하게 쫓아다닌 모양이다.
그녀가 이런 부담을 느낄 만큼.
‘나는 그저 시아나가 너무 보고 싶어서, 그녀를 보면 너무 좋아서…… 그랬던 것뿐인데.’
그것이 남들에게 어떻게 보일지 진지하게 생각하지 못했다.
아니, 않았다.
시아나의 말대로 라시드는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기에.
사람들이 뭐라 수군거리든 라시드에게는 벌레 소리보다 하찮았기에.
‘그녀에게는 절대 그렇지 않았을 텐데도.’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귀 끝까지 얼굴이 달아올랐다.
라시드가 당혹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내가 너무 생각이 짧았구나.”
“…….”
“너를 힘들게 했어.”
시아나는 말없이 라시드를 쳐다보았다.
라시드가 감정을 추스르지 못한 채로 말을 이었다.
“이제부터 조심하마. 다시 예전처럼…….”
거기까지 말한 라시드는 말문이 막혔다.
예전처럼, 뭘 어떻게 한다는 거지?
라시드는 요즘 제정신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제 상태가 어떤지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하루 종일 시아나가 보고 싶다.
그녀의 목소리가 듣고 싶다.
그녀만 보면 가슴이 뛰고 웃음이 나오고, 그녀를 껴안고 싶고, 입을 맞추고 싶다.
그런데 예전처럼 돌아간다고?
작은 동물을 대하듯 귀여워하고, 유치한 장난을 치며 재미있어 하던 고작 그 정도 감정으로?
‘개소리.’
불가능한 일이었다.
라시드가 시아나와 눈을 마주쳤다.
괴로움이 담긴 얼굴로 라시드가 말했다.
“예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어, 이제.”
“……!”
눈을 크게 뜬 시아나를 향해 라시드가 웃었다.
“미안.”
“…….”
그 미소가 너무 서글퍼 시아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 * *
라시드는 그토록 좋아하는 시아나의 차를 마시지도 않고 루비궁을 떠났다.
그가 떠난 자리에는 끝끝내 시아나가 받지 않은 꽃다발이 놓여 있었다.
시아나를 향한 미련처럼.
그렇게 일주일이 지났을 때, 아리스가 궁금함을 참지 못하겠다는 얼굴로 물었다.
“시아나, 도대체 오라버니께 무슨 말을 했기에 하루에 세 번씩 찾아오던 인간이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거야?”
그렇다.
라시드는 요 며칠 루비궁에 오지 않았다.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혹시 오라버니가 싫다고 따귀라도 때린 거야?”
아리스가 내뱉은 잔혹한 말에 니니와 나나가 정색했다.
“세상에. 그 예쁜 얼굴을 어떻게 때려요.”
“전하라면 따귀 맞은 얼굴도 섹시하실 테지만.”
그 말에 아리스가 인상을 썼다.
“너희들, 보면 은근히 오라버니 편을 든다? 오라버니가 그렇게 좋아?”
니니와 나나가 무슨 말이냐는 듯 정색을 했다.
“그게 아니라 공주님의 오라버니니까 그렇죠.”
“빛나는 보라색 눈동자나 조각상처럼 오밀조밀한 이목구비 같은 것들이 똑 닮았단 말이에요.”
“물론 저희 눈에는 공주님이 백배는 더 고우시지만요.”
“백배가 뭐야. 만 배는 예쁘시지.”
쉴 새 없이 몰아치는 두 사람의 칭찬에 아리스는 잠시 넋을 놓았다.
그러나 이내 정신을 차린 아리스는 시아나를 바라보았다.
아까 했던 질문에 답을 달라는 듯이.
시아나는 눈썹을 내리며 대답했다.
“따귀를 때린 것도 아니고, 더는 찾아오지 말라는 무엄한 말도 하지 않았어요. 그냥 정중하게 부탁드린 것뿐이에요. 사람들에게서 이상한 말이 나오지 않게 조심해 주셨으면 좋겠다고요.”
아리스가 헛, 하고 숨을 내쉬더니 중얼거렸다.
“오라버니가 고작 그런 말을 듣고 안 올 사람이 아닌데 이상하네.”
그러나 고민은 길지 않았다.
이내 아리스는 환하게 웃었다.
“아무튼 사사건건 와서 방해하던 오라버니가 안 오니까 좋네. 우리끼리 신나게 놀자고!”
니니와 나나가 눈을 반짝였다.
“좋아요. 오늘은 뭘 할까요.”
“시아나 님 옷 갈아입히기는 어때요?”
아리스가 꺅, 하고 소리를 질렀다.
“나는 찬성!”
장미꽃 연회 이후, 시아나를 꾸미는 데 한껏 재미가 들린 세 사람이었다.
시아나를 어떻게 꾸밀지에 대해 말하며 까르륵대는 세 사람과 달리 시아나의 마음은 복잡했다.
라시드는 시아나에게 제 마음을 강요하지 않았다. 고백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시아나를 찾아와 웃었을 뿐이다.
사랑이 담긴 눈빛으로.
그것을 시아나는 냉정하게 잘라 버렸다.
그때 본 라시드의 얼굴이 아직도 기억에 선명했다.
‘상처받은 얼굴이었지.’
어쩌면 라시드는 단순히 속상한 것에서 끝나지 않았을지 모른다.
감히 저를 거부한 시녀에게 강한 수치심을 느끼고 원망하고 있을 수도.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시아나는 온몸이 차갑게 식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시아나는 그 감정 속에 오래 파묻힐 틈이 없었다.
충격적인 소식이 루비궁에 전해졌기 때문이다.
“황태후 마마께서 쓰러지셨습니다.”
* * *
아리스는 시아나와 함께 황태후궁으로 향했다.
굳은 얼굴로 서 있던 황태후의 최측근 시녀가 아리스를 맞이했다.
“어서 오십시오, 공주님.”
“할마마마는?”
“다행히 주치의가 다녀간 후 안정을 취하셨습니다. 공주님께서 오시면 침전으로 안내하라 하셨습니다.”
아리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시녀를 따라갔다.
황태후가 아리스와 단둘이 대화를 원했기에 시아나는 밖에 대기했다.
달칵.
시녀가 문을 열어 주는 순간 아리스는 많은 생각을 했다.
‘요즘 할마마마의 안색이 썩 좋지 않았지.’
그럼에도 아리스는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황태후는 늘 깐깐하고 위엄이 넘쳤기 때문이다. 어린 손녀의 섣부른 걱정이 필요 없을 만큼.
하지만…….
“할마…… 마마?”
아리스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커튼을 쳐 어둠이 드리운 방 안에 황태후가 창백해진 얼굴로 침대에 누워 있었다.
황태후가 천천히 눈을 떴다.
“왔구나, 아리스.”
늘 힘이 어려 있던 목소리가 가늘었다.
아랫사람을 짓누르던 눈동자도 흐릿했다.
며칠 전과 확연히 다른 황태후의 모습에 아리스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굳어 버린 어린 손녀를 바라보며 황태후가 눈썹을 내렸다.
“그런 표정 할 것 없다. 원래 이 나이가 되면 이곳저곳이 아픈 법이니까.”
나름 어린 손녀를 위로하려는 듯 밝게 말하는 황태후에게 아리스가 말했다.
“……어디가 아픈 건데요.”
황태후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말했다.
“심장병이야. 오랜 지병이지. 너를 만난 후 부쩍 좋아졌는데, 요즘 다시 상태가 좋지 않아졌구나.”
“…….”
아리스는 황태후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으나, 마음속에는 늘 그녀에 대한 미움이 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황태후의 약한 모습을 보는 지금 전혀 기쁘지 않았다.
그러기는커녕 심장이 바스러지는 기분을 느꼈다.
‘말도 안 돼. 내가 이 사람을 얼마나 싫어하는데.’
제 마음에 혼란을 느끼며 아리스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런 아리스를 빤히 쳐다보던 황태후가 입을 열었다.
“아리스, 사실 오늘 널 부른 것은 내 몸 상태에 대해 알려 주고 싶어 부른 것이 아니란다.”
“……그럼요?”
“아리스, 내가 몸을 추스르면 나와 함께 궁을 나가 동부로 가지 않겠느냐?”
황당한 말에 아리스가 눈썹을 찡그렸다.
‘내가 거길 왜 가요?’라는 표정을 한 아리스에게 황태후가 말을 이었다.
“동부에는 나의 친정 가문인 메디치안 후작가가 있다.”
“……그런데요?”
“그곳을 너의 뒷배로 만들어 주고 싶구나.”
조금도 예상하지 못한 충격적인 이야기였다.
― 4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