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정체불명 레이디
식재료 관리실의 분위기가 평소와 달랐다.
오늘이 시아나가 관리 시녀로서 일하는 마지막 날이었기 때문이다.
진녹색 제복을 입은 시아나는 일렬로 늘어선 하급 시녀들을 향해 말했다.
“그동안 내 말을 잘 따라 주고 맡은 일을 열심히 해 주어서 고마워.”
하급 시녀들은 아쉬운 얼굴로 대답했다.
“저희야말로 잘 이끌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시아나 님.”
함께 땀을 흘리며 일을 한 덕에 시아나와 하급 시녀들 사이에는 끈끈한 정이 붙었다.
몇몇 하급 시녀들은 시아나를 따라서 루비궁으로 근무처를 옮기고 싶어 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시아나는 그 말을 들어줄 수가 없었다.
‘루비궁은 아리스 공주님 혼자 계신걸.’
시녀는 니니와 나나, 시아나 세 사람이면 충분했다.
다행히 하급 시녀들은 시아나의 뜻을 잘 이해했다.
하급 시녀들 사이에 있던 소피가 한 발짝 나섰다.
“그간 고생하셨다는 의미로 저희들끼리 선물을 하나 준비했어요.”
시아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선물?”
“네.”
소피가 시아나의 목에 걸어 준 것은 목걸이였다.
금은보화로 만든 것이 아니라 호두, 땅콩 같은 견과류를 엮어 만든 것이다.
식재료 관리실다운 선물에 시아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고마워. 일하다가 배고프면 하나씩 깨물어 먹을게.”
훈훈한 풍경이었다.
딱 한 명만 빼고는.
잔느는 썩은 표정으로 구석에 서 있었다.
‘이제 좀 꺼져! 이 지긋지긋한 시아나 년아!’
그러나 잔느는 시아나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표정이 확 변했다.
잔느는 애써 눈초리를 휘며 두 손을 비볐다.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신가요, 시아나 님?”
시아나는 그 얼굴을 보며 생각했다.
‘회초리가 무섭긴 하구나.’
회초리 100대를 때린 이후, 잔느는 시아나만 보면 사자와 마주친 하이에나처럼 굴었다.
그 모습을 보면 썩 기분이 좋지는 않았으나 어찌 되었건 그 덕에 잔느가 조용해졌으니 다행이었다.
“잔느.”
“네!”
시아나의 목소리에 잔느가 어깨를 움츠리며 대답했다.
기합이 잔뜩 들어 있는 잔느를 향해 시아나가 말했다.
“다시는 못된 짓 하지 마. 다음번엔 회초리만으로 끝나지 않을 테니까.”
시아나의 선에서 끝났기에 그 정도였지 또 그런 일을 벌인다면 목이 잘릴 수도 있었다.
동무이자 부하였던 잔느를 위한 조언이었다.
그러나 잔느에게는 명백한 협박으로 들렸다.
잔느는 일그러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새겨듣겠습니다.”
“…….”
시아나는 그런 잔느를 빤히 쳐다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뭐, 알아서 잘하겠지.’
이렇게 말해 주었는데도 또 문제를 일으킨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며 시아나는 식재료 관리실을 나왔다.
혼자가 된 시아나는 짓고 있던 근엄한 표정을 풀었다.
점잖은 중급 시녀에서 앳된 소녀로 돌아온 시아나는 하늘을 향해 두 팔을 뻗고 소리쳤다.
“야호, 이제 정말 중급 시녀다!”
교육을 마친 지금, 시아나는 누가 뭐래도 당당한 황궁의 중급 시녀가 되었다.
* * *
3주 동안 텅 비어 있던 루비궁이 다시 복작해졌다.
궁의 주인인 아리스와 세 명의 시녀 시아나, 니니와 나나가 돌아왔기 때문이다.
니니가 말했다.
“공주님, 저희가 없는 동안 황태후마마께서 엄청나게 잘해 주셨나 봐요.”
나나가 말했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저희가 모셨을 때보다도 더 고와지셨다고요!”
세 시녀가 중급 시녀 교육 때문에 궁을 비운 동안 아리스는 황태후궁에 머물렀었다.
그리고 그간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아리스는 전보다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아니, 뭐…….”
입을 우물거리는 아리스를 향해 시아나도 물었다.
“황태후 폐하와 어떻게 지내셨는지 말해 주세요. 저도 궁금해요.”
황태후는 약속대로 아리스를 위해 많은 것들을 해 주었다.
제국에서 가장 유명한 파티시에를 불러서 매일 다른 디저트를 만들어 주었으며, 하루가 멀다 하고 책, 드레스, 보석, 악기 같은 갖가지 선물을 주었다.
그러나 아리스는 그것을 순수하게 기뻐하지 않았다.
아리스는 황태후의 애정에 대한 강력한 불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리스는 일부러 심술 맞게 굴었다.
식사 시간에는 예법을 따지지 않고 더럽게 먹었으며, 황태후가 부른 공부 선생들에게는 짓궂은 장난을 치며 수업을 빼먹었다.
황태후가 주는 선물들은 마음에 드는 것만 골라 쏙 챙기고, 그다지 끌리지 않은 것들은 필요 없다며 받지 않았다.
그런데도 황태후는 얼굴 한번 찡그리지 않았다.
그토록 성격이 고약한 노인네가.
아리스가 눈썹을 찡그리며 말했다.
“할마마마는 생각보다 나를 좋아하는 것 같더라.”
“…….”
“뭐, 내가 아니라 죽은 딸이 그리워서 그렇게 잘해 주는 것일 테지만…….”
복잡한 표정을 짓는 아리스를 바라보며 시아나는 눈썹을 내렸다.
아리스의 말대로 황태후가 처음 아리스에게 마음을 연 것은 오래전 죽은 딸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다.
하지만 그로부터 벌써 몇 달이 흘렀다.
그리움에 취해 사라졌던 이성이 돌아올 시간이었다.
게다가 아리스의 모습 또한 황태후의 죽은 딸을 연기했던 때와는 전혀 달라졌다.
아련하게 웃지도 않았고 예쁜 말을 속삭이지도 않았다.
하고 싶은 말은 다 입 밖에 내뱉는 오만한 공주님만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도 황태후의 아리스에 대한 애정은 흔들림이 없었다.
‘황태후 마마께서 진심으로 아리스 공주님을 아끼게 되신 거야.’
그리고 아마 아리스도 그것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본인은 절대 아니라고 부정을 할 테지만.’
분명 첫 시작은 좋지 않았다.
태어난 손녀에게 일말의 관심도 없었던 할머니와 제가 살기 위해 그런 할머니를 이용하고자 했던 손녀.
그뿐인가.
황태후는 아리스에게 많은 죄를 지었다.
특히 아리스의 친모인 로즈마리가 목숨이 위험했을 때, 그녀의 도움을 거절한 것은 쉽게 용서하기 힘든 것이다.
그것을 알고 아리스는 더더욱 황태후를 철저히 이용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황태후가 죽는 순간, 사실은 당신을 미워했다고 저주 같은 말을 내뱉을 거라고.
‘하지만 가장 큰 힘이 되어 주는 사람과 계속 그런 관계로 지내는 것은 좋지 않아.’
다른 누구도 아닌 아리스를 위해서라도.
시아나는 아리스가 미움과 원망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길 바랐다.
쉽지는 않겠지만 아리스는 해낼 수 있을 것이다.
‘철없는 어린 공주님인 것처럼 보여도 사실은 누구보다 어른스러운 분이니까.’
아리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시아나가 아리스의 동그란 머리통을 쓰다듬었기 때문이다.
시아나가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저희가 없는 동안 힘드셨을 텐데 잘 견디셨어요. 대견해요, 우리 공주님.”
“흥, 알긴 아는구나. 내가 너희를 얼마나 보고 싶어 했는지 알아?”
아리스의 말에 니니와 나나가 대번에 눈물을 글썽거렸다.
“흑흑. 공주님이 저 같은 것을 보고 싶었다니 믿기지가 않아요.”
“엉엉. 저는 정말 이번 생에 이루고 싶은 것을 다 이뤘습니다.”
“그럼 넌 꺼져. 나 혼자 공주님을 모실 테니.”
“너나 꺼져. 공주님께는 나만 있으면 충분해.”
서슬 퍼런 쌍둥이의 대화를 바라보며 아리스가 시아나에게 속삭였다.
“저 둘, 중급 시녀 교육을 받고 오더니 더 이상해지지 않았어?”
시아나가 대답했다.
“교육 기간 동안 시간 여유가 많아서 소설책을 더 열심히 본 모양이에요. 거기 나오는 남자 주인공이 여자주인공에게 집착하며 저런 대사를 많이 한다고 하네요.”
아리스가 눈썹을 찡그렸다.
“뭐야. 그건 내 캐릭터인데.”
시아나는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 * *
햇볕이 따스하게 내리쬐던 어느 날.
루비궁 문 앞에 선 아리스는 고개를 한껏 들어 키가 훌쩍 큰 여인을 노려보았다.
새하얀 얼굴에 새까만 머리카락을 한 여인.
아리스는 그녀를 알고 있었다.
왜 모르겠는가.
‘내가 알던 것과 모습이 많이 변하긴 했지만, 일곱 명의 황녀 중 가장 아름답다고 하는 그레이스 레비쥬앙 드 아즈벨리잖아.’
즉, 아리스의 배다른 언니였다.
하지만 말이 언니지 아리스는 그레이스와 아무런 연이 없었다.
일 년에 몇 번, 같은 연회장에 있었던 것이 다였다.
그때마다 그레이스는 가장 밝은 자리에서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웃고 있었고, 아리스는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가장 구석진 자리에 앉아 있었다.
웃고 있는 그레이스를 보며 아리스는 이런 생각을 했었다.
[흥, 다들 뭐가 그렇게 예쁘다고 난리야. 팔뚝이 나무꼬챙이처럼 빼빼 말랐는데. 징그러워.]
저 멀리서 쭈굴하게 앉아 있는 아리스를 바라보며 그레이스는 이런 생각을 했다.
[아무리 친모도 없고 제대로 보살펴 주는 사람도 없다지만 황녀가 저런 초라한 몰골로 나타나다니 부끄럽지도 않나.]
결론적으로 서로 좋은 감정이라고는 모래알만큼도 없는 두 사람이었다.
지금이라고 다를 리가 없었다.
아리스는 흉흉한 기색을 숨기지 않고 물었다.
“초대도 하지 않았는데 여긴 무슨 일로 왔어요?”
뾰족한 아리스의 말에 그레이스가 눈을 내리깔며 대답했다.
“널 보러 온 게 아니야. 시아나를 보러 온 거지.”
아리스는 눈썹을 찡그렸다.
“언니가 내 시녀를 왜 보고 싶어 하는데요?”
“그 애가 중급 시녀 시험 교육 중에 내게 큰 도움을 주었거든. 오랜만에 인사를 하고 싶어 들렀으니 그 애 좀 불러 주련?”
“싫어요.”
“뭐?”
“난 내 시녀를 다른 사람에게 보여 주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요. 그러니 돌아가세요.”
아리스의 야무진 말에 그레이스가 하, 하고 웃었다.
“요것 봐라. 귀여운 말을 하네.”
“귀여우라고 한 말 아니거든요?”
파지직.
두 사람 사이로 심상치 않은 기운이 흘렀다.
그때였다.
저쪽에서 나타난 시아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레이스 황녀 저하, 어쩐 일로 이곳에…….”
그레이스를 향해 아는 척을 하던 시아나가 눈을 더 크게 떴다.
“츄츄, 왜 그래. 너 울어?”
“……?!”
“……?!”
그 말에 아리스와 그레이스는 한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제야 아리스는 그레이스의 뒤에 서 있던 시녀가 누군지 알아보았다.
커다란 덩치, 두터운 팔뚝.
시아나의 친한 동무라던 츄츄였다.
츄츄의 순박한 얼굴에는 눈물이 찔끔 맺혀 있었다.
세 사람의 시선 속에 눈을 끔뻑거리던 츄츄가 아리스에게 허리를 꾸벅 숙였다.
“황녀 저하, 갑자기 찾아온 것이 불쾌하셨다면 죄송합니다! 실은 제가 시아나를 보고 싶다고 해서 그레이스 공주님께서 이곳까지 오신 거구만유.”
츄츄는 몸을 돌려 그레이스에게도 허리를 숙였다.
“저 때문에 이곳까지 와 주셔서 참말로 감사합니다만, 이만 돌아가시는 게 좋겠어유. 저 땜시 애틋한 자매 사이에 금이 갈까 봐 겁나는구만유.”
쇠로 내리쳐도 아무렇지 않을 것 같은 건장한 시녀가 훌쩍거리며 용서를 비는 모습에, 아리스와 그레이스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한 발짝 떨어진 곳에 있던 시아나는 지금 눈앞의 광경이 어떤 상황인지 단번에 깨달았다.
어떻게 이 사태를 해결해야 하는지도.
시아나는 정색한 얼굴로 츄츄에게 다가가 말했다.
“그래. 네가 잘못했어, 츄츄.”
차가운 시아나의 목소리에 아리스와 그레이스의 눈이 커졌다.
두 사람의 시선 속에 시아나가 말을 이었다.
“아무리 친구가 보고 싶다고 해도 이렇게 찾아와서는 안 되는 거야. 너나 나나 일개 시녀일 뿐이니까. 주제도 모르고 모시는 분들의 기분을 상하게 하다니 이 일을 어쩌면 좋니.”
아리스와 그레이스는 당황했다.
‘아니. 그렇게까지 심각해질 필요는 없는데.’
그러나 그건 순전히 황녀들의 입장인 모양이었다.
시아나와 츄츄에게서 느껴지는 분위기는 범접할 수 없을 만큼 무거웠다.
마치 어마어마한 죄를 저지른 것처럼.
이 사태를 수습하게 위해 먼저 입을 연 것은 아리스였다.
아리스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호호, 방금 전은 장난이었어요. 언니가 저를 찾아와 주시니 얼마나 기쁜지 몰라요.”
그레이스도 미소 지으며 빠르게 답했다.
“그랬구나. 역시 내 동생은 하는 짓이 참으로 귀엽고 깜찍해.”
“이렇게 오셨으니 차 한잔 마시고 가세요.”
“좋지.”
두 사람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하하 호호 웃으며 팔짱을 끼고 궁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 모습을 본 츄츄는 휘둥그레진 눈을 깜빡이더니 시아나를 바라보았다.
‘갑자기 왜들 저러시는거여?’
라는 눈빛이었다.
정색했던 얼굴을 싹 지운 시아나가 헤실헤실 웃으며 말했다.
“공주님 두 분 다 착하시다는 거지.”
저를 섬기는 일개 시녀들의 눈치를 살필 만큼 말이야.
* * *
티 테이블에 마주 보며 앉기는 했으나 아리스와 그레이스는 각각 비슷한 생각을 했다.
‘차 한 잔 먹이고 바로 보내야지.’
‘차 한 잔 마시고 바로 가야지.’
그런데 그레이스가 아무 생각 없이 던진 한마디에서 대화의 물꼬가 트였다.
“넌 아직 약혼자가 없지?”
그 말에 아리스는 눈썹을 찡그렸다.
그레이스가 뻔한 잔소리를 늘어놓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공주라면 한시라도 빨리 상대를 구해야 한다는 둥, 최대한 도움이 되는 가문의 남자를 찾아야 한다는 둥, 그런 이야기 말이다.
하지만 그레이스가 꺼낸 말은 전혀 다른 내용이었다.
“부럽다. 웬만하면 약혼은 늦게 해. 아예 하지 않으면 더 좋고.”
예상했던 것과는 다른 이야기에 아리스의 눈이 커졌다.
그레이스는 쿠키를 오독거리며 말을 이었다.
“약혼이라는 거 해 봤자 좋을 게 하나도 없어. 특히 어렸을 때 한 약혼은 더더욱.”
“……왜요?”
“나이가 들면 상대가 어릴 때랑 전혀 다르게 보이거든. 분명 예전에는 동화 속에 나오는 왕자님처럼 멋졌는데 지금은 바짝 마른 오징어 같기만 하다니까. 하아, 이럴 줄 알았으면 약혼 따위 하지 않았을 텐데.”
아리스는 연회장에서 몇 번 보았던 그레이스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녀는 늘 약혼자와 껌처럼 찰싹 붙어 있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약혼을 후회한다니.
‘게다가 외모도 확 달라지고.’
아리스는 처음으로 언니에 대한 궁금증이 일었다.
“혹시 약혼자와 무슨 일 있었어요?”
“결정적으로 무슨 일이 있었던 건 아니지만 하는 짓이 영 불쾌해. 자꾸만 나보고 이것저것 귀찮은 것을 요구하잖아.
“…….”
“공주는 늘 엄격하게 자신을 관리하여 아름다운 외모를 유지해야 한다.”
아리스가 그레이스의 말을 받듯 말을 이었다.
“공주는 레이스가 달린 살랑대는 드레스를 입고 목소리는 새처럼 여리고 나긋해야 한다.”
이번에는 다시 그레이스의 차례였다.
“공주는 어느 순간이라도 우아하고 정숙하게 행동해야 한다. 절대 소리치거나 거친 말을 입에 담으면 안 된다.”
“공주는 100편의 엄선된 시를 낭독할 줄 알아야 하며 자수에 능해야한다.”
그것은 예법서에 적혀 있는 공주의 행동 지침이었다.
몇 차례 말을 주고받던 두 사람은 동시에 소리쳤다.
“그렇게 좋으면 자기들이나 그렇게 하라고!”
한 발짝 뒤에서 두 사람을 바라보던 츄츄가 어깨를 흠칫하며 시아나에게 속삭였다.
“생각보다 두 분이 이야기가 잘 통하시는 것 같구먼.”
시아나가 웃으며 대답했다.
“두 분 다 공주님이니까. 공감되는 것이 많겠지.”
그러던 중, 루비궁에 두 번째 손님이 찾아왔다.
안젤리나 황비와 레이시스였다.
오랜 시간 비어져 있던 루비궁에 사람들이 돌아왔다는 말을 듣고 찾아온 참이었다.
안젤리나 황비는 그레이스를 보고는 당황스러운 얼굴을 했다.
“먼저 온 손님이 있군요. 저는 다음에 다시 오도록 할게요.”
안젤리나는 그레이스와 그리 친한 사이가 아니었다. 게다가 레이시스까지 함께 있으니 불편한 자리를 만들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왜 이렇게 나를 쳐다보는 거죠?”
그레이스는 저를 향해 눈을 반짝이는 레이시스를 보며 말했다.
안젤리나가 당황한 얼굴로 대답했다.
“레이시스가 공주를 그리고 싶은 모양이에요.”
“……!”
그 말에 그레이스는 눈을 크게 떴다.
라시드의 초상화가 공개된 후, 황족과 귀족들 사이에서 레이시스는 유명 인사가 됐다.
어린 나이의 천재 화가로.
레이시스의 그림에 푹 빠진 이들 중 몇몇은 따로 초상화를 그려 달라는 요청을 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아무리 높은 금액을 제시하고 간절히 빌어도, 레이시스는 주문을 받지 않았다.
‘제 눈에 보이는 반짝이고 아름다운 것들만 그리기 때문에.’
그것을 아는 그레이스의 눈이 빛났다.
“내가 아름답다는 거구나.”
이렇게 머리카락을 짧게 자르고, 화장도 하지 않고, 단조로운 드레스를 입은 채 두 손에 잔뜩 쿠키를 든 이 모습이 말이다.
그레이스는 호탕하게 웃으며 소리쳤다.
“어디 한번 그려 봐. 나를 얼마나 잘 표현할지 지켜봐 주마.”
팔짱을 낀 그레이스는 위풍당당한 얼굴로 레이시스를 바라보았다.
그레이스가 허락을 한 것을 알아챈 레이시스가 눈을 반짝이며 연필을 꺼내 들었다.
“우와, 오라버니가 그림 그리는 거 오랜만에 보네.”
아리스가 상기된 얼굴로 레이시스의 뒤에 서서 구경할 준비를 했다.
갑작스럽게 벌어진 판에 눈을 깜빡이던 안젤리나가 시아나를 향해 속삭였다.
“이거 어디서 많이 본 장면 아니니?”
아리스도, 라시드도, 레이시스를 처음 만났을 때 꼭 저랬다.
그것을 떠올린 시아나가 웃으며 대답했다.
“황실의 전통인가 봅니다.”
안젤리나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해 눈을 깜빡거렸다.
* * *
레이시스가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덕분에 루비궁은 꽤 복작거리게 되었다.
손님들을 위해 열심히 간식거리를 나르던 니니가 말했다.
“이때쯤 등장할 때가 되었는데 어째 보이질 않네.”
옆에 서 있던 나나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러게 말이야. 루비궁 문을 열자마자 가장 먼저 오실 줄 알았는데 말이지.”
옆에서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시아나가 물었다.
“도대체 누구를 말하는 거예요?”
니니와 나나가 대답했다.
“당연히 라시드 황태자 전하지요.”
루비궁 최다 방문 횟수를 자랑하는 단골손님! 루비궁 최고의 VIP!
어쩐 일인지 그가 보이지 않았다.
그 무렵, 라시드는 긴 다리를 꼰 채 서신 한 장을 읽고 있었다.
요양을 떠난 황제와 황후로부터 온 것이다.
눈을 내리깐 라시드가 말했다.
“아바마마와 어마마마께서 한동안 더 그곳에 계시겠다는구나.”
호위 기사 솔이 눈썹을 찡그렸다.
“그 말은…….”
“곧 있을 장미꽃 연회를 내가 주최해야 한다는 말이지.”
“……!”
솔은 입을 쩍 벌렸다.
장미꽃 연회.
매년 5월, 장미꽃이 만발하는 시기에 황궁에서 제국의 이름 높은 귀족들을 초대하는 행사였다.
장미꽃 연회에는 특별한 규칙이 있었다.
바로 파트너와 함께 참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연회의 주최자도 마찬가지였다.
매해, 황제와 황후는 다정한 모습으로 나타나 귀족들에게 인사를 하고 춤을 추었다.
그런 행사를 라시드가 주최해야 한다는 것은 즉…….
“전하께 파트너가 필요하다는 이야기군요.”
솔의 말에 라시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솔은 썩은 얼굴이 되었다.
‘전하께 그런 사람이 어디 있어!’
믿기지 않게도 라시드는 혼자였다.
이 나이 때의 황족이라면 당연히 있어야 할 약혼녀가 없는 것은 물론이고 은밀하게 만나는 여인조차 없었다.
긴 시간 전쟁터에 있었던 탓이었다.
‘그야말로 순결의 황태자!’
물론 이것은 전혀 자랑이 아니었다.
열여덟 살이나 된 황태자에게는 더더욱.
솔이 결연한 얼굴로 말했다.
“애초에 황태자 전하라는 분이 지금까지 약혼녀조차 없다는 게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이 기회에 전하의 배필이 될 만한 아가씨를 찾아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어떤 여자?”
“그야 전하께 충성을 바치는 명문가 출신에, 꽃 같은 나이, 곱디고운 미모를 가졌으며, 전하의 괴팍한 성질머리를 이해해 줄 만한 성품을 가진 분으로…….”
“필요 없어.”
“…….”
“알고 있잖아, 솔. 난 여자에게 관심이 없단다.”
호위 기사 솔이 빽 하고 소리를 질렀다.
“아, 이상한 말씀 좀 하지 마십시오! 전하께서 자꾸 그러시니 이상한 소문이 나도는 것 아닙니까.”
아무리 오랜 시간 전쟁터를 누볐다 해도, 그간 어떤 여인과도 스캔들 한번 없는 황태자란 괴상망측한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 사이에는 별의별 이야기가 다 돌았다.
무성애자라든가.
동성애자든가.
고자라든가.
그냥 사람 죽이는 것 아니면 아무 데도 흥미를 못 느끼는 희대의 미친놈이라든가.
아무튼 하나같이 곤란하기 짝이 없는 소문이었다.
라시드가 제 품에 파고든 쭉쭉이(흰 페럿)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걸. 난 이렇게 귀여운 아이들에게만 시선이 가니까.”
“아이고, 전하. 그러다가 그 아이들에게 분홍 리본을 묶어 파트너랍시고 연회장에 데리고 가시겠습니다.”
“좋은 생각인데?”
해사하게 웃는 라시드를 보며 솔은 미칠 것 같았다.
‘역시 내가 나서야 해.’
안 그러면 라시드는 정말로 세 마리의 작은 동물들과 함께 연회장에 들어설지도 모른다.
그랬다가는 빼도 박도 못하고 ‘진짜 미친놈’이란 도장이 찍혀 버릴 것이다.
솔은 생각을 정정했다.
‘방금 전 말했던 것처럼 대단한 집 안이나 아름다운 미모 따위 필요 없어. 장미꽃 연회가 열리는 날, 전하의 옆에 설 아가씨의 조건은 하나면 돼!’
전하의 마음에 들 것.
솔은 얼굴을 찡그렸다.
그게 가장 힘든 조건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잠시 후, 솔은 눈을 번쩍 떴다.
‘있잖아!’
라시드의 마음에 꼭 드는 아가씨.
거기에 귀족들 앞에서도 창피당하지 않을 만한 궁중 예법과 주목받는 자리에서도 큰 실수를 하지 않을 영민함까지 갖추고 있었다.
솔이 눈을 번뜩이며 말했다.
“전하, 장미꽃 연회의 파트너로 시아나 님은 어떠십니까?!”
나른한 얼굴로 있던 라시드가 눈을 크게 떴다.
솔을 빤히 바라보던 라시드가 두 눈을 부드럽게 휘며 말했다.
“최고야.”
그러나 라시드는 이내 눈썹을 내렸다.
“하지만 그녀가 그런 귀찮은 일을 맡아 줄까?”
“그럼요!”
호위 기사 솔은 두툼한 가슴 근육을 꿈틀거리며 자신만만 얼굴로 말했다.
“저만 믿으십시오!”
그렇게 루비궁 최다 방문 횟수를 자랑하는 단골손님의 호위 기사 솔은 루비궁으로 향했다.
제 뜻을 이루겠다는 부푼 마음을 안고.
* * *
호위 기사 솔의 한 손에는 최고급 초콜릿이 가득 담긴 바구니가, 다른 한 손에는 금화가 가득 담긴 주머니가 들려 있었다.
솔은 거대한 체구를 90도로 구부리며 우렁차게 소리쳤다.
“부탁합니다, 시아나 님!”
시아나가 웃으며 대답했다.
“거절합니다.”
“……!”
솔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성의가 부족했나?
초콜릿이나 금화 따위가 아니라 더 대단한 선물을 들고 왔어야 하는 건가.
그 생각을 빤히 읽은 시아나가 고개를 저었다.
“자책하실 필요 없어요. 아무리 대단한 선물을 가지고 오셨다고 해도 저는 솔 님의 부탁을 들어드리지 않았을 테니까요.”
“왜죠?!”
“……그야 부담스러우니까요.”
아무리 연회 날 하루만이라 해도 황태자의 파트너라니.
“감히 시녀 따위가 전하의 옆에 서 있냐며 온갖 비난을 받게 될 거예요. 연회가 끝난 후에도 황태자 전하를 꼬여낸 여우 같은 시녀 계집이라는 꼬리표가 달릴 테고요. 저의 평화로운 시녀 생활은 끝이 나겠죠.”
“……!”
솔은 충격받은 얼굴을 했다.
“그, 그렇군요. 그 부분은 생각을 못했습니다.”
호위 기사 솔은 절망에 빠진 얼굴로 어깨를 내렸다.
“저는 그냥 털이 복슬복슬한 놈들이 아니라 멀쩡한 아가씨가 전하의 옆자리에 서면 좋겠다는 생각에 급급해서…….”
“…….”
솔을 빤히 쳐다보던 시아나는 눈썹을 찡그렸다.
이상한 일이었다.
라시드는 황태자였다.
게다가 열여덟 살이란 창창한 나이에 눈부시게 아름다운 미모까지 가지고 있다.
“아무리 피의 황태자라는 흉흉한 별명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전하의 파트너가 되고 싶다는 아가씨들이 줄을 이을 텐데요?”
“맞습니다. 하지만 전하께서는 그 많은 분 중에 한 분도 원하는 분이 없습니다. 워낙에 사람에게 까다로운 분이신지라.”
“…….”
솔직히 시아나에게는 그다지 와 닿는 말이 아니었다.
시아나에게 라시드는 하루가 멀다 하고 찾아오고, 웃고, 좋다며 꼬리를 흔드는 남자였기 때문이다.
솔이 간절한 얼굴로 말했다.
“그런 전하께서 유일하게 좋아하는 분이 시아나 님이십니다. 정말 안 되시겠습니까?”
시아나도 라시드의 마음을 알고 있었다.
‘그래. 날 좋아하긴 하시지. 전하께서 키우는 작은 동물들을 귀여워하듯 말이야.’
하지만 그것이 시아나가 이런 황당한 부탁을 받아들일 이유는 되지 못했다.
“죄송합니다.”
명백한 거절의 뜻에 솔의 듬직한 어깨가 더 내려갔다.
“어쩔 수 없지요.”
솔의 대답에 시아나는 미안함을 담아 웃었다.
하지만 이어진 솔의 말에 눈을 부릅뜰 수밖에 없었다.
“제가 전하의 파트너가 되는 수밖에요.”
“……?!”
내가 잘못 들은 거지요?
아니면 농담을 하시는 거죠?
라는 눈빛이었건만 솔의 얼굴은 진지하기만 했다.
“전하와 제가 특별한 사이다 어쩐다하는 추잡한 소문이 나돌기는 하겠지만 괜찮습니다. 한두 번 들었던 소문도 아니니까요. 물론 그 소문 때문에 겨우 들어와 있던 혼처가 싹 다 날아가 홀로 계신 어머니께서 눈물을 삼키시겠지만 저는 정말, 정말 괜찮습니다.”
“…….”
“저는 전하의 유일한 호위 기사니까 말입니다.”
저기요, 호위 기사님.
하나도 안 괜찮아 보이거든요.
눈가에 눈물이 찔끔 어려 있다고요.
시아나는 황당한 얼굴로 솔을 쳐다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알았어요. 그 부탁, 들어드릴게요.”
“정말입니까?!”
솔의 얼굴이 대번에 밝아졌다.
“네. 대신 공짜는 아니에요.”
“그럼요! 뭐든 말씀하십시오.”
솔은 시아나의 품에 가지고 왔던 선물을 안기며 소리쳤다.
두 손 가득 초콜릿과 금화를 든 시아나가 말했다.
“위험부담이 상당한 일인데 이것으로는 보수가 적어요.”
“열 배로 챙겨 드리겠습니다.”
번개 같은 대답에 시아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과연 황태자의 호위 기사.
시원하게 올리는구나.
‘돈은 많을수록 좋으니 준다면 받아야지.’
시아나는 생긋이 웃으며 손가락을 들었다.
“그리고 또 하나. 전하의 파트너로 참석은 하겠지만 제 정체를 온전히 드러낼 생각은 없어요. 저는 평온한 시녀의 삶을 유지하고 싶으니까요.”
시아나라는 것을 숨기고 라시드의 옆에 서고 싶다는 것이다.
좋은 의견이었다.
“하지만 그게 가능할까요? 황궁에는 시아나 님의 얼굴을 아는 이들이 많지 않습니까. 가면이라도 쓰는 게 아닌 이상 다들 시아나 님인 것을 알아볼 텐데요.”
“그 부분은 제가 알아서 할 테니 솔 님께서는 전하의 파트너로서 적당한 가짜 신분만 만들어 주세요.”
솔은 멍하니 시아나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새삼 아리스 공주가 왜 그렇게 시아나에게 의지하는지 알 것 같았다.
동그란 얼굴에 순한 눈동자를 한 소녀는 묘하게 믿음직스러운 구석이 있었다.
* * *
시아나는 오랜만에 황태자궁을 찾았다.
장미꽃 연회에 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였다.
라시드는 해사한 얼굴로 시아나를 맞이했다.
“어서 와, 시아나.”
“…….”
“네가 나의 파트너가 되어 주다니 정말 기뻐.”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그래 보였다.
라시드의 뒤로 존재하지 않는 꼬리가 살랑대는 것이 보일 만큼.
시아나가 새침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게 좋아하실 거면 왜 직접 와서 부탁하지 않으셨어요?”
“…….”
시아나의 말에 라시드의 눈동자가 동그래졌다.
시아나가 말을 이었다.
“고귀하신 황태자 전하께서 하찮은 시녀에게 먼저 무엇인가를 부탁하는 것이 자존심 상하셨나요?”
라시드는 정색한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설마. 그럴 리가.”
“…….”
“나는 다만…….”
다만? 시아나는 무슨 말을 하나 보자라는 얼굴로 라시드를 바라보았다.
라시드가 눈을 내리깔며 말을 이었다.
“내가 말하면 명령이 될까 봐.”
“…….”
“나는 네게 어떤 명령도 하고 싶지 않아.”
라시드가 시아나와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하지만 네 얼굴을 보니 내가 비겁했었던 것 같구나.”
라시드가 시아나의 앞에 다가갔다.
그러더니 허리를 숙여 시아나의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
갑작스러운 라시드의 행동에 굳어 버린 시아나를 올려다보며 라시드가 두 눈을 곱게 휘었다.
“곤란한 부탁을 들어주어서 고마워, 시아나.”
“……!”
시아나는 속으로 소리쳤다.
‘악귀야, 물럿거라!’
어쨌건 그렇게 충격적인 인사가 마무리되고, 시아나는 본론을 꺼냈다.
“장미꽃 연회에 대해 자세히 알려 주셔요.”
아무리 하루 동안 라시드의 옆에 서 있으면 그만인 역할이라고 해도 어떤 연회에 참석하는지는 알아야 했다.
라시드는 어느덧 자연스럽게 시아나가 타 주는 차를 홀짝이며 말했다.
“장미꽃 연회. 장미꽃과 사랑의 여신 로즈린타를 기리는 행사지.”
이름만 들어도 낭만이 뚝뚝 떨어지는 연회에는 절대적인 규칙이 있었다.
파트너와 함께 참석할 것.
시아나가 눈을 가늘게 떴다.
“짝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참 잔인한 연회네요.”
라시드가 웃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라시드가 찻잔을 들이켜며 말을 이었다.
“더 고약한 것은 연회의 오프닝 때 주최자가 춤을 추어야 한다는 거지. 여신 로즈린타에게 연회에 참석한 이들의 영원한 사랑을 기도하는 의미로 말이야.”
영원한 사랑이라니. 그런 게 어디 있어.
시아나는 저도 모르게 썩은 표정이 되었다.
그 표정이 귀엽다는 듯 라시드가 쿡쿡 웃었다.
“사랑을 믿지 않아?”
“아예 믿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기적처럼 극히 드문 일이라고 생각해요. 황족이나 귀족들에게는 더더욱요. 그런 사람들이 모여 사랑이니 뭐니 하는 행사가 있다는 것이 충격적이네요.”
시아나는 작은 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뭐, 이해는 해요. 원래 사람들은 가지지 못한 것을 더 원하는 법이니까요. 그런 의미로 그런 해괴한 연회도 생겨났겠죠.”
“…….”
“어쨌건 결론은 오프닝 때 제가 나서야 한다는 거죠?”
“그래. 부담스워할 필요는 없어. 음악에 맞추어 적당히 움직이면 그만이니까.”
하지만 그건 라시드의 생각이었다.
시아나는 제가 맡은 일은 그게 무엇이든 대충 넘어갈 생각이 없었다.
“춤 연습부터 시작해야겠네요. 지금 당장.”
느긋한 얼굴로 찻잔을 들이켜던 라시드가 눈을 깜빡거렸다.
* * *
황태자궁 안에 있는 연회장.
텅 빈 홀에는 라시드와 시아나가 서 있었다. 장미꽃 연회에서 출 춤을 연습하기 위해서였다.
시아나와 손을 맞잡은 라시드가 아이처럼 해맑은 얼굴로 말했다.
“시아나, 춤 솜씨도 뛰어나구나. 역시 대단해.”
“이래 봬도 공주였으니까요.”
새 왕비는 시아나에게 수많은 훈련을 시켰고 개중에는 춤도 있었다.
사실 궁중 춤은 거기에서 거기라 기본을 익혀 두면 크게 어려울 것이 없었다.
몇 가지 안무를 응용하여 음악에 맞추어 움직이면 춤이 완성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로 당연히 라시드도 능숙하게 춤을 출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시아나가 눈썹을 찡그리며 말했다.
“믿기지 않지만 전하는 꼭 춤을 처음 배우는 분 같네요.”
시아나의 말에 라시드가 해사하게 웃었다.
“맞아. 나는 춤을 제대로 배운 적이 없어. 정확히는 배울 틈이 없었지. 13살부터 전쟁터에 있었으니까.”
라시드는 평온한 얼굴로 말했지만 시아나는 눈썹을 찡그렸다.
라시드는 태어났을 때부터 황자로서의 입지가 대단했다.
친모는 황궁에서 가장 고귀한 여인인 황후. 게다가 황후는 황제와 사이가 좋았다.
‘그런 사람이 제대로 춤을 배울 새도 없을 만큼 전쟁터를 누볐다고?’
예전에는 단순히 황태자가 되기 위해 스스로 고된 길을 택했다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왜 그렇게까지 했어야 하지?’라는 의아함이 들었다.
게다가 이상한 점은 또 있었다.
황족이, 그것도 황좌에 가장 가까운 황태자가 열여덟 살이나 되도록 장래를 약속한 사람이 없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시아나가 눈썹을 모으며 물었다.
“그 나이가 되도록 약혼녀가 없으시다니. 혹시 여자한테 관심이 없으신가요?”
보통의 사람이라면 무슨 무례한 질문이냐고 질색을 할 질문이었건만 라시드는 웃으며 대답했다.
“응.”
“……!”
눈을 부릅뜬 시아나를 향해 라시드가 말을 이었다.
“그렇지만 어쩔 수 없어. 여자건 남자건 다 흐느적거리는 오징어처럼 보이니까.”
“…….”
“하지만 시아나, 너만은 다르단다. 네 얼굴은 새하얀 빵에 동그란 콩이 세 개 박힌 것처럼 보여. 아주 귀엽지.”
칭찬인지 욕인지 모를 말에 시아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네, 네. 그것참, 영광이네요.”
제정신이 아닌 황태자를 상대로 자신이 너무 멀쩡한 질문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에휴, 춤 연습이나 하자.’
다행히 라시드는 기본기가 부족할 뿐 몸을 잘 움직이고 박자 감각도 좋았다.
연회 날에는 사람들 앞에서 멋진 춤을 보여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 * *
“연습, 꼭 하셔야 해요.”
시아나는 라시드에게 단단히 이른 후 황태자궁을 나왔다.
루비궁에 도착한 시아나는 먼저 아리스에게 인사를 했다.
“다녀왔습니다, 공주님.”
시아나는 아리스에게 장미꽃 연회 때 라시드의 파트너로 참석한다는 것을 이야기한 상태였다.
주인의 동의가 필요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아리스는 시아나가 왜 그런 일을 하냐며 분노하지 않았다.
대신 짜증스러운 얼굴로 한마디를 내뱉을 뿐이었다.
[흥, 오라버니의 파트너라니. 시아나 네가 1억만 배는 아까워.]
그래서 마음 편히 라시드를 만나고 왔건만 이건 무슨 상황일까.
팔짱을 낀 아리스가 새침한 눈을 하고 말했다.
“흥. 나 말고 다른 황족의 곁에 있다 오니 좋아? 하지만 더는 그냥 두고 보지 않을 거야. 널 나의 향기로 물들일 거라고!”
로맨스 소설 속에 나올 법한 해괴한 대사를 내뱉은 아리스는 니니와 나나에게 손짓했다.
두 시녀는 결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니니와 나나는 시아나를 번쩍 들어 욕실로 데려간 후, 순식간에 옷을 벗겨 욕조에 담가 버렸다.
“꺄!”
갑작스러운 상황에 눈을 동그랗게 뜬 시아나를 향해 니니가 말했다.
“장미꽃과 허브를 넣은 목욕물이에요. 몸을 담그면 피로가 싹 풀리죠.”
나나도 말했다.
“욕조에서 나오시면 장미꽃 향유도 몸에 발라 드릴게요. 피부와 머리카락이 보드라워지고 좋은 향기가 날 거예요.”
갑작스럽게 저를 공주님 취급하는 두 사람의 모습에 시아나는 당황한 얼굴로 눈을 깜빡거렸다.
욕실 안으로 따라 들어온 아리스가 허리를 숙여 시아나의 턱을 잡고 말했다.
“난 내 시녀가 연회장에서 볼품없는 모습으로 서 있는 건 못 봐. 장미꽃 연회 때, 넌 누구보다 아름다운 모습으로 등장하게 할 거야.”
“…….”
그제야 시아나는 아리스의 의도를 알아챘다.
저를 꾸며 주려는 것이다.
‘어머나. 이건 생각도 못했던 상황이네.’
물론 시아나도 추레한 꼴로 황태자의 옆에 서 있을 생각은 없었다.
그래서 솔에게서 돈도 넉넉히 챙겨 두었던 것이고.
‘받은 돈으로 드레스와 화장품을 살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호사스럽게 준비할 생각은 못했는데…….’
시아나가 난감한 듯 눈썹을 내렸다.
당황스럽기는 했으나 기껏 공주님이 도와준다는데 아득바득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시아나가 말했다.
“감사합니다, 공주님. 공주님의 호의를 받들어 열심히 저를 꾸며 보겠습니다.”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아리스와 니니, 나나를 향해 시아나가 말을 이었다.
“그런 의미로 말씀드리는데 다음부터는 라벤더로 목욕수와 마사지 오일을 맞춰 주세요. 제 피부에는 라벤더향이 잘 맞거든요. 이왕이면 레크라산 라벤더가 좋고요.”
“……?!”
“그리고 머리에 바를 향유는 바바수 오일이 좋아요. 저는 머리카락이 가늘어서 너무 무거운 오일을 바르면 뭉쳐 버린답니다.”
그 모습은 결코 난생처음 외모를 가꿀 기회를 가진 시녀의 모습이 아니었다.
평생 이렇게 살아 왔던 공주님처럼 자연스러웠다.
니니와 나나는 놀라 입을 쩍, 벌렸다.
그 사이로 얼굴을 살짝 붉힌 아리스가 중얼거렸다.
“하, 역시 내 시녀는 수상해. 그래서 좋은 거지만.”
어쨌건 그렇게 루비궁에서는 본격적인 시아나 꾸미기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 * *
햇빛이 비치는 아침.
챙이 넓은 밀짚모자를 쓴 시아나가 궁을 나왔다. 시아나의 손에는 빗자루가 들려 있었다.
‘살살. 소리가 나지 않게.’
어깨를 바짝 웅크린 시아나가 조심스럽게 빗자루질을 하려던 순간이었다.
“시아나 님!”
“지금 무슨 짓을 하시는 겁니까!”
니니와 나나의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와다다다.
엄청난 속도로 달려온 니니가 시아나의 손에서 빗자루를 뺏었다.
나나는 재빨리 시아나의 작은 몸을 검거하여 궁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흉악범 체포 완료.’
꼭 이런 장면 같았다.
나나의 두 팔에 갇힌 시아나가 울상을 지었다.
“정원을 좀 쓸려던 것뿐이었어요.”
니니가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
“저희가 할 일입니다.”
나나도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
“빗자루질을 하다가 어젯밤 내내 관리한 손톱이 망가지면 어쩌시려고요.”
어느새 합류한 아리스도 한 소리 보탰다.
“햇볕은 또 어떻고. 이런 쨍한 햇빛 아래에서 일을 하면 기껏 뽀얗게 관리한 피부가 엉망이 되는 것 몰라?”
저를 험악한 눈으로 바라보는 세 사람을 향해 시아나가 변명하듯 말했다.
“그래서 손이 상하지 않게 장갑을 꼈어요. 모자도 썼고요.”
그러나 세 사람은 어림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시아나는 울 것 같은 표정이 되었다.
처음, 세 사람이 시아나 꾸며 주기를 선포했을 때 시아나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먼저 도와주겠다고 한 것이니 고맙게 도움을 받자고.
그러나 세 사람은 시아나가 생각했던 것보다 열성적이고 진지했다.
그날 이후 시아나가 시녀로서 해야 하는 어떤 일도 할 수 없을 만큼.
그늘진 방 안으로 끌려와 얼굴에 팩이 발라진 시아나가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세 분이 저를 위해 이러시는 건 알아요. 하지만 이렇게까지 하진 않아도 돼요. 그래 봐야 고작 하루 동안 황태자 전하의 파트너가 되는 것뿐인걸요. 저는 그일 때문에 시녀의 업무를 허투루 할 생각은 전혀 없어요.”
시아나의 옆에 앉은 아리스가 하, 하고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내저었다.
“정말 모르겠어, 시아나?”
“무엇을요?”
“너의 주인인 내가 원하고 있어. 네가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연회에 참석하길 말이야. 그러니 그날을 위해 최선을 다해 꾸미는 것이 네가 할 일이야.”
시아나는 잠깐 할 말을 잃었다.
‘제법 말을 멋지게 하시네요, 공주님. 매일같이 로맨스 소설을 열심히 읽으신 보람이 있어요.’
하지만 그렇게 쉬이 넘어갈 일이 아니었다.
시아나가 눈썹을 내렸다.
“공주님의 생각은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공주님, 저는 루비궁의 시녀예요. 제가 일을 하지 않으면 니니와 나나가 힘들어져요.”
그러나 이게 웬걸.
니니와 나나는 절대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루비궁은 작아요. 둘이서 바지런히 하면 반나절이면 일이 다 끝나요.”
“그리고 몸이 좀 힘들면 어때요. 시아나 님을 가꾸어 주다 보면 피로가 확 날아가는데.”
놀랍지만 두 사람의 말은 진심이었다.
열 살의 꼬마 공주를 꾸며 주는 것도 큰 즐거움이었지만, 열여덟 살의 아가씨를 아름답게 가꾸는 것 또한 색다른 쾌감을 주었던 것이다.
니니와 나나가 뜨거운 콧김을 내뿜으며 말했다.
“저희는 시아나 님이 지금 모습에서 얼~마나 더 아름다워질 수 있을까 매일 상상을 한답니다.”
“저희를 위해서라도 부디 협조해 주세요.”
“…….”
니니와 나나까지 저렇게 말하니 시아나는 할 말이 없어졌다.
결국 시아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세 분이 그렇게 말씀하니 오늘부터 연회 날까지 시녀 일은 잠시 쉬도록 할게요.”
“야호!”
아리스와 니니, 나나는 꺅, 하고 웃으며 손바닥을 마주쳤다.
아리스가 생기 넘치는 목소리로 말했다.
“니니, 나나. 어제 구입한 오일부터 준비해. 마사지부터 시작하자.”
“옙!”
니니와 나나가 신나는 얼굴로 대답했다.
* * *
“왜 그렇게 쳐다보세요? 혹시 제 얼굴에 뭐라도 묻었나요?”
시아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라시드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춤 연습을 하기 위해 황태자궁 연회장에서 두 손을 맞잡고 있는 상태였다.
라시드가 시아나를 향해 눈을 내리깔며 말했다.
“요즘 뭔가 달라졌어.”
“아…….”
시아나는 눈을 깜빡거렸다.
요즘 시아나는 시녀의 업무를 일절 그만두고 외모 관리에 열을 올리는 중이었다.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
며칠 사이 피부는 매끈해지고 머리카락은 윤기가 흘렀다.
시아나가 수줍은 듯 눈썹을 내리며 웃었다.
“확 달라진 것은 아니라 눈치채지 못하실 줄 알았는데 의외로 눈썰미가 좋으시네요.”
시아나의 칭찬에 라시드가 뿌듯한 얼굴로 웃었다.
연회장 바깥을 지키고 서 있는 호위 기사 솔이 보았다면 기함을 할 만한 장면이었다.
라시드는 눈썰미의 ‘ㄴ’도 없었으니까.
아마 솔이 머리를 양 갈래로 깜찍하게 땋고 나타나도 뭐가 달라진지 모를 것이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시아나는 시아나였다.
라시드는 시아나의 작은 변화도 알아챌 수가 있었다.
스스로가 신기할 정도로.
“…….”
시아나는 잠시 숨을 멈추었다.
‘또 저렇게 나를 쳐다보네.’
라시드는 종종 시아나를 말도 안 되게 다정한 눈빛으로 쳐다볼 때가 있었다.
그럴 때마다 시아나는 가슴이 콩콩거렸다.
‘헉 소리 날 정도로 아름다운 남자가 숨소리가 들릴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손까지 마주잡고 나를 쳐다보니 당연하지.’
18살 소녀다운 지극히 평범한 반응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라시드에게 이런 감정을 들키고 싶지는 않아 시아나는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참, 내일은 춤 연습을 하러 오지 못해요.”
해사하게 웃고 있던 라시드의 눈빛이 순식간에 싸늘해졌다.
“왜?”
“장미꽃 연회 때 입을 드레스와 액세서리를 맞추러 갈 계획이거든요.”
얼음처럼 냉랭했던 라시드의 눈빛이 봄날의 햇빛처럼 반짝였다.
“함께 갈까?”
짧은 순간 시시각각 변하는 라시드를 신기하게 바라보던 시아나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
라시드가 눈썹을 내렸다.
꼭 주인과 함께 산책 가는 것에 실패한 강아지처럼.
그 모습이 제법 처량 맞아 보였지만 시아나는 라시드와 함께 거리에 갈 생각이 모래알만큼도 없었다.
시아나가 라시드를 달래듯 말했다.
“장미꽃 연회 때 저는 제 정체를 숨기고 전하의 옆에 설 거예요. 그러려면 최대한 소문이 나지 않게 조용히 준비를 해야 하고요.”
그러나 라시드와 함께 거리를 나가 드레스를 고르는 순간…….
‘동네 사람들, 여기 좀 보세요! 제가 바로 이번 연회 때 황태자 전하의 파트너로 설 사람이랍니다!’
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라시드가 걱정할 거 없다는 듯 말했다.
“예전처럼 스카프로 얼굴을 두르고 가면 되지.”
“그때와 지금은 상황이 전혀 다르잖아요.”
그때는 평민들의 축제라 상관없었지만, 지금은 연회를 준비하는 귀족들이 거리에 가득할 터였다.
스카프 한 장으로 라시드의 정체를 완벽하게 숨기는 것은 무리였다.
“그리고 전하와 함께 드레스를 고르고 싶지 않아요.”
“왜지?”
이렇게까지 본격적으로 준비를 하게 된 김에, 전하를 깜짝 놀래 주고 싶어졌거든요.
시아나는 그 말을 하는 대신 새침하게 말했다.
“그런 게 있어요. 아무튼 저 혼자 갈 거예요.”
단호한 얼굴에 라시드는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서운한 기색은 여전히 숨기지 못했지만.
아무튼 그렇게 이야기를 끝낸 두 사람은 오늘 치의 춤 연습을 끝냈다.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시아나가 라시드에게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한 후 발걸음을 옮기려던 차였다.
“참, 시아나.”
“네?”
혹시 뭔가 빠뜨리고 간 것이라도 있나 싶어 시아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돌렸다.
톡.
그 순간 시아나의 입 속에 달콤한 무언가가 들어왔다.
“뭐예요, 이게?”
시아나가 두 볼을 우물거리며 물었다.
라시드가 키득거리며 대답했다.
“산딸기잼을 안에 넣은 초콜릿이야.”
“새콤한 산딸기 향과 달콤한 초콜릿 맛이 어우러져 확실히 맛있긴 하네요. 그런데 다음부터는 이런 것을 주시려거든 예쁜 상자에 넣어서 정중하게 주시겠어요?”
초콜릿을 삼킨 시아나가 눈썹을 올리며 말했다.
“단 하룻밤이지만 저는 전하의 파트너가 될 예정이니까요. 그에 걸맞은 대우를 해 주실 필요가 있어요.”
앙큼한 말에 라시드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럴게, 라는 듯.
* * *
라시드는 창가에 서서 시아나가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체구는 작고 다리 길이도 앙증맞은데 발이 정말 빠르네.’
마치 짧은 다리로 잽싸게 움직이는 다람쥐 같았다.
‘귀여워라.’
라시드는 키득거렸다.
그런 라시드를 바로 곁에서 바라보는 사람이 있었다.
호위 기사 솔이었다.
솔의 얼굴은 차마 못 볼 것을 본 사람처럼 일그러져 있었다.
솔은 라시드를 모신 세월이 길었다. 거기에 전쟁터까지 늘 함께였으니 라시드의 일생 대부분을 지켜보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피의 황태자’라는 별명과 달리 라시드는 온화했다.
불처럼 화내는 일도 없고 말투도 상냥했다.
하지만 겉모습만 그럴 뿐이었다.
‘사실은 인간으로서 뭔가 결여된 것이 있지 않나 싶을 만큼 냉정하시지.’
라시드는 사람에게는 일말의 애정이 없었다.
아무런 죄책감 없이 상대의 목을 벨 수 있을 만큼.
그런 라시드가 시아나와 함께 있을 때는 꼭 평범한 사람 같았다.
‘아니, 이쪽도 평범하다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지. 열여덟 살 먹은 남자가 저렇게 나사 하나 빠진 얼굴로 헤실거리는 경우는 많지 않으니까 말이야.’
솔은 복잡한 얼굴로 물었다.
“전하, 시아나 님이 그렇게 좋으십니까?”
라시드는 일말의 고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라시드는 눈을 내리깔고 말을 이었다.
“놀라울 정도야. 어쩜 저렇게 귀여울까.”
“…….”
“매일 맛있는 음식을 먹여 주고 싶어. 하품을 하면 품속에 안아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심심해하면 어깨 위에 올려 산책을 나가고 싶구나. 그럼 정말 즐거울 텐데.”
해사한 얼굴로 정신 나간 말을 내뱉는 주인을 바라보며 솔은 눈썹을 찡그렸다.
“시아나 님을 보면 하는 생각이 그게 다라고요?”
“그럼?”
라시드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솔을 바라보았다.
그것 말고 또 뭐가 있냐는 듯이.
저토록 애정이 뚝뚝 떨어지는 눈을 하고서 동물을 귀여워하는 것 같은 감정이 전부라니.
솔은 그 말을 쉽게 믿을 수 없어 물었다.
“한 가지 더 묻겠습니다, 전하. 혹시 시아나 님께서 궁을 나가고 싶다고 하시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갑작스러운 질문에 라시드의 눈빛이 변했다.
라시드가 싸늘해진 눈빛으로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냐.”
“그, 그러니까 가정을 해 보는 겁니다. 시아나 님께서는 원래 공주셨잖습니까. 그러니 말은 하지 않으셔도 당연히 시녀로 생활하는 것이 고달프실 테지요. 언젠간 성을 나가고 싶지 않으시겠습니까.”
“…….”
시아나는 라시드의 힘을 빌려 황궁의 시녀가 되었다.
그래서 시아나에게는 다른 시녀들에게는 없는 제약이 있었다.
시아나가 시녀를 그만두고 황궁에서 나가고 싶다면, 라시드의 허락이 필요했다.
솔은 그런 순간이 와도 흔쾌히 시아나를 보내 줄 것이냐고 묻는 것이다.
“…….”
라시드는 어느새 제 몸 위로 올라온 작은 동물 세 마리(흰 페럿, 다람쥐, 새)을 바라보았다.
라시드는 제 마음에 든 동물을 발견하면 애정을 쏟았다.
살뜰히 보살펴 주며 소중히 했다.
그러면서도 꼭 지키는 것이 있었다.
작은 동물들을 절대 속박하지 말 것.
라시드는 동물들의 목에 끈을 묶거나 궁의 창문을 닫아 둔 적이 없었다.
그들이 원하면 얼마든지 바깥세상으로 떠날 수 있도록.
그러니…….
라시드가 눈을 내리깔고 말했다.
“시아나가 궁 밖으로 나가길 원한다면 보내 줘야지.”
정말이요?
라고 물으려던 솔은 입을 꾹 다물었다.
라시드의 얼굴이 한껏 가라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아이고.’
괜한 말로 라시드의 기분을 언짢게 했다는 생각에 솔은 눈썹을 내렸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제가 말한 것이 어디까지나 ‘만약에’라는 가정이었다는 것이다.
‘시아나 님이 당장 황궁을 나간다고 하실 일은 없을 거야.’
시아나는 패망한 왕국에 대한 어떤 그리움도 내비친 적이 없었다.
자세한 사정은 모르겠지만 시아나는 제 나라에 큰 애정이 없는 게 분명했다.
게다가 시아나는 황궁에서 시녀로 지내는 것에 꽤 만족해하는 것 같았다.
‘모시는 공주님이 황태후의 예쁨을 받는 데다가 최단 기간에 중급 시녀로 승진까지 했으니 그럴 만하지.’
망국의 공주로서 죽거나 감옥에 갇힌 것보다야 훨씬 나은 상황이었다.
그러나 변수는 있었다.
예를 들어 누군가 찾아와 시아나를 공주로서 극진하게 모시겠다고 한다면…….
‘에이, 설마.’
솔은 불길한 상상을 애써 머릿속 너머로 밀어냈다.
* * *
제국 수도로 오는 길.
화려한 마차 안에는 두 남녀가 앉아 있었다.
‘미스틱 상단’ 상단주의 딸 캐롤라인과 그녀의 동생 키르안이었다.
구불거리는 오렌지색 머리카락을 가진 캐롤라인이 눈썹을 찡그렸다.
“키르안, 너 또 그걸 보고 있니?”
누나와 꼭 닮은 오렌지색 머리카락을 가진 키르안이 보고 있는 것은 회중시계 안에 꽂아 둔 작은 초상화였다.
초상화에는 동그란 얼굴과 순한 에메랄드색 눈동자를 가진 소녀가 그려져 있었다.
이제는 멸망한 왕국의 공주, 시아나였다.
캐롤라인이 혀를 쯧, 차며 말했다.
“이제 그만 잊어. 아실론드 왕국이 멸망하는 날 시아나 공주는 죽어 버렸잖아.”
키르안이 고양이처럼 날카로운 눈을 부릅떴다.
“시아나 공주님은 죽지 않았어!”
“그래. 시체가 발견되지는 않았지.”
공식적으로 시아나 공주는 행방불명 상태였다.
하지만 캐롤라인은 시아나 공주가 사망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왕도 제대로 도망치지 못하고 죽었잖아. 연약한 공주라면 말할 것도 없지.’
하지만 동생 키르안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아실론드 왕국에 사람까지 풀어 시아나 공주를 찾았지. 성과는 전혀 없었지만.’
캐롤라인은 한숨을 내쉬며 바보 같은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동생을 바라보았다.
“키르안, 네가 시아나 공주에게 특별한 감정을 가진 것은 알겠어. 하지만…….”
캐롤라인은 저를 노려보고 있는 키르안의 미간을 콕 찍으며 말했다.
“우리는 이곳에 놀러 온 것이 아니야. 연회에 참석하여 제국 황실과 친분을 다지기 위해 온 거라고.”
“…….”
“시아나, 시아나, 거리다가 곤란한 상황이라도 만들면 가만두지 않을 거야. 알겠냐?”
누나의 말에 키르안은 사나운 고양이처럼 이를 으득거렸다.
키르안은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캐롤라인의 손을 밀치며 소리쳤다.
“걱정 마. 그런 실수 할 만큼 얼이 빠지진 않았으니까!”
매섭게 이야기를 하는 와중에도 시아나의 사진은 두 손에 꼭 쥐고 있었다.
캐롤라인은 답이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키르안은 그런 누나에게서 시선을 돌리며 다시 회중시계 안에 든 초상화를 바라보았다.
엄지손가락만큼 작은 초상화 속에 있는 시아나는 빙긋이 웃고 있었다.
아무 걱정도 없는 것처럼 해사하게.
바짝 날이 선 고양이 같던 키르안의 얼굴이 이내 슬픔으로 가득 찼다.
‘시아나 공주님,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거예요.’
키르안은 시아나가 살아 있다고 믿었다.
반은 공주님이 절대 죽었을 리 없다는 바람이었고, 반은 감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키르안의 감은 놀랄 만치 잘 맞는 편이었다.
누나인 캐롤라인조차 ‘바보에게도 뛰어난 것이 하나는 있구나.’라며 인정할 정도였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도 머리카락 하나 보이지 않으니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전쟁 통에 사악한 놈들에게 끌려가 노예로 팔려 가기라도 한 건 아닐까.’
누더기 옷을 입고 상처투성이가 되어 눈물을 뚝뚝 흘리며 일하는 시아나를 떠올리는 순간, 키르안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시아나 공주님!’
* * *
냠냠.
시아나는 행복한 얼굴로 알록달록한 과일이 꽂혀 있는 꼬치를 우물거렸다.
시아나가 있는 곳은 황궁 근처의 거리에 있는 작은 노점이었다.
평민들이 애용하는 이곳의 음식은 황궁의 음식과 비교하면 재료도 조리법도 소박하기 짝이 없었다.
그럼에도 비교할 수 없는 맛이 났다.
양념이 듬뿍 묻은 고깃덩어리를 우물거리며 시아나가 중얼거렸다.
“궁의 음식보다 훨씬 맛이 자극적이라 그런가.”
물론 그것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시아나의 주위에서 식사를 하는 사람들은 입가에 소스를 묻힌 채 까르르 웃고 있었다.
허리를 곧게 펴고 엄격한 예법을 지켜야 하는 황궁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이것도 맛의 비결 중 하나일 거야.’
시아나는 꽉 찬 두 볼을 우물거렸다.
식사를 마친 시아나는 거리를 걷기 시작했다.
오늘 시아나가 황궁 밖으로 나온 이유는 장미꽃 연회 때 입을 드레스와 액세서리를 사기 위해서였다.
진즉 라시드를 떼어내긴 했으나 혼자 나오는 것은 쉽지 않았다.
아리스가 시아나를 꽉 껴안고 들러붙었기 때문이다.
[네게 맛있는 것을 사 주려고 할마마마께 용돈을 잔뜩 받았단 말이야.]
니니와 나나도 시아나의 양팔을 붙잡고 소리쳤다.
[시아나 님이 드레스 고르는 것을 도와주려고 최신 드레스 유행을 싹 다 공부했어요.]
[저도 드레스에 딱 맞는 액세서리를 엄청나게 공부했어요.]
그러니까 같이 가!
그러나 시아나는 세 사람의 동행을 단호하게 거절했다.
[저는 장미꽃 연회 때 제 정체를 숨기고 황태자 전하의 파트너로 나설 생각이에요. 그러려면 드레스도 액세서리도 비밀리에 준비해야 하죠. 세 사람과 함께 움직이면 너무 튀어요.]
너무 맞는 말이라 아리스와 니니, 나나는 더는 조를 수가 없었다.
세 사람은 오리처럼 입을 쭉 내밀고는 꾸역꾸역 손을 흔들며 시아나를 보내 주었다.
‘그 모습을 떠올리면 마음이 아프긴 하지만 어쩔 수 없었어.’
작게 한숨을 내쉰 시아나가 도착한 곳은 간판이 없는 작은 드레스 숍이었다.
큰 거리에 늘어서 있는 휘황찬란한 드레스 숍을 뒤로하고 이곳을 선택한 이유가 있었다.
이곳은 드레스와 액세서리, 구두까지 패키지로 준비할 수 있는 숍이었다. 번거롭게 이곳저곳을 다니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었다.
더 큰 이유도 있었다.
‘이곳은 이용하는 고객에 대한 정보를 철저하게 숨겨 주는 시크릿 숍이야. 황태자 전하의 비밀 파트너가 드레스를 맞추기에 딱이란 말이지.’
시아나는 문을 열고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가게는 넓지는 않았지만 고급스러운 물건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황금으로 장식된 샹들리에, 수없이 많은 보석이 박혀 반짝이는 드레스.
‘마치 황후의 드레스 룸 안에 들어온 것 같은 느낌이네.’
가게를 살피는 시아나를 향해 직원이 다가왔다.
직원의 표정은 조금 굳어 있었다.
그도 그럴 게 이곳을 이용하는 다른 고객들과 시아나의 차림새가 너무 달랐기 때문이다.
화장기 없는 얼굴에 액세서리 하나 달지 않았다.
게다가 초라한 드레스까지.
‘딱 봐도 귀족은 아니야. 돈 많은 평민도 아니고. 그런 여자가 주제도 모르고 우리 가게에서 드레스를 맞춘다고?’
라고 생각하고 있겠구나.
직원의 머릿속을 유추한 시아나는 눈썹을 내렸다.
‘유쾌하진 않지만 어쩔 수 없지. 지금 내 모습이 이곳과 어울리지 않는 건 사실이니까.’
그래도 시아나를 내쫓지 않은 것만으로도 직원은 최소한의 선을 지킨 셈이었다.
그래서 시아나는 불쾌해하는 대신 웃으며 말했다.
“드레스와 액세서리, 구두까지 세트로 맞추고 싶어요.”
“……비용은 어느 정도 생각하고 계시는지요?”
이곳은 일류 디자이너가 최고의 드레스를 만드는 숍이었다.
거기에 고객에 대한 비밀 유지 비용까지 추가로 붙어 일반 숍보다 가격이 배로 나갔다.
시아나는 문제없다는 듯 말했다.
“제 예산은 10,000골드예요.”
“……!”
순간 직원은 돈 뭉텅이로 뒤통수를 후려 맞은 얼굴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시아나가 방금 입에 담은 금액은 최고급 드레스 세트 5벌은 살 수 있을 만한 어마어마한 가격이었기 때문이다.
부릅뜬 눈으로 저를 바라보는 직원을 향해 시아나가 말을 덧붙였다.
“참고로 훔친 것 아니고 위조 화폐도 아니랍니다. 금액의 반을 선불로 내고 갈 테니 걱정이 되거든 확인해 보세요.”
“아, 아닙니다. 절대 고객님께 그런 불손한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뻥이었다.
직원은 시아나가 ‘표 안 나게 미친 여자’나 ‘순진한 얼굴을 한 사기꾼’ 둘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직원의 혼란은 깊어졌다.
드레스를 맞추는 시아나의 모습 때문이었다.
“드레스 원단은 미카도산 실크가 좋겠어요. 우아하면서도 고급스러운 느낌을 주니까요. 부드러워서 피부에 닿았을 때 느낌이 가장 좋기도 하고요.”
“드레스와 함께 착용할 목걸이는 이것밖에 없나요? 아드리안에서 나는 하얀 진주나 센터리안 다이아몬드로 만든 목걸이가 있으면 좋을 것 같은데…….”
“기, 기다리십시오.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직원은 황급히 몸을 움직여 다른 보석함을 가져다주었다.
대부분의 손님은 처음 보여 주는 보석함에 있는 보석들로 선택하였기에 잘 꺼내지 않는 보석함이었다.
반짝이는 보석을 꺼내어 목 위에 대어 본 시아나가 말했다.
“음. 하얀 진주가 마음에 드네요. 내 피부색과도 어울리고 조명을 받으면 다이아몬드보다 빛나니까요. 디자이너님의 생각은 어떠세요?”
한 발짝 떨어진 곳에서 입을 벌리고 시아나를 바라보고 있던 디자이너는 한 박자 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
디자이너의 옆에 있던 직원은 이제 시아나가 미친 여자라든가, 사기꾼일 것이라는 생각은 버렸다.
그런 자가 저만치 드레스와 보석에 능숙할 리가 없었기 때문에.
직원이 디자이너에게 속삭였다.
“선생님, 도대체 정체가 뭘까요?”
수십 명의 귀부인을 상대한 전력이 있는 디자이너가 확신 어린 얼굴로 말했다.
“저 정도로 보석을 꿰고 있으려면 적어도 이름 높은 대귀족인 것이 분명해. 그러니 실수 없이 깍듯이 대하도록 해라.”
직원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시아나가 처음 가게에 들어섰을 때 퉁명스럽게 굴었던 것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으아악. 어떡하지. 저런 큰 손님이 아까 일을 문제 삼기라도 하면 그 즉시 난 해고야!’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혼란스러운 직원과 달리 시아나는 태평스러운 고민을 하고 있었다.
‘한껏 사치스럽게 드레스를 맞추었는데도 돈이 남네.’
시아나에게 라시드의 파트너 일을 부탁한 솔은 의뢰비 겸 준비 금액으로 넉넉한 돈을 주었다.
워낙에 큰돈이라 받은 돈의 반 이상은 연회 준비를 위해 쓰려고 했는데 그조차 쉽지가 않았다.
‘그래도 다 쓰고 가야지.’
시아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숍에 진열되어 있던 머리핀을 몇 개 골랐다.
아리스와 니니, 나나, 츄츄를 위한 것이다.
잠시 고민하던 시아나는 머리핀을 두 개 더 샀다.
안젤리나 황비와 그레이스 황녀의 것이다.
‘일개 시녀가 고귀한 분들께 선물을 드리는 게 이상해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드리고 싶어.’
자신을 좋아해 주는 그들에게 고마움을 표하고 싶었으니까.
레이시스의 선물은 안젤리나의 머리핀과 색이 똑같은 레몬색 브로치를 골랐다.
‘그래도 돈이 남네.’
땜빵 때우는 느낌으로 솔에게 줄 브로치까지 골랐다.
처음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깍듯해진 직원이 말했다.
“이 브로치까지 구입하시면 맞추신 드레스 세트를 포함하여 지불하실 금액이 총 10,000골드가 됩니다.”
겨우 목적을 달성한 시아나가 방긋 웃었다.
* * *
긴 쇼핑을 끝내고 돌아온 다음 날, 시아나는 선물을 배달했다.
아리스는 머리핀을 보더니 눈썹을 찡그렸다.
“뭘 이런 걸 사 왔어. 돈도 없는 시녀가.”
저 돈 많아요. 솔 님이 엄청 챙겨 주셨어요.
그러나 시아나는 그 말을 할 수 없었다.
아리스가 울 것 같은 얼굴로 시아나를 꼭 껴안았기 때문이다.
“네가 이런 선물을 주기 위해 얼마나 큰 희생을 했는지 모를 거라 생각하지 마. 너의 마음을 영원히 기억할 거야.”
“…….”
아리스의 말만큼 엄청난 의미를 부여한 선물은 아니었지만, 어찌 되었건 소중하게 간직하겠다는 말이었기에 시아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니니와 나나의 반응도 만만치 않았다.
니니와 나나는 두 손 위에 머리핀을 올리고 흐느끼고 있었다.
“흑흑, 저 이렇게 부티 나는 머리핀 처음 받아 봐요.”
“흑흑, 나도. 이런 건 공주님들이나 하는 줄 알았는데.’
니니와 나나는 휙 하고 고개를 돌려 시아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시아나 님, 이 은혜, 평생 갚도록 할게요.”
“얘는. 평생이 뭐니! 죽은 후에도 갚아야지.”
“아니야. 죽은 후에 갚는 것도 부족해 보여. 다음 생에 태어나서도 갚자.”
“그래. 다음 생의 그다음 생까지 갚자.”
환생 100번째까지 은혜를 갚을 기세인 쌍둥이 자매를 향해 시아나는 하하 웃었다.
이제는 익숙해져서 니니와 나나가 무슨 말을 해도 당황스럽지 않았다.
선물 배달은 여기에서 끝이 아니었다.
오랜만에 안젤리나 황비의 궁을 찾았다.
시아나에게 머리핀을 받은 안젤리나가 소녀처럼 해사하게 웃었다.
“세상에. 참으로 예쁘구나.”
안젤리나의 옆에 있던 레이시스는 시아나가 준 브로치를 테이블 위에 놓고 슥슥 그리기 시작했다.
알아들을 수 없는 혼잣말을 콧노래처럼 흥얼거리며.
안젤리나가 그 모습을 보더니 쿡쿡 웃었다.
“레이도 선물이 마음에 든 모양이야. 챙겨 주어서 고맙다, 시아나.”
“아닙니다. 기쁘게 받아 주시니 제가 다 기쁠 따름이어요.”
짧은 인사를 끝낸 시아나가 향한 곳은 그레이스 황녀의 궁이었다.
땀 흘리며 운동을 하던 그레이스와 츄츄는 시아나를 보더니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여기까지 웬일이야?”
시아나는 그레이스와 츄츄에게 반짝이는 머리핀을 건넸다.
“이것을 드리려고 왔어요. 뇌물은 아니고요, 순수한 선물이랍니다.”
시아나의 장난스러운 말에 그레이스가 입꼬리를 올렸다.
“뇌물이라도 상관없다만, 선물이라니 더 기쁘구나.”
쿨한 그레이스의 반응과 달리 츄츄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공주님 것만 챙기면 되지 뭘 내 것까지 준비혔어.”
시아나가 제 머리 위에 꽂혀 있는 머리핀을 매만지며 말했다.
“츄츄, 너도 내가 정식 시녀가 되었을 때 선물을 주었잖아. 나도 진작 줬어야 하는데 너무 늦게 주어서 미안해.”
“그게 무슨 말이여! 친구끼리는 이딴 일로 미안하다는 거 아니여. 이 착한 시아나야!”
츄츄가 시아나를 꼭 껴안았다.
켁.
시아나는 츄츄의 빵빵한 근육 속에서 숨이 막혀 컥컥대며 숨을 뱉었다.
그레이스가 혀를 츳, 차며 츄츄의 목깃을 잡아당겼다.
놀랍게도 츄츄의 거대한 몸이 시아나에게서 가볍게 떼어졌다.
시아나가 눈을 깜빡거렸다.
‘공주님 힘이 정말 세시구나.’
이전에도 세긴 했지만, 점점 강도를 더해 가는 운동으로 그레이스의 힘은 괴력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탄탄한 근육이 붙은 팔로 머리를 쓸어 넘기던 그레이스가 생각난 듯 물었다.
“참, 시아나. 물어볼 게 하나 있는데…….”
“네. 말씀하셔요.”
“루비궁에 라시드 오라버니가 자주 방문하시지?”
“네.”
“그럼 너 혹시 장미꽃 연회 때 라시드 오라버니의 파트너로 오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 있니?”
그럼요. 바로 저랍니다.
라고 말할 수 없어서 시아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시아나가 라시드의 파트너로 참석하는 것은 일급비밀이었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아는 이는 아리스와 니니, 나나밖에 없었다.
‘못된 마음을 품고 속이는 것은 아니니 이해해 주세요, 황녀 저하.’
시아나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말을 돌렸다.
“왜 그런 것을 여쭤보세요? 황녀 저하께서는 황태자 전하께 큰 관심이 없으셨잖아요.”
“그렇긴 하지. 그런데 그 문제로 요즘 사교계가 무척 시끄러워서 말이야. 관심을 안 가질 수가 없다니까.”
약혼녀도, 친하게 지내는 여인도 없는 황태자.
수많은 귀족 여인들은 젊은 황태자의 파트너 자리를 노리고 편지를 보냈다.
우아한 레이디의 교양을 담은 편지부터, 절절한 마음을 담은 편지까지.
그 수가 무려 100명이었다.
어마어마한 숫자에 시아나가 눈을 깜빡거렸다.
“백, 백 명이요?”
“그래. 대략 그 정도래.”
“…….”
“그런데 놀라운 건 모든 여인들에게 같은 답이 돌아왔다는 거지.”
황태자 라시드는 함께할 파트너가 있다.
그 말에 사교계는 난리가 났다.
“다들 모이면 오라버니의 파트너가 과연 누구인지에 대해서만 이야기를 한다니까.”
“…….”
“오라버니의 파트너가 누구인지는 몰라도 장미꽃 연회 때 단단히 각오를 해야 할 거야. 안 그러면 사람들의 시선과 귀족 여인들의 질투에 휩싸여 울음을 터뜨려 버릴 테니까.”
그레이스가 시아나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갑자기 왜 그래? 얼굴이 굳었어.”
“하하. 황태자 전하의 인기가 놀라워서 그래요.”
정말이었다.
‘전하의 외모가 대단한 것은 인정해. 그런 얼굴은 흔치 않지. 황궁에서도 시녀들에게 인기가 엄청 나잖아.’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파트너가 되고 싶다고 줄을 선 귀족 여인이 100명이나 된다는 것은 너무 심했다.
시아나는 기가 찬 얼굴로 생각했다.
‘도대체 전하께서 귀족 여인들에게 얼마나 여지를 주고 다녔기에 그러냐고!’
* * *
‘화난 병아리 같다.’
라고 라시드는 시아나를 보고 생각했다.
라시드가 물었다.
“왜 그래. 무슨 일이라도 있니?”
“아니요, 아무 일도 없는데요.”
“그래? 그런데 왜 그렇게 입이 삐죽 나와 있을까.”
“제 입술은 원래 이렇게 생겼어요.”
시아나의 새침한 대답에 라시드는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 모습에 시아나는 미간에 눈썹을 모았다.
‘그래. 저런 식으로 사람들한테 웃고 다니니까 전하 옆에 서 보겠다고 줄을 서는 여인들이 100명이나 되지.’
어쩐지 오늘따라 아름다운 얼굴로 웃는 모습이 영 꼴 보기가 싫었다.
그래서 시아나는 휙 하고 고개를 돌렸다.
시아나의 시선이 향한 곳은 라시드의 옆에 서 있던 호위 기사 솔이었다.
“참, 솔 님. 드릴 게 있어요.”
“네? 제게요?”
예상 못했던 말에 솔이 눈을 크게 떴다.
고개를 끄덕인 시아나가 솔에게 건넨 것은 반짝이는 브로치였다.
이게 도대체 뭐냐는 듯, 솔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 이걸 왜 제게…….”
“특별한 의미로 드리는 것은 아니니 부담 갖지 마세요. 솔 님께서 주신 준비금이 남아서 산 거니까요.”
“그, 그렇지만…….”
솔의 굳은 얼굴을 보고 시아나는 손을 내저었다.
“정말이에요. 솔 님 것만 사지도 않았어요. 저를 아껴 주시는 분들과 친한 동료들 것도 하나씩 골랐답니다. 그러니 편하게 받으세요.”
아니오! 절대로 편하게 받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전하께서 지금 저를 죽일 것처럼 쳐다보시고 계시니까!’
솔은 희게 질린 얼굴로 라시드를 바라보았다.
라시드는 얼핏 평온한 얼굴로 솔과 시아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일평생 라시드를 모셨던 솔은 알 수 있었다.
라시드가 어마어마하게 불쾌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솔은 울고 싶었다.
‘시아나 님, 왜 가만히 있던 제게 이런 시련을 주시는 겁니까!’
혹시 나도 모르는 새에 시아나 님께 잘못한 것이 있는 것일까. 그래서 나를 죽이려는 건가.
만약 그런 음모라면 대단히 효과적인 수라고 할 수 있었다.
그만치 지금 등 뒤에서 느껴지는 라시드의 기운이 어마어마했다.
시아나는 전혀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지만.
어떻게든 살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솔은 시아나를 바라보았다.
시아나 님, 당연히 전하의 선물도 있겠지요?
요 작은 브로치보다 훨씬 더 크고! 반짝이는! 좋은 선물 말입니다.
그러나 솔은 그 말을 하지 못했다.
시아나가 라시드를 보며 말을 꺼냈기 때문이다.
“전하,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장미꽃 연회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엄청나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그런 것 같더군.”
“사람들이 잔뜩 기대를 가지고 쳐다볼 텐데 볼품없는 춤을 출 수는 없죠. 최고의 춤을 보여 줄 거예요.”
시아나가 라시드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니 어서 연습을 시작해요.”
“…….”
어딘가 뾰족해 보이는 시아나의 얼굴을 바라보며 라시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주 본 두 사람을 바라보던 솔은 에라 모르겠다, 하며 연회장 바깥으로 도망치듯 나가 버렸다.
춤 연습을 할 때는 괜히 신경 쓰이지 않게 나가 있으라고 했던 라시드의 명령이 이토록 고마운 적은 처음이었다.
드넓은 연회장 안에는 기묘한 적막히 흘렀다.
평소와 달리 라시드와 시아나 사이의 분위기가 싸늘했기 때문이다.
먼저 정적을 깬 것은 라시드였다.
“나한테 뭔가 화가 났어?”
라시드의 질문에 시아나는 정해진 답처럼 아니라고 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사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시아나가 눈썹을 모으며 물었다.
“화가 난 게 아니고요. 황당해서 그래요.”
“뭐가?”
시아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전하께서 100명의 귀족 여인들에게 파트너 제의를 받았다는 게 사실인가요?”
라시드가 예상 못한 질문이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세상에!’
시아나는 경악한 얼굴로 라시드를 쳐다보았다.
라시드의 별명은 ‘피의 황태자’였다.
그래서 그가 아무리 아름다운 외모와 대단한 힘을 가졌다 해도, 그에 대한 연심은 바라보는 것에서 끝났다.
적어도 황궁의 시녀들은 그랬다.
그래서 시아나는 귀족 여인들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아무리 라시드가 매력적인 남자라 한들, 제 목숨이 더 소중할 테니까.
그런데 그토록 대담하게 파트너 신청을 한 귀족 여인이 백 명이라니.
“의외로 전하께서 귀족 여인들에게 무~척 친절하게 대해 주셨나 봐요. 그러니 전하를 무서워하지도 않고 그런 편지를 보내왔겠지요.”
마음 한편에서는 반박하길 바라고 던진 말이었건만 라시드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귀족 여인들은 제 부모들과 달리 나를 무서워하지 않는 것 같더군. 나를 추앙하는 모임도 있다고 들었어. 남몰래 나의 초상화를 가지고 다니고, 나에 대한 노래를 만들어 부르기도 한다더군.”
“하!”
시아나는 기가 막힌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그런 시아나를 보며 라시드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앞의 말은 전혀 사실이 아니야. 나는 귀족 여인들에게 친절하게 대한 적 없어. 아니, 애초에 만남조차 드물었지.”
“…….”
“말했잖아. 나는 열세 살 때부터 전쟁터에 있었다고. 귀족 여인들과 시시덕거릴 여유 따위는 없었어.”
입을 꾹 다문 시아나를 향해 라시드가 허리를 숙였다.
시아나의 귓가에 입을 댄 라시드가 속삭였다.
“그러니까, 시아나. 내가 친절하게 대하는 여자는 오직 너뿐이야.”
“……!”
나지막한 목소리에 시아나의 얼굴이 잘 익은 토마토처럼 새빨개졌다.
시아나는 간질거리는 귀를 손으로 가리며 라시드를 바라보았다.
시아나와 눈이 마주친 라시드가 해사하게 웃고 있었다.
조금 전에 한 말이 진심이라 듯 천진한 얼굴로.
그 얼굴을 보자 시아나는 새삼 부끄러움이 밀려들었다.
‘내가 어떻게 됐었나 봐. 전하께서 귀족 여인들에게 인기가 많다 한들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라고.’
아, 창피해.
시아나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고개를 숙인 시아나를 내려다보며 라시드는 참을 수 없는 깜찍함을 느꼈다.
‘귀여워라.’
하지만 귀여운 것은 귀여운 것이고, 확인해야 할 것은 확인해야 한다.
라시드가 입을 열었다.
“시아나, 기분은 풀렸어?”
“애초에 화가 난 게 아니라니까요. 그냥 좀 황당해서 여쭈어본 거라고 했잖아요.”
그래, 네가 그러고 싶다면 그렇다고 쳐.
라시드는 시아나의 궁색한 변명을 굳이 캐묻지 않았다.
“그럼 나도 하나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말씀하세요.”
“왜 나만 선물을 주지 않아?”
“……?!”
조금도 예상하지 못한 질문에 시아나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시아나를 내려다보는 라시드의 얼굴은 짐짓 심각했다.
“솔에게는 주었잖아. 다른 사람들에게도 주었다 했고.”
“…….”
“그런데 나만 주지 않는 건…… 내가 싫어서야?”
시아나는 말도 안 된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그럼 왜…….”
라시드의 눈빛에 작은 원망이 어렸다. 꼭 혼자만 요정에게 선물을 받지 못한 어린아이 같았다.
‘그런 거 하나도 신경 쓰지 않을 줄 알았는데.’
시아나는 라시드의 모습에 놀라며 대답했다.
“전하의 선물은 일부러 사지 않았어요. 브로치보다 다른 것을 더 좋아하실 것 같아서요.”
“내가 좋아하는 게 뭔데?”
“그건…….”
시아나는 선뜻 대답하려다가 힐끗 라시드를 쳐다보았다.
방금 전까지 풀죽었던 표정은 한껏 기대감 가득한 얼굴로 바뀌어 있었다.
어째서일까.
‘저런 얼굴을 보자니 순순히 알려 주고 싶지 않잖아.’
시아나가 손가락을 들어 입술 위로 올렸다.
“때가 되면 알려 줄게요. 그때까지는 비밀이에요.”
라시드의 입술이 삐죽 나왔다.
오늘 황태자궁에 막 도착했을 때의 시아나처럼.
* * *
어전.
황제를 대신하여 황금 의자에 앉은 라시드는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긴 은색 속눈썹이 반쯤 내려앉은 보라색 눈동자는 쉽게 범접할 수 없는 고혹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 모습을 본 시종들이 살짝 붉어진 얼굴로 수군거렸다.
“황태자 전하께서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시기에 저렇게 심오한 표정을 짓고 계신 걸까요.”
“그러게 말입니다. 이제 곧 황궁에 도착하는 손님을 어떻게 맞으실지 생각이 많으신가 봅니다.”
그러나 다 정답이 아니었다.
라시드가 생각하고 있는 것은 ‘시아나가 내게 준다는 선물이 뭘까’였다.
‘내가 좋아하는 선물이라고 했지.’
그것이 유일한 힌트였건만 라시드에게는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웃기게도 그 힌트에 대해 생각나는 답은 ‘시아나’뿐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럴 리가 없잖아.’
라시드는 의외로(?) 현실 파악을 잘 했다.
그럼 어떤 선물이 있을까.
쭉쭉이(흰 페럿)에게 달아 줄 리본인가, 냠냠이(다람쥐)가 좋아하는 간식인가, 아니면 짹짹이(새)의 장난감일까.
고민하는데 문밖에서 시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하, 미스틱 상단의 대표가 도착했습니다.”
제 상념을 방해하는 소리에 라시드가 미간을 찌푸렸다.
라시드의 옆에 있던 호위 기사 솔이 그 표정을 기민하게 알아차리며 재빨리 말했다.
“전하, 미스틱 상단은 희귀한 마력석을 제작하여 판매하는 곳입니다. 워낙에 특별한 물건을 취급하는 상단인지라 황제 폐하께서 특히 아끼시는 곳이지요.”
귀찮다고 쫓아내지 말고 적당히 대우해 주라는 말이었다.
라시드는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귀찮긴 하지만, 어쨌건 지금 라시드는 황제의 대리인이었다.
적어도 돌아온 황제가 분노할 상황은 만들지 않아야 했다.
잠시 후, 어전 안으로 두 남녀가 들어섰다.
선명한 오렌지색 머리카락을 가진 캐롤라인과 키르안이었다.
캐롤라인은 황좌에 앉아 있는 라시드를 보며 눈을 빛냈다.
‘어쩜. 소문으로 듣기는 했지만 정말 엄청난 미남이잖아.’
옆에 있던 키르안도 눈을 빛냈다.
‘뭔 남자가 저렇게 요사스럽게 생겼냐.’
각기 다른 감상을 가진 남매는 라시드를 향해 다가갔다.
캐롤라인이 먼저 두 손으로 치맛자락을 올리며 허리를 숙였다.
“고귀하신 황태자 전하께 미스틱 상단주의 장녀, 캐롤라인 인사드립니다. 다가올 장미꽃 연회에 참석하기 위해 제국을 찾았습니다. 이렇게 전하께서 친히 맞아 주시니 더 없는 영광입니다.”
무슨 소리. 나야말로 이렇게 먼 길을 와 주어 기쁘군, 아름다운 아가씨.
따위의 틀에 박힌 느끼한 인사가 나와야 할 타이밍이건만, 라시드는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까닥였다.
캐롤라인은 라시드를 본 지 10초 만에 동생과 똑같은 생각을 했다.
‘역시 과하게 잘생긴 것들은 재수가 없어.’
그러나 캐롤라인은 그 마음을 표내 지 않았다.
애초에 그녀가 여기까지 온 것은 남자의 호감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제국 황실과의 관계를 돈독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캐롤라인은 영업용 미소를 띠며 옆에 있던 남동생의 옆구리를 쳤다.
‘어서 인사 안 하고 뭐 해.’
그러나 누나의 마음과 달리 키르안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라시드를 노려보고 있었다.
‘저놈이 시아나 공주님의 고국인 아실론드 왕국을 멸망시킨 놈이란 말이지.’
그 자체에는 큰 유감이 없었다.
라시드가 아니었어도 아실론드 왕국은 언제 망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썩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놈이 왕국을 쑥대밭으로 만든 탓에 시아나 공주님이 실종되어 버렸잖아.’
그 점이 화가 났다.
이성적으로 황태자를 대해야지, 라고 다짐했던 것을 잊어버릴 만큼.
‘얘가 미쳤나!’
눈으로 황태자를 욕하는 남동생을 본 캐롤라인은 기겁했다.
그렇게 티 내지 말라고 했는데도, 저 바보는 기어코 그 말을 잊어버린 모양이었다.
단상 위에 있는 황태자가 키르안의 되바라진 눈빛에 대해 언급을 하기 전에 캐롤라인이 선수를 쳤다.
“용서하십시오, 전하!”
“…….”
“실은 제 동생이 오랜 시간 마음에 두었던 아가씨가 행방불명되었거든요. 그래서 요즘 제정신이 아니랍니다.”
그러나 필사적인 대답이 무색하게 라시드는 키르안이 무슨 눈빛을 하건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라시드의 머릿속에는 며칠 전부터 시아나가 준비한 선물이 무엇인지에 대한 생각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보다 못한 솔이 라시드에게 눈짓을 했다.
‘아무리 황제 대행이라도 최소한의 대화는 하셔야죠!’
귀찮게.
라시드는 한숨을 내쉬며 대충 아무 말이나 던졌다.
“정신이 나갈 정도로 미인이었나?”
키르안은 반항적인 눈빛으로 대답했다.
“네. 그분은 희고 동그란 얼굴에 순한 눈망울을 가지고 있습니다. 꼭 밀가루로만 만든 빵처럼 소박하고 사랑스러운 분이죠.”
누군가를 떠올리게 하는 키르안의 말은 라시드를 반응하게 만들었다.
라시드가 입꼬리를 올리며 중얼거렸다.
“취향이 제법 훌륭하구나.”
“……?!”
동생의 정신 나간 소리에 얼굴이 창백해졌던 캐롤라인은 더 괴랄한 말을 하는 라시드를 기가 찬 얼굴로 바라보았다.
그런 캐롤라인을 사이에 두고 키르안이 말했다.
“피에 굶주린 어떤 나쁜 놈 때문에 잃어버리고 말았지만 꼭 찾아내고야 말 겁니다. 다시는 그 손을 놓치지 않을 거예요.”
라시드가 두 눈을 내리깔며 말했다.
“그대의 바람이 이루어지길 기도하지.”
뭐, 그러시든지.
키르안이 불량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까닥였다.
두 사람 사이에 있던 캐롤라인은 똥 씹은 얼굴로 생각했다.
뭐야, 이 미친놈들은.
어전을 나오자마자 캐롤라인은 키르안의 등짝을 후려쳤다.
“야, 너 진짜 죽고 싶어? 내가 황태자 전하께 정신 나간 소리 하지 말라고 했지!”
키르안은 누나의 매서운 손길을 피하며 눈썹을 찡그렸다.
“아, 내가 뭘!”
키르안은 황태자에게 욕도 하지 않았다. 멱살도 잡지 않았다.
“나는 황태자에게 깽판치고 싶은 것도 참고 (나름대로)예의를 차린 거라고.”
캐롤라인이 지끈거리는 이마를 잡았다.
그 개소리와 껄렁한 태도가 예의를 다했던 것이라니.
‘그나마 황태자도 얘랑 똑같은 미친놈이었기에 망정이지.’
그게 아니었다면 제아무리 황제가 아끼는 미스틱 상단주의 아들이라고 해도 당장 목이 잘렸을 것이다.
캐롤라인은 한숨을 내쉬더니 키르안을 노려보았다.
“너, 장미꽃 연회만 끝나면 당장 내 눈앞에서 꺼져. 시아나인지 시어머니인지 찾으러 떠나라고. 괜히 짜증 나게 얼쩡거리지 말고.”
누나의 서슬 퍼런 협박에 키르안은 흥, 하고 콧바람을 내뿜었다.
“걱정 마.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니까.”
장미꽃 연회에 참석하면 상단주인 어머니가 시킨 심부름이 끝난다.
그 후, 키르안은 상단으로 돌아가지 않고 본격적으로 시아나를 찾아볼 생각이었다.
키르안은 목에 걸린 회중시계를 열어 시아나의 초상화를 바라보았다.
‘시아나 공주님, 공주님이 어디에 있든 꼭 찾아낼게요. 그러니 조금만 더 기다려 주세요.’
애틋한 얼굴로 시아나를 그리워하는 키르안은 꿈에도 알 수 없었다.
한 발짝 떨어진 곳에서 시아나가 종종걸음으로 자신을 지나쳤다는 사실을.
* * *
황태자궁의 연회장.
라시드와 시아나는 마주 보며 인사를 했다.
오늘의 춤 연습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시아나는 살짝 숙였던 허리를 펴고 라시드와 눈을 마주쳤다.
“고생하셨습니다, 전하.”
라시드가 두 눈을 부드럽게 휘었다.
“너야말로.”
해사한 미소에 흠, 하고 목소리를 가다듬은 시아나가 말했다.
“춤 연습은 오늘이 마지막이에요. 동작과 박자를 잊어버리지 않게 신경 써 주세요.”
그 말에 라시드의 웃던 얼굴이 대번 시무룩해졌다.
시아나는 내일부터 황태자궁에 오지 않는다.
장미꽃 연회가 삼 일 뒤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연회가 얼마 남지 않은 만큼 라시드는 바빴다.
연회 전 미리 도착하는 손님들의 인사를 받아야 했고, 연회의 준비 사항도 체크해야 했다.
그럼에도 라시드는 버림받기 싫어 매달리는 고양이처럼 측은한 얼굴로 말했다.
“꼭 이래야 해? 아무리 바쁘다고 해도 널 만날 시간은 있어.”
그러나 시아나는 얄짤없었다.
“네, 꼭 이래야 해요. 눈코 뜰 새도 없이 바쁘실 전하를 번거롭게 하고 싶지 않아요. 그리고 제게도 연회 준비를 위한 시간이 필요하고요.”
사실이었다.
이만한 규모의 연회에 참석하려면 여인은 준비해야 할 것이 많았다.
시아나는 특히 더 그랬다.
장미꽃 연회 때 누구도 시아나의 정체를 알 수 없는 모습으로 나타날 계획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을 떠올린 라시드는 새삼 궁금해졌다.
지금 제 앞에 있는 동그랗고 귀여운 시아나가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 전혀 상상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면을 쓰는 것도 아니고 마법사의 힘을 빌리는 것도 아니라고 했지. 그럼 도대체 어떻게 다른 사람처럼 변한다는 거지?”
시아나가 입꼬리를 올렸다.
깜짝 선물을 준비한 어린애처럼 짓궂은 미소였다.
“삼 일 후에 있을 장미꽃 연회 때 보시면 아시겠지요.”
“…….”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는 라시드를 향해 시아나가 치맛자락을 들어 인사했다.
“그럼 그날 뵙겠습니다, 전하.”
시녀가 아닌 황태자의 파트너로.
* * *
장미꽃 연회 당일.
이른 아침 일어난 시아나는 창문을 열어 시원한 공기를 마셨다.
지금 시아나가 있는 곳은 궁밖에 있는 저택이었다.
시아나의 요청으로 호위 기사 솔이 마련해 준 아지트였다.
보다 완벽하게 황태자의 비밀 파트너가 되기 위한 수였다.
‘루비궁에서 연회장으로 바로 가는 것보다는, 궁 밖에서 마차를 타고 연회장으로 가는 편이 더 자연스럽게 외부에서 온 손님처럼 보일 테니까.’
시아나는 팔을 쭉 뻗으며 기지개를 켰다.
오후에 있는 연회에 참석하기 위해서는 지금부터 준비해야 한다.
달칵.
문을 열고 두 여인이 들어왔다.
시아나의 치장을 도와주기 위해 함께 온 니니와 나나였다.
“일어나셨군요, 시아나 님.”
“식사는 어떻게 하시겠어요?”
시아나가 고개를 저었다.
“아침은 생략할게요.”
오늘 하루만큼은 꽉 조여지는 코르셋과 풍성한 페티코트 때문에 화장실 가기도 힘들 테니 아무것도 먹지 않는 편이 나았다.
니니와 나나 뒤에 있던 아리스가 중얼거렸다.
“배고프겠다.”
시아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공주님, 벌써 일어나셨어요?”
아직 이른 아침이었다.
늦잠꾸러기 공주님은 한창 잠을 잘 시간이었다.
잠옷 차림의 아리스가 화장대 옆에 있는 소파에 털썩 주저앉으며 말했다.
“말했잖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볼 거라고.”
딱히 시아나를 도울 재주가 없는 아리스가 이곳까지 함께 온 것은 오로지 시아나가 꾸미는 모습을 구경하기 위해서였다.
“후후후, 나 이런 거 엄청 좋아해. 로맨스 소설에 나오는 초라한 여자 주인공이 빠밤 하고 화려한 공주님으로 변하는 거!”
시아나의 변신을 상상하며 눈을 반짝이는 아리스를 보며 시아나는 ‘못 말려.’ 하고 작게 웃었다.
시아나는 니니와 나나에게 종이를 건넸다.
“오늘 꾸밀 헤어스타일과 메이크업에 대해 간략하게 그림을 그려 보았어요.”
니니와 나나가 감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이렇게 꾸미면 시아나 님인 것을 알아볼 수 없겠네요.”
“드레스와도 무척 잘 어울리고요.”
시아나가 빙긋이 웃었다.
“그럼 시작해 볼까요?”
니니와 나나는 자신만만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먼저 니니가 화장용 붓을 손가락 사이에 끼고 빙그르르 돌렸다.
“메이크업은 니니에게 맡기세요. 이날을 위해 수도에서 가장 화장을 잘 하는 분께 화장을 배워 왔으니까요. 제 손이 닿으면 쭈글쭈글 할머니도 청초한 열다섯 살 소녀로 변한답니다.”
니니는 자신감 넘치는 말처럼 능숙한 손길로 메이크업을 시작했다.
확실히 근 한 달 동안 피부 관리에 심혈을 기울인 보람이 있었다.
시아나의 피부는 어린아이처럼 매끄러워서 화장이 아주 잘 먹었다.
다음은 나나의 차례였다.
나나는 뜨겁게 달군 인두를 들고 있었다. 얼핏 무시무시하게 보이는 도구는 머리를 구불거리게 만드는 용도였다.
나나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헤어는 나나에게 맡기세요. 반짝반짝 대머리를 풍성한 장발로, 빳빳한 직모도 윤기 나는 곱슬로 만드는 마법을 보여 드리죠.”
나나의 손이 섬세하게 움직였다.
기초부터 색조까지 화장을 하고, 머리카락을 한 가닥 한 가닥 웨이브를 주는 것은 시간이 무척 오래 걸리는 일이었다.
소파에서 세 시녀를 구경하던 아리스는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공주님, 공주님. 일어나 보세요.”
니니의 목소리에 아리스가 게슴츠레 눈을 떴다.
아직 잠이 덜 깨어 흐릿한 시야 속에, 허리를 곧게 펴고 선 시아나와 그녀의 뒤에서 리본을 묶어 주는 나나의 모습이 보였다.
천천히 시야가 밝아지며 시아나의 모습이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
멍하니 그것을 바라보던 아리스는 이내 세상에서 가장 감동적인 것을 목격한 것처럼 황홀한 표정을 지었다.
* * *
장미꽃 연회라는 이름답게 연회장은 황궁의 거대한 정원에 꾸며졌다.
정원에는 이날을 위해 키운 수천 송이의 장미꽃이 만개해 있었다.
장미꽃은 형형색색이었다.
빨간색, 푸른색, 보라색, 하얀색, 분홍색, 노란색.
탐스럽게 핀 장미꽃 한 송이 한 송이는 보석처럼 아름다웠다.
봄날의 설렘과 장미꽃의 낭만이 뒤섞인 아름다운 연회장에 사람들이 짝을 지어 들어서기 시작했다.
황궁에서 직접 초대하는 연회니 만큼, 연회에 참석한 이들은 하나같이 대단한 가문의 사람들이었다.
고급스러운 드레스를 입고 우아한 몸짓을 한 이들 사이에도 유독 튀는 사람이 있었다.
황실의 세 번째 황녀, 그레이스였다.
그레이스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흑단처럼 길었던 머리는 짧게 자르고, 화장을 거의 하지 않은 얼굴은 본연의 이목구비가 뚜렷하게 드러났다.
그 아래로는 착 달라붙는 드레스를 입었는데 훤히 드러난 등과 팔은 이전처럼 가늘지 않았다.
자잘한 근육이 섬세하게 붙어 아주 단단해 보였다.
도무지 ‘공주’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나이 든 귀족들은 저게 무슨 해괴한 모습이냐며 눈썹을 찡그렸지만 젊은 귀족들은 아니었다.
“예전과는 다른 의미로 아름답네요.”
“그러게요. 건강한 흑표범 같아요.”
특히 그간 그레이스를 부러워하거나 질투했던 또래의 여인들은 얼굴을 붉혔다.
꼭 동화 속 왕자님을 마주친 것처럼.
그리고 그레이스의 옆에 서 있는 아이작은 이 분위기가 당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이작은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한 듯 부드럽게 웃으며 그레이스에게 속삭였다.
“공주님, 제가 간곡히 요청했잖습니까. 평소에 음식을 얼마나 많이 먹든, 운동을 얼마를 하든 상관없으니 오늘만큼은 제가 보내 준 드레스를 입어 달라고 말입니다.”
그것이 그렇게 어려웠습니까.
라는 원망이 어린 목소리였다.
그러나 그레이스는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
“입어 볼까 했는데 드레스가 너무 작아 입을 수가 없었어요.”
“그, 그게 무슨 말입니까.”
“아이작 님도 눈이 있으니 아실 것 아니에요. 요즘 제가 부쩍 체격이 커져서 그런 앙증맞은 사이즈는 맞지 않습니다.”
물론 무리해서 살을 빼고 코르셋으로 허리를 조인다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레이스는 그렇게까지 해 가며 레이스가 주렁주렁 달린 인형 옷 같은 드레스를 입어 줄 생각이 없었다.
그레이스가 중얼거렸다.
“그렇게 그런 드레스가 좋으면 자기가 입든가.”
“뭐, 뭐라고요?”
그레이스의 말을 들은 아이작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이작이 또 떽떽거리는 것이 듣고 싶지 않아 그레이스는 몸을 일으켰다.
아이작은 눈을 크게 떴다.
허리를 곧게 펴고 선 그레이스의 시선이 저보다 위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레이스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일부러 높은 힐을 신은 보람이 있네.’
그간 아이작과 함께 있을 때 그레이스는 일부러 굽이 낮은 구두를 신었다.
아이작보다 적어도 한 뼘은 작아 보이고 싶어서.
하지만 지금은 전혀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얼굴을 일그러뜨린 약혼자를 내려다보는 기분이 제법 괜찮았다.
“제 모습이 꽤 마음에 들지 않은 모양인데 다행히 저도 같은 생각이랍니다. 괜히 붙어 다니며 서로를 불쾌하게 하느니 떨어져서 다니도록 하죠.”
“……!”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아무리 요 근래에 사이가 벌어졌다고 해도 두 사람은 약혼한 사이였다.
그런데 따로따로 다니자니.
‘사람들이 뭐라고 수군거리겠어!’
그러나 아이작이 그러건 말건 그레이스는 휙 몸을 돌렸다.
정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한 약혼자는 이제 보기만 해도 짜증이 치솟았다.
그런 자에게 더 이상 잘 보일 이유가 없었다.
‘장미꽃 연회만 끝나면 어머니께 파혼을 하고 싶다고 이야기하자.’
라일라 황비는 눈썹을 찡그릴 테지만 그레이스의 말을 들어줄 것이다.
큰 관심이 없는 대신 딸이 원하는 것은 대부분 들어주었으니까.
그 마음을 알 리 없는 아이작이 애써 웃으며 그레이스를 쫓아갔다.
“그레이스 공주님, 마음 푸십시오. 저는 절대 공주님의 모습을 비난한 것이 아닙니다. 오늘도 정말 아름다워요. 단지 사람들이 보기에 예전처럼 살랑이는 드레스를 입는 편이 좋을 것 같아 드린 말씀입니다.”
따위의 소리를 하며.
사람들은 해괴한 광경을 바라보며 수군거렸다.
개중에는 미스틱 상단의 대표, 캐롤라인과 키르안도 있었다.
캐롤라인이 눈을 빛내며 말했다.
“와우, 황태자 전하도 대단한 미남이셨는데 황녀 저하도 대단하네. 제국 황족은 대대로 미인이 많다더니 정말인가 봐.”
그러나 옆에 서 있던 동생 키르안은 아무 대꾸도 없이 테이블에 놓인 과자만 오독오독 깨물었다.
미인이 열 명이건 백 명이건 관심 없다는 듯한 심드렁한 얼굴이었다.
그 모습을 썩은 얼굴로 쳐다보던 캐롤라인이 입을 열었다.
“앗, 저 사람은 설마 시아나 공주?!”
“어디!”
키르안이 번쩍 고개를 들며 번개처럼 반응했다.
캐롤라인이 얄미운 얼굴로 말을 이었다.
“어머나, 아니네. 머리카락 색이 비슷해서 착각했어.”
그제야 누나가 자신을 놀린 것을 안 키르안이 험악하게 인상을 찌푸리며 주먹을 쥐었다.
“내가 이따위 유치한 장난 하지 말라고 했지.”
“이따위 유치한 장난에 당하는 네가 바보인 거지. 아무리 정신이 팔렸다고 해도 생각을 해 봐라. 여기에 시아나 공주가 있을 리가 있나.”
이곳은 제국 황가의 초대를 받은 이들이 모인 장미꽃 연회.
패전국의 공주 시아나가 있을 리가 없었다.
캐롤라인이 키르안의 이마를 콕 찍으며 말했다.
“황태자 전하를 뵈었을 때처럼 미친 소리 하지 말고 정신 차려라. 여기 있는 사람들, 하나같이 미스틱 상단의 물건을 사 줄 만한 돈줄, 아니 고객님이니까.”
“흥.”
“이번에도 실수하면 진짜 가만 안 둘 거야. 시아나 공주를 아예 찾을 생각도 못하게 알몸으로 꽁꽁 묶어 가둬 버릴 테니 그런 줄 알아.”
누나의 끔찍한 협박이 진심임을 안 키르안은 속으로 욕을 내뱉으면서도 입을 꾹 다물었다.
‘그래, 참자. 오늘만 얌전히 있으면 누나도 시아나 공주님을 찾는 데 협조해 준다고 했으니까.’
키르안에게 중요한 것은 그것뿐이었다.
* * *
연회장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장미꽃 연회의 주최자이자 황제 대리인 황태자 라시드가 등장한 것이다.
“꺅!”
여기저기서 외마디 비명이 터져 나왔다.
황태자의 비현실적일 만큼 아름다운 모습 때문이다.
황실의 핏줄을 상징하는 은색 머리카락, 같은 색의 긴 속눈썹 아래로 반짝이는 보라색 눈동자.
‘피의 황태자’라는 섬뜩한 별명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섬세한 얼굴이었다.
그러나 그 아래에 보이는 남색 제복을 입은 몸은 단단한 근육질이었다.
얼굴에서 조금도 느낄 수 없었던 별명이 사실임을 증명하는 것처럼.
연회장에 있던 모든 이들이 넋이 나간 얼굴로 황태자를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하나둘씩 정신을 차린 사람들이 의아한 얼굴로 말했다.
“그런데 왜 전하께서 혼자시지?”
참석하는 이들은 모두 파트너와 함께여야 한다. 그것은 주최자도 마찬가지였다.
그것이 오랜 시간 이어진 장미꽃 연회의 규칙이었다.
라시드가 그 생각을 다 읽었다는 듯 귀족들을 향해 말했다.
“걱정할 것 없네. 잠시 후면 나의 파트너가 도착할 테니까.”
그 말에 몇몇 귀족들은 눈썹을 찡그렸다.
아직 정식 연회 시작 시간은 아니니 지각은 아니었지만, 황태자를 기다리게 하는 것은 큰 죄였기 때문이다.
정작 라시드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지만.
태연한 얼굴로 서 있는 라시드를 바라보며 한편에 서 있던 여인들은 눈썹을 모았다.
“아니, 도대체 전하의 파트너가 누구기에 저렇게 온화한 얼굴로 기다려 주시냔 말이에요.”
안 그래도 그에 관해 수많은 소문이 돈 상태였다.
외국의 공주님이라더라.
저 먼 북부에서 온 귀족 여인 중 한 명이라더라.
어쨌건 결론은 여인의 정체가 누구라도 라시드를 흠모하는 수많은 귀족 여인들에게는 적이라는 사실이었다.
‘얼마나 잘난 여인인지 이 두 눈으로 지켜봐 주겠어.’
‘조금이라도 전하께 부족한 여인이면 망신을 줄 거라고.’
여인들의 서슬 퍼런 생각을 알 리 없는 라시드는 천진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시아나, 어서 보고 싶다.’
시아나를 보지 못한 것이 무려 삼 일째였다.
라시드는 시아나를 한시라도 빨리 보고 싶었다.
그러나 그런 라시드의 바람과 달리 시아나는 오늘 연회 시작 시간에 딱 맞추어 온다는 말을 전했다.
[장미꽃 연회에서 보여 줄 저의 콘셉은 도도하고 오만한 공주님이거든요.]
편지에 적힌 글귀를 보고 얼마나 웃었던가.
도도하고 오만한, 이라니.
라시드가 아는 시아나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누구도 자신인 것을 알아보지 못하게 한다고 했으니 확연히 다르게 꾸미고 오겠지.’
그래도 동그란 얼굴과 순한 눈매가 어디 갈 리 없다.
아무리 값비싼 드레스를 입고 짙은 화장을 한다 해도 귀여울 테지.
라고 라시드는 생각했다.
막 연회장에 들어서는 여인을 보기 전까지는.
연회 시작을 알리는 종이 치기 직전, 한 여인이 연회장에 들어섰다.
처음에는 연회장에 있던 이들 중 누구도 그녀에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나 한 명, 두 명, 점차 많은 사람들이 눈을 크게 뜨고 여인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여인은 그런 시선은 하등 상관하지 않는다는 듯 경쾌하게 걸음을 내디뎠다.
또각, 또각.
“…….”
라시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저를 향해 다가오는 여인을 바라보았다.
또렷한 눈매와 붉은 입술.
구불거리는 밀색 머리카락 위에 반짝이는 수십 개의 장미꽃 모양 보석.
봉긋한 가슴과 잘록한 허리 아래로 미묘하게 색이 다른 치맛자락이 겹겹이 쌓인 붉은 드레스.
여인은 꼭 장미꽃 같았다.
새침하고 사랑스러우며, 다가가면 가시로 콕 찌를 것 같은 오만한 꽃.
라시드와 눈을 마주친 여인이 두 눈을 부드럽게 휘었다.
색정적일 만큼 화려한 여인의 눈동자는 맑은 에메랄드빛이었다.
그녀를 멍하니 바라보던 라시드가 중얼거렸다.
“설마…….”
시아나?
그녀의 이름을 내뱉기 전에 여인이 먼저 입을 열었다.
“로즈안나입니다. 오늘 하루, 고귀한 전하의 옆에 설 영광을 받았지요.”
“…….”
로즈안나.
시아나가 미리 알려 주었던 가짜 이름이었다.
그러니 눈앞의 여인은 시아나가 맞았다.
그러나 라시드는 그 사실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 * *
대놓고 바라보지는 않았으나 연회장에 있는 이들은 하나같이 한곳을 힐끗힐끗 보고 있었다.
그들의 시선이 향한 곳은 황태자 라시드와 붉은 드레스를 입은 여인이었다.
귀족들이 수군거렸다.
“황태자 전하의 파트너라고 해서 어떤 여인일까 했는데 대단한 미인이네요.”
그 말에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심지어 조금이라도 허점이 보이면 가만두지 않겠다며 불타올랐던 귀족 여인들마저도 미모에 관해서 만큼은 반발을 하지 못할 정도였다.
그리고 그건 여인의 옆에 서 있던 라시드도 마찬가지였다.
라시드는 고개를 숙여 여인을 바라보았다.
아이라인을 진하게 그려 치켜 올라간 눈매, 새빨간 입술.
이 화려하고 오만해 보이는 여인이 시아나라는 것이 아직도 믿기지가 않았다.
라시드의 시선을 느낀 시아나가 부채로 라시드와 자신의 입을 가리며 속삭였다.
“전하, 아까부터 왜 그렇게 쳐다보시나요. 혹시 눈 화장이 번지기라도 했나요?”
얼굴과 달리 한없이 부드러운 목소리는 시아나가 맞았다.
그래서 라시드는 눈썹을 내렸다.
“아무리 봐도 다른 사람 같아서.”
그 말에 시아나가 키득 웃었다.
“전하께서 그런 말을 하시니 성공이네요.”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거지?”
“메이크업과 드레스의 힘이죠.”
“여자들이 화장을 하면 얼굴이 달라지는 것은 알고 있어. 하지만 이 정도로 바뀐 모습은 처음 보는데.”
“제 입으로 말하기 좀 그렇지만 제가 화장발이 무척 잘 받아요.”
시아나는 밀가루 빵이 생각나는 흐릿한 인상 덕분에 얼핏 평범해 보였지만 의외로 이목구비의 모양과 위치가 좋았다.
거기에 뽀얀 피부까지 가지고 있어 화장하기에 최적의 얼굴이었다.
‘덕분에 처음 화장을 했을 때는 제법 관심을 끌었지.’
아름다움이라는 권력을 포기한 후로 화장을 하지 않으면서 인기도 거품처럼 사라져 버렸지만.
그 이후로 제대로 화장을 하고 사람들 앞에 선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예상대로 아무도 날 알아보지 못하는구나.’
시아나를 아는 몇몇 시녀들은 물론, 저쪽에 서 있는 그레이스 황녀조차도 전혀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라시드가 손을 들며 말했다.
“그럼 이제 시작할까요, 로즈안나.”
시아나가 붉은 입술을 보기 좋게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라시드와 시아나는 연회장 한가운데 설치된 동그란 단상 위로 올라섰다.
화려한 장미꽃 문양이 새겨진 단상 위에 마주 선 두 사람은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이내 한편에 있던 악사들이 연주를 시작했다.
장미꽃 연회의 오프닝.
연회에 참석한 이들을 위해 추는 축복의 춤이 시작된 것이다.
올해는 자리를 비운 황제와 황후를 대신하여 젊은 황태자와 신분을 정확히 알 수 없는 레이디가 그 자리에 섰지만, 부족함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젊은 두 남녀의 싱그러움과 아름다움은 만발한 장미꽃과 어우러져 반짝반짝 빛이 났다.
사람들은 넋을 놓고 두 사람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춤을 보는 것뿐인데 이상하게 가슴이 설레네요.”
“후후, 그러게 말이에요. 열정 가득 했던 20대로 돌아간 듯한 느낌이에요.”
사람들의 시선 속에서 라시드와 손을 맞잡은 시아나가 소곤거렸다.
“삼 일이나 춤 연습을 하지 않아서 걱정했는데 잘하시네요? 마지막으로 춤을 추었을 때보다 능숙해요.”
“네가 연습하라고 했잖아.”
시아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바쁜 와중에 제 말을 이렇게 잘 따를 줄은 몰랐다.
라시드가 다른 사람과 춤을 추는 것이 상상이 가지 않아 물었다.
“누구랑 연습을 하셨는데요?”
“솔.”
“아…….”
덩치 큰 두 남자가 손을 맞대고 빙그르 돌았을 모습을 떠올리니 시아나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키득.
붉은 입꼬리를 올리는 시아나를 라시드가 묘한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미소를 머금은 시아나가 말했다.
“제 말을 잘 따라 주셨으니 그에 대한 보상으로 특별 서비스를 하나 해 드릴게요.”
시아나가 고양이처럼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전하를 흠모하는 여인들이 많아 귀찮을 때가 있다고 하셨죠. 그녀들의 관심과 애정의 반을 사라지게 해 드릴게요.”
“어떻게?”
시아나는 대답 대신 라시드의 손을 잡고 빙그르, 만개한 꽃잎처럼 한 바퀴 돌았다.
춤의 마지막 단계였다.
원래 동작은 빙그르 돈 시아나가 라시드와 눈을 마주치며 춤을 끝내는 것이다.
그러나 시아나는 한 손을 뻗어 라시드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
그 순간 멍하니 춤추는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던 이들이 눈을 크게 떴다.
사람들을 향한 시아나의 눈빛이 한껏 도도하면서 농염했기 때문이다.
선명한 빛을 띤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말하고 있었다.
‘이 남자는 내 거야.’
그러니까 손대면 안 돼.
제 사냥감을 지키겠다고 선언하는 앙큼한 고양이 같았다.
춤을 끝낸 라시드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방금 전 도대체 무슨 일을 벌인 거지?”
춤의 마지막 순간 라시드는 보았다.
시아나를 보던 사람들의 얼굴이 순식간에 새빨갛게 달아오른 것을.
당황한 것 같기도 하고, 부끄러워하는 것 같기도 하고, 또 누군가는 분노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정작 시아나가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는 보지 못했다.
시아나가 짓궂은 얼굴로 답했다.
“별것 아니에요. 그저 전하께 침을 좀 발라 보았답니다.”
“……?”
“남이 먼저 침 바른 음식은 건들지 않는 게 상식이지요. 이제 예전만큼 많은 여성들이 전하께 과도한 애정을 표하지는 않을 거예요.”
도무지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어 라시드는 눈썹을 찡그렸다.
그러나 더 물어볼 여유가 없었다.
본격적으로 연회가 시작되며 사람들이 두 사람에게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라시드는 긴 시간 전쟁터를 누비느라 오랜만에 연회장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라 더더욱 관심이 대단했다.
콧수염을 멋지게 기른 노신사가 상기된 얼굴로 물었다.
“전하, 이렇게 건장하신 모습으로 뵙게 되어 실로 기쁩니다. 전쟁터로 가시기 전 헬링턴 백작가에 들르신 적이 있으시지 않습니까.”
몰라, 기억 안 나.
라시드의 얼굴에 그렇게 쓰여 있었다.
권력자로서 거드름을 피우거나, 눈앞의 노인을 망신 주려는 것이 아니었다.
라시드는 정말로 지금 제 앞에서 떠드는 이들이 누가 누구인지 잘 알지 못했다.
라시드의 서늘한 눈빛에 헬링턴 백작은 민망함으로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때, 라시드의 옆에 있던 시아나가 나섰다.
“헬링턴 백작가는 거대한 포도밭을 기반으로 순도 높은 와인을 제작하는 것으로 유명한 곳이지요?”
“……!”
헬링턴 백작의 눈이 커졌다.
시아나가 눈을 부드럽게 휘며 말했다.
“지금 연회장에도 헬링턴의 와인이 배치되어 있네요. 덕분에 많은 분들이 즐거운 시간을 보낼 듯합니다.”
시아나의 사려 깊은 칭찬에 굳어 있던 헬링턴 백작의 얼굴이 활짝 폈다.
시아나의 활약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시아나는 라시드와 제게 다가오는 이들에게 맞추어 적절한 대화를 이끌었다.
“오클란드 공국의 왕족이시군요. 아름다운 오클란드의 푸른 해변은 언젠간 꼭 가 보고 싶은 곳이랍니다.”
“라인하르트 님께서는 이곳까지 오시느라 정말 고생이 많으셨겠어요. 워낙 영지에서 수도까지의 거리가 멀고 길도 험난하니까요.”
사람들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얼핏 단순해 보이는 내용이었지만, 수많은 귀족과 왕족에 대해 저렇게 해박하게 안다는 것은 보통 힘든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예법은 또 어떻고.
도도하고 새침해 보이는 외모와 달리 시아나는 손짓 하나까지 완벽했다.
마치 엄격한 교육을 받은 공주님처럼.
그야말로 그린 듯한 완벽한 레이디였다.
귀족들은 한편에서 도대체 저 신비로운 여인의 정체가 무엇인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실례를 무릅쓰고 물어봐도 로즈안나라는 이름 외에는 아무것도 알려 주시지 않으니 답답하네요.”
“그러게 말입니다. 저토록 다양한 정보를 알고 있으시고 예법도 출중하신 것을 보면 대단한 가문의 아가씨인 게 분명할 텐데 말입니다.”
어쨌건 중요한 것은 그녀가 라시드에게 더할 나위 없이 잘 어울린다는 사실이었다.
라시드의 곁에 있던 젊은 귀족이 웃으며 말했다.
“두 분이 함께 있는 모습을 보니 참 좋습니다. 오늘만이 아니라 다른 날에도 이렇게 함께 뵈면 좋을 텐데요.”
말을 거의 하지 않았던 라시드가 드물게 대꾸했다.
“나도 같은 생각이야.”
두 눈을 부드럽게 휘는 라시드를 본 젊은 귀족은 입을 쩍 벌리더니, 이내 눈을 꾹 감았다.
‘나는 남자에, 약혼녀까지 있는데 전하를 보고 왜 심장이 쿵쾅거리는 거야!’
다행히(?) 동행한 약혼녀도 라시드를 보고 똑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시아나가 눈썹을 내렸다.
언젠가 라시드는 제가 관심을 주는 사람은 시아나뿐이라고 했다.
놀랍게도 그 말은 진실이었다.
라시드는 귀족들과 외국의 왕족들에게 일말의 관심도 없었다.
황제가 되기 위해 굳건히 입지를 다지고 세력을 모아야 할 황태자가 저래도 되나? 싶을 정도였다.
그러나 시아나는 이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전하께서 본격적으로 제 사람을 만들려고 했으면 연회장이 아주 난리가 났겠어.’
그만큼 라시드의 미소는 치명적이었다.
다행히 라시드는 그런 무서운 행위를 자주 하지 하지 않았기에 연회는 평화롭게 진행되었다.
끝없이 사람들을 상대하던 시아나는 휴, 하고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대로 별일 없이 연회가 끝났으면 좋겠다.’
그때였다.
“저기요.”
귀족답지 않은 투박한 말투에 시아나는 귀를 쫑긋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목소리의 주인공을 본 시아나는 눈을 크게 떴다.
너무 놀라 손에 든 부채를 떨어뜨릴 뻔했다.
오렌지색 머리카락에 고양이처럼 날카로운 눈매를 가진 날렵한 인상의 소년.
분명 미스틱 상단주의 아들, 키르안이 맞았다.
‘키르안이 어떻게 여기에…….’
시아나는 바로 납득했다.
키르안은 귀족은 아니었으나 대륙에서 특별하다고 손꼽히는 상단의 아들이었다.
제국의 연회에 초대될 만했다.
키르안이 심각한 표정으로 시아나를 바라보다가 물었다.
“혹시 나를 알아요?”
묘한 질문에 시아나는 눈썹을 찡그렸다.
‘나를 알아본 건가?’
다행히 키르안의 표정을 보니 그것은 아닌 것 같았다.
그래서 시아나는 놀란 감정을 추스르며 물었다.
“무슨 의미로 하는 질문이죠?”
“이상하게 어디에서인가 당신을 본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요.”
“…….”
키르안이 다시 물었다.
“혹시 우리가 만난 적이 있나요?”
시아나는 속으로 대답했다.
응, 있어.
키르안을 만났던 것은 마법을 좋아했던 새 왕비의 취향 덕분이었다.
새 왕비는 마력석을 판매하는 미스틱 상단주를 부르는 날이 많았고, 상단주는 종종 자식들을 데려왔다.
딸인 캐롤라인은 썩은 미소를 지으면서도 제멋대로인 새 왕비의 자식들과 놀아 주었지만, 키르안은 질색한 얼굴로 그들을 피해 도망치곤 했다.
왕국에서 가장 구석진 곳에 있는 시아나의 비밀 기지로.
[공주님!]
제 엄마와 누나의 눈을 피해 챙긴 갖가지 먹을거리와 선물들을 가지고.
오랜 시간 시아나는 키르안과 제법 돈독한 사이였다.
하지만…….
‘지금은 내 정체를 밝힐 때가 아니야.’
그래서 시아나는 오만한 표정으로 눈을 내리깔았다.
“아니요. 나는 그쪽을 처음 보는데요.”
그러나 키르안은 뚫어질 듯한 시선으로 시아나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 시아나는 조금 긴장이 됐지만 이내 당당해졌다.
‘지금 내 모습은 진짜 내 모습과는 완전히 달라.’
물론 그나마 원래 모습이 남아 있는 눈동자와 머리 색을 보고 시아나인 것을 유추할 수도 있었지만, 그래도 큰 문제는 아니었다.
시아나는 뻔뻔하게 절대 아니라고 시치미를 딱 뗄 생각이었으니까.
키르안이 시아나를 쳐다보는 시간이 길어지는 찰나, 키르안의 누나 캐롤라인이 나타났다.
“어머머, 죄송합니다. 제 남동생이 잘 아는 사람이 실종되어서 지금 제정신이 아니거든요. 보기에는 멀쩡해 보여도 좀 이래요.”
키르안의 머리 위로 손가락을 빙빙 돌린 캐롤라인이 말을 이었다.
“어린데 안 됐구나 하고 너그럽게 넘어가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호호호.”
캐롤라인은 그렇게 말하며 키르안을 끌고 도망치듯 멀어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며 시아나는 눈썹을 내렸다.
‘캐롤라인도 여전하구나.’
캐롤라인은 동생이 조금이라도 문제를 일으키는 것 같으면 번개처럼 나타나 동생을 데리고 사라지곤 했다.
그렇게 사라지면 키르안이 다시 돌아오는 일은 없었다.
아마 오늘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시아나는 안심이 되는 한편 마음이 무거워졌다.
‘캐롤라인이 말한 실종되었다는 사람이 나인가.’
그럴 확률이 높았다.
그만큼 키르안은 시아나를 살뜰히 챙겼으니까.
그 생각을 하자 미안한 마음이 밀려들었다.
저를 걱정한다는 사람을 모르는 척하려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그러던 시아나는 묘한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옆에 있던 라시드가 눈을 내리깔고 시아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웃고 계시던 분이 또 왜 저러실까.’
눈을 동그랗게 뜬 시아나를 향해 라시드가 허리를 숙여 귓가에 속삭였다.
“다른 남자는 보지 마. 오늘 넌 나의 파트너잖아.”
“…….”
분명 목소리는 더없이 달콤한데 왜 이렇게 한기가 느껴지는 건지.
시아나는 곤란한 얼굴로 라시드를 바라보았다.
* * *
장미꽃 연회가 끝난 것은 어두운 밤이 다 되어서였다.
시아나는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하게 라시드의 파트너 역할을 해냈다.
“장미꽃과 사랑의 여신 로즈린타의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연회장을 나서는 손님들에게 일일이 기도를 해 주기까지 했다.
손님들은 오늘 처음 본 아름다운 레이디에게 푹 빠진 얼굴로 황궁을 나섰다.
드디어 마지막 손님이 나가고 드넓은 연회장에는 라시드와 시아나만이 남았다.
연회 내내 허리를 곧게 펴고 서 있던 시아나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와, 드디어 끝이 났네요.”
그런 시아나를 바라보며 라시드는 눈썹을 내렸다.
“힘들었지?”
“네.”
예의상이라도 아니라고 할 수 없었다.
새벽부터 일어나 치장을 한 데다가, 연회 내내 사람들을 상대하고, 그 와중에 곤란한 상황이 생길까 봐 음식도 제대로 먹지 못했으니까.
시아나는 진이 다 빠졌다.
‘이럴 때는 정말 시녀로 지내는 편이 훨씬 나은 것 같다니까. 적어도 식사는 마음껏 하잖아.’
의자에 앉아 흐물거리는 시아나에게 다가온 라시드가 무릎을 꿇었다.
“뭐, 뭐 하시는 거예요?”
갑작스러운 행동에 뭐라 할 새도 없이, 라시드는 시아나의 발을 잡아 구두를 벗겼다.
발가락 끝은 빨갛게 변해 있었고, 발꿈치에는 상처가 나 있었다.
그것을 본 라시드가 눈썹을 내렸다.
“역시.”
“…….”
“걸을 때 가끔씩 눈썹을 찡그렸잖아. 발이 불편한 것처럼 발을 왔다 갔다 움직이기도 하고.”
그렇긴 했다.
하루 종일 높은 구두를 신은 것이 너무 오랜만이라 발이 지끈거렸다. 게다가 길이 들지 않은 새 구두라 상처까지 생겼다.
하지만 시아나는 라시드가 그걸 알아챌 줄 몰랐다.
“……나름대로 티 내지 않게 노력했는데 어떻게 아셨어요?”
“그냥 알아.”
라시드는 태연한 얼굴로 대답한 후 손을 들었다.
저쪽에서 시녀 한 명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라시드에게 약과 붕대가 담긴 쟁반을 건네주었다.
마치 이때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시아나는 눈썹을 내렸다.
“시녀에게 미리 말해 둔 거예요?”
라시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라시드는 자연스러운 손놀림으로 쟁반 위에 놓인 약을 들었다.
시아나가 눈을 크게 떴다.
“설마 직접 치료해 주시려고요?”
“그럼 누가 해?”
그제야 시아나는 방금 전 쟁반을 가지고 온 시녀가 잽싸게 사라진 것을 깨달았다.
이제 정말 연회장에는 둘뿐이었다.
“차라리 제가…….”
시아나는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라시드가 한 손으로 시아나의 발을 잡고 나머지 한 손으로 약을 바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발을 빼려고 미약한 힘을 줘 보았지만, 발을 잡은 라시드의 손에서는 절대 놓아주지 않겠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라시드는 능숙한 손길로 발목 뒤편의 상처에 약을 바른 후 붕대까지 한 바퀴 둘러 주었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라시드는 붕대를 감은 시아나의 발을 주물러 주기 시작했다.
‘꺅!’
시아나는 경악한 얼굴을 했지만 빠르게 모든 것을 포기했다.
‘아아, 이제 모르겠다. 어차피 하지 말래도 할 거잖아.’
게다가 라시드의 손이 크고 시원해서일까.
딱딱한 구두 끝에 갇혀 있어서 빨갛게 부어올랐던 발의 통증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있었다.
‘기분 좋다.’
한편 라시드는 라시드대로 감탄을 하고 있었다.
‘발이 이렇게 작다니.’
평균치보다 조금 작은 시아나의 발은 평균치보다 훨씬 큰 라시드의 손안에 쏙 들어왔다.
‘귀여워.’
라시드는 저도 모르게 쿡쿡 웃다가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 라시드의 얼굴에 어려 있던 미소가 사라졌다.
새하얀 달빛 아래, 시아나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삐뚜름하게 앉아 테이블에 올린 손에 머리를 기대고 있던 시아나가 불쾌하다는 듯 눈썹을 찡그리며 입을 열었다.
“뭐가 그렇게 재미있으세요? 설마 제 둘째 발가락이 유독 긴 것을 보고 그러시는 거라면 숙녀의 이름으로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장난스러운 말투.
맑은 에메랄드색 눈동자.
분명 시아나가 맞는데 왜 이렇게 다르게 느껴지는 것일까.
평소와 다른 짙은 눈매와 붉은 입술 때문일까.
‘정말 단순히 그런 이유로 이렇게…….’
쿵, 쿵.
100만 명의 적군을 마주쳤을 때도 고요했던 라시드의 심장이 뛰고 있었다.
오늘 시아나를 보고 난 뒤부터, 계속.
* * *
같은 시각, 숙소로 돌아가는 마차 안에서 키르안이 말했다.
“누나, 연회를 잘 끝내면 나를 도와준다고 했지?”
동생의 말에 캐롤라인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연회장에 오기 전, 망할 동생 놈이 또 무슨 미친 짓을 할까 싶어 그런 말을 하긴 했다.
그러나 예상대로 키르안은 캐롤라인의 경고를 잊고 날뛰었다.
“네놈, 황태자의 파트너에게 미친 말을 지껄였잖아.”
“하지만 그 이후에는 누나가 원하는 대로 협조했잖아. 짜증 나는 소리를 내뱉는 귀족들에게 웃어 주기까지 했다고.”
그것도 맞는 말이었다.
키르안은 원래 귀족이라면 질색을 했다.
귀족 자체를 싫어한다기보다는 귀족 특유의 잘난 척을 못 참았다.
‘그런 놈이 웬일로 얌전히 있기는 했지.’
덕분에 캐롤라인은 그럭저럭 연회를 즐길 수 있었다.
어리고 철없는 동생은 외모만은 반반한 편이라, 입만 다물고 있으면 귀족 여인들이 한껏 귀여워해 주었으니까.
캐롤라인은 키르안의 보기 드문 활약을 인정해 주기로 했다.
“그래, 인심 쓴다. 뭐든 원하는 것을 말해 봐.”
물론 캐롤라인은 키르안이 무엇을 도와 달라고 할지는 전혀 궁금하지 않았다.
보나마나 시아나 공주를 찾는 데 협력을 해 달라는 것일 테니까.
그러나 키르안은 예상과는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오늘 황태자 전하의 파트너로 온 여자. 그 여자의 정체가 뭔지 알아내고 싶어.”
캐롤라인은 눈썹을 찡그렸다.
“너 설마 그분에게 한눈에 반하기라도 한 거야? 그래서 그렇게 날 아세요, 따위의 개소리를 늘어놓으면서 집적거린 거냐고.”
누나의 주책없는 말에 키르안이 정색했다.
“그런 거 아니야!”
“그럼 왜 그런 걸 궁금해하는데!”
“그거야 자꾸 거슬리니까. ……분명 얼굴도, 분위기도, 전혀 다른데 자꾸 시아나 공주님이 떠오른단 말이야.”
캐롤라인이 지끈거리는 이마를 잡으며 말했다.
“그래 뭐, 그럴 수 있어. 어쨌건 그분은 시아나 공주와 같은 눈동자 색과 머리카락을 가진 데다가 체구도 비슷하니 말이야. 시아나 공주가 작정을 하고 다른 사람처럼 꾸몄다면 그런 모습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말이 안 되잖아.”
시아나 공주는 나라의 패망과 함께 사라졌다.
재수 없으면 사망.
재수 좀 있더라도 어딘가에서 신분을 숨기며 근근이 살아가고 있을 것이 뻔했다.
대다수의 왕족이 목이 잘려 죽은 만큼, 공주인 것을 들키는 순간 끌려갈 테니까.
“그런 시아나 공주가 다른 이도 아니고 황태자의 파트너가 되어 연회장에서 웃고 있다고?”
작은 토끼가 제 가족을 모두 먹어치운 사자의 머리 위로 올라탄 것보다 말도 안 되는 상황이었다.
키르안도 그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그래도 조사해 봐. 그 여자에게는 뭔가가 있어. 내 감이 그렇게 말하고 있다고.”
“하아, 그놈의 감.”
캐롤라인은 눈을 흘겼지만 더는 동생을 타박하지 않았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키르안의 감은 잘 들어맞는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어쨌건 이런 중요한 자리에 황태자 전하의 파트너로 서기까지 한 여인이니 정체를 알아 두면 쓸모가 있겠지.’
캐롤라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 * *
장미꽃 연회가 끝난 후, 황궁의 시녀들은 그날에 대한 이야기를 꽃피웠다.
이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 그레이스 황녀나 붉은 여우 같은 모습으로 귀족 여인들의 귀여움을 독차지했던 미스틱 상단의 키르안.
여러 사람이 도마에 올랐지만 개중에서 가장 압도적으로 입에 오르내린 사람은 바로 황태자 라시드와 그의 파트너, 로즈안나였다.
“황태자 전하께 그런 분이 있었다니 정말 놀랐다니까.”
“두 분 정말 잘 어울리더라. 역시 교제하는 사이겠지?”
“그건 또 아닌 것 같아. 내가 음료수를 가져다드리다가 슬쩍 이야기를 들었는데, 귀족들이 무슨 사이냐고 물어도 전하께서 그저 웃기만 하시더라고.”
“에이, 그게 그거지!”
시녀들은 꺅~ 하고 발을 동동 굴렀다.
“귀족들도 다들 모른다는 걸 보면 제국의 귀족은 아닌 것 같지?”
“그럼 외국의 공주님이려나?”
“그렇겠지. 최소한 그 정도는 되어야 우리 전하와 특별한 사이가 될 수 있지 않겠니?”
“혹시 그분, 전하께서 정복한 왕국의 공주님인 것 아닐까? 자신의 부모와 나라, 백성들을 짓밟은 침략자와 눈이 마주친 순간 사랑에 빠진 거지. 그래서 정체를 밝히지 못하는 거고!”
“꺅~! 너무 로맨틱하다.”
시녀들은 또 한 번 발을 동동 굴렀다.
“—라고 말한다고 하네요.”
“크! 역시 우리 시아나 님이야!”
니니와 나나가 황홀한 얼굴로 말했다.
아리스도 똑같은 표정이 되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럼. 그런 말도 안 되는 말이 나올 수밖에 없지. 연회 날의 시아나는 엄청나게 아름다웠으니까. 나는 정말 장미꽃 요정이 나타난 줄 알았다고.”
응, 응.
니니와 나나, 아리스는 서로 눈을 마주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사이에 낀 시아나는 민망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장미꽃 연회의 파급력이 엄청나구나.’
물론 어느 정도는 노린 것이다.
시아나는 제 미모를 극도로 화려하게 꾸미고, 극적인 순간에 나타나는 연출을 하기까지 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시아나에게서는 많은 이들을 놀라게 했던 그날 밤의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화장기 하나 없는 수수한 얼굴, 단정하게 땋아 내린 머리카락.
장식 없는 진녹색 제복.
흔하디흔한 시녀 한 명이 존재할 뿐. 이제 누구도 그날 밤 나타났던 아름다운 여인을 다시 볼 리 없을 터였다.
그럼에도 장미꽃의 잔향을 쫓듯 사람들의 관심은 대단했다.
아리스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그레이스 언니가 그러는데 시녀들만이 아니라 귀족들도 그날 밤 시아나, 아니 로즈안나에게 관심이 대단하대. 보는 귀족들마다 그레이스 언니에게 그녀에 대해 물어본다고 하더라.”
물론 그레이스는 아는 게 없으니 대답해 줄 게 없었다.
아리스가 짓궂은 얼굴로 키득거리며 말했다.
“언니가 저 말을 할 때 얼마나 입이 근질근질했는지 몰라. 여러분, 장미꽃 연회 때 나타났던 그 아름답고 사랑스러우며 도도한 여인은 나의 시녀 시아나랍니다! 이렇게 외치고 싶다고.”
“정말 그렇게 말하실 생각은 아니시죠?”
곤란한 얼굴을 한 시아나를 향해 아리스가 말했다.
“그럼! 로즈안나가 시아나라는 사실은 절대 알려지면 안 되잖아!”
사람들이 이처럼 과도한 관심을 갖는 이유는 단순히 로즈안나가 아름다워서가 아니었다.
그녀가 차기 황좌에 가장 가까운 황태자의 파트너라는 특별한 위치였기 때문이다.
그런 존재가 사실은 일개 시녀인 시아나라는 사실이 알려지면 좋을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 정도는 어린 아리스도 알았다.
니니가 시아나를 안심시키듯 말했다.
“걱정 마세요, 시아나 님. 제가 이래 봬도 입이 무거우니까요. 오죽하면 나나 쟤가 8살 때 이불에 오줌을 싼 것도 말한 적 없다니까요.”
나나도 거들었다.
“저도 그래요. 니니 쟤가 짝사랑하던 남자아이 앞에서 고백하면서 방귀 낀 것을 보았지만 누구에게도 말 안 했어요.”
진지한 얼굴로 신뢰가 뚝뚝 떨어지는 말을 하는 두 사람을 향해 시아나는 에라 모르겠다는 듯 웃었다.
“하하하.”
사실 심각하게 걱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세 사람이 저렇게 장난 같은 말은 해도 절대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않으리라 믿기 때문이다.
‘겉모습은 촐랑거리는 것처럼 보여도 중요한 데서는 선을 확실히 지키니까.’
저 세 사람을 제외하면 로즈안나의 정체를 아는 이는 라시드와 호위 기사 솔.
그 두 사람에게서 비밀이 새어 나갈 리도 없었다.
‘그러니 그나마 나의 흔적을 찾을 수 있는 것은 그날 밤 내가 입었던 드레스와 장식구들인데…… 그조차 쉽지는 않을 거야.’
시아나가 드레스와 보석을 맞춘 숍은 제국에서 가장 유명한 시크릿 숍이었다.
그들은 설령 황제가 목에 칼을 들이밀어도 고객의 정보를 절대 말하지 않을 것이다.(혹시 몰라 라시드의 힘을 빌려 모종의 협박까지 해 둔 상태였다.)
거기에 시아나가 연회 날 탔던 마차와 마부까지도 라시드가 준비했으니, 아무리 많은 이들이 난리를 쳐도 로즈안나의 정체를 알아낼 수 없을 터였다.
‘하지만 한 명이 걸려.’
시아나는 눈을 내리깔고 연회 날 보았던 한 금색 눈동자의 소년을 떠올렸다.
미스틱 상단의 키르안이었다.
[혹시 나를 알아요?]
키르안은 시아나에게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그리고 캐롤라인에게 붙잡혀 멀리 떨어진 후에도 힐끗힐끗 시아나를 쳐다보았다.
사냥감을 발견한 여우처럼 집요하게.
시아나가 눈을 내리깔았다.
‘그 애가 단순히 로즈안나의 정체를 궁금해하는 것이라면 그리 걱정할 일은 아니야. 미스틱 상단의 정보망이 아무리 대단하다 해도 로즈안나에 대한 것은 알아내지 못할 테니까.’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 로즈안나를 파고들 때의 이야기.
‘만약 키르안이 로즈안나를 신경 쓰는 것이 아니라, 로즈안나의 정체가 시아나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면? 그래서 이제는 없는 로즈안나 대신 시아나를 찾는다면?’
그렇게 되면 겹겹이 걸어 놓은 자물쇠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들은 이내 황궁에 있는 시아나의 존재를 알아챌 것이다.
시아나가 눈썹을 찡그리며 중얼거렸다.
“그럼 곤란한데…….”
* * *
미스틱 상단의 캐롤라인은 고급 호텔의 푹신한 소파에 몸을 파묻고 있었다.
캐롤라인은 오렌지색 머리카락을 넘기며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리 조사를 해도 안 나와. 황태자의 파트너였던 그 여자에 대한 단서가 전혀 없다고.”
말 그대로 연기처럼 사라졌다.
캐롤라인은 키르안에게 이제 그만 포기하자고 말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전혀 지친 기색이 없는 키르안이 눈을 내리깔고 입을 열었다.
“알겠어. 그럼 이제 그쪽은 관두고 시아나 공주님에 대한 것을 조사해줘.”
“뭐?!”
“어차피 내가 그 여자를 조사하려고 했던 이유는 시아나 공주님과 연관되어 있을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어. 그 여자에게서 아무것도 얻어 내지 못한다면 버리면 돼.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서 시아나 공주님을 찾으면 그만이라고.”
“야이, 썩은 치즈 같은 새끼야!”
캐롤라인이 참지 못하고 소리를 빽 질렀다.
“그럼 처음부터 시아나 공주를 찾아 달라고 하든가. 왜 이제 와서 말을 바꿔. 지금 나 똥개 훈련 시키냐?”
“아, 몰라! 내 부탁 들어 준다고 했잖아! 그러니 약속 지켜!”
“이놈이?!”
분노한 캐롤라인은 두 주먹으로 키르안의 머리 양옆을 꾹꾹 돌리기 시작했다.
키르안도 지지 않겠다는 듯 캐롤라인의 두 볼을 잡아 늘렸다.
치열한 남매의 싸움을 멈춘 것은 갑작스럽게 방문한 손님 때문이다.
“키르안을 찾아왔다고?”
하인의 말에 캐롤라인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도 그럴 것이 미스틱 상단주의 대리인은 캐롤라인이었다. 그래서 상단에 볼일이 있어 오는 이들은 다 캐롤라인만 찾았다.
있어도 딱히 쓸모없는 키르안을 찾아오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캐롤라인이 키르안의 목을 조르며 눈을 흘겼다.
“너 나 몰래 나가서 미친 짓 했냐? 왜 너를 찾아.”
“흥. 나한테 반했나 보지.”
키르안은 뻔뻔한 얼굴로 말했다.
놀랍게도 이 말은 사실이었다.
키르안은 어린 여우를 닮은 외모 덕분에 여자들에게 인기가 아주 많았는데, 개중에는 이렇게 직접 찾아오는 이들도 있었다.
캐롤라인이 썩은 얼굴로 말했다.
“츳. 남자를 볼 때 교양이나 지능은 전혀 상관 않는 한심한 여자가 누군지 좀 보자.”
“그러시든가.”
어차피 키르안도 저런 이유로 찾아오는 여자에게 일말의 관심이 없었기에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이내 하인이 안내한 손님이 도착했다.
그때까지도 껄렁한 얼굴로 있던 남매는 들어선 손님이 후드를 내려 얼굴을 드러낸 순간 눈을 부릅떴다.
“……!”
멍하니 손님을 바라보던 키르안이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시, 시, 시아나 공주님?!”
시아나가 웃었다.
“응. 오랜만이야, 키르안. 그리고 캐롤라인도.”
키르안과 캐롤라인은 눈알이 빠질 것 같은 얼굴로 시아나를 바라보다가 작은 비명을 내질렀다.
특히 키르안은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굴었다.
“마, 말도 안 돼. 어떻게 이런 일이. 지금 제가 환각을 보는 건가요? 그게 아니면 꿈을 꾸고 있나?”
헛소리를 늘어놓는 키르안의 뺨을 캐롤라인이 찰싹 휘갈겼다.
알싸한 아픔을 느낀 키르안은 현실임을 깨달았다.
“시아나 공주님!”
키르안은 시아나에게 달려가 와락 껴안으려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무릎을 굽혔다.
“공주님께 인사드립니다!”
시아나가 당황한 얼굴로 키르안을 일으켰다.
“인사는 됐어, 키르안. 이제 난 공주가 아니야.”
“무슨 말씀이세요! 나라가 멸망했다고 해도 공주님은 공주님이죠!”
키르안이 살짝 빨개진 눈으로 시아나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공주님, 정말 보고 싶었어요.”
그 순간 본 키르안의 얼굴이 너무 어린아이 같아서 시아나는 눈썹을 내리며 웃었다.
그런 시아나를 향해 캐롤라인이 다가왔다.
캐롤라인은 키르안처럼 무릎을 꿇고 예를 갖추지 않았다. 간단한 목례로 인사를 마친 캐롤라인이 물었다.
“시아나 공주, 도대체 지금 이 상황이 어떻게 된 일인지 묻고 싶네요.”
시아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테죠. 내가 갑자기 찾아와서 무척 놀랐을 거예요.”
시아나는 두 사람을 찾아오게 된 경위를 간략하게 이야기했다.
왕국이 멸망한 후 어찌어찌하여 제국의 수도에 와 지내다가 미스틱 상단의 키르안과 캐롤라인이 이곳에 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찾아왔다고.
캐롤라인이 눈썹을 찡그렸다.
“굳이 저희에게 인사를 하러 찾아오셨다고요?”
시아나는 맑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키르안이 저를 많이 따랐으니까요.”
키르안이 상기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제가 공주님을 영원히 따르겠다고 충성을 맹세했잖아요!”
그 순간 캐롤라인은 ‘언제 그런 토 나오는 말을 했어?’라는 얼굴을 했다.
키르안은 그런 누이의 반응은 조금도 상관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러니 공주님은 제게 여전히 공주님이세요.”
진지한 얼굴로 말한 키르안은 조심스럽게 시아나를 눈에 담았다.
얼핏 봐도 시아나의 모습은 소탈하기 짝이 없었다.
화장기 없는 맨얼굴에 반짝이는 장식은 하나도 걸치지 않았다.
수도에서 어찌 지냈는지는 몰라도 절대 부귀영화를 누리고 사는 것은 아닌 게 분명했다.
키르안이 시아나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저와 함께 가요, 공주님. 극진히 모시겠습니다. 이전처럼 우아하게, 아니 그보다 더 편안하게 지내실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게요.”
진심 어린 걱정과 애정이 듬뿍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원하는 바가 있어 찾아온 시아나조차 눈동자가 흔들릴 만큼.
물론 키르안의 옆에 있던 캐롤라인은 전혀 다른 감상이었다.
‘저게 진짜 미쳤나! 생사를 확인했으면 거기서 끝나야지, 패망한 나라의 공주를 왜 지가 책임져!’
동생이 더 정신 나간 소리를 하기 전에 캐롤라인이 나서려던 찰나, 시아나가 말했다.
“키르안, 그런 말을 해 주어서 고마워. 너의 마음에 깊은 경의와 기쁨을 느껴.”
“그럼……!”
“하지만 난 너와 함께 가지 않을 거야.”
초롱초롱 눈을 빛내던 키르안의 얼굴이 대번에 곰에게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일그러졌다.
“어째서요?”
“나는 지금의 생활에 만족하고 있으니까. 큰일 없이 조용히 살고 싶어. 그래서 찾아온 거야. 혹시 나를 찾고 있다면 걱정하지 말라고.
“…….”
부드러운 목소리였지만 결론은 더는 제게 관심 갖지 말라는 말이었다.
키르안은 차마 네, 라고 대답도 하지 못하고 울상을 지으며 시아나를 바라보았다.
시아나는 함께 가자는 키르안의 말을 한사코 거절하며 호텔을 떠났다.
캐롤라인이 고개를 숙이고 있는 키르안을 발로 툭 쳤다.
“뭘 그렇게 우울해하냐.”
“…….”
“공주님이 너랑 같이 가는 거 싫다잖아. 네가 금전적으로 도움을 주고 싶다는 것도 거절했고.”
시아나는 키르안이 제시한 모든 호의를 철저하게 거절했다.
그래서 캐롤라인은 안도하고 있었다.
‘키르안을 찾아왔기에 빌붙는 것이면 어쩌나 했는데 그게 아니라 다행이야.’
시아나에게 유감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패망한 왕국의 공주를 데리고 있는 것은 여러모로 좋을 게 없었다.
그러나 키르안은 전혀 다른 생각을 한 모양이었다.
키르안이 심각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이상해.”
“뭐가.”
“기껏 나를 찾아와서 한다는 말이 더는 자신에게 신경 쓰지 말라니.”
“…….”
“게다가 끝까지 공주님이 지금 어디 계신지도 알려 주지 않으셨어. 꼭 말해서는 안 될 곳에 있으신 것처럼.”
키르안의 말처럼 미심쩍은 부분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그러나 캐롤라인은 더는 시아나에게 관여하고 싶지 않아 눈썹을 찡그렸다.
“그래서 뭐, 어쩌려고.”
“공주님에 대해 제대로 조사해 봐야겠어. 분명 나에게 말 못할 사정이 있는 게 분명해.”
그 순간 캐롤라인은 구두 굽으로 동생의 뒤통수를 후려치고 싶은 심정을 느꼈다.
* * *
“……또다.”
긴 의자에 기대어 앉아 있던 라시드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라시드는 왼쪽 가슴 위에 손을 얹었다.
쿵, 쿵, 쿵.
심장이 뛰고 있었다.
라시드는 제 몸 위에서 꾸물거리고 있는 쭉쭉이(흰 페럿)과 냠냠이(다람쥐)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이상하지? 평생 아팠던 것이 손에 꼽을 정도로 튼튼한 몸이었는데…….”
가슴이 쿵쿵거리는 날이 늘어났다.
장미꽃 연회 이후로.
더 정확히 말하자면 달빛 아래에서 시아나가 저를 보며 웃었던 이후로.
‘그때 시아나의 모습은 다른 사람들도 넋을 놓고 볼 만큼 아름다웠지. 그래서 이렇게 가슴이 뛰는 걸까.’
매혹적인 것을 보았을 때 흥분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었다.
단순히 그런 것일까.
라시드는 제 마음을 정확히 알 수가 없어 혼란스러웠다.
그런 라시드에게 호위 기사 솔이 다가왔다.
“전하,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라시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황제 대리를 맡고 있는 라시드에게 많은 이들이 찾아 왔지만 그들은 며칠 전에 서신을 보내 방문 날짜를 예약했다.
이렇듯 당일 찾아오는 건 사적인 관계에서나 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라시드에게 이런 식으로 찾아올 만한 이는 거의 없었다.
솔이 말을 이었다.
“미스틱 상단의 키르안이라는 자입니다. 장미꽃 연회 때 전하의 파트너였던 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하는군요.”
“……!”
그제야 라시드는 한 소년이 생각났다.
선명한 오렌지색 머리카락과 날렵한 턱 선을 가진 소년.
장미꽃 연회 날 밤, 소년은 시아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불쾌하기 짝이 없는 시선이었다.
순간 라시드의 머릿속에 작은 상상이 일었다.
장미꽃이 만발한 연회장에서 이름 모를 여인에게 한눈에 반한 소년.
연회가 끝나고 소년은 여인을 찾아 헤맸지만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었다.
참도 못한 소년은 여인의 파트너였던 황태자를 찾아오게 된다.
그녀에 대한 것을 조금이라도 알고 싶어서.
‘만약 그런 것이라면…….’
라시드가 눈을 내리깔았다.
‘감히 황태자의 여인을 넘본 죄를 물어 눈을 베어 버려야지. 다시는 시아나를 그딴 눈으로 보지 못하게.’
라시드의 얼굴에 섬뜩한 미소가 감돌았다.
그 얼굴을 본 솔이 다급히 말했다.
“전하! 이곳은 전쟁터가 아니라 평화로운 황궁입니다. 또한 키르안은 황제 폐하께서 아끼시는 미스틱 상단의 상단주 아들입니다. 그러니까 절대 죽이시면 안 됩니다!”
“걱정 마. 죽이지는 않을 테니까.”
죽이지는 않는다?
미묘한 말의 의미를 깨달은 솔이 울상을 지었다.
“죽이지 않고 다른 위해를 가하시는 것도 안 됩니다. 선량한 시민이지 않습니까.”
“그래, 주의하마. 그러니 어서 그자를 데리고 오거라.”
전혀 주의할 것 같지 않은 라시드를 울상을 하고 바라보던 솔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제발 큰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면서.
잠시 후, 키르안이 황제 알현실에 모습을 드러냈다.
선명한 오렌지색 머리카락과 고양이처럼 치켜 올라간 눈초리, 그 아래로 반짝이는 황금색 눈동자.
일개 상인의 아들이라고 하기에는 화려한 얼굴을 보며 라시드는 속으로 눈을 내리깔았다.
‘그래 보았자 아직 덜 큰 애송이야.’
냉정한 평가를 마친 라시드가 무표정한 얼굴로 물었다.
“그래, 장미꽃 연회 때 내 파트너였던 여인에 대해 할 말이 있다고?”
무슨 말을 내뱉든, 조금이라도 시아나에 대한 흑심을 드러낸다면 황태자의 여인을 탐낸 죄로 혼쭐을 내 줄 생각이었다.
그러나 키르안이 꺼낸 말은 라시드가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그날 전하의 옆에 계셨던 분은 아실론드 왕국의 시아나 공주님이 맞으시죠?”
“……!”
눈을 크게 뜬 라시드를 향해 키르안이 매서운 눈으로 말을 이었다.
“아니라는 말도, 모른다는 말도 하지 마십시오. 조사를 다 마쳤으니까요.”
시아나가 다녀간 후 키르안은 조사를 시작했다.
가장 먼저 알아본 것은 시아나가 지금 머물고 있는 곳이었다.
그러나 수도 구석구석을 샅샅이 뒤져도 시아나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혹시나 싶어 키르안은 황궁까지 범위를 넓혔다.
황궁은 워낙 보안이 철저하여 조사하는 것이 쉽지 않았지만 겨우 단서를 잡을 수 있었다.
시아나는 제 나라를 멸망시킨 제국의 황궁에 있었다.
그것도 일개 시녀로서.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는 이야기였다.
키르안은 더더욱 집요하게 이 황당한 일의 전말을 파고들었다.
키르안이 라시드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실론드 왕국이 제국군에게 짓밟힌 날, 공주님께서 사라지셨죠. 그 후에 황태자 전하께서 제국 황궁으로 귀환한 것과 동시에 공주님이 황궁의 수습 시녀가 되었고요.”
키르안은 이것이 단순한 우연의 일치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게다가 아무리 제국 황궁이 시녀를 선발하는 기준이 까다롭지 않다고 해도, 불과 얼마 전 제국에 의해 짓밟힌 나라의 공주를 시녀로 뽑아 줄 리 없었다.
그것도 그토록 은밀하게.
키르안이 매서운 눈으로 말했다.
“전하께서 시아나 공주님을 황궁의 시녀로 만든 거지요?”
“……그렇다면?”
“……!”
라시드의 평온한 얼굴에 키르안의 속이 확 뒤집혔다.
‘멀쩡히 잘 살고 있던 공주님을 잡아 와서 시녀로 부려 먹는 주제에 뻔뻔하기는!’
게다가 확실한 증거는 결국 찾지 못했으나,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 라시드가 장미꽃 연회 때 파트너랍시고 데리고 온 여인도 시아나임이 분명했다.
거기까지 알아낸 키르안은 도무지 참을 수가 없어 냅다 황궁으로 달려온 것이다.
물론 키르안은 눈앞에 있는 남자가 피의 황태자라는 끔찍한 별명을 가진 자라는 것을 알았다.
대륙의 반을 차지하는 거대한 제국의 차기 황제에 가장 가까운 존재라는 것도.
그럼에도 할 말은 해야 했다.
“황태자 전하, 아무리 대단한 분이라도 사람을 강제로 끌고 와 노예처럼 부려 먹으면 안 되는 겁니다. 그건 정말 악당 중의 대악당이나 하는 짓이라고요!”
누나인 캐롤라인이 옆에 있었다면 ‘너 진짜 죽고 싶어?!’라고 소리칠 만한 말이었다.
그러나 라시드는 키르안의 목을 당장 베거나 무엄한 말을 하는 혀를 자르지 않았다.
대신 차분한 목소리로 답했다.
“무언가 단단히 오해를 하고 있구나. 나는 시아나를 억지로 끌고 온 적 없어. 그녀가 황궁의 시녀가 되는 것을 원했기에 그 바람을 들어준 것뿐이다.”
보통 이런 상황이 생기면 라시드는 저를 귀찮게 하는 이를 무시하거나, 쫓아내거나, 죽여 버렸다.
이런 식으로 변명을 하듯 주절주절 말을 늘어놓는 것은 처음이었다.
잠시 후, 라시드는 제가 왜 이런 바보 같은 말을 늘어놓는지 깨달았다.
‘나는 시아나에게 잘못한 것이 없다.’
이 말이 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키르안이 그렇군요, 하고 순순히 고개를 끄덕일 리 없었다.
키르안은 기가 차다는 얼굴로 말했다.
“하. 어느 누가 제 왕국을 짓밟고 제 가족을 죽인 자에게 그딴 부탁을 하고 싶겠습니까.”
“…….”
“공주님은 그저 살기 위해 아무 말이나 내뱉으신 겁니다. 제 목숨 줄을 쥔 살인귀에게 죽고 싶지 않아서요.”
“……!”
키르안은 라시드의 보라색 눈동자가 흔들린 것을 놓치지 않았다.
키르안은 한층 당당해진 눈동자로 쏘아 붙였다.
“여기저기 써먹을 영특한 시녀가 필요한 거라면 미스틱 상단에서 마땅한 자를 찾아 보내드리겠습니다. 혹시 공주님의 몸값이 필요한 것이라면 그 또한 얼마든지 지불할 거고요. 그러니까…….”
한 박자 말을 멈춘 키르안이 라시드를 노려보며 말했다.
“시아나 공주님을 이 끔찍한 곳에서 풀어 주세요. 그분은 원수의 궁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고통받을 분이 아닙니다.”
라시드의 아름다운 얼굴이 얼음처럼 싸늘하게 굳어 있었다.
* * *
키르안이 돌아가고 한참이 지난 후에도 라시드는 알현실에 앉아 있었다.
홀로 앉아 있던 라시드가 중얼거렸다.
“그따위 불쾌한 소리를 늘어놓는 자를 멀쩡하게 살려 보내다니.”
평소의 라시드라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럴 수밖에 없었다.
[어느 누가 제 왕국을 짓밟고, 제 가족을 죽인 자에게 그딴 부탁을 하고 싶겠습니까.]
[공주님은 그저 살기 위해 아무 말이나 내뱉으신 겁니다. 제 목숨 줄을 쥔 살인귀에게 죽고 싶지 않아서요.]
……그 말이 가슴에 꽂혀 몸이 움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라시드는 본래 타인의 감정에 대해 전혀 신경 쓰는 법이 없었다.
저를 살육자라고 비난하든, 저를 보며 살려 달라고 덜덜 떨든 늘 무심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시아나가 저를 향해 어떤 마음일지 생각하니 피가 바짝 마르는 기분이 들었다.
그녀에게 저지른 죄 때문일 것이다.
그녀의 고향을 짓밟고, 그녀의 피붙이들을 모조리 죽인 죄.
그러나 라시드는 그것을 잠시 잊고 있었다.
시아나가 무심하게 제 고향에 대해 아무런 정이 없다고, 그러니 신경 쓰실 것 없다고 담담하게 웃어서.
그러나 문득 두려움이 밀려들었다.
‘그 말이 정말일까?’
시아나는 필사적으로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닐까?
어떻게든 내 비위를 맞추고 싶어서.
내게 죽고 싶지 않아서.
라시드는 끔찍한 결론에 도달했다.
‘시아나는 사실 나를 미워할지도 모른다.’
라시드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가라앉은 얼굴로 앉아 있던 라시드가 몸을 일으킨 것은 어두운 밤이 되어서였다.
끼익.
라시드는 침실 문을 열었다.
“뀨!”
“찍!”
어둠 속에서 흰 페럿과 다람쥐가 라시드를 향해 달려들었다.
작은 동물들의 따스한 온기를 느낀 후에야 굳어 있던 라시드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어렸다.
그러나 이내 라시드의 눈이 커졌다.
작은 동물 세 마리 중 한 마리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짹짹아?”
라시드는 놀란 얼굴로 평소에 짹짹이가 앉아 쉬던 새장을 바라보았다.
짹짹이가 언제든 나갔다 들어왔다 할 수 있도록 문을 열어 놓은 새장이 텅 비어 있었다.
‘이곳에도 없으면 도대체 어디에…….’
드넓은 방을 이곳저곳 살피던 라시드의 시선이 한 곳에 닿았다.
한쪽 문이 열린 창문이었다.
라시드의 침실에 있는 창문 중 하나는 늘 저렇게 열려 있었다. 작은 동물들이 원하면 언제든 자유롭게 방을 나갈 수 있게 하기 위함이었다.
라시드는 느린 걸음으로 창가로 다가갔다.
열린 창밖에는 새까만 밤하늘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라시드는 알 수 있었다.
‘짹짹이가 떠나갔구나.’
씁쓸한 마음이 밀려왔지만 전혀 놀랄 일은 아니었다.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라시드는 숲속에서, 길거리에서, 황궁 어디인가에서 작은 동물들을 데리고 오곤 했다.
그 후에 손수 먹이를 챙겨 주고, 목욕을 시키고, 놀아 주었다.
작은 동물들은 이내 라시드의 품속에 파고들며 애교를 부리곤 했다.
그러나 그 시간은 영원이 아니었다.
아무리 라시드의 품속을 좋아했던 작은 동물이라도 어느 순간이 되면 그의 곁을 떠났다.
라시드는 그것을 이해했다.
‘아무리 잘해 준다 해도 이런 곳에 갇혀 있는 것은 답답했겠지.’
그것을 알았기에 라시드는 작은 동물을 절대 제 품속에 가두지 않았다.
피비린내 나는 궁보다는, 끝없이 펼쳐진 푸른 하늘과 초록 풀잎이 우거져 있는 곳이 훨씬 더 행복할 것을 알았기에.
언젠간 솔과 나누었던 대화가 떠올랐다.
솔은 라시드에게 물었다.
시아나가 궁을 나가고 싶어 하면 어떻게 할 거냐고.
그 질문에 라시드는 이렇게 대답했다.
[시아나가 궁 밖으로 나가길 원한다면 보내 줘야지.]
그때를 떠올린 라시드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일그러진 미소였다.
* * *
루비궁.
정원을 가꾸던 니니가 말했다.
“장미꽃 연회 이후로 황태자 전하께서 안 놀러 오시네?”
나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그전에는 아리스 공주님께 구박을 받으면서도 끈질기게 오셨으면서 말이야.”
니니와 나나가 동시에 한곳을 바라보았다.
챙이 넓은 밀짚모자를 쓰고 부지런히 움직이는 시아나를 향해 두 사람이 ‘흐흐’ 하고 수상쩍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시아나 님, 혹시 장미꽃 연회 때 황태자 전하와 무슨 일 있으셨던 거 아니에요?”
사방에 뻗힌 장미꽃 넝쿨을 정리하고 있던 시아나가 똑 부러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니니와 나나는 그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에이~ 시아나 님이 그렇게 아름다운 숙녀로 변신해서 나타났는데 아무 일도 없었다고요?”
“황태자 전하께서 남자라면 절대 그럴 수가 없죠. 분명 가슴이 쿵쾅쿵쾅, 근육이 불끈불끈하셨을걸요.”
“그래서 전하께서 요즘 루비궁에 못 오고 계신 것 아니야?”
“시아나 님 보는 게 부끄러워서!”
상기된 얼굴로 신나게 말을 주고받는 니니와 나나와 달리 시아나의 얼굴은 평온하기 짝이 없었다.
로맨스 소설 애독자인 두 사람의 핑크빛 상상과 달리, 라시드와 시아나 사이에는 정말 아무 일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 이상했다.
‘갑자기 이렇게 방문이 뜸해지시다니. 설마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시아나는 눈썹을 모았다.
며칠 뒤, 시아나는 황태자궁을 찾아갔다.
낯익은 시녀가 시아나를 맞이했다. 시녀는 시아나를 푸르른 나무와 꽃으로 꾸며진 응접실로 안내했다.
“황태자 전하께 말을 전하겠습니다. 편히 기다리십시오.”
여전히 일개 중급 시녀를 대한다고 하기엔 과하게 깍듯한 모습이었다.
‘그래도 몇 번 겪었다고 예전처럼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되진 않네.’
시아나는 이전보다 편안한 얼굴로 의자에 앉았다.
‘그러고 보니 이렇게 전하를 찾아온 것은 처음이구나.’
시아나가 라시드를 찾아왔을 때는 늘 확실한 이유가 있었다.
그에게 무언가를 부탁하거나, 그에게 받은 도움에 대한 답례를 하기 위해서거나.
그러나 오늘은 순수하게 라시드의 안부가 걱정되어 찾아온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하니 새삼 얼굴에 열이 올랐다.
‘나도 참.’
후끈거리는 얼굴에 손부채질을 하는데 저쪽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시아나는 눈을 빛내며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푸르른 나뭇잎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낸 이는 라시드가 아니었다.
호위 기사 솔이었다.
“……?”
의아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시아나를 향해 솔이 머리를 긁적였다.
“오랜만입니다, 시아나 님.”
라시드가 루비궁에 오지 않은 이후 솔도 오지 않았으니, 장미꽃 연회 이후로 두 사람은 오늘 처음 만난 것이다.
시아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전하를 알현하고 싶어서 왔습니다. 그런데 솔 님만 나오시다니…… 혹시 전하께서 어딘가 편찮으시기라도 한가요?”
“아닙니다.”
“그럼요?”
솔은 눈을 내리깔며 말했다.
“……실은 얼마 전에 전하께서 키우시던 새가 떠나 버렸거든요. 그래서 전하께서 기운이 없으십니다.”
솔의 말에 시아나의 얼굴이 굳었다.
시아나는 라시드의 주변을 날아다니며 빽빽거리던 작은 새를 떠올렸다.
그 새를 사랑스럽다는 듯 보던 라시드의 얼굴도.
‘사람이 죽어도 눈 하나 깜짝 안 하는 분이지만 키우는 동물들에게는 누구보다 진심인 분이잖아. 얼마나 상심이 크실까.’
시아나가 솔을 향해 말했다.
“제가 새를 찾아볼까요?”
“예?”
“황궁이 넓으니 아직 궁 안에 있을 수도 있잖아요. 황궁 곳곳에 있는 시녀들에게 새의 외양과 특징을 알려 주면 목격자가 나타날지도 몰라요.”
눈을 동그랗게 뜬 솔을 향해 시아나가 말을 이었다.
“참, 그리고 새가 좋아하는 것도 알려 주세요. 니니와 나나가 사냥꾼의 딸이라 동물 잡는 데 일가견이 있거든요. 두 사람의 도움을 받으면 새가 다치지 않게 잡을 수 있을 거예요.”
솔은 멍하니 시아나를 바라보았다.
눈을 빛내며 말하는 시아나를 보자니 당장이라도 집 나간 짹짹이가 잡혀 들어올 것 같았다.
대단한 행동력이었다.
이내 정신을 차린 솔이 말했다.
“마음은 감사합니다만 괜찮습니다. 전하께서는 제 발로 나간 동물은 절대 되잡아 오지 않으니까요.”
“…….”
“걱정 마십시오. 시간이 지나면 곧 괜찮아지실 겁니다.”
“정말이요?”
시아나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솔은 저도 모르게 대답했다.
“아니요.”
“…….”
두 사람 사이에 잠시 정적이 머물렀다.
시아나는 단번에 솔이 제게 숨기는 것이 있음을 깨달았다.
시아나가 눈을 가늘게 떴다.
저보다 한참 작은 시아나의 매서운 눈빛에 솔은 저도 모르게 시선을 위로 돌렸다.
그러나 오래가지 못했다.
솔은 곤혹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실은 말이지요.”
“말해 보세요.”
“며칠 전에 미스틱 상단의 키르안이라는 자가 전하를 찾아왔습니다.”
“……!”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이름에 시아나의 눈이 커졌다.
솔이 말을 이었다.
“그자가 전하께 시아나 님을 그만 놓아 달라고 말한 모양입니다. 아무리 나라가 패망했다고 해도 이런 곳에 공주님을 둘 수는 없다면서요.”
시아나는 그 순간 세 가지 생각을 했다.
하나는 키르안에 대한 실망.
‘키르안, 내 말을 무시하고 기어코 나에 대해 조사했구나.’
둘은 키르안에 대한 걱정.
‘아무리 나를 위해서라도 그렇지 전하를 찾아와 저런 말을 늘어놓다니 제정신이야? 그러다가 큰 벌이라도 받으면 어쩌려고.’
그리고 셋은…… 라시드의 대답에 관한 것이다.
“그래서 전하께서는 뭐라고 답하셨나요?”
머뭇거리며 솔이 대답했다.
“……전하께서도 시아나 님을 보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계십니다.”
어째서일까.
저토록 다정한 생각에 이토록 짜증이 치미는 것은.
시아나가 입을 열었다.
“전하를 뵙고 싶어요, 지금 당장.”
정중한 목소리에는 어딘가 싸늘한 감정이 묻어 있어서 솔은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 * *
황태자궁의 응접실에는 창문이 많아 들어오는 바람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사르륵.
시아나는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눈을 떴다.
시아나의 앞에는 라시드가 서 있었다.
[지금 오지 않으시면 다시는 제가 이렇게 전하를 찾아오는 일은 없을 거예요.]
시아나가 솔에게 전한 협박 같지도 않은 말이 먹힌 모양이었다.
지금의 라시드에게는 그게 가능했다.
‘그런 사람이 나를 내보내겠다고?’
시아나는 가는 눈으로 라시드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시아나는 평소처럼 라시드와 눈을 마주칠 수 없었다.
시아나를 보기만 하면 쉴 새 없이 눈웃음을 치던 라시드는 현재 무표정한 얼굴로 눈을 내리깔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치 시아나에게 아무 관심이 없는 것처럼.
그러나 그것은 겉으로 드러난 모습일 뿐이었다.
지금 라시드는 엄청난 불안함을 느끼고 있었다.
‘시아나가 당장 황궁을 나가고 싶다고 하면 어쩌지?’
혹시 그런 말을 들을까 봐 두려워 시아나를 찾아가지도 않았다.
그러나 결국 이렇게 저를 찾아온 시아나를 마주하게 되니 심장이 쿵쿵 뛰었다.
그 마음을 알 리 없는 시아나는 말없이 라시드를 보다가 두 손을 모아 허리를 숙였다.
“고귀하신 황태자 전하께 인사드립니다. 미리 연락도 없이 찾아온 시녀에게 귀한 시간을 내주셔서 황송합니다.”
“……!”
라시드의 눈이 커졌다.
시아나가 이런 식으로 제대로 예를 갖추어 인사를 한 것은 오랜만이었기 때문이다.
시아나의 행동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시아나는 고개를 숙인 채 말을 이었다.
“전하, 솔 님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미스틱 상단의 키르안이 전하를 찾아와 저를 풀어 달라는 청을 했다지요?”
“……!”
라시드의 눈빛이 흔들렸다.
한참 후에야 라시드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래.”
“…….”
“……너는 어떻게 하고 싶으냐.”
라시드는 미약한 기대를 품고 있었다.
시아나는 아리스를 정성을 다해 모시고 있는 중이고, 빠른 속도로 중급 시녀로 승급할 만큼 능력도 인정받고 있다.
‘그러니 의외로 시아나는 이 궁에 남고 싶다고 말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러나 시아나의 말은 라시드의 예상과는 전혀 달랐다.
“전하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겠습니다.”
“……뭐?”
“저는 전하께 목숨을 구걸하는 대가로 황궁의 시녀가 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저의 신병에 관한 권한은 전하께 있습니다.”
“…….”
“어떻게 할까요, 전하. 제가 황궁을 떠날까요, 아니면 이곳에 계속 있을까요.”
시아나의 목소리는 더없이 평온했다.
아무 감정도 느껴지지 않을 만큼.
그러나 라시드는 그녀와는 다르게 엄청난 혼란을 느끼고 있었다.
물론 답은 정해져 있었다.
‘제 왕국을 멸망시키고 가족을 죽인 남자의 곁에 있고 싶을 리가 없잖아.’
게다가 시아나는 이따금 과거를 이야기할 때 왕궁 시절은 끔찍한 기억뿐이라고 했다.
그랬던 그녀가 이곳이라고 다르게 느낄 리가 없었다.
게다가 공주도 아닌 일개 시녀로 있으니 더더욱.
라시드가 입을 열었다.
“가…….”
“…….”
이내 얼음처럼 무표정했던 얼굴이 허물어졌다.
“가지 마.”
라시드는 떨리는 손으로 시아나의 어깨를 잡아 저를 보게 했다. 그리고 한 번 더 말했다.
“네가 원하는 것은 뭐든 해 줄게. 일개 시녀로 있는 것이 힘들다면 적당한 신분을 만들어 주마. 물질적인 보상이 필요한 것이라면 다이아몬드 광산이든, 대저택이든 무엇이든 줄게. 그러니까…….”
“…….”
“이 황궁에 계속 있어 줘. ……제발, 부탁이다.”
시아나에게 너무나 끔찍하고 잔인한 말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멈출 수가 없었다.
일생 처음 느낀 간절한 바람이었으니까.
라시드는 허물어진 얼굴로 시아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시아나는 평소와 똑같은 얼굴로 라시드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라시드는 심장이 꽉 조이는 느낌을 받았다.
손끝이 차가워지고 입 안이 바싹 말라왔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시아나가 두 눈을 부드럽게 휘었다.
“그럴게요.”
라시드는 그 말을 믿을 수가 없어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정말이냐?”
“네. 저는 한 입으로 두말을 하지 않습니다. 전하의 바람대로 이 황궁에 있어 드리죠.”
“…….”
라시드는 믿기지 않는 얼굴로 시아나를 바라보다가 시아나를 와락 안았다.
라시드의 꽉 잡은 두 팔에서는 시아나가 가지 않아 다행이라는 마음이 듬뿍 묻어나 있었다.
그것을 느낀 시아나는 멍하니 라시드의 얼굴을 쳐다보다가, 이내 정신을 차리고 그를 밀어냈다.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전하. 궁에 남아 있겠다고 한 것이지 이런 망측한 짓을 허락한 것이 아니예요!”
시아나의 뾰족한 목소리에 라시드가 아차 싶은 얼굴로 시아나를 안았던 손을 뗐다.
“미안. 너무 기뻐서 그만…….”
그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처럼 라시드의 얼굴에서 환희와도 같은 기쁨이 느껴졌다.
시아나는 가슴이 간질거리는 느낌에 흠, 하고 헛기침을 했다.
목소리를 가다듬은 시아나가 물었다.
“제가 전하의 부탁을 들어주면 원하는 것은 뭐든 들어주신다고 하셨죠?”
“물론이야.”
라시드는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시아나를 잡기 위해 허풍을 떤 것이 아니었다. 라시드는 정말로 그녀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해 줄 생각이 있었다.
시아나가 라시드와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다시는 저의 거취에 대해 함부로 결정하지 마세요.”
“…….”
“확실히 황궁에 처음 온 것은 온전한 제 의지가 아니었어요. 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선택한 것이었죠. 하지만 지금은 아니에요. 저는 이곳의 생활이 제법 만족스럽습니다.”
물론 언젠간 황궁 생활이 질릴지도 모른다. 시녀 일이 벅찰 수도 있고.
그럼 이곳을 떠나고 싶겠지.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시아나가 또렷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앞으로는 제 의지로 제가 있을 곳을 선택할 거예요. 그것을 존중해 주세요.”
그 말은 시아나가 언제든 원하면 이곳을 떠날 수도 있다는 말이었다.
그럼에도 안심이 되는 것은 지금 이 순간만큼은 시아나가 이곳에 있다는 것이다.
그것도 자신의 의지로.
라시드의 얼굴에 웃음이 어렸다.
“얼마든지. 네가 원하는 대로 해.”
천사처럼 해사한 미소를 짓는 라시드를 바라보며 시아나는 생각했다.
‘내가 황궁에 있고 싶은 이유 중 하나는 저 얼굴 때문일지도 몰라. 온 세상을 돌아다녀도 보기 힘들 만큼 아름다운 얼굴이잖아.’
내가 이렇게 예쁜 것에 약할 줄이야.
시아나는 자신에 관한 새로운 사실을 깨달으며 입을 열었다.
“어쨌건 복잡한 이야기를 끝냈으니 이제 두 번째 본론을 꺼내도 될까요?”
“……?”
“사실 일전에 약속했던 선물을 가지고 왔거든요.”
그 말에 라시드의 눈이 커졌다.
* * *
얼마 전 시아나는 솔에게 브로치를 선물해 주었다.
내 것은 없냐고 입이 삐죽 나온 라시드에게 시아나는 전하께는 다른 선물을 준다고 했다.
그 말에 라시드는 시아나가 제게 줄 선물이 무엇일지 며칠을 고민했다.
장미꽃 축제 때 본 시아나의 모습과 뜬금없이 저를 찾아와 시아나를 풀어 달라던 키르안 때문에 까맣게 잊고 있었지만.
라시드가 눈을 빛냈다.
‘뭔데? 뭐야?’
세상에서 가장 멋진 선물을 기대하는 고양이처럼 눈을 빛내는 라시드의 앞에 시아나가 내민 것은 마른 장미꽃잎이 담긴 유리병이었다.
시아나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캐싱턴가든 장미꽃으로 만든 찻잎이에요. 그래서 시간이 좀 걸렸죠.”
캐싱턴가든 장미꽃은 향과 맛이 강한 품종이라 차를 만들기 좋지만 다른 장미꽃보다 피는 시기가 조금 늦었다.
며칠 전에야 화사하게 핀 장미꽃을 따서 찻잎을 만들 수 있었다.
“전하께서 브로치보다는 차를 더 좋아하리라 생각해서 만든 것인데 어떠실지 모르겠네요.”
“최고야!”
라시드가 두 눈을 반짝이며 힘차게 소리쳤다.
그 모습에 시아나는 눈썹을 내리며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사실 순수하게 가격만 따지면 브로치가 이 찻잎보다 수백 배는 비싼 물건인데.’
그런 것은 상관 않고 격하게 기뻐하는 라시드를 보니 뿌듯함이 밀려들었다.
시아나는 헤헤 웃으며 말했다.
“그럼 서비스로 첫 잔은 제가 따라 드릴까요?”
시아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라시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시아나는 시녀를 불러 준비를 부탁했다.
이내 동그란 테이블에 뜨거운 물과 찻주전자, 찻잔이 놓였다.
시아나가 유려하게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찻주전자의 거름망 안에 바싹 말린 장미 꽃잎을 넣고, 그 안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찻물을 넣었다.
그 후에 찻물을 한 번 버린 후 다시 한번 뜨거운 찻물을 넣었다.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보던 라시드가 물었다.
“시아나.”
“네.”
“……나를 미워하지 않아?”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시아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라시드가 눈을 내리깔았다.
사실 라시드가 시아나를 피한 것은 그녀가 떠나겠다고 할까 봐서만은 아니었다.
시아나가 자신을 미워한다고 할까 봐.
그것이 무서웠다.
그러나 그의 두려움이 무색하게 시아나는 담담하게 말했다.
“몇 번이나 말씀 드렸잖아요. 저는 제 고향과 가족에 아무런 애정도 없어요. 전하께 아무런 미움도 원망도 없답니다.”
“…….”
“그러니까 어울리지 않게 풀죽은 얼굴 마시고 평소처럼 행복한 얼굴로 차를 즐겨 주세요.”
그렇게 말하며 시아나는 라시드의 앞에 놓인 찻잔에 차를 따랐다.
또르르…….
둥그런 호선을 그리며 내려온 찻물이 찻잔에 채워졌다.
라시드는 그것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시아나가 분명히 말했다.
저를 미워하지 않는다고.
그럼 그것을 믿으면 그뿐이었다.
라시드는 이제 더는 이 일로 흔들리지 않을 생각이었다.
라시드는 한결 편안해진 얼굴로 찻잔을 들어 입가에 가져갔다.
“맛있어.”
환하게 풀어진 라시드의 얼굴을 보며 시아나는 뿌듯한 얼굴로 웃었다.
제 앞에 놓인 찻잔에도 찻물을 채운 시아나가 코를 찡긋거렸다.
‘캐싱턴가든의 장미꽃은 역시 향기가 진해.’
꼭 작은 찻잔 안에 장미꽃이 핀 것 같았다.
시아나가 차를 홀짝이며 말했다.
“그거 아세요? 장미꽃 차에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져요. 사랑과 장미꽃의 여신 로즈린타의 축복을 받은 장미꽃으로 차를 만들어 함께 마시면 사랑에 빠진다고 하네요.”
물론 누군가 만들어 낸 유치한 미신일 것이 분명했다.
‘얼핏 들으면 로맨틱한 이야기지만, 사랑에 빠져도 괜찮을 이성과 단둘이 차를 마시는 경우는 많지 않잖아.’
오히려 차는 동성과 즐기는 경우가 훨씬 많았다.
티 파티 때 로즈린타의 힘을 받은 장미꽃 차를 마시기라도 한다면……
‘테이블에 앉아 있는 여인들끼리 사랑하게 될 테지. 난장판이 따로 없을 거야.’
시아나는 황당한 상상에 킥킥 웃었다.
그리고 그런 시아나를 라시드는 넋을 놓고 바라보고 있었다.
장미꽃 연회 때 시아나가 달라 보였던 것은 그녀가 평소와는 다르게 화려한 치장을 해서라고 생각했다.
짙은 속눈썹과 붉은 입술 때문이라고.
하지만…….
화장기 없는 소담한 얼굴과 장식 하나 없이 밋밋한 진녹색 제복을 입고 있는 지금도…….
‘그때처럼 심장이 뛰어.’
쿵, 쿵, 쿵, 쿵.
이러다 이 소리가 새어 나가면 어쩌나 싶을 만큼 크게.
제 앞에서 웃고 있는 작은 여인을 향해서.
그리고 이제 라시드는 그 이유를 모르지 않았다.
‘작은 동물처럼 귀여워했던 것이 아니었어.’
언젠가부터 나는 너를 사랑하고 있었다.
한 명의 여자로.
내 곁을 떠난다는 생각만으로 두려워질 만큼.
* * *
캐롤라인은 초조한 얼굴로 소파에 앉아 있었다.
황궁으로 간 동생 키르안이 아직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캐롤라인은 긴 손톱을 물어뜯으며 다리를 떨었다.
‘젠장. 어떻게든 가지 못하게 막았어야 하는데!’
얼마 전 시아나가 두 사람을 찾아온 후, 키르안은 시아나의 현 상황을 알아야겠다며 조사를 시작했다.
그리고 이내 어마어마한 사실을 알아냈다.
시아나 공주가 현재 황궁의 시녀로 있다는 것이다.
그것도 다른 이도 아닌 황태자의 힘으로.
그것을 안 키르안은 소리를 질렀다.
[황태자, 이 개자식! 감히 공주님을 납치해서 시녀로 부려 먹어?!]
캐롤라인은 날뛰는 키르안을 진정시키기 위해 별수를 다 썼지만 이번에는 통하지 않았다.
키르안은 제 발목을 붙잡는 캐롤라인을 떼어 내고 기어코 황궁으로 가 버렸다.
‘지금이라도 쫓아가 데리고 올까?’
하지만 캐롤라인이 아무리 동생을 사랑한데도 같이 죽을 생각은 없었다.
그만큼 캐롤라인은 현재 키르안의 생사에 큰 불신을 가지고 있었다.
키르안이 이글거리는 눈으로 찾아간 자가 다른 누구도 아닌 피의 황태자 라시드였으니까.
그러나 아무리 꼴 보기 싫어도 동생은 동생이었다.
‘지금이라도 키르안을 구하러 가자.’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문을 연 캐롤라인은 눈을 크게 떴다.
문 앞에 키르안이 서 있었기 때문이다.
캐롤라인은 놀란 얼굴로 키르안을 쳐다보다가 중얼거렸다.
“벌써 유령이 되어 버린 거야?”
“…….”
“으아앙! 그러니 내가 가지 말랬잖아, 이 멍충아!”
캐롤라인은 울먹이며 주먹으로 키르안의 가슴을 쾅쾅 쳤다.
그리고 이내 주먹에 느껴지는 감각이 무척 실감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이건 유령에게서 느낄 수 있는 타격감이 아니었다.
캐롤라인이 키르안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안 죽었어?”
“무슨 개소리야.”
키르안은 어이없다는 얼굴로 험한 말을 중얼거리더니 캐롤라인을 지나쳐 방 안으로 들어왔다.
소파에 앉아 테이블 위에 놓인 물을 벌컥벌컥 마시는 키르안을 보며 캐롤라인은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말했다.
“회까닥 돌아 버린 얼굴로 떠나기에 분명 황태자 전하께 ‘공주님을 돌려놔, 이 개새끼야’ 따위의 말을 해서 목이 잘릴 거라 생각했는데…… 어떻게 이렇게 멀쩡하게 돌아왔어?”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섬뜩한 말을 늘어놓는 누나를 노려보며 키르안이 말했다.
“그놈도 인간으로서 가져야 할 최소한의 양심은 있었던 모양이야. 내가 시아나 공주님에 관한 이야기를 하니 찍소리도 못하던걸.”
인간으로서 가져야 할 최소한의 양심, 찍소리, 그 어떤 것도 제가 아는 피의 황태자라는 별명을 가진 남자와 매칭이 되지 않아 캐롤라인은 눈썹을 찡그렸다.
‘어쨌건 키르안이 살아온 것은 사실이니까.’
캐롤라인은 찝찝한 얼굴로 키르안의 말을 일부 수용하며 물었다.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할 건데?”
“준비가 되면 시아나 님을 당장 뵈러 갈 거야. 그리고 이야기를 해 주어야지. 공주님을 악랄하게 붙잡아 놓았던 황태자 놈은 입 다물게 했으니 이제 마음 놓고 궁을 떠나도 된다고.”
“그리고?”
“뭘 그리고야. 당연히 공주님을 모셔 와 최고로 안락한 생활을 하게 해 드려야지.”
캐롤라인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머니께서 그따위 호구 짓을 잘도 허락하시겠다.”
미스틱 상단의 상단주이며 두 남매의 어머니 레드락은 철저하게 이익으로만 움직이는 여인이었다.
데리고 있어 보았자 이득이라고는 없는 시아나 공주를 아들이 모시겠다고 하면 그녀는 절대 허락하지 않으리라.
그러나 정작 키르안의 얼굴은 태평했다.
“문제없어. 어머님이 하는 말은 무엇이든 들어드릴 테니까.”
“…….”
“귀족들이 득실거리는 귀족 아카데미에 입학하는 것이든, 파티를 다니며 꼴 보기도 싫은 귀족들에게 아부를 떠는 것이든, 말 잘 듣는 개처럼 다 한다고 할 거야. 그럼 어머니도 그 정도는 내 마음대로 하라고 허락하시겠지.”
캐롤라인은 기가 찼다.
지금 키르안이 말한 것은 모두, 키르안이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하기 싫다고 질색을 하던 것들이기 때문이다.
시아나는 질린 얼굴로 말했다.
“네가 시아나 공주에게 빠져 있는 건 알았지만 이 정도였을 줄이야.”
솔직히 조금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캐롤라인이 보기에 시아나는 발에 차일 만큼 평범한 여인이었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그녀보다 고귀한 신분을 가지고 있는 자도, 훨씬 더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자도 많았다.
그러나 그것은 캐롤라인의 생각일 뿐이었다.
키르안에게 시아나는 세상에서 단 한 명뿐인, 특별한 공주님이었다.
처음 만난 그날부터.
* * *
키르안이 7살, 캐롤라인이 10살 되던 해, 두 사람은 어머니와 함께 마차를 타고 어디론가 향하고 있었다.
최고급 셔츠에 앙증맞은 나비넥타이를 맨 어린 아들과 레이스가 달린 화사한 드레스를 입은 딸을 향해, 미스틱 상단주 레드락이 말했다.
“지금 가는 아실론드 왕국의 왕비님은 우리 미스틱 상단을 매달 찾아 주시는 특별 고객이시다. 내가 아이가 있다고 하니 왕비님께서 한번 데리고 오라고 하시더구나. 왕자님과 공주님도 나이가 비슷하니 함께 놀면 좋겠다고 말이야.”
레드락은 왕비의 제안을 받아 들였다.
상단의 값비싼 물건을 거침없이 구입해 주는 왕비의 비위를 맞추기 위한 것이기도 했고, 두 아이들이 후에 미스틱 상단을 이을 것을 생각하면 슬슬 왕궁 분위기를 익힐 때도 된 참이었기 때문이다.
레드락이 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왕자님과 공주님을 만나면 잘 놀아 드려야 한다. 미래의 고객이 될 분이니.”
어릴 때부터 싹싹했던 캐롤라인은 “네!” 하고 힘차게 대답했다.
캐롤라인은 잔뜩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말로만 듣던 공주님과 왕자님을 처음 만나는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그와 달리 옆에 앉은 키르안의 표정은 뾰로통하기만 했다.
‘왕자와 공주라니 안 봐도 뻔해. 귀족들보다 더 재수 없겠지.’
그러나 그 생각은 틀렸다.
키르안이 생각했던 것보다 왕자와 공주의 상태는 심각했다.
이제 막 7살이 된 아실론드 왕위 후계자이자 유일한 왕자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는 캐롤라인이 왕자와 공주와 친해지기 위해 가지고 온 인형을 아무 말도 않고 빼앗아 가더니, 인형의 배를 나무로 만든 장난감 칼로 푹푹 찌르기 시작했다.
“크헤헤헷.”
솜이 튀어나온 인형을 보고 웃어 대는 어린 소년의 모습은 섬뜩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왕자가 캐롤라인과 키르안에게는 일절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 그럼 저희는 이만…….”
캐롤라인은 창백해진 얼굴로 키르안의 옷소매를 잡아끌어 옆방으로 향했다.
공주의 방이었다.
이제야 왜 왕자와 공주가 각기 다른 방에 있는지 알았다.
‘왕자가 저 모양이라 그렇구나. 공주님은 다르겠지.’
캐롤라인은 희망을 걸었다.
다행스럽게도 왕자보다 1살 어린 공주는 평범했다.
그러니까, 평범한 수준에서 못됐다는 말이다.
“네가 인형이고 내가 주인이야. 인형은 주인 말을 잘 들어야지?”
캐롤라인이 제대로 대답도 하기 전에 어린 공주는 캐롤라인에게 달려들어 긴 머리카락을 우악스럽게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아얏!”
캐롤라인의 비명소리에 놀란 키르안이 공주에게 소리쳤다.
“이게 무슨 짓이야!”
그 순간 한편에서 지켜보던 시종들이 달려와 정색했다.
“감히 공주님께 그게 무슨 말버릇 입니까.”
무서운 얼굴을 한 어른들이 키르안을 둘러쌌다.
평범한 아이라면 눈물을 터뜨릴 만한 상황이었으나 키르안은 고양이 같이 뾰족한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
“당신들도 봤잖아요. 공주님이 누나를 아프게 했어요.”
되바라진 말버릇에 시종들의 얼굴이 더더욱 험악해졌다.
제아무리 왕비님이 아끼는 상단주의 자식들이라지만, 그들의 눈에는 미천한 평민일 뿐이었다.
“아무래도 도련님에게는 왕실의 교육이 필요한 것 같군요.”
그들이 키르안에게 다가가려는 순간 캐롤라인이 끼어들었다.
“요, 용서해 주세요. 제 동생이 아직 어려서 모르는 것이 많아요!”
“…….”
시종들이 잠시 멈춘 틈을 타 캐롤라인이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환하게 웃었다.
“참, 어머니께서 공주님께 드리라고 선물을 잔뜩 챙겨 주셨는데…….”
캐롤라인은 커다란 목소리로 소리치며 가방에서 온갖 장난감들을 꺼내 놓기 시작했다.
작은 마력석을 넣어 소리가 나거나 움직이는 장난감들이었다.
신기한 구경거리에 시종들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 눈썹을 찡그리고 있던 공주도 우와! 하고 눈을 빛냈다.
그 틈을 타 캐롤라인이 키르안에게 속삭였다.
“괜히 일 크게 만들지 말고 넌 나가 있어.”
키르안은 분통이 터졌다.
공주랍시고 누나를 괴롭혀 댄 꼬맹이의 엉덩이를 흠씬 때려 주고, 저를 협박하듯 노려보던 시종들에게도 한마디 더 해 주고 싶었다.
그러나 그랬다가는 캐롤라인이 애써 부드럽게 만든 분위기가 망쳐지겠지.
키르안도 그 정도 눈치는 있었다.
“망할.”
키르안은 어린애답지 않은 험한 말을 중얼거리며 방을 나섰다.
건물 밖으로 나온 후에도 키르안의 분노는 식지 않았다
‘왕자나 공주나 재수 없어!’
어머니가 왕자와 공주와 친하게 지내라고 했던 말은 머릿속에서 사라진 지 오래였다.
키르안은 저렇게 성질머리 더러운 꼬맹이들과 어울릴 생각 따위 없었다.
그래서 키르안은 성큼성큼 걸었다.
처음 와 보는 성이라 길은 알지 못했지만, 최대한 저 악마들의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키르안은 만족스러운 곳을 발견했다.
오가는 사람이 전혀 보이지 않는 정원 한구석, 제대로 관리가 되지 않아 풀과 나무가 우거진 곳이었다.
오면서 본 화려한 정원에 비하면 밀림과 다를 바 없을 만큼 투박했지만 키르안은 이곳이 마음에 들었다.
‘여기에서 죽치다가 적당한 시간이 되면 돌아가자.’
키르안은 완벽하게 사람들의 눈을 피할 생각으로 거대한 버드나무 뒤로 걸어갔다.
“……!”
키르안은 눈을 크게 떴다.
그늘진 나무 아래에 한 소녀가 쪼그려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동그란 얼굴에 큰 눈망울을 가진 순진한 얼굴의 소녀가 새빨개진 눈으로 울고 있었다.
차마 소리도 내지 못하고.
키르안은 원래 어린애는 질색이었다.(지도 어린애면서.)
거기에 여자애는 더 싫고, 그 여자애가 울면 더욱더 싫었다.
‘씨, 괜한 걸 봐 버렸네.’
마음 같아서는 못 본 척 돌아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어머니의 엄격한 교육 덕분에, 다른 건 몰라도 여자가 울고 있으면 위로해 줘야 한다는 인식이 콕 박혀 있었기 때문이다.
‘누나가 챙겨 준 손수건이라도 던져 주자.’
키르안은 주머니를 뒤적여 손수건을 건넸다.
“……!”
불쑥 내밀어진 손길에 놀란 소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작은 손으로 손수건을 받았다.
그러더니 손수건에 얼굴을 묻고 다시 울기 시작했다.
작은 어깨를 흐느끼며.
키르안은 소리 없이 우는 것이 얼마나 서글픈 것인지 그날 처음 알았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겨우 울음을 멈춘 소녀는 손수건에서 얼굴을 떼었다.
방금 전까지 울었던 동그란 눈에는 맑은 눈물이 어려 있었다.
‘귀엽다.’
저를 바라보는 얼굴을 보며 키르안은 시답지 않은 생각을 했다.
소녀가 콧물을 훌쩍이며 말했다.
“손수건을 빌려주어 고마워.”
“아니, 뭐.”
“다시 줘야 하는데 손수건이 너무 더럽혀졌구나. 어쩌면 좋지?”
“안 줘도 돼. 집에 그런 손수건이 100장은 더 되니까.”
키르안의 말에 소녀는 키득 웃음을 터뜨렸다.
“역시 부자는 다르네.”
“……날 알아?”
“시녀에게 들었어. 오늘 궁에 미스틱 상단의 상단주와 그녀의 아들과 딸이 온다고.”
여린 목소리로 또랑또랑 말하는 소녀를 바라보며 키르안은 위화감을 느꼈다.
기껏해야 제 나이 정도 되어 보이는데 말투가 도무지 어린애 같지가 않았다.
게다가 입고 있는 드레스나 장신구도 궁에서 일하는 어린 시녀와는 거리가 멀고.
키르안이 눈을 가늘게 떴다.
“너 누구야?”
그 말에 소녀는 어머, 하는 얼굴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손수건까지 얻어 썼는데 아직 내 소개도 하지 않았구나. 부끄러워라.”
소녀는 쪼그려 앉아 있던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허리를 곧게 편 소녀는 아까보다는 커졌지만 여전히 작았다.
그러나 그녀가 어린아이로 보인 것은 그때까지였다.
소녀는 치맛자락을 한 손으로 잡고 고개를 살짝 숙였다.
소녀는 맑은 에메랄드색 눈동자로 키르안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부드럽게 휘었다.
“내 이름은 시아나 아실론드 폰 실리테. 아실론드 왕국의 첫 번째 공주란다.”
눈물이 남아 있는 앳된 얼굴.
보석이 치렁치렁 달린 드레스가 무거워 보일 만큼 작은 몸.
그러나 그것들과 어울리지 않게 한없이 우아한 동작에 키르안은 뭐라 말할 수 없는 감정을 느꼈다.
그날, 키르안은 어머니께 물어 시아나 공주에 대한 것을 들었다.
아실론드 왕국의 첫 번째 공주.
그러나 현 왕비의 친자식이 아니라 제대로 된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왕은 자기 딸이 그런 취급을 받게 내버려 둬요?”
“폐하는 왕비님과 사이가 좋은 반면 자식에게는 큰 관심이 없으시다. 게다가 왕비님이 공주님을 구박하는 방법은 대놓고 욕을 한다거나 때리는 것도 아니니 더더욱 신경 쓸 일이 없지.”
“……그게 무슨 말이에요?”
“왕비님은 공주님을 어린아이에게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을 만큼 엄하게 교육을 시킨다더구나. 그리고 배운 것을 제대로 해내지 못하면 무섭게 혼을 내고.”
“…….”
“어쨌건 공주님을 가르친다는 명분이 있는 셈이니 폐하도 아무 말씀 하지 않으시는 거지. 그러니까…….”
레드락은 어린 아들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콕 찌르며 말을 이었다.
“우연히라도 시아나 공주님을 만나면 필요 이상 친한 척하지 마. 가까워져 보았자 득이 될 게 없으니.”
하지만 늦었다.
키르안은 이미 시아나를 만난 후였다.
눈치 좋은 키르안은 어머니에게 굳이 그 말을 하지 않았다.
대신 키르안은 레드락이 왕궁에 갈 때마다 따라갔다.
레드락은 키르안이 궁에 와 보았자 왕자나 공주와 놀지 않고 사라지는 것을 알았으나 크게 상관하지 않았다.
왕비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고, 캐롤라인도 미친 왕자와 못된 공주를 상대하는 데 키르안이 없는 게 훨씬 낫다고 했으니까.
‘뭐, 기껏해야 한시도 가만있지 못하는 새끼 여우처럼 왕궁을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있겠지.’
그러나 그 시간, 키르안은 수풀과 나무가 우거진 정원 구석에서 시아나와 만나고 있었다.
어머니 몰래 챙겨 온 장난감을 가지고.
“공주님, 이거 받으세요.”
키르안은 어느새 시아나에게 존댓말을 쓰고 있었다.
시아나가 저보다 2살 많다는 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공주인 시아나를 향해 예를 갖춘 것이었다.
시아나는 눈을 반짝이며 키르안이 준 선물을 손에 들었다.
오늘 키르안이 가지고 온 장난감은 은으로 만든 나비였는데 허공 위로 던지면 날개를 펄럭이며 날았다.
“와, 정말 예뻐. 꼭 진짜 나비 같다.”
시아나가 나비를 바라보며 손뼉을 치며 웃었다.
“고마워, 키르안.”
저를 향해 환하게 웃는 시아나를 바라보며 키르안은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 키르안은 시아나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이곳은 시아나가 누구에게도 간섭받지 않고 숨고 싶을 때 오는 비밀 기지였다.
처음 만난 날 시아나가 울고 있던 이유도 알았다.
[어마마마께서 미스틱 상단주를 만나는 동안 아실론드 왕가의 역대 계보를 외우라고 하셨거든. 아무리 노력해도 잘 외워지질 않아 속상해 눈물이 조금 나왔어.]
그 말을 하며 시아나는 눈썹을 내리며 웃었다.
철없는 제 행동이 부끄럽다는 듯이.
그러나 키르안은 시아나가 말하지 않은 내용을 알고 있었다.
시킨 것을 제대로 해내지 못하면 날아들 왕비의 회초리가 무서워 시아나는 울었던 것이다.
아무도 저를 찾을 수 없는 곳에 숨어서.
그것을 생각하면 키르안은 가슴이 아파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어떻게든 여린 공주님을 위로해 주고 싶었다.
행복한 얼굴로 나비 장난감을 만지작거리는 시아나를 향해 키르안이 말했다.
“공주님, 세상에는 엄청난 것들이 많아요.”
“알고 있어. 키르안이 말해 주었잖아.”
키르안은 시아나에게 미스틱 상단에 있는 신비로운 물건들에 대해 이야기해 주곤 했다.
이미지를 보여 주는 구슬이라든가, 사람의 목소리를 저장하는 도구, 그리고 또…….
“사람이 하늘을 날 수 있게 해 준다는 마력석이 가장 흥미로워. 내게도 그런 것이 있으면 좋을 텐데.”
눈을 반짝이는 시아나를 보며 키르안이 물었다.
“……궁을 나가고 싶으세요?”
시아나는 대답 없이 서글픈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간절히 원해도 쉽게 이뤄질 수 없는 소망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아마 시아나가 이 끔찍한 곳을 나가는 것은, 저를 확실하게 불행하게 만들 남편감이 정해진 후에나 가능할 것이다.
그것이 새 왕비의 바람이었으니까.
그리 희망적이지 않은 미래를 떠올린 시아나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것을 본 키르안이 시아나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키르안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시아나가 눈을 크게 떴다.
키르안이 말했다.
“시아나 공주님, 조금만 기다리세요. 언젠간 제가 공주님을 꼭 이곳에서 데리고 나갈게요.”
시아나는 갑자기 왜 그런 말을 하냐고 묻지 않았다. 철없는 말을 한다고 핀잔을 주지도 않았다.
그저 웃었을 뿐이다.
그런 말을 해 주어서 고맙다는 듯이.
시아나 열여섯 살, 키르안 열네 살 때의 일이었다.
그 후, 키르안은 한동안 아실론드 왕국에 갈 일이 없었다.
대륙 곳곳을 떠도는 미스틱 상단이 아실론드 왕국의 반대편으로 길을 떠났기 때문이다.
그사이 키르안은 어머니에게 조금이라도 인정받기 위해 노력했다.
조금이라도 힘을 가지면 어떡해서든 시아나를 지옥 같은 성에서 구해 낼 생각이었다.
그러나 2년 후, 키르안에게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졌다.
“……뭐?”
“아실론드 왕국이 제국군의 침략으로 패망했습니다. 패배의 책임을 물어 왕을 포함한 모든 왕족의 목을 베었다고 합니다.”
키르안은 머릿속이 하얘졌다.
그러다 겨우 입술을 떼어 물었다.
“시, 시아나 공주님은?!”
“시아나 공주의 시체는 발견되지 않았습니다만 높은 확률로 전란에 휘말려 사망하신 것으로 추정됩니다.”
키르안은 커다란 바윗덩이가 제 뒤통수를 후려갈기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늘 고마워, 키르안.]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 저를 향해 웃던 작은 공주님이 떠올랐다.
여리디여린 미소였다.
* * *
그 후, 키르안은 시아나를 미친 듯이 찾아다녔다.
결코 그녀가 죽었을 리 없다는 간절한 희망을 가지고.
그러다가 드디어 시아나를 만났다.
믿기지 않게도 시아나는 아실론드 왕국을 짓밟은 제국의 황태자가 있는 황궁에 있었다.
그것도 노예나 다름없는 시녀로.
키르안은 분노한 얼굴로 벽을 내리쳤다.
‘빌어먹을 성을 나오셨나 했는데 원수에게 끌려와 개고생을 하고 계셨다니.’
키르안은 시아나가 안쓰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목숨을 걸고 황태자를 찾아가 하고 싶은 말을 다 했고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었다.
황태자는 시아나가 원하는 대로 해 주겠다고 했다.
황궁에서 돌아온 키르안은 당장에 계획을 짰다.
‘일단 시아나 공주님을 뵙고 상황을 말씀드리자. 황태자가 보내 주기로 한 것을 아시면 얼른 궁을 나오실 테지. 그럼 최고급 호텔로 모신 후에 일 잘하는 하녀 5명을 붙여 드릴 거야.’
시아나는 공주였다.
그녀는 누군가를 섬기는 것보다 시중받는 게 훨씬 잘 어울리는 존재였다.
‘적어도 한 달은 손끝 하나 움직이지 않아도 될 만큼 편히 쉬게 해 드리자.’
작고 여린 공주님이 한동안 시녀로서 궂은일을 했을 거란 생각을 하니 정신이 아찔했다.
‘그렇게 쉬다가 기운이 좀 나시면 쇼핑을 시켜 드리는 거야.’
키르안을 찾아왔던 시아나는 싸구려 원단으로 만든 옷을 입고 있었다.
새 왕비에게 아무리 구박받아도 차림새만큼은 늘 단정했던 시아나였기에 키르안은 그 모습에 충격을 받았다.
‘최고급 드레스를 입고 반짝이는 액세서리를 하시면 엄청 예쁘실 거야. 장미꽃 연회 때도 그토록 아름다우셨으니까.’
또 뭘 해 드리면 좋을까.
키르안은 상기된 얼굴로 시아나에게 해 주고 싶은 것들을 생각했다.
그러던 중 예상 못한 손님이 찾아왔다.
시아나였다.
시아나는 일전에 왔던 모습대로, 장식 하나 없는 초라한 옷에 낡은 후드를 걸치고 있었다.
예상치 못했던 시아나의 방문에 키르안의 얼굴이 환해졌다.
“어서 오세요, 공주님. 일단 앉으세요.”
기꺼이 상석을 양보하는 키르안을 향해 고개를 저은 시아나가 말했다.
“키르안, 며칠 전 황궁으로 와 황태자 전하를 알현했다면서.”
그제야 키르안은 시아나가 자신을 왜 찾아왔는지 깨달았다.
키르안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아요. 지난번 공주님께서 저를 찾아오신 후 조사를 했어요. 그래서 황태자가 공주님께 얼마나 극악무도한 짓을 저질렀는지 알게 되었죠.”
“…….”
“그래서 황태자를 찾아가 말했습니다. 더는 공주님을 괴롭히지 말고 놓아 달라고요. 황태자도 그러겠다고 했어요.”
키르안이 목소리에 힘을 주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 공주님, 이제 더 이상 황태자의 눈치를 보며 겁먹으실 필요 없어요. 공주님께서 하고 싶으신 대로 하시면 된다고요.”
키르안은 확신하고 있었다.
황태자만 아니라면 시아나가 적국의 황궁에서 시녀 따위로 있을 리가 없다고.
그러나 그건 키르안의 착각이었다.
키르안을 마주 본 시아나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키르안, 나는 네 생각처럼 지금의 생활이 끔찍하지 않아.”
“네……?”
“공주였었던 시절에는 몰랐지만, 난 땀이 나올 만큼 몸을 움직이는 것을 좋아해.”
그뿐이 아니었다.
화분에 꽂힌 꽃처럼 가만히 앉아 웃는 것이 할 수 있는 것의 전부였던 이전과는 달리 시녀인 시아나는 많은 것을 바꿀 수 있었다.
빗자루질을 하면 복도가 깨끗해지고, 씨앗을 심으면 정원에 화사한 꽃이 피었다.
밀가루 반죽을 주물거리면 달콤한 쿠키가 구워졌고, 빨래를 하면 뽀얗게 된 이불에서 향기가 났다.
개중에서 가장 인상 깊은 변화는 지금 모시는 작은 공주님이었다.
꼬질꼬질한 모습을 하고 험악한 눈빛을 하던 아리스는 어느새 살랑대는 드레스를 입고 태양처럼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 모습을 떠올리며 시아나는 말을 이었다.
“나는 공주로 지냈을 때보다 지금이 더 행복해.”
말도 안 돼.
키르안의 얼굴이 당혹으로 물들었다.
키르안은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없어요. 어떻게 공주님이었던 분이 시녀 생활에 만족할 수 있겠어요. 착각을 하고 계신 게 분명해요.”
“…….”
“공주님, 그러지 말고 당장 궁을 나오세요. 제가 잘 모시겠습니다. 편안히 지내시다 보면 진짜 행복이 무엇인지 아시게 될 거예요.”
키르안은 시아나를 위해 제가 계획한 것을 말하려고 했다.
최고급 호텔방, 5명의 하녀, 반짝이는 드레스와 보석.
그러나 키르안이 그것에 대해 말하기 전에 시아나가 입을 열었다.
“키르안, 나를 네 멋대로 휘두르려 하니?”
“……!”
낮아진 시아나의 목소리에 키르안이 눈을 크게 떴다.
시아나가 또렷한 눈동자로 키르안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나라는 짓밟히고 허울뿐이었던 공주라는 신분도 숨긴 나는 지금 일개 시녀일 뿐이야. 하지만 그것은 네가 나를 휘두를 어떤 이유도 되지 못한단다.”
“…….”
“마지막으로 말하마. 더는 내게 신경 쓰지 마.”
이전에 했던 것처럼 다정한 부탁이 아니었다.
명백한 명령이었다.
엄한 눈빛으로 저를 바라보는 시아나의 모습에 키르안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두 사람 사이에 숨 막히는 정적이 감돌았다.
먼저 입을 연 것은 키르안이었다.
“……제가 주제넘었습니다, 공주님.”
“…….”
“공주님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괴로운 얼굴로 말하는 키르안을 향해 시아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눈을 내리깔고 키르안을 바라볼 뿐이었다.
오만하고 엄격한 공주의 얼굴이었다.
* * *
시아나가 떠난 후, 자리를 피해 주었던 캐롤라인이 방으로 돌아왔다.
주인을 찾은 새끼 여우처럼 신나게 꼬리를 흔들던 키르안은 잔뜩 풀죽은 얼굴로 앉아 있었다.
“표정이 왜 그래? 시아나 공주한테 한 방 맞았어?”
농담으로 던진 말이었는데 키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비슷해.”
“헐.”
그 꼴을 봤어야 하는데, 하고 아쉬운 얼굴을 하는 캐롤라인을 향해 키르안이 중얼거렸다.
“공주님이 내 제안을 거절하셨어. 황궁의 시녀로 계속 있으실 거래.”
“세상에. 미친 거 아냐?”
그러나 이내 캐롤라인은 눈을 가늘게 뜨고 중얼거렸다.
“하긴 뭐. 아주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지만.”
“…….”
캐롤라인은 아실론드 왕국에서 몇 차례 보았던 시아나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때 보았던 시아나의 얼굴은 도축장에 끌려가는 것을 기다리는 소처럼 우울해 보였다.
그러나 이곳에서 본 시아나는 훨씬 생기가 넘쳤다.
‘공주였던 때보다 훨씬 초라한 몰골이었는데도.’
그러나 키르안은 그 변화를 아는지 모르는지 죽상이었다.
그것이 한심해 캐롤라인은 손가락으로 키르안의 이마를 콕 찍으며 말했다.
“너 뭔가 착각하나 본데, 시아나 공주는 악독한 왕비의 구박을 받으면서도 꿋꿋하게 버텼던 사람이야. 게다가 지금은 어떠니. 아실론드 왕족이 다 죽은 와중에도 혼자 살아남았잖아.”
그러니 불쌍하다, 라고 말하려던 키르안에게 캐롤라인이 말했다.
“대단한 분이야.”
“……!”
“어머니나 내게 어리광 피우느라 정신없는 너 따위 애송이보다 훨씬 강한 분이라고. 그러니까 더는 잘사는 공주님 귀찮게 하지 말고 너나 열심히 사세요. 네?”
누나의 말에 키르안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내가 언제 귀찮게 했다고 그래!”
“공주님은 됐다는데 자꾸 얼쩡거리는 게 귀찮게 하는 거지 뭐냐.”
“얼쩡거린 게 아니라 걱정한 거거든?”
“그건 네 생각이고.”
“…….”
키르안은 짜증 가득한 눈빛으로 캐롤라인을 노려보긴 했으나 더는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그날 밤, 키르안은 확실히 마음을 정리했다.
더는 시아나에게 신경 쓰지 않고 수도를 떠나기로.
* * *
키르안이 수도를 떠나는 아침, 시아나가 호텔 앞에 찾아왔다.
키르안이 눈을 크게 떴다.
“공주님!”
시아나가 눈썹을 내리며 웃었다.
“매정하게 말을 하긴 했지만 작별 인사는 제대로 하고 싶어서 왔어.”
“아…….”
“잘 가, 키르안. 늘 건강하길 바라.”
“…….”
시아나를 빤히 바라보던 키르안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나 싶더니 시아나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놀란 얼굴을 한 시아나를 바라보며 키르안이 말했다.
“시녀로서 살고자 하는 공주님의 의사를 존중합니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제게는 소중하고 귀한 공주님이세요.”
“…….”
“언제든 제 힘이 필요한 날이 오면 말씀하세요. 공주님의 힘이 되어 드리겠습니다.”
“……응, 그럴게.”
짧게 대답한 시아나는 두 눈을 휘며 웃었다.
“고마워, 키르안.”
오래전 수없이 보았던 미소였다.
옆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던 캐롤라인이 우웩, 하고 못 볼 꼴을 보았다는 얼굴을 하며 말했다.
“어서 출발하자.”
키르안은 아쉬운 얼굴로 마차에 올라탔다.
이내 키르안과 캐롤라인이 탄 마차가 멀어지기 시작했다.
시아나는 제자리에 서서 그 모습을 한참 동안 지켜보았다.
저 멀리 떠난 마차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언제까지 여기 서 있을 생각이야?”
“그러게요.”
저도 모르게 대답한 시아나는 곧 꺅, 하고 비명을 질렀다.
시아나에게 말을 건 이가 다름 아닌 라시드였기 때문이다.
“저, 전하께서 왜 여기 계세요?”
“그러게요.”
라시드가 방금 전 시아나와 똑같은 말투로 대답했다.
‘지금 장난으로 물은 것 아니거든요?’
라는 시아나의 눈빛에 라시드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그냥 좀, 산책 중이었어.”
“황태자 전하께서 황궁에서 한참 떨어진 호텔 앞까지 산책을 하러 오셨다고요? 그것도 이런 이른 아침에요?”
“…….”
딱 보아도 수상한 말을 해 놓고는 시선을 피하는 라시드를 바라보며 시아나가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시아나는 제 목에 두르고 있던 숄을 빼 라시드의 얼굴에 돌돌 말아 주었다.
“호위도 없이 밖을 다니실 때는 꼭 얼굴을 가리시라고 했잖아요.”
이른 시간이라 얼마 되지 않았지만, 길가를 지나는 사람들이 힐끗힐끗 라시드를 쳐다보고 있었다.
대부분은 놀랍도록 아름다운 남자를 향한 순수한 호기심이었겠지만, 혹시나 개중에는 황태자인 것을 알아보고 나쁜 마음을 품은 이가 있을지도 모른다.
‘설령 그런 자가 있다 해도 상관없지만…….’
라시드는 강했다.
그리고 딱 열 발자국 떨어진 곳에 서서 지나가는 행인처럼 서 있는 호위 기사 솔도 강했다.
암살자 몇 명쯤 나타나도 눈썹 하나 껌뻑하지 않고 처치할 수 있을 정도로.
그럼에도 시아나가 걱정해 주는 것이 좋아 라시드는 순순히 시아나가 둘러준 숄로 얼굴을 가렸다.
감은 숄 사이로 눈만 빼꼼 나온 라시드가 물었다.
“그놈은 아예 떠난 건가?”
시아나는 ‘그놈’이 누군지 대번에 알아채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의외로 순순히 떠나는군. 네가 가기 싫다고 해도 악을 쓰며 데려가려고 할 줄 알았는데.”
그것이 걱정되어 라시드는 이른 새벽부터 시아나의 뒤를 쫓아온 것이었다.
시아나가 말도 안 된다는 듯 눈썹을 내렸다.
“그렇지 않아요. 키르안은 제멋대로 행동하는 구석이 있긴 하지만 제 말만큼은 늘 순순히 들어주는걸요.”
굳센 믿음이 느껴지는 말에 라시드의 눈이 대번에 샐쭉해졌다.
“도대체 그놈과 무슨 사이지?”
공주와 공주를 모시는 신하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시아나는 음, 하고 고민하더니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비밀 공간을 공유한 친구 사이라고 해야 할까요?”
“…….”
두 사람 사이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잠시 후, 시아나가 당황한 얼굴로 라시드의 팔을 덥석 잡았다.
“안 돼요, 전하!”
“……뭐가?”
“저도 몰라요. 아무튼 지금 전하의 얼굴이 사람으로서 절대 해서는 안 될 생각을 하신 것 같거든요.”
어떻게 알았지.
라시드는 키르안을 순순히 보낸 것을 후회하고 있었다.
‘주제도 모르고 찾아와 내뱉은 말이 거슬렸지만 시아나를 위해 행동한 것이니 너그럽게 넘어가자, 따위의 생각을 내가 왜 했을까.’
하고 싶은 대로 해 버릴걸.
라시드의 스산해진 눈빛을 본 시아나가 다시 한번 깡총 뛰었다.
“안 된다니까요, 제발 참으세요!”
“……참으면 뭘 해 줄 건데?”
뻔뻔한 말에 시아나는 기가 찼다.
‘지금 이게 내가 뭘 해 줘야 할 상황이야?’
순간 말리지 않을 테니 전하 마음대로 하세요, 라고 톡 쏘고 싶었지만 참았다.
어쩐지 그 말은 절대 하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아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까치발을 들었다. 그리고 팔을 쭉 뻗어 라시드의 머리 위에 손을 올렸다.
“……!”
눈을 크게 뜬 라시드를 향해 시아나가 말했다.
“칭찬해 드릴게요.”
“…….”
“이것으론 부족한가요? 아리스 공주님께선 이렇게 하시면 엄청 좋아하시…….”
“좋아.”
“…….”
“나도 좋아. 그러니까 나도 계속해 줘, 칭찬.”
라시드는 그렇게 말하며 무릎을 살짝 굽혔다.
그 모습에 시아나는 웃음이 터져 나올 뻔했다.
‘커다란 개가 저를 쓰다듬어 달라고 머리를 숙이는 같아.’
시아나는 키득거리며 라시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손바닥에 닿은 가느다란 은빛 머리카락이 부드러웠다.
바람이 불었다.
살랑-.
바람 속에서 진한 장미꽃 향기가 났다.
쿵쿵쿵.
그 순간 들린 심장 소리는 누구의 것일까.